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kim631217sjz 블로그홈 | 로그인
시지기-죽림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홈 > 전체

전체 [ 8099 ]

7499    오스트리아 "수수께끼"같은 화가 - 클림트 댓글:  조회:3005  추천:0  2019-12-12
인물세계사 구스타프 클림트 오스트리아 화가 [ Gustav Klimt ] 출생 - 사망 1862.7.14. ~ 1918.2.6. 1897.4.3 클림트 회장으로 한 빈 분리파가 공식적으로 창설되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수수께끼 같은 화가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그림에 대해 한번도 설명한 적이 없고, 인터뷰도 하지 않았으며, 사생활은 철저히 숨겼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그림이 풍기는 매력이 한층 돋보이게 된 것일까? 사후 50년 후부터 재평가 되기 시작하더니 언제부턴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화가로 손꼽히게 되었다.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겐 자유를", 예술도시 빈에 새바람 불다 세계 미술사에서 ‘분리주의’ 또는 ‘분리파’를 얘기하게 되면 당연히 구스타프 클림트를 떠올리게 된다. 예술사조 중에서 ‘분리파’라는 이름처럼 특이한 것도 없다. 통합이 아닌 분리를 이념으로 세울 수 있다는 말인가? 예술의 경우에는 ‘분리주의’가 있을 수 있다. 19세기 말 클림트를 비롯한 혁신적인 예술가들은 빈 미술가협회의 회원이었으나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중견과 원로들의 작품을 참을 수 없었다. 이들은 빈 미술가협회로부터 분리(독립)를 꿈꾸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권력이란 안정적인 활동을 보장하는 울타리가 되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감과 도전정신이 넘쳤던 클림트는 안주를 거부하고 ‘빈 분리파’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1897년 4월 3일, 클림트를 회장으로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공예가인 콜로먼 모저, 건축가 오토 바그너,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 등이 함께한 빈 분리파는 빈 미술가협회에 공식 통보하고 조촐한 창설식을 올림으로써 세상에 그 존재를 알렸다. 1898년경 빈 분리파의 창시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서 있는 사람 왼쪽부터 요제프 호프만,카를 몰,클림트,알프레드 롤러,신원 불명,콜로만 모저(왼쪽), 클림트가 만든 제1회 분리주의 포스터. 분리파 예술가를 상징하는 테세우스가 전통 예술가를 상징하는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고 있다(오른쪽) ‘빈 분리파’가 분리파의 처음은 아니었다. 1892년 독일의 프란츠 폰 슈투크를 중심으로 ‘모나코 분리파’가 창설되었으며, 1893년에는 막스 리베르만을 중심으로 ‘베를린 분리파’가 이미 창설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리파 하면 ‘빈 분리파’가 떠오르는 것은 클림트라는 거장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의 제자 에곤 실레와 오스카 코코슈카가 있었기 때문이다. 1897년 빈 분리파가 결성되면서 클림트의 작품은 혁신적으로 바뀌게 되며, 그의 작품세계는 예술의 도시 빈에서 집중 조명을 받았다. 결국 빈 분리파의 등장은 빈이 음악의 도시에서 예술의 도시로 이미지를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빈 분리파는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라는 표어를 내세워 매너리즘에 빠진 미술가협회에 맞섰다. 그들은 이제 검열에 통과하려고 애쓰지 않았고 오직 진실만을 생각하고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솔직하고 대담하게 그렸다. 빈 분리파는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되는 수공예를 위한 투쟁이기도 했다. 이들은 ‘부자를 위한 예술과 가난한 자를 위한 예술’을 일치시키고자 했고, 감각적인 예술을 추구했다. 아울러 모든 예술 영역의 요소들을 이용하여 종합예술작품을 만들고자 했으며 나아가 자신들의 작품으로 사회를 변혁하려 했다. 바야흐로 유럽 작단의 아틀리에에 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었다. 탄탄한 기본기를 닦은 어린 시절, 청년 시절에는 최고의 역사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자세한 것을 알기 힘들다. 클림트가 자서전을 쓴 적도 없고 인터뷰 한 적도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린 시절을 짐작할 수 있는 기본적인 사항이 그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는 1862년 7월 14일 빈 근교의 바움가르텐에서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보헤미아 출신의 귀금속 세공사이자 조각가였다. 그가 나중에 금을 이용하여 모자이크 작업을 펼칠 때 아버지의 수공예품에 대한 기억이 크게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클림트는 또 오페라 가수인 어머니에게서 음악에 대한 열정을 물려받았다. 천재 베토벤을 기념하는 위대한 작품을 만든 것도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음악에 대한 열정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클림트의 집안은 다복했으나, 1873년 경제위기의 여파로 형편이 어려워지게 된다. 1876년 클림트는 빈 응용미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1883년까지 이 학교에서 모자이크 기법이나 금속을 이용하는 방법, 그리스의 도자기 미술, 이집트와 바빌론의 부조, 슬라브 민속학 등 수세기에 걸친 다양한 장식 기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이 또한 훗날 다양한 실험을 전개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이 시기에 클림트가 특히 매료된 것은 한스 마카르트로 대표되는 역사화였다. 역사화는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면서도 섬세한 필치가 보는 이를 압도하는 장르였다. 특히 ‘예술의 연인’이자 ‘빈의 우상’인 한스 마카르트의 그림은 모호하면서도 지극히 매혹적이었다. 빈 대학의 천장화로 사용하기 위해 그린 그림,,중 유일하게 그 밑그림이 남아있는 (1900년)(왼쪽), (1900년)(가운데),(1903년)(오른쪽). 클림트는 한스 마카르트를 능가하는 재능을 갖고 있었다. 1883년 클림트는 남동생 에른스트 클림트와 친구 프란츠 마치와 함께 의뢰 받은 작품을 그렸다. 당시 왕실에서는 각 지역에 새로운 건축물을 건설하거나 수리할 때 실내에 적절한 그림을 그려 넣곤 했다. 세 예술가는 트란실바니아의 펠레스키 왕궁, 헤름스빌라의 침실 등 빈의 저택들을 ‘한스 마카르트의 스타일’로 장식했다. 1886년 클림트는 기념비적인 작품을 착수하게 되는데, 그것은 부르크 극장을 장식하는 작업이었다. 1888년에 완성된 은 등장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세밀한 초상을 섬세하게 그려 넣어 보는 이들을 경탄케 했다. 이 작업으로 인해 황제에게 특별격려상인 황금공로십자훈장을 받았고, 그들의 명성은 빈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892년 동생 에른스트가 죽자 클림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구가 생기지 않았다. 이 휴지기가 어쩌면 클림트에게 사고의 깊이를 확보하게 한 기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동생의 죽음으로 깊이 파인 가슴을 쓸며 클림트는 인간의 운명과 구원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였다. 1895년 클림트가 다시 붓을 들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상징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는 상징과 알레고리를 통해 현실을 풍자하고 인간의 운명을 암시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클림트는 교육부에서 의뢰 받은 빈 대학의 대강당을 장식할 내용을 구상하고 있었다. 오랜 구상 끝에 마치와 클림트는 첫 천장 도안을 제출했다. 마치는 중앙과 신학 부분을 작업하고, 클림트는 철학, 의학, 법학 부분을 맡았다. 나중에 이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빈의 미술계는 뜨거운 스캔들에 휩싸이게 된다. 빈 분리파의 전성시대, 불후의 걸작 를 역사 속에 각인 시키다 클림트는 개성이 강한 예술가였다. 한스 마카르트의 작품에 매료되어 한동안 역사화를 그렸지만, 그것은 어차피 종합예술로 표현되는 자신의 예술세계로 가는 과정이었다. 빈 미술가협회의 보수적인 태도에 반감을 느낀 클림트는 1896년 요제프 엥겔버트, 카를 몰과 함께 분리파의 기원이 되는 연합회를 처음으로 기획했고, 이듬해에는 빈 분리파를 공식적으로 창설했다. 이제 클림트는 빈 분리파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준비해야 했다. 클림트를 비롯한 분리파 예술가들은 대규모 전시회를 기획하는 한편 모나코 분리파가 만드는 잡지 와 유사한 잡지를 기획했다. 이듬해 빈 분리파는 제1회 분리주의 전시회를 개최했으며 잡지 을 창간했다. 1898년 3월 23일, 한 원예회사 가건물에서 제1회 분리주의 전시회 개회식이 간소하게 열렸다. 개회식에 황제가 참석하여 축하하는 자리에서 분리파 예술가들이 적절한 선을 넘지 않는다면 새로운 예술 활동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클림트는 ‘적절한 선을 넘지 않는다면’이라는 단서가 불편하긴 했다. 포스터를 만드는 과정에서 그 ‘적절한 선’을 넘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 포스터는 젊은 예술가를 상징하는 테세우스가 전통 예술가를 상징하는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는 장면을 그린 것이었는데, 테세우스의 성기가 노출되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클림트는 그 앞에 나무를 그려 넣어 성기를 가려서 검열에 통과했었다. 제1회 분리주의 전시회는 5만7천여 명의 관람객이 방문하고 218점의 작품을 판매하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끝을 내었다. 이제 클림트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 해 빈 분리파가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그들만의 공간인 ‘분리파관’이 지어졌다. 건축가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가 전시한 이 건물은 오늘날에도 빈의 문화적 상징물이 되었다. 의 마지막 부분 1902년 제14회 분리주의 전시회는 분리파 역사에서 정점을 이룬다. 이 전시회는 천재 음악가 베토벤에게 헌정되었는데, 이 전시회야말로 클림트가 기획한 종합예술작품을 지향하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요제프 호프만이 전시실 내부 장식을 맡았고, 개막일에는 구스타프 말러가 베토벤 9번 교향곡의 모티프로 편곡한 작품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전시회의 백미는 무엇보다도 클림트가 베토벤의 을 모티프로 그린 벽화 였다. 벌거벗은 여인들의 고통스런 모습으로 시작되는 그림은 온갖 악마의 위협적인 공간을 지나, 마침내 합창하는 여인들 사이에서 두 남녀가 뜨겁게 포옹하고 키스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한 영웅이 무절제한 여인들의 유혹과 악마들의 방해를 물리치고 마침내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이야말로 클림트가 꿈꾸는 유토피아의 실현, 예술에 대한 끝없는 갈망과 사랑을 노래한 상징주의의 절정이었으며 다양한 기법을 활용한 응용미술의 극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난잡함과 향락과 무절제가 그려진 이 작품에 대해 관람객들은 반감을 일으켰고, 그들의 싸늘한 시선은 빈 분리파의 열정을 얼어붙게 했다. 빈 분리파에서도 분리된 자유인, 고집과 뚝심으로 혼자가 되는 것을 즐기다 클림트에게 또 다른 시련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빈 대학의 천장 도안으로 그린 , , 시리즈 때문이었다. 클림트는 나체의 임신부를 비롯한 벌거벗은 사람들, 혼돈 속에서 무기력하게 떠도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통해 병에 들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고뇌에 찬 인간의 불안한 심리와 필연적인 운명과 삶의 부조리를 표현했다. (1907~1908),빈 오스트리아 미술관 소장 1903년 이 완성되자 클림트의 작품들은 대학 건물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판정을 받았다. 클림트는 그 작품들을 새로 건축한 현대미술관에 전시할 것을 제안 받았지만, 본래 그림의 목적과 어긋나는 일이라며 거절하였다. 클림트는 이렇게 나체와 성을 대담하게 표현하면서 대중의 고상한 취향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의 인기는 식어갔고, 빈 분리파 안에서도 지지를 잃었다. 클림트는 1904년 빈 분리파 전시회에 를 출품하는 것을 끝으로 이듬해에는 빈 분리파를 떠나고 만다. 빈 분리파를 떠났다고 해서 분리파 이념까지 버렸다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때부터가 진정한 분리파를 실현한 시기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권력화된 분리파로부터도 분리되는 것이 진정한 분리파의 이념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물론 클림트를 추종하는 몇 명의 예술가와는 계속해서 교류했지만, 이제 클림트를 막을 수 있는 단체는 없어졌다. 이때부터 클림트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활을 누리게 되는데, 대가에게는 그것이 또한 최상의 작업 조건이 되었다. 그는 어차피 단체와는 어울리지 않는 누구보다도 고집 센 사람이었고, 더욱이 어떤 것에도 얽매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제 독창적인 예술세계에 몰두하여 특별한 세계를 구축해나갔다. 그리하여 (1907~1908), (1907~1908) 등 이른바 ‘황금 시기’의 대작과 클림트의 예술세계를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풍경화를 포함한 명작들이 우리 앞에 선보이게 된 것이다. 자유로운 성생활의 이면에 존재한 영원한 소년이 되고 싶은 '피터 팬' 클림트는 평생 혼인하지 않고 많은 여인들과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14명의 여인들이 친자확인소송을 냈다. 많은 모델들과 관계했지만 그는 어쩌면 진정으로 안주할 여인을 찾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혹은 혼인하여 아기를 낳고 생활에 안주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에게 부담되는 일이었을까? 클림트의 전기작가들도 그가 영원한 피터 팬이 되고 싶어했다고 짐작한다. 그것은 그가 오히려 사랑에 관한 한 이상주의자였음을 말해준다. 이상적인 사랑은 쉽게 오지 않는 것, 클림트에게는 이상적인 사랑을 나눌 만한 모델은 없었다. 오직 한 사람, 에밀리 플뢰게라는 여인은 클림트의 진정한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플뢰게는 클림트와 늘 함께한 정신적 반려였지만, 두 사람이 육체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클림트의 명작 의 여주인공이 플뢰게라고 짐작하고 있다. 아터 호수에서 플뢰게와 클림트, 그리고 친구들(좌), 1903년 무렵의 클림트(우) 실로 는 남녀가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 같지는 않다. 여성이 수동적인 것을 넘어서 오히려 거부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자는 입술이 아니라 볼에 키스하고 있다. 입술을 굳게 다문 여성의 표정도 황홀함과는 거리가 멀다. 더욱이 두 사람은 몸을 잘못 놀리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되는 절벽 위에서 키스하고 있다. 결국 는 클림트가 꿈속에서 그려본 이상적인 여인인 플뢰게와의 사랑을 그린 것이 아닐까? 아직도 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작품의 신비함에 이끌리고 더 황홀해하는지도 모른다. 1918년 1월 11일 클림트는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그는 다급하게 “미디를 오라고 해!”라고 소리쳤다. 미디는 에밀리 플뢰게의 애칭이었다. 플뢰게는 급히 달려와 클림트가 저세상으로 갈 때까지 그의 마지막을 지켜주었다. 2월 6일 클림트가 죽은 후 플뢰게는 많은 서신들을 태워 그의 비밀을 없앴다고 한다. 플뢰게는 1952년 세상을 뜰 때까지 구스타프의 추억을 안고 살았다. 클림트의 마지막에는 또 혈육 못지않게 절친했던 에곤 실레가 함께했는데, 실레는 클림트의 마지막 모습을 그림 속에 담았다. 묘하게도 빈 분리파의 주축 멤버였던 오토 바그너, 콜로만 모저, 그리고 에곤 실레도 같은 해에 죽었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속에 숨은 이룰 수 없는 사랑과 자유를 향한 열망 구스타프 클림트는 생전에 이미 유명 작가였지만, 한편으로는 영욕이 교차하는 경험을 거듭했다. 그가 빈번하게 그린 나체와 섹스 장면이 줄곧 문제되었던 것이다. 클림트 사후 약 50년 동안 클림트나 그의 동료이자 제자인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의 작품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 클림트는 무덤에서 벌떡 일어서게 된다. 20세기의 세기말이 19세기의 세기말과 비슷해서일까? 클림트의 작품들이 급부상하더니 클림트는 이제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화가가 되었다. 한때는 외설로 여겨졌던 것이 지금은 참으로 부드러운 낭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실로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인간의 육체가 발하는 미묘한 숭고함을 느낄 수 있다. 클림트의 전기를 쓴 니나 크랜젤은 이렇게 말한다. “빈이 낳은 유명한 예술가 클림트가 만약 자신의 작품이 현재 얼마나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지 볼 수 있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그는 지금 오스트리아 예술의 간판스타로 이름을 올렸고, 그 당시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었던 작업 방식은 일상 문화의 일부로 자리잡았다.” 그의 그림에 나왔던 모티프들은 다양한 상품으로 둔갑하여, 넥타이, 열쇠고리, 도자기, 게임용 카드, 퍼즐 등으로 다시 나온다. 우리는 다양하게 다가오는 그의 생애와 예술을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즐긴다. 그는 수수께끼를 내는 스핑크스인지도 모른다. 다행히 이 스핑크스는 우리가 답을 맞히지 못하더라도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고민하고 즐길 뿐이다. 그의 그림을 즐기다가 우리는 문득 그가 향락 속에 빠진 듯한 생활 속에서도 진정한 사랑과 자유를 갈구했음을, 끝내 그것들을 구할 수 없었음을 가슴 아프게 확인하고야 만다. 그러나 그의 작품만은 인간 구원의 황홀경을 참으로 숭고하면서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구스타프 클림트에 열광하는 이유가 아닐까?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을 직접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 2009년 2월2일부터 5월15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구스타프 클림트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명작 를 구경할 수 없는 것은 아쉽지만, 대작 와 , , 그리고 필자에게 특히 인상 깊었던 풍경화 등 수많은 걸작들을 포함하여 종합예술을 추구했던 클림트의 면모를 유감없이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베토벤의 을 들으며 를 오랫동안 구경했던 추억을 필자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을 해설한 책은 매우 많으며, 각자 나름대로 훌륭하다. 한국의 필자들이 쓴 몇 권의 책은 클림트의 인기만큼이나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클림트의 생애를 소설화한 책도 있다. 클림트에 관한 여러 책 중에서 필자는 두 권을 소개한다. 다른 책들이 클림트의 생애보다는 예술세계를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되었다면, 다음 두 권의 책은 클림트의 생애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크게보기 구스타프 클림트 에바 디 스테파노 저 김현주 역 예담 2006.06.15. 상세보기 에바 디 스테파노의 는 클림트의 생애를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했을 뿐만 아니라, 본문에 언급되는 그림을 거의 수록하고 있기 때문에 클림트의 예술과 생애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매우 요긴하다. 가치평가를 많이 하지 않고 사실 위주로 기술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자율적으로 판단하도록 유도한다는 점도 좋다. 크게보기 구스타프 클림트 질 네레 저 최재혁 역 마로니에북스 2005.06.05. 상세보기 니나 크랜젤의 또한 클림트의 생애와 예술을 입체적으로 조명한 책이다. 당시의 시대상황부터 오늘날 빈 분리파가 새롭게 각광받는 것의 의미까지를 재미있으면서도 설득력 있게 기술하였다. 자유분방한 생활 속에서도 이상적인 사랑을 찾아 헤매는 클림트의 진정한 꿈을 잘 보여주는 책이다.     관련이미지 17                                               구스타프 클림트 이미지 갤러리 [네이버 지식백과]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 오스트리아 화가 (인물세계사)   ========================/// 두산백과 구스타프 클림트   [ Gustav Klimt ] 요약 오스트리아의 화가. 아르누보 계열의 장식적인 양식을 선호하며 전통적인 미술에 대항해 ‘빈 분리파’를 결성했다. 관능적인 여성 이미지와 찬란한 황금빛, 화려한 색채를 특징으로 하고 성(性)과 사랑, 죽음에 대한 알레고리로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이미지 크게보기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출생-사망 1862.7.14 ~ 1918.2.6 국적 오스트리아 활동분야 회화 출생지 오스트리아 바움가르텐 주요작품 《유디트 Judith》(1901),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Portraitof Adele Bloch-Bauer》(1907), 《입맞춤 The Kiss》(1907~1908), 《다나에 Danaë》(1907~1908) 구스타프 클림트는 1862년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났다. 보헤미아에서 이민 온 그의 아버지는 금세공사이며 판화가였지만 그리 성공하지는 못해 클림트의 어린 시절은 가난하고 우울했다. 14세 때인 1876년 빈 응용미술학교에서 회화와 수공예적인 장식 교육을 받았다. 1883년 졸업 후에는 그의 동생 에른스트(Ernst)와 동료 학생인 프란츠 마치(Franz Matsch)와 함께 공방을 차려 공공건물에 벽화를 그리는 일을 했다. 그는 1880년대 말경 빈에 새로 들어선 국립극장과 미술사박물관에 장식화를 그려 건축 장식미술의 대가로 자리를 굳혔다. 클림트는 1892년 아버지와 동생 에른스트의 죽음으로 정신적인 동요를 겪으며, 인상파와 상징주의 등 다양한 아방가르드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순수와 응용이라는 이분법을 넘어 총체적인 예술을 지향했다. 1897년 당시 보수적인 미술 단체의 일원이었던 클림트는 낡고 판에 박힌 사상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고, 미술과 삶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인간의 내면에 접근하고자 하는 ‘빈 분리파’를 결성하고 초대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에곤 실레(Egon Schiele),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칼 몰(Carl Moll), 오토 바그너(Otto Wagner) 등 당대 오스트리아를 선도한 화가, 디자이너, 건축가들이 빈 분리파에 참여했다. 클림트의 작품은 관능적인 여성 이미지와 찬란한 황금빛, 화려한 색채를 특징으로 한다. 그는 성(性)과 사랑, 죽음에 대한 풍성하고도 수수께끼 같은 알레고리로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극적인 에로티시즘을 강조했다는 이유로 강력한 항의를 받기도 했다. 1900년부터 1903년까지 빈 대학교 대강당의 천장에 차례로 그린 우의적인 장식화 《철학》, 《의학》, 《법학》은 그 외설성으로 인해 빈 대학교 교수들과 정면충돌하는 사태를 빚었다. 이 일로 그는 공공작품을 의뢰받지 않았으며, 기하학적이고 지적인 추상 양식으로 변모해갔다. 클림트는 빈 분리파가 더 이상 본래의 취지에 충실하지 못하고 있음을 목격하고는 이에 낙담하고 1905년 빈 분리파를 탈퇴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이른바 ‘황금시대’를 여는 시발점이 되었다. 클림트는 이탈리아 라벤나의 모자이크와 장식적인 패턴, 금을 사용하여 눈에 띄는 독창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이 시기의 그의 작품은 실생활에 거리를 두고 신비로운 것과 정신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어 매우 화려하고 역동적이며, 에로틱한 요소와 강렬한 상징주의 등을 지속시켜 나갔다. 클림트는 1918년 1월 11일 갑작스런 뇌출혈이 있은 후, 같은 해 2월 6일 일련의 합병증으로 병원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주요 작품에는 《유디트 Judith》(1901), 《프리차 리들러의 초상 Portrait of Fritsa Reidler》(1906),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Portrait of Adele Bloch-Bauer》(1907), 《입맞춤 The Kiss》(1907~1908), 《다나에 Danaë》(1907~1908), 《아담과 이브 Adam and Eve》(1917~1918) 등이 있다. 참조항목 상징주의, 아르누보, 키스, 유디트, 다나에, 나무 아래 장미가 있는 풍경, 빈 분리파 역참조항목 코코슈카, 에곤 실레, 프리차 폰 리들러, 아담과 이브 카테고리 지역 > 유럽 > 오스트리아 인물 > 미술 > 기타서양미술 관련이미지 3                               이미지 이전 입맞춤오스트리아의 화가 클림트의 작품. 1907-1908년. 캔버스에 은박, 금박, 유채. 180 x 180cm. 빈미술사미술관 소장. 이미지 갤러리 출처: corel [네이버 지식백과]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두산백과)   ==============================/// 도난당했던 그림 되찾다... 이탈리아의 한 미술관에서 도난당한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이 22년 만에 미술관 벽 속에서 발견돼 화제를 낳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북부 도시 피아첸차의 리치 오디 갤러리 앞 정원에서 한 인부가 건물 외벽을 덮은 담쟁이덩굴을 가지치기하다 우연히 검은 쓰레기봉투에 담긴 그림 한 점을 발견했다고 ANSA 통신이 보도했습니다. 이 그림은 '아르누보의 대가'로 불리는 오스트리아 출신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가 1917년에 그린 젊은 여인의 초상화로 1997년 2월 리치 오디 갤러리에서 도난당했습니다. 갤러리 관계자는 "당시 갤러리 전체를 샅샅이 뒤졌는데도 흔적조차 찾지 못했던 그림이 인적이 드문 벽 속에 고스란히 감춰져 있었다는 게 신기하다"며 "그림 상태가 매우 훌륭하다"고 말했습니다. 이탈리아 미술계에선 이 그림이 1969년 시칠리아의 한 성당에서 홀연히 사라진 카라바조의 그림에 이어 두 번째로 가치 있는 도난 미술품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경찰은 전문가에 감정을 의뢰해 그림의 진품 여부를 확인할 계획입니다.
7498    [세계속에서] - 왕과 서민, 서민과 왕... 댓글:  조회:3301  추천:0  2019-12-12
오바마, 베트남 현지 식당서 뜻하지 않게 공짜 밥 먹은 사연 2019.12.12.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016년 베트남 하노이에서 미국의 스타셰프 앤서니 부르댕과 분짜 저녁식사를 하고 있다. [앤서니 부르댕 트위터 캡처]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부부가 베트남 호치민시에 있는 한 서민식당에서 의도치 않게 공짜 밥을 먹었다.  12일 현지 온라인 매체 VN익스프레스에 따르면 오바마 전 대통령 부부는 지난 11일 오후 호치민시 당떳 거리에 있는 '꾹각'이라는 식당을 찾아 저녁 식사를 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돼지고기 스튜, 스프링롤, 신맛이 나는 수프 등 베트남 전통 음식을 1시간여 동안 즐긴 뒤 카드로 밥값을 내려고 했다.  하지만 이 식당 매니저는 음식값 계산을 정중하게 사양했다. 그는 "오늘 음식에 들어간 재료를 모두 우리 농장에서 길러 돈이 별로 안 들었다"면서 "집에 온 손님처럼 대하고 싶다"고 말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매니저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식당을 떠나기 전 주방장과 기념사진을 찍으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 부부는 이번 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리는 오바마 재단 행사에 참석하기에 앞서 지난 8일부터 베트남을 방문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재임 중이던 2016년 베트남을 공식 방문했을 때 들러 전통음식인 분짜를 먹었던 식탁과 식기 등이 유리 상자 안에 전시 보존되고 있다. [연합뉴스] 오바마 전 대통령은 현직에 있던 2016년 5월 베트남을 공식 방문했을 당시 수도 하노이 하이바쯔엉구의 팜딩호 거리에 있는 식당 '분짜 흐엉 리엔'에서 미국 유명 셰프 앤서니 부르댕과 저녁 식사로 '분짜'를 먹어 화제가 됐다. 분짜는 현지식 소스에 쌀국수와 숯불에 구운 돼지고기를 적셔 먹는 음식이다.  그들은 등받이가 없는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분짜와 함께 현지 맥주 1병을 곁들인 뒤 6달러(약 7100원)를 지불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의 이같은 서민 행보에 베트남 누리꾼은 열광했고 해당 식당은 관광명소가 됐다.  /김지혜 기자
7497    [세계는 지금] - 축구로 남과 북 "2800 하나"로... 댓글:  조회:3562  추천:0  2019-12-11
  "박항서호"… `40년 남북갈등` 베트남 하나로 묶었다  2019.12.11.   좋아요 훈훈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동향 아니면 응원도 안했는데 분단후 동족상잔의 비극 겪어 1400㎞ 긴 국토, 지역 감정 키워 박항서 이후 "우리는 하나" 남부 호찌민 출신 선수 활약에 북부 하노이서도 열띤 환호 베트남 축구 팬들이 10일(현지시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제30회 동남아시안게임(SEA) 결승전을 가슴 졸이며 지켜보고 있다.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팀은 이날 결승전에서 인도네시아를 3대0으로 꺾고 1959년 대회 창설 이후 60년 만에 처음으로 금메달을 땄다. [로이터 = 연합뉴스]베트남 수도 하노이는 11일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베트남을 짓누르던 남북 갈등도 이날 이후로는 깨끗이 사라진 듯 보였다. "베트남은 하나로 뭉치면 강하다. 함께하면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베트남 22세 이하(U-22) 축구 대표팀이 10일 필리핀에서 열린 동남아시안(SEA) 게임에서 60년 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을 따면서다. 현지 언론은 대부분 지면 1면을 '박항서 매직'으로 대서특필했다. 박항서 감독의 '나비효과'가 베트남 경제·사회·정치 모든 분야에서 국가를 한 단계 '레벨업'할 수 있다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박항서호의 거침없는 선전이 뿌리 깊은 베트남 남북 지역 갈등을 해소할 촉매제로 작용하고 있다. 전국 각 지역 출신 선수들이 '대표팀'이라는 용광로에서 화학적 결합을 이루며 금메달을 따낸 덕분이다. 박 감독 부임 이전 베트남 대표팀 조직력은 '바닥'에 가까웠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되면 대표팀 경기 관람조차 하지 않는 이기적인 자세가 팽배했다. 특히 대표팀 선수 간, 출신 지역 간 갈등으로 하나로 뭉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베트남은 1976년 7월 통일을 이뤘지만 이후 40년 넘도록 지역 간 갈등은 여전하다. 북쪽 '정치수도 하노이', 남쪽 '경제수도 호찌민'으로 양분되며 라이벌 의식도 상당하다. 하노이 사람들은 호찌민 출신 남자의 억양을 '유약해 보인다'며 깎아내리고, 호찌민 사람들은 하노이 발음을 '촌스럽다'고 생각한다. 서로 총을 겨눴던 불행한 역사가 여전히 상처로 남아 있다. 남북으로 국토 길이가 1400㎞에 이르는 독특한 국경선도 서로를 좀처럼 섞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다. 하지만 박 감독 부임 이후 선수들이 '원 팀'을 이뤄내고, 출전하는 모든 대회에서 혁혁한 성과를 내자 국가 분위기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지난 10일 SEA 게임 결승전에서 베트남의 두 번째 골을 어시스트한 공격수 응우옌띠엔링 부모를 둘러싼 스토리가 화제에 오른 게 대표적이다. 라오스전에서 해트트릭과 태국전에서 2골을 몰아친 그는 고비마다 팀을 승리로 이끌며 베트남에 우승컵을 선사했다. 그는 베트남 남부 호찌민 인근 빈즈엉성이 고향이다. 그의 부모는 고향에서 카페를 운영한다. 그의 선전으로 베트남이 우승컵을 차지하자 북부 하노이 축구팬들 사이에 빈즈엉에 있는 부모님 카페가 화제로 떠올랐다. "기회가 되면 띠엔링 부모가 운영하는 커피숍에 가보고 싶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는 중부 출신 부이띠엔중, 북부 하노이 출신 응우옌꽝하이 등이 골고루 활약했다. 하노이에서 백화점 종업원으로 일하는 조안티투이 씨는 "1000㎞보다 더 멀리 떨어져 사는 선수들이 조국을 위해 모여 성과를 냈다는 점에 감동을 느낀다"며 "축구를 보고 있을 때만큼은 베트남 전역이 모두 하나"라고 말했다. 윤옥현 대한상의 하노이사무소장은 "베트남 정부는 정부 고위직 자리를 지역별로 기계적 배분을 할 만큼 사회 통합에 각별히 신경 쓴다"며 "응우옌쑤언푹 베트남 총리가 연일 박 감독을 치하하는 것 역시 그를 통해 베트남이 하나로 뭉치는 효과를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베트남과 한국 관계도 더욱 돈독해질 것으로 보인다. 결승전 이후 베트남 주요 대도시 거리에는 금성홍기와 태극기를 번갈아 흔드는 차량과 오토바이 인파가 쏟아져 나와 도로가 마비될 정도였다. 이들은 "꼬렌 비엣남(파이팅 베트남), 박항세오" 등을 번갈아 외치며 광란의 거리 파티를 벌였다. 부부젤라 부는 소리와 폭죽 터지는 소리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김강욱 PTI 이사회 부의장은 "베트남 국가대표팀이 선전을 펼친 이후 한국과 베트남 관계가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며 "한국 기업에 대한 베트남 국민의 호감도 더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노이 = 홍장원 특파원] ==================================/// 국부 호치민과 나란히··· 박항서로 도배된 베트남 신문 1면 기사입력 2019.12.11.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22세 이하(U-22) 축구 대표팀이 10일 동남아시아(SEA) 게임 결승전에서 인도네시아를 3-0으로 완파하고 60년 만에 처음으로 정상을 차지했다. [EPA=연합뉴스]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22세 이하(U-22) 축구 대표팀이 지난 10일 동남아시아(SEA) 게임 60년 역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을 따자, 베트남 전역이 '박항서 신드롬'으로 들썩이고 있다.  우선 베트남 현지언론들은 11일 관련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이날 조간신문 1면은 대부분 ‘박항서 매직’이란 제목으로 도배됐고, 축구 전문지 ‘봉다’는 1면 전체를 박항서호 사진으로 덮었다. 봉다는 또 4면에 ‘베트남이 동남아시아의 정상에 우뚝 섰다’는 제목 하에 베트남 대표팀 선수들이 박 감독을 헹가래 치는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싣고, 박항서호가 지난해 12월 아세안축구연맹(AFF) 스즈키컵에서 10년 만에 우승했을 때와 같은 장면이 연출됐다고 전했다.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22세 이하(U-22) 축구 대표팀이 10일 동남아시아(SEA) 게임 결승전에서 인도네시아를 3-0으로 완파하고 60년 만에 처음으로 금메달을 획득하자 베트남 하노이에서 현지 축구 팬들이 거리를 질주하며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연합뉴스] 징(Zing)과 VN익스프레스 등 현지 대표적인 온라인 매체도 메인 페이지를 베트남 축구 소식으로 채웠고, ‘베트남 인베스트 리뷰’ 등 경제 전문지도 박항서호의 업적 소개를 빼놓지 않았다.  일간 베트남뉴스는 ‘SEA 축구에서 베트남의 역사적인 우승’이라는 제목으로 올린 기사에서 “수백만 베트남 축구 팬들의 꿈이 60년 만에 이뤄졌다”면서 “결승전 종료 휘슬이 울리자 온 국민이 황홀감에 빠졌고, 자축하는 팬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왔다”고 전했다.  일간 년전은 베트남 축구 대표팀이 이번 SEA 게임 7경기에서 6승 1무로 경이로운 무패 행진을 이어갔다며 박항서호가 우승을 차지한 뒤 찍은 기념사진을 올렸다. 이 사진에는 베트남의 국부인 호찌민 전 국가주석 사진, 베트남 국기와 함께 태극기가 나란히 등장했다.  VN익스프레스는 베트남이 오랫동안 기다린 SEA 게임 금메달을 획득하자 축구 팬들이 밤늦게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도로를 질주했다면서 전국이 열광했다고 현지 분위기를 소개했다. 매체는 또 박 감독이 베트남 국민, 베트남 축구협회와 베트남 축구 대표팀을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이번 우승의 영광을 돌리고 내년 1월 태국에서 개최되는 2020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 본선에 대한 각오를 다졌다고 전했다.  한편, 응우옌 응옥 티엔 베트남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이번 승리에 대해 포상금 10억동(약 5000만원)을 지급했으며 베트남 축구협회(VFF)도 30억동(약 1억5000만원)을 내놨다고 현지 언론은 전했다. 이 밖에도 민간기업들이 20억동(약 1억원) 이상을 후원해 10일 오후 11시 현재 70억동(약 3억6000만원) 이상의 포상금이 모였다.  /김다영 기자 ============================///   '박항서 매직'... 베트남에 부는 코리아 열풍 기사입력 2019.12.13.    좋아요 훈훈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박항서 매직'으로 베트남은 지금, 코리아 열풍입니다.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 대표팀이 동남아시안 게임 60년 역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을 따자 베트남 현지 언론들도 이렇게 신문 1면에 대서특필했는데요. 박항서 호에 포상금이 쇄도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도 함께 전했습니다. 경기 중 보여준 박 감독의 리더십도 주목을 받고 있는데요. 당시 경기 장면 함께 보시죠. 박 감독은 후반 32분, 베트남 선수가 거친 몸싸움으로 쓰러지자 상대 선수에게 파울을 주지 않았다며, 심판 판정에 항의하다가 퇴장을 당했는데요. 이를 두고 현지 언론은 마치 새끼를 보호하는 어미 닭 같았다며 박 감동의 지도력을 극찬했습니다. 하지만 박 감독은 경기 후 인터뷰에서 자제하지 못해 미안하다며, 자신이 레드카드를 받는 것보다는 우승이 우선이었다고 끝까지 뭉클함을 안겼습니다. [박항서 /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10일) : 미안합니다. 하지만 제가 잘 통제를 해야 했는데 제 레드카드 받는 것보다 우승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불만을 표출한 게 과했나 봅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 시각, 베트남 시내는 그야말로 축제의 밤이었습니다. 오토바이에 국기를 달고, 거리 응원을 하는 모습이 마치 2002 월드컵 우리나라의 4강 신화 때를 보는 듯하죠. 베트남 국민은 박항서 감독의 이름을 목청껏 외치며 60년 만에 거둔 우승의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박항서 매직' 덕분일까요? 베트남 시장에 진출한 우리 기업도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습니다. 이미 삼성은 지난 6월 베트남 한정 상품으로 '박항서 에디션' 스마트폰을 출시했고요. 현대차는 올해 들어 지난달까지 베트남의 자동차 누적 판매량에서 일본의 도요타를 제치고 1위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한국 과자도 베트남에서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초코파이는 베트남 제사상에도 오를 정도로 국민 간식 반열에 올랐죠. 초코파이 회사인 오리온의 베트남 사업 매출액도 지난해 최고치를 찍고 처음으로 국내 매출을 뛰어넘었습니다. 또 한 번 진한 감동을 안기며 베트남 축구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박항서 감독. 베트남 시민들은 박 감독에게 운이 좋은 때라는 뜻의 '당손'과 그의 성씨를 붙여 '박당손'이라는 별명까지 붙여줬다는데요. 우승 뒤에도 세계의 벽은 높다며, 동남아 왕좌를 지키겠다는 각오를 보여준 박 감독의 도전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주목됩니다. /차정윤 기자
