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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알고싶다] - 조선영화계에서의 춘사 라(나)운규?...
2018년 10월 03일 21시 49분  조회:5957  추천:0  작성자: 죽림
 
출생 1902년 11월 26일(음력 10월 27일) 함경북도 회령(회령군 회령면 2동 399번지)
사망 1937년
데뷔 1925년 〈운영전〉

요약 일제 강점기 조선의 영화감독 겸 배우인 나운규는 〈아리랑〉을 감독하고 출연한 이후 나운규의 인기는 최고조에 달하고 조선영화계는 나운규의 영향력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실제로 조선키네마는 〈풍운아〉, 〈들쥐〉, 〈금붕어〉 등의 작품을 나운규 위주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특히 〈풍운아〉는 ‘니콜라이 박’이라는 암흑가의 영웅을 내세우며, 나운규 식 남성 인물형의 전형을 선보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나운규는 조선키네마를 탈퇴하고 ‘나운규프로덕션’을 설립하여, 〈잘 있거라〉, 〈옥녀〉, 〈사랑을 찾아서〉, 〈사나이〉, 〈벙어리 삼룡이〉 등의 작품을 감독하였다. 〈아리랑〉 이후 나운규는 자신이 각본을 쓰고, 직접 출연과 연출을 겸하는 작업 방식을 따르고 있다.

 

생애와 이력

나운규 Na Un-kyoo 羅雲奎 (1902~1937)

일제 강점기 조선의 영화감독 겸 배우. 나운규는 1902년 11월 26일(음력 10월 27일) 함경북도 회령(회령군 회령면 2동 399번지)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약종상(한약상)을 하던 나형권(羅亨權)으로, 그는 6남매(3남 3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회령공립보통학교와 신흥보통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간도 명동중학교를 다녔다. 그는 열여섯에 조혼을 하여(1917년), 연상인 아내를 맞이했고 이후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어려서부터 연극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 윤봉춘, 이범래, 김용국 등과 회청동우회를 결성하고 〈이전 반(二錢 半)〉이라는 연극을 공연한 적도 있다. 또 어려서 의기가 높았기 때문에, 1919년 3.1운동에 가담했다가 만주와 러시아 일대를 방황한 적도 있었고, 이후 간도로 돌아와 독립군 비밀 조직체인 도판부(圖判部)에 가입하여 무산령 터널 폭파 지령을 하달받기도 했다. 1920년 경성으로 들어와 공부할 때 도판부 사건이 드러나며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이러한 나운규의 어릴 적 활동은 훗날 그의 배우 이력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기도 했다.

나운규가 연예계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함경도 지방을 방문한 안종화의 예림회 때문이었다. 1923년 출소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나운규는 예림회의 방문에 고무되어 연구생으로 입단하였다. 이것은 본격적인 의미에서 나운규의 첫 무대 데뷔였다. 안종화가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입사하자, 나운규는 안종화를 따라 부산까지 내려가 끈질기게 입사를 희망했고, 결국에는 입사하고 말았다. 나운규는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두 번째 영화인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에서 단역으로 데뷔하였다.

이후 나운규는 윤백남과 이경손을 따라 ‘윤백남프로덕션’으로 이적하여, 이 프로덕션에서 제작한 영화 〈심청전〉의 ‘심봉사’(중년) 역할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윤백남프로덕션에 참여했던 이경손을 비롯한 김태진, 주인규, 주삼손 등에 비해 나운규는 뛰어난 활약을 보이지는 못했다.

작품 세계

나운규는 조선키네마의 첫 작품 〈농중조〉에서 출연하였다. 조선키네마사는 경성 본정(지금의 충모로)에서 모자점을 운영하던 일본인 요도 도라조(淀虎藏)가 설립한 영화사였다. 나운규는 1926년 조선키네마 두 번째 작품의 각본을 쓰고 출연하며 동시에 감독을 맡았다. 나운규가 배우로서 그리고 감독으로서 각광을 받게 된 영화는, 이 영화 〈아리랑〉이었다. 개봉 당시에는 검열을 피하기 위해서 일본인 스모리슈이치(津守秀一, 한국명 김창선)가 감독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그래서 훗날 김창선과 나운규 중에 누가 〈아리랑〉의 감독이냐는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대 조선 관객들은 〈아리랑〉의 작품성을 높게 칭찬했고, 나운규의 재능에 열광적인 찬사를 보냈다. 〈아리랑〉에는 기존의 조선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세련된 표현 기법이 나타나 있었다. 한국영화에서 느끼지 못했던 특유의 표현기법이 세인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또한 지주의 앞잡이와 대항하는 민족적인 신념과, 여동생을 보호하려는 의협심이 담겨 있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통쾌함을 전하기도 했다. 영화 기법 상으로 개와 고양이의 비유나, 침략자의 멸망을 보여주는 진시황의 죽음, 환상 장면으로서의 사막 장면 등은 특히 주목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당대의 민중들은 이 영화를 일단 민족주의 정신이 담긴 영화로 일단 이해했다.

〈아리랑〉을 감독하고 출연한 이후 나운규의 인기는 최고조에 달하고 조선영화계는 나운규의 영향력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실제로 조선키네마는 〈풍운아〉, 〈들쥐〉, 〈금붕어〉 등의 작품을 나운규 위주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특히 〈풍운아〉는 ‘니콜라이 박’이라는 암흑가의 영웅을 내세우며, 나운규 식 남성 인물형의 전형을 선보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영화에서 니콜라이 박은 러시아 용병으로 나갔다가 조국에 돌아왔으나 차거운 현실에 직면하고 다시 방랑길에 오르는 한국청년으로 묘사되었다.

이후 나운규는 조선키네마를 탈퇴하고 ‘나운규프로덕션’을 설립하여, 〈잘 있거라〉, 〈옥녀〉, 〈사랑을 찾아서〉, 〈사나이〉, 〈벙어리 삼룡이〉 등의 작품을 감독하였다. 〈아리랑〉 이후 나운규는 자신이 각본을 쓰고, 직접 출연과 연출을 겸하는 작업 방식을 따른다. 조선키네마와 나운규프로덕션에서 제작한 10편의 영화는 대부분 이렇게 생산되었다.

