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7만명 숨진 전쟁 끝낸 ‘평화 전도사’… 100번째 노벨평화상 아비 아머드
전채은 기자 , 파리=김윤종 특파원 2019-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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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에티오피아 총리 취임 석달만에 에리트레아와 20년 전쟁 종식
아프리카 최초 남녀 동수 내각 구성, 100만 난민에게도 포용정책 펼쳐
《‘동아프리카의 평화 전도사’ 아비 아머드 알리 에티오피아 총리(43·사진)가 201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1998년부터 20년간 벌어진 이웃나라 에리트레아와의 내전을 종식시킨 공로다. 100번째 평화상 수상자로 12월 10일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에서 상금 900만 크로네(약 11억 원)를 받는다. 그는 8월 말 한국을 방문해 문재인 대통령과 정상회담도 가졌다.》
지난해 7월 15일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아비 아머드 알리 에티오피아 총리(앞줄 오른쪽)가 아페웨르키 이사이아스 에리트레아 대통령과 손을 붙잡고 높이 들어 보이고 있다. 1998년부터 20년간 전쟁을 벌여온 두 나라는 당시 종전을 선언했고 두 달 후 평화협정도 체결했다. 아디스아바바=AP 뉴시스
아비 아머드 알리 에티오피아 총리(43)가 11일(현지 시간) 이웃 나라 에리트레아와의 20년 전쟁을 종식시킨 공로로 2019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뽑혔다. 지난해 이라크 인권운동가 나디아 무라드와 공동으로 평화상을 받은 콩고민주공화국 의사 드니 무퀘게에 이은 2년 연속 아프리카 출신 수상자다. 그는 올해 8월 한국을 찾았을 때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의 관계는 남북한 관계와 비슷하다. 두 나라가 화해했듯 남북한 관계도 개선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베리트 라이스안데르센 노벨위원회 위원장은 이날 “그는 화해, 연대, 사회 정의를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수상 이유를 밝혔다. 아비 총리도 “매우 행복하고 감격스럽다. 이 상은 아프리카와 에티오피아 전체에 주는 상”이라는 소감을 밝혔다.
에티오피아는 나이지리아에 이은 아프리카 2위 인구 대국(약 1억 명)이다. 지난해 4월 취임한 그는 자국 내에서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못지않은 인기를 끌고 있다. 그의 지지자들은 스스로를 ‘아비마니아(Aby+mania)’로 부른다. 전쟁 종식 외에도 아프리카 최초의 남녀 동수 내각을 출범시키고 종교·종족 분쟁이 심각한 에티오피아의 사회 통합에도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는 100만 명의 자국 내 난민에게도 포용적인 정책을 펼쳤고 수단 분쟁도 중재했다. 과거 정권의 정치범들을 대거 석방했고 고문 관행도 비판했다. CNN 등 서구 언론이 오래전부터 그를 유력한 평화상 후보로 꼽은 이유다. 올해 4월 유네스코 평화상 수상자로도 선정됐다.
에티오피아는 1952년 에리트레아를 병합했다. 42년의 분쟁 끝에 1993년 에리트레아가 독립했지만 갈등은 여전했다. 결국 1998년부터 20년간 전쟁이 벌어져 7만 명 이상이 숨졌다. 에티오피아는 또 다른 이웃 나라 소말리아와도 사이가 좋지 않다. 소말리아는 소말리족이 주로 살고 있는 오가덴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1977년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아비 총리는 취임 3개월 만인 지난해 7월 에리트레아와 종전을 선언했다. 같은 해 9월 평화협정도 체결했다. 소말리아의 침공 후 41년간 중단됐던 에티오피아항공의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 운항도 재개했다. 한 달 후 아프리카 최초로 20명의 정부부처 장관 중 10명을 여성으로 채운 양성평등 내각도 출범시켰다. 구색 맞추기가 아니라 국방, 평화(경찰 및 정보기관 총괄부서) 등 주요 부서 장관이 모두 여성이다. 올해 1월 난민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경제 활동도 허용했다. 서구 선진국의 강력한 반(反)난민 정책과 대조적이다.
그는 1976년 무슬림인 오로모족 아버지와 정교회 신자였다 무슬림으로 개종한 암하라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유엔 평화유지군, 사업가 등을 거쳐 정계에 입문했고 지난해 42세 나이로 최고 권좌에 올랐다.
/동아일보 ///전채은 기자 / 파리=김윤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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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대통령 만났던
노벨평화상 수상자
"韓 모델에 영감"
머니투데이
최경민 기자
2019.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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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the300]文, 지난 8월 에티오피아 총리와 정상회담
【서울=뉴시스】전신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이 8월26일 청와대 본관에서 한국을 공식방문 중인 아비 아흐메드 알리 에티오피아 총리와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2019.08.26.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에티오피아의 아비 아흐메드 총리는 지난 8월 한국을 방문해 문재인 대통령과 정상회담, 만찬을 가졌었다. 아비 총리는 포용적경제, 녹색경제를 에티오피아의 목표로 거론하며 한국이 '롤모델'이라고 추켜세웠었다.
문 대통령은 지난 8월26일 청와대에서 아비 총리와 청상회담을 갖고 "아프리카 내 평화 프로세스를 선도하는 열정과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며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평화를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에티오피아는 오랜 적대관계에 있던 에리트레아와 역사적인 평화협정을 체결했고, 남수단 분쟁 중재에도 앞장서고 있다"고 강조했다.
아비 총리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업적을 추켜세운 것이다.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위원회는 11일(현지시간) 아비 총리의 노벨평화상 수상 소식을 전하며 "수십년 간 지속됐던 에리트레아와의 유혈 영토 분쟁을 종식하는데 기여했다"고 평했었다.
문 대통령은 "에티오피아는 한국전쟁 당시 아프리카 나라 가운데 유일하게 지상군 각뉴(Kagnew) 부대를 파병하여 한국의 평화와 자유를 함께 지켜준 매우 고마운 나라"라며 "한국인들은 그 고마움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아프리카의 중심국가인 에티오피아와의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며 "혈맹관계이고 많은 가치를 공유하는 양국이 이번을 계기로 우호협력 관계를 한 차원 더 발전시키고 함께 성장해 나가는 동반자가 되기를 바란다"고 힘을 줬다.
아비 총리는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간 관계가 남북관계와 흡사한 면이 많이 보이고 있다"며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간 관계가 개선이 됐던 것과 같은 그런 성과가, 남북관계 간에 목도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특히 "에티오피아에서는 한국과의 관계를 한 단계 더 격상을 시켜서 전략적인 파트너로 발전하기를 간절히 희망을 하고 있다"며 "에티오피아와 한국과의 양자관계 뿐만 아니라 한국과 아프리카의 모든 국가들과의 관계가 한층 더 증대되기를 희망한다. 이런 과정에서 제가 에티오피아의 총리로서 한국과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대사 역할을 하고자 희망한다"고 밝혔다.
아비 총리는 "에티오피아와 한국은 역사적인 유대관계를 공유한다. 한국의 발전 모델에 많은 영감을 받고 있다"며 "에티오피아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대륙 전체 국가들이 향후 몇십년 내로 많은 경제 발전을 구가할 수 있도록 한국의 발자취를 따라 가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만찬에서는 "과거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 그리고 에티오피아의 형제자매들이 한국인들을 위해서 국왕께서 파병을 했다"며 "이러한 양국 간의 오랜 우정이라고 하는 것은 공통의 가치와 평화와 화합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에티오피아는 한국이 그동안에 이룬 놀라운 발전상과 한국의 모범사례를 뒤따르고자 노력하고 있다"며 "에티오피아는 현재 녹색, 그리고 녹색경제를 구축하기 위해서, 그리고 저력 있는 경제건설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고, 또 이를 향해서 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비 총리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 대한민국으로부터도 에티오피아가 배울 점이 상당히 많다고 생각한다"며 "왜냐하면 한국의 국민들은 자연보호를 위해서 상당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울러 "에티오피아는 포용적인 경제 구축을 위해서 노력을 하고 있다"며 "현재 수백만의 고용창출이 이뤄지도록 노력을 하고 있고, 이런 차원에서 많은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비즈니스 환경 조성을 위해서도 노력을 하고 있다. 전세계 비즈니스가 에티오피아에 진출했을 때 우호적인 환경을 맞이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비 총리는 "과거 우리 양국 간의 혈맹관계가 혹시나 우연에 의해서 탄생을 했다면 앞으로 에티오피아와 한국 양국이 굉장히 강한 의도를 가지고 의도적으로 관계를 구축하자"며 "양국, 그리고 양국 국민 상호 간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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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의 기적'으로
불린 남자,
100번째 노벨평화상
[중앙일보] 2019.10.11
기자
김성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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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노벨평화상을 탄 아비 아머드 에티오피아 총리 [AFP=연합뉴스]
‘아비 아머드는 우리에게 기적 같은 존재다.’
독재 중단, 망명 반체제 인사 귀국 허용
수감된 야당 인사 석방…자유주의 개혁
평화상은 에리트레아와 전쟁 종식 인정
올해 경쟁률 300대 1…상금 10억 여원
민족간 폭력 갈등 해결은 숙제로 남아
영국 일간 가디언은 지난해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서 특별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소개했다. 아비 아머드 알리(43) 에티오피아 총리가 2018년 4월 집권한 이후 독재와 국가가 자행하는 폭력이 사라지면서 민주주의와 비슷한 양상이 자리를 잡고 있다면서다. 수년 동안 반정부 시위로 몸살을 앓던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지역에서 본보기로 꼽히는 나라가 됐다.