7496    [세계는 지금] - "세계 최연소..." 녀인천하"... 댓글:  조회:3767  추천:0  2019-12-11
세계 최연소 여성 총리 탄생… 핀란드 내각은 '여인천하'  2019.12.11.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마린 총리, 선출되자마자 12명 여성 장관 입명 북유럽에 있는 나라 핀란드에서 세계 최연소 총리가 탄생했습니다. 올해 34살인 이 신임 총리는 선출되자마자 장관 19명 가운데 12명을 여성으로 임명했습니다. 김석재 기자가 기자입니다. 1985년 11월생, 올해 34살인 사회민주당 산나 마린 의원이 핀란드의 새 총리로 선출됐습니다. 세계 최연소 총리로, 핀란드의 세 번째 여성 총리입니다. 마린 총리는 선출되자마자 내각의 장관 19명 가운데 12명을 여성으로 임명했습니다.[산나 마린/핀란드 총리 : 모든 아이들이 꿈을 이루고 모든 사람들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핀란드가 되길 원합니다.] 핀란드는 1906년 유럽에서 처음으로 여성에게 참정권을 준 나라입니다. 이를 반영하듯 사회민주당과 중도좌파 연정을 구성하는 4개 정당의 대표 역시 모두 여성입니다. 마린 총리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15살부터 빵 포장회사에서 일을 했고 대학생 때는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영업사원으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27살에 시의원에 당선된 뒤 국회의원을 거쳐 지난 6월부터 교통부 장관을 맡아왔습니다. 마린 총리는 그동안 나이와 성별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해왔습니다. [산나 마린/핀란드 총리 : 내 나이와 성별을 생각해본 적이 결코 없습니다. 정치에 입문했던 이유와 유권자의 신뢰를 얻었던 것들만 생각합니다] 핀란드 국민들은 젊은 여성 총리의 선출에 환호했습니다. [핀란드 국민 : 젊은 여성 총리가 선출된 게 자랑스럽습니다. 좋은 일이고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린 총리는 내일(12일)부터 벨기에서 열리는 EU 정상회의에 참석해 국제무대에 처음으로 나설 예정입니다. (영상편집 : 정용화)  
7495    [그것이 알고싶다] - 안중근 거사 뒷얘기...일본인 "삽화 기자" 댓글:  조회:3473  추천:0  2019-12-11
  일본인 기자가 그린 재판받는 안중근 의사  2019.12.11.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앵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체포된 뒤 열렸던 재판 과정을 묘사한 그림이 공개됐습니다. 당시 재판을 방청한 일본인 기자가 묘사한 법정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이철호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열차에서 내린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가 경찰에 체포됩니다. 이듬해 열린 재판에 안중근 의사는 호송 마차를 타고 출석했습니다. 거사에 동참한 동료들과 함께 법정에 섰습니다. 재판 관계자 한 명 한 명의 얼굴. 안중근 의사를 방청석에서 바라만 보는 한국인 변호사들. 방청객이 소란을 피우는 모습까지 시간 순으로 재판 과정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습니다. [이주화/안중근 의사 숭모회 학예팀장 : "이때도 사진기자들이 있었는데 나가라고 했습니다. 일본 재판부에서. 그리고 삽화 기자만 남겨 놨었어요. 삽화 기자가 크로키 형태로 즉석에서 그린 겁니다."] 기자가 남긴 재판 방청권에는 여섯 번의 재판 중 네 번째라는 표시가 선명합니다. 그림과 방청권, 안중근 의사로부터 직접 받은 글씨까지 일본인 기자의 후손이 기증했습니다. [이혜균/안중근 의사 숭모회 사무국장 : "정말 정말 내 몸같이 아껴달라, 그런 이야기를 하셔서 저희가 감사히 받아 왔습니다."] 공판 기록물은 정확한 재판 날짜와 참석자, 법정 분위기까지, 그림과 함께 남겨진 유일한 자료로 평가됩니다. [정윤서/서울시 역사문화재과 주무관 : "재판장, 검사, 통역관, 변호사들이 다 일본인들로 구성된 불공정한 공판이었는데요. 이를 정확하게 입증할 수 있는 사료로써 가치가 있다고 봤습니다."] 서울시는 그림과 방청권은 국가문화재로, 일본인 기자와 간수가 받은 안중근 의사의 글씨는 보물로 지정, 등록해 달라고 문화재청에 신청했습니다. KBS 뉴스 이철호입니다. /이철호 기자
7494    [문단소식] - 두만강 역 화룡 로과 호곡령에서 리욱시인 오다... 댓글:  조회:2475  추천:0  2019-12-10
중국조선족시인의 이름을 딴 문학상... 제1회 리욱문학상 시상식 연길서 (ZOGLO) 2019년12월9일 중국조선족시인의 이름으로 명명한 첫 문학상인 ‘제1회 리욱문학상 시상식’이 지난 12월 7일 오전, 연길시 한성호텔에서 개최되였다.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의 주최로 열린 이날 행사는 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 방순애 회장이 환영사를 하고 연변대학 우상렬교수(차홍화 대독)가 리욱시인 소개를 하였으며 최룡관시인이 심사평을 했으며 연변작가협회 부주석이며 시가창작위원회 김영건 주임, 연변작가협회 허룡석 전임 주석, 단군문학상 리사회  엄철인 사무국장, 연변시인협회  전병칠 회장이 축사를 했다.  방순애 회장은 환영사에서 리욱문학상을 설치하게 된 계기를 밝히면서 "시인들 모두가 리욱시인처럼 문학을 통해 사회와 력사 속에서 인간의 삶을 노래하고 그의 진취적 정신을 발양하기 위한데 있다."고 말했다.   최룡관 시인은 보고에서 강시나의 하이퍼시집 《굴레 씌운 말 탈출기》와 한설매시인의 하이퍼동시집 《애기 바람 꿈》이 각각 리욱문학상 성인시집상과 동시집상을 수상하게 되였다고 하면서 전자는 돌연변이 수법의 령활한 표현으로 시의 본질인 애매성이 짙고 후자는 시에 표현되는 이미지들이 가상적이고 환각적인 동시에 천진란만한 꿈이 넘쳐흘렀다는데 그 수상리유를 밝혔다.   강시나 수상자와 함께     한설매 수상자와 함께.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 박문희 편집국장은 페회사에서 "하이퍼시가 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 회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시상범위를 확장함으로서 하이퍼시의 영향력을 넓히고 창작을 활성화함으로써 우리 문학의 발전에 벽돌한장이나마 쌓아올리자는 것이 우리의 초심"이라며  "문학상 상금이 많고 적기를 떠나서 그것이 우리 조선족문학의 터전에 밑거름이 된다는 생각에서이다. 더구나 태여난지 얼마 안되는 하이퍼시는 아직 성숙단계와는 거리가 먼 초기단계인만큼 아끼고 정성껏 키워야 하겠다는 사명감이 앞선다."고 말했다.    리욱(1907-1984)시인은은 중국조선족문학의 개척자와 대표자의 한사람이다. 그는 1924년 서정시 "생명의 례물"을 처녀작으로 문단에 데뷔하였으며 해방전후를 이어오며 한시, 소설, 수필, 번역 등 문학창작활동을 연변땅에서 활발하게 진행하면서 중국조선족문학사에 굵직한 한획을 그었다.   글 조글로미디어 문야 / 사진 협회 제공  =============================================/// "구월이라/ 휘영청 푸른 하늘 아래/ 황금 국화 피였네/ 황금 국화에 솟아난/ 나의 고향/ 우리 연변!// 꽃송이에 때오르는/ 자색 노을은/ 지난 시절의 핏빛인가?// 꽃머리에 또오르는/ 꽃구름은/ 밝은 나날의 행운인가?// 고향 사람들/ 삼림으로 묶어져/ 당의 은덕 노래하거니// 황금 국화에 훤히 열린/ 연변의 하늘에/ 번영은 별무리처럼 빛나고// 황금 국화에 당실히 솟은/ 연변의 땅에/ 행복은 꽃떨기처럼 피여났네." 조선족 문단을 대표하는 시인 리욱이 1984년 2월 사망하기 직전에 쓴 '고향'의 전문이다. 조선족 시인 리욱 (해란강닷컴 제공)   오는 15일 탄생 110주년을 맞는 리욱은 조선족 시문학의 주춧돌을 놓은 시인으로 불린다. 일제강점기 간도 문학을 대표했으며 해방 이후 중국 조선족 문학의 토대를 일구었다. 암담했던 시절, 인간과 자연, 생명을 노래했으며, 새로운 이상과 민족의 앞날을 제시했다. 광고   그는 서정시와 서사시, 한시를 비롯해 소설, 수필, 문학 이론, 번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하게 집필 활동을 했다.   리욱은 1907년 7월 15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안촌(고려촌)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장원. 해방 전까지는 학성, 월촌, 단림, 산금, 월파 등의 필명을 사용하다가 해방 이후 리욱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1910년 지린 성 옌볜 허룽현으로 이주해 유년 시절을 보냈다. 만주 일대에서 저명한 한문학자인 조부와 부친의 영향으로 중국과 조선의 고전을 배우며 자라 어린 나이에 한문에 능통하고 한시를 잘 썼다고 한다. 중학교 2학년에 생활고로 학업을 중단하고 농사일에 매달렸다. 그러나 시 창작에 매진하여 1924년 17세 되던 해에 처음으로 서정시 '생명의 례물'을 간도일보에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 후 간도 지역의 진보적 신문 민성보의 기자로 일하다가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그만두고 야학에서 농민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1937년부터 1944년까지 조선일보 간도특파원으로 일하는 한편 신문, 잡지에 부지런히 시를 발표해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리욱은 시인 김조규와 함께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던 시인들의 작품을 모아 '재만조선시인집'을 간행하여 조선족 문단의 결집을 도모했다. 해방 이후 간도예문협회 문학부장, 동라문인동맹 시문학분과 책임자, 옌지중소한문회협회 문학국장, 문예지 ‘불꽃’의 편집 등을 맡아 조선족 문단을 새롭게 정비하고 조선족 문학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노력했다. 1947년 동북군정대학에 들어가 혁명이론을 학습하며 첫 시집 '북두성'을 출간했다. 졸업 후 잡지 '대중'의 주필 겸 옌볜도서관 관장을 맡았다. 1949년에는 두 번째 시집 '북륜의 서정'을 펴냈다. 그는 옌볜대학을 세우는 데 참여했고, 옌볜사범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1951년 말부터 옌볜대학 조문학과 교수를 지냈다. 베이징사범대학에서 소련문학과 마르크스주의 문예이론, 혁명적 사실주의 창작론을 공부하기도 했다. 리욱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시기 새로운 국가체제 안에서 조선족 문학의 발전을 모색했다. 1956년 조선족 작가로는 처음으로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해 중국작가협회 옌볜분회 이사로 활동했다. 그는 조선족 문학이 중국 문학의 일부로 인정받는 동시에 독자적인 문학을 구축할 수 있도록 중국 문학과의 교류에 힘썼다. 중국어로 된 작품을 창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6년부터 1976년 문화대혁명 시기에 '반동 문인,' '반동학술권위' 등으로 몰려 탄압을 받았다. 교수자격은 취소됐으며 창작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벽지 농촌으로 추방됐다. 문화대혁명의 혼란이 지나고 복권된 리욱은 다시 시 창작에 힘을 쏟아 1980년 73세의 나이로 '리욱 시선집'을 내놓았다. 리욱은 시집으로 '북두성'(1947), '북륙의 정서'(1949), '고향사람들'(1957), '장백산하'(1959), '연변의 노래'(한문. 1959), '리욱시선집'(1980) 등을 남겼고, 이론서 '현대소설의 구성'을 출판했다. 1982년 항일투사들의 영웅적 투쟁을 담은 장편서사시 '풍운기' 제1부를 펴냈고 이어 제2부를 쓰다가 1984년 2월 6일 77세를 일기로 뇌일혈로 사망했다. '풍운기' 제2부는 유고로 발표됐다. 시집 '고향사람들'은 조선족의 역사와 혁명적 전통을 소재로, 간도 개척 과정에서 발생했던 지주와의 투쟁, 만주사변 이후 장백산을 근거지로 벌였던 유격전, 항일 전쟁 이후 승리의 감격 등을 주 내용으로 하여 조선족들의 긍지와 자부심을 고취했다. 그의 시 세계는 자연물에 대한 순수한 서정에서부터 간도 조선인들이 처한 삶의 현실,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향한 열정, 역사적 항쟁과 혁명적 투지, 그리고 인생을 반추하는 명상적 내용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펼쳐져 있다. 그의 아들 리선호는 2015년 2월 9일 옌볜도서관에서 열린 '다시 읽는 우리 문학' 세미나에서 "아버지는 슬하에 10명의 자녀를 두었다. 어머니가 일자무식이였지만 항상 어머니를 존중해주셨다. 자식들이 책을 사고 싶어 할 때마다 기꺼이 사주셨다. 아버지와 함께 문학상을 받은 적 있다. 모두들 우리 집에 쌍봉황이 날아들어 온다고 기뻐해 주셨다. '너무 틀에만 얽매이지 말고 틀을 벗어나 사는 것도 좋다'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셨다"고 말했다. 리욱의 생애는 일제 치하와 중화인민공화국 정권수립, 문화대혁명 등 격변기에 시련을 겪으면서 이를 극복하고 오늘날 당당한 소수민족으로 정착한 200만 조선족의 삶과 역사를 보여 준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고국을 떠나 중국 땅에서 험난한 세월을 보낸 조선족의 피눈물 나는 이민사이며 개척사이다. / 김은주
7493    조선 후기 시인 - 김택영 댓글:  조회:3996  추천:0  2019-12-06
한국문학 김택영   [ 金澤榮 ] 요약 조선 후기의 문인.국내의 문인으로는 시에서는 신위(申緯), 산문에서는 박지원(朴趾源)을 가장 높이 평가하였는 바, 신위와 박지원이 시와 산문 분야에서 각기 조선 제1의 대가로 인정받게 된 데는 김택영의 노력이 크게 작용하였다. 중국에 망명해서는 ≪신위시집≫과 ≪여한구가문초 麗韓九家文抄≫등을 편찬하여 한국 한문학의 진수를 중국에 알리는데 공헌하였으며, 지기인 이건창과 황현의 문집을 편집하는 한편 망국의 한을 노래한 다수의 시편을 남겼다. 김택영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의 고려 유민(遺民)의식이다. 이는 조선 5백년 동안 외면 당해온 개성인의 의식세계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출생 - 사망 1850년 ~ 1927년 이명 자 : 우림(于霖) 호 : 창강(滄江) 이칭 : 소호당(韶濩堂) 본관 화개(花開) 시대 철종1 가족관계 아버지 : 김익복(金益福) 조선 후기의 문인, 학자. 본관은 화개(花開), 자는 우림(于霖), 호는 창강(滄江), 당호는 소호당(韶濩堂). 개성 출신으로 개성부(開城府) 분감역(分監役) 익복(益福)의 둘 째 아들이다. 소년 시절부터 시장에서 이름을 떨쳤고 17세에 성균초시(城均初試)에 합격하기도 하였으나, 개성인을 등용하지 않는 조정의 정책과 무반 가계라는 신분상의 제약 때문에 급제하지 못하였다. 20대 초반에 서울에 와서 이건창(李建昌)과 교유하기 시작하면서 문명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황현(黃玹)과 더불어 신헌(申櫶)의 아들인 신정희(申正熙)의 식객 노릇을 하며 지냈다. 1883년 김윤식(金允植)의 소개로 당시 서울에 와 있던 중국의 진보적 지식인인 장건(張騫)을 알게 되었는데 장건은 뒷날 김택영의 중국 망명을 주선하게 된다. 1891년 여론의 압력으로 진사시에 급제하여 가문의 오랜 숙원을 풀었다. 그 뒤 갑오경장으로 벼슬길이 열려 1894년 편사국주사(編史局主事), 1895년 중추원 서기관(中樞院書記官), 1903년 문헌비고 속찬위원(文獻備考續撰委員)으로 임명되어 통정대부에 오르고 1905년 학부 편집위원이 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 1908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장건의 주선으로 남통(南通)에 있는 출판사에서 교정일을 보는 것으로 생계를 해결하였다. 김택영은 시와 문이 모두 대가의 반열에 드는 우리나라의 몇 안되는 문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중국에 망명한 뒤에도 국내의 문단과 끊임없이 교류하며 한문학 분야의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하였으며 망명지 중국에서는 우리나라 한문학을 중국에 소개하는데 진력하는 한편 그와 교유한 남방의 문인들로부터 양계초(梁啓超)에 필적하는 대가로 인정받았다. 김택영은 청나라의 시인 왕사정(王士禎)에게 깊이 경도하여 그의 신운설(神韻設)을 자신의 문학론으로 소화하여 시창작에 활용하고 있다. 또한 산문에서는 명나라의 귀유광(歸有光)을 모범으로 삼고 자신의 독자적 문체를 개발하는데 진력하였다. 또한 국내의 문인으로는 시에서는 신위(申緯), 산문에서는 박지원(朴趾源)을 가장 높이 평가하였는 바, 신위와 박지원이 시와 산문 분야에서 각기 조선 제1의 대가로 인정받게 된 데는 김택영의 노력이 크게 작용하였다. 중국에 망명해서는 ≪신위시집≫과 ≪여한구가문초 麗韓九家文抄≫등을 편찬하여 한국 한문학의 진수를 중국에 알리는데 공헌하였으며, 지기인 이건창과 황현의 문집을 편집하는 한편 망국의 한을 노래한 다수의 시편을 남겼다. 김택영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의 고려 유민(遺民)의식이다. 이는 조선 5백년 동안 외면 당해온 개성인의 의식세계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김택영은 중국인들에게 한국 역사를 소개할 목적으로 ≪한사경 韓史綮≫를 저술하였는데 이 책에서 이성계의 건국을 부정적으로 기술하여 국내에서 많은 물의가 야기되기도 하였다. 또한 개성 출신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의 행적을 수집하여 ≪숭양기구전 崧陽耆舊傳≫을 집필한 것도 이 고려 유민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저서로는 ≪한국소사 韓國小史≫, ≪한사경 韓史綮≫, ≪교정삼국사기 校正三國史記≫가 있고 시문집으로는 ≪창강고 滄江稿≫와 ≪소호당집 韶濩堂集≫이 있다. 경력사항 성균초시(城均初試)에 합격 1891년 ~ 진사시에 급제 1894년 ~ 편사국주사(編史局主事) 1895년 ~ 중추원 서기관(中樞院書記官) 1903년 ~ 문헌비고 속찬위원(文獻備考續撰委員)으로 임명되어 통정대부에 오름 1905년 ~ 학부 편집위원 작품목록 숭양기구전 여한십가문초 오호부 관련이미지 4                               이미지 이전 김택영(1850-1927)1850(철종 1)-1927. 조선 말기의 학자.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김택영 [金澤榮] (네이버고전문학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김택영   [ 金澤榮 ] 1850(철종 1)-1927. 조선 말기의 학자. 이칭별칭 자 우림(于霖), 호 창강(滄江) 소호당주인(韶濩堂主人) 유형 인물 시대 근대 출생 - 사망 1850년(철종 1) ~ 1927년 성격 학자, 시인 출신지 개성 성별 남 본관 화개 목차 정의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상훈과 추모 정의 조선후기 『한국역대소사(韓國歷代小史)』·『한사경(韓史綮)』·『창강고(滄江稿)』 등을 저술한 학자. 개설 본관은 화개(花開). 자는 우림(于霖), 호는 창강(滄江), 당호는 소호당주인(韶濩堂主人). 경기도 개성 출생. 아버지는 개성부(開城府) 분감역(分監役) 김익복(金益福)이고, 어머니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윤희락(尹禧樂)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소년시절부터 고문과 한시를 공부해서 1866년(고종 3) 17세의 나이로 성균초시(成均初試)에 합격했다. 20대 전후에 이건창(李建昌)과 교유를 가지면서 문명(文名)을 얻기 시작했다. 34세인 1883년(고종 20) 김윤식(金允植)의 추천으로 당시 서울에 와 있던 중국의 진보적인 지식인 장첸[張騫]과 알게 되었다. 장첸은 그의 시문을 격찬했다. 1891년(고종 28)에 42세로 진사가 되고, 1894년(고종 31) 편사국주사(編史局主事), 1895년(고종 32) 중추원서기관(中樞院書記官)을 지내고 이듬해 낙향했다. 1903(광무 7)년 다시 홍문관 찬집소(纂集所)에 보직되어 『문헌비고』속찬위원(續撰委員)으로 있으면서 통정대부에 올랐다. 1905년(광무 9) 학부 편집위원이 되었으나, 이 해 겨울에 사직했다. 을사조약으로 국가의 장래를 통탄하다가 1905년(광무 9)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양쯔강[揚子江] 하류 난퉁[南通]에서 장첸의 협조로 출판소의 일을 보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이 시기에 그는 창작활동과 병행해서 한문학에 대한 정리·평가와 역사 서술에 힘을 기울였다. 한편, 이승만(李承晩) 등과 관계가 있어 중화민국정부에 우리나라 독립 지원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썼다. 중국의 계몽사상가인 량치차오[梁啓超]·장핑린[章炳麟] 등과도 교유가 있었다. 김택영은 한문학사의 종막을 장식하는 대가로서 시에서의 황현(黃玹)과 문(文)에서의 이건창과 병칭된다. 그는 고문가(古文家)로서 문장일도(文章一道)를 주장하였으며, 우리나라 고문의 전통과 맥락을 독자적으로 체계화시켰다. 이것이 『여한구가문초(麗韓九家文鈔)』이다. 그의 시는 호방하고 화려하여 신운(神韻)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중국 망명 이후에는 주로 우국적인 시작품을 많이 썼다. 특히, 망국의 한을 작품 속에 담아 내어 지식인으로서의 고뇌를 표출 하였다. 「오호부(嗚呼賦)」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그의 역사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문은 명나라의 귀유광(歸有光)과 박지원(朴趾源)의 문장을 좋아하여 웅혼한 기상이 있다. 저서로는 『한국역대소사(韓國歷代小史)』·『한사경(韓史綮)』·『교정삼국사기(校正三國史記)』 등이 있고 시문집으로 『창강고(滄江稿)』와 『소호당집(韶濩堂集)』이 있다. 상훈과 추모 2018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기려수필(騎驢隨筆)』 「김택영전 연구」(이상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2) 「창강 김택영론」(오윤희,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1) 「영재 이건창과 창강 김택영의 고문관」(김도련,『한국학논총』3, 국민대학교, 1980) 「개화기의 한문학」(민병수,『국어국문학』68·69, 1975) 「근한한문학에 대한 일고찰」(권오돈,『인문과학』5, 1960) 관련이미지 3                               이미지 이전 한사경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詩有聲先而意隨者。如明月松間照。若就明字。易以皎字或寒字。可能有天然之意乎。亦有意先而聲隨者。如愁思看春不當春。若將一春字。作椿字讀。則雖利口。必不能諧律矣。 시에는 먼저 소리가 있고 뜻이 따라가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명월송간조(밝은 달이 소나무 사이를 비춘다)”에서 明자를 皎나 寒으로 바꾼다면 천연의 뜻이 있지 않겠는가마는 그것은 또한 뜻이 먼저요 소리가 따르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추사간춘부당춘(시름겨운 생각에 봄을 보아도 봄인 것 같지 않다)”에서 만약 春 한 글자를 가져다가 椿으로 하여 읽으면 비록 발음에는 이롭겠지만 반드시 음률에는 맞지 않는다.   吾邦盖在上古之世。只有方言而無文字。其有文字自箕子始。則吾邦字音。卽箕子之所授也。而今其字音。與中國大異而小同者何。吾嘗思之。盖始同而後變耳。安徽王饒生聞余讀書曰。某字某字。是中國之古音。夫中音有古今之變。則東音何獨不然。故今之不同者。卽互失其本音故也。惟吾邦入聲字音。似與中國絶異。然徐而尋之。特其音太猛而已。亦未甞絶異也。 우리나라는 대개 상고때에 단지 방언만 있고 문자는 없었다. 문자가 있게 된 것은 기자로부터 시작하니 우리나라 글자의 음은 기자에게 받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글자의 음이 중국과 매우 다르고 같은 것은 거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내가 생각해 보니 대개 처음에는 같다가 나중에 변했을 뿐이다. 안휘의 왕요생이 내가 글 읽는 것을 듣더니 말하기를 “무슨 무슨 글자는 중국의 고음입니다.”하였다. 무릇 중국의 음이 고금의 변화가 있었으니 우리나라 음이 어찌 홀로 그렇지 않겠는가? 서로 그 본음을 잃어버린 까닭이다. 오직 우리나라의 입성 글자의 음은 중국과 완전히 다르지만, 천천히 찾아보면 특별히 그 음이 매우 사나울 뿐이지 또한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다.
7492    [그것이 알고싶다] - 우주에서 만든 맥주의 맛???... 댓글:  조회:3419  추천:0  2019-12-06
감정표현 AI 로봇·맥주 원료 우주로 보낸 이유는? 2019.12.06.    후속기사원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NASA, 화물선 `드래건` 발사 인간과 대화 가능한 AI 로봇 3년간 ISS서 우주인과 협업 버드와이저 맥아·양조장비 화성에서 맥주 생산 목표 감정 표현이 가능한 IBM의 인공지능 로봇 사이먼2. [사진 제공 = 독일항공우주센터 국제우주정거장]우주비행사들이 기쁨과 슬픔 등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인공지능(AI) 로봇과 함께한다면 어떤 심리적인 변화가 나타날까. 우주에서 맥주를 양조하면 어떤 맛일까.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과학자들이 감정 표현이 가능한 AI 로봇과 맥주 빚을 보리를 우주로 보냈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5일(현지시간)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새로운 우주과학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세계 각국의 실험 장비를 실은 화물선 '드래건(CRS-19)'을 성공적으로 발사했다고 밝혔다. 드래건은 스페이스X의 재사용 로켓 '팰컨9'에 실려 이날 낮 12시 51분께 미국 플로리다주 케이프커내버럴 공군기지에서 발사됐다. 총 38종의 실험 장비가 실렸고, 이 중 23종은 ISS에 보내는 새로운 실험 장비다. 독일항공우주센터(DLR)는 이번에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AI 로봇을 처음 우주로 보냈다. 우주 환경에서 인간과 로봇이 어떻게 협력하고 상호작용하는지 시험하기 위해 IBM이 개발한 모니터 형태의 AI 로봇 '사이먼2'를 투입했다. 이전 모델인 사이먼은 단순히 업무만 보조했지만 사이먼2에는 감정 표현과 공감 기능이 추가됐다. IBM은 "사이먼2는 우주비행사들의 감정을 파악하고 반응할 수 있어 대화 파트너도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사이먼2는 향후 3년간 ISS에서 우주인들과 생활하며 임무를 수행할 예정이다. 2030년대 화성에 맥주를 공급하기 위한 버드와이저의 우주 맥주 실험 장비. [사진 제공 = 독일항공우주센터 국제우주정거장]'버드와이저'로 대표되는 미국 맥주 제조 업체 앤하이저부시는 우주의 무중력 환경이 보리와 맥주 양조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 위해 보리와 특수 설계된 버드와이저 양조 장비를 보냈다. 버드와이저는 2030년대 인류의 화성 식민지 건설에 대비해 화성에 맥주를 공급하겠다는 목표로 2017년부터 ISS에서 맥주 실험을 추진 중이다. 이들은 이번 임무를 통해 무중력 상태에서의 맥아 제조법을 본격적으로 연구한다. 맥아 제조는 맥주 양조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계다. 리카르도 마르케스 버드와이저 부회장은 "버드와이저는 화성에서 양조하는 첫 맥주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 밖에 우주 환경에서 근육·뼈 손실을 연구하기 위한 실험 쥐 40마리와 우주인들의 안전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불꽃 확산 실험 장비, 멕시코 학생들이 개발한 초소형 통신위성 'Az테크샛-1' 등이 실렸다. 이 과학 장비들은 8일 ISS에 도착할 예정이다. 현재 ISS에는 총 6명의 우주비행사가 체류하고 있다. 드래건은 ISS에서 진행 중인 과학 실험 결과물 등 54종의 샘플을 싣고 지구로 귀환할 예정이다.  /송경은 기자
7491    길에 길을 묻다... 댓글:  조회:1446  추천:0  2019-12-05
길에 길을 묻다 (외7수)                                      金勝鍾 길... 가끔, 사(寺)의 풍경소리와 시(詩)속에서의 를 철철철 들어보신적 있으십니까 길 하나... 재너머, 금싸래기의 긴 한숨과 은방울소리의 성스러움이 저기 저 보리밭을 꿰질러 간, 녹이 덕지덕지 슬은 오솔길을 너울너울 톺는것을 보신적 있으십니까 길 둘... 재너머너머, 유치원돌에서는 물짜장구치기- 일학년돌에서는 개발헤염치기- 이학년돌에서는 밴대헤염치기- 삼학년돌에서는 줄바헤염치기- 사학년돌에서는 메드레헴치기- 여보소, 헴 배워주시던 죽림동 후나미(后男)누나는 어디에 그 어디에 계십니까 길 셋... 재너머 또 너머, 한때는 쏘련홍군비행기가 이 구멍에서 저 구멍으로 들락거리던... 한때는 미군비행기(쌕쌔기)가 저 눈가에서 이 눈가에로 곤두박질하던... 수십년의 두만강 압록강 단교(斷橋)는 이 내눈굽의 티눈으로 꽃핀지 오래고... 천년의 침묵은 자유의 려정에 흐드러지고,ㅡ 길 넷... 재너머 또 너머 그 너머, 문을 안쪽에서 잠구는 이이다가 문을 바깥쪽에서 잠구는 이이다가 문고리를 잡은 이이다가 문고리를 잡자는 이이다가 문지기는 함구무언 묵묵부답... 길 다섯... 아희야, 재너머,- 산은 경계선 된것을 모른채 면면히 소리치고 강은 철책선 된것도 모른채 유유히 흐르고 호수는 허리가 반으로 잘리운지도 모른채 처절히 넘실대고 바다는 그 무슨 선(線)이 새하야니 긋어져 있는지도 모른채 한악스레 한악스레 아우성친다... 길과 길은 길을 데리고 길과 길은 길을 물으며,- 거문고야 배낭을 챙겨라... 가야금아 보리떡도,- 길 ... 가끔, 이 섶다리를 싱겅싱겅 건너 저 징검다리로 건너보고싶어짐은 또,- 그리고,ㅡ 이 섬과 저 섬 사이에도... 여보소,- 당신의 길과 그 길속의 길은 무사하니껴... 넋 한점이라도... 오늘도 역시 흐른다 올리 흐르고 내리 흐르고 또,- 가로 흐르고 세로 흐르고 동서중남북 흐르고... 오늘도 찬란히 흐른다 빨갛게 흐르고 파랗게 흐르고 노랗게 흐르고 하얗게 흐르고 까맣게 흐르고... 신호등 숙제에 나머지공부하느라 드바쁘고... 오늘도 처절히 흐른다 왕방울눈이 되여 흐르고 뒷꽁무니 그으름내 피우며 흐르고 샅타구니 피비린내 선보이며 흐르고 소리 소리도 소소리 장송곡속에서 흐르고... 쉿,ㅡ 량켠 인행도 기슭,- 빨강 바위 파랑 너설 노랑 바위장 하양 여울목 까망 옹두라지 문득 선뜩 요리조리 발부리를 잡는다... 온 하루 돌장 굽이굽이 돌아 반두질 투망질 낚시질해도 그으름내 피비린내 들숨날숨일뿐,- 돌쫑개며 버들치며 산천어며... 그 어떤 그림자꼬투리 넋 한점도 없다... 오늘도, 당신의 십자거리는 무사하니껴... 넋을 세탁하기 서시장에 갔다오면 명표 세탁기는 늘 바쁘다 소음을 꼬장꼬장 엿들은 귀이다가 그으름을 할금할금 훔친 코이다가 방부제에 꺼이꺼이 게발린 입이다가 금싸래기에 호락호락 홀리운 눈이다가 두루뭉실 썩썩 떼어내여 와락와락 세탁시킨다... 핫,- 이제 서시장에 갈 때면 아예 머리를 살짝쿵 떼어내여 녹스른 랭동고에 보관하기로 했다... 오늘도, 당신의 머리는 무사하니껴... 용정송(龍井頌) 아득히 펼쳐진 만무과원에  웃음꽃 피여나는 곳 룡두레우물가에  아름다운 멜로디가 흘러흐르네 둥기당당 가야금의 고향  만방에 전해가는 곳 슬기로운 우리 민족 그 기상 떨쳐간다네 유서깊은 문화의 고향 룡정이여 해란강의 새 전설  아리랑과 함께  천만년 울러퍼져라 기름진 세전이벌 록색입쌀  어공미로 소문난 곳 일송정기슭 너머  향기로운 사과배도 넘쳐난다네 천불지산 송이버섯의 고향  만방에 전해가는 곳 슬기로운 우리 민족 그 기상 떨쳐간다네 유서깊은 행복의 고향 룡정이여 해란강의 새 전설  아리랑과 함께  천만년 울려퍼져라 바위 그리고... 이 거리 저 거리 온통 바람투성이 바람의 뒷모습에는 그림자도 없고지고... 바위에게도 억겁의 바람주머니가 항용 비워있고지고... 아희야 공룡화석아 어절쑤 나와 놀아나보쟈... 바위와 그리고 또... 바위가 체포되여 이 거리 저거리에서 처절히 처절히 하아얗게 조림당하고지고... 억겁의 보자기속에 억만년전 공룡의 이야기 스리스리 슬쩍 귀가에 눈시울에 밟혀오고... 바람의 뒷모습에 락서 몇장이 백팔배 하느라 찬란히 찬란히 오체투지 부산을 떨고지고... 오호라 바람과 바람꽃 너머 넘어 마음과 마음의 거리를 지나 바위가 또 체포되여 오고지고...          "부끄러움"의 美 엊그제 그 어느 날, 반도의 반(半) 이방 영화관에서 경건히 "동주"를 보았다 온통  "흑백"과  "흐느낌"이였다 헐벗은 손과 손마다  이슬 맺힌 별들을  한 둬어큼씩 쥐고 떠나고 있었다... "...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ㅡ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중에서. 또 그 어느 날, 한옥의 "륙첩방"에서 경경열열 "동주"를 재다시 모셨다... 온통  "부끄러움"과  "부르짖음"이였다... 륙도하가를 거닐던 시지기는 그날 온 밤 새벽녘 너머 북두칠성과 함께  반쪼가리 시 락서장을 짓찌져 불사르고 있었다... 검정말을 잃고... ㅡ고 한춘스승님께                              그날 따라 유난히 비가 짖찌져지고 있었습니다... 비물 밟는 이내 발길이 참 무겁기만 하였습니다   신문사로 향하여져야 할 발길이였습니다 대학가로 향하여져야 할 발길이였습니다 세미나실로 향하여져야 할 발길이였습니다 중앙대가로 향하여져야 할 발길이였습니다 선술집으로 향하여져야 할 발길이였습니다 하지만 하지만,ㅡ 그날, 낯설은 홍십자로 향해지는 열둬가락 발길이 참 무섭기만 하였습니다 천갈래만갈래 손톱여물 참 피멍든지 오랩니다 ... 송화강반에서 효용하던 검정말이였습니다 북방의 하늘에서 별을 따던 시채굴인이였습니다
7490    아버님, 이를 어찌 하람니껴... 댓글:  조회:1593  추천:0  2019-12-04
아버님, 이를 어찌 하람니껴...(외4수)                                          # 죽림   버빡골연에서 두 잎사귀 쫑긋 두만강 따라 그 두잎은 저쪽 이 쪽...   어떤 첫잎은 더하기 입 어떤 샛잎은 덜기 입 어떤 속잎은 나누기 입 어떤 떡잎은 곱하기 입 ...   어느 날 평방메터 잎과 어느 날 립방메터 잎새와 어느 날 미적분 수렬 입과 여러 구멍에서 나온 입과 파아란 하늘 향한 꺼무접접히 태래쳐오르는 저 구새통 입과...   오늘도 버빡골 벗님네들,-  잎과 입과 입과 잎은 무사함니껴 요지음 울 집 구구 비둘기 그렇게도 고소하다던 콩도  지릿지릿 고름 농즙맛이라 맨날 투정질한다아임껴... 아버님, 이를 어찌 하람니껴...   아버님, 정통편 있씀둥...   저 파아란 하늘 향하였었지 이 희불그레한 원통 속 쇠물 녹이였었지 광풍속에서 대식품과 벗했었지 회억대비 풋대죽과 함께  "혁명" 외쳤었지 응아응아 소소리 새벽장막 귀가에 달아매고 저 두만강 건너 호곡령 너머  새하야니 새하야니  감자꽃 피기전 서리에 나섰었지   오호라- 버뻑골연 울 아버님께 ㅡ"...정통편 있씀둥? ...사랑하꾸매..." 이 둬어마디 살가운 말이라도 처절히 찬란히 뻥긋 못한 이 막내 아들 불효자식 죄인을 수배한다아임껴... 아버님, 이를 어찌 하람니껴...   "아버님표" 군주름살   왕할배 곱사등 지게에 얹혀 허위허위 두만강 색시구비 건너 버빡골연 처처 모기쑥타래 흥건히 흥건히 나붓겼다...   울 할배 흰두루마기에 휘익휘익 휘감기며  보리고개 기웃기웃 죽림골 막치기 넘어 핫젖은 저고리옷고름과 노을자락으로 나붓꼈다...   휘모리장단에 강강술래 부르던 석쉼한 목소리가  휘익- 휙 뒤바뀌여 "혁명" "혁명" 외치며  그 무슨 제전을 답쌓이기도 하며 그 멋쟁이 범바위도 다아 까부셔던 울 아버지 그때는 그때는 들숨 날숨 엎치락뒤치락 했었지...   귀머거리의 씨실과 날실도 벙어리의 손짖과 발질도 장님의 더듬질과 돌기물질도 고사리고개 너머 도라지재 넘어 아리랑 구성지게 부르며 풋옥수수와 함께 화토불에 찬란히 굽히고지고...   여보소 버빡골 벗님네들,- 오늘도 이 시지기는 꿈결에도 꿈땜에도 "아버님표"  군주름살을 오리오리 다림질못해 슬프디 슬프디 울고지고... 아버님, 이를 어찌 하람니껴...   매돌 찾아 구만팔천리   버빡골연에서 오선생님 늘 얘기하던 어느 바다이다가 우물집 소설쟁이 항용 펼쳐보이던 소설속 바다이다가 아버지 엄마의 혈세로 말타고 꽃구경하며 눈꼽에 붙었던 천진 당고 대련 려순 두루두루 앞바다 뒷바다이다가 니엿니엿 두만강 건너  꼬장꼬장 버빡골 넘어 녹쓰름이 덕지덕지한 라진 선봉 비파도 유희장 옆바다이다가 천불지산 사과배꽃 고향살자 새초롬히 뿌리치고 날아가고 날아오며 소금꽃 서걱서걱대는 인천 단동 위해 연태 청도 너덜너덜 트렁크행진곡에 맞추어 손톱 발톱 허파 여물목 짛고 빻고 깨던 달빛에 그을린 그림자 바다이다가 반의 반의 반도에서 꿔온 보리짝 신세타령하며 눈물젖은 포항 울진 군산 강구 강릉 해운대 처절썩처절썩 정나미 삭고 곰삭은 응어리진 리산이방인의 바다이다가... ...   여보소 버빡골 벗님네들,- 오늘도 이 텁석부리 시지기는 "록색"이라는 매돌 암짝과 "평화"라는 매돌 숫짝을 찾아 구만팔천리 버빡골연과 맘바다에서 헤매며지고... 아버님, 이를 어찌 하람니껴...   오늘도 청석매돌 돌리며 버빡골연에서 늘 바다구경 하고싶다던 그 해돋이 해넘이 눈뿌리를 앗는 바다를 두만강역 죽림골 촌지서네 막내녀석이 아버님 눈가에 철썩 쨍그란히 달아주지 못해 매양 소금매돌 손바닥 부르트도록 돌림을 아버님, 아버님 이를 어찌하랍니껴...   저기 저 경계선도 모르고 처절썩처절썩 태질해대는 서해를 빙빙 에둘러 다녀야 함을, 아버님, 아버님 이 어리석은 날바다를 어디에다 그 어디에다 콱 담아둬랍니껴...   태고에 없었던 온갖 요지경들과 불가사리들을 녹쓸어가는 철궤에 담아들고 서로서로 넉살좋게 으시대는 꼬락서니를 설설 걸러치우는 바다뜰채나 날바다투망따위를 아버님 그 어디에 그 어느 시렁위에 그렇게도 낯설게 꽁꽁 얹혀두셨습니껴...   아버님, 아- 버- 님,- 이러구러 철부지 막내녀석 텁썩부리 시지기이라는 눔애가 바다귀신 씨나락 까먹듯 한다는 "시시한" 바다 시를 호주머니와 배낭에서 항용 소소리 만지작만지작거려도 가시돋힌 철책선 맘바다 한구석에서는 오늘 따라 오늘도 꿈결에도 시큼털털한 바다소금과 찝찌레한 불효도소금을 공룡화석이 천만억겁 들어박힌 청석매돌로 이내 손바닥이 터실터실 부르트도록 드르륵스르륵 돌리며 갈고지고 스르륵드르륵 갈며 돌리고지고... 아희야ㅡ 버빡골 아버님,-  아버님, 이를 또, 또한 어찌하랍니껴... 죽림 김승종 프로필   1963년, 화룡 두만강역 로과 출생. 전 화룡시작가협회 주석, 연변작가협회 리사, 룡정'윤동주연구회 회원, 중국소수민족작가연구중심 회원,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보리 한알과 등록되잖은 ®와 일회용 삶", "보리깜부기와 구혼광고와 흰 그림자의 삶", "시천하루밤과 시작노트와 시지기 삶", "우물 일곱개였던 마을과 삶(지용문학상 수상작품집)" 등 시집, 론저 출간. 두만강여울소리 시우수상, 연변작가협회 인터넷 문학상, 연변일보 해란강 문학상, 연변 정지용문학상, 중국조선족대학생리육사문학제 유치 공로상 등 다수 수상.     시음병자(詩淫病者) 시지기-죽림 넋두리: 시를 쓴다는것은 자기의 생애를 걸고 벼랑길을 톺는 모험이라고나 할가,  자기의 피를 빨아 먹으며, 자기의 살점을 뜯어 먹으며, 자기의 뼈를 갉아 먹으면서 일체를 분신하는 인생수업의 길임을 처절히 말하고싶다... 그 길을 이 텁썩부리 시지기는 뚜벅뚜벅 가고싶다... 그리고 뚜벅뚜벅 갈것이다... "송화강" 2019년 2기.      
