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란?
시가란 마치 화가가 색채로 하는 것을 언어로 하는 예술로서 상상력에 의하여 환상을 분출하는 방법에 의하여 산출하는 예술이다. ―토마스 머코올리. 시란 이성의 조력에 상상력을 동원하여 진리와 즐거움을 결합시키는 예술이다. 시의 본질을 발견이다. 예기치 않는 것을 산출함으로써 경이와 환희 같은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S.존슨. 시인은 그의 예민한 흥분된 눈망울을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서 하늘로 굴리며 상상은 모르는 사물의 형체를 구체화시켜 시인의 펜은 그것들에 형태를 부여해 주며 형상 없는 것에 장소와 명칭을 부여해 준다. ―W.세익스피어. 시는 생의 진술이며 표출이다. 그것은 체험을 표시하고 생의 내면적 진실을 묘사하는 것이다. 제2의 세계, 꿈은 최고의 시인이다. ―워즈워드. 한 편의 시는 하나의 의식(儀式)이다. 따라서,형식적이고 의식적 성격을 갖춘다. 시가 가지는 언어의 용법은 회화의 용어와는 달리 의식적이며 화려한 꾸밈새가 있다. 시가 회화의 용어나 리듬을 이용하는 경우에도 그러한 것과 대조를 이루게 마련인 규범을 미리 전제하고 의식적으로 형식을 피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다. ―W.A.오오든. 시는 몸을 언어의 세계에 두고, 언어를 소재로 하여 창조된다. ―M.하이데거 『詩論』. 시의 용어는 필연적인 것같이 보이는 것이어야 한다.―W.B.예이츠. 시는 언어를 향한 일제사격이다.―앙리 미쇼. 시는 언어의 건축물이다.―M.하이데거. 시는 언어의 모자이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행위와 시는 언제나 인간보다 크다. ―T.E.흄. 시는 극점에 달한 언어다. ―말라르메. 시는 절조 있는 언어로서 절규·눈물·애무·입맞춤·탄식 등을 암암리에 표현하려는 것이다. ―뽈 발레리. 시인에게 있어서 낱낱의 단어가 그 원료다. 단어는 극히 여러가지 모양의 뜻을 가진 것으로 이것들의 뜻은 시의 구성에 따라 처음으로 똑똑해진다. 이와같이 단어가 콤포지션의 가능성에 따라서 변모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형성된 예술 형태의 한 부분이 될 때까지는 어세(語勢)도 그 효과도 다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프도프킨. 시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의 생활은 사막의 생활이다. ―메르디트. 시란 우리에게 다소 정서적 반응을 통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해주는 언어이다.―E.A.로빈슨. 시에선 해조(諧調)가 미리 공허한 형식을 결정하고 말이 위로 와서 위치를 잡는다. 말과 경험 사이의 응화(應和)와 불응화 그리고 결국에 응화가 해조를 확보하여 주의력을 거기에 모은다. 물러섬이 없는 움직임이 듣는 사람과 시인을 함께 끌고 간다. ―알랭 . 시는 미의 음악적 창조다.―E.A.포우. 시란 영혼의 음악이다. 보다 더욱 위대하고 다감한 영혼들의 음악이다. ―볼테에르. 정서가 있고 운율이 있는 언어로 인간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또 예술적 으로 표현하는 것이 시이다. ―오든.시는 어떤 리듬을 선택하여 그것들을 체계화시켜 반복한다. 이것이 운율이다. ―r.브리지스. 시는 역설과 아이러니의 구성체다.―브룩스. 시는 우연을 기피한다. 시에 나타나는 클라스·성격·직분 등의 개성은 반드시 어떠한 클라스를 대표한다. ―코울리지. 시를 구성하는 두 개의 주요한 원리는 격조와 은유이다.―웰렉·워렌. 시는 정서의 표출이 아니라 정서로부터의 도피요,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의 도피이다. ―T.S.엘리어트. 시는 상상과 감정을 통한 인생의 해석이다. ―W.H.허드슨. 예술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작게 되는 것처럼 느끼게 하며, 그러면서도 우리들을 확대 시킨다. ―E.M.포스터. 아직 탄생하지 않은 어느 특별한 일절 또는 일련의 배후에서, 하나의 힘과 같이 집중되어, 넓게 전개되는 의식의 총체. ―보트킨. 열정적인 시란 것은, 우리들의 본성의 도덕적 지적 부분과 동시에 감각적 부분―지식에의 욕망, 행위의 의지, 감각의 힘을 방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가 완전한 것이 되려면, 우리들의 신체의 다른 여러 부분에 자극을 주어야 한다. ―하즈리트. 시는 조잡한 요소로(물을 타고 섞어서) 연하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엑기스(精)이며, 그것을 키울 수 있는 것, 쓸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순수한 이미지의 시는 수정 조각과 같은 것이어서―우리들의 동물감각엔 너무나도 차고 투명한 것이다. ―허버트 리드. 가장 위험한 것은, 순수한 물의 성분에 대하여 설명할 수 없는 거와 같이, 정말로의 순수한 시라는 것은 그 무엇에 대하여서도 강연을 할 수 없는 것이다.불순하며, 메칠알콜이 들어간 거칠은 시에 대해선,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월터 로리. 시적 논리가 시의 결말을 맺는 것은, 일반적으론, 기분의 변화라든가, 위상의 전환을 통하여 행해지는 경우가 많다.……그것이 시적 논리이다. 즉 논술이나 명증에 의하여 위상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단계가 듣는 사람의 마음에 만족을 주는 그러한 위상의 변화이며, 이해할 수 있는 추이인 동시에 그 진행은 앞의 단계를 무효로 하는 그러한 것이어서는 안된다. ―W.P.카. 오로지 이미지는 시의 극치이며 생명이다. ―드라이든. 방대한 저작을 남기는 것보다 한평생에 한번이라도 훌륭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낫다. ―에즈라 파운드. 믿을 수 있는 모든 것이란 진실한 이미지 뿐이다. ―W.블레이크. 만약 지각(知覺)의 문을 맑게 한다면 모든 것은 그대로 즉 무한감(無限感)을 가진 것같이 보일 것이다. ―W.블레이크. 이미지는 우리들에게 사랑과 희생의 능력을 각성시킨다. 그것은 어느 경험을 생각케 하며 그 문체에 의하여 그러한 경험에의 어느 종류의 능력을 각성시킨다. 우리들은 어느 하나를 배우게 된다. 즉 그것이 우리들에게 가능한 것같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희열이든가 절망이든가 어떠한 감정이든간에 그것을 아는 것이 강한 만족으로서 느껴지는 것이다. ―챨스 윌리암즈. 이미지의 생산은 무의식의 어두침침한 속에서의 정신의 일반적 행위에 속한다. ―E.S.달라스. 나에게 있어서 지각은 처음에 명료한 일정한 목적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중에 형성되는 것이다, 나의 어느 음악적인 무우드(기분)가 우선한 다음에 시적 사상이 나에게 다가온다. ―쉴러. 이미지의 발생, 진전, 설정은, 예를 들면 태양의 광선이 자연히 그에게 도달하여 ―그의 위에 빛나고 다음엔 냉정히 더구나 장려하게 기울어 가라앉아가며 그를 호화스러운 황혼 속에 혼자 남기는 현상에 흡사하다. ―J.키츠. 우리들은 정신의 영역을 3중의 층으로 생각할 수가 있을 것 같다. 더구나 그러한 경우 지질학의 ‘단층’에 비교할 수 있는 어느 현상이 일어난다. 그 결과……지층은 비연속적이며 서로 불규칙한 단층을 나타나게 된다. 그와 매한가지로 자아의 감각적 의식은 본능적 충동과 직접 교섭을 갖게 되며, 그 ‘끓는 가마솥’에서 어떠한 원형적 형태 즉 예술작업의 기초가 되는 말, 이미지, 음 등의 본능적 짜임을 끄집어내게 되는 것이다. ―H.리드. 나의 경우 시에 있어서는 많은 이미지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시의 중심이 많은 이미지이기 때문에 나는 하나의 이미지를 만든다. ―‘만든다’라는 말은 적당치 않은 말이지만, 나는 나의 이미지에 내 내부에서 정서의 여러 가지 배색을 물들여 놓고 그것에 내가 가지고 있는 지적 비평적인 힘을 적용하여 그것이 또 다른 이미지를 낳게 한다. 그리곤 그 제2의 이미지를 제1의 그것과 모순시켜, 그 둘에서 난 제3의 이미지에서 제4의 모순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그것들 모든 것을 나에게 주어진 형식적인 제한의 범위 내에서 서로 모순시킨다. 각각의 이미지는 그 속에 스스로를 파괴하는 종자를 가지고 있다. 즉 나의 변증적 방법(나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은 중심의 종자에서 성장하는 많은 이미지의 끊임없는 건설과 파괴며, 그 중심의 종자도 그 자신으로 파괴적인 동시에 건설적인 것이다.……나의 시의 생명은 중심에서 나오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 속에서 나와, 그리고 죽지 않으면 안된다. 나의 이미지의 건설은 창조와 재창조와 파괴와 모순이 아니면 안되는 것이다. ……이미지의 어쩔 수 없는 충돌에서 (아무리 해도 피할 수 없는 충돌에서)―아무리 해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자극을 주는 중심 즉, 충돌의 모태가 창조와, 재창조와, 파괴와, 모순의 성질을 갖기 때문에―나는 시라는 순간적 평화를 만들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딜런 토마스. 이미지는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 자신으론 시인의 특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지가 독자적인 본능의 증거가 되는 것은 훌륭한 정열, 또는 그 정열로 잠깨워진 일련의 사상 혹은 이미지 여하에 따라 시 그 자체가 변할 만큼 그 중요성을 가지고 있을 때 뿐이다. ―코울리지 추상적 관념에 대립하는 감각적 이미지를 너무나 주장하는 나머지…… 결과는 회화에 의한 시로 되어버렸다. 다시 말하면, 때로는 그림이 전부가 되어버려, 일반적 경험에 아무런 관계가 없어져 버렸다. 이것은 존재와 의미와를 분리시키는 잘못의 제일보였던 것이다. ―로버트 히리아. 상상된 이미지를 통해 우리는 시적 몽상이라는 몽상의 절대를 인식한다. ―바슐라르. 실제로 물질적 상상력은 문화적 이미지와 실체를 합체시키는 유일한 매개체이다. 우리는 물질적으로 자신을 표현함으로써 모든 삶을 시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바슐라르. 상상력 그 자신은 기억의 작용이므로 기억이 시의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 진실한 것이다. 내가 모르는 것을 상상한다는 것은 없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상상력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전에 경험한 것을 기억하며, 그것을 어느 다른 환경에 적용하는 능력이다. ―스펜서. 추상적인 것의 구체화를 추구하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내 방법은 아니다. 나는 내 자신 속에 감동 ―감각적으로 생생한, 사랑스러운, 다채로운 여러가지의 감동 ―을 기민한 상상력의 에너지로서 받았던 것이다. ―괴테 이성이라는 것은, 기지(旣知)의 사물을 질서있게 정리하는 작용이며 상상력이라는 것은 사물의 개개, 혹은 전체로서의 가치를 지각하는 작용이다. ―C.V코노리 상상력이야말로 도덕적 선(善)의 훌륭한 방편이다. ―셸리. 상상력이라는 것은 죽어 가는 정열을 되살리기 위하여 살(肉)을 잡아 두는 불사의 신을 말하는 것이다. ―J.키츠 모든 것에 앞서서 훨씬 중요한 것은 은유를 자기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만은 다른 사람에게서 얻을 수 없는 천부의 은총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정밀하게 만들도록 하라. 그러면 자연 은유가 될 것이다. ―J.M.머리. 은유는 현실을 살피며 경험을 질서짓게 하는 정신의 본질적이며 또한 필요한 행위와 같이 생각된다. ―J.M.머리. 어떠한 번역이나, 은유나, 우의라도 극단적인 비유와는 전연 다른 방향으로 흘러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면 은유를 바다나 파도에서 시작하여 불꽃이나 재로 끝내서는 안된다. 그것은 대단히 나쁜 모순이기 때문에. ―벤 존슨 은유를 깊이 추구하려면 건전한 의식의 세계에 들어갈 필요가 있다. ―J.M.머리. 상징파의 상징은 언제나 자기만이 아는, 특별한 관념을 표현하기 위하여 시인이 독단적으로 쓰고 있는 ―즉, 그러한 관념의 일종의 투영인 것이다. ―에드문드 윌슨 상징주의의 상징의 실체는 제재에서 분리한 은유였었다.―왜냐하면 시에 있어서 어느 한 점을 넘으면 색채와 음은 그 자신을 위하여 즐거워할 수가 없을 뿐더러 이미지의 내용을 억측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에드몬드 윌슨. 시는 감촉할 수 있고 묵묵해야 한다. 구형의 사과처럼 무언(無言)이어야 한다. 엄지손가락에 닿는 오랜 대형 메달처럼 조용해야 한다 이끼 자란 창턱의 소매자락에 닳은 돌처럼 시는 말이 없어야 한다. 새들의 비상처럼 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마치 달이 떠 오를 때처럼 마치 달이 어둠에 얽힌 나뭇가지를 하나씩 하나씩 놓아주듯이 겨울 잎사귀에 가린 달처럼 기억을 하나하나 일깨우며 마음에서 떠나야 한다. 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마치 달이 떠오를 때처럼 ―A.맥클리쉬 『詩法』. 나의 시의 장부(帳簿)는 어디에 있는가 이 나의… 종이도 없고 펜도 없고 시도 없이 나는 무(無)앞에 있다. ―R.끄노오 『詩法을 위하여』 시(詩)는 낳는 것이지 만드는 것은 아니다. The poem is born, not made. ―시는 체험에 의해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 ..
