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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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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0    미국 녀성 시인 - 에드나 슨트 빈센트 밀레이 댓글:  조회:3716  추천:0  2015-04-25
활짝 편 손으로 사랑을                             / 에드나 빈센트 밀레이  활짝 편 손에 담긴 사랑, 그것밖에 없습니다 보석장식도 없고, 상처 날까 조심스레 숨기지도 않고, 누군가 모자 가득히 앵초풀꽃 담아 당신에게 불쑥 내밀듯이, 아니면 치마 가득 사과를 담아 주듯이, 나는 당신에게 그런 사랑을 드립니다 아이들처럼 외치면서 “내가 무얼 갖고 있나 좀 보세요! ―이게 다 당신 거예요!”   [출처]활짝 편 손으로 사랑을 - 에드나 빈센트 밀레이 - 한재영교수의 명시의 세계입니다|작성자 영원속으로     베토벤 교향곡을 들으며(外1수)   에드나 슨트 빈센트 밀레이[미국]       에드나 슨트 빈센트 밀레이 Edna St. Vincent Millay (1892-1950)   미국의 녀성 시인이자 극작가. 메인 주의 로클랜드에서 태어나 바사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첫 시집 을 펴내었다. 이 시집의 완숙한 기교와 신선감,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녀는 소넷(sonnet) 형식의 시에서 특히 빛이 나는 순수한 서정시인이었지만, 정치, 사회 문제에도 관심을 보였으며 녀배우로서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 퓰리처상을 받은 , 등의 시집과 희곡 작품 등이 알려져 있다. 그녀는 대담할 정도로 솔직한 관능적 표현과 자기 시대의 정신에 걸맞는 새로운 자유와 모랄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며 산 것으로도 유명하다       달콤한 소리, 오, 아름다운 음악이여, 그치지 말아다오! 나를 세상에 되돌려 보내지 말아다오. 너와 함께만이 뛰어남과 평화로움이 있고 인간이 그럴 듯해 보이고 그의 목표가 뚜렷해지누나. 다정하고 영리한 네 선율에 매혹당해, 원한에 찬 자, 인색한 자, 무례한 자들이 사지를 벌린 채 공허하고 파리한 얼굴로 동화 속의 부엌데기들처럼 잠을 잔다. 이 순간은 세상이 줄 수 있는 최고의 것. 고문당한 나뭇가지에 피어난 고즈넉한 꽃. 거절하지 말아다오, 달콤한 소리여, 나를 살게 해다오. 파멸의 운명이 내 성루를 찾아내 부숴버릴 때까지는 이우는 태양 아래 주문에 걸려 있는 도시를. 음악은 나의 성벽, 나의 유일한 성벽.   유년은 아무도 죽지 않는 왕국이다   유년이란 것은 태어나서부터 어느 나이까지가 아니고, 어느 나이엔가 아이는 다 자라 어릴 적 것들을 치워 버린다. 유년은 아무도 죽지 않는 왕국이다.   말하자면, 중요한 사람은 아무도 죽지 않는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먼 친척들은 물론 죽는다. 혹은 한 시간쯤 본 적이 있는 친척들도. 그리고 그들은 분홍색과 초록색 줄무늬의 봉지에 든 캔디 하나 혹은 재크나이프 한 개를 주고 가버렸고 그러므로 결코 정말로 살았던빈센트 밀레이 빈틈없이 약삭빠른 윤나는 갈색의 벼룩들이 느릿느릿 살아 있는 세계 속으로 떨어져 나온다. 너는 구두 상자를 가져 오지만, 그러나 고양이는 이젠 웅크리려 하지 않기에 그 상자는 너무 작다. 그래서 너는 좀더 큰 상자를 찾아, 고양이를 마당에 묻고, 운다. 하지만 네가 그로부터 한 달, 두 달 후에, 그로부터 일 년, 이 년 후에, 한밤중에 깨어나 손가락 마디를 입에 물고 울면서, 아 하나님! 아 하나님! 하고 말하는 일은 없다. 유년은 중요한 사람은 아무도 죽지 않는, 어머니들과 아버지들은 죽지 않는 왕국이다.   그리고 만일 네가, 혹은 라고 말했다면, 내일 혹은 모레라도, 네가 재미있게 노느라 바쁘다 하더라도, 라고 말할 시간은 충분히 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죽은 사람들과 함께 식탁에 앉는 것이다. 그들은 듣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으며, 차를 마시지도 않는다. 생전에는 차가 낙이라고 말했었으면서도.   지하실로 달려 내려가 마지막 남은 나무 딸기 병을 갖고 올라 오라. 그래도 그들은 끌려 들지 않는다. 그들의 비위를 맞추고, 그들이 정확히 그때에 주교에게 혹은 감독관에게 혹은 마슨 부인에게 뭐라 말했었는지 물어 보라.   그래도 그들은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그들에게 소리치고, 얼굴을 붉히며 일어나 그들의 뻣뻣한 어깨를 잡고 의자에서 끌어내 그들을 흔들어 대면서 악을 써 보라. 그들은 놀라지 않는다. 당황조차 하지 않는다. 그들은 도로 자기들의 의자에 미끄러지듯 앉는다.   너의 차는 이젠 차갑게 식었다. 너는 그것을 선 채로 마시고 그리고 집에서 나간다.                     [출처]활짝 편 손으로 사랑을 - 에드나 빈센트 밀레이 - 한재영교수의 명시의 세계입니다|작성자 영원속으로  
1059    80년 반입 금지령 내려졌던 책 댓글:  조회:5080  추천:0  2015-04-25
  英 포츠머스市, 비판작가 책 금지령 80년만에 철회 영국 유명 소설가 찰스 디킨스의 고향인 영국 포츠머스 시(市)가 디킨스를 비판한 작가의 저서에 대한 반입 금지령을 80년 만에 철회하기로 했다.    영국 BBC 방송에 따르면 포츠머스 시의회는 디킨스 탄생 200주년을 앞두고 지난 80년간 시내 도서관에 반입이 금지됐던 작가 칼 로버츠의 저서들을 다시 들이기로 했다.    지난 1928년 로버츠는 자신의 저서 '우상숭배의 이 편(This Side Idolatry)'에서 디킨스를 호의적이지 않은 관점으로 묘사했다.    로버츠는 비록 소설이더라도 자신의 책을 통해 디킨스를 둘러싼 신화를 타파하길 희망했고, 그의 책은 발간되자마자 논란에 휩싸였다.    영국 일요신문 선데이타임스에 실린 한 논평은 "로버츠는 디킨스를 위선자이자 바람둥이에다가 이기적이고 저속하며, 뚱하고 탐욕스러울 뿐 아니라 책 속에서 자신의 친구들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는 인물로 만들었다"고 평하기도 했다.    이에 불쾌해진 포츠머스 시는 시내 모든 도서관에 로버츠의 저서 반입을 금지했고 이는 80년 동안 이어졌다.    포츠머스 시의회의 문헌 담당관인 돔 키핀은 "이젠 지나간 일은 잊어 버려야 할 때"라며 "당시에는 디킨스의 유산을 보호하려는 조치였지만, 이제는 표현과 토론의 자유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디킨스도 동의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는 "디킨스의 문학적 유산은 매우 인정받고 있고, 로버츠의 저서는 디킨스를 영국의 위대한 작가들 가운데 한 명으로 만든 생각과 견해들이 짜인 풍요로운 태피스트리에 단지 힘을 더할 뿐"이라고 덧붙였다.
1058    지구상에서 유령이 가장 많이 사는 도시 댓글:  조회:4937  추천:0  2015-04-25
지구상에서 유령이 가장 많이 사는 도시       파이낸셜타임스 주말판(2, 3일자)은 영국 런던에 유령이 가장 많이 살고 있다고 보도했다.    골목 어귀, 주택가, 지하철역, 공공 건물 등 유령과 관련이 없는 장소가 거의 없을 정도라는 것.   영국은행 박물관은 은행의 두 유령에 대한 공식자료까지 전시하고 있다.    한 명은 은행 직원이었다가   1798년 은행 뜰에 매장이 허락된 뒤 가끔 나타나는 키 228.6㎝의 윌리엄 젠킨스.    사후(死後) 자신의 시체가 영혼을 불러내는 실험을 하려는 도굴꾼들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주장해    은행 이사회가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다른 한 명은 1838년에 사망한 사라 화이트헤드로 은행 입구에서 떠돈다.    은행에서 일하던 오빠가 사기 혐의로 교수형에 처해지자    정신이상을 일으켜 은행 직원들을 붙잡고 오빠의 행방을 물었다는 여자다.    당시 은행은 돈을 줘서 쫓아버렸는데 죽어서 은행 계단으로 돌아온 셈.     유령들은 시 외곽인 히스로 국제공항으로 세를 넓혔다.    1947년 비행기 사고 이후 잘 차려입은 신사 유령이 공항 소방관들에게 자신의 서류가방이 어디 있는지를 묻는다고 한다.   이제는 런던의 유령 거리에 대한 전문안내서에다 5파운드에 하룻밤 동안 유령거리를 도는 관광상품까지 나왔다.     천연두로 숨진 ‘긁는 소리를 내는 패니’는 관광객들에게 특히 유명하다.    본명이 프란세스 파슨스인 이 유령은 긁는 소리로 암호를 보내 자신이 독살됐다고 알렸는데    시체를 꺼내 부검해보니 사실로 밝혀졌다.     이런 유령들을 조사하는 단체로는 1863년 설립된 유령클럽회가 유명하다.    소설가 찰스 디킨스도 회원으로 활동했고 현재 200여명의 회원이 있다.    
1057    정끝별 시 한수 댓글:  조회:3345  추천:0  2015-04-25
으름이 풍년 - 정끝별(1964~ ) 쩍 벌어진 으름 씨는 새가 먹고 굴러 떨어진 헛이름은 개가 먹고 갓 벌어진 주름은 내가 먹고 군침 흘리던 해어름 먹구름은 나와 개와 새를 으르며 붉으락 붉으락 으름장을 펼쳐놓고 아뿔싸 입에 쩍쩍 들러붙은 가을 게으름이라니! 음 물큰한 처음 졸음처럼 들척지근한 죽음 음음 잘 익은 울음 오랜 으름 다 먹었다 소리 내어 읽어봐야 제 맛이 난다. 으름·헛이름·주름은 ‘름’자 항렬이다. 해어름·먹구름·게으름도 ‘름’으로 끝을 맞춘 방계 혈통이다. 다음에 오는 처음·죽음·울음은 ‘음’자 항렬이다. ‘름’과 ‘음’은 소리값이 유사한 고종 사촌지간이다. 으름, 으르는 것, 으름장은 이종사촌쯤 되겠다. 누군가는 으름을 먹고 게으름을 부리며 주름을 늘리며 산다. 그 사이 물큰한 ‘처음’들과 잘 익은 ‘울음’들이 끼어든다. ‘처음’과 ‘울음’으로 연륜을 쌓으며 살다 마지막으로 맞는 게 ‘죽음’이다. ------------------------------------------------- 오픈지식 현대 문학의 이해 1)시 1. 시의 뜻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을 운율 있는 언어로 압축하여 표현한 글 2. 시의 3대 요소 ⑴  음악적 요소 : 시에 깃들어 있는 소리에 의해 나타나는 요소. 운율을 말한다. ⑵ 회화적 요소 : 시에 나타나는 형상에 의해 나타나는  요소. 심상을 말한다. ⑶ 의미적 요소 : 시에 담겨져 있는 뜻에 의해 나타나는 요소. 정서와 사상을 말한다. 3. 시의 형식적 요소 ⑴  시어 : 시에 쓰인 말. 운율, 심상, 함축적 의미를 지닌다. ⑵ 시행 : 시의 한 줄 한 줄 ⑶ 연 : 시에서 한 줄 띄어 쓴 한  덩어리 - : :시어  : :시행  : :연  : :시 ⑷  운율 : 시어들의 소리가 만들어 내는 가락  : : : : : 4. 시의 내용적  요소 ⑴ 주제 : 시에 담긴 지은이의 느낌이나 중심되는 생각. 주로 암시적으로 표현된다. ⑵ 소재 : 주제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한  글감 ⑶ 심상(image) : 사람의 여러 감각을 자극하여 마음 속에 감각했던 것을 다시 기억하여 재생시키는 것 5. 시의 운율 시에  있어서 음악성을 나타나 해 주는 것으로 자음과 모음을 규칙적으로 반복하는 韻과 소리의 고저 장단 강약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律格으로  나뉜다. ⑴ 운율의 갈래 ① 외형률 : 시어의 일정한 규칙에 따라 생기는 운율로 시의 겉모습에 드러난다. 정형시에서 흔히 볼  수 있다. - 음수율 : 시어의 글자수나 행의 수가 일정한 규칙을 가지는 데에서 오는 운율 - 음위율 : 시의 일정한 위치에 일정한  음을 규칙적으로 배치하여 만드는 운율.  :일정한 음이 시행의 앞부분에 있는 것을 두운, 가운데 있는 것을 요운, 끝 부분에 있는 것을  각운이라고 한다. - 음성률 : 음의 길고 짧음이나, 높고 낮음, 또는 강하고 약함 등을 규칙적으로 배치하여 만드는  운율 - :음보(音步) : 우리 나라의 전통시에서 발음 시간의 길이가 같은 말의 단위가 반복됨으로써 생기는 음의 질서. 보통 띄어  읽는 단위가 되는데 일반적으로 평시조는 4음보격, 민요시는 3음보격으로 되어 있다. (즉, 3.4조니, 4.4조니 할 때의 시는 3 4음절이  하나의 음보를 이루고, 이것들이 3번 내지 4번 반복되어 하나의 큰 休止를 가져 온다는 뜻이다) ② 내재율 : 일정한 규칙이 없이 각각의  시에 따라 자유롭게 생기는 운율로 시의 내면에 흐르므로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자유시에서 흔히 볼 수 있다. ⑵ 운율을 이루는  요소 ① 동음 반복 : 특정한 음운을 반복하여 사용 ② 음수 반복 : 일정한 음절 수를 반복하여 사용 ③ 의성어, 의태어 사용  : 감각적 반응을 일으킨다. ④ 통사적 구조 : 같거나 비슷한 문장의 짜임을 반복하여 사용 6. 심상의  갈래 ⑴ 시각적 심상 : 색깔, 모양, 명암, 동작 등의 눈을 통한 감각 : 알락달락 알록진 산새알 ⑵  청각적 심상 : 귀를 통한 소리의 감각 :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⑶ 후각적 심상 : 코를 통한 냄새의  감각 :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⑷ 미각적 심상 : 혀를 통한 맛의 감각 : 모밀묵이 먹고  싶다. 그 싱겁고도 구수하고  ⑸ 촉각적 심상 : 살갗을 통한 감촉의 감각 : 아름다운 영원을 내 주름 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⑹ 공감각적 심상 : 동시에 두 감각을 느끼는 것 : 분수처럼 쏟아지는 푸른 종소리 7. 심상의 시적 기능   : : : ⑴ 구체성 : 단순한 서술에 비해 대상을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다. ⑵  함축성 : 시어의 의미와 느낌을 한층 함축성 있게 나타낼 수 있다. ⑶ 직접성 : 감각을 직접적으로 뚜렷이 전달할 수 있다.   : : : : : : : 8. 시의 갈래 ⑴  형식상 갈래 ① 정형시 : 형식이 일정하게 굳어진 시 - 음수적 정형시 : 글자의 수가 일정한 시. 7·5조, 4·4조, 오언시  등 - 시행적 정형시 : 시행의 수가 일정한 시. 향가, 소네트(sonnet) 등 ② 자유시 : 특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지은 시 ③ 산문시 : 행의 구분이 없이 산문처럼 쓰여진 시. 운율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산문과 구분된다. ⑵ 내용상  갈래 ① 서정시 : 개인적인 정서를 읊은 시 - : :서경시 : 자연 풍경을 주로 읊은 시로 서정시에  속한다. ② 서사시 : 신화나 역사, 영웅들의 이야기를 길게 읊은 시 ③ 극시 : 사건의 전개를 대화 형식으로 쓴 시. 운문으로 된  희곡 ⑶ 성격상 갈래  ① 순수시 : 개인의 순수한 서정을 중시한 시 ② 사회시(참여시) : 사회의 현실에 참여하여  자신의 의견을 내놓는 시 9. 서정적  자아 지은이와는 별도로 시 속에서 말을 하는 사람으로 1인칭으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에서는 어떤 남자  어린이가 서정적 자아가 될 것이고, 이육사의 [광야]에서는 지사적이고 예언자적인 남성이 서정적 자아가 될 것이며, 우리 민요 [아리랑]의 서정적  자아는 임과 이별하는 애달픈 여인이 될 것이다. 10. 어조  어조를 서정적 자아의 목소리라고 한다면 그 목소리는 강하거나 약하거나,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이거나 하는 어떤 가락을 지닌다. 이  때의 시의 서정적 목소리를 어조(Tone)라고 한다. 따라서 어조는 시인의 태도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시가 어떤 어조를 갖는냐에 따라  독자는 남성적 여성적, 또는 강건 온화 우아 비장 등의 다양한 목소리를 체험하게 된다. 11. 시의 상징  ⑴ 관습적 상징 : 한 사회에서 오랫동안 쓰여져서 널리 인정되는 상징 : 비둘기 → 평화, 십자가 →  기독교, 월계관 → 승리 등 ⑵ 창조적 상징 : 개인에 의해 만들어져서 문학적 효과를 발휘하는 상징.  :작품이나 작가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12. 시적 허용  시에서 구사되는 어휘는 함축적이고 암시적일 뿐만 아니라, 문법적 측면에서 허용되지 않는 표현도 자유로이  사용된다. :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그리움과 아쉬움에 ) 13. 시어의 모호성(다의성)  한 개의 시어, 또는 문장 구조 속에 두 개 이상의 의미가 들어 있는 것으로 시어가 하나의 의미로만 해석되지 않고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므로 오히려 시의 의미와 가치를 풍부하게 한다.  
1056    語錄 댓글:  조회:8466  추천:0  2015-04-23
1. 坚定信心、凝聚共识、统筹谋划、协同推进。   2. 实践发展永无止境,解放思想永无止境,改革开放也永无止境,停顿和倒退没有出路。   3. 敢于啃硬骨头,敢于涉险滩,既勇于冲破思想观念的障碍,又勇于突破利益固化的藩篱。   4. 我们要尊重人民首创精神,在深入调查研究的基础上提出全面深化改革的顶层设计和总体规划,尊重实践、尊重创造,鼓励大胆探索、勇于开拓,聚合各项相关改革协调推进的正能量。   5. 空谈误国,实干兴邦。   6. 办事依法、遇事找法、解决问题用法、化解矛盾靠法。   7. 有权必有责,用权受监督,失职要问责,违法要追究。   8. 回首过去,必须牢记,落后就要挨打,发展才能自强。   9. 审视现在,必须牢记,道路决定命运,找到一条正确的道路多么不容易,我们必须坚定不移走下去。   10. 展望未来,必须牢记,要把蓝图变为现实,还有很长的路要走,需要我们付出长期艰苦的努力。   11. 历史告诉我们,每个人的前途命运都与国家和民族的前途命运紧密相连。国家好,民族好,大家才会好。   12. 人民是历史的创造者,群众是真正的英雄。人民群众是我们力量的源泉。   13. 我们深深知道:每个人的力量是有限的,但只要我们万众一心,众志成城,就没有克服不了的困难;每个人的工作时间是有限的,但全心全意为人民服务是无限的。   14. 责任重于泰山,事业任重道远。我们一定要始终与人民心心相印、与人民同甘共苦、与人民团结奋斗,夙夜在公,勤勉工作,努力向历史、向人民交一份合格的答卷。   15. 中国需要更多地了解世界,世界也需要更多地了解中国。   16. 我们自豪而不自满,决不会躺在过去的功劳簿上。   17. 打铁还需自身硬。   18. 我们的人民热爱生活,期盼有更好的教育、更稳定的工作、更满意的收入、更可靠的社会保障、更高水平的医疗卫生服务、更舒适的居住条件、更优美的环境,期盼着孩子们能成长得更好、工作得更好、生活得更好。人民对美好生活的向往,就是我们的奋斗目标。   19. 人世间的一切幸福都是要靠辛勤的劳动来创造的。   20.“众人拾柴火焰高。”   21.“千磨万击还坚劲,任尔东西南北风。”   22. 永远要有逢山开路、遇河架桥的精神,锐意进取,大胆探索,敢于和善于分析回答现实生活中和群众思想上迫切需要解决的问题,不断深化改革开放,不断有所发现、有所创造、有所前进,不断推进理论创新、实践创新、制度创新。   23. 我们的事业越前进、越发展,新情况新问题就会越多,面临的风险和挑战就会越多,面对的不可预料的事情就会越多。我们必须增强忧患意识,做到居安思危,懂就是懂,不懂就是不懂;懂了的就努力创造条件去做,不懂的就要抓紧学习研究弄懂,来不得半点含糊。   24. 衡量一名共产党员、一名领导干部是否具有共产主义远大理想,是有客观标准的,那就要看他能否坚持全心全意为人民服务的根本宗旨,能否吃苦在前、享受在后,能否勤奋工作、廉洁奉公,能否为理想而奋不顾身去拼搏、去奋斗、去献出自己的全部精力乃至生命。一切迷惘迟疑的观点,一切及时行乐的思想,一切贪图私利的行为,一切无所作为的作风,都是与此格格不入的。   25. 要加强对权力运行的制约和监督,把权力关进制度的笼子里,形成不敢腐的惩戒机制、不能腐的防范机制、不易腐的保障机制。   26. 要坚持“老虎”、“苍蝇”一起打,既坚决查处领导干部违纪违法案件,又切实解决发生在群众身边的不正之风和腐败问题。   27. 位高不擅权、权重不谋私。   28. 要防止和克服地方和部门保护主义、本位主义,决不允许“上有政策、下有对策”,决不允许有令不行、有禁不止,决不允许在贯彻执行中央决策部署上打折扣、做选择、搞变通。   29. 工作作风上的问题绝对不是小事,如果不坚决纠正不良风气,任其发展下去,就会像一座无形的墙把我们党和人民群众隔开,我们党就会失去根基、失去血脉、失去力量。   30.“善禁者,先禁其身而后人。”   31. 要大力弘扬中华民族勤俭节约的优秀传统,大力宣传节约光荣、浪费可耻的思想观念,努力使厉行节约、反对浪费在全社会蔚然成风。   32. 作风是否确实好转,要以人民满意为标准。要广泛听取群众意见和建议,自觉接受群众评议和社会监督。群众不满意的地方就要及时整改。   33. 中央纪委、监察部和各级纪检监察机关要加大检查监督力度,执好纪、问好责、把好关。要以踏石留印、抓铁有痕的劲头抓下去,善始善终、善做善成,防止虎头蛇尾,让全党全体人民来监督,让人民群众不断看到实实在在的成效和变化。   34. 中国人民对战争带来的苦难有着刻骨铭心的记忆,对和平有着孜孜不倦的追求,十分珍惜和平安定的生活。中国人民怕的就是动荡,求的就是稳定,盼的就是天下太平。   35. 没有和平,中国和世界都不可能顺利发展;没有发展,中国和世界也不可能有持久和平。我们一定要抓住机遇,集中精力把自己的事情办好,使国家更加富强,使人民更加富裕,依靠不断发展起来的力量更好走和平发展道路。   36. 世界潮流,浩浩荡荡,顺之则昌,逆之则亡。   37. 世界繁荣稳定是中国的机遇,中国发展也是世界的机遇。   38. 我们要坚持走和平发展道路,但决不能放弃我们的正当权益,决不能牺牲国家核心利益。   39. 中国走和平发展道路,其他国家也都要走和平发展道路,只有各国都走和平发展道路,各国才能共同发展,国与国才能和平相处。   40. 中国发展绝不以牺牲别国利益为代价,我们绝不做损人利己、以邻为壑的事情。
1055    공자 시 어록 댓글:  조회:5072  추천:0  2015-04-23
『시경』을 게재하며                  --/『논어』에 언급된 공자의 시 관련 어록 (...공부하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침잠완색(沈潛玩索)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詩는 글자 그대로 믿을(寺) 수 있는 말(言)로, 뜻을 말하는 것(言志)이며, 노래가 말을 길게 빼는 것(歌, 永言)이다. 시가는 곧 노랫말을 읊는 것이다. 『시경』은 고대 중국에서 불렀던 노랫말로 가장 오래된 노랫말을 담고 있다. 노랫말은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교화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므로 공자는 이를 중시하여 하나의 책으로 엮었다.  삼경(시경 ․ 서경 ․ 역경) 혹은 오경(삼경+예기+춘추), 육경(오경+악기)중의 하나인 『시경』은 공자가 당시 유행하던 노래 3천여 편을 수집하여 산시서(刪詩書), 곧 깎아낼 것은 깎아내고 교육이 될 만한 것은 모아서 그중 311편만을 모아 하나의 책으로 엮은 것으로 크게 風(국풍 정풍) 雅(소아 대아) 頌으로 나뉜다.  “詩三百에 一言以蔽之면 曰思無邪라”  공자는 『시경』 삼 백편을 다 편집하고 난 뒤에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思無邪’라고 하였다(『논어』위정편 제2장). 『시경』의 글들이 “興也ㅣ라 賦也ㅣ라”하고 끝나 마음이 흥기되어 즐겁기는 하지만 關雎(관저)장에서 보듯이 음탕한 데로 흐르지 않고[樂而不淫], 슬프게 했어도 상하는 일이 없고[哀而不傷], 군자가 숙녀를 그리는 마음이 삿될 것 같은 데도 삿된 곳으로 흐르지 않음을 이른 말이다(『논어』팔일편 제20장).  공자가 시를 매우 중요히 여겼음은 『논어』 곳곳에 인용된 글들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는데, 위에 인용된 글 말고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子ㅣ 曰誦詩三百호대 授之以政에 不達하며 使於四方에 不能專對하면 須多ㅣ나 亦奚以爲리오 (공자 가라사대 시 삼 백편을 외우되 정사로써 줌에 통하지 못하며, 사방으로 부림에 능히 오로지 대하지 못하면 비록 많으나 또한 무엇에 쓰리오. - 자로편 제5장) [해설]  시경 삼백 편은 정치하는 법을 비유한 노래이다. 삼백 편을 달달 외우면서도 정치를 맡겨놓으면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사방 여러 나라의 사신이 되어 나갔을 적에 외교를 능수능란하게 하지 못하면 그런 사람을 어디에 쓰겠는가? “子ㅣ 曰小子는 何莫學夫詩오 詩는 可以興이며 可以觀이며 可以群이며 可以怨이며 邇之事父ㅣ며 遠之事君이오 多識於鳥獸草木之名이니라 (공자 가라사대 너희들은 어찌 시를 배우지 아니하는고? 시는 가히 흥기함이며, 가히 써 관찰함이며, 가히 써 무리하며, 가히 써 원망함이며, 가까이는 어버이를 섬기며, 멀리는 인군을 섬기고, 조수와 초목의 이름에 대하여 많이 아니라. - 양화편 제9장) [해설] 공자는 시의 중요성을 알고 제자들에게 시를 공부하도록 하였다. 시를 읽으면 흥기되고, 사물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으며, 무리와 더불어 화합하지만 함께 어울려 방탕한 짓은 하지 않고, 억울한 일에 대해 원망할 줄은 알지만 그로 인해 성내며 상하게 하는 일은 없을뿐더러, 부모를 섬기고 인군을 섬기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발로되며, 정서가 풍부해져 아는 것이 많아진다. “子ㅣ 謂伯魚曰女ㅣ 爲周南召南矣乎아 人而不爲周南召南이면 其猶正牆面而立也與인저(공자가 백어에게 일러 가로대 네가 주남 소남을 했는가? 사람이면서 주남 소남을 하지 아니하면 그 바로 담을 향하여 서 있는 것과 같을진저. - 양화편 제10장) [해설] 시 삼백편 가운데 처음에 나오는 국풍편의 주남장과 소남장을 읽으면 시를 다 공부했다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대목이다. 위 글은 공자가 아들인 백어에게 한 말로, 바로 담을 향하여 선다는 것은 그 지극히 가까운 땅에 이르러서도 하나의 물건도 보지 못하고, 더 이상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것과 같음을 이른 말이다. 끝으로 『시경』의 시 해석에 탁월했던 맹자는 ““說詩者는 不以文害辭하며 不以辭害志오 以意逆志라야 是得之矣라 / 시를 해설하는 자는 문으로써 말을 해하지 말며, 말로써 (지은이의) 뜻을 해하지 말고, (나의, 읽는 자의) 뜻으로써 (지은이의) 뜻을 志를 맞이하여야 이 얻음이 되니라(『맹자』만장상편 제4장)”라고 말하였듯이 지은이의 뜻을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1054    마음속에 새겨야 할 어록들-- 댓글:  조회:6346  추천:0  2015-04-23
답변 고마워요 -윈스턴 처칠 어록-   최선을 다하고 있노라고 말할 필요없다. 꼭 필요한 일을 반드시 성취해야 한다.   인간이 끊임없이 계속하는 노력에 의하여 달마다 또는 해마다 만들어내는 소득과 일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꾸준히 계속해서 들어오는 소득, 이 두가지만큼 서로 다른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연은 바람을 타고 오를 때가 아니라, 바람과 마주할때 가장 높게 나른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라는 말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말이다. 단지 성과만이 요구될 뿐이다   낙천적인 사람은 위기 속에서도 기회를 찾지만, 비관적인 사람은 기회가 와도 위험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기타 어록들-   ..『때를 놓치지 말라. 이 말은 인간에게 주어진 영원한 교훈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것을 그리 대단치 않게 여기기 때문에 좋은 기회가 와도 그것을 잡을 줄 모르고 때가 오지 않는다고 불평만 한다. 하지만 때는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다. - A. 카네기- 』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화살은 결코 돌에 꽂히지 않는다. 그것은 때로 그것을 쏜 사람에게로 도로 튀어 간다. -제롬- 』 ..『모든 행복한 가족들은 서로 서로 닮은 데가 많다. 그러나 모든 불행한 가족은 그 자신의 독특한 방법으로 불행하다. -톨스토이 - 』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알 수 없다. 그래서 인생은 멋진 것이다. -톨스토이 - 』 ..『깊은 강물은 돌을 던져도 흐리지 않는다. 모욕을 받고 이내 발칵하는 인간은 강도 아닌 조그마한 웅덩이에 불과하다. -톨스토이- 』 ..『자기가 보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막연히 바라보는 사람, 어디에 자기가 서 있는지 모른 채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 그들은 불행하다. -탈무드- 』 ..『물고기는 언제나 입으로 낚인다. 인간도 역시 입으로 걸린다. -탈무드 - 』 ..『나무는 그 열매에 의해서 알려지고, 사람은 일에 의해서 평가된다. -탈무드- 』 지난날 우리에게는 깜박이는 불빛이 있었고, 오늘날 우리에게는 타오르는 불빛이 있다.. 그리고 미래에는 온 땅 위와 바다 위를 비추는 불빛이 있을 것이다. - 윈스턴 처칠  ..『포도주는 새 술일 때에는 신포도와 같은 맛이 난다. 그러나 오래 되면 오래 될 수록 맛이 좋아진다. 지혜도 똑같은 것이다. 해를 거듭함에 따라 지혜는 닦여진다. -탈무드- 』 ..『해머로 자물쇠는 열리지 않는다. 자물쇠에 맞는 열쇠라면 열린다. -타고르 - 』 ..『행복의 비결은 포기해야 할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앤드류 카네기- 』 ..『밝은 성격은 어떤 재산보다도 귀하다. -앤드류 카네기-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부하로 하고 그와 더불어 일하는 길을 알고 있는 사람, 이곳에 잠자고 있다. -앤드류 카네기 묘비문- 』 누구라도 사과 속의 씨를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씨 속의 사과를 볼 줄 아는 눈은 흔치 않습니다. ..『세상에서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타인들에게서 사랑받는 덕(德)과 타인들이 두려워할 만한 뚜렷한 소신이 필요하다. -주베르- 』 ..『우리의 일생은 타인에게 얽매여 있다. 타인을 사랑하는 데에 인생의 반을 소모하고, 반은 타인을 비난하는 데에 소모한다. -조제프 주베르- 』 ..『난폭한 짐승이나 배회하는 새도 똑같은 덫이나 그물에 두 번 걸리지 않는다. -제롬- 』 ..『허영심은 인간의 마음을 흔드는 원동력이며 아첨은 이간 관계의 윤활유이다. -제롬 K. 제롬- 』 ..『오래 찾아야 하고 잘 발견되지 않으며 유지하기도 힘드는 것이 친구이다. -제롬 - 』 ..『우리는 서로의 건강을 위해 축배하고 자신들의 건강을 해친다. - J.K. 제롬 - 』 ..『원래 가난하고 천할 때는 가난하고 천한 그대로 행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는 어려운 그대로 행하면 근심이 없다. -자사- 』 ..『벽까지 몰아 붙이지 말라. -임어당- 』 ..『우리는 행복이란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재료와 힘을 자신 속에 지니고 있으면서도 기성품의 행복만을 찾고 있다. -알랭- 』 ..『산은 반드시 올라오는 자에게만 정복당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 -알랭- 』 ..『행복, 미래에 있을 듯 생각될 때 잘 생각해 보라. 그것은 이미 행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기대를 지닌다는 것, 이것이 곧 행복이다. -알랭- 』 ..『인간의 미래는 인간의 마음에 있다. - A. 슈바이처- 』 ..『삶을 바라보는 인간의 방식은 그의 운명을 결정한다. -알베르 슈바이처- 』 ..『약간의 근심, 고통, 고난은 항시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바닥 짐을 싣지 않은 배는 안전하지 못하여 곧장 갈 수 없으리라. -쇼펜하우어 -』 『 인생의 최초 40년은 내게 텍스트를 부여하고, 나머지 30년도 그에 대한 주석을 부여해 준다. -쇼펜하우어-』 『 스스로 돕지 않는 자에게는 기회도 힘을 빌려주지 않는다. -소포클레스- 』 『 네 자식들이 해 주기 바라는 것과 똑같이 네 부모에게 행하라. -소크라테스- 』 『 사냥꾼은 개로 토끼를 잡지만 아첨자는 칭찬으로 우둔한 자를 사냥한다. -소크라테스- 』 『 지도자는 물과 같이 외유내강(外柔內剛)해야 한다. -소크라테스- 』 『 사람의 일생은 한 순간의 여유마저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영원히 살 것처럼 한순간 한순간을 소홀히 여긴다. -셰익스피어- 』 『 부모들이 우리의 어린 시절을 꾸며 주셨으니 우리는 그들의 말년을 아름답게 꾸며 드려야 한다. -생텍쥐페리- 』 『 시작하는 데 있어서 나쁜 시기란 없다. - F. 카프카-』 『 두 가지, 세 가지 일로 마음을 두 갈래 세 갈래 내는 일이 없어야 한다. -퇴계 선생 -』 『 모기는 산을 짊어질 수 없고 작대기는 큰 집을 버틸 수 없다. -이황-』 『 부귀는 뜬 연기와 같고 명예는 나는 파리와 같다. -이황-』 『 행운은 매달 찾아온다. 그러나 그것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거의 다 놓치고 만다. 이번 달에는 이 행운을 놓치지 말라. -데일 카네기-』 『 성격의 씨앗을 뿌리면, 운명의 열매가 열린다. -나폴레옹 -』 『 사람의 눈은 그가 현재 어떻다 하는 인품을 말하고, 사람의 입은 그가 무엇이 될 것인가 하는 가능성을 말한다. -고리키-』 『 행복을 자신의 두 손안에 꽉 잡고 있을 때는 그 행복이 항상 작아 보이지만, 그것을 풀어준 후에야 비로소 그 행복이 얼마나 크고 귀중했던지 알 수 있다. -막심 고리끼-』 『 이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적을 만난다. -공자 -』 『 오해는 뜨개질하는 양말의 한 코를 빠뜨린 것과 같아서, 시초에 고치면 단지 한 바늘로 해결된다. -괴테-』 『 가라, 달려라, 그리고 세계가 6일 동안에 만들어졌음을 잊지 말라. 그대는 그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나에게 청구할 수 있지만 시간만은 안 된다. -나폴레옹- 』 『 작전계획을 세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적다. -나폴레옹 - 』 『 지도자란 희망을 파는 상인이다. -나폴레옹- 』 『 자신이 특별한 인재라는 자신감만큼 그 사람에게 유익하고 유일한 것은 없다. -데일카네기 - 』 『 해와 달이 아무리 밝더라도 엎어놓은 항아리의 밑은 비추지 못하고, 칼날이 아무리 날카롭다 해도 죄없는 사람은 베지 못하며, 뜻밖의 재앙도 조심하는 집 문안에는 들어오지 못한다. -강태공- 』 『 받은 상처는 모래에 기록하라. 받은 은혜는 대리석에 새기라. - B. 프랭클린 - 』 『 만일 우리자신에게 결점이 없다면 다른 사람의 결점에도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라 로슈프코 - 』 『 내 비장의 무기는 아직 손안에 있다. 그것은 희망이다. -나폴레옹 - 』 『 어제는 어젯밤에 끝났다. 오늘은 새로운 시작이다. 잊는 기술을 배워라.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라. -노만 V. 필- 』 『 강한 인간이 되고 싶다면, 물과 같아야 한다. -노자 - 』 『 귀로 남의 그릇됨을 듣지 말아라. 눈으로 남의 단점을 보지 말아라. 입으로는 남의 허물을 말하지 말아라. -명심보감 - 』 『 평생에 눈썹 찡그릴 일을 하지 않으면 세상에 이를 갈 사람이 없을 것이다. 크게 떨친 이름을 어찌 무딘 돌에 샛길 것인가. 길 가는 사람이 하는 말은 비석보다 나으니라. -격양시- 』 『 절망하지 말라. 설혹 너의 형편이 절망하지 않을 수 없더라도 그래도 절망은 하지 말라. 이미 끝장이 난 듯 싶어도 결국은 또 새로운 힘이 생겨나는 것이다. 최후에 모든 것이 정말로 끝장이 났을 때는 절망할 여유도 없지 않겠는가. - F. 카프카 - 』 『 마음이 편안하면 초가집도 편안하고, 성품이 안정되면 나물국도 향기롭다. -명심보감 - 』 『 충성스런 친구가 셋이 있다. -늙은 아내, 늙은 개, 그리고 현금. -벤저민 프랭클린- 』 『 굼벵이는 지극히 더럽지만 변하여 매미가 되어 가을 바람에 이슬을 마시고, 썩은 풀은 빛은 없지만 반디가 되어 여름달에 빛나나니 진실로 알겠노라. 깨끗함은 항상 더러운 데로부터 나오며, 밝은 것은 매양 어둠으로 좇아 생기느니라. -채근담- 』 『 기쁨에 들떠 가벼이 승낙하지 말고, 술취한 기분에 성내지 말라. 유쾌함에 들떠 일을 많이 벌리지 말고, 고달프다 하여 끝나기 전에 그치지 말지니라. -채근담- 』 『 그날 그날이 일생을 통해서 가장 좋은 날이라는 것을 마음속 깊이 새겨 두라. -에머슨- 』 『 마음은 자손의 뿌리이다. 뿌리를 심지 않고서도 그 가지와 잎이 무성한 일은 이제까지 없었느니라. -채근담- 』 『 실패를 맛본 사람만이 차별성,개성,영혼의 성장을 경험한다 -마티아스 호르크스- 』 『 웨이터의 매너가 좋으면, 어떤 술이라도 미주(美酒)가 된다. -탈무드 - 』 『 은혜와 의리를 널리 베풀라. 사람이 살다가 어느 곳에서든지 만나지 않으랴? 원수와 원한을 맺지 말라. 길이 좁은 곳에서 만나면 피하기가 어렵다. -경행록- 』 『 마음이 거기에 있지 아니하면 보아도 보이지 아니하고 들어도 들리지 아니하고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 -대학 - 』 『 강에 이르러 물고기를 부러워하는 것보다는 돌아와서 물고기를 잡을 그물을 만드는 것이 낫다. -회남자- 』 『 느닷없이 떠오르는 생각이 가장 귀중한 것이며, 보관해야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메모하는 습관을 갖자. -베이컨- 』 『 오래 엎드린 새는 반드시 높게 날고 먼저 핀 꽃은 홀로 일찍 떨어진다. 사람도 이런 이치를 알면 가히 발을 헛디딜 근심을 면할 수 있고, 가히 초조한 생각을 없앨 수 있느니라. -채근담- 』 『 석화의 불빛 속에서 길고 짧음을 다툰들 그 시간이 얼마나 길겠는가. 달팽이 뿔 위에서 자웅을 겨룬들 그 세계가 얼마나 넓겠는가. -채근담- 』 '한 사람이 꾸면 꿈이지만, 여럿이 함께 하면 현실이 됩니다.' 『 사나운 짐승은 굴복받기 쉬워도 사람의 마음은 항복받기 어렵고, 골짜기는 채우기 쉬워도 사람의 마음은 채우기 어렵다. -채근담- 』 『 마음이 넓으면 만종(萬鐘)의 녹(祿)도 질항아리와 같고, 마음이 좁으면 터럭 하나라도 수레바퀴와 같게 보이느니라. -채근담 - 』 『 새끼로도 톱삼아서 오래 쓰면 나무를 자르고, 물방울도 오래 떨어지면 돌을 뚫는다. 도(道)를 배우는 사람은 모름지기 힘써 찾기를 더할 것이니라. 물이 모이면 도랑이 되고, 오이는 익으면 꼭지가 떨어지나니 도를 얻으려는 사람은 하늘에 일임할지니라. -채근담- 』 『 나무는 뿌리로 돌아간 뒤에라야 꽃과 가지와 잎의 헛된 영화를 알게 되고, 사람은 관 뚜껑을 덮은 다음에라야 자손과 재물이 쓸데없다는 것을 알게 되느니라. -채근담- 』 『 사람을 부림에는 마땅히 각박하지 말라. 각박하게 대하면 성과를 올리려는 사람은 떠나느니라. 친구를 사귐에는 마땅히 마구 사귀지 말라. 마구 사귀면 아첨하는 자가 모여드느니라. -채근담- 』 『 생각이 너그럽고 두터운 사람은 봄바람이 따뜻하게 만물을 기르는 듯하여 무엇이든지 이런 사람을 만나면 살아나고, 마음이 모질고 각박한 사람은 차가운 눈이 만물을 얼게 하는 듯하여 무엇이든지 이런 사람을 만나면 죽느니라. -채근담- 』 『 배고프면 달라붙고, 배부르면 떠나가며, 따뜻하면 몰려들고, 추우면 버리나니 이것이 바로 인정의 널리 퍼진 폐단이다. -채근담- 』 『 성질이 조급하고 마음이 거친 자는 한 가지도 이루어지는 일이 없고, 마음이 화평하고 기상이 평탄한 자는 백 가지 복이 절로 모이느니라. -채근담- 』 『 세상을 살아감에는 마땅히 세속과 같게 하지도 말고, 또한 다르게 하지도 말라. 일을 함에는 마땅히 남을 싫어하게 하지도 말고 또한 기쁘게 하지도 말라. -채근담 - 』 『 바닷물이 마르면 마침내 그 밑바닥을 볼 수 있지만, 사람은 죽어도 그 마음속을 알 수가 없다. -명심보감- 』 『 차라리 밑 빠진 항아리는 막을 수 있지만, 코 밑에 가로놓인 입은 막기 어렵다. -명심보감- 』 『 경제가 허용하는 한, 몸에 걸치는 것에는 돈을 아끼지 말아라. 그렇다고 지나치게 차려 입어서는 안 된다. 대개 입은 것으로 미루어 그 인물을 알 수 있으니까. -셰익스피어- 』 『 기쁨과 노여움은 마음속에 있고, 말은 입에서 나오는 것이니 신중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 -채옹선생- 』  『 사람들은 행복과 불행은 모두 운명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운명은 우리에게 그 기회와 재료와 씨를 제공할 따름이다. -몽테뉴- 』 『 침묵을 당하는 모든 진실은 독이 된다. -니체 - 』 『 남을 꾸짖을 때는 허물이 있는 가운데서도 허물없음을 찾아내면 감정이 평온해지리라. 자기를 꾸짖을 때는 허물없는 속에서도 허물 있음을 찾아내면 덕이 자라나리라. -채근담- 』 『 성질이 조급하고 마음이 거친 자는 한 가지도 이루어지는 일이 없고, 마음이 화평하고 기상이 평탄한 자는 백 가지 복이 절로 모이느니라. -채근담- 』 『 늙은 눈으로 젊음을 보면 바쁘게 달리고 서로 다투는 마음을 가히 없앨 수 있고, 쇠퇴한 처지에서 영화로움을 보면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가히 끊을 수 있느니라. -채근담- 』 『 입술이 없어지면 입술에 가까이 있는 이가 시리다. 입술과 이는 별개의 것이지만 관계가 깊다. 세상에는 얼른 보기에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 같지만 불가분으로 연관되는 것이 있다는 말. -장자- 』 『 누군가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물으면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다고 답하라. 그리곤 그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알아내려 최선을 다하라 -테오도 루즈벨트- 』 『 마음에는 예의란 것이 있다. 그것은 애정과 같은 것이어서 그같이 순수한 예의는 밖으로 흘러나와 외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괴테- 』 『 제 마음이 늘 원만함을 얻는다면 천하도 저절로 결함이 없는 세계가 될 것이요, 제 마음이 늘 관대하다면 천하도 저절로 험악한 인정이 없을 것이니라. -채근담- 』 『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사람이 반드시 모두 성실하지 못하더라도 자기만은 홀로 성실하기 때문이며, 사람을 의심하는 것은 사람이 반드시 모두 속이지 않더라도 자기가 먼저 스스로를 속이기 때문이니라. -채근담- 』 『 생각이 너그럽고 두터운 사람은 봄바람이 따뜻하게 만물을 기르는 듯하여 무엇이든지 이런 사람을 만나면 살아나고, 마음이 모질고 각박한 사람은 차가운 눈이 만물을 얼게 하는 듯하여 무엇이든지 이런 사람을 만나면 죽느니라. -채근담- 』 『 열매를 맺지 않는 꽃은 심지 말고, 의리 없는 벗은 사귀지 말라. -명심보감- 』 『 비싼 진주가 없어져서, 이것을 찾기 위해 별다른 값어치도 없는 촛불이 사용된다. -탈무드 - 』 『 보이지 않는 가치를 논할 때에는 조심하라. 무형의 가치는 무한할 수도 있지만 보통은 엉터리일 때가 많으니까. -이드리스 샤흐- 』 『 즐거움에 찬 얼굴은 한 접시의 물로도 연회를 만들 수 있다. -허버트- 』 『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지만 일을 바르게 보는데도 한가지 방법뿐이다. 곧 일 전체를 보는 것이다. -존 러스킨- 』 『 불행한 사람은 언제나 자기가 불행하다는 것을 자랑삼고 있는 사람이다. -러셀- 』 『 우리들은 감탄과 희망과 사랑으로 산다. -워즈워드- 』 『 자기 불신은 우리들이 실패하는 대부분의 원인이다.-헤밍웨이- 』 『 성격이 모두 나와 같아지기를 바라지 말라. 매끈한 돌이나 거친 돌이나 다 제각기 쓸모가 있는 법이다. -안창호- 』 『 얼굴을 해가 있는 쪽으로 향하면 그림자를 볼 수 없다 -헬렌 켈러 』 『 성격이 모두 나와 같아지기를 바라지 말라. 매끈한 돌이나 거친 돌이나 다 제각기 쓸모가 있는 법이다.-안창호- 』 『 평온한 바다는 결코 유능한 뱃사람을 만들 수 없다.-영국속담- 』 『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손 안에 넣을 수 없다.-괴테- 』 『 오늘 계란 하나를 가지는 것보다 내일 암탉 한마리를 가지는 쪽이 낫다. - 플러-』 『 짬을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짬이 없다. - 유럽의 속담- 』 『 모든 경영관리 문제의 60% 이상이 잘못된 커뮤니케이션에서 기인한다- 』 『 시간의 걸음걸이에는 세 가지가 있다.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하고 있다. - F. 실러- 』 『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자본금이다. 이 자본을 잘 이용한 사람에겐 승리가 있다. - 아뷰난드- 』 『 행복의 원칙은 첫째 어떤 일을 할 것, 둘째 어떤 사람을 사랑할 것, 세째 어떤 일에 희망을 가질 것이다. 』 『 한창 때는 다시 오지 않고, 하루가 지나면 그 새벽은 다시 오지 않는다. 』 『 말은 마음의 초상이다 』 『 나를 세우는 데는 몇 천년이 걸리나 이것을 잿더미로 만드는 데는 하루면 된다 』 『 인간의 얼굴은 마음의 간판이고 생활의 기록이다』 『 인생은 진정 부메랑과 같다. 당신이 준 것만큼 받는다.』 『 말은 마음의 초상이다 』 『 로마인은 좋다 싶으면 그것이 적의 것이라 해도 거부하기보다는 모방하는 쪽을 선택했다 』 『 승자가 즐겨 쓰는 말은 “다시 한 번 해보자.” 이고, 패자가 즐겨 쓰는 말은 “해봐야 별 수 없다.” 이다』 『 꿈을 지녀라. 그러면 어려운 현실을 이길 수 있다 』 『 남을 따르는 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없다』 『 다른 사람의 인생과 비교하지 말고 그대 자신의 인생을 즐겨라 』 『 꿈을 계속 간직하고 있으면 반드시 실현할 때가 온다 』 『 성공하는 사람들이란 자기가 바라는 환경을 찾아내는 사람들이다. 발견하지 못하면 자기가 만들면 된다 』 『 맛 없는 국이 뜨겁기만 하다 』  『 불필요한 것을 사면, 필요한 것을 팔게 된다 』 『 결단을 내리면 즉시 실천하라. 김은 새어나가기 마련이다 』 『 사람을 의심하거든 쓰지 말고, 사람을 썼거든 의심하지 말라 』 『 지식보다는 상상력이 더욱 중요하다 』 『 당신의 능력은 당신이 고용한 사람들이 좌우한다 』 『 평온한 바다는 결코 유능한 뱃사람을 만들 수 없다 』 『 타인에게는 온순하되 자신에게는 엄격하라 』 『 분별 없이 행동하지 말고 산처럼 무겁고 조용하게 일을 해야 한다 』 『 얼굴을 해가 있는 쪽으로 향하면 그림자를 볼 수 없다 』 『 성격이 모두 나와 같아지기를 바라지 말라. 매끈한 돌이나 거친 돌이나 다 제각기 쓸모가 있는 법이다 』 『 갓 열리기 시작한 오이는 그 오이가 장차 맛있게 될지 어떨지 모른다 』 『 상처 입은 굴이 진주를 만든다 』 『 앞에 가던 수레가 전복한 것은 뒤에 오는 수레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앞 사람의 실패를 보고 뒷사람의 경계로 삼는다 』 『 불행한 사람은 언제나 자기가 불행하다는 것을 자랑삼고 있는 사람이다 』 『 책은 반드시 많이 읽을 필요가 없다. 읽은 책의 요령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 『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치열하면서도 온화해야 한다. 또한 이상주의자이면서 현실주의자이어야 한다. 』 『행복의 원칙은 첫째 어떤 일을 할 것, 둘째 어떤 사람을 사랑할 것, 세째 어떤 일에 희망을 가질 것이다.』 『독불장군이 되면 될수록 그만큼 자신의 위치가 흔들리는 법이며, 자신을 낮게 하면 할수록 견고하게 되는 법입니다』 『햇살이 뚫고 나오지 못할 만큼 두터운 구름은 없다 』 『작은 것만을 생각하고 있으면 사람도 작아진다. 큰 것을 생각하면 사람도 커진다 』 『 모든 경영관리 문제의 60% 이상이 잘못된 커뮤니케이션에서 기인한다 』 『 당신이 나타내는 것 중에서 표정이 가장 중요하다 』 『좋은 일을 생각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 나쁜 일을 생각하면 나쁜 일이 생긴다』 『 행복은 바로 감사하는 마음이다 』 『 같은 사물이라도 어떻게 보고 형상화하는가는 그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다르다 』 『 오래된 고객을 붙잡아라. 그것이 새 고객을 얻는 것보다 몇 배나 싸다 』 『 만사에는 두 가지의 시점이 있다. 적절한 시점 그리고 놓쳐버린 시점... 』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아랫사람들이 그들 자신이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성취하도록 고무시키는 능력이다』 『리더십은 혼자 못하는 사람들을 어디론가 데려가는 것을 의미한다』 『 나는 말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늘 본보기로 팀을 이끌었다 』 『네가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을 결코 부탁하지 말라』 『 어려움의 한복판에 기회가 있다 』 『 세상은 둥글다. 마치 막다른 골목처럼 보이는 곳도 실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 『 당신의 능력은 당신이 고용한 사람들이 좌우한다 』 『한 선수가 팀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일 수는 있지만, 한 선수만으로 팀을 만들 수는 없다 』 『감독이란 마치 손 안에 비둘기를 쥐고 있는 것과 같아. 너무 강하게 움켜쥐면 비둘기가 죽을 테고, 너무 약하게 죄면 비둘기는 날아갈 것이다』 『 사업에서 성공하려면 대담하라. 첫째가 되라. 남과 달라야 한다 』 『백년을 살 것같이 일하고 내일 죽을 것같이 기도하라. - B.프랭클린 - 』 『 작은 일이라고 해서 결코 낮춰보지 말라. 그 일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 『 경영자에게는 원시가 근시보다 낫다 』 『성공을 위한 모든 노력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타이밍이다.』 『 꾸중은 살짝이, 칭찬은 공개적으로... 』 『 큰 일과 작은 일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쓸모가 없다 』 『 성공의 규칙: 나는 결코 한번에 두 마리 토끼를 쫓지 않는다 』 『 부드럽고, 관대하고, 현명하며, 이성적이기 위해서는 적당한 분량의 엄격함을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 『경영자는 항상 현재와 먼 장래라는 두 개의 시간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어떤 일의 마지막 안은 10%가 전체 문제의 3분의 2를 만들어낸다. 』 『우리는 결코 「너무 늦었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시간은 언제나 있다』 『그간 우리에게 가장 큰 피해를 끼친 말은 바로 ‘지금껏 항상 그렇게 해왔어’라는 말이다.』 『 영광의 순간을 경험하고 싶다면 과감해져야 한다 』 『 날카로운 말은 약과 의사도 치료하기 힘든 상처를 낸다 』 『 당신의 모습은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만들어진다 』 『 누구나 자기가 아는 것을 좀더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한다 』 『행복이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즐거운 생각을 하고 있는 마음의 상태이다』 『할 수 없어도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으면 찬스는 없다. 우선"할 수 있다”라고 말하자 』 『 친절한 말 한 마디가 세 번의 겨울을 따뜻하게 한다 』 『죽지만 않는다면 나는 언제든지 빈손으로 재기할 수 있다. - 스유엔의 '상경'중에서 』 『할 수 없어도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으면 찬스는 없다. 우선 할 수 있다 라고 말하자』 『사람은 앞을 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백미러를 보고 있다』 『꿈을 계속 간직하고 있으면 반드시 실현할 때가 온다』 『이 세상의 일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예단(豫斷, 미리 판단함)은 금물이다.』 『 사람의 불행과 행복을 좌우하는 것은 비교이다 』 『 꿈을 계속 간직하고 있으면 반드시 실현할 때가 온다 』 『 하루의 가장 달콤한 순간은 새벽에 있다. - 윌콕스- 』 『지독히 화가 날 때에는 인생이 얼마나 덧없는가를 생각해 보라』 『가장 좋은 술에도 찌꺼기는 있다』 『 Fear can make you prisoner. Hope can set you free... 두려움은 당신을 가둬 두고, 희망은 당신을 자유롭게 한다. -쇼생크탈출- 』  『 Tomorrow is another day... 내일은 오늘보다는 나은 하루가 될꺼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 『 동기를 마련하는 것은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 『 "나처럼 행동하라"하고 누구에게나 말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 』 『 인생은 생각이 만들어낸 그대로이다. 』 『 재능의 일부는 용기에 있다 』 『 장래를 설계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신념도 필요한 것이다. 』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을 존경하는 것이다. 나는 바로 그렇게 한다.』 『사람을 변화시키고자 하면 그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점잖은 사람들은 남들을 반박하고, 현명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반박한다.』 『위대한 성공의 시초에는 언제나 비전이 있다.』 『전략은 외부에 존재하는 기회와 내부에 존재하는 역량을 통합하는 것이다.』 『가장 개선되어야 할 부분을 파악하려면 나쁜 소식을 받아들여라.』 『시작이 좋으면 끝도 좋다.』 『섣불리 예상하지 말라. 특히 미래에 대해선....』 『자신이 하는 일을 재미없어 하는 사람치고 성공하는 사람 못 봤다.』 『문제는 목적지에 얼마나 빨리 가느냐가 아니라, 그 목적지가 어디냐는 것이다.』 『인간이 노력하는 모든 분야에서 80%의 결과는 20%의 활동으로 생겨난 것이다. 』 『친절한 말 한 마디가 세 번의 겨울을 따뜻하게 한다.』 『사람을 잘 활용하는 회사가 급성장한다.』 『진정으로 성공한 지도자는,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발휘하는 데 있어 전혀 완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누구나 칭찬이라는 말로 인하여 하고자 하는 의욕이 생긴다.』 『현명해지기란 무척 쉽다. 그저 머리 속에 떠오른 말 중에 바보 같다 생각되는 말을 하지 않으면 된다.』 『나를 세우는 데는 몇 천년이 걸리나 이것을 잿더미로 만드는 데는 하루면 된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않아 당신은 사는 대로 생각할 것입니다.』 『과거는 생각하기 위해, 현재는 일하기 위해, 미래는 즐거움을 위해 존재한다.』 『자기가 인정한 것을 힘차게 찾아 헤매는 하루하루가 인생이다.』 『생각의 관점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가져라. 그리고 변화하라!』 『인간의 얼굴은 마음의 간판이고 생활의 기록이다.』 『 사람은 그가 입은 제복대로의 인간이 된다. 』 『굴러가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 고비의 순간일수록 여유로 극복하라. 』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서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 -법구경-』 『목적이 멀면 멀수록, 더욱더 앞으로 나아감이 필요하다. 성급히 굴지 말라. 그러나 쉬지 말라.』 『우리들은 감탄과 희망과 사랑으로 산다.』 『많은 민심을 얻으면 일국을 얻게 되고 민심을 잃으면 일국을 잃게 된다. 이것을 만고 불변의 정치의 요체다.』 『좋은 친구가 생기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스스로가 누군가의 친구가 되었을 때 행복하다.』 『남을 행복 되게 할 수 있는 사람만이 또한 행복을 얻는다』 『장애물과 기회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 차이란 그것에 대한 우리의 태도일 뿐이다.』 『 인연이란 만날 때 묻는 것이 아니라 헤어질 때 묻는 것이다. -영화중에서-』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유능한 간부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맡길 적임자를 고르는 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가 그 일을 하는 동안 간섭하지 않을 만큼 자제력을 가져야 한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을 존경하는 것이다.』 『인생에는 확실한 것이란 없고 오로지 기회만 있을 뿐이다.』 『네가 그렇게 보이고 싶은 사람이 되라.』 『정신에는 한계가 없다.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긋는 한계다.』 『자신이 하는 일을 재미없어 하는 사람치고 성공하는 사람 못 봤다.』 『이 세상이 어떠해야 하고 또 안 그럴 경우에는 비판을 하기보다는, 우리는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세 사람이 어떤 일을 같이 하면 반드시 스승으로서 배울 만한 사람이 있다.』 『낙관주의자는 모든 곳에서 푸른 신호등을 보며, 비관주의자는 붉은 신호등만을 본다. 그러나 진정으로 현명한 사람은 색맹이다.』 『기회는 어떤 준비되어 있는 정신이 필요하다』 『경영이란 다른 사람들을 북돋우고 고무시키는 기술이다』 『사업을 좌우하여라. 사업에 의해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편견을 부수기가 원자를 부수기보다 어렵다.』 『산 정상에 오르기 전에 결코 산의 높이를 재지말라. 정상에 오르면 그 산이 얼마나 낮은지 알게 될 것이다.』 『행복의 원칙은 첫째 어떤 일을 할 것, 둘째 어떤 사람을 사랑할 것, 세째 어떤 일에 희망을 가질 것이다.』 『모든 약점들 가운데 가장 큰 약점은 약하다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사람은 금전을 시간보다 중히 여기지만, 그로 인해 잃어버린 시간은 금전으론 살 수 없다. -유태격언-』 『최선을 기대하고 최악에 대비하라. 항상 기회를 잘 이용하라.』 『만사에는 두 가지의 시점이 있다. 적절한 시점 그리고 놓쳐버린 시점.』 『작은 일이라고 해서 결코 낮춰보지 말라. 그 일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인생은 진정 부메랑과 같다. 당신이 준 것만큼 받는다.』 『세상은 둥글다. 마치 막다른 골목처럼 보이는 곳도 실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감독이란 마치 손 안에 비둘기를 쥐고 있는 것과 같아. 너무 강하게 움켜쥐면 비둘기가 죽을 테고, 너무 약하게 죄면 비둘기는 날아갈 것이다.』 『세상은 둘글다. 마치 막다른 골목처럼 보이는 곳도 실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사람의 성격이야말로 그 자신의 수호신이다.』 『결단을 내리면 즉시 실천하라. 김은 새어나가기 마련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즉 자신이 원하는 상황을 생각하라.』 『운은 결코 우연히 얻어지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로또를 사듯 어쩌다 걸리겠지, 하는 마음으로 운을 기다리는 사람에겐 평생 동안 운이 따를 가능성이 적다. -하이브로 무사시-』 『가장 강한 자가 아니라 환경에 잘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는다.』 『삶이 비극인 것은, 우리가 너무 일찍 늙고 너무 늦게 철이 든다는 점이다. -벤자민 프랭클린-』 『새로운 약을 두려워 하는 자는 오래된 고통을 견뎌야 한다.』 『“자신이 하는 일을 재미없어 하는 사람치고 성공하는 사람 못 봤다.” ("People rarely succeed at anything unless they have fun doing it.")-데일 카네기-』 『“현명해지기란 무척 쉽다. 그저 머리 속에 떠오른 말 중에 바보 같다 생각되는 말을 하지 않으면 된다.”("It's so simple to be wise. Just think of something stupid to say and then don't say it.") -샘 레븐슨- 』 『섣불리 예상하지 말라. 특히 미래에 대해선...(Never make predictions, especially about the future...) -케이시 스텐겔-』 『“평온한 바다는 결코 유능한 뱃사람을 만들 수 없다. (A smooth sea never made a skillful mariner)”』 『지식보다는 상상력이 더욱 중요하다.(Imagination is more important than knowledge)-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문제는 목적지에 얼마나 빨리 가느냐가 아니라, 그 목적지가 어디냐는 것이다. (It is more important to know where you are going than to get there quickly.) -메이벨 뉴컴버-』 『부는 낙관주의가 아닌 혁신으로부터 나온다. 부는 이미 알려진 것을 완벽하게 소화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케빈 켈리-』 『오늘 보낸 하루는 내일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 지금 이 순간에도 적들의 책장은 넘어가고 있다. 』 『인생을 살아야 할 이유를 아는 사람은 어떠한 상태에서도 견뎌낼 수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 』 『내일의 일을 훌륭하게 하기 위한 최선의 준비는 바로 오늘 일을 훌륭하게 완수하는 것이다. -엘버트 허버드 』 『실패는 고통스럽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지 못했음을 깨닫는 것은 몇 배 더 고통스럽다. -앤드류 매튜스 』 『눈이 감기는가? 그럼 미래를 향한 눈도 감긴다.』 『 행운은 스스로 운이 좋다고 믿을 때 찾아온다 -테네시 윌리엄스- 』 『뭐든 그냥하는 사람은 열심히하는 사람을 당할 수 없고, 열심히 하는사람은 즐겨서 하는사람을 당할 수 없고, 즐겨서 하는사람은 미쳐서 하는사람을 당할수 없다. 』 『웃음은 나를 위한 것이지만 미소는 상대방을 위한 배려입니다』 『영원히 살 것 처럼 꿈을 꾸고, 내일 죽을 것 처럼 오늘을 살아라.(Dream as if you'll live forever. Live as if you'll die today) 』 『 인생에 있어서 난관에 부딪치면 우리는 왜 이런어려움에 처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이 어려움을 헤쳐나가야 할것인지를 고민하면 된다. 』 『습관은 버릇을 만들고, 버릇은 성격을 만들고, 성격은 인생을 만든다.』 『 어려운 일이 있을때 우는 놈은 삼류, 이를 악무는 놈은 이류, 웃어라 그게 일류다 』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기존의 것을 포기하는 것이 더 어렵다.』 『빛나는 것이 모두 금은 아니다 』 『인간은 자기가 행복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다. 』 『승자는 더 좋은 길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패자는 갈수록 태산이라 생각한다. 』 『승자는 문제 속에 뛰어들지만 패자는 문제의 주위에만 맴돈다. 』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각 다르다 -톨스토이-』 『승자는 구름 위에 뜬 태양을 보고 패자는 구름 속의 비를 본다. -J.하비스- 』 『좋은 일에는 남이요, 궂은 일에는 가족이다.』 『할 수 없어도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으면 찬스는 없다. 우선 '할 수 있다'라고 말하자. -나카타니 아키히로 -』 『어둡다고 불평하는 것보다 작은 촛불을 하나라도 켜는 것이 낫다. -공자-』 『 뻗어가는 칡도 한이 있다. 』 『life(삶)이란 단어에 if가 들어가는 이유는 우리의 삶 속에는 항상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 주먹을 꽉 쥔 손과는 악수를 할 수 없다. -인디라 간디- 』 『세상의 모든 일은 꿈과 희망이 있기에 이루어진다. -마틴 루터 킹(흑인목사)-』 『행복을 자기 자신 이외의 것에서 발견하려고 바라는 사람은 그릇된 사람이다.』 『 당신의 인생을 바꾸는 말은 오늘이라는 단어다. -로버트 기요사키- 』 『좋은 일을 생각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 나쁜 일을 생각하면 나쁜 일이 생긴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루 종일 생각하고 있는 것 바로 그것이다. -조셉 머피- 』 『복은 아끼되 인사는 아끼지 말라. 석복불석배(惜福不惜拜). -김갑수- 』 『 밝은 성격은 어떤 재산 보다도 귀하다.-카네기- 』 『 폭풍은 참나무가 더욱 뿌리를 깊게 박도록 한다. -허버드- 』 『머리를 너무 높이 들지 말아라. 모든 입구는 낮은 법이다. -영국속담- 』 『탐내면서도, 제공될 때 받지 못하면 두 번 다시 그것을 찾지 못할 것이다. -셰익스피어- 』 『그래, 어떻든 간에 인생은 좋은 것이다. -괴테 -』 『자신의 주인이 아닌 자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 -에피테투스 - 』 『인간은 자신이 결심한 만큼 행복해진다. -링컨-』 『기회는 앞 머리카락만 있고, 뒷머리는 벗겨져 있다. 기회를 만나려면 앞 머리카락을 잡으라. -영국 속담 -』 『머리를 너무 높이 들지 말아라. 모든 입구는 낮은 법이다. -영국속담- 』 『말하지 말아라. 오늘 공부하지 않으면서 내일이 있다고. -고문진보- 』 『겨울이 되어 날씨가 추워진 연후에라야 비로소 소나무와 전나무가 얼마나 푸르른가를 알 수가 있다. 사람도 큰 일을 당한 때에라야 그 진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논어- 』 『이 세상이 어떠해야 하고 또 안 그럴 경우에는 비판을 하기보다는, 우리는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로버트 호치하이저- 』 『한 회사의 주식에 전 재산을 투자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당신의 미래 전체를 한 사람의 고용인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 -스테판 M. 폴란- 』 『생각의 관점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가져라. 그리고 변화하라! -이케다 키요히코-』 『별은 반딧불로 보이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세계를 움직이려고 한다면 우선 자기 자신을 움직여라. -소크라테스- 』 『가루는 칠수록 고와지고 말은 할수록 거칠어진다. 』 『아내를 칭찬해 주고 가치를 인정해 주라. 그러면 딸들은 '긍지를 가진 아내와 엄마'가 될 것이다. -마이클 패리스- 』 『좋은 일을 생각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 나쁜 일을 생각하면 나쁜 일이 생긴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루 종일 생각하고 있는 것 바로 그것이다. -조셉 머피- 』 『둔한 자는 오래 살고, 뾰족하고 날카로운 자는 일찍 죽는다. 가령 붓은 날카롭고 뾰족하다. 따라서 빨리 못쓰게 된다. 벼루는 둔한 것이라 오래오래 쓸 수가 있다. -고문진보- 』 『복을 얻고 못 얻고는 자신의 힘에 달린 것이다. 대아(大雅)에 있는 말. -좌전- 』 『앞서 가야 제압할 수 있다. 뒤쳐지면 상대에게 제압당한다. -사기(史記)- 』 『남에게 부정하게 대하지 말 것이며, 남이 나에게 부정하게 못하게 하라. -마호메트-』 『명랑한 기분으로 생활하는 것이 육체와 정신을 위한 가장 좋은 위생법이다. 값비싼 보약보다 명랑한 기분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 약효를 지니고 있다. -샌드- 』 『이긴다고 생각하면 이긴다. 승리는 자신감을 가진 사람의 편이다. -가토 마사오- 』 『곧은 나무는 재목(材木)으로 쓰이고, 굽은 나무는 화목(火木)으로 쓰인다. 』 『지능의 차이는 있지만 타고난 뇌세포의 수는 같다. -오시마 기요시- 』 『로마인은 좋다 싶으면 그것이 적의 것이라 해도 거부하기보다는 모방하는 쪽을 선택했다. -시오노 나나미- 』 『평생에 내가 접하는 사람이나 동물에게 힘 미치는 대로 기쁨을 주자. -이광수- 』 『하늘은 두 가지를 다 주지 않는다. 이빨을 준 자에게는 뿔은 주지 않았다. 날개를 준 자에게는 발은 두 개만 주었다. -한서- 』 『 할 수 없어도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으면 찬스는 없다. 우선 '할 수 있다'라고 말하자. -나카타니 아키히로- 』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웨인 W. 다이어- 』 『서투르다는 말은 계속 듣고 있는 사람은 없다. 서투른 경험이 쌓이면 능숙해 지는 것이다. -나카타니 아키히로- 』 『생각의 관점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가져라. 그리고 변화하라! -이케다 키요히코- 』 『사람은 의복에 알맞게 환영받고, 지능에 알맞게 해고된다. -러시아 속담- 』 『-부하를 돕는 것이 경영관리자의 책임 - 피터드러커- 』 『소유물에 대한 집착은 인간에게 커다란 고통을 안겨준다.-이드리스 샤흐-』 『복을 얻고 못 얻고는 자신의 힘에 달린 것이다. 대아(大雅)에 있는 말. -좌전- 』 『너 자신을 누구에겐가 필요한 존재로 만들어라. -- R.W. 에머슨-』 『필요하지 않을 때 우정을 맺어라. -미국 속담- 』 『마음의 준비만이라도 되어 있으면 모든 준비는 완료된 것이다. -셰익스피어-』 『아버지의 치명적인 결점은 자녀가 자신의 명예를 빛내주기 바란다는 점이다 -BERTRAND RUSSELL- 』 『하늘은 두 가지를 다 주지 않는다. 이빨을 준 자에게는 뿔은 주지 않았다. 날개를 준 자에게는 발은 두 개만 주었다. -한서- 』 『 할 수 없어도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으면 찬스는 없다. 우선 '할 수 있다'라고 말하자. -나카타니 아키히로 』 『마음으로 성실하게 구한다면 적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멀리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그 가까운 것까지는 구할 수가 있다는 말. -대학- 』 『아이들은 어른의 말은 귀담아 듣지않지만 행동은 꼭 따라 한다 -James Baldwin- 』 『둔한 자는 오래 살고, 뾰족하고 날카로운 자는 일찍 죽는다. 가령 붓은 날카롭고 뾰족하다. 따라서 빨리 못쓰게 된다. 벼루는 둔한 것이라 오래오래 쓸 수가 있다. -고문진보- 』 『실패자, 그는 신이 버린 사람이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신은 그를 다시 주워서 재활용하실 것이다. -maximlee-』 『곧은 나무는 재목(材木)으로 쓰이고, 굽은 나무는 화목(火木)으로 쓰인다. 』 『아내를 칭찬해 주고 가치를 인정해 주라. 그러면 딸들은 '긍지를 가진 아내와 엄마'가 될 것이다. -마이클 패리스- 』 『복은 아끼되 인사는 아끼지 말라. 석복불석배(惜福不惜拜). -김갑수- 』 『만사에 너그러움을 따르면 그 복(福)이 두터워진다. -고희동- 』 『화복동문(禍福同門). 화와 복은 모두 자신이 불러들인다.』 『자기의 적에게 무엇으로 복수해야 할까? 가능하면 많은 선(善)을 베풀 수 있도록 노력하라. -에픽테토스-』 『필요하지 않을 때 우정을 맺어라. -미국 속담- 』 『큰 길을 계속 가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유혹에 못 이겨 다른 길로 접어들면 전망은 그만큼 더 어두워진다. -도교-』 『삼밭 속에 자란 쑥은 붙들어 주지 않아도 곧게 자란다. 좋은 친구 사이에 있으면 저절로 좋은 친구들처럼 되어 좋아진다는 말. -고시원-』 『자기의 결점만을 걱정하고 있는 사람은, 인간이 갖는 결점을 깨닫지 못한다. -탈무드- 』 『현명한 사람의 입은 가슴에 있고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입에 있다. --솔로몬 왕- 』 『너무 고르는 자가 가장 나쁜 것을 갖는다. -영국 속담- 』 『한 회사의 주식에 전 재산을 투자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당신의 미래 전체를 한 사람의 고용인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 -스테판 M. 폴란- 』 『착한 말은 착한 마음에서, 착한 마음은 자비로운 마음에서 생겨나 능히 하늘을 움직인다. -정법안장 -』 『둔한 자는 오래 살고, 뾰족하고 날카로운 자는 일찍 죽는다. 가령 붓은 날카롭고 뾰족하다. 따라서 빨리 못쓰게 된다. 벼루는 둔한 것이라 오래오래 쓸 수가 있다. -고문진보-』 『이 세상이 어떠해야 하고 또 안 그럴 경우에는 비판을 하기보다는, 우리는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로버트 호치하이저- 』 『침묵은 한마디 말보다 더 감동적이다.-토마스 칼라일- 』 『한 회사의 주식에 전 재산을 투자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당신의 미래 전체를 한 사람의 고용인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 -스테판 M. 폴란- 』 『자신에 대한 믿음이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삼성-』 『모르는 것보다는 사실과 다르게 알고 있는 것이 더 문제다. -마크 트웨인- 』 『복을 얻고 못 얻고는 자신의 힘에 달린 것이다. -시경-』 『교묘하다는 것은 서툰 것만 못한 것이다. 약삭빠른 것보다는 오히려 우직한 것이 더 귀중하다. -회남자-』 『무례함은 강한 체 하는 약한 자의 모습이다. -에릭 호퍼- 』 『찬스는 위대한 인간을 만들어낸다. -리히텐브로그- 』 『타인의 지혜로는 멀리까지 갈 수 없다. -리투아니아 속담-』 『악화가 재화를 구축한다. 많은 의사들을 먹여살리기 위해서는 많은 환자들의 생산이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maximlee- 』 『절반은 전체보다 더 크다. --헤시오드(고대 그리스 시인)- 』 『몸이 고생하든 머리가 고생하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이것은 직업 선택의 철칙이다. -maximlee-』 『이 세상이 어떠해야 하고 또 안 그럴 경우에는 비판을 하기보다는, 우리는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로버트 호치하이저-』 『지혜를 얻고자 애쓰고 힘쓰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현명한 사람이다. 자신이 그것을 이미 찾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페르시아 속담-』 『생각의 관점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가져라. 그리고 변화하라! -이케다 키요히코- 』  
1053    詩란 惡魔의 酒... 댓글:  조회:4655  추천:0  2015-04-23
