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문학이다
백석
빼어난 토속어 지향, 그 시적 보고
[ 白石 ]
출생 - 사망
1912년 ~ 1996년
출생지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목차
잊혀진 민족시인
토속성과 모더니티
잊혀진 민족시인
국토 분단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앗아간다. 분단이야말로 한반도 사람들의 피할 수 없는 상처이며, 비극의 원체험이다. 온갖 상실과 망각, 이산의 고통으로 덧나고, 다시 아물고, 덧난 상처의 자리다. 남북 분단은 대륙으로 나가는 길을 끊어놓고, 그 결과 한반도에서의 삶을 고립무원(孤立無援)의 협소하고 남루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부여·발해·여진과 같은 나라 이름이며, 흥안령·아무르·송화강 같은 땅과 강 이름…… 이런 것은 모두 저 바깥에 있다. 대륙과 단절된 반도는 말 그대로 밖으로 열린 길이 끊긴 섬이다. 나는 그 섬에서 잊힌 한 시인의 이름을 떠올린다.
백석(白石)은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수원 백씨 시박(時璞)과 단양 이씨 봉우(鳳宇)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 백시박은 당시로써는 드물게 사진 기술이 있었다. 본명이 기행(夔行)인 백석은 오산고보를 다니는데, 학과목 중에서 특히 문학과 영어에 관심과 소질을 보인다. 백석은 오산고보를 나오고서 집안 사정으로 진학하지 못하고, 고향에서 책을 읽으며 소일한다. 그러다가 1929년 후원 장학생 선발 시험에 붙어 일본의 아오야마학원 전문부 영어 사범학과에 들어간다.
1930년 그는 열아홉 나이로 신춘문예에 응모해 당선되는데, 이 등단작은 시가 아니라 「그 모(母)와 아들」이라는 단편소설이다. 1934년 아오야마학원 졸업과 함께 교원 검정시험에 합격한 백석은 귀국하고 바로 에 입사해 계열 잡지인 《여성》의 편집을 맡는다. 그는 같은 해 에 산문 「이설(耳說) 귀ㅅ고리」를 비롯해 번역 산문 「임종 체홉의 6월」, 「죠이쓰와 애란(愛蘭) 문학」, 1935년 에 단편 「마을의 유화(遺話)」 등을 발표한다. 백석의 초기 단편들은 노쇠한 부부, 죽음 등 삶의 어두운 부면과 연관된 황량한 분위기로 채색되어 있는 것이 많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 부문으로 발길을 돌리면서 이런 분위기는 거의 사라진다.
백석이 구체성을 특징으로 하는 소설보다 감정을 웬만큼 은폐할 수 있는 시로 전향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시를 쓰게 된 것은 창작 이외의 문단 활동은 일절 꺼린다거나, 집에 돌아와서는 병균을 염려해 늘 손과 얼굴을 씻는1) 그의 유난스런 폐쇄성이며 결벽증과 관련이 깊어 보인다는 뜻이다. 그는 1935년 《조광》에 시 「정주성(定州城)」, 「산지」, 「주막」, 「나와 지렝이」, 「비」, 「여우 난 곬족(族)」, 「흰 밤」 등을 발표한다. 백석이 1936년 조광인쇄주식회사를 통해 펴낸 첫 시집 『사슴』은 우리 문학사에서 독특한 시의 영역을 구축하게 된다. 『사슴』은 백석이 신문사 번역 일을 하는 틈틈이 준비한 초기작 33편을 담은 시집으로, 발간 뒤 문단으로부터 호평을 받는다.
1937년 겨울, 백석은 두 해 동안 묶여 있던 신문사 교정직을 버리고, 본격적으로 시를 쓰려고 함경도로 내려간다. 그는 이때의 전후 상황을 같은 해 9월 에 게재한 산문 「가재미. 나귀」라는 글을 통해 밝힌다. 여행을 즐기던 그는 이 무렵 여러 고장을 돌아다니며 고유의 민속, 명절, 향토 음식 같은 갖가지 풍물과 방언 등을 취재해 시에 담아낸다. 이런 풍물과 방언은 특히 「남행시초(南行詩抄)」를 기점으로 이후 해마다 나오는 백석의 기행시 형식의 연작시에서 잘 표현된다.
이 밖에도 같은 해 백석은 와 《조광》, 《시와 소설》에 「통영(統營)」, 「오리」, 「탕약(湯藥)」, 「연자ㅅ간」, 「황일(黃日)」 등을, 1937년 《조광》에 「함주시초(咸州詩抄)」 연작시를, 《여성》에 산문 「가을의 표정-단풍」을 발표한다.
가난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 눈은 푹푹 날리고 /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 나탸샤와 나는 /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 눈은 푹푹 나리고 /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 나탸샤가 아니 올 리 없다 /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여성》(1938. 3.)
백석은 눈 덮인 함경도 산간 지방의 고적한 여인숙에서 「함주시초」를 비롯한 여러 시편을 쓰면서도 가슴 한구석에 구멍이 난 것처럼 자꾸 허전한 느낌이 든다. 두 해 전에 친구 허준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잠깐 본 이화여고 학생 ‘란(蘭)’, 지난가을 영생고보 선생들과의 회식 자리에 만난 ‘자야(子夜)’, 그리고 영생고보 학내 분규로 퇴학당한 애제자 고순덕의 얼굴이 착잡하게 스쳐 지나간다.
1938년 백석은 영생여고보 교사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와서 다시 《여성》의 편집을 맡는다. 그는 같은 해 《조광》에 「산중음(山中吟)」 연작시와 「물닭의 소리」 연작시, 《삼천리문학》에 「석양」, 「고향」, 「절망」, 《여성》에 「설문답」, 「내가 생각하는 것은」, 「가무래기의 약(藥)」, 「멧새 소리」 등을 발표하고, 『현대문학전집』에 「외가집」, 「개」와 『조선문학독본』에 「고성 가도(固城街道)」, 「박각시 오는 저녁」 등을 수록한다.
이 무렵 백석은 동료 기자 신현중에게 이끌려 란의 집을 찾게 된다. 란을 보는 순간 백석의 심장은 터질 듯 쿵쾅거리고, 혈관은 펄떡거린다. 백석은 자신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은 통영 출신의 처녀 란에게 끝내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사랑 고백은 차치하고 재입사한 지 열 달 만에 를 그만두고 만주로 떠나버린다. 그는 떠나면서 친구들인 소설가 허준과 화가 정현웅에게 “만주라는 넓은 벌판에서 시 1백 편을 건져 오리라.”고 말한다.
1940년 1월 만주 신징(新京)에 도착한 백석은 먼저 시영 주택 황씨방(黃氏方)에 방을 얻는다. 곧이어 친구들의 도움으로 만주국 경제부에 자리를 얻고 나중에 일본인들의 횡포에 못 이겨 그만둘 때까지 시작(詩作)과 직장 일을 충실히 병행한다. 당시 친구와 함께 살던 황씨방은 토굴이나 마찬가지여서 주말마다 그는 근교의 러시아인 마을로 방을 얻으러 돌아다닌다. 이런 일로 북만주 두메산골의 원시 부족 사람들과도 얼굴을 익히게 되고, 밤이면 시 1백 편을 건지려고 시작에 몰입한다.
1939년 에 산문 「입춘」과 연작시 「서행시초(西行詩抄)」와 시 「안동」을, 《문장》에 「함남도안(咸南道安)」, 「동뇨부(童尿腑)」, 「넘언집 범 같은 노큰마니」 등을 내놓은 그는 1940년 《조광》에 「목구(木具)」, 「북방에서」, 「허준(許俊)」 등을 발표한다.
백석은 서른 살도 되기 전에 한반도에서 가장 뛰어난 서정 시인으로 입지를 굳힌다. 그의 시는 발표될 때마다 화제를 낳고, 그의 시가 실린 잡지는 책방에 나오기 무섭게 팔려나간다. 뒷날 백석의 명편 「남신의주(南新義州) 유동(柳洞) 박시봉방(朴時逢方)」을 실은 잡지 《학풍(學風)》은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시인들은 과연 얼마나 이 고고한 시인에 육박할 수 있으며, 또 능가할 수 있었더냐.”고 백석을 극찬한다.2)
같은 해 백석은 《인문평론》에 「수박씨 호박씨」를 발표하고, 《조광사》에서 토머스 하디 원작의 「테스」를 번역해 발간하고, 이듬해에는 생계를 위해 만주에서 측량 보조원과 측량 서기로 일한다. 1941년 그는 《조광》에 시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촌에서 온 아이」, 《인문평론》에 「두보(杜甫)나 이백(李白)같이」, 「귀농(歸農)」 등을 발표한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이 강화되면서 백석은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며 산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3) “이미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 없이 떠도는”것이다.4)
1942년 만주 안둥(安東)의 세관으로 직장을 옮긴 그는 엔 패아코프의 원작 소설 「밀림 유정」을 번역한다. 한편, 그가 만주에 있는 동안 동료 김소운은 백석의 시 「산우(山雨)」, 「미명계(未明界)」 등 7편의 작품을 일본어로 옮겨 『조선시집』에 싣는다.
해방 뒤 귀국한 백석은 신의주에서 얼마 동안 머물다가 고향 정주로 가서 1947년 《신천지》에 「적막 강산」, 에 「산」을 발표하고, 1948년 《신세대》에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학풍》에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문장》에 「칠월 백중」 등을 발표한다. 해방 후 고향 정주로 돌아온 백석은 그곳에서 남북 분단을 맞는다. 북한에서 「뿌슈킨 선집 - 시편」을 번역하기도 하고, 꾸준히 시를 발표한 것으로 추정하는 백석은 1995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한다.
토속성과 모더니티
이 시기 ‘구인회’를 비롯한 모더니스트들의 서구적 취향과 달리 백석은 영문학을 전공한 시인이면서도 또 다른 향토 시인 김소월이 무색할 정도로 작품 속에 북녘 지방의 토속 방언들을 꽉꽉 채워 넣는다. 마가리, 개니빠디, 잠풍, 몽둥발이, 벌배, 열배, 매감탕, 토방돌, 아릇간, 홍게등, 텅납새, 무이징게국, 가즈랑집, 깽제미, 물구지우림, 둥글레우림, 광살구, 모랭이, 노나리꾼, 청밀, 냅일눈, 곱새담, 앙궁, 고뿔, 갑피기, 게사니, 울파주, 나주볕, 땃불, 밭최뚝, 마토ㅌ, 양지귀…… 고조곤히, 지중지중, 쇠리쇠리하야, 씨굴씨굴, 째듯하니, 자즈러붙어, 벅작궁, 고아내고, 너들씨는데, 오구작작, 살틀하던, 임내내는, 이즈막하야, 깨웃듬이, 홰즛하니…… 이처럼 이제는 거의 들을 수 없는, 들어도 무슨 말인지 가늠하기 힘든 북방 언어들. 백석의 현저한 토속어 지향의 시 세계는 한국인의 얼과 넋을 황홀할 정도로 빼어나게 담아낸다.
백석은 이미 표준어가 정착한 시기에 창작 활동을 한 문학인이다. 신문사의 편집 일을 맡기도 한 그는 표준어와 방언의 차이를 잘 알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굳이 방언을 고집한 것은 작품 세계의 심화를 위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가 구사한 방언은 용례가 매우 구체적이고 세밀해서 한국어의 질량을 한껏 느끼게 해준다. 아울러 백석 시의 방언 구사는 아이의 시각과 목소리로 이루어지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명절날 나는 엄매 아베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고모 고모의 이녀(李女) 작은 이녀(李女) / 열여섯에 사십(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며 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고모 고모의 딸 승녀(承女) 아들 승(承)동이 / 육십리(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山)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던 말끝에 섧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곬고모 고모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洪)동이 작은 홍(洪)동이 / 배나무접을 잘 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으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촌 삼촌엄매 사촌누이 사촌동생들 // 이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인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뽁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것들이다. //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래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방을 잡고 조아질을 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구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랫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서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 백석, 「여우 난 곬족」 전문, 《조광》(1935. 12.)- 시집 『사슴』(1936)에 재수록
이 시의 화자는 명절날 어머니 아버지를 따라 할머니 집에 가서 지낸 경험 세계를 그리고 있다. 또래의 아이들과 놀다가 잠이 드는 광경, 명절날의 분위기와 풍속 등에서 유년의 태도와 시각과 목소리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방언은 고향의 언어이고 유년 시절에 습득한 언어다. 따라서 방언으로 표출되는 고향 마을의 풍물과 정취는 생생함을 불러일으키며, 유년의 목소리에 실린 방언은 한결 자연스럽고 친근감을 준다. 백석의 시 속에 나오는 평안도 방언을 비롯한 여러 가지 언어는 분명히 우리나라의 어느 한구석에서 쓰이던 토속어가 틀림없다. 그럼에도 꿈결인 듯 이 같은 소리를 읊조리는 시인의 노래는 때로 영어나 불어 또는 이 세상 어떤 언어보다 귀에 익지 않고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한편, 그는 몇 작품을 제외한 많은 작품에서 자신의 주관적 감정을 철저히 억누르는 극도의 절제를 발휘한다. 바로 이런 것이 백석을 모더니즘적 시인으로 불리게 하는, 그러면서도 다른 모더니즘 시인들과 구별하게 하는 원인이다. 반도시(反都市), 산촌(山村) 성격은 백석의 시를 더욱 독특하게 보이도록 한다. 시집 『사슴』에는 총 33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도시 문명 또는 도시 감각에 바탕을 둔 시는 한 편도 없다.
흔히 백석 시에 나오는 시골은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공간이 아니라 안온하고 풍요로운 전원으로 비친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시는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비판되기도 한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면에는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을 삭이려는 시인의 힘겨운 얼굴이 숨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즉, 백석 시의 시적 공간은 현실에서 유년 시절 시골의 농가나 토방으로, 그리고 할머니와 무당의 옛날이야기에 실려 동화나 전설, 때로는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주술적 공간으로 다양하게 변화한다. 그런데 과거에 대한 동경이나 몽상 또는 신비 세계에 대한 집착은 현실에 강한 거부감을 느낄 때 일어나곤 하는 현상이다. 백석의 시 또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되지만, 현실의 고통과 번민을 초월하려는, 시인 나름의 진지한 모색이라는 점에서 생명력을 지닌다.
이처럼 절제된 감정으로 토속성과 개성 있는 모더니티를 추구한 백석은 1940년 만주에 있을 때 이역에서 사는 비겁함과 부끄러움 그리고 고독감이 너무도 절실해 감정을 더 감출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이 무렵에 쓰인 백석의 시에서 우리는 바로 얼마 전까지 토방에 앉아 신화를 꿈꾸던 아이 대신 갑작스레 늙어버린 시인과 마주치게 된다.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 부여를 숙신(肅愼)을 발해를 여진을 요(遙)를 금(金)을 / 흥안령(興安嶺)을 음산(陰山)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 …… // 나는 그때 / 아무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 아침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 그동안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금은보화는 땅에 묻히고 가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 / 이리하여 또 한 아득한 새 옛날이 비롯하는 때 / 이제는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 나는 나의 옛 한울로 땅으로 - 나의 태반(胎盤)으로 돌아왔으나 // 이미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 백석, 「북방에서」 부분, 《문장》(1940. 7.)