자기 시에서 진단해야 할 것들
1. 첫번째 질문
당신은 문학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대부분의 문인들은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문제보다 창 작방법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글 을 쓰려면 먼저 자기 문학관부터 검토해 봐야 할 것입니다. 그것 은 어떤 문학관을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 작품 구조와 조직의 초점 이 달라지고, 독자들의 반응 역시 어느 정도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일관된 문학관을 지니고 있는 문인들이 드물다는 점입니다. 아니, 문인들만 그런 게 아닙니다. 문학을 연 구하는 학자나 비평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앞 페이지에서 문학 을 '작가의 사상과 감정의 표현'이라고 정의하고, 뒤 페이지에서 는 '허구'나 '모방'으로, 그 다음 페이지에서는 '언어의 구조물'이 나 '교훈을 전달할 수 있는 장치'로 정의하기가 일수입니다. 이와 같은 용어들이 같은 관점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은 문예이론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도 조금만 생각하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상과 감정의 표현'은 작가 '내부'에서 발생한 정서와 의 식의 움직임을 화제로 삼는 '표현적 관점expressive view'으로서, 이러한 관점을 지닌 사람들은 진실하고 강렬한 표현을 목표로 삼습 니다. 그리고 '모방'은 작가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을 화제로 삼는 '모방적 관점(mimetic view)'으로서, 객관적이며 사실적 표현 을 목표로 삼습니다. 또, '언어의 구조물'이나 '독자들에게 교훈을 전달할 수 있는 장치'로 정의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자는 '객관적 관점(objective view)'으로서, 텍스트의 구조와 조직을 비롯한 '형식'을 중시하고, 후자는 '효용적(pragmatic view) 관점'으로서 '내용'을 중시합니다. 하지만, 문학관의 문제에서 우리가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용어뿐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혼란을 일으키는 것들이 있기에 이를 첫 번째로 삼았습니다. 자아, 질문 일발 장진하고…, 쏩니다. 받아 보세요! □ 당신은 장르에 따라 각기 다른 관점을 지니고 있는가, 아니면 같은 관점을 지니고 있는가? 혹시 모든 관점이란 일관성을 지녀야 한다는 생각에 모든 장르를 같은 관점으로 읽고 쓰는 분은 없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문학의 입문에들어서지도 못한 사람이라고 말씀을 드려도 화내지 마 시기 바랍니다. 만일 시를 쓰는 분이라면 소설이나 수필로 써야 할 제재를 시로 써서 '서사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테고, 소설을 쓰는 분이라면 시로 쓸 제재를 소설로 써서 '스토리성이 박약하다'는 지적을 받고, 알고 있는 이론을 끌어대며 변명하는 분일 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각 장르는 그 나름대로 탄생된 목적이 달리 있습니다. 먼저 모든 담화를 크게 구분하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느꼈다)'와 '그것은 이렇다'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전자는 '주관적 정보를 제공 하기 위한 담화'로서 우리가 이제까지 문학의 범주에 포함시켜온 것들이고, 후자는 '객관적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담화'로서 문학의 범주에서 제외해 왔던 것들입니다. 그리고, 각 장르의 목적을 알아보기 위해 전자를 다시 속성에 따라 나눠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가운데 글을 쓰는 사람이 ―다음부터는 자주 화자話者라고 부르 겠습니다 ― 어떤 사건을 겪은 과정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전달 하려는 수필은, ― 이 역시 '교술敎述로 바꿔 부르겠습니다. '수필'은 느슨한 구성을 염두에 두고 붙인 명칭인 반면에, '교술'은 화제의 속성을 염두에 둔 명칭으로서, 기본 장르는 구성이나 조직의 특징으로 분류하는 것보다 화제의 속성에 따라 분류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입니다.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 탄생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효용적 관점'에서 탄생된 장입니다. 물론, 교술 가운데에는 단순히 사건을 기록하거나 논평을 붙이기 위해 쓰여지는 유형도 있습니다. 기행문이나 논픽션 같은 '서사적 교술'과, 칼럼과 비평 같은 '분석적 교술'이 이에 속합니다. 그러 나, 이들도 겉으로만 교훈을 잠재시켰을 뿐, 독자에게 유용하리라 고 믿는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탄생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술이 이와 같이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 탄생된 장르라는 것은 우선 보편적이고 윤리적인 화제를 택하고, 화자가 텍스트 전면에 나서서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쓰여지는 걸 미루어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작가의 주장 +예화'를 교차시키는 '느슨한 구성'을 택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훈은 아무리 열심히 이야기해도 독자 ―앞으로는 자주 청자聽者라고 바꿔 부르겠습니다―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자면 청자가 화자를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고, 보편 타당성을 지닌 이야기이어야 합니다. 신뢰가 가지 않은 사람이 의심스러운 이야기를 할 경우에는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술이 보편적이고 윤리적인 화제를 택하고, 화자가 자기 인격을 걸고 텍스트 의 전면에 나서서 독자에게 직접 말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도 이를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상대를 설득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화자가 말하려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나야 하고, 그런 주장을 입증할 수 있는 실례實例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조작하고 있다 는 느낌이 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작가의 주장 +예화'를 교차시키고, 주장을 펴는 부분에서는 '작가적 어법authorial speech'으로, 예화를 드는 부분에서는 '모방적 어법figural speech'으로 이야기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그리고, '느슨한 구성'이 되어도 고치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교차 구조로 나타나는 결과이긴 하지만, 조작된 느낌이 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독자에게 무엇인가 교훈을 주기 위한 제재는 교술의 형식을 택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서사敍事는 '사건의 과정'을 그리기 위해 탄생된 장르입니다. 그리고, 부차적인 목적이 있다면, 그 사건에 대해 부분적으로 '자기의 주장과 해석'을 덧붙여 독자들로 하여금 깨닫도록 유도하기 위한 장르입니다. 서사가 이런 목적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사건을 그리는 부분은 '모방적 어법'으로, 자기 주장과 해석을 덧붙이는 부분은 '작가적 어법'으로 쓰여지는 것으로 미루어서도 짐작할 수 있습 니다. 따라서 서사는 교술과 아주 비슷한 장르라고 할 수 있습니 다. 스토리성이 허약한 서사가 교술과 유사하게 보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상이나 교훈이 부차적인 목적으로 물러나기 때문에 교술과 달리 사적私的이거나 비윤리적인 화제도 무방합니다. 서사는 독자에게 작중 인물을 모방하라고 권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건의 전개 과정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삶과 비교하고 재미로 읽어보라는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서사에서 발견되는 교훈이나 사상은 작가가 직접 말한 것이 아니라 독자가 임의로 해석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 구조와 조직적 국면에서도 상당한 차이가 납니다. 교술은 자기주관을 이야기하는 부분이 중심이 되지만, 서사에서는 예화가 중심이 됩니다. 그로 인해 '모방적 어법'으로 쓰여지는 부분이 주류를 이룹니다. 그리고 작가적 어법으로 이야기하는 부분도 작가의 주관을 이야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청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 사건에 대한 해설과 논평을 붙이는 수준에 그칩니다. 그러므로, 서사 는 무엇보다 리얼리티와 오락성이 중시되는 장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건을 겪은 후 '현재의 정서'를 이야기하려는 서정적 장르에 서는 '모방적 어법'이 배제되고 '작가적 어법'으로 쓰여집니다. 그로 인해 앞의 두 장르가 추구하던 객관성과 사실감을 부각시키기 가 어려워지는 반면에 정서의 개별성, 강렬성, 자유로운 상상력을 부각시키기가 용이합니다. 그리고, 어법상으로 보았을 때는 얼마든지 가능하게 보이는 사상의 표현도 어려워집니다. 사상이나 윤리는 수백 번 언급하는 것보다 실천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화제가 '현재 이 순간'으로 제한되기 때문에 이들을 거론하는 것만 가능할 뿐, 실천하는 과정을 그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흔히 위대한 사상을 지녔다는 작품도 텍스트 자체만을 분석할 때에는 별다른 사상을 발견하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입니다. 또, 여타의 장르와 달리 로 치환置換하는 어법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모티프와 모티프를 '인과적因果的'으로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연접連接된 것으로 연결합니다. 그로 인해 객관성과 사실성 또 는 논리성을 확보하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표현한 시 인의 의도는 보조관념vehicle을 유추하는 방법을 통해 해석할 수밖에 없는데, 이 과정에서 독자의 자의적 해석이 개입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동적 인식'을 방해하기 위해 유사성similarity이 큰 보조관념보다 적은 것을 선택하는 현대시는 더욱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서정시는 교훈이나 재미보다는 정서적 공감이나 억눌린 상상력을 풀어주기 위해 탄생된, 다시 말해 '표현적 관점'에서 탄생된 장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희곡은 '과정을 재현再顯'하려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거지가 등장하면 거지의 말투로, 제왕이 등장하면 제왕의 말투로 말하는 '모방적 어법'을 택합니다. 그러므로 '모방적 관점'에서 탄 생된 장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연公演'을 전제로 한다는 조건을 붙일 경우에는 문학의 한 장르로 분류하는 데는 무리가 따릅니다.공연을 하자면, 연출·연기·미술·음악·효과·조명 등의 무수한 담당자가 참가해야 하고, '언어로 쓰여진다'라는 조건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직 내 견해에 동의하는 사람은 드물지만, 문학의 한 장르로 분류하기보다는 '언어 예술'과 '행위 예술'의 중간 장르로 분류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연'이라는 조건을 포기하면 어느 장르보다 사실성과 객관성을 확보하기 용이한 장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사와 마찬가지로 과정을 다루기 때문에 사상 내지 윤리성도 표현할 수있습니다. 그러나, 교술보다는 훨씬 그를 표현하는 기능이 떨어지고, 서사보다도 약화됩니다. 그것은 해설자가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아닌 데다가, 그를 제거할 경우 작가의 발언은 작중 인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비평은 작가가 텍스트 표면에 등장하여 직접 독자에게 말을 거는 양식으로서, 화제가 '타자(텍스트)'인가, '자아'인가의 차이만 지닐 뿐입니다. 비평을 교술의 하위 장르로 분류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객관적 관점'에서 태어난 장르로서, 목적이 달라 교술과는 전혀 다른 색채를 띄고 있습니다. 타자를 논의하고 평가 할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교술보다 훨씬 객관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합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타자를 비난하거나 칭찬하면 독자들이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논리의 전개를 비롯하여 용어와 문체도 신중을 기해 선택해야 합니다. 질문있다구요? 뭡니까? 왜 과거는 물론 현대의 문예이론가들은 이와 같이 각 장르의 차이를 염두에 두지 않고 문학을 어느 한 관점 에서 정의해 하고 있느냐구요? 제 말을 의심하시는군요. 하긴 그래 요. 제가 아리스토텔레스나 공자님보다 더 똑똑한 건 아니니까요. 아니, 더 똑똑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분들은 컴퓨터도 모르고, 인터넷도 모르고, 자동차 운전도 할 줄 모르고, 삼각함수도 미적분도 풀지 못하는 분들이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그분들이 돌아가신 후 2000여 년 동안 축적된 학문을 배운 사람들이니까요. 농담입니다. 다시 본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그것은 그분들과 우리의 장르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아리스토텔레스가 문학을 '모방'이라고 정의한 것은 극적 장르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 니다. 그리고 동양 사회에서 '사상과 감정의 표현'이라고 한 것은 '사상'은 '문文으로, '정서'는 '시詩'로 표현할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분들이 모든 장르를 염두에 두고 내린 결론이라고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의문과 혼동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들 시대의 장르관을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서구에서는 헤겔Hegel 이전까지는 장르의 순위를 '극 →서사 →서정'으로 꼽아왔습니다. 다시 말해, 서정은 선량한 시민들을 혼란시 키는 가장 열등한 장르로, 교술은 아예 문학으로 취급하지도 않았 습니다. 그것은 18세기까지 서구문학사를 살펴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저들의 문예이론은 서정시의 추방과 쫓겨나지 않으려는 변명과 방어로 일관되어 왔습니다. 이런 사정은 한자 문화권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0세기 초 서구 문학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시나 수필만 사대부의 장르로 꼽고, 소설은 '소인지배小人之輩의 문학'으로, 희곡은'광대의 문학'으로 꼽아왔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런 장르관이 완전히 불식된 게 아닙니다. 제가 시와 비평과 학문을 택한 것도 어렸을 때 할머니가 양반의 자식은 학문과 시문을 해야 한다는 말씀이 무의식 속에서 작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장르를 같은 관점에서 읽고 쓰려는 사람은 '과거로 가라! 뿅뿅뿅…' 소리를 들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너무 이야기가 길어졌나요? 그럼, 다시 질문을 일발 장진하고 쏩니다. 받아 보세요, 빵! □ 당신은 문학 작품을 탄생시키는 데 참여하는'화자(작가)-화제(작품)-청자(독자)' 가운데 어느 단위를 더 중시하는가? 