    [1] 시는 악마의 술이다. 《A.아우구스티누스/반회의파 反懷疑派》  [2] 시를 쓰는 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말게. 그건 낚시질하고 똑같네. 아무 소용이 없는 것같이 보이지.       하지만 그래도 그것이 좋은 수확이 되는 법이거든. 《E.크라이더/지붕 밑의 무리들》  [3] 시는 아름답기만 해서는 모자란다.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필요가 있고,       듣는 이의 영혼을 뜻대로 이끌어 나가야 한다. 《호라티우스/시론 詩論》  [4] 시는 신(神)의 말이다. 그러나 시는 반드시 운문(韻文)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는 곳곳에 충일(充溢)한다. 미와 생명이 있는 곳에는 시가 있다. 《I.S.투르게네프/루딘》  [5] 나의 시는 어지럽지만 나의 생활은 바르다. 《M.V.마르티알리스/풍자시집 諷刺詩集》  [6] 시란 것은 걸작이든가, 아니면 전연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J.W.괴테》  [7] 위대한 시는 가장 귀중한 국가의 보석이다. 《L.베토벤》  [8] 시는 거짓말하는 특권을 가진다. 《플리니우스》  [9] 시란 미(美)의 음악적인 창조이다. 《E.A.포》  [10] 시는 단지 그 자체를 위해 쓰인다. 《E.A.포》  [11] 시는 단 하나의 진리이다.       명백한 사실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상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건전한 마음의 표현이다. 《R.W.에머슨》  [12] 시는 최상의 마음의 가장 훌륭하고 행복한 순간의 기록이다.        하나의 시란 그것이 영원한 진리로 표현된 인생의 의미이다. 《P.B.셸리》  [13] 시란 그 시를 가장 강력하고 유쾌하게 자극하는 방법으로 사상의 심벌들을 선택하고 배열하는 예술이다.《W.C.브라이언트》  [14] 즉흥시는 진정 재지(才知)의 시금석(試金石)이다. 《J.B.P.몰리에르》  [15] 시의 목적은 진리나 도덕을 노래하는 것은 아니다. 시는 다만 시를 위한 표현인 것이다. 《C.P.보들레르》  [16] 기쁨이든 슬픔이든 시는 항상 그 자체 속에 이상을 좇는 신과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 《C.P.보들레르》  [17] 감옥에서는 시는 폭동이 된다. 병원의 창가에서는 쾌유에의 불타는 희망이다.       시는 단순히 확인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재건하는 것이다. 어디에서나 시는 부정(不正)의 부정(否定)이 된다. 《C.P.보들레르/낭만파(浪漫派) 예술론(藝術論)》  [18] 시란 영혼의 음악이다. 보다 더욱 위대하고 다감한 영혼들의 음악이다. 《볼테르》  [19] 한 줄의 글자와 공백으로 구성되는 시구는      인간이 삶을 흡수하고 명확한 말을 되찾아내는 이중의 작용을 한다. 《P.클로델/입장(立場)과 제언(提言)》  [20] 나는 부재(不在)를 위해서 제기된 언어다. 부재는 모든 나의 재행사(再行使)를 격파한다.        그렇다. 그것은 다만 언어뿐이라는 것의 재빠른 소멸이다.        그리고 그것은 숙명적인 오점이며 헛된 완성이다. 《Y.본푸아》  [21] 시의 세계는 식물계, 이것은 또한 지상의 사랑과 미의 왕국이다. 《R.기카드》  [22] 시란 냉랭한 지식의 영역을 통과해선 안 된다. ……        시란 심중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곧바로 마음으로 통해야 한다. 《J.C.F.실러》  [23] 과학의 적절하고 직접적인 목적은 진리를 획득하고 전달하는 것이며,        시의 적절하고 직접적인 목적은 즉흥적인 즐거움을 전달하는 것이다. 《S.T.콜리지》  [24] 내용이 끝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 황금어의 피안에, 도시 성곽의 외부에, 토론의 형자(形姿)를 뒤로        하고, 사고 체계를 벗어나서 신비로운 장미는 개화한다. 서릿발의 열기(熱氣) 속에,        도배지의 희미한 무늬 속에, 제단의 뒷벽 위에, 피어나지 않는 불꽃 속에 시는 존재한다. 《M.아널드》  [25] 시란 본질적인 면에서 인생의 비평이다. 《M.아널드》  [26] 시란 간단히 말해 가장 아름답고, 인상적이고, 다양하게, 효과적으로 사물을 진술하는 방법이다.      《M.아널드》  [27] 시란 힘찬 감정의 발로이며, 고요로움 속에서 회상되는 정서에 그 기원을 둔다.        《W.워즈워스/서정민요집 抒情民謠集》  [28] 말은 어느 편이냐 하면, 시의 수면기를 재촉하는 부분이며, 상상(想像)이 시의 생명이다.       《O.펠섬/각오 覺悟》  [29] 시는 최상의 행복, 최선의 정신, 최량이고 최고의 행복한 순간의 기록이다.        《P.B.셸리/시가옹호론 詩歌擁護論》  [30] 고대인의 시는 소유의 시며, 우리들의 시는 동경의 시다. 전자는 현재의 지반 위에 굳게 서지만,        후자는 추억과 예감의 사이를 흔들려 움직이고 있다. 《A.W.슐레겔》  [31] 시란 어휘를 사용하여 상상력 위에서 하나의 환상을 산출해 내는 예술을 의미한다. 《T.B.매콜리》  [32] 시란 이성의 조력에 상상력을 동원하여 진리와 즐거움을 결합시키는 예술이다. 시의 본질은 발견이다.         예기치 않은 것을 산출함으로써 경이와 환희 같은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S.존슨》  [33] 시인은 그의 예민한 흥분된 눈망울을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서 하늘로 굴리며,        상상은 모르는 사물의 형체를 구체화시켜,      시인의 펜은 그것들에 형태를 부여해 주며 형상 없는 것에 장소와 명칭을 부여해 줍니다. 《W.셰익스피어》  [34] 시의 언어는 필연적인 것같이 보이는 것이어야 한다. 《W.B.예이츠》  [35] 시인의 시는 국어처럼 직접적이고 자연스런 것이어야 한다. 《W.B.예이츠》  [36] 나에게 있어서 시는 목적이 아니고 정열이다. 《E.A.포》  [37] 시적(詩的)이 아닌 한, 나에게 있어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A.지드/사전(私錢)꾼》  [38] 시는 모든 예술의 장녀(長女)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의 양친이다. 《W.콩그리브》  [39] 만약 사람이 마력적인 시의 의미를 알게 된다면 그 때부터 그대는 아름다운 생(生)을 알게 된다.     《J.F.아이헨도르프》  [40] 도덕적인 시라든가 부도덕한 시라든가에 대해서 말할 것은 아니다. 시는 잘 쓰여져 있는가 아니면        시원찮게 쓰여져 있는가, 그것만이 중요하다. 《O.F.O.W.와일드/영국의 르네상스》  [41] 시는 예술 속의 여왕이다. 《스프라트》  [42] 시는 마치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 나가는 모래와 같은 것이다. 《R.M.릴케》  [43] 시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감정은 아니다. 시가 만일 감정이라면 나이 젊어서 이미 남아돌아갈 만큼 가지고 있지 않아서는 안 된다. 시는 정말로 경험인 것이다. 《R.M.릴케/말테의 수기(手記)》  [44] 나이 어려서 시(詩)를 쓴다는 것처럼 무의미한 것은 없다. 시는 언제까지나 끈기 있게 기다리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은 일생을 두고, 그것도 될 수만 있으면 칠십 년, 혹은 팔십 년을 두고 벌처럼 꿀과 의미(意味)를 모아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최후에 가서 서너 줄의 훌륭한 시가 씌어질 것이다. 《R.M.릴케/말테의 수기(手記)》  [45] 시란 진리며 단순성이다. 그것은 대상에 덮여 있던 상징과 암유(暗喩)의 때를 벗겨서 대상이 눈에 보이지 않고 비정하고 순수하게 될 정도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J.콕토/암살(暗殺)로서의 미술(美術)》  [46] 열여덟 살 때 나는 시라는 것은 단순히 남에게 환희를 전달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스무 살 때, 시는 연극이라는 걸 깨달았지요. 나는 가끔 시를, 갱도(坑道) 속 함정에 빠져서 미칠 것 같은 불안 속에서 자기를 구출해 줄 다른 갱부들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는 사람에게 생기를 주는 희망과 비교해 보았습니다. 시인은 성자여야 합니다. (*장 콕토와의 인터뷰) 《P.토인비》  [47] 시란 삶을 육성시키고, 그러고 나서 매장시키는 지상의 역설이다. 《C.샌드버그》  [48] 시는 근본적인 언어방법이다. 그것에 의해 시인은 그의 사상과 정서는 물론 그의 직각적 메커니즘을 포착하고 기록할 수 있다. 《M.C.무어》  [49] 시는 오직 인간의 능력을 발양(發揚)하기 위해서 우주를 비감성화시킨 것이다. 《T.S.엘리엇/초현실주의(超現實主義) 간략사전(簡略辭典)》  [50] 시란 감정의 해방이 아니고 감정으로부터의 탈출이며, 인격의 표현이 아니고 인격으로부터의 탈출이다. 《T.S.엘리엇/전통(傳統)과 개인(個人)의 재능(才能)》  [51] 시의 세계로 들어온 철학이론은 붕괴되는 법이 없다. 왜냐 하면 어떤 의미에서 볼 때 그것이 진리이건 우리가 오류를 범했건 그런 것은 이미 문제가 되지 않으며, 의미하에서는 그 진리가 영속성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T.S.엘리엇/평론선집 評論選集》  [52] 시의 의미의 주된 효용은 독자의 습성을 만족시키고, 시가 그의 마음에 작용하는 동안 정신에 대해서 위안과 안정감을 주는 데 있다. 《T.S.엘리엇/시(詩)의 효용(效用)과 비평(批評)의 효용(效用)》  [53] 시란 「무엇은 사실이다」 하고 단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좀더 리얼하게 느끼도록 해 주는 것이다. 《T.S.엘리엇》  [54] 리듬과 운율은 시에 있어 인위적이며 외면적인 첨가물이다. 그리하여 다양한 변화가 일어날 때 이들은 점점 더 무미하게 되어 드디어는 경시적이고 방해적 요소가 되고 만다. 《F.S.플린트》  [55] 나는 정서를 스며들게 하는 것이――사상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감각 속에 작자가 느낀 것에 상응하는 하나의 진동을 일으키는 것――시의 특유한 기능이라 생각한다. 《A.E.하우스먼》  [56] 우리의 일상생활의 정서생활과 시의 소재 사이엔 차이가 없다. 이러한 생활의 언어적 표현은 시의 기교를 사용하게 되어 있다. 이것만이 단지 근본적인 차이일 뿐이다. 《I.A.리처즈》  [57] 한 편의 시는 하나의 의식(儀式)이다. 따라서, 형식적이고 의식적 성격을 갖춘다. 시가 가지는 언어의 용법은 회화의 용어와는 달리 의식적이며 화려한 꾸밈새가 있다. 시가 회화의 용어나 리듬을 이용하는 경우에도 그러한 것과 대조를 이루게 마련인 규범을 미리 전제로 하고 의식적으로 형식을 피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다. 《W.H.오든》  [58] 시는 몸을 언어의 세계에 두고 언어를 소재로 하여 창조된다. 《M.하이데거/시론 詩論》  [59] 시는 우리들이 익숙해서 믿어 버리고 있고 손쉽게 가깝고 명백한 현실에 비해서 무엇인가 비현실적인 꿈 같은 느낌을 일으킨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뒤바뀐 것으로서, 시인이 말하고 시인이 이렇다고 긍정한 것 그것이야말로 현실인 것이다. 《M.하이데거/횔덜린과 시(詩)의 본질(本質)》  [60] 시는 법칙이나 교훈에 의해 완성될 수 없으며, 본질적으로 감각과 신중함에 의해 완성될 수 있다. 《J.키츠》  [61] 아무리 시시한 시인이 쓴 글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정말로 그를 이해한다면 좋은 시를 읽어 버림으로써 받은 인상보다야 훨씬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나. 내가 시를 읽고 싶지 않을 때, 시에 지쳤을 때, 나는 항상 자신에게다 그 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타이르는 바일세. 또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대단히 아름다운 감정이 내 마음속에서 진행중일 것이라고 타이르기도 하네. 그래서 언젠가 어느 순간에 내가 내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가 있어 그 훌륭한 감정을 꺼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네. 《B.A.W.러셀/사랑이 있는 기나긴 대화(對話)》  [62] 시는 보통의 이성의 한계를 지난 신성한 본능이며 비범한 영감이다. 《E.스펜서》  [63] 시는 어떤 리듬을 선택하여 그것들을 체계화시켜 반복한다. 이것이 운율이다. 《R.S.브리지스》  [64] 시는 시인의 노고와 연구의 결과이며 열매이다. 《B.존슨》  [65] 시는 인류에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법칙과 패턴을 제공해 준다. 《B.존슨》  [66] 시의 으뜸가는 목적은 즐거움이다. 《J.드라이든》  [67] 시란 우리에게 다소 정서적 반응을 통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해 주는 언어이다. 《E.A.로빈슨》  [68] 한 편의 시는 그 자체의 전제(前提)를 훌륭하게 증명해 놓은 것이다. 《S.H.스펜더/시(詩)를 위한 시(詩)》  [69] 시는 결국 야회복을 입은 산문은 아니다. 《J.콕토》  [70] 실러는 어떤 편지에서(괴테에게 쓴 것이었다고 생각되지만) 「시적(詩的)인 기분」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 있다. 실러가 무엇을 의미하였는지 나는 알 것 같다. 「시적인 기분」이라는 것은 우리가 자연을 받아들일 때의 기분이고, 사상이 자연과 마찬가지로 생동하고 있다고 느낄 때의 기분일 것이다. 《L.비트겐슈타인/반철학적(反哲學的) 단장(斷章)》  [71] 시는 자기 속에 가지고 있지 못하면 아무 데에서도 찾지 못한다. 《J.주베르/팡세》  [72] 미합중국 자체가 본질적으로 가장 위대한 시(詩)이다. 《W.휘트먼/풀잎》  [73] 위대한 시는 아주 오래오래 공동의 것이고, 모든 계급과 얼굴색을, 모든 부문과 종파를, 남자만큼이나 여자를, 여자만큼이나 남자를 위한 것이다. 위대한 시는 남자나 여자에게 최후가 아니라 오히려 시작이다. 《W.휘트먼/풀잎》  [74] 언어는 이미 강제적으로 보편화하는 것으로 시는 보편화를 체현(體現)하고 사상에 활기를 주고, 다시 말하자면 우수한 실재(實在), 실제의 세계보다 고귀하고 더 선택된 세계를 낳게 된다. 시는 신자(信者)의 눈으로 볼 때 종교적 신앙이 부활에서 기대하는 효능을 사물에 대해서 부여한다. 시는 사물을 더욱 아름답고 순수하고 위대한 것으로 표현하며, 불멸성의 후광(後光)으로 이것을 둘러싼다. 그러므로 시인은 다른 생활양식의 예언자, 변용을 이루는 자연과 인간의 직관자이지만 산문은 이 세계의 언어이다. 시인은 올림포스의 주민이 한때 하계(下界)에서 생활을 한 자이며, 테살리아의 페레스 왕 아드메도스 곁에서 양을 지키는 아폴론이다. 거기서 시를 신들의 언어라고 부르는 것은 거의 문자 그대로 진실인 것이다. 《H.아미엘/일기 日記》  [75]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닌 것은 모두가 그렇듯이 시도 경탄을 강요한다. 《S.말라르메/예술(藝術)의 이단(異端)》  [76] 몇 개의 발성으로 마치 주문(呪文)과도 같이 세속언어와는 별개의 새롭고 온전한 어휘를 재창조하는 시구는 말의 완전한 독립을 이룩한다. 《S.말라르메/예술(藝術)의 이단(異端)》  [77] 비전의 확장. 《K.지브란/나는 네 행복(幸福)을 기린다》  [78] 빅토르 위고는 그의 전 작품을 통해서 우리에게 시(詩)에 있어서는 직접적인 표현은 일종의 기이함이 될 수밖에 없으며, 한 작품에 그런 직접적 표현이 범람하고 있으면 그 작품 전체의 시적 아름다움을 말살하고 말 것이라고 증명하고 있다. 《P.발레리/문학론 文學論》  [79] 시는 이해하기보다도 짓기가 더 쉽다. 《M.E.몽테뉴/수상록 隨想錄》  [80] 시라는 것은 시적 천재 그 자체로부터 생기는 특성이며, 이와 같은 시적 천재가 곧 시인 자신의 시혼에 비치고 있는 심상(心像)이나 사상 또는 정서를 사로잡아서 이것을 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S.T.콜리지/시(詩)의 철학적(哲學的) 정의(定義)》  [81] 시는 모든 지식의 숨결이자 정수(精髓)이다. 《W.워즈워스/서정민요집 抒情民謠集》  [82] 위대한 시에는 이러저러한 것――깊은 생각, 훌륭한 소리, 또는 생생한 이미저리(imagery)――이 「꼭」 있어야 한다는 일반론은 한낱 무지몽매한 독단에 불과하다. 시는 생각이 없을 경우는 물론이고 의미가 없을 경우에도 거의 성립할 수 있고, 혹는 감각적(또는 형식적) 구조 없이도 「거의」 성립할 수 있으며, 그런 경우에도 시가 도달할 수 있는 극점(極點)까지 도달한다. 《I.A.리처즈/시(詩)의 분석(分析)》  [83] 시는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다. 《맥뤼시/시론 詩論》  [84] 시(詩)는 순간의 형이상학이다. 하나의 짤막한 시편(詩篇) 속에서 시는 우주의 비전과 영혼의 비밀과 존재와 사물을 동시에 제공해야 한다. 시가 단순히 삶의 시간을 따라가기만 한다면 시는 삶만 못한 것이다. 시는 오로지 삶을 정지시키고 기쁨과 아픔의 변증법을 즉석에서 삶으로써만 삶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다. 그 때서야 시는 가장 산만하고 가장 이완된 존재가 그의 통일을 획득하는 근원적 동시성(同時性)의 원칙이 된다. 다른 모든 형이상학적 경험들은 끝없는 서론(緖論)으로 준비되는 것인 데 비하여 시는 소개말과 원칙과 방법론과 증거 따위를 거부한다. 시는 의혹을 거부한다. 그것이 필요로 하는 것은 기껏해야 어떤 침묵의 서두(序頭) 정도이다. 우선 시는 속이 텅 빈 말을 두드리면서, 독자의 영혼 속에 사고(思考)나 중얼거림의 어떤 계속성을 남기게 될지도 모르는 산문(散文)과 서투른 멜로디를 침묵시킨다. 그러고 나서 진공(眞空)의 울림을 거쳐서 시는 저의 순간을 만들어 낸다. 《G.바슐라르/시적(詩的) 순간(瞬間)과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순간(瞬間)》  [85]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시경(詩經)에 있는 삼백 편의 시(詩)는 한 마디로 말해 사악함이 없다.」 *子曰 詩三百 一言以蔽之曰 思無邪 《논어 위정편 論語 爲政篇》  [86] 고시(古詩)는 충후(忠厚)를 주로 했다. 시라는 것은 언어만 가지고 구하여 얻어지는 것이다. 언제나 깊이 그 의도를 관찰해야 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기평(譏評)할 때에는 그 소위(所爲)의 악을 얘기하지 아니하고 그 벼슬의 존비와 차안의 미려를 들어 백성의 반응을 주시하여야 하는 것이다. 《소식 蘇軾/동파전집 東坡全集》  [87] 시란 뜻이 향해 가는 바라, 마음 안에 있으면 뜻이 되고 말로 나타내면 시가 된다. 《모시 서 毛詩 序》  [88] 시란 천지의 마음이요, 군덕(君德)의 사원이며 만물의 문호다. 《연감류함 淵鑑類函》  [89] 시부(詩賦)란 선하거나 추한 덕을 칭송하는 길이며, 슬프거나 즐거운 정을 배설하는 길이다. 《왕부 王符/잠부론 潛夫論》  [90] 시란 정(情)을 뿌리로 하고 말을 싹으로 하며, 소리를 꽃으로 하고 의미를 열매로 한다. 《백거이 白居易》  [91] 시란 정신의 떠오른 영화(英華)요, 조화의 신비한 생각이다. 《서정경 徐禎卿》  [92] 시에 아홉 가지 마땅치 않은 체격이 있으니, 이것은 내가 깊이 생각해서 스스로 터득한 것이다. 한 편 안에 고인의 이름을 많이 썼으니, 이것은 한 수레 가득히 귀신을 실은 체격이다. 고인의 뜻을 모조리 앗아다 쓴 것이 있으니, 용한 도적질도 오히려 옳지 못한데 도적질조차 용하지 못하니, 이것은 서툰 도적이 잡히기 쉬운 체격이다. 어려운 운을 달기는 했는데 근거(根據)한 곳이 없다면 이것은 쇠뇌를 당겼으나 힘이 모자란 격식이다. 그 재주는 헤아리지 않고 운을 번드레하게 달았다면 이것은 술을 제 양에 넘도록 먹은 격이다. 어려운 글자를 쓰기 좋아해서 남을 쉽게 현혹하려 했다면 이것은 함정을 파 놓고 장님을 인도하는 체격이다. 사연은 순탄하지 못하면서 끌어다 쓰기를 일삼는다면 이것은 강제로 남을 내게 따르게 하려는 체격이다. 속된 말을 많이 쓴다면 이것은 시골 첨지가 모여 이야기하는 체격이다. 기피해야 할 말을 함부로 쓰기를 좋아한다면 이것은 존귀를 침범하는 체격이다. 사설이 어수선한 대로 두고 다듬지 않았다면 이것은 잡초가 밭에 우거진 체격이니, 이런 마땅치 못한 체격을 다 벗어난 뒤에야 정말 더불어 시를 말할 수 있다. 《이규보 李奎報/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  [93] 무릇 시(詩)는 뜻을 주장으로 하는데, 뜻을 갖추기가 제일 어렵고 사연을 엮는 것이 그 다음이다. 뜻은 또한 기(氣)를 주장삼으니 기의 우열(優劣)에 따라 깊고 얕음이 있다. 그러나 기는 하늘에 근본하여 배워서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기가 모자라는 자는 글을 만들기에만 힘쓰고 뜻을 먼저 두려 하지 않는다. 대개 그 글을 새기고 치장함에 있어서, 구절을 단청(丹靑)하면 실로 아름답지만 그 안에 감추어진 깊고 무거운 뜻이 없어서 처음 읽을 때는 잘된 듯하나 두 번째 씹으면 벌써 맛이 없다. 《이규보 李奎報/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  [94] 세상에서 말하기를, 시는 문(文)의 쇠약한 것이요 율(律)은 시의 변한 것이라 하지만, 이것은 특별히 아로새기고 엮어 가는 공교함만을 가리킨 것뿐이다. 대체로 성정(性情)을 다스리고 풍속의 교화에 통달하는 일이 시 아니고 어디에 의지하겠는가. 《노수신 盧守愼/소재집 蘇齋集》  [95] 무릇 남겨 두는 시는, 말은 간단하고 뜻은 극진한 것을 아름답다 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과장하거나 풍부하고 화려할 것은 아니다. 《최자 崔滋/보한집 補閑集》  [96] 시라는 것은 기(氣)를 주(主)로 한다. 기(氣)는 성(性)에서 나오고 뜻은 기에 의지하며 말은 정(情)에서 나온다. 정이란 것은 즉 뜻이다. 그리고 신기(新奇)한 뜻은 말을 만들기가 더욱 어렵다. 자칫하면 생경하고 난삽하게 된다. 그러나 문순공(文順公) 같은 이는 경사백가(經史百家)를 골고루 열람하고 그 꽃다운 향기에 삶아지고 고운 채색에 물들여졌다. 그런 까닭에 그 말은 자연히 풍부하고 고와서 비록 새로운 뜻의 지극히 미묘하고 어려워서 형상하기 어려운 곳이라도 그 말이 곡진(曲盡)하고 다 정숙(精熟)하다. 대체로 표현하는 재주가 시정(詩情)을 이기면 비록 아름다운 뜻이 없더라도 말은 오히려 원숙하지만, 시정이 표현하는 재주를 이기면 말이 비근(鄙近)하고 산만하여서 아름다운 뜻이 있음을 알지 못하게 된다. 정과 재주가 겸비된 뒤라야 그 시는 볼 만한 것이 있는 것이다. 《최자 崔滋/보한집 補閑集》  [97] 에 이르기를, 「기(氣)는 싱싱한 것을 숭상하고 말은 원숙(圓熟)코자 하는데, 초학(初學)의 시는 기가 싱싱한 다음이라야 장년(壯年)이 되어서 기가 표일(飄逸)하고, 장년의 기가 표일한 다음이라야 노년(老年)이 되어서 기가 호탕(豪宕)하여진다.」 하였다. 《최자 崔滋/보한집 補閑集》  [98] 시라는 것은 사상의 표현이다. 사상이 본디 비겁하다면 제아무리 고상한 표현을 하려 해도 이치에 맞지 않으며, 사상이 본디 협애하다면 제아무리 광활한 묘사를 하려 해도 실정에 부합하지 않는다. 때문에 시를 쓰려고 할 때는 그 사상부터 단련하지 않으면 똥무더기 속에서 깨끗한 물을 따라 내려는 것과 같아서 일생토록 애를 써도 이룩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천인 성명의 법칙을 연구하고 인심 도심의 분별을 살펴 그 때묻은 잔재를 씻어 내고 그 깨끗한 진수를 발전시키면 된다. 《정약용 丁若鏞/증언 贈言》  [99] 대체로 두보(杜甫)의 시가 모든 시인들의 시보다도 으뜸인 점은 삼백 편의 사상을 잘 계승하였기 때문이다. 삼백 편은 모두가 충신·효자·열부·친우들의 측달충후한 사상의 표현이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지 않은 것은 시가 아니며, 어지러운 시국을 아파하고 퇴폐한 습속을 통분히 여기지 않은 것은 시가 아니며, 진실을 찬미하고 허위를 풍자하며 선을 전하고 악을 징계하는 사상이 없으면 시가 아니다. 그러므로 의지가 확립되지 못하고 학식이 순정하지 못하며 큰 도를 알지 못하고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으며 백성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이 없는 자가 시를 지을 수 없다. 《정약용 丁若鏞》  [100] 보기 좋은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모아 놓고 시라고 하는 것이야 비천한 잡배의 장난에 불과하다. 시는 선언이다. 만천하의 현재뿐 아니라 진미래제(盡未來際)까지의 중생에게 보내는 편지요, 선언이요, 유언이다. 《이광수 李光洙》  [101] 시는 그 시인의 고백이다. 신의 앞에서 하는 속임 없는 고백이다. 구약에 시편만이 아니라 무릇 시는 시인의 심정 토로다. 시인은 시에서 거짓말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신을 기만하는 것이다. 《이광수 李光洙/문학평론 文學評論》  [102] 작품에는 그 시상(詩想)의 범위, 리듬의 변화, 또는 그 정조(情調)의 명암에 따라, 비록 같은 한 사람의 시작(詩作)이라고는 할지라도, 물론 이동(異同)은 생기며 또는 읽는 사람에게는 시작 각개의 인상을 주기도 하며, 시작 자신도 역시 어디까지든지 엄연한 각개로 존립될 것입니다. 그것은 또 마치 산색(山色)과 수면(水面)과 월광성휘(月光星輝)가 모두 다 어떤 한때의 음영에 따라 그 형상을 보는 사람에게는 달리 보이도록 함과 같습니다. 물론 그 한때 한때의 광경만은 역시 혼동할 수 없는 각개의 광경으로 존립하는 것도, 시작의 그것과 바로 같습니다. 《김소월 金素月/시혼 詩魂》  [103] 시란 작렬이다. 시의 생성은 아메바적 분열작용에서만 유래한다. 시와 시인은 같은 조각이다. 《김상용 金尙鎔》  [104] 시를 직업으로는 못 한다. 정절(貞節)을 직업으로 할 수 있을까. 《김상용 金尙鎔》  [105] 시란 곧 참이다. 《함석헌 咸錫憲/아름다움에 관하여》  [106] 시는 언제나 우리의 삶을 새로 출발하도록 고무하며 그 삶의 근원으로 되돌아가게 할 것이다. 《박두진 朴斗鎭/시(詩)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107] 뒤집어서 말하자면 시는 새벽에 엄습하는 어두운 그림자, 죽음――그것을 이기는 기도, 삶 자체의 가장 순수한 보람의 사랑보다도 어느 의미에서는 더 충족적이며 순수한 자각과 생명 욕구의 가장 포괄적인 발현일 수 있는 것이다. 시가 더 내적이며 더 구체적이며 더 현실적인 삶의 징표(徵表)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더 구체적인 삶의 내용, 가장 선택된 마지막 낙원, 가장 가능한 아름다움의 세계가 되는 셈이다. 《박두진 朴斗鎭/시(詩)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108] 시는 천계(天啓)다. 그러나 그 천계는 스스로가 만든 것이다. 《조지훈 趙芝薰/영원(永遠)과 고독(孤獨)을 위한 단상(斷想)》  [109] 시란 지·정·의가 합일된 그 무엇을 통하여 최초의 생명의 진실한 아름다움을 영원한 순간에 직관적으로 포착하여 이를 형상화한 것이다. 《조지훈 趙芝薰/영원(永遠)과 고독(孤獨)을 위한 단상(斷想)》  [110] 시를 쓴다는 것은 생에 대한 불타오르는 시인의 창조적 정신에서 결실되는 것이니, 대상하는 인생을 보다 더 아름답게 영위하려고 의욕하고 그것을 추구·갈망하는 데서 제작된다면 그 시인의 한 분신(分身)이 아닐 수 없다. 《신석정 辛夕汀/나는 시(詩)를 이렇게 생각한다》  [111] 시에 있어서의 기술이란 필경 언어 사용술을 말하는 것인데, 시상은 언어를 통하여서만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상에는 이미 거기에 해당되는 기술이 저절로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머리 안에서 언어로 형성되는 시상을 그대로 문자로 옮기면 시가 된다. 《오지호 吳之湖》  [112] 시란 사랑이다. 《김영일 金英一/동심 童心》  [113] 시 또한 짙은 안개가 아닌가. 답이 없는 세계, 답이 있을 수 없는 세계, 그 안개 같은 실재를 지금 더듬고 있는 거다. 《조병화 趙炳華/인생(人生)은 큰 안개이다》  [114] 피아노가 음악의 모체라면 시는 문학의 모체이다. 어떠한 산문작품이라 할지라도 시정신이 내포되어 있지 않으면 문학이 될 수 없을 것이다. 《한흑구 韓黑鷗/싸라기 말》  [115] 시작품(포엠)이란 포에지와 의미와의 차갑고도 뜨거운 긴장에서만 우러나오는 산물이어야 할 것입니다. 포에지와 의미 사이에 벌어지는 알력 갈등의 에너지는 실인즉 전달되어야 할 가장 뜻깊은 시의 에너지인지도 모릅니다. 《신동집 申瞳集/모래성 소감(所感)》  [116] 시는 여하튼 어떤 양상에 있어서는 산문(散文)의 특징을 피하려는 한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기자식(棋子式)의 언어가 아니고 시각적이며, 구체적인 언어이다. 그것은 감각을 그 모양 그대로 옮겨 놓으려는 직각(直覺)의 언어에 대한 하나의 타협이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들의 주의를 끌며, 우리들로 하여금 구상적(具象的)인 사물을 계속적으로 바라보게 하고, 우리들이 추상적 과정 안으로 빠져드는 것을 막으려고 한다. 그것은 청신한 형용사나 청신한 비유를 골라낸다. 딴은, 그것이 새롭고 우리들은 낡은 것에 싫증 났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낡은 것이 구상(具象)의 것을 전달하기를 멈추고 추상적인 기자(棋子)가 되기 때문에서다. 시인은 「배가 범주(帆走)하였다」는 기자식의 말을 쓰는 대신, 「뱃길을 더듬었다」고 하여 구상적인 심상(心象)을 얻게 되는 것이다. 시각적인 의미는 오직 비유의 새 그릇에 의해서만 담을 수 있는 것이다. 산문은 그러한 것이 새어 버리는 낡은 항아리이다. 시에 있어서의 심상은 한낱 장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직각적 언어의 본질 그 자체인 것이다. 시는 우리들을 데리고 지상(地上)을 걸어가는 보행자이며, 산문은 우리를 목적지로 운반하는 열차인 것이다. 《미상 未詳》  [117] 시는 현실 이상의 현실, 운명 이상의 운명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이고, 이 창조력은 언제나 현세적 속박의 반작용의 힘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이어령 李御寧/통금시대(通禁時代)의 문학(文學)》  [118]「패러독스」 「아이러니」 「위트」 「메타포」 여러 가지 현대시의 무기는 새로운 신화를 우리 앞에 펼쳐 주고 있다. 《이어령 李御寧/전후문학(戰後文學)의 새 물결》  【시·묘사】  [119]  시는 감촉할 수 있고 묵묵해야 한다  구형의 사과처럼  무언(無言)이어야 한다  엄지손가락에 닿는 낡은 훈장처럼  조용해야 한다  이끼 자란 창턱의 소맷자락에 붙은 돌처럼  시는 말이 없어야 한다  새들의 비약처럼  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마치 달이 떠오를 때처럼  마치 달이 어둠에 얽힌 나뭇가지를  하나씩 하나씩 놓아주듯이  겨울 잎사귀에 가린 달처럼  기억을 하나하나 일깨우며 마음에서 떠나야 한다  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마치 달이 떠오를 때처럼  시는 비등해야 하며  진실을 나타내지 않는다  슬픔의 모든 역사를 표현함에  텅 빈 문간과 단풍잎 하나  사랑엔  기운 풀과 바다 위의 등대불들  시는 의미해선 안 되며  존재해야 한다  《A.매클리시/시학 詩學》  [120]  사람들은 시를  조그마한 사슬에 달아  내복 밑  벌거벗은 피부 위에 달고 있다.  《A.A.숄/시집 詩集》  [121]  무상하기에 무상하지 않고  일시적이기에 결정적이며  시간적이기에 무시간적이고  단편적이기에 완전하며  무방비이기에 강력하며  모방할 수 있기에 반복할 수 없고  비논리적이기에 현실적이고  포착할 수 없기에 포착할 수 있다.  《A.A.숄/시집 詩集》  [122]  나의 시의 장부(帳簿)는 어디에 있는가  이 나의……  종이도 없고 펜도 없고  시도 없이 나는 무(無) 앞에 있다.  《R.크노/시법(詩法)을 위하여》  [123 ] 나의 시(詩)는 싸움이다. 《W.바이라우흐/나의 시(詩)》  [124]  한 편의 시를 낳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리운 것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  《전촌융일 田村隆一/사천(四千)의 날과 밤》  [125]  붓 놓자 풍우가 놀라고  시편이 완성되자 귀신이 우는구나.  筆落驚風雨  詩成泣鬼神  《두보 杜甫》  [126]  눈 내려 이 해도 늦어 가는데,  풍진은 하 번져서 수습 못하네.  벗님네 아스라이 서울을 떠나,  타향의 나그네로 오랜 세월을.  상대하니 문득 기쁜 얼굴이지만,  슬픈 노래 흰 머리털 어찌하리오.  소매 속에 감춰 놓은 몇 수의 시는,  방황하는 인생을 위로해 주네.  雨雪歲將晩  風塵浩未收  故人京國遠  久客異鄕遊  相對忽靑眼  悲歌堪白頭  袖中詩幾首  聊得慰淹留  《정도전 鄭道傳/삼봉집 三峯集》  [127]  한 줄기 시의 연간(聯間)을 걸어가면서  어디엔가 반짝이고 있을  나의 오늘을 나는 짚어야 한다.  《신동집 申瞳集/어떤 시(詩)》  [128] 이 고운 화병에 무엇을 꽂을 것인가. 옳지 그렇다. 시를 꽂자. 앵도알같이 열린 시를, 백합꽃같이 핀 시를, 난초잎같이 솟은 시를 멋지게 꽂는 것이 좋겠다. 《신동문 辛東門/수정화병(水晶花甁)에 꽂힌 현대시(現代詩)》  [129]  겨울 하늘은 어떤 불가사의(不可思議)의 깊이에로 사라져 가고,  있는 듯 없는 듯 무한(無限)은  무성하던 잎과 열매를 떨어뜨리고  무화과나무를 나체(裸體)로 서게 하였는데,  그 예민한 가지 끝에  닿을 듯 닿을 듯 하는 것이  시(詩)일까,  언어(言語)는 말을 잃고  잠자는 순간,  무한(無限)은 미소하며 오는데  무성하던 잎과 열매는 역사의 사건으로 떨어져 가고,  그 예민한 가지 끝에  명멸하는 그것이  시일까,  《김춘수 金春洙/나목(裸木)과 시(詩) 서장(序章)》  [130]  문득 한 줄의 시가 일어섰다.  작업모를 쓰고  장갑을 끼고  시는 어둠의 진한 성감대(性感帶)를  후볐다.  잠시 후 꽃의 기침 소리가 나고  텅빈 마당이 다시 조립되는 소리가 나고  삽질하는 시의 섬광이 번쩍이고 《이규호 李閨豪/시(詩)가 아침을》  [131]더듬거리며 되찾는 한두 마디 말  말에 시가 깃드는 아픔이여  시(詩) 시시 시줄의 눈발 따라  내 어린것보다는  쉽사리 익혀 갖는 나의 말법.  《박경용 朴敬用/폭설 暴雪》  [132] 그러는 시의 주소는 여기에 있다. 지리하고 긴 회임(懷姙), 쉽사리 단안을 못 내리는 사념의 발열, 심층심리 안의 문답, 외롭게 희귀한 개성적 심상(心像), 선명하지도 밝지도 못한 사고의 교착(膠着), 암시, 모든 잠재의식과 꼬리가 긴 여운. 시인이 버리면 영 유실되는 것, 시인이 명명하지 않으면 영 이름이 붙지 못하는 것. 원초의 작업 같은 혼돈에의 투신과 첩첩한 미혹, 그리고 눈물 나는 긴 방황. 《김남조 金南祚/시(詩)의 주소(住所)는 어디인가》  【격언·속담】  [133] 시에는 그림이 있고, 그림에는 시가 있다. 《중국 中國》  [134] 시(詩)는 낳는 것이지 만드는 것은 아니다. *The poem is born, not made. (*시는 체험에 의해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 《영국 英國》  【고사·일화】  [135] 뮤즈 여신들은 자주 천상 올림포스에 올라가 그 아름다운 노래로 신들의 잔치 자리에 흥을 돋우었으나, 여느 때는 보이오티아 지방의 헬리콘 산에서 살았다. 헬리콘 산의 언덕진 산비탈은 향긋한 나무로 뒤덮여 독사의 독까지 삭아 없어진다는 성역(聖域)으로, 맑은 샘터가 많아 그 중에도 유명한 것이 아가니페 샘터가 있고, 또 천마(天馬) 페가수스가 지나간 발굽 자리에서 솟아나왔다는 히포크레네 샘터가 있다. 이 샘물을 마시면 영묘(靈妙)한 시상(詩想)이 저절로 떠오른다. 여신들은 또한 파르나소스 산을 즐겨 찾아가 아폴론 신과 자리를 같이하곤 했다. 이 산기슭에 키스탈리아라는 샘터가 있었는데, 역시 여신들의 성지(聖地)로, 그 샘물을 마시면 시상이 떠오른다고 한다. 이 샘터는 케페소스 강으로 흘러 들어 황천(黃泉)의 스틱스 강에 통한다는 것이다. 현대시가 메마른 것은 여신들의 이 아가니페 샘, 히포크레네 샘, 그리고 키스탈리아 샘이 말랐다는 뜻인가?  [136] 어떤 사람이 당나귀를 타고 단테의 시를 읊으면서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 버릇이 되어 시의 구절 구절의 끝마디마다 「이랴이랴」 하면서 당나귀 궁둥이를 두들겼다. 이것을 보고 있던 시인 단테는 벌컥 화를 내며, 「이놈아, 시 어느 구절에도 '이랴이랴'라고 써 놓지는 않았어!」  [137] 후에 존슨 박사의 전기를 쓴 보즈웰이 존슨 박사와 같이 점심을 먹으며, 「선생님, 솜씨 좋은 요리사가 탁월한 시인보다 세상에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존슨 박사가 점잖은 표정으로, 「거리에 있는 개들이라면 그렇게 생각하겠지.」라고 대답하였다.  [138] 앙드레 비이가 무어를 회견했을 때 무어는 이상한 말을 하였다. 「영국의 작가 토마스 하디는 자꾸 문법에 틀리는 말을 쓰게 되는 것이 싫증이 나서 산문 쓰는 일을 그만두고 시를 쓰게 된 것이오.」 「그렇다면 산문보다도 시를 쓰는 것이 수월하시오?」 이렇게 묻는 비이에게 무어는 대답하기를, 「그렇지요. 왜냐 하면 시에는 여러 가지 제재와 규칙이 있어서 실상 그것들이 시를 쓰는 데 도움이 되거든요.」 하였다.  [139] 독일에서 나폴레옹과 괴테와의 회견 때의 일이다. 「오늘의 회견 기념으로 시(詩) 한 수를 지어서 나에게 줄 수 없겠는가?」 나폴레옹이 청하자, 괴테는 대답했다. 「나는 누구에게도 시를 바치지 않습니다.」 하였더니, 나폴레옹은 되물었다. 「어떤 이유에서인가?」 「후회하고 싶지 않은 까닭입니다.」 하고 괴테는 그의 독재성을 은근히 비판하는 대답을 했다.  [140] 어느 여름 괴테는 실러와 같이 드레스덴의 케르나 포도원에 갔다. 케르나는 독일 관리로서 실러의 친구였다. 쓸쓸한 시골에서 두 사람은 당시의 속된 사람들을 욕하는 풍자시를 많이 썼다. 케르나의 집 여인들은 머리맡 다락방에서 시를 짓는 친구들의 소리를 들었다. 다락방에서는 간혹 가다 킥킥거리며 웃기도 하고, 때로는 발 구르는 소리도 들렸다. 그리고,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말했다. 「오늘도 그 속된 인간들에게 몹시 화를 내게 했군.」 《P.발레리/문학론 文學論》  [144]구양수(歐陽脩)가 매성유(梅聖兪)에게 말하기를, 「세상에서 흔히 시인들은 거의가 궁하다고 한다. 그러나 시가 사람을 궁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궁한 뒤라야 시가 좋아지는 탓이다.」 또 소동파(蘇東坡)는, 「구양수의 말이 절대 망언이 아니다. 그는 일찍이 시는 사람을 달(達)하게 만들지 시로 인하여 궁한 사람은 못 보았다라고 했는데, 나는 그것을 어떤 다른 격정으로 인한 발언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 《사문유취 事文類聚》     
1052    詩란 삶의 파편쪼가리... 댓글:  조회:3962  추천:0  2015-04-23
.. 늙은 사람 한 가지 즐거운 것은  붓가는 대로 마음껏 써 버리는 일.  어려운 韻字에 신경 안 쓰고  고치고 다듬느라 늙지도 않네.  흥이 나면 당장에 글로 옮긴다.  나는 본래 조선사람  즐겨 조선의 詩를 지으리.  그대들은 그대들 법 따르면 되지  이러쿵저러쿵 말 많은 자 누구인가.  까다롭고 번거로운 그대들의 格과 律을  먼 곳의 우리들이 어떻게 알 수 있나.  ―정약용 「老人一快事」  붓놓자 풍우가 놀라고  시편이 완성되자 귀신이 우는구나  筆落驚風雨 詩成泣鬼神 ―杜甫  시 3백수에는, 한마디로 말한다면 사악함이 없다.  ―공자 『논어』 爲政篇  그대들은 왜 시를 공부하지 않느냐? 시는 사람에게 감흥을 돋우게 하고 모든 사물을 보게 하며, 대중과 더불어 어울리고 화락하게 하며, 또 은근한 정치를 비판하게 하는 것이다. 가깝게는 어버이를 섬기고, 나아가서는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시에서 배울 수 있으며, 또한 시로써 새나 짐승, 풀, 나무들의 이름도 많이 배우게 될 것이다. ―공자  시란 뜻(志)이 향해 가는 바라, 마음 안에 있으면 뜻이 되고 말로 나타내면 시가 된다. ―공자  고시(古詩)는 충후(忠厚)를 주로 했다. 시라는 것은 언어만 가지고 구하여 얻어지는 것이다. 언제나 깊이 그 의도를 관찰해야 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기평(譏評)할 때에는 그 소위(所爲)의 악을 얘기하지 아니하고 그 벼슬의 존비와 차안의 미려를 들어 백성의 반응을 주시하여야 하는 것이다. ―소식  시란 정(情)을 뿌리로 하고 말을 싹으로 하며, 소리를 꽃으로 하고 의미를 열매로 한다. ―白居易  시란 말의 뜻을 나타내고 노래란 말을 가락에 맞춘 것이다. 소리는 길게 억양을 붙이는 것이고 가락은 소리가 고르게 된 것이다.―유협 『문심조룡』  시는 의(意)가 주가 되므로 의를 잡는 것이 가장 어렵고 말을 맞추는 것은 그 음이다. 의도 또한 기(氣)를 위주로 한다. 기의 우열에 따라 의의 깊고 옅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기란 천성(天性)에 딸린 것이어서 배워서 이룰 수는 없다. 그러므로 기가 떨어지는 사람은 글 다듬는 것을 능사로 여기고 의를 앞세우지 않는다. 대체로 글을 깎고 다듬어 구(句)를 아롱지게 하면 아름다움에는 틀림 없다. 하나 거기에 심후한 의가 함축되어 있지 아니하면 처음에는 볼 만하나 다시 씹어보면 맛이 없어져 버린다. ―이규보  시에는 마땅치 못한 아홉 가지 체가 있다. 이것은 내가 깊이 생각하여 체득한 것이다. 시 한 편 속에 옛사람의 이름을 많이 사용한 것은 수레에 귀신을 가득 실은 것, 옛사람의 뜻을 몰래 취해 쓰는 것은 도둑질을 잘한다고 해도 옳지 않은데 도둑질이 서투르면 이것은 서툰 도둑질이 잘 잡히는 것, 강운으로 압운하여 근거가 없으며 이것은 쇠를 당기나 이기지 못하는 것, 재주는 헤아리지 않고 지나치게 압운하면 이것은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것, 험벽한 글자를 쓰기 좋아하며 사람으로 하여금 미혹하게 하는 것은 구덩이를 파놓고 장님을 인도하는 것, 말이 순편하지 않으면서도 같은 사람에게 쓰기를 강요하는 것은 억지로 자기를 따르게 하는 것, 일상용어를 많이 쓰는 것은 촌사람이 이야기하는 것, 공자나 맹자를 범하기 좋아하는 것은 존귀함을 함부로 범하는 것, 글이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것은 잡초가 밭에 가득한 것이다. 이 마땅하지 못한 체격을 면할 수 있게 되면 함께 시를 이야기 할 수 있다. ―이규보  시문은 기를 위주로 삼는다. 기는 성(性)에서 발하고 의(意)는 기에 의지하며,말은 정(情)에서 나오므로 정이 곧 의이다. 그러나 신기한 뜻은 말을 만들기 어려우므로, 서두르면 더욱 생소하고 조잡해지는 것이다. ―최자  시는 마음에서 우러난다고 한 것이 믿을 만하다.―이인로 『破閑集』  시는 함축되어 드러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그러나 희미한 글,  숨은 말로서 명백하고 통쾌하지 않은 것은 또한 시의 큰 병통이다.  ―서거정 『東人詩話』  시가 교화를 위한 것이라는 뜻은 본래 온유 돈후한 시정신으로써  성정을 다스려서 풍화(風化)를 이루게 하며, 사람의 마음을 감화하여  세상의 도리를 평정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남구만  시는 성정의 허령(虛靈)한 곳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유몽인  시는 성정을 나타내는 것이다.―이의현  시는 원리와는 관계 없는 별종의 취향을 갖고 있다. 오직 천기(天機)를 농(弄)하여서 심원한 조화 속을 파악하여 정신이 빼어나고 음향이 밝으며 격이 높고 생각함이 깊으면 가장 좋은 시가 된다. ―허균 시란 사람의 천성과 정서를 조정하고 인간관계를 향상시킬 수 있어야  한다. ―심덕잠  지금 우리 나라의 시와 문장은 고유의 언어를 버리고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워서 쓴 것이다. 가령 아주 흡사해진다 해도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을 뿐이다.―김만중  무릇 시에 있어서는 자득(自得)이 귀하다.―이수광  시란 마음이 흘러가는 바를 적은 것이다. 마음 속에 있으면 지(志)라  하고 말로 표현하면 시가 된다. 정(情)이 마음 속에 움직일 때,  시인은 그것을 말로써 표현한다. ―신위  시는 교화(敎化)하는 것이니 힘써 그 뜻을 전달해야 한다. ―이익  임금을 사랑하지 않고 나라를 걱정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며, 어지러운 시국을 아파하지 않고 퇴폐적 습속을 통분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다. 단 진실을 찬미하고 거짓을 풍자하거나 선을 전하고 악을 징계하는 사상이 없으면 시가 아니다.―정약용 『목민심서』  시는 대개 정신과 기백이 있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정약용  시에는 신비한 정신의 경지가 있는데 이것은 무형 중에 우거(寓居)하면서 갑자기 나타났다 갑자기 사라지기 때문에, 우연히 만나면 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고는 찾아보려고 해도 얻을 수 없다. ―신광수  보기 좋은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모아놓고 시라고 하는 것이야 비천한  잡배의 장난에 불과하다. 시는 선언이다. 만천하의 현재 뿐 아니라  진미래제(盡未來際)까지의 중생에게 보내는 편지요, 선언이요,  유언이다. ―李光洙  시는 그 시인의 고백이다. 신의 앞에서 하는 속임 없는 고백이다. 구약에 시편만이 아니라 무릇 시는 시인의 심정 토로다. 시인은 시에서 거짓말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신을 기만하는 것이다. ―李光洙  시인이 창작한 제2의 자연이 시다.―조지훈  시는 신(神)의 말이다. 그러나, 시는 반드시 운문(韻文)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는 곳곳에 충일(充溢)한다. 미와 생명이 있는 곳에  시가 있다. ―I.S.투르게네프 『루진』  시는 아름답기만 해서는 모자란다.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필요가 있고, 듣는 이의 영혼을 뜻대로 이끌어 나가야 한다. ―F.Q.호라티우스  『詩法』  시의 목적은 진리나 도덕을 노래하는 것은 아니다. ―보들레르  기쁨이든 슬픔이든 시는 항상 그 자체 속에 이상을 쫓는 신과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보들레르  시는 진리가 그 목적이 아니다. 시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보들레르  시를 쓰는 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말게, 그건 낚시질하고 똑 같네. 아무 소용이 없는 것같이 보이지. 허지만 그래도 그것이 좋은 수확이 되는 법이거든. ―E.크라이더 『지붕밑의 무리들』  시는 넘쳐 흐르는 정감의 힘찬 발로이다.―워즈워드  시는 체험이다.―R.M.릴케  시는 악마의 술이다.―A.아우구스티누스  시란 것은 걸작이든가, 아니면 전연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J.W.괴에테  위대한 시는 가장 귀중한 국가의 보석이다.―L.베에토벤  시는 거짓말하는 특권을 가진다.―프리뉴스2世  시는 의미할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한다. ―머클리쉬  시는 단지 그 자체를 위해 쓰여진다.―E.A.포우  시는 예술 속의 여왕이다. ―스프랏트  시는 마치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나가는 모래와 같은 것이다. ―R.M.릴케  시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감정은 아니다. 시가 만일 감정이라면  나이 젊어서 이미 남아 돌아갈 만큼 가지고 있지 않아서는 안된다.  시는 정말로 경험인 것이다. ―R.M.릴케 『말테의 手記』  시는 단 하나의 진리이다.……명백한 사실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상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건전한 마음의 표현이다. ―에머슨  시는 최상의 마음의 가장 훌륭하고 행복한 순간의 기록이다. 하나의  시란 그것이 영원한 진리로 표현된 인생의 의미이다. ―P.B.셸리』  감옥에서는 시는 폭동이 된다. 병원의 창가에서는 쾌유에의 불타는 희망이다. 시는 단순히 확인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재건하는 것이다. 어디에서나 시는 부정(不正)의 부정(否定)이 된다. ―보들레르 『로만파 藝術』  시란 냉랭한 지식의 영역을 통과해선 안된다.……시란 심중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곧바로 마음에로 통해야 한다. ―F.실러  시란 가장 간단히 말해 가장 아름답고 인상적이고 다양하게 효과적으로 사물을 진술하는 방법이다. ―M.아놀드  시적(詩的)이 아닌 한, 나에게 있어서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A.지이드 『私錢쟁이』  시는 모든 예술의 장녀(長女)며 대부분의 사람들의 양친이다.  ―콩그레브  만약 사람이 마력적인 시의 의미를 알게 된다면 그때부터 그대는  아름다운 생(生)을 알게 된다.―J.아이헨돌프  도덕적인 시라든가 부도덕적인 시라든가에 대해서 말할 것은 아니다.  시는 잘 씌어져 있는가 아니면 시원찮게 씌어져 있는가, 그것만이  중요하다. ―O.와일드 『英國의 르네상스』  시는 힘찬 감정의, 위세 좋은 충일(充溢)이다. 그 원천은 조용히  회상된 감동이다. ―O.와일드 『英國의 르네상스』  나이 어려서 시(詩)를 쓴다는 것처럼 무의미한 것은 없다. 시는 언제까지나 끈기 있게 기다리지 않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사람은 일생을 두고 그것도 될 수만 있으면 70년, 혹은 80년을 두고 별처럼 꿀과 의미(意味)를 모아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최후에 가서 서너 줄의 훌륭한 시가 써질 것이다. ―R.M.릴케 『말테의 手記』  시는 근본적인 언어 방법이다. 그것에 의해 시인은 그의 사상과 정서는 물론 그의 직각적 매카니즘을 포착하고 기록할 수 있다. ―M.무어  시는 오직 인간의 능력을 발양(發揚)하기 위해서 우주를 비감성화시킨  것이다. ―T.S.엘리어트 『超現實主義 簡略事典』  시란 감정의 해방이 아니고 감정으로부터의 탈출이며, 인격의 표현이  아니고 인격으로부터의 탈출이다.  ―T.S.엘리어트 『傳統과 個人의 才能』  시의 세계로 들어 온 철학 이론은 붕괴되는 법이 없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 볼 때 그것이 진리이건 우리가 오류를 범했건 그런  것은 이미 문제가 되지 않으며 의미하는 그 진리가 영속성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T.S.엘리어트 『評論選集』  시의 의미의 주된 효용은 독자의 습성을 만족시키고 시가 그의  마음에 작용하는 동안 정신에 대해서 위안과 안정감을 주는 데 있다.  ―T.S.엘리어트 『詩의 효용과 批評의 효용』  시란 무엇은 사실이다 하고 단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좀더 리얼하게 느끼도록해 주는 것이다. ―T.S.엘리어트  시는 미에 있어서의 참된 집이다. ―킬피란  우리의 일상 생활의 정서 생활과 시의 소재 사이엔 차이가 없다.  이러한 생활의 언어적 표현은 시의 기교를 사용하게끔 되어 있다.  이것만이 단지 근본적인 차이일 뿐이다. ―I.A.리차아드  시는 우리들이 익숙해서 믿어버리고 있고 손쉽게 가깝고 명백한  현실에 비해서 무엇인가 비현실적인 꿈 같은 느낌을 일으킨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뒤바뀌어진 것으로서 시인이 말하고 시인이  이렇다고 긍정한 것 그것이야말로 현실인 것이다.  ―M.하인거 『횔더린과 詩의 本質』  시는 법칙이나 교훈에 의해 완성될 수 없으며 본질적으로 감각과  신중함에 의해 완성될 수 있다. ―J.키이츠  아무리 시시한 시인이 쓴 글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정말로 그를 이해한다면 좋은 시를 얼핏 읽어버림으로써 받은 인상보다야 훨씬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나. 내가 시를 읽고 싶지 않을 때, 시에 지쳤을 때, 나는 항상 자신에게다 그 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타이르는 바일세. 또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대단히 아름다운 감정이 내 마음 속에서 진행 중일 것이라고 타이르기도 하네. 그래서 언젠가 어느 순간에 내가 내 마음 속을 들여다 볼 수가 있어 그 훌륭한 감정을 꺼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네. ―J.러셀 『사랑이 있는 기나긴 對話』  시는 보통의 이성의 한계를 지닌 신성한 본능이며 비범한 영감이다.  ―스펜서  시는 시인의 노고와 연구의 결과이며 열매이다.―B.존슨  시의 으뜸가는 목적은 즐거움이다. ―J.드라이든  한 편의 시는 그 자체의 전제(前提)를 훌륭하게 증명해 놓은 것이다. ―S.H.스펜더 『시를 위한 시』  18살 때 나는 시라는 것은 단순히 남에게 환희를 전달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0살 때, 시는 연극이라는 걸 깨달았지요.  나는 가끔 시를 갱도(坑道)속 함정에 빠져서 미칠 것 같은 불안  속에서 자기를 구출해 줄 다른 갱부들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는  사람에게 생기를 주는 희망과 비교해 보았습니다.  시인은 성자여야 합니다. ―P.토인비 『J.콕토와의 인터뷰』  시란 삶을 육성시키고 그리고 나서 매장시키는 지상의 역설이다.  ―K.샌드버그  시의 본질은 동작이다. 이 동작은 내적 완전을 나타내고 이 내적  완전이 참으로 인간적이고 또 진실이기 때문에 참으로 시적인  성격은 위대한 격정의 자유로운 움직임 가운데 나타난다. ―네싱  시적 형식은 본질이 무엇이든 시가 문학의 특수한 형식으로서  쾌락을 주는 근원은 변화에 의한 반복성에 있다. ―R.E.앨링턴  한 줄의 글자와 공백으로 구성되는 싯귀는 인간이 삶을 흡수하고  명확한 말을 되찾아 내는 이중의 작용을 한다. ―클로델  시에는 그림이 있고, 그림에는 시가 있다.  ―스카르보로 『중국격언집』  만약 시가, 위대한 그 무엇이 아니면 안된다면, 어느 의미에서  그것은 현대와 관계를 가진 것이 아니면 안된다. 그 제재가  무엇이든간에, 작자의 정신의 내부에 있는 산 그 무엇과, 그것이  전달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시로써 표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신체는 어디 있든간에, 그 혼은, 이곳에, 그리고 현재 있어야  하는 것이다. ―A.C.브래드레  시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과 같이 단순히 감정이 아니다  .(감정이라면 우리들은 간단히 가질 수가 있다) 시는 경험이다.  한 편의 시를 쓰려면, 많은 도시를, 많은 사람들을, 많은 사물들을  보지 않으면 안된다. 동물, 새의 날으는 모습, 아침에 피는  꽃의 상태 등을, 알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 미지의 토지에 있는 도로,  우연히 만난 사람들, 애당초부터 이미 알고 있었던 이별, 기억도 확실치 않은 먼 어린 시절, 자기도 알지 못하였던 즐거움이며, 마음먹고  아버지 어머니가 주는 것을 반항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들에 공상의  힘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사람 각자가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서로 사랑하던 밤의 일, 분만하는 부인의 애끊는 절규. 어린애 침대에서 잠도 자질 못하고 창백하게, 그리고 잠들어버리는 부인들의 추억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땐, 들창을 열어 놓은 채, 계속적인 시끄러움이 들리는 방에서, 죽은 사람 곁에 앉아 있었던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만으로도 충분치 않다. 기억이 많이 있을 땐 잊어버리는  것도 필요하다. 그리하여 기억이 또 한번 떠 오를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억이 우리들의 내부에서 피가 되어 명확히 이름지울 수도 없게끔 되어버리든가, 이미 우리들 자신과 구별할 수도 없게끔  되어버릴 때 ―그야말로 어느 순간 시의 최초의 한마디가, 기억의  한가운데 나타나 빠져나가게 되는 것이다.  ―R.M.릴케 「말테의 수기」에서  시의 기능은 세계의 슬픔과 조화시키는 것이다. ―A.E.하우스만  시적 진실 ―‘개인적, 국부적인 것이 아니고, 보편적이며, 기능적인 것’ ―워즈워드  시는, ……인간의 마음의 제일 먼저의 활동이다. 인간은 일반적인  개념을 만드는 단계에 이르기 전에 상상상의 관념을 만든다. 명증한  마음으로 생각하기 전에 혼란한 머리로 파악한다. 명확하게 발음하기  전에 노래부른다. 산문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운문으로 이야기한다.  전문어를 쓰기 전에 은유를 쓴다. 말을 은유풍으로 쓴다는 것은  우리들이 ‘자연발생적’이라 부르는 것과 같이, 그에 있어서  자연인 것이다. ―G.B.비코  시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T.E.흄  시의 중요한 목적은 정밀하고 명확한 표현에 있다. ―T.E.흄  사랑받지 못한 해바라기가 아름답게 빛나고  씨를 가진 꽃만이 불꽃으로 반사한다. ―A.L.테니슨  시는 상징주의이기 때문에 우리들을 감동시킨다는 이론을 만약  사람들이 승인하지 않으면 안된다면 현대시의 양식 속에 어떠한  변화를 찾지 않으면 안되는가? 그것은 우리들의 선조들의 방법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즉, 자연을 위하여 자연묘사를, 도덕을  위하여 도덕율을, 그리고 테니슨의 경우 시의 중심이 되는 불꽃을  거의 다 깨버린 일화나, 과학적 의견에의 고려 등을 버리는 것이다.  ―오든  시란 현존시에 붙어다니는 한낱 장식물에 그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일시적인 감격이나 감동에 그치는 바도 아니다. 더구나  한낱 열중에 빠지는 바도 아니며 오락물로 떨어져버리는 것도 아니다.  시는 역사를 지탱해주는 밑바탕이다. ―하이데거  산문시란 리듬과 각운이 없으면서도 음악적이고 영혼의 서정적 동요,  환상의 파동, 의식의 경련에 응답하기 위해 충분히 유연하고 충분히  거칠은 시적 산문이다.  ―C.보들레르 ―『파리의 우울』(Spleen de Paris)  ‘시―인스피레이션’의 공식을 믿는 시적 사고는 허망한 하나의  옛이야기가 되어도 좋다. 지적(知的)으로 확신되는 사상에만  정적(情的) 신앙을 주려는 폐습이 일부 사람들에게 굳게 뿌리  박혀 있다. 과학이 증대하여 힘과 그것은 장차 일반화하여 갈 것이다.  ―L.A.리처즈  시는 최상의 행복, 최선의 정신, 최량이고 최고의 행복한 순간의 기록이다. ―P.B.셀리 『詩歌擁護論』  시란 진리며 단순성이다. 그것은 대상에 덮여 있던 상징과 암유(暗喩)  의 때를 벗겨서 대상이 눈에 보이지 않고 비정하고 순수하게 될  정도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J.콕토 『暗殺로서의 美術』  시란 그 시를 가장 강력하고 유쾌하게 자극하는 방법으로 사상의  심볼들을 선택하고 배열하는 예술이다. ―W.C.브라이언트』  즉흥시는 진정 재지(才知)의 시금석(試金石)이다. ―J.B.P.몰리에르  서정시는 감정이 흘러 넘치는 청춘의 생명의 표현. 억제하려고  해도 억제할 수 없는 힘이며 열렬한 신앙의 발로다. 그 대상으로  하는 것은 자연과 사랑과 신 등으로 작자의 모양이 십분 나타나는  것으로 봐서 제1인칭의 시라고 해도 좋다. ―에론네스트보배  서사시의 흥미는 작자가 아니고 그 시 속의 사건이다. 예를 들면  그리스의 위대한 서사시인 호메르스는 개인적으로는 실제인물인지  아닌지 분명치 않을 만큼 아무래도 좋은 인물이다. 다만 호메르스의  시 속 영웅들에 흥미를 느낄 따름이다. 이에 비하여 같은 그리스의  위대한 서정시인 만나의 시를 읽을 때는 시 속의 영웅들은 무엇이던가  관계할 바 없고 다만 시인 그 자신에 일체의 흥미를 느끼게 되는데  서정시의 주관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단테  시는 음악과 맞추어 만든 수사적인 작품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단테  뮤직과 포에지의 길은 서로 교차한다. ―뽈 발레리  포에지는 말의 전능으로 베일을 벗긴다. 포에지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문제는 날마다 그의 마음과 눈에 부딪치는 것을 그가 보고  느끼는 것처럼 그가 생각하도록 각도와 속도를 맞추어 그에게 보여주는 데 있다. ―쟝.꼭또  시는 우주에 담긴 비밀의 광선을 찾아내어 우리에게 잊어버린 천국을  소생케 한다. ―D.E.시트웰  시는 애련 속에서만 존재한다. ―W.H.오든  진실로 시라고 할만한 것은 서정시를 제쳐놓고는 없다.  ―E.A.포우  의식의 사고와 시적 표현의 기초는 구체적 직관 그 자체이다.  ―S.길버트  시의 안에 사상은 과실의 영양가와 같이 숨어 있지 않으면 안된다.  ―뽈 발레리  시는 운문에 의한 모방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는 가르치고 즐거움을 주려는 의도를 가진, 말하는 그림이다.  ―필립 시드니  현대시는 하나의 신앙 위에 서 있다. 곧 숨은 진실이 존재한다는  신앙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되려면 믿어야 한다. 미지의 세계를  믿어야 한다. ―R.M.알베레스  산문;말을 최상의 순서로 놓은 것. 시;최상의 말을 최상의 순서로  놓은 것. ―워즈워드  시는 본질적으로 무슨 악마적인 것이 있다. ―괴테  시는 시 이외의 무슨 목적을 가질 수 없다. 도덕이라든지 과학과  결부시킬 수 없다. 시는 두 가지 기본적인 문학적 특질, 즉 초자연과  아이러니 속에 있다. ―보들레르  시는 말의 의미를 이마쥬들의 분위기로 둘러싸이게 하면서 그 의미의  가지를 치게 한다. ―바슐라르  시는 진정한 의지의 범미주의적(汎美主義的) 활동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의 의지를 표현한다. ―바슐라르  서정적인 시는 돌진한다. 그러나 유연하고 물결치는 움직임으로이다.  모든 갑작스럽거나 끊어지는 것은 시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시는 그런 움직임을 비극이나 관습적인 성격의 소설 쪽으로 돌린다.  ―보들레르  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다. 시가 감정이라면  젊은 나이에도 벌써 흐를 정도로 시를 갖게 될 게 아닌가. 시는  정말로는 체험인 것이다. ―R.M릴케  시란 꿈과 같은 것이기는 하나 현실은 아니다. 말장난이기는 하나  진지한 행위는 아니다. 시란 해로운 까닭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힘이 있다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말보다 해롭지 않은 것이 어디  또 있으랴. ―하이데거  온갖 예술은 감각적 매개물에 의한 관념의 표현이라고 말하나  시의 매개물인 말은 사실 관념이다. ―R.S.브리제스  다정한 시여! 예술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여! 우리 안에  창조의 힘을 불러일으키고 우리를 신성(神性)으로 접근시키는  그대여! 어릴때 내가 그대에게 바치던 사랑은 수많은 환멸도 꺾질  못했다! 전쟁까지도 시가 내게 미치는 영향력을 더욱 커지게 하였으니, 이제부터 별 박힌 내 머리와 하늘이 서로 혼동되기에 이른 것은 전쟁과 시의 덕분이다. ―아뽈리네르  우리는 남들과 논쟁할 때는 수사학으로써 논쟁하지만 스스로 논쟁할  때는 시로써 한다. 자기를 지지한 혹은 지지할 거라는 군중을  의식하는 데서 오는 자신만만한 음성을 지닌 웅변가들과는 달리  우리는 불확실성 가운데서 노래한다. 따라서 가장 고상한 아름다움의  존재 가운데서도 우리가 고독하다는 인식때문에 우리의 리듬은 떨린다. ―에이츠  시의 의미란 그 텐션, 즉 시에서 발견되는 모든 외연(外延)extension)  과 내포(內包)intension를 완전히 조직한 총체이다. ―알렌 테이트  시가란 마치 화가가 색채로 하는 것을 언어로 하는 예술로서 상상력에  의하여 환상을 분출하는 방법에 의하여 산출하는 예술이다.  ―토마스 머코올리  시란 이성의 조력에 상상력을 동원하여 진리와 즐거움을 결합시키는  예술이다. 시의 본질을 발견이다. 예기치 않는 것을 산출함으로써 경이와 환희 같은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S.존슨  시인은 그의 예민한 흥분된 눈망울을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서  하늘로 굴리며 상상은 모르는 사물의 형체를 구체화시켜 시인의  펜은 그것들에 형태를 부여해 주며 형상 없는 것에 장소와 명칭을  부여해 준다. ―W.세익스피어  시는 생의 진술이며 표출이다. 그것은 체험을 표시하고 생의 내면적  진실을 묘사하는 것이다. 제2의 세계, 꿈은 최고의 시인이다.  ―워즈워드  한 편의 시는 하나의 의식(儀式)이다. 따라서, 형식적이고 의식적 성격을 갖춘다. 시가 가지는 언어의 용법은 회화의 용어와는 달리 의식적이며 화려한 꾸밈새가 있다. 시가 회화의 용어나 리듬을 이용하는 경우에도 그러한 것과 대조를 이루게 마련인 규범을 미리 전제하고 의식적으로 형식을 피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다. ―W.A.오오든  시는 몸을 언어의 세계에 두고, 언어를 소재로 하여 창조된다.  ―M.하이데거 『詩論』  시의 용어는 필연적인 것같이 보이는 것이어야 한다.―W.B.예이츠  시는 언어를 향한 일제사격이다.―앙리 미쇼  시는 언어의 건축물이다.―M.하이데거  시는 언어의 모자이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행위와 시는 언제나  인간보다 크다. ―T.E.흄  시는 극점에 달한 언어다. ―말라르메  시는 절조 있는 언어로서 절규․눈물․애무․입맞춤․탄식 등을 암암리에 표현하려는 것이다. ―뽈 발레리 시인에게 있어서 낱낱의 단어가 그 원료다. 단어는 극히 여러가지  모양의 뜻을 가진 것으로 이것들의 뜻은 시의 구성에 따라 처음으로  똑똑해진다. 이와같이 단어가 콤포지션의 가능성에 따라서 변모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형성된 예술 형태의 한 부분이 될 때까지는 어세(語勢)도 그 효과도 다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프도프킨  시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의 생활은 사막의 생활이다. ―메르디트  시란 우리에게 다소 정서적 반응을 통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해주는 언어이다. ―E.A.로빈슨  시에선 해조(諧調)가 미리 공허한 형식을 결정하고 말이 위로 와서  위치를 잡는다. 말과 경험 사이의 응화(應和)와 불응화 그리고 결국에  응화가 해조를 확보하여 주의력을 거기에 모은다. 물러섬이 없는  움직임이 듣는 사람과 시인을 함께 끌고 간다. ―알랭  시는 미의 음악적 창조다.―E.A.포우  시란 영혼의 음악이다. 보다 더욱 위대하고 다감한 영혼들의 음악이다. ―볼테에르  정서가 있고 운율이 있는 언어로 인간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또 예술적  으로 표현하는 것이 시이다. ―오든  시는 어떤 리듬을 선택하여 그것들을 체계화시켜 반복한다. 이것이  운율이다. ―r.브리지스  시는 역설과 아이러니의 구성체다.―브룩스  시는 우연을 기피한다. 시에 나타나는 클라스․성격․직분 등의 개성은 반드시 어떠한 클라스를 대표한다. ―코울리지  시를 구성하는 두 개의 주요한 원리는 격조와 은유이다.―웰렉․워렌  시는 정서의 표출이 아니라 정서로부터의 도피요,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의 도피이다. ―T.S.엘리어트  시는 상상과 감정을 통한 인생의 해석이다. ―W.H.허드슨  예술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작게 되는 것처럼 느끼게 하며, 그러면서도  우리들을 확대 시킨다. ―E.M.포스터  아직 탄생하지 않은  어느 특별한 일절 또는 일련의 배후에서, 하나의 힘과 같이 집중되어,  넓게 전개되는 의식의 총체. ―보트킨  열정적인 시란 것은, 우리들의 본성의 도덕적 지적 부분과 동시에  감각적 부분―지식에의 욕망, 행위의 의지, 감각의 힘을 방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가 완전한 것이 되려면, 우리들의 신체의 다른 여러 부분에 자극을 주어야 한다. ―하즈리트  시는 조잡한 요소로(물을 타고 섞어서) 연하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엑기스(精)이며, 그것을 키울 수 있는 것, 쓸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순수한 이미지의 시는 수정 조각과 같은 것이어서―우리들의 동물감각엔 너무나도 차고 투명한 것이다. ―허버트 리드  가장 위험한 것은, 순수한 물의 성분에 대하여 설명할 수 없는 거와  같이, 정말로의 순수한 시라는 것은 그 무엇에 대하여서도 강연을  할 수 없는 것이다.―불순하며, 메칠알콜이 들어간 거칠은 시에 대해선,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월터 로리  시적 논리가 시의 결말을 맺는 것은, 일반적으론, 기분의 변화라든가,  위상의 전환을 통하여 행해지는 경우가 많다.……그것이 시적 논리이다. 즉 논술이나 명증에 의하여 위상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단계가 듣는 사람의 마음에 만족을 주는 그러한 위상의 변화이며,  이해할 수 있는 추이인 동시에 그 진행은 앞의 단계를 무효로 하는  그러한 것이어서는 안된다. ―W.P.카  오로지 이미지는 시의 극치이며 생명이다. ―드라이든  방대한 저작을 남기는 것보다 한평생에 한번이라도 훌륭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낫다. ―에즈라 파운드  믿을 수 있는 모든 것이란 진실한 이미지 뿐이다. ―W.블레이크  만약 지각(知覺)의 문을 맑게 한다면 모든 것은 그대로 즉 무한감(無限感)을 가진 것같이 보일 것이다. ―W.블레이크  이미지는 우리들에게 사랑과 희생의 능력을 각성시킨다. 그것은 어느 경험을 생각케 하며 그 문체에 의하여 그러한 경험에의 어느 종류의 능력을 각성시킨다. 우리들은 어느 하나를 배우게 된다. 즉 그것이 우리들에게 가능한 것같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희열이든가 절망이든가 어떠한 감정이든간에 그것을 아는 것이 강한 만족으로서 느껴지는 것이다. ―챨스 윌리암즈  이미지의 생산은 무의식의 어두침침한 속에서의 정신의 일반적 행위에  속한다. ―E.S.달라스  나에게 있어서 지각은 처음에 명료한 일정한 목적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중에 형성되는 것이다, 나의 어느 음악적인 무우드(기분)가 우선한 다음에 시적 사상이 나에게 다가온다. ―쉴러  이미지의 발생, 진전, 설정은, 예를 들면 태양의 광선이 자연히  그에게 도달하여 ―그의 위에 빛나고 다음엔 냉정히 더구나 장려하게  기울어 가라앉아가며 그를 호화스러운 황혼 속에 혼자 남기는  현상에 흡사하다. ―J.키츠  우리들은 정신의 영역을 3중의 층으로 생각할 수가 있을 것 같다.  더구나 그러한 경우 지질학의 ‘단층’에 비교할 수 있는 어느  현상이 일어난다. 그 결과……지층은 비연속적이며 서로 불규칙한  단층을 나타나게 된다. 그와 매한가지로 자아의 감각적 의식은 본능적  충동과 직접 교섭을 갖게 되며, 그 ‘끓는 가마솥’에서 어떠한  원형적 형태 즉 예술작업의 기초가 되는 말, 이미지, 음 등의 본능적  짜임을 끄집어내게 되는 것이다. ―H.리드  나의 경우 시에 있어서는 많은 이미지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시의 중심이 많은 이미지이기 때문에 나는 하나의 이미지를 만든다. ―‘만든다’라는 말은 적당치 않은 말이지만, 나는 나의 이미지에  내 내부에서 정서의 여러 가지 배색을 물들여 놓고 그것에 내가 가지고 있는 지적 비평적인 힘을 적용하여 그것이 또 다른 이미지를 낳게 한다.  그리곤 그 제2의 이미지를 제1의 그것과 모순시켜, 그 둘에서 난  제3의 이미지에서 제4의 모순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그것들 모든 것을  나에게 주어진 형식적인 제한의 범위 내에서 서로 모순시킨다. 각각의  이미지는 그 속에 스스로를 파괴하는 종자를 가지고 있다.  즉 나의 변증적 방법(나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은 중심의 종자에서 성장하는 많은 이미지의 끊임없는 건설과 파괴며, 그 중심의 종자도 그 자신으로 파괴적인 동시에 건설적인 것이다.……나의 시의 생명은 중심에서 나오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 속에서 나와, 그리고  죽지 않으면 안된다. 나의 이미지의 건설은 창조와 재창조와 파괴와  모순이 아니면 안되는 것이다. ……이미지의 어쩔 수 없는 충돌에서  (아무리 해도 피할 수 없는 충돌에서)―아무리 해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자극을 주는 중심 즉, 충돌의 모태가 창조와, 재창조와, 파괴와,  모순의 성질을 갖기 때문에―나는 시라는 순간적 평화를 만들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딜런 토마스  이미지는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 자신으론 시인의 특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지가 독자적인 본능의 증거가 되는 것은 훌륭한 정열,  또는 그 정열로 잠깨워진 일련의 사상 혹은 이미지 여하에 따라 시  그 자체가 변할 만큼 그 중요성을 가지고 있을 때 뿐이다.  ―코울리지  추상적 관념에 대립하는 감각적 이미지를 너무나 주장하는 나머지……  결과는 회화에 의한 시로 되어버렸다. 다시 말하면, 때로는 그림이  전부가 되어버려, 일반적 경험에 아무런 관계가 없어져 버렸다.  이것은 존재와 의미와를 분리시키는 잘못의 제일보였던 것이다.  ―로버트 히리아  상상된 이미지를 통해 우리는 시적 몽상이라는 몽상의 절대를 인식한다. ―바슐라르  실제로 물질적 상상력은 문화적 이미지와 실체를 합체시키는 유일한  매개체이다. 우리는 물질적으로 자신을 표현함으로써 모든 삶을 시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바슐라르  상상력 그 자신은 기억의 작용이므로 기억이 시의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 진실한 것이다. 내가 모르는 것을 상상한다는 것은 없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상상력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전에 경험한 것을 기억하며, 그것을 어느 다른 환경에 적용하는 능력이다. ―스펜서  추상적인 것의 구체화를 추구하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내 방법은  아니다. 나는 내 자신 속에 감동 ―감각적으로 생생한, 사랑스러운,  다채로운 여러가지의 감동 ―을 기민한 상상력의 에너지로서  받았던 것이다. ―괴테  이성이라는 것은, 기지(旣知)의 사물을 질서있게 정리하는 작용이며  상상력이라는 것은 사물의 개개, 혹은 전체로서의 가치를 지각하는  작용이다. ―C.V코노리  상상력이야말로 도덕적 선(善)의 훌륭한 방편이다. ―셸리  상상력이라는 것은 죽어 가는 정열을 되살리기 위하여 살(肉)을  잡아 두는 불사의 신을 말하는 것이다. ―J.키츠  모든 것에 앞서서 훨씬 중요한 것은 은유를 자기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만은 다른 사람에게서 얻을 수 없는 천부의  은총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정밀하게 만들도록 하라. 그러면 자연 은유가 될 것이다. ―J.M.머리  은유는 현실을 살피며 경험을 질서짓게 하는 정신의 본질적이며 또한  필요한 행위와 같이 생각된다. ―J.M.머리  어떠한 번역이나, 은유나, 우의라도 극단적인 비유와는 전연 다른  방향으로 흘러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면 은유를 바다나 파도에서  시작하여 불꽃이나 재로 끝내서는 안된다. 그것은 대단히 나쁜  모순이기 때문에. ―벤 존슨  은유를 깊이 추구하려면 건전한 의식의 세계에 들어갈 필요가 있다. ―J.M.머리  상징파의 상징은 언제나 자기만이 아는, 특별한 관념을 표현하기  위하여 시인이 독단적으로 쓰고 있는 ―즉, 그러한 관념의 일종의  투영인 것이다. ―에드문드 윌슨  상징주의의 상징의 실체는 제재에서 분리한 은유였었다.―왜냐하면  시에 있어서 어느 한 점을 넘으면 색채와 음은 그 자신을 위하여  즐거워할 수가 없을 뿐더러 이미지의 내용을 억측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에드몬드 윌슨  시는 감촉할 수 있고 묵묵해야 한다.  구형의 사과처럼  무언(無言)이어야 한다.  엄지손가락에 닿는 오랜 대형 메달처럼  조용해야 한다  이끼 자란 창턱의 소매자락에 닳은 돌처럼  시는 말이 없어야 한다.  새들의 비상처럼  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마치 달이 떠 오를 때처럼  마치 달이 어둠에 얽힌 나뭇가지를  하나씩 하나씩 놓아주듯이  겨울 잎사귀에 가린 달처럼 기억을 하나하나 일깨우며 마음에서 떠나야 한다.  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마치 달이 떠오를 때처럼  ―A.맥클리쉬 『詩法』  나의 시의 장부(帳簿)는 어디에 있는가 이 나의…  종이도 없고 펜도 없고  시도 없이 나는 무(無)앞에 있다. ―R.끄노오 『詩法을 위하여』   
1051    <소리> 시모음 댓글:  조회:4129  추천:0  2015-04-23
  이양우의 '맑은 소리' 외 + 맑은 소리  다시 또 이슬처럼 곱기를 햇살처럼 맑기를 고요처럼 무겁기를 숨소리에 잠이 깨일 까봐서 작은 미동에도 내가 널 그르칠까봐  이렇게 나직한 자세로 고개를 떨구누나 사랑함이 얼마나 깊은 것이기에 사랑함이 얼마나 고요해야 하는 것이기에 맑게 흐르는 실개천  아침 햇살에도 여린 찰나여!  쌀을 씻는 아낙의 손길이 그 얼마나 정결하고 진지함일지 아아, 나는 당신의 행주치마 같은 햇살이고파라. (이양우·시인, 1941-)  + 소리의 탑 첼로 연주 소리가 들린다.  지그재그로 공기를 찢으며 다가온  音波가 나를 흔든다.  소리를 낸다는 것은  대기에 상처를 낸다는 것.  첼리스트의 움직임에 따라 가슴에 파고드는  그 상처에 넋 나간 듯 사로잡혀 있으니  감동이라는 말은  형형색색으로 파헤쳐진 영혼의 상처를  美化시킨 말.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도  마음 깊은 곳에 소리를 새겨넣는 일.  지그재그로 상처를 새겨넣는 일.  몸 안 奧地에 박힌 그 상처가  살아가는 밑천이 되기도 하니  그대와 나는  적요 속의 소리에 실려가는 존재.  연주가 끝나고 박수 소리 들린다.  이 소리 저 소리가 숱한 사금파리로 쌓이는 몸은  소리로 된 탑일지도 모를 일.  때가 되어 무너지는 날은  또 다른 소리를 부를지도 모를 일.  (설태수·시인, 1954-) + 삶의 소리  삶의 소리가 나를 깨운다  의식을 깨우고 머리를 맑게하고 숨을 쉬게한다  베란다를 통해 들려오는 자동차 시동 거는 소리  바람이 커튼을 펄럭이는 소리  설거지하는 소리  수돗물 소리  등교하면서 햇살에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해맑은 소리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소리  누군가가 버튼을 눌렀을 전화벨소리  모든 소리는 살아 숨쉬는 생의 소리이다  움직임 이는 이동의 소리이다  아무도 제 자리에서는 숨을 쉬지 않는다  계절에 빛 바랜 길가의 들풀도  어제보다 더 깊은 침묵으로 조용히 숨을 쉬며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이기적인 마음에 한때 시끄럽다고  짜증내던 그 시간들은 가장 활발하게  내 주위에 생명이 모여있었던 행복한 순간이었음을  좀더 일찍 알았더라면  나의 생은 좀더 기쁨으로 충만했을 텐데... (한상숙·시인) + 소리  나무 책상 하나를 구했다  대패 자국이 선명하다  대패가 지나갈 때마다  풀려 나왔을 소리들이 들린다  숲에서 들었던 소리들이 아니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그렇게 흘러가는 소리들이 아니다  나무는 흘러가는 것들을 그냥 버려두고  제 몸 속 소리만 품어 키운 것이다  소리도 오래 되면 곰삭아서  말갛게 걸러진 소리를 갖는다  새파란 대팻날 앞에서 조근조근 말할 수 있고  제 소리 담아 둘 옹이를 만들 줄도 안다  살점 저미는 소리를 고요하게 만들 줄도 알고  저며진 살점 속에 향기로 바꾼 소리를 쟁여 둘 줄도 안다  저렇게 자세 반듯한 책상이 될 줄도 아는  오래된 소리  이제는 곰삭아 아무렇지도 않게 제 몸 내보이는  나무의 해탈을 본다  숱한 직립의 소리들 쪽으로 몸을 돌리는  목쉰 소리 하나 (박미라·시인) + 북소리    목덜미 수줍게  훅  훅  바람을 불어  귓불마저 빨개지면  가슴 한마당  둥  둥  진군進軍의  북소리가 울린다 (공석진·시인)  + 빛의 소리  빛이 소리를 내며 들어온다  창문을 드르륵 하고 여니 빛이 들어오고  방문을 스르르 하고 여니 빛이 들어오고  삐걱거리는 옷장을 여니  잠자던 옷가지에 빛이 들어온다  소리는 빛을 타고 와  빛이 비치는 곳마다 소리가 들린다  뒤뜰의 기지개 켜는 소리가 들리고  들판의 땅 밑에 함성이 들리고  흙 속의 벌레 알 발가락 펴는 소리가 들린다  빛은 소리를 데리고 봄으로도 와  빛이 머무는 곳마다 소리를 낸다  목련꽃에는 하얀 소리를 내고  개나리꽃에는 노란 소리를 내고  참꽃에서는 연분홍 소리가 난다  철길 두드리는 봄 소리가 난다  (우영규·시인, 대구 출생) + 봄이면 어디선가 쮸쮸바 소리가 들린다  봄이면  닫혔던 물관이  툭! 터지면서  물살 소리를 낸다  아마도  겨우내 심한 몸살을  앓았다는 징표인가 보다  연약한 실뿌리도  몸통을 키우기 위해  심연으로부터 자양분을  쪼옥 쪽 빨아들이는 소리 들린다  그 소리 예전에 먹던  쮸쮸바 소리와   어쩜 그렇게 똑같은지  나도 모르게  옳거니 옳거니  박수를 치고 말았다  아, 그렇구나  봄이면 어디선가  쮸쮸바 소리가 들리는가 보다  봄에 도취된 사람만  느낄 수 있는 깊은 영혼과 같은 소리  오, 쮸쮸바 (반기룡·시인) + 심야의 소리  초저녁, 바람소리가 심하다  개 밥그릇 날아가는 소리가 화단 쪽에서  자지러진다. 분명 사지가 너덜거리겠지  텔레비전에서 애국가가 끝나고부터  집 밖 처마귀퉁이 어디쯤에서 토닥토닥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저 발자욱 소리, 밤새도록 어디로 가나  아마도 봄 동산에 꽃불 켜려고 가겠지  둘째딸 방에서 기침소리가 여전하다 (신석정·시인, 1907-1974) + 자연의 소리     졸졸졸 물 흐르는 시냇가에서  숨죽이고 귀기울여  조용히 그 물소리를 듣는다  잔잔한 음악 같기도 하고  준엄한 교훈 같기도 하고  다정한 속삭임 같기도 하다  살구만한  사과만한  참외만한 둥근 돌 틈 사이로  낮은 데를 향해 흘러가며  끊임없이 들려주는 저 소리  계절을 가리지 않고 밤낮없이  흘러가는 저 물소리  오늘 내 귀에 들려오는  변함없는 저 자연의 소리  낮아져라  겸손해라  사랑해라  (오정방·시인, 1941-) + 작은 소리로  탁자 위에 한 묶음 국화가  가까이 코를 대면  그제서야  제 이름을 말한다  미미한 향기  그래도 제 향기  그들은 벌 나비 날갯짓을 알고 있을까  벌 날개 같은 꽃잎들이 동그랗게  나비춤을 추려 한다  그들은 달 뜨고 별 지는 하늘을 보았을까  속 꽃잎들은 달 모양으로 떠서 별빛을 담아 놓고 있다  그들은 가을 바람에 허리 휘어본 적이 있을까  가느다란 줄기가 곧 휘어질 것만 같다  조그맣게 부르는 소리  작은 손짓으로 멈추게 하는  미미한 향기  그래도 제 향기  작은 소리로 제 이름을 말하고 있다.  (유봉희·시인) + 풀벌레 소리  풀벌레 소리가 들려온다  그 옛날  시냇가에서  물장구 칠 때 듣던 소리  대청에 앉아  별똥별 떨어지는 밤하늘 바라보면  배경음악처럼 잔잔히 들리던 소리  메뚜기, 개구리 잡으려 소리 죽이면  더 크게 울어대던 소리  언제부턴가  자동차 소음과  기계음 소리가  익숙하게 들려오는데  오늘은  어디선가 또 다시  정겨운 풀벌레 소리가 들려온다 (박인혜·시인, 1961-) + 시냇물소리  두꺼운 얼음장 밑에서  종일토록 이어지는  맑은 영혼의 기도소리  음색은 가늘어도  끊이지 않고 울려 퍼지는  고운 영혼의 찬양소리  겨울의 꼭지점에서  얼어붙은 냇물을  온몸으로 녹이고 있다.  꽃망울이 터지며  종달새는 높이 날고  온 세상에 봄이 오리라. (박인걸·시인) + 살구나무 속 흐르는 물소리  토담에 박혀있는 늙은 살구나무  터실터실 갈라 터진  껍질 속으로 가만가만  어디론가  봄물 올리는 소리  그 옛적 도시로 떠난 아이들이  맨발로 살금살금  설익은 살구를 따기 위해  나무에 바짝 붙어 기어오를 때  들려오던 가뿐 숨소리  꼬르륵 꼬르륵  모든 것 다 잘 아는  하나님도 미처 모르고 있는  보이지 않는 요정의 손들  물방울 밀어 올린다  하늘 밑 가지 끝  작은 꽃봉오리 마른입에  한 모금 축여 꽃피움 바라보며  삼동에 마른 이끼 내 마음도  새롭게 푸르러진다 (김내식·시인, 경북 영주 출생) + 소리 아내가 돌리는 전자동 세탁기 소리는  몇 시간 낮잠을 푹 자도 된다는  아내가 좋아하는 뽕짝 같은  자장가.  그 옛날  어머니의 다듬이 소리는  엄마가 네 옆에 있으니  온밤  안심하고 꿈을 꿔도 좋다는  엄마가 내게 보내는  수신호.  세상의 어떤 소리는  제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가끔은 마음속  덧난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정성수·시인, 1945-) + 웃음소리   촉촉한  봄비가  소리치며  내리고 있습니다.  봄비가 그치고  따스한 햇볕 아래  눈 비비고 씨앗은  목을 쑥 올리고  세상을 향해 나옵니다.  언제나  한 번도 불평하지 않고  내색하지 않고  항상 웃음 가득하게  피어납니다.  그 밝은  웃음소리로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조동천·시인) + 소리에 젖다  오지게도 내린다  삼월 한밤 내내  두터운 침묵을 두드리는  푸른 빗소리  안으로 동여맨 섶 풀어내어  차박차박 적시고 있다  부풀리고 있다  꿈속까지 찾아와  하염없이 수런대는 댓잎 같은  그대처럼  지금 지상은  제 소리에 겨워 우는  타악기이다 (김기연·시인) + 잔소리반찬     아내는 부재 중  삼일 홀아비 수저 챙겨 보네  반찬 종지 두어 개  씁쓸하게 밀어 넣은 찬밥  돌아서자 빈자리처럼 허기지네  하루가 시들해지고  별처럼 잠도 오질 않네  숟가락에 넘어가던 잔소리도  내겐 빠질 수 없는 반찬이었던 것 같네  찹쌀처럼 달라붙던 차진 소리에  밥 한번 비벼 먹었으면  둥 둥 둥  배 두드릴 것 같네 (김종구·농부 시인, 1957-) + 산이 소리를 낼 때에는  가을이 와서  산이 소리를 낼 때에는  쉿, 조용해라  먹을 것 못 먹고 입을 것 못 입고  오직 목소리 하나만은 내 혼백과 맞바꾸겠다는 일념으로  깊은 산중에 들어온 소리꾼 하나가  언제 트일지 모르는 소리를 위해  목구멍이 찢어지고 갈라지고 피를 토해가면서,  그 피로 나뭇잎을 붉게 물들여가면서  으엑! 으엑! 처절하게는 목이 죽은 소리를 저리 내고 있지 않느냐  범부의 소리를 죽이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 심심해서라든지 지겨워서라든지,  아무튼 생각 없이 산 구경이나 즐기러 온 팔자 좋은 이들이라면  별일 아닌 듯 말없이 그냥, 그냥 가거라  그저 못 본체하고 지나가거라  가을이 와서  조용했던 산이 소리를 낼 때에는  한 소리꾼의 소리의 붉은 피가  몇 되박은 족히 이 숲 저 숲 잎잎마다에 뿌려져  속내까지 뻘건 적단풍이 되고 말았느니 (곽진구·시인, 1956-)
1050    진달래(참꽃, 천지꽃)와 철쭉(수달래)의 차이점 댓글:  조회:5800  추천:0  2015-04-23
진달래와 철죽(수달래)... 얼핏보면 비슷해서 모두가 진달래로 보입니다.   하지만, 자칫 큰일날 수도 있습니다.   진달래는 참꽃이라 하여 어릴적부터 많이 따먹던 꽃입니다만,   수달래은 절대로 먹어서는 안되는 꽃입니다. 독성이 있어서 바로 구토와 설사로 부작용이 나타납니다.   진달래는 대체로 꽃이 먼저 피고 수달래는 잎과 함께 핍니다. 진달래는 꽃의 윗부분만 갈라진 5장의 꽃잎중 위의 것에 붉은 반점이 나타나는 반면   수달래는 꽃잎속의 붉은 반점이 뚜렷합니다. 토질에 따라서 색깔이 다를 수도 있고   진달래는 먼저피고,   수달래는 늦게 핍니다. 지형과 기온 차이에 따라 피는 시기가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산을 오르다보면 산 위에는 진달래,   산 아래서는 수달래...함께 볼수도 있겠지요.   철쭉은 한자로 '척촉'이라고 하는데 꽃이 너무 아름다워 지나가던 나그네가 자꾸 걸음을 멈추어 이런 이름이 생겼다하며 산객(山客)이란 이름도 같은 맥락에서 생긴 이름이다.   부모님들 말씀에 의하면 진달래를 참꽃이라 하여 어린시절 꽃잎을 따먹기도 하였는데   철쭉은 연달래라 하여 먹으면 죽는다고 단단히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철쭉 꽃잎에는 독이 있어 먹을 수 없다.   구 분 방 법--   1. 잎과 꽃 진달래와 철쭉을 쉽게 구별하는 방법은 꽃과 잎이 같이 피었느냐로 구분하는 방법이다.   진달래는 꽃이 먼저 피고 꽃이 지면서 잎이 나온다.   철쭉은 잎이 먼저 나오고 꽃이 피거나 꽃과 잎이 같이 핀다.   2. 개화기 진달래는 보통 4월,   철쭉은 5월에 개화   3. 서식 환경--   진달래는 산의 볕이 잘 드는 양지가에서 자란다.   철쭉은 산사면의 음지에서 자란다.   4. 꽃 모양--   진달래 꽃의 화관은 깔대기 모양으로 붉은 빛이 도는 자주색으로 겉에 털이 있다. 잎 표면에는 비늘이 있고 뒤편은 털이없다.   철쭉은 연분홍색으로 꽃받침은 작은 꽃줄기와 함께 선모가 난다. 철쭉은 꽃은 위쪽에 적갈색의 반점이 있으며 열매는 타원형이다. 철쭉은 가지 끝에 작은 주걱모양으로 매끈하게 생긴 잎이 너댓장 돌려 나며 꽃빛깔이 아주 연한 분홍빛이어서 오히려 흰 빛깔에 가깝다.   그래서 남부지방에서는 색이 연한 진달래란 뜻으로 '연달래'라고도 한다.   5.잎 모양 진달래잎은 피침형이다.   철쭉은 잎이 진달래에 비해 둥굴다.   6. 나무 높이--   진달래 높이는 2-3미터 정도이고,   철쭉 높이는 3-5미터 정도다.   7. 독성 유무--   선조들은 단맛이 나는 진달래는 참꽃이라 했고,   먹지 못하는 철쭉을 개꽃이라 블렀다
1049    진달래와 철쭉의 차이점 댓글:  조회:6059  추천:0  2015-04-23
진달래(참꽃, 천지꽃)와 철쭉(개꽃, 연달래)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진달래는 양지에서 잘 자라고 철쭉보다 일찍 3~4월에핀다. 진달래는 꽃이 먼저 피고 잎이 나중에 나온다. 진달래는 잎이 매끈하고 털이 없다. 진달래는 식용을 할 수 있다.   철쭉은 응달에서 잘 자라고 4~5월에핀다. 철쭉은 잎이 먼저 나고 꽃이핀다. 철쭉은 잎이 뒷면에 털이 나있다. 철쭉은 독이 있어 식용을 할 수 없다. 철쭉은 연달래라고도 부른다.