7489    "하늘나라 천사가 눈 뜨는 별" 댓글:  조회:2344  추천:0  2019-12-04
[평론] ‘광란’ 속의 동요와 동시   1. 서론 문학발전사의 시각으로부터 보면 해방전 조선인문학은 망명문학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해방전 조선인문학은 사실상 비교적 긴 력사를 가지고 있지만 만약 단독적으로 동요나 동시를 실례로 든다면 다른 상황으로 될 것이다. 왜냐 하면 문학발전사를 근거로 하여도 망명문학시기에는 동요나 동시와 같은 아동문학이 탄생되기 힘든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방전 조선인문학은 비교적 긴 력사를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동요나 동시 같은 아동문학은 사실상 1920년도 즉 이민문학단계에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되였다고 보아야 한다. 상기에 언급한 것을 기초로 하여 본문에서는 당시 위만주국에서 동요나 동시와 같은 아동문학을 언급하였던 《북향》, 《카톨릭소년》, 《만몽일보》, 《만선일보》등을 대상으로 하였다. 2. 동요, 동시와 동심 우선 동요와 동시에 대해 리해하려면 아동문학에 대해 리해하여야 한다. 아동문학이란 어린이들한테 즐거움을 주는 것을 의의로 하고 어린이들의 심신의 긴장을 풀고 욕구불만을 해소함으로써 정신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문학형식이다. 1930년대 이전까지 동요와 동시는 정확히 구분되지 않은 두 분야였다. 이러한 경향은 1950―1960년대 초기까지 지속되였는데 심지어 많은 자유시들은 동요라는 이름을 달고 발표되였고 동요 모집 콩쿠르에서 동시와 동요를 통털어 이야기하는 경향이 존재하기도 하였다.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자유로운 표현을 할 수 있는 동시에 애착이 더 가면서 1980년대 동시 문학이 소실되는 위기에 도달하자 1981년에 ‘동요로 돌아가자’는 〈동요문학〉선언을 공포하고 동요의 참담한 모습을 되돌리기 시작하였다. 상술한 내용을 근거로 하여보면 본문에서는 해방전 동요와 동시를 동시에 언급하여도 모순이 되지 않는다고 보고 1930년부터 1940년까지 어둡고 슬픈 ‘광란’의 년대라고 불릴 수 있는 시기에 태여난 순수하고 깨끗한 ‘평심’을 위하여 창작된 동요와 동시들에 대해 론술을 진행하였다. 3. 북향회의 기관지ㅡ《북향》 《북향》은 1935년 10월에 룡정에서 무어진 문학단체 ‘북향회’에서 꾸린 문학잡지로서 도합 4호를 내였는데 주필은 리주복이고 편집위원들로는 안수길, 천청송, 김유훈 등이였다. 방울(동요) 정룡화 방울방울 무슨 방울/ 땡굴땡굴/ 왕방울// 방울방울 무슨 방울/ 떨렁떨렁/ 말방울// ―《북향》 제3호 여기서 왕방울과 말방울의 소리를 ‘땡굴땡굴’이나 ‘떨렁떨렁’과 같은 의성어를 사용하면서 어른들은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소리에 어린이들의 순수하고 호기심이 많은 동심을 나타냈다. 다음 동요 〈골방쥐〉를 보자. 골방쥐(동요) 김릉 좁쌀단지에 골방쥐 드럿다/ 일 안하고도 먹고만 노는 놈/ 때려잡아라 에이차 에이차// 불눅뱃둑이 골방쥐 달는다/ 일 안하고도 훔처만 먹는 놈/ 쪼처가거라 하나둘 하나둘// ―《북향》 제3호 1934. 9. 25 여기서 말하는 골방쥐는 순 우리말로써 골방이나 지붕에서 사는 쥐를 말한다. 동요 〈골방쥐〉에서는 일을 하지 않고도 좁쌀단지에서 먹을 것을 탐내는 쥐를 보면서 이것을 때려잡아라고 “에이차, 에이차” 소리를 친다. 또한 제2련에서는 좁쌀단지에서 좁쌀을 훔쳐먹은 관계로 인하여 불눅(불룩)하게 뱃둑(배)이 나온 골방쥐를 “하나둘, 하나둘” 하면서 쫓아가는 모습을 생동하게 그렸다. 상기에 언급한 것과 같이 〈골방쥐〉에서는 일상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는 작은 일을 생동하게 묘사하면서 동심을 만족시켰다. 4. 카톨릭소년사에서 발행한 《카톨릭소년》 《카톨릭소년》은 간도 룡정천주교회 카톨릭소년사에서 1936년 2월에 발행한 아동잡지이다. 도합 9호를 내고 1938년 9월에 페간되였다. 창간시기의 사장은 배광피, 총장은 독일인 철학박사 백주교(白主教)이며 주필은 황덕영이였다. 우선 동시 〈별〉을 보자. 별(동시) 방수룡 반작! 반작!/ 저녁하늘에 별들이 반작!/ 하늘나라 천사가 눈 뜨는 거래// 총 3구절로 구성된 동시〈별〉이다. 카톨릭소년사의 성질에 맞추어 천사라는 추상적인 요소를 사용하였다. 이 시에서는 저녁에만 볼 수 있는 별을 천사가 눈을 뜬다는 것에 비유를 시켰는데 이는 동심에서 많이 나올 수 있는 비론리적인 유희색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두운 밤하늘에서 나타나고 있는 별들을 천사가 눈을 깜빡이는 모습으로 비유를 하는 것과 같이 비론리적이지만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을 호상 련결시키는 것이야말로 동시의 묘미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동시 〈가랑닙〉을 보자. 가랑닙(동시) 방수룡 욹읏붉읏 고읍게 물든 가랑닙/ 가랑닙 하나 주어 편지할가요/ 여기두 지금은 가을이라구/ 시골 게신 엄마한테 편지할가요// 욹읏뷹읏 고읍게 물든 가랑닙/ 가랑닙 하나 주어 편지할가요/ 나두 이런 꼭까옷을 입엇다구요/ 서울 게신 누나한테 편지할가요// 〈가랑닙〉에서 우리가 먼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우에서 언급하였던 〈별〉과 〈눈 내리는 저녁〉과는 달리 종교적인 요소가 나타나지 않았다. 전체적인 시의 내용을 보면 가을의 단풍잎을 손에 들고 고향에 계신 엄마와 누나한테 편지를 쓰려는 것이다. 하지만 시골은 이미 가을이 되였는데 시적 주인공이 생활하고 있는 곳도 가을이 되였다고 편지를 쓰려 하는 모습, ‘꼭까옷(고운 옷)’을 입을 수 있게 되여 기쁜 마음으로 서울에 있는 누나한테 편지를 쓰는 모습 등을 통해서 새로운 것을 접촉하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려는 어린 아이의 해맑은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5. 《만선일보》와 《만몽일보》 여기서 말하는 《만몽일보》는 《만선일보》의 전신으로서 1933년 8월 25일에 창간되였고 1937년 10월 21일부터 《간도일보》와 더불어 《만선일보》로 제호를 바꾸었다. 《만몽일보》는 일제강점기에 위만주국 신경에서 발행된 친일 일간신문이고 《만선일보》로 제호를 바꾸고 난 후에는 평균 일주일간으로 진행되였고 1945년까지 어언 8년을 출간하였다. 우선 〈오리〉를 보자. 오리 리광현 돌돌돌돌 물소리 따라/ 아장아장 거러가지/ 오리오리 물오리가/ 물을 따라 차저가지// 돌돌돌돌 물소리 따라/ 갸웃갸웃 살펴보지/ 물이물이 어듸 잇나/ 아장아장 차저가지// 돌돌돌돌 물소리따라/ 오리오리 아장아장/ 물이물이 그리워서/ 소리차저 쭝긋쭝긋// ―《만몽일보》1937. 7. 21 〈오리〉는 내물가에서 걸어다니고 있는 오리를 보고 묘사하였다. 〈둥근달님〉과 마찬가지로 어른들이 흔히 지나치기 쉬운 자연의 흐름이나 사물의 특징을 어린이다운 시선 속에서 새롭게 되살리고 있고 ‘돌돌돌돌, 아장아장, 갸웃갸웃’과 같은 소리나 동작을 묘사하는 반복어와 ‘오리오리, 물이물이’와 같은 방식으로 동심을 잘 나타내고 있다. 다음으로 《만선일보》에 수록된 〈누가누가 잠자나〉를 보자. 누가누가 잠자나 리우범 끗도 없는 밤하날엔/ 누가누가 잠자-나/ 빤짝빤짝 아기별님/ 까물까물 잠자-지// 우수수한 숩속에선/ 누가누가 잠자-나/ 엄마 일흔 참새아기/ 바들바들 잠자-지// 포근포근 이불밋헨/ 누가누가 잠자-나/ 오동보동 우리 아기/ 새근새근 잠자-지// ―《만선일보》1940. 3. 3 시 전체를 놓고 보면 어른의 시각으로부터 ‘우리 아기’가 잠자는 모습에 대해 묘사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밖에서 ‘까물까물’ 잠자는 별과 ‘바들바들’ 잠자는 참새와는 달리 ‘포근포근’한 이불 밑에서 ‘새근새근’ 잠자고 있는 ‘오동보동(포동포동)’한 아이이다. 작품은 전체적인 묘사를 진행하면서 집이야말로 따스하고 포근함을 줄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6. 결론 우에서 론술한 것을 기초로 보면 그 당시의 정치적인 색채가 많이 나타나지 않았거나 심각한 내용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아동문학이라는 천성적인 속성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자주 보는 ‘성인문학’과는 다른 심리적 각도가 기초로 될 것이고 이러한 기초로 인하여 어린아이들이 많이 가지고 있는 순수함과 다종다양한 환상이 주류로 되고 있다. 이러한 원인으로 인하여 그 당시의 의식형태와 제도의 공해도 보다 적게 받고 순수하고 투명하고 아름다운 심리세계가 나타나고 비리성적인 사유의 단계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춘련
7488    글쟁이들과 조선말규범... 댓글:  조회:2488  추천:0  2019-12-04
글쟁이들의 직업정신□ 리련화 풍향계 2019-11-29 10:25:15     글쟁이들의 직업정신 / 리련화 취재통지가 오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이 주최측(主办单位), 주관측(承办单位)에 대한 정보이다. 그런데 행사에 가보면 프랑카드에 버젓이 주최측과 주관측을 바꿔 쓴 사례가 많다.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주최’란 “행사나 모임을 주장하고 기획하여 엶.”이고 ‘주관’은 “어떤 일을 책임을 지고 맡아 관리함.”이다. 굳이 간단한 비유를 하자면 아버지께서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였고 손님접대, 음식준비는 어머니가 하였다고 하면 아버지는 주최측이 되고 어머니는 주관측이 된다. 우리 기자들도 헛갈릴 때가 많아서 ‘최관협’이라고 외우기도 한다. 행정사업을 하는 친구들은 가끔씩 회의 혹은 행사 프랑카드 번역을 나에게 물어보면서 페를 끼친다고 미안해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가슴을 치며 “이런 번역은 나한테 맡겨!” 하고 오지랖 넓게 나선다. 내가 번역을 잘한다기보다는 《연변일보》 기자로서 알맞는 번역과 옳바른 표기법에 자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2016년 새로운 《조선말규범집》이 출판된 후 《연변일보》에서는 통일적인 학습시간을 갖고 테스트까지 진행했다. 그만큼 《연변일보》는 정통일간지로서 장기간 우리 말, 우리 글의 옳바른 표기법의 든든한 기치로 앞장서왔다. 가끔씩 일부 독자들이 전화가 와서 나의 글을 지적한다. 그런데 그 지적이 아무 근거가 없는, 자신만의 자대로 지적하는 것이라서 나는 당당히 반박한다. “저는 새로 나온 조선말규범집에 근거해서 쓴 겁니다. 그 책을 학습했으면 좋겠네요.” 《조선말규범집》은 약 23만자 분량이다. 책을 펼치노라면 새롭게 바뀐 규범들이 눈에 띈다. 특히 문장부호가 많이 바뀌였다. 례를 들어 도서, 신문잡지의 이름과 영화, 드라마 등은 《》부호이고 글제목, 그림이나 노래와 같은 예술작품의 제목, 상호, 법률, 규정 등을 나타낼 때는 부호를 쓴다. 물론 언어문자는 사회적 속성을 띠였기 때문에 시대의 발전과 더불어 자주 변화한다. 우리의 언어도 10년 사이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럴수록 우리에게는 언어규범이 더 필요하다. 조선어규범이 새롭게 바뀐 지도 3년이 다돼간다. 그럼에도 지금도 투고한 글을 받아보면 옛 기준 대로 쓴 작가들이 많다. 지어 옛 기준은커녕 틀린 철자가 수두룩한 문장도 많다. 아무리 훌륭한 문장이라 해도 틀린 철자를 보면 자연히 눈이 찌프러지기 마련이다. 문장의 가치도 자연히 감점이 된다. 가끔씩 문장부호 한곳 고칠 데 없이 물이 못나게 완성해서 보내온 글을 보면 그런 작가들에게는 존경심이 들고, 단정한 직업정신에 박수를 보내게 된다. 자연히 그런 글들은 소중히 다루게 된다. 조선말규범을 지키는 일은 편집만의 일이 아니다. 무릇 글을 쓴다면, 아니 조선족이라면 다 학습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작가들이 고심해서 쓰는 작품인데, 틈틈이 조선어규범을 학습해서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면 얼마나 좋을가 하는 바람이다. 작가들이, 기자들이, 더 나아가서 우리 글을 가르치는 교원들이 조선말규범을 학습하고 지키는 것은 자기 직업에 대한 근엄한 태도이자 자기 작품, 자기 학생에 대한 책임이다.
7487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동물보호",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179  추천:0  2019-12-04
  누가 북극곰 몸뚱이에 '소련 전차이름'을 새겼나  2019.12.04.   화나요 슬퍼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러시아에서 몸에 검정색 글씨가 선명하게 그려진 북극곰이 목격됐다. 영국 가디언 유튜브 갈무리. 러시아 북부 지역에서 몸뚱이에 글씨가 적힌 북극곰이 포착됐다. 영상 속 북극곰은 하얀 털 위에 또렷하게 보이는 검정 글씨 때문에 먹이를 찾거나 흰 눈 위에서 몸을 숨기는 데에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영국 가디언은 3일(현지시간) 몸에 ‘T-34’라는 글이 선명하게 적힌 북극곰의 영상을 공개했다. ‘T-34’는 2차대전 당시 소련군의 중형전차 이름으로, 일부 주민들은 전승기념일에 자동차에 새겨 2차대전 종전을 기념하기도 한다.  영상은 러시아 극동지역의 세계자연기금(WWF) 직원이 페이스북에 올린 것으로, 메신저를 통해 전달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 국영 생물연구소는 현재 이 영상이 찍힌 장소를 찾는 중이라며, 스프레이로 글씨를 적으려면 북극곰을 붙잡아 진정제를 주는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추정했다. 기후변화로 인해 북극곰과 사람의 접촉이 점점 잦아지고 있다. 북극곰들이 먹이를 찾아 마을로 내려오는 경우가 늘었기 때문이다. 북극해 인근 노바야제믈랴 제도의 한 마을에서는 올 2월에만 50마리가 넘는 북극곰이 목격됐다.  북극곰의 몸에 낙서를 한 것이 먹이를 찾으러 온 북극곰들에게 화가 난 주민이 저지른 짓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연구소 측은 인근 지역 주민들이 올 초 소란을 겪은 뒤 북극곰 접근 차단 조치를 강화한 바 있다면서 “겨울이 되면 이런 사례가 더 늘어날 수도 있다. 붙잡아서 진정제를 놓고 낙서를 하는 일은 최소한 과학자들이 할 행동은 아니다” 라고 밝혔다. /임소정 기자
7486    [그것이 알고싶다] - 베트남(월남) 통일 댓글:  조회:4239  추천:0  2019-12-02
    베트남과 우리나라 통일의 공통점 1.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로 나누어져 있었다. 2. 남북간의 왕래가 자유롭지 못했다.(독일은 서독과 동독이 왕래가 자유로웠음) 3. 한쪽의 나라는 다른 한쪽의 나라에 비해 잘 살지 못했다.(우리나라를 예로 들면 남한은 잘사는데 북한은 가난해서 다른 나라의 도움을 받았고, 베트남도 북쪽이 경제적으로는 어려웠음)   베트남과 우리나라 통일의 차이점 1. 우리나라는 통일을 하지 못했지만 베트남은 통일을 하였음. 2. 우리나라는 국제적인 위상이나 경제력에서 남쪽이 우월하고 군사력도 밀리지 않고 있지만, 베트남은 북쪽이 남쪽보다 우월해서 공산주의로 통일이 됨.   베트남의 통일에 대한 문제점 1. 무력에 의해 통일이 되었음. 2. 양측의 대화와 타협이 충분하지 않았음.   베트남의 통일로 본 우리의 자세 1. 힘이 있어야 통일을 함. 2. 가능하면 대화와 타협으로 통일을 해야 함. 3. 통일이후의 발전을 위해 미리 계획을 세움(남북간의 화해, 격차 해소 등)   * 참고자료 : 베트남의 역사와 통일과정   베트남의 역사는 약 4천년 정도로 추정되며 그들의 설화에 의하면 랑롱권과 어우꺼를 그들은 자기네 시조로 생각하고 있다. 베트남은 계속적으로 중국왕조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10세기 중반에 최초의 베트남 독립왕조를 세우려 했으나 이내 다시 중국 송나라의 지배에 들어간다.   11세기에 200여년을 지배한 리왕조, 13세기에 200여년을 지배한 쩐왕조, 호씨정권, 레왕조, 이후 16세기에 분열과 혼란의 시기를 맞는다.   17,8세기의 베트남 역사에 중대한 사실은 북쪽의 쩐씨와 남쪽의 우옌씨에 의해 베트남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18세기 말엽에 우옌왕조가 베트남을 재통일하게 되는데 마지막 왕조인 우옌왕조는 성립과정에 참여하게 되었던 프랑스 세력의 침입에 의해 1860년대에 절름발이 상태가 되고 1880년대에는 아르망 조약체결로 완전히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다.   1945년 3월 일본은 프랑스를 무력으로 격퇴하고 80여년의 프랑스의 베트남 통치를 종식시킨다. 8월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자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즉각 하노이를 장악하고 남부의 사이공까지 통제해 간다. 이것을 공산당은 8월 혁명이라 일컫는다. 9월2일 호치민은 하노이에서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한다.   그러나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빌미로 16도선의, 북에는 중국의 국민당 군대가, 남에는 영국군이 진주하고 뒤를 이어 프랑스가 자신의 유산임을 주장하면서 베트남에 되돌아오므로 대립과 투쟁은 또다시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를 몰아낸 제 1차 인도차이나 전쟁, 1968년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의 민족해방전선의 남베트남 공세로 인한 미국과의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마지막으로 1975년 싸이공이 북베트남에 함락되고 베트남은 공산주의 국가로의 통일을 맞이하게 된다.   * 자료 출처 : 지식인의 답변들 =========================/// 베트남은 전쟁으로 무력통일을 한 그런 나라죠. 좀 설명하자면   베트남은 원래 프랑스의 식민지였어요. 그런데 1941년 일본군이 인도차이나반도로 공격을 해와서 일본과 프랑스가 협약을 맺었는데 그 내용이 일본은 프랑스의 '형식적' 베트남 지배를 인정한다는 것이였거든요. 그 후 일본은 거의 모든 베트남내의 프랑스인들을 가두고 괴뢰정부(허수아비 정권) 를 수립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한건 아시죠? 그러면서 베트남에는 권력의 공백이 생기게 됩니다. 그 때 프랑스 파리에서 '호치민'이 돌아와서 베트민, 즉 베트남 공산주의 독립운동단체를 설립합니다. 베트민군은 일본 항복 후 며칠만에 베트남 북부를 장악하고 1945년 9월 2일 하노이에서 베트남 재통일과 독립을 선언합니다.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인 연합국들은 중국에게 베트남 문제를 떠넘깁니다. 중국군은 자기네들 세력이 뿌리박기 전까지는 프랑스인들을 풀어줄수 없다면서 그들을 계속 억류하고 있었고, 그 사이 베트민군이 점점 남쪽으로 세력을 뻗쳐왔습니다. 프랑스인들은 억류되어 있고, 중국은 실질적으로 통치를 하지 않으니 남부는 권력 공백상태가 되었죠. 그때서야 중국군은 프랑스인들을 풀어주어서 북부는 베트민 공산군, 남부는 프랑스가 장악합니다. 1946년 말에 그 둘 사이에 8년간 전쟁이 계속되었어요. 하지만 그 전쟁은 확실히 베트민군에게 유리했습니다. 유럽에 본국을 둔 프랑스로서는 베트남 재지배의 명분이 떳떳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후에 베트민군이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게되면서 프랑스의 요새 디엔비엔푸가 1954년 5월 함락됩니다. 하지만 베트남은 다시 남북으로 나누어집니다. 북쪽은 호치민이 대통령인 베트남인민공화국이, 남쪽은 괴뢰정권인 베트남공화국이 세워지죠. 프랑스는 패배후 발빠르게 베트남을 떠납니다. 어느새 베트남문제는 미국이 떠안고 있게됩니다. 미국은 반공주의자인 응오딘지엠을 총리로 내세웠지만 독재정치를 펼쳐 신뢰도가 바닥을 기었죠. 반면 북부에서는 토지개혁을 단행해 호치민의 인기가 계속 높아져만 갔습니다. 그러나 응오딘지엠은 정치, 경제 모두 무관심했을 뿐이었죠. 1959년에 북베트남은 민족해방전선, NLF. 흔히들 말하는 베트콩을 만들었습니다. 베트콩은 게릴라전으로 1960년대 초 남베트남의 많은 지역을 장악하고요. 그리고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군사개입을 시작해 통킹만 공습을 합니다. 남부는 혼란에 빠지게 되고, 응오딘지엠은 암살됩니다. 1969년 공산군은 더 강하게 공격해왔고 미국은 서서히 발을 뺄 준비를 합니다. 1973년 1월에는 미국과 베트콩 사이에 파리협정이 조인됩니다. 미군이 철수한다는 조건으로 공산군과 남베트남군도 휴전한다는 내용이었지만 미군이 떠난뒤 4월에 공산군은 총공격을 개시합니다. 1975년 4월 말 공산군이 사이공 대통령궁을 침입함으로써 베트남공화국은 멸망하고, 통일 베트남인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됩니다.   베트남은 통일을 위해 딱히 노력한건 아닙니다. 무력통일을 했으니까요. 또 여러 서방국가들에 의해 상당히 피해를 많이 봤으니까요.   긴글 다 읽으셨다면.. 어느정도 도움이 되셨을거라 믿습니다. 출처가로세로세계사 읽고.. ===========================/// 더욱이 미군이 철수한 시점에서 월맹은 총공세를 폅니다. 1974년 1월부터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과 남베트남 정부 간의 갈등은 다시 무력충돌로 확대되었다. 결국 북베트남은 1975년 대규모 공세를 벌여 그해 4월 30일 남베트남의 수도인 사이공을 점령했고, 남베트남의 대통령이던 즈엉반민의 항복을 받았다. 사이공이 점령된 뒤 남베트남공화국이 수립되었고, 1976년 7월 2일 남북 베트남이 통합해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을 수립하면서 베트남은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베트남전쟁 [Vietnam War] (두산백과)   더욱이 미군이 철수한 시점에서 월맹은 총공세를 폅니다. 자세한건 아래를..   미군 없는 월남은 빈 땅이나 마찬가지였다. 월맹은 앞에서는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뒤에서는 남베트남을 재차 침공할 준비를 했다. 침공 준비를 마치고 1975년 1월 시험삼아 푹룽 성(福隆省)을 공격하여 점령 한 뒤, 1975년 3월 월맹은 남베트남을 대대적으로 침공한다. 미국은 이왕 도와준 놈인데 그냥 손 빼기는 좀 찝찝했는지, 미군은 철수하면서 남베트남에게 많은 수의 무기를 공여했다. 남베트남이 그거 갖고 잘 싸우라는 거였는데... 1974년에 월맹군이 쳐들어 오자 대부분은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박살나버렸다. 결국, 남베트남군은 대패했고 월맹군은 미군 무기를 노획하여 남베트남군을 역공하는 사태까지 갔다.# 사실 미국이 무기는 줬지만, 이 무기들의 유지를 위한 예산 비용을 주지 않았다. 그 결과 남베트남군은 일상적인 전투에도 지장을 받을 지경이었다. 일례로 미군 철수 전에는 전투 한번에 100발을 쏘던 포대가 단 3발만을 쏠 수 있었다. 특히 유지 보수에 민감한 공군의 타격이 커서 전투기는 많았지만 부품과 기름, 탄약이 없어서 제대로 출격할 수 없었다. 급기야 C-130 수송기에서 폐유 드럼통과 폭탄을 함께 투하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본래 공산주의자로서 군 내에 위장 잠입해 있던 전투기 조종사가[52] 남베트남 대통령궁에 폭탄을 떨구고 월맹에 귀순하기도 했다. 조종사들이 출격을 위해 금전을 요구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래서인지 남베트남이 멸망할 때가 닥치자 태국이나 말레이시아까지 날아가서 태국 및 말레이시아에 망명한 조종사들이 수십명이다.[53] 공군 참모총 장이자 전 부통령 응우옌까오끼의 탈출 명령이 있었다고 한다. 귀중한 조종사와 전투기를 공산주의자에게 넘겨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던가[54].흠좀무. 이때 탈출한 항공기들은 태국이 임시로 보관하다가 미국에 반환하였다.[55] 보병들은 미군을 따라서 싸운 경험이 남아있었는지 공군 지원 없이는 한 발도 못 움직인다는 식으로 행동했다. 1975년 3월 초에야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은 더이상 지탱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국에 흩어진 군대를 재배치해서 좀 더 버텨보려고 시도했으나 이게 잘못되면서 오히려 패망을 앞당기는 자충수가 된다. 1975년 3월 10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남베트남군의 주요 거점지인 부온마투옷을 점령했고, 이로써 수도 사이공으로 가는 길을 확보한다. 미국 정부는 의회에 9억 7,200만 달러의 남베트남 지원 예산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의회는 더 이상의 예산 지원은 용납되지 않는다고 거부했다. 물론 남베트남군이 무능력했던 면도 있긴 했으나 그 밖에 지휘 체계의 붕괴와 전략, 전술적인 문제도 상당히 컸다. 보급과 병참이 여의치 않았던 데다, 월맹군의 대공세에 남베트남의 대통령 응우옌 반 티에우가 내린 무모한 철수 작전으로 인해 피난민들과 군이 뒤섞이는 대혼란에 빠지면서 일개 야전군이 월맹군의 공격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궤멸되어버렸다. 이 철수 작전의 문제점은 대규모 철수작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령관은 그 자리에 없었고, 사령관 대리는 막 진급해서 별을 단 여단급 지휘관에 불과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보안을 유지한답시고 철수 작전 자체가 부대장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았다(...) 이 재배치를 틈타서 호치민 루트로 우회해서 진격한 월맹군에 의해 이후 1, 2군단이 통째로 붕괴되고 휴전선인 북위 17도선과 중부 고원지대가 넘어가면서 남베트남은 막장으로 치닫게 된다. 결국 1975년 3월 26일 중부에 고립된 최대의 기지겸 도시인 다낭이 함락되고 남베트남군은 궤멸된다. /위키백과에서  ==========================/// 두산백과 베트남전쟁   [ Vietnam War음성듣기 ] 요약 베트남의 통일 과정에서 미국과 벌인 전쟁 (1960~1975). 이미지 크게보기 미토의 피난민 언제 1960∼1975년 어디서 베트남 누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과 북베트남 : 남베트남 정부군과 미국 왜 베트남의 통일 1960년에 결성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이 베트남의 완전한 독립과 통일을 위해 북베트남의 지원 아래 남베트남 정부와 이들을 지원한 미국과 벌인 전쟁이다.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프랑스와 벌인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1946〜1954)과 구분해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도 하며, ‘월남전(越南戰)’이라고도 한다. 남베트남 정부가 붕괴된 1975년 4월 30일까지 지속되었다. 초기에는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과 남베트남 정부 사이의 내전(內戰)이라는 성격을 띠었으나, 1964년 8월 7일 미국이 통킹 만 사건을 구실로 북베트남을 폭격한 뒤에 전쟁은 북베트남과의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미국과 소련의 냉전 체제 하에서 한국, 타이,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중국 등이 참전한 국제적인 전쟁으로 비화되었으며, 미국이 캄보디아와 라오스 등으로 군사개입의 범위를 넓히면서 전장도 인도차이나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한편 전쟁 중에 미국, 한국군에 의해 미라이 학살, 빈호아 학살, 퐁니 퐁넛 양민 학살 등 베트남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베트남전쟁의 배경   베트남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1927년에는 베트남국민당이, 1930년에는 인도차이나공산당이 조직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 일본이 베트남을 점령하자 호찌민[胡志明]을 중심으로 1941년 5월 19일 베트민(Viet Minh, 베트남독립동맹)이 결성되었고, 이들은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한 뒤에 베트민은 하노이를 점령하고 그해 9월 2일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수립과 독립을 선포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1946년 11월 23일 하이퐁(Haiphong) 항구에 함포 사격을 가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일으켰고, 전쟁은 1954년 5월 7일 프랑스군의 거점인 디엔비엔푸(Dien Bien Phu)가 함락될 때까지 9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리고 그해 7월 제네바에서 휴전협정이 성립되어, 북위 17°선을 경계로 베트남은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제네바협정에서는 1956년 국제감시위원회의 감독 아래 베트남 전역에 걸쳐 자유선거를 실시하도록 규정했으나 1955년 미국의 지원을 받아 남베트남(베트남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은 선거 실시를 거부했다. 그리고 농민들이 베트민의 토지개혁으로 분배받은 농지를 다시 회수하고, 친 가톨릭 정책을 펼쳐 민중의 반발을 샀다. 이에 대한 불만으로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났는데, 초기에 카오다이(Cao Dai)나 호아하오(Hoa Hao) 등의 종교집단을 중심으로 시작된 봉기에 베트민의 구성원들이 합세하면서 1950년대 중반에는 이른바 ‘베트콩(Viet Cong)’이라고 불리는 게릴라 군사조직으로 발전했다. 지엠 정권은 1958년 반공법을 시행하는 등 대대적인 탄압으로 반발을 억누르려 했으나, 남베트남의 반란 세력은 1960년 12월 20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해 정부군과 본격적으로 맞섰다. 이들은 민족민주정부의 수립, 토지개혁, 평화통일, 중립외교 등 10개 항을 강령으로 내세웠다.    베트남전쟁의 경과   지엠 정권에 대한 반발이 확대되자 1963년 즈엉반민(Dưong Van Minh) 등은 미국의 방조 아래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응오딘지엠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1964년 응우옌칸(Nguyen Khanh)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키는 등 남베트남 정권은 잇따른 쿠데타로 크게 불안정해졌다. 이렇듯 남베트남의 상황이 악화되자 미국의 존슨(Lyndon Baines Johnson) 정부는 남베트남에 주둔하는 미군의 숫자를 늘렸다. 그리고 미국의 구축함이 북베트남의 어뢰 공격을 받았다는 이른바 ‘통킹 만 사건’을 구실로 1964년 8월 7일 북베트남에 폭격을 가해 전쟁을 북베트남과의 전면전으로 확대했다. 미국은 그 뒤 1968년까지 북베트남에 약 1백만 톤에 이르는 폭탄을 퍼부었으며, 약 55만 명에 이르는 지상군을 파병했다. 그리고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 등에 파병을 요청해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태국, 필리핀 등의 참전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은 1968년 1월 30일 음력 설날을 이용한 구정대공세를 펼쳐 주요 도시들에서 미국과 동맹국들의 주요 시설을 점령했다. 그리고 그 성과를 배경으로 1969년 6월 8일에는 남베트남공화국 임시혁명정부를 수립했다. 미군과 남베트남 정부군은 곧바로 빼앗겼던 도시와 시설들을 탈환했지만, 이 사건은 미국의 여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전쟁의 승리를 낙관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에서는 반전 여론이 높아졌고, 결국 존슨 대통령은 재선에 실패하고 군사개입의 중단을 내세운 닉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닉슨은 1969년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을 새로운 안보·외교 전략으로 내세우며 미군의 철수 계획을 발표하였다. 