이처럼 ‘북방에서’ 나라를 버린 수치심과 고독에 떨던 시인은 절망스럽고 슬픈 현실을 거부하기보다 차츰 하늘이 정한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껴안는 자기긍정에 도달한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 가난하고 외롭게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부분, 《문장》(194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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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백석 [白石] - 빼어난 토속어 지향, 그 시적 보고 (나는 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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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교과단원
국어(상), Ⅵ. 노래의 아름다움, Ⅵ-심화 여승
목차
1. 교과서 속 주개념
백석의 생애
2. 확장 개념
백석의 작품 세계
3. 관련 지식
근대시에 나타난 고향의 이미지
4. 관련 작품
여우난곬족
1. 교과서 속 주개념
백석의 생애
백석(白石 ; 1912∼?)은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본명은 백기행이지만 아호였던 백석을 필명으로 사용하였다. 1929년 정주에 있는 오산 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34년 아오야마학원 전문부 영어사범과를 졸업했다. 그 후 해방이 될 때까지 조선일보사, 영생 여자 고등 보통학교, 여성사, 왕문사 등에 근무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면서 등단하였다. 이후 조선일보 후원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동경의 아오야마 학원에서 공부하게 된다. 조선일보사와 계열사인 〈여성〉지에서 근무하는 동안 단편 소설 〈마을의 유화〉와 〈닭을 채인 이야기〉, 수필 〈이설 귀고리〉를 발표하였다. 이 밖에 〈임종 체흡의 6월〉이라는 서간문을 번역 소개하거나, 〈죠이스와 애란문학〉이라는 티 에스 마르키스의 논문을 번역하기도 했다.
그 후 1935년 첫 시 〈정주성〉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시작(詩作) 활동을 시작하였고, 1936년 1월 33편의 시로 이루어진 시집 〈사슴〉을 출간하였다. 이때부터 1940년까지의 기간 동안 활발히 활동하며 집중적으로 시를 지었다. 시집을 낸 직후 함흥의 영생 여자 고등 보통학교에 부임했다가, 곧 만주의 신경으로 떠났다.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에서 일하기도 하고, 북만주 산간 오지를 여행하며 측량보조원, 소작인, 세관원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다가 해방 후에 신의주를 거쳐 고향 정주로 돌아왔다. 그 후 계속 북한에 남아있었으나 작품 활동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다.
2. 확장 개념
백석의 작품 세계
백석은 당대의 어떤 문단이나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 독특한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언뜻 보기에는 매우 편안하고 일상적인 언어와 평북 지방의 방언을 사용하는 백석의 시는 향토적이고 토속적인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 체험을 조직하는 데 있어 매우 탁월하고 모더니즘적인 느낌을 풍기고 있기도 하다. 이런 점은 초기 백석의 시에서 두드러지는데 고향의 풍물과 민속, 인물들을 다루고 있지만 이를 이야기하는 방식은 묘사를 통해 감정과 정서를 표현하지 않고 매우 객관적으로 절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시집 〈사슴〉을 발표한 이후에는 묘사 이외에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담담하게 직접 표현하는 방식으로 시가 변화하게 된다. 백석은 38년 이후의 시에서는 이러한 낭만주의적 시작 태도를 보이면서, 공간성보다도 시간성과 역사성에 관심을 보이게 된다. 이 땅의 역사에서도, 시인 개인으로서도 힘들었던 이 시기에 백석의 시는 원초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에 대한 역사성과 깊은 인식을 보여준다.
백석은 앞서 말했듯이 고향의 자연과 풍속, 사람들을 대상으로 시를 썼다. 이 소재들은 단순히 하나의 풍물을 제시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고향의 삶과 역사에 깊이 관련을 맺는 것들이었다. 백석의 시에서 고향은 〈모닥불〉에서 보이듯이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이 정겹게 하나 되는 곳으로, 〈여우난곬족〉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과 자연, 귀신과 사람까지도 화해롭게 공존하는 제의적이고 풍요로운 공동체적인 공간으로 그려지고 있다. 백석의 시에서 주인공은 고향과 공동체의 품에 안겨 있지만, 현실의 자신은 공동체적 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 속에서 따뜻한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는 마음과 이와 상반되는 현실의 상황이 백석 시에 의미와 생명력을 주고 있는 것이다.
3. 관련 지식
근대시에 나타난 고향의 이미지
일제 강점기라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근대시에 나타나는 고향은 대체로 ‘잃어버린 곳’ 또는 ‘떠나온 곳’이라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는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기는 하지만 고향에 대한 상실과 그리움, 이와 대비되는 처참한 현실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러 시인들의 시에서 고향의 이미지를 찾아볼 수 있는데, 정지용과 백석의 시에서 이러한 고향의 이미지는 순수하고 인간적인 세계를 재현시키고자 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오장환이나 이용악의 시에서는 실향 의식을 주제로 하여 유랑민의 비애와 고독의 정서가 나타나고 있다. 그밖에 윤동주는 이러한 실향 의식을 자아의 내면적인 성찰을 통해 심화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4. 관련 작품
여우난곬족
명절날 나는 엄매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고모 고모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李女) 열여섯에 사십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고모 고모의 딸 승녀(承女) 아들 승(承)동이 육십리(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 옷이 정하던 말 끝에 섧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모 고모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洪)동이 작은 홍(洪)동이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촌 삼촌엄매 사촌누이 사촌동생들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 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가 나고 끼니 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볶은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 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오양간섶 발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 타고 시집 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 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우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랫목 싸움 자리 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가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 틈으로 장지문 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 백석,
〈여우난곬족〉은 백석이 1935년 12월 잡지 [조광]에 발표한 작품이다. 명절날 ‘여우난골’에 있는 큰집으로 간 시적화자의 눈에 담긴 친척들의 모습, 명절 음식상에 오른 다양한 전통음식들, 밤이 깊어 가는 줄 모르게 즐기던 놀이 등이 토속적이면서도 서정적인 언어와 표현을 통해 질박하게 형상화되어 있다. 1930년대 당대에도 낯설었던 다양한 방언을 구사하여 토속적 세계의 모습을 현장감 있게 그려내고 있으면서도, ‘별자국이 솜솜 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등의 표현들에서는 다양한 감각을 살려 다채로운 이미지를 선사하고 있다. 모더니즘 시인이었던 백석의 시적 경향을 잘 느낄 수 있는 시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백석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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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백석
[ 白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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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별칭
백기행(白夔行)
유형
인물
시대
근대/일제강점기
출생 - 사망
1912년 7월 1일 ~ 1996년
성격
시인
출신지
평안북도 정주
성별
남
관련사건
문학예술총동맹, 조선작가대회, 아동문학논쟁
저서(작품)
사슴, 집게네 네 형제
대표관직(경력)
조선일보 기자, 함흥 영생고보 교사, 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 분과위원
목차
정의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정의
해방 이후 「집게네 네 형제」·「석양」·「고향」 등을 저술한 시인.
개설
본명은 백기행(白夔行), 필명은 백석(白石).
생애 및 활동사항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하였다. 1924년 오산소학교를 졸업하고 오산학교(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일 때 조만식, 홍명희가 교장으로 부임한 적이 있고, 6년 선배인 김소월을 동경하면서 시인의 꿈을 키웠다. 1929년 오산고보를 졸업한 후, 1930년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었고, 조선일보사가 후원하는 춘해장학회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도쿄[東京]의 아오야마[靑山] 학원 영어사범과에 입학하였다. 유학 중 일본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의 시를 즐겨 읽었고, 모더니즘 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1934년 졸업 후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입사하면서 서울생활을 시작하였고, 허준, 신현중 등과 자주 어울렸다. 1935년 『조광』 창간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8월 30일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주막」, 「여우난골족」 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1936년 시집 『사슴』을 선광인쇄주식회사에서 한정판으로 간행하였다. 이 해에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고보의 영어교사로 부임하였다. 함흥에서 소설가 한설야, 시인 김동명을 만났고, 기생 김진향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고야」, 「통영」, 「남행시초(연작)」 등을 발표하였다.
1937년 소설가 최정희, 시인 노천명, 모윤숙 등과 자주 어울렸으며, 「함주시초」, 「바다」 등을 발표하였다. 1938년 함경도 성천강 상류 산간지역을 여행하였고, 함흥의 교원직을 그만두고 경성으로 돌아왔다. 「산중음(연작)」, 「석양」, 「고향」, 「절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물닭의 소리(연작)」 등 22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1939년 자야와 동거하면서 『여성』지 편집 주간 일을 하다가 사직하고 고향인 평북 지역을 여행하였다.
1940년 만주의 신경(神京, 지금의 장춘(長春))으로 가서 3월부터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의 말단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창씨개명의 압박이 계속되자 6개월만에 그만두었다. 6월부터 만주 체험이 담긴 시들을 발표하기 시작하였고, 10월 중순 자신이 번역한 토마스 하디의 장편소설 『테스』의 출간을 앞두고 교정을 보러 경성에 다녀갔다. 「목구」, 「수박씨, 호박씨」, 「북방에서」, 「허준」 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1941년 「귀농」,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을 발표하였다. 1942년 만주의 안둥[安東] 세관에서 일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신의주를 거쳐 고향인 정주로 돌아왔다. 10월에 조만식을 따라 소설가 최명익, 극작가 오영진 등과 ‘김일성 장군 환영회’에 참석해 러시아어 통역을 맡았다. 1946년 북조선예술총동맹이 결성되었으나 처음에는 참여하지 않았다가 1947년 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 분과위원이 되었다. 이때부터 러시아 문학을 번역하는 일에 매진하였다. 허준이 백석이 해방 전에 쓴 시 「적막강산」,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등을 보관하고 있다가 1947년 말부터 1948년 가을에 걸쳐 서울의 잡지에 실었다. 1948년 『학풍』 창간호에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발표하였다. 남쪽 잡지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시였다.
1949년 솔로호프의 『고요한 돈강』 등을 번역하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1953년 전국작가예술가대회 이후 외국문학 분과원으로 이름을 올리고 번역에 집중하였다. 1956년 동화시 「까치와 물까치」, 「집게네 네 형제」를 발표하였고, 「동화문학의 발전을 위하여」, 「나의 항의, 나의 제의」 등의 산문을 발표하였다. 10월에 열린 제2차 조선작가대회 이후 조선작가동맹 기관지 『문학신문』의 편집위원으로 위촉되었고 『아동문학』과 『조쏘문화』 편집위원을 맡으며 안정적인 창작활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57년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를 정현웅의 삽화를 넣어 간행하였고, 동시 「멧돼지」, 「강가루」, 「기린」, 「산양」을 발표한 뒤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6월에 「큰 문제, 작은 고찰」과 「아동문학의 협소화를 반대하는 위치에서」를 발표하면서 아동문학 논쟁이 본격화되었고, 9월 아동문학토론회에서 자아비판을 하였다. 1958년 시 「제3인공위성」을 발표하였고, 9월의 ‘붉은 편지 사건’ 이후 창작과 번역 등 문학적 활동이 대부분 중단되었다.
1959년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에 있는 국영협동조합으로 내려가 축산반에서 양을 치는 일을 맡았다. 삼수군 문화회관에서 청소년들에게 시 창작을 지도하면서 농촌 체험을 담은 시 「이른 봄」, 「공무여인숙」, 「갓나물」 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1960년 1월 평양의 『문학신문』 주최 ‘현지 파견 작가 좌담회’에 참석하였고, 시 「눈」, 「전별」 등과 동시 「오리들이 운다」, 「앞산 꿩, 뒷산 꿩」 등을 발표하였다. 1961년 「탑이 서는 거리」, 「손벽을 침은」 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1962년 시 「조국의 바다여」, 「나루터」 등을 마지막으로 발표하였다. 10월 북한 문화계에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창작활동을 일절 하지 못하게 되었다. 1996년 삼수군 관평리에서 사망하였다.
백석은 소월과 만해, 지용이 다져놓은 현대시의 기틀 위에서 새로운 시의 문법을 세움으로써 한국 시의 영역을 넓히는 데 기여한 시인이다. 평안 방언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언어들을 시어로 끌어들이고 고어와 토착어를 빈번하게 사용함으로써 시어의 영역을 넓히고 모국어를 확장시켰다. 또한 우리말의 구문이 품고 있는 의미 자질을 적절히 활용하여 경험세계를 감각적으로 재현하였다. 백석의 시는 형태적인 측면에서도 정제된 운율이 있는 전통적인 서정시 형식 대신 이야기 구조를 갖춘 서사지향적인 시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때 ‘이야기 구조’는 서사양식처럼 사건의 서사적 진행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장면 묘사와 서술에 의미의 중심이 놓여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주 짤막한 형태로 이루어진 시들은 대상의 미감을 가장 압축된 형태로 포착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또한 시각 외에 청각과 후각, 촉각, 미각 등 거의 모든 감각을 사용하여 대상을 감각적으로 포착하고 표현해냈다. 구체적인 생활 현장에서 벌어지는 삶의 면면들을 그려낸 시들은 풍속을 시로 재현해냄으로써 풍속사적인 의의를 담고 있기도 하다. 백석의 시 중에서 1인칭 화자의 주관적 독백을 표출하는 전형적인 서정시들은 특별한 수사나 기교 없이 평명한 언어로써 차분하게 내면을 성찰하고 있다.
참고문헌
『정본 백석 시집』(고형진 엮음, 문학동네, 2007)
『백석시전집』(송준 편, 학영사, 2004)
『(증보판) 백석 전집』(김재용 엮음, 실천문학사, 2003)
『백석시전집』(이동순 편, 창작과비평사, 1987)
『다시 읽는 백석 시』(현대시비평연구회 편저, 소명출판, 2014)
『백석평전』(안도현, 다산책방, 2014)
[네이버 지식백과] 백석 [白石]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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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故鄕) /백석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平安道) 정주(定州)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氏)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씨(氏)ㄹ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 북관 : 함경남도
- 관공 : 삼국지에 나오는 관운장
『 삼천리 문학』 2호, 1938년 4월 발표
작품 해설
▶ 성격 : 서정적, 서사적
▶ 심상 : 감각(시각, 촉각)적 심상
▶ 어조 : 친근하고 다정다감한 어조
▶ 구성
제1연 : 의원을 만나봄
제2연 : 의원이 고향을 물어봄
제3연 : 아무개 씨와 막역지간이라는 의원
제4연 : 아버지의 친구인 의원
제5연 : 의원의 손길에서 느끼는 육친과 고향에의 그리움
▶ 주제 : 육친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鄕愁)
이 시는 백석 특유의 고향 정서가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백석의 시는 무엇보다도 한국인의 원초적인 고향 개념을 환기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그의 시가 보여 주는 토속적 사투리와 현대적 가족 제도, 풍물의 세계는 단순한 풍물이 아니라 반드시 인간이 개입된 풍물로, 그는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의 삶의 방식을 감동적으로 보여 준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시는 민족 정서가 점차 상실되어 가는 일제 치하에서 더욱 존재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편, 백석의 시 세계의 주인공은 항상 공동체의 품속에 깊이 침잠해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공동체적 세계로부터 멀어져 있는 시인의 현실적 세계와 대립됨으로써 고향이라는 공동체는 삶의 풍요로움을 더해 주는 세계로 형상화된다.