1048    천지꽃과 백두산 댓글:  조회:4489  추천:0  2015-04-23
  천지꽃과 백두산 /석화   이른 봄이면 진달래가 천지꽃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피어나는 곳이다   사래 긴 밭을 갈면 가끔씩 오랜 옛말이 기와 조각에 묻어 나오고 룡드레 우물가에 키 높은 버드나무가 늘 푸르다   할아버지는 마을 뒤 산에 낮은 언덕으로 누워 계시고 해살이 유리창에 반짝이는 교실에서 우리 아이들이 공부가 한창이다   백두산 이마가 높고 두만강 천 리를 흘러 내가 지금 자랑스러운 여기가 연변이다. ※천지꽃 : ‘진달래꽃’의 방언 ※룡드레 우물 : 북간도에 정착한 조선인들이 룡정(龍井)시를 세웠는데, ‘룡정’이라는 이름의 기원이 된 용두레 우물을 가리킨다.     시 혼자 살피기 ○제목 : 천지꽃과 백두산 → 작품의 주요 소재 → 상징적 의미를 파악해볼 필요가 있음. ○화자 : 나 ○청자 : 없음 ○대상 : 연변에서 살아가는 우리 민족의 모습 ○상황 : 화자가 연변의 모습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조선족의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정서 : 자부심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주제) : 연변에 살고 있는 조선족의 삶에 대한 민족적 자긍심 ○어조 : 예찬적 ○표현 : 상징, 직접적으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제시함    
1047    투우장에서 댓글:  조회:2051  추천:0  2015-04-22
에구머니나! 황소가 날선 쇠뿔로 찌른 곳이... [ 2015년 04월 21일 09시 46분 ]       스페인 동부 한 투우장에서.
1046    강물 거슬며 배를 끄는 인부들 댓글:  조회:2302  추천:0  2015-04-22
[ 2015년 04월 20일 10시 21분 ]     삼협저수지 신농계(三峡库区神农溪) " 하의실종" 인부들이 밧줄로 배를 끄는 장면  호북성 파동현(湖北省巴东县) 
1045    벼랑길과 청결공 댓글:  조회:2165  추천:0  2015-04-22
[ 2015년 04월 20일 08시 19분 ]     하남 란천 로군산(河南栾川老君山) 벼랑길
1044    재미있는 사진들... 댓글:  조회:2222  추천:0  2015-04-22
  무지 무지 웃기고 재미있는 사진 입니다.                                                                                                                                                                                                                                                                                                                                                                                                                                                                                                                                                                                                                                                                                                                                                        
1043    영국 시인 - 드라이든 댓글:  조회:5228  추천:0  2015-04-20
  정의의 여신의 귀환 이제 일련의 보다 흰 시대가 시작되어, 유연한 세기로 부드럽게 흘러, 그대의 아침을 덮고 있는 저 구름들이 하늘의 가장 먼 구석으로 쫓겨 날아가게 되리라. 우리 민족은 제 세력의 통합으로 축복받아 이제 균형 맞추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나머지 세계를 지배하리라. 그대의 제국은 해외에서 어떤 한계도 알지 못할 것이고, 끝없이 순환하는 바다처럼 흐르리라. 그대가 총애하는 함대는 넓은 제해권으로 육지의 작은 군주들을 포위하리라. 그리고 오래된 시간이 그의 자손을 집어삼켰듯이, 우리 대양도 깊이에서 모든 바다를 익사시키리라. 그들의 풍요로운 무역은 해적의 약탈로부터 자유로워 우리 상인들은 더 이상 모험가가 되지 않으리. 비천한 네덜란드가 여기서 숨기는 그런 위험을 근동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스페인은 그대의 선물에 인도 제국을 빚지고 있다, 강자는 취한 것을 주지는 않기에. 그리고 망명자의 존재를 두려워한 프랑스는 그대가 여전히 너무 가까이 있는 것을 정당하게 염려하네. 국내에서는 당파라는 증오스러운 이름들이 그치고 당파적인 사람들이 지쳐 평화를 찾네. 지금 불평분자들은 이전에 그대의 정당한 대의를 배신하는 죄를 저질렀던 자들뿐이다. 그들의 몇몇에 대해 그대의 칙령이 죄에서 벗어나도록 선도했고, 하지만 그대의 삶과 축복받은 모범이 대부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오, 행복한 군주시여, 하늘이 맹세를 지킴으로써 더 많은 맹세를 지키게 할 길을 가르쳐 주었으니! 오, 행복한 시대여! 위대한 아우구스투스 왕좌를 위해 운명에 의해 홀로 점지된 시대들과 같은 시대들이여! 그러한 때 무력과 문력의 조화로운 성장이 세상에게 한 군주를 미리 보여 주었는데, 그 군주가 바로 그대다. (원전 292∼323행) ≪드라이든 시선≫, 존 드라이든 지음, 김옥수 옮김, 28∼30쪽 “일련의 보다 흰 시대”가 무엇인가? 황금시대를 가리킨다. 황금시대가 뭔가? 사회의 진보가 최고조에 이르러 행복과 평화가 가득 찬 시대다. “행복한 군주”는 누구인가? 찰스 2세다. 정의의 여신도 찰스 2세다. 이 시는 드라이든이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1660년, 찰스 2세의 프랑스로부터의 귀환을 축하하기 위해 쓴 찬양시다. 이 시는 무엇을 겨냥하는가? 선전과 권고다. 로마의 정치 안정과 문화 융성, 경제 번영을 영국에서 이루려는 바람이다. 찰스 2세 시대의 영국이 새로운 로마 제국이 될 것이라고 선전하는 동시에 그가 진정한 군주, 아우구스투스 같은 군주가 되기를 권한다. 오거스턴 시다 오거스턴 시란? Augustan poetry란 아우구스투스적인 세계를 이상향으로 제시하는 시다. 오거스턴은 아우구스투스 시대 로마 문인들을 모방하려는 18세기 시인들을 일컫는다. 드라이든은 베르길리우스나 호라티우스를 모방했다. 시가 왜 정치에 복무하는가? 드라이든은 공적, 사회적 문제에 대해 대중을 설득하는 공공의 웅변가(public speaker)를 이상적인 시인의 모습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세계관을 제시해 왕과 국민들에게 규범으로 삼도록 했다. 그의 이상적 세계관이란? 토리 세계관이다. 그는 야당인 휘그당과 대립하는 토리당을 지지했다. 휘그파의 과도한 정치, 경제 개인주의가 문제가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태도가 사회 혼란을 조장한다고 이해했다. 토리 세계관은 무엇 위에 서있나? 정치적으로는 왕정과 귀족 중심의 위계질서, 경제적으로는 도덕 경제를 토대로 삼는다. 그의 정치관은 문학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는가? 공격성을 주된 특징으로 하는 풍자시를 주로 쓰게 되었다. 풍자시로 토리적 세계관을 규범으로 제시하는 한편 휘그파를 공격했다. 문학사에서 드라이든의 의미는? 영국의 신고전주의 시대를 열었다. 오거스턴 신화를 실현해 18세기 시인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영국 비평의 아버지’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비평적 혜안을 보여 주는 평론도 많이 남겼다. 어떻게 살다 갔나? 1631년 영국 노샘프턴셔에서 태어났다. 학생 때인 1649년에 첫 번째 시 <헤이스팅스 경의 죽음>을 발표했다. 1668년 계관시인이 되었다. 1700년 사망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드라이든John Dryden 폰트확대| 폰트축소| 공유하기|   인쇄 미리보기   출생 1631. 8. 19, 잉글랜드 노샘프턴셔 올드윙클 사망 1700. 5. 1, 런던 국적 영국 1631. 8. 19 잉글랜드 노샘프턴셔 올드윙클~ 1700. 5. 1 런던.  영국의 시인·극작가·문학비평가. 목차 펼치기 개요 원본사이즈보기 드라이든 드라이든, Godfrey Kneller 경이 그린 유화 당대를 '드라이든 시대'라고 부를 만큼 당시의 문학계를 주도한 문인이다. 초기생애와 교육 시골 유지의 아들로 태어나 시골에서 자랐다. 11세 때 청교도혁명이 일어났는데 친가와 외가 모두 왕에 맞서 의회 편에 섰으나, 당시 드라이든의 생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1644년경 웨스트민스터 스쿨에 입학, 유명한 리처드 버즈비로부터 주로 고전적인 교육을 받았다. 이러한 교육 덕분으로 그리스 로마 문학에 일생동안 수월하게 친숙할 수 있었으며 뒤에 그리스 로마 문학을 영어다운 영어로 번역할 수 있었다. 1650년 케임브리지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고, 1654년 문학사학위를 받았다. 1654년 대학을 졸업한 뒤부터 1660년 찰스 2세의 왕정복고 때까지의 행적은 확실하지 않다. 1649년 올리버 크롬웰을 위한 기념문집에 글을 실어 시인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의 영웅시(heroic stanzas)는 원숙하고 깊이있고 격조가 높으며, 후기시의 특징이 될 고전적·과학적 인유(引喩)로 점철되어 있다. 그는 이런 종류의 공적인 행사시(行事詩)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1660년 5월 찰스 2세가 왕위에 복귀하자 그는 왕을 환영하는 시인의 한 사람으로 6월에 2행연구의 300행이 넘는 시 〈아스트리아 리덕스 Astraea Redux〉를 발표했다. 또 1661년의 대관식을 경축해 〈신성한 폐하께 To His Sacred Majesty〉를 썼다. 이 2편은 왕권을 강화하고 권위를 드높이며, 젊은 군주에게 영원한 신성함이 깃든 위엄을 부여하기 위해 계획된 시였다. 그뒤로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는데 그의 필치는 거의 변함없이 확신에 차 있었다. 1663년 12월 1일에 버크셔의 백작 1세인 토머스 하워드의 막내딸 엘리자베스 하워드와 결혼해 아들 셋을 두었다. 특정시기를 반영하는 가장 긴 시 〈경이로운 해 Annus Mirabilis〉(1667)는 영국 함대의 네덜란드 제패와 1666년 런던 대화재 때 살아남은 사람들을 축하하는 글이다. 이 시에서도 왕의 이미지를 미화하고 훌륭한 왕 아래 단합한 충성스러운 국민의 모습을 강조했다. 이로 미루어 보아 1668년 계관시인 윌리엄 대버넌트 경이 죽자 그 자리에 임명되었고 2년 뒤에 궁정사료편찬가로 임명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극작 활동 찰스 2세는 1660년 왕위에 복귀한 뒤, 1642년부터 닫혀 있던 극장에 2가지 특허를 내주었다. 드라이든은 다시 활성화된 극장에 공연할 희곡을 쓰는 소수의 극작가 그룹에 참여했다. 첫 희곡 〈The Wild Gallant〉는 유머와 음탕한 대화가 담긴 소극(笑劇)으로 1663년에 상연되었다. 이 작품은 실패에 가까웠으나, 1664년 1월에 로버트 하워드 경과 같이 쓴 2행연구 영웅비극 〈인도 여왕 The Indian Queen〉은 성공작이었다. 이 작품들은 사랑과 명예 사이의 갈등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아름다운 여주인공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던 남자들이 무릎을 꿇고마는 내용을 담은, 새로운 대중적 장르의 연극을 개척하는 데 성공했다. 1665년 봄에 〈인도 여왕〉의 속편 〈인도 황제 The Indian Emperour〉를 발표하여 처음으로 독자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1667년에 발표한 희비극 〈은밀한 사랑, 처녀여왕 Secret Love, or the Maiden Queen〉도 대단한 인기를 얻었는데, 특히 왕이 이 작품을 좋아했다. 명랑하고 재담이 풍부한 궁녀 플로리멜 역은 왕의 애첩 넬리 그윈이 맡아 완벽하게 연기했다. 플로리멜이 셀러던과 수다를 떠는 대목에서는 재치있는 응답을 즐기는 왕정복고기의 성향이 새로운 수준에 도달해 있음을 보여 주었다. 1667년에는 몰리에르의 희극 〈얼간이 L'Etourdi〉(뉴캐슬의 공작인 윌리엄 캐븐디시가 번역)를 개작하여 〈마틴 매럴 경 Sir Martin Marall〉이라는 제목으로 무대에 올렸다. 1668년에 발표한 〈극시론 Of Dramatick Poesie, an Essay〉은 드라이든(작품에서 'Neander'로 지칭됨)을 포함한 4명의 작가가 모여 여유있게 토론하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고대 고전극과 신고전주의 프랑스극에 맞서 영국극을 옹호하는 한편 극비평의 일반원리를 찾아보려는 의도에서 씌어졌다. 고대와 현대, 프랑스와 영국, 엘리자베스 시대와 왕정복고기 등의 이미 굳어진 대립관계를 깨기 위해 작중의 논쟁자들을 알맞게 설정해 토론을 깊이있고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극시론〉은 현대 극비평을 다룬 최초의 비중있는 저서로서, 분별있고 신중하며 탐구적일 뿐 아니라 차분하고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문체로 일반적인 원칙과 분석의 결합을 시도했다. 그는 이 글뿐 아니라 모든 비평에서 매우 사색적이고, 공정한 과학적 탐구자세를 취했다. 1668년 드라이든은 토머스 킬리그 루극단에 전속되어 1년에 3편씩 극을 써주기로 약속하고 극단 수입의 1/10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주주가 되었다. 실제로는 1년에 1편 정도밖에 못 썼지만 계약은 서로에게 이익을 주었다. 1669년 6월에는 거드름을 피고 신성을 모독하는 발언을 하는 주인공 맥시민이 등장하는 〈폭군 같은 사랑 Tyrannick Love〉을 썼다. 또 이듬해 12월에 〈스페인의 그라나다 정복 The Conquest of Granada by Spaniards〉의 1부를 썼고 1개월 뒤에 2부를 썼다. 이 세 작품은 대성공을 거두었는데 특히 〈스페인의 그라나다 정복〉의 대담무쌍한 주인공 알만조를 통해 표현했던 사랑과 명예라는 주제가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1671년 버킹검의 공작 2세인 조지 빌리어스가 드라이든(작품에서 베이스 씨)을 풍자해 쓴 영웅극 〈예행연습 The Rehearsal〉의 재치있는 풍자에서 나타나듯이, 그의 희곡은 이무렵 거의 활력을 잃고 있었다. 그렇지만 〈예행연습〉이 드라이든의 영웅극을 완전히 매장시키지는 못했다. 1675년 11월 그가 쓴 영웅극의 마지막 작품이며 가장 잘된 작품 〈Aureng-Zebe〉가 무대에 올랐다. 여기에서는 압운을 갖춘 2행연구를 사용하지 않고 무운시를 썼다. 영웅극에서 드라이든은 드럼과 트럼펫, 장광설과 허풍, 무대 위의 전쟁, 화려한 의상, 이국적인 장면 등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으려 했다. 그러나 1672년에 발표한 희극 〈유행하는 결혼 Marriage A-la-Mode〉에는 대중의 구미에 맞는 장광설과 호언장담을 쓰지 않으려는 노력이 상징적으로 나타났다. 이 작품은 왕정복고기를 배경으로 남녀의 사랑싸움을 묘사하는데, 뒷날 조지 에서리지 경과 윌리엄 콩그리브의 훌륭한 작품에서나 나옴직한 기교를 부린 세련된 표현을 쓰고 있다. 비극 〈모두 사랑을 위해 All for Love〉(1677)는 다른 류이긴 하지만 역시 훌륭한 극으로,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를 모체로 하여 유창하면서도 절제된 무운시로 썼다. 드라이든은 이무렵에 신고전주의기에 들어섰으며, 그뒤의 비극들은 초기 작품의 과장된 성격으로부터 아주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구성이 탁월하며 상황이나 인물로부터 자연스럽게 발생한 사건을 다루었다. 1678년경에는 부실한 경영으로 심각한 곤경에 빠져있던 킬리그루 극단의 동료 주주와 다투게 되었다. 이 때문에 내서니엘 리와 함께 쓴 비극 〈오이디푸스 Oedipus〉를 경쟁상대가 되는 극단에 주고 주주로서의 권리를 포기했다. 풍자시 〈경이로운 해〉를 출판한 뒤 드라이든은 12년 동안 거의 극작에만 전념했다. 만약에 그가 1680년에 죽었더라면 극작가로서만 알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2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의 집필 활동을 통해 그의 이름은 영국 최대의 풍자시인으로 통하게 되었다. 1681년에 찰스 2세의 동생으로 요크의 공작이며 가톨릭 신자인 제임스가 왕으로 옹립될 것이라는 정치적인 의혹이 생겨서 왕은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자 샤프츠버리 백작의 주도 아래 휘그당의 지도자들은 가톨릭 음모사건을 이용하여 제임스를 왕위계승에서 배제하고 찰스의 서자이며 신교도인 몬머스 공작을 옹립하려 했다. 그러나 왕은 재빨리 손을 써서 여론이 휘그당의 편을 들지 못하게 했고, 샤프츠버리는 대반역죄로 투옥되었다. 드라이든은 계관시인으로서 몇 달 간의 위기를 방관만 할 수 없었으므로 1681년 11월 〈압살롬과 아히도벨 Absalom and Achitophel〉을 써 휘그파의 분노를 자기 쪽으로 돌림으로써 왕을 도왔다. 〈구약성서〉의 다윗왕(찰스 2세), 총애하는 아들 압살롬(몬머스), 아버지에게 반역하라고 압살롬을 부추긴 나쁜 아히도벨(샤프츠버리)을 시의 골격으로 삼아, 지난 몇 년 간의 사건들을 왕과 토리 당원의 관점에서 풍자하면서 왕과 심각한 정치상황에 알맞는 영웅시체로 썼다. 반(反)휘그 선전문으로써 휘그당의 지도자들을 우스꽝스럽게 풍자적으로 묘사해 비웃는 이 시는 공공연한 비난이 호소력있게 표현된 걸작이며, 한편 토리파 선전문으로서도 차분하고 설득력있게 토리당측을 옹호했다. 런던 대배심이 샤프츠버리를 반역죄로 기소하기를 거부하자 동료 휘그 당원들이 그에게 훈장을 주기로 결정했는데, 이에 대한 반응으로 드라이든은 1682년초에 〈훈장 The Medall〉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휘그당에 대한 신랄한 비난으로 가득 차 있으며 힘차고 솔직한 산문 〈휘그에게 보내는 서한 Epistle to the Whigs〉이 서문으로 실려 있다. 같은 해에 드라이든의 허락없이 익명으로 그가 약 4년 전에 쓴 유명한 긴 풍자시 〈맥 플렉노 Mac Flecknoe〉가 출판되었다. 휘그파 극작가인 토머스 섀드월을 신랄하게 공격한 이 글의 계기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려진 바 없으나, 분명한 점은 〈맥 플렉노〉에서 문학가와 비평가로서 섀드월의 재능이 너무나 유쾌하고 악의 없는 경멸을 받은 나머지 실제적 평판마저 나빠졌다는 사실이다. 섀드월을 바보 글쟁이로 만든 이 풍자는 벤 존슨의 위트에 대한 섀드월과 드라이든의 견해 차이에 기초를 두고 있다. 드라이든은 존슨이 위트가 부족하다고 생각한 반면 섀드월은 엘리자베스 시대 극작가라면 무조건 흠모했던 것이다. 이 재미있는 희극적 풍자문은 영어로 된 최초의 의사(疑似) 영웅시이며 알렉산더 포프가 쓴 〈던시아드 The Dunciad〉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후기작품 새로 등극한 제임스 2세가 가톨릭교도에 관용적인 움직임을 보이자, 드라이든은 1685년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그가 쓴 가장 긴 시이며 동물 우화인 〈암사슴과 표범 The Hind and the Panther〉(1687)에서는 영국국교회와 다른 종파들에 맞서서 가톨릭 교회의 입장을 옹호했다. 1688년 제임스 2세가 왕위에서 물러나면서부터 드라이든의 정치적 전도(前途)는 막히게 되었고 계관시인 칭호도 섀드월에게 빼앗겼다. 그는 다시 극장으로 돌아왔다. 비극 〈돈 세바스찬 Don Sebastian〉(1689)은 실패했으나, 헨리 퍼셀의 음악 덕분에 〈암피트리온 Amphitryon〉(1690)은 성공했다. 퍼셀과 합작한 〈아서 왕 King Arthur〉(1691)도 성공을 거두었다. 비극 〈클레오메네스 Cleomenes〉는 정치적으로 위험한 소재를 썼다고 하여 공연허가를 얻지 못했고, 1694년에 쓴 희비극 〈승리한 사랑 Love Triumphant〉이 실패하자 그는 극작을 그만두었다. 1680년대와 1690년대에는 출판업자 제이콥 톤슨을 도와 시문집을 주간했고 주베날리스와 페르시우스의 작품을 번역했다. 1692년 애빙던 백작부인의 남편으로부터 많은 후원금을 받고 긴 기념시 〈엘리오노라 Eleonora〉를 써서 출판했다. 그러나 후기의 대표작은 1694년에 톤슨과 계약을 맺고 집필하여 1697년에 출간한 베르길리우스의 번역서이다. 이무렵 드라이든은 영국문단의 원로로서 윌스 커피하우스에서 젊은 작가들과 한담을 나누곤 했다. 톤슨이 출판한 그의 마지막 작품은 오비디우스·초서·보카치오 등의 작품을 개작한 〈고대와 현대의 우화 Fables Ancient and Modern〉(1700)로서, 비평적 서문으로 시작한다. 1700년에 죽었으며, 웨스트민스터 대사원의 시인들 코너(Poet's Corner)에 제프리 초서와 에이브러햄 카울리를 양옆에 두고 묻혔다.
1042    삶의 원칙 200가지 댓글:  조회:5930  추천:0  2015-04-20
    존 템플턴이 정리한 200가지 삶의 원칙   존 템플턴은 《삶의 법칙》에서 학교의 1년 학제와 마찬가지로 40주에 걸쳐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하나씩, 모두 200개의 삶의 법칙들을 읽고 이해하도록 정리했다고 밝히고 있다 - 옮긴이   제1주 1. 마음을 다스리면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다 - 빌 프로보스트 2. 비전이 없는 사람은 쇠퇴한다 - 잠언 29장 18절 3. 사랑은 치유할 수 없는 결점을 견뎌내는 인내다 - J. 옐리네크 4. 이 우주에는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가능성이 있다 - 무명씨 5.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 황금률(마태복음 7장 12절)   제2주 1. 당신의 삶은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된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2. 사랑을 주는 것이 사랑을 받는 것이다 - 존 템플턴 3. 용서받기 위해서는 먼저 용서해야 한다 - 존 템플턴 4. 감사하는 태도는 축복을 만든다 - 존 템플턴 5.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 무명씨   제3주 1. 당신 자신을 제외하고는 어느 것도 당신에게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없다 - 랄프 왈도 에머슨 2. 듣는 방법을 배우라 - 무명씨 3. 지혜는 실수에서 나온다; 잘못을 직시하고 배우라 - J. 옐리네크 4. 겸손은 당신을 기도와 발전으로 이끌고, 무한한 존재와 함께 할 수 있게 해준다 - 존 템플턴 5. 계획하는 데 실패한다면 실패를 계획하는 것이다 - 벤자민 프랭클린   제4주 1. 아름다운 생각이 아름다운 영혼을 만든다 - 존 템플턴 2. 발전은 근면한 생활과 불굴의 인내에 달려있다 - 존 템플턴 3.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마태복음 19장 19절 4. 모욕당한 것은 계속 기억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아니다 - 공자 5. 열정은 성취를 가져다 주는 동력이다 - 존 템플턴   제5주 1. 베풀수록 성장한다 - 존 템플턴 2. 잃어버린 시간은 다시 찾을 수 없다 - 벤자민 프랭클린 3. 함께 기도하는 가족은 늘 함께 한다 - 격언 4. 처음에 성공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다시 시도하고, 또 다시 시도하라 - 윌리엄 에드워드 힉슨 5. 어둠을 탓하기 보다는 촛불 하나를 밝히는 게 더 낫다 - 크리스토퍼 집안의 가훈   제6주 1. 사랑받는 것보다 사랑하는 게 더 좋다 - 성 프란시스 2. 감사하게 되면 감사할 일들이 더 많이 생긴다 - 존 템플턴 3. 외로운 사람을 도와주면 절대 외로울 수 없다 - 존 템플턴 4. 당신이 사랑과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신의, 절제, 온유함을 드러내보이면 사람들은 당신을 따르게 된다 - 존 템플턴 5. 미소는 미소를 낳는다 - 테드 엥그스트롬   제7주 1. 위대한 영웅들은 겸손하다 - 성 프란시스 2. 사랑은 주면 커지고 쌓아두면 줄어든다 - 존 템플턴 3. 어디서든 선함을 발견하고자 노력한다면 정신적으로 건강한 것이다 - 존 템플턴 4. 마음속에 품을 수 잇는 것은 이루어질 수 있다 - 무명씨 5. 기도를 통해 영적인 에너지를 얻을 수 잇다 - 존 템플턴   제8주 1. 불가능해 보이는 것은 단지 우리가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세이예드 후세인 나스르 2. 나는 어떤 사람을 미워함으로써 내 영혼이 작아지도록 하지 않을 것이다 - 부터 워싱턴 3. 한정된 목표를 달성한 데 만족하면서 머물러 있는다면 진정한 성공이 아니다 - 세이예드 후세인 나스르 4. 열정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된다 - 존 템플턴 5. 작은 시도를 계속 완성해나가면 어던 일이든 성취할 수 있다 - 오그 만디노   제9주 1. 패배했더라도 굴복하지 않는다면 그 맛은 결코 쓰지 않다 - 테드 엥그스트롬 2.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는 삶이다 - 소크라테스 3. 당신이 하는 말이 곧 당신이다 - 존 템플턴 4. 십일조가 번영과 명예를 가져다 주기도 한다 - 존 템플턴 5. 자기절제가 결국 승부를 결정짓는다 - 무명씨   제10주 1. 자유란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 무명씨 2. 의지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닫혀있던 많은 문들이 우리 앞에 열릴 것이다 - 세이예드 후세인 나스르 3. 얼마나 많은 축복을 받았는지 한번 세어보라. 그러면 감사하게 될 것이다 - 존 템플턴 4. 남의 비판을 앙갚음 하기보다 비판을 달가워할 때 더 많이 배우게 된다 - J. 옐리네크 5. 당신이 삶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묻지 말라; 삶이 당신에게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를 물어라 - 빅터 프랭클   제11주 1. 우리는 구하는 것을 얻게 된다: 선이든 악이든, 문제든 해결책이든 - 존 템플턴 2. 끝남은 모두가 새로운 시작이다 - 수잔 헤이워드 3. 친구를 얻는 유일한 방법은 친구가 되어주는 것이다 - 랄프 왈도 에머슨 4. 자신이 그렇다고 믿는 존재가 자신이다 - 안톤 체호프 5. 정신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2000년 전의 프톨레마이오스가 천문학에 대해 알았던 것보다도 적다 - 존 템플턴   제12주 1. 억지로 끌고 가기보다는 남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이 더 좋은 결과를 낳는다 - 무명씨 2. 유유상종(類類相從)이다 - 로버트 버튼 3. 범죄에는 아무런 이득도 없다 - 무명씨 4. 장애물도 당신에게 이로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 무명씨 5. 시도해보기 전까지는 누구도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른다 - 퍼블릴리우스 사이러스   제13주 1. 현명한 사람은 내일을 위해 오늘 스스로를 절제하고, 모든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다 - 미겔 데 세르반테스 2. 생각이 곧 사물이다 - 찰스 필모어 3. 안에서 그러하면 바깥에서도 그러하다 - 연금술의 원칙 4. 불평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이 다른 사람들을 당신에게로 끌어들인다 - 존 템플턴 5. 불굴이 인내가 성공과 실피를 가르는 열쇠다 - 무명씨   제14주 1. 생산적인 삶의 비밀이 무엇인지는 찾으면 발견할 수 있다 - 존 템플턴 2. 행복은 언제나 따라오는 것일 뿐이다 - 존 템플턴 3. 나쁜 세상을 치유하는 길은 좋은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 랄프 왈도 에머슨 4. 비판하는 것보다는 칭찬하는 것이 더 낫다 - 존 템플턴 5. 웃음은 최고의 명약이다 - 노먼 커즌스   제15주 1. 겸손함은 마치 어둠처럼 거룩한 빛을 드러내준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2. 당신에게 있는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현명하게 활용하라 - 오그 만디노 3. 인생에서 무엇을 성취해야 할지 모른다면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없을 것이다 - 존 템플턴 4. 기도를 통해 우리가 이 세상에서 꿈꾸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 - 알프레드 테니슨 경 5. 주위의 모든 사람과 사물이 스승이다 - 켄 키스   제16주 1. 높은 이상을 갖고 자신을 채찍질하라 - 랄프 왈도 에머슨 2. 위대함을 얻으려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 윈스턴 처칠 3. 좋은 말 한마디의 가치는 매우 크지만 비용은 거의 들지 않는다 - 조지 허버트 4. 어떤 문제든 그와 똑같은 수준에서는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 에밋 폭스 5. 행복한 관계를 맺으려면 올바른 사람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 에릭 버터워스   제17주 1. 아낌없이 주면 아낌없이 받는다 - 무명씨 2.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 요한복음 8장 32절 3. 황금을 발견하려면 황금이 어디에 있는지 먼저 공부해야 한다 - 윌리엄 주노 4. 습관은 최고의 하인이자 최악의 주인이다 - J. 옐리네크 5. 해안가가 보이지 않는 먼 바다까지 나아가지 않는다면 새로운 대양은 발견할 수 없다 - 무명씨   제18주 1. 배움에는 결코 끝이 없다 - 존 템플턴 2. 긍정적인 면은 더욱 강조하라; 부정적인 면은 아예 없애라 - 조니 머서 3. 용서는 용서하는 자를 고양시킨다 - 존 템플턴 4. 이해의 빛은 두려움의 망령을 몰아낸다 - 엘리 헤롤드 5.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보다 딱 한 가지 더 강력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경험으로부터 배우지 않는 것이다 - 존 템플턴   제19주 1.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되라. 그러면 인류가 당신에게 먹을 식량을 줄 것이다 - 랄프 왈도 에머슨 2. 행복은 물질적인 부가 아니라 정신적인 부에서 나온다 - 존 템플턴 3.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은 자꾸 비슷한 생각을 만들어낸다 - 찰스 필모어 4. 진보는 변화를 필요로 한다 - 존 템플턴 5. 행운은 준비하고 있는 사람의 문을 두드린다 - 무명씨   제20주 1. 좋은 평판은 돈보다 더 귀중한 것이다 - 퍼블릴리우스 사이러스 2.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인간적인 것이고, 용서를 하는 것은 성스러운 것이다 - 알렉산더 포르 3. 자기 자신을 탓해야만 할 그 어떤 일도 하지 말라 - 무명씨 4. "불행(EVIL)"의 영어 철자를 거꾸로 좋으면 "살아있다(LIVE)"는 단어가 된다 - 피니우스 큄비 5.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어떤 "방식"에도 견딜 수 있다 - 프리드리히 니체   제21주 1. 우리의 모든 것은 우리가 생각한 것의 결과다 - 부처 2. 한번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다 - 웬트워스 로스커먼 3. 당신은 사랑과 기도라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를 지니고 있다 - 존 템플턴 4. 당신이 동의하지 않는 한 어떤 사람도 당신이 열등하게 느끼도록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 엘리노어 루즈벨트 5. 어떤 사람도 자신이 받은 것으로 인해 존경을 받지 못한다. 존경이란 자신이 준 것에 대한 보답이다 - 캘빈 쿨리지   제22주 1. 물질적으로 발전하려면 기업가가 필요하다 - 존 템플턴   2.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축복해주면 그들도 자신의 짐이 가벼워졌음을 알게 된다 - 존 템플턴 3. 최선의 것을 바라게 되면 당신의 긍정적인 전망이 기회의 문을 열어줄 것이다 - 존 템플턴 4. 분노가 지배할 때 부정적인 결과가 생겨난다 - 찰스 렐리 5. 현명한 사람은 그의 마음속에서 영원한 평화를 발견한다 - 인도 속담   제23주 1. 준비하는 것은 성공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 존 템플턴 2. 실패란 단지 잠시 돌아서 가는 길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이미 성공을 향한 길에 들어선 것이다 - 코리 텐 붐 3. 감사하는 마음은 주는 마음과 용서하는 마음으로 이어지고, 정신적인 성장을 낳는다 - 존 템플턴 4. 사랑이 충분하면 극복하지 못할 어려움은 없다 - 에밋 폭스 5. 자기 절제는 성공을 부른다 - 존 템플턴   제24주 1. 생각이란 부메랑과 같아 늘 다시 돌아온다 - 아일린 캐디 2. 남이 화를 내는 것만큼이나 당신이 화를 내는 것도 당신과 다른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 켄 키스 3. 사소한 것이 큰 의미를 갖는다 - 에디스 린더만 4. 당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불평한다면 당신이 가진 것마저 낭비하는 일이다 - 켄 키스 5. 정직이 최선의 방책이다 - 미켈 드 세르반테스   제25주 1. 기도에 대한 응답은 "Yes"가 될 수도 있지만 "No" 혹은 "다른 대안들(alternatives)"이 될 수도 있다 - 루스 스태포드 필 2.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신체를 낳고,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 존 템플턴 3. 외면의 아름다움은 일시적이지만 내면의 아름다움은 영원히 지속한다 - 세이예드 후세인 나스르 4. 행복한 사람이란 특별한 환경에 둘러싸인 사람이 아니라 특별한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 무명씨 5. 남을 돕는 것이 스스로를 돕는 것이다 - 존 템플턴    제26주 1. 당신이 바로 당신 자신의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 제인 로버츠 2. 어떤 일이든 그것에 할당된 시간만큼 걸리기 마련이다 - 파킨슨의 법칙 3. 엉덩이를 걷어차는 것보다는 어깨를 두드려주는 게 대개 더 낫다 - 윌리엄 주노 4. 당신을 도와주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신뢰와 도움을 주라 - 존 템플턴 5. 생각이 굳어지면 습관이 될 수 있고, 습관이 쌓이면 환경이 될 수 있다 - 무명씨   제27주 1. 이 세상에 자신의 천국을 지을 수 있는 것도 자신이요, 지옥을 지을 수 있는 것도 자신이다 - 존 템플턴 2. 친절한 대답 한마디는 분노를 가라앉히지만 거친 말 한마디는 분노를 더 자극한다 - 잠언 15장 1절  3. 펜은 칼보다 강하다 - E.G. 벌워 리튼  4. 근심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귀중한 시간만 낭비할 뿐이다 - 존 템플턴 5. 거룩함이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거룩함 속에 있다 - 무명씨   제28주 1. 웃으면 세상이 함께 웃지만, 운다면 당신 혼자 울게 될 것이다 - 엘라 휠러 윌콕스 2.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 존 헤이우드 경 3. 정직은 지혜의 책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첫 번째 장이다 - 토마스 제퍼슨 4.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 전까지는 실패한 것이 아니다 - 테드 엥스트롬 5. 고귀한 목표가 없는 영혼은 키가 없는 배와 같다 - 아일린 캐디   제29주 1. 즐거워하는 마음은 남에게 믿음을 주고, 시기하는 마음은 자신을 외톨이로 만든다 - 존 템플턴 2. 태양만 내리쬐면 사막이 되어버린다 - 중국 속담 3. 할 수 있다고 생각하든, 아니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든 당신 생각이 맞는 것이다 - 핸리 포드 4. 우리 마음은 천국을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고, 지옥을 천국으로 만들 수도 있다 - 존 밀튼 5.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지 못하면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 에픽테투스   제30주 1. 자기를 잊음으로써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 성 프란시스 2.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를 다 해보라 - 유리피데스 3. 어떤 것에 집중하게 되면 그것은 계속 커진다 - 아놀드 페이턴트 4. 당신이 생각하는 그대로가 당신이다 - 찰스 필모어 5. 당신이 가고자 하는 길은 당신이 선택하는 것이다 - 존 템플턴   제31주 1. 부정적인 언어는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 존 템플턴 2. 성공은 스스로를 살찌우고, 더 큰 성공을 만들어낸다 - 존 템플턴 3.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 체스터필드 경 4. 당신이 흥미를 느끼지 않으면 어떤 것도 흥미로울 수 없다 - 존 템플턴 5. 이미 지나간 일은 지나간 것이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제32주 1. 무엇을 경험하는가에 따라 우리는 더 나아질 수도, 혹은 더 나빠질 수도 있다 - 에릭 버터워스 2. 기쁨은 어떤 사물에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다 - 존 템플턴 3. 불행도 축복이 될 수 있다 - 존 템플턴 4. 행복은 좇으면 자꾸 달아나지만 주게 되면 다시 돌아온다 - 존 템플턴 5.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실패로 가는 지름길이다 - 브라이언 아담스   제33주 1. 그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 마태복음 7장 16절 2. 낙관적인 자세는 변함없는 선량함에서 나온다 - 무명씨 3.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면 그만큼 배우기가 더 어렵다 - 존 템플턴 4. 우리가 바깥에서 찾으려 하는 기적은 실은 우리 내부에서 찾을 수 있다 - 에릭 버터워스 5. 무지의 그늘은 두려움이다 - J. 옐리네크   제34주 1. 당신은 문제의 일부가 아니면 해결책의 일부일 것이다 - 앨드리지 클리버 2. 사랑이 넘치는 사람은 사랑이 넘치는 세계에서 살아간다 - 켄 키스 3. 빚을 진 자는 빚을 준 자의 종이다 - 잠언 22장 7절 4. 당신이 무엇을 갖고 있든, 당신을 그것을 쓰거나 잃어버릴 것이다 - 헨리 포드 5.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은 멋진 일이다. 그러나 멋진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 존 템플턴    제35주 1. 절대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없다 - 존 템플턴 2. 그 사람의 진정한 인격은 아무도 볼 수 없는 데서 하는 행동에 따라 결정된다 - 노마스 맥컬리 3. 당신의 삶을 변화시키려면 당신의 마음을 바꿔야 한다 - 존 템플턴 4. 늘 해왔던 방식대로 모든 일을 하게 되면 발전과 성장은 불가능하다 - 웨인 다이어 5.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축복이다 - 사도행전 20장 35절   제36주 1. 불만을 계속 품고 있는 것은 스스로 고통을 선택하는 것이다 - 제럴드 잼폴스키 2. 일곱가지 죄악은 다음과 같다: 오만, 탐욕, 나태, 시기, 화냄, 색욕, 폭식 - 성 그레고리 3. 겉모습이 눈속임인 경우가 있다 - 이솝 4. 열의란 목표를 향해 정진하라고 촉구하는 우리 영혼 내부의 불길이다 - 찰스 필모어 5. 마음이란 낙하산과 같아 활짝 펴졌을 때에만 역할을 한다 - 딕 수펜   제37주 1. 당신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당신을 규정짓는다 - 무명씨 2. 아주 먼 여행길도 첫 걸음을 떼면서 시작된다 - 노자 3. 밤이 되어 어둠이 찾아온다 해도 세상이 끝난 것은 아니다 - 무명씨 4. 사랑은 모든 것을 이겨낸다 - 버질 5. 매일 당신이 받은 축복을 세어보라. 그러면 축복은 마치 잘 가꾼 나무처럼 몇 배로 커질 것이다 - 윌리엄 주노   제38주 1. 도전을 멈추지 않는 한 정말로 패배한 것은 아니다 - 마이크 디트카  2. 누구나 살아가는 데 필요한 또 하나의 계획을 여분으로 갖고 있다 - 존 템플턴  3. 눈앞의 길이 올바른 방향이라면 해야 할 일은 오로지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 불교 격언  4. 우리가 모르는 것은 단순히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이다 - 존 템플턴 5. 용서는 용서하는 자와 용서받는 자 모두에게 이롭다 - 존 템플턴   제39주 1. 겸손하면 발전으로 향한 문이 열리게 된다 - 존 템플턴 2. 꿈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 때 비로소 꿈은 이루어질 수 있다 - 존 템플턴 3. 일을 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 칼릴 지브란 4. 모든 결과에는 이유가 있다 - 연금술의 원칙 5. 선을 행하는 자가 성공한다 - 존 템플턴   제40주 1. 당신이 서 있는 곳이 아니라 당신이 가고자 하는 곳에 집중하라 - 존 템플턴 2. 주게 되면 돌려 받는다 - 존 템플턴 3. 감사하는 마음은 정신적인 성장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어준다 - 존 템플턴 4. 우리가 더 많은 사랑을 줄수록 우리에게는 더 많은 사랑이 남게 된다 - 존 템플턴 5. 모든 삶에는 살아갈 만한 사명이 있다 - 존 템플턴   로버트 허만 / 존 템플턴 중  
1041    詩論하면 論字만 봐도 머리가 지끈지끈... 하지만... 댓글:  조회:3629  추천:0  2015-04-20
1. 시 론  강의 목차에는 거창하게 '시론'이라고 넣어 놓았지만 막상 글을 쓰려고 하니 어렵군요. 대학에서 '시론' 하나만으로도 한 학기는 필요할 텐데 더구나 詩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사람이 어찌 이 한 강에서 시론을 논하겠습니까?  '論'자만 봐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니 여기서는 '시론' 대신에 일화(逸話) 두어 개를 가볍게 소개하면서 '시론'에 대신할까 합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들에게 심심풀이 땅콩으로 올리는 것은 아니니 가볍게 읽되, 생각은 좀 깊이 해 보십시오.  1) 일화 1  이 일화는 P.발레리의 '문학단상(文學斷想)'에 나오는 드가와 말라르메에 관한 일화입니다.  "드가는 시작(詩作)이 순조롭지 않거나, 시의 여신이 그를 저버렸거나, 그가 시의 여신을 잊고 있어 시상(詩想)이 떠오르지 않을 때면 여러 예술가들에게 달려가 불평도 털어놓고, 조언도 구하곤 했다. 그는 때로는 에레디아에게, 때로는 스테판 말라르메에게 달려갔다. 그는 자기의 고통을, 갈망을, 마침내는 자기의 무능력을 늘어놓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난 온종일 이 빌어먹을 소네트를 쓰느라고 애를 썼소. 난 이 시를 써 보려고 그림도 제쳐놓고 완전히 하루를 바쳤단 말이오. 그런데도 내가 바라던 것을 쓸 수가 없었소. 이젠 머리가 다 지끈거리오.' 한번은 그런 얘기를 말라르메에게 하고 난 후에 마침내 이런 호소까지 털어놓았다. '난 왜 내가 짧은 시 한 편을 완성할 수 없는지 알 수가 없소. 이렇게 많은 생각들이 넘칠 듯이 있는데도 말이오.' 이 말에 말라르메는 이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드가, 시를 짓는 것은 생각들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니오. 시는 말들을 가지고 만드는 것이오.' 바로 이 말 속에 위대한 교훈이 들어 있는 셈이다."  이 글 속에서 여러분들 나름대로 '위대한 교훈'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세요. 어려운 시론이 왜 따로 필요할까요?  2) 일화 2  이 일화는 '동인시화(東人詩話)'에 나오는 고려 시대의 시적(詩敵)이었던 정지상과 김부식에 관한 일화입니다.  "고려의 정지상과 김부식은 서로 시적(詩敵)이었다.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관군의 사령관이었던 김부식은 정지상도 이 난에 관련되었다 하여, 평소 시에 있어서의 숙적이었던 그를 처형해 버렸다. 그 뒤 어느 봄날 김부식은 시 한 수를 지었다. '양류천록록(楊柳千綠綠) 도화만점홍(桃花滿點紅)[버들은 일천 가지로 푸르고 복사꽃은 일만 송이로 붉구나.]' 그러자 문득 공중에서 정지상의 귀신이 나타나 김부식의 뺨을 갈기면서 호령했다. '이놈아! 버드나무가 일천 가지인지 복사꽃이 일만 송이인지를 네가 세어 보았느냐? 왜 양류록록록(楊柳綠綠綠) 도화점점홍(桃花點點紅)[버들은 실실이 푸르고 복사꽃은 송이송이 붉구나.]이라고 못 하느냐?' 했다. 나중에 김부식은 어느 절간 변소에서 정지상의 귀신에게 불알을 잡아당기어 죽었다는 일화가 있다."  별로 모양새가 좋은 일화는 아니지만 이 일화 속에서도 현명하신 여러분들께서는 아주 훌륭한 시론을 나름대로 터득하셨을 것입니다.  딱딱한 시론보다야 재미있는 일화 속에서 스스로 노력하여 얻어내는 '시론'이 훨씬 더 값지고 오래 기억되지 않을 까요?  물론 이 강의에서도 '시'의 어원부터 끄집어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들은 학자님들이나 할 일이고 우리는 생활 속에서 '시론'을 이해하도록 합시다. 그럼 여기서 호라티우스의 '시론'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음미해 보면서 '시론'은 마무리짓도록 합시다.  "시는 아름답기만 해서는 모자란다.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필요가 있고, 듣는 이의 영혼을 뜻대로 이끌어 나가야 한다."  2. 詩의 정의(定義)  '詩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人生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만큼이나 어려운 질문입니다.  누가 이 질문에 대하여 만점 답안을 제출할 수 있을까요?  따라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살고 간 선인들이 먼저 시를 쓰신 분들이 내린 그 수없이 많은 정의 중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하기사 그 정의도 정답이 될 수는 없겠지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詩에 대한 정의를 내리면서 '詩는 운율에 의한 모방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정의도 너무 광범위한 것이어서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범위를 좀더 좁혀서 내린 시의 정의를 찾아볼까요?  이 때도 시의 정의를 기능과 효용 측면, 내용과 형식의 구분 측면, 그리고 구조나 구성 과정 측면 등으로 나누어 살펴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여기서는 그것도 골치 아픈 일이니 다 그만두고, 동서양의 시인들이 내린 정의 중에서 살펴보는 것이 그래도 가장 빠른 길이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문장백과대사전'을 펼쳐보면 詩에 대한 어록만도 백여 개가 훨씬 넘어서 그것을 다 살펴볼 수는 없는 일이라, 여기서는 나의 주관적 기준에서 선택하여 여러분들에게 보여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 시는 악마의 술이다.  * 시란 美의 음악적인 창조이다.  * 나에게 있어서 시는 목적이 아니고 정열이다.  * 시는 최상의 마음의 가장 훌륭하고 행복한 순간의 기록이다. 한 편의 시란 그것이 영원한 진리로 표현된 인생의 의미이다.  * 시의 목적은 진리나 도덕을 노래하는 것은 아니다. 시는 다만 시를 위한 표현인 것이다.  * 시란 냉랭한 지식의 영역을 통과해서는 안 된다. ......시란 심중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곧바로 마음으로 통해야 한다.  * 시란 간단히 말해 가장 아름답고, 인상적이고, 다양하게, 효과적으로 사물을 진술하는 방법이다.  * 시의 언어는 필연적인 것같이 보이는 것이어야 한다.  * 시는 예술 속의 여왕이다.  * 나이 어려서 시를 쓴다는 것처럼 무의미한 것은 없다. 시는 언제까지나 끈기 있게 기다리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은 일생을 두고, 그것도 될 수만 있으면 칠십 년, 혹은 팔십 년을 두고 벌처럼 꿀과 의미를 모아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최후에 가서 서너 줄의 훌륭한 시가 씌어질 것이다.  * 시란 진리며 단순성이다. 그것은 대상에 덮여 있던 상징과 암유(暗喩)의 때를 벗겨서 대상이 눈에 보이지 않고, 비정하고 순수하게 될 정도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 시의 의미의 주된 효용은 독자의 습성을 만족시키고, 시가 그의 마음에 작용하는 동안 정신에 대해서 위안과 안정감을 주는 데 있다.  * 시는 법칙이나 교훈에 의해 완성될 수 없으며, 본질적으로 감각과 신중함에 의해 완성될 수 있다.  * 시는 보통의 이성의 한계를 지난 신성한 본능이며 비범한 영감이다.  * 시의 으뜸가는 목적은 즐거움이다.  * 시는 자기 속에 가지고 있지 못하면 아무 데에서도 찾지 못한다.  *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닌 것은 모두가 그렇듯이 시도 경탄을 강요한다.  * 빅토르 위고는 그의 전 작품을 통해서 우리에게 詩에 있어서는 직접적인 표현은 일종의 기이함이 될 수밖에 없으며, 한 작품에 그런 직접적인 표현이 범람하고 있으면 그 작품 전체의 시적 아름다움을 말살하고 말 것이라고 증명하고 있다.  * 시는 모든 지식의 숨결이자 정수(精髓)이다.  * 시는 순간의 형이상학이다. 하나의 짤막한 시편 속에서 시는 우주의 비전과 영혼의 비밀과 존재와 사물을 동시에 제공해야 한다. 시가 단순히 삶의 시간을 따라가기만 한다면 시는 삶만 못한 것이다. 시는 오로지 삶을 정지시키고 기쁨과 아픔의 변증법을 즉석에서 삶으로써만 삶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다. 그때서야 시는 가장 산만하고 가장 이완된 존재가 그의 통일을 획득하는 근원적 동시성(同時性)의 원칙이 된다.  - 시경(詩經)에 있는 삼백 편의 시는 한 마디로 말해 사악함이 없다.[詩三百 一言以蔽之曰 思無邪(시삼백 일언이폐지왈 사무사)  - 시란 정(情)을 뿌리로 하고 말을 싹으로 하며, 소리를 꽃으로 하고 의미를 열매로 한다. - 에 이르기를, '기(氣)는 싱싱한 것을 숭상하고 말은 원숙코자 하는데, 초학(初學)의 시는 기가 싱싱한 다음이라야 장년이 되어서 기가 표일(飄逸)하고, 장년의 기가 표일한 다음이라야 노년이 되어서 기가 호탕(豪宕)하여진다.' 하였다.  - 시라는 것은 사상의 표현이다. 사상이 본디 비겁하다면 제 아무리 고상한 표현을 하려 해도 이치에 맞지 않으며, 사상이 본디 협애(狹隘)하다면 제 아무리 광활한 묘사를 하려 해도 실정에 부합하지 않는다. 때문에 시를 쓰려고 할 때는 그 사상부터 단련하지 않으면 똥 무더기 속에서 깨끗한 물을 따라 내려는 것과 같아서 일생토록 애를 써도 이룩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천인 성명의 법칙을 연구하고 인심 도심의 분별을 살펴 그 때 묻은 잔재를 씻어 내고 그 깨끗한 진수를 발전시키면 된다.  -시란 곧 참이다  -시는 언제나 우리의 삶을 새로 출발하도록 고무하며 그 삶의 근원으로 되돌아가게 할 것이다.  -시란 지. 정. 의가 합일된 그 무엇을 통하여 최초의 생명의 진실한 아름다움을 영원한 순간에 직관적으로 포착하여 이를 형상화한 것이다.  - 시를 쓴다는 것은 생에 대한 불타오르는 시인의 창조적 정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대상하는 인생을 보다 더 아름답게 영위하려고 의욕하고 그것을 추구. 갈망하는 데서 제작된다면 그 시인의 한 분신(分身)이 아닐 수 없다.  - 시에 있어서의 기술이란 필경 언어 사용술을 말하는 것인데, 시상은 언어를 통하여서만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상에는 이미 거기에 해당되는 기술이 저절로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머리 안에서 언어로 형성되는 시상을 그대로 문자로 옮기면 시가 된다.  - 시 또한 짙은 안개가 아닌가. 답이 없는 세계, 답이 있을 수 없는 세계, 그 안개 같은 실재를 지금 더듬고 있는 거다.  이상에서 서른 분의 시에 대한 생각을 살펴보았는데, 너무 많이 제시했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 하나 하나가 자신의 시 창작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아주 소중한 것들이라 최대한 많이 올렸으니, 그 속에서 여러분들도 나름대로의 시에 대한 정의 즉, '시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1040    영국 시인 - 알렉산더 포프 댓글:  조회:4996  추천:1  2015-04-20
   평온한 삶   물려받은 몇 마지기 땅 외엔 더 바랄 것도 더 원할 것이 없고 제 땅에 서서 고향 공기를 들이마시며 흡족한 자는 행복한 사람   소 길러 우유 짜고 밭 갈아 빵을 얻고 양떼 길러 옷 만들고 나무에서 여름철엔 그늘을 겨울철엔 땔감을 얻네   날마다 조용히 근심걱정 모르고 매순간, 매일, 매년을 스쳐보내는 건강한 육신, 평온한 마음을 가진 자는 복 받은 사람   밤에는 편히 자고, 배우다 때로 쉬니 더불어, 상쾌한 여유로움 그 순박함은 고요한 명상과 더불어 더욱 흐뭇해지네   나 또한 이처럼 흔적 없이 이름 없이 살다 미련 남기지 않고 죽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구나 내 누운 곳 말해줄 비석조차 하나 없이 (알렉산더 포프)         알렉산더 포프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 1688년~1744년)는 영국의 시인이다.   목차    생애     생애 런던에서 출생, 12살에 척추결핵에 걸려 불구의 몸이 되었다. 아버지가 가톨릭 교도였기 때문에 정규학교에서 배우지 못하여 독학으로 고금의 시인을 탐독하고 특히 드라이든의 시풍을 경모하였으며 더 나아가 대성하여 영국 고전주의의 대표적 시인이 되었다. 고전 취미의 《전원시》(Pastorals, 1709)와 운문으로 쓴 《비평론》(An Essay on Criticism, 1711)으로 시단에서 인정을 받았다. 후자는 20세경의 작품이지만 원숙기에 발표한 (Essay on Man, 1732-1734)과 더불어 명언과 좋은 말이 풍부하여 셰익스피어, 밀턴에 이어서 가장 빈번하게 인용되는 격언적 시구를 포함하고 있다. 당시 대륙에서 유행하고 있던 모의(模擬) 영웅시라 하는 희시 《머리채 겁탈》(The Rape of the Lock, 1712) 및 《우졸우인전》(The Dunciad, 1728년)이 그의 걸작이다. 특히 전자는 경묘한 기지와 세련된 공상으로 사람을 매혹케 한다. 명번역으로 이름이 높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Iliad)와 《오디세이아》(Odyssey)는 원작이 지닌 야성적이고, 소박함을 줄이고, 궁정시인의 작품인 것과 같은 느낌을 주지만 경제적인 면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만년에는 호라티우스적인 풍자시와 서간시(書簡詩)를 주로 써서 예리하게 인생을 비평하고 시작(詩作)기교의 오묘함이 최고에 이르렀다.
1039    서로서로 혼돈하기 쉬운 명사 댓글:  조회:4824  추천:0  2015-04-20
*해학  비일상성, 상식의 파괴, 비합리성, 비정상성으로 단순한 웃음의 유발, 비공격적  (예)여느 두부 장수들은 "두부 사려오!" 라고 하거나, 그렇잖으면, "두부나 비지 사아려!"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 특색 있는 한 두부 장수는 반드시, "두-부 사아 주오!"라고 외친다. 그래서 그 외침이 들리기만 하면 아이들이 "어머니! 사주오가 가요!" 하고 두부 사기를 묻는 것이 버릇이 되다시피 하였다.[최현배의 '사주오 두부 장수' 중에서]  -두부 장수의 독특한 외침은 필자와 독자에게 가벼운 웃음을 짓게 하는 표현이다.  *풍자  부조리의 고발, 모순의 비판, 오류의 수정을 목적으로 적극적인 공격을 가함  (예)소의 뿔은 벌써 소의 무기는 아니다. 소의 뿔은 오직 안경의 재료일 따름이다. 소는 사람에게 얻어맞기로 위주니까 소에게는 무기가 필요 없다. 소의 뿔은 오직 동물학자를 위한 표지(標識)이다. 야우(野牛) 시대에는 이것으로 적을 공격한 일도 있습니다. - 하는 폐병(廢兵)의 가슴에 훈장처럼 그 추억성이 애상적이다.[이상의 '권태' 중에서]  -지나치게 순한 소의 표정에서 권태로움을 느끼고, 그 모습을 야유적(揶揄的)으로 나타낸 표현이다.  *반어  의미의 대립, 공격적, 힐난적임  (예)네가 만일 학이라면 너도 응당 이 곡조를 취하고 화하여 너의 가슴 속에 가득 답답한 설움과 한을 잠시라도 잊고 춤이라도 한 번 덩실 추는 것을 보련마는 - 아아, 차라리 너마저 죽어 없어지면 네 얼마나 행복하며 네 얼마나 구제되랴.[오상순의 '짝 잃은 거위를 곡(哭)하노라' 중에서]  -실제로 죽어 없어지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짝 읽고 구슬프게 우는 거위에 대한 연민과 동정의 마음을 나타낸 표현이다.  *역설  의미의 모순을 통한 진리성 강조, 어법의 파괴, 비공격적임  (예)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쯤 생각해 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無所有)의 역리(逆理)이니까.[법정의 '무소유' 중에서]  -물질에의 집착에서 벗어날 때, 그리고 물질을 버리고 비울 때 진정한 삶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교훈을 강조한 표현이다.  *기지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서 재빨리 발휘되는 재치  (예)낙화암에서 다시 아래로 내려가면, 의자왕의 놀이터가 있는데 여기서 다시 한 번 상류 쪽을 돌아다보면 너무도 아름다움 경치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이가 여기서 "산수여차호(山水如此好) 하죄의자왕(何罪義慈王)"이란 시 구절을 외쳤다던가? "산수가 이리 좋거니 의자왕이 무슨 죄랴. 내가 의자왕이 되었더라도 이렇게 좋은 산수 속에서 그렇게 놀기가 쉬었을 게야!" 하는 뜻이다.[이은상의 '오월의 낙화암' 중에서]  -낙화암 부근의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는 뜻으로 고사를 인용해 재치 있게 나타낸 표현이다. 