아비 총리는 에티오피아에 자유주의 개혁의 바람을 몰고 왔다. 극도로 통제되던 국가를 뒤흔들었다. 야당 운동가 수천 명을 감옥에서 풀어줬다. 추방한 반체제 인사들이 에티오피아로 돌아올 수 있도록 허용하기도 했다.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는 수많은 군중이 반체제 인사들의 귀향을 반겼다. 과거 정치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하기 두려워하던 주민들은 이제 자유롭게 발언하고, 오랫동안 금지돼 있던 현수막 등도 시내에 나부낀다고 BBC 등이 전했다.
지난해 6월 아비 아머드 총리를 지지하는 집회가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 아바바에서 열리고 있다. [AP=연합뉴스]
하지만 그의 이런 개혁은 에티오피아 민족 갈등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국가의 강력한 통제가 사라지자 민족 간 폭력 충돌이 빚어져 250만 명이 피난을 떠나는 일이 벌어졌다. 소셜미디어에 인종 혐오 발언이 난무하고, 무법 행위도 빈발하고 있다. 아비 총리를 반기는 주민들이 그를 ‘기적'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그가 국내적으로 안고 있는 숙제다.
아비 총리가 100번째 노벨평화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11일(현지시간) 아비 총리를 2019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아비 총리는 에티오피아의 독재주의를 허문 당사자이지만 노벨위원회는 특히 그가 에티오피아와 오랫동안 대립해온 이웃 에리트레아와 화해한 공로를 높게 평가했다.
노르웨에 노벨위원회가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발표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노벨위원회는 “평화와 국제 협력을 위한 노력, 특히 이웃 에리트레아와의 국경분쟁 해소를 위해 결단력 있는 이니셔티브를 시행해 노벨평화상을 주기로 했다”고 밝혔다.
에리트레아는 1952년 에티오피아에 합병됐다가 30년간 투쟁을 하다 1993년 독립했다. 이후 1998∼2000년 국경을 둘러싸고 전쟁이 발발해 양측에서 7만명 이상이 숨졌다. 지난해 4월 취임한 아비 총리가 에리트레아와 화해를 추진한 데 힘입어 양국은 지난해 7월 종전을 선언했다. 20년간의 군사적 대립 상태를 끝낸 것이다.
에티오피아 총리실은 수상 소식에 성명을 내고 “국가적 자랑"이라며 “모든 에티오피아인의 승리이자 에티오피아를 번성하는 국가로 만들려는 우리의 의지를 더 강하게 하라는 요구"라고 했다.
에리트레아 국기(왼쪽)와 에티오피아 국기가 나란히 들려 있다. [AFP=연합뉴스]
노벨위원회는 에리트레아의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대통령의 역할도 컸다고 인정했다. 노벨위원회는 “평화는 한쪽 당사자의 행동만으로 일어설 수 없다. 아페웨르키 대통령은 아비 총리가 내민 손을 잡고 양국 평화 프로세스가 공식화하는 것을 도왔다"고 소개했다. 노벨위원회는 그러면서 평화협정이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전 국민에게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길 희망한다고 했다.
노벨위원회는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고 동아프리카에서 최대 경제국인 에티오피아가 평화롭고 안정될 경우 해당 지역 국가와 민족들이 우의를 다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아비 총리는 지난 8월 문재인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한국을 공식 방문했었다. 북한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있는 아비 총리는 “하나의 한국, 남북의 통일을 기원한다"고 말했다.
노르웨이 노벨상위원회 의장이 100번째 평화상 수상자인 아비 아머드 총리의 사진을 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노벨 평화상은 지난해까지 99차례 수여됐기 때문에 아비 총리가 100번째 수상자다. 그동안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2009년 ‘국제 외교와 국민 간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이유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2002년), 아동 교육 운동가 말랄라 유사프자이, 유럽연합,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 김대중 전 대통령 등이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평화상 시상식은 오는 12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다. 900만 스웨덴 크로나(약 10억9000만원)의 상금과 노벨상 메달, 증서를 받는다. 올해 노벨평화상 후보에는 개인 223명과 단체 78개가 올랐다. 301대 1의 경쟁을 뚫은 셈이다.
누가 올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될지 관심을 모았지만, 노벨위원회의 규칙상 후보자 명단은 50년간 공개되지 않는다. 기후변화 활동가인 16세 스웨덴 소녀 그레타 툰베리가 유력한 후보로 꼽혔다. 그가 수상했다면 역대 최연소 수상자였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출처: 중앙일보] '에티오피아의 기적'으로 불린 남자, 100번째 노벨평화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에티오피아
[ Ethiopia, Federal Democratic Republic of Ethiop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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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에 있는 오각형 솔로몬의 별은 국민들의 단결을 상징한다.
이칭별칭
에티오피아연방민주공화국, Federal Democratic Republic of Ethiopia
유형
지명/국가
시대
현대
성격
국가
위치
아프리카 동북부
인구
9946만 5819명(2015년 현재)
면적
110만 4300㎢
수도
아디스 아바바
언어
암하릭어, 영어, 이태리어
종교
에티오피아 정교, 이슬람교, 토착종교
정치·의회형태
이원집정제, 공화제, 양원제
목차
정의
개관
약사
한국과의 관계
정의
아프리카 동북부 홍해에 면한 공화국.
개관
정식 명칭은 에티오피아연방민주공화국(Federal Democratic Republic of Ethiopia)이다. 면적은 110만 4300㎢, 인구는 9946만 5819명(2015년 현재)이며, 수도는 아디스 아바바(Addis Ababa)이다.
주민은 오모로족이 35%, 암하라족이 27%, 티크레이족이 6% 등 80여개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언어는 암하릭어와 영어가 사용되는데, 암하라는 암하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란 의미이다. 종교는 에티오피아 정교 45%, 이슬람교 35%, 토착종교 15%이다.
국토의 절반이 고원이며, 저지대는 아주 덥고 비도 거의 내리지 않아 사막을 이룬다. 주요 산업은 커피 생산이었으나 국제수지 악화로 국민소득은 적은 편이다. 천연자원은 풍부하지 않으나 금·은·동 등 광물은 비교적 많이 산출된다.
2015년도 국민총생산은 576억 달러이고, 1인당 국민소득은 619달러이다.
이 나라는 이원집정제의 공화제로, 총리가 실권을 가지며, 의회는 양원제로, 임기 각각 5년의 상원(108석)과 하원(547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정당으로는 에티오피아인민혁명민주전선(EPRDF), 민주연합당(UEDP), 오로모 해방전선(OLF) 등이 있다.
약사
이 나라는 기원전 1000년경에 이미 고대 에티오피아왕국으로 성립하여 16세기까지 중세형 국가를 유지하였으나 1889년 이탈리아의 보호령이 되었다. 1896년 10월 독립하였으나 1935년 무솔리니에 의해 다시 정복당하기도 하였고, 1944년 완전 독립하였다.
1930년 이래 셀라시에(Selassie, H.) 황제 치하에서 비교적 안정되었으나, 1974년 9월 군부쿠데타에 의해 사회주의국가가 되었으며, 친소좌경노선을 대외정책으로 삼아왔다.
그 후 거듭된 지역간 분쟁과 내란, 기근 등으로 인해 수십만 명의 에티오피아인들이 인근 국가로 피난하는 등 혼란을 겪고 있다. 1991년 반정부세력에 의해 군사정권이 붕괴되었다.
1994년 12월 신헌법을 제정하였다.
대외정책은 중도중립의 비동맹중립외교를 펴고 있으며, 1945년유엔에, 1961년비동맹회의에 가입하여 인근의 국가와 선린평화정책을 추구하고 있다.
한국과의 관계
우리나라와는 1963년 12월 23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1965년 3월 상주공관을 개설하였다. 이 나라는 6·25전쟁 당시 보병 1개 대대를 파병한 바 있으며, 셀라시에 황제가 방한한 바도 있으나 사회주의정권이 들어선 뒤로는 한국과 정치적으로 소원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1969년 5월 의료기술협력 협정을 체결한 이래 1992년 11월에 경제·기술협력 협정, 1998년 10월에 문화 협정, 2003년 4월에 무역 협정 등을 체결하여 친선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에티오피아에 대한 우리나라의 수출액은 2015년 현재 1억 6883만 달러로 백신, 화학제품 등이 주종목이고, 수입액은 5543만 달러로 커피, 참깨 등이 주종목이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과 경남기업, 명성병원 등이 진출해 있으며, 약 460명의 한국인이 체류하고 있다.
한편, 북한과는 1975년 6월 5일 외교관계를 수립한 뒤 상호 상주공관을 개설하고 있으나, 2002년 4월 상주공관을 폐쇄하였다. 1975년 11월에 항공봉사 협정, 1985년 12월에 경제 및 기술협조협정, 2000년 5월에 문화교류 협정을 체결하고, 2008년 4월에는 보건협조에 관한 합의서를 교환한 바 있다.