구정대공세 이후인 1968년 5월부터 미국과 북베트남의 정전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1972년까지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1970년 이후에는 미국이 캄보디아의 내전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면서 전장이 캄보디아와 라오스 등 인도차이나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1972년 4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각지에서 대규모 봉기를 일으키자, 미국은 북베트남의 모든 항만에 기뢰를 부설하고, 하노이와 하이퐁에 대규모 폭격을 가하는 등 북베트남에 대한 공세를 더욱 강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2년 여름부터 미국과 북베트남 사이의 정전 협상이 비밀리에 재개되었고, 마침내 1973년 1월 27일 파리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파리평화협정은 남북의 휴전과 선거를 통한 통일정부 구성, 60일 안에 모든 미군의 철수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평화협정을 체결한 뒤 미군은 남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했고, 북베트남과 미군 사이에 포로 교환도 이루어졌다. 미국은 남베트남에 대한 원조 규모를 크게 줄였고, 오일쇼크로 촉발된 경제위기를 배경으로 1974년 1월부터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과 남베트남 정부 간의 갈등은 다시 무력충돌로 확대되었다. 결국 북베트남은 1975년 대규모 공세를 벌여 그해 4월 30일 남베트남의 수도인 사이공을 점령했고, 남베트남의 대통령이던 즈엉반민의 항복을 받았다. 사이공이 점령된 뒤 남베트남공화국이 수립되었고, 1976년 7월 2일 남북 베트남이 통합해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을 수립하면서 베트남은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었다.   베트남전쟁과 한국   한편, 한국은 베트남전쟁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한 국가이다. 한국은 1964년 9월 의료진을 중심으로 한 비전투요원을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맹호부대와 청룡부대, 백마부대 등 30만 명이 넘는 전투병력을 베트남에 파병했다. 그 과정에서 1만6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많은 참전 군인들이 고엽제 피해 등의 후유증에 시달렸다. 1999년에는 1만6천여 명의 고엽제 피해자들이 고엽제 제조사들인 미국의 다우케미칼과 몬산토 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베트남전쟁 [Vietnam War] (두산백과) ========================================///   재미있는 전쟁 이야기 베트남 전쟁 강대국 미국의 굴욕으로 남다   전쟁 국가 : 미국 vs. 베트남 연도 : 1964~1975년 목차 베트남, 남과 북으로 나뉘어 싸우다 미국, 베트남전에 본격적으로 참가하다 라오스와 캄보디아로 확대된 전쟁 미국, 북베트남의 공격과 반전 여론에 몰리다 북베트남, 미국에 승리하고 베트남을 통일하다 베트남은 1883년부터 프랑스의 식민지였어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일본의 지배를 받기도 했지요. 그런데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한 다음 해인 1946년, 프랑스는 다시 베트남을 자기네 식민지로 삼았어요. 베트남은 독립을 위해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지요. 1954년, 프랑스에 승리를 거두고 기뻐하는 베트남 독립군 베트남, 남과 북으로 나뉘어 싸우다 베트남에는 오랫동안 독립 운동을 이끈 호찌민이라는 지도자가 있었어요. 그는 사회주의자로, 베트남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고 있었어요. 결국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남군은 1954년에 프랑스를 베트남에서 몰아냈답니다. 그런데 미국을 비롯한 서양의 강대국들은 베트남이 사회주의 국가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베트남을 남과 북으로 갈라놓았지요. 호찌민(1890~1969년) 이에 따라 베트남의 북쪽에는 호찌민이 이끄는 독립 국가가 들어섰고, 남쪽에는 미국이 지원하는 정권이 세워졌어요. 그런데 남베트남의 대통령인 응오딘지엠은 사람들을 탄압하는 독재 정치를 했어요. 그래서 호찌민을 지지하는 남쪽 사람들이 많았어요. 이들은 통일을 위해 베트콩(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만들어 남베트남 정권과 싸웠지요. 호찌민은 이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어요. 미국, 베트남전에 본격적으로 참가하다 미국은 남쪽 정부를 지원했어요.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남베트남 정권을 돕기 위해 군대를 보냈지요.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존슨은 북베트남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어요. 존슨 대통령은 1964년 8월에 미국 전함 두 척이 베트남과 중국 사이에 있는 통킹 만에서 북베트남의 공격을 받았다고 발표했어요. 이것이 바로 '통킹 만 사건'이에요. 사실 이것은 미국이 북베트남과 전쟁을 하기 위해 꾸민 일이었어요. 이로써 본격적인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었어요. 통킹 만 사건과 미국의 베트남 전쟁 참여를 보도한 신문 라오스와 캄보디아로 확대된 전쟁 미군은 북베트남을 무자비하게 공격했어요. 밀림에 불을 지르고 고엽제(식물의 잎을 말려 죽이는 약품)를 뿌렸지요. 베트콩들이 숨을 곳을 없애고 식량 보급을 막기 위해서였어요. 하지만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어요. 베트콩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정글에 숨어 미군과 맞써 싸웠지요. 그러면서 전쟁은 이웃 나라인 라오스와 캄보디아까지 번지게 되었답니다. 무장한 채 강을 건너는 베트콩들 미국, 북베트남의 공격과 반전 여론에 몰리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치르며 유럽 나라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어요. 그러자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필리핀, 뉴질랜드 등의 도움을 받아 전쟁을 계속했지요. 미군은 전쟁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어요.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점점 강해졌기 때문이에요. 1968년,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베트남의 음력 설날인 1월 30일에 남베트남의 서른여섯 개 도시를 기습적으로 공격했고, 남베트남의 수도인 사이공까지 빼앗았어요.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서 열린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 이렇게 되자 미국은 전쟁을 계속하기 힘들어졌어요. 상황이 역전되어 베트남에서 점점 힘을 잃고 있었던 데다가, 미국 안에서도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이에요. 북베트남, 미국에 승리하고 베트남을 통일하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던 닉슨은 북베트남과 평화 회담을 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1969년 6월 이후부터 남베트남에서 미국 군대를 조금씩 철수했지요. 결국 1973년 1월,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 남베트남, 북베트남, 베트콩의 대표가 모여 평화 회담을 열고, 전투를 중단하기로 하는 휴전 협정을 맺었어요. 휴전 협정에 서명하는 미국 국무 장관 하지만 이듬해 12월에 북베트남이 다시 전투를 시작했고, 1975년 4월에 결국 남베트남은 항복했어요. 베트남이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통일되면서 비로소 베트남 전쟁이 끝난 거예요.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패배한 최초의 전쟁으로 남았어요. 한편 베트남은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통일 국가를 건설하여 민족의 자존심을 지켰지요. 흥미진진 전쟁 상식! 베트남 전쟁이 남긴 상처, 고엽제 후유증 베트남 전쟁 때 미군이 뿌린 고엽제를 맞은 많은 사람들은 두통, 피부 질환, 암 등의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어요. 고엽제에는 몸에 해로운 다이옥신이라는 성분이 들어 있기 때문이에요. 1994년에 베트남 정부는 약 200만 명이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발표했어요. 베트남 전쟁에 참가한 우리나라 군인들 중에도 고엽제 후유증을 앓는 사람들이 많아요. 정부는 법을 만들어 이들의 치료를 지원하고 있답니다. 베트남 밀림에 고엽제를 뿌리는 미군 헬리콥터 관련이미지 19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북베트남의 독립 운동 지도자, 호찌민베트남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건너가 일을 했다. 공산주의자로 활동하다가 베트남에 와서 독립 운동을 펼쳤다. 이미지 갤러리 출처: (CC BY)Lynhdan Nguyen [네이버 지식백과]베트남 전쟁 - 강대국 미국의 굴욕으로 남다 (재미있는 전쟁 이야기, 서울대학교 뿌리깊은 역사나무)   =========================///   처음 세계사 10 - 현대 세계의 냉전과 변화 베트남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둘로 갈라진 나라가 또 있었어요. 바로 베트남이었어요. 베트남은 1883년부터 프랑스의 지배를 받고 있었어요.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한 사이에는 일본이 베트남을 지배했지요. 일본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베트남에서 물러났어요. 이때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이 혁명을 일으켰어요. 일본의 꼭두각시였던 왕조를 무너뜨렸지요. 그리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세웠어요. 북베트남의 독립 운동 지도자, 호찌민베트남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건너가 일을 했다. 공산주의자로 활동하다가 베트남에 와서 독립 운동을 펼쳤다. 그런데 프랑스가 베트남을 지배할 권리를 주장했어요. 결국 1946년 베트남 민주 공화국과 프랑스가 충돌했어요. 이후 8년간 전쟁이 이어졌지요.(인도차이나 전쟁) 베트남의 저항과 세계의 여론에 밀린 프랑스는 1954년 베트남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어요. 이때 제네바 협정1)에 따라 북위 17도를 기준으로 베트남은 남과 북으로 나뉘었지요. 북베트남은 독립 운동 지도자였던 호찌민이 통치했고, 남베트남은 일본과 프랑스의 꼭두각시였던 바오다이가 다스렸어요. 북베트남의 호찌민은 주장했어요. “남과 북 가릴 것 없이 모든 베트남 사람들이 힘을 모아 외국 세력을 몰아내고 남북을 통일합시다.” 호찌민의 주장에 미국이 귀를 쫑긋 세웠어요. “이러다 공산주의자 호찌민이 남베트남을 집어삼키는 거 아냐?”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의 깃발과 군인베트남 공산주의자라는 뜻으로 ‘베트콩’이라고도 부른다. 미국은 한 나라가 공산주의 국가가 되면 이웃 나라들도 공산주의 국가가 되기 쉽다고 생각했어요. 더구나 남베트남의 바오다이는 아주 무능한 통치자여서 미국은 걱정이 더 컸어요. 남북 통일 선거를 하면 북베트남의 호찌민이 이길 것은 불 보듯 뻔했거든요. 그래서 베트남의 분단을 강화하기로 했어요. 미국은 바오다이를 물러나게 하고 응오딘지엠을 새로운 통치자로 내세웠어요. 응오딘지엠은 호찌민이 주장하는 남북 총선거에 반대하고, 군대를 강화했어요. 미국 군사 고문단이 이를 도왔지요. 그리고 남베트남 정부에 맞서는 무리를 공격하기 시작했어요. 1960년에 결성된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이라는 단체였어요. 이들은 ‘베트콩’이라 불리며 게릴라 활동을 했는데, 북베트남의 도움을 받아 날로 강해졌지요. 응오딘지엠은 미국의 도움을 받아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의 반격을 막아 보고자 애썼어요. 남베트남에 계엄령2)을 선포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이 혼란을 틈타 남베트남 군인들이 1963년에 쿠데타를 일으켰어요. 응오딘지엠은 쿠데타 세력에게 목숨을 잃고 말았지요. 쿠데타 성공으로 들어선 군사 정부도 무능하기는 마찬가지였어요. 그러던 1964년 어느 여름날이었어요. “미국의 군함이 북부 베트남의 통킹 만 앞바다를 순찰하던 중 북베트남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를 통킹 만 사건이라고 불러요. 하지만 정말로 미국 군함이 북베트남의 공격을 받았는지는 지금까지도 확실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당시 미국은 이 사건을 구실로 베트남에서 전쟁을 확대하기로 결심했어요. 베트남 전쟁 참전 미군미국은 때에 따라 징병제나 모병제를 실시했다. 남북 전쟁, 제1차 · 2차 세계 대전, 1948년부터 1973년까지는 징병제를 실시했다. 미국은 복수를 한다면서 항공기를 보내 북베트남의 함정3)과 석유 저장소를 공격했어요. 1965년 2월부터는 폭격기를 보내 북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와 여러 도시들에 폭탄을 퍼부었어요. 뿐만 아니라 직접 군대를 남베트남에 상륙시키기까지 했어요. 하지만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어요. 숨어 있다가 나타나 공격하고 밀림으로 숨어 버리는 게릴라 작전을 펼쳤지요. 그 작전에 미군도 쉽사리 힘을 쓰지 못했어요. 그러자 미국은 더 많은 군대를 베트남에 보냈어요. 1965년에 18만여 명이었던 미군은 1969년에는 48만 명, 최고로 많을 때는 54만 명에 이르렀어요. 뿐만 아니라 미국은 다른 나라의 군대까지 베트남 전쟁에 끌어들였어요. 한국을 비롯해 호주와 필리핀의 군대가 남베트남을 돕기 위해 파견되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을 물리치지 못했어요. 오히려 북베트남군까지 남으로 진격하는 바람에 점점 더 밀리기만 했지요. 다급해진 미국은 본토에서 군대를 더 모아 베트남에 보냈어요. 그래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어요.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은 땅굴을 파고 숨어들거나 밀림 속에 위장하여 움직이면서 미군을 괴롭혔어요. 그러자 미군은 게릴라와 몰래 연락한다며 민간인4)들의 집을 불태웠어요.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을 숨겨 주었다는 핑계로 수많은 주민들을 학살하기도 했지요. 밀림에 숨어든 게릴라를 찾는다며 고엽제를 뿌리기도 했고, 수많은 신무기로 베트남을 마구 공격했어요. 이 때문에 전쟁이 끝난 뒤에도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후유증을 앓아야 했어요. 나무를 죽이는 고엽제미군의 무기는 뛰어났으나 밀림을 잘 아는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의 게릴라 작전에는 소용없었다. 결국 밀림을 없애기 위해 고엽제를 뿌렸다. 하지만 이를 맞은 참전 군인들은 전쟁 후에도 후유증에 시달렸다. 미국 본토에서는 전쟁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어요. “우리의 젊은이를 아무런 의미 없는 전쟁에 몰아넣지 말라!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미국 정부는 전쟁에 돈을 엄청나게 쏟아붓느라 재정 적자가 늘었어요. 미국 정부는 점점 더 궁지에 몰리고 있었지요. 게다가 미국 국내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어요. 결국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닉슨은 미국 군대를 철수하기로 했어요. 1969년부터 미국 군대가 철수하기 시작했어요. 대신에 미국은 남베트남 군대 수를 늘렸어요. 그 때문에 베트남에서는 전쟁이 끝나지 않고 계속되었지요. 결국 1972년 봄, 북베트남 군대는 남베트남으로 계속 진격해 내려오며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어요. 미국과 북베트남은 본격적으로 교섭5)을 진행했어요. 하지만 미국은 협정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미국은 계속 사인을 미루며 수정을 요구했지요. 북베트남은 이를 거부했고요. 닉슨은 북베트남을 압박하기 시작했어요. 12월 18일부터 크리스마스 폭격6)을 실시했지요. 그러자 세계적으로 미국을 비난하는 분위기가 거세졌어요. 미국 의회도 전쟁을 그만 멈추라고 강한 태도를 보였지요. 12월 말 북베트남이 협상에 응하겠다고 하고 나서야 미국은 폭격을 멈추었어요. 1973년 1월 미국과 북베트남은 파리 협정을 맺었지요. 협정에서 휴전하기로 약속했지만 남베트남에서는 여전히 원래 남베트남 정권과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이 계속 싸웠어요. 북베트남까지 나서서 1975년 4월 말 마침내 사이공7)을 점령했어요. 이렇게 해서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패배, 공산주의 혁명 세력의 승리로 돌아갔어요. 전쟁을 치르는 동안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죽었어요. 보트피플(배 위의 사람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생겨났지요. 이들은 북베트남 정부를 반대하며 나라를 떠나 바다 위를 떠돌아야 했어요. 뿐만 아니라 베트남 국토 역시 말할 수 없이 엉망이 되고 말았지요.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 정부와 군은 전쟁에서 패배를 맛보았어요. 또한 본토와 세계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아야 했답니다. 관련이미지 20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1954년, 프랑스에 승리를 거두고 기뻐하는 베트남 독립군 이미지 갤러리 출처: 재미있는 전쟁 이야기 [네이버 지식백과]베트남 전쟁 (처음 세계사 10 - 현대 세계의 냉전과 변화, 초등 역사 교사 모임)   =============================///   Basic 고교생을 위한 세계사 용어사전 호찌민   [ 胡志明 ] 직업 혁명가, 대통령 국적 베트남 베트남의 혁명가이자 대통령. 1911년 가난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선원이 된 그는 1917년 프랑스에서 새로 조직된 프랑스 공산당(PCF)에 입당하였다. 1923년에는 모스크바로 가서 1924년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참석하고 혁명에 있어서 농민의 중요성에 관해 연설하였다. 1924년부터 1927년까지 코민테른 대표로 중국에서 근무한 뒤 그는 피압박 인민 연맹, 베트남 혁명 청년 연맹의 창설을 지원하였으며, 1930년에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창당을 지원하였다. 1940년에는 일본이 점령한 인도차이나로 돌아와 저항 군사 조직인 베트민을 조직하였다. 그 뒤 하노이에 정부를 수립하고 대통령이 된 그는 1946년에 남부 베트남을 점령한 프랑스와 싸워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 승리함으로써 베트남의 분할을 가져왔다. 대외적으로도 소련 및 중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1959년 남베트남의 베트콩 게릴라를 지원하여 남베트남 정부를 타도한 그는 같은 해 당 서기직은 사임하였지만 대통령직은 유지하였다. 관련이미지 20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호찌민(1890~1969), 출처: 게티이미지 코리아 이미지 갤러리 [네이버 지식백과]호찌민 [胡志明] (Basic 고교생을 위한 세계사 용어사전)   ==========================///   시사상식사전 호찌민      베트남의 민족운동 지도자로 아시아의 반식민지 운동을 이끌었으며, 구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초대 주석이 되었다.             외국어 표기     胡志明(한자) Ho Chi Minh     출생 - 사망     1890. 5. 19 ~ 1969. 9. 3   호찌민(1890~1969), 출처: 게티이미지 코리아 1890년 베트남 중부 호앙쭈(Hoang Tru)라는 작은 마을에서 출생했으며, 본명은 응웬 닷 탕(Nguyen Tat Thanh)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사망하고 농민 출신인 아버지는 관직에서 면직되면서 경제적으로 빈곤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다 1911년 바(Ba)라는 가명으로, 프랑스 증기선 아미랄 라투슈 트레빌호의 요리사로 근무하며 3년 이상 여러 국가를 여행하였다. 그는 생전 160여 개가 되는 가명과 필명 등을 사용했다.  1914~1917년까지는 영국 런던 등지에서 밑바닥 인생을 전전했으나, 그 경험은 시야를 넓히고 사고를 성숙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후 1919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프랑스 파리에 정착하였고, 그곳에서 정원사·웨이터·청소부 등으로 일하며 '응우옌 아이 꾸옥'이란 이름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시작한다. 당시 파리에는 각 식민지에서 건너온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었고, 그는 1919년 6월 베르사유 평화회의에 '베트남 인민의 8항목의 요구'를 제출하였다. 이는 중재자들에게는 반응을 얻지 못했으나 많은 베트남 지식인들에게 그의 이름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1920년 프랑스공산당이 창립되자 여기에 가담하였고, 이듬해인 1921년 공산당의 지원으로 '프랑스식민지인민연맹'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식민지 정책의 해악을 고발하는 기관지 <르 파리아(Le Paria)>(추방자라는 뜻)를 편집·발행하였다.  1924년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 출석하였고 이곳에서 약 2년간 머물며 공산당 혁명사상을 익혔다. 그는 코민테른으로부터 지령을 받고 중국 남부 및 태국으로 파견되는 등 베트남 주변에서 혁명운동을 계속한다. 그리고 1930년 마침내 코민테른에 의하여 권한을 부여받으면서 인도차이나공산당을 창립하게 되는데, 이때에는 '리 투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는 중국을 근거지로 베트남 혁명청년동지회를 결성, 이곳에서 훈련받은 베트남인들을 인도차이나 지하조직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기관지 <청년>을 발행하며 조직을 키워나간다. 그러다 1931년 6월 홍콩에서 영국 경찰에 체포되었고, 1933년 석방된 뒤에는 모스크바로 돌아간다. 이후 1940년부터 중국 쿤밍에서 공산당 조직과 함께 활동하였고, 1941년 베트남 잠입에 성공한다. 당시 인도차이나는 프랑스와 일본의 공동협약 아래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그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중심으로 월맹(베트남독립동맹)을 결성하여 해방을 위한 총봉기를 목표로 세를 확산시켜 나갔다. 그리고 이때부터 호찌민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다.  그는 2차 대전에서 일본의 패배를 직감하고 중국과 미국에 전략적으로 접근하여 지원을 받아낸다. 1942년 중국 중경 방문 시에는 스파이로 오인되어 국민당에 체포되기도 하나 이듬해 9월 석방되었고, 중국과 미국에게 월맹이 임시과도정부임을 승인받는다. 미국은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 세력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월맹을 지원하고, 이로써 호찌민은 승리할 기회를 얻게 된다. 태평양 전쟁 종결 후 호찌민을 의장으로 하여 민족해방위원회가 결성되어 총봉기하였으며, 월맹은 베트남 중·북부 지역을 빠르게 장악해 갔다.  1945년 2월 호찌민은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 정부 주석으로 취임하였다. 1954년에는 직접 프랑스에 대한 항전을 지휘하여 독립을 지켜내기도 하지만, 구소련과 중국의 간섭으로 인해 완전한 독립에 이르지는 못했다. 이후 제네바 회담에서 베트남은 17도 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할되었으며, 이내 남북 간 전쟁이 시작되었다(베트남 전쟁). 당시 호찌민은 정계 일선에서는 물러났으나 여전히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는 폭격 위험 아래서는 절대로 협상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였으나, 1969년 심장병으로 급사하였다. 이후 협상의 기회는 줄게 되었고, 베트남 전쟁은 그가 죽은 지 3년이 되어서야 막을 내렸다.     관련이미지 19                                         이미지 갤러리 출처: 인물세계사 [네이버 지식백과]호찌민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 호찌민베트남 혁명의 중심 인물인 호찌민('깨우치는 자'라는 뜻)의 청년 시절 모습이다. 호찌민은 1911년 프랑스에 건너가 식민지 해방 운동을 시작하였다. 1920년 코민테른에 가담하였고, 프랑스 공산당 창립과 함께 당원이 되었다. 1925년에는 '베트남 혁명 청년 동지회'를 결성하여 사회주의 혁명 사상을 전파하였고, 1930년 2월 베트남 공산당을 정식으로 창립하는데 성공하였다. ■ 호찌민, 베트남 민족 운동을 이끌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리고 있는 베르사유 사무국에 한 베트남 청년이 찾아왔다. 그는 '베트남 인과 프랑스 인을 법적으로 동등하게 대우할 것, 프랑스 의회에 베트남 대표가 참석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할 것' 등 8개 항의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대표단이 청원하였을 때 그랬던 것처럼 이 청년의 청원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청년은 회담장 복도에서 쫓겨났다. 제국주의자들은 절대 자진해서 식민지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은 이 청년 호찌민은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소련에 호의를 가지게 되었고, 코민테른에 합류하여 민족 해방 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베트남에서는 서양 지식을 보급하고 경제적 근대화와 행정 제도의 개혁을 추진하는 민족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호찌민은 1925년 베트남 청년 혁명 동지회를 결성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 중국의 국민 혁명에 자극받은 민족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베트남 국민당을 조직하였다. 베트남 국민당은 세력을 급속히 키워 나가면서 프랑스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1930년 이들이 일으킨 전면적인 무장 봉기 시도가 실패하면서 중심 인물들이 대거 체포되어 처형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베트남 국민당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인도네시아 독립 포스터1928년 국민당을 만들어 반네덜란드 운동을 벌였던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받으며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어서는 독재 정치를 벌이다가 실각하였다. 1930년에 조직된 호찌민의 베트남 공산당도 프랑스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쇠퇴기에 빠져들었다. 베트남 공산당은 1936년 이후에나 다시 활동에 나설 수 있었다. 베트남 공산당은 독립을 바라는 모든 계층과 연합하는 쪽으로 노선을 바꾸면서 대중 속으로 파고들며 대대적인 독립 전쟁을 준비하였다. 한편 인도네시아에서는 이슬람 연합이 공산당을 결성하여 네덜란드에 맞서 해방 투쟁을 벌여 나가다 해산당하였다. 이후 인도네시아에서는 민족주의자들이 국민당을 만들어 민족 운동을 주도하였다. 인도네시아에서는 특히 이슬람 교가 민족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인도네시아 인들에게 이슬람 교는 자신들을 화교나 네덜란드 인과 구별짓도록 하는 것이자, 민족 정체성을 드러내 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인도네시아의 민족 운동은 이슬람 공동체 운동과 깊은 관련을 맺으면서 전개되었다.   베트남 응헤띤 지역의 농민 봉기베트남 공산당은 농민과 노동자 속으로 들어가 농민 항쟁과 노동자 파업 투쟁을 조직하였다. 위 그림은 1930년 여름, 소비에트가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던 응헤띤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 기록화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시아에 민족 운동이 확산되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전국역사교사모임)    
7485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친환경실천",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763  추천:0  2019-12-02
커피 잔 텀블러, 오래 안 쓰면 환경에 득 아닌 독  2019.12.02.    화나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앵커] 내후년부터는 카페와 음식점에서 종이컵 사용이 금지된다는 소식, 전해드렸는데요.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고, 텀블러나 머그잔 같은 다회용 컵을 더 많이 써보잔 취지입니다. 그런데 이 다회용 컵도, 잘못하면 환경에 독이 될 수 있다고 하는데요. 이유민 기자가 그 이유를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서울의 한 공원. 커피를 즐기려는 직장인들이 모여듭니다. 대부분 일회용 컵을 들고 있습니다. [김현수·남광호/회사원 : "사무실에서 쓰는 컵은 있고요. 점심 먹고 들고 다니긴 좀 불편해서..."] [김서영/회사원 : "(일회용 컵에도) 돈을 지불한 건데 편하게 쓰는 게 좋은 것 같습니다."] 내후년부터는 음료를 밖에 들고 나가려면 추가로 돈을 내거나, 텀블러나 머그잔 등 다회용 컵을 가지고 와야 합니다. 환경 보호 차원에섭니다. 일회용품 사용 좀 줄이겠다고 사게 되는 이 텀블러. 정말 환경에 도움이 되는 건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국내 한 환경 연구소에 의뢰해, 컵을 만들고 사용하고 폐기하는 모든 과정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양을 계산해봤습니다. 텀블러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671그램. 플라스틱 컵의 13배, 종이컵보다는 24배나 더 많았습니다. 당장에는 환경에 더 나쁜 것처럼 보이지만 문제는 시간입니다. 꾸준히 사용한다면, 결과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루에 커피 한 잔씩을 마신다고 가정할 경우 플라스틱 컵은 2주 만에, 종이컵은 한 달 만에 텀블러를 따라잡습니다. 온실가스 배출량이 역전되는 겁니다. 2년이 지나면 플라스틱 컵을 쓸 때보다 온실가스가 33배가량 줄어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윤희/기후변화행동연구소 선임연구원 : "1435 텀블러의 온실가스 감축 효과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기 때문에 오래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이 실험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환경을 살리는 건 일회성이 아닌 꾸준한 실천이라는 것을 이 실험결과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KBS 뉴스 이유민입니다. /이유민 기자
