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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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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    시집 1000권 읽기 14 댓글:  조회:2320  추천:0  2015-02-14
  131□겨울강□오탁번, 세계사시인선 44, 세계사, 1994   시는 단면이라는 지당한 사실을 다시 한 번 더 곱씹어야 할 일이다. 그 단면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다. 방법의 일관성은 높이 살 일이지만, 구차한 설명처럼 들리기 일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단면을 단면으로만 드러내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한 시 안에서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시가 무겁다. 무거우면 시는 침울하다. 그리고 둔하다. 둔하면 시는 수필이나 소설처럼 변한다. 이 점을 경계할 일이다.★★☆☆☆[4336. 11. 18.]   132□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이수명, 세계사시인선 62, 세계사, 1995 133□왜가리는 왜가리 놀이를 한다□이수명, 세계사시인선 84, 세계사, 1998   보조관념이 원관념에 투명한 낚싯줄 같은 관계만 겨우 드리우고서 혼자 떠도는 것은, 내가 알기론, 송찬호의 시에서 시작된 것이다. 10년만에 다시 시 곁으로 돌아와 남의 시집을 읽으면서 보니 그러한 경향이 이미 굵은 물줄기를 형성하였다는 사실이 눈에 띈다. 이수명, 박서원, 노혜경 같은 시인들이 그들이다. 오히려 이들은 송찬호보다 더 훨씬 더 멀리 나아갔다. 이제 바야흐로 면도칼의 날을 살짝 갖다 대기만 하면 그 투명한 줄마저 툭 끊어버리고 이미지는 의미를 지상의 먼발치에 남겨둔 채 저 혼자서 둥둥 떠다닐 것이다. 그 구름은 지상으로 쏟아지는 자외선을 막아주는 오존층이 될 것이다. 바로 그 문전에서 시인은 서성이고 있다.   죽음의 폭죽이 하늘로 쏘아 올린 구름 떼 같은 시들이 시집을 떠돌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시인조차도 점차 사라지고 있어서 시 쓰는 일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돼버린 문명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박서원이나 노혜경 같은 경우는 그나마 어떤 의지라도 느껴지는데, 이수명은 미라 같아서 체온계를 꽂아도 수은주가 올라갈 것 같지 않다. 젊은 사람이 어떻게 이런 경지에 이르렀을까 놀라운 생각이 든다. 이 경지는 아무나 올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머지 않아 우리는 엘리어트의 “황무지” 같은 대작을 볼 것이다. 그러기 전에 이 문명이 끝나지 말아야 할텐데.★★★☆☆[4336. 11. 19.]   134□지느러미가 아름다운 사람□박인숙, 세계사시인선 27, 세계사, 1993   시를 보는 눈과 쓰는 방법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독특한 색채로 시세계를 꾸려가는 능력도 엿보인다. 그러나 말들이 직접 쏟아져 나오고 있어서 설명으로 그치는 시들이 많아서 흠이다. 이미지를 따라서 시를 만들지 말고 먼저 할말을 분명히 정한 다음에 거기에 맞는 이미지만을 선택해서 써야만 시가 야물고 맑아진다.   시에서 자꾸 설명을 하려드는 것은 독자를 믿지 못하는 심리 때문이다. 그러나 독자들은 그렇게 우매하지 않다. 우매한 독자들까지 고려하며 시를 쓰다간 시를 망치고 만다. 우매한 독자들은 우롱 당하도록 놔두고 내가 나가야 할 곳으로 나가는 용기도 때론 필요한 법이다. 말을 아끼고 사물을 감싸는 방법을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기 전에 제일 먼저 버려야 할 말이 한자이다.★☆☆☆☆[4336. 11. 19.]   135□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정현종, 세계사사인선 1, 세계사, 1989   시가 메말랐다. 골조만 세워놓고 입주자를 받는 모델하우스 형국이다. 그렇게 메마른 형식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깨달음이라면 그건 반구제기(反求諸己)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글쎄, 시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깨달음에 자신을 갖고 말하겠지만, 남들도 그렇게 생각해 주겠느냐가 문제이다. 시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읽는 것이 아니다. 그러려면 시는 너무나 거추장스런 옷이다. 그런 깨달음이 어떤 매무새로 외출을 나섰느냐 하는 것을 감상하는 것이 시이다. 그러니 옷매무새를 나무랄 밖에! 한자는 잘못 붙은 뿌러찌 같다.★★☆☆☆[4336. 11. 19.]   136□속죄양, 유다□이연주, 세계사시인선 26, 세계사, 1993   한 이미지를 얻기 위해 치열하게 고뇌하는 모습은 존경스럽지만, 그 몸짓이 너무 크게 드러나면 시가 빳빳해진다. 격렬한 표현이 감당할 내용물이 너무 작다면 그것에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형식만의 춤이어서 읽고 나면 허무하게 느껴진다. 그렇기 때문에 시는 형식만으로도 안 되고 내용만으로도 안 되는 것이다. 그 둘이 적당히 어울려야 하는데, 그 감각이 쉽지 않다. 비유를 쓰는 것이 무난한 것인데, 어려운 비유를 써야 시가 된다는 믿음을 갖게 되면 시가 이상해진다.   잘 쓴 것 같은데, 허전한 느낌이 가시지 않는다. 써야 할 감정과 내용을 단단히 벼리고서 이미지가 찾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 순간에 쏟아낼 필요가 있다. 기다려주면 형식과 내용이 마치 찰떡궁합처럼 들러붙는 순간이 온다. 그 순간까지 진득하니 기다려야지 조급하게 칼질을 너무 많이 하면 시가 빳빳해진다.★★☆☆☆[4336. 11. 19.]   137□내 사는 아름다운 동굴에 달이 진다□김재혁, 세계사시인선 99, 세계사, 1999   호기심이 너무 많으면 시가 어지러워진다. 이 역시 절제하지 못한 결과이다. 한 시 안에서 동원되는 이미지들은 그 의미를 전하는 데 알맞은 숫자이어야 한다. 너무 많은 이미지가 동원되면 그 이미지들의 배열을 뒤쫓다가 정작 의미를 놓치거나 의미 파악을 지연시킨다. 따라서 이미지 과잉 역시 시에서 좋은 것이 아니다. 부분보다는 전체의 모양새에 신경을 써야 할 일이다. 버리지 못한 것 역시 시에서 보통 큰 병이 아니다. 버리고 버려서 더 이상 버릴 것이 남아있지 않아도 군더더기가 있는 것이 시이다. 따라서 과감하게 버릴 줄 아는 것이 시를 위해 좋다.★★☆☆☆[4336. 11. 19.]   138□우울씨의 일일□함민복, 세계사시인선 10, 세계사, 1990   시가 담을 수 없는 것이 어디 있을까마는 자학을 담기엔 시가 너무 불편한 도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집중력도 좋고 주제도 선명하며 그것을 전달하기 위한 방법도 아주 좋다. 그러나 안과 밖이 구별이 안 되어 초점이 흩어진 것이 흠이다. 세상일이라는 것이 안팎의 구별이 잘 안 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런 시에서는 작전이 필요하다. 안팎을 구별하지 않은 채 작전을 펴는 것은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다. 내가 어떻게 살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과연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자문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산삼을 찾아놓고 잘못 캐어 뿌리를 끊어먹은 경우가 되겠다. 한자는 여기서 과연 어떤 도움이 되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일이다.★★☆☆☆[4336. 11. 19.]   139□그 나라□조재도, 세계사시인선 91, 세계사, 1999   과거의 체험이 시로 들어올 때 조심해야 하는 것은 수필을 닮는 일이다. 이 시집의 시들도 수필과 시 사이에 아슬하게 걸쳐있다. 수필은 자신의 경험을 다루지만 시는 그 경험의 상징성을 다룬다. 그렇기 때문에 내 경험 얘기로 그쳐서는 시가 될 수 없다. 시집 속에 들어있는 세계가 시를 이루기에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세계인데도 시의 탄력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시 형식에 대한 고민이 그만큼 적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한 벌 더 벗어나서 그 경험이 담아야 할 시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일이다. 이때 제일 먼저 생각할 것은 한자를 버려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4336. 11. 19.]   140□오, 가엾은 비눗갑들□이선영, 세계사시인선 24, 세계사, 1992   한 번 잡은 주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그것을 상징까지 만드는 재주가 용하다. 그렇게 하면 시가 한 곳으로 집중된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설명으로 만드는 상징은 부스러지기 쉽다. 그리고 건조하다. 시는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나를 객관화시키더라도 그것을 설명으로 하면 안 된다. 설명은 시에 틀림없이 군더더기이다.★☆☆☆☆[4336. 11. 19.]    
218    시집 1000권 읽기 13 댓글:  조회:1966  추천:0  2015-02-14
  121□슬픈 바퀴벌레 일가□이진우, 세계사시인선 36, 세계사, 1994   거침없이 내달리는 상상력과 모든 체험을 시로 만들어버리는 과감성이 돋보인다. 이런 것이야말로 젊음의 패기이리라. 그런데 좀 가볍다. 이 가벼움이 의도한 것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이것은 성급함일 수도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굳이 시로 써도 되지 않을 것들을 시로 만드느라고 고생한 작품들이 여기저기 눈에 뜨인다. 애써 쓴 작품들이 가벼움으로 기화하지 않으려면 인식의 깊이가 문제가 된다. 가볍게 떠오르더라도 시인의 인식은 지구의 핵까지 닿아있어야 한다.★★☆☆☆[4336. 11. 17.]   122□사랑을 위한 아침□서석화, 세계사시인선 38, 세계사, 1994   시에서 쓰이는 발언과 시가 아닌 다른 곳에서 쓰이는 발언을 구별할 줄 아는 것이 이 시인이 해야할 가장 시급한 일이다. 그냥 묘사와 그냥 발언이 시집의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다. 시는 절약해야 할 말이 있고, 풀어야 할 말이 있다. 그 완급을 적절히 조절하며 이미지를 전개하고 할 말을 펼쳐야 하는데, 무엇이 시가 되는지 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구별이 없다. 묘사되는 대상이 어떤 정서를 환기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그냥 대상에 대한 단순하 묘사로 남는 경우가 많다.★☆☆☆☆[4336. 11. 17.]   123□우리 낯선 사람들□이하석, 세계사시인선 3, 세계사, 1989   도시 문명 속으로 침몰 당하는 자연인의 마지막 세대라고나 할까? 자연이 준 추억과 비정한 도시의 관계를 아주 독특한 시각으로 노래한다. 노래하는 방법과 시각이 확고하게 서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잃지 않고 할 말을 다하고 있다. 다만 자신의 정서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그칠 것인가, 아니면 비정한 문명을 비판하려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자각이 분명하지 않은 것이 흠이다. 그리고 곳곳에서 설명으로 대신한 경우가 있어서 옥에 티라고 하겠다. 이미지들을 단순한 묘사에 그치지 않고 상징으로 읽히게 만드는 방법도 눈여겨볼 만하다.★★★☆☆[4336. 11. 17.]   124□잠언집□박상배, 세계사시인선 39, 세계사, 1994   인식은 없고 기교가 살아서 시를 이끈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규정하든 간에 그것이 깊은 울림을 주기는 어렵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절실하지 않는 상태에서 나오는 시는 거짓이나 허풍이다. 그것이 형식의 문제이든 인식의 문제이든 그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아무도 그 자유를 박탈할 권리는 없지만, 그것이 도달해야 할 어떤 세계라고 주장하는 것은 강변이다. 그런 궤변을 도와주는 자가 있다면 그건 평론가들이리라.★★☆☆☆[4336. 11. 17.]   125□지상의 인간□박남철, 문학과지성시인선 36, 문학과지성사, 1984   서정시가 가슴속에서 마그마처럼 꿈틀거리는 감정을 어떤 형식에 기대어 분출시키는 것이라면 그 형식이 어떤 것이든 이 시집의 시들은 순수한 서정시로 보인다. 그 만큼 시속의 정서가 순수하다. 다만 그것을 표출하는 방법이 기존의 시들과 판이하게 다른데, 그렇다고 해도 그런 파괴된 형식 속에서 시인이 표출하고자 하는 것들이 너무나 순수한 감정들이어서 오히려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따스한 느낌이 들게 한다. 진정한 형식 파괴가 되려면 그 안에 깃든 정서까지도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이 시집의 시들은 아직 거기까지 가 닿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형식 파괴로 본다면 기성세대의 마지막 주자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4336. 11. 17.]   126□묵을 갈다가□김상옥, 창비시선 21, 창작과비평사, 1980   이 시집 속의 시들을 보면 시인의 절제된 감정이 돋보인다. 그리고 자연을 통해서 인사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아주 오랜 전통을 볼 수가 있다. 바로 자연과 동화를 꿈꾸는 그 노력 때문에 언어조차도 엄정한 절제미를 갖추게 된다. 이 시집에서도 그런 전형을 엿볼 수 있다. 이 점은 그 후 세대들이 완전히 잃어버려서 영원히 복구하지 못할 세계관이다. 우리가 옛날 성리학자들이 보던 자연을 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간해서는 흉내내기 힘든 세계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여 상상력 역시 그 진폭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고고하고 깨끗하되 답답한 것이다. 한자 역시 답답함을 일조한다.★★☆☆☆[4336. 11. 17.]   127□마지막 지상에서□김현승, 창비시선 3, 창작과비평사, 1975   우리가 옛 시조나 옛날 봉건시대의 시를 비판할 때 가장 먼저 들이댄 말이 영탄조에 시대의식이 증발했다는 것이었는데, 그 비판을 그대로 되돌려 받아야 할 시집이다. 시의 방법론이나 현실인식 어느 곳에서도 만족할 만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비유체계는 긴장을 잃고 할 말도 뚜렷하지 않다. 신에 대한 믿음을 노래한 작품은 찬송가의 가사 수준에 머물러 있다. 시가 되는 것과 시가 될 수 없는 것을 구별하지 못한 상황에서 나온 작품들이다. 한자는 그 시대 사람들의 업보이니 굳이 시인을 탓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 가지 건질 것이 있다면 사물과 세상에 대한 경건한 마음이다.★☆☆☆☆[4336. 11. 17.]   128□트렁크□김언희, 세계사시인선 61, 세계사, 1995   섬뜩한 느낌이 들도록 과감하게 한 주제를 향해서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은 높이 살 만하다. 그리고 우리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성욕과 성풍속에 칼끝을 들이대고 있다는 점에서 그 용기 또한 살 만하다. 이들이 이렇게 황폐하고 섬뜩한 것은 어쩌면 시인이 의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어떤 권위에 대한 도전의 형식일 때는 그것이 형식마저도 황폐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시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가 인식만으로 이루어지면 너무 깡마르고 메마르게 된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시는 칼날이 아니라 칼을 든 사람의 마음이어야 하는 것이다.★★☆☆☆[4336. 11. 18.]   129□무림일기□유하, 세계사시인선 50, 3쇄, 세계사, 2000   좀 산만하다. 그 산만함은 주제가 통일되어 있지 않는 까닭도 있지만, 어법과 발상 자체가 산만한 까닭이다. 이 산만함은 좋은 의미라면 발랄함이라고 해도 되겠다. 발랄함은 시인의 기본이다. 발랄하지 않으면 이미 고착된 관념과 말의 관계를 뚫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발랄함을 김현은 ‘키치’라고 했지만, 그건 포장지를 싸들고 다니며 새로운 것을 기다리는 버릇이 몸에 밴 평론가들의 입방아일 뿐이다.   이 시집은 목소리가 크다. 그래서 허풍을 떤다. 아마도 이 시에서 노래한 우리 시대의 경망스러움을 보여주려는 뜻일 것이다. 무림일기 같은 경우 얼마나 화사하고 화려한 문장으로 되어있는가? 기실 쪼개보면 아무 것도 아닌 내용인데 말이다. 그러나 아무 것도 아닌 말투로 시대의 정곡을 찌르고 있으니, 이것이 발랄함의 힘이다. 한자는 이 발랄함에 발을 건다.   중간의 영화론은 쓸데없는 짓을 한 셈이다. 시를 영화로 보고자 하는 사람은 있어도 영화를 시로 보고자 하는 사람은 없는 시대가 아닌가? 남의 장르에다가 아무리 시를 옷 입혀봤자 허수아비 꼴을 면할 수 없다. 시집 전체가 초점이 흩어져서 산만하다. 맨 뒤쪽의 시 몇 편은 차라리 해프닝이다.★★☆☆☆[4336. 11. 18.]   130□자본주의의 약속□함민복, 세계사시인선 31, 세계사, 1993   전략을 생각해야 할 시집이다. 너무 많은 말들이 동원되고 있다. 이 수다스러움을 이 시집의 한 특징으로 보아도 되겠지만, 수다스러움은 능력 없음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와 싸우기에는 너무나 맥빠진 방법이다. 자본주의는 그런 수다스러움에 넘어지지 않는다. 겉으로는 아닌 척하고 있지만, 자본주의가 거꾸러지는 꼴을 보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성질을 타고났다. 박노해와 백무산을 부러워할 일이 아니라 좀 더 뿌리를 흔들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고민해야 할 일이다. 온몸으로 자본주의의 밑바닥을 기어다니는 시인의 노력이 경탄스럽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렇게 기어다닐 수만은 없는 것이 삶이고 시이다. 이제 칼을 뽑아도 된다.★★★☆☆[4336. 11. 18.]    
217    千字文 댓글:  조회:5536  추천:0  2015-02-13
千 字 文   천자문 펜습 교본   天(하늘 천) 地(땅 지) 玄(검을 현) 黃(누를 황) 하늘은 위에 있어 그 빛이 검고 땅은 아래 있어서 그 빛이 누르다.   宇(집 우) 宙(집 주) 洪(넓을 홍) 荒(거칠 황) 하늘과 땅 사이는 넓고 커서 끝이 없다. 즉 세상의 넓음을 말한다.   日(날 일) 月(달 월) 盈(찰 영) 仄(기울 측)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달도 차면 점차 이지러진다. 즉 우주의 진리를 말한다.   辰(별 진) 宿(잘 숙) 列(벌일 열) 張(베풀 장) 성좌가 해 달과 같이 하늘에 넓게 벌려져 있음을 말한다.   寒(찰 한) 來(올 래) 暑(더울 서) 往(갈 왕) 찬 것이 오면 더운 것이 가고 더운 것이 오면 찬 것이 간다. 즉 사철의 바뀜을 말한다.   秋(가을 추) 收(거둘 수) 冬(겨울 동) 藏(감출 장) 가을에 곡식을 거두고 겨울이 오면 그것을 감춰 들인다.   閏(윤달 윤) 餘(남을 여) 成(이룰 성) 歲(해 세) 일년 이십사절기 나머지 시각을 모아 윤달로 하여 해를 이루었다.   律(가락 률) 呂(음률 려) 調(고를 조) 陽(볕 양) 천지간의 양기를 고르게 하니 즉 율은 양이요 여는 음이다.   雲(구름 운) 騰(오를 등) 致(이를 치) 雨(비 우) 수증기가 올라가서 구름이 되고 냉기를 만나 비가 된다. 즉 자연의 기상을 말한다.   露(이슬 로) 結(맺을 결) 爲(할 위) 霜(서리 상) 이슬이 맺어 서리가 되니 밤기운이 풀잎에 물방울처럼 이슬을 이룬다.   金(쇠 금) 生(낳을 생) 麗(고울 려) 水(물 수) 금은 여수에서 나니 여수는 중국의 지명이다.   玉(구슬 옥) 出(날 출) 崑(메 곤) 岡(메 강) 옥은 곤강에서 나니 곤강은 역시 중국의 산 이름이다.   劍(칼 검) 號(이름 호) 巨(클 거) 闕(대궐 궐) 거궐은 칼이름이고 구야자가 지은 보검이다. 즉 조나라의 국보다.   珠(구슬 주) 稱(일컬을 칭) 夜(밤 야) 光(빛 광) 구슬의 빛이 밤의 낮 같은 고로 야광이라 칭하였다.   果(과실 과) 珍(보배 진) 李(오얏 리) 柰(능금나무 내) 과실 중에 오얏과 능금나무의 그 진미가 으뜸임을 말한다.   菜(나물 채) 重(무거울 중) 芥(겨자 개) 薑(생강 강) 나물은 겨자와 생강이 중하다.   海(바다 해) 鹹(짤 함) 河(물 하) 淡(묽을 담) 바다 물은 짜고 밀물은 맛도 없고 맑다.   鱗(비늘 린) 潛(잠길 잠) 羽(깃 우) 翔(높이 날 상) 비늘 있는 고기는 물 속에 잠기고 날개 있는 새는 공중에 난다.   龍(용 룡) 師(스승 사) 火(불 화) 帝(임금 제) 복희씨는 용으로써 벼슬을 기록하고 신농씨는 불로써 기록하였다.   鳥(새 조) 官(벼슬 관) 人(사람 인) 皇(임금 황) 소호는 새로써 벼슬을 기록하고 황제는 인문을 갖추었으므로 인황이라 하였다.   始(처음 시) 制(지을 제) 文(글월 문) 字(글자 자) 복희의 신하 창힐이라는 사람이 새의 발자취를 보고 글자를 처음 만들었다.   乃(이에 내) 服(옷 복) 衣(옷 의) 裳(치마 상) 이에 의상을 입게 하니 황제가 의관을 지어 등분을 분별하고 위의를 엄숙케 하였다.   推(밀 추) 位(자리 위) 讓(사양할 양) 國(나라 국) 벼슬을 미루고 나라를 사양하니 제요가 제순에게 전위하였다.   有(있을 유) 虞(헤아릴 우) 陶(질그릇 도) 唐(당나라 당) 유우는 제순이요 도당은 제요이다. 즉 중국 고대 제왕이다.   弔(슬퍼할 조) 民(백성 민) 伐(칠 벌) 罪(허물 죄) 불쌍한 백성은 돕고 죄지은 백성은 벌주었다.   周(두루 주) 發(필 발) 殷(나라이름 은) 湯(끓을 탕) 주발은 무왕의 이름이고 은탕은 왕의 칭호이다.   坐(앉을 좌) 朝(아침 조) 問(물을 문) 道(길/말할 도) 좌조는 천하를 통일하여 왕위에 앉은 것이고 문도는 나라 다스리는 법을 말한다.   垂(드리울 수) 拱(껴안을 공) 平(평평할 평) 章(글월 장) 밝고 평화스럽게 다스리는 길을 겸손히 생각함을 말한다.   愛(사랑 애) 育(기를 육) 黎(검을 려) 首(머리 수) 明君이 천하를 다스림에 衆民을 사랑하고 양육함을 말한다.   臣(신하 신) 伏(엎드릴 복) 戎(오랑캐 융) 羌(종족이름 강) 이상과 같이 나라를 다스리면 그 덕에 융과 강도 항복하고야 만다.   遐(멀 하) 邇(가까울 이) 壹(한 일) 體(몸 체) 멀고 가까운 나라가 전부 그 덕망에 귀순케 하며 일체가 될 수 있다.   率(거느릴 솔/비율 률) 賓(손 빈) 歸(돌아갈 귀) 王(임금 왕) 거느리고 복종하여 왕에게 돌아오니 덕을 입어 복종치 않음이 없음을 말한다.   鳴(울 명) 鳳(봉황새 봉) 在(있을 재) 樹(나무 수) 명군 성현이 나타나면 봉이 운다는 말과 같이 덕망이 미치는 곳마다 봉이 나무 위에서 울 것이다.   白(흰 백) 駒(망아지 구) 食(밥 식) 場(마당 장) 평화스러움을 말한 것이며, 즉 흰 망아지도 감화되어 사람을 따르며 마당 풀을 뜯어먹게 한다.   化(될 화) 被(입을 피) 草(풀 초) 木(나무 목) 덕화가 사람이나 짐승에게만 미칠 뿐 아니라 초목에까지도 미침을 말한다.   賴(힘입을 뢰) 及(미칠 급) 萬(일만 만) 方(모 방) 만방이 극히 넓으나 어진 덕이 고루 미치게 된다.   蓋(덮을 개) 此(이 차) 身(몸 신) 髮(터럭 발) 이 몸의 털은 대개 사람마다 없는 이가 없다.   四(넉 사) 大(큰 대) 五(다섯 오) 常(항상 상) 네 가지 큰 것과 다섯 가지 떳떳함이 있으니 즉 사대는 천지 군부요 오상은 인의예지신이다.   恭(공손할 공) 惟(오직 유) 鞠(국문할 국) 養(기를 양) 국양함을 공손히 하라. 이 몸은 부모의 기르신 은혜이기 때문이다.   豈(어찌 기) 敢(감히 감) 毁(헐 훼) 傷(상할 상) 부모께서 낳아 길러 주신 이 몸을 어찌 감히 훼상할 수 있으랴.   女(계집 녀) 慕(사모할 모) 貞(곧을 정) 烈(매울 렬) 여자는 정조를 굳게 지키고 행실을 단정하게 해야 함을 말한다.   男(사내 남) 效(본받을 효) 才(재주 재) 良(어질 량) 남자는 재능을 닦고 어진 것을 본받아야 함을 말한다.   知(알 지) 過(지날/허물 과) 必(반드시 필) 改(고칠 개) 누구나 허물이 있는 것이니 허물을 알면 즉시 고쳐야 한다.   得(얻을 득) 能(능할 능) 莫(말 막) 忘(잊을 망) 사람으로써 알아야 할 것을 배운 후에는 잊지 않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罔(없을 망) 談(말씀 담) 彼(저 피) 短(짧을 단) 자기의 단점을 말 안하는 동시에 남의 잘못을 욕하지 말라.   靡(아닐 미) 恃(믿을 시) 己(몸 기) 長(길 장) 자신의 특기를 믿고 자랑하지 말라. 그럼으로써 더욱 발달한다.   信(믿을 신) 使(하여금 사) 可(옳을 가) 覆(뒤집힐 복) 믿음은 움직일 수 없는 진리이고 또한 남과의 약속은 지켜야 한다.   器(그릇 기) 欲(하고자할 욕) 難(어려울 난) 量(헤아릴 량) 사람의 기량은 깊고 깊어서 헤아리기 어렵다.   墨(먹 묵) 悲(슬플 비) 絲(실 사) 染(물들일 염) 흰 실에 검은 물이 들면 다시 희지 못함을 슬퍼한다. 즉 사람도 매사를 조심하여야 한다.   詩(시 시) 讚(칭찬할 찬) 羔(새끼양 고) 羊(양 양) 시전 고양편에 문왕의 덕을 입은 남국 대부의 정직함을 칭찬하였으니 사람의 선악을 말한 것이다.   景(경치 경) 行(다닐 행/항렬 항) 維(벼리 유) 賢(어질 현) 행실을 훌륭하게 하고 당당하게 행하면 어진 사람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克(이길 극) 念(생각 념) 作(지을 작) 聖(성인 성) 성인의 언행을 잘 생각하여 수양을 쌓으면 자연 성인이 됨을 말한다.   德(덕 덕) 建(세울 건) 名(이름 명) 立(설 립) 항상 덕을 가지고 세상일을 행하면 자연 이름도 서게 된다.   形(모양 형) 端(바를 단) 表(겉 표) 正(바를 정) 몸 형상이 단정하고 깨끗하면 마음도 바르며 또 표면에 나타난다.   空(빌 공) 谷(골 곡) 傳(전할 전) 聲(소리 성) 산골짜기에서 크게 소리치면 그대로 전한다. 즉 악한 일을 당하게 된다.   虛(빌 허) 堂(집 당) 習(익힐 습) 聽(들을 청) 빈방에서 소리를 내면 울려서 다 들린다. 즉 착한 말을 하면 천리 밖에서도 응한다.   禍(재앙 화) 因(인할 인) 惡(악할 악/미워할 오) 積(쌓을 적) 재앙은 악을 쌓음에 인한 것이므로 재앙을 받는 이는 평일에 악을 쌓았기 때문이다.   福(복 복) 緣(인연 연) 善(착할 선) 慶(경사 경) 복은 착한 일에서 오는 것이니 착한 일을 하면 경사가 온다.   尺(자 척) 璧(구슬 벽) 非(아닐 비) 寶(보배 보) 한 자 되는 구슬이라고 해서 결코 보배라고는 할 수 없다.   寸(마디 촌) 陰(그늘 음) 是(옳을/이 시) 競(다툴 경) 한 자 되는 구슬보다도 잠깐의 시간이 더욱 귀중하니 시간을 아껴야 한다.   資(자료 자) 父(아비 부) 事(일/섬길 사) 君(임금 군) 아비를 자료로 하여 임금을 섬길지니 아비 섬기는 효도로 임금을 섬겨야 한다.   曰(가로 왈) 嚴(엄할 엄) 與(더불 여) 敬(공경할 경) 임금을 대하는 데는 엄숙함과 공경함이 있어야 한다.   孝(효도 효) 當(마땅할 당) 竭(다할 갈) 力(힘 력) 부모를 섬길 때에는 마땅히 힘을 다하여야 한다.   忠(충성 충) 則(곧 즉/법 칙) 盡(다할 진) 命(목숨 명) 충성함에는 곧 목숨을 다하니 임금을 섬기는 데 몸을 사양해서는 안된다.   臨(임할 림) 深(깊을 심) 履(밟을 리) 薄(얇을 박) 깊은 곳에 임하듯 하며 얇은 데를 밟듯이 세심 주의하여야 한다.   夙(일찍 숙) 興(흥할 흥) 溫(따뜻할 온) 疓(서늘할 정) 일찍 일어나서 추우면 덥게, 더우면 서늘케 하는 것이 부모 섬기는 절차이다.   似(같을 사) 蘭(난초 란) 斯(이 사) 馨(향기 형) 난초같이 꽃다우니 군자의 지조를 비유한 것이다.   如(같을 여) 松(소나무 송) 之(갈 지) 盛(성할 성) 솔 나무같이 푸르러 성함은 군자의 절개를 말한 것이다.   川(내 천) 流(흐를 류) 不(아니 불) 息(쉴 식) 내가 흘러 쉬지 아니하니 군자의 행지를 말한 것이다.   