이 시기 나운규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모험 활극을 통해, 여자 혹은 정의를 구해내는 남자 주인공의 의협심을 창조한 점이다. 불의한 세력에 맞서거나 수난당하는 여성을 구하는 임무는 그의 영화를 통해 반복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아리랑〉에서 순결한 여동생 영희를 구하는 플롯은, 〈풍운아〉의 윤성실을 구하는 플롯으로 반복되었고, 이후 이러한 도움을 구하는 여성들을 배치하고 나운규의 분신 격인 영웅들이 이 여성들을 구해내는 영화적 구성으로 이어졌다. 〈잘 있거라〉와 〈옥녀〉의 전옥이 맡은 역할이 그러한 대표적인 캐릭터였다. 기원을 따지고 보면 영희 역의 신일선도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나운규 영화에는 새로운 여배우들이 등장해서 각광 받는 경우가 많았다. 복혜숙, 전옥, 신일선, 김연실, 그리고 이후 등장하는 현방란 등이 그러한 여배우들이다. 나운규는 새로운 여배우를 통해 사회적 음지에서 활동하는 영웅의 상을 재창조하려는 자신의 영화적 목표를 달성하거나 강화하려 한 셈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신진 여배우의 역할은 남성 캐릭터를 보조하는 역할에 국한되었고, 결과적으로 그의 작품 속에서 여배우의 역할은 이러한 영웅의 조건을 마련하는 보조 역할에 불과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반복적 구조와 상투적 인물형은 결국 매너리즘을 불러일으켰고, 나운규 영화의 소재적 특이성을 식상한 소재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결국 나운규가 운용하고 있던 나운규프로덕션마저 재정적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나운규는 자신의 영화사를 잃은 후 박정현이 제의한 원방각프로덕션에 가담하였다. 원방각프로덕션에서 〈철인도〉(감독 나운규, 1930)와 〈아리랑 그후 이야기〉(감독 이구영, 1930)를 제작했는데, 나운규는 전작에서는 감독을 맡았고, 후작에서는 배우로 출연하였다.

이러한 몰락은 계속 이어져서 1931년 나운규는 일본인 원산만이 운영하는 원산만프로덕션에 가담하여 〈금강한〉과 〈남편은 경비대로〉 같은 영화에 출연하였다. 이 영화에서 나운규는 조역을 맡았고, 결과적으로 기존 영화 세계에 반하는 활동 이력을 남기고 말았다.

원산만의 일본 이름은 ‘도오야마 미츠루’였다. 원래 원산만은 검극(劒戟)을 잘 다루는 예인이었지만, 동경에서 극단을 운영하며 연극 공연을 시행하는 시대극 배우이기도 했다. 원산만이 조선 영화사에 그 이름을 드러낸 시점은 1930년이다. 유현목에 따르면, 원산만은 일본인 신파배우로 1930년 10월 경 ‘원산만(遠山滿)프로덕션’을 설립했다. 그는 처음에는 자본금 10만원에 이르는 ‘대일본영화흥업주식회사(大日本映畵興業株式會社)’를 설립하겠다는 포부를 피력했으나, 이러한 당초 계획은 쉽게 달성되지 못했다(『한국영화발달사』). 대신 그는 군소프로덕션인 원산프로덕션을 설립했고, 나운규를 초빙하여 창립작 〈금강한(金剛恨)〉을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당대의 여론은 나운규가 원산프로덕션에 가입하여 영화 제작에 가담하는 행위를 ‘훼절’로 평가할 정도로 부정적이었다(『동아일보』, 1931년 8월 2일).

원산만프로덕션에서는 “조선의 남녀 영화인을 채용하여 순전한 조선 영화를 제작한 후 경성을 비롯한 조선의 각 지방은 물론이요, 잘하면 동경, 대판 등지에까지 배급을 해볼 작정”으로 〈금강한〉을 기획․제작하고자 했다(『매일신보』, 1930년 11월 22일).

〈금강한〉은 원산만 제작, 도전장(島田章) 감독, 이창용 촬영․편집, 나운규․소원소춘(小原小春)․김정숙․김연실․원산만 등이 출연한 작품으로, 1931년 1월 13일부터 19일까지 단성사에서 8권 2019척 규모로 개봉한 영화였다. 나운규는 각색과 배우로 출연했고, 상업적인 이유로 공동 감독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이 작품의 줄거리 역시 자극적인 요소를 한껏 겨냥하고 있었다. 부잣집 아들(색마)이 본처와 이혼하고 시골 마을의 순진한 처녀를 유린하여 임신을 시킨다는 것이 전체적인 설정이었다. 그래서 색마에게 순결을 빼앗긴 처녀는 자결을 하고, 색마는 본처에게 살해를 당하게 된다(매일신보』, 1931년 1월 14일). 이러한 대강의 줄거리는 이 작품이 ‘여성’과 ‘성’이라는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려는 의도를 앞세운 작품임을 증언한다고 하겠다.

