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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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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59    반삭발을 한 윤동주... 댓글:  조회:2662  추천:0  2019-11-24
  윤동주가 한 학기 만에 릿쿄대학 그만둔 사연  2019.11.24.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여행 속 역사의 발자취 - 도쿄편⑦] 윤동주의 일본 유학 시절 [오마이뉴스 김보예 기자] ...이어 일본에서 윤동주의 학창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윤동주의 유학 시절은 크게 도쿄에서의 생활(릿쿄대학, 立敎大學)과 교토에서의 생활(도시샤대학, 同志社大學)로 나뉜다. [도쿄편⑦]과 [도쿄편⑧]에서는 릿쿄대학 재학 시절의 흔적을 찾아가 보았다. 도쿄, 미션스쿨 릿쿄대학에 입학한 윤동주 윤동주는 고종사촌이자 단짝인 송몽규와 함께, 1942년 1월에 교토제국대학(현재 교토대학)에 입시 시험을 본다. 그러나 송몽규만 합격하고, 윤동주는 떨어진다. 윤동주는 차선으로 릿쿄대학의 입시를 다시 보고, 릿쿄대학의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한다. 어린 시절부터 오랫동안 붙어 있었던 윤동주와 송몽규가 유학 입시로 인해 처음으로 떨어지게 된 것이다. 릿쿄대학은 기독교 신교의 한 교파인 '성공회(聖公會)'에서 경영하는 미션스쿨이다. 송우혜의 저서 (2014, 시정시학)에 의하면, '성공회'는 당시 통치자였던 쇼와(昭和) 일왕의 친동생 중 한 명이 영국 유학 중에 성공회 신자가 되어 돌아옴으로써 황실의 배경을 갖게 되었다. 때문에 '성공회(聖公會)'는 신사(神社)와 황실(皇室)이 숭상되고 불교(佛敎)가 치성인 일본에서도 큰 세력을 가지게 되었고, 릿쿄대학은 이런 튼튼한 배경 아래 경영되고 있는 좋은 대학이었다.   ▲ 릿쿄대학 전경 . ⓒ 심오선(snap the5/Right45 대표)   그러나 윤동주가 실질적으로 릿쿄대학에 다닌 기간은 매우 짧다. 릿쿄대학의 학적부를 보면 '1942년 12월 퇴학'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은 봄학기가 4월 시작, 가을학기가 10월인 것을 생각하면, 한 학기만 다니고 학교를 그만둔 것이다. 실제로 1942년 가을학기(10월)부터는 교토에 있는 미션스쿨인 도시샤대학에 다니기 시작한다. 윤동주는 7월 하순, 여름방학을 맞아 약 2주간 북간도 용정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윤동주의 모친이 병환 중이었는데, 모친의 병석 가까이에서 이야기 동무를 해 드리고 있을 때, 일본에서 전보가 왔다고 한다. 도호쿠제국대학(현재, 도호쿠 대학)에 재학 중인 친구(한국인)가 본인 대학의 편입 수속을 치르러 오라는 전보였다. 편입 시험 등 각종 수속을 치르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는지, 윤동주는 급히 일본으로 떠났다고 한다. 처음부터 윤동주는 릿쿄대에 계속 다닐 의사는 없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의 공식 나라명은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으로 대학 이름에 '제국(帝國)'이 들어가면 명문국립대학이었다. 명문 학벌에 대한 선망이 만연했던 당시, 윤동주의 부친은 윤동주가 제국대학 중 하나에 다니길 바랐다. 그러나 윤동주가 옮겨 간 곳은 교토에 있는 사립 미션스쿨인 도시샤대학이었고, 전보를 받은 윤동주 부친은 노여워했다고 한다. 윤동주는 북간도 집으로 가기 전부터 도시샤대학에 전학 갈 예정이었으나, 제국대학에 들어가길 희망하는 부친에게 차마 말을 못 꺼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7월 하순, 윤동주의 도쿄 하숙집을 방문한 문익환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윤동주는 교토로 내려갈 이삿짐을 꾸렸다고 한다. 윤동주가 릿쿄대학을 떠난 사연, '교련 수업 거부' 윤동주 왜 이토록 급하게 릿쿄대학을 떠났을까? 릿쿄대학도 좋은 사립 미션스쿨이기에 또 다른 사립 미션스쿨인 도시샤대학으로 굳이 전학을 갈 필요가 없었다. 윤동주가 교토에 있는 학교로 옮겨간 이유로는 교토제국대학에 다니는 송몽규의 영향을 많이 꼽는다. 물론 송몽규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교련 수업 거부'로 보인다. 윤동주의 릿쿄대학 후배이자 연구자인 야나기하라 야스코(楊原泰子)씨는 1942년 4월 10일 자 으로부터, '學部斷髮令四月中旬實施'(학부 단발령 4월 중순 실시)라는 기사를 발견했다. 그녀는 조사에 의하면, '조선인 학생 중에서 교련을 거부한 학생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군국주의 사상이 세간을 지배하고 있을 때, '교련 수업 거부'는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행동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영화 에서도 '교련 수업 거부'로 반삭발을 당하는 윤동주가 묘사된다. 실제로 윤동주가 거행한 '교련 수업 거부'는 교련복을 입지 않은 채, 교련 수업에 출석한 것이었다.   ▲  영화 ‘동주’ 속 교련 수업 거부로 반삭발 당하는 윤동주(강하늘 역) ⓒ (주)루스이소니도스   1941년 가을, 육군 대좌 이지마 노부유키(飯島信之)가 릿쿄대학의 군사훈련 담당 교관으로 배속된다. 남학생들은 누구나 매주 1시간씩 군사 훈련을 받아야 했다. 송우혜의 저서 (2014, 시정시학)에 의하면, 그는 릿쿄대학에 오기 전에 같은 기독교 학교인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 배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메이지대학에 있을 때도 어찌나 횡포가 심했는지, 그가 릿쿄대학으로 옮겨갈 때 메이지대학에서 축배를 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릿쿄대학의 학생 중, 이지마 대좌에게 미움을 사 '교련 출석 정지' 조치를 당하고 '징병 연기'가 취소되어, 군대에 입대한 학생들이 꽤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군국주의가 일본의 모든 대학에 만연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7월 하순, 윤동주가 고향집 북간도를 방문했을 때, 송몽규도 맞추어서 일시 귀향한다. 이때, 윤동주와 송몽규는 다른 친지들과 함께 1942년 8월 4일에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사진 속에 반삭발한 사람은 윤동주뿐이 없다. 윤동주가 이토록 급히 릿쿄대를 떠난 것은 '교련 수업'에 대한 반감으로, '교련 수업'이 거행되지 않는 교토 지역으로 옮겨 간 것으로 보인다.   ▲  1942년 8월 4일, 마지막 귀향 때, 남긴 사진. 뒷줄 오른쪽 반삭발 머리가 윤동주, 앞줄 가운데 안경을 낀 사람이 송몽규다. 송우혜의 저서 (2014, 시정시학)에 올려진 사진 재촬영. ⓒ 시정시학   윤동주가 애정한 과목 , 1104호 교실 릿쿄대학에서 윤동주가 이수한 과목을 살펴보면 봄학기에 ,으로 단 두 과목만 이수한 것을 알 수 있다. 릿쿄대학에서 수강한 과목 중, 는 윤동주가 가장 애정한 수업으로 알려져 있다. 윤동주가 동양철학사를 들은 교실은 릿대교대학 정문에서 보이는 건물 1층에 있는 1104호 교실이다. 릿쿄대학 교목 김대원 신부님의 설명에 의하면, 현재의 1104호 교실은 당시의 작은 교실 2개를 이어 넓게 만든 것이라고 하니, 윤동주가 재학할 당시의 1104호 교실은 지금의 약 절반 정도의 작은 규모였을 것이다.   ▲ 윤동주가 수업을 들은 릿쿄대학의 1104호 교실 . ⓒ 심오선(snap the5/Right45 대표)   윤동주는 일본 유학 시절 한국에서 있었을 때보다, 더 많은 시를 지었을 것으로 예측된다. 그러나 1944년에 '치안유지법 제5조 위반 죄'로 체포되었을 당시, 거의 모든 시가 압수되어 처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학 시절 습유작품(拾遺作品)으로는 '흰 그림자' '사랑스런 追憶(추억)' '흐르는 거리' '쉽게 씌여진 詩(시)' '봄' 이렇게 5편의 시가 있다. 5편의 시 모두, 릿쿄대학 재학 시절에 적은 시이다. 위의 5편의 시가 압수되지 않은 이유는, 위의 시만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에 재학 당시, 친우였던 강처중에게 한국으로 우송(郵送)하였기 때문이다. 윤동주의 유학 시절 습유작품 중, '쉽게 씌여진 시'에는 '노교수의 수업을 들으러 간다'는 구절이 있다. 연구자 야나기하라 씨는, 시 속의 '노교수'는 를 가르친 우노 데쓰토(宇野哲人) 교수라고 밝혔다. 우노 교수는 일본 동양철학계의 거목이자 도쿄제국대학의 명예교수로, 당시 릿쿄대학에 초빙교수로 강의를 하였다. 이쯤해서 영화 를 본 사람이라면 '영화 속에 나온 교수는 누가인가?'라는 궁금증이 생길 것이다. ... (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 윤동주는 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나  2019년9월16일    영화 '동주' 스틸컷(사진=메가박스㈜플러스엠 제공)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 '서시' 중국 지린(吉林)성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에 있는 용정시에서는 길가에 우뚝 솟은 웅장한 바위 하나를 만날 수 있다. 그 유명한 '선바위'다. 안중근(1879~1910) 의사가 사격훈련을 한 곳으로도 알려졌다   선바위가 내려다보는 마을이 있으니 바로 '명동촌'이다. 이곳은 북간도 한인 문화의 발상지로 불리운다. 북간도로 옮겨와 새로운 터전을 다졌던 한인들에게 정신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끼친 까닭이다.  명동촌은 한국 근대사에서 눈에 띌 만큼 모범적인 공동체로 평가된다. 이곳은 민족교육의 산실이었고 이상적인 기독교 신앙촌이었다. 명동촌에서는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신분의식을 타파하고 평등주의와 같은 시대정신을 꽃피웠다. 바로 이곳 명동촌에서 시인 윤동주(1917~1945)가 태어났다. 한반도에서 북간도로 넘어와 명동촌을 터전으로 다진 1세대에 이어 등장한, 윤동주가 포함된 명동촌 2세대는 부모들보다 더 나은 교육을 받았다. 특히나 당대 독립운동가들이 일궈낸 승리의 기쁨은 물론 패배의 아픔까지 모두 듣고 자란 그들은, 민족 의식과 기독교 사상이 결합한 교육을 받으면서 스스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몸에 익히고 자랐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꼽히는 윤동주의 삶과 사상을 압축해 놓은 듯한 '서시'는 분명 이러한 시대적, 공간적 배경의 영향을 깊이 받았으리라. ◇ "윤동주가 생각했던 하늘…관념 아니라 뚜렷한 의미 담아"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 스틸컷(사진=CBS 제공) 여느 명동촌 집안처럼 윤동주는 어린 시절부터 교회와 기독교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지식을 쌓고 삶의 태도를 다졌다. '십자가'와 같은 그의 시에서는 희생과 헌신을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기독교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윤동주는 1936년부터 다양한 경로를 통해 동시, 시, 산문 등을 발표하면서 시집 간행의 꿈을 차근차근 준비했다. 그러나 1943년 독립운동 혐의로 일제 경찰에 체포돼 1945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안타깝게 생을 마치면서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시인으로서 윤동주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때는 극에 달한 일제의 탄압 탓에 한국어 사용과 창작이 금지됐던 시기다. 1941년 윤동주가 우리말 시집 출간을 추진하다가 무산된 데도 이러한 이유가 있다. 결국 그의 사후인 1948년, 어렵사리 보존된 육필 원고가 친지들의 도움으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태어났다. 널리 알려진 '서시' '별 헤는 밤' '십자가' 등 윤동주의 생을 대변하는 시들은 그렇게 빛을 봤다. 익히 알려졌듯이 윤동주 시에는 '하늘'이 자주 등장한다. 윤동주 연구에 천착해 온 숙명여대 김응교 교수는 윤동주의 하늘을 크게 세 가지 의미로 풀이한다.   그 첫 번째는 '맹자'에 나오는 하늘이다. 김 교수는 "윤동주의 하늘이 나오는 '서시' 문장을 주의해 봐야 한다"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이라는 문장은 '맹자'에 나오는 '앙불괴어천'(仰不愧於天)을 번역한 문장"이라고 설명했다. 두 번째 의미는 '자아성찰의 대상'으로서 하늘이다. "(윤동주 시) '자화상'의 '우물'이나 '참회록'의 '거울'처럼 하늘은 자신을 반성하는 매체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의미가 '기독교의 하나님'이다. 김 교수는 "윤동주가 생각했던 하늘은 관념이 아니라, '맹자의 하늘' '자아성찰의 하늘' '기독교의 하늘'로 뚜렷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분석했다. ◇ "윤동주 정신,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우쳐 줘"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 스틸컷(사진=CBS 제공) 시인 윤동주는 자신이 발 붙인 시대, 그리고 그 험한 시대를 함께 살아내는 사람들을 향했던 두 눈과 가슴을 거두지 않았다. 그가 남긴 시들은 그 뚜렷한 증거다. 김응교 교수는 "윤동주 '서시'의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가 가리키는 대상은 주변의 '가난한 이웃들'로 뚜렷하다"며 "윤동주의 '오줌싸개 지도' 속 부모가 없는 아이들, '병원'의 환자, '해바라기 얼굴'의 여공, 산문 '종시'에서 복선 철도 노동자에 대한 묘사 등이 그 증거"라고 설명했다. 이어 "윤동주의 작품에서는 동시대를 산 노동자들의 모습도 세 차례 등장한다"며 "윤동주는 그렇게 현실적인 고민을 했다. 그의 '하늘'이 '경천애인' '민심'으로 읽히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익히 알려졌다시피 윤동주의 시는 치열한 자아성찰을 담고 있다. 김 교수 표현을 빌리면 윤동주는 "자기 존재의 고유성을 사랑하는 인간"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라는 '서시'를 두고도 김 교수는 "결국 윤동주 정신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우쳐 준다는 데 의미가 크다"고 전했다. 더 나아가 그는 "모든 언론, 논문이 윤동주를 '자아성찰' 안에 가두고 있다"며 "윤동주는 그야말로 혁명의 시인"이라고 강조했다. 그 근거로 김 교수는 윤동주 시의 구절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시 '십자가' 중에서), '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는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시 '간' 중에서) 등을 들었다. 김 교수는 "윤동주처럼 산다는 것은 스스로를 냉철하고도 고독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을 방 안에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쪼개어 자기 능력껏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라며 "꼭 정치적 행위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살피는 사회 그 자체가 곧 혁명이라고 믿는다. 윤동주 시처럼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혁명적 존재"라고 강조했다. 일제 강점기, 나라를 잃고 만주 북간도로 이주했던 조선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황무지를 삶의 터전으로 일구면서 민족운동과 기독교를 결합시킨 남다른 문화를 뿌리내리죠. 이는 당대 항일 독립운동은 물론 해방 뒤 한국 사회 민주화운동에도 뚜렷한 영향을 미칩니다. 10월 17일 개봉을 앞둔 다큐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를 바탕으로 북간도와 그곳 사람들의 숨겨진 가치를 조명합니다. [편집자 주] /CBS노컷뉴스 이진욱 기자
7458    [이런저런] - "생가문제"... 댓글:  조회:2703  추천:0  2019-11-24
  독일의 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생가는 규모가 엄청나다. 인도 콜카타에 학교 규모로 세워진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생가와 비견될 정도다. 온 집안을 돈으로 칠갑해 놓은 것으로는 괴테 쪽이 단연 앞선다. 4층 건물에 20여개의 방이 있는 고딕 양식의 괴테 생가는 18세기 유복한 중산층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어 더욱 가치가 있다. 1층에는 당시의 조리대와 그릇장 등이 있는 부엌과 식당이 있고, 괴테가 태어난 2층에는 아버지의 서재와 세계에서 가장 비싸다는 대형 골동품 시계가 있다. 시인의 방이라 불리는 3층 왼쪽의 방은 괴테의 명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파우스트’가 탄생한 곳이다. 괴테의 책상과 자필 원고가 전시돼 그의 문학적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생가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의 관광 제1 코스로 자리 잡았다. 베트남의 국부로 추앙받는 호찌민의 생가는 소박함 그 자체로 괴테의 생가와 대비된다. 호찌민은 응에안성 호앙쭈 지역에 있는 외가의 방 5개짜리 초가집에서 태어나 5살까지 살았다. 그의 생가는 전쟁 때 폭격으로 사라질 것을 우려한 주민들이 지붕과 벽을 뜯어 보관했다가 나중에 복원했다고 한다. 호찌민을 향한 국민들의 존경심이 읽힌다. 이곳은 응에안성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됐다. 중국의 국부 마오쩌둥이 태어난 후난성 사오산의 생가는 혁명 성지로 꼽힌다. 주말에는 10만명이 넘는 참배객이 줄을 잇는다. 중국인들이 일생에 한 번은 가고 싶어 하는 ‘최애’ 장소다. 덩샤오핑과 장쩌민, 후진타오 등 역대 중국 지도자들이 이곳을 찾았다. 시진핑 국가주석도 부주석 때인 2011년 3월 생가를 방문했다. 중국인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외국인들도 이곳을 찾는다. 오스트리아 정부가 그제 아돌프 히틀러 전 독일 총통 생가를 경찰서로 바꿀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건물이 유럽 극우세력의 성지가 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신나치주의자들은 매년 히틀러 생일인 4월20일이 되면 생가를 찾아 참배한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600만여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독재자가 히틀러다. 그를 영웅으로 떠받드는 추종자들이 활개 치는 한 히틀러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다. 홀로코스트 같은 인류의 비극이 반복되지 않을까 두렵다. /김환기 논설위원 ⓒ 세계일보 
7457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생태보호",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789  추천:0  2019-11-23
[와우! 과학] “안녕, 올라프!”… 멸종위기 두꺼비, ‘체외수정’으로 부화  2019.11.23.    좋아요 훈훈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서울신문 나우뉴스] 세계 최초로 체외수정을 통해 태어난 푸에르토리칸 두꺼비 ‘올라프’미국 텍사스에서 세계 최초로 체외수정을 통해 멸종 직전의 두꺼비가 부화하는데 성공했다고 AP통신 등이 23일 보도했다. 미시시피주립대학 연구진과 텍사스주 포트워스동물원 연구진은 최근 체외수정을 통해 알을 수정시키고, 이를 부화해내는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카리브해 대앤틸리스 제도의 미국 자치령인 푸에르토리코에서 서식했던 것으로 알려진 ‘푸에르토리칸 볏두꺼비’(학명 Peltophryne lemur)는 푸에르토리코와 영국령 버진고르다섬 등지에서 서식했지만, 1987년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으로부터 ‘매우 가까운 장래에 야생에서 멸종 위험성이 매우 높은 종'을 의미하는 CR(critically endangered) 등급을 받았다. 1990년대 초반부터 이 두꺼비를 보호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시작됐지만 개체수는 좀처럼 늘지 않았고, 일부 전문가들은 지난 30년간 이 두꺼비가 완전히 멸종했다고 여기기도 했다. 이에 연구진은 실험실에서 키우던 푸에르토리칸 두꺼비 암컷 두 마리에게서 추출한 난자와 야생에 서식하는 푸에르토리칸 두꺼비 수컷 6마리에서 추출한 뒤 얼려 둔 냉동정자를 결합하는 체외수정을 시도했다.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지난 9월 포트워스동물원에서 태어난 세계 최초의 체외수정 두꺼비는 몸무게 6g으로 매우 작지만 건강상태는 양호한 것으로 알려졌다. 연구진은 멸종위기 두꺼비의 개체수 보호에 성공한 것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해당 두꺼비를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Frozen)의 눈사람 캐릭터의 이름을 본 따 ‘올라프’라고 명명했다. 연구진은 “양서류에 대한 체외수정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야생에 사는 동물을 해치지 않고 정자만을 채취해 냉동시킨 뒤 이를 체외수정에 이용해 (부화에) 성공한 사례는 이번이 세계 최초”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번 실험의 성공은 멸종 직전에 있는 동물들의 개체수를 확장시키는데 분명한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앞으로도 야생에 서식하는 푸에르토리칸 두꺼비는 그대로 놔둔 채 (정자 등) 생물학적 시료만 채취한 뒤 이를 미래에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송현서 기자
7456    무수한 점점이 백억이 되기까지... 댓글:  조회:3088  추천:0  2019-11-23
  김환기 '우주' 경매가 132억 넘어… 한국 미술품 '최고' 2019.11.23.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앵커] 조금 전 홍콩에서 한국 미술품 경매 사상 가장 값비싼 작품이 나왔습니다. 김환기 만년의 대작 '우주'가 132억 5000만 원에 새 주인을 만났습니다. 우리 미술품이 100억 원 넘는 가격에 경매된 것도 이번이 처음입니다. 권근영 기자입니다. [기자] [크리스티 홍콩경매소 : 8800만 (홍콩)달러입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우리 돈으로 약 132억 5000만 원, 지금까지 경매된 한국 미술품 중 가장 높은 가격입니다. 1971년 뉴욕의 화랑에서 처음 전시된 '우주'는 김환기와 절친했던 외과의사 김마태 씨가 구입해 48년 동안 간직하다가 이번 경매에 내놓았습니다.  김환기는 두 폭의 캔버스에 커다란 원을 그리듯 파란 점을 찍고 또 찍어 '우주'를 완성했습니다. 이 그림은 지난해 85억 원에 팔린 김환기의 또다른 추상화 '붉은 점화'의 기록을 넘어섰습니다.  지금까지 가장 비싸게 경매된 한국 미술품 10점 중 9점이 김환기의 것입니다. 단순하고도 숭고한 아름다움, 한국적인 동시에 세계 미술의 흐름과 함께 한 그의 작품이 점점 각광받고 있습니다.  [에블린 린/크리스티 아시아 미술 부회장 : 홍콩에서 전시하면 많은 사람들이 김환기를 잘 몰라도 그의 그림에 매료됩니다.] 106년 전 전남 신안에서 태어난 김환기는 달항아리와 매화 같은 전통적인 소재를 사랑했습니다. 쉰 살 되던 1963년 낯선 뉴욕으로 건너가 새로운 미술에 도전했습니다. [유홍준/명지대 석좌교수 (2012년) : 그 하나하나가 점을 찍을 적에 당신이 생각했던 사람도 있고 산도 있고 별도 있고 그랬어요.] 고향인 안좌도 섬마을의 뻐꾸기 소리를 추억하며, 먼 곳의 그리운 이들을 떠올리며, 노화가가 찍은 무수한 점들은 이제 한국 현대 미술의 문을 활짝 연 별이 됐습니다. (화면제공 : 환기재단 환기미술관) (영상그래픽 : 오은솔) /권근영 기자  ===========================///   김환기 '우주', 한국미술사 새로 썼다… 132억원 낙찰(종합) 2019.11.23.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크리스티 홍콩 경매서 한국 미술품 첫 100억원 돌파 작가 추상화 최대 크기·유일 두폭화 희귀성·예술성 인정 김환기, '우주'(Universe 5-IV-71 #200), 1971[크리스티코리아 제공] (홍콩=연합뉴스) 강종훈 기자 = 한국 추상미술 선구자 김환기(1913∼1974)의 대표작 '우주'(Universe 5-IV-71 #200)가 100억원을 훌쩍 넘기며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우주'는 23일 홍콩컨벤션전시센터(HKCEC)에서 열린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약 131억8천750만원(8천800만 홍콩달러)에 낙찰됐다. 이는 구매 수수료는 포함하지 않은 가격이다. 수수료를 뺀 낙찰가 기준으로 한국 미술품이 경매에서 100억원 넘는 가격에 팔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20세기&동시대 미술 이브닝 경매 하이라이트 작품 중 하나로 선보인 '우주'는 시작가 약 60억원(4천만 홍콩달러)으로 출발, 치열한 경쟁 끝에 예상가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전화로 경매에 참여한 고객에게 돌아갔다. 낙찰자는 크리스티 뉴욕을 통해 경매에 참여한 외국 컬렉터로 추정된다.  1971년작 푸른색 전면점화인 '우주'는 김환기 작품 가운데 가장 큰 추상화이자 유일한 두폭화다. 254×127㎝ 독립된 그림 두 점으로 구성돼 전체 크기는 254×254㎝에 달한다. 김환기 작품 중에도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그림으로, 기량이 최고조에 이른 작가의 말년 뉴욕 시대에 완성했다. 자연의 본질을 담아내려고 한 김환기 예술사상과 미학의 집성체로 평가된다.  작가의 헌신적인 후원자이자 각별한 친구, 주치의였던 의학박사 김마태(91)씨 부부가 작가에게 직접 구매해 40년 넘게 소장했다. 1971년 완성 이후 경매 출품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환기 작품은 한국 미술품 최고가 기록을 1년 6개월 만에 자체 경신했다. 직전 최고가는 김환기가 1972년 그린 붉은색 전면점화 '3-II-72 #220'가 지난해 5월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기록한 낙찰가 85억3천만원(6천200만 홍콩달러)이다.  김환기 작품은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 순위 상단을 독차지했다. 9위 이중섭 '소'를 제외한 상위 10위가 모두 김환기 작품으로 채워졌다. 이날 경매 결과는 한국 미술의 위상을 높이고 세계 시장에서의 가능성을 확인한 쾌거로, 김환기뿐만 아니라 다른 한국 작가들의 작품이 재평가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홍콩=연합뉴스) 강종훈 기자 = 홍콩 홍콩컨벤션전시센터(HKCEC) 그랜드홀에 전시된 김환기 1971년작 '우주'(Universe 5-IV-71 #200). 이 작품은 23일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한국 미술품 사상 처음으로 낙찰가 100억원을 돌파했다. =====================/// "'우주'만이 한국미술품 최고가 다시 깰 것" 2019.11.23.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에블린 린 크리스티 홍콩 아시아 20세기&동시대 미술 부문 부회장 (홍콩=연합뉴스) 강종훈 기자 = 홍콩 홍콩컨벤션전시센터(HKCEC) 그랜드홀에 전시된 김환기 1971년작 '우주'(Universe 5-IV-71 #200) 앞에 선 에블린 린 크리스티 홍콩 아시아 20세기&동시대 미술부문 부회장. 2019.11.23 (홍콩=연합뉴스) 강종훈 기자 = "'우주'는 경매시장에 등장할 때마다 늘 새로운 기록을 남길 것입니다. 이 작품만이 김환기 기록을 다시 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3일 열린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132억원 낙찰 기록을 세운 김환기 '우주'(Universe5-IV-71 #200)에 대한 에블린 린 크리스티 홍콩 아시아 20세기&동시대 미술 부문 부회장의 평가다. 경매에 앞서 홍콩컨벤션전시센터(HKCEC)에서 만난 에블린 린 부회장은 '우주'의 한국미술품 최고가 달성을 확신하며 "이번 기록은 기념비적으로 남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른 한국 작품이 예술성과 희귀성을 모두 갖춘 '우주'의 기록을 넘어서기 쉽지 않다는 분석이자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한국 대표 작가로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한 김환기 전면점화 가운데 가장 크고 뛰어난 작품으로 꼽히는 '우주'는 실제 이날 경매에서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대만 출신 에블린 린 부회장은 소더비에서 14년간 근무하고 지난해 크리스티로 옮겨 동아시아 미술품 경매를 총괄한다. 2013년 장판즈의 '최후의 만찬'으로 당시 아시아 동시대 미술 경매 최고가 경신을 끌어내는 등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2015년 홍콩에서 기획전을 열어 한국 단색화를 처음 선보이는 등 한국 근대 미술을 세계 시장에 소개하는 데에도 역할을 했다. 그중에서도 김환기와 '우주'에 대한 애착이 각별하다. 에블린 린 부회장은 "한국 미술에 관심이 많고 특히 김환기 작품을 좋아한다"라며 "지난 10년 가까이 김환기 작품을 세계 무대에 소개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 갈 때마다 '우주'가 위탁 전시된 환기미술관에서 작품을 보고 정말 훌륭하다고 느꼈다"며 "세계 시장에 내놓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회가 없었다"고 덧붙였다. '우주'는 김환기의 후원자이자 친구였던 김마태 박사가 작가에게서 직접 사들여 소장한 작품이다. 서울 환기미술관에서 대여해 전시했으며, 경매에는 이번에 처음 나왔다.  김환기와 김 박사는 1950년대 초반 부산 피란 시절 우연히 만나 각별한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됐다. 김 박사는 1953년 25세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가고, 김환기는 1956년 프랑스로 떠났다. 김 박사는 성공한 외과 의사가 되고, 파리에서 3년간 서양미술을 접하고 서울로 돌아온 김환기는 1963년 뉴욕으로 이주한다. 뉴욕에서 재회한 이들의 우정은 더욱 돈독해지고, 김 박사는 많은 김환기 작품을 구매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컬렉션인 '우주'는 1971년 포인덱스터 갤러리에서 열린 김환기 첫 뉴욕 개인전에서 선보인 작품이다. 당시 전시 포스터 이미지로 사용할 만큼 작가도 큰 애정을 가졌다. 김 박사는 40여년간 소장한 '우주'를 마침내 시장에 내놓기로 하고, 지난여름 여러 경매사 중 크리스티를 선택했다. 동아시아 미술 담당자인 에블린 린 부회장이 뉴욕으로 날아갔다. 에블린 린 부회장은 "'우주'를 큰 무대에 내놓는 날을 오래도록 꿈꿨는데 이뤄졌다. 운명적이었다"고 당시 감격을 전했다.  경매를 앞두고 전시장에 걸린 '우주'는 신비로운 기운을 뿜어내며 관람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에블린 린 부회장은 "붓으로 점을 찍듯 작업해 자연스러운 번짐이 있는 작품에 많은 사람이 감동을 받았다"라며 "많은 색을 써서 화려하게 그리기는 쉽지만, 색을 절제하면서도 다양한 푸른 빛을 낸 김환기는 정말 위대하다"고 말했다. 앞으로 김환기와 한국 미술 작품이 세계시장에서 더 많은 관심을 받을 것으로 그는 전망했다.  그는 "서양 미술계에서도 '우주'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라며 "단색화를 비롯한 한국미술이 국제무대에서 보다 좋은 평가를 받는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 PICK 안내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 기록... 김환기 작품 '우주' 131억여원 낙찰  2019.11.23.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23일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 기록을 달성한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 김환기 화백(1913~1974)의 작품 ‘Universe 5-IV-71 #200’(1971년 작·일명 ‘우주’). ‘우주’는 이날 저녁 홍콩에서 열린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8800만 홍콩달러(약 131억8750만원)에 낙찰됐다. 크리스티 코리아 제공.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 김환기(1913~1974)의 작품 ‘Universe 5-IV-71 #200’(일명 ‘우주’)이 23일(현지 시간) 미술품 경매사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8800만 홍콩달러(약 131억8750만원)에 낙찰되면서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를 기록했다.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 기록을 거듭 경신해온 김 화백의 작품이 이날 기존 최고가 기록을 다시 깬 것이다. 한국 현대 미술작품이 경매에서 100억원을 돌파한 것도 처음이다. 또 ‘우주’가 최고가를 차지하면서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 상위 1~10위 가운데 김 화백의 작품이 9개에 이르는 대기록도 세워졌다(이중섭 화백의 ‘소’가 9위다). 미술계에서는 한국 작가의 작품값이 100억원 대를 넘어서면서 세계 미술시장에서 한국의 입지가 다져지고, 향후 김 화백은 물론 한국 화가 작품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1971년에 미국 뉴욕에서 그려진 작품 ‘우주(Universe)’는 푸른색 전면 점화(點畵)로 김 화백의 전성기 화력을 보여주는 대표적 걸작으로 평가받아 왔다. 김 화백 작품 중 유일하게 2폭 짜리이자 크기도 가장 크다(254×127㎝×2㎡). ‘우주’는 김 화백의 후원자로 미국에서 활동한 의사 김마태씨와 부인 전재금씨가 작가에게서 직접 구입, 40여년 소장해왔다. 경매에 나온 것도 이번이 최초다. ‘우주’는 이날 저녁 홍콩 완차이의 컨벤션센터 그랜드홀에서 열린 크리스티 홍콩의 ‘20세기와 동시대미술 이브닝 세일’에 17번째로 출품됐다. ‘우주’ 경매는 시작가 4200만 홍콩달러로 막을 열면서 경합이 벌어졌다. 치열한 경합 끝에 결국 전화로 응찰한 낙찰자가 시작가의 2배가 넘는 131억여 원의 최고가를 부르면서 경매는 마감됐다. 낙찰자는 경매 특성상 신원이 공개되지 않지만, 외국인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이자 김 화백 작품의 최고가이기도 했던 기존 최고가 기록은 지난해 5월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6200만 홍콩달러(약 85억3000만원)에 낙찰된 붉은색 점화 ‘3-Ⅱ-72 #220’이다. 2017년 4월 케이옥션 서울경매에서는 푸른색 전면 점화 ‘고요 5-IV-73 #310’가 65억5000만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김 화백의 작품이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를 처음 기록한 것은 2015년 10월이다. 홍콩에서 열린 서울옥션 경매에서 1971년 작품 푸른색 전면점화 ‘19-Ⅶ-71 #209’가 약 47억2100만원에 낙찰되면서 직전 최고가 기록이던 박수근 화백의 작품 ‘빨래터’를 뛰어넘었다. 이후 김 화백의 작품은 자체 경신을 거듭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도재기 선임기자 =====================================/// 한국미술 新 기원 연 김환기… "세계시장이 주목할 것"  2019.11.23.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한국미술품 최고가 10위 중 9개 김환기 작품  (홍콩=연합뉴스) 강종훈 기자 = 김환기 1971년작 '우주'(Universe 5-IV-71 #200)가 23일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한국 미술품 사상 처음으로 낙찰가 100억원을 돌파했다. (홍콩=연합뉴스) 강종훈 기자 = 김환기 대표작 '우주'(Universe 5-IV-71 #200)가 23일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예상을 크게 웃도는 가격에 판매되며 시장을 깜짝 놀라게 했다.  국내 미술품 사상 최초로 경매 낙찰가 100억원 돌파가 기대됐던 '우주'는 이에 그치지 않고 단숨에 130억원대를 기록했다. 한국 미술이 국내 시장을 넘어 세계로 도약하는 계기가 될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 대기록 세운 김환기 대표작 '우주' 김환기 작품 가운데에서도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우주'는 경매 출품 당시부터 화제가 됐다.  1971년 완성 후 경매 시장에 처음 나온 데다 예술성, 희귀성을 모두 갖춰 낙찰가 100억원 돌파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점쳐졌다. 그동안 많은 미술계 '큰손'들이 손에 넣고자 했고, 경매사들도 이 작품을 시장에 내놓기 위해 애쓴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경매에서도 국내외 컬렉터들의 관심이 뜨거웠다. 시작가는 약 60억원(4천만 홍콩달러)이었으나 추정가 상단인 95억원 선을 순식간에 넘고 100억원마저 돌파했다. 현장에 묘한 긴장감이 맴도는 가운데 전화로 참여한 두 입찰자 간에 치열한 경합이 벌어져 가격은 132억원까지 치솟았다.  일각에서는 홍콩 정세 불안 등으로 낙찰가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으나 기우였다. 별을 상징하는 푸른 점들로 캔버스를 가득 채운 '우주'는 작가의 작품세계가 완성된 뉴욕 시대 대표작이다. 김환기 특유의 점화 중에서도 정신적, 기술적으로 완전히 성숙한 단계의 작품으로 평가된다.  김환기는 1970년께 얇은 서예 붓으로 수묵화를 그리는 기법으로 전체 화면에 점을 찍는 전면점화를 선보였다. 이후 타계할 때까지 캔버스를 내려다보면서 한 점씩 찍어나가는 작업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이로 인해 척추신경이 손상될 정도였다. '우주'는 김환기 전체 작품 중 가장 폭넓은 푸른 색조를 사용한, 가장 큰 그림이다. '환기 블루'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로 푸른빛은 김환기를 대표하는 색이다. 작가가 남긴 유일한 두폭 그림이라는 점에서도 특별하다. 작가의 추상화 가운데 완전한 원형 소용돌이 형태가 나타나는 드문 작품이기도 하다.  (홍콩=연합뉴스) 강종훈 기자 = 김환기 1971년작 '우주'(Universe 5-IV-71 #200)가 23일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한국 미술품 사상 처음으로 낙찰가 100억원을 돌파했다. ◇ "한국 미술 재평가 계기 만든 쾌거" 세계적인 경매회사 크리스티는 '우주'를 가장 귀한 작품을 소개하는 20세기&동시대 미술 부문 '하이라이트 이브닝 경매'에 올리고 별도 도록도 제작하는 등 공을 들였다.  이날 경매에는 김환기를 비롯해 요시모토 나라, 산유, 자오우키, 후지타 등 아시아 대표 작가들의 작품이 여럿 나왔다. 그중에서도 '우주'와 이날 경매 최고가인 398억6천만원(2억6천600만 홍콩달러)에 낙찰된 산유의 '다섯 명의 나부'에 이목이 쏠렸다. '우주'는 프리뷰 전시장에서도 산유 작품과 마주 보는 부스에 전시됐다. 그만큼 이번 경매에서 김환기와 '우주'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고, 그래서 이날 경매 결과가 더욱 중요했다.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는 직전 기록보다 무려 47억원 뛰었다. 기존 기록은 김환기의 1972년작 붉은색 전면점화가 지난해 5월 기록한 85억3천만원(6천200만 홍콩달러)이었다.  2015년 10월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47억2천만원에 팔린 푸른색 전면점화 '19-Ⅶ-71 #209'를 시작으로 김환기 작품은 지난 4년간 한국미술품 최고가 기록을 7차례나 다시 썼다.  이날 '우주' 경매 결과를 포함하면 국내 미술품 판매가 상위 10위권이 9위 이중섭 '소'(47억원)를 제외하고 모두 김환기 작품으로 채워진다. 이날 경매 전까지 10위였던 박수근 '빨래터'가 11위로 내려갔다.  미술계는 김환기의 약진으로 한국 미술이 세계시장에서 더 주목받을 것으로 기대한다. 서진수 강남대 교수는 "어려운 시기에 절대 가치를 인정받은 쾌거로, 한국 대표작가 김환기가 국제 시장에서도 통한다는 것을 보여줬다"며 "상징적인 액수 100억원을 돌파한 김환기 작품에 대한 관심은 앞으로 더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우찬규 학고재갤러리 대표는 "100억원대를 깨는 한국 작가가 나왔으면 하는 미술계 염원이 있었는데 매우 의미 있는 결과"라며 "그동안 작품성에 비해 국내 작가들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는데 반전 계기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옥경 서울옥션 대표도 "앞으로 한국미술이 국내외에서 다시 한번 더 부각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홍콩=연합뉴스) 강종훈 기자 = 홍콩 홍콩컨벤션전시센터(HKCEC) 그랜드홀에 전시된 김환기 1971년작 '우주'(Universe 5-IV-71 #200). 이 작품은 23일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한국 미술품 사상 처음으로 낙찰가 100억원을 돌파했다. 2019.11.23 ===================================/// '우주', 김환기 작품 중 유일한 두폭화 ‘우주’는 김환기 작품 중 유일한 두폭화(diptych)이다. 이는 뉴욕 시절 김환기의 추상예술의 정수이며, 그의 작품 중 가장 큰 작품이기도 하다. 세로 254cm, 가로 254cm의 화폭을 푸른 점들이 가득 메우며 두 원의 형상을 이루고 있다. 이는 김환기 작고 3년 전에 완성한 것으로 그의 그림 중 가장 대표적으로 손꼽히지만, 경매 시장에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우주’를 소장해온 이들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김마태(한국명 김정준)·전재금씨 부부. 1951년 부산 피난시절 김환기를 만난 부부는 그에게서 작품을 직접 사들여 50년 가까이 보관해왔다. 첫 만남부터 김 화백이 타계한 1974년까지 김마태씨는 단순한 후원가를 넘어 친구로서 김환기의 작품 활동을 지원해왔고, 그에게 있어서 ‘우주’는 "미술 작품 이상이었다"고 한다.  1972년 김마태 박사의 거실서 자신의 작품 '우주' 앞에 앉아 있는 김환기. [사진 환기재단·환기미술관] ‘우주’는 그동안 환기미술관에서만 전시됐다. 이후 크리스티를 비롯한 여러 경매사나 바이어들이 재단 측으로 숱한 러브콜을 보냈으나 소장자인 김마태씨가 답한 적은 없었다. 그런 소장자가 ‘우주’를 경매에 내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에블린 린 (Evelyn Lin) 크리스티 홍콩 아시아 20세기 & 동시대 미술 부문 부회장은 "그가 작품을 시장에 내놓은 것은 단순히 판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술 시장 내에서 김환기에게 걸맞은 자리를 찾아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전했다.  “(김마태·전재금씨 부부가) 크리스티 뉴욕에 연락해 왔을 때, 저는 운명을 느꼈어요. 김환기의 작품을 미술 시장에서 올바르게 자리매김(포지셔닝)하는 것이 김마태씨의 꿈이었기에 크리스티 뉴욕에 먼저 연락해온 것입니다.”  린 부회장은 김환기의 ‘우주’가 한국 추상미술의 정수뿐만 아니라 “아시아 문화 자체를 대변”한다고 말했다. 두 개의 원은 음과 양의 조화, 해와 달, 빛과 그림자, 삶과 죽음, 남성과 여성 등과 같은 우주의 모든 기운을 상징한다는 점에서다. 제목이 ‘우주’인 것도 그런 이유다.  김환기 기록, 여기서 끝날까? 이미 한국 미술 시장에서는 김환기의 경쟁상대는 김환기뿐이었다.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 톱5가 전부 김환기 작품이다. 앞서 지난해 5월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붉은색 점화 ‘3-II-72 #220’이 85억에 낙찰되면서 김환기의 최고가 기록과 한국 미술품 경매 기록이 경신된 바 있다. 올해 4월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는 분홍색 점화 ‘무제’가 71억원에 낙찰됐다.  작품가격 사이트 K-Artprice에 따르면 2015년부터 2019년 상반기까지 지난 5년간 김환기의 작품은 총 1413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김환기 작품은 나오기만 하면 최고가”라는 것이 이학준 크리스티 코리아 대표의 설명이다. 린 부회장은 전날 경매에 앞서 “김환기의 신기록은 ‘우주’만이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한국미술 성장에 직결될까? 하지만 린 부회장은 “(김환기 작품의 최고가 기록이)바로 한국 미술 시장의 성장과 직결되지는 않을 것”이라 덧붙였다. 김환기의 작품이 재평가되는 것은 그 자체로 유의미하지만, 한국 미술의 걸작(마스터피스)은 경매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이번 신기록은 “김환기 미술 시장만 바꿀 것”이라 말했다. “한국에는 좋은 작품들이 많지만 대부분이 미술관 소장이라 시장에는 좋은 작품이 많이 없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한국을 처음 방문한 후 정상화 화백의 그림을 보고 반했지만, 작품 가격이 터무니없이 낮았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 미술 시장을 부흥시키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게 됐다”고 전했다. 현재 한국 미술 시장은 연간 4000억원 규모로, 28조원 정도의 미국이나 여타 선진국과는 비교하기 어렵다.  "한국 미술 저평가돼 있다" 린 부회장은 “이번 경매에 나온 김환기, 박서보 등 많은 한국 작가들의 작품이 인정받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한국 미술 자체가 저평가되어 있다”면서 “미술은 어떤 아이디어를 어떤 방식으로 소개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변한다”며 “한국 미술에는 충분한 잠재력이 있다”고 밝혔다.  /홍콩=윤소연 /코리아중앙데일리 기자 ======================================/// 한국 미술사 새로 쓴 김환기는 누구? 2019.11.24.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 앵커멘트 】 한국 미술사를 새로 쓴 김환기 작가는 대중은 다소 생소하실 겁니다. 어떤 인물이고, 이번 경매는 어떻게 이뤄진 건지 뒷얘기를 문화스포츠부 국영호 기자와 함께 뉴스추적을 해보겠습니다. 【 질문 1 】 132억 원, 낙찰가가 이 정도일 것이라고 예상이 됐던 건가요? 【 답변 1 】 사실 이번엔 한국 미술품 최초로 100억 원을 돌파할지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지난해 다른 작품이 국내 최고인 85억 원 거래가 됐기 때문이었는데, 이런 액수가 나오자 다들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 질문 2 】 정말 그랬을 것 같은데, 경매 현장 분위기 자세히 전해주시죠. 【 답변 2】 이번 우주란 작품의 경매는 10분 정도 진행이 됐습니다. 가치가 낮게 매겨진 작품은 1분, 중요 작품은 5분 정도 소요된 걸 보면 '우주'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중국과 일본 작품 경매가가 그동안 200억 원을 훌쩍 뛰어넘어왔었는데, 우리 미술도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기게 됐다는 평가도 나옵니다. 현장에 있었던 관계자 얘기 들어보겠습니다. ▶ 인터뷰(☎) : 이학준 / 크리스티 코리아 대표 - "마지막에 8,800만 홍콩 달러에 최종 낙찰됐을 때 장내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나왔습니다. (한국 미술이 세계) 주류 미술시장에 편입됐다는 신호탄으로 보시면 될 것 같아요." 【 질문 3 】 그런데 132억 원에 낙찰한 분, 누구인지 알 수 있을까요? 【 답변 3】 크리스티 경매 측은 고객 정보 보호를 위해 '신원 미상의 전화 응찰자'로만 밝힌 상황인데요. 오늘 오전에 한 언론에서 '국내 모 건설사 회장의 손자인 25세의 한 큐레이터'라고 보도를 해서 이목을 끌었습니다. 당사자는 "애매한 부분 있어 말씀드리기 어렵다"고 말을 아낀 상황이고, 일각에선 외국인 수집가란 말도 나옵니다. 그리고, 낙찰자는 구매 수수료까지 포함하면 최종 구매가로 우리 돈으로 153억 정도를 내야 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 질문 4 】 그렇다면, 영상에 계속 나오긴 했지만, 우주란 작품 어떤 그림인가요. 【 답변 4 】 작품은 자세히 보시면 아시겠지만, 점으로 꽉 채워진 '전면점화' 형태입니다. 작가가 작품명처럼 우주를 표현한 것인데요, 두 가지로 해석해 그린 두 폭의 그림이 하나로 붙여져 구성돼 있습니다. 전체 크기는 가로, 세로 2m를 훌쩍 뛰어넘는 대형작품인데요, 김환기 작품 가운데 가장 큰 걸작으로 평가됩니다. ▶ 인터뷰(☎) : 문지수 / 크리스티 코리아 실장 - "음과 양, 여성과 남성 이렇게 우주의 본질을 하나의 캔버스에 담아내려고 하셨거든요. 고국의 밤하늘을 그리워하면서 한 점 한 점 그리셨던." 【 질문 5 】 그럼, 이런 걸작을 완성한 김환기 작가는 어떤 인물인가요. 【 답변 5 】 김환기 작가는 사실 고인입니다. 1913년에 전남 신안에서 태어나 1974년 미국 뉴욕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우주는 작고 3년 전인 1971년에 그린 것이고요. 굴곡진, 어떻게 보면 드라마 같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청소년기는 국내에서, 이후 일본 대학에서 미술을 공부했고, 프랑스와 미국에서 활동하며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의 국제화를 이끌었습니다. 유명 시인인 이상의 부인과 재혼을 한 것으로 알려졌고요, 미술 인생 말미엔 미국 뉴욕에서 이번 우주를 비롯한 걸작들을 쏟아냈습니다. 【 질문 6 】 그럼 우주란 이 작품 대중은 볼 수 있습니까. 【 답변 6 】 사실, 지난달까지는 김환기 작가의 이름을 딴 환기미술관에 전시됐었습니다. 그런데 작품이 현재 경매를 위해 해외로 가 있는 상황이라 쉽진 않아 보입니다. 낙찰자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내인이라고 해도 개인적으로 소장한다면 공개가 어렵고, 외국인이라면 더더욱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훌륭한 작품을 공개한다고 하면 가능할 일일 것 같습니다. ---- 김환기 작가는 잠자는 시간 빼고는 그림만 그렸을 정도로 집념과 열정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그만의 예술혼과 진정성이 이제 와서 국내를 넘어 전 세계에 알려지고 있는 것인데, 그 울림이 상당하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도 큰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문화스포츠부국영호 기자였습니다. ===============================、、、 ... ‘우주’가 경매에 나오는데 김환기의 오랜 절친이자 후원자였으며 주치의였던 김마태(91) 박사와의 인연이 그 배경에 있어 눈길을 끈다. 크리스티는 이번 경매를 앞두고 발간한 ‘우주’ 도록을 통해 이 작품을 40여년간 소장하며 김환기와의 우정을 지켜온 김마태 박사의 인터뷰를 소개했다. 김마태 박사는 현재 미국 뉴욕에 산다. 인터뷰에 따르면 김환기와 김마태 박사의 첫 만남은 한국전쟁 시기인 1950년대 부산 광복동의 한 커피집이었다. 당시 전쟁을 피해 내려온 많은 예술가들이 이곳에 모여들었는데 김마태 박사의 부인 전재금의 어머니인 소설가 김말봉도 그 중 하나였다. 김마태 박사는 당시 약혼자였던 전재금과 함께 길에서 우연히 김환기와 만나 인연을 맺고 곧 절친이 됐다. 이후 두 사람은 미국과 프랑스 등 각기 다른 대륙에 있었음에도 돈독한 우정을 이어왔다. 1963년 김환기가 서울에서 뉴욕으로 이주할 것으로 결심하고 그의 부인이 이듬해 합류할 때 김마태 박사가 항공권 비용을 도왔다. 이에 김환기는 감사의 표현으로 자신의 1959년작 ‘섬의 달밤’을 김마태 박사 부부에게 선물했다. 이후 이들 부부는 점점 더 자주 만났으며 김마태 박사는 개업과 함께 더 많은 김환기의 작품을 구매하며 컬렉션을 점차 키워갔다. ‘우주’는 뉴욕의 포인덱스터 갤러리에서 1971년 전시됐고 이때 김마태 박사와 그의 부인이 작품을 구매해 소장해왔다. 김마태 박사는 “김환기 화백은 언제나 환영 받는 손님이었다”며 “친화력 있는 웃음과 짓궂은 농담으로 인해 그는 중심 인물로 종종 주목을 받곤 했다”고 회상했다... =================================///   김환기 ‘우주’ 구매자 미스터리… “한국인 아니다” VS “20대 한국인 컬렉터”  2019.11.24.    화나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머니투데이 김고금평 기자] [131억 한국 미술 최고가 경신한 ‘낙찰자’에 관심 집중…송자호 큐레이터 “애매한 부분 있어”] 김환기, '우주'(Universe 5-IV-71 #200), 1971 /사진제공=크리스티코리아 23일 열린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한국 미술 역사상 최고가인 131억원에 낙찰된 김환기의 대표작 ‘우주’의 주인공을 놓고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미술계 관례상, 낙찰자의 신원은 비공개가 원칙이지만 구매자가 20대 한국 컬렉터라는 얘기가 퍼지면서 ‘사실 여부’가 관심사로 떠올랐다. ‘우주’는 10분이 넘는 치열한 경합 끝에 약 131억 8750만원(8800만 홍콩달러)에 낙찰됐다. 구매 수수료를 포함하면 150억원이 넘는다. 한국 미술품이 경매에서 100억원이 넘는 가격에 팔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우주’의 경매를 담당한 크리스티코리아 측은 낙찰가를 알리면서 구매자는 “한국인이 아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몇 시간 뒤 K씨가 보낸 ‘긴급속보’라는 제목의 메일에는 “한국인이 최종 구매자”라며 간단하지만 구체적인 설명도 덧붙였다. K씨 내용에 따르면 25세 한국인 송자호 큐레이터가 마지막까지 전화응찰로 치열한 경합으로 따라갔으며(구매의사가 확실해 최종 가격까지 경합했다는 의미) 미국 국적의 송씨 대리인이 직접 전화연결로 낙찰을 받았다는 것이다. 또 구매 목적은 송씨 개인의 수집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이학준 크리스티코리아 대표는 “구매자가 한국인이 아니라는 보도자료 내용은 변함이 없다”며 “송자호 큐레이터가 누군지 모른다”고 했다. 낙찰자가 한국인이냐 아니냐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자, 송자호 큐레이터는 24일 오전 한 언론과 전화통화에서 “애매한 부분이 있다”며 직·간접적으로 구매에 관여했음을 ‘사실상’ 인정했다. 한국 미술 경매 시장에서 ‘최초’와 ‘최고’ 기록이 나오면서 송 큐레이터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높아졌다. 송씨는 송승헌 전 동원건설 회장의 장손으로, 동원건설에서 문화예술 분야를 도맡고 있다. 현재 M컨템포러리 아트센터의 수석큐레이터다. 미국 보스톤에서 고등학교 졸업 후 뉴욕으로 이주한 그는 2015년부터 동원건설 큐레이터로 입사해 다양한 전시의 기획과 후원을 담당해왔다. 그는 올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가업 대신 미술을 선택한 것에 대한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다”며 “하지만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상, 꿈꿔온 것을 이뤄내고 싶어 이 길을 택했다”고 말했다. 송 큐레이터는 국내 신인작가를 후원하고 다양한 작품을 수집하면서 국내외 갤러리로부터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또 걸그룹 카라 출신의 박규리와 연인 사이로도 화제를 모았다. 두 사람은 지난 6월 M컨템포러리 아트센터에서 열린 ‘낙서 천재’ 존 버거맨 전시회에서 만나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송 큐레이터는 “앞으로 기획하는 전시에 연예인 등을 참여시켜 대중적으로 더 알리고 싶다”며 미술의 대중화를 강조하기도 했다. /김고금평 기자 =======================================/// 두산백과 김환기   [ Kim Whan Ki , 金煥基 ] 요약 한국의 서양화가.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서구 모더니즘을 한국화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초창기 추상미술의 선구자였고, 프랑스와 미국에서 활동하며 한국미술의 국제화를 이끌었다. 이미지가 걸러진 절제된 조형성과 한국적 시 정신을 바탕으로 한국회화의 정체성을 구현해냈다. 출생-사망 1913.2.27 ~ 1974.7.25 호 수화(樹話) 국적 한국 활동분야 회화 출생지 전남 신안 주요수상 제7회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 회화부문 명예상(1963),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 대상(1970) 주요저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2005) 주요작품 《론도》(1938), 《항아리와 여인들》(1951), 《항아리와 매화》(1954), 《영원의 노래》(1957), 《달과 산》(1960), 《작품》(1968),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 주요업적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서구 모더니즘의 한국화 구현 김환기(金煥基)는 1913년 전남 신안군 기좌도(현 안좌도)에서 태어났다. 남도의 조그만 섬마을에서 자란 그는 푸른 바다와 깊고 넓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는 소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중학교 때 서울로 유학을 오지만 곧 중퇴하고 고향에 내려갔다가 다시 일본으로 갔다. 일본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1933년 도쿄 일본대학 예술학원 미술부에 입학해 1936년 졸업하고, 이어 대학 연구과를 수료한 다음 1937년 귀국했다. 대학시절 김환기는 동료들과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1934)나 ‘백만회’(1936) 같은 혁신적인 그룹을 조직하는 한편 ‘이과회’와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 시기에 그가 출품한 작품들에는 대부분 직선과 곡선, 그리고 기하학적 형태들로 구성된, 당시 한국 화단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비대상회화가 대담하게 시도되고 있어 우리나라의 선구적인 추상화가로서의 그의 초기 역할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론도》(1938) 같은 작품을 보면 음악적인 주제와 어울리는 흐르는 듯한 서정적 운율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러한 음악적 서정은 이후에도 그의 작품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요소이다. 해방 이후 김환기는 유영국, 이규상 등과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미술 그룹인 ‘신사실파’를 조직하고 그룹전을 열었다. 그는 서구의 양식을 실험하는 한편 한국적인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국 전쟁 중에는 부산으로 피난을 가 해군 종군화가로 활동하며 부산 피난시절을 묘사한 작품들을 남기기도 했다. 1950년대 김환기 작품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작품의 주제가 전통적인 소재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달, 도자기, 산, 강, 나목(裸木), 꽃, 여인 등의 소재를 통해 그는 한국적인 미와 풍류의 정서를 표현했다. 특히 백자 항아리의 멋에 깊이 심취하여 도자기는 그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1956년에서 1959년까지의 파리 시기에도 지속되었다. 그의 한국적 모티프에 대한 탐닉은 파리에서의 제작 기간 동안 그 농도를 더했다. 그가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루브르 박물관에도 가지 않았던 이야기는 익히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항아리, 십장생, 매화 등을 기본으로 한 추상 정물화 작업을 선보였고, 이는 후에 고국산천의 모습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김환기의 색채는 화면 가득 푸른색을 띠게 되었다. 그에게 푸른색은 고국의 하늘과 바다의 색이고, 그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색이기도 했다. 1963년 10월 김환기는 제7회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대표로 참가해 회화부문 명예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바로 뉴욕으로 가 11년에 걸친 뉴욕 생활의 첫 발을 내디뎠다. 그가 뉴욕에 정착한 1963년 무렵에 미국 화단의 주도적 경향은 색면회화였지만, 한편으로는 팝 아트와 미니멀리즘을 비롯한 여러 새로운 실험적 미술들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의 뉴욕 시기 작품은 크게 형상이 남아 있는 1970년 이전과 점과 선만의 완전한 추상으로 화면 전체가 변하는 1970년 이후로 나눌 수 있다. 1970년에서 그가 타계한 1974년까지는 그의 활동이 절정에 이른 시기이다. 1970년부터 김환기의 캔버스는 전체가 점들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1970년에 제작한 점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이 그 해 한국일보에서 주최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차지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이다. 김광섭의 시 의 마지막 구절을 제목으로 가져다 쓴 이 작품에서 김환기는 뉴욕이라는 거대한 도시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수많은 인연들을 하나하나의 점으로 새겨 넣었다. 여기에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우주적 윤회를 담고 있다. 한 점 한 점 찍어가는 행위는 호흡을 고르고 정신을 집중하여 자연과 합일을 이루는 과정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의 작업은 문인화의 정신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김환기는 누구보다 서양미술을 풍부하게 경험했지만, 그 정신에 있어서는 동양의 전통을 계승하고 예술을 통하여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이 시대의 문인화가였다. 비록 자연의 외형은 사라졌으나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자연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1971년과 1972년의 그의 작품에서는 점화의 단조로울 수 있는 화면에 활형의 곡선으로 변화를 주었다. 1973년에는 활형과 직선들이 교차되거나 어우러져 사용되었다. 이러한 요소는 무한으로 열린 공간의 확장을 상징하고 광대한 우주의 에너지를 느끼게 해준다. 1970년 이후 그의 작품은 점점 더 크기가 커져 200호 상당의 대작들을 남겼다. 이들 작품은 한 시기의 작업이라기보다 그의 전 생애 작업을 갈무리하여 완성한 것이라고 하겠다. 김환기는 1974년 7월 갑작스런 뇌출혈로 뉴욕의 한 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고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한국적 풍류와 정취를 지닌 인정 많은 감성의 소유자였던 그는 온몸으로 예술을 살다가 이렇게 61세의 생을 마감했다. 그의 곁은 부인 김향안(본명 변동림)이 지켰다. 1992년에는 그의 예술정신을 기리기 위해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이 세워졌다. 그의 생가인 ‘신안 김환기 고택’은 2007년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자료 251호로 지정되었다. 주요 작품에는 《종달새 노래할 때》(1935), 《론도》(1938), 《항아리와 여인들》(1951), 《항아리와 매화》(1954), 《영원의 노래》(1957), 《산》(1958), 《달과 산》(1960), 《18-VII-65 밤의 소리》(1965), 《작품》(1968),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 《Echo 22-1》(1973), 《09-05-74》(1974)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환기 [Kim Whan Ki, 金煥基] (두산백과) ==============================================/// 한국의 미술가 동경유학: 추상회화를 실험하다     김환기의 작품활동에서 별로 알려지지 않은 시기가 동경유학을 했던 시절이다. 그 이유는 그 무렵에 활동한 다른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현재 작품들이 많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김환기의 부인 김향안은 동경유학 시기를 회고하며 “우리는 동경에서 공부했지만 유럽의 미술을 또는 세계문학을 공부했으며 되도록 일본의 영향을 안 받으려고 노력했었다. 실은 영향을 받을 것도 없었고 일본이란 우리들 생리에 맞지도 않았다”라고 말하고 있다.1) 그러나 김향안의 회상을 존중하더라도 일본에서 미술학교를 다니고 배우는 과정에서 일본화단과 알게 모르게 연관을 맺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동경유학 시절 김환기는 우리나라의 어느 화가들보다 일본화단의 진보적인 화가들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이러한 사실이 작가로서의 그에 대한 평가절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1913년 전라남도 신안군 기좌도에서 태어난 김환기는 부농 김상현의 1남 4녀 중 넷째로 태어난 외아들이었다. 그는 상당히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서 1927년 서울의 중동중학에 진학하였다. 김환기는 19세였던 1931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동경의 니시키시로중학[錦城中學]을 다녔고 1년 후인 1932년에 졸업했다. 그 후 1933년부터 1936년까지 일본대학 예술학원 미술학부에서 공부하였고, 졸업 후 1937년까지 연구과에 남아 있었다. 『일본대학 예술학부 50년사』에 의하면 1934년 당시 미술과 관계되는 교수와 강사 중 서양화 실습 교수에는 후기인상주의 양식으로 그리던 기무라 쇼오하치[木村莊八, 1893~1958]를 비롯해 나카시마 주니로[長島重二郞]가 있었고, 일본미술사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가 담당하였다.2) 김환기가 이들에게서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으나 일본의 민예운동을 일으킨 야나기가 이 무렵 일본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의 관심을 끈다. 김환기는 어느 글에서도 자신이 야나기에게 배웠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으나 조선 도자에 대한 야나기의 관심이 혹시 김환기가 훗날 한국의 도자를 사랑하고 작품의 소재로 삼게 되는 동기가 되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해보게 된다. 일본대학 재학시절인 1935년에 김환기는 이과회(二科會)에서 주최하는 ‘제22회 이과전(二科展)’에 를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그의 데뷔 작품인 약 100호 크기의 이 작품은 현재 사진으로만 남아 있는데 이 작품에 대해 김환기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는 달기만 했던 작품이다. 모델 없이 제작했으나 누이동생 사진을 보며 머릿속으로 그렸던 작품이었다. 구름, 버드나무, 새알들이 보이는 지극히 낭만적인 풍토를 느끼게 하는 그림이었다. 나는 남방의 따사로운 섬에서 나고 섬에서 자랐다. 섬이란 태풍이 오기 전에는 평화롭기만 했다. 사실이다. 그렇지만 특히 종달새 노래하기 시작하는 봄이면 살았나 죽었나 한계를 모를 정도로, 하여간 무엇인지 모를 것들이 느껴지기만 하던 내 고향이었다. 나의 소년 시절의 이러한 것들을 표현해보려고 내 딴에는 애써보고 한 달 만에 가 이루어졌다.3) 이 작품에서 김환기는 사실적인 묘사에서 벗어나 소녀의 상체나 팔을 거의 원통으로 단순화하고 추상화시키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머리에 올린 바구니의 명암표현에서는 입체주의[Cubism]적 단면화를 보는 듯하고, 바구니 안에 든 새알은 초기 입체주의 작품들에서 간혹 나타나듯 그대로 투명하게 표현되었다. 또 명암을 강하게 대조시킨 배경과 축도된 원근법을 통해 이미 사실주의적 묘사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35년, 캔버스에 유채, 178.0×127.0cm. 일본대학에 재학 중이던 1935년, ‘제22회 이과전’에 출품하여 입선한 작품으로 김환기의 데뷔작이다. 원통처럼 표현된 상체나 팔, 투명하게 보이는 새알 등을 보면 사실적인 묘사에서 벗어나 대상을 단순화ㆍ추상화시켜 표현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35년, 캔버스에 유채, 178.0×127.0cm. 일본대학에 재학 중이던 1935년, ‘제22회 이과전’에 출품하여 입선한 작품으로 김환기의 데뷔작이다. 원통처럼 표현된 상체나 팔, 투명하게 보이는 새알 등을 보면 사실적인 묘사에서 벗어나 대상을 단순화ㆍ추상화시켜 표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에서 보이는 이러한 특징은 입체주의의 변형, 예를 들면 레제(Fernand Léger, 1881~1955)의 작품에서 기하학적으로 원통화되어가는 인물표현들이나 말레비치(Kasimir Malevich, 1878~1935)의 1912년경의 초기 작품들, 또는 1928년에 프랑스에서 귀국해 ‘이과회’를 중심으로 활약하던 도고 세이지[東鄕靑兒, 1897~1978]의 양식과도 유사성을 가진다. 이와 같이 입체주의에서 유래한 단순화된 형태의 추구는 자연을 합리적으로 분석하려는 의지에서 출발한 것이고 근본적으로는 20세기 초 근대화ㆍ도시화되어가는 유럽 사회의 모더니티의 표현이다. 그런데 김환기의 작품에서는 이러한 서구의 실험적 형태와 이질적인 토속적인 서정성이 서로 공존하면서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섬이라는 배경설정과 머리에 바구니를 이고 가는 소녀의 전 근대적 주제, 그리고 작가가 털어놓는 평화로운 섬의 낭만적 분위기가 서구의 근대적인 양식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이때부터 자연에 대한 서정적 반응이 김환기 작품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으로 깔려 있음을 볼 수 있다. 일본에서 김환기는 대학 밖에서도 다른 화가들과 더불어 공부하고 활약할 수 있었던 기회가 많았다. 우선 그가 와 같이 낭만적인 주제에서 좀더 기하학적 추상으로 전환하는 데에 적어도 간접적인 영향을 준 화가는 무라이 마사나리[村井正城, 1905~1999]였다. 1928년부터 1932년까지 유럽에서 공부한 무라이는 귀국 후 문화학원에서 가르치면서 주로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의 1910년대 회화를 연상시키는 작품을 제작하였으나 1937년부터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풍의 기하학적 추상으로 변모를 모색한 화가였다. 무라이는 1935년 12월에 동경 시나가와[品川]구의 ‘포플러의 집’으로 불리던 아파트로 이사를 했는데 그 후 이곳에는 화가이자 문화학원에서 가르치던 츠다 세이슈[津田正周, 1907~1952]가 이사해왔고, 화가 오노사토 도시노부[小野里利信, 1912~1986]가 자주 놀러왔다. 이 ‘포플러의 집’에 약 1년 정도 같이 기거한 우리나라 화가들이 김환기와 유영국(劉永國, 1916~2002)이었다. 무라이 마사나리의 화실에서(1938년 동경). 오른쪽으로부터, 김환기, 길진섭, 무라이 마사나리, 무라이의 부인이다. 무라이는 ‘포플러의 집’으로 불리던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김환기는 이곳에서 1년 정도 같이 기거하였다. 1991년 일본에 있었던 필자4)는 무라이와 인터뷰를 할 수 있었는데 무라이는 키가 훌쩍 컸던 김환기를 기억하면서 그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잘 울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무라이와 츠다 그리고 오노사토는 모두 1937년부터 시작되는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들과의 친분 때문에 김환기뿐 아니라 문화학원에 다니던 문학수(文學洙, ?~?), 이중섭(李仲燮, 1916~1956), 유영국 등 우리나라 유학생들이 이 전시회에 참여하게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1936년은 김환기에게 매우 바쁜 해였다. 그는 ‘제23회 이과전’에 아직도 인물의 형상이 남아 있는 을 출품하여 입선했다. 이때 그는 훗날 일본 추상회화의 선구자들이 되는 도고 세이지, 야마구치 다케오[山口正男, 1902~1983], 사이토 요시시게[齊藤義重, 1904~2001], 야마모토 게이호[山本敬輔, 1911~1963] 등과 같이 제9호실에서 전시를 하게 되었다. 제9호실에서 전시한 이들 작가들은 1938년 10월에 도고 세이지와 후지타 츠구지[藤田嗣治, 1886~1968]를 고문으로 하여 ‘구실회(九室會)’를 결성하였다. 김환기는 1938년 12월 결성 성명서를 발표할 때 가입하였으나 1939년 5월에 있었던 제1회 전시회에 참여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며 그 직후 탈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5) 한편 1936년에 김환기는 길진섭(吉鎭燮, 1907~?), 다시카미 다케나[鶴見武長], 간노 유이코[管能由爲子]와 더불어 ‘백만회(白蠻會)’를 조직하고 동경 긴자에 있는 기노쿠니아[紀伊國屋] 화랑에서 네 번의 전시회를 가졌다. 이 그룹은 도고 세이지, 아베 곤고[阿部今剛, 1900~1968], 초현실주의 화가 고가 하루에[古賀春江, 1895~1933], 그리고 프랑스에서 화려하게 귀국했던 후지타 츠구지 등이 1933년에 개설한 아방가르드 양화(洋畫)연구소의 연습생들이 결성한 것이다.6) 김환기가 다니던 이 연구소의 일본 화가들은 전위적 추상화가에 속하였으며 전후에는 모두 유명 미술가들이 되었다. 이해 11월 그는 동경의 아마기[天城] 화랑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가졌으나 이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이나 반응에 대해서는 아쉽게도 알려진 바가 없다. 1937년 4월에 김환기는 일단 귀국했다. 귀국 후에도 1937년부터 1940년까지 계속해서 그는 일본 최초의 추상미술 공모전이었던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작품을 출품하였는데 아마도 그의 고향 기좌도 혹은 서울에서 작품을 보낸 것으로 추측된다. 이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한 김환기의 작품목록과 활동, 그리고 사진으로 남아 있는 그의 작품에 대해서 필자는 이미 논문으로 자세하게 언급한 바 있다. 7) 그가 출품한 작품들은 대부분 없어졌으나 사진 자료를 보면 대부분 곡선과 직선 그리고 기하학적 형태들로 구성된, 당시 서울 화단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던 비대상회화가 대담하게 시도되어 우리나라 추상회화의 선구자로서 그의 초기 역할을 확인할 수 있다. 다행히 남아 있는 예로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 중인 는 1938년도 ‘제2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은 제4회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으로 보인다. 에는 아직도 피아노의 곡선적인 형태와 사람의 형상이 남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평면에서 곡선과 직선, 그리고 흰색과 검은색, 노란색과 파란색들의 색면으로 이루어진 구성작품이다. 이것은 도 마찬가지이다. 김환기의 이러한 표현양식은 ‘자유미술가협회전’의 주류를 이루었던 기하학적 추상이나 구성주의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러나 말레비치나 몬드리안의 기하학적 추상작품들이 엄격하고 팽팽한 균형감과 역동감에 근거하는 데 비해 김환기의 와 같은 작품에서는 곡선이 더 많이 사용되었고, 음악적인 주제에 어울리게 흐르는 듯한 서정적 운율감을 느낄 수 있다. 김환기는 동경에 있으면서 서양음악에 눈을 뜨게 되었고, 음악적 서정은 그 후에도 그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1938년, 캔버스에 유채, 60.7×72.6cm,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곡선과 직선 그리고 흰색, 검은색, 노란색, 파란색들의 색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론도’는 순환부분을 가진 악곡 형식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음악적인 주제에 어울리게 서정적인 운율감이 드러나 있다.  1938년, 캔버스에 유채, 60.7×72.6cm,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곡선과 직선 그리고 흰색, 검은색, 노란색, 파란색들의 색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론도’는 순환부분을 가진 악곡 형식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음악적인 주제에 어울리게 서정적인 운율감이 드러나 있다. 서울과 기좌도를 왕래하고, 일본에 작품을 보내기도 하면서 지내던 김환기는 1940년 10월 서울의 정자옥(丁字屋) 화랑에서 제2회 개인전을 가졌다. 그러나 그 후 해방까지 일본이나 우리나라 화단의 활동은 전쟁의 영향으로 위축되었고 김환기의 경우에도 역시 거의 작품활동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그는 문인들을 많이 알고 지내게 되었고 문예지였던 『문장(文章)』 등에 글을 기고하기도 하면서 지냈다. 관련이미지 25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김환기(c)환기재단·환기미술관 이미지 갤러리 [네이버 지식백과]동경유학: 추상회화를 실험하다 (한국의 미술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신안 김환기 고택   [ 新安金煥基古宅 ] 이미지 크게보기 2015년에 촬영된 신안 김환기 고택 전경이다. 유형 유적 성격 생가 건립시기·연도 20세기초 소재지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 읍동리 문화재 지정번호 국가민속문화재 제251호 문화재 지정일 2007년 10월 12일 목차 정의 내용 정의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에 있는 일제강점기 에 설립된 화가 김환기의 생가. 국가민속문화재. 내용 국가민속문화재 제251호. 신안 김환기가옥은 서양화가 수화(樹話) 김환기(1913-1974)의 생가로서 현재 안채와 화실 1채로만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1920년에 건축된 것으로 원형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현 소유주는 신안군 교육청으로 되어있다. 현재는 교사 사택으로 사용하고 있다. 별동으로 건립된 화실은 1940년대에 건축된 것으로 이 건물 역시 현 소유자는 김환기 가족이 아닌 정기웅으로 되어 있다. 안채와 화실 사이에 사랑채가 있었으나 1970년대에 훼철되어 현재는 공터로 남아있다. 김환기는 안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화실은 김환기가 주로 방학을 이용하여 잠시 서울에서 내려와 작업을 하던 곳이다. 현재는 살림집으로 사용하여 내부가 많이 변형되어 있다. 신안 김환기가옥은 안좌면 읍동마을의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입지한 집터는 상당히 넓으며 건물 위치는 안쪽에서 보아 좌측에 안채, 우측에 화실이 자리하고 있다. 안채는 ㄱ자형 기와집으로 평면구성을 보면 좌측으로부터 곡간, 건너방, 대청마루, 안방, 정지의 순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정지 앞쪽으로 꺾어져서 다시 방 1칸이 있다. 이 방이 김환기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라고 한다. 구조는 다듬은 네모 초석 위에 네모기둥을 세운 민도리집 형식으로 되어 있다. 문은 정지의 판장문만을 제외하고 모두 띠살문으로 되어 있고 벽체는 회벽으로 마감되어 있다. 화실은 본래는 초가였으나 현재는 시멘트기와로 개조된 一자형 민도리집이다. 평면 구성은 현재 우측 전면으로 방 2개가 자리 잡고 있으며 그 뒤쪽으로 정지, 그리고 좌측으로는 넓은 대청과 끝으로 곡간이 자리하고 있다. 원래는 좌측으로 방 1칸과 현재의 정지에 목욕칸만이 있었고 나머지(곡간 제외) 공간은 모두 넓은 대청(화실)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집은 현재 별도의 담장 내에 위치하고 있다. 신안 김환기가옥은 건축적 측면 보다는 이 고장이 낳은 한국의 대표적 서양화가 김환기의 생가로서 그 존재의미가 있다 하겠다. 참고문헌 『전남의 전통건축』(천득염, 전남대학교박물관·전라남도, 1999) 『문화재도록』(전라남도, 1998) 『지방문화재 조사보고서』 (I)(전라남도, 1992. 10) 관련이미지 신안 김환기 고택 전경1999년 이전에 촬영된 신안 김환기 고택 전경이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촬영: )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신안 김환기 고택 [新安金煥基古宅]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7455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일회용품 사용",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057  추천:0  2019-11-22
카페·식당에서 종이컵 못 쓴다  2019.11.22.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앵커] 일회용품 사용이 많이 줄었다고 합니다만 아직 여전히 갈 길이 멉니다. 정부가 일회용품 대책을 내놨는데 플라스틱에 이어 종이컵도 2021년부터는 카페나 식당 등에서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또 음료를 살 때 보증금을 내고 컵을 반환하면 돌려주는 컵 보증금제 도입도 추진됩니다. 황선욱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이 커피 전문점은 지난해부터 매장 내 종이컵을 아예 없앴습니다. 다만 테이크아웃에 한해 종이컵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자율적으로 하고 있지만 2021년부터는 카페와 식당, 패스트푸드점 등에서 종이컵 사용이 금지됩니다. [이승재 / 서울 상암동 : 안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나갈 때 컵을 바꿔서 나가야 하는 불편한 점이 있긴 하지만 일회용품 사용 문제가 워낙 심각하니까 저는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시다 남은 음료를 일회용 컵에 다시 담아가려면 컵 비용을 추가로 내야 합니다. 일회용 컵 보증금 반환제도 추진됩니다. 현재 국회에 법안이 계류 중인데 법안이 통과하면 2008년 폐지됐다가 다시 부활하는 셈입니다. [유은혜 /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 온라인 쇼핑과 음식 배달 등 순간의 편리함을 위해 불필요하게 사용되는 일회용품이 450억 개 이상이라고 합니다.] 비닐 봉투 사용 금지 대상도 확대됩니다. 지금은 백화점과 쇼핑몰, 대형 슈퍼마켓 등이 대상인데, 2022년부터는 편의점, 제과점도 비닐 봉투 사용이 금지됩니다. 이밖에 포장 배달 음식의 일회용 수저와 플라스틱 빨대, 우산 비닐도 제공할 수 없게 됩니다. 정부는 이번 대책이 제대로 이행되면 2022년까지 일회용품 사용량이 35% 이상 줄어들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YTN 황선욱입니다.