잠깐!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데 무슨 놈의 '작품'과 '독자'가 참여 하느냐구요? 맞아요. 작품은 작가가 창조해낸 것이고, '독자'는 작가가 쓰는 대로 읽기 마련인데. 그쵸, 이? 치이-, 당신은 '작가중심'의 관점을 지니고 있는 분이군요. 그렇다면 몇 가지만 여쭤보겠습니다. 당신은 작품을 쓰기 전에 혹시 다른 사람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습니까? 읽었다면 그때 무얼 생각 하셨습니까? 이 작품은 차암 좋다, 나도 이렇게 써봐야지 라든가, 이걸 작품이라고 썼어, 나는 이렇게 쓰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하셨겠지요? 그러다가 글을 쓸 때 뭘 생각하셨습니까? 내 글을 읽고 다 른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를 생각해 보셨지요? 그래서 이야기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표현을 가다듬기도 하셨지요? 이게 작품과 독자가 창작에 참여하는 게 아니고 무엇입니까? 하지만, 이 질문은 그리 단순한 게 아닙니다. 화자는 화제의 속성과 청자의 반응을 어떻게 예측하느냐에 따라 담화의 구조와 조직을 전략을 세우기 때문에 질문한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담화는, 그러니까 애인과 하는 말이라든가, 그를 만나러 나갈 때 입는 옷과 화장이라든가, 그와 만나기 위해 선택한 장소, 그리고 화안히 웃는다던가 새초롬한 얼굴 표정 같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를 표 현하려는 담화는 '화자↔화제↔청자'의 상호 관계로 탄생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작가중심'의 관점을 가졌다고 해서 낡은 문인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 시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이런 관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관점은 문학의 시원始原에서부터 지속되어온 것인 데다가, 과거에는 문인들이 독자들보다는 훨씬 더 배운 사람들 이었고, 사회적 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점을 지닌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독자에게 무엇인가 유익한 교훈을 주기 위해 쓴다는 사람들입니다. '시는 사람의 마음 속에 사특邪慝한 생각을 없애 준다'는 공자孔子를 비롯하여, 시인의 의무는 독자에게 교훈을 주는 것이라는 로마 시대의 호라티우스F. Q. Horatius, 입에 쓴 약을 먹기 편하게 꿀을 바르듯 재미로 유익한 사상을 재미로 감싼 것이 문학이라는 시드니P. Sydney, 독자들을 계도하려는 계몽주의啓蒙主義, 현실을 고발하여 개조하려는 대응론적對應論的 사실주의寫實主義, 특정한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쓴다는 목적주의目的主義 문학가 들이 이에 속합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정서를 표현하려는 목적에서 쓴다는 사람들입니다. 플라톤의 '시인 추방론'을 반대하고 모방의 즐거움을 내세운 아리스토텔레스, 예술은 일종의 '놀이'로서 그 자체의 목적에만 적합하면 그만이라며 '무목적無目的의 합목적성purposeless of purposiveness'을 내세운 칸트I. Kant, 문학을 개성의 표현으로 보는 낭만주의자들, 창작이나 독서 행위를 모두 정신적 결핍의 해소를 위한 것으로 보는 현대 심리주의자들이 이런 관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후자는 전자보다 훨씬 뒤에 세력을 얻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생존 자체가 어려운 시대에 표현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 쓰고 읽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사치스러운 일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표현론적 관점이 세력을 얻기 시작한 것은 어느 정도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고급 문화가 보편화된 뒤부터라고 보아야 할 것 입니다. 그런데, '작가 중심'의 관점을 취하는 사람들의 문제점은 하나같이 독자들을 열등한 존재로 보고 교화敎化나 하소연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입니다. 이와 같은 관점을 지닐 경우, 자기가 말하려는 교훈이나 하소연을 강조하기 위해 관념의 과잉 상태에 빠지기가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작가중심의 관점은 20세기로 접어들면서 객관론자로부터 비판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시란 개성의 추구가 아니라 도피라며 '몰개 성 시론沒個性詩論'을 주장한 엘리어트T. S. Eliot와 영미 주지주의자主知主義者들 언어학적 자각에서 출발한 러시아 형식주의形式 主義들과 기호학파記號學派, 이들보다 뒤늦게 출발한 프랑스 구조 주의자構造主義者들입니다. 그들은 아예 작가의 의도를 존중하려는 것을 '의도론적 오류 intentional fallacy'라며 작가의 위치를 부정합니다. 그리고, 작품은 그 자체의 구조structure와 조직texture의 원리를 지니고 있 으며, 그 원리는 작품의 미적 가치와 전체 질서를 유지하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는 견해를 폅니다. 따라서, 이들은 '작품중심'의 관점을 지닌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이와 같이 '작품중심'의 관점이 대두된 것은 '작가중심'이 지닌 약점과 문예이론이 발달했다는 이유 이외에 도, 경제가 발달하고 고등 교육이 보편화됨에 따라 문학을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을 전달할 수 있는 도구로 인식하고 글을 쓰려는 사람들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생산의 과잉으로 인해 작품을 선별하여 전달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문학사회는 두 그룹으로 분열되기 시작합니다. 하나는 비평가들이 특이하다고 인정하는 작품을 쓰고 그를 읽는 그룹이고, 다른 하나는 전통적으로 문학이라고 생각해온 것들만 고집하 는 그룹입니다. 이와 같은 분열은 다시 독자들로 이어져 그들의 시선은 차츰 문학 이외 다른 예술로 시선을 옮겨가고 있습니다. 20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문학관은 다시 '독자중심'의 관점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 시대를 여는 데 앞장을 선 사람들은 독 일의 콘츠탄츠 대학의 교수들입니다.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는 과 정에서 축적된 부조리를 개혁하기 위해 1966년 이 대학이 실험대학 으로 설립되고, 그 이듬해 야누스H. R. Jauss가 불문학 교수로 취임하면서 [문예학의 도전으로서 문학사Literaturgeschichte als Provokation der Literaturwissenchaft]라는 강의를 통해 '문학작품의 예술적 가치는 독자들의 기대지평선期待地平線,Erwartungshorozont을 얼마나 만족시켜 주었는가에 따라 판단되어 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다시 그 다음 해 볼프강 이저가 영문학 교수로 취임하면서 [텍스트의 호소 구조―문학적 산문의 영향 조건으로서 미정성Die Appellstruktur der Texte -Unbestimmtheit als Wirkungbedingung literarischer Prosa)]을 발표하고, 뒤를 이어 바인리히H. Weinrich는 '독자의 기대는 작품 속에 반영되고, 작품은 독자와 대화하며, 문학사는 그 대화의 역사'라는 주장을 펴서 수용미학受容美學이 탄생되고, 미국에서도 이들의 자극을 받아 '독자반응비평reader-response criticism'이 생겨납니다. 하지만, 이들을 진정한 의미에서 '독자중심'의 문학관을 연 사람들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들보다는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해체주의, 후기구조주의자들을 꼽아야 할 것입니다. 수용미학자들이나 독자반응 비평가들은 독자가 문학사회의 주체라는 것을 주장하고 독서 심리를 연구하는 데 급급했지만, 이들은 독자의 다양한 가치관을 수용하기 위하여 다원주의多元主義를 인정하고, 의미signified는 기표signifiant에서 벗어나 떠돈다는 이론을 바탕으로 '작가의 죽음'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작가가 지시하는 대로 읽을 것을 요구하는 '인과적 구성' 대신 독자들이 자기 취향대로 '빈 틈'을 메워가며 완성하는 '비인과적 병렬구성'을 택하고, 몽타쥬, 패스티쉬, 패러디 기법 등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작가나 비평가들보다 더 보수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로 인해 독자들은 이런 관점에서 쓰여진 작품들을 '기괴하다'든지 '무엇을 말하려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문학 작품에는 무엇인가 고정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믿어온 독자들은 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할 경우 불안해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화자-화제-청자'로 이어지는 축 가운데 어떤 단위를 더 중시해야 할까요? '작가중심'요? 에이. 지금 사회는 '정치적 민주주의'에서 '경제적 민주주의'를 거쳐 '문화적 민주주의'로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경제체제 역시 '생산자 중심'에서 '유통자중심'으로, 다시 '소비자 중심'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런 세상에 내가 주는 대로 받아 먹으라고 해서 받아 먹겠습니까? 읽을 테면 읽고, 말 테면 말라면, 쓸 테면 쓰고, 말 테면 말라고 응수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독자들의 비위를 맞추라는 것은 아닙니다. 할 말을 포기하고 독자들의 비위를 맞춰 쓰라면 아마도 글을 쓰는 사람은 몇이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작품은 작품으로서 갖춰야 할 구조와 조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독자들을 설교나 하소연의 대상으로 삼지 말고 작품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이야기하고, 독자도 함께 작품에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간단히 논급할 대상이 아니니 이 연재가 끝날 때까지 계속 논의하기로 하고, 다른 질문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다시 질문 일발 발사합니다. 받으세요. 빵, 빵, 빵! □ 당신은 각 장르의 양식을 고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유동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이 질문 역시 아주 중요합니다. 만일 장르마다 고정된 양식fixed form이 있고, 그에 맞추어 쓰면 그만이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작품은 언제나 일정한 형식을 취하고, 내용에만 치중한 나머지 마침내 설교로 떨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학사에 기록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람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새로운 내용을 찾기 위해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문학에서 새로운 내용이란 거의 없습니다. 연애소설을 예로 들어봅시다. A라는 남자와 B라는 여자의 연애 이야기라고 하면, '서 로 좋아했다', '좋아하다가 헤어졌다', '좋아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세 가지 경우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연애소설은 '어떤 사람'이며, '어디'에서 '어떻게' 만나 어떻게 '되었는가'만 바꾸고, 모티프를 배열하는 플롯과 표현하는 문체만 다를 뿐 이 세 유형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또 문학사에 기록되는 사람들은 적어도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낸 사람입니다. 예컨대, 최남선崔南善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나 주요한 朱耀翰의 [불놀이]만 해도 그렇습니다. 지금 중학생들도 '우르릉 꽝!, 때려라, 부셔라' 정도는 쓸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문학사에 기록된 것은 '학도야, 학도야, 청년 학도야'하고 정형율에 맞추 노래부르던 시절에 이를 파괴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레빈H. Levin이 말했듯이, 장르란 문학적 관습 literary convention과 제도institution의 총화總和로서 고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이 관습적 양식에 지배를 받지만, 또한 그를 초월하여 새로운 양식을 만들 수 있습니다. 아니, 장르의 양식만 바뀌는 게 아닙니다. 이보다는 훨씬 속도가 늦 지만 장르 정신 역시 바뀝니다. 우리가 가장 산문적이라고 하는 신문 기사의 표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과거에는 '롯데팀 몇 대 몇으로 승리'라고 뽑는 것이 관행이었는데, 현대로 접어들면서 '롯데팀'을 '자이언트(giant)'라는 은유적 명칭을 붙이고, 다시 '거인'으로 바꾸어 '거인 **팀을 잔혹하게 유린해'라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문 기사에 시정신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각 장르의 정신과 관습은 어떤 방향으로 바뀔까요? 그에 대한 일차적 해답은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문학사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작품에는 강조되는 차이가 있지만 문학 이 지녀야 할 요소들이 전부 들어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각 작품의 차이는 전경화fore-grounding되는 요소들과 배경화back- grounding되는 요소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며, 전경화된 요소들 은 시간이 흐르면 자동화自動化되어 배경으로 물러나고, 배경의 요소 중 어느 하나가 강조되어 바뀐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낯설게 만들기defamiliarization'의 원리에 입각하여 바뀐다는 것입니다. '전경화'니 '배경화'니 '자동화'가 무슨 뜻이냐구요? 예, 전경화는 작품 안에서 초점을 받아 강조되는 것을, 배경화는 별로 주목을 끌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동화는 친숙해져 주목을 끌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걸 말합니다. 그러니까, 연애를 할 때는 상대가 홍차를 마실까, 커피를 마실까, 커피라면 블랙일까, '웨딩wedding'일까, 웨딩이 뭐냐구요? 결혼식 피로연에서 설탕과 프림을 한 스푼 반씩 타서 주는 커피 있잖습니까, 아무튼 그런 것까지 호기심을 가지고 관찰하지만, 결혼 후는, 그러니까 친숙해진 뒤에는 어지간한 일에도 신경을 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견해만으로는 각 장르가 어느 방향으로 이동하는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의 관점은 무조건 싫증이 나면 어느 한 요소가 전경으로 나선다고 것으로서, 진행의 방향 을 밝히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미래에는 앞에서 말한 '화자(작가)-화제(작품)-청자(독자)' 가운데에 어느 단위를 더 중시될 것인가와, 각 장르를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어떤 요소가 부족한가를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해답은 이미 말한 것 같군요. 미래는 '독자중심'시대이고, 서정적 장르는 사상이나 사실감을 표현하기가 어렵고, 서사는 함축성과 서정성이 부족하다는 걸 말씀 드렸으니. 그렇습니다. 각 장르는 독자를 중시하면서 그 장르에 부족한 요소들을 다른 장르에 서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아 니 10년 이내로 문학 전체는 기호만으로 이뤄진 추상성을 극복하 기 위하여 시각이나 청각적 요소들을 받아들여 멀티 아트multi-art 로 바뀔 것입니다.
