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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별] - 碑가 悲哀하다...
2019년 11월 20일 23시 51분  조회:3374  추천:0  작성자: 죽림

밀양 표충비에서
18일 또 '땀방울'...
무슨 일을 예고한 걸까

18일 약 1ℓ의 땀을 흘린 것으로 전해진 밀양 표충비. [연합뉴스]

18일 약 1ℓ의 땀을 흘린 것으로 전해진 밀양 표충비. [연합뉴스]

국가에 중대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리는 것으로 유명한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15호 ‘밀양 표충비’에 또 ‘땀’이 맺힌 것으로 나타났다. 
  

 

밀양 표충비에서 18일 5시간동안 약 1ℓ의 물방울 흘러내려
민간에선 "사명대사의 우국충정", 전문가들 "결로 현상 가능성"









18일 경남 밀양시 등에 따르면 이날 오전 4시부터 9시까지 5시간 동안 무안면 홍제사 경내에 있는 표충비에서 약 1ℓ의 땀 같은 물방울이 맺혀 흘러내렸다. 9시 이후에는 흐르던 물방울이 멈추고 이날 오후부터는 비석이 마른 상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홍제사 관계자는 “올해 들어 표충비각에서 흥건하게 땀이 흐른 것은 처음”이라며 “하지만 오전 9시 이후부터 더는 땀이 흐르지 않아 비석 주변도 물이 마른 상태”라고 말했다. 
  
임진왜란 당시 국난을 극복한 사명대사의 높은 뜻을 새긴 비석인 표충비는 ‘사명대사비’로도 불린다. 사명대사는 서산대사 등과 함께 조선시대에 승려 신분으로 나라를 구하는 일에 앞장선 승병장이다. 무안면에 표충비가 세워진 것은 이곳이 사명대사의 출생지여서다. 사명대사는 왕명으로 일본에 다녀온 뒤 스승인 서산대사의 입적 소식을 듣고 1년 동안 묘향산에 머물렀다가 고향인 밀양 영축산 동쪽 기슭에 백하암(白霞庵)이란 암자를 지어 지낸 적이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정은 당시 의병장으로 공을 세운 사명대사를 불러 포로 귀환 임무를 줬다. 스님은 일본에 들어가 협상 끝에 3000여명의 포로를 송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이유로 사명대사의 우국충정이 지금까지도 표충비에 남아 있어 국가에 큰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다. 
  
실제로 표충비는 국가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땀 같은 물방울이 맺혀 그 조짐을 알려줬다. 1894년 동학농민 운동,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1945년 8·15 해방, 1950년 6·25 전쟁, 1985년 남북고향 방문 등에 땀을 흘렸다는 기록이 있다. 최근에는 2008년 FTA 소고기 협상, 2009년 김수환 추기경 선종, 2010년 천안함 침몰, 2017년 대통령 탄핵심판 당시 물방울이 맺힌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표충비에 땀 같은 물방울이 맺히는 현상을 사명대사의 우국충정이 지금까지 이 비를 통해 전해진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반면 과학계에서는 아직 정확한 원인이 규명되지 않았다. 밀양시 관계자는 “표충비는 좋을 일이 있을 때나 나쁜 일이 있을 때도 땀을 흘리는 현상이 나타났다”며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이 대기가 함유한 수분이 온도 차가 있는 물체 표면에 물방울로 맺히는 결로현상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밀양=위성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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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속문학사전: 설화 편

땀 흘리는 비석

 

 

정의

‘사명대사비’라고도 하며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비석 면에 땀방울이 맺힌다는 증거를 기반으로 한 전설.

역사

비석에 얽힌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은 증거물만 있다면 인물이나 사건을 제시하여 환상적 요소를 덧붙여서 이야기를 전한다. 신기한 현상을 기후 변화에 따른 외기 현상이나 결로 현상으로 보는 등 과학적으로 해명해도 비석이 그 자리에 있는 한 민중은 비석이 지닌 영험함을 믿는다.

줄거리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어 왜병을 크게 무찌르고 일본에 전쟁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 삼천 명을 환국시킨 사명대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옛 표충사 터에 비를 세웠다. 이 비를 세우고 나서부터 나라에 큰일이 생기면 비석 면에 땀방울이 맺혔다고 한다. 땀방울은 마치 구슬처럼 비석 면을 타고 흘러내렸다.

