1. 중국 시가(詩歌)의 유형과 작품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가?
一. 중국시가의 원류(源流) : 시경(詩經)과 초사(楚辭)
중국문학사의 주류를 가장 일찍이 형성한 것은 북방(北方)의 서주(西周)에서 춘추(春秋)에 이르는 시기였다. 중국 최고(最古)의 시가총집(詩歌總集)으로서 이 시기에 출현한 ≪시경(詩經)≫은 풍(風)․아(雅)․송(頌)으로 이루어졌는데, 서정시(抒情詩)가 위주였던 풍(風)은 관청(官廳)에서 민정(民情)을 살피려고 채집(採集)한 민요(民謠)였고, 사회시(社會詩)가 위주였던 아(雅)는 궁정(宮廷)의 연회(宴會)와 전례(典禮)에 쓰인 악가(樂歌)였으며, 종교시(宗敎詩)가 위주였던 송(頌)은 선조(先祖)와 제신(諸神)의 제사(祭祀)에 쓰인 악가였다. 집단적(集團的)이면서 실용(實用)을 목적으로 했던 ≪시경(詩經)≫은 공자(孔子)가 이를 제자(弟子)들의 교과서로 사용한 이후에 유가경서(儒家經書)로서의 지위를 굳히게 되었다.
≪시경(詩經)≫의 작법(作法)은 부(賦)․비(比)․흥(興)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부(賦)는 직서법(直敍法)으로 ‘그대는 참으로 아름답소’와 같은 직접적인 묘사를 말하고, 비(比)는 상징법(象徵法)으로 ‘그대는 한 떨기 붉은 수선화’와 같은 비유(比喩) 혹은 상징(象徵)을 말하며, 흥(興)은 암시법(暗示法)으로 ‘수선화 피어나니 그대는 아름답소’와 같은 정경교융(情景交融)을 말한다. 이러한 ≪시경(詩經)≫의 작법(作法)은 전통적으로 계승되어 중국시가(中國詩歌)의 수사법(修辭法)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춘추에 이어서 전국(戰國)의 시기에는 ≪시경(詩經)≫에 대한 반동으로 남방(南方) 초(楚) 나라의 새로운 시가(詩歌)로서 ≪초사(楚辭)≫가 있었다. 앞 장(章)에서도 언급했듯이 ≪시경(詩經)≫은 그 문체(文體)가 중국어의 리듬을 바탕으로 한 사언(四言)이 기본이었고, 내용은 백성들의 생활에서 우러나온 여러 가지 서정(抒情)이 거의 전부였던데 비해서, ≪초사(楚辭)≫는 문체가 춤의 리듬을 바탕으로 한 삼언(三言)이 기본이었고, 내용은 굴원(屈原)․송옥(宋玉) 등 작자 개인의 이상(理想)과 환상(幻想)이 그 줄거리였다.
二. 사부(辭賦)
사부(辭賦)는 원래 초사와(楚辭)와 한부(漢賦)를 통칭(通稱)하는 것이다. 한대(漢代)에 새로이 흥성(興盛)한 사부(辭賦)는 서정면(抒情面)에서 개인적인 성분이 감소되고, 서사영물(敍事詠物)에 치중하여 수사(修辭)에 힘쓰는 아름다운 문장(文章)을 나열하였다. 한대(漢代)의 사부(辭賦)는 형성기에는 초사(楚辭)의 형식을 답습(踏襲)한 것으로 가의(賈誼)의 <조굴원부(弔屈原賦)>․<복조부(鵩鳥賦)>와 매승(枚乘)의 <칠발(七發)> 등이 있었고, 전성기(全盛期)에는 초사(楚辭)에 비해서 산체화(散體化)된 장부(長賦: 大賦)로서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허부(子虛賦)>․<상림부(上林賦)>․<대인부(大人賦)>․<미인부(美人賦)>․<장문부(長門賦)> 등이 있었으며, 모방기(模倣期)에는 전성기(全盛期)의 사부(辭賦)를 모방․계승한 것으로 양웅(揚雄)의 <촉도부(蜀都賦)>와 반고(班固)의 <양도부(兩都賦)> 등이 있었다. 전변기(轉變期)에는 이전의 산체장부(散體長賦)에서 서정성(抒情性)을 위주로 하여 개성적(個性的)이면서도 청신(淸新)한 단부(短賦: 小賦)로 바뀐 것으로 장형(張衡)의 <귀전부(歸田賦)> 등이 있었다. 사부(辭賦) 가운데 초사(楚辭) 계통은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등 대표작을 남기면서 후대까지 계승되었고, 한부(漢賦) 계통은 한대(漢代)의 고부(古賦)에서 육조(六朝)의 변부(騈賦), 당대(唐代)의 율부(律賦), 송대(宋代)의 문부(文賦)로 발전하였다.
三. 악부시(樂府詩)
한대(漢代)의 악부시(樂府詩)는 참신(斬新)하고 다양(多樣)한 형식과 정채(精彩)로운 서사(敍事) 수법을 갖추었으며 질박(質朴)하고 자연스러운 풍격(風格)을 지녔다. 주요 작품으로는 <전성남(戰城南)>․<십오종군정(十五從軍征)>․<고아행(孤兒行)>․<동문행(東門行)>․<공작동남비(孔雀東南飛)> 등이 있었고, 이 가운데 <공작동남비>는 중국 고대의 가장 장편(長篇)이자 가장 뛰어난 서사시(敍事詩)로서, 한대(漢代) 말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내용은 봉건적인 가족제도와 전통적인 윤리도덕 때문에 희생된 초중경(焦仲卿)과 유란지(劉蘭芝)라는 젊은 부부(夫婦)의 슬픈 사랑 이야기이다. ≪시경(詩經)≫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악부시(樂府詩)는 가깝게는 오언시(五言詩)의 발생과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멀리는 당대(唐代) 백거이(白居易)의 ‘신악부운동(新樂府運動)’에 영향을 미쳤다. 한대(漢代)에 발생한 것으로 보이는 오언고시(五言古詩)의 대표작으로는 작자 미상(未詳)의 고시십구수(古詩十九首)가 있는데 한대(漢代) 말기(末期)의 중하층(中下層) 문인(文人)들이 지은 것으로 보이며, 그 내용은 어지러운 동한말(東漢末)의 사회를 배경으로 한 남녀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 대부분이고 세련된 오언(五言)과 진솔(眞率)한 서정성(抒情性)이 매우 탁월하다. 또한 한대(漢代)에는 초사(楚辭)와 한부(漢賦)의 영향으로 칠언고시(七言古詩)가 발생하였으나 아직은 미숙(未熟)하였다.
四. 오칠언고시(五七言古詩)와 오칠언율시(五七言律詩)
당송시(唐宋詩)의 사조(思潮)에 두드러지게 영향을 준 것은 크게 도불(道佛) 양교(兩敎) 및 후에 이에 대한 반동(反動)으로 일어난 유가사조(儒家思潮)로 볼 수 있다. 한위육조(漢魏六朝)로부터 성당(盛唐)에 이르기까지는 귀족정치(貴族政治)의 전성시대(全盛時代)인 동시에 도불 양교의 발흥시대(勃興時代)였다.
당시(唐詩)는 성당(盛唐)이 황금시대(黃金時代)였고, 도불(道佛)의 사조(思潮)도 이때가 전성기(全盛期)였으며. 이 시대의 시인(詩人)으로는 시불(詩佛)로 칭(稱)해지는 왕유(王維)와 시선(詩仙)으로 칭해지는 이백(李白) 등이 있었다. 중당(中唐)에 이르러 안록산(安綠山)의 난(亂)을 전후(前後)해서 사회(社會)가 혼란(混亂)함에 따라 유가사조(儒家思潮)가 부흥(復興)되었고, 유가사상(儒家思想)을 가진 모든 시인(詩人) 가운데 가장 위대(偉大)한 존재(存在)로서 시성(詩聖)으로 칭해지는 두보(杜甫)의 작품(作品)은 태반(太半)이 사회문제(社會問題)에 관한 시(詩)였으며, 이러한 작풍(作風)은 작시(作詩)에 있어서 풍유(諷諭)를 자신(自身)의 임무(任務)로 삼았던 백거이(白居易)의 신악부(新樂府)에 이르러 더욱 노골화(露骨化)되었다.
당시(唐詩)를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송시(宋詩)의 완성자(完成者)로서 소식(蘇軾)은 송사(宋詞)와 문부(文賦)에 있어서도 완성자로서의 역할을 했고, 유(儒)․불(佛)․도(道)의 사상(思想)을 두루 섭렵(涉獵)하여 호방(豪放)한 풍격(風格)을 이루었으며, 가장 낭만적(浪漫的)이고 가장 열정적(熱情的)이며 가장 자유(自由)를 사랑한 시인(詩人)이었다.
