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자가
거북선을 직접 보고
그린 그림을 공개합니다
2019.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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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하백원 작품... 거북선 연구에 새로운 길 모색 가능한 중요한 자료
[오마이뉴스 황정수 기자]
▲ 하백원 ‘영보정’ 중 ‘거북선’ 부분
ⓒ 황정수
조선 후기 전남 화순 출신의 규남(圭南) 하백원은 다방면에 재능이 많았던 실학자로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 1727-1798), 이재(?齋) 황윤석(黃胤錫, 1729-1791)과 함께 호남의 3대 실학자로 불렸다. 중앙의 학자들과도 교류가 많아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1783) 등과도 소통을 하였다. 그는 천문, 지리, 산술, 율력 등 실질적인 학문에 몰두하였고, 그림이나 글씨에도 능해 여러 종의 서화첩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는 혼자 힘으로 자승차(양수기)를 발명하였고, 동국지도, 만국지도, 천문도 등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또한 자명종, 계영배(戒盈杯), 방적기 등 많은 새로운 물건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평소에는 자명종을 걸어두고 동네 사람들에게 시간에 맞추어 생활하도록 하는 등 과학 정신을 생활화 한 실질적인 실학자이기도 하였다.
▲ 현재의 충남 보령 오천항 ‘영보정’
ⓒ 황정수
하백원은 61세 되던 1842년 충남 보령으로 유배를 당한다. 석성(石城) 현감으로 부임하였다 지방 토호들에게 모함을 당하며 겪은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보령은 충청 수영이 있는 군사 지역으로 매우 외진 곳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약 1년 남짓 귀양 생활을 하는데, 그동안 보령 지역 선비들과 가까이 지낸다.
1842년 4월 15일, 하백원은 보령 출신의 이병중(李秉中), 이우명(李遇明), 조순영(趙淳榮), 이우정(李遇正), 심사숙(沈思淑) 등 5명의 선비들과 배를 타고 바다를 유람한다. 이곳은 군사 지역이지만 오랫동안 경치가 좋은 곳으로 유명한 명승지였다. 지금의 충남 보령 오천항 지역이다.
이들은 배를 타고 바닷가의 명승을 감상하며 시를 짓는다. 그림을 잘 그렸던 하백원이 '송호(松湖)', '황학루(黃鶴樓)', '영보정(永保亭)' 등 명승 세 곳을 차례로 그리면, 나머지 여섯 명은 유람하는 동안 느낀 감상을 시로 지었다. 유람을 끝낸 후 이들은 그날 추억을 담은 글들을 모아 모두 여섯 개의 서화첩을 만들어 나누어 갖기로 약속한다.
▲ 하백원 ‘해유첩’ 표지와 속지
ⓒ 황정수
서화첩은 '해유시화(海遊詩畵)' 또는 '해유첩(海遊帖)'이라 제첨 하였고, 속지에 '서호기관(西湖奇觀)'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이어 하백원과 이우명이 서문을 쓰고, 다음에 하백원의 그림 한 점을 싣고 여섯 명의 시를 차례로 붙였다. 마지막에는 이병중의 발문을 달아 끝을 맺었다.
각자 지은 글은 모두 자신이 직접 썼으며, 그림은 모두 하백원이 그렸다. 이 서화첩은 유람한 이듬해인 1843년 7월 16일에야 완성된다. 6개의 서화첩을 만드는데 꼭 1년 3개월이 걸렸다. 이때 쯤 하백원의 유배가 풀려 고향에 돌아갈 것 같은 분위기가 되자, 회합을 갖고 서화첩을 나누어 갖는다.
이 때 만든 여섯 개의 서화첩 중 현재 두 종이 전한다. 하나는 하백원 후손에게 전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10여 년전부터 간직해오던 필자의 소장품이다. 하백원 집안 소장품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져왔으나, 필자 소장품은 이번에 처음 세상에 공개하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 '해유첩'을 입수한 후 글의 내용을 번역하고 그림과의 연관성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거북선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충청 수영(水營)에 정박해 있는 '거북선(龜船)'의 모습을 보고 그린 이 그림은 그동안 전해 오던 거북선의 구조를 선묘로 그린 것이나, 민화 속 거북선과 달리, 실학자가 실제 거북선을 보고 회화적으로 그린 것이라는데 그 특징이 있다.
▲ 하백원 ‘해유첩’ 중 ‘영보정’ 부분.
ⓒ 황정수
하백원이 그린 '송호', '황학루', '영보정' 세 곳의 그림은 모두 지도식 산수화이다. 산세나 물에 떠 있는 배 등을 제대로 학습한 화법으로 그리지 못하고 지도식 민화 같은 양식으로 그렸다. 하백원이 전문적인 미술 수업을 하지 못하고 독학하다 보니 더 이상의 솜씨를 내기 어려웠던 듯하다. 이 세 점 중 '영보정'을 그린 그림 속에 거북선의 모습이 나온다.