淵(못 연) 澄(맑을 징) 取(취할 취) 暎(비칠 영) 못이 맑아서 비치니 즉 군자의 마음을 말한 것이다.   容(얼굴 용) 止(그칠 지) 若(같을 약) 思(생각 사) 행동을 덤비지 말고 형용과 행지를 조용히 생각하는 침착한 태도를 가져라.   言(말씀 언) 辭(말씀 사) 安(편안 안) 定(정할 정) 태도만 침착할 뿐 아니라 말도 안정케 하며 쓸데없는 말을 삼가라.   篤(도타울 독) 初(처음 초) 誠(정성 성) 美(아름다울 미) 무엇이든지 처음에 성실하고 신중히 하여야 한다.   愼(삼갈 신) 終(마지막 종) 宜(마땅 의) 令(하여금 령) 처음뿐만 아니라 끝맺음도 좋아야 한다.   榮(영화 영) 業(업 업) 所(바 소) 基(터 기) 이상과 같이 잘 지키면 번성하는 기본이 된다.   籍(호적 적) 甚(심할 심) 無(없을 무) 竟(마침내 경)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명예스러운 이름이 길이 전하여질 것이다.   學(배울 학) 優(넉넉할 우) 登(오를 등) 仕(벼슬 사) 배운 것이 넉넉하면 벼슬에 오를 수 있다.   攝(잡을 섭) 職(벼슬 직) 從(좇을 종) 政(정사 정) 벼슬을 잡아 정사를 좇으니 국가 정사에 종사하니라.   存(있을 존) 以(써 이) 甘(달 감) 棠(해당화 당) 주나라 소공이 남국의 아가위나무 아래에서 백성을 교화하였다.   去(갈 거) 而(어조사 이) 益(더할 익) 詠(읊을 영) 소공이 죽은 후 남국의 백성이 그의 덕을 추모하여 감당시를 읊었다.   樂(풍류 악/즐길 락/좋아할 요) 殊(다를 수) 貴(귀할 귀) 賤(천할 천) 풍류는 귀천이 다르니 천자는 팔일 제후는 육일 사대부는 사일 선일은 이일이다.   禮(예도 례) 別(다를 별) 尊(높을 존) 卑(낮을 비) 예도에 존비의 분별이 있으니 군신, 부자, 부부, 장유, 붕우의 차별이 있다.   上(위 상) 和(화할 화) 下(아래 하) 睦(화목할 목) 위에서 사랑하고 아래에서 공경함으로써 화목이 된다.   夫(지아비 부) 唱(부를 창) 婦(며느리 부) 隨(따를 수) 지아비가 부르면 지어미가 따른다. 즉 원만한 가정을 말한다.   外(밖 외) 受(받을 수) 傅(스승 부) 訓(가르칠 훈) 팔세면 바깥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入(들 입) 奉(받들 봉) 母(어미 모) 儀(거동 의) 집에 들어서는 어머니를 받들어 종사하라.   諸(모두 제) 姑(시어미 고) 伯(맏 백) 叔(아재비 숙) 고모, 백부, 숙부 등 집안 내의 친척 등을 말한다.   猶(같을 유) 子(아들 자) 比(견줄 비) 兒(아이 아) 조카들도 자기의 아들과 같이 취급하여야 한다.   孔(구멍 공) 懷(품을 회) 兄(맏 형) 弟(아우 제) 형제는 서로 사랑하여 의좋게 지내야 한다.   同(한가지 동) 氣(기운 기) 連(이어질 연) 枝(가지 지) 형제는 부모의 기운을 같이 받았으니 나무의 가지와 같다.   交(사귈 교) 友(벗 우) 投(던질 투) 分(나눌 분) 벗을 사귈 때에는 서로가 분에 맞는 사람끼리 사귀어야 한다.   切(끊을 절/모두 체) 磨(갈 마) 箴(경계 잠) 規(법 규) 열심히 닦고 배워서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지켜야 한다.   仁(어질 인) 慈(사랑할 자) 隱(숨을 은) 惻(슬플 측) 어진 마음으로 남을 사랑하고 또는 이를 측은히 여겨야 한다.   造(지을 조) 次(버금 차) 弗(아닐 불) 離(떠날 리) 남을 위한 동정심을 잠시라도 잊지 말고 항상 가져야 한다.   節(마디 절) 義(옳을 의) 廉(청렴 렴) 退(물러갈 퇴) 청렴과 절개와 의리와 사양함과 물러감은 늘 지켜야 한다.   顚(엎드러질 전) 沛(자빠질 패) 匪(아닐 비) 虧(이지러질 휴) 엎드려지고 자빠져도 이지러지지 않으니 용기를 잃지 말라.   性(성품 성) 靜(고요할 정) 情(뜻 정) 逸(편안할 일) 성품이 고요하면 뜻이 편안하니 고요함은 천성이요 동작함은 인정이다.   心(마음 심) 動(움직일 동) 神(귀신 신) 疲(피곤할 피) 마음이 움직이면 신기가 피곤하니 마음이 불안하면 신기가 불편하다.   守(지킬 수) 眞(참 진) 志(뜻 지) 滿(찰 만) 사람의 도리를 지키면 뜻이 차고 군자의 도를 지키면 뜻이 편안하다.   逐(쫓을 축) 物(만물 물) 意(뜻 의) 移(옮길 이) 마음이 불안함은 욕심이 있어서 그렇다. 너무 욕심내면 마음도 변한다.   堅(굳을 견) 持(가질 지) 雅(우아할 아) 操(잡을 조) 맑은 절조를 굳게 가지고 있으면 나의 도리를 극진히 함이라.   好(좋을 호) 爵(벼슬 작) 自(스스로 자) 慔(얽을 미) 스스로 벼슬을 얻게 되니 찬작을 극진하면 인작이 스스로 이르게 된다.   都(도읍 도) 邑(고을 읍) 華(빛날 화) 夏(여름 하) 도읍은 왕성의 지위를 말한 것이고 화하는 당시 중국을 지칭하던 말이다.   東(동녘 동) 西(서녘 서) 二(두 이) 京(서울 경) 동과 서에 두 서울이 있으니 동경은 낙양이고 서경은 장안이다.   背(등 배) 邙(산이름 망) 面(낯 면) 洛(강이름 락) 동경은 북에 북망산이 있고 낙양은 남에 낙천이 있다.   浮(뜰 부) 渭(강이름 위) 據(의거할 거) 涇(통할 경) 위수에 뜨고 경수를 눌렀으니 장안은 서북에 위천, 경수, 두물이 있었다.   宮(집 궁) 殿(큰집 전) 盤(서릴 반) 鬱(답답 울) 궁전은 울창한 나무 사이에 서린 듯 정하고   樓(다락 루) 觀(볼 관) 飛(날 비) 驚(놀랄 경) 궁전 가운데 있는 물견대는 높아서 올라가면 나는 듯하여 놀란다.   圖(그림 도) 寫(베낄 사) 禽(날짐승 금) 獸(짐승 수) 궁전 내부에는 유명한 화가들이 그린 그림 조각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畵(그림 화) 采(채색 채) 仙(신선 선) 靈(신령 령) 신선과 신령의 그림도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다.   丙(남녘 병) 舍(집 사) 傍(곁 방) 啓(열 계) 병사 곁에 통고를 열어 궁전 내를 출입하는 사람들의 편리를 도모하였다.   甲(갑옷 갑) 帳(휘장 장) 對(대답할 대) 楹(기둥 영) 아름다운 갑장이 기둥을 대하였으니 동방 삭이 갑장을 지어 임금이 잠시 정지하는 곳이다.   肆(베풀 사) 筵(자리 연) 設(베풀 설) 席(자리 석) 자리를 베풀고 돗자리를 베푸니 연회하는 좌석이다.   鼓(북 고) 瑟(비파 슬) 吹(불 취) 笙(생황 생) 비파를 치고 저를 부니 잔치하는 풍류이다.   陞(오른쪽 승) 階(뜰 계) 納(바칠 납) 陛(섬돌 폐) 문무백관이 계단을 올라 임금께 납폐하는 절차이니라.   弁(고깔 변) 轉(구를 전) 疑(의심할 의) 星(별 성) 많은 사람들의 관에서 번쩍이는 구슬이 별안간 의심할 정도이다.   右(오를 우) 通(통할 통) 廣(넓을 광) 內(안 내) 오른편에 광내가 통하니 광내는 나라 비서를 두는 집이다.   左(왼 좌) 達(통달할 달) 承(이을 승) 明(밝을 명) 왼편에 승명이 사무치니 승명은 사기를 교열하는 집이다.   旣(이미 기) 集(모을 집) 墳(무덤 분) 典(법 전) 이미 분과 전을 모았으니 삼황의 글은 삼분이요 오제의 글은 오전이다.   亦(또 역) 聚(모을 취) 群(무리 군) 英(꽃부리 영) 또한 여러 영웅을 모으니 분전을 강론하여 치국하는 도를 밝힘이라.   杜(막을 두) 稿(볏짚 고) 鍾(쇠북 종) 隸(글씨 례) 초서를 처음으로 쓴 두고와 예서를 쓴 종례의 글로 비치되었다.   漆(옻칠할 칠) 書(글씨 서) 壁(벽 벽) 經(날 경) 하나라 영제가 돌벽에서 발견한 서골과 공자가 발견한 육경도 비치되어 있다.   府(마을 부) 羅(벌릴 라) 將(장수 장) 相(서로 상) 마을 좌우에 장수와 정승이 벌려 있었다.   路(길 로) 夾(낄 협) 槐(괴화나무 괴) 卿(벼슬 경) 길에 고위 고관인 삼공구경의 마차가 열지어 궁전으로 들어가는 모습이다.   戶(지게 호) 封(봉할 봉) 八(여덟 팔) 縣(고을 현) 한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 여덟 고을 민호를 주어 공신을 봉하였다.   家(집 가) 給(줄 급) 千(일천 천) 兵(군사 병) 제후 나라에 일천 군사를 주어 그의 집을 호위시켰다.   高(높을 고) 冠(갓 관) 陪(더할 배) 輦(손수레 련) 높은 관을 쓰고 연을 모시니 제후의 예로 대접했다.   驅(몰 구) 嘪(바퀴 곡) 振(떨친 진) 纓(끈 영) 수레를 몰며 갓끈이 떨치니 임금출행에 제후의 위엄이 있다.   世(세상 세) 祿(녹 록) 侈(사치할 치) 富(부자 부) 대대로 녹이 사치하고 부하니 제후 자손이 세세 관록이 무성하여라.   車(수레 거) 駕(멍에 가) 肥(살찔 비) 輕(가벼울 경) 수레의 말은 살찌고 몸의 의복은 가볍게 차려져 있다.   策(꾀 책) 功(공 공) 茂(무성할 무) 實(열매 실) 공을 꾀함에 무성하고 충실하러라.   勒(굴레 륵) 碑(비석 비) 刻(새길 각) 銘(새길 명) 비를 세워 이름을 새겨서 그 공을 찬양하며 후세에 전하였다.   磻(강이름 반) 溪(시내 계) 伊(저 이) 尹(다스릴 윤) 문왕은 반계에서 강태공을 맞고 은왕은 신야에서 이윤을 맞이하였다.   佐(도울 좌) 時(때 시) 阿(언덕 아) 衡(저울대 형) 때를 돕는 아형이니 아형은 상나라 재상의 칭호이다.   奄(문득 엄) 宅(집 댁/택) 曲(굽을 곡) 阜(언덕 부) 주공이 큰 공이 있는 고로 노국을 봉한 후 곡부에다 궁전을 세웠다.   微(작을 미) 旦(아침 단) 孰(누구 숙) 營(경영 영) 주공의 단이 아니면 어찌 큰 궁전을 세웠으리요.   桓(굳셀 환) 公(공변될 공) 匡(바를 광) 合(모을 합) 제나라 환공은 바르게 하고 모두었으니 초를 물리치고 난을 바로잡았다.   濟(건널 제) 弱(약할 약) 扶(도울 부) 傾(기울 경) 약한 나라를 구제하고 기울어지는 제신을 도와서 붙들어 주었다.   綺(비단 기) 回(돌아올 회) 漢(한수 한) 惠(은혜 혜) 하나라 네 현인의 한 사람인 기가 한나라 혜제를 회복시켰다.   設(말씀 설/달랠 세/기뻐할 열) 感(느낄 감) 武(호반 무) 丁(고무래 정) 부열이 들에서 역사하매 무정의 꿈에 감동되어 곧 정승에 되었다.   俊(준걸 준) 乂(어질 예) 密(빽빽할 밀) 勿(말 물) 준걸과 재사가 조정에 모여 빽빽하더라.   多(많을 다) 士(선비 사) 寔(이 식) 寧(편안 녕) 준걸과 재사가 조정에 많으니 국가가 태평함이라.   晋(나라 진) 楚(나라 초) 更(다시 갱/고칠 경) 覇(으뜸 패) 진과 초가 다시 으뜸이 되니 진문공 초장왕이 패왕이 되니라.   趙(나라 조) 魏(나라 위) 困(곤할 곤) 橫(비낄 횡) 조와 위는 횡에 곤하니 육군때에 진나라를 섬기자 함을 횡이라 하니라.   假(거짓 가) 途(길 도) 滅(멸할 멸) 坆(나라 괵) 길을 빌려 괵국을 멸하니 진헌공이 우국길을 빌려 괵국을 멸하였다.   踐(밟을 천) 土(흙 토) 會(모일 회) 盟(맹세 맹) 진문공이 제후를 천토에 모아 맹세하고 협천자영 제후하니라.   何(어찌 하) 遵(좇을 준) 約(약속할 약) 法(법 법) 소하는 한고조로 더불어 약법삼장을 정하여 준행하리라.   韓(나라 한) 弊(해질 폐) 煩(번거로울 번) 刑(형벌 형) 한비는 진왕을 달래 형벌을 펴다가 그 형벌에 죽는다.   起(일어날 기) 烳(자를 전) 頗(자못 파) 牧(칠 목) 백기와 왕전은 진나라 장수요 염파와 이목은 조나라 장수였다.   用(쓸 용) 軍(군사 군) 最(가장 최) 精(정할 정) 군사 쓰기를 가장 정결히 하였다.   宣(베풀 선) 威(위엄 위) 沙(모래 사) 漠(아득할 막) 장수로서 그 위엄은 멀리 사막에까지 퍼졌다.   馳(달릴 치) 譽(칭찬할 예) 丹(붉을 단) 靑(푸를 청) 그 이름은 생전뿐 아니라 죽은 후에도 전하기 위하여 초상을 기린각에 그렸다.   九(아홉 구) 州(고을 주) 禹(하우씨 우) 跡(자취 적) 하우씨가 구주를 분별하니 기, 연, 청, 서, 양, 옹, 구주이다.   百(일백 백) 郡(고을 군) 秦(나라 진) 幷(아우를 병) 진시황이 천하봉군하는 법을 폐하고 일백군을 두었다.   嶽(산마루 악) 宗(마루 종) 恒(항상 항) 岱(뫼 대) 오악은 동태산, 서화산, 남형산, 북항산, 중숭산이니 항산과 태산이 조종이라.   禪(터닦을 선) 主(임금 주) 云(이를 운) 亭(정자 정) 운과 정은 천자를 봉선하고 제사하는 곳이니 운정은 태산에 있다.   雁(기러기 안) 門(문 문) 紫(붉을 자) 塞(변방 새) 안문은 봄기러기 북으로 가는 고로 안문이고 흙이 붉은 고로 자색이라 하였다.   鷄(닭 계) 田(밭 전) 赤(붉을 적) 城(성 성) 계전은 옹주에 있는 고을이고 적성은 기주에 있는 고을이다.   昆(맏 곤) 池(못 지) 碣(돌 갈) 石(돌 석) 곤지는 운남 곤명현에 있고 갈석은 부평현에 있다.   鉅(클 거) 野(들 야) 洞(골 동/꿰뚫을 통) 庭(뜰 정) 거야는 태산 동편에 있는 광야 동전은 호남성에 있는 중국 제일의 호수이다.   曠(빌 광) 遠(멀 원) 綿(이어질 면) 邈(멀 막) 산, 벌판, 호수 등이 아득하고 멀리 그리고 널리 줄지어 있음을 말한다.   巖(바위 암) 峀(메뿌리 수) 杳(아득할 묘) 冥(어두울 명) 큰 바위와 메뿌리가 묘연하고 아득함을 말한다.   治(다스릴 치) 本(근본 본) 於(어조사 어) 農(농사 농) 다스리는 것은 농사를 근본으로 하니 중농 정치를 이른다.   務(힘쓸 무) 玆(이 자) 稼(심을 가) 穡(거둘 색) 때맞춰 심고 힘써 일하며 많은 수익을 거둔다.   林(비로소 숙) 載(실을 재) 南(남녘 남) 畝(이랑 묘) 비로소 남양의 밭에서 농작물을 배양한다.   我(나 아) 藝(재주 예) 黍(기장 서) 稷(피 직) 나는 기장과 피를 심는 일에 열중하겠다.   稅(징수할 세) 熟(익을 숙) 貢(바칠 공) 新(새 신) 곡식이 익으면 부세하여 국용을 준비하고 신곡으로 종묘에 제사를 올린다.   勸(권할 권) 賞(상줄 상) 黜(물리칠 출) 陟(오를 척) 농민의 의기를 앙양키 위하여 열심인 자는 상주고 게을리한 자는 출석하였다.   孟(맏 맹) 軻(수레 가) 敦(도타울 돈) 素(흴 소) 맹자는 그 모친의 교훈을 받아 자사문하에서 배웠다.   史(역사 사) 魚(물고기 어) 秉(잡을 병) 直(곧을 직) 사어라는 사람은 위나라 태부였으며 그 성격이 매우 강직하였다.   庶(여러 서) 幾(몇 기) 中(가운데 중) 庸(떳떳 용) 어떠한 일이나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일하면 안 된다.   勞(힘쓸 로) 謙(겸손 겸) 謹(삼갈 근) 勅(칙서 칙) 근로하고 겸손하며 삼가고 신칙하면 중용의 도에 이른다.   聆(들을 령) 音(소리 음) 察(살필 찰) 理(다스릴 리) 소리를 듣고 그 거동을 살피니 조그마한 일이라도 주의하여야 한다.   鑑(거울 감) 貌(모양 모) 辨(분별 변) 色(빛 색) 모양과 거동으로 그 마음속을 분별할 수 있다.   貽(끼칠 이) 厥(그 궐) 嘉(아름다울 가) 猷(꾀 유) 도리를 지키고 착함으로 자손에 좋은 것을 끼쳐야 한다.   勉(힘쓸 면) 其(그 기) 祗(공경 지) 植(심을 식) 착한 것으로 자손에 줄 것을 힘써야 좋은 가정을 이룰 것이다.   省(살필 성/덜 생) 躬(몸 궁) 譏(나무랄 기) 誡(경계 계) 나무람과 경계함이 있는가 염려하며 몸을 살피라.   寵(고일 총) 增(더할 증) 抗(저항할 항) 極(다할 극) 총애가 더할수록 교만한 태도를 부리지 말고 더욱 조심하여야 한다.   殆(위태 태) 辱(욕할 욕) 近(가까울 근) 恥(부끄러울 치) 총애를 받는다고 욕된 일을 하면 머지 않아 위태함과 치욕이 온다.   林(수풀 림) 皐(언덕 고) 幸(다행 행) 卽(곧 즉) 부귀할지라도 겸토하여 산간 수풀에서 편히 지내는 것도 다행한 일이다.   兩(두 량) 疏(상소할 소) 見(볼 견/나타날 현) 機(틀 기) 한나라의 소광과 소수는 기틀을 보고 상소하고 낙향했다.   解(풀 해) 組(짤 조) 誰(누구 수) 逼(핍박할 핍) 관의 끈을 풀어 사직하고 돌아가니 누가 핍박하리요.   索(찾을 색) 居(살 거) 閑(한가 한) 處(곳 처) 퇴직하여 한가한 곳에서 세상을 보냈다.   沈(잠길 침) 默(잠잠할 묵) 寂(고요할 적) 寥(고요 요) 세상에 나와서 교제하는 데도 언행에 침착해야 한다.   求(구할 구) 古(옛 고) 尋(찾을 심) 論(의논할 론) 예를 찾아 의논하고 고인을 찾아 토론한다.   散(흩을 산) 慮(생각 려) 逍(거닐 소) 遙(멀 요) 세상일을 잊어버리고 자연 속에서 한가하게 즐긴다.   欣(기쁠 흔) 奏(아뢸 주) 累(여러 루) 遣(보낼 견) 기쁨은 아뢰고 더러움은 보내니.   瓷(슬플 척) 謝(사례 사) 歡(기뻐할 환) 招(부를 초) 심중의 슬픈 것은 없어지고 즐거움만 부른 듯이 오게 된다.   渠(개천 거) 荷(연꽃 하) 的(과녁 적) 歷(지낼 력) 개천의 연꽃도 아름다우니 향기를 잡아볼 만하다.   園(동산 원) 莽(풀 망) 抽(빼낼 추) 條(조목 조) 동산의 풀은 땅속 양분으로 가지가 뻗고 크게 자란다.   枇(비파나무 비) 杷(비파나무 파) 晩(늦을 만) 翠(푸를 취) 비파나무는 늦은 겨울에도 그 빛은 푸르다.   梧(오동 오) 桐(오동 동) 早(이를 조) 凋(시들 조) 오동잎은 가을이면 다른 나무보다 먼저 마른다.   陳(베풀 진) 根(뿌리 근) 委(맡길 위) 欦(가릴 예) 가을이 오면 오동뿐 아니라 고목의 뿌리는 시들어 마른다.   落(떨어질 락) 葉(잎사귀 엽) 飄(나부낄 표) 汞(나부낄 요) 가을이 오면 낙엽이 펄펄 날리며 떨어진다.   游(헤엄칠 유) 噔(곤새 곤) 獨(홀로 독) 運(운전 운) 곤새가 자유로이 홀로 날개를 펴고 運回하고 있다.   凌(업신여길 릉) 摩(만질 마) 絳(붉을 강) 曨(하늘 소) 적색의 大空을 업신여기는 듯이 선회하고 있다.   耽(즐길 탐) 讀(읽을 독/이두 두) 翫(가지고놀 완) 市(저자 시) 하나라의 왕총은 독서를 즐겨 서점에 가서 탐독하였다.   寓(붙일 우) 目(눈 목) 囊(주머니 낭) 箱(상자 상) 왕총이 한번 읽으면 잊지 아니하여 글을 주머니나 상자에 둠과 같다고 하였다.   易(쉬울 이/바꿀 역) 淙(가벼울 유) 攸(바 유) 畏(두려워할 외) 매사를 소홀히 하고 경솔함은 군자가 진실로 두려워하는 바이다.   屬(붙을 속/이을 촉) 耳(귀 이) 垣(담 원) 牆(담 장) 담장에도 귀가 있다는 말과 같이 경솔히 말하는 것을 조심하라.   具(갖출 구) 膳(반찬 선) 朄(밥 손) 飯(밥 반) 반찬을 갖추고 밥을 먹으니   適(마침 적) 口(입 구) 充(채울 충) 腸(창자 장) 훌륭한 음식이 아니라도 입에 맞으면 배를 채운다.   飽(배부를 포) 槤(배부를 어) 烹(삶을 팽) 宰(재상 재) 배부를 때에는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그 맛을 모른다.   饑(주릴 기) 厭(싫을 염) 糟(재강 조) 糠(겨 강) 반대로 배가 고플 때에는 겨와 재강도 맛있게 되는 것이다.   親(친할 친) 戚(겨레 척) 故(연고 고) 舊(옛 구) 친은 동성지친이고 척은 이성지친이요 고구는 오랜 친구를 말한다.   老(늙을 로) 少(젊을 소) 異(다를 이) 糧(양식 량) 늙은이와 젊은이의 식사가 다르다.   妾(첩 첩) 御(모실 어) 績(길쌈 적) 紡(길쌈 방) 남자는 밖에서 일하고 여자는 안에서 길쌈을 짜니라.   侍(모실 시) 巾(수건 건) 涌(장막 유) 房(방 방) 유방에서 모시고 수건을 받드니 처첩이 하는 일이다.   紈(흰비단 환) 扇(부채 선) 圓(둥글 원) 潔(깨끗할 결) 흰 비단으로 만든 부채는 둥글고 깨끗하다.   銀(은 은) 燭(촛불 촉) 济(빛날 위) 煌(빛날 황) 은촛대의 촛불은 빛나서 휘황 찬란하다.   晝(낮 주) 眠(잘 면) 夕(저녁 석) 寐(잘 매) 낮에 낮잠 자고 밤에 일찍 자니 한가한 사람의 일이다.   藍(쪽 람) 筍(죽순 순) 象(코끼리 상) 牀(상 상)=床 푸른 대순과 코끼리 상이니 즉 한가한 사람의 침대이다.   弦(줄 현) 歌(노래 가) 酒(술 주) 檗(잔치 연) 거문고를 타며 술과 노래로 잔치하니.   接(이을 접) 杯(잔 배) 擧(들 거) 觴(잔 상) 작고 큰 술잔을 서로 주고받으며 즐기는 모습이다.   矯(바로잡을 교) 手(손 수) 頓(두드릴 돈) 足(발 족) 손을 들고 발을 두드리며 춤을 춘다.   悅(기쁠 열) 豫(미리 예) 且(또 차) 康(편안 강) 이상과 같이 마음 편히 즐기고 살면 단란한 가정이다.   嫡(정실 적) 後(뒤 후) 嗣(이을 사) 續(이을 속) 적자된 자, 즉 장남은 뒤를 계승하여 대를 이룬다.   祭(제사 제) 祀(제사 사) 蒸(찔 증) 嘗(맛볼 상) 제사하되 겨울 제사는 증이라 하고 가을 제사는 상이라 한다.   稽(조아릴 계) 斎(이마 상) 再(둘 재) 拜(절 배) 이마를 조아려 선조에게 두 번 절한다.   悚(두려워할 송) 懼(두려워할 구) 恐(두려워할 공) 惶(두려워할 황) 송구하고 공황하니 엄중, 공경함이 지극함이라.(3년상 이후의 제사시의 몸가짐이다.)   烗(편지 전) 牒(편지 첩) 簡(편지 간) 要(중요 요) 글과 편지는 간략함을 요한다.   顧(돌아볼 고) 答(대답 답) 審(살필 심) 詳(자세할 상) 편지의 회답도 자세히 살펴 써야 한다.   骸(뼈 해) 垢(때 구) 想(생각할 상) 浴(목욕할 욕) 몸에 때가 끼면 목욕하기를 생각하고.   執(잡을 집) 熱(더울 열) 願(원할 원) 凉(서늘할 량) 더우면 서늘하기를 원한다.   驢(나귀 려) 岲(노새 라) 犢(송아지 독) 特(특별 특) 나귀와 노새와 송아지, 즉 가축을 말한다.   駭(놀랄 해) 躍(뛸 약) 超(넘을 초) 槐(달릴 양) 뛰고 달리며 노는 가축의 모습을 말한다.   誅(벨 주) 斬(벨 참) 賊(도적 적) 盜(도적 도) 역적과 도적을 베어 물리침.   捕(잡을 포) 獲(얻을 획) 叛(배반할 반) 亡(망할 망/없을 무) 배반하고 도망하는 자를 잡아 죄를 다스린다.   布(베 포) 射(쏠 사) 僚(벗 료) 丸(알 환) 한나라 여포는 화살을 잘 쐈고 의료는 탄자를 잘 던졌다.   笩(산이름 혜) 琴(거문고 금) 阮(악기 완) 嘯(휘파람 소) 위국 혜강은 거문고를 잘 타고 완적은 휘파람을 잘 불었다.   恬(편안 념) 筆(붓 필) 倫(인륜 륜) 紙(종이 지) 진국 봉념은 토끼털로 처음 붓을 만들었고 후한 채윤은 처음 종이를 만들었다.   鈞(고를 균) 巧(공교할 교) 任(맡길 임) 釣(낚시 조) 위국 마균은 지남거를 만들고 전국시대 임공자는 낚시를 만들었다.   釋(놓을 석) 紛(어지러울 분) 利(이로울/날카로울 리) 俗(풍속 속) 이상 팔인의 재주를 다하여 어지러움을 풀어 풍속에 이롭게 하였다.   竝(아우를 병) 皆(다 개) 佳(아름다울 가) 妙(묘할 묘) 모두가 아름다우며 묘한 재주였다.   毛(털 모) 施(베풀 시) 淑(맑을 숙) 姿(모양 자) 모는 오의 모타라는 여자이고 시는 월의 시라는 여자인데 모두 절세 미인이었다.   工(장인 공) 撒(찡그릴 빈) 姸(고울 연) 笑(웃을 소) 이 두 미인의 웃는 모습이 매우 곱고 아름다웠다.   年(해 년) 矢(화살 시) 每(매양 매) 催(재촉 최) 세월이 빠른 것을 말한다. 즉 살같이 매양 재촉하니   曦(햇빛 희) 暉(빛날 휘) 朗(밝을 랑) 耀(빛날 요) 태양 빛과 달빛은 온 세상을 비추어 만물에 혜택을 주고 있다.   璇(구슬 선) 璣(구슬 기) 懸(달 현) 斡(빙빙돌 알) 선기는 천기를 보는 기구이고 그 기구가 높이 걸려 도는 것을 말한다.   晦(그믐 회) 魄(넋 백) 環(고리 환) 照(비칠 조) 달이 고리와 같이 돌며 천지를 비치는 것을 말한다.   指(손가락 지) 薪(섶나무 신) 修(닦을 수) 祐(복 우) 불타는 나무와 같이 정열로 도리를 닦으면 복을 얻는다.   永(길 영) 綏(편안 수) 吉(길할 길) 暦(아름다울 소) 그리고 영구히 편안하고 길함이 높으리라.   矩(법 구) 步(걸음 보) 引(끌 인) 領(거느릴 령) 걸음을 바로 걷고 따라서 얼굴도 바르니 위의가 당당하다.   俯(굽을 부) 仰(우러를 앙) 廊(행랑 랑) 廟(사당 묘) 항상 남묘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머리를 숙여 예의를 지키라.   束(묶을 속) 帶(띠 대) 矜(자랑 긍) 莊(씩씩할 장) 의복에 주의하여 단정히 함으로써 긍지를 갖는다.   徘(배회 배) 徊(배회 회) 瞻(쳐다볼 첨) 眺(바라볼 조) 같은 장소를 배회하며 선후를 보는 모양이다.   孤(외로울 고) 陋(더러울 루) 寡(적을 과) 聞(들을 문) 하등의 식견도 재능도 없다.(천자문의 저자가 자기 자신을 겸손해서 말한 것이다.)   愚(어리석을 우) 蒙(어릴 몽) 等(등급 등) 痱(꾸짖을 초) 적고 어리석어 몽매함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말한다.   謂(이를 위) 語(말씀 어) 助(도울 조) 者(놈 자) 어조라 함은 한문의 조사, 즉 다음 글자이다.   焉(어찌 언) 哉(어조사 재) 乎(어조사 호) 也(어조사 야)   '언재호야' 이 네 글자는 어조사이다. [출처] [본문스크랩] 千 字 文|작성자 수위
216    세계 각국 유적지들 댓글:  조회:5414  추천:0  2015-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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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세계 각 나라별 지도 댓글:  조회:6509  추천:0  2015-02-13
■ 아시아지도   네팔 지도 대만 지도 라오스 지도 레바논 지도 말레이시아 지도 몽골 지도 미얀마 지도 방글라데시 지도 베트남 지도 스리랑카 지도 시리아 지도 싱가포르 지도 요르단 지도 우즈베키스탄 지도 이란 지도 이스라엘 지도 인도 지도 인도네시아 지도 일본 지도 중국 지도 캄보디아 지도 태국 지도 파키스탄 지도 필리핀 지도 한국 지도 홍콩 지도     ■ 유럽지도   그리스 지도 네덜란드 지도 노르웨이 지도 덴마크 지도 독일 지도 라트비아 지도 러시아 지도 루마니아 지도 리투아니아 지도 리히텐슈타인 지도 마케도니아 지도 몰도바 지도 몰타 지도 벨기에 지도 벨로루시 지도 불가리아 지도 스웨덴 지도 스위스 지도 스코틀랜드 지도 스페인 지도 슬로바키아 지도 슬로베니아 지도 아르메니아 지도 아이슬란드 지도 아일랜드 지도 안도라 지도 알바니아 지도 에스토니아 지도 영국 지도 오스트리아 지도 우크라이나 지도 이탈리아 지도 체코 지도 크로아티아 지도 키프로스 지도 터키 지도 포르투갈 지도 폴란드 지도 프랑스 지도 핀란드 지도 헝가리 지도           ■ 남아메리카   도미니카 지도 베네수엘라 지도 볼리비아 지도 브라질 지도 아르헨티나 지도 에콰도르 지도 우루과이 지도 칠레 지도 콜롬비아 지도 파라과이 지도 페루 지도       ■ 북아메리카   과테말라 지도 그레나다 지도 니카라과 지도 멕시코 지도 미국 지도 바베이도스 지도 바하마 지도 벨리즈 지도 엘살바도르 지도 온두라스 지도 자메이카 지도 캐나다 지도 코스타리카 지도 쿠바 지도 파나마 지도       ■ 아프리카   가나 지도 감비아 지도 나미비아 지도 남아프리카공화국 지도 마다가스카르 지도 말라위 지도 모로코 지도 모리셔스 지도 모잠비크 지도 보츠와나 지도 부르키나파소 지도 세네갈 지도 세이셸 지도 스와질란드 지도 에티오피아 지도 오만 지도 우간다 지도 이집트 지도 잠비아 지도 짐바브웨 지도 카메룬 지도 케냐 지도 케이프 베르데 지도 탄자니아 지도 튀니지 지도     ■ 오세아니아 뉴질랜드 지도 뉴칼레도니아 지도 미크로네시아 지도 사모아 지도 솔로몬제도 지도 쿡 아일랜드 지도 키리바시 지도 팔라우 지도 폴리네시아 지도 피지 지도 호주 지도     유럽 지도 -고지도 [출처] [펌] 세계지도 - 국가별 지도|작성자 수위
214    세계 각 나라 國歌들 댓글:  조회:6429  추천:0  2015-02-13