五. 사곡(詞曲) : 송사(宋詞)와 산곡(散曲)
앞 장에서 언급했듯이, 송대의 새로운 시가로서 송사(宋詞)가 있었고, 원대의 새로운 시가로서 산곡(散曲)이 있었다. 송사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언급했으므로 산곡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산곡(散曲)은 중국을 지배하게 된 몽고인들이 북곡을 숭상했기 때문에 유행하게 된 북곡(北曲)을 바탕으로 생겨난 것이다. 초기의 산곡은 초기의 사(詞)가 그랬던 것처럼 민간(民間)에서 유행하던 소곡(小曲)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뒤에는 좀더 많은 내용을 노래하기 위해서 당시에 소령(小令)으로 일컬어지던 여러 개의 소곡(小曲)을 모아서 대곡(大曲)을 이루고 이를 투수(套數)라고 하였다. 투수는 길이가 길기 때문에 서술적인 묘사 방법을 많이 쓰며, 복잡한 내용이나 고사(故事)를 노래하기에 편리한 형식이었다.
2. 중국 시가(詩歌)의 내용과 특징은 어떠한가?
우선 시경(詩經)의 첫 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관저(關雎); 우는 물수리
꾸안꾸안 물수리 關關雎鳩
강물 가에 머무니, 在河之洲
아리따운 아가씨 窈窕淑女
사나이의 좋은 짝. 君子好逑
올망졸망 마름풀 參差荇菜
이리저리 찾으니, 左右流之
아리따운 아가씨 窈窕淑女
자나깨나 그리네. 寤寐求之
찾아도 못얻어서 求之不得
자나깨나 생각하니, 寤寐思服
가이없는 내마음 悠哉悠哉
잠못들어 뒤척이네. 輾轉反側
올망졸망 마름풀 參差荇菜
이리저리 뜯으니, 左右采之
아름다운 아가씨 窈窕淑女
금슬좋게 사귀려네. 琴瑟友之
올망졸망 마름풀 參差荇菜
이리저리 캐담으니, 左右芼之
아리따운 아가씨 窈窕淑女
종고처럼 반기려네. 鐘鼓樂之
이어서는 편폭(篇幅)이 길어서 소개하기 어려운 초사(楚辭)와 한부(漢賦) 및 아직 민가(民歌)의 수준에 있었던 악부(樂府)를 제외시키고, 문인(文人)에 의한 본격적 개인문학(個人文學)이 이루어진 위진육조(魏晉六朝) 이후의 오칠언시 여러 편과 소식(蘇軾)이
「적벽회고(赤壁懷古)」라고 부제(副題)를 붙여 지은 <염노교(念奴嬌)>사(詞) 및 <적벽부(赤壁賦)> 등을 소개한다.
제 3 장에서도 언급했듯이 정치적으로 혼란했던 위진육조시기에는 이 시대에 크게 성행했던 도불(道佛)의 영향으로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비롯해서 도연명(陶淵明)․사령운(謝靈運) 등 전원(田園)․산수(山水) 시인(詩人)들의 청담지풍(淸談之風)이 크게 일어났고, 문인(文人)에 의한 본격적인 개인문학(個人文學)이 발달하여 화려(華麗)한 문학형식과 문장의 기교(技巧)를 추구했다.
이 시기의 대표적 문학작품으로는 도연명의 <음주(飮酒)>시(詩) 다섯째 편과 사령운의 <과시녕서(過始寧墅)> 및 제갈량(諸葛亮; 孔明)의 <출사표(出師表)>를 들 수 있다. 이들 작가를 간략히 소개하고 그 작품을 감상해 보면 다음과 같다.
도연명은 자연(自然)과의 융화(融化)를 통해서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感情)과 이상(理想)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중국의 대표적 시인이다. 그의 전원시는 자연 속에 융화된 꾸밈없는 감정의 노래로서 중국 자연시(自然詩)의 기원(起源)을 이루었다. 또한 사령운 이후에 중국의 자연시는 산수시(山水詩)가 주류(主流)를 이루었으나, 후대의 시인들이 자연과 완전히 융화되어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도연명의 문학적 경지(境地)를 고귀(高貴)하게 여겼으므로 전원시가 그 정통(正統)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의 <귀거래사(歸去來辭)>와 함께 오래도록 불후(不朽)의 명작(名作)으로 평해지고 있는 <음주(飮酒)>시(詩) 다섯째 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사람 사는 곳에 움막을 지었으나, 수레와 말의 시끄러운 소리 없네.
그대에게 어찌 그러한가 물어본즉, 마음이 멀면 땅도 절로 외지다네.
동녘 울밑에서 국화 송이 따드니, 아득히 멀리 남쪽 산 바라보이네.
산 기운은 해 기울어 아름다운데, 나는 새들 서로 어울려 돌아오네.
이런 중에 가식없는 참뜻 있으되, 밝혀 보려다 이내 할 말을 잊네.
(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 問君何能爾, 心遠地自偏. 采菊東籬下, 悠然見南山. 山氣日夕佳, 飛鳥相與還. 此中有眞意, 欲辨已忘言.)
위의 시에서 우리는 그가 자연과 융화된 경지가 이미 무아지경(無我之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사람 사는 곳에 움막을 짓고 살되 마음이 멀리 자연에 있어 속세(俗世)의 잡념(雜念)이나 망상(妄想)이 없이 고요했으므로, 몸 또한 자연 속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주위의 시끄러운 소리에 전혀 구애받지 않았다. 따라서 한가로운 가운데 무심히 울밑의 국화(菊花) 송이를 따드는 순간에 아득히 먼 남쪽 산의 자연(自然)이 그에게로 성큼 다가왔던 것이다. 이 때 그의 경지는 이미 자기를 잊고 자연과 완전히 융화되어, 해 기울자 쉴 곳으로 돌아오는 새들과 한 몸이 된다. 그 역시 해 기울면 쉴 곳으로 돌아갈 것이니, 이는 타고난 본성(本性)대로 자연에 귀의(歸依)하여 그 변화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되, 이미 자기를 잊고 자연과 자기와의 분별(分別)이 없이 일체(一體)가 되어 있는 터에, 자연의 오묘(奧妙)한 섭리(攝理)로 보아서 당연히 그래야 함을 인간의 지식과 말로써는 설명하여 밝힐 필요도 없고 설명하여 밝힐 방법도 없는 것이다. 해 기울면 쉴 곳으로 돌아오는 새로써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形象化)한 그에게 있어서 자연은 결국 귀의(歸依)의 대상(對象)이었다. 이는 장자(莊子)의 「제물론(齊物論)」에서 「천지가 나와 함께 영원히 존재하고, 만물이 나와 일체가 된다(天地與我幷生, 而萬物與我爲一).」라고 말한 「사람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人與自然合一)」 도가적(道家的) 경지를 추구한 것이다. 도연명은 그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오로지 자연의 변화에 따라 남김없이 귀의하리니, 타고난 그대로의 천성(天性)을 즐겨야 함에 어찌 의심(疑心)이 있겠는가(聊乘化以歸盡, 樂夫天命復奚疑).」라고 했듯이, 타고난 본성대로 자연에 귀의하는 삶을 누리고자 했던 것이다.