2. 당신의 시 속에는 이 등장합니까, 이 등장합니까? 피이, 그것도 질문이라고 하느냐구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 체면을 봐서 그냥 대답해 보세요. 시인 자신을 등장 시킨다구요? 히히히…. 땡입니다. 만일 이제까지 그런 방식으로 써왔다면 고급 독자들로부터 낡았다고 외면을 당했어도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서정 장르는 화자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하여 탄생된 장르이고, 그래서 을 채택하고, 모든 사람들이 시인을 등장시키는 장르라고 믿어 왔으니까 말입니다. 이와 같은 서정 장르에 의 개 념이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현대로 접어들어서부터입니다. 그리 고, 그 이전의 작품도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결코 작가 자신이 등장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이 문제를 좀 더 정확히 알아보려면 먼저 일상적 담화의 구조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러시아 형식주의 문학이론을 출발시킨 사람 중 한 사람인 야콥슨(R. Jakobson)에 의하면, 일상적 담화는 의 역동적 관계에서 탄생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관계를 문학에 대입시키면 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학적 담화, 특히 이나 는 에 해당하는 속에 작가가 꾸며낸 인물들이 등장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다시 말해, 속에 다시 가 들어있고, 그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고 행동하는 것을 독자가 엿보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를 좀 더 알기 쉽게 그리면 다음과 같이 그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서정 장르도 등장 인물이 제한되고, 청자는 그냥 듣기만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날 뿐, 마찬가지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낡았다고 치부하는 김소월(金素月)의 [진달래꽃]만 해도 그렇습니다. 김소월은 남자 시인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싫어떠나는 님에게 꽃을 뿌릴 테니 '사뿐히 즈려 밟고' 가라고 애원하는 여성화자(女性話者)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아니, '내 님이 그리워 밤 늦게 울며 쏘다닙니다'라는 고려 시대의 [정과정곡(鄭瓜亭曲)]도, 임금님을 님으로 비유한 조선 시대 정철(鄭徹)의 [사미인곡(思美人曲)]과 [속미인곡(續美人曲)]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문학의 3대 장르인 시·소설·희곡 등은 를 채택하고, 작품 속에 다시 가 들어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작품 속의 화자를 완전한 허구(虛構)의 산물로 보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리고 작가 자신이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교술적 장르도 정도 차이가 날 뿐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 하여 꾸며 쓴다 해도 결국 작가의 경험을 재구(再構)한 것에 불과하고, 사실대로 쓰려 해도 그 작품의 목적과 구조에 맞추어 수정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실대로 쓴다고 믿는 일기(日記)를 살펴보아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기를 쓸 때에는 그 당시에 그렇게 생각하지않은 것들도 그렇게 생각한 것처럼 부분적으로 꾸미고, 어떤 부분을 강조하거나 약화시킵니다. 따라서 문학 작품 속의 화자는 시인 자신의 반영도 아니고, 허구적 존재도 아닌 의 절충적 존재(折衷的存在)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이론일 뿐, 을 내세운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무엇이 그리 잘못되었냐구요? 네에, 그건 제가 질문하려 했던 건데, 독자들이 먼저 하셨으니 대답할 수밖에 없군요. 우선 시인 자신이 작품 속에 등장한다고 믿으면 화제를 제한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가 경험한 것이 아니면 작품으로 쓸 수 없을 뿐더러 자신을 등장시키면 자신을 돋보이도 록 만들고 싶어하는 심리 때문에 고상하고, 우아하고, 진지하고, 영웅적인 화제만 택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작품 전체를 통일시키기 어려워진다는 게 문제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도 남의 이야기 처럼 하면 훨씬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왕 꾸미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시간적 공간적 배경은 물론, 거리와 어조, 어법, 어휘까지 조절할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허구적 화자를 택할 경우 자전적 화자를 택할 때보다 의미적 국면에서부터 조직적국면에 이르기까지 훨씬 유기적인 작품이 될 수 있습니다.머뭇거리다가는 여러분들이 다시 질문하실 테니, 먼저 질문하겠습니다. 자아, 받아보세요. 뿅! □당신은 를 설정할 때 무얼 먼저 염두에 두십니까? '그냥 대충…'이라구요? 그러시겠지요. 작품 속에 자신이 등장해야 한다고만 믿어 왔으니까. 제일 먼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자기가 쓰려는 작품의 주제에 적합한 인물의 ··입니다. 어떤 계층의 인물을 선택했느냐에 따라 화제는 물론 시적 공간·어조·시어· 시 의 형태 등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가령 시골 여자 어린이로 정했다고 합시다. 이런 화자를 선택하 면, 성이라든지 폭력 같은 화제는 다룰 수 없습니다. 소설의 경우이긴 하지만, 주요섭(朱耀燮)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만 해도 그 렇습니다. '옥희'라는 어린 여자 아이를 등장시켰기 때문에 어머니가 사랑방 손님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이 빨개지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른 요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가운데 무엇보다 먼저 유의해야 할 것은 화자의 성(性)입니다. 성에 따라 지켜야 할 화자의 특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시의 의미적 국면
ⅰ) 화자의 태도와 정서 : 남성화자를 등장시키면 대상으로부터 독립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면서 이성적(理性的) 능동적(能動的)으로 대응하는 태도를, 여성화자를 등장시키면 대상과의 관계를 중시하면서 보살핌의 원리로 감성적(感性的) 수동적(受動的)으로 대응하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ⅱ) 화제의 성격 : 남성화자를 등장시키면 국가 사회 윤리 같은 공적(公的) 추상적(抽象的) 화제를, 여성화자를 등장시키면 이별 사랑 아름다움 같은 사적(私的) 구체적(具體的) 화제를 택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② 시의 형식적 국면
ⅰ) 시형과 율격 : 남성화자를 등장시키면 상대적이지만 자유율(自由律)의 경우 자유분방한 시형을, 여성화자를 등장시키면 정제된 시형을 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정형율(定型律)의 경우우 남성화자는 4음보처럼 균형적(均衡的)이며 대응적(對應的)인 음보를, 여성화자는 3음보처럼 가변적(可變的)이며 대응된 짝이 없는 음보를 택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ⅱ) 음성 조직 : 남성화자를 택하면 기능적이고 소박한 음성을, 여성화자를 택하면 섬세하고 장식적인 음성을 택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물론,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 여성 독자들은 상당히 불만스러워할지 모르겠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여성주의자들이 남성중심주의적 인 가치관을 담고 있다고 해서 반대해온 프로이드(S. Freud)와 융 (C. G Jung)의 분석심리학(分析心理學)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석심리학만 참조한 게 아닙니다. 남성화자의 '대상으로 부터 독립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면서'라는 조건이나, 여성화자의 '대상과의 관계를 중시하면서 보살핌의 원리'로 행동한다는 조건은 길리건(C. Gilligan)을 비롯한 여성 심리학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좀더 생각해보면 여성심리학자들의 주장은 같은 특징을 달 리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대상으로부터 독립하여 옳고 그름을 따질 경우에는 능동적이고 이성적일 수밖에 없으며, 관계를 중시하고 관계되는 것들을 아낄 경우에는 자연히 수동적이고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배우자의 바람에 대한 반응을 가지고 생각해봅시다. 남자든 여자든 그런 기미를 눈치채면 분노하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 와이셔츠 깃에 묻은 루즈 자욱을 보고도 용서하는 것은 내가 이혼하면 어린 자식들은 누가 돌보나, 친정 어머니는 얼마나 상심하실까, 친구들이 뭐라고 수군댈까를 생각해서 참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타자와의 관계를 생각하고, 그들에 대한 '보살핌의 윤리(ethic of care)'로 행동하기 때문에 참는 것입니다. 그리고, 맨 날 늦게 들어오는 남편이 아내의 늦은 귀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 잘못은 돌아보지 못하고 아내의 일이 옳은가 그른가만 따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차(性差) 무시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 차이를 인정하되 나름의 가치를 지녔다고 받아들이는 의식구조가 더 중요합니다. 다시 본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작품 속의 화자는 이와 같은 성적 특질을 그대로 반영해야 자연스러워집니다. 그것은 다음 김소월의 작품들을 비교해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 [진달래꽃] 1, 2연 ⓑ마소의 무리와 사람들은 돌아들고, 적적(寂寂)히 빈 들에 엉머구리 소리 우거져라. 푸른 하늘은 더욱 낮춰, 먼 산(山) 비탈길 어둔데 우뚝우뚝한 드높은 나무, 잘 새도 깃들어라. 볼수록 넓은 벌의 물빛을 물끄러미 드려다 보며 고개 수그리고 박은 듯이 홀로 서서 긴 한숨을 짓느냐. 왜 이다지! - [저녁 때] 1.2연ⓐ는 상대가 '님'인 점으로 미루어 여성화자로, ⓑ는 '-어라'와 같은 남성적 어미를 택한 점으로 미루어 남성화자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비슷한 시기에 쓰여졌고, 시인 자신이 골라 시집 {진달래꽃}에 수록한 작품인데도 전혀 다른 특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화제를 살펴보면, ⓐ는 개인적인 사랑을 다루는 반면에, ⓑ 는 일제(日帝)의 토지 수탈 정책에 의해 농토를 빼앗긴 농민의 문제인 공적·사회적 화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는 님이 떠 나는 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변함없는 사랑을 다짐하는 반면에, ⓑ는 한숨을 지으며 물끄러미 바라보는 행위를 통해 땅을 빼앗긴 것이 과연 정당한가 따지려 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앞에서 지적한 특징 그대로 들어맞고 있지요? 그리고, 형식과 율격 면에도 역시 달라지고 있습니다. 두 작품 모두가 4연시지만, ⓐ는 하나의 율행(律行)을 2개의 층량(層量) 3보격으로 나누고, 2개의 율행(律行)을 한 연으로 구성하여 정형성이 강하게 드러납니다. 반면에, ⓑ는 각행이 2음보(音步)에서 6음보 사이를 불규칙하게 넘나들면서 자유시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가 대응(對應)되는 짝이 없는 3보격을 규칙적으로 택한 것은 여성의 가변적(可變的)이면서도 정제된 정서를 나타내기 위해서 이며, ⓑ가 자유시 형식을 택한 것은 남성의 자유분방하면서도 격렬한 정서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이런 차이는 시어와 통사 구조(統辭構造)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국어에서 화자의 행위와 정서를 잘 드러내는 문장성분은 서술어(敍述語)입니다. 이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는 전(轉) 의 '가시옵소서'를 제외하고 '보내드리우리다'·'뿌리우리다'·'흘리우리다'와 같은 극존칭(極尊稱) 종결어미와 음성모음 및 활음조 현상(euphony)이 우세한 시어들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술어를 수식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는 '-져라'·'-어라'·'-느냐'와 같은 오연(傲然)한 어미와 투박하고도 실용적인 어휘들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푸른 하늘은 더욱 낮춰, 먼 산 비탈길 어둔데/우뚝우뚝한 드높은 나무, 잘 새도 깃들어라'와 같이 행 가운데 쉼표를 찍고, '긴한숨을 짓느냐. 왜 이다지!' 같은 구절에서는 도치법(倒置法)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가 극존칭 어미를 선택한 것은 청자(님)가 화자(나)보다 상위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음성모음이 우세한 어휘를 선택한 것은 화자의 서럽고도 어두운 심정을 반영하기 위해서이며, 활음조 현상이 일어나기 쉬운 어휘를 선택하고 통사 구조를 정제시킨 것은 이별의 순간에도 아름답게 보이려는 여성적 태도를 반영이 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가 거친 문장과 실용적인 어미를 택한 것은 남성화자의 자유 분방한 성격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작품은 화자에 따라 의미적 국면에서부터 조직적 국면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정됩니다. 그러므로, 각 유형의 화자가 어떤 기능을 지니고 있는가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면, 그리고 화자에 맞춰 모든 것을 조정할 수 없다면 결코 좋은 시인이 될 수 없습니다. 자아, 이번 문제는 좀 까다운 질문을 해볼까요? 준비하시고, 받아 보세요. 쾅! □당신이 채택한 화자는 언제나 명백하고 단정하게 말합니까, 아니 면 때때로 흐트러지는 수도 있습니까? 그야 명백하고 군더더기 없이 써야 되는 게 아니냐구요? 땡, 땡, 땡. 또 틀렸습니다. 그럼 달리 여쭤보겠습니다. 어린애가 유리창을 깨뜨렸다고 합시다. 그래서 '누가 깨뜨렸어?'하고 고함치자,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큰 소리로 '제가 깨뜨렸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기막히겠지요? 또 정말로 좋아하는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한다고 합시다. 논리 정연하게, 그리고 청산유수격으 로 이야기하면 오히려 거짓말처럼 들리겠지요? 말은 아무 때나 명백하게 하는 게 아닙니다. 때로는 군더더기가 있고, 더듬는 게 더 진실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시 속의 화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앰프슨(W. Empson)의 '다의성(ambiguity)의 이론'에 의해 비로소 논리화된 것이긴 하지만, 이렇게도 해석되고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는 작품이 우수한 작품이고, 서정 장르는 장르 자체가 그런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시의 기본 어법인 비유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녀는 아름답다'라는 말을 '꽃'이나 다른 것으로 치환(置換)하여 얼른 알아듣지 못하게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왜 사람을 식물의 기관인 꽃으로 비유했는가를 생각하고, 여자의 아름다움, 연약함, 열매를 맺을수 있는 생식성(生殖性) 등을 떠올릴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여자가 아름답다고 아무리 직접 이야기한들 독자 는 예사로 들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동화(automatic)'되어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비유를 통해 낯설게 하기(defamilarization)를 시도하는 것입니다. 우선 명백히 말하지 않아야 할 경우는 두 가지를 상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화자가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감성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청자가 화자보다 상위라서 직설적으로 말하면 역효과가 나타나리라는 판단에서 속셈을 감추는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이럴 이 경우 화자가 겉으로 말하는 와 로 분열됩니다. 그리고, 역설(pardox)나 반어(irony)의 어법을 채택합니다. 앞에서 인용한 [진달래꽃]의 경우만 해도 그렇습니다. 보내고 싶어 보낸다는 게 아닙니다. 떠나려는 님은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라고 역설적으로 말했다 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3연에서는 꽃을 뿌릴 테니 '밟고' 가라 고 한 것으로 미뤄어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자기가 버린 여자가 뿌리는 꽃을 밟고 갑니까? 그러니까, 표층적 화자는 가 라고 했지만, 심층적 화자는 가지 말라는 게 이 작품의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보내겠다고 말했지만 자신도 보낼 수 없고, 가겠다고 하지만 님도 갈 수 없다는 걸 알고 그렇게 말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말했다면, 이 작품은 아이러니 어법을 채택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 역시 표층과 심층의 화자는 분리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니, 이 작품은 이렇게만 해석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무수하게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한번 이제까지 다른 사람들이 해석한 것과 제 나름대로 해석한 것을 열거해 볼까요? ⑴내가 이토록 사랑하는데도 떠날 수 있느냐는 고도 수법의 만류.