참고문헌
『세계각국편람』(외교통상부, 2008)
『한국의 창』(동아일보사, 2008)
『해외동포현황』(외교통상부, 2007)
『세계무역통계』(한국무역협회, 2007)
『주요수출입통계』(관세청, 2007)
『제3세계론』(신정현, 일신사, 1986)
『아프리카 아프리카』(최평규 편, 국풍, 1983)
『아프리카정치론』(하경근, 일조각,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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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에티오피아 [Ethiopia, Federal Democratic Republic of Ethiopia]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두산백과
에티오피아
[ Ethiopia음성듣기 ]
요약 아프리카 대륙 북동부에 있는 나라로, 1935년 이탈리아가 침공하였으나 1944년 영-에티오피아 협정으로 완전 해방되었다. 1987년 9월 12일 에티오피아 인민민주주의공화국을 수립하였고, 1995년 총선을 통해 에티오피아 연방민주공화국이 출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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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국기
위치
동아프리카, 소말리아의 서쪽
경위도
동경 38° 00', 북위 8° 00'
면적(㎢)
1104300
해안선(km)
0
시간대
EAT (UTC+3)
수도
아디스아바바
종족구성
오모로족(34.5%), 암하라족(26.9%), 소말리족(6.2%), 티그러웨이족(6.1%), 시다모족(4%), 구라기족(2.5%) 등
공용어
암하라어, 영어, 아랍어
종교
에티오피아정교(43.5%), 이슬람교(33.9%), 개신교(18.6%)
건국일
1941년
국가원수/국무총리
물라투 테쇼메(Mulatu Teshome) 대통령(2013.10 취임)
국제전화
+251
정체
공화제
통화
비르(Br)
인터넷도메인
.et
ISO 3166-1
231
ISO 3166-1 Alpha-3
ETH
인구(명)
91,195,675(2012년)
평균수명(세)
49.43(2008년)
1인당 명목 GDP($)
471(2012년)
수출규모(억$)
29.57(2011년)
수입규모(억$)
96.94(2011년)
인구밀도(명/㎢)
79(2012년)
1인당 구매력평가기준 GDP(PPP)($)
1,159(2012년)
소리듣기
소리듣기에티오피아(국가)아프리카 대륙 북동부에 있는 나라. 정식명칭은 에티오피아 인민 민주공화국(People’s Democratic Republic of Ethiopia)이다.
정식명칭은 에티오피아 연방민주공화국(Federal Democratic Republic of Ethiopia)이다. 북쪽으로 에리트레아, 동쪽으로 지부티·소말리아, 남쪽으로 케냐, 서쪽으로 수단에 접한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와 달리 솔로몬왕 시대부터 시작되는 약 3000년의 긴 역사를 가졌으며, 1936~1941년을 빼고 식민지배를 받은 적이 없다. 국명은 ' '혼혈인' 또는 ‘태양에 그을린 얼굴의 땅’이라는 뜻으로, 아랍어(語)로 '아비시니아'라고도 부른다. 행정구역은 9개주(kilil)와 2개 자치시(astedader)로 되어 있다.
주요도시
디레다와, 아디스아바바, 하레르
에티오피아 위치
에티오피아
1000km
© NAVER Corp.
OpenStreetMap Natural Earth
[네이버 지식백과] 에티오피아 [Ethiopia]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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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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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일지
기타
아프리카 내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국경분쟁 위치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국경분쟁 지도
개요
1) 에리트레아 독립 투쟁
에리트레아는 에티오피아의 북부지역에 위치하여 1889년 이탈리아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2차 대전을 전후한 1941년부터 1952년까지 영국이 일시적으로 통치하였고, 1952년에는 미국 정부의 압력과 UN의 제안에 의해 에티오피아와 연방을 형성하여 자치주가 되었다. 그러나 1961년, 에티오피아를 강권 통치해온 독재자 셀라시에(Haile Selassie) 황제가 무력으로 에리트레아를 강제 합병하였다.
합병 직후부터 에리트레아 주민들은 분리 독립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반정부세력인 에리트레아인민해방전선(Eritrean People's Liberation Front, EPLF)을 결성하고, 이웃 아랍국가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30년간에 걸친 무력투쟁을 개시하였다. 1974년 셀라시에 황제를 폐위시키고 정권을 획득한 에티오피아의 멩기스투(Mengistu) 사회주의 정권은 소련의 군사지원을 이용해 EPLF에 대한 탄압을 일층 강화하였다. 한편 1980년대에 들어와 정부군의 EPLF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은 대규모의 가뭄과 기아 문제의 발생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EPLF와 에티오피아군과의 전쟁은 1990년을 정점으로 격화되었으며, EPLF는 대표적 반정부단체인 에티오피아인민혁명민주전선(Ethiopian People's Revolutionary Democratic Front, EPRDF) 및 다른 지역 반군들과 연합하여 멩기스투 정권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였다. EPLF는 반(反)멩기스투 연합전선에 참여하면서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에리트레아의 독립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1991년 냉전 종식으로 독립 투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멩기스투 정권의 후견인 역할을 담당해온 소련이 에티오피아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였고, 이에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한 멩기스투 정권이 반정부세력의 공격에 의해 1991년 5월 붕괴되면서, 에리트레아의 독립문제가 해결 국면을 맞이하였다.
1991년 5월, 멩기스투 정권을 붕괴시키고 집권한 반정부세력인 EPRDF의 제나위(Zenawi) 의장을 원수로 한 신(新) 정권이 등장함에 따라 1962년 이후 약 30년을 끌어온 에리트레아 독립투쟁이 종료되었다. 에리트레아는 1993년 4월 에티오피아로부터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99.8%의 찬성을 얻어 동년 5월 24일 정식으로 독립을 선언하였고, 아프리카에서 53번째의 독립국이 되었다.
에리트레아의 초대 대통령으로는 EPLF의 리더로서 아프리카 최고의 지성으로 불렸던 이사이아스 아프웨르키(Isaias Afwerki)가 당선되었다. 에리트레아의 독립은 에티오피아가 제나위 신(新) 정권을 확립함에 있어 EPLF가 EPRDF, 티그레 지역의 자치를 주장하는 티그레인인민해방전선(Tigrayan People's Liberation Front, TPLF), 오로모인민민주조직(Oromo Peoples' Democratic Organization, OPDO) 등이 중심이 되어 구정권의 타도에 참여한 것에 대한 합의사항으로서, 내전을 승리로 이끄는데 공헌한 대가로 얻어낸 것이었다. 티그레 및 오로모 분리주의자들은 제나위가 연방제 실시를 약속하자 에티오피아에 잔존하기로 합의하였다.
2)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 국경 분쟁
1993년 독립 이후 에리트레아는 혁명 동지로서의 유대를 강화하며 에티오피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다. 에리트레아의 독립으로 내륙국가가 된 에티오피아는 무역의 대부분은 에리트레아의 항구인 아사브(Assab)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양국 간의 관계는 경제문제를 둘러싸고 점차 긴장이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오랫동안 억압당해온 에리트레아 민족주의가 독립을 기점으로 날개를 단 듯 급격히 발현됨에 따라, 에티오피아와 에티트리아의 외교관계는 더욱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에티오피아와의 경제마찰을 통해 갈등이 고조된 가운데, 1998년 5월 에리트레아는 독립한지 7년 만에 독립 이후부터 소유권 분쟁이 있었던 국경 지역을 무력 점령하였다. 분쟁의 발단이 된 양국 간 경제마찰은 에리트레아가 1997년 11월 화폐개혁을 통해 '경제주권'을 선언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에리트레아가 독자 화폐를 채택하자 이에 반발한 에티오피아가 무역결제를 '달러'로 할 것을 요구해 에티오피아의 경제에 50% 이상을 의존하고 있는 에리트레아의 경제에 타격을 준 것이다. 이때, 에티오피아가 에리트레아 농부를 티그레이 지역(Tigray Region)의 바드메(Badme) 마을에서 추방하고 일부 에리트레아 관료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에리트레아는 1998년 5월 12일 에티오피아의 북동부 티그레주에 위치한 4백㎢의 이르가(Yirga) 삼각지를 무력 점령함으로써 본격적인 분쟁이 개시되었다.
이에 반발한 에티오피아는 1998년 6월 5일과 6일 미그 23 전투기를 동원하여 에리트레아의 수도인 아스마라(Asmara)의 국제공항과 공군 기지, 아사브항 등에 전격 공습을 강행했다. 에리트레아도 6월 5일 에티오피아 북부의 메켈레(Mekele) 공항을 폭격하는 등 사태가 악화되었다.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서방측은 양측이 잠정 휴전한 6월 6일 오후부터 13시간 동안 군용기와 프리깃함을 동원하여 자국민들을 인근 지부티로 소개(疏開)하였다. 6월 9일 새벽 국경지대에서 전투가 재개되었으며, 6월 14일 양국은 민간인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항공 폭격을 중단하자는 미국의 안을 받아들였고, 에리트레아는 미군과 UN군이 포함된 PKO 부대가 비무장지대를 관리할 수 있도록 요구하였다.
직접적인 전투는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으나, 7월에 양국은 보복전의 일환으로 자국 내 거주하는 상대방 국민들을 추방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에티오피아는 경제 악화와 빈곤을 핑계로 자국 내 거주하고 있던 약 50만 명의 에리트레아인들에 대한 추방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당시 에티오피아에 거주하던 에리트레아인들 대부분은 1952년부터 에티오피아 정부가 실시한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정착한 이들이었다. 이들의 일부는 에티오피아 국적을 보유하고 있고 일부는 영주권을 보유하는 등 분쟁 직전인 1998년 5월까지는 에티오피아 국민으로 취급받았으나, 에티오피아 정부는 자국의 빈곤을 핑계로 에리트레아인들의 출국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수천 명이 에티오피아를 떠났고, 수천 명은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또한 3만 명 이상의 에티오피아인들도 에리트레아의 항구에 억류되었다.