각국의 국가 모음 〈그리스〉《예리한 칼날에》는 D.솔로모스 작사에 N.만토차로스가 작곡한 것으로 1863년 국가로서 제정되었다. 〈네덜란드〉《빌헬무스 판 나소우베:Wilhelmus van Nassouwe》와 《네덜란드인의 피에 끓는 것》의 2곡이 있다. 전자는 수백 년 전부터 불려오던 민요로서 네덜란드의 빌헬무스왕의 원정담을 노래한 것이다. 후자는 1830년 벨기에와의 독립전쟁 때 H.토렌스가 지은 가사에 J.빌무스가 곡을 붙인 것이다.  〈노르웨이〉《우리가 사랑하는 산의 나라:Ja, vi elsker dette Landet》는 노르웨이의 영광된 역사를 노래한 것으로, 1859년에 씌어진 B.뵈른슨의 시에 1864년 R.노르다크가 작곡하여 붙인 것이다.  〈덴마크〉 《크리스찬왕은 돛대 위에 서서:Kong Christian stod ved høien mast》는 옛 민요를 바탕으로 J.하르트만이 작곡하였으며, 1776년경에 국가로 제정되었다. 〈독일〉 《세계에 군림하는 독일:Deutschland über Alles》이라는 곡은 하이든이 작곡한 옛 오스트리아 국가의 선율에 1841년 H.파렐르스레벤이 가사를 붙인 것이다. 1920년에 국가로 제정되어 히틀러 치하에서도 불리었으나, 1952년부터는 그 중에서 제3절 〈통일과 권리와 자유〉만을 부르기로 결정하였다. 〈러시아〉 제정(帝政)러시아 때는 주코프스키가 작사하고, 표드로비치가 작곡한 국가가 있었다. 그리고 소련시대에는 공모한 작품 중에서 미하르코프 및 에리레기스턴의 가사와, 적군합창단 지휘자 알렉산드로프의 곡이 당선되어 새 국가로 제정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러시아연방은 M.글링카가 작곡한 《애국자의 노래》를 국가로 하고 있다.  〈멕시코〉 《조국에 평화를:Cina! Oh patria! tus siènes de oliva》와 《멕시코의 용사들 :Méxicanos, al Grito de Guerra》의 2곡이 있다. 전자는 1958년 X.G.보카네그로가 작곡한 것이고, 후자는 J.누뇨가 작곡한 것으로 이는 공모에 당선된 곡이다. 〈미국〉《성조기:The Star-Spangled Banner》는 1814년 영국-미국전쟁 때 교섭을 위하여 영국 군함을 방문했던 F.S.키가, 요새에 휘날리고 있던 성조기를 보고 감격하여 시를 지었다. 곡은 영국의 J.S.스미스의 축배의 노래 《천국의 아나크레온》에서 인용하였다. 19세기부터 애국가로서 불리기 시작했으며, 선율은 푸치니의 가극 《나비부인》에서도 인용되고 있다. 1918년 정식 국가로 제정되었다. 〈벨기에〉《브라방의 노래:La Brabanonne》는 1830년대 네덜란드혁명전쟁 때 벨기에측 브라방출신자들의 군가로서 작사는 주느발이, 작곡은 칸프누가 하였다. 작사자는 이 전쟁에서 전사하였으며, 그 후 1860년에 로디에 의해 평화적인 가사로 개작되었다. 〈브라질〉《고요한 이피랑가의 강변에:Ouviram do Ypiranga as margens placidas》는 O.D.에스트라다 작사에, 페드로 2세의 궁정음악가였던 F.M.다시르바가 작곡한 것이다. 조국을 찬양한 웅대한 느낌을 주는 곡이다. 〈스웨덴〉《우리의 참마음》은 군주에 대한 충성을 노래한 것으로, K.W.A.슈투란드베리 작사에 J.O.린드프라드가 곡을 붙였다. 〈스위스〉《독립의 산이여:O monts indépendants》(프랑스어)와 《외쳐라 나의 조국:Rufst du, mein Vaterland》(독일어)이 국가로서 불리어 왔다. 곡은 영국 국가와 똑같다. 그러나 요즘은 L.위드마 작사에 A.츠비히 작곡의 곡이 불리고 있다. 〈아르헨티나〉《조국행진곡:Marcha de la Partia》은 V.L.플라네스 작사에 B.파레라가 작곡한 것이다. 1813년 혁명 당시에 애창되고, 1900년 정식으로 국가로 제정되었다. 〈에스파냐〉《왕의 행진곡:Marche Real》은 무명의 독일인 작곡가에 의해 씌어진 기악행진곡으로 1770년 카를로스 3세에 의해 국가로 제정되었다. 1931년의 공화정 이래 대령 리에고 작사, 헤르타 작곡으로 알려진 웅장한 《리에고의 노래:Himno de Riego》가 국가로 불리었으나, 프랑코정권의 등장으로 다시 《왕의 행진곡》이 불리게 되었다.  〈영국〉《신이여 여왕(왕)을 구하소서:God save the Queen(King)》는 영국의 시인이며 작곡가인 헨리 케어리가 지었다는 설이 있으나 확증은 없다. 1745년 영국왕립극장에서 연주된 이후 국가로서 널리 불리었다. 간결·장중한 명곡으로 세계 국가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19세기에는 약 20개국이 국가로서 이 선율을 인용하였으며, 미국에서도 1831년 이래 《아메리카》라는 가사로 준국가로서 불리었다. 베토벤, 베버, 브람스 등의 작품 가운데도 이 선율이 쓰였다. 〈오스트레일리아〉영국연방의 하나로 국가는 영국과 같다. 국민의 노래로는 《축복하라 국민이여》와 《왈칭 마틸다》가 애창되고 있다.  〈오스트리아〉《산의 나라, 강의 나라:Land der Berg, Land am Strom》는 여류시인 P.프레라드빅의 시에 모차르트의 《프리메이슨을 위한 칸타타》의 1부인 〈단결의 노래〉의 곡을 붙인 것이다. 1946년 하이든이 작곡한 옛 국가가 폐지되고 새로운 국가로 제정되었다. 구(舊) 왕정시대에는 1797년 하이든이 작곡한 《신은 우리의 황제를 수호하다》가 국가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왕정이 없어지자 폐지되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옛 국가의 선율에 다른 가사를 붙여 부르기도 하였다. 〈이스라엘〉 《희망》은 시온과 예루살렘의 자유를 찬양한 노래로 N.H.임페르 작사에 S.코엔이 작곡한 장중한 곡이다. 1897년 제l회 국제시오니스트회의에서 국가로 제정되었다.  〈이탈리아〉《마멜리 찬가(이탈리아의 형제들이여):Inno di Mameli》는 이탈리아의 애국시인 G.마멜리가 1848년 장군 가리발디 휘하의 용병으로 참가했을 때 쓴 시에다 G.베르디가 작곡을 하였다. 이탈리아가 통일국가를 이룩했던 1861∼1922년까지는 G.가베티 작곡의 가사가 없는 《황제행진곡》이 국가였다. 그러나 1922년 파시스트당(黨)이 정권을 장악한 후부터는 당가(黨歌) 《조비네차》가 국가로 불리었고, 제2차 세계대전 후 1946년 이탈리아공화국이 되면서부터 다시 《마멜리 찬가》가 국가로 부활되었다.  〈인도〉《인도의 아침:Jana Gana Mana》은 인도의 시인 R.타고르가 작사하였고, H.무릴이 작곡한 것이다. 선율은 인도 고래의 라가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인도네시아〉《대인도네시아:Indonesia Raja》는 작사자가 미상이며, 가사는 3절이고, 작곡은 W.R.스프라트만이 하였다. 장음계의 웅장한 행진곡이다.  〈일본〉《기미가요:君が代》 가사는 9세기경부터 알려진 와카[和歌]이며, 1880년 궁내성 악사 하야시[林廣守]가 작곡하였다.  〈중국〉《의용군행진곡(義勇軍行進曲)》은 1932년 톈한[田漢]이 작사하고 녜얼[隔耳]이 작곡한 것으로 1949년 국가로 제정되었다.  〈캐나다〉국가는 영국과 같으나 캐나다의 상징인 단풍을 노래한 《단풍이여 영원히》가 애창되고 있다. 작사 ·작곡 모두 A.밀이 하였다. 또 국민의 노래로서 A.루시아 작사에 C.라파리가 작곡한 《오 캐나다》가 널리 불리고 있다.  〈터키〉《독립행진곡:Istiklâl marsi》은 M.A.에르소이 작사에 Z.융겔이 작곡한 것으로, 1921년 국민의회에서 정식으로 국가로 제정되었다. 탱고풍의 곡이다. 〈페루〉《길고 고통스러운 날:Largo timpo el peruano oprimido》은 1821년 공모에 T.우가르티가 작사하고 J.B.알세도가 작곡한 곡이 채택되었으나, 1869년 가사와 곡이 다같이 일부 개작되었다. 《라 마르세예즈》와 비슷한 데가 있는데 자유를 찬양하고 있다.  〈폴란드〉《다블로스키의 마주르카》는 1794년 독립혁명 전의 지도자였던 장군 다블로스키를 찬양하여 우이비츠키가 가사를 만들고, 거기에 M.K.오긴스키가 곡을 붙인 것이다. 폴란드 무곡양식의 노래로 애국가로서 널리 애창되어 오다가, 1945년 통일정부의 수립과 더불어 정식 국가로 제정되었다.  〈프랑스〉《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는 프랑스혁명 직후인 1792년 4월 독일 등의 연합군이 프랑스를 침공하려 했을 때, 알자스지방의 스트라스부르에 주둔하고 있던 공병대위 루제 드 릴이 작사·작곡한 행진곡이다. 이 노래는 곧 프랑스 각지에 널리 보급되었고, 마르세유에서 올라온 의용군 대대가 이 노래를 부르면서 그 해 7월 파리에 입성, 8월에 튈르리궁전을 습격한 데서 ‘라 마르세예즈’라는 이름이 붙었다. 선율은 차이코프스키의 관현악곡 《1812년》, 슈만의 가곡 《두 사람의 척탄병》에서 인용되었다.  〈핀란드〉《찬양하라, 조국을:Maame》은 1846년 J.L.루네베뤼가 가사를 짓고, 1848년 F.파시우스가 곡을 붙였다. 핀란드어와 스웨덴어로 된 2가지 가사가 있다. 〈필리핀〉《애국행진곡》은 1898년 독립전쟁의 지도자였던 아기날도가 J.펠리페에게 작곡하게 한 것으로, 독립선언일에 연주되고 이듬해 애국시인 J.팔마가 가사를 붙였다. 미국 통치시대에는 영어로 된 가사가 쓰였으나, 지금은 팔마가 에스파냐어로 쓴 가사로 불린다.  〈헝가리〉《힘루츠(찬가)》는 F.케르체이 작사에 F.에르켈이 작곡한 것이다.    [출처] [펌] 각국의 국가|작성자 수위
213    세계 각 나라 국기들 댓글:  조회:5906  추천:0  2015-02-13
세계 각국의 국기와 국가             Albania Argentina Armenia Australia Austria Azerbaijan     Belarus Belgium Bolivia Brazil Bulgaria Burma Cameroon Canada Chile China Costa Rica Croatia Cuba Czech Denmark Ecuador Egypt Ethiopia Europe Union Finland Falkland France Germany Greece Hungary Iceland India Indonesia Iran Iraq Ireland Israel Italia Japan Korea Lebanon Libya Malta Mexico Moldova Mongolia Morocco Nepal Netherlands New Zealand Nigeria North Korea Norway Pakistan Paraguay Peru Philippine Poland Portugal Romania Russia Saudi Arabia Senegal Slovenia Slovakia   Singapore South Africa Soviet Union Spain Sudan Sweden Switzerland Taiwan Thailand Tunisia Turkey UK     Uruguay USA Uzbekistan Venezuela     [출처] [펌] 세계 각국의 국기와 국가|작성자 수위
212    애송시선 7 댓글:  조회:4854  추천:0  2015-02-13
---------------------------------------------------------------------      한국인의 애송시 I           제1권   편집고문:서정주, 조병화, 이어령   펴낸이:장석주   펴낸곳:청하 출판사   발행일:1985년 7월 25일   묵자책의 페이지:437   점자책의 페이지:   입력기간:1992년 2월 15일   입력 및 교정자:임종욱   제작:부산맹인점자도서관       차례   서문   작고시인 61인선   한용운   님의 침묵   나룻배와 행인   꽃싸움   최남선   해에게서 소년에게   봄길   이병기   난초   아차산   오동꽃   이광수   붓 한 자루   서울로 간다는 소   김억   봄바람   삼수갑산   오상순   첫날밤   남궁벽   말   황석우   소녀의 마음   초대장   노자영   불 사루자   변영로   논개   김형원   벌거숭이의 노래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의 침실로   주요한   불놀이   빗소리   샘물이 혼자서   홍사용   나는 왕이로소이다   김동명   파초   내 마음은   김동환   산너머 남촌에는   북청 물장수   강이 풀리면   박영희   유령의 나라   박종화   청자부   백기만   청개구리   은행나무 그늘   심훈   그날이 오면   밤   오일도   5월의 화단   김상용   남으로 창을 내겠소   향수   김소월   진달래꽃   산유화   초혼   엄마야 누나야   금잔디   접동새   못잊어   가는 길   왕십리   가막 덤불   풀따기   이장희   봄은 고양이로다   청천의 유방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오-매 단풍 들것네   내 마음을 아실 이   양주동   산길   산 넘고 물 건너   나는 이 나랏 사람의 자손이외다   이은상   가고파   박용철   떠나가는 배   고향   눈은 내리네   이육사   청포도   광야   일식   절정   자야곡   꽃   호수   황혼   김광섭   성북동 비둘기   저녁에   신석정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   산수도   추석   임께서 부르시면   유치환   깃발   바위   생명의 서   그리움   의주ㅅ 길   춘신   신석초   고풍   바라춤   이상   거울   꽃나무   절벽   오감도 15호   김용호   주막에서   눈오는 밤에   이호우   개화   난   살구꽃 핀 마을   김현승   눈물   플라타너스   가을의 기도   절대고독   노천명   사슴   남사당   이름없는 여인이 되어   장만영   달, 포도, 잎사귀   비   소쩍새   길 손   박목월   나그네   윤사월   청노루   산도화   산이 날 에워싸고   우회로   난   이영도   백록담   함형수   해바라기의 비명   윤동주   서시   별 헤는 밤   참회록   십자가   자화상   또 다른 고향   조향   Episode   허민   산록기   김종문   샤보뎅   첼로를 켜는 여인   의자   한하운   보리피리   여인   이동주   강강수월래   혼야   조지훈   승무   고풍의상   완화삼   김수영   풀   달나라의 장난   폭포   눈   김종삼   북치는 소년   그리운 안니, 로, 리   시인학교   한성기   역   공중인   설야의 장   박용래   강아지풀   월훈   풀꽃   저녁 눈   황산메기   겨울밤   이인석   도척의 개   송욱   장미   개의 이유   구자운   청자수병   우리들은 샘물에   박인환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김관식   옹손지   연   거산호   이경록   이 식물원을 위하여 5     원로, 중견 85인선 I   강계순   안개속에서   강민   비가 내린다   강우식   사행시초   타는 사랑은   강인환   귀   고원   모나리자의 손   고은   문의 마을에 가서   신해가사   투망   삶   화살   조국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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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영란   초야   노향림   가을편지   마종기   연가 9   연가 12   마종하   비가   배꽃이 피면   모윤숙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문덕수   꽃과 언어   손수건   문병란   코카콜라   폐염전   문충성   이어도   제주바다 1   민영   냉이를 캐며   민재식   밤에 산엘   박경석   졸본꾀꼬리   박근영   동정의 시   박남수   새   종소리   박두진   해   도봉   묘지송   청산도   꽃   당신의 사랑 앞에   박봉우   휴전선   눈길 속의 카츄사   박성룡   교외   바람 부는 날   풀잎   박의상   풍뎅이   아내와 함께   박이도   나의 형상   바람의 손 끝이 되어   박이문   내 꿈속의 나비는   박재륜   편지   박재릉   서울   박재삼   울음이 타는 가을 강   아득하면 되리라   어떤 귀로   천년의 바람   자연   가난의 골목에서는   박정온   차에서   박정희   술래의 편지   박제천   장자시   사기등잔과 함께   박태진   무교동       를 펴내면서   이 시선집은 그 제목이 시사하고 있듯이 최남선, 이광수, 등의 신문학기 이후의 작고 시인으로부터 80년대의 신예 시인까지를 포괄하여 애송될 만한 작품들을 선정 수록한 책이다. 이 책의 기획 의도는 오늘의 사회 전반을 침식, 부패시키는 불건강한 정서의 오염을 막고, 시적 정화와 의식의 혁신을 불러 일으키는 범문화적인 새바람을 일으키는 시의 애송을 생활화하고, 그에 따라 시정신이 주도하는 문화풍토를 조성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 우리는 거대한 도시산업화 속의 획일화, 집단화, 익명화라는 변화지향의 압력 속에서 살고 있다. 이 압력은 인간의 고유한 창조적 자아의 근거와 기반마저 위협하는 폭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때 시는 혼의 울림을 일으키는 넋의 어휘로서, 비인간화된 세계의 비인간적 힘에 굴복하여 박제화된 자아가 상실한 역동적 자유로움을 회복하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시적 명상과 사고는 삶과 그 삶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의미와 본질을 날카롭게 일깨워줄 뿐만 아니라, 존재의 충실에 이르게 한다는 점에서 그 값을 더하고, 그 빛을 더 밝게 한다.   일찌기 한 시인은 시작행위를 ^6 236^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356 3^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라는 표현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시인들의 삶과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하려는 진정성의 밀도이다. 위대한 시인들은 바로 그러한 진정성의 밀도 속에 민족적 삶의 결을 담아 노래하려고 애써 왔다. 따라서 나날의 삶의 무의미하고 시시콜콜한 반복과 지리멸렬을 넘어서는 삶의 본질적인 국면 속에 깃들어 있는 궁국적 의미와 가치를 묻고 캐내는 시인들의 창조적인 작업은 그 자체로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 그것은 시대의 혼란 속에 묻혀 흔히 간과되기 쉬운 진실의 전체성을 드러내는 작업으로, 마음에 새길 만한 민족적 자산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여기 의 시편들의 하나하나는 시인들의 살아 있는 얼과 뜻이 응축되어 있는 삶의 공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작업은 1984년 여름에 처음 시작되었다. 애송시의 선정이라는 주관적 작업이 빠질 수 있는 객관성의 결핍을 보완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지혜를 짜내 그에 따라 단계적으로 작업을 진행시키느라 많은 시간이 소모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먼저 KBS 방송국의 전국 애청자 1,296명을 대상으로 집계한 자료를 받아 일반의 애송시에 대한 기초자료를 만들 수 있었다. 여기에 서울의 10개 대학과 지방의 15개 대학의 국문과 학생들에게 조사한 설문지를 기준으로 하여 조금더 정밀한 기초자료를 작성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우리의 기대에 흡족할 만한 애송시 목록을 만들어낼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다시 금년 1월에 시인 150분의 명단을 작성하고, 애송시로 낭송될 만한 1) 1950년 이전에 발표된 시 10편과, 2) 1950년 이후 발표된 시 10편을 추천해 달라는 설문지를 발송하였고, 설문의 내용이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까다로웠음에도 불구하고 82P의 회답을 얻었으며, 이 결과 의 전체적인 윤곽을 붙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다시 현역시인 거의 모든 분들에게 의 기획의도를 밝히고, 거기에 수록할 만한 자천 시와 간단한 시인의 이력, 시적 경향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을 협조받았다. 그 작업의 번거로움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분들이 빠짐없이 자료를 보내주셔서, 우리는 그 자료를 토대로 최종적인 마무리 작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렇게하여 최종적으로 집계된 시인들은 319분이었고 작품은 무려 599편이나 되는 방대한 책으로 묶여지게 된 것이다. 이것을 다시 3부로 나누었는데 1부에서는 작고 시인 61분의 161편의 시를, 2부에서는 1945년도까지 출생한 시인 210분의 356편의 시를, 그리고 3부에서는 1945년도 이후에 출생하여 1979년도까지 문단에 등단한 시인 48분의 82편의 시를 2권으로 나누어 로 묶은 것이다. 시인들의 순서에는 1부에서는 작품활동 연대를 기준으로 했고, 2부와 3부에서는 가나다 순으로 했음을 덧붙여 밝혀둔다.   워낙 많은 시인들의 시편을 다루었기 때문에 다소 무리한 점도 있었다. 예를들면 3부로 작품을 나누는 작업에서 중견과 신예시인을 구분함에 있어 출생연도에 비해 등단연도가 좀 늦었거나 빨랐을 경우 과연 중견과 신예를 출생연도에만 기준으로 한다는 것이 적절한 것인가, 그리고 객관적 형평의 원칙이 지켜져야 할수록 시인을 선정하는 점에서, 시인별 수록 작품 편수를 결정하는 점에서 우리의 편견은 얼마나 잘 억제되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끝으로 를 만드는 진행 과정에서 조언과 협조를 아끼지 않은 여러분들의 성함을 일일이 밝혀 고마움을 표하지 못하는 우리의 게으름도 용서를 구한다.   1985년 5월 10일   편집고문   서정주. 조병화. 이어령.          작고시인 61인선     한용운. 1879 - 1944. 충남 홍성 출생. 호는 만해. 3.1운동 당시 불교계 민족 대표 중의 한 사람. 타고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시작 전편을 통해 불교적인 사상이 개진되고 있다.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개혁자로서 또한, 위대한 민족 운동가로서 실천한 민족시인이었다. 시집으로 과 소설 및 저서 이 있다.      님의 침묵   님은 갔읍니다. 아아 나의 사랑하는 님은 갔읍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읍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 갔읍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읍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 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읍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 부었읍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읍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나룻배와 행인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았읍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읍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꽃 싸움   당신은 두견화를 심으실 때에 꽃이 피거든 꽃싸움하자고 나에게 말하였읍니다.   꽃은 피어서 시들어가는데  당신은 옛 맹세를 잊으시고 아니 오십니다.   나는 한 손에 붉은 꽃수염울 가지고 한 손에 흰 꽃수염을 가지고   꽃 싸움을 하여서 이기는 것은 당신이라 하고 지는 것은 내가 됩니다.   그러나 정말로 당신을 만나서 꽃싸움을 하게 되면 나는 붉은 꽃수염울 가지고 당신은 흰 꽃수염을 가지게 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나에게 번번히 지십니다.   그것은 내가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나에게 지기를 기뻐하는 까닭입니다.   번번히 이긴 나는 당신에게 우승의 상을 달라고 조르겠읍니다.   그러면 당신은 빙긋이 웃으며 나의 뺨에 입맞추겠읍니다.   꽃은 피어서 시들어 가는데 당신은 옛 맹세를 잊으시고 아니오십니다.     최남선. 1890 - 1957. 서울 출생이며 호는 육당.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수학 했고 신문화 운동의 선구자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학 잡지 외에 등을 발간. 개화기 문화운동에 공이 크며 기미독립 선언문을 기초하기도 한 신문학 3대 천재 중 한분. 주요 저서로는 등이 있다.      해에게서 소년에게   1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따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태산같은 높은 뫼 집채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따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처얼썩 처얼썩 척 튜르릉 콱.   2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내게는 아무것 두려움 없어   육상에서 아무런 힘과 권을 부리던 자라도   내 앞에 와서는 꼼짝 못하고   아무리 큰 물결도  내게는 행세하지 못하네.   내게는 내게는 나의 앞에는   처얼썩  처얼썩 척 튜르릉 콱.      3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나에게 절하지 아니한 자가   지금까지 있거든 통기하고 나서 보아라.   진시황 나팔륜 너희들이냐.   누구 누구 누구냐 너희 역시 내게는 굽히도다.   나하고 겨룰 이 있건 오너라.   처얼썩 처얼썩 척 튜르릉 콱.   4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조그만 산 모를 의지하거나   좁쌀같은 작은 섬 손벽만한 땅을 가지고   그 속에 있어서 영악한 체를   부리면서 나 혼자 거룩하다 하는 자   이리 좀 오너라 나를 보아라.   처얼썩 처얼썩 척 튜르릉 콱.   5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나의 짝 될 이는 하나 있도다.   크고 깊고 너르게 뒤덮은 바 저 푸른 하늘   저것은 우리와 틀림이 없어   작은 시비 작은 쌈 온갖 모든 더러운 것 없도다.   저 따위 세상에 저 사람처럼   처얼썩 처얼썩 척 튜르릉 콱.   6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저 세상 저 사람 모두 미우나   그 중에서 똑 하나 사랑하는 일이 있으니   담 크고 순진한 소년배들이   재롱처럼 귀엽게 나의 품에 와서 안김이로다.   오너라 소년배 입맞춰 주마.   처얼썩 처얼썩 척 튜르릉 콱.      봄 길   버들잎에 구는 구슬 알알이 짙은 봄빛,   찬 비라 할지라도 임의 사랑 담아 옴을   적시어 뼈에 스민다 마달 수가 있으랴.   볼 부은 저 개구리 그 무엇에 쫓겼관대   조르르 젖은 몸이 논귀에서 헐떡이나.   떼봄이 쳐들어 와요, 더위 함께 옵데다.   저 강상 작은 돌에 더북할쏜 푸른 풀을   다 살라 욱대길 제 그 누구가 봄을 외리.   줌만한 저 흙일망정 놓쳐 아니 주도다.     이병기. 1891 - 1968. 전북 익산 출생이며, 한성 사범을 졸업했다. 호는 가람. 1927년 에 시조 '고향으로 돌아갑시다'를 발표하여 문단 활동을 시작했고, 의 일원으로서 시조 부흥에 기여했다. 저서로는 시조집 등과 등이 있다.      난초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줏빛 굵은 대공 하얀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미진도 가까이 않고 우로 받아 사느니라.      아차산   고개 고개 넘어 호젓은 하다마는   풀섶 바위 서리 빨간 딸기 패랭이꽃.   가다가 다가도 보며 휘휘한 줄 모르겠다.   묵은 기와쪽이 발끝에 부딪히고,   성을 고인 돌은 검은 버섯 돋아나고,   성긋이 벌어진 틈엔 다람쥐나 넘나든다.   그리운 옛날 자취 물어도 알 이 없고,   벌건 메 검은 바위 파란 물 하얀 모래,   맑고도 고운 그 모양 눈에 모여 어린다.       오동꽃   담머리 넘어드는 달빛은 은은하고    한두 개 소리 없이 내려지는 오동꽃을   가랴다 발을 멈추고 다시 돌아보노라.     이광수. 1892 - ?. 평북 정주 출생. 호는 춘원.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 중퇴. 와세다 시절 우리나라 최초의 장편소설 '무정'을 발표하는 등 육당과 더불어 우리나라 신문화 여명기의 개척자. 시집으로 이 있으며, 6.25 때 납북되어 생사불명.      붓 한 자루   붓 한 자루   나와 일생을 같이 하란다.   무거운 은혜   인생에서 얻은 갖가지 은혜,   언제나 갚으리   무엇해서 갚으리 망연해도   쓰린 가슴을   부둠고 가는 나그네 무리   쉬어나 가게   내 하는 이야기를 듣고나 가게.   붓 한 자루야   우리는 이야기나 써볼까이나.      서울로 간다는 소   깍아 세운 듯한 삼방 고개로   누른 소들이 몰리어 오른다.   꾸부러진 두 뿔을 들먹이고   가는 꼬리를 두르면서 간다.   움머움머 하고 연해 고개를   뒤로 돌릴 때에 발을 헛짚어,   무릎을 꿇었다가 무거운 몸을   한 걸음 올리고 또 돌려 움머.   갈모 쓰고 채찍 든 소장사야   산길이 험하여 운다고 마라.   떼어두고 온 젖먹이 송아지   눈에 아른거려 우는 줄 알라.   삼방 고개 넘어 세포 검불령   길은 끝없이 서울에 닿았네.   사람은 이 길로 다시 올망정   새끼 둔 고산 땅, 소는 다시 못 오네.   안변 고산의 넓은 저 벌은   대대로 네 갈던 옛터로구나.   멍에에 벗겨진 등의 쓰림은   지고 갈 마지막 값이로구나.     김억. 1893 - ?. 평북 곽산 출생.호는 안서. 19때에 시 '미련' '이별' 등을 발표하여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동인으로 활약하면서 프랑스의 상징파 시운동을 소개한 (1921)와 근대 최초의 개인 시집인 (1923)를 내어 신시 운동의 선구자로 이바지했다. 김소월의 스승이기도 한 그는 이 땅의 자유시, 서정시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치었고 한글시에 압운을 주장, 정형시를 시도하기도 했으나 6.25때 이북으로 납치되었다. 저서로는 등이 있으며 의 편자로서도 알려져 있다.      봄바람   하늘 하늘   잎사귀와 춤을 춤니다.   하늘 하늘   꽃송이와 입맞춥니다.   하늘 하늘   어디론지 떠나갑니다.   하늘 하늘   떠서 도는 하늘 바람은   그대 잃은   이 내 몸의 넋들이외다.      산수갑산   삼수갑산 가고지고   삼수갑산 어디메냐   아하 산첩첩에 흰구름만 쌓이고 쌓였네.   삼수갑산 보고지고   삼수갑산 아득코나   아하 촉도난이 이보다야 더할소냐.   삼수갑산 어디메냐   삼수갑산 내 못가네   아하 새더라면 날아 날아 가련만도.   삼수갑산 가고지고   삼수갑산 보고지고   아하 원수로다 외론 꿈만 오락가락.     오상순. 1894 - 1963. 서울 출생. 호가 공초인 그는 동인으로 문단에 데뷔(1920)했다가 일제시에는 절필, 해방후 다시 붓을 들어 허무와 명상의 구도적 작품을 다수 발표했다. 중앙고보, 보성고보 등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고 각지의 사원을 두루 다니며 참선의 생활도 했다. 1962년 을 수상했고, 시집으로 (1963)이 있다.      첫날밤   어어 밤은 깊어   화촉동방의 촛불은 꺼졌다.   허영의 의상은 그림자마저 사라지고...   그 청춘의 알몸이   깊은 어둠 바다 속에서   어족인 양 노니는데   홀연 그윽히 들리는 소리 있어,   아야... 야!   태초 생명의 비밀 터지는 소리   한 생명 무궁한 생명으로 통하는 소리   열반의 문 열리는 소리   오오 구원의 성모 현빈이여!   머언 하늘의 뭇 성좌는   이 빰을 위하여 새로 빛날진저!   밤은 새벽을 배고   침침히 깊어 간다.     남궁벽. 1895 - 1922. 평북 함열 출생. 호는 초몽. 서울 한성고보를 졸업하고 도일하여 동인으로 참가하여 자연의 생명을 예찬한 낭만적 경향의 작품들을 발표했다. '신뢰'^별의 아픔' 등이 유작시로 발표되었다.      말   말님.   나는 당신이 웃는 것을 본 일이 없읍니다.   언제든지 숙명을 체관한 것 같은 얼굴로   간혹 웃는 일은 있으나   그것은 좀처럼 하여서는 없는 일이외다.   대개는 침묵하고 있읍니다.   