⑵'진달래꽃'이 화자 자신의 상징물이라고 할 때, 나를 밟고 가라는 뜻으로 절대 못 보내겠다는 반어적 표현. ⑶내가 싫어 떠난다면 눈물을 흘리기는커녕 죽어도 안 붙잡겠다는 프로이트 식의 오기(傲氣) 또는 실언(失言). ⑷화자가 님이 없는 사람이라면, 나는 싫다고 떠날 때 꽃까지 뿌려 줄 정도로 착한 사람인데 왜 날 사랑하는 사람이 없느냐는 자기 선전. ⑸떠날 때는 막지 않을 테니 함께 있는 동안만은 마음놓고 사랑해 달라는 현실주의적 책략. ⑹떠날 때 깨끗이 보냄으로써 잊지 못하여 되돌아오게 만들겠다는 [가시리]식 계산. ⑺남녀간 사랑은 한번 깨지면 울며 매달려도 회복되지 않으니 차라리 깨끗이 보내자는 체념. ⑻어쩌면 발생할지도 모르는 미래의 이별할 때의 가정해본 자기 태도. ⑼이별은 꿈도 꾸지 않으면서 만발한 진달래꽃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을 순순하게 받아들이겠다는 사랑의 표현. ⑽여성의 무의식 속에 숨겨진 피학적 욕구. 시를 읽는 재미는 이렇게 해석할 수 있고, 저렇게 해석할 수도 있는 구절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완성하는 데 있습니다. 명백한 시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만이지만, 모호한 시는 자기 나름대로 상상력을 발휘하고 완성하는 기쁨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명백한 시가 좋다는 것은 자기 생각을 명백하게 전달하여 설득하려는 시인의 욕심일 뿐, 독자나 문학적인 입장에서는 결코 상찬할 만 한 게 못됩니다. 군더더기가 끼어 있는 것이 자연스럽게 보일 경우는 화자가 격정에 빠졌을 때입니다. 일상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논리 정연 하게 말하던 사람도 다급하거나 격정에 빠지면 횡설수설하고 어법 에 맞지 않게 말하는 것이 보통입니다.시적 담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행과 연을 비슷한 길이로 나누고 표준적인 어법을 준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화자가 격정에 빠졌을 때에는 형식이 흐트러지고 어법에 어긋나게 표현해야 더 실감이 납니다. 라이트(G. T. Wright)는 이와 같은 점을 염두에 두고, 정상적 정서 상태의 화자는 , 격정에 빠졌을 때의 화자는 로 나누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의 실수로 나타나는 문장의 혼란과는 구분해야 합니다. 그리고 작품의 첫머리부터 원시화자를 등장시키는 것도 고려해 봐야 합니다. 먼저 문명화자를 등장시키고, 정서가 격앙하는 과정을 그려 준 다음, 원시화자를 등장시키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담화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에서 원시화자를 구사하여 성공한 예로는 서정주(徐廷柱)의 초기시 가운데 [화사(花蛇)]를 비롯한 몇 편을 들 수 있습니다. 좀더 자세한 분석이 필요하니 번호를 붙여가며 인용해 볼까요? ⓐ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 아름다운 베암… ⓒ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여났기에, 저리도 징그라운 몸둥아리냐. ⓓ 꽃다님 같다. ⓔ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든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 소리 잃은 채 낼룽그리는 붉은 아가리로 ⓖ 푸른 하눌이다…물어뜯어라, 원통히 무러뜯어, ⓗ 다라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麝香) 방초(芳草)ㅅ길 ⓙ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 우리 할아버지의 안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 석유(石油) 먹은 듯…석유(石油) 먹은 듯…가쁜 숨결이야 ⓜ 바늘에 꼬여 두를까부다. 꽃다님보단도 아름다운 빛… ⓝ 크레오파투라의 피먹은양 붉게 타오르는 고흔 입설이다…슴여라! 베암. ⓞ 우리 순네는 스믈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흔 입설…슴여라! 베암. ⓐ에서 ⓓ까지는 문명화자의 발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터는 갑자기 기독교 신화인 에덴 동산의 전설을 이야기하고,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결합도 일상적 감각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다 시 말해 원시화자의 발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곱다'의 보조관념으로 동원한 '피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이나 '고양이같이 고흔 입설(ⓞ)'만 해도 그렇습니다. 피먹은 입술은 징그럽고, 고양이 같은 입술은 야옹하고 할퀼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아름답다는 의미를 보조하기 위해 차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뱀을 무슨 헝겊처럼 바늘에 꼬여 두르고 싶어하며 (ⓜ), 액체처럼 입술로 스며들라고 명령하는 것(ⓝ,ⓞ) 역시 비논리적입니다. 이와 같이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폭력적(暴力的)으로 결합한 것은 화자의 정서 상태가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유사성 여부를 따질 만큼 이성적인 상태가 아님을 의미합니다. 뿐만 아니라, 통사 구조 역시 뒤틀린 상태입니다. '너희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 내던 달변의 혓바닥(ⓔ)'이라는 구절 뒤에는 그 상태가 든지, 라는 서술부(敍述部)가 와야 합 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소리를 잃은 채 낼룽거리는 붉은 아가리로(ⓕ)/푸른 하늘이다…물어뜯어라, 원통히 무러뜯어(ⓖ)'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ㅅ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이라는 구절 뒤에는 무엇 때문이라는 이유가 와야 하는 데 '석유 먹은 듯…석유 먹은 듯…가쁜 숨결이야 (ⓛ)'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 연이나 행의 배치에서도 혼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서 ⓓ까지는 각 행을 완결된 의미로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터는 한 연을 하나의 문장으로 짜는가 하면, 한 행의 길이를 2음보 에서부터 7음보까지 불규칙하게 구성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화자의 정서가 적당한 단위로 의미를 분절할 만큼 이성적 상태가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에서 ⓓ까지는 이성적인 문명화 자가 지배하고, ⓔ에서 ⓜ까지는 원시화자가 등장하기 시작하며, ⓝ 이후는 완전히 원시화자가 지배하는 곳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시적 담화는 적절한 비유와 완전하고 매끄러운 문장만이 시의 주무기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아어(雅語)와 율문(律文) 중심의 고전적 시어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서,상황에 따라 군더더기를 남겨두고 흐트러트릴 수 있어야 최고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런 방식을 이론으로 설명하고 있는 저 자신조차도 매끈하게 다듬는 습관이 있어 항상 작픔을 자신도 모르게 다듬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질문 하나만 더 하고 이번 호는 마칠까요? 장진했습니다. 받으세요. 빵! □당신은 현대시에 주로 채택되는 화자가 어떤 유형이며, 이들의 문제점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논의한 화자의 유형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건 제가 정리해 드릴 테니 답변을 준비해 두세요. 시인과 관계에 따른 유형 : 신분에 따른 유형 : , , , 담화의 담당 층위에 따른 유형 : 정서 상태에 따른 유형 : 글쎄요, 잘 모르시겠다구요? 화자의 변천사(變遷史)를 살펴보면, 시인과 화자 관계의 경우 인 에서 출발하여 인 쪽으로 이동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바뀐 것은 문학 작품을 자아의 표현으로 보던 고전적 관점이 오락성이나 미적 탐구 쪽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신분을 살펴보면 으로, 성은 으로 이동해 왔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작품 속의 주인공들이 쪽으로 하강해 왔다는 프라이(N. Frye)의 지적이나, 고대로 올라갈수록 남성 시인이 여성화자를 택하여 노래하는 작품이 드문 반면에 현대시로 내려올수록 여성화자를 빌어 노래하는 작품이 늘어가는 점을 미루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하강 현상은 모든 장르에 나타나는 것으로서, 사실감(reality)을 강화시키기 위한 노력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에 따른 이동 방향은 리얼리즘의 강화라는 이유로는 설명이 부족합니다. 남성이 이성적이고 여성이 감성적이라고 할 때, 리얼리즘은 이성주의를 배경으로 탄생되는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일부에서는 현대시의 여성화 경향을 한국 문학에는 여성화의 전통이 있었고, 그것이 현대에 재현되고 있다든가, 일제(日帝)의 강압적인 파시즘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소극적 여성주의(女性主義)를 택한 것이 체질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비단 우리 문학에만 나타나는 게 아닙니다. 세계 각국의 시들이 대체적으로 여성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다 보편적인 현상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경 제의 발달에 원인을 찾는 게 보다 타당할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기초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 재화(財貨)를 소비하던 것이 자기의 사회적 신분을 표시한 로 바뀌고, 그로 인해 실용성(實用性) 이나 기능성(機能性)보다 장식성(裝飾性)과 세공성(細工性)을 중시하는 문화가 형성되면서 남성적 특질인 사상과 교훈보다 정서와 섬세함을 강조하는 여성 화자 중심의 작품이 증가했다고 보아야 할것입니다. 한편 화자의 분열 방향은 아이러니를 중시하는 낭만주의 시대부터 로, 초현실주의 시가 등장한 뒤부터 와 쪽으로 이동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적 인물의 이동 방향은 전인성(全人性)을 상실하고 비인간화(非人間化) 내지 해체화(解體化) 쪽으로 진행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이동의 원인은 더 이상 진로가 막힌 리얼리즘 문학이 심리학의 도움을 받아 의식의 밑바닥에 숨겨진 인간상을 등장시키는 방법으로 돌파구를 찾으려 한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하여 문학사 속에서 독자적 위치를 확보하려는 작가들에 의해 가속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해체 작업은 바람직한 방향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문학작품이 사회보다 앞서 인간성을 해체하는 것은 문학의 본래 목적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독자와 작가의 관계를 파괴하고, 자아와 사회의 해체를 촉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미 변해버린 독자의 감수성을 무시하고 과거로 돌아갈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현대 시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전자아(全自我)를 대변할 수 있는, 그러니까 의식과 무의식, 이성과 감성, 도덕과 욕망 등을 모두 대변할 수 있는 화자를 발견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3. 풀을 뜯던 송아지조차 하늘을 바라보며 시심을 기르는 가을이 깊어 가고 있으니 이번에는 시의 화제(話題)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화제의 유형을 내용에 따라 나눕니다. 문학의 경우, 농촌소설이니, 심리소설이니, 역사소설이니, 연시(戀詩)니 해양시(海洋詩)니 풍자시니 하는 분류가 그런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분류는 매우 자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양시'를 인정하면 '도시시(都市詩)'나 '농촌시(農村詩)'를 인정하고, 다시 '중산간(中山間) 시'니, '종로(鍾路) 시'니 하는 것들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콥슨(R. Jakobson)은 화제의 유형을 지향성(志向性)에 따라 으로 분류합니다.이를 시적 담화와 연결할 경우, 시란 결국 내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기 위한 장르이므로, ··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하면 지향성의 유형은 이 세 가지만 있는 게 아닙니다. 와 가 등장하고 에 대해 이야기하는 유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화자가 주로 이야기하되 청자가 간혹 틈입(闖入)하는 유형으로서, 가 전부 등장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이 유형을 이라 고 부르기로 한다면, 지향성에 따른 유형은 모두 4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화제의 특질은 지향성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게 아닙니다. 그보다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입니다. 같은 지향형을 택해도 초점(focus)이 달라지면 전혀 다른 담화가 되기때문입니다. 시적 담화의 경우 초점의 유형은 크게 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관념형은 화자가 감성(感性)을 통해 획득한 의미나 정서를 표현하는 대 초점을 맞춘 유형을 말합니다. 문예사조상으로는 낭만주의 시, 신비평의 지도자인 랜섬(J. C. Ransom)의 분류에 따르면 '관념시(platonic poetry)'가 이 유형에 해당합 니다. 그리고, 즉물형은 관념형과 반대으로 이성적 인식을 통해 발견한 물질적 외관(外觀)을 그리는 데 초점을 맞춘 유형을 말합니다. 문예사조 상으로는 이미지즘, 신비평의 분류에 따르면 즉물시 (physical poetry)가 이 유형에 해당합니다. 또 무의식형은 이성적 통제를 풀 때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무의식적 심상들을 받아쓰기 하듯이 자동 기술(automatism)하는 유형을 말합니다. 문예사조상으로는 초현실주의 시가 이에 해당하고, 우리 나라에서는 1930년대 이상(李箱), 1940년대의 동인들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호적 상징(signal symbol)은 대상의 의미나 모습을 배제하고, 추상적인 논리에 의하 여 재편성한 것에 초점을 맞춘 유형을 말합니다. 입체주의(Cubism)·미래주의(Futurism)·다다이즘(Dadaism) 시인들이 실험적으로 쓴 '구체시(concrete poem)', '음향시(poem sonora)', '꼴라주(collage)와 몽타쥬(montage)의 시', '추상시(abstract poem)', '침묵시(dumb poem)'에서 발견되는 초점입니다. 우리 나라 에서는 이상(李箱)의 일부 작품을 꼽을 수 있습니다. 자아 그럼 질 문합니다. 준비하세요. 뿅뿅뿅 ▣당신은 어느 지향성의 화제를 즐겨 택하십니까?
그야 두말할 것 없이 이라고요?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우리 나라 시인 가운데 90%가 이 유형을 택하고 있으니까요. 이런 지향형을 채택하면, 표현의 기능이 강화되고, 독자로부터 공감을 받기 쉽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첫째로, 시의 화제가 매우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화자 지향형을 택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이야기를 쓴다는 이야기가 되고, 인간은 누구나 자기를 우아하고 고상하고 진지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하여 그런 제재들만 고르기 때문입니다. 이 유형을 택하되, 김동리의 [등신불]이나 주요섭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처럼 허구적 화자를 등장시키면 어떠냐구요? 네에, 그러면 좀 낫겠지요. 하지만, 완전히 자유롭기는 어렵습니다. 독자들은 여전히 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자유로울 수가 없을 겁니다. 또 하나 약점은 감정이 고조되어 구조적으로 허약해지고, 감상(感傷)에 떨어지기 쉽다는 점입니다. 다음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봄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운 줄도[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김소월,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앞부분 이 작품의 화제는 예전엔 내가 당신을 그토록 사랑하는 줄 몰랐다는 후회와 그로 인해 복바쳐 오르는 슬픔입니다. 따라서, 자기 생각과 느낌을 이야기하기 위한 화자 지향형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느낌은 외부로부터 어떤 자극을 받거나 과거에 대한 회상 또는 미래에 대해 전망할 때 발생합니다. 그로 인해 현재의 자극을 대상으로 삼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 를 되돌아보거나 를 상상하면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구조를 취하게 됩니다. 이때 현재의 나는 , 과거나 미래의 나는 가 됩니다. 그리고, 현재보다 과거나 미래가 더 이상적으로 그려지 면서, 회고적(回顧的) 영탄적(詠嘆的)·감상적(感傷的) 어조를 띠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 작품에서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라는 반복적인 구절이 그런 곳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반복은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무의식에서는 그쪽으로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상황이 변했음을 인정하면서 고착적(固着的) 정서를 보이는 걸 감상주의(sentimentalism)라고 한다면, 이 유형은 근본적으로 감상성을 바탕에 깔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럼 은 어떠냐고요? 청자 지향형은 에 대한 이야기로서, 라든지, 는 식의 의문 명령 애원 요청 호소의 성격을 띠는 화제를 말합니다. 구 조상으로는 와 로 나눠집니다. 이런 화제는 화자 지향형보다도 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화제로 제한된다는 단점을 지닙니다. 남에 대한 판단이나 요구는 객관적이고 윤리이며 관습적인 범위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결 강렬하고도 단순한 어조를 택합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 요구를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행동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강렬한 어조로 단순하게 말하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현대로 접어들면 서, 연시(戀詩), 조시(弔詩)나 축시(祝詩), 정치시(政治詩)를 제외 하고는 이런 지향형을 택하는 작품이 드문 것도 바로 이런 단점 때문입니다. 다음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에서 이 작품의 의미는 와 로 나눠집니다. 