7484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환경보호",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133  추천:0  2019-12-02
지구온난화로 죽어가는 산호초 살리는 물고기들 2019.12.02.    슬퍼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건강한 산호초 소리 녹음해 들려줘도 '효과' 황폐화한 산호초 [엑시터대학 팀 고든 제공] (서울=연합뉴스) 엄남석 기자 = 산호초는 산소량이 높고 먹이가 풍부해 바다 생물의 4분의 1이 살아가는 생물 다양성의 보고(寶庫)다. 또 1㎡당 1천500~3천700g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며 열대우림에 맞먹는 역할까지 한다.  건강한 지구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존재지만 지구온난화로 수온이 오르고 각종 쓰레기로 바닷물이 오염되면서 곳곳에서 심각한 위협을 받으며 죽어 나가고 있다.  과학자들이 산호초 생태계 보전에 관심을 갖고 다양한 연구 결과를 내놓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 비롯된 것인데, 최근 죽은 산호초를 복원하는 것과 관련된 2건의 연구 결과가 잇따라 발표돼 관심을 끌고 있다.  ◇ 산호초 '의사' 파랑비늘돌돔(parrotfish) 산호에 붙어있는 미생물을 긁어먹는 파랑비늘돌돔 [켄달 클레멘트 제공] 호주 해양과학연구소(AIMS)에 따르면 이 연구소의 브렛 테일러 박사가 이끄는 연구팀은 심각한 '백화현상'을 보이는 산호초 주변의 물고기 개체 수를 분석한 결과를 과학 저널 '글로벌 생물학 변화 (Global change Biology)' 최신호에 발표했다.  백화현상은 산호초가 높은 해수면 온도에 장기간 노출될 때 보이는 스트레스 반응으로, 길게 이어지면 산호가 죽게 된다.  연구팀은 서태평양의 대보초(Great Barrier Reef)와 인도양 차고스 제도에서 백화현상을 보이는 산호초를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그 결과, 백화현상이 나타난 곳에서 대부분의 어종이 급격히 줄어든 것과는 정반대로 파랑비늘돌돔은 개체 수가 2~8배 증가하고 각 개체의 몸집도 백화현상이 없는 산호초에 사는 개체에 비해 20%가량 큰 것을 확인했다.  연구팀은 파랑비늘돌돔이 촘촘하게 난 이빨로 산호에 붙어있는 미생물을 긁어먹는데, 이런 행동이 산호의 회복을 도왔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분석했다.  백화가 진행되면서 산호가 죽어 황폐화한 자리에 미세조류와 남세균이 달라붙게 되는데, 이런 미생물을 먹이로 삼는 파랑비늘돌돔이 늘어 이들을 잡아먹으며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면 산호가 복원할 기회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산호와 파랑비늘돌돔이 순환고리를 형성해 산호가 죽으면 파랑비늘돌돔이 늘어 복원할 기회를 제공하고, 산호가 회복되면 먹이가 줄면서 파랑비늘돌돔 개체도 줄어들어 서로 균형을 맞추는 것으로 분석했다.  테일러 박사는 약 8천㎞ 떨어진 서태평양과 인도양의 산호초에서 파랑비늘돌돔 개체가 많이 늘어났다는 것은 이런 순환고리가 지역적 현상이 아니라 산호초 생태계의 고유한 일부분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건강한 산호 소리로 산호초 복원 '시동' 죽은 산호초 주변에 건강한 산호초 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설치한 수중 스피커 [엑시터대학 제공 동영상 화면 캡처] 영국 엑시터대학에 따르면 이 대학 해양생물학 교수 스티브 심슨 박사가 이끄는 국제 연구팀은 수중 스피커로 건강한 산호초의 소리를 들려줬더니 어린 물고기들이 황폐화한 산호초로 몰려들었다는 연구 결과를 과학저널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NatureCommunication)' 최신호에 발표했다.  연구팀은 대보초 내 죽은 산호초에서 이런 실험을 진행한 결과, 비슷한 산호초에 비해 두 배에 달하는 물고기가 찾아와 머물렀으며, 생물 종(種)도 50%가량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심슨 박사는 "건강한 산호초 주변에서는 물고기나 딱총새우가 내는 소리가 어우러져 상당히 시끄러우며, 어린 물고기들은 이런 소리를 듣고 서식지를 찾는다"면서 "산호가 죽으면 물고기와 새우가 사라져 귀신이 나올 것처럼 조용해지는데 수중 스피커로 건강한 산호 소리를 들려줌으로써 어린 물고기를 다시 유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논문 제1저자인 엑시터대학의 박사과정 연구원 팀 고든은 "물고기는 산호초가 건강한 생태계로 기능하는 데 중요하다"면서 "이런 방식으로 주변에 물고기 개체를 늘리는 것이 자연적인 산호 복원을 촉발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수중 스피커를 설치하는 연구원 [엑시터대학 제공 동영상 화면 캡처] AIMS의 어류학자 마크 미칸 박사는 "죽은 산호초 주변에 물고기를 모은다고 해서 자동으로 살아나는 것은 물론 아니다"라면서 "그러나 물고기들이 산호초 주변을 깨끗이 하고 산호가 다시 자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줌으로써 산호 복원을 뒷받침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다른 참고 얘기... "백두산도 수증기 폭발 위험".. 천지 물 + 마그마 = 대형 폭발 예측하기 어려운 열수·수증기 화산 폭발이 큰 희생을 불러온 사례는 또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 2014년 일어난 일본 온타케산 분화입니다. 일본 나가노(長野)현과 기후(岐阜)현 경계에 있는 온타케산은 2014년 9월 27일 정오쯤 갑자기 분화했습니다. 하지만 이전에 별다른 징후가 없어 일본 기상청은 경계 레벨을 올리지 않았고, 등산객들이 폭발에 휩쓸려 수십 명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벌어졌습니다. 한반도에도 '수증기 폭발' 위험성이 큰 화산이 하나 있습니다. 네, 백두산입니다. 단 이 경우 지하수 때문이 아닌 천지에 담긴 막대한 양의 물이 폭발 원인이 될 수 있다는 분석입니다. 대형 칼데라호인 천지에는 무려 20억 톤 정도의 물이 담겨 있습니다. 문제는 천지 아래쪽에서 마그마가 활동 중이라는 겁니다. 호수에서 5~10km 아래에 서울시 면적의 2배의 마그마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마그마가 점점 위쪽으로 상승하다 천지의 막대한 물과 만나면 대폭발이 일어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 전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재난이 될 것이라고 하네요. 하지만 남북 분단에 막혀 백두산에 관한 연구는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더구나 북한의 핵실험이 백두산 마그마 층을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까지 제기되는데요. 뉴질랜드의 재난이 한반도에서 되풀이되지 않도록 남북간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해 보입니다. /이재희 기자
7483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환경오염",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244  추천:0  2019-12-02
눈 내린 인도 해변?… 모래사장에 쌓인 흰 거품의 정체 2019.12.02.    슬퍼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1일 오염된 흰 거품 속에서 뛰노는 인도 남부 첸나이 마리나 해변의 어린이들. [AP=연합뉴스] 흰 거품으로 뒤덮인 인도 남부 유명 해변 모습이 공개돼 환경 오염에 경각심을 높이고 있다. 최근 인도 뉴델리 인근 강에서 발생한 흰 거품과 같은 현상으로 거품에는 각종 오염물질이 쌓인 것으로 보인다.  인디언 익스프레스 등 현지 매체와 AFP통신은 2일 인도 남부 타밀나두주 첸나이 인근 유명 휴양지 마리나 해변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 보도했다.  1일 오염된 흰 거품 속에서 뛰노는 인도 남부 첸나이 마리나 해변의 어린이들. [AP=연합뉴스] 사진 속 해변은 폭설이 내린 듯 흰 거품으로 뒤덮였다. 파도가 해변으로 거품을 밀어 올린 바람에 모래사장에는 흰 거품이 솜사탕처럼 두껍게 쌓였다.  타밀나두주 오염관리국은 폐수가 빗물과 만나면서 거품이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폭우로 물이 불어나면서 고농도 인산염이 포함된 하수, 정화되지 않은 오수 등과 뒤섞인 것이다. 이 물이 급류를 이루면서 바다로 흘러 들어가 거품을 만들었다고 오염관리국은 설명했다.  최근 타밀나두에서는 갑자기 쏟아진 비로 17명이 목숨을 잃었다. 폭우가 지나간 지난달 말, 마리나 해변 수 킬로미터가 며칠째 흰 거품으로 뒤덮였다. 거품에서는 악취도 진동하고 있다고 현지 매체는 전했다.  1일 인도 마리나 해변에 쌓인 오염된 흰 거품을 즐기는 인근 주민들. [AP=연합뉴스] 인근 수산업 종사자들은 '해변 거품 사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해변 근처에서 수산물 가게를 운영하는 폰 쿠마란은 "생선도 오염돼 질병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사람들이 선뜻 생선을 사지 않는다"고 걱정했다.  하지만 인근 주민들은 거품의 위험성을 모른 채 해변을 뛰어다니고 있다. 어린이들은 온몸에 거품을 묻히며 장난을 치고 있고, 거품 속에 누워 사진을 찍는 등의 모습이 언론 카메라에 찍혔다.  해안연구센터 소속 과학자인 프라바카르 미슈라는 AFP통신에 "사람들은 그 위험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면서 "거품으로 들어가는 것은 건강에 절대로 좋지 않다"고 경고했다.  2019년 11월 3일 뉴델리 인근 흰 거품으로 오염된 야무나강에서 힌두교 의식에 따라 물에 몸을 담근 인도 여성. [로이터=연합뉴스] /이민정 기자
7482    [별의별] - 100 = 100 = 3 = 량심 댓글:  조회:3581  추천:0  2019-12-02
  길에 흘린 100위안 100장 찾아주는데 3분 걸린 중국 양심 2019.12.02.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전동차 타고 가다 1만 위안 길에 흘린 노인 청소부와 교통 보조원, 행인 등이 모두 나서 100위안짜리 100장 찾아 돌려주는데 3분 소요중국에서 많이 듣는 말 중 하나로 ‘비에관시엔스(別管閑事)’란 말이 있다.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라면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길에 쓰러진 사람을 보고도 지나치기 일쑤란 원성을 듣기도 한다.  중국 노인이 전동차 타고 가다 100위안짜리 100장 즉 1만위안을 길에 흘렸는데 행인들이 이를 3분 만에 주워 돌려줘 화제다. [중국 인민망 캡처] 그러나 길에 돈이 떨어졌다면 어떻게 되나. 여기에도 ‘비에관시엔스’가 적용될까. 혹시 앞다퉈 주운 뒤엔 슬그머니 사라지지는 않을까. 지난달 28일 장쑤(江蘇)성 쑤저우(蘇州)에서 100위안(약 1만 7000원)짜리 100장이 길바닥에 떨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이날 오전 11시 15분께 전동차(電動車)를 타고 쑤저우의 펑원(葑門)로를 지나던 루(陸)씨 노인이 실수로 주머니에 있던 100위안짜리 100장 즉 1만 위안을 길바닥에 흘리고 말았다.  중국 장쑤성 쑤저우의 한 노인이 전동차 타고 가다 1만위안을 흘리자 길을 지나던 행인들이 나서 줍고 있다. [중국 인민망 캡처] 처음엔 모르고 그냥 가다가 오토바이를 타고 뒤따르던 이가 알려줘 돌아왔다. 돈은 어떻게 됐나. 바람이 불어 돈이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은행 보안(保安)과 청소부, 교통 보조원, 길을 지나던 행인 등이 모두 나서 줍기 시작했다.  길에 흘린 100장의 100위안짜리가 한 장도 빠짐없이 모두 돌아오는데 걸린 시간은 3분이었다. [중국 인민망 캡처] 중국 인민일보(人民日報)는 2일 보도에서 정확히 3분 걸렸다고 했다. 한장도 빠짐없이 주워 주인을 돌려주는 데 걸린 시간이 그렇다. 루씨 노인은 “감사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중국 네티즌은 “바깥은 영하 13도인데 이렇게 따뜻할 수 있나”라며 찬사를 보내고 있다.  /베이징=유상철 특파원
7481    [별의별] - "부자 거지" 댓글:  조회:3575  추천:0  2019-12-02
  노숙자 배낭 들추니 2억 돈다발이? '부자' 거지 화제 2019.12.02.    화나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화제의 인물' [서울경제] 노숙하는 거지를 잡고 보니 그의 배낭 안에서 1억 9,450만 루피아(1,630만원)의 지폐 다발이 나와 화제다.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일이다. 2일 자카르타포스트와 콤파스에 따르면 지난달 29일 오전 자카르타 간다리아 지역에서 구걸하던 거지 묵리스 묵타르 브사니(65)가 남자카르타 사회복지국의 단속에 적발됐다. 당국이 이 거지를 잡고 보니 그의 배낭 안에서 1,000만 루피아(84만원)씩 묶인 지폐 뭉치 18개 등 총 1억9,450만 루피아가 나왔다. 수도 자카르타의 월 최저임금이 394만여 루피아(32만8,000원)인 점을 고려하면 매우 큰 돈임을 알 수 있다. 지방 최저임금은 자카르타의 절반 이하인 곳도 많다. 그는 처음에는 ‘일해서 번 돈’이라고 주장했지만, 결국 구걸해서 모은 돈임을 인정했다. 묵리스는 구걸로 모은 동전과 소액권 지폐가 50만 루피아(4만2,000원)가 되면 은행에 가서 큰 단위 지폐로 바꿔 배낭에 보관했다고 말했다.  자카르타 조례상 거지가 구걸하는 행위와 거지에게 돈을 주는 행위 모두 금지된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전경 / 로이터연합뉴스 묵리스가 사회복지 당국에 붙잡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2017년에도 8,600만 루피아(720만원) 돈다발을 소지한 채 거리에서 구걸하다 적발됐다. 묵리스는 가족이 있지만 거리에서 노숙 생활을 이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적발 당시 공무원들은 그를 복지센터에 보호하다 “다시는 구걸하지 않겠다”고 약속받은 뒤 모은 돈과 함께 가족에게 인계했다.  당국은 이번에도 가족이 그를 데리러 오면 모은 돈과 함께 인계할 계획이다. 지방 정부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거지에게 돈을 주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다. /강신우기자
7480    그립다 그리워 또 다시 한번 그리워... 댓글:  조회:1409  추천:0  2019-12-01
그립다 그리워 또 다시 한번 그리워                                         죽림     ㄱ     오늘 따라 울 할배 허리께 찡쓩쌩쓩 오늘 따라 울 할매 무릎 쏠라닥쑬러덕 쌍가매 엠니 실개천에서 호미자루 왱강쟁강 뒷집 똥돌이 입투레질 동전젖무덤속에서 틉투루루틉투루루 팔간집 돌퇴마루밑 개미들 이불짐 꿍져메고 발빠름 발볌빨뼘 참제비 굴제비들도 개바자 싸리삽작문 건너 깐죽거리며 쌔앵씨잉 뭇거미들도 반두질 투망질 얼기설기 늘여놓고 복자리 용트림 히히호호 버들가지 마개로 목구멍을 틀어막은 물병 거꾸로 매달려 노들강변 촐랑출렁 방앗간을 지키던 키로 물을 길어 꽃머리에 이고지고 돈돌라리 곱쌔춤 절벅즐벅 굿부채질도 하지 말라 갯벌모자도 쓰지 말라 애기오줌도 찰옥시 먹여라 징쨍그락... 예, 예, 예...   "새양한" 죽림동 범바위로 기우제를 지내러 새하야니 새하야니 어서들 어서들 간다 하아얀 웃동네 떼들과 아랫동네 떼들이 소달구지에 소발구를 앞서거니 뒷서거니 흰띠 간다 하아얀 모시보자기속 물함지에 갑뿍갑뿍 담긴 좁쌀보리쌀감자밥도 김 물물 정겨웁게 간다 하아얀 광목천보자기속 이남박에 넘지시 담긴 돼지대가리도 군침 꿀꺽이며 흐드러져 간다 하아얀 삼베보자기속 비술광주리에 삐죽히 목 내민 막걸리술통도 콧노래 흥겨워서 간다...   아앗따,ㅡ 여보 쌍가매 에미, 범바위에 뿌릴 도야지생피를 갖고 왔능기여? 예이,ㅡ 으련히 챙겼쑤꾸예... 이랴낄낄... 둥글아, 어서들 가쟈... 워리워리... 황둥개야, 어서들 가쟈...   성스러운 고향의 넋과  유구한 오곡백과의 노래가 할아버지들과 할머니들의 석쉼한 타령과 함께 "새양한" 죽림동 범바위 너머 넘어 저기 저 푸른 창공 헤가르고  자랑차게 명랑하게 울러 퍼진다... 우렁차게 찬란하게 치솟구쳐 울러 퍼진다...   아희야,ㅡ 그립다 그리워 또 다시 한번 그리워...     ㄴ     오늘 따라, 첩첩첩 버빡골 왕버들숲 지나 저기 저 "새양한" 죽림동 동산마루 하늘가에 별이 쏟아진다   희끄무레한 피겻보자기속에서 노닐던 별들과 콧쓰깨로 윤나다 팔소매끝자락에서 뛰쳐나온 별들과 앞집 뒷집 옆집 사랑채 건너 설기떡 미역국에 띄우던 별들과 민들레이며 냉이이며 고사리이며 도라지이며가 살점이 되던 별들과 태극문양 정나는 팔간집의 호롱불속에서 꿈자락 펼치던 별들과...   오늘도 숲속에 숨어버린 별들이 초롱초롱 이슬 맺혀 발볌발볌 눈굽에 밟혀오고...   오늘 따라,  버빡골 왕버들숲 지나 저기 저 "새양한" 죽림동 동산마루 별들이  장엄히 은하수 되여 철철철 흐르고지고...   아희야,ㅡ 그립다 그리워 또 다시 한번 그리워...     ㄷ     오늘 따라,  그 누군가를 불러보고싶어짐은,ㅡ   아버지가 부르면 "예" 하던 정나미 별이다가 어머니가 부르면 "예" 하던 곱돌솥 별이다가 삼촌님이 부르면 "예" 하던 초롱꽃 별이다가 이모님이 부르면 "예" 하던 햇총각 별이다가 체육선생님이 부르면 "예" 하던 씨름꾼 별이다가 하숙집 아주매 부르면 "예" 하던 개구쟁이 별이다가 시인님께서 부르면 "예" 하던 달맞이 별이다가 오양쇠가 부르면 "응" 하던 깨금발 별이다가...   오늘 따라,  천복만복 넘쳤던 별들을  마냥 목청껏 불러 불러보고싶어짐은 또,ㅡ    아희야,ㅡ 그립다 그리워 또 다시 한번 그리워...     ㄹ ... ... 오늘도 이 텁썩부리는 배낭 메고  고향으로  고향으로 태줄 찾아 떠난다...    벗님네들,ㅡ 무사함둥...     @ @ "연변일보" 해란강 문예부간 2019년 11월 29일자 제1725기. ///////////////////////////////////////////////////////////   그립다 그리워 또다시 한번 그리워□ 김승종   2019-11-29 10:44:25     ㄱ 오늘따라 울 할배 허리께 찡쓩쌩쓩 오늘따라 울 할매 무릎 쏠라닥쑬러덕 쌍가매 엠니 실개천에서 호미자루 왱강쟁강 뒤집 똥돌이 입투레질 동전젖무덤속에서 틉투루루틉투루루 팔간집 돌퇴마루 밑 개미들 이불짐 꿍져메고 발빠름 발볌빨뼘 참제비 굴제비들도 개바자 싸리삽작문 건너 깐죽거리며 쌔앵씨잉 뭇거미들도 반두질 투망질 얼기설기 늘어놓고 복자리 용트림 히히호호 버들가지 마개로 목구멍을 틀어막은 물병 거꾸로 매달려 노들강변 촐랑출렁 방아간을 지키던 키로 물을 길어 꽃머리에 이고 지고 돈돌라리 곱새춤 절벅즐벅 굿부채질도 하지 말라 개벌모자도 쓰지 말라 애기오줌도 찰옥수 먹여라 징쨍그락… 예, 예, 예…   ‘새양한’ 죽림동 범바위로 기우제를 지내러 새하야니 새하야니 어서들 어서들 간다 하아얀 웃동네 떼들과 아래동네 떼들이 소달구지에 소발구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흰띠 간다 하아얀 모시보자기 속 물함지에 갑뿍갑뿍 담긴 좁쌀보리쌀감자밥도 김 물물 정겨웁게 간다 하아얀 광목천보자기 속 이남박에 넌지시 담긴 돼지대가리도 군침 꿀꺽이며 흐드러져 간다 하아얀 삼베보자기 속 비술광주리에 삐죽이 목 내민 막걸리술통도 코노래 흥겨워서 간다…   아앗따,- 여보 쌍가매 에미, 범바위에 뿌릴 도야지생피를 갖고 왔능기여? 예이,- 으련히 챙겼쑤꾸예… 이랴낄낄… 둥글아, 어서들 가쟈… 워리워리… 황둥개야, 어서들 가쟈…   성스러운 고향의 넋과 유구한 오곡백과의 노래가 할아버지들과 할머니들의 석쉼한 타령과 함께 ‘새양한’ 죽림동 범바위 너머 넘어 저기 저 푸른 창공 헤가르고 자랑차게 명랑하게 울려퍼진다… 우렁차게 찬란하게 치솟구쳐 울려 퍼진다…   아희야,- 그립다 그리워 또다시 한번 그리워… ㄴ 오늘따라, 첩첩첩 뻑박골 왕버들숲 지나 저기 저 ‘새양한’ 죽림동 동산마루 하늘가에 별이 쏟아진다   희끄무레한 피겨보자기 속에서 노닐던 별들과 코쓰깨로 윤나다 팔소매 끝자락에서 뛰쳐나온 별들과 앞집 뒤집 옆집 사랑채 건너 설기떡 미역국에 띄우던 별들과 민들레이며 냉이이며 고사리이며 도라지이며가 살점이 되던 별들과 태극무양 정나는 팔간집의 호롱불 속에서 꿈자락 펼치던 별들과…   오늘도 숲속에 숨어버린 별들이 초롱초롱 이슬 맺혀 발볌발볌 눈굽에 밟혀오고…   오늘따라, 뻑박골 왕버들숲 지나 저기 저 ‘새양한’ 죽림동 동산마루 별들이 장엄히 은하수 되여 철철철 흐르고지고…   아희야,- 그립다 그리워 또다시 한번 그리워…   ㄷ 오늘따라, 그 누군가를 불러보고 싶어짐은-   아버지가 부르면 “예” 하던 정나미 별이다가 어머니가 부르면 “예” 하던 곱돌솥 별이다가 삼촌님이 부르면 “예” 하던 초롱꽃 별이다가 이모님이 부르면 “예” 하던 햇총각 별이다가 체육선생님이 부르면 “예” 하던 씨름군 별이다가 하숙집 아주매 부르면 “예” 하던 개구쟁이 별이다가 시인님께서 부르면 “예” 하던 달맞이 별이다가 오양쇠가 부르면 “예” 하던 깨끔발 별이다가…   오늘따라, 천복만복 넘쳤던 별들을 마냥 목청껏 불러 불러보고 싶어짐은 또,-   아희야,- 그립다 그리워 또다시 한번 그리워…   ㄹ … … 오늘도 이 텁석부리는 배낭 메고 고향으로 고향으로 태줄 찾아 떠난다…   벗님네들,- 무사함둥…  
7479    "당신은 감각을 잃어버리는것은 아닌지?!..." 댓글:  조회:2099  추천:0  2019-12-01
몸도,땅도 기억하는 감각을 잃어버린건 아닐지··· 2019.11.30.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한-싱가포르 수교 45주년 국제네트워크 전시 '더 센시스:과잉과 결핍 사이에서 호흡하다' 한국과 싱가포르 등 작가 13팀 참여 토탈미술관 전시 후 내년 싱가포르서 개최애들린 쿠에 ‘속삭임(당신을 기억하는 100가지 방법)’ [서울경제] 감각은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나 싱가포르서 활동하는 예술가 애들린 쿠에에게 후각을 자극하는 냄새는 할머니를 생각나게 했다. 더 정확히는 야들리(Yardley)의 잉글리시 라벤더향 파우더를 사용하던 그의 할머니와 고모할머니에 대한 기억이다. 작가는 지난 2014년 9월, 싱가포르 라벤더 거리의 철거 예정인 건물을 위한 작업을 요청받았다. 라벤더 향과 할머니들의 시대를 기억해 낸 작가는 장소의 역사성을 되짚었다. 1858년 식민지를 장악한 영국인들이 농담처럼 이름 붙인 ‘라벤더 거리’는 가스 공장의 악취와 분뇨를 비료로 사용하는 채소농장을 가로지르며 우마차가 다니는 곳이었고, 라벤더 향수를 뿌린 성매매 여성들이 드나들던 매춘업소 이름이 그 거리의 대표 건물인 ‘라벤더 스파’였다.  토탈미술관의 기획전 ‘더 센시스(The Senses):과잉과 결핍 사이에서 호흡하다’의 오프닝 퍼포먼스로 작가 쿠에가 선보인 작품 ‘속삭임(당신을 기억하는 100가지 방법)’은 이렇게 탄생했다. 철거된 호텔 객실을 재구성 한 짙은 보라색 벽면의 공간에는 라벤더 파우더가 수북이 깔렸다. 2개의 종을 매단 가느다란 빨간 실은 아시아 지역 대부분이 공유하는 ‘인연’의 상징이다. 첸 사이 화 콴 ‘대지의 소리 싱가포르’ 감각을 기억하는 것은 사람뿐만 아니다. 땅도 기억을 품는다. 싱가포르 작가 첸 사이 화 콴은 재해를 겪은 땅을 찾아다니며 깊이 1m 지점의 흙을 파 모았다. 탄소와 무기물을 함유한 흙이 전지처럼 작동해 미묘한 음파를 만들어, 지진·홍수·테러 등 땅이 겪은 상흔을 끄집어낸다. 작품 ‘대지의 소리 싱가포르’는 인간이 미처 감지하지 못하거나 잊어버린 자연의 소리를 들려준다. 이번 전시 ‘더 센시스’에 참여한 국내외 작가 13팀은 전쟁이나 식민지를 경험한 적 없는 전후 세대로, 물질적 풍요와 사회·경제적 발전의 변화 속에서 경험한 서로의 ‘다른 감각’을 보여준다. 오는 2020년 한국·싱가포르 수교 45주년을 기념하는 이 전시는 12월 2일까지 토탈미술관에서 열린 다음 내년에는 싱가포르에서도 개최될 예정이다. 이잠 라만 ‘그는 사랑할 수 없는 한 남성으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투명한 유리그릇에 담긴 연분홍 꽃은 아름답건만 슬픈 이름을 가졌다. 싱가포르 작가 이잠 라만의 ‘그는 사랑할 수 없는 한 남성으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야들야들해 보이는 꽃잎의 재료는 라만이 자신의 몸에서 떼어 낸 굳은살이다. 파르르 솟은 꽃술은 잘라낸 손·발톱이다. 꽃을 떠받친 잎사귀는 피 묻은 붕대를 잘라 만들었다. 작가는 몸이 기억하는 인간의 감정을 자신의 신체 조각들로 재구성했다. 버려졌을지 모를 은밀하고 사적인 기억들은 작품을 통해 영원성을 얻는 셈이다. 최수앙 ‘언더 더 스킨’ 극사실적인 조각으로 유명한 최수앙의 신작은 일견 파괴된 듯한 모습이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정교한 조각작업을 하다 건강까지 상하게 된 작가가 ‘이제는 안 그래야지’ 다짐했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자신도 모르는 새 너무나 ‘잘’ 재현해 놓은 인간 형상을 마주하고선 그만 “얼굴의 가운데를 엄지로 짓누르고 쓸어 올린” 작품이다. 몸에 밴 감각을 떨치지 못했던 것이다. 짓이긴 손가락 지문마저 선명해 “사실과 같은 허구에 또렷한 실재를 남기고” 있다. 김지민 ‘인사이드 아웃’ 작가 김지민의 ‘인사이드 아웃’은 해골 모양의 새장 안에 마주 앉은 새 두마 리를 통해 현대인의 지각·소통방식을 보여준다. 짹짹(tweet)거리는 새들은 생각도, 감각도 없이 옆 사람이 말한 정보를 반복적으로 따라 읊고 복제만 할 뿐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함몰된 현대인을 풍자하는 듯하다. 김 작가는 의류에 붙은 라벨을 재료로 한 작업으로 유명하지만 ‘라벨 공장’들이 인건비 싼 중국 등지로 옮겨가면서 재료 수급이 어려워진 것을 계기로 전혀 달라진 근작들을 선보이고 있다. 이준 ‘입의 향연’ 작가 이준의 ‘입의 향연’은 잘 차려놓은 식탁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맛보는 입이 아니라 쉴새 없이 재잘거리는 입을 위한 성찬이다. 관객이 내는 소리에 센서가 반응해 포털사이트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 인터넷신문 기사 제목·댓글 등을 식탁 위에 펼쳐놓는다. 식탁 색깔은 현재 미술관 바로 위 하늘의 색과 현장의 날씨를 반영한다. 접시 위에 놓인 병을 감싼 노랑·초록·파랑 등의 색깔은 카카오·네이버·페이스북과 트위터 등을 상징한다. 전시를 기획한 이승아 객원큐레이터는 “더 많은 양의 정보를 더 빠른 속도로 소통할 수 있게 된 지금, 과연 인간의 감각과 지성의 지평은 더욱 넓어졌고 그 소통 역시 더욱 확대되었는가 묻고 싶다”면서 “이번 전시는 인간의 감각을 사유하고 새롭게 경험, 지각하는 작품들을 통해 예술의 본질과 성격을 재조명하는 자리”라고 소개했다. /조상인기자 
7478    [타산지석] - 우리 연변에서도 "대형 하우스"가 있었으면... 댓글:  조회:3286  추천:0  2019-11-30
축구장 맞먹는 국내서 가장 큰 비닐하우스 2019.11.30.    좋아요 후속기사원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앵커] 정말 규모가 어마어마한 크기의 초대형 비닐하우스가 처음 선보였습니다. 공간이 넓어, 온도 조절이 잘 돼 작물 재배가 쉽다고 하는데요. 오점곤 기자가 다녀왔습니다. [기자] 그렇게 작지 않은 상당한 규모의 일반 온실. 그런데 그 옆에 있는 비닐하우스는 상상 초월입니다. 높이만 아파트 4∼5층 규모. 농구장보다 훨씬 크고 웬만한 축구장 크기와 거의 맞먹습니다. [유봉식 / 농진청 연구관 : 폭이 52m, 길이가 86m, 높이는 16m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지난 5월부터 비닐하우스를 짓기 시작했는데 국내에서는 첫 번째 시도라 짓는 과정을 드론 영상에 담아 놓기도 했습니다. 이 초대형비닐하우스가 지어진 건 지난 7월 말, 그러니까 한여름이었는데 이렇게 이번에 처음으로 장미 수확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차광막, 환풍기, 보광등, 분무시스템 등 그야말로 갖출 건 다 갖춘 초대형 온실. 시범적으로 장미와 딸기를 길러봤는데 어떤 효과가 있었을까? [김지강 / 농진청 원예작물부장 : 이 고온극복하우스에서 재배한 결과 장미는 초기 수량이 늘어났고 딸기는 일반 농가보다 수확 시기를 앞당길 수 있었습니다.] 점점 더 뜨거워지는 여름철 날씨와 폭염이지만, 초대형 하우스라 최대 13도 낮게 온도 조절을 할 수 있어 재배가 가능했습니다. [김지강 / 농진청 원예작물부장 : 온도가 높으면 생육에 어려움이 많거든요. 온도가 높을 때 온도를 기존하우스보다 많이 낮출 수 있어서….] 농진청은 앞으로 이 초대형 하우스에서 다른 작물의 시험 재배도 확대할 예정입니다. 또 열사의 나라 아랍에미리트에도 내년쯤 이 초대형 비닐하우스를 시범 설치할 예정입니다. /YTN 오점곤
7477    [그것이 알고싶다] - 로봇 앞엔 이젠 사람은 노예... 댓글:  조회:3185  추천:0  2019-11-30
  배달도 요리도 척척… 가까워진 ‘푸드 로봇’, 과제는? 2019.11.30.    좋아요 화나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앵커] 로봇이 음식을 만들고 배달하는 시대가 성큼 다가왔습니다.  아직 사람을 완벽히 대체할 수준은 아니지만, 가까운 미래엔 이른바 '푸드 로봇'과 함께하는 일상이 현실화될 것으로 기대되는데요. 황정호 기자가 직접 체험해봤습니다 [리포트] 대학 캠퍼스 식당 앞에 배달 로봇이 등장했습니다. 스마트폰 앱에서, 음식 주문을 받자마자 배달 준비에 들어갑니다. 캠퍼스 안에 음식을 받을 수 있는 장소가 9곳 마련돼있는데 그 중 한 군데를 선택하면 배달로봇이 음식을 제 앞까지 가져다줍니다.  커브 길도 돌고.. 방지턱도 곧잘 지나갑니다. 하지만, 배달 실력은 아직 초봅니다. [김요섭/배달서비스업체 로봇딜리버리셀 연구이사 : "자율주행으로 안 되는 구간들이 항상 있거든요. 저희가 원격으로 조종할 수 있게 해서 그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계속 고민하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널찍한 매장 한쪽에 국수 삶는 로봇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와아~신기하게 (요리)하네.) 여기 사람이 필요없겠다. (그러게)"] 고명을 골라 그릇에 담기만 하면 금세 완성됩니다. 긴 팔로 익숙하게 육수를 담아줍니다. [신철호/○○전자 컨버전스센터 로봇선행연구소 연구위원 : "조리사 교육프로그램에 저희도 들어가서 실제로 어떤 모션으로 작업하시는지 보고 인간 친화적인 모션이 되도록 연구를 해왔습니다."] 다만, 사람을 대신하려면 편의성과 안전성을 더 높여야 합니다. [오준호/카이스트 기계공학과 교수 : "굉장히 제한된 조건에서 연구를 하고 개발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이 실제로 환경에 갔을 때는 예측하지 못한 환경들이 너무 많이 발생하는 거죠."] 인건비 부담을 줄이려는 외식 업계에서도 로봇 시장을 선점하려는 경쟁이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KBS 뉴스 황정호입니다. 황정호 기자
7476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백두산연구",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959  추천:0  2019-11-30
영화 속 '백두산 폭발'... 실제 가능성은? 2019.11.30.    화나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동영상 뉴스 [앵커] 민족의 영산, 백두산은 화산 활동이 주춤하고 있을 뿐 살아있는 위험한 활화산입니다. 이 백두산이 대폭발을 일으키는 상황을 가정한 대형 재난 영화가 개봉을 앞두고 있는데요. 영화 '백두산'의 내용과 실제 가능성을 정혜윤 기자가 알아봤습니다. [기자] 남북을 집어삼킬 초유의 재난이 시작되고 한반도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에 빠집니다. 역사상 최대 규모로 백두산이 화산 폭발을 일으킨 겁니다. 백두산의 마지막 폭발을 저지하고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의 운명 같은 이야기를 다룬 영화 '백두산'입니다. 이런 영화 같은 이야기가 실제 가능한 걸까? 화산학자들은 백두산을 세계에서 가장 위협적인 화산 중 한 곳으로 주목하고 있습니다. 지표 아래 마그마가 살아 있는 '활화산'으로 언제든 폭발할 수 있다는 겁니다. [윤성효 / 부산대학교 지구과학교육과 교수 : 천 년에 한 번 정도는 백두산에서 큰 규모의 화산 분화가 있었다고 유추를 하기 때문에...] [제임스 해먼드 / 영국 버크백 런던대 교수 : 거대한 폭발의 영향은 엄청납니다. 946년에 폭발한 백두산도 그런 화산 중의 하나였습니다.] 2000년대 들어 백두산 주변 지표면이 부풀어 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하거나, 화산성 지진이 급증하는 등 심상치 않은 화산 징후들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윤수 / 포항공대 환경공학과 교수 : 2002년 6월부터 2005년 12월까지 3년 반 동안 백두산에서 심각한 화산 징후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언제 또 나타날지 모릅니다. 우리는 항상 긴장해야 하거든요.] 전문가들은 백두산 대폭발이 일어나면 800도가 넘는 뜨거운 용암과 화산석으로 백두산 주변 지역은 초토화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또 남북한 모두 재앙 수준의 화산재 피해를 보게 되고 그 피해액은 남한만 11조 1,895억 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됐습니다. 우리 정부가 북한에 백두산 화산 분화에 대한 공동 연구를 꾸준하게 요구하는 이유입니다. YTN 정혜윤입니다.