그리고 온순하게 물건을 운반도 하고   사람을 태워 가지고 달아나기도 합니다.   말님, 당신의 운명은 다만 그것뿐입니까.   그러하다는 것은 너무나 섭섭한 일이외다.   나는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의 악을 볼 때   항상 내세의 심판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같이   당신의 은명을 생각할 때   항상 당신도 사람이 될 때가 있고   사람도 당신이 될 때가 있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황석우. 1895 - 1958. 서울 출생이며, 호는 상아탑. 동인으로 활동, 문단에 데뷔(1915). 난해한 상징시로 서구 상징시의 선구자로 불리워졌으나 '장미촌' 시대에는 낭만주의로 전환하여 낭만주의 시인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 전문지 과 (1922) 발간. 조선일보 기자, 국민대 교무처장 등을 역임했고, 저서로 (1929)이 있다.      소녀의 마음   소녀의 마음은 봄잔디 풀!   그는 밟으면 으크러지고    그는 불대면 터진다.   소녀의 마음은 유리 풍경   그는 바람 부딪치면 울리고   그는 내던지면 깨진다.      초대장   꽃동산에서 산호탁을 놓고   어머님께 상장을 드리렵니다.   어머님께 훈장을 드리렵니다.   두 고리 붉은 금가락지를 드리렵니다.   한 고리는 아버지 받들고   한 고리는 아들딸, 사랑의 고리   어머님이 우리를 낳은 공로훈장을 드리렵니다.   나라의 다음가는 가정상, 가정훈장을 드리렵니다.   시일은 ^6 236^어머니의 날^356 3^로 정한   새 세기의 봄의 꽃.   그 날 그 시에는 어머님의 머리 위에   찬란한 사랑의 화환을 씌워 주세요.   어머님의 사랑의 공덕을 감사하는 표창식은   하늘에서 비가 오고 개임을 가리지 않음이라.   세상의 아버지들, 어린이들   꼭, 꼭, 꼭, 와 주세요.   사랑의 용사,   어머니 표훈식에 꼭 와 주세요.     노자영. 1898 - 1940. 호는 춘성.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시집 을 간행하기도 했다. 을 직접 주재하기도 했고, 평론집 를 간행했다. 그의 작품 세계는 감상적인 연정에 바탕을 둔  서정주의적 세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불 사루자   아, 빨간 불을 던지라, 나의 몸 위에   그리하여 모두 태워 버리자   나의 피, 나의 뼈, 나의 살!   자아를 모두 태워 버리자!   아, 강한 불을 던지라, 나의 몸 위에   그리하여 모두 태워 버리자   나의 몸에 붙어 있는 모든 애착, 모든 인습   그리고 모든 설움 모든 아픔을   자아를 모두 태워  버리자.   아, 횃불을 던지라, 나의 몸 위에   그리하여 모두 태워 버리자   나의 몸에 숨겨 있는 모든 거짓, 모든 가면을   오 그러면 나는 불이 되리라   타오르는 불꽃이 되리라   그리하여 불로 만든 새로운 자아에 살아 보리라.   불 타는 불, 나는 영원히 불나라에 살겠다   모든 것을 사루고, 모든 것을 녹이는 불나라에 살겠다.     변영로. 1898 - 1961. 서울 출생. 호는 수주. 미국 산호세 대학 졸업 후 동아일보, 이화여전, 성균관대 교수 역임. 동인으로 활동. '정신계의 생명은 영원히 산다^356 3^는 사상으로 알려져 있다. 제1회 을 수상(1948)했고, 시집으로는 (1924)과 영문시집 등 다수를 발표하였다.      논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렬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이릿땁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 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훈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김형원.1901 - ?. 충남 강경 출생. 호는 석송. 보성고보 중퇴. 1920년대에 문단에 데뷔하여 에 미국의 민중 시인 휘트먼을 소개하였으며, 민중, 민족주의적인 긍정적 세계를 지향하는 시들을 발표하였다. 시집으로 등이 있다. 6.25때 이북으로 피납되었다.      벌거숭이의 노래     1   나는 벌거숭이다.   옷같은 것은 나에게 쓸 데 없다.   나는 벌거숭이다.   제도 인습은 고인의 옷이다.   나는 벌거숭이다.   시비도 모르는, 선악도 모르는.   2   나는 벌거숭이다. 그러나 나는   두루마기까지 갖추어 단정히 옷을 입은   제도와 인습에 추파를 보내어 악수하는   썩은 내가 몰씬몰씬 나는 구도덕에 코를 박은,   본능의 폭풍 앞에 힘없이 항복한 어린 풀이다.   3   나는 어린 풀이다.   나는 벌거숭이다.   나에게는 오직 생명이 있을 뿐이다.   태양과 모든 성신이 운명하기까지,   나에게는 생명의 감로가 내릴 뿐이다.   온 누리의 모든 생물들로 더불어,   나는 영원히 생장의 축배를 올리련다.   4   그리하여 나는 노래하려 한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감투를 쓴 사람으로부터   똥통을 우주로 아는 구더기까지.   그러나 형제들아,   내가 그대들에게 이러한 노래를   (모순되는 듯한 나의 노래를)   서슴지 않고 보내는 것을 기뻐하라.   새로운 종족아! 나의 형제들아!   그대들은 떨어진 옷을 벗어던지자.   절망의 어둔 함정을 벗어나고자 힘을 쓰자.   5   강장한 새로운 종족들아!   아침 해는 금 노을을 친다.   생장의 발은 아직도 처녀이다.   개척의 괭이를 들었느냐?   핏기 있는 알몸으로 춤을 추며,   굳세인 목소리로 합창을 하자-   6   나는 벌거숭이다.   우리는 벌거숭이다.   개성은 우리가 뿌릴 ^6 236^생명의 씨^356 3^이다.   우리의 밭에는 천재자변도 없다.   우리는 오직 어린 풀과 함께   햇빛을 먹고 마시고 입고,   길이길이 노래만 하려 한다.     이상화. 1900 - 1941. 경북 대구 출생. 호는 상화. 일본 동경 외국어학교 불어과 졸업. 월탄, 팔봉 등과 를 창간(1921). 중국대륙을 방랑하며 낭만적이고  상징적인 시를 썼으며, 잘 알려져 있는 '나의 침실로'는 18세때 작품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며   종달이는 울타리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다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같은 멀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쁜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도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셈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서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몸 신명이 집혔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나의 침실로   마돈나! 지금은 밤도 목거지에 다니로라 피곤하여 돌아 가련도다.   아, 너도 먼동이 트기 전으로 수밀도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 오너라.   마돈나! 오려무나, 네 집에서 눈으로 유전하던 진주는 다 두고 몸만 오너라.   빨리 가자. 우리는 밝음이 오면 어딘지 모르게 숨는 두 별이어라.   마돈나! 구석지고도 어둔 마음의 기리에서 나는 두려워 떨며 기다리노라.   아, 어느 덧 첫닭이 울고-뭇개가 짓도다. 나의 아씨여, 너도 듣느냐.   마돈나! 지난 밤이 새도록 내 손수 닦아 둔 침실로 가자, 침실로!   낡은 달은 빠지려는데, 내 귀가 듣는 발자국-오, 너의 것이냐?   마돈나! 짧은 씸지를 더우 잡고, 눈물도 없이 하소연하는 내 마음의 촛불울 봐라.   양털같은 바람결에도 질식이 되어 얕푸른 연기로 꺼지려는도다.   마돈나! 오너라, 가자. 앞산 그리매가 도깨비처럼 발도 없이 이곳 가까이 오도다.   아, 행여나 누가 볼는지-가슴이 뛰누나,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마돈나! 날이 새련다. 빨리 오려므나. 사원의 쇠북이 우리를 비웃기 전에   네 손이 내 목을 안아라. 우리도 이 밤과 같이 오랜 나라로 가고 말자.   마돈나! 뉘우침과 두려움의 외나무다리 건너 있는 내 침실, 열 이도 없으니!   아, 바람이 불도다. 그와 같이 가볍게 오려무나, 나의 아씨여, 네가 오느냐?   마돈나! 가엾어라. 나는 미치고 말았는가. 없는 소리를 내 귀가 들음은-   내 몸에 피란 피-가슴의 샘이 말라 버린 듯 마음과 몸이 타려는도다.   마돈나! 언젠들 안 갈 수 있으랴. 갈 테면 우리가 가자, 끄을려 가지 말고!    너는 내 말을 믿는 마리아-내 침실이 부활의 동굴임을 네가 알련만...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얽는 꿈, 사람이 안고 궁그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느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   마돈나! 별들의 웃음도 흐려지려 하고, 어둔 밤 물결도 잦아지려는도다.   아, 안개가 사라지기 전으로 네가 와야지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주요한. 1900 - 1979. 평남 평양 출생이며, 호는 송아. 동인으로 우리나라 신시운동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며 전원과 자연을 구가한 낭만적인 세계를 노래한 시인. 주요 작품으로는 '불놀이'(1919)가 있고, 시집 (1924)) (1929:이광수, 김동환 공저) 및 (1930)이 있다.      불놀이   아아, 날이 저문다. 서편 하늘에 외로운 강물 위에 스러져 가는 분홍빛 놀... 아아, 해가 저물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사월이라 파일 날, 큰 길을 물밀어 가는 사람 소리는 듣기만 하여도 흥성스러운 것을,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고?   아아,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시뻘건 불덩이가 춤을 춘다. 잠잠한 성문 위에서 내려다 보니, 물 냄새, 모래 냄새, 밤을 깨물고하늘을 깨물은 횃불이 그래도 무엇이 부족하여 제 몸까지 물고 뜯으며, 혼자서 어둔 가슴 품은 젊은 사람은 과거의 퍼런 꿈을 찬 강물 위에 내어던지나 무정한 물결이 그 그림자를 멀출 리가 있으랴?-아아 꺽어서 시들지 않는 꽃도 없건마는, 가신 임 생각에 살아도 죽은 이 마음이야, 에라 모르겠다. 저 불길로 이 가슴 태워 버릴까. 어제도 아픈 발 끌면서 무덤에 가 보았더니 겨울에는 말랐던 꽃이 어느 덧 피었더라마는 사랑의 봄은 또 다시 안 돌아오는가, 차라리 속 시원히 오늘 밤 이 물속에... 그런데, 행여나 불쌍히 여겨 줄 이나 있을까... 할 적에 퉁탕 불티를 날리면서 튀어나는 매화포, 펄떡 정신을 차리니 우구구 떠드는 구경꾼의 소리가 저를 비웃는 듯 꾸짖는 듯, 아아, 좀 더 강렬한 정열에 살고 싶다. 저기 저 횃불처럼 엉기는 연기, 숨막히는 불꽃의 고통 속에서라도 더욱 뜨거운 삶을 살고 싶다고 뜻밖에 가슴 두근 거리는 것은 나의 마음...   사월달 따스한 바람이 강을 넘으면 청류벽 모란봉 높은 언덕 위에 허어옇게 흐느끼는 사람떼. 바람이 와서 불적마다 봄빛에 물든 물결이 미친 웃음을 웃으니, 겁 많은 물고기는 모래 밑에 들어 박히고, 물결치는 뱃속에서 졸음오는 리듬의 형상이 오락가락-어른거리는 그림자, 일어나는 웃음소리, 달아논 등불 밑에서 목청 길게 빼는 어린 기생의 노래, 뜻밖에 정욕을 이끄는 불구경도 이제는 겹고, 한 잔 한 잔 또 한 잔 끝없는 술도 인제는 싫어, 지저분한 배 밑창에 맥없이 누우면 까닭 모르는 눈물은 눈을 데우며, 간단 없는 장구 소리에 겨운 남자들은 때때로 불 이는 욕심에 못 견디어 번득이는 눈으로 뱃가에 뛰어 나가면, 뒤에 남은 죽어가는 촛불은 우그러진 치마 깃 위에 조을 때, 뜻 있는 듯이 찌걱거리는 배젖개 소리는 더욱 가슴을 누른다...   아아, 강물이 웃는다. 괴상한 웃음이다. 차디찬 강물이 컴컴한 하늘을 보고 웃는 웃음이다. 아아, 배가 올라온다. 배가 오른다. 바람이 불 적마다 슬프게 삐걱거리는 배가 오른다.   저어라 배를, 멀리서 잠자는 능라도까지, 물살 빠른 대동강을 저어 오르라. 저기 너의 애인이 맨발로 서서 기다리는 언덕으로 곧추 뱃머리를 돌리라. 물결 끝에서 일어나는 추운 바람도 무엇이리오. 괴이한 웃음 소리도 무엇이리오. 사랑 잃은 청년의 가슴 속도 너에게야 무엇이리오. 그림자 없이는 밝음도 있을 수 없거늘-오오 다만 네 확실한 오늘을 놓치지 말라. 오오 사르라, 오늘밤! 너의 빨간 횃불을 빨간 입술을 눈동자를 또한 너의 빨간 눈물을.      빗소리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 뜰 위에 속삭입니다.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같이.   이즈러진 달이 실낱같고   별에서도 봄이 흐를 듯이   따뜻한 바람이 불더니   오늘은 이 어둔 밤을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다정한 손님같이 비가 옵니다.   창을 열고 맞으려 하여도   보이지 않게 속삭이며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뜰 위에 창 밖에 지붕에   남 모를 기쁜 소식을   나의 가슴에 전하는 비가 옵니다.      샘물이 혼자서   샘물이 혼자서   춤추며 간다.   산골짜기 돌 틈으로   샘물이 혼자서   웃으며 간다.   험한 산길 꽃사이로   하늘은 밝은데   즐거운 그 소리   산과 들에 울리운다.     홍사용. 1900 - 1947. 경기 수원 출생. 호는 노각이며, 휘문의숙을 졸업했다. 동인으로 감상적이며 애수가 어린 서정시를 발표하여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적 시인으로 불린다. 신극운동에 투신, 희곡작가로도 활동한 그는 멤버이기도 했다. 시와 수필, 회상기 등의 작품 다수를 발표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님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가장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   그러나 시왕전에서도 쫓기어난 눈물의 왕이로소이다.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며는   하겠나이다. 다른 것도 많지요마는...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며는   하겠나이다. 다른 말씀도 많지요마는...   이것은 노상 왕에게 들리어 주신 어머님의 말씀인데요.   왕이 처음으로 이 세상에 올 때에는 어머님의 흘리신 피를 몸에다 휘감고 왔더랍니다.    그 말에 동네의 늙은이와 젊은이들은 모두 고 쓸데없는 물음질로 한창 바쁘게 오고갈 때에도   어머님께서는 기꺼움보다도 아무 대답도 없이 속아픈 눈물울 흘리셨답니다.   벌거숭이 어린 왕 나도 어머니의 눈물을 따라서 발버둥질치며, '으아' 소리쳐 울더랍니다.   그날 밤도 이렇게 달이 있는 밤인데요,   으스름 달이 무리 서고, 뒷동산에 부엉이 울음 울던 밤인데요,   어머니께서는 구슬픈 옛 이야기를 하시다가요,   일없이 한숨을 길게 쉬시며 웃으시는 듯한 얼굴을 얼른 숙이시더이다.   왕은 노상 버릇인 눈물이 나와서 그만 끝까지 섦게 울어버렸오이다. 울음의 뜻은 도무지 모르면서도요.   어머니께서 조으실 때에는 왕만 혼자 울었소이다.   어머니의 지으시는 눈물이 젖 먹는 왕의 뺨에 떨어질 때이면 왕도 따라서 시름없이 울었소이다.   열 한 쌀 먹던 해 오월 열 나흗 날 밤 맨 잿더미로 그림자를 보러 갔을 때인데요, 명이나 긴가 짜른가 보랴고.   왕의 동무 장난꾼 아이들이 심술스럽게 놀리더이다 모가지 없는 그림자라고요.   왕은 소리쳐 울었소이다. 어머니께서 들으시도록, 죽을까 겁이 나서요   나뭇군의 산 타령을 따라가다가 건넛 산 비탈로 지나가는 상둣군의 구슬픈 노래를 처음 들었소이다.    그 길로 옹달 우물로 가자고 지름길로 들어서며는 찔레나무 가시덤불에서 처량히 우는 한 마리 파랑새를 보았소이다.   그래 철없는 어린 왕 나는 동무라 하고 좋아 가다가 돌부리에 걸리어 넘어져서 무릎을 비비며 울었소이다.   할머니 산소 앞에 꽃 심으러 가던 날 아침에   어머니께서는 왕에게 하얀 옷을 입히시더이다.   그리고 귀밑 머리를 단단히 땋아 주시며   아아 그 때부터 눈물의 왕은-어머니 몰래 남 모르게 속 깊이 소리 없이 혼자 우는 그것이 버릇이 되었소이다.   누우런 떡갈나무 우거진 산길로 허물어진 봉화 뚝 앞으로 쫓긴 이의 노래를 부르며 어슬렁거릴 때에   바위 밑에 돌부처는 모른 체하며 감중련하고 앉았더이다.   아아, 뒷동산 장군 바위에서 날마다 자고 가는 뜬 구름은 얼마나 많이 왕의 눈물을 싣고 갔는지요.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이로소이다.   그러나 눈물의 왕-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이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김동명. 1901 - 1968. 강원 강릉 출생. 호는 초허. 시 '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 주신다면'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923).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전원에 묻혀 참신하고 투명한 서정으로 민족의 비애를 노래한 전원파 시인. 해방후 정치와 사회에 대한 관신이 높은 참여의 시인이었으나 종교인이었던 만큼 관조적이며 철학적인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집으로는 (1938), (1947), (1957)와 수필집 (1958) 등이 있다.      파초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을 향한 불타는 향수.   너의 넋은 수녀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 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마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라.       내 마음은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라.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 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 주오.   나는 달 아래 귀를 기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     김동환. 1901 - ?. 함북 경성 출생. 호는 파인. 에 시를 발표, 데뷔한 이후 잡지 와 순문예지 을 간행했다. 우리나라 신시사상 최초의 서사시집 (1925)을 출간하여 문단적 위치를 확고히 했고 시집으로 (1925), (1942) 등을 발표했으나 6.25 때 납북되어 생사불명이다.      산 너머 남촌에는   1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꽃 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데나.   2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저 하늘 저 빛깔이 저리 고울까?   금잔디 넓은 벌엔 호랑나비떼.   버들밭 실개천엔 종달새 노래.   어느 것 한 가진들 들려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데나.   3   산 너머 남촌에는 배나무 있고,   배나무 꽃 아래엔 누가 섰다기,   그리운 생각에 영에 오르니,   구름에 가리어 아니 보이네.   끊였다 이어 오는 가느단 노래   바람을 타고서 고이 들리네.      북청 물장수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물을 쏴-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북청 물장수.   물에 젖은 꿈이   북청 물장수를 부르면   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   온 자취도 없이 다시 사라져 버린다.   날마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북청 물장수.      강이 풀리면   강이 풀리면 배가 오겠지   배가 오며는 임도 탔겠지.   임은 안 타도 편지야 탔겠지   오늘도 강가서 기다리다 가노라.   임이 오시면 이 설움도 풀리지   동지 섣달에 얼었던 강물도   제멋에 녹는데 왜 아니 풀릴까   오늘도 강가서 기다리다 가노라.     박영희. 1901 - ?. 호는 희월. 동인으로 1924년 이후 예맹파로 전향하여 카프의 중심 멤버가 되었으나 1933년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다'라는 유명한 선언을 하고 전향한 시인이다. 시집으로 가 있고 6.25 때 납북된 후 생사불명이다.      유령의 나라   꿈은 유령의 춤추는 마당   현실은 사람의 괴로움 불붙이는   싯벌건 철공장   눈물은 불에 단   괴로움의 찌꺼기   사랑은 꿈속으로 부르신 여신!   아! 괴로움에 타는   두 사람 가슴에   꿈의 터를 만들어 놓고   유령과 같이 춤을 추면서   타오르는 사랑은   차디찬 유령과 같도다.   현실의 사람 사람은   유령을 두려워 떠나서 가나   사랑을 가진 우리에게는   꽃과 같이 아름답도다.   아! 그대여!   그대의 흰 손과 팔을   저 어둔 나라로 내밀어 주시오   내가 가리라, 내가 가리라.   그대의 흰 팔을 조심해 밟으면서!   유령의 나라로, 꿈의 나라로   나는 가리라! 아 그대의 탈을-.     박종화. 1901 - 1981. 서울 출생. 호는 월탄. 동인이며, 시동인지 을 통해 시작활동을 했다. 상징에 의한 낭만적 감상에 젖어 있는 그의 시는 민족적 전통 의식에 기조를 두고 있다. 시 '밀실로 들어가다'와 소설 '목매는 여자' 등이 그의 출세작이나 주로 역사 소설가로 알려지고 있다.시집 (1924), (1946)와 소설 등이 있고 수필집 (1942)이 있다.      청자부   선은   가냘픈 푸른 선은   아리따웁게 구을려   보살같이 아담하고   날씬한 어깨여   4월 훈풍에 제비 한 마리   방금 물을 박차 바람을 끊는다.   그러나 이것은   천 년의 꿈 고려 청자기!   빛깔 오호 빛깔!   살포시 음영을 던진 갸륵한 빛깔아   조촐하고 깨끗한 비취여   가을 소나기 마악 지나간   구멍 뚫린 가을 하늘 한 조각,   물방울 뚝뚝 서리어   곧 흰 구름장 이는 듯하다.   그러나 오호 이것은   천년 묵은 고려 청자기!   술병, 물병, 바리, 사발   향로, 향합, 필통, 연적   화병, 장고, 술잔, 벼개   흙이면서 옥이더라.   구름무늬 물결무늬   구슬무늬 칠보무늬   꽃무늬 백학무늬   보상화문 불타무늬   토공이요 화가더냐   진흙 속 조각가다.   그러나, 이것은   천년의 꿈, 고려 청자기!     백기만. 1901 - ?. 대구출생. 호는 목우. 일본 와세다대학을 중퇴했고 1920 - 25년 사이에 문단에 등단했다. 3.1운동 때 대구 학생운동의 주모자로 투옥, 해방될 때까지 항일운동을 했다. 을 통해 정열적인 시를 발표한 순정 비분파의 시인. 6.25 때 납북되었다.      청개구리   청개구리는 장마 때에 운다. 차디찬 비 맞은 나뭇잎에서 하늘을 원망하듯 치어다보며 목이 터지도록 소리쳐 운다.   청개구리는 불효한 자식이었다. 어미의 말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어미 청개구리가 하면 그는 물에 가서 놀았고, 또, 하면 그는 기어이 산으로 갔었느리라.   알뜰하게 애태우던 어미 청개구리가 이 세상을 다 살고 떠나려 할 때, 그의 시체를 산에 묻어 주기를 바랬다. 그리하여 모로만 가는 자식의  머리를 만지며 하였다.   청개구리는 어미의 죽음을 보았을 때 비로소 천지가 아득하였다. 그제서야 어미의 생전에 한 번도 순종하지 않았던 것이 뼈 아프게 뉘우쳐졌다.   청개구리는 조그만 가슴에 슬픔을 안고, 어미의 마지막 부탁을 쫓아 물 맑은 강가에 시체를 묻고, 무덤 위에 쓰러져 발버둥치며 통곡하였다.   그 후로 장마비가 올 때마다 어미의 무덤을 생각하였다. 싯벌건 황토물이 넘어 원수의 황토물이 넘어 어미의 시체를 띄워갈까 염려이다.   그러므로 청개구리는 장마 때에 운다. 어미의 무덤을 생각하고는 먹을 줄도 모르고 자지도 않고 슬프게 슬프게 목놓아 운다.      은행나무 그늘   훌륭한 그이가 우리집을 찾아왔을 때   이상하게도 두 뺨이 타오르고 가슴은 두근거렸어요.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없이 바느질만 하였어요.   훌륭한 그이가 우리집을 떠날 때에도   여전히 그저 바느질만 하였어요.   하지만 어머니, 제가 무엇을 그이에게 선물하였는지 아십니까?   나는 그이가 돌아간 뒤에 뜰 앞 은행나무 그늘에서   달콤하고도 부드러운 노래를 불렀어요.   우리 집 작은 고양이는 봄볕을 흠뻑 안고 나무가리 옆에 앉아   눈을 반만 감고 내 노래소리를 듣고 있었어요.   하지만 어머니, 내 노래가 무엇을 말하였는지 누가 아시리까?   저녁이 되어 그리운 붉은 등불이 많은 꿈을 가지고 왔을 때   어머니는 젖먹이를 잠재려 자장가를 부르며 아버지를 기다리시는데   나는 어머니 방에 있는 조그만 내 책상에 고달픈 몸을 실리고 뜻도 없는 책을 보고 있었어요.   하지만 어머니, 제가 무엇을 그 책에서 보고 있었는지 모르시리다.   어머니, 나는 꿈에 그이를, 그이를 보았어요.   흰 옷 입고 초록 띠가 드리운 성자 같은 그리운 그이를 보았어요.   그 흰 옷과 초록 띠가 어떻게 내 마음을 흔들었는지 누가 아시리까?   오늘도 은헹나무 그늘에는 가는 노래가 떠돕니다.   고양이는 나무 가리 옆에서 어제같이 조을고요.   하지만 그 노래는 늦은 봄 바람처럼 괴롭습니다.     심훈. 1901 - 1936. 서울 출생. 본명은 대섭이다. 1935년 동아일보에 소설 '상록수'가 당선하여 문단에 확고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가 남긴 저항시는 해방 후에 출간 되었는데 시에 담긴 고귀한 정신은 중요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시집으로는 (1949)이 있다.       그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드리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밤   밤, 깊은 밤 바람이 뒤설레며   문풍지가 운다.   방, 텅 비인 방안에는   등잔불의 기름 조는 소리뿐...   쥐가 천정을 모조리 써는데   어둠은 아직도 창 밖을 지키고   내 마음은 무거운 근심에 짓눌려   깊이 모를 연못 속에서 자맥질한다.   아아, 기나긴 겨울 밤에   가늘게 떨며 흐느끼는   고달픈 영혼의 울음소리...   별 없는 하늘 밑에 들어 줄 사람 없구나!     오일도. 1901 - 1946. 경북 영양 출생이며, 본명은 희병이다. 서울에서 중학교편을 잡으며 시단에 등단, 1935년 지를 창간하여 5호까지 주재했다. '시문학'파의 흐름을 받아 우수어린 순수시를 지향한 시인이다.      5월의 화단   5월의 더딘 해 고요히 나리는 화단   하루의 정열도   파김치같이 시들다.   바람아, 네 이파리 하나 흔들 힘 없니!   어두운 풀 사이로   월계의 꽃 조각이 환각에 가물거린다.      누른 포도잎   검젖은 뜰 위에   하나 둘...   말없이 내리는 누른 포도잎.   오늘도 나는 비 들고   누른 잎을 울며 쓰나니   언제나 이 비극 끝이 나려나!   검젖은 뜰 위에   하나 둘...   말없이 내리는 누른 포도잎.     김상용. 1902 - 1950. 경기 연천 출생. 호는 월파. 이화여전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35년 을 통해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첫시집 (1939)에 '남으로 창을 내겠소' 등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시집을 통해 명랑하고 관조적인 시세계를 깔끔한 필치로 표현하고 있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 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깔 이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향수   인적 끊긴 산 속   돌을 베고 하늘을 보오.   구름이 가고,   있지도 않은 고향이 그립소.     김소월. 1902 - 1934. 평북 곽산 출생이며, 본명은 정식. 오산학교 시절의 스승 김억의 영향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에 '진달래꽃'(1922)을 발표,김동인과 함께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아름다운 서정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의 시는 우리나라 고유의 민족적 시형에 향수, 애수 등을 담아 독자적인 세계로 묘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동아일보 지국을 경영하다 운영 실패 등 인생에 대한 회의에 빠져 33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시집으로는 (1925) 외에 최근에 나온 (1983) 등이 있다.      