그리고 그 '껍데기'는 거짓된 인간들 이거나 그들이 만들어 낸 제도(制度)와 같은 불특정한 것들로서,화자가 청자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섭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청자 지향형은 청자와의 관계에 따라 화자의 어 조와 태도가 달라집니다. 화자가 상위(上位)에 설 때에는 직설적인 어법과 강압적 자세를 취합니다. 앞의 작품이 강압적이면서도 명령적인 어법을 택한 것은 화자가 청자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서 있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위(下位)에 설 때에는 아이러니를 비롯하여 역설 같은 완곡(婉曲) 어법을 택하고, 직설적인 어법을 택할 때도 간절하게 청원하는 형식과 화려하고 수식적인 문체를 택합니다. 그리고 아예 신처럼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일 때에는 기도·찬송·애원의 태도를 취합니다. 그것은 가급적 청자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화자의 의도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현대로 접어들면서 채택하기 시작한 유형은 입니다. 이 유형은 청자(독자)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그에 대한 판단은 청자가 내리도록 하는 형식으로서, 라는 형식을 취합니다. 그리고, 문맥의 표면에서 화자와 청자가 잠재되고, 정서적 표현과 의미 부여를 억제한 채 카메라로 사물을 포착하듯 이미지화합니다. 다음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햇살은 모두 둑 밑에 내려와 있다 미루나무 가지 사이로 강 바람이 분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시골 청년 자전거 바퀴 살에 햇살이 실려서 돌아간다 그 바퀴 살 사이로 투명한 강 얼마쯤 걸었을까 미루나무도 가고 있는지…… 미루나무는 조금씩 작아져 갔다 - 한성기(韓性祺), [둑길.1] 전문 이 작품에서 화자는 걷고 있는 둑길에 대해 어떤 의미나 정서도 부여하지 않은 채 걷고 있다는 사실과 둑길을 풍경만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풍경들이 화자의 시선을 거쳐 들어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잠재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보가 주관적이라 는 인상을 띨 경우 신뢰를 잃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화제 지향형이라고 해도 화자의 정서가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이 어떤 화제를 선택하든 것은 근본적으로 자기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대부분의 사실들은 은유적 형태로 제시됩니다.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화자는 '청년'과 '강'과 '미루나무'를 뒤에 두고 한없이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두고 떠날 수밖에 없는 노년의 쓸쓸한 감정을 은유하기 위한 객관적상관물(相關物)에 해당합니다. 은 1인칭 지향형의 정서와 의미 부여 기능, 2인칭 지향형의 상대에 대한 요구와 명령 기능, 3인칭 지향형의 객관적 자세와 이미지화 기능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어 작중 상황이 연극처럼 환하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자칫하면 너무 길어지고, 산문으로 떨어지기 쉽다는 단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음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거리에서 우연히 아내를 만난다. 나는 일부러 모른 척하고 지나간다. 아내는 등 뒤에서 [여보, 여보!]하고 쫓아온다. 그래도 나는 모른 척하고 지나간다. (내가 인정하지 않는 한 어째서 저 여자가 내 아내란 말인가?) 저녁 상을 가운데 놓고 아내와 마주 앉았다. 갑자기 서베이어 1호처럼 난데없이 사뿐히 착륙하는 얼굴. [바로 저 얼굴입니다!] [뭐가 저 얼굴이예요?] [아니, 서베이어 1호의 달 연착(軟着) 말이야] 이제는 신비의 베일도 벗겨지고 대재벌(大財閥)의 몰락처럼 쓸쓸한 얼굴 달. - 김윤성(金潤成), [아내의 얼굴] 전문 이 작품에서 화자는 아내를 만났는데, 모르는 척하고 그냥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여보, 여보!' 부르며 뒤따라오자 '내가 인정하지 않는 한 어째서 저 여자가 내 아내란 말인가?' 독백합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무심코 아내의 얼굴이 '서베이어 1호'의 착륙으로 인하여 신비를 잃은 달 같다했다가 아내가 묻자 인공 위성 이야기라고 둘러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의 삼자 관계를 고루 지향하는 극적 지향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앞에서 인용한 어떤 작품보다 한결 깁니다. 그리고, '내가 인정하지 않는 한 어째서 저 여자가 내 아내란 말인가'라는 관계와 본질에 대한 철학적 질문, 라는 은유의 축이 없으면 산문으로 떨어졌을 것입니다. 종래의 시에서 극적 지향형을 택한 작품이 드문 것도 이런 약점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단점만 극복할 수 있다면 가장바람직한 유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아, 또 하나 질문을 해볼까요? 당신의 시가 현대적인가 여부를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질문이니 잘 판단하고 대답하십시오. 준비하시고, 쏩니다. 쾅! ▣당신은 선택한 화제의 어디에 초점을 맞춰 써오셨습니까 시란 '시인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장르'이니, 당연히 의미나 정서를 표현하는 데 초점을 맞춰 써왔다고요? 그렇다면 그 정서와 사상은 당신만이 발견한 것이었나요? 그렇지는 않다구요? 그렇겠지요. 과학에는 새로운 발견이 있지만, 사상이나 감정은 새로운 게 없는 법이니까요. 가령, 사랑에 대한 감정만 해도 그렇습니다. 구애나 결혼의 풍습은 시대와 민족에 따 라 차이가 나지만, 아득한 옛날의 원시인도 아프리카 오지의 깜둥이 처녀도 우리처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귓볼이 빨개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가까이 가고 싶은 것은 마찬가지니까요. 사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박애(博愛), 공자님의 인의예지(仁義禮智) 사상은 그분들이 처음 주장한 게 아닙니다.그분들은 인간의 보편적 심성 밑에 깔려 있는 사상을 체계화하고 실천한 분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상이나 정서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은 대부분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을 늘어놓는 결과가 되기 쉽고, 그 전달하는 데 신경을 쏟다보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물들이 물질적 속성을 상실하고 앙상한 관념의 덩어리가 되어 독자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기 일수입니다. 우리 시단에서 상당한 시인으로 평가해온 김종삼(金宗三)의 다음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되므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으면서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 김종삼(金宗三),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전문 이 작품의 지향성은 화제 지향형입니다. 그러므로 대상의 물질적 외관(外觀)을 강조하기에 적합한 화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라는 관념을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무교동'도 '서울역'도 '빈대떡'을 먹고 있는 목로 주점의 풍경도 사라지고 완전한 산문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초점이 관념 쪽에 맞추어지면, 시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와 정서가 강화되고, 명상의 흔적이 뚜렷이 부각됩니다. 반면에 시적 사물들은 특정감(特定感)을 상실한 채 물명(物名) 상태로 떨어지고, 정서 과잉에 빠지게 됩니다. 낭만주의 시가 흄(T. E. Hulme)이나 파운드(E. Pound)를 비롯한 이미지스트들의 공격을 받 고 물러난 것도 이런 약점 때문입니다. 그럼, 관념형의 반대인 즉물형(卽物形)은 어떠냐구요? 이 유형은 관념형보다 한결 구체적이고 현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예사조상으로도 관념형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제시된 초점일 뿐만 아니라, 현대 독자들은 시인으로부터 설교를 듣는 것보다는 그가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게된 상황을 직접 목격하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더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미 없는 텅 빈 그림(meaningless picture)'으로 떨어진다는 게 문제입니다. 다음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바다는 뿔뿔이 달아날랴고 했다. 푸른 도마뱀떼같이 재재발렸다. - 정지용(鄭芝溶), [바다·2]에서 이 작품은 봄날 얕은 여울목에서 자잘하게 부서지는 바다 물살의 모습만 제시되었을 뿐, 시인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나 사색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독자들은 도대체 무얼 이야기하려고 하는가를 생각하고, 그러다가 별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없을 때는 참 깔끔하게 그렸다는 것 이상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흄과 함께 이미지즘 운동에 앞장섰던 파운드(E. Pound)가 그 대열에서 이탈해 '은유하는 그림(picture of metaphor)'을 추구고, 그의 제자격인 엘리어트(T. S. Eliot)가 사상과 감정이 융합된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 이론을 내세우며 '형이상시 (metaphysical poetry)' 운동에 앞장선 것도 이 초점이 지닌 한계때문입니다. 무의식에 초점을 맞추면 이제까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접할 수없는 풍경을 끌어들여 개별성(個別性)을 확보기에 용이해집니다. 그리고 고정 관념에 가려진 인간의 본성을 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그림으로 이어져 사실감(reality)을 획득하기 어렵고, 무의식 속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을 들어내어 문학이란 이름으로 부도덕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다음 중 한 사람인 조향(趙鄕)의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열 오른 눈초리, 한잔한 입 모습으로 소년은 가만히 총을 겨누었다.
소녀의 손바닥이 나비처럼 총 끝에 와서 사뿐히 앉는다. 이윽고 총 끝에선 파아란 연기가 물씬 올랐다 뚫린 손바닥의 구멍으로 소녀는 바다를 내다보았다. ---아이! 어쩜 바다가 이처럼 똥그랗니? 놀란 갈매기들은 황토 산태바기에다 연달아 머릴 처박곤 하이얗게 화석(化石)이 되어 갔다. - 조향, [EPISODE] 전문 이 작품은 우리의 경험에 비춰볼 때 너무 낯설어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프로이트(S. Freud)나 융(C. G. Jung)과 같은 무의식을 연구한 사람들의 이론을 빌어 해석 합니다. 그들의 이론을 따를 경우, '총'은 남성 성기, '구멍'은 여성 성기, '바다'는 '모성'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열오른 소년'이 성기로 소녀를 겨누고, 섹스가 끝난 다음 소녀는 날아오르는 갈매기를 바라보면 '아이, 어쩜 바다가 이렇게 똥그랗니'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유형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주장했듯이 자동 기술법으로 쓰여l진다는 것은 지나친 표현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의식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무의식을 자동 표출시켜 문자 언어 로 기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상 생활에서 언뜻언뜻 떠오르는 무의식적 심상들을 몽타쥬한 것이거나, 세속적 논리와 가치관을 배제하고 자유 연상(自由聯想)한 결과를 표 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기호적 상징형은 뒤짚힌 숫자들을 나열한 이상의 [오감도(烏敢圖) : 시 제4호] 같은 작품에 나타나는 초점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처럼 언어로 쓴 것도 기호적 상징에 초점을 맞춘 작품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소녀는 지평선을 가볍게 허리에 두르고 외출을 한다. 2. 탐정이 찾아와 가족들의 충치에 대하여 상세히 노트 한다. 3. 수음(手淫) 상습범인 하녀가 앵무새에게 말을 도둑맞고 실어증이 된다. 그것은 책을 읽는 고양이 때문이다. 그릇 찬장 속에서 역사가 눈을 뜬다 4. 말더듬이 집사가 에스키얼그 요리에 대하여 부친과 논의를 하고 있다는 추론 5. 그 방정식은 엄지손가락 + 우유x =서양사 개론 - 테레야마 슈누시(寺山修可), [물 속의 소녀]에서 이 작품은 얼핏 보면 무의식적 심상을 대상으로 삼은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좀더 살펴보면 기호적 상징으로 쓰여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향의 작품에서 소녀가 총구를 막았는데도 쓰고, 손이 구멍 뚫렸는데도 그 구멍을 통해 바다를 내다본다는 것은 현실의 논리에 비춰 볼 때 이상스러운 일이지만, 실제로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모티프와 모티프의 연결이 비 일상적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모티프의 연결만 비일상적인 게 아닙니다. 각 연에 번호를 붙였지만 필연적 계기성을 발견할 수 없고, 암호적인 부분이 너무 자주 눈에 뜨입니다. 우선 '소녀는 지평선을 가볍게 허리에 두르고 외출을 한다'라는 첫머리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다 더듬어도 '지평선'을 허리띠처럼 두르고 외출하는 장면을 떠올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우유x=서양 사 개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엄지 손가락'에 얼마간(x)의 '우유'를 더하면 '서양사 개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소녀', '지평선', '탐정', '가족들의 충치' 등은 시인이 나름대로 논리적으로 추론을 하여 치환한 기호적 상징으로 보아야 할것입니다. 사실, 누구의 시에서나 사용하는 은유(metaphor)도 기호적 상징으로 바뀌는 중간 단계의 어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으로 바꾸었다고 합시다. 이 은유는 과 의 과 가운데, 차이성은 제거하고 유사성만 택한 것으로서, 이를 배제했다는 것은 여인의 본질 가운데 절반 이상을 제거하고 추상화했음을 의미합니다. 오르테가 (Y. G. Ortega)가 은유를 다른 사물로 바꿔 보려는 지적(知的) 행위로서, 현실로부터 도피하면서 비인간화하려는 본능에서 출발한다고 지적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따라서, 은유와 기호적 상징의 차이는 보조관념에 원관념을 추론할 수 있는 고리를 남겼느냐 차이로 결정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기호적 상징에 초점을 맞추면 전통적인 시에서 얻을 수없는 새로움과 시적 긴장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논리적 전환의 고리가 생략되어 그 작품이 채택한 상징 체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전달이 차단됩니다. 이제까지 대부분의 시인들이 이런 초 점을 기피해 온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 유형도 문제가 있고 저 유형도 문제가 있다면 도대체 어떤 것이 이상적이냐구요? 안 돼요. 제가 질문하려는 걸 대신 하시네요. 자아, 받으세요. 쾅, 쾅, 쾅! 왜, 이번에는 한번만 '쾅'하지 않고 세 번씩이나 '쾅쾅쾅'이냐구요? 제 역할을 침범하려고 했으니까요. ▣이제까지 당신은 자신의 작품 속에 몇 개의 초점을 담아왔습니까? 한 개의 초점을 담지 몇 개의 초점을 담느냐구요? 그렇다면, 당신의 시는 결코 새로운 게 아닙니다. 특히, 관념에만 초점을 맞췄다면 '낡은 시'라고 비판을 받아도 불평하지 마십시오. 이번만은 동의할 수 없다구요? 그럼, 당신이 고를 때, 어떤 사람이 최고로 꼽았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실제로 그런 사람은 없지만, 얼굴도 이쁘고, 마음씨도 착하고, 교양도 있고, 능력도 있고, 나도 잘 이해해주는, 그런 사람을 꿈꾸지 않았나요? 문학 작품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미도 풍부하고, 작중 풍경도 눈에 선하게 보이고, 의식의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무의식적 욕망도 충족시켜줄 수 있고, 객관적인 논리도 지닌 작품이 최고입니다. 그 래서, 앞에서 소개한 신비평가들도 인간 정신을 과 으로 나누고, 이들을 모두 포괄한 를 최고의 작품으로 꼽았습니다. 그런데, 신비평가들의 분류에는 무의식과 기호적 상징이 빠져 있습니다. 무의식은 부도덕하고, 기호적 상징은 문학 작품에서 쓸 수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문학사 속에서 실제로 채택된 초점이므로, 관념형을 C, 물질형을 P, 무의식형을 U, 기호적 상징형을 S로 표현하고 이들을 포함하여 분류할 경우, 신비평에서 설정한 초점의 유형은 관념(C)와 즉물(P) 그리고 복합형인 형이상시(CP) 3개에 불과하지만, 다음과 같이 15개로 늘어납니다. ○기본형 : 관념시(C), 즉물시(P), 무의식의 시(U) 기호적 상징의 시(S) ○1차 결합형 : CP(형이상시), CU, CS, PU, PS, US ○2차 결합형 : CPU, CPS, CUS, PUS ○3차 결합형 : CPUS 이들을 다시 화제의 지향성과 결합시키면 기본형만도 16가지로 늘어납니다. 그리고 초점은 라고 해도 모두 균등하게 배분될 수 없으므로 주된 것을 대문자로 부차적인 것을 소문자로 표시하면 서 , , , , , , , , 처럼 연속 상태를 이뤄 하나의 구(球)처럼 무수한 유형을 설정할 수 있습니다. 같은 시인이 같은 내용의 화제를 택해도 매번 다른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자아, 그럼 복합 초점이 독자의 전인적 인식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것을 다음 작품을 살펴보면서 확인해볼까요? 이번 호에는 바다를 배경으로 삼은 작품들을 많이 골랐으니, 비교하기 좋게 역시 바 다를 배경으로 삼은 작품을 소개해보겠습니다. ①늦가을 햇살이 스적스적 떨어지는 바닷가 언덕 지난 여름 붉게 타던 칸나가 대궁 채 무너져 내린다. 나는 완벽한 그 추락의 자세에서 불같이 날카로웠던 네 입술을 떠올리려 애쓴다만, 나른한 미열과 슬픔에 떨며 너를 산이나 이별이라고 부르려 애쓴다만, 오, 칸나여. 늦가을 바다로 대궁 채 썩어 떨어지는 칸나여!이제 바다는 바다, 산을 산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구나.
②캉캉 춤을 추던 파도는 …… 그날 그 찻집 그 의자 …… 조랑말 떼처럼 갈기를 휘날리며 …… 다시 그 음악 소리가 …… 물이랑을 박차고 내달리며 …… 부우 부우 부우 …… 푸른 갈기에 실려 올라 가던 수평선은 ……섹스폰 낮은 가락이 불안하게 꺾일 때마다 …… 떨어지는데 …… 구두 앞부리로 마루바닥을 탁탁 구르 고…….
③이제 바다를 바다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차가운 바다로 천천히 추락하는 기억의 칸나여! 난 네 희고 긴 손가락 끝을 잡고 어두운 층계를 다시 내려가려 한다만, 그 층계 아래 타오르던 불빛이 붉었던가 노랬던가 희미한 기억의 언저리를 맴돌 뿐, 언듯언듯 기어들던 빗소리가 네 겨드랑이 밑에서 새소리처럼 부서 지던 것밖엔 기억할 수 없어 자꾸 발을 헛디딘다.