아울러 참고적으로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歸去來兮 귀거래혜 돌아가자 돌아가
田園將蕪胡不歸 전원장무호불귀 논밭이 거칠어지려는데 어이 아니 돌아가리
旣自以心爲形役 기자이심위형역 스스로가 먹고사는 일로 마음을 구속하였거늘
奚惆悵而獨悲 해추창이독비 어찌 근심에 싸여서 슬퍼만 하고 있으리
悟已往之不諫 오이왕지불간 지나간 날은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달았고
知來者之可追 지래자지가추 다가올 일은 제대로 할 수 있음을 알겠으니
實迷途其未遠 실미도기미원 실로 어긋난 길이 아직 오래되지 않아서
覺今是而昨非 각금시이작비 지금이 옳고 이전은 글렀음을 안 것일세
舟搖搖以輕颺 주요요이경양 돌아가는 배 흔들흔들 가벼이 떠나가고
風飄飄而吹衣 풍표표이취의 바람은 불어 살랑살랑 옷자락을 휘날리네
問征夫以前路 문정부이전로 나그네에게 앞으로 남은 길을 물어보며
恨晨光之熹微 한신광지희미 새벽빛이 더디게 밝아옴을 한스러워 하네
乃瞻衡宇 내첨형우 마침내 허술한 내 집 바라보고
載欣載奔 재흔재분 기쁜 마음에 서둘러 달려가니
僮僕歡迎 동복환영 머슴 아이는 반겨하며 맞아주고
稚子候門 치자후문 어린 자식들은 문앞에서 기다리네
三徑就荒 삼경취황 세 갈래 사잇길에 잡초가 무성해도
松菊猶存 송국유존 소나무와 국화는 그대로 남아 있네
携幼入室 휴유입실 어린것들 손 잡고 방으로 들어서니
有酒盈樽 유주영준 술 항아리에는 술이 가득 차 있네
引壺觴以自酌 인호상이자작 술병과 술잔을 끌어당겨 홀로 술 마시며
眄庭柯以怡顔 면정가이이안 뜰의 나무 둘러보고 얼굴에 기쁨 짓네
倚南牕以寄傲 의남창이기오 남쪽 창가에 앉아 거리낌 없이 즐기니
審容膝之易安 심용슬지이안 비좁은 방이지만 쉬이 편안함을 맛보네
園日涉以成趣 원일섭이성취 정원은 매일 거닐어도 좋은 풍치 이루고
門雖設而常關 문수설이상관 문은 비록 나 있으되 언제나 닫혀 있네
策扶老以流憩 책부로이류게 지팡이에 의지해서 발 닿는 대로 가다 쉬고
時矯首而遐觀 시교수이하관 때때로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네
雲無心以出岫 운무심이출수 구름은 아무 미련 없이 산굴을 벗어나고
鳥倦飛而知還 조권비이지환 새들은 날다가 지치면 돌아올 줄을 아네
景翳翳以將入 경예예이장입 햇빛은 가물가물 머잖아 사라지려 하는데
撫孤松而盤桓 무고송이반환 홀로 선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머뭇거리네
歸去來兮 귀거래혜 돌아가자 돌아가
請息交以絶遊 청식교이절유 원컨대 교제를 그만두고 왕래를 끊으리라
世與我而相違 세여아이상위 세상과 나는 어울리기에 서로 맞지 않으니
復駕言兮焉求 복가언혜언구 다시 세상에 나아가서 무엇을 바라겠는가
悅親戚之情話 열친척지정화 이웃 친척들의 정다운 이야기에 기뻐하고
樂琴書以消憂 낙금서이소우 거문고와 책을 즐기면서 근심을 잊으리라
農人告余以春及 농인고여이춘급 농사짓는 이가 내게 봄이 왔음을 알려주면
將有事於西疇 장유사어서주 장차 서쪽 밭에 나가서 농사를 지으리라
或命巾車 혹명건차 때로는 휘장 두른 수레를 부르고
或棹孤舟 혹도고주 때로는 혼자서 조각배를 저으리라
旣窈窕以尋壑 기요조이심학 그윽하고 깊숙한 산골짜기를 찾기도 하고
亦崎嶇而經丘 역기구이경구 험하고 가파른 산 언덕을 넘기도 하리라
木欣欣以向榮 목흔흔이향영 나무는 싱싱하게 뻗어서 무성해지려 하고
泉涓涓而始流 천연연이시류 샘물은 졸졸 소리내며 흐르기 시작하리니
善萬物之得時 선만물지득시 세상 만물이 마땅히 제철을 만나련만
感吾生之行休 감오생지행휴 내 삶은 한스럽게도 저물어만 가는구나
已矣乎 이의호 아서라 아서
寓形宇內復幾時 우형우내복기시 세상에 살아있을 날이 앞으로 얼마나 되리
曷不委心任去留 갈불위심임거류 어째서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로이 살지 않고
胡爲乎遑遑欲何之 호위호황황욕하지 무엇을 찾아 허둥지둥 어디로 가려 하겠는가
富貴非吾願 부귀비오원 현세의 부귀는 내 바라는 바 아니고
帝鄕不可期 제향불가기 내세의 천국도 기대해서는 아니 되리
懷良辰以孤往 회양신이고왕 좋은 시절이 왔다고 여겨지면 홀로 나가서
或植杖而耘耔 혹식장이운자 지팡이를 잠시 세워두고 김을 매기도 하리
登東皐以舒嘯 등동고이서소 동쪽 언덕에 올라가서 느긋하게 노래 부르고
臨淸流而賦詩 임청류이부시 맑게 흐르는 시내를 바라보며 시를 지으리
聊乘化以歸盡 요승화이귀진 오직 자연의 이치로 돌아가 사라지려 하거늘
樂夫天命復奚疑 낙부천명복해의 무릇 천명을 즐겨야 함을 어찌 또 의심하리
사령운은 도연명과 비슷한 시기의 인물(人物)로서, 도 연명이 자연과의 융화를 통해서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과 이상을 문학적으로 승화(昇華)시킨 시인(詩人)이라면, 그는 자연 속에 묻힌 고독(孤獨)한 개체(個體)로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객관적(客觀的)으로 감상(感賞)하고 이를 문학으로써 묘사(描寫)한 시인이다. 그는 풍부한 수사(修辭)와 다듬어진 싯귀(詩句)로 아름다운 산수자연(山水自然)의 경치를 재현(再現)시킴으로써, 중국 자연시의 주류(主流)를 이룬 산수시(山水詩)의 창시자(創始者)가 되었다. 그의 산수시 가운데 고향(故鄕) 땅 시녕(始寧)의 별장(別莊)을 지나면서 지은 <과시녕서(過始寧墅)>시(詩)의 후반부(後半部)에서 일부(一部)를 보면 다음과 같다.
산을 넘어 끊임없이 오르내리고, 물길 따라 쉬지않고 우회하였네.
바위는 험하게 산악에 빽빽하고, 모래톱 층층이 물가에 연이었네.
흰 구름은 검은 돌을 감싸안고, 푸른 대 맑은 물결에 아양떠네.
민가는 구비도는 강 곁에 있고, 누각이 높은 산정 기슭에 있네. (山行窮登頓, 水涉盡洄沿. 巖峭嶺稠疊, 洲縈渚連綿. 白雲抱幽石, 綠篠媚淸漣. 葺宇臨廻江, 築觀基層巓.)
위의 시에서 우리는 그에게 있어서 자연(自然)은 인간(人間)과 대립(對立)된 차원에서 그 아름다움을 객관적(客觀的)으로 감상(感賞)하기 위한독립적(獨立的) 대상(對象)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산수자연의 경치를 자신의 심미(審美) 기준(基準)에 따라 의도적(意圖的)으로 배치(配置)하여 시각적(視覺的)으로 묘사하였다. 위에서 「흰 구름은 검은 돌을 감싸안고, 푸른 대 맑은 물결에 아양떠네.」의 귀절은 자연을 인격화(人格化)하여 묘사하는 세련미(洗練味)를 지닌 동시에, 「흰 구름」․「푸른 대」․「검은 돌」․「맑은 물결」 등의 색채어(色彩語)를 대조적(對照的)으로 구사(驅使)하여 특히 회화적(繪畵的)이다. 그는 평소에 맑고 밝은 생활을 지향(志向)하면서 아름다운 자연을 마음의 양식(糧食)으로 삼았고, 이를 시로써 형상화(形象化)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던 시인으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대표적 문학작품으로는 왕유의 <녹채(鹿柴)>․<조명간(鳥鳴澗)>․<산중(山中)>, 이백의 <서악운대가송단구자(西嶽雲臺歌送丹丘子)>․<월하독작(月下獨酌)>․<독좌경정산(獨坐敬亭山)>, 두보의 <춘망(春望)>․<석호리(石壕吏)> 등 시(詩)와 소식의 <염노교(念奴嬌)>사(詞) 및 <적벽부(赤壁賦)>를 들 수 있다. 이들 작가를 간략히 소개하고 그 작품을 감상해 보면 다음과 같다.
왕유는 도연명․사령운과 함께 중국의 대표적 자연파(自然派) 시인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또한 그는 중국 남종화(南宗畵)의 원조(元祖)가 되었을 만큼 뛰어난 화가(畵家)였다. 그가 살았던 성당(盛唐)은 도연명의 전원시와 사령운의 산수시를 계승하여 커다란 집단의 자연시파가 형성된 시기였다. 그의 자연시는 도연명을 계승하여, 세속을 초탈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전원 풍취가 넘쳐흘렀다. 그러나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그는 도연명의 도가적 무위자연(無爲自然)과는 달리, 불가적 정적(靜寂)과 청정(淸淨) 속에서 자기를 직관(直觀)함으로써 이상(理想)을 추구하는 관조시(觀照詩)를 지었다. 따라서 그는 자연 속에 묻힌 고독(孤獨)한 개체(個體)로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객관적으로 감상하여 묘사한 사령운과도 시풍(詩風)이 달랐다. 그의 관조시는 자연과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 이를 객관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스스로의 감개(感慨)를 수렴(收斂)하여 용해(溶解)시켰던 것이다. 그의 자연시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오언절귀(五言絶句)로서, 그 중 <녹채(鹿柴)>와 <조명간(鳥鳴澗)>의 두 편을 보면 다음과 같다.