당대의 조선인들은 이 작품을 저질 신파극으로 간주했고, 이러한 작품에 나운규가 참여한 행위에 대해 깊은 반감을 드러냈다. 더구나 원산만은 영화 흥행을 위해 나운규를 공동 감독(감독은 島田章)으로 이름을 올리고, 조선 관객의 호응을 얻으려는 전략을 구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은 오히려 나운규에게 욕설을 퍼붓고 악담을 할 정도로 영화에 대해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전략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로 인해 원산만의 입지도 줄어들었고, 나운규의 인기도 한껏 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운규가 원산만프로덕션에 가입한 것은 그 이전 작품 제작에서 짊어져야 했던 ‘빚’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빚은 결국 나운규 자신에게도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다. 1930년대 초반 나운규는 한때 최고조에 달했던 자신의 인기를 지나치게 과신하고 방만하게 행동했고, 지나친 여성 편력으로 인해 건강과 창작 열의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 결국 조선의 영화인으로서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일본 영화의 아류작을 만드는 처지에 처하고 말았다. 이때 나운규는 시련기를 본격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1930년대 전반기 『삼천리』에는 나운규의 시나리오 〈개화당〉과 〈지상영화 종로〉가 게재되었다. 나운규는 영화 〈개화당이문〉을 통해 재기작으로 선정하여 조선영화계에 다시 출사표를 제기했다. 나운규는 ‘김옥균과 삼일천하’의 이야기가 당대에 필요한 이야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검열이었다. 일본 정부가 개화당 인사들이 정부를 전복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대목에 대한 삭제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개화당이문〉은 역사극도, 야화(野話)도 아닌 어중간한 영화가 되고 말았고, 이로 인해 다시 한 번 큰 실패를 경험해야 했다.

임자없는 나룻배
임자없는 나룻배

 

1932년 9월 18일부터 22일까지는 나운규 주연의 영화 〈임자없는 나룻배〉가 단성사에서 상연되었고, 나운규 원작․감독의 연쇄극 시대활극 〈신라노(新羅老)〉의 공연이 임박했던 시기였다. 당초에는 1932년 10월 8일 개봉 예정이었지만, 실제 개봉은 1932년 11월 22일이었다. 하지만 나운규는 〈홍길동(전)〉이 무대에 오를 당시, 〈신라노〉의 촬영과 계획에 분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나운규가 신무대와 관련을 맺기 시작한 시점이 〈홍길동(전)〉을 산출하던 시기였다. 이 시점의 나운규는 영화에서 하락하고 있던 인기와 명성을 만회하고자 했었다. 그래서 그는 신무대의 〈젊은이여 울지 말자〉의 감독을 맡은 것으로 소개되었고, 연쇄극 〈신라노〉의 감독으로 선전된 것으로 여겨진다.

나운규는 연극을 연출하거나 무대극에 출연하기도 했다. 1933년 7월 8일부터는 나운규 편 양극 〈칼멘〉이 공연되었고, 1933년 7월 1일부터는 김능인 편 비극 〈일설 장한몽〉에 특별출연하였다. 특히 후자는 순수 무대극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광고에 신은봉과 함께 특별 출연한 것으로 소개되었는데, 이것은 남녀 주인공 역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나운규가 무대극 연기도 했음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증거에 해당한다.

영화사적 평가

1920년대 후반 나운규는 흥행성과 작품성에서 조선을 대표하는 작가 겸 감독이었지만, 1930년대 전반에 이르러서 연이은 실패를 경험하면서 과거의 명성이 무색해졌다. 나운규는 현성완 일행(형제좌)에 가담하여 지방 순회공연을 다녀야 했는데, 그 때 촬영한 〈무화과〉와 〈그림자〉를 개봉하면서 조선영화계에 복귀하였다. 이 두 작품에서 나운규는 현방란과 윤봉춘을 주요 배우로 기용하였다. 그 이유는 한 사람은 나운규의 애인이자 투자자의 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나운규의 고향 친구로 자신이 데뷔시킨 배우였기 때문이다. 처지가 곤궁했던 나운규는 두 사람을 활용해야만 자신의 작품 제작을 완수할 수 있었다.

934년 재기를 위해 전택이, 차상은 등과 함께 한양영화사를 설립하고 창립작으로 〈강 건너 마을〉을 감독했다. 이 영화에 출연하지는 않았고, 현순영․전택이․차상은 등의 신인배우들을 기용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나운규가 한양영화사에서 주력을 쏟은 작품은 〈아리랑 제 3편〉으로, 이 작품에 자신이 직접 영진 역할로 출연하고, 〈아리랑〉의 여주인공 ‘신일선’이 ‘영희’ 역할로 복귀하였다. 이 영화는 최초의 발성영화로 기획, 촬영되었지만, 기술과 경험이 부족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영화 제작이 적지 않은 자금이 소요되었고, 결과적으로 흥행 수입도 거둘 수 없었기 때문에, 한양영화사가 일시 폐업하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이후 나운규는 경성촬영소 이적하여 〈오몽녀〉를 감독하면서 자연스럽게 한양형화사와 멀어졌다. 〈오몽녀〉는 1937년 1월 20일에 개봉했다. 나운규에 대해 평소 비판적이고, 나운규의 영화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서광제도 이 작품에 대해서만은 상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영화는 나운규의 마지막 영화가 되었으며, 당시 관객들에게는 발성영화 배우 나운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영화였다(〈아리랑 제 3편〉은 기술적인 문제로 인해 발성영화의 면모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그는 1937년 8월 9일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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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02. 10. 17, 함북 회령
사망 1937. 8. 9
국적 한국

요약 영화 제작자·감독·배우·시나리오 작가.

나운규
나운규

일제강점기의 활동한 조선의 영화인. 민족 정신을 담은 대표작 '아리랑'을 크게 흥행시켰다.

 

호는 춘사(春史). 일제강점기 선구적인 영화인으로, 직접 제작·감독·주연한 〈아리랑〉(1926)은 민족정신을 살린 동시에 흥행에 성공한 좋은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군인으로 있다가 한의사가 된 형권(亨權)의 3남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회령보통학교를 거쳐 1918년 간도의 명동중학교에 입학했으나 학교가 일본군의 습격으로 불타버리자 만주·연해주를 떠돌며 청년시절을 보냈다. 1916년 조정옥(曺貞玉)과 혼인하여 종익(鐘益)·신자(辛子)·봉한(奉漢)을 두었다. 연해주 일대를 돌아다닐 때는 러시아 백군의 용병생활을 하기도 했는데 이때의 체험은 〈나의 로서아 방랑기〉에 잘 기록되어 있다.