'영보정'은 충청 수영의 바닷가 쪽에 있는 가장 큰 정자로 경치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서해안 바다가 가장 멀리 보이는 요지이다. 수영 앞에는 항상 이곳을 지키는 배들이 정박해 있거나 수영을 지키느라 바다 위를 떠다니며 활동 중이었다. 그런데 마침 하백원 일행이 이곳을 유람할 때 거북선이 판옥선(板屋船)과 나란히 정박해 있었다. 하백원은 충무공 이순신의 옛 적 일을 생각하며 글을 짓고 그림을 그린다.
▲ 하백원 ‘이충무공 거북선’ 부분.
ⓒ 황정수
서화첩 앞부분에 하백원이 시문 형식으로 쓴 서문에도 거북선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나온다.
"거북을 숨겨 오묘하게 사용했던 이충무공의 전함은 물가에 가로놓여 있고,
교룡을 절단한 영매한 기풍의 장유격의 그림이 벽에 걸려 있네.
藏龜妙用李忠武之戰艦橫汀, 截蛟英風張游擊之紗籠揭壁"
'해유첩'의 글과 그림이 실학자였던 하백원이 모두 실제 유람을 하고 기록한 것이니, 이 그림은 실제 본 거북선을 정확히 묘사한 것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현재 전하는 조선시대 그림 중 당대 인물이 실제로 본 거북선을 그린 유일한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서화첩의 다른 부분에서도 거북선에 대한 사실을 증빙할 만한 구절이 또 나온다.
이병중의 시에는 '거북은 한 쌍의 섬을 옮겨 골짜기를 단정히 단장하고(鰲移雙嶼端粧壑 )'라는 구절이 나온다. 곧 이어 나오는 하백원의 시에서도 '거북이 등에 진 섬은 어디서 온 것일까?(何處浮來鰲背島)'라는 구절이 또 나오는 것을 보면 이곳 경치 중 거북선의 모습이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백원의 그림 속에 나오는 거북선이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 때 사용한 바로 그 거북선인지는 명확치 않다. 그러나 하백원이 정조 때부터 살았던 인물이고, 고증학을 바탕으로 한 실학자였던 것을 생각하면, 그의 기록 방식의 신빙성을 믿을 만하다. 그런 면에서 이 그림과 충무공 거북선과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다 할 수 있다.
그동안 거북선 그림으로 남아 있는 것은 1795년 정조 때 출판된 '충무공전서'에 나오는 거북선과 민화 형식의 '해진도(海陣圖)'에 나오는 거북선 등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림들은 실제 현장을 확인하고 그린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또한 개인 화가의 회화 중에서는 실제 존재하는 거북선을 보고 기록한 그림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하백원의 이 거북선 그림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동안 거북선의 외형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었다. 어떤 이는 독립적인 거북 모양의 철갑선이라 하고, 어떤 이는 판옥선 이층에 거북 모양을 올린 것이라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하백원의 그림을 보면 판옥선 위에 거북 모양을 올린 형태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하백원이 유배당했던 1842년까지도 여전히 거북선이 조선 해군의 유력 전함으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거북선이 고종 때까지도 사용되고 있었다는 다른 기록과 서로 통하는 면이 있고, 거북선이 임진왜란 이후 지속적으로 조선 수군의 주력 전함이었음을 증명하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하백원이 기록한 거북선의 모습은 비록 통제영 거북선이나 전라좌수영 거북선보다는 후에 기록된 것이나 실제 거북선을 보고 그린 현장성이 강하다는 면에서 역사적가치가 높다고 본다. 그동안 글이나 전승되는 이야기에 의지해 연구해왔던 거북선 연구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을 만한 매우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오마이뉴스(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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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
거북선
[ 거북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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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은 왜구의 격퇴를 위하여 돌격선으로 특수하게 제작된 장갑선의 일종인데 이미 고려말 또는 조선초부터 제조, 사용되었으나, 1592년(선조 25)에 발발한 임진왜란 때 이순신에 의하여 철갑선으로서의 거북선이 창제, 실용화되었다. 복원된 거북선.
이칭별칭
귀선, 철갑병선, 돌격전함
유형
유물
시대
조선
성격
전투선, 전함
제작시기·일시
16세기(추정)
재질
나무, 철
크기(높이, 길이, 두께, 너비)
선체높이 6-6.5m, 선체길이 26-28m, 선체너비 9-10m
목차
정의
개설
연원 및 변천
내용
특징
현황
의의와 평가
정의
임진왜란 당시 수전에서 활약한 거북 모양의 전투선.