변이

이 설화는 비석을 증거물로 하여 땀을 흘리거나 피를 흘리는 데서 유래한 이야기이다. ‘땀 흘리는 표충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호)’로 알려진 비석은 경남 밀양에 있는데 나라에 큰일이 있기를 전후하여 물방울이 맺혀서 몇 시간씩 구슬땀처럼 흘러내린다. 이 외에도 전라북도 김제시에 있는 대제복구비는 ‘피 흘리는 비석’으로 알려져 있다. 전북 벽골제의 복구비에는 비석에 낫을 갈다가 다친 사람은 영원히 낫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

분석

비석이 땀을 흘린다는 것은 나라에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려 준다는 예지력을 믿는 민중의 신앙에 바탕을 둔다. 피 흘리는 비석에서는 본래의 자리에 제 모습을 갖추고 있지 않을 때는 비석이 저주를 내릴 수도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신성성과 진실성을 갖춘 객관적 증거물을 바탕으로 인간의 왜소함을 드러내는 이야기이다.

특징

<땀 흘리는 비석>과 <피 흘리는 비석>에 대한 이야기는 전국적으로 전한다. ‘사명대사비’라고도 하는 경남 밀양 표충사에 있는 비석은 사명대사를 기리는 것이고, 전북 김제시에 있는 대제복구비는 비석 근처에 몹쓸 짓을 하거나 나쁜 일이 일어나면 비석이 피를 흘린다는 전설이 있다.

의의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때 비석이 먼저 알고 땀을 흘린다고 믿는 것은 나쁜 일이 일어나기 전에 훌륭한 인물들이 미리 알려 줄 수도 있다는 신앙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비석에 해를 가하거나 탐욕으로 훼손하면 변을 당한다는 이야기를 통해 민중에게 착하게 살라는 교훈을 전하고 있다.

집필

  • 박성석(朴性錫)/경상대학교

참고문헌

  • 한국구비문학개론(김태곤 외, 민속원, 1996년)
  • 우리 민속 문학의 이해(김열규 외, 개문사, 1979년)

출처

  • 김제 시사(김제시 편찬위원회, 1995)
  • 한국구비문학대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1988) 

    [네이버 지식백과] 땀 흘리는 비석 (한국민속문학사전 ,설화 편)


    =====================================///
     

    불교설화

    땀흘리는 비석

     

     

    분류 문학 > 콘텐츠모음 > 시놉시스
    땀흘리는 비석 본문 이미지 1
    땀흘리는 비석 본문 이미지 2
    땀흘리는 비석 본문 이미지 3
    땀흘리는 비석 본문 이미지 4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해 분연히 앞장섰던 승병대장 사명대사의 구국의지를 기리기 위해 조선조 선조대왕은 사명대사의 고향에 전각을 세우고 그곳에 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여 스님의 충훈을 모시라는 명을 내렸다.
    임금의 명이 떨어지자 사명대사의 출생지인 경남 밀양군 무안면 산강리에는 사당이 세워지고 스님의 영정이 봉안됐으며, 선조는 이 전각을 「표충사」라 사액했다.
    그로부터 관료는 말할 것도 없고 백성들까지도 그 사당 앞을 지날 때는 늘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를 올렸다.
    그렇게 백 여 년의 세월이 흘러 당우가 퇴락하자 사명 스님의 5대 법손인 남붕선사는 표충사를 중수하는 동시에 스님의 공적을 기리는 표충비를 세웠다.
    때는 영조 14년, 1738년이었다.
    표충비를 세울 돌을 고르기 위해 경상도 경산까지 가서 돌을 구해온 남붕 스님은 당시 정승 이익현에게 비문을 부탁했다.
    표충비가 세워지고 다시 백 년 후, 그러니까 조선 제24대 헌종 5년(1839), 사명대사의 8대 법손인 월파선사는 표충사를 밀양 영정사로 옮기고 절 이름을 「표충사」로 바꿨다.
    표충서원을 옮겨 가자 사명 스님의 고향엔 표충비만 남게 됐다.
    지방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어 지난날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는 이 비석은 현재 몸체에 금이 간 채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비석 몸체에 금이 간 것은 일제 때였다.
    사명대사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일본 사람들이 비석을 보면 섬뜩하다 하여 비석옆에다 창고를 세워 혈맥을 끊으려하자 한동안 못견딜 정도로 비석이 몸부리치니 비석 몸체에 피가 흐르는 형상으로 금이 갔다.
    비석이 세워진 후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땀을 흘렸다는 첫 기록은 1894년 갑오경장이 일어나기 7일 전으로 되어 있다. 그때 비석이 흘린 땀이 3말 1되나 된다고 한다.
    그 뒤 군지()에 기록된 표충비의 땀 기록은 경술합방, 기미독립만세운동, 8 · I5해방, 6 · 25동란, 4 19학생의거, 5 · 16 혁명 등 여섯 차례이다. 그 중 가장 많은 땀을 흘린 것은 기미년 만세사건 때와 5 · 16 혁명 때로 기미독립운동 때는 19일간에 걸쳐 5말 7되를, 5 · 16 혁명 때는 5일간에 5말 7되를 흘렸다.
    군()의 공식 기록은 없으나 육영수 여사가 입적한 다음 날도 비석은 땀을 흘렸다고 한다.
    이렇듯 나라에 중대사가 있을 때면 미리 땀을 흘려 어려움을 예고해 주니 마을 사람들은 비석의 영험을 받아들여 대소사에 준비하는 마음가짐을 갖게 됐다.
    6 · 25동란 때는 전쟁이 일어나기 25일 전부터3말 8되나 홀렸다.
    이 마을 사람들은 앞으로는 이 비석이 나라의 경사로 땀 흘리는 일이 많기를 발원하고 있다.