7454    [그것이 알고싶다] - "난 다 봤어요"... 댓글:  조회:3135  추천:0  2019-11-21
신상옥 “조선시대 빤스가 어딨냐” 최은희 치마 입고 ‘강화도령’ 촬영 기사입력 2019.11.21.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신영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   내 영화의 뮤즈 최은희 최은희 “난 다 봤다” 두고두고 놀려 신 감독 북한서 네 차례 탈출 시도 수용소 갇혀 단식하다 간염 얻어‘분단의 여배우’라 불리는 최은희씨와 나는 1960년대 한국영화 전성기를 함께 누빈 환상의 콤비다. 연인으로, 부부로 호흡을 맞추면서 알게 모르게 정이 많이 들었다. 지난해 봄 최씨가 세상을 떴을 때 가슴 한쪽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하고 괴로웠다. 무엇보다 젊은 시절 함께 고생을 많이 했는데, 말년에 몸이 아파 고생하다 돌아간 게 참 마음 아프다.  “세월이 갈수록 더 보고 싶어요.” 최씨는 2006년 4월 남편 신상옥 감독을 먼저 떠나보내고 종종 이런 말을 했다. 1978년 1월 최씨가 홍콩에서 북한에 납치되자 신 감독은 2년 전 이혼한 전처를 찾겠다며 홍콩에 갔다가 그해 7월 똑같이 납북됐다. 최씨는 신 감독이 북한 수용소에 갇혀 있는 동안 병을 얻은 것 같다고 한탄하곤 했다. 술·담배도 안 하던 이가 북한을 다녀온 뒤 건강이 악화됐으니 말이다.  “북한에서 네 번이나 탈출하려다 붙잡혀 정치범 수용소 같은 곳에 끌려갔어요. 거기서 단식을 하니까 강제로 영양제 주사를 맞았는데 그게 소독이 제대로 안 돼서 C형 간염균을 얻은 거예요. 숨지기 2년 전엔 간 이식 수술도 받았어요.”  최은희 북 배우들 한복 지어 입혀  영화 ‘강화도령’(1963)에서 복녀(최은희)가 원범(신영균)에게 찢어진 바지를 꿰매줄 테니 벗어달라며 자신의 치마를 빌려주고 있다. [영화 캡처] 신 감독이 타계한 후 최씨도 점점 쇠약해졌다. 2010년부터 척추협착증으로 휠체어 신세를 졌고, 말년에는 일주일에 세 번씩 신장투석도 받았다. 그래도 바깥 활동을 할 때는 여배우의 품위를 지키겠다며 한껏 치장을 하고 씩씩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최은희씨와 종종 식사자리를 마련해 정담을 나눴다.  최씨를 처음 만난 건 신 감독의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에서다. 김진규·최은희씨가 주연이고 나는 조연으로 그녀의 오빠 역을 맡았다. 신 감독은 이때 갓 데뷔한 나를 눈여겨본 모양이다. 우리 셋은 ‘상록수’(1961), ‘연산군’(1961), ‘열녀문’(1962), ‘강화도령’(1963), ‘빨간 마후라’(1964), ‘이조 여인 잔혹사’(1967) 등에서 손발을 맞췄다. 다른 감독 연출작까지 포함해 최씨와 나는 30여 편을 함께했다.  300편 넘는 영화를 찍었지만 내 신체의 은밀한 부위까지 목격한 여배우는 최씨가 유일하다. ‘강화도령’ 촬영 때니 50년도 더 된 일이다. 나는 왕손인 줄도 모르고 강화도 갯벌에서 뛰놀며 살다가 하루아침에 철종으로 등극한 촌뜨기 ‘원범’, 최씨는 원범의 단짝 친구 같은 말괄량이 섬처녀 ‘복녀’로 나왔다. 원범이 산에서 칡뿌리를 뽑으려다 굴러 한 벌뿐인 옷이 찢어지자 복녀를 찾아가 꿰매 달라고 부탁한다. 복녀가 벗어준 한복치마를 입고 기다리는 장면을 찍는데 신상옥 감독이 이런 주문을 했다.  “신영균씨, 이거 찍을 땐 ‘빤스’까지 다 벗어야 해.”  “예? 농담이지요?”  “아이 벗으라니까. 조선시대에 ‘빤스’가 어딨느냐 말이야.”  신영균이 나무 뒤에 숨어 최은희의 치마를 두르고 바지를 벗어 던져준 후 드러난 속살을 감추고 있는 모습. [영화 캡처] 조선 말기에는 속옷이라고 해봐야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흰 천이었다. 나는 결국 흰 천만 걸쳐 입고 치마를 둘렀다. 한창 촬영하다 강둑에 앉아 쉴 때였나 보다. 아래쪽에 있던 최씨가 나한테 손가락질하며 웃기 시작했다.  “최은희씨, 갑자기 왜 그래?”  “아유 난 몰라, 다리 쩍 벌리고 편히 앉으니 속이 다 들여다보이잖아요.”  최씨는 이후 두고두고 나를 놀려댔다.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나는 그때 다 봤다”며 깔깔 웃곤 했다. 마침 영화 속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최씨는 상대 배우를 참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나보다 두 살 많은 영화계 선배였지만 나는 “최은희씨” 혹은 “최 여사”라고 불렀다. 영화밖에 모르는 남편, 신 감독 때문인지 최씨는 손재주가 좋고 생활력도 강했다. 밤 늦게까지 촬영이 이어질 때도 대기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법이 없었다(신 감독은 젊어서 못질 한 번 한 적이 없을 정도로 가정을 등한시했다).  “최 여사, 가만히 쉬지 않고 뭘 그렇게 계속해요?”  “바느질이든 뜨개질이든 뭘 해야 시간이 잘 가요.”  탈북 후 미국 머물 때 찾아가 만나  신영균과 최은희는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에서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다. [중앙포토] 나중에 최씨에게 들은 얘기지만 78년 신 감독과 함께 납북돼 북한 영화를 제작할 땐 배우들의 한복을 직접 만들어 입히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북한 옷은 우리 전통 한복에 비해 볼품이 없었다”고 했다. 두 사람은 북한에서 ‘돌아오지 않는 밀사’ ‘사랑 사랑 내 사랑’ 등 영화 17편을 찍었다. 최씨는 북한 영화 ‘소금’으로 85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도 수상했다.  두 사람은 86년 오스트리아에서 미국대사관을 통해 탈북에 성공했지만 간첩이 두려워 바로 한국에 오지 못했다. 신 감독 부부가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우리 부부가 찾아가 만나기도 했다.  “북한에서 영화 만들 때 신영균이 생각 많이 났어.”  “그렇다고 날 불렀으면 큰일났겠네. 나도 납치당할 뻔했구먼.”  이런 농담을 주고받으며 함께 냉면도 먹고 했던 기억이 난다.  하늘나라로 간 최씨가 신 감독을 잘 만났는지 모르겠다. 나도 곧 따라갈 테니 먼저 가서 ‘신필름’ 같은 영화사를 만들고 있으라고, 같이 출연하자고 당부해 두었는데….  /정리=박정호 논설위원, 김경희 기자
7453    [그것이 알고싶다] - "살아있는 다리" 댓글:  조회:3245  추천:0  2019-11-21
수백 년 견디는 '살아있는 다리'의 비밀  2019.11.21.    좋아요 후속기사원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애니멀피플]  인도 전통기술, 고무나무 공기뿌리 자라 얽혀 다리 형성고무나무의 공기뿌리로 만들어진 ‘살아있는 다리’. 시간이 갈수록 자라 튼튼해진다. 페르디난드 루드비히 교수 제공. 인도 북동부 메갈라야주는 연평균 강수량이 1만2000㎜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비가 많이 오는 아열대림 지역이다. 이곳 산악지대 원주민인 카시족과 자인티아족은 석회암 지대의 가파른 협곡에 물이 차오르는 몬순 때마다 고립됐다.  다리가 필요하지만, 대나무나 목재로 만든 다리는 습한 날씨에 쉽게 썩어 떠내려가고, 강철이나 콘크리트 다리는 비싸기도 하거니와 결국 낡아 무너지기 마련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민들이 오래전부터 찾은 해결책은 ‘살아있는 다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인도고무나무의 공기뿌리를 강 건너로 유도하는 방식으로 나무다리를 만들면, 시간이 지날수록 다리가 자라 점점 튼튼해지는 실용적이고 지속가능한 건축물이 된다. 페르디난드 루드비히 독일 뮌헨공대 교수 등 연구자들은 인도의 ‘살아있는 나무다리’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현지조사를 통해 주민의 전통지식으로 지은 이 다리가 수백 년을 견디는 비결을 찾아냈다. 메갈라야의 ‘살아있는 다리’는 오래전부터 알려졌지만, 체계적인 조사가 이뤄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854년 그림이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연구자들은 모두 74개의 다리를 분석 대상으로 수천장의 사진을 촬영해 3차원 입체 모델을 만들고, 형태와 구조, 관리 방법 등을 조사했다. 루드비히 건축학 교수는 “촘촘하게 서로 꼬인 뿌리가 안정된 다리를 형성하는데, 가장 긴 것은 50m가 넘는다”고 이 대학 보도자료에서 말했다. 가정에서 화분에 많이 재배하는 인도고무나무는 자연상태에서 보통 30∼40m, 크게는 60m 높이로 자란다. 정글의 숲 지붕(수관)에서 새의 배설물을 통해 옮겨져 싹튼 고무나무는 숙주 나무 아래로 수많은 공기뿌리(기근)를 뻗는다. 인도고무나무의 공기뿌리. 정글의 숲 지붕에서 숙주 나무를 죽이고 거대한 나무를 지탱하는 것은 서로 얽힌 공기뿌리이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뿌리는 서로 얽히고 결합해, 마치 건축물 거푸집처럼 숙주 나무를 에워싸 결국 숙주를 죽인다. 숙주 나무가 썩어 없어져 가운데가 텅 빈 공간에서 공기뿌리끼리 튼튼한 구조물을 이루는 고무나무의 속성이 ‘살아있는 다리’의 핵심이다. 연구에 참여한 토마스 스펙 독일 프라이부르크대 식물학 교수는 “다리 놓기 공사는 다리의 끝이 놓일 절벽 끄트머리에 고무나무를 심는 것으로 시작된다”며 “나무가 자라 공기뿌리가 나오면 대나무나 야자 줄기로 만든 틀에 감아 강 건너 다리 쪽으로 수평으로 자라게 유도한다”고 설명했다. 움모노이 다리는 53m로 가장 긴 ‘살아있는 다리’이다(a). 다리 위에서 본 바닥 모습(b). 페르디난드 루드비히 외 (2019) ‘사이언티픽 리포트’ 제공. 뿌리가 강 건너편에 도달하면 땅에 심는다. 새로 공기뿌리가 생겨나고, 기존의 뿌리는 점점 굵어지면서 서로 얽혀 ‘접합’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스펙 교수는 “식물 줄기에 상처가 나면 세포가 분열해 상처를 막고 비대해지는 현상을 나타내는데, 같은 원리로 공기뿌리끼리 만나 하나로 뭉치는 접합이 이뤄진다”고 말했다. 접합은 자연적으로 또는 사람이 매듭을 지어줘 형성되는데, 결과적으로 전체 뿌리의 강도를 강화하는 구실을 한다. 공기뿌리를 이용해 인위적으로 매듭을 지은 모습(위). 이 부위는 결합되고, 그곳에서 새 공기뿌리가 나와 구조를 강화한다(아래). 페르디난드 루드비히 외 (2019) ‘사이언티픽 리포트’ 제공. 뿌리가 서로 얽히고 융합해 튼튼한 구조물을 이루고, 손잡이를 만들고, 바닥을 채워 제 기능을 하는 다리를 만들려면 오랜 세월이 걸린다. 연구자들은 현재 주민이 만들고 있는 살아있는 나무다리뿐 아니라, 알려진 조상이 시작해 200년 된 다리, 그리고 마을만큼 오랜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다리도 확인했다. 다리 만들기를 시작한 지 66년이 됐는데도 아직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다리도 있었다. 뿌리가 점점 자라 다리가 튼튼해지는 것은 좋지만 늘어나는 무게는 어떻게 감당할까. 다리를 이용하는 사람과 짐의 무게, 그리고 홍수 때는 범람하는 물살의 하중까지 견뎌야 한다. 연구자들은 하중을 주로 받는 수평 방향의 뿌리 단면이 뒤집힌 ‘T’ 자 모양으로 심하게 변형된 사실을 발견했다. 또 수직 방향의 뿌리 단면에 원형이 많았지만 수평 방향에는 타원형이 많았다. 스펙 교수는 “뿌리는 기계적 하중에 이차적인 성장으로 대응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농그리아트 마을의 복층 살아있는 다리 모습. 여러 세대에 걸쳐 짓고 수백 년을 쓰는 지속가능한 건축물이다. 아르쉬야 우르비자 보세,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고무나무를 이용한 살아있는 다리는 인도 산악지대의 토착기술이지만 현대 건축에 응용할 수도 있다. 이른바 ‘식물 건축’이 그것이다.  루드비히 교수는 ‘식물 건축’이 기후변화의 충격에 더 잘 적응한다고 말한다. 그는 “석재, 콘크리트, 아스팔트는 고온 사태 때 빠르게 더워지기 때문에 특히 도시에서 열 스트레스 문제를 일으킨다. 그러나 식물은 냉각 기능이 있어 도시 기상을 완화한다. 식물 건축의 개념은 나무를 심을 공간을 새로 만드는 게 아니라, 나무를 아예 건축의 필수 구조물로 삼는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연구는 과학저널 ‘사이언티픽 리포트’ 8월 22일 치에 실렸다. 살아있는 나무를 주요한 건축 재료로 쓰는 ‘식물 건축’이 기후변화 시대에 관심을 끌고 있다. 루드비히 쇤레 제공. /조홍섭 기자
7452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문화재사음(私蔭)"과 "문화재기증" ... 댓글:  조회:3206  추천:0  2019-11-21
52살 이항복이 6살 손주에게 직접 써준 등 유물 17점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 이기환 선임기자       2019.11.21  . 할아버지의 손주 사랑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백사 이항복이 52살 때 6살 짜리 손자에게 직접 써준. 할아버지의 손주 사랑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정미년(1607년) 4월에 손자 시중에게 써준다. 오십 먹은 노인이 땀을 닦고 고통을 참으며 쓴 것이니 함부로 다뤄서 이 노인의 뜻을 저버리지 말지어다(丁未首夏 書與孫兒時中 五十老人 揮汗忍苦 毋擲牝以孤是意).” 백사 이항복(1556~1618)은 ‘오성과 한음(이덕형·1561~1613)’ 설화로 유명한 분이다. 한음과 함께 실무능력이 탁월한 관료학자로 당색에 치우치지 않고 나라의 안위를 생각한 진정한 재상으로 알려졌다. 그런 백사가 52살 때 6살 손자(이시중·1602~1657)에게 손수 써준 이 있다. 백사는 이 천자문을 써준 뒤에 “50살 노인이 힘들게 쓴 것이니 할아비의 뜻을 저버리지 말라”고 당부하는 말을 남겼다. 굵고 단정한 해서체로 직접 손으로 쓴 천자문 가운데는 가장 시기가 올라가는 것이어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을 손자에게 써주면서 남긴 당부의 말. “정미년(1607년) 4월에 손자 시중에게 써준다. 오십 먹은 노인이 땀을 닦고 고통을 참으며 쓴 것이니 함부로 다뤄서 이 노인의 뜻을 저버리지 말지어다(丁未首夏 書與孫兒時中 五十老人 揮汗忍苦 毋擲牝以孤是意)”라고 썼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백사가 을 손자에게 써주면서 남긴 당부의 말. “정미년(1607년) 4월에 손자 시중에게 써준다. 오십 먹은 노인이 땀을 닦고 고통을 참으며 쓴 것이니 함부로 다뤄서 이 노인의 뜻을 저버리지 말지어다(丁未首夏 書與孫兒時中 五十老人 揮汗忍苦 毋擲牝以孤是意)”라고 썼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백사가 쓴 친필 중에는 이 있다. 백사가 유교경전 중 제사와 관련된 ‘제의’, ‘제통’, ‘예기’ 편을 써서 병풍으로 만든 것인데, 백사의 9대손이자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1814~1888)이 첩으로 제작했다. 백사는 “나이 어린 학도나 아이들이 제사를 지낼 때 무턱대고 윗사람만 따라할 뿐, 그것이 무슨 의의인 줄 전혀 모르고 있음을 걱정해서 엣 경전에 나온 제의(祭儀)를 직접 써서 병풍으로 남긴다”고 기록했다.   . 유일하게 전하는 호성공신 1등교서로 보물급 문화재다. 백사 이항복은 임진왜란 때 도승지(대통령비서실장) 신분으로 선조를 호종한 공로로 호성공신 작위를 받았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유일하게 전하는 호성공신 1등교서로 보물급 문화재다. 백사 이항복은 임진왜란 때 도승지(대통령비서실장) 신분으로 선조를 호종한 공로로 호성공신 작위를 받았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백사의 15대 종손인 이근형씨(47·사업가)는 21일 400년 넘게 종가에서 간직해온 조선의 명재상인 오성부원군 이항복 관련 유품 17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기증유물 중에는 백사가 자손교육을 위해 쓴 과 , 그리고 임진왜란 직후에 받은 와 등이 있다. 14대 종부 조병희씨(74)는 “백사 할아버지 유물을 지금까지 모시고 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니 마음이 편안하고 좋다”면서 “박물관에서 널리 알려주시길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종손 이근형씨도 “백사 할아버지 유품이 국가 기관에 보존되어 다음 세대에도 잘 전달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 중에서 제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직접 써서 병품으로 남겼다. 백사는 후손들이 제사를 지낼 때 절차가 아닌 제사의 근본을 깨우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병풍을 제작했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항복이 쓴 . 중에서 제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직접 써서 병품으로 남겼다. 백사는 후손들이 제사를 지낼 때 절차가 아닌 제사의 근본을 깨우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병풍을 제작했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기증품 가운데는 , 외에도 백사가 임진왜란 직후 호성공신으로 임명될 때 받은 문서인 가 눈에 띈다. 선조(재위 1567~1608)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604년(선조 37년) 호성공신 86명, 선무공신 18명, 정난공신 5명에게 작위를 내렸다. 는 임진왜란 중 임금(聖)을 의주까지 호종(扈)하는데 공을 세운 86명에게 작위를 내리면서 발부한 교서이다. 백사는 37세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도승지(대통령 비서실장)로서 선조를 의주까지 모셨다. 선조는 호성공신 86명 중에 이항복과 정곤수(1538~1602) 등 2명에게만 1등의 작위를 내렸다. 이번에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이항복 호성공신 교서’가 바로 그 유물이다. 이 교서에는 ‘어려움 속에서도 임금을 수행한 백사의 공적’이 자세히 언급돼있다. “충성스럽고 건실하게 나(선조)를 잘 호위하며 엎어지며 달아나느라 온갖 고생을 고루 맛보았다. 시종 어려움과 험난한 것을 겪은 것이 어느 누가 경의 어질고 수고한 것을 넘을 수 있겠는가(忠勤疇衛予於顚越備嘗終始艱險孰逾鄕之賢勞).”   백사 이항복이 호성공신 작위를 받은다음 하사받은 초상화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교서에는 공신호(功臣號)와 공적, 특권(공신 초상화, 품계, 토지·노비·은자)과 공신 명단이 적혀 있다. 백사는 호성공신을 포함, 모두 5차례나 공신에 임명되었다. 35살 때인 1590년(선조 22년) 정여립(1546~1589)의 난을 처리한 공로로 평난공신 3등에, 1613년(광해군 5년) 임진왜란 때 광해군(재위 1608~1623)을 호종한 공로로 위성공신(衛聖功臣) 1등에, 임해군(1572~1609) 역모사건 처리 공로로 익사공신 2등에, 김직재(1554~1612) 옥사처리의 공로로 형난공신 2등에 각각 임명된 바 있다. 보통 공신의 후손들은 하사받은 초상화를 가문의 영광으로 귀하게 보존한다. 이수경 학예연구관은 “백사의 가문도 초상화가 낡으면, 베껴 그려서 후모본(後模本)을 제작하는 방식으로 보존하고 계승했다”며 “이번에 기증된 이항복 초상화 2점 모두 1604년 호성공신 초상과 1613년 위성공신 초상을 18세기에 모사하여 보존한 것”이라 설명했다. 이항복 관련 유물들은 후손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보존을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유지될 수 있었다.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은 “한국전쟁 때도 후손들이 전란의 화를 피하기 위해 피난가면서 이 유물들을 모시고 다닌 것으로 알고 있다”며 “평소에도 정기적으로 초상화나 글씨를 햇볕과 바람에 말려 포쇄하며 보관에 힘썼다”고 전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이항복 종가 기증 기념 특별전을 2020년 3월부터 7월까지 상설전시실 서화관에서 개최할 계획이다. ‘종가의 품격’… 400년 오성 이항복 유물, 박물관 품으로 2019.11.21.    좋아요 훈훈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앵커] 민족의 귀한 보물을 시민들과 함께 나누겠다고 나선 종가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오성과 한음'의 오성 이항복 종가입니다. 400년 넘게 지켜온 보물들을 박물관에 기증했는데, 함께 보시죠, 김석 기자입니다. [리포트]  임진왜란 당시 임금을 보필하며 지혜와 기개로 국난을 극복한 명재상 이항복. 둘도 없는 벗 이덕형과 함께 힘든 시기에 나라를 이끈 공신이었습니다. ["이 조정 잘 지키고 있게. 내 돌아와도 엉망이면 그땐 정말 절교할 걸세."] 최고의 공신에게 내려준 특별한 초상화. 17세기 그림을 18세기에 다시 베껴 그린 것으로 국난을 극복한 명재상 이항복의 기개와 인품이 엿보입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1등 공신으로 뽑힌 이항복에게 선조가 내려준 공신 교서입니다. ["충성스럽고 건실하게 나를 잘 호위하며 온갖 고생을 두루 맛보았다. 어느 누가 경의 어질고 수고한 것을 넘을 수 있겠는가."] [이수경/국립중앙박물관 유물관리부 학예연구관 : "교서가 많이 남아 있긴 하지만 1등 공신은 유일한 교서인 거죠. 가치가 굉장히 높고 보물급으로도 가능한 문화재입니다."] 어린 손자를 위해 이항복이 손수 써준 천자문. 굵고 단정한 글씨로 정성껏 쓴 이 천자문은 손으로 쓴 천자문 가운데선 가장 오래돼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후손들은 400년 넘게 종가에서 고이 간직해온 유물들을 널리 알려달라며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종가의 품격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들은 내년 3월 전시회를 통해 일반에 공개됩니다. KBS 뉴스 김석입니다. /김석 기자 ================================/// 백사 이항복의 全身 초상화 나왔다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네이버블로그 공유 100자평 좋아요 페이스북 공유 트위터 공유 카카오스토리 공유 기사 URL공유     임란 종전 3년 뒤 화원이 그린 2m 크기의 국보급 문화재… 14대 宗婦, 한석봉 쓴 공신녹권 등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키로   조선 선조·광해군 때의 학자이자 명신인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 1618)의 전신 초상화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조선 중기 최고 수준의 화원이 그린 작품으로, 국보급 문화재로 평가된다. 이항복의 초상화는 서울대박물관이 소장한 반신상이 있지만, 후손이 보관하고 있던 전신상은 존재 자체가 알려지지 않았었다. 이 초상화는 이항복의 임진왜란 공신녹권(공신을 책봉하고 공훈을 적어 수훈자에게 준 문서) 등 다른 유물과 함께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될 전망이다.   1601년에 그려진 백사 이항복의 전신 초상화. 이항복의 후손이 27일 공개했다. /이태경 기자 이항복의 14대 종부인 조병희(72)씨는 27일 서울 종로구 한국미술발전연구소에서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들과 만나 가문에 전해 내려오던 백사의 공신(功臣) 초상의 대형 사진을 공개하고 기증 의사를 밝혔다. 이 자리에는 원로 미술사학자인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과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가 배석했다. 조씨가 조심스럽게 말아 가져 온 사진을 펼치자 참석자들 사이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건 정말 처음 보는 그림인데…." "훼손이 거의 없네요!" 원본 그림의 길이가 2m에 달하는 이항복의 전신 초상화는 임진왜란 종전 3년 뒤인 1601년(선조 34년) 작품. 공신으로 책봉된 직후 관복을 입고 의자에 앉은 백사의 모습을 그렸다. 눈썹과 수염을 터럭 한 올까지 세밀하게 묘사했고, 흉배(관복의 가슴에 붙인 사각형 표장)의 공작과 모란은 그린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청색과 홍색의 색채가 생생했다. 바닥의 채전(彩氈·카펫) 문양까지도 정교하게 그렸다. 그림의 오른쪽 상단엔 '유명(有明) 조선국(朝鮮國) 영의정(領議政)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증시(贈諡·시호를 내림) 문충공(文忠公) 백사(白沙) 이선생(李先生) 휘(諱·이름) 항복(恒福) 화상(畵像)'이라 써서 초상화의 주인공이 이항복임을 분명히 했다. 정양모 전 관장은 "이렇게 누구라고 적은 조선시대 초상화는 드물다"고 했다. 안휘준 교수는 "세부까지도 정성을 들인 묘사와 표현에서 기존에 알려진 반신상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작품"이라며 "조선 중기의 초상화를 대표할 수 있는 최고의 수작"이라고 평가했다. 이수미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장은 "기법이 매우 뛰어난 공신 초상화로, 보존 상태도 좋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종부 조씨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 의사를 밝힌 유물은 이 초상화와 또 다른 이항복의 전신상 1점, 이항복의 증손인 이세필(1642~1718)의 반신 초상화, 이항복을 임진왜란 극복의 일등공신으로 봉한 석봉 한호 글씨의 공신녹권, 이항복이 53세 때 손자를 위해 직접 쓰고 한글로 토를 단 '천자문' 등이다. 이항복의 전신 초상화는 경기 포천시 가산면 묘소 앞에 있는 사당에 걸려 있었으며, 1940년대 한 차례 도난당했다 되찾은 적도 있었다. 2008년부터는 사당에 사진을 대신 걸어 놓고 원본은 후손이 보관하고 있었다. 14대 종손 이상욱씨는 포천에 유물을 수장할 박물관 건립을 추진했으나 2015년 작고했다. 15대 종손 이근형(45)씨는 "제대로 보존하려면 국립중앙박물관 기증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종부 조씨는 "시부모님이 6·25 피란길에도 소중히 모셨던 초상화인데… 내 대(代)에서 기증하게 돼 안타깝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국립중앙박물관 유병하 학예연구실장은 "소장자의 뜻대로 기증될 수 있도록 긍정적으로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7451    [별의별] - 碑가 悲哀하다... 댓글:  조회:3373  추천:0  2019-11-20
밀양 표충비에서 18일 또 '땀방울'... 무슨 일을 예고한 걸까 [중앙일보] 입력 2019.11.19  기자 위성욱 기자 SNS 공유 및 댓글 SNS 클릭 수   18일 약 1ℓ의 땀을 흘린 것으로 전해진 밀양 표충비. [연합뉴스] 국가에 중대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리는 것으로 유명한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15호 ‘밀양 표충비’에 또 ‘땀’이 맺힌 것으로 나타났다.       밀양 표충비에서 18일 5시간동안 약 1ℓ의 물방울 흘러내려 민간에선 "사명대사의 우국충정", 전문가들 "결로 현상 가능성" 18일 경남 밀양시 등에 따르면 이날 오전 4시부터 9시까지 5시간 동안 무안면 홍제사 경내에 있는 표충비에서 약 1ℓ의 땀 같은 물방울이 맺혀 흘러내렸다. 9시 이후에는 흐르던 물방울이 멈추고 이날 오후부터는 비석이 마른 상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홍제사 관계자는 “올해 들어 표충비각에서 흥건하게 땀이 흐른 것은 처음”이라며 “하지만 오전 9시 이후부터 더는 땀이 흐르지 않아 비석 주변도 물이 마른 상태”라고 말했다.     임진왜란 당시 국난을 극복한 사명대사의 높은 뜻을 새긴 비석인 표충비는 ‘사명대사비’로도 불린다. 사명대사는 서산대사 등과 함께 조선시대에 승려 신분으로 나라를 구하는 일에 앞장선 승병장이다. 무안면에 표충비가 세워진 것은 이곳이 사명대사의 출생지여서다. 사명대사는 왕명으로 일본에 다녀온 뒤 스승인 서산대사의 입적 소식을 듣고 1년 동안 묘향산에 머물렀다가 고향인 밀양 영축산 동쪽 기슭에 백하암(白霞庵)이란 암자를 지어 지낸 적이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정은 당시 의병장으로 공을 세운 사명대사를 불러 포로 귀환 임무를 줬다. 스님은 일본에 들어가 협상 끝에 3000여명의 포로를 송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이유로 사명대사의 우국충정이 지금까지도 표충비에 남아 있어 국가에 큰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다.     실제로 표충비는 국가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땀 같은 물방울이 맺혀 그 조짐을 알려줬다. 1894년 동학농민 운동,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1945년 8·15 해방, 1950년 6·25 전쟁, 1985년 남북고향 방문 등에 땀을 흘렸다는 기록이 있다. 최근에는 2008년 FTA 소고기 협상, 2009년 김수환 추기경 선종, 2010년 천안함 침몰, 2017년 대통령 탄핵심판 당시 물방울이 맺힌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표충비에 땀 같은 물방울이 맺히는 현상을 사명대사의 우국충정이 지금까지 이 비를 통해 전해진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반면 과학계에서는 아직 정확한 원인이 규명되지 않았다. 밀양시 관계자는 “표충비는 좋을 일이 있을 때나 나쁜 일이 있을 때도 땀을 흘리는 현상이 나타났다”며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이 대기가 함유한 수분이 온도 차가 있는 물체 표면에 물방울로 맺히는 결로현상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밀양=위성욱 기자  =====================/// 한국민속문학사전: 설화 편 땀 흘리는 비석     목차 정의 역사 줄거리 변이 분석 특징 의의 정의 ‘사명대사비’라고도 하며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비석 면에 땀방울이 맺힌다는 증거를 기반으로 한 전설. 역사 비석에 얽힌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은 증거물만 있다면 인물이나 사건을 제시하여 환상적 요소를 덧붙여서 이야기를 전한다. 신기한 현상을 기후 변화에 따른 외기 현상이나 결로 현상으로 보는 등 과학적으로 해명해도 비석이 그 자리에 있는 한 민중은 비석이 지닌 영험함을 믿는다. 줄거리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어 왜병을 크게 무찌르고 일본에 전쟁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 삼천 명을 환국시킨 사명대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옛 표충사 터에 비를 세웠다. 이 비를 세우고 나서부터 나라에 큰일이 생기면 비석 면에 땀방울이 맺혔다고 한다. 땀방울은 마치 구슬처럼 비석 면을 타고 흘러내렸다. 변이 이 설화는 비석을 증거물로 하여 땀을 흘리거나 피를 흘리는 데서 유래한 이야기이다. ‘땀 흘리는 표충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호)’로 알려진 비석은 경남 밀양에 있는데 나라에 큰일이 있기를 전후하여 물방울이 맺혀서 몇 시간씩 구슬땀처럼 흘러내린다. 이 외에도 전라북도 김제시에 있는 대제복구비는 ‘피 흘리는 비석’으로 알려져 있다. 전북 벽골제의 복구비에는 비석에 낫을 갈다가 다친 사람은 영원히 낫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 분석 비석이 땀을 흘린다는 것은 나라에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려 준다는 예지력을 믿는 민중의 신앙에 바탕을 둔다. 피 흘리는 비석에서는 본래의 자리에 제 모습을 갖추고 있지 않을 때는 비석이 저주를 내릴 수도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신성성과 진실성을 갖춘 객관적 증거물을 바탕으로 인간의 왜소함을 드러내는 이야기이다. 특징 과 에 대한 이야기는 전국적으로 전한다. ‘사명대사비’라고도 하는 경남 밀양 표충사에 있는 비석은 사명대사를 기리는 것이고, 전북 김제시에 있는 대제복구비는 비석 근처에 몹쓸 짓을 하거나 나쁜 일이 일어나면 비석이 피를 흘린다는 전설이 있다. 의의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때 비석이 먼저 알고 땀을 흘린다고 믿는 것은 나쁜 일이 일어나기 전에 훌륭한 인물들이 미리 알려 줄 수도 있다는 신앙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비석에 해를 가하거나 탐욕으로 훼손하면 변을 당한다는 이야기를 통해 민중에게 착하게 살라는 교훈을 전하고 있다. 집필 박성석(朴性錫)/경상대학교 참고문헌 한국구비문학개론(김태곤 외, 민속원, 1996년) 우리 민속 문학의 이해(김열규 외, 개문사, 1979년) 출처 김제 시사(김제시 편찬위원회, 1995) 한국구비문학대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1988)  [네이버 지식백과] 땀 흘리는 비석 (한국민속문학사전 ,설화 편) =====================================///   불교설화 땀흘리는 비석     분류 문학 > 콘텐츠모음 > 시놉시스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해 분연히 앞장섰던 승병대장 사명대사의 구국의지를 기리기 위해 조선조 선조대왕은 사명대사의 고향에 전각을 세우고 그곳에 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여 스님의 충훈을 모시라는 명을 내렸다. 임금의 명이 떨어지자 사명대사의 출생지인 경남 밀양군 무안면 산강리에는 사당이 세워지고 스님의 영정이 봉안됐으며, 선조는 이 전각을 「표충사」라 사액했다. 그로부터 관료는 말할 것도 없고 백성들까지도 그 사당 앞을 지날 때는 늘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를 올렸다. 그렇게 백 여 년의 세월이 흘러 당우가 퇴락하자 사명 스님의 5대 법손인 남붕선사는 표충사를 중수하는 동시에 스님의 공적을 기리는 표충비를 세웠다. 때는 영조 14년, 1738년이었다. 표충비를 세울 돌을 고르기 위해 경상도 경산까지 가서 돌을 구해온 남붕 스님은 당시 정승 이익현에게 비문을 부탁했다. 표충비가 세워지고 다시 백 년 후, 그러니까 조선 제24대 헌종 5년(1839), 사명대사의 8대 법손인 월파선사는 표충사를 밀양 영정사로 옮기고 절 이름을 「표충사」로 바꿨다. 표충서원을 옮겨 가자 사명 스님의 고향엔 표충비만 남게 됐다. 지방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어 지난날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는 이 비석은 현재 몸체에 금이 간 채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비석 몸체에 금이 간 것은 일제 때였다. 사명대사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일본 사람들이 비석을 보면 섬뜩하다 하여 비석옆에다 창고를 세워 혈맥을 끊으려하자 한동안 못견딜 정도로 비석이 몸부리치니 비석 몸체에 피가 흐르는 형상으로 금이 갔다. 비석이 세워진 후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땀을 흘렸다는 첫 기록은 1894년 갑오경장이 일어나기 7일 전으로 되어 있다. 그때 비석이 흘린 땀이 3말 1되나 된다고 한다. 그 뒤 군지(郡誌)에 기록된 표충비의 땀 기록은 경술합방, 기미독립만세운동, 8 · I5해방, 6 · 25동란, 4 19학생의거, 5 · 16 혁명 등 여섯 차례이다. 그 중 가장 많은 땀을 흘린 것은 기미년 만세사건 때와 5 · 16 혁명 때로 기미독립운동 때는 19일간에 걸쳐 5말 7되를, 5 · 16 혁명 때는 5일간에 5말 7되를 흘렸다. 군(郡)의 공식 기록은 없으나 육영수 여사가 입적한 다음 날도 비석은 땀을 흘렸다고 한다. 이렇듯 나라에 중대사가 있을 때면 미리 땀을 흘려 어려움을 예고해 주니 마을 사람들은 비석의 영험을 받아들여 대소사에 준비하는 마음가짐을 갖게 됐다. 6 · 25동란 때는 전쟁이 일어나기 25일 전부터3말 8되나 홀렸다. 이 마을 사람들은 앞으로는 이 비석이 나라의 경사로 땀 흘리는 일이 많기를 발원하고 있다. [설화내용]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해 분연히 앞장섰던 승병대장 사명대사의 구국의지를 기리기 위해 조선조 선조대왕은 명을 내렸다. 『사명대사의 고향에 전각을 세우고 그곳에 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여 훗날까지 스님의 충혼을 모시도록 해라.』 임금의 명이 떨어지자 사명대사의 출생지인 경남 밀양군 무안면 산강리에는 사당이 세워지고 스님의 영정이 봉안됐으며, 선조는 이 전각을 「표충사」라 사액했다. 『누구든 이 표충사 근처를 어지럽히거나 신성시 하지 않을시는 엄히 다스리도록 하라.』 친히 사액한 선조는 고을 원에게 이처럼 신신당부하여 사명 스님의 호국정신을 치하했다. 그로부터 관료는 말할 것도 없고 백성들까지도 그 사당 앞을 지날 때는 늘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를 올렸다. 그렇게 백 여 년의 세월이 흘러 당우가 퇴락하자 사명 스님의 5대 법손인 남붕선사는 표충사를 중수하는 동시에 스님의 공적을 기리는 표충비를 세웠다. 때는 영조 14년, 1738년이었다. 표충비를 세울 돌을 고르기 위해 경상도 경산까지 가서 높이 3.9m 폭 97cm, 두께 70cm크기의 돌을 구해온 남붕 스님은 당시 정승 이익현에게 비문을 부탁했다. 『내 본시 승려의 부탁으로 글 짓는 것을 즐기지 않았으나 오직 대사님의 사정이 간절하여 이를 물리치기 어려워 특례로 곧 비에 글월을 새기는 것입니다.』 배불숭유 정책으로 불교를 탄압했던 당시의 정승 역시 사명대사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외면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표충비가 세워지고 다시 백 년 후, 그러니까 조선 제24대 헌종 5년(1839), 사명대사의 8대 법손인 월파선사는 표충사를 밀양 영정사로 옮기고 절 이름을 「표충사」로 바꿨다. 표충서원을 옮겨 가자 사명 스님의 고향엔 표충비만 남게 됐다. 지방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어 지난날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는 이 비석은 현재 몸체에 금이 간 채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비석 몸체에 금이 간 것은 일제 때였다. 사명대사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일본 사람들은 잔꾀를 냈다. 『저 비석은 보기만 해도 왠지 섬뜩하단 말이야. 마치 사명대사 귀신이라도 담긴 것만 같으니 무슨 방법을 쓰는 것이 어떻겠소?』 『좋소. 나도 동감입니다. 저 비석 옆에다 담배 창고를 옮겨 짓도록 합시다.』 일본인들이 사명대사의 혈맥을 끊기 위해 비석 옆에다 창고를 세우던 날이었다. 비석은 마치 살아있는 듯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한동안 못 견딜 정도로 몸부리치니 비석 몸체에 마치 피를 흘리는 듯한 형상으로 「확」금이 갔다. 일본 사람들이 표충비를 무서워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물론 임진왜란 때 왜구를 물리친 용맹스런 승장의 비라는 점도 없지 않으나 마치 스님의 구국혼이 비석에 어린 듯 나라에 큰일이 일어날 때면 비석에서 땀이 흐른다는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진 것이다. 예전 것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고 비석이 세워진 후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땀을 흘렸다는 첫 기록은 1894년 갑오경장이 일어나기 7일 전으로 되어 있다. 비석이 있는 곳을 지나던 한 아낙은 매서운 겨울 날씨인데도 비석몸체에서 땀이 흐르듯 물기가 흐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낙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집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에게 말했다. 남편 역시 가만히 두고만 볼 일이 아니다 싶어 관가로 달려가 고했다. 당시 비석이 흘린 땀이 3말 1되나 된다고 한다. 그 뒤 군지(郡誌)에 기록된 표충비의 땀 기록은 경술합방, 기미독립만세운동, 8 · I5해방, 6·25동란, 4 ·19학생의거, 5· 16 혁명 등 여섯 차례이다. 그 중 가장 많은 땀을 흘린 것은 기미년 만세사건 때와 5·16 혁명 때로 기미독립운동 때는 19일간에 걸쳐 5말 7되를, 5 ·16 혁명 때는 5일간에 5말 7되를 흘렸다. 군(郡)의 공식 기록은 없으나 육영수 여사가 입적한 다음 날도 비석은 땀을 흘렸다고 한다. 이렇듯 나라에 중대사가 있을 때면 미리 땀을 흘려 어려움을 예고해 주니 마을 사람들은 비석의 영험을 받아들여 대소사에 준비하는 마음가짐을 갖게 됐다. 6 ·25동란 때는 전쟁이 일어나기 25일 전부터3말 8되나 흘렸다. 『표충비가 땀을 흘린다는 소문이 동네에 나돌기 시작하자 주민들은 아무래도 무슨 변이 있을 조짐인 듯하다며 양식이며 비상약품 등을 준비했지요.』 6·25무렵을 회고하는 주민 이씨의 말처럼 마을 사람들은 땀 흘리는 비석의 영험을 믿으며 크고 작은 일에 조심하고 준비하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 『우리 마을에선 사명대사의 구국 충혼이 이 표충비에 서려 있다고 믿고 있지요. 매년 관광 철이면 이 비석을 보려고 1백 여 명의 관광객이 들르는데 주민들은 너나없이 사명대사의 호국정신을 강조하며 자랑스럽게 안내합니다.』 사명당 추모회 구장회 회장의 말처럼 마을 주민들은 사명대사의 정신을 이어 대체로 정의감이 강하다는 소문이다. 비석이 땀을 흘릴 때는 사람이 땀 흘리는 형상과 똑같아서 앞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뺨으로 흘러내리는 듯 비석 전후면 머리 쪽에서 땀이 나와 비문 글귀 사이를 타고 흘러내린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외지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기후·습도 운운하지만 여러 차례 땀 흘리는 광경을 목격한 저희들은 사명대사의 충혼이 서리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불가사의 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을 촌노 한 분은 자신의 믿음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62년 장마 때는 보리가 썩어 나갈 정도였는데도 비석엔 습기 하나 차지 않았다.』 며 사명대사의 높은 도력을 거듭 강조한다. 이 마을 사람들은 앞으로는 이 비석이 나라의 경사로 땀 흘리는 일이 많기를 발원하고 있다. (밀양 · 표충사) [네이버 지식백과] 땀흘리는 비석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불교설화), 2004., 한국콘텐츠진흥원)   ///////////////////////////////////////////참고... 한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얼음골, 종소리가 나는 만어사 경석과 함께 밀양의 ‘3대 신비’ 로 알려진 사명대사 표충비각,ㅡ 무안면 홍제사(무안리 903-5) 내에 소재한 표충비각은 경상남도 유형 문화제 제15호로 이 비석은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려 그 조짐을 미리 알려 준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민간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사명대사의 우국충정이 지금까지 전해지기 때문이라고 믿으며, 이 비를 신성시하고 있다. 더욱이 땀방울이 글자의 획 안이나 머릿돌과 받침돌에는 맺히지 않는다 하여, 그 신비함을 더해주고 있다... =========================///   밀양 "얼음골";ㅡ       종 목  천연기념물  제224호  면 적 86,612㎡ 지 정 일 1970.04.24 소 재 지 경남 밀양시  산내면 남명리 산95-1외  재약산(천황산) 북쪽 중턱의 높이 600-750m쯤 되는 곳의 골짜기 9천여평을 얼음골 이라고 한다. 봄부터 얼음이 얼었다가 처서가 지나야 녹는 곳이며, 반대로 겨울철에는 계곡물이 얼지 않고 오히려 더운 김이 오른다는 신비한 곳이다. 더위가 심할수록 바위 틈새에 얼음이 더 많이 얼고, 겨울에는 반팔을 입을 정도로 더운 김이 나 "밀양의 신비"라 불리며 천연기념물 224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이 곳 얼음골은 대지의 열기가 점점 더워오는 3월 초순경에 얼음이 얼기 시작하여 7월 중순까지 유지되며, 삼복더위를 지나 처서가 되면 바위틈새의 냉기가 점차 줄어든다.이런 신비한 이유로 밀양의 4대 신비의 하나로 손꼽고 있으며, 특히 다른 관광지와는 달리 초여름부터 늦가을까지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얼음골의 신비와 함께 주변에 다양한 볼거리가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인 가마볼 협곡은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절벽이 태고적부터 흘러내린 계곡물에 의해 두터운 암반이 깍여나가 계곡이 마치 가마솥을 걸어 놓는 아궁이처럼 생겼다하여 이름이 가마볼(암,수 가마볼)이 되었다 한다.    비가 온 뒤에는 녹아서 얼음이 보이지 않으며 어는 경우도 예전만큼 많지는 않다고 하는데 그래도 계곡입구에 들 어서면 냉장고 속에 들어간듯 쏴아한 얼음바람을 맛볼 수가 있다. 얼음골의 여름 평균기온은 섭씨 0.2도, 계곡물은 5℃ 정도. 물이 차서 10초 이 상 발을 담그고 있기 어렵다. 얼음골의 정식이름은 오랜 옛날부터 시례빙곡으로 불리워졌다. 우리나라에서 얼음골로 알려진 곳은 이 곳 밀양의 천황산 얼음골, 의성군 빙혈, 전라북도 진안군의 풍혈, 냉천, 울릉도 나리분지의 에어컨굴 등 네 곳이다.   이러한 곳은 특이한 기상현상으로 인하여 기상관광의 대상이 되는데, 지질학상 이 러한 지형을 애추(talus 혹은 scree)라고 한다. 단애면으로부터 중력에 의해 떨어지는 풍화 산물이 단애 밑에 쌓여 만들어진 지형 을 애추라고 한다. 얼음골에서 냉기가 나오는 곳은 이 애추 사면인데 주로 주빙하 기후하에서 풍화작용에 의해 발달한 화석지형으로서, 구성물질이 모난 바위덩어리 로 되어 있다. 여름철에 이 애추사면에 산사태가 발생하여 도로의 교통을 방해하기도 한다.   수십 미터를 미꾸러지듯 쏟아지는 시원한 폭포수는 병풍처럼 둘러선 기암절벽과 함께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 외 백옥같은 화강암이 수십만 년 동안 물에 씻겨 커다란 소(沼)를 이루어 그 모양이 마치 절구(臼)의 호박같이 생겼다 하여 이름 붙여진 호박소가 있다.   =========================///   답사여행의 길잡이 14 - 경남 만어사     옛날 옛적 동해 용왕의 아들이 자신의 수명이 다한 것을 깨닫고 낙동강 건너에 있는 무척산이란 곳의 신승(神僧)을 찾아가 새로 살 곳을 마련해줄 것을 부탁했다. 신승은 용왕의 아들에게 가다가 멈추는 곳이 바로 그곳이라고 말해주었다. 용왕의 아들이 길을 떠나자 수많은 고기떼가 그의 뒤를 따랐는데, 그가 멈춘 곳이 만어사이다. 만어사에 이르자 용왕의 아들은 큰 미륵돌로 변했고, 그를 따르던 수많은 고기들 또한 크고 작은 돌로 변했다는 전설이 있다. 밀양 시내를 흘러내린 밀양강이 낙동강과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낙동강 포구 삼랑진1)의 만어산(萬魚山, 670m) 만어사(萬魚寺)에 가면 이 믿을 수 없는 전설이 사실이 되고야 만다. 크고 작은 돌이 쏟아져내린 듯 또는 쏟아부은 듯 널브러져 있는 곳을(대개 골짜기이기 쉽다) 흔히 ‘너덜지대’라고 하는데, 만어사가 안겨 있는 만어산 곳곳이 그렇다. 이런 너덜지대가 가장 크고 장관을 이루는 곳이 만어산의 턱밑에 자리잡은 만어사 주변이다. 그 규모도 장관이지만 너덜지대를 이루는 돌 하나하나의 생김새가 예사롭지 않다. 전설처럼 물고기가 입질하는 모양이다. 폭이 약 100m, 길이가 약 500m 규모로 골짜기를 가득 메운 입질하는 물고기 모양의 크고 작은 검은 돌들은 신기하게도 두드리면 쇠종 소리가 난다. 그러나 모든 돌에서 그런 소리가 나는 것은 아니고, 서너 개 중 한두어 개 어림으로 쇳소리가 나는데, 그 이유 또한 불분명하여 더 신비롭다. 만어석만어사 주변 골짜기 너덜지대를 가득 메운 독특한 모양의 검은 돌들은 용왕의 아들을 따라온 수많은 고기떼가 돌로 변한 것이라 한다. 이 때문에 만어석이라 불리는 이 돌들은 두드리면 맑은 종소리가 나 종석이라고도 불린다. 이와 같은 이유로 만어사 주변 너덜지대의 돌들은 ‘만어석’(萬魚石)이라고 불린다. 동해의 물고기들이 변한 것이라는 전설에 따른 것이다. 또, 두드리면 쇠종 소리가 난다고 하여 ‘종석’(鐘石)이라고도 불린다. 이들 만어석은 다른 돌보다 유난히 무겁고 야물다고 하며, 조선 세종 때에는 이 돌로 ‘종경’(鐘磬)이라는 악기를 만들려고 돌을 채집하여 시험했으나 음률이 맞지 않아 그만두었다고도 한다. 그런가 하면 『삼국유사』 「탑상」(塔像)편 ‘어산불영’(魚山佛影)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만어산은 옛날의 자성산(慈聖山) 또는 아야사산(阿耶斯山)인데, 그 옆에 가락국이 있었다. 옛날 하늘에서 알이 바닷가로 내려와 사람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으니, 곧 수로왕이다. 이때 그 영토 안에 옥지(玉池)가 있었는데, 그 못 안에 독룡이 살고 있었다. 만어산에 다섯 나찰녀(羅刹女)2)가 있어 그 독룡과 서로 오가며 사귀었다. 그러므로 때때로 우레와 비를 내려 4년 동안 오곡이 결실을 맺지 못했다. 왕은 주술로써 이 일을 금하려 해도 할 수 없으므로 머리를 숙이고 부처를 청하여 설법했더니 그제야 나찰녀가 오계(五戒)3)를 받았는데, 그후로는 재해가 없었다. 그 때문에 동해의 고기와 용이 마침내 골짜기에 가득 찬 돌로 변하여 각기 쇠북과 경쇠(옥 또는 돌로 만든 악기) 소리가 난다. 또 살펴보면 대정(大定) 20년 경자(庚子)는 고려 명종 10년(1180)인데 처음으로 만어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 기록으로 본다면 만어사가 창건된 것은 46년 김수로왕에 의해서이며, 고려 명종 때인 1180년에 중창된 것으로 여겨진다. 신비로운 고대왕국 가야시대에 세워진 뜻깊은 절인 셈이다. 하지만 지금의 만어사는 그런 오랜 창건 역사를 기대할 만큼 고색창연한 고찰의 모습은 아니다. 근래에 지어진 대웅전과 범종각, 삼성각 그리고 요사 한 채로 이루어진 조촐한 산중 절집일 뿐이다. 다만 수로왕 때나 동해 용왕의 아들이 수많은 고기떼를 이끌고 불교에 귀의해 만어사를 창건했다는 전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자연경관이 독특하고, 고려시대의 숨결을 느끼게 하는 삼층석탑만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만어사 전경가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절이지만 지금의 만어사는 고려 때의 삼층석탑과 근래에 지어진 대웅전과 범종각, 삼성각과 요사 한 채로 이루어진 조촐한 산중 절집일 뿐이다. 석탑은 흔히 법당의 마당 중심에, 쌍탑일 경우에는 법당 마당의 좌우에 자리잡게 마련인데, 만어사 삼층석탑은 현재 이런 가람배치 양식에서 벗어나 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절이 여러 차례 고쳐지어지면서 가람배치가 흐트러진 때문으로 보인다. 높이 3.7m 정도의 만어사 삼층석탑은 단층기단이지만, 전체적으로 지대석과 기단부가 안정적이고, 몸돌이나 지붕돌의 체감률 또한 조화로운 편이다. 지붕돌받침이 3단으로 줄어들었다거나 기단부 면석이 4매로 간소화되고, 몸돌의 굄이 1층과 2층에서는 1단이었다가 3층에서는 2단으로 불규칙해진 점들을 감안하면 통일신라 전성기 때의 탑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고려 명종 때 중창되면서 현 위치에 세워진 탑으로 보는 것이 옳을 성싶다. 그외에 기단면석과 몸돌에 귀기둥이 표현돼 있을 뿐 별다른 장식이 없으나, 지붕돌 낙수면이 밖으로 불룩한 곡선을 그리며 급하게 내려오다 처마선에서 살짝 반전하여 수평을 찾고 추녀 쪽에서는 다시 살짝 치켜올라가 반전을 이루는 모습이 독특하다. 만어사 삼층석탑고려 중기에 세워진 자그마한 삼층석탑이다. 단층기단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지대석과 기단부가 안정적이고 몸돌과 지붕돌의 체감률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석탑 역시 너덜지대의 만어석 또는 종석으로 만들어졌는지 두드리면 맑은 종소리가 난다. 그러나 석탑 전체에서 그런 소리가 나는 것은 아니어서 더욱 신비롭다. 이런 석탑의 신비를 확인하려는 사람들이 무척 많은 듯, ‘석탑을 두드리지 말라’는 안내문이 눈에 띈다. 서 있는 자리나 모습이 마치 만어석들을 굽어보는 듯한데, 학자에 따라서는 이색적인 너덜지대의 터를 다스리기 위해 세운 비보탑이 아니냐 추정하는 이도 있다. 만어사 삼층석탑은 보물 제466호로 지정돼 있다. 또한 경내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미륵바위’ 또는 ‘미륵불상’이라고 불리는 높이 5m 크기의 자연석이다. 전설 속 동해 용왕의 아들이 변한 돌이며, 『삼국유사』 ‘어산불영’의 ‘불영’인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자연석 표면에 붉은색이 감도는 부분이 마치 가사(袈裟)와 같아 더욱 신비롭게 여겨진다. 이 미륵바위를 신비스럽게 하는 이야기로는 해마다 0.3㎝씩 큰다거나 병자호란이나 임진왜란, 갑오농민전쟁, 활빈당이 활약할 때, 한일합방, 3·1만세운동 때 돌의 오른쪽 면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으며, 그외에도 한국전쟁, 4·19혁명, 5·16군사정변 때에도 땀이 흘렀다고 하는 것들이 있다. 근래에는 미륵바위를 보호하기 위한 미륵전 불사가 이루어졌다. 미륵바위 앞쪽에는 사람들이 크고 작은 소원을 빌며 쌓아올린 돌탑 무더기가 있는 바위의 아래쪽 틈으로 작은 샘이 보이는데, 이 샘물은 낙동강의 조수에 따라 물 높이가 달라진다고 한다. 이로써 만어산 너덜지대의 만어석들이 동해바다에서 낙동강을 타고 이곳까지 거슬러 올라왔다는 전설이 확실해지는 셈인가. 아무튼 너덜지대 아래로 물이 흐르는 것이 사실이긴 하다. 만어사는 바다를 이룬 너덜지대의 장관과 더불어 멀리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낙동강의 전망이 매우 좋아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고 있다. 만어사 너덜지대의 만어석을 두드리며 전설을 확인하는 재미와 아울러 만어석의 울림만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서 울려오는 소리에 귀기울여보는 사색의 공간으로 삼아봄이 좋을 듯하다. 돌을 두드렸을 때 그 맑은 정도가 사람 됨됨이를 나타내는 지표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도 즐겁다. [네이버 지식백과] 만어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14 - 경남, 한국문화유산답사회)        
7450    [그것이 알고싶다] - 중국 고대 철학가 - 고자 댓글:  조회:2870  추천:0  2019-11-20
두산백과 고자   [ 告子 ] 출생-사망 ? ~ ? 본명 성 고(告), 이름 불해(不害) 국적 중국 제(齊) 활동분야 철학 중국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사상가. 성 고(告), 이름 불해(不害). 맹자(孟子:BC 372∼BC 289)와 같은 시대의 사람이다. 인성(人性)에 관하여 맹자와 논쟁을 벌여, “사람의 본성은 본래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며, 다만 교육하기 나름으로 그 어느 것으로도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맹자와의 논의는 《맹자》 에 수록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서만 고자의 존재를 알수 있을 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자 [告子] (두산백과)  
7449    [그것이 알고싶다] - 중국 고대 법가학파 - 한비자 댓글:  조회:3170  추천:0  2019-11-20
5000년 중국을 이끌어온 50인의 모략가 한비자 법(法)은 드러내야 하고, 술(術)은 드러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 韓非子 ] 목차 법·술·세를 함께 구사하라 개인적 원한을 공적인 일에 개입시키지 말라 한비자(기원전 약 280∼233년)의 이름은 한비이고 전국 말기 한(韓) 출신이다. 원래는 한나라의 공자로 순자(荀子)에게 배운 중국 고대의 이름난 사상가이자 법가 학파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기원전 234년은 진왕 정(훗날의 진시황) 13년으로 진나라가 군사를 동원해 한나라를 공격해왔다. 이 해 진왕 정이 한을 공격한 것은 까닭이 있었다. 오랫동안 천하통일에 힘을 쏟아온 진은 6국을 제거할 결심을 하고 6국 중에 가장 약한 한나라를 우선 공격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또 한편, 진왕 정은 6국을 소멸시키는 자신의 숙원을 위해 인재를 적극적으로 긁어모으고 있었다. 그런 진왕 정이 언젠가 한비자의 저술인 『고분(孤憤)』과 『오두(五蠹)』를 읽고는 깜짝 놀라며 이 책을 쓴 사람은 틀림없이 기재일 것이며 자신의 통일대업에 필요한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이사(李斯)에게 감탄을 연발하며 "이 사람을 한번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사는 "이것은 한비자란 자가 쓴 것입니다"라고 말해주었다. 진왕 정은 한비자를 얻기 위해 한을 공격한 것이었다. 그러고는 한비자를 지명하며 진나라로 보내줄 것을 요구했고, 한왕은 진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여 한비자를 사신으로 보냈다. 한비자는 법가의 집대성자이자 통치술·제왕학의 창시자이기도 했다."  저주받은 비서(秘書)를 남긴 말더듬이 한비자는 법가의 집대성자이자 통치술·제왕학의 창시자이기도 했다. 한비자와 이사는 사실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한비자는 말을 더듬고 말도 잘 꾸미지 못했다. 하지만 재주와 생각이 남다르고 글을 잘 썼다. 이사는 이런 한비자에 열등의식을 느끼며 자책했다. 『한비자』는 군왕들이 보라고 쓴 책이다. 한비자는 유가 학설에 반대하면서 군주의 권술(權術)에 대해 대서특필하여 훗날 군주가 전제독재로 신하를 통제하는 데 이론과 방법을 제공했다. 한비자는 한나라가 갈수록 약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매우 걱정이 되어 여러 차례 한왕에게 부국강병의 모략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한왕이 씩씩하게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 못내 가슴 아팠다. 또 권력을 가지고도 신하들을 제대로 통제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재능 있는 인재를 기용하여 국가를 강성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한나라의 상황은 이와는 정반대로 허영과 사치에 빠져 나라를 위기로 몰고 갈 인물들을 등용하고 있었고, 이 자들의 지위가 나라에 공을 세운 공신들보다 더 높았다. 이에 울분을 품고 『고분』, 『오두』, 『내외저(內外儲)』, 『설림(說林)』, 『세난(說難)』 등 십만여 자에 이르는 저작을 써서 역사상 득실의 변화를 종합했다. 한왕은 당초 한비자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진나라의 공격을 받아 상황이 급하게 돌아가자 비로소 한비자를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항복을 자청하게 했다. 진은 한비자를 억류시킨 다음 단숨에 한나라를 공격하여 한왕 안(安)을 포로로 잡고 한나라를 멸망시켰다. 법·술·세를 함께 구사하라 이는 한비자가 제창한 치국의 길이었다. 한비자가 말하는 '법'은 상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술'은 신불해(申不害)에 근원을 두고 있다. 한비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사람이 "신불해와 공손앙(상앙) 두 사람의 견해 중 어느 쪽이 나라에 더 필요합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그것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문제다. 사람은 열흘 이상 먹지 않으면 죽고, 아주 추운 날씨에 옷을 입지 않으면 얼어 죽는다. 그런데 옷과 음식 중 어느 것이 사람에게 더 긴요하냐고 묻는다면,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고 대답할 것이다. 두 가지 모두 사람이 사는 데 꼭 있어야 할 것들이기 때문이다."(『한비자』 「정법」) 그는 국가에서 '법'과 '술'은 사람에게 있어서 옷이나 음식과 같은 것으로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고 본 것이다. 그는 "법이란 먼저 관부에서 공포하여, 지키면 상을 받고 명령을 어기면 처벌받아 상과 벌이 분명하게 시행된다는 사실을 백성들이 마음으로 믿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법'이란 백성들이 반드시 따라야 할 조령(條令) 같은 것으로, 이 조령은 각종 상벌 조건을 상세하면서도 구체적으로 규정하여 군주에 복종하면 상을 받고 저항하면 벌을 받도록 한다. '술'에 대해서 한비자는 "지금 신불해는 '술'을 공손앙은 '법'을 제창하고 있다. '술'이란 재능에 따라 관직을 주되 그 관직에 따른 직책을 맡긴 다음 생사여탈의 권한을 가지고 신하들의 능력을 평가하는 것으로 이는 군주가 장악해야 마땅하다"라고 말한다. 이는 군주가 관직 임명과 일처리에 대한 검사, 공을 세운 자에게는 상을 주고 잘못을 한 자에게는 벌을 주는 일, 신하들을 심사하는 일 등에 대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가리킨다. 통치에서 '법'과 '술'이 갖는 중요성은 "군주에게 '술'이 없으면 바보처럼 멍청하게 윗자리를 차지하는 꼴이 되고, 신하에게 '법'이 없으면 밑에서 난리를 피우게 된다. 따라서 이 두 가지는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제왕이 천하를 다스리는 도구"인 것이다. 영리하고 지혜로운 군주가 '법'과 '술'을 장악하여 운용하는 종합적 원칙은 "절기에 맞추어 농사를 지어 재물을 얻게 하고, 세금 제도를 정비하여 빈부를 고르게 하고, 형벌을 엄격하게 하여 간사한 악행을 끊는다. 백성들이 땀을 흘려 일해서 부를 쌓고, 직무를 잘 처리하여 귀한 지위에 오르고, 죄를 지으면 벌을 받고 공적을 세워 상을 받게 하고 군주의 인자한 은혜만을 바라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다(「육반」)"라고 지적한다. 그는 또 "법은 드러내는 것이 낫고 술은 드러내지 않는 것이 낫다"라는 책략적 사상을 강조한다. 이 말의 뜻은 '법'은 널리 선전하여 집집마다 다 알게 해야 하고, '술'는 마음속에 꼭 감추어 드러내지 않으면서 백성을 통치하고 신하들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세(勢)'란 지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킨다. 통치자는 말과 행동을 떠나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영향력도 커진다. '세'를 탈 줄 알면 좋은 사람도 나쁜 자도 모두 이용할 수 있다. 다만 유능한 자를 기용하면 천하를 다스릴 수 있지만, 못난 자를 기용하면 천하를 어지럽히게 된다. 통치자로서 현명한 군신은 자신의 권력으로 국가를 다스리지만, 간사한 군신은 권력으로 백성과 어진 사람을 해친다. 군왕이라면 권세를 잘 이용해야 한다. 이에 대해 한비자는 우화 한 가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조보(造父)가 밭을 갈고 있는데 한 부자가 마차를 타고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말이 놀라 더 이상 가려 하지 않았다. 아들이 마차에서 내려 앞쪽으로 말을 끌고 아버지는 뒤에서 마차를 밀었다. 그래도 여의치 않자 밭을 갈고 있던 조보에게 도움을 청했다. 조보는 농기구를 챙긴 다음 마차 위로 뛰어올라 말을 모는 자리에 앉은 다음 고삐를 잡고 채찍을 드니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한비자는 이 고사를 이용하여 신하와 백성을 다루는 현명한 군주의 이치를 설명한다. 조보가 말을 다루는 기술이 없었더라면 있는 힘을 다해 마차를 미는 일을 도왔을 것이고, 그러면 말은 계속 버티고 마차는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조보가 마부 자리에 편히 앉은 것은 그에게 말을 다루는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군주에 있어서 국가는 수레에 비유할 수 있다. 그리고 군주의 '세(권력)'는 말에 비유할 수 있다. 나라를 다스리는 기술이 없다는 것은 말을 다루는 기술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몸이 피로하면 국가는 환란을 면하기 어렵고, 몸을 편안한 곳에 두면 국가도 다스려져 부강해질 것이다. 한비자는 현명한 군주는 "관리들만 잘 감독할 뿐이지 백성들을 직접 다스리지 않는다. 나무줄기를 흔들면 나무 전체 잎사귀가 흔들리게 되고, 그물의 벼리를 당기면 힘들이지 않고 그물을 펼 수 있는 이치가 바로 이런 도리다(「외저설·우하」)"라고 말한다. 또 "이익이 있는 곳에 백성들이 몰리고,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일에 선비들이 목숨을 건다(「외저설·좌상」)"고도 했다. 한비자는 군주가 나라와 백성을 통치하는 데는 효과적인 길이 있다고 주장한다. 즉 자신이 직접 백성을 다스릴 필요가 없고 각급 관리들을 통하여 다스린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나무줄기를 흔드는 것과 같아, 나무 전체가 흔들리면 나뭇잎이 떨어진다. 연못 주변 나무에 둥지를 틀고 사는 새들도 놀라 하늘로 날아가고, 연못 속의 물고기들은 바닥으로 숨는다. 또 그물을 잘 던지는 사람은 그물의 벼리만을 쥐면 되지, 그 많은 그물코를 일일이 건드리는 것은 헛수고일 뿐이다. 따라서 관리는 나무줄기와 그물의 벼리에 비유할 수 있고, 군주는 이 관리들만 잘 다스리면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또 불을 끄는 일에 비유할 수도 있다. 관리들에게 직접 물동이를 들고 가서 불을 끄게 하는 것은 개인의 작용을 발휘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관리들에게 채찍이나 지휘용 깃발을 들게 하여 만 명의 백성들을 지휘하면 빨리 불을 끌 수 있는 이치와 같다. 따라서 현명한 군주는 구체적이고 작은 일에는 매달리지 않는다. 한비자는 또 백성들을 너무 사납게 압박하지 말라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백성들의 반란을 자극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비자는 앞서 인용한 조보의 이야기를 다시 들고 있다. 말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조보는 제나라 왕을 위해 마차를 몰았다. 그는 말을 길들이기 위해 백 리 동안 말에게 물을 주지 않고 갈증을 나게 만들어 말을 길들였다. 그런 다음 제나라 왕에게 보고했다. 이에 제나라 왕은 화원에서 한번 시험해보라고 했다. 조보가 말을 몰고 화원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말은 화원의 연못을 보자 갈증을 참지 못하고 바로 연못 속으로 뛰어들었다. 조보가 고삐를 당기며 통제하려 했지만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조보는 말을 갈증나게 하는 방식으로 말을 길들였지만 물을 본 말은 참지 못했고 조보도 어쩔 수 없었다. 조보는 이 일을 가지고 군주를 깨우쳤다. 백성의 생존방식으로 백성들을 길들이려 해서는 되레 반발만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개인적 원한을 공적인 일에 개입시키지 말라 사람을 기용하는 '용인(用人)' 기술은 군주 통치의 중요한 방면이다. 한비자는 이 방면에서도 많은 견해를 제기했다. 한비자의 통치모략에는 법가사상이 짙게 깔려 있다. 한비자는 통치자의 이익을 위해서 유능한 인재를 반드시 기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유능한 인재는 반드시 군주를 위해 활용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 자를 제거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한비자는 강태공의 예를 소개하고 있다. 강태공이 제(齊)나라에 봉해졌다. 제나라에는 동해에 숨어사는 은사(隱士) 광율(狂矞)과 화사(華士) 형제가 있었다. 형제는 천자의 대신이 되는 것도 싫고, 제후와 사귀는 것도 싫고, 남의 도움 없이 그저 스스로 농사를 지어먹고 우물을 파서 마시고 싶다고 했다. 그들은 높은 명성도 좋은 자리도 군왕이 주는 녹봉도 싫다면서 자신들의 힘으로 살겠다고 했다. 그러자 강태공은 사람을 보내 이 두 형제를 죽여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주공(周公) 단(旦)은 그 두 사람은 모두 성현인데 왜 죽였냐고 물었다. 강태공은 이렇게 말했다. "그자들이 군왕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면 그들을 기용하여 신하로 삼을 수 없습니다. 제후들과 교류도 않겠다고 했으니 그들을 사신으로 활용할 수도 없습니다. 자기들 손으로 농사를 짓고 우물을 파서 먹고 마시겠다고 하니 상벌도 그들에게는 소용없습니다. 그리고 큰 명망도 필요 없다고 했으니 지혜가 있다한들 써먹을 수 없습니다. 또 군주의 녹봉도 필요 없다고 했으니 유능하다한들 공을 세울 수도 없습니다. 관리도 싫고 국가를 다스리는 일에 참여도 않겠다고 합니다. 이는 군주에게 충성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하물며 군주가 백성을 통치할 수 있는 것은 녹봉과 형벌 아닙니까? 이런 자들에게 네 가지 수단을 모두 동원해도 소용없다면 저의 법·술·세가 힘을 잃는 것이니 죽이지 않고 다른 방법이 있겠습니까?(「외저설·우」)" 강태공은 또 이런 말도 했다. "말 같기도 하고 기린 같기도 한 천하 최고의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다그쳐도 달리지 않고 멈추라고 해도 멈추지 않습니다. 왼쪽으로 가라 해도 말을 안 듣고 오른쪽으로 가라 해도 말을 안 듣습니다. 주인의 명령을 듣지 않는 말이라면 주인에게 필요한 공구가 될 수 없고 아무짝에 쓸모가 없습니다. 쓸모가 없을 뿐만 아니라, 명령을 듣지 않는 말의 표본이 되어 다른 말들도 그것을 본받을 가능성이 있으니 죽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을 유능하다고 생각하는 자가 군주를 위해 소용이 없다면 말 안 듣는 천리마처럼 제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인재를 현인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통치자의 이익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인재라야 유능한 인재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비자는 유능한 인재의 기준을 분명하게 정했다. 또 이런 인재들을 기용하고 추천하는 용인의 원칙도 제기했다. 그는 "안으로는 친척이라 해서 피하지 않고, 밖으로는 원수라 해서 피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법'과 '술'의 요구에 부합하고 재능이 있으며 군주에게 소용이 있다면, 사회적 지위가 아무리 낮아도, 또 친척이나 원수라도 추천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비자의 이런 '용인' 철학은 지금 보아도 진보적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깊은 산속이나 동굴 속에 사는 사람일지라도, 감옥에 갇혀 있는 범죄자라도, 요리를 하거나 소를 치는 노예라도 현명한 군주는 그 지위의 비천함을 따지지 않고 오로지 그 재능에 근거하여 대담하게 추천하고 임용하여 법도를 밝히고 국가와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여 자신의 몸과 지위를 존엄하게 만들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비자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다. 진(晉)의 중모현(中牟縣)에 현령 자리가 비어 있었다. 진 평공(平公)이 조무(趙武)에게 "중모는 진나라의 요충지이며, 한단으로 가는 관문 역할을 하는 곳이오. 과인은 우수한 관리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누가 가장 적당하겠소?"라고 물었다. 조무는 형백의 아들이 적당하다고 대답했다. 평공은 깜짝 놀라면서 "형백이라면 그대와 원수처럼 지내는 집안이 아닌가?"라고 물었다. 이에 조무는 "군주를 위해 국사를 말하는 데 사적인 은혜나 원한 같은 감정이 끼어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진 평공은 또 "중부(中府) 담당관으로는 누구를 임명하면 좋겠소?"라고 조무에게 자문을 구했다. 조무는 자기 아들을 추천했다. 이처럼 인재를 추천할 때는 원수나 아들이라고 피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또 이런 예도 소개한다. 해호(解狐)가 조간자(趙簡子)에게 자기와 원수인 사람을 재상으로 추천했다. 재상에 추천된 그 사람은 이에 원한이 없어진 것이라 생각하여 사례를 하고자 해호의 집을 방문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해호는 그를 맞으러 나오면서 활시위를 당겨 그를 향해 화살을 쏘았다. 그러면서 "당신을 추천한 것은 공적인 행동일 뿐이다. 당신이라면 맡은 바 임무를 잘 수행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신과의 원한은 사적인 일이기 때문에 원한이 있다고 왕께 당신을 추천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개인의 원한이 공적인 일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비자는 진(秦)에서 6국을 병합하는 계책을 건의했다. 먼저 원교근공으로 6국의 합종을 깨고 한·조·위를 멸망시킨 다음 다른 제후국을 멸망시킬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진왕은 그를 믿지 않았다. 그러고는 얼마 뒤 그의 재능을 시기하고 질투한 이사가 진왕 앞에서 "한비자는 한의 공자입니다. 지금 대왕께서 6국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하려고 하시는데, 한비자는 결국은 한을 돕지 진을 돕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인지상정 아닙니까? 그런데 그를 기용도 하지 않으면서 오랫동안 머물게 한 다음 돌려보내는 것은 후환을 스스로 남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구실을 달아 법에 따라 그를 죽이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라고 모함했다. 진왕은 사법관에게 명령하여 한비자의 죄를 묻도록 했다. 이어 이사는 다시 사람을 보내 한비자에게 독약을 주면서 자살케 했다. 얼마 뒤 진왕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면서 한비자를 사면하려 했으나 한비자는 벌써 옥중에서 죽은 뒤였다. 그러나 진왕은 법·술·세를 결합한 한비자의 정치모략을 모두 접수했고, 실질적인 정책으로 실행해 전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이로써 한비자의 학설이 후세에 남게 되었다. 사마천은 한비자를 두고 일을 단호하게 잘 처리했으며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명쾌했지만 그의 사상은 너무 가혹하고 각박하여 은덕이 부족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유세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한비자가 『세난』 편을 상세하게 저술했음에도 결국은 진에서 죽음을 당해 그 자신이 유세에 따른 재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며 몹시 비탄해 했다. 인물소개 한비자 저주받은 '비기'를 남긴 말더듬이 한비자, 그는 인성의 약점과 욕망을 끔찍하리만큼 아프게 지적한 칼날같이 예리하고 얼음처럼 차가운 지성의 소유자였다. 그는 이 무서운 지성으로 법가 사상을 집대성했고, 그것은 통치술과 제왕학으로 표출되었다. 한비자, 영광과 비극을 한 몸에 지녔던 이 학자는 법가학파의 종합판이었다. 그의 중심 사상은 이런 것이었다. 군주는 막강한 권력을 지녀야 하며 인민들의 감사를 바랄 필요가 없다. 또한 인민의 원망에도 아랑곳할 필요가 없다. 그저 상벌이 엄격하고 분명하면 정부를 만능으로 만들 수 있다. 한비자가 죽은 뒤 그를 숭배하는 학자들이 그의 작품을 하나의 책으로 정리하여 『한비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비자를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던 진시황과 동문수학한 이사는 한비를 죽였지만 그의 사상은 고스란히 접수하여 날로 커져가는 그들의 제국을 통치하는 데 한껏 활용했다. 제왕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탄생시킨 한비자는 말 그대로 뜨거운 감자와 같은 존재였다. 이 때문에 숱한 오해와 공격의 표적이 되었지만 그만큼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제왕학과 정치사상을 제시한 인물은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권력관계와 그를 둘러싼 투쟁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틀'로서 인성(人性)이란 문제를 제기했던 한비자는 존재 자체로 충격이었다. 그는 인간의 이기심을 섬세하고 날카롭게 간파한 다음 이를 제왕학(통치학)의 권술(權術)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권력론-권술론-제왕학이 그에 이르러 하나로 결합되어 가장 실감나는 이론체계로 확립되었다. 그의 이론은 깨어 있는 시대의식을 바탕으로 당시 상황을 그대로 적용한 결과물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비극적인 최후를 면키 어려웠다. 관련이미지 21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한비자 초상화 이미지 갤러리 출처: 중국역대인물 초상화 [네이버 지식백과]한비자 [韓非子] - 법(法)은 드러내야 하고, 술(術)은 드러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5000년 중국을 이끌어온 50인의 모략가)   두산백과 한비자   [ 韓非子 ] 요약 중국 전국(戰國)시대 말기 한(韓)나라의 공자(公子)로 법치주의(法治主義)를 주창한 한비(韓非:BC 280?∼BC233)와 그 일파의 논저(論著). 구분 논저 저자 한비 시대 중국 전국시대 말 55편 20책에 이르는 대저(大著)로, 원래 《한자(韓子)》라 불리던 것을 후에 당(唐)나라의 한유(韓愈)도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혼동을 막기 위하여 지금의 책이름으로 통용되어 왔다. 이 책은 한비가 죽은 다음 전한(前漢) 중기(BC 2세기 말) 이전에 지금의 형태로 정리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은 거의가 법의 지상(至上)을 강조하는데, 55편을 크게 나누면 다음과 같이 성질이 다른 6군(群)으로 나눌 수 있다. ① 한비의 자저(自著)로 추정되는 등이다. 이들 논저는 먼저 인간의 일반적 성질은 타산적이고 악에 기우는 것으로 설혹 친한 사이에 애정이 있다 해도 그것은 무력(無力)한 것이라 하였고, 따라서 정치를 논할 기초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이 세상은 경제적 원인에 의하여 끊임없이 변화진전하기 때문에 과거에 성립된 정책이 반드시 현세에 적용되지는 않는 것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유가(儒家)나 묵가(墨家)의 주장은 인간사회를 너무 좋도록 관찰하여 우연성에만 의존하는 공론(空論)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군주는 그러한 공론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끊임없이 시세(時世)에 즉응(卽應)하는 법을 펴고, 관리들의 평소의 근태(勤怠)를 감독하여 상벌을 시행하고 농민과 병사를 아끼고 상공(商工)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 군주는 측근·중신·유세가(遊說家)·학자·민중들에게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② 한비 일파의 강학(講學) ·토론으로 추정되는 편(編)으로, 등이 있다. 사상 내용은 한비의 사상과 거의 같다. 이 중에서 주목할 것은 와 으로, 유가의 덕치론(德治論)은 물론 법가(法家)에 속하는 신자(愼子) ·신자(申子) ·상자(商子)의 설까지도 비판하고 수정한다. 이 책을 법가학설의 집대성이라고 일컫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③ 한비 학파가 전한 설화집 등의 제편(諸編). 상고(上古)로부터의 설화 300가지 정도를 독특한 체계에 의하여 배열하고, 그들 이야기의 흥미를 통하여 법가사상을 선전하였다. 소화(笑話)의 유(類)도 섞여 있으나 고대 단편소설로서의 측면도 지닌다. ④ 전국시대 말기부터 한대(漢代)까지의 한비 후학(後學)들의 정론(政論)으로 추정되는 제편(諸編). 편수(編數)는 가장 많으며 그 중 등은 오래된 것이고, 등은 새로운 설이다. 후학들의 주장에서 한비의 사상은 현저하게 조직화되었고, 특히 군신통어(群臣統御:刑名參同)나 법의 운용(運用:法術)에 관한 술책이 세밀하게 고찰되었다. 그러나 군권강화(君權强化)와 엄벌주의를 주장하는 점만이 농후하고, 법의 최고 목적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⑤ 도가(道家)의 영향을 받은 한비 후학들의 논저인 등의 4편. 유가의 덕치를 부정하고 법치를 제창한 법가는, 덕치와 법치를 모두 부정하는 도가와는 근본적으로 입장을 달리하고 있어, 현실적으로 등에서는 강력한 반대를 나타낸다. 그러나 군주는 공평무사를 본지(本旨)로 하여 신하(臣下)에 대하여는 인간적 약점을 보이지 않는 심술(心術)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법가 중에도 도가의 허정(虛靜)의 설을 도입한 일파가 있다. 위의 4편은 이들 일파의 논저로서, 전(前) 편은 정론(政論)이고, 후 2편은 편명 그대로 《노자(老子)》의 주석(注釋) 또는 해설편이다. ⑥ 한비 학파 이외의 논저인 등 2편 모두 한비의 사적(事蹟)에 결부시켜 책 첫머리에 편입되어 있으나 전자는 유세가의 작품이고, 후자는 한비의 작품을 모방한 상주문(上奏文)이 포함된 것으로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한비와 그 학파의 사상은 일반적으로 편견적인 인간관 위에 성립된 것으로 지적되며, 특히 유가로부터는 애정을 무시하는 냉혹하고도 잔인한 술책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확실히 급소를 찌르는 적평(適評)이라 하겠으나, 그들이 유가·법가·명가(名家)·도가 등의 설을 집대성하여, 법을 독립된 고찰대상으로 삼고 일종의 유물론과 실증주의에 의하여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수립함으로써 진 ·한의 법형제도(法刑制度)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점, 또 감상(感傷)을 뿌리친 그들의 간결한 산문이나 인간의 이면을 그린 설화가 고대문학의 한 전형을 이룬 점에 있어 커다란 문화적 사명을 다하고 있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여러 가지 간행본이 있으나 절강서국(浙江書局)의 22자본(子本)이 좋은 간본이라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비자 [韓非子] (두산백과) ================================///   중국사상의 뿌리 한비자의 법가 집대성     사상적으로 법가를 완성시킨 사람은 순자의 제자인 한비였다. 제자는 스승과 정반대의 길을 걸어 유가를 신랄하게 비판하였지만 어디에서도 스승을 언급한 곳은 없다. 존경해서였으리라. 순자는 평생의 학문적 노력을 통해 제자백가 사상을 집대성하였고, 한비는 뛰어난 머리로 법가사상을 집대성하였다. 말더듬이였으나 글은 훌륭하여, 진시황이 "오호라! 과인이 이 사람을 만나보고 더불어 놀 수 있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사기』 「노장신한열전」)고 할 정도였다. 한비자는 현실과 역사에 대한 냉정한 분석에 의거하여, 우화를 통해 구체적인 방법들을 얘기한다. "상고에는 도덕을 겨루었으며, 중세에는 지모를 쫓았고, 당금은 기력을 다투는데"(『한비자』 「五蠹」), 과거와 같은 도덕주의만 지향한다는 것은 토끼가 와서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혀 죽어주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수주대토(守株待兎)의 어리석은 무리라고 힐난하며, 또 "의사가 사람들의 상처를 잘 빨아주고 사람들의 피를 입가에 머금는 것"(「備內」)이나, 수레 만드는 이가 다른 사람들이 부귀해지기를 바라고, 관을 만드는 이가 다른 사람들이 죽기를 바라는 것은 모두 이익 때문이라는 현실적 인성론을 제기한다. 또, 한비자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군신관계가 매매관계라고 말한 사람이다.1) 그는 군주의 이익이 곧 국가의 이익이라고 생각하였고, 신하에 대한 통제 또한 군주의 이익, 즉 국가의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군주는 절대적 세를 가지고 공평무사한 법을 집행하여야 하며, 효율적인 술로 신하를 통제해야 한다는 법·술·세를 혼융한 법가정치를 주창하였다. 이 입장에서 그는 초기 법가 노선을 비판하였다. 상앙은 법은 알았으나 술이 없어 법 또한 다하지 못했으며, 신불해는 술은 알았으나 법에 통달하지 못해 술 또한 다하지 못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2) 또, 신도의 세에 관한 주장은 미진했다고 보았다.3) 특히 한비자는 신하 제어술에 대하여, 노자사상을 흡수하여 독보적인 권모술수의 경지를 열었다.4) 한편 한비자는 정치에 관한 논의, 특히 조국 한나라의 정치 상황을 감안한 강간약지(强幹弱枝)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그러나 "국부는 농사에 달려 있다"(「오두」)는 주장에서처럼 경제 방면의 중본억말(重本抑末) 사상 또한 대단히 구체성을 띠고 있다. 자연의 규율에 따르고, 농사철을 위배해서는 안 되며, 땅을 다루는 농사 지식을 익히도록 하고, 새로운 농사 도구를 개량하고, 낭비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등 농업생산력을 높이는 방법에 집중하였다. 전국시대 사회 변동의 와중에서 법가는 그 변동을 가장 민감하게 반영하고, 가장 세밀하게 관찰하였다. 그들은 전쟁과 형벌을 사회 모순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로 여겼다. 전쟁을 통해 천하통일을 하면 전쟁이 없어질 것이고, 형벌을 통해 사회적 죄악이 없어지면 마침내 형벌도 없어진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또, 실용적인 지식이나 법을 해석하는 관리만을 스승으로 섬기도록 하고 일체의 학문사상을 금지시키라고 주장한다. 한비자와 같이 순자에게 동문수학한 이사는 진시황의 재상을 하면서 강력한 법가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리하여 군주 전제제도와 중앙 집권에 큰 공헌을 하여 중국을 제국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와 문화 이상의 결여로 법가사상 자체는 생명력을 점차 상실하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비자의 법가 집대성 (중국사상의 뿌리) ============================================///참고... "중국 전국시대의 철학자. 본명은 한비(韓非)이다. 전국시대 말기에 한(韓)나라에 살던 공자(公子)로 한왕(韓王) 안(安)의 서자로 태어났다. 법치주의를 주장했으며 법가를 집대성한 철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보통이라면 '한자(韓子)'라고 해야겠지만, 후에 당의 한유를 한자라 부르게 되면서, 유가가 아닌 법가 사상가인 한비자의 우선순위가 낮기 때문에 한자 쪽을 이름 전체를 넣어서 한비자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7448    [그것이 알고싶다] - 중국 고대 백가묵가 - 묵자 댓글:  조회:3362  추천:0  2019-11-20