진달래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산유화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찌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초혼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그 소리는 비껴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멀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엄마야 누나야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금잔디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 산천에 붙는 불은   가신 임 무덤가에 금잔디.   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   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   봄빛이 왔네, 봄날이 왔네.   심심 산천에도 금잔디에.      접동새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 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 나라   먼 뒷쪽의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읍니다.   누나라고 불러 보랴   오오 불설워   시샘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읍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는 오랍동생을   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 잊어   야삼경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 산 저 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      못잊어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한 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 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그러나 또한긋 이렇지요,        가는 길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 가자고   홀려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왕십리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 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   웬걸, 저 새야   울랴거든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 다고,   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히 젖어서 늘어졌다네.   비가 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구름도 상마루에 걸려서 운다.      가막 덤불   산에 가시나무   가막덤불은   덤뿔 덤불 산마루로   벋어 올랐소   산에는 가려 해도   가지 못하고   바로 말로   집도 있는 내 몸이라오   길에는 혼잣몸의   홑옷 자락은   하룻밤 눈물에는   젖기도 했소   산에는 가시나무   가막덤불은    덤불덤불 산마루로   벋어 올랐소.      풀따기   우리집 뒷산에는 풀이 푸르고   숲 사이의 시냇물, 모래바닥은   파아란 풀 그림자, 떠서 흘러요.   그리운 우리 님은 어디 계신고.   날마다 피어나는 우리 님 생각.   날마다 뒷산에 홀로 앉아서   날마다 풀울 따서 물에 던져요.   흘러가는 시내의 물에 흘러서   내어던진 풀잎은 옅게 떠갈 제   물살이 해적해적 품을 헤쳐요.   그리운 우리 님은 어디 계신고.   가엾는 이내 속을 둘 곳 없어서   날마다 풀을 따서 물에 던지고   흘러가는 잎이나 맘해 보아요.     이장희. 1902 - 1928. 경북 대구 출생이며, 호는 고월이다. 1924년 을 통해 시단에 등단했으며, 동인으로 활동했다. '시란 광채없고 탄력성 없는 굵다란 철사선이어서는 안된다'라고 말한 그는 인생과 사회에 대한 몸부림 속에서 27세 때 음독자살한 천재시인이다. 전해지는 작품은 300여 편인데 주로 모더니즘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봄은 고양이로다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우리로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청천의 유방   어머니 어머니라고   어린 마음으로 가만히 부르고 싶은   푸른 하늘에   따스한 봄이 흐르고   또 흰 별을 놓으며   불룩한 유방이 달려 있어   이슬 맺힌 포도 송이보다 더 아름다와라.   탐스러운 유방을 볼지어다.   아아 유방으로서 달콤한 젖이 방울지려 하누나   이때야말로 애구의 정이 눈물 겨웁고   주린 식욕이 입을 벌리도다.   이 무심한 식욕   이 복스러운 유방...   쓸쓸한 심령이여 쏜살같이 날라지어다.   푸른 하늘에 날라지어다.     김영랑. 1903 - 1950. 전남 강진 출생. 본명은 윤식이며 동경 청산학원에서 수학했다. 동인으로 정지용, 박용철과 작품을 발표하였던 그는 언어의 리듬을 시의 제의적인 것으로 주장, 우리에게 알려진 서정시인이다. 해방 후의 작품들은 당시 상황에 비춘 작품들을 밢표했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작품들은 고향의 미를 추구한 것으로 예술지상주의적인 정신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6.25 동란 때 포탄의 파편으로 변사. 시집으로 (1935), (1956)이 남아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어느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ㅎ게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르러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은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머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은 골 붉은 감잎 날아와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추석이 내일모래 기둘리리   바람이 잦이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그래도 어디나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우리는 티끌과   속임 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밤 고이 맺는 이슬 같은 보람을   보밴 듯 감추었다 내어 뜨리지.   아!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 맑은 옥돌에 불이 달아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     양주동. 1903 - 1977. 개성 출생. 호는 무애. 와세다대학 불문과 졸업. 지와 을 발간하면서 '조선의 맥박' 등 일련의 작품을 발표했다. 대체로 시인 비평가로서의 그의 문단활동은 1922 - 1935년 경까지이며 그 뒤는 향가의 해독과 고려가요의 연구 등 국문학 연구에 전심했다. 그의 시세계의 특징은 민족과의 정신적 연대성, 그리고 가요적인 서정성에 있다.      산길   1   산길을 간다, 말 없이   호울로 산길을 간다.   해는 져서 새소리 그치고   짐승의 발자취 그윽히 들리는   산길을 간다, 말 없이   밤에 호올로 산길을 간다.   2   고요한 밤   어두운 수풀   가도 가도 험한 수풀   별 안 보이는 어두운 수풀   산길은 험하다.   산길은 멀다.   3   꿈같은 산길에   화톳불 하나.   (길 없는 산길은 언제나 끝나리)   (캄캄한 밤은 언제나 새리)   바위 위에   화톳불 하나.      산 넘고 물 건너   산 넘고 물 건너   내 그대를 보려 길 떠났노라.   그대 있는 곳 산 밑이라기   내 산 길을 토파 멀리 오너라.   그대 있는 곳 바닷가라기   내 물결을 헤치고 멀리 오너라.   아아, 오늘도 잃어진 그대를 찾으려   이름 모를 이 마을에 헤매이노라.      나는 이 나랏 사람의 자손이외다   이 나랏 사람은   마음이 그의 옷보다 희고,   술과 노래를   그의 아내와 같이 사랑합니다.   나는 이 나랏 사람의 자손이외다.   착하고 겸손하고   꿈많고 웃음 많으나,   힘없고 피없는   이 나랏 사람-   아아 나는 이 나랏 사람의 자손이외다.   이 나랏 사람은   마음이 그의 집보다 가난하고   평화와 자유를   그의 형제와 같이 사랑합니다.   나는 이 나랏 사람의 자손이외다.   외로웁고 쓸쑬하고   괴로움 많고 눈물 많으나,   숨결있고 생명있는   이 나랏 사람-   아아 나는 이 나라 사람의 자손이외다.     이은상. 1903 - 1980. 경남 마산 출생. 호는 노산. 연희전문과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수업했다. 동아일보에 '어포 달 밝은 밤에'를 발표하여 문단활동을 시작. 이화여전, 호남일보 사장 등을 역임했다. 시조집에 , 기행문에 등이 있다.      가고파   -내 마음 가 있는 그 벗에게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이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린 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 간들 잊으리오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가서 한데 얼려 옛날같이 살고 지라   내 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 웃고 지내고저   그 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   물 나면 모래판에서 가재 거이랑 달음질하고   물 들면 뱃장에 누워 별 헤다 잠들었지   세상 일 모르던 날이 그리워라 그리워.   여기 물어 보고 저기 가  알아 보나   내 몫엔 즐거움은 아무데도 없는 것을   두고 온 내 보금자리에 가 안기자 가 안겨.   처자들 어미 되고 동자들 아비된 사이   인생의 가는 길이 나뉘어 이렇구나   잃어진 내 기쁨의 길이 아까와라 아까와.   일하여 시름 없고 단잠들어 죄 없는 몸이   그 바다 물소리를 밤낮에 듣는구나   벗들아 너희는 복된 자다 부러워라 부러워.   옛 동무 노젓는 배에 얻어 올라 치를 잡고   한바다 물을 따라 나명들명 살까이나   맞잡고 그물 던지며 노래하자 노래해.   거기 아침은 오고 또 거기 석양은 져도   찬 얼음 찬 바람은 들지 못하는 그 나라로   돌아가 알몸으로 살꺼나 깨끗이도 깨끗이.   박용철. 1904 - 1938. 전남 광산 출생. 호는 용아. 일본 동경 외국어대 독문과와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했다. 1930년 김영랑, 정지용 등과 함께 시동인지 을 창간했고 이어 과 순수 문예지 을 창간하여 태서문학파의 문학운동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전 2권이 1940년에 출간되었다.      떠나가는 배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구인들 손쉽게야 버릴거냐.   안개같이 물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사랑하는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   돌아다 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미련이나 있을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 보낼거냐.   나 두 야 간다.      고향   고향은 찾어 무얼 하리   일가 흩어지고 집 흐너진대   저녁 까마귀 가을풀에 울고   마을 앞 시내로 옛자리 바뀌었을라.   어린 때 꿈을 엄마 무덤 위에   남겨두고 떠도는 구름 따라   멈추는 듯 불려온 지 여남은 해   고향은 이제 찾어 무얼 하리.   하늘 가에 새 기쁨을 그리어보랴   남겨둔 무엇일래 못 잊히우랴   모진 바람아 마음껏 불어쳐라   흩어진 꽃잎 쉬임 어디 찾는다냐.   험한 발에 짓밟힌 고향생각    -아득한 꿈엔 달려가는 길이언만-   서로의 굳은 뜻을 남께 앗긴    옛 사랑의 생각 같은 쓰린 심사여라.      눈은 내리네   이 겨울의 아침을   눈은 내리네   저 눈은 너무 희고   저 눈의 소리 또한 그윽하므로   내 이마를 숙이고 빌까 하노라   임이여 설운 빛이   그대의 입술을 물들이나니   그대 또한 저 눈을 사랑하는가   눈은 내리어   우리 함께 빌 때러라.     이육사. 1904 - 1944. 경북 안동 출생. 본명은 원록이며 아명은 원삼이다. 중국 북경 대학 사회학과 졸업. 동인으로 활약하다가 일본 관헌에 피검되어 북경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일제의 형무소에서 복역할 때 감방 번호가 264였기 때문에 육사라 했다고 한다. 34편의 시를 남겼고 광복 후에 출간된 이 있다.      청포도   내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주절이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 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며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리.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 곳을 범하던 못 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일식   쟁반에 먹물을 담아 비쳐 본 어린 날   불개는 그만 하나밖에 없는 내 날을 먹었다.   날과 땅이 한줄 위에 돈다는 그 순간만이라도   차라리 헛말이기를 밤마다 정녕 빌어도 보았다.   마침내 가슴은 동굴보다 어두워 설레인고녀   다만 한 봉오리 피려는 장미 벌레가 좀치렸다.   그래서 더 예쁘고 진정 더없지 아니하냐   또 어디 다른 하나를 얻어   이슬 젖은 별빛에 가꾸련다.      절정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갈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켜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자야곡   수만 호 빛이래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러라.   슬픔도 자랑도 집어 삼키는 검은 꿈   파이프엔 조용히 타오르는 꽃불도 향기론데   연기는 돛대처럼 날려 항구에 돌고   옛날의 들창마다 눈동자엔 짜운 소금이 절여   바람 불고 눈보라 치잖으면 못 살리라   매운 술을 마셔 돌아가는 그림자 발자취소리   숨 막힐 마음 속에 어데 강물이 흐르느뇨   달은 강을 따르고 나는 차디찬 강 맘에 드리노라.   수만호 빛이래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러라.      꽃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 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쪽 순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움직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아 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여   한 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에는   나비처럼 취하는 회상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호수   내어 달라고 저운 마음이련마는   바람 씻은 듯 다시 명상하는 눈동자   때로 백조를 불러 휘날려 보기도 하건만   그만 기슭을 안고 돌아누워 흑흑 흐느끼는 밤   희미한 별 그림자를 씹어 놓이는 동안   자줓빛 안개 가벼운 명상같이 내려 씌운다.      황혼   내 골방의 커어틴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 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 보련다.   그리고 네 품안에 안긴 모든 것에게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다오.   저-십이월 성좌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소리 저문 산림 속 그윽한 수녀들에게도   시멘트 장판 위 그 많은 수인들에게도   의지가지 없는 그들의 심장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사막을 걸어가는 낙타 탄 행상에게나   아프리카 녹음 속 활 쏘는 토인들에게라도   황혼아, 네 부드러운 품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의 반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다오.   내 오월의 골방이 아늑도 하니   황혼아 내일도 또 저-푸른 커어틴을 걷게 하겠지   암암히 사라지길 시냇물 소리 같아서   한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나 보다.     김광섭. 1905 - 1977. 함북 경성 출생. 호는 이산.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일제때 반일 혐의로 4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고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애탄하며 많은 글을 남긴 그는 에도 참가. (1957), (1970), (1974)을 수상했으며 등의 시집이 있다.      성북동 비둘기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인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 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꽈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저녁에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신석정. 1907 - 1974. 충남 서천 출생. 시 ^6 236^선물^356 3^이 에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1930). 도회지를 멀리 떠나 전원생활을 하며 부단히 움직이는 역사와 더불어 응결된 서정시를 발표한 그는 동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시집으로 와 역시집 등이 있다.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 합니다.   언덕에서는 우리의 어린 양들이 낡은 녹색 침대에 누워서   남은 햇빛을 즐기느라고 돌아오지 않고,   조용한 호수 위에는 이제야 저녁 안개가 자욱히 내려오기 시작하였읍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늙은 산의 고요히 명상하는 얼굴이 멀어가지 않고   머언 숲에서는 밤이 끌고 오는 그 검은 치맛자락이   밤길에 스치는 발자욱 소리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멀리 있는 기인 둑을 거쳐서 들려오는 물결 소리도 차츰차츰 멀어갑니다.   그것은 늦은 가울부터 우리 정원을 방문하는 까마귀들이   바람읋 데리고 멀리 가버린 까닭이겠읍니다.   시방 어머니의 등에서는 어머니의 콧노래 섞인   자장가를 듣고 싶어하는 애기의 잠덧이 있읍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이제야 저 숲 너머 하늘에 작은 별이 하나 나오지 않았읍니까?      봄을 기다리는 마음   우수도   경칩도   머언 날씨에   그렇게 차가운 계절인데도   봄은 우리 고운 핏줄을 타고 오고   호흡은 가빠도 이토록 뜨거운가?   손에 손을 쥐고   볼에 볼을 문지르고   의지한 채 체온을 길이 간직하고픈 것은   꽃피는 봄을 기다리는 탓이리라.   산은   산대로 첩첩 쌓이고   물은   물대로 모여 가듯이   나무는 나무끼리   짐승은 짐승끼리   우리도 우리끼리   봄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산수도   숲길같이 이끼 푸르고   나무 사이사이 강물이 희어...   햇볕 어린 가지 끝에 산새 쉬고   흰 구름 한가히 하늘을 지난다.   산가마귀 소리 골짝에 잦은데   등 너머 바람이 바람이 넘어 닥쳐 와...   굽어든 숲길을 돌아서   시내물 여운 옥인 듯 맑아라.   푸른 산 푸른 산이 천 년만 가리...   강물이 흘러 흘러 만 년만 가리...   산수는 오로지 한폭의 그림이냐?      추석   가윗날 앞둔 달이 지치도록 푸른 밤,   전선에 우는 벌레 그 소리도 푸르리.   소양강 물 소리며 병정들 얘기소리,   그 속에 네 소리도 역력히 들려오고.   추석이 내일 모레, 고무신도 사야지만,   네게도 치약이랑 수건도 부쳐야지...      임께서 부르시면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호수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말없이 재 넘는 초승달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포곤히 풀릱 봄 하늘 아래   굽이굽이 하늘 가에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파아란 하늘에 백로가 노래하고   이른 봄 잔디밭에 스며드는 햇볕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유치환. 1908 - 1967. 경남 충무 출생이며 호는 청마. 연회전문 문과에서 수학했으며 동인지 를 발간(1929)하기도 했다. 에 '정적'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1931). 생명과 자연, 허무와 신을 노래한 시인으로 14권의 시집과 수상록을 발간했다.  시집으로는 외에 다수의 작품집이 있다.      깃발   이것은 소리 없는 아수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바위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깍이는 대로   억 년 비정의 함묵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   꿈 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생명의 서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에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번 뜬 백일이 불사신 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6 236^나^356 3^와 대면하게 될지니   하여 ^6 236^나^356 3^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그리움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찌기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언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더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드메 꽃같이 숨었느냐.      의주ㅅ 길   장안을 나서서 북쪽가는 천 리 길   아카시아 꽃수술에 꿀벌 엉기는   이 길을 떠나면 다시 오지 안하리니   속눈썹 감실감실 사랑한 너야   이대로 고이 나는 너를 하직하노니   누가 묻거들랑 울지 말고 모른다 하소.   천리 길 너 생각에 하염없이 걷노라면   하늘도 따사로이, 뒷등도 따사로이   가며가며 쉬어쉬어 울 곳도 많아라.      춘신   꽃등인 양 창 앞에 한 그루 피어오른   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   작은 멧새 하나 찾아와 무심히 놀다 가나니.   적막한 겨우내 들녘 끝 어디에서   작은 깃 얽고 다리 오그리고 지내다가   이 보오얀 봄길을 찾아 문안하여 나왔느뇨.   앉았다 떠난 아름다운 그 자리 가지에 여운 남아   뉘도 모를 한 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나니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작은 길이여.     신석초. 1909 - 1976. 충남 서천 출생. 본명은 응식이며 일본 호오세이 대학에서 수학했다. 1935년 동인으로 시를 쓰기 시작, 한때 발레리에 심취하기도 했다. 시집으로 등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다.      고풍   분홍색 회장저고리   남끝동 자주 고름   긴 치맛자락을   살며시 치켜들고   치마 밑으로 하얀   외씨버선이 고와라.   멋들어진 어여머리   화관 몽두리   화관 족두리에   황금 용잠 고와라.   은은한 장지 그리메   새 치장하고 다소곳이   아침 난간에 섰다.      바라춤   언제나 내 더럽히지 않을   티 없는 꽃잎으로 살어여러 했건만   내 가슴의 그윽한 수풀 속에   솟아오르는 구슬픈 샘물을   어이할까나.   청산 깊은 절에 울어 끊인   종소리는 아마 이슷하여이다.   경경이 밝은 달은   빈 절을 덧없이 비초이고   뒤안 이슥한 꽃가지에   잠 못 이루는 두견조차   저리 슬피 우는다.   아아 어이 하리. 내 홀로   다만 내 홀로 지닐 즐거운   무상한 열반을   나는 꿈꾸었노라.   그러나 나도 모르는 어지러운 티끌이   내 맘의 맑은 거울을 흐리노라.   몸은 서러라.   허물 많은 사바의 몸이여!   현세의 어지러운 번뇌가   짐승처럼 내 몸을 물고   오오, 형체, 이 아리따움과   내 보석 수풀 속에   비밀한 뱀이 꿈 어리는 형역의   끝없는 갈림길이여.   구름처럼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 소리   지는 꽃잎도 띄워 둥둥 떠내려가것다.   부서지는 주옥의 여울이여   너울너울 흘러서 창해에   미치기 전에야 끊일 줄이 있으리.   저절로 흘러가는 널조차 부러워라.     이상. 1910 - 1937. 서울 출생. 본명은 김해경. 에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구인회 동인으로 활동했다. 에 오감도를 연재하다가 각계의 비난을 받고 중단(1934)했고, 에 단편소설 '날개'를 발표(1936)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암담한 생활에 대한 회의로 일본에 건너갔다가 지병인 폐환으로 27세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유작으로 이 있다.      거울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께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꽃나무   벌판한복판에꽃나무하나가있소. 근처에는꽃나무가하나도없소. 꽃나무는 제가생각하는꽃나무를열심으로생각하는것처럼열심으로꽃을피워가지고섰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소. 나는막달아났소. 한꽃나무를위 하야그러는것처럼나는참그런이상스런흉내를내었소.      절벽   꽃이보이지않는다. 꽃이향기롭다. 향기가만발한다. 나는거기묘혈을판다. 묘혈도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묘혈속에나는들어앉는다. 나는눕는다. 또 꽃이향기롭다. 꽃은보이지않는다. 향기가만발한다. 나는잊어버리고재처거 기묘혈을판다. 묘혈은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묘혈로나는꽃을깜빡잊어버 리고들어간다. 나는정말눕는다. 아아, 꽃이또향기롭다. 보이지도않는꽃이 -보이지도않는꽃이.      오감도. 15   1   나는거울없는실내에있다. 거울속의나는역시외출중이다. 나는지금거울속 의나를무서워하며떨고있다. 거울속의나는어디가서나를어떻게하려는음모를 하는중일까.   2   죄를품고침상에서잤다. 확실한내꿈에나는결석하였고의족을담은군용장화 가내꿈의백지를더럽혀놓았다.   3   나는거울있는실내로몰래들어간다. 나를거울에서해방하려고그러나거울속 의나는침울한얼굴로동시에꼭들어온다. 