1038    김삿갓 풍자, 해학시 모음 댓글:  조회:13383  추천:1  2015-04-20
김삿갓의 시 (풍자와 해학...일화(逸話)편)  환갑 잔치  저기 앉은 저 노인은 사람 같지 않으니  아마도 하늘 위에서 내려온 신선일 테지.  여기 있는 일곱 아들은 모두 도둑놈이니  서왕모의 선도 복숭아를 훔쳐다 환갑 잔치에 바쳤네.  還甲宴 환갑연  彼坐老人不似人 疑是天上降眞仙 피좌노인불사인 의시천상강진선  其中七子皆爲盜 偸得碧桃獻壽筵 기중칠자개위도 투득벽도헌수연  *환갑 잔치집에 들린 김삿갓이 첫 구절을 읊자 자식들이 모두 화를 내다가 둘째 구절을 읊자 모두들 좋아하였다.  셋째 구절을 읊자 다시 화를 냈는데 넷째 구절을 읊자 역시 모두들 좋아하였다.  *서왕모의 선도 복숭아는 천 년에 한번 열리는 복숭아로 이것을 먹으면 장수하였다.  원생원  해 뜨자 원숭이가 언덕에 나타나고  고양이 지나가자 쥐가 다 죽네.  황혼이 되자 모기가 처마에 이르고  밤 되자 벼룩이 자리에서 쏘아대네.  元生員 원생원  日出猿生原 猫過鼠盡死 일출원생원 묘과서진사  黃昏蚊첨至 夜出蚤席射 황혼문첨지 야출조석사  *김삿갓이 북도지방의 어느 집에 갔다가 그곳에 모여 있던 마을 유지들을 놀리며 지은 시이다.  구절마다 끝의 세 글자는 원 생원(元生員), 서 진사(徐進士), 문 첨지(文僉知), 조 석사(趙碩士)의 음을 빌려 쓴 것이다.  피하기 어려운 꽃  청춘에 기생을 안으니 천금이 초개 같고  대낮에 술잔을 대하니 만사가 부질없네.  먼 하늘 날아가는 기러기는 물 따라 날기 쉽고  청산을 지나가는 나비는 꽃을 피하기 어렵네.  難避花 난피화  靑春抱妓千金開 白日當樽萬事空 청춘포기천금개 백일당준만사공  鴻飛遠天易隨水 蝶過靑山難避花 홍비원천이수수 접과청산난피화  *김삿갓이 어느 마을을 지나가는데 청년들이 기생들과 놀고 있었다.  김삿갓이 부러워하여 한자리에 끼어 술을 얻어 마신 뒤 이 시를 지어 주었다.  기생과 함께 짓다  평양 기생은 무엇에 능한가. -김삿갓  노래와 춤 다 능한 데다 시까지도 능하다오.-기생  능하고 능하다지만 별로 능한 것 없네. -김삿갓  달 밝은 한밤중에 지아비 부르는 소리에 더 능하다오. -기생  妓生合作 기생합작  金笠. 平壤妓生何所能 김립. 평양기생하소능  妓生. 能歌能舞又詩能 기생. 능가능무우시능  金笠. 能能其中別無能 김립. 능능기중별무능  妓生. 月夜三更呼夫能 기생. 월야삼경호부능  *평양감사가 잔치를 벌이면서 능할 능(能)자 운을 부르자 김삿갓이 먼저 한 구절을 짓고 기생이 이에 화답하였다.  젖 빠는 노래  시아비는 그 위를 빨고  며느리는 그 아래를 빠네.  위와 아래가 같지 않지만  그 맛은 한가지일세.  시아비는 그 둘을 빨고  며느리는 그 하나를 빠네.  하나와 둘이 같지 않지만  그 맛은 한가지일세.  시아비는 그 단 곳을 빨고  며느리는 그 신 곳을 빠네.  달고 신 것이 같지 않지만  그 맛은 한가지일세.  嚥乳章三章 연유장삼장  父嚥其上 婦嚥其下 부연기상 부연기하  上下不同 其味卽同 상하부동 기미즉동  父嚥其二 婦嚥其一 부연기이 부연기일  一二不同 其味卽同 일이부동 기미즉동  父嚥其甘 婦嚥其酸 부연기감 부연기산  甘酸不同 其味卽同 감산부동 기미즉동  *어느 선비의 집에 갔는데 그가 "우리집 며느리가 유종(乳腫)으로 젖을 앓기 때문에 젖을 좀 빨아 주어야 하겠소"라고 했다.  김삿갓이 망할 놈의 양반이 예의도 잘 지킨다고 분개하면서 이 시를 지었다.  옥구 김 진사  옥구 김 진사가  내게 돈 두 푼을 주었네.  한번 죽어 없어지면 이런 꼴 없으련만  육신이 살아 있어 평생에 한이 되네.  沃溝金進士 옥구김진사  沃溝金進士 與我二分錢 옥구김진사 여아이분전  一死都無事 平生恨有身 일사도무사 평생한유신  *김삿갓이 옥구 김 진사 집을 찾아가 하룻밤 묵기를 청하자 돈 두 푼을 주며 내쫓았다.  김삿갓이 이 시를 지어 대문에 붙이니 김 진사가 이 시를 보고 자기 집에다 재우고 친교를 맺었다.  창  십(十)자가 서로 이어지고 구(口)자가 빗겼는데  사이사이 험난한 길이 있어 파촉(巴蜀)가는 골짜기 같네.  이웃집 늙은이는 순하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지만  어린 아이는 열기 어렵다고 손가락으로 긁어대네.  窓 창  十字相連口字橫 間間棧道峽如巴 십자상연구자횡 간간잔도협여파  隣翁順熟低首入 稚子難開擧手爬 인옹순숙저수입 치자난개거수파  *눈 오는 날 김삿갓이 친구의 집을 찾아가자 친구가 일부러 문을 열어주지 않고  창(窓)이라는 제목을 내며 파촉 파(巴)와 긁을 파(爬)를 운으로 불렀다.  양반  네가 양반이면 나도 양반이다.  양반이 양반을 몰라보니 양반은 무슨 놈의 양반.  조선에서 세 가지 성만이 그중 양반인데  김해 김씨가 한 나라에서도 으뜸 양반이지.  천 리를 찾아왔으니 이 달 손님 양반이고  팔자가 좋으니 금시 부자 양반이지만  부자 양반을 보니 진짜 양반을 싫어해  손님 양반이 주인 양반을 알 만하구나.  兩班論 양반론  彼兩班此兩班 班不知班何班 피양반차양반 반부지반하반  朝鮮三姓其中班 駕洛一邦在上班 조선삼성기중반 가락일방재상반  來千里此月客班 好八字今時富班 내천리차월객반 호팔자금시부반  觀其爾班厭眞班 客班可知主人班 관기이반염진반 객반가지주인반  *김삿갓이 어느 양반 집에 갔더니 양반입네 거드럼을 피우며 족보를 따져 물었다.  집안 내력을 밝힐 수 없는 삿갓으로서는 기분이 상할 수 밖에. 주인 양반이 대접을 받으려면 행실이 양반다워야 하는데  먼 길 찾아온 손님을 박대하니 그 따위가 무슨 양반이냐고 놀리고 있다.  서당 욕설시  서당을 일찍부터 알고 와보니  방 안에 모두 귀한 분들일세.  생도는 모두 열 명도 못 되고  선생은 와서 뵙지도 않네.  辱說某書堂 욕설모서당  書堂乃早知 房中皆尊物 서당내조지 방중개존물  生徒諸未十 先生來不謁 생도제미십 선생내불알  *추운 겨울날 서당에 찾아가 재워주기를 청하나 훈장은 미친 개 취급하며 내쫓는다.  인정없는 훈장을 욕하는 시. 소리나는대로 읽어야 제 맛이 난다     김삿갓 해학시 모음       詠笠 (영립)  浮浮我笠等虛舟 一着平生四十秋 부부아립등허주 일착평생사십추  牧堅輕裝隨野犢 漁翁本色伴沙鷗 목수경장수야독 어옹본색반사구  醉來脫掛看花樹 興到携登翫月樓 취래탈괘간화수 흥도휴등완월루  俗子依冠皆外飾 滿天風雨獨無愁 속자의관개외식 만천풍우독무수    내삿갓  가뿐한 내 삿갓이 빈 배와 같아  한번 썼다가 사십 년 평생 쓰게 되었네.  목동은 가벼운 삿갓 차림으로 소 먹이러 나가고  어부는 갈매기 따라 삿갓으로 본색을 나타냈지.  취하면 벗어서 구경하던 꽃나무에 걸고  흥겨우면 들고서 다락에 올라 달 구경하네.  속인들의 의관은 모두 겉치장이지만  하늘 가득 비바람쳐도 나만은 걱정이 없네.  자신의 조부를 탄핵하고 시작한 방랑 생활. 언제나 벗이 되어 주며 비바람에도 몸을 보호해 주는 삿갓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했다.  그리해서 '병연'은 그 이름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이때부터 이 시인은 '병연'이란 이름을 스스로 숨기고 잊어 버렸다.  그리고 삿갓을 쓴 이름없는 시인이 되었다.... 그가 읊은 자신의 '삿갓'시는 표연자적하는 자연과 풍류 속의 자기 운명을 그린 자화상이었다.   自嘆 (자탄)  嗟乎天地間男兒 知我平生者有誰 차호천지간남아 지아평생자유수  萍水三千里浪跡 琴書四十年虛詞 평수삼천리랑적 금서사십년허사  靑雲難力致非願 白髮惟公道不悲 청운난력치비원 백발유공도불비  驚罷還鄕夢起坐 三更越鳥聲南枝 경파환향몽기좌 삼경월조성남지   스스로 탄식하다  슬프다 천지간 남자들이여  내 평생을 알아줄 자가 누가 있으랴.  부평초 물결 따라 삼천리 자취가 어지럽고  거문고와 책으로 보낸 사십 년도 모두가 헛것일세.  청운은 힘으로 이루기 어려워 바라지 않았거니와  백발도 정한 이치이니 슬퍼하지 않으리라.  고향길 가던 꿈꾸다 놀라서 깨어 앉으니  삼경에 남쪽 지방 새 울음만 남쪽 가지에서 들리네.  월조(越鳥)는 남쪽 지방의 새인데 다른 지방에 가서도 고향을 그리며 남쪽 가지에 앉는다고 한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내는 말로 쓰였다.   竹詩 (죽시)  此竹彼竹化去竹 風打之竹浪打竹 차죽피죽화거죽 풍타지죽랑타죽  飯飯粥粥生此竹 是是非非付彼竹 반반죽죽생차죽 시시비비부피죽  賓客接待家勢竹 市井賣買歲月竹 빈객접대가세죽 시정매매세월죽  萬事不如吾心竹 然然然世過然竹 만사불여오심죽 연연연세과연죽   대나무 시  이대로 저대로 되어 가는 대로 바람치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이대로 살아가고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고, 저대로 맡기리라.  손님 접대는 집안 형세대로 시장에서 사고 팔기는 세월대로  만사를 내 마음대로 하는 것만 못하니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지나세.  한자의 훈(訓)을 빌어 절묘한 표현을 하였다.  此 이 차, 竹 대나무 죽 : 이대로  彼 저 피, 竹 : 저대로  化 화할 화(되다), 去 갈 거, 竹 : 되어 가는 대로  風 바람 풍, 打 칠 타, 竹 : 바람치는 대로  浪 물결 랑, 打 竹 : 물결치는 대로 二十樹下 (이십수하)  二十樹下三十客 四十家中五十食 이십수하삼십객 사십가중오십식  人間豈有七十事 不如歸家三十食 인간개유칠십사 불여귀가삼십식   스무나무 아래  스무나무 아래 서른 나그네가 마흔 집안에서 쉰 밥을 먹네.  인간 세상에 어찌 일흔 일이 있으랴.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 서른 밥을 먹으리라.  二十樹 : 스무나무는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나무 이름  三十客 : 三十은 '서른'이니 '서러운'의 뜻. 서러운 나그네.  四十家 : 四十은 '마흔'이니 '망할'의 뜻. 망할 놈의 집.  五十食 : 五十은 '쉰'이니 '쉰(상한)'의 뜻. 쉰 밥.  七十事 : 七十은 '일흔'이니 '이런'의 뜻. 이런 일.  三十食 : 三十은 '서른'이니 '선(未熟)'의 뜻. 설익은 밥.  함경도 지방의 어느 부잣집에서 냉대를 받고 나그네의 설움을 한문 수자 새김을 이용하여 표현한 시이다.  스무나무 아래 서러운 나그네가  망할 놈의 집안에서 쉰 밥을 먹네.  인간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으랴.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 선 밥을 먹으리라.   無題 (무제)  四脚松盤粥一器 天光雲影共排徊 사각송반죽일기 천광운영공배회  主人莫道無顔色 吾愛靑山倒水來 주인막도무안색 오애청산도수래   죽 한 그릇  네 다리 소반 위에 멀건 죽 한 그릇.  하늘에 뜬 구름 그림자가 그 속에서 함께 떠도네.  주인이여, 면목이 없다고 말하지 마오.  물 속에 비치는 청산을 내 좋아한다오.   산골의 가난한 농부 집에 하룻밤을 묵었다. 가진 것 없는 주인의 저녁 끼니는 멀건 죽.  죽 밖에 대접할 것이 없어 미안해하는 주인에게 시 한 수를 지어 주지만 글 모르는 그에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風俗薄 (풍속박)  斜陽鼓立兩柴扉 三被主人手却揮 사양고립양시비 삼피주인수각휘  杜宇亦知風俗薄 隔林啼送不如歸 두우역지풍속박 격림제송불여귀   야박한 풍속  석양에 사립문 두드리며 멋쩍게 서있는데  집 주인이 세 번씩이나 손 내저어 물리치네.  저 두견새도 야박한 풍속을 알았는지  돌아가는 게 낫다고 숲속에서 울며 배웅하네.   難貧 (난빈)  地上有仙仙見富 人間無罪罪有貧 지상유선선견부 인간무죄죄유빈  莫道貧富別有種 貧者還富富還貧 막도빈부별유종 빈자환부부환빈   가난이 죄  지상에 신선이 있으니 부자가 신선일세.  인간에겐 죄가 없으니 가난이 죄일세.  가난뱅이와 부자가 따로 있다고 말하지 말게나.  가난뱅이도 부자되고 부자도 가난해진다오.   姜座首逐客詩 (강좌수축객시)  祠堂洞裡問祠堂 輔國大匡姓氏姜 사당동리문사당 보국대광성씨강  先祖遺風依北佛 子孫愚流學西羌 선조유풍의북불 자손우류학서강  主窺첨下低冠角 客立門前嘆夕陽 주규첨하저관각 객립문전탄석양  座首別監分外事 騎兵步卒可當當 좌수별감분외사 기병보졸가당당   강좌수가 나그네를 쫓다  사당동 안에서 사당을 물으니 보국대광 강씨 집안이라네.  선조의 유풍은 북쪽 부처에게 귀의했건만  자손들은 어리석어 서쪽 오랑캐 글을 배우네.  주인은 처마 아래서 갓을 숙이며 엿보고  나그네는 문 앞에 서서 지는 해를 보며 탄식하네.  좌수 별감이 네게는 분에 넘치는 일이니 기병 보졸 따위나 마땅하리라.  김삿갓을 내쫓은 주인은 나그네가 갔나 안 갔나 확인하려고 갓을 숙이고 엿보는데 김삿갓은 문 앞에 서서 인심 고약한 주인을 풍자하고 있다.   開城人逐客詩 개성인축객시  邑號開城何閉門 山名松嶽豈無薪 읍호개성하폐문 산명송악개무신  黃昏逐客非人事 禮義東方子獨秦 황혼축객비인사 예의동방자독진   개성 사람이 나그네를 내쫓다  고을 이름이 개성인데 왜 문을 닫나  산 이름이 송악인데 어찌 땔나무가 없으랴.  황혼에 나그네 쫓는 일이 사람 도리 아니니  동방예의지국에서 자네 혼자 되놈일세.     逢雨宿村家 (봉우숙촌가) 曲木爲椽첨着塵 其間如斗僅容身 곡목위연첨착진 기간여두근용신  平生不欲長腰屈 此夜難謀一脚伸 평생불욕장요굴 차야난모일각신  鼠穴煙通渾似漆 봉窓茅隔亦無晨 서혈연통혼사칠 봉창모격역무신  雖然免得衣冠濕 臨別慇懃謝主人 수연면득의관습 임별은근사주인   비를 만나 시골집에서 자다  굽은 나무로 서까래 만들고 처마에 먼지가 쌓였지만  그 가운데가 말만해서 겨우 몸을 들였네.  평생 동안 긴 허리를 굽히려 안했지만  이 밤에는 다리 하나도 펴기가 어렵구나.  쥐구멍으로 연기가 들어와 옻칠한 듯 검어진 데다  봉창은 또 얼마나 어두운지 날 밝는 것도 몰랐네.  그래도 하룻밤 옷 적시기는 면했으니  떠나면서 은근히 주인에게 고마워 했네.  어느 시골집에서 비를 피하며 지은 것으로 궁벽한 촌가의 정경과 선비로서의 기개가 엿보이는 시이다.  누추하지만 나그네에게 비를 피할 수 있도록 베풀어 준 주인의 따뜻한 마음에 감사하면서 세속에 굽히지 않으려는 의지를 볼 수 있다.     艱飮野店 (간음야점)  千里行裝付一柯 餘錢七葉尙云多 천리행장부일가 여전칠엽상운다  囊中戒爾深深在 野店斜陽見酒何 낭중계이심심재 야점사양견주하   주막에서  천릿길을 지팡이 하나에 맡겼으니  남은 엽전 일곱 푼도 오히려 많아라.  주머니 속 깊이 있으라고 다짐했건만  석양 주막에서 술을 보았으니 내 어찌하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떠돌아 다니는 나그네 길, 어쩌다 생긴 옆전 일곱닢이 전부지만 저녁놀이 붉게 타는 어스름에  술 한 잔으로 허기를 채우며 피곤한 몸을 쉬어가는 나그네의 모습.     失題 (실제)  許多韻字何呼覓 彼覓有難況此覓 허다운자하호멱 피멱유난황차멱  一夜宿寢懸於覓 山村訓長但知覓 일야숙침현어멱 산촌훈장단지멱  제목을 잃어 버린 시  수많은 운자 가운데 하필이면 '멱'자를 부르나.  그 '멱'자도 어려웠는데 또 '멱'자를 부르다니.  하룻밤 잠자리가 '멱'자에 달려 있는데  산골 훈장은 오직 '멱'자만 아네.  김삿갓이 어느 산골 서당에 가서 하룻밤 재워 달라고 하니 훈장이 시를 지으면 재워 주겠다고 하면서  시를 짓기 어려운 '멱'(覓)자 운을 네 번이나 불렀다. 이에 훈장을 풍자하며 재치있게 네 구절 다 읊었다.    宿農家 (숙농가)  終日緣溪不見人 幸尋斗屋半江濱 종일연계불견인 행심두옥반강빈  門塗女와元年紙 房掃天皇甲子塵 문도여와원년지 방소천황갑자진  光黑器皿虞陶出 色紅麥飯漢倉陳 광흑기명우도출 색홍맥반한창진  平明謝主登前途 若思經宵口味幸 평명사주등전도 약사경소구미행  농가에서 자다  골짜기 따라 종일 가도 사람을 못 보다가  다행히도 오두막집을 강가에서 찾았네.  문을 바른 종이는 여와 시절 그대로고  방을 쓸었더니 천황씨 갑자년 먼지일세.  거무튀튀한 그릇들은 순임금이 구워냈고  불그레한 보리밥은 한나라 창고에서 묵은 것일세.  날이 밝아 주인에게 사례하고 길을 나섰지만  지난밤 겪은 일을 생각하면 입맛이 쓰구나.  여와는 중국 전설에 나오는 천지를 만들었다는 인물, 천황씨는 전설에 나오는 고대 중국 임금.   過安樂見오 (과안락견오 ) 安樂城中欲暮天 關西孺子聳詩肩 안락성중욕모천 관서유자용시견  村風厭客遲炊飯 店俗慣人但索錢 촌풍염객지취반 점속관인단색전  虛腹曳雷頻有響 破窓透冷更無穿 허복예뢰빈유향 파창투냉갱무천  朝來一吸江山氣 試向人間벽穀仙 조래일흡강산기 시향인간벽곡선  안락성을 지나다가 배척받고  안락성 안에 날이 저무는데  관서지방 못난 것들이 시 짓는다고 우쭐대네.  마을 인심이 나그네를 싫어해 밥 짓기는 미루면서  주막 풍속도 야박해 돈부터 달라네.  빈 배에선 자주 천둥 소리가 들리는데  뚫릴 대로 뚫린 창문으로 냉기만 스며드네.  아침이 되어서야 강산의 정기를 한번 마셨으니  인간 세상에서 벽곡의 신선이 되려 시험하는가.  벽곡은 신선이 되기 위해 곡식을 먹지 않고 수련하는 방법.  안락성에서 안락하지 않게 밤을 지냈음을 풍자했다.     自詠 (자영)  寒松孤店裡 高臥別區人 한송고점리 고와별구인  近峽雲同樂 臨溪鳥與隣 근협운동락 임계조여린  치銖寧荒志 詩酒自娛身 치수영황지 시주자오신  得月卽帶憶 悠悠甘夢頻 득월즉대억 유유감몽빈  스스로 읊다  겨울 소나무 외로운 주막에  한가롭게 누웠으니 별세상 사람일세.  산골짝 가까이 구름과 같이 노닐고  개울가에서 산새와 이웃하네.  하찮은 세상 일로 어찌 내 뜻을 거칠게 하랴.  시와 술로써 내 몸을 즐겁게 하리라.  달이 뜨면 옛생각도 하며  유유히 단꿈을 자주 꾸리라.  세속에 물들지 않고 시와 술로 근심을 잊으며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풍류객의 모습을 그렸다.   思鄕 (사향)  西行己過十三州 此地猶然惜去留 서행기과십삼주 차지유연석거유  雨雪家鄕人五夜 山河逆旅世千秋 우운가향인오야 산하역려세천추  莫將悲慨談靑史 須向英豪問白頭 막장비개담청사 수향영호문백두  玉館孤燈應送歲 夢中能作故園遊 옥관고등응송세 몽중능작고원유  고향 생각  서쪽으로 이미 열세 고을을 지나왔건만  이곳에서는 떠나기 아쉬워 머뭇거리네.  아득한 고향을 한밤중에 생각하니  천지 산하가 천추의 나그네길일세.  지난 역사를 이야기하며 비분강개하지 마세.  영웅 호걸들도 다 백발이 되었네.  여관의 외로운 등불 아래서 또 한 해를 보내며  꿈 속에서나 고향 동산에 노닐어 보네.  오야(五夜)는 오경(五更)으로 오전 3시부터 5시 까지이다.     卽吟 (즉음)  坐似枯禪反愧髥 風流今夜不多兼 좌사고선반괴염 풍류금야부다겸  燈魂寂寞家千里 月事肅條客一첨 등혼적막가천리 월사숙조객일첨  紙貴淸詩歸板粉 肴貧濁酒用盤鹽 지귀청시귀판분 효빈탁주용반염  瓊거亦是黃金販 莫作於陵意太廉 경거역시황금판 막작어릉의태염  즉흥적으로 읊다  내 앉은 모습이 선승 같으니 수염이 부끄러운데  오늘 밤에는 풍류도 겸하지 못했네.  등불 적막하고 고향집은 천 리인데  달빛마저 쓸쓸해 나그네 혼자 처마를 보네.  종이도 귀해 분판에 시 한 수 써놓고  소금을 안주 삼아 막걸리 한 잔 마시네.  요즘은 시도 돈 받고 파는 세상이니  오릉땅 진중자의 청렴만을 내세우지는 않으리라.   진중자(陳仲子)는 제나라 오릉(於陵)에 살았던 청렴한 선비.     自顧偶吟 (자고우음)  笑仰蒼穹坐可超 回思世路更초초 소앙창궁좌가초 회사세로경초초  居貧每受家人謫 亂飮多逢市女嘲 거빈매수가인적 난음다봉시녀조  萬事付看花散日 一生占得月明宵 만사부간화산일 일생점득월명소  也應身業斯而已 漸覺靑雲分外遙 야응신업사이이 점각청운분외요  나를 돌아보며 우연히 짓다  푸른 하늘 웃으며 쳐다보니 마음이 편안하건만  세상길 돌이켜 생각하면 다시금 아득해지네.  가난하게 산다고 집사람에게 핀잔 받고  제멋대로 술 마신다고 시중 여인들에게 놀림 받네.  세상만사를 흩어지는 꽃같이 여기고  일생을 밝은 달과 벗하여 살자고 했지.  내게 주어진 팔자가 이것뿐이니  청운이 분수밖에 있음을 차츰 깨닫겠네  세속의 번잡스러움에서 벗어나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며 지내는 자신의 생활을 감회에 젖어 읊은 시이다.     是是非非詩 시시비비시  年年年去無窮去 日日日來不盡來 년년년거무궁거 일일일래부진래  年去月來來又去 天時人事此中催 년거월래래우거 천시인사차중최  시시비비  이 해 저 해 해가 가고 끝없이 가네.  이 날 저 날 날은 오고 끝없이 오네.  해가 가고 날이 와서 왔다가는 또 가니  천시(天時)와 인사(人事)가 이 가운데 이뤄지네.  옳은 것 옳다 하고 그른 것 그르다 함이 꼭 옳진 않고  그른 것 옳다 하고 옳은 것 그르다 해도 옳지 않은 건 아닐세.  그른 것 옳다 하고 옳은 것 그르다 함, 이것이 그른 것은 아니고  옳은 것 옳다 하고 그른 것 그르다 함, 이것이 시비일세.     蘭皐平生詩 (난고평생시)  鳥巢獸穴皆有居 顧我平生獨自傷 조소수혈개유거 고아평생독자상  芒鞋竹杖路千里 水性雲心家四方 망혜죽장로천리 수성운심가사방  尤人不可怨天難 歲暮悲懷餘寸腸 우인불가원천난 세모비회여촌장  初年自謂得樂地 漢北知吾生長鄕 초년자위득락지 한북지오생장향  簪纓先世富貴人 花柳長安名勝庄 잠영선세부귀인 화류장안명승장  隣人也賀弄璋慶 早晩前期冠蓋場 인인야하농장경 조만전기관개장  髮毛稍長命漸奇 灰劫殘門飜海桑 발모초장명점기 회겁잔문번해상  依無親戚世情薄 哭盡爺孃家事荒 의무친척세정박 곡진야양가사황  終南曉鍾一納履 風土東邦心細量 종남효종일납리 풍토동방심세양  心猶異域首丘狐 勢亦窮途觸藩羊 심유이역수구호 세역궁도촉번양  南州從古過客多 轉蓬浮萍經幾霜 남주종고과객다 전봉부평경기상  搖頭行勢豈本習 口圖生惟所長 요두행세기본습 구도생유소장  光陰漸向此中失 三角靑山何渺茫 광음점향차중실 삼각청산하묘망  江山乞號慣千門 風月行裝空一囊 강산걸호관천문 풍월행장공일낭  千金之子萬石君 厚薄家風均試嘗 천금지자만석군 후박가풍균시상  身窮每遇俗眼白 歲去偏傷빈髮蒼 신궁매우속안백 세거편상빈발창  歸兮亦難佇亦難 幾日彷徨中路傍 귀혜역난저역난 기일방황중로방  난고평생시  새도 둥지가 있고 짐승도 굴이 있건만  내 평생을 돌아보니 너무나 가슴 아파라.  짚신에 대지팡이로 천 리 길 다니며  물처럼 구름처럼 사방을 내 집으로 여겼지.  남을 탓할 수도 없고 하늘을 원망할 수도 없어  섣달 그믐엔 서글픈 마음이 가슴에 넘쳤지.  초년엔 즐거운 세상 만났다 생각하고  한양이 내 생장한 고향인 줄 알았지.  집안은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렸고  꽃 피는 장안 명승지에 집이 있었지.  이웃 사람들이 아들 낳았다 축하하고  조만간 출세하기를 기대했었지.  머리가 차츰 자라며 팔자가 기박해져  뽕나무밭이 변해 바다가 되더니,  의지할 친척도 없이 세상 인심 박해지고  부모 상까지 마치자 집안이 쓸쓸해졌네.  남산 새벽 종소리 들으며 신끈을 맨 뒤에  동방 풍토를 돌아다니며 시름으로 가득 찼네.  마음은 아직 타향에서 고향 그리는 여우 같건만  울타리에 뿔 박은 양처럼 형세가 궁박해졌네.  남녘 지방은 옛부터 나그네가 많았다지만  부평초처럼 떠도는 신세가 몇 년이나 되었던가.  머리 굽실거리는 행세가 어찌 내 본래 버릇이랴만  입 놀리며 살 길 찾는 솜씨만 가득 늘었네.  이 가운데 세월을 차츰 잊어 버려  삼각산 푸른 모습이 아득하기만 해라.  강산 떠돌며 구걸한 집이 천만이나 되었건만  풍월시인 행장은 빈 자루 하나뿐일세.  천금 자제와 만석군 부자  후하고 박한 가풍을 고루 맛보았지.  신세가 궁박해져 늘 백안시 당하고  세월이 갈수록 머리 희어져 가슴 아프네.  돌아갈래도 어렵지만 그만둘래도 어려워  중도에 서서 며칠 동안 방황하네.  난고는 김삿갓의 호이다.     多睡婦 (다수부)  西隣愚婦睡方濃 不識蠶工況也農 서린우부수방농 부식잠공황야농  機閑尺布三朝織 杵倦升粮半日春 기한척포삼조직 저권승량반일춘  弟衣秋盡獨稱搗 姑襪冬過每語縫 제의추진독칭도 고말동과매어봉  蓬髮垢面形如鬼 偕老家中却恨逢 봉발구면형여귀 해로가중각한봉  잠 많은 아낙네  이웃집 어리석은 아낙네는 낮잠만 즐기네.  누에치기도 모르니 농사짓기를 어찌 알랴.  베틀은 늘 한가해 베 한 자에 사흘 걸리고  절구질도 게을러 반나절에 피 한 되 찧네.  시아우 옷은 가을이 다 가도록 말로만 다듬질하고  시어미 버선 깁는다고 말로만 바느질하며 겨울 넘기네.  헝클어진 머리에 때 낀 얼굴이 꼭 귀신 같아  같이 사는 식구들이 잘못 만났다 한탄하네.   懶婦 (나부)  無病無憂洗浴稀 十年猶着嫁時衣 무병무우세욕희 십년유착가시의  乳連褓兒謀午睡 手拾裙蝨愛첨暉 유연보아모오수 수습군슬애첨휘  動身便碎廚中器 搔首愁看壁上機 동신변쇄주중기 소수수간벽상기  忽聞隣家神賽慰 柴門半掩走如飛 홀문인가신새위 시문반엄주여비  게으른 아낙네  병 없고 걱정 없는데 목욕도 자주 안해  십 년을 그대로 시집 올 때 옷을 입네.  강보의 아기가 젖 물린 채로 낮잠이 들자  이 잡으려 치마 걷어 들고 햇볕 드는 처마로 나왔네.  부엌에서 움직였다하면 그릇을 깨고  베틀 바라보면 시름겹게 머리만 긁어대네.  그러다가 이웃집에서 굿한다는 소문만 들으면  사립문 반쯤 닫고 나는 듯 달려가네.   喪配自輓 (상배자만)  遇何晩也別何催 未卜其欣只卜哀 우하만야별하최 미복기흔지복애  祭酒惟餘醮日釀 襲衣仍用嫁時裁 제주유여초일양 습의잉용가시재  窓前舊種少桃發 簾外新巢雙燕來 창전구종소도발 염외신소쌍연래  賢否卽從妻母問 其言吾女德兼才 현부즉종처모문 기언오녀덕병재  아내를 장사지내고  만나기는 왜 그리 늦은데다 헤어지기는 왜 그리 빠른지  기쁨을 맛보기 전에 슬픔부터 맛보았네.  제삿술은 아직도 초례 때 빚은 것이 남았고  염습옷은 시집 올 때 지은 옷 그대로 썼네.  창 앞에 심은 복숭아 나무엔 꽃이 피었고  주렴 밖 새 둥지엔 제비 한 쌍이 날아 왔는데  그대 심성도 알지 못해 장모님께 물으니  내 딸은 재덕을 겸비했다고 말씀하시네.  시집 온 지 얼마 안 되는 아내의 상을 당한 남편을 대신하여 지은 시이다.  아내가 떠난 집에 제비가 찾아오고 복숭아 꽃이 피니, 아내를 그리는 정이 더욱 간절해짐을 표현했다.   贈妓 (증기)  却把難同調 還爲一席親 각파난동조 환위일석친  酒仙交市隱 女俠是文人 주선교시은 여협시문인  太半衿期合 成三意態新 태반금기합 성삼의태신  相携東郭月 醉倒落梅春 상휴동곽월 취도락매춘  기생에게 지어 주다  처음 만났을 때는 어울리기 어렵더니  이제는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되었네.  주선(酒仙)이 시은(市隱)과 사귀는데  이 여협객은 문장가일세.  정을 통하려는 뜻이 거의 합해지자  달그림자까지 합해서 세 모습이 새로워라.  서로 손 잡고 달빛 따라 동쪽 성곽을 거닐다가  매화꽃 떨어지듯 취해서 쓰러지네.  주선(酒仙)은 술을 즐기는 김삿갓 자신.  시은(市隱)은 도회지에 살면서도 은자같이 지내는 사람.  이백(李白)의 시 '월하독작'(月下獨酌)에 "擧杯邀明月 對影成三人"이라고 하여  달, 자신, 자신의 그림자가 모여 셋이 되었다는 구절이 있다.  술을 좋아하는 시객(詩客)이 아름다운 기녀와 대작을 하며 시로 화답하고 봄 밤의 취흥을 즐기는 풍류시이다.     老吟 (노음)  五福誰云一曰壽 堯言多辱知如神 오복수운일왈수 요언다욕지여신  舊交皆是歸山客 新少無端隔世人 구교개시귀산객 신소무단격세인  筋力衰耗聲似痛 胃腸虛乏味思珍 근력쇠모성사통 위장허핍미사진  內情不識看兒苦 謂我浪遊抱送頻 내정부식간아고 위아랑유포송빈  늙은이가 읊다  오복 가운데 수(壽)가 으뜸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오래 사는 것도 욕이라고 한 요임금 말이 귀신 같네.  옛친구들은 모두 다 황천으로 가고  젊은이들은 낯설어 세상과 멀어졌네.  근력이 다 떨어져 앓는 소리만 나오고  위장이 허해져 맛있는 것만 생각나네.  애 보기가 얼마나 괴로운 줄도 모르고  내가 그냥 논다고 아이를 자주 맡기네.  요임금이 말하기를 아들이 많으면 근심이 많아지고 부귀하면 일이 많으며 장수하면 욕된 일이 많아 진다고 했다.  오복(五福)의 첫째는 장수(長壽)라 하나 늙으면 버림 받고 외로워지니 요임금이 이를 알고 長壽는 多辱이라 했다.     老人自嘲 (노인자조)  八十年加又四年 非人非鬼亦非仙 팔십년가우사년 비인비귀역비선  脚無筋力行常蹶 眼乏精神坐輒眠 각무근력행상궐 안핍정신좌첩면  思慮語言皆妄녕 猶將一縷線線氣 사려어언개망녕 유장일루선선기  悲哀歡樂總茫然 時閱黃庭內景篇 비애환락총망연 시열황정내경편  노인이 스스로 놀리다  여든 나이에다 또 네 살을 더해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데 신선은 더욱 아닐세.  다리에 근력이 없어 걸핏하면 넘어지고  눈에도 정기가 없어 앉았다 하면 조네.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모두가 망령인데  한 줄기 숨소리가 목숨을 이어가네.  희로애락 모든 감정이 아득키만 한데  이따금 황정경 내경편을 읽어보네.  김삿갓이 노인의 청을 받아 지은 것으로, 기력이 쇠해서 근근히 살아가면서도  도가(道家)의 경전을 읽으며 허무에 심취한 것을 읊었다.   嘲幼冠者 (조유관자)  畏鳶身勢隱冠蓋 何人咳嗽吐棗仁 외연신세은관개 하인해수토조인  若似每人皆如此 一腹可生五六人 약사매인개여차 일복가생오륙인  갓 쓴 어린아이를 놀리다  솔개 보고도 무서워할 놈이 갓 아래 숨었는데  누군가 기침하다가 토해낸 대추씨 같구나.  사람마다 모두들 이렇게 작다면  한 배에서 대여섯 명은 나올 수 있을 테지.  어린 꼬마 신랑이 갓을 쓰고 다님을 조롱했다.  솔개를 무서워할 나이에 몸을 가릴 만큼 큰 갓을 쓰고 몸집은 대추씨처럼 작은데 벌써 새신랑이 되었음을 표현했다.     嘲年長冠者 (조연장관자)  方冠長竹兩班兒 新買鄒書大讀之 방관장죽양반아 신매추서대독지  白晝후孫初出袋 黃昏蛙子亂鳴池 백주후손초출대 황혼와자난명지  갓 쓴 어른을 놀리다  갓 쓰고 담뱃대 문 양반 아이가  새로 사온 맹자 책을 크게 읽는데  대낮에 원숭이 새끼가 이제 막 태어난 듯하고  황혼녘에 개구리가 못에서 어지럽게 우는 듯하네.   訓戒訓長 (훈계훈장)  化外頑氓怪習餘 文章大塊不平噓 화외완맹괴습여 문장대괴불평허  여盃測海難爲水 牛耳誦經豈悟書 여배측해난위수 우이송경기오서  含黍山間奸鼠爾 凌雲筆下躍龍余 함서산간간서이 능운필하약용여  罪當笞死姑舍己 敢向尊前語詰거 죄당태사고사기 감향존전어힐거  훈장을 훈계하다  두메산골 완고한 백성이 괴팍한 버릇 있어  문장대가들에게 온갖 불평을 떠벌리네.  종지 그릇으로 바닷물을 담으면 물이라 할 수 없으니  소 귀에 경 읽기인데 어찌 글을 깨달으랴.  너는 산골 쥐새끼라서 기장이나 먹지만  나는 날아 오르는 용이라서 붓끝으로 구름을 일으키네.  네 잘못이 매 맞아 죽을 죄이지만 잠시 용서하노니  다시는 어른 앞에서 버릇없이 말장난 말라.  김삿갓이 강원도 어느 서당을 찾아가니 마침 훈장은 학동들에게 고대의 문장을 강의하고 있는데 주제넘게도 그 문장을 천시하는 말을 하고 김삿갓을 보자 멸시를 하는것이었다. 이에 훈장의 허세를 꼬집는 시를지었다.     訓長 (훈장)  世上誰云訓長好 無烟心火自然生 세상수운훈장호 무연심화자연생  曰天曰地靑春去 云賦云詩白髮成 왈천왈지청춘거 운부운시백발성  雖誠難聞稱道賢 暫離易得是非聲 수성난문칭도현 잠리이득시비성  掌中寶玉千金子 請囑撻刑是眞情 장중보옥천금자 청촉달형시진정  훈장  세상에서 누가 훈장이 좋다고 했나.  연기없는 심화가 저절로 나네.  하늘 천 따 지 하다가 청춘이 지나가고  시와 문장을 논하다가 백발이 되었네.  지성껏 가르쳐도 칭찬 듣기 어려운데  잠시라도 자리를 뜨면 시비를 듣기 쉽네.  장중보옥 천금 같은 자식을 맡겨 놓고  매질해서 가르쳐 달라는 게 부모의 참마음일세.  김삿갓은 방랑 도중 훈장 경험을 하기도 했는데 훈장에 대한 그의 감정은 호의적이지 못해서  얄팍한 지식으로 식자(識者)인 체하는 훈장을 조롱하는 시가 여럿있다.     嘲山村學長 (조산촌학장)  山村學長太多威 高着塵冠揷唾排 산촌학장태다위 고착진관삽타배  大讀天皇高弟子 尊稱風憲好明주 대독천황고제자 존칭풍헌호명주  每逢兀字憑衰眼 輒到巡杯籍白鬚 매봉올자빙쇠안 첩도순배적백수  一飯횡堂生色語 今年過客盡楊州 일반횡당생색어 금년과객진양주  산골 훈장을 놀리다  산골 훈장이 너무나 위엄이 많아  낡은 갓 높이 쓰고 가래침을 내뱉네.  천황을 읽는 놈이 가장 높은 제자고  풍헌이라고 불러 주는 그런 친구도 있네.  모르는 글자 만나면 눈 어둡다 핑계대고  술잔 돌릴 땐 백발 빙자하며 잔 먼저 받네.  밥 한 그릇 내주고 빈 집에서 생색내는 말이  올해 나그네는 모두가 서울 사람이라 하네.  풍헌(風憲)은 조선 시대 향직(鄕職)의 하나.     可憐妓詩 (가련기시)  可憐行色可憐身 可憐門前訪可憐 가련행색가련신 가련문전방가련  可憐此意傳可憐 可憐能知可憐心 가련차의전가련 가련능지가련심  기생 가련에게  가련한 행색의 가련한 몸이  가련의 문 앞에 가련을 찾아왔네.  가련한 이 내 뜻을 가련에게 전하면  가련이 이 가련한 마음을 알아주겠지.  김삿갓은 함경도 단천에서 한 선비의 호의로 서당을 차리고 3년여를 머무는데 가련은 이 때 만난 기생의 딸이다.  그의 나이 스물 셋. 힘든 방랑길에서 모처럼 갖게 되는 안정된 생활과 아름다운 젊은 여인과의 사랑...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그의 방랑벽은 막을 수 없었으니 다시 삿갓을 쓰고 정처없는 나그네 길을 떠난다.     離別 (이별)  可憐門前別可憐 可憐行客尤可憐 가련문전별가련 가련행객우가련  可憐莫惜可憐去 可憐不忘歸可憐 가련막석가련거 가련불망귀가련  이별  가련의 문 앞에서 가련과 이별하려니  가련한 나그네의 행색이 더욱 가련하구나.  가련아, 가련한 이 몸 떠나감을 슬퍼하지 말라.  가련을 잊지 않고 가련에게 다시 오리니.   贈某女 (증모녀)  客枕條蕭夢不仁 滿天霜月照吾隣 객침조소몽불인 만천상월조오린  綠竹靑松千古節 紅桃白李片時春 녹죽청송천고절 홍도백리편시춘  昭君玉骨湖地土 貴비花容馬嵬塵 소군옥골호지토 귀비화용마외진  人性本非無情物 莫惜今宵解汝거 인성본비무정물 막석금소해여거  어느 여인에게 나그네 잠자리가 너무 쓸쓸해 꿈자리도 좋지 못한데  하늘에선 차가운 달이 우리 이웃을 비추네.  푸른 대와 푸른 솔은 천고의 절개를 자랑하고  붉은 복사꽃 흰 오얏꽃은 한 해 봄을 즐기네.  왕소군의 고운 모습도 오랑케 땅에 묻히고  양귀비의 꽃 같은 얼굴도 마외파의 티끌이 되었네.  사람의 성품이 본래부터 무정치는 않으니  오늘 밤 그대 옷자락 풀기를 아까워하지 말게나.  왕소군은 한나라 원제(元帝)의 궁녀. 흉노 땅에서 죽음.  마외파는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을때 양귀비가 피난 갔다가 죽은 곳.  김삿갓이 전라도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날이 저물어 커다란 기와집을 찾아갔다.  주인은 나오지 않고 계집종이 나와서 저녁상을 내다 주었다.  밥을 다 먹은 뒤에 안방 문을 열어보니 소복을 입은 미인이 있었는데 독수공방하는 어린 과부였다.  밤이 깊은 뒤에 김삿갓이 안방에 들어가자 과부가 놀라 단도를 겨누었다.  김삿갓이 한양으로 과거 보러가는 길인데 목숨만 살려 달라고 하자 여인이 운을 부르며 시를 짓게 하였다. 街上初見 (가상초견)  芭經一帙誦分明 客駐程참忽有情 파경일질송분명 객주정참홀유정  虛閣夜深人不識 半輪殘月已三更 -金笠詩 허각야심인불식 반륜잔월이삼경  難掩長程十目明 有情無語似無情 난엄장정십목명 유정무어사무정  踰墻穿壁非難事 曾與農夫誓不更 -女人詩 유장천벽비난사 증여농부서불경   길가에서 처음 보고  그대가 시경 한 책을 줄줄 외우니  나그네가 길 멈추고 사랑스런 맘 일어나네.  빈 집에 밤 깊으면 사람들도 모를테니  삼경쯤 되면 반달이 지게 될거요. -김삿갓  길가에 지나가는 사람이 많아 눈 가리기 어려우니  마음 있어도 말 못해 마음이 없는 것 같소.  담 넘고 벽 뚫어 들어오기가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내 이미 농부와 불경이부 다짐했다오. -여인  김삿갓이 어느 마을을 지나는데 여인들이 논을 메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미인이 시경을 줄줄 외우고 있어서 김삿갓이 앞구절을 지어 그의 마음을 떠 보았다.  그러자 여인이 뒷구절을 지어 남편과 다짐한 불경이부(不更二夫)의 맹세를 저 버릴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詠影 (영영)  進退隨농莫汝恭 汝농酷似實非농 진퇴수농막여공 여농혹사실비농  月斜岸面篤魁狀 日午庭中笑矮容 월사안면독괴상 일오정중소왜용  枕上若尋無覓得 燈前回顧忽相逢 침상약심무멱득 등전회고홀상봉  心雖可愛終無信 不映光明去絶踪 심수가애종무신 불영광명거절종  그림자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날 따르는데도 고마워 않으니  네가 나와 비슷하지만 참 나는 아니구나.  달빛 기울어 언덕에 누우면 도깨비 모습이 되고  밝은 대낯 뜨락에 비치면 난쟁이처럼 우습구나.  침상에 누워 찾으면 만나지 못하다가  등불 앞에서 돌아보면 갑자기 마주치네.  마음으로는 사랑하면서도 종내 말이 없다가  빛이 비치지 않으면 자취를 감추네.  아직 그의 파격적인 희롱의 시편들을 예감하기에는 이르다.  그의 마음 가운데 잉태하고 있는 시의 파괴적인 상태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다만 시의 내용에서 어떤 우수나 비애도 내비치지않은 냉철한 서술이 있는데 바로 이 서술에서 그의 장난스러운 상상력을 얼핏 내보이고 있다. 嘲地官 (조지관)  風水先生本是虛 指南指北舌飜空 풍수선생본시허 지남지북설번공  靑山若有公侯地 何不當年葬爾翁 청산약유공후지 하불당년장이옹  지관을 놀리다  풍수 선생은 본래 허망된 말만 하는 사람이라  남이다 북이다 가리키며 부질없이 혀를 놀리네.  청산 속에 만약 명당 자리가 있다면  어찌 네 아비를 파묻지 않았나. 嘲地師 (조지사)  可笑龍山林處士 暮年何學李淳風 가소용산임처사 모년하학이순풍  雙眸能貫千峰脈 兩足徒行萬壑空 쌍모능관천봉맥 양족도행만학공  顯顯天文猶未達 漠漠地理豈能通 현현천문유미달 막막지리기능통  不如歸飮重陽酒 醉抱瘦妻明月中 불여귀음중양주 취포수처명월중  지사를 조롱함  가소롭구나 용산에 사는 임처사여  늘그막에 어찌하여 이순풍을 배웠나.  두 눈으로 산줄기를 꿰뚫어 본다면서  두 다리로 헛되이 골짜기를 헤매네.  환하게 드러난 천문도 오히려 모르면서  보이지 않는 땅 속 일을 어찌 통달했으랴.  차라리 집에 돌아가 중양절 술이나 마시고  달빛 속에서 취하여 여윈 아내나 안아 주시게.  이순풍(李淳風)은 당나라 사람으로 역산(曆算)에 밝았고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었다.  천체의 형상도 모르면서 땅의 이치를 안답시고 명당이라는 곳을 찾기 위해 수많은 산봉우리와 골짜기를 누비고 다녔으나  모두 헛수고를 한 것이니 그만 두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조롱을 했다.   溺缸 (요항)  賴渠深夜不煩扉 令作團隣臥處圍 뢰거심야부번비 영작단린와처위  醉客持來端膽膝 態娥挾坐惜衣收 취객지래단담슬 태아협좌석의수  堅剛做體銅山局 灑落傳聲練瀑飛 견강주체동산국 쇄락전성연폭비  最是功多風雨曉 偸閑養性使人肥 최시공다풍우효 투한양성사인비  요강  네가 있어 깊은 밤에도 사립문 번거롭게 여닫지 않아  사람과 이웃하여 잠자리 벗이 되었구나.  술 취한 사내는 너를 가져다 무릎 꿇고  아름다운 여인네는 널 끼고 앉아 살며시 옷자락을 걷네.  단단한 그 모습은 구리산 형국이고  시원하게 떨어지는 물소리는 비단폭포를 연상케 하네.  비바람 치는 새벽에 가장 공이 많으니  한가한 성품 기르며 사람을 살찌게 하네.  오줌이 거름이 되고 또 비바람 치는 새벽에도 문밖에 나가지않고 편안히 일을 보게하므로 사람을 살찌게 한다.  그때까지 어느 누구도 다루지 않았던 생활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들을 소재로 택하여 자유자재로 표현했다.   博 (박)  酒老詩豪意氣同 戰場方設一堂中 주로시호의기동 전장방설일당중  飛包越處軍威壯 猛象준前陳勢雄 비포월처군위장 맹상준전진세웅  直走輕車先犯卒 橫行駿馬每窺宮 직주경차선범졸 횡행준마매규궁  殘兵散盡連呼將 二士難存一局空 잔병산진연호장 이사난존일국공   장기  술친구나 글친구들이 뜻이 맞으면  마루에 마주 앉아서 한바탕 싸움판을 벌이네.  포가 날아오면 군세가 장해지고  사나운 상이 웅크리고 앉으면 진세가 굳어지네.  치달리는 차가 졸을 먼저 따먹자  옆으로 달리는 날쌘 말이 궁을 엿보네.  병졸들이 거의 다 없어지고 잇달아 장군을 부르자  두 사가 견디다 못해 장기판을 쓸어 버리네.  주객(酒客)과 시우(詩友)가 대청 마루에서 장기를 두고 있는 모습을 읊었다.  포(包), 상(象), 차(車), 마(馬)의 활약이 잘 묘사되어 있다.   棋 (기)  縱橫黑白陳如圍 勝敗專由取舍機 종횡흑백진여위 승패전유취사기  四皓閑秤忘世坐 三淸仙局爛柯歸 사호한칭망세좌 삼청선국난가귀  詭謨偶獲擡頭點 誤着還收擧手揮 궤모우획대두점 오착환수거수휘  半日輪영更挑戰 丁丁然響到斜輝 반일윤영갱도전 정정연향도사휘  바둑  흑백이 종횡으로 에워싼 것처럼 진을 치니  승패는 오로지 때를 잡고 못 잡음에 달렸네.  사호가 은거하여 바둑으로 시국을 잊었고  삼청 신선들 대국에 도끼자루 다 썩더라.  뜻밖의 속임수로 세력 뻗을 점도 얻고  잘못 두고 물러 달라 손 휘두르기도 하는구나.  한나절 승부를 걸고 다시금 도전하니  바둑알 치는 소리에 석양이 빛나네.  사호(四皓)는 진시황 때 난을 피해 상산(商山)에 숨은 네 은사(隱士).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녹里先生). 삼청(三淸)은 옥청(玉淸), 상청(上淸), 태청(太淸)으로 신선들이 산다는 궁의 이름이다. 眼鏡 (안경)  江湖白首老如鷗 鶴膝烏精價易牛 강호백수노여구 학슬오정가역우  環若張飛준蜀虎 瞳成項羽沐荊후 환약장비준촉호 동성항우목형후  삽疑濯濯穿籬鹿 快讀關關在渚鳩 삽의탁탁천리록 쾌독관관재저구  少年多事懸風眼 春陌堂堂倒紫류 소년다사현풍안 춘맥당당도자류  안경  강호에 사람이 늙어 갈매기처럼 희어졌는데  검은 알에 흰 테 안경을 쓰니 소 한 마리 값일세.  고리눈은 장비와 같아 촉나라 범이 웅크려 앉았고  겹눈동자는 항우와 같아 목욕한 초나라 원숭이일세.  얼핏 보면 알이 번쩍여 울타리를 빠져 나가는 사슴 같은데  노인이 시경 관저편을 신나게 읽고 있네.  소년은 일도 없이 멋으로 안경 걸치고  봄 언덕으로 당나귀 거꾸로 타고 당당히 다니네.  각 행의 끝나는 글자들이 모두 동물 이름이다.  갈매기 구(鷗), 소 우(牛), 범 호(虎), 원숭이 후(후), 사슴 록(鹿), 비둘기 구(鳩), 눈 안(眼), 당나귀 류(류) 접을 수 있는 안경 다리가 두루미 무릎을 닮았다고 해서 학슬(鶴膝)이라 불렀다.  오정(烏精)은 거무스럼한 안경알을 가리킨다. 磨石 (마석)  誰能山骨作圓圓 天以順還地自安 수능산골작원원 천이순환지자안  隱隱雷聲隨手去 四方飛雪落殘殘 은은뇌성수수거 사방비설낙잔잔  맷돌  누가 산 속의 바윗돌을 둥글게 만들었나.  하늘만 돌고 땅은 그대로 있네.  은은한 천둥소리가 손 가는 대로 나더니  사방으로 눈싸라기 날리다 잔잔히 떨어지네.  돌로 만든 무생물체도 그가 노래하면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로 태어났다.   錢 (전)  周遊天下皆歡迎 興國興家勢不輕 주유천하개환영 흥국흥가세불경  去復還來來復去 生能死捨死能生 거복환래래복거 생능사사사능생  돈  천하를 두루 돌아 다니며 어디서나 환영받으니  나라와 집안을 흥성케 하여 그 세력이 가볍지 않네.  갔다가 다시 오고 왔다가는 또 가니  살리고 죽이는 것도 마음대로 하네.  죽어가는 사람도 살리고 산 사람도 죽게 만드는 것이 돈이니 당시에도 그 위력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落花吟 (낙화음)  曉起飜驚滿山紅 開落都歸細雨中 효기번경만산홍 개락도귀세우중  無端作意移粘石 不忍辭枝倒上風 무단작의이점석 불인사지도상풍  鵑月靑山啼忽罷 燕泥香逕蹴全空 견월청산제홀파 연니향경축전공  繁華一度春如夢 坐嘆城南頭白翁 번화일도춘여몽 좌탄성남두백옹  떨어진 꽃  새벽에 일어나 온 산이 붉은 걸 보고 놀랐네.  가랑비 속에 피었다 가랑비 속에 지네.  끝없이 살고 싶어 바위 위에도 달라붙고  가지를 차마 떠나지 못해 바람 타고 오르기도 하네.  두견새는 푸른 산에서 슬피 울다가 그치고  제비는 진흙에 붙은 꽃잎을 차다가 그저 올라가네.  번화한 봄날이 한차례 꿈같이 지나가자  머리 흰 성남의 늙은이가 앉아서 탄식하네.  초목과 꽃이 풍성한 봄이 지나감을 아쉬워하여 읊은 작품이다.   雪中寒梅 (설중한매)  雪中寒梅酒傷妓 風前槁柳誦經僧 설중한매주상기 풍전고류송경승  栗花落花尨尾短 榴花初生鼠耳凸 율화낙화방미단 유화초생서이철  눈 속의 차가운 매화  눈 속에 핀 차가운 매화는 술에 취한 기생 같고  바람 앞에 마른 버들은 불경을 외는 중 같구나.  떨어지는 밤꽃은 삽살개의 짧은 꼬리 같고  갓 피어나는 석류꽃은 뾰족한 쥐의 귀 같구나. 雪日 (설일)  雪日常多晴日或 前山旣白後山亦 설일상다청일혹 전산기백후산역  推窓四面琉璃壁 分咐寺童故掃莫 추창사면유리벽 분부사동고소막  눈 오는 날 늘 눈이 내리더니 어쩌다 개어  앞산이 희어지고 뒷산도 희구나.  창문을 밀쳐 보니 사면이 유리벽이라  아이에게 시켜서 쓸지 말라고 하네.  김삿갓이 어느 절에 가서 하룻밤 재워 달라고 청하자 중이 거절했다.  김삿갓이 절을 나가려 하자 혹시 김삿갓이 아닌가 생각하고 시를 짓게 했다.  혹(或), 역(亦), 벽(壁), 막(莫) 같은 어려운 운을 불러 괴롭혔지만 이 시를 짓고 잠을 자게 되었다. 雪 (설)  天皇崩乎人皇崩 萬樹靑山皆被服 천황붕호인황붕 만수청산개피복  明日若使陽來弔 家家첨前淚滴滴 명일약사양내조 가가첨전누적적  눈  천황씨가 죽었나 인황씨가 죽었나  나무와 청산이 모두 상복을 입었네.  밝은 날에 해가 찾아와 조문한다면  집집마다 처마 끝에서 눈물 뚝뚝 흘리겠네.  천황씨와 인황씨는 고대 중국 전설에 나오는 임금이다.  눈이 녹아 흐르는 물을 임금의 죽음을 슬퍼하여 흘리는 눈물에 비유하였다. 蚤 (조)  貌似棗仁勇絶倫 半風爲友蝎爲隣 모사조인용절륜 반풍위우갈위린  朝從席隙藏身密 暮向衾中犯脚親 조종석극장신밀 모향금중범각친  尖嘴嚼時心動索 赤身躍處夢驚頻 첨취작시심동색 적신약처몽경빈  平明點檢肌膚上 剩得桃花萬片春 평명점검기부상 잉득도화만편춘  벼룩  모습은 대추씨 같지만 용기가 뛰어나  이와는 친구 삼고 전갈과는 이웃일세.  아침에는 자리 틈에 몸을 숨겨 찾을 수 없고  저녁에는 이불 속에 다리 물려고 가까이 오네.  뾰족한 주둥이에 물릴 때마다 찾아볼 마음이 생기고  알몸으로 튈 때마다 단꿈이 자주 깨네.  밝은 아침에 일어나 살갗을 살펴보면  복사꽃 만발한 봄날 경치를 보는 것 같네.  벼룩의 모양과 습성을 묘사하고 벼룩에 물린 사람의 피부를 복숭아꽃이 만발한 봄 경치에 비유하였다.   猫 (묘)  乘夜橫行路北南 中於狐狸傑爲三 승야횡행로북남 중어호리걸위삼  毛分黑白渾成繡 目狹靑黃半染藍 모분흑백혼성수 자협청황반염람  貴客床前偸美饌 老人懷裡傍溫衫 귀객상전투미찬 노인회리방온삼  那邊雀鼠能驕慢 出獵雄聲若大膽 나변작서능교만 출렵웅성약대담  고양이  밤에는 남북 길을 제멋대로 다니며  여우와 삵괭이 사이에 끼어 삼걸이 되었네.  털은 흑백이 뒤섞여 수를 놓고  눈은 청황색에다 남색까지 물들었네.  귀한 손님 밥상에선 맛있는 음식을 훔쳐 먹고  늙은이 품 속에서 따뜻한 옷에 덮여 자니  쥐가 어디에 있나 찾아나설 땐 교만 떨다가  야옹소리 크게 지를 땐 간담이 크기도 해라.  예민한 관찰과 기발한 착상으로 고양이의 생김새와 습성을 표현하였다.   老牛 (노우)  瘦骨稜稜滿禿毛 傍隨老馬兩分槽 수골릉릉만독모 방수노마양분조  役車荒野前功遠 牧竪靑山舊夢高 역거황야전공원 목수청산구몽고  健우常疎閑臥圃 苦鞭長閱倦登皐 건우상소한와포 고편장열권등고  可憐明月深深夜 回憶平生만積勞 가련명월심심야 회억평생만적노  늙은 소  파리한 뼈는 앙상하고 털마저 빠졌는데  늙은 말 따라서 마굿간을 같이 쓰네.  거친 들판에서 짐수레 끌던 옛공은 멀어지고  목동 따라 푸른 들에서 놀던 그 시절 꿈 같아라.  힘차게 끌던 쟁기도 텃밭에 한가히 놓였는데  채찍 맞으며 언덕길 오르던 그 시절 괴로웠었지.  가련해라 밝은 달밤은 깊어만 가는데  한평생 부질없이 쌓인 고생을 돌이켜보네.  세월의 무상함은 인간에게서만 느낄수 있는것은 아니다.  늙은 소를 보고서도 세월이 앗아간 전날의 혈기 넘쳤던 때를 생각할 수 있다.   松餠 (송병)  手裡廻廻成鳥卵 指頭個個合蚌脣 수리회회성조란 지두개개합방순  金盤削立峰千疊 玉箸懸燈月半輪 금반삭립봉천첩 옥저현등월반륜  송편  손에 넣고 뱅뱅 돌리면 새알이 만들어지고  손가락 끝으로 낱낱이 파서 조개 같은 입술을 맞추네.  금쟁반에 천봉우리를 첩첩이 쌓아 올리고  등불을 매달고 옥젖가락으로 반달 같은 송편을 집어 먹네.  새알을 만들고 조개 같은 입술을 맞추고 반달 같은 송편을 먹는 묘사에서 시인의 관찰력과 재치를 볼 수 있다. 白鷗時 (백구시)  沙白鷗白兩白白 不辨白沙與白鷗 사백구백양백백 불변백사여백구  漁歌一聲忽飛去 然後沙沙復鷗鷗 어가일성홀비거 연후사사부구구  갈매기  모래도 희고 갈매기도 희니  모래와 갈매기를 분간할 수 없구나.  어부가(漁夫歌) 한 곡조에 홀연히 날아 오르니  그제야 모래는 모래, 갈매기는 갈매기로 구별되누나.   入金剛 (입금강)  緣靑碧路入雲中 樓使能詩客住공 연청벽로입운중 누사능시객주공  龍造化含飛雪瀑 劒精神削揷天峰 용조화함비설폭 검정신삭삽천봉  仙禽白幾千年鶴 澗樹靑三百丈松 선금백기수년학 간수청삼백장송  僧不知吾春睡腦 忽無心打日邊鐘 승부지오춘수뇌 홀무심타일변종  금강산에 들어가다  푸른 길 따라서 구름 속으로 들어가니  누각이 시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네.  눈발 흩날리며 걸린 폭포는 용의 조화가 분명하고  하늘 찌르며 솟은 봉우리는 칼로 신통하게 깎았네.  속세 떠난 흰 학은 몇천 년이나 살았는지  시냇가 푸른 소나무도 삼백 길이나 되어 보이네.  스님은 내가 봄잠 즐기는 것도 알지 못하고  무심하게 낮종을 치고 있구나.  봄날 금강산으로 들어가면서 주위에 펼쳐진 경치의 아름다움을 읊었다. 答僧金剛山詩 (답승금강산시)  百尺丹岩桂樹下 柴門久不向人開 백척단암계수하 시문구불향인개  今朝忽遇詩仙過 喚鶴看庵乞句來 -僧 금조홀우시선과 환학간암걸구래 -승  矗矗尖尖怪怪奇 人仙神佛共堪凝 촉촉첨첨괴괴기 인선신불공감응  平生詩爲金剛惜 詩到金剛不敢詩 -笠 평생시위금강석 시도금강불감시 -립  스님에게 금강산 시를 답하다  백 척 붉은 바위 계수나무 아래 암자가 있어  사립문을 오랫동안 사람에게 열지 않았, ?  오늘 아침 우연히 시선께서 지나는 것을 보고  학 불러 암자를 보이게 하고 시 한 수를 청하오. - 스님  우뚝우뚝 뾰족뾰족 기기괴괴한 가운데  인선(人仙)과 신불(神佛)이 함께 엉겼소.  평생 금강산 위해 시를 아껴 왔지만  금강산에 이르고 보니 감히 시를 지을 수가 없소. -삿갓  한 승려의 청으로 금강산을 읊으려 하나 너무나 장엄하고 기이한 산세에 압도되어 시를 짓지 못하겠다는 내용이다. 妙香山詩 (묘향산시)  平生所欲者何求 每擬妙香山一遊 평생소욕자하구 매의묘향산일유  山疊疊千峰萬인 路層層十步九休 산첩첩천봉만인 노층층십보구휴  묘향산  평생 소원이 무엇이었던가. 묘향산에 한번 노니는 것이었지.  산 첩첩 천 봉 만 길에 길 층층 열 걸음에 아홉 번은 쉬네.  평소에 한번 와 보고 싶었던 묘향산의 겹겹이 둘러싸인 산세와 산봉우리의 빼어남을 노래하였다. 九月山峰 (구월산봉)  昨年九月過九月 今年九月過九月 작년구월과구월 금년구월과구월  年年九月過九月 九月山光長九月 연연구월과구월 구월산광장구월  구월산  지난해 구월에 구월산을 지났는데 올해 구월에도 구월산을 지나네.  해마다 구월에 구월산을 지나니 구월산 풍경은 늘 구월일세.   金剛山 (금강산)  松松栢栢岩岩廻 水水山山處處奇 송송백백암암회 수수산산처처기  금강산  소나무와 소나무, 잣나무와 잣나무, 바위와 바위를 도니  물과 물, 산과 산이 곳곳마다 기묘하구나.  운의 반복으로 시각적, 청각적 효과를 높혔다.   賞景 (상경)  一步二步三步立 山靑石白間間花 일보이보삼보립 산청석백간간화  若使畵工模此景 其於林下鳥聲何 약사화공모차경 기어림하조성하  경치를 즐기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가다가 서니  산 푸르고 바윗돌 흰데 틈틈히 꽃이 피었네.  화공으로 하여금 이 경치를 그리게 한다면  숲 속의 새소리는 어떻게 하려나.  그에게 있어 자연은 단순히 보고 즐기는 대상이 아니었다.  방랑의 동반자요 거처가 되었으니 발길 닿은 산천경개는 모두 그의 노래가 되었다.  화가가 아름다운 봄의 경치는 그릴 수 있겠지만 숲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울음 소리는 어떻게 그려낼수 있겠는가.   嶺南述懷 (영남술회)  超超獨倚望鄕臺 强壓覇愁快眼開 초초독의망향대 강압기수쾌안개  與月經營觀海去 乘花消息入山來 여월경영관해거 승화소식입산래  長遊宇宙餘雙履 盡數英雄又一杯 장유우주여쌍극 진수영웅우일배  南國風光非我土 不如歸對漢濱梅 남국풍광비아토 불여귀대한빈매  영남 술회  높다란 망향대에 나 홀로 기대 서서  나그네 시름을 억누르고 사방을 둘러 보았네.  달을 따라 드나드는 바다도 둘러보고  꽃소식 알고 싶어 산 속으로 들어왔네.  오랫동안 세상 떠돌다 보니 나막신 한 짝만 남았는데  영웅들을 헤아리며 술 한 잔을 다시 드네.  남국의 자연이 아름다워도 내 고장 아니니  한강으로 돌아가 매화꽃이나 보는 게 낫겠네.  아무리 남쪽 지방의 경치가 좋다한들 집으로 돌아가 물가에 핀 매화 보는 것만 못하니  망향대에 올라 고향을 떠난 자신의 기구한 팔자를 읊고 있다.   淮陽過次 (회양과차)  山中處子大如孃 緩著粉紅短布裳 산중처자대여양 완저분홍단포상  赤脚낭창羞過客 松籬深院弄花香 적각낭창수과객 송리심원농화향  회양을 지나다가  산 속 처녀가 어머니만큼 커졌는데  짧은 분홍 베치마를 느슨하게 입었네.  나그네에게 붉은 다리를 보이기 부끄러워  소나무 울타리 깊은 곳으로 달려가 꽃잎만 매만지네.  '낭'은 足(족)부에 良, '창'은 足(족)부에 倉.  김삿갓이 물을 얻어먹기 위해 어느 집 사립문을 들어 가다가 울타리 밑에 핀 꽃을 바라보고 있는 산골 처녀를 발견했다.  처녀는 나그네가 있는 줄도 모르고 꽃을 감상하고 있다가 인기척을 느끼고는 짧은 치마 아래 드러난 다리를 감추려는 듯 울타리 뒤에 숨었다.   過寶林寺 (과보림사)  窮達在天豈易求 從吾所好任悠悠 궁달재천개이구 종오소호임유유  家鄕北望雲千里 身勢南遊海一구 가향북망운천리 신세남유해일구  掃去愁城盃作추 釣來詩句月爲鉤 소거수성배작추 조래시구월위구  寶林看盡龍泉又 物外閑跡共比丘 보림간진용천우 물외한적공비구  보림사를 지나며  빈궁과 영달은 하늘에 달렸으니 어찌 쉽게 구하랴.  내가 좋아하는 대로 유유히 지내리라.  북쪽 고향 바라보니 구름 천 리 아득한데  남쪽에 떠도는 내 신세는 바다의 물거품일세.  술잔을 빗자루 삼아 시름을 쓸어 버리고  달을 낚시 삼아 시를 낚아 올리네.  보림사를 다 보고나서 용천사에 찾아오니  속세 떠나 한가한 발길이 비구승과 한가지일세.  보림사는 전남 장흥 가지산에 있는절, 용천사는 전남 함평 무악산에 있는 절이다. 寒食日登北樓吟 (한식일등북루음)  十里平沙岸上莎 素衣靑女哭如歌 십리평사안상사 소의청녀곡여가  可憐今日墳前酒 釀得阿郞手種禾 가련금일분전주 양득아랑수종화  한식날 북루에 올라 읊다  십 리 모래 언덕에 사초꽃이 피었는데  소복 입은 젊은 여인이 노래처럼 곡하네.  가련해라 지금 무덤 앞에 부은 술은  남편이 심었던 벼로 빚었을 테지.  김삿갓이 원산에 이르러 명사십리(明沙十里)를 지나다가 정자에 올라 쉬고 있는데 근처에서 어린 과부가 남편 무덤 앞에 술잔을 올리며 내는 곡소리가 슬픈 노래처럼 들려 왔다.   泛舟醉吟 (범주취음)  江非赤壁泛舟客 地近新豊沽酒人 강비적벽범주객 지근신풍고주인  今世英雄錢項羽 當時辯士酒蘇秦 금세영웅전항우 당시변사주소진  배를 띄우고 취해서 읊다  강은 적벽강이 아니지만 배를 띄웠지.  땅은 신풍에 가까워 술을 살 수 있네.  지금 세상에 영웅이 따로 있으랴, 돈이 바로 항우이고  변사가 따로 있으랴, 술이 바로 소진이지.  신풍(新豊)은 한대(漢代)의 현(縣) 이름으로 신풍미주(新豊美酒)라 하여 좋은 술이 나왔다고 함.  항우(項羽)는 초(楚)나라를 세워 한나라 유방과 함께 진나라를 멸망시킨 영웅.  소진(蘇秦)은 중국 전국시대에 말 잘하던 유세객(遊設客)이다.  지금 김삿갓이 놀고 있는 강은 소동파가 적벽부(赤壁賦)를 읊었던 그 적벽강은 아니지만 땅은 맛있는 술이 나왔던 신풍과 닮았다.  오늘날의 세상은 돈만 있으면 항우 같은 힘을 낼 수도 있고 술에 취하면 말 잘하는 소진도 될 수 있다.   吉州明川 (길주명천)  吉州吉州不吉州 許可許可不許可 길주길주불길주 허가허가불허가  明川明川人不明 漁佃漁佃食無漁 명천명천인불명 어전어전식무어  길주 명천  길주 길주 하지만 길하지 않은 고장.  허가 허가 하지만 허가하는 것은 없네.  명천 명천 하지만 사람은 밝지 못하고  어전 어전 하지만 밥상에는 고기 없네.  어전은 함경도 명천군 기남면 어전리이다.  길주는 나그네를 재워주지 않는 풍속이 있어 허가가 많이 살지만 잠자도록 허가해 주지 않고, 어전(漁佃)은 물고기 잡고 짐승을 사냥한다는 뜻인데 이 동네 밥상에는 고기가 오르지 않음을 풍자한 시이다.   看山 (간산)  倦馬看山好 執鞭故不加 권마간산호 집편고불가  岩間재一路 煙處或三家 암간재일로 연처혹삼가  花色春來矣 溪聲雨過耶 화색춘래의 계성우과야  渾忘吾歸去 奴曰夕陽斜 혼망오귀거 노왈석양사  산을 구경하다  게으른 말을 타야 산 구경하기가 좋아서  채찍질 멈추고 천천히 가네.  바위 사이로 겨우 길 하나 있고  연기 나는 곳에 두세 집이 보이네.  꽃 색깔 고우니 봄이 왔음을 알겠고  시냇물 소리 크게 들리니 비가 왔나 보네.  멍하니 서서 돌아갈 생각도 잊었는데  해가 진다고 하인이 말하네.  주마간산(走馬看山)이라 했으니 산을 구경하기에는 빨리 달리는 말보다 게으른 말이 좋다는 것이다.   還甲宴 (환갑연)  彼坐老人不似人 疑是天上降眞仙 피좌노인불사인 의시천상강진선  其中七子皆爲盜 偸得碧桃獻壽筵 기중칠자개위도 투득벽도헌수연  환갑 잔치  저기 앉은 저 노인은 사람 같지 않으니  아마도 하늘 위에서 내려온 신선일 테지.  여기 있는 일곱 아들은 모두 도둑놈이니  서왕모의 선도 복숭아를 훔쳐다 환갑 잔치에 바쳤네.  환갑 잔치집에 들린 김삿갓이 첫 구절을 읊자 자식들이 모두 화를 내다가 둘째 구절을 읊자 모두들 좋아하였다.  셋째 구절을 읊자 다시 화를 냈는데 넷째 구절을 읊자 역시 모두들 좋아하였다. 서왕모의 선도 복숭아는 천 년에 한번 열리는 복숭아로 이것을 먹으면 장수하였다.   元生員 (원생원)  日出猿生原 猫過鼠盡死 일출원생원 묘과서진사  黃昏蚊첨至 夜出蚤席射 황혼문첨지 야출조석사  원생원  해 뜨자 원숭이가 언덕에 나타나고  고양이 지나가자 쥐가 다 죽네.  황혼이 되자 모기가 처마에 이르고  밤 되자 벼룩이 자리에서 쏘아대네.  김삿갓이 북도지방의 어느 집에 갔다가 그곳에 모여 있던 마을 유지들을 놀리며 지은 시이다.  구절마다 끝의 세 글자는 원 생원(元生員), 서 진사(徐進士), 문 첨지(文僉知), 조 석사(趙碩士)의 음을 빌려 쓴 것이다.   難避花 난피화  靑春抱妓千金開 白日當樽萬事空 청춘포기천금개 백일당준만사공  鴻飛遠天易隨水 蝶過靑山難避花 홍비원천이수수 접과청산난피화  피하기 어려운 꽃  청춘에 기생을 안으니 천금이 초개 같고  대낮에 술잔을 대하니 만사가 부질없네.  먼 하늘 날아가는 기러기는 물 따라 날기 쉽고  청산을 지나가는 나비는 꽃을 피하기 어렵네.  김삿갓이 어느 마을을 지나가는데 청년들이 기생들과 놀고 있었다.  김삿갓이 부러워하여 한자리에 끼어 술을 얻어 마신뒤 이 시를 지어주었다. 妓生合作 (기생합작)  金笠. 平壤妓生何所能 김립. 평양기생하소능  妓生. 能歌能舞又詩能 기생. 능가능무우시능  金笠. 能能其中別無能 김립. 능능기중별무능  妓生. 月夜三更呼夫能 기생. 월야삼경호부능  기생과 함께 짓다  평양 기생은 무엇에 능한가. -김삿갓  노래와 춤 다 능한 데다 시까지도 능하다오.-기생  능하고 능하다지만 별로 능한 것 없네. -김삿갓  달 밝은 한밤중에 지아비 부르는 소리에 더 능하다오. -기생  평양감사가 잔치를 벌이면서 능할 능(能)자 운을 부르자 김삿갓이 먼저 한 구절을 짓고 기생이 이에 화답하였다.   沃溝金進士 (옥구김진사)  沃溝金進士 與我二分錢 옥구김진사 여아이분전  一死都無事 平生恨有身 일사도무사 평생한유신  옥구 김 진사  옥구 김 진사가  내게 돈 두 푼을 주었네.  한번 죽어 없어지면 이런 꼴 없으련만  육신이 살아 있어 평생에 한이 되네.  김삿갓이 옥구 김 진사 집을 찾아가 하룻밤 묵기를 청하자 돈 두 푼을 주며 내쫓았다.  김삿갓이 이 시를 지어 대문에 붙이니 김 진사가 이 시를 보고 자기 집에다 재우고 친교를 맺었다.   窓 (창)  十字相連口字橫 間間棧道峽如巴 십자상연구자횡 간간잔도협여파  隣翁順熟低首入 稚子難開擧手爬 인옹순숙저수입 치자난개거수파  창  십(十)자가 서로 이어지고 구(口)자가 빗겼는데  사이사이 험난한 길이 있어 파촉(巴蜀)가는 골짜기 같네.  이웃집 늙은이는 순하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지만  어린 아이는 열기 어렵다고 손가락으로 긁어대네.  눈 오는 날 김삿갓이 친구의 집을 찾아가자 친구가 일부러 문을 열어주지 않고 창(窓)이라는 제목을 내며 파촉 파(巴)와 긁을 파(爬)를 운으로 불렀다.   兩班論 (양반론)  彼兩班此兩班 班不知班何班 피양반차양반 반부지반하반  朝鮮三姓其中班 駕洛一邦在上班 조선삼성기중반 가락일방재상반  來千里此月客班 好八字今時富班 내천리차월객반 호팔자금시부반  觀其爾班厭眞班 客班可知主人班 관기이반염진반 객반가지주인반  양반  네가 양반이면 나도 양반이다.  양반이 양반을 몰라보니 양반은 무슨 놈의 양반.  조선에서 세 가지 성만이 그중 양반인데  김해 김씨가 한 나라에서도 으뜸 양반이지.  천 리를 찾아왔으니 이 달 손님 양반이고  팔자가 좋으니 금시 부자 양반이지만  부자 양반을 보니 진짜 양반을 싫어해  손님 양반이 주인 양반을 알 만하구나.  김삿갓이 어느 양반 집에 갔더니 양반입네 거드럼을 피우며 족보를 따져 물었다.  집안 내력을 밝힐수없는 삿갓으로서는 기분이 상할수 밖에. 주인 양반이 대접을 받으려면 행실이 양반다워야 하는데  먼 길 찾아온 손님을 박대하니 그 따위가 무슨 양반이냐고 놀리고 있다.   暗夜訪紅蓮 (암야방홍련)  探香狂蝶半夜行 百花深處摠無情 탐향광접반야행 백화심처총무정  欲採紅蓮南浦去 洞庭秋波小舟驚 욕채홍련남포거 동정추파소주경  어두운 밤에 홍련을 찾아가다  향기 찾는 미친 나비가 한밤중에 나섰지만  온갖 꽃은 밤이 깊어 모두들 무정하네.  홍련을 찾으려고 남포로 내려가다가  동정호 가을 물결에 작은 배가 놀라네.  동정(洞庭)은 두보의 '등악양루'(登岳陽樓)의 배경이 된 중국 호남성에 있는 동정호(洞庭湖)를 말한다.  홍련을 만나려고 여러 여인들이 자는 기생방을 한밤중에 찾아갔는데 어둠 속에서 얼결에 추파라는 기생을 밟고는 깜짝 놀랐다. 諺文風月 (언문풍월)  靑松듬성담성立이요 청송듬성담성립이요  人間여기저기有라. 인간여기저기유라.  所謂엇뚝삣뚝客이 소위엇뚝삣뚝객이  平生쓰나다나酒라. 평생쓰나다나주라.  언문풍월  푸른 소나무가 듬성듬성 섰고  인간은 여기저기 있네.  엇득빗득 다니는 나그네가  평생 쓰나 다나 술만 마시네.  서당에서 있을 유(有)자와 술 주(酒)자를 운으로 부르자 언문과 한자를 조합하여 지었다.   開春詩會作 (개춘시회작)  데각데각 登高山하니 데각데각 등고산하니  시근뻘뜩 息氣散이라. 시근뻘뜩 식기산이라.  醉眼朦朧 굶어觀하니 취안몽롱 굶어관하니  욹읏붉읏 花爛漫이라. 욹읏붉읏 화난만이라.  봄을 시작하는 시회  데걱데걱 높은 산에 오르니  씨근벌떡 숨결이 흩어지네.  몽롱하게 취한 눈으로 굶주리며 보니  울긋불긋 꽃이 만발했네.  산에서 시회가 열린 것을 보고 올라갔는데  시를 지어야 술을 준다고 하자 이 시를 지었다.  사람들이 언문풍월도 시냐고 따지니 다시 한수를 읊었다.  諺文眞書석거作하니 언문진서섞어작하니  是耶非耶皆吾子라. 시야비야개오자라.  언문과 진서를 섞어 지었으니  이게 풍월이냐 아니냐하는 놈들은 모두 내자식이다.   犢價訴題 (독가소제)  四兩七錢之犢을 放於靑山綠水하야 사양칠전지독을 방어청산녹수하야  養於靑山綠水러니 隣家飽太之牛가 양어청산녹수러니 인가포태지우가  用其角於此犢하니 如之何卽可乎리요. 용기각어차독하니 여지하즉가호리요.  송아지 값 고소장  넉 냥 일곱 푼짜리 송아지를 푸른 산 푸른 물에 놓아서  푸른 산 푸른 물로 길렀는데, 콩에 배부른 이웃집 소가  이 송아지를 뿔로 받았으니 어찌하면 좋으리까.  가난한 과부네 송아지가 부잣집 황소의 뿔에 받혀 죽자 이 이야기를 들은 김삿갓이 이 시를 써서 관가에 바쳐 송아지 값을 받아 주었다. 辱說某書堂 (욕설모서당)  書堂乃早知 房中皆尊物 서당내조지 방중개존물  生徒諸未十 先生來不謁 생도제미십 선생내불알  서당 욕설시  서당을 일찍부터 알고 와보니 방 안에 모두 귀한 분들일세.  생도는 모두 열 명도 못 되고 선생은 와서 뵙지도 않네.  추운 겨울날 서당에 찾아가 재워주기를 청하나 훈장은 미친 개 취급하며 내쫓는다.  인정없는 훈장을 욕하는 시. 소리나는대로 읽어야 제 맛이 난다. 破格詩 (파격시)  天長去無執 花老蝶不來 천장거무집 화로접불래  菊樹寒沙發 枝影半從池 국수한사발 지영반종지  江亭貧士過 大醉伏松下 강정빈사과 대취복송하  月利山影改 通市求利來 월이산영개 통시구이래  파격시  하늘은 멀어서 가도 잡을 수 없고 꽃은 시들어 나비가 오지 않네.  국화는 찬 모래밭에 피어나고  나뭇가지 그림자가 반이나 연못에 드리웠네.  강가 정자에 가난한 선비가 지나가다가  크게 취해 소나무 아래 엎드렸네.  달이 기우니 산 그림자 바뀌고  시장을 통해 이익을 얻어 오네.  이 시는 모든 글자를 우리말 음으로 읽어야 한다.  천장에 거미(무)집, 화로에 겻(접)불 내  국수 한 사발, 지렁(간장) 반 종지  강정 빈 사과, 대추 복숭아  월리(워리) 사냥개, 통시(변소) 구린내 辱孔氏家 욕공씨가  臨門老尨吠孔孔 知是主人姓曰孔 임문노방폐공공 지시주인성왈공  黃昏逐客緣何事 恐失夫人脚下孔 황혼축객연하사 공실부인각하공  공씨네 집에서  문 앞에서 늙은 삽살개가 콩콩 짖으니  주인의 성이 공가인 줄 알겠네.  황혼에 나그네를 쫓으니 무슨 까닭인가  아마도 부인의 아랫구멍을 잃을까 두려운거지.  구멍 공(孔)자를 공공(개 짖는 소리), 공가(성), 구멍이라는 세 가지 뜻으로 썼다. 虛言詩 허언시  靑山影裡鹿抱卵 白雲江邊蟹打尾 청산영리녹포란 백운강변해타미  夕陽歸僧계三尺 樓上織女낭一斗 석양귀승계삼척 누상직녀낭일두  허언시  푸른 산 그림자 안에서는 사슴이 알을 품었고  흰 구름 지나가는 강변에서 게가 꼬리를 치는구나.  석양에 돌아가는 중의 상투가 석 자나 되고  베틀에서 베를 짜는 계집의 불알이 한 말이네.  사슴이 알을 품고 게가 꼬리를 치며, 중이 상투를 틀고 계집에게 불알이 있을 수 있으랴.  허망하고 거짓된 인간의 모습을 헛된 말 장난으로 그림으로써 당시 사회의 모순을 해학적으로 표현했다.   胡地花草 (호지화초)  胡地無花草 胡地無花草 호지무화초 호지무화초  胡地無花草 胡地無花草 호지무화초 호지무화초  오랑캐 땅의 화초  오랑캐 땅에 화초가 없다지만 오랑캐 땅이라고 화초가 없으랴.  오랑캐 땅에는 화초가 없더라도 어찌 땅에 화초가 없으랴.  호(胡)자에 '오랑캐'라는 명사와 '어찌'라는 부사의 뜻이 있다.   落民淚 (낙민루)  宣化堂上宣火黨 樂民樓下落民淚 선화당상선화당 낙민루하낙민루  咸鏡道民咸驚逃 趙岐泳家兆豈永 함경도민함경도 조기영가조기영  낙민루  선정을 펴야 할 선화당에서 화적 같은 정치를 펴니  낙민루 아래에서 백성들이 눈물 흘리네.  함경도 백성들이 다 놀라 달아나니  조기영의 집안이 어찌 오래 가랴.  관찰사가 집무 보는 관아를 선화당이라고 하였다.  구절마다 동음 이의어를 써서 함경도 관찰사 조기영의 학정을 풍자했다.  宣化堂(선정을 베푸는 집) 宣火黨(화적 같은 도둑떼)  樂民樓(백성들이 즐거운집)落民淚(백성들이 눈물 흘리다)  咸鏡道(함경도) 咸驚逃(모두 놀라 달아나다)  趙岐泳(조기영) 兆豈永(어찌 오래 가겠는가  
1037    방랑 시인 - 김삿갓 풍자시 댓글:  조회:3168  추천:0  2015-04-20
                                                                                                                                                                                                                                                                 
1036    프랑스 초현실주의 대표시인 - 앙드레 브르통 댓글:  조회:8453  추천:0  2015-04-20
      20세기 초현주의를 대표하는 프랑스의 시인이자 이론가 1924년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 인간정신의 자유를 구현하는 시의 혁신운동을 주창했다 문학 . 초.현.실주의혁명등 기관지를 발간했고 나자 연통관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데파르트망 탱슈브레에서 태어났으며 14세때부터 시를 썼다. 파리대학 의학부에 재학중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육군병원 정신과에 복무하면서 프로이트의 작품과 접했다.       1917년 아폴리네르 아라공 t 수포 p차라 등과 함께 교류하며 다다이즘에도 참여했다   초.현실주의 운동은 많은 동조자들이 공산주의자가 되면서 분열을 겪었지만 브르통은 끝까지 그것에 전념을 했다고한다.   자유로운 결합 / --앙드레 브르통  나의 아내에게는 장작불같은 머리카락이  여름 하늘의 마른 번개같은 생각들이  모래시계의 허리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범에 물린 수달의 허리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고광도 행성의 화환과 꽃리본같은 입술이  백토 위에 남겨진 흰쥐의 족적같은 이빨이  불투명 유리와 황갈색 호박의 혀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비수에 찔린 제물의 혀가  눈을 깜빡이는 인형의 혀가  전무후무한 보석의 혀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어린아이의 글씨획같은 속눈썹이  제비둥지 가장귀같은 눈썹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유리창에 서린 김과  온실 지붕의 기와같은 관자놀이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얼음 아래 돌고래의 정기를 지닌 샘과  석회질 평원같은 어깨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성냥개비같은 손목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행운의 하트 에이스같은 손가락을  베어낸 건초같은 손가락들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세례 요한 축일의 밤과  쥐똥나무와 엔젤 피쉬 둥지와  담비와 너도 밤나무 열매같은 겨드랑이가 있다  밀과 방아의 혼합같은  수문과 해수 거품같은 팔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폭죽같은 다리와  시계와 절망의 몸짓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딱총나무의 목수같은 장딴지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성명 이니셜 같은 발이  물 마시는 작은 참새의 발 열쇠 꾸러미같은 발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미정백의 보릿단같은 목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급류 하상에서의 만남같은  황금 계곡의 목구멍이  밤의 유방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해변의 둔덕같은 유방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루비 항아리같은  이슬 머금은 장미의 분광같은 유방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세월의 부채살같은 아랫배  거대한 발톱같은 아랫배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수직으로 도망가는 새의 등이  수은의 등이  눈부신 등이 있고  잘 세공된 보석과 젖은 백묵같은  우리가 비워버린 술잔의 추락같은 목덜미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작은 곤돌라같은 엉덩이  샹들리에와 화살깃의  섬세한 균형의  하얀 공작의 우간같은 엉덩이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사암과 석면의 볼기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백조의 등짝같은 볼기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봄의 볼기가  글라디올러스같은 성기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사금 광상과 오리너구리의 성기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오래된 봉봉사탕과 해초같은 성기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거울의 성기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눈물 그렁그렁한 눈이  보라색 갑옷과 자침같은 눈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대초원의 눈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감옥속 마실것같은 눈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도끼에 패인 장작같은 눈이  물과같은 공기 대지불과같은 차원의 눈이 있다  (자유로운 결합),1931, 갈리마르 출판사  여기 내가 좋아하는 브르통의 언술을 덧 붙인다  시인은 문장 속에서는 물론이고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자신에게 신호를 보낼수 있는 의미 심장한 우연의 일치들  기묘한 유사점들을 주의 깊게 포착하는 일종의 감시병이 된다  삶과 죽음, 현실과 상상, 과거와 미래, 표현 가능한것과  표현 불가능한것, 숭고함과 저속함이 상호 대립으로  인지 되기를 멈추는 한지점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주관과 객관,  꿈과 현실의 이원성을 제거할수 있다  서정성의 발현을 좌우 하는것도 다양한 효과를 지닌  어떤 풍부한 긴장이다  때때로 작가의 개성이 거세된 엄숙한 표현은  탁월한 문장의 정련과 언어가 지닌 잠재적인 힘에의  전적인 의존 사이의 교차를 통하여 자신의 노래를  변주하여 시의 골격을 진동시키는 어떠한 감정에  갑자기 순종하는 양상을 보이기도한다  그를 고찰 하면서 빠질수 없는 단어가 있다  지루할지 모르지만 간략하게 나마 몇자 발췌해 적어본다  자동기술  초현실주의 운동 속에서 자동기술의 역사는 끊임없는  불운의 역사였다 사실상 자동기술의 이론적 실천적  난점들은 너무나 많다( 어떻게 동질성을 확보 할것인가,  다시 말하자면 상이한 성격을 지닌 언술의 토막들이  아주 빈번하게 발견 될수 있는 자동기술된 언술 속에서  이 언술을 구성하는 제 부분의 이질성을 어떻게 극복  할것인가? 중복과 누락은 어떻게 할것인가? 연상되는 것을  무한정 기술할수 없다면 어디쯤에서 중단해야 할것인가?  청각적 인것에서 시각적인 것에 이르기 까지 대단히  난삽 할수있는 구절들을 어떻게 기술 할것인가? 등등)  그러나 이러한 난점들에도 불구하고 자동기술은  그 근거가 되는 목적 때문에 여전히 초현실주의의  중요한 전리품 중의 하나로 남아있다  초현실주의의 특징은 잠재의식의 전언 앞에서  모든 정상적인 인간들이 전적으로 동등 하다는 것을  선언했다는 것이며 아주 가까운 시일 내에  이 무의식의 전언이 반드시 몇몇 사람들의 전유물로  간주 되기를 그치고 자기 몫의 요구는 오로지 각자가  책임져야할 인류의 공동 유산이 되리라는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인간은  모두에게나 각자에게 비밀스런 무의식의 세계를 밝혀주는  수단 그 자체가 될수있으며 초 자연적인 것은 조금도  갖고있지 않는 이 언어를 스스로 마음껏 이용할수 있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절대적 가능성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말해 주고 싶다  죽은 놈 불알 만지듯이 너무 오래된 관념 가지고  너무 떠들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브르통 이후 전세계 시단은 초현실주의로  확 덮혔던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한국도 마찮가지 였고요  며칠 있다가는 엘런 식수 라는 프랑스의 작가이자  페미니즘의 이론가가 쓴 페미니즘의 이론에서  빼놓을수 없는 메두사의 웃음이라는 글을 소개해  올리겠습니다  여성적인 것이 어떻게 억압 되는가 하는 문제와 동시에  남성 중심적인 언어와 사상의 구조들 즉 온갖 이원론과  위계적 질서화 등에 도발적인 방식으로 의문을 던지는  글 입니다  사실 엘런식수는 너무너무 예뻣습니다  캬트린느 드뇌브 인줄 알았다니까요  캬트린느 드뇌브는 테마 창고에서 할께요     오픈지식 직유와 은유 직유와 은유                                          구상(具常)    지난번 장에서도 거듭 말했지만 〈시는 사물과 사물의 비교〉, 즉 비유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광의적으로 보면 모든 시적 표현들이 모두 다 비유로서 상징이나 심상(이미지)은 물론 우화적(寓話的ㅡ알레고리)·반어적(反語的ㅡ빗댐, 아이러니)·환상적(일류전) 수법이나 또는 의인법·의성법·돈호법(頓呼法)등이 그 모두가 비유적 표현이라 하겠다. 저러한 비유적 표현  들의 설명은 다음 장으로 미루고, 보통으로 비유라고 말할 때 우리는 직유(直喩ㅡsimile)와 은유(隱喩ㅡmetaphor) 두 가지로 나눈다.    먼저 직유는 무엇을 말할 때 어떤 것을 다른 것과 직접적으로 비교해서 말하는 것으로, 비유하는 것과 비유되는 것이 〈처럼〉〈같이〉〈인 양〉〈인 듯〉〈모양〉〈마냥〉등이란 낱말로 연결되어 두 가지 다른 사물의 유사성(類似性ㅡ아날로지)을 나타낸다.    여기서 그리 저명한 시인도 아니고 또 명작이라고 할 작품도 아니지만 단정한 직유로 이뤄진 미국의 조지프 캠벨(Joseph Campbell, 1881∼1944)의 「할머니」라는 시를 보면,        성전 안의        흰 촛불인 듯        늙은 얼굴이        아름답구나.        겨울날의        쇠잔한 햇빛처럼        자기 구실을 다한        여인.        자식들은 품에서 떠났지만        황폐한 방앗간 아래        괴어 있는 물모양        그녀는 여전히 자식들 생각에 잠겨 있다.    할머니의 늙은 얼굴을 성전 안의 흰 촛불에다 비유해서 〈인 듯〉으로 연결하고, 자기 구실을 다한 그녀의 오늘을 겨울날의 쇠잔한 햇빛에다 비유해서〈처럼〉으로 연결하고, 그녀가 자기 품에서 자라 떠나간 자식들 생각을 하는 것을 황폐한 물방앗간 아래 괴어 있는 물에다 비유해서〈모양〉으로 연결하고 있다. 물론 이 시의 원문에는 〈인 듯〉〈처럼〉〈모양〉으로 구별되어 있지 않고 그저 〈as〉만인 것을 필자가 편의상 구별해서 번역한 것이다.    이렇듯 직유는 만들기도 간단하고 이해하기도 쉬운 것이지만 그 비유가 유효적절하게 쓰여지느냐 하는 것은 그리 간단하고 쉽지가 않다. 가령 내가 명색 기성시인의 작품에서 발견한 시 귀절로, 〈아가의 눈망울이 눈처럼 맑고 따습다〉라는 직유가 있는데, 아가의 눈이 맑은 것을 흰눈에다 비교한 것은 오히려 그 실제의 감동을 감소시켰다고나 하겠다. 왜냐하면 아가의 눈망울이 주는 그 맑은 빛은 흰눈의 맑음과 색부터 다르고 그 따스함도 눈[雪]이라는 실재의 사물에서는 차가움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부적당하게 씌어졌거나 조잡한 비유를 혼유(混喩)라고 하는데, 이런 비유는 오히려 시의 생명을 죽이는 결과를 낳는다. 이와 반대로 T.S.엘리어트의 처녀시집인『J.알프레드 프르프로크외기타(基他)』속에 있는 「프로프로크 연가(戀歌)」의 일절,        마취에 든 수술대의 환자처럼        저녁 어스름이 하늘에 번져갈 때    이렇듯 적절한 비유는 아무리 비유하고 비유되는 사물이 동떨어진 것이라도 서로가 결합하여 독자에게 새로운 경험의 세계와 존재의 의미를 제시한다.    그래서 직유는 그것이 단순한 것이든 복잡한 것이든 두 개의 사물 사이의 유사성을 포착·추출하여 독자에게 작자의 상념이나 감동을 보다 생생하게 전달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그 비유의 대상을 더 잘 설명할 뿐 아니라 그 대상을 생동하게 만들어야 한다.    다음, 은유는 한마디로 말하면 앞의 직유가 사용하는 비교의 말 〈처럼〉이나 〈같이〉등을 사용하지 않고 두 사물이 지니는 유사성을 한 말로 압축시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은유란 오직 직유에서 비교용어를 생략한다고 이뤄지는 것은 아니고 그 비유의 발상과정에서부터 다르다고 하겠다. 가령 〈돌과 같은 침묵〉이라고 하면, 돌이라는 형상과 침묵이라는 형  상이 없는 개념이 일단 인간의 이지적 비교를 통한 그 결과에서 연결되지만, 〈돌의 침묵〉이나〈침묵하는 돌〉이라면 저러한 논리를 넘어서 직관적으로 결합되는 표현인 것이다. 또한 은유는 그 비유의 세계를 (비유되는 말)한정시켜서 설명하지 않고 독자의 상상력에 맡기는 특성을 지닌다. 그 설명은 실제의 작품에서 하기로 하고 이번에는 우리 시인 유치환(柳致環, 1908∼67)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시 「기(旗)ㅅ발」을 음미해보면,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말고 곧은 이념의 표 ㅅ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이 시에서 〈물결같이〉와 〈백로처럼〉의 직유를 제외하면 주제가 된 사물인 깃발의 본질적인 정서를 나타내기 위해서 전혀 관련 없는 사물이나 뜻밖의 관념들이 아무런 설명 없이 그것을 비유하고 있다.    언뜻 외양으로는 〈깃발과 아우성〉〈깃발과 손수건〉〈깃발과 애수(哀愁〉는 동떨어진 사물이나 관념이지만, 그 깃발이 내포하고 있는 이념 그 자체는 그야말로 절규처럼 강렬한 주장으로서, 가령 태극기를 다는 그 자체가〈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하겠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깃발과 아우성〉이라는 두 가지 사물의 유사성이 논리적 귀결에서 이뤄졌다기보다는 직관적으로 결합되고 또한 그 유사성의 발견을 독자의 상상력에 제한 없이 맡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은유의 특징은 〈깃발과 손수건〉〈깃발과 애수〉에 이르르면 더욱 잘 나타나고 있어 비유상징의 그 묘미를 보여주고 있다.    비유라면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것은 외면적인 유사성인데 이것은 우리의 사물에 대한 통념화된 의식의 접촉으로서 이것을 달리 말하면 일상생활 속에서 쓰여지는 말과 말의 평면적 접촉인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앞장에서 말했듯 그 본질에 있어 무한하다고 할 만큼 여러 면을 가지고 있어서 일상생활에서는 아주 좁고 적은 면밖에 사용되지 않고 다른 면은 우리 의식 안에 파묻혀 있다. 그래서 이렇듯 빈약한 언어와 언어의 협소한 면의 접촉만으로써는 남을 놀라게 할 뜻밖의 유사성을 결코 끄집어낼 수가 없다. 그 두 가지 말이 지니는 무한한 면 (뜻)속에서 가장 유일의 것을 골라내어 하나의 유사성을 만들어내야 한다.    또한 시가 설득의 문학이 아니고 암시의 문학이라는 것은 바로 이 비유, 특히 은유의 기능을 말하는 것으로 이 기능은 도식적 형태에서부터 복잡한 변형과 다양한 발전을 거듭해왔다. 그래서 비유기능의 질적 변화가 시의 진화의 역사라고 말할 수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초심자들에게는 이해하기 곤란하고 아주 지겹도록 길기도 하지만 현대시의 초현실주의적 수법(은유)의 족보같이 여겨지는 시라 우선 읽어두기라도 하여야겠기에, 불란서의 정신과의사 출신 시인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1896∼1966)의 「자유로운 결합」을 여기에 옮겨 소개하는 바다.      내 아내는 갖고 있다. 산불의 머리칼을      백열(白熱)하는 번개의 생각을      모래시계의 몸통을      내 아내는 갖고 있다. 호랑이 이빨 사이의 수달의 몸통을      내 아내는 갖고 있다. 장미꽃 무늬 리본 매듭과 최후의 웅대한 별의 화환의    입술을      흰 땅 위의 흰 생쥐의 흔적 같은 이를      문지른 호박과 유리의 혀를      내 아내는 갖고 있다. 칼에 찔린 제병(祭餠)같은 혀를      눈을 감았다 떴다 하는 인형의 혀 같은 혀를      믿기 어려운 보석의 혀를      내 아내는 갖고 있다. 어린이의 첫 습자글씨 같은 눈썹을      제비둥지의 가장자리 같은 눈썹을      내 아내는 갖고 있다. 온실 지붕의 슬레이트 같은 관자놀이를      유리창에 낀 습기의 관자놀이를      내 아내는 갖고 있다. 샴페인과      얼음 밑의 돌고래들 머리의 분수(噴水)와 같은 어깨를      내 아내는 갖고 있다. 성냥개비 같은 팔목을      내 아내는 갖고 있다. 우연과 하아트의 에이스의 손가락을      잘린 마른 풀의 손가락을      내 아내는 갖고 있다. 담비와 너도밤나무 열매의      그리고 세례자 요한 축일 밤의      쥐똥나무와 고사리 둥지의 겨드랑이를      바다 거품과 수문(水門) 거품의 팔을      밀과 물레방아의 범벅 같은 팔을      폭죽과 같은 다리를      내 아내는 갖고 있다. 시계장치의 절망의 운동을 하는      로케트의 다리를      내 아내는 갖고 있다. 말오줌나무의 속 같은 종아리를      내 아내는 갖고 있다. 머릿글자의 발을      열쇠꾸러미 같은 발을, 술 마시는 배틈막이 일꾼의 발을      내 아내는 갖고 있다. 패이지 않은 보리쌀의 목을      내 아내는 갖고 있다. 황금 골짜기의 목구멍을      격류의 강바닥에서의 밀회의 목구멍을      한밤중의 유방을      내 아내는 갖고 있다. 루비 도가니의 유방을      이슬 내린 장미의 유령의 유방을      바다두더쥐 집 같은 유방을      내 아내는 갖고 있다. 일상용(日常用)의 부채를 펼치는 것 같은 배를      거대한 발톱 같은 배를      내 아내는 갖고 있다. 수직으로 나는 새의 등을      수은(水銀)의 등을      빛의 등을      굴린 돌과 젖은 분필의 목덜미를      마셔버린 술잔의 떨어짐과 같은 목덜미를      내 아내는 갖고 있다. 작은 보트 같은 엉덩이를      샹들리에 화살깃의 엉덩이를      감지할 수 없는 균형의      백공작의 날갯죽지의 엉덩이를      내 아내는 갖고 있다. 모랫돌과 돌솜의 엉덩이를      내 아내는 갖고 있다. 백조의 등 같은 엉덩이를      내 아내는 갖고 있다. 봄의 엉덩이를      글라디올러스의 섹스를      내 아내는 갖고 있다. 금광상(金鑛床)과 오리너구리의 섹스를      내 아내는 갖고 있다. 바닷말[海藻]과 옛 봉봉의 섹스를      내 아내는 갖고 있다. 거울의 섹스를      내 아내는 갖고 잇다. 눈물이 가득한 눈을      보랏빛 갑옷투구와 자석침(磁石針)의 눈을      내 아내는 갖고 있다. 대초원(大草原)의 눈을      내 아내는 갖고 있다. 옥중에서 마실 수 있는 물의 눈을      내 아내는 갖고 있다. 언제나 도끼에 찍힐 나무의 눈을      수준기(水準器)의 눈, 공기와 흙과 불의 수준기의 눈을.    이 시는 작자 브르통이 그의 전공인 정신분석학을 응용, 초현실파 특유의 일상적 연상을 단절하고 일반적 논리나 감각을 뛰어남은 인간의식의 심층에서 그 유사성을 추출하고 있다. 즉, 나의 아내라는 여체의 모든 부분을 일상의식에서 포착하고 이를 상징적으로 비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매몰되고 잠재하는 의식의 영역 속에서 찾아내고 이를 표상한  다. 그래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아내라는 통속적 개념을 파괴하고 존재의 특수한 본질에 접근하려고 든다.    저렇듯 브르통의 비유가 난해하지만 그래도 문맥상으로는 비유하는 것과 비유되는 것이 명료하고 단순하여서 거듭 읽으며 함께 상상의 나래를 펴 가면 제 나름대로의 음미가 가능하다. 그러나 점차 현대시인의 시적 사고가 복잡해지고 그 암시적인 의식이 미묘해질수록 은유의 세계는 더욱 난해해져서 일반독자에게 광범한 상상의 자유가 허용된달까! 이것이 이것이라고 적확한 해석을 낼 수가 없다는 것이 정직한 토로라고 하겠다. 그러나 우리가 저 〈자유로운 결합〉의 비유를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핍진한 내적 진실을 독자에게 말하려드는 것만은 최소한 알 수가 있다. 그래서 그것이 한 사물에 대하여 아주 새로운 지각의 경험세계를 보여주는 그 자체만으로도 작품의 역할을 다한다고 하겠다. 하지만 아무리 복잡미묘하고 초현실적인 비유라 하여도 어디까지나 그 의식 내면에 실재하는 유사성과 그 진실성에 인간상호간의 공통성이 있어야지 그저 황당무계한 기상(奇想)과 언어의 유희로써는 탁월한 비유는커녕 표상의 실재가 없는 도깨비(거짓의)시가 되고 만다.    여하간 희랍 고대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384∼322)가 그 『시학』속에서 〈은유를 구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까지 말하고 있는 것은 말의 본질과 존재의 본질의 인식이 깊어질수록 그것이 바로 메타포의 창출로 직결되기 때문이라 하겠다.  ================================================ 요약 초현실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반예술 운동인 초기 다다이즘으로부터 생겨났다. 그러나 초현실주의는 다다이즘처럼 부정 그 자체를 강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대한 적극적인 표현을 강조했다. 초현실주의는 특히 회화에서 많은 공적을 이루었다. 초현실주의 미술은 다다이즘뿐만 아니라 프란시스코 고야와 마르크 샤갈 같은 화가들의 환상적이고 기괴한 이미지의 영향을 받았다. 장 아르프, 막스 에른스트, 앙드레 마송, 르네 마그리트, 살바도르 달리, 피에르 루아, 호안 미로 등이 대표적인 화가이다. 초현실주의는 내용적 측면과 자유로운 형식을 강조함으로써 형식주의로 치우치고 있던 당시 입체파 미술의 대안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내용을 강조하는 회화적 전통을 현대 미술에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초현실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반예술 운동인 초기 다다이즘으로부터 생겨났다. 그러나 초현실주의는 다다이즘처럼 부정 그 자체를 강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대한 적극적인 표현을 강조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과거 유럽 문화와 정치를 주도해왔으며 제1차 세계대전의 공포 속에서도 절정을 이루었던 이성주의가 결국은 파괴를 야기시켰다고 보고 그에 대한 반대를 표방했다. 시인이자 비평가인 앙드레 브르통은 이 운동의 대변자로서 1924년에 '초현실주의 선언'을 공표했다. 브르통 (André Breton) 프랑스의 시인, 수필가, 평론가 그에 따르면 초현실주의는 경험의 의식적 영역과 무의식적 영역을 완벽하게 결합시키는 수단이며, '절대적 실재, 즉 초현실' 속에서는 꿈과 환상의 세계가 일상적인 이성의 세계와 결합될 수 있다고 한다. 주로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이론을 원용하면서 무의식의 세계를 상상력의 원천으로 간주했다. 또한 시인이나 화가에 의해 달성될 수 있는 천재성은 일반적으로 미개발된 무의식의 영역에 대한 접근가능성으로 규정했다.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 피에르 르베르디 등의 시는 전과정에 걸쳐 논리적이 아닌 심리적인, 즉 무의식적인 것에 의해 결정된 생경한 단어들의 병치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게 된다. 초현실주의는 특히 회화에서 많은 공적을 이루었다. 초현실주의 미술은 다다이즘뿐만 아니라 히에로니무스 보스, 프란시스코 고야 등 전 시대의 화가들과 오딜롱 르동, 조르조 데 키리코, 마르크 샤갈 등 동시대 화가들의 환상적이고 기괴한 이미지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예술작품이 인간심리의 탐구와 그 표현을 촉구하는 수단임을 강조하면서, 방법론적 연구와 실험을 매우 중시한다. 그러나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원리에 충실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1925년 파리에서 전람회를 열었으나 초현실주의의 역사는 제명과 탈퇴, 인신공격 등으로 얼룩졌다. 장 아르프, 막스 에른스트, 앙드레 마송, 르네 마그리트, 이브 탕기, 살바도르 달리, 피에르 루아, 폴 델보, 호안 미로 등이 대표적인 작가이다. 호안 미로 (Joan Miró) 스페인의 화가, 조각가 그들의 작품은 매우 다양하여 초현실주의적 양식으로 범주화해서 요약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각자 나름대로 자기탐구의 수단을 모색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의식의 통제로부터 벗어난 무의식의 세계를 즉흥적으로 표현하려는 1가지 목표만을 추구했다. 한편 미로를 비롯한 화가들은 지고미(至高美)를 형식적 수단으로 해서 개인의 환상, 무의식과 의식을 탐구했다. 이 두 극단은 그 발전가능성의 영역면에서 구별된다. 장 아르프의 작품으로 대표되는 한쪽 극단은 추측할 수는 있지만 불확정적인 생물형태적인 이미지를 창조한다. 보는 사람의 마음에 무의식적인 연상작용을 일으켜 그 끝없는 탐구과정을 통해 창조적 상상력이 스스로 발언하게 하는 것이다. 에른스트·마송·미로 등도 다소 차이는 있지만 이와 비슷한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태도를 일컬어 유기적·상징적·절대적 초현실주의라고도 했다. 이와 반대되는 극단에서는 명확하고 세밀하게 묘사되었으나 비합리적인 세계를 접하게 된다.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인식 가능한 이미지는 일상적인 맥락으로부터 분리되어 모호하고 역설적이며 충격적인 구조로 재구성된다. 이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논리에 의해서는 드러나지 않는 비이성적인 선천적 감각을 받아들이게 하고, 이에 대한 공감을 유발시킨다. 르네 마그리트는 햄 한 조각이 담긴 접시가 놓여 있는 보통 테이블 하나만 그리는 등 단순하면서도 힘이 있는 표현을 하여 그러한 접근의 가장 직접적인 형태를 보여주었다. 살바도르 달리, 피에르 루아, 폴 델보 등도 이와 유사하지만 좀더 복잡한 형상으로, 현실세계에 꿈처럼 기이한 장면을 결합시켜 표현했다. 그들은 심리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몇 가지 특수한 기법을 고안했다. 나무 등 요철이 있는 재료 위에 종이를 놓고 연필 등으로 문지르는 프로타주, 캔버스를 긁어 자국을 만드는 그라타주 등은 에른스트가 개발한 것으로 그 불완전한 이미지가 보는 이의 마음속 에서 완성되도록 하는 것이다. 작가의 무의식으로부터 분출하는 혼돈의 이미지를 다듬지 않고 즉흥적으로 기록하는 자동기술적 소묘(→ 자동기술법), 일상 생활에서 취한 오브제 등도 주요기법에 속한다. 프로타주(frottage) 동전 프로타주 초현실주의는 내용적 측면과 자유로운 형식을 강조함으로써 형식주의로 치우치고 있던 당시 입체파 미술의 대안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내용을 강조하는 회화적 전통을 현대 미술에 이어준 공로가 크다. 특히 유기적 초현실주의는 1940년대와 1950년대에 비재현적인 형태로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던 미국의 추상 표현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1035    프랑스 시인 - 자크 프레베르 댓글:  조회:4593  추천:0  2015-04-20