철학사전 묵자   [ 墨子 ] 묵자 출생 - 사망 BC 479년경 ~ BC 381년경 이명 본명 : 적(翟) 직업 사상가 분야 묵가 국적 중국 시대 전국시대 초기 이름은 적(翟). 제자백가의 하나인 묵가의 시조로 전국시대 초기에 활약한 사상가. 철기의 사용으로 생산력이 발전하자, 농민, 수공업자, 상인 등은 그에 힘입어 신흥계급으로 성장하고 점차 종래의 지배계급이던 씨족 귀족보다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신흥계급의 입장에 서서 씨족 귀족의 정치와 지배에 정면으로 대결하면서 그의 사상을 전개했다. 그의 정치사상은 '천하(天下)에 이익되는 것(利)을 북돋우고(興), 천하의 해가 되는 것(害)을 없애는(除)' 것을 정치의 원칙으로 하고, 그 실현 방법으로서 유능하다면 농민이나 수공업자도 관리로 채용하는 '상현'(尙賢), 백성의 이익에 배치되는 재화ㆍ노동력의 소비를 금지하는 '절용'(節用), 지배자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약탈이나 백성 살상의 전쟁에 반대하고, 타인을 사랑하고 자신과 타인의 이익을 서로 높이는 '비공'(非攻)과 '겸애'(兼愛)를 주장했다. 또 이러한 원칙과 방법에 기초를 둔 현실비판 속에서, 논리적 용어, '유'(類 : 보편), '고'(故 : 까닭, 이유)의 개념 등을 발명, 구사하여 논리적 사고를 풍부히 했다. 주요저서 墨子 53편 관련이미지 23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묵자의 동상 이미지 갤러리 출처: 중국역대인물 초상화 [네이버 지식백과]묵자 [墨子] (철학사전) =====================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묵자 사랑의 정치 철학과 논리의 발견 [ 墨子 ] 이미지 크게보기 『묵자』 저자 묵적(墨翟) 해설자 강신주(인천대학교 중국학과 강사) 목차 민중 편에 서서 『묵자』의 10가지 주제 사랑의 정치철학 요청된 초월적 종교론 논리의 발견 아쉬운 묵가의 소멸 더 생각해볼 문제들 추천할 만한 텍스트 민중 편에 서서 우리는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하여 진(秦)나라를 세우기 이전의 혼란의 시대를 선진(先秦)시대 혹은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는 탐욕, 의심, 모략, 갈등, 살육의 시대였다. 춘추시대에는 제후국들이 명목적이나마 주(周)나라를 인정하고 있었으나 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제후국들은 천하를 차지하려고, 혹은 다른 제후국들에 병합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전쟁의 과정에서 가장 위험한 삶을 보낼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바로 일반 민중이다. 제후들의 탐욕과 강박관념에 의해 야기되었던 수많은 전쟁과 전투에서 살육되었던 사람들은, 제후들을 대표로 하는 위정자들이라기보다는 바로 이 힘없는 민중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 전국시대에 습관적으로 자행되던 전쟁에 대해 단호한 반대 입장[非攻]을 보인 철학자이자 실천가가 탄생하는데, 그가 바로 묵적(墨翟)이다. 전국시대에 있어 전쟁을 반대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부당한 국가 권력에 대한 저항을 함축한다. 따라서 묵자와 그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견지하기 위해 강력한 공동체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공동체는 묵자가 죽은 뒤에도 계승ㆍ유지되었는데 그 지도자를 거자(鉅子)라고 했다. 제자백가들 중 유일하게 선생의 이름을 학파의 이름으로 사용했던 묵가(墨家)라는 사상가 집단은 바로 이렇게 탄생했던 것이다. 『묵자』의 10가지 주제 『묵자』는 묵자를 포함한 묵가들 전체의 사유와 논쟁의 기록이다. 묵가들의 철학적 주장들은 흔히 10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데, 이 10가지 주제들은 각각 『묵자』를 구성하는 편명이기도 하다. 1. 상현(尙賢) : 현명한 사람을 숭상해야 한다. 2. 상동(尙同) : 윗사람을 높이 받들며 따라야 한다. 3. 겸애(兼愛) :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한다. 4. 비공(非攻) : 전쟁을 금지해야 한다. 5. 절용(節用) : 재정 지출을 절제해야 한다. 6. 절장(節葬) : 장례를 간소화해야 한다. 7. 천지(天志) : 하늘의 뜻을 따라야 한다. 8. 명귀(明鬼) : 귀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9. 비악(非樂) : 사치의 상징인 음악을 금지해야 한다. 10. 비명(非命) : 주체적 노력에 반하는 숙명론을 거부해야 한다. 얼핏 살펴보아도 이 열 가지 주제들은 심각한 모순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한다는 주장이, 윗사람의 뜻을 숭상하고 따라야 한다거나 하늘과 귀신의 존재를 긍정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수평적인 차원의 사랑인 '겸애'는, 수직적인 독재론이나 하늘과 귀신의 의지를 강조하는 초월적인 종교론의 그것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묵자』를 자세히 읽어 보면 이러한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이 열 가지 주제 가운데 핵심 주제인 '겸애'이며, 다른 주제들은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맹자』와 『장자』, 『한비자』, 『여씨춘추』, 『회남자』 등에서 묵가의 핵심 주제로 '겸애'를 규정하고 있는 데서도 드러난다. 『묵자』의 「겸애(兼愛)」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반드시 혼란이 일어나는 까닭을 알아야만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게 되고, 혼란이 일어나는 까닭을 알지 못하면 곧 다스릴 수 없는 것이다. 비유를 들자면 마치 의사가 사람의 병을 고치는 것과 같다. 반드시 병이 생겨난 까닭을 알아야만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며, 병이 일어난 까닭을 알지 못하면 곧 고칠 수가 없는 것이다. 묵가는 세상에 혼란이 발생하는 원인을 바로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는 현실에서 찾았다. 결국 문제는 사랑인 것이다. 공동체의 성원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혼란이 발생했다면, 결국 공동체의 성원들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게 할 수만 있다면 혼란은 종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묵가의 모든 사유는 어떻게 하면 공동체 성원들이 상호간의 사랑을 회복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있다. 사랑의 정치철학 묵자의 '겸애'는 '차별이 없는 사랑'이나 '상호간의 사랑'을 의미한다. 그 때문에 묵가의 '겸애'를 기독교적 사랑과 유사한 '박애(博愛)'의 의미로 속단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그러나 겸애는 현존하는 정치적 질서나 위계적 구조를 긍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남의 부모를 나의 부모처럼 여기고, 남의 집안을 나의 집안처럼 여기고, 남의 도읍을 나의 도읍처럼 여기고, 남의 국가를 나의 국가처럼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가족 제도나 정치 질서는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 단지 '나'와 '남'의 차별을 없애자는 것이지 모든 사회적 차별을 없애자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묵자의 '겸애'란 평등한 사랑이라기보다는 불평등한 사랑이라고 규정될 수 있겠다. 다음으로 겸애라는 개념 속에 들어 있는 공리주의적1) 성격을 살펴보자. 묵가의 사랑은 아끼고 사랑하는 단순한 감정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물질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묵가에게 있어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물질적으로 이롭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겸애' 혹은 '겸상애(兼相愛)'2)라는 묵가의 주제는 항상 '교상리(交相利)'3)라는 표현과 연용해서 사용 한다. 예를 들어 참혹한 살육으로 점철되었던 전국시대 민중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을 것인데, 묵가는 민중의 고통을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굶주린 자가 먹을 것을 얻지 못하고 추운 자가 옷을 얻지 못하며 수고하는 자가 휴식을 얻지 못하는 것, 이 세 가지가 백성들의 커다란 환난이다. 군주로서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다. 반드시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하고 추운 자에게 옷을 주어야 하며, 노동이나 병역으로 지친 자는 쉬게 해 주어야 한다. 백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 백성에게 가장 유효한 이익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군주다. 그렇기 때문에 묵가는 "윗사람을 높이 받들며 따라야 한다"는 독재론을 피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독재를 지향하는 전체주의자들이라서가 아니라, 군주만이 유일하게 실질적인 재력과 권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점에서 우리는 『묵자』의 나머지 네 주제, 즉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고 재정 지출을 절제하도록 하며, 장례를 간소화하고 음악을 금지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군주가 겸애를 실천하려면 백성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허례허식에 드는 비용을 줄여야 하고 재정 지출을 절제해야 하며, 백성의 삶 자체를 고통에 빠뜨리는 전쟁도 수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요청된 초월적 종교론 앞에서도 말했지만, 묵가에게 있어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물질적 이익을 준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자임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라도 물질적인 이익을 누군가에게 제공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남에게 준다면 그의 삶은 궁핍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경제학적 원리다. 이러한 점에서 묵가의 고난에 찬 실천 과정이 유래한다. 『장자(莊子)』에서는, 묵가의 무리가 "대부분 짐승가죽옷과 베옷을 입고 나막신이나 짚신을 신고서 밤낮을 쉬지 않았으며,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삶의 표준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 다시 말해 남에게 물질적 이익을 제공하려는 사람은 자신을 돌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면 자신은 굶어야 한다. 헐벗은 자에게 따뜻한 옷을 주면 자신은 춥게 지내야만 한다. 삶에 지친 사람을 대신하여 노동을 하면 그 자신이 피로해질 수밖에 없다. 바로 이들이 묵가의 무리였던 것이다. 묵가의 무리는, 이러한 희생이 너무나 힘든 일이긴 하지만, 사회의 혼란과 갈등을 위해 반드시 해야만 한다고 확신했으며 스스로 그렇게 살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희생 정신은 이기심이나 탐욕, 질투,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위정자들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다. 여기서 묵가는 위정자들로 하여금 겸애의 정신을 실천하도록 하기 위해서 새로운 논리 장치를 고안한다. 그 논리 장치가 바로 하늘과 귀신의 의지를 긍정하는 초월적 종교론이다. 천자는 천하에서 가장 귀한 사람이며 천하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부유하고 귀한 사람은 마땅히 하늘의 뜻을 따라서 순종하지 않을 수 없는 법이다. 하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며 - 즉, 겸상애(兼相愛) - 서로를 이롭게 해주기 - 즉, 교상리(交相利) - 때문에 반드시 하늘의 상을 받을 것이다. 하늘의 뜻에 반하는 사람은 서로를 미워하며 서로를 해쳐서 반드시 하늘의 벌을 받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묻기 쉽다. 묵가들은 하늘과 귀신의 의지가 진정으로 존재한다고 믿었을까? 현대의 일부 연구자들은 묵가의 초월적 종교론을 기독교와 비교하며, 그 유사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연구 경향은 묵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전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묵가들이 주장하고 싶었던 것은 '겸상애'와 '교상리'라는 실천적 원칙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결코 신을 최종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는 신학자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그 당시 제사와 관련된 종교적 통념에 호소함으로써 자신들의 실천 원칙을 정당화한 것에 불과하다. 만약 조상의 귀신이 있다는 믿음과 같은 종교적 통념이 통용되지 않았다면, 묵가들은 다른 논거에 의해서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려고 했을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묵가의 주장은 '신을 믿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자는 데 있었다. 논리의 발견 서양의 철학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데 비해 동양의 철학은 직관적이고 신비적이라는 지적이 있다. 이성(理性)4)은 합리적 추론의 능력을 가리키는 동시에 이유를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성적인 사유는 기본적으로 어떤 주장에 대해 이유나 근거를 대는 사유다. 이 점에서 『묵자』는 동양 철학에 대한 기존의 편견을 뒤엎는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묵자』는 고유한 주장과 함께 철저하게 그것을 뒷받침하는 이유를 대고 있기 때문이다. 『묵자』의 이런 합리주의적 정신은 다음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어진 사람들은 취하고 버리는 것과 옳고 그른 것의 이유를 서로 알려 준다. 이유를 대지 못하는 사람은 이유를 대는 사람을 따르고 알지 못하는 사람은 아는 사람을 따르며, 할 말이 없다면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 묵가에서는 어떤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필요한 이유나 근거들을 세 가지로 유형화하는데, 그것이 유명한 '삼표(三表)'다. 말에 표준이 없는 경우, 이것은 비유하자면 움직이는 물레 위에서 동쪽과 서쪽을 확립하려는 것과 같아서 옳고 그름, 이로움과 해로움의 구분에 대해 분명히 알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말에는 반드시 세 가지 표준이 있어야 한다. 무엇을 세 가지 표준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곧 역사적 표본과 경험적 근거, 현실적 유용성이다. 무엇에서 역사적 표본을 찾는가? 옛날 성왕들의 사적에서 찾아야 한다. 무엇에서 경험적 근거를 찾는가? 백성들의 귀와 눈으로 듣고 본 사실에서 경험적 근거를 찾아야 한다. 무엇에서 현실적 유용성을 찾는가? 형벌과 정책을 시행하여 그것이 국가, 백성 그리고 인민의 이익에 부합되는가를 살펴보는 데서 알 수 있다. 위의 세 가지로 분류된 근거가 중요한 이유는, 앞에서 살펴본 『묵자』의 열 가지 주제들이 모두 이런 근거들로 정당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우리는 다음과 같이 반문할 수도 있다. 옛날 성왕들의 사적이 근거가 될 수 있을까? 또 사람들의 경험이 근거가 될 수 있을까? 혹은 현실적 유용성이 근거가 될 수 있을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묵가가 근거나 이유를 가지고 주장을 제기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기본적으로 상대방이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따라서 묵가가 제시한 세 가지 근거는 당시의 사람들을 설득시키기에 충분하다고 판단되어 정립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 묵가는, 겸애라고 하는 유의미한 정치철학적 주장을 했다는 내용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그런 주장에 대한 합리적 근거를 제공하려 한 사유 방식을 최초로 피력했다는 측면에서도 중국 철학사에서 특기할 만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아쉬운 묵가의 소멸 묵가의 철학은 전국시대 초기에서부터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에 가장 유력한 사상이었다. 이것은 전국시대 중기의 맹자, 말기의 순자(荀子)나 한비자(韓非子)가 당시의 유력한 사상으로 묵가의 철학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도 확인될 수 있다. 묵가는 춘추시대 말기에 인문 정신을 드러낸 공자와 그를 수장으로 하는 유가(儒家)에 맞서 싸웠고 이런 싸움은 전국시대 내내 지속된다. 유가와 묵가 사이의 논쟁은 너무나 강렬하고 지속적이어서 장자(莊子)가 지식인들 사이의 사상 논쟁을 '유가와 묵가의 시비논쟁'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묵가가 이렇게 격렬하게 유가를 공격했던 이유는, 유가에서는 말로만 사랑을 외칠 뿐 그 사랑의 완성이 기본적으로 자기희생과 이타적 행위에 기초한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묵가에서는 사랑이란 반드시 사랑하는 사람을 물질적으로 이롭게 해야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묵가에게는 번잡한 예절, 무용한 장례 의식 혹은 화려하고 사치스런 음악 활동에 기생해서 살고 있는 유가의 무리가 위선자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대개 유가는 오만하고 자신만을 따르는 자들이어서 아랫사람들을 가르칠 수도 없고, 음악을 좋아하며 사람들을 어지럽히기에 직접 백성들을 다스리도록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운명이 있다는 주장을 세워 할 일에 태만하므로 직책을 맡겨서도 안 되고, 상례를 중시하고 슬픔을 그치지 않으니 백성들을 자애하도록 해서도 안 되며, 옷을 기이하게 입고 용모를 치장하는 데 힘쓰기에 백성들을 이끌도록 해서도 안 된다. 아이러니한 것은 유가에 대한 묵가의 치열하고 지속적인 공격이 묵가 사상을 역사 속에 묻히게 만든 한 가지 이유가 되었다는 점이다.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가 단명한 뒤 한(漢)나라의 무제(武帝)가 "모든 제자백가들을 물리치고 유학만을 숭상한다"고 선언한 뒤 중국의 역사는 유학의 지배 하에 들어갔고, 그 때문에 묵가의 사상과 실천은 철저하게 무시되고 망각되어 버렸던 것이다. 철학사적으로 묵가 사유가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차별적인 사랑을 강조했던 유가들과는 달리 인간 사이의 차별 없는 사랑을 역설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중요한 그들의 공헌은 동양 철학에 대해 해묵은 편견을 수정해 준다는 데 있다. 우리는 논리와 이유를 강조했던 서양 철학과 달리, 동양 철학이 예술적이고 직관적이며 나아가 신비주의적이라고까지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유나 근거에 기초를 두지 않는 철학은 가능할까? 그렇다면 동양 철학은 철학이라기보다 종교에 가까운 것이게 된다. 바로 이 점에서 이유와 근거를 강조했던 묵가 사유는 우리로 하여금 동양의 정신을 다시 반추하도록 하는 계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묵자』를 진지하게 읽게 되면, 우리는 동양에 합리주의적이며, 따라서 논증적인 전통이 있었다는 것을 긍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철학이 철학일 수 있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인 믿음이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철학은 삶에 대한 건전한 주장과 그에 대한 충분한 근거대기 작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묵가는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하늘의 의지로서 '천지(天志)'라는 외적인 권위를 도입한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외적인 권위에 의해 실현가능하다고 할 수 있는가? 타인에 대한 사랑이 외적인 권위를 두려워해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타인에 대한 사랑은 일종의 역설에 빠지게 된다. 이 경우 사랑의 대상은 타인이라기보다는 외적인 권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은 주체에 의해 결단되고 지속되는 정감일 때에만 의미가 있다. 2. 묵가들이 사회적 혼란과 갈등을 사회 구성원들 간의 상호 애정의 결여에서 찾았다. 그러나 사회적 혼란과 갈등은 구조적인 문제로 접근해야 올바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묵가에서는 군주, 관료, 인민으로 표현될 수 있는 통치 질서를 그대로 인정한 후, 사회 구성원 상호간의 사랑을 회복함으로써 사회적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았다. 이런 논리라면 사회적 문제는 개개인의 자의적 결단에 내맡겨지게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구성원 상호간의 사랑을 유도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점이다. 추천할 만한 텍스트 『묵자』, 묵적 지음, 김학주 옮김, 명문당, 2003. 각주 1) 공리주의(utilitarianism)에 따르면 도덕의 정당화는 더 많은 쾌락이나 이익에 대한 계산으로 가능해진다. 예를 들면 음식을 절제하는 것이 좋다는 덕목은 음식을 과식했을 때 생기는 불쾌감으로 쉽게 설명될 수 있다. 2) 겸애(兼愛)에 대한 자세한 표현으로, '모두를 아울러 서로 사랑한다'는 의미다. 흥미로운 것은 『묵자』를 보면 '겸애'를 공자 사유의 핵심 범주인 '인(仁)'으로 대치해서 사용한다는 점이다. 이 점은 묵자의 사상이 기본적으로 공자의 사유를 배우면서 그를 극복해 갔다는 증거일 것이다. 3) '상호간에 서로 이익을 제공한다'는 의미다. 『묵자』에서는 '겸애'를 '인'으로 설명하는 동시에, '교상리'를 '의(義)'로 대치해서 쓰기도 한다. 4) 이성(reason)은 '계산'이나 '이유'를 뜻하는 라틴어 '라치오(ratio)'에서 온 말이다. 라치오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로 쓰였다고 한다. 첫째로 자신의 행동을 인식하고 판단하여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둘째로 동기나 이유, 셋째로는 정당화다. 그래서 '라치오'로부터 유래한 '이성'이란 말은 어떤 주어진 것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둔 채 반성하고 사유한다는 철학적 의미를 띠게 된 것이다. 거리를 두고 반성할 수 있어야 우리는 자신의 행동을 반성할 수 있고 그 행동의 이유를 발견할 수도 있으며, 나아가 그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묵자 [墨子] - 사랑의 정치 철학과 논리의 발견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 묵자라는 존칭으로 일컬어지는 묵적(墨翟)의 생존연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그의 활동 반경을 미루어 볼 때 대략 BC 479~438年 경으로, 공자(孔子)보다 10여 년 뒤에 노나라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사기(史記)》에는 묵자가 송나라 대부라고 적혀 있으나 노예 출신의 수공인이어서 도망을 방지하기 위해 얼굴에 입묵했으므로 묵(墨)이라 불린다는 설이 있다. 수성(守城)기구ㆍ병기ㆍ공구 등의 기계(器械) 제작에 능했으며 성곽 방위술에 뛰어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주(周)나라의 사각(史角)이라는 사람의 자손에게 글을 배웠다. 그리고 공자의 유학도 배웠으나 번거로운 예의가 백성들의 생산을 저해하고 생활을 궁핍하게 할 우려가 있으며 혼란한 세상을 구제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배척했다.   그의 근본 사상은 [겸애설(兼愛說)]로서, 자타를 구별하여 사랑을 차등화하는 기존 유가의 한정적 사랑(묵가에서는 이를 “별애(別愛)”라고 부름)은 개인 간에 시기(猜忌)와 도둑질, 살인과 투쟁을 유발시키며 국제간에는 전쟁을 야기 시키는 등 천하의 가장 큰 화근이라 하여 비판하고, 나와 남을 구분하지 않는 겸애(謙愛)를 실천하는 것만이 이러한 사회적 병폐와 문제를 제거하여 궁극적인 태평성세를 이룩할 수 있는 사상이라고 주장했다.   모든 인간이 계급이나 신분의 차등에서 벗어나 평등한 사랑을 실천할 때 사리사욕이 아닌 공리를 얻어 서로가 이익을 보게 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보았으니 이를 [교상리(交相利)]라 부른다.   정치적 견해에 있어서는 [상현정치(尙賢政治)]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적으로는 운명론을 배척하고 노력에 의한 생산의 증대와 절용이 부의 원천이라고 주장하면서 귀족들의 사치ㆍ낭비ㆍ부의 편중을 지탄했다.   묵자는 이러한 자신의 사상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 극히 검소하고 분수에 맞게 생활했으며 월나라 왕이 사방 500리에 달하는 봉지를 준다고 하는데도 분수에 넘는 대우는 오히려 자신의 사상과 배치된다 하여 거절했다.   그는 천하에 이로운 일이 있으면 쉴 틈이 없이 동분서주, 찾아가 할만큼 근면하여 고통을 돌보지 않고 부지런히 활동했는데 “정강이의 털이 부스러질 만큼 열심히 노력했다(《맹자(孟子)》).”는 정도로 호인이며 선인이었다고 한다.   제후들과 귀족들의 횡포 때문에 고통을 받아오던 백성들은 묵자의 평등ㆍ박애 사상에 크게 공감하여 당시에는 오히려 유가를 능가하는 주도적 사상이 되어 일세를 풍미했다.   그러다가 전국 시대에서 진(秦)의 통일을 거치는 동안 점차 쇠퇴하더니 한나라 때에 이르러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이처럼 잊혀진 사상체계였던 묵가의 사상은 청나라 말에 이르러 묵자의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묵가(墨家)는 묵자가 주창한 사상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집단을 이르는 말이다.   묵자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이 그의 교설을 편집한 것으로 전해진 《묵자(墨子)》 53편에 남아 있는데 상현(尙賢)ㆍ상동(尙同)ㆍ겸애(兼愛)ㆍ비공(非攻)ㆍ절용(節用)ㆍ절장(節葬) 등의 주장은 그 하나하나가 당시의 일반적인 민중들의 관념에 비해서는 아주 획기적인 것이었다.   신분과 지위상의 귀천ㆍ경제적인 빈부ㆍ지능상의 현우(賢愚)ㆍ힘의 강약을 불문하고 모두가 평등함을 지적하며 육친간의 친소에 따라 사랑의 지향이 달라지는 유가(儒家)의 인(仁)을 배척했다.   만민에 대한 박애 정신인 겸애(兼愛)를 주창하는 묵가는 출발점부터 유가와 대립하기 시작하여 당시의 양대 학파를 이루었으며, 상대방을 통박(痛駁)하면서 소위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서막을 올렸다.   묵가는 사람들이 선천적으로 결정되었다고 믿는 모든 것을 타파하려고 했다. 혈연 관념을 타파하기 위한 겸애(兼愛), 인간의 숙명관을 타파하기 위한 비천명(非天命)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잘못된 관념을 타파해야만 비로소 시비곡직을 바르게 가릴 수 있고 현우(賢愚)ㆍ근태(勤惰:부지런하고 나태함)만을 가지고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다는 게 묵자의 생각이다. 이 겸상애(兼相愛)와 비천명은 묵자사상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겸애(兼愛)사상과 교상리(交相利)   묵자는 그의 중심 사상인 자타를 구별하지 않는 평등애, 곧 겸애를 실현시키는 방법으로 [삼표(三表)]를 내세우고 이를 공리의 기준으로 삼아 개인의 사리가 아닌 천하의 공공복리를 추구하는 [교샹리(交相利)]를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삼표란 성왕(聖王)의 사적에 근본을 두는 [본(本)], 백성들의 직접 경험에 근거한 [원(原: 연원(淵源))]>, 국가와 백성들의 이익에 일치하는 데에 효용성을 두는 [용(用)]을 가리킨다.   그들은 오로지 남을 위해 산다는 종지(宗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남을 위해서는 자기의 희생을 아끼지 않았으나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일은 오히려 가능한 한 삼갔다. 비락(非樂)과 절장(節葬:장례식을 검약하게 함)을 주장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상현(尙賢)사상과 상동(尙同)사상   국가 제도는 안정되고 통일된 세상을 견지하기 위한 하늘의 뜻이라는 것이 묵자의 생각이다. 천하를 한 사람이 다스릴 수는 없으므로 각인의 능력에 맞게 제후와 향장ㆍ이장(里長) 등을 임명해야 되지만 그러한 직분을 담당할 사람으로는 범인이 아닌 현자(賢者)라야 한다고 역설한다.   현명한 사람을 숭상하여 아랫사람이 위에 있는 현자를 모방하거나 동일하게 되어가도록 해야 한다는 [상동정치]를 주장하는 것이다.   평화 사상인 비공(非攻)   [비공]이란 타인을 공격하지 않으며 따라서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철저한 비전론이다. 묵자는 전쟁을 집단적인 살인행위로, 모든 죄악 가운데 가장 무거운 죄악이라고 보았다.   그는 실제적으로도 수성 장비를 제작하고 밤낮으로 10일을 달려 자기의 조국인 송나라를 침공하려는 초(楚)나라 왕과 공성 기구 제작자인 공수반(公輸盤)을 찾아가 이를 저지시킨 일도 있다.   경제 사상인 절용   묵자는 근검절약을 주창했으며 이를 몸소 실천했다. 그는 “정수리부터 발꿈치까지를 모두 갈아서라도 천하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하리라(마정방종 이천하위지(摩頂放踵, 利天下爲之)).”고 외치며“몸을 가릴 만큼만 입고 먹을 만큼만 헤아려 먹으며 노예들과 똑같이 어울릴지언정 벼슬자리 따윈 얻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탁신이의 양복이식 비어빈맹 미감구사(度身而衣, 量腹而食, 比於賓萌, 未敢求仕))”고 하면서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다.   대부분이 농민이며 노동자ㆍ수공업자들이었던 묵자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생산의 증가를 위해서는 인구의 증가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조혼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생산의 증대와 아울러 물자를 절약해 써야함을 강조했다. 길흉화복이 타고 나는 것이라는 운명론을 배척하고 근면과 절약이 부의 원천이라고 하면서 왕후장상 등 귀족들의 호의호식과 사치ㆍ낭비를 비난하고 특권 계층에 의한 부의 독점을 지탄했다.   묵자의 제자들과 묵가의 성쇠   묵자 사후에 그의 제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활동했는데 역대의 거자(鉅子: 묵가의 최고 지도자)로 알려진 금활리(禽滑釐)ㆍ맹승(孟勝)ㆍ전양자(田襄子) 등의 활약이 두드려졌고 절용과 실리 비공 등을 주장한 학자 송형(宋銒)과 윤문(尹文)ㆍ공상과(公尙過)ㆍ허행(許行) 등등이 묵자의 사상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했다.   또 여러 계파 중 상리씨(相理氏) 무리는 동방의 제(齊)에서, 초나라 사람인 고획(苦獲)ㆍ등능(鄧陵)ㆍ자이치(子巳齒) 등은 남방에서, 상부씨(相夫氏) 무리는 서방의 진(秦)나라에서 활동했다.   그 중 별묵(別墨)으로 불리는 혜시(惠施)와 공손룡(公孫龍) 등은 변론의 방법을 개발하여 묵가의 겸애사상과 철학적 입장을 밝히고 변호하면서 제가(諸家)에 대한 비평에 치중했는데 이들을 [명가(名家)]라고도 부른다.   한동안 묵가들의 활약은 유가를 압도했다.   맹자는 “양주(楊朱)와 묵적의 학설이 하늘 아래 가득하여 천하의 학설이 양주에게 쏠리지 않으면 묵적에게 돌아간다.”고 한탄했다. 한비자(韓非子) 또한 이렇게 말했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저명한 학파를 꼽자면 유가와 묵가를 들 수 있다.” 유가가 비약적인 발전을 했으나 그때까지도 묵자의 학설은 유가와 더불어 ‘세상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학(顯學: 뚜렷하게 드러난 학파)’으로 꼽힐 정도로 창성했다.   묵가 집단은 거자를 중심으로 철통같은 단결력으로 조직되어 종교 집단이나 정치 집단처럼 엄격하게 활동했으며 그 조직원은 [묵자(墨者)]라고 불렸다.   복돈(腹)ㆍ맹승(孟勝)ㆍ전양자(田襄子) 등의 초기 거자들은 투철한 묵가 사상을 지니고 이를 실천하는데 전력을 다 했으나 이후 묵가 조직에 이들 만한 사상적 지도자가 계속해 출현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비자가 “묵자가 죽은 뒤 상리씨의 묵가, 상부씨의 묵가, 등릉씨의 묵가로 분열되었다.”고 전하는 바와 같이 묵가의 분파들이 서로를 별묵이라 비난하며 다투었다〈《장자(莊子)》〈천하편(天下篇)〉고 한다.   그래서인지 전국 말기 칠국의 대립 항쟁 과정에서 쇠약해지기 시작한 그들은 진(秦)ㆍ한대(漢代)이후에는 학맥 자체가 완전히 끊어져 잊혀진 집단이 되었다.   그러다가 청대(淸代)의 고증학자들에 의해 비로소 묵가 연구가 부활되었던 것이다.
7447    [그것이 알고싶다] - 중국 고대 유가 성악설 - 순자 댓글:  조회:3211  추천:0  2019-11-20
철학사전 순자   [ 荀子 ] 이미지 크게보기 순자 출생 - 사망 BC 298년 ~ BC 238년 직업 사상가 분야 유물론적 경향의 유가(儒家), 성악설(性惡說) 국적 중국 시대 전국시대 중국 주나라 말기 전국시대의 유물론적 경향의 유가(儒家).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에 대하여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성). 그 시대는 전국의 7대 강국이 중국의 천하 통일을 지향하면서 격렬하게 대립하고, 그 와중에서 진(秦)이 통일 사업을 강력히 추진하였던 시대였다. 그는 객관적 조건이 무르익고 있던 중국 통일의 과제에 몰두하여, '군거화일'(群居和一)이라고 하는 질서를 지향하고 '예의'(禮義)라는 수단을 제기하였다. '군거화일'이란 천자, 제후, 사대부, 관인백리(官人百吏), 서민이 직분에 따라 일을 하고 각각 그 '직분'(職分)에 만족하는 질서를 일컫는다. '예의'는 이 '분'(分)을 결정하는 기준(귀천지등貴賤之等, 장유지차長之差, 지우능불능지분知愚能不能之分)이며, 선왕(先王 : 성인聖人)의 제작(制作)에 따른 것이다. 이 '예의'의 '분'은 '천인(天人)의 분'(分)을 전제로 하고 있고, 인간의 자연에 대한 공통성이 이것에 의해 크게 발휘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부국강병의 문제도, 인재를 양성하는 문제도, 모두 '예의'에 의거하여 해결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예의'는 법가의 '법'(法)에 접근하고 있고, 인식론상으로는 도가의 영향이 농후하다. 그는 유가의 입장을 지키면서, 진(秦)의 입장에 서서 제가(諸家)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흡수하여 선진사상(先秦思想)의 집대성자라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순자』는 그의 언론(言論)을 모은 것이다. 관련이미지 36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순자 이미지 갤러리 출처: 만화로 보는 교과서 인물 [네이버 지식백과]순자 [荀子] (철학사전)   ============================///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순자 성왕이 다스리는 나라 [ 荀子 ] 이미지 크게보기 『순자』 저자 순황(荀況) 해설자 장현근(용인대학교 중국학과 교수) 목차 『순자』와 실천 유학 『순자』와 그 시대 『순자』의 핵심 관념 순자의 영향과 현대적 의미 『순자』의 한계와 가능성 더 생각해볼 문제들 추천할 만한 텍스트 『순자』와 실천 유학 사회에 대해 건강한 관심을 갖도록, 그리고 복잡다단한 인간 관계를 도덕적으로 해결하여 보다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원만한 사람을 키워 내는 것이 유가 사상의 큰 목적이다. 그래서 유가 사상은 정치철학이자 사회철학이며, 교육철학이자 인생철학이기도 하다. 유가의 경전인 『시경』이나 『서경』, 『주역』 등이 확립된 시기를 주(周)나라 초로 본다면, 유가 사상은 5~6백 년의 온축을 거쳐 마침내 공자에 의해 처음으로 집대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로부터 3백여 년 동안 어떤 외부 사상의 유입도 없이 중국 내에서 자생한 제자백가의 사상은 인류 역사상 가장 빛나는 학문적 성취 중 하나다. 우주의 작동 원리에서 인간 내면의 심성 문제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상상력과 치밀한 탐구로 수많은 학파와 사상가들이 출몰하였다. 『순자』는 정통 유가를 자임한 순황(荀況)이 제자백가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초기 유가 사상을 두 번째로 집대성한 탁월한 학문적 업적을 담은 책이다. 전통 시대 중국을 지배해 온 정치적 이념으로서 유교 사상은 순자의 영향이 매우 컸다. 순자는 이렇게 얘기한다. 듣지 않음은 듣느니만 못하다. 듣는 것은 보느니만 못하다. 보는 것은 아느니만 못하다. 아는 것은 행하느니만 못하다. 학문은 그것을 행하게 되었을 때 그친다. 『순자』를 읽으면 관념적 도덕이 아니라 실천적 도덕을 생각하게 된다. 또한 갈등하는 현대 사회에서 지식인의 역할이 무엇인지 그리고 냉혹한 법치와 자본의 지배를 넘어서 인류를 위한 새로운 이념적 대안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순자』와 그 시대 순자는 정치적으로 부국강병과 실리를 숭상하던 전국 시대 말기에 왕도(王道)에 대해 목청을 높였으며, 예의로 질서를 잡아가는 예치(禮治) 국가를 세우라고 권고하였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복잡한 세금과 요역을 과감히 줄이고 투기 세력을 억제하여 농업 중심의 경제 질서를 안정시키자고 주장하였다. 사회적으로는 신분의 대변동 시대에 오히려 신분 질서의 확립을 강조하는 한편, 도덕적ㆍ학문적 성취를 통한 신분 변동은 긍정하였다. 당시 중국 천하의 통일이 눈앞에 닥친 시대 분위기와 맞물려 제자백가의 다양한 주장들이 통합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각 학파의 사상가들은 다른 학파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였으며, 그들의 저작 또한 백과사전과 같은 성향을 띠게 되었다. 『순자』는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순자의 시대는 정치적으로 전국칠웅이 첨예하게 대립하였고 사상적으로 제자백가의 다양한 경쟁이 절정에 이르렀으며, 사회적으로 계급이 동요하고 신분 변동이 극심했다. 그래서 국가간의 합종연횡이 난무하고 부국강병을 추구한 법가 사상이 우세한 환경이었지만 순자는 최고의 학자로서 스스로를 위대한 유가 사상가로 자임하였다. 유가 내부로 볼 때 당시는 공자를 추종하는 세력들 사이에 분파 현상이 치열하고, 특히 맹자(孟子)에 의해 공자 사상의 정치적 의미가 더욱 풍부해진 시기였다. 정부 사업으로 춘추전국시대 서적을 총정리했던 한나라 유향(劉向)은 순자가 남겼다는 수만 자의 문헌과 '손경의 책'이란 이름으로 돌아다닌 322편의 글 가운데 중복된 290편을 빼고 32편으로 확정하여 재정리하였다. 그리고 『손경신서(孫卿新書)』라 이름을 붙인 다음 「서록(敍錄)」을 달았다. 순자 본인의 초기 저작들은 그의 생전에 이미 널리 유행했었으며, 현존 『순자』의 상당 부분은 그 초기 작품들로 생각된다. 나머지는 그의 제자들의 기록과 후인들이 순자의 이름을 빌어 지은 글 혹은 다른 작품들이 뒤섞여 있다. 하지만 『순자』의 모든 내용은 본인의 친필 저작 여부와 무관하게 일관된 사상체계를 갖추고 있어 순자의 기본 사상을 연구하는 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현재 전해지는 『순자』 20권은 당나라 양량(楊倞)1)이 두 차례 정리하고 재편집하여 주석을 덧붙인 것이다. 『순자』는 대부분 각 편의 핵심 주제를 편명으로 삼고 있다. 그 30여 편명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하늘과 인간의 일, 정치ㆍ경제와 논리학에 이르기까지 백과사전식의 종합적인 학문을 다루고 있다. 당나라 말기 한유(韓愈)가 "맹자는 순정하고도 지순하지만, 순자는 대체로 순정하되 조금 하자가 있다"고 평한 이래 송나라 이후의 성리학에서는 한결같이 순자 사상을 부정하고 멀리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공격은 주로 『순자』의 「성악(性惡)」2)편과 「비십이자(非十二子)」편에 집중되었을 뿐, 『순자』 전체를 진지하게 연구하거나 주석한 사람은 없었다. 순자가 재조명된 것은 청나라에 이르러서이다. 많은 유학자들이 양량 주석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고, 위서 여부를 고증하였으며, 해독이 어려운 글자에 상세한 해설을 덧붙였다. 이들을 종합하여 『순자』에 관한 가장 상세하고 완전한 주석서 『순자집해(荀子集解)』를 낸 사람은 왕선겸(王先謙)3)이다. 『순자』의 핵심 관념 순자는 현세의 군주를 지극히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현실 군주를 위대한 성왕으로 만들어 도덕적인 나라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그 방법은 신분에 기초한 예의를 통해 사회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 사고의 바탕에는 인위적인 노력으로 하늘을 제어하고 악한 본성을 교화하며, 각종 폐단을 해소해야 한다는 사유가 깔려 있다. 1) 천생인성(天生人成), 성악(性惡), 정명(正名) 순자는 사람의 사회성을 중시하였으며, 국가 권력을 개인의 자유보다 우선시하였다. 그는 사회 질서의 안정을 위한 예(禮)의 두 가지 기능을 중심으로 사유하였다. 하나는 신분 등급ㆍ도덕적 성취 등 각종 질서를 분명하게 구분시켜 주는 인위적 기능 즉 명분(明分)이며, 다른 하나는 인류로 하여금 원만하고 만족스러운 집단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기능 즉 사군(使群) 기능이다. 순자 사유의 바탕은 이 두 문제를 중심으로 엮어져 있다. 순자의 우주관과 인생관은 한마디로 자연 세계가 인문 세계에 의해 주재된다는 천생인성(天生人成)4)이다. 천지의 기운으로 세상만물이 생겨났으니 이들을 조화롭게 꾸미고 성취시키는 것은 사람, 즉 성인의 일이다. 하늘의 도와 인간 행위의 조화로 이 세계가 이루어졌으며, 예의라는 인간의 힘이 개입되었을 때 하늘은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다는 사고다. 순자는 하늘과 인간을 완전히 나누어 생각하면서 하늘을 그저 불변하는 자연체로만 파악한다. 인간 세상의 치란(治亂)은 하늘 때문이 아니라 인위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사람 스스로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초점은 인위, 즉 예를 강조하는 데 있었다. 순자는 사람의 본성을 악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본질적ㆍ이성적으로 악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타고난 본능 혹은 동물적 욕망의 결과가 악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탄생 후 사회적 존재가 되면서 인간의 악한 성질이 발현된다는 의미다. 그 발현 양태는 경쟁과 다툼이며 결과는 사회적 혼란이다. 순자가 성악설을 제기한 목적은 인위적인 교육과 감화를 통해 인간의 악한 성질을 바꾸어 선한 행위를 하도록 이끌려는 것, 즉 화성기위(化性起僞)5)였다. 따라서 순자 성악설의 요지는 인위적 예의를 강조하는 데 있다. 순자의 인식론은 소극적인 적폐의 해소, 즉 해폐(解蔽)6)와 적극적으로 명분을 바로 세워 공공 인식에 도달한다는 정명(正名)으로 대표된다.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내재하는 맑고 깨끗한 마음이 가려져 있을 때 한 쪽으로 치우치는 폐단이 생겨나므로 인위의 결정인 예를 통해 쌓여가는 폐단을 해소하는 것이 올바른 인식에 도달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명분을 바르게 세움으로써 공공 인식에 도달할 수 있으며, 인위의 결정체인 예의로 사회 혼란을 야기하는 인식의 헷갈림을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2) 성왕(聖王) 사람의 사회성을 강조하고 집단의 질서를 중시했던 순자는 그 질서를 관장하는 중추로서 군주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선을 향해 가는 모든 인위적 행위의 표준인 예의를 만들고 주도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성왕(聖王)이다. 현실 군주는 이 성왕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천하를 다스리는 막중한 책임뿐만 아니라 도덕적 판단의 최고의 준칙이 되어야 하는 만큼 군주의 지위와 역할은 높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적인 군주인 성왕은 인륜의 극치이고 이상적 인격의 최고 형태이다. 성왕은 우선 인격적으로 완전하고 지혜가 출중해야 한다. 예의와 그것의 역사적 원칙인 통류(統類)7)를 꿰뚫고 있어야 하며, 철저히 규범을 준수하여 왕도(王道)를 실현해야 한다. 인간의 끊임없는 적극적 행위를 통해 선을 쌓아가니 모든 인민의 가치 판단의 준거가 된다. 이러한 성인은 예의를 힘써 배우고 실천하여 역사에 관통하는 원칙을 깨달으면 누구나 될 수 있다. 즉, "길거리의 어떤 사람도 우(禹)임금처럼 성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순자는 군주 정치라는 현실적 한계 때문에 기왕에 세(勢)를 얻어 군주가 된 사람의 정치적 영향력을 인정하고, 왕도엔 못 미치지만 믿음을 강조하며 법과 인민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패도(覇道) 또한 긍정한다. 어떤 상태든지 인위적 노력만 기울일 수 있으면 예치사회가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순자』의 상당 부분은 현명한 관료의 임용, 외재적 규범 확립, 복지 정책 등 이를 위한 구체적인 정책ㆍ대안들을 다루고 있다. 3) 예치(禮治) 순자는 외재적 사회 규범을 통해 질서 있는 사회를 복원코자 하였다. 순자는 예의야말로 도덕적으로 완벽한 질서를 구가할 수 있는 매우 구체적이고도 실행 가능한 규범이며, 역사적으로 성왕의 나라에는 예의의 대원칙인 통류가 관통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시ㆍ서를 통한 내부적 성인 공부, 즉 내성(內聖)의 길보다는 예의를 드높이는 외부적 왕도의 실천 즉 외왕(外王)의 길을 더 중시하였다. 순자는 역사적으로 관통하는 예의 원칙이 지금의 정치 권력에 반영되어 모든 인민들이 그로써 예의 구체적 행위를 유추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가치관의 표준이라고 생각했다. 순자는 도덕을 실천하는 현실 속의 군주를 후대의 성왕이란 뜻에서 후왕(後王)이라 불렀고, 예의가 나라를 다스리는 원리원칙이라 보았다. 그도 공자처럼 주나라 도덕정치이념의 건설자인 주공(周公)을 따르고자 하였다. 주공의 치국 이념 속에 관통하고 있는 보편적 법칙이 선왕의 예법을 충분히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순자는 예의에 통달하는 외부적 수양만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그의 「악론(樂論)」편을 보면 내성 공부의 중요한 일면으로 내적 심성을 도야시키는 역할 또한 중시하였다. 즉, 예의로 교화를 행하여 멋진 나라를 만들려면, 예를 통한 외부적 절제와 더불어 음악을 통한 내부적 덕성의 조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백성들의 욕망을 적절히 만족시켜 줌과 동시에 신분에 따른 분수를 지키도록 알맞게 절제시키는 예와 악의 기능을 모두 중시했다. 교화를 통한 질서의 확립이라는 정치적 목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역시 사람이다. 그래서 순자가 주장한 예의치국의 핵심은 항상 다스리는 사람, 즉 치인(治人)에게 모아진다. 통치이념이나 법제(法制)의 존재 여부보다 어떤 사람이 그 원칙을 사용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순자의 영향과 현대적 의미 천하를 주유했고 오래 살았으며 학문적 위상이 당대 최고였던 점을 감안하면, 순자의 제자들은 대단히 많았을 것이다. 진나라의 천하통일에 결정적 공헌을 하였던 한비(韓非)와 이사(李斯) 외에도, 전국시대 말기에서 진나라를 거쳐 한나라 초까지 유학을 이은 사람은 거의 순자의 문하생이거나 그의 제자의 제자들이 많았다. 특히 유가 경전에 대한 전승과 전파에서 순자 사상의 공헌은 지대한 것이었다. 한(漢)나라 때에 유학은 국가 이데올로기가 되었는데, 그 학문적 바탕인 경학은 대부분 순자의 학통을 계승한 것이었다. 특히 『시경』과 『춘추』, 『예기』는 순자의 제자 및 그 제자의 제자들에 의해 온전히 후대에 전승되었다. 순자 스스로도 "학문하는 방법은 경전을 암송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예를 읽는 데서 끝난다"고 할 정도로 경전을 중시했다. 『순자』 전체를 볼 때 『시경』 인용이 84문장, 『역경』 인용이 2곳, 『서경』 인용이 15항목에 이른다. 그 외에도 공자의 말과 격언 등을 인용하여 사회 문제에 대해 날카로운 평가를 내리고 있는 점은 『춘추』의 비판적 글쓰기 방법을 그대로 이은 것이라 하겠다. 한나라와 당나라의 유학이 사실상 경학이었음을 고려한다면 순자의 유학사에서의 위치는 대단히 중요하다. 거의 모든 유가 경전의 전승이 순자와 크든 적든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대로 성리학이 지배하는 송나라 이래 『순자』는 철저히 부정당하였다. 그러다가 서구적 근대화의 과정에서 오랫동안 동아시아 사회를 이끌어 온 유교 그 자체가 송두리째 부정당하게 되었다. 유학 스스로 현대 사회와 인류 전체를 향해 보다 적극적인 실천 대안을 스스로 마련하지 못한다면 지난 수천 년 동안 동양 사회를 이끌어 온 선인들의 지혜는 몽땅 역사 속 한 페이지로 끝나 버리고 말 것이다. 성리학적 고담준론으로만 유학을 이해하지 말고, 주자학의 극복을 통한 새로운 대안 모색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적극적 사회적 실천성과 건강한 삶의 성취라는 원시 유학 본래의 측면을 되살려야 한다. 현대적 시각에서 『순자』를 다시 읽어야 할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순자는 예의라는 도덕의 틀을 통해 모든 사회 문제를 극복하려 하였다. 사람 사이의 원만한 관계를 의미하는 예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함으로써 순자는 예에 사회적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 예는 동아시아 사회 전반에 걸쳐 삶과 사회의 핵심이 되었다. 공자가 유학을 보편 학문으로 승화시킨 유학 발전의 첫 번째 위업을 달성하였다면, 순자는 유학을 사회철학으로 구성해낸 유학 발전의 두 번째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현대 사회는 법의 지배가 사회 정의의 척도가 된다. 제도보다 인간을 앞세운 것이 예이고, 사람보다 제도를 앞세우는 것이 법이다. 법을 만들고 지배하는 사람이 정치의 핵심이어야지 법이 사람을 지배하는 정치여선 안 된다. 이를 긍정한다면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데 순자의 예론(禮論)은 매우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유학에서의 군주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덕이 있는 사람이 군주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고, 하나는 군주라면 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맹자로 대표되는 전자의 입장은 정치적 혼란기에 도탄에 빠진 민중의 함성을 담고 있으며, 순자로 대표되는 후자의 입장은 정치적 안정기에 지도자들의 도덕성에 대한 강력한 요청이다. 『순자』를 읽으면 민주주의에 '갇힌' 우리의 편협한 사유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며, 정치적인 것과 정치가에 대한 새로운 자기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순자』의 한계와 가능성 순자는 사람을 중시한 인문주의자였으나, 현실 군주를 인정한 상태에서 '예의'라는 절대적인 가치 기준만을 강조했다. 이는 자칫 절대 권력을 소유한 통치자들에게 독재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다. 그의 제자 한비와 이사가 혹독한 법치주의자가 된 것은 이런 권위주의적 가능성과 무관하지 않다. 이 외에 『순자』를 읽으면 악한 인성을 소유한 인간 세계에 어떻게 성인이 출현하게 되는지 명쾌한 해답을 얻을 수 없는 등 일부 사상적 한계도 있다.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과도하게 신분 등급을 강조하고 있는가 하면, 권리와 의무의 상호관계에 대한 제도적 구상을 하지 못한 점 등이 지적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한계를 알고 『순자』를 읽을 필요가 있으며, 배경을 버리고 보편적 사유를 끌어 내는 현대적 독해를 해야 한다. 성악설 때문에 송나라 이후 성리학자들은 순자를 거의 매장하여 버렸다. 순자 성악설의 '성(性)'자는 맹자 성선설의 '성'자와 달리 정치적ㆍ사회적 존재로써 인간의 본성을 얘기하는 개념으로 기실 성리학자들의 정치 의식과도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에 의해 혹독한 비판을 받았으니 순자 본인에겐 억울할 일이다. 고려시대 말엽 우리나라에 들어와 조선 왕조 전체를 지배한 유학은 바로 이 성리학이었다. 이 때문에 조선에서 순자는 금서였다. 그럼에도 성리학을 뛰어넘어 보려는 무수한 유학자들은 여전히 순자를 읽었으며, 거기서 많은 자극을 받은 듯하다. 예컨대 『순자』를 읽고 정약용의 글들을 읽으면 구절까지 유사한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다. 전통 사상의 비판적 계승을 통해 동양과 서양의 조화, 전통과 현대의 접목을 시도할 때 순자 사상은 대안적 사유로써 새로운 유학의 건립에 매우 훌륭한 아이디어를 제공해 준다. 지배자가 제멋대로 모든 일을 처리하는 인치(人治)가 아니라, 높은 수양ㆍ엄격성ㆍ도덕성ㆍ청렴성을 갖춘 새로운 인간형의 창출에 미래 사회의 희망을 건다면, "공동체의 화해와 질서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을 길러 내는 것이 법제도보다 중요하다"는 순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볼 만하지 않는가? 이제 우리는 철학과 윤리학을 구분하고, 굳이 정치와 윤리를 구별하여 학문적 정의를 내리는 서양식 사유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면 어떻게 이상적 인격체로서 성인이 출현할 수 있겠는가? 순자는 텅 비어 한결같으며 고요한 상태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인간 사회에 성인이 출현할 수 있다고 한다. 그의 성악설은 사람이 천성적으로 악한 존재로 태어난다는 말이 아니라 본성은 본래 투박한데 욕망 때문에 정치적 사회적으로 악한 결과를 낳는다는 말이다. 사람이 본래 지니고 있는 맑고 투명한 마음으로부터 성인이 출현하고, 이 성인의 가르침 때문에 성악한 인간이 도덕적인 예치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다. 2. 법치와 예치 가운데 어느 것이 사회문제 해결에 유용한가? 법치는 범죄를 공평하고 객관적인 법으로 강제하여 개인 중심의 사회 질서를 수립한다는 의미다. 주로 벌금과 형벌로 이미 저지른 '죄의 결과'를 단죄하려는 것이다. 예치는 각종 인륜을 바탕으로 도덕적인 교화를 실시하여 공동체 중심의 사회 질서를 수립한다는 의미다. 주로 예의염치(禮義廉恥)에 충실하도록 철저히 가르쳐 범죄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것이다. 어느 쪽이 더 나은 해결책인가. 추천할 만한 텍스트 『순자』, 순황 지음, 김학주 옮김, 을유문화사, 2001. 『순자』, 순황 지음, 장현근 옮김, 책세상, 2002. 각주 1) 양(倞)은 '경'이라고도 읽으나 당나라시대 음가는 '량'이다. 양량은 당나라 홍농(弘農) 사람으로 현존하는 『순자』의 최초 주석자이며 생몰 연대는 미상이다. 2)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순자의 주장이다. 성(性)의 실질은 정(情)이고 작용은 욕(欲)이며, 그 욕망이 만든 무질서의 결과가 악이라는 의미이다. 3) 왕선겸(1842~1917)은 호남성 장사(長沙) 사람으로 국자감(國子監) 좨주 등을 역임했으며, 신학문에 반대하고 유신파를 도살하기도 했으나, 1911년 혁명 후 낙향하여 고문헌의 주석 및 편집에 전념했다. 4) 만물을 낳는 것은 하늘이지만 그것을 성취시키는 것은 사람이라는 순자의 인문주의적 우주관ㆍ인생관이다. 5) 인위적인 교육과 감화를 통해 인간의 악한 성질을 바꾸어 선한 행위를 하도록 이끌겠다는 사유를 말한다. 6) 한 쪽으로 치우치는 주관적 인식의 폐단을 해소한다는 순자의 지식 방법론이다. 7) 순자는 역사를 관통하는 근본적인 원칙이 있고, 이 원칙에 입각해서 예의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이 원칙만 이해하면 현실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에 대한 대응책을 유추해 낼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즉, 현실 문제에 유추 적용할 수 있는 예의의 역사적 원칙이 곧 '통류'다. [네이버 지식백과] 순자 [荀子] - 성왕이 다스리는 나라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7446    [그것이 알고싶다] - 중국 고대 道學 - 정자 댓글:  조회:2448  추천:0  2019-11-20
철학사전 정자   [ 程子 ] 출생 - 사망 미상 ~ 미상 직업 철학자 분야 유교 국적 중국 시대 송나라 관련인물 주염계 중국 송나라의 정명도(程明道, 1032~1085)와 정이천(程伊川, 1033~1107) 두 형제를 말하며 이(二)정자라고도 한다. 모두 유교철학자. 주염계(周簾溪)에게서 배우고 '이'(理)를 최고의 범주로 삼아 도학(道學)을 체계화하고 발전시켰다. 그들은 하늘(天)을 이(理)라고 하여 달이 냇물에 그 모습이 비치듯이 천하 만물은 이 유일하고 절대인 이(理)를 구현하고 있는 것이고, 천리(天理)가 일정한 목적 하에 우주의 질서를 세운다고 하는 목적론적 세계관을 수립하였다. '부자ㆍ군신'도 '천하의 정리'(天下之定理)이기에 어느 누구도 이 관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하여 불교의 출세간(出世間)주의를 비판하고 현실의 봉건적 신분질서를 절대화 시켰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그 사상, 성격에 차이점이 있다. 명도는 천지의 움직임을 '역'(易)에 기초하여 '생생'(生生)이라고 보고, 만물(사물도 인간도 모두)은 모두 천지의 생의(生意)를 받은 '일체'라고 생각하였으며, 천지생생의 덕을 '인'(仁)이라고 하여 '만물 일체의 인'이란 관념을 수립하였다. 이것은 인(仁)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서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인이 만물일체=물아(物我)일체로 되고, 범위를 확장시켜 종래엔 인(仁)과 병렬되어 있던 의ㆍ예ㆍ지ㆍ신(義ㆍ禮ㆍ智ㆍ信)도 모두 인(仁)으로 되어, 인(仁)은 덕(德)의 근본이고 의ㆍ예ㆍ지ㆍ신은 그 한정으로서 오상(五常)이 구조적으로 해석되어 왔으며, 이것은 주자학으로 완성되었다. 이리하여 인은 학자가 제1로 삼아야 할 것이며, 그 실현은 인의 규정에 따라서 천지 만물 만민의 생의를 직접 공감하는 체인(體認)에 의해서 가능하다. 이와 같이 명도의 사상은 직관, 체인을 특징으로 한 데 비하여, 아우인 이천은 분석적, 사변적 태도와 엄격한 도덕주의를 본령으로 하였다. 이천은 '역'(易)의 '일음일양'(一陰一陽) 즉 '도'(道)라는 명제에 대하여 음양은 기(氣)로 형이하학적인 것이고 도는 음양의 '이유'(所以)로서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양자를 차원을 달리하는 것으로 보았다. 윤리설에서는 '성즉리'(性卽理)의 명제를 세워 성선설을 천리로 삼아 절대화하고, 성을 천명(天命)의 성과 기질(氣質)의 성으로 나누고 또한 성과 정(情)을 구별하였다. 여기서 '천리'를 세우고 '인욕'(人欲)을 멸한다는 엄숙주의가 나오는 것이다. 이천은 '이'의 분석적 추구, '격물궁리'(格物窮理)를 강조함과 동시에 '경'(敬)을 통하여 마음을 수양하는 '거경'(居敬 ; 마음의 집중)이란 방법을 중시한다. 유일 절대한 '이'를 대상으로 하는 '궁리'는 실증적인 것이 아니라 관념적이기 때문에 '거경'이 '궁리'의 정신적 태도로서 강조되었다. 주자(朱子)는 명도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이천의 사상을 전면적으로 수용하여 주자학의 골격을 세웠다. 주요저서 明道文集, 5권. 易傳, 4권(이천). 伊川文集. [네이버 지식백과] 정자 [程子] (철학사전)
7445    [그것이 알고싶다] - 중국 고대 성선설 - 맹자 댓글:  조회:3453  추천:0  2019-11-20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맹자   [ 孟子 , Mencius음성듣기 ] 맹자 출생 - 사망 BC 372년 추정 ~ BC 289년 추정 대표분야 유가철학 대표이론 성선설 대표학파 선진유학 대표저서 맹자 관련철학자 공자 목차 생애 해설 생애 연보 생애 해설 맹자는 공자가 죽고 나서 100년 정도 뒤에 태어났다. 공자나 맹자나 정확하게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가능한 방법은 『논어』나 『맹자』에 실려 있는 그들의 행적을 추적해서, 즉 그들이 만났던 사람들이나, 목격했거나 관련되었던 사건들을 참고해서 연대를 추정하는 것이다.  공자는 대략 기원전 551년경에 태어나 기원전 479년경에 죽었으며 맹자는 기원전 372년경에 태어나 기원전 289년경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가들에 의해 공자와 맹자가 살았던 시대는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로 분류된다. 공자는 춘추시대에 살았으며 맹자는 전국시대에 살았다. 춘추시대는 기원전 770년에서 기원전 403년까지이며 전국시대는 기원전 403년에서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 전인 기원전 222년까지이다.  기원전 770년은 주(周) 왕실이 견융(犬戎)이라는 종족에게 쫓겨 수도를 동쪽인 낙양(洛陽)으로 옮긴 해이다. 그 전까지 중국은 주 왕실을 중심으로 많은 봉건국가들이 위성처럼 분립해 있었으며 이들은 혈연과 제사와 군사에 의해 주 왕실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주 왕실이 동쪽으로 천도할 즈음을 전후해서 이러한 봉건제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춘추시대는 패자(覇者)들의 시대였다. 패자는 주 왕실의 명목만은 존중하면서 실상은 무력으로 다른 제후들을 정복했고 그럼으로써 천하를 다스렸다. 차례로 천하를 제패했던 제(齊)나라의 환공(桓公), 송(宋)나라의 양공(襄公), 진(晉)나라의 문공(文公), 진(秦)나라의 목공(穆公), 초(楚)나라의 장왕(莊王)은 5패로 불린다. 춘추시대만 해도 ― 제후국들은 실제적으로 독립한 나라였지만 ― 패자들은 근왕(勤王)의 기치를 내걸었다.  전국시대에 들어서면 주나라는 거의 존재감을 상실하고 제후들도 더 이상 근왕의 명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춘추시대에 170여개에 달했던 제후국들은 동맹과 연맹의 결성, 외교적․군사적 전쟁을 통해 7개의 제후국으로 정리되었다. 즉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 불리는 한(韓)․위(魏)․조(趙)․연(燕)․제(齊)․초(楚)․진(秦)이 이들이다. 이들은 천하를 제패한다는 한 가지 목표를 두고 약육강식의 전쟁을 전개했다.  공자는 주 왕실 중심의 봉건제를 이상적인 제도로 생각했다. 공자를 시조로 하는 유가의 눈에서 보면 이러한 춘추전국시대는 인륜이 무너져가는 윤리․정치적 혼란기였을 뿐이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철기와 우경의 보급으로 인한 생산력의 증대와 함께 문화면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진 시대였다. 특히 전국시대에는 국가차원에서 생산력을 높이려는 정책도 시도되었으며, 한편에서는 상인의 세력이 커져서 상인으로서 부에 의해 진의 재상까지 된 여불위(呂不韋) 같은 사람도 등장했다.  전국시대는 또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시대였다. 사회의 혼란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어떻게 세상을 구제할 것인가에 관한 각종 사상이 태어났으며, 사상을 통제할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중국사상사에서 가장 자유롭고 다채로운 논쟁이 전개된 시기였다. 법가, 도가, 농가, 종횡가, 명가, 음양가, 잡가 등을 표방하는 수많은 학자들이 왕성한 사상활동을 펼치고 있었으며 맹자는 그들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맹자는 공자의 제자로 자처하면서, 다른 학파들을 비판하고 때로는 그들과 논쟁하면서 유학의 골격을 완성해갔다.  맹자孟子, 즉 맹선생의 성은 맹(孟)이며 이름은 가(軻)이다. 추(鄒)라는 지방 출신인데 추는 공자가 태어난 노(魯)나라에 속한 지방이라는 설도 있고 독립된 나라라는 설도 있다. 어느 쪽이든 공자의 고향인 곡부(曲阜)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교육에 열심인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어머니가 아들의 좋은 교육환경을 위해 이사를 세 번 했다거나 중도에 공부를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들에게 명심시키기 위해 자신이 짜던 베를 잘랐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온다.  맹자는 인의(仁義)의 덕을 바탕으로 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가 당시의 정치적 분열상태를 극복할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왕도정치를 시행하라고 제후들에게 유세하고 다녔다. 기원전 320년경에 양(梁)나라(하남성 개봉시)에 가서 혜왕에게 왕도에 대해 유세했으나, 일이 년 뒤에 혜(惠)왕이 죽은 뒤, 아들인 양(襄)에게 실망해서 산동에 있는 제(齊)나라로 옮겼다. 그곳에서 제나라의 선(宣)왕에게 기대를 걸고 칠팔 년을 머물렀으나, 역시 자신의 이론이 채용되지 않자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송(宋, 하남성 상구현), 설(薛, 산동성 등현 서남쪽)을 거쳐 일차로 추에 돌아온 뒤, 다시 문공(文公)의 초대를 받아 등(藤, 산동성 등현)으로 갔다. 역시 이상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노魯(산동성 곡부현)를 거쳐 고향인 추로 돌아왔다. 당시의 제후들이 필요로 했던 것은 부국강병의 정치술이었다. 그러한 제후들의 현실적 관심과 맞아떨어질 여지가 없었던 맹자의 이론은 어느 제후에게도 채택되지 못했으며, 맹자는 당대에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는 것은 포기해야 했다.  50세가 넘어서 시작했던 편력을 그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70세 가량 되었을 때라고 추정된다.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과 함께 『시경』과 『서경』, 그리고 공자의 정신에 대해 토론했으며, 그 때 만들어진 책이 오늘날 전해지는 『맹자』7편이다. 생애 연보 기원전 372년 : 중국 추鄒(산동성)에서 출생  기원전 320년 : 양梁나라에 가서 혜왕惠王을 만남  기원전 319년 : 혜왕 사망  기원전 318년 : 양왕襄王의 사람됨에 실망해서 양나라를 떠나 제齊나라로 감  기원전 315년 : 모친 사망, 노魯에서 장사 치름  기원전 312년 : 제나라를 떠남  기원전 311년 : 송宋에 체류. 송경을 만남.  기원전 307년 : 설薛을 거쳐 추鄒로 돌아감. 藤의 文公에게 초대 받음  기원전 305년 : 등나라에 1~2년 체류 후, 노魯를 거쳐 추도 돌아감. 이후 교육에 전념  기원전 289년 : 사망 관련자료 원문보기 맹자 『맹자』(해제) (PDF 파일) 관련이미지 37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맹자 초상화 이미지 갤러리 출처: 중국인물사전 [네이버 지식백과]맹자 [孟子, Mencius]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   중국인물사전 맹가   [ 孟軻 , mèng kē ] 요약 유가의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교육가 이미지 크게보기 맹자 초상화 시대 전국시대 출생 - 사망 약 BC.372년 ~ 약 BC.289년 이칭 맹자(孟子) 관련 고사성어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단기지훈(斷機之訓), 단기지교(斷機之敎) 목차 1. 어머니의 사려 깊은 교육환경 2. 공자 문하의 적통을 잇다 3. 맹자의 시대적 배경 4. 정치적 이상주의 5. 맹자의 주요사상 1) 천인합일(天人合一) 2) 성선설(性善說) 3) 인륜(人倫)과 대장부(大丈夫) 6. 맹자의 공부법 1) 스스로 구하면 얻을 것이다 2) 꾸준히 한 마음으로 3) 다 차거든 나아가라 4) 거듭 생각하고 의심을 품어라 5) 이의역지(以意逆志) 6) 지인논세(知人論世) 7) 치밀하게 공부하되 요약할 수 있어야 7. 맹자의 공부법이 추구하는 기본 정신 8. 맹자 공부법의 뿌리인 맹모(孟母) 9. 관련 유적 1) 맹묘(孟廟) 2) 맹부(孟府) 3) 맹림(孟林) 10. 참고자료: 맹자를 읊은 역대 시 모음 1. 어머니의 사려 깊은 교육환경 맹자는 이름이 가(軻), 자는 자여(子輿)이다. 공자의 고향인 곡부(지금의 산둥성 취푸) 부근인 추(鄒, 현 산둥성 추현 동남)에서 태어났다. 그는 노나라 희(姬)씨 성의 귀족공자(贵族公子) 경부(庆父)의 후예로 부친의 이름은 격(激)이고, 모친은 장씨(仉氏)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사려 깊은 교육환경 속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그의 어머니는 맹자의 교육환경을 위하여 세 번씩이나 집을 옮겼었다. 저 유명한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가 바로 그것이다. 또 맹자가 공부하는 기간을 채우지 않고 집으로 왔다고 해서 당신이 짜던 베를 끊어 경계했다는 ‘단기지훈’1)이란 유명한 고사를 통해 어질고 현명한 어머니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맹모삼천지교를 나타낸 청나라 때 그림 2. 공자 문하의 적통을 잇다 맹자 초상화 맹자가 난 곳은 공자의 탄생지인 노나라의 창평향(昌平鄕) 취읍(현 산둥성 추현)과 극히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어릴 때부터 공자를 숭배하고 또 사숙2)하였다. 자라나면서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 즉 공급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유가학파의 분류상 ‘사맹 학파’로 불리며 공문(孔門)의 적통을 대표한다. 학설에 의하면 직접 자사에게서 배웠다고 하기도 하나 연대가 맞지 않는다. 맹자는 오경에 능통했으며, 『시경』과 『서경』(또는 『상서』)에 조예가 깊었다. 말년에 문인 만장, 공손추 등과 함께 책을 써서 자신의 설을 세우는 한편, 시, 서 등 유학을 강론하는 등 교육활동에도 종사했다. 그가 죽은 뒤 역대 왕조들이 잇따라 작위를 추증하여 그 위상을 높였는데, 송나라 때인 1083년에 추국공(鄒國公)에 봉해진 이래 1330년 원나라 때 ‘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 1530년 명나라 때 ‘아성(亞聖)’, 1935년(민국 24)에 ‘아성봉사관(亞聖奉祀官)’ 등으로 봉해졌다. 『한서』 「예문지」에 『맹자』 11편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7편만 남아 있는데, 제자들과 맹자의 언행록이 수록되어 있다. 3. 맹자의 시대적 배경 맹자 초상화 공자와 맹자의 시대적 차이는 몹시 컸다. 공자가 처했던 춘추시대는 비록 주나라 왕실의 세력이 쇠퇴했고 또 춘추오패가 나타났으나, 그래도 존왕양이3)의 풍조가 남아 있었고 어느 정도 도덕적으로 재건할 수 있는 희망이 적게나마 있었다. 그러나 맹자가 살았던 시대는 전국시대로서 주 왕실의 힘이 극도로 미약하여 사람들이 그 존재조차도 망각할 정도에 이르렀고, 각기 제후들은 승부를 다투는 싸움을 벌여 약육강식의 난맥 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폭력과 허망한 사설(邪說)이 횡행하여 천하는 극도로 혼란에 빠지고 백성들은 도탄의 구렁텅이에서 신음하며 갈 바를 몰랐다. 세상이 쇠퇴하고 도가 희미해져서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는 자가 있고 자식으로서 아비를 죽이는 자가 생기자 공자께서 두려워하여 『춘추』를 지었다는 그 춘추시대를 훨씬 뛰어넘는 모습이었으니, 중국사 전체를 통해서도 일찍이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었던 혼란시대였다. 이런 때에 맹자는 의연히 일어나 불타협의 굳은 신념으로 무력에 의한 패도를 버리고 하 · 은(상) · 주 3대의 전통인 인의왕도(仁義王道)의 덕치로 천하가 하나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고, 실제로 여러 나라의 군주를 찾아 그들을 설득하는 데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4. 정치적 이상주의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계승하여 왕도정치에 의한 이상적인 세계의 건설을 주장하는 복고적 이상주의에 집착한 사상가였다. 맹자의 주장은 대부분이 당시의 실권자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현실적으로 부국강병에 광분하고 있던 여러 군주에게 이(利)를 버리고 인의(仁義)를 찾으라고 했다. 불쌍한 것을 보고 못 견디는 마음을 확대하는 것이라고 하여 왕도덕치의 근원이 임금의 덕심(德心)에 달려 있음을 강조했다. 이렇게 천하의 온갖 책임을 위정자 한 사람의 덕에 돌리면서도 맹자는 임금의 존재를 형편없이 격하시켰다. 즉, 맹자는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다음이고, 임금은 가볍다”라고 했다. 또 “임금은 백성과 같이 즐겨야 한다”고 주장하여 민권(民權)을 더없이 높였고 민본사상(民本思想)을 최대한으로 고취했다. 맹자는 패도정치(覇道政治)는 악덕할 뿐만 아니라 오래 가지도 못하고, 또 천하를 통일하고 참다운 왕자(王者)가 될 수 있는 길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보다는 백성을 사랑하고 민생을 안정시켜 민심을 얻으면 온 천하가 저절로 귀순심복(歸順心腹)할 것이며, 그 때에야 스스로 천하를 덕으로 다스리는 참다운 왕좌에 오를 것이요, 그것이 바르고 영원한 길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무력을 배제하고 덕치를 주장한 맹자는 당연히 보민양생(保民養生), 즉 민생을 중하게 강조했다. 맹자의 민생주의는 바로 맹자의 경제사상의 일환이기도 했다. 맹자는 농업생산을 진작하여 백성이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고 안락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제안정, 민생안정이 정치의 바탕이라는 생각은 오늘에 와서는 당연하지만 당시의 제후들에게는 일대 공격이 아닐 수 없었다. 맹자의 민생안정은 제후들의 포악을 막고 반대로 백성들의 재산과 생명을 보장하라는 뜻이기도 했다. 맹자는 민생안정을 국민복리 면에서도 강조했다. “양잠을 장려하여 비단을 증산하고 가축을 증산하여 노인들에게 따뜻한 비단옷을 입히고 든든하게 고기를 먹이라”고 강조했다. 또 백성을 안락하게 살게 해주고 나아가서 백성을 교육하여 높은 경지에 이끌어 올려야 한다고 했다. 맹자의 정치사상은 필연적으로 교육사상과 연결된다. 그는 말했다. “정성껏 학교 교육을 시행하고 더 나아가 효제인의를 넓히면 노인들이 길가에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니지 않을 것이다. 일흔 살의 노인들이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고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는 그런 상태로 다스린다면 바로 왕도의 임금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훗날 유가가 독존의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그는 공자 다음가는 성인이란 뜻으로 ‘아성(亞聖)’으로 추앙되었지만, 당시 정치판으로부터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그러나 맹자의 이러한 티없는 선의에서 우러난 사상과 그것을 토대로 하여 설정된 여러 가지 방책은 정치제도, 사회정세, 경제정책, 문교시책, 생활태도, 학술문화 등 실로 다방면에 걸쳐 선명하게 반영되었고 폭넓게 논의되었다. 특히 백성을 귀하게 여기는 민본사상은 아주 귀중한 주장으로 정치사상의 질을 높였다. 그는 공자와 더불어 ‘공맹(孔孟)’으로 불리기도 하고, 성선설에 입각하여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기도 했는데, 순자의 ‘성악설(性惡說)’과 함께 중국 철학사의 중요한 쟁점을 제공했다. 5. 맹자의 주요사상 1) 천인합일(天人合一) 맹자에게 있어 하늘은 천리(天理)이자 동시에 만물의 근원이며 또한 우주의 주재자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뜻, 즉 천의(天意)의 발동자였다. 따라서 사람은 본성 속에 하늘을 지각하고 따르는 속성이 있다고 인정했다. 즉 맹자는 말했다. “영명한 본심을 극진하게 계발하면 본성을 알 수 있고 나아가서는 하늘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영명한 본심을 잘 간직하고 본성을 잘 배양하면 천도를 따라 섬길 수가 있다.” 결국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하늘과 일치 즉, 천인합일하게 마련이며, 동시에 하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자이므로 천명을 따르게 되어 있으니, 사람이 할 일은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을 가다듬고 자기에게 주어진 명수를 잘 받아, 자기의 책임을 다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2) 성선설(性善說) 공자의 도는 맹자에 이르러서 더욱 선양되고 빛났다. 맹자는 도의 근원을 요 · 순으로부터 시작하여 우 · 탕 · 문무(문왕(文王)과 무왕(武王)) · 주공(周公) 그리고 공자를 거쳐서 자신에 이르기까지 도의 정통을 세움으로써 유교의 체계를 확립시켰다. 사람의 본성이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으로 그 본성 속에는 다른 사람의 불행이나 고통을 차마 보아 넘길 수 없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인 인(仁)을 비롯해서, 옳지 않은 것을 미워하고 부끄러워하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인 의(義), 어른을 공경하고 다른 사람에게 겸손하는 사양지심(辭讓之心)인 예(禮), 선악을 식별하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인 지(智) 등 사단(四端)이 존재하며, 인간의 이 본성은 공통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성은 본선(本善)이라는 성선설을 주장하였고, 천진난만한 어린이가 잘못하여 우물로 빠져 들어가려는 광경을 발견했을 때 경악과 측은한 감정이 부지불식간에 일어나는 것을 금치 못하는 것은 사람의 공통적인 것이라는 것을 들어 성선설을 증명하고 있다. 한편 선한 본성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맹자는 선한 본성의 발단과 적극적인 확충, 선의 본성을 잃는 일을 막자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논하고, 인간만사를 선한 본성에 따라서 처리할 것을 권했다. 사람은 누구나 선한 본성을 다 지니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을 적극적으로 확충해 나가게 되면 성인에 못지않은 경지에까지도 도달할 수 있지만, 만약에 그것을 잃어버리면 본래부터 선한 본성이라고는 없었던 것처럼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인간으로 타락해 버린다는 점을 시사한 것이라 하겠다.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인간이 선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무한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고 동시에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발전을 지향하도록 줄기차게 고무해 주는 힘이 있다. 3) 인륜(人倫)과 대장부(大丈夫) 맹자의 인생관이나 윤리관은 한 마디로 이상주의적 도덕주의에 서 있다. 맹자는 말했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 부모님을 모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 천지에 죄 될 일이나 부끄러운 일을 안 한 것, 천하의 수재들을 모아 교육하는 것이다. 그 중에 임금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끼지 못한다.” 맹자는 가장 높은 작위를 천작(天爵)이라 했고, 인간 정치사회에서의 작록(爵祿)을 인작(人爵)이라 하여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렇게 정치보다도 도를 더 존중했기 때문에 맹자는 인생의 가치를 “인을 이루고 의를 따르는” 데 두었으며, “의를 살리고 목숨을 버리라”고 했다. 나의 생명보다도 인의(仁義)를 중요시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인의가 우주의 대도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맹자는 대도의 윤리와 덕목을 지키는 사람을 여러 가지로 불렀는데 그 중에서 ‘대장부’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인(仁), 즉 천하의 넓은 집에 몸을 두고, 의(義) 즉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서 천하의 대도(大道)를 간다. 뜻을 얻으면 백성과 함께 인의의 대도를 구현하고, 뜻을 못 얻으면 자기 하나만이라도 대도를 간다. 부귀에도 타락하지 않고, 빈천에도 절개를 바꾸지 않으며, 어떤 권세 앞에도 굴복하지 않으니 그런 사람이 바로 대장부이니라.” 이러한 대장부는 지대지강(至大至剛, 더없이 크고 굳셈)하고 천지에 대통하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호연지기를 키우는 바탕은 바로 존심양성4)이다. 한편, 맹자는 자기향상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자기 격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리고 자기향상의 목표를 요 · 순 같은 성인에 둘 것을 말했다. 그리고 대장부로 큰 뜻을 실현시키고자 한다면 시련을 극복하고 유혹을 물리치는 굳센 신념이 있어야 함을 말했다. 6. 맹자의 공부법 맹자의 공부법은 공자의 공부법 못지않게 체계적이고 계통적이다. 먼저 독서와 관련하여 맹자는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독서 과정에서의 주관적이고 능동적인 작용을 중시하여 “책에 나온 내용을 다 믿는다는 것은 책이 없는 것만 못하다”(「진심(盡心)」하)라고 말할 정도였다. 공부는 자연스럽게 순서에 따라 차근차근 해나가야지 서두르거나 요령을 피워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동시에 굳센 의지와 항상심을 가지고 꾸준히 한 마음으로 해야지 용두사미식의 공부는 절대 안 된다고 했다. 맹자의 공부법을 몇 개 항목으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1) 스스로 구하면 얻을 것이다 맹자는 독서나 공부는 자신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말한다. 맹자는 이렇게 말한다. “구하면 얻고, 버리면 잃는다. 구하면 얻는데 유리하고, 구하면 내게 존재하게 된다”(「진심」상). 이 공부법을 간단하게 줄여 ‘자구자득(自求自得)’이라 할 수 있다. 맹자는 이와 관련하여 또 이렇게 말한다. “무릇 도란 큰 길과 같으니 어찌 알기 어려우리오! 사람이 구하지 않는 것이 병이니 그대가 돌아가 구하면 배울 것이 남아 있을 것이다.”(「고자(告子)」하). 맹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군자가 깊이 나아가는 길을 택하는 것은 스스로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얻으면 삶이 편안하고, 삶이 편안하면 자질이 깊어지고, 자질이 깊으면 좌우에서 취하여 그 근원을 만나기 때문에 군자는 스스로 얻고자 하는 것이다.”(「이루(離婁)」하). 이 대목을 공부나 교육과 연관 지어 보면 이렇다. 스승이 학생들을 보다 깊이 있는 공부로 이끄는 방법은 학생의 내적 동기를 계발하고 유도함으로써 스스로 구하여 얻게 하는 것이다. 즉 자신의 지적 욕구에 기대어 자신의 적극적인 노력을 통해 얻게 하는 것이다. 2) 꾸준히 한 마음으로 “학문의 길이라는 것이 다른 게 아니다. 그 놓인 마음을 구하는 것일 뿐이다”(「고자」상). 이런 저런 잡념과 딴 마음으로 독서하는 태도를 맹자는 단호히 배격했다. 맹자는 천하에 바둑을 잘 두기로 이름난 혁추(奕秋)가 오로지 한 마음으로 집중하는 사람과 사냥 따위에 마음이 팔려 있는 사람에게 바둑을 가르쳤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이냐며 “마음을 오로지 하고 뜻을 극진히 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고자」상)고 강조한다. 공부에 만족할 만한 효과를 얻지 못하는 것은 총명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한 마음으로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머리가 아니라 자세의 문제라는 것이다. 맹자는 공부하는 자세와 태도를 우물을 파는 일에 비유하며 “뭔가를 한다는 것은 비유컨대 우물을 파는 것과 같다. 우물을 아홉 길이나 파고도 물이 안 나온다고 우물을 버리는 것이다”(「진심」상)라고 하여 공부나 독서를 견지하지 못하면 끝내는 헛공부가 된다고 지적했다. 독서나 공부는 축적이 핵심이다. 축적되지 않는 공부는 헛공부다. 쌓이는 과정 그 자체가 한 인간의 성숙도를 결정한다. 이런 점에서 맹자가 한 마음으로 꾸준히 공부하라고 한 것은 공부와 독서의 핵심과 그 효과를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다. 3) 다 차거든 나아가라 인간이 성장단계를 건너 뛸 수 없듯이 공부에도 단계가 있다. 지력과 관심의 정도에 따라 공부의 질과 양은 달라지지만 그 지력과 관심에는 단계가 있다. 쉽게 말해 성장과정과 각자의 특성에 맞는 공부와 독서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흐르는 물이 웅덩이에 차지 않으면 흐르지 못한다. 군자가 도에 뜻을 두어도 글을 이루지 못하면 통달할 수 없다”(「진심」하). 물은 밤낮없이 흘러 웅덩이를 채워야만 계속 흘러 바다에까지 이를 수 있다. 맹자는 물을 공부에 비유하여 점점 축적되는 지식, 순서에 따라 꾸준히 나아가는 공부법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다. 이 공부법은 앞에서 꾸준히 한 마음으로 공부하라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꾸준히 한 마음’이 큰 테두리에서 공부의 태도와 자세를 말한 것이라면, 이 방법은 좀 더 구체적이다. 그 같은 자세를 견지하면서 순서를 밟아 단계적으로 공부하면 지식은 축적되고 지혜는 깊어져 보다 성숙한 사람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4) 거듭 생각하고 의심을 품어라 맹자는 오로지 마음이란 기관에 의지한 사유야말로 사물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듣고 보고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듣지 않고 보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라 했다. 우선 맹자의 말을 들어보자. “귀와 눈은 생각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사물에 가려진다. 그래서 눈과 귀는 사물과 접촉하면 거기에 끌려 갈 뿐이다. 마음은 생각할 줄 알기 때문에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지 못하게 된다”(「고자」상). 이 말은 실제 인식을 감성 단계에 머물러 있지 않게 하라는 요구다. 따라서 반드시 사유를 거쳐 사물의 진실된 내면, 즉 본질을 파악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맹자는 또 독서하면 의문이 생긴다고 주장하면서 앞서 말한 대로 “책을 다 믿느니 책이 없는 것이 낫다”(「진심」상)라고까지 말한다. 어떤 공부가 되었건 의문을 품을 줄 모르는 공부는 제대로 된 공부가 아니다. 독서나 공부의 출발은 호기심과 관심이며, 그 호기심과 관심의 이면에는 강한 의문이 함께 웅크리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5) 이의역지(以意逆志) 맹자의 공부법에서는 작품, 특히 시를 해석하는 방법에 관한 언급이 눈에 띤다. “시를 말하는 사람이 글로 말을 해치지 않고, 말로 뜻을 해치지 않아서 ‘자신의 뜻으로 작자의 뜻을 찾아 아는’ 것을 시를 안다고 할 것이다”(「만장(萬章)」상). 이 중에서도 ‘자신의 뜻으로 작자의 뜻을 찾아 아는’ 이의역지란 대목에 대해서는 역대로 논란이 적지 않았는데, 대체로 두 가지 해석이 유력하다. 하나는 청나라 때 학자들의 해석으로 ‘옛사람의 뜻으로 옛사람의 뜻을 찾는 것’으로, 말하자면 ‘시로 시를 논하는 것’이다. 작품 자체를 분석하여 작가의 사상을 유추한다는 의미다. 또 하나는 한나라 이래 다수의 해석이다. 이 해석들에 따르면 ‘이의역지’에서 ‘의(意)’자를 독자의 사상 · 지식 · 경험 등으로 해석한다. 즉 작품을 읽는 사람의 뜻으로 작가의 뜻을 이해하거나 유추한다는 것이다. 맹자의 ‘이의역지’ 공부법은 문학 작품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우선 작가에 대한 상세한 정보와 다른 작품들을 참조하여 그것들을 근거로 작품을 이해하고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하나의 방법을 끌어낼 수 있다. 또 이와는 달리 지금까지 자신이 쌓아온 지식이나 주관에 근거하여 작품의 경향과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방법도 가능하다. 어느 쪽이나 작품과 작가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데 상당히 유용한 방법이다. 물론 이 두 가지를 적절히 절충하면 더 효과적일 것이다. 6) 지인논세(知人論世) ‘사람을 알고 세상을 논하다’는 ‘지인논세’는 그 방법과 의미가 확대되면 독서나 공부의 최고 경지가 된다. 맹자는 이를 우선 책의 작가와 그 작품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한다. 맹자는 작품과 작가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인논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옛 사람들의 시를 외우고 글을 읽으면서 그 사람을 알지 못하는 것이 옳은가? 그러므로 (그 다음으로는) 그 세상을 논하는 것이니 이것이 옛날로 올라가서 옛 사람을 벗하는 것이다”(「만장」하) 진정으로 그 작품을 이해하려면 작가의 경력과 사상 심지어는 감정과 인격까지 파악해야 한다. 또 그 사람의 객관적 조건, 이를 테면 그가 처했던 시대적 환경 따위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좁게는 한 작가와 작품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방법이지만, 이 공부법이 확대되고 깊어지면 말 그대로 세상 모든 부류의 사람과 세상을 알고 논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7) 치밀하게 공부하되 요약할 수 있어야 모든 공부는 지나온 과정을 종합하고 그것을 자기만의 생각과 견해로 요약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이 진짜 독서고 제대로 된 공부다. 명인들이 하나같이 제기하는 공부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맹자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넓게 배우고 상세히 해설하는 것은 되돌아가 요약하려는 것이다”(「이루」하) 맹자가 말하는 ‘상세히 해설’은 읽고 공부한 것에 대한 정교하고 세밀한 연구를 통해 그 의미를 자세히 해석하는 것을 가리킨다. ‘요약’은 공부한 내용에 대한 간명한 개괄을 말한다. 공부는 먼저 넓고 치밀해야 하며, 그런 다음 이를 기초로 귀납하고 개괄하여 명확하게 공부한 핵심을 파악해야 한다. 이상 살펴본 맹자 공부법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공부법이 대단히 체계적이라는 점이다. 