7475    "새의 지저귐 소리를 알아 들을수 있어야?!..." 댓글:  조회:2051  추천:0  2019-11-30
황홀한 시의 세계 2019년 11월 29일 작성자: 강룡운 황홀한 시의 세계 □ 강룡운   1 나는 어려서부터 시를 좋아했다. 소학교 다닐 땐 동요 동시를 좋아했고 중학교 때는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조기천의 시를 유난히 좋아했다. 그때 우리 학교의 한 선생님은 휴교일이면 자주 학교에 나와 조용한 교무실에서 우람찬 목소리로 조기천의 시를 랑송하군 하였는데 격정에 차넘치는 그 모습이 얼마나 멋있어 보이던지 나도 가끔 선생님처럼 시랑송을 해보면서 시의 황홀경에 빠져보았다. 그 시절엔 무턱대고 시를 좋아하였기에 그저 손에 닥치는 대로 뿌쉬낀이며 레르몬또브며 이싸꼽쓰끼의 시집들을 들고 다니면서 그 어느 하나도 제대로 리해하지 못하는 주제에 그래도 열심히 읽군 하였다. 그러다가 대학에 진학해서는 김소월의 시에 흠뻑 빠져 그 아름다운 음률에 심취된 듯 때로는 시를 쓴답시고 무병신음 (无病呻吟)도 해보았고 한때는 마야꼽쓰끼와 하경지의 시를 흔상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전공이 중국문학이다 보니 주로는 당송시사(唐诗宋词)를 많이 접하게 되였고 ‘문화대혁명’ 때는 모택동의 시사를 최고의 시로 간주하기도 했었다.   2 이렇게 나도 명색이 문학을 전공한 사람인데 그 언제부터인가 저도 모르게 점점 시를 멀리하게 되였다. 왜 이렇게 되였을까? 그것은 줄곧 전통시만 읽어오던 나로서는 현대시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태여나는 시들을 보게 되면 아무리 읽어봐도 도통 그 뜻을 리해할수가 없었기 때문이였다. 지금은 다들 이미지시를 현대시라고 지칭한다. 한 시인이 쓴 《이미지》란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말짱 처음 보는 것들이구나 진달랜가 하면 진달래 아니고 바윈가 하면 바위 아니고 강아진가 하면 강아지 아니고 죄다 이 생 저 생에도 없는 것들 불과 물의 살놀이로 태여난 이쁨들아   진달랜가 하면 진달래 아니고, 바윈가 하면 바위 아니고, 강아진가 하면 강아지 아닌 이런 시구들을 도대체 어떻게 리해한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차츰 시와는 담을 쌓고 일찌감치 멀리 도망쳐버렸다. 그래서 정년퇴직하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잡지나 신문지상에서 시를 보게 되여도 아예 곁눈조차 주지 않았다.   3 최근 몇년간 나는 북경, 청도, 무석 등 여러 도시들을 전전하면서 만년을 보내게 되였는데 금년 여름엔 무석이란 고장이 어찌나 무더운지 무작정 피서하러 고향으로 돌아왔다. 연길에 와서 우연한 기회에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 2007년 4월에 출간한 최룡관 저 《이미지시 창작론》이란 책을 손에 쥐게 되였다. 범굴에 들어가야 범새끼를 잡고 배를 먹어봐야 배맛을 안다고 하지 않았던가. 인생만년에는 흔하디 흔한 게 시간이고 날마다 남아 도는 게 시간인지라 나는 어디 한번 시간을 허비해볼 셈 치고 《이미지시 창작론》이란 이 범의 굴속으로 직접 들어가 보기로 작심했다.   4 최룡관 시인이 10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자료를 수집 정리하고 알심들여 집필한 《이미지시 창작론》은 수많은 동서고금의 명시들을 이미지즘의 시각으로 재조명한 48만자에 달하는 현대시론에 관한 전문적인 문학저서로서 우리 연변에선 물론, 중국조선족문단에서도 미증유의 거작이였다. 그래서 나는 최룡관 시인이 우리 겨레 문학 발전을 위하여 큰 일을 해놓았다고 생각한다. 한국 《자유문학》 문학계간(季刊)이 2008년 가을호 69기부터 시작하여 2011년 여름호 80기에 이르기까지 장장 3년동안이나 12기에 나누어 연변 조선족시인이 쓴 시론 《이미지시 창작론》을 련재했다는 것은 두말할것없이 이 책의 무게를 잘 말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최룡관 시인이 독자들에게 펼쳐 보인 현대시의 세계는 어쩌면 사람들에게 낮설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막상 그 안에 들어가 보면 거기에는 한없이 황홀하고 아름다운 시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5 그러면 먼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한 시인의 대표작부터 읽어보자.   하아얀 너울을 쓴 수천만 가수와 악사들 휘우듬히 반원으로 둘러서서 장엄한 교향곡을 울린다 튕기는 하아얀 목소리에 하아얀 악음에 젖어 속세의 어지러움과 소음 쥐죽은 나라로 달아나고 청신과 순수만 메아리쳐 구중천을 휘젓는다 천만년 부르고 불러도 끝이 없는 다부작 연주 그속에서 한번만 젖어봐도 혼령마저 시원히 가셔지는 너그러운 대자연의 교향곡이여   이것은 최룡관 시인이 우리 민족의 저명한 시인 김응준님의 수많은 시 가운데서 그의 대표작으로 점찍은 “나이아가라폭포”라는 시의 전문이다. “이 시는 폭포에 대한 설명이나 해석이 한마디도 없다. 제목에 ‘나이아가라폭포’란 명칭이 있을 뿐 본문에는 폭포라는 언어조차 비치지 않는다.” 이 시가 바로 이미지시, 바꾸어 말하면 현대시라는 것이다. 나는 이처럼 훌륭한 현대시도 온통 변형투성이라는 리유 때문에, 그리고 전통시처럼 쉽게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는 리유 때문에 거부감을 갖고 외면하여 왔다. 그런데 최룡관 시인이 펴낸《이미지시 창작론》을 읽고나니 김응준 시인의 “나이아가라폭포”를 비롯하여 김철 시인의 “대장간 모루우에서”, 조룡남 시인의 “옥을 파간 자리”, 리상각 시인의 “파도” 등 현대시 대표작품들이 차츰 가슴에 와 닿기 시작했고 비록 아직까지는 많이 미흡하지만 그래도 조금씩이나마 리해가 되기 시작하였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이 현대시들의 묘미에 대해서도 재삼 음미해볼 수 있게 되였다.   6 서혜의 골짜기 파란 잔디밭에서 고독의 피스튼이 작업한다 한쌍 꽃망울의 향로에 취하여 무아의 황홀이 퍼득거림이여 비탄의 발광속에서 하늘의 열림이여 대지가 태여남이여 부옇게 휘여든 하늘에서 흐느끼는 구름구름 훨훨 태양의 힘찬 날개짓 아늑한 자장가의 부드러운 바람결에 별들이 익어가는 소리 생성의 도가니에 빠져버린 대지의 희열이여 면면한 산발은 그대 기발의 물결이런가 오색이 피여나는 오색의 소리는 그대의 아름다운 노래런가   이것은 최룡관 시인의 “고독의 노래”라는 시의 마지막 한 부분이다. 몇번 읽어봐도 무엇을 썼는지 잘 리해가 되지 않는다. 무언가 짚이는 데가 있으면서도 알듯말듯 아리숭하고 몽롱하다. 하지만 참 아름답다. 게다가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한 시이므로. 독자 나름 대로 상상의 날개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이 주어져있기에 각양각색의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것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시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이런 시를 예술이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시는 언어의 예술이다. 만약 자연의 모습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려낸다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생각을 생각나는 그대로 직설한다면 그것 역시 문학이 아니다. 신이 만들어낸 이 세상 만물 중에는 직선이라는 게 없다. 곡선미가 바로 자연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이다. 직선은 예술이 아니다. 미도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게끔 직설적으로 씌여진 시는 문학이 아니다. 예술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작자가 독자에게 전혀 상상의 공간을 마련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은 례외없이 미를 추구한다. 나는 이 세상 모든 예술의 궁국적인 미적 감수는 애오라지 수용자의 상상과 재구성을 거쳐야만 비로소 그 미적 가치가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7 나는 온 세상을 술렁거리게 만드는 피카소의 일부 대표작들을 감상하면서 나도 남들처럼 그것들이 어찌하여 그렇게 엄청난 천문학적인 수자로 헤아려지는 값어치를 지니게 된 명화들인가를 리해해보려고 무등 애를 써보았다. 그런데 그 게 다 허사였다. 아직까지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 마냥 정답을 찾을 수 없는 미스터리, 아니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일지도 모른다. 얼마전에 읽었던 피카소에 관한 한 일화가 매우 인상적이였다. 누군가가 피카소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당신의 그림은 어찌하여 그렇게 알아보기 힘든 겁니까?” 그러자 피카소가 되려 그 사람에게 물었단다. 그들의 일문일답은 아래와 같다 “당신은 새의 지저귐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소리가 듣기 좋았습니까?” “예, 듣기 좋았습니다.” “그럼 그 소리를 알아 들을 수 있었습니까?” 이 일문일답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2015년 9월 15일 연길에서)  
7474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평화, 친선의 사절" = 참대곰 댓글:  조회:2900  추천:0  2019-11-30
‘영어 능력자’ 판다 귀국…모국어 不通 [ 2019년 11월 29일]     ‘영어 능력자’ 판다 귀국…모국어 不通, 영어에만 반응   [인민망 한국어판 11월 27일] 미국에 임대됐던 판다 베이베이(貝貝)가 첫 귀국 ‘쇼’를 했다. 귀국 후 처음 공개된 베이베이는 부끄러운지 나무 뒤에 숨어 죽순만 먹고 있다. 베이베이가 모국어에 익숙해지도록 하기 위해 사육사가 영어와 쓰촨(四川) 말로 그에게 말을 건다. 네티즌들은 “분명 영어 8급 판다일거야~”라는 댓글을 달았다. 안타깝게도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베이베이는 중국어(쓰촨 말)를 알아 듣지 못한다. 2016년 귀국한 ‘메이룬(美輪)’과 ‘메이환(美奐)’이 중국 사육사의 중국어 명령에 무반응으로 일관하다 ‘come here’라고 하자 느릿느릿 걸어왔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베이베이는 2015년에 톈톈(添添)과 메이샹(美香)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다. 중•미 판다 번식 관련 협정에 따라 미국 국립동물원에서 태어난 판다는 4살이 되면 중국으로 돌려 보내진다. 앞서 베이베이의 형 타이산(泰山)과 누나 바오바오(寶寶)도 귀국했다. 고국으로 돌아온 베이베이의 인기가 치솟을 때 베이베이의 귀국을 앞둔 미국 동물원 안 분위기는 슬픔에 잠겼다. 미국 매체는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보도를 내보냈다.  ▎CNN: Bye Bye, 베이베이: 사랑스런 판다 베이베이가 워싱턴에서 전용기 편으로 중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ABC: 베이베이의 귀국을 앞두고 미국 국립동물원이 ‘Bye Bye, 베이베이’ 환송식을 열었습니다. ▎ABC산하 방송국 WTVM 홈페이지: 판다 베이베이가 워싱턴 동물원을 떠나 귀국해야 합니다. 팬들이 작별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베이베이가 있던 워싱턴 국립동물원은 베이베이의 팬들이 베이베이와 다시 한 번 더 놀 수 있도록 하기 위해 1주일간의 환송식을 열었다. 1주일의 환송식 기간, 판다관은 베이베이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미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로 가득 찼다. 워싱턴 국립동물원 측은 올해로 4살이 된 베이베이는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떠나기 전 1주일간 하루 평균 3,000~5,000명이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고 전했다. 판다는 중국의 국보이자 중국의 고유종이다. 판다들은 과거 여러 번 외국으로 보내져 우호 사절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고, 평화와 친선의 상징으로 차츰 자리를 잡았다. (번역: 인민넷 이인숙) 원문 출처: 중국일보 위챗 공식계정. abcnews, wtvm, cnn, cgtn, 관찰자망, 신화망, iPanda, 시각지 등 내용 종합
7473    트렁크행진곡 댓글:  조회:1325  추천:0  2019-11-28
  ={시랑송 원고}=   트렁크행진곡                   죽림     그 어느 때,-   트렁크란 이름표 달고 성스런 고향 삽짝문 활짝 뿌리치고 비행기 귀문(貴門) 굳게 굳게 잡고 콩크리트 무덤- 서울행 하고 종횡무진 속초 부산 내리 끌리우고 위풍당당 광주 파주 올리 끌리우고 우왕좌왕 안동 대전 가로 끌리우고 동서남북 대구 목포 세로 끌리우고 다시 한번 반의 반도를 들숨날숨과 함께 허파속에 억겁마저 마구마구 털어넣는... …   그 어느 어느 일찰나,-   해란강 량안 저 너머 너머 일송정기슭 사과배 고향에서 울고 있다 트렁크라는 이름표를 짓씹어버린채 울고 있다 설한풍을 듬뿍 껴안고 슬피디 울고있다 그믐밤 오늘, 꺼이꺼이 울고 있다...   강 건너 산 넘어 저편을 넋두리하며 울고 있다 인천공항 앞바다에 한을 풀어내며 울고 있다 박달재를 허위허위 쓴웃음하며 울고 있다 문경새재를 굽이굽이 황그리며 울고 있다...   두바퀴 처절히 짝사랑한채 울고 있다 끌손잡이도 산산이 주눅이든채 울고 있다 조르러기도 후줄근히 탕개풀린채 울고 있다 구곡간장 얼키설키 곰팡이 피운채 울고 있다...   용두레우물가를 구석구석 떠난채 울고 있다 천불지산 송이버섯 향기를 뒤로한채 울고 있다 해란강여울소리 가슴에 품은채 울고 있다 새하아얀 얼 흑진주한테 전당잡힌채 울고 있다... …   당신 트렁크의 주체방향, 당신 트렁크의 번지, 당신 트렁크의 얼,ㅡ   무사합니껴…    
7472    "7천만"에게 보내는 향서 댓글:  조회:1243  추천:0  2019-11-28
메아리 그리고 봄우뢰(외2수)                       죽림     백두산 메아리도 한라산 메아리도 하얗게 바래며 혼백으로 익힌 소리 소리 장벽의      울부짖음에         손톱 여물 깨고지고... 봄우뢰 울고지고...       "7천만"에게 보내는 향서     삼천리 금수강산아,- 새하야니 새하야니 너도 나도 타(他)도 가슴을 열자... 맘과 맘 너머 벽을 허물자... 선과 선 사이길에 꽃잔디 심자...   오해 아닌 최대의 죄악의 오해와 시비 아닌 최대의 죄악의 시비와 슬픔 아닌 최대의 죄악의 슬픔과 고독 아닌 최대의 죄악의 고독과 랑비 아닌 최대의 죄악의 랑비와 이산 아닌 최대의 죄악의 이산을 안고 두만강을 건너 온 할배는 북녘땅에 딸을 묻은채 압록강을 건너 온 할매는 남녘땅에 아들 묻은채 등천길에 허위허위 오르며 눈을 감지 못하고지고...   "7천만"은 고향도 없다... "7천만"은 번지도 없다...   여보소, 벗님네들,- 살아서 한냥짜리가 될가?? 죽어서 천만냥짜리가 될가!! 모두들 종당엔 저ㅡ 높은 산아래        자그마한 "산"이 되련만!!!    아희야,ㅡ  삼천리 금수강산아,- 새하야니 새하야니 "7천만"에게 고향을 찾아주자... "7천만"에게 번지를 달아주자...     망향편지   엄마,- 엄마는 호롱불 밑에서 이 새벽녘까지 수해(嗽咳)에 시름시들 하면서 두만강 투망을 다아 깁어놓으셨능기여   엄마,- 새벽녘 짓깨는 소리 듣는 순간 고향 엄마는 마냥 이내 눈가에 대롱대롱 밟혀오고 있었쑤예   두만강으로 찬란히 달려나가 보았쓔예 두만강은  모든 것 다ㅡ "주저리주저리" 받아주고 있었쑤꾸매 성스러운 울 고향 엄마처럼...     룡정 명동 하늘가에 별무리 흐른다                                                  오늘 따라 용두레우물가 왕버들나무 지나      저기 저 룡정 동산마루 너머 별들이 쏟아진다       희끄무러한 광목천 보자기에서 노닐던 별들과 코쓰깨로 윤나다 팔소매끝자락에서 뛰쳐나온 별들과     앞집 뒷집 삽작문 건너 설기떡 미역국에 띄웠던 별들과     민들레며 냉이며 고사리며 도라지며가 살점이였던 별들과     도깨비짐승들과 장돌뱅이짐승들이 마을안팎 노릴던 별들과     태극문양 정나는 팔간집의 호롱불속에서 꿈자락 펼치던 별들과...       “...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페이(佩), 찡(鏡), 위이(玉) 이런 이국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윤동주 시 “별을 헤는 밤”에서                           1941.11.5.       오늘도 "흙으로 덮어 버린" 별들이  초롱초롱 이슬 맺혀 즈려밟혀오고     "부끄러움"의 별과 함께      아리랑 고개 너머 넘어      룡정 명동 하늘가에 별무리 흘러 흐른다...       오호라, 불멸의 영원한 청년이여-     “별을 헤는” 동주의  “밤”이여-      
7471    하늘, 새벽, 떼목, 진달래동네... 그립다... 댓글:  조회:1194  추천:0  2019-11-28
  하늘(3수)                죽림   아버님 아버님 아버님은,- 남들을 위한 하늘 그렇게도 성스럽게 성스러이 펼쳐 주셨소이다...   아버님 아버님 아버님은,- 자신을 위한 하늘 단 한자락도 아니 갖고 아니 갖고 가셨소이다...   아 ㅡ 버 ㅡ 님 ㅡ       새벽       어머님 어머님 어머님은,- 남들을 위한 종을 그렇게도 수천만번 수천만번 쳐주셔소이다...   어머님 어머님 어머님은,- 자신을 위한 종을 단 한번도 아니 치고 아니 치고 가셨소이다...   어 ㅡ 머 ㅡ 님 ㅡ         두만강에 떼목이 흐른다                                  여보소, 벗님네들! 버빡골 할배 떼목앞에서 거연히 뼈로 솟아 흐르오 죽림동 할배 떼목뒤에서 소소리 탑으로 솟아 흐르오 진달래동산 빠알갛게 지나 살구꽃동네 새하얗게 돌아 굽이굽이마다 아리랑 구성지오 에헹야 듸야  듸헹야 에야 두만강에 겨레의 새전설 새하야니... 새하야니... 지평선 향해 흘러 흐르고지고...       진달래동네                          이 골연 저 골연 사이사이 어깨결이 하는 산발 따라 찬란히 미여터지도록 파아란 추억의 연줄 주저리주저리 풀리고...   이 산자락 저 산마루 아름아름 재너머 화사스럽게 복 터지도록 연분홍빛잔치 한마당 강강술래 처절히 처절히 펼치는... 이 찰나,-   쉿ㅡ 잠깐, 고택스러운 내 고향 소꿉놀이터는? 앞집 춘이와 진달래꽃전 냠냠 나눠먹던 세상은?   아희야,  그립다 그리워 또 다시 한번 그리워...    
7470    [타산지석] - 우리 연변에도 "관객참여 공연장" 있었으면... 댓글:  조회:3153  추천:0  2019-11-28
무대 거닐며, 음식 먹고, 줄거리 바꾸는 '관객참여' 공연 인기 기사입력 2019.11.28.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앵커]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문 '관객 참여형' 공연이 계속 진화 중입니다. 소통을 넘어 음식을 먹으며 관람하고, 관객의 결정에 줄거리가 바뀌기도 합니다.  최윤정 기자입니다. [리포트] 미용실 2층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는 연극 '쉬어 매드니스' 극중 형사들은 관객과 함께 범인을 찾습니다. 배우들이 그럴싸한 알리바이를 내세울 때 관객들이 사건 당일 행적을 캐묻습니다.  남자 관객 "저희가 참여하면서 보니까 재밌었고 집중해서 보게 되고,"  관객의 추리와 결정에 따라 줄거리 까지 바뀌는데.. 이번 공연의 범인은 미용실 여직원의 애인으로 밝혀집니다.  박종수 / 오준수 역 "집중 공격하는 질문들이라던지 그런 것들을 통해서 결말이 매번 바뀌니까 공연을 하는 입장에서 배우들도 항상 새롭고요"  셰익스피어의 희곡 3개를 엮은 '로마비극'도 무대와 관객의 경계를 허물었습니다.  5시간이 넘는 공연시간 동안 관객들은 무대와 객석을 자유롭게 오가고, 심지어 음식을 먹으며 공연을 보기도 합니다.  관객 참여형 공연으로 영국 역사상 가장 롱런하고 있는 위대한 개츠비는 다음달 관객을 찾아옵니다.  1920년 미국을 재현한 다양한 공간에서 관객과 소통하며, 현장성과 즉흥성을 살렸습니다. 무대를 벗어난 배우, 무대로 올라온 관객. 관객 참여형 공연이 새로운 장르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TV조선 최윤정입니다. 
  ○○○는 사람보다 더 '오른쪽'을 좋아한다 2019.11.28.    후속기사원해요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먹이를 캐내기 직전 왼쪽으로 회전해 우측 몸을 아래로 돌린 돌고래의 모습. (https://royalsocietypublishing.org/doi/10.1098/rsos.190929#d3e634) 지능이 높은 동물 중 하나로 알려진 돌고래가 사람보다 더 심한 ‘오른쪽 편향’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인간은 약 90%가 오른손잡이이지만, 가장 흔하게 관찰되는 돌고래 중 하나인 큰돌고래(병코돌고래)들은 해저에서 먹이를 사냥할 때 99% 이상 오른쪽 편향을 나타냈다. 해당 연구는 27일(현지시간) 발간된 영국왕립학회의 ‘로열 소사이어티 오픈 사이언스’ 저널에 실렸다.  미국의 비영리단체 ‘돌핀 커뮤니케이션 프로젝트’(Dolphin Communication Project)는 카리브해의 바하마에서 2012년부터 2018년까지 큰돌고래들의 행동을 관찰했다. 돌고래들은 초음파를 활용해 해저의 모래 속 먹이를 찾아내는데, 주둥이로 모래구멍을 파 먹이를 낚아채기 직전에 순간적으로 90도에서 180도를 회전한다. 이때 대부분은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오른쪽 몸을 바닥에 가깝게 만들었다.  이들이 관찰한 돌고래 수는 최소 27마리였으며, 총 709번의 회전 중 705건(99.44%)이 좌회전이었다. 4번의 예외를 보여준 건 딱 한마리의 돌고래였다. 이 돌고래는 오른쪽 가슴지느러미가 기형인 경우였으나, 다른 똑같이 기형을 가졌거나 오른쪽 지느러미가 없었던 다른 두 돌고래는 다른 돌고래들과 같이 좌회전을 했다.  연구진들은 급격한 좌회전 후 오른쪽 눈과 오른쪽 몸을 해저표면에 가깝게 유지한 것이 강력한 오른쪽 편향을 드러낸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 이유로는 돌고래 두개골의 좌우가 비대칭이며 후두가 왼쪽으로 치우쳐 음식을 넘길 공간은 오른쪽이 더 넓다는 점, 외비공(콧구멍) 아래에 있는 두 개의 소리를 만드는 기관(원숭이입술 혹은 소리입술) 중 오른쪽 편이 더 크다는 점과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또다른 가능성은 뇌의 작용과 연관된다. 돌고래는 시각 정보와 초음파 정보를 합쳐 물체의 모양을 시각화하며, 공간지각 능력을 발휘할 때는 오른눈을 사용하는 경우가 더 탁월했다. 사람처럼 돌고래도 한쪽 몸의 감각정보를 반대쪽 뇌에서 처리하므로, 뇌의 왼쪽 반구가 시각 정보와 초음파 정보를 처리하는 데에 더 유리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오른쪽 편향은 많은 포유류와 비포유류에서 널리 관찰된다. 큰돌고래 외에 다른 고래들도 일반적으로 오른쪽 편향을 보이고 있다. 귀신고래와 혹등고래는 해저에서 먹이를 사냥할 때 오른쪽으로 구르는 경향이 있고, 눈에 수정체가 없어 음파탐지만으로 수영을 하는 갠지스강돌고래는 수영을 할 때 늘 오른쪽 몸을 바닥으로 향한 채 수영하는 것이 관찰됐다. 영국 가디언지에 따르면, 사람과에 속하는 고릴라 또한 오른손을 주로 사용한다. 왼쪽을 쓰는 성향이 우세한 동물로는 캥거루가 꼽힌다. 고양이의 경우, 수컷은 왼발잡이가 많고 암컷은 오른발잡이가 많은 편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임소정 기자
7468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비닐쓰레기전쟁",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2826  추천:0  2019-11-28
태국 야생 사슴 뱃속에서 나온 쓰레기들… 플라스틱만 7kg 2019년11월27일  태국 한 국립공원의 야생 사슴 뱃속에서 플라스틱 쓰레기 7㎏가 나와 다시 한 번 환경 오염 심각성을 일깨우고 있다. 일간 방콕포스트에 따르면 지난 26일 북부 람팡주에 있는 쿤 사탄 국립공원 사무소 근처에서 수컷 야생 사슴이 발견됐다. 이 사슴은 키 135㎝에 몸길이 230㎝, 몸무게 200㎏에 달하는 대형 야생 동물로 10살이 넘은 것으로 추정됐다. 발견 당시 사슴은 죽은 지 수일이 지난 듯 다소 여위고, 털이 빠져있었다. 또 발굽에도 문제가 보이는 등 건강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국립공원 관리사무소는 정확한 사인을 밝히기 위해 사체 부검에 나섰다. 부검 결과 사슴의 위에서 플라스틱 쓰레기를 비롯해 속옷, 손수건 등이 나왔다. 위에서 나온 쓰레기양은 플라스틱 쓰레기만 7㎏에 달했다. 플라스틱 쓰레기에는 커피 용기와 즉석 라면 용기, 비닐봉지, 고무장갑, 플라스틱 밧줄 등이 포함됐다. 국립공원 사무소 측은 사슴이 각종 쓰레기를 먹어 장이 막히면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한다. 이번 사건으로 해당 국립공원은 내년 1월 1일부터 비닐봉지나 일회용 도시락 등 플라스틱 제품 반입을 금지하기로 했다. 태국은 지난 8월에도 해양 쓰레기로 멸종위기 해양 포유류 듀공 '마리암'을 잃은 바 있다. 지난 4월 남부 끄라비 지역에서 마을 주민들에게 발견된 마리암은 듀공 보호구역으로 옮겨져 보호를 받던 중 숨졌다. 국립공원보호국은 마리암을 보호국은 바다에 폭우와 거친 파도가 예보되면서 해상 보호구역에서 실내 수조로 옮겼다. 하지만 숨을 거둔 마리암의 장에서 20㎝ 크기의 플라스틱 한 조각을 발견했다. 보호국은 마리암이 플라스틱을 먹고 위장 염증 등 쇼크와 고통을 겪다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고 있다. /중앙일보
7467    [그것이 알고싶다] - "거북선"을 보고 "거북선"을 그리다... 댓글:  조회:4553  추천:0  2019-11-27
  실학자가 거북선을 직접 보고 그린 그림을 공개합니다 2019.11.27.    좋아요 후속기사원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조선 후기 하백원 작품... 거북선 연구에 새로운 길 모색 가능한 중요한 자료 [오마이뉴스 황정수 기자] ▲  하백원 ‘영보정’ 중 ‘거북선’ 부분 ⓒ 황정수   조선 후기 전남 화순 출신의 규남(圭南) 하백원은 다방면에 재능이 많았던 실학자로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 1727-1798), 이재(?齋) 황윤석(黃胤錫, 1729-1791)과 함께 호남의 3대 실학자로 불렸다. 중앙의 학자들과도 교류가 많아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1783) 등과도 소통을 하였다. 그는 천문, 지리, 산술, 율력 등 실질적인 학문에 몰두하였고, 그림이나 글씨에도 능해 여러 종의 서화첩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는 혼자 힘으로 자승차(양수기)를 발명하였고, 동국지도, 만국지도, 천문도 등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또한 자명종, 계영배(戒盈杯), 방적기 등 많은 새로운 물건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평소에는 자명종을 걸어두고 동네 사람들에게 시간에 맞추어 생활하도록 하는 등 과학 정신을 생활화 한 실질적인 실학자이기도 하였다.   ▲  현재의 충남 보령 오천항 ‘영보정’ ⓒ 황정수   하백원은 61세 되던 1842년 충남 보령으로 유배를 당한다. 석성(石城) 현감으로 부임하였다 지방 토호들에게 모함을 당하며 겪은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보령은 충청 수영이 있는 군사 지역으로 매우 외진 곳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약 1년 남짓 귀양 생활을 하는데, 그동안 보령 지역 선비들과 가까이 지낸다. 1842년 4월 15일, 하백원은 보령 출신의 이병중(李秉中), 이우명(李遇明), 조순영(趙淳榮), 이우정(李遇正), 심사숙(沈思淑) 등 5명의 선비들과 배를 타고 바다를 유람한다. 이곳은 군사 지역이지만 오랫동안 경치가 좋은 곳으로 유명한 명승지였다. 지금의 충남 보령 오천항 지역이다. 이들은 배를 타고 바닷가의 명승을 감상하며 시를 짓는다. 그림을 잘 그렸던 하백원이 '송호(松湖)', '황학루(黃鶴樓)', '영보정(永保亭)' 등 명승 세 곳을 차례로 그리면, 나머지 여섯 명은 유람하는 동안 느낀 감상을 시로 지었다. 유람을 끝낸 후 이들은 그날 추억을 담은 글들을 모아 모두 여섯 개의 서화첩을 만들어 나누어 갖기로 약속한다.             ▲  하백원 ‘해유첩’ 표지와 속지 ⓒ 황정수 서화첩은 '해유시화(海遊詩畵)' 또는 '해유첩(海遊帖)'이라 제첨 하였고, 속지에 '서호기관(西湖奇觀)'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이어 하백원과 이우명이 서문을 쓰고, 다음에 하백원의 그림 한 점을 싣고 여섯 명의 시를 차례로 붙였다. 마지막에는 이병중의 발문을 달아 끝을 맺었다. 각자 지은 글은 모두 자신이 직접 썼으며, 그림은 모두 하백원이 그렸다. 이 서화첩은 유람한 이듬해인 1843년 7월 16일에야 완성된다. 6개의 서화첩을 만드는데 꼭 1년 3개월이 걸렸다. 이때 쯤 하백원의 유배가 풀려 고향에 돌아갈 것 같은 분위기가 되자, 회합을 갖고 서화첩을 나누어 갖는다. 이 때 만든 여섯 개의 서화첩 중 현재 두 종이 전한다. 하나는 하백원 후손에게 전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10여 년전부터 간직해오던 필자의 소장품이다. 하백원 집안 소장품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져왔으나, 필자 소장품은 이번에 처음 세상에 공개하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 '해유첩'을 입수한 후 글의 내용을 번역하고 그림과의 연관성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거북선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충청 수영(水營)에 정박해 있는 '거북선(龜船)'의 모습을 보고 그린 이 그림은 그동안 전해 오던 거북선의 구조를 선묘로 그린 것이나, 민화 속 거북선과 달리, 실학자가 실제 거북선을 보고 회화적으로 그린 것이라는데 그 특징이 있다.   ▲  하백원 ‘해유첩’ 중 ‘영보정’ 부분. ⓒ 황정수   하백원이 그린 '송호', '황학루', '영보정' 세 곳의 그림은 모두 지도식 산수화이다. 산세나 물에 떠 있는 배 등을 제대로 학습한 화법으로 그리지 못하고 지도식 민화 같은 양식으로 그렸다. 하백원이 전문적인 미술 수업을 하지 못하고 독학하다 보니 더 이상의 솜씨를 내기 어려웠던 듯하다. 이 세 점 중 '영보정'을 그린 그림 속에 거북선의 모습이 나온다. '영보정'은 충청 수영의 바닷가 쪽에 있는 가장 큰 정자로 경치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서해안 바다가 가장 멀리 보이는 요지이다. 수영 앞에는 항상 이곳을 지키는 배들이 정박해 있거나 수영을 지키느라 바다 위를 떠다니며 활동 중이었다. 그런데 마침 하백원 일행이 이곳을 유람할 때 거북선이 판옥선(板屋船)과 나란히 정박해 있었다. 하백원은 충무공 이순신의 옛 적 일을 생각하며 글을 짓고 그림을 그린다.   ▲  하백원 ‘이충무공 거북선’ 부분. ⓒ 황정수    서화첩 앞부분에 하백원이 시문 형식으로 쓴 서문에도 거북선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나온다.   "거북을 숨겨 오묘하게 사용했던 이충무공의 전함은 물가에 가로놓여 있고, 교룡을 절단한 영매한 기풍의 장유격의 그림이 벽에 걸려 있네. 藏龜妙用李忠武之戰艦橫汀, 截蛟英風張游擊之紗籠揭壁" '해유첩'의 글과 그림이 실학자였던 하백원이 모두 실제 유람을 하고 기록한 것이니, 이 그림은 실제 본 거북선을 정확히 묘사한 것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현재 전하는 조선시대 그림 중 당대 인물이 실제로 본 거북선을 그린 유일한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서화첩의 다른 부분에서도 거북선에 대한 사실을 증빙할 만한 구절이 또 나온다. 이병중의 시에는 '거북은 한 쌍의 섬을 옮겨 골짜기를 단정히 단장하고(鰲移雙嶼端粧壑 )'라는 구절이 나온다. 곧 이어 나오는 하백원의 시에서도 '거북이 등에 진 섬은 어디서 온 것일까?(何處浮來鰲背島)'라는 구절이 또 나오는 것을 보면 이곳 경치 중 거북선의 모습이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백원의 그림 속에 나오는 거북선이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 때 사용한 바로 그 거북선인지는 명확치 않다. 그러나 하백원이 정조 때부터 살았던 인물이고, 고증학을 바탕으로 한 실학자였던 것을 생각하면, 그의 기록 방식의 신빙성을 믿을 만하다. 그런 면에서 이 그림과 충무공 거북선과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다 할 수 있다. 그동안 거북선 그림으로 남아 있는 것은 1795년 정조 때 출판된 '충무공전서'에 나오는 거북선과 민화 형식의 '해진도(海陣圖)'에 나오는 거북선 등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림들은 실제 현장을 확인하고 그린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또한 개인 화가의 회화 중에서는 실제 존재하는 거북선을 보고 기록한 그림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하백원의 이 거북선 그림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동안 거북선의 외형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었다. 어떤 이는 독립적인 거북 모양의 철갑선이라 하고, 어떤 이는 판옥선 이층에 거북 모양을 올린 것이라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하백원의 그림을 보면 판옥선 위에 거북 모양을 올린 형태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하백원이 유배당했던 1842년까지도 여전히 거북선이 조선 해군의 유력 전함으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거북선이 고종 때까지도 사용되고 있었다는 다른 기록과 서로 통하는 면이 있고, 거북선이 임진왜란 이후 지속적으로 조선 수군의 주력 전함이었음을 증명하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하백원이 기록한 거북선의 모습은 비록 통제영 거북선이나 전라좌수영 거북선보다는 후에 기록된 것이나 실제 거북선을 보고 그린 현장성이 강하다는 면에서 역사적가치가 높다고 본다. 그동안 글이나 전승되는 이야기에 의지해 연구해왔던 거북선 연구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을 만한 매우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오마이뉴스(시민기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거북선   [ 거북船 ] 이미지 크게보기 거북선은 왜구의 격퇴를 위하여 돌격선으로 특수하게 제작된 장갑선의 일종인데 이미 고려말 또는 조선초부터 제조, 사용되었으나, 1592년(선조 25)에 발발한 임진왜란 때 이순신에 의하여 철갑선으로서의 거북선이 창제, 실용화되었다. 복원된 거북선. 이칭별칭 귀선, 철갑병선, 돌격전함 유형 유물 시대 조선 성격 전투선, 전함 제작시기·일시 16세기(추정) 재질 나무, 철 크기(높이, 길이, 두께, 너비) 선체높이 6-6.5m, 선체길이 26-28m, 선체너비 9-10m 목차 정의 개설 연원 및 변천 내용 특징 현황 의의와 평가 정의 임진왜란 당시 수전에서 활약한 거북 모양의 전투선. 개설 정식 명칭은 귀선(龜船)이다. 거북선은 조선 수군의 주력 전선인 판옥선(板屋船)의 상체 부분을 개량해서 덮개를 덮은 구조이다. 판옥선은 바닥이 평평한 선체 위에 그보다 폭이 넓은 갑판을 2층 구조로 만든 전선이다. 1층 갑판에는 한국식 노를 설치하여 격군들이 노를 젓고, 2층에는 사령부가 위치하는 ‘장대’를 설치하고, 갑판 둘레에는 방패를 두르고 각종 화포를 장착하였다. ‘상장’의 1층은 노역 공간, 2층은 전투 공간이었던 셈이다. 거북선은 바로 이와 같은 판옥선의 상장 부분을 개량해 덮개를 만든 구조였던 것이다. 연원 및 변천 1. 기원 우리나라 전선의 구조와 형식은 주로 해적선과의 싸움을 통해 발전되었다. 고려 때부터 여진 해적이나 왜구와의 싸움에서 우리가 주로 사용한 전술은 배를 부딪쳐 해적선을 깨뜨리는 방법이나 화포를 사용하여 적선을 소각시키는 것이었다. 반면에 해적들은 상대방의 배에 접근한 후 배로 뛰어들어 싸우는 육박전을 주로 사용하였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적이 우리의 배에 뛰어들지 못하게 해야 했다. 그러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 이른바 ‘거북선〔龜船〕’이었다. 『태종실록(太宗實錄)』의 기록에 따르면, 1413년(태종 13)에 임금이 임진(臨津) 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과 왜선(倭船)이 서로 싸우는 상황을 구경하였다고 한다. 또 1415년 탁신(卓愼)은 국방 문제를 논하면서 “거북선[龜船]의 법은 많은 적과 충돌하여도 적이 능히 해를 입히지 못하니 가히 결승(決勝)의 좋은 계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戰勝)의 도구를 갖추게 하소서”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거북선의 제도는 이미 조선 초기에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태종 때 만들어진 거북선은 그 후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않았던 것 같고, 이것이 임진왜란 때 이순신에 의해 다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2. 제작 거북선과 관련하여 임진왜란의 와중에 이덕홍(李德弘)이 제작을 건의한 ‘귀갑선(龜甲船)’이 주목된다. 그는 왜적들의 장기가 조총으로 대표되는 ‘철환(鐵丸)’에 있다고 지적하면서, 왜적들이 성세를 올리는 것이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덕홍이 생각하기에 왜적의 ‘철환’을 막는 방법은 왜적들이 육지에 올라서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최선책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두 가지를 고안하였다. 하나는 왜적의 배가 육지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포구에 ‘침수진목전(沉水眞木箭)’을 설치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가 바로 ‘귀갑선’의 제작이었다. 이덕홍이 생각한 ‘귀갑선’의 제도는 다음과 같았다. “귀갑선의 제도는 등 부분에 창검(鎗劒)을 부착하고 머리 부분에 쇠뇌[伏弩]를 숨겨 두고, 허리 부분에 작은 판옥(板屋)을 만들어서 사수(射手)가 그 가운데 들어갈 수 있게 한다. (판옥의) 곁으로는 쏘는 구멍[射穴]으로 통하고, 아래로는 배의 중심부에 통하게 한 다음, 가운데에 총통(銃筒)과 큰 도끼[大斧]를 싣는다. 그리하여 때려 부수거나 포를 쏘아 대고, 쏘거나 들이치면 적들이 비록 많이 몰려오더라도 반드시 (우리 편을)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이순신의 거북선과 상당히 유사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거북선은 뛰어나고 독창적인 배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거북선은 그 이전의 배무이 기술의 바탕 위에서 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되어 온 배무이(선박건조) 기술이 거북선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통일신라 시기의 장보고의 해상 활동이나 고려 왕조의 활발한 무역 활동은 모두 훌륭한 배의 존재를 전제로 가능한 일이었다. 고려시기 배무이의 전통이 조선왕조에 계승되어 판옥선과 거북선을 출현하게 하였던 것이다. 조선의 싸움배는 판옥선이 주축이었다. 그것은 배 위 갑판을 덮어 다시 그 위에 누각이나 다른 건조물을 세운 구조를 가진 배였다. 즉 2층 구조로 이루어져 1층에서는 노를 젓고, 2층에서는 전투를 하게 만든 것이었다. 갑판 아래서 노를 젓는 노군들을 적의 화살이나 화포로부터 직접 공격당하지 않게 지붕을 덮은 것이었는데, 거북선은 이러한 판옥선 위에 다시 덮개를 씌운 것이었다. 적들이 아군의 배에 뛰어들어 발을 붙이지 못하게 고안된 것이었다. 내용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구조적 특징을 알 수 있는 기록으로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의 1592년(선조 25) 5월 1일의 기사를 들 수 있다. “이에 앞서 (이)순신은 전투 장비를 크게 정비하면서 자의로 거북선을 만들었다. 이 제도는 배 위에 판목을 깔아 거북 등처럼 만들고 그 위에는 우리 군사가 겨우 통행할 수 있을 만큼 십자(十字)로 좁은 길을 내고 나머지는 모두 칼·송곳 같은 것을 줄지어 꽂았다. 그리고 앞은 용의 머리를 만들어 입은 총구멍[銃穴]으로 활용하였으며,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만들어 꼬리 밑에 총구멍을 설치하였다. 