이 시가 환기시키는 정서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그 고향이 불러일으키는 따스한 정이다. 에서는 고향을 무대로 그 곳에서 벌어지는 토속적이고 원형적인 삶의 모습을 서사적 구조를 통해 고향 정서를 보여 준 데 반해, 이 시는 인물들 사이에 주고받는 대화와 시적 상황을 압축적으로 서술하는 기법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
연 구분이 없는 전 17행의 단연시 구조의 이 시는 내용상 4단락으로 나누어진다. 이 시는 시적 화자가 타향인 '북관'에서 병을 앓아 '의원'을 찾아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첫째 단락인 1·2행은 바로 그러한 상황을 압축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부분으로, 외로운 타향살이를 하는 화자가 병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도 각별해진 향수를 느끼게 해 준다. 둘째 단락은 3·4행으로 화자가 의원을 찾아가 첫 대면한 '의원'의 풍모와 인상을 시각적 묘사로 표출하고 있다. 5행부터 15행까지의 셋째 단락은 '의원'이 화자인 '나'를 진맥하는 상황을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그 서술은 화자의 주관적 감정을 최대한 억제한 채, 진맥하는 '의원'의 행위와 표정을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동시에 '의원'과의 극적이고 생생한 대화를 통해 전개시키고 있다. 넷째 단락은 16·17행으로 화자의 내면 세계를 보여 주는 독백 부분이다. '의원'에게서 부드럽고 따스한 정을 느끼게 된 화자가 마침내 그에게서 고향과 아버지를 느끼게 되었다는 감정의 토로는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는 평범한 서술로 나타나 있다. 화자의 이 같은 직접적인 감정 토로는 특별한 시적 수사 없이도 절실한 감동의 울림을 주고 있다. 그것은 셋째 단락에서 화자를 진맥하는 의원의 행위와 그와 함께 나눈 대화를 통해 그러한 정서가 충분히 환기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국수 / 백석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 옆 은댕이 예데가리 밭에서
하로밤 뽀오얀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녯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의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텀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 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아베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베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기사발에 그득히 사리워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러났다는 먼 녯적 큰 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아바지기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끊는 아루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출전 (1941.4)
시어ㆍ시구 풀이
김치가재미-북쪽 지역의 김치를 넣어 두는 창고, 헛간
양지귀-햇살 바른 가장자리
은댕이-가장자리
예대가리밭-산의 맨 꼭대기에 있는 오래된 비탈밭
산멍에-이무기의 평안도의 말
분틀-국수 뽑아내는 틀이라 한다.
큰마니-할머니의 평안도의 말
집등색이-짚등석, 짚이나 칡덩쿨로 짜서 만든 자리
자채기-재치기
댕추가루-고추가루
탄수-석탄수
삿방-삿(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를 깐 방
아르궅-아랫목
고담(枯淡)-(글, 그림, 글씨, 인품 따위가) 속되지 아니하고 아취가 있음
백석(白石) 시인
본명은 백기행(夔行)이며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했다. 오산중학과 일본 도쿄 아오야마학원을 졸업하였다. 1935년 「조선일보」에 '정주성'을 발표하면서 주목을 받았고, 1936년 첫 시집 을 출판하였다. 방언을 즐겨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모닥불', '고향', '여우난골족', '팔원' 등 대표작은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들이다. 토속적, 민족적이면서도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시인으로, 8.15 광복 후에는 고향에 머물렀다. 1963년을 전후하여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사망연도가 1995년임이 밝혀졌다.
통영(統營)
백석 [白石, 1912.7.1 ~ 1995]
구마산(舊馬山)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가깝기도 하다
바람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삼 영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漁場主) 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한다는곳
산 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錦)이라는 이 같고 내가 들은 마산(馬山) 객주(客主)집의 어린 딸은 난(蘭)이라는 이 같고
난(蘭)이라는 이는 명정(明井)골에 산다는데
명정(明井)골은 산을 넘어 동백(冬栢)나무 푸르른 감로(甘露) 같은 물이 솟는 명정(明井) 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쳐며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은
평안도(平安道)서 오신 듯한데 동백(冬栢)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
옛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한산도(閑山島)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고당 : 고장.
아개미 : 아가미.
호루기 : 쭈꾸미와 비슷하게 생긴 해산물.
황화장사 : 온갖 잡살뱅이의 물건을 지고 집집이 찾아다니며 파는 사람.
오구작작 : 여러 사람이 두섞여 떠드는 수선스런 모양.
녕 : 이엉.
월간 『朝光』 1935년 12월호 발표
평안도 출신 백석, 왜 통영까지 내려왔을까
백석의 시 '통영'에 담긴 아픈 첫사랑 이야기
예향(藝鄕)의 도시 통영엔 박경리, 윤이상, 김춘수, 유치환, 전혁림 등 통영이 낳은 문화예술인들의 자취를 따라 걷는 '역사문화기행코스'가 있다. 명정동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신위를 모신 사당 충렬사 건너편 공원에 긴 시가 새겨져 있는 시비가 눈에 띄었다. 라는 제목의 시였는데 이채롭게도 통영 출신이 아닌 평안북도 정주가 고향인 시인 백석((1912~1996)의 시였다.
구마산(舊馬山)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갓갓기도 하다
바람 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북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서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중략)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 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은 평안도서 오신 듯한데
동백꽃이 피는 철이 그 언제요
녯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아서 나는 이 저녁 울듯 울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 백석
우리 모국어가 얼마나 아름답고 깊이 있는지, 시어로 재탄생한 고어나 토착어, 생소한 사투리에서 신비한 매력을 느끼게 해주는 백석의 시를 뜻밖에 통영에서 만나다니. 반가운 마음에 천천히 읽어 보았다.
제목도 그렇고 그저 통영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겠거니 했는데, 후반부에 연이어 나오는 '내가 좋아하는 그이, 여인, 내 사람'이 누굴까 궁금하게 한다. 알고 보니 그녀는 백석의 나이 스물넷에 만난 애끓는 첫사랑이었다.
시인의 애끓는 첫사랑, 통영 사는 천희 '난'
▲ 멋쟁이 모던보이 백석 시인과 통영에 있는 그의 시비
시인 백석의 사랑으로 익히 알려진 연인은 그의 시 속 나타샤의 모델로 알려진 고(故) 김영한 여사다. 백석 시인은 기생이었던 그녀를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졌고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붙였다. 후일 '자야'는 밀실정치의 요람이었던 요정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했는데, 이곳이 현재 서울 성북동의 명소 길상사라는 사찰이 돼 더 유명해졌다.
18세의 나이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의 아들'로 등단해 조선일보의 후원으로 일본 유학(영문학)까지 다녀온 후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해 시단에 혜성과 같이 등단한 수려한 외모의 촉망받는 '모던 보이' 백석. 그에게도 열병처럼 아프게 앓은 첫사랑이 있었다. 통영에 사는 아가씨 '난'이 그 주인공으로, 백석이 써내려간 통영에 대한 시엔 그녀가 그립게 그려져 있다. 그가 남쪽 끝 항구도시 통영에 대해 시를 세 편이나 남긴 것은 그만큼 '난'에 대한 그리움이 컸기 때문이리라.
한 여인을 간절히 그리는 를 읽다보면 가수 윤도현의 와 어찌나 비슷한지, 애타는 심정을 잘 전하지 못해 서툴고 안타까웠던 내 청춘의 사랑도 함께 떠올라 슬며시 웃음 짓게 된다.
나의 하루를 가만히 닫아주는 너
은은한 달빛 따라 너의 모습 사라지고
홀로 남은 골목길엔 수줍은 내 마음만 ♬
- 윤도현의 가운데
1936년 1월 백석은 통영 출신의 '천희' 중 하나인 '난'을 다시 만나기 위해 두번째로 통영을 방문한다. 경상도 말로 처녀를 '천희' 혹은 '처니'라고 부른단다. 하지만 통영 천희 난은 겨울방학이 끝나가자 서울로 상경해 버린 탓에 서로 길이 엇갈린다. 이때 상실감을 안고 쓴 시가 충렬사 건너편 시비의 로, 난이 살던 마을, 명정골까지 찾아가 그 애틋한 마음을 털어 놓는다. 백석은 그해 3월에도 다시 통영을 방문하지만, 이때도 결국 난을 만나지 못한다.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러 통영까지 왔다가 못 만나고 그녀가 살던 집과 동네만 하릴없이 기웃거리다 서글픈 마음으로 쓴 시. 이라며 사랑하는 여인의 고장까지 아름답게 그리는 마음에 공감이 간다.
학창시절 사귀었던 여친과 함께 난생 처음 그녀의 고향인 전주를 찾아갔을 때가 떠올랐다. 소박한 전주천이며 사람들로 북적이던 질박한 남문시장이 얼마나 정답고 포근하게 느껴지던지··· 그래서인가, 시인의 첫 번째시 이 유월에 김냄새가 나고 저녁비가 내리는 쓸쓸한 풍경이라면, 두번째 는 북소리가 들리고 뱃고동이 들리는 활기찬 통영 풍경이 펼쳐진다.
말없고 수줍었던 백석과 난의 사랑
처음 백석이 난을 만난 건 1935년. 당시 시인이자 조선일보 기자였던 백석은 절친한 친구의 결혼식 축하모임에서 같은 신문사 동료인 신현중의 소개로 당시 서울의 이화고교 학생이던 통영 여자 난(본명 박경련)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백석은 스물넷, 난은 열여덟 꽃다운 나이였다. 백석은 후일 그의 산문 에서 난의 모습을 이렇게 그린다.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 하였습니다.
- 산문 가운데
난은 신현중 누나의 제자였던 터라 신현중과 잘 아는 사이였다. 백석은 내친김에 신현중과 함께 친구의 통영 신행길을 따라나섰다. 사랑하게 된 여인의 고향과 집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 쓴 시가 1935년 12월 에 발표된 이다.
녯날에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녯날이 가지 않은 천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 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늬 오랜 객주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
남녘 끝 항구도시에 사는 옛 여인의 사랑은 미역오리같이 마르고 굴껍지처럼 말없고 투박했나보다. 벅찬 마음에 그 먼 길을 단걸음에 찾아간 그이지만 막상 그녀와의 만남은 수줍고 담백하다. 말없이 앉아있는 여인과 먼 길을 달려온 무뚝뚝한 사내가 오랜 객줏집 마루방에서 설렘을 마음속에 품고 마주하고 있는 장면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스라이 떠오르는 시다.
사랑과 우정과 배신의 드라마
▲ 통영 충렬사 계단에 주저앉아 엇갈린 사랑의 안타까움을 써내려간 백석.
이후 두 번 더 통영을 찾아가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서로 엇갈려 못 만나게 되고 백석은 상실감속에 충렬사 계단에 주저앉아 두번째 시 를 남기게 된다. 이 두번째 '통영' 시는 백석이 통영을 다녀왔다는 증거처럼 자신이 근무하던 조선일보를 통해 발표를 했다. 서울에서 그 공개구혼 같은 시를 읽었던 통영여자 '난'은 얼마나 가슴이 뛰었을까.
1936년 12월 마침내 백석은 친구 신현중과 함께 또다시 통영을 방문해 난의 어머니에게 난과 혼인할 뜻이 있음을 전한다. 난의 어머니 서씨는 서울에 사는 오빠 서상호를 만나 난의 혼사문제를 상의하고 백석에 대해 알아봐 줄 것을 청한다. 당시 난은 외삼촌 서상호의 집에서 돌봄을 받으며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서상호는 아끼는 고향 후배 신현중에게 백석에 대해 묻는다. 그때 신현중은 숨겨주어야 할 친구 백석의 비밀을 발설하고 만다. 그것은 백석의 어머니가 기생 출신이라는 소문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백석과 난의 혼사는 깨져버린다. 대신 그 자리에서 신현중은 서상호에게 자신이 난과 혼인할 뜻이 있음을 밝히고 단번에 승낙을 받는다. 1937년 4월 7일 신현중과 난은 혼인을 한다.
청혼을 했으나 거절당하고, 자신의 절친한 친구에게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백석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자신을 배반한 절친했던 친구, 연모하는 여인을 잃은 슬픔까지··· 너무나 애절했던 첫사랑을 잃은 백석은 이런 시를 남긴다.
그렇건만 나는 하이얀 자리 우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내가 살튼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 백석의 시 중에서
오마이뉴스 - 2014.01.20 14:30
백석 [白石, 1912.7.1 ~ 1995] 시인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 본명은 백기행(夔行). 오산학교를 거쳐 동경 청산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 1935년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을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사슴』이 있음. 1995년 사망.
[출처] 통영(統營) / 백석 - 백석의 아픈, 그 애끓는, 첫사랑 이야기 (시詩 시사랑 시인의 숨비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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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백기행(夔行).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했다. 오산중학과 일본 도쿄 아오야마학원을 졸업하였다. 1935년 「조선일보」에 '정주성'을 발표하면서 주목을 받았고, 1936년 첫 시집 을 출판하였다. 방언을 즐겨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모닥불', '고향', '여우난골족', '팔원' 등 대표작은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들이다. 토속적, 민족적이면서도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시인으로, 8.15 광복 후에는 고향에 머물렀다. 1963년을 전후하여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사망연도가 1995년임이 밝혀졌다.
시인 백석, 그는 누구인가?
시인 백석(白石). 그는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인해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 신음하던 1912년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마을에서 아버지 백시박과 어머니 이봉우 사이에서 3
남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그가 태어나서 얻은 호적상의 이름은 백기행이다.
우리들이 백기행이란 이름은 모르지만 백석이란 이름에 오히려 익숙한 까닭은 그의 고
향,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를 다니면서 그가 문학에 뜻을 두고 필명을 백석이라 개명한 뒤,
1955년 북한에서 사망했을 때까지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가 유명한 문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버지와 그가 다닌 그의 모교, 오산학교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알려진다.
수원 백씨 17대손인 그의 아버지는 정주(定州)에서 서양의 신문화에 일찍 눈을 떠
백석이 7살이 되던 해애 오산소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사실, 정주는 중국하고 지리적으로도 그리 멀지 않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던 탓
에 서양의 신문화를 쉽게 접할 수가 있었다. 그 때문에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나왔는
데 국문학사는 물론, 시문학사에도 에 길이 남을 춘원 이광수와 김억, 김소월 등이
이 고장의 출신이다.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 선생이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동하여 세운 학교로
서 수많은 문학인과 예술가를 배출시킨 학교로도 유명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민족시인 김소월(金素月)과 '소나기'의 소설가 황순원과 가장 한국적인 작가인 동
시에 가장 현대적인 작가로 평가받는 화가,이중섭(李仲燮)이다.
백석은 13살에 오산보통학교에 입학하고 18살 무렵에는 오산고보를 졸업하여 그가
일본으로 유학가서 사학의 명문, 야오야마(靑山) 학원에서 대학생활을 하기 이전까
지 오산학교 교정에서 대부분의 학창시절을 보냈다.
오산고교에는 매우 훌륭한 선생들이 많았으나 김소월의 스승이었던 김억과 그리고
이광수가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백석이 재학시에 고당 조만식 선생이 교장
선생으로 있었는데 백석은 그의 집서 하숙을 했었다고 전해진다.
그가 문학에 대해 남다른 소질을 보이고 자신의 인격을 다듬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와
같이 훌륭했던 스승들과 선배들의 밑에서 공부했던 이 무렵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려 하였지만 가정의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포기
하고 집에서 쉬면서 문학에 심취하여 창작활동에만 전념했다.
이 시기에 그는 소설을 써서 그 이듬해인 1930년 1월 조선일보에서 공모한 제2회 『신년현
상문예 공모』에 응모하여 『그 母와 아들이 』 당선되며 문단에 데뷔했다. 『신년현상문
예 』라고 함은 오늘날에 신춘문예를 의미한다.
