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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알고싶다] - 조선 영화계에서의 선구자 = 라(나)운규
2018년 10월 03일 22시 22분  조회:4798  추천:0  작성자: 죽림

1926년 10월 1일에 서울의 단성사에서 첫 개봉된 흑백 무성 영화 [아리랑]. 영화가 끝날 무렵 극장 안은 눈물바다가 되었고 관객 모두가 영화의 주제곡인 ‘아리랑’을 따라 불렀다. 영화 [아리랑]은 일제강점기 민족의식과 항일 정신을 고취시키는 작품이었다. 첫 개봉 이후, 영화 [아리랑]은 당시로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흥행하여 전국 구석구석까지 상영되었으며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은 각본, 감독, 배우 1인 3역을 맡아 종횡무진 활약한 당시 20대 중반의 나운규(羅雲奎, 1902~1937)였다.

 


민족을 울린 영화 [아리랑]


1920년대 전국적인 돌풍을 일으킨 영화 [아리랑]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실성한 영진에게 옛 친구 현구가 방문하고 현구는 영진의 여동생 영희와 사랑에 빠진다. 악덕 지주의 마름이자 친일파인 오기호는 마을 축제의 어수선한 틈을 타 영희를 겁탈하려 하고 이를 말리던 현구와 난투극을 벌인다. 지켜보던 영진은 갑자기 환상에 빠지고 환상 끝에 낫을 휘둘러 기호를 죽인다. 붉은 피를 본 영진은 충격으로 다시 맑은 정신이 돌아오지만, 살인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된다. 끌려가는 영진의 뒤로 민요 ‘아리랑’이 울려 퍼지며 영화는 끝이 난다.

미치광이 영진역은 이 영화의 각본과 감독을 겸하고 있던 나운규가 맡았고 영희역은 신일선, 오기호역은 주인규가 맡았다.

 

영화 [아리랑]은 핍박받던 농촌의 현실과 일제에 고통받는 민중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주인공에 감정이입한 관객들에 의해 영화 주제가 ‘아리랑’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전국에 퍼져 나갔다. 

 

주연을 맡았던 여배우 신일선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관객들이 너무나 감동이 벅차서 목놓아 우는 사람, 아리랑을 합창하는 사람, 심지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까지 그야말로 감동의 소용돌이였다.

일제치하 암흑기 고통받던 우리 민족의 한과 슬픔이 그대로 표현된 영화 [아리랑]은 서울에서 성공한 이후, 전국 곳곳에서 상영되었는데. 평양에서는 관객이 너무 많이 들어서 극장의 들보가 부러지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제는 [아리랑]의 성공에 당황했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아리랑을 보고 공감했기 때문에 통제가 거의 불가능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프롤로그에 '고양이와 개'라는 자막을 넣어 속박하는 자와 속박당하는 자의 대립을 암시하였고, 주인공 영진이 실성한 사람인 것은 나라를 빼앗겨 온전한 정신이 될 수 없었던 우리 민족을 상징한 것이었다고 한다. [아리랑]은 당시 신파물이나 외국작품의 번안물이 넘쳐나던 시절, 사실주의에 바탕하여 민족의 문제를 영상화함으로써 한국 영화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 올렸다는 평을 받았다.

 

배우로 출연한 것 외에 각본과 감독 데뷔작이기도 한 이 작품으로 나운규는 일약 한국 영화계의 총아로 떠올랐으며 이후, 한국영화를 이끌어 가는 선구자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아리랑]의 필름은 현전하고 있지 않다.

 

 

 

나운규. [아리랑]을 만든 한국영화의 선구자.

 

 

항일운동을 하던 청년의 영화계 입문

나운규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구한말 군인이던 나형권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한말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낙향하여 고향에서 한약방을 하면서 후학들을 키우기도 하였다.

 

나운규는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신흥학교 고등과를 거쳐 1918년 만주 북간도 용정에 김약연이 세운 명동중학에 입학하였지만 일제 탄압으로 학교가 폐교되자 북간도와 만주 일대를 떠돌았다.