빈 산에 사람은 아니 보이고, 다만 사람의 말소리만 들리네.
노을 빛이 깊은 숲에 들더니, 다시 푸른 이끼 위를 비치네.
(空山不見人, 但聞人語響. 返景入深林, 復照靑苔上.)
인적 드문데 계수꽃 떨어지고, 밤 고요하여 봄산은 비어있네.
달이 떠올라 산새들 놀래키니, 때때로 봄내 골짝서 지저귀네.
(人閒桂花落, 夜靜春山空. 月出驚山鳥, 時鳴春澗中.)
위 두 편의 시에서 우리는 그가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어 정적(靜寂) 속에 자기를 관조(觀照)하는 선적(禪的)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위에서 특히 강조된 것은 산중(山中)의 고요함이다. <녹채>에서의 두런거리는 말소리와 <조명간>에서의 떨어지는 계수(桂樹) 꽃은 주위의 정적감(靜寂感)을 더욱 깊게 하고 있다. 그리하여 너무나도 고요한 나머지 잡념(雜念)이나 망상(妄想)이 끼어들 수 없는 공허(空虛) 속에서 그는 자기를 잊고 자연과 완전히 융화(融化)되어, 푸른 이끼와 한 몸이 되고 산새들과 한 몸이 된다. 깊은 숲의 푸른 이끼에도 해질 녘이면 고운 노을 빛이 비치고, 깊은 골짝의 산새들도 달뜰 녘이면 밝은 달 빛을 받으며 지저귀니, 이는 그가 자기가 존재(存在)하는 이치(理致)가 푸른 이끼나 산새들이 존재하는 이치와 같음을 직관적(直觀的)으로 깨달은 것이다.
위에서 사람은 아니 보이고 다만 사람의 말소리만 들리는 빈 산(山)과 인적(人迹) 드문데 계수꽃 떨어지는 고요한 밤의 빈 산은 우리에게 불가(佛家)의 공관(空觀)을 느끼게 한다. 또한 깊은 숲의 푸른 이끼에 비치는 노을 빛과 깊은 골짝의 산새들이 받는 달 빛은 우리에게 불가의 자비(慈悲)를 느끼게 한다. 이처럼 그의 자연시는 매우 평이(平易)하고 담박(淡泊)한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그 안에 심오(深奧)한 이치(理致)와 이상(理想)을 담고 있었다. 불가(佛家)에서 우주만물(宇宙萬物)이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부처 아닌 것이 없고 모든 개체(個體)는 스스로가 천상천하(天上天下)에서 유일(唯一)하게 존귀(尊貴)한 존재라고 말하듯이, 왕유에게 있어서의 자연은 그에 융화됨으로써 자기의 참모습과 참가치를 직관하기 위한 관조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와 아울러 위 두 편의 시에서 우리는 자연경치(自然景致)의 순간포착(瞬間捕捉)에 의한 시각적(視覺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자연경치의 순간포착에 의한 회화성(繪畫性)은 도연명과 사령운이 썼던 수법(手法)과 비슷한 것이지만, 그의 시에 나타난 독창적(獨創的) 회화성은 뛰어난 화가(畵家)로서의 예민(銳敏)한 관찰과 독실(篤實)한 불교신자로서의 선적(禪的)인 탐구(探究)가 바탕이 된 것이다. 소동파(蘇東坡)는 그가 그린 「남전연우도(藍田煙雨圖)」를 평하면서 「마힐의 시를 음미하면 시 가운데 그림이 있고, 마힐의 그림을 감상하면 그림 가운데 시가 있다(味摩詰之詩, 詩中有畵, 觀摩詰之畵, 畵中有詩)」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이 때 그 그림의 내용과 흡사한 것으로 생각해서 함께 인용했던 왕유의 <산중(山中)>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쪽빛 계곡물에 새하얀 돌 드러나고, 옥빛 시내엔 붉은 낙엽 섞이었네.
산길에는 애당초 비내린 적 없건만, 공허한 푸르름 사람 옷깃 적시네.
(藍谿白石出, 玉川紅葉稀. 山路元無雨, 空翠濕人衣.)
위의 시에서 우리는 시어(詩語)의 선택(選擇)과 배치(配置)를 통해서 극도(極度)의 시각적 형상미(形象美)를 드러내고 있는 그의 시풍을 엿볼 수 있다. 위에서 「쪽빛」․「새하얌」․「옥빛」․「붉음」 등의 대조적(對照的) 색채감(色彩感)과 「계곡물」․「시내」․「산길」․「공허한 푸르름」 등의 공간적(空間的) 배경은 한 폭의 그림을 연상(聯想)케 한다. 동시에 위에서처럼 「돌 드러남」․「낙엽 섞임」․「비내린 적 없음」․「공허한 푸르름」 등으로써 여름 동안 감추어져 있다가 가을 되어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 자연의 그윽하고 산뜻한 정취(情趣)를 묘사하였다면, 그의 그림은 극도의 문학적 함축미(含蓄美)를 드러낸 한 편의 시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시는 시각적 형상미와 문학적 함축미를 함께 지니고 있는데, 이는 심미(審美)를 추구(追求)하는 화가로서의 예민한 관찰과 함께 본질(本質)을 관조하는 불교신자로서의 선적인 탐구에 의한 것이었다. 위에서 「공허한 푸르름」은 온통 티 하나 없이 깨끗하여 물방울이라도 맺혀 떨어질 듯이 짙푸르게 우거진 녹음(綠陰)을 가리키는 것으로, 비 내린 적 없어도 사람의 옷깃을 적시는 푸르름은 역시 불가의 공관(空觀)을 느끼게 한다.
이백은 왕유와 거의 같은 시기에 살았던 인물로서, 지극히 열정적(熱情的)인 낭만시인(浪漫詩人)이며 천재시인(天才詩人)이었다. 그는 생각하는 바가 활달(豁達)하고 기백(氣魄)이 웅장(雄壯)하며 재기(才氣)가 흘러넘쳐서, 능동적으로 낭만적인 기질(氣質)을 발휘하였다. 또한 도교(道敎)에 심취(心醉)했던 그는 현실을 초월하여 산수자연(山水自然)을 방랑(放浪)하면서 유선적(遊仙的)인 시를 지었다. 전설(傳說)에 의하면 그는 채석기(采石磯)라는 강가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술에 취한 김에 물에 비친 달을 건지려고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고 한다. 이와 함께 우리가 어릴 때부터 익히 들어왔던 동요(童謠)의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 태백이 놀던 달아!」라는 귀절은 그가 발휘했던 낭만적인 기질을 여실(如實)히 대변(代辯)해 준다. 일종(一種)의 유선시(遊仙詩)로서, <서악운대가송단구자(西嶽雲臺歌送丹丘子)>시의 전반부(前半部)를 보면 다음과 같다.
서악의 험준함은 어찌나 장엄한지, 황하가 가물가물 하늘 끝서 흘러오네.
황하 만리 달려 산을 쳐 뒤흔들고, 소용돌이 바퀴 돌듯 천지를 울려대네.
영광스런 서기 어려 오색 찬란하니, 천 년에 한번 맑아 성인을 나게하네.
큰 신령 포효하며 산 둘로 쪼개서, 홍수 파도 내뿜어져 동해로 달려가네.
세 봉우리 우뚝 서 꺾일듯 가파르고, 푸른 벽 붉은 골 손자욱 열려있네.
(西嶽崢嶸何壯哉, 黃河如絲天際來. 黃河萬里觸山動, 盤渦轂轉秦地雷. 榮光休氣紛五彩, 千年一淸聖人在. 巨靈咆哮擘兩山, 洪波噴流射東海. 三峯却立如欲摧, 翠崖丹谷高掌開.)