『신년현상문예』소설이 당선되며 사실상 그의 인생이 바뀌었다. 정주에서 금광으로
크게 부자가 된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사들여서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의 후원을 받아
그는 일본 도쿄에 있는 청산학원로 유학가서 1930년부터 4년동안 영문학을 전공했다.
오산학교 시절에는 반친구들 40명 중에 10등을 할 만큼 공부에 별다른 재능을 보이지 않던 그가
대학에선 영문학을 전공하면서도 러시아어는 물론, 프랑스어 등의 외국어에 상당한 실력
을 보였다고 한다.영어회화에도 능통하여 그는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취직해서 직장생
활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소설을 쓰기보다는 오히려 외국서적 번역에만 몰두했다.그의 영어
실력은 훗날 함흥에 있는 영생고보에서 영어교사로 재직당시 학생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얻으면서 명성이 자자했을 정도였다.
그런 때문인지 그는 소설에도 시작에도 크게 관심을 안보이고 외국서적 번역에 날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 처음에는 체홉 등이 쓴 러시아의 소설과 산문들을 번역하였으나 시릉 번역하기 시작하며 번역하는일을 점차 줄이고 창작시에 전념했고 조선일보에 「定州城」이란 자신의 창작
시를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이때부터 탁월한 시의 재능을 보였다. 그 이후로 그가 남긴 소설로는 「마을의 遺話」와 「닭을 채인 이야기」라는 제목의 두 편의 단편소설이다.
山턱원두막은뷔였나 불빛이외롭다
헌깁심지에 아즈까리기름의 쪼는 소리가들리는 듯하다
잠자리조을든 문허진城터
반디불이난다 파란魂들같다
어데서말있는 듯이 크다란山새한마리 어두운 곬작이로난다
헐리다남은성문이
한을빛같이훤하다
날이밝으면 또 메기수염의늙은이가 청배를팔려올 것이다
- 「定州城」의 전문 -
위의 시를 발표한 뒤에도 조선일보에서 발행했던 「朝光(조광)」이란 잡지에 햔토색
이 짙은 ’統營(통영)' 등의 서정시를 계속해서 발표했다. 이 시절에 그는 그 당시 문단
을 이끌었던 임화,박용철 등의 여러 문인들과 교류했다. 그들 모두가 백석의 시에 관
심을 보였고 이때부터 백석은 시문단을 주도하는 시인으로 서서히 자리를 굳혀갔다.
그러던 그가 시인의 입지를 더욱 굳힌 것은 그의 첫시집 『사슴』을 발간한 뒤였다.조
선일보사에서 직장일을 하면서도 더욱 많은 시를 써서 발표했고 점점 더욱 많은 문인
들과 사귀었다. 그때 그가 사귀었던 대표적인 문인들은 신석정과 함대훈 등이었다.
그 시기는 '향수'의 정지용과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김영랑 시인이 첫시집을 내던 때
였다.사실, 그 당시 그는 회사에서 바쁘게 보냈지만, 문학에만 전념함으로서 그에게 있
어서는 그의 문학이 참으로 내실을 기한 매우 소중한 시기였다.
그리고 시집 '사슴' 발표이후 그는 오늘날의 표현으로 문단에서 조명받는 스타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일보사에서의 2년간의 생활을 접고 함흥에 있는 영생고보호
직장을 옮겼다. 그가 그곳에서 맡은 임무는 영어교사였다.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영어는 물론, 외국어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게다가 소설가요, 시인으로 학생들과
다른 선생들로부터 대단한 관심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는 외국어나 문학보다 연극, 미술, 체육 등의 과목에 더욱 관심을 보
이며 학생들을 지도했다. 연극반과 축구부의 학생들과 친구처럼 절친하게 지낼 만큼
학생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학생들의 재능을 키우는데 주력했다.
교사로서 생활하며 자긍심을 느낀 것도 이때였다. 그는 바쁜 교직생활에도 시창작을
게을리하지 않고 꾸준하게 시를 썼다.
사실 시집 『사슴』에 발표된 시들은 거의 사물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에
그쳤다면 함흥에서 교직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자신을 주체로 한 내면세계를 강조하
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의 시셰계에 변화가 생긴 무렵으로 그의 연보(年譜)를 보아
도 그에게는 나름대로 매우 의미있는 시기로 평가된다.
그러나, 함흥에서 2년동안 교사로 재직시에 그에게는 또 다른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기생 자야와의 만남과 사랑이었다.
이때 백석의 나이가 26살이었고 그녀의 나이는 22살이었다.
자야의 본명은 김영한. 그녀는 1916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사별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다가 어머니가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그녀
의 집안은 재산을 모두 날리고 거리에 나앉는 신세가 되자 16살에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서 기생이 되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정악계(正樂界)의 대가로 이름을 날리었던 하규일의 문하생이 되어
창과 가무를 배웠다고 한다. 문학에도 재능을 보였던 그녀는 게녀의 생활을 하면서도
'삼천리 문학'에 수필을 발표하여 인텔리 기생으로 불리었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을 접하면서 문인들과 사귀었다.
그러던 중, 그곳을 자주 찿던 조선어학회의 해관 신윤국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신윤국은 1894년(고종 31년) 황해도의 연백(延白)에서 태어나서 1917년 미국으로 건너
가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에 회원으로 미주 지역의 항일 운동에 투신한 이후,도
산 안창호가 이끌었던 흥사단(興士團) 활동했던 인물이다.
뜻한 바가 있어 귀국을 결심하고 고국으로 되돌아온 그는 1932년 『국사강의록(國史
講義錄)』을 간행했고,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에도 참가해 항일운동과 더불
어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다시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에 가입하여 『조선어사전』 편찬 재정위원으로 활약
했다.
그의 후원으로 도쿄에서 공부를 하다가 스승으로 섬기던 신윤국이 동우회사건(同友
會事件)과 관련해 동우회원 181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귀국했다.
함흥경찰서에 투옥되어 잔혹한 고문을 받고 있는 그를 어떻게든 만나려고 하였으나
사상범(思想犯)의 이유로 면회가 안되자 그녀는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않겠
다고 결심하고 함흥에 눌러앉게 되었다.
그녀는 고심하던 끝에 함흥에서 기생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찿아오는 사람중에 법조
인이 오면 그에게 부탁해서 신윤국을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끝까지 면회의 허락이 안되 만나지 못했지만, 영생고보 선생들의 회식자리에
나갔다가 백석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첫눈에 반해버린 백석은 학교에서 퇴근하면 그녀의 하숙방으로 달려가서 그녀와
밤을 지내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둘사이는 사실상의 부부관계라고 해도
좋을 만큼 뜨거웠다.
자야라고 하는 이름은 백석이 그녀에 붙여준 이름이다.어느날 그녀가 서점에 들러 '당
시선집(唐詩選集)을 사왔는데 이태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읽다가 '자야(子夜)
라는 아호를 지어준 것이다.
달콤했던 그들의 사랑은 그녀가 먼저 서울로 떠나면서 백석과 그녀는 서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얼마나 사랑하였을까 둘은 서로 보고 싶어 하루속히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어느 날, 조선축구학생연맹전 조 대표선수 인솔 교사로 발탁되어 그들을 서울로 인솔
하는 기회가 생겼다. 그런데, 그는 선수들은 여관에 투숙시킨 다음 자신은 청진동의
자야집에 가서 둘만의 사랑을 불태웠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학교서는 그에게 책임을 물어 사임을 강요했고 사랑하는 여인 때문
에 백석은 사표를 제출하고 상경했다.
그는 결국 청진동 그녀의 집에서 살림을 차리고 동거에 들어갔다.
다시 지금의 서울인 경성으로 되돌아와 조선일보사에 재입사했다.그는 거기서 조선일
보 계열사인 「여성」誌의 편집일을 맡았는데 이는 예전에 했던 일이고 문학에 관련
된 일이라서 모든 일이 익숙했다.
그들은 마치 부부처럼 생활하며 서로가 없으면 하루라도 못살 것첨럼 행복하게 사는
듯했다.
그러나, 백석의 부모는 아들이 기생과 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서로 헤어지게 만들
려고 아들에게 다른 여자와 결혼토록 강요했다. 부모의 강요에 못이겨 그는 고향으로
가서 정혼녀와 혼인했다. 마지못해 혼인은 했지만 백석은 그녀와 첫날밤도 치르지 않
은 채 도망치듯 고향집을 빠져나와 자야의 곁으로 돌아갔다.
그해 말에 느닷없이 다시 회사를 그만두고 이번에는 북만주의 신경, 오늘날의 長春(장
춘)이란 곳으로 홀연이 떠나갔다.
신경으로 떠나갈 때 그녀에게 함께 가서 살자고 하였으나 자신이 백석의 장래를 가로
막고 있다는 생각에 괴롭지만 백석을 혼자 보내게 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사랑하기 때문에 떠나보낸다는 유행가의 가사처럼 서로 헤어지게 되었는데
그들간의 사랑은 아쉽게도 그렇게 끝이 났다. 시인 백석과 그녀가 격였을 이별의 고통
이 짐작된다.
"그런데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 이별이 될 줄 몰랐다"고 1995년 출간한 ‘내 사랑 백석’(문
학동네)에서 그렇게 회고했다.
백석이 그녀와의 이별을 아쉬워해 그의 그런 심경을 담아 쓴 시가 바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디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全文
짐작컨데 그다지 많지 않은 이십대의 시절을 떠돌이로 생활했던 것은 그 당시의 시대
상황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백석의 결혼관에 대해 부모들의 봉건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부모와의 마찰을 빚은 것도 하나
의 이유가 되겠지만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에서 벌인 남경대학살 등의 아시아 전역에서 침략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국내서는 말할 것도 없이 유학생들까지 학도병의 이름으로 강제로
징집하여 전선으로 내보내던 시기라서 인테리의 입장에서 나라없는 설움까지 격으면서 남모
르는 고민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그는 펜을 놓지 않았다. 그는 북만주의 신경서도 여전히 시를
써서 『문장』등의 문예지를 통해 오늘날에 시인이나 시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
랑받고 있는 「북방에서」와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의 시를 잇달아 발표했다.
그 중에서 그의 「북방에서」는 일제말의 식민지 현실에 대한 암울함과 무력하게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자책감을 보여주는 시이다. 이 시의 주체는 한민족의 역사가 시작되던 때부
터 현재까지 살고 있으면서 민족이 함께 격는 역사적 일들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시는 백석이 만주북방을 떠돌면서 그의 역사에 대한 죄채감을 느끼
면서 쓴 시이다. 특히 지난 과거의 역사에 대한 반성을 , 민족의 역사와 함께 살아가는
자신의 입장에서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식민지 현실에 대한 슬픔을 이겨내려하는 시인
의 의지와 동시에 무력함에 대해 자책하는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를 숙신을 발해를 여진을 요를 금을
흥안령을 음산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든 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드든 말도 잊지 않었다
오로촌이 멧돌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든 것도
쏠론이 십리길을 따러나와 울든 것도 잊지 않었다
나는 그때
아모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아츰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그동안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금은보화는 땅에 묻히고 가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
이리하여 또 한 아득한 새 옛날이 비롯하는 때
이제는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나는 나의 옛 한울로 땅으로―나의 태반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해는 늘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 북방에서 」전문
그리고 「흰 바람벽이 있어」역시 이국에서 유랑생활을 하며 격고 있는 자신의 심중을 조국의
어머니와 가족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현실, 즉 일본에 빼앗긴 조국의 현실을 한탄하며 그 슬픔
을 노래한 시이다. 이 시 전반에서 비록 현실은 슬프지만 자신이 격고 있는 고독과 슬픔을 이겨
내려하는 그의 삶의 의지를 엿볼 수가 있다.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 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 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아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흰 바람벽이 있어」전문
그는 이와 같이 시를 쓰면서도 한편으로 토마스 하디가 쓴 「테스 」등의 여러 소설들을
계속 번역하여 「朝光」에 발표하며 중국서도 그의 건재를 과시했다.
그러나 그의 그곳서의 삶이 순탄했던 것만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북만주에 건너가서 신경시의 東三馬路 시영주택 '황씨집'에 에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삶은 떠돌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어느 관청에 근무했던 그는 창씨개명을 하라는 일본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직장을
다시 그만두고 새로운 직업을 택했는데 측량기사 보조 등의 일과 만주 안둥[安東]으
로 옮겨 세관업무를 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살던 신경이란 곳이 그 옛날 북만주 일대까지 호령했던 고구려의 영토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을까?
그 영토를 중국에게 빼앗기고 조선마저 일본에게 빼앗겨서 자신이 나라없는 백성
이란 사실에 자신이 태어난 조선과 유학생활을 위해 지낸 일본과 지인들을 멀리하
고 그곳 중국땅까지 떠돌면서 느꼈던 비애와 슬픔, 그리고 감회가 소설가와 시인이
란 입장에서 특별히 남달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차라리 그에게 있어서 형별이요, 고통이 아닐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만주 등을 떠돌면서 유랑생활을 자처했던 것은 일제의 동화정책을 반대하고 저
항했던 그의 소신있는 애국심의 발로는 아닐까?
마침내, 1945년 8월15일 조국이 그토록 기다리던 해방을 맞이했다.
당시 조선사람치고 기뻐하지 않았을 사람이 어디 있었겠냐마는 백석도 무척이나
기뻐했을 것이다.
그는 설레이는 마음으로 즉시 귀국했다.
그런데, 그는 왜 고향으로 바로 가지 않았고 사랑했던 여인을 찿지도 않고 거처를
신의주로 옮겼을까? 그것이 아직까지 의문으로 남는다.
그것은 아마도 결혼을 강요했던 부모와의 불화와 자야와의 원치 않던 이별이 못내
그를 괴롭혔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기에 그는 그의 대표작으로도 손꼽히는 시의 하나인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을 『學風(학풍)』誌에 발표했다.
말하자면, 남신의주 유동 마을 박시봉이란 사람의 집 방에 살면서 쓴 시로 짐작된
다.
고향 정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신의주서 살면서 가족과 고향을 그리면서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는 시이다.해방되기 이전에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서 탄압과 감시
속에 떠돌이 생활을 했다가 해방을 했는데도 자신이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남의
집에 더부살이 하는 자신의 처지를, 마지막 연의 갈매나무를 보며 자신의 삶을 반
성하고 있다.
또한 이 시는 서양문물 유입으로 가족이 뭉쳐 살던 대가족 중심의 우
리나라 사회가 핵가족 사회로 점점 붕괴되는 사회상을 비판하는 시로도 평가된다.
어쨌거나 그는 그가 쓰는 작품마다 고향의 지명이나 이웃사람들의 이름, 그리고
고향인 평안남도 정주를 사투리를 넣어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를 많이 썼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全文
백석은 신의주에 살았지만 그리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고향으로 가기로 결심을 굳힌
뒤에 그는 곧장 정주, 자신의 본가로 돌아갔다.미물인 짐승들도 죽을 때는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는 귀소본능처럼 백석 자신도 그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을 한시
라도 잊지 않고 살았었던 그였기에 귀향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 이후의 그의 행각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해방되던 그해 12
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남북한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어 38도선을 경계로 이남에는
미국이, 이북에는 쏘련의 통치하여 남한에는민족주의 정부가 그리고 북한에는 사회주
의 정부가 들어섰다.
그 당시에 윈스턴 처칠이 미국을 방문해서 쏘련은 '철의 장막(iron curtain)으로 가리
워져 있다' 라고 말한 그의 연설처럼 쏘련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혀 알 수 없을
만큼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철저하게 통제했던 쏘련의 통치를 받게된 뒤부터 백석은
남쪽의 문인들과 교류가 없었다.