    [설화내용]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해 분연히 앞장섰던 승병대장 사명대사의 구국의지를 기리기 위해 조선조 선조대왕은 명을 내렸다.
    『사명대사의 고향에 전각을 세우고 그곳에 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여 훗날까지 스님의 충혼을 모시도록 해라.』
    임금의 명이 떨어지자 사명대사의 출생지인 경남 밀양군 무안면 산강리에는 사당이 세워지고 스님의 영정이 봉안됐으며, 선조는 이 전각을 「표충사」라 사액했다.
    『누구든 이 표충사 근처를 어지럽히거나 신성시 하지 않을시는 엄히 다스리도록 하라.』
    친히 사액한 선조는 고을 원에게 이처럼 신신당부하여 사명 스님의 호국정신을 치하했다.
    그로부터 관료는 말할 것도 없고 백성들까지도 그 사당 앞을 지날 때는 늘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를 올렸다.
    그렇게 백 여 년의 세월이 흘러 당우가 퇴락하자 사명 스님의 5대 법손인 남붕선사는 표충사를 중수하는 동시에 스님의 공적을 기리는 표충비를 세웠다.
    때는 영조 14년, 1738년이었다.
    표충비를 세울 돌을 고르기 위해 경상도 경산까지 가서 높이 3.9m 폭 97cm, 두께 70cm크기의 돌을 구해온 남붕 스님은 당시 정승 이익현에게 비문을 부탁했다.
    『내 본시 승려의 부탁으로 글 짓는 것을 즐기지 않았으나 오직 대사님의 사정이 간절하여 이를 물리치기 어려워 특례로 곧 비에 글월을 새기는 것입니다.』
    배불숭유 정책으로 불교를 탄압했던 당시의 정승 역시 사명대사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외면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표충비가 세워지고 다시 백 년 후, 그러니까 조선 제24대 헌종 5년(1839), 사명대사의 8대 법손인 월파선사는 표충사를 밀양 영정사로 옮기고 절 이름을 「표충사」로 바꿨다.
    표충서원을 옮겨 가자 사명 스님의 고향엔 표충비만 남게 됐다.