러시아 백군에서 탈출하여 만주에서 독립군 활동을 하다가 1921년 서울 중동학교를 거쳐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이 시기에 그는 어린시절 친구였던 윤봉춘(尹逢春)과 더불어 우미관을 출입하며 〈명금 名金〉·〈쾌걸 조로〉·〈철로의 백장미〉 등의 영화감상에 몰두하게 된다. 그러나 북간도 시절의 도판부 사건이 뒤늦게 문제되어 경찰에 체포된 뒤 1년 6개월의 실형을 언도받고 청진·함흥형무소에 복역했다. 감옥생활을 하던 중 독립투사 이춘성(李春成)을 만나 호(號)를 받게 되었다. 출감 이후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아버지와 둘째 형 시규(始奎)는 폐결핵으로 고통받고 있었고, 가세는 몰락한 뒤였다.

나운규는 극진히 간호했지만 그들은 세상을 뜨게 되고 이때의 간병으로 인해 폐결핵이 전염되어 1937년 사망했다.

활동

배우가 되고 싶어했던 그는 1923년 12월 '예림회'라는 신극단에 입단하여 수개월 동안 북간도 일대를 돌아다녔고 뒷날 그에게 많은 도움을 준 안종화·김태진(金兌鎭)·주인규 등을 이 때 사귀게 되었다.

1924년 예림회가 자금난으로 해산되자 다시 서울로 와서 안종화의 주선으로 부산에 설립된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연구생이 되었다. 윤백남 원작, 안종화 감독의 영화 〈해(海)의 비곡〉에 단역으로 출연했고 뒤이어 〈신(神)의 장(粧)〉(일명 암광)에 출연했으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뒤 윤백남프로덕션이 제작한 〈심청전〉에서 심봉사 역을 하면서 배우로서 가능성을 인정받았고 1926년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 제작한 〈농중조 籠中鳥〉에 복혜숙과 함께 출연했다.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은 당시 서울에서 요도야[淀屋]라는 모자점을 하던 일본인 여자 사업가 요도[淀]가 자본을 댄 영화사로 나운규가 영화활동을 하는 데 기반이 되었다. 〈농중조〉의 감독을 맡았던 이규설은 그가 연기·각본·연출에 재능이 있음을 발견하여 많은 관심을 보였다.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2번째 작품으로 1926년 10월 1일 단성사에서 개봉된 〈아리랑〉은 높은 예술성으로 흥행에 성공함으로써 나운규는 영화계의 총아로 부각되었다.

영화의 주제·구성에서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민족정서를 담아내어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어 직접 각본·감독·주연하여 〈풍운아〉(1926)·〈들쥐〉(1927)·〈금붕어〉(1927)를 만들었으나 흥행에 실패했다. 그결과 조선키네마프로덕션과 불화가 생기게 되어 1927년 '나운규프로덕션'이라는 영화사를 세워 독립했다. 이 영화사의 재정 후원은 단성사 사장 박승필이 맡았고 감독 이경손, 배우 주삼손·윤봉춘·이금룡·이경선·홍개명, 촬영기사 이창용·이명우 등이 창립할 때 참여했다.

이때 〈잘 있거라〉(1927)·〈옥녀〉(1928)·〈사랑을 찾아서〉·〈사나이〉(1928)·〈벙어리 삼룡〉(1929) 등 5편을 만들어 흥행에 성공했다. 그러나 무절제한 생활로 단원들과 불화가 잦아지고 자금난도 심해지자 〈벙어리 삼룡〉을 끝으로 '나운규프로덕션'은 해산되고 말았다. 그뒤 그는 차츰 인기가 떨어지고 카프의 영화인들과 마찰이 심해지면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1930년 단성사 사장 박정현의 후원으로 '원방각사'와 손잡고 〈아리랑 그후의 이야기〉를 제작했으나 흥행에 실패했다.

1931년 일본인 도오야마[遠山滿]가 제작한 〈금강한 金剛恨〉에 출연하여 비난을 받게 되자 더욱 어려워졌다. 이규환이 감독한 〈임자 없는 나룻배〉(1932)에서 열연을 했으나 옛날의 전성기를 되찾지는 못했다. 이즈음 〈개화당이문 開化黨異聞〉·〈종로〉·〈7번통의 소사건〉·〈무화과〉·〈그림자〉·〈강건너 마을〉 등을 제작했으나 실패했다. 1936년 〈아리랑 3편〉을 발성영화로 만들었고 이어 이태준 원작의 〈오몽녀 五夢女〉를 완성했으나 폐결핵이 악화되어 죽었다. 현재 그가 제작한 영화의 필름은 한 편도 남아 있지 않다.

나운규에 대한 평가

나운규는 대부분의 영화에서 원작·각색·감독·주연을 겸하여 엄청난 열정과 역량을 과시했으나 한편으로 지나친 독선에 빠지기도 했다. 그의 영화는 약자에 대한 동정, 사회에 대한 고발과 풍자를 담고 있다. 일제시대에 그가 보여준 민족정신과 예술관은 그뒤에도 많은 후진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미나도좌 '신극부'에서 연극을 하기도 했고 〈철도공부의 죽음〉(1930)·〈홍엽〉(1934)·〈이순신장군〉 등의 희곡을 썼다. 영화감독위원회는 1990년 그의 업적과 영화정신을 기려 '춘사 영화예술상'을 제정했고 같은 해 12월 1회 시상식을 가졌다. 문화부에서는 1991년 '연극영화의 해'를 기념하여 그를 '1월의 인물'로 선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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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02년 10월 27일
사망 1937년 8월 9일
수상 건국훈장 애국장 1993

 

인용문
조선 영화계의 위대한 개척자 나 군이여. 조선의 살림이 좀 더 넉넉하고 문화가 좀 더 발달되었더라면 그대는 벌써 세계적 예술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평론가 서광제