 

그는 3.1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고 만주에서는 독립군 단체에 투신하기도 하였는데, 1920년에는 북간도에 사는 한국인들이 만든 대한국민회(혹은 간도국민회)에 가입하였다. 그는 비록 미수사건에 그쳤지만 일제의 수비부대 간의 교통을 차단하기 위해 회령-청진간 철로 폭파임무를 맡기도 하는 등, 적극적으로 항일 운동에 참여하였다. 

 

회청선 폭파 미수사건으로 나운규는 일제에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수감되기도 하였다. 이때 나운규는 감방의 동료로부터 춘사(春史)라는 호를 얻었다고 한다.

 

영화 [사랑을 찾아서]의 한 장면. 이 영화는 노골적인 저항의식을 담고 있어 상영 닷새 만에 중단되었다가 많은 장면이 가위질 된 채 재개봉되어, 우리 영화사 사상 최초의 검열 사건으로 회자된 작품이다.

 

1923년 출감 이후 나운규는 당시 지방 순회공연을 하던 신극단 예림회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안종화를 만났다. 나운규와 동갑내기인 안종화는 이듬해 부산으로 내려가 한국 최초의 영화사인 조선키네마 창립에 관여하게 되고 나운규를 부산으로 불러들였다.

 

1924년에 설립된 조선키네마는 부산에 거주하던 일본인 실업가들이 20만 원의 자본금을 공동 출자해 세운 영화 제작사였다. 이들은 총포 화약상인 다카사 간조를 사장으로 내세우고 일본에서 기술자들을 데려와 영화를 찍기 시작하였는데 이 영화사에 우리나라 배우와 제작자, 연출가들도 참여하게 되었다.

 

안종화의 소개로 나운규는 조선키네마에서 단역배우로 배우 인생을 시작하였다.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에 대사 없는 가마꾼으로 출연했던 나운규는 이듬해 윤백남이 조선키네마를 나와 세운 백남프로덕션의 첫 번째 작품 [심청전]에 심봉사로 출연하여 연기파 배우로 성장하였다. 또 조선키네마에서 만든, 자유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이규설 감독의 [농중조(새장 속의 새)]에 조연으로 출연하여 연기에 절찬을 받으면서 명배우로 뛰어올랐다.

 

[농중조]에 주연 여배우로 출연한 복혜숙의 회고에 따르면 [농중조]를 찍을 무렵 나운규는 이미 자신의 감독 데뷔작 [아리랑]을 구상하고 있었으며 [농중조] 촬영현장에서도 배우의 역할뿐만 아니라 연출부분 스탭 역할도 자진해서 했다고 한다.

 

마침내 1926년 나운규는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자본으로 자신이 구상하고 각본을 쓴 [아리랑]을 감독하면서 주연으로 출연하는 1인 3역의 역할을 해냈다. [아리랑]은 개봉하자마자 요새 말로 하면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한국영화의 선구자

[아리랑]의 성공 후 나운규는 1927년 고향 친구였던 윤봉춘 등과 함께 ‘나운규프로덕션’을 설립하고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하였다. 이 ‘나운규프로덕션’에서 [옥녀]·[사나이]·[사랑을 찾아서]를 만들었고 1929년에는 한국 최초의 문예영화라 할 수 있는 [벙어리 삼룡]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나운규의 개인적 인기와는 달리 ‘나운규프로덕션’은 경영이 순조롭지 못했다. 결국, 영화사는 해체되었고 나운규는 원방각사 박정현의 자본으로 [아리랑 후편]과 [철인도] 등을 만들었지만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한때 경제적인 궁핍에 시달리던 나운규는 돈 때문에 일본 ‘도야마 프로덕션’의 작품에 출연하여 대중의 지탄을 받기도 하고, 생활고를 해결하고자 배구자의 악극단을 따라다니며 무대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1931년 일본 영화계를 돌아보고 온 나운규는 영화 [개화당이문]을 만들었지만 일제의 검열 때문에 많은 중요 장면들이 잘려나가 결국 흥행에 실패하였다. 