고향에서 계속 글을 썼다고는 하나, 공산당 산하에 있는 조선작가동맹의 『조선문학』
에만 작품을 발표했다.
해방이전에는 동인 등의 형식으로 어떤 문학단체에도 가담하지 않고 모더니즘 성향의
토속적인 서정시를 주로 쓰며 탈정치와 탈이념적인 시세계를 펼쳤던 그가 북한에 머물
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 성향을 표방했다.
그가 타계하기 이전까지 그는 매월 『조선문학』에 자신의 작품을 실었는데 아동문학
평론, 창작시와, 수필, 번역시를 소개했다.
그는 아동문학작품과 관련해서 『조선문학』 1956년 5월호에 실린 「동화문학의 발전
을 위하여」와1956년 9월호에 실린 「나의 항의, 나의 제의 : 아동시와 관련하여, 아동
문학의 새 분야와 관련하여」 그리고 1957년 6월호에 실린 「큰 문제, 작은 고찰」라는
제목으로 세 편의 평론을 실었는데 여기서도 백석은 아동문학은 교양과 선전의 무기
로서 사회주의 혁명의 한 부분을 담당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비공식적으로 그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1961년까지 그는 시나 수필 등에서도 자신이
번역한 외국의 작품에도 사회주의 이념을 지지하는 글을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일설(一說)에 의하면, 1950년 6월25일 일어난 한국전쟁 당시 백석은 중국으로 건너갔다는 설과
고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북진했을 때는 국군으로부터 정주 군수가 되어 줄 것
을 제의받았다는 설도 있지만 , 모두 확인되지 않은 설에 불과하다.
또한 해방이후 북한의 자신의 고향에서 1963년 그가 사망하기까지 사회주의 체제를 지지하는
글을 시와 수필 등의 여러 장르에 걸쳐 『조선문학』에만 발표했다는 것도 의문이다.
백석 시인이 북한에서 생존시에 『조선문학』을 통해 1963년 그가 사망하기 두 해전인 1961년
까지 작품을 발표했다는 북한의 주장과는 달리 최근 연구가에 의하여 밝혀진 사실은 그의 사망
연도는 북한에서 발표한 1963년보다 훨씬 이전인 1955년도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과연 어느 쪽이 진실일까?
분명한 사실은 북한의 체제가 남한의 체제와는 다르다는 점이다.훗날 그와 관련한 모든 사실들
이 명명백백(明明白白) 밝혀지기 전까지는 그를 변절자로 매도해선 안된다. 이미 밝혀진 일제시
대 일본에게 협조했던 친일파 문인들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무능했던 조선의 정부를 무력으로 위협해서 국권을 빼앗고 36년간을 극악무도한 만행을 일삼으
며 민족을 말살하려 했던 일본! 해방이 되었는가 싶었는데 이번에는 외세에 의해 남북이 분단되
고 쏘련의 사주에 의한 저질러진 동족상잔의 6.25를 격으면서 지성인들, 특히 문인들이 격어야
만 했던 정신적인 갈등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북한의 발표대로 백석이 사망을 했는지 아니면 아직까지 생존해 있는지는 알 수없다. 물론, 생존
해 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만일 그가 생존해 있다면 올해 그의 나이가 94살이란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시대적인 배경에도 좌절하지 않고 토속적이면서
향토적인 우리민족 고유의 시언어로 자신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구축하며 서정시를 썼던 시인
백석! 어느 문예지나 문학파에 가담하지 않고 민족혼을 일깨웠던 시를 써던 시인 백석!
그의 대표시인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과 『나와 나타샤와 희 당나귀』와 『흰 바람벽
이 있어』외에『통영(統營)』,『고향』,『북방(北方)에서』,『적막강산』등의 다수의 시들
은 오늘날 많은 시인들과 평론가 그리고 대학에서 학생들에 의해 평론이나 논문으로 발표
되는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제 그의 시는 시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널리 애송되고 있다.
백석 시인! 그는 이제 한국시 100년史에 있어 문단의 또 다른 큰 별임에 틀림없다.
백석 시인
본명은 백기행(夔行).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했다. 오산중학과 일본 도쿄 아오야마학원을 졸업하였다. 1935년 「조선일보」에 '정주성'을 발표하면서 주목을 받았고, 1936년 첫 시집 을 출판하였다. 방언을 즐겨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모닥불', '고향', '여우난골족', '팔원' 등 대표작은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들이다. 토속적, 민족적이면서도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시인으로, 8.15 광복 후에는 고향에 머물렀다. 1963년을 전후하여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사망연도가 1955년임이 밝혀졌다.
시인 백석(白石). 그는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인해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 신음하던 1912년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마을에서 아버지 백시박과 어머니 이봉우 사이에서 3남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그가 태어나서 얻은 호적상의 이름은 백기행이다.
우리들이 백기행이란 이름은 모르지만 백석이란 이름에 오히려 익숙한 까닭은 그의 고향,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를 다니면서 그가 문학에 뜻을 두고 필명을 백석이라 개명한 뒤,1955년 북한에서 사망했을 때까지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가 유명한 문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버지와 그가 다닌 그의 모교, 오산학교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알려진다.
수원 백씨 17대손인 그의 아버지는 정주(定州)에서 서양의 신문화에 일찍 눈을 떠백석이 7살이 되던 해애 오산소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사실, 정주는 중국하고 지리적으로도 그리 멀지 않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던 탓에 서양의 신문화를 쉽게 접할 수가 있었다. 그 때문에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나왔는데 국문학사는 물, 시문학사에도 에 길이 남을 춘원 이광수와 김억, 김소월 등이이 고장의 출신이다.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 선생이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동하여 세운 학교로 서 수많은 문학인과 예술가를 배출시킨 학교로도 유명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민족시인 김소월(金素月)과 '소나기'의 소설가 황순원과 가장 한국적인 작가인 동시에 가장 현대적인 작가로 평가받는 화가,이중섭(李仲燮)이다.
백석은 13살에 오산보통학교에 입학하고 18살 무렵에는 오산고보를 졸업하여 그가 일본으로 유학가서 사학의 명문, 야오야마(靑山) 학원에서 대학생활을 하기 이전까지 오산학교 교정에서 대부분의 학창시절을 보냈다.
1918년 오산소학교를 거쳐 오산중학교를 마치고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으로 일본 아오야마 학원[靑山學院]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입사, 〈여성〉에서 편집을 맡아보다가 1935년 8월 〈조선일보〉에 〈정주성 定州城〉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36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있었으며 만주 신징[新京]에 잠시 머물다가 만주 안둥[安東]으로 옮겨 세관업무를 보기도 했다. 해방 후 고향 정주에 머물면서 글을 썼으며, 6·25전쟁 뒤에는 북한에 그대로 남았다. 1936년에 펴낸 시집 〈사슴〉에 그의 시 대부분이 실려 있으며, 시 〈여승 女僧〉에서 보이듯 외로움과 서러움의 정조를 바탕으로 했다. 〈여우 난 곬족〉(조광, 1935. 12)·〈고야 古夜〉(조광, 1936. 1)에서처럼 고향의 지명이나 이웃의 이름, 그리고 무술(巫術)의 소재가 자주 등장하며 정주 사투리를 그대로 썼는데, 이것은 일제강점기에 모국어를 지키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사슴〉 이후에는 시집을 펴내지 못했으며 그뒤 발표한 시로는 〈통영 統營〉(조광, 1935. 12)·〈고향〉(삼천리문학, 1938. 4)·〈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학풍, 1948. 10) 등 50여 편이 있다. 시집으로 1987년 창작사에서 〈백석시전집〉과 1989년 고려원에서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을 펴냈다.
시인 백석은 민족의 주체적 자아를 문학 쪽에서 보존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활동 영역을 농촌 공동체의 생활과 그 정서에서 찾으려 했다. 그무렵 도시공간에서는 이미 말의 타락 현상이 극심하게 일어나 인간 의식의 붕괴 및 파탄으로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민중들이 믿어왔던 지식인들은 참으로 그 모습이 말이 아니게 달라져서 소일본인화되어 버리고, 그들이 내뱉는 말이라곤 지원병 참가를 독려하는 강연, 전시체제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는 선무성 시국강연 따위로 분주하던 시절이었다. 세상에 믿을 사람 없었고, 신뢰할 수 있는 한 마디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농촌만큼은 제국주의자들의 극악한 농촌파괴 정책에도 불구하고 혈연과 거주지로 함께 엮어지는 생활공동체의 끈끈한 유대를 여전히 갖고 있었던 것이다.
시인 백석의 본명은 백기행, 평안북도 정주군 출생이다. 역시 동향인 시인 김소월과는 당시의 유명했던 사학 오산고보의 선후배 사이로 백석은 선배시인 소월의 문학세계를 매우 흠모하고 존경했다. 그러나 둘은 서로 만난 적이 없는 채로 소월이 먼저 요절하고 말았다. 소월의 문학에는 민요적 틀에 실어서 표현하는 관서지방 특유의 정서가 있지만 백석은 소월보다 어쩌면 더 짙게 마천령 서쪽 지역인 평안도 주민들의 일반적인 정서를 특이한 문체로 담아내고 있다.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가락닢도 머리카락도 헌겊 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와장도 닭의 깃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문장)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 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모닥불」전문
이 시의 첫연에 나오는 사물들은 생물, 무생물의 구분을 따로 나눌 것 없이 우리들의 유년체험과 친숙하게 맞닿아 있는 모닥불의 재료들이다. 하지만 여전히 요긴하고 쓸모있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거의 쓸모없게 되어 삶의 뒷전으로 물러나 있거나 아예 버려진 하찮은 사물들끼리 모여서 이처럼 따뜻한 모닥불의 광휘와 온기를 이루어내고 있는 것이다. 1∼2연에 등장하는 각 낱말 끝에 '∼도'라는 특수조사가 낱낱이 붙어 있는 것은 모닥불이라는 공간이 애틋한 소외존재들이 서로 만나는 평등한 장소임을 일깨워주는 하나의 시적 장치로 여겨진다.
백석의 시세계에서 또하나 돋보이는 것은 농촌적 정서를 아주 현장감이 느껴지도록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 시는 관서지방 농촌공동체의 여름, 저녁 풍경을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다.
당콩밥에 가지 냉국의 저녁을 먹고 나서
바가지꽃 하이얀 지붕에 박각시 주락시 붕붕 날아오면
집은 안팎 문을 휑하니 열젖기고
인간들은 모두 뒷등성으로 올라 멍석자리를 하고 바람을 쐬이는데
풀밭에는 어느새 하이얀 대림질감들이 한불 널리고
돌우래며 팟중이 산 옆이 들썩하니 울어댄다
이리하여 하늘에 별이 잔콩 마당 같고
강낭밭에 이슬이 비 오듯 하는 밤이 된다
「박각시 오는 저녁」 전문
백석은 분단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금지에 의해 인위적으로 매몰되어온 시인이었다. 백석의 경우는 그 자신이 무슨 사회주의 사상을 가졌거나 꼭 북쪽의 정치체제를 선택할 만한 어떤 필연성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단지 있었다면 그의 고향이 평안북도 정주라고 하는 사실, 해방 이후에 만주에서 돌아온 그가 줄곧 고향의 가족들과 기거해 왔다는 사실, 굳이 서울 쪽으로 월남해 내려와야할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을 리 없었다. 그는 그냥 고향에 눌러 앉았었고, 이 때문에 남쪽의 문학사에서는 '북쪽을 선택한 시인'의 명단에 올라 있었으며, 심지어 어떤 자료에서는 백석이 프로문인들의 몇 차 월북때 북으로 올라 갔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실로 어처구니 없는 기록들까지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북쪽에서의 백석의 시인으로서의 생활은 항시 불안정한 것이었다. 체제 정비를 끝낸 다음 김일성이 맨먼저 착수한 것이 언어의 통일이라는 명제였다. 이것은 함경도와 평안도 두 지역간의 뿌리깊은 알력과 갈등이 사회주의 체제의 발전에 막대한 장애를 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두 지역에서 오랫동안 지방 토호로서 대대로 살아오던 많은 주민들이 대량으로 집단 이주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함경도 주민과 평안도 주민을 서로 적절한 배수로 섞바꾸어 살게 하는 인위적 강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는 지역성을 가장 농도 짙게 포괄하고 있는 방언을 소멸시킴으로써 지역 감정을 무화시킬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소위 문화어 정책이라는 것을 실시했는데 이것이야말로 방언의 구획과 변별성을 일거에 무너뜨리고자 하는 시도였다. 정황이 이러하니 백석의 시세계가 지녀오던 방언주의가 제대로 지탱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백석은 실제로 1960년대 초반까지 북한의 각종 문학자료에 아주 드물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더 계속되지는 못했던 것이 바로 백석 특유의 방언주의와 그것을 가로막는 문화어 정책 간의 충돌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해서 백석은 북에서도 비운의 시인이었지만 남에서도 마찬가지로 비운의 금지시인이었다. 그러던 것이 1987년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이 발간된 이후 백석의 시는 문학인에 대한 금지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조치인가를 그대로 일깨워 주었다. 동시에 백석의 문학에 대한 경탄과 더불어 백석처럼 그동안 금지라는 강제에 매몰되어 왔던 월북 문인들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봇물 터지듯 일거에 터져나오게 되었다. 전후 세대들의 상당수는 백석을 비롯한 이찬, 오장환, 임화, 이용악, 설정식, 정지용, 김기림, 박아지, 여상현, 조벽암, 조영출, 권환 등 많은 금지 시인들의 작품은 물론 그들의 존재조차 모르고 살아왔으며, 이런 분위기 속에서 분단시대 남한의 문학인들은 개별적인 작품 활동에 종사했다.(위의 시인들 가운데 권환같은 시인은 고향인 마산에서 살다가 1950년대 초반에 세상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월북시인으로 간주해 버리는 넌센스까지 있었다) 그들의 학생 시절에 배우고 영향을 받았던 문인들이라곤 대부분이 중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수록된 작품들이 가장 주된 모범적 교본이었고, 이들 작품의 상당수가 일제말의 황민문학 계열이나 순수문학 계열, 또는 분단 이후의 반공 이데올로기 계열이었다. 사정이 그러했으니 해금문인들의 작품을 대하는 전후 세대들의 정서적 충격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분단 이후 냉전시대의 남한 문학이 나타내 보여왔던 작품의 성향이란 대개 이러한 분위기의 연속이요,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이제 백석의 문학작품은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문학사에 편입되고 있다. 전국에서 많은 신진 문학연구가들에 의해 백석의 작품은 주요 단골 연구 테마로 각광받고 있으며 전집 발간 이후 가장 최근에 발간된『백석전집』(김재용 편)에 이르기까지 무려 100여편이 넘는 연구 논문, 학위 논문, 또는 평론들이 학계와 문단에 제출 발표되었다. 이와 동시에 문단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는 전후 세대 시인들에 의해 백석의 문학 작품과 시정신은 깊은 영향의 수수관계로 재창조되어서 계승되어가고 있다.