<아리랑>이라는 사건

1926년 10월 1일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 제작한 나운규(羅雲奎)의 영화 <아리랑>이 단성사(團成社)에서 개봉되었다.과 함께 상영된 영화는 미국 유니버셜사에서 만든 <작은 거인(The Little Giant)>(1926)이었다.">1) ‘마치 어느 義烈團員이 서울 한구석에 폭탄을 던진 듯한 설렘을 느끼게 했다’2) 는 이경손(李慶孫)의 회고처럼 관객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아리랑>의 열기는 단성사에서 상영이 끝난 이후에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내내 전국 방방곡곡에서 상영되었던 이 영화는 1942년 조선인들이 징용으로 끌려와 있던 홋카이도의 탄광에서도 상영되어 조선인 노무자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3)

    • 1단성사
    • 2영화 <아리랑>의 한 장면

<아리랑>의 주인공은 만세운동에 가담하였다가 미치광이가 된 최영진(나운규 扮)이었다. 소작인의 아들인 그에게는 여동생 최영희(신일선[申一仙] 扮)가 있었다. 그녀는 오빠의 친구인 윤현구(남궁운[南宮雲]4) 扮)와 사랑하는 사이이다. 그런데 마름 오기호(주인규[朱仁奎] 扮)가 영희를 차지하려 한다. 미친 영진은 영희와 현구 사이를 훼방 놓던 오기호를 살해하고 감옥에 간다.

6․10만세운동 직후에 제작된 <아리랑>의 근저에는 토지를 매개로 한 계급문제가 있었다. 마치 “토지는 농민에게”와 같은 6․10만세운동의 슬로건을 연상시킴으로써 6․10만세운동의 열기를 거리에서 스크린으로 옮겨 놓은 듯 했다. 고소설이나 일본 신파를 번안하여 영화로 만들던 당시에 당대 사회현실에 대해 비판적 인식과 이를 극적으로 묘사한 <아리랑>의 제작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이 영화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준 충격은 대단했다. 예컨대 카프 소속의 평론가 최승일(崔承一)은 소설이 하지 못한 것을 영화가 하고 있다며 이전의 조선영화 모두를 불살라버려도 될 정도의 거상(巨像)이라 극찬했다.5) 이렇듯 <아리랑>은 식민지 조선영화인들에게 있어서 기념비적인 작품이자 넘어야 할 산이었다. 36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불꽃처럼 살다 간 나운규는 <아리랑>을 통해 일제강점기 조선영화를 대표하는 영화인으로 기억되었다.

3.1운동 발발과 독립군 활동

나운규(1902~1937)는 1902년 10월 27일]《문학신문》, 1957.8.15.) 이를 통해 보면 나운규의 실제 태어난 해와 호적상의 기록이 다를 수 있다.">6)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금성(錦城)이며 호는 춘사(春史)이다. 회령보통학교를 졸업 후 간도의 명동중학(明東中學)에서 수학했다. 부친은 대한제국 무관 출신인 나형권(羅亨權)으로 군대 해산 후 회령에서 약종상을 했다고 전한다.7)

나운규가 수학했던 간도의 명동중학은 독립군 양성 기지로 민족운동의 중심이었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했을 때에는 명동중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회령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나운규 역시 회령에서 만세운동에 가담했다가 경찰의 수배를 당했다. 연해주로 도주한 나운규는 러시아혁명의 발발로 내전이 한창이던 시베리아를 방랑하던 중 러시아 백군의 용병으로 입영했다. 그러나 목숨을 건 용병 생활에 대한 회의로 탈영하여 훈춘(琿春)을 거쳐 북간도로 돌아왔다.

회령 시내
회령 시내

 

3․1운동 이후 간도지역의 무장독립운동은 더욱 활기를 띄었다. 나운규는 독립군 단체인 도판부(圖判部)에 가입했다. 나운규의 은사이기도 했던 박용운(朴龍雲)이 책임자였던 도판부는 독립군이 간도에서 회령으로 진격하기 전 터널이나 전신주를 파괴하는 임무를 띤 결사대였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기 위해 청산리 인근으로 갔던 나운규는 그곳에서 만난 나이 지긋한 독립군에게 “당신 똑똑한데 군대말고 공부를 해라”라는 조언을 듣는다. 공부를 통해서 더 큰 독립운동을 할 수 있다는 충고에 나운규는 독립군 부대를 나와 서울로 간다.

서울에 온 나운규는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예비과정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훈춘사건을 일으켜 북간도로 출병한 일제는 도판부 관련 비밀문서를 획득하고 도판부 책임자인 박용운 등을 곧바로 체포하고 곧이어 나운규를 비롯한 관련자들을 체포했다. 재판에 회부된 나운규는 보안법 위반으로 2년 형을 언도받고 1921년 3월부터 1923년 3월까지 청진형무소에서 복역했다.

1923년 3월 출소 한 나운규는 회령에서 머물던 중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다. 1924년 1월 북선지역을 순회하던 극단 예림회(藝林會)가 공연차 회령을 방문했을 때 예림회에 가입한 것이다. 나운규가 가입한 예림회는 함흥에 동명극장(東明劇場)과 함흥극장(咸興劇場)이라는 주식회사 형태의 두 개 극장이 설립되는 것을 계기로 지두한(池斗漢)을 중심으로 20여명의 청년들이 조직한 소인극단이었다.,《朝鮮日報》, 1924.1.8.">8) 예림회 단원 대부분은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의 여파로 고향으로 돌아온 도쿄유학출신의 학생들이었기에 연극공연을 위해서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때 윤백남(尹白南)이 만들었던 민중극단(民衆劇團) 출신의 전문연극인인 안종화(安鍾和)가 문예부장으로 초빙되어 이들을 이끌었다.