 

대신 그는 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에 출연하여 오랜만에 관객들의 가슴에 남을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이후에도 나운규는 비록 [아리랑] 만큼의 선풍적인 인기를 끌지는 못했지만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하고 감독하고 출연하여 한국영화의 중심에 있었다.

 

1936년 나운규는 [아리랑]의 성공 이후 우리 영화사에 또 하나의 기록이 될 시도를 하였다. 그는 새로 제작하는 [아리랑 3편]을 당시 막 인기를 끌기 시작한 발성영화로 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영화는 변사가 대신 대사를 말해주던 무성영화시대에서 벗어나 배우가 그대로 대사를 하면서 연기하는 유성영화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나운규가 출연한 [임자 없는 나룻배]의 한 장면. 이 영화는 일제 강점기 뱃사공 부녀가 겪는 비극적 현실을 그린 1932년 한국 흑백 무성영화이다. 나운규가 주연으로 나왔다. [아리랑]과 함께 일제시대 문제작으로 손꼽힌다. 민족저항영화로서 조선총독부의 검열에서 도끼로 철로를 찍는 부분 등이 삭제당하였다.

 

나운규는 문학작품의 영화화를 선호하였다. 1937년 나운규는 이태준의 소설 [오몽녀(五夢女)]를 영화화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으로 그는 그동안의 침체에서 벗어나 흥행과 예술성 면에서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그러나 오랫동안의 생활고와 영화촬영 시의 과로 등이 겹쳐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면서 35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나운규는 영화계에 입문해 활동한 약 15년 동안 29편의 작품을 남겼고, 26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그중에서 직접 각본·감독·주연을 맡은 영화가 15편이나 된다. 그는 투철한 민족정신과 자유로운 영화예술관을 가진 최초의 시나리오작가이자 감독 그리고 배우였으며 초창기 한국영화를 이끈 영화계의 선구자였다.

 

 김정미/시나리오 작가, 역사 저술가.///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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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리랑’

영화 ‘아리랑’은 나운규 각본, 제작, 감독, 주연의 무성 영화로, 조선 키네마에서 제작하여 1926년 10월 1일에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아리랑’은 한국 초기 영화사에 한 획을 긋는 작품이며 영화인 나운규의 천재적 능력을 전국에 널리 알린 작품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개봉 첫날부터 사상 유래 없는 인파가 밀려들었는데, 당시 주연을 맡았던 여배우가 “관객들이 너무나 감동이 벅차서 목놓아 우는 사람, 아리랑을 합창하는 사람, 심지어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는 사람까지 그야말로 감동의 소용돌이”였다고 표현할 만큼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일제 강점하의 비극적 민족 현실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격을 주고, 3 · 1 운동의 실패 후 허무주의에 빠져 있는 방방곡곡에 항일 저항 의식을 고취시킨 것이다.
또한, 당시 이상숙이 불렀던 이 영화의 주제가 ‘아리랑’을 수많은 사람들이 애국가처럼 부르게 된 데서도 이 영화에 대한 당시의 사회적 관심을 엿볼 수 있다.

‘아리랑’의 연출 수법과 그 효과

ⓒ (주)천재교육 | BY-NC-ND

한국의 초기 영화

우리 나라 영화의 시초는 1903년 6월 23일“황성신문”에 ‘활동 사진 광고’라는 제호의 광고가 실림으로써 시작되었는데, ‘활동 사진’이라고 불렀던 초기 무성 영화를 한국에 들여온 것은 일본 요시자와 상회(吉澤商會)의 순회 영화반이다. 그리고 1919년 10월의 ‘의리적 구투(義理的仇鬪)’ 라는 영화가 최초로 한국인에 의해 제작, 상영되어 한국 영화의 효시가 되었다. 이어서 1923년에 완전한 무성 영화 ‘월하(月下)의 맹세’가 윤백남(尹白南)에 의해 제작된 후 ‘춘향전’, ‘장화홍련전’, ‘흥보전’, ‘심청전’, ‘멍텅구리’ 등이 제작되어 무성 영화 시대를 이루었으며, 나운규의 ‘아리랑’에 이르러 무성 영화의 절정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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