위의 시에서 우리는 산을 밀어젖히고 바다를 뒤엎는 듯한 이백의 과장(誇張)된 표현을 볼 수 있다. 이는 그의 자유분방(自由奔放)한 낭만정신(浪漫精神)의 소산(所産)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격렬(激烈)한 표현을 하지 않고서는 풀릴 수 없는 강렬(强烈)한 사상(思想)과 감정의 뜨거움 때문인 것이기도 하다. 즉 그의 드높은 웅지(雄志)를 펴지 못하는 데서 오는 울분(鬱憤)이 시의 표현에 반영(反映)된 것이다. 그의 시에 있어서 산수자연(山水自然)은 그의 격렬한 감정과 도교적 상상력(想像力)에 의해서 과장되고 변형(變形)된다. 그는 속세(俗世)에서 벗어난 대자연(大自然) 속에서 협소(狹小)한 인간사회의 추악(醜惡)함을 말끔히 씻고 이를 초월함으로써, 자신의 광적(狂的)인 기질에 맞는 삶의 이상을 추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가난과 울분이 교차(交叉)하는 가운데 유랑(流浪)을 거듭했던 이백은 깨끗하고 거짓없는 자연을 정관(靜觀)하고, 소박(素朴)한 자연의 풍물(風物)과 대화(對話)를 나누면서 진실(眞實)된 삶을 간직하려고 하였다. 그는 술과 함께 달을 좋아했다. 달은 그에게 있어서 자연의 영원(永遠)함과 아름다움을 집약적(集約的)으로 느끼게 해주는 대상이었다. 그가 지은 <월하독작(月下獨酌)>시 4 편 가운데 첫 편을 보면 다음과 같다.
꽃 사이에 한 병의 술을 놓고는, 혼자서 술잔 드니 친구가 없네.
잔 들어 밝은 달을 불러 오고서, 그림자를 대하니 세 사람 되네.
달은 원래 술 마시지 못하는데다, 그림자 건성 내 몸 따라다니네.
잠시나마 달 그림자 함께 있으니, 즐겨 놂이 봄철에 맞아야 하네.
내가 노래하면 저 달이 서성이고, 내가 춤추면 그림자가 흔들대네.
깨어서는 어울려 즐거움 나누다가, 취한 후에 저마다 흩어져 가네.
속정이 없는 교유를 영원히 맺어, 멀리 은하에서 만남을 기약하네.
(花間一壺酒, 獨酌無相親. 擧杯邀明月, 對影成三人. 月旣不解飮, 影徒隨我身. 暫伴月將影, 行樂須及春. 我歌月徘徊, 我舞影零亂. 醒時同交歡, 醉後各分散. 永結無情遊, 相期邈雲漢.)
위의 시에서 우리는 그가 자연을 벗삼고 이와 합일(合一)되는 차원에서 세속적인 생각에 얽매이지 않는 담담하고 맑은 교유(交遊)를 추구하는 낭만적인 멋과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위에서 장차 아득한 하늘의 은하(銀河)에서 만날 수 있는 달은 인생(人生)의 유한(有限)함과는 상대적으로 영원히 변함이 없는 대자연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모순(矛盾)되고 어지러운 세속에 대한 감정이나 욕심(慾心)을 깨끗이 씻어버리고, 언제나 변함없이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자신을 맡겨 융화시키려고 했을 것이다. 또한 그는 그리 하였을 때 비로소 자신의 참되고 순수한 경지를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자연과의 융화를 추구한 것으로서, 그가 지은 <독좌경정산(獨坐敬亭山)>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뭇 새들 높이 날아가 사라지고, 외로운 구름만 한가로이 흘러가네.
바라봐도 서로 싫증나지 않으니, 이는 오직 경정산이 있을 뿐이네.
(衆鳥高飛盡, 孤雲獨去閑. 相看兩不厭, 只有敬亭山.)
위의 시에서 우리는 정적(靜寂)과 한가로움이 감도는 가운데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어 서로 간의 분별(分別)을 잊는 그의 경지를 느낄 수 있다. 경정산은 안휘성(安徽省) 선성현(宣城縣)의 북쪽에 있는 유명한 산이다. 그는 이 아름다운 산이 그저 좋아서 하염없이(이렇다 할 생각이 없이) 바라본 것이고, 산도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하염없이 그를 바라보아 주었다. 그는 산을 의인화(擬人化)시켜서 자기와의 분별을 없앤 것이다. 그리하여 언제나 바라보아도 서로 싫증이 나지 않았으니, 이는 그가 자기를 잊고 자연과 완전히 융화되어 산과 한 몸이 된 순수(純粹)한 경지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서로 싫증나지 않는 것은 오직 경정산 뿐이라고 하였으니, 그에게 있어서의 자연은 영원히 싫증나지 않는 벗인 동시에 궁극적(窮極的)인 귀의처(歸依處)였던 것이다.
두보는 이백과 병칭(竝稱)되는 중당(中唐)의 위대한 시인으로서, 이백의 성격이 격정적(激情的)이고 자유분방(自由奔放)했던 데 비하여 유가적(儒家的)인 윤리관(倫理觀)을 바탕으로 현실(現實) 속에서 착실하게 살려던 사람이었으며, 시형(詩型)에 있어서도 격율(格律)이 가장 엄격한 율시(律詩)를 잘 지었다. 또한 그는 일생을 통한 곤궁한 생활과 안록산의 난을 전후한 시기의 대혼란을 겪으면서 그가 체험한 여러 가지 정치적 사회적 모순을 반영하여 고시체(古詩體)로써 현실주의적(現實主義的)인 사회시(社會詩)를 짓기도 했다. 우선 그의 대표적인 율시(律詩)의 하나인 <춘망(春望)>시(詩)를 보면 다음과 같다.
나라는 부서져도 산천은 여전하여, 도성에 봄이 오니 초목이 우거졌네.
시국을 슬퍼하여 꽃은 눈물 뿌리고, 이별 한스러워 새의 마음 놀라네.
전란의 봉화불 석 달을 이어지니, 집에서 온 편지는 만금에 해당되네.
흰 머리는 긁을수록 더욱 짧아져서, 모두어도 비녀를 이겨내지 못하네.
(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 感時花濺淚, 恨別鳥驚心, 烽火連三月, 家書抵萬金, 白頭搔更短, 渾欲不勝簪.)
위의 시에서 우리는 두보의 우국지정(憂國之情)과 비전사상(非戰思想)을 엿볼 수 있다. 작자는 첫귀에서부터 ‘나라는 부서져도(國破)’라는 강렬한 시어(詩語)로써 처참한 전쟁상(戰爭象)을 긴박한 현실감을 띠면서 그려냈고, 이러한 상황을 다시 ‘산천은 여전하여(山河在), 도성에 봄이 오니 초목이 우거진’ 모습과 대조시켜서 대단히 허무(虛無)하고 우울(憂鬱)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니 자신의 심정(心情)으로는 봄철을 맞아서 이슬을 머금고 피어난 꽃은 전란(戰亂) 중의 어려운 시국(時局)을 슬퍼해서 눈물을 뿌리는 것 같았고, 짹짹거리며 지저귀는 새소리는 가족(家族)과의 이별(離別)이 한스러워 마음이 놀라서 그러는 것으로 보였다. 이는 바로 작자 자신이 처한 상황과 심정이 그러함을 말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 전란은 석 달 동안이나 끊이지 않고 지속되고 있으니, 집에서 온 편지를 한 통이라도 받는다면 그것은 만금(萬金) 만큼이나 귀한 것이 될 것이다. 이는 실제로는 전란 중이라 집에서 온 편지를 받지 못하여 헤어진 가족의 안부를 전혀 알 수 없는 애타는 상황을 말해주는 것이다. 더욱이 그의 몸은 이미 늙고 쇠약해졌으므로, 숱이 적은 흰 머리는 상투를 틀려고 긁어 올릴 때마다 더욱 짧아져서 비녀를 꽂을 수 조차 없었으니, 인생의 무상(無常)함 마저 느끼게 되어 더욱 비애(悲哀)에 젖었던 것이다.
이제 고시체(古詩體)로써 지은 현실주의적(現實主義的)인 사회시(社會詩)로서 <석호리(石壕吏)>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날 저물어 석호촌에 묵고 있는데, 관리가 한밤중에 사람을 잡아가네.
영감은 담장을 넘어서 달아나고, 할멈이 문밖에서 관리를 맞이하네.
관리의 호통은 어찌 저리 거세고, 할멈의 흐느낌 어찌 저리 애닲은가.
할멈의 하소연하는 말 들어보니, 세 아들이 업성을 지키러 나갔다오.
한 아들이 부친 편지가 왔는데, 두 아들은 최근의 전투에서 죽었다오.
산 놈은 어찌어찌 해서 산다지만, 죽은 놈은 영원히 끝장이 아니겠소.
집안에는 더 이상의 사람은 없고, 오직 젖먹이 손자가 있을 뿐이라오.
가지 않은 손자의 어미가 있지만, 입고서 나갈 성한 치마조차 없다오.
늙은 몸이라 기운은 비록 없지만, 나으리를 따라서 밤에 가게 해주오.
서둘러 하양의 전쟁터에 나간다면, 내일 새벽에 밥 지을 수 있겠지요.
밤이 깊자 말하는 소리 끊어지고, 흐느껴 우는 소리 들리는 듯하였네.
날이 밝아 내 갈 길을 떠나면서, 오직 영감하고만 작별할 수 있었네.