신입회원으로 가입한 나운규는 연구생으로 예림회 무대에서 본격적인 연극배우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예림회는 북선공연을 마치고 자금난에 직면하여 문을 닫게 된다. 문예부장 안종화는 민중극단 출신들이 주축이 된 무대예술연구회(舞臺藝術硏究會)의 연락을 받고 부산으로 내려가기로 한다. 나운규는 연극 활동에 관심이 많던 김태진(金兌鎭, 예명 남궁운), 주인규와 함흥역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안종화를 배웅하며 이별을 아쉬워했다.9)

<아리랑>과 나운규 시대

예림회가 문을 닫은 후 서울에서 학업을 이어가고 있던 나운규는 반가운 인물과 조우한다. 부산으로 내려갔던 안종화였다. 이 때 안종화가 활약하던 무대예술연구회원 전원은 부산의 일본인 실업가들이 세운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전속배우로 입사하여 있었다. 부친상을 당해 서울에 올라와 있었던 안종화의 소개로 나운규는 부산으로 내려가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연구생으로 입사한다. 이미 부산에는 주인규와 김태진이 연구생으로 있었다. 나운규는 이들과 더불어 제2촬영반의 영화감독으로 초빙된 윤백남의 집에 하숙하며 영화배우로 첫발을 내딛는다.

나운규의 영화 데뷔는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두 번째 작품인 윤백남 연출의 <총희의 연(寵姬의 戀)>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제는 <총희의 연>이다.">10)에서 가마꾼 중 한명으로 출연한 것이다.으로 기억하고 있었고 이것이 정황상 맞다. 그러나 나운규와 함께 연구생으로 있었던 이규설, 김태진 등은 나운규가 <해의 비곡>의 어부로 처음 영화에 출연했다고 전한다.">11) 이 영화가 제작되던 중 윤백남과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고 그 결과 윤백남은 조선키네마주식회사와 결별하고 조연출이던 이경손을 위시하여 자신이 데리고 있던 연구생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오게 된다.

1925년 윤백남은 백남프로덕션을 세우고 이경손 연출의 <심청전(沈淸傳)>을 제작했다. 윤백남을 따라 서울에 온 나운규는 <심청전>에서 중요 배역인 심봉사 역을 맡아 연기했다. 그는 살아있는 연기를 위해 실제 소경을 만나 그 모습을 탐구했다.12) 이러한 노력의 결과 나운규는 <심청전>의 심봉사 역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흑과백>, <장한몽(長恨夢)>, <농중조(籠中鳥)> 등에 연거푸 출연하면서 특색 있는 배우로 주목받게 된다.

아리랑 출연진과 제작진

 

영화 소설 <아리랑>

 

이즈음 백남프로덕션은 문을 닫았다. 윤백남을 따라 나섰던 사람들 중 나운규, 이규설, 주인규, 남궁운 등은 일본인 모자상(帽子商) 요도 도라죠(淀虎藏)가 세운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 입사해 있었다.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창립 작품은 이규설의 <농중조(籠中鳥)>였다. 일본의 신파물을 번안한 것이었다.

<농중조>에 이어 나운규의 <아리랑>이 제2회 작으로 제작되었다. 나운규의 <아리랑>은 당대의 현실 문제를 이야기 하고 있으면서도 곳곳에 서양 활극영화와 같은 박진감 있는 장면들이 포함되어 흥미를 돋우었다. 관객이 쏟아져 들어왔고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은 큰돈을 벌었다. 나운규는 일약 조선영화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주목받았다.

<아리랑>의 성공에 고무된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는 나운규에게 곧바로 다음 작품을 만들 기회를 주었다. 나운규가 선택한 작품은 <풍운아(風雲兒)>(1926)였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나운규가 연기한 니콜라이 박이였다. 그는 시베리아 방랑시절의 나운규를 연상시키는 듯 시베리아에서 건너온 인물로 세탁소를 내서 고학생들을 돕고 악한을 응징하는 영웅적인 인물이었다. <아리랑>보다 활극적 요소가 강했던 이 작품 역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급하게 만들기 시작한 작품이라 시나리오 없이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촬영이 진행되었고 이로 인해 예림회 시절부터 함께 활동하던 주인규, 김태진, 이규설 등 동료들과 갈등을 빚게 된다. 결국 나운규의 독선적인 행동을 이유로 주인규 등은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을 탈퇴한다.13)이들의 빈자리는 나운규의 연락을 받고 회령에서 내려온 윤봉춘(尹逢春)이 메웠다.

나운규는 <들쥐>(1927), <금붕어>(1927) 와 같은 작품을 만들어내며 조선영화계의 스타로 군림한다. 그야말로 흥행의 보증수표와 같은 이름이었다. 그러한 나운규에게 단성사 운영주 박승필(朴承弼)이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을 나와 독립할 것을 권한다. 1927년 9월 나운규는 단성사의 후원을 받아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 나와 자신의 이름을 딴 나운규프로덕션을 세운다.

나운규프로덕션 시절 나운규는 <잘 있거라>(1927), <옥녀(玉女)>(1928), <사랑을 찾아서>(1928), <사나이>(1928), <벙어리 삼룡>(1929)등의 영화를 만들었다. 이중 <사랑을 찾아서>는 <두만강을 건너서>라는 원래 제목이 검열에 문제가 되어 제목을 바꾸어야 했던 작품으로 독립군으로 활약하던 시기의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 또한 <벙어리 삼룡>은 나도향(羅稻香)이 쓴 동명의 소설을 각색한 문예영화였다.

나운규가 만들어낸 작품은 여전히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다. <벙어리 삼룡>이 대구의 만경관(萬鏡館)에서 상영될 때에는 너무나 많은 관객이 들어 극장 2층이 붕괴되었고 진주에서는 무대에까지 들어찬 관객들로 배우들이 극장에 들어가지 못할 지경이었다. 누가 뭐래도 나운규의 시대였다. 그러나 실상은 초라했다. 나운규의 방탕한 생활로 인해 회사는 적자를 면치 못했다. 나운규프로덕션의 살림을 맡았던 형 나민규(羅泯奎)는 나운규와 다투고 회사 운영에서 손을 뗐다. 동시에 나운규의 동료들 역시 나운규의 방탕한 생활과 절제치 못하는 행동에 반기를 들며 나운규프로덕션을 탈퇴한다. 혼자 남은 나운규는 일본의 촬영소를 시찰한다는 이유를 들어 조선을 떠난다.