        1961년의 자크 프레베르   서명   어느 새의 초상화를 그리려면        자크 프레베르         우선 문이 열린 새장을 하나 그릴 것 다음에는 새를 위해 뭔가 예쁜 것 뭔가 단순한 것 뭔가 쓸 만한 것을 그릴 것   그 다음엔 정원이나 숲이나 혹은 밀림 속 나무에 그림을 걸어 놓을 것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움직이지도 말고…… 때로는 새가 빨리 오기도 하지만 맘먹고 오는 것이 여러 해가 걸리기도 하는 법   실망하지 말 것 기다릴 것 필요하다면 여러 해를 기다릴 것 새가 빨리 오고 늦게 오는 것은 그림의 성공과는 무관한 법   새가 날아올 때는 혹 새가 날아오거든 가장 깊은 침묵을 지킬 것 새가 새장에 들어가기를 기다릴 것 그리고 새장에 들어가거든 살며시 붓으로 새장을 닫을 것 그리고 모든 창살을 하나씩 지우되 새의 깃털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할 것   그리고는 가장 아름다운 가지를 골라 새의 초상을 그릴 것 푸른 잎새와 서늘한 바람과 햇빛의 가루와 여름 열기 속 풀숲을 기어다니는 작은 곤충 소리들을 또한 그릴 것   이어서 새가 노래하기를 맘먹도록 기다릴 것 혹 새가 노래하지 않으면 그것은 나쁜 징조 그러나 새가 노래하면 좋은 징조 당신이 사인해도 좋다는 징조   그런 후에 당신은 살며시 새의 깃털 하나를 뽑아 그림 한 구석에 당신 이름을 쓰세요         ----------- 자크 프레베르(Jacques Prévert, 1900년 2월 4일 ~ 1977년 4월 11일) 프랑스의 시인, 영화 각본가. 그의 시는 프랑스어 세계, 특히 학교에서 매우 유명했고 지금도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가 쓴 영화 가운데 사상 최고의 영화 하나로 여겨지는 '천국의 아이들'과 더불어 매우 잘 알려져 있다.  이브 몽탕이 부른 유명한 샹송 '고엽'의 작사자이기도 하다.       메세지                            - 자크 프레베르   누군가 연 문 누군가 닫은 문 누군가 앉은 의자 누군가 쓰다듬는 의자 누군가 깨문 과일 누군가 읽은 편지 누군가 넘어뜨린 의자 누군가 연문 누군가 아직 달리고 있는 길 누군가 건너지르는 숲 누군가 몸을 던지는 강물 누군가 죽은 병원  나는 보통 시를 읽을때 그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리고 이에 얼마나 내가 감정이입 할 수 있으며 그 시가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지를 중요시 한다. 물론 운율이나 기타 다른 요소 또한 작용하겠지만, '나'는 머릿속에 그리며 따라가는 그 과정이 좋다. 그렇기에 우연히 본 자크 프레베르의 '아침의 식사'에서 시작하여 계속해서 다른 시들을 찾고 있는지 모른다.   아침의 식사         찻잔에 커피를 부었다.  찻잔의 커피에 밀크를 부었다.  밀크 커피에 사탕을 넣었다  작은 스푼으로 저었다  밀크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찾잔을 놓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기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재떨이에 재를 떨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은 나를 보지 않고 일어섰다  모자를 머리에 썼다  비가 내렸으므로 레인코트를 입었다  그리고 빗속으로 나가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쪽을 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머리를 감쌌다  그리고 나는 울었다.           사실상 비슷한 구성. 물론 그의 시가 모두 이런 구성인건 아니지만 그의 느낌은 시 곳곳에서 살아있어 계속 찾게 만든다.   난 이런사람   나는 이런사람 이렇게 태어났지   웃고싶으면 큰소리로 웃고 날 사랑하는 이를사랑하지   내가 사랑하는사람이 매번 다르다해도 그게어디 내탓인가   나는 이런사람 이렇게 태어났지 하지만 넌 더이상무엇을 바라나 이런 내게서   나는 하고싶은걸 하도록 태어났지 바뀔건 단 하나도없지   내 발꿈치가 아주 높이솟았다 해도 내 몸이 몹시 휘었다 해도 내 가슴이 너무도 거칠다 해도 내 두눈이 이다지 퀭하다 해도 네가 그걸 어쩌겠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나는 이런사람 난 내마음에드는 사람이 좋은 걸 네가 그걸 어쩌겠나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뿐인데 그래 난누군가를 사랑했지 누군가가 날 사랑했었지 어린아이들이 서로 사랑하듯이 오직 사랑밖에는 할 줄 모르듯이 서로 사랑하고 사랑하듯이.... 왜 내게 묻는거지 난 너를 즐겁게 하려고 이렇게 있고 바뀐건 아무 것도 없는데    이 얼마나 솔직한가. 위 두 시에서는 감정의 표현 없이 사건의 나열로 솔직하게 표현하였다면 여기선 그냥 꾸밈 없이 자기 하고싶은 말만 나불댄다. 그는 숨김 없는 표현으로 내면의 순수성을 자극한다. 시 '쓰기공책'에서는 주입식 교육에 대한 반항을 보여주며 자유로운 영혼에 대한 추구를 보여주며 자연으로의 회귀를 외치고 있다.    밤의 파리    성냥개비 세 개를 하나씩 켠다 어둠 속에서 첫 번째는 네 얼굴 또렷이 보기 위하여 두 번째는 네 두 눈을 보기 위하여 마지막 것은 네 입술 보기 위하여 그 다음 캄캄한 어둠 속에서 내 두 팔 안에 너를 꼭 껴안는다 이 모든 것을 기억하기 위하여      일상적인 풍경과 소재로 시를 쓴다는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단순히 시 뿐만 아니라 내가 당연하다는 듯 행동하던 것, 느꼈던 것들을 제 3자가 보는 것처럼 관찰하는 일은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보다, 모래밭에서 각 모래에도 차이가 있다는 걸 깨닫는게 더 어렵다는걸 알게 한다. 사소함에서 시를 쓰기에 그의 시 하나하나에서 나의 모습 또한 읽히는 것은 아닐까. 
1034    詩歌란?... 댓글:  조회:3878  추천:0  2015-04-20
시가란?     시가란 마치 화가가 색채로 하는 것을 언어로 하는 예술로서 상상력에 의하여 환상을 분출하는 방법에 의하여 산출하는 예술이다. ―토마스 머코올리. 시란 이성의 조력에 상상력을 동원하여 진리와 즐거움을 결합시키는 예술이다. 시의 본질을 발견이다. 예기치 않는 것을 산출함으로써 경이와 환희 같은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S.존슨. 시인은 그의 예민한 흥분된 눈망울을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서 하늘로 굴리며 상상은 모르는 사물의 형체를 구체화시켜 시인의 펜은 그것들에 형태를 부여해 주며 형상 없는 것에 장소와 명칭을 부여해 준다. ―W.세익스피어. 시는 생의 진술이며 표출이다. 그것은 체험을 표시하고 생의 내면적 진실을 묘사하는 것이다. 제2의 세계, 꿈은 최고의 시인이다. ―워즈워드. 한 편의 시는 하나의 의식(儀式)이다. 따라서,형식적이고 의식적 성격을 갖춘다. 시가 가지는 언어의 용법은 회화의 용어와는 달리 의식적이며 화려한 꾸밈새가 있다. 시가 회화의 용어나 리듬을 이용하는 경우에도 그러한 것과 대조를 이루게 마련인 규범을 미리 전제하고 의식적으로 형식을 피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다. ―W.A.오오든. 시는 몸을 언어의 세계에 두고, 언어를 소재로 하여 창조된다. ―M.하이데거 『詩論』. 시의 용어는 필연적인 것같이 보이는 것이어야 한다.―W.B.예이츠. 시는 언어를 향한 일제사격이다.―앙리 미쇼. 시는 언어의 건축물이다.―M.하이데거. 시는 언어의 모자이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행위와 시는 언제나 인간보다 크다. ―T.E.흄. 시는 극점에 달한 언어다. ―말라르메. 시는 절조 있는 언어로서 절규·눈물·애무·입맞춤·탄식 등을 암암리에 표현하려는 것이다. ―뽈 발레리. 시인에게 있어서 낱낱의 단어가 그 원료다. 단어는 극히 여러가지 모양의 뜻을 가진 것으로 이것들의 뜻은 시의 구성에 따라 처음으로 똑똑해진다. 이와같이 단어가 콤포지션의 가능성에 따라서 변모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형성된 예술 형태의 한 부분이 될 때까지는 어세(語勢)도 그 효과도 다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프도프킨. 시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의 생활은 사막의 생활이다. ―메르디트. 시란 우리에게 다소 정서적 반응을 통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해주는 언어이다.―E.A.로빈슨. 시에선 해조(諧調)가 미리 공허한 형식을 결정하고 말이 위로 와서 위치를 잡는다. 말과 경험 사이의 응화(應和)와 불응화 그리고 결국에 응화가 해조를 확보하여 주의력을 거기에 모은다. 물러섬이 없는 움직임이 듣는 사람과 시인을 함께 끌고 간다. ―알랭 . 시는 미의 음악적 창조다.―E.A.포우. 시란 영혼의 음악이다. 보다 더욱 위대하고 다감한 영혼들의 음악이다. ―볼테에르. 정서가 있고 운율이 있는 언어로 인간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또 예술적 으로 표현하는 것이 시이다. ―오든.시는 어떤 리듬을 선택하여 그것들을 체계화시켜 반복한다. 이것이 운율이다. ―r.브리지스. 시는 역설과 아이러니의 구성체다.―브룩스. 시는 우연을 기피한다. 시에 나타나는 클라스·성격·직분 등의 개성은 반드시 어떠한 클라스를 대표한다. ―코울리지. 시를 구성하는 두 개의 주요한 원리는 격조와 은유이다.―웰렉·워렌. 시는 정서의 표출이 아니라 정서로부터의 도피요,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의 도피이다. ―T.S.엘리어트. 시는 상상과 감정을 통한 인생의 해석이다. ―W.H.허드슨. 예술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작게 되는 것처럼 느끼게 하며, 그러면서도 우리들을 확대 시킨다. ―E.M.포스터. 아직 탄생하지 않은 어느 특별한 일절 또는 일련의 배후에서, 하나의 힘과 같이 집중되어, 넓게 전개되는 의식의 총체. ―보트킨. 열정적인 시란 것은, 우리들의 본성의 도덕적 지적 부분과 동시에 감각적 부분―지식에의 욕망, 행위의 의지, 감각의 힘을 방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가 완전한 것이 되려면, 우리들의 신체의 다른 여러 부분에 자극을 주어야 한다. ―하즈리트. 시는 조잡한 요소로(물을 타고 섞어서) 연하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엑기스(精)이며, 그것을 키울 수 있는 것, 쓸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순수한 이미지의 시는 수정 조각과 같은 것이어서―우리들의 동물감각엔 너무나도 차고 투명한 것이다. ―허버트 리드. 가장 위험한 것은, 순수한 물의 성분에 대하여 설명할 수 없는 거와 같이, 정말로의 순수한 시라는 것은 그 무엇에 대하여서도 강연을 할 수 없는 것이다.불순하며, 메칠알콜이 들어간 거칠은 시에 대해선,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월터 로리. 시적 논리가 시의 결말을 맺는 것은, 일반적으론, 기분의 변화라든가, 위상의 전환을 통하여 행해지는 경우가 많다.……그것이 시적 논리이다. 즉 논술이나 명증에 의하여 위상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단계가 듣는 사람의 마음에 만족을 주는 그러한 위상의 변화이며, 이해할 수 있는 추이인 동시에 그 진행은 앞의 단계를 무효로 하는 그러한 것이어서는 안된다. ―W.P.카. 오로지 이미지는 시의 극치이며 생명이다. ―드라이든. 방대한 저작을 남기는 것보다 한평생에 한번이라도 훌륭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낫다. ―에즈라 파운드. 믿을 수 있는 모든 것이란 진실한 이미지 뿐이다. ―W.블레이크. 만약 지각(知覺)의 문을 맑게 한다면 모든 것은 그대로 즉 무한감(無限感)을 가진 것같이 보일 것이다. ―W.블레이크. 이미지는 우리들에게 사랑과 희생의 능력을 각성시킨다. 그것은 어느 경험을 생각케 하며 그 문체에 의하여 그러한 경험에의 어느 종류의 능력을 각성시킨다. 우리들은 어느 하나를 배우게 된다. 즉 그것이 우리들에게 가능한 것같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희열이든가 절망이든가 어떠한 감정이든간에 그것을 아는 것이 강한 만족으로서 느껴지는 것이다. ―챨스 윌리암즈. 이미지의 생산은 무의식의 어두침침한 속에서의 정신의 일반적 행위에 속한다. ―E.S.달라스. 나에게 있어서 지각은 처음에 명료한 일정한 목적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중에 형성되는 것이다, 나의 어느 음악적인 무우드(기분)가 우선한 다음에 시적 사상이 나에게 다가온다. ―쉴러. 이미지의 발생, 진전, 설정은, 예를 들면 태양의 광선이 자연히 그에게 도달하여 ―그의 위에 빛나고 다음엔 냉정히 더구나 장려하게 기울어 가라앉아가며 그를 호화스러운 황혼 속에 혼자 남기는 현상에 흡사하다. ―J.키츠. 우리들은 정신의 영역을 3중의 층으로 생각할 수가 있을 것 같다. 더구나 그러한 경우 지질학의 ‘단층’에 비교할 수 있는 어느 현상이 일어난다. 그 결과……지층은 비연속적이며 서로 불규칙한 단층을 나타나게 된다. 그와 매한가지로 자아의 감각적 의식은 본능적 충동과 직접 교섭을 갖게 되며, 그 ‘끓는 가마솥’에서 어떠한 원형적 형태 즉 예술작업의 기초가 되는 말, 이미지, 음 등의 본능적 짜임을 끄집어내게 되는 것이다. ―H.리드. 나의 경우 시에 있어서는 많은 이미지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시의 중심이 많은 이미지이기 때문에 나는 하나의 이미지를 만든다. ―‘만든다’라는 말은 적당치 않은 말이지만, 나는 나의 이미지에 내 내부에서 정서의 여러 가지 배색을 물들여 놓고 그것에 내가 가지고 있는 지적 비평적인 힘을 적용하여 그것이 또 다른 이미지를 낳게 한다. 그리곤 그 제2의 이미지를 제1의 그것과 모순시켜, 그 둘에서 난 제3의 이미지에서 제4의 모순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그것들 모든 것을 나에게 주어진 형식적인 제한의 범위 내에서 서로 모순시킨다. 각각의 이미지는 그 속에 스스로를 파괴하는 종자를 가지고 있다. 즉 나의 변증적 방법(나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은 중심의 종자에서 성장하는 많은 이미지의 끊임없는 건설과 파괴며, 그 중심의 종자도 그 자신으로 파괴적인 동시에 건설적인 것이다.……나의 시의 생명은 중심에서 나오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 속에서 나와, 그리고 죽지 않으면 안된다. 나의 이미지의 건설은 창조와 재창조와 파괴와 모순이 아니면 안되는 것이다. ……이미지의 어쩔 수 없는 충돌에서 (아무리 해도 피할 수 없는 충돌에서)―아무리 해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자극을 주는 중심 즉, 충돌의 모태가 창조와, 재창조와, 파괴와, 모순의 성질을 갖기 때문에―나는 시라는 순간적 평화를 만들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딜런 토마스. 이미지는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 자신으론 시인의 특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지가 독자적인 본능의 증거가 되는 것은 훌륭한 정열, 또는 그 정열로 잠깨워진 일련의 사상 혹은 이미지 여하에 따라 시 그 자체가 변할 만큼 그 중요성을 가지고 있을 때 뿐이다. ―코울리지 추상적 관념에 대립하는 감각적 이미지를 너무나 주장하는 나머지…… 결과는 회화에 의한 시로 되어버렸다. 다시 말하면, 때로는 그림이 전부가 되어버려, 일반적 경험에 아무런 관계가 없어져 버렸다. 이것은 존재와 의미와를 분리시키는 잘못의 제일보였던 것이다. ―로버트 히리아. 상상된 이미지를 통해 우리는 시적 몽상이라는 몽상의 절대를 인식한다. ―바슐라르. 실제로 물질적 상상력은 문화적 이미지와 실체를 합체시키는 유일한 매개체이다. 우리는 물질적으로 자신을 표현함으로써 모든 삶을 시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바슐라르. 상상력 그 자신은 기억의 작용이므로 기억이 시의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 진실한 것이다. 내가 모르는 것을 상상한다는 것은 없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상상력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전에 경험한 것을 기억하며, 그것을 어느 다른 환경에 적용하는 능력이다. ―스펜서. 추상적인 것의 구체화를 추구하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내 방법은 아니다. 나는 내 자신 속에 감동 ―감각적으로 생생한, 사랑스러운, 다채로운 여러가지의 감동 ―을 기민한 상상력의 에너지로서 받았던 것이다. ―괴테 이성이라는 것은, 기지(旣知)의 사물을 질서있게 정리하는 작용이며 상상력이라는 것은 사물의 개개, 혹은 전체로서의 가치를 지각하는 작용이다. ―C.V코노리 상상력이야말로 도덕적 선(善)의 훌륭한 방편이다. ―셸리. 상상력이라는 것은 죽어 가는 정열을 되살리기 위하여 살(肉)을 잡아 두는 불사의 신을 말하는 것이다. ―J.키츠 모든 것에 앞서서 훨씬 중요한 것은 은유를 자기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만은 다른 사람에게서 얻을 수 없는 천부의 은총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정밀하게 만들도록 하라. 그러면 자연 은유가 될 것이다. ―J.M.머리. 은유는 현실을 살피며 경험을 질서짓게 하는 정신의 본질적이며 또한 필요한 행위와 같이 생각된다. ―J.M.머리. 어떠한 번역이나, 은유나, 우의라도 극단적인 비유와는 전연 다른 방향으로 흘러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면 은유를 바다나 파도에서 시작하여 불꽃이나 재로 끝내서는 안된다. 그것은 대단히 나쁜 모순이기 때문에. ―벤 존슨 은유를 깊이 추구하려면 건전한 의식의 세계에 들어갈 필요가 있다. ―J.M.머리. 상징파의 상징은 언제나 자기만이 아는, 특별한 관념을 표현하기 위하여 시인이 독단적으로 쓰고 있는 ―즉, 그러한 관념의 일종의 투영인 것이다. ―에드문드 윌슨 상징주의의 상징의 실체는 제재에서 분리한 은유였었다.―왜냐하면 시에 있어서 어느 한 점을 넘으면 색채와 음은 그 자신을 위하여 즐거워할 수가 없을 뿐더러 이미지의 내용을 억측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에드몬드 윌슨. 시는 감촉할 수 있고 묵묵해야 한다. 구형의 사과처럼 무언(無言)이어야 한다. 엄지손가락에 닿는 오랜 대형 메달처럼 조용해야 한다 이끼 자란 창턱의 소매자락에 닳은 돌처럼 시는 말이 없어야 한다. 새들의 비상처럼 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마치 달이 떠 오를 때처럼 마치 달이 어둠에 얽힌 나뭇가지를 하나씩 하나씩 놓아주듯이 겨울 잎사귀에 가린 달처럼 기억을 하나하나 일깨우며 마음에서 떠나야 한다. 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마치 달이 떠오를 때처럼 ―A.맥클리쉬 『詩法』. 나의 시의 장부(帳簿)는 어디에 있는가 이 나의… 종이도 없고 펜도 없고 시도 없이 나는 무(無)앞에 있다. ―R.끄노오 『詩法을 위하여』 시(詩)는 낳는 것이지 만드는 것은 아니다. The poem is born, not made. ―시는 체험에 의해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 ..           자기 시에서 진단해야 할 것들                   1. 첫번째 질문   당신은 문학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대부분의 문인들은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문제보다 창 작방법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글 을 쓰려면 먼저 자기 문학관부터 검토해 봐야 할 것입니다. 그것 은 어떤 문학관을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 작품 구조와 조직의 초점 이 달라지고, 독자들의 반응 역시 어느 정도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일관된 문학관을 지니고 있는 문인들이 드물다는 점입니다. 아니, 문인들만 그런 게 아닙니다. 문학을 연 구하는 학자나 비평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앞 페이지에서 문학 을 '작가의 사상과 감정의 표현'이라고 정의하고, 뒤 페이지에서 는 '허구'나 '모방'으로, 그 다음 페이지에서는 '언어의 구조물'이 나 '교훈을 전달할 수 있는 장치'로 정의하기가 일수입니다. 이와 같은 용어들이 같은 관점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은 문예이론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도 조금만 생각하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상과 감정의 표현'은 작가 '내부'에서 발생한 정서와 의 식의 움직임을 화제로 삼는 '표현적 관점expressive view'으로서, 이러한 관점을 지닌 사람들은 진실하고 강렬한 표현을 목표로 삼습 니다. 그리고 '모방'은 작가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을 화제로 삼는 '모방적 관점(mimetic view)'으로서, 객관적이며 사실적 표현 을 목표로 삼습니다. 또, '언어의 구조물'이나 '독자들에게 교훈을 전달할 수 있는 장치'로 정의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자는 '객관적 관점(objective view)'으로서, 텍스트의 구조와 조직을 비롯한 '형식'을 중시하고, 후자는 '효용적(pragmatic view) 관점'으로서 '내용'을 중시합니다. 하지만, 문학관의 문제에서 우리가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용어뿐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혼란을 일으키는 것들이 있기에 이를 첫 번째로 삼았습니다. 자아, 질문 일발 장진하고…, 쏩니다. 받아 보세요! □ 당신은 장르에 따라 각기 다른 관점을 지니고 있는가, 아니면 같은 관점을 지니고 있는가? 혹시 모든 관점이란 일관성을 지녀야 한다는 생각에 모든 장르를 같은 관점으로 읽고 쓰는 분은 없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문학의 입문에들어서지도 못한 사람이라고 말씀을 드려도 화내지 마 시기 바랍니다. 만일 시를 쓰는 분이라면 소설이나 수필로 써야 할 제재를 시로 써서 '서사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테고, 소설을 쓰는 분이라면 시로 쓸 제재를 소설로 써서 '스토리성이 박약하다'는 지적을 받고, 알고 있는 이론을 끌어대며 변명하는 분일 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각 장르는 그 나름대로 탄생된 목적이 달리 있습니다. 먼저 모든 담화를 크게 구분하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느꼈다)'와 '그것은 이렇다'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전자는 '주관적 정보를 제공 하기 위한 담화'로서 우리가 이제까지 문학의 범주에 포함시켜온 것들이고, 후자는 '객관적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담화'로서 문학의 범주에서 제외해 왔던 것들입니다. 그리고, 각 장르의 목적을 알아보기 위해 전자를 다시 속성에 따라 나눠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가운데 글을 쓰는 사람이 ―다음부터는 자주 화자話者라고 부르 겠습니다 ― 어떤 사건을 겪은 과정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전달 하려는 수필은, ― 이 역시 '교술敎述로 바꿔 부르겠습니다. '수필'은 느슨한 구성을 염두에 두고 붙인 명칭인 반면에, '교술'은 화제의 속성을 염두에 둔 명칭으로서, 기본 장르는 구성이나 조직의 특징으로 분류하는 것보다 화제의 속성에 따라 분류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입니다.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 탄생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효용적 관점'에서 탄생된 장입니다. 물론, 교술 가운데에는 단순히 사건을 기록하거나 논평을 붙이기 위해 쓰여지는 유형도 있습니다. 기행문이나 논픽션 같은 '서사적 교술'과, 칼럼과 비평 같은 '분석적 교술'이 이에 속합니다. 그러 나, 이들도 겉으로만 교훈을 잠재시켰을 뿐, 독자에게 유용하리라 고 믿는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탄생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술이 이와 같이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 탄생된 장르라는 것은 우선 보편적이고 윤리적인 화제를 택하고, 화자가 텍스트 전면에 나서서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쓰여지는 걸 미루어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작가의 주장 +예화'를 교차시키는 '느슨한 구성'을 택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훈은 아무리 열심히 이야기해도 독자 ―앞으로는 자주 청자聽者라고 바꿔 부르겠습니다―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자면 청자가 화자를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고, 보편 타당성을 지닌 이야기이어야 합니다. 신뢰가 가지 않은 사람이 의심스러운 이야기를 할 경우에는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술이 보편적이고 윤리적인 화제를 택하고, 화자가 자기 인격을 걸고 텍스트 의 전면에 나서서 독자에게 직접 말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도 이를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상대를 설득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화자가 말하려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나야 하고, 그런 주장을 입증할 수 있는 실례實例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조작하고 있다 는 느낌이 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작가의 주장 +예화'를 교차시키고, 주장을 펴는 부분에서는 '작가적 어법authorial speech'으로, 예화를 드는 부분에서는 '모방적 어법figural speech'으로 이야기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그리고, '느슨한 구성'이 되어도 고치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교차 구조로 나타나는 결과이긴 하지만, 조작된 느낌이 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독자에게 무엇인가 교훈을 주기 위한 제재는 교술의 형식을 택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서사敍事는 '사건의 과정'을 그리기 위해 탄생된 장르입니다. 그리고, 부차적인 목적이 있다면, 그 사건에 대해 부분적으로 '자기의 주장과 해석'을 덧붙여 독자들로 하여금 깨닫도록 유도하기 위한 장르입니다. 서사가 이런 목적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사건을 그리는 부분은 '모방적 어법'으로, 자기 주장과 해석을 덧붙이는 부분은 '작가적 어법'으로 쓰여지는 것으로 미루어서도 짐작할 수 있습 니다. 따라서 서사는 교술과 아주 비슷한 장르라고 할 수 있습니 다. 스토리성이 허약한 서사가 교술과 유사하게 보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상이나 교훈이 부차적인 목적으로 물러나기 때문에 교술과 달리 사적私的이거나 비윤리적인 화제도 무방합니다. 서사는 독자에게 작중 인물을 모방하라고 권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건의 전개 과정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삶과 비교하고 재미로 읽어보라는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서사에서 발견되는 교훈이나 사상은 작가가 직접 말한 것이 아니라 독자가 임의로 해석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 구조와 조직적 국면에서도 상당한 차이가 납니다. 교술은 자기주관을 이야기하는 부분이 중심이 되지만, 서사에서는 예화가 중심이 됩니다. 그로 인해 '모방적 어법'으로 쓰여지는 부분이 주류를 이룹니다. 그리고 작가적 어법으로 이야기하는 부분도 작가의 주관을 이야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청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 사건에 대한 해설과 논평을 붙이는 수준에 그칩니다. 그러므로, 서사 는 무엇보다 리얼리티와 오락성이 중시되는 장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건을 겪은 후 '현재의 정서'를 이야기하려는 서정적 장르에 서는 '모방적 어법'이 배제되고 '작가적 어법'으로 쓰여집니다. 그로 인해 앞의 두 장르가 추구하던 객관성과 사실감을 부각시키기 가 어려워지는 반면에 정서의 개별성, 강렬성, 자유로운 상상력을 부각시키기가 용이합니다. 그리고, 어법상으로 보았을 때는 얼마든지 가능하게 보이는 사상의 표현도 어려워집니다. 사상이나 윤리는 수백 번 언급하는 것보다 실천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화제가 '현재 이 순간'으로 제한되기 때문에 이들을 거론하는 것만 가능할 뿐, 실천하는 과정을 그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흔히 위대한 사상을 지녔다는 작품도 텍스트 자체만을 분석할 때에는 별다른 사상을 발견하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입니다. 또, 여타의 장르와 달리 로 치환置換하는 어법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모티프와 모티프를 '인과적因果的'으로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연접連接된 것으로 연결합니다. 그로 인해 객관성과 사실성 또 는 논리성을 확보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표현한 시 인의 의도는 보조관념vehicle을 유추하는 방법을 통해 해석할 수밖에 없는데, 이 과정에서 독자의 자의적 해석이 개입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동적 인식'을 방해하기 위해 유사성similarity이 큰 보조관념보다 적은 것을 선택하는 현대시는 더욱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서정시는 교훈이나 재미보다는 정서적 공감이나 억눌린 상상력을 풀어주기 위해 탄생된, 다시 말해 '표현적 관점'에서 탄생된 장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희곡은 '과정을 재현再顯'하려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거지가 등장하면 거지의 말투로, 제왕이 등장하면 제왕의 말투로 말하는 '모방적 어법'을 택합니다. 그러므로 '모방적 관점'에서 탄 생된 장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연公演'을 전제로 한다는 조건을 붙일 경우에는 문학의 한 장르로 분류하는 데는 무리가 따릅니다.공연을 하자면, 연출·연기·미술·음악·효과·조명 등의 무수한 담당자가 참가해야 하고, '언어로 쓰여진다'라는 조건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직 내 견해에 동의하는 사람은 드물지만, 문학의 한 장르로 분류하기보다는 '언어 예술'과 '행위 예술'의 중간 장르로 분류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연'이라는 조건을 포기하면 어느 장르보다 사실성과 객관성을 확보하기 용이한 장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사와 마찬가지로 과정을 다루기 때문에 사상 내지 윤리성도 표현할 수있습니다. 그러나, 교술보다는 훨씬 그를 표현하는 기능이 떨어지고, 서사보다도 약화됩니다. 그것은 해설자가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아닌 데다가, 그를 제거할 경우 작가의 발언은 작중 인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비평은 작가가 텍스트 표면에 등장하여 직접 독자에게 말을 거는 양식으로서, 화제가 '타자(텍스트)'인가, '자아'인가의 차이만 지닐 뿐입니다. 비평을 교술의 하위 장르로 분류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객관적 관점'에서 태어난 장르로서, 목적이 달라 교술과는 전혀 다른 색채를 띄고 있습니다. 타자를 논의하고 평가 할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교술보다 훨씬 객관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합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타자를 비난하거나 칭찬하면 독자들이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논리의 전개를 비롯하여 용어와 문체도 신중을 기해 선택해야 합니다. 질문있다구요? 뭡니까? 왜 과거는 물론 현대의 문예이론가들은 이와 같이 각 장르의 차이를 염두에 두지 않고 문학을 어느 한 관점 에서 정의해 하고 있느냐구요? 제 말을 의심하시는군요. 하긴 그래 요. 제가 아리스토텔레스나 공자님보다 더 똑똑한 건 아니니까요. 아니, 더 똑똑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분들은 컴퓨터도 모르고, 인터넷도 모르고, 자동차 운전도 할 줄 모르고, 삼각함수도 미적분도 풀지 못하는 분들이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그분들이 돌아가신 후 2000여 년 동안 축적된 학문을 배운 사람들이니까요. 농담입니다. 다시 본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그것은 그분들과 우리의 장르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아리스토텔레스가 문학을 '모방'이라고 정의한 것은 극적 장르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 니다. 그리고 동양 사회에서 '사상과 감정의 표현'이라고 한 것은 '사상'은 '문文으로, '정서'는 '시詩'로 표현할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분들이 모든 장르를 염두에 두고 내린 결론이라고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의문과 혼동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들 시대의 장르관을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서구에서는 헤겔Hegel 이전까지는 장르의 순위를 '극 →서사 →서정'으로 꼽아왔습니다. 다시 말해, 서정은 선량한 시민들을 혼란시 키는 가장 열등한 장르로, 교술은 아예 문학으로 취급하지도 않았 습니다. 그것은 18세기까지 서구문학사를 살펴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저들의 문예이론은 서정시의 추방과 쫓겨나지 않으려는 변명과 방어로 일관되어 왔습니다. 이런 사정은 한자 문화권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0세기 초 서구 문학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시나 수필만 사대부의 장르로 꼽고, 소설은 '소인지배小人之輩의 문학'으로, 희곡은'광대의 문학'으로 꼽아왔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런 장르관이 완전히 불식된 게 아닙니다. 제가 시와 비평과 학문을 택한 것도 어렸을 때 할머니가 양반의 자식은 학문과 시문을 해야 한다는 말씀이 무의식 속에서 작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장르를 같은 관점에서 읽고 쓰려는 사람은 '과거로 가라! 뿅뿅뿅…' 소리를 들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너무 이야기가 길어졌나요? 그럼, 다시 질문을 일발 장진하고 쏩니다. 받아 보세요, 빵! □ 당신은 문학 작품을 탄생시키는 데 참여하는'화자(작가)-화제(작품)-청자(독자)' 가운데 어느 단위를 더 중시하는가? 잠깐!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데 무슨 놈의 '작품'과 '독자'가 참여 하느냐구요? 맞아요. 작품은 작가가 창조해낸 것이고, '독자'는 작가가 쓰는 대로 읽기 마련인데. 그쵸, 이? 치이-, 당신은 '작가중심'의 관점을 지니고 있는 분이군요. 그렇다면 몇 가지만 여쭤보겠습니다. 당신은 작품을 쓰기 전에 혹시 다른 사람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습니까? 읽었다면 그때 무얼 생각 하셨습니까? 이 작품은 차암 좋다, 나도 이렇게 써봐야지 라든가, 이걸 작품이라고 썼어, 나는 이렇게 쓰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하셨겠지요? 그러다가 글을 쓸 때 뭘 생각하셨습니까? 내 글을 읽고 다 른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를 생각해 보셨지요? 그래서 이야기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표현을 가다듬기도 하셨지요? 이게 작품과 독자가 창작에 참여하는 게 아니고 무엇입니까? 하지만, 이 질문은 그리 단순한 게 아닙니다. 화자는 화제의 속성과 청자의 반응을 어떻게 예측하느냐에 따라 담화의 구조와 조직을 전략을 세우기 때문에 질문한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담화는, 그러니까 애인과 하는 말이라든가, 그를 만나러 나갈 때 입는 옷과 화장이라든가, 그와 만나기 위해 선택한 장소, 그리고 화안히 웃는다던가 새초롬한 얼굴 표정 같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를 표 현하려는 담화는 '화자↔화제↔청자'의 상호 관계로 탄생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작가중심'의 관점을 가졌다고 해서 낡은 문인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 시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이런 관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관점은 문학의 시원始原에서부터 지속되어온 것인 데다가, 과거에는 문인들이 독자들보다는 훨씬 더 배운 사람들 이었고, 사회적 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점을 지닌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독자에게 무엇인가 유익한 교훈을 주기 위해 쓴다는 사람들입니다. '시는 사람의 마음 속에 사특邪慝한 생각을 없애 준다'는 공자孔子를 비롯하여, 시인의 의무는 독자에게 교훈을 주는 것이라는 로마 시대의 호라티우스F. Q. Horatius, 입에 쓴 약을 먹기 편하게 꿀을 바르듯 재미로 유익한 사상을 재미로 감싼 것이 문학이라는 시드니P. Sydney, 독자들을 계도하려는 계몽주의啓蒙主義, 현실을 고발하여 개조하려는 대응론적對應論的 사실주의寫實主義, 특정한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쓴다는 목적주의目的主義 문학가 들이 이에 속합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정서를 표현하려는 목적에서 쓴다는 사람들입니다. 플라톤의 '시인 추방론'을 반대하고 모방의 즐거움을 내세운 아리스토텔레스, 예술은 일종의 '놀이'로서 그 자체의 목적에만 적합하면 그만이라며 '무목적無目的의 합목적성purposeless of purposiveness'을 내세운 칸트I. Kant, 문학을 개성의 표현으로 보는 낭만주의자들, 창작이나 독서 행위를 모두 정신적 결핍의 해소를 위한 것으로 보는 현대 심리주의자들이 이런 관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후자는 전자보다 훨씬 뒤에 세력을 얻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생존 자체가 어려운 시대에 표현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 쓰고 읽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사치스러운 일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표현론적 관점이 세력을 얻기 시작한 것은 어느 정도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고급 문화가 보편화된 뒤부터라고 보아야 할 것 입니다. 그런데, '작가 중심'의 관점을 취하는 사람들의 문제점은 하나같이 독자들을 열등한 존재로 보고 교화敎化나 하소연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입니다. 이와 같은 관점을 지닐 경우, 자기가 말하려는 교훈이나 하소연을 강조하기 위해 관념의 과잉 상태에 빠지기가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작가중심의 관점은 20세기로 접어들면서 객관론자로부터 비판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시란 개성의 추구가 아니라 도피라며 '몰개 성 시론沒個性詩論'을 주장한 엘리어트T. S. Eliot와 영미 주지주의자主知主義者들 언어학적 자각에서 출발한 러시아 형식주의形式 主義들과 기호학파記號學派, 이들보다 뒤늦게 출발한 프랑스 구조 주의자構造主義者들입니다. 그들은 아예 작가의 의도를 존중하려는 것을 '의도론적 오류 intentional fallacy'라며 작가의 위치를 부정합니다. 그리고, 작품은 그 자체의 구조structure와 조직texture의 원리를 지니고 있 으며, 그 원리는 작품의 미적 가치와 전체 질서를 유지하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는 견해를 폅니다. 따라서, 이들은 '작품중심'의 관점을 지닌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이와 같이 '작품중심'의 관점이 대두된 것은 '작가중심'이 지닌 약점과 문예이론이 발달했다는 이유 이외에 도, 경제가 발달하고 고등 교육이 보편화됨에 따라 문학을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을 전달할 수 있는 도구로 인식하고 글을 쓰려는 사람들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생산의 과잉으로 인해 작품을 선별하여 전달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문학사회는 두 그룹으로 분열되기 시작합니다. 하나는 비평가들이 특이하다고 인정하는 작품을 쓰고 그를 읽는 그룹이고, 다른 하나는 전통적으로 문학이라고 생각해온 것들만 고집하 는 그룹입니다. 이와 같은 분열은 다시 독자들로 이어져 그들의 시선은 차츰 문학 이외 다른 예술로 시선을 옮겨가고 있습니다. 20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문학관은 다시 '독자중심'의 관점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 시대를 여는 데 앞장을 선 사람들은 독 일의 콘츠탄츠 대학의 교수들입니다.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는 과 정에서 축적된 부조리를 개혁하기 위해 1966년 이 대학이 실험대학 으로 설립되고, 그 이듬해 야누스H. R. Jauss가 불문학 교수로 취임하면서 [문예학의 도전으로서 문학사Literaturgeschichte als Provokation der Literaturwissenchaft]라는 강의를 통해 '문학작품의 예술적 가치는 독자들의 기대지평선期待地平線,Erwartungshorozont을 얼마나 만족시켜 주었는가에 따라 판단되어 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다시 그 다음 해 볼프강 이저가 영문학 교수로 취임하면서 [텍스트의 호소 구조―문학적 산문의 영향 조건으로서 미정성Die Appellstruktur der Texte -Unbestimmtheit als Wirkungbedingung literarischer Prosa)]을 발표하고, 뒤를 이어 바인리히H. Weinrich는 '독자의 기대는 작품 속에 반영되고, 작품은 독자와 대화하며, 문학사는 그 대화의 역사'라는 주장을 펴서 수용미학受容美學이 탄생되고, 미국에서도 이들의 자극을 받아 '독자반응비평reader-response criticism'이 생겨납니다. 하지만, 이들을 진정한 의미에서 '독자중심'의 문학관을 연 사람들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들보다는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해체주의, 후기구조주의자들을 꼽아야 할 것입니다. 수용미학자들이나 독자반응 비평가들은 독자가 문학사회의 주체라는 것을 주장하고 독서 심리를 연구하는 데 급급했지만, 이들은 독자의 다양한 가치관을 수용하기 위하여 다원주의多元主義를 인정하고, 의미signified는 기표signifiant에서 벗어나 떠돈다는 이론을 바탕으로 '작가의 죽음'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작가가 지시하는 대로 읽을 것을 요구하는 '인과적 구성' 대신 독자들이 자기 취향대로 '빈 틈'을 메워가며 완성하는 '비인과적 병렬구성'을 택하고, 몽타쥬, 패스티쉬, 패러디 기법 등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작가나 비평가들보다 더 보수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로 인해 독자들은 이런 관점에서 쓰여진 작품들을 '기괴하다'든지 '무엇을 말하려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문학 작품에는 무엇인가 고정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믿어온 독자들은 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할 경우 불안해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화자-화제-청자'로 이어지는 축 가운데 어떤 단위를 더 중시해야 할까요? '작가중심'요? 에이. 지금 사회는 '정치적 민주주의'에서 '경제적 민주주의'를 거쳐 '문화적 민주주의'로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경제체제 역시 '생산자 중심'에서 '유통자중심'으로, 다시 '소비자 중심'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런 세상에 내가 주는 대로 받아 먹으라고 해서 받아 먹겠습니까? 읽을 테면 읽고, 말 테면 말라면, 쓸 테면 쓰고, 말 테면 말라고 응수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독자들의 비위를 맞추라는 것은 아닙니다. 할 말을 포기하고 독자들의 비위를 맞춰 쓰라면 아마도 글을 쓰는 사람은 몇이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작품은 작품으로서 갖춰야 할 구조와 조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독자들을 설교나 하소연의 대상으로 삼지 말고 작품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이야기하고, 독자도 함께 작품에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간단히 논급할 대상이 아니니 이 연재가 끝날 때까지 계속 논의하기로 하고, 다른 질문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다시 질문 일발 발사합니다. 받으세요. 빵, 빵, 빵! □ 당신은 각 장르의 양식을 고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유동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이 질문 역시 아주 중요합니다. 만일 장르마다 고정된 양식fixed form이 있고, 그에 맞추어 쓰면 그만이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작품은 언제나 일정한 형식을 취하고, 내용에만 치중한 나머지 마침내 설교로 떨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학사에 기록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람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새로운 내용을 찾기 위해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문학에서 새로운 내용이란 거의 없습니다. 연애소설을 예로 들어봅시다. A라는 남자와 B라는 여자의 연애 이야기라고 하면, '서 로 좋아했다', '좋아하다가 헤어졌다', '좋아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세 가지 경우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연애소설은 '어떤 사람'이며, '어디'에서 '어떻게' 만나 어떻게 '되었는가'만 바꾸고, 모티프를 배열하는 플롯과 표현하는 문체만 다를 뿐 이 세 유형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또 문학사에 기록되는 사람들은 적어도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낸 사람입니다. 예컨대, 최남선崔南善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나 주요한 朱耀翰의 [불놀이]만 해도 그렇습니다. 지금 중학생들도 '우르릉 꽝!, 때려라, 부셔라' 정도는 쓸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문학사에 기록된 것은 '학도야, 학도야, 청년 학도야'하고 정형율에 맞추 노래부르던 시절에 이를 파괴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레빈H. Levin이 말했듯이, 장르란 문학적 관습 literary convention과 제도institution의 총화總和로서 고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이 관습적 양식에 지배를 받지만, 또한 그를 초월하여 새로운 양식을 만들 수 있습니다. 아니, 장르의 양식만 바뀌는 게 아닙니다. 이보다는 훨씬 속도가 늦 지만 장르 정신 역시 바뀝니다. 우리가 가장 산문적이라고 하는 신문 기사의 표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과거에는 '롯데팀 몇 대 몇으로 승리'라고 뽑는 것이 관행이었는데, 현대로 접어들면서 '롯데팀'을 '자이언트(giant)'라는 은유적 명칭을 붙이고, 다시 '거인'으로 바꾸어 '거인 **팀을 잔혹하게 유린해'라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문 기사에 시정신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각 장르의 정신과 관습은 어떤 방향으로 바뀔까요? 그에 대한 일차적 해답은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문학사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작품에는 강조되는 차이가 있지만 문학 이 지녀야 할 요소들이 전부 들어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각 작품의 차이는 전경화fore-grounding되는 요소들과 배경화back- grounding되는 요소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며, 전경화된 요소들 은 시간이 흐르면 자동화自動化되어 배경으로 물러나고, 배경의 요소 중 어느 하나가 강조되어 바뀐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낯설게 만들기defamiliarization'의 원리에 입각하여 바뀐다는 것입니다. '전경화'니 '배경화'니 '자동화'가 무슨 뜻이냐구요? 예, 전경화는 작품 안에서 초점을 받아 강조되는 것을, 배경화는 별로 주목을 끌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동화는 친숙해져 주목을 끌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걸 말합니다. 그러니까, 연애를 할 때는 상대가 홍차를 마실까, 커피를 마실까, 커피라면 블랙일까, '웨딩wedding'일까, 웨딩이 뭐냐구요? 결혼식 피로연에서 설탕과 프림을 한 스푼 반씩 타서 주는 커피 있잖습니까, 아무튼 그런 것까지 호기심을 가지고 관찰하지만, 결혼 후는, 그러니까 친숙해진 뒤에는 어지간한 일에도 신경을 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견해만으로는 각 장르가 어느 방향으로 이동하는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의 관점은 무조건 싫증이 나면 어느 한 요소가 전경으로 나선다고 것으로서, 진행의 방향 을 밝히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미래에는 앞에서 말한 '화자(작가)-화제(작품)-청자(독자)' 가운데에 어느 단위를 더 중시될 것인가와, 각 장르를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어떤 요소가 부족한가를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해답은 이미 말한 것 같군요. 미래는 '독자중심'시대이고, 서정적 장르는 사상이나 사실감을 표현하기가 어렵고, 서사는 함축성과 서정성이 부족하다는 걸 말씀 드렸으니. 그렇습니다. 각 장르는 독자를 중시하면서 그 장르에 부족한 요소들을 다른 장르에 서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아 니 10년 이내로 문학 전체는 기호만으로 이뤄진 추상성을 극복하 기 위하여 시각이나 청각적 요소들을 받아들여 멀티 아트multi-art 로 바뀔 것입니다.     2. 당신의 시 속에는 이 등장합니까, 이 등장합니까? 피이, 그것도 질문이라고 하느냐구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 체면을 봐서 그냥 대답해 보세요. 시인 자신을 등장 시킨다구요? 히히히…. 땡입니다. 만일 이제까지 그런 방식으로 써왔다면 고급 독자들로부터 낡았다고 외면을 당했어도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서정 장르는 화자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하여 탄생된 장르이고, 그래서 을 채택하고, 모든 사람들이 시인을 등장시키는 장르라고 믿어 왔으니까 말입니다. 이와 같은 서정 장르에 의 개 념이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현대로 접어들어서부터입니다. 그리 고, 그 이전의 작품도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결코 작가 자신이 등장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이 문제를 좀 더 정확히 알아보려면 먼저 일상적 담화의 구조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러시아 형식주의 문학이론을 출발시킨 사람 중 한 사람인 야콥슨(R. Jakobson)에 의하면, 일상적 담화는 의 역동적 관계에서 탄생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관계를 문학에 대입시키면 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학적 담화, 특히 이나 는 에 해당하는  속에 작가가 꾸며낸 인물들이 등장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다시 말해,  속에 다시 가 들어있고, 그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고 행동하는 것을 독자가 엿보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를 좀 더 알기 쉽게 그리면 다음과 같이 그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서정 장르도 등장 인물이 제한되고, 청자는 그냥 듣기만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날 뿐, 마찬가지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낡았다고 치부하는 김소월(金素月)의 [진달래꽃]만 해도 그렇습니다. 김소월은 남자 시인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싫어떠나는 님에게 꽃을 뿌릴 테니 '사뿐히 즈려 밟고' 가라고 애원하는 여성화자(女性話者)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아니, '내 님이 그리워 밤 늦게 울며 쏘다닙니다'라는 고려 시대의 [정과정곡(鄭瓜亭曲)]도, 임금님을 님으로 비유한 조선 시대 정철(鄭徹)의 [사미인곡(思美人曲)]과 [속미인곡(續美人曲)]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문학의 3대 장르인 시·소설·희곡 등은 를 채택하고, 작품 속에 다시 가 들어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작품 속의 화자를 완전한 허구(虛構)의 산물로 보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리고 작가 자신이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교술적 장르도 정도 차이가 날 뿐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 하여 꾸며 쓴다 해도 결국 작가의 경험을 재구(再構)한 것에 불과하고, 사실대로 쓰려 해도 그 작품의 목적과 구조에 맞추어 수정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실대로 쓴다고 믿는 일기(日記)를 살펴보아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기를 쓸 때에는 그 당시에 그렇게 생각하지않은 것들도 그렇게 생각한 것처럼 부분적으로 꾸미고, 어떤 부분을 강조하거나 약화시킵니다. 따라서 문학 작품 속의 화자는 시인 자신의 반영도 아니고, 허구적 존재도 아닌 의 절충적 존재(折衷的存在)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이론일 뿐, 을 내세운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무엇이 그리 잘못되었냐구요? 네에, 그건 제가 질문하려 했던 건데, 독자들이 먼저 하셨으니 대답할 수밖에 없군요. 우선 시인 자신이 작품 속에 등장한다고 믿으면 화제를 제한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가 경험한 것이 아니면 작품으로 쓸 수 없을 뿐더러 자신을 등장시키면 자신을 돋보이도 록 만들고 싶어하는 심리 때문에 고상하고, 우아하고, 진지하고, 영웅적인 화제만 택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작품 전체를 통일시키기 어려워진다는 게 문제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도 남의 이야기 처럼 하면 훨씬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왕 꾸미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시간적 공간적 배경은 물론, 거리와 어조, 어법, 어휘까지 조절할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허구적 화자를 택할 경우 자전적 화자를 택할 때보다 의미적 국면에서부터 조직적국면에 이르기까지 훨씬 유기적인 작품이 될 수 있습니다.머뭇거리다가는 여러분들이 다시 질문하실 테니, 먼저 질문하겠습니다. 자아, 받아보세요. 뿅! □당신은 를 설정할 때 무얼 먼저 염두에 두십니까? '그냥 대충…'이라구요? 그러시겠지요. 작품 속에 자신이 등장해야 한다고만 믿어 왔으니까. 제일 먼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자기가 쓰려는 작품의 주제에 적합한 인물의 ··입니다. 어떤 계층의 인물을 선택했느냐에 따라 화제는 물론 시적 공간·어조·시어· 시 의 형태 등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가령 시골 여자 어린이로 정했다고 합시다. 이런 화자를 선택하 면, 성이라든지 폭력 같은 화제는 다룰 수 없습니다. 소설의 경우이긴 하지만, 주요섭(朱耀燮)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만 해도 그 렇습니다. '옥희'라는 어린 여자 아이를 등장시켰기 때문에 어머니가 사랑방 손님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이 빨개지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른 요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가운데 무엇보다 먼저 유의해야 할 것은 화자의 성(性)입니다. 성에 따라 지켜야 할 화자의 특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시의 의미적 국면   ⅰ) 화자의 태도와 정서 : 남성화자를 등장시키면 대상으로부터 독립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면서 이성적(理性的) 능동적(能動的)으로 대응하는 태도를, 여성화자를 등장시키면 대상과의 관계를 중시하면서 보살핌의 원리로 감성적(感性的) 수동적(受動的)으로 대응하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ⅱ) 화제의 성격 : 남성화자를 등장시키면 국가 사회 윤리 같은 공적(公的) 추상적(抽象的) 화제를, 여성화자를 등장시키면 이별 사랑 아름다움 같은 사적(私的) 구체적(具體的) 화제를 택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② 시의 형식적 국면   ⅰ) 시형과 율격 : 남성화자를 등장시키면 상대적이지만 자유율(自由律)의 경우 자유분방한 시형을, 여성화자를 등장시키면 정제된 시형을 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정형율(定型律)의 경우우 남성화자는 4음보처럼 균형적(均衡的)이며 대응적(對應的)인 음보를, 여성화자는 3음보처럼 가변적(可變的)이며 대응된 짝이 없는 음보를 택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ⅱ) 음성 조직 : 남성화자를 택하면 기능적이고 소박한 음성을, 여성화자를 택하면 섬세하고 장식적인 음성을 택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물론,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 여성 독자들은 상당히 불만스러워할지 모르겠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여성주의자들이 남성중심주의적 인 가치관을 담고 있다고 해서 반대해온 프로이드(S. Freud)와 융 (C. G Jung)의 분석심리학(分析心理學)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석심리학만 참조한 게 아닙니다. 남성화자의 '대상으로 부터 독립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면서'라는 조건이나, 여성화자의 '대상과의 관계를 중시하면서 보살핌의 원리'로 행동한다는 조건은 길리건(C. Gilligan)을 비롯한 여성 심리학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좀더 생각해보면 여성심리학자들의 주장은 같은 특징을 달 리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대상으로부터 독립하여 옳고 그름을 따질 경우에는 능동적이고 이성적일 수밖에 없으며, 관계를 중시하고 관계되는 것들을 아낄 경우에는 자연히 수동적이고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배우자의 바람에 대한 반응을 가지고 생각해봅시다. 남자든 여자든 그런 기미를 눈치채면 분노하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 와이셔츠 깃에 묻은 루즈 자욱을 보고도 용서하는 것은 내가 이혼하면 어린 자식들은 누가 돌보나, 친정 어머니는 얼마나 상심하실까, 친구들이 뭐라고 수군댈까를 생각해서 참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타자와의 관계를 생각하고, 그들에 대한 '보살핌의 윤리(ethic of care)'로 행동하기 때문에 참는 것입니다. 그리고, 맨 날 늦게 들어오는 남편이 아내의 늦은 귀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 잘못은 돌아보지 못하고 아내의 일이 옳은가 그른가만 따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차(性差) 무시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 차이를 인정하되 나름의 가치를 지녔다고 받아들이는 의식구조가 더 중요합니다. 다시 본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작품 속의 화자는 이와 같은 성적 특질을 그대로 반영해야 자연스러워집니다. 그것은 다음 김소월의 작품들을 비교해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 [진달래꽃] 1, 2연 ⓑ마소의 무리와 사람들은 돌아들고, 적적(寂寂)히 빈 들에 엉머구리 소리 우거져라. 푸른 하늘은 더욱 낮춰, 먼 산(山) 비탈길 어둔데 우뚝우뚝한 드높은 나무, 잘 새도 깃들어라. 볼수록 넓은 벌의 물빛을 물끄러미 드려다 보며 고개 수그리고 박은 듯이 홀로 서서 긴 한숨을 짓느냐. 왜 이다지! - [저녁 때] 1.2연ⓐ는 상대가 '님'인 점으로 미루어 여성화자로, ⓑ는 '-어라'와 같은 남성적 어미를 택한 점으로 미루어 남성화자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비슷한 시기에 쓰여졌고, 시인 자신이 골라 시집 {진달래꽃}에 수록한 작품인데도 전혀 다른 특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화제를 살펴보면, ⓐ는 개인적인 사랑을 다루는 반면에, ⓑ 는 일제(日帝)의 토지 수탈 정책에 의해 농토를 빼앗긴 농민의 문제인 공적·사회적 화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는 님이 떠 나는 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변함없는 사랑을 다짐하는 반면에, ⓑ는 한숨을 지으며 물끄러미 바라보는 행위를 통해 땅을 빼앗긴 것이 과연 정당한가 따지려 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앞에서 지적한 특징 그대로 들어맞고 있지요? 그리고, 형식과 율격 면에도 역시 달라지고 있습니다. 두 작품 모두가 4연시지만, ⓐ는 하나의 율행(律行)을 2개의 층량(層量) 3보격으로 나누고, 2개의 율행(律行)을 한 연으로 구성하여 정형성이 강하게 드러납니다. 반면에, ⓑ는 각행이 2음보(音步)에서 6음보 사이를 불규칙하게 넘나들면서 자유시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가 대응(對應)되는 짝이 없는 3보격을 규칙적으로 택한 것은 여성의 가변적(可變的)이면서도 정제된 정서를 나타내기 위해서 이며, ⓑ가 자유시 형식을 택한 것은 남성의 자유분방하면서도 격렬한 정서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이런 차이는 시어와 통사 구조(統辭構造)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국어에서 화자의 행위와 정서를 잘 드러내는 문장성분은 서술어(敍述語)입니다. 이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는 전(轉) 의 '가시옵소서'를 제외하고 '보내드리우리다'·'뿌리우리다'·'흘리우리다'와 같은 극존칭(極尊稱) 종결어미와 음성모음 및 활음조 현상(euphony)이 우세한 시어들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술어를 수식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는 '-져라'·'-어라'·'-느냐'와 같은 오연(傲然)한 어미와 투박하고도 실용적인 어휘들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푸른 하늘은 더욱 낮춰, 먼 산 비탈길 어둔데/우뚝우뚝한 드높은 나무, 잘 새도 깃들어라'와 같이 행 가운데 쉼표를 찍고, '긴한숨을 짓느냐. 왜 이다지!' 같은 구절에서는 도치법(倒置法)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가 극존칭 어미를 선택한 것은 청자(님)가 화자(나)보다 상위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음성모음이 우세한 어휘를 선택한 것은 화자의 서럽고도 어두운 심정을 반영하기 위해서이며, 활음조 현상이 일어나기 쉬운 어휘를 선택하고 통사 구조를 정제시킨 것은 이별의 순간에도 아름답게 보이려는 여성적 태도를 반영이 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가 거친 문장과 실용적인 어미를 택한 것은 남성화자의 자유 분방한 성격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작품은 화자에 따라 의미적 국면에서부터 조직적 국면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정됩니다. 그러므로, 각 유형의 화자가 어떤 기능을 지니고 있는가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면, 그리고 화자에 맞춰 모든 것을 조정할 수 없다면 결코 좋은 시인이 될 수 없습니다. 자아, 이번 문제는 좀 까다운 질문을 해볼까요? 준비하시고, 받아 보세요. 쾅! □당신이 채택한 화자는 언제나 명백하고 단정하게 말합니까, 아니 면 때때로 흐트러지는 수도 있습니까? 그야 명백하고 군더더기 없이 써야 되는 게 아니냐구요? 땡, 땡, 땡. 또 틀렸습니다. 그럼 달리 여쭤보겠습니다. 어린애가 유리창을 깨뜨렸다고 합시다. 그래서 '누가 깨뜨렸어?'하고 고함치자,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큰 소리로 '제가 깨뜨렸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기막히겠지요? 또 정말로 좋아하는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한다고 합시다. 논리 정연하게, 그리고 청산유수격으 로 이야기하면 오히려 거짓말처럼 들리겠지요? 말은 아무 때나 명백하게 하는 게 아닙니다. 때로는 군더더기가 있고, 더듬는 게 더 진실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시 속의 화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앰프슨(W. Empson)의 '다의성(ambiguity)의 이론'에 의해 비로소 논리화된 것이긴 하지만, 이렇게도 해석되고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는 작품이 우수한 작품이고, 서정 장르는 장르 자체가 그런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시의 기본 어법인 비유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녀는 아름답다'라는 말을 '꽃'이나 다른 것으로 치환(置換)하여 얼른 알아듣지 못하게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왜 사람을 식물의 기관인 꽃으로 비유했는가를 생각하고, 여자의 아름다움, 연약함, 열매를 맺을수 있는 생식성(生殖性) 등을 떠올릴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여자가 아름답다고 아무리 직접 이야기한들 독자 는 예사로 들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동화(automatic)'되어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비유를 통해 낯설게 하기(defamilarization)를 시도하는 것입니다. 