개설
정식 명칭은 귀선(龜船)이다. 거북선은 조선 수군의 주력 전선인 판옥선(板屋船)의 상체 부분을 개량해서 덮개를 덮은 구조이다. 판옥선은 바닥이 평평한 선체 위에 그보다 폭이 넓은 갑판을 2층 구조로 만든 전선이다. 1층 갑판에는 한국식 노를 설치하여 격군들이 노를 젓고, 2층에는 사령부가 위치하는 ‘장대’를 설치하고, 갑판 둘레에는 방패를 두르고 각종 화포를 장착하였다. ‘상장’의 1층은 노역 공간, 2층은 전투 공간이었던 셈이다. 거북선은 바로 이와 같은 판옥선의 상장 부분을 개량해 덮개를 만든 구조였던 것이다.
연원 및 변천
1. 기원
우리나라 전선의 구조와 형식은 주로 해적선과의 싸움을 통해 발전되었다. 고려 때부터 여진 해적이나 왜구와의 싸움에서 우리가 주로 사용한 전술은 배를 부딪쳐 해적선을 깨뜨리는 방법이나 화포를 사용하여 적선을 소각시키는 것이었다. 반면에 해적들은 상대방의 배에 접근한 후 배로 뛰어들어 싸우는 육박전을 주로 사용하였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적이 우리의 배에 뛰어들지 못하게 해야 했다. 그러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 이른바 ‘거북선〔龜船〕’이었다.
『태종실록(太宗實錄)』의 기록에 따르면, 1413년(태종 13)에 임금이 임진(臨津) 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과 왜선(倭船)이 서로 싸우는 상황을 구경하였다고 한다. 또 1415년 탁신(卓愼)은 국방 문제를 논하면서 “거북선[龜船]의 법은 많은 적과 충돌하여도 적이 능히 해를 입히지 못하니 가히 결승(決勝)의 좋은 계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戰勝)의 도구를 갖추게 하소서”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거북선의 제도는 이미 조선 초기에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태종 때 만들어진 거북선은 그 후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않았던 것 같고, 이것이 임진왜란 때 이순신에 의해 다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2. 제작
거북선과 관련하여 임진왜란의 와중에 이덕홍(李德弘)이 제작을 건의한 ‘귀갑선(龜甲船)’이 주목된다. 그는 왜적들의 장기가 조총으로 대표되는 ‘철환(鐵丸)’에 있다고 지적하면서, 왜적들이 성세를 올리는 것이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덕홍이 생각하기에 왜적의 ‘철환’을 막는 방법은 왜적들이 육지에 올라서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최선책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두 가지를 고안하였다. 하나는 왜적의 배가 육지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포구에 ‘침수진목전(沉水眞木箭)’을 설치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가 바로 ‘귀갑선’의 제작이었다.
이덕홍이 생각한 ‘귀갑선’의 제도는 다음과 같았다. “귀갑선의 제도는 등 부분에 창검(鎗劒)을 부착하고 머리 부분에 쇠뇌[伏弩]를 숨겨 두고, 허리 부분에 작은 판옥(板屋)을 만들어서 사수(射手)가 그 가운데 들어갈 수 있게 한다. (판옥의) 곁으로는 쏘는 구멍[射穴]으로 통하고, 아래로는 배의 중심부에 통하게 한 다음, 가운데에 총통(銃筒)과 큰 도끼[大斧]를 싣는다. 그리하여 때려 부수거나 포를 쏘아 대고, 쏘거나 들이치면 적들이 비록 많이 몰려오더라도 반드시 (우리 편을)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이순신의 거북선과 상당히 유사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거북선은 뛰어나고 독창적인 배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거북선은 그 이전의 배무이 기술의 바탕 위에서 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되어 온 배무이(선박건조) 기술이 거북선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통일신라 시기의 장보고의 해상 활동이나 고려 왕조의 활발한 무역 활동은 모두 훌륭한 배의 존재를 전제로 가능한 일이었다. 고려시기 배무이의 전통이 조선왕조에 계승되어 판옥선과 거북선을 출현하게 하였던 것이다.
조선의 싸움배는 판옥선이 주축이었다. 그것은 배 위 갑판을 덮어 다시 그 위에 누각이나 다른 건조물을 세운 구조를 가진 배였다. 즉 2층 구조로 이루어져 1층에서는 노를 젓고, 2층에서는 전투를 하게 만든 것이었다. 갑판 아래서 노를 젓는 노군들을 적의 화살이나 화포로부터 직접 공격당하지 않게 지붕을 덮은 것이었는데, 거북선은 이러한 판옥선 위에 다시 덮개를 씌운 것이었다. 적들이 아군의 배에 뛰어들어 발을 붙이지 못하게 고안된 것이었다.