(暮投石壕村, 有吏夜捉人, 老翁踰牆走, 老婦出門看, 吏呼一何怒, 婦啼一何苦, 聽婦前致詞, 三男鄴城戌, 一男附書至, 二男新戰死, 存者且偸生, 死者長已矣, 室中更無人, 惟有乳下孫, 有孫母未去, 出入無完裙, 老嫗力雖衰, 請從吏夜歸, 急應河陽役, 猶得備晟炊, 夜久語聲絶, 如聞泣幽咽, 天明登前途, 獨與老翁別.)
위의 시에서 두보는 전쟁이라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한 가정의 모습을 통해서 정치적 암흑상태를 생생하게 묘사했다. 작자는 전편(全篇)의 모든 구절에서 한 사건을 객관적으로 서술했을 뿐 자신의 느낌을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이를 통해서 자신의 감정을 여실히 드러냄으로써 독자들에게 더욱 선명(鮮明)하고도 강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소식은 시의 극성기였던 당대(唐代)의 뒤를 이은 송대(宋代)의 시인으로서, 당시(唐詩)와는 다른 송대 특유의 시풍(詩風)을 완성시킨 인물이다. 그는 당시(唐詩)가 감각(感覺)이나 분위기에 치우쳤던 것과는 달리, 논리적(論理的)이고 철학적(哲學的)인 시를 지었다. 그러나 그의 시도 대부분은 개인적 서정(抒情)을 읊거나 자연의 경치를 노래했으며, 그의 독특한 예술적 성취(成就) 또한 이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개인적 서정을 읊은 시에서 인생에 대한 적극적(積極的)인 관심과 진지(眞摯)한 감정을 토로(吐露)하였고, 자연의 경치를 노래한 시에서 시인으로서의 생활정취(生活情趣)와 산수자연(山水自然)의 생생한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 또한 호방(豪放)한 개성(個性)과 뛰어난 재기(才氣)를 지녔던 그는 유(儒)․불(佛)․도(道)의 사상(思想)을 고르게 수용(受容)한 거시적(巨視的) 인생철학(人生哲學)을 구비하고, 시와 산문은 물론이고 송대에 새로이 흥성한 시가인 사(詞)와 전통시가의 하나인 부(賦)에 있어서도 제재(題材)의 무한한 확대(擴大)를 이룩하여, 중국문학사상(中國文學史上) 가장 호방한 풍격의 작품을 지었다.
또한 이러한 그의 호방성(豪放性)은 형식이 비교적 자유로운 사(詞)의 창작에서 특히 남김없이 발휘되었다. 그의 사는 호방한 표현에 사실적(寫實的)인 묘사를 구사(驅使)하면서 거시적(巨視的)인 인생관(人生觀)을 그 안에 담고 있다. 그의 사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으로서, 그가 「적벽에서 옛날을 생각함」이라는 뜻으로 「적벽회고(赤壁懷古)」라고 부제(副題)를 붙여 지은 <염노교(念奴嬌)>사(詞)를 보면 다음과 같다.
큰 강은 동쪽으로 흐르며,
그 물결이 남김없이 쓸어갔으니, 천고의 풍류 인물들이었네.
옛 보루의 서쪽에 있으니,
사람들이 이를 두고 말하여, 삼국시대 주유의 적벽이라네.
흩어진 바위 구름을 뚫고,
놀란 파도는 강언덕을 찢으며, 천 무더기 눈을 말아올리네.
강산은 한 폭 그림일진대,
한 때는 호걸들이 그 얼마나 되었던가?
아득히 주유의 그 때를 생각해 보니,
소교가 막 시집을 왔었고, 씩씩한 모습에 재기를 드러냈지.
깃털 부채에 윤건을 쓰고,
담소하는 사이, 강한 적은 재처럼 날고 연기처럼 사라졌지.
옛 고장서 신선놀이 하니,
다정한 이들 마땅히 나를 비웃어, 벌써 흰머리가 생겼다나.
인간 세상은 꿈과 같으니,
한 잔 술을 강에 비친 달 위에 붓네.
(大江東去, 浪淘盡, 千古風流人物. 故壘西邊, 人道是, 三國周郞赤壁. 亂石崩雲, 驚濤裂岸, 捲起千堆雪. 江山如畵, 一時多少豪傑. 遙想公瑾當年, 小嬌初嫁了, 雄姿英發. 羽扇綸巾, 談笑間, 强虜灰飛烟滅. 故國神遊, 多情應笑我, 早生華髮. 人間如夢, 一樽還酹江月.)
위의 사(詞)에서 우리는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활약했던 주유(周瑜)와 제갈공명(諸葛孔明) 등 영웅 호걸(豪傑)의 삶일지라도 장엄(莊嚴)하고 영원(永遠)한 자연에 비하면 한낱 보잘 것 없는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 마디로 말한 그의 호방하고 거시적인 인생관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는 한 잔 술을 강에 비친 달 위에 부음으로써 영원히 자연에 귀의하려는 자신의 열망을 표현하였다. 이와 같이 자연을 영원한 것으로 인식하고 이에 융화되고자 하는 인생관의 철학적인 배경은 같은 시기에 지은 불후의 명작 <적벽부(赤壁賦)>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그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임술년 가을, 칠 월 보름 다음날,
소자 객과 배 띄우고, 적벽 기슭 노니는데,
맑은 바람 서서히 불어, 물결은 잔잔하니,
술잔 들어 객에게 권하면서, 명월의 시를 읊어, 요조의 장 노래했네.
이윽고, 동산에 달이 솟아, 남두성과 두우성 사이 배회하니,
흰 이슬안개 강 가로지르고, 물위에 비친 달빛 하늘과 맞닿았으며,
한 잎 갈대 배가 흘러가는 대로, 만 이랑 망망한 수면을 건너는데,
어찌나 넓은지, 허공에서 바람타고 날아, 그 멈춤을 모르는 듯하고,
훨훨 나부끼니, 속세 떠나 홀로 존재하며, 날개돋혀 신선된 듯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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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이 말하기를, 달 밝아 별 드문데, 까막까치 남쪽으로 날아가니,
이는 조조의 시가 아닌가.
서쪽을 바라보니 하구이고, 동쪽을 바라보니 무창이며,
산천은 서로 얽혀서, 짙푸르게 우거졌으니,
이는 조조가 주유에게 욕본 곳이 아닌가.
형주를 격파하고, 강릉으로 내려와서, 흐름 따라 동쪽으로 올 때,
군선은 연이어 천리이고, 깃발들이 하늘을 덮었는데,
술 따라 들고 강을 굽어보며, 창을 가로놓고 시를 지었으니,
진실로 일세의 영웅일진대, 지금은 어디 가고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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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자가 말하기를, 객도 저 강물과 달을 아는가?
흘러가는 것 이와 같으나, 아주 가버려 없어진 적 없고,
차고 비는 것 저와 같으나, 결국 늘거나 줄지 않았으니,
변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천지도 일순간을 멈추어 있지 못하지만,
불변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만물과 내가 모두 무궁하기 때문인즉,
그런데 또 무엇을 부러워 하겠는가?
또한 무릇 천지간에 있어, 만물은 각기 주인을 가졌으니,
만일 나의 소유 아니면, 터럭 하나라도 취해선 안될진대,
오직 강상의 맑은 바람 있어, 산간의 밝은 달과 더불어,
귀에 들리면 음악이 되고, 눈에 보이면 경치를 이루어서,
이를 취함에 막는 이 없고, 이를 써도 없어지지 않는즉,
이는 조물주의 무한한 보고로서, 나와 그대가 함께 즐길 것이네.
객은 기뻐하며 빙그레 웃고, 술잔을 가셔서 다시 따르니,
안주는 어느새 없어지고, 잔과 쟁반 어질러진 채,
서로 포개져 배에서 누워 자며, 동쪽이 어느새 밝은 것도 몰랐네.
(壬戌之秋, 七月旣望, 蘇子與客泛舟, 遊於赤壁之下, 淸風徐來, 水波不興, 擧酒屬客, 誦明月之詩, 歌窈窕之章. 少焉, 月出於東山之上, 徘徊於斗牛之間, 白露橫江, 水光接天, 縱一葦之所如, 凌萬頃之茫然, 浩浩乎, 如馮虛御風, 而不知其所止, 飄飄乎, 如遺世獨立, 羽化而登仙. ------ 客曰, 月明星稀, 烏鵲南飛, 此非曹孟德之詩乎. 西望下口, 東望武昌, 山川相繆, 鬱乎蒼蒼, 此非孟德之困於周郞者乎. 方其破荊州, 下江陵, 順流而東也, 舳艫千里, 旌旗蔽空, 釃酒臨江, 橫槊賦詩, 固一世之雄也, 而今安在哉. ------ 蘇子曰, 客亦知夫水與月乎. 逝者如斯, 而未嘗往也, 盈虛者如彼, 而卒莫消長也. 蓋將自其變者而觀之, 則天地不能以一瞬, 自其不變者而觀之, 則物與我無盡也, 而又何羨乎. 且夫天地之間, 物各有主, 苟非吾之所有, 雖一毫而莫取. 唯江上之淸風, 與山間之明月, 耳得之而爲聲, 目遇之而成色. 取之無禁, 用之不竭. 是造物者之無盡藏也, 而吾與子之所共適. 客喜而笑, 洗盞更酌, 肴核旣盡, 杯盤狼籍, 相與枕藉乎舟中, 不知東方之旣白.)