백석의 시에서 다른 소재들에 비해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소재는 음식물과 관련된 사례들이다. 그의 시전집을 통틀어 음식물 소재는 대략 150여종이나 된다. 이 음식물들을 살펴 보면 별반 특이한 음식이 많은 것은 아니나 아무튼 우리의 토착적인 음식 문화를 느끼게 하는 부분들이 있다. 이는 외래 문화, 즉 제국주의적인 일본 문화의 침탈을 시인이 의식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민족적 분위기가 강렬히 풍겨나는 토속 음식들을 열거하고 집착을 보이기까지 했을 것이다. 그 주된 음식물이나 기호물, 또는 그 재료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막써레기, 돌나물김치, 백설기,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고사리, 두릅순, 회순, 물구지 우림, 둥굴네 우림, 도토리묵, 도토리 범벅, 광살구, 찰복숭아, 반디젓,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 두부, 콩나물, 뽂운 잔디, 도야지 비게, 무이징게국, 찹쌀탁주, 왕밤, 두부산적, 소, 니차떡, 쇠든 밤, 은행여름, 곰국, 조개송편, 죈두기 송편, 밤소, 팥소, 설탕든 콩가루소, 내빌물, 무감자, 시라리타래, 개구리의 뒷다리, 날버들치, 호박잎에 싸오는 붕어곰, 미역국, 술국, 추탕, 엿, 송이버섯, 옥수수, 노루고기, 산나물, 조개, 김, 소라, 굴, 미역, 참치회, 청배, 임금알, 벌배, 돌배, 띨배, 오리, 육미탕, 금귤, 전복회, 해삼, 도미, 가재미, 파래, 아개미젓, 호루기젓, 대구, 건반밥, 명태창란젓에 고추무거리에 막칼질한 무이를 뷔벼 익힌 것, 힌밥, 튀각, 자반, 머루, 꿀, 오가리, 석박디, 생강, 파, 청각, 마늘, 노루고기, 국수, 모밀가루, 떡, 모밀국수, 달재생선, 진장, 명태, 꽃조개, 물외, 꼴두기, 당콩밥, 가지냉국, 싱싱한 산꿩의 고기, 김치가재미, 동티미국, 밤참국수, 게산이알, 취향이돌배, 만두, 섭누에번디, 콩기름, 귀이리차, 칠성고기, 쏘가리, 35도 소주, 시래기국에 소피를 넣고 끓인 술국, 도야지 고기, 기장차떡, 기장쌀, 기장차랍, 기장감주, 기장쌀로 쑨 호박죽, 보탕, 식혜, 산적, 나물지짐, 반봉과일, 오두미, 수박씨, 호박씨, 멧돌,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 얼얼한 댕추가루,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감주, 대구국, 닭의 똥, 연소탕, 원소라는 중국떡, 고사리, 가지취, 뻑꾹채, 게루기, 약물, 깨죽, 문주, 송구떡, 백중물
도합 148종이 넘는다. 이 음식물들의 종류를 가려뽑아서 보면 백석의 시에서 동원된 음식들이 모두 일반 서민들이 먹는 생활 음식들의 명칭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는 시골 아이들이 어릴 적에 주워 먹던 길바닥의 닭똥도 있고, 젓갈에 가자미식혜 등의 지역 음식도 보인다. 거의 대다수가 민중적 향취가 느껴지는 음식물들이며, 동물성보다는 식물성 음식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특징이다.
백석의 시에 등장하는 동물과 식물의 구체적인 명칭도 상당수인 바 야생 동물, 가축, 물고기, 곤충 따위의 동물적 소재와 과수, 야생초, 약초, 해초, 채소, 과일, 곡식 등의 식물적 소재를 모두 추출하여 대비해보면 식물성이 약간 많다. 동물적 소재는 모두 72종 가량이 된다.
지렝이, 박각시, 주락시, 개구리, 자벌기, 거미, 찰거머리, 버러지, 노랑나비, 벌, 딱장벌레, 파리떼, 노루(복작노루), 곰, 멧도야지, 승냥이, 배암, 산토끼, 잔나비, 여우, 쪽재피(복쪽제비), 다람쥐, 도적괭이, 땅괭이, 호랑이, 당나귀, 오리, 개(강아지), 도적개, 얼럭소새끼, 도야지, 닭, 말(망아지), 토끼, 노새, 게사니, 소(송아지), 멧새, 물총새, 짝새, 까치(까막까치), 꿩(덜걱이), 멧비둘기, 어치, 제비, 물닭, 뻐꾸기, 갈새, 뫼추리, 갈매기, 물총새, 백령조, 꼴두기, 붕어, 농다리, 게, 굴, 소라, 조개(가무락 조개), 참치, 꼴두기, 전복, 해삼, 명태, 호루기, 대구, 칠성고기(칠성장어), 가재미, 도미, 반디, 미꾸라지, 쏘가리
대부분의 동물들이 맹수류가 아니라 평화스러웁고 양순한 성질의 동물들이다. 이러한 동물들의 선택에서도 시인의 기질이나 품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비해 식물적 소재들은 도합 79종이나 되는데 거의 모두가 시골 생활에서 흔히 대할 수 있는 것들이다.
돌나물,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고사리, 두릅순, 회순, 도토리, 살구나무, 찰복숭아, 배나무, 무이, 찹쌀, 왕밤, 천도복숭아, 콩가루, 섭구슬, 박, 감나무, 산뽕, 땅버들, 석류, 수리취, 송이버섯, 도라지꽃, 옥수수, 아카시아, 미역, 수무나무, 아주까리, 밤나무, 머루넝쿨, 재래종의 임금나무, 돌배, 벌배, 다래나무, 갈부던, 복사꽃, 들매나무, 삼, 숙변, 목단, 백복령, 산약, 택사, 금귤, 파래, 동백나무, 진달래, 개나리, 당콩, 머루, 쑥국화꽃, 자작나무, 바구지꽃, 강낭, 귀리, 모밀, 피나무, 버드나무, 호박씨, 수박씨, 이깔나무, 바구지꽃, 오이, 마늘, 파, 감자, 쉬영꽃, 뻑꾹채, 게루기, 고사리, 갈매나무, 싸리, 이스라치, 가지, 함박꽃
이러한 식물들의 성격은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동물들의 이미지와 어울려서 작품 세계의 아늑하고 민중적인 삶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키는데 이바지하고 있다. 적어도 시작품속에서는 동물성과 식물성의 구별이 느껴지지 않는 합일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으로서의 백석은 천부적으로 참된 슬픔의 의미와 진정한 가치의 고귀함 등을 타고난 시인적 기질의 소유자이다. 백석이 자신의 문학적 아포리즘을 구체적으로 밝힌 글은 거의 없다. 이런 가운데 만주의 신경에서 거주하던 시절 {만선일보(滿鮮日報)}(1940.5.9∼10)에 발표한 하나의 짧은 시평은 그의 문학적 지향이나 기질을 짐작하게 해주는 매우 소중한 자료이다. 당시 시인 박팔양이 함께 신경에 와서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무렵 발간된 박팔양의 시집 {여수시초(麗水詩抄)}에 대한 서평을 위의 신문에 발표하였다. 이 글에서 백석은 '시인이란 세상의 온갖 슬프지 않은 것에 슬퍼할 줄 아는 영혼을 지닌 사람'이라는 의미있는 말을 하고 있다.
일설(一說)에 의하면, 1950년 6월25일 일어난 한국전쟁 당시 백석은 중국으로 건너갔다는 설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북진했을 때는 국군으로부터 정주 군수가 되어 줄 것을 제의받았다는 설도 있지만 , 모두 확인되지 않은 설에 불과하다.
또한 해방이후 북한의 자신의 고향에서 1963년 그가 사망하기까지 사회주의 체제를 지지하는 글을 시와 수필 등의 여러 장르에 걸쳐 『조선문학』에만 발표했다는 것도 의문이다.
백석 시인이 북한에서 생존시에 『조선문학』을 통해 1963년 그가 사망하기 두 해전인 1961년까지 작품을 발표했다는 북한의 주장과는 달리 최근 연구가에 의하여 밝혀진 사실은 그의 사망연도는 북한에서 발표한 1963년보다 훨씬 이전인 1955년도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과연 어느 쪽이 진실일까?
분명한 사실은 북한의 체제가 남한의 체제와는 다르다는 점이다.훗날 그와 관련한 모든 사실들이 명명백백(明明白白) 밝혀지기 전까지는 그를 변절자로 매도해선 안된다. 이미 밝혀진 일제시대 일본에게 협조했던 친일파 문인들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무능했던 조선의 정부를 무력으로 위협해서 국권을 빼앗고 36년간을 극악무도한 만행을 일삼으며 민족을 말살하려 했던 일본! 해방이 되었는가 싶었는데 이번에는 외세에 의해 남북이 분단되고 쏘련의 사주에 의한 저질러진 동족상잔의 6.25를 격으면서 지성인들, 특히 문인들이 격어야만 했던 정신적인 갈등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북한의 발표대로 백석이 사망을 했는지 아니면 아직까지 생존해 있는지는 알 수없다. 물론, 생존해 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만일 그가 생존해 있다면 올해 그의 나이가 94살이란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시대적인 배경에도 좌절하지 않고 토속적이면서 향토적인 우리민족 고유의 시언어로 자신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구축하며 서정시를 썼던 시인 백석! 어느 문예지나 문학파에 가담하지 않고 민족혼을 일깨웠던 시를 써던 시인 백석!
그의 대표시인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과 『나와 나타샤와 희 당나귀』와 『흰 바람벽
이 있어』외에『통영(統營)』,『고향』,『북방(北方)에서』,『적막강산』등의 다수의 시들
은 오늘날 많은 시인들과 평론가 그리고 대학에서 학생들에 의해 평론이나 논문으로 발표
되는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제 그의 시는 시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널리 애송되고 있다.
백석 시인! 그는 이제 한국시 100년史에 있어 문단의 또 다른 큰 별임에 틀림없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본명은 백기행(夔行).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했다. 오산중학과 일본 도쿄 아오야마학원을 졸업하였다. 1935년 「조선일보」에 '정주성'을 발표하면서 주목을 받았고, 1936년 첫 시집 을 출판하였다. 방언을 즐겨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모닥불', '고향', '여우난골족', '팔원' 등 대표작은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들이다. 토속적, 민족적이면서도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시인으로, 8.15 광복 후에는 고향에 머물렀다. 1963년을 전후하여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사망연도가 1995년임이 밝혀졌다.
시인 백석, 그는 누구인가?
우원호(도서출판 정인문학 主幹)
시인 백석(白石). 그는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인해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 신음하던 1912년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마을에서 아버지 백시박과 어머니 이봉우 사이에서 3
남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그가 태어나서 얻은 호적상의 이름은 백기행이다.
우리들이 백기행이란 이름은 모르지만 백석이란 이름에 오히려 익숙한 까닭은 그의 고
향,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를 다니면서 그가 문학에 뜻을 두고 필명을 백석이라 개명한 뒤,
1955년 북한에서 사망했을 때까지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가 유명한 문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버지와 그가 다닌 그의 모교, 오산학교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알려진다.
수원 백씨 17대손인 그의 아버지는 정주(定州)에서 서양의 신문화에 일찍 눈을 떠
백석이 7살이 되던 해애 오산소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사실, 정주는 중국하고 지리적으로도 그리 멀지 않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던 탓
에 서양의 신문화를 쉽게 접할 수가 있었다. 그 때문에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나왔는
데 국문학사는 물론, 시문학사에도 에 길이 남을 춘원 이광수와 김억, 김소월 등이
이 고장의 출신이다.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 선생이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동하여 세운 학교로
서 수많은 문학인과 예술가를 배출시킨 학교로도 유명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민족시인 김소월(金素月)과 '소나기'의 소설가 황순원과 가장 한국적인 작가인 동
시에 가장 현대적인 작가로 평가받는 화가,이중섭(李仲燮)이다.
백석은 13살에 오산보통학교에 입학하고 18살 무렵에는 오산고보를 졸업하여 그가
일본으로 유학가서 사학의 명문, 야오야마(靑山) 학원에서 대학생활을 하기 이전까
지 오산학교 교정에서 대부분의 학창시절을 보냈다.
오산고교에는 매우 훌륭한 선생들이 많았으나 김소월의 스승이었던 김억과 그리고
이광수가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백석이 재학시에 고당 조만식 선생이 교장
선생으로 있었는데 백석은 그의 집서 하숙을 했었다고 전해진다.
그가 문학에 대해 남다른 소질을 보이고 자신의 인격을 다듬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와
같이 훌륭했던 스승들과 선배들의 밑에서 공부했던 이 무렵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려 하였지만 가정의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포기
하고 집에서 쉬면서 문학에 심취하여 창작활동에만 전념했다.
이 시기에 그는 소설을 써서 그 이듬해인 1930년 1월 조선일보에서 공모한 제2회 『신년현
상문예 공모』에 응모하여 『그 母와 아들이 』 당선되며 문단에 데뷔했다. 『신년현상문
예 』라고 함은 오늘날에 신춘문예를 의미한다.
『신년현상문예』소설이 당선되며 사실상 그의 인생이 바뀌었다. 정주에서 금광으로
크게 부자가 된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사들여서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의 후원을 받아
그는 일본 도쿄에 있는 청산학원로 유학가서 1930년부터 4년동안 영문학을 전공했다. 오산
학교 시절에는 반친구들 40명 중에 10등을 할 만큼 공부에 별다른 재능을 보이지 않던 그가
대학에선 영문학을 전공하면서도 러시아어는 물론, 프랑스어 등의 외국어에 상당한 실력
을 보였다고 한다.영어회화에도 능통하여 그는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취직해서 직장생
활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소설을 쓰기보다는 오히려 외국서적 번역에만 몰두했다.그의 영어
실력은 훗날 함흥에 있는 영생고보에서 영어교사로 재직당시 학생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얻으면서 명성이 자자했을 정도였다.
그런 때문인지 그는 소설에도 시작에도 크게 관심을 안보이고 외국서적 번역에 날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
처음에는 체홉 등이 쓴 러시아의 소설과 산문들을 번역하였으나 시릉 번역하기 시작하며
번역하는일을 점차 줄이고 창작시에 전념했고 조선일보에 「定州城」이란 자신의 창작
시를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이때부터 탁월한 시의 재능을 보였다.
그 이후로 그가 남긴 소설로는 「마을의 遺話」와 「닭을 채인 이야기」라는 제목의
두 편의 단편소설이다.
山턱원두막은뷔였나 불빛이외롭다
헌깁심지에 아즈까리기름의 쪼는 소리가들리는 듯하다
잠자리조을든 문허진城터
반디불이난다 파란魂들같다
어데서말있는 듯이 크다란山새한마리 어두운 곬작이로난다
헐리다남은성문이
한을빛같이훤하다
날이밝으면 또 메기수염의늙은이가 청배를팔려올 것이다
- 「定州城」의 전문 -
위의 시를 발표한 뒤에도 조선일보에서 발행했던 「朝光(조광)」이란 잡지에 햔토색
이 짙은 ’統營(통영)' 등의 서정시를 계속해서 발표했다. 이 시절에 그는 그 당시 문단
을 이끌었던 임화,박용철 등의 여러 문인들과 교류했다. 그들 모두가 백석의 시에 관
심을 보였고 이때부터 백석은 시문단을 주도하는 시인으로 서서히 자리를 굳혀갔다.
그러던 그가 시인의 입지를 더욱 굳힌 것은 그의 첫시집 『사슴』을 발간한 뒤였다.조
선일보사에서 직장일을 하면서도 더욱 많은 시를 써서 발표했고 점점 더욱 많은 문인
들과 사귀었다. 그때 그가 사귀었던 대표적인 문인들은 신석정과 함대훈 등이었다.