공부하는 자세와 태도로부터 작품과 작가를 이해하는 방법, 나아가 그 모든 것을 종합하여 자신의 주관으로 요약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구체적인 방법론들을 제시한다. 이런 점에서 맹자의 공부법은 체계적일 뿐만 아니라 단계적이기도 하다. 7. 맹자의 공부법이 추구하는 기본 정신 맹자의 어머니가 베틀을 끊고 아들에게 자극을 주었다는 기념비 맹자는 ‘마음을 다한다’는 뜻의 「진심」(상)이란 장에서 “부모형제가 모두 아무 일 없이 살아 있는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하늘을 우러러 보아도 땅을 굽어보아도 한 점 부끄러움 없는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며, 천하의 재능 있는 인재를 얻어 교육시키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며 세 가지 즐거움을 이야기했다. 소위 ‘군자삼락(君子三樂)’이란 것이다. 인재를 교육시키는 것을 낙으로 알았던 맹자이기에 공부에서도 대단히 적극성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맹자의 공부법이 추구하는 기본 정신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맹자 자신이 “구하는 데는 방법이 있고, 얻는 데는 명이 있다”(「진심」상)고 했듯이 공부에도 나름대로의 규칙과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규칙에 근거하여 정확한 공부법을 잡아야 한다는 정신이다. 또 하나는 자신이 공부하는 과정 자체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 방법을 알 수 있다.’ 즉, 공부의 규칙을 확실하게 장악하여 수시로 자신의 학습 행위를 그 규칙에 맞게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안 되면 평생을 공부해도 제대로 된 방법과 길을 모른 채 헤매다 평범한 독서인으로 남게 된다. 8. 맹자 공부법의 뿌리인 맹모(孟母) 공부에 관한 맹자의 기본 정신은 대단히 엄격하다. 이는 맹자의 성격과도 관련이 있으며 특히, 그 어머니의 교육법과도 관계가 있어 보인다. 맹자의 어머니는 너무나 잘 알다시피 자식의 교육을 위해 이사를 세 번씩이나 한 어머니이지 않은가. 맹모의 극성은 삼천지교에만 머물지 않았다. ‘결단(決斷)’이란 단어가 있다. 무엇인가 확고한 결정을 내리거나 굳은 결심을 할 때 ‘결단을 내린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이 단어의 근원지를 추적해보면 공교롭게도 맹모와 만나게 된다. 학업에 힘쓰던 맹자가 한번은 공부하다말고 밖에 나가 논 적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맹모는 아들을 불러다 놓고 맹자가 보는 앞에서 한동안 열심히 짜놓은 베를 칼로 서슴없이 잘라버렸다. 맹자는 깜짝 놀라며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맹모는 다음과 같은 말로 아들 맹자를 가르쳤다. “베는 실 한 올 한 올이 연결되어야 한다. 학문도 마찬가지로 한 방울 한 방울 쌓여야만 한다. 네가 공부하다말고 나가 놀았다는 것은 잘려나간 이 베와 마찬가지로 쓸모없어진다는 것과 같으니라!” 이 일화에서 이른바 ‘베틀을 끊어 가르친다’는 ‘단기지교(斷機之敎)’ 또는 ‘단직교자(斷織敎子)’의 고사성어가 탄생했고, 또 여기서 ‘결단’이란 단어가 파생되었다. 맹자의 고향 마을 9. 관련 유적 맹자 관련 유적은 고향 추현에 그의 무덤과 사당을 비롯하여, 그 어머니의 무덤인 맹모림(孟母林)과 ‘맹모삼천지교’와 관련된 유지 등이 남아 있다. 1) 맹묘(孟廟) ‘아성묘(亞聖廟)’라고도 부르는 맹자의 사당 맹묘는 쩌우청시 남관에 위치한다. 역대로 맹자에게 제사를 드리는 장소였다. 맹묘의 역사는 북송 인종 경우(景祐) 4년인 1037년에 공자의 45대손인 공도보가 연주지주(延州知州)로 있으면서 사기산(四基山)에서 맹자의 무덤을 방문하고 무덤 옆에다 사당을 세움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러나 성에서 좀 떨어져 있기 때문에 참배 및 제사가 불편해서 휘종 선화(宣和) 3년인 1121년에 지금 장소에 사당을 옮겨지었다. 북송 신종 원풍(元豊) 연간에는 맹자를 추국공(鄒國公)으로 봉했으며, 원나라 때 다시 ‘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에 봉해졌다. 그 후로도 계속 맹묘를 확장하고 수리했고, 명나라 때 지금과 같은 규모를 갖추기에 이르렀다. 맹자의 사당인 맹묘에 모셔진 맹자상 사당은 전체적으로 장방형이며, 모두 다섯 구역에 64칸의 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1만 2,000여 평에 이른다. 기록에 따르면 역대로 중수한 횟수만 38차가 넘는다. 현존 건축물들은 청 강희(康熙) 연간에 지진으로 기울어진 다음 다시 중건한 것이다. 아성전(亞聖殿)이 남북 중축선상에 자리잡은 사당 내의 주체건물인데, 7칸에 높이 17미터, 길이 27.7미터 깊이 20.48미터이다. 중층에 녹색 유리기와를 얹었다. 처마 밑으로 팔각기둥이 26개가 있는데 기둥 전체에 용과 봉황 그리고 꽃을 조각했다. 중축선 양 옆으로 침전(寢殿) · 계성전(啓聖殿) · 맹모전(孟母殿) · 치엄당(致嚴堂) · 도주사 · 동서무(東西廡) · 제기고(祭器庫) · 성생소 · 강희 및 건륭(乾隆) 어비정(御碑亭) 등이 늘어서 있다. 사당 내 비갈5)이나 석각만 350기가 넘는다. 그 중 이름난 것으로는 원나라 때 다시 만든 진(秦)나라 이사가 소전체6)로 쓴 ‘역산각석(嶧山刻石)’을 비롯하여 서진시대 유보(한 순제)의 묘표, 당나라 구양순의 ‘소옥화묘지명(蘇玉華墓志銘)’ 등이며, 이밖에 청나라 때 세운 ‘맹모단기처(孟母斷機處)’ 비석이 있다. 사당 안은 고목이 우거져 하늘을 가릴 정도인데 회나무가 많고 간간히 홰나무 · 은행나무 · 등나무 등이 눈에 띈다. 명나라 때의 유명한 화가 동기창은 라는 시에서 맹묘의 나무를 언급하고 있다. “지언문 밖에는 홰나무 안에서 나무가 자라나 홰나무를 감싼 기이한 측백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은 ‘측백나무가 홰나무를 끌어안았다’고 말한다. 수백 년 풍상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짙은 잎사귀가 자라고 있는 참으로 기이한 나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맹묘는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2) 맹부(孟府) 쩌우청시 남관에 위치한 맹자 후손들의 고택인 맹부는 처음 세워진 연대가 정확하지 않다. 동쪽으로 맹묘와 이웃하고 있으며, 맹묘를 북송 선화 3년인 1121년에 이곳으로 옮긴 것으로 보아 맹부도 그 무렵 사당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옮겨 다시 지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원나라 문종 지순(至順) 2년인 1331년 맹자를 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에 봉하면서 맹부도 아성부(亞聖府)로 불리기 시작했고, 명나라 때 오면서 상당한 규모를 갖추었다. 맹부의 앞쪽은 관아이고 뒤쪽은 주택이다. 현재 건축은 모두 네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남북 길이 226미터, 동서 폭 99미터에 전당과 문 그리고 회랑이 모두 116칸이다. 대문은 검은 옻칠을 했고 양 옆에 머리를 치켜들고 있는 사자가 웅크리고 있다. 문 안쪽 동서 회랑은 맹부를 지키는 수위와 심부름꾼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두 번째 문을 들어서면 정중앙에 대당(大堂)이 있는데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문무관원을 접대하며 친족과 가족의 법규 따위를 논의하는 곳이다. 당 안에는 조정에서 하사한 각종 패와 깃발이 진열되어 있다. 당 앞 동남쪽에는 해시계가, 서남쪽에는 됫박이 설치되어 있다. 동서 회랑은 맹부를 관리하는 여러 관리들의 사무실이다. 대당 뒤에는 맹자의 후손들이 거처하는 내택(內宅)과 사서루(賜書樓)가 있다.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3) 맹림(孟林) 맹림은 쩌우청시 동북 사기산 서쪽 기슭에 자리 잡은 맹자의 무덤이다. ‘신건맹자묘기(新建孟子墓記)’라 쓴 비석의 기록에 의하면, 북송 경우 4년인 1037년에 처음으로 이곳에서 맹자 무덤이 발견되어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 뒤 선화 연간에 현성(縣城) 남관으로 사당이 옮겨졌다. 원풍 7년인 1084년 조정에서 30만 전을 내려 무덤과 사당을 정비하게 하고 제사를 위한 땅을 사는 한편 측백과 홰나무를 고루 심었다. 청 강희제 때 이르면 제사와 무덤을 관리하기 위한 땅이 약 2만 평으로 늘었다. 맹림 내에는 측백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 울창하며 작은 시내가 남북을 관통하고 흐른다. 신도에서 무덤에 이르는 길은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돌로 바닥을 깔아 향전(享殿) 대문 앞까지 통하게 되어 있다. 제사를 지내는 향전은 5칸이고 전 뒤에 맹자의 무덤이 있다. 무덤 서쪽 300미터 지점에 옛 무덤 3기가 있는데, 맹손(孟孫) · 계손(季孫) · 숙손(叔孫)7)의 무덤으로 본다. 맹자의 무덤인 맹림 맹자 연구서인 대진(戴震)의 『맹자자의소증(孟子字義疏證)』 10. 참고자료: 맹자를 읊은 역대 시 모음 맹모송(孟母頌) - 한(漢) 유향 孟子之母, 敎化別分. 맹자의 모친은 교화에 분별이 있었네. 處子擇業, 使從大倫. 자식이 업(業)을 택함에 있어 대륜(大倫)을 따르게 했다네. 子學不近, 斷機示焉. 자식의 학업이 비근(卑近, 알기 쉬움)할 때에 베를 잘라 가르쳤네. 子遂成德, 爲當世冠. 자식이 마침내 덕을 완성하자, 당세에 세상에서 으뜸으로 삼았네. 맹자(孟子) - 송 왕안석 沉魄浮魂不可招, 가라앉은 백(魄)과 떠있는 혼(魂)은 불러들일 수 없고, 遺編一讀想風標. 유편(遺編, 맹자) 한번 읽고 그 풍도와 본보기가 그리웠네. 何妨擧事嫌迂闊, 거사(擧事)에 있어 오활(迂闊, 멍청함)함을 싫어함이 무슨 상관이오? 故有斯人慰寂廖. 이 사람 덕분에 무료함을 위안할 수 있네. 제맹자(題孟子) - 금 조정 戰國縱橫際, 전국(戰國)이 종횡(縱橫)할 때에 姬周喪亂余. 희씨의 주나라가 난리로 어수선해졌네. 聖經渾掃地, 성인의 경전으로 혼연히 땅을 쓸었고, 爲著七編書. 7편의 책을 저술했다네. 삼천교자(三遷敎子) - 명 유준(劉浚) 孟氏三遷宅已荒, 맹씨 삼천(三遷)의 집은 이미 황폐되고, 至今猶說斷機堂. 지금은 오직 단기당(斷機堂)의 말만 전해지네. 絲成交匹勤方得. 실이 필(匹)이 되는 것은 부지런히 해야 비로소 가능하고, 身入芝蘭久自香. 몸은 지초과 난초가 있는 방에 들어간 것 같이 오래도록 향기가 나네. 俎豆容儀非賈衒, 사고 팖에 있어 제수를 올리고 용모를 갖추었으니 經綸事業豈尋常. 경륜과 사업이 어찌 보통이겠는가. 母賢子聖誰能似, 어머니는 어질고 자식은 성스러우니 누가 그에 견주리오 故里千秋尙有光. 고향에는 아직까지 천추의 빛이 남아있네. 알맹자묘(謁孟子廟) - 청 고염무 古殿移邾邑, 고전(古殿)은 주읍(邾邑)으로 옮겨지고 高山近孔林. 높은 산은 공림(孔林)에 가깝다네. 遊從齊梁老, 제와 양나라에서 늙을 때까지 유세하면서 功續禹周深. 공적은 우왕과 주공보다 깊었다네. 孝弟先王業, 효제(孝弟)로서 선왕의 유업을 잇고, 耕桑海內心. 농사로써 나라 안 사람들의 마음을 다스렸다네. 期應過七百, 나라의 주기가 7백년을 넘고 보니 運豈厄當今. 천운은 지금 액운이 되었다네. 辯說千秋奉, 변설(辯說, 아름다운 말)은 오랜 세월 신봉되고 精靈故國歆. 정령은 옛 나라에서 흠향(歆饗)을 받네. 四基岡上柏, 사기산(四基山) 언덕 위에 측백나무 凝望轉森森. 눈여겨보니 삼삼하게 펄럭이네. 아성맹자묘(亞聖孟子廟) - 청 애신각라(愛新覺羅) 홍력(弘歷) 戰國春秋, 又異其世. 전국춘추 또 그 세상은 기이하네. 陷溺人心, 豈惟功利. 인심을 함닉(陷溺)시키고, 어찌 공리만 찾았나. 時君爭雄, 處士橫議. 그때에 임금들은 자웅을 다투고, 처사(處士)는 멋대로 지껄였다네. 爲我兼愛, 簧鼓樹帜. 위아(爲我)와 겸애(兼愛)로 생황 불고 북치는(망령된) 기치를 심었네. 魯連高風8), 陳仲廉士9). 노중련은 고풍을 불렀고, 진중자는 청렴한 선비처럼 행동했다네. 所謂英賢, 不過若是. 이른바 영재와 현인이 이와 같을 따름이었네. 于此有人, 入孝出弟. 이곳에 한 사람이 있어 집에선 효도하고 나가선 어른을 공경했다네. 一發千鈞, 道脈永系. 한 올의 실에 천근의 무게를 매달고, 도맥(道脈)을 오래 이었다네. 能不動心, 知言養氣. 부동심(不動心)에 능하고, 지언과 양기를 설파했네. 治世之略, 堯舜仁義. 치세의 책략과 요순의 인의로 愛君澤民, 惓惓余意. 임금을 사랑하고 백성에게 은택을 주고, 내 뜻을 간곡히 하였네. 欲入孔門, 非孟何自? 공문에 들어가려면 맹자가 아니면 어디서부터 시작하리. 孟丁其難, 顔丁其易. 맹씨(孟氏)처럼 하기 어렵고, 안씨(顔氏)처럼 하기 쉽네. 語墨故殊, 道無二致. 묵자(墨子)와는 다르다고 하나 두 길이 아니네. 卓哉亞聖, 功在天地. 우뚝하도다! 아성(亞聖), 공은 천지에 있다네. 알맹자묘(謁孟子墓) - 청 심덕잠 夢寐懷鄒邑, 자나 깨나 추읍(鄒邑)을 그리다가 今來亞聖堂. 오늘에야 아성당(亞聖堂)에 왔다네. 斯文天不喪, 하늘도 사문(斯文)을 버리지 않아서 吾道日重光. 우리의 도가 날로 거듭 빛을 발하네. 古木森松檜, 고목 삼나무과 노송나무 사이에 豊碑峙漢唐. 한(漢)과 당나라 비석이 우뚝 서있네. 薪傳應有俟, 섶나무가 불을 전하듯 기다리고 있듯이, 誰復數筍揚? 누가 다시 영명을 드날리나? 당시적구(唐詩摘句) 無國要孟子, 맹자를 원하는 나라가 없고, 有人毁仲尼. 어떤 이는 중니(공자)를 헐뜯네. - 두목  孟母遷鄰罷, 맹자의 어머니는 이웃을 가려 옮겼고, 將軍辭第切10). 장군은 처음부터 저택을 사양했네. - 이교(李嶠) 韋生堪繼相, 위생(韋生)은 후손을 이어가길 감내했고, 孟子願依隣. 맹자는 이웃과 의지해 살기 원했네. - 맹교  참고문헌 『사기(史記)』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 『맹자(孟子)』 『현자들의 평생 공부법』, 김영수, 역사의 아침, 2011. 『백양 중국사』, 백양, 김영수역, 역사의 아침, 2014. 관련이미지 29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맹자 이미지 갤러리 출처: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네이버 지식백과]맹가 [孟軻, mèng kē] (중국인물사전) 청소년을 위한 동양철학사 맹모삼천지교가 만든 성인, 맹자     목차 사람은 본래 착하다 부동심과 호연지기 왕도정치와 정전제도 초상화가 제거되다 맹자1)는 산둥성 추현 지방 출생으로 이름은 가(軻), 자는 자여(子與) 또는 자거(子車)다. 세 살 때에 아버지를 잃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했는데, 조숙했던 공자와는 달리 말썽꾸러기였다. 모방하려는 기질이 강하여 주변 지역의 풍습을 곧잘 흉내 냈기 때문에, 그 어머니가 세 번 이사를 다니며 가르쳤다고 하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가 유명하다. 맹자(孟子), 기원전 372~기원전 289 " data-font-image="false" data-seq="2" data-title="" desc="맹자의 교육을 위해 집을 세 번이나 옮겼다는 일화가 담긴 삽화다. 어머니의 노력대로 맹자는 유명한 사상가로 커갔다. 중국의 화가 송인회(宋人繪)의 작품이다." hastitle="N" height="227" source="청소년을 위한 동양철학사" src="https://dbscthumb-phinf.pstatic.net/4164_000_1/20151202174840317_VEGX9UCHG.jpg/ab87_13_i3.jpg?type=m4500_4500_fst_n&wm=Y" style="border: 0px; vertical-align: top; max-width: 690px; display: block; margin: 0px auto;" width="617" /> 맹자의 교육을 위해 집을 세 번이나 옮겼다는 일화가 담긴 삽화다. 어머니의 노력대로 맹자는 유명한 사상가로 커갔다. 중국의 화가 송인회(宋人繪)의 작품이다.     이와 관련하여 《열녀전》에 나온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맹자가 어렸을 때, 그 집은 공동묘지 근처에 있었다. 그가 노는 모양을 보니, 무덤을 만들고 발로 달공2)하는 흉내를 냈으므로 맹자 어머니는 “이곳은 아이를 기를 만한 데가 못 된다.” 하고는 이제 시장 근처로 이사를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물건을 파는 장사꾼의 흉내를 자꾸 내서, 이에 맹모는 “이곳도 아이를 교육할 만한 곳이 못 된다.” 하며 다시 학교 근처로 이사했다. 그러자 여기에서는 놀이를 하되, 제기를 차려놓고 어른에게 인사하고 겸손하며 양보하는 예를 다하는지라, 이때에야 비로소 맹모는 마음을 놓고 “이곳이야말로 참으로 자식을 가르칠 만한 곳이구나.” 하며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맹자의 어머니가 모성 교육의 사표(師表)로서 후세에 길이 빛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 시대나 맹자가 생존했던 전국 시대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적으로는 큰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 이때 제자백가(諸子百家)라 부를 만큼 많은 사상가들이 나왔는데, 가령 유가 외에도 도가 · 묵가 · 법가 · 병가 등이 있었으며, 또한 황당무계하고 대담한 학설도 다양하게 나타났다. 이처럼 잡다한 학설에 대항하여 유가의 이름을 크게 떨친 인물이 바로 맹자였다. 앞서 언급한 것 외에도 맹자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더 있다. 맹자가 어렸을 때, 밖에서 놀다가 이웃집의 돼지를 잡는 것을 보고 집으로 뛰어 들어가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돼지는 왜 잡습니까?” 그러자 어머니는 무심코 대답했다. “너를 먹이려고 그런단다.” 하지만 곧 맹모는 자신의 말에 크게 후회했다. “내 듣건대 예전에는 태교(胎敎)도 있었다는데, 이 아이가 무엇을 알려고 묻거늘 내가 만일 거짓말을 한다면, 이것은 불신을 가르치는 결과가 된다.” 이런 생각에 맹모는 결국 그 돼지고기를 사다 먹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후 맹자는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 몇 년 후에 선생님이 그를 불러서 말했다. “너는 내게서 배울 것을 다 배웠으니, 이제부터 여기에 나올 필요가 없다.” 《맹자》맹자 7편은 맹자의 말을 모은 것으로 후세의 편찬물이며, 내용은 맹자 사상을 그대로 담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맹자는 노나라의 수도인 취푸(曲阜)로 가게 되었고, 공자의 손자인 자사3)의 문하에서 배우기 시작했다. 맹자는 공자가 태어난 곳에서 겨우 6리 정도 떨어진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일찍이 그를 흠모했고 그와 같은 성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얼마 후 맹자는 말 타기를 배우다가 넘어져 팔을 다쳤는데, 마침 어머니와 헤어진 지도 오래되고 하여 고향으로 갔다. 그때 길쌈을 하던 맹모가 물었다. “너의 공부가 얼마나 성취되었느냐?” 이에 맹자가 대답했다. “별로 나아진 바가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맹모는 칼을 들어 길쌈하던 것을 끊으며 말했다. “네가 공부를 하다가 중단하는 것은 마치 내가 이 칼로 여태까지 애써서 짜던 이 길쌈을 끊는 것과 같다.” 맹자는 크게 깨닫고,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공부하여 쉴 줄을 몰랐다. 이것을 맹모의 단기지교(斷機之敎)라고 한다. 증자(曾子), 기원전 504~기원전 436 그는 공자의 손자이기도 하고 또 증자4)의 제자이기도 한 자사의 문하에서 정통적인 유학을 배웠고, 수많은 제자들과 더불어 여러 나라를 주유(周遊)하며 유가의 이상을 달성하고자 했다. 마흔 살을 전후로 추(鄒)나라의 벼슬길에 올랐으나, 혼란한 세태에 실망한 채 물러나고 말았다. 그가 수백 명의 제자와 함께 수십 대의 수레를 이끌고 이동할 때는 일대장관을 이뤘으며, 용기가 넘치고 기질이 강했던 그는 여러 왕들에게 이상정치를 실시하도록 강력히 권고하기도 했다. 여든네 살까지 제자들과 함께 공부했고, 자신의 이상을 전하기 위해 《맹자》를 일곱 편까지 썼다. 철학논술 Q. 오늘날 서울의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나라 전체에서 불고 있는 학원 과외 열풍을 어떻게 봐야 할까? 자녀 교육에 대한 어머니들의 순수한 열정이라는 긍정적 측면에서 볼 수 있는가, 아니면 내 자녀만 잘되면 된다는 식의 이기적 행태로 봐야 하는가? 사람은 본래 착하다 사람의 천성은 선할까, 악할까? 이에 대해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맹자가 주장한 성선설이고, 다른 하나는 순자가 주장한 성악설이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천성은 물이 항상 아래로 흐르듯이, 오직 선한 것만을 따른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자기 마음속에 들어 있는 것을 이끌어내기만 하면 되며, 현자의 모범적인 삶을 따로 배울 필요가 없다. 그저 자기 마음속에서 속삭이는 착한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인간의 모든 잘못이나 죄는 밖에서 사람을 옭아매는 사회제도가 불완전한 데서, 그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의 잘못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맹자는 다음의 예를 든다. “인간은 누구나 남의 고통을 차마 보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가령 한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갑자기 보았다고 하자. 그러면 누구나 깜짝 놀라서 건지려고 할 것이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부모와 잘 사귀어보려고 하기 때문도 아니고, 동네 사람들과 친구들로부터 칭찬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도 아니며, 그 아이의 지르는 소리가 듣기 거북해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 이렇듯 측은한 마음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니···.” 이러한 맥락에서, 맹자는 인간에게 다음 네 가지의 ‘착함의 처음’이 있다고 말한다.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은 어짊의 시작이요,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로움의 시작이요, 사양하는 마음은 예절의 시작이요,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은 지혜의 시작이라.”5) 이를 다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누구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면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생기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선천적으로 어질다고 하는 증거다. 둘째, 누구나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는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선천적으로 의롭다고 하는 증거다. 셋째,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선천적으로 예의바르다고 하는 증거다. 그리고 넷째, 누구나 어떤 일이 옳은지 그른지는 판단할 수 있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선천적으로 지혜롭다고 하는 증거다. 그러므로 모두 이처럼 타고난 본성대로 행동하면 누구나 착해질 수 있다. 그러나 본래 착한 인간의 마음일지라도 불의 불씨나 물의 샘 줄기와 같아서 그것을 바르게 잘 이끌면 요원(燎原)의 불길이나 큰 강이 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꺼지거나 말라버리기 쉽다. 이처럼 인간은 누구든지 선하게 될 수도 있고 악하게 될 수도 있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인간의 선한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수양해야 한다는 과제가 놓여 있는 것이다. 부동심과 호연지기 수양을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맹자는 우리가 착한 본성의 씨앗을 잘 보존하고 널리 키워나가는 방법으로, 존심양성(存心養性)6)의 수양법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밖에서부터 찾아오는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 부동심(不動心)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를 위해, 맹자는 먼저 참된 용기(大勇)를 길러야 한다고 말한다. 참된 용기란, 만용과 비겁의 중용이다. 이는 스스로 반성해봐서, 자신을 의롭지 않다고 여기면 아무리 헐렁헐렁한 옷을 입은 사람일지라도 그에게 겁을 내게 되고,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면 설사 천만 명의 사람일지라도 그들에게 겁을 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바로 이러한 용기에 의해 부동심은 길러진다. 둘째, 우리가 부동심을 얻기 위해서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야 한다. 호연지기란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한 것이다. 손상시키지 않고 곧게 키우면 천지 사이에 꽉 차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만 의리에 맞는 행동을 취했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내면적으로 의리를 쌓도록 노력해야 하며, 그러한 노력을 잠시라도 중단해서는 안 된다. 또한 항상 마음속에 지니고 잊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한편 그것은 억지로 조장해서도 안 된다. 송나라의 어떤 사람은 자기 논에 심은 모가 잘 자라지 않는 것을 걱정하여, 한 뿌리 한 뿌리씩 손으로 잡아 뽑아서 올려주었다. 그리고 피곤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와서는, “오늘 나는 논의 모가 빨리 자랄 수 있도록 돕느라 매우 혼이 났다.”라고 했다. 이에 놀란 그의 아들이 달려가 보니, 논의 모들은 벌써 다 말라죽어 있었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 기(氣)를 키우겠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이처럼 모를 억지로 뽑겠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고, 맹자는 지적했다. 수양이 잘된 사람은 절대로 물질에 대한 욕심에 유혹되어 도덕적 신념이 흔들리지도 않거니와 어떤 위협이나 곤란 아래서도 인의의 행위 원칙을 저버리지 않는다. 말하자면, “아무리 부귀하여도 음탕한 데 빠지지 않으며, 아무리 빈천하여도 주체 없이 이리저리 움직이지 않으며, 아무리 무력으로 위협하더라도 굴복하지 않는다.”(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돈이 많아지면 성적인 음란에 빠지고 술이나 도박에 취하기 십상인데, 도덕적으로 수양이 잘된 사람은 결코 그런 일에 빠져들지 않는다. 또한 사람이 물질적으로 너무 가난해지면 자기도 모르게 비굴해져 줏대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게 마련이지만, 도덕적으로 수양이 잘된 사람은 그러하지 않는다. 아울러 웬만한 사람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위험한 상황에서 무릎을 꿇기 십상이지만, 역시 도덕적으로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은 자기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원칙을 지켜낼 수 있다. 그런 사람은 가령 복권에 당첨되어 일확천금을 했다고 해서 흥청망청 쓰지도 않고, 비빌 언덕조차 없이 가난해졌다고 해도 끝까지 인간의 도리를 지켜나가며, 어떠한 위협에도 끄떡하지 않는다. 왕도정치와 정전제도 개인마다 스스로 수양을 잘해야 하겠지만, 한 나라가 백성을 잘 다스리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이에 맹자는 성선설을 바탕으로 개인의 도덕적 가치를 국가사회에 실현하기 위한 실천 방안을 제시한다. ‘사람의 본성은 어질기 때문에, 위정자는 인의로써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이른바 왕도정치(王道政治)가 그 정치론의 핵심이다. 왕도정치는 먼저, 공리주의(功利主義)7)를 배격한다. 맹자는 양 혜왕(梁 惠王)에게 공리주의의 폐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만약 임금께서 어떻게 하여 내 나라를 이롭게 할까 주장하신다면, 대부(大夫)들도 어떻게 하여 내 집안을 이롭게 할까 하고 말할 것이며, 또 선비나 백성들도 어떻게 하여 나 자신을 이롭게 할까 하고 말할 것입니다. 이렇게 위아래가 서로 자기의 이익만을 얻기 위해 다투면 나라가 위태롭게 되고 말 것입니다.” 또한 신하 된 자가 자기 이익을 생각해서 임금을 섬기고, 자식 된 자가 자기 이익을 생각해서 어버이를 섬기고, 동생 된 자가 이익을 생각해서 형을 섬긴다면, 그것은 인의가 아니라 이익 때문에 서로 만나는 것이 된다. 그러하면서도 멸망하지 않은 자는 지금까지 없었다고 맹자는 통렬히 비판한다. 둘째, 왕도정치는 백성들의 먹고사는 문제, 즉 민생 문제를 해결해줘야 한다. 왜냐하면 백성들은 항산(恒産)8)이 있어야 항심(恒心)9)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명한 왕들은 우선 백성들의 생산 능력을 안정시켜 위로는 부모를 봉양할 수 있게 해주고, 아래로는 아내와 자녀들을 부양할 수 있게 해주며, 풍년에는 배불리 먹고, 흉년에는 굶어 죽지 않도록 해주었던 것이다. 맹자는 백성들의 생업을 보장해주기 위해 정전제도의 실시를 주장했다. 이 제도는 여덟 집이 한 정(井)이 되어 집집마다 100무(畝)10)의 토지를 받아 농사를 짓되, 한가운데 있는 공전(公田)은 공동으로 경작하여 그 수확물을 나라에 세금으로 바치도록 하는 것이다. 맹자에 의하면, 5무 되는 집터 안에 뽕을 심고 누에를 치면 쉰의 늙은이도 모두 비단옷을 입을 수 있으며, 닭과 돼지를 길러 새끼 치는 것을 돌봐주면 일흔의 노인도 모두 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백성들에게는 생업을 보장해준 뒤에 비로소 도덕적인 생활로 이끌어야 하는 반면, 지도층에게는 생업에 좌우되지 않고 도덕적인 생활을 솔선수범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이들에게 먹고살 만큼의 녹봉을 주되, 그렇다고 정치지도자들이 재산을 쌓아놓아서도 안 되고 부와 사치와 음란을 누려서도 안 된다. 정치지도자는 백성들에게 어질고 너그러운 정치를 베풀어야 한다. 형벌을 줄여주고 세금을 가능한 한 적게 거두며, 모두 편안한 마음으로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정치의 궁극적 목표는 먹고사는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가치를 충분히 발휘하도록 하는 데 있다. 즉 백성들이 효성과 공경, 우애와 진실, 신의와 도덕을 닦게 하여 살고 죽는 일에 유감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면에서, 맹자는 인의를 숭상하고 덕을 본위로 하는 왕도정치가 이(利)를 숭상하고 힘을 본위로 하는 패도정치보다 우월하다고 말한다. 왕도정치의 최고 책임자라 할 수 있는 천자(天子)는 백성들의 신망을 받는 덕스러운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임금은 백성들의 신뢰를 받는 현자 가운데서, 선거에 의한 것이 아닌 선양에 의해 추대되어야 한다. 사실 왕이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다시 세우는 세습제도나, 오늘날 국민들이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뽑는 방식에는 모두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백성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왜곡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덕스러운 사람을 추대해 왕으로 모시도록 하는 방식이 훨씬 바람직하다고 맹자는 본 것이다. 이렇게 추대된 통치자는 자기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국민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 온 힘을 쏟아야 한다. 현재의 맹림(孟林)예전 중국에서는 죽은 사람의 무덤에 나무를 심었다. 주로 무덤 뒤편에 나무를 심었는데, 그래서 공자의 무덤을 다른 말로 공림(孔林), 맹자의 무덤을 다른 말로 맹림(孟林)이라고 한다. 성현의 무덤을 다른 말로 부르는 방식이다. 만일 막강한 힘을 가진 군주가 중대한 잘못을 저지를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에는 당연히 백성들이 이의를 제기할 수 있으며, 이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에는 다른 군주를 모셔올 수도 있다. 군주로서의 의무를 게을리 하여 백성들의 마음에서 멀어진 자는 왕위를 물러나게 해야 하고, 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심지어 살해해도 좋다. 폭압정치를 펴며 타락한 모습을 보이는 임금은 이미 임금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설령 그를 퇴위시키거나 죽인다 한들 신하 된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초상화가 제거되다 맹자는 성선설을 통해 동물과 인간을 구별함으로써, 인간의 지위를 드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나아가 그는 성선설에 기초하여 인의의 도덕정치, 이른바 왕도정치를 주장함으로써 정치사상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공자가 주로 교육의 대상으로 삼은 사람들은 제자들이었다. 이에 반해 맹자는 군왕이나 권력자, 그리고 귀족들을 교육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맹자가 그들에게 가르친 방법은 아첨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예지와 용기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많은 군주들 앞에서도 당당했고, 막강한 힘을 가진 그들은 도리어 맹자 앞에서 쩔쩔매는 모습을 연출했다. 그러나 그가 민심에 바탕을 둔 인의정치를 주장하면서도, 군주제를 선호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민주제 아래에서는 국민 개개인을 교육시켜야만 하는 데 비해, 군주제 아래에서는 왕후 한 사람만을 올바르게 이끌면 족하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즉 정치를 담당한 소수, 나아가 한 사람만 현명하면 나라는 저절로 잘 다스려진다고 믿었던 까닭이 아닌가 싶다. 한편 맹자는 “백성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권력자는 언제라도 물러나게 해야 한다.”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의 초상화와 글이 문묘(文廟)에서 제거된 일도 있었다. 즉 역대의 왕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흔들 수도 있는 맹자의 정치사상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은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면이 많다. [네이버 지식백과] 맹모삼천지교가 만든 성인, 맹자 (청소년을 위한 동양철학사)  
7444    [그것이 알고싶다] - 고대 중국 儒敎의 시조 - 공자 댓글:  조회:3740  추천:0  2019-11-20
인물세계사 공자 동아시아 인문주의의 원형이 된 고대 중국의 사상가 [ 孔子 ] 출생 - 사망 B.C. 551 ~ B.C. 479 일생을 바쳐 학문을 좋아하고 목숨을 걸고 실천을 중시한다. 망하려는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않는다. 천하가 잘 다스려질 때는 나아가고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무시당한다. 정의가 행해지는 나라에 살면서 가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불의가 통하는 나라에서 부자라든지 지위가 높다든지 하는 것은 더욱 부끄러운 일이다.[논어], ‘태백’(泰伯)편 중에서 ===============================================/// Basic 고교생을 위한 윤리 용어사전 공자   [ 孔子 ] 출생 - 사망 BC 551년 ~ BC 479년 시대 춘추 시대 직업 사상가 출생지 노나라 이명 자 : 중니(仲尼) 국적 중국 목차 생애 사상 영향 중국 춘추 시대의 사상가이며 유교의 시조이다.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이다. 공자의 자(子)는 존칭으로, '선생'이라는 뜻을 지닌다. 생애 중국 춘추 시대 말기에 노나라에서 태어났다. 그의 언행과 사상에 대해서는 공자의 제자들이 기록한 에 잘 나타나 있다. 중국 최고(最古)의 시집인 오경을 공자가 편찬했다고 전해지나 확실하지 않다. 가난한 가정환경 속에서 부모를 일찍 여의었지만, 학문에 힘써 17세에는 관리가 되어 재상에까지 이르렀다. 노나라의 정치에 실망하여 제자들과 함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이상을 정치에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오랜 방랑 생활에도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정치 생활을 포기하고 귀국하여 고향에서 후학 양성에 매진하였다. 사상 주나라의 봉건 질서가 쇠퇴하는 춘추 말기, 사회적으로 혼란이 극심해지자 공자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주나라의 초장기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최고의 덕을 사람에 대한 사랑인 '인(仁)'으로 보아 그의 사상적 중심으로 삼았고, 정치에 있어서는 위정자가 도덕과 예의로 백성을 교화하는 이상적 지배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 공자의 인은 부모 형제에 대한 애정인 효제(孝悌)를 중심으로 한 사상으로, 이를 실천하기 위한 방법으로 '예(禮)'의 형식을 강조하였다. 또한, 공자의 신(神)에 대한 개념은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것으로,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압박하는 존재가 아닌 인간을 도와주는 존재로서의 신이었다. 영향 공자는 제자들에게는 물론 본인 스스로에게도 인의 실현이라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였으며, 그 영향력은 살아생전에도 지대하였다. 공자 사후에도 가르침을 받은 많은 제자들에 의해 그의 사상이 유지되었으며, 특히 맹자는 제자백가 사상의 난립 속에서 세력이 약해져갔던 공자의 사상을 다시 일으켜 전파하였다. 그 후 전국 시대 말기에 순자는 다른 학파의 사상도 받아들여 공자의 사상을 더욱 발전시키고 집대성하였다. 관련이미지 124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공자 이미지 갤러리 출처: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네이버 지식백과]공자 [孔子] (Basic 고교생을 위한 윤리 용어사전)   공자 『논어』(해제) 생애 해설     공자의 조상은 송나라 미자(微子)의 후손이다. 아버지 숙량흘은 안씨의 딸 징재와 야합(野合)하여 공자를 낳았다. 숙량흘은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딸만 아홉을 두었고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있었지만 다리 장애인이었다. 건강한 아들을 원했던 그가 안씨의 딸과 혼인하기를 구하자 그 딸은 아버지의 명에 따라 혼인을 했다. 야합(野合)이란 숙량흘은 70살이 넘었는데 안징재는 16세여서 예에 맞지 않음을 일컬은 것이라고도 하나, 아무튼 정상적인 혼인관계가 아니었다. 어머니 안씨가 이구산(尼丘山)에 기도하여 공자를 얻었다. 나면서부터 머리 위가 오목하게 들어간 고로 인하여 구(丘)라고 이름 지었다. 공자가 출생한 후 곧 숙량흘은 죽어서 방산(防山)에 묻혔다. 공자는 아버지의 무덤의 위치를 몰라, 어머니가 돌아가자 거리에 빈소를 차렸다. 지방의 나이든 여인이 아버지의 무덤을 알려주자 공자는 어머니를 방산에 합장했다. 공자는 가난하고 천하여 자라서는 계씨의 창고지기도 하고 축사지기 노릇도 하였다. 공자는 키가 9척 6촌이나 되어 사람들이 모두 '키다리(長人)'라고 부르며 이상하게 여겼다. 공자의 나이 20세 무렵 계씨가 선비들에게 잔치를 벌여 대접을 했다. 공자도 가서 참여하려고 했는데 계씨의 가신인 양호(陽虎)가 쫓아내며 "계씨는 선비를 대접하자는 것이지, 너 같은 놈을 대접하자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그 이후 공자는 발분망식하여, 공자의 나이 34세 때에는, 노나라의 대부 맹리자(孟釐子 : 삼환의 하나인 맹손씨)가 병이 들어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 그는 맏아들 맹의자(孟懿子)에게 "공구는 성인(은나라 탕왕)의 후손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송나라의 후계자였으나 여공에게 양위한 분이다. 정고보(正考父)에 와서 여러 임금을 보좌함에 그 공손함이 지극하였다. 내가 듣자하니 성인의 후손은 비록 세상을 맡아 다스리지는 못하나 반드시 통달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지금 공구는 나이가 젊고 예를 좋아하니 아마 통달한 사람일 것이다. 나는 곧 죽을 것이니 너는 반드시 그를 스승으로 모셔야 한다"라는 당부를 남길 정도로 유명해져 있었다. 실제로 맹의자는 공자에게 예를 배웠고 『논어』에 나온다. 공자 나이 35세에, 계평자(季平子)가 후소백과 닭싸움을 하다가 다투어 후소백의 집터를 침략하여 집을 늘려 지었다. 평소에도 계평자는 못된 짓으로 노나라 대부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그가 평소 집안의 힘을 믿고 방자하게 구는 것을 싫어했던 소공도 가담하여 그를 몰아내려고 군사를 이끌고 쳤는데, 계평자는 맹씨 숙손씨의 세 집안과 더불어 소공을 공격했다. 소공의 군대는 패배했고, 소공은 제나라로 도망갔다. 그 뒤 노나라에 난리가 나자 공자는 제나라에 갔다. 고소자(高昭子)의 가신이 되어서 그를 통해서 경공과 통하려고 했다. 제나라 태사(太師)와 더불어 음악을 논하고, 순임금의 음악인 「소(韶)」를 들은 다음 배우려고 석달 동안 고기 맛을 잊자 제나라 사람들이 칭송했다.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를 묻자 공자는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고 말했다. 다른 날에 또 정치를 묻자 공자는 "정사는 비용을 절약하는 데 있다"고 하자, 경공이 기뻐서 장차 공자를 봉하려고 하자, 안영(晏嬰)이 반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유자(儒者)란 약디 약아서 법도를 좇으려 않으며, 오만하고 제멋대로여서 아래 사람으로 삼기 힘들고, 상례를 숭상하여 애도를 다한답시고 파산할지라도 장례는 후히 하니 풍속에 득이 없고, 유세나 하고 다니면서 재물만 빌어먹으니 나라에 득이 없습니다. 큰 현인이 없어진 뒤로, 주나라 왕실이 쇠약하여 예와 음악이 없어진 지 오래 되었습니다. 지금 공자가 예복(禮服)을 성대하게 차려입고, 임금에게 예절과 진퇴의 절도를 번잡하게 하고 있으니, 여러 대를 두고 하더라도 그 학문을 다 할 수 없고, 한평생 하여도 그 예를 다 할 수 없습니다. 임금님께서 그를 써서 제나라의 풍속을 고치고자 하시면, 어리석은 백성을 위하는 첫째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논어』를 보면 공자는 "안영은 타인과의 교우 관계가 몹시 좋았다. 관계가 오래 지속될수록 더욱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5-17)라며 안영을 찬양하고 있다. 그 후 경공이 공자를 보더라도 예를 묻지 않았다. 다른 날 경공은 공자에게 "선생을 계씨처럼 받들지는 못하더라도, 계씨와 맹씨 사이로 대접하겠습니다"고 말하였다. 이에 제나라 대부들이 공자를 해치려고까지 하였다. 경공은 나중에 "내가 늙었는지라 등용하지 못하겠다" 하니, 공자는 다시 노나라로 돌아갔다. 계씨는 공실을 업신여기고 배신이 국정을 잡으니, 이 때문으로 노나라에서는 대부 이하 모두 바른 길(正道)을 무시하였다. 그리하여 공자는 벼슬을 포기하고 물러나 『시(詩)』, 『서(書)』, 『예(禮)』, 『악(樂)』을 닦으니, 제자가 더욱 많아졌다. 공산불요가 비 땅을 근거로 계씨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사람을 보내 공자를 불렀다. 공자는 자신의 이상을 시험해 볼 곳이 없음을 답답해하고 있던 차였다. 그래서 말하기를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은 풍과 호 지방에서 일어나 왕이 되었다. 이제 비 땅이 비록 작지만, 혹시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고, 가려고 했다. 자로가 화를 내며 공자를 막자, 공자는 말하였다. "나를 부르는 자는 어찌 아무 생각이 없었겠는가? 만약 나를 써준다면, 나는 동쪽의 주나라로 만들 것이다." 그러나 성사되지는 못 했다. 그 뒤에 정공이 공자를 중도(中都)의 읍재로 삼았다. 일 년 만에 사방이 모두 그를 본받았다. 그로 말미암아 사공(司空)이 되었고, 사공에서 다시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공자는 나이 56세에 대사구로 말미암아 재상의 일을 대리하면서 기뻐하였다. 또 정치를 어지럽힌 노나라의 대부 소정묘(少正卯)를 죽였다. 공자가 정치를 맡은 지 삼 개월 만에 염소나 돼지를 파는 자는 값을 속이지 않았고, 남녀는 걸을 때 길을 달리하였고, 길에 떨어져 있는 물건을 주워 가지 않았으며, 읍으로 오는 사방의 손님들이 관리에게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되었고, 모두 대접받고 돌아갔다. 제나라 사람들이 이 일을 전해듣고 두려워하며, "공자가 정치를 하면 반드시 노나라가 패자가 될 것이고, 패자가 되면 우리나라부터 먼저 합병할 것이다" 하면서, 계책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제나라 가운데서 예쁜 여자 80명을 뽑아, 춤을 가르치고 화려한 옷을 입혀 장식을 한 말이 끄는 수레 30대에 태워 노나라 임금에게 보냈다. 이에 노나라 임금 이하 신하들이 종일 구경하면서 정치에 태만했다. 그러자 공자는 제사고기를 보내주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고 벼슬을 그만두었다. 공자는 위나라에 가서 자로의 처형 안탁추(顔濁鄒)의 집에 머물렀다. 위나라 영공이 묻기를 "노나라에서는 녹봉을 얼마나 받으셨습니까?" 하자, "곡식 육 만(약 2000섬)을 받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위나라에서도 곡식 육 만을 주었다. 얼마 지난 뒤에 공자를 참소하는 일이 생기자 공자는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열 달 후 위나라를 떠났다. 진나라로 가면서 광 땅을 지나는데, 광 사람들이 공자를 노나라의 양호로 착각하고 공자의 행차를 멈추게 했다. 공자의 모습이 양호와 비슷한 관계로 5일 동안을 구금했다. 다시 위나라로 돌아와 거백옥의 집에 머물렀다. 위영공의 부인인 남자(南子)가 사람을 시켜 공자를 보기를 원한다고 했다. 공자는 사양했지만, 어쩔 수 없어서 만났다. 부인은 갈포(葛布)로 만든 발(휘장) 안 쪽에 있었다. 공자가 문으로 들어와 북쪽을 향해 머리를 조아려 절을 했다. 부인은 발 안에서 재배를 했는데, 차고 있던 패옥이 쨍그렁 소리를 냈다. 공자가 말하기를 "우리 마을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보지 않지만, 만나는 예로 답을 합니다" 하였다. 이 일로 자로가 화를 냈다. 공자가 조나라에서 송나라로 가는 도중, 제자들과 함께 큰 나무 밑에서 예를 익혔다. 송나라 사마 환퇴가 공자를 죽이려고 그 나무를 쓰러뜨렸다. 제자들이 떠나기를 재촉하자 공자는 말하기를 "하늘이 나에게 덕을 내리셨으니, 환퇴가 나를 어찌 하겠는가!" 하였다. 공자가 진(陳)나라에 이르렀을 때, 오나라 왕 부차(夫差)는 진나라를 정벌해서 세 읍을 빼앗았고, 월나라 왕 구천(句踐)을 회계에서 쳐부수었다. 공자가 진나라에 머무는 3년 동안, 여러 나라들이 계속 전쟁을 벌였다. 진나라는 항상 침략을 당하고 있어서 그 나라를 떠나갔다. 또 포 지방을 지나면서 반란자들이 공자를 붙잡아두고 괴롭히며 말하기를, 만약 위나라로만 가지 않겠다고 맹세하면 놓아주겠다 하였다. 그러자 일행은 곧 맹세를 하고 동문으로 나갔다. 그러나 공자는 곧장 위나라로 갔다. 자공이 묻기를 "어찌 맹세를 저버릴 수 있습니까?" 하자, 공자는 대답하기를 "강요된 맹세는 귀신도 듣지 않는다" 하였다. 위령공이 늙어 정사에 태만하고 공자를 쓰지 않자, 공자는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누가 나를 써주기만 한다면 1년만 되어도 좋고, 3년이면 성과를 낼 텐데" 하고 위나라를 떠나갔다. 공자는 서쪽으로 조간자(趙簡子)를 만나려고 황하에 이르렀을 때, 두명독과 순화가 조간자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공자는 황하 강물에 서서 이렇게 탄식하였다. "아름답다, 물이여! 저렇게도 출렁거리는구나! 내가 이 물을 건너지 못함은 운명이로구나!" 자공이 감히 그 까닭을 묻자, 공자는 말하였다. "두명독과 순화는 진(晉)나라의 어진 대부였다. 조간자가 세력을 잡지 못했을 때는 그 두 사람 말을 들은 뒤에 정사를 했는데, 세력을 잡은 뒤에는 그들을 죽이고 정사를 하고 있다. 나는 들으니 '태를 쪼개 어린것을 죽이면 기린이 들판에 오지 않고, 연못의 물을 말려 고기를 잡으면 교룡이 음양을 합하지 못하고, 둥지를 뒤엎고 알을 깨뜨리면 봉황이 날아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왜냐? 군자는 자기와 같은 부류를 해침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새나 짐승도 의롭지 못함을 오히려 피할 줄 알거든, 하물며 사람이랴!" 마을로 돌아와 거문고 가락을 연주하며 슬퍼하였다. 가을에 계환자가 병이 들어 수레를 타고 노나라의 성을 보며 "옛날이 나라가 흥성할 수 있었는데, 내가 공자에게 죄를 얻어 흥하지 못하였구나" 하고 탄식하며, 아들 계강자에게 "내가 죽거든 너는 노나라의 정승으로서 반드시 공자를 모셔와라" 하고 당부하였다. 아버지를 장사한 다음 계강자가 공자를 부르려 하자, 공지어가 말하였다. "옛날에 우리 선군께서 그를 등용하여 끝까지 쓰지 못하고, 끝내 제후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등용하여 끝까지 쓰지 못 하면, 또 다시 제후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 대신 제자인 염구를 불러들였다. 자공은 염구를 환송하면서 당부하기를 "자네가 등용되거든 곧 공자님을 부르게 하라" 하였다. 공자가 진·채의 국경에 있다는 말을 듣고 초나라에서 공자를 초빙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진·채의 대부들이 모의하면서 "공자가 초나라에서 등용되면 우리들은 위태롭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공자 일행을 들판에서 에워싸고 억류하자 식량이 떨어졌다. 따르는 이들은 병들어 일어나지 못했다. 그런데도 공자가 강송(講誦)과 현가(弦歌)를 그치지 않자, 자로가 성을 내며 "군자도 곤궁함이 있습니까?" 하자, 공자는 "군자는 원래 곤궁한 것이다. 소인은 곤궁하면 혼란에 빠진다" 하였다. 공자는 제자들이 불만이 많음을 알고 자로를 불러 말하였다. "시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를 헤매고 있구나' 했는데, 우리의 도가 바로 그런 격인가? 내가 여기서 어찌 한단 말이냐?" "우리가 아직 어질지 못한 것입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믿지 못하니! 우리가 아직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억류하고 있으니!" "대답이 그것뿐이냐! 자로야, 어진 이는 필히 사람들의 신임을 얻는 것이라면 어찌 백이·숙제가 있었겠으며, 지혜로운 이가 반드시 사람들에게 억류되지 않는 것이라면 어찌 왕자 비간(比干)이 있었겠는가?" 자로가 나오고 자공이 들어가니 공자가 말하였다. "자공아, 시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를 헤매고 있구나' 하였는데, 우리 도가 바로 그런 격인가? 내가 여기서 어찌 한단 말이냐?" "선생님의 도가 너무 높기 때문에 천하에 어느 누구도 포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낮추시면 어떨까요?" "자공아, 솜씨 좋은 농부가 씨를 잘 뿌린다고 잘 수확하는 것은 아니다. 솜씨 좋은 기술자가 기술을 잘 발휘한다고 꼭 사람들 뜻을 맞출 수는 없다. 군자는 도를 닦아서, 강기(綱紀)하고 통리(統理)할 수는 있어도, 반드시 사람들에게 포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제 너는 네 도를 닦지 않고, 포용되기만을 기다리는구나. 자공아, 네 뜻은 원대하지 않구나!" 자공이 나가고 안연이 들어와 뵈니 공자가 말하였다. "안연아, 시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를 헤매고 있구나' 하였는데, 우리의 도가 그런 격인가? 내가 여기서 어찌 한단 말이냐?" "선생님의 도가 지극히 크기 때문에 천하 어느 누구도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선생님께서는 밀고 나아가시면 되지, 남이 용납하지 않음을 어찌 걱정하십니까? 용납되지 않은 연후라야 그가 군자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도를 닦지 못함은 나의 부끄러움이나, 도를 크게 닦았는데도 써주지 않음은 임금들의 부끄러움(잘못)입니다. 용납되지 않음을 어찌 근심하십니까? 용납되지 않은 연후라야 군자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공자가 흔연히 웃으며 말하였다. "그러냐, 안씨의 아들이여! 만약 네가 재물이 많다면, 나는 너의 관리인이 되리라." 이에 자공을 시켜 초나라로 보냈다. 초나라 소왕이 군사를 일으켜 공자를 맞이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마침내 계강자가 폐백을 갖추어 공자를 불러들이자, 공자는 노나라로 돌아왔다. 노나라를 떠난 지 14년만이었다. 그러나 노나라는 끝내 공자를 등용하지 않자, 공자도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그 후 육예를 편찬하고 제자를 가르치는데 몰두하였다. 공자가 72세 때 자로가 위나라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공자가 병이 깊은 후 자공이 찾아왔다. 공자는 마침 지팡이를 짚고 문 앞을 거닐다가 "자공아, 왜 이제야 오느냐?" 하였다. 공자는 탄식하며 노래하기를 "태산이 무너지려나! 대들보가 부러지려나! 철인(哲人)이 시들려나!" 하였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가 오래 된지라 아무도 나를 받드는 이가 없구나. 어제 저녁 나는 은나라 식으로 제사 받는 꿈을 꾸었으니, 나의 선조가 은나라 사람임이라"고 말하였다. 그 뒤 7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노나라 애공은 만사(挽詞)하기를 "하늘이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니, 나는 괴로운 아픔 속에 있네. 아아 슬프다! 이보(尼父 : 仲尼 존칭)시여!" 하였다. 이에 자공이 말하기를 "애공 임금은 노나라에서 죽지 못할 것이다. 살아서는 써 주지 않고, 죽어서야 만사하여 시호를 내는 것은 예가 아니다" 하였다. 공자는 노나라 성 북쪽 사수(泗水) 가에 묻혔다. 제자들이 모두 3년 동안 복을 입었다. 자공은 홀로 무덤가에 여막을 짓고 다시 3년이 지난 후에야 떠나갔다. 제자와 노나라 사람 중에 묘소 밑에서 집을 짓고 사는 사람이 100여 집이었다. 그래서 '공리(孔里 : 공자 마을)'가 되었다. 공자 무덤에서 노나라에서는 대대로 세시(歲時 : 새 해를 맞을 때)에 제사를 드렸고, 선비들은 향음주와 대사의 예를 행하였다. 한나라 고조 황제는 노나라를 지나가다 태뢰(太牢 : 천자에게 드리는 제사)로 제사지냈으며, 제후와 경상들이 오면 항상 먼저 공자 무덤에 참배하고 정사에 나아갔다. 사마천은 말하기를 "천하에 군왕에서 현인까지 많은 사람이 있었건만, 생시에 아무리 영화로웠던들 죽으면 다 끝이었다. 오직 공자만은 포의(布衣)로 죽었으나 대대로 전해오면서 학자들의 종주(宗主)로 숭앙되고 있다" 하였다.(이상 『사기』 「공자세가」의 내용임) [네이버 지식백과] 생애 해설 (공자 『논어』 해제) ===================================/// 중국사상의 뿌리 공자의 가르침     공자의 출현은 중국, 아니 인류의 큰 행운이다. 키 크고 잘생겼으며, 구수한 목소리에 술 잘 마시고 사람 좋아하는 인간, 솔직담백하고 항상 세상일에 열변을 토하는 사람, 끊임없이 탐구하며 옳은 일에 고집불통인 공자는 참으로 위대한 정치인이자 교육자였다. 독서와 사색을 겸하는 공부 방법, 재능에 따라 달리 가르치는 교수 방법으로 공자는 그 이전 중화문명의 진수들을 집대성하여 유가 및 제자백가의 문을 활짝 열었다. 공자는 탁월한 언어감각을 지닌 학자이다. 예를 들어 공자의 어록인 『논어』엔 "군자유(君子儒)가 되라"고 한다. 임금의 아들[君子]이라는 기존 개념에 도덕적 의미부여[儒]를 함으로써 군자의 뜻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인(仁)이 그렇고, 예(禮)가 그렇고, 그의 철학적 개념이 모두 그렇다. 그러면서도 그는 "옛사람의 말을 옮겼을 뿐 창조하지 않았다"고 겸손해 한다. 예를 중시한 주나라에서 큰일을 치르는 의식에 밝은 유들은 예식을 돕는 상례(相禮)와 교육활동으로 생계를 꾸려갔는데, 공자는 거기에다 기존의 사상적 유산인 6예를 성공적으로 결합시켰다. 그리고 마른 고기 한 묶음만 가져오면 각지에서 찾아온 가난한 자, 강도·건달까지도 가리지 않고 열성으로 가르쳐 그들을 전통문화의 계승자로 만들어냈다. 참으로 위대한 역사의 기적이다. 그의 관심은 땅 위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사람이었다. 자로가 귀신 섬기는 일을 묻자 공자는, "아직 사람도 섬길 수 없는데 어떻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논어』 「선진」)고 대답한다. 사람과 사회를 중요한 인식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는 개인의 수양과 품덕을 특별히 강조한 도덕주의자였으며, 상식적인 인간관계를 중시한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런 입장에서 과거의 일에 대해 연구하고 정의하였다. 예컨대 삼년상을 치를라치면 산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며 합리적인 항의를 한 재아를 어질지 못한 놈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자식으로 태어나 삼 년이 지나야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기"(「양화」) 때문이라는 인간적인 이유를 단다. 이렇게 전통의 현대적 해석에 성공한 공자는 기존의 『시』 『서』 『예』 『악』 『역』 『춘추』를 재정리했고, 이로써 유가는 경전을 갖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학파가 될 수 있었다. 고문헌에 대한 선별·편찬이 문제가 될 수도 있으나, 체계적인 이론이 바탕이 되어 줌으로써 오히려 육경의 의미는 더욱 승화되었다. 『예기』 「경해 經解」편은 공자의 육경에 대해, "사람됨에 온유하고 돈후하란 것이 『시』의 가르침이다. 소통하여 멀리 알라는 것이 『서』의 가르침이다. 폭넓고 어진 삶을 살라는 것이 『악』의 가르침이다. 정밀하고 미묘한 것을 잘 재어 보고 헤아리라는 것이 『역』의 가르침이다. 공손·검약하고, 엄숙·경건하라는 것이 『예』의 가르침이다. 사건을 잘 비유하여 말을 하라는 것이 『춘추』의 가르침이다"라고 논평하고 있다. 공자의 제자들 가운데 일부는 정치적 능력을 발휘해 스승보다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도 여럿이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제자들은 각지로 흩어져 교육에 종사하면서 스승의 말씀을 나름대로 해석하기도 하고, 유복(儒服)이라는 독특한 복장을 하며 동질성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유'가 한 학파의 칭호가 된 것은 공자의 사후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스승의 사상에 대한 이해 정도에 따라 제자들 사이에 급속히 분파가 생겨났다. 『순자』 「유효」편은 이들을 여섯 등급으로 나누었고,1) 구체적으로 제자들 이름을 거명해 자궁(子弓)을 공자의 정통으로, 자사와 맹자를 정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잡학한 사람으로, 자장(子張)씨의 유는 말만 그럴듯하게 늘어놓은 자들로, 자하(子夏)씨의 유는 의관만 정제하고 있는 사람들로, 자유(子游)씨의 유는 염치를 모르는 사람들로 비판하기도 한다. 『한비자』 「현학」편엔 "공자가 죽은 뒤 자장의 유, 자사의 유, 안(顔)씨의 유, 맹(孟)씨의 유, 칠조(漆雕)씨의 유, 중량(仲良)씨의 유, 손(孫)씨의 유, 악정(樂正)씨의 유가 있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여러 분파로 나뉘었다는 사실은 유가가 쇠락했다기보다 발전했다는 징표이다. 즉, 이러한 분파 투쟁을 통해 이론적 성숙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나뉜 초기의 유가 사상가들에겐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공통된 사상 형식·개념·범주가 있었다. 정치와 윤리를 일체화시킨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학문과 정치 사이를 오간 유가 사상가들은 첫째, 선왕 특히 요·순(堯舜)과 문·무(文武)의 도를 자신들의 깃발로 삼았다. 둘째, 전통 문화유산이며 공자가 정리한 육예를 모든 교육과 삶의 모범으로 삼았다. 셋째,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마라"(『논어』 「안연」)는 가르침에 따라 군신·부자·귀천·상하·친소의 구분이 엄격한 예의를 숭상하였다. 넷째, 인·의·예·지·충·효·신·애·화·중(仁義禮智忠孝信愛和中) 등을 사회생활을 실천하는 데 공통된 기본 개념이자 범주로 삼았다. 다섯째, 모두가 공자를 최고의 스승으로 받들었다. 따라서 덕·중용·정명(正名) 등 공자의 주장은 항상 유가의 주된 관심 대상이었다. =========================/// 대사구(大司寇, 형조판서) 시절의 공자 초상화   중국인물사전 공자   유교의 시조 [ 孔子 , kǒng zǐ ] 요약 중국의 대 철학자이자 사상가 이미지 크게보기 대사구(大司寇, 형조판서) 시절의 공자 초상화 시대 춘추 전국시대 노나라 출생 - 사망 BC.551년 ~ BC.479년 목차   1. 불우했던 개인 생애 2. 정치적 야망을 접고 교육에 전념하다 3. 공자 출현의 시대적 배경 4. 공자와 유가학파 5. 공자 사상의 핵심 - 인(仁) 6. 공자의 인재관과 교육관 1) ‘유교무류(有敎無類)’ - 평등한 인재 교육을 강조한 공자의 인재론 7. 공자에 대한 재평가 8. 관련 유적 9.  공자의 인생 회고록 10.  공자 가문의 영욕사 11.  공자의 유머 1) 유머 사례 2) 공자의 모습에 대한 도학자들의 평 3) 공자의 인간미를 엿볼 수 있는 『논어』 4) 마음을 움직이는 위트 12.  공자연보 1. 불우했던 개인 생애   공자는 춘추 전국시대 즉 고대 노예제도가 차차 봉건제도로 옮아가던 시대에 노나라 추읍(陬邑, 지금의 산둥성 취푸(曲阜))에서 아버지 숙량흘과 어머니 안징재(顔徵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안징재는 공자를 가졌을 때 니구산(尼丘山)에서 백일 동안 기도를 드렸다고 하며, 후일 공자의 이름이 ‘구(丘)’이고 자인 중니(仲尼)에 ‘니’자가 들어간 것도 기도를 드렸던 니구산에서 유래했다는 말이 전한다. 공자의 선조는 송나라의 귀족 출신이었으나 송에서 정치적 실패로 노나라로 망명하였다. 공자는 세 살 되던 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라 귀족 집안의 소사1)가 되었다가 나중에 노나라의 관리가 되기도 했으나 단기간의 임관에 불과했다. 19세에 결혼을 한 공자는 24세에 어머니 안씨를 잃었고 66세 때 부인이 죽었으며 69세 때는 아들 백어(伯魚)마저 세상을 떠나는 등 어릴 때와 마찬가지로 말년도 매우 불우했다. 그의 제자 안자(顔子, 안회)가 자기보다 앞서 세상을 떠났을 때 통탄하던 공자의 모습(『논어』)을 보면 그가 일찍이 3세 때 아버지를 잃고 난 후 오늘에 이르러 부모와 아들과 수제자마저 보내는 심정이 편안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2. 정치적 야망을 접고 교육에 전념하다   공자는 10여 년 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각처에서 유세2)하고 정치에 참여하는 등 자기의 정치적 이상 실현을 도모했으나 그 기대와 희망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68세 때 노나라로 돌아온 뒤에는 세월을 한탄하며 관직을 단념하고 시, 서(書), 역(易), 예기(禮記), 춘추(春秋)의 육경을 풀이 및 정리하고 제자 교육에 전념하였다. 요, 순, 문왕, 무왕, 주공을 높이 받들어 숭배하고 고대의 사상을 집대성했으며 유가와 가학3)을 창립했다. 당시에 공자는 ‘하늘이 허락한 거룩한 성인(聖人)’, ‘하늘이 세상을 위해 목탁으로 삼으신 분’이라는 영광스런 명칭을 얻었고, 후대에 ‘지성(至聖)’, ‘지성선사(至聖先師)’, ‘만세사표(萬世師表)’, ‘문선황제(文宣皇帝)’, ‘문선왕(文宣王)’, ‘소왕(素王)’ 등으로 받들어졌다. 그의 사상은 맹자와 순자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인(仁)을 이상의 도덕이라 하여 효제4)와 충서5)를 이상의 근거로 삼았고, 후에 그의 제자들이 그의 언행록을 기록해 놓은 『논어』 7권이 현재 전해진다. 노자를 만나는 공자의 모습을 나타낸 벽돌 그림 3. 공자 출현의 시대적 배경   공자가 태어난 춘추시대 사회 실정을 보면 공자의 출현은 시대의 당연한 요청일지도 모른다. 이 시대의 사회 실정에 대해 『한서』 「화식전(貨殖傳)」에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주(周)나라 왕실이 쇠하여 예법이 무너지고 제후들은 제멋대로 사치하고 방자해졌다. 선비와 서민들은 각기 본분을 지키지 아니하여 농사에 힘쓰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상업 무역에 종사하는 사람만 많아져 쌀과 곡식이 부족한데 상품은 넘쳐흐른다. 제 환공, 진 문공 이후로는 예의가 크게 무너져 위아래가 없고 나라마다 정치가 제각각이고 집집마다 풍속도 제각각이며, 욕망은 제한이 없고 분에 넘치는 일이 허다하다. 상인은 구하기 어려운 상품을 마구잡이로 사다 들이고 공인(工人)은 사치스런 기물을 제조하기에 바쁘다. 선비는 정도에서 벗어난 학설과 유행만 좇은 공부에만 몰두하며, 호사스러운 자들은 헛된 명예를 위하여 진실은 배반하고 사리사욕을 위해 남에게 해를 끼친다. 폭도라도 나라를 뺏은 자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 되고 왕위를 찬탈한 자는 영웅이 된다. 예의가 군자의 마땅한 도리가 되지 못하고 형벌도 소인을 무섭게 하지 못하여, 부자들은 헛된 우상에게 비단옷을 입히고 개와 말에게도 고기를 먹여 배부르게 하는데 가난한 자들은 떨어진 베옷에 콩잎을 먹고 물만 마실 뿐이다. 군주를 도와주면 비록 그 출신이 노예의 신분이었더라도 사대부와 같이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서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권모술수를 모르면 배고픔을 면치 못한다.” 맹자는 이러한 공자의 시대를 평가하기를, 세상이 혼란스러워지고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희미해져 요망하고 간사한 말들과 폭행이 심하여 신하가 임금을 죽이고 자식이 아비를 죽이는 세태에 공자가 이를 심히 염려하여 『춘추』를 지었다고 했다. 제자를 가르치고 있는 공자의 모습 4. 공자와 유가학파   비석에 새겨져 있는 공자상(시안 비림박물관) 『한서』 「예문지(藝文志)」는 중국 고대의 여러 학파를 아홉 종류로 분류하여 1) 유가류 2) 도가류 3) 음양가류 4) 법가류 5) 명가류 6) 묵가류 7) 종횡가류 8) 잡가류 9) 농가류 학파의 특징을 논술하였는데, 그 중 유가류(儒家類)라 한 것은 공자를 우두머리로 하는 유가학파를 말한다. 그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유가의 학파는 주(周)나라 때의 ‘사도(司徒)’6)라는 관직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중생을 가르치고 이끌어서 옳은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그 임무이다. 음양의 이치를 따르고 대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며 임금을 바르게 도와 사회를 안전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근본사상은 인(仁)과 의(義)이며 인의사상이 유교의 경전인 육경을 통하여 구체화된다고 하였다. 역사적 학통을 보면, 요 · 순과 문왕 · 무왕을 본받고 이를 집대성한 공자를 만세의 스승으로 받들고, 유가학파의 도가 모든 학파 중에서 으뜸이며 동양의 모든 학술 · 문화의 사상적 근원으로 그 전통을 이루어온 것이라고 하겠다.” 중국 철학사상사에 있어서 공자를 중심으로 하여 그 전과 후를 획기적으로 구별하는 것은 서양철학사에서 소크라테스가 갖는 위치와 같은 것으로 본다. 공자사상은 도가처럼 자연주의도 아니고 묵가의 공리주의도 아니며, 성실성과 불변함을 지닌 인간가치에 관한 학문이며 인간을 중심으로 파헤친 인생철학이다. 그런데 공자의 사상 가운데 가장 핵심이 되는 인(仁)은 자기를 완성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완성까지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공자는 인을 도덕실천의 최고 목표로 삼은 것이다. 5. 공자 사상의 핵심 - 인(仁)   유가 사상은 ‘인(仁)’으로 통용되는 공자의 중심사상이다. ‘인’은 유도(儒道)의 근본이며 인류애의 근본사상이다. 이 ‘인’에 관하여서는 『논어』에만 105자에 달하며 사서에 나타나 있는 ‘인’ 자를 모두 합하면 272자가 된다. 이로 볼 때 유교에서 얼마나 ‘인’자에 치중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인’은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자기 혼자 존립할 수 없으며 상호관계 속에서 서로 도와야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중용』에서는 “仁者, 人也(인자, 인야: 인은 곧 사람이다)”라 하였고, 『맹자』에서는 “仁也者 人也(인야자 인야: 인이라는 것은 사람이다)”라 하였으니, ‘인’은 곧 사람, 다시 말하면 ‘인’은 인간 자체의 성실성 있는 가치관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인’을 이해하려면 먼저 인간을 이해해야 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인의 길(仁道)’은 곧 ‘사람의 길(人道)’과 서로 통한다. 공자는 ‘인’ 사상에 대해서 뚜렷한 정의를 밝히지 않았고 제자들의 물음에 대해 때와 장소에 따라 인물에 따라 각각 그 답이 달랐다.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라 했으나 다른 제자의 질문에는 “남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서(恕, 관대함)가 그것”이라 하기도 했고 “집에 있을 때는 공손하고 일을 할 때는 신중하고 남과 사귀는 데는 성실한 것”이라고 하기도 했다. 또 공자는 증삼에게 내 도는 한결같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다른 제자가 증참에게 그게 무슨 뜻이냐고 하자 “충서(忠恕)가 그것”이라 했다. 이런 말은 자공(단목사)도 하고 있어서 충서야말로 ‘인’일 것이라는 사람도 있다. 요컨대 주관에 따라 어떻게라도 해석이 가능한 반면 그 어느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인’에 대한 학설들이다. 이는 공자가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으로 규정하기를 기피했고 사람에 따라 말을 달리 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우리도 ‘인’의 개념에 대한 규정을 피하는 것이 좋겠다. 그 어느 ‘덕(德)’도 ‘인’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는 반면, 그 어느 것만으로는 그 내용이 대변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인’이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이다. 최고 선(善)은 어디에라도 적용되는 반면, 어느 것으로도 포착이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논어』 「자로(子路)」편 18장에는 엽공과 공자가 정직에 대해 문답한 것이 나와 있다. 아버지가 양을 훔쳤는데 자식이 고발했다는 말을 듣고 공자는 “아비는 자식을 위해 숨기고, 아들은 아비를 위해 숨기는 것이 정직”이라고 하였다. 어떤 덕이든 그 형식적인 면에 얽매이면 도리어 생명을 잃고 마는 것이니, 공자가 ‘인’의 규정을 회피한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인’은 사랑이다”라는 정의는 애정이 결핍된 사람에게는 교훈이 되겠지만 이 정의로 고정시켜 버리면 적군도 사랑하고 악인도 사랑해야 하는 것으로 오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가 ‘인’에 대하여 완벽한 정의를 내리지 않고 그때그때 적절히 대응한 것은 저울이 평형을 이루려면 상대의 무게에 따라 추의 무게나 위치가 달라지는 것과 같은 맥락이 아닐는지, 그 사람이 아니면 그 사람을 모르듯 우리 범부중생이 성자철인의 속 깊은 뜻을 어이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공자가 정의를 안 내린 이 ‘인’에 대해서는 그것이 인간의 최고 선이었다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겠다 싶다. 또 그것이 추상적 이념이 아니라 실천적 윤리임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공자의 사당인 공묘 대성전에 모셔져 있는 공자의 상 6. 공자의 인재관과 교육관 1) ‘유교무류(有敎無類)’ - 평등한 인재 교육을 강조한 공자의 인재론   공자는 춘추시대 후기를 살면서 평생 교육과 학술 활동을 펼친 사상가이자 교육가였다. 공자의 교육활동은 중국 인재사와 교육사에 있어서 계획적이고 전문화된 대량의 인재창출의 시초를 열었다는 점에 획기적인 의의를 가진다. 기록에 의하면 중국은 상(商) · 주(周) 때부터 국가 차원의 교육기관과 체제를 갖추고 귀족과 그 자제들에게 시 · 서 · 예 · 악을 가르쳐 자질을 향상시켰다.(『순자(荀子)』 「왕제(王制)」) 그러나 국가가 주도하여 실행한 이런 교육은 너무 형식적이라 전문적 지식을 갖춘 인재를 대량으로 배출할 수는 없었다. 춘추시대 및 그 이전의 이름난 군주를 비롯하여 장수와 재상 및 기타 인재들 중에 귀족학교에서 배출된 사람은 없었다. 공자는 교육에 있어서 귀족의 독점을 타파하고 사학(私學)을 창립하여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최초의 인물이다. 공자는 사학을 창립하여 각계각층의 자제들을 키웠는데, 스스로 ‘가르침에 부류는 없다’는 뜻의 ‘유교무류(有敎無類)’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 그가 길러낸 제자는 3000명에 이르렀으며 그 중 뛰어난 학생만도 7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학생들 대부분이 노나라 사람이었지만 진(晉) · 정(鄭) · 송 · 오 · 초 등에서 온 사람도 있었으며, 맹의자 · 남궁적(南宮適) 등과 같이 귀족 집안 출신이 있는가 하면 안회 · 증삼 등과 같이 빈곤한 집안 출신도 적지 않았다. 또 염옹은 신분이 최하층민이었고, 공야장은 죄인의 몸이었다. 공자의 교육활동은 인재 배양을 독립된 사회활동으로 발전시켰으며, 인재와 관련한 이론 연구의 시작이기도 했다. 이는 인재 발전사의 중대한 사건이었다. 인재관과 관련하여 공자는 애인7)과 존현8)을 강조했다. 그는 “인(仁)이란 곧 사람이므로 어버이를 어버이로 받드는 것이 옳고, 어진 사람을 존경하고 의리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라고 했다.(『예기』, 『중용』) 공자의 교육 목적은 어진 선비를 많이 배출하는 데 있었다. 공자가 가르친 내용으로는 시 · 서 · 예 · 악 · 어(御) · 사(射)가 있었는데, 기본 경전과 예악은 물론 말타기와 활쏘기까지 익히게 하여 학생이 보다 전반적인 지식을 습득한 인재들로 커가도록 의도했다. 공자의 교육방법은 생활 속의 활동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교육에 대한 평가 기준으로 문(文, 지식) · 행(行, 실천) · 충(忠, 국가관) · 신(信, 신용)을 내세웠다. 이는 최초의 인재 평가기준이라 할 수 있다. 공자는 일찍부터 정치에 뜻을 두고 여러 나라를 돌며 책임 있는 자리에서 일을 해보고자 하였으나, 공자가 활동했던 춘추 후기는 약육강식으로 대변되는 전국 시대로 넘어가기 직전이었고, 당시 각국이 원했던 인재는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주의자였다. 서주(西周) 시대로의 회귀를 갈망했던 공자의 정치사상은 당연히 이런 풍조와 맞지 않았고 현실 정치에서 철저히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공자의 위대한 점은 여기에 절망하지 않고 자신의 학문과 경험을 종합하여 이를 교육과 학술에 재투자했다는 것이다. 또 자신이 겪었던 불운을 거울삼아 어질고 유능한 인재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는 ‘존현(尊賢)’이란 용인관을 내세운 점도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정치적 이상은 처절하게 실패했지만, 교육적 이상은 오늘날까지 살아 현대인의 삶 곳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7. 공자에 대한 재평가   1949년 중화민국이 성립한 이래 공자에 대한 논쟁은 주로 공자의 사상에 나타나는 계급적 속성 문제와 철학적 속성 문제에 집중되었다. 계급적 속성 문제는 중국 역사시기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 하는 시대 구분 문제와 한데 얽혀 대단히 복잡하게 전개되었는데, 주진(周秦, 주나라와 진나라) 봉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공자 사상의 계급적 속성에 대해 대체로 다음 네 가지 견해를 제기한다. 1) 귀족 노예주 계급의 이익을 대표한다. 2) 봉건 지주 계급의 이익을 대표한다. 3) 노예주 귀족에서 변화한 지주 계급의 이익을 대표한다. 4) 평민의 이익을 대변한다. 다음 공자의 철학적 속성 문제에 대한 견해 역시 크게 네 가지로 대표된다. 1) 공자는 무신론자이며 그의 천도관(天道觀)은 유물주의적이다. 2) 공자 사상은 유물주의와 유심주의 두 가지 성분을 아울러 갖고 있다. 3) 공자는 유물주의와 유심주의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4) 공자는 은 · 주 이래 전통적인 천명관념을 계승한 유심주의자다. 공자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약간의 변화와 차이는 있었지만 그가 수립한 사상체계와 교육사상 등은 지금까지 엄청난 영향을 발휘했고 또 여전하다. 그의 사상체계에 보수적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그는 급변하는 시대상을 자신의 주관으로 파악하고 이를 전통사상과 연계하여 새로운 시대적 이념과 사상을 제기한 진보적인 지식인이자 정치가였다. 실제 정치에서는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그가 만년에 정리한 역사, 철학, 사상, 교육, 예술, 정치윤리 등과 관련된 이론은 중국뿐만 아니라 동남아 각국에까지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공자를 주인공으로 한 공연의 모습 8. 관련 유적   공자와 관련한 유적은 중국 전역에 남아 있다. 특히 공자의 고향인 산둥성 취푸에 집중적으로 남아 있는데, 그 중에서 삼공(三公)이 가장 유명하다. 삼공이란 공자의 무덤인 공림(孔林), 공자의 사당인 공묘(孔廟), 공자의 저택인 공부(孔府)를 말한다. 삼공을 포함한 관련 유적을 아래에 정리해둔다. ① 창평니산부자동(昌平尼山夫子洞): 산둥성 취푸시 동남 30킬로미터 창평향 니산 동쪽 기슭 ② 궐리방(闕里坊): 산둥성 취푸시 공묘동장 밖 궐리가 중부 ③ 공자고택문(孔子故宅門): 산둥성 취푸시 공부대문 서측 ④ 공택고정(孔宅故井): 산둥성 취푸시 공묘 동로 시례당 뒤 ⑤ 문례당(問禮堂): 산둥성 취푸시 성 동북 1킬로미터 주공묘 동로 내 ⑥ 시례당(詩禮堂): 산둥성 취푸시 공묘 동로 내 ⑦ 행단(杏亶): 산둥성 취푸시 공묘 대성전 앞 ⑧ 선사수식회(先師手植檜): 산둥성 취푸시 공묘 대성문 북폐 동측 ⑨ 수사서원(洙泗書院): 산둥성 취푸시 공림 동북 1킬로미터 ⑩ 무우태(舞雩台): 산둥성 취푸시 성 남쪽 2킬로미터 ⑪ 춘추태(春秋台): 산둥성 취푸시 성 남쪽 8킬로미터 식감촌 내 ⑫ 석문사(石門寺): 산둥성 취푸시 성 동북 26킬로미터 석문산 남쪽 기슭 ⑬ 관천정(觀川亭): 산둥성 취푸시 니산 공묘 대성문 동남 ⑭ 공자문소처(孔子聞韶處): 산둥성 쯔보시 성 동쪽 소원촌 ⑮ 협곡(夾谷): 장쑤성 공유현 성 서북 15킬로미터, 위공자 상로회제후 ⑯ 호산(虎山): 산둥성 타이안시 태산 남쪽 기슭 비규령 동북 ⑰ 공자애(孔子崖): 산둥성 타이안시 태산 옥황정 서남 ⑱ 공자등림처방(孔子登臨處坊): 산둥성 타이안시 태산 남쪽 기슭 홍문궁 앞 반도 위 ⑲ 공자소천하처(孔子小天下處): 산둥성 타이안시 태산 옥황정 동남 태평정 위 ⑳ 공망산(孔望山): 장쑤성 롄윈강시 신포 남쪽 2.5킬로미터 ㉑ 학당강(學堂崗): 허난성 창위안현 성 북쪽 5킬로미터 ㉒ 격경처(擊磬處): 허난성 급현 남관, 상전 공자증재차 격경습락 ㉓ 현가태(弦歌台): 허난성 화이양현 성 밖 서남 모퉁이 ㉔ 문아태(文雅台): 허난성 상추(商丘)현 동남 1.5킬로미터 태지 위 ㉕ 부자애여쇄서태(夫子崖與曬書台): 허난성 닝청현 동북 32킬로미터 망산진 서남 기슭 ㉖ 공자문례처(孔子問禮處): 허난성 락현시 노성 동관 ㉗ 공자묘(孔子墓): 산둥성 취푸시 공림 내 남부 ㉘ 공자묘(孔子廟): 산둥성 취푸시 성내 ㉙ 대성전(大成殿): 산둥성 취푸시 공묘 내 ㉚ 규문각(奎文閣): 산둥성 취푸시 공묘 내, 동문문여 십삼어비정 사이 ㉛ 십삼어비정(十三御碑亭): 산둥성 취푸시 공묘 대성문 앞 ㉜ 니산공자묘(尼山孔子廟): 산둥성 취푸시 동남 30킬로미터 니산 동쪽 기슭 ㉝ 확상포(矍相圃): 산둥성 취푸시 내, 공묘 서측, 상국가로 남쪽 ㉞ 공림(空林): 산둥성 취푸시 성 북쪽 1킬로미터 공자의 무덤인 공림 공자의 사당인 공묘 공자의 저택인 공부 9.  공자의 인생 회고록   공자는 만년에 자신의 70 평생을 단 38자의 문장으로 개괄했는데 세상에서 가장 짧은 자서전 내지 회고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열다섯 무렵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서른 무렵에 내 뜻을 세웠고, 사십 무렵에는 흔들리지 않게 되었고, 오십 무렵에는 하늘이 준 사명을 알게 되었다. 육십대에는 순종하게 되었고, 칠십이 넘자 마음 가는대로 따라가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게 되었다.”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논어』 「위정(爲政)」편) 위 38자의 회고록은 공자가 70이 넘자 인생을 회고하면서 제자들에게 구술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데,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삶을 정리하면서 감개무량한 심경을 고백한 것으로 본다. 10.  공자 가문의 영욕사   공자의 가문은 역대로 통치자들에 의해 크게 중시되어 많은 특혜를 받았다. 따라서 가문의 영속성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공자로부터 공덕성(孔德成, 1920~2008)에 이르기까지 77대가 되고 있는데, 그 동안 공씨 가문은 여러 차례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 가운데 중요한 사건들을 몇 가지 추려보면 아래와 같다. 1) 오대 후량(後粱) 건화(乾化) 연간(911~912)에 공부9)에서 청소를 담당하던 공말10)이란 자가 공자의 42대손 공광사(孔光嗣)를 죽이고 공씨 가문의 자리를 빼앗는 사건이 일어났다. 18년 뒤 공광사의 아들 공인옥이 당 명종에게 상소문을 올려 사건을 밝히자 공말은 처형되었다. 이 일로 공인옥은 공씨 가문을 다시 일으킨 중흥조(中興祖)로 존중되었다. 한편, 공말의 후손들은 이 사건으로 ‘가문 밖의 가짜 공씨’란 뜻의 ‘외원위공(外院僞孔)’, 줄여서 ‘외공(外孔)’으로 찍혀 족보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2) 북송 말기 제 48대 연성공(衍聖公, 공자의 후손을 이렇게 높여 불렀다) 공단우(孔端友)가 강왕(康王)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저장성 취저우(衢州)에 살게 되니, 이를 남쪽 지역의 공씨 가문이라는 의미로 ‘남종(南宗)’이라 한다. 그 동생 공단조(孔端操)는 취푸에 남아 가문을 이으니 이것이 ‘북종(北宗)’이다. 실제로는 남종이 공씨 가문의 장손 후예들이지만 취푸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남종과 북종이 정통을 놓고 서로 다투기도 했다. 명나라 홍치(弘治) 연간(1488~1505)에 와서야 비로소 황제에 의해 북종이 정통으로 인정되었다. 3) 종법제도에 따라 적장자는 윗대를 잇는 계승자다. 공씨 가문은 장자는 끊어지지 않는다는 원칙하에 장자가 아들이 없으면 반드시 가장 가까운 혈통을 골라 장손의 자리를 잇게 했는데, 조카가 장손 자리를 이을지언정 동생이 장손 자리를 이을 수는 없게 했다. 11.  공자의 유머11)   공자의 유머는 자연스럽다. 『논어』에는 유머러스한 공자의 말이 많은데, 이는 공자가 실제로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정감 넘치고 이치에 합당한 이야기를 많이 했기 때문이다. 다만 안타깝게도 성리학의 기세가 너무 강했던 탓에 공자 이후 사람들이 알지 못했을 따름이다. 그는 14년 동안 송 · 위(衛) · 진(陳) · 채(蔡) 사이를 떠돌아 다녔는데, 여의치 않은 경우가 열에 아홉이었지만 그 때마다 늘 의연하게 대처했다. 세상에 대해 상심하는 말을 하기도 했는데, 고향인 노나라에서 계환자12)와 양화13) 같은 인물을 만나는 바람에 진(晉)나라로 가려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황하 가에서 “물이여, 물이여!”14)라며 탄식한 것이 그런 경우였다. 환퇴란 자가 공자를 해치려 하자 “환퇴 그가 나를 어쩌겠는가?”15)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말은 강한 자신감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역시 스스로 만족하고 유유자적하는 군자의 두려움 없는 기세라 해야 할 것이다. 그가 진 · 채 · 여(汝) · 영(潁)에서 왜 그렇게 특별히 오래 머물렀는지는 알 수 없다. 1) 유머 사례   공자의 침착하고 유유자적한 태도를 잘 보여주는 사례는 진(陳)에서 먹을 것이 떨어져 무려 7일 간을 굶었을 때의 일이다. 제자들은 불평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자는 꼿꼿하게 혼자서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르면서 침착하고도 여유로운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는 몇 번이고 제자들에게 “우리가 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데 어쩌다 이곳에 버려졌느냐?”16)고 물었다고 한다. 이 대목은 우리가 공자에게 가장 탄복하게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17) 또 한 번은 공자와 제자들이 길에서 흩어져 서로를 잃어 버렸다. 잠시 후 누군가가 동문에서 공자를 보았다면서 그 행색이 마치 ‘상갓집 개’ 같더라고 했다. 이 얘기를 전해들은 공자는 “다른 건 몰라도 상갓집 개란 말은 그럴 듯하구나.”라 했다. 2) 공자의 모습에 대한 도학자들의 평   공자는 인정(人情)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공손하면서도 편안했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았다. 천리 밖까지 찬바람이 쌩쌩 도는 도덕군자인양 점잔을 빼는 그런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정자나 주자와 같은 송나라 유학자들의 손을 거치면서 공자의 모습은 바뀌어 버렸다. 도학적 관점에서 공자를 논하면 공자의 본래 모습을 잃게 마련이다. 그들은 마치 보통 사람이 하는 행동을 성인은 하지 않는 것처럼 말했다. 모름지기 도학적인 송대 유학자들이 감히 할 수 없는 행동이나 말을 공자는 거침없이 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예를 한 가지 들어보자. 유비18)라는 자가 공자를 만나러 왔다. 공자는 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거나 문지기를 시켜 집에 없다고 하라 했다. 그런데도 유비가 가지 않고 문 앞을 얼쩡거리자 공자는 일부러 유비가 들으라고 비파를 연주했다.19) 공자가 왜 그랬을까? 주자는 공자가 유비를 몹시 싫어한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이라고 했다. 그와는 달리 청나라 때 학자 최술은 다른 해석을 했다. 그는 이 대목이 후세 사람이 멋대로 갖다 붙인 것이라면서, 성인께서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겠냐고 했다. 역사학자 고힐강은 최동벽의 이런 견해에 불만을 나타내며, “경서(經書)와 공자 · 맹자를 지나치게 신봉하여 도처에 선입견과 주관이 물들어 있다.”20)라고 했다. 3) 공자의 인간미를 엿볼 수 있는 『논어』   『논어』에는 공자의 인간미가 물씬 풍긴다. 『논어』의 멋을 알려면 먼저 공자가 제자들에게 한 말들을 음미해야 하는데, 그 중에는 유유자적하면서 한 말, 솔직담백한 말, 외부인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한 말, 그냥 나오는 대로 내뱉은 말, 유머러스한 말, 심지어는 농담 및 욕까지 다양하다. 요컨대 『논어』는 공자와 제자들이 사적으로 나눈 대화체 실록(實錄)으로, 공자의 진면목을 다시 볼 수 있다. 진지함과 농담이 적당히 섞인 조용하고도 차분한 이 실록으로부터 우리는 공자의 진짜 성품을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래에 몇 가지 대화 내용을 인용한다. “그게 바로 나다!”21) 공자는 제자들에 대해 전혀 격이 없었다. 철학과 종교에 대해 강의하면서도 후대의 정자처럼 스승과 제자 사이의 예의에 집착하는 태도와는 달랐다. 공자는 “너희들 내가 너희들한테 뭐 숨기는 것이 있는 줄 아는 모양인데, 나 숨기는 것 하나 없다. 지금까지 나는 무슨 일을 하고 너희들에게 알려 주지 않은 적이 없다. 그게 바로 나다.”라고 말한다. 정겨운 모습이 절로 떠오르지 않는가? “농담이야!”22) 공자는 자신이 한 농담에 대해서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한번은 제자인 언언이 성재(城宰, 성의 우두머리)로 있는 무성(武城, 산둥성 더저우에 있는 현) 지방을 방문했는데, 집집마다 책 읽는 소리와 거문고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공자는 싱긋이 웃으며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라고 했다. 그러자 언언이 공자의 말을 반박하고 나섰다. “선생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시지 않으셨습니까? 군자가 도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 쉽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공자는 “얘들아 언(偃)의 말이 옳다. 방금 전에 내가 한 말은 농담이었을 뿐이니라.”라고 말했다. 공자가 한가하게 제자들과 나눈 대화의 말투는 보통 이러했다. “나는 점아를 따라 가겠다.”23) 제자들에게 각자의 바람을 물어보는 대목이다. 모두들 매우 즐겁게 자신의 포부 등을 얘기했다. 공자는 딱딱한 겉치레 말이 아닌 은근한 정을 담은 말로 분위기를 끌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이 끝나자 증석(증점)은 자신의 ‘바람’은 관직을 하는 것도 아니오, 조정과 종묘 사이에 위태롭게 서 있는 것도 아니어서 선뜻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공자는 “무슨 상관이냐? 나는 그저 각자의 바람을 듣고 싶을 뿐이니라.”라고 말했다. 그러자 증석은 비파의 굵은 줄을 한번 퉁겨 소리가 울리게 한 다음 비파를 내려놓고는 일어서서 자신의 바람을 말했다. 그 부분을 대략 오늘날 사람들이 하는 말로 바꾸어 보면 이렇다. “3월과 4월 사이 새 옷을 입고 양음산24) 중정공원(中正公園)으로 놀러 갑니다. 어른들 대여섯이 아이들 예닐곱을 데리고 수영장에서 논 다음, 근처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다가 노래를 부르며 돌아오는 것입니다.”25) 이 말을 들은 공자는 한숨을 내쉬면서 “점(點)아! 나는 너하고 같이 가겠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네 말에 전적으로 뜻을 같이 한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앞에서 진지하고도 점잖게 자신의 바람을 말한 것에 뒤이어 증석이 이렇게 느긋하게 분위기를 풀어 버리니 자연스럽게 유머 작용을 한 것이다. 공자도 흔쾌히 그 뜻을 알아주었다. “말을 탈까, 활을 쏠까?”26) 누군가 공자를 두고 “공자는 정말 위대하다. 그렇게 박학다식하면서도 특기 하나 없으니.”라고 비꼬았다. 이 말을 들은 공자는 “나한테 무슨 특기를 가르쳐 주려고? 말을 탈까? 아니면 활을 쏠까? 아무래도 말을 타는 것이 낫겠지?”라고 말했다. 이 대목은 진짜 유머의 멋이 물씬 느껴진다고 평가한다. “그래? 어찌 그럴 수가!”27) 공자가 공명가(公明賈)28)에게 위나라 대부 공숙문자(公叔文子)에 대해 묻기를 “정말로 그 사람 말하지도 웃지도 욕심부리지도 않느냐?”라 했다. 그러자 공명가는 “그렇게 말한 사람이 부풀려 한 말입니다. 그 분은 말할 줄도 웃을 줄도 아는데 다만 그럴 만한 때라야 말을 하고 웃기 때문에 모두들 그를 싫어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공자는 “그러냐? 정말 그러냐?”라고 말했다. 이런 중첩된 말투는 『논어』에 흔히 보이는 회화체 필법이다. “사야, 네 능력 밖이다.”29) 자공은 말을 아주 잘 했다. 한번은 그가 “남이 저를 아무렇게 대하는 것을 바라지 않듯이 저도 사람들을 그렇게 대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공자는 “사(賜, 자공의 이름)야, (말은 쉽다만) 내가 보기에 네가 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세 번 냄새 맡고는 그냥 일어서다.”30) 이 대목은 해석하기 가장 어려운 것으로 꼽히는데, 최술은 또 위작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실 별 것 아닌 대목이다. 그저 공자가 꿩의 냄새를 맡아보고는 구역질이 나 먹지 않으려 했다는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 대목은 「향당편(鄕黨篇)」에 보이는데, ‘향당편’은 주로 먹는 것에 관한 얘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야기는 이렇다. 새 한 마리가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내려앉았다. 자로(중유)가 가만히 다가가서 “들새로구먼. 마침 잘 왔다!”며 잡아서는 공자에게 드렸는데, 공자는 서너 번 냄새를 맡아보더니 들새의 비린내가 싫어 먹지 않고 그냥 일어섰다. 원래 들새는 2~3일 말렸다가 먹는 게 좋다고 한다. 그러니 이 대목에서 무슨 거창한 도리를 찾아내려 할 필요가 있을까? “여럿이 하루 종일 죽치다.”31) 공자 왈 “여럿이 하루 종일 함께 있으면서 좋은 말 한 마디 않고 사사로운 꾀나 부리고 있으니, 정말 힘들구나 너희들!” 여기서 맨 뒤의 ‘정말 힘들구나 너희들’이라는 말은 ‘잘 하는 짓이다’라는 말이다. 주자는 이 대목을 ‘장차 근심과 해가 있을 것이다’라고 풀이했지만 이것은 ‘잘 하고 있구나, 너희들’이라는 한적한 말투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와 똑같은 말투가 또 한 군데 더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구절이다. “하루 종일 배불리 먹고 마음 쓰는 일 하나 않는구나. 정말 잘 하는 짓이다! 장기나 바둑 같은 것도 있지 않느냐? 그런 곳에라도 신경을 쓰는 것이 아무데도 마음 안 쓰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32) 유머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자연스럽고 조용한 방에서 친한 친구와 나누는 한담 같이 전혀 꾸밈없고 허세 부리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공자의 『논어』다. 한번은 이런 말도 했다. “내가 어찌 담에 매달려 있기만 하고 먹지도 못하는 표주박과 같을 수 있나?”33) 또, “팔아야지! 암, 팔아야지! 나는 누군가 나를 사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34)라는 말도 했다. 이 구절은 현명한 군주가 자기를 등용하길 기다린다는 뜻으로, 속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은 말이지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해 준비해 두었다가 한 말이 아니다. 그러나 친한 친구와 한담을 나누는 분위기라면 오해는 사지 않을 것이다. 이 대목을 너무 진지하게 읽는다면 그 맛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공자가 사람을 욕한 대목도 적지 않다. 오늘날 정치하는 사람들이 어떠냐는 물음에 공자는 “아, 째째한 인간들이니 인간 축에 끼지도 못한다.”35)라고 대답했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아, 밥만 축내는 그 밥통들, 어디다 쓰겠느냐!” 정도가 될 것이다. 친구 원양을 욕하는 대목에서 공자는 “늙어서 죽지 않으면 도적이야!”라고 한 다음, 그것도 모자랐던지 몽둥이를 들고 땅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원양의 정강이를 때렸다. 염구를 욕하면서 “내 제자가 아니니라. 얘들아 북을 울리고 공격을 가해도 좋다!”36)라고까지 말했다. 제자에 대해서까지도 이렇게 화를 낸 것은 염구가 권력자 계씨(季氏)의 앞잡이가 되어 세금을 거두어 들였기 때문이었다. “유(由)야는 제 명에 못 죽을 것이다.”37) 이 말은 자로(중유)를 두고 한 욕으로 곱게 죽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4) 마음을 움직이는 위트   진짜 위트 넘치는 공자의 말을 독자들은 평소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가장 좋은 보기 중 하나가 『공자가어』에 나오는 다음 대목이다. 자공이 죽은 자에게도 지(知)가 있냐고 묻자 공자는 대뜸 “네가 죽으면 알게 되겠지.”라고 대답했다. 이는 자로가 비슷한 질문을 했을 때 “삶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느냐?”38)라고 대답한 것처럼 위트가 넘친다. “말하지 않겠다는데 어쩌겠는가? 어쩌겠는가? 이런 사람은 정말이지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다.”39) “아는 걸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아는 것이다.”40) 이런 대목들도 같은 종류로 본다. “잘못하고도 고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잘못하는 것이다.”41) 또 “남이 나를 몰라준다고 걱정하지 말고 알아 줄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 힘써라.”42)라는 대목은 알 ‘지(知)’43)자를 가지고 대단히 좋은 문장을 만들었는데, 위트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구절이다. 공자는 화통한 사람이었다. 나오는 대로 말해도 모두가 이치에 합당했다. 그는 자신의 발로 여러 곳을 실제로 돌아다녔고, 또 쉬우면서도 친근한 말로 사람과 접촉했다. 부모를 섬길 때는 봉양만 해서는 안 되고 존경해야 한다면서 “봉양이야 개나 말도 다 할 수 있는 것이야.”44)라고 말한다. “부자가 될 수만 있다면 나더러 마부가 되어 수레를 몰게 해도 기꺼이 하겠다.”45)는 말도 한다. 모두가 참으로 꾸밈없는 말들이다. 여러 곳을 몸소 다녔기 때문에 늘 유머러스한 말들이 자연스럽게 그의 입에서 나왔다. 미국의 대문호 칼 밴 도렌(Carl van Doren)은 공자의 말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목이 계문자(季文子, 계연)가 세 번 생각하고 난 다음 행동한다고 말하자 공자가 “두 번, 그 정도면 되네.”46)라고 말한 대목이라고 말했다. 이는 아무리 좋은 일도 지나치면 못쓴다는 뜻으로 결단과 실천을 강조한 대목이다. 12.  공자연보   BC.551: 아버지 숙량흘(叔梁紇)과 어머니 안징재(顔徵在) 사이에서 태어남 BC.549(3세): 아버지 사망 BC.535(17세): 어머니 사망 BC.533(19세): 결혼 BC.532(20세): 아들 공리 출생 BC.522(30세): 자로(중유), 증석(증점), 염경, 염구, 염옹 등의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 BC.518(34세): 노나라 대부 맹리자(孟釐子)가 죽으면서 그의 맏아들 맹의자(孟懿子) 등 두 아들에게 공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예를 배우라고 당부함 BC.517(35세): 제나라 경공이 정치에 대해 질문 BC.502(50세): 노나라 권신 공산불요(公山弗擾)가 공자를 부름 BC.501(51세): 처음 벼슬을 하여 노나라 중도재(中都宰, 산둥성 중도 현령)가 됨 BC.500(52세): 다시 사공(司空, 정1품 관직)이 되고 다시 대사구(大司寇, 형조판서)가 됨 BC.497(55세): 노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감 BC.496(56세): 광 땅에서 액운을 만남. 필힐이 부름 BC.495(57세): 위나라 영공을 만나 벼슬하고 남자(위령공의 부인)를 만남 BC.494(58세): 벼슬을 그만두고 위나라를 떠남 BC.492(60세): 조나라를 거쳐 송나라로 가다가 환퇴에게 액운을 당함 BC.489(63세): 진나라 채나라 초나라를 거쳐 위나라로 돌아감 BC.488(64세): 다시 위나라(출공 재위4년)에 벼슬을 함 BC.484(68세): 노나라 계강자(노나라의 실권자)가 공자를 부르자 고국을 떠난 지 14년 만에 노나라로 돌아감. 이후 유약, 증삼, 자하(복상(蔔商)), 자장(전손사) 등의 제자를 가르침 BC.483(69세): 아들 공리 사망 BC.481(71세): 제자 안회 사망. 제나라 진항이 임금을 시해하자 노나라 임금에게 토벌을 간청했으나 실현되지 않음. 노나라 서쪽에서 기린이 사로잡히자 낙심하여 『춘추』 저작을 절필함. BC.480(72세): 자로가 위나라 난리에 사망 BC.479(73세): 공자가 세상을 떠남 참고문헌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 『논어(論語)』 『맹자(孟子)』 『공자전(孔子傳)』, 전목(錢穆), 삼련서점(三聯書店), 2002. 『논공자적유묵(論孔子的幽黙)』, 임어당(林語堂), 무소불담합집(無所不談合集) 『유머와 인생』, 김영수옮기고엮음, 아이필드, 2003. 『용인』, 리수시편저, 김영수역, 랜덤하우스코리아, 2003. 『백양 중국사』, 백양, 김영수역, 역사의 아침, 2014. 『중국역대명인승적대사전』, 상해문예출판사, 1995. [네이버 지식백과] 공자 [孔子, kǒng zǐ] - 유교의 시조 (중국인물사전)  