우선 명백히 말하지 않아야 할 경우는 두 가지를 상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화자가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감성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청자가 화자보다 상위라서 직설적으로 말하면 역효과가 나타나리라는 판단에서 속셈을 감추는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이럴 이 경우 화자가 겉으로 말하는 와 로 분열됩니다. 그리고, 역설(pardox)나 반어(irony)의 어법을 채택합니다. 앞에서 인용한 [진달래꽃]의 경우만 해도 그렇습니다. 보내고 싶어 보낸다는 게 아닙니다. 떠나려는 님은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라고 역설적으로 말했다 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3연에서는 꽃을 뿌릴 테니 '밟고' 가라 고 한 것으로 미뤄어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자기가 버린 여자가 뿌리는 꽃을 밟고 갑니까? 그러니까, 표층적 화자는 가 라고 했지만, 심층적 화자는 가지 말라는 게 이 작품의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보내겠다고 말했지만 자신도 보낼 수 없고, 가겠다고 하지만 님도 갈 수 없다는 걸 알고 그렇게 말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말했다면, 이 작품은 아이러니 어법을 채택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 역시 표층과 심층의 화자는 분리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니, 이 작품은 이렇게만 해석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무수하게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한번 이제까지 다른 사람들이 해석한 것과 제 나름대로 해석한 것을 열거해 볼까요? ⑴내가 이토록 사랑하는데도 떠날 수 있느냐는 고도 수법의 만류.   ⑵'진달래꽃'이 화자 자신의 상징물이라고 할 때, 나를 밟고 가라는 뜻으로 절대 못 보내겠다는 반어적 표현. ⑶내가 싫어 떠난다면 눈물을 흘리기는커녕 죽어도 안 붙잡겠다는 프로이트 식의 오기(傲氣) 또는 실언(失言). ⑷화자가 님이 없는 사람이라면, 나는 싫다고 떠날 때 꽃까지 뿌려 줄 정도로 착한 사람인데 왜 날 사랑하는 사람이 없느냐는 자기 선전. ⑸떠날 때는 막지 않을 테니 함께 있는 동안만은 마음놓고 사랑해 달라는 현실주의적 책략. ⑹떠날 때 깨끗이 보냄으로써 잊지 못하여 되돌아오게 만들겠다는 [가시리]식 계산. ⑺남녀간 사랑은 한번 깨지면 울며 매달려도 회복되지 않으니 차라리 깨끗이 보내자는 체념. ⑻어쩌면 발생할지도 모르는 미래의 이별할 때의 가정해본 자기 태도. ⑼이별은 꿈도 꾸지 않으면서 만발한 진달래꽃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을 순순하게 받아들이겠다는 사랑의 표현. ⑽여성의 무의식 속에 숨겨진 피학적 욕구. 시를 읽는 재미는 이렇게 해석할 수 있고, 저렇게 해석할 수도 있는 구절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완성하는 데 있습니다. 명백한 시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만이지만, 모호한 시는 자기 나름대로 상상력을 발휘하고 완성하는 기쁨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명백한 시가 좋다는 것은 자기 생각을 명백하게 전달하여 설득하려는 시인의 욕심일 뿐, 독자나 문학적인 입장에서는 결코 상찬할 만 한 게 못됩니다. 군더더기가 끼어 있는 것이 자연스럽게 보일 경우는 화자가 격정에 빠졌을 때입니다. 일상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논리 정연 하게 말하던 사람도 다급하거나 격정에 빠지면 횡설수설하고 어법 에 맞지 않게 말하는 것이 보통입니다.시적 담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행과 연을 비슷한 길이로 나누고 표준적인 어법을 준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화자가 격정에 빠졌을 때에는 형식이 흐트러지고 어법에 어긋나게 표현해야 더 실감이 납니다. 라이트(G. T. Wright)는 이와 같은 점을 염두에 두고, 정상적 정서 상태의 화자는 , 격정에 빠졌을 때의 화자는 로 나누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의 실수로 나타나는 문장의 혼란과는 구분해야 합니다. 그리고 작품의 첫머리부터 원시화자를 등장시키는 것도 고려해 봐야 합니다. 먼저 문명화자를 등장시키고, 정서가 격앙하는 과정을 그려 준 다음, 원시화자를 등장시키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담화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에서 원시화자를 구사하여 성공한 예로는 서정주(徐廷柱)의 초기시 가운데 [화사(花蛇)]를 비롯한 몇 편을 들 수 있습니다. 좀더 자세한 분석이 필요하니 번호를 붙여가며 인용해 볼까요? ⓐ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 아름다운 베암… ⓒ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여났기에, 저리도 징그라운 몸둥아리냐. ⓓ 꽃다님 같다. ⓔ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든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 소리 잃은 채 낼룽그리는 붉은 아가리로 ⓖ 푸른 하눌이다…물어뜯어라, 원통히 무러뜯어, ⓗ 다라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麝香) 방초(芳草)ㅅ길 ⓙ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 우리 할아버지의 안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 석유(石油) 먹은 듯…석유(石油) 먹은 듯…가쁜 숨결이야 ⓜ 바늘에 꼬여 두를까부다. 꽃다님보단도 아름다운 빛… ⓝ 크레오파투라의 피먹은양 붉게 타오르는 고흔 입설이다…슴여라! 베암. ⓞ 우리 순네는 스믈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흔 입설…슴여라! 베암. ⓐ에서 ⓓ까지는 문명화자의 발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터는 갑자기 기독교 신화인 에덴 동산의 전설을 이야기하고,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결합도 일상적 감각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다 시 말해 원시화자의 발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곱다'의 보조관념으로 동원한 '피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이나 '고양이같이 고흔 입설(ⓞ)'만 해도 그렇습니다. 피먹은 입술은 징그럽고, 고양이 같은 입술은 야옹하고 할퀼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아름답다는 의미를 보조하기 위해 차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뱀을 무슨 헝겊처럼 바늘에 꼬여 두르고 싶어하며 (ⓜ), 액체처럼 입술로 스며들라고 명령하는 것(ⓝ,ⓞ) 역시 비논리적입니다. 이와 같이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폭력적(暴力的)으로 결합한 것은 화자의 정서 상태가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유사성 여부를 따질 만큼 이성적인 상태가 아님을 의미합니다. 뿐만 아니라, 통사 구조 역시 뒤틀린 상태입니다. '너희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 내던 달변의 혓바닥(ⓔ)'이라는 구절 뒤에는 그 상태가 든지, 라는 서술부(敍述部)가 와야 합 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소리를 잃은 채 낼룽거리는 붉은 아가리로(ⓕ)/푸른 하늘이다…물어뜯어라, 원통히 무러뜯어(ⓖ)'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ㅅ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이라는 구절 뒤에는 무엇 때문이라는 이유가 와야 하는 데 '석유 먹은 듯…석유 먹은 듯…가쁜 숨결이야 (ⓛ)'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 연이나 행의 배치에서도 혼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서 ⓓ까지는 각 행을 완결된 의미로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터는 한 연을 하나의 문장으로 짜는가 하면, 한 행의 길이를 2음보 에서부터 7음보까지 불규칙하게 구성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화자의 정서가 적당한 단위로 의미를 분절할 만큼 이성적 상태가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에서 ⓓ까지는 이성적인 문명화 자가 지배하고, ⓔ에서 ⓜ까지는 원시화자가 등장하기 시작하며, ⓝ 이후는 완전히 원시화자가 지배하는 곳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시적 담화는 적절한 비유와 완전하고 매끄러운 문장만이 시의 주무기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아어(雅語)와 율문(律文) 중심의 고전적 시어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서,상황에 따라 군더더기를 남겨두고 흐트러트릴 수 있어야 최고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런 방식을 이론으로 설명하고 있는 저 자신조차도 매끈하게 다듬는 습관이 있어 항상 작픔을 자신도 모르게 다듬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질문 하나만 더 하고 이번 호는 마칠까요? 장진했습니다. 받으세요. 빵! □당신은 현대시에 주로 채택되는 화자가 어떤 유형이며, 이들의 문제점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논의한 화자의 유형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건 제가 정리해 드릴 테니 답변을 준비해 두세요. 시인과 관계에 따른 유형 :  신분에 따른 유형 : , , ,  담화의 담당 층위에 따른 유형 :  정서 상태에 따른 유형 :  글쎄요, 잘 모르시겠다구요? 화자의 변천사(變遷史)를 살펴보면, 시인과 화자 관계의 경우 인 에서 출발하여 인  쪽으로 이동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바뀐 것은 문학 작품을 자아의 표현으로 보던 고전적 관점이 오락성이나 미적 탐구 쪽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신분을 살펴보면 으로, 성은 으로 이동해 왔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작품 속의 주인공들이  쪽으로 하강해 왔다는 프라이(N. Frye)의 지적이나, 고대로 올라갈수록 남성 시인이 여성화자를 택하여 노래하는 작품이 드문 반면에 현대시로 내려올수록 여성화자를 빌어 노래하는 작품이 늘어가는 점을 미루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하강 현상은 모든 장르에 나타나는 것으로서, 사실감(reality)을 강화시키기 위한 노력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에 따른 이동 방향은 리얼리즘의 강화라는 이유로는 설명이 부족합니다. 남성이 이성적이고 여성이 감성적이라고 할 때, 리얼리즘은 이성주의를 배경으로 탄생되는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일부에서는 현대시의 여성화 경향을 한국 문학에는 여성화의 전통이 있었고, 그것이 현대에 재현되고 있다든가, 일제(日帝)의 강압적인 파시즘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소극적 여성주의(女性主義)를 택한 것이 체질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비단 우리 문학에만 나타나는 게 아닙니다. 세계 각국의 시들이 대체적으로 여성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다 보편적인 현상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경 제의 발달에 원인을 찾는 게 보다 타당할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기초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 재화(財貨)를 소비하던 것이 자기의 사회적 신분을 표시한 로 바뀌고, 그로 인해 실용성(實用性) 이나 기능성(機能性)보다 장식성(裝飾性)과 세공성(細工性)을 중시하는 문화가 형성되면서 남성적 특질인 사상과 교훈보다 정서와 섬세함을 강조하는 여성 화자 중심의 작품이 증가했다고 보아야 할것입니다. 한편 화자의 분열 방향은 아이러니를 중시하는 낭만주의 시대부터 로, 초현실주의 시가 등장한 뒤부터 와  쪽으로 이동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적 인물의 이동 방향은 전인성(全人性)을 상실하고 비인간화(非人間化) 내지 해체화(解體化) 쪽으로 진행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이동의 원인은 더 이상 진로가 막힌 리얼리즘 문학이 심리학의 도움을 받아 의식의 밑바닥에 숨겨진 인간상을 등장시키는 방법으로 돌파구를 찾으려 한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하여 문학사 속에서 독자적 위치를 확보하려는 작가들에 의해 가속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해체 작업은 바람직한 방향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문학작품이 사회보다 앞서 인간성을 해체하는 것은 문학의 본래 목적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독자와 작가의 관계를 파괴하고, 자아와 사회의 해체를 촉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미 변해버린 독자의 감수성을 무시하고 과거로 돌아갈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현대 시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전자아(全自我)를 대변할 수 있는, 그러니까 의식과 무의식, 이성과 감성, 도덕과 욕망 등을 모두 대변할 수 있는 화자를 발견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3. 풀을 뜯던 송아지조차 하늘을 바라보며 시심을 기르는 가을이 깊어 가고 있으니 이번에는 시의 화제(話題)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화제의 유형을 내용에 따라 나눕니다. 문학의 경우, 농촌소설이니, 심리소설이니, 역사소설이니, 연시(戀詩)니 해양시(海洋詩)니 풍자시니 하는 분류가 그런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분류는 매우 자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양시'를 인정하면 '도시시(都市詩)'나 '농촌시(農村詩)'를 인정하고, 다시 '중산간(中山間) 시'니, '종로(鍾路) 시'니 하는 것들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콥슨(R. Jakobson)은 화제의 유형을 지향성(志向性)에 따라  으로 분류합니다.이를 시적 담화와 연결할 경우, 시란 결국 내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기 위한 장르이므로, ··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하면 지향성의 유형은 이 세 가지만 있는 게 아닙니다. 와 가 등장하고 에 대해 이야기하는 유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화자가 주로 이야기하되 청자가 간혹 틈입(闖入)하는 유형으로서, 가 전부 등장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이 유형을 이라 고 부르기로 한다면, 지향성에 따른 유형은 모두 4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화제의 특질은 지향성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게 아닙니다. 그보다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입니다. 같은 지향형을 택해도 초점(focus)이 달라지면 전혀 다른 담화가 되기때문입니다. 시적 담화의 경우 초점의 유형은 크게  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관념형은 화자가 감성(感性)을 통해 획득한 의미나 정서를 표현하는 대 초점을 맞춘 유형을 말합니다. 문예사조상으로는 낭만주의 시, 신비평의 지도자인 랜섬(J. C. Ransom)의 분류에 따르면 '관념시(platonic poetry)'가 이 유형에 해당합 니다. 그리고, 즉물형은 관념형과 반대으로 이성적 인식을 통해 발견한 물질적 외관(外觀)을 그리는 데 초점을 맞춘 유형을 말합니다. 문예사조 상으로는 이미지즘, 신비평의 분류에 따르면 즉물시 (physical poetry)가 이 유형에 해당합니다. 또 무의식형은 이성적 통제를 풀 때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무의식적 심상들을 받아쓰기 하듯이 자동 기술(automatism)하는 유형을 말합니다. 문예사조상으로는 초현실주의 시가 이에 해당하고, 우리 나라에서는 1930년대 이상(李箱), 1940년대의  동인들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호적 상징(signal symbol)은 대상의 의미나 모습을 배제하고, 추상적인 논리에 의하 여 재편성한 것에 초점을 맞춘 유형을 말합니다. 입체주의(Cubism)·미래주의(Futurism)·다다이즘(Dadaism) 시인들이 실험적으로 쓴 '구체시(concrete poem)', '음향시(poem sonora)', '꼴라주(collage)와 몽타쥬(montage)의 시', '추상시(abstract poem)', '침묵시(dumb poem)'에서 발견되는 초점입니다. 우리 나라 에서는 이상(李箱)의 일부 작품을 꼽을 수 있습니다. 자아 그럼 질 문합니다. 준비하세요. 뿅뿅뿅 ▣당신은 어느 지향성의 화제를 즐겨 택하십니까?   그야 두말할 것 없이 이라고요?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우리 나라 시인 가운데 90%가 이 유형을 택하고 있으니까요. 이런 지향형을 채택하면, 표현의 기능이 강화되고, 독자로부터 공감을 받기 쉽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첫째로, 시의 화제가 매우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화자 지향형을 택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이야기를 쓴다는 이야기가 되고, 인간은 누구나 자기를 우아하고 고상하고 진지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하여 그런 제재들만 고르기 때문입니다. 이 유형을 택하되, 김동리의 [등신불]이나 주요섭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처럼 허구적 화자를 등장시키면 어떠냐구요? 네에, 그러면 좀 낫겠지요. 하지만, 완전히 자유롭기는 어렵습니다. 독자들은 여전히 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자유로울 수가 없을 겁니다. 또 하나 약점은 감정이 고조되어 구조적으로 허약해지고, 감상(感傷)에 떨어지기 쉽다는 점입니다. 다음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봄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운 줄도[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김소월,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앞부분 이 작품의 화제는 예전엔 내가 당신을 그토록 사랑하는 줄 몰랐다는 후회와 그로 인해 복바쳐 오르는 슬픔입니다. 따라서, 자기 생각과 느낌을 이야기하기 위한 화자 지향형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느낌은 외부로부터 어떤 자극을 받거나 과거에 대한 회상 또는 미래에 대해 전망할 때 발생합니다. 그로 인해 현재의 자극을 대상으로 삼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  를 되돌아보거나 를 상상하면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구조를 취하게 됩니다. 이때 현재의 나는 , 과거나 미래의 나는  가 됩니다. 그리고, 현재보다 과거나 미래가 더 이상적으로 그려지 면서, 회고적(回顧的) 영탄적(詠嘆的)·감상적(感傷的) 어조를 띠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 작품에서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라는 반복적인 구절이 그런 곳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반복은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무의식에서는 그쪽으로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상황이 변했음을 인정하면서 고착적(固着的) 정서를 보이는 걸 감상주의(sentimentalism)라고 한다면, 이 유형은 근본적으로 감상성을 바탕에 깔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럼 은 어떠냐고요? 청자 지향형은 에 대한 이야기로서, 라든지, 는 식의 의문 명령 애원 요청 호소의 성격을 띠는 화제를 말합니다. 구 조상으로는 와 로 나눠집니다. 이런 화제는 화자 지향형보다도 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화제로 제한된다는 단점을 지닙니다. 남에 대한 판단이나 요구는 객관적이고 윤리이며 관습적인 범위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결 강렬하고도 단순한 어조를 택합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 요구를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행동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강렬한 어조로 단순하게 말하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현대로 접어들면 서, 연시(戀詩), 조시(弔詩)나 축시(祝詩), 정치시(政治詩)를 제외 하고는 이런 지향형을 택하는 작품이 드문 것도 바로 이런 단점 때문입니다. 다음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에서 이 작품의 의미는 와 로 나눠집니다. 그리고 그 '껍데기'는 거짓된 인간들 이거나 그들이 만들어 낸 제도(制度)와 같은 불특정한 것들로서,화자가 청자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섭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청자 지향형은 청자와의 관계에 따라 화자의 어 조와 태도가 달라집니다. 화자가 상위(上位)에 설 때에는 직설적인 어법과 강압적 자세를 취합니다. 앞의 작품이 강압적이면서도 명령적인 어법을 택한 것은 화자가 청자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서 있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위(下位)에 설 때에는 아이러니를 비롯하여 역설 같은 완곡(婉曲) 어법을 택하고, 직설적인 어법을 택할 때도 간절하게 청원하는 형식과 화려하고 수식적인 문체를 택합니다. 그리고 아예 신처럼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일 때에는 기도·찬송·애원의 태도를 취합니다. 그것은 가급적 청자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화자의 의도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현대로 접어들면서 채택하기 시작한 유형은 입니다. 이 유형은 청자(독자)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그에 대한 판단은 청자가 내리도록 하는 형식으로서, 라는 형식을 취합니다. 그리고, 문맥의 표면에서 화자와 청자가 잠재되고, 정서적 표현과 의미 부여를 억제한 채 카메라로 사물을 포착하듯 이미지화합니다. 다음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햇살은 모두 둑 밑에 내려와 있다 미루나무 가지 사이로 강 바람이 분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시골 청년 자전거 바퀴 살에 햇살이 실려서 돌아간다 그 바퀴 살 사이로 투명한 강 얼마쯤 걸었을까 미루나무도 가고 있는지…… 미루나무는 조금씩 작아져 갔다 - 한성기(韓性祺), [둑길.1] 전문 이 작품에서 화자는 걷고 있는 둑길에 대해 어떤 의미나 정서도 부여하지 않은 채 걷고 있다는 사실과 둑길을 풍경만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풍경들이 화자의 시선을 거쳐 들어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잠재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보가 주관적이라 는 인상을 띨 경우 신뢰를 잃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화제 지향형이라고 해도 화자의 정서가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이 어떤 화제를 선택하든 것은 근본적으로 자기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대부분의 사실들은 은유적 형태로 제시됩니다.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화자는 '청년'과 '강'과 '미루나무'를 뒤에 두고 한없이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두고 떠날 수밖에 없는 노년의 쓸쓸한 감정을 은유하기 위한 객관적상관물(相關物)에 해당합니다. 은 1인칭 지향형의 정서와 의미 부여 기능, 2인칭 지향형의 상대에 대한 요구와 명령 기능, 3인칭 지향형의 객관적 자세와 이미지화 기능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어 작중 상황이 연극처럼 환하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자칫하면 너무 길어지고, 산문으로 떨어지기 쉽다는 단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음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거리에서 우연히 아내를 만난다. 나는 일부러 모른 척하고 지나간다. 아내는 등 뒤에서 [여보, 여보!]하고 쫓아온다. 그래도 나는 모른 척하고 지나간다. (내가 인정하지 않는 한 어째서 저 여자가 내 아내란 말인가?) 저녁 상을 가운데 놓고 아내와 마주 앉았다. 갑자기 서베이어 1호처럼 난데없이 사뿐히 착륙하는 얼굴. [바로 저 얼굴입니다!] [뭐가 저 얼굴이예요?] [아니, 서베이어 1호의 달 연착(軟着) 말이야] 이제는 신비의 베일도 벗겨지고 대재벌(大財閥)의 몰락처럼 쓸쓸한 얼굴 달. - 김윤성(金潤成), [아내의 얼굴] 전문 이 작품에서 화자는 아내를 만났는데, 모르는 척하고 그냥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여보, 여보!' 부르며 뒤따라오자 '내가 인정하지 않는 한 어째서 저 여자가 내 아내란 말인가?' 독백합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무심코 아내의 얼굴이 '서베이어 1호'의 착륙으로 인하여 신비를 잃은 달 같다했다가 아내가 묻자 인공 위성 이야기라고 둘러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의 삼자 관계를 고루 지향하는 극적 지향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앞에서 인용한 어떤 작품보다 한결 깁니다. 그리고, '내가 인정하지 않는 한 어째서 저 여자가 내 아내란 말인가'라는 관계와 본질에 대한 철학적 질문, 라는 은유의 축이 없으면 산문으로 떨어졌을 것입니다. 종래의 시에서 극적 지향형을 택한 작품이 드문 것도 이런 약점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단점만 극복할 수 있다면 가장바람직한 유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아, 또 하나 질문을 해볼까요? 당신의 시가 현대적인가 여부를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질문이니 잘 판단하고 대답하십시오. 준비하시고, 쏩니다. 쾅! ▣당신은 선택한 화제의 어디에 초점을 맞춰 써오셨습니까 시란 '시인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장르'이니, 당연히 의미나 정서를 표현하는 데 초점을 맞춰 써왔다고요? 그렇다면 그 정서와 사상은 당신만이 발견한 것이었나요? 그렇지는 않다구요? 그렇겠지요. 과학에는 새로운 발견이 있지만, 사상이나 감정은 새로운 게 없는 법이니까요. 가령, 사랑에 대한 감정만 해도 그렇습니다. 구애나 결혼의 풍습은 시대와 민족에 따 라 차이가 나지만, 아득한 옛날의 원시인도 아프리카 오지의 깜둥이 처녀도 우리처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귓볼이 빨개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가까이 가고 싶은 것은 마찬가지니까요. 사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박애(博愛), 공자님의 인의예지(仁義禮智) 사상은 그분들이 처음 주장한 게 아닙니다.그분들은 인간의 보편적 심성 밑에 깔려 있는 사상을 체계화하고 실천한 분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상이나 정서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은 대부분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을 늘어놓는 결과가 되기 쉽고, 그 전달하는 데 신경을 쏟다보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물들이 물질적 속성을 상실하고 앙상한 관념의 덩어리가 되어 독자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기 일수입니다. 우리 시단에서 상당한 시인으로 평가해온 김종삼(金宗三)의 다음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되므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으면서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 김종삼(金宗三),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전문 이 작품의 지향성은 화제 지향형입니다. 그러므로 대상의 물질적 외관(外觀)을 강조하기에 적합한 화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라는 관념을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무교동'도 '서울역'도 '빈대떡'을 먹고 있는 목로 주점의 풍경도 사라지고 완전한 산문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초점이 관념 쪽에 맞추어지면, 시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와 정서가 강화되고, 명상의 흔적이 뚜렷이 부각됩니다. 반면에 시적 사물들은 특정감(特定感)을 상실한 채 물명(物名) 상태로 떨어지고, 정서 과잉에 빠지게 됩니다. 낭만주의 시가 흄(T. E. Hulme)이나 파운드(E. Pound)를 비롯한 이미지스트들의 공격을 받 고 물러난 것도 이런 약점 때문입니다. 그럼, 관념형의 반대인 즉물형(卽物形)은 어떠냐구요? 이 유형은 관념형보다 한결 구체적이고 현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예사조상으로도 관념형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제시된 초점일 뿐만 아니라, 현대 독자들은 시인으로부터 설교를 듣는 것보다는 그가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게된 상황을 직접 목격하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더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미 없는 텅 빈 그림(meaningless picture)'으로 떨어진다는 게 문제입니다. 다음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바다는 뿔뿔이 달아날랴고 했다. 푸른 도마뱀떼같이 재재발렸다. - 정지용(鄭芝溶), [바다·2]에서 이 작품은 봄날 얕은 여울목에서 자잘하게 부서지는 바다 물살의 모습만 제시되었을 뿐, 시인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나 사색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독자들은 도대체 무얼 이야기하려고 하는가를 생각하고, 그러다가 별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없을 때는 참 깔끔하게 그렸다는 것 이상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흄과 함께 이미지즘 운동에 앞장섰던 파운드(E. Pound)가 그 대열에서 이탈해 '은유하는 그림(picture of metaphor)'을 추구고, 그의 제자격인 엘리어트(T. S. Eliot)가 사상과 감정이 융합된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 이론을 내세우며 '형이상시 (metaphysical poetry)' 운동에 앞장선 것도 이 초점이 지닌 한계때문입니다. 무의식에 초점을 맞추면 이제까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접할 수없는 풍경을 끌어들여 개별성(個別性)을 확보기에 용이해집니다. 그리고 고정 관념에 가려진 인간의 본성을 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그림으로 이어져 사실감(reality)을 획득하기 어렵고, 무의식 속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을 들어내어 문학이란 이름으로 부도덕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다음  중 한 사람인 조향(趙鄕)의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열 오른 눈초리, 한잔한 입 모습으로 소년은 가만히 총을 겨누었다.   소녀의 손바닥이 나비처럼 총 끝에 와서 사뿐히 앉는다. 이윽고 총 끝에선 파아란 연기가 물씬 올랐다 뚫린 손바닥의 구멍으로 소녀는 바다를 내다보았다. ---아이! 어쩜 바다가 이처럼 똥그랗니? 놀란 갈매기들은 황토 산태바기에다 연달아 머릴 처박곤 하이얗게 화석(化石)이 되어 갔다. - 조향, [EPISODE] 전문 이 작품은 우리의 경험에 비춰볼 때 너무 낯설어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프로이트(S. Freud)나 융(C. G. Jung)과 같은 무의식을 연구한 사람들의 이론을 빌어 해석 합니다. 그들의 이론을 따를 경우, '총'은 남성 성기, '구멍'은 여성 성기, '바다'는 '모성'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열오른 소년'이 성기로 소녀를 겨누고, 섹스가 끝난 다음 소녀는 날아오르는 갈매기를 바라보면 '아이, 어쩜 바다가 이렇게 똥그랗니'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유형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주장했듯이 자동 기술법으로 쓰여l진다는 것은 지나친 표현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의식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무의식을 자동 표출시켜 문자 언어 로 기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상 생활에서 언뜻언뜻 떠오르는 무의식적 심상들을 몽타쥬한 것이거나, 세속적 논리와 가치관을 배제하고 자유 연상(自由聯想)한 결과를 표 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기호적 상징형은 뒤짚힌 숫자들을 나열한 이상의 [오감도(烏敢圖) : 시 제4호] 같은 작품에 나타나는 초점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처럼 언어로 쓴 것도 기호적 상징에 초점을 맞춘 작품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소녀는 지평선을 가볍게 허리에 두르고 외출을 한다. 2. 탐정이 찾아와 가족들의 충치에 대하여 상세히 노트 한다. 3. 수음(手淫) 상습범인 하녀가 앵무새에게 말을 도둑맞고 실어증이 된다. 그것은 책을 읽는 고양이 때문이다. 그릇 찬장 속에서 역사가 눈을 뜬다 4. 말더듬이 집사가 에스키얼그 요리에 대하여 부친과 논의를 하고 있다는 추론 5. 그 방정식은 엄지손가락 + 우유x =서양사 개론 - 테레야마 슈누시(寺山修可), [물 속의 소녀]에서 이 작품은 얼핏 보면 무의식적 심상을 대상으로 삼은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좀더 살펴보면 기호적 상징으로 쓰여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향의 작품에서 소녀가 총구를 막았는데도 쓰고, 손이 구멍 뚫렸는데도 그 구멍을 통해 바다를 내다본다는 것은 현실의 논리에 비춰 볼 때 이상스러운 일이지만, 실제로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모티프와 모티프의 연결이 비 일상적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모티프의 연결만 비일상적인 게 아닙니다. 각 연에 번호를 붙였지만 필연적 계기성을 발견할 수 없고, 암호적인 부분이 너무 자주 눈에 뜨입니다. 우선 '소녀는 지평선을 가볍게 허리에 두르고 외출을 한다'라는 첫머리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다 더듬어도 '지평선'을 허리띠처럼 두르고 외출하는 장면을 떠올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우유x=서양 사 개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엄지 손가락'에 얼마간(x)의 '우유'를 더하면 '서양사 개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소녀', '지평선', '탐정', '가족들의 충치' 등은 시인이 나름대로 논리적으로 추론을 하여 치환한 기호적 상징으로 보아야 할것입니다. 사실, 누구의 시에서나 사용하는 은유(metaphor)도 기호적 상징으로 바뀌는 중간 단계의 어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으로 바꾸었다고 합시다. 이 은유는 과 의 과  가운데, 차이성은 제거하고 유사성만 택한 것으로서, 이를 배제했다는 것은 여인의 본질 가운데 절반 이상을 제거하고 추상화했음을 의미합니다. 오르테가 (Y. G. Ortega)가 은유를 다른 사물로 바꿔 보려는 지적(知的) 행위로서, 현실로부터 도피하면서 비인간화하려는 본능에서 출발한다고 지적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따라서, 은유와 기호적 상징의 차이는 보조관념에 원관념을 추론할 수 있는 고리를 남겼느냐 차이로 결정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기호적 상징에 초점을 맞추면 전통적인 시에서 얻을 수없는 새로움과 시적 긴장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논리적 전환의 고리가 생략되어 그 작품이 채택한 상징 체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전달이 차단됩니다. 이제까지 대부분의 시인들이 이런 초 점을 기피해 온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 유형도 문제가 있고 저 유형도 문제가 있다면 도대체 어떤 것이 이상적이냐구요? 안 돼요. 제가 질문하려는 걸 대신 하시네요. 자아, 받으세요. 쾅, 쾅, 쾅! 왜, 이번에는 한번만 '쾅'하지 않고 세 번씩이나 '쾅쾅쾅'이냐구요? 제 역할을 침범하려고 했으니까요. ▣이제까지 당신은 자신의 작품 속에 몇 개의 초점을 담아왔습니까? 한 개의 초점을 담지 몇 개의 초점을 담느냐구요? 그렇다면, 당신의 시는 결코 새로운 게 아닙니다. 특히, 관념에만 초점을 맞췄다면 '낡은 시'라고 비판을 받아도 불평하지 마십시오. 이번만은 동의할 수 없다구요? 그럼, 당신이 고를 때, 어떤 사람이 최고로 꼽았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실제로 그런 사람은 없지만, 얼굴도 이쁘고, 마음씨도 착하고, 교양도 있고, 능력도 있고, 나도 잘 이해해주는, 그런 사람을 꿈꾸지 않았나요? 문학 작품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미도 풍부하고, 작중 풍경도 눈에 선하게 보이고, 의식의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무의식적 욕망도 충족시켜줄 수 있고, 객관적인 논리도 지닌 작품이 최고입니다. 그 래서, 앞에서 소개한 신비평가들도 인간 정신을 과 으로 나누고, 이들을 모두 포괄한 를 최고의 작품으로 꼽았습니다. 그런데, 신비평가들의 분류에는 무의식과 기호적 상징이 빠져 있습니다. 무의식은 부도덕하고, 기호적 상징은 문학 작품에서 쓸 수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문학사 속에서 실제로 채택된 초점이므로, 관념형을 C, 물질형을 P, 무의식형을 U, 기호적 상징형을 S로 표현하고 이들을 포함하여 분류할 경우, 신비평에서 설정한 초점의 유형은 관념(C)와 즉물(P) 그리고 복합형인 형이상시(CP) 3개에 불과하지만, 다음과 같이 15개로 늘어납니다. ○기본형 : 관념시(C), 즉물시(P), 무의식의 시(U) 기호적 상징의 시(S) ○1차 결합형 : CP(형이상시), CU, CS, PU, PS, US ○2차 결합형 : CPU, CPS, CUS, PUS ○3차 결합형 : CPUS 이들을 다시 화제의 지향성과 결합시키면 기본형만도 16가지로 늘어납니다. 그리고 초점은 라고 해도 모두 균등하게 배분될 수 없으므로 주된 것을 대문자로 부차적인 것을 소문자로 표시하면 서 , , , , , , , , 처럼 연속 상태를 이뤄 하나의 구(球)처럼 무수한 유형을 설정할 수 있습니다. 같은 시인이 같은 내용의 화제를 택해도 매번 다른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자아, 그럼 복합 초점이 독자의 전인적 인식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것을 다음 작품을 살펴보면서 확인해볼까요? 이번 호에는 바다를 배경으로 삼은 작품들을 많이 골랐으니, 비교하기 좋게 역시 바 다를 배경으로 삼은 작품을 소개해보겠습니다. ①늦가을 햇살이 스적스적 떨어지는 바닷가 언덕 지난 여름 붉게 타던 칸나가 대궁 채 무너져 내린다. 나는 완벽한 그 추락의 자세에서 불같이 날카로웠던 네 입술을 떠올리려 애쓴다만, 나른한 미열과 슬픔에 떨며 너를 산이나 이별이라고 부르려 애쓴다만, 오, 칸나여. 늦가을 바다로 대궁 채 썩어 떨어지는 칸나여!이제 바다는 바다, 산을 산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구나.   ②캉캉 춤을 추던 파도는 …… 그날 그 찻집 그 의자 …… 조랑말 떼처럼 갈기를 휘날리며 …… 다시 그 음악 소리가 …… 물이랑을 박차고 내달리며 …… 부우 부우 부우 …… 푸른 갈기에 실려 올라 가던 수평선은 ……섹스폰 낮은 가락이 불안하게 꺾일 때마다 …… 떨어지는데 …… 구두 앞부리로 마루바닥을 탁탁 구르 고…….   ③이제 바다를 바다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차가운 바다로 천천히 추락하는 기억의 칸나여! 난 네 희고 긴 손가락 끝을 잡고 어두운 층계를 다시 내려가려 한다만, 그 층계 아래 타오르던 불빛이 붉었던가 노랬던가 희미한 기억의 언저리를 맴돌 뿐, 언듯언듯 기어들던 빗소리가 네 겨드랑이 밑에서 새소리처럼 부서 지던 것밖엔 기억할 수 없어 자꾸 발을 헛디딘다.   ④칸나여, 시들은 햇살 속 반짝이며 떨어지는 기억의 칸나여. 완벽한 네 추락의 자세가 너무 슬퍼 나는 수평선을 타고 하늘로 오른다. -필자, [다시 칸나가 핀 언덕에 와서] 전문 좀 긴가요? 여러 초점을 포괄하다보면 길어질 수밖에 없거든요. 이 작품의 첫머리는 '특정한 순간'에 '특정한 모습'의 칸나꽃과 그에 대한 정서를 담고 있습니다. '바닷가 언덕'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냥 바닷가 언덕이 아니라 '늦가을 언덕'이고, 그것도 햇살이 생기를 잃고 '스적스적' 떨어지는 언덕입니다. 그리고, 꽃잎도 그냥 지는 게 아니라 '대궁 채 썩어'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상의 모습을 그리고, 의미와 정서를 부여해나가면서 점점 감정을 고조시키다가 ②로 접어들면 사랑하던 여인과 만났던 추억에 사로잡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③으로 접어들면 무의식적 환 상에 빠져들고, ④에서는 차츰 정신을 가듬으면서 의식의 상태로 되돌아오려고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작품에는 기호적 상징만 빠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복합 초점을 취하면 정지용의 [바다·2]에서 제거되었던 의미와 정서, 조향의 [EPISODE]에서 제거되었던 사실감을 부여하기가 용이해집니다. 제 작품이라서 계속 설명을 하자니 쑥스럽네요. 그만 설명하고, 마지막 질문을 한 다음 이번 호는 마칠까 합니다. 쏩니다, 받으세요. ▣시의 화제는 어느 방향으로 이동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에 대한 대답하자면 고대에서부터 현대까지 시문학사(詩文學史)를 면밀하게 살펴봐야 하는데, 학자가 아닌 우리에게 너무 복잡한 질문을 하는 게 아니냐구요? 그래도 생각해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문학사의 방향을 가늠해보지 않으면 언제나 뒷북만 치게 되니까요. 제 생각으로는 지향성은 의 순으로 변천해 온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시의 기원을 신이나 전쟁에 출전하는 용사들을 위 해 쓰여졌다는 히른(Y. Hirn)과 그로세(E. Grosse) 같은 사람들의 사회학적 기원설(起源說)을 미뤄봐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생존 자체가 어려운 시대에는 자기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누군가에게 바치기 위해 썼다는 이야기가 훨씬 타당하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에서 출발한 시가 을 거쳐 으로 바뀐 것은 어느 정도 경제와 문화가 발달한 뒤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활에 여유가 생김에 따라 자기 정서를 표출하기 위한 화자 지향형이 탄생되었고, 객관적 정보가 팽창됨에 따라 화제 지향형이 탄생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초점의 이동 방향은 로 바뀌어 온 게 아닌가 합니니다. 그러니까 에서 출발하여 물질적 초점이 첨가되고, 그 다음 단계에서 관념을 배제한 가 출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시기에 과 이 출현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시의 효용성(效用性)과, '시란 시인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장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초점에 즉물성이 첨가되기 시작한 것은, 자기사상과 감정을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이며, 그 다음 단계에 순수한 즉물형이 등장한 것은 관념적 인식에 대한 반동으로써 시인의 판단을 보류하고 독자로 하여금 제시된 풍경을 통하여 생각해 보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무의식형이나 기호적 상징형의 출현도 의식 세계만을 다루는 것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의식형이 먼저 탄생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술이란 근본적으로 자아의 표현이며, 인간을 대상으로 삼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미래시에는 어떤 화제가 주류를 이룰까요? 그것은 아마 도 이제까지 문학이 점점 미시주의(微視主義) 쪽으로 흘러왔음을 염두에 둘 때, 다음 시대의 통합주의(統合主義)로 방향을 돌리고, 화제 역시 의 결합이 아닐까 추측됩니다. 현대시에 점점 산문성이 증가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움직임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 유형 역시 앞에서 말한 약점을 지니고 있으니, 그를 조심해야 할 겁니다.           4. 작품의 의미적 국면을 형성하는 데 참여하는 마지막 요소인 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실까요? 종래의 시에서는 이 문제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시란 시인의 사상과 감정의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화자(話者)의 행동과 발언만 주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대로 접어들면서 배경의 문제는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배경은 단지 작중 인물의 등장 무대 구실만 하는 게 아니라 존재(存在)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이고, 같은 존재도 언제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며, 시의 화제(話題)가 화자나 청자지향형에서 배경을 대상으로 삼는 화제지향형으로 바뀌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배경은 크게 과 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물리적 배경은 으로 이뤄집니다. 그리고, 상황적 배경은 물리적 배경에 인간의 문제인 역사, 문화, 사회 등이 추가됩니다.   이들은 흔히 줄여 전자는 그냥 , 후자는 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전자는 인적 요소들이 빠져 있기 때문에 정적(靜的)인 속성이 강합니다. 그리고 후자 는 인간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어 가변적인 속성이 강합니다. 또 서정론(抒情論)에서는 배경을, 서사론(敍事論)에서는 상황을 더 중시 합니다. 현재 시는 이 순간의 정서를 화제로 삼고, 서사는 사건의 진행 과정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배경은 다시 작품에 그려진 과 그 작품의 대상이 존재했던 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텍스트 속의 배경은 작중 인물의 등장 무대 노릇만 하는 과 인물의 성격을 부각시키고, 어떤 행동을 조장하거나 억제하는 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작품을 쓰려는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서정적 장르에서 중시하는 물리적 배경을 중심으로 슬슬 질문을 시작해 볼까요? 그럼, 질문 일발 장진합니다. 받으세요. 뿅! ▣당신은 과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하니 곰곰이 생각하고 대답하세요. 이들의 차이를 모르면 언제나 중성적 배경만 채택할 테니까요. 뭐라구요? 텍스트 속의 배경은 시적 대상이나 존재했던 실제배경을 모방적으로 그리는 게 아니냐구요? 에이, 땡입니다. 실제배경과 작품 속의 배경의 차이는 입체적인 현실을 문자로 기호화한 정도에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우선 실제배경은 이고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까요? 지금 제 책상 위에는 램프 옆에 책받침대가 있고, 그 위에 이 글 초고의 프린 트한 것들이 올려져 있고, 그 앞에는 스탬플러와 철침을 뽑는 도구, 다시 그 옆에는 라이터, 핸드폰, 재떨이, 지갑, 연필꽂이, 전화기, 화상 통신을 위한 PC 카메라와 마이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바람에 펄럭이는 연분홍 커텐과 바다가 보이는 유리창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 자리에 꼭 있어야 할 것들이 아닙니다. 그저 우연히 놓여져 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이 실제배경을 이루는 사물들은 우연히 그 자리에 놓여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글을 쓸 때는 이들 가운데 그 작품의 테마와 관계 있는 것들만 골라서 표현해야 합니다. 가령, '글쓰기의 어려움'을 주제로 삼아 글을 쓴다고 합시다. 이 경우, 핸드폰, 지갑, 화상 통신 기구들은 빠져야 합니다. 이들은 글 쓰기의 어려움에 별다른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텍스트 속의 배경은 그 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그러나, 필요 없는 것들도 글을 쓰는 사람이 동기를 부여 (motivation)하면서 인과관계를 맺어주면 달라집니다. 제 책상 위의 PC 카메라와 마이크는 지난 해부터 인터넷에 구축하고 있는  서울 프로그램팀과 업무를 연락하기 위해서이고, 탁상용 전화기가 있는데도 핸드폰을 함께 올려 놓은 것은 사방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기 위해서이고,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어야 할 지갑이 나와 있는 것은 방금 신문값을 받으러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문값을 주고 지갑을 책상 위에 펄썩 던지면서 원고 마감 날짜를 헤아려 보았다. 그때 컴퓨터 화면에서 뿅하며 화상 통신을 요청하는 신호음이 울렸다. 그리고 핸드폰과 탁상용 전화가 한꺼번에 울렸다. 아, 아. 이 원고를 언제 마치나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라고 인과관계를 맺어주면 불필요하게 보이던 것들도 모두 필요한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와 같이 텍스트 속의 시간과 공간은 작중 인물의 것으로서, 실제배경을 작품 속으로 옮겨올 때는 인물의 심리 상태에 따라  ···되어 나타납니다. 다음 작품만 해도 그렇 습니다. 술시(戌時)의 항구, 노인 한 분이 낚싯대를 접고 선술집 벽에 기대어 졸고 있다. 벽에 걸린 그림 속, 바람을 안은 프랑스 범선(帆船)이 한껏 부풀어오르고 등 푸른 참치 떼가 수면 위로 날아오르는데 그때마다 하이얀 비말(飛沫)이 갑판을 쌔리는데 술시의 항구,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 바다를 깔고 앉아 노인이 졸고 있다. - 강중훈, [술시의 선술집 간판] 전문 술시(戌時)는 밤 7시에서 9시 사이입니다. 이 시각 선술집 안에는 '프랑스 범선'을 그린 액자만 걸려있을 리가 없습니다. 노인이 앉아 있는 탁자와 의자도 있을 테고, 겨울철이라면 난로가 켜져 있을 테고, 그 위에는 물주전도 있을 테고, 주방에서는 부글부글 술안주가 끓고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액자 속 풍경만을 확대하여 묘사한 것은 액자 속의 바다는 고기가 풍부한 살아 있는 바다임에 비하여 노인의 바다는 어족 자원이 고갈된 바다고, 그로인해 인간의 삶마저 활기를 잃었음을 그리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액자 속의 바다는 이 작품의 테마를 드러내기 위해 확대(擴大) 된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기능적인 배경이 되려면, 작중 인물의 성격(character)을 드러내고, 그의 욕망을 실현하기에 적합하도록 조직되어야 합니다. 밤비가 내리네 어둠을 흔들며 조용히 내리네 그리움이 늘어선 언덕에 마른 수수잎 소리가 들리네 아련한 파도 소리 고향집 울타리에 철석이는데 낮닭 우는 소리도 가슴에 차오르네. -차한수(車漢洙), [손·47 : 고향] 전문 이 시는 꼭 비가 내리는 밤에 썼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어쩌면 환한 대낮이나 폭풍우 치는 밤에 썼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비가 내리는 밤에 썼었어도 다른 것을 그릴 수도 있습니다.하지만, 대낮으로 설정했다면 이만큼 절실한 작품이 되지 않았을것입니다. 조용히 내리는 비와 어둠은 누구나 생각에 젖어들게 만듭니다. 그런데, 대낮으로 설정하면 그런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폭풍우 치는 밤으로 설정하면 어색한 작품이 되었을 겁니다.그런 밤에는 누구나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기능적인 배경이 되려면 그 배경이 화자의 심리 상태를 은유해야 합니다. 다음 작품은 1930년대에 쓰여진 것으로서 그리 상큼한 맛은 없지만 풍경 전체가 작중 인물의 심리상태를 은유하고 있습니다. 일층(一層)위에있는이층(二層)위에있는삼층(三層)위에있는옥상정원 에올라서남쪽을보아도아무것도없고북쪽을보아도아무것도없고해서옥 상정원(屋上庭園)밑에있는삼층밑에있는이층밑에있는일층으로내려간 즉동(東)쪽에서솟아오른태양(太陽)이서(西)쪽으로떨어지고동쪽에서 솟아올라서쪽에떨어지고동쪽에서솟아올라하늘한복판에와있기때문에 시계(時計)를꺼내본즉서기는했으나시간(時間)은맞는것이지만시계는 나보담도젊지않으냐하는것보담은나는시계보다는늙지아니하였다고아 무리해도믿어지는것은필시그럴것임에틀림없는고로나는시계를내동댕 이처버리고말았다. - 이상(李箱), [운동(運動)] 전문 다른 사람이 이 작품을 썼다면 아마 '옥상 정원 올라서…'부터 쓰기 시작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1층에서부터 2층과 3층을 거쳐 옥상까지 올라가는 과정을 모두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내려오는 과정도 각층을 모두 거론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띄어쓰기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을 심리학적인 방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반복을 상동증(常同症)이 니 음송증(音誦症)이니 하고, 무엇인가 명확하게 말하기 어려울때 나타나는 병리 현상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변화가 없음을 드러내는 이 작품은 인생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새로울 것이 없다는 시인의 가치관 내지 작품의 테마를 은유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배경의 기능에 대해서는 이쯤 이야기하고, 다시 다른 질문을 해볼 까요? 자기 받을 준비 됐어? 사아알작 쏠께. 빵! ▣ 당신은 테마나 화자에 따라 어떤 배경을 선택하십니까? 그냥 별다른 생각이 없이 쓴다구요? 그러면 안 되지요.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텍스트 속에 등장하는 배경의 유형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텍스트 속의 배경은 크게 ···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을 추가할 수도 있습니다. 신화적 배경은 모든 사물이 살아 움직이는 배경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토끼와 다람쥐가 이야기하고, 꽃이 방긋방긋 웃는 것으로 그려진 세상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묘사는 시인이 수식(修飾)을 위해 그런 것이 아니라면 심리적인 배경에 포함시켜도 무방합니다. 그리고 사실적 배경은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세상을 말합니다. 또, 가정적 배경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어떤 조건이 실현되는 세상을 말하고, 심리적 배경은 어떤 특정한 순간에 마음 속에 드려진 세상을 말하고, 창조적 배경은 작가가 상상력을 발휘하여 만든 세상을 말합니다.   이들의 전체 구조는 어느 유형이든 모두 현실 세계를 바탕으로 삼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유형에 따라 배경소(背景素)의 모습이 달라질 뿐입니다. 그리고, 화자의 정서나 화제를 부각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은 모두 제거하거나 변형시킵니다. 아래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 작품의 배경은 사실적 배경으로 분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릴 적의 추억을 환기시키기 위해 아득한 옛날에 물 속에 잠긴 '소나무'와 그에 걸렸던 '방패연'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물 속을 들여다보면 방패연 하나 늙은 소나무 가지에 걸려 있습니다 '아버지'하고 부르면 메아리 대신 솟아오르는 달 고향 하늘 물이 넘쳐 팔월 보름달이 잠긴다. - 이무원(李茂原), [수몰지구(水沒地區)]에서 이와 같은 사실적 배경을 채택하면 작중 상황을 쉽게 짐작할 수 있어 시적 리얼리티를 확보하는데 용이합니다. 하지만, 배경소들을 섬세하게 그리지 않으면, 중성적(中性的)이거나 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배경소들 을 '특정한 순간의 특정한 모습'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적 배경은 화자의 성이나 연령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우선 계절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과 은 여성적이 되, 전자는 순진·화려·화사한 정서를, 후자는 성숙·고뇌·우울 의 정서를 나타내는데 적합합니다. 그리고 과 은 남성적이되, 전자는 성장·성취·기쁨·정열을, 후자는 정지·좌절·절망·엄숙의 정서를 나타내는데 적합합니다. 또 연령과 관계지으면, 봄은 유년기에, 여름은 청·장년기에, 가을은 노년기에, 겨울은 죽음과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루주기를 ··으로 나누어 살필 경우, 빛의 시간에는 남성적 성격(animus), 어둠의 시간에는 여성적 성격(anima)과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이런 관계는 공간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공간의 유형을 , , 으로 나눌 경우, 열린 공간에서는 남성적 성격이 강화됩니다. 그리고 닫힌 공간에서는 여성적 성격이 강화되고, 경계의 공간에서는 여성화된 남성이나 남성화된 여성의 성격이 강화됩니다. 다음 이육사(李陸史)의 시만 해도 그렇습니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 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중략)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광야]에서 ⓑ내 골방의 커-텐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 [황혼]에서 ⓐ에서 시인이 전달하려는 것은 '천고의 뒤'에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에게 자기 노래를 '목놓아 부르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주 남성적인 테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과 을 택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반면에 ⓑ에서 전달하려는 것은 수인(囚人)의 외로움입니다. 하지만, 단순한 외로움이 아닙니다. 독립 운동을 하다가 갇힌 투사의 외로움입니다. 따라서 남성이긴 하되 여성성을 띄기 시작하는 여성화된 남성화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서서히 여성화되기 시작하는 황혼의 시간과 닫힌 공간을 선택한 것도 이들이 지닌 속성을 이용하여 화자의 외로움을 돋보이도록 하려는 계산에서입니다.   프라이(N. Frye)의 설명에 의하면, 이와 같이 공간과 시간의 유형에 따라 어느 한 쪽의 성이 강화되고, 정서가 달라지는 것은 자연 현상에 대한 은유적 해석이 조상 대대로부터 축적되어 온 결과라 고 합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밤이 되면 모든 행동을 중단하고 생각에 젖어들고, 넓은 곳으로 나가면 활동적이고, 좁은 곳에서는 행동을 작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으로 보이게 만든 결과라고 봅니다.   은 화자의 성이나 연령과는 특별한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대신 진리, 도, 윤리 같은 · 화제를 취한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그로 인해 화자의 발언이나 행동은 도덕적이고 이상적인 것을 지향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격정적인 순간에도 균형과 절제를 잃지 않습니다. 그것은 담화 속의 사건이 현실의 사건이 아니라 가상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자주 인용한 김소월의 [진달래꽃]의 경우만 해도 그렇습니다. 화자는 사랑하는 님이 떠날 때 꽃까지 뿌려드리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복권에 당첨된다면, 너에게 반을 줄께'하는 식 의 발언으로서, 거의 믿을 게 못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어색하지 않게 보이는 것은 현실의 이별이 아니라 가상의 이별이라서 그렇게 말한 것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가정적 배경을 채택하면 배경소들이 추상적으로 그려진 다는 게 약점입니다. 그것은 화자의 발언에만 초점을 맞추고, 배경을 그리는 데 소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관념시가 되지 않도록 배경의 모습을 구체화하는 데 힘을 써야 합니다. 은 어느 순간 자기 마음의 창에 비친 배경을 그대로 그린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마음의 창에 비친 풍경을 그리기 때문에 앞의 두 유형과 달리 현실의 세계와 아주 다른 모습을 띄게 됩니다. 초사흘 달빛이 가늘게 내리는 저녁…   희디흰 그리움 한 올 한 올 풀어 비뚤어진 내 눈썹 위에 살짝 붙이고,   있는 듯 없는 듯한 그대 불러 옆에 눕히고,   왼 쪽 갈비뼈 하나 뽑아 내 갈비뼈를 만들려 하나니.   돌아 누우라,   그대여. 나를 향해 돌아 누우라. 푸르른 달빛이 비껴 내리는 그대 갈비뼈 사이 느릅나무 잎새 하나가 가뭇가뭇 진다. -현희, [달빛 소곡(小曲)] 전문 이 작품의 테마는 외로움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러므로, 여성화자를 택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닫힌 공간인 '방'과 어둠의 시간인 '밤'을 택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아무리 강한 사람도 밤에 혼자 잠자리에 들면 외롭기 때문에 그렇게 설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앞부분은 사실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줄 한 줄 띄어 쓰고, 몸을 공간화하면서 '갈비뼈 사이/느릅나무 잎새 하나가 가뭇가뭇 진다'라는 뒷부분은 심리적 배경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풍경은 무심코 떠오르는 무의식적 환상을 수정하지 않고 옮겨 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리적 배경은 화제가 시인을 자극하여 만들어낸 풍경을 바탕으로 삼기 때문에 이미 테마와 배경이 상호 결합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이런 배경은 기능적 배경이 됩니다. 그리고 아무리 진부한 화제도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게 됩니다. 현실적 자극이 마음의 창에 비춰지는 과정에서 일상의 탈을 벗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배경들은 의식의 안팎에 존재하는 풍경을 모방한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닙니다. 그러나, 창조적 배경은 언어에 남아 있는 사물성(事物性)을 이용하여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려는 배경을 말합니다. 예컨대, 김춘수(金春洙)의 후기시인 '무의미시(無意味詩)'나 이승훈(李昇薰)의 '비대상시(非對象詩)'가 이런 예에 속합니다. 벽(壁)이 걸어오고 있었다. 늙은 홰나무가 걸어오고 있었다. 한밤에 눈을 뜨고 보면 호주(濠洲) 선교사(宣敎師)네 집 회랑(回廊)의 벽에 걸린 청동 시계(靑銅時計)가 검고 긴 망또를 입고 걸어오고 있었다. 내 곁에는 바다가 잠을 자고 있었다. - [처용단장] 제1부 3 이 작품의 사물들은 앞의 작품과 달리 어떤 관념이나 심리 상태를 은유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앞 작품의 공간소들은 모두 '그리움'에 연결된 치환은유적(epiphoric) 구조를 취하는 반 면에, 이 작품의 '벽'·'홰나무'·'청동시계'·'바다' 등은 [T(?)=V[(t1)=v1/(t2)=v2/…/(tn)=vn] 식으로 나열된 병치은유적 (diaphoric) 구조로서, 전체의 의미가 형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이질적인 보조관념군(補助觀念群)을 인과관계를 배제한 채 병치한 것은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로 치환되어 의미가 형성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시인이 지시 하는 어떤 관념을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그 무엇을 창조하기 위해서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창조적 배경을 채택하면 모든 배경소들이 서로 결합하고 분열을 일으키면서 제2 제3의 풍경으로 바뀌어 참신감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수적인 독자들은 자기 경험과 크게 어긋난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느끼고, 무의미한 언어 유희로 받아들인다는 게 문제입니다. 자아, 그럼 또 다른 질문을 해볼까요? ▣당신은 선택한 배경이 부자연스러울 때 어떻게 조절하십니까?   무슨 소리냐구요? 좀 더 구체적으로 질문하라구요? 그럼 다시 하지요. 어떤 남자가 대낮 큰길에서 울고 있다고 합시다. 그리고 배경을 그대로 채택하고 싶을 때 어떻게 하느냐구요? 굳이 그러고 싶다면 그대로 쓰는 방법밖에 더 있느냐구요? 그럼 다 큰 어른이 질질짜는 게 부자연스럽게 보일텐데요. 이 문제는 다음 작품을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따서 먹으면 자는 듯이 죽는다는 붉은 꽃밭 사이 길이 있어 핫슈 먹은 듯 취해 나자빠진 능구렝이같은 등어릿길로, 님은 다라나며 나를 부르고… 강한 향기로 흐르는 코피 두 손에 받으며 나는 쫓느니 밤처럼 고요한 끓는 대낮에 우리 둘이는 왼몸이 달어… - 서정주, [대낮]에서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대낮입니다. 그런데도 밤이나 일어날 일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것도 방안이 아니라 바깥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좀 찐하긴 해도 별로 이상하게 보이지도 않지요? 이와 같이 화자의 행위와 배경의 성격이 어긋날 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장치가 뭐냐는 겁니다. 잘 모르시겠다구요? 그럼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작품에는 몇 가지 장치가 설정되어 있습니다. 우선 그런 욕망이 어느 정도 타당하게 보이도록 만들기 위해 '밤처럼'이란 보조관념을 동원하 여 어둠의 이미지를 첨가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낮이면서도 밤으로 만든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 '고요한' 상태로 묘사한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깥으로 설정했지만 여러 사람들에게 노출되기 쉬운 전면(前面)이 아니라 꽃으로 가려진 '사이 길'로 점을 잡은 들 수 있습니다. 밤이라도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이라면 풍기문란죄(風紀紊亂罪)로 끌려갈 테니까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자의 의식 상태가 정상적이 아닌 것으로 그린 점을 들 수 있습니다. '핫슈를 먹어 취해 나자빠진'이나 '능구렝이 같은 등어릿길'이 그런 증상을 드러내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의 구절은 마약을 먹은 것처럼 비정상적임을 의미하고, 뒤의 구절은 이미 제 정신이 아닌 걸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자아, 미당(未堂)의 비결을 요약해 봅시다. 화자의 의식 상태가 정상적인 아님을 보여주고 시간적 배경에는 일 경우 , 일 경우에는  첨가하고 공간적 배경은 일 경우 , 일 경우에는 의 색채를 가미하면 됩니다. 이렇게 엇갈리게 짜면 한결 더 짜릿하고도 조마조마한 작품이 됩니다. 아무리 어둠을 색칠하고, 꽃밭으로 주변의 시선을 막아도 여전히 바깥이고 대낮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장치를 설치해 둬도 독자들이 주목하지 않으면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독자들이 주목하도록 시선을 끌 장치를 함께 붙여줘야 합니다. 이 작품에서 '핫슈', '취해 나자빠진', '능구렝이 같은 등어릿길', '강한 향기로 흐르는 코피', '밤처럼 고요한 끓는 대낮' 등의 어휘간의 결합이나 음운조직 이 그런 장치 노릇을 합니다.   왜냐구요? '핫슈'는 아편입니다. 아편이라면 금방 그 의미를 알아들어 주목하지를 않지만, 핫슈는 우리말이 아니라서 그 의미를 생각해야 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 알았기 때문에 오랜 동안 기억하 게 됩니다. 그리고, 기억하는 동안 아편을 먹었다는 사실을 상기하여 화자의 행동을 용인하게 됩니다. 또 '취해 나자빠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자빠진' 비속어가 독자 의 시선을 끌어당깁니다. 그리고 '능구렁이같은 등어릿길'은 미끈거리는 유음(流音, r)과 음성모음의 연속, 남성 성기의 상징인 뱀이 결합하여 성적 장면을 연상을 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한 향기로 흐르는 코피'는 엉뚱하게 향기와 결합시켰기 때문에, '밤처럼 고요한 끓는 대낮'은 , 처럼 상반되거나 엉뚱한 것으로 연결시켰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막아 줍니다.하지만, 이와 같이 어휘론적 차원이나 음성학 차원의 변조는 의미론적 차원의 변조보다 훨씬 약합니다. 독자들은 무엇보다 의미로 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음 작품은 완전히 변조하고 있습니 다. 시계는 열 두 점, 열 세 점, 열 네 점을 치더라.   시린 벽에 못을 박고 엎드려 나는 이름을 부른다.   이름은 가혹하다.           바람에 휘날리는 집이여.   손가락들이 고통을 견디는 집에서,   한밤의 경련 속에서,   금이 가는 애정 속에서 이름 부른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계속된다.           계속되는 밤,   더욱 시린 밤은 참을 수는 없는 강가에서   배를 부르며 나는 일어나야 한다.   누우런 아침 해 몰려오는 집에서 나는 포복한다.       진득진득한 목소리로 이름 부른다. 펄럭이는 잿빛,   어긋나기만 하는 사랑, 경련하는 존재여,   너의 이름을 이제 내 가 펄럭이게 한다. - 이승훈(李昇薰), [이름 부른다] 전문 이 작품에는 독자의 시선을 끄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벽시계는 열두 번 이상 울리지 않게 만듭니다. 그런데, '열세 점, 열네 점'까지 울린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밤중에 못을 박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시린 벽에 못을 박고' 자 기 '이름'을 부르며 울고, '집'과 '이름'이 종잇장처럼 휘날리며, '밤'이 경련하면서 균열을 일으킨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배경소들을 왜곡시킨 것은 독자에게 화자가 처한 상황과 정서 상태가 정상적이 아님을 유의하며 읽어 달라고 요구하기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그냥 '시계가 끝없이 울린다'면 독자들 은 무심코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밤이 깊어감에 따라 불안이 가중된다는 사실을 은유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그를 유의하여 읽어 달라고 '열 두 점, 열 세 점, 열 네 점' 울린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자아, 하나만 더 질문하고 이번 호도 마감하기로 할까요? 준비하세요. 쏩니다. 뿅, 뿅, 뿅! ▣작품 속의 배경은 어떻게 변천해왔다고 생각하십니까?   대답하기 전에 한 가지 질문할 게 있다구요? 뭡니까? 왜 매호 끝날 때마다 ,  하는 식의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느냐구요? 눈치채셨군요. 제가 이와 같이 변천의 문제를 되풀이하여 질문하는 것은 역사 속에서 살아남는 시인이 되려면, 문학사가 어떻게 진행되어왔는지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걸 몰 라도 작품만 잘 쓰면 되지 않느냐구요? 얼른 납득이 안 되신다면 대중 음악을 예로 들어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 청년 시절에는 이미 자(李美子)씨의 노래가 아주 인기 좋았습니다. 목소리도 좋고, 가락도 애절하고…. 그래서 이미자씨가 죽으면 그분의 성대(聲帶)를 연구하기 위해 일본에서 미리 예약해 두었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우리 집 공주님들은 차 속에서 그런테이프를 틀면 '아빠! 귀 버려.'하고 요즘 유행하는 테이프를 갈아 끼웁니다. 그건 이미자씨가 노래를 잘못 불러서가 아닙니다. 세 월이 흐름에 따라 청중(독자)들의 감수성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문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의 진행 방향을 모르면 옛날의 감각을 고집하게 됩니다. 자아, 이젠 시 속의 배경이 어떻게 변천해왔는가를 말씀해 보시지요? 그쯤은 잘 안다구요? 그래 뭡니까?  순이라구요? 어쩐 일이세요? 맞았습니다. 땡땡땡, 땡땡땡, 대한민국 만세, 땡땡땡…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역사란 모자라는 것을 보충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기 마련이니까.