내용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구조적 특징을 알 수 있는 기록으로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의 1592년(선조 25) 5월 1일의 기사를 들 수 있다. “이에 앞서 (이)순신은 전투 장비를 크게 정비하면서 자의로 거북선을 만들었다. 이 제도는 배 위에 판목을 깔아 거북 등처럼 만들고 그 위에는 우리 군사가 겨우 통행할 수 있을 만큼 십자(十字)로 좁은 길을 내고 나머지는 모두 칼·송곳 같은 것을 줄지어 꽂았다. 그리고 앞은 용의 머리를 만들어 입은 총구멍[銃穴]으로 활용하였으며,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만들어 꼬리 밑에 총구멍을 설치하였다.
좌우에도 총구멍이 각각 여섯 개가 있었으며, 군사는 모두 그 밑에 숨어 있도록 하였다. 사면으로 포를 쏠 수 있게 하였고 전후좌우로 이동하는 것이 나는 것처럼 빨랐다. 싸울 때에는 거적이나 풀로 덮어 송곳과 칼날이 드러나지 않게 하였는데, 적이 뛰어오르면 송곳과 칼에 찔리게 되고, 덮쳐 포위하면 화총(火銃)을 일제히 쏘았다. 그리하여 적선 속을 횡행(橫行)하는데도 아군은 손상을 입지 않은 채 가는 곳마다 바람에 쓸리듯 적선을 격파하였으므로 언제나 승리하였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①기존의 배[판옥선] 위에 판목을 깔아 거북등처럼 만들었다, ②군사가 통행할 수 있는 십자로를 만들고 나머지는 칼과 송곳을 줄지어 꽂았으며, 싸울 때는 거적이나 풀로 덮어 배 위에 올라타려는 적군에게 상처를 입혔다, ③배의 앞에는 용의 머리를 만들어 그 입을 대포 구멍으로 활용했으며, ④배의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만들고 그 밑에 총구멍을 설치했다, ⑤배의 좌우에 총구멍을 여섯 개씩 설치하였다, ⑥사면으로 포를 쏠 수 있게 하였다, ⑦전후좌우로 이동하는 것이 빨랐다는 점 등이다. 아군의 병력을 보호하고 적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면서 적진을 휘젓는 돌격선으로서의 거북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특징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 가운데 거북선의 모습과 규모에 대해서 『선조수정실록』의 기록보다 더 상세한 내용은 없다. “크기가 판옥선만하다”는 언급을 통해 거북선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지만 판옥선의 정확한 규모 역시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격군(格軍)과 사수를 합쳐 125명이 승선했다는 기록은 확인할 수 있다. 현존하는 기록 가운데 거북선의 규모와 특징에 대해 가장 자세하게 기록한 문헌은 정조 19년(1795) 정조의 명에 의해 편찬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이다. 이순신의 사후 그를 왕조에 충성을 다한 충신으로 추대하는 움직임은 정조대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이충무공전서』의 편찬은 그와 같은 사업의 일환이었다. 당시 규장각 문신인 윤행임(尹行恁)이 편찬 책임을 맡았던 『이충무공전서』에는 이순신의 일기·장계와 그를 예찬하는 여러 사람들의 시문, 비명 등이 수록되었다. 이 책의 권수(卷首) ‘도설(圖說)’ 부분에는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구조를 추정할 수 있는 두 장의 거북선 그림과 그에 대한 설명문이 기재되어 있다. 두 개의 거북선은 통제영 거북선과 전라좌수영 거북선인데, 이 가운데 통제영에 있던 거북선이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에서 유래한 것이며, 다만 치수에 가감이 있다고 하였다.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통제영 거북선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1) 밑바닥 판[底版]은 10쪽을 이어 붙였다. 그것의 길이는 64척 8촌이다. 머리 쪽 폭은 12척, 허리 쪽 폭은 14척 5촌, 꼬리 쪽 폭은 10척 6촌이다.
2) 오른쪽과 왼쪽의 현판(舷版, 배의 외판, 바깥판)은 각각 7쪽을 아래에서 위로 이어 붙였다. 높이는 7척 5촌이다. 맨 아래 첫 번째 판자의 길이는 68척이지만 차츰 길어져서 맨 위 7번째 판자에 이르러서는 113척이 된다. 판자의 두께는 모두 4촌씩이다.
3) 노판(艣版, 배의 전면부)은 배 앞쪽에 4쪽을 이어 붙였다. 높이는 4척이다. 두 개의 판이 왼쪽, 오른쪽에 있는데 현자(玄字) 구멍을 내어 각각에 박혈(礟穴, 돌노쇠 구멍)을 두었다.
4) 주판(舳版, 배 뒤쪽 고물)에도 7쪽을 이어 붙였다. 높이는 7척 5촌이다. 위의 폭은 14척 5촌이고 아래쪽 폭은 10척 6촌이다. 6번째 판 가운데에 구멍을 뚫고 둘레 1척 2촌의 키를 꽂았다.
5) 좌우 뱃전판[舷]에는 난간[欄]이 설치되어 있다. 난간 머리에 서까래가 세로로 가로질렀는데, 바로 뱃머리 앞에 닿게 된다. 마치 소나 말의 가슴에 멍에를 메인 것과 같은 모습이다.