    지방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어 지난날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는 이 비석은 현재 몸체에 금이 간 채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비석 몸체에 금이 간 것은 일제 때였다. 사명대사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일본 사람들은 잔꾀를 냈다.
    『저 비석은 보기만 해도 왠지 섬뜩하단 말이야. 마치 사명대사 귀신이라도 담긴 것만 같으니 무슨 방법을 쓰는 것이 어떻겠소?』
    『좋소. 나도 동감입니다. 저 비석 옆에다 담배 창고를 옮겨 짓도록 합시다.』
    일본인들이 사명대사의 혈맥을 끊기 위해 비석 옆에다 창고를 세우던 날이었다.
    비석은 마치 살아있는 듯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한동안 못 견딜 정도로 몸부리치니 비석 몸체에 마치 피를 흘리는 듯한 형상으로 「확」금이 갔다.
    일본 사람들이 표충비를 무서워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물론 임진왜란 때 왜구를 물리친 용맹스런 승장의 비라는 점도 없지 않으나 마치 스님의 구국혼이 비석에 어린 듯 나라에 큰일이 일어날 때면 비석에서 땀이 흐른다는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진 것이다.
    예전 것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고 비석이 세워진 후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땀을 흘렸다는 첫 기록은 1894년 갑오경장이 일어나기 7일 전으로 되어 있다.
    비석이 있는 곳을 지나던 한 아낙은 매서운 겨울 날씨인데도 비석몸체에서 땀이 흐르듯 물기가 흐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낙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집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에게 말했다.
    남편 역시 가만히 두고만 볼 일이 아니다 싶어 관가로 달려가 고했다.
    당시 비석이 흘린 땀이 3말 1되나 된다고 한다.
    그 뒤 군지()에 기록된 표충비의 땀 기록은 경술합방, 기미독립만세운동, 8 · I5해방, 6·25동란, 4 ·19학생의거, 5· 16 혁명 등 여섯 차례이다. 그 중 가장 많은 땀을 흘린 것은 기미년 만세사건 때와 5·16 혁명 때로 기미독립운동 때는 19일간에 걸쳐 5말 7되를, 5 ·16 혁명 때는 5일간에 5말 7되를 흘렸다.
    군()의 공식 기록은 없으나 육영수 여사가 입적한 다음 날도 비석은 땀을 흘렸다고 한다.
    이렇듯 나라에 중대사가 있을 때면 미리 땀을 흘려 어려움을 예고해 주니 마을 사람들은 비석의 영험을 받아들여 대소사에 준비하는 마음가짐을 갖게 됐다.
    6 ·25동란 때는 전쟁이 일어나기 25일 전부터3말 8되나 흘렸다.
    『표충비가 땀을 흘린다는 소문이 동네에 나돌기 시작하자 주민들은 아무래도 무슨 변이 있을 조짐인 듯하다며 양식이며 비상약품 등을 준비했지요.』
    6·25무렵을 회고하는 주민 이씨의 말처럼 마을 사람들은 땀 흘리는 비석의 영험을 믿으며 크고 작은 일에 조심하고 준비하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
    『우리 마을에선 사명대사의 구국 충혼이 이 표충비에 서려 있다고 믿고 있지요. 매년 관광 철이면 이 비석을 보려고 1백 여 명의 관광객이 들르는데 주민들은 너나없이 사명대사의 호국정신을 강조하며 자랑스럽게 안내합니다.』
    사명당 추모회 구장회 회장의 말처럼 마을 주민들은 사명대사의 정신을 이어 대체로 정의감이 강하다는 소문이다.
    비석이 땀을 흘릴 때는 사람이 땀 흘리는 형상과 똑같아서 앞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뺨으로 흘러내리는 듯 비석 전후면 머리 쪽에서 땀이 나와 비문 글귀 사이를 타고 흘러내린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외지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기후·습도 운운하지만 여러 차례 땀 흘리는 광경을 목격한 저희들은 사명대사의 충혼이 서리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불가사의 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을 촌노 한 분은 자신의 믿음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62년 장마 때는 보리가 썩어 나갈 정도였는데도 비석엔 습기 하나 차지 않았다.』
    며 사명대사의 높은 도력을 거듭 강조한다.

    이 마을 사람들은 앞으로는 이 비석이 나라의 경사로 땀 흘리는 일이 많기를 발원하고 있다.

    (밀양 · 표충사)

    [네이버 지식백과] 땀흘리는 비석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불교설화), 2004., 한국콘텐츠진흥원)

     

    ///////////////////////////////////////////참고...

    한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얼음골,
    종소리가 나는 만어사 경석과 함께 밀양의 ‘3대 신비’ 로 알려진 사명대사 표충비각,ㅡ


    무안면 홍제사(무안리 903-5) 내에 소재한 표충비각은 경상남도 유형 문화제 제15호로 이 비석은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려 그 조짐을 미리 알려 준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민간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사명대사의 우국충정이 지금까지 전해지기 때문이라고 믿으며, 이 비를 신성시하고 있다.
    더욱이 땀방울이 글자의 획 안이나 머릿돌과 받침돌에는 맺히지 않는다 하여, 그 신비함을 더해주고 있다...