거울속의나는내게미안한뜻을전한다. 내가그때문에영오되어있드키그도나때문에영오되어떨고있다.   4   내가결석한나의꿈내위조가등장하지않는내거울무능이라도좋은나의고독의 갈망자다. 나는드디어거울속의나에게자살을권유하기로결심하였다. 나는그 에게시야도없는들창을가르치었다. 그들창은자살만을위한들창이다. 그러나 내가자살하지아니하면그가자살할수없음을그는내게가르친다. 거울속의나는 불사조에가깝다.   5   내왼편가슴심장의위치를방탄금속으로엄폐하고나는거울속의내왼편가슴을 겨누어권총을발사하였다. 탄환은그의왼편가슴을관통하였으나그의심장은바 른편에있다.   6   모형심장에서붉은잉크가엎질러졌다. 내가지각한내꿈에서나는극형을받 았다. 내꿈을지배하는자는내가아니다. 내가악수조차할수없는두사람을봉쇄 한거대한죄가있다.     김용호. 1912 - 1973. 경남 마산 출생. 호는 학산, 야돈, 추강이다. 일본 메이지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면서 동인으로 활동했다. (1956)을 수상했고 시집으로는 와 서사시 '남해찬가' 등이 있다.      주막에서     어디든 멀찌감치 통한다는   길 옆   주막   그   수없이 입술이 닿은   이 빠진 낡은 사발에   나도 입술을 댄다.   흡사   정처럼 옮아 오는   막걸리 맛   여기   대대의 슬픈 노정이 집산하고   알맞은 자리, 저만치   위의 있는 송덕비 위로   맵고도 쓴 시간이 흘러가고   세월이여!   소금보다도 짜다는   인생을 안주하여   주막을 나서면   노을 빗긴 길은   가없이 길고 가늘더라만   내 입술이 닿은 그런 사발에   누가 또한 닿으랴   이런 무렵에.      눈오는 밤에   오누이들의   정다운 얘기에   어느 집 질화로엔   밤알이 토실토실 익겠다.   콩기름 불   실고추처럼 가늘게 피어나던 밤   파묻은 불씨를 헤쳐   잎담배를 피우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할머니,   바깥엔 연방 눈이 내리고.   오늘 밤처럼 눈이 내리고.   다만 이제 나 홀로   눈을 밟으며 간다.   오우버 자락에   구수한 할머니의 옛 이야기를 싸고,   어린 시절의 그 눈을 밟으며 간다.   오누이들의   정다운 얘기에   어느 집 질화로엔   밤알이 토실토실 익겠다.     이호우. 1912 - 1970. 경북 청도 출생. 호는 이호우. 지에 '달밤'이 추천(1940)되어 문단에 데뷔, 낙동강인으로 활약했다. 제1회 을 수상. 시조집으로 과, 누이 이영도와 함께 낸 등이 있다.      개화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      난   벌 나빈 알 리 없는   깊은 산 곳을 가려   안으로 다스리는   청자빛 맑은 향기   종이에 물이 스미듯   미소 같은 정이여.      살구꽃 핀 마을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   뉘 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바람 없는 밤을 꽃그늘에 달이 오면,   술 익는 초당마다 정이 더욱 익으리니,   나그네 저무는 날에도 마음 아니 바빠라.     김현승. 1913 - 1975. 전남 광주 출생. 호는 남풍, 다형. 숭실전문시절 에 시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이 발표됨으로 문단에 데뷔한 그는 지적이고 건강한 생리를 지닌 기독교적 주지 시인이다. (1973)을 수상. 시집으로는 등이 있다.      눈물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는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플라타나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나스,   너의 머리는 어느 덧 파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 모르나   플라타나스,   너는 내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나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너의 영혼을 불어 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나스,   나는 너와 함께 신이 아니다!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플라타나스,   너를 맞아 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나는 길이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가을의 기도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무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절대고독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혼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하품을 하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아름다운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나는 무엇인가 내게로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스한 체온을 느낀다.   그 체온으로 내게로 끝나는 영원의 먼 끝을   나는 혼자서 내 가슴에 품어준다.   나는 내 눈으로 이제는 그것들을 바라본다.   그 끝에서 나의 언어들을 바람에 날려 보내며,   꿈으로 고인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 보낸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   무한의 눈물겨운 끝을   내 주름 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때 나아갈 수 없는 그 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나의 시는.   노천명. 1913 - 1957. 황해 장연 출생.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일생을 독신으로 진내며 등의 여기자로 활동하며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여류시인. 시집으로   와 수필집 등의 작품 다수를 발표했다.      사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 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남사당   나는 얼굴에 분칠을 하고   삼단 같은 머리를 땋아내린 사나이   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   날라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르고 나는 향단이가 된다.   이리하여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어   램프불을 돋운 포장 속에선   내 남성이 십분 굴욕되다.   산 너머 지나온 저 동리엔   은반지를 사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 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나는 집시의 피였다.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우리들의 도구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의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라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삽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장만영. 1914 - 1976. 황해 연백 출생. 호는 초애. 일본 미자키 영어학교를 졸업. 유학시절 에 시 '봄노래'가 김억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했다. 그의 시는 이미지즘을 바탕으로 했으며 현실 의식이 크게 반영된 작품과 농촌적 이미지화라는 두 개의 의식을 이중으로 노출시킨 세련된 시로 평까받고 있다. 시집으로 와 자작시 해설집 등이 있다.      달, 포도, 잎사귀   순이 벌레 우는 고풍한 뜰에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 왔구나.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아 있다.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   동해바다 물처럼   푸른   가을   밤   포도는 달빛이 스며 고웁다.   포도는 달빛을 머금고 익는다.   순이 포도덩쿨 밑에 어린 잎새들이   달빛에 젖어 호젓하구나.      비   순이 뒷산에 두견이 노래하는 사월달이면   비는 새파아란 잔디를 밟으며 온다.   비는 눈이 수정처럼 맑다.   비는 하이얀 진주 목걸이를 자랑한다.   비는 수양버들 그늘에서   한종일 은빛 레이스를 짜고 있다.   비는 대낮에도 나를 키스한다.   비는 입술이 함씬 딸기물에 젖었따.   비는 고요한 노래를 불러   벚꽃 향기 풍기는 황혼을 데려온다.   비는 어디서 자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순이 우리가 촛불을 밝히고 마주 앉을 때   비는 밤 깊도록 창 밖에서 종알거리다가   이윽고 아침이면 어디론지 가고 보이지 않는다.      소쩍새   소쩍새들이 운다.   소쩍소쩍 솥이 작다고   뒷산에서도   앞산에서도   소쩍새들이 울고 있다.   소쩍새가   저렇게 많이 나오는 해는   풍년이 든다고   어머니가 나에게 일러 주시는 그 사이에도   소쩍소쩍 솥이 작다고   소쩍새들은 목이 닳도록 울어 댄다.   밤이 깊도록 울어 댄다.   아아, 마을은   소쩍새 투성이다.      길손   길손이 말없이 떠나려 하고 있다.   한 권의 조이스 시집과   한 자루의 외국제 노란 연필과   때 묻은 몇 권의 노트와   무수한 담배꽁초와   덧없는 마음을 그대로   낡은 다락방에 남겨 놓고   저녁놀 스러지듯이   길손이 말없이 떠나려 하고 있다.   날마다 떼지어 날아와 우는   검은 새들의 시끄러운   지저귐 속에서   슬픈 세월 속에서   아름다운 장미의 시   한편 쓰지 못한 채   그리운 벗들에게 문안편지   한 장도 내지 못한 채   벽에 걸린 밀레의   풍경화만 바라보며 지내던   길손이 이제 떠나려 하고 있다.   산등 너머로 사라진   머리처네 쓴 그 아낙네처럼   떠나 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   영겁의 외로운 길손   붙들 수조차 없는 길손과의   석별을 서러워 마라.   닦아 놓은   회상의 은촛대에   오색 촛불 가지런히   꽃처럼 밝히고   아무 말 아무 생각하지 않고   차가운 밤하늘로 퍼지는   먼 산사의 제야의 종소리 들으며   하룻밤을 뜬 채 세우자.     박목월. 1916 - 1978. 경북 경주 출생. 대구 계성중학을 졸업했다. 지에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해방후, 좌익 우익의 대립 양상 속에서 동인을 만들어 민족적 서정시집인 을 발간했다. 예술원 회원으로 시전문지 을 발행하여 많은 시인을 배출했으며, 시집으로 , 자작시 해설집인 가 있다.      나그네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윤사월   송홧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운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고   엿듣고 있다.      청노루   머언 산 청운사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   오리목   속잎 피는 열 두 구비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산도화   산은   구강산   보랏빛 석산   산도화   두어 송이   송이 버는데   봄눈 녹아 흐르는   옥같은   물에   사슴은   암사슴   발을 씻는다.      산이 날 에워싸고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고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고 살아라 한다.   어느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구름처럼 살아라 한다.   바람처럼 살아라 한다.      우회로   병원으로 가는 긴 우회로   달빛이 깔렸다.   밤은 에테르로 풀리고   확대되어 가는 아내의 눈에   달빛이 깔린 긴 우회로   그 속을 내가 걷는다.   흔들리는 남편의 모습.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메스를 가아제로 닦고   응결하는 피.   병원으로 가는 긴 우회로   달빛 속을 내가 걷는다.   흔들리는 남편의 모습.   혼수 속에서 피어 올리는   아내의 미소(밤은 에테르로 풀리고)   긴 우회로를   흔들리는 아내의 모습   하얀 나선 통로를   내가 내려간다.      난   이쯤에서 그만 하직하고 싶다.   좀 여유가 있는 지금, 양손을 들고   나머지 허락 받은 것을 돌려보냈으면   여유 있는 하직은   얼마나 아름다우랴.   한 포기 난을 기르듯   애석하게 버린 것에서   조용히 살아나고   가지를 뻗고,   그리고 그 섭섭한 뜻이   스스로 꽃망울을 이루어   아아   먼 곳에서 그윽히 향기를   머금고 싶다.     이영도. 1916 -  경북 청도 출생. 호는 정운. 에 시조를 발표(194)하면서 데뷔했다. 고유한 민족 정서를 바탕으로 인생에 대한 관조를 간결한 수사로 구현한 그는 시조집 과  수필집인 등이 있다.      백록담   차라리 스스로 달래어   싸느라니 고였는가   그 날 하늘을 흔들고   아우성치던 불길   투명한 가슴을 열고   여기 내다뵈는 상채기.     함형수. 1916 - 1946. 함북 경성 출생. 동인으로 창간호에 시 '해바라기의 비명'을 발표하면서 데뷔. 일종의 데카당한 모더니즘 계열의 시인으로, 심한 정신 착란증으로 사망했다. 그의 전 작품은 10여 편에 불과하나 1930년대 후반기 시인으로 유명하다.      해바라기의 비명   -청년화가 ㄴ을 위하여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비ㅅ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깥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윤동주. 1917 - 1945. 북간도 명동촌 출생. 아명은 해환이다. 연희전문과 일본 도오지샤 대학을 다녔으며, 재학중 독립운동의 혐의를 받아 2년의 선고를 받고 큐우슈의 형무소에서 복역중 옥사했다. 자아에 대한 내적응시와 조국광복의 염원이 그의 시에 나타나 있다. 유고 30여 편을 묶은 가 1948년에 발간되었다.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차 있읍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6 236^프랑시스 잠^356 3^, ^6 236^라이너 마리아 릴케^356 3^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읍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읍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 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십자가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읍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왔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읍니다.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읍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읍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읍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읍니다.      또 다른 고향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밤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조향. 1917 - 1984. 경남 사천 출생. 본명은 섭제, 니혼 대학 상경과 수학. 신춘문예로 등단(1941)하여 동인지 을 주제했으며 동인으로 참여했다. 그는 시에 외래어를 대담하게 도입하고, 종래의 산문적 설명적 요소를 철저히 배격하여 초현실주의 계열의 시풍을 확립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사화집 와 소설 등 작품 다수를 발표했다.      Episode   열 오른 눈초리, 하잔한 입 모습으로 소년은 가만히 총을 겨누었다.   소녀의 손바닥이 나비처럼 총 끝에 와서 사쁜히 앉는다.   이윽고 총 끝에선 파아란 연기가 몰씬 올랐다.   뚫린 손바닥의 구멍으로 소녀는 바다를 내다보았다.   -아이! 어쩜 바다가 이렇게 똥그랗니?   놀란 갈매기들은 황토 산태바기에다 연달아 머릴 쳐박곤 하얗게 화석이 되어 갔다.     허민. ? - 1943. 출생연도나 출생지가 확실치 않은 시인으로 미발표 유작 백여 편이 남아 있다. 소설가이기도 한 그는 유고시집 제8권(이중 3, 4권 분실)을 남겼으며 동시대 시인인 윤동주와 쌍벽을 이루는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산렵기   추석 이튿날 그와 바람 없는 골에 들어   산새들이 먹다 남긴 산과를 따며   산 밖을 나가는 날의 설움을 잊어보려고   가재 웅크린 개울에서 노래도 불렀드니라   전설도 없는 이 산천 깊숙한 넌출아래   가지고 오신 괴로움을 모다 묻어두어서   사람을 보고도 피하지 않는 짐승들로하여   다양한 봄날을 기다려 파 내도록 당부하였드니라.   허울차게 태고의 꿈이 감긴 교목에   유원한 한숨을 보여 주시는 너드렁이 비탈   머루랑 다래랑 으름이랑 한껏   그와 노나먹으며 철없이 잠들었드니라.     김종문. 1919 - 1981. 평남 평양 출생. 일본 도오꼬오 아테네 프랑세 졸업. 평론 ^6 236^문학의 문화에 미치는 영양에 대해^356 3^를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 균형잡힌 지성을 바탕으로 폭넓은 미학의 질서를 보여준 그는 파이프 시인이라 불리기도 한다. 시집으로 등이 있다.      샤보뎅   하늘에서 모래알이 쏟아지고 있었다.   인간은 바람결에 소리를 내며   이루고 있었다. 평원과 산을   생각하는 모래알처럼.   인간이 죽어간 폐허 위에   집을 지으며 정원을 가꾸며 살고 있었다.   행복하다는 생각을 생각하며.   사막에서 떠나 살 수 없는 체념에서 해골바가지를 들고   오아시스를 찾는 여정을 더듬어 가고 있었다.   태양이 흘리며 간 적은 피자국들은   뉘의 눈에도 뛰우지 않았다.   태양의 유형처럼.   하늘에서 모래알이 쏟아지고 있었다.   하늘도, 땅도, 사막   저 멀리 사막 사이를 가고 있었다.   검은 스카프로 얼굴을 가리운 여인이.      첼로를 켜는 여인   무대는 여인의 차지다.   부푼 유방, 파인 허리, 부푼 만삭,   긴 머리채로 가리우고, 긴 팔로 가리우고   진동하는 저음, 아가의 고성을 묻고,   비트는 긴 모가지, 꼬아 붙이는 두 다리,   객석은 남자의 차지다.      의자   내가 서양 문명의 혜택을 입었다면   그것은 단 한 가지, 의자이다.   그렇지만 나의 의자는   바로크풍이나 로마네스크풍과는 거리가 멀고   더우기 대감들이 즐기던 교의 따위도 아니다.   나의 의자는 강원도산 박달나무로   튼튼한 네 다리와 두터운 엉덩판과 가파른 등이   나의 계산에 의해 손수 만들어졌고   칠이라고는 나의 손때 뿐이다.   나의 의자는   나의 무게를 저울보다는 잘 알고 있고   나의 동작 하나 하나에 대해 민감하며   나의 거칠어지는 피부를 어루만질 줄 안다.   나의 고독은 나의 의자와의 교감이기에 고독이 아니고   나의 독백은 나의 의자와의 대화이기에 독백이 아니다.   낮을 밤에 이어 시를 쓰노라면   나의 의자에서 시가 우러나며   나의 다리, 나의 엉덩판, 나의 등이 되어   때로는 지하 8척 아래로, 때로는 구중의 탑 위로   나를 운반하지만   나의 의자는 항시 제자리에 있다.   나의 의자는 세계의 축, 나의 만세반석이다.   세상에는 빈 것이 하도 많지만   나의 의자는   비록 공석중이라도 비어 있지 않다.     한하운. 1919 - 1975. 함남 함주 출생. 본명은 태영. 나병의 재발로 월남하여 한때 방랑생활을 했다. 나병의 병고에서 오는 저주와 비통을 읊어 문단의 주목을 끌었으며, 시집으로는 자작시 해설 등이 있다.      보리피리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   눈물의 언덕을   피ㄹ 닐니리.      여인   눈여겨 낯익은 듯한 여인 하나   어깨 넓직한 사나이와 함께 나란히   아가를 거느리고 내 앞을 무심히 지나간다.   아무리 보아도   나이가 스무살 남짓한 저 여인은   뒷모습 걸음걸이 하며   몸맵시 틀림없는 저... 누구라 할까...   어쩌면 엷은 혀 끝에 맴도는 이름이요!   어쩌면 아슬아슬 눈 감길 듯 떠오르는 추억이요!   옛날엔 아무렇게나 행복해 버렸나 보지?   아니 아니 정말로 이제금 행복해 버렸나 보지?     이동주. 1920 - 1979. 전남 해남 출생. 에 시를 발표하면서 시작 활동을 했으며 에 '황혼'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한 그는 전통적인 정서 세계를 심미적으로 노래한 서정시인이며 실명소설분야를 개척 저명 문인의 일대기를 소설화하기도 했다. 시집으로 등이 있다.      강강술래   여울에 몰린 은어떼.   삐비꽃 손들이 둘레를 짜면   달무리가 비잉빙 돈다.   가아응, 가아응, 수우워얼래애   목을 빼면 설움이 솟고...   백장미 밭에   공작이 취했다.   뛰자 뛰자 뛰어나 보자   강강술래.   뉘누리에 테이프가 감긴다.   열 두 발 상모가 마구 돈다.   달빛이 배이면 술보다 독한 것   기폭이 찢어진다.   갈대가 쓰러진다.   강강술래   강강술래.      혼야   금슬은 구구 비둘기...   열 두 병풍   첩첩 산곡인데   칠보 황홀히 오롯한 나의 방석.   오오 어느 나라 공주오이까.   다수굿 내 앞에 받아들었오이다.   어른일사 원삼을 입혔는데   수실 단 부전 향낭이 애릿해라.   황촉 갈고 갈아 첫닭이 우는데   깨알 같은 쩡화가 스스로와...   눈으로 당기면 고즈너기 끌려와 혀 끝에 떨어지는 이름   사르르 온 몸에 휘감기는 비단이라   내사 스스로 의의 장검을 찬 왕자.   어느 새 늙어 버린 누님 같은 아내여.   쇠갈퀴 손을 잡고 세월이 원통해 눈을 감으면   살포시 다시 찾아오는 그대 아직 신부고녀.   금슬은 구구 비둘기.     조지훈. 1920 - 1968. 경북 영양 출생. 본명은 동탁이며, 혜화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39년 지에 시가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1939)하여 동인으로 활동했다. 초기 시는 불교적 선의 감각을 엿볼 수 있으며 동양적 정신의 깊이를 보여주는 시세계를 완성했다.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을 발행하기도 했다.      승무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설러워라.   빈 대에 황촉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똥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양 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고풍의상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 끝 풍경이 운다.   처마 끝 곱게 늘이운 주렴에 반월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가는 밤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자줏빛 호장을 받친 호장저고리   호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살살이 퍼져 내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곡선을 이루는 곳   열 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치마 끝에 곱게 감춘 운혜 당혜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삶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   호접인 양 사풋이 춤을 추라, 아미를 숙이고...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눈 감고 거문고 줄 골라 보리니   가는 버들인 양 가락에 맞추어 흰 손을 흔들어지이다.      완화삼   차운 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한성기. 1923 - 1984. 함남 정평 출생. 와 으로 등단한 그는 사물과 실재에의 겸허하고도 차분한 접근과 통찰을 통하여 경이로운 질서와 참신한 시적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시인. 시집으로 등이 있으며, 동인이기도 했다.      역   푸른 불 시그낼이 꿈처럼 어리는   거기 조그마한 역이 있다.   빈 대합실에는   의지할 의자 하나 없고   이따금   급행열차가 어지럽게 경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눈이 오고   비가 오고...   아득한 선로 위에   없는 듯 있는 듯   거기 조그만 역처럼 내가 있다.     공중인. 1923 - 1966. 호는 서양. 필명은 시예리, 운서, 공화이다. 동인으로 활약했으며 씨집으로 (1956)가 있다.      설야의 장   새하얀 장미의 탄식과도 같이   눈 내리는, ^6 236^마리아^356 3^의 밤!   옛날의 그이를 사모쳐   새하얀 공간에 가득히   그려 놓은 새하얀 그림들이   일시에 무너지듯이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가 없는 추억을 묻히고   밤을 묻히고, ^6 236^청춘^356 3^이 작별한   나의 마음을 묻힌다.   밤이 새도록 쉴 새 없이   머언 그이의 사라진 발자욱처럼   꽃과 나비와 낙엽들의   쓰러져 하염없는 사연처럼   눈은 내 고독의 숲을 내려 쌓인다.   아- 이러한 밤에   ^6 236^예수^356 3^는 태어났는가!   바람들이 남기고 간   이 새하얀 영원의 여백.   하늘과 땅이 융합하는   그 설백한 사랑의 노래는,   그지없는, ^6 236^운명^356 3^을 우는   나의 혼을 갈앉히우며   세계를 덮는다.   ... 눈 내리는 밤에.   김수영. 1921 - 1968. 서울 출생. 연세대 영문과 졸업. 박인환, 김경린 등과 엔솔로지 (1948)을 간행했으며, 반서정과 참여시의 기치를 높여 문단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또한 현실과 생활에 밀착된 지성에 의해 전개된 서정시라는 평을 받았고 4.19후에는 참여시를 즐겨 쓰기도 했다. 시집으로는 과 합동시집 등이 있다. 48세 때 교통사고로 사망.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 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더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달나라의 장난   팽이가 돈다   어린아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 한 번 팽이를 돌려 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 안에서 쫓겨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 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찝을 가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게 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 던지니   소리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에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년전의 성인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폭포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햐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눈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김종삼. 1921 - 1984. 황해 은율 출생. 일본 도오꼬오 문화학원에서 수학했으며 유치진 씨에게 사사하여 연극 음악을 담당하기도 했다. 