좌우에도 총구멍이 각각 여섯 개가 있었으며, 군사는 모두 그 밑에 숨어 있도록 하였다. 사면으로 포를 쏠 수 있게 하였고 전후좌우로 이동하는 것이 나는 것처럼 빨랐다. 싸울 때에는 거적이나 풀로 덮어 송곳과 칼날이 드러나지 않게 하였는데, 적이 뛰어오르면 송곳과 칼에 찔리게 되고, 덮쳐 포위하면 화총(火銃)을 일제히 쏘았다. 그리하여 적선 속을 횡행(橫行)하는데도 아군은 손상을 입지 않은 채 가는 곳마다 바람에 쓸리듯 적선을 격파하였으므로 언제나 승리하였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①기존의 배[판옥선] 위에 판목을 깔아 거북등처럼 만들었다, ②군사가 통행할 수 있는 십자로를 만들고 나머지는 칼과 송곳을 줄지어 꽂았으며, 싸울 때는 거적이나 풀로 덮어 배 위에 올라타려는 적군에게 상처를 입혔다, ③배의 앞에는 용의 머리를 만들어 그 입을 대포 구멍으로 활용했으며, ④배의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만들고 그 밑에 총구멍을 설치했다, ⑤배의 좌우에 총구멍을 여섯 개씩 설치하였다, ⑥사면으로 포를 쏠 수 있게 하였다, ⑦전후좌우로 이동하는 것이 빨랐다는 점 등이다. 아군의 병력을 보호하고 적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면서 적진을 휘젓는 돌격선으로서의 거북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특징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 가운데 거북선의 모습과 규모에 대해서 『선조수정실록』의 기록보다 더 상세한 내용은 없다. “크기가 판옥선만하다”는 언급을 통해 거북선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지만 판옥선의 정확한 규모 역시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격군(格軍)과 사수를 합쳐 125명이 승선했다는 기록은 확인할 수 있다. 현존하는 기록 가운데 거북선의 규모와 특징에 대해 가장 자세하게 기록한 문헌은 정조 19년(1795) 정조의 명에 의해 편찬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이다. 이순신의 사후 그를 왕조에 충성을 다한 충신으로 추대하는 움직임은 정조대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이충무공전서』의 편찬은 그와 같은 사업의 일환이었다. 당시 규장각 문신인 윤행임(尹行恁)이 편찬 책임을 맡았던 『이충무공전서』에는 이순신의 일기·장계와 그를 예찬하는 여러 사람들의 시문, 비명 등이 수록되었다. 이 책의 권수(卷首) ‘도설(圖說)’ 부분에는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구조를 추정할 수 있는 두 장의 거북선 그림과 그에 대한 설명문이 기재되어 있다. 두 개의 거북선은 통제영 거북선과 전라좌수영 거북선인데, 이 가운데 통제영에 있던 거북선이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에서 유래한 것이며, 다만 치수에 가감이 있다고 하였다.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통제영 거북선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1) 밑바닥 판[底版]은 10쪽을 이어 붙였다. 그것의 길이는 64척 8촌이다. 머리 쪽 폭은 12척, 허리 쪽 폭은 14척 5촌, 꼬리 쪽 폭은 10척 6촌이다. 2) 오른쪽과 왼쪽의 현판(舷版, 배의 외판, 바깥판)은 각각 7쪽을 아래에서 위로 이어 붙였다. 높이는 7척 5촌이다. 맨 아래 첫 번째 판자의 길이는 68척이지만 차츰 길어져서 맨 위 7번째 판자에 이르러서는 113척이 된다. 판자의 두께는 모두 4촌씩이다. 3) 노판(艣版, 배의 전면부)은 배 앞쪽에 4쪽을 이어 붙였다. 높이는 4척이다. 두 개의 판이 왼쪽, 오른쪽에 있는데 현자(玄字) 구멍을 내어 각각에 박혈(礟穴, 돌노쇠 구멍)을 두었다. 4) 주판(舳版, 배 뒤쪽 고물)에도 7쪽을 이어 붙였다. 높이는 7척 5촌이다. 위의 폭은 14척 5촌이고 아래쪽 폭은 10척 6촌이다. 6번째 판 가운데에 구멍을 뚫고 둘레 1척 2촌의 키를 꽂았다. 5) 좌우 뱃전판[舷]에는 난간[欄]이 설치되어 있다. 난간 머리에 서까래가 세로로 가로질렀는데, 바로 뱃머리 앞에 닿게 된다. 마치 소나 말의 가슴에 멍에를 메인 것과 같은 모습이다. 6) 난간을 따라 판자를 깔고 그 둘레에는 패(牌, 네모 방패)를 둘러 꽂았다. 방패 위에 또 난간을 만들었다. 현의 난간에서 패의 난간에 이르는 높이는 4척 3촌이다. 7) 방패의 난간 좌우에는 각각 11쪽의 판자가 비늘처럼 서로 마주 덮고 있다. 8) 배의 등에는 1척 5촌의 틈을 내어 돛대를 세웠다 뉘었다 하는 데 편하게 했다. 9) 뱃머리에는 거북머리[龜頭]를 설치했다. 길이는 4척 3촌, 넓이는 3척이다. 그 속에서 유황염초를 태워 벌어진 입으로 안개처럼 연기를 토하여 적을 혼미하게 한다. 10) 좌우의 노는 각각 10개이다. 11) 왼쪽과 오른쪽 22개의 방패에는 각각 박혈(礟穴)을 뚫었고, 12개의 문을 두었다. 12) 거북머리 위에도 두 개의 박혈(礟穴)을 냈다. 그 아래에 두 개의 문을 냈다. 문 옆에는 각각 박혈(礟穴) 한 개씩을 두었다. 13) 왼쪽과 오른쪽의 덮개 판목[覆版] 12개에도 각각 박혈(礟穴)을 뚫었으며 ‘귀(龜)’자가 적힌 기를 꽂았다. 14) 왼쪽과 오른쪽의 포판(鋪版, 갑판)에는 방이 각각 12칸이다. 그 가운데 두 칸에는 철물을 넣어두고, 세 칸에는 화포, 활, 화살, 창, 칼 등을 넣어두고, 나머지 열아홉 칸은 군사들의 휴식처로 쓴다. 15) 왼쪽 갑판 위에 있는 방 한 칸은 선장이 거처하고, 오른쪽 갑판 위의 방 한 칸은 장교들이 거처한다. 16) 군사들은 쉴 때는 갑판 아래에 있고, 싸울 때는 갑판 위로 올라와 모든 대포구멍에 대포를 대놓고 쉴 새 없이 쟁여 쏜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통제영 거북선의 대체적인 형태를 그려볼 수 있다. 그것은 판옥선의 갑판 주위에 둘러쳐진 여장을 제거하고 갑판 위에 바로 거북 뚜껑을 덮은 모양이다. 노는 현의 난간 부근에 좌우 각각 10개를 설치하였다. 거북선의 대포 구멍[礟穴]은 배 양쪽의 22개, 앞쪽 거북머리의 위 아래 4개, 배 위의 거북등에 12개가 설치되었다. 전방위 포격이 가능하도록 구상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전라좌수영 거북선은 통제영 거북선과 치수·길이·넓이 등은 같지만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마치 판옥선의 여장을 그대로 두고 거기에 뚜껑을 씌운 듯한 모습이다. 거북머리 아래에 귀신의 머리를 새겼고, 덮개 위에 거북무늬를 새겨 넣었다. 대포구멍은 거북머리 아래에 2개, 현판 좌우에 각각 1개, 현의 난간 좌우에 각각 10개, 덮개 판목 좌우에 각각 6개씩 있었다. 노는 좌우에 각각 8개를 설치하였다. 현황 1. 거북선 관련 논쟁 거북선의 구체적인 구조와 기능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많은 논란이 있다. 그 가운데는 견해차가 뚜렷한 논의들도 적지 않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물론 거북선의 실물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실물의 확인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원형을 찾는 작업은 임진왜란 당시와 그 이후의 거북선에 대한 기록들을 토대로 더듬어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자료들이 단편적이고 해석도 어렵다는데 또 다른 문제점이 있다. 거북선의 구조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그림 자료는 여러 가지 있지만 대표적인 것은 『이충무공전서』의 앞부분에 실려 있는 두 개의 그림이다. 흔히 ‘통제영(統制營) 거북선’과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 거북선’으로 불리는 것이다. 문제는 양자의 제도에 상당한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이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도 아니라는 점이다. 『이충무공전서』가 편찬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 200여 년이 경과한 1795년(정조 19)이었다. 결국 거북선의 원형을 찾는 작업은 『이충무공전서』의 기록을 토대로, 그 이외에 실록기사와 회고록 등의 단편적인 자료를 참조하고,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조선기술의 발전 과정을 염두에 두고 차근차근 접근하여야 할 것이다. 거북선과 관련된 논란에서 가장 먼저 제기되는 문제는 거북선이 언제 누구에 의해 창시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태종 때 이미 거북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배가 있었다. 따라서 이것과 임진왜란 때의 거북선이 어떤 관계에 있었는가, 양자는 구조면에서 같은 배인가를 밝히는 것이 거북선의 창시 문제에서 중요한 관건이 된다. 아마도 태종 때의 거북선은 실전에 활용되지 못하였던 것 같으며, 세종대 이후 왜구의 격감 등을 고려한 전략적 판단에 의해 사라졌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따라서 임진왜란 때의 거북선은 이순신과 그의 부하 군관들이 종래의 거북선을 개조하여 실용적으로 만든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거북선이 과연 ‘철갑선’인가 하는 점이다.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주장의 유래가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이야기와 일본측 문헌자료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런데 일찍부터 일본측의 자료는 그 신빙성을 의심받아 왔다. 임진왜란의 패전을 거북선에 돌리려는 숨은 의도가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유길준(兪吉濬)은 『서유견문(西遊見聞)』에서 “이충무공의 거북선은 철갑병선(鐵甲兵船)으로 세계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였고,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거북선을 ‘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 정의하였지만 근거가 확실한 주장은 아니었다. 물론 거북선의 등에는 거북 무늬를 그렸을 뿐만 아니라 그 위에 날카로운 못이나 칼날(칼송곳) 같은 것을 꽂아 적의 접근을 근본적으로 차단하였다. 그러나 거북선의 표면에 철갑이 덮여 있었는지의 여부는 아직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철갑을 덮을 경우에 배의 무게가 증가하여 민첩성이 떨어지고, 바닷물에 의해 부식되는 등 효율적이지 않다는 점을 들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다음으로 복잡한 문제는 거북선의 세부적인 구조이다. 거북선의 내부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었던 것일까? 거북선에서 사용하였던 노는 어떻게 생긴 것이며, 노역의 위치와 노역의 공간은 어디인가? 포 구멍의 실질적인 쓰임새와 뱃머리에 설치된 거북머리[용두(龍頭)]의 기능은 무엇인가? 이러한 여러 문제들은 거북선의 내부가 2층 구조였는가, 아니면 3층 구조였는가 하는 논란과 연결된다. 2층 구조론에 따르면 아래층에는 병사의 휴게실과 무기고를 설치하고, 위층에는 화포 등의 공격 시설이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 경우 노를 젓는 노역이 화포와 같은 장소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좁은 공간에 많은 인원이 탑승하는 단점이 있어 전투효율이 떨어진다”는 평가는 이러한 거북선의 구조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반면에 3층 구조론에 따르면 1층에는 병사들의 침실과 군량·무기고가 있었고, 2층에는 사부(사격수)와 격군(노 젓는 병사)이 자리하며, 3층에는 포대가 설치되어 화포를 쏠 수 있는 구조였다고 한다. 따라서 노역의 위치가 2층 구조론의 주장과 달라지고, 전투의 효율성에 대한 평가도 상반된다. 거북선의 크기와 배의 척수 역시 논쟁거리였다. 거북선의 크기와 척수는 시대에 따라 변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분명하게 확인되는 것은 거북선의 척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거북선의 기능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부분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거북선은 돌격용 전함이었다. 탑승자 전원을 덮개 밑에 수용함으로써 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고, 적진을 휘젓고 다니며 공격하는데 유리한 전함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적선과 접전을 벌일 때에는 매우 적합하지만,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공격을 가하는 데는 불편한 점도 있었다. 은폐된 거북선 안에서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상갑판 위의 넓은 공간에서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판옥선이 훨씬 실용적이었다. 거북선의 척수가 제한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요컨대 거북선은 일본 해적 집단과 일본 수군의 백병전술에 대비해 개발한 돌격전함이었다. 즉 여러 개의 중화기로 무장한 연해용 돌격전함으로서, 독특한 아이디어로 설계된 특이한 모델의 전선이었던 것이다. 전체적으로 거북 모양에, 용머리에서는 포를 쏘거나 유황 연기를 내뿜었다고 하니, 이런 새로운 디자인의 전투함은 적을 당황케 하여 사기를 꺾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2. 거북선 축제 전라남도 여수시는 거북선을 하나의 축제로 승화시켜 ‘여수거북선축제’를 매년 시행하고 있다. 이 축제는 1967년부터 시작하여 2013년 현재 47회에 이르고 있다. 축제프로그램으로는 ‘통제영 길놀이’, ‘둑제’, ‘거북선그리기·만들기’, ‘승전한마당’, ‘수륙고혼천도대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거북선이 임진왜란에서 승전을 올리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한 이후 조선과 일본의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었다. 거북선에 대한 다양한 그림은 그러한 관심의 일환이었다고 여겨진다. 현재까지 전하는 거북선 그림은 10여 종에 달한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통제영과 전라좌수영의 거북선으로 가장 신빙성 있는 기록으로 간주된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에서 토요토미 히데오시의 일대기를 그림으로 그리고 해설한 책 가운데 『회본태합기(繪本太閤記)』에 실린 거북선 그림으로,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어 일본군을 물리치다”라는 설명문이 붙어 있다. 1910년 경상남도 고성에서 발굴되어 현재는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청화백자에는 용머리에서 연기를 토하고 있는 모습의 거북선이 그려져 있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는 10폭짜리 병풍으로 된 「거북선해진도」도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는 거북선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전선(戰船)의 포진 상황이 그려져 있다. 한편 이순신 후손의 종가에서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두 종의 거북선 그림이 있는데, 다른 거북선 그림과는 달리 거북선의 등 위에 두 개의 돛대가 달려 있고, 지휘소라 할 수 있는 장대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아울러 거북선의 크기를 비롯해 구조, 장대 설치 등에 대한 설명도 첨부되어 있다. 참고문헌 『서유견문(西遊見聞)』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태종실록(太宗實錄)』 『회본태합기(繪本太閤記)』 『우리과학의 수수께끼 2』(신동원, 한겨례출판, 2007) 『우리역사 과학기행』(문중양, 동아시아, 2007) 『배무이』(최완기, 보림, 2003) 『유물의 재발견』(남천우, 학고재, 1997) 『거북선』(김재근, 정우사, 1992) 『한국과학기술사』(전상운, 정음사, 1975) Korean Boats and Ships (Horace H. Underwood, 1933) 관련이미지 69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통제영 귀선≪이충무공전서≫의 통제영귀선.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거북선 [거북船]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두산백과 거북선   [ 龜船 ] 요약 고려말 조선초에 왜적을 격퇴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며, 기록상으로는 조선초 문헌에 처음 나타난다. 임진왜란 직전에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창제귀선을 건조하여 왜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세계 최초의 돌격용 철갑전선(鐵甲戰船)으로 평가된다. 이미지 크게보기 거북선 현재까지 전해오는 문헌 중에서 ‘거북선[龜船]'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나는 기록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1413년(태종 13) 5월 초에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이 왜선으로 꾸민 배와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고 하였고, 2년 후에는 다시 “거북선이 매우 견고하여 적선이 해치지를 못한다”고 되어 있으나, 어떤 형태와 규모였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적혀 있지 않아서 알 길이 없다. 그 후 180여년 간 거북선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다가 이순신 장군의 임진년(1592) 일기인 《난중일기(亂中日記)》 2월 8일 기사에 “거북선에 사용할 돛 베(帆布) 29필을 받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난중일기》에 따르면 거북선에 비치한 포(砲)를 처음 발사한 날은 임진년(壬辰年:1592) 3월 27일이며, 처음 해전에 참가한 것은 장계(狀啓)에서 “5월 29일 사천해전(泗川海戰)”이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건조한 창제귀선(創製龜船)의 일반적인 외부의 형태와 전투력에 관해서만 기록하고 있으며, 실제 건조에 필요한 세부적인 치수에 대해서는 기록한 것이 없다. 따라서 태종 때의 거북선과 이순신이 말한 거북선과의 관계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때 거북선은 이순신의 고안에 의해서 군관 나대용(羅大用) 등이 실제로 건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거북선이 임진왜란 때 돌격전선으로서 기능을 발휘함에 따라 전란 후에는 그 모양이 조금씩 변하여 용머리[龍頭]는 거북머리[龜頭]로 바뀌고, 치수도 일반적으로 장대(長大)해지는 등 차차 크게 건조되었는데, 1795년(정조 19)에 간행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전라좌수영 거북선’ 및 ‘통제영 거북선’의 그림과 함께 건조에 필요한 부분적인 치수가 어느 정도 기록되어 있다.  참조항목 검선, 나대용, 이순신, 임진왜란, 전라좌수영귀선, 판옥선 역참조항목 거북선해진도, 마하수, 아산 이충무공 유허, 귀함별황자총통, 한국의 조선업, 조선의 과학기술, 대방진 굴항 카테고리 역사 > 아시아사 > 한국사 > 조선시대 기술과학 > 무기 및 병기공학 > 해상병기 관련이미지 24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거북선 모형강릉함정전시관. 이미지 갤러리 [네이버 지식백과]거북선 [龜船] (두산백과)   민족의 자랑 거북선? 오리무중 거북선! 영화 에서 단연 관객의 시선을 사로 잡는 장면은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포함한 단 12척의 배를 끌고 나가  330척의 왜적을 물리치는 통쾌한 해상 전투 신입니다. 당시 이순신 장군이 처한 상황은 참담했습니다. 거침없이 쳐들어오는 왜군에 조선 전역이 쑥대밭이 되었고, 이순신 장군은 주변의 모함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끝에  앞선 칠천량 대전에서 130척의 배를 갖고도 대패한 원균의 뒤를 이어 전라좌수사에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민심은 피폐해져 있었고, 조정에서는 이순신 장군에게 아무런 도움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두려움에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이고  자신의 힘으로 난파선을 수습해 전력을 재정비합니다.  그렇게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지만 스스로 거북선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이때 한 가지,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의 발명품일까요? 아닙니다.  거북선은 판옥선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20여 년 전부터 존재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여기에 화포를 더해 거북선을 더욱 강력하게 만든 것이죠.  에 보면 이순신 장군은 전쟁이 없어도 이 거북선에서 먹고 자며 생활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거북선을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하루 전 완성하였습니다. 그렇게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이끌고 나가 23전 23승의 쾌거를 이룩하게 됩니다.   출처: 영화 공식 예고편 캡처 만약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서 패했다면 임진왜란은 더욱 참담한 결과를 낳았을 것입니다.  과거의 전쟁은 군사들에게 먹고 마시는 물자를 보급하는 일이 전쟁의 승패를 가릴 정도로 중요했는데 그 물자를 보급하는 경로를 해전에서 차단했기 때문에 전쟁의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이처럼 통쾌하게 왜군을 깨뜨려버렸던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 그런데 우리 민족의 자랑인 거북선의 원형은 오늘 날 한 척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에 대해 《진짜 싸울 수 있는 거북선》의 저자 디자이너 한호림은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임진왜란을 치르는 동안 총 5척이 있었다는 거북선이 모두 침몰했다고 치자.  거북선을 해저에서 발견하려면  먼저 수없이 침몰한 일본 전투선의 잔해부터 발견되었어야 할 것 아냐?  그리고 간혹 판옥선처럼 조선 수군의 다른 전투선도 발견되고 말이지. 그러다 그런 무더기 속에 아주 기적적으로 거북선의 잔해가 나오거나 해야 할 거 아냐? 그런데? 거북선은 고사하고 일본 전투선의 파편조차 발견되지 않았어. 왜? 가장 중요한, 물리학에서의 '비중'. 이걸 놓치고 있는 거야. 선재(船材, 배 만드는 나무)는 비중이 0.44밖에 안 돼. 그러니 목선이 어떻게 가라앉을 수 있어? 신안 보물선처럼 아주 무거운 화물이라도 잔뜩 싣기 전에는. 그러니까 우리 공격으로 파괴되어 침수되거나 불에 타던 적선들이  어느 정도 가라앉다가 비중이 딱 맞으면 저절로 멈추고  그때부터는 물결 따라 떠밀려 다녔지. 그러면? 그걸 우리 수군이 모두 예인해 새로 배를 만들거나 고치는 데 썼지. 즉 재활용한 거지. 선재는 엄청 비싸고 귀하거든. 이순신 장군의 기록에도 그렇게 나와 있어. 일본 전투선이고, 우리 판옥선과 거북선이고 가라앉지를 않았는데  어떻게 바다 빝에서 발견될 수 있겠어?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한 괴짜 디자이너의 열정 이렇게 거북선의 원형이 종적을 감춰버린 지금.  학계에서 이 거북선을 복원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나름대로 다양한 형태의 거북선을 내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거북선을 실제로 물에 띄워 보았을 때에는  전투는커녕 제대로 항해조차 하지 못하고 하나같이 부두에 그냥 묶여만 있습니다. 통영 거북선. 오늘날 거북선들은 하나같이 모두 '묶여 있는' 신세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 《주니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1, 2》 등의 베스트셀러로 잘 알려져 있는 디자이너 한호림은 순전히 호기심으로 똘똘 뭉쳐 거북선 연구에 몰입하게 됩니다. 그렇게 7년 반의 세월이 걸려  《진짜 싸울 수 있는 거북선》을 출간하게 됩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지? 그런데 정말야, 나로선 해군 상병 시절부터 모아온 '거북선 구슬'이  서 말이 뭐야? 삼십 말도 넘게 있었어. 국내고 세계 어디고 별의별 것을 '호기심'으로 돌아다니다가 특히 거북선과 뭐라도 연계가 될 듯싶으면 '뚜뚜뚜뚜-zoom in' 투시해보구,  프로로서 정밀하게 촬영하구 왈, 연구(?)를 했지.  […]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거북선 구조 생각 하여간 내 머릿속에는 늘 거북선 구조 퍼즐이 들어 있었는데 서로 뭔가가 통하는 것끼리는 저절로 이리 붙고 저리 연결되어  차츰 어떤 거북선 형태를 보이데. 그렇게 디자이나 한호림은 7년 반의 세월 동안 머릿속의 거북선 구조를 컴퓨터 2차 도면으로 그리고  이를 다시 3차원 투시도로 그려  거북선에 관해 수집한 모든 지식을 텍스트로 엮었습니다. 순전히 한 덕후의 호기심으로 완성한 거북선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진짜 싸울 수 있는 거북선'의 설계도면은 다음 회차에서 보다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진짜 싸울 수 있는 거북선》 '거북선' 하나에 몰두해 7년 여의 세월을 보낸 디자이너 한호림 선생님이 최근 유튜브를 시작했습니다. 거북선의 실제 모습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고 싶다면 아래의 링크를 클릭해보세요!    
7466    [그것이 알고싶다] - "모나리자"의 화장법?... 댓글:  조회:3376  추천:0  2019-11-27
모나리자 미소 뒤에 달팽이팩 효과 있다? [서양고전학자 김동훈의 물질인문학]  기사입력 2019.11.27.   좋아요 후속기사원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ㆍ르네상스 마스크팩 르네상스 시대 여인들은 오늘날 마스크팩이라 할 만한 미백용 팩을 만들어 사용했다. 동물성 기름이 주로 사용된 그 팩은 당시 화장품 속 납 성분의 독성으로 인한 부작용을 중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모나리자’의 모델인 리자 게라르디니는 수녀원에서 얻은 달팽이점액 추출물을 함유한 마스크팩을 붙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점성가이자 예언자인 노스트라다무스(1503~1566)가 ‘화장법’에 관한 글을 썼다. “치아를 검게 하지 않고 얼굴을 희게 하는 화장품” 이야기였다. 그를 프랑스 궁정으로 초빙한 사람은 셔벗, 과실주, 파라솔, 포크, 하이힐, 마카롱 등을 프랑스에 전달한 여인이다.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으로 프랑스 왕비가 되었으며 남편이 죽고 세 명의 아들이 차례로 왕이 되는 동안 섭정을 했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1519~1589)다. 그녀는 앙리 2세(1519~1559)와 결혼해 프랑스에 자신의 미용사를 대동하고 와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식 화장법을 전파했다. 남편을 이어 첫째아들마저 죽자 겁먹은 그녀는 주위 반대를 무릅쓰고 노스트라다무스를 궁정 의사로 초빙했다. 바로 그 예언가가 하필 화장품, 그것도 치아를 검게 하지 않는 화장품에 대해 말했다. ■ 르네상스 여인의 치아는 왜 까맸을까 중세의 속박이 느슨해지고 여성들의 화장이 시작된 곳은 이탈리아다. 그런데 그 르네상스 여인들은 치아까지 검게 화장했다는 오해가 있었다. 사실은 화장한 것이 아니라 치아가 검게 변색된 것이다. 얼굴에 칠했던 분에 납과 같은 중독 성분이 많아 치아에 흡수돼 쌓였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여인들, 하얀 피부 갈망 수은·납 성분 섞인 분으로 화장 독성물질 쌓이며 치아 까맣게 변해 르네상스 시대에 이상적인 미녀는 얼굴이나 살갗, 손가락이 하얗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검은 벨벳으로 된 가느다란 리본을 이마에 늘어뜨리면서까지 얼굴이 대조적으로 희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피부를 하얗게 만드는 화장품은 은과 수은, 납 가루와 백반을 섞고, 유향을 씹었을 때 고인 침으로 그것을 묽게 만들어 빗물 속에서 끓인 뒤, 발생하는 연기를 식혀 만들어졌다. 납은 몸속에 축적돼 치아와 뼈를 검게 만들고 백반은 치아가 힘없이 빠지게도 했다. 이런 독성물질을 함유한 화장품이 프랑스와 영국에까지 전해지면서 이후 많은 비극적 사건이 발생했다. 그래서 의사였던 노스트라다무스가 치아를 검게 하지 않는 화장품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중세에 꺼렸던 화장품이 유럽에서 다시 사용됐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납 가루의 중독성이 밝혀지자 베네치아 여인들은 그 독성을 중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지금이야 궁금한 것이 생길 때마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쉽게 해결되지만 당시는 그럴 수 없는 시기였기에, 해독 정보가 필요했던 르네상스인들은 다시 고전을 살폈다. 특히 르네상스인들이 관심을 가진 책은 고대 로마의 플리니우스(24~79)가 저술한 였다. 이 책은 플리니우스가 464명의 작가가 쓴 2000여권의 책을 읽고 거기에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약 2만개 항목을 37권으로 정리한 백과사전이었다. 르네상스인들은 그 책에서 ‘얼굴 화장품(Medicamina faciei)’이라는 항목을 발견했다. 약을 의미하는 영어 ‘medicine’의 고대 라틴어는 약품만을 의미하지 않고 화장품까지 포함했다. ■ 로마시대 화장법에서 마스크팩을 찾아내다 로마시대 화장법서 해독정보 찾아 플리니우스 책에 소개된 피부 덮개 가면 쓴 것처럼 보여 ‘마스크’라 불러 오비디우스의 동물성 기름에도 관심 송아지 생살 저며 얇은 팩 만들어 플리니우스는 1세기의 이상한 메이크업을 소개한다. 벌꿀, 콩과 보리 가루, 달걀, 포도주의 앙금, 녹용 가루, 수선화 뿌리를 반죽해 얼굴에 올린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피부의 미백을 유지하는 일종의 덮개였다. 르네상스 여인들은 이것을 보고 전해져 내려오는 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네로 황제(54~68년 재위)의 아내 포파이아 사비나(30~65)가 사용했다는 ‘포파이아 마스크’다. 지방, 벌꿀, 곡물 가루를 반죽한 두꺼운 팩으로, 얼굴에 올리면 가면을 쓴 것처럼 보여서 당시 사람들은 ‘마스크’라 불렀다고 한다. 포파이아는 네로가 로마를 비우면 며칠 동안 밤낮 없이 반죽을 얼굴에 올리고 있었고, 네로가 돌아올 때까지 그것을 떼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녀의 살결이 진주나 비단처럼 고운 색채를 띠고 있었기에 이 마스크가 로마에 크게 유행하게 돼 남편들은 밤마다 부인의 진짜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됐다. 그 정도로 유명했던 마스크가 베네치아 여인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르네상스 여인들은 ‘포파이아 마스크’를 활용해 납 성분을 해독하는 새로운 마스크를 제작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어떤 성분의 팩을 만들어야 할까? 르네상스인들은 또 고전에서 ‘재발견’하는 수밖에 없었다. 뜻밖에도 플리니우스보다 이전 사람인 오비디우스(BC 43~AD 17)의 글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의 작가 오비디우스는 과 에 메이크업에 대해 아주 상세하게 기록했다. 당신은 분을 발라 희게 할 줄 알지요. 창백한 혈색도 화장술로 붉게 하죠. 숱이 적은 눈썹은 기술적으로 그려 넣고요.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양쪽 볼에는 연지를 찍지요.(오비디우스, 에서) 요즘과 같은 ‘치크 블러셔’가 없었기 때문에 고대 로마 여인들은 연지를 열심히 찍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연지(aluta)’는 ‘컴프리(Comfrey)’라는 약초로 상처 부위에 바르면 효험은 있지만 피부에 자극을 가해 그 주위를 붉게 만들었다. 이렇게 자극받아 벌겋게 된 민감한 피부에 로마 여인들이 ‘양모기름(oesypum)’을 사용했다고 오비디우스는 전한다. 양모기름은 피부에 자극적이지도 않고 흡수가 잘돼 피부연화제나 자극완화제로 쓰였다. 오비디우스는 미인들이 이 기름으로 만든 액체를 하루에 몇 번씩이나 몸에 발랐다고 전한다. 결국 르네상스 여인들은 오비디우스에게서 힌트를 얻어 마스크의 성분으로 동물성 기름에 관심을 갖는다. 그런 시각에서 보니 플리니우스의 저서에도 동물성 약품(화장품)을 말한 곳이 상당히 많았다. 특히 송아지 기름을 리넨천에 싸서 얼굴에 얹으면 미백과 주름 개선, 상처 완화, 햇볕에 자극받은 민감한 피부와 건조해진 입술 개선에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르네상스 여인들은 완전히 다른 개념의 해독용 마스크팩을 생각해 낸다. 그것은 더 이상 올리지 않고 얇은 동물성 팩으로 얼굴에 붙이는 것이었다. 여러 시행착오 끝에 베네치아 여인들은 송아지 생살을 얇게 저민 것으로 가장 효과적인 팩을 만들었다. 천연성분의 곡물이나 흙을 반죽해 올리는 팩은 이전에도 있었으나 요즘처럼 간편히 붙이는 마스크팩의 역사는 이렇듯 르네상스 시대에 시작됐다. 하지만 르네상스인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 모나리자의 달팽이점액 추출물 르네상스에 있었던 증류법의 발전을 통해 마스크팩에는 이제 갖가지 성분이 들어가게 된다. 꽃잎뿐만 아니라 동물성 원액도 포함된다. 추출물에 함유된 단백질, 즉 콜라겐, 엘라스틴, 케라틴 및 점액 다당류를 마스크팩에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전 시대에는 반죽을 통해 시트지를 얼굴에 깔고 그 위에 덮어야 했지만 꽃잎 에센스를 팩에 흡수시키면서 향을 낼 수도 있었다. 증류법 발전으로 갖가지 성분 추출 모나리자 모델로 알려진 리자 부인은 달팽이점액 추출물 얼굴에 바르기도 점차 완성을 향해 가던 르네상스의 마스크팩 중 가장 특이한 것은 달팽이점액 추출물이 함유된 것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리자 게라르디니(1479~1542)는 달팽이를 껍질이 녹을 때까지 고아서 거기에 레몬즙과 포도즙을 가미해 만든 에센스를 사용했다고 한다. 피렌체의 부유한 직물 상인의 아내였던 리자, 즉 ‘모나 리자(리자 부인)’의 은은한 미소는 ‘달팽이점액-마스크팩’의 효과로 만들어진 흐뭇한 미소일지도 모른다. 흥미롭게도 리자 부인이 달팽이점액을 얻은 곳은 성 우르술라 수녀원이었다. 리자는 이 수녀원을 자주 방문하였는데, 달팽이의 신비한 추출물을 얻고 관대한 기부를 했다고 전한다. 여성들이 화장을 시작하자 보수적이던 수녀원에서도 화장품을 만드는 시대가 르네상스였던 것이다. 이 밖에도 르네상스 초기 인문주의자로 알려진 레온 알베르티(1404~1472)의 , 여걸이었던 카테리나 스포르차(1463~1509)의 등 메이크업과 관련된 책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르네상스는 프랑스어로 ‘재생’ ‘부활’이라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고전의 재발견’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르네상스 사람들은 플라톤이나 키케로가 저술한 책만을 재발견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 일상이 현실에서 새롭게 부활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을 샅샅이 뒤지고 또 그런 책들을 저술한 것이다. 16세기 프랑스 화가 프랑수아 클루에가 그린 앙리 2세의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초상화(1580년경). ■ 회복을 향한 열망 전쟁·전염병 쓸고간 르네상스 시대 재생·부활의 열망 담긴 마스크팩은 ‘회복을 향한 몸부림’이었던 것 미용, 화장법, 성형 등을 뜻하는 영어 ‘cosmetic’은 ‘질서’ ‘조화’ ‘세상’을 뜻하는 그리스어 ‘코스모스’의 형용사형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혼란을 뜻하는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만드는 것이 코스메틱의 원래 의미다. 십자군전쟁과 흑사병으로 이탈리아 인구의 3분의 1을 잃은 직후 르네상스인들 마음에는 파괴되고 상처 입은 세상을 회복하려는 열망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질서’와 ‘조화’를 불어넣어 ‘세상’을 회복하려는 르네상스인들 이야기는 화장품이라는 그리스어의 뜻과 그 맥을 같이한다. 르네상스 여인들에게는 아름다움에 대한 미적 추구가 있었다. 그러다가 얻게 된 납중독, 비록 치아는 검게 변색됐지만 또 회복해야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다. 건강이 필요했고 치료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리저리 모든 것을 동원해 들춰보고 수소문하며 오랜 시도 끝에 만들어낸 마스크팩, 그것은 회복을 향한 몸부림이었다. 구체적 실천의 하나로서 마스크팩을 얼굴에 붙이며 회복을 다짐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르네상스 시대의 마스크팩에는 ‘재생’과 ‘부활’의 열망이 들어 있었다. 그렇다면 당시보다 책도 많고 정보도 많고 수명도 길어진 오늘날, 르네상스와 크게 차이 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시대는 당장 나 자신부터 회복을 향한 열망이 없다. 변색되고 찢기고 터졌는데도 회복과 재생의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상처와 결핍에 민감한 적이 있었으나 언젠가부터 애써 포기하고 순응하며 산다. 그러다 보니 상처가 곪고 있는데도 둔감하거나 무감각한 사람들이 된다. 돌같이 딱딱한 마음이 되었다. 감동도 없고 눈물도 없고 미소마저 사라졌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인문주의자들의 ‘문예부흥’이나 ‘고전의 재발견’ 이전에 회복의 열망이 먼저 돋아나고 있었다. 전역을 휩쓸고 지나간 전쟁과 전염병의 지울 수 없는 생채기에 새살이 돋듯 감각이 살아나는 것이었다. 감기에라도 걸렸다가 회복될라치면 그동안 아무 맛도 느끼지 못했던 입맛부터 되살아난다. 관심 없었던 하늘이 갑자기 푸르고 드높은 것으로 보인다면 기력이 회복되는 것이다. 보이지 않던 세상의 색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세상이 마냥 아름다워진다. 상처 때문에 겁부터 먹고 닫아뒀던 감각의 문이 비로소 열리기 때문이다. 르네상스는 재생을 향한 감각이 불 일 듯 열리는 시기였다. 오늘 밤에는 마스크팩 하나 가만히 붙이고 그 ‘재생’의 꿈을 꾸고 싶다. 회복을 향한 르네상스인들의 열망을 진정 닮고 싶다. /김동훈 