1999년 2월 말, 에티오피아는 전쟁의 승리를 선언했고, 에리트레아는 자국이 상당부분의 영토를 상실했음을 인정했다.1) 이 전쟁으로 두 국가의 피해는 상당했다. 에티오피아에서는 35만 명 정도의 피난민을 발생하였으며, 전쟁으로 인한 에티오피아의 경제적 피해는 무려 290억 달러에 이르렀다.2) 또한 양국 국민 약 1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3)
그러나 실제로 양국의 전투는 여전히 종결되지 않고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이후 UN, 아프리카 연합(당시 Organization for African Unity, OAU), 그리고 알제리 정부 등이 협력한 국제사회의 중재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성과는 쉽게 가시화되지 않았다.
결국 2000년 5월 25일, 에티오피아가 에리트레아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종전을 선언했다. 이어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는 알제리 정부의 중재 하에 2000년 12월 12일 평화 협정을 체결하였다. 국경선을 획정하고, 수감자들을 교환하며, 난민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보상 문제를 해결하는 내용 등이 포함되었다. 평화협정 준수와 국경선 획정을 위해 에리트레아-에티오피아 국경위원회(Eritrea-Ethiopia Boundary Commission, EEBC)가 설치되었으며, 임시안전지대(Temporary Security Zone, TSZ)를 설정하여 양국 간의 분쟁 재발을 방지하도록 유엔평화유지군(United Nations Mission in Ethiopia and Eritrea, UNMEE)이 파병되었다.
2002년 4월, EEBC에 의한 국경 획정이 이루어졌다. 결정에 따르면, 양쪽에게 각각 영토의 일부가 주어졌으나, 바드메 마을은 에리트레아에 귀속되었다. 이에 대하여 에티오피아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했고 이로 인한 양국의 외교적 분쟁은 2년이 넘게 지속되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는 국제사회의 압박으로 인해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2005년 12월,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레아 국경으로부터 철수할 것을 발표했으며, 이에 따라 유엔 역시 철수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양국 간의 대립은 다시 첨예해졌고, 에티오피아는 결정을 번복했다. 이후로 실질적 군사적 대립은 없었지만, EEBC가 정한 국경을 지키려는 에리트레아와 이를 부정하려는 에티오피아는 다시 전쟁의 고비를 여러 번 넘겨야 했다. 그리고 바드메 마을은 여전히 에티오피아의 실질적 지배로 에티오피아의 영토로 남아있다. 국제사회가 EEBC의 결정을 강제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에리트레아의 불만은 지속되었고, 에리트레아는 유엔 평화유지군을 강제로 추방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EEBC가 결정한 대로의 영토 분리는 2014년 현재까지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비록 국경 분쟁에 따른 물리적 충돌은 아니었으나, 2012년 3월 16일, 에티오피아군이 3개의 반란 그룹 기지를 공격한다는 명목으로 에리트레아 영토인 접경 지역 인근을 공격하는 일에 발생하여 또 다시 전운이 감돌기는 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가 이것이 에리트레아에 대한 공격이 아님을 분명히 했고, 이에 대해 에리트레아는 이는 국경 분쟁으로부터 주의를 분산시키려는 의도라며 이러한 농락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라고 받아쳤다. 결국 에리트레아가 물리력으로 대응하지 않아 전쟁은 재발되지 않았다.4)
이처럼 전쟁이 종결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양국은 국경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긴장과 대립을 지속하는 관계로 남아있다. 그러나 또한 많은 점이 달라지기도 했다. 에티오피아는 지난 10년간 경제적으로 매우 성장하고 정치적으로도 안정을 되찾았고, 에리트레아는 붕괴 직전의 국가로 여겨질 만큼 온갖 인도적 위기 속에 놓여있을 뿐 아니라 악명 높은 소말리아 출신 테러단체 알샤바브를 지원하고 있다. 따라서 에티오피아는 이제 국경문제에 따른 에리트레아와의 전쟁을 우려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국가 에리트레아의 붕괴, 그리고 이들이 지원하고 있는 알샤바브에 의한 피해를 우려하고 있는 상황이다.5)
분석
[의미 및 영향]
에리트레아의 독재자인 이사이아스 아페워르키(Isaias Afwerki)는 2010년 전 세계에서 가장 극악무도한 독재자 6위에 이름을 올렸다.6) 2014년 기준으로 21년째 에리트레아를 통치하고 있는 아페워르키 대통령은 에리트레아 해방을 주도한 인물로서 당시만 해도 ‘아프리카 최고의 지성’이라 불릴 정도로 존경 받았으나, 에티오피아와의 전쟁 이후 국가 안보를 명목으로 국민들의 자유를 심하게 탄압해왔다. 독립적 언론매체를 불허하고 선거를 금지시켰으며, 청소년들에게 무기한 군복무를 의무로 할 뿐 아니라 자국민보다 소말리아 반군을 보호하는 데 더 주력하는 등 독재자의 전형을 보여주었다.7)
이러한 아페워르키의 통치로 인해 가장 즉각적으로 나타난 징후는 지난 10년간 지속된 주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피난 및 이주다.8) 이는 기아와 가뭄으로 인한 경제난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로 앞서 언급한 무기한 군복무 제도 때문이다.9) 이 제도는 1995년에 시작되어 에티오피아와의 전쟁기간 중 연장되었는데, 이 때문에 에리트레아에서는 성별에 관계없이 15세가 되면 군대에 잡혀가기 전에 국가를 떠나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 되었다.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리트레아 정부는 어떠한 개혁적 조치도 시도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해외로 빠져나간 젊은 인력들이 본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내는 송금과 세금으로 나타나는 이익을 국가 재정에 이로운 것으로 여겨 이를 일정부분 묵고하는 실정이다.11)
더욱이 정부는 스스로 위험 부담을 하면서까지 현상을 변경할 이유가 없다. 그 많은 젊은이들이 가족을 두고 국가를 떠날 작정을 할 정도로 국가와 정부의 정책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은 물론 그들의 아버지 세대조차 국가와 맞서 싸워 국가 내 상황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오늘날 에리트레아의 단면이기 때문이다. 피난과 이주의 방법을 계속 택할지, 아니면 언젠가 상황이 국민들에게 훨씬 우호적인 때에 보다 급진적인 대안을 택하게 될지는 알 수 없으나, 아직까지 에리트레아 국민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고, 일상생활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바쁘다.
이 같은 젊은 인구의 대량 유출은 장기적으로 에리트레아의 모든 분야의 발전에 반드시 요구되는 인적 자원의 절대적 부족을 야기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에리트레아 국민들을 수용해야 하는 주변국에게 부담을 안겨주어 아프리카 뿐 아니라 유럽의 문제가 되고 있다. 이들이 외국에서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선진화된 공부를 하고 고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떠난 이들이라면, 이들의 출신 국가나 이들을 받는 국가에게나 긍정적일 수 있다.12) 그러나 이들은 그런 경우가 아니다. 특히 이들의 이동은 생존을 위해 불법적 수단과 거래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일례로 유럽 내 불법 체류 1위 국가인 이탈리아는 지중해를 건너 밀입국한 난민들 때문에 몸살을 겪고 있는데, 이들 중 가장 많은 수인 연평균 만 명 이상이 과거 이탈리아령이었다가 독립한 에리트레아로부터 오고 있다.13)
[추후 전망]
전쟁 이후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양국 정상은 한 차례의 대화도 갖지 않았다. 국경 분쟁이 지속되진 않았으나, 양국의 관계는 케냐와 소말리아의 관계처럼 적대적인 채로 남아있었고, 이는 아프리카를 유럽과 중동, 아시아로 잇는 아프리카 뿔 지역의 불안정에 기여함으로써 국제 무역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왔다.
그리고 2012년 8월, 에티오피아의 제나위 총리가 지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에티오피아가 구시대와 작별한 것인 동시에, 새 시대로 도약하는 기회를 얻게 된 셈이다. 제나위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된 하일레마리암 데살렌(Hailemariam Desalegn)은 에리트레아와의 대화를 원한다는 의사를 표명해오고 있다.14) 이는 에리트레아와 달리 전쟁 종결 이후 안정적 성장세를 유지한 에티오피아의 자신감 표출일 것이며, 역내 안정을 주도함으로써 자국의 국제적 입지를 높이려는 의도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에리트레아의 독립으로 인해 내륙국이 된 에티오피아는 홍해로의 원활한 진출과 이에 따른 대외무역 증대를 위해서라도 에리트레아의 관계 개선이 중요하다.