④칸나여, 시들은 햇살 속 반짝이며 떨어지는 기억의 칸나여. 완벽한 네 추락의 자세가 너무 슬퍼 나는 수평선을 타고 하늘로 오른다. -필자, [다시 칸나가 핀 언덕에 와서] 전문 좀 긴가요? 여러 초점을 포괄하다보면 길어질 수밖에 없거든요. 이 작품의 첫머리는 '특정한 순간'에 '특정한 모습'의 칸나꽃과 그에 대한 정서를 담고 있습니다. '바닷가 언덕'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냥 바닷가 언덕이 아니라 '늦가을 언덕'이고, 그것도 햇살이 생기를 잃고 '스적스적' 떨어지는 언덕입니다. 그리고, 꽃잎도 그냥 지는 게 아니라 '대궁 채 썩어'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상의 모습을 그리고, 의미와 정서를 부여해나가면서 점점 감정을 고조시키다가 ②로 접어들면 사랑하던 여인과 만났던 추억에 사로잡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③으로 접어들면 무의식적 환 상에 빠져들고, ④에서는 차츰 정신을 가듬으면서 의식의 상태로 되돌아오려고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작품에는 기호적 상징만 빠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복합 초점을 취하면 정지용의 [바다·2]에서 제거되었던 의미와 정서, 조향의 [EPISODE]에서 제거되었던 사실감을 부여하기가 용이해집니다. 제 작품이라서 계속 설명을 하자니 쑥스럽네요. 그만 설명하고, 마지막 질문을 한 다음 이번 호는 마칠까 합니다. 쏩니다, 받으세요. ▣시의 화제는 어느 방향으로 이동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에 대한 대답하자면 고대에서부터 현대까지 시문학사(詩文學史)를 면밀하게 살펴봐야 하는데, 학자가 아닌 우리에게 너무 복잡한 질문을 하는 게 아니냐구요? 그래도 생각해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문학사의 방향을 가늠해보지 않으면 언제나 뒷북만 치게 되니까요. 제 생각으로는 지향성은 의 순으로 변천해 온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시의 기원을 신이나 전쟁에 출전하는 용사들을 위 해 쓰여졌다는 히른(Y. Hirn)과 그로세(E. Grosse) 같은 사람들의 사회학적 기원설(起源說)을 미뤄봐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생존 자체가 어려운 시대에는 자기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누군가에게 바치기 위해 썼다는 이야기가 훨씬 타당하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에서 출발한 시가 을 거쳐 으로 바뀐 것은 어느 정도 경제와 문화가 발달한 뒤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활에 여유가 생김에 따라 자기 정서를 표출하기 위한 화자 지향형이 탄생되었고, 객관적 정보가 팽창됨에 따라 화제 지향형이 탄생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초점의 이동 방향은 로 바뀌어 온 게 아닌가 합니니다. 그러니까 에서 출발하여 물질적 초점이 첨가되고, 그 다음 단계에서 관념을 배제한 가 출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시기에 과 이 출현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시의 효용성(效用性)과, '시란 시인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장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초점에 즉물성이 첨가되기 시작한 것은, 자기사상과 감정을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이며, 그 다음 단계에 순수한 즉물형이 등장한 것은 관념적 인식에 대한 반동으로써 시인의 판단을 보류하고 독자로 하여금 제시된 풍경을 통하여 생각해 보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무의식형이나 기호적 상징형의 출현도 의식 세계만을 다루는 것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의식형이 먼저 탄생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술이란 근본적으로 자아의 표현이며, 인간을 대상으로 삼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미래시에는 어떤 화제가 주류를 이룰까요? 그것은 아마 도 이제까지 문학이 점점 미시주의(微視主義) 쪽으로 흘러왔음을 염두에 둘 때, 다음 시대의 통합주의(統合主義)로 방향을 돌리고, 화제 역시 의 결합이 아닐까 추측됩니다. 현대시에 점점 산문성이 증가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움직임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 유형 역시 앞에서 말한 약점을 지니고 있으니, 그를 조심해야 할 겁니다.
4. 작품의 의미적 국면을 형성하는 데 참여하는 마지막 요소인 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실까요? 종래의 시에서는 이 문제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시란 시인의 사상과 감정의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화자(話者)의 행동과 발언만 주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대로 접어들면서 배경의 문제는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배경은 단지 작중 인물의 등장 무대 구실만 하는 게 아니라 존재(存在)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이고, 같은 존재도 언제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며, 시의 화제(話題)가 화자나 청자지향형에서 배경을 대상으로 삼는 화제지향형으로 바뀌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배경은 크게 과 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물리적 배경은 으로 이뤄집니다. 그리고, 상황적 배경은 물리적 배경에 인간의 문제인 역사, 문화, 사회 등이 추가됩니다.
이들은 흔히 줄여 전자는 그냥 , 후자는 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전자는 인적 요소들이 빠져 있기 때문에 정적(靜的)인 속성이 강합니다. 그리고 후자 는 인간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어 가변적인 속성이 강합니다. 또 서정론(抒情論)에서는 배경을, 서사론(敍事論)에서는 상황을 더 중시 합니다. 현재 시는 이 순간의 정서를 화제로 삼고, 서사는 사건의 진행 과정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배경은 다시 작품에 그려진 과 그 작품의 대상이 존재했던 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텍스트 속의 배경은 작중 인물의 등장 무대 노릇만 하는 과 인물의 성격을 부각시키고, 어떤 행동을 조장하거나 억제하는 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작품을 쓰려는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서정적 장르에서 중시하는 물리적 배경을 중심으로 슬슬 질문을 시작해 볼까요? 그럼, 질문 일발 장진합니다. 받으세요. 뿅! ▣당신은 과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하니 곰곰이 생각하고 대답하세요. 이들의 차이를 모르면 언제나 중성적 배경만 채택할 테니까요. 뭐라구요? 텍스트 속의 배경은 시적 대상이나 존재했던 실제배경을 모방적으로 그리는 게 아니냐구요? 에이, 땡입니다. 실제배경과 작품 속의 배경의 차이는 입체적인 현실을 문자로 기호화한 정도에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우선 실제배경은 이고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까요? 지금 제 책상 위에는 램프 옆에 책받침대가 있고, 그 위에 이 글 초고의 프린 트한 것들이 올려져 있고, 그 앞에는 스탬플러와 철침을 뽑는 도구, 다시 그 옆에는 라이터, 핸드폰, 재떨이, 지갑, 연필꽂이, 전화기, 화상 통신을 위한 PC 카메라와 마이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바람에 펄럭이는 연분홍 커텐과 바다가 보이는 유리창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 자리에 꼭 있어야 할 것들이 아닙니다. 그저 우연히 놓여져 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이 실제배경을 이루는 사물들은 우연히 그 자리에 놓여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글을 쓸 때는 이들 가운데 그 작품의 테마와 관계 있는 것들만 골라서 표현해야 합니다. 가령, '글쓰기의 어려움'을 주제로 삼아 글을 쓴다고 합시다. 이 경우, 핸드폰, 지갑, 화상 통신 기구들은 빠져야 합니다. 이들은 글 쓰기의 어려움에 별다른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텍스트 속의 배경은 그 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그러나, 필요 없는 것들도 글을 쓰는 사람이 동기를 부여 (motivation)하면서 인과관계를 맺어주면 달라집니다. 제 책상 위의 PC 카메라와 마이크는 지난 해부터 인터넷에 구축하고 있는 서울 프로그램팀과 업무를 연락하기 위해서이고, 탁상용 전화기가 있는데도 핸드폰을 함께 올려 놓은 것은 사방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기 위해서이고,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어야 할 지갑이 나와 있는 것은 방금 신문값을 받으러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문값을 주고 지갑을 책상 위에 펄썩 던지면서 원고 마감 날짜를 헤아려 보았다. 그때 컴퓨터 화면에서 뿅하며 화상 통신을 요청하는 신호음이 울렸다. 그리고 핸드폰과 탁상용 전화가 한꺼번에 울렸다. 아, 아. 이 원고를 언제 마치나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라고 인과관계를 맺어주면 불필요하게 보이던 것들도 모두 필요한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와 같이 텍스트 속의 시간과 공간은 작중 인물의 것으로서, 실제배경을 작품 속으로 옮겨올 때는 인물의 심리 상태에 따라 ···되어 나타납니다. 다음 작품만 해도 그렇 습니다. 술시(戌時)의 항구, 노인 한 분이 낚싯대를 접고 선술집 벽에 기대어 졸고 있다. 벽에 걸린 그림 속, 바람을 안은 프랑스 범선(帆船)이 한껏 부풀어오르고 등 푸른 참치 떼가 수면 위로 날아오르는데 그때마다 하이얀 비말(飛沫)이 갑판을 쌔리는데 술시의 항구,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 바다를 깔고 앉아 노인이 졸고 있다. - 강중훈, [술시의 선술집 간판] 전문 술시(戌時)는 밤 7시에서 9시 사이입니다. 이 시각 선술집 안에는 '프랑스 범선'을 그린 액자만 걸려있을 리가 없습니다. 노인이 앉아 있는 탁자와 의자도 있을 테고, 겨울철이라면 난로가 켜져 있을 테고, 그 위에는 물주전도 있을 테고, 주방에서는 부글부글 술안주가 끓고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액자 속 풍경만을 확대하여 묘사한 것은 액자 속의 바다는 고기가 풍부한 살아 있는 바다임에 비하여 노인의 바다는 어족 자원이 고갈된 바다고, 그로인해 인간의 삶마저 활기를 잃었음을 그리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액자 속의 바다는 이 작품의 테마를 드러내기 위해 확대(擴大) 된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기능적인 배경이 되려면, 작중 인물의 성격(character)을 드러내고, 그의 욕망을 실현하기에 적합하도록 조직되어야 합니다. 밤비가 내리네 어둠을 흔들며 조용히 내리네 그리움이 늘어선 언덕에 마른 수수잎 소리가 들리네 아련한 파도 소리 고향집 울타리에 철석이는데 낮닭 우는 소리도 가슴에 차오르네. -차한수(車漢洙), [손·47 : 고향] 전문 이 시는 꼭 비가 내리는 밤에 썼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어쩌면 환한 대낮이나 폭풍우 치는 밤에 썼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비가 내리는 밤에 썼었어도 다른 것을 그릴 수도 있습니다.하지만, 대낮으로 설정했다면 이만큼 절실한 작품이 되지 않았을것입니다. 조용히 내리는 비와 어둠은 누구나 생각에 젖어들게 만듭니다. 그런데, 대낮으로 설정하면 그런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폭풍우 치는 밤으로 설정하면 어색한 작품이 되었을 겁니다.그런 밤에는 누구나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기능적인 배경이 되려면 그 배경이 화자의 심리 상태를 은유해야 합니다. 다음 작품은 1930년대에 쓰여진 것으로서 그리 상큼한 맛은 없지만 풍경 전체가 작중 인물의 심리상태를 은유하고 있습니다. 일층(一層)위에있는이층(二層)위에있는삼층(三層)위에있는옥상정원 에올라서남쪽을보아도아무것도없고북쪽을보아도아무것도없고해서옥 상정원(屋上庭園)밑에있는삼층밑에있는이층밑에있는일층으로내려간 즉동(東)쪽에서솟아오른태양(太陽)이서(西)쪽으로떨어지고동쪽에서 솟아올라서쪽에떨어지고동쪽에서솟아올라하늘한복판에와있기때문에 시계(時計)를꺼내본즉서기는했으나시간(時間)은맞는것이지만시계는 나보담도젊지않으냐하는것보담은나는시계보다는늙지아니하였다고아 무리해도믿어지는것은필시그럴것임에틀림없는고로나는시계를내동댕 이처버리고말았다. - 이상(李箱), [운동(運動)] 전문 다른 사람이 이 작품을 썼다면 아마 '옥상 정원 올라서…'부터 쓰기 시작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1층에서부터 2층과 3층을 거쳐 옥상까지 올라가는 과정을 모두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내려오는 과정도 각층을 모두 거론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띄어쓰기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을 심리학적인 방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반복을 상동증(常同症)이 니 음송증(音誦症)이니 하고, 무엇인가 명확하게 말하기 어려울때 나타나는 병리 현상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변화가 없음을 드러내는 이 작품은 인생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새로울 것이 없다는 시인의 가치관 내지 작품의 테마를 은유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배경의 기능에 대해서는 이쯤 이야기하고, 다시 다른 질문을 해볼 까요? 자기 받을 준비 됐어? 사아알작 쏠께. 빵! ▣ 당신은 테마나 화자에 따라 어떤 배경을 선택하십니까? 그냥 별다른 생각이 없이 쓴다구요? 그러면 안 되지요.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텍스트 속에 등장하는 배경의 유형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텍스트 속의 배경은 크게 ···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을 추가할 수도 있습니다. 신화적 배경은 모든 사물이 살아 움직이는 배경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토끼와 다람쥐가 이야기하고, 꽃이 방긋방긋 웃는 것으로 그려진 세상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묘사는 시인이 수식(修飾)을 위해 그런 것이 아니라면 심리적인 배경에 포함시켜도 무방합니다. 그리고 사실적 배경은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세상을 말합니다. 또, 가정적 배경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어떤 조건이 실현되는 세상을 말하고, 심리적 배경은 어떤 특정한 순간에 마음 속에 드려진 세상을 말하고, 창조적 배경은 작가가 상상력을 발휘하여 만든 세상을 말합니다.