몰락과 재기

도쿄의 가와이영화제작사(河合映畵製作社)를 견학하고 돌아온 나운규는 1929년 12월 30일 서대문의 아성키네마에서 열린 영화인들의 망년회에 얼굴을 비췄다. 그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은 여전했다. 나운규는 자신에 대한 화살을 일간지 영화기자들의 모임인 찬영회(讚映會)에 돌렸다. 우수영화를 소개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영화인들 위에 군림했던 찬영회에 대한 조선영화인들의 반감은 컸다. 망년회장은 찬영회 성토회장으로 바뀌었다. 유도선수 출신의 영화배우 이원용(李源鎔)이 조끼를 찢어 깃발을 만들었다. 몇 개의 조를 짜서 찬영회 회원인 중외일보의 최상덕(崔象德), 매일신보의 이서구(李瑞求), 정인익(鄭寅翼), 조선일보의 안석주(安碩柱), 동아일보의 이익상(李益相)의 집으로 향했다. 영화인들은 이들 신문기자들을 불러내 폭력을 가했다. 기자들에 대한 폭력사건으로 경찰에서는 다수의 영화인을 체포했다. 이중 김형용(金形容), 김태진(金兌鎭), 이원용, 홍개명(洪開明), 나웅(羅雄)이 검사국으로 넘겨졌다. 충남 금산으로 도망친 나운규는 사태가 수습되기를 기다렸다.《大韓日報》, 1973.5.8.">14) 기자들과 영화인들 간의 폭력사건은 기자들이 찬영회를 해체하기로 약속하면서 일단락되었다.15)

찬영회 사건 이후 좌익영화인들은 민족영화인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그 첫 번째 대상은 나운규였다. 나운규프로덕션을 지원하던 단성사와 나운규 사이는 <사랑을 찾아서>를 제작하면서 그 관계가 틀어졌다. 제작비가 부족했던 나운규가 조선극장(朝鮮劇場)에서 자금을 지원받은 후 단성사가 아닌 조선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상황에서 원방각(圓方角, ○□△)이라는 영화제작회사를 만든 단성사에서는 이구영(李龜永) 연출로 <아리랑 후편>(1930)을 제작하기로 한다. <아리랑 후편>의 제작을 위해서는 나운규의 이름이 필요했던 단성사에서는 나운규프로덕션 해산 이후 재기에 골몰하던 나운규를 영화에 출연시킨다. <아리랑 후편>이 개봉되자마자 나운규에 대한 좌익영화인들의 비난이 시작되었다. 포문은 좌익영화인인 평론가 남궁옥(南宮玉)과 서광제(徐光霽)가 열었다. 특히 서광제는 이 영화가 허무주의와 숙명론을 주입시키는 영화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영화제작에 참여했던 촬영기사 이필우(李弼雨)가 현실적 문제를 들어 반론을 펼쳤다. 이에 대한 서광제의 반론이 이어졌고, 더불어 안종화, 윤기정(尹基鼎), 나운규 등이 가세한 논쟁이 이어졌다. 1930년을 뜨겁게 다뤘던 민족영화인과 좌익영화인 사이의 논쟁은 신흥영화예술가동맹(新興映畵藝術家同盟)에 대한 카프영화부의 해산명령으로 인한 좌익영화인들 사이의 분열로 흐지부지 종결되었다.

나운규 영화 <사랑을 찾아서>

 

나운규는 카프연극부를 지도했던 최승일과 손잡고 미나도좌에서 프롤레타리아 연극을 시도했으나 소부르주아적인 연극이라는 비난을 들었다.,《東亞日報》, 1931.4.12.">16) 이어 일본국수회(日本國粹會) 회원인 도야마 미츠루(遠山滿)가 세운 원산만프로덕션에 참여하여 <금강한(金剛恨)>(1931)이라는 영화에 출연하였고 배구자무용단(裴龜子舞踊團)과 함께 순회공연을 다니기도 했다. 나운규의 갈팡질팡한 행보에 나운규에 대한 영화인들의 성토는 높아졌다. 나운규의 죽마고우인 윤봉춘이 앞장서서 “나운규 성토대회”를 열었다. 박완식(朴完植)은 “羅 氏에게 對하여 아모 企待도 가질 수 업게 되엿다. 오히려 朝鮮映畵界에서 避身하여 주기를 强迫하고 십다”《中外日報》, 1930.3.15.">17) 고 비난 했으며 심훈(沈熏)은 “천인비봉 千仞飛鳳 기불탁속 饑不啄粟(봉황은 천 길을 날며 주려도 조 따위는 먹지 않는다)”18) 라며 나운규의 몰락을 안타까워했다. <아리랑>으로 얻은 성공의 빛이 찬란했던 만큼 그 그림자는 짙었다.

1932년 일본에서 영화공부를 하고 돌아온 이규환(李圭煥)은 후원자인 강정원(姜鼎遠)의 도움으로 <임자 없는 나룻배>(1932)를 만들기로 한다. 나운규라는 스타가 출연하기를 바랐던 이규환은 나운규에게 시나리오를 보냈고 나운규는 출연을 결심한다. 이규환은 뱃사공이라는 배역에 어울리게 삭발을 한 채 나타난 나운규의 모습에 놀랐고 한편으로 고마웠다.19) 나운규가 혼신의 연기를 펼친 <임자 없는 나룻배>는 성공적이었다. <아리랑> 이후를 대표하는 무성영화라는 평을 얻었다. 더불어 나운규는 제작비 부족으로 중단되었던 <개화당이문(開化黨異聞)>(1932)을 강정원의 도움으로 완성시킬 수 있게 된다.