위의 부에서 소식은 초가을 적벽선유(赤壁仙遊)의 감상(感想)을 외면상(外面上)의 제재(題材)로 하고, 내면적(內面的)으로는 인간(人間)의 생사문제(生死問題)를 중심제재(中心題材)로 하여, 다양(多樣)한 구성(構成)과 시적(詩的) 정취(情趣)가 넘치는 내용을 표현하였다. 이 작품이 불후의 명문으로 성공한 일차적(一次的)인 요소는 제재선택(題材選擇)의 보편성(普遍性)과 표현기교(表現技巧)의 뛰어난 예술성(藝術性)에 있다. 특히 그 내면적 중심제재인 생사문제는 인간에게 너무나도 근본적(根本的)인 것이다. 소식은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가장 친숙(親熟)한 소재(素材)인 산(山)․수(水)․풍(風)․월(月)의 대자연(大自然)과 주(酒)․객(客) 및 역사상(歷史上)의 영웅(英雄)을 인용(引用)하였고, 간결평이(簡潔平易)한 묘사(描寫) 및 자연스러운 기교(技巧)로써 예술적인 경지(境地)를 드러내었다.
이 작품의 첫 단락(段落)은 서두(序頭)에서 시간(時間)․상대(相對)․장소(場所)를 밝힘으로써 서사적(敍事的)인 유기문(遊記文)의 형식을 취(取)했고, 뛰어난 서경(敍景) 및 즉흥적(卽興的) 서정(抒情)으로 낭만적(浪漫的)인 분위기를 조성(造成)하였다. 특히 그 서경(敍景)의 회화성(繪畫性)은 낭만적(浪漫的)이고 상징적(象徵的)인 분위기의 서경묘사(敍景描寫)를 크게 뒷받침하는 것으로, 시화합일(詩畵合一)의 문예론(文藝論)을 주장했던 소식의 탁월한 시정신(詩精神)이 반영된 것이다.
우선 그는 자신을 삼인칭(三人稱)으로 묘사하여, 초가을 저녁 적벽(赤壁) 강물 위에 객(客)과 선유(船遊)하는 낭만적 구도(構圖)의 객관적(客觀的) 소재(素材)로 포함시켰다. 이어서 「맑은 바람 서서히 불어, 물결은 잔잔하다」라고 하였는데, 회화적(繪畵的) 측면에서는 잔잔한 수면(水面)에서 맑은 바람을 연상(聯想)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객(客)과 술을 나누고, 당이 곧 떠오를 것을 예견(豫見)하여 ≪시경(詩經)≫의 <월출(月出)>편(篇)을 외워서 「요조(窈窕)」의 장(章)을 노래하는 모습은 정답고 한가롭기 그지없다.
우리는 그가 생(生)과 사(死)의 문제를 논함에 있어, 집착의 뿌리 없이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객관적인 사물로서 자연 속의 강물과 달을 예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그의 인생관은 변화하는 현상 세계에 집착하지 않고, 불변하는 본질 세계와 합일되려는 달관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 변하는 측면과 불변하는 측면에서의 관점은 우선 ≪장자(莊子)≫의 <덕충부(德充符)> 편에서 「서로 다르다는 관점에서 보면 가까이 붙어있는 간과 쓸개일지라도 초나라와 월나라 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되고, 서로 같다는 관점에서 보면 만물은 모두 하나이다(自其異者觀之, 肝膽楚越也, 自其同者觀之, 萬物皆一也)」라고 했듯이, 도가의 상대론적 입장과 내용이 일치한다. 이는 생과 사의 현상 역시 인간의 경험적 지식에 의해서 상대적으로 대립되어 있는 것일 뿐 절대적인 것은 아니고, 본질적으로 차별과 대립이 있을 수 없는 대자연의 이치에 따를 때 생과 사는 서로 같아서 만물과 내가 모두 무궁하다는 의미가 된다. 또한 이러한 현상과 본질은 불가에서의 색(色)과 공(空)의 문제로서, 이는 상대론을 넘어서고 있다. 색은 현상적인 것이고 공은 본질적인 것인데,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는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니, 만법의 공한 모양은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色卽是空, 空卽是色, ---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增不減)」라고 했다. 이는 인(因)과 연(緣)이 서로 응하여 만법(萬法)이 존재한다는 전체적 연기관(緣起觀)에 의한 것이다. 현상과 본질은 서로가 전체적으로 주어지며 하나만이 존재하지 않아서, 현상의 이면에는 반드시 본질이 있고, 본질적인 것에는 독립적인 유무(有無)나 완전한 증감(增減)이 있을 수 없으며, 변하는 현상과 불변하는 본질은 서로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로 원융(圓融) 혹은 교융(交融)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과 사 역시 현상적인 것일 뿐 만물은 끊임없이 생성변화한다는 본질적인 이치로 볼 때 그 분별은 있을 수 없으므로, 현상 세계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 생사문제의 고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고 하겠다. 결국 자연의 무궁함을 부러워하지 않게 된 그는 청풍명월의 낭만적 대자연을 찾으면서, 철학적 인생관의 경지를 성큼 넘어서는 탁월한 시정신을 발휘한다. 만물이 모두 같다는 장자의 도가적 입장에서는 이목(耳目)의 즐거움에 마음을 둘 수 없고,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말하는 불가의 공에는 「눈․귀․빛․소리가 있을 수 없겠으나(無眼耳---, 無色聲---)」, 청풍명월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주관적 감각에 의한 것이 아니고 조물주 대자연이 들려주고 보여주는 있는 그대로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속세의 소유 관념이 있을 수 없고, 그 가치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한 것이다. 이곳에서 「나와 그대가 함께 즐길 것이네.」라고 말을 맺은 그는 대자연을 이해하고 이에 융화되는 참된 경지와 인생을 긍정함에 따른 낙관적이고 적극적인 기상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 현대시는 호적(胡適)이 미국에서 돌아와 문예잡지 ≪신청년(新靑年)≫을 중심으로 백화문학운동(白話文學運動)을 주창(主唱)하면서부터 이른바 신시(新詩)라는 이름으로 창작되기 시작했다. 이때 활동한 시인들은 대부분 구시(舊詩) 형식의 속박을 깨고 있다는 면에서 시의 형식만을 바꾸었을 뿐 의식은 옛 시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단조로웠다. 다만 유반농(劉半農)의 시는 민중에 대한 관심으로 새로운 면을 보여주었다. 그의 시 <한 장의 종이를 사이에 두고(相隔一層紙)>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집안엔 난로불이 피워 있고
영감은 과일을 사오라 시키며 말한다.
“날씨는 춥지도 않은데 불이 너무 뜨거워,
나를 데워 죽게 할 작정이냐!”
집 밖엔 한 거지가 누워 있는데,
어금니를 악물고
북풍을 향해 “추워 죽겠다” 소리친다.
집 밖과 집 안이란
다만 한 장의 종이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인데.
( 屋子裏擺着爐火, 老爺吩咐買水菓,
說 “天氣不冷火太熱, 別任它烤壞了我.”
屋子外躺着一個叫化子, 咬緊着牙齒, 對着北風呼 “要死.”
可憐屋外與屋裏, 相隔只有一層紙! )
또한 곽말약(郭沫若)은 개인적 울분과 민족적 비애 그리고 뜨거운 열정의 낭만적인 열창으로 조국과 만족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비분강개함을 대신 노래하여 현대 낭만시의 선두를 장식하였다. 그의 시 <봉황열반(鳳凰涅槃)>의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섣달 그믐 저문 하늘에
오락가락 비상하는 한 쌍의 봉황,
------
숫봉황이 향나무를 쪼자
별 하나 하나가 불똥으로 튀어 나르고
암봉황이 화성으로 날자
연기 한 오래기 한 오래기가 하늘로 피어오른다.
------
불길은 당신
불길은 나
불길은 저 사람,
불길은 곧 불길
날아라, 날아
노래하라, 노래해.