7443    [그것이 알고싶다] - 고대 중국 道家의 시조 - 로자 댓글:  조회:2901  추천:0  2019-11-19
철학사전 노자   [ 老子 ] 노자 출생 - 사망 미상 ~ 미상 출생지 초나라 이명 자 : 담(聃) 본명 : 이이(李耳) 직업 사상가 분야 도가 국적 중국 중국 고대의 사상가이며 도가(道家)의 시조이다.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 자는 담(聃). 『노자도덕경』이라고도 불리우는 『노자』는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상당히 발전한 무렵부터 한(漢)대까지의 도가 사상의 소산(所産)이다. 『노자』의 중심 사상은 인의(仁義) 등 도덕이나 지혜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인민을 지배하려고 하는 유가(주로 맹자)에 대하여, 도덕ㆍ지혜를 버리고 지배의욕을 버리고 무위자연(無爲自然)에 의하여 지배하려고 하는 정치사상과, 동일하게 무위무욕(無爲無欲)으로 남에게 겸양하는 것에 의하여 성공ㆍ보신(保身)하려고 하는 처세술이다.  이들에 대한 근거로서, 현상의 배후에 불가지(不可知)의 실재(實在)인 도(道)를 설정하여, 우주생성설과 음양의 자연학을 도입하여, 세계는 도(道)로부터 나오고 '도'에 의하여 생성ㆍ사멸의 운동을 한다고 하는 객관적 관념론을 전개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노자 [老子] (철학사전) ===============================///   헤겔사전 노자   [ 老子 , Lao-tse ] 중국에서 사람들은 자기 밖의 황제 안에서 자기의 직접성을 보았지만, 다음의 단계에 이르면 자기 내면 안에서 자기를 보고자 하는 교설이 나타난다. 이것이 도교이다[『종교철학』 16. 328 참조]. 헤겔에 따르면 내적인 것, 즉 추상하는 순수사유로의 이러한 방향은 이미 고대 중국에서 발견되지만, 그러나 그 교설이 좀더 변화하여 심화된 것은 후대에서이며, 특히 노자에서이다. 노자에 의해서 심화된 교설에서는 사상이라는 순수한 지반으로의 이행이 싹트고 있다. 그러나 사상의 추상에 전념하는 사람들은 그것 자체에서 순수한 불사의 존재가 되고자 의도했다. 그러므로 생명성 · 의식 · 정신적인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사상은 완전한 추상에 그치게 된다. 헤겔은 『역사철학』에서 공자와 노자를 동시대인이라고 하고 있지만, 현대의 연구에서 노자는 공자보다 100년가량 후(춘추시대 말기)로 되고 있다. 헤겔은 노자에 관한 자료로서 아벨 레뮈자(Abel Rémusat 1788-1832) 「노자의 생애와 견해에 관한 각서」(Paris 1824)와 『노자도덕경』의 번역을 읽고 있었다. -핫타 다카시(八田隆司) [네이버 지식백과] 노자 [老子, Lao-tse] (헤겔사전) =====================================/// 도덕경』에서는 규정성의 파기와 언어에 대한 부정을 강조하는데, 유가사상이 중국 북방의 황하유역에서 형성된 것인 반면, 이런 무위자연의 사상은 중국 남방의 양쯔강유역에서 형성되었다는 기질적인 차이로 설명되기도 한다. 즉, 북방은 생존조건이 열악하기 때문에 살아가기 위해서는 현실적이고 투쟁적이어야 하지만, 남방은 날씨가 온화하고 자연 조건이 순조로워 평화적이고 낭만적이었는데, 이런 분위기의 차이가 사상 형성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유가사상이 인(仁)·의(義)·예(禮)·지(智)의 덕목을 설정하여 예교(禮敎)를 강조하면서 현실적인 상쟁대립이 전제된 반면, 『도덕경』의 사상은 상쟁의 대립이 인위적인 것으로 말미암아 생긴다고 보고, 무(無)와 자연의 불상쟁(不相爭) 논리를 펴나간 것이다. 이러한 내용의 『도덕경』의 사상은 학문적인 진리 탐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위·진, 남북조시대처럼 사회가 혼란과 역경에 빠져 있을 때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지혜를 밝혀 주는 수양서로서도 받아 들여졌으며, 민간신앙과 융합되면서 피지배계급에게 호소력을 지닌 사상 및 세계관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우리 나라 자료에는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2 근구수왕 즉위년조에 근구수왕이 태자로 있을 때 침입해 온 고구려군을 패퇴시키고 계속 추격하려 하는 순간, 휘하의 장수 막고해(莫古解)가 다음과 같이 간언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듣기로는 도가의 말에, 족함을 알면 치욕을 당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제 얻은 것이 많은데 더 욕심을 내어서 무엇합니까?” 이 말을 듣고 추격이 중지되었다고 하는데, 이 구절은 『도덕경』 제44장에 나오는 말이다. 『도덕경』의 구절이 장수의 입에까지 오를 정도였다면 당시 사회에서는 상당히 광범위한 영향력을 가졌던 것임에 틀림이 없고, 나중의 일이지만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도 비슷한 내용의 시를 수나라 장수에게 보낸 것이 『삼국사기』에 나타나 있다. 『삼국유사』 보장봉로조(寶藏奉老條)에는 당나라 고조(高祖)가 고구려인의 오두미교 신봉 이야기를 듣고 624년 천존상과 함께 도사를 보내어 『도덕경』을 강론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이듬해 영류왕은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불(佛)·노(老)를 배우고자 하였고, 고조는 이를 허락하였다는 것이다.   노자의 초상화 이미지 갤러리   출처: 중국인물사전 ========================/// 공자-논어 인.예.정명사상.덕치.대동사회를 주장 맹자-맹자 인의.성선설.왕도정치.민본주의.역성혁명을 주장 노자-도덕경 도.무위자연.상선약수.무위정치.소국과민 주장 장자-장자 도.소요유.물아일체.제물론.좌망.심재를 주장  
7442    [그때 그 노래] - "손에 손잡고"... 댓글:  조회:2379  추천:0  2019-11-19
88올림픽 주제가 ㅡ"Hand In Hand" 손에 손잡고                   /조로지오 모로더 작곡 하늘 높이 솟는 불 우리의 가슴 고동치게 하네 이제 모두 다 일어나 영원히 함께 살아가야 할길 나서자.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우리 사는 세상 더욱 살기좋도록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서로 서로 사랑하는 한 마음 되자. 어디서나 언제나 우리의 가슴 불타게 하자 하늘향해 팔 벌려 고요한 아침 밝혀주는 평화 누리자.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우리사는 세상 더욱 살기좋도록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서로서로 사랑하는 한 마음 되자.
7441    [그 사람, 그 세계] - 뻣속까지 악기인... 댓글:  조회:3330  추천:0  2019-11-19
“수백년 동안 튜닝한 악기, 시간 지날수록 좋은 소리 들려줘”  2019.11.19.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이탈리아 명품 古악기 복원 전문가 플로리안 레온하드 바이올린은 흔히 300~400년 전에 이탈리아 북부의 크레모나 지역에서 제작된 장인들의 악기를 최고로 꼽는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우스와 과르네리 델 제수는 명품 악기의 대명사로 통한다.  이탈리아 명품 고(古)악기 복원 및 제작, 감정분야의 세계적인 전문가인 플로리안 레온하드(56)가 14일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영국 왕실이 소유했던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 ‘에든버러 공작’(The Duke of Edinburgh)과 1727년산 과르네리 델 제수 등 4대의 고악기도 함께 들고 왔다. 개당 최소 1000만 달러(약 116억 원) 이상의 가치를 지닌 명품이다.  영국 런던에 있는 고악기 복원 및 제조공방인 ‘W.E Hill & Sons’에서 30년 넘게 일해 온 그는 고악기 전문 딜러이자 감정분야 권위자다. 그는 막심 벵게로프, 레오니다드 카바코스, 니콜라 베네데티와 같은 유명 바이올리니스트는 물론 런던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베를린 필하모닉, 금호문화재단 등 음악관련 단체의 악기 구입을 자문해왔다. 그는 이번에도 한국과 중국, 일본 등의 컬렉터들에게 자문해주기 위해 아시아를 방문했다.  ―‘에딘버러 공작’은 어떤 악기인가.  “스트라디바리가 1724년에 독일의 한 백작의 주문으로 만든 바이올린이다. 이후 영국 왕실에 팔렸고, 1880년대 즈음 빅토리아 여왕이 앨버트 왕자(에든버러 공작)에게 주었다. ‘로열 피들러’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앨버트 왕자는 영국 해군 제독으로 근무할 때 선상이나 콘서트홀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모습이 신문에 자주 실렸다.” 이후 이 바이올린은 미국으로 팔려나가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기증됐다. 그런데 프리츠 크라이슬러, 외젠느 이자이, 미샤 엘만, 야샤 하이페츠 등 당시 유명 연주자들이 반기를 들었다. “위대한 악기가 있어야 할 곳은 박물관이 아니라 콘서트장”이라는 주장이었다. 결국 법적 소송 끝에 박물관은 소유권을 포기하게 됐고, 이후 이 바이올린은 연주악기로 활용돼왔다.  ―왜 명품 고악기는 박물관에 있어선 안 되는가.  “지난 200~300년 동안 세계 최고의 연주자들이 사운드를 체크하면서 최고가 될 때까지 수정하고, 튜닝해온 악기는 소리가 좋을 수밖에 없다. 바이올린은 더 많이 사용될수록 나무의 떨림을 통한 파동의 진폭이 좋아진다. 연주자가 모든 부분을 만져주고, 눌러주고, 마사지해줄 때 바이올린은 좋은 바이브레이션에 대한 메모리를 만들어낸다.” ―스트라디바리와 과르네리 델 제수의 소리는 어떻게 다른가.  “스트라디바리는 아름답고 화려한 외형에, 따뜻하고 깊이 있고 다채로운 컬러의 사운드를 들려준다. 과르네리 델 제수는 마치 사자가 포효하듯이 강력한 파워를 뿜어내기 때문에 개성있는 연주자들이 선호한다. 반면 스트라디바리는 훨씬 더 예민하기 때문에 살살 달래가며 조심스럽게 연주해야 한다. F1 레이싱 카를 운전하는 드라이버처럼 최상의 숙련도가 필요하다. 만일 재능 없는 운전자가 F1 카를 몬다면 빙글 돌다가 벽에 충돌하고 말 것이다.” 바이올리니스트들은 개성이 각기 다른 두 악기를 비교한 평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스트라디바리우스는 노래를 부르고, 과르네리는 말을 한다”(바딤 레핀) “스트라디바리우스는 아무리 슬퍼도 너무 고고해서 차마 눈물을 보이지 못하는 귀족이라면, 과르네리는 울고 싶을 때 땅바닥에 탁 퍼져 앉아서 통곡할 수 있는 솔직하고 겸손한 농부와 같아 인생의 맛이 묻어 있다.”(정경화) ―세계적으로 고악기 거래 시장의 규모는 얼마인가.  “연간 약 40억 달러 규모로 추정된다. 현재 100만 달러 이상의 가치를 가진 고악기는 약 3000개 정도 밖에 남아있지 않다. 희소성 때문에 가치는 계속 오른다. 2008년 금융위기 때 주식시장은 폭락해도 스트라디바리우스의 가격은 10% 이상 올랐다.”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제작한 바이올린 중 1721년산 ‘레이디 블런트(Lady Blunt)’라는 별명이 붙은 작품은 2011년 경매 당시 980만 8000파운드(당시 한화로 약 172억 원)에 팔려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또한 1741년산 과르네리 델 제수 ‘비외탕(Vieuxtemps)’은 옥션에서 1600만 달러(약 179억 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아버지는 화가였고, 어머니는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레온하드는 22살 때부터 런던에서 바이올린 복원 공방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이후 30여 년 간 이탈리아 고악기를 복원하고, 제작하고, 책도 펴냈다. 세계적인 고악기 감정 전문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에게는 ‘셜록 홈즈’라는 별명도 따라다닌다. 그는 “악기 시장에서 100만 달러 이상의 바이올린 중 10분의 1은 가짜로 봐야 한다”며 주의를 상기시켰다.  “가짜 바이올린을 밝혀내는 일은 셜록 홈즈가 범죄현장에서 수사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돋보기를 들여다보면서 핏자국을 조사하고, 알리바이를 검증하듯이 나도 바이올린을 보면서 증거를 찾죠. 바이올린을 CT촬영으로 스캔 해서 목재의 세포까지 검사하고, 접착제와 안료까지 정밀 조사합니다. 이러한 흔적과 디테일을 조사하면서 모든 가능성을 탐색하고, 배제해나갑니다. 결국 마침내 하나의 결론에 이르죠. 진짜냐, 가짜냐.”  ―새로운 악기를 제작할 때 고려하는 점은 무엇인가.  “런던에 있는 나의 작업장은 복원 전문가들에게 파라다이스다. 전 세계의 스트라디바리우스와 과르네리가 모든 이 워크숍을 거쳐 수리되기 때문이다. 30여 년간 고악기들을 복원하면서 뚜껑을 열어보고, 틈을 메우고, 목재를 분석하면서 모든 것을 조사하고, 터치하고, 느끼고, 기록해왔다. 이렇게 최고의 악기를 이해하기 위한 수많은 경험이 내 손과 머리에 쌓여 있다. 이러한 데이터베이스가 고악기 복원과 새로운 악기 제작에도 적용된다. 악기마다 장점과 단점이 있는데, 그러한 장점을 종합하고 단점을 보완한 악기를 만들어낸다. 우리 공방에서 만들어낸 현대 악기의 경우 가격이 6만 달러 정도 한다.” 2003년 이후 한국을 자주 찾아 온 그는 “금호아트홀에서 열린 바이올린 전시회에서 15살짜리 연주자가 명품 악기를 얼마나 능숙하게 연주하던지 깜짝 놀랐다”며 “글로벌 음악재단에서 악기를 구입해 젊은 연주자들에게 대여해주는 사업이 더욱 확대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전승훈 문화전문기자 
7440    [그때 그 사람] - 뼛속까지 영화인... 댓글:  조회:2906  추천:0  2019-11-19
안내 최은희와 입맞춤 연기 쭈뼛··· 남편 신상옥 "제대로 해라" 호통  2019.11.19.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신영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ㅡ 뼛속까지 영화인 신상옥 감독 신 감독 촬영 준비 중 낭떠러지 추락 “에이, 앵글 좋았는데…” 아쉬워해 김승호·김진규·최무룡 제치고 ‘연산군’ 주연 발탁 스타 만들어줘 은막 떠나자 “왜 일찍 관뒀나” 타박 영화 ‘강화도령’(1963)에서 다 죽어가는 철종(신영균)에게 복녀(최은희)가 입으로 물을 먹이는 장면. 신영균씨는 신상옥 감독이 보는 앞에서 그의 부인인 최은희씨와 입 맞추는 연기를 하는 게 곤혹스러웠다고 회고했다. [영화 캡처] “우리 좋은 작품 하나, 다시 한번 멋지게 해봅시다.”  천국에 가서 신상옥 감독을 만나면 꼭 전하고 싶은 말이다. 그의 아내이자 동지인 최은희씨와도 약속한 일이다. 최씨가 투병 중일 때 “살아서 못다 이룬 꿈을 이루자고, 셋이 다시 뭉쳐서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맘껏 만들자”고 얘기했다. 그 첫 번 작품은 신 감독이 평생의 대작으로 기획한 ‘징기스칸’이 되지 않을까 싶다.  “신영균은 수도꼭지” 내 연기 늘 칭찬 신 감독은 말년에 병환으로 고생하다 2006년 세상을 떴다. 장례식은 ‘대한민국 영화계장’으로 진행됐고 내가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영결식 때는 공군 군악대의 반주에 맞춰 모두가 ‘빨간 마후라’를 불렀다. 수도 없이 부른 노래지만 그토록 슬프게 들린 적은 없었다.  신 감독이 저세상으로 가기 한두 달 전쯤 내 제주 집에 온 적이 있다. 하루 이틀 머물러 보고는 풍광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다시 서울로 떠나던 날 그가 부탁 하나를 해왔다.  “나 여기서 좀 쉬게 해줘. ‘징기스칸’ 콘티를 여기서 끝내야겠어.”  “예, 언제든 오십시오. 우리 마지막 작품 같이 하십시다.”  우리는 그렇게 단단히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그게 우리의 마지막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곧 보따리 싸서 다시 오겠다던 신 감독과 그렇게 영영 이별을 하게 될 줄을….  내 인생의 영화감독을 꼽으라면 단연 신 감독이 1순위다. 나를 영화계에 발 들이도록 한 건 ‘과부’(1960)의 조긍하 감독이지만, 톱스타 반열에 오르게 해준 건 신 감독이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형 영화사인 ‘신필름’을 이끌고 있었는데 잘나가는 배우들도 그와 일하고 싶어 경쟁을 했다. 특히 ‘연산군’(1961)은 김승호·김진규·최무룡 등 당시 최정상 스타들이 서로 주연을 맡고 싶어 했는데 신 감독이 “이건 신영균이 딱이다”며 아직 충무로 신출내기인 나를 점지했다. 연극 무대에서 다진 나만의 폭발력을 주목한 것 같다. 나보다 두 살 많은 신 감독은 정말 영화를 위해서 태어나 영화만을 위해 산 사람이다.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그는 빛을 좇는 불나방이 됐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몸을 던졌다.  신상옥 감독은 카메라가 돌면 물불을 안가렸다. 북한산에서 영화 ‘강화도령’을 찍다가 7~8m 아래 낭떠러지로 떨어지기도 했다. [중앙포토] 한번은 ‘강화도령’(1963)을 찍을 때였다. 신 감독은 카메라 앵글을 잡으려고 북한산 암벽 위를 아슬아슬하게 왔다 갔다 했다. 한쪽 눈을 감고 루페(렌즈)를 보며 앞으로 가다가 한순간 이끼 낀 곳을 헛디뎠는지 7~8m 아래로 미끄러졌다. 다행히 낭떠러지 아래 가시넝쿨이 있어 목숨을 건졌다. 팔이 좀 긁히고 뒷주머니에 있던 선글라스가 박살 나는 정도로 끝이 났으니 천만다행이었다. 정작 그는 아픈 내색도 않고 “에이, 앵글 좋았는데…”라며 아쉬워했다.  나도 그렇고 당시 배우들은 신 감독을 참 좋아했다. 그는 무엇보다 연기자를 카메라 프레임 안에 가두지 않았다. 동선을 정해두고 몇 발짝 움직이도록 지시하는 게 아니라 연기자가 자유롭게 자기 감정을 맘껏 표출할 수 있도록 카메라를 움직여줬다. 물론 맘에 드는 장면이 나오지 않으면 거침없이 ‘컷’ ‘NG’를 외쳤다.  신 감독, 사망 두 달 전까지 작품 몰두 그때는 영화 필름이 비싸서 연기가 마음에 안 들어도 ‘이만하면 됐습니다’ 하는 감독들이 많았는데 신 감독은 달랐다. 남들은 필름을 한 3만~4만 자 쓴다면 신 감독은 7만~8만 자씩 썼다. 사업 하다 궁지에 몰렸을 때 빚쟁이들이 촬영장까지 찾아와 옆에 서 있는데도 눈 하나 꿈쩍 않았다. 세트장에 고급 가구나 집기가 필요하면 자신의 집에서 쓰던 걸 가져와 망가뜨리는 경우도 많아 부인 최은희씨가 종종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 양반은 진짜 뼛속까지 영화인이구나’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신 감독 앞에서 최은희씨와 입술이 맞닿는 연기를 하느라 진땀 뺐던 장면도 잊을 수 없다. ‘강화도령’에서 최은희씨가 물 한 모금을 자기 입안에 넣어 다 죽어가는 내게 먹이려 하는 장면이 있다. 남편인 신 감독이 카메라 렌즈를 통해 지켜보고 있으니 나는 왠지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입술을 정면으로 포갤 용기가 나지 않아서 내가 약간 비뚤어지게 고개를 돌리면 신 감독은 어김없이 컷을 외쳤다. “물을 입속에 넣어야지 왜 옆에 다 흘리나. 제대로 해!”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야 “오케이” 사인이 나왔다. 신 감독은 사랑하는 여인보다 영화를 더 우위에 두는 사람 같았다.  같은 ‘평산 신씨’라서인지 우리는 통하는 구석이 많았다. 신 감독은 “연기 지도를 안 해도 쓸 수 있는 배우 중 하나”라고 나를 치켜세우곤 했다. 한번은 촬영장을 찾은 내 아내에게 이런 말도 했다. “신영균은 수도꼭지예요. 우는 장면에서 10번 NG가 나면 다시 찍어도 10번을 다 진짜 울어요.” 무뚝뚝한 신 감독치고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신 감독은 100% 영화인이었다. 70년대 후반 내가 은막을 떠난 이후 나는 그의 불만 섞인 타박을 들어야 했다. 그는 “신영균에게 흠이 있다면 배우를 일찍 그만둔 거야”라며 아쉬워했다. 늙으면 늙은 대로, 노망이 들면 노망이 든 대로 배우의 생명은 길고 길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욕심 같아선 살아생전에 마지막으로 멋진 영화를 남기고 싶지만, 신 감독이 없으니 어쩐지 용기가 나지 않는다.  /정리=박정호 논설위원, 김경희 기자
7439    [타산지석] - 우리 연변에서도 "큰 글자 책" 있었으면... 댓글:  조회:3405  추천:0  2019-11-18
“돋보기 필요 없어요”… ‘큰 글자’로 되찾은 독서의 즐거움 기사입력 2019.11.18.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앵커] 작은 글씨 읽기가 힘든 어르신들을 위해 글자 크기를 키운 큰 글자 책이,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다고 합니다. 공공도서관에서 쉽게 빌려 볼 수 있다는데, 1.5배 큰 글자로 채워진 책을 김세희 기자가 소개합니다. [리포트]  종종 동네 도서관을 찾아 독서를 즐기는 최행식 할아버지. 그런데 다른 책들과 뭔가 달라 보입니다. 보통의 책들보다 글자 크기를 1.5배 키운 '큰 글자 책'입니다. [최행식/서울시 동작구 : "안경을 벗었는데도 크게 잘 보여서 굉장히 좋았습니다."] 평소 인문 서적을 즐겨 읽는 문성재 할아버지도 큰 글자 책이 반가운 건 마찬가지입니다. 글자가 커진 대신 책이 조금 두껍고 무거워지긴 했지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성재/서울시 동작구 : "(무게는) 상관이 없다고 봅니다. 조금 무거운 건 그만큼 내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죠)."] 10년 전 80여 개 공공 도서관에서 시작된 큰 글자 책은 이제는 전국 대부분 공공 도서관에서 빌려 볼 수 있습니다. 도서관 인기 대출 목록과 인터넷 서점 판매 목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큰 글자 책이 2백여 종이 넘습니다. 다만, 크기가 커진 만큼 비싸진 제작비가 관건. 여지껏 국고 보조금으로 운영돼 왔는데, 출판업계의 자발적인 참여까지는 갈 길이 멉니다. [손지혜/한국도서관협회 사업본부 운영팀장 : "일본 같은 경우에는 특정 한 출판사가 모든 도서의 판권을 사서 대활자본, 큰 글자 책으로 만들고 있어요. 그래서 유통이 더 잘 되고 있는 편이고..."] 고령화 시대, 어르신들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되찾아주려는 노력이 큰 글자 책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KBS 뉴스 김세희입니다. /김세희 기자
7438    토속적, 향토적, 민족적 시인 - 백석 댓글:  조회:6139  추천:0  2019-11-18
      나는 문학이다 백석 빼어난 토속어 지향, 그 시적 보고 [ 白石 ] 출생 - 사망 1912년 ~ 1996년 출생지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목차 잊혀진 민족시인 토속성과 모더니티 잊혀진 민족시인 국토 분단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앗아간다. 분단이야말로 한반도 사람들의 피할 수 없는 상처이며, 비극의 원체험이다. 온갖 상실과 망각, 이산의 고통으로 덧나고, 다시 아물고, 덧난 상처의 자리다. 남북 분단은 대륙으로 나가는 길을 끊어놓고, 그 결과 한반도에서의 삶을 고립무원(孤立無援)의 협소하고 남루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부여·발해·여진과 같은 나라 이름이며, 흥안령·아무르·송화강 같은 땅과 강 이름…… 이런 것은 모두 저 바깥에 있다. 대륙과 단절된 반도는 말 그대로 밖으로 열린 길이 끊긴 섬이다. 나는 그 섬에서 잊힌 한 시인의 이름을 떠올린다. 백석(白石)은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수원 백씨 시박(時璞)과 단양 이씨 봉우(鳳宇)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 백시박은 당시로써는 드물게 사진 기술이 있었다. 본명이 기행(夔行)인 백석은 오산고보를 다니는데, 학과목 중에서 특히 문학과 영어에 관심과 소질을 보인다. 백석은 오산고보를 나오고서 집안 사정으로 진학하지 못하고, 고향에서 책을 읽으며 소일한다. 그러다가 1929년 후원 장학생 선발 시험에 붙어 일본의 아오야마학원 전문부 영어 사범학과에 들어간다.  1930년 그는 열아홉 나이로 신춘문예에 응모해 당선되는데, 이 등단작은 시가 아니라 「그 모(母)와 아들」이라는 단편소설이다. 1934년 아오야마학원 졸업과 함께 교원 검정시험에 합격한 백석은 귀국하고 바로 에 입사해 계열 잡지인 《여성》의 편집을 맡는다. 그는 같은 해 에 산문 「이설(耳說) 귀ㅅ고리」를 비롯해 번역 산문 「임종 체홉의 6월」, 「죠이쓰와 애란(愛蘭) 문학」, 1935년 에 단편 「마을의 유화(遺話)」 등을 발표한다. 백석의 초기 단편들은 노쇠한 부부, 죽음 등 삶의 어두운 부면과 연관된 황량한 분위기로 채색되어 있는 것이 많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 부문으로 발길을 돌리면서 이런 분위기는 거의 사라진다. 백석이 구체성을 특징으로 하는 소설보다 감정을 웬만큼 은폐할 수 있는 시로 전향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시를 쓰게 된 것은 창작 이외의 문단 활동은 일절 꺼린다거나, 집에 돌아와서는 병균을 염려해 늘 손과 얼굴을 씻는1) 그의 유난스런 폐쇄성이며 결벽증과 관련이 깊어 보인다는 뜻이다. 그는 1935년 《조광》에 시 「정주성(定州城)」, 「산지」, 「주막」, 「나와 지렝이」, 「비」, 「여우 난 곬족(族)」, 「흰 밤」 등을 발표한다. 백석이 1936년 조광인쇄주식회사를 통해 펴낸 첫 시집 『사슴』은 우리 문학사에서 독특한 시의 영역을 구축하게 된다. 『사슴』은 백석이 신문사 번역 일을 하는 틈틈이 준비한 초기작 33편을 담은 시집으로, 발간 뒤 문단으로부터 호평을 받는다. 1937년 겨울, 백석은 두 해 동안 묶여 있던 신문사 교정직을 버리고, 본격적으로 시를 쓰려고 함경도로 내려간다. 그는 이때의 전후 상황을 같은 해 9월 에 게재한 산문 「가재미. 나귀」라는 글을 통해 밝힌다. 여행을 즐기던 그는 이 무렵 여러 고장을 돌아다니며 고유의 민속, 명절, 향토 음식 같은 갖가지 풍물과 방언 등을 취재해 시에 담아낸다. 이런 풍물과 방언은 특히 「남행시초(南行詩抄)」를 기점으로 이후 해마다 나오는 백석의 기행시 형식의 연작시에서 잘 표현된다. 이 밖에도 같은 해 백석은 와 《조광》, 《시와 소설》에 「통영(統營)」, 「오리」, 「탕약(湯藥)」, 「연자ㅅ간」, 「황일(黃日)」 등을, 1937년 《조광》에 「함주시초(咸州詩抄)」 연작시를, 《여성》에 산문 「가을의 표정-단풍」을 발표한다. 가난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 눈은 푹푹 날리고 /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 나탸샤와 나는 /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 눈은 푹푹 나리고 /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 나탸샤가 아니 올 리 없다 /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여성》(1938. 3.) 백석은 눈 덮인 함경도 산간 지방의 고적한 여인숙에서 「함주시초」를 비롯한 여러 시편을 쓰면서도 가슴 한구석에 구멍이 난 것처럼 자꾸 허전한 느낌이 든다. 두 해 전에 친구 허준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잠깐 본 이화여고 학생 ‘란(蘭)’, 지난가을 영생고보 선생들과의 회식 자리에 만난 ‘자야(子夜)’, 그리고 영생고보 학내 분규로 퇴학당한 애제자 고순덕의 얼굴이 착잡하게 스쳐 지나간다. 1938년 백석은 영생여고보 교사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와서 다시 《여성》의 편집을 맡는다. 그는 같은 해 《조광》에 「산중음(山中吟)」 연작시와 「물닭의 소리」 연작시, 《삼천리문학》에 「석양」, 「고향」, 「절망」, 《여성》에 「설문답」, 「내가 생각하는 것은」, 「가무래기의 약(藥)」, 「멧새 소리」 등을 발표하고, 『현대문학전집』에 「외가집」, 「개」와 『조선문학독본』에 「고성 가도(固城街道)」, 「박각시 오는 저녁」 등을 수록한다. 이 무렵 백석은 동료 기자 신현중에게 이끌려 란의 집을 찾게 된다. 란을 보는 순간 백석의 심장은 터질 듯 쿵쾅거리고, 혈관은 펄떡거린다. 백석은 자신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은 통영 출신의 처녀 란에게 끝내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사랑 고백은 차치하고 재입사한 지 열 달 만에 를 그만두고 만주로 떠나버린다. 그는 떠나면서 친구들인 소설가 허준과 화가 정현웅에게 “만주라는 넓은 벌판에서 시 1백 편을 건져 오리라.”고 말한다. 1940년 1월 만주 신징(新京)에 도착한 백석은 먼저 시영 주택 황씨방(黃氏方)에 방을 얻는다. 곧이어 친구들의 도움으로 만주국 경제부에 자리를 얻고 나중에 일본인들의 횡포에 못 이겨 그만둘 때까지 시작(詩作)과 직장 일을 충실히 병행한다. 당시 친구와 함께 살던 황씨방은 토굴이나 마찬가지여서 주말마다 그는 근교의 러시아인 마을로 방을 얻으러 돌아다닌다. 이런 일로 북만주 두메산골의 원시 부족 사람들과도 얼굴을 익히게 되고, 밤이면 시 1백 편을 건지려고 시작에 몰입한다.  1939년 에 산문 「입춘」과 연작시 「서행시초(西行詩抄)」와 시 「안동」을, 《문장》에 「함남도안(咸南道安)」, 「동뇨부(童尿腑)」, 「넘언집 범 같은 노큰마니」 등을 내놓은 그는 1940년 《조광》에 「목구(木具)」, 「북방에서」, 「허준(許俊)」 등을 발표한다. 백석은 서른 살도 되기 전에 한반도에서 가장 뛰어난 서정 시인으로 입지를 굳힌다. 그의 시는 발표될 때마다 화제를 낳고, 그의 시가 실린 잡지는 책방에 나오기 무섭게 팔려나간다. 뒷날 백석의 명편 「남신의주(南新義州) 유동(柳洞) 박시봉방(朴時逢方)」을 실은 잡지 《학풍(學風)》은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시인들은 과연 얼마나 이 고고한 시인에 육박할 수 있으며, 또 능가할 수 있었더냐.”고 백석을 극찬한다.2) 같은 해 백석은 《인문평론》에 「수박씨 호박씨」를 발표하고, 《조광사》에서 토머스 하디 원작의 「테스」를 번역해 발간하고, 이듬해에는 생계를 위해 만주에서 측량 보조원과 측량 서기로 일한다. 1941년 그는 《조광》에 시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촌에서 온 아이」, 《인문평론》에 「두보(杜甫)나 이백(李白)같이」, 「귀농(歸農)」 등을 발표한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이 강화되면서 백석은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며 산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3) “이미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 없이 떠도는”것이다.4) 1942년 만주 안둥(安東)의 세관으로 직장을 옮긴 그는 엔 패아코프의 원작 소설 「밀림 유정」을 번역한다. 한편, 그가 만주에 있는 동안 동료 김소운은 백석의 시 「산우(山雨)」, 「미명계(未明界)」 등 7편의 작품을 일본어로 옮겨 『조선시집』에 싣는다. 해방 뒤 귀국한 백석은 신의주에서 얼마 동안 머물다가 고향 정주로 가서 1947년 《신천지》에 「적막 강산」, 에 「산」을 발표하고, 1948년 《신세대》에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학풍》에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문장》에 「칠월 백중」 등을 발표한다. 해방 후 고향 정주로 돌아온 백석은 그곳에서 남북 분단을 맞는다. 북한에서 「뿌슈킨 선집 - 시편」을 번역하기도 하고, 꾸준히 시를 발표한 것으로 추정하는 백석은 1995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한다. 토속성과 모더니티 이 시기 ‘구인회’를 비롯한 모더니스트들의 서구적 취향과 달리 백석은 영문학을 전공한 시인이면서도 또 다른 향토 시인 김소월이 무색할 정도로 작품 속에 북녘 지방의 토속 방언들을 꽉꽉 채워 넣는다. 마가리, 개니빠디, 잠풍, 몽둥발이, 벌배, 열배, 매감탕, 토방돌, 아릇간, 홍게등, 텅납새, 무이징게국, 가즈랑집, 깽제미, 물구지우림, 둥글레우림, 광살구, 모랭이, 노나리꾼, 청밀, 냅일눈, 곱새담, 앙궁, 고뿔, 갑피기, 게사니, 울파주, 나주볕, 땃불, 밭최뚝, 마토ㅌ, 양지귀…… 고조곤히, 지중지중, 쇠리쇠리하야, 씨굴씨굴, 째듯하니, 자즈러붙어, 벅작궁, 고아내고, 너들씨는데, 오구작작, 살틀하던, 임내내는, 이즈막하야, 깨웃듬이, 홰즛하니…… 이처럼 이제는 거의 들을 수 없는, 들어도 무슨 말인지 가늠하기 힘든 북방 언어들. 백석의 현저한 토속어 지향의 시 세계는 한국인의 얼과 넋을 황홀할 정도로 빼어나게 담아낸다. 백석은 이미 표준어가 정착한 시기에 창작 활동을 한 문학인이다. 신문사의 편집 일을 맡기도 한 그는 표준어와 방언의 차이를 잘 알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굳이 방언을 고집한 것은 작품 세계의 심화를 위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가 구사한 방언은 용례가 매우 구체적이고 세밀해서 한국어의 질량을 한껏 느끼게 해준다. 아울러 백석 시의 방언 구사는 아이의 시각과 목소리로 이루어지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명절날 나는 엄매 아베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고모 고모의 이녀(李女) 작은 이녀(李女) / 열여섯에 사십(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며 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고모 고모의 딸 승녀(承女) 아들 승(承)동이 / 육십리(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山)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던 말끝에 섧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곬고모 고모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洪)동이 작은 홍(洪)동이 / 배나무접을 잘 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으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촌 삼촌엄매 사촌누이 사촌동생들 // 이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인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뽁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것들이다. //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래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방을 잡고 조아질을 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구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랫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서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 백석, 「여우 난 곬족」 전문, 《조광》(1935. 12.)- 시집 『사슴』(1936)에 재수록 이 시의 화자는 명절날 어머니 아버지를 따라 할머니 집에 가서 지낸 경험 세계를 그리고 있다. 또래의 아이들과 놀다가 잠이 드는 광경, 명절날의 분위기와 풍속 등에서 유년의 태도와 시각과 목소리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방언은 고향의 언어이고 유년 시절에 습득한 언어다. 따라서 방언으로 표출되는 고향 마을의 풍물과 정취는 생생함을 불러일으키며, 유년의 목소리에 실린 방언은 한결 자연스럽고 친근감을 준다. 백석의 시 속에 나오는 평안도 방언을 비롯한 여러 가지 언어는 분명히 우리나라의 어느 한구석에서 쓰이던 토속어가 틀림없다. 그럼에도 꿈결인 듯 이 같은 소리를 읊조리는 시인의 노래는 때로 영어나 불어 또는 이 세상 어떤 언어보다 귀에 익지 않고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한편, 그는 몇 작품을 제외한 많은 작품에서 자신의 주관적 감정을 철저히 억누르는 극도의 절제를 발휘한다. 바로 이런 것이 백석을 모더니즘적 시인으로 불리게 하는, 그러면서도 다른 모더니즘 시인들과 구별하게 하는 원인이다. 반도시(反都市), 산촌(山村) 성격은 백석의 시를 더욱 독특하게 보이도록 한다. 시집 『사슴』에는 총 33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도시 문명 또는 도시 감각에 바탕을 둔 시는 한 편도 없다. 흔히 백석 시에 나오는 시골은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공간이 아니라 안온하고 풍요로운 전원으로 비친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시는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비판되기도 한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면에는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을 삭이려는 시인의 힘겨운 얼굴이 숨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즉, 백석 시의 시적 공간은 현실에서 유년 시절 시골의 농가나 토방으로, 그리고 할머니와 무당의 옛날이야기에 실려 동화나 전설, 때로는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주술적 공간으로 다양하게 변화한다. 그런데 과거에 대한 동경이나 몽상 또는 신비 세계에 대한 집착은 현실에 강한 거부감을 느낄 때 일어나곤 하는 현상이다. 백석의 시 또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되지만, 현실의 고통과 번민을 초월하려는, 시인 나름의 진지한 모색이라는 점에서 생명력을 지닌다. 이처럼 절제된 감정으로 토속성과 개성 있는 모더니티를 추구한 백석은 1940년 만주에 있을 때 이역에서 사는 비겁함과 부끄러움 그리고 고독감이 너무도 절실해 감정을 더 감출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이 무렵에 쓰인 백석의 시에서 우리는 바로 얼마 전까지 토방에 앉아 신화를 꿈꾸던 아이 대신 갑작스레 늙어버린 시인과 마주치게 된다.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 부여를 숙신(肅愼)을 발해를 여진을 요(遙)를 금(金)을 / 흥안령(興安嶺)을 음산(陰山)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 …… // 나는 그때 / 아무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 아침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 그동안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금은보화는 땅에 묻히고 가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 / 이리하여 또 한 아득한 새 옛날이 비롯하는 때 / 이제는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 나는 나의 옛 한울로 땅으로 - 나의 태반(胎盤)으로 돌아왔으나 // 이미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 백석, 「북방에서」 부분, 《문장》(1940. 7.) 이처럼 ‘북방에서’ 나라를 버린 수치심과 고독에 떨던 시인은 절망스럽고 슬픈 현실을 거부하기보다 차츰 하늘이 정한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껴안는 자기긍정에 도달한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 가난하고 외롭게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부분, 《문장》(1940. 4.) 관련이미지 3                               이미지 이전 백석 이미지 갤러리 출처: Basic 고교생을 위한 문학 용어사전 [네이버 지식백과]백석 [白石] - 빼어난 토속어 지향, 그 시적 보고 (나는 문학이다)     ////////////////////////////////////////////////////////////////////////////=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 언어영역 백석     교과단원 국어(상), Ⅵ. 노래의 아름다움, Ⅵ-심화 여승 목차 1. 교과서 속 주개념 백석의 생애 2. 확장 개념 백석의 작품 세계 3. 관련 지식 근대시에 나타난 고향의 이미지 4. 관련 작품 여우난곬족 1. 교과서 속 주개념 백석의 생애 백석(白石 ; 1912∼?)은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본명은 백기행이지만 아호였던 백석을 필명으로 사용하였다. 1929년 정주에 있는 오산 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34년 아오야마학원 전문부 영어사범과를 졸업했다. 그 후 해방이 될 때까지 조선일보사, 영생 여자 고등 보통학교, 여성사, 왕문사 등에 근무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면서 등단하였다. 이후 조선일보 후원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동경의 아오야마 학원에서 공부하게 된다. 조선일보사와 계열사인 〈여성〉지에서 근무하는 동안 단편 소설 〈마을의 유화〉와 〈닭을 채인 이야기〉, 수필 〈이설 귀고리〉를 발표하였다. 이 밖에 〈임종 체흡의 6월〉이라는 서간문을 번역 소개하거나, 〈죠이스와 애란문학〉이라는 티 에스 마르키스의 논문을 번역하기도 했다. 그 후 1935년 첫 시 〈정주성〉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시작(詩作) 활동을 시작하였고, 1936년 1월 33편의 시로 이루어진 시집 〈사슴〉을 출간하였다. 이때부터 1940년까지의 기간 동안 활발히 활동하며 집중적으로 시를 지었다. 시집을 낸 직후 함흥의 영생 여자 고등 보통학교에 부임했다가, 곧 만주의 신경으로 떠났다.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에서 일하기도 하고, 북만주 산간 오지를 여행하며 측량보조원, 소작인, 세관원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다가 해방 후에 신의주를 거쳐 고향 정주로 돌아왔다. 그 후 계속 북한에 남아있었으나 작품 활동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다. 2. 확장 개념 백석의 작품 세계 백석은 당대의 어떤 문단이나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 독특한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언뜻 보기에는 매우 편안하고 일상적인 언어와 평북 지방의 방언을 사용하는 백석의 시는 향토적이고 토속적인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 체험을 조직하는 데 있어 매우 탁월하고 모더니즘적인 느낌을 풍기고 있기도 하다. 이런 점은 초기 백석의 시에서 두드러지는데 고향의 풍물과 민속, 인물들을 다루고 있지만 이를 이야기하는 방식은 묘사를 통해 감정과 정서를 표현하지 않고 매우 객관적으로 절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시집 〈사슴〉을 발표한 이후에는 묘사 이외에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담담하게 직접 표현하는 방식으로 시가 변화하게 된다. 백석은 38년 이후의 시에서는 이러한 낭만주의적 시작 태도를 보이면서, 공간성보다도 시간성과 역사성에 관심을 보이게 된다. 이 땅의 역사에서도, 시인 개인으로서도 힘들었던 이 시기에 백석의 시는 원초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에 대한 역사성과 깊은 인식을 보여준다. 백석은 앞서 말했듯이 고향의 자연과 풍속, 사람들을 대상으로 시를 썼다. 이 소재들은 단순히 하나의 풍물을 제시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고향의 삶과 역사에 깊이 관련을 맺는 것들이었다. 백석의 시에서 고향은 〈모닥불〉에서 보이듯이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이 정겹게 하나 되는 곳으로, 〈여우난곬족〉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과 자연, 귀신과 사람까지도 화해롭게 공존하는 제의적이고 풍요로운 공동체적인 공간으로 그려지고 있다. 백석의 시에서 주인공은 고향과 공동체의 품에 안겨 있지만, 현실의 자신은 공동체적 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 속에서 따뜻한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는 마음과 이와 상반되는 현실의 상황이 백석 시에 의미와 생명력을 주고 있는 것이다. 3. 관련 지식 근대시에 나타난 고향의 이미지 일제 강점기라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근대시에 나타나는 고향은 대체로 ‘잃어버린 곳’ 또는 ‘떠나온 곳’이라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는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기는 하지만 고향에 대한 상실과 그리움, 이와 대비되는 처참한 현실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러 시인들의 시에서 고향의 이미지를 찾아볼 수 있는데, 정지용과 백석의 시에서 이러한 고향의 이미지는 순수하고 인간적인 세계를 재현시키고자 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오장환이나 이용악의 시에서는 실향 의식을 주제로 하여 유랑민의 비애와 고독의 정서가 나타나고 있다. 그밖에 윤동주는 이러한 실향 의식을 자아의 내면적인 성찰을 통해 심화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4. 관련 작품 여우난곬족 명절날 나는 엄매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고모 고모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李女) 열여섯에 사십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고모 고모의 딸 승녀(承女) 아들 승(承)동이 육십리(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 옷이 정하던 말 끝에 섧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모 고모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洪)동이 작은 홍(洪)동이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촌 삼촌엄매 사촌누이 사촌동생들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 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가 나고 끼니 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볶은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 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오양간섶 발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 타고 시집 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 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우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랫목 싸움 자리 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가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 틈으로 장지문 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 백석, 〈여우난곬족〉은 백석이 1935년 12월 잡지 [조광]에 발표한 작품이다. 명절날 ‘여우난골’에 있는 큰집으로 간 시적화자의 눈에 담긴 친척들의 모습, 명절 음식상에 오른 다양한 전통음식들, 밤이 깊어 가는 줄 모르게 즐기던 놀이 등이 토속적이면서도 서정적인 언어와 표현을 통해 질박하게 형상화되어 있다. 1930년대 당대에도 낯설었던 다양한 방언을 구사하여 토속적 세계의 모습을 현장감 있게 그려내고 있으면서도, ‘별자국이 솜솜 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등의 표현들에서는 다양한 감각을 살려 다채로운 이미지를 선사하고 있다. 모더니즘 시인이었던 백석의 시적 경향을 잘 느낄 수 있는 시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백석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백석   [ 白石 ] 이미지 크게보기   이칭별칭 백기행(白夔行) 유형 인물 시대 근대/일제강점기 출생 - 사망 1912년 7월 1일 ~ 1996년 성격 시인 출신지 평안북도 정주 성별 남 관련사건 문학예술총동맹, 조선작가대회, 아동문학논쟁 저서(작품) 사슴, 집게네 네 형제 대표관직(경력) 조선일보 기자, 함흥 영생고보 교사, 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 분과위원 목차 정의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정의 해방 이후 「집게네 네 형제」·「석양」·「고향」 등을 저술한 시인. 개설 본명은 백기행(白夔行), 필명은 백석(白石). 생애 및 활동사항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하였다. 1924년 오산소학교를 졸업하고 오산학교(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일 때 조만식, 홍명희가 교장으로 부임한 적이 있고, 6년 선배인 김소월을 동경하면서 시인의 꿈을 키웠다. 1929년 오산고보를 졸업한 후, 1930년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었고, 조선일보사가 후원하는 춘해장학회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도쿄[東京]의 아오야마[靑山] 학원 영어사범과에 입학하였다. 유학 중 일본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의 시를 즐겨 읽었고, 모더니즘 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1934년 졸업 후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입사하면서 서울생활을 시작하였고, 허준, 신현중 등과 자주 어울렸다. 1935년 『조광』 창간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8월 30일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주막」, 「여우난골족」 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1936년 시집 『사슴』을 선광인쇄주식회사에서 한정판으로 간행하였다. 이 해에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고보의 영어교사로 부임하였다. 함흥에서 소설가 한설야, 시인 김동명을 만났고, 기생 김진향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고야」, 「통영」, 「남행시초(연작)」 등을 발표하였다. 1937년 소설가 최정희, 시인 노천명, 모윤숙 등과 자주 어울렸으며, 「함주시초」, 「바다」 등을 발표하였다. 1938년 함경도 성천강 상류 산간지역을 여행하였고, 함흥의 교원직을 그만두고 경성으로 돌아왔다. 「산중음(연작)」, 「석양」, 「고향」, 「절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물닭의 소리(연작)」 등 22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1939년 자야와 동거하면서 『여성』지 편집 주간 일을 하다가 사직하고 고향인 평북 지역을 여행하였다. 1940년 만주의 신경(神京, 지금의 장춘(長春))으로 가서 3월부터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의 말단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창씨개명의 압박이 계속되자 6개월만에 그만두었다. 6월부터 만주 체험이 담긴 시들을 발표하기 시작하였고, 10월 중순 자신이 번역한 토마스 하디의 장편소설 『테스』의 출간을 앞두고 교정을 보러 경성에 다녀갔다. 「목구」, 「수박씨, 호박씨」, 「북방에서」, 「허준」 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1941년 「귀농」,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을 발표하였다. 1942년 만주의 안둥[安東] 세관에서 일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신의주를 거쳐 고향인 정주로 돌아왔다. 10월에 조만식을 따라 소설가 최명익, 극작가 오영진 등과 ‘김일성 장군 환영회’에 참석해 러시아어 통역을 맡았다. 1946년 북조선예술총동맹이 결성되었으나 처음에는 참여하지 않았다가 1947년 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 분과위원이 되었다. 이때부터 러시아 문학을 번역하는 일에 매진하였다. 허준이 백석이 해방 전에 쓴 시 「적막강산」,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등을 보관하고 있다가 1947년 말부터 1948년 가을에 걸쳐 서울의 잡지에 실었다. 1948년 『학풍』 창간호에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발표하였다. 남쪽 잡지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시였다. 1949년 솔로호프의 『고요한 돈강』 등을 번역하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1953년 전국작가예술가대회 이후 외국문학 분과원으로 이름을 올리고 번역에 집중하였다. 1956년 동화시 「까치와 물까치」, 「집게네 네 형제」를 발표하였고, 「동화문학의 발전을 위하여」, 「나의 항의, 나의 제의」 등의 산문을 발표하였다. 10월에 열린 제2차 조선작가대회 이후 조선작가동맹 기관지 『문학신문』의 편집위원으로 위촉되었고 『아동문학』과 『조쏘문화』 편집위원을 맡으며 안정적인 창작활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57년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를 정현웅의 삽화를 넣어 간행하였고, 동시 「멧돼지」, 「강가루」, 「기린」, 「산양」을 발표한 뒤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6월에 「큰 문제, 작은 고찰」과 「아동문학의 협소화를 반대하는 위치에서」를 발표하면서 아동문학 논쟁이 본격화되었고, 9월 아동문학토론회에서 자아비판을 하였다. 1958년 시 「제3인공위성」을 발표하였고, 9월의 ‘붉은 편지 사건’ 이후 창작과 번역 등 문학적 활동이 대부분 중단되었다. 1959년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에 있는 국영협동조합으로 내려가 축산반에서 양을 치는 일을 맡았다. 삼수군 문화회관에서 청소년들에게 시 창작을 지도하면서 농촌 체험을 담은 시 「이른 봄」, 「공무여인숙」, 「갓나물」 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1960년 1월 평양의 『문학신문』 주최 ‘현지 파견 작가 좌담회’에 참석하였고, 시 「눈」, 「전별」 등과 동시 「오리들이 운다」, 「앞산 꿩, 뒷산 꿩」 등을 발표하였다. 1961년 「탑이 서는 거리」, 「손벽을 침은」 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1962년 시 「조국의 바다여」, 「나루터」 등을 마지막으로 발표하였다. 10월 북한 문화계에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창작활동을 일절 하지 못하게 되었다. 1996년 삼수군 관평리에서 사망하였다. 백석은 소월과 만해, 지용이 다져놓은 현대시의 기틀 위에서 새로운 시의 문법을 세움으로써 한국 시의 영역을 넓히는 데 기여한 시인이다. 평안 방언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언어들을 시어로 끌어들이고 고어와 토착어를 빈번하게 사용함으로써 시어의 영역을 넓히고 모국어를 확장시켰다. 또한 우리말의 구문이 품고 있는 의미 자질을 적절히 활용하여 경험세계를 감각적으로 재현하였다. 백석의 시는 형태적인 측면에서도 정제된 운율이 있는 전통적인 서정시 형식 대신 이야기 구조를 갖춘 서사지향적인 시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때 ‘이야기 구조’는 서사양식처럼 사건의 서사적 진행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장면 묘사와 서술에 의미의 중심이 놓여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주 짤막한 형태로 이루어진 시들은 대상의 미감을 가장 압축된 형태로 포착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또한 시각 외에 청각과 후각, 촉각, 미각 등 거의 모든 감각을 사용하여 대상을 감각적으로 포착하고 표현해냈다. 구체적인 생활 현장에서 벌어지는 삶의 면면들을 그려낸 시들은 풍속을 시로 재현해냄으로써 풍속사적인 의의를 담고 있기도 하다. 백석의 시 중에서 1인칭 화자의 주관적 독백을 표출하는 전형적인 서정시들은 특별한 수사나 기교 없이 평명한 언어로써 차분하게 내면을 성찰하고 있다. 참고문헌 『정본 백석 시집』(고형진 엮음, 문학동네, 2007) 『백석시전집』(송준 편, 학영사, 2004) 『(증보판) 백석 전집』(김재용 엮음, 실천문학사, 2003) 『백석시전집』(이동순 편, 창작과비평사, 1987) 『다시 읽는 백석 시』(현대시비평연구회 편저, 소명출판, 2014) 『백석평전』(안도현, 다산책방, 2014) [네이버 지식백과] 백석 [白石]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고향(故鄕) /백석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平安道) 정주(定州)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氏)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씨(氏)ㄹ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 북관 : 함경남도 - 관공 : 삼국지에 나오는 관운장     『 삼천리 문학』 2호, 1938년 4월 발표           작품 해설   ▶ 성격 : 서정적, 서사적 ▶ 심상 : 감각(시각, 촉각)적 심상 ▶ 어조 : 친근하고 다정다감한 어조 ▶ 구성       제1연 : 의원을 만나봄       제2연 : 의원이 고향을 물어봄       제3연 : 아무개 씨와 막역지간이라는 의원       제4연 : 아버지의 친구인 의원       제5연 : 의원의 손길에서 느끼는 육친과 고향에의 그리움 ▶ 주제 : 육친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鄕愁)       이 시는  백석 특유의 고향 정서가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백석의 시는 무엇보다도 한국인의 원초적인 고향 개념을 환기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그의 시가 보여 주는 토속적 사투리와 현대적 가족 제도, 풍물의 세계는 단순한 풍물이 아니라 반드시 인간이 개입된 풍물로, 그는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의 삶의 방식을 감동적으로 보여 준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시는 민족 정서가 점차 상실되어 가는 일제 치하에서 더욱 존재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편, 백석의 시 세계의 주인공은 항상 공동체의 품속에 깊이 침잠해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공동체적 세계로부터 멀어져 있는 시인의 현실적 세계와 대립됨으로써 고향이라는 공동체는 삶의 풍요로움을 더해 주는 세계로 형상화된다. 이 시가 환기시키는 정서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그 고향이 불러일으키는 따스한 정이다. 에서는 고향을 무대로 그 곳에서 벌어지는 토속적이고 원형적인 삶의 모습을 서사적 구조를 통해 고향 정서를 보여 준 데 반해, 이 시는 인물들 사이에 주고받는 대화와 시적 상황을 압축적으로 서술하는 기법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 연 구분이 없는 전 17행의 단연시 구조의 이 시는 내용상 4단락으로 나누어진다. 이 시는 시적 화자가 타향인 '북관'에서 병을 앓아 '의원'을 찾아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첫째 단락인 1·2행은 바로 그러한 상황을 압축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부분으로, 외로운 타향살이를 하는 화자가 병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도 각별해진 향수를 느끼게 해 준다. 둘째 단락은 3·4행으로 화자가 의원을 찾아가 첫 대면한 '의원'의 풍모와 인상을 시각적 묘사로 표출하고 있다. 5행부터 15행까지의 셋째 단락은 '의원'이 화자인 '나'를 진맥하는 상황을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그 서술은 화자의 주관적 감정을 최대한 억제한 채, 진맥하는 '의원'의 행위와 표정을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동시에 '의원'과의 극적이고 생생한 대화를 통해 전개시키고 있다. 넷째 단락은 16·17행으로 화자의 내면 세계를 보여 주는 독백 부분이다. '의원'에게서 부드럽고 따스한 정을 느끼게 된 화자가 마침내 그에게서 고향과 아버지를 느끼게 되었다는 감정의 토로는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는 평범한 서술로 나타나 있다. 화자의 이 같은 직접적인 감정 토로는 특별한 시적 수사 없이도 절실한 감동의 울림을 주고 있다. 그것은 셋째 단락에서 화자를 진맥하는 의원의 행위와 그와 함께 나눈 대화를 통해 그러한 정서가 충분히 환기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국수 / 백석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 옆 은댕이 예데가리 밭에서 하로밤 뽀오얀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녯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의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텀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 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아베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베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기사발에 그득히 사리워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러났다는 먼 녯적 큰 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아바지기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끊는 아루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출전 (1941.4)        시어ㆍ시구 풀이  김치가재미-북쪽 지역의 김치를 넣어 두는 창고, 헛간 양지귀-햇살 바른 가장자리 은댕이-가장자리 예대가리밭-산의 맨 꼭대기에 있는 오래된 비탈밭 산멍에-이무기의 평안도의 말 분틀-국수 뽑아내는 틀이라 한다. 큰마니-할머니의 평안도의 말 집등색이-짚등석, 짚이나 칡덩쿨로 짜서 만든 자리 자채기-재치기 댕추가루-고추가루 탄수-석탄수 삿방-삿(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를 깐 방 아르궅-아랫목 고담(枯淡)-(글, 그림, 글씨, 인품 따위가) 속되지 아니하고 아취가 있음                                 백석(白石) 시인     본명은 백기행(夔行)이며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했다. 오산중학과 일본 도쿄 아오야마학원을 졸업하였다. 1935년 「조선일보」에 '정주성'을 발표하면서 주목을 받았고, 1936년 첫 시집 을 출판하였다. 방언을 즐겨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모닥불', '고향', '여우난골족', '팔원' 등 대표작은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들이다. 토속적, 민족적이면서도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시인으로, 8.15 광복 후에는 고향에 머물렀다. 1963년을 전후하여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사망연도가 1995년임이 밝혀졌다.       통영(統營)               백석 [白石, 1912.7.1 ~ 1995]               구마산(舊馬山)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가깝기도 하다   바람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삼 영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漁場主) 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한다는곳      산 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錦)이라는 이 같고 내가 들은 마산(馬山) 객주(客主)집의 어린 딸은 난(蘭)이라는 이 같고      난(蘭)이라는 이는 명정(明井)골에 산다는데   명정(明井)골은 산을 넘어 동백(冬栢)나무 푸르른 감로(甘露) 같은 물이 솟는 명정(明井) 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쳐며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은   평안도(平安道)서 오신 듯한데 동백(冬栢)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       옛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한산도(閑山島)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고당 : 고장. 아개미 : 아가미. 호루기 : 쭈꾸미와 비슷하게 생긴 해산물. 황화장사 : 온갖 잡살뱅이의 물건을 지고 집집이 찾아다니며 파는 사람. 오구작작 : 여러 사람이 두섞여 떠드는 수선스런 모양. 녕 : 이엉.         ​ ​    월간 『朝光』 1935년 12월호 발표             평안도 출신 백석, 왜 통영까지 내려왔을까 백석의 시 '통영'에 담긴 아픈 첫사랑 이야기         예향(藝鄕)의 도시 통영엔 박경리, 윤이상, 김춘수, 유치환, 전혁림 등 통영이 낳은 문화예술인들의 자취를 따라 걷는 '역사문화기행코스'가 있다. 명정동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신위를 모신 사당 충렬사 건너편 공원에 긴 시가 새겨져 있는 시비가 눈에 띄었다. 라는 제목의 시였는데 이채롭게도 통영 출신이 아닌 평안북도 정주가 고향인 시인 백석((1912~1996)의 시였다. 구마산(舊馬山)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갓갓기도 하다 바람 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북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서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중략)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 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은 평안도서 오신 듯한데 동백꽃이 피는 철이 그 언제요 녯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아서 나는 이 저녁 울듯 울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 백석 우리 모국어가 얼마나 아름답고 깊이 있는지, 시어로 재탄생한 고어나 토착어, 생소한 사투리에서 신비한 매력을 느끼게 해주는 백석의 시를 뜻밖에 통영에서 만나다니. 반가운 마음에 천천히 읽어 보았다. 제목도 그렇고 그저 통영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겠거니 했는데, 후반부에 연이어 나오는 '내가 좋아하는 그이, 여인, 내 사람'이 누굴까 궁금하게 한다. 알고 보니 그녀는 백석의 나이 스물넷에 만난 애끓는 첫사랑이었다. 시인의 애끓는 첫사랑, 통영 사는 천희 '난'   ▲  멋쟁이 모던보이 백석 시인과 통영에 있는 그의 시비     시인 백석의 사랑으로 익히 알려진 연인은 그의 시 속 나타샤의 모델로 알려진 고(故) 김영한 여사다. 백석 시인은 기생이었던 그녀를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졌고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붙였다. 후일 '자야'는 밀실정치의 요람이었던 요정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했는데, 이곳이 현재 서울 성북동의 명소 길상사라는 사찰이 돼 더 유명해졌다. 18세의 나이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의 아들'로 등단해 조선일보의 후원으로 일본 유학(영문학)까지 다녀온 후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해 시단에 혜성과 같이 등단한 수려한 외모의 촉망받는 '모던 보이' 백석. 그에게도 열병처럼 아프게 앓은 첫사랑이 있었다. 통영에 사는 아가씨 '난'이 그 주인공으로, 백석이 써내려간 통영에 대한 시엔 그녀가 그립게 그려져 있다. 그가 남쪽 끝 항구도시 통영에 대해 시를 세 편이나 남긴 것은 그만큼 '난'에 대한 그리움이 컸기 때문이리라. 한 여인을 간절히 그리는 를 읽다보면 가수 윤도현의 와 어찌나 비슷한지, 애타는 심정을 잘 전하지 못해 서툴고 안타까웠던 내 청춘의 사랑도 함께 떠올라 슬며시 웃음 짓게 된다. 나의 하루를 가만히 닫아주는 너 은은한 달빛 따라 너의 모습 사라지고 홀로 남은 골목길엔 수줍은 내 마음만 ♬ - 윤도현의 가운데 1936년 1월 백석은 통영 출신의 '천희' 중 하나인 '난'을 다시 만나기 위해 두번째로 통영을 방문한다. 경상도 말로 처녀를 '천희' 혹은 '처니'라고 부른단다. 하지만 통영 천희 난은 겨울방학이 끝나가자 서울로 상경해 버린 탓에 서로 길이 엇갈린다. 이때 상실감을 안고 쓴 시가 충렬사 건너편 시비의 로, 난이 살던 마을, 명정골까지 찾아가 그 애틋한 마음을 털어 놓는다. 백석은 그해 3월에도 다시 통영을 방문하지만, 이때도 결국 난을 만나지 못한다.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러 통영까지 왔다가 못 만나고 그녀가 살던 집과 동네만 하릴없이 기웃거리다 서글픈 마음으로 쓴 시. 이라며 사랑하는 여인의 고장까지 아름답게 그리는 마음에 공감이 간다. 학창시절 사귀었던 여친과 함께 난생 처음 그녀의 고향인 전주를 찾아갔을 때가 떠올랐다. 소박한 전주천이며 사람들로 북적이던 질박한 남문시장이 얼마나 정답고 포근하게 느껴지던지··· 그래서인가, 시인의 첫 번째시 이 유월에 김냄새가 나고 저녁비가 내리는 쓸쓸한 풍경이라면, 두번째 는 북소리가 들리고 뱃고동이 들리는 활기찬 통영 풍경이 펼쳐진다. 말없고 수줍었던 백석과 난의 사랑 처음 백석이 난을 만난 건 1935년. 당시 시인이자 조선일보 기자였던 백석은 절친한 친구의 결혼식 축하모임에서 같은 신문사 동료인 신현중의 소개로 당시 서울의 이화고교 학생이던 통영 여자 난(본명 박경련)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백석은 스물넷, 난은 열여덟 꽃다운 나이였다. 백석은 후일 그의 산문 에서 난의 모습을 이렇게 그린다.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 하였습니다. - 산문 가운데 난은 신현중 누나의 제자였던 터라 신현중과 잘 아는 사이였다. 백석은 내친김에 신현중과 함께 친구의 통영 신행길을 따라나섰다. 사랑하게 된 여인의 고향과 집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 쓴 시가 1935년 12월 에 발표된 이다. 녯날에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녯날이 가지 않은 천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 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늬 오랜 객주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 남녘 끝 항구도시에 사는 옛 여인의 사랑은 미역오리같이 마르고 굴껍지처럼 말없고 투박했나보다. 벅찬 마음에 그 먼 길을 단걸음에 찾아간 그이지만 막상 그녀와의 만남은 수줍고 담백하다. 말없이 앉아있는 여인과 먼 길을 달려온 무뚝뚝한 사내가 오랜 객줏집 마루방에서 설렘을 마음속에 품고 마주하고 있는 장면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스라이 떠오르는 시다. 사랑과 우정과 배신의 드라마   ▲  통영 충렬사 계단에 주저앉아 엇갈린 사랑의 안타까움을 써내려간 백석.     이후 두 번 더 통영을 찾아가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서로 엇갈려 못 만나게 되고 백석은 상실감속에 충렬사 계단에 주저앉아 두번째 시 를 남기게 된다. 이 두번째 '통영' 시는 백석이 통영을 다녀왔다는 증거처럼 자신이 근무하던 조선일보를 통해 발표를 했다. 서울에서 그 공개구혼 같은 시를 읽었던 통영여자 '난'은 얼마나 가슴이 뛰었을까. 1936년 12월 마침내 백석은 친구 신현중과 함께 또다시 통영을 방문해 난의 어머니에게 난과 혼인할 뜻이 있음을 전한다. 난의 어머니 서씨는 서울에 사는 오빠 서상호를 만나 난의 혼사문제를 상의하고 백석에 대해 알아봐 줄 것을 청한다. 당시 난은 외삼촌 서상호의 집에서 돌봄을 받으며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서상호는 아끼는 고향 후배 신현중에게 백석에 대해 묻는다. 그때 신현중은 숨겨주어야 할 친구 백석의 비밀을 발설하고 만다. 그것은 백석의 어머니가 기생 출신이라는 소문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백석과 난의 혼사는 깨져버린다. 대신 그 자리에서 신현중은 서상호에게 자신이 난과 혼인할 뜻이 있음을 밝히고 단번에 승낙을 받는다. 1937년 4월 7일 신현중과 난은 혼인을 한다. 청혼을 했으나 거절당하고, 자신의 절친한 친구에게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백석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자신을 배반한 절친했던 친구, 연모하는 여인을 잃은 슬픔까지··· 너무나 애절했던 첫사랑을 잃은 백석은 이런 시를 남긴다. 그렇건만 나는 하이얀 자리 우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내가 살튼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 백석의 시 중에서       오마이뉴스 - 2014.01.20 14:30                          백석 [白石, 1912.7.1 ~ 1995] 시인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 본명은 백기행(夔行). 오산학교를 거쳐 동경 청산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 1935년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을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사슴』이 있음. 1995년 사망. [출처] 통영(統營) / 백석 - 백석의 아픈, 그 애끓는, 첫사랑 이야기 (시詩 시사랑 시인의 숨비소리) =================================/// 본명은 백기행(夔行).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했다. 오산중학과 일본 도쿄 아오야마학원을 졸업하였다. 1935년 「조선일보」에 '정주성'을 발표하면서 주목을 받았고, 1936년 첫 시집 을 출판하였다. 방언을 즐겨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모닥불', '고향', '여우난골족', '팔원' 등 대표작은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들이다. 토속적, 민족적이면서도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시인으로, 8.15 광복 후에는 고향에 머물렀다. 1963년을 전후하여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사망연도가 1995년임이 밝혀졌다.       시인 백석, 그는 누구인가?       시인 백석(白石). 그는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인해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 신음하던 1912년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마을에서 아버지 백시박과 어머니 이봉우 사이에서 3 남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그가 태어나서 얻은  호적상의 이름은 백기행이다. 우리들이 백기행이란 이름은 모르지만 백석이란 이름에 오히려 익숙한 까닭은 그의 고 향,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를 다니면서 그가 문학에 뜻을 두고 필명을 백석이라 개명한 뒤, 1955년 북한에서 사망했을 때까지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가 유명한 문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버지와 그가 다닌 그의 모교, 오산학교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알려진다.     수원 백씨 17대손인 그의 아버지는 정주(定州)에서 서양의 신문화에 일찍 눈을 떠 백석이 7살이 되던 해애 오산소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사실, 정주는 중국하고 지리적으로도 그리 멀지 않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던 탓 에 서양의 신문화를 쉽게 접할 수가 있었다. 그 때문에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나왔는 데 국문학사는 물론, 시문학사에도 에 길이 남을 춘원 이광수와 김억, 김소월 등이 이 고장의 출신이다.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 선생이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동하여 세운 학교로 서 수많은 문학인과 예술가를 배출시킨 학교로도 유명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민족시인 김소월(金素月)과 '소나기'의 소설가 황순원과 가장 한국적인 작가인 동 시에 가장 현대적인 작가로 평가받는 화가,이중섭(李仲燮)이다.   백석은 13살에 오산보통학교에 입학하고 18살 무렵에는 오산고보를 졸업하여 그가 일본으로 유학가서 사학의 명문, 야오야마(靑山) 학원에서 대학생활을 하기 이전까 지 오산학교 교정에서 대부분의 학창시절을 보냈다.   오산고교에는 매우 훌륭한 선생들이 많았으나 김소월의 스승이었던 김억과 그리고 이광수가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백석이 재학시에 고당 조만식 선생이 교장 선생으로 있었는데 백석은 그의 집서 하숙을 했었다고 전해진다.    그가 문학에 대해 남다른 소질을 보이고 자신의 인격을 다듬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와 같이 훌륭했던 스승들과 선배들의 밑에서 공부했던 이 무렵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려 하였지만 가정의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포기 하고 집에서 쉬면서 문학에 심취하여 창작활동에만 전념했다.   