음악의 뿌리를 찾아 민족예술의 혼을 불태워 (ZOGLO) 2019년11월25일  인물이름 : 김예풍 서남민족대학 예술학원 김예풍 교수      문화부 민족민간문예발전중심 “서남연구중심”부주임, 중국소수민족음악학회 회원,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상무리사, 사천민족문화예술연구회 리사, 사천성음악가협회 회원, 사천 중국서부연구와 발전촉진회 챵(羌)학 연구원 특약 부원장 등 수많은 직함을 가지고 있는 김예풍 교수는 현재 서남민족대학 예술학원 중국소수민족예술, 음악과 무용학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김예풍 교수의 주요 연구령역은 작곡과 음악리론, 민속과 의식음악 등이다.   1959년 연길에서 태여난 김예풍 교수는 남들보다 늦게 음악을 시작했다고 한다.   “어릴때부터 음악을 시작한건 아니였습니다. 시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처음에는 문학에 흥취를 가졌습니다. 그러다가 늦게 손풍금을 접하게 되였고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아 경연에 참가해서 훌륭한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그 뒤로 음악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였고 작곡을 배우게 되였습니다. 따로 음악에 끼가 있는 건 아니였고 작곡 역시 창작이기때문에 문학과 갈라놓을수가 없었던것 같습니다. ”   김예풍 교수의 아버지는 저명한 조선족 시인 김성휘 시인이다. 문학을 좋아하게 된것도 시인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하지만 강박은 없었고 단지 집에 책이 많았고 책밖에 없었기 때문에 책과 친해지게 되였다고 한다.   1986년, 김예풍 교수는 연변대학예술학원 작곡학부를 졸업하고 학교에 남아서 교편을 잡았다. 그 해에 마침 좋은 기회로 상해음악학원에 연수를 떠나게 되였다.   “그때 당시 연변대학 교장이였던 김삼진 교장님께서 연변의 음악을 발전시키고자는 큰 뜻을 안고 저희들에게 상해음악학원 지휘학부에서 연수할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남자 마자 바로 상해로 가서 3년동안 작곡공부를 했습니다.”   1986년,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김예풍 교수는 음악학부 작곡교연실에서 작곡을 가르쳤다.   1998년, 아직 공부에 대한 끊을 놓지 못한 김예풍 교수는 자신의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작곡학부에서 석사과정을 밟았다. 그의 욕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000년, 석사연구생을 졸업한 그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음악학부에서 4년만에 동아시아 중한일 음악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03년 서남민족학원이 서남민족대학으로 바뀌면서 예술학원이 새로 설립되였다. 인재가 필요했던 학교의 관계자들은 인재영입차 한국에 가서 수소문하게 되였고 김예풍 교수를 발견하고 바로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서 의향을 물었다.   그렇게 되여 2004년, 김예풍 교수는 연변으로 돌아가지 않고 서남민족대학 예술학원 음악학부에 남아 음악인, 교육자로서의 길을 걸었다.   “한국에서 음악사 공부를 하면서 서남지역의 음악의 뿌리가 아주 깊다는 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서남 지역이 저의 연구방향과 적합하다는 점을 발견하고 서남민족대학을 선택하게 되였습니다.”   서남민족대학에 있는 약 15년동안의 시간에 김예풍 교수는 많은 일들을 했다.   선후하여 국가 과학기술기초사업 전문항목 , 국가 사회과학기금 중대의뢰항목 (사천 음력설편), 교육부 인문사회과학연구 기획기금항목 , 사천성 교육청 교육교학개혁 과학연구중점항목 등 5개 항목을 주관했고 국가 사회과학기금 중대전문항목, 국가 사회과학기금 중대전문항목, 국가 사회과학기금 중대의뢰학목등 3개 항목을 공동 합작했다.   이밖에 , , , , 등 5권의 학술전문서적을 출판했고 화성학교재 을 출판했으며 , 등 책 2권을 번역했고 , 등 서적을 공동 편찬했다.   또한 , , 등 학술기간지에 20여편의 학술론문을 발표했고 그중 는 중국소수민족음악학회 제3회 “학회컵”론문평선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김예풍 교수는 창작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가 작곡한 , 등 노래는 전국음악류 핵심기간지에 발표되였다.   “머타먼 타향 사천성에서도 이렇게 무언가를 해낼수 있다는것 또한 우리 민족을 빛낼수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 와서 다시 돌아보면 뿌듯하기도 합니다. ”   김예풍 교수는 처음 사천에 왔을때 언어장벽때문에 힘들었다고 한다. 성도의 사투리를 알아듣지 못해서 학원의 통지도 잘못 전달 받을 때가 많았고 이밖에 조습한 기후, 고향에 대한 그리움, 외로움 등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는 오직 학술연구 하나만 바라보고 버텨냈다.   민요악보수집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방학이면 언어도 통하지 않는 산골로 무작정 차를 몰고 지도를 보면서 찾아갑니다. 술과 간단한 안주를 사들고 마을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말을 겁니다. 그렇게 함께 일도 도와주고 하면서 일이 끝나면 집으로 따라갑니다. 같이 술 한잔 기울이면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춥니다. 그때 록음기를 꺼내서 록음을 하는거죠. 처음 2,3년은 그렇게 했던것 같습니다. 민요수집하느라고 방학도 없었고 명절도 없었죠.”   한번 마을로 찾아가면 며칠씩 그곳에서 묵어야 한다. 대부분 깊은 산골이라서 길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향진에 차를 세워놓고 배낭을 메고 해발이 높은 곳까지 걸어서 올라가야 했다.   산이 많다 보니 가끔씩 비가 내려서 산사태가 발생하면 산골에서 나오지 못한다. 그렇게 개학까지 나오지 못했을때도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은 가기로 되였던 마을이 있었는데 갑자기 세미나 일정이 잡혀서 못가게 되였다고 한다. 그렇게 2시에 회의장에 들어가게 되였고 2시20분에 지진이 일어나서 그 마을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날이 바로 2008년 5월12일이였다.   이런 렬악한 조건을 마다하고 끝까지 견지한 김예풍 교수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김예풍 교수는 자신이 편찬한 책, 자신이 수집한 민요로 작곡을 가르칠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한개 민족의 민요를 가지고 작곡법을 가르치는 건 이 책이 유일합니다. 학생들로 하여금 소수민족의 음악도 공부하면서 작곡원리도 배울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   김예풍 교수의 안해 최선자 가수도 현재 서남민족대학 예술학원에서 성악을 가르치고 있다.   김예풍 교수는 앞으로의 목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는 교단에 설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서남지역 소수민족들의 문화를 조선말 책으로 편찬하여 한국,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일본과 교류하는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조선족의 민족 우월성을 발휘하여 문화교류에서 교량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아버지 김성휘 시인의 뒤를 이어서 또 하나의 예술령역에서 자신의 기량을 널리 펼치는 김예풍 교수, 우리 민족의 숨은 보석이 따로 없다.   앞으로 그의 강한 정신력과 책임감이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많은 본보기가 되기를 바란다.        /중국조선어방송넷
7464    [그것이 알고싶다] - 2000여년전의 그린 벽화... 댓글:  조회:2145  추천:0  2019-11-26
그리스 신화 그린 관능적 벽화 伊폼페이서 첫 공개  2019년11월26일  백조로 변신한 제우스와 스파르타 왕비 레다의 모습이 그려진 폼페이의 벽화. [EPA=연합뉴스] (로마=연합뉴스) 전성훈 특파원 = 그리스 신화를 모티브로 한 이탈리아 폼페이의 관능적 벽화가 25일(현지시간) 처음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됐다고 ANSA 통신이 보도했다. 고대 로마시대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려진 이 벽화는 스파르타의 왕비 레다가 백조로 변신한 제우스에 의해 임신하는 그리스 신화 내용을 묘사한다. 작년 11월 폼페이 유적지 내 상류층 저택 침실로 추정되는 곳에서 발굴됐다. 2천년이 지났음에도 그림의 형태가 거의 완벽하게 보존된 것은 물론 색감도 놀라울 정도로 생생해 고고학계와 미술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레다와 제우스 간 관계는 그리스 신화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내용 가운데 하나로, 고대 로마의 폼페이에선 이를 소재로 한 프레스코화가 꽤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프레스코는 벽면에 석회를 바른 뒤 수분이 마르기 전에 채색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인류 회화사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 기술 또는 형태로 인식된다. 폼페이는 고대 로마제국에서 가장 번성했던 도시였으나 서기 79년 8월 인근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한순간에 폐허가 됐다. 고고학계는 지금도 폼페이에서 꾸준히 유적·유물 발굴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최근엔 고대 로마인들의 생활상과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벽화 등이 잇따라 출토돼 시선을 끌었다. 지난달에는 검투사들을 상대로 매춘을 한 여관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두 명의 검투사가 혈투를 벌이는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진 프레스코화가 발굴된 바 있다. 이탈리아 고대 도시 폼페이에서 발견된 '검투사' 프레스코화. [EPA=연합뉴스]
천재 화가 다빈치 '모나리자' 미완성 이유 찾았다? 2019년5월8일  천재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포함한 다수의 미완성작을 남긴 것은 오른손의 마비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6일(현지시간) 폭스뉴스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의료전문가들은 영국왕립의사회가 발행하는 학술지 RSM저널에 기고한 논문을 통해 다빈치가 말년에 오른손 마비로 작품을 제작하는 데 애로를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로마에 있는 빌라 살라리아 클리닉의 성형외과 전문의 다비디 라제리와 폰테데라 병원 신경외과 전문의 카를로 로시는 16세기의 화가 지오반 암브로지오 피지노가 그린 다빈치의 초상화가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다고 말했다. 이 초상화에 등장하는 다빈치의 손은 옷으로 감겨 있는 데다 뻣뻣하고 수축된 모양새를 하고 있다. 종전의 연구에서는 이를 뇌졸종 탓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두 전문가들은 다빈치가 평소 왼손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썼고 오른손으로는 채색을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오른손에 이상이 생긴 뒤로는 팔렛을 잡거나 붓을 쥐는 데 문제가 생긴 것으로 추정했다.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는 명화 '모나리자'는 1503년에 착수됐으나 다빈치가 숨진 1519년에도 그의 화실에 남아있었고 완성작은 아니라는 것이 미술 전문가들의 지배적 견해다. 라제리 박사는 다빈치가 죽음을 앞둔 5년 동안 제자를 지도하고 데생을 계속했으면서도 상당수의 작품을 미완성으로 남겨둔 연유는 바로 오른손 마비로 설명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다빈치의 어색한 손은 뇌졸중 이후의 근육 경직에 의한 주먹쥔 손이라기 보다는 척골신경마비에 의한 이른바 '갈퀴손'으로 진단할 수 있다고 밝혔다. 라제리 박사는 실족이 뇌졸중 보다는 더 설득력을 가진 원인으로 본다면서 그가 순간적으로 넘어지면서 상지골에 부상을 입은것이 척골신경마비를 초래했을 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척골신경은 어깨에서 새끼손가락까지 뻗어있으며 손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을 관장한다. /한국경제
7462    [별의별] - "이색 수염 겨루기 대회" 댓글:  조회:2700  추천:0  2019-11-26
'수염으로 이게 가능해?' 2019년 최고의 수염 한 자리에 (ZOGLO) 2019년11월25일  상남자들이 모여 자신의 이색 수염을 겨루는 대회가 있다. '2019 National Beard and Mustache Championships'가 그것이다. 1990년대 초부터 유럽과 미국 각지에서 열린 이 대회는 이상한 모양의 콧수염, 가장 긴 턱수염까지 여러 종류의 콧수염과 턱수염 모양을 뽑는 대회로 올해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렸다. 크게 콧수염(Mustache),반수염 (Partial Beards), 완수염(Full Beards)으로 나뉘며 각 부문은 살바도르 달리·귀족·헝가리안·중국인 스타일 등으로 나뉜다. 지난 2017년부터는 여성 부문도 신설됐다. 미국 온라인 매체 보어드판다는 지난 23일(현지시간) 최종 결선에 오른 30인의 모습을 공개했다. 수염 대회 참가자들은 자선기금을 모으기 위해 사진촬영에 응했고 기금은 참전용사 후원과 유기동물 보호시설 등에 기부될 예정이다. 아래는 이색 수염을 자랑하는 참가자들의 모습이다.
7461    [그것이 알고싶다] - "에밀레종" 타종소리... 댓글:  조회:5519  추천:0  2019-11-26
  1200년 전 ‘에밀레종’ 복원, SKT 첨단기술 한‧아세안 행사 빛내 2019.11.26.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디지털데일리 최민지기자] SK텔레콤 첨단 정보통신기술(ICT)이 한‧아세안 리더들 눈길을 사로잡았다. SK텔레콤은 미디어 기술로 1200년 전 신라시대 성덕대왕신종, 일명 에밀레종을 복원하고 마지막 타종소리까지 고음질로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SK텔레콤(대표 박정호)은 지난 25~26일 열린 ‘2019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서 ▲5G‧인공지능(AI) 기반 성덕대왕신종 미디어아트 ▲5GX K-팝 퍼포먼스 ▲미래형 무인장갑차 등을 선보였다고 26일 밝혔다.  지난 25일 SK텔레콤은 한‧아세안 환영 만찬이 열린 부산 힐튼 호텔 로비에 설치한 5G‧AI 기반 미디어아트 ‘선향정’을 전시했다. 바른 울림이 있는 곳이라는 뜻의 선향정은 아세안 국가의 평화와 번영을 상징하는 성덕대왕신종(일명 에밀레종) 모형 구조물과 한국 전통 수묵산수화를 담은 3면의 특수 스크린으로 구성됐다. SK텔레콤은 첨단 기술을 활용해 1200년의 시간과 경주‧부산 간 공간을 넘어 천년왕조 신라 시절 성덕대왕신종을 행사장에 복원했다. 선향정은 성덕대왕신종 타종 소리로 각국 정상과 대표단을 환영했다. 범종에는 정상이 입장할 때마다 각국 국기가 형상화되고, 특수 스크린에는 한국의 사계를 표현한 초고화질(12K) 수묵화가 살아있는 듯 움직였다. 여러 개 산수화 영상을 자연스럽게 결합시켜 초고화질 동영상으로 구현하는 SK텔레콤 ‘엣지블랜딩’ 기술이 더해졌다.  성덕대왕신종은 2003년 문화재 보호차원에서 타종이 중지됐다. 이에 SK텔레콤은 마지막 타종 소리 음원을 AI 기반 미디어품질 개선 기술 ‘5GX슈퍼노바’를 통해 잡음 없는 고음질(FLAC) 음원으로 16년만에 복원했다.  ... ...   윤용철 SK텔레콤 커뮤니케이션센터장은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가 한국의 5G, 인공지능, 미디어 기술 우수성을 해외 정상과 대표단에게 소개하는 최고의 쇼케이스가 됐다”며 “앞으로도 모두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5G‧AI 기반 실감형 콘텐츠를 지속 선보여 한국 ICT 위상을 높이겠다”고 말했다. /최민지 기자 =================================///   에밀레종 (성덕대왕신종)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은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현존하는 한국 최대의 종이다. 설화에 따라 에밀레종으로 부르거나 봉덕사에 걸려있던 종이라 하여 봉덕사종이라 부르기도 한다.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1], 손자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했다. 조선시대인 1460년 봉덕사에서 영묘사로 이전되었으며, 다시 1915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높이는 3.75미터, 입 지름은 2.27미터, 두께는 11~25센티미터이다.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 실측한 결과 18.9톤이다.[2] 1992년 제야(除夜)에 서른세번 종을 친 뒤 한동안 타종을 중단하였다가, 1996년 학술조사를 위해 시험으로 타종하였다. 그 뒤 2001년 10월 9일, 2002년 10월 3일, 2003년 10월 3일에 타종행사를 열었으나, 이후로는 보존을 위해 이를 금하고 있다. ====================/// 일명 에밀레종인 성덕대왕 신종은 국보 29호이고 첨성대는 국보 31호입니다. 국보의 지정번호는 결코 국보의 가치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정순서를 나타낼 뿐이죠. 이 두 유물이 국보로 지정된 때는 1962년 12월 20일이라네요. 다음은 네이버 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것을 옮긴 것입니다.   국보는 보물로 지정될 가치가 있는 것 중에 제작연대가 오래 되고 시대를 대표하거나, 유례가 드물고 우수하며 특이하거나, 역사적 인물과 관련이 있는 것을 지정한다. 국보는 관보(官報)에 고시(告示)한 날로부터 효력이 발생한다. 국보로 지정되면 문화재보호법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국보지정의 연혁을 보면, 일제강점기 때는 ‘조선보물고적명승 천연기념물 보존령’에 의하여 지정되었고, 1955년에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던 유형문화재를 모두 국보로 지정하였으며,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공포되면서 이 법에 의하여 1963년 728점에 이르는 지정문화재 중 116점을 국보로 지정하였다. 2001년 11월 현재 지정된 국보는 303호에 이르고 있다. 국보의 지정번호는 가치의 높고 낮음을 표시한 것이 아니고 지정된 순서를 말한다.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 천재학습백과 초등 스토리텔링 한국사 에밀레종의 전설     교과과정 초등학교 > 5학년 > 2학기 > 사회 5-2 > 1. 우리 역사의 시작과 발전 > 4) 삼국 통일과 발해의 건국 목차 1. 눈물이 깃든 종 2. 내용 정리 1. 눈물이 깃든 종 “어째서 종소리가 이리 탁하단 말이오?” 경덕왕의 말에 봉덕사1) 스님들이 고개를 떨구었어요. “이 종은 선왕이신 성덕 대왕2)을 기리기 위한 것이오. 그런데 종소리가 이래서야 되겠소이까!” 옷자락을 팽 하니 뿌리치며 경덕왕은 성큼성큼 자리를 떠났어요. 스님들은 화가 난 경덕왕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허리를 구부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어요. 잠시 뒤, 주지 스님3)이 먼저 말문을 열었어요. “종이 제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은 정성이 부족해서입니다. 여러분들이 힘을 내서 시주4)를 모아 오세요.” 주지 스님의 말에 한 스님이 대답했어요. “좋은 종을 만들려면 정성어린 시주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저희들이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신라의 백성들은 가난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맞습니다. 귀족들은 사치를 누리고 있지만 백성들은 가난하여 매일 끼니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백성들에게 시주를 얻는 것은 힘들 뿐 아니라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스님들 모두 근심어린 얼굴로 백성들을 염려했어요. 결국 봉덕사 스님들은 경덕왕이 죽을 때까지 제대로 울리는 종을 만들지 못했어요. 경덕왕의 뒤를 이은 혜공왕이 다시 봉덕사를 찾아왔어요. 혜공왕은 아직도 비어 있는 종루5)를 바라보며 스님들에게 부탁을 했어요. “아버님의 꿈을 꼭 이루어 주세요.” “알겠습니다. 저희들이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스님들은 종을 만들기 위해 다시 시주를 받으러 다녔어요. 그러던 어느 날, 봉덕사 주지 스님이 낡고 허름한6) 집에 들러 어렵게 말을 꺼냈어요. “조금이라도 좋으니 시주를 해 주십시오.” “주지 스님이 직접 오시다니…….” 가난한 집 여인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아이를 데리고 나왔어요. “저희 집에 있는 것이라곤 이 아이뿐입니다.” 여인은 아이를 주지 스님에게 건네려 했어요. “아, 아닙니다. 아이를 시주로 받을 수는 없지요.” 주지 스님은 깜짝 놀라며 얼른 발길을 돌렸어요. 가난한 집에 시주를 하라고 한 것을 오히려 미안하게 생각했지요. 그 날 밤 주지 스님은 꿈을 꾸었어요. 깜깜한 하늘에서 한 줄기 빛과 함께 이런 말소리가 들려 왔지요. “봉덕사의 종을 제대로 울리려면 그 아이가 필요하니 어서 데려오거라.” 너무나 생생한 꿈을 꾼 주지 스님은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어요. 주지 스님은 밤새 고민을 하다 아침이 오자 곧바로 여인을 찾아갔어요. “부인, 전에 말씀하신 아이를 시주로 내어 주시겠습니까?” “꼭 원하신다면 보내 드려야겠지요.” 여인은 아이를 내어 주며 눈물을 흘렸어요. “모든 것이 부처님의 뜻이니 슬퍼하지 마십시오.” 주지 스님도 흐르는 눈물을 감추며 여인을 위로했어요. 얼마 후, 봉덕사에서는 새로운 종을 만들며 아이를 넣었어요. “부디 좋은 세상에 태어나 행복하게 살거라.” 주지 스님은 아이의 넋을 위로하는 기도를 올렸어요. 그러자 그 동안 계속 깨지고 찌그러지던 종이 너무도 쉽게 만들어졌어요. 그리고 마침내 종이 완성되었어요. 성덕 대왕 신종(국보 29호)통일 신라 시대의 범종으로 현재까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범종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다. 상원사 동종과 함께 통일 신라 시대의 대표적인 종이다. 종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혜공왕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봉덕사로 찾아왔어요. “그토록 기다리던 종이 완성되었다니……, 어서 울려 보거라.” 혜공왕의 명을 받은 스님들이 힘껏 종을 쳤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종소리는 엄마를 간절하게 부르는 아이의 소리 같았어요. 종소리를 들은 모든 사람들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놀라워할 때 한 여인이 털썩 주저앉으며 목놓아 울었어요. “아가야, 네가 나를 원망하는구나. 이 어미를 용서해 다오.” 그녀는 얼마 전 아이를 시주로 바친 여인이었어요. 사람들은 어미를 부르는 듯 슬픈 소리를 내는 이 종을 ‘에밀레종7)’이라고 불렀어요. 성덕 대왕 신종의 비천 상(飛天 象)종에 조각된 비천 상은 신라의 여러 문양 중에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에밀레종은 높이가 3.75미터, 무게 18.9톤에 이르는 거대한 종이에요. 크기뿐만 아니라 겉면에 새겨진 조각은 너무도 아름다우며, 소리 또한 세계의 어떤 종에서도 들을 수 없는 뛰어난 음을 들려 주지요. 에밀레종은 우리 조상이 남긴 최고의 보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답니다. 2. 내용 정리 신라의 경덕왕은 선왕인 성덕 대왕의 업적을 기리는 종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종을 만들지 못하고 죽자 그 뒤를 이은 혜공왕이 스님들에게 부탁하였습니다. 어느 날 봉덕사 주지 스님은 꿈에서 아이를 넣어야만 종을 완성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지 스님은 지난 날 아이를 시주로 내놓겠다던 집을 찾아가 아이를 받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정성을 다하여 종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런데 종소리는 마치 ‘에밀레’ 하고 아이가 어머니를 부르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종을 에밀레종이라고 불렀습니다. 관련이미지 11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이미지 갤러리 출처: 생방송 한국사 3 [네이버 지식백과]에밀레종의 전설 (천재학습백과 초등 스토리텔링 한국사)   ===============================/// 한국문학 에밀레종설화     구분 고전 저자 작자미상 작품해설 구전하는 이야기를 통해 어떤 사물이 왜 그러한지를 설명해 주는 유래담(由來譚)에 속하는 설화.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인 에밀레종이 어린애를 희생하여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에밀레종은 신라(新羅) 제36대 혜공왕(惠恭王) 6년 12월에 완성된 봉덕사종(奉德寺鐘) 또는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의 이칭(異稱)인데, 이 종에 대하여 두 가지 서로 다른 설화가 전승되고 있다. 하나는 나라에서 주종(鑄鐘) 작업을 계속 실패하게 되자 모든 사람이 걱정하고 있었다. 그때 한 노인이 나타나 주종 실패의 이유를 설명해 준다. ‘부처님께 시주할 것이 없으니 어린애라도 가져가라’고 한 여인의 불경한 말 때문이라는 것이다. 노인은 그 여인의 아이를 데려와야 종이 완성될 것이라고 한다. 절의 주지(住持)는 정재(淨財)를 거두러 다녔던 중들을 불러 어떤 여인이 그러한 말을 했는지 확인한다. 그리고 왕명(王命)으로 여인의 아이를 빼앗아다가 끓는 쇳물에 어린 애를 던진다. 그 뒤에야 종이 완성된다. 다른 하나는 종을 만드는 공장(工匠) 일전(一典)이 계속 주종에 실패하자 모두가 비난한다. 종을 만들지 못하자 일전의 누이는 자기의 부덕(不德)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여긴다. 그 때 시주 온 중이 그녀에게 어린애를 인주(人柱)로 해야 종이 완성된다고 일러준다. 누이는 고민하다가 오빠를 위하여 자신의 딸을 주종을 위해 바친다. 그래서 종을 완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두 이야기는 주종을 위해 어린애를 강제로 빼앗아 희생시키는 경우와 자진하여 희생하게 하는 데에서 서로 대조적인 관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두 이야기가 모두 인신공희담(人身供犧譚)의 모티프를 담고 있다. 현대소설 가운데 박용숙(朴容淑)의 단편 과 박용구(朴容九)의 장편 은 모두 이 설화를 소재로 작품화하고 있다. 관련이미지 25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이미지 갤러리 [네이버 지식백과]에밀레종설화 (한국현대문학대사전)   ===============================///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현존하는 한국 최대의 종이다.  봉덕사에 걸려 있던 종이라 하여 봉덕사종이라 부르기도 한다.     742년부터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손자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했다. 봉덕사에 달았다가 조선시대인 1460년수해로 봉덕사가 없어지자 영묘사로 옮겼으며, 다시 봉황대(鳳凰臺) 아래에 종각을 짓고 보존하였다. 1915년8월 종각과 함께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높이는 3.75미터, 입 지름은 2.27미터, 두께는 11~25센티미터이다. 무게는 1997년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 실측한 결과 18.9톤이다.   성덕대왕신종의 특징;ㅡ 성덕대왕신종의 특징은 장중하면서도 맑은 종소리라 할 수 있다. 지금은 중단되었지만  몇 해 전만 해도 에밀레종은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로 매일 아침 여섯 시에 세 번 타종되었다. 이 종이 만들어진 770년 12월 14일 이후 그것이 종각에 걸려 있는 한 변함 없이 서라벌에서 울려온 종소리였다. 낮게 내려앉은 저음이지만 그 맑은  여운은 긴 파장을 이루며 한없이 퍼져 나가는 그 소리는 장중하면서 맑은 소리였다. 사람들은 이 소리를 "엄청나게 큰 소리이면서 이슬처럼 영롱하고 맑다."고 하였다.   에밀레 종;ㅡ 성덕대왕신종이 에밀레 종으로 바뀌게 된 시기는 명백히 일제 강점기이다. 일제 강점기 이전의 어떠한 문헌에서도 성덕대왕신종을 에밀레종이라고 한 자료는 없다. 따라서 계획적이고 의도를 알 수 있는 단서는 1925년8월 5일자 조선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창작문예란에 렴근수라는 무명인의 이름으로 《어밀네 종》 동화가 올라있다. 얼마 후 친일 극작가 함세득이 많은 살을 붙인 희곡을 써서 현대극장에 올린다. 성덕대왕신종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단순한 동화처럼 씌었던 렴근수의 단편 동화 《어밀네 종》은 에밀레 종 이야기가 최초로 나타난 자료이며, ‘어밀네’를 처음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즉 에밀레종이란 말은 일제치하에 친일극작가가 만들어낸 말입니다. 출처문화재청 자료 ==========================/// 천년고도 경주에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소리를 내는 종이 있다. 771년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성덕대왕신종이다. 이 종에는 가슴 아픈 설화가 전해진다. 당시 구리 12만근으로 큰 종을 만들기로 했으나 아무리 해도 쇠가 붙지 않았다. 한 승려의 조언대로 갓난아기를 쇳물이 끓는 가마에 넣었더니 종이 깨지지 않았다. 이후 종을 칠 때마다 죽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낸다고 해서 에밀레종이란 별칭이 붙었다고 한다. 예전에 인신공양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과학자들이 검증에 나선 일이 있다. 1998년 국내 한 연구기관이 에밀레종에서 시료를 채취해 분석했더니 사람 뼈에 있는 인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다. 하지만 인이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인신공양이 없었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제조 과정에서 인골 성분이 쇳물 위에 떠올라 제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아기 울음과 흡사한 “에밀레~ 에밀레~” 소리를 내게 하는 것일까. 이는 맥놀이 현상과 관련이 깊다. 맥놀이란 진동수가 비슷한 두 소리가 중첩돼 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종소리는 치는 표면의 위치에 따라 진동수에서 미세한 차이가 발생한다. 이 소리들이 뒤섞여 신비스러운 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에밀레종 소리가 이번에 국내 최첨단 기술로 복원됐다. 25일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환영만찬에선 새로 복원된 에밀레종이 단연 인기였다. 각국 정상들은 종을 배경으로 깊은 울림의 종소리를 들으며 기념촬영을 했다. 에밀레종은 문화재 보호를 위해 2003년부터 타종이 중단됐으나 SK텔레콤은 인공지능(AI) 기술을 적용해 종소리를 살려냈다. 슬픈 에밀레종 소리에는 백성의 안녕을 염원하는 대왕의 애민정신이 녹아 있다. 종에 새겨진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큰 소리는 천지에 진동하고 있으나 귀로 듣고자 해도 그 울림을 들을 수 없다.” 국가 지도자들이 들어야 하는 큰 소리는 바로 민심(民心)의 소리다. 그것은 귀가 아닌 마음으로만 들을 수 있다. 1200년 만에 ‘큰 소리’가 이 땅에 복원됐지만 마음으로 듣는 지도자가 없다. 애끊는 민심의 소리가 ‘에밀레’ 소리보다 슬프다.   /배연국 논설위원 ///세계일보 ===================================/// [fn스트리트] 성덕대왕 신종 파이낸셜뉴스2019.11.26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공유 더보기 인쇄 글자 작게 글자 크게 한국의 불교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 유물 가운데 하나가 종이다. 삼국유사에는 한국종이 6세기부터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1500년 동안 수많은 종이 제작됐다. 현존하는 한국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오대산 상원사종(725년)이다. 그러나 모양과 소리가 아름답기로는 성덕대왕 신종(771년)을 최고로 꼽는다. 성덕대왕 신종은 에밀레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인신공양의 슬픈 설화가 전해진다. 신라 35대 경덕왕은 아버지 성덕대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구리 12만근을 내려 큰 종을 만들기로 했다. 그러나 덕이 부족한 탓인지 아무리 해도 쇠가 붙지 않아 실패를 거듭하다 세상을 떴다. 아들 혜공왕 때에 이르러 어느 여인의 갓난아기를 끓는 쇳물에 던져넣자 놀랍게도 종이 완성됐다. 이후 종을 칠 때마다 죽은 갓난아기의 울음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성덕대왕 신종에는 과학의 신비도 함께 스며 있다. 김석현 교수(강원대)는 "미세한 비대칭성 맥놀이 현상이 아기울음 같은 소리를 내게 한다"고 분석했다. 맥놀이란 주파수가 비슷한 두 소리가 중첩돼 규칙적으로 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현상이다. 그에 따르면 종을 칠 때 표면의 위치에 따라 두께와 모양의 차이로 미세한 차이를 지닌 진동수의 소리가 난다. 이 소리들이 뒤섞여 에밀레종 특유의 신비스러운 소리가 난다는 설명이다. 성덕대왕 신종이 1200년 시간의 벽을 넘어 한·아세안 정상회담 만찬장에 신비스러운 모습을 드러냈다. 25일 부산 힐튼호텔 만찬장 입구에서는 실물의 5분의 4 크기로 재현된 에밀레종이 각국 정상들을 맞았다. SK텔레콤이 최첨단 5세대 이동통신(5G)과 인공지능(AI) 기술을 이용해 입체 홀로그램 이미지와 음원을 복원한 것이다.   신종은 각국 대표단이 입장할 때마다 특유의 울음소리를 내며 이들을 환영했다. 한국과 아세안의 평화와 공동번영도 기원했다. 전통문화와 최첨단 과학이 한데 어우러진 것이어서 더욱 뜻깊다. /염주영 논설위원  ///파이낸셜뉴스 ===================================/// ▲  경주박물관 마당에 있는 성덕대왕신종.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신라시대 궁궐터인 월성 곁에 있는 국립경주박물관(경주시 인왕동)은 들러야 할 이유가 많은 곳이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너른 마당에 서있는 큰 범종 소리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에밀레종이라 불리는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이다. 신라 771년 12월 14일에 만들어진 한국의 대표하는 범종으로 국보 29호다. 범종(梵鐘)은 불교 사찰에 걸려 있는 커다란 종으로 성덕대왕신종 또한 봉덕사라는 절에 있었다. 아쉽게도 녹음된 종소리가 나오지만 진중하고 여운 깊은 울림이 느껴진다. 가까이 다가가면 종의 표면을 장식한 꽃구름 속의 선인(仙人)과 2쌍의 비천상(飛天像)을 볼 수 있다.    ▲  범종 앞에 서면 녹음된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  멋진 그림이 새겨져 있는 성덕대왕신종.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종소리가 좋아 몇 번 더 들었는데 별칭처럼 '에밀레~' 하고 울지 않는다. 박물관 문화해설사에게 이 종을 만들 때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전설에 대해 물어보았다가 흥미로운 얘기를 듣게 됐다. 인신공양설화는 동아시아 문화권에 흔히 나오는 설화인데, 놀랍게도 에밀레종 설화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나 삼국사기가 아니라 일제강점기인 1925년에 처음 나왔다고 한다. 이전의 어떠한 문헌에서도 성덕대왕신종을 에밀레종이라고 한 예는 찾아볼 수 없다고. 에밀레종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건 1925년 8월 5일자 조선총독부 기관지 창작문예란에 실린 렴근수(廉根守) 작가의 이라는 동화다. 1943년 친일 극작가 함세덕이 희곡 을 집필하고 현대극장에 상연했다. 이후 에밀레종 설화는 급속도로 대중 속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김종성  
7460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문화재보호", 남의 일이 아니다... 댓글:  조회:3103  추천:0  2019-11-24
  2000년 전 나스카인이 그린 땅그림 143점 추가 발견  2019.11.24.    좋아요 후속기사원해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페루 나스카인, 2100~1700년전 제작 추정 일 야마가타대-아이비엠 항공사진 분석 1개는 딥러닝 인공지능 추론으로 찾아내 천문현상과 관련한 종교의식 일환인 듯2천년 전 페루 나스카인들의 땅그림. 사람 형상이다. 오른쪽은 윤곽선을 표시한 가공사진. 야마가타대 제공 남미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남쪽으로 약 400km 거리에 있는 동태평양 해안지대의 나스카 평원에 가면 오늘날 세계 고고학의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를 만나볼 수 있다. 널따란 평원에 새겨져 있는 대형 땅그림(geoglyphs, 지상화)이다. 무려 450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광대한 평원에 땅을 파헤친 자국이 만들어낸 문양들이 즐비하다.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은 이 땅그림들은 이 지역에 거주하던 나스카인들이 기원전 500년~서기 500년 사이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기기묘묘한 기하학적 도형, 다양한 동물과 식물을 연상시키는 그림 등은 최대 길이가 수킬로미터나 돼 항공 촬영을 통해서만 그 모양을 확인할 수 있다.  인공지능이 찾아낸 페루 나스카평원의 땅그림. 막대기를 든 사람의 형상이다. 야마가타대 제공 일본 야마가타대 연구진과 아이비엠이 최근 이 지역에서 143개의 땅그림을 추가로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특히 이 가운데 1개는 기존 사진 분석으로 찾아내지 못한 것을 아이비엠의 딥러닝 인공지능을 이용해 찾아냈다. 인공지능을 앞세워 땅그림을 발견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새(오른쪽은 윤곽을 뚜렷하게 표시한 가공사진) 머리 두개인 뱀과 사람. 물고기 2016~2018년에 촬영한 항공사진 분석을 통해 새로 확인한 땅그림에는 사람, 뱀, 새 등이 포함돼 있다. 야마가타대 연구진은 기원전 100년에서 서기 30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했다. 인공지능이 이번에 찾아낸 땅그림은 막대기를 들고 있는 사람의 형상이다. 인공지능이 항공 사진을 분석해 형상을 추론한 뒤, 이를 토대로 현지 조사를 하는 방식으로 땅그림을 확인했다. 페루의 나스카평원(노란색 점). 나스카인들이 거대한 땅그림을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가지 추측만 무성할 뿐 확실한 이유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 웹사이트에 따르면 천문 현상과 관련한 종교의식의 일환이었을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곽노필 기자
‹처음  이전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