이들의 전체 구조는 어느 유형이든 모두 현실 세계를 바탕으로 삼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유형에 따라 배경소(背景素)의 모습이 달라질 뿐입니다. 그리고, 화자의 정서나 화제를 부각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은 모두 제거하거나 변형시킵니다. 아래 작품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 작품의 배경은 사실적 배경으로 분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릴 적의 추억을 환기시키기 위해 아득한 옛날에 물 속에 잠긴 '소나무'와 그에 걸렸던 '방패연'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물 속을 들여다보면 방패연 하나 늙은 소나무 가지에 걸려 있습니다 '아버지'하고 부르면 메아리 대신 솟아오르는 달 고향 하늘 물이 넘쳐 팔월 보름달이 잠긴다. - 이무원(李茂原), [수몰지구(水沒地區)]에서 이와 같은 사실적 배경을 채택하면 작중 상황을 쉽게 짐작할 수 있어 시적 리얼리티를 확보하는데 용이합니다. 하지만, 배경소들을 섬세하게 그리지 않으면, 중성적(中性的)이거나 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배경소들 을 '특정한 순간의 특정한 모습'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적 배경은 화자의 성이나 연령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우선 계절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과 은 여성적이 되, 전자는 순진·화려·화사한 정서를, 후자는 성숙·고뇌·우울 의 정서를 나타내는데 적합합니다. 그리고 과 은 남성적이되, 전자는 성장·성취·기쁨·정열을, 후자는 정지·좌절·절망·엄숙의 정서를 나타내는데 적합합니다. 또 연령과 관계지으면, 봄은 유년기에, 여름은 청·장년기에, 가을은 노년기에, 겨울은 죽음과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루주기를 ··으로 나누어 살필 경우, 빛의 시간에는 남성적 성격(animus), 어둠의 시간에는 여성적 성격(anima)과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이런 관계는 공간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공간의 유형을 , , 으로 나눌 경우, 열린 공간에서는 남성적 성격이 강화됩니다. 그리고 닫힌 공간에서는 여성적 성격이 강화되고, 경계의 공간에서는 여성화된 남성이나 남성화된 여성의 성격이 강화됩니다. 다음 이육사(李陸史)의 시만 해도 그렇습니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 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중략)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광야]에서 ⓑ내 골방의 커-텐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 [황혼]에서 ⓐ에서 시인이 전달하려는 것은 '천고의 뒤'에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에게 자기 노래를 '목놓아 부르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주 남성적인 테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과 을 택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반면에 ⓑ에서 전달하려는 것은 수인(囚人)의 외로움입니다. 하지만, 단순한 외로움이 아닙니다. 독립 운동을 하다가 갇힌 투사의 외로움입니다. 따라서 남성이긴 하되 여성성을 띄기 시작하는 여성화된 남성화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서서히 여성화되기 시작하는 황혼의 시간과 닫힌 공간을 선택한 것도 이들이 지닌 속성을 이용하여 화자의 외로움을 돋보이도록 하려는 계산에서입니다.
프라이(N. Frye)의 설명에 의하면, 이와 같이 공간과 시간의 유형에 따라 어느 한 쪽의 성이 강화되고, 정서가 달라지는 것은 자연 현상에 대한 은유적 해석이 조상 대대로부터 축적되어 온 결과라 고 합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밤이 되면 모든 행동을 중단하고 생각에 젖어들고, 넓은 곳으로 나가면 활동적이고, 좁은 곳에서는 행동을 작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으로 보이게 만든 결과라고 봅니다.
은 화자의 성이나 연령과는 특별한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대신 진리, 도, 윤리 같은 · 화제를 취한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그로 인해 화자의 발언이나 행동은 도덕적이고 이상적인 것을 지향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격정적인 순간에도 균형과 절제를 잃지 않습니다. 그것은 담화 속의 사건이 현실의 사건이 아니라 가상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자주 인용한 김소월의 [진달래꽃]의 경우만 해도 그렇습니다. 화자는 사랑하는 님이 떠날 때 꽃까지 뿌려드리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복권에 당첨된다면, 너에게 반을 줄께'하는 식 의 발언으로서, 거의 믿을 게 못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어색하지 않게 보이는 것은 현실의 이별이 아니라 가상의 이별이라서 그렇게 말한 것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가정적 배경을 채택하면 배경소들이 추상적으로 그려진 다는 게 약점입니다. 그것은 화자의 발언에만 초점을 맞추고, 배경을 그리는 데 소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관념시가 되지 않도록 배경의 모습을 구체화하는 데 힘을 써야 합니다. 은 어느 순간 자기 마음의 창에 비친 배경을 그대로 그린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마음의 창에 비친 풍경을 그리기 때문에 앞의 두 유형과 달리 현실의 세계와 아주 다른 모습을 띄게 됩니다. 초사흘 달빛이 가늘게 내리는 저녁…
희디흰 그리움 한 올 한 올 풀어 비뚤어진 내 눈썹 위에 살짝 붙이고,
있는 듯 없는 듯한 그대 불러 옆에 눕히고,
왼 쪽 갈비뼈 하나 뽑아 내 갈비뼈를 만들려 하나니.
돌아 누우라,
그대여. 나를 향해 돌아 누우라. 푸르른 달빛이 비껴 내리는 그대 갈비뼈 사이 느릅나무 잎새 하나가 가뭇가뭇 진다. -현희, [달빛 소곡(小曲)] 전문 이 작품의 테마는 외로움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러므로, 여성화자를 택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닫힌 공간인 '방'과 어둠의 시간인 '밤'을 택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아무리 강한 사람도 밤에 혼자 잠자리에 들면 외롭기 때문에 그렇게 설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앞부분은 사실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줄 한 줄 띄어 쓰고, 몸을 공간화하면서 '갈비뼈 사이/느릅나무 잎새 하나가 가뭇가뭇 진다'라는 뒷부분은 심리적 배경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풍경은 무심코 떠오르는 무의식적 환상을 수정하지 않고 옮겨 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리적 배경은 화제가 시인을 자극하여 만들어낸 풍경을 바탕으로 삼기 때문에 이미 테마와 배경이 상호 결합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이런 배경은 기능적 배경이 됩니다. 그리고 아무리 진부한 화제도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게 됩니다. 현실적 자극이 마음의 창에 비춰지는 과정에서 일상의 탈을 벗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배경들은 의식의 안팎에 존재하는 풍경을 모방한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닙니다. 그러나, 창조적 배경은 언어에 남아 있는 사물성(事物性)을 이용하여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려는 배경을 말합니다. 예컨대, 김춘수(金春洙)의 후기시인 '무의미시(無意味詩)'나 이승훈(李昇薰)의 '비대상시(非對象詩)'가 이런 예에 속합니다. 벽(壁)이 걸어오고 있었다. 늙은 홰나무가 걸어오고 있었다. 한밤에 눈을 뜨고 보면 호주(濠洲) 선교사(宣敎師)네 집 회랑(回廊)의 벽에 걸린 청동 시계(靑銅時計)가 검고 긴 망또를 입고 걸어오고 있었다. 내 곁에는 바다가 잠을 자고 있었다. - [처용단장] 제1부 3 이 작품의 사물들은 앞의 작품과 달리 어떤 관념이나 심리 상태를 은유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앞 작품의 공간소들은 모두 '그리움'에 연결된 치환은유적(epiphoric) 구조를 취하는 반 면에, 이 작품의 '벽'·'홰나무'·'청동시계'·'바다' 등은 [T(?)=V[(t1)=v1/(t2)=v2/…/(tn)=vn] 식으로 나열된 병치은유적 (diaphoric) 구조로서, 전체의 의미가 형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이질적인 보조관념군(補助觀念群)을 인과관계를 배제한 채 병치한 것은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로 치환되어 의미가 형성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시인이 지시 하는 어떤 관념을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그 무엇을 창조하기 위해서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창조적 배경을 채택하면 모든 배경소들이 서로 결합하고 분열을 일으키면서 제2 제3의 풍경으로 바뀌어 참신감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수적인 독자들은 자기 경험과 크게 어긋난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느끼고, 무의미한 언어 유희로 받아들인다는 게 문제입니다. 자아, 그럼 또 다른 질문을 해볼까요? ▣당신은 선택한 배경이 부자연스러울 때 어떻게 조절하십니까?
무슨 소리냐구요? 좀 더 구체적으로 질문하라구요? 그럼 다시 하지요. 어떤 남자가 대낮 큰길에서 울고 있다고 합시다. 그리고 배경을 그대로 채택하고 싶을 때 어떻게 하느냐구요? 굳이 그러고 싶다면 그대로 쓰는 방법밖에 더 있느냐구요? 그럼 다 큰 어른이 질질짜는 게 부자연스럽게 보일텐데요. 이 문제는 다음 작품을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따서 먹으면 자는 듯이 죽는다는 붉은 꽃밭 사이 길이 있어 핫슈 먹은 듯 취해 나자빠진 능구렝이같은 등어릿길로, 님은 다라나며 나를 부르고… 강한 향기로 흐르는 코피 두 손에 받으며 나는 쫓느니 밤처럼 고요한 끓는 대낮에 우리 둘이는 왼몸이 달어… - 서정주, [대낮]에서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대낮입니다. 그런데도 밤이나 일어날 일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것도 방안이 아니라 바깥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좀 찐하긴 해도 별로 이상하게 보이지도 않지요? 이와 같이 화자의 행위와 배경의 성격이 어긋날 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장치가 뭐냐는 겁니다. 잘 모르시겠다구요? 그럼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작품에는 몇 가지 장치가 설정되어 있습니다. 우선 그런 욕망이 어느 정도 타당하게 보이도록 만들기 위해 '밤처럼'이란 보조관념을 동원하 여 어둠의 이미지를 첨가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낮이면서도 밤으로 만든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 '고요한' 상태로 묘사한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깥으로 설정했지만 여러 사람들에게 노출되기 쉬운 전면(前面)이 아니라 꽃으로 가려진 '사이 길'로 점을 잡은 들 수 있습니다. 밤이라도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이라면 풍기문란죄(風紀紊亂罪)로 끌려갈 테니까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자의 의식 상태가 정상적이 아닌 것으로 그린 점을 들 수 있습니다. '핫슈를 먹어 취해 나자빠진'이나 '능구렝이 같은 등어릿길'이 그런 증상을 드러내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의 구절은 마약을 먹은 것처럼 비정상적임을 의미하고, 뒤의 구절은 이미 제 정신이 아닌 걸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자아, 미당(未堂)의 비결을 요약해 봅시다. 화자의 의식 상태가 정상적인 아님을 보여주고 시간적 배경에는 일 경우 , 일 경우에는 첨가하고 공간적 배경은 일 경우 , 일 경우에는 의 색채를 가미하면 됩니다. 이렇게 엇갈리게 짜면 한결 더 짜릿하고도 조마조마한 작품이 됩니다. 아무리 어둠을 색칠하고, 꽃밭으로 주변의 시선을 막아도 여전히 바깥이고 대낮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장치를 설치해 둬도 독자들이 주목하지 않으면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독자들이 주목하도록 시선을 끌 장치를 함께 붙여줘야 합니다. 이 작품에서 '핫슈', '취해 나자빠진', '능구렝이 같은 등어릿길', '강한 향기로 흐르는 코피', '밤처럼 고요한 끓는 대낮' 등의 어휘간의 결합이나 음운조직 이 그런 장치 노릇을 합니다.
왜냐구요? '핫슈'는 아편입니다. 아편이라면 금방 그 의미를 알아들어 주목하지를 않지만, 핫슈는 우리말이 아니라서 그 의미를 생각해야 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 알았기 때문에 오랜 동안 기억하 게 됩니다. 그리고, 기억하는 동안 아편을 먹었다는 사실을 상기하여 화자의 행동을 용인하게 됩니다. 또 '취해 나자빠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자빠진' 비속어가 독자 의 시선을 끌어당깁니다. 그리고 '능구렁이같은 등어릿길'은 미끈거리는 유음(流音, r)과 음성모음의 연속, 남성 성기의 상징인 뱀이 결합하여 성적 장면을 연상을 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한 향기로 흐르는 코피'는 엉뚱하게 향기와 결합시켰기 때문에, '밤처럼 고요한 끓는 대낮'은 , 처럼 상반되거나 엉뚱한 것으로 연결시켰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막아 줍니다.하지만, 이와 같이 어휘론적 차원이나 음성학 차원의 변조는 의미론적 차원의 변조보다 훨씬 약합니다. 독자들은 무엇보다 의미로 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음 작품은 완전히 변조하고 있습니 다. 시계는 열 두 점, 열 세 점, 열 네 점을 치더라.
시린 벽에 못을 박고 엎드려 나는 이름을 부른다.
이름은 가혹하다.
바람에 휘날리는 집이여.
손가락들이 고통을 견디는 집에서,
한밤의 경련 속에서,
금이 가는 애정 속에서 이름 부른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계속된다.
계속되는 밤,
더욱 시린 밤은 참을 수는 없는 강가에서
배를 부르며 나는 일어나야 한다.
누우런 아침 해 몰려오는 집에서 나는 포복한다.
진득진득한 목소리로 이름 부른다. 펄럭이는 잿빛,
어긋나기만 하는 사랑, 경련하는 존재여,
너의 이름을 이제 내 가 펄럭이게 한다. - 이승훈(李昇薰), [이름 부른다] 전문 이 작품에는 독자의 시선을 끄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벽시계는 열두 번 이상 울리지 않게 만듭니다. 그런데, '열세 점, 열네 점'까지 울린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밤중에 못을 박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시린 벽에 못을 박고' 자 기 '이름'을 부르며 울고, '집'과 '이름'이 종잇장처럼 휘날리며, '밤'이 경련하면서 균열을 일으킨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배경소들을 왜곡시킨 것은 독자에게 화자가 처한 상황과 정서 상태가 정상적이 아님을 유의하며 읽어 달라고 요구하기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그냥 '시계가 끝없이 울린다'면 독자들 은 무심코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밤이 깊어감에 따라 불안이 가중된다는 사실을 은유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그를 유의하여 읽어 달라고 '열 두 점, 열 세 점, 열 네 점' 울린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자아, 하나만 더 질문하고 이번 호도 마감하기로 할까요? 준비하세요. 쏩니다. 뿅, 뿅, 뿅! ▣작품 속의 배경은 어떻게 변천해왔다고 생각하십니까?
대답하기 전에 한 가지 질문할 게 있다구요? 뭡니까? 왜 매호 끝날 때마다 , 하는 식의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느냐구요? 눈치채셨군요. 제가 이와 같이 변천의 문제를 되풀이하여 질문하는 것은 역사 속에서 살아남는 시인이 되려면, 문학사가 어떻게 진행되어왔는지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걸 몰 라도 작품만 잘 쓰면 되지 않느냐구요? 얼른 납득이 안 되신다면 대중 음악을 예로 들어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 청년 시절에는 이미 자(李美子)씨의 노래가 아주 인기 좋았습니다. 목소리도 좋고, 가락도 애절하고…. 그래서 이미자씨가 죽으면 그분의 성대(聲帶)를 연구하기 위해 일본에서 미리 예약해 두었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우리 집 공주님들은 차 속에서 그런테이프를 틀면 '아빠! 귀 버려.'하고 요즘 유행하는 테이프를 갈아 끼웁니다. 그건 이미자씨가 노래를 잘못 불러서가 아닙니다. 세 월이 흐름에 따라 청중(독자)들의 감수성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문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의 진행 방향을 모르면 옛날의 감각을 고집하게 됩니다. 자아, 이젠 시 속의 배경이 어떻게 변천해왔는가를 말씀해 보시지요? 그쯤은 잘 안다구요? 그래 뭡니까? 순이라구요? 어쩐 일이세요? 맞았습니다. 땡땡땡, 땡땡땡, 대한민국 만세, 땡땡땡…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역사란 모자라는 것을 보충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기 마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