이 시기에 그는 소설을 써서 그 이듬해인 1930년 1월 조선일보에서 공모한 제2회 『신년현 상문예 공모』에 응모하여 『그 母와 아들이 』 당선되며 문단에 데뷔했다. 『신년현상문 예 』라고 함은 오늘날에 신춘문예를 의미한다.   『신년현상문예』소설이 당선되며 사실상 그의 인생이 바뀌었다. 정주에서 금광으로 크게 부자가 된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사들여서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의 후원을 받아 그는 일본 도쿄에 있는 청산학원로 유학가서 1930년부터 4년동안 영문학을 전공했다.    오산학교 시절에는 반친구들 40명 중에 10등을 할 만큼 공부에 별다른 재능을 보이지 않던 그가 대학에선 영문학을 전공하면서도 러시아어는 물론, 프랑스어 등의 외국어에 상당한 실력 을 보였다고 한다.영어회화에도 능통하여 그는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취직해서  직장생 활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소설을 쓰기보다는 오히려 외국서적 번역에만 몰두했다.그의 영어 실력은 훗날 함흥에 있는 영생고보에서 영어교사로 재직당시 학생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얻으면서 명성이 자자했을 정도였다.   그런 때문인지 그는 소설에도 시작에도 크게 관심을 안보이고 외국서적 번역에 날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 처음에는 체홉 등이 쓴 러시아의 소설과 산문들을 번역하였으나 시릉 번역하기 시작하며 번역하는일을 점차 줄이고 창작시에 전념했고 조선일보에 「定州城」이란 자신의 창작 시를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이때부터 탁월한 시의 재능을 보였다. 그 이후로 그가 남긴 소설로는 「마을의 遺話」와 「닭을 채인 이야기」라는 제목의 두 편의 단편소설이다.       山턱원두막은뷔였나 불빛이외롭다 헌깁심지에 아즈까리기름의 쪼는 소리가들리는 듯하다 잠자리조을든 문허진城터 반디불이난다 파란魂들같다 어데서말있는 듯이 크다란山새한마리 어두운 곬작이로난다 헐리다남은성문이 한을빛같이훤하다 날이밝으면 또 메기수염의늙은이가 청배를팔려올 것이다   - 「定州城」의 전문 -       위의 시를 발표한 뒤에도 조선일보에서 발행했던 「朝光(조광)」이란 잡지에  햔토색 이 짙은 ’統營(통영)' 등의 서정시를 계속해서 발표했다. 이 시절에 그는 그 당시 문단 을 이끌었던 임화,박용철 등의 여러 문인들과 교류했다. 그들 모두가 백석의 시에 관 심을 보였고 이때부터 백석은 시문단을 주도하는 시인으로 서서히 자리를 굳혀갔다.   그러던 그가 시인의 입지를 더욱 굳힌 것은 그의 첫시집 『사슴』을 발간한 뒤였다.조 선일보사에서 직장일을 하면서도 더욱 많은 시를 써서 발표했고 점점 더욱 많은 문인 들과 사귀었다. 그때 그가 사귀었던 대표적인 문인들은 신석정과 함대훈 등이었다.   그 시기는 '향수'의 정지용과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김영랑 시인이 첫시집을 내던 때 였다.사실, 그 당시 그는 회사에서 바쁘게 보냈지만, 문학에만 전념함으로서 그에게 있 어서는 그의 문학이  참으로 내실을 기한 매우 소중한 시기였다.   그리고 시집 '사슴' 발표이후 그는 오늘날의 표현으로 문단에서 조명받는 스타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일보사에서의 2년간의 생활을 접고 함흥에 있는 영생고보호 직장을 옮겼다. 그가 그곳에서 맡은 임무는 영어교사였다.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영어는 물론, 외국어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게다가 소설가요, 시인으로  학생들과 다른 선생들로부터  대단한 관심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는 외국어나 문학보다 연극,  미술, 체육 등의 과목에 더욱 관심을 보 이며 학생들을 지도했다. 연극반과 축구부의 학생들과 친구처럼 절친하게 지낼 만큼 학생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학생들의 재능을 키우는데 주력했다.   교사로서 생활하며 자긍심을 느낀 것도 이때였다. 그는 바쁜 교직생활에도 시창작을 게을리하지 않고 꾸준하게 시를 썼다.   사실 시집 『사슴』에 발표된 시들은 거의 사물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에 그쳤다면 함흥에서 교직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자신을 주체로 한 내면세계를 강조하 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의 시셰계에 변화가 생긴 무렵으로 그의 연보(年譜)를 보아 도 그에게는 나름대로 매우 의미있는 시기로 평가된다.   그러나, 함흥에서 2년동안 교사로 재직시에 그에게는 또 다른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기생 자야와의 만남과 사랑이었다.   이때 백석의 나이가 26살이었고 그녀의 나이는 22살이었다.   자야의 본명은 김영한. 그녀는 1916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사별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다가 어머니가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그녀 의 집안은 재산을 모두 날리고 거리에 나앉는 신세가 되자 16살에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서 기생이 되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정악계(正樂界)의 대가로 이름을 날리었던 하규일의 문하생이 되어 창과 가무를 배웠다고 한다. 문학에도 재능을 보였던 그녀는 게녀의 생활을 하면서도 '삼천리 문학'에 수필을 발표하여 인텔리 기생으로 불리었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을 접하면서 문인들과 사귀었다. 그러던 중, 그곳을 자주 찿던 조선어학회의 해관 신윤국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신윤국은 1894년(고종 31년) 황해도의 연백(延白)에서 태어나서 1917년 미국으로 건너 가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에 회원으로 미주 지역의 항일 운동에 투신한 이후,도 산 안창호가 이끌었던 흥사단(興士團) 활동했던 인물이다.   뜻한 바가 있어 귀국을 결심하고 고국으로 되돌아온 그는 1932년  『국사강의록(國史 講義錄)』을 간행했고,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에도 참가해 항일운동과 더불 어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다시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에 가입하여 『조선어사전』 편찬 재정위원으로 활약 했다. 그의 후원으로 도쿄에서 공부를 하다가 스승으로 섬기던 신윤국이 동우회사건(同友 會事件)과 관련해 동우회원 181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귀국했다.   함흥경찰서에 투옥되어 잔혹한 고문을 받고 있는 그를 어떻게든 만나려고 하였으나 사상범(思想犯)의 이유로 면회가 안되자 그녀는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않겠 다고 결심하고 함흥에 눌러앉게 되었다.   그녀는 고심하던 끝에 함흥에서 기생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찿아오는 사람중에 법조 인이 오면 그에게 부탁해서 신윤국을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끝까지 면회의 허락이 안되 만나지 못했지만, 영생고보 선생들의 회식자리에 나갔다가 백석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첫눈에 반해버린 백석은 학교에서 퇴근하면 그녀의 하숙방으로 달려가서 그녀와 밤을 지내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둘사이는 사실상의 부부관계라고 해도 좋을 만큼 뜨거웠다.   자야라고 하는 이름은 백석이 그녀에 붙여준 이름이다.어느날 그녀가 서점에 들러 '당 시선집(唐詩選集)을 사왔는데 이태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읽다가 '자야(子夜) 라는 아호를 지어준 것이다.   달콤했던 그들의 사랑은 그녀가 먼저 서울로 떠나면서 백석과 그녀는 서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얼마나 사랑하였을까 둘은 서로 보고 싶어  하루속히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어느 날, 조선축구학생연맹전 조 대표선수 인솔 교사로 발탁되어 그들을 서울로 인솔 하는 기회가 생겼다. 그런데, 그는 선수들은 여관에 투숙시킨 다음 자신은 청진동의 자야집에 가서 둘만의 사랑을 불태웠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학교서는 그에게 책임을 물어 사임을 강요했고 사랑하는 여인 때문 에 백석은 사표를 제출하고 상경했다. 그는 결국 청진동 그녀의 집에서 살림을 차리고 동거에 들어갔다.   다시 지금의 서울인 경성으로 되돌아와 조선일보사에 재입사했다.그는 거기서 조선일 보 계열사인 「여성」誌의 편집일을 맡았는데 이는 예전에 했던 일이고 문학에 관련 된 일이라서 모든 일이 익숙했다. 그들은 마치 부부처럼 생활하며 서로가 없으면 하루라도 못살 것첨럼 행복하게 사는 듯했다.   그러나, 백석의 부모는 아들이 기생과 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서로 헤어지게 만들 려고 아들에게 다른 여자와 결혼토록 강요했다. 부모의 강요에 못이겨 그는 고향으로 가서 정혼녀와 혼인했다. 마지못해 혼인은 했지만 백석은 그녀와 첫날밤도 치르지 않 은 채 도망치듯 고향집을 빠져나와 자야의 곁으로 돌아갔다.   그해 말에 느닷없이 다시 회사를 그만두고 이번에는 북만주의 신경, 오늘날의 長春(장 춘)이란 곳으로 홀연이 떠나갔다.    신경으로 떠나갈 때 그녀에게 함께 가서 살자고 하였으나  자신이 백석의 장래를 가로 막고 있다는 생각에 괴롭지만 백석을 혼자 보내게  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사랑하기 때문에 떠나보낸다는 유행가의 가사처럼 서로 헤어지게  되었는데  그들간의 사랑은 아쉽게도 그렇게 끝이 났다. 시인 백석과 그녀가  격였을 이별의 고통 이 짐작된다.   "그런데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 이별이 될 줄 몰랐다"고 1995년 출간한 ‘내 사랑 백석’(문 학동네)에서 그렇게 회고했다.   백석이 그녀와의 이별을 아쉬워해 그의 그런 심경을 담아 쓴 시가 바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디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全文      짐작컨데 그다지 많지 않은 이십대의 시절을 떠돌이로 생활했던 것은 그 당시의 시대 상황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백석의 결혼관에 대해 부모들의 봉건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부모와의 마찰을 빚은 것도 하나 의 이유가 되겠지만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에서 벌인 남경대학살 등의 아시아 전역에서 침략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국내서는 말할 것도 없이 유학생들까지 학도병의 이름으로 강제로 징집하여 전선으로 내보내던 시기라서 인테리의 입장에서 나라없는 설움까지 격으면서 남모 르는 고민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그는 펜을 놓지 않았다. 그는 북만주의 신경서도 여전히 시를 써서  『문장』등의 문예지를 통해 오늘날에 시인이나 시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 랑받고 있는 「북방에서」와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의 시를 잇달아 발표했다.   그 중에서 그의 「북방에서」는 일제말의 식민지 현실에 대한 암울함과  무력하게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자책감을 보여주는 시이다. 이 시의 주체는 한민족의 역사가 시작되던 때부 터 현재까지 살고 있으면서 민족이 함께 격는 역사적 일들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시는 백석이 만주북방을 떠돌면서  그의 역사에 대한 죄채감을 느끼 면서 쓴 시이다. 특히 지난 과거의 역사에 대한 반성을 , 민족의 역사와 함께 살아가는 자신의 입장에서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식민지 현실에 대한 슬픔을 이겨내려하는 시인 의 의지와 동시에 무력함에 대해 자책하는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를 숙신을 발해를 여진을 요를 금을  흥안령을 음산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든 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드든 말도 잊지 않었다  오로촌이 멧돌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든 것도  쏠론이 십리길을 따러나와 울든 것도 잊지 않었다   나는 그때  아모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아츰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그동안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금은보화는 땅에 묻히고 가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 이리하여 또 한 아득한 새 옛날이 비롯하는 때  이제는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나는 나의 옛 한울로 땅으로―나의 태반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해는 늘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 북방에서 」전문      그리고 「흰 바람벽이 있어」역시 이국에서 유랑생활을 하며 격고 있는 자신의 심중을 조국의 어머니와 가족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현실, 즉 일본에 빼앗긴 조국의 현실을 한탄하며 그 슬픔 을 노래한 시이다. 이 시 전반에서 비록 현실은 슬프지만 자신이 격고 있는 고독과 슬픔을 이겨 내려하는 그의 삶의 의지를 엿볼 수가 있다.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 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 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아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흰 바람벽이 있어」전문     그는 이와 같이 시를 쓰면서도 한편으로 토마스 하디가 쓴 「테스 」등의 여러 소설들을  계속 번역하여 「朝光」에 발표하며 중국서도 그의 건재를 과시했다. 그러나 그의 그곳서의 삶이 순탄했던 것만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북만주에 건너가서 신경시의 東三馬路 시영주택 '황씨집'에 에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삶은 떠돌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어느 관청에 근무했던 그는 창씨개명을 하라는 일본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직장을 다시 그만두고 새로운 직업을 택했는데 측량기사 보조 등의 일과 만주 안둥[安東]으 로 옮겨 세관업무를 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살던 신경이란 곳이 그 옛날 북만주 일대까지  호령했던 고구려의 영토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을까?   그 영토를 중국에게 빼앗기고 조선마저 일본에게 빼앗겨서 자신이 나라없는 백성 이란 사실에 자신이 태어난 조선과 유학생활을 위해 지낸 일본과 지인들을 멀리하 고 그곳 중국땅까지 떠돌면서 느꼈던 비애와 슬픔, 그리고 감회가 소설가와 시인이 란 입장에서 특별히 남달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차라리 그에게 있어서 형별이요, 고통이 아닐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만주 등을 떠돌면서  유랑생활을 자처했던 것은 일제의 동화정책을 반대하고 저 항했던 그의 소신있는 애국심의 발로는 아닐까?   마침내, 1945년 8월15일 조국이 그토록 기다리던 해방을 맞이했다. 당시 조선사람치고 기뻐하지 않았을 사람이 어디 있었겠냐마는 백석도 무척이나 기뻐했을 것이다.   그는 설레이는 마음으로 즉시 귀국했다. 그런데, 그는 왜 고향으로 바로 가지 않았고 사랑했던 여인을 찿지도 않고 거처를 신의주로 옮겼을까? 그것이 아직까지 의문으로 남는다. 그것은 아마도 결혼을 강요했던 부모와의 불화와 자야와의 원치 않던 이별이 못내 그를 괴롭혔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기에 그는 그의 대표작으로도 손꼽히는 시의 하나인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을 『學風(학풍)』誌에 발표했다. 말하자면, 남신의주 유동 마을  박시봉이란 사람의 집 방에 살면서 쓴 시로 짐작된 다.   고향 정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신의주서 살면서 가족과 고향을 그리면서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는 시이다.해방되기 이전에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서 탄압과 감시 속에 떠돌이 생활을 했다가 해방을 했는데도 자신이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남의 집에 더부살이 하는 자신의 처지를, 마지막 연의 갈매나무를 보며 자신의 삶을 반 성하고 있다.    또한 이 시는 서양문물 유입으로 가족이 뭉쳐 살던 대가족 중심의 우 리나라  사회가 핵가족 사회로 점점 붕괴되는 사회상을 비판하는 시로도 평가된다. 어쨌거나 그는 그가 쓰는 작품마다  고향의 지명이나 이웃사람들의 이름, 그리고 고향인 평안남도 정주를 사투리를 넣어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를 많이 썼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全文     백석은 신의주에 살았지만 그리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고향으로 가기로 결심을 굳힌 뒤에 그는 곧장 정주, 자신의 본가로 돌아갔다.미물인 짐승들도 죽을 때는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는 귀소본능처럼 백석 자신도 그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을 한시 라도 잊지 않고 살았었던 그였기에 귀향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 이후의 그의 행각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해방되던 그해 12 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남북한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어 38도선을 경계로 이남에는 미국이, 이북에는 쏘련의 통치하여 남한에는민족주의 정부가 그리고 북한에는 사회주 의 정부가 들어섰다.   그 당시에 윈스턴 처칠이 미국을 방문해서 쏘련은 '철의 장막(iron curtain)으로 가리 워져 있다' 라고 말한 그의 연설처럼 쏘련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혀 알 수 없을 만큼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철저하게 통제했던 쏘련의 통치를 받게된 뒤부터 백석은 남쪽의 문인들과 교류가 없었다.   고향에서 계속 글을 썼다고는 하나, 공산당 산하에 있는 조선작가동맹의  『조선문학』 에만 작품을 발표했다.   해방이전에는 동인 등의 형식으로 어떤 문학단체에도 가담하지 않고 모더니즘 성향의 토속적인 서정시를 주로 쓰며 탈정치와 탈이념적인 시세계를 펼쳤던 그가 북한에 머물 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 성향을 표방했다.   그가 타계하기 이전까지 그는 매월 『조선문학』에 자신의 작품을 실었는데 아동문학 평론, 창작시와, 수필, 번역시를 소개했다.    그는 아동문학작품과  관련해서 『조선문학』 1956년 5월호에 실린 「동화문학의 발전 을 위하여」와1956년 9월호에 실린 「나의 항의, 나의 제의 : 아동시와 관련하여, 아동 문학의 새 분야와 관련하여」 그리고 1957년 6월호에 실린 「큰 문제, 작은 고찰」라는 제목으로 세 편의 평론을 실었는데 여기서도 백석은  아동문학은 교양과 선전의 무기 로서 사회주의 혁명의 한 부분을 담당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비공식적으로 그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1961년까지 그는 시나 수필 등에서도 자신이  번역한 외국의 작품에도  사회주의 이념을 지지하는 글을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일설(一說)에 의하면, 1950년 6월25일 일어난 한국전쟁 당시 백석은 중국으로 건너갔다는 설과 고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북진했을 때는 국군으로부터 정주 군수가 되어 줄 것 을 제의받았다는 설도 있지만 , 모두 확인되지 않은 설에 불과하다.   또한 해방이후 북한의 자신의 고향에서 1963년 그가 사망하기까지 사회주의 체제를 지지하는 글을 시와 수필 등의 여러 장르에 걸쳐 『조선문학』에만 발표했다는 것도 의문이다. 백석 시인이 북한에서 생존시에 『조선문학』을 통해 1963년 그가 사망하기 두 해전인 1961년 까지 작품을 발표했다는 북한의 주장과는 달리 최근 연구가에 의하여 밝혀진 사실은 그의 사망 연도는 북한에서  발표한 1963년보다 훨씬 이전인 1955년도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과연 어느 쪽이 진실일까? 분명한 사실은 북한의 체제가 남한의 체제와는 다르다는 점이다.훗날 그와 관련한 모든 사실들 이 명명백백(明明白白) 밝혀지기 전까지는 그를 변절자로 매도해선 안된다. 이미 밝혀진 일제시 대 일본에게 협조했던  친일파 문인들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무능했던 조선의 정부를 무력으로 위협해서 국권을 빼앗고 36년간을 극악무도한 만행을 일삼으 며 민족을 말살하려 했던 일본! 해방이 되었는가 싶었는데 이번에는 외세에 의해 남북이 분단되 고 쏘련의 사주에 의한 저질러진 동족상잔의 6.25를 격으면서 지성인들, 특히 문인들이 격어야 만 했던 정신적인 갈등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북한의 발표대로 백석이 사망을 했는지 아니면 아직까지 생존해 있는지는 알 수없다. 물론, 생존 해 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만일 그가 생존해 있다면 올해 그의 나이가 94살이란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시대적인 배경에도 좌절하지 않고  토속적이면서 향토적인 우리민족 고유의 시언어로 자신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구축하며 서정시를 썼던 시인 백석! 어느 문예지나 문학파에 가담하지 않고 민족혼을 일깨웠던 시를 써던 시인 백석!   그의 대표시인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과 『나와 나타샤와 희 당나귀』와 『흰 바람벽 이 있어』외에『통영(統營)』,『고향』,『북방(北方)에서』,『적막강산』등의 다수의 시들 은 오늘날 많은 시인들과 평론가 그리고 대학에서 학생들에 의해 평론이나 논문으로 발표 되는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제 그의 시는 시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널리 애송되고 있다.   백석 시인! 그는 이제 한국시 100년史에 있어 문단의 또 다른 큰 별임에 틀림없다.                                                          백석 시인     본명은 백기행(夔行).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했다. 오산중학과 일본 도쿄 아오야마학원을 졸업하였다. 1935년 「조선일보」에 '정주성'을 발표하면서 주목을 받았고, 1936년 첫 시집 을 출판하였다. 방언을 즐겨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모닥불', '고향', '여우난골족', '팔원' 등 대표작은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들이다. 토속적, 민족적이면서도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시인으로, 8.15 광복 후에는 고향에 머물렀다. 1963년을 전후하여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사망연도가 1955년임이 밝혀졌다.       시인 백석(白石). 그는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인해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 신음하던 1912년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마을에서 아버지 백시박과 어머니 이봉우 사이에서 3남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그가 태어나서 얻은  호적상의 이름은 백기행이다. 우리들이 백기행이란 이름은 모르지만 백석이란 이름에 오히려 익숙한 까닭은 그의 고향,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를 다니면서 그가 문학에 뜻을 두고 필명을 백석이라 개명한 뒤,1955년 북한에서 사망했을 때까지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가 유명한 문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버지와 그가 다닌 그의 모교, 오산학교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알려진다. 수원 백씨 17대손인 그의 아버지는 정주(定州)에서 서양의 신문화에 일찍 눈을 떠백석이 7살이 되던 해애 오산소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사실, 정주는 중국하고 지리적으로도 그리 멀지 않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던 탓에 서양의 신문화를 쉽게 접할 수가 있었다. 그 때문에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나왔는데 국문학사는 물, 시문학사에도 에 길이 남을 춘원 이광수와 김억, 김소월 등이이 고장의 출신이다.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 선생이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동하여 세운 학교로 서 수많은 문학인과 예술가를 배출시킨 학교로도 유명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민족시인 김소월(金素月)과 '소나기'의 소설가 황순원과 가장 한국적인 작가인 동시에 가장 현대적인 작가로 평가받는 화가,이중섭(李仲燮)이다. 백석은 13살에 오산보통학교에 입학하고 18살 무렵에는 오산고보를 졸업하여 그가 일본으로 유학가서 사학의 명문, 야오야마(靑山) 학원에서 대학생활을 하기 이전까지 오산학교 교정에서 대부분의 학창시절을 보냈다.  1918년 오산소학교를 거쳐 오산중학교를 마치고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으로 일본 아오야마 학원[靑山學院]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입사, 〈여성〉에서 편집을 맡아보다가 1935년 8월 〈조선일보〉에 〈정주성 定州城〉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36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있었으며 만주 신징[新京]에 잠시 머물다가 만주 안둥[安東]으로 옮겨 세관업무를 보기도 했다. 해방 후 고향 정주에 머물면서 글을 썼으며, 6·25전쟁 뒤에는 북한에 그대로 남았다. 1936년에 펴낸 시집 〈사슴〉에 그의 시 대부분이 실려 있으며, 시 〈여승 女僧〉에서 보이듯 외로움과 서러움의 정조를 바탕으로 했다. 〈여우 난 곬족〉(조광, 1935. 12)·〈고야 古夜〉(조광, 1936. 1)에서처럼 고향의 지명이나 이웃의 이름, 그리고 무술(巫術)의 소재가 자주 등장하며 정주 사투리를 그대로 썼는데, 이것은 일제강점기에 모국어를 지키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사슴〉 이후에는 시집을 펴내지 못했으며 그뒤 발표한 시로는 〈통영 統營〉(조광, 1935. 12)·〈고향〉(삼천리문학, 1938. 4)·〈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학풍, 1948. 10) 등 50여 편이 있다. 시집으로 1987년 창작사에서 〈백석시전집〉과 1989년 고려원에서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을 펴냈다.  시인 백석은 민족의 주체적 자아를 문학 쪽에서 보존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활동 영역을 농촌 공동체의 생활과 그 정서에서 찾으려 했다. 그무렵 도시공간에서는 이미 말의 타락 현상이 극심하게 일어나 인간 의식의 붕괴 및 파탄으로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민중들이 믿어왔던 지식인들은 참으로 그 모습이 말이 아니게 달라져서 소일본인화되어 버리고, 그들이 내뱉는 말이라곤 지원병 참가를 독려하는 강연, 전시체제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는 선무성 시국강연 따위로 분주하던 시절이었다. 세상에 믿을 사람 없었고, 신뢰할 수 있는 한 마디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농촌만큼은 제국주의자들의 극악한 농촌파괴 정책에도 불구하고 혈연과 거주지로 함께 엮어지는 생활공동체의 끈끈한 유대를 여전히 갖고 있었던 것이다.    시인 백석의 본명은 백기행, 평안북도 정주군 출생이다. 역시 동향인 시인 김소월과는 당시의 유명했던 사학 오산고보의 선후배 사이로 백석은 선배시인 소월의 문학세계를 매우 흠모하고 존경했다. 그러나 둘은 서로 만난 적이 없는 채로 소월이 먼저 요절하고 말았다. 소월의 문학에는 민요적 틀에 실어서 표현하는 관서지방 특유의 정서가 있지만 백석은 소월보다 어쩌면 더 짙게 마천령 서쪽 지역인 평안도 주민들의 일반적인 정서를 특이한 문체로 담아내고 있다.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가락닢도 머리카락도 헌겊 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와장도 닭의 깃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문장)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 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모닥불」전문    이 시의 첫연에 나오는 사물들은 생물, 무생물의 구분을 따로 나눌 것 없이 우리들의 유년체험과 친숙하게 맞닿아 있는 모닥불의 재료들이다. 하지만 여전히 요긴하고 쓸모있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거의 쓸모없게 되어 삶의 뒷전으로 물러나 있거나 아예 버려진 하찮은 사물들끼리 모여서 이처럼 따뜻한 모닥불의 광휘와 온기를 이루어내고 있는 것이다. 1∼2연에 등장하는 각 낱말 끝에 '∼도'라는 특수조사가 낱낱이 붙어 있는 것은 모닥불이라는 공간이 애틋한 소외존재들이 서로 만나는 평등한 장소임을 일깨워주는 하나의 시적 장치로 여겨진다.    백석의 시세계에서 또하나 돋보이는 것은 농촌적 정서를 아주 현장감이 느껴지도록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 시는 관서지방 농촌공동체의 여름, 저녁 풍경을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다.     당콩밥에 가지 냉국의 저녁을 먹고 나서   바가지꽃 하이얀 지붕에 박각시 주락시 붕붕 날아오면   집은 안팎 문을 휑하니 열젖기고   인간들은 모두 뒷등성으로 올라 멍석자리를 하고 바람을 쐬이는데    풀밭에는 어느새 하이얀 대림질감들이 한불 널리고    돌우래며 팟중이 산 옆이 들썩하니 울어댄다   이리하여 하늘에 별이 잔콩 마당 같고   강낭밭에 이슬이 비 오듯 하는 밤이 된다                                           「박각시 오는 저녁」 전문     백석은 분단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금지에 의해 인위적으로 매몰되어온 시인이었다. 백석의 경우는 그 자신이 무슨 사회주의 사상을 가졌거나 꼭 북쪽의 정치체제를 선택할 만한 어떤 필연성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단지 있었다면 그의 고향이 평안북도 정주라고 하는 사실, 해방 이후에 만주에서 돌아온 그가 줄곧 고향의 가족들과 기거해 왔다는 사실, 굳이 서울 쪽으로 월남해 내려와야할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을 리 없었다. 그는 그냥 고향에 눌러 앉았었고, 이 때문에 남쪽의 문학사에서는 '북쪽을 선택한 시인'의 명단에 올라 있었으며, 심지어 어떤 자료에서는 백석이 프로문인들의 몇 차 월북때 북으로 올라 갔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실로 어처구니 없는 기록들까지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북쪽에서의 백석의 시인으로서의 생활은 항시 불안정한 것이었다. 체제 정비를 끝낸 다음 김일성이 맨먼저 착수한 것이 언어의 통일이라는 명제였다. 이것은 함경도와 평안도 두 지역간의 뿌리깊은 알력과 갈등이 사회주의 체제의 발전에 막대한 장애를 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두 지역에서 오랫동안 지방 토호로서 대대로 살아오던 많은 주민들이 대량으로 집단 이주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함경도 주민과 평안도 주민을 서로 적절한 배수로 섞바꾸어 살게 하는 인위적 강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는 지역성을 가장 농도 짙게 포괄하고 있는 방언을 소멸시킴으로써 지역 감정을 무화시킬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소위 문화어 정책이라는 것을 실시했는데 이것이야말로 방언의 구획과 변별성을 일거에 무너뜨리고자 하는 시도였다. 정황이 이러하니 백석의 시세계가 지녀오던 방언주의가 제대로 지탱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백석은 실제로 1960년대 초반까지 북한의 각종 문학자료에 아주 드물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더 계속되지는 못했던 것이 바로 백석 특유의 방언주의와 그것을 가로막는 문화어 정책 간의 충돌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해서 백석은 북에서도 비운의 시인이었지만 남에서도 마찬가지로 비운의 금지시인이었다. 그러던 것이 1987년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이 발간된 이후 백석의 시는 문학인에 대한 금지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조치인가를 그대로 일깨워 주었다. 동시에 백석의 문학에 대한 경탄과 더불어 백석처럼 그동안 금지라는 강제에 매몰되어 왔던 월북 문인들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봇물 터지듯 일거에 터져나오게 되었다. 전후 세대들의 상당수는 백석을 비롯한 이찬, 오장환, 임화, 이용악, 설정식, 정지용, 김기림, 박아지, 여상현, 조벽암, 조영출, 권환 등 많은 금지 시인들의 작품은 물론 그들의 존재조차 모르고 살아왔으며, 이런 분위기 속에서 분단시대 남한의 문학인들은 개별적인 작품 활동에 종사했다.(위의 시인들 가운데 권환같은 시인은 고향인 마산에서 살다가 1950년대 초반에 세상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월북시인으로 간주해 버리는 넌센스까지 있었다) 그들의 학생 시절에 배우고 영향을 받았던 문인들이라곤 대부분이 중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수록된 작품들이 가장 주된 모범적 교본이었고, 이들 작품의 상당수가 일제말의 황민문학 계열이나 순수문학 계열, 또는 분단 이후의 반공 이데올로기 계열이었다. 사정이 그러했으니 해금문인들의 작품을 대하는 전후 세대들의 정서적 충격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분단 이후 냉전시대의 남한 문학이 나타내 보여왔던 작품의 성향이란 대개 이러한 분위기의 연속이요,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이제 백석의 문학작품은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문학사에 편입되고 있다. 전국에서 많은 신진 문학연구가들에 의해 백석의 작품은 주요 단골 연구 테마로 각광받고 있으며 전집 발간 이후 가장 최근에 발간된『백석전집』(김재용 편)에 이르기까지 무려 100여편이 넘는 연구 논문, 학위 논문, 또는 평론들이 학계와 문단에 제출 발표되었다. 이와 동시에 문단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는 전후 세대 시인들에 의해 백석의 문학 작품과 시정신은 깊은 영향의 수수관계로 재창조되어서 계승되어가고 있다. 백석의 시에서 다른 소재들에 비해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소재는 음식물과 관련된 사례들이다. 그의 시전집을 통틀어 음식물 소재는 대략 150여종이나 된다. 이 음식물들을 살펴 보면 별반 특이한 음식이 많은 것은 아니나 아무튼 우리의 토착적인 음식 문화를 느끼게 하는 부분들이 있다. 이는 외래 문화, 즉 제국주의적인 일본 문화의 침탈을 시인이 의식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민족적 분위기가 강렬히 풍겨나는 토속 음식들을 열거하고 집착을 보이기까지 했을 것이다. 그 주된 음식물이나 기호물, 또는 그 재료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막써레기, 돌나물김치, 백설기,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고사리, 두릅순, 회순, 물구지 우림, 둥굴네 우림, 도토리묵, 도토리 범벅, 광살구, 찰복숭아, 반디젓,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 두부, 콩나물, 뽂운 잔디, 도야지 비게, 무이징게국, 찹쌀탁주, 왕밤, 두부산적, 소, 니차떡, 쇠든 밤, 은행여름, 곰국, 조개송편, 죈두기 송편, 밤소, 팥소, 설탕든 콩가루소, 내빌물, 무감자, 시라리타래, 개구리의 뒷다리, 날버들치, 호박잎에 싸오는 붕어곰, 미역국, 술국, 추탕, 엿, 송이버섯, 옥수수, 노루고기, 산나물, 조개, 김, 소라, 굴, 미역, 참치회, 청배, 임금알, 벌배, 돌배, 띨배, 오리, 육미탕, 금귤, 전복회, 해삼, 도미, 가재미, 파래, 아개미젓, 호루기젓, 대구, 건반밥, 명태창란젓에 고추무거리에 막칼질한 무이를 뷔벼 익힌 것, 힌밥, 튀각, 자반, 머루, 꿀, 오가리, 석박디, 생강, 파, 청각, 마늘, 노루고기, 국수, 모밀가루, 떡, 모밀국수, 달재생선, 진장, 명태, 꽃조개, 물외, 꼴두기, 당콩밥, 가지냉국, 싱싱한 산꿩의 고기, 김치가재미, 동티미국, 밤참국수, 게산이알, 취향이돌배, 만두, 섭누에번디, 콩기름, 귀이리차, 칠성고기, 쏘가리, 35도 소주, 시래기국에 소피를 넣고 끓인 술국, 도야지 고기, 기장차떡, 기장쌀, 기장차랍, 기장감주, 기장쌀로 쑨 호박죽, 보탕, 식혜, 산적, 나물지짐, 반봉과일, 오두미, 수박씨, 호박씨, 멧돌,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 얼얼한 댕추가루,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감주, 대구국, 닭의 똥, 연소탕, 원소라는 중국떡, 고사리, 가지취, 뻑꾹채, 게루기, 약물, 깨죽, 문주, 송구떡, 백중물   도합 148종이 넘는다. 이 음식물들의 종류를 가려뽑아서 보면 백석의 시에서 동원된 음식들이 모두 일반 서민들이 먹는 생활 음식들의 명칭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는 시골 아이들이 어릴 적에 주워 먹던 길바닥의 닭똥도 있고, 젓갈에 가자미식혜 등의 지역 음식도 보인다. 거의 대다수가 민중적 향취가 느껴지는 음식물들이며, 동물성보다는 식물성 음식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특징이다. 백석의 시에 등장하는 동물과 식물의 구체적인 명칭도 상당수인 바 야생 동물, 가축, 물고기, 곤충 따위의 동물적 소재와 과수, 야생초, 약초, 해초, 채소, 과일, 곡식 등의 식물적 소재를 모두 추출하여 대비해보면 식물성이 약간 많다. 동물적 소재는 모두 72종 가량이 된다. 지렝이, 박각시, 주락시, 개구리, 자벌기, 거미, 찰거머리, 버러지, 노랑나비, 벌, 딱장벌레, 파리떼, 노루(복작노루), 곰, 멧도야지, 승냥이, 배암, 산토끼, 잔나비, 여우, 쪽재피(복쪽제비), 다람쥐, 도적괭이, 땅괭이, 호랑이, 당나귀, 오리, 개(강아지), 도적개, 얼럭소새끼, 도야지, 닭, 말(망아지), 토끼, 노새, 게사니, 소(송아지), 멧새, 물총새, 짝새, 까치(까막까치), 꿩(덜걱이), 멧비둘기, 어치, 제비, 물닭, 뻐꾸기, 갈새, 뫼추리, 갈매기, 물총새, 백령조, 꼴두기, 붕어, 농다리, 게, 굴, 소라, 조개(가무락 조개), 참치, 꼴두기, 전복, 해삼, 명태, 호루기, 대구, 칠성고기(칠성장어), 가재미, 도미, 반디, 미꾸라지, 쏘가리 대부분의 동물들이 맹수류가 아니라 평화스러웁고 양순한 성질의 동물들이다. 이러한 동물들의 선택에서도 시인의 기질이나 품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비해 식물적 소재들은 도합 79종이나 되는데 거의 모두가 시골 생활에서 흔히 대할 수 있는 것들이다. 돌나물,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고사리, 두릅순, 회순, 도토리, 살구나무, 찰복숭아, 배나무, 무이, 찹쌀, 왕밤, 천도복숭아, 콩가루, 섭구슬, 박, 감나무, 산뽕, 땅버들, 석류, 수리취, 송이버섯, 도라지꽃, 옥수수, 아카시아, 미역, 수무나무, 아주까리, 밤나무, 머루넝쿨, 재래종의 임금나무, 돌배, 벌배, 다래나무, 갈부던, 복사꽃, 들매나무, 삼, 숙변, 목단, 백복령, 산약, 택사, 금귤, 파래, 동백나무, 진달래, 개나리, 당콩, 머루, 쑥국화꽃, 자작나무, 바구지꽃, 강낭, 귀리, 모밀, 피나무, 버드나무, 호박씨, 수박씨, 이깔나무, 바구지꽃, 오이, 마늘, 파, 감자, 쉬영꽃, 뻑꾹채, 게루기, 고사리, 갈매나무, 싸리, 이스라치, 가지, 함박꽃   이러한 식물들의 성격은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동물들의 이미지와 어울려서 작품 세계의 아늑하고 민중적인 삶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키는데 이바지하고 있다. 적어도 시작품속에서는 동물성과 식물성의 구별이 느껴지지 않는 합일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으로서의 백석은 천부적으로 참된 슬픔의 의미와 진정한 가치의 고귀함 등을 타고난 시인적 기질의 소유자이다. 백석이 자신의 문학적 아포리즘을 구체적으로 밝힌 글은 거의 없다. 이런 가운데 만주의 신경에서 거주하던 시절 {만선일보(滿鮮日報)}(1940.5.9∼10)에 발표한 하나의 짧은 시평은 그의 문학적 지향이나 기질을 짐작하게 해주는 매우 소중한 자료이다. 당시 시인 박팔양이 함께 신경에 와서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무렵 발간된 박팔양의 시집 {여수시초(麗水詩抄)}에 대한 서평을 위의 신문에 발표하였다. 이 글에서 백석은 '시인이란 세상의 온갖 슬프지 않은 것에 슬퍼할 줄 아는 영혼을 지닌 사람'이라는 의미있는 말을 하고 있다. 일설(一說)에 의하면, 1950년 6월25일 일어난 한국전쟁 당시 백석은 중국으로 건너갔다는 설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북진했을 때는 국군으로부터 정주 군수가 되어 줄 것을 제의받았다는 설도 있지만 , 모두 확인되지 않은 설에 불과하다. 또한 해방이후 북한의 자신의 고향에서 1963년 그가 사망하기까지 사회주의 체제를 지지하는 글을 시와 수필 등의 여러 장르에 걸쳐 『조선문학』에만 발표했다는 것도 의문이다. 백석 시인이 북한에서 생존시에 『조선문학』을 통해 1963년 그가 사망하기 두 해전인 1961년까지 작품을 발표했다는 북한의 주장과는 달리 최근 연구가에 의하여 밝혀진 사실은 그의 사망연도는 북한에서  발표한 1963년보다 훨씬 이전인 1955년도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과연 어느 쪽이 진실일까? 분명한 사실은 북한의 체제가 남한의 체제와는 다르다는 점이다.훗날 그와 관련한 모든 사실들이 명명백백(明明白白) 밝혀지기 전까지는 그를 변절자로 매도해선 안된다. 이미 밝혀진 일제시대 일본에게 협조했던  친일파 문인들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무능했던 조선의 정부를 무력으로 위협해서 국권을 빼앗고 36년간을 극악무도한 만행을 일삼으며 민족을 말살하려 했던 일본! 해방이 되었는가 싶었는데 이번에는 외세에 의해 남북이 분단되고 쏘련의 사주에 의한 저질러진 동족상잔의 6.25를 격으면서 지성인들, 특히 문인들이 격어야만 했던 정신적인 갈등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북한의 발표대로 백석이 사망을 했는지 아니면 아직까지 생존해 있는지는 알 수없다. 물론, 생존해 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만일 그가 생존해 있다면 올해 그의 나이가 94살이란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시대적인 배경에도 좌절하지 않고  토속적이면서 향토적인 우리민족 고유의 시언어로 자신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구축하며 서정시를 썼던 시인 백석! 어느 문예지나 문학파에 가담하지 않고 민족혼을 일깨웠던 시를 써던 시인 백석! 그의 대표시인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과 『나와 나타샤와 희 당나귀』와 『흰 바람벽 이 있어』외에『통영(統營)』,『고향』,『북방(北方)에서』,『적막강산』등의 다수의 시들 은 오늘날 많은 시인들과 평론가 그리고 대학에서 학생들에 의해 평론이나 논문으로 발표 되는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제 그의 시는 시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널리 애송되고 있다. 백석 시인! 그는 이제 한국시 100년史에 있어 문단의 또 다른 큰 별임에 틀림없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본명은 백기행(夔行).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했다. 오산중학과 일본 도쿄 아오야마학원을 졸업하였다. 1935년 「조선일보」에 '정주성'을 발표하면서 주목을 받았고, 1936년 첫 시집 을 출판하였다. 방언을 즐겨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모닥불', '고향', '여우난골족', '팔원' 등 대표작은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들이다. 토속적, 민족적이면서도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시인으로, 8.15 광복 후에는 고향에 머물렀다. 1963년을 전후하여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사망연도가 1995년임이 밝혀졌다.         시인 백석, 그는 누구인가?     우원호(도서출판 정인문학 主幹)     시인 백석(白石). 그는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인해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 신음하던 1912년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마을에서 아버지 백시박과 어머니 이봉우 사이에서 3 남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그가 태어나서 얻은  호적상의 이름은 백기행이다. 우리들이 백기행이란 이름은 모르지만 백석이란 이름에 오히려 익숙한 까닭은 그의 고 향,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를 다니면서 그가 문학에 뜻을 두고 필명을 백석이라 개명한 뒤, 1955년 북한에서 사망했을 때까지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가 유명한 문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버지와 그가 다닌 그의 모교, 오산학교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알려진다. 수원 백씨 17대손인 그의 아버지는 정주(定州)에서 서양의 신문화에 일찍 눈을 떠 백석이 7살이 되던 해애 오산소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사실, 정주는 중국하고 지리적으로도 그리 멀지 않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던 탓 에 서양의 신문화를 쉽게 접할 수가 있었다. 그 때문에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나왔는 데 국문학사는 물론, 시문학사에도 에 길이 남을 춘원 이광수와 김억, 김소월 등이 이 고장의 출신이다.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 선생이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동하여 세운 학교로 서 수많은 문학인과 예술가를 배출시킨 학교로도 유명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민족시인 김소월(金素月)과 '소나기'의 소설가 황순원과 가장 한국적인 작가인 동 시에 가장 현대적인 작가로 평가받는 화가,이중섭(李仲燮)이다. 백석은 13살에 오산보통학교에 입학하고 18살 무렵에는 오산고보를 졸업하여 그가 일본으로 유학가서 사학의 명문, 야오야마(靑山) 학원에서 대학생활을 하기 이전까 지 오산학교 교정에서 대부분의 학창시절을 보냈다. 오산고교에는 매우 훌륭한 선생들이 많았으나 김소월의 스승이었던 김억과 그리고 이광수가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백석이 재학시에 고당 조만식 선생이 교장 선생으로 있었는데 백석은 그의 집서 하숙을 했었다고 전해진다.  그가 문학에 대해 남다른 소질을 보이고 자신의 인격을 다듬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와 같이 훌륭했던 스승들과 선배들의 밑에서 공부했던 이 무렵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려 하였지만 가정의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포기 하고 집에서 쉬면서 문학에 심취하여 창작활동에만 전념했다. 이 시기에 그는 소설을 써서 그 이듬해인 1930년 1월 조선일보에서 공모한 제2회 『신년현 상문예 공모』에 응모하여 『그 母와 아들이 』 당선되며 문단에 데뷔했다. 『신년현상문 예 』라고 함은 오늘날에 신춘문예를 의미한다. 『신년현상문예』소설이 당선되며 사실상 그의 인생이 바뀌었다. 정주에서 금광으로 크게 부자가 된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사들여서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의 후원을 받아 그는 일본 도쿄에 있는 청산학원로 유학가서 1930년부터 4년동안 영문학을 전공했다. 오산 학교 시절에는 반친구들 40명 중에 10등을 할 만큼 공부에 별다른 재능을 보이지 않던 그가 대학에선 영문학을 전공하면서도 러시아어는 물론, 프랑스어 등의 외국어에 상당한 실력 을 보였다고 한다.영어회화에도 능통하여 그는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취직해서  직장생 활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소설을 쓰기보다는 오히려 외국서적 번역에만 몰두했다.그의 영어 실력은 훗날 함흥에 있는 영생고보에서 영어교사로 재직당시 학생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얻으면서 명성이 자자했을 정도였다. 그런 때문인지 그는 소설에도 시작에도 크게 관심을 안보이고 외국서적 번역에 날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 처음에는 체홉 등이 쓴 러시아의 소설과 산문들을 번역하였으나 시릉 번역하기 시작하며 번역하는일을 점차 줄이고 창작시에 전념했고 조선일보에 「定州城」이란 자신의 창작 시를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이때부터 탁월한 시의 재능을 보였다. 그 이후로 그가 남긴 소설로는 「마을의 遺話」와 「닭을 채인 이야기」라는 제목의 두 편의 단편소설이다.   山턱원두막은뷔였나 불빛이외롭다 헌깁심지에 아즈까리기름의 쪼는 소리가들리는 듯하다 잠자리조을든 문허진城터 반디불이난다 파란魂들같다 어데서말있는 듯이 크다란山새한마리 어두운 곬작이로난다 헐리다남은성문이 한을빛같이훤하다 날이밝으면 또 메기수염의늙은이가 청배를팔려올 것이다   - 「定州城」의 전문 -     위의 시를 발표한 뒤에도 조선일보에서 발행했던 「朝光(조광)」이란 잡지에  햔토색 이 짙은 ’統營(통영)' 등의 서정시를 계속해서 발표했다. 이 시절에 그는 그 당시 문단 을 이끌었던 임화,박용철 등의 여러 문인들과 교류했다. 그들 모두가 백석의 시에 관 심을 보였고 이때부터 백석은 시문단을 주도하는 시인으로 서서히 자리를 굳혀갔다. 그러던 그가 시인의 입지를 더욱 굳힌 것은 그의 첫시집 『사슴』을 발간한 뒤였다.조 선일보사에서 직장일을 하면서도 더욱 많은 시를 써서 발표했고 점점 더욱 많은 문인 들과 사귀었다. 그때 그가 사귀었던 대표적인 문인들은 신석정과 함대훈 등이었다. 그 시기는 '향수'의 정지용과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김영랑 시인이 첫시집을 내던 때 였다.사실, 그 당시 그는 회사에서 바쁘게 보냈지만, 문학에만 전념함으로서 그에게 있 어서는 그의 문학이  참으로 내실을 기한 매우 소중한 시기였다. 그리고 시집 '사슴' 발표이후 그는 오늘날의 표현으로 문단에서 조명받는 스타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일보사에서의 2년간의 생활을 접고 함흥에 있는 영생고보호 직장을 옮겼다. 그가 그곳에서 맡은 임무는 영어교사였다.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영어는 물론, 외국어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게다가 소설가요, 시인으로  학생들과 다른 선생들로부터  대단한 관심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는 외국어나 문학보다 연극,  미술, 체육 등의 과목에 더욱 관심을 보 이며 학생들을 지도했다. 연극반과 축구부의 학생들과 친구처럼 절친하게 지낼 만큼 학생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학생들의 재능을 키우는데 주력했다. 교사로서 생활하며 자긍심을 느낀 것도 이때였다. 그는 바쁜 교직생활에도 시창작을 게을리하지 않고 꾸준하게 시를 썼다. 사실 시집 『사슴』에 발표된 시들은 거의 사물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에 그쳤다면 함흥에서 교직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자신을 주체로 한 내면세계를 강조하 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의 시셰계에 변화가 생긴 무렵으로 그의 연보(年譜)를 보아 도 그에게는 나름대로 매우 의미있는 시기로 평가된다. 그러나, 함흥에서 2년동안 교사로 재직시에 그에게는 또 다른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기생 자야와의 만남과 사랑이었다. 이때 백석의 나이가 26살이었고 그녀의 나이는 22살이었다. 자야의 본명은 김영한. 그녀는 1916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사별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다가 어머니가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그녀 의 집안은 재산을 모두 날리고 거리에 나앉는 신세가 되자 16살에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서 기생이 되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정악계(正樂界)의 대가로 이름을 날리었던 하규일의 문하생이 되어 창과 가무를 배웠다고 한다. 문학에도 재능을 보였던 그녀는 게녀의 생활을 하면서도 '삼천리 문학'에 수필을 발표하여 인텔리 기생으로 불리었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을 접하면서 문인들과 사귀었다. 그러던 중, 그곳을 자주 찿던 조선어학회의 해관 신윤국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신윤국은 1894년(고종 31년) 황해도의 연백(延白)에서 태어나서 1917년 미국으로 건너 가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에 회원으로 미주 지역의 항일 운동에 투신한 이후,도 산 안창호가 이끌었던 흥사단(興士團) 활동했던 인물이다. 뜻한 바가 있어 귀국을 결심하고 고국으로 되돌아온 그는 1932년  『국사강의록(國史 講義錄)』을 간행했고,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에도 참가해 항일운동과 더불 어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다시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에 가입하여 『조선어사전』 편찬 재정위원으로 활약 했다. 그의 후원으로 도쿄에서 공부를 하다가 스승으로 섬기던 신윤국이 동우회사건(同友 會事件)과 관련해 동우회원 181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귀국했다. 함흥경찰서에 투옥되어 잔혹한 고문을 받고 있는 그를 어떻게든 만나려고 하였으나 사상범(思想犯)의 이유로 면회가 안되자 그녀는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않겠 다고 결심하고 함흥에 눌러앉게 되었다. 그녀는 고심하던 끝에 함흥에서 기생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찿아오는 사람중에 법조 인이 오면 그에게 부탁해서 신윤국을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끝까지 면회의 허락이 안되 만나지 못했지만, 영생고보 선생들의 회식자리에 나갔다가 백석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첫눈에 반해버린 백석은 학교에서 퇴근하면 그녀의 하숙방으로 달려가서 그녀와 밤을 지내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둘사이는 사실상의 부부관계라고 해도 좋을 만큼 뜨거웠다. 자야라고 하는 이름은 백석이 그녀에 붙여준 이름이다.어느날 그녀가 서점에 들러 '당 시선집(唐詩選集)을 사왔는데 이태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읽다가 '자야(子夜) 라는 아호를 지어준 것이다. 달콤했던 그들의 사랑은 그녀가 먼저 서울로 떠나면서 백석과 그녀는 서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얼마나 사랑하였을까 둘은 서로 보고 싶어  하루속히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어느 날, 조선축구학생연맹전 조 대표선수 인솔 교사로 발탁되어 그들을 서울로 인솔 하는 기회가 생겼다. 그런데, 그는 선수들은 여관에 투숙시킨 다음 자신은 청진동의 자야집에 가서 둘만의 사랑을 불태웠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학교서는 그에게 책임을 물어 사임을 강요했고 사랑하는 여인 때문 에 백석은 사표를 제출하고 상경했다. 그는 결국 청진동 그녀의 집에서 살림을 차리고 동거에 들어갔다. 다시 지금의 서울인 경성으로 되돌아와 조선일보사에 재입사했다.그는 거기서 조선일 보 계열사인 「여성」誌의 편집일을 맡았는데 이는 예전에 했던 일이고 문학에 관련 된 일이라서 모든 일이 익숙했다. 그들은 마치 부부처럼 생활하며 서로가 없으면 하루라도 못살 것첨럼 행복하게 사는 듯했다. 그러나, 백석의 부모는 아들이 기생과 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서로 헤어지게 만들 려고 아들에게 다른 여자와 결혼토록 강요했다. 부모의 강요에 못이겨 그는 고향으로 가서 정혼녀와 혼인했다. 마지못해 혼인은 했지만 백석은 그녀와 첫날밤도 치르지 않 은 채 도망치듯 고향집을 빠져나와 자야의 곁으로 돌아갔다. 그해 말에 느닷없이 다시 회사를 그만두고 이번에는 북만주의 신경, 오늘날의 長春(장 춘)이란 곳으로 홀연이 떠나갔다.  신경으로 떠나갈 때 그녀에게 함께 가서 살자고 하였으나  자신이 백석의 장래를 가로 막고 있다는 생각에 괴롭지만 백석을 혼자 보내게  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사랑하기 때문에 떠나보낸다는 유행가의 가사처럼 서로 헤어지게  되었는데  그들간의 사랑은 아쉽게도 그렇게 끝이 났다. 시인 백석과 그녀가  격였을 이별의 고통 이 짐작된다. "그런데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 이별이 될 줄 몰랐다"고 1995년 출간한 ‘내 사랑 백석’(문 학동네)에서 그렇게 회고했다. 백석이 그녀와의 이별을 아쉬워해 그의 그런 심경을 담아 쓴 시가 바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디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全文      짐작컨데 그다지 많지 않은 이십대의 시절을 떠돌이로 생활했던 것은 그 당시의 시대 상황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백석의 결혼관에 대해 부모들의 봉건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부모와의 마찰을 빚은 것도 하나 의 이유가 되겠지만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에서 벌인 남경대학살 등의 아시아 전역에서 침략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국내서는 말할 것도 없이 유학생들까지 학도병의 이름으로 강제로 징집하여 전선으로 내보내던 시기라서 인테리의 입장에서 나라없는 설움까지 격으면서 남모 르는 고민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그는 펜을 놓지 않았다. 그는 북만주의 신경서도 여전히 시를 써서  『문장』등의 문예지를 통해 오늘날에 시인이나 시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 랑받고 있는 「북방에서」와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의 시를 잇달아 발표했다. 그 중에서 그의 「북방에서」는 일제말의 식민지 현실에 대한 암울함과  무력하게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자책감을 보여주는 시이다. 이 시의 주체는 한민족의 역사가 시작되던 때부 터 현재까지 살고 있으면서 민족이 함께 격는 역사적 일들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시는 백석이 만주북방을 떠돌면서  그의 역사에 대한 죄채감을 느끼 면서 쓴 시이다. 특히 지난 과거의 역사에 대한 반성을 , 민족의 역사와 함께 살아가는 자신의 입장에서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식민지 현실에 대한 슬픔을 이겨내려하는 시인 의 의지와 동시에 무력함에 대해 자책하는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를 숙신을 발해를 여진을 요를 금을  흥안령을 음산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든 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드든 말도 잊지 않었다  오로촌이 멧돌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든 것도  쏠론이 십리길을 따러나와 울든 것도 잊지 않었다   나는 그때  아모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아츰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그동안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금은보화는 땅에 묻히고 가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 이리하여 또 한 아득한 새 옛날이 비롯하는 때  이제는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나는 나의 옛 한울로 땅으로―나의 태반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해는 늘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 북방에서 」전문      그리고 「흰 바람벽이 있어」역시 이국에서 유랑생활을 하며 격고 있는 자신의 심중을 조국의 어머니와 가족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현실, 즉 일본에 빼앗긴 조국의 현실을 한탄하며 그 슬픔 을 노래한 시이다. 이 시 전반에서 비록 현실은 슬프지만 자신이 격고 있는 고독과 슬픔을 이겨 내려하는 그의 삶의 의지를 엿볼 수가 있다.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 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 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아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흰 바람벽이 있어」전문   그는 이와 같이 시를 쓰면서도 한편으로 토마스 하디가 쓴 「테스 」등의 여러 소설들을  계속 번역하여 「朝光」에 발표하며 중국서도 그의 건재를 과시했다. 그러나 그의 그곳서의 삶이 순탄했던 것만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북만주에 건너가서 신경시의 東三馬路 시영주택 '황씨집'에 에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삶은 떠돌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어느 관청에 근무했던 그는 창씨개명을 하라는 일본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직장을 다시 그만두고 새로운 직업을 택했는데 측량기사 보조 등의 일과 만주 안둥[安東]으 로 옮겨 세관업무를 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살던 신경이란 곳이 그 옛날 북만주 일대까지  호령했던 고구려의 영토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을까? 그 영토를 중국에게 빼앗기고 조선마저 일본에게 빼앗겨서 자신이 나라없는 백성 이란 사실에 자신이 태어난 조선과 유학생활을 위해 지낸 일본과 지인들을 멀리하 고 그곳 중국땅까지 떠돌면서 느꼈던 비애와 슬픔, 그리고 감회가 소설가와 시인이 란 입장에서 특별히 남달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차라리 그에게 있어서 형별이요, 고통이 아닐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만주 등을 떠돌면서  유랑생활을 자처했던 것은 일제의 동화정책을 반대하고 저 항했던 그의 소신있는 애국심의 발로는 아닐까? 마침내, 1945년 8월15일 조국이 그토록 기다리던 해방을 맞이했다. 당시 조선사람치고 기뻐하지 않았을 사람이 어디 있었겠냐마는 백석도 무척이나 기뻐했을 것이다. 그는 설레이는 마음으로 즉시 귀국했다. 그런데, 그는 왜 고향으로 바로 가지 않았고 사랑했던 여인을 찿지도 않고 거처를 신의주로 옮겼을까? 그것이 아직까지 의문으로 남는다. 그것은 아마도 결혼을 강요했던 부모와의 불화와 자야와의 원치 않던 이별이 못내 그를 괴롭혔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기에 그는 그의 대표작으로도 손꼽히는 시의 하나인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을 『學風(학풍)』誌에 발표했다. 말하자면, 남신의주 유동 마을  박시봉이란 사람의 집 방에 살면서 쓴 시로 짐작된 다. 고향 정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신의주서 살면서 가족과 고향을 그리면서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는 시이다.해방되기 이전에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서 탄압과 감시 속에 떠돌이 생활을 했다가 해방을 했는데도 자신이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남의 집에 더부살이 하는 자신의 처지를, 마지막 연의 갈매나무를 보며 자신의 삶을 반 성하고 있다. 또한 이 시는 서양문물 유입으로 가족이 뭉쳐 살던 대가족 중심의 우 리나라  사회가 핵가족 사회로 점점 붕괴되는 사회상을 비판하는 시로도 평가된다. 어쨌거나 그는 그가 쓰는 작품마다  고향의 지명이나 이웃사람들의 이름, 그리고 고향인 평안남도 정주를 사투리를 넣어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를 많이 썼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全文   백석은 신의주에 살았지만 그리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고향으로 가기로 결심을 굳힌 뒤에 그는 곧장 정주, 자신의 본가로 돌아갔다.미물인 짐승들도 죽을 때는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는 귀소본능처럼 백석 자신도 그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을 한시 라도 잊지 않고 살았었던 그였기에 귀향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 이후의 그의 행각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해방되던 그해 12 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남북한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어 38도선을 경계로 이남에는 미국이, 이북에는 쏘련의 통치하여 남한에는민족주의 정부가 그리고 북한에는 사회주 의 정부가 들어섰다. 그 당시에 윈스턴 처칠이 미국을 방문해서 쏘련은 '철의 장막(iron curtain)으로 가리 워져 있다' 라고 말한 그의 연설처럼 쏘련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혀 알 수 없을 만큼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철저하게 통제했던 쏘련의 통치를 받게된 뒤부터 백석은 남쪽의 문인들과 교류가 없었다. 고향에서 계속 글을 썼다고는 하나, 공산당 산하에 있는 조선작가동맹의  『조선문학』 에만 작품을 발표했다. 해방이전에는 동인 등의 형식으로 어떤 문학단체에도 가담하지 않고 모더니즘 성향의 토속적인 서정시를 주로 쓰며 탈정치와 탈이념적인 시세계를 펼쳤던 그가 북한에 머물 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 성향을 표방했다. 그가 타계하기 이전까지 그는 매월 『조선문학』에 자신의 작품을 실었는데 아동문학 평론, 창작시와, 수필, 번역시를 소개했다.  그는 아동문학작품과  관련해서 『조선문학』 1956년 5월호에 실린 「동화문학의 발전 을 위하여」와1956년 9월호에 실린 「나의 항의, 나의 제의 : 아동시와 관련하여, 아동 문학의 새 분야와 관련하여」 그리고 1957년 6월호에 실린 「큰 문제, 작은 고찰」라는 제목으로 세 편의 평론을 실었는데 여기서도 백석은  아동문학은 교양과 선전의 무기 로서 사회주의 혁명의 한 부분을 담당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비공식적으로 그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1961년까지 그는 시나 수필 등에서도 자신이  번역한 외국의 작품에도  사회주의 이념을 지지하는 글을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일설(一說)에 의하면, 1950년 6월25일 일어난 한국전쟁 당시 백석은 중국으로 건너갔다는 설과 고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북진했을 때는 국군으로부터 정주 군수가 되어 줄 것 을 제의받았다는 설도 있지만 , 모두 확인되지 않은 설에 불과하다. 또한 해방이후 북한의 자신의 고향에서 1963년 그가 사망하기까지 사회주의 체제를 지지하는 글을 시와 수필 등의 여러 장르에 걸쳐 『조선문학』에만 발표했다는 것도 의문이다. 백석 시인이 북한에서 생존시에 『조선문학』을 통해 1963년 그가 사망하기 두 해전인 1961년 까지 작품을 발표했다는 북한의 주장과는 달리 최근 연구가에 의하여 밝혀진 사실은 그의 사망 연도는 북한에서  발표한 1963년보다 훨씬 이전인 1955년도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과연 어느 쪽이 진실일까? 분명한 사실은 북한의 체제가 남한의 체제와는 다르다는 점이다.훗날 그와 관련한 모든 사실들 이 명명백백(明明白白) 밝혀지기 전까지는 그를 변절자로 매도해선 안된다. 이미 밝혀진 일제시 대 일본에게 협조했던  친일파 문인들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무능했던 조선의 정부를 무력으로 위협해서 국권을 빼앗고 36년간을 극악무도한 만행을 일삼으 며 민족을 말살하려 했던 일본! 해방이 되었는가 싶었는데 이번에는 외세에 의해 남북이 분단되 고 쏘련의 사주에 의한 저질러진 동족상잔의 6.25를 격으면서 지성인들, 특히 문인들이 격어야 만 했던 정신적인 갈등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북한의 발표대로 백석이 사망을 했는지 아니면 아직까지 생존해 있는지는 알 수없다. 물론, 생존 해 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만일 그가 생존해 있다면 올해 그의 나이가 94살이란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시대적인 배경에도 좌절하지 않고  토속적이면서 향토적인 우리민족 고유의 시언어로 자신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구축하며 서정시를 썼던 시인 백석! 어느 문예지나 문학파에 가담하지 않고 민족혼을 일깨웠던 시를 써던 시인 백석! 그의 대표시인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과 『나와 나타샤와 희 당나귀』와 『흰 바람벽 이 있어』외에『통영(統營)』,『고향』,『북방(北方)에서』,『적막강산』등의 다수의 시들 은 오늘날 많은 시인들과 평론가 그리고 대학에서 학생들에 의해 평론이나 논문으로 발표 되는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제 그의 시는 시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널리 애송되고 있다. 백석 시인! 그는 이제 한국시 100년史에 있어 문단의 또 다른 큰 별임에 틀림없다. ====================================///  백석의 시를 만났다. 아니 백석을 만났다고 하는 것이 옳다. 시는 바로 그 사람이니까. 표지에서 그의 빛바랜 흑백사진을 보면 머리 모양이 참 특이하다. 그 옛날에 이런 머리를 할 수 있는 그의 감각이 얼마나 현대적인지 옛사람이란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아 반갑기 그지없다. 그의 시를 읽으면서 맨 처음 떠오르는 단어는 격조였다. 그의 시는 다른 작품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격조를 느끼게 했다.  신경림 시인은 백석의 시집 을 읽은 저녁, 밥도 반 사발밖에 못 먹고 밤을 꼬박 새웠노라고 고백했다. 신경림 시인처럼 백석의 시 한 편이, 아니 시 한 연, 한 행이 주는 전율을 나는 뒤늦게야 알았다. 그 전율이 주는 행복을 누리면서 나 역시 밤을 밝혔다. 백석의 시는 시어가 순수한 우리 고유어로 되어있는데 얼마나 맑고 투명한지 읽으면 가슴에 깊은 떨림으로 남았다. 문학의 위대한 힘을 나는 알고 있다. 시 한 편 때문에 삶을 다시 찾은 사람들, 책 한 권 때문에 살아남은 사람들 이야기는 문학의 힘을 웅변으로 말해주었다. 백석의 이름 앞에는 천재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다. 백석의 천재성을 먼저 깨달은 사람은 노리다께 가스오라는 일본 시인이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의 15년 정도를 당시 조선에서 보내 한국 문인친구들을 많이 두었던 그는 일본 후꾸이현 최고의 시인이라고 하는데 그의 시 에서 "뛰어난 시인 백석, 무명의 나"라고 백석을 노래하고 있다. 노리다께의 인품은 매우 고결하고 덕이 있어 많은 문인들과 예술인들이 그의 도움을 받았는데 화가 이중섭은 그의 도움으로 일본인 여성과 결혼했다고 한다.  백석의 시어를 정주 사투리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사투리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쓰지 않아 묻혀있는 우리 고유 언어에 낯선 우리에게 백석의 시는 각주를 보면서 읽어야 하지만 토속적인 시어로 전혀 어렵지 않은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눈앞에 그림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바람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멍멍이 짓는 소리도 들리고 구름이 둥둥 떠 있기도 하고, 시냇물이 흐르기도 한다. 이토록 아름다운 시를 불행하게도 우리 세대는 만날 수 없었지만 2004년, 수능 언어영역에서 사상 처음으로 복수정답을 인정해야 했던 이라는 시를 통해 비로소 널리 알려지게 되어 그나마 다행스럽다.  그의 연보를 보면 1957년 46세까지의 활동이 나와 있고 1963년 52세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이 소식을 들은 일본의 시인 노리다께 가스오는 백석을 추모하는 시를 발표했다고 하는데 실제 사망은 1995년 84세로 나와 있다. 그렇다면 1963년에서 1995년까지 32년이라는 그 긴 세월동안 동안 그는 무엇을 했을까. 그동안 빛나는 시들을 얼마나 많이 쏟아냈을까. 그 시들은 어디 있을까?  북한은 계관시인 칭호제도가 있다고 한다. 지난 2000년 남북이산가족 첫상봉 때 북쪽의 계관시인이었던 오영재 시인이 가족을 찾아 내려왔지만 등 그의 시 몇 편을 보면 토속적이거나 서정성은 기대만큼 높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 그토록 격조 높은 시를 썼던 천재시인 백석은 어떻게 되었을까 싶어 찾아보니 30대에 연금중인 고당 조만식 선생을 적극적으로 도왔고, 해방 후에는 우익문인으로 활동하다가 상당한 곤란을 겪어 나중에는 북한의 문인인명록에서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수십 권에 이르는 러시아 문학을 번역하고 창작 집필은 금지당할 정도로 북한문단에서 철저히 소외되었다 한다. 천재시인에게 창작금지는 얼마나 잔혹한 형벌인가.  고 이응로 화백은 감옥에서 끌어올라 주체할 수 없는 창작 욕구를 식사때 나오는 음식을 먹지 않고 아껴놓았다가 간장이나 밥알로 풀어냈었다. 불타오르는 자신의 창작력을 지켜내려 몸부림쳤던 그 흔적들을 보면서 인간이 육신은 가두어도 영혼은 가두지 못함을 보았었다. 백석은 그 고통의 기나긴 시간들을 어떻게 견디어내다 눈을 감았을까. 생각할수록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래서인지 남아있는 시들이 더욱 더 소중하게 다가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라는 시를 읽고 있으면 마치 파노라마 사진을 보고 있는 듯하다. 전반부에서는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지나가는데 후반부에서는 시인 자신의 얼굴이 지나간다. 그리고 마치 자신의 운명을 말해주는 듯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어떻게 이런 시상을 떠올려 시를 쓸 수 있을까. 이 부분을 읽고 있으면 천재시인이라는 말이 실감나게 한다. 마치 누군가 읊어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 적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시인과 평론가 등 문인 120명으로부터 2년 연속 '지난 1년 가장 좋은 시'로 뽑힌 시를 쓴 문태준 시인은 그 시를 쓴 뒤 탈진할 정도였다고 고백했다. 백석도 그렇게 힘들게 시를 썼을까. 아니면 떠오르는 시상을 그대로 한 번에 완성했을까.   (앞부분 생략) -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이런 시인의 천재성을 일찍이 알아챈 일본의 노리다께 가스오는 백석 앞에서 자신은 무명이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그동안 내가 이름도 몰랐던 시인 백석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그가 자야라고 불렀던 그의 연인 김영한 때문이었다. 김영한은 1996년, 고급요정이었던 대원각(부지 7,000평)을 법정 스님에게 조건 없이 시주하여 길상사를 지을 수 있게 해 세간의 관심을 모았던 여인이다. 사찰은 일 년 뒤 완성되었고, 그녀는 시주하고 3년 뒤인 1999년 83세로 이 세상과 하직했다. 대원각은 기부 당시 재산가치가 1000억 원대였다고 한다. 백석은 북에서 1995년 사망했으니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한 그들은 영적으로 무언가 연결이 되어있었던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법정 스님은 송광사 불일암에서 지낼 때 겨울이 너무 추워 미국에 있는 사찰에 머물면서 책을 번역하고 설법을 하며 지냈는데 그때 김영한 보살을 만나 대원각을 사찰로 만들고 싶다는 제의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말한 대로 조건 없이 시주했고 사찰은 완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얼마나 깊은 불심인지 그녀를 보면서 감탄했었다. 또한 그녀로 하여금 이런 깊은 불심을 자아내게 만든 법정스님의 그릇을 다시 보게 되었다. 사람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 참으로 놀랍고 감동적이었다. 그녀의 소식을 접하면서 나도 이런 진정어린 신뢰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며 살고 싶었다. 길상사는 올해로 개원 12주년을 맞았는데 법정스님은 해마다 12월 14일 개원일에 가까운 일요일에 봉행되는 개원법회에 참석해 대중법문을 해왔으나 올해는 불참했다고 한다. 대중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법정스님은 폐암으로 수차례 수술을 받았으며 현재는 와병중으로 제주도의 한 신도 집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를 또 한 번 놀라게 한 것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녀가 한 말이었다. 기부한 1000억이 아깝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1000억은 그 사람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녀가 말한 그 사람, 그는 바로 백석이었다. 김영한, 그녀는 최고의 천재시인 백석이 사랑했던 연인, 자야였다. 그러나 봉건시대의 길목에서 20대에 만난 그들은 비련의 연인들이었다. 백석은 그녀를 위해 란 시를 썼다. 시에서는 슬픔이 느껴지지 않지만 3년 동안 서로를 뜨겁게 사랑했던 그들은 남과 북으로 헤어졌다. 그리고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를 마신다  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전문 자야는 '내 사랑 백석'이라는 저서에서 "백석의 시는 자신에게 있어 쓸쓸한 적막(寂寞)을 시들지 않게 하는 맑고 신선한 생명의 원천수였다"고 전한다. 자야가 죽기 열흘 전 기운 없이 누워 있는 여사에게 기자가 "다시 태어난다면 어디서 태어나 무엇을 하고 싶은가" 물었더니 영국쯤에나 태어나서 문학을 하고 싶다고 했다 한다. 시를 쓰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시를, 사람을 온 가슴으로 사랑할 줄 알았던 그녀의 유해는 유언대로 화장되어 한겨울 눈이 하얗게 쌓인 길상사 마당에 뿌려졌다. 백석이 사랑한 자야를 노래한 시처럼 하얀 겨울에.  백석의 약력을 보면 1918년 오산소학교를 거쳐 오산중학교를 마치고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으로 일본 靑山學院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여성>에서 편집을 맡아보다가 1935년 詩 정주성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1936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만주 신징[新京]에 잠시 머물다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영어교사로 있었다.  백석이 자야라 불렀던 연인 김영한은 춤추고 노래하는 기생이었다. 부친을 일찍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한 그녀의 집안은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알거지가 되어 거리로 나앉게 되었는데 이때 김영한은 열여섯 살의 나이로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는데 교사들의 회식 장소에 나갔다가 함흥영생여고 영어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백석과 운명적으로 만난 것이다.  두 사람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시대 환경은 냉정해서 고향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강제로 백석을 자야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결혼을 시키지만 백석은 자야 품으로 다시 돌아간다. 이런 식으로 강제 결혼을 하고 다시 도망치기를 세 차례. 부모에 대한 효와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갈등한 백석은 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야에게 만주로 같이 도피하자고 설득하지만 자야는 이를 거절, 백석은 혼자서 만주 신경으로 떠났는데 남북이 분단되어 이것이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영원한 이별이 되어버렸다.  자야(子夜, 본명 金英韓) 여사는 1997년 창작과 비평사에 2억 원을 출연하여 백석문학상을 제정하도록 했는데 1997년 10월에 결성된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가 그 첫 사업으로 백석 시인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백석문학상을 제정해 첫 시행은 1999년에 했다. 상금은 1000만원이며, 매년 8월을 기준으로 2년 내에 출간된 뛰어난 시집에 시상하는데 제1회는 이상국·황지우 시인이 수상했으며, 올해는 안도현 시인이 제11회 백석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지난달에 수상했다.  언어는 그 민족의 혼을 품고 있다. 그래서 일제는 우리 언어를 말살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의 시에는 정주 토속어를 그대로 쓰고 있어 향토색이 물씬 풍긴다. 언어유희도 없이 담백하다. 이것은 일제 강점기에 모국어를 지키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평한다. 백석은 월북한 시인이 아닌데도 월북 작가로 분류되어 그의 작품은 모두 금지도서가 되어 우리 세대는 단 한 번도 만날 수가 없었다. 분단의 비극이 개인사뿐만 아니라 민족문학사에도 깊은 상처를 남긴 것이다. 그는 남북 양쪽에서 모두 잊혀졌던 비련과 비운의 천재 시인이었다. 1987년 해금되고 그에 대한 연구가 발표되면서 이동순 교수가 창작과 비평사에서 '백석 시선집'을 펴내자 자야 여사가 연락해와 그들의 슬픈 사랑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백석을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평생을 간직하며 살다가 죽기 전에 세상에는 천억 원이 넘는 대사찰을, 연인에게는 그의 이름을 영원히 기릴 수 있는 백석문학상을 남겨주고 간 아름다운 여인, 김영한. 그들의 슬픈 그러나 아름다운 사랑은 남북분단도 막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남북분단이 그의 문학 또한 막을 수 없었더라면 우리나라의 시문학이 얼마나 더 성큼 발전했을까. 생각할수록 분단의 비극이 곳곳에 남긴 손실과 상흔의 슬픔에 가슴이 아파온다. 가장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이었던 백석은 자신의 시처럼 이 세상에서 하늘이 가장 귀해하고 사랑한 시인으로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남겨졌다. 그의 시와 비련의 사랑, 그리고 그의 연인 자야의 고결한 사랑은 세월이 가도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살아있어 우리들의 가슴을 촉촉히 적셔줄 것이다.     (차례대로) 길상사의 극락전, 법정 스님의 유골이 뿌려진 공간, 4층 돌의 정원에서 만나는 민불, 길상사의 길상화 공덕비와 사당, 길상사 범종각_문일식 촬영     서울 성북동 길상사 무소유의 삶을 기억하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 법정 스님은 글을 통해 많은 독자에게 강한 울림을 선사한 분이다. , 등 저서 20여 권을 남긴 법정 스님. 그는 2010년 입적했지만, 그의 맑고 향기로운 흔적이 성북동 길상사에 남아있다. 길상사는 법정 스님의 를 읽고 감명받은 김영한의 시주로 탄생한 절집이다. 창건 역사는 20년 남짓하지만, 천년 고찰 못지않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 길상사의 길상화 공덕비와 사당. #“대원각 1000억원은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 서울 성북구 선잠로5길에 있는 길상사는 법정 스님이 입적한 곳인데 시인 백석과 그가 사랑한 자야(김영한)와의 스토리도 유명하다. 길상사는 원래 대원각이라는 요정으로 군사독재 시절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3대 요정으로 이름을 날렸다. 김영한은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아 1000억원에 달하는 대원각 재산을 법정 스님이 소속된 송광사에 시주, 2년동안의 개보수를 거쳐 길상사가 탄생했다. 시인 백석과 자야의 사랑 이야기가 담긴 성북동 길상사. 한국관광공사 제공 백석은 김영한에게 아호 자야를 지어줄 정도로 그녀를 아끼고 사랑했지만 백석이 만주로 떠나면서 결국 사랑은 결실을 보지 못했다. 김영한이 대원각을 시주할 때 “그까짓 1000억원은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고 한 말은 유명하다. 김영한은 1999년 길상사 길상헌에서 눈을 감았는데 뒤편에는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새겨져 그들의 애절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 죽기전까지 백석을 그리워한 김영한은 이 시처럼 “내가 죽거든 눈이 많이 내리는 날 유골을 길상사에 뿌려달라”고 유언했다...  