하지만 에티오피아 총리가 주장한 바에 따르면, 제나위 역시 줄곧 에리트레아와 대화를 원했지만, 에리트레아 정부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고 한다.15) 더욱이 이번 분쟁의 발단에서도 보았듯, 에리트레아는 독립성을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반면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레아를 독립국으로 인정은 하지만 자국의 영향력 하에 두려고 하는 상이점이 존재한다. 따라서 에리트레아가 설득되어 대화의 장에 나온다 할지라도, 양국이 이견 없이 진정한 합의를 이루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단, 아페워르키 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나면, 양국과의 관계는 달라질 수 있다는 긍정적 전망이 있다. 그리고 일부 전문가는 이것이 멀지 않았다는 예측을 내놓았다.16) 문제는 아페워르키가 어떻게 권좌에서 물러나는가 인데, 이와 관련해서는 쿠데타 혹은 반란 가능성이 언급되고 있다.17)젊은 층의 대량 피난 및 이주와 함께, 정보부 장관을 비롯한 대통령의 측근 인사들이 2012년과 2013년에 줄줄이 망명했다. 또 2013년에는 군 인사에 의한 쿠데타와 유사한 시도도 있었다.18)더불어 최근 몇 년 사이 아페워르키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박 강도가 높아졌다. 유엔은 알샤바브를 돕는 혐의로 에리트리아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였고, 엠네스티 인터내셔널 등 국제 비정부 조직들은 에리트리아의 정치범 수용소 운영 등의 인권 침해 행위에 대해 국제사회의 관심을 촉구해왔다.19)
이처럼 안팎으로 압박이 강해질 경우, 아페워르키는 개혁을 시도할 수도 있다. 그러나 20년이 넘게 이를 시도하지 않았음을 비추어볼 때, 그는 개혁에 따른 현상변경에 두려움을 크게 느낄 가능성이 높으며, 자신의 정권이 전복될 가능성을 심각하게 고려하지는 않을 것 같다. 따라서 에리트레아의 미래는 굉장히 비극적인 방향으로 불안정하게 향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에리트레아의 미래가 에리트레아-에티오피아 양국의 관계에도 핵심적인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일지
일자
주요내용
1889년
이탈리아의 식민지가 됨
1952년
영국이 통치개시 후, 미국정부 압력. UN 제안에 따라 에티오피아와 연방을 형성 자치주로 편입
1961년
에리트리아인민해방전선(EPLF) 결성, 무력투쟁 개시
1962년
에티오피아의 셀라시에(Selasie) 황제가 에리트리아를 강제 합병
1989년
EPLF, 반정부 연합인 에티오피아인민혁명민주전선(EPRDF) 참여
1991년
에티오피아의 좌파 멩기스투(Mengitsu) 정권 붕괴, 에리트리아 독립기반 마련
1993년 5월
에리트리아 독립
1997년 9월
에티오피아 제나위(Zenawi) 수상, 에리트리아 방문 관계 회복 협의, 결렬됨
1997년 11월
에리트리아 경제주권 선언, 에티오피아 달러화 결재 개시로 긴장 증대
1998년 5월 6일
에리트리아군, 이르가(Yirga) 삼각지를 점령
1998년 5월 12일
티그레(Tigre,Tigray)주 바드메(Badme) 지역 점령
1998년 6월 1일
에리트리아가 아쌈(Assam)항에 군대 진주. 에리트리아는 메켈레(Mekele) 북부 알리트나(Alitena)를 공격. 미국과 르완다는 중재 노력 계속(르완다의 투치족은 종족상 에티오피아와 관련). 동 분쟁에서 최대의 피해국은 분쟁 양 당사국과 우호관계에 있던 이스라엘이며, 이스라엘은 하니쉬(Hanish) 섬을 점령하려는 에리트리아를 지원해 옴
1998년 6월 2일
아이가(Aiga), 인달게다(Indalgeda), 알리트나(Alitena) 격전에서 100명 이상의 군인이 사망. 교황 바울 2세는 아프리카 지역에서 유일하게 기독교 신자가 지도자로 있는 양국에 대해 정전을 촉구
1998년 6월 3일
에티오피아는 남부지역 암베세트 겔레바(Ambesete Geleba)를 공격, 에리트리아는 아이가 재탈환에 실패하는 등 양군 간 격전 지속. 미국은 평화봉사단의 철수 개시, 에리트리아의 철군과 국경협상 재개를 제시한 르완다의 평화안을 지지. 에리트리아는 이를 거부하면서 자국영토 고수를 주장,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의 영유권 주장을 거부
1998년 6월 4일
에티오피아는 미-르완다 평화안 수락. 국경논쟁에 군사력 사용은 현대사회에서 수용할 수 없다는 EU의 입장과 대조적으로 OAU는 양국에 평화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요구
1998년 6월 5일~6일
에티오피아군 에리트리아 수도(아스마라-Asmara)와 공항, 항만에 대해 수회에 걸쳐 전격 보복 공습(5일 에리트리아 공격으로 에티오피아군 5명 사망)
1998년 6월 10일
에티오피아 정부는 에리트리아가 국경부근에서 공습을 개시하였다고 발표. 에리트리아는 이집트에 중재를 요청. 6월 10일 아프리카 통일기구(OAU) 수뇌회담에서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양국에 대표단 파견할 것을 결정. 전쟁 확산을 우려하는 지부티는 국경지역에 전군을 배치
1998년 6월 14일
에리트리아는 비무장 국경지대를 통제하기 위해 미군과 UN군을 포함한 평화유지군의 파견을 요청. 아프리카 통일 기구(OAU) 수뇌급 대표단은 양국을 방문 분쟁 조정에 진전 없음을 발표. 이유는 국경지역으로부터 양국군의 철수를 포함한 미국과 르완다가 제시한 '4개 항목 제안'에 대해 에리트리아가 거부
1998년 6월 26일
UN 안보리는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분쟁을 비난,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수단을 강구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
* 6월 11일 이후 전투 소강 상태, 3만 명에 이르는 에티오피아인들이 에리트리아의 아사브(Assab)항에 억류. 에리트리아 항으로부터 차단되어 있는 에티오피아는 지부티에 자유무역지대 설치. 에티오피아는 이스라엘에 전투기 구매 요청(이스라엘은 결정 보류)
1998년 7월
양국 주재 상대방 국민 추방
1998년 8월 1일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 주재 외국 공관은 부루키나파소에서 협력단국(ContactGroup Nation)과 각각 회동하였으나, 성과 무
1998년 8월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는 부르키나파소에서 열린 중재회담에서 국경 긴장 해소에 실패. 에리트리아는 5∼6월에 발생한 에티오피아와의 전투에서 생포한 71명의 에티오피아군을 석방. 에티오피아는 UN 직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30명의 에리트리아인의 출국을 명령
1998년 12월 6월~7월
에티오피아 정부는 에리트리아가 양국 간 국경 분쟁 이후 총 39,075명의 에티오피아인을 강제 추방하였다고 발표. 미국은 레이크 특사를 이 지역에 3번째 파견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함. OAU는 양국의 자제력 발휘를 요구
1999년 1월 5일
에티오피아는 제3국에 의해 에리트리아 군이 국경지대에서 철수되지 않으면 전쟁을 재개할 것이라고 발표. 에리트리아는 자국군은 정당한 국경선에 배치되어 있으며, 결코 철수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거부
1999년 1월 24일
미국은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에 거주하고 있는 자국민에 대해 철수하도록 통고, 주요 인사를 제외한 민간인 철수 개시
1999년 1월 29일
OAU와 UN 새로운 전쟁 발발 방지를 위해 경쟁
1999년 2월 4일
에리트리아는 에티오피아군의 기동을 제압하기 위해 아디그라(Adigrat)에 소재한 연료창을 폭격, 실패
1999년 2월 6일
양국군간 대격전 재발
1999년 2월 7일
에티오피아의 제2차 에리트리아 중부지역에 대한 공격 개시
1999년 2월 9일
에리트리아는 1,500명의 에티오피아인을 사살했다고 발표. 이집트, 미국, UN안보리는 정전을 요구
1999년 2월 10일
UN안보리 교전상태에 있는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에 즉각적인 정전을 요구, 양국에 대한 회원국의 무기 금수를 만장일치로 채택
1999년 2월 11일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가 OAU가 제시한 평화안을 수용하도록 국제적 압력이 필요하다고 주장. 에리트리아는 UN이 에티오피아를 침략자로 보지 않는 것이 놀랍다고 주장. 소말리아는 에티오피아가 자국 항구를 통한 전쟁물자의 반임을 불허한다고 발표
1999년 2월 12일
에티오피아는 전쟁 재발 이후 7,000명의 에리트리아군들이 사망 혹은 부상하였다고 발표
1999년 2월 14일~16일
양국은 각각 포격 지속
1999년 2월 20일
에리트리아는 정전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전선에 대한 국제감시가 필요하다고 시사
1999년 2월 21일
에티오피아 정부군은 에리트리아의 아사브 공항을 폭격, 공적을 거두었다고 발표. 2월 6일 분쟁 재연 후 공항 폭격은 처음
1999년 2월 25일
에리트리아는 우크라이나, 러시아, 벨라루스, 불가리아인 용병이 에티오피아군에 고용되어 전투에 참가하고 있다고 발표
1999년 2월 27일
에리트리아 대통령은 아난 UN사무총장과 안보리 의장에 서한을 보내 아프리카 통일기구(OAU)의 평화안 수락 의사 표명
1999년 2월 28일
에티오피아 정부는 에리트리아 점령지(바드메-Badme) 탈환 전투에서 전면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발표
1999년 3월 3일