1033    프랑스 시인 - 앙리 미쇼 댓글:  조회:4765  추천:0  2015-04-20
오픈지식 ALPHABET     내가 죽음에 이르는 추위 속에 있었던 동안, 나는 마지막인 듯이 존재들을 깊게 바라보았었다. 냉담한 그 시선의 죽음을 대할 때, 본질적이지 않은 모든 것은 사라졌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매질했었던 동안에, 죽음마저도 늦출 수 없는 그 무엇인가를 붙잡고자 그것들을 파헤치고 있었다.     그들은 축소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알파벳과 같이 줄어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또 다른 세상에서도, 어떠한 세상에서도 사용될 수 있었던 알파벳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누군가가 나를 내가 살아온 세계에서 완전히 떼어놓지는 않을까하는 불안을 씻었다. 이런 생각으로 굳어진 나는, 패배한 적 없는, 그것을 주시하고 있었다.   내 소동맥들과 정맥들 안으로, 만족감과 함께 피가 되돌아 올 때, 나는 천천히, 삶의 열린 비탈을 다시 올랐다. [출처] 앙리 미쇼의 시 : 알파벳 |작성자 SaTaNas   앙리 미쇼 [ Henri Michaux ] 프랑스의 시인·화가인 앙리 미쇼 Henri Michaux (1899.5.24~1984.10.18)는 때로는 자기의 무의식 속을 파고들어가 존재의 실태와 존재 이유를 찾기도 하고 악의에 찬 세계에 둘러싸인 현대인의 고뇌와 무력을 독특한 풍자와 유며로 나타냄으로써 현대 프랑스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높은 평가와 인정을 받고 있다.  벨기에 출생. 브뤼셀에서 성장하였다. 1955년에야 프랑스 국적을 얻었다. 어려서부터 극히 고독한 성격으로 부모 형제나 어떠한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자기는 남이라고 느꼈다고 한다. 브뤼셀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신비 작가의 작품이나 성인들의 전기를 즐겨 읽었고 잠시 의과 대학에 다닌 적도 있었으나 중도에 포기했다. 21세 때 새로운 다른 세계를 동경하여 수부가 되어 약 2년 동안 바다를 떠다니며 방랑 생활을 하기도 했다.  1924년부터 파리에 정착하여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특히 시인 C.D.로트레아몽과 J.쉬페르비엘에게 큰 감동과 충격을 받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1927년 자아의 분열을 다룬 시집 를 발표하고 계속하여 자신에 대한 거의 과학적, 의학적 관찰 보고서인 ,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박해받는 인물을 풍자적으로 그린 , 그리고 꿈과 환각, 충동을 조사, 보고한 등의 시집을 내어 주목을 끌었다.  아울러 1927년에서 1939년에 이르는 동안 그는 또 다시 다른 세계를 찾아 에쿠아도르를 비롯한 남미, 터키, 인도, 중국, 일본 등을 여행하고 두 권의 여행기 와 을 펴냈는데 저자는 이 가운데 각국의 도시, 인물, 풍습, 동식물에 대한 학자적인 정밀한 관찰과 시인으로서의 깊은 성찰을 하여 많은 독자에게 감명을 주었다.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남 프랑스의 코트다쥐르로 피난했는데 여기서 앙드레 지드를 만났고 지드는 미쇼의 내면적 시가 가지는 현대적 뜻과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앙리 미쇼를 발견하자!"라는 강연을 하여 그의 이름을 높였다. 같은 시기에 그가 전시 중에 쓴 특이한 항전시가 발표되어 일약 그는 유럽에서 유명해졌다. 뿐만 아니라 그는 30년대부터 아무에게서도 배우지 않은 자기류의 그림을 그려 발표해왔는데 이 특이한 그림이 화단에서도 높이 인정되어 그의 이름은 더욱 널리 퍼졌다.  그는 시인으로 계속하여 , 등의 환상적인 시집과 라는 가공적이며 상상적인 3부작 기행 문집들을 펴냈다.  1955년 경부터 인간의 심층 내부를 철저히 탐색하기 위해 그는 마약인 메스칼린을 복용하여 그 환각과 취기를 이용하여 의식 내부를 탐험하려고 했다. 즉 자신의 마음 속 깊이 잠입하여 약의 힘을 빌어 인간의 모든 감각, 꿈, 인상, 이미지, 무의식을 알고 느끼고 경험하려고 했다. 그는 그가 직접 느끼고 본 것을 그의 시로 또는 그림으로 옮겼다. 어느 작가도 그만큼 인간의 희미하고 붙잡기 힘든 내부 세계를 이렇게 철저하게 탐험, 실험하려고 애쓴 작가는 없었다. 약 15년에 걸친 실험에서 얻은 작품으로 ''비참한 기적'', ''소란스러운 무한'', ''구렁에서 얻은 지식'', ''정신의 큰 시련'' 등이 있다.  미쇼는 만년에도 인간의 내부 세계와 환상 세계에 대한 많은 작품을(''잠든 모양, 깬 모양'', ''사라지는 것과 대면하여'' 등) 내놓았으나 점점 글자로 표현하기보다는 형상적인 그림으로 나타내는 경우가 더욱 많아졌다. 그의 그림이란 회화라기보다는 현미경 아래 보는 박테리아의 표본이나 X선 사진과 같이 기이하고 독특한 것이다. 그러나 화가로서 그는 거의 매년 프랑스를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전람회를 열고 있고 그 때마다 주목과 논란을 일으켰다.  1945년부터는 신비주의와 광기(狂氣)와의 교차점에 서는 독자적인 시경(詩境)을 개척, 현대 프랑스 시의 대표적 시인의 한 사람으로 지목된다. 주요 저서에 (1944) (1945) 《주름 속의 삶:La Vie dans les plis>(1950) (1955) (1957) 등이 있다.  1965년에는 파리의 국립 현대 미술관에서 그의 총작품 전시회가 개최되어 그의 예술에 대한 경의를 표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국가 문학 대상의 수상자로 추대되었으나 그는 이를 사절하였다. 그는 시인으로서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엄밀한 뜻에서 문학권 외에 있으면서도 1940년대 이후의 젊은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032    시문학의 미래를 생각하며 댓글:  조회:3870  추천:0  2015-04-20
한국 시문학의 미래는 어둡다     다시 말한다. 한국 시문학의 미래는 어둡다 문예지의 수, 등단자의 수, 전체 시인의 수를 보면 양적으로는 분명히 풍요로워졌다. 시집을 시리즈로 펴내던 유명 출판사에서 연간 시집 발행 권수를 줄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집은 여전히 엄청나게 많이 출간되고 있다. 인터넷상의 시 동호인 모임이 활성화되고 있으며 인터넷 온라인을 통한 작품 공모가 붐을 이루고 있다. 문예창작학과가 있는 대학이 50개 정도로 늘어났으며 정규 학제가 아닌 대학 사회교육원을 비롯한 각종 문학 사숙도 번창 일로에 있다. 이러한 양적 풍요가 질적 심화를 가져오지 않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1970~80년대에 비해 90년대의 시집 판매량은 뚝 떨어졌고, 2000년대에 들어서서 서점가에서 시집은 거의 팔리지 않는 품목이다. 설사 팔린다 하더라도 이른바 ‘베스트셀러 시집’과 류시화나 김용택 같은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는 시인이 선정하여 해설을 붙인 시선집에 국한되어 있다. 오늘날 시단에는 별다른 화제가 없고, 문학평론가들의 담론은 맥을 잃고 있으며, 독자와 평론가들한테서 특별히 주목받는 정통문학권의 시집도 없는 듯하다. 작품은 많이 생산되고 있지만 좋은 작품이 그리 많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 활발한 비평작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 독자의 호응이 사라졌다는 것은 삼박자를 이루어 총체적인 위기 상황이 야기되고 있다. 여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활자 문화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영상 문화가 잠식함으로써 오늘날의 대중은 시집 같은 데서 마음의 양식을 구하지 않고 재미있는 영화․텔레비전․비디오․만화를 보고 있으며, 컴퓨터 앞에 앉아서 게임을 하거나 채팅을 하거나 정보를 검색하는 데 여념이 없다. 책을 읽더라도 실생활과 처세술에 관련된 책이 아니면 황당무계한 판타지 소설을 주로 본다.     노벨문학상이 발표되는 때가 오면 간혹 나는 이런 생각에 잠기곤 한다. 수상의 여부와 관계없이,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는 시인․소설가를 배출한 나라에 비해 우리 문학이 무엇이 부족한가 하고. 20세기 100년만 놓고 보더라도 프랑스, 영국, 미국, 러시아, 일본, 중남미 여러 나라 등과 견주어 우리에게 부족한 요소가 도대체 무엇일까. 국력의 문제? 번역의 문제? 문학적 토양의 문제? 세계어가 아닐 뿐만 아니라 외국인이 배우기에는 어려운 언어인 한국어의 특수성 때문? 시대적 환경의 문제? 어느 한두 가지 문제라기보다는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우리 문학이 세계 문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적절한 처방을 내릴 자신이 내게는 없다. 그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며, 이 자리에서 제법 그럴듯한 처방전을 제시한다고 한들 그것이 우리 문단에 큰 파문을 일으켜 하루아침에 왕성한 피돌기를 할 리가 없다. 나는 다만 내가 써온 시를 반성하며 더 좋은 시를 쓰기 위해 자성록을 써볼까 한다. 그럼 이제까지보다 조금 나은 시를 쓸 수 있는 해법도 도출되지 않겠는가. 희망 사항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1. 우리 시단은 참으로 완고하다     우리 문단은 장르를 넘나드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시와 소설을 겸하는 이가 있다고 했을 때, 그는 한 우물이라도 제대로 파지 않으면서 욕심만 많다고 욕을 많이 들을 것이다. 내가 바로 그 장본인이다. 나는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하고 나서 5년 뒤에 운 좋게 다시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었다. 그때 어떤 문학평론가가 “이형, 다음엔 문학평론이나 희곡을 써 또 상금 타 먹을 거죠?”라고 놀려 퍽 당황한 적이 있다. 소설 쓰지 말라는 말을 여기저기서 적어도 스무 번 이상은 들었다. 어느 장르로 등단한 뒤에 다른 장르의 글을 쓰면 대뜸 외도를 한 것으로 간주하는데, 이는 우리 문단의 완고함을 말해주는 사례이다.     문학적 역량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학연과 지역 연고, 등단 지면, 그리고 활동 범위라고 한다면 그렇지 않다고 부정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리고 우리 시단은 새로운 목소리에 귀를 잘 기울이지 않는다. 1980년대 초반의 우리 시단에는 실험 정신이 충일한 세 명의 시인이 있었다. 이성복ㆍ박남철ㆍ황지우의 시에는 해체시니 실험시니 형태파괴시니 하는 명칭이 따라다녔다. 그들의 시를 어떻게 통칭하든 간에 그 이전의 시들과는 변별되는 요소가 확실히 있었다. 전통적인 서정시의 문법으로는 체제 수호적인 작품밖에 더 쓰겠냐는 이들의 반항 정신(혹은 부정 정신)은 우리 시를 무척 풍요롭게 하였다. 이들의 시정신은 80년대 후반에 장정일ㆍ김영승 등이, 90년대에 유하ㆍ함민복ㆍ장경린ㆍ박서원ㆍ박상순 등이 잇는다. 시에서의 실험 정신을 용인하지 않는 90년대 시단의 풍토는 이들의 팔에서 힘을 앗아간다. 실험 정신이 충만한 작품과 더불어 이른바 민중시의 위세도 꺾여 순수서정시가 득세한 시대가 바로 90년대였다. 서정시를 쓰는 시인들에게는 비평적 조명이 따뜻하게, 아니 뜨겁게 내리쬐었으나 실험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아류로 취급되면서 매도당했다. 한편 민중시는 소련 연방의 해체와 동구 공산권의 자본주의 체제 도입 이후 갑자기 맥을 놓아 서정시로 자리바꿈을 하였다. 그러자 앞서 거론한 시인 중 혹자는 불교의 세계의 귀의하여 현실로부터 떠나버렸고, 혹자는 시를 버리고 산문의 세계로 갔으며, 혹자는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을 근본으로 하는 서정적 자아 탐색의 길로 떠나버렸다. 90년대 시단에는 그래서 새로운 형식의 시(형식은 정신을 낳는다)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과거 신동엽이나 김수영 같은 치열한 정신과의 만남도 어렵게 되었다. 시대의 이단자가 새로운 사조를 창조하는 법이다. 우리네 문단 풍토에서는 보들레르도 랭보도 나올 수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성귀수 시인의 시집과 평론집이 나오지 않는 데 대해 많은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는데 등단 십수 년 만인 2004년에 첫 시집이 나왔다. 이 시집은 너무 늦게 출간되는 바람에(내 생각에는 그렇다) 비평적 조명을 전혀 받지 못하고 묻혀버렸다. 그리고 시대의 변화를 어쩔 수 없이 반영한 결과이겠지만 박노해ㆍ백무산ㆍ김신용ㆍ유용주 등 몇 분 시인의 작품이 근년에 들어 현실에서 벗어나 관념화되어가고 철학적 사변이 늘어난 데 대해 다소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2. 우리 시에는 ‘서사’가 많지 않다     과거 정족(鼎足)의 관계를 이루던 실험시ㆍ민중시ㆍ서정시는 90년대에 들어 어느덧 서정시만 살아남아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내 내면 세계에 대한 정밀한 탐구가 주류를 이룬 것은 우리 시문학 전체의 진폭을 생각할 때 그리 환영할 일이 못 된다. 일반 독자들로부터 오늘날 이 땅의 시는 별 재미도 없고 큰 감동도 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서구의 시, 특히 프랑스 상징주의, 독일 표현주의, 엘리엇으로 대표되는 영미 주지주의의 시를 읽다 보면 ‘서정’이 ‘서사’의 자리를 빼앗은 것이, ‘정감’이 ‘지성’의 세계를 빼앗은 것이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고 자꾸만 생각된다. 김동환의 「국경의 밤」 이래 서사시가 많이 씌어지지 않은 우리네 특유의 문단 풍토도 그렇거니와, 풍자시가 크게 환영받지 못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가 아닐까. 우리를 일상적 삶을 옥죄고 있는 정치와 경제, 사회구조와 인간관계를 따져볼 때, 서사시와 풍자시가 많이 나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회를 향한 목소리는 완전히 잦아든 느낌이 든다. 신동엽의 「錦江」이나 김지하의 「五賊」 같은 시를 읽고 싶어하는 사람이 나 혼자뿐일까. 한때 이야기시론을 주창하며 시 속에다 이야기를 담고자 애썼던 최두석의 작업이 나는 무척 그립다. 백석의 시가 점점 더 좋아지는 이유도 ‘서사’에 대한 갈망 때문일 것이다.     3. 현대시는 운문을 버리고 산문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 시의 상당수가 산문시가 아니고 그냥 산문이다.   산문이 산문시가 되지 않으면 잡문이 된다. 시라는 것이 행과 연 구분은 대충 되어 있지만 문장들이 길고 난삽하기 이를 데 없다.   어떤 시는 한 개의 문장이 5~6행까지 이어지고 심지어는 7~8행까지 한 문장으로 되어 있다. 문장도 우리 구문법에 어긋나는 것이 많고 영어와 일어 번역체 분장까지 있다.    산문시이지만 정진규의 산문시는 오히려 내재율을 갖추고 있다. 문장이 짧아 속도감이 있고 은유와 상징이 적절히 깔려 있어 읽는 맛이 난다. 그런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문예지상의 수많은 시가 외양은 시 같지만 분명한 산문이라 잘 읽히지도 않을 뿐 아니라 시다운 맛이 없다.   반면에 독자의 사랑을 듬뿍 받아 베스트셀러가 된 시집은 운율을 적절히 지니고 있어서 잘 읽힌다. 많은 말을 하지 않고 단순 소박하되 내용은 사실상 별 볼 것이 없다.    잃어버린 운율을 되찾아야만 시가 산문과 다름을 보여주어 우리 시의 활로를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4. 시인은 우리말의 파수꾼이 아닌가     시인은 모국어를 사수하고 잘 가꾸어 후손에 물려주는 역할을 하는 언어의 파수꾼인데 여기에 대한 자각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다. 참으로 심각한 것은 시어 구사에 있다. 비어ㆍ속어ㆍ욕설ㆍ육담ㆍ유행어ㆍ외래어 등은 우리 현대시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지만 순 우리말은 발견하기가 정말 어렵다. 그래서 시집 그 자체가 우리말의 보고인 영랑과 백석의 작업이 참으로 위대한 것이었다고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다. 그 어떤 형식에 구애됨이 없는 실험시건, 민중의 언어를 사용하고 민중에게 어필한다는 민중시건, 감정의 자연스런 발로인 서정시건 상관이 없다. 시인들이 나서서 우리말 파괴 공작에 열중하고 있다. 시대 상황이나 주제 의식을 배제하고 시어만을 보자.   미군이 없으면 삼팔선이 터지나요 삼팔선이 터지면 대창에 찔린 깨구락지처럼 든든하던 부자들 배도 터지고요.          ―김남주, 「다 쓴 시」 전문   총칼 한번 휘둘러 수천 시민을 살해한 놈은 대통령이 되어 청와대로 가고   주먹 한번 휘둘러 뺨 한 대 때린 놈은 폭력배가 되어 가막소로 가고.          ―김남주, 「깡패들」 전문   쳐라 쳐라 폭력테러로 좌경용공 구속조치 탄압의 쇠망치로 네놈들이 미쳐 날뛰어 치면 칠수록 나는 시퍼런 칼날로 일어설 것이다 이제 무너져야 할 것은 네놈들의 자본의 황금탑이다   네놈들이 짓밟고 치면 칠수록 시퍼런 칼날 되어 내가 일어서고 내 아내가 일어서고 우리 동지가 일어서고 이 공장 저 공단 전국의 노동자가 우뚝우뚝 일떠서 손을 치켜드는 날 공고한 자본가 세상은 모래성처럼 무너져 피 비린 총칼은 수수깡처럼 흩어져 끝내 한줌 먼지로 화하고 말 것이다          ―박노해, 「무너진 탑」 부분        ―WXY 그려진 W.C 入口      非常口 같은 膣口      都市는, 아 고녀석 자지도 굵다      까만 데만 25㎝네, 이젠, 凱旋門도      疥癬, 改善, 개, 個個, 砲門도 이젠      이젠 揷入 以前에 끝난단다, 少女야      찢어지지 않아서 좋겠다, 좆 컸다   美童들아 脚뜬 유방과 히프 한 사라 ※ 사라 : dish․皿․접시 200₩어치는 안 판다고요?         ―김영승, 「반성 784」 부분     때로는 과격하게, 때로는 적나라하게 쓸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인 이유가 있긴 했었지만 시를 꼭 이렇게 써야 했던가 하는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언어의 조탁이나 퇴고의 힘든 과정은 고사하고 폭언이나 욕설처럼 난폭하기 짝이 없는 이런 시의 사례를 들자면 끝이 없다. 그런 점에서 홍명희ㆍ박경리ㆍ김주영ㆍ최명희ㆍ김소진 등 소설 쪽에서의 작업이 많이 부럽다. 시인이 우리말을 사랑하고 돌보지 않는다면 누가 그 역할을 할 것인가.     5. 전통과의 단절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오래 전부터 전통 계승론과 단절론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지만 ‘골계미’의 측면에서 보자면 단절이 분명하다. 전통과의 단절은 우선 근대문학 성립 과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최남선이 쓴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와 이광수가 쓴 「무정」으로부터 우리 근대 문학이 시작된다고 하자. 두 사람은 그 당시 홍안의 청년이었고, 일본 유학도였으며, 한동안 천상천하를 이 두 사람이 휘어잡았다. 두 사람의 뒤를 이어 동인지 문단 시대를 전개한 사람들도 당대 사회에 있어 최고의 엘리트들이었다. 후일 최남선이 시조부흥운동을 전개하긴 했지만 신문학 초기에 전통의 계승 같은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전통의 계승 따위가 문제가 아니라 계승에 대한 부정의 정신이 우리 신문학의 문을 열고 길을 닦아나갔던 것이다. 인간의 정신세계를 다루는 것이 문학일진대 조선조 후기의 그 좋은 문학적 전통이 근․현대 문학으로 뻗어나가질 못했다. 서양 문물이 쏟아져 들어온 개화기부터 서민 문학이 죽고 귀족 문학이 살아남게 되었다.     조선조 전기와 후기는 어떻게 다른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뒤 정치는 걷잡을 수 없이 혼란스러워졌고 국민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다. 자연히 귀족 계급의 무능은 폭로되었고 평민 계급의 자의식은 싹텄다. 또한 훈민정음 반포 후 100년이 지나는 동안 평민과 부녀자들 사이에 한글이 널리 보급되어 우리말로 인간 생활을 표현하는 일이 아주 자연스럽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귀족 계급의 문학은 쇠퇴해졌고 평민 계급의 문학이 발달하였다. 대표적인 문학은 사설시조ㆍ평민가사ㆍ수필ㆍ소설ㆍ판소리 등이다. 우리의 시조는 조선조 후기, 윤선도의 등장과 사설시조의 성행으로 수많은 수작들이 나왔다. 사가문학은 박인로가 벽두를 장식한 이후 내방가사․평민가사․잡가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나왔다. 설화를 창곡화(唱曲化)한 판소리는 원래 열두 마당이 있었으나 신재효가 여섯 마당을 가려내 독특하게 개작하여 우리 서민 문학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조선조 후기에는 이밖에도 지방마다 들놀음․오광대놀이․산대놀이․탈춤 등 민속극이 행해져 서민들의 애환을 달랬다. 그러나 서구 문예사조의 난입, 특히 낭만주의와 모더니즘의 수입 이래 그런 것은 문학이 아닌 것으로 치부되었다. 자유시는 곧 모더니즘과 상징주의를 표방한 것이어서 우리는 형식에 있어서는 운율을, 미학적 측면에 있어서는 골계미를 잃어버렸다. 김동환과 김소월로 대표되는 민요조 서정시가 있었고, 그 전통이 신경림과 김용택의 시에까지 흘렀지만 후배 시인들에게 끼친 영향력에 있어서는 모더니즘 표방 시의 위력에 당할 수는 없었다.     6. 우리 시는 전반적으로 유약하다     우리 시문학은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탐스런 열매를 많이 맺었고 아름다운 꽃도 숱하게 피웠다. 그런데 민족의 수난기에 우리 시문학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순수서정시가 시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 때문에 블레이크․워즈워드․콜리지․셸리․키츠․바이런 등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낭만주의와는 달리 퇴폐적이고 감상적인 낭만주의가 우리 시문학에 깊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 영향은 일제시대 전체를 관류하였고,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 젊은이들이 부를 수 있는 노래는 비가였다. 밝은 미래를 예감케 하는 웅혼한 기백의 정서, 진취적인 기상의 정서는 한국 현대시의 문맥에서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언젠가 나는 서정주의 「바다」를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개탄한 바 있다.     일제에 의해 목숨을 잃었으며, 저항의 의지가 뚜렷한 시를 남긴 이육사와 윤동주의 시에도 감상과 회한은 조금씩이나마 배어 있었고, 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나 소월의 「招魂」, 영랑의 「毒을 차고」 같은 절창도 그의 전 작품을 통해서 볼 때는 예외적인 작품에 속했다. 유치환의 「생명의 書」와 김춘수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을 줄줄 외울 수 있었던 나는 그런 힘찬 시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니 자연히 「국화 옆에서」「春香遺文」「귀촉도」 등 서정주의 여러 시를 애송하면서도 이들 작품이 지나치게 고색창연하거나 유약하게 느껴져 그다지 만족스럽게 생각되지 않는 것이었다. 일제 강점기 시인들의 나라 잃은 슬픔이 오죽했으랴만 때때로 고구려 사람들의 웅혼한 기백의 정서, 백제 사람들의 진취적 기상의 정서를 보여줄 수는 없었던 것일까. 향가의 박진감, 사설시조와 판소리의 비판정신, 민요의 민중정서, 무가의 상상력, 한시의 선비정신, 선시의 불교정신 중 우리 현대시는 한 가지도 배울 수 없었던 말인가. 도대체 시에 강인함이란 것을 찾아보기 어려웠으니, 서구 낭만주의를 우리는 완전히 왜곡해서 받아들였던 셈이었다.                                                                                                       ―「진취적인 기백의 정서」, 『詩의 아포리아를 넘어서』, 이숭원 외, 이룸, 2001.     지금 읽어보니 지나치게 흥분해서 쓴 감이 있다. 우리 시의 유약함에 대한 평소의 불만이 엉뚱한 자리에서 터뜨려진 것이었다. 남성 시인의 시에 여성 화자가 지나치게 많이 등장하는 것과 센티멘털리즘은 우리 시의 고질이면서 나의 고질이다.     7. 현실 반영만큼 중요한 것이 형이상학이다     존재론적인 시가 드문 것도 한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싶다. 1926년에 한용운이 자비로 출간한 『님의 침묵』이 참으로 대단한 것은, 불교적인 세계관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현실에서 일탈하지 않았다는 점과, 형이상학적인 세계를 지향하면서도 연애시풍으로 써 관념의 세계로 빠져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시 역시도 리얼리즘 소설처럼 현실을 반영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시인의 상상력이 현실에 뿌리내리고 있지 않을 때, 그것은 그야말로 사상누각이다. 하지만 시가 지향하는 세계가 그 어떤 궁극적인 실체를 만나기 위한 힘든 도정일 수 있고,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진지한 탐색일 수도 있으며, 우주와 인간의 신비에 대한 치열한 연구일 수도 있다. 한용운 이래 우리는 이 광활한 세계를 너무 무시하고 시를 써온 것이 아닐까. 몇 해 전에 구상 시인과 대담을 한 적이 있는데, 시인의 말씀 중 시를 쓸 때마다 생각나는 것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 생래적으로, 또 문학적 전통으로 봐도 로고스적인 면보다 파토스적인 면이 강하지요. 감성적인 면이 강하기 때문에 자연 서정이나 정한 같은 것이 흔히 소재가 되지요. 그래서 존재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인식의 세계가 한국 시인들에게는 결핍된 거라 봅니다. 기독교인들도 불교인들도 시를 쓰고 있지만 독자적인 고뇌, 즉 등가량의 진실과 오뇌(懊惱)가 보여야 하는데 그런 것이 부족해 보여요. 자기가 혼자서 초탈한 체하는 시에는, 또 선사가 법어를 하는 식의 시 속에는 진실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기어(綺語)의 죄에 해당하는 거죠. (……) 말에는 신비한 힘이 있습니다. 겉으로 번드르르하게 외면치레를 할 게 아니라 감동을 주는 말을 해야 하는데, 오늘날에는 시인들조차 말의 치장만을 노리고 있습니다.                                                                                                                          ―「진리의 증득을 위한 몸부림의 문학을」, 『라쁠륨』, 1999. 여름.     노시인의 질타는 우리 시의 취약점에 대한 일갈이면서 사실상 나를 향한 꾸지람이었다. 너는 왜 허구한 날 그런 가벼운 시만 쓰고 있느냐, 이제는 좀 시다운 시를 써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말씀’이어서 속이 뜨끔뜨끔하였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우리 시의 취약점은 이상 일곱 가지 정도이다. 다 시를 쓰고 있는 내가 극복해야 될 문제이므로 그 누구를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영상 매체의 쇄도에 주눅들지 말고 우리 시문학사를 주옥으로 수놓을 좋은 작품이 많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체계도 없이, 생각나는 대로 말을 많이 늘어놓았다. 구상 시인의 말대로 나야말로 기어의 죄를 짓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1031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시를 써보기 댓글:  조회:4504  추천:0  2015-04-20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시를 써보자 -- 엄숙주의를 벗어나기 위하여       여러분은 혹시 우리 시에 ‘웃음’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없습니까? 시하는 것이 엄숙하기만 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는 지난 100년 동안 엄숙주의로 일관해왔던 것이 아닐까요. 이번 호에서는 시가 불러일으킬 수 있는 웃음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승하 (시인/중앙대 교수)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하는 시들   보들레르 시 두 편부터 읽어보겠습니다.     내 마누라가 죽어서, 난 자유로워졌다! 그러니 취해 떨어지게 술을 마셔도 돼 빈털터리로 집에 돌아오면 그녀의 고함소리 내 가슴 찢었지                                                     -김인환 역,     오, 구더기여! 귀도 눈도 없는 검은 동료들이여! 보라, 자유롭고 즐거운 죽은 자 너희들에게 왔도다 호색적인 철학자, 부패의 아들들이여 이제 후회 없이 내 육신 파고 들어가라 그리하여 나에게 말하라, 아직도 무슨 고통 남아 있는지 주검들 사이에 끼어 있는 영혼 없는 이 늙은 죽은 몸에!                                                     -김인환 역, 마지막 연     제가 《악의 꽃》에 실려 있는 이 두 편의 시를 읽은 것은 대입 수험생일 때였습니다. 교과서에 나와 있는 엄숙한 시들을 수십 번씩 읽으며 예비고사 대비 공부를 할 때 이런 시를 읽어보니 얼마나 재미가 있던지요. 은 잔소리가 심한 마누라를 죽인 사리인자가 다시금 술에 취해 허우적대는 모습을 그린 시입니다. 사람을 죽여놓고 다시 술을 마시는 섬뜩한 광경이 펼쳐지지만 “내 마누라가 죽어서, 난 자유로워졌다!”라고 외치는 술꾼에게 왠지 동정심이 갑니다. 에서는 시적 화자가 구더기들에게 자기의 영혼은 이제 육신과 나누어졌으니 육신을 파고 들어가 배를 채우라고 말합니다. 죽음의 세계를 자유롭고 즐거운 세계로 묘사한 이 시를 보고 “야, 참 시가 이렇게 엉뚱하고 재미있을 수도 있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프랑스 시인들 가운데 앙리 미쇼, 앙드레 브르통, 자크 프레베르 같은 시인의 시는 별로 심각하지 않고 아주 재미가 있습니다. 지면 관계상 소개를 못 해드리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혹시 우리 시에 ‘웃음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없습니까? 시라는 것이 엄숙하기만 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는 지난 100년 동안 엄숙주의로 일관해왔던 것이 아닐까요. 언제가 ’풍자‘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지금부터 시가 불러일으킬 수 있는 웃음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도 시를 쓸 때 어깨에 너무 힘을 주지 말고, 재미있게 쓰는 훈련을 해보십시오. 김영승의 다음과 같은 시는 어떻습니까.   남들 안 입는 그런 옷을 입었으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왜 으스대는가. 왜 까부는가. 왜 어깨에 목에 힘이 들어가 있는가. 왜 꼭 그렇게 미련을 떨어야 하는가. 하얀 가운을 걸치고 까만 망토를 걸치고 만원 버스를 타봐라. 만원 전철을 타봐라. 얼마나 쳐다보겠냐. 얼마나 창피하겠냐. 수녀복을 입고, 죄수복을 입고, 별 넷 달린 군복을 입고……   왼쪽 손가락을 깊이 베어 며칠 병원을 다녔는데 어떤 파리 대가리같이 생긴 늙은, 늙지도 않은 의사새끼가 어중간한 반말이다. 아니 반말이다. 그래서 나도 반말을 했다.   “좀 어때?” “응 괜찮어” 그랬더니 존댓말을 한다. 그래서 나도 존댓말을 해줬다. “내일 또 오십시오.” “그러지요.”                           - 전문     김영승은 아마도 병원에 갔다가 직접 겪은 일을 갖고 이 시를 썼을 것입니다. 제복을 입었다면 봉사 정신에 투철해야 할 텐데 그들 중 다수는 사람을 깔보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맞대응을 했던 것이고, 의사는 그때서야 말을 높여서 환자를 대합니다. 사회풍자라고 해야 할지, 시인이 한 방 멋지게 펀치를 날렸군요. 김영승은 시집 《반성》에 이어 《권태》를 낸 바 있는데 두 시집 모두 연작시로만 이루어진 독특한 시집입니다. 《반성》에는 이런 구절이 있는 시가 나옵니다. “신문에 난 《내 잠 속에 비 내리는데》 수필집 광고에 나온/ 李外秀 사진을 보며 어머니는 또 그러신다 그러더니 또 별안간/ ‘야 저 새끼 장가갔냐?’ 하신다”. 소설가 이외수의 얼굴을 떠올려도 그렇거니와 어머니의 말투가 거칠기 이를 데 없어 독자는 씩 웃게 됩니다.   웃음에 대한 개념들과 전통속의 웃음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보통 이하의 열등한 인물을 모방하는 데서 희극이 성립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또, 웃음은 타인에게 고통이나 해악을 끼치지 않는 일종의 과오나 추함이라고 했습니다. 이 내용은 움베르토 에코가 쓴 《장미의 이름》의 모티브가 됩니다. 17세기에 와서 홉스는 웃음이란 타인의 약점을 통해 느끼는 우월감 내지는 갑작스러운 승리감이라 했습니다. 18세기의 칸트는 웃음이란 긴장했던 기대가 갑자기 무로 전화해서 발생하는 정서라고 했습니다. 홉스와 칸트 두 사람은 ‘불일치’의 관점에서 웃음을 이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세기에 와서 베르그송은 《웃음-희극의 의미에 대한 시론》에서 웃음을 ‘생명적인 것에 덧붙여진 기계적인 것’으로 설명합니다. 인간은 사회의 변화에 주의하고 이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긴장감과 유연성을 가집니다. 그러나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고 기계처럼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경직성과 방심 상태에 놓일 때, 웃음을 자아내게 됩니다. 웃음의 사회적 성격을 강조하는 베르그송에게 있어서 웃음의 원인인 ‘불일치’는 바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비사회성’입니다. ‘비사회성’에서 오는 기계적인 경직성이나 방심상태를 단죄하는 사회적 징벌이 베르그송이 말하는 웃음의 사회적 기능입니다. 웃음은 미적 개념으로는 골계미에 해당됩니다. 미의 기본 범주로 숭고미, 우아미, 비장미, 그리고 골계미의 4분법 체계를 드는 것이 일반적이지요. 골계의 유형 중 가장 비중이 큰 풍자는, 현실 개선의 의도를 가지고 인간의 어리석음과 악덕을 폭로하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외부 상황의 자극과 그 고통의 감정을 웃음으로 넘겨 자아를 손상하지 않고 지키는 데 해학의 본질이 있다고 했습니다. 풍자가 공격성의 골계라면, 해학은 방어의 골계입니다. 또한 풍자가 사나운 골계라고 한다면 해학은 부드러운 골계에 해당합니다. 우리 문학에는 예로부터 골계미가 풍부했습니다. 골계미는 서양 말로 하면 ‘유머 센스’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서양에서는 골계의 하위 범주로 풍자․해학․아이러니․위트 네 가지를 설정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풍자(satire)는 사회의 모순과 허위를 능란한 궤변으로 까발리거나 과장하여 공격하는 비우호적인 태도입니다. 해학(humor)은 현실을 포용과 융화로 여유 있게 보면서 현실로 인한 슬픔이나 분노를 익살스럽게 드러내는 태도입니다. 아이러니(irony)는 겉으로 나타난 말과 실질적인 의미 사이의 괴리로 생겨나 반어적 표현입니다. 위트(wit)는 서로 다른 사물에서 남이 보지 못하는 유사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경구나 격언 같은 압축되고 정리된 말로 능숙하게 표현하는 지적 능력입니다. 아래의 시는 위트가 넘치는 작품이죠.     가만히 지구를 두들겨 본다 뗑 뗑 반대편에 있는 누군가 발밑을 내려다본다 밑을 자식 뭘 보냐 씩 웃는다                ― 김용길, 전문       여기서의 지구는 물방울 하나입니다. 지구가 아무리 크다지만 보는 시각에 따라 물방울 하나, 지구본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인의 상상력은 독자가 지구를 물방울 하나로 인식하게끔 유도합니다. 지구를 두들겨보니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 시인의 발밑을 내려다  봅니다. 물론 이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처럼 상상의 공간이지요. 시인은 마지막에 두 행에서 웃음의 미학을 보여줍니다. 지구 저쪽의 누가 자기의 발밑을 보니까 화자는 “자식 뭘 보냐”하고 한마디 했고, 그러자 상대방이 씩 웃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지구는 하나의 촌(村)이며, 그보다 더욱 작은 물방울 병인 것입니다. 국권상실의 시대에 근대적인 의미의 시가 출발한 탓인지 눈물과 한숨, 좌절과 절망은 1910~1920년대의 종합지 시단과 동인지를 수놓은 주된 정조였습니다. 기나긴 일제 36년 동안 이 땅의 많은 시인들은 광복을 생각하며 우국지사의 정신 내지는 선비 정신을 가져야 했습니다. 광복의 날이 오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친일의 대열에 합류해 일제의 침략전쟁을 고무, 찬양하고 일군에 자진해서 입대할 것을 종용하는 친일작품을 썼던 시인도 많았습니다. 나라를 되찾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남북으로 분단이 되고 6․25 전쟁을 겪어야 했습니다. 남쪽의 시인들은 1980년대가 저물도록 독재자가 아니면 군인 출신이 나라를 통치한 탓에 민주투사의 길을 가거나 정치에 환명을 느끼고 서정시인의 길을 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농담 질하는 시인을 우리는 그리 많이 갖지 못했습니다. 저 역시도 이제껏 인간의 슬픔과 설움, 아픔과 절망의 세계를 탐구해온 시인입니다. 제 시에는 재미있는 구석이 별로 없지요. 다만 두 번째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에 나오는 몇 편의 시가 다소 재미있는 시의 유형에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웃음은 인간의 전유물입니다. 동물이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나 동물의 웃음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아직 동물이 웃는 모습을 못 보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웃을 줄 아는 존재이고, 남을 웃길 줄 아는 존재입니다. 요즘 젊은 여성들은 신랑 될 사람이 갖추어야 되는 조건 중 하나로 유머 감각을 제시할 정도라고 합니다. 숫기 없는 사람은 장가도 못 가게 생겼습니다. 우리 시사에서 웃음이 전통은 〈처용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신라의 향가 〈처용가>는  내용이 아주 익살스럽습니다. 처용이 밤늦게 집에 와서 보니 이불 밖으로 다리가 네 개 나와 있습니다. 외간 남자(역신)가 아내와 동침 중이었던 것입니다. 처용은 그 충격적인 광경을 보고 화를 내기는커녕 얼씨구나 하고 한바탕 춤을 추었으니 그 배포가 보통이 아닙니다. 판소리 가운데 〈흥부전〉과 〈춘향전〉에는 청중을 웃음의 도가니에 빠뜨리는 대목이 몇 번이나 나옵니다. 탈춤과 들놀이〔野遊〕의 양반춤 과장에서는 꼭 관중의 웃음을 유도하는 장면이 나오며, 유랑광대의 인형극ㄱ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문학에서 웃음의 전통은 안국선의 〈금수회의록〉을 징검다리 삼아서 김유정과 채만식으로 이어지집니다. 저는 윤흥길과 심상대, 성석제의 소설을 읽으며 키득키득 웃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웃음의 전통은 우리 현대시에서 김영승  외에 어떤 시인들이 계승하고 있을까요?   우리 현대시 속에서의 웃음   김지하는 풍자의 올바른 방향이 민중이나 소시민의 자기 풍자가 아니라 민중의 반대편에 서 있는 특권 지배계층에 대한 신랄한 풍자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재벌․국회의원․고급공무원․장성․장차관을 을사오적신에 빗대어 비판한 〈오적〉은 단형 판소리 요소를 차용한 작품입니다. 그는 일련의 담시를 통해 군사독재정치 시대의 비리에 가득 찬 특권 지배계층과 반민주적인 지배이데올로기, 그리고 반민족적인 친일 세력에 대해서도 통렬하게 풍자했습니다. 황지우의 웃음은 우리 사회의 죄악상이나 불미스런 점들을 비꼬아 찌르는 촌철살인의 웃음입니다.  조롱과 야유가 담긴 싸늘한 웃음이지요. 황지우의 냉소는 현실부정의 소산이어서 삶의 끔찍스러움을 긍정하는 고소(苦笑)와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박남철은 산문체와 요설체, 금기어, 욕설, 야유 등의 해체적 문법에 의해 전통적인 시적 규범을 깨뜨림으로써 사회의 규범과 문학적 엄숙주의를 타파하고자 애쓴 시인입니다. 〈주기도문〉이나 〈주기도문, 빌어먹을〉같은 시에서 보이는 신성에 대한 반발도 그의 초기 시세계의 중요한 특징이었습니다. 냉소를 선사했던 그들의 뒤를 이어 유하와 함민복은 우리에게 유쾌한 웃음을 주었습니다.   경천동지항 무공으로 중원을 휩쓸고 우뚝 무림왕국을 세웠던 무림패왕 천마대제 만박이 주지육림에 빠져 온갖 영화를 누리다 무림의 안위를 위해 창설했던 정보기관 동창 서열 제 2위 낙성천마 금규(金圭)에게 불의의 일장을 맞고 척살되자, 무림계는 난세천하를 휘어잡으려는 군웅들이 어지러이 할거하기 시작했다 (…) 무력 19년 가을, 광도일귀는 승산의 영웅대회에서 잔혹귀존 폭풍마독 등 형식적인 비무를 거친 뒤 무림맹주의 권좌에 등극하였다 그날 무협신문들은 일제히 환영의 뜻을 표하며 혈의방 무사들이 통천가공할 무공을 익히며 호시탐탐 중원을 노리는 이때 강력한 무공의 소유가자 중원을 다스려야 한다고 수심에 가득한 기사를 썼지만 대부분 인면수심들이었다.                 ―〈武歷 18년에서 20년 사이 ― 무림일기1〉부분   유하는 저급한 대중문화의 대명사인 ‘키치’를 이용하여 지난 시대의 정치적 억압상황과 대중문화, 그리고 현대문명을 비판한 시인입니다. 이 시에서 유하는 정치인들을 무림계의 고수들로 형상화하여 그 행태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무림패황 천마대제 만박”은 박정희를, “낙성천마 금규”는 김재규를 가리킵니다.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피살된 후 군사정권 존립에 위기감을 느낀 전두환이 김재규와 정승화를 몰아내고 대통령이 되는 일련의 정치적 일정이 무협지의 세계로 풍자되고 있습니다. 유하가 당시의 정치현실을 무협지에 빗댄 의도는 ‘허구 같은 역사적 사실’을 표현하고자 한 데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시인은 시대적 소명을 저버리고 한결같이 “환영의 뜻을 표하며” 강력한 무력의 소유자가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며 ‘인면수심’을 보인 당대 신문들을 풍자하는 것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시의 제목은 군사정권 18년에서 20년 사이를 의미합니다. 1980년대의 군사정권도 바로 박정희 정권의 연장이라는 유하의 시대의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잘 벗겨지지 않아요 ―제비(?)표 페인트 알아서 빨아줘요 ―대우 봉(?) 세탁기 구석구석 빨아줘요 ―삼성(?) 세탁기 빨아주고 비벼주고 말려주고 ―금성(?) 세탁기 우리는 그이가 다 빨아줘요 잘 빨아주니 새댁은 좋겠네 ―럭키슈퍼타이   무엇이, 무엇을 의도적으로 빠는 이 광고에 우리는 무엇을 꼭 집어넣으라고 욕해야 할지                   ―〈내 귀가 섹스 쪽으로 타락하고 있다〉전문     함민복은 상업광고의 언어를 패러디하여 우리 사회의 타락상을 비판한 시인입니다. 패러디란 원래 어떤 작품이 지닌 특징을 포착해서 만든, 모방적 측면을 지닌 작품이지요. 함민복은 육체적 이미지와 관련된 먹고 사는 것, 성적인 것, 배설로 말미암은 것이 유쾌한 것으로 찬양될 수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또 기존의 신성과 권위, 이데올로기 및 가치는 얼마든지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차원으로 격하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당시의 세탁기 광고 언어를 모른다고 해도 함민복의 시가 지닌 웃음의 의미는 약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시는 패러디가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현실을 첨예하게 반영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단적인 예입니다. 다음 시에도 웃음의 미학이 듬뿍 담겨 있습니다.   나 어느덧 입덧 심한 임산부 되어 배만 찾는다 값비싸고 큰 배만 맛있게 먹는다 아, 배! 아그 배! 아그, 아그으, 아그 배! 아크 배! 아크, 아크, 아, 크, 큰 배〔腹〕! 아흐으으으 배!         ―이선영, 〈아그배〉전문   아그배는 아그배나무의 열매로 아주 작고 맛이 시며 떫습니다. 이 시는 먹는 배를 탐하던 임산부가 점점 커져만 가는 자신의 배를 보고 경악해 마지않는 장면을 담아 임신한 여성의 심리를 절묘하게 묘사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의성어와 감탄사가 웃음의 효과를 배가하고 있습니다. 이야기 듣기 체험의 산물인 〈굴비〉나 재미있는 상상력의 산물인 〈교통사고의 기쁨〉을 보면 앞으로 우리 시의 활로는 눈물의 시가 아니라 웃음의 시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비록 체질에 안 맞아 웃음이 시를 쓸 수 없지만 여러분은 시를 쓰실 때 농담이나 육담 한마디를 곁들려 보십시오. 골계미와 풍자․해학․아이러니․위트를 적절히 구사한 시를 써보십시오. 그러면서도 사회를 풍자하고 세태를 비판하면 일거양득이 아닙니까.   나는 편해, 도로에 볼썽 사나운 모습 으로 누워 있지만, 고통도 더 이상 없고 아주 편해, 그래, 페허를 헤매는 늑대 같은 직장 동료 안 만나도, 이젠 되고, 이젠 자녀의 앞날도, 사랑하는 사랑한다는, 남편이나 아내의 기분도 하루 세 끼, 그 지겨운 식사도,                 ―이만식,〈교통사고의 기쁨〉부분   교통사고를 강해 죽은 한 가장의 영혼의 독백으로 전개되는 이 시는 역설의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 왜 기쁨이냐 하면, 죽음으로써 온갖 의무의 사슬에서 풀려나 자유로운 저승세계로 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통도 더 이상 없고 아주 편하다는 죽은 자의 말에서 우리는 샐러리맨의 비애가 어떤 것인가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오탁번의 시 〈굴비〉는 웃음 없이 읽을 수 없습니다. 시의 대화 부분만을 따서 제시합니다.   ―굴비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이상 제 1연의 대화) ―웬 굴비여? ―앞으로는 절대로 하지 마!(이상 제 2연의 대화) ―또 웬 굴비여? ―앞으로는 안 했어요(이상 제 3연의 대화)   이 시의 재미는 굴비 장수와 ‘김매던 계집’의 화간이나 “앞으로는”이란 말의 뜻에 있는 것 같지만 제가 보건대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박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 불렀다”라는 마지막 4행에 있습니다. 사내는 아내의 굴비 봉사(?)에 오히려 그날 밤을 뜨겁게 밝힙니다. 개똥벌레들과 베짱이들도 사라의 하모니를 연주하지요. 우리 시에는 이러한 웃음이 부족했던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웃음보를 터뜨리게 하는 영화가 얼마나 많습니까. 시인이라고 우스꽝스러운 시를 쓰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골계미를 분출하는 시, 웃음 속에 눈물이 얼비치는 시를 저는 읽고 싶습니다.       [출처]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시를 써보자 /이승하 |작성자 노연화  
1030    해체시에 관하여 댓글:  조회:4991  추천:0  2015-04-20
  희망인가, 절망인가                 해체는 지금 막 시작되고 있는 해체이어야만 한다.                               -남진우, {바벨탑의 언어}, p.99          모든 아방가드는 일어나는 당시에는 아무리 새롭다 할지라도        시간이 흐르면 전통의 일부로 수렴되고 마는 운명이어서...                          -권택영,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p.11       1. 해체의 논리와 비논리   -왜 해체에 대해 말해야 하는가? 해체 시에 대해서는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듯 보인다. 그 이전 시대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80년대 시의 굵은 줄기 중의 하나로 해체시를 위치시키는데 독자들은 인색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난날 우리 시가 언어를 조탁하여 아름답게 대상을 묘사하고자 했던 묵시적 전통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고, 겉으로 드러나는 변화이었기에 더욱 독자들의 관심을 주목시킬 수 있었다. 여러 시인 비평가들이 앞 다투어 작품으로, 혹은 이론으로 해체시의 당위성을 이야기해왔다. 리얼리즘 계열의 평론가들은 나름대로의 해박한 지식을 동원해 애써 해체시를 평가 절하시키려고 애썼다. 자의든 타의든 해체 시 자체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그 존재를 검증받지 않을 수 없었고, 따라서 해체시를 둘러싼 말들이 무성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80년대는 지나갔다. 실제의 작품을 보더라도 80년대 초반 이성복, 황지우, 박남철 등에 의해 촉발된 해체 분위기는 80년대 후반에 들어 한 절정을 이루다 지금은 각개약진 식으로 다양해지기는 했으나 상당히 정숙해진 느낌이다. 모더니즘 혹은 요즘 많이 언급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기본 방향으로 잡고 있는 {현대시사상}에서 꾸준히 해체를 하나의 묶음으로 정착시키려고 애써왔고, {문학사상}에서도 근래 해체 시 특집을 기획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지금 우리를 둘러싼 해체의 분위기는 분명히 80년대의 그것이 아니다. 단언한다면, '80년대식 해체'는 이제 끝났다. 아니 한걸음 양보한다면, 지금 끝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또 철지난 사랑타령처럼 해체시를 들먹거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숲에 있을 땐 나무 하나하나의 모양을 세밀히 보지만 정작 숲 전체를 조감할 수 없다는 흔한 상식을 상기하자. 우리는 80년대와 함께 해체시의 숲을 통과해, 지금 숲이 끝난 곳에서 뒤돌아볼 여유를 갖게 되었다. 또 과거가 역사로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현재와 만나야한다는 교훈도 상기하자. 해체는 지금 완전히 분해 되지 않고 우리 주변을 떠돌아다닌다. 한 때 해체의 선봉에 섰던 황지우와 이성복이 이후 방향을 선회하긴 했지만, 그들의 선배 세대인 이승훈, 박의상, 박상배 등이 여전히 해체시를 만들고 있고, 그들의 후배세대인 장정일, 박상우, 황인숙, 최계선 등이 나름대로 실험을 거듭하고 있으며, 그들과 비슷한 시기에 작품 활동을 시작한 최승자, 김영승, 김정란 등이 비록 성격은 다르지만 해체를 방법으로 차용하여 꾸준히 작품을 써오고 있다. 80년대가 끝난 지금 우리는 이들에게서 전 시대와는 다른 해체를 읽게되고, 그것이 90년대식 방법이 되기 위해서는 지난날의 해체를 꼼꼼히 따져 보아야 할 시점에 다다른 것이다.   해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의 대답은 명백한 것처럼 보인다. 언어를 뒤집고, 그림이나 도표를 인용하고, 과감한 패러디를 쓰고, 대상을 감추거나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혹은 글자들이 있어야 할 자리를 빈 공간으로 채우는, 한마디로 요약해 전통 시형을 파괴하고 새로움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해체이론은 이러한 정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더 이상 따지고 들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주로 해체시의 타당성, 다시 말해 해체시가 시로서 존재할 가치가 있는 가 아닌가에 집중되어 왔던 게 사실이다. 모더니즘의 입장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시의 영토를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리얼리즘 쪽의 논객들은, 시를 언어의 유희 즉 말장난 정도로 여겼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들의 첨예한 대결은 해체에만 국한된 대결이 아니라 문학 전반을 바라보는 견해의 차이, 더 나아가 이 세상을 해석하는 이데올로기나 가치관의 차이라는 점에서 전혀 접근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해체시의 바른 평가와 방향설정에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따라서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 이전의 해체를 둘러싼 어떤 해석이나 이론에도 기대지 않기로 한다. 해체를 언어형식의 파괴로 파악할 때 우리는 엄청난 오해에 휩싸인다. 일상의 우리 대화 속에는 문장으로 기술할 때 전혀 의미가 통하지 않을 수많은 언어의 단절이 숨어 있다. 말을 할 당시의 주변 환경, 상대방의 태도, 공통으로 갖고 있는 인식의 틀 등으로 인해 우리는 완전한 문장이 아니어도 상대의 말을 이해하고 거기에 마찬가지로 반응한다. 이것을 글자로 옮겼을 때 거기에는 엄청난 언어파괴 현상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의 대화를 두고 '해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한편 오늘의 시들이 갖고 있는 문자적 속성은 시에 숙명적인 제약을 가져다주었다. 인쇄되지 않은 시는 시로 인정되지 않는 모순 속에 살고 있으면서 그것을 모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시집이나 문학잡지를 통해 시를 읽는데 익숙해진 탓이리라. 그러나 엄격히 말해 시행을 이루는 글자들은 언어의 보조수단에 지나지 않는 아주 제한적인 약속일뿐이다. 상식적인 이야기이면서도 우리가 흔히 잊어버리는 사실, 따라서 주의력을 환기하고 생각해 보야 야 할 점이 바로 이것이다. 다시 말해 시는 '글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어는 글자로 옮길 수 있는 것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미지의 엄청난 수렁을 갖고 있다. 해체 시에서 다루는 도형이나 그림, 낯선 기호나 표식은 모두 그러한 언어의 일종이며 시인의 의도를 드러내는 장치이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해체라고 불렀던 것은 바로 이 '언어의 해체'가 아니라 '글자의 해체'였던 것이다. 해체를 언어의 해체가 아니라 글자의 해체로 이해한다는 사실은 지금까지의 해체시 자체가 그런 면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글자의 해체는 언어가 내용과 형식으로 구성된다고 할 때 형식의 해체로 국한된다는 뜻이며, 이점은 해체의 특징이자 곧 한계이기도 하다. 내용이란 시인의 세계관 또는 가치관일 것인데, 그들의 시에 이 내용이 파괴되지 않고 남아, 독자를 향해 여전히 충실하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완전한 해체, 즉 내용까지를 해체하여 텅 빈 세계를 보여주기엔 해체시인들의 욕심이 허용하지 않는다. 여기에 대하여는 실제의 작품을 검토한 후 그 구체적 증거들을 찾아보는 것이 옳을 것 같아 일단 유보하기로 하고, 먼저 해체시가 나타나게 된 경위와 이유를 살피기로 하자. 해체가 80년대 시의 한 특징이긴 하지만 그 시대만의 것은 물론 아니다. 30년대의 모더니스트들, 특히 이상이라든지, 50년대의 후기 모더니스트, 즉 김구용 조향 박인환 등은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해체의 시를 썼다. 모더니즘에서 벗어난 김수영에게서조차 그런 해체의 흔적은 얼마든지 발견된다. 70년대에도 이승훈이나 김광규 등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리고 본인들이 인정하든 아니든, 해체에 매달려 있었다. 그런데 왜 해체 시는 80년대에 유독 두드러져 나온 것일까. 해체시인들의 개인적인 상상력을 논외로 친다면, 여기에는 몇 가지 대답으로서의 가설을 세울 만 하다. 첫째는 전통적 시형식의 폐쇄성에 대한 반발로 새로움을 찾으려는 노력이 그렇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60년대 4.19가 미완의 혁명으로 마무리되고 군사정권이 장기화되면서 우리 시는 리얼리즘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순수/참여의 소모적 논쟁을 겪기도 했고, 일부 현실비판 작가들이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현실에서 움츠러든 문학은 현실을 도피하고 언어의 아름다움이란 미명 아래서 시들시들 메말라 갔다. 유신 이래 이런 경향은 더욱 깊어져 당연히 새로움에 대한 갈증도 짙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일부 반영이론 측의 시인들은 폐쇄된 공간에서 자유를 찾기 위한 염원이 지나쳐 문학을 이념의 충실한 매개물로 생각하고 현실을 그리는 데만 전념했을 뿐, 문학이 지녀야 할 정서 환기력에는 무관심하였다. 역시 새롭고 강렬한 방법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80년대에도 군사독재는 계속되었지만 광주의 봄을 겪고 난 우리의 의식은 훨씬 자유롭게 꿈꿀 여유를 얻게 되었고, 이것이 목마름과 잘 연결되어 새로운 시 형태를 낳게 하였다. 초기 황지우의 시에 살짝 감추어져 있기는 하지만,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는 이데올로기는 이런 배경에서 생겨난 당연한 결과이다. 이런 점에서도 해체시를 두고 리얼리즘/모더니즘의 계파논쟁을 벌였던 지난날의 입씨름은 무익한 것이다. 두 번째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설은,  산업화에 의한 사회구조의 변화와 그에 따르는 우리들 인식구조의 변화가 해체를 가능케 하였다는 점이다. 요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소개와 연구서가 쏟아져 나오고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이건 아니건 관심도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관심과는 달리 이들이 느끼는 당혹함은 이들을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으로부터 회피하게 만들고 있는 실정이다. 도대체 그게 뭔지 모르겠고, 별로 대단한 것 같지도 않다는 것이다. 사실 그렇다. 다만 지금 이 자리에서 해체시의 대사회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부터 매우 유익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지금의 후기 산업사회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세상읽기는 불가능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어떤 한 가지 가치관으로 삶을 해석하려 해도 그 엄청난 다양성 때문에 전체를 이해할 수가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고도산업화 정책은 70년대를 지나면서 1차 산업 위주의 사회를 2차 산업 위주의 사회로 바꾸어 놓았고, 80년대 들어와 그 변화는 더욱 두드러져 다시 3차 산업 중심의 사회로 바뀌어 갔다. 2차 혹은 3차 산업 사회에서는, 인간의 개성은 몰락하고 개인이 거대한 조직의 일원으로 부속품 화 되어 간다. 인구의 도시집중화로  사람들은 많아졌지만 가까워도 진정 가까울 수 없는 사람들 틈에서 각 개인이 고립된 채 살아가야 한다. 80년대는 이러한 후기 산업 사회적 징조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 시대였고,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말하는 해체의 밑거름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파편화된 삶이 시에 반영될 때, 시는 파괴적 혹은 해체적 양상을 나타내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앞의 두개의 가설은 해체의 등장을 무슨 필연처럼 이야기했다. 그러나 해체를 포함한 모든 새로움, 모든 아방가드는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해체는 그 자체가 해체되어야 할 운명으로 시작되었다는 일부 평자들의 주장은 해체를 올바로 꿰뚫어본 견해이다. 왜냐하면 해체는 처음 그것이 나타났을 때는 새로운 환기력을 독자에게 안겨줄 수 있지만, 그것이 시일이 지나고 유사한 작품들을 여럿 본 연후에는 더 이상 새로움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 쯤 되면 해체는 관습이나 전통의 일부로 편입되어 더 이상 해체가 아니게 된다. 스스로를 '해체'해야 할 운명에 당도하는 것이다. 문학이나 사회현상, 나아가 과학의 발전까지도 이러한 패러다임의 발현과 세속화라는 반복된 경로를 밟으며 발전해 왔다.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80년대의 해체는 더 이상 해체가 아닌 셈이고, 나아가 80년대의 해체가 80년대만으로 규정될 특이점이 아니라 도전과 응전이라는 보편적 법칙에 의해 있었던 하나의 문화기류로 이해되어지는 것이 그 본질을 파악하는데 올바른 지침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의 해체적 글쓰기, 또는 해체적 글 읽기의 과정에는 공통으로 전제되는 조건이 하나 있다. '우리의 해체'라는 관형표현을 붙인 이유는 여러 지면에서 해체주의라고 어설프게 소개되곤 하는 서구의 해체와 우리의 것이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해체는 해체의 대상이 시의 전면에 강하게 부각되어 나타나는 반면, 서구의 것은 대상 그 자체를 해체함으로써 해체의 흔적까지를 지워버리곤 한다. 예를 들어 장정일의 [백화점 왕국]은 비틀린 언어로 시인의 생활주변을 묘사하면서 그가 시에서 의도한 방향과는 조금 다른, 시 속의 현실로 독자들을 유도하지만, 그것이 거대한 조직 속에 살아가야 하는 우리 모두의 비극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눈치 챌 수 있다. 그러나 쟈크 데리다로 대표되는 서구의 해체이론은 근본적인 면에서 다르다. {그래마톨로지}에서 그는 진리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화폐로서의 가치가 사라지고 금속으로서의 가치만 남은' 그런 화폐와 같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잊고 있다고 개탄한다. 즉 작품에서 구현할 진리는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다 철저한, 불교적 냄새까지 띠고 있는 이러한 해체 개념은 해체의 마지막 단계를 이르는 말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해체'는 독일의 구체시나 형태시의 또 다른 한 변형이 아니며, 또 그렇게까지 해체를 극단으로 밀고가지도 않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가치가 떨어진다는 말은 절대로 아니지만, 우리의 해체가 대상을 염두에 두고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해체라는 점에서 불완전한 해체에 머무르고 말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2. 해체시인, 해체시, 해체적 글쓰기   지난 10년간의 세월이 해체의 시대로 평가될 수 있을지는 더 두고볼 일이다. 하지만 해체라는 표현 대신에 다양성이라는 좀더 부드러운 말을 쓴다면 분명히 80년대는 그 다양함이 어느 때보다 확대된 시기로 잡아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문화현상에서 운동성이나 이데올로기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실천이 이론보다 강조되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런 현상은 다양한 현실의 일부분으로, 가속적으로 다양성을 더욱 부추기는데 큰 몫을 했다. 실천이건 반영이건 80년대를 전체 속의 개인, 혹은 획일성 속의 다양성으로 우리의 의식이 변화해간 시대로 자리매김하더라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그에 따른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80년대는 전통서정을 노래한 시인, 현실변혁을 주창한 시인, 언어의 아름다움을 탐구한 시인 등, 모두 제 목소리를 갖고자 애썼던 시대였다. 해체 시는 바로 이러한 다양성의 대표적 표징으로 80년대를 상징하는 움직임이었던 것이다. 우선 시어의 형태를 과감하게 바꾸려는 외형적 해체에서 시작하여 전통정서에의 반기를 든 온건한 양식의 해체에 이르기까지, 해체의 방법이나 정도가 시인에 따라 차이가 남은 당연한 일이다. 해체시인, 혹은 해체시라고 했을 때 그것들을 같은 색깔로 한 보따리에 묶어 보낼 수 없는 것이다. 그 거칠었던 시대를 뚫고 나온 지금, 해체시인들을 갈래 구분하는 일이 이제는 문학사적인 입장에서 어느 정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물론 해체 시 이론이나 시인 론이 화려한 질투 속에 집중적으로 있었기에 해체시인을 갈래 구분하는 일이 좀 수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해체시인이라고 우리가 흔히 일컫는 시인 중 소수의 몇몇 시인들만이 조명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해체의 폭을 남몰래 넓히고도 영광의 그늘에 소리 없이 감추어진 시인들도 상당수 있다. 그러니까 그 많은 해체시론과 시인론이 해체의 전반적 모습을 살피는데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필자가 스스로 인정한 오해의 소지에도 불구하고 그간 많이 언급된 시인들을 다시 다룬다. 이 글을 통해 해체에 대한 일반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필자의 한가지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체시를 쓴 모든 시인을 여기에 초대하는 것도 그렇게 생산적일 것 같지 않다. 이 글을 쓰면서 필자가 주로 염두에 둔 시인과 시집을 연대순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성복,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1980)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1983) 이하석, {金氏의 옆 얼굴} (1984) 최승자, {즐거운 日記} (1984) 김영승, {반성} (1987) 장정일, {햄버거에 대한 명상} (1987) 박남철, {반시대적 고찰} (1988) 박상우, {사람구경} (1988) 황인숙,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1988) 박의상, {흔들리는 中心} (1989) 김정란, {다시 시작하는 나비} (1989) 이승훈, {너라는 환상} (1989) 최계선, {검은 지층} (1990)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들이 80년대의 해체를 이끌어갔고 지금도 활발히 작품을 쓰고 있는 대표적인 시인들이긴 하지만, 이들만이 해체의 전부는 아니다. 또한 이들의 작품 전부가 해체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 해체시인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많은 시인들의 작품에서도 일부 해체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고, 비록 지명도에 있어 뒤지긴 하지만 김종석이나 가나인처럼 극단적 해체시인의 부류로 넣어야 할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선 그들을 모두 뺀다. 해체시인을 세부적으로 갈래구분하기 위하여는 그 기준을 먼저 정하여야 할 것이다. '무엇을 해체하는가'에 따라 거칠게 나눈다면 다음의 세가지 부류가 가능할 것이다. 시의 대상을  현실, 언어, 자아의 3분법으로 나누는 것은 별로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주변의 현실적 삶과 질곡을 일종의 알레고리적 수법으로 해체하는 것이 첫 번째 부류일 텐데, 여기에는 황지우, 이하석, 장정일, 최계선 등이 속할 것이다. 존재나 언어 자체, 혹은 비대상을 해체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두 번 째 부류로, 박남철,박상우,박의상,김정란,이승훈 등이 여기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자아의 확인이란 전통적 주제를 새로운 형식으로 바꾸어 나타내고자 하는 이성복, 최승자, 김영승, 황인숙 등을 한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기준을 달리하여, 해체의 정도, 다시 말해 겉으로 드러나는 파격의 정도만을 가지고 갈래구분한다면 두 구룹으로의 구분이 가능할 것이다. 황지우,박남철, 박의상 등이 과격파라면 나머지는 온건파에 속하고, 특히 황인숙 같은 경우는 표현형태만을 가지고는 해체로 보기 어려운 면도 있다. 겉모양새로의 구분은, 분류 자체보다, 강도의 약화현상이 80년대 전반기에서 후반기로의 변이과정이라는데 더 큰 문학사적 주목을 필요로 한다. 초반의 과격함은 출구 없이 막힌 시의 흐름에 신선한 충격이 되기 위한 전략적 측면도 깃들여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해체는 같은 방법이 반복될 때 더 이상 해체가 아닌 불우한 운명을 갖고 있기 때문에 초기의 과격한 형태파괴가 후기에 들어 세밀해지고 조심스러워지면서 언어나 생활의 해체로 바뀌어갔다. 90년대로 접어든 지금 초기의 형태파괴시인들이 전통적 수법으로 복귀하거나 상당히 느슨해진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가 간다. 해체의 대상이 무엇이었던가를 밝히면서 해체시인들이 설정한 목표와 한계를 간략히 짚어본다. 먼저 80년대 해체시의 선두이며 기폭제 역할을 했던 황지우의 예를 본다. 그를 생각하면, {시들도 세상을 뜨는구나}가 처음 발간되었을 때 받았던 충격이 새삼 되살아난다. 독자들마다 받아들이는 방향과 폭이 물론 달랐을 테지만, 이상의 [烏瞰圖]이래 가장 강한 이질감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으리라. 지금은 해체에 익숙해져 그의 시를 느긋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지만, 당시로서는 이런 파격이 과연 시로서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앞섰었다. 그러나 형태파괴가 가져다준 효과가 말을 곱게 다듬는 것보다 훨씬 강렬하고 직설적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독자들은 그와의 기호소통체계를 묵시적 약속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을 했고, 그런 의미에서 성공했다. 이 시집은 현재 우리의 보편적 생활에 대한 일종의 보고서의 형식을 띠고 있다. 가령, 꽤 긴 작품인 [한국생명보험회사 송일환씨의 하루]라는 작품에서 작중 주인공인 송일환씨의 하루생활을 카메라로 비추듯 객관적으로 보여줄 때, [徐伐,셔 ,셔 ,서울,SEOUL]에서 '보성물산주식회사 종로 지점'에 근무하는 장만섭씨의 하루생활을 보여주었을 때, 혹은 [숙자는 남편이 야속해]에서 신문의 TV프로그램 한 조각을 옮겨놓았을 때, 우리는 이것이 우리들 삶의 현실과 얼마나 가까이 있는 것인지 안다. 우리가 그들 자신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 하여도 그들이 우리와 함께 살 붙이며 살아가는 사회구성원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결국 이 시집을 일관하여 흐르고 있는 핵심은 우리의  현실 생활을 정확하게 재현해 내고자하는 노력이며, 이 시집에서 만들어진 가공의 상황이나 인물들은 시인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들의 전형인 셈이다. 우리의 현 생활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 시집은 우리에게 가장 낯익은 것이 되어야할 시집이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것일수록 시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이전의 시적 태도와 달랐기에 우리에겐 오히려 낯설게 보인 시집이었고, 이 점도 시인의 의도에는 음흉하게 포함되어 있었다. 다시 말하면 시가 대상의 이차적 반영이라고 믿었던 통념을 깨고 대상을 일차적으로 반영함으로써 훨씬 리얼리즘에 가깝게 접근해 들어갔던 것이다. 따라서 흔히 말하는 '낯설게 하기' 수법으로 이해될 수는 있지만, 더욱 흔히 생각하는 바의  '해체'는 전혀 아니다. 황지우 시인의 진정한 목적과 방법은 현실의 진솔한 반영이며, 언어를 사실적으로 드러냈을 뿐이다. 그를 해체시인으로 몰아버린 것은 평론가들이며 여기에 대하여 평론가들은 책임을 지고 그를 다시 새로운 리얼리즘 시인의 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 황지우보다는 온건한 것으로 평가되지만, 역시 80년대 초반에 해체의 선두주자로 매김 당하는 이성복의 경우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황지우의 대상이 주로 대사회적인 것이라면 이성복은 다분히 개인사적인 면을 속에 담고 있다. [루우트 기호 속에서]에서 보이는 어머니와 자의식의 성장관계라든지,[그날]에 나오는 가족들의 흩어진 모습 등은 그 증거이다. 그러나 많은 부분에서 그의 내부는 스스로 닫힌 것이 아니라 외부에 의하여 통제된 내부이며, 이렇게 닫혀 있으면서도 인식의 성장과정을 참담한 언어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내부의 풍경을 그리는 것이 때로는 환상적 세계로 빠져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어느날 우연히], [蒙昧日記]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개인이 집단에 의하여 규정된다는 생각은 자아의 틀에만 빠져있지 않도록 하고 있다. 그는 자아의 내부와 외부를 부단히 연결시키려고 하고 있지, 절대로 대상을 포기하거나 해체하려 하지 않는다. 박남철의 시는 마음이 너그러운 독자에게도 거칠게 읽힌다. 시인의 신변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나 그의 주변을 장식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자신을 포함한 자아의 모든 것들을 그는 시의 대상으로 포착한다. 이 잡동사니 대상들은 황지우의 것처럼 사회적 이데올로기를 갖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이성복의 경우처럼 자아의 인식성장을 위한 보조수단이 되지도 않는다. 그에게 있어 시의 대상은 그냥 자기자리에 '있는' 것들로 우연히 체포되었을 뿐, 어떤 혐의도 둘 수 없는 그런 것들이다. 따라서 좋게 말할 때, 그가 해체하고자 애쓰는 대상은 존재 자체인 것이다. 그러나 나쁘게 말하면, 그의 대상은 의미 없는 것들로, 그는 의미 없는 대상들을 가지고 시를 '만들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존재가 의미를 잃을 때, 그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광인일기]는 욕설과 야유와 죽음에 대한 비난의 원색적인 말들로 가득 채워진 꽤 긴 시인데 (그의 다른 시에 비하면 그래도 짧은 셈이지만), 마지막 행의 (글자가 고딕으로 뒤집혀 똑같이 반복되며 끝남) 라는 것을 뺀다면 이 시가 의미하고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 이 마지막 행을 위하여 그 이전의 많은 언어와 대상들이 동원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가장 경제적 표현으로 가장 큰 효과를 노리는 것이 시라고 하는, 그 낡아빠진 시의 개념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박남철의 시에서는 앞 구절이 뒷 구절을 위해 기획되어진 것으로는 보기 어렵다. 앞의 욕설이 망자에 대한 분노나 슬픔을 환기시켜주지 못하고 욕설을 드러내는 것으로 그치기 때문이다. 이 작품 뿐만이 아니라 [박해미르] 시리즈 작품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는 그냥 언어의 흩어짐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렀다면 지금 해체를 논하고 있는 이 자리에서, 박남철을 진정한 해체시인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대상 자체를 해체하고 언어를 기호화 혹은 알레고리화 함으로써 어떤 면에서는 가장 철저하게 해체를 실천하는 시인인지도 모른다. {地上의 人間}에서 최근 {용의 모습으로}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러한 해체는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해체는 해체가 지닐 수 있는 결정적인 약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80년대 해체시의 한 표본이 된다. 시가 가치없고 일회용 종이컵 정도의 용도로 밖에는 쓰이지 않는 것이라면 문제는 간단하지만, 이천 오백원 정도의 돈을 지불하여 책을 사고 아까운 시간을 쪼개어 읽어야할 문학작품이라면 우리는 시를 두고 가치와 판단의 면모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언어는 의미화 되지 못함으로써 가볍게 공중에 떠 있는데, 가벼움과 유희가 목적이일 때에만 성공할 수 있다. 새로운 형식을 통해 독자에게 충격을 주려는 시도는 한번으로 족하다. 같은 것이 두번 반복될 때 그것은 더이상 새로움도 아니고 해체도 아니다. 박남철 시인에게서 특징적으로 보이는 바와 같이 80년대의 해체는 해체가 스스로 해체되어야할 숙명을 안에 담고 있었다. 박상우가 보여주는 야유와 재치, 김정란의 자아와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독백도 색깔이나 지향점은 서로 다르지만 넓은 의미에서 박남철이 갖고 있는 해체의 속성과 한계를 함께 지니고 있다. 70년대부터 해체를 실천해온 이승훈과, 역시 비슷한 연배이지만 80년대 들어와서야 해체에 뛰어든 박의상에게도 엮시 같은 지적을 할 수밖에 없다. 이승훈의 '비대상'은 다르게 표현하면 '대상의 해체'일 것인데, 그가 언젠가 스스로 고백했듯, 비대상의 허무함이 시를 텅 빈 그릇으로 만들 때, 시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박의상의 경우는 시행을 불규칙하게 배열하고 의미없는 언어를 반복하는 수법의 해체작품을 쓰고 있다. 이럴 때 시행의 배열은 시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定處]연작은 내용상의 '자리찾음'이 아니라 불규칙한 시행이 보여주는 바의 불확실한 현재 위치를 말하는 것이 된다. 이승훈이나 박의상에게 있어 의미 없는 대상의 존재는 시의 중심개념이 되고 있는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전제하기 위하여는 존재의 해체가 적절한 방법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에서 박남철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가벼움이 가라앉지 않는 한 그들의 뿌리는 쉽게 고갈될 것이고, 스스로 자신의 시에 어떤 해석을 부가하더라도 독자들은 그들에게서 의미 찾기를 포기할 것이다. 80년대 후반에 들어오면 황지우나 박남철과는 다른 유형의 해체시들이 여러 시인에 의하여 다양한 목소리로 나타난다. 그 중 대표적인 얼굴로 필자에게 떠오르는 시인은 장정일과 황인숙이다. 80년대 후반은 초반의 과격한 문자파괴를 거치고 난 이후였기 때문에 문자가 더 이상 해체의 대상이 되기에 적합하지 않은 환경이었다. 글자의 파괴는 진정한 의미에서 아무것도 해체하지 못한다는 것을 젊은 시인들은 인식했기 때문이다. 해체의 일차적 대상이 문자로 지목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문자는 글자 이전에 한 의미체계를 지닌 구조물이기에 글자의 해체를 통해서는 대상을 완전히 해체했다고 볼 수가 없다. 그 반대로 대상의 의미만을 비워두고 언어형식을 해체하지 않아도 완전한 해체에는 다다를 수 없다. 그렇다고, 양자의 장점만을 택한 방법, 즉 대상의 의미와 글자를 동시에 해체한다고 해서 해체시가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은 여러모로 주목할 만한 시집이다. 그의 시에는 이야기가 있고, 그래서 대부분 시가 길고 서술적이며 알레고리화 되어 있다. 이야기들은 대개 그의 개인사적인 매개물로 시작되지만 단순히 한 개인의 고백으로 끝나지 않는다. 평범한 보통사람의 머리로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그러나 중요한 만큼 무겁게 짊어지고 다니고 싶지 않을 그런 문제들을 향해 장정일의 상상력은 종횡으로 날아다닌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시의 표면에 드러내고 독자를 향해 말한다. 이야기의 재미에 이끌려 시를 끝까지 읽은 독자들은 시가 끝나고 나서야 그것이 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독자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는 섬뜩해진다. 그의 해체는 해체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전개되고 쉽사리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일부 평자들은 그의 시를 두고 현대 도시의 물질화된 생활, 특히 미국식으로 변해가는 문명생활에 대한 야유와 경고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의 시에서 다루는 소재들이 주로 도시적 삶에서 얻은 것들이기에 그런 평가가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장정일이 다루고자 하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삶의 진실에 대한 회의인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표제시 [햄버거에 대한 명상]은 햄버거를 만드는 요리과정에 대한 설명 뿐이고, [붉은 신호에 걸린 여자]는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만나러 가던 여자가 횡단보도 한가운데서 하이힐이 걸려 넘어지면서 길을 건너지고 되돌아가지도 못한다는 상황묘사 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요리책도 아니고 소설의 일부를 따놓은 것도 아니다. 재미는 있지만 시인이 이 작품을 쓴 의도를 찾기가 어렵다. 그가 [쉬인]에서 말하는 것처럼 '지랄떠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 이야기들은 우리들이 지금껏 생각해왔던 '진리'의 숭고함, 형이상학적인 속성, 세속으로부터의 거리감 등을 완전히 무시한데서 온 결과이다. 진실이 교과서에만 써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활이나 주변에 얼마든지 흩어진 것이라는 역설적 표현이다. 따라서 그는 진실을 거부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진실을 찾고자하는 노력을 이야기를 통해 나타냈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최승자는 자의식이 강한 면에서 장정일과는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지만 그의 선배격인 이하석은 장정일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시인이다. 다만 보편적 진실보다는 이데올로기화된 진실, 즉 현실을 풍자하고 비판함으로써 삶을 개조시키려고 애쓴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여기에 비하여 황인숙의 애매모호함이 장정일과 더욱 접근된 모습을 보여준다.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에서 황인숙의 시가 매력적인 것은 쉽고 활달한 말을 사용하면서도 그 의미를 한마디로 규정하기 매우 어려운 다층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 때문이다. 또 많은 경우에 의미해석을 강요하지 않고 그 분위기가 주는 막연한 느낌이 독자를 오히려 포근하게 감싸준다. 그의 작품을 두고 '둥근 시'라고 평하는데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역시 중요한 문제는 진실에 대한 문제, 즉 기존의 진실의 질서를 신뢰할 수 있는냐 하는 문제이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여 대상이 예전의 대상이 아닌 그만의 것인 대상이 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 대상이 그의 것이되었을 때, 그는 세상의 신기로움과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고정된 진실이 아닌 열린 개념으로서의 새로운 진실들을 만나게 된다. 황인숙은 진실을 해체하는 작업과 동시에 진실을 새롭게 구성하는 창조작업을 하고 있는 셈이다. 최근에 최계선이 낸 시집 {검은 지층}은 글자가 아닌 그림의 삽입이라는 점에서 박남철을 생각나게 하지만, 박남철과는 분명히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생활을 다룬 시들과 지질학적 상상력으로 인간존재를 다룬 시들이 혼재해 있는데, 눈에 얼른 띄는 것은 물론 후자의 것이고, 형태적 해체를 취한 부분도 바로 이 부분이다. 단층이나 모래의 형상을 실제의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은 유감이지만 전혀 신기하지 않다. 다만 그것이 인류학적, 혹은 지질학적 인간존재를 다루고 있어 시의 영역을 넓히는데 크게 공헌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시에 자연과학을 도입한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다.   3. 무엇을 해체할 것인가   80년대에 해체는 리얼리즘에 대립되는 모더니즘의 방편으로 오해되는 가운데, 각 진영으로부터 해체 자체에 대한 깊은 천착 없이 심정적인 찬반의 평가를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80년대가 지니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와 모순이 바로 그러한 결과를 낳았다고도 볼 수 있겠는데, 사실 해체는 리얼리즘/모더니즘의 이분법적 기준과는 관계없이 어떠한 예술작용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일종의 아방가드인 것이다. 단순히 '새롭다'는 면에서는 모더니즘과 통하는 면이 없지 않지만 해체의 대상은 리얼리즘에서 다루는 사회성일 수도 있고 모더니즘에서 다루는 현대문명일 수도 있다. 그리도 동시에 이들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해체를 규정할 때 우리가 기준으로 삼아야할 것은 어떤 당파, 혹은 사조에 휩쓸려 있는냐 하는 것이 아니라, 해체의 대상이 무엇이며 해체로 인하여 어떤 환기력을 갖을 수 있느냐 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이다. 앞에서  80년대의 중요한 해체시인들을 검토하며, 필자는 황지우 식의 비해체적 해체, 박남철 식의 무의미적 해체가 진정한 해체를 보여주지 못했다고 결론지은 바 있다. 그리고 장정일이나 황인숙의 시들이 보여주는 진리의 해체작업이 앞으로 우리시에서 해체시가 가야할 길을 어느 정도 밝혀주고 있음도 말했다. 이들의 차이점은 글자와 의미의 해체인가, 아니면 진리가 존재한다는 믿음의 해체인가로 요약된다. 진리는 존재하지만 그 진리는 교과서에 적혀있는 죽은 언어들이 아니라 삶의 구석구석에서 우리가 늘 얼굴맞대며 사는 일상에 있다. 고정된 진리를 진리로 받아들일 때 이미 그것은 우리의 진리가 아니다. 즉 주어진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해체함으로써 새롭게 탄생된 진리를 알고 즐기는 행위가 바로 해체작업의 본질이다. 80년대의 해체시 중 대부분이 현실의 절망적인 면을 부각시키고 있으면서도 해체가 본질적으로 절망을 위한 만가가 아니라 희망을 향해 열린 축복인 것은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다. 해체가 하나의 아방가드로 그 효력을 상실하고 새로운 아방가드가 해체의 해체에서 새롭게 시작할 것이라면, 지금의 해체가 무엇을 과연 해체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앞으로의 지표를 정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물론 미래를 점치고 이론화한다는 것은 교조주의적 심판으로 흐르기 쉽지만, 그걸 알면서도 그럴 위험을 피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한가지, 90년대의 해체는 삶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삶의 표면에 그치지 않고 거기에서 진실을 추출하고 그 진리를 해체시킴으로써 보다 철저한 해체로 나아가야 하리라는 점을 지적해두고 싶다. 세월이 흐르면 삶이 바뀌고, 삶이 바뀌면 진리도 바뀌고, 진리가 바뀌면 해체의 대상도 바뀐다. 따라서 해체는 늘 새롭게 시작하는 해체이어야 하는 것이다.    [출처] 정한용  |작성자 툭툭
1029    브레히트 시의 리해 댓글:  조회:3887  추천:0  2015-04-20
마리 A의 기억               / 베트톨트 브레히트     브레히트 시의 이해               /박찬일(연세대출판부)     1. 사용가치의 시       브레히트는 예술의 사용 가치를 중시하였다. 그런 점에서 당시 독일시단에서 쌍벽을 이룬 고트프리 벤과 대조를 이룬다. 벤은 문학을 통한 현실 참여에 반대했다. “가난한 자들은 올라가려고 하고 부자들은 내려가지 않으려고 한다. 끔찍한 세계, 그러나 3천년이 경과한 후에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으며 다만 현상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벤은 문학적 형식만이 세상을 혼돈에서, 무의미에서, 구원할 수 있다고 보았다. “형식만이 신앙이고 행위이다./손에 의해 어루만져졌으나,/그 후 손을 떠난 조각품은/씨앗을 품고 있는 조각품이다”, “삶은 망상”이라는 것. 삶에는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형식만 남는다는 것이다. 형식이 “씨앗”이라는 것이다. 한편 브레히트는 상황을 알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상황은 “사회적 인과관계의 복합체”. 사회적 인과관계의 복합체를 알아내면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변화의 주체는 다수의 민중이고 변화의 객체는 소수의 지배계급이었다.     브레히트의 사용가치의 예술관은 계몽주의 전통에 맞닿아 있다. 계몽주의 작가들은 문학의 과제는 ‘유익함과 즐거움’이라는 호라티우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레싱은 특히 문학의 유익함과 교술적 의미를 강조하여 무대를 “도덕 세계의 학교”라고 하였다. 브레히트의 예술관은 칸트 이래의 ‘예술의 자율성’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모든 이해관계에서 벗어난”것이 “미적 취미”, 혹은 “아름다움”이었다. 예술은 사회적 이해관계, 경제적 이해관계,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나중에 뷔르거는 칸트가 예술을 최대 이윤의 법칙에서 벗어나 있다고 한 것으로 풀이했다.   2. 논리의 시     브레히트는 이성을 중시했다. 이때 이성은 시인의 이성이기도 하지만 독자의 이성이기도 하다. 브레히트는 독자에게 이성을 요구했다. 장미는 시 한편이며, 독자는 꽃잎 떼어내듯 시행 하나하나(혹은 단어 하나하나)를 냉정한 논리로 분석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훌륭한 시행과 잘못된 시행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능력 없이는 진정으로 시를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봐야 한다. 이 능력은 논리적 능력이며, 진정으로 향유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즐긴다는 것이다.     브레히트의 창작미학상의 목표는 논리적으로 즐기게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낯설게 하기 효과”(소외효과)이다. 낯설게 하기 효과는 시학적 개념이기도 하고 인식론적 개념이기도 하다. 소외시킨다는 것, 즉 낯설게 한다는 점에서 시학적 개념이고, 낯설게 하기를 통해 대상을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는 점에서 인식론적 개념이다. 낯설게 만드는 과정이 논리적이다. 독자는 이 낯설게 만드는 과정을 통과하면서, 하나의 논리를 통과하면서 하나의 인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한편 브레히트는 시가 원래 “비사교적 요소들”이기 때문에 “주석”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주석이 시와 청자 사이에 거리를 만들고 청자로 하여금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소외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낯설게 하기는 벤야민에 의하면 감정이입 대신에 ‘놀라움’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낯설게 하기는 또한 벤야민에 의하면 “중단”과 관계 있다. 시에서 의 예를 보자.     아, 어떤 식으로 이 작은 장미를 기록해야 할까     아, 어떤 식으로 이 작은 장미를 기록해야 할까? 갑자기 짙은 빨강의 장미, 신선한 장미가 보이지 않는가? 아, 장미를 찾아온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도착했을 때 장미가 거기 있었네. 장미가 거기 있기 전에는 아무도 장미를 기대하지 않았는데. 장미가 거기 있었을 때 누구나 놀랐네. 출발하지 않은 것이 목적지에 도착한 것. 그런데 대체로 모든 일이 그렇지 않은가?       이 시에는 시를 중단시키는 자아가 있다. 시를 중단시키는 자아는 ‘낯설게 하기 효과’를 노리는 자아이다. 중단은 낯설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출발하지 않은 것이 목적지에 도착한 것./그런데 대체로 모든 일이 그렇지 않은가?”라는 구절이 중단시키는 자아의 말이다. 특히 “그런데 대체로 모든 일이 그렇지 않은가?”라는 구절이 그렇다.  중단시키는 자아는 서사적 자아이다. 끼어드는 자아이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서사적 자아는 첫째, 결론을 내리고 있다. “출발하지도 않은 것이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라고 한 것이 그것. 둘째,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대체로 모든 일이 그렇지 않은가?”라고 한 것이 그것.     독자에게 시를 논리적으로 즐기라고 하고 시인에게는 낯설게 하기라는 논리적 형식을 요구하는 것은 헤겔로 연원하는 서정시 개념에 반대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서정시는 논리의 서정시가 아닌 ‘주관성’의 서정시이기 때문이다. 헤겔에 의하면 서사시는 “외적 실재의 형식”으로서 “사건 속에서 사실은 자유롭고 자립적으로 진행되며 서사적 자아는 뒤로 후퇴한다.” “객관적인 것”(내용)을 ‘주관성(형식)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주관적인 것은 내면적 세계이며 “주관성”은 “직관, 느낌” 등이다.   3. 醜의 시     브레히트에게 보들레르의 쇼크는 부도덕적 쇼크로서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대도시의 정경, 대도시의 삶에 대한 기술은 부도덕적 쇼크의 판매로 간주되었다. 예를 들어 죽음, 주검, 파멸, 도박, 싸움, 신성모독 등에 대한 기술들이다. 에 대해 도덕적 잣대를 적용하여 도덕적 단죄를 내린 것이다. 그러나 도덕적 쇼크에 관해서라면 브레히트도 보들레르 못지않다. 브레히트도 부도덕적 쇼크를 불러 일으켰으니 첫 시집 의 많은 시편들이 ‘부도덕’의 기록, 혹은 신성모독의 기록이었다.     악의 서술은 악(자본주의의 악)의 내용에 대해 ‘선의 방식’으로서의 대응이 아니라, 악의 내용에 대한 ‘악의 방식’으로서의 대응이라는 점에서 근대적 서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이전의 서술은 악의 내용에 대한 선의 방식으로서의 서술이었기 때문이다. 작가에게 진선미의 법칙, 즉 진리의 법칙, 도덕의 법칙, 아름다움의 법칙을 따를 것을 요구하였다.     브레히트가 보들레르의 시편들을 부도덕적 쇼크라고 한 것은 그의 도덕적 엄숙주의 때문이었다. 마르크스주의자는 도덕적 엄숙주의자였다. 브레히트는 의 시편을 쓸 때는 도덕적 엄숙주의자가 아니었다. 보들레르의 시편들을 비판할 때 도덕적 엄숙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추의 미학은 ‘몰락’과 ‘폐물’에 ‘아름다움’을 부여한 것이다. 그의 초기 시집인 의 시편들은 19세기 말의 자연주의를 넘어 19세기 중반의 보들레르와 만나는 지점이 있다. 자연주의에 와서 추의 미학이 보편적으로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자연주의는 산업화 시대의 문학이었다. 노동자, 빈민, 창녀, 알코올 중독자, 정신병자들이 전면적으로 등장한 문학이었다. 가난, 고통, 질병, 매춘, 살인이 미학으로서 자리 잡았다. 추의 미학이 자리 잡았다. 근대문학은 자연주의에서 전면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실이 추하기 때문에 문학에도 추가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추의 미학’은 리얼리즘의 확장에 기여하였다.   * 전통적인 진선미의 코드는 쉴레겔에 와서 완전히 그 위력을 상실한다. 문학예술은 진선미에서 완전히 독립한다. 진리 법칙, 도덕 법칙, 아름다움의 법칙에서 독립한다. 악과 추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문학적 형상화는 심미적인 것으로 정당화된다. ‘흥미로움/지루함’이었다. ‘흥미로움/지루함’의 코드가 이후의 문학의 잣대였다. 악과 추는 흥미로운 악과 추일 수 있고 지루한 악과 추일 수 있다. 지루한 문학보다 흥미로운 문학이 의미 있다면 의미 있는 악과 추일 수 있고 의미 없는 악과 추일 수 있다. 보들레르와 자연주의 문학에서 나타나는 악과 추가 의미 있는 악과 추라면 ‘산업화 시대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 김수용 외, 악의 문학적 형상화 연구, 뷔히너와 현대문학, 제19호, 2002   마지막으로 브레히트의 시 두 편을 감상해보자.     마리에 대한 추억     1 푸르른 9월 어느 날 어린 자두나무 아래서 나는 그녀를, 그 고요하고 창백한 사랑을 조용히 품에 안았네. 마치 부드러운 꿈인 듯 했네. 우리 머리 위 아름다운 여름 하늘에는 구름 한 점 떠있었네. 그 구름을 나는 오래 쳐다보았네. 아주 하얗고 엄청 높은 곳에 있던 구름. 내가 다시 올려 보았을 땐 사라지고 없었네.     2 그날 이후 수많은 달, 수많은 세월이 조용히 흘러 흘러 사라져갔네. 자두나무들은 아마 베어졌을 것. 사랑이 어떻게 됐느냐고 그대가 물으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리. 그대가 말한 뜻을 나는 이미 알고 있지만 정말이네, 그녀 얼굴이 생각나지 않네. 다만 그녀 얼굴에 언젠가 키스를 했다는 사실뿐.     3 그 키스도 구름이 여기 있지 않았더라면 벌써 오래 전에 잊었을 것이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구름, 앞으로도 잊지 못할 구름은 아주 희었네. 위에서부터 온 것이라네. 자두나무들은 여전히 꽃을 피우고 있을지. 그녀는 일곱 번째 아이를 가지고 있을지도. 그러나 구름은 몇 분 동안만 피어올랐고 내가 올려다보았을 대 벌써 바람에 사라지고 없었네.           악한 자의 가면       내 방 한쪽 벽면에 일본 목각 작품 한 개가 걸려 있다. 금색 칠을 한 악마 형상의 가면이다. 이마에 툭 불거진 힘줄을 감전된 듯 나는 본다. 그것은 악한 것도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보여주는 것.