7437    "그까짓 1000억, 그 사람 '시' 한줄만 못해"... 댓글:  조회:2728  추천:0  2019-11-18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과 그의 연인 자야의 사랑 19.01.31 l 임영열      
7436    "제 핏줄을 이어가며 건사한다는것은..." 댓글:  조회:2662  추천:0  2019-11-15
형님전 상서 2019년 11월 14일  작성자: 김인섭                                                 /대련 김인섭  형님,이번 한가위를 부모님 선산에서 보내며 보고 느낀 바를 적어 올리겠습니다..   그날 오전 부모님들께 제사상을 올리면서 작년 이맘때 영생의 길에 오르신 어머니를 아버지 유택에 합장하고 형님과 나란히 엎드렸던 기억이 새삼스럽습니다.나이가 말미암인가요 어쩐지 지난날 굶주리며 헐벗어 배고프며 춥던 시절의 모진 사연들이 자꾸 눈앞에 떠오르며 우울해 지고 있습니다.부모님들이 우리 가족을 이끌고 보릿고개의 엉키고엉킨 가시덤불을 헤가르며 지어낸 만가지 고생담들이 가슴에서 교차되며 퍼그나 먹먹해 지었습니다.하산하는 산길에서 허허로운 벌판에 외홀로 서있다는 심란한 기분을 도저히 삭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날 제일 가슴을 저릿하게 하는 꼴불견이었다면 주위 선산에 온 제꾼 거의가 60대 혹은 70대인데 벌초객 중 젊은이의 모습은 눈을 씻어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그러나 간혹 로구(老躯)를 이끌고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어렵사리 올라오신 존장(尊长)들과 갈 길 바쁘신 로인들이 가을 옷자락을 여미며 조상 영전에 엎드린 모습은 보기에 숙연했습니다.각자가 당신의 예정을 짐작하는 듯 숙배(肃拜)를 올리는 자태에 파란이 많았던 지난 세월의 세례가 슴배었다고 류추해보니 무척 가긍해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형님,지금 문중벌초(门中伐草)의 분위기가 옛날과 완연히 달라졌습니다.화장이 법제화 된 현실에서 더 이상의 분묘를 들일 장소가 없다는 사실은 말말고 유구한 나날을 두고 전해오던 장묘의례(葬墓儀禮)가 사라지지 않는가는 우려를 떨칠 수 없었습니다.제사 흔적이 보이지 않는 묘소가 수두룩하고 가토 벌초를 했다해야 지난 시절과 대비가 안되는데 버려진 묘자리도 숱해였습니다.지난날 이랬다면 곱빼기로 욕을 얻어먹었을 행실이 오늘은 눈앞에 버젓이 펴져서 드러나 있습니다.오래지 않아 고향 산역을 주선하고 산소를 돌볼 후손이 씨가 말라가지 않겠는가 걱정했습니다.물질주의가 팽창하는 오늘 젊은이들에게 민족의 전통과 문화 그리고 핏줄을 근거로 사회를 전승시키고 조상과 고향을 습득시키기가 쉽지않을 같기만 합니다.뒤이어 들이닥칠 전환의 소용돌이는 우리 몫이 될 것만 같아서 당혹하기만 합니다.사뢰기 어려운 말씀입니다만 멀잖아 성묘의 발길마저 끊어질 고향의 선영들을 도대체 어찌 해야 할가요!?   이웃의 젯군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 옛날 번성하던 민족 촌락의 대부분에는 아기 울음소리에 이어 초등학생마저 사라진 지 오래인데 절반도 남지않은 가옥들엔 로년 어른들 아니면 당신을 숙명에 맏겨버린채 최후 행사만을 기다리는 외짝들이 거의 전부라는 이야기입니다.지난날 우리 시대에는 경조사 행사 때 각지의 피붙이들이 모여앉아 서로 안부를 전해가며 뉴대를 맺아가던 미풍은 오늘 젊은이들에게는 생업의 부담으로만 느껴지는 모양입니다.혹시 참여한다 해도 그들에겐 강제로 불려나온 부역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것입니다.세상살이가 치열해진 탓이라 체면차리기조차 어렵다는 세월의 개탄이기도 합니다만 세태가 그러하니 그들을 나쁘다고 일갈(一喝)할 일만이 결코 아닌 같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출산 문제입니다.지금 넘들은 기껏해야 아들 딸 구별없이 하나만 생산하는데 자식이 둘이면 치다꺼리로 되어 자신의 행복을 희생한다는 리유입니다.웰빙이라는 시대의 화두 앞에서  물질 풍요를 자기들만 누리면 된다고 오도된 잘살기 폐해입니다.대를 이을 아들이 있어 행복하거나 없어서 섭섭하다는 생각이 꼬물만치도 없다는 이것입니다.이렇게 몇 세대가 내려간다면 어떤 집안은 절손(絶孫)의 화를 면할 수 있을가요.제 핏줄을 이어가며 건사한다는 가장 기본적 본능이 사라지고 있는 엄중한 현실입니다.이제는 친족들의 혈통 관리가 어려워지고 고향 마을도 선산과 함께 사라질 것은 명약관화입니다..   이제는 자식이 어미나 아비의 성에서 골라 달아도 문제시 되지않는 세월이 되었습니다.자식이 제 어미의 성을 따를 수도 있게 된다 합니다.김씨 피붙이가 리씨의 혈육으로 둔갑하고 내 자손이 생면부지 남의 후손으로 매김되기도 하는 것이지요. 어느새 사촌부터 가파로운 망각 곡선을 타는 오늘인데 형제 자매의 성이 이렇게 갈라진다면 사촌끼리 혼인을 한들 하등의 거리낌이 없는 세상이 아니 될가요!   형님,이제는 지나간 불효의 변명이나 유아적인 슬픔을 거듭하지 않겠습니다.세태 조류인 양 밀려드는 심란한 과제들이 하나같이 벅찬 탓입니다.불평을 부리기엔 너무도 힘겹고 다급합니다.적지 않은 나이를 먹고 이제 남은 시간마저 길지 않다는 각성 때문입니다.유사이래 전례없는 풍요를 누린다고 너나없이 호언하는데 밀어닥친 시대의 소용돌이가 원망스럽습니다.우리 등 뒤로 겹쳐지는 고향마을의 상실과 문화전통이 퇴락하는 정경이 흡사 시대의 종막인 양 비감스러운 것입니다. 하필 이 비운이 왜 우리 인생에 드리워 질가요?아닌게 아니라 원망스럽습니다.   형님,무심코 간지를 짚어 보니 나도 예순갑자를 한 바퀴 돌고도 일곱 고개를 넘었다는 각성에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고 쌓여가는 나이 더미를 느끼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시계 시보판처럼 명백한 인생 단계의 확정 앞에서 아연치 않을 수가 없습니다.사실이 이러히 엄연하니 선배들과 부모님들이 지성으로 꾸려온 우리 민족사회가 우리의 손에서 거덜이 나지 않는가는 자책에 민망하고 무색해 지고 있습니다.   형님 늘 하던 버릇대로 수다가 도를 넘는 같습니다.이 생각 저 생각이 갈피없이 떠올라 되는대로 적었으니 괘념하지 마십시오.세월이 가는 대로 눈치나 보며 살다 보면 새로운 무엇이 나타나고 민족도 새 정착과 부흥을 이루겠지요.우리가 이러쿵저러쿵해도 력사는 그냥 자기 맥을 이어 가겠지요. 남의 뒤를 따르다 보면 새로운 질서야 생겨나지 않겠습니까?   하오나 형님,고향마을의 지난날들이 불현듯 그립습니다.그 공동체 속에서 동잇땀을 흘리던 나날의 어느 것이 그립지 않은 것 없습니다.더구나 농사의 계절마다와 설명절이면 동네 남녀로소가 모여 즐기었고 동네의 관혼상제 때면 좌상 어른들의 주선하에 제 풍속과 전통을 정연히 뽐내던 그 때가 바짝 그리워 지고 있습니다. (끝)
7435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장애인 문학",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355  추천:0  2019-11-14
전용 집필공간 단 한 곳뿐… 작품발표도 바늘구멍 뚫기 사각지대는 어느 분야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정부 정책도 예외가 아니다. 대중의 관심이 다른 곳에 쏠려 있을 때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사각지대가 발견되곤 한다. 장애인 예술에선 ‘문학’이 그렇다. 미술, 무용 등 분야가 미약하게나마 정부 지원을 받고 있는 것과 달리 엄연히 예술의 한 분야인 문학 분야는 정부의 지원과 관심에서 철저히 소외되어 왔다. 대한민국장애인창작집필실 개관식 모습. ◆한 곳뿐인 집필실도 없어질 처지  현재 장애인 문인을 위한 집필 공간은 전국에 단 한 곳뿐이다. 대전에 있는 ‘대한민국 장애인 창작 집필실’이 그것이다. ‘장애인인식개선오늘’이라는 시민단체가 2010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공모한 ‘장애인 전용공간 임차 지원사업’에 선정돼 마련한 공간이다. 그동안 이 집필실을 직간접적으로 거쳐 발표된 책만 35권이다. 발굴한 작가는 51명에 이른다.  정부 지원은 전혀 없다시피하다. 지방자치단체가 주는 지원금만으로는 매월 200만원에 육박하는 집필실 운영비를 대기에도 빠듯하다. 집필실을 운영하는 박재홍 대표는 “장애인 창작 집필실은 중중 장애인이 직접 와서 문학에 관해 토론하고 집필하는 공간인데도 휠체어 리프트 등 장애인 관련 편의시설 설치비 등에 관한 지원을 한 푼도 받을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결국 박 대표가 사비를 털어 운영비를 충당해왔다. 그마저도 최근 공모사업 마감에 따라 임차 지원금을 반납해야 할 위기에 내몰렸다.  장애인 문인들의 창작 결과물을 선보일 매체 역시 크게 부족하다. 현재 장애인 문인들이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통로는 계간 문예지 ‘솟대문학’과 장애인 창작 집필실이 운영하는 출판 지원 프로그램 외에는 없어 바늘구멍보다 좁은 실정이다. 자비로 책을 펴내거나 언론사 신춘문예 같은 높은 문턱을 넘어야 하는 것이다.  장애인 문학 발전을 위해선 그 토대부터 다질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2012년 국내에서 발간된 서적 중 장애인이 읽거나 들을 수 있게끔 대체자료로 변환된 서적의 비율은 겨우 5%에 그쳤다. 시각장애 또는 청각장애를 가진 국민이 접근할 수 있는 자료는 20종 가운데 한 종꼴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이렇듯 열악한 지식정보 접근성 문제가 장애인 문학의 토양을 척박하게 만든다.  대통령 직속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는 올해부터 2018년까지 적용되는 제2차 도서관발전종합계획을 내놓으며 “대체자료 비율을 2018년까지 10%로 늘리겠다”고 약속했다. 이를 놓고 장애인들 사이에 ‘보여주기식 숫자놀음’에 그쳐선 안 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장애인 문인들은 대체자료의 ‘다양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2013년 중봉조헌문학상 대상을 받은 1급 시각장애인 손병걸 시인은 “조금 전문적인 인문학 서적이나 다양한 고전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전국에 단 하나뿐인 장애인 문인 전용 집필실인 ‘대한민국 장애인 창작 집필실’의 모습. 집필실을 운영하는 시민단체 ‘장애인인식개선오늘’의 박재홍 대표는 “단순히 공간만 유지할 게 아니라 의미 있는 성과를 낼 수 있게끔 정부 차원의 지원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장애인인식개선오늘 제공 ◆표절 사각지대에 놓이다  이처럼 열악한 현실을 비집고 세상에 얼굴을 내민 장애인 문인의 작품은 저작권 등 측면에서 법적 보호를 거의 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엉뚱한 작가의 이름이 붙어 온라인을 떠돌거나 고교생이 작품을 도용해 백일장에서 수상을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 때문에 장애인 문인들은 “우리의 권리가 너무나 무시되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린다.  2013년 뇌성마비 장애인 김준엽 시인은 자신의 시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이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으로 제목이 바뀌어 온라인을 떠돌아다니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다. 문장 몇 개를 조금 수정했을 뿐 시의 흐름이나 주제는 완전히 똑같았다.  확인해 보니 그 시는 1995년 한 문예지에 발행인 이름으로 게재됐다. 그해 김 시인은 시집 출간을 위해 한 출판사에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등 자작시들을 보냈다. 이 문제를 조사해 온 ‘솟대문학’ 측은 저작권 반환을 위한 소송을 준비했으나 증거 부족으로 현재는 손을 놓고 있다.  표절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다. 전신마비 장애인 김옥진 시인의 작품 중 하나를 표절했다는 의심을 받아 온 모 대학교수는 잘못을 인정하고 해당 시를 삭제했다. 한 여고생이 장애인 문인의 단편소설을 베껴 쓴 작품으로 수상한 다음 그 경력에 힘입어 대학에 합격한 사례도 있다. 정승재 장안대 행정법률과 교수는 “정부의 장애인 문인 지원 대책에 적극적인 저작권 보호도 반드시 포함시켜야 한다”며 “장애인 문인들의 저작권 침해 피해를 막을 인력 확충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서필웅·김승환 기자  ///ⓒ 세계일보  =======================///   뇌성마비 시인, “작품 저작권 강탈당했다” 솟대문학에 도움 요청…조사한 결과 ‘도용 맞다’ 방귀희 발행인, “바로잡기 위한 법적절차 밟을 것” 에이블뉴스, : 2013-12-31  관련기사 - ‘표절 사각지대’에 놓인 장애인문학 - “장애문인의 저작권 보호조치 절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어보겠지요 그러면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하겠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시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은 20년 전 김준엽(뇌병변장애) 시인이 쓴 작품이다. 김준엽 시인은 중증 뇌성마비로 손가락 하나조차도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아 펜을 입에 물고 시를 써서 2011년 첫 시집 “그늘 아래서”를 출간했고, 새해 두 번째 시집을 준비하고 있다.  또한 보치아 국가대표선수로 ‘2014 인천장애인아시아경기대회’ 출전을 앞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구사이버대학교 사회복지학과 3학년에 재학하고 있다. 이처럼 시인으로, 운동선수로, 사회복지전문가로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장애인문학지 솟대문학(발행인 방귀희)에 “작품 저작권을 강탈당했다. 세상에 알려 바로잡아 줄 것을 바란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이유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시 7편을 제출하기 위해 가장 아끼는 작품을 선별하는 과정에서 김준엽 시인의 활동보조인이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이 인터넷상에서 좋은 글로 사랑받고 있는 시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확인을 했더니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으로 이름을 바꾸어서 윤동주, 정용철, 작가미상으로 떠돌아다니고 있다는 것. 솟대문학은 신속히 이 문제를 처리하기로 정한 뒤 사실 관계에 대한 조사에 나섰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김준엽 시인은 20여년 전 하이텔 사이버문단을 통해 자신의 시들을 발표하며 문학 활동을 하던 중 1995년 봄 서울의 한 출판사에서 시집 발간 제의를 받고 작품을 보냈다. 하지만 출판사가 문을 닫게 되어 시집 출간도 못하고, 작품도 돌려받지 못했다. 몇 개월이 지난 뒤 알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났다. 월간 ‘좋은 생각’ 1995년 9월호에 게재된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란 제목의 시가 김준엽 시인의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과 유사한 점이 많았던 것. 솟대문학은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란 제목의 시는 좋은 생각 발행인 정용철 시인의 작품으로 게재됐다”면서 “정 시인은 ‘인생이 끝날 때’로 제목을 수정해 발표하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내 인생에 황혼이 오면’이란 제목의 시는 작자미상을 인터넷상에 떠돌아다니고 있고, 가장 많이 알려진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의 경우 윤동주, 정용철로 작가가 표기되는 등 김준엽 이란 작가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다”고 덧붙였다. 방귀희 발행인은 “김준엽 시인의 작품이 윤동주의 작품으로 둔갑한 것은 그만큼 작품이 우수하다는 증거”라면서도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이 김준엽 시인의 작품임을 밝혀 저작권을 바로잡아 주기 위한 법적 절차를 밟을 것”이라고 밝혔다. 방 발행인은 또한 “이 같은 작품 도용 사례가 적지 않기에 장애인들의 작품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 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김준엽 시인의 ‘내 인생에 환혼이 들면’, 정용철 시인의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윤동주로 알려졌으나 작자 미상인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을 보기로 하자.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김준엽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어 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가벼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해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어 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자신 있게 열심히 살았다고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느냐고 물어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얼른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어 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나는 기쁘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가족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부끄러움이 없느냐고 나에게 물어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반갑게 대답하기 위해 나는 지금 가족의 좋은 일원이 되도록 내 할 일을 다 하면서 가족을 사랑하고 부모님께 순종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이웃과 사회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고 물어 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나는 힘주어 대답하기 위해 지금 이웃에 관심을 가지고 좋은 사회인으로 살아가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내 마음 밭에서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어 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자랑스럽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정용철 (좋은 생각 발행인)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에게 물어 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해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도록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얼른 대답하기 위해 나는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나는 기쁘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가족에게 부끄러움이 없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반갑게 대답하기 위해 나는 지금 좋은 가족의 일원이 되도록 내 할 일을 다하면서 가족을 사랑하고 부모님께 순종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이웃과 사회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나는 힘주어 대답하기 위해 지금 이웃에 관심을 가지고 좋은 사회인으로 살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자랑스럽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내 마음의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윤동주로 알려졌으나 작자미상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는지에 대해 물을 것입니다 그때 나는 가볍게 마음으로 대답하기 위해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의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대답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겠습니다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나는 그때 기쁘게 대답하기 위해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꿔 나가겠습니다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나는 사랑스럽게 대답하기 위해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놓아 좋은 말과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권중훈 기자 ======================/// [박지영의 잠꼬대] 김준엽 시인의 카톡 문자를 보고     박지영 문학마당 편집장 “이 시를 쓰게 된 동기는 앞으로 남은 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며 나이 들어 죽음을 맞이하는 그날이 온다면 나는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를 고민하고 생각하다 1994년 봄날에 지은 작품입니다.” 뇌성마비 김준엽 시인 카톡으로 필자에게 전해 온 말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온라인 상에서 작자미상 혹은 윤동주 시로 떠돌다 1995년 9월호 ‘좋은 생각’에 게재된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란 제목으로 정용철 작품으로 실렸는데, 원래 어느 출판사에서 펴내려고 하다 출판사의 부도로 허사가 된 원고도 못 받은 작품이라 기억이 가물거리는 김준엽 시인의 작품인“내 인생의 황혼이 들면”과 유사하다고 여겼다. 특히 작품성이 좋아 둔갑한 것이라는 점과 중증 장애인 작품이라는 점에서 십 수 년 전에 “홀로서기”라는 시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서정윤시인의 경우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비교가 되는 간과되지 않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묵과할 수 없는 것이 그가 대처하기 어렵고, 법적 제도적 대응이 늦을 수 밖에 없는 사회적 약자요 중증 장애인이라는 측면에서 더욱 공분을 사고 있는 일이다. 그는 2011년 재)한국문화예술위원회 장애인 문학창작예술전용공간인 대전광역시 중구 대흥동에 소재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한민국 장애인 창작집필실(운영단체인 장애인 인식개선 오늘 대표 박재홍)에서 장애인과 일반인 창작활성화 사업의 일환으로 대장글 시리즈 첫 번째 공모사업에서 선정 작가로 선정되어 첫 시집 “그늘 아래서”를 펴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명’이라는 설움을 겪는 것도 억울한데 표절까지 짊어져야 한 것이다. 그는 건강한 사람이다. 보치아 국가대표선수로 2014년 인천 장애인아시아 경기대회에 출전을 앞둔 대표 선수로 대구사이버대학교에 재학 중인 사회복지학과 전공의 늦깎이 대학생활을 하고 있는 매력적인 남자다. 표절(剽竊)의 어원적 의미는 '표절(Plagiarism)'의 어원인 라틴어의 '플라지아리우스(Plagiarius)'라는 유괴범을 뜻했다(위키피디아). 17세기에 말은 영어에 끼어 들었지만,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대가의 문예 창작물을 최대한 똑같이 베끼고 불필요한 창작을 배제하라는 것이 대세였다고 한다. 지금의 표절 인식은 근대화의 산물이고 작금에 이르러 선진화 된 사회를 살고 있는 한국은 인식과 제도적으로 그 초입에 있다고 보는 시각이 짙다.  장애도 천형이라 감당하기 어려운데 그가 영혼으로 쓴 시가 승화되기 보다는 건강한 그것도 “좋은 생각”의 발행인이 그랬다는 생각에 김준엽 시인의 작품을 보면서 더 가슴이 저리다. 내인생에 황혼이 들면 (김준엽 시인)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어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가벼운 마음으로 / 사람들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해야겠습니다. 내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어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자신있게 /열심히 살았다고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겠습니다. 내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느냐고 물어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얼른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아야겠습니다. 내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어 보겠지요(중략)  이렇듯 일상에서 자신의 성찰에 담담하게 명상하듯이 내려가는 이타심이 가득한, 불편하기 때문에 바로 보이는 세상이라고 어느 시인이 얘기했듯이 그 사람에 있어 진실성을 획득하고자 노력하는 그는 이미 장애인이 아닌 정상인으로 살고 있고 그것을 훔치는 행위를 하는 부적절한 정상인이 편협되어 보이는 것에 대해 신년 벽두에 씁쓸함을 감추기 어렵다. ///© 디트news24  
7434    최소한 윤동주에게 욕을 보이는 일이 없도록... 댓글:  조회:2980  추천:0  2019-11-14
오피니언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 작자 미상     2017-10-15    권순진의 맛있게 읽는 시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 볼/ 이야기가 몇 가지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는지에 대해 물을 것입니다/ 그때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대답하기 위해/ 나는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해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얼른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기쁘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꿔가야겠습니다 (후략) 지난 주말 MBN을 보다가 회사 이미지 광고로 이 시의 일부를 인용하면서 저자를 윤동주 시인이라고 밝힌 걸 목격하고 깜짝 놀랐다. 이 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서시’와 ‘별 헤는 밤’의 그 윤동주 시인의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시의 작자를 잘못 표기할 경우 현존 시인에겐 정신적 고통을, 윤동주와 같은 민족시인에게는 명예에 큰 손상을 가져올 수 있으므로 사실 관계를 밝히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또 마땅하다. 나도 유사한 사례로 인해 곤란을 겪은 일이 있다. 먼저 글에서 좀 간지럽고 오글거리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아무리 윤동주 시인이 요절하여 20대의 청춘만을 살다간 시인이지만 그의 삶과 대표작 몇 편을 알고 좋아하는 ‘정상적인’ 독자라면 미심쩍은 생각이 들어야 온당하다. 학교에서 입시 위주의 교육을 받는 대신 시를 제대로 감상하는 시간만 가졌더라도 시의 어조에서 어렵지 않게 의문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우선 내용의 상투성(물론 나쁜 글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아니지만)이 느껴진다. 그리고 표현기법의 얼개가 얼핏 윤동주의 분위기를 연상케도 하지만 자세히 보면 주제의 심오함이 현격히 떨어져 윤동주 시인의 시와는 거리가 멀고 동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상처’ 운운 등의 표현도 눈에 거슬린다. 윤동주 시인은 1945년 사망하여 생전엔 시집을 묶어내지 못하고, 1948년 유고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었다. 이후 여러 판본의 ‘윤동주 시집’이 나왔으나 그 어느 시집 목록에도 같은 제목의 시는 없었다. 그동안 인터넷뿐만 아니라 일부 언론과 책에서도 윤동주의 시라면서 인용된 사례가 있었다. 윤동주를 연구하는 분이 적지 않고 확실히 정리해 매듭을 짓자고 한다면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더구나 모교인 연세대학교 측이나 ‘윤동주 기념사업회’ 등도 이 문제를 잘 인지하고 있다고 들었다. 몇 년 전 한국일보 논설고문인 임철순 선생께서 인터넷한국일보에 ‘그건 윤동주의 시가 아니다’라는 칼럼을 쓴 바도 있다. 그럼에도 오류가 방치된 채 인터넷을 중심으로 지금껏 유포되고 방송사에서 그걸 회사 이미지 광고에 인용한다는 것은 여전히 문제의 심각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의 원작자가 ‘좋은 생각’ 정용철 발행인이란 설도 있고 뇌성마비 장애시인 김준엽이란 말도 있다. 어쩌면 동명이인의 한 젊은 여성의 글인지도 모르겠다. 이참에 진위가 밝혀지길 바란다. 지금 ...라고 말하고 있다. 원통한 죽음도 모자라 ...자리매김 되고 있는 이 현실에 말로만 우리가 제일 사랑하는 시인으로 추켜세울 게 아니라 최소한 이런 식으로 욕을 보이는 일은 없어야겠다. 올해 윤동주 시인 탄생 100년을 맞아 생각이 많다. ///ⓒ 대구·경북 대표지역언론 /대구일보 ====================================/// “장애문인의 저작권 보호조치 절실” 장안대 정승재 교수, 솟대문학 특집 통해 ‘강조’ “범죄에 취약한 약자…정부가 보호할 의무 있어” 에이블뉴스,  2014-03-26  관련기사 - 뇌성마비 시인, “작품 저작권 강탈당했다” 계속되는 표절문제에 놓인 위태로운 장애인문학. 정부가 장애문인의 저작권 보호조치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장안대학교 행정법률과 정승재 교수는 최근 솟대문학이 발행한 통권 93호 신춘특집 ‘표절 사각지대에 놓인 장애인 문학’을 통해 표절 사태를 진단하고, 해결방안을 제시했다. 구체적으로 사례를 보면, 20년 전 뇌성마비 김준엽 시인의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이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으로 이름을 바꾸어서 윤동주, 정용철, 작자미상으로 떠돌아다니고 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어보겠지요 그러면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하겠습니다 -김준엽,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는지에 대해 물을 것입니다 그 때 가벼운 마음을 대답하기 위해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윤동주로 알려졌으나 작가미상,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이 뿐만이 아니다. 지난 1987년에 발간된 전신마비장애 김옥진 시인의 시집 ‘산골소녀 옥진이 시집’에 수록된 ‘기도’ 라는 시가 변영인 교수의 시집 ‘그대의 강가에 서서’에 ‘기도1’로 절반 이상이 표절된 상태로 실려 있었다. 아울러 지체장애 이용석씨의 제8회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당선 수상작인 단편소설 ‘바리데기꽃’이 2002년 제1회 전국 고교생 소설백일장 대상 수상자인 김해 A여고 김 모양이 수상경력으로 대학 특례 입학하기도 했다. 정 교수는 “사실관계를 확인해보면 이것은 오히려 표절이 아니라 도용에 해당한다고 봐야한다. 이러한 일은 문학계에서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라며 “문학이 그만큼 고독한 투쟁 속의 산물이고 그 창작의 고통이 너무나도 커서 남의 작품을 훔쳐오고픈 유혹이 늘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유독 장애인 문인들의 작품을 도용하거나 표절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무엇일까.  정 교수는 “공지영 작가의 도가니에서 보듯 유독 장애인을 상대로 한 성폭력이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범죄의 속성에 기인하는 것”이라며 “장애인이란 세상살이에서 불리한 조건을 하나 이상 가지고 있는 사람, 즉 약자다. 범죄란 강자가 약자를 상대로 무엇인가를 빼앗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정 교수는 “저작권은 기본적으로 사법영역이지만, 장애인의 저작권은 사회법영역이라 봐야 한다. 장애 작가의 활동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라며 “국가가 불리한 조건을 지원해줘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국가의 장애문인에 대한 지원 속에는 장애문인의 저작권을 적극적으로 보호할 의무까지 포함돼 있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정 교수는 “정부의 적극적인 장애문인의 저작권 보호조치가 있어야 한다”며 “장애문인의 저작권을 보호하기 위한 조직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이슬기 기자  
뇌성마비 김준엽 시인 “내 시를 돌려달라”… 국민애송시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알고 보니   정창교 기자입력 : 2014.01.04    [쿠키 사회]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라는 시가 페이스북에서 저작권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 시를 쓴 실제 주인공은 2014인천장애인아시아경기대회에 보치아 선수로 출전하는 김준엽씨로 파악됐다. 솟대문학 방귀희 발행인은 3일 페이스북을 통해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이라는 시가 윤동주 시인으로 알려졌으나 이 시를 쓴 시인은 뇌성마비 시인 김준엽씨라는 사실이 확인됐다고 소개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겁니다./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겠습니다./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여 살겠습니다./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나는 나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사람들을 상처주는 말과 행동을 말아야 하겠습니다./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겁니다./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꿔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으냐고 물을 겁니다./그때 나는 자랑스럽게 대답하기위해,/지금 나는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놓은/좋은 말과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겠습니다.// 이 시는 당초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이라는 제목이었다. 20년 전 뇌성마비 장애인 김준엽씨가 쓴 것이다. 그러나 최근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시 7편을 제출하기 위해 김준엽 시인이 가장 아끼는 작품을 선별하는 과정에서 김준엽 시인의 활동보조인이 문제의 시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이 인터넷상에서 좋은 글로 사랑받고 있는 시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확인을 한 결과 시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이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으로 이름을 바꿔 윤동주, 정용철, 작자미상으로 떠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우리나라 유일의 장애인문학지 ‘솟대문학’에 억울한 사정을 알려왔다. ‘솟대문학’ 방귀희 발행인은 신속하게 이 사건을 처리하기로 하고 조사한 결과 김준엽 시인이 20여 년 전 하이텔 사이버문단을 통해 자신의 시들을 발표하며 문학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어 1995년 봄 서울에 있는 한 출판사에서 시집을 발간해주겠다고 해 시작품들을 보냈지만 출판사가 문을 닫게 되어 김준엽시인은 시집 출간도 못하고 작품도 돌려받지 못한 정황도 파악됐다. 이 과정에서 월간 ‘좋은 생각’ 1995년 9월호에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란 제목의 시가 ‘좋은 생각’ 발행인 정용철 시인의 작품으로 게재됐고, 정용철 시인은 ‘내 인생이 끝날 때’로 제목을 수정해 발표하기도 했다고 솟대문학측은 설명했다. 솟대문학측은 또 김준엽 시인의 시 제목 황혼을 그대로 사용한 ‘내 인생에 황혼이 오면’이란 작품은 작자 미상으로 인터넷상에서 떠돌아다니고 있다고 밝혔다. 가장 많이 알려진 시는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으로 윤동주/정용철로 작가가 표기되기도 하고 윤동주로 알려졌으나 작자미상으로 표기될 뿐 그 어디에도 김준엽 이란 작가의 이름은 없다. 김준엽 시인은 중증뇌성마비로 손가락 하나조차도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아 펜을 입에 물고 시를 써서 2011년에는 첫시집 ‘그늘 아래서’를 출간했고, 새해 두 번째 시집을 준비하고 있는 당당한 시인이다. 그리고 뇌성마비 종목인 보치아 국가대표선수로 2014 인천장애인아시안게임 출전을 앞두고 있다. 또한 대구사이버대학교 사회복지학과 3학년에 재학하고 있다. 방귀희 작가는 “김준엽은 시인으로, 운동선수로, 사회복지전문가로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서 “무명의 힘없는 시인이라고 작품 저작권을 강탈한 사실을 세상에 알려 바로 잡아줄 것을 솟대문학에 호소해와 사실관계를 알리게 됐다”고 말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정창교 기자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김준엽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 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여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열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내 마음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리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겠습니다 2018.10.29. ========================///신문의 주필이라는 "양반"까지 윤동주의 시공부는 아니 하고 이 따위로 편집하고 아직도 오발하고 있으니... 참, 답답도 합니다... 이는 윤동주 시가 아님을 명백히 밝힙니다... 이 시는 김준엽이 쓴것 시입니다.ㅡ 죽림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 몇가지가 있습니다./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 했는지에 대하여 물을 것 입니다./그때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대답하기 위해/ 나는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 해야 겠습니다./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냐고 물을 것 입니다./그때 나에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야 겠습니다./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냐고 물을 것입니다./그때 얼른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겠습니다./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냐고 물을 것 입니다./나는 그때 기쁘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꿔가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그때 나는 자랑스럽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놓은/ 좋은 말과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 가겠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라는 시다. 계절의 변화가 실감이 난다. 바람 끝은 쌀쌀하고 나뭇잎은 붉게 물들어간다. 여름의 긴 시간이 끝나고 산 위에서 바라보는 들녘은 마음을 풍요롭게 하지만 ‘나의 인생도 이처럼 넉넉한가’ 되돌아 보게하는 계절이다. 이런 가을을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한다. 아마도 계절 속에 다른 때보다 더 많은 생각이 숨어 있어서가 아닐까? 맑은 하늘을 보고 진실을 생각하면서 더 투명해지고 싶어지는 때도 가을이다. 사람들이 계절중 가을을 제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을이 되면, 세월 가는 것을 더 느끼게 된다. 단풍을 보면 철학적인 사색을 하기 때문이다. 가을이 오면 인생도 후회가 없어야 하지만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 마지막 남은 잎새를 상상하게 된다. 왠지 쓸쓸하고 수많은 그리움들이 생각나는 가을, 그러나 작년 이맘때 품은 희망이 무엇이었는지 가물가물하다. 가을이 주는 혼미함 인가.  ///경기신문/정준성 주필 ==========================/// 명색이 박사라는 분도 윤동주의 시공부를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시를 이 따위로 가위질해 써먹으니... 참, 참, 답답도 합니다... 시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은 김준엽이 쓴 시로서 절대로 윤동주 시 아님을 정중히 밝힙니다. ㅡ 죽림   가을철 명상 세월은 쏜살같고 흐르는 물(流水) 같다. 쉼 없이 계속 흘러간다. 그래서 아껴 써야 한다. 주자(朱子)의 권학시를 보자.     “少年易老學難成/ 一寸光陰不可輕/ 未覺池塘春草夢/ 階前梧葉已秋聲”(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조그만 시간인들 가벼이 여길쏘냐?/ 뜰 앞의 풀들이 봄꿈을 깨기도 전에/ 계단 아래 오동잎은 가을 소리를 내는구나).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감을 알려주고 있다. 중국의 도연명(陶淵明)도 비슷한 시를 지었다. “盛年不重來/ 一日難再晨/ 及時當勉勵/ 歲月不待人”(인생에 청년의 때가 두 번 오지 않고/ 하루에 새벽도 두 번 오지 않는다/ 그러니 때에 맞춰 열심히 살아라/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가을이 되면, 세월 가는 것을 더 느끼게 된다. 뜨거운 여름에 혼미하고 바쁘다가도 가을철의 결실과 추수와 단풍을 보면 약간 철학적인 사색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윤동주(尹東柱) 시인은 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며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겠습니다”(이하 생략). 고은(高銀) 시인은 란 시를 썼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흩어진 날, 헤매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모든 것을 헤매인 마음 보내드려요, 낙엽이 사라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이제 가을이 아름다운 이유를 찾아보자. “가을이 봄보다 아릅답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투명한 가을의 분위기는 정(情)을 느끼게 하며 친근감을 주고 청명(淸明)한 가을하늘을 향해 해맑게 핀 코스모스(cosmos)를 보면 정녕 가을은 봄보다 아름답다. 가을이 아름다운 것은 가을이라는 계절 속에 다른 때보다 더 많이 생각(思索)이 스며들기 때문일 게다. 꽃이 할 일은 그곳이 어느 곳이든 뿌리를 내려 아름답게 꽃을 피우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어느 곳이든 발이 닿는 그곳에서 열심히 일하여 자기 이름(사명)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이다. 이름 모를 들꽃들도 우리에게 깨우침을 주는데 천하보다 귀중한 우리들은 더 많은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자연은 불평하지 않는다. 자연은 인내하기 때문이다. 자연은 거만하지 않다. 자연은 진실하기 때문이다. 자연은 목적 없이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가을은 온 산하에 수많은 단풍들로 우리를 일깨우고 있다. 우리는 겸손한 자세로 단풍 한 잎을 보면서 삶의 소박한 진리를 알아낸다면 참 좋겠다. 우리들은 확실히 가을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자신의 미래도 좀 더 멀리 내다보게 되고 오늘의 내 모습도 세심히 살펴보게 되며 다른 이의 삶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된다. 맑은 하늘을 보고 진실을 생각하면서 더 투명해지고 싶어지는 때도 바로 가을이다. 가을이 되어 이렇게 생각이 깊어지면 우리는 그 생각의 틈새에서 사랑을 느끼게 된다. 가을이 아름다운 이유다.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외로움을 느낄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랑을 생각하게 된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며 인생의 무상함도 느낀다. 인간의 연약함을 알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함에 의존하게 된다. 맑고 투명한 하늘을 볼 때, 우리는 진실의 문을 열고 사랑이라는 손님을 맞이하게 된다. 가을은 우리를 외롭게 만든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마지막 남은 잎새’를 상상하게 된다. 그 잎마저 떨어지는 날 우리는 드디어 하늘을 바라본다. 가을은 왠지 쓸쓸하고 수많은 그리움들을 생각나게 한다. 생명의 유한함을 깨닫는 순간 우리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이렇게 연약한 우리들의 모습을 추슬러 일으켜 세우는 방법은 단 한 가지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 서로가 더욱 뜨겁게 사랑하는 것뿐이다.” /김형태 박사(한국교육자선교회이사장)      ⓒ 크리스천투데이  
7431    한용운 시모음 댓글:  조회:2541  추천:0  2019-11-14
      * 산거(山居) - 한용운 티끌 세상을 떠나면 모든 것을 잊는다 하기에 산을 깍아 집을 짓고 돌을 뚫어 샘을 팠다. 구름은 손인 양하여 스스로 왔다 스스로 가고 달은 파수꾼도 아니언만 밤을 새워 문을 지킨다. 새소리를 노래라 하고 솔바람을 거문고라 하는 것은 옛사람을 두고 쓰는 말이다. 님 기루어 잠 못 이루는 오고 가지 않는 근심은 오직 작은 베개가 알 뿐이다. 공산(空山)의 적막이여 어디서 한가한 근심을 가져 오는가. 차라리 두견성(杜鵑聲)도 없이 고요히 근심을 가져오는 오오 공산(空山)의 적막이여 * 떠날 때의 님의 얼굴 - 한용운 꽃은 떨어지는 향기가 아름답습니다 해는 지는 빛이 곱습니다 노래는 못 마친 가락이 묘합니다 님은 떠날 때의 얼굴이 더욱 어여쁩니다 떠나신 뒤에 나의 환상의 눈에 비치는 님의 얼굴은 눈물이 없는 눈으로 바로 볼 수가 없을 만큼 어여쁠 것입니다 님의 떠날 때의 어여쁜 얼굴을 나의 눈에 새기겠습니다 님의 얼굴은 나를 울리기에는 너무도 야속한 듯 하지만 님을 사랑하기 위하여는 나의 마음을 즐겁게 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그 어여쁜 얼굴이 영원히 나의 눈을 떠난다면 그때의 슬픔은 우는 것보다도 아프겠습니다     * 사랑 - 한용운 봄 물보다 깊으니라 가을 산보다 높으니라. 달보다 빛나리라 돌보다 굳으리라. 사랑을 묻는 이 있거든 이대로 말하리.     * 사랑하는 까닭 - 한용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만은 당신의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만은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만은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 춘화(春晝) 1 - 한용운 따스한 별 등에 지고 유마경 읽노라니 가벼웁게 나는 꽃이 글자를 가린다 구태여 꽃 밑 글자를 읽어 무삼하리오. * 춘화(春晝) 2 - 한용운 봄날이 고요키로 향을 피고 앉았더니 쌉쌀개 꿈을 꾸고 거미는 줄을 친다 어디서 꾸꿍이 소리 산을 넘어 오더라.   * 꿈이라면 - 한용운 사랑의 속박이 꿈이라면 출세의 해탈(解脫)도 꿈입니다. 웃음과 눈물이 꿈이라면 무심(無心)의 광명도 꿈입니다. 일체만법(一切萬法)이 꿈이라면 사랑의 꿈에서 불멸을 얻겠습니다. * 꿈과 근심 - 한용운 밤 근심이 하 길기에 꿈도 길 줄 알았더니 님을 보러 가는 길에 반도 못가서 깨었구나 새벽 꿈이 하 짧기에 근심도 짧은 줄 알았더니 근심에서 근심으로 끝 간 데를 모르겠다. 만일 님에게도 꿈과 근심이 있거든 차라리 근심이 꿈되고 꿈이 근심되어라.     * 나룻배와 행인(行人) - 한용운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 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 길이 막혀 - 한용운 당신의 얼굴은 달도 아니언만 산 넘고 물 넘어 나의 마음을 비칩니다. 나의 손은 왜 그리 짧아서 눈앞에 보이는 당신의 가슴을 못 만지나요. 당신이 오기로 못 올 것이 무엇이며 내가 가기로 못 갈 것이 없지마는, 산에는 사다리가 없고 물에는 배가 없어요. 뉘라서 사다리를 떼고 배를 깨뜨렸습니까. 나는 보석으로 사다리를 놓고, 진주로 배 모아요. 오시려도 길이 막혀서 못 오시는 당신이 괴로워요.     * 심은 버들 - 한용운 뜰앞에 버들을 심어 님의 말을 매렸더니 님은 가실 때에 버들을 꺾어 말채찍을 하였습니다. 버들마다 채찍이 되어서 님을 따르는 나의 말도 채칠까하였더니 남은 가지 천만사는 해마다 해마다 보낸 한을 잡아 맵니다. * 당신이 아니더면 - 한용운 당신이 아니더면 포시럽고 매끄럽던 얼굴에 왜 주름살이 접혀요 당신이 기룹지만 않더면 언제까지라도 나는 늙지 아니할 터이요 맨 첨에 당신에게 안기던 그때대로 있을 테여요 그러나 늙고 병들고 죽기까지라도 당신 때문이라면 나는 싫지 않아요 나에게 생명을 주든지 죽음을 주든지 당신의 뜻대로 하서요 나는 곧 당신이어요      * 알 수 없어요 - 한용운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 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이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 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 인연 - 한용운 정말 사랑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는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안합니다. 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 사랑의 진리입니다. 잊어야겠다는 말은 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정말 잊고 싶을땐 잊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헤어질때 돌아보지 않는것은 너무 헤어지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은 그 만큼 그 사람을 못 잊는 것이요 그 만큼 그 사람과 사랑했다는 것이요. 그러나 알 수 없는 표정은 이별의 시초이며 이별의 시달림입니다. 떠날때 울면 잊지 못하는 증거요. 가다가 달려오면 사랑하니 잡아달라는 것이요 가다가 멈추면 다시 한번 더 보고 싶다는 것이요 뛰다가 전봇대에 기대어 울면 오직 당신만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 인연설 - 한용운 함께 영원히 있을 수 없음을 슬퍼 말고 잠시라도 같이 있을 수 없음을 노여워말고 이만큼 좋아해 주는 것에 만족하고 나만 애태운다고 원망 말고 애처롭기까지 한 사랑할 수 없음을 감사하고 주기만 하는 사랑이라 지치지 말고 더 많이 줄 수 없음을 아파하고 남과 함께 즐거워한다고 질투하지 말고 그의 기쁨이라 여겨 함께 기뻐할 줄 알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 일찍 포기하지 말고 깨끗한 사랑으로 오래 간직할 수 있는 나는 당신을 그렇게 사랑하렵니다.   * 행복 - 한용운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행복을 사랑합니다. 나는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행복을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정말로 당신을 사랑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미워하겠습니다.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을 미워하는 고통도 나에게는 행복입니다.     * 나를 잊고자 - 한용운 남들은 님을 생각한다지만 나는 님을 잊고자 하여요 잊고자 할수록 생각하기로 행여 잊힐까 하고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잊으려면 생각하고 생각하면 잊히지 아니하니 잊도 말고 생각도 말아 볼까요 잊든지 생각든지 내버려 두어 볼까요 그러나 그리고 아니 되고 끊임없는 생각생각에 님뿐인데 어찌 하여요. 구태여 잊으려면 잊을 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잠과 죽음뿐이기로 님 두고는 못 하여요. 아아. 잊히지 않는 생각보다 잊고자 하는 생각이 더욱 괴롭습니다. * 이별은 미(美)의 창조 - 한용운 이별은 미(美)의 창조입니다. 이별의 미는 아침의 바탕[質] 없는 황금과 밤의 올[絲] 없는 검은 비단과 죽음 없는 영원의 생명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에도 없습니다. 님이여,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오오, 이별이여. 미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 해당화 - 한용운 당신은 해당화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봄은 벌써 늦었습니다. 봄이 오기 전에는 어서 오기를 바랐더니, 봄이 오고보니 너무 일찍 왔나 두려워합니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뒷동산에 해당화가 피었다고, 다투어 말하기로 듣고도 못들은 체하였더니, 야속한 봄바람은 나는 꽃을 풀어서 경대 위에 놓입니다그려. 시름없이 꽃을 주워서 입술에 대이고, [너는 언제 피었니] 하고 물었습니다. 꽃은 말도 없이 나의 눈물에 비쳐서, 둘도 되고 셋도 됩니다.   * 꽃이 먼저 알아 - 한용운 옛집을 떠나서 다른 시골에 봄을 만났습니다. 꿈은 이따금 봄바람을 따라서 아득한 옛터에 이릅니다. 지팽이는 푸르고 푸른 풀빛에 묻혀서, 그림자와 서로 다릅니다. 길가에서 이름도 모르는 꽃을 보고서, 행여 근심을 잊을까 하고 앉았습니다. 꽃송이에는 아침 이슬이 아직 마르지 아니한가 하였더니, 아아 나의 눈물이 떨어진 줄이야 꽃이 먼저 알았습니다.       〈春晝 2〉 는 원래 《불교》 96호 (1932년 6월 발행) 권두언으로 발표된 것인데 뒷날 《민성(民聲)》 29호 (1948년 10월 발행)에 〈공화란타(空華亂墜)〉라는 제목으로 수록되고 있으며, 이때까지도 두번째 시조는 보이지 않고 있다.22) 〈춘주〉는 불립문자인 선의 특성을 시적 미감을 통해서 멋지게 나타낸 시조이다. 유마거사는 재가의 거사이면서도 불교의 깊은 뜻에 통달한 대승불교의 이상적 인물이다. 중국 당나라 왕유가 유마거사를 자처하였고, 만해도 유마적인 삶을 산 사람이다. 《님의 침묵》에서 ‘침묵’은 유마의 침묵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만해는 미완성이지만 《유마힐소경 강설》을 번역하고 강설하였다. 《유마경》의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品)〉에 나오는 ‘유마의 침묵’은 선가에서 《유마경》을 선서로 삼는 유명한 법문이다. “문수보살이 유마힐에게 물었다. 어떠한 것이 보살이 불이법문(진리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입니까? 이때 유마힐은 아무 말이 없었다. 문수보살이 찬탄하여 말했다. ‘참으로 훌륭합니다. 진리의 세계는 문자나 말이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이것이 진실로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깨달음(禪)의 세계를 언어문자로 표현하지 않을 수 없을 때 부득이 그 언어는 고도의 상징 또는 역설적 표현일 수밖에 없다. 침묵이 효과적일 때도 있다. 그래서 《유마경》에서 유마의 침묵은 최고의 법문이 된다. 〈춘주(春晝)〉는 최동호 편 《한용운 시전집》에는 시의 제목이 〈춘화(春畵)〉(344쪽)라고 되어 있는데 〈춘화(春畵): 그림같은 봄날〉보다는 〈춘주(春晝): 봄날의 낮〉가 시의 내용으로 보아 맞다. 그리고 시조 〈춘조(春朝)〉가 있는 것으로 보아 따사로운 봄날 아침과 낮에 시를 쓴 것으로 본다. 〈춘주〉는 따사로운 봄날 낮에 《유마경》을 읽는데 바람에 나는 꽃잎이 글자를 가렸다. 처음에 붙인 제목 〈공화란타(空華亂墜)〉에서 알 수 있듯이 ‘나는 꽃(空華)’은 허공에 핀 꽃으로 본래 실체가 없는 번뇌 망상을 상징하는 선어이다. 번뇌 망상을 없애고 진리의 길에 이르는 길은 불립문자 교외별전인 참선의 체험뿐이다. 그러니 구태여 꽃 밑의 글자를 읽을 필요가 없다는 선의 세계를 시화한 것이다. 선가에서는 부처님의 경전을 깨닫고 보면 휴지조각과 같은 무용지물이라고 하였다. 내 마음 속에 무진장한 여래지(如來智)가 함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해가 《유마경》을 번역 강설하다가 중도에서 그만두었는지 모르겠다. 김대행은 〈한용운의 시조와 삶의 문제〉에서 〈춘주〉의 긍정적 의미 지향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공화란타(空華亂墜)〉와 더불어 지금까지 살펴본 바 있는 불교적 시조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작품의 의미 지향은 순접관계에 있는 긍정적 전개다. 이것은 대부분의 시조 작품에서 그 구성의 기본 구조로 초·중장의 병렬 관계가 종장에서 종결된다. 그런데 이같은 긍정적 의미 지향은 한용운의 경우 불교적 혹은 교훈적 작품에만 한정된다는 것이 특색이다. 〈선우(禪友)에게〉, 〈남아(男兒)〉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정서적 시조에 오면 그 의미 지향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다.”23) 시조는 형식면에서 초·중장이 연결되고 종장이 분리되는 형식이 일반적이다. 〈춘주〉의 형태는 초·중장이 전대절(前大節)로 분단되고 종장이 후소절(後小節)로 분립되는 가장 전통적인 시조형식이다. 이러한 형식은 음악(唱)과의 관련성 때문에 형성된 것으로 한국 고전 시가 특히 시조의 전통적 특징인 것이다. 봄날에 유유자적하는 모습이 초·중장에 서술되고 종장에 이르러는 한흥(閑興)이 결구를 이루게 된 것이다.24) 〈춘주〉의 두번째 시조를 “후각 심상인 ‘향(香)’과 청각 심상인 ‘꾸꿍이 소리’가 공감각(共感覺), 심상을 형성하여 고요한 선(禪)감각을 표출한다”25)고 김재홍은 분석하였다. 초장 ‘봄날이 고요키로 香을 피고 앉았더니’는 고요한 봄날 향을 피워 놓고 단정히 앉아 참선을 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중장 ‘삽살개가 꿈을 꾸고 거미가 줄을 친다’고 한 것은 삽살개도 따스한 봄볕 아래 참선하듯이 졸고 있고, 거미도 자신의 본분사인 거미줄을 치고 있다고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서 현상계의 모든 사물들이 각기 불성을 발휘하고 있는 화엄성기(華嚴性起)의 세계를 읊은 것이다. 거미는 자기가 친 거미줄에 걸리지 않고 자유로워, 무애한 해탈 자유를 상징한다. 종장에서 ‘어디서 꾸꿍이 소리는 산을 넘어오더라’라고 결구한 것은 선시 이론의 극치인 뜻을 글자 밖에 나타내는 운외지미(韻外之味)를 절묘하게 표현한 것이다. 산 너머에서 꾸꿍이 소리를 따라 깨달음, 봄의 정취가 들려오는 듯하다. 익재가 “도연명의 동편 울타리 밑 국화를 꺾어 들고 우두커니 남쪽 산 바라본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는 시구는 눈 앞의 경치를 묘사하지만 뜻은 글자의 밖에 들어 있다. 말은 다할 수 있으나, 의미는 다하지 못한다”26)고 한 경지를 표현한 명시조이다.     * 한용운 1894년 홍성생. 24세때 백담사에서 중이됨. 불교개혁에 앞장서 을 씀. 3·1운동때 33인의 한 사람, 독립운동 헌신, 1925년 발간, 소설 등 문필활동 활발     =================================================/// 서안 1000여년 은행나무 [ 2019년 11월 14일 ]     서안에 있는 1000년된 은행나무가 황금빛을 뿌리며 국외 SNS 타고 일파만파 전해지고 있다. 최근 국외 SNS에서 5만6000번 전재할만큼 인기가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누리군들은 황금이 찬란해 눈이 부신다며 극찬했다. 观察者网
7430    "님의 침묵" - 한용운 댓글:  조회:3930  추천:0  2019-11-14
Basic 고교생을 위한 문학 용어사전 님의 침묵     1926년에 한용운이 간행한 시집. 표제시인 을 비롯하여 , , , 등 초기 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한용운의 시는 불교적인 비유와 고도의 상징적 수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은 '님'을 떠나보내는 여인의 정한을 노래한 시이다. 그러나 한용운의 시세계에서 '님'은 해석하기에 따라 '조국, 부처, 연인'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시에서 화자는 '님은 갔다'고 말함으로써 객관적인 현실을 긍정하면서도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다'라고 하면서 주관적인 의지로서 '님은 자기와 함께 있음'을 강조한다. 즉, 조국이 일본의 식민지 치하에 있지만, 시인 자신은 조선을 독립된 조국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시는 아래와 같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려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관련이미지 7                           이미지 이전 님의 침묵 / 한용운한용운이 지은 시. 1926년에 발간된 ≪님의 침묵≫의 서시이자 표제시이다. 산문적 율격을 지닌 자유시로서 작자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님의 침묵 (Basic 고교생을 위한 문학 용어사전) ========================/// 한국 근대문학 해제집 I - 단행본 님의 침묵     구분 시 서명 님의 沈黙 저자 한용운(1879~1944) 발행 회동서관, 1926. 면수 168면 크기 13.2×19.2(cm) 한용운(韓龍雲)의 속명(俗名)은 유천(裕穿)이고 법명(法名)은 용운(龍雲)이며 법호는 만해(萬海)이다. 1879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하여 향리에서 서당교육을 받았다. 1897년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였으며, 그후 설악산의 백담사 등지를 전전하며 불도에 입문하였다. 1910년 경술의 국치를 전후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혁신운동에 앞장서는 한편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조선불교유신론』(불교서관, 1913), 『불교대전』(범어사, 1914), 『정선강의 채근담』(동양서원, 1916) 등을 연이어 간행하였다. 1918년 월간 교양잡지 《유심(惟心)》지를 발간하여 편집 겸 발행인으로 신문화 사업에 힘썼다. 1919년 3 · 1운동 당시 33인 민족대표로 「기미독립선언서」의 말미에 「공약삼장」을 추가 기초하였으며, 서대문 감옥소에서 일본인 검사가 독립에 대한 답변서를 요구하자 「조선독립의 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1926년 『십현담주해』(법보회)와 시집 『님의 침묵』(회동서관)을 발간하였다. 1927년 신간회를 발기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었으며, 일제의 불교 탄압에 맞서 불교대중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불교》지를 인수하여 불교 교리를 널리 펴는 한편 많은 논설을 발표하였다. 이후 『흑풍』, 『박명』 등의 장편소설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으며, 만년에는 『삼국지』를 번역하기도 하였다. 불교 개혁과 독립 투쟁의 정신적 지주로서 의연한 삶을 살던 한용운은 1944년 지병으로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서 입적하였다. 1973년 『한용운전집』(신구문화사)이 발간되었다. 『님의 침묵』 표지, 초판아단문고 소장 『님의 침묵』 속표지, 초판아단문고 소장     『님의 침묵』은 한용운의 시집으로 회동서관에서 1926년 5월 20일 초판 발행되었다. 서두에 「군말」을 두고 88편의 시를 별도의 항목으로 나누지 않고 배열하였다. 말미에 ‘을축년 8월 29일밤 ’이란 부기가 붙은 「독자에게」를 첨부하였다. 시는 「님의 침묵」으로 시작해서 「사랑의 판」으로 끝난다. 김재홍의 『한용운문학연구』(1982)에 의하면 시집 『님의 침묵』은 이별하는 데서 시작되어 만남으로 끝나는 극적 구조성을 지닌 한 편의 연작시로 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곧 시집 『님의 침묵』은 시 전편이 이별-갈등-희망-만남이라는 구조의 끈으로 연결되어 소멸(정(正))-갈등(반(反))-생성(합(合))이라는 변증법적 지양을 목표로 하는 극복과 생성의 시편들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님의 침묵」, 「이별은 미의 창조」, 「당신을 보았습니다」 등은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 주는 시편들이다. 시집 『님의 침묵』은 부정과 역설로 가득차 있다. 이는 부정을 통해 긍정의 세계가 도출되며, 역설을 통해 참다운 진리가 생성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처럼 ‘님’이 부재한 상황을 만해는 도리어 ‘님’의 존재를 자각하는 계기로 삼음으로써 주체와 세계 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 간극을 노래한 김소월의 시와 그 궤를 달리한다. 이는 불교의 철학적 원리와 민족 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선행되었기에 가능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님’이 부재하는 시대에 ‘님’과의 합일을 꿈꾼 만해 한용운은 그의 시에서 끝없는 구도와 견인의 자세를 보여 준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줄만은 아러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날마다 낡어갑니다”(「나룻배와 행인」)라는 시구처럼 시집 도처에서 ‘당신’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드러내 보인다. ‘당신’은 ‘님’이며, 그 ‘님’은 서두에 쓰인 「군말」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된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긔른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만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시집 전체가 겉보기에는 여성적 화자를 동원한 사랑의 노래이지만 불교적 사유와 민족 현실에 기초한 사상적 깊이는 『님의 침묵』을 일제강점기 최고의 시집 반열에 올리는 데 손색이 없게 만든다. 판권지에 의하면 『님의 침묵』은 1926년 5월 15일 인쇄되어 1926년 5월 20일 발행된 것으로 되어 있다. 저작 겸 발행인은 한용운이고 인쇄자는 권태균이다. 인쇄소는 대동인쇄주식회사이고 발행소는 회동서관(滙東書舘)이다. 진홍빛 천으로 감싼 하드 커버의 앞뒤 표지에는 어떠한 문양이나 글씨도 넣지 않고 등표지에만 ‘님의 침묵’이란 제목과 ‘한용운 저’란 저자명을 표시하였다. 앞표지에 제목이 없는 대신 내제지(內題紙)에 굵고 붉은 글씨로 ‘님의 침묵(沈黙)’이란 제명을 힘 있게 써 놓았다. 1934년 7월 30일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발행된 재판본은 내제지(內題紙)와 판권지만 달라졌다. 그러나 1950년 4월 5일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발행된 삼판본은 표지의 장정이 완전히 바뀌었다. 분홍색 바탕에 흰색 모란과 짙은 나무색 줄기가 ‘한용운 저, 님의 침묵’이란 각진 제호와 잘 어울려 있다. 내제지와 서두의 「군말」 사이에 저자인 한용운의 사진도 삽입하였다.(박용찬) 『님의 침묵』 판권지, 초판아단문고 소장 참고어 : 조선불교유신론, 독립운동, 소멸과 생성, 역설 참고자료 [님의 沈黙] 원문보기 참고문헌 김우창, 『궁핍한 시대의 시인』, 민음사, 1977. 김재홍, 『한용운문학연구』, 일지사, 1982. 만해사상연구회 편, 『한용운사상연구』, 민족사, 1980. 불교문화연구원, 『한용운 전집』 (전6권), 2006. 송욱, 『님의 침묵 전편해설』, 과학사, 1974. 최동호, 『한용운』, 건국대학교출판부, 2001. 한용운전집편집위원회, 『증보 한용운전집』, 신구문화사, 1979. 관련이미지 4                               이미지 이전 님의 침묵 / 한용운한용운이 지은 시. 1926년에 발간된 ≪님의 침묵≫의 서시이자 표제시이다. 산문적 율격을 지닌 자유시로서 작자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님의 침묵 (한국 근대문학 해제집 I - 단행본)   ============================/// 님의 침묵(沈默)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追憶)은 나의 운명(運命)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希望)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沈默)을 휩싸고 돕니다.     탐구//' 질문) 님의 침묵에서 서정적 자아에 대한 설명으로 ‘이별의 정한이 어린 전통적 자아’ 라는 말이 어울리나요?   답변) 이별의 정한을 서술한 행을 살펴 보면 이렇습니다.    1행과4행의 전개는 임과의 이별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追憶)은 나의 운명(運命)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5과6행은 이별 후의 슬픔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7행과8행은 새 희망에의 의지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希望)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9행과10행은 불굴의 의지의 사랑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沈默)을 휩싸고 돕니다.     결과적으로  ‘이별의 정한이 어린 전통적 자아’ 라는 말이 어울리나요는 조금은 진보된 이별의 정한이라 여깁니다만  김소월의 이별적 정한을 비교하기는 조금은 그렇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님은 나라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만, 글쎄요, ..... 시적인 면면을 들여다 보면 낭만적. 상징적. 의지적, 형이상학적, 명상적, 불교적이면서   연가풍의 여성적 어조를 보인다는 점이죠, 여기에서는 그렇습니다.   질문하신 의도는 부정을 말하시는 것 같군요.  정통적 이별의 정한이 내포되지 않은 점은 아마도 민족적인 성향이 내재되어 있기에 순수의도와는 별개라 보여집니다. 정치적인 것을 두고 말합니다. 고로, 순수한 이별의 정한이 퇴색한 점이 있다 봅니다. 차라리 윤동주의 서시처럼 대놓고 하늘을 우러러 ! 그리 하였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저의 소견이었습니다.   