수상(1971). 시집으로 (공저) (공저) 등이 있다. 동인으로 활동한 그는 음악적 리듬과 회화적 형상화를 중요시한 시인이었다.      북치는 소년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그리운 안니, 로, 리   나는 그동안 배꼽에   솔방울로 돋아   보았고   머리 위로는 몹쓸 버섯도 돋아   보았읍니다 그러다가는   ^6 236^맥웰^356 3^이라는   노의의 음성이   자꾸만   넓은 푸름을 지나   머언 언덕가에 떠오르곤 하였읍니다   오늘은   이만치하면 좋으리만치   리봉을 단 아이들이 놀고 있음을 봅니다   그리고는   얕은   파아란   페인트 울타리가 보입니다   그런데   한 아이는   처마 밑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않고   짜증을 내고 있는데   그 아이는   얼마 못가서 죽을 아이라고   푸름을 지나 언덕가에   떠오르던   음성이 이야기ㄹ 하였읍니다   그리운   안니, 로, 리라고 이야기   하였읍니다.      시인학교   오늘 강사진   음악 부문   모리스 라벨   미술 부문   폴 세잔느   시 부문   에즈라 파운드   모두   결강   김관식, 쌍놈의 새끼들이라고 소리지름. 지참한 막걸리를 먹음.   교실내에 쌓인 두터운 먼지가 다정스러움.   김소월   김수영 휴학계   전봉래   김종삼 한 귀퉁이에 서서 조심스럽게 소주를 나눔. 브란덴브르그 협주곡 제5번을 기다리고 있음.   교사.   아름다운 레바논 골 기에 있음.     박용래. 1925 - 1984. 충남 부여에서 출생하여 강경상고를 졸업했다. 1955년 에 ^6 236^가을의 노래^356 3^를 추천받아 문단에 데뷔, 한국적 정서를 바탕으로 섬세하고 간결한 함축미를 특징으로 하는 작품을 발표했다. 시집으로 , 유작집으로 가 있다.      강아지풀   남은 아지랑이가 훌훌   타오르는 어느 역 구   내 모퉁이 어메는 노   오란 아베도 노란 화   물에 실려 온 나도사   오요요 강아지풀. 목   마른 침묵은 싫어 삐   걱 삐걱 여닫는 바람   소리 싫어 반딧불 쀼리는. 동네로 다시 이   사 간다. 다 두고 이   술 단지만 들고 간다.   땅 밑에서 엣 상여 소   리 들리어라. 녹물이   든 오요요 강아지풀.      월훈   첩첩 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읍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뚝, 그 너머 강기슭에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마을.   갱 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지처럼 후미진 외딴 집, 외딴집에도 불빛은 앉아 이슥토록 창문은 모과빛입니다.   기인 밤입니다. 외딴 집 노인은 홀로 잠이 깨어 출출한 나머지 무우를 깎기도 하고 고구마를 깎다, 문득 바람도 없는데 시나브로 풀려 풀려 내리는 짚단 짚오라기의 설레임을 듣습니다. 귀를 모으고 듣지요. 후루룩 후루룩 처마깃에 나래 묻는 이름 모를 새, 새들의 온기를 생각합니다. 숨을 죽이고 생각하지요.   참 오래 오래, 노인의 자리맡에 밭은 기침 소리도 없을 양이면 벽 속에서 겨울 귀뚜라미는 울지요. 떼를 지어 웁니다. 벽이 무너지라고 웁니다.   어느덧 밖에는 눈발이라도 치는지, 펄펄 함박눈이라도 흩날리는지, 창호지 문살에 돋는 월훈.      풀꽃   홀린 듯 홀린 듯 사람들은   산으로 물구경 가고   다리 밑은 지금 위험수위   탁류에 휘말려 휘말려 뿌리 뽑힐라   교각의 풀꽃은 이제 필사적이다   사면에 물보래치는 아우성   사람들은 어슬렁 어슬렁 물구경 가고.      저녁 눈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적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 터만 다니며 붐비다.      황산메기   밀물에   슬리고   썰물에   뜨는   하염없는 개펄   살더라, 살더라   사알짝 흙에 덮여   목이 메는 백강하류   노을밴 황산메기는   애꾸눈이 메기는 살더라   살더라.      겨울밤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 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밑 딸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이인석. 1917 - 1979. 황해도 해주 출생. 해주고보 졸업. 해방후 월남하여 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 1959년도 을 수상했으며 이 무렵부터 시극을 발표함으로써 우리나라에 시극이란 문학형태를 개척해 놓았다. 시집으로 이 있다.      도척의 개   밤의 고요를 찢으며   줄기차게   절망을 운다   원한이 납덩이로 가라앉은   담장높은   흉가들...   공포의 성곽을 둘러치는 충견이여   이 밤 또 네 주인은   무엇을 음모하여 미소짓는가.     송욱. 1925 - 1960. 서울 출생. 서울 문리대 영문과를 졸업. 1952년 지에 '꽃'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한 그는 문명비평적인 풍자와 패러독스를 즐겨 다루었다. 시집 시론집 등이 있다.      장미   장미밭이다   붉은 꽃잎 바로 옆에   푸른 잎이 우거져   가시도 햇살 받고   서슬이 푸르렀다   벌거숭이 그대로   춤을 추리라   눈물에 씻기운   발을 뻗고서   붉은 해가 지도록   춤을 추리라   장미밭이다   피 방울이 지면   꽃잎이 먹고   푸른잎을 두르고   기진하며는   가시마다 살이 묻은   꽃이 피리라      개의 이유   살결이 아니라 털결이 흡사 눈송이와 같다. 스핏쓰란 이름처럼 주둥이가 뾰죽하다. 밖에서 돌아오면 채 앉을 사이도 없이 무릎 위로 기어오르다가 눈덩이처럼 온 몸이 돌돌돌 뭉쳐지며 떨어진다. 눈덩이처럼 아프지 않다!   마치 첫사랑으로 껴안은 때같이 죽을 듯 되살아날 듯 한 시이에서 저리도록 기쁜 소리가 목청 속에서 사뭇 구구대다가 구르기만 하다가 트일 새 없이 온갖 몸짓으로 자지러진다!   가려우면 날카로운 발톱에 침칠하고 긁는다. 침과 발톱, 이상하게 색다른 두 가지 무기를 갖추었다!   아무리 귀한 손님이라도 낯을 가려 마구 짖는다. 아무리 다정한 사이라도 먹는 사이에는 얼씬 못하게 한다. 원수와 먹이를 보면 태고적처럼 법열에 들어 정신을 통일한다!   잠들어도 종긋한 두 귀는 안테나 삼아 세워 둔다. 콧길 씀씀이 이루 이르지 않는 데가 없고 빈틈 없는 주의력이 레이더망과 같다.   되도록 납작하게 엎드리어 대지와 일치한 몸매로써 두 발로 뼈다귀를 쥐고 깨무는 이빨! 구미가 당기면 명주 행주처럼 접시를 말끔히 훔쳐 놓는 혓바닥! 전쟁에 익숙하며 능히 평화를 즐길 줄 안다.   오직 애무를 청할 때만 비로서 쫑긋한 귀를 재우고 손을 핥아 준다. 아아 경계라는 마지막 깃발을 내린 셈이다!   이 때문일까. 너무나 아름다워 적막한 설경에는 흔히 사랑스런 강아지가 보이는 것은! 뛰노는 눈덩이가, 딩구는 눈덩이가 보이는 것은!     구자운. 1926 - 1972. 부산 출생. 소아마비의 불구인 그는, 에 시 '균열'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했으며 을 수상(1959) 했다. 동인, 한국적인 소재를 노래하면서도 사물의 존재의 영원성까지 노래한 것이 그의 시의 특징이다. 시집으로 등이 있다.      청자수병   아련히 번져 내려   구슬을 이루었네.   벌레가 살며시   풀포기를 헤치듯   어머니의 젖빛   아롱진 이 수병으로   이윽고 이르렀네.   눈물인들   또 머흐는 하늘의 구름인들   오롯한 이 자리   어이 따를손가.   서려서 슴슴히   희맑게 엉긴 것이랑   여민 입   은은히 구을른 부프름이랑   궁글르는 바다의   둥긋이 웃음 지은 달이라커니.   아롱아롱   묽게 무늬지어 어우려진 운학   엷고 아스라하여라.   있음이어!   오, 저어기 죽음과 이웃하여   꽃다움으로 애설푸레 시름을   어루만지어라.   오늘   뉘 사랑 이렇듯 아늑하리야?   꽃잎이 팔랑거려   손으로 새는 달빛을 주우려는 듯   나는 왔다.   오, 수병이여!   나의 목마름을 다스려   어릿광대   바람도 선선히 오는데   안타까움이야   호젓이 우로에 젖는 양   가슴에 번져내려   아렴풋 옥을 이루었네.      우리들은 샘물에   저물녘 흥청대는 이끼를 뜯으면서   우리들은 샘물에 씻기는 해골일 걸세.   소금인 양 흰 덩어리 이루어   아늑한 깊은 수풀의 길표 옆에서.   점백이 뱀이 움틀거린다.   전엔 희망이었을 엷은 눈을 뜨고서   반역의 바위를 물어뜯을 때,   우리들은 꿈꾸느니, 어슬녘의 파선을,   검은 절망의 물결 드높이   벼락불의 축복을 가져오며,   허무의 고요가 기슭으로 밀려닥침을   그리고 갓난 아이의 울음이 어머니의 오장을 꿰뚫음을,   캄캄한 어둠에서 아침이 태어남을,   노여움이 아니고 배의 키바퀴도 아니고,   영롱한 맑은 숨결로 엉긴   소리들이 날개 이루어 파닥거려 옴을.   우리들은 밤잠에 잠기는   썩어 버린 관 속의 해골일 걸세.   빗물인 양 내리는 나뭇잎의 입맞춤에 덮인,   그리고 가끔씩 하품을 하며 있는 야심 없는 꽃,   묻혀서 보이진 않지만 가장 뚜렷한   작은 거울 쪽.     박인환. 1926 - 1956. 강원 인제 출생.  평양 의학전문시절부터 시작을 했던 그는 해방과 함께 의학을 중단, 서점을 경영하면서 많은 시인들과 교류를 갖기 시작했다.  5인 합동시집 을 발간하여 모더니즘 운동을 활발히 전개, 도시적이면서도 인생파적인 비애가 다른 동인들보다 두드러진 것이 그의 시세계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시집으로 과 가 있다.      목마와 숙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 한다.   ... 등대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세월이 가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 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신동엽. 1932 - 1969. 충남 부여 출생. 신춘문예에 장시 ^6 236^이야기 하는 쟁기꾼의 대지^356 3^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으며 시극운동에도 참여하여 단막 시극 ^6 236^그 입술에 파인 그늘^356 3^을 공연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서사적 긴 호흡과 민족사의 수난을 바탕으로 했으며 시집으로는 등이 있다.  39세에 요절.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 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   티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모아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김관식. 1934 - 1970. 충남 논산 출생. 호는 우현. 유년시절에 한학을 했으며 의 추천을 받아 데뷔(1955)했다.  우달리 주벽이 심해 숱한 에피소드를 남겼으나 강직하고 너그러운 천성의 시인으로 10여년간의 가난과 질병을 청산하고 3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시집 과 에세이 등 다수를 발표했다.      옹손지   해 뜨면   굴 속에서   기어나와   노닐고,   매양 나물죽 한 보시기   싸래기밥 두어 술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다.   남루룰 벗어   바위에 빨아 널고   발가벗은 채 쪼그리고 앉아서   등솔기에 햇살을 쪼이다.   해지면   굴 안으로   기어들어   쉬나니.      연   수천만 마리   떼를 지어 날으는 잠자리들은   그날 하루가 다하기 전에   한 뼘 가웃 남짓한 날빛을 앞에 두고, 마즈막 타는, 안쓰러히 부서지는 저녁 햇살을.   얇은 나래야 바스러지건 말건   불타는 눈동자를 어즈러히 구을리며   바람에 흐르다가 한동안은 제대로 발을 떨고 곤두서서   어젯밤 자고온 풀시밭을 다시는 내려가지 않으리라고   갓난 애기의 새끼손가락 보담도 짧은 키를 가지고   허공을 주름잡아 가로 세로 자질하며 가물 높이 떠 돌아다니고 있었다.   연못가에서는   인제 마악 자라 오르는 어리디 어린 아그배나무같이   물 오른 아희들이 웃도리를 벗고 서서   그 가운데 어떤 놈은 물 속의 하늘만을 들여다보고 제가끔 골똘한 생각에 잠겼다.   허전히 무너져 내린 내 마음 한구석 그 어느 그늘진 개흙밭에선   감돌아 흐르는 향기들을 마련하며   연꽃이 큰 봉오리를 열었다.      거산호   산에 가 살래.   팥밭을 일궈 곡식도 심우고   질그릇이나 구워 먹고   가끔, 날씨 청명하면 동해에 나가   물고기 몇놈 데리고 오고   작록도 싫으니 산에 가 살래.     이경록. 1948 - 11977. 경북 월성 출생. 중대 문예창작꽈 졸업. 으로 문단에 데뷔하여 각 문예지와 동인지를 통해 활동하면서 자신의 의식 구조에 숨어 있는 좌절과 죽음의 그늘을 딛고 일어서려는 강한 초극의지와 사랑에의 접근을 시화시킴으로써 관심을 모았으나 1977년에 지병인 백혈병과의 악전고투 끝에 30세의 아까운 나이로 요절했다. 시집으로 가 있다.      이 식물원을 위하여 5   우리 서로 합창합시다. 구화로   꽃을 피웁시다. 구화로   우리만의 암유를 위해서, 구화로   우리만의 결사를 지키기 위해서, 구화로   산난초가 입을 벙긋합니다. 포인세티아도 입을 벙긋합니다. 남천도 벙긋하고, 진달래도 벙긋합니다. 일렬의 철쭉, 동백, 열대식물들도 따라 벙긋합니다. 식물원의 식물들은 모두 입만 벙긋댑니다. 언젠가 때가 오면, 두 발 독사도 알게 될 겝니다.   우리 서로 합창합시다. 구화로,   꽃을 피웁시다. 구화로,       원로, 중견 85인선 I     강계순. 1937년 경남 김해 출생. 성균관대 불문과 졸업. 를 통해 문단에 데뷔하여 동인에 참여했다. 시집으로 과 에세이 등이 있다. 현재 동인으로 작품에 전념하고 있다.      안개속에서   땅 속에는 마르지 않는   물의 근원이 있었서   수만 가지 색깔의 눈물로   봄을 피워 올리고   하늘 속에 떠 있는   맑고 맑은 우물   마르지 않는 눈물을   나는 길어 올리고 있다.   욕심을 놓고 돌아서면   사방에서 소리치고 있는 안깨   안개 속에 떠 있는   무중력의 사랑을 본다.   돌아가리라   가진 것 다 돌려주고   이제야 몸 가볍게 시작하는   여행   휘적이며 휘적이며   조금씩 소멸해 가는   우리들의 매듭.   돌아가리라   이른 아침   승천하는 맨 살의 안개   다친 몸 거두어   비단 수건으로 닦아 내고   이제   무연의 들판에 돌아가리라.     강민. 1933년 서울 출생. 본명은 성철.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등에서 기획실장으로 일했다. 시집으로 등이 있고 현재 금성출판사 편집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그는 강한 현실감과 개성의 추구에 몰두하는 시작품을 쓰고 있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비가 내린다   충충한 층암의 벼랑에서   의미를 잃은 언어   고단한 잠 속에   그것은 거대한 쭉지를 벌리고   검은 그늘로 덮여 온다.   우리 생명의 광맥은   어디에 숨어 있나   가위 눌려, 허덕이다 깨어 보면   무심한 천정에 번진   어쩌면 독버섯같은   어쩌면 미소같은   빗물의 무늬   모반의 물결에   갈리고 닦이어 오수중 시민인 의   조약돌이 찾고 있는 것   승리의 깃발 없는 깃대에   어둡게 나부끼는   잃어버린 심층의 언어,   녹슨 유자철선 속에서   언젠가 형제가 찾아 헤맨   애증의 인간 동산에   비가 내린다.   시민의 고단한 잠 속에   그 비는 내린다.     강우식. 1941년 강원도 주문진 출생. 성균관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에 '사행시초'(1966)를 추천받아 문단활동을 시작한 그는 서민들의 한을 질펀하고 끈질긴 맛으로 시에 토속적인 색감을 잘 살리고 있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동인이며 현재 성균대 강사로 출강.      사행시초   (하나)   내외여, 우리들의 방은 하나의 사과속 같다.   아기의 손톱 끝에련듯 해맑은 햇볕속   누가 그 순수한 외계의 안쪽에서   은밀하게 짜올린 속살 속의 우리를 알리.   (둘)   순이의 혓바닥만한 잎새 하나   먼 세상이나 내다보듯   초록의 물구비를 넘어나   짝진 머슴애의 얼굴을 파랗게 쳐다보네.   (셋)   화사한 잔치로 한 마을을   온통 불길로 휩쓸 것 같은 노을이 타면   그 옛날 순이가 자주 얼굴을 묻던   내 왼쪽 가슴팍에 새삼 피어 오르는 쓰린 눈물이여.   (넷)   계집애들의 뱃때기라도 올라타듯   달이 뜬다. 젖물같이 젖어 오는   저 빛살들은 내 어머님의 사랑방 같은 데서   얼마나 묵었다 시방 오는가.   (다섯)   낙엽은, 한 여자가 생리일에 꾸겨버린 색종이처럼   나무가지 끝에 매달려 있다. 가을날   무덤 속같이 생각이 깊어버린 여자 곁에서   사랑이여, 우리가 할일이라곤 하나도 없다.      타는 사랑은   태양에 끄을린 살갗이   하루나 이틀쯤 쓰려오는   팔월이면 별이 박히듯   떠오르는 여자들이 있어   아파라   살뭉치로 살뭉치로 와서   타는 사랑은   물집이 생기는 아픔으로 일어   올리브 향유나 바르며   온밤을 뒤척이게 하고   아내 몰래 창가에서   그 옛날 여자들의 이름을 죄처럼 쓰고   어떤 때는 그리움으로,   아픔으로 지우나니.   팔월이면 어이하여 살이든지,   마음이든지   이리 불타고   살아 있다는 것이   가만히 가만히 그리운 이름들을   하나씩 떠올리듯   행복하기만 하냐.   강인한. 1944년 전북 전주 출생. 전북대학교 국문과 졸업.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을 수상(1982).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시집으로 이 있다.      귀   길이 끝나는 곳에서   바람이 일어난다.   바람보다 투명한 우리들의 귀.     하찮은 이야기에도   놀라기를 잘해   잠자는 시간에도 닫혀지지 않고   문 밖에 나가 쪼그려 앉은   가엾은 우리들의 귀.   이 세상 어디선가   총성이 울리고, 사람이   사람이 눈 부릅뜬 채 거꾸러져도   전혀 듣지 못하고   수도 꼭지에서 방울방울   무심히 떨어지는 물방울   그 동그란 소문 속으로 들어가버린   편리한 우리들의 귀      남행길   서울에서 정읍까지   적막한 직선으로   눈이 내린다.   영하 오도의 슬픔으로 내린다.   검은 고속도로 위에   도로정비를 하는 늙은 인부들의   오렌지빛 제복 위에   삼륜차로 달달거리는 가난한 이삿짐 위에   내린다.   창밖을 바라보는   나어린 작부의 취한 눈망울   떠나온 방직공장 기숙사 지붕 위에   손금처럼 말라붙은 만경강 줄기 위에   갈가마귀 북풍 속을   떼지어 날아가는 남행길   반도의 하반신에   어루만지듯이 눈이 내린다. [출처] [펌] 한국의 애송시 (1)|작성자 수위    
211    특수문자 쓰는 방법 댓글:  조회:5399  추천:0  2015-02-13
한/영 키에서 한글로 해 놓은 상태에서 "ㄱ", "ㄴ"등의 모음을 누른다음에 한자키를 누르면 특수문자가 나오는거 아시죠? 한눈에 알아보기 쉽게 정리를 해봤습니다.    ㄱ ! ' , .  ̄ : ; ‥ … ¨ 〃 ­ ― ∥ \ ∼ ´ ~ ˇ ˘ ˝ ˚ ˙ ¸ ˛ ¡ ¿ ː ㄴ " ( ) [ ] { } ‘ ’ “ ” 〔 〕 〈 〉 《 》 「 」 『 』 【 】 ㄷ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ㄹ $ % ₩ F ′ ″ ℃ Å ¢ £ ¥ ¤ ℉ ‰ ?? ㎕ ㎖ ㎗ ℓ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Ω ㏀ ㏁ ㎊ ㎋ ㎌ ㏖ ㏅ ㎭ ㎮ ㎯ ㏛ ㎩ ㎪ ㎫ ㎬ ㏝ ㏐ ㏓ ㏃ ㏉ ㏜ ㏆ ㅁ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ª º ㅂ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ㅅ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ㅇ ⓐ ⓑ ⓒ ⓓ ⓔ ⓕ ⓖ ⓗ ⓘ ⓙ ⓚ ⓛ ⓜ ⓝ ⓞ ⓖ ⓠ ⓡ ⓢ ⓣ ⓤ ⓥ ⓦ ⓧ ⓨ ⓩ ① ② ③ ④ ⑤ ⑥ ⑦ ⑧ ⑨ ⑩ ⑪ ⑫ ⑬ ⑭ ⑮ ⒜ ⒝ ⒞ ⒟ ⒠ ⒡ ⒢ ⒣ ⒤ ⒥ ⒦ ⒧ ⒨ ⒩ ⒪ ⒫ ⒬ ⒭ ⒮ ⒯ ⒰ ⒱ ⒲ ⒳ ⒴ ⒵ ⑴ ⑵ ⑶ ⑷ ⑸ ⑹ ⑺ ⑻ ⑼ ⑽ ⑾ ⑿ ⒀ ⒁ ⒂ ㅈ 0 1 2 3 4 5 6 7 8 9 ⅰ ⅱ ⅲ ⅳ ⅴ ⅵ ⅶ ⅷ ⅸ ⅹ Ⅰ Ⅱ Ⅲ Ⅳ Ⅴ Ⅵ Ⅶ Ⅷ Ⅸ Ⅹ ㅊ ½ ⅓ ⅔ ¼ ¾ ⅛ ⅜ ⅝ ⅞ ¹ ² ³ ⁴ ⁿ ₁ ₂ ₃ ₄ ㅋ ㄱ ㄲ ㄳ ㄴ ㄵ ㄶ ㄷ ㄸ ㄹ ㄺ ㄻ ㄼ ㄽ ㄾ ㄿ ㅀ ㅁ ㅂ ㅃ ㅄ ㅅ ㅆ ㅇ ㅈ ㅉ ㅊ ㅋ ㅌ ㅍ ㅎ ㅏ ㅐ ㅑ ㅒ ㅓ ㅔ ㅕ ㅖ ㅗ ㅘ ㅙ ㅚ ㅛ ㅜ ㅝ ㅞ ㅟ ㅠ ㅡ ㅢ ㅣ ㅌ ㅥ ㅦ ㅧ ㅨ ㅩ ㅪ ㅫ ㅬ ㅭ ㅮ ㅯ ㅰ ㅱ ㅲ ㅳ ㅴ ㅵ ㅶ ㅷ ㅸ ㅹ ㅺ ㅻ ㅼ ㅽ ㅾ ㅿ ㆀ ㆁ ㆂ ㆃ ㆄ ㆅ ㆆ ㆇ ㆈ ㆉ ㆊ ㆋ ㆌ ㆍ ㆎ ㅍ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T U V W X Y Z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t u v w x y z ㅎ Α Β Γ Δ Ε Ζ Η Θ Ι Κ Λ Μ Ν Ξ Ο Π Ρ Σ Τ Υ Φ Χ Ψ Ω α β γ δ ε ζ η θ ι κ λ μ ν ξ ο π ρ σ τ υ φ χ ψ ω ㄲ Æ Ð Ħ IJ Ŀ Ł Ø Œ Þ Ŧ Ŋ æ đ ð Ł Ø ij ĸ ŀ ł ø œ ß þ ŧ ŋ ʼn ㄸ ぁ あ ぃ い ぅ う ぇ え ぉ お か が き ぎ う ぐ け げ こ ご さ ざ し じ す ず せ ぜ そ ぞ た だ ち ぢ っ つ づ て ぞ た だ ち ぢ っ つ づ て で と ど な に ぬ ね の は ば ぱ ひ び ぴ ふ ぶ ぷ へ べ ぺ ほ ぼ ぽ ま み む め も ゃ や ゅ ゆ ょ よ ら り る れ ろ ゎ わ ゐ ゑ を ん ㅃ ァ ア ィ イ ゥ ウ ェ エ ォ オ カ ガ キ ギ ク グ ケ ゲ コ ゴ サ ザ シ ジ ス ズ セ ゼ ソ ゾ タ ダ チ ヂ ッ ツ ヅ テ デ ト ド ナ ニ ヌ ネ ノ ハ バ パ ヒ ビ ピ フ ブ プ ヘ ベ ペ ホ ボ ポ マ ミ ム メ モ ャ ヤ ュ ユ ョ ヨ ラ リ ル レ ロ ヮ ワ ヰ ヱ ヲ ン ヴ ヵ ヶ ㅆ А Б В Г Д Е Ё Ж З И Й К Л М Н О П Р С Т У Ф Х Ц Ч Ш Щ Ъ Ы Ь Э Ю Я а б в г д е ё ж з и й к л м н о п р с т ф х ц ч ш щ ъ ы ы ь э ю я [출처] [펌] 특수문자|작성자 수위
210    애송시선 6 댓글:  조회:4146  추천:0  2015-02-13
구경서. 1921년 출생. 호는 남촌 또는 가남. 1945년 동인지 을 주간했으며 시집으로 등이 있다.      정물   은쟁반 속에   그 과수원은   싱그러운 가을 바람   사과 배 청포도...   그것들은   포개 쌓인 피라미트 형의 지세로   피곤한 한숨을 잔다   위대한 음악의 반주로   입체의 핵과 핵은   심연의 사상.   하나의 계시   원의 울타리 속   원숙한   발효   그리고   생명의 시간을 기다린다.   그것은   사자의 치아 앞에서   돌과 같이 굳어져 있는   과일들의 인력.   그 하이얀 에프론   위의 과수원   아침   햇살에   난무하는   미각의 나이프   하나.     구상. 1919년 함남 원산 출생. 본명은 상준. 일본 니혼대학 종교과 졸업. 원산 문학가 동맹에서 낸 동인시집 에 작품을 발표 문단에 데뷔. 시집으로는 등이 있다.      초토의 시   1   하꼬방 유리 딱지에 애새끼들   얼굴이 불타는 해바라기마냥 걸려 있다.   내려 쪼이던 햇발이 눈부시어 돌아선다.   나도 돌아선다.   울상이 된 그림자 나의 뒤를 따른다.   어느 접어든 골목에서 걸음을 멈춰라.   잿더미가 소복한 울타리에   개나리가 망울졌다.   저기 언덕을 내려 달리는   체니의 미소엔 앞니가 빠져   죄 하나도 없다.   나는 술 취하듯 흥그러워진다.   그림자 웃으며 앞장을 선다.      수난의 장   1   우 몰려 온다. 돌팔매가 날은다.   머슴애들은 수수깡에 소똥을 꿰매 달고   어른들은 고꽹이를 휘저며 마구 쫓아 오는데   돌아 서서 눈물을 찔끔 흘리고   선지피가 쏟아지는 이마를 감싸 쥐고서   어머니 얼굴도 떠오르지 않는데   나는 이제 어디메로 달려야 하는가.   2   쫓기다가 쫓기다가 숨었다.   도갓집으로 숨었다.   애비 욕 애미 망신 고래고래 터뜨리며   벌떼처럼 에아싸고 빙빙 돌아 가는데   나는 얼른 상여 뚜껑을 열어 제치고   벌떡 드러누워 숨을 죽엮다.   3   피를 토한 듯 후련해지는 가슴이여   술 취한 듯 흥그러워지는 마음이여   사람도 토까비도 얼씬 못하는 상여 속에서   나는 어느 새 달디 단 꿈 한 자리를 엮고 있고나.   4   상여 속에서 송장처럼 잠들은   사나이 얼굴은 십상 달같이 흴게다.   어쩌면 상달같이 깜찍한 여인이 별같은 두 눈을 반짝이며   내 상처에 향기로운 기름을 바르고 있어야 핳 풍경   나의 달가운 꿈 속의 꿈이여.   5   추억의 연못 가엔 사랑의 연꽃도 한 송이 피었으리.   다 홍신은 벗어 놓고 외로움에   장승처럼 못 박혀 있는   또 나의 사랑.   6   꽃다발처럼 화려한 상여를 타고   림보로 향하는 길 위엔   곡성마저 즐겁구나   소복한 나의 여인아   사흘만 참으라.     구석봉. 1936년 충북 영동 출생. 호는 곡천, 양산.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수료. 을 통해 문단에 등단했으며, 제1회 역사 소설 모집, 동아일보사 방송국 개국 기념 단막극 현상모집에서 입상했다. 시집으로 가 있다.      백년 후에 부르고 싶은 노래   그것은 몽롱한 구름을 타고, 장승마냥 서 있는 나를 향하여 무쇠의 형벌을 가하면서, 겹겹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의 시야속은 온통 그들로해서 가득하고, 어떤 날 그들은 밀물과 썰물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그해만의 특권처럼 음탕한 6월이 숨어버리고, 뒤미쳐 달려온 7월도 흠뻑 자란 어느날, 난 마을 사람들의 박꽃 얼굴 빛을 본뜨고 있었다.   우리들의 뒤로는 훌훌히 버리고 뜬 푸른 산이 있었고, 가난한 이들의 집과 황량해진 논밭이 조을고 있었다.   -거기 지나쳐 간 갖가지 슬픈 실화가 있었다.   위도와 경도가 선뜻 취해 잠꼬대를 했기, 지구 위의 조그만 귀퉁이에 불은 노도처럼 날뛰고 있었다.   낯이 검어 가는 태양 아래 가을이 익고 있을 무렵, 엎드려 피를 토한 나의 시집이 있었고, 배만 움켜쥔 채 신음했을 그 일그러진 퇴색한 초가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시멘트 벗은 부엌이 설워 돌아가는 아줌마, 펌풋대 우뚝 우뚝 묵묵한 공허가 있었다고, 젖내 풍기는 고사리 손을 놀려 어영차 밥도 짓고 국수도 썰고, 내 아우랑 여설 살 짜리 계집애랑 각시 신랑 혼례식장 꾸미던 그 회상의 담장 아래로, 아 탄피가 있었고, 해골이 희쭉 웃고 있었다.   거기 슬프게 억센 아이들의 입다문 눈 빛에서 무한히 겹쳐간 밤의 살생과 야만을 읽을 수 있었다. 뼈가 녹아날 태양의 투시처럼 읽어 나갈 수 있었다.   위도와 경도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만물은 다시 바위의 굳굳한 위치로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들의 뒤으로 미망인의 울음 소리가 들려오고, 시가지엔, 죄인 같은 고아와 불구자의 행렬이 밀려 가고 있었다.   나의 시야 속은 어느 지점 눈 덮이는 이국벌판 위에, 새로 생긴 공동묘지가 폭풍우를 삼켜가면서 울고 있었다.     권국명. 1942년 경북 대구에서 출생했다. 경북대를 졸업하고 을 통하여 문단에 데뷔(1946)했다. 연작시 '무명효' 외에도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나는 사랑이었네라   나는 피였네라,   처음은 다만 붉음만이었다가   다음은 조금씩 풀리는   아픔이었다가,   석남꽃 허리에 아픔이었다가,   이 어지러운 햇살 속에   핏줄 터져 황홀히 흘리는   피였네라,   내 피는 남산을 적시고   남산과 대천세계를 적시고   그래도 죽지 않는 더운 사랑이었네라.     권달웅. 1944년 경북 봉화 출생. 한양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시집으로는 이 있으며 현재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감처럼   가랑잎 더미에는   서리가 하얗게 내리고   훤한 하늘에는   감이 익었다.   사랑하는 사람아,   긴 날을 잎피워 온   어리석은 마음이 있었다면   사랑하는 사람아,   해지는 하늘에   비웃음인 듯 네 마음을   걸어놓고 가거라.   눈웃음인 듯 내 마음을   걸어놓고 가거라.   찬서리 만나   빨갛게 익은 감처럼.     권일송. 1933년 전북 순창 출생. 신춘문예에 시 '불면의 훈장'과 신춘문예에 '강변이야기'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동인으로 활동. 언어의 사회성을 추구 표현의 세련도를 이루는 것이 그의 시의 특징. 시집으로 와 수필집 등이 있다.      풀잎   그리운 이의 눈 속에 들어가서   그 눈 속의 우뚝한 무덤이 되고 싶다.   무덤에 돋아나는 엉겅퀴와   가느다란 몸살의 햇빛   그리운 이의 눈 속에 들어가서   늘 깨어 있는 한 방울의   술이 되고 싶다.   뺏고 빼앗기는 마음의 줄 다리기   실상 사람의 말씀은   죽음 속에서 돌아 눕는   조용한 풀잎의 새벽   언제까지나 외로운 이승의 뱃길   글썽한 눈물로 풀이하는   내 마음 깊은 곳   서걱이는 갈대의 숲.