1028    명시인 - 베르톨트 브레히트 댓글:  조회:3713  추천:0  2015-04-20
  세계의 명시/ 베르톨트 브레히트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나도 안다, 행복한 자만이 사랑받고 있음을, 그의 음성은 듣기 좋고, 그의 얼굴은 잘생겼다. 마당의 구부러진 나무가 토질 나쁜 땅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으레 나무를 못생겼다 욕한다. 해협*의 산뜻한 보트와 즐거운 돛단배들이 내게는 보이지 않는다. 내게는 무엇보다도 어부들의 찢어진 어망이 눈에 띌 뿐이다. 왜 나는 자꾸 40대의 소작인 처가 허리를 꼬부리고 걸어가는 것만 이야기하는가? 처녀들의 젖가슴은 예나 이제나 따스한데. 나의 시에 운을 맞춘다면 그것은 내게 거의 오만처럼 생각된다.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동과 엉터리 화가**에 대한 경악이 나의 가슴 속에서 다투고 있다. 그러나 바로 두 번째 것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다. * 스웨덴과 덴마크 사이의 해협 ** 히틀러를 지칭       시를 말하다 정끝별 l 시인 “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땅 속에 묻었다/ 꽃이 자라고 나비가 그 위로 날아간다…/ 체중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나의 어머니’)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몇 해 전 가을 잎들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땅에 아버지를 묻어 드리고 올 적에 나는 브레히트의 이 시를 생각했다. 180센티미터를 밑돌던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직전 47킬로그램이셨다. 브레히트의 시에는 이처럼, 절박한 현실 속에서 다시 부르게 하는 힘이 있다.   1933년 2월 28일 브레히트는 가족과 함께 독일을 떠난다. 히틀러가 그를 정치사상범으로 몰아 체포 대상자 명단에 올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체코, 오스트리아, 스위스, 덴마크(1933년 망명), 핀란드, 파리, 모스크바, 미국(1941년 망명), 스위스, 동독으로 이어지는 15년간의 망명 생활이 시작되었다. 브레히트 자신의 표현대로 “구두보다도 더 자주 나라를 바꿔 가며”, ▶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전전하는 동안 그의 문학은 강철처럼 단련되곤 했다. 나치즘이 초래한 학살과 전쟁의 시대를 ‘살아남기 위한’ 브레히트의 생존력은 놀라웠다. 할리우드에 팔아먹을 영화 대본을 쓰기도 했고 스탈린을 찬양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탈출하듯 뉴욕을 떠날 때 그는 묘비명 같은 시 한 편을 남겼다. “호랑이를 피해 달아나니/ 빈대들에게 뜯기게 되었네./ 평범한 것들이/ 나를 먹어 치우고 말았네.” 미국에 망명할 즈음에 쓴 ‘사상자 명부’라는 시에서 브레히트는 죽은 동료들의 이름을 애도하듯 부르고 있다. 모스크바에서 병사한 마르가레트 슈테핀(Margarete Steffin), 스페인 국경에서 자살한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베를린 시대의 영화감독 카를 코흐(Karl Koch)…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자신이 미워졌다.”라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시가 탄생하게 된 지점이다. ‘살아남은’ 자신의 삶을 항변하려는 듯, 브레히트는 ‘폭력에 대한 조치’는 폭력보다 오래 살아남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곤 했다. 폭력 앞에서는 모든 것이 정당화되므로 폭력에 정면으로 대항하다가 희생당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해서든 폭력보다 오래 살아남는 것이 폭력을 이기는 길이라고 그는 믿었던 것이다.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던 시대에 대한 분노와 자신에 대한 연민이 느껴지는 시이다.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는 1939년 초에 쓴 시이다. 이 시를 쓸 무렵 브레히트는 덴마크에 망명 중이었다. 벤야민의 회상에 따르면 브레히트는 농가의 마구간을 회칠하여 작업실로 썼는데 그 작업실의 떡갈나무 기둥에 “진실은 구체적이다.”라는 문구를 붙여 놓았다고 한다. 그의 다른 시들처럼, 이 시 역시 구체적이고 단순하고 분명하다. 브레히트는 학살과 전쟁의 주범이자 젊은 시절 화가 지망생이었던 히틀러를 ‘칠쟁이’, ‘엉터리 화가’라 희화화시킨다. ‘칠장이 히틀러의 노래’라는 시에서는 “칠장이 히틀러는/ 색깔을 빼놓고는 아무것도 배운 바 없어/ 그에게 정작 일할 기회가 주어지자/ 모든 것을 잘못 칠해서 더럽혔다네./ 독일 전체를 온통 잘못 칠해서 더럽혔다네.”라고 쓰기도 했다. “아름다운 사과나무의 감동”보다는 이 ‘엉터리 화가’에 대한 분노가 브레히트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하는 힘이었다. 사랑받고 있는 행복한 자, 해협의 산뜻한 보트와 돛단배, 따뜻한 처녀들의 젖가슴을 노래하는 아름답고 충만한 서정시 대신, 마당의 구부러진 나무, 어부들의 찢어진 어망, 40대인 소작인의 처의 구부러진 허리로 상징되는 현실의 결핍과 폭력에 대해서 쓰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를 위해 일부러 ‘운을 맞추’지 않은 거칠고, 구체적인 시에 대한 지향을 시사하는 시이다. 토질이 나쁜 땅에서는 나무가 굽어 자라듯, 나치즘의 광기가 휩쓸고 있는 그의 시대가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임을 천명하는 시이다. 브레히트에게 시를 쓰는 일이란 “인간적인 행위로서, 모든 모순성과 가변성을 지니며 역사를 규정하면서 또한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사회적 실천”에 다름 아니었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는 아도르노의 선언 또한 이 시로부터 비롯되었다. 야만적인 자본의 논리가 세계를 점령하고 있는 우리 시대 역시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이다. 1퍼센트의 부자는 돈을 쓰는 재미에 빠져 서정시 따위에 무관심하고, 99퍼센트의 빈자들은 밥에 매달려 서정시를 외면하고 있다. 월가를 점령한 젊은이들은 이렇게 외쳤다. “Who's street?” “Ours street!” “We are ninety-nine percent!" 이런 외침이 거세지는 시대는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임이 분명하다. 서정보다 자본이, 꽃보다 밥이, 노래보다는 목숨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2011년 가을, TV에서 월가의 시위 장면을 보면서도 나는 브레히트의 시를 떠올렸다. “암울한 시대에/ 그때도 역시 노래하게 될 것인가?/ 그때도 역시 노래하게 될 것이다./ 암울한 시대에 대해”(‘모토’)!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2.10-1956.8.14) / 1898년 독일 바이에른 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뮌헨 대학 의학부 재학 중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위생병으로 소집되어 육군병원에서 근무하였다. 1928년 연극 로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초기에는 무정부주의자였으나, 나중에는 전쟁 체험을 통해서 차츰 혁명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덴마크, 미국 등에서 망명 생활을 했으며, 독일이 분단된 뒤 동독을 선택했다. 1949년 배우이자 아내인 헬레네 바이겔과 함께 극단 베를리너 앙상블을 창단하고 서사극을 발전시켰다. 1956년 지병인 심장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1922년 로 클라이스트(Kleist) 상을 받았으며, 1954년 레닌 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주요 작품으로, , , , , , , , 등이 있다. 글 정끝별 / 1988년 에 시가, 1994년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된 후 시 쓰기와 평론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시집으로 , , , , 시론ㆍ평론집 , , , 등이 있다.     브레히트 딸 獨여배우 히오프 사망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의 브레히트 생가 독일 바이에른 주 아우크스부르크에 위치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생가. 브레히트는 반전과 비사회적인 가치를 담은 작품을 서술했던 시인이자 극작가이다. 아우크스부르크는 로마의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의 일족이 세운 도시로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다. (베를린 AP=연합뉴스) '연극의 거장'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딸이자 독일 연극 배우인 한네 히오프가 2009년도 별세, 향년 86세.    베를린에 있는 브레히트 후손들의 사무소는 히오프가 독일 뮌헨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밝혔다.    히오프는 1923년 3월 12일 독일 남부에서 브레히트와 그의 첫번째 부인인 오페라 가수 마리안네 초프의 딸로 태어났다.    히오프는 초프로부터 무용 및 연기 교육을 받았으며 후에 서독, 동독, 오스트리아, 스위스의 극장에서 공연을 펼쳤다.    그녀는 브레히트의 작품 '카라 부인의 총'과 '도살장의 성(聖) 요한나'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다.    히오프는 1976년 연극계를 은퇴한 뒤 반전운동과 브레히트 유작 관리에 힘썼다.    브레히트는 서사극과 '낯설게 하기' 기법 등을 확립해 현대 서구 연극이론과 연극사의 한 획을 그은 극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1027    詩的 變容에 對하여 댓글:  조회:3936  추천:0  2015-04-20
  詩的 變容에 대하여   핏속에서 자라난 파란 꽃, 빨간 꽃, 흰 꽃, 혹시는 험하게 생긴 독이(毒栮), 이것들은 그가 자라난 흙과 하늘과 기후를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다. 어디 그럴 필요가 있으랴! 그러나 이 정숙한 따님들을 그저 벙어리로 알아서는 안 된다. 사랑에 취해 흘려듣는 사람의 귀에, 그들은 저의 온갖 비밀을 쏟기도 한다. 저들은 다만 지껄이지 않고 까불거리지 않을 뿐, 피보다 더 붉게, 눈보다 더욱 희게 피어나는 한 송이 꽃. 우리의 모든 체험은 피 가운데로 용해한다. 피 가운데로 피 가운데로 한낱 감각과, 한 가지 구경과, 구름같이 피어올랐던 생각과, 한 근육의 움직임과, 읽은 시 한 줄, 지나간 격정이 모두 피 가운데, 알아보기 어려운 용해된 기록으로 남긴다.지극히 예민한 감성이 있다면, 옛날의 전설같이 우리의 맥을 짚어봄으로, 우리의 호흡을 들을 뿐으로 얼마나 길고도 가는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랴! 흙 속에 어찌 풀이 나고 자라며, 버섯이 생기뇨? 무슨 솜씨가 핏 속에 시를, 시의 꽃을 피어나게 하느뇨? 변종을 만들어내는 원예가, 하느님의 다음 가는 창조자, 그는 실로 교묘하게 배합하느니라. 그러나 몇 곱절이나 더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이랴! 교묘한 배합‧고안‧기술, 그러나 그 위에 다시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되는 변종 발생의 찬스. 문학에 뜻을 두는 사람에게, “너는 먼저 쓴다는 것이 네 심령의 가장 깊은 곳에 뿌리를 박고 있는 일인지를 살펴보라. 그리고 밤과 밤의 가장 고요한 시간에 네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그것을 쓰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가? 쓰지 않고는 못 배길, 죽어도 못 배길 그런 내심의 요구가 있다면, 그때 너는 네 생애를 이 필연성에 의해서 건설하라.”고. 이런 무시무시한 권고를 한 독일의 시인 마리아 릴케는 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은 전 생애를 두고, 될 수 있으면 긴 생애를 두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의미와 감미를 모으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러면 아마 최후에 겨우 열 줄의 좋은 시를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시는 보통 생각하는 것같이 단순히 애정이 아닌 것이다. 시는 체험인 것이다.한 가지 시를 쓰는 데도 사람은 여러 도시와 사람들과 도시들을 봐야하고, 짐승들과, 새의 날아감과, 아침을 향해 피어날 때의 작은 꽃의 몸가짐을 알아야 한다. 모르는 지방의 길, 뜻하지 않았던 만남, 오래 전부터 생각던 이별, 이러한 것들과, 지금도 분명하지 않은 어린 시절로 마음 가운데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것들을 생각할 수 있는 것만으로는 넉넉지 않다. 여러 밤의 사람의 기억-하나가 하나와 서로 다른-진통하는 여자의 부르짖음과,아이를 낳고 해쓱하게 잠든 여자의 기억을 가져야 한다. 죽어가는 사람의 곁에도 있어봐야 하고, 때때로 무슨 소리가 들리는 방에서 창을 열어 놓고, 죽은 시체도 지켜봐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억을 가지는 것만으로는 넉넉지 않다. 기억이 이미 많아질 때, 기억을 잊어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말할 수 없는 참을성이 있어야 한다. 기억만으로는 시가 아닌 것이다. 다만, 그것들이 우리 속에 피가 되고, 눈짓과 몸가짐이 되고, 우리 자신과 구별할 수 없는 이름 없는 것이 된 다음에라야-그때에라야 우연히 가장 귀한 시간에 시의 첫 말이 그 가운데서 생겨나고, 그로부터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열 줄의 좋은 시를 기다리고 일생을 보낸다면, 한 줄의 좋은 시도 못 쓰리라. 다만, 하나의 큰 꽃만을 바라고 일생을 바치면 아무런 꽃도 못 가지리라. 최후의 한 송이, 극히 크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하여는 그보다 작을지라도, 덜 고울지라도 수다히 꽃을 피우며 일생을 지내야 한다. 마치 그것이 최대의 것인 것같이 최대의 정열을 다하여-주먹을 펴면 꽃이 한 송이 나오고, 한참 심혈을 모아 가지고 있다가 또 한 번 펴면 또 한 송이 꽃이 나오고, 이러한 기술사와 같이.’   나는 서도를 까맣게 모른다. 그러면서도 그 서도를 예로 이야기할 욕망을 느낀다. 서도의 대가가 그 생애의 절정에 섰을 때에, 한번 붓을 들어서 한 글자를 이룬다 하자. 괴석같이 뭉치고, 범같이 쭈그린 이 한 자. 최고의 지성과 웅지를 품었던 한 생애의 전 체험이, 한 인격이, 온통 거기 불멸화하였다. 그것이 주는 눈짓과 부르는 손짓과 소곤거리는 말을 나는 모른다. 나는 그것이 그러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유추할 뿐이다. 이 무슨 불행일 것이냐! 어떻게 하면 한 생애가, 한 정신이 붓대를 타고, 가는 털을 타고, 먹으로써 종이 위에 나타나, 웃고 손짓하고 소곤거릴 수 있느냐? 어쩌면 한참 만에 손을 펼 때마다 한 송이 꽃이 나오는 기술에 다다를 수 있으랴. 우리가 처음에는 선인들의 그 부러운 기술을 보고, 서투른 자기 암시를 하고, 염언(念言)을 외고, 땀을 흘리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것이다. 그저 빈주먹을……. 그러는 중에 어쩌다가 자기 암시가 성공하는 때가 있다. 비로소 주먹 속에 드는 조그만 꽃 하나! 염화시중의 미소요, 이심전심의 비법이다. 이래서, 손을 펼 때마다 꽃이 나오는 확실한 경지에 다다르려면 무한한 고난과 수련의 길을 밟아야 한다. 그러나 그가 한번 밤에 흙을 씻고, 꾸며 놓은 무대 위에 흥행하는 기술사로 올라설 때에 그의 손에서는 다만 가화(假花) 조각이 펄펄 날릴 뿐이다. 그가 뿌리는 땅에 박고 광야에 서서 대기를 호흡하는 나무로 있을 때만 그의 가지에서는 생명의 꽃이 핀다. 시인은 진실로 우리 가운데서 자란 한 그루 나무다. 청명한 하늘과 적당한 온도 아래서 무성한 나무로 자라나고, 장림(長霖)과 담천(曇天) 아래서 험상궂은 버섯으로 자라날 수 있는 기이한 식물이다. 그는 지질학자도 아니요, 기상대원일 수도 없으나, 그는 가장 강렬한 생명에의 의지를 갖고 빨아올리고 받아들이고 한다. 기쁜 태양을 향해 손을 뻗치고 험한 바람에 몸을 움츠린다. 그는 다만 기록하는 이상으로 그 기후를 생활한다. 꽃과 같이 자연스러운 시, 꾀꼬리같이 흘러나오는 노래, 이것은 도달할 길 없는 피안을 이상화한 말일 뿐이다. 비상한 고심과 노력이 아니고는 그 생활의 정을 모아 표현의 꽃을 피게 하지 못하는 비극을 가진 식물이다.     박용철(1904~1938) 호 龍兒. 전남 광산 출신. 시인. 도쿄 아오야마 학원과 연희전문에서 수업. 1930년 《시문학》에 시 ,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 시작. 1931년 《문예월간》을 출자 간행. 정지용, 김영랑, 이하윤, 신석정 등과 경향파에 대립하여 순수시 운동을 전개. 작품집에 《박용철 전집》이 있음  
1026    시인 - 朴龍喆 댓글:  조회:4486  추천:0  2015-04-20
  1904년 6월 21일 ~ 1938년 5월 12일[1]) 한국의 시인이다. 문학평론가, 번역가로도 활동했다. 아호는 용아(龍兒).       생애 전라남도 광산군(현 광주광역시)에서 출생했다. 배재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에서 수학하였다. 일본 유학 중 시인 김영랑과 교류하며 1930년 《시문학》을 함께 창간해 문학에 입문하였다. 1931년 《월간문학》, 1934년 《문학》을 창간하여 순수문학 계열에서 활동했다. "나 두 야 간다/나의 이 젊은 나이를/눈물로야 보낼거냐/나 두 야 가련다"로 시작되는 대표작 〈떠나가는 배〉 등 시작품은 초기에 많이 발표했고, 이후로는 주로 극예술연구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해외 시와 희곡을 번역하고 평론을 발표하는 방향으로 관심을 돌렸다. 1938년 결핵으로 요절하여 자신의 작품집은 생전에 내보지 못했다. 박용철이 사망하고 1년 뒤에 《박용철전집》이 시문학사에서 간행되었다. 전집의 전체 내용 중 번역이 차지하는 부분이 절반이 넘어, 박용철의 번역 문학에 대한 관심을 알 수 있다.괴테, 하이네, 릴케 등 독일 시인의 시를 많이 번역했다. 번역 희곡으로는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입센의 《인형의 집》 등이 있다. 극예술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번역한 작품들이다. 박용철은 1930년대 문단에서 임화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으로 대표되는 경향파 리얼리즘 문학, 김기림으로 대표되는 모더니즘 문학과 대립하여 순수문학이라는 하나의 흐름을 이끌었다. 김영랑, 정지용, 신석정, 이하윤 등이 박용철과 함께 순수시를 옹호하는 시문학파 시인들이다. 박용철의 시는 대체로 김영랑이나 정지용의 시에 비하면 시어가 맑지도 밝지도 못한 결함이 있지만, 그의 서정시의 밑바닥에는 사상성이나 민족의식 같은 것이 깔려 있어, 그 점이 김영랑, 정지용의 시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특색이라는 평가가 있다.[2] 광주에 생가가 보존되어 있고 광주공원에는 〈떠나가는 배〉가 새겨진 시비도 건립되어 있다.                                                                     떠나가는 배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구인들 손쉽게야 버릴거냐   안개같이 물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사랑하는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미련이나 있을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 보낼거냐   나 두 야 간다          고향     고향은 찾어 무얼 하리   일가 흩어지고 집 흐너진대   저녁 까마귀 가을풀에 울고   마을 앞 시내로 옛자리 바뀌었을라.     어린 때 꿈을 엄마 무덤 위에   남겨두고 떠도는 구름 따라   멈추는 듯 불려온 지 여남은 해   고향은 이제 찾어 무얼 하리.     하늘 가에 새 기쁨을 그리어보랴   남겨둔 무엇일래 못 잊히우랴   모진 바람아 마음껏 불어쳐라   흩어진 꽃잎 쉬임 어디 찾는다냐.     험한 발에 짓밟힌 고향생각    -아득한 꿈엔 달려가는 길이언만   서로의 굳은 뜻을 남께 앗긴    옛 사랑의 생각 같은 쓰린 심사여라.          눈은 내리네     이 겨울의 아침을   눈은 내리네     저 눈은 너무 희고   저 눈의 소리 또한 그윽하므로     내 이마를 숙이고 빌까 하노라   임이여 설운 빛이   그대의 입술을 물들이나니   그대 또한 저 눈을 사랑하는가     눈은 내리어   우리 함께 빌 때러라.       희망과 절망은   어느 해와 달에 끄을림이뇨  내 가슴에 밀려드는 밀물 밀물  둥시한 수면은 기름같이 솟아올라  두어마리 갈매기 어긋저 서로 날고  돛폭은 바람가득 먹음어  만리길 떠날 차비한다  그러나 이순간을 스치는 한쪽 구름  가슴 폭 내려앉고 깃발은 꺾어지며  험한 바위 도로 다 제 얼굴 나타내고  검정 뻘은 죽엄의 손짓조차 없다  남은 웅덩이에 파닥거리는 고기들  기다림도 없이 몸을 내던진 해초들  우연은 머리칼처럼 헝클어지도 않았거니  너는 무슨 낙시를 오히려 드리우노  희망과 절망의 두 등처기 사이를  시계추같이 건네질하는 마음씨야  시의 날랜 날개로도 따를 수 없는  걸음빠른 술레잡기야 이 어리석음이야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1  온전한 어둠 가운데 사라져버리는  한 낱 촛불이여.  이 눈보라 속에 그대 보내고 돌아서 오는  나의 가슴이여.  쓰린 듯 비인 듯한데 뿌리는 눈은  들어 안겨서  발마다 미끄러지기 쉬운 걸음은  자취 남겨서.  머지도 않은 앞이 그저 아득하여라.  2  밖을 내어다보려고, 무척 애쓰는  그대도 설으렷다.  유리창 검은 밖에 제 얼굴만 비쳐 눈물은  그렁그렁하렷다.  내 방에 들면 구석구석이 숨겨진 그 눈은  내게 웃으렷다.  목소리 들리는 듯 성그리는 듯 내 살은  부대끼렷다.  가는 그대 보내는 나 그저 아득하여라.  3  얼어붙은 바다에 쇄빙선같이 어둠을  헤쳐나가는 너.  약한 정 뿌리쳐 떼고 다만 밝음을  찾아가는 그대.  부서진다 놀래랴 두 줄기 궤도를  타고 달리는 너.  죽음이 무서우랴 힘있게 사는 길을  바로 닫는 그대  실어가는 너 실려가는 그대 그저 아득하여라.  4  이제 아득한 겨울이면 머지 못할 봄날을  나는 바라보자.  봄날같이 웃으며 달려들 그의 기차를  나는 기다리자. "잊는다"말인들 어찌 차마! 이대로 웃기를  나는 배워보자.  하다가는 험한 길 헤쳐가는 그의 걸음을  본받아도 보자.  마침내는 그를 따르는 사람이라도 되어 보리라.          싸늘한 이마 큰 어둠 가운데 홀로 밝은 불 켜고 앉아 있으면 모두 빼앗기는 듯한 외로움 한 포기 산꽃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한 위로이랴. 모두 빼앗기는 듯 눈덮개 고이 나리면 환한 왼몸은 새파란 불붙어 있는 인광 까만 귀뚜리 하나라도 있으면 얼마나 한 기쁨이랴. 파란 불에 몸을 사르면 싸늘한 이마 맑게 트이어 기어가는 신경의 간지러움 길 잃은 별이라도 맘에 있다면 얼마나 한 즐거움이냐.          이대로 가랴마는 설만들 이대로 가기야 하랴마는 이대로 간단들 못 간다 하랴마는 바람도 없이 고이 떨어지는 꽃잎같이 파란 하늘에 사라져 버리는 구름 쪽같이 조그만 열로 지금 숫더리는 피가 멈추고 가늘은 숨결이 여기서 끝맺는다면 ㅡ 아, 얇은 빛 들어오는 영창 아래서 차마 흐르지 못하는 눈물이 온 가슴에 젖어나리네.              밤 마음아 너는 더 어질어지렴아 너는 다만 헛되이 아 ㅡ 진실로 헛되지 아니하냐 남국의 어리석은 풀잎은  속임수 많은 겨울날 하로 빛에 고개를 들거니 가문 하늘에 한 조각 뜬구름을 바랐고 팔을 벌려 불타오르는 나뭇가지같이 오 ㅡ 밤길의 이상한 나그네야 산기슭 외딴집의 그물어가는 촛불로  네 희망조차 헛되이 날뀌려느냐 아 ㅡ 그 현명의 노끈으로 그 희망의 목을 잘라 걸으라 걸으라 무거운 짐 곤한 다리로 걸으라 걸으라 가도 갈 길 없는 너의 길을 걸으라 걸으라 불 꺼진 숯을 가슴에 안아 새벽 돌아옴 없는 밤을 걸으라 걸으라 걸으라          朴龍喆의 초기시   박용철의 초기시를 검토해 보면 그가 생전에 보여준 일련의 행동들이 더욱 명쾌하게 설명될 수 있다. 애초부터 격조 있는 서정시를 지향한 점에서는 朴龍喆이 다른  詩文學  동인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 해석에 있어서 그는 다른 동인들과 상당한 차이를 보여 준다. 이런 경우의 우리에게 좋은 보기가 되는 것이 , 등이다.        나두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무로야 보낼겨냐    나두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군들 손쉽게야 버릴거냐    안개같이 물어린 눈에도 비최나니    골잭이 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모양    주름ㅅ살도 눈에 익은 아 ─ 사랑하든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 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회살짓는다    앞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거냐        나두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두야 간다.                                                 ─ 전문        고향은 찾어 무얼하리    일가 흩어지고 집흐너진데    저녁 가마귀 가을 풀에 울고    마을 앞 시내도 넷자리 바뀌었을라.        어릴 때 꿈을 엄마 무덤 우에    남겨 두고 떠도는 구름따라    멈추는듯 불려온지 여나무해    고향은 이제 찾어 무얼하리.        하날가에 새 기쁨을 그리어보랴    남겨둔 무엇일래 못잊히우랴    모진 바람아 마음껏 불어쳐라    흩어진 꽃닢 쉬임 어디 찾는다냐.        험한 발에 짓밟힌 고향 생각    ─아득한 꿈엔 달려가는 길이언만    서로의 굳은 뜻을 남게 앗긴    옛사랑의 생각같은 쓰린 심사여라.                                                        ─ 전문       이들 작품은 그 말씨부터가 金永郞의 경우와는 상당히 다르다. 이미 살핀 바와 같이 金永郞은 감정을 정서의 상태로 바꾸는 데 역점을 두면서 말을 썼다. 그리하여 그 말들은 의미 내용을 갖는 게 아니라 그 분위기를 자아내게 하도록 쓰여졌던 것이다. 그러나 朴龍喆의 詩는 그와 달라서 상당히 사변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편이다. 그 결과 그의 말들은 감각의 상태에 그치기보다 다소간 서술적인 쪽으로 기울어진 게 되었다. 또 하나 여기서 지적되어야 할 것이 이 작품에 나타나는 상실감정이라든가 우수의 그림자 같은 것이다. 따지고 본다면 상실의 감정은 金永郞에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경우 상실의 느낌은 내면화되기 이전의 가벼운 감상에 그쳐 있다. 말하자면 마음 밑바닥에 닿는 내면적 깊이나 무게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朴龍喆의 경우에는 사정이 그와 다르다. 그의 우수나 상실감정 속에는 대개 思辨的 속성이 깃들여져 있는 것이다. 범박하게 보면 이것은 호흡 영역의 확장 시도인 동시에 정신의 깊이를 수용하려는 노력에 해당된다. 그리고 거기에는 제 나름의 논거가 마련된 자취도 검출된다.    넓은 의미에서 창작활동이란 제 목소리를 지니며 제 설 자리를 마련하는 일에 해당된다. 그런데 시문학파가 발족한 뒤 그 영역은 아주 제한되어 있었다.  詩文學  동인 가운데 한 사람인 金永郞은 이미 짧은 형식 속에 해맑은 가락을 담은 詩를 발표했다. 그리고 鄭芝溶은 독특한 말씨로 선명한 심상의 詩를 발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감각이나 정서만으로는 朴龍喆이 새로 기를 꽂을 여지가 없었던 게 당시의 우리 시단 상황이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한 나머지 이루어진 게 朴龍喆의 사변적 공간 개발 시도가 되는 셈이다. 아울러 그 말씨가 길어진 까닭도 바로 이런 데 있다. 이것은 분명히 朴龍喆이 그 나름의 설자리를 마련하고자 한 시도에 해당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시도가 시도로 끝날 수 없었던 데 있었다. 되풀이되지만 朴龍喆이 노린 것은 질적으로 정상에 속하는 서정시의 제작이었다. 그런데 그를 위해 사변적인 내용을 갖는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문제였다. 물론 하잘 것 없는 제재나 옅은 내용을 바닥에 깐 작품보다는 여러 사람에게 유의성을 가진다거나 철학적 깊이를 다룬 詩가 묵직하게 보일 공산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詩를 위한 여러 소인들이지 그 자체가 詩는 아닌 것이다. 이런 사실은 한국 근대시에 나타난 여러 사례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입증된다. 가령 개항기에 六堂이나 孤舟는 즐겨 문명․개화를 노래했다. 그런 내용은 당시 우리 주변에서 충분히 우리를 긴장케 하는 제재들이었다. 또한 신경향파와 카프의 경우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가능하다. 목적의식을 내세운 그들의 詩는 어떻든 현실에 입각한 작품의 제작을 외친 나머지 씌어진 것들이다. 그러나 그런 의도에도 불구하고 개화․계몽을 노래한 詩나 대지에 발을 붙이기를 기한 프로시 가운데 좋은 詩로 손꼽힐 수 있는 것은 아주 드물었다. 朴龍喆은 우리 근대시사가 이런 단계를 거친 다음에 그의 활동을 시작한 시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여러 독자에게 즐겨 읊조려지는 詩를 쓰고 싶었던 시인이다. 그런데 실제 그의 詩는 그런 목표에 넉넉히 도달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이 의욕과 실제의 거리를 의식한 순간, 그는 또 다른 시도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좋은 서정시 제작에 걸어버린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1025    시적 마술(변용) - 알베르 베갱 댓글:  조회:4285  추천:0  2015-04-20
                                            시적 마술(변용)          자기 내부로의 하강 - 내부를 향한 모든 시선-은 동시에 진정한 외적 현실을 향한 상승 -승천-의 시선이기도 하다.  자신의 껍질을 벗는 것은 모든 하강의 근본일 뿐 아니라 모든 진정한 상승의 토대이기도 하다.  자기내부로의 하강은 본질적인 최초의행위이다. 하지만 이 행위는 자연에 대한 정확한 관찰이 뒤따라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이전에는 사물의 표면에만 머물러있던 의식도 영혼의 심원한 근원에 담금질되고  본질적인 리듬에 따라 교육을 받게되면 절대적 권능에 도달하여 지고한 의식이 될 수 있다.     노발리스가 말하는 정복의 이 모든 과정들은 그의 정신에 내재하고 있는 두가지 욕구, 즉 부분들의 빠짐없는 통합을 통해서 모든것을 그 통일성 속에서 바라보고자하는 성향과 그로하여금 가시적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세계의 상징과 발현을 찾도록 이끄는 미학적 경향에 따른 것이다.  인간의 인격은 무의식과 의식의 조화 속에서만 완전하다. 그것은 조화 그자체, 고등한 변증법적 종합이다. 더 나아가서 그것은 완전한 자연과 우리 영혼의 종합이다. 그에게는 정신적일 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우주의 전체적인 통일성만이 온전한 의미로 존재한다. 모든 것을 통합시키고 모든 것의 공존을, 모든 분리가 절대적 조화로 귀환함으로서 사라지고 말 미래를 믿으려는 생명욕구가, 통일성에 대한 근본적 갈망이 한 인간 존재속에 이렇게 깊이 뿌리내린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자연과 인간들에 대한 고찰 그리고 내적 경험을 통해 그는 끊임없이 보편화된 불완전과 분리를 확인하게 된다. 그로하여금 그래도 통일성의 도래를 믿게 만드는 방책은 '마술'이다. 자신의 절대력을 행사하는 지평위에 모든 것을 옮겨 놓으려 애쓰는 정신의 마술, 사물들을 통해 그리고 이미 이 세상에서 보이지않는 세계의 보편적인 흔적을 포착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시적 창조의 마술.    그는  황금시대가 인간에게 약속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인간에게 주어지려면,  인간자신이 모든 무의식을 통합시킬 고등한 의식을 통해 진정한 통일성의 소유행위인 시적 마술을 통해 그것을 창조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내적인 변화를 통해 우리 내부에 획득된 완벽한 의식은 동시에 우주를 변화시킬 것이다. 인류에게 조화를 창조하는 이 절대적 힘을 되돌려줄 사람은 바로 시인이다. 노발리스의 미학은 마법사인 이 시인이라는 개념에 집중된다.  "무한 보다도 정신이 더 쉽게 다가설 수있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보이는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 들을 수있는 것은 들을 수 없는 것에  감지할 수 있는 것은 감지할 수 없는 것에, 그리고 아마 생각되는 것은 생각할 수 조차 없는 것에 묶여 있기에"    사실 정령의 세계는 이미 우리에게 개방되어 있다. - 그것은 항상 드러나 있다. - 우리의 불완전한 현 상태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발견되어야 한다.  우리로 하여금 사물들 속에 각인된 정신의 발현을 포착하고, 우주를 거기에 수록된 모든 말들이 영원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   투명한 하나의 텍스트로 바라보게 해줄 하나의 고행을 발견해야한다. 시인은 이런 고행을 따르는 사람이다.    시는 내적 근원에서 영감을 길어오고 자신 속으로 내려가는 신비스런 길로 접어든다. 성공한 작품은 언제나 무언가 비밀스러운 것을 , 손에 잡을 수 없는 것을 지니고 있다.  "우리 내부에 아직 감겨져 있는 눈에" 호소한다.     시는 영혼의 표상이고 전체성 속에 포착된 내적 세계의 표상이다. 그것은 표상 할 수 없는 것을 표상한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느낄 수 없는 것을 느낀다.    .. 시인은 말 그대로 정신나간 사람이다. - 그대신 모든 것이 그 내부에서 일어난다. 그는 문자그대로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고 영혼인 동시에 우주이다. 거기서 훌륭한 시의 무한한 특질이 생겨난다.    시인은 고로 내부의 유령들을 불러내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는 대결을 벌이게 하는 마법사이다.  감각적인 우주의 질료들은 시인에게 제공되어 절대적으로 개인적이고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조합된다.  무한히 다양한 감각적인 세계의 면모들을 두고, 시인은 선별을 거쳐,  그가 그 개별성때문에 선택한 하나의 개별적인 현상으로 완전히 선회한다.     -  알베르 베갱의 에서 발췌          알베르 베갱 1901년 스위스 쇼 드 퐁에서 태어나 스위스 바젤 대학 교수와 문학 잡지 '에스프리'의 편집장(1950~57)을 지냈다. 마르셀 레몽과 더불어 제네바 학파의 대표적 인물로 평가받는 그는 현대인이 직면한 본질적인 실존의 문제를 심도 있게 제기함으로써 세계적 명성을 얻었으며 발자크, 블루아, 네르발, 파스칼 등 여러작가들에 대한 에세이를 다수 출간했다.  시적인 문체로 인간 영혼의 심층에 접근해 들어가는 그의 글쓰기는 단순한 문학 이론의 지평을 넘어 심오한 종교적, 정치적 울림을 전해주고 있다.  
1024    대상의 고유한 특성 잡기와 시적 변용 댓글:  조회:4073  추천:0  2015-04-20
대상의 고유한 특성 잡기와 시적 변용   1.여는말    시 창작 기법의 하나인 대상의 고유한 특성 잡기는 창의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나름대로 언급해 본다. 창의성은 라고 정의한 로데스의 창의성 정의를 문학에 도입해 보면   이전의 사례 참조는 좋은 시를 읽고 감상하며 필사를 해보는 것이다.  좋은 시를 읽고  필사하는 과정 안에 시의 비밀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필사하면서 집중하여 생각을 하면 그 시의 심상, 그 이미지를 쓰게 된 시인의 남모를 동기, 행을 바꾼 의도, 시 속의 소리 없이 숨쉬는 운율 등이 은근히 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단순히 읽고 지나쳐버리고 만다면 그 중요한 것들의 눈짓을 알지 못한다. 또한 시를 쓰는 방법도 자연 그렇게 터득되는 것이다. 어떠한 이론적 습득보다 이 방법이 가장 확실하기에 이렇게 하다보면 재조합의 기법이 터득 된다고 본다.    그리고 또한 창의력을 기르는 방법의 하나는 시 이외의 교양서적을 섭렵하는 게 좋다. 문학, 철학, 신화, 미술, 음악, 역사 등 교양의 축적이 폭넓은 시적 자산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시 속에 좋은 시를 쓰는 왕도(王道)가 있다는 생각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2. 대상의 고유한 특성 잡기와 시적 변용의 의미 확장       -시창작에 있어서 "대상의 고유한 특성을 잡아라."    이는 어떤 한 대상의 고유한 특징을 잡아 의미를 확장시켜 전혀 다른 대상으로 만들어라.       우리는 가끔 시를 짓기 위하여 그 대상을 찾아 여행도가고 직접 그 대상이 있는 곳으로 찾아 간다는 말을 듣곤 하는데 앞서 언급한 과 일맥상통 한다고 생각 된다.  나 역시 3류 시인에 불과하지만 어디를 다녀와서 보고 온 것을 지었다고 하면서 감상해 보라고 보여주는 시를 보면 거의 대부분이 풍경이 전개되어 있는 모습만을 미사어구로 풍경화만 그려놓았을 뿐 이미지를 통한 메시지 전달이 아쉬운 점을 느끼곤 했었다.    그러면 이미지를 통한 메시지 전달이란 무엇인가? 서두에 말한 이 바로 그에 해당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을 해본다.    인터넷 여행을 하다가 주암호 억새라는 사진을 감상할 기회가 생겨 직접 현지에 가지는 않았지만 그 사진을 통하여 현지에서 주암호의 억새 감상을 하는 느낌이 들더니 불현듯 을 읽었던 내용이 떠올라 주암호 억새 사진을 통하여 대상의  특성을 나름대로 찾아보고 그 의미를 확장시켜 전혀 다른 대상으로 만들어 보려고 한참을 생각 하였지만, 나의 상식으로는 주암호에 대한 정보가 깊지 못하고 단지 광주시민의 상수원지라는 사실밖에 더 이상 다른 것은 떠오르지 않았고 억새의 사진을 보면서 전혀 다른 대상의 특징을 생각 하던 중 억새의 윗부분 하얀 부분이 바람에 누워있는 듯 휘어져 있는 모양이 개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모습으로 떠올랐다.    광주시민은 주암호의 물을 마신다, 그렇다면 주암호를 광주의 이미지로 변환 시켜보자. 광주의 특성은 무엇일까? 역사적 사실로 접근해보자 하고는, 현대사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광주학생독립운동, 5.18 등의 사건을 떠올릴 수 있었고 이 사건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기에 5.18당시의 군중집회, 계엄군의 시민을 쫓으며 총을 쏘는 장면, 쫓기는 군중, 이러한 장면으로 주암호 억새를 의미, 확장시켜 전혀 다른 대상으로 이미지를 담아 보았기에 졸작을 소개하면서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마친다.     주암호 억새 / 이근모     가을이 되면 주암호에서는 허가 받지 못한 억새들이 집회를 하고 이를 바라보는 태양이 울고 있는 것을 본다.     억새의 눈물방울 호수를 가득 채우고 이름 모를 영혼들을 달래는 진혼곡 가을 물빛으로 산산이 부서지고 있다.     봄을 피우기 위한 5월의 함성이 가을 햇살 아래서 벌이는 한 마당 집회는 겨울 저수지를 달래는 촛불 행사 같다.     억새풀, 꽹과리 상쇠 머리 돌리 듯 빙글빙글 돌리는 휘모리장단 소리 개 꼬리 쫓고 있다.     어디서 저 많은 개가 모였을까. 탕, 탕, 탕, 탕. 깽, 깽, 깽, 깽.     개털 태우는 향기 산야를 진동하고 주암호 붉게 물들인 눈물 억새 뿌리 적신다.      다음은 냉장고라는 저의 졸시를 앞서 소개한 이론에 의하여 소개한다. 먼저 냉장고의 특징은 보관 물품을 차게 하기위하여 작동을 할 때 윙윙 하고 기계를 작동 하는데 이를 울음소리로 발상 전환을 했고 냉장고에 보관 물품을 넣기 위하여 문을 열면 환하게 불이 켜진다는 것. 그리고 문을 꼭꼭 닫아야 냉동이 된다는 것, 이러한 특성을 이용하여 전혀 다른 사랑의 이미지로 확장 전환 했다.     냉장고 / 이근모     가까이 다가오지 마세요. 당신의 열꽃 너무 뜨거워요. 당신이 그렇게 뜨겁게, 뜨겁게 다가올수록 나는 꼭꼭 문을 닫을 수밖에 없어요. 가슴 붉어지게 왜 자꾸 문을 두드려요? 왜 자꾸 문을 열어요? 당신의 그 뜨거운 열정 나의 이 차가운 눈으로 녹여 버릴래요. 당신의 그 뜨거운 구애(求愛), 바람으로 피어날까봐 내 안에 가두고 한 눈 팔지 못하게 꽁꽁 얼려서 옴싹달싹 못하게 할거 에요. 그리하여 입안에서 달콤하게 녹아 드릴게요. 당신이 뜨겁게 다가올수록 나는 더 빗장을 걸어요. 당신이 내 가슴을 엿볼 때마다 얼굴이 붉어져요. 당신을 품어야 하는 수줍음에... 그렇다고 너무 가까이 오지 마세요. 당신의 그 뜨거운 사랑 감당하지 못해 나는 더 차가워지니까요. 파고들수록 마음 꼭꼭 걸어 잠근 채 어둠의 고요 안에서 가끔은 엉엉 울어야 되니까요. 나를 울게 하지 말아요.      다음은 지팡이라는 저의 졸시를 앞서 말한 이론에 의하여 소개해 봅니다. 지팡이 하면 흔히들 보행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의 보조기구로 일반화 되어 있다. 그러나 보행이 어려운 사람의 보조기구로써의 지팡이와 맹인의 보행을 위한 지팡이는 그 대상의 고유한 특성이 다르기에 여기에 착안하여 지팡이가 전달해 주는 느낌으로 보행을 하는 맹인의 마음의 눈을 그려 의미 확장을 해본 시다.     지팡이 / 이근모       충장로4가 횡단보도에서 맹인의 지팡이 두드리는 소리를 듣는다. 지팡이 소리로 앞서 가는 숙녀의 각선미를 보고, 뒤 따라 오는 애 엄마의 쳐진 젖가슴도 본다. 소주방 앞을 지날 때는 쇠주 잔에서 출렁이는 인생의 노래를 듣고, 국밥집 문 앞에서는 뚝배기에 담겨진 된장국 삶을 그린다. 지팡이 하나로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그릴 수 있는 심안(心眼)으로 피어나는 지팡이 소리, 딱. 딱. 딱.  나의 육안(肉眼)으로는 볼 수도 들을 수도 그릴 수도 없는 소리.     4.맺음말    우리의 현대시 형태를 나름대로 느꼈던 점을 이야기 하라면 압축이 기교의 중심이 되었던 시에서 드러냄이 시적 기교의 중심이 되는 시로 변천했다고 나름대로 정의 한다. 따라서 드러냄의 시적 기교의 성공은 적절한 시적 언어의 선택과 활용이라 할 수 있다. 적절한 시적 언어의 선택과 활용이란 감추면서도 드러내고 드러내면서도 감추어진 형식의 언어 사용 기법일 것이다.  이러한 기법의 하나가 시적 대상의 고유한 특성을 찾되 전혀 다른 의미 확장을 시키는 것이고 이 의미 확장을 시키는 요령이 바로 창의와 아이디어인 것이다.    창의와 아이디어의 발상은 아주 간단하다. 고정관념(固定觀念)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낯선 곳은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며, 불안의 자리를 의미하는 것이며, 뜻하지 않았던 새로운 영감에 대한 발견을 의미한다. 하여 우리는 항상 시창작의 새로움에 도전할 각오를 준비하여야 한다.   준비한 자만이 독자의 사랑을 받는 시인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러한 나의 스콜라철학 같은 괴변 문학 이론으로 변변치 못한 발표를 읽어 주신 시인 여러분께 존경과 감사를 전하면서 이태백의 시 창작 기술법을 소개하면서 마친다.     선경후정(先景後情)-  먼저경치(자연, 사물, 대상 등)를 서술하고 난후 화자의 마음(발상전환)을 그려내라 이는 앞서 소개한 “대상의 고유한 특성을 잡아 전혀 다른 대상으로 확장 발상 전환 하라는 말과도 일맥상통 한다 하겠다.   감사합니다.     
1023    시적 변용과 형상화 댓글:  조회:3714  추천:0  2015-04-20
시적 변용과 형상화                              -문병란(조선대교수,시인)  요즈음 양산되는 시들을 보면 초보자이든 이력을 쌓은  경우든 시와 산문이 구분되지 않은 시적 해체를 보게 된  다. 의도적 해체나 반시운동은 그 나름대로 변혁 의지쯤  으로 볼 수 있으나 수필의 감상을 행과 연으로 전개했다  고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저 조잡하기 이를 데 없는 잡  문적 성격의 수시수상 낙서글 같이 뒤죽박죽 엉망진창을  가지고 실험시, 새로운 시 떠들어도 난처한 일이다.  소설 한권으로 쓸 것을 짧은 시 한 편으로 쓴다면 전적으  로 시의 생명은 '함축적표현'1)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함축, 그것이야말로 시의 생명이며 비법일 것이다.  시적변용과 형상화 즉 시 만드는 기법에 대해서  이근모 시인의 '노을' 이라는 시를 감상하면서 췌언을  더할까 한다.  '변용'이란 일종의 데포르마시옹(deformation)으로 미술  용어 이기도 하다. 대상의 자연형태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  라 작가의 주관에서 모양이나 형태를 의식적으로 확대하  거나 변개하여 표현하는 그 기법을 문장이나 시문에서  차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30년 모더니즘 운동에 참여  한 박용철 시인의 ≪시적변용≫ 이란 평론이 그 한 예가  되겠다.  리어카 바퀴에 감겨있던 노을  불꺼진 방 어둠을 갉아 먹는다    이 싯구를 산문적으로 이해한다면 어리석은 헛수고에  그친다. 불이 어둠을 어떻게 갉아 먹는가. 이는 주관적  정서적 해석을 통해 실감을 부여한 것이다. 이런 표현이  지나칠 때 난해성이 오지만 적당할 때 수많은 사실적 설  명과 논리적 사고를 함축적으로 표현하여 갉아먹는다고  표현한 것이다.  가장 오래된 뇌세포만이  뚜렷한 흔적으로 남아  생글생글 웃음짓는 홍안같이  서산 등선마루에 걸친 노을    마치 수술대 위에 누워있는 마취된 환자의 흐릿한 몽환  상태를 느끼게 하는 함축적 표현으로 ‘노을’을 정서적으  로 형상화 했다. 이 시 한 편만으로도 그가 만만찮은  T.S.엘리어트를 졸업한 모던한 시학도임을 직감케 한다.  읊으는 시와 만드는 시, 자연발생적 인습의 감상시와 주  지적 창조적 생각하는 시 의미하는 시가 아니라 존재하  는 시 현대적 모더니티란 흉내 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시사를 관류하는 수많은 업적의 결과물로써 시삼백에  사무사의 경지에 이르듯 선인들의 명시 몇 백편을 줄줄  이 외워야 깨치는 시미학의 경지가 있다.  이근모 시인은 야무지게 터를 닦아 적어도 자연발생적  인습적 감상배설의 푸념이나 넋두리의 경지를 벗어나 시  적 알맹이를 만지는 그 경지에 접근했음을 작품으로써  말해주고 있다.  의 끝부분은 다음과 같다.  팔고 남은 생선 한 마리  리어카 좌판에서 뒹굴고  석양에 지친 그림자 드리우며  문지방 들어서는 아들  치매 엄마 눈동자엔  첫돌 맞은 모습만이 생생할 뿐  파란중첩 삶의 애환  노을 저편으로 달린다.    위의 시는 누구의 흔적도 없이 오직 이근모의 이  다. 마치 반고흐의 그림을 보듯 어질어질하다. 필자는 이  것을 시적변용이라 한다. T.S.엘리엇 가라사대 '삼류 시  인은 모방하고, 일류 시인은 표절한다'고 했던가. 서투른  흉내는 이류가 되지만 감쪽같이 훔쳐먹고 완전히 소화  하여 피만들고 똥사버리는 기똥찬 천재는 표절(훔치기)  하는 것일까. 이근모를 천재라 한다고서 큰일날 일은 아  니지 않는가. 병사가 전쟁터에 나가서 이기려면 신무기가  필요하듯이 경쟁이 필요한 세상에 내놓는 시이라면 신무기  하나쯤 있어야 한다. 당신의 신무기는 무엇입니까? 물으면  이것이다 내놓을 시가 있어야 시를 쓰는 당위성이 있을 것  이다. '자인'의 시가 아니라 '졸렌'2) 의 시라고 만드는 시로  나아가려는 그의 모더니티에 대하여 다시 한번 기대를 건다.  주1)  함축적표현: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내면에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  흔히 시에서 말하는 내포적 의미나 metaphor기능을 말한다.  주2)  자인(Sein)은 독일어로 존재. sollen은 당위의 뜻.   
1022    철학적 사유의 시적 변용 댓글:  조회:3996  추천:0  2015-04-20
              철학적 사유의 시적 변용                                                -- 시집 “꿈꾸는 시간”을 중심으로                                                                                                       김성열   춘광 시인의 시집 “꿈꾸는 시간”을 주의 깊게 읽어 온 나로서는 할 말이 많은 데도 불구하고 조금은 망설여진 면이 없지 않다. 인동초의 줄기처럼 눈 속을 뻗어나가는 그의 시적 에너지의 본류(本流)를 섣불리 말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시집 원고를 다 읽고 나서 다시 더 읽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철학가로서 그의 사유의 세계로 더 가까이 가보고 싶은 충동 때문 이었다. 그의 시에는 세계를 끌어안는 넓은 가슴이 있고, 소용돌이치는 내면세계의 어지러움을 질서 있게 정리하고 재단하는 기교가 있다. 감각세계의 모든 물상은 그의 내면에 전입되어 철학적 사유와 결합하여 묘한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그가 구축해 내는 시세계는 육화된 철학적 사유와 시의 주제가 결합한 화학 반응의 결과물로서 시적 변용을 이뤄 내는 독특한 정신세계인 것이다. 그의 시에는 꿈과 사랑의 형상물로 가득 차 있다. 관념으로 떠도는 동경의식은 세계의 모든 물상에 투사되고 재단되어 독특한 창조적 시공을 형상화 한다. 자연은 시적 대상과 소재의 중심에 놓여 있고 영원회기라는 사유의 섬에 맞닿아 있다. 이 시인은 시 쓰는 마음의 상태를 운명이라는 말로 대체하고 있다. 외형적으로는 겸손하고 소박하게 보이지만 시작과정과 운명과의 엄숙한 거리는 냉혹하게 치열하고 숙연하다. 이러한 심리상태에서 튕겨져 나오는 시적 언어가 세속적인 일상어와 어찌 같을 수가 있을까. “소리치는 나를 가지런히 쏟아내어 그날이 올 때까지 사뭇 촐랑거리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나의 운명 속에 잠재 되어 있는 소박한 소망이다“라고 피력한 그의 단상은 그의 시세계를 조망하는 단서가 된다. 시를 쓰는 소망이 운명과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면서 너무도 진솔한 자세를 읽을 수 있다. 그의 시는 이러한 맥락에서 어렵지 않게 이해되고 거리낌 없이 공감하게 된다.   어느 사이/나도 모르게/스며든 향기가 있습니다.//눈이 마주칠 때면/향기가 짙어/차마/ 바라보는 것조차 힘겹습니다.// 강물을 따라/길게 펼쳐진 들판에/영롱히 피어난 들꽃 한 송이//마치 코 끝에 찡하게 느껴지는/블랙러시안 칵테일 향기.../그런 것입니다.//이 가을날// 새 바람을 타고 온 색 고은 들꽃은/ 기다림이 안타깝지 않기에/향기로만 남고 있습니다// 들꽃을 바라보는/가을 속의 나그네는/혼자이고 싶은 그에게서//툭/툭/툭/외투를 털고/떠날 것을 준비합니다.                                                - 전문   이 시에서 세계를 끌어안는 시인의 넓은 가슴이 드러난다. 들꽃은 인간의 손길이 잘 닿지 않는 원시적 상징물이고, 들꽃의 향기는 열린 마음으로 세계를 호흡하면서 느끼는 후각적 형상물(이미지)이다. 세계의 존재자에 대한 물리적 상태의 단순한 감각상이 아니라 내면세계의 철학적 사유와 결합된 형상물로 표출된 결과이다. 세계를 가슴으로 끌어안고 무한히 열려 있지 않으면 보여 질 수 없는 일이다.                                      원시적 순수의 실체인 들꽃의 존재에 인간의 때 묻은 관념으로 덮씌우기를 거부하는 시적 화자는 “혼자이고 싶은 그에게 외투를 털고 떠날 것을 준비”하는 것이다. 가슴으로 끌어 안는 세계내의 존재는 그 순수의 절대 자유를 인정하고 구속하지 않겠다는 넉넉한 의지의 표현이다. 여기에 제시되는 “강물” “들판” “들꽃” “가을”등의 자연현상은 시인의 열려진 가슴에 안겨지면서 순수한 존재의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언젠가부터/내 마음엔/호수와 봄비가 있습니다//산모퉁이/작은 찻집엔/계절 따라/향수 짓고//이름 없는/가수의 촉촉한 열창은/봄비를 삼키는 호수의/눈물입니다//헤이즐넛 커피향은/창틀 사이로 스며가고/창밖으론 또다시/계절이 스치옵니다//시간이 흐르고/음악이 멈추면/그 추억/다시/비 적신 호수에 담고/아픈 작별을 합니다//하얀 눈을 삼키는 호수와/다시 만날 수 있기에/내 심정 향수로 남기고/떠날 수 있습니다.                                   -전문   잔잔하게 속삭이며 호수의 수면을 적시는 봄비, 언제나 넉넉한 자세로 기다림의 몸짓을 잃지 않는 호수, 이러한 풍경은 우리 주변에서 평범하게 만날 수 있고 정서적 감흥도 쉽게 느껴지기 마련이지만 이별과 정한의 형식을 통하여 질서 지어주는 비범한 수법으로 시적 조형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언젠가부터, 내 마음엔 호수와 봄비가 있습니다“로 시작 되는 1연의 호수와 봄비의 이미지는 화자의 내면세계에 자리 잡고 이별의 정한을 예비하고 있는 것이다. 산모퉁이 작은 찻집의 향수와 추억, 가수의 촉촉한 열창, 호수의 눈물, 창틀 사이로 스며가는 커피향, 흐르는 시간 등의 시적 영상은 모두가 이별의 정한을 환기하는 정서적 등가물이고 그 추억은 다시 비에 젖어 아픈 작별로 이어지면서(6연) 하얀 눈을 삼키는 호수와 다시 만날 수 있기에 내 심정 향수로 남기고 떠날 수 있습니다(끝연) 이 같이 시인의 내면세계에 숙성 된 철학적 사유의 응결체로 현시 된다. 떠남을 재회의 향수로 남겨 둔다는 것이다. 불교의 윤회설에 근거한 자기 정서의 시적 표출이라 하겠다. 늘쌍으로 무심하게 스쳐가곤 하는 주변의 자연현상을 회자정리의 철학적 사유물로 잘 재단하여 이별과 만남의 질서를 부여해 준 수작이라 할 수 있다. 시 쓰기를 위한 양식적(樣式的) 상상력이 풍부하게 드러나고 잘 훈련 된 시적 기교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관념이나 상상의 세계는 기교적 가공이 가해지지 않으면 공허한 허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춘광 시인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으며 능란하게 잘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기교에만 능하고 주제의식이나 시정신이 치열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시의 양식적 기교와 정신적 치열성이 조화롭게 작품에 반영 된다는 것이다.   동해의 파도는/수평선 끝에 닿아/푸른색이 출렁입니다//사랑 하나,/금빛 모래밭에 숨기며/ 미소 짓는 여인의/휘어든 몸짓은 /찬란한 햇살로 아름답습니다//쏴아∼/밀려드는 바다의 연가!//거기 물방울의 벅찬 부서짐으로/태양빛 반짝이며/솜털같이 부드러운 여인의 얼굴에 고운 수를 놓습니다.//시리도록/ 아름다운 모습!/파도의 유혹에/솔바람이/시샘하며 지나칩니다. //금빛 모래 속/ 숨어 있던 사랑 하나/두 팔로 바다를 들어/덩실 춤을 춥니다. - 전문                                꿈과 사랑이 시로 형상화 되었다고 정리, 평가할 수 있는 작품이다. 관념이 형상물로 조형되었다는 의미다. 시로 형상화 되었다는 것은 상징적 의미도 내포된 뜻이다. 在天成象(재천성상),在地成形(재지성형),變化見矣(변화견의)라는〔周易 〕말에서 보듯이 象과 形을 구별하였고, 象은 하늘에서 形은 땅에서 이루어짐을 뜻하여 形과 象이합한 [形象]이란, 관념의 세계와 감각세계의 萬物을 일컫는다. 사랑과 꿈은 우리의 의식 내부에서 꿈틀대는 초감각적 바람의 뜻인데 이를 형체 있도록 조형하는 것이 시적 형상물(形象物)이 된다. 는 시인의 사랑과 꿈이 시 작품으로 구현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파도가 수평선 끝에 닿아 푸른색으로 출렁이는 1연은 이상과 꿈의 감각적 현상이다. 수평선이란 하늘과 바다의 접경 지역, 언제나 멀리서 손짓하고 있는 그리움의 표상이다. 여기에 푸른색으로 출렁이는 파도는 역동성을 부여하는 입체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사랑 하나 금빛 모래밭에 숨기고는 고이 간직하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미지)이고, 휘어든 몸짓은 찬란한 햇살로, 아름답다 함은 사랑의 가시적 현란함이다. “파도의 유혹” “태양빛 반짝임” “바다” “여인의 얼굴” “솔바람” “금빛 모래” 등의 시어로 조형 되는 이미지는 사랑과 꿈의 형상을 위하여 동원 된 언어이고, 이러한 시어들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통하여 감각적 형상물로 현시된다. 시인의 주제의식과 기교적 표현에 힘입어 더욱 상승작용을 일으켜 작품의 격을 높이고 감동의 깊이를 더해주는 것이다.     나 지금//그곳에 가고 싶어라//살갗 젖어드는 오솔길 따라 오르면//서울 시내가 장난감 병정 놀이터로 보이는 곳!//절간 앞 다다르면//향내는 코끝에서 그윽이도 향기로워// 기왓장 쓰러진 마당//내 영혼도 쓰러져 행복한 꿈으로,//당나귀 귀 쫑긋 세운 정재스님 반가운 //흘러내린 촛농 향내음 따라//가을이 내리는 곳//도봉산 석굴암/나 지금//그곳에 가고 싶어라……                                            - 전문   한번 읽고 나면 평범한 개인적 독백처럼 들리지만, 디시 찬찬이 읽어 보면 서정적 자아의 진솔한 의미와 만나게 된다. 철학적 사유의 깊이가 잘 드러나고 있다. 영원회기의 궁극적 문제에 접근하는 존재론적 의미를 담고 있다. 시인의 사유가 시적 화자를 통하여 이르고자 하는 이상향의 지향점인 고독한 섬나라가 보일 듯이 아른거리고 있다. 표면적인 소재와 배경은 범속한 세속의 거리이고 스님이 반갑게 맞이해 주는 산사의 마당 같은 곳이지만 그러한 시적 상관물이 이끄는 진의는 영원과 맞닿아 있는 철학적 사유의 형상물인 것이다. “나 지금 그곳에 가고 싶어라”로 시작된 발단부터 철학적 사유의 의지를 암시하는 의도된 표현으로 읽혀진다. “살갗 젖어드는 오솔길 따라 오르면 서울 시내가 장난감 병정 놀이터로 보이는 곳”과 같은 표현은 이 시를 지탱하는 중심축이라 할 만큼 중요한 의미를 거느린다. 살갗 젖어드는 병정놀이터 쯤으로 보이는 서울 시가지가 어울리면서 나 지금 그곳에 가고 싶어라까지의 과정을 상징적으로 문맥화 하고 있다. 이 시가 서사적 구조가 아니고 서정적 자아의 독백적 구조이기 때문에 상징적 의미 구축을 위한 객관적 상관물로 선택 되어 있음을 보는 것이다. 춘광 시인은 이러한 상징적 문맥을 통하여 보다 넓은 시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다른 시 한편을 더 보기로 한다.     내가 존재할 때는/창가에 든 햇살이/눈부실 때입니다.//내가 존재할 때는 아침 햇살 반짝이는/ 한강 위에 있을 때입니다.//내가 존재할 때는 /하얀 분필을 내려놓고/박수를 받을 때입니다//내가 존재할 때는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한 잔 할 때이기도 합니다.//그러나/ 진정 내가 존재할 때는/ 이렇게/밤을 깊이 불러들여/그리움을 쏟아/하얀 백지를 물들일 때라고/말할 수 없습니다. - 전문   이 작품 또한 철학적 사유의 산물로 볼 수 있는 상징적 구조라 할 수 있다. “내가 존재 할 때는”의 존재란 시어가 전편 5연에 걸쳐 반복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동일한 문장이 거듭해서 제시됨은 읽기에 지루하다고 할 수 있으나 그 존재 위치에 따라 각각 다른 의미를 환기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구조에서 상징적 문맥을 추출하는 근거를 찾게 된다. 무한이 열려 있고 그 실체를 영원히 밝힐 수 없는 나의 존재에 대한 실체를 암시와 환기를 통하여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법이 상징시를 쓰는 시인이나 읽는 사람이 공감하면 서 즐거움을 맛보는 것이다. 이 시의 묘미는 끝 연에서 기발한 반응을 보이는 곳에 있다. 4연까지는 내가 존재할 때의 상황 여건이 긍정적으로 진술 되었으나 끝 연에서는 같은 맥락의 존재 상황을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 내가 존재할 때는…하얀 백지를 물들일 때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이는 논리의 부정이나 비약이 아니라 기발한 시적 변용이다. 결국 나의 존재에 대한 무한한 개방성을 암시 한다고 하겠다. 긍정-긍정, 긍정-부정과 같은 문맥은 시에서 허용될 수 있는 내면적 타당성(내재율)이라 하겠다. 이와 같은 시작기법을 거리낌 없이 활용하고 있는 춘광은 좋은 시인이다.   시집 “꿈꾸는 시간”의 시 5편을 예시로 그의 시세계와 작품 경향을 살펴보면서 네 갈래의 결론을 도출하게 되었다. 첫째 그는 세계를 끌어안는 넓은 시인의 가슴을 가졌다. 둘째 복잡한 내면세계를 시적으로 질서지어 주는 양식적 상상력이 풍부하다. 셋째 꿈과 사랑 같은 관념을 형상화 해내는 시적 지향점이 잘 드러나고 있다. 넷째 상징적 재문맥화를 통하여 철학적 사유의 심연을 탐색하는 경향성을 보인다.   철학의 빈곤이라는 작금의 우리 시단에 춘광 시인과 같은 철학적 사유의 심연을 탐색하는 시작품이 많이 생산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끝”              
1021    박용철 시론을 중심으로 댓글:  조회:4143  추천:0  2015-04-20
  ● 연기와 화염을 뿜으며               타오를 수 있는 이 무명화(無名花) - 박용철 시론 -●                                             / 김정수 1. 들어가기에 앞서 이 글은 박용철의 시론을 「시적 변용에 대하여」(『삼천리 문학』. 1938)라는 그의 글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 순수시 용어의 문제와 시문학파 우리는 일반적으로 '순수문학'과 '순수시'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중에서 '순수문학'이란 비평적 용어라기 보단 일종의 관습적 어법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즉 상업적 '대중문학'의 상대적 용어로 정착한 어휘라서 뚜렷한 학술적, 비평적 보편함의를 가지고 있지는 않고, 다만 편의적으로 이용되는 말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순수시'에 이르면 상황은 달라진다. '순수시'에 비길 만한 '대중시'의 개념이 따로 존재하지도 않거니와 이 용어는 우리 문학의 뚜렸한 유파적 변별의식과 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이 용어의 사용은 각기 다르다. 어떤 논자들에게는 이 용어가 현재 문제되고 있는 '순수문학'이라는 용어와 함께 '예술파' '예술지상주의' '기교주의' 등등의 용어가 동일한 함의를 갖는 말로 사용되고 있으며 또한 순수시의 범주를 사회주의에 반기를 든 시이자 예술품으로 완성된 시라고 이해하는 논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된다면, 30년대 초반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유형의 시인군이 여기에 포함될 터이다. 이로 볼 때 시문학파를 중심으로 새로운 경향에 '순수'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아무런 비평적 기준도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시문학파의 시론은 순수시론이 아닌 시문학파 시론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더 논리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이 시문학파의 발생요건을 몇 가지로 간추릴 수 있는데, 그 요인들은 크게 문학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으로 나누어진다. 문학 외적인 요인으로는 '당대 정치적 현실의 악화' 문제와 한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광범한 확대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와 함께 문학 내적 요인으로는 안서 김억의 시론 작업과 해외 문학파의 성립, 그리고 모더니즘시와 시론의 형성을 꼽을 수 있겠다. 이러한 문학내외적 요인들로 인해 시문학파는 30년대 한국시단의 한 중요한 흐름을 형성하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30년대 문학의 전방위적인 반 카프 경향이라는 심리적 공조가 보더 심층적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점을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이다.   3. 박용철, 「시적 변용의 길」 그는 "우리의 모든 체험은 피 가운데로 용해한다"고 말한다. 즉 "피 가운데로, 피 가운데로, 한낱 감각과, 한 가지 구경과, 구름같이 떠올랐던 생각과, 한 근육의 움직임과, 읽은 시 한줄, 지나간 격정이 모두 피 가운데 알아보기 어려운 용해된 기록을 남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시는 보통 생각하는 것같이 단순히 애정이 아닌 것이다. 시는 체험인 것이다"고 말한다. 그러나 체험만으로 시는 되지 않는다. 기다림이 필요하다. "긴 생애를 두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의미와 감미(甘味)를 모으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의미와 감미를 모은다는 것은 박용철에게는 기억의 행위이다. "모르는 지방의 길, 뜻하지 않았던 만남, 오래 전부터 생각하던 이별"등을 기억해야만 한다. 또한 이런 기억의 행위는 곧 한 편의 시를 완성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러 밤의 사랑의 기억, 진통하는 여자의 부르짖음과 아이를 낳고 해쓱하게 잠든 여자의 기억"들이 시인에게 필요하다. 그러나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기억이 많아진 때 기억을 잊어버릴 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말할 수 없는 참을성이 있어야" 한다. "기억만으로는 시가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들이 우리 속에 피가 되고 눈짓과 몸가짐이 되고 우리 자신과 구별할 수 없는 이름없는 것이 된 다음이라야" 한 줄의 시가 만들어진다. 즉, 기억이 기다림을 통하여 나와 일체가 될 때 시가 나온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열 줄의 좋은 시를 다만 기다리고 일생을 보낸다면 한줄의 좋은 시도 쓰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좋은 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한한 고난과 수련의 길을 밟아야" 한다는 것이다. 박용철은 "시인은 진실로 우리 가운데서 자라난 한 포기 나무이다"고 말한다. 즉 시인이 "뿌리를 땅에 박고 광야에 서서 대기를 호흡하는 나무로 서 있을 때만 그의 가지에서는 생명의 꽃이 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꽃을 피우는 과정은 쉽지 않다. 그래서 박용철은 시인을 두고 "비상한 고심과 노력이 아니고는 그 생활의 정을 모아 표현의 꽃을 피게 하지 못하는 비극을 가진 식물이다"고 말한다.  「시적 변용의 길」이라는 글에서 박용철은 시를 쓰는 과정의 구체화와 함께 시인의 자질됨을 이야기 하고 있다. 박용철에게 시는 시인의 자기완성이다. 시는 곧 시인의 삶 자체이자 유일한 목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독일의 시인 릴케의 말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너는 먼저 쓴다는 것이 네 심령의 가장 깊은 곳에 뿌리를 박고 있는 일인가를 살펴보라. 그리고 밤과 밤의 가장 고요한 시간에 네 스스로 물어보라 - 그 글을 쓰지 않으면 너는 죽을 수 밖에 없는가. 쓰지 않고는 못 배길, 죽어도 그런 내심의 요구가 있다면 그때 너는 네 생애를 이 필연성에 의해서 건설하라"  4. 박용철 시론의 의의 박용철 시론의 의미는 창작 체험의 내밀한 부분을 최초로 언표하려 했다는 데에 있다. 시어로서의 언어가 지닌 마술성을 이 땅에서 최초로 논리화했다는 의미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당대의 많은 시인들이 제대로 된 한국어의 훈련 내지는 기술의 습득을 지니지 않고 조야한 논리나 구호만으로 시를 구성하려 했던 잘못에 대한 엄숙한 경고의 의미도 지닌다. 뿐만 아니라 박용철 논리의 많은 부분은 독특한 시론이 아니라 시를 쓰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을 환기했다는 의미도 지닌다. 즉, 시인이라면 누구나 갖추어야 할 시적 완성에의 경로를 강조하고 있다는 말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1930년대에 형성된 이 시문학파 시론은 우리 근대문학이 그 시작에서 부터 빠져버렸던 오류를 극복하는데 중추적 역활을 했다고 평가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시란 문학이며 그것은 언어를 매재로 하는 예술의 하나일뿐이라는 이 단순하고도 당연한 사실을 널리 인지케 함으로써 우리 근대 문학의 한 단계 비약을 가능케 했다는 말이다. 5. 나가면서 조금씨 게을러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아닌 척,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젠 정말 떠날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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