7429    독립운동가, 시인 - 한용운 댓글:  조회:3218  추천:0  2019-11-1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용운   [ 韓龍雲 ] 이미지 크게보기   이칭별칭 호 만해(萬海), 만해(卍海) 유형 인물 시대 근대 출생 - 사망 1879년(고종 16) 8월 29일 ~ 1944년 6월 29일 성격 승려, 시인, 독립운동가 출신지 충청남도 홍성 성별 남 본관 청주(淸州) 저서(작품) 조선불교유신론, 님의 침묵, 흑풍, 후회 등 목차 정의 개설 생애 활동사항 상훈과 추모 정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함께 『조선불교유신론』, 『님의 침묵』, 『흑풍』, 『후회』 등을 저술한 승려. 시인,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청주(淸州). 본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裕天).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萬海, 卍海). 충청남도 홍성 출신. 아버지는 응준(應俊)이다. 유년시대에 관해서는 본인의 술회도 없고 측근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유년시대는 대원군의 집정과 외세의 침략 등으로 나라 안팎이 어수선한 시기였다. 그 불행한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여건은 결국 그를 독립운동가로 성장시킨 간접적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생애 4세 때 임오군란(1882)이 일어났으며, 6세 때부터 향리 서당에서 10년 동안 한학(漢學)을 익혔다. 14세에 고향에서 성혼의 예식을 올렸다. 1894년 16세 되던 해 동학란(東學亂)과 갑오경장이 일어났다. ‘나는 왜 중이 되었나.’라는 그 자신의 술회대로 넓은 세계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집을 떠나 1896년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입산하여 처음에는 절의 일을 거들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출가 직후에는 오세암에 머무르면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선(禪)을 닦았다. 이후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이 깊은 나머지 블라디보스톡 등 시베리아와 만주 등을 여행하였다. 1905년 재입산하여 설악산 백담사(百潭寺)에서 연곡(連谷)을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득도(得度)하였다. 불교에 입문한 뒤로는 주로 교학적(敎學的) 관심을 가지고, 대장경을 열람하였으며, 특히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 즉 불교의 대중화 작업에 주력하였다. 1910년에는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다. 1914년≪불교대전 佛敎大典≫과 함께 청나라 승려 내림(來琳)의 증보본에 의거하여 ≪채근담 菜根譚≫ 주해본을 저술하였다. 1908년 5월부터 약 6개월간 일본을 방문, 주로 토쿄(東京)와 교토(京都)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물을 익히고, 일본의 풍물을 몸소 체험하였다. 일본 여행 중에 3·1독립운동 때의 동지가 된 최린(崔麟) 등과 교유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국권은 물론, 한국어마저 쓸 수 없는 피압박 민족이 되자, 그는 국치의 슬픔을 안은 채 중국 동북삼성(東北三省)으로 갔다. 이곳에서 만주지방 여러 곳에 있던 우리 독립군의 훈련장을 순방하면서 그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력하였다. 1918년 월간 ≪유심 惟心≫이라는 불교잡지를 간행하였다. 불교의 홍포와 민족정신의 고취를 목적으로 간행된 이 잡지는 뒷날 그가 관계한 ≪불교≫ 잡지와 함께 가장 괄목할 만한 문화사업의 하나이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 백용성(白龍城) 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참여하였다. 그는 독립선언문의 내용을 둘러싸고 최남선(崔南善)과 의견 충돌을 하였다. 내용이 좀더 과감하고 혁신적이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으나, 결국 마지막의 행동강령인 공약 3장만을 삽입시키는 데 그쳤다. 1920년 만세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재판을 받아 3년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에도 일본 경찰의 감시 아래에서 강연 등 여러 방법으로 조국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하였다. 1925년 오세암에서 선서(禪書) ≪십현담주해 十玄談註解≫를 탈고하였다. 1926년 한국 근대시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인정받는 대표적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였다. 이곳에 수록된 88편의 시는 대체로 민족의 독립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사랑의 노래로서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27년 일제에 대항하는 단체였던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는 주도적 소임을 맡았다. 그는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자리를 겸직하였다. 나중에 신간회는 광주학생의거 등 전국적인 민족운동으로 전개, 추진되었다. 1930년≪불교≫라는 잡지를 인수하여 그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전까지는 권상로(權相老)가 맡아오던 이 잡지를 인수하여 불교를 널리 알리는 데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 특히, 고루한 전통에 안주하는 불교를 통렬히 비판하였으며, 승려의 자질향상·기강확립·생활불교 등을 제창하였다. 1933년 55세 때 부인 유씨(兪氏)와 다시 결합하였다. 1935년≪조선일보≫에 장편소설 <흑풍 黑風>을 연재하였고, 이듬해에는 ≪조선중앙일보≫에 장편 <후회 後悔>를 연재하였다. 이러한 소설을 쓴 까닭은 원고료로 생활에 보탬을 얻기 위한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도 소설을 통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려는 의도가 더 큰 것으로 이해된다. 1938년 그가 직접 지도해오던 불교계통의 민족투쟁비밀결사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이 일어났고, 많은 후배 동지들이 검거되고 자신도 고초를 겪었다. 이 시기에 ≪조선일보≫에 <박명 薄命>이라는 소설을 연재하였다. 1939년 회갑을 맞으면서 경상남도 사천군다솔사(多率寺)에서 몇몇 동지들과 함께 자축연을 가졌다. 다솔사는 당시 민족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본거지였다. 1944년 6월 29일 성북동의 심우장(尋牛莊)에서 중풍으로 별세하였다. 동지들에 의하여 미아리 사설 화장장에서 다비된 뒤 망우리 공동묘지에 유골이 안치되었다. 친하던 벗으로는 이시영(李始榮)·김동삼(金東三)·신채호(申采浩)·정인보(鄭寅普)·박광(朴珖)·홍명희(洪命熹)·송월면(宋月面)·최범술(崔凡述) 등이 있었으며, 신채호의 비문은 바로 그가 쓴 것이다. 활동사항 그의 혁신사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① 불교행정조직혁신론: 한용운이 활약하던 1910년 초에는 친일적 색채를 띤 원종(圓宗)이라는 불교종파가 생겼다. 그들은 일본과 한국 불교의 원류가 하나임을 주장하면서 일제의 동화정책에 교묘하게 영합하였다. 그는 그들에 대항하는 길은 사찰 중심의 현재 조직이 전교(傳敎)와 행정에 있어서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 역사적 원류로 보아 일본 불교는 종파적 특색을 가진 데 비해 한국 불교는 선교 융합적 특색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당시, 일제의 <조선사찰령> 발표 이후, 거의 모든 사원의 운영권이 총독부에 넘어갈 추세였다. 그래서 그는 통일종단의 조직·규약·재정확보 등을 일원화시켜 일제의 야욕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현행의 본말사제도(本末寺制度)를 그냥 두고 중앙에 통제기구를 신설하자는 것이었다. 이후에 김법린(金法麟) 등을 중심으로 하는 혁신불교파가 세운 불교총무원은 바로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이 결실된 것이다. 비록, 대다수 승려들의 개혁적인 의지가 뒷받침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큰 실효를 얻지 못하였으나, 이는 불교행정조직의 좌표를 제시한 탁견(卓見)이었다. 오늘날에는 조계종·태고종·천태종·진각종 등 한국 불교의 대부분 종단은 이 총무원제도와 본사제도를 병행하는 행정조직을 갖추고 있다. ② 사원운영의 혁신론: 불교가 시대를 계도(啓導)하려면 그 운영과 조직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이 그가 주장한 유신의 골자이다. 사원 운영에 있어서 첫째로 염불당(念佛堂)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근본 교리에 비추어볼 때 우주에 변재(遍在)한 법신불(法身佛)이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 결코 특정한 신앙대상이 따로 없는 것이라 보았다. 둘째로 불교의식의 개혁이다. 많은 다라니(陀羅尼)를 중심으로 한 의식보다는 오히려 간략한 법식(法式)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또 대부분의 다라니가 산스크리트(Sanskrit) 음역(音譯) 위주로 암송되고 있어서 그의 한글화 작업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셋째로 승려의 취처(娶妻)이다. 생활 불교가 되려면 독신이 아니라 생산적인 부부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결혼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는 윤리적·생물학적 여러 논거를 제시하였다. ③ 청년불교의 제창: 엄밀한 의미로 한국 근대불교에 있어서 불교청년회를 조직한 것은 그가 최초라고 할 수 있다. 친일적 경향의 원종에 대항하여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을 결성한 것은 1914년이었다. 그 강령을 보면, 첫째 정교분리(政敎分離), 둘째 불교통일, 셋째 사회적 진출의 필요 등이다. 이는 대중불교의 확산을 위하여 그 모체(母體)를 청년운동으로 삼아야 한다는 그의 실천행이었다. 그는 이 운동의 실천을 위하여 ‘승려에서 대중에로’, ‘산간에서 길가로’ 등을 내걸었다. 또, 해외 포교에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서 미국·중국 등지에 해외 법당을 세워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④ 선교진흥론(禪敎振興論): 불교의 진흥을 위한 필수불가결의 요건은 수행 이상을 확립하는 일이다. 한국 불교는 그 동안 오교구산(五敎九山)이니 선교 양종이니 해서, 마치 교의(敎義)와 종지(宗旨)가 다른 듯이 오도(誤導)하여왔다. 그러나 선과 교는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다. 왜냐하면, 선이란 불교의 마음이며, 교란 불교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양자의 이론적 합일과 실천이 불교 진흥의 관건이라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선원(禪院)이나 강원(講院)의 지도 이념이나 실수(實修)에 있어서 외전(外典)을 첨가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선교일치를 주장해온 한국 불교의 일승정신(一乘精神)이 새로운 시대의 좌표여야 한다고 보았다. ⑤ 경전의 한역: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대장경의 우리말 번역이다. 현대 포교의 요체는 문서에 의해서 널리 알리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일반인들이 읽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방대한 대장경을 쉽게 옮기는 일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가 쓴 ≪불교대전≫은 바로 그와 같은 시도의 결정이다. 대장경의 요지를 발췌하여 대의를 옮겨 적은 이 책은 요즈음에 간행되는 ≪불교성전≫의 효시인 셈이다. 그의 노력은 광복 후에 결실을 보아 한글대장경 사업을 촉진시켰으며, 불교 근대화에 결정적 공헌을 한 점에서 평가할 수 있다. 그 밖에도 불교학 진흥을 위하여서는 금석문(金石文)이나 사장된 자료들이 일반에 소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용운의 대표작인 ≪조선불교유신론≫은 불교중흥에 대한 그의 이론과 실천을 망라한 최대의 불교시론이다. 특히, 구태의연한 현실 안주의 자세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귀감이 될 수 있다. 사실 그의 주장은 90여 년 후인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탁월한 불교개혁책이라고 인정받고 있다. 그의 주장 중 상당 부분은 현실화되었는데 종단행정의 단일화를 위한 노력이 곧 총무원으로 나타났고, 승려 자질 향상은 오늘날 여러 방면으로 추진되고 있다. 또, 국역(國譯)의 중요성 강조는 숱한 불교성전의 편찬과 함께, 역경원(譯經院) 등의 발족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는 과격한 부분이 없지 않아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는 부분도 있다. 첫째, 사원 운영의 조직에서 염불당 및 불필요한 법당을 타파하라는 주장인데, 그것은 이상론이다. 불교의 근본 교리로도 무리가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다양한 대중교화의 방편이었다. 오히려, 그 사상성을 고양(高揚)시키려는 노력 대신에, 단순히 지난 과오를 매도하는 태도는 위험한 발상이다. 둘째, 승려의 대처(帶妻)에 관한 주장인데, 이것도 설득력이 없다. 청정한 교단은 독신 수행승에 의하여 주도하여온 것이 우리 불교의 전통이었다. 그런데 취처(娶妻)를 합법화시키는 일은 상당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 그 이후 이른바 이판(理判)이니 사판(事判)이니 하는 승려의 자격 기준에 대한 시비가 끊이지 않게 된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당시의 시대상황으로서는 적절한 개혁책이었지만, 보편타당한 정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그의 불교사상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결국, 그는 악과 부조리의 사회현실을 타파하려는 노력의 결심으로 이 ‘불교유신’을 제창하게 된 것이다. 그 구체적 방법론으로서 무질서한 불교교단의 통제를 주장하였고, 이른바 불교현대화를 내세우게 된 것이다. 그의 실천적 불교정신의 응결이 바로 청년불교운동이었다. 따라서, 비록 다소간 혁신적 사상이 가미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의 사상은 독창적이었고 위대하였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 또, 불교인의 일반적 신앙자세를 탈피하여 시나 소설 등을 통한 적극적인 대중교화도 특기할 만한 점이다. 불교인으로서 그만큼 조국수호에 대한 열의를 실천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특히 당시의 암울한 시대환경과 관련지어 생각할 때 그의 위대성은 한층 돋보인다. 다만, 당시에는 그의 주장이 전혀 실현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의 여러 주장들은 오히려 1960년대 이후부터 빛을 발하여 현대불교의 이론적 근거로서, 또 실천윤리의 강령으로서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한용운은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독립운동가이자 불교 혁신론자로서 다양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는 시공(時空)을 초월한 예언자적 가치를 부여받기에 충분한 불교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용운 문학의 특징은 불교사상과 독립사상이 탁월하게 예술적으로 결합된 데서 드러난다. 자유와 평등사상, 민족사상과 민중사상으로 요약되는 불교적 세계관과 독립사상은 한용운 문학의 뼈대이자 피와 살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의 문학은 불교사상과 독립사상, 문학사상이 삼위일체를 이룬다는 점이 특징이라는 뜻이다. 1926년에 간행된 ≪님의 침묵≫은 이별하는 데서 시작되어 만남으로 끝나는 극적 구조를 지닌 한편의 연작시로 볼 수 있다. 곧, 시집 ≪님의 침묵≫은 시 전편이 ‘이별-갈등-희망-만남’이라는 구조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소멸[正]-갈등[反]-생성[合]이라는 변증법적 지양을 목표로 하는 극복과 생성의 시편들이라 할 수 있다. 이별은 그의 시 전체의 대전제로서 만남에 이르는 방법적인 원리이며 사랑을 완성하는 자율적인 법칙인 것이다. 님을 이별한 시대는 바로 침묵의 시대, 상실의 시대인 것이며 따라서, 언젠가 맞이하게 되는 만남의 시간은 바로 참된 낙원 회복의 시대, 광복의 시대가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시는 기다림의 시 또는 희망의 시로 파악할 수 있다. 아울러 그의 시 도처에는 부정적 세계관이 깔려 있다. 즉 ‘못한다·아니한다·없다·말라’ 등의 부정적 종지법이 상당수에 달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부정적 사유와 비극적 세계인식은 그가 당대 사회를 모순의 시대로 파악하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제의 강점에 의한 식민지 지배가 근본적으로 모순된 것이며, 이에 대한 타파와 극복만이 정상적인 질서를 회복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의 일관된 일제에 대한 저항과 투쟁정신은 그대로 시를 통한 부정적 세계관으로 상징화된다. 이별이 더 큰 만남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적 원리였던 것과 같이 부정은 참다운 긍정과 생성을 이룩하기 위하여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저항시로서 만해의 시의 참된 면모가 드러난다. 한편, ≪님의 침묵≫의 또 다른 특징은 신성과 세속의 갈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님의 침묵≫의 전편을 통독하면 많은 시구가 대중가요와 같은 느낌을 준다. “나의 노래는 세속의 노래 곡조와는 조금도 맞지 않습니다”와 같이 신성 지향을 갈망하면서도 본능적이며 인간적인 정감이 시의 밑바탕에 깔려 있으며 그것이 직설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또한 ≪님의 침묵≫에는 충청도 방언과 토속어가 세련되지 않은 표현으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향토적 정감의 방언 및 토속어 애용과 서민적인 시어의 활용은 ≪님의 침묵≫에 민중정신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세속적인 정감의 진솔성이 불러일으키는 인간적 설득력과 함께 세속적인 사랑을 표출하면서도 세속사의 진부함에 떨어지지 않으며, 목소리 높여 민중정신을 강조하지도 않는, 바로 이 지점에 참된 민중시로서의 만해의 시의 진가가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님의 침묵≫에서 사랑을 호소하는 주체가 여성으로 나타나 있으며 시적 분위기 또한 여성적인 정감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이다. 여성주체는 물론 여성운이 활용되고 여성적인 상관물(相關物)들이 등장하는 등 여성적 성향이 주조를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주의는 불교의 관음사상 또는 인도의 여성사상에 기인한다고도 볼 수 있지만 그보다는 한국 시가의 전통에서 연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왜냐하면 고려가요는 물론 많은 시조·한시·가사·민요 등의 저변을 이루는 것이 여성적인 분위기와 주체 그리고 이와 상통하는 한과 눈물의 애상적 정서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 정철(鄭澈)이 왕권으로부터 소외를 극복하기 위하여 여성주의의 <사미인곡>을 쓴 것처럼, 한용운도 님이 침묵하는 시대에 잃어버린 조국과 민족에 대한 회복의 소망을 역설화한 여성주의적 방법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의 시의 여성주의는 정감적인 호소력을 유발하기 위한 표면적 기법일 뿐 그 내면에는 저항과 극복정신이 잠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성주의적인 부드러움과 애한의 정조는 실상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정신적 응전(應戰) 방식일 뿐 내면에 흐르는 선비정신으로서의 저항정신 및 극복정신과 조화되어 한국 문학의 총체적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만해의 시의 저항시로서 가치를 가지며, 또한 전통시와 상관관계가 선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아울러 만해의 시는 은유와 역설 등 시의 방법과 산문적인 개방을 지향한 자유시로서의 형태를 완성시킴으로써 현대시적 특성을 지니게 된다. 이 점에서 그의 시는 타고르(Tagore, R.) 등 외래 시의 영향을 받아들이면서도 전통시에 그 정신과 방법상의 맥락을 계승하고 있다. 실상 그의 시는 신문학사 초기의 각종 문예사조의 범람 등 서구지향의 홍수 속에서 전통적인 시정신의 심화와 확대를 통해서 창조적 계승을 성취한 것이다. 그의 시의 은유와 역설 역시 서구의 것보다도 전통시에서 연원한 것이 확실하다는 점에서 그의 시는 민족주체성을 시적으로 탁월하게 형상화한 민족시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이 밖에 그는 현대시 <님의 침묵>과는 별도로 다수의 한시와 시조, 그리고 <죽음>·<흑풍>·<박명>등의 소설도 남기고 있는데 이들 역시 불교사상과 독립사상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처럼 그의 문학은 험난한 역사를 살아가는 예지와 용기를 가르쳐주며, 현실적인 생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신념과 희망을 불러일으켜 준다는 점에서 참된 의미를 가진다. 또한, 그의 문학이 한국 문학에 있어 가장 부족한 요소인 종교적 명상의 진지함과 형이상학적 깊이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역사와 현실상황에 치열하게 부딪히면서도 물러나 정관하고 투시하는 구도자적 삶 속에서 그의 시가 견지한 미적 거리와 형이상적 주제의 진지함은 한국 문학의 원숙을 위하여 참으로 값진 교훈이라 하겠다. 일관성 있는 행동에 따른 실천의지와 저항정신을 깊이 있는 불교사상으로 이끌어 올리면서 끊임없이 변모하고 스스로 뛰어넘은 그의 시혼은 우리가 되살려야 할 소중한 정신사적 자산이 될 수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의 시정신과 미학은 어려운 시대일수록 풍란화 매운 향내로서 더욱 그 빛과 향기를 더해갈 것이 확실하다. 상훈과 추모 1962년에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관련이미지 29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유심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한용운 [韓龍雲]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두산백과 한용운   [ 韓龍雲 ] 요약 독립운동가 겸 승려, 시인. 일제강점기 때 시집《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였다.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주요 저서로 《조선불교유신론》 등이 있다. 이미지 크게보기 만해 한용운 선사상 출생-사망 1879.8.29 ~ 1944.6.29 본관 청주 호 만해 별칭 속명 유천, 자 정옥, 계명 봉완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충남 홍성 주요수상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주요저서 《조선불교유신론》《님의 침묵》 본관 청주(淸州), 호 만해(萬海·卍海), 속명 유천(裕天), 자 정옥(貞玉), 계명 봉완(奉玩)이다.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洪城)에서 출생하였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1896년(건양 1)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 그 뒤 1905년(광무 9)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 가서 연곡(連谷)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1908년(융희 2) 전국 사찰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설립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명을 시찰했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에 가서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 이를 격려하고 만주·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해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8년 서울 계동(桂洞)에서 월간지 《유심(惟心)》을 발간,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이듬해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이듬해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일을 맡았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 이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그 후에도 불교의 혁신과 작품활동을 계속하다가 서울 성북동(城北洞)에서 중풍으로 죽었다. 시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고 불교적인 ‘님’을 자연(自然)으로 형상화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衆生濟度)를 노래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이 추서되었다.  작품으로는 상기 장편 외에 장편소설인 《박명(薄命)》이 있고,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불교대전》 《불교와 고려제왕(高麗諸王)》 등이 있다. 1973년 《한용운전집》(6권)이 간행되었다.   한용운 연보 출생 1879.8.29~ 사망 1944.6.29 1879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한응준과 온양 방씨 사이의 아들로 출생.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 1892 전정숙과 결혼. 1894 동학농민운동에 가담. 이후 인제군 백담사로 들어가 불교에 심취. 1908 조선 전국 사찰 대표 52인에 참여. 1913 통도사 불교강사 취임. 《조선불교 유신론》 간행. 1914 《불교대전》 저술. 조선불교청년동맹 결성. 1917 《정선강의 채근담》 발간. 1918 월간지 《유심》 창간. 1919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참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함. 독립선언서낭독과 만세 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 후에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3년간 복역. 1926 시집 《님의 침묵》 출판. 《동아일보》에 발표. 1927 신간회 중앙위원회 위원 지냄. 1931 《불교》지를 인수함. 1932 수필 를 《조선일보》에 발표. 1935 장편 《흑풍》 연재. 1944 6월 29일 서울 성북동에서 사망. 1973 7월 《한용운전집》 간행. 1997 백담사에 만해기념관 건립. 참조항목 신간회, 유심, 조선불교유신론, 민족대표 33인 역참조항목 님의 침묵, 3·1독립선언서, 민립대학설립운동, 한, 이별은 미의 창조, 나룻배와 행인, 당신을 보았습니다 카테고리 지역 > 아시아 > 한국 > 충청남도 역사 > 아시아사 > 한국사 > 조선시대 인물 > 종교 > 불교 > 한국불교 인물 > 사회 > 한국사회 인물 > 문학 > 한국문학 인물 > 수상자 > 한국상과훈장 관련이미지 11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한용운선생의 수형기록표만해 한용운선생이 1929년 12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을 때 수형기록표에 붙어 있는 사진이다. 이미지 갤러리 출처: (주)연합뉴스 [네이버 지식백과]한용운 [韓龍雲] (두산백과)   독립운동가 한용운 민족대표 33인 불교계 대표 [ 韓龍雲 ] 출생 - 사망 1879.8.29. ~ 1944.6.29. 님은 갔습니다. 님은 갔습니다./아 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선생의 [님의 침묵]중에서(1926) 1905년 백담사에서 불교에 귀의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 8. 29 ~ 1944. 6. 29) 선생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한응준과 온양 방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이며 자(字)는 정옥(貞玉), 속명은 유천(裕天), 법명(法名)은 용운(龍雲), 법호(法號)는 만해이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한 뒤, 향리에서 훈장으로 학동을 가르치는 한편 부친으로부터 때때로 의인들의 기개와 사상을 전해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기울어 가는 국운 속에서 홍주에서 전개되었던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운동을 목격하면서 더 이상 집에 안주하고 있을 수 없었다. 때문에 1896년 선생은 홀연히 집을 나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수도하다가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노령 시베리아 등지를 여행하기도 하였다. 귀국 후 1905년 선생은 다시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가 속세와 인연을 끊고 연곡(蓮谷)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충남 홍성에 소재한 선생의 생가    
7428    "배 곯게 하는 문학은 절대 안 된다"... 댓글:  조회:3028  추천:0  2019-11-14
민족·국제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도처오르는 아침 날빛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김영랑 중) 어쩌면 이처럼 아름다운 시어(詩語)가 있을까. '솟아오르는 아침 햇빛을 받아 물결이 은빛처럼 반짝이는 강'같은 청량한 내면을 가진 이는 영랑 말고 대체 누가 있을까. 가장 애송되는 는 말할 것도 없고, , , , , , 등 영랑의 시는 한결같이 아름답고 영롱한 세상과 평화롭고 유유자적한 인간의 삶을 관조한다. 도란도란 속삭이는 모습을 그는 '도른도른' 이란 정겹고 토속적인 남도 어휘의 조탁(彫琢, 갈고 닦음)으로 그려낸다. 흔히들 영랑을 섬세하고 투명한 감성의 세계를 고운 심성으로 노래하는 탐미주의 시인의 전형이라 평한다. 그가 좋아해 마지 않았던 영국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의 명시 구절처럼 그에게 "아름다움은 영원한 기쁨"이었다. 영랑 시의 아름다움은 소리를 내어 읽어야만 제맛이 난다. 처음 읽으면 뭉클한 감동에 가슴이 '철렁'하고, 한 참 읽다보면 "부드럽고 섬세한 서정이 어느새 운율을 타고" 흐르며 노래가 되고 춤이 된다. '북에는 소월, 남에는 영랑'이라고 했던 문학평론가 이헌구는 "언어의 격조가 높은 점에서는 영랑은 옥이요, 소월은 화강석이다. 소월의 그 많은 한과 노래는 영랑의 옥저(옥피리)의 여운에 미치지 못하는 바 없지 않다"라고 했다. '추한' 세상에 반기를 들고   ▲  전남 강진의 영랑 생가 안채 . 본래는 기와집이었으나 강진군의 실수로 초가로 바뀌었다. ⓒ 김현철 관련사진보기   영랑은 1903년 산수가 수려하기로 이름난 전남 강진에서 탯줄을 끊고 나왔으나, 그가 당장 경험한 세상은 일제에 의해 비틀어지고 어그러진 '추한' 세상이었다. 청소년기에 무용가 지망생 최승희와 목숨을 건 열애에 빠지고, 프랑스 미인 여배우의 그림엽서 한 장에 눈물을 흘렸을 정도로 '순수미'를 시어(詩語)로 담아내고자 했던 그였다. 나긋하고 달착지근한 서정시를 쓰며 세상을 호호낙낙 살기를 꿈꾸었을 영랑이 사실은 '독(毒)을 품고' 산 시인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의 삶과 시를 제대로 조망하는 사람들은 그를 '시대의 반항아'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잡티 하나 없는 박속 같던 영랑이 '자연'을 거스르는 '부자연', 그리고 '아름다움'에 반하는 '추함'에 처음으로 저항한 것은 불과 14세때였다. 그는 3.1운동 2년 전인 1917년 휘문의숙에 다니던 시절, 친구들과 종로 네거리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다 주모자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과 구타를 당하고 훈방조치 되었다. 아직 솜털이 송송한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요주의 인물로 일제의 감시를 받아야 했던 영랑의 항일정신은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을 맞아 본격 발동한다.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지자 서울에서 몰래 입수한 독립선언문과 태극기 등을 구두 안창에 숨기고 강진으로 내려온 영랑은 4월 4일을 거사일로 잡아 봉기하기로 친구들과 모의한다. 그러나 거사일 사흘을 앞두고 경찰에 급습 당하여 모두 체포되었다. 이번에도 어린 학생(16세)신분이라는 점이 고려되어 6개월 만에 대구형무소에서 석방된다.    ▲  휘문 고보 시절의 김영랑 ⓒ 김현철 관련사진보기   영랑은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가기를 꿈꾸었으나, 부모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후 일본 경찰의 감시를 견디지 못한 영랑은 동경유학길에 올라 아오야마학원(청산학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도 비밀리에 독립운동가들을 만난다. 무정부주의자 독립운동가 박열(1902~1974)과 같은 하숙집에서 교유한 것도 이때다. 영랑의 삼남 김현철의 증언에 따르면, 청년 영랑의 자유의식과 항일정신은 이때 더욱 고취되었다. 일본에서 '독을 차고' 귀향하다 일본에서 시문학을 공부하며 암중모색하던 영랑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귀국한다. 관동대지진시 엉뚱하게 증오의 대상이 된 조선인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이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강진으로 돌아온 그는 1930년대 중반까지 , , , 등 토속적 서정이 듬뿍 담긴 작품을 쏟아낸다. 그러던 어느날부터 일제의 폭압이 극도로 심해지기 시작하자 저항의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특히 1930년 말에서 1940년 중반까지 집중적으로 저항시를 쏟아내는데, 말랑한 서정시를 쓰던 때와는 딴판이었다. 윤동주와 한용운의 저항시에 버금갈 만한 다수의 시편이 그때 발표되었는데, 는 그때 토해낸 시다.   ▲  김영랑의 생전 모습 ⓒ 김현철 관련사진보기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 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중략)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 건지기 위하여. ( 중) 군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1930년대 말, 일제는 황국신민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조선 성씨를 일본식 성씨로 바꾸는 창씨개명을 강요하여 조선인의 혼까지 말살하려 들었다. 일제는 국책문학을 내세우며 천황을 찬양하거나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내용의 시를 쓰도록 강요했다. 함석헌의 에는 그 당시의 상황을 '나라의 지사, 사상가, 종교가, 교육자, 지식인, 문인은 신사 참배하라면 허리가 부러지게 하고, 성을 고치라면 서로 다투어가며 했다'고 기록했을 정도로 내로라 하는 대부분의 지도급 인사들은 일제에 굴복했다. 영랑은 추한 세상에 빌붙어서 목숨을 구걸하는 세태를 비관·비판하는 한편, '독을 차고'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 힘썼다. 데뷔 초기작부터 유독 '내마음'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해온 영랑은 아름다운 우리말 어휘를 갈고 닦아 자연과 세상을 노래하며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억제해 오던 터였다.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영랑은 이리(일제)와 승냥이떼(친일 부역자)가 득실대는 세상에서 '독립이고 뭐고 모두가 쓸데없는 짓'이라며 그를 회유하는 친구조차도 위협하며 '독을 차고' 일제가 지배하던 세상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에 이어 , , 등에는 그의 결연하고 비장감이 감도는 '내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바깥은 거친 들 이리떼만 몰려다니고 사람인양 꾸민 잔나비떼들 쏘다니어 내 기린은 맘 둘 곳 몸 둘 곳 없어지다. 문 아주 굳이 닫고 벽에 기대선 채 해가 또한번 바뀌거늘 이 밤도 내 기린은 맘 놓고 울들 못한다. ( 중) 쓴 대로 살고, 사는 대로 쓴 시인 영랑은 시를 쓴 그대로 살았고, 살아간 만큼 시를 썼다. 그가 일찍이 에서 고백했듯 "시를 살로 새기고 피로 쓰듯" 하며 자신의 정체성은 물론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 했다. 중국의 대문호 루쉰이 "머리로 쓴 거짓말은 피로 쓴 진실을 은폐시키지 못한다"고 절규하며 부조리한 사회를 고발했던 것처럼, 대부분의 문인들이 머리를 굴려 추한 짓을 할 때, 영랑은 교활한 폭압체제의 실체를 폭로하고 항거했다. 그는 갖은 탄압에도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영랑의 삼남 김현철이 쓴 라는 책에 기록된 일화에 그의 '뚝심'이 잘 나와 있다. 일본 경찰이 조선인 가구주들에게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라고 강요할 때면 영랑은 "내 성명은 김윤식이다. 일본 말로 발음하면 '깅인쇼큐'다. 즉 나는 '깅씨'로 창씨했다"라며 당당히 대응했다. 그는 자신뿐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 창씨개명을 거부하도록 했는데, 자녀들은 학교에서 교사들에게 협박을 당하고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다. 매주 토요일 형사들이 대문을 두드리며 신사 참배를 강요했을 때도 습관성 설사병 등을 핑계로 이리 저리 이를 피했다. 양복을 갖춰 입고 단발을 하라는 명령도 끝내 불복했고, 해방이 될 때까지 한복을 벗지 않았다. '외로운 혼'으로 '독을 차고' 살던 영랑은 회유와 협박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심해지자 홀연 절필을 선언했고, 1940년 을 마지막으로 해방이 될 때까지 단 한 편의 시도 발표하지 않았다. 우리말을 쓰는 것 자체가 죄가 되던 시기에 영랑은 일본어로 된 단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은 시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일제시대에 총을 가지고 싸운 독립군이 있는가 하면 펜과 종이로 싸운 사람들이 있는데, 영랑은 총칼 대신 펜과 종이로 싸운 독립군이라 할 수 있다. 친일문학연구가임종국 선생이 마지막 순간까지 단 한 번도 친일을 하지 않은 영랑을 '일제 저항시인 7인'(윤동주, 변영로, 김영랑, 이희승, 황석우, 이승기, 오상순)에 포함시킨 이유다. 일제에 펜과 종이로 싸운 시인, 해방을 맞다   ▲  전남 강진의 영랑 생가 안채 본래 모습. 1997년까지 우아한 기와집이었으나 강진군의 실수로 초가로 바뀌었고, 현재까지 복원이 되지 않고있다. ⓒ 김현철 관련사진보기 '울들(울지) 못하는 기린(조선)'이 마음껏 목놓아 울 해방이 찾아왔다. 절필을 선언한지 5년 만에 그는 (일명 '치제'), , 등을 통해 해방 조국에 대한 벅찬 기쁨과 희망을 실토하고 현실 참여 의욕을 보인다.   자네 소리 하게 내 북을 치제 진양조 중머리 중중머리 엇머리 자저지다 휘모라보아 이러케 숨결이 꼭 마저사만 이룬 일이란 인생에 흔치 않어 어려운 일 시원한 일(중략) 떠밧는 명기인듸 잔가락을 온통 이즈오 떡떡궁! 정중동이오 소란 속에 고요 잇어 인생이 가을가치 익어가오 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치제 ( 중)   바다로 가자 큰 바다로 가자 우리 인젠 큰 하늘과 넓은 바다를 마음대로 가졌노라 하늘이 바다요 바다가 하늘이라 바다 하늘 모두 다 가졌노라 옳다 그리하여 가슴이 뻐근치야 우리 모두 다 가자꾸나 큰 바다로 가자꾸나 ( 중) 영랑은 해방 정국에서 한때 순진하게도 대한청년단에 입단하여 활동하다가 폭력적 상황에 질려 금방 그만 두었고, 이승만 정권에서 공보수석비서관이었던 의 시인 김광섭의 권유로 출판국장을 맡았으나 친일파들이 중앙청에 득실대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 힘들어 했다. 일제시대에 입었던 흰색 바지저고리와 검은색 두루마기를 그대로 다려입고 관청에 출근하는 그를 주변에선 못마땅해 했으나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다. 영랑이 경무대를 발칵 뒤집은 사건은 그의 유별난 결벽증을 보여주는 사례 가운데 하나다. 어느날 영랑이 이승만 대통령의 경무대 집무실을 방문했다. 그런데 집무실 뒷벽 전면을 장식하고 있던 대형 병풍 그림을 보고 금세 얼굴이 굳어졌다. 영랑이 "각하, 어찌 대한민국 대통령 집무실에 일본 금각사를 그려 넣은 병풍을 놓아둘 수 있습니까? 외국인들이 볼까 두렵습니다"라며 직설을 퍼부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충격을 받은 듯 눈을 크게 뜨며 "아니, 저게 일본 사찰 그림이란 말인가? 누가 그런 말을 해줘야 내가 알지. 당장 치우도록 사람을 부르게!"라고 했다. 무질서한 정국과 이승만의 독재에 환멸을 느낀 영랑은 7개월만에 출판국장직을 그만 두었다.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이었다.   ▲  영랑이 사망하기 1년 전인 1949년 여름 신당동 자택에서 찍은 마지막 가족사진. ⓒ 김현철 관련사진보기   영랑은 1950년 한국전에서 유엔군에 맞서며 후퇴하던 인민군이 쏜 유탄에 맞아 4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해방을 맞은 기쁨에 떡떡궁! 북을 쳤던 영랑은 "찬란한 슬픔"을 안고 일찍 그렇게 갔다. 대한민국 정부는 영랑 사후 68년이 흐른 지난 2018년에서야 그의 애국정신을 기려 독립유공 훈장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영랑은 대한민국 최고의 문화·예술인이 받는 금관문화훈장도 지난 2008년에서야 받았다. 전남 강진에 있는 영랑의 생가는 문학인의 생가로는 유일하게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순수한 시적 감성으로 추악한 일제의 모습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여 '독하게' 그려낸 영랑. 교활하게 거짓을 감추며 더 추해져가는 현재의 일본과 잔류 친일파들의 모습을 본다면 어떤 시어(詩語)로 이들을 꾸짖을까. 아들 김현철이 본 아버지 영랑, 그리고 대한민국 슬하에 5남 3녀를 둔 영랑은 '배 곯게 하는 문학은 절대 안 된다'고 자녀들에게 신신당부했으나, 두 딸을 제외한 5남 1녀가 글쓰는 일(영문학, 불문학, 언론인, 독문학, 영어학)을 전공하여 교수, 통역사, 언론인 등을 평생 업으로 삼아 아버지의 명을 어기며 살았다. 현재 영랑의 직계 자손 중 셋째 현철, 다섯째 현도, 여덟째 애란(여)이 생존해 있는데, 특히 셋째인 김현철(84) 선생은 전남 강진의 '영랑 현구 문학관' 관장을 거치며 영랑 시인의 삶의 족적을 관리.보존하는데 초석을 다졌다. 김현철 선생은 MBC 본사 기자를 거치고 1974년 미국으로 이주, 미주 동포언론 을 창간한 언론인 출신이다. 도미 후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독하게 맞서 싸우다 한때 입국금지인물 명단에 오른적도 있다. 그가 7년 전 폭로한 박정희 관련 유튜브('비운의 여배우 김삼화')는 5백만 회가 넘는 클릭을 기록하며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는 자유기고가로 와 등에 남북관계와 한국정치 관련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  영랑 사후 58년 만에 추서된 금관문화훈장 증서와 훈장. ⓒ 김명곤 관련사진보기   - 영랑이 뒤늦게나마 그 진면목을 인정받아 항일 저항시인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소감은? "만시지탄의 감은 있으나 지난 2008년의 금관문화훈장에 이어 작년에 독립유공훈장 건국포장을 받은 것은 천만다행으로 여긴다. 장기간 친일파 정권이 지속된 탓도 있겠지만, 지나치게 늦게 진실을 인정받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좀 안타깝다. 정부가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예우에 좀더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한다." - 선친에 대한 평론가들의 평에서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모두는 아니지만 아버님의 시에서 전체를 흐르고 있는 정서는 진취적이고 긍정적인 면도 강하다고 본다. 가령 같은 시는 해방정국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으나, 다가올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희망과 용기와 자신감을 예언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역시 슬픔을 노래하는 듯하지만 희망의 세계가 암시되어 있다." - '영랑 시인의 시는 운율적 흐름이 강해 한참 읽다보면 절로 노래가 나온다'는 평들이 많다. "사실 아버지는 성악가(테너)를 꿈꾸셨다. 어머님과 지역 노인들의 전언에 따르면, 아버지의 남도 판소리는 당시 명창들도 놀랄 정도로 수준급이었고, 거문고, 가야금, 북, 양금의 연주 실력도 전문가 뺨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특히 임방울, 박초월, 이화중선, 임춘앵, 김소희 등 당대의 명창들을 생가에 초청하면 고수를 데려올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아버지의 북 연주실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 선친과 음악에 얽힌 이야기 중 특별한 기억이 있을 듯하다. "아버지가 서양 클래식뿐 아니라 판소리까지 고전음악을 무척 좋아하셨다. 4살쯤부터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를 무릎에 앉혀놓고는 그 긴 판소리가 끝날 때까지 놓아주지 않으셨다. 미칠 지경이었다. 소변이 마려워도 아버지가 무서워서 꼼짝 못하고 갇혀 있어야 했다. 나만 아니라 다른 형제들도 그렇게 컸다." - 영랑시인은 일제에 대해 '독을 차고' 사셨으면서도 서정주 등 친일파 시인들과 친하게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선친이 친일파 시인 서정주와 어울리는 것을 보고 대학생이던 큰 형님이 '왜 저런 분과 가까이 지내십니까'라고 종종 불평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11년 연하의 서정주를 지칭하며) 불쌍한 사람이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으니 이해해야 한다'고 타일렀다. 아버지는 매우 인간적인 분이셨다." - 선생님이 본 아버님의 성격은? "이광수, 김광섭, 정지용, 서정주, 박목월 등 선후배 문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선친은 수줍음을 매우 많이 타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불의를 보면 불같이 화를 내는 과격한 면도 있었다. 이승만 정권 출판국장 시절 한글맞춤법통일안 수용 여부로 논쟁이 벌어졌는데, 통일안을 반대하는 이승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절친 김광섭에 뒤틀린 나머지 교자상을 뒤엎고 나온 일도 있었다. 언젠가는 옹졸한 직계 상사가 사사건건 월권을 하자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정도다." - 선친이 한국전 당시 북한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유탄에 맞아 사망했다고들 하는데, 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 "설령 인민군의 포격에 돌아가셨다고 해도 민족상잔의 비극 앞에서 억울하게 당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아버지도 북한군을 원망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아버님이 한때 잘 모르고 대한청년단에서 활동하신 일이 있으나, 자주통일과 평화통일을 선호하신 분이다. 진보적 민족주의자 몽양 여운형 선생을 모셔서 결혼식 주례를 서게 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 여운형 선생이 주례를 설 정도였으면 해방정국에서 좌파 사회주의로 기울었을 법한데.  "큰 형님의 생전 전언에 따르면, 언젠가 일본 유학생 시절 친구들이 '자네 같은 엘리트가 택할 길은 우리처럼 사회주의인데 왜 그 길을 따르지 않나?'라고 추궁하며 크게 다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선친은 '사회주의 좋지… 그런데 말야, 자유가 없는 게 싫네!'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선친은 같은 시문학파 동료이자 영랑이라는 호를 지어준 정지용과 단 둘이서 금강산 여행을 할 만큼 막역한 사이였다. 그러나 사상에서 차이가 있어 서로 멀어지며 결국 결별했다. 선친은 자유를 매우 소중하게 여긴 분이셨다."   ▲  미국 플로리다 마이애미에 거주하는 영랑 시인의 삼남 김현철 선생 ⓒ 김현철 관련사진보기   - 한인사회 일각에서 선생님을 친북인사로 부르기도 한다. 이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듯한데. "(웃으며) 지겹도록 들어온 한심한 소리다. 나 스스로는 누가 뭐래도 선친과 같은 진보 민족주의자라고 생각한다. 사실 1980년대 초반까지도 우리 세대가 받아온 길고 긴 반공교육이 가져온 트라우마 때문에 북을 적대시 했다. 운영하던 신문사에서 김재준, 함석헌, 송건호, 함세웅, 문동환 등 민주인사들을 초청하여 강연을 들으며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나는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선호한다." - '반미주의자'라는 비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미국은 독립 후 242년간 200여차례나 타민족을 괴롭혀 왔다. 노엄 촘스키에 따르면, 미국은 평균 9개월마다 침략 전쟁을 벌인 나라다. 이러한 미국을 보고 친미를 한다면 그게 정상인가? 극심한 빈부격차를 가져오는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과 미국을 인권국가로 착각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가령 악명높은 관타나모 인권유린의 실상을 안다면 감히 미국을 인권국가로 부르지 못할 것이다. " - 영랑 시인이 살아 있다면 현재의 한일관계에 얽힌 논쟁들을 어떻게 보고 계실까. "현재의 갈등은 친일파 70년 체제에서 나온 토착왜구 세력과 민족주의 진영간의 싸움이라고 본다. 아버지는 결단코 토착왜구 세력을 지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 ...
7427    민족저항 3대시인... 댓글:  조회:2411  추천:0  2019-11-14
일제시대의 민족저항 3대시인으로 이육사, 윤동주, 이상화  상화(尙火) 이상화는 대구의 명문 이시우의 차남으로 현진건보다 8개월 늦게 태어났다. 형 이상정은 임시정부 장군으로 항일전을 지휘했으며, 동생 이상백은 잘 알려진 유명한 사학자겸 체육인이다. 중앙학교 3년 수료 후 금강산 등을 방랑하며 고민 많은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창간호에 발표한 가 이때 씌어졌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주요한의 보다 앞서 탁월한 자유시를 쓴 것이 된다. 동경 아테네 프랑세스에서 불어를 공부하던 그는, 동경 대지진 때의 조선인 대학살에서 천운으로 목숨을 구하고 귀국하여 경향팡에 기울어지면서 를 쓰고, 연애하던 류보화를 폐병으로 잃은 뒤의 을 썼다. 요정 출입을 하며 울분을 달래던 이상화는 1936년 중국으로 형 이상정을 만나고 돌아왔다가 간첩 혐의로 일본 경찰의 모진 고문을 받고 풀려 나온 후, 대구에서 교육 문화사업에 주력하며 교남학교의 무료 강사가 되었다. 중앙중학 시절 야구부의 3루수였던 이상화는 '피압박 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 한다'며 교남학교에서 권투를 권장했다. 일제 밑에서는 벙어리와 같다 하여 말년의 호를 '백아(白啞)'로 했던 이상화는 바라마지 않던 원고를 끝내지 못하고 위암으로 운명하니, 1948년에 세워진 달성 공원의 상화시비가 그의 저항정신을 여전히 기리고 있다. ------------> 백아 이상화 시인의 프로필 윤동주는 29세의 젊은 나이로 해방을 앞둔 1945년 2월 일본의 후쿠오카 감옥에서 안타깝게 순절한 저항 시인이다. 그가 옥사하고 3년뒤에 나온 유고시집(遺稿時集)은 그가 연희전문 졸업을 기년하기 위하여 뜻깊게 남긴 자필시고(自筆時稿) 3부 중에서 1부를 유일하게 보관하던 친구 정병욱과 아우 윤일주에 의하여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로 출간 되었다. 동주는 대부준의 작품마다 작품의 연대를 적어놓고 있는데 '자화상'이 1939년 9월로, ' 별헤는 밤'이 1941년 11월 20일로 되어 있다.이로 보아 자필 시고 3부를 만들무폅에는 '별헤는 밤'이 가장 마지막 쓴 작품으로 추정된다. 동주는 그의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의 제목에서 시사하듯이 하늘과 별과 바람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던 것 같다.그에게 있어서 하늘과 별은 주로 그리움과 꿈의 대상으로 나타나 있다. 이 그리움과 꿈은 자신의 삶에 대한 외로움이며 슬픔이기도 하다. 그의 시세계는 그리움과 슬품으로 점철된세계였고 그러한 세계에 대한 지향은 하늘과 바람과 별로 투영되었다. 하늘과 바람과 별은 동주에게 있어서는 현실의 고로움을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표상이었다. 윤동주는 해방은 눈앞에 두고 일제의 어두운 옥중에서 젊은 나이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저항 시인이다.. 그의 괴운 삶과 시편들은 오히려 어두운 밤하늘의 별처럼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이' 살다 간 윤동주, 그는 암흑기에 산 우리 민족을 가장 투철하고 아름답게 빛낸 별의 시인이었다. -------------------------->윤동주 시인의 프로필 1904-1944  본명은 원록(源綠) , 별명은 원삼(源三) ,후에 활(活)로 개명.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에서 둘째로 출생. 지금은 그가 태어난 곳에 '청포도'시비가 우리를 맞고 있습니다.  1904년 음력 4월 4일은 그의 생일입니다. 1944년 1월16일 새벽 5시에 북경감옥에서 돌아가셨습니다.  詩 '절정'에는 '매운 계절의 채찍'과 '서릿발 칼날진'그때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는 경상북도 안동에서 이퇴계의 14대손으로 태어났습니다.  이 시절 선비의 자녀들이 대개 그러했듯이 육사도 다섯 살 때 할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우는 등 어린 시절에는 전통적인 한학을 공부했습니다.  육사의 할아버지는 보문의숙(寶文義塾)이라는 신식학교를 운영하였습니다. 열두 살 이후(1905) 백학서원을 거쳐(19세) 일본에 건너가 일 년 남짓 머물렀던 스무 살(1923) 무렵까지는 한학과 함께 주로 새로운 학문을 익혔습니다.  의열단은 항일독립운동을 위한 무장투쟁 단체였습니다. 1925년 항일투쟁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의 대열에 참여합니다.  6.10만세사건후 1926년 북경에 갑니다. 다음해 귀국한 그는 장진홍 의사가 일으킨 대구은행 폭파사건의 피의자로 붙들려 형님 및 동생과 함께 옥에 갇혔다가 장진홍 의사가 잡힘으로 석방되었지만 같은 해 10월 광주학생사건이 터지자 또 예비 검속 되기도 합니다.  1931년 북경으로 다시 건너간 육사는 이듬해 조선군관학교 국민정부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에 들어가서 두 해 뒤에 조선군관학교 제 1기생으로 졸업합니다.  1943년 일본 형사대에 붙잡혀 해방을 일년 남짓 앞둔 1944년 1월 북경의 감옥에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무려 열일곱 번이나 옥살이를 했습니다.  육사(陸史)라는 그의 아호는 그가 스물네 살 되던 해인 1927년 처음으로 감옥에 갇혔을 때의 그의 죄수번호가 264번이어서 그것을 소리나는 대로 적은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 전해지고 있습니다. 육사는 투쟁론의 입장 - 글이나 쓰면서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온몸을 바쳐서- 에 선 독립운동가이며 또한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 저항시인입니다.  1933년 {신조선}에 [황혼]을 발표하며 등단하였으나 작품 수가 많지 않고 문단활동도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 대부분은 만주와 중국 조선을 오가며 살았습니다. 시대의 질곡(일본의 식민통치)에 대결하는 강인한 정신을 정제된 시형식으로 표현한 점이 그의 시가 지닌 특징이다. 유고시집으로 {육사시집}(1946)이 있다.  -------------->육사 이육사 시인의 프로필 =================================/// 사랑하는 까닭    - 한용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이 시는 진정한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주제라 해도 좋죠. 화자의 당신이라는 존재는 백발, 눈물, 죽음 등 화자에게 있어 부정적인 요소로 비칠 수 있는 모습들 조차도 사랑합니다. 조건없는 사랑, 다시말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진정한 이해와 진정한 사랑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한용운 시에서 당신 혹은 님이라는 존재가 한용운 삶의 배경때문에 여러가지로 해석되곤 합니다만, 시를 즉물적으로 바라본다면 화자의 연인이 될 수 있겠죠. 그러나 그보다는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경지에 도달한 (이상적인) 인물을 그려놓았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네요. 그것이 당연히 붓다일 수도 있구요.  조국이나 국가가 이런 절대적이고 진정한 사랑을 베풀진 않잖아요ㅋㅋㅋㅋ 한용운 이 시인의 의식 혹은 인식의 수준은 당시 상황과 당시 많은 사람들에 비추어 봤을때 높아 존경스럽습니다. 당시로썬 쉽게 나타나기는 어려운 위인이란 생각이 듭니다.     바람이 불어  - 윤동주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 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꼬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우에 섰다. 강물이 자꼬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우에 섰다.     윤동주는 청년기를 보내며, 자신 개인의 삶이 혼란스러운 당시 사회와 역사 흐름에 이바지를 하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고민을 많이 한듯 합니다. 다수의 시에서 윤동주의 그런 고민의 흔적들이 많이 보이구요. 이 시도 그런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수 있습니다.   1.바람은 혼란스럽고 힘겨운 당시 시대상으로 여겨지네요.  첫째 연에서는 그러한 모습의 정체(바람의 연기緣起 혹은 인과)가 무언지 읊조리며, 자신의 고민을 꺼내기 시작합니다.  2.바람이 부는 모습을 보고, 시선을 옮겨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니 '괴롭습니다'(2연).  3.세번째 연과 넷째 연에서는 그 이유가 또한 무엇인지 사색을 하죠. 여자를 사랑하거나 시대를 슬퍼해서 괴로운 것은 아니다. 그것이 괴로움의 이유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4.한번더 시선이 이동하여, 자신이 괴로운 이유를 직접적으로 서술하는 대신 그것을 알 수 있는 자신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화자의 발은 '안전한 반석 위에' 있고, 강물(시대의 흐름, 거창하게 말하면 역사의 흐름)도 자꾸 흐르는데 '그 흐름에 휩쓸릴 염려가 없는 언덕 위'에 있다고 합니다. 서두에 언급한 바와 같은 윤동주의 고민이 보입니다.  윤동주 시인의 모든 시들에서는 청년기에 가져야할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그 순수함 그대로 느껴집니다.     반드시 저항시인의 관점에서만 보기 보다는 그런 타이틀을 일단 내려놓고 한 인간의 모습에서 부터 출발하여 감상했으면 좋겠습니다.
7426    264, 저항 시인 이육사... 댓글:  조회:4339  추천:0  2019-11-13
생방송 한국사 - 근대 · 현대 죄수 번호 264번, 저항 시인 이육사     목차 1. 이육사의 독립운동 2. 누명을 쓰고 감옥을 간 이육사 3. 이육사, 총 17번 감옥에 갇히다 4. 이육사의 다양한 독립 투쟁 활동 5. 시를 통해 일제에 대한 저항 의지를 표현한 이육사 6. 이육사의 「광야」 감상 7. 이육사의 갑작스런 죽음 8.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다 그의 이름은 바로 이육사. 그가 마흔 하나라는 이른 나이에 숨을 거두고, 그 다음 해에 광복을 맞이하게 되어 더욱 안타깝지요. 오늘은 이육사의 생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이육사의 독립운동 이육사는 친가와 외가 모두 일제에 저항했던 대쪽 같은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답니다. 그는 앞선 독립운동가들의 항일 투쟁에서 큰 깨달음을 얻고, 형제들과 함께 항일 무력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습니다. 이육사와 형제들은 중국 베이징을 오가며 국내 소식과 군에 필요한 돈을 전달하는 등의 활동을 했지요. 2. 누명을 쓰고 감옥을 간 이육사 이육사는 독립운동을 하던 중, 1927년에 ‘조선은행 대구 지점 폭파 사건’의 주동자로 휘말리게 되어 이육사와 형제들이 일본 경찰에 붙잡히게 됩니다. 일본 경찰들은 이들 형제가 사건을 계획하고 폭탄을 운반한 것으로 사건을 조작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진짜 주동자였던 장진홍 의사가 잡히게 되어 2년 4개월 만에 석방되었어요. 이육사는 이때의 죄수 번호였던 264번을 따서 자신의 이름을 육사라고 지은 거랍니다. 원래 이름은 이원록이에요. 3. 이육사, 총 17번 감옥에 갇히다 모진 고문 끝에 병을 얻은 이육사는 휴양을 하며 건강을 회복해야 할 정도였어요. 그러나 이미 일본에 감시 인물로 찍힌 터라 굵직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번번이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 투옥을 당하곤 했죠.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 때도 투옥되었다가 풀려났고, 1934년에도 서울에서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다가 풀려났지요. 이런 식으로 감옥에 투옥된 횟수가 무려 열일곱 차례나 된다는군요. 4. 이육사의 다양한 독립 투쟁 활동 일본이 이육사를 주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어요. 살아생전 정말 쉼 없이 독립운동에 참여했거든요. 그는 중외일보의 기자로 활동하기도 하고, 중국 독립운동 기지의 조선 군관 학교에서 독립 투쟁을 준비하며 군사 훈련을 받기도 했습니다. 적 몰래 통신하는 법, 폭발물을 설치하고 터뜨리는 법 등의 훈련을 받기도 했어요. 뿐만 아니라 끝없이 만주를 오가며 국내외 소식을 전하고 독립군을 모집하기 위한 비밀 임무를 계속 수행했지요. 그러느라 이육사의 건강은 더욱 나빠졌어요. 5. 시를 통해 일제에 대한 저항 의지를 표현한 이육사 건강이 나빠진 이육사는 시를 비롯한 다양한 글을 쓰며 민족 시인으로서의 활동을 이어갔어요. 시를 통해서 민족의 정신을 일깨우고 일제에 끝까지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던 거예요. 6. 이육사의 「광야」 감상 이 무렵 이육사가 쓴 「절정」, 「청포도」, 「광야」 등의 작품은 광복을 꿈꾸는 이들에게 크나큰 용기를 주었습니다. 이육사의 시 중에서 한 편을 감상해 보시죠.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그의 시를 읽은 사람들은 나라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일제 강점기라는 어둠 속을 헤치고 나아가겠다는 시인의 굳은 의지를 느낄 수 있었어요. 7. 이육사의 갑작스런 죽음 광야를 지은 후, 이육사는 영문도 모르는 채 경찰에 붙잡혀 베이징의 교도소에 투옥되었습니다. 그리고 1944년 1월 16일 새벽 5시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요. 이육사 갑작스럽게 그가 죽었다는 소식에 동생 이원창이 황급히 베이징으로 향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어요. 일본 영사관은 가족이 이육사의 시신을 확인하기도 전에 화장해 버렸거든요. 8.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다 이육사의 유해는 처음에는 미아리 공동 묘지에 안장했다가 광복 후 안동시에 이장했어요. 1990년에 나라에서는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내렸지요. [네이버 지식백과] 죄수 번호 264번, 저항 시인 이육사 (생방송 한국사)  
7425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댓글:  조회:3041  추천:0  2019-11-13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참여시인으로는 누가 있나요?     분야 현대 시 목차 김수영 :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신동엽 : 종로 5가의 비참한 현실 조태일, 이성부, 민영, 김지하, 고은의 작품도 주목하길!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가치와 중요성 고등학교 국어Ⅰ 문학과 사회적 소통 우리나라는 1960년대에 참여시가 많이 발표되었다고 하는데 참여시인에는 누가 있나요? 그리고 그들이 쓴 작품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고 싶어요. 김수영 :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우리나라 참여시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작가는 김수영 시인입니다. 그가 남긴 마지막 작품 「풀」은 부당한 권력에 의해 고통받는 민중의 저항의지를 불태운 작품이었습니다. 「풀」은 민중들이 힘겹고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위로와 격려를 보내 주었지요. 연약해서 거센 비바람에 쓰러지는 풀은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 바람보다 먼저 웃는”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것으로 그려졌지요. 김수영 시인은 원래 모더니즘적인 시를 쓰던 작가였습니다. 도시 문명에 대한 비판과 전통적 시 형식에 대한 실험적 의식을 지닌 시인이었지요. 그런데 정치 권력이 지나치게 부패하자 이를 참지 못하고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합니다.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김수영, 「눈」 중에서 이 시에서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는 부정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젊은 시인에게 “기침을 하자”고 권하는 것은 부정한 현실에 대해 용감하게 대응하자는 뜻으로 읽힙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눈을 바라보며” 가래를 뱉자고 한 것일까요. 순결한 눈 위에서 더러운 가래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김수영 시인은 현실 참여적인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했습니다. 「폭포」,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푸른 하늘을」과 같은 시도 함께 감상해 보기 바랍니다. 신동엽 : 종로 5가의 비참한 현실 참여시인 중에 빠뜨려서는 안 될 이로는 신동엽 시인이 있습니다. 신동엽 시인은 여러분에게 「껍데기는 가라」라는 작품으로 익숙할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신동엽은 4월 혁명의 정신과 동학 혁명의 정신적 본질을 잊지 말 것을 주문하면서 남과 북이 외세에 휘둘리지 말고 스스로 화해를 이루자는 메시지를 형상화했습니다. 신동엽은 1960년대 시대 현실을 날카롭게 그려 내 현실 참여를 적극 유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보았어. 세종로 고층건물 공사장, 자갈지게 등짐 하던 노동자 하나이 허리를 다쳐 쓰러져 있었지. 그 소년의 아버지였을까. 반도의 하늘 높이서 태양이 쏟아지고, 싸늘한 땀방울 뿜어낸 이마엔 세 줄기 강물. 대륙의 섬나라의 그리고 또 오늘 저 새로운 은행국(銀行國)의 물결이 뒹굴고 있었다. 신동엽, 「종로 5가」 중에서 한 편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작품 전체를 살펴보면 시적 화자인 ‘나’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어떤 소년 하나를 마주합니다. 그 소년은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처럼 보이는 어린 나이에 매우 초라한 모습으로 시골에서 올라온 것 같은 인상이었습니다. 소년을 보면서 시적 화자는 소년이 찾으러 온 사람이 누굴까 상상합니다. 그런데 그 상상 속의 인물들은 모두 어렵고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몸을 파는 여자였고 두 번째는 위의 인용부에서 보듯이 고층건물 공사장에서 자갈지게 등짐 지다가 허리를 다쳐 쓰러진 노동자였습니다. 신동엽은 이 두 사람을 통해서 당시의 현실이 얼마나 힘겹고 어려운지를 보여 주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위 인용문의 마지막 세 행을 보면 이토록 현실을 어렵게 만드는 이유가 외세의 침략과 관련이 있다고 시인이 말하려는 것 같습니다. 대륙, 섬나라, 은행국은 각각 중국, 일본, 미국을 가리키는데 이들에 의해서 현실의 삶이 어려워졌음을 제시하려 했던 것입니다. 참여작품... 김수영, 신동엽 이외에도 현실 문제에 적극 참여하고자 했던 시인은 적지 않습니다. 그중에서도 조태일, 이성부, 민영 시인의 작품은 여러분이 직접 읽어 볼 것을 권합니다. 조태일의 「국토 서시」는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과 우리 국토에 대한 한없는 애정이 담긴 시이며, 이성부의 「벼」는 민중의 공동체적인 연대의식과 공동체를 위한 희생의 태도가 아름답게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이성부의 또 다른 시 「봄」은 부정한 현실을 극복하고 자유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시인의 마음이 나타나기도 했지요. 민영의 「용인 지나는 길에」는 외세에 물든 현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 밖에도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고은의 「화살」 같은 작품도 꼭 읽어 보길 바랍니다. 문학의 현실 참여 논쟁은 무엇인가요? 문학에서의 현실 참여 논쟁은 1960년대, 문학이 현실에 참여해야 하는지, 순수한 문학성을 지녀야 하는지를 두고서 벌였던 논쟁을 가리킵니다. 이 논쟁은 문학평론가 김우종이 당시의 문학이 어려운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시작되었지요. 이후 이형기 시인이 순수 문학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고 또다시 김수영 시인과 이어령 평론가 사이에서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이 과정에서 김수영 시인은 ‘모든 전위 문학은 불온하다.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불온한 것이다’라며 문학을 한 가지 흐름에만 가두어 놓으려는 경향을 비판했습니다. 현실 참여 논쟁은 서구의 앙가주망(참여 문학)으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본질적으로 4 · 19 혁명을 경험하면서 싹튼 사회 참여적 흐름이 문학에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참여시인으로는 누가 있나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7424    [겨레자랑] - "사전동행자" = "사전사나이" 댓글:  조회:3195  추천:0  2019-11-13
'마음의 부자' 김성규씨의 사전 사랑 (ZOGLO) 2019년11월13일  인물이름 : 김성규   “숙명이라 할가…”   1983년 21세 때다. 중앙민족대학 조선어학과 3학년생 김성규(1962년 생)는 시간 날 때마다 훑어보는 《조선말사전(6권사전)》 속의 낯선 외래어에 점차 호기심을 갖게 되였다. 그 호기심을 해결하는 방법도 간단했다. 사전 속 외래어들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베껴보는 것.   무작정 베끼다 보니 어느새 3, 4천개 외래어를 접하게 됐다. 워낙 언어에 애착이 있어서 그는 그 외래어에 상응한 중국어도 알고 싶어 외래어 단어 번역을 취미삼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훗날의 사전편찬으로 이어지고 평생직업으로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대학교 4학년 때다. 우연 속에도 필연이 있다고 했던가? 졸업실습을 출판사에서 하게 되였고 출판 업무를 접촉하면서 외래어사전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 마음 속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1984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출판계통이 아닌 정부기관에 배치받았다. 그러나 사전에 대한 애착은 가셔지지 않았다. 포기할 수 없었다.   김성규씨는 낮에는 맡은 바 사업을 착실히 완수하는 한편 저녁시간을 리용하여 사전편찬에 본격적으로 들어갔다. 사전 편찬은 인내력과의 싸움이였다. 표현의 자유가 무한한 문학작품과 달리 사전 편찬은 티끌 만한 상상력도 용납할 수가 없다. 무미건조하게 기계적으로 한페지 한페지씩 쌓아가는 과정이 혹독한 마음 수련의 과정이였다. 출근시간을 제외하곤 매일 6~7시간 정도 사전편찬에 심혈을 몰부은 결과 1년 만에 원고를 마무리지었다.   이내 들뜬 마음으로 출판사에 원고를 제출했으나 결국 ‘퇴짜’를 맞았다. 무어라 간곡하게 당부하던 편집선생의 말도 잊어버리고 정신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공든 탑이 일조일석에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다시는 이런 헛고생을 하지 않겠다고 원고를 트렁크 속에 처박아두고 몇년 동안 필을 놓았다.   그런 와중에 중국과 한국간 민간래왕의 문이 차츰 열리면서 그는 신문과 간행물을 통해 다시 낯설은 외래어를 접촉하게 되였다. 마음 속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사전 편찬’이란 소망이 다시금 고개를 쳐들었다. 중한 교류에 외래어사전이 꼭 필요하다고 판단한 그는 다시금 사전 편찬 작업에 뛰여들었다.   원고 작성에 이어 조판까지 스스로 마쳤다. 리유는 단순했다. 활자조판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그는 여기저기서 모은 돈으로 ‘386 컴퓨터’ 한대를 마련하고 조판프로그램을 깐 후 직접 조판에 들어갔다. 드디여 《한중외래어사전》이 1996년 료녕민족출판사에 의해 세상에 나왔다. 150만자 되는 이 사전은 국내 여러 대학 조선어(한국어)학과로부터 필수 공구책으로 선정되여 각광을 받았다.   사전 편찬에서 행복감, 획득감을 느낀 그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공무원 생활을 청산하고 아예 출판사로 자리 옮겨 매일매일 사전 만드는 일에만 매달렸다. 그러다 2001년 출판사에서 사직하고 지금까지 자유작가로 지내오고 있다.   《한중외래어사전》을 시작으로 그는 계속해서 2000년에 《한중외래어사전(중한대조편)》, 2001년에 《영-한-중 컴퓨터용어사전》(공저), 2005년에 《뉴밀레니엄 한국어외래어사전》, 2011년에 《신편 한국어외래어사전》, 2019년에 《포켓 한국어외래어사전》 등을 펴냈으며 큰 공을 들인 《중한대사전》(공저)도 출판을 앞두고 있다.     총 천여만자에 달하는 사전들을 펴낸 그는 지금도 매일 사전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휴식 삼아 텔레비죤 방송을 시청할 때도 새 단어들이 나타나면 꼭꼭 메모하군 한다. 사전이 나오는 순간에도 세상에 새로운 말들이 끊임없이 나오기 때문에 사전 편찬은 늘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남자의 성공 절반은 녀자의 공로”라는 말은 김성규씨에게 너무나 적절하게 들어맞는다. 모든 정력을 사전 편찬에만 쏟아붓는 남편을 응원하기 위해 아내는 소리없이 집안의 모든 일을 도맡았고 짬만 나면 책상에 마주 앉아 원고를 정리해 주기도 했다. 아내의 든든한 뒤바라지가 그에게 큰 조력임이 틀림없다.   사전과 수십년간 인연을 이어오면서 비록 부와 지위 등 세속적인 성공을 얻지 못했지만 그는 "후대들에게 무언가 남겨줄 수 있는 보람찬 삶을 살고 있다"며 ‘마음의 부자’라 자칭했다.   ///료녕신문 /최동승 기자
7423    [별의별] - 장춘에 "술문화박물관" 없다?... 있다!... 댓글:  조회:3038  추천:0  2019-11-13
당신은 백만원짜리 모태주를 보았는가? (ZOGLO) 2019년11월13일  길림성술문화박물관 67개 계렬, 6천병에 달하는 소주 소장해 기네스북에 올라     물과 곡물이 만나 손을 꼭 잡고 오랜 기다림 끝에 빚어진 옥액경장, 술은 천시와 지리, 인화의 걸작이다. 술은 또 생활과 기억의 기록이다. 술하면 떠오르는 두 명인이 있으니 바로 시선 리백과 방랑시인 김삿갓이다. 리백은 “기로인께서는 황천에서도 여전히 맛있는 술 빚고 계시리라. 그러나 무덤 속 저승에 리백이 없으니 그 술을 누구에게 파시려는지( 纪叟黄泉里, 还应酿老春。夜台无李白,沽酒与何人。)”라는 유명한 시구를 후세에 남겼다.  김삿갓은 “천리 먼 길을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는데 남은 엽전 겨우 일곱잎이나 오히려 많다 여기네. 주머니 속의 너에게 깊이 숨어라 경계했는데 황혼녘 들판의 주막에서 술을 봐버렸으니 어이할가.(千里行裝付一柯/餘錢七葉尙云多/囊中戒爾深深在/野店斜陽見酒何)”라는 명시를 남겼다. 술향기가 천년 두고 기억할 시인을 낳았다면 시인은 그 답례로 반만년 두고 전할 술이야기를 빚었다. 중국 17대 명주 전시해 술 문화와 력사 알리다 백산방대그룹의 녕봉련을 알기전 명주 한병도 나오지 않는 장춘에 술문화박물관이 있다는게 참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민영기업인 백산시의 방대그룹이 중국 명주 류통업계에서 한자리를 당당히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은 지 꽤 오래 되지만 장춘에 세워진 길림성술문화박물관이 이 민영기업의 주인 녕봉련에 의해 세워졌다는 사실은 얼마 전에야 비로소 알게 됐다. 그리고 길림성술문화박물관에 한병에 백만원에 가는 고가의 모태주를 포함해 소장가치가 어마어마한 명주들이 그렇게 많이 있을 줄은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서야 알게 되였다. 장춘 아태대가를 따라 남쪽방향으로 줄기차게 달리다보면 위성로와의 교차점에서 500메터쯤 직진하면 바로 큰길 옆에 길림성술문화박물관이 시선에 안겨온다. 이 박물관은 국내 명주 류통업계의 쟁쟁한 실력파인 백산방대그룹에서 3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만들어낸 야심작으로서 2012년 8월에 개관해 시민들에게 무료로 개방하고 있으며 3,000여평방메터의 공간에서 참관도 할 수 있고 또 주류 구매 그리고 모태주와 오량액 진가 감별까지도 동시에 가능한 기능을 갖추었다. 3층으로 된 건물은 그중 두층을 술문화전시구로 사용하고 있는데 국내의 현대명주로부터 세계명주, 길림성술과 기타 성에서 생산되는 지방술, 담금술 그리고 한병에 백만원도 넘어가는 국가급진품소장술인 모태주전문전시구에 이르기까지 70종류에 가까운 근 6,000병에 달하는 각종 술을 전시하고 있다.     현대명주전시구에 들어서면 전국 동서남북의 내노라하는 술공장들에서 생산한 명품술과 잘 팔린다는 술들과 대면할 수 있다. 전시와 판매를 동시에 겸비한 장소라서 피뜩 보아서는 어느 술은 구입이 가능하고 어느 술은 진렬품인지 구분이 잘 안되므로 유관 일군에게 물어봐야 한다. 술문화박물관에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 또한 술과 술문화력사를 알아가는 좋은 시간이다. 담금술전시구는 유리병에 소주와 함께 가득 채워진 담금재료들을 통해 우리에게 양생술로서의 담금술의 문화를 직관적으로 알려준다. 인삼, 록용, 불로초 그리고 령지, 천마, 더덕, 송이에 운남의 삼칠, 청장고원의 설련화에 이르기까지 보는 이들의 눈을 부시게 한다.  국가급진품소장술진렬구에는 공화국이 건립되여서 1952년에 있은 첫 주류평의회에서 탄생한 전설의 4대명주로부터 시작하여 1989년에 마지막으로 있은 제5회 주류평의회에서 나온 17대명주가 한병도 빠짐없이 진렬되여 있다. 중국 명주의 력사를 료해할 수 있는 좋은 공간이다. 1989년 이후 유관부문에서는 더는 주류평의회를 조직하지 않았다고 하니 이제 다시 명주이름을 가지려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미정이다. 량곡대성인 길림성에 명주가 하나도 없는 것이 못내 아쉽다. 4대명주로부터 17대명주에 이르기까지 이름이 쟁쟁한 부동한 지역, 부동한 브랜드, 부동한 향을 가진 명주들은 부동한 시기 국내 전반 소주 소비시장을 령솔하는 인도자의 역할을 담당해왔으며 주류기업들의 생산과 기술 수준을 향상하는 추진제 역할을 남김없이 발휘해왔다. 한병에 백만원 넘는 모태주와 친근감 주는 길림성 지방술 국주로서의 모태주는 세계 3대명주에 속한다. 주식시장에서 팔고 사는 모태주 한주의 주가가 지금 1.200원에 간다고 하니 이 고귀한 명주의 값을 잘 설명해주는 또 한가지 생동한 실례라고 할 수 있겠다. 길림성술문화박물관의 주인장인 녕봉련은 모태주에 대한 남다른 애착심을 가지고 박물관 2층에 단독전시구를 만들어 명주들을 귀빈을 모시듯이 진렬하고 있다.     국주로 불리우는 모태주.     한병에 백만원 넘는 모태주.   부동한 년대에 만들어진 모태주, 인민대회당 준공 50주년, 공화국 창립 50주년을 기념해 특제한 모태주 그리고 300세트만 출품된 한정판 10대 청동기모태주, 56개 민족을 상징하는 모태주...구태여 세세한 설명이 필요 없이 진렬장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해설원이 알려주는 소장품 모태주 가격에 두눈이 뒤집어질 정도다. 그중에는 모태주가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계기가 된 1915년 빠나마국제박람회 때 얼굴을 보인 모태주가 일정량으로 들어간 술이 있으니 말 그대로 이 박물관의 자존심이다. 지금의 시가로 따지면 100만원을 훨씬 넘기고 있다고 한다.   길림성술전시구에 들어서면 당년에 백성들의 술상에 흔하게 올랐던 대중술들이 눈안에 안겨온다. 저도 모르게 친근감이 들고 거리감을 확 줄여주는 술전시구임에 틀림이 없다. 애주가들은 덧없이 흘러간 그 세월에 종종 마셨던 유수천, 도남향, 토얼하, 대천원, 룡천춘 그리고 연변 애주가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조양주... 그 술이름들을 하나둘씩 떠올리느라면 그때 이야기에 푹 젖어들어가 감개가 무량하기만 하다. 길림성술전시구에는 우리 성 12개 현, 시의 술공장에서 생산되던 150여종의 600여병에 달하는 술이 전시되여 있다.     길림성에서 생산된 술.   술문화박물관에서는 또 시민들을 위하여 매달 9일에 모태주와 오량액 진가 감별을 무료로 해드리고 있다. 공장과 계약을 체결하고 직접 술공장에서 전문일군이 매달 9일이 되면 박물관에 와서 모태주와 오량액 진가 감별을 하고 있는데 이는 전국적으로 유일무이하다고 하니 장춘 시민들로 놓고 말하면 일종 행운이라고 할 수도 있다. 만약 당신이 집에다 애지중지 보관해오던 모태주나 오량액이 진짜인가를 알아보려면 시간을 내 한번 가서 시원하게 감별을 받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2013년 10월, 길림성술문화박물관은 67개 계렬, 5,759병에 달하는 소주를 소장해 기네스‘제일 많은 수량의 소주를 소장'한 세계기록을 창조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2014년 10월, 길림성술문화박물관은 또 국가 4A급유람구로 선정되여 장춘을 찾는 유람객들에게 또 하나의 볼거리를 만들어주었다. 유구한 술문화의 력사를 료해하고 싶은가, 그리고 그때 그 시절로 되돌아가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면서 세상만사를 론하던 감각을 찾고 싶은가? 술향기 따라 문화 따라 길림성술문화박물관으로 한번 행차해보시라. /길림신문 리철수기자
7422    [그것이 알고싶다] - 할리우드 댓글:  조회:3505  추천:0  2019-11-11
영화사전 할리우드   [ Hollywood음성듣기 ] [1]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한 지구. 로스앤젤레스 중심부에서 약 12㎞, 비벌리힐스 동쪽에 있는 지역.  [2] 세계적인 영화 산업의 중심지.  [3] 미국 대자본 영화 산업의 중심지. 할리우드는 로스앤젤레스 교외로 영화 산업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인구가 1천 명도 안 되는 곳이었다. 1908년 영화특허회사(Motion Picture Patents Company)사가 설립되자 많은 독립 영화사들이 미국 동부의 강력한 법적 규제와 트러스트 집단의 견제를 피해 남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1910년 겨울, 바이오그래프(Biograph)에서 일하던 D. W. 그리피스(D. W. Griffith)는 자신의 영화사를 이 지구에 두었다. 이 회사가 바로 네스터사(Nestor FilmCompany)인데 실질적으로 1911년 10월 27일 로스앤젤레스시 교외, 할리우드라고 불리우는 곳에 사무실을 열었다. 1911년까지 거의 20여 개의 독립 영화사가 할리우드에 스튜디오를 차렸다. 화창한 날씨, 사막과 산, 바다로 이어지는 다양한 풍경, 값싼 부동산이라는 천혜의 조건은 영화를 만드는 데 매우 이상적인 곳이었다. 땅값이 쌌으므로 페르난도 계곡에 유니버설 시티(Universal City)와 같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스튜디오가 들어설 수 있었다. 1920년까지 할리우드 주변에 세워진 50개의 스튜디오가 미국 영화의 90%를 제작했다. 영화 스튜디오는 매우 전문화된 제작 지향적인 공간이었다. 각 스튜디오는 영화 제작에 필요한 다양한 기능을 완벽하고 신속하게 구현하기 위해 감독, 촬영 기사, 음악가, 배우를 비롯해 많은 조직과 인원을 보유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의 메이저 스튜디오로는 엠지엠(MGM), 패러마운트(Paramount), 20세기 폭스(20th Century Fox), 유니버설(Universal), 워너 브러더스(Warner Brothers), 알케이오(RKO), 콜럼비아(Columbia) 등을 들 수 있다. 할리우드는 이 시기 연간 400~500편을 제작했는데 대개 미국인 관객의 취향에 영합하는 영화였다. 2차 세계대전 후 할리우드는 스튜디오 시스템 붕괴로 소멸의 위기에 처했다. 스튜디오 시스템이 몰락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작용했는데 우선 1948년 미국 대법원은 메이저 스튜디오가 영화관을 계열로 지배하는 것을 불법화했다. 또 텔레비전이 등장하여 영화 관객이 감소했고 유럽 영화가 일취월장해 세계 시장을 잠식했으며, 영화 제작의 경제적 측면에서 스튜디오 제작보다 야외 및 해외 촬영이 더 효율적인 것으로 판명됐다. 할리우드는 와이드 스크린을 도입해 로버트 와이즈(Robert Wise)의 〈사운드 오브 뮤직〉(The Sound of Music, 1965)을 성공시키는 등 대작을 연이어 내놓았으나 결국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 시기 스튜디오는 임금 지불에 차질을 겪으면서 재산과 부동산을 압류 당하기 시작했으며 독립 영화사와 TV방송사에 스튜디오를 대여하는 처량한 신세가 됐다. 오늘날 대부분 메이저 영화사들은 대기업에 속해 있으며 여전히 많은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메이저 영화사는 이제 제작과 배급을 담당하면서 독립 영화 제작에 자본을 투자한다. 때때로 기자재를 대여하기도 하고, 그들이 투자한 영화나 다른 회사가 투자한 영화를 배급하기도 한다. 미국의 관객 수는 1980년대에 크게 증가해 10년 동안 총 매표 수익은 두 배로 늘어나 50억 달러에 달했고 비디오 판매와 대여도 폭발적으로 증가해 비슷한 수익을 올렸다. 동시에 세계 시장은 더 빠른 속도로 성장해 1993년 한 해에 거의 80억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오늘날 메이저 영화사로는 디즈니(Disney), 패러마운트, 워너 브러더스, 엠시에이 유니버설(MCA/Universal), 20세기 폭스, 콜럼비아 트라이스타(Columbia Tristar) 등을 거론할 수 있다. 최근의 영화는 이른바 ‘원 소스 멀티 유즈’(one source,multi use)의 자원으로 각광받고 있다. 즉 개별 영화는 상영 수입뿐만 아니라 DVD와 홈 비디오, 케이블 영화 채널, 텔레비전으로 이어지는 배급 라인과 캐릭터 산업과의 연계 등으로 수익을 증폭시킨다. 세계적으로 영화는 이제 대중문화 산업의 중심이다. 영화계 뉴스는 이제 영화 그 자체가 아니라 출연료 협상을 벌이는 스타, 독점 경쟁을 벌이면서 자산을 매각하고 인수해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제작자, 스타 못지않게 돈을 버는 영화감독, 2천만 달러에 달하는 돈을 출연료로 받아 영화 제작 예산의 많은 부분을 가져가는 영화배우에 관한 소식이다. 영화에 드는 엄청난 규모의 자금과 흥행을 점치기 어려운 점 때문에 이미 성공을 거둔 영화의 형식과 틀로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열중하기도 한다. 2003년 미국 영화 산업은 자국에서 95억 달러의 흥행 수입을 올렸으며 해외에서 108억 달러를 벌여들였다. 2003년 미국에서 2억 5천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인 영화는 모두 7편이었다. 할리우드는 거의 언제나 블록버스터 영화를 제작하려고 하는데 이런 영화는 가장 안목이 떨어지는 관객의 취향에 영합하는 수준으로 만들어진다. 할리우드 영화는 미국의 제 2수출 품목으로 세계 시장의 70%를 점유하고 있으며 세계 시장에서 총수익 중 40% 이상의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할리우드 [Hollywood] (영화사전)   ======================///   할리우드가 LA에 있는 있는 이유는 LA시에 한 지역이기 때문 입니다.   할리우드는 1800년대 중반부터 사람들이 거주를 했습니다. 초창기에는 농사를 짓던 농장 지역이었습니다. Hollywood 라는 이름은 할리우드를 개발하고 할리우드의 아버지"로 알려진 H. J. Whitley 라는 사람이 지었는데, 이 사람이 이곳에 신혼여행을 와서 중국 사람이 수레에 나무를 내리는 모습을 보고 무엇을 하냐고 묻자, hauling wood(나무 운반)을 한다고 한 것에서 유래를 했다고 합니다.   도시가 된 것은 1903년입니다. 그리고 바로 1910년 로스앤젤레스 시와 통합을 하게 됩니다.   미국의 영화 산업은 초창기에 미국 동부 뉴저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Thomas Edison의 영화 사진 회사 (Motion Picture Patents Company가 대부분 제작을 했는데, 영화 필름에 대한 특허 때문에 영화 제작자들이 영화 제작 여건이 좋지 않자, Edison의 특허를 피할 수 있는 서부로 이전을 하게 되어 1910대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영화 산업이 시작되었습니다.   할리우드에서는 1911년에 최초로 영화가 촬영이 되면서 파라마운트 (Paramount), 워너 브라더스 (Warner Bros), RKO (R), 콜롬비아 (Columbia)등 4대 영화사가 1920년대부터 스튜디오를 두고 영화산업이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1900 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할리우드는 영화 엔터테인먼트의 성지와 같은 위상을 갖게 된 것입니다.     ==========================///   두산백과 할리우드   [ Hollywood음성듣기 ] 요약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지구. 영화의 중심지. 이미지 크게보기 할리우드 간판 로스앤젤레스 중심부에서 북서쪽으로 13km 떨어진 지점에 있으며, 1910년에 시(市)의 일부가 되었다. 1920년 영화촬영소가 설립되면서 발전하였다. 미국의 주요 영화회사에 대한 중앙배역사무소(中央配役事務所)와 영화박물관 등이 있어 미국 영화계의 총본산 구실을 한다. 할리우드볼(Hollywood Bowl)이라고 불리는 1919년에 건설된 유명한 야외극장과 그리피스 공원에 있는 연극 원형극장, 콘크리트 앞뜰에 많은 배우들의 손바닥 또는 발바닥 도장이 찍혀있는 중국극장 등이 있다. 할리우드 지구 서쪽에 인접한 비벌리힐스 일대는 부호나 영화배우가 많이 사는 고급주택지이며, 선셋 대로(大路)가 할리우드를 동서로 관통하여 비벌리힐스와 이어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할리우드 [Hollywood] (두산백과)      
7421    [세계속에서] - 전쟁속에서 피여난 "순애보" 댓글:  조회:3934  추천:0  2019-11-11
6·25 와중에 꽃핀 美해병대원과 한국 여성의 '순애보'  2019.11.10.    좋아요 훈훈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해리스 美대사, 92세 해병대원 조지 램프먼 소개 / 1949년 주한 대사관 보안요원으로 한국에 첫발 / 대사관 근무하던 한국 여성과 사랑… 1950년 결혼 / 2015년까지 해로… "그런 여성은 또 없을 겁니다" 미국 해병대 창설 기념일(11월10일)을 맞아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 대사가 70년 전에 주한 미국 대사관 보안을 책임졌던 90대 노(老)해병 용사를 한국인들한테 소개했다. 이 노병은 6·25 전란의 와중에 한국인 여성과 결혼해 60년 넘게 해로한 것으로 전해져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해리스 대사는 10일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1775년 11월10일 필라델피아에서 출범한 미 해병대가 창설 224주년을 맞았음을 알리고 축하의 뜻을 전했다. 그는 “이번에 열린 창설 기념 파티에는 1927년에 출생하고 44년 입대해 49년 미국 대사관의 첫 보안요원이 된 조지 램프먼 준위가 함께했다”면서 램프먼 준위와 찍은 사진도 게재했다. 미국이 외국에 있는 자국 대사관 등 외교공관 보안을 해병대에 맡기고 있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를 위해 미 해병대는 산하에 ‘대사관경비대(Marine Corps SecurityGroup)’라는 전문 부대를 두고 있다. 눈길을 끄는 건 램프먼 예비역 해병 준위와 한국의 깊은 인연이다. 그는 해병대 입대 6년차이던 1949년 신생 대한민국에 갓 설치된 미국 대사관의 보안 업무를 맡아 한국에 처음 입국했다. 램프먼 준위는 당시 대사관에 근무하던 3살 아래의 한국인 여성 이숙이씨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이듬해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6·25 전쟁이 터졌다. 현역 해병대원인 램프먼 준위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서울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그해 9월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가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의 대성공으로 미군 등 유엔군과 한국군이 서울을 수복했다. 3개월 여 만에 대사관에 복귀한 램프먼 준위는 오랫동안 마음에 둬 왔던 일을 기어이 실행에 옮겼다. 이숙이씨와 서울에서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신혼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1950년 10월 중공군이 북한을 도와 참전함으로써 전세가 다시 뒤집히고 말았다. 서울이 도로 적군 수중에 떨어졌고 램프먼 준위 부부는 다른 대사관 식구들을 따라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이듬해인 1951년 부부는 새 삶을 찾아 미국으로 떠났다. 수도 워싱턴 외곽에 정착해 자녀 4명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램프먼 준위에게 2015년은 잊을 수 없는 해다. 모처럼 온가족이 이숙이씨 고향인 서울 여행에 나선 것이다. 램프먼 준위의 자녀들은 어머니가 태어나 자라고 아버지 역시 한때 자국 대사관 보안요원으로 일했던 도시 곳곳을 둘러보며 색다른 감상에 젖었다. 그런데 이숙이씨가 가족이 투숙한 호텔 객실에서 수면 도중 그만 급서하고 말았다. 향년 85세였다. 2년이 지난 2017년 램프먼 준위는 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6·25 전쟁을 나와 함께 온몸으로 겪은 여성(부인)을 기리는 조그만 기념물을 서울에 하나 세웠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세상 그 어느 누구도 그녀가 해준 것처럼 나를 보살필 수는 없었을 거예요.” /김태훈 기자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
7420    [그것이 알고싶다] - "안녕하세요, 지구인입니다"... 댓글:  조회:3153  추천:0  2019-11-10
“안녕하세요, 지구인입니다”… 보이저 1·2호에 실어 보낸 인류 메시지 2019.11.10.    좋아요 후속기사원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ㆍ구리 함유 레코드판 ‘골든 레코드’ ㆍ외계 생명체 찾기 일환으로 탑재 ㆍ55개국 인사말·음악 27곡 등 담아 보이저 2호 동체 겉면에 붙어 있는 골든 레코드. NASA 제공 국내에 2017년 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미국 영화 에는 어느 날 갑자기 각국 영토로 진입한 외계 비행물체가 등장한다. 여기서 내린 생명체는 문어를 닮은 몸을 지녔지만 고도의 지적 능력을 갖췄다. 생물학적·기술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는 인간과는 의사소통을 하지 못한다. 그런 와중에 외계 생명체들과 끊임없이 접촉한 지구인 언어학자가 그들의 기호 체계를 하나둘 익힌다. 외계 생명체의 말을 알아들으면서 진보된 지적 능력까지 얻게 된다는 얘기다. 물론 그런 능력을 가지게 된 지구인은 외계인을 깊숙이 연구한 영화 속 박사가 유일하다. 완전히 다른 별에서 생겨난 문명과 대화를 하는 건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인간이 20세기 중반 우주 시대를 열면서 외계 생명체와의 접촉 가능성은 과학계의 화두였다. 1960년대 미국에서 태동한 ‘외계 지적생명체 탐색계획(SETI)’이라는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프로그램에 속한 과학자들은 접시처럼 생긴 크고 작은 전파망원경에 눈과 귀를 고정하고 외계인이 만들었을 법한 인공적인 전파를 찾는 데 촉각을 곤두세웠다. 다만 외계 생명체가 전파를 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이 때문에 일부 과학자들은 지구에서 특정 천체로 전파를 쏘는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좀 더 능동적인 외계 생명체 찾기다. 지난해 11월 태양이 내뿜는 에너지의 영향권, 즉 ‘태양권’을 벗어난 보이저 2호에는 조금 특별한 방식의 외계 생명체 찾기 프로그램이 실려 있다. 바로 동체에 부착된 레코드판이다. 비슷한 시기 발사된 보이저 1호에도 실린 이 레코드판은 구리로 만들어졌고 지름은 30㎝이다. 레코드판 전체에 금이 입혀져 있다. 이 때문에 미국항공우주국(NASA)은 ‘골든 레코드’라고 부른다.  골든 레코드의 목적은 명확하다. 외계 생명체가 보이저호를 우연히 발견할 경우 지구의 존재를 알리겠다는 것이다. 레코드 탑재를 주도한 건 유명한 천문학자이며 과학 대중화 운동에 앞장섰던 칼 세이건이다. 같은 스테디셀러의 저자이다. 그는 NASA와 협의해 음악 27곡, 사진 115장, 55개국의 인사말 등을 실었다. 음악은 클래식이 많다. 모차르트와 바흐, 베토벤의 곡을 짤막짤막하게 녹음했다. 음파를 통해 정보를 습득하는 외계 생명체라면 감정이 움직일 만한 것들이다. 사진들은 매우 다채롭다. 우선 달 표면과 목성, 지구의 사진을 넣었다. 남녀로 구분되는 인간의 신체적 특징, 키와 몸무게를 알려주는 정보도 실려 있다. 사람의 일상을 표현한 사진들은 무척 구체적이다. 어린이의 공부를 지도하는 교사,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는 주부, 트랙에서 전력 질주 중인 육상 선수, 교통체증 상태에 놓인 도로의 모습 등이 내장돼 있다. 인간이 외계로 보내는 메시지인 만큼 인사말도 수록됐다. 지금은 쓰지 않는 고대어부터 중국 방언까지 다양하다. 한국어도 실려 있다. 골든 레코드에 수록된 자료를 확인할 수 있는 NASA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지금도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한 여성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문홍규 한국천문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우주는 워낙 방대해 이 메시지가 외계 생명체에게 발견될 확률은 낮은 게 사실”이라며 “하지만 우주를 향한 인간의 의지를 되돌아본다는 점에서 이 메시지는 지구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정호 기자 ====================================/// 우주 탐사선 ‘보이저 2호’의 속삭임… “태양권이 숨쉬는 폐와 닮았어요”  2019.11.10.    좋아요 슬퍼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ㆍ보이저 1호 측정한 ‘태양권 범위’, 6년 만에 관측한 2호에선 감소 ㆍNASA “태양풍 양 증감 따라 호흡하는 상황처럼 크기 달라진 듯” 1977년 3월 발사 5개월을 앞두고 최종 점검 중인 보이저 2호. 당초 목표는 태양계 행성 탐사였지만 발사 뒤 성간 우주로 나아가는 것으로 임무가 변경됐다. NASA 제공 1977년 8월20일 미국 플로리다주 케이프 커내버럴 기지에서 육중한 덩치의 ‘타이탄 3E 센타우르 로켓’이 불꽃과 흰 연기를 뿜으며 하늘로 솟구쳤다. 이 로켓에는 여행자란 뜻을 가진 ‘보이저(Voyager)’ 탐사선이 실려 있었다. 중량은 722㎏, 덩치는 소형버스 정도였다. 당시 발사된 건 보이저 2호였으며 비슷한 형태와 임무를 가졌던 보이저 1호는 2호보다 2주 늦게 우주로 향했다. 보이저 2호는 발사 뒤 2년 만인 1979년 목성을, 1981년에는 토성을 탐사했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은 천왕성과 해왕성까지 보이저 2호를 인도한 뒤에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이번엔 태양계를 벗어나 먼 우주를 탐사하는 임무를 시작한 것이다. 각종 측정 장비를 움직이는 전기는 탐사선에 내장된 핵물질인 플루토늄을 통해 얻고 있었기 때문에 장기 임무가 가능한 특징을 십분 살린 결정이었다. 먼저 태양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건 보이저 1호였다. 이동 경로가 2호와 달랐던 보이저 1호는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인 2012년 이른바 ‘태양권(heliosphere)’의 경계선에 도달했다.  보이저 2호는 이보다 늦은 2018년 11월5일 태양권을 돌파했다. 태양권은 뭘까. 우리가 익히 아는 태양계는 태양과 함께 태양의 중력에 묶여 있는 천체들을 일컫는다. 수성과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등 크고 작은 행성들이 주요 구성원이다. 하지만 태양권은 개념이 다르다. 태양에서 뿜어져 나오는 전기의 성질을 띤 입자의 바람, 즉 태양풍이 미치는 범위를 뜻한다. 태양의 힘이 엄청나기 때문에 태양풍이 미치는 범위인 태양권은 태양계보다 훨씬 넓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태양의 영역인 셈이다.  보이저 2호가 이 태양권을 넘어선 지 1년 만인 이달 초 NASA는 태양권의 크기가 일정치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보이저 1호가 2012년 통과했을 때 측정한 태양권 경계의 위치가 지난해 보이저 2호가 지나갔을 때와 달랐다는 것이다. NASA에 따르면 보이저 1호는 122.6AU 지점에서 태양권을 벗어났지만, 보이저 2호는 119.7AU에서 태양의 힘을 뿌리쳤다. 1AU는 태양과 지구 사이 거리인 1억5000만㎞를 뜻하는 천문학 개념이다. 6년 만에 태양권이 꽤 많이 좁아졌다는 뜻이다.  태양에 그동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NASA는 태양 활동이 11년 주기로 활발했다 잠잠해졌다를 반복하는 것에 주목했다. 문용재 경희대 우주과학과 교수는 “태양 활동이 활발하다는 건 태양풍의 양이 증가한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보이저 1호가 태양권 계면을 통과한 2012년이 바로 그 시점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보이저 2호가 태양권 계면을 통과한 지난해는 2012년보다 태양 활동이 훨씬 줄어 있었다. 이 때문에 태양풍의 양도 줄어 태양권 크기가 좁아졌다는 것이다.  NASA는 태양권의 범위가 늘었다 줄었다 하는 상황을 빗대 “숨을 쉴 때 폐가 확장하고 수축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태양권은 외계 별에서 날아오는 우주 방사선의 70%를 막아내며 지구와 다른 행성들을 보호한다. 이런 보호막이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한다는 사실이 보이저 1호와 2호가 연달아 태양권 계면을 통과하며 입증된 것이다.  NASA 보이저 프로젝트 담당자인 에드 스톤 캘리포니아공대 물리학과 교수는 “보이저 2호가 보낸 자료가 없었다면 우리는 보이저 1호의 자료가 태양권의 일반적인 특징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의 우주과학기술이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이처럼 태양권을 넘어 먼 우주로 들어선 탐사선은 지금까지 보이저 1호와 2호 단 두 기에 불과하다. 현재 보이저 1호는 태양에서 220억㎞, 보이저 2호는 182억㎞ 떨어진 거리에서 맹렬하게 우주를 향해 날아가고 있다. 보이저 2호에서 지구로 불빛을 겨냥해 쏜다면 지구인들은 16시간 반은 지나야 볼 수 있는 먼 거리다. 먼 우주에 나가 있는 척후병처럼 소중한 존재이지만 보이저 1호와 2호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건 인류에게 아쉬운 대목이다. 동력원인 플루토늄이 2024년쯤에는 탐사선에 내장된 장비를 돌릴 수 있는 수준의 전기를 만들지 못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보이저 탐사선은 지구에 좋은 소식도, 나쁜 소식도 전하지 않는 ‘방랑자’가 된다.  NASA는 보이저 탐사선들의 죽음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한정된 전력을 최대한 아낄 예정이다. 당장 필요하지 않은 장비에는 보온용 전기를 끊는 식이다. 우주는 영하 200도가 넘는 강추위 때문에 장비의 정상적인 작동을 보장하기 위해 일정 수준의 보온용 장비가 같이 탑재돼 있다. 인류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 향하는 보이저 탐사선들의 임무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이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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