에티오피아는 정전협상에 관심이 없다고 선언
1999년 3월 6일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군이 OAU가 제시한 평화안에서 요구한 철군지역에서 철수하지 않고 있다고 불평
* 에티오피아는 정전과 협상 개시 이전에 영유권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전 영토에서 에리트리아군의 철수를 주장
1999년 3월 14일
에티오피아군은 일라자모(Ilazamo) 평원에 대한 공격을 개시, 적어도 10,000명의 에리트리아인을 사살하고 57대의 탱크를 파괴, 2대의 Mig 23, Mi‐35 소총을 노획했다고 주장. 에티오피아는 자국의 피해는 경미했으며, 에리트리아는 무모한 전쟁으로 고통 받고 있다고 주장. 양국 간 전투는 서부전선지역인 메라브(Merab) 강을 따라 3월 17∼18일까지 지속되고 있다고 보도
1999년 3월 29일
전투는 다소 진정. 양국은 상대국이 무기를 수입하고 민간인을 추방하고 있다고 주장. OAU는 분쟁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중재 노력 지속
* 양국 간 전선을 따라 산발적 전투 지속. 미국은 자국민의 에티오피아 여행 자제 촉구, 핵심 요원을 제외한 대사관 직원의 귀국 허용. UN 사절단 산훈(Sanhoun)은 정전 방법 모색
1999년 4월 6일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군이 에티오피아영토에서 철수하지 않는 한 평화대화는 있을 수 없다고 선언
1999년 4월 16일
에티오피아 공군기는 중부전선의 목표물을 폭격. 에티오피아 공군기, 사와(Sawa)에 있는 에리트리아 훈련소를 폭격
1999년 4월 28일
에리트리아는 에티오피아 항공기가 폭격을 개시했다고 발표
1999년 5월 6일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 간 제2차 연도 전투 개시. 이집트의 중재 무산
1999년 5월 15일~17일
에리트리아는 에티오피아 군용기가 5월 15일 잘라 안베사(Zala Anbesa)와 16일에는 마사와(Masawa)를 폭격, 17일에는 포병부대가 비비나(Bibina)를 공격했다고 발표.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가 분쟁 지역에서 철수하지 않는 한 평화 대화나 정전은 있을 수 없으며, 에리트리아가 자발적으로 철군하지 않을 경우, 계속해서 압력을 가할 것이라고 선언
1999년 6월 9일
국경선 획정 문제로 마찰을 빚고 있는 에리트리아와 에티오피아군간의 전투 재개, 에리트리아군 8,200명 이상이 죽거나 부상 또는 생포(에티오피아 정부 발표). 이에 맞서 에리트리아 외무부는 성명을 통해 5일째 계속되고 있는 동부전선 전투에서 에티오피아군 2,300명을 사살했다고 주장. 인접국 사이인 양국은 지난해 5월 국경선 획정 문제로 갈등을 빚으면서 전쟁 상태에 돌입한 이래 간헐적으로 전투를 벌이고 있음. 에리트리아는 지난 62년 에티오피아에 합병된 이래 무장 독립 투쟁을 벌인 끝에 지난 93년 독립을 쟁취
1999년 7월 15일
소규모의 에티오피아 군이 소말리아에 진군, 파솔레이(Farsoley) 마을을 점령. 그러나 소말리아 지방군은 무 대응
1999년 7월 16일
에리트리아와 에티오피아는 효과적인 정전 개시일, 평화유지군 설치 장소 등 대화를 통해 평화 조건 설정할 것에 동의
1999년 7월 17일
에티오피아군과 OLF(Oromo Liberation Front) 및 ONLF 간에 2시간여에 걸친 전투 발생. 반군들은 정부군 500명을 사살하고 200명의 정부군이 부상당했다고 주장
1999년 7월 26일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는 평화조건을 수용할 준비가 되었다고 발표. 그러나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음
1999년 7월 30일
미국의 중재 노력에도 불구,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는 정전 합의에 도달하지 못함. 국경지역에서 전투 지속, 양측 모두 낮은 수준이긴 하나 국경 경계 계속
1999년 8월 12일
최근 3개월 동안 에티오피아군은 소말리아를 이탈한 OLF와 격전, OLF군 700명을 사살하고 300명이상을 생포.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가 에티오피아의 오로모(Oromo)지역 독립 투쟁 단체인 OLF를 지원하고 있다고 비난
1999년 8월 19일
에티오피아는 최근 1주일간 OLF와의 전투에서 OLF의 리더인 보레다 비루(BoredaBirru)를 사살하고 고위 간부들을 생포함으로써 동 독립단체는 붕괴되었다고 주장
1999년 8월 24일~5일
소말리아 민족전선(Somali Nationa Front: SNF)은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 국경지역 소재 에티오피아 용병 수백명이 루크(Luuq)와 돌로우(Dolow)시에 잠입하였다고 발표
1999년 8월 26일
에리트리아는 에티오피아가 국경분쟁 종식을 위한 평화협정에 분명한 태도를 취하도록 강조
1999년 8월 28일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가 국경지역 인근의 잘라 안베사를 위협하고 있다고 비난
1999년 9월 2일
에티오피아는 잘라 안베사 전선내의 친 케렌(Chin Keren)에 있던 에티오피아인들을 공격했다고 비난
1999년 9월 6일
영토의 격전지인 잘라 안베사 지역에서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간의 접전이 보도됨
1999년 9월 7일
소말리아 소식통은 RRA(Somali Rahanwein Army)와 DSAL(Digil Salvation Army)의 지원을 받고 있는 에티오피아군이 샤벨레(Shabelle)의 저지대에 위치한 도시를 공격했다고 보도. RRA와 DSAL은 모가디쉬에 기지를 둔 후세인 모하메드 아디드(HusseinMohamed Aidid) 장군에 반대하는 세력
1999년 9월 10일
에리트리아군은 1,000㎞에 이르는 국경지역에 소재하고 있는 수개 도시에 대한 에티오피아군의 공격에 대비 고도의 경계태세 유지
1999년 9월 13일
에티오피아정부는 에티오피아와의 에리트리아 간의 분쟁을 종식시키는 길은 개전 이전의 국경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성명서를 발표. 영토분쟁의 대상지역은 잘라 안베사-아가(Zala Anbesa‐Aiga), 에갈라(Egala), 바두바두(Badu‐Badu) 등임
1999년 9월 15일
에티오피아는 쿠바와 기술협력 협정을 체결하였다고 발표. 쿠바군은 에티오피아 막시스트 멩기스투 체제를 지원 중
1999년 9월 28일
미 외교 당국은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간 분쟁 종식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발표
1999년 10월 1일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가 여전히 영토 확장에 대한 야망을 버리지 않고 있으며, 에티오피아는 결코 이를 허용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에리트리아와의 전쟁 협정 서명을 거부
1999년 10월 5일
에티오피아는 에티오피아가 국경지역에 대한 새로운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에리트리아의 주장을 부정
1999년 10월 24일
UN 고등 난민위원회는 25만 명이 동원된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간의 전쟁에서 60,000명의 난민 등을 포함하여 수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발표
1999년 10월 25일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는 상호 비방과 침략행동 중지에 노력. 에티오피아는 65,000명의 에티오피아내 에리트리아 노동자를 추방하고 자국내 항만 창고에서 에티오피아인 소유 재산 1억 3,000만 달러어치를 약탈했다고 비난한 바 있음(에리트리아는 이를 부인)
1999년 10월 30일
에티오피아는 자국군이 10월 23일과 24일 제베르트(Jerbert) 강 근처에서 공격을 감행해 오던 에리트리아군을 격퇴시켰으며, 이 전투에서 300명의 에리트리아군을 사살하였다고 주장. 에리트리아는 이같은 에티오피아의 주장을 부인하면서, 에티오피아는 1998년 5월에 발효된 전쟁종식을 위한 중재노력을 방해하기 위해 에리트리아가 전투를 유발했다고 있다고 주장. OAU(Organization for African Unity)가 제시한 평화계획에 대해, 에티오피아 정부 대변인은 어떠한 평화협정도 에리트리안인을 태도를 바꿀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되풀이
1999년 11월 8일
프랑스는 에리트리아가 프랑스군 2,500명이 주둔하고 있는 지부티(Djibouti)를 침략하려하고 있다고 우려 표명. 지부티는 내륙국 에티오피아에 해안접안을 위한 통과권을 제공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보복으로 에리트리아는 지부티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FRUD(Front for the Restoration of Unity and Democracy) 반군을 지원하고 있음
1999년 11월 9일
에티오피아의 반정부 세력들은 2년 전부터 새로운 언어법의 채택을 요구하고 있음
1999년 11월 17일
에티오피아 정부 소식통은 에리트리아가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와 지부티간을 운항중인 기차를 파괴하기 위해 에티오피아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반군세력을 지원하고 있다고 주장
1999년 11월 18일
에티오피아와 예멘은 외국의 반군세력의 공격에 공동대처하며, 외국에 거주하고 있는 양국국민의 보호를 상호 지원한다는 안보협정에 서명
1999년 12월 3일