    =========================///

     

    밀양 "얼음골";ㅡ    

     

    종 목  천연기념물  제224호 
    면 적 86,612㎡
    지 정 일 1970.04.24
    소 재 지 경남 밀양시  산내면 남명리 산95-1외 


    재약산(천황산) 북쪽 중턱의 높이 600-750m쯤 되는 곳의 골짜기 9천여평을 얼음골 이라고 한다. 봄부터 얼음이 얼었다가 처서가 지나야 녹는 곳이며, 반대로 겨울철에는 계곡물이 얼지 않고 오히려 더운 김이 오른다는 신비한 곳이다. 더위가 심할수록 바위 틈새에 얼음이 더 많이 얼고, 겨울에는 반팔을 입을 정도로 더운 김이 나 "밀양의 신비"라 불리며 천연기념물 224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이 곳 얼음골은 대지의 열기가 점점 더워오는 3월 초순경에 얼음이 얼기 시작하여 7월 중순까지 유지되며, 삼복더위를 지나 처서가 되면 바위틈새의 냉기가 점차 줄어든다.이런 신비한 이유로 밀양의 4대 신비의 하나로 손꼽고 있으며, 특히 다른 관광지와는 달리 초여름부터 늦가을까지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얼음골의 신비와 함께 주변에 다양한 볼거리가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인 가마볼 협곡은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절벽이 태고적부터 흘러내린 계곡물에 의해 두터운 암반이 깍여나가 계곡이 마치 가마솥을 걸어 놓는 아궁이처럼 생겼다하여 이름이 가마볼(암,수 가마볼)이 되었다 한다. 

     

    비가 온 뒤에는 녹아서 얼음이 보이지 않으며 어는 경우도 예전만큼 많지는 않다고 하는데 그래도 계곡입구에 들 어서면 냉장고 속에 들어간듯 쏴아한 얼음바람을 맛볼 수가 있다. 얼음골의 여름 평균기온은 섭씨 0.2도, 계곡물은 5℃ 정도. 물이 차서 10초 이 상 발을 담그고 있기 어렵다. 얼음골의 정식이름은 오랜 옛날부터 시례빙곡으로 불리워졌다. 우리나라에서 얼음골로 알려진 곳은 이 곳 밀양의 천황산 얼음골, 의성군 빙혈, 전라북도 진안군의 풍혈, 냉천, 울릉도 나리분지의 에어컨굴 등 네 곳이다.

     

    이러한 곳은 특이한 기상현상으로 인하여 기상관광의 대상이 되는데, 지질학상 이 러한 지형을 애추(talus 혹은 scree)라고 한다. 단애면으로부터 중력에 의해 떨어지는 풍화 산물이 단애 밑에 쌓여 만들어진 지형 을 애추라고 한다. 얼음골에서 냉기가 나오는 곳은 이 애추 사면인데 주로 주빙하 기후하에서 풍화작용에 의해 발달한 화석지형으로서, 구성물질이 모난 바위덩어리 로 되어 있다. 여름철에 이 애추사면에 산사태가 발생하여 도로의 교통을 방해하기도 한다.

     

    수십 미터를 미꾸러지듯 쏟아지는 시원한 폭포수는 병풍처럼 둘러선 기암절벽과 함께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 외 백옥같은 화강암이 수십만 년 동안 물에 씻겨 커다란 소(沼)를 이루어 그 모양이 마치 절구(臼)의 호박같이 생겼다 하여 이름 붙여진 호박소가 있다.

     

    =========================///
     

    옛날 옛적 동해 용왕의 아들이 자신의 수명이 다한 것을 깨닫고 낙동강 건너에 있는 무척산이란 곳의 신승()을 찾아가 새로 살 곳을 마련해줄 것을 부탁했다. 신승은 용왕의 아들에게 가다가 멈추는 곳이 바로 그곳이라고 말해주었다. 용왕의 아들이 길을 떠나자 수많은 고기떼가 그의 뒤를 따랐는데, 그가 멈춘 곳이 만어사이다. 만어사에 이르자 용왕의 아들은 큰 미륵돌로 변했고, 그를 따르던 수많은 고기들 또한 크고 작은 돌로 변했다는 전설이 있다.