그 시기는 '향수'의 정지용과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김영랑 시인이 첫시집을 내던 때
였다.사실, 그 당시 그는 회사에서 바쁘게 보냈지만, 문학에만 전념함으로서 그에게 있
어서는 그의 문학이 참으로 내실을 기한 매우 소중한 시기였다.
그리고 시집 '사슴' 발표이후 그는 오늘날의 표현으로 문단에서 조명받는 스타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일보사에서의 2년간의 생활을 접고 함흥에 있는 영생고보호
직장을 옮겼다. 그가 그곳에서 맡은 임무는 영어교사였다.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영어는 물론, 외국어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게다가 소설가요, 시인으로 학생들과
다른 선생들로부터 대단한 관심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는 외국어나 문학보다 연극, 미술, 체육 등의 과목에 더욱 관심을 보
이며 학생들을 지도했다. 연극반과 축구부의 학생들과 친구처럼 절친하게 지낼 만큼
학생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학생들의 재능을 키우는데 주력했다.
교사로서 생활하며 자긍심을 느낀 것도 이때였다. 그는 바쁜 교직생활에도 시창작을
게을리하지 않고 꾸준하게 시를 썼다.
사실 시집 『사슴』에 발표된 시들은 거의 사물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에
그쳤다면 함흥에서 교직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자신을 주체로 한 내면세계를 강조하
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의 시셰계에 변화가 생긴 무렵으로 그의 연보(年譜)를 보아
도 그에게는 나름대로 매우 의미있는 시기로 평가된다.
그러나, 함흥에서 2년동안 교사로 재직시에 그에게는 또 다른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기생 자야와의 만남과 사랑이었다.
이때 백석의 나이가 26살이었고 그녀의 나이는 22살이었다.
자야의 본명은 김영한. 그녀는 1916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사별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다가 어머니가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그녀
의 집안은 재산을 모두 날리고 거리에 나앉는 신세가 되자 16살에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서 기생이 되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정악계(正樂界)의 대가로 이름을 날리었던 하규일의 문하생이 되어
창과 가무를 배웠다고 한다. 문학에도 재능을 보였던 그녀는 게녀의 생활을 하면서도
'삼천리 문학'에 수필을 발표하여 인텔리 기생으로 불리었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을 접하면서 문인들과 사귀었다.
그러던 중, 그곳을 자주 찿던 조선어학회의 해관 신윤국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신윤국은 1894년(고종 31년) 황해도의 연백(延白)에서 태어나서 1917년 미국으로 건너
가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에 회원으로 미주 지역의 항일 운동에 투신한 이후,도
산 안창호가 이끌었던 흥사단(興士團) 활동했던 인물이다.
뜻한 바가 있어 귀국을 결심하고 고국으로 되돌아온 그는 1932년 『국사강의록(國史
講義錄)』을 간행했고,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에도 참가해 항일운동과 더불
어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다시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에 가입하여 『조선어사전』 편찬 재정위원으로 활약
했다.
그의 후원으로 도쿄에서 공부를 하다가 스승으로 섬기던 신윤국이 동우회사건(同友
會事件)과 관련해 동우회원 181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귀국했다.
함흥경찰서에 투옥되어 잔혹한 고문을 받고 있는 그를 어떻게든 만나려고 하였으나
사상범(思想犯)의 이유로 면회가 안되자 그녀는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않겠
다고 결심하고 함흥에 눌러앉게 되었다.
그녀는 고심하던 끝에 함흥에서 기생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찿아오는 사람중에 법조
인이 오면 그에게 부탁해서 신윤국을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끝까지 면회의 허락이 안되 만나지 못했지만, 영생고보 선생들의 회식자리에
나갔다가 백석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첫눈에 반해버린 백석은 학교에서 퇴근하면 그녀의 하숙방으로 달려가서 그녀와
밤을 지내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둘사이는 사실상의 부부관계라고 해도
좋을 만큼 뜨거웠다.
자야라고 하는 이름은 백석이 그녀에 붙여준 이름이다.어느날 그녀가 서점에 들러 '당
시선집(唐詩選集)을 사왔는데 이태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읽다가 '자야(子夜)
라는 아호를 지어준 것이다.
달콤했던 그들의 사랑은 그녀가 먼저 서울로 떠나면서 백석과 그녀는 서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얼마나 사랑하였을까 둘은 서로 보고 싶어 하루속히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어느 날, 조선축구학생연맹전 조 대표선수 인솔 교사로 발탁되어 그들을 서울로 인솔
하는 기회가 생겼다. 그런데, 그는 선수들은 여관에 투숙시킨 다음 자신은 청진동의
자야집에 가서 둘만의 사랑을 불태웠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학교서는 그에게 책임을 물어 사임을 강요했고 사랑하는 여인 때문
에 백석은 사표를 제출하고 상경했다.
그는 결국 청진동 그녀의 집에서 살림을 차리고 동거에 들어갔다.
다시 지금의 서울인 경성으로 되돌아와 조선일보사에 재입사했다.그는 거기서 조선일
보 계열사인 「여성」誌의 편집일을 맡았는데 이는 예전에 했던 일이고 문학에 관련
된 일이라서 모든 일이 익숙했다.
그들은 마치 부부처럼 생활하며 서로가 없으면 하루라도 못살 것첨럼 행복하게 사는
듯했다.
그러나, 백석의 부모는 아들이 기생과 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서로 헤어지게 만들
려고 아들에게 다른 여자와 결혼토록 강요했다. 부모의 강요에 못이겨 그는 고향으로
가서 정혼녀와 혼인했다. 마지못해 혼인은 했지만 백석은 그녀와 첫날밤도 치르지 않
은 채 도망치듯 고향집을 빠져나와 자야의 곁으로 돌아갔다.
그해 말에 느닷없이 다시 회사를 그만두고 이번에는 북만주의 신경, 오늘날의 長春(장
춘)이란 곳으로 홀연이 떠나갔다.
신경으로 떠나갈 때 그녀에게 함께 가서 살자고 하였으나 자신이 백석의 장래를 가로
막고 있다는 생각에 괴롭지만 백석을 혼자 보내게 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사랑하기 때문에 떠나보낸다는 유행가의 가사처럼 서로 헤어지게 되었는데
그들간의 사랑은 아쉽게도 그렇게 끝이 났다. 시인 백석과 그녀가 격였을 이별의 고통
이 짐작된다.
"그런데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 이별이 될 줄 몰랐다"고 1995년 출간한 ‘내 사랑 백석’(문
학동네)에서 그렇게 회고했다.
백석이 그녀와의 이별을 아쉬워해 그의 그런 심경을 담아 쓴 시가 바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디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全文
짐작컨데 그다지 많지 않은 이십대의 시절을 떠돌이로 생활했던 것은 그 당시의 시대
상황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백석의 결혼관에 대해 부모들의 봉건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부모와의 마찰을 빚은 것도 하나
의 이유가 되겠지만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에서 벌인 남경대학살 등의 아시아 전역에서 침략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국내서는 말할 것도 없이 유학생들까지 학도병의 이름으로 강제로
징집하여 전선으로 내보내던 시기라서 인테리의 입장에서 나라없는 설움까지 격으면서 남모
르는 고민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그는 펜을 놓지 않았다. 그는 북만주의 신경서도 여전히 시를
써서 『문장』등의 문예지를 통해 오늘날에 시인이나 시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
랑받고 있는 「북방에서」와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의 시를 잇달아 발표했다.
그 중에서 그의 「북방에서」는 일제말의 식민지 현실에 대한 암울함과 무력하게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자책감을 보여주는 시이다. 이 시의 주체는 한민족의 역사가 시작되던 때부
터 현재까지 살고 있으면서 민족이 함께 격는 역사적 일들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시는 백석이 만주북방을 떠돌면서 그의 역사에 대한 죄채감을 느끼
면서 쓴 시이다. 특히 지난 과거의 역사에 대한 반성을 , 민족의 역사와 함께 살아가는
자신의 입장에서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식민지 현실에 대한 슬픔을 이겨내려하는 시인
의 의지와 동시에 무력함에 대해 자책하는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를 숙신을 발해를 여진을 요를 금을
흥안령을 음산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든 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드든 말도 잊지 않었다
오로촌이 멧돌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든 것도
쏠론이 십리길을 따러나와 울든 것도 잊지 않었다
나는 그때
아모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아츰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그동안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금은보화는 땅에 묻히고 가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
이리하여 또 한 아득한 새 옛날이 비롯하는 때
이제는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나는 나의 옛 한울로 땅으로―나의 태반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해는 늘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 북방에서 」전문
그리고 「흰 바람벽이 있어」역시 이국에서 유랑생활을 하며 격고 있는 자신의 심중을 조국의
어머니와 가족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현실, 즉 일본에 빼앗긴 조국의 현실을 한탄하며 그 슬픔
을 노래한 시이다. 이 시 전반에서 비록 현실은 슬프지만 자신이 격고 있는 고독과 슬픔을 이겨
내려하는 그의 삶의 의지를 엿볼 수가 있다.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 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 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아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흰 바람벽이 있어」전문
그는 이와 같이 시를 쓰면서도 한편으로 토마스 하디가 쓴 「테스 」등의 여러 소설들을
계속 번역하여 「朝光」에 발표하며 중국서도 그의 건재를 과시했다.
그러나 그의 그곳서의 삶이 순탄했던 것만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북만주에 건너가서 신경시의 東三馬路 시영주택 '황씨집'에 에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삶은 떠돌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어느 관청에 근무했던 그는 창씨개명을 하라는 일본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직장을
다시 그만두고 새로운 직업을 택했는데 측량기사 보조 등의 일과 만주 안둥[安東]으
로 옮겨 세관업무를 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살던 신경이란 곳이 그 옛날 북만주 일대까지 호령했던 고구려의 영토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을까?
그 영토를 중국에게 빼앗기고 조선마저 일본에게 빼앗겨서 자신이 나라없는 백성
이란 사실에 자신이 태어난 조선과 유학생활을 위해 지낸 일본과 지인들을 멀리하
고 그곳 중국땅까지 떠돌면서 느꼈던 비애와 슬픔, 그리고 감회가 소설가와 시인이
란 입장에서 특별히 남달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차라리 그에게 있어서 형별이요, 고통이 아닐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만주 등을 떠돌면서 유랑생활을 자처했던 것은 일제의 동화정책을 반대하고 저
항했던 그의 소신있는 애국심의 발로는 아닐까?
마침내, 1945년 8월15일 조국이 그토록 기다리던 해방을 맞이했다.
당시 조선사람치고 기뻐하지 않았을 사람이 어디 있었겠냐마는 백석도 무척이나
기뻐했을 것이다.
그는 설레이는 마음으로 즉시 귀국했다.
그런데, 그는 왜 고향으로 바로 가지 않았고 사랑했던 여인을 찿지도 않고 거처를
신의주로 옮겼을까? 그것이 아직까지 의문으로 남는다.
그것은 아마도 결혼을 강요했던 부모와의 불화와 자야와의 원치 않던 이별이 못내
그를 괴롭혔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기에 그는 그의 대표작으로도 손꼽히는 시의 하나인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을 『學風(학풍)』誌에 발표했다.
말하자면, 남신의주 유동 마을 박시봉이란 사람의 집 방에 살면서 쓴 시로 짐작된
다.
고향 정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신의주서 살면서 가족과 고향을 그리면서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는 시이다.해방되기 이전에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서 탄압과 감시
속에 떠돌이 생활을 했다가 해방을 했는데도 자신이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남의
집에 더부살이 하는 자신의 처지를, 마지막 연의 갈매나무를 보며 자신의 삶을 반
성하고 있다. 또한 이 시는 서양문물 유입으로 가족이 뭉쳐 살던 대가족 중심의 우
리나라 사회가 핵가족 사회로 점점 붕괴되는 사회상을 비판하는 시로도 평가된다.
어쨌거나 그는 그가 쓰는 작품마다 고향의 지명이나 이웃사람들의 이름, 그리고
고향인 평안남도 정주를 사투리를 넣어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를 많이 썼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全文
백석은 신의주에 살았지만 그리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고향으로 가기로 결심을 굳힌
뒤에 그는 곧장 정주, 자신의 본가로 돌아갔다.미물인 짐승들도 죽을 때는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는 귀소본능처럼 백석 자신도 그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을 한시
라도 잊지 않고 살았었던 그였기에 귀향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 이후의 그의 행각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해방되던 그해 12
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남북한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어 38도선을 경계로 이남에는
미국이, 이북에는 쏘련의 통치하여 남한에는민족주의 정부가 그리고 북한에는 사회주
의 정부가 들어섰다.
그 당시에 윈스턴 처칠이 미국을 방문해서 쏘련은 '철의 장막(iron curtain)으로 가리
워져 있다' 라고 말한 그의 연설처럼 쏘련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혀 알 수 없을
만큼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철저하게 통제했던 쏘련의 통치를 받게된 뒤부터 백석은
남쪽의 문인들과 교류가 없었다.
고향에서 계속 글을 썼다고는 하나, 공산당 산하에 있는 조선작가동맹의 『조선문학』
에만 작품을 발표했다.
해방이전에는 동인 등의 형식으로 어떤 문학단체에도 가담하지 않고 모더니즘 성향의
토속적인 서정시를 주로 쓰며 탈정치와 탈이념적인 시세계를 펼쳤던 그가 북한에 머물
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 성향을 표방했다.
그가 타계하기 이전까지 그는 매월 『조선문학』에 자신의 작품을 실었는데 아동문학
평론, 창작시와, 수필, 번역시를 소개했다.
그는 아동문학작품과 관련해서 『조선문학』 1956년 5월호에 실린 「동화문학의 발전
을 위하여」와1956년 9월호에 실린 「나의 항의, 나의 제의 : 아동시와 관련하여, 아동
문학의 새 분야와 관련하여」 그리고 1957년 6월호에 실린 「큰 문제, 작은 고찰」라는
제목으로 세 편의 평론을 실었는데 여기서도 백석은 아동문학은 교양과 선전의 무기
로서 사회주의 혁명의 한 부분을 담당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비공식적으로 그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1961년까지 그는 시나 수필 등에서도 자신이
번역한 외국의 작품에도 사회주의 이념을 지지하는 글을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일설(一說)에 의하면, 1950년 6월25일 일어난 한국전쟁 당시 백석은 중국으로 건너갔다는 설과
고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북진했을 때는 국군으로부터 정주 군수가 되어 줄 것
을 제의받았다는 설도 있지만 , 모두 확인되지 않은 설에 불과하다.
또한 해방이후 북한의 자신의 고향에서 1963년 그가 사망하기까지 사회주의 체제를 지지하는
글을 시와 수필 등의 여러 장르에 걸쳐 『조선문학』에만 발표했다는 것도 의문이다.
백석 시인이 북한에서 생존시에 『조선문학』을 통해 1963년 그가 사망하기 두 해전인 1961년
까지 작품을 발표했다는 북한의 주장과는 달리 최근 연구가에 의하여 밝혀진 사실은 그의 사망
연도는 북한에서 발표한 1963년보다 훨씬 이전인 1955년도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과연 어느 쪽이 진실일까?