1930년부터 토오키(talkie) 영화20) 가 상영되기 시작한 조선에서 조선영화의 제작은 극도로 위축되었다. 1931년 단성사의 후원으로 <말 못할 사정>이라는 제목의 토오키 영화를 제작하려 했던 나운규는 기술부족으로 성공하지 못한다. <임자 없는 나룻배>와 <개화당이문>을 통해 다시 명성을 회복하기는 했으나 1932년 1월 조선영화 제작의 가장 큰 후원자이던 단성사의 박승필이 사망한 이후에는 영화제작을 지원해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나운규는 궁여지책으로 연쇄극(連鎖劇)을 제작, 상연하기 시작했다.21)

영화를 지속적으로 제작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기에 지방순회극단이던 현성완 일행을 따라 다니며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그 사이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아 적조하던 조선영화계에 영화제작의 움직임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나운규에게도 영화제작 의뢰가 들어왔다. 나운규는 <아리랑>을 제작한 바 있었던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을 통해 <무화과>(1935)와 <그림자>(1935)를 만들었다. 이 사이 차상은(車相銀)의 자금 지원을 받아 한양영화사(漢陽映畵社)를 세워 <강 건너 마을>(1935)을 제작했다. 관객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신화가 된 이름

1935년을 전후하여 조선영화계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강 건너 마을>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나운규는 한양영화사의 두 번째 작품으로 조선 최초의 토오키 영화를 만들 계획을 세운다. 이를 위해 다시 <아리랑>을 들고 나왔다. 3만원을 투자하여 이태원에 촬영소를 만들고 일본에 가서 녹음기와 조명기를 구입하였다. 촬영은 동시녹음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3개월에 걸쳐 촬영된 필름은 초점이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고 소리 또한 들리지 않았다. 동시녹음 촬영이 실패한 것이다. 부랴부랴 나운규프로덕션에서 촬영기사로 활약한바 있었던 고려영화협회(高麗映畵協會)의 대표 이창용(李創用)의 도움을 받아 재촬영을 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다시 녹음을 했다. 하지만 이 사이 경성촬영소(京城撮影所)에서는 최초의 토오키 영화 <춘향전(春香傳)>(1935)을 세상에 내 놓았다.

조선 최초의 토오키 영화라는 타이틀을 얻는데 실패한데다가 3,000원의 추가비용까지 들었던 <아리랑 제3편>은 손해가 막대했다. 폐병으로 몸은 극도로 쇠약해졌지만 큰 빚을 진 상황에서 쉴 틈이 없었다. 조선흥행계의 실력자인 경성촬영소의 와케지마 슈지로(分島周次郞)가 나운규에게 접근해 왔다. 와케지마 수하에 있던 도야마 미츠루가 만든 원산만프로덕션에서 활동하여 조선영화인들의 지탄을 받았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다. 많은 자본과 최신의 기술이 필요한 토오키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일본인 흥행업자들의 지원이 필요했다. 나운규는 경성촬영소에서 <오몽녀>(1937)를 만들기로 한다.

나운규는 <아리랑>을 만들기 전, 어느 신문에서 한 무명작가의 소설을 읽고 영화로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오몽녀>라는 제목만 기억하고 있었다. 누군가 이 소설이 소설가 이태준(李泰俊)이 무명 시절에 쓴 작품이라고 했다. 당시 이태준은 병으로 성북동 집에서 정양 중이었다. 나운규 역시 폐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이태준을 문병했다. 이태준은 시대일보에 연재했던 <오몽녀>의 스크랩북을 꺼냈다. 십여 년 전 읽었던 그 작품이었다. 이태준에게 영화로 만들 수 있는지를 물었고 다행히 승낙을 받았다. 검열을 고려하여 어떤 부분을 고칠 것인지를 상의하고 곧바로 영화제작에 착수했다.22)

촬영은 강원도에서 진행되었다. 쇠약한 몸에 주사를 맞아가며 분투하고 있었기에 신경은 여느 때보다 날카로웠다. 촬영 중 전기사용 문제로 시비가 붙자 주먹을 휘둘러 경찰에 체포되기까지 했다. 병색이 극도로 좋지 않았던 그는 와케지마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병든 몸으로 힘들게 완성한 <오몽녀>는 1937년 1월 20일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나운규의 병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쉬면서 몸이 좋아지기를 기다렸다. 차도가 있자 무성영화로 제작했던 <사랑을 찾아서>를 발성판으로 바꾸기 위해 도쿄에 다녀왔다. 몸이 완쾌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움직였던 것이 독이 되었다. 폐병이 악화된 것이다. 1937년 8월 9일 나운규는 향년 36세로 사망했다. 영결식은 11일 <아리랑>이 개봉되었던 단성사에서 열렸다.

한국 영화계의 신화 나운규

 

칠흑같이 어두운 시대였기에 만드는 영화마다 검열의 가위에 잘려나가기 일쑤였다. 그러한 상황에도 나운규는 영화를 통해 조선인 관객들을 울고 웃게 만들었다. 그가 만든 영화의 밑바탕에는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이를 위한 실천이 깔려 있었다. ”진정 그가 없었다면 우리들의 지난날이 얼마나 삭막했을지 모를 일이다.”, 《한국일보》, 1962.11.25.">23) 1962년 나운규 탄생 60주년 기념을 맞아 오영진(吳泳鎭)이 남긴 추도사의 한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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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3 [그것이 알고싶다] - "퀴어축제"?... 2018-09-08 0 4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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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8 [쉼터] - 나도 "엉터리"이다... 2018-09-04 0 3419
2447 [고향소식] - 우리 연변에도 "중국조선족농악무대회"가 있다... 2018-09-04 0 3563
2446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쥐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2018-09-04 0 4725
2445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말(馬)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2018-08-30 0 4736
2444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담배꽁초", 남의 일이 아니다... 2018-08-30 0 5021
2443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한글통일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2018-08-29 0 3525
2442 [고향문단] - "칠색아리랑" 닐리리... 2018-08-29 0 3273
2441 [동네방네] - 우리 연변에도 "농부절"이 있다... 2018-08-29 0 3521
2440 [동네방네] - 우리 연변에도 "투우축제"가 있다... 2018-08-29 0 3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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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8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원주민보호", 남의 일이 아니다... 2018-08-24 0 4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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