( 除夕將近的空中,
飛來飛去的一對鳳凰,
------
鳳啄香木,
一星星的火點迸飛,
鳳扇火星,
一縷縷的香煙上騰.
------
火便是你,
火便是我,
火便是他,
火便是火,
翶翔! 翶翔!
歡唱! 歡唱! )
위의 시에서 중국의 근대사(近代史)를 외침(外侵)의 굴욕사(屈辱史)로 보고 근대사의 승리(勝利)를 외침과 봉건에 대한 저항으로 보았던 곽말약은 중국의 재생(再生)을 봉황(鳳凰)으로 상징(象徵)했다. 그 중국의 재생을 형상화(形象化)한 것이 바로 오백 년을 살고도 향나무를 모아서 거기에 불을 붙이고 죽은 잿더미에서 재생한다는 봉황이고, 그 봉황의 형상(形象)이 바로 비상(飛翔)이었다. 위의 시에서는 처음부터 ‘섣달 그믐 저문 하늘에 오락가락 비상하는 한 쌍의 봉황’을 등장시켰는데, 비상의 동작은 바로 불이나 힘의 종합적인 표현이었다.
또한 상징적으로 표현된 불길은 곧 중국의 문화와 역사를 짓눌렀던 봉건사상(封建思想)에 대한 화약(火藥)으로도 풀이되고, 민주주의 혁명을 도입한 중국의 새로운 창조(創造)와 저항(抵抗)의 불길로도 풀이될 수 있다. 하나는 과거를 불사르는 해방적(解放的)인 욕구의 불길이요, 하나는 미래를 점화하는 상향적(上向的)인 욕구의 불길인 것이다.
그후 문일다(聞一多)는 시의 격률(格律)을 완전히 무시한 이들을 비판하고, 백화(白話)로 지으면서도 시의 음악적인 미(美)와 함께 회화적인 미, 건축적인 미를 중시하면서 현대시의 새로운 격률 창조에 힘썼다. 그의 시 <사수(死水)>의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는 썩어 문드러진 폐수
바람이 일어도 잔물결 하나 일지 않는다.
차라리 망가진 구리나 고철들을 잔득 던지게나
그대의 반찬 찌꺼기나 식은 국물을 뿌리면서.
거기 구리조각들이 파랗게 비취가 되고
거기 쇠깡통에 복사꽃 녹이 슬지도 모른다.
거기 기름덩이에 곱게 비단을 짜고
거기 곰팡이에 구름노을이 자욱히 필지 모른다.
( 這是一溝絶望的死水, 這是 一溝 絶望的 死水,
淸風吹不起半點漪淪. 淸風 吹不起 半點 漪淪.
不如多扔些破銅爛鐵, 不如 多扔些 破銅 爛鐵,
爽性潑你的剩菜殘羹. 爽性 潑你的 剩菜 殘羹.
也許銅的要綠成翡翠,
鐵罐上銹出幾瓣桃花,
再讓油膩織一層羅綺,
霉菌給他蒸出些雲霞. )
위의 시에서 문일다는 ‘폐수(廢水)’로써 부패와 부조리로 기능을 상실한 사회를 상징하고, 이를 사랑으로 관조한 끝에 차라리 멸망의 순환을 바라는 애국심으로, 그러한 부패 속에서도 녹슨 깡통을 복사꽃으로, 응결된 기름덩이를 곱게 짜여진 비단으로, 곰팡이 핀 어느 물체를 구름노을로 미화(美化)하는 감성(感性)을 발휘했다. 또한 시를 ‘예술을 위한 예술’로 신앙시(信仰視)했던 그답게 청각상(聽覺上)․시각상(視覺上)의 미(美)를 추구해서, 위의 오른 쪽에 예시(例示)한 것처럼 한 절(節)을 사행(四行)으로 쓰면서 한 행은 또 네 개의 음절 마디로 나누었으며, 매 음절 마디는 대개 두 글자 혹은 세 글자의 기본조직을 갖게 하였다.
이 무렵에 노신(魯迅)은 산문시집(散文詩集) ≪야초(野草)≫를 발표했는데,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세속적인 사회와 암담한 정치현실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대체로 매우 상징적(象徵的)인 방법으로 창조된 형상(形象) 속에 감정을 함축시키는 예술성을 구비하였다. 그의 산문시 <추야(秋夜)>의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사는 집 뒤뜰에서는 담밖으로 두 그루의 나무가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한 그루는 대추나무이고, 또 한 그루 역시 대추나무이다.
그 위의 밤 하늘은 괴이하게 높은데, 내 평생에 이렇게 괴이하게 높은 하늘을 본 적이 없다. 그는 마치 인간세계를 떠나서 사람들로 하여금 올려다 보아도 더 이상 볼 수 없게 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쪽빛처럼 매우 푸르고, 수십 개의 별들의 눈, 차가운 눈을 반짝이며 깜박이고 있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를 드러내고 있어서, 스스로 자못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여기는 듯하면서, 가득한 서리를 내 뜰안의 야생 화초에 뿌려 놓고 있다.
나는 그 화초들이 실제로 무슨 이름으로 불리우는지, 사람들이 그들을 무슨 이름으로 부르는지를 모른다. 나는 매우 작은 분홍꽃이 피었던 한 종류를 기억하고 있는데, 지금도 아직 피고 있지만 더욱 매우 작아졌고, 그녀는 차가운 밤 공기 속에서 움츠러들며 꿈을 꾸면서, 봄이 오는 것을 꿈에 보고, 가을이 오는 것을 꿈에 보고, 수척한 시인이 눈물을 그녀의 가장 끝 꽃잎에 닦으면서 그녀에게, 가을이 비록 왔지만, 겨울이 비록 왔지만, 다음에 이어서는 다시 봄이니, 나비가 어지러이 날고, 꿀벌이 모두 봄노래를 부르기 시작할 거라고 말해주는 것을 꿈에 보았다. 그녀는 그때 빙긋이 웃었고, 그렇지만 안색은 불그스레 얼었으며, 여전히 움츠러들어 있었다.
( 在我的後園, 可以看見牆外有兩株樹, 一株是棗樹, 還有一株也是棗樹.
這上面的夜的天空, 奇怪而高, 我生平沒有見過這樣的奇怪而高的天空. 他彷佛要離開人間而去, 使人們仰面不再看見. 然而現在却非常之藍, 閃閃地睒着幾十個星星的眼, 冷眼. 他的口角上現出微笑, 似乎自以爲大有深意, 而將繁霜灑在我的園裏的野花草上.
我不知道那些花草眞叫什麽名字, 人們叫他們什麽名字. 我記得有一種開過極細小的粉紅花, 現在還開着, 但是更極細小了, 她在冷的夜氣中, 瑟縮地做夢, 夢見春的到來, 夢見秋的到來, 夢見瘦的詩人將眼淚擦在她最末的花瓣上, 告訴她秋雖然來, 冬雖然來, 而此後接着還是春, 胡蝶亂飛, 蜜蜂都唱起春詞來了. 她於是一笑, 雖然顔色凍得紅慘慘地, 仍然瑟縮着. )
위 산문시의 내용은 다시 대추나무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대추나무는 사람들이 대추를 다 따가고 잎새마저 모두 떨어져 버렸다. 별 반짝이는 하늘은 더욱 쪽빛으로 파래져서 불안한 것이 인간세계를 떠나서 대추나무를 피하려는 듯 했다. 대추나무의 줄기는 죽을 운명을 이겨내려는 듯 괴이하게 높은 하늘을 찔러댔다. 작은 분홍꽃의 꿈처럼 봄이 다시 오면 대추나무는 무성하게 잎이 돋고 열매가 맺힐 것이다.
작품의 내용에서 괴이하게 높은 하늘 아래 대추나무는 어려움에 처한 중국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노신은 대추나무에 감정을 기탁하고 있지만 상징적인 방법으로 감정을 함축시켰을 뿐 현실을 구체적으로 공격하지는 않았다. 또한 작품 원문(原文)의 밑줄 그은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같은 단어나 어휘를 지속적으로 반복함으로써 길고 짧은 호흡이 어울어지는 운률적(韻律的)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는 현실주의(現實主義) 문학에 대한 그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현실주의 문학을 논함에 있어서 지나치게 현실적 의의(意義)에만 치중한 나머지 문학예술성을 도외시(度外視)한다면, 이는 문학이 아닌 선전(宣傳)이나 광고(廣告)로 전락(轉落)하고 말 것이다. 노신이 직접 말했듯이, 비록 모든 문예가 선전일지라도 모든 선전이 다 문예인 것은 결코 아니다. 기실 선전효과를 놓고 보더라도 문학 속에서의 호소력과 설득력은 오히려 현실적 의의 표현이 명시적(明示的)일수록 약해지고 암시적(暗示的)일수록 강해진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