에리트리아 해방전선(Eritria Liberation Front)의 게릴라들은 12월초 1주일 사이에 26명의 에리트리아군 52사단 소속요원을 포함하여 총 56명의 에리트리아 정부군들이 투항해왔다고 발표
1999년 12월 20일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가 에티오피아 국적을 가진 17명의 아파즈(Afars)족을 살해했다고 비난. 이들 아파즈족들은 보킬라(Bokila)근교에서 살해되었음
1999년 12월 27일
OAU, 평화계획안에 대한 에리트리아의 우려(충돌국경선에의 평화유지군 배치 문제 등) 검토
2000년 1월 18일
에티오피아는 수단과 140㎞에 이르는 고속도로 개방협정에 서명하였다고 발표. 동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경우, 에티오피아는 수단항을 통해 물자를 신속하게 거래할 수 있다고 함
2000년 1월 21일
평화 및 인권 네트워크(The Peace and Human Rights Network)은 소말리아에 대한 무기와 군수물자의 제공을 금지한다는 UN헌장 제733조를 위배하고 에티오피아가 소말리아내 무사 수디 얄라호우(Musa Sudi Yalahow)가 이끄는 부족 군대인 아바갈(Abagal)에 물자와 무기를 제공하고 있다고 비난. 에티오피아는 이를 부인
2000년 1월 22일
에리트리아와 수단간 국경 재개방. 양국은 완전한 외교관계 수립에 합의하였는데 이는 수단이 에리트리아 항만에의 접근이 필요하였기 때문으로 해석되고 있음(FYEO 분석)
2000년 2월 18일
에리트리아, 에티오피아의 침입에 대비, 전군에 비상경계령
2000년 2월 23일
에리트리아는 에티오피아가 아사브(Assab)항(港) 부근의 부리에(Burie) 전선에 1개여단(3천명) 공격을 감행했다고 주장. 이로써 8개월간의 정전상태가 깨어짐
2000년 4월 8일
양국간의 국경분쟁에도 불구하고 에리트리아는 에티오피아로 지원되는 물품의 조루트를 제공하겠다고 발표
2000년 4월 16일
에리트리아, 18세∼40세 사이의 남자에 대한 징집령 발표
2000년 4월 29일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국경분쟁을 종결시키기 위한 평화협상이 알제리에서 개최됨
2000년 5월 12일
에티오피아가 잘라 안베사(Zala Anbesa) 전선, 바드메(Badme) 지역에서 전면공격 개시
2000년 5월 15일
에티오피아가 메레브‐세딧(Mereb‐Sedit) 강을 건너서 진격. 남동지역에서는 다스(Das), 바렌투(Barentu) 지역으로 진격
2000년 5월 17일
에티오피아군이 다스와 바렌투지역에서 에리트리아군을 포위
2000년 5월 18일
에티오피아군이 바렌투, 다스를 점령
2000년 5월 19일
에티오피아는 에르트리아와 OAU에게 평화회담을 가질 의사가 있음을 표명. 에티오피아는 팽창정책에 의한 전쟁이 아니라, 중부전선의 잘라 안베사지역, 동부지역의 부리에지역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힘. 에리트리아는 멘데페라(Mendefera)로부터 50km 떨어진 군사적 요충지 마이디마(Maidima)도 포기
2000년 5월 20일
에티오피아 서부지역에서도 공격 개시
2000년 5월 23일
잘라안베사‐에갈라(Egala)전선에서 치열한 전투. 에리트리아는 "조건없이" 평화협상을 재개하겠다고 발표. 에티오피아는 아스마라, 아싸브를 점령할 의도는 없으며, 에티오피아가 바렌투에서 철수하는 조건으로 에리트리아는 잘라안베사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
2000년 5월 25일
에리트리아는 1998년의 전쟁 개시 이전의 상태로 군대를 철수할 의사를 표명
2000년 5월 26일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와의 평화교섭 재개에 동의.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의 군사력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것이 목표라고 밝힘. 에티오피아군은 세나페(Senafe) 점령
2000년 6월 6일
테세네이(Teseney)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 에티오피아는 1개사단과 2개여단을 투입
2000년 6월 9일
에티오피아 수상(Meles Zenawi), 에리트리아가 재침하지 않도록 분쟁지대에 대한 평화유지군 개입 요청
2000년 6월 10일
에티오피아는 부리에 전선(에리트리아는 아싸브 전선이라고 부름)에서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했다고 발표. 또한 테세네이 전선에서도 성공적으로 작전을 수행중이라고 발표. 에리트리아는 아프리카단결기구(OAU)의 "즉각적인 적대행위 중지"를 요청하는 정전안을 수락
2000년 6월 11일
알제리에서의 정전협상이 진전을 보임. OAU의 지휘하에 유엔이 평화유지활동을 하는 안을 포함한 평화계획이 검토되고 있음
2000년 6월 14일
에티오피아가 OAU의 정전안을 수락
2000년 6월 18일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가 알제리에서 평화협정에 조인. 정전협정의 내용은 ①1998년 5월 6일 이전 에티오피아 영역이 아닌 지역으로부터 에티오피아가 철수, ② 1000㎞에 달하는 국경이 정해질 때까지 평화유지군이 "일시적 안전보장지대"(에리트리아 영내의 25㎞의 완충지대)에 전개, ③ 평화유지군이 전개된 뒤 2주 후까지 에티오피아군은 에리트리아 점령지대에 체재 가능, ④ 이후 평화협정의 체결을 위해, 식민지시대의 조약, 국제법 등에 기반하여 국경선을 획정지을 예정
2000년 6월 19일
에티오피아군 테세네이 지역에서 철수 시작
2000년 6월 25일
에리트리아는 에티오피아가 정전협정에 새로운 조건을 추가하려 한다고 비난.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군의 규모를 감축할 것을 요구
2000년 7월 13일
워싱턴에서 양국간의 평화협상 개시
2000년 7월 31일
유엔 안보리는 100명의 국경감시단을 파견하겠다고 발표
2000년 9월 11일
유엔안보리는 4,200명의 평화유지군 파견을 결정(UNMEE: United Nations Mission inEthiopia and Eritrea)
2000년 9월 15일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간의 전투로 총 7만명 사망하고 80만명의 난민이 발생한 것으로 집계
2000년 11월 27일
네덜란드가 UNMEE에 700명을 파병하는 데 동의
2002년 11월 17일
에티오피아의 최악의 가뭄에 대한 원조 노력을 위해 항구를 개방하기로 약속20)
2004년 11월 25일
멜레스 제나위 에티오피아 총리는 의회에서 국제사법재판소 국경위원회의 에리트리아와의 국경분쟁에 대한 중재 결정을 이행하기 위한 '에티오피아 5개안'이 표결을 통해 통과된 직후 행한 연설에서 "원칙적으로 에리트리아와의 국경 분쟁에 대한 국제적 중재 결정을 수용할 것이며 에리트리아와의 협상에 착수할 것"이라고 밝힘. 또한 5개안에 따라 국제사법재판소 국경위원회 요원들이 에티오피아 국경에서 활동하는 것을 허락하며 그 같은 활동에 대한 자국 부담 경비도 지급할 것임을 천명21)
2005년 10월 4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 사이 국경전쟁 재발 가능성을 경고하고 에리트리아에 대해 유엔 평화 유지군의 헬리콥터 비행금지 조치를 철회할 것을 촉구22)
2005년 10월 10일
유엔대표부는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 사이 국경지대를 감시하는 평화유지군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림
2005년 11월 3일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가 최근 국경지대에 병력을 증파하고 부대를 전진배치하는 등 국경지대 긴장이 고조되고 있어 지난 2000년 종식된 양국 간의 국경분쟁이 재발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음23)
2005년 11월 4일
아프리카연합(AU)은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간 국경 부근의 군사적 행동으로 야기된 긴장이 자칫 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다며 양국의 자제를 촉구24)
2005년 12월 23일
유엔 평화유지군 사령부는 에리트리아와 에티오피아 간 국경분쟁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에티오피아 군 병력이 국경에서 철수하고 있다고 밝힘25)
2007년 2월 1일
에티오피아 정부는 지난달 29‐30일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열린 아프리카연합(AU) 정상회의를 겨냥한 에리트리아의 폭탄공격 음모를 분쇄했다고 밝힘26)
2007년 4월 25일
에티오피아 정부는 동부 유전에서 반군 공격으로 74명이 피살된 것과 관련해 에리트리아 정부가 이 사건의 배후에 있다고 비난. 이에 대해 에리트리아 정부는 "근거 없는 것"이라고 일축하면서 이와 같은 주장은 "에티오피아 정부가 호전적 행위를 취하기 위한 구실을 삼기 위한 것"이라고 반박
2008년 7월 30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에리트리아와 에티오피아 국경지대에 배치된 평화유지군을 철수시키기로 만장일치로 의결27)
2009년 8월 18일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는 지난 1998년부터 2년간 이어진 에리트리아와 에티오피아 간 국경 분쟁과 관련해 에리트리아와 에티오피아에 대해 각각 1억7천 400만 달러, 1억 6천 300만 달러를 각각 상대방에 배상하라고 판결.28)
2011년
2000년 6월 18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국제상설중재재판소에 의해 배상 판결이 난후 별다른 직접적인 분쟁상황은 있지 않으나, 기본적으로 적대적인 관계(감정)를 유지하고 있음.