6) 난간을 따라 판자를 깔고 그 둘레에는 패(牌, 네모 방패)를 둘러 꽂았다. 방패 위에 또 난간을 만들었다. 현의 난간에서 패의 난간에 이르는 높이는 4척 3촌이다.
7) 방패의 난간 좌우에는 각각 11쪽의 판자가 비늘처럼 서로 마주 덮고 있다.
8) 배의 등에는 1척 5촌의 틈을 내어 돛대를 세웠다 뉘었다 하는 데 편하게 했다.
9) 뱃머리에는 거북머리[龜頭]를 설치했다. 길이는 4척 3촌, 넓이는 3척이다. 그 속에서 유황염초를 태워 벌어진 입으로 안개처럼 연기를 토하여 적을 혼미하게 한다.
10) 좌우의 노는 각각 10개이다.
11) 왼쪽과 오른쪽 22개의 방패에는 각각 박혈(礟穴)을 뚫었고, 12개의 문을 두었다.
12) 거북머리 위에도 두 개의 박혈(礟穴)을 냈다. 그 아래에 두 개의 문을 냈다. 문 옆에는 각각 박혈(礟穴) 한 개씩을 두었다.
13) 왼쪽과 오른쪽의 덮개 판목[覆版] 12개에도 각각 박혈(礟穴)을 뚫었으며 ‘귀(龜)’자가 적힌 기를 꽂았다.
14) 왼쪽과 오른쪽의 포판(鋪版, 갑판)에는 방이 각각 12칸이다. 그 가운데 두 칸에는 철물을 넣어두고, 세 칸에는 화포, 활, 화살, 창, 칼 등을 넣어두고, 나머지 열아홉 칸은 군사들의 휴식처로 쓴다.
15) 왼쪽 갑판 위에 있는 방 한 칸은 선장이 거처하고, 오른쪽 갑판 위의 방 한 칸은 장교들이 거처한다.
16) 군사들은 쉴 때는 갑판 아래에 있고, 싸울 때는 갑판 위로 올라와 모든 대포구멍에 대포를 대놓고 쉴 새 없이 쟁여 쏜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통제영 거북선의 대체적인 형태를 그려볼 수 있다. 그것은 판옥선의 갑판 주위에 둘러쳐진 여장을 제거하고 갑판 위에 바로 거북 뚜껑을 덮은 모양이다. 노는 현의 난간 부근에 좌우 각각 10개를 설치하였다. 거북선의 대포 구멍[礟穴]은 배 양쪽의 22개, 앞쪽 거북머리의 위 아래 4개, 배 위의 거북등에 12개가 설치되었다. 전방위 포격이 가능하도록 구상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전라좌수영 거북선은 통제영 거북선과 치수·길이·넓이 등은 같지만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마치 판옥선의 여장을 그대로 두고 거기에 뚜껑을 씌운 듯한 모습이다. 거북머리 아래에 귀신의 머리를 새겼고, 덮개 위에 거북무늬를 새겨 넣었다. 대포구멍은 거북머리 아래에 2개, 현판 좌우에 각각 1개, 현의 난간 좌우에 각각 10개, 덮개 판목 좌우에 각각 6개씩 있었다. 노는 좌우에 각각 8개를 설치하였다.
현황
1. 거북선 관련 논쟁
거북선의 구체적인 구조와 기능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많은 논란이 있다. 그 가운데는 견해차가 뚜렷한 논의들도 적지 않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물론 거북선의 실물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실물의 확인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원형을 찾는 작업은 임진왜란 당시와 그 이후의 거북선에 대한 기록들을 토대로 더듬어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자료들이 단편적이고 해석도 어렵다는데 또 다른 문제점이 있다.
거북선의 구조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그림 자료는 여러 가지 있지만 대표적인 것은 『이충무공전서』의 앞부분에 실려 있는 두 개의 그림이다. 흔히 ‘통제영(統制營) 거북선’과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 거북선’으로 불리는 것이다. 문제는 양자의 제도에 상당한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이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도 아니라는 점이다. 『이충무공전서』가 편찬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 200여 년이 경과한 1795년(정조 19)이었다. 결국 거북선의 원형을 찾는 작업은 『이충무공전서』의 기록을 토대로, 그 이외에 실록기사와 회고록 등의 단편적인 자료를 참조하고,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조선기술의 발전 과정을 염두에 두고 차근차근 접근하여야 할 것이다.