    밀양 시내를 흘러내린 밀양강이 낙동강과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낙동강 포구 삼랑진1)의 만어산(, 670m) 만어사()에 가면 이 믿을 수 없는 전설이 사실이 되고야 만다. 크고 작은 돌이 쏟아져내린 듯 또는 쏟아부은 듯 널브러져 있는 곳을(대개 골짜기이기 쉽다) 흔히 ‘너덜지대’라고 하는데, 만어사가 안겨 있는 만어산 곳곳이 그렇다. 이런 너덜지대가 가장 크고 장관을 이루는 곳이 만어산의 턱밑에 자리잡은 만어사 주변이다. 그 규모도 장관이지만 너덜지대를 이루는 돌 하나하나의 생김새가 예사롭지 않다. 전설처럼 물고기가 입질하는 모양이다. 폭이 약 100m, 길이가 약 500m 규모로 골짜기를 가득 메운 입질하는 물고기 모양의 크고 작은 검은 돌들은 신기하게도 두드리면 쇠종 소리가 난다. 그러나 모든 돌에서 그런 소리가 나는 것은 아니고, 서너 개 중 한두어 개 어림으로 쇳소리가 나는데, 그 이유 또한 불분명하여 더 신비롭다.

    만어석

    만어석만어사 주변 골짜기 너덜지대를 가득 메운 독특한 모양의 검은 돌들은 용왕의 아들을 따라온 수많은 고기떼가 돌로 변한 것이라 한다. 이 때문에 만어석이라 불리는 이 돌들은 두드리면 맑은 종소리가 나 종석이라고도 불린다.

    이와 같은 이유로 만어사 주변 너덜지대의 돌들은 ‘만어석’()이라고 불린다. 동해의 물고기들이 변한 것이라는 전설에 따른 것이다. 또, 두드리면 쇠종 소리가 난다고 하여 ‘종석’()이라고도 불린다. 이들 만어석은 다른 돌보다 유난히 무겁고 야물다고 하며, 조선 세종 때에는 이 돌로 ‘종경’()이라는 악기를 만들려고 돌을 채집하여 시험했으나 음률이 맞지 않아 그만두었다고도 한다.

    그런가 하면 『삼국유사』 「탑상」()편 ‘어산불영’()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만어산은 옛날의 자성산() 또는 아야사산()인데, 그 옆에 가락국이 있었다. 옛날 하늘에서 알이 바닷가로 내려와 사람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으니, 곧 수로왕이다. 이때 그 영토 안에 옥지()가 있었는데, 그 못 안에 독룡이 살고 있었다. 만어산에 다섯 나찰녀()2)가 있어 그 독룡과 서로 오가며 사귀었다. 그러므로 때때로 우레와 비를 내려 4년 동안 오곡이 결실을 맺지 못했다. 왕은 주술로써 이 일을 금하려 해도 할 수 없으므로 머리를 숙이고 부처를 청하여 설법했더니 그제야 나찰녀가 오계()3)를 받았는데, 그후로는 재해가 없었다. 그 때문에 동해의 고기와 용이 마침내 골짜기에 가득 찬 돌로 변하여 각기 쇠북과 경쇠(옥 또는 돌로 만든 악기) 소리가 난다. 또 살펴보면 대정() 20년 경자()는 고려 명종 10년(1180)인데 처음으로 만어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 기록으로 본다면 만어사가 창건된 것은 46년 김수로왕에 의해서이며, 고려 명종 때인 1180년에 중창된 것으로 여겨진다. 신비로운 고대왕국 가야시대에 세워진 뜻깊은 절인 셈이다. 하지만 지금의 만어사는 그런 오랜 창건 역사를 기대할 만큼 고색창연한 고찰의 모습은 아니다. 근래에 지어진 대웅전과 범종각, 삼성각 그리고 요사 한 채로 이루어진 조촐한 산중 절집일 뿐이다. 다만 수로왕 때나 동해 용왕의 아들이 수많은 고기떼를 이끌고 불교에 귀의해 만어사를 창건했다는 전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자연경관이 독특하고, 고려시대의 숨결을 느끼게 하는 삼층석탑만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만어사 전경

    만어사 전경가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절이지만 지금의 만어사는 고려 때의 삼층석탑과 근래에 지어진 대웅전과 범종각, 삼성각과 요사 한 채로 이루어진 조촐한 산중 절집일 뿐이다.