2012년 3월 15일
Shimelis Kemald 에티오피아 정부 대변인은 자국군이 에리트레아 국경을 16-18km가량 진격해 에리트레아의 3개 군기지를 공격했다고 발표함. Kemald 대변인은 에리트레아가 동 군사시설에서 에티오피아 반군을 양성하고 있어 사전 공격하였다고 발표. 특히 최근 아파르 지역에서 외국인 관광객 피살 등 에티오피아 내에서 에리트레아가 자행한 일련의 테러 행위가 금번 군사작전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설명함. 이에 에리트레아 외교부는 에리트레아는 에티오피아와 더 이상 전쟁을 치를 생각이 없다고 발표하는 등 금번 주재국측 도발에 대해 보복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시사함. 에리트레아 정부는 또한 에티오피아가 △에티오피아의 에리트레아 일부 영토에 대한 불법 점령 및 △에티오피아 국내 문제 등으로 부터 주재국 국민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금번 도발을 자행하였다고 주장함
기타
에티오피아 대 에리트리아의 국력 비교
에티오피아 대 에리트리아의 국력 비교
구분
에티오피아
에리트리아
인구
5900만 명
360만 명
면적
113만 2천㎢
11만 7천㎢
병력
12만 명
3만 5천 명
군사비
1억 2700만 $
8천 만 $
※ 에티오피아 : 인구 5500만, 87개 종족, 290개 언어, 기독교와 이슬람교, 병력 12만명(10만은 육군)
※ 에리트리아 : 인구 350만, 9개 종족, 2개 언어, 병력 46,000명, 1889년 이태리로부터 독립, 1952년 에티오피아와 연합, 1962년 에티오피아에 의해 영토 합병, 1993년 독립
[네이버 지식백과]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분쟁 (KIDA 세계분쟁 데이터 베이스, KIDA 세계분쟁 데이터 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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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정치학대사전
에티오피아ㅡ소말리아 국경분쟁
[ Ethiopia-Somalia boundary disipute ]
처분적 조약에서 이른바 속지적 의무의 계승문제에 연결되는 국경분쟁. 소말리아 독립(1960. 6. 26) 전의 식민지시대에 영국보호령 정부는 영지(領地)의 바운드지역 및 오가던 관련지역을 에티오피아에 할양하는 조약(1897. 5. 14)을 체결하고 국경선을 획정하였지만 이 국경선이 소말리부족의 관습적인 방목지대를 분단하였기 때문에 양측의 소말리부족은 방목을 위해 국경선을 넘어 왕래할 수 있다는 취지의 교환공문이 붙여졌다. 1935년 에티오피아를 정복한 이탈리아는 영국보호령 정부와 교환공문에서 양측 부족의 방목권과 용수권에 관하여 합의에 달한 취지, 성명을 하였다(1937. 1. 27). 제2차 세계대전 후 해방된 에티오피아는 영국정부와 행정권 반환협정(1954. 11. 29)을 체결하고 1조에서 1897년 조약에 의해 승인된 영역에 대한 에티오피아의 배타적 주권, 2조에서 국경선 양측의 소말리아부족의 방목권을 각각 재확인하고, 3조에서 방목권 실시 규정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소말리아 독립직전 영국정부는 ‘1897년 조약의 규정은 유효, 1954년 협정 제3조는 소멸’이라고 표명하였으며(1960. 4. 11), 에티오피아도 '방목권은 자동적으로 무효’라고 하여 양국 모두 당연히 승인을 부인하였다. 소말리아도 1897년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면서 분쟁의 발단이 되었다.
국경획정 조약은 일단 국경선이 유효하게 획정되면 다른 모든 국가는 이것을 존중해야 하는 것이 일반국제법의 원칙이다. 또한 토지 및 그것에 부과된 부담, 이른바 속지적 의무는 영역의 이전과 함께 승계되는 것이 통설이다. 본 건은 토지에 부과된 부담의 당연한 승계가 부인된 예는 있지만 방목권이 토지의 이용에 관하여 인정된 일종의 부담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조약에 있어서 국가승계에 관한 비엔나협약’(1978. 8. 22) 11조, 12조에서도 목초지의 이용은 영역에 대해 승계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편, 소말리아도 1982년 북부에서의 정부타도운동으로부터 1988년에는 내전에 돌입, 1991년 5월에는 북부가 소말릴란드 공화국이라고 칭하고 독립을 선언하였다. 무질서와 빈곤의 사태를 중시한 국제연합은 1992년 12월 3일의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무력행사를 포함한 다국적군을 파견하는 결의(S/RES/794)를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미군이 지휘권을 갖는 최초의 평화집행부대가 파견되었다. 그러나 사태의 조기수습을 위해 클린턴 미국대통령은 부대를 증파하는 한편 1994년 3월말까지 미군의 완전철수를 표명(1993. 10. 7)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에티오피아소말리아국경분쟁 [Ethiopia-Somalia boundary disipute] (21세기 정치학대사전, 정치학대사전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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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DA 세계분쟁 데이터 베이스
이집트, 수단, 에티오피아 등 나일강 연안국 분쟁
목차
개요
분석
아프리카 내 이집트, 수단, 에티오피아 등 나일강 연안국분쟁 위치
이집트, 수단, 에티오피아 등 나일강 연안국분쟁 지도
개요
• 나일강 유역의 용수 확보권을 둘러싼 물 분쟁
• 분쟁 당사자 : 이집트와 수단, 그리고 에티오피아를 비롯한 10여 개 나일강 상류 연안국가들
1958년 이집트가 아스완댐을 건설하기 시작해 10만 명의 수단인이 이주하였다. 당시 이집트와 수단 사이 분쟁이 발생하였고, 이집트는 물을 더 주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수단인들과의 문제는 일단 해결된 듯 보였다.
1959년, 이집트와 수단이 ‘나일강 이용협약’으로 알려진 쌍무협정에 조인하였다. 양국 간의 물 분쟁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두 나라의 협약이 상류 연안국가의 물 수요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이었기에 또 다른 물분쟁을 유발하였다. 즉 수단보다 나일강 상류에 연해 있는 에티오피아와는 나일강 물을 나누어 쓰는 문제에 관해 전혀 상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에티오피아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나일강 물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사용하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고 이로 인해 분쟁이 발생하였다.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Haile Selassie) 황제는 1960년대에 아프리카 개발은행으로부터 차관을 빌리고 미국 등의 기술지원을 받아 청 나일강(Blue Nile)의 유역에 29개의 댐을 건설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상류에 새로운 댐이 건설되면 이집트의 물 공급이 8.5%나 감소하게 됨으로 당국은 차관 승인에 반대하고 사업의 착수를 적극적으로 막았다.
분쟁이 계속되자 유엔은 1997년 ‘국제수로의 비항해적 사용법에 관한 회의’를 개최해, 두 나라 이상을 지나가는 강을 공유하는 경우에 적용할 지침을 만들었다. 첫째, 다수의 물 사용자 간에는 공평하게 물이 공유되어야 한다는 사실과, 둘째, 강에 인접한 국가들 사이에는 서로 피해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사실이었다.
1999년 2월, 탄자니아에서 10개의 나일강 유역 국가들이 ‘나일강 유역 물 관련 장관 협의회’를 갖고, 연안 국가들은 나일강 수자원을 국경 내에서 개발을 목적으로 사용할 권리를 인정하는 ‘나일강 유역 전략행동프로그램’을 지지하였다. 이로 인해 나일강 물 분쟁은 일단락지었다.
2000년대 들어 나일강의 수자원을 이용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일강 상류 연안국들은 이집트와 수단만의 인근 하이댐으로 인한 혜택이 부당하다는 판단하에 공동 이용 및 합당한 대우를 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이집트, 수단 및 다른 연안국들 간의 불만과 긴장이 지속되었다.
2010년 이집트가 나일강유역구상(NBI) 국제조약체제에 가입할 것을 무바라크 대통령에게 설득하였고, 어느 정도 완화된 입장과 함께 분쟁 해결의 조짐이 보였으나, 수단의 지속적인 반대와 함께 합의점을 찾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에티오피아 수자원부 장관인 알레마예후 테게누는 2011년 3월 30일 아디스 아바바에서 열린 콘퍼런스에서 나일강 상류에 거대한 ‘그랜드 댐’ 건설 프로젝트를 추진중이라고 밝혔으며, 이집트와 수단을 제외한 7개국(에티오피아, 케냐, 탄자니아, 르완다, 우간다, 부룬디, 콩고-예정)이 동의한 상태라고 하였다. 이에 이집트와 수단은 만일 여러 국가가 나일강 물을 나눌 시에 심각한 물부족 현상이 발생할 것이라며 댐 건설에 반대하고 있어, 나일강의 물을 둘러싼 긴장관계는 댐 프로젝트 진행과 함께 점점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분석
[추후 전망]
나일강 유역 국가들 간의 물 분쟁은 국경 분쟁으로도 비화되는 듯한 양상을 띠고 있다. 2003년 12월에 들어, 수단과 국경지역인 서부의 감벨라(Gambela) 지역에서 토지와 거주권 문제를 둘러싼 종족간의 분쟁으로 수백 명이 사망하는 유혈사태가 발생하였다. 정부군과 경찰에 의해 질서가 회복되었으나 종족간의 반목과 갈등이 깊어 언제든 폭동 재발의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더욱이 2009년 2월에도 모얄(Moyale), Borana(보라나), Gehri(게리) 등 케냐와 에티오피아 국경 지대에서 토지와 용수 사용권을 둘러싸고 유혈충돌이 발생, 300여 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 이주민이 생겨났으며, 2011년 3월 30일 에티오피아를 비롯한 나일강 상류의 국가들(총7개국)이 수단-에티오피아 국경 ‘베니상굴-구모즈’ 서부지역에 ‘그랜드 댐’을 건설할 계획임을 밝히면서 연안 국가들의 긴장이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2012년 1월에도 케냐북부의 모얄(Moyal)e 지방에서 있었던 유목 부족들 간의 유혈 충돌로 인해 4만 명이 넘는 난민들이 이웃나라인 에티오피아 북부로 이주하였다. 그 배경에는 그 전해인 2011년 Moyale 지방에서 일어난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유목 부족들 간에 목초지와 용수를 둘러싼 투쟁이 자리한다. 이번 유혈 충돌은 케냐 북부의 Moyale 지방에 거주하는 Borana 부족과 Gabra 부족 간에 일어나 국제분쟁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수만 명이 에티오피아와의 국경지대로 삶의 터전을 옮김에 따라 에티오피아인들과의 긴장은 높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Borana 부족과 Gabra 부족은 목초지와 물을 둘러싸고 자동소총과 machete1)를 동원한 유혈 충돌을 일으킴에 따라 적어도 18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집트, 수단, 에티오피아 등 나일강 연안국 분쟁 (KIDA 세계분쟁 데이터 베이스, KIDA 세계분쟁 데이터 베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