거북선과 관련된 논란에서 가장 먼저 제기되는 문제는 거북선이 언제 누구에 의해 창시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태종 때 이미 거북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배가 있었다. 따라서 이것과 임진왜란 때의 거북선이 어떤 관계에 있었는가, 양자는 구조면에서 같은 배인가를 밝히는 것이 거북선의 창시 문제에서 중요한 관건이 된다. 아마도 태종 때의 거북선은 실전에 활용되지 못하였던 것 같으며, 세종대 이후 왜구의 격감 등을 고려한 전략적 판단에 의해 사라졌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따라서 임진왜란 때의 거북선은 이순신과 그의 부하 군관들이 종래의 거북선을 개조하여 실용적으로 만든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거북선이 과연 ‘철갑선’인가 하는 점이다.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주장의 유래가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이야기와 일본측 문헌자료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런데 일찍부터 일본측의 자료는 그 신빙성을 의심받아 왔다. 임진왜란의 패전을 거북선에 돌리려는 숨은 의도가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유길준(兪吉濬)은 『서유견문(西遊見聞)』에서 “이충무공의 거북선은 철갑병선(鐵甲兵船)으로 세계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였고,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거북선을 ‘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 정의하였지만 근거가 확실한 주장은 아니었다. 물론 거북선의 등에는 거북 무늬를 그렸을 뿐만 아니라 그 위에 날카로운 못이나 칼날(칼송곳) 같은 것을 꽂아 적의 접근을 근본적으로 차단하였다.
그러나 거북선의 표면에 철갑이 덮여 있었는지의 여부는 아직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철갑을 덮을 경우에 배의 무게가 증가하여 민첩성이 떨어지고, 바닷물에 의해 부식되는 등 효율적이지 않다는 점을 들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다음으로 복잡한 문제는 거북선의 세부적인 구조이다. 거북선의 내부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었던 것일까? 거북선에서 사용하였던 노는 어떻게 생긴 것이며, 노역의 위치와 노역의 공간은 어디인가? 포 구멍의 실질적인 쓰임새와 뱃머리에 설치된 거북머리[용두(龍頭)]의 기능은 무엇인가? 이러한 여러 문제들은 거북선의 내부가 2층 구조였는가, 아니면 3층 구조였는가 하는 논란과 연결된다.
2층 구조론에 따르면 아래층에는 병사의 휴게실과 무기고를 설치하고, 위층에는 화포 등의 공격 시설이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 경우 노를 젓는 노역이 화포와 같은 장소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좁은 공간에 많은 인원이 탑승하는 단점이 있어 전투효율이 떨어진다”는 평가는 이러한 거북선의 구조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반면에 3층 구조론에 따르면 1층에는 병사들의 침실과 군량·무기고가 있었고, 2층에는 사부(사격수)와 격군(노 젓는 병사)이 자리하며, 3층에는 포대가 설치되어 화포를 쏠 수 있는 구조였다고 한다. 따라서 노역의 위치가 2층 구조론의 주장과 달라지고, 전투의 효율성에 대한 평가도 상반된다.
거북선의 크기와 배의 척수 역시 논쟁거리였다. 거북선의 크기와 척수는 시대에 따라 변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분명하게 확인되는 것은 거북선의 척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거북선의 기능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부분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거북선은 돌격용 전함이었다.
탑승자 전원을 덮개 밑에 수용함으로써 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고, 적진을 휘젓고 다니며 공격하는데 유리한 전함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적선과 접전을 벌일 때에는 매우 적합하지만,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공격을 가하는 데는 불편한 점도 있었다. 은폐된 거북선 안에서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상갑판 위의 넓은 공간에서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판옥선이 훨씬 실용적이었다. 거북선의 척수가 제한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요컨대 거북선은 일본 해적 집단과 일본 수군의 백병전술에 대비해 개발한 돌격전함이었다. 즉 여러 개의 중화기로 무장한 연해용 돌격전함으로서, 독특한 아이디어로 설계된 특이한 모델의 전선이었던 것이다. 전체적으로 거북 모양에, 용머리에서는 포를 쏘거나 유황 연기를 내뿜었다고 하니, 이런 새로운 디자인의 전투함은 적을 당황케 하여 사기를 꺾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2. 거북선 축제
전라남도 여수시는 거북선을 하나의 축제로 승화시켜 ‘여수거북선축제’를 매년 시행하고 있다. 이 축제는 1967년부터 시작하여 2013년 현재 47회에 이르고 있다. 축제프로그램으로는 ‘통제영 길놀이’, ‘둑제’, ‘거북선그리기·만들기’, ‘승전한마당’, ‘수륙고혼천도대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거북선이 임진왜란에서 승전을 올리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한 이후 조선과 일본의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었다. 거북선에 대한 다양한 그림은 그러한 관심의 일환이었다고 여겨진다. 현재까지 전하는 거북선 그림은 10여 종에 달한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통제영과 전라좌수영의 거북선으로 가장 신빙성 있는 기록으로 간주된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에서 토요토미 히데오시의 일대기를 그림으로 그리고 해설한 책 가운데 『회본태합기(繪本太閤記)』에 실린 거북선 그림으로,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어 일본군을 물리치다”라는 설명문이 붙어 있다.