    석탑은 흔히 법당의 마당 중심에, 쌍탑일 경우에는 법당 마당의 좌우에 자리잡게 마련인데, 만어사 삼층석탑은 현재 이런 가람배치 양식에서 벗어나 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절이 여러 차례 고쳐지어지면서 가람배치가 흐트러진 때문으로 보인다.

    높이 3.7m 정도의 만어사 삼층석탑은 단층기단이지만, 전체적으로 지대석과 기단부가 안정적이고, 몸돌이나 지붕돌의 체감률 또한 조화로운 편이다. 지붕돌받침이 3단으로 줄어들었다거나 기단부 면석이 4매로 간소화되고, 몸돌의 굄이 1층과 2층에서는 1단이었다가 3층에서는 2단으로 불규칙해진 점들을 감안하면 통일신라 전성기 때의 탑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고려 명종 때 중창되면서 현 위치에 세워진 탑으로 보는 것이 옳을 성싶다. 그외에 기단면석과 몸돌에 귀기둥이 표현돼 있을 뿐 별다른 장식이 없으나, 지붕돌 낙수면이 밖으로 불룩한 곡선을 그리며 급하게 내려오다 처마선에서 살짝 반전하여 수평을 찾고 추녀 쪽에서는 다시 살짝 치켜올라가 반전을 이루는 모습이 독특하다.

    만어사 삼층석탑

    만어사 삼층석탑고려 중기에 세워진 자그마한 삼층석탑이다. 단층기단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지대석과 기단부가 안정적이고 몸돌과 지붕돌의 체감률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석탑 역시 너덜지대의 만어석 또는 종석으로 만들어졌는지 두드리면 맑은 종소리가 난다. 그러나 석탑 전체에서 그런 소리가 나는 것은 아니어서 더욱 신비롭다. 이런 석탑의 신비를 확인하려는 사람들이 무척 많은 듯, ‘석탑을 두드리지 말라’는 안내문이 눈에 띈다. 서 있는 자리나 모습이 마치 만어석들을 굽어보는 듯한데, 학자에 따라서는 이색적인 너덜지대의 터를 다스리기 위해 세운 비보탑이 아니냐 추정하는 이도 있다. 만어사 삼층석탑은 보물 제466호로 지정돼 있다.

    또한 경내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미륵바위’ 또는 ‘미륵불상’이라고 불리는 높이 5m 크기의 자연석이다. 전설 속 동해 용왕의 아들이 변한 돌이며, 『삼국유사』 ‘어산불영’의 ‘불영’인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자연석 표면에 붉은색이 감도는 부분이 마치 가사()와 같아 더욱 신비롭게 여겨진다. 이 미륵바위를 신비스럽게 하는 이야기로는 해마다 0.3㎝씩 큰다거나 병자호란이나 임진왜란, 갑오농민전쟁, 활빈당이 활약할 때, 한일합방, 3·1만세운동 때 돌의 오른쪽 면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으며, 그외에도 한국전쟁, 4·19혁명, 5·16군사정변 때에도 땀이 흘렀다고 하는 것들이 있다. 근래에는 미륵바위를 보호하기 위한 미륵전 불사가 이루어졌다.

    미륵바위 앞쪽에는 사람들이 크고 작은 소원을 빌며 쌓아올린 돌탑 무더기가 있는 바위의 아래쪽 틈으로 작은 샘이 보이는데, 이 샘물은 낙동강의 조수에 따라 물 높이가 달라진다고 한다. 이로써 만어산 너덜지대의 만어석들이 동해바다에서 낙동강을 타고 이곳까지 거슬러 올라왔다는 전설이 확실해지는 셈인가. 아무튼 너덜지대 아래로 물이 흐르는 것이 사실이긴 하다.

    만어사는 바다를 이룬 너덜지대의 장관과 더불어 멀리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낙동강의 전망이 매우 좋아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고 있다. 만어사 너덜지대의 만어석을 두드리며 전설을 확인하는 재미와 아울러 만어석의 울림만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서 울려오는 소리에 귀기울여보는 사색의 공간으로 삼아봄이 좋을 듯하다. 돌을 두드렸을 때 그 맑은 정도가 사람 됨됨이를 나타내는 지표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도 즐겁다.

    [네이버 지식백과] 만어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14 - 경남, 한국문화유산답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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