분명한 사실은 북한의 체제가 남한의 체제와는 다르다는 점이다.훗날 그와 관련한 모든 사실들
이 명명백백(明明白白) 밝혀지기 전까지는 그를 변절자로 매도해선 안된다. 이미 밝혀진 일제시
대 일본에게 협조했던 친일파 문인들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무능했던 조선의 정부를 무력으로 위협해서 국권을 빼앗고 36년간을 극악무도한 만행을 일삼으
며 민족을 말살하려 했던 일본! 해방이 되었는가 싶었는데 이번에는 외세에 의해 남북이 분단되
고 쏘련의 사주에 의한 저질러진 동족상잔의 6.25를 격으면서 지성인들, 특히 문인들이 격어야
만 했던 정신적인 갈등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북한의 발표대로 백석이 사망을 했는지 아니면 아직까지 생존해 있는지는 알 수없다. 물론, 생존
해 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만일 그가 생존해 있다면 올해 그의 나이가 94살이란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시대적인 배경에도 좌절하지 않고 토속적이면서
향토적인 우리민족 고유의 시언어로 자신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구축하며 서정시를 썼던 시인
백석! 어느 문예지나 문학파에 가담하지 않고 민족혼을 일깨웠던 시를 써던 시인 백석!
그의 대표시인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과 『나와 나타샤와 희 당나귀』와 『흰 바람벽
이 있어』외에『통영(統營)』,『고향』,『북방(北方)에서』,『적막강산』등의 다수의 시들
은 오늘날 많은 시인들과 평론가 그리고 대학에서 학생들에 의해 평론이나 논문으로 발표
되는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제 그의 시는 시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널리 애송되고 있다.
백석 시인! 그는 이제 한국시 100년史에 있어 문단의 또 다른 큰 별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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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의 시를 만났다. 아니 백석을 만났다고 하는 것이 옳다. 시는 바로 그 사람이니까. 표지에서 그의 빛바랜 흑백사진을 보면 머리 모양이 참 특이하다. 그 옛날에 이런 머리를 할 수 있는 그의 감각이 얼마나 현대적인지 옛사람이란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아 반갑기 그지없다. 그의 시를 읽으면서 맨 처음 떠오르는 단어는 격조였다. 그의 시는 다른 작품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격조를 느끼게 했다.
신경림 시인은 백석의 시집 을 읽은 저녁, 밥도 반 사발밖에 못 먹고 밤을 꼬박 새웠노라고 고백했다. 신경림 시인처럼 백석의 시 한 편이, 아니 시 한 연, 한 행이 주는 전율을 나는 뒤늦게야 알았다. 그 전율이 주는 행복을 누리면서 나 역시 밤을 밝혔다. 백석의 시는 시어가 순수한 우리 고유어로 되어있는데 얼마나 맑고 투명한지 읽으면 가슴에 깊은 떨림으로 남았다. 문학의 위대한 힘을 나는 알고 있다. 시 한 편 때문에 삶을 다시 찾은 사람들, 책 한 권 때문에 살아남은 사람들 이야기는 문학의 힘을 웅변으로 말해주었다.
백석의 이름 앞에는 천재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다. 백석의 천재성을 먼저 깨달은 사람은 노리다께 가스오라는 일본 시인이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의 15년 정도를 당시 조선에서 보내 한국 문인친구들을 많이 두었던 그는 일본 후꾸이현 최고의 시인이라고 하는데 그의 시 에서 "뛰어난 시인 백석, 무명의 나"라고 백석을 노래하고 있다. 노리다께의 인품은 매우 고결하고 덕이 있어 많은 문인들과 예술인들이 그의 도움을 받았는데 화가 이중섭은 그의 도움으로 일본인 여성과 결혼했다고 한다.
백석의 시어를 정주 사투리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사투리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쓰지 않아 묻혀있는 우리 고유 언어에 낯선 우리에게 백석의 시는 각주를 보면서 읽어야 하지만 토속적인 시어로 전혀 어렵지 않은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눈앞에 그림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바람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멍멍이 짓는 소리도 들리고 구름이 둥둥 떠 있기도 하고, 시냇물이 흐르기도 한다. 이토록 아름다운 시를 불행하게도 우리 세대는 만날 수 없었지만 2004년, 수능 언어영역에서 사상 처음으로 복수정답을 인정해야 했던 이라는 시를 통해 비로소 널리 알려지게 되어 그나마 다행스럽다.
그의 연보를 보면 1957년 46세까지의 활동이 나와 있고 1963년 52세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이 소식을 들은 일본의 시인 노리다께 가스오는 백석을 추모하는 시를 발표했다고 하는데 실제 사망은 1995년 84세로 나와 있다. 그렇다면 1963년에서 1995년까지 32년이라는 그 긴 세월동안 동안 그는 무엇을 했을까. 그동안 빛나는 시들을 얼마나 많이 쏟아냈을까. 그 시들은 어디 있을까?
북한은 계관시인 칭호제도가 있다고 한다. 지난 2000년 남북이산가족 첫상봉 때 북쪽의 계관시인이었던 오영재 시인이 가족을 찾아 내려왔지만 등 그의 시 몇 편을 보면 토속적이거나 서정성은 기대만큼 높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 그토록 격조 높은 시를 썼던 천재시인 백석은 어떻게 되었을까 싶어 찾아보니 30대에 연금중인 고당 조만식 선생을 적극적으로 도왔고, 해방 후에는 우익문인으로 활동하다가 상당한 곤란을 겪어 나중에는 북한의 문인인명록에서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수십 권에 이르는 러시아 문학을 번역하고 창작 집필은 금지당할 정도로 북한문단에서 철저히 소외되었다 한다. 천재시인에게 창작금지는 얼마나 잔혹한 형벌인가.
고 이응로 화백은 감옥에서 끌어올라 주체할 수 없는 창작 욕구를 식사때 나오는 음식을 먹지 않고 아껴놓았다가 간장이나 밥알로 풀어냈었다. 불타오르는 자신의 창작력을 지켜내려 몸부림쳤던 그 흔적들을 보면서 인간이 육신은 가두어도 영혼은 가두지 못함을 보았었다. 백석은 그 고통의 기나긴 시간들을 어떻게 견디어내다 눈을 감았을까. 생각할수록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래서인지 남아있는 시들이 더욱 더 소중하게 다가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라는 시를 읽고 있으면 마치 파노라마 사진을 보고 있는 듯하다. 전반부에서는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지나가는데 후반부에서는 시인 자신의 얼굴이 지나간다. 그리고 마치 자신의 운명을 말해주는 듯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어떻게 이런 시상을 떠올려 시를 쓸 수 있을까. 이 부분을 읽고 있으면 천재시인이라는 말이 실감나게 한다. 마치 누군가 읊어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 적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시인과 평론가 등 문인 120명으로부터 2년 연속 '지난 1년 가장 좋은 시'로 뽑힌 시를 쓴 문태준 시인은 그 시를 쓴 뒤 탈진할 정도였다고 고백했다. 백석도 그렇게 힘들게 시를 썼을까. 아니면 떠오르는 시상을 그대로 한 번에 완성했을까.
(앞부분 생략)
-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이런 시인의 천재성을 일찍이 알아챈 일본의 노리다께 가스오는 백석 앞에서 자신은 무명이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그동안 내가 이름도 몰랐던 시인 백석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그가 자야라고 불렀던 그의 연인 김영한 때문이었다. 김영한은 1996년, 고급요정이었던 대원각(부지 7,000평)을 법정 스님에게 조건 없이 시주하여 길상사를 지을 수 있게 해 세간의 관심을 모았던 여인이다. 사찰은 일 년 뒤 완성되었고, 그녀는 시주하고 3년 뒤인 1999년 83세로 이 세상과 하직했다. 대원각은 기부 당시 재산가치가 1000억 원대였다고 한다. 백석은 북에서 1995년 사망했으니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한 그들은 영적으로 무언가 연결이 되어있었던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법정 스님은 송광사 불일암에서 지낼 때 겨울이 너무 추워 미국에 있는 사찰에 머물면서 책을 번역하고 설법을 하며 지냈는데 그때 김영한 보살을 만나 대원각을 사찰로 만들고 싶다는 제의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말한 대로 조건 없이 시주했고 사찰은 완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얼마나 깊은 불심인지 그녀를 보면서 감탄했었다.
또한 그녀로 하여금 이런 깊은 불심을 자아내게 만든 법정스님의 그릇을 다시 보게 되었다. 사람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 참으로 놀랍고 감동적이었다. 그녀의 소식을 접하면서 나도 이런 진정어린 신뢰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며 살고 싶었다. 길상사는 올해로 개원 12주년을 맞았는데 법정스님은 해마다 12월 14일 개원일에 가까운 일요일에 봉행되는 개원법회에 참석해 대중법문을 해왔으나 올해는 불참했다고 한다. 대중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법정스님은 폐암으로 수차례 수술을 받았으며 현재는 와병중으로 제주도의 한 신도 집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를 또 한 번 놀라게 한 것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녀가 한 말이었다. 기부한 1000억이 아깝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1000억은 그 사람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녀가 말한 그 사람, 그는 바로 백석이었다. 김영한, 그녀는 최고의 천재시인 백석이 사랑했던 연인, 자야였다. 그러나 봉건시대의 길목에서 20대에 만난 그들은 비련의 연인들이었다. 백석은 그녀를 위해 란 시를 썼다. 시에서는 슬픔이 느껴지지 않지만 3년 동안 서로를 뜨겁게 사랑했던 그들은 남과 북으로 헤어졌다. 그리고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를 마신다
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전문
자야는 '내 사랑 백석'이라는 저서에서 "백석의 시는 자신에게 있어 쓸쓸한 적막(寂寞)을 시들지 않게 하는 맑고 신선한 생명의 원천수였다"고 전한다. 자야가 죽기 열흘 전 기운 없이 누워 있는 여사에게 기자가 "다시 태어난다면 어디서 태어나 무엇을 하고 싶은가" 물었더니 영국쯤에나 태어나서 문학을 하고 싶다고 했다 한다. 시를 쓰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시를, 사람을 온 가슴으로 사랑할 줄 알았던 그녀의 유해는 유언대로 화장되어 한겨울 눈이 하얗게 쌓인 길상사 마당에 뿌려졌다. 백석이 사랑한 자야를 노래한 시처럼 하얀 겨울에.
백석의 약력을 보면 1918년 오산소학교를 거쳐 오산중학교를 마치고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으로 일본 靑山學院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여성>에서 편집을 맡아보다가 1935년 詩 정주성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1936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만주 신징[新京]에 잠시 머물다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영어교사로 있었다.
백석이 자야라 불렀던 연인 김영한은 춤추고 노래하는 기생이었다. 부친을 일찍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한 그녀의 집안은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알거지가 되어 거리로 나앉게 되었는데 이때 김영한은 열여섯 살의 나이로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는데 교사들의 회식 장소에 나갔다가 함흥영생여고 영어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백석과 운명적으로 만난 것이다.
두 사람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시대 환경은 냉정해서 고향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강제로 백석을 자야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결혼을 시키지만 백석은 자야 품으로 다시 돌아간다. 이런 식으로 강제 결혼을 하고 다시 도망치기를 세 차례. 부모에 대한 효와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갈등한 백석은 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야에게 만주로 같이 도피하자고 설득하지만 자야는 이를 거절, 백석은 혼자서 만주 신경으로 떠났는데 남북이 분단되어 이것이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영원한 이별이 되어버렸다.
자야(子夜, 본명 金英韓) 여사는 1997년 창작과 비평사에 2억 원을 출연하여 백석문학상을 제정하도록 했는데 1997년 10월에 결성된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가 그 첫 사업으로 백석 시인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백석문학상을 제정해 첫 시행은 1999년에 했다. 상금은 1000만원이며, 매년 8월을 기준으로 2년 내에 출간된 뛰어난 시집에 시상하는데 제1회는 이상국·황지우 시인이 수상했으며, 올해는 안도현 시인이 제11회 백석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지난달에 수상했다.
언어는 그 민족의 혼을 품고 있다. 그래서 일제는 우리 언어를 말살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의 시에는 정주 토속어를 그대로 쓰고 있어 향토색이 물씬 풍긴다. 언어유희도 없이 담백하다. 이것은 일제 강점기에 모국어를 지키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평한다. 백석은 월북한 시인이 아닌데도 월북 작가로 분류되어 그의 작품은 모두 금지도서가 되어 우리 세대는 단 한 번도 만날 수가 없었다. 분단의 비극이 개인사뿐만 아니라 민족문학사에도 깊은 상처를 남긴 것이다. 그는 남북 양쪽에서 모두 잊혀졌던 비련과 비운의 천재 시인이었다.
1987년 해금되고 그에 대한 연구가 발표되면서 이동순 교수가 창작과 비평사에서 '백석 시선집'을 펴내자 자야 여사가 연락해와 그들의 슬픈 사랑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백석을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평생을 간직하며 살다가 죽기 전에 세상에는 천억 원이 넘는 대사찰을, 연인에게는 그의 이름을 영원히 기릴 수 있는 백석문학상을 남겨주고 간 아름다운 여인, 김영한. 그들의 슬픈 그러나 아름다운 사랑은 남북분단도 막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남북분단이 그의 문학 또한 막을 수 없었더라면 우리나라의 시문학이 얼마나 더 성큼 발전했을까. 생각할수록 분단의 비극이 곳곳에 남긴 손실과 상흔의 슬픔에 가슴이 아파온다.
가장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이었던 백석은 자신의 시처럼 이 세상에서 하늘이 가장 귀해하고 사랑한 시인으로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남겨졌다. 그의 시와 비련의 사랑, 그리고 그의 연인 자야의 고결한 사랑은 세월이 가도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살아있어 우리들의 가슴을 촉촉히 적셔줄 것이다.
(차례대로) 길상사의 극락전, 법정 스님의 유골이 뿌려진 공간, 4층 돌의 정원에서 만나는 민불, 길상사의 길상화 공덕비와 사당, 길상사 범종각_문일식 촬영
서울 성북동 길상사
무소유의 삶을 기억하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 법정 스님은 글을 통해 많은 독자에게 강한 울림을 선사한 분이다. , 등 저서 20여 권을 남긴 법정 스님. 그는 2010년 입적했지만, 그의 맑고 향기로운 흔적이 성북동 길상사에 남아있다. 길상사는 법정 스님의 를 읽고 감명받은 김영한의 시주로 탄생한 절집이다. 창건 역사는 20년 남짓하지만, 천년 고찰 못지않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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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의 길상화 공덕비와 사당.
#“대원각 1000억원은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
서울 성북구 선잠로5길에 있는 길상사는 법정 스님이 입적한 곳인데 시인 백석과 그가 사랑한 자야(김영한)와의 스토리도 유명하다. 길상사는 원래 대원각이라는 요정으로 군사독재 시절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3대 요정으로 이름을 날렸다. 김영한은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아 1000억원에 달하는 대원각 재산을 법정 스님이 소속된 송광사에 시주, 2년동안의 개보수를 거쳐 길상사가 탄생했다.
시인 백석과 자야의 사랑 이야기가 담긴 성북동 길상사. 한국관광공사 제공
백석은 김영한에게 아호 자야를 지어줄 정도로 그녀를 아끼고 사랑했지만 백석이 만주로 떠나면서 결국 사랑은 결실을 보지 못했다. 김영한이 대원각을 시주할 때 “그까짓 1000억원은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고 한 말은 유명하다. 김영한은 1999년 길상사 길상헌에서 눈을 감았는데 뒤편에는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새겨져 그들의 애절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 죽기전까지 백석을 그리워한 김영한은 이 시처럼 “내가 죽거든 눈이 많이 내리는 날 유골을 길상사에 뿌려달라”고 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