1910년 경상남도 고성에서 발굴되어 현재는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청화백자에는 용머리에서 연기를 토하고 있는 모습의 거북선이 그려져 있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는 10폭짜리 병풍으로 된 「거북선해진도」도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는 거북선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전선(戰船)의 포진 상황이 그려져 있다.
한편 이순신 후손의 종가에서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두 종의 거북선 그림이 있는데, 다른 거북선 그림과는 달리 거북선의 등 위에 두 개의 돛대가 달려 있고, 지휘소라 할 수 있는 장대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아울러 거북선의 크기를 비롯해 구조, 장대 설치 등에 대한 설명도 첨부되어 있다.
참고문헌
『서유견문(西遊見聞)』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태종실록(太宗實錄)』
『회본태합기(繪本太閤記)』
『우리과학의 수수께끼 2』(신동원, 한겨례출판, 2007)
『우리역사 과학기행』(문중양, 동아시아, 2007)
『배무이』(최완기, 보림, 2003)
『유물의 재발견』(남천우, 학고재, 1997)
『거북선』(김재근, 정우사, 1992)
『한국과학기술사』(전상운, 정음사, 1975)
Korean Boats and Ships (Horace H. Underwood,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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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영 귀선≪이충무공전서≫의 통제영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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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거북선 [거북船]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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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백과
거북선
[ 龜船 ]
요약 고려말 조선초에 왜적을 격퇴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며, 기록상으로는 조선초 문헌에 처음 나타난다. 임진왜란 직전에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창제귀선을 건조하여 왜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세계 최초의 돌격용 철갑전선(鐵甲戰船)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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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
현재까지 전해오는 문헌 중에서 ‘거북선[龜船]'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나는 기록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1413년(태종 13) 5월 초에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이 왜선으로 꾸민 배와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고 하였고, 2년 후에는 다시 “거북선이 매우 견고하여 적선이 해치지를 못한다”고 되어 있으나, 어떤 형태와 규모였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적혀 있지 않아서 알 길이 없다. 그 후 180여년 간 거북선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다가 이순신 장군의 임진년(1592) 일기인 《난중일기(亂中日記)》 2월 8일 기사에 “거북선에 사용할 돛 베(帆布) 29필을 받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난중일기》에 따르면 거북선에 비치한 포(砲)를 처음 발사한 날은 임진년(壬辰年:1592) 3월 27일이며, 처음 해전에 참가한 것은 장계(狀啓)에서 “5월 29일 사천해전(泗川海戰)”이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건조한 창제귀선(創製龜船)의 일반적인 외부의 형태와 전투력에 관해서만 기록하고 있으며, 실제 건조에 필요한 세부적인 치수에 대해서는 기록한 것이 없다. 따라서 태종 때의 거북선과 이순신이 말한 거북선과의 관계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때 거북선은 이순신의 고안에 의해서 군관 나대용(羅大用) 등이 실제로 건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거북선이 임진왜란 때 돌격전선으로서 기능을 발휘함에 따라 전란 후에는 그 모양이 조금씩 변하여 용머리[龍頭]는 거북머리[龜頭]로 바뀌고, 치수도 일반적으로 장대(長大)해지는 등 차차 크게 건조되었는데, 1795년(정조 19)에 간행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전라좌수영 거북선’ 및 ‘통제영 거북선’의 그림과 함께 건조에 필요한 부분적인 치수가 어느 정도 기록되어 있다.
참조항목
검선, 나대용, 이순신, 임진왜란, 전라좌수영귀선, 판옥선
역참조항목
거북선해진도, 마하수, 아산 이충무공 유허, 귀함별황자총통, 한국의 조선업, 조선의 과학기술, 대방진 굴항
카테고리
역사 > 아시아사 > 한국사 > 조선시대
기술과학 > 무기 및 병기공학 > 해상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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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 모형강릉함정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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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거북선 [龜船] (두산백과)
민족의 자랑 거북선? 오리무중 거북선!
영화 에서 단연 관객의 시선을 사로 잡는 장면은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포함한 단 12척의 배를 끌고 나가
330척의 왜적을 물리치는 통쾌한 해상 전투 신입니다.
당시 이순신 장군이 처한 상황은 참담했습니다.
거침없이 쳐들어오는 왜군에 조선 전역이 쑥대밭이 되었고,
이순신 장군은 주변의 모함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끝에
앞선 칠천량 대전에서 130척의 배를 갖고도 대패한 원균의 뒤를 이어 전라좌수사에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민심은 피폐해져 있었고, 조정에서는 이순신 장군에게 아무런 도움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두려움에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이고
자신의 힘으로 난파선을 수습해 전력을 재정비합니다.
그렇게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지만 스스로 거북선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이때 한 가지,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의 발명품일까요? 아닙니다.
거북선은 판옥선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20여 년 전부터 존재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여기에 화포를 더해 거북선을 더욱 강력하게 만든 것이죠.
에 보면 이순신 장군은 전쟁이 없어도 이 거북선에서 먹고 자며 생활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거북선을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하루 전 완성하였습니다.
그렇게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이끌고 나가 23전 23승의 쾌거를 이룩하게 됩니다.
출처: 영화 공식 예고편 캡처
만약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서 패했다면 임진왜란은 더욱 참담한 결과를 낳았을 것입니다.
과거의 전쟁은 군사들에게 먹고 마시는 물자를 보급하는 일이 전쟁의 승패를 가릴 정도로 중요했는데
그 물자를 보급하는 경로를 해전에서 차단했기 때문에 전쟁의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이처럼 통쾌하게 왜군을 깨뜨려버렸던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
그런데 우리 민족의 자랑인 거북선의 원형은 오늘 날 한 척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에 대해 《진짜 싸울 수 있는 거북선》의 저자 디자이너 한호림은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임진왜란을 치르는 동안 총 5척이 있었다는 거북선이 모두 침몰했다고 치자.
거북선을 해저에서 발견하려면
먼저 수없이 침몰한 일본 전투선의 잔해부터 발견되었어야 할 것 아냐?
그리고 간혹 판옥선처럼 조선 수군의 다른 전투선도 발견되고 말이지.
그러다 그런 무더기 속에 아주 기적적으로 거북선의 잔해가 나오거나 해야 할 거 아냐?
그런데? 거북선은 고사하고 일본 전투선의 파편조차 발견되지 않았어. 왜?
가장 중요한, 물리학에서의 '비중'.
이걸 놓치고 있는 거야. 선재(船材, 배 만드는 나무)는 비중이 0.44밖에 안 돼.
그러니 목선이 어떻게 가라앉을 수 있어?
신안 보물선처럼 아주 무거운 화물이라도 잔뜩 싣기 전에는.
그러니까 우리 공격으로 파괴되어 침수되거나 불에 타던 적선들이
어느 정도 가라앉다가 비중이 딱 맞으면 저절로 멈추고
그때부터는 물결 따라 떠밀려 다녔지.
그러면? 그걸 우리 수군이 모두 예인해 새로 배를 만들거나 고치는 데 썼지.
즉 재활용한 거지. 선재는 엄청 비싸고 귀하거든.
이순신 장군의 기록에도 그렇게 나와 있어.
일본 전투선이고, 우리 판옥선과 거북선이고 가라앉지를 않았는데
어떻게 바다 빝에서 발견될 수 있겠어?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한 괴짜 디자이너의 열정
이렇게 거북선의 원형이 종적을 감춰버린 지금.
학계에서 이 거북선을 복원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나름대로 다양한 형태의 거북선을 내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거북선을 실제로 물에 띄워 보았을 때에는
전투는커녕 제대로 항해조차 하지 못하고 하나같이 부두에 그냥 묶여만 있습니다.
통영 거북선. 오늘날 거북선들은 하나같이 모두 '묶여 있는' 신세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 《주니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1, 2》 등의 베스트셀러로 잘 알려져 있는
디자이너 한호림은 순전히 호기심으로 똘똘 뭉쳐 거북선 연구에 몰입하게 됩니다.
그렇게 7년 반의 세월이 걸려 《진짜 싸울 수 있는 거북선》을 출간하게 됩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지?
그런데 정말야, 나로선 해군 상병 시절부터 모아온 '거북선 구슬'이
서 말이 뭐야? 삼십 말도 넘게 있었어.
국내고 세계 어디고 별의별 것을 '호기심'으로 돌아다니다가
특히 거북선과 뭐라도 연계가 될 듯싶으면 '뚜뚜뚜뚜-zoom in' 투시해보구,
프로로서 정밀하게 촬영하구 왈, 연구(?)를 했지.
[…]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거북선 구조 생각
하여간 내 머릿속에는 늘 거북선 구조 퍼즐이 들어 있었는데
서로 뭔가가 통하는 것끼리는 저절로 이리 붙고 저리 연결되어
차츰 어떤 거북선 형태를 보이데.
그렇게 디자이나 한호림은 7년 반의 세월 동안
머릿속의 거북선 구조를 컴퓨터 2차 도면으로 그리고 이를 다시 3차원 투시도로 그려
거북선에 관해 수집한 모든 지식을 텍스트로 엮었습니다.
순전히 한 덕후의 호기심으로 완성한 거북선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진짜 싸울 수 있는 거북선'의 설계도면은 다음 회차에서 보다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진짜 싸울 수 있는 거북선》
'거북선' 하나에 몰두해 7년 여의 세월을 보낸 디자이너 한호림 선생님이 최근 유튜브를 시작했습니다.
거북선의 실제 모습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고 싶다면 아래의 링크를 클릭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