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서설   아르노 강변의 꽃도 지고   백합 문장의 도시와 창들이   이파리를 접으며 가을에 사위는   눈을 들면 낙엽으로 저무는 모든 것   글썽한 눈물이게 내 맘도 지고   4년을 하루같이 순금으로 일렁였던   마지막 한 점 붓을 놓았을 때   모나리자 모나리자 모나리자   부인 ^6 236^지오콘다^356 3^여-   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울지 않겠읍니다.   당신의 신비로운 눈동자와 함께   그 온갖 것   내게서 소리없이 사라져 간다 할지라도   영원을 때리는 오묘로운 빛보라   그 앞에서   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서러워 않겠읍니다.   육신에 닿는 아픈 여백의 사랑을 말고   찰나에 숨지는 이슬의 영광을 말고   이승에서 만나는 그 최후의   값진 두려움에 떠는 담홍빛의 영혼들   이윽고 첫날같이 칠칠한 밤이 내리고   서늘한 내 손이   깊디깊은 산회의 덧문에 걸리어   서성이고 있었던 경이의 순간   모나리자 모나리자 모나리자   부인 ^6 236^지오콘다^356 3^여-   그때 당신의 수정 입술은   내 머리털에 부딪고   처음으로 내미는   당신의 부신 손목에 입맞추었을 때   오호 전혀 부끄러운 쉰 넷의 생애   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차마 울 수조차 없었읍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오지 못할 길   죽음과 만날 그 최후의 약속 위하여   나는 눈 덮힌 알프스를 넘고   당신은 카라브리아 연안   지아비 프란체스코의 곁으로   달려갔읍니다.   사랑이란 기다리는 플로렌스의 꽃밭   예술이란 호올로 남는   나의 키 큰 그림자에 불외했던 것   나의 손은 이미 조용한 천상의 것   당신의 눈동자는 이승을 출렁이는   고요한 상징과 강물의 회귀로 시방은   문예부흥의 심장   플로렌스에 떨구는   나의 한 방울 눈물의 의미처럼   아르노 강변의 꽃은 지고   내 맘의 설운 문장도 어둠에 묻히는   부인 ^6 236^지오콘다^356 3^여-     고원. 1925년 출생. 삼인시집 으로 문단에 데뷔하여 등 시집이 있고, 미국 아이오아대학 출판부를 통해 을 영역 간행하여 해외에 한국 현대시를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모나리자의 손   저녁 냄새가 번지는 미소,   그쪽으로 가까이 가면서   나는 유난히 크다란   모나리자의 손을 느낀다.   두껍고 따뜻하다.   이 손은 나의 어느 부분이든지   스쳐가거나 휘감을 수 있고, 나를   저 아래로 밀어 넣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미소 뒤의 세계는   그 손, 큰 손 때문에   어둡고 차지 않는가?   놀빛 속에 입술이 흐르는구나.     고은. 1933년 전북 군산 출생. 본명은 은태이며 법명은 일초이다. 11년간 불교 승려 생활을 했으며 에 시 '봄밤의 말씀' 등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그의 시의 특색은 자연이 갖고 있는 무의지의 율동에서 삶의 빛을 찾아 내려는 노력과 의식의 객관화를 표현하는 데 있다. 시집으로 과 장편소설 등이 있다.      문의 * 마을에 가서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달고   길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벋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 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 문의:충북 청원군의 한 마을.      신해가사   청수장에서   내가 무엇이 되어 여기에 남아 있는가.   청수장 수년의 빈 마음으로   때로는 모르는 것을 너라고 불러   물소리를 이루어 앉아 있어도,   살아온 것 만큼 헛되이 오래인 것이   다만 물소리로 물을 흐르게 한다.   네 앞에서 낯익을수록 추운 너보다도   어둑어둑한 나무 잎새 저마다 잠들어서   네 몸안에 둔 마음도 잠이 든다.   이제 내가 무엇이 되어 여기에 남아 있는가.   깊은 밤이 돌아다보면 더욱 깊어서   물소리는 저 혼자서 흐르는 물을 따라 가는가.   죽사 * 에서   강물은 저 스스로 돌면서 흐른다.   때때로 빠른 강물도 늦어서   아직 이 세상을 벗어나지 않고   빛이 푸룬 빛을 만들어   강 기슭의 풀과 나무 사이로 흐른다.   그러나 강물을 따라가며   아무리 오래된 소리로 불러도   죽음이란 더 깊어서   깨이는 것은   저문 강물 위의 작은 물소리 일 뿐.   이 세상은 서로 서로 혼자 남아서   강물이 남겨 준 것이 된다.   아아 놀라워라 바람 한 자락,   새삼스러운 산 너머에도   이 세상에도 따로 남겨 둔 것이 된다.   * 죽사:경기도 양평군 용문산 근처의 산사. 옛 시대에 있었던 암자 죽사에서 연유된다.   제4 한강교에서   없어진 것은 고인만이 아니다.   이 세상도 강을 건너서   비오는 날만큼 멀고   항상 울던 밤섬이 없어져서   이 세상에 흩어졌다.   저녁 무렵 불이 켜질 때   흐르는 물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맹세하랴.   우리가 무엇을 맹세하고 돌아가랴.   우리가 이름을 부르며 떠도는 것은   떠도는 곳에만 우리가 있을지라도   또한 금빛 저녁바다 위에도 있다.   그렇다. 우연은 어느 날보다 잉잉 거린다.   우리가 우연으로 모여서   몸 속의 어둠으로 떠도는   저녁바다에 이르러   다음날 모든 금빛을 거둬버리려 함!   우연이란 몇 만개의 우연인 하나와   또 하나의 그리운 벗들아   우리가 우뢰 소리를 먹어도   앞에서 쓰러지지 않고   저녁 바다의 번개를 불러서 운다.   우리가 떠돌지 않을 때   누가 구층 십층 밑에서 우리로서 떠돌겠는가.      투망   최근 나에게 비극이 없었다.   어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새벽마다   동해 전체에 그물을 던졌다.   처음 몇 번은 소위 허무를 낚아올렸을 뿐,   내 그물에서 새벽 물방울들이 발전했다.   캄캄한 휘파람소리,   내 손이 타고 온 몸이 탔다.   그러나 새벽마다 그물을 던졌다.   이윽꼬 동해 전체를 낚아 올려서   동해안의 긴 줄에 오징어로 널어 두었다.   한반도여 아무리 가난할지라도 내 오징어를 팔지 말라.      삶   비록 우리가 가진 것이 없더라도   바람 한 점 없이   지는 나무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또한 바람이 일어나서   흐득흐득 지는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우리가 아는 것이 없더라도   물이 왔다가 가는   저 오랜 썰물 때에 남아 있을 일이다.   젊은 아내여   여기서 사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가지며 무엇을 안다고 하겠는가   다만 잎새가 지고 물이 왔다가 갈 따름이다.      화살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가서는 돌아오지 말자   박혀서   박힌 아픔과 함께 썩어서 돌아오지 말자   우리 모두 숨 끊고 활시위를 떠나자   몇 십년 동안 가진 것   몇 십년 동안 누린 것   몇 십년 동안 쌓은 것   행복이라던가   뭣이라던가   그런 것 다 넝마도 버리고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이 소리친다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저 캄캄한 대낮 과녁이 달려온다   이윽고 과녁이 피 뿜으며 쓰러질 때   단 한번   우리 모두 화살로 피를 흘리자   돌아오지 말자   오 화살 정의의 병사여 영령이여      조국의 별   별 하나 우러러보며 젊자   어둠 속에서   내 자식들의 초롱초롱한 가슴이자   내 가슴으로   한밤중 몇백 광년의 조국이자   아무리 멍든 몸으로 쓰러질지라도   지금 진리에 가장 가까운 건 젊음이다   땅 위의 모든 이들아 젊자   긴 밤 두 눈 두 눈물로   내 조국은   저 별과 나 사이의 가득 찬 기쁨 아니냐   별 우러러보며 젊자   결코 욕될 수 없는   내 조국의 뜨거운 별 하나로   네 자식 내 자식의 그날을 삼자   그렇다 이 아름다움의 끝   항상 끝에서 태어난다 아침이자   내 아침 햇빛 떨리는 조국   오늘 여기 부여안을 일체 결합의 젊음이자     김경린. 1918년 함북 경성 출생. 해방직전에 모더니즘 에 참가. 8.15후엔 및 동인으로 모더니즘 운동을 전개. 이후 침묵하다가 최근 다시 시와 시론을 쓰기 시작(1981)했다. 엔솔로지 등에 작품을 다수 발표했다.      국제 열차는 타자기처럼   오늘도   성난 타자기처럼   질주하는 국제열차에   나의   젊음은 실려가고   보라빛   애정을 날리며   경사진 가로에서   또다시   태양에 젖어 돌아오는 벗들을 본다.   옛날   나의 조상들이   뿌리고 간 설화가   아직도 남은 거리와 거리에   불안과   예절과 그리고   공포만이 거품일어   꽃과 태양을 등지고   가는 나에게   어둠은 빗발처럼 내려온다.   또디시   먼 앞날에   추락하는 애증이   나의 가슴을 찌르면   거울처럼   그리운 사람아   흐르는 기류를 안고   투명한 아침을 가져오리.     김광규. 1941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독문과와 서독 뮌헨대에서 수학. 현재는 한양대 독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에 작품을 발표(1975)하기 시작하여 시집 등을 출간했다. 제1회 제5회 제4회 을 수상한 그의 작품 세계는 평이한 언어로 씌어진 일상시이면서도 깊은 내용을 담고 있어 독자와의 통교 회복에 좋은 역할을 하였다.      안개의 나라   언제나 안개가 짙은   안개의 나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안개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안개 속에 사노라면   안개에 익숙해져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그러므로   보려고 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듣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귀는 자꾸 커진다   하얀 안개의 귀를 가진   토끼 같은 사람들이   안개의 나라에 산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 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갔고   몇이서 춤을 추러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김광균. 1914년 경기 개성 출생. 에 시 '야차'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 및 동인으로 활동했다. 김기림의 이론과 시작에 영향을 받고 '시는 회화다'라는 모더니즘의 시론을 실천, 회화성과 이미지 공간적 조형으로 이루어진 것이 그의 작품의 특징이다. 시집으로 등이 있으며, 1950년 이후 실업계에 투신하고 있다.      추일 서정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ㅎ게 한다.   길은 한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진   일광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나무의 근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낸 채   한가닥 꾸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세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홀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      설야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에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먼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서리다.      와사등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 여름 해 황망히 날개를 접고   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진 채   사념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구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고 왔기에   길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김광림. 1929년 함남 원산 출생. 본명은 충남이다. 에 시 '장마' 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 동인지 과 시집지 을 발행했으며 제5회 을 수상했다. 시집으로는 과 시론집 등이 있다.      파리의 개   애를 낳기보다   차라리 개와 함께 산다는   빠리의 여인들   빠리의 개는   낯선 사람을 짖지 않는다   동족끼리 싸울 줄도 모른다   유순하고 점잖키가   퇴화한 어느 인종만 같다   빠리의 개는   이미 개가 아니다   둔갑한 천사의 모습이던가   불신시대를 사는 유일한 동반자가 되어간다.   문명의 한복판에다   질끔 오줌을 갈긴다   이권 앞에서   쿠리게 똥을 싼다   파괴를 모르는   불독의 험상궂은 얼굴이   진짜 형화인지도 모른다   저주를 잊은   세퍼트의 사나운 입술이   정말 자유의 징표인지도 모른다   말귀를 알아 듣는   빠리의 개야   네가 버린 짐승티를   누가 가져갔는지   지금 빠리에는 코제트나 말세리노만한 귀엽게 생긴 애들이   떼지어 다니며 들개처럼 길손을 습격하고 있다   다가오면   밀어부치거나   발길로 걷어차도 무방한   누가 버린지도 모르는 악의 종자들이 있다      석쇠   1   도마 위에서   번득이는 비늘을 털고   몇 토막의 단죄가 있은 다음   숯불에 누워   향을 사르는 물고기   고기는 젓가락 끝에서   맛나는 분신이지만   지도 위에선   자욱한 소연 속   총칼에 찝히는 영토가  된다.   2   날마다 태양은   투망을 한다.   은어떼는   쾌청이고   비린내는   담천과 같아.   3   나란히 선   계집아이들의 종횡,   질서의 꽃밭,   머리를 갸우뚱,   천상   무봉의 하늘   드리운 그물 속엔   비늘 찬 인어가 한 마리   헤엄쳐 오르다가   그만 걸림직도 하다만.     김광협. 1941년 제주 출생. 서울대 사대 졸업. 와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데뷔했으며 현재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 그의 작품 세계는 삶의 세계를 건강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로 충만되어 있다.      말씀   칼 가세요   칼을 가세요   대낮에 거리를 가며   칼을 가세요   목소리도 시언 시언   날이 선 목소리   모든 집이 칼을 가세요   녹이 슬고 무딘 칼을   시퍼렇게 가세요   모든 것이 원한이기보다는   모든 것이 사랑이기에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칼을 가세요   한 근 고깃덩일 탐낼 것이 아니요   양심의 한 쪼가리   그것이 귀하나 그것을 우러러   칼을 가세요   영원히 휘두를 칼을 가세요   김광회. 1929년 충남 예산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을 통해 등단했으며 섬세한 감성으로 절도있는 언어를 구사하는 시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시집으로 가 있다.      피리를 불자   아직도 남은 한 밤 낮이   목이 마르다 피리를 불자.   이삭들은 아직 덜 여물고   열매도 풋내만 난다.   우리들의 소망은 별밭의 꽃   사랑도 저 문 밖에 지나간다.   그리고 모두 멀리만 있지   아직 반가운 대답은 없지   우리는 어디에선가 따로따로   높은 하늘밑 빈 땅위다.   오늘도 한줄기 강물이 간다   강물을 보며 피리를 불자.     김규동. 1923년 함북 경성 출생. 연변의대 수업. 에 '강'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1948). 시집으로 등이 있으며, 수상집 , 평론집 등 다수의 작품이 있는 그는 사회성이 짙은 리얼리즘 경향으로 역사의식과 민중적 언어로써 새로운 시를 많이 발표했다.      오는구나 봄이   다행한 일이다   봄이 오는 소릴 듣는 것은   지난 겨울은   너무 춥고 스산하여   마음 놓지 못하고 살았거니   이제 강이 풀리고   나무에 파란 물이 오르니   희망, 기쁨   그런 것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만 같다   생각해 보라   희망이 없다면 무엇이 될건가   여전히 캄캄한 세상 살아가는 건   죽음이나 마찬가지다   봄바람 살랑대는 거리에 서면   그나마 한 줄기 빛이   잔인하게 등골을 어루만져 주는구나   통일하자   통일하자   외쳐댄 소리도   다시금 산울림 되어 들려온다   이 혼란 속에도   구정이라   더러는 명절 기분을 내는데   북으로 달리는 기차소리   영 들리지 않고   빈소리 외쳐댄 몸이 차라리   형제와 조상님 앞에   엎드려 잘못을 빈다   무엇이 어떻게 됐다는 것이냐   하루 하루 연명이나 하는 건   삶이 아니다   절대로 삶이 아니구나   삼천리 강산 소리치고 일어설   그날 없이는   영광도 아니구나   사십년 묵은   분단의 가시 철망   그대로 놓아둔 채   떨리는 봄소식 듣는 건   산뜻한 봄바람 속에   소스라쳐 놀라는 건   무엇 때문이냐   오 가고 싶고나 고향 가고 싶고나   북쪽 형제 있는 곳   가보고 싶어라   얼싸안고 울어보고 싶어라.      곡예사   가벼우나 슬픈 음악.   관객이 손뼉을 치며 즐거워 할 때,   곡예사의 가슴엔   싸늘한 바람이 스쳐 간다.   아슬 아슬한 새 기술을 부리기 위하여   파리한 얼굴의 여자와   표정없는 구리빛 가슴의 사나이가   줄을 타고 오를 때   껌을 씹으며 담배를 피우며 과자를 먹으며   얼마나 신기한 기대를 보내는 관중들이었던가.   이런 상업일수록 인기가 있어야 하고   또 새로운 멋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곡예사는   오늘도 위험한 공간 속에 살아야 한다.   이쪽 그네에서   저쪽 그네에로   서로 옮겨 탈 순간과 순간.   담배 연기 자욱한   아득한 하늘 위에서   아 저러다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그런 것은 벌써 잊어버린   곡예사의 어저께와 오늘-   하얀 손의 여자여   곡예사여   너의 입술에 어린   떨리는 생명의 포말들을 삼키며   아 인간은   왜 이처럼 잔인해야만 하는가.   원폭의 하늘처럼   소란한 오늘의 기류-   그 속에서 오히려   네가 지니는 한오리의 질서가   오늘은 무한한 기쁨처럼 나를 울린다.     김규태. 1938년 대구 출생. 서울대학교 불문과 졸업. 과 로 등단하여 시집 (공저)이 있다. 현재 부산일보 논설위원으로 재직중이다.      갇힌 뻐꾸기   이따금   내 책상서랍에선   뻐꾸기 소리가 난다.   낡은 목재의   어느 구석진 자리에   새의 혼령이 남아 있었을까.   경상북도 죽령부근의   숲 속에서나 들릴   뻐꾸기 소리.   헐은 사무용   책상 위엔   핏발 잘 서던 날의   내 벌건 손자국도 묻어 있다.   내 절망을 소리내어 울던   눈물 자국도 얼룩져 있다.   속 쓰린   내 추억의 반점들을 쪼아먹고   대신 울어 주는 새   무성했던 그 원형의 나무들에   옮겨 다니며 살던   옛날의 뻐꾸기 한 마리.      졸고 있는 신   하느님은   요즘 계속 졸고 계신다.   눈을 뜨고   맑고 깊게 사물을 가늠해 볼 여유가 없다.   옛날엔   단지 밤에만 주무셨다.   주무실 동안에는   풀벌레까지도 함께 잠들어 꿈꾸었고   자신도 흥건히 꿈 속에 빠져 들 수 있었다.   어쩌다 마른 기침소리만 내어도   아주 잠에 골아 떨어진   땅 속의 두더지와   아슬한 가지 끝에서 숙면하던 날짐승까지도   흠칫 놀라 눈을 떴다.   나도 그때 깨어 일어났다가   다시 잠 들어야 했다.   그때는 생물들이   한결같이 하느님편이어서   그를 극진히 보살폈다.   요즘은   너무 변괴스러운 일이 많아   한 밤에도 잠자리를 펴지 못하고   천상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노인.   하느님이 한낮에도 졸고 있는 이상   우리는 모두 불면증으로 고생하게 된다.     김규화. 1919년 전남 승주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을 통해 문단에 데뷔했으며 시집으로 가 있다. 현재 발행인.      솔베이지 노래를 주제로 한 시   -페르귄트의 말   그러면 그대, 베틀에서 내려오게.   우리들의 사랑은 저 빙산   깊으디 깊은 살얼음 속   영원한 청춘으로 갇히어 있으니.   세월은 그대 베틀에서 날올을 짜며   여름과 겨울을 나누어 놓으며   돌아온 영웅, 백발의 나에게   한조각 꿈과 방랑의 지팡이   회한의 가지 위에 걸어두게 한다.   그러면 그대, 베틀에서 내려오게.   우리들의 사랑은 저 들판   한점 소리 없는 바람으로   잠자다 깨어 있는 푸른 이마.   영원 속에서 살아남아   돌아온 허깨비의 우리들.   훠어이훠어이 춤이나 추어 보세.     김남석. 1920년 함남 북청 출생. 동인지 편집부장을 역임했으며 시집으로 이 있고 시론집 다수를 발표했다.      길은 하난데   길은 하난데   산산하는 발길들아   춥고 시장한 우리 거리일지라도   종소리가 하나의 성전에 굳어지듯   너와 나의 심장은 걷고 있노라.   몹시   출출하고 허술함이   낙화일지라도   낙화일 수 없는   너와 나의 성전보다 굳은 가슴   어버이의 종을 울리며   하늘이 흐리어 어두울지라도   노을빛보다 귀중한   저 능선의 아침으로   아아,   3월에 꽃핀   길은 하난데   옆집 외등 밑을 허우적대지 말고   빈 주머니에 손을 박고   흩어져 까는 밤아!   고달픈 청춘아!   꽃피는 소녀의 남루한 지도가   하이힐에 찢기는 고층 골목은   이렇게 춥고 시장한 시간일지라도   빙하는 흐른다.   얼어붙은 가슴 그대로라도   흐른다.   처럼이나   찢긴 심장에 검을 울리며   북을 울리며 산산치 말고   소녀의 울음 귀담아 안고   구름에 가린 햇살 안고   종소리가 하나의 성전에 굳어지도록   춥고 시장한 우리 거리가   3월의 제비되어지도록   흐르지 않으려나   해빙이 오는 피안으로   아아,   너와 나   길은 하난데.     김년균. 1942년 전북 김제 출생. 서라벌 예대 졸업. 1971년 박목월, 이동주 선생의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 시집으로 이 있다. 그의 시는 짙은 서정을 바탕으로 인간의 내면에 깔린 슬픔과 비애를 노래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문의   우리는 왜 가고 있는가.   모두 오는데,   창가에 서면 꿈들이 오듯   버려진 생각들도 따라서 오듯   강가에 서면 강물이 오듯   강물의 줄기따라 세월이 오듯   삼라만상을 이끄는 평범한 바람   거리에 오듯   모두 오는데,   우리는 왜 가고 있는가.   가랑잎 떨어져서 길목에 지듯   패어진 웅덩이로 빗물 스미듯   우리는 왜 가고 있는가.   어디론지 어디론지 가고만 있는가.     김남조. 1927년 경북 대구 출생.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시집 (1951)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 , (1975)을 수상하였다. 시집으로는 등이 있으며, 현재는 숙명여대 교수로 있다.      목숨   아직 목숨을 목숨이라고 할 수 있는가   꼭 눈을 뽑힌 것처럼 불쌍한   산과 가축과 정든 장독까지   누구 가랑잎 아닌 사람이 없고   누구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고   불 붙은 서울에서   금방 오무려 연꽃처럼 죽어갈 지구를 붙잡고   살면서 배운   가장 욕심없는 기도를 올렸읍니다   반만년 유구한 세월에   가슴 틀어박고 매아미처럼 목 태우다 태우다   끝내 헛되이 숨져간 이건 그 모두가 하늘이 낸 선천의 벌족이더라도   돌멩이처럼 어느 산야에고 굴러   그래도 죽지만 않는   그러한 목숨이 갖고 싶었읍니다.      범부의 노래   1   바다는 큰 눈물   웅얼 웅얼  울며 달을 따라가지   그 눈물 다 가면   광막한 벌이라네   바다는 그저 눈물   눈물이 더 불어 누워 돌아오지   그리곤 또 가네   몇 번이라도 달 때문이네   2   이 바람을 어이랴   실바람 한 오락지 살갗에만 닿아도 사람 내음에 절은 머리털 한 움큼에 열 손가락 찔러 넣듯, 진홍의 관능에 몸서리치며 내 미치네   이적진 몷랐던   이리도 피가 달아진 일   아아 바람에, 바람에, 이 살을 다 풀어 주어야 내가 살겠네   3   사랑만으로는   결코 배부르게 못해 줄   지금 세상의 사나이들,   신이 한 가지만을 주신다 하면   나는 역시 한 남자를 갖겠다.   패전한 국민이 소리를 모아 부르는   국가의 절망과 그 소망을 품겠지.      생명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벌거벗고 언 땅에 꽂혀 자라는   생명의 어머니도 먼 곳   추운 몸으로 왔다.   진실도   부서지고 불에 타면서 온다   벌어지고 피를 흘리면서 온다   겨울 나무들을 보라   추위의 면도날로 제 몸을 다듬는다   잎은 떨어져 먼 날의 섭리에 불려 가고   줄기는 이렇듯이   충전 부싯돌임을 보라   금가고 일그러진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상한 살을 헤집고 입맞출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열 두 대문 다 지나온 추위로   하얗께 드러눕는   함박눈 눈송이로 온다.      겨울바다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마저 얼어 버리고   허무의 불   물 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혼령을 갖게 하소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갔었지   인고의 물이   수심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정념의 기   내 마음은 한 폭의 기   보는 이 없는 시공에   없는 것 모양 걸려 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 오는 네거리에 나서면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기는   이제금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나에게 원이 있다면   뉘우침 없는 일몰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 가는 그것이란다.   황제의 항서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가   맑게 가라앉은   하얀 모래벌 같은 마음씨의   벗은 없을까.   내 마음은   한 폭의 기.   보는 이 없는 시공에서   때로 울고   기도 드린다.     김달진. 1907년 경남 창원 출생. 호는 월하. 일제시 지방에 묻혀 시작생활을 해오다 해방후 에 가입. 동양적인 인생관을 노래하는 것이 이 시인의 특징. 시집으로는 와 수필집 외에 번역 시집이 있다.      단장   1   아무 마음 없이   나 홀로 여기까지 걸어 왔구나.   숲 속은 좁은 산길 위에   엷은 저녁 햇방울이 떨어져 있다.   2   몇 날을 두고   아침 산보길에서 만나는 여인이기에   그 이름이 알고 싶었다.   3   기다려 기다려도 비는 오지 않고   쨍쨍 쪼이는 한낮 창 앞에   멀리 어디서 포소리 들려 오더니   건너 산에서 흰 연기 구름처럼 떠 오른다.   4   밝은 달빛이 가득 차 넘치는 넓은 이 마당   별처럼 반짝이는 이 숱한 벌레소리 속에 서면   해질녘까지 그처럼 시끄러이 놀던 애들의   꿈 속에 벌어지는 화려한 놀이판.   5   아침 산 그늘이   모시 적삼에 스미는 썰렁한 기운,   아 이제 대지에는   그 숱한 나뭇잎이 알고 모르고 꽃잎처럼 내리겠구나.      체념   봄 안개 자욱히 내린   밤 거리 가등은 서러워 서러워   깊은 설움을 눈물처럼 머금었다.   마음을 앓는 너의 아스라한 눈동자는   빛나는 웃음보다 아름다워라.   몰려가고 오는 사람 구름처럼 흐르고   청춘도 노래도 바람처럼 흐르고   오로지 먼 하늘가로 귀 기울이는 응시   혼자 정렬의 등불을 달굴 뿐   내 너 그림자 앞에 서노니 먼 사람아   우리는 진정 비수에 사는 운명   다채로운 행복을 삼가하오.   견디기보다 큰 괴롬이면   멀리 깊은 산 구름 속에 들어가   몰래 피었다 떨어지는 꽃잎을 주워   싸늘한 입술을 맞추어 보자.     김대규. 1942년 경기 안양 출생. 연세대 국문과 및 경희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을 통해 문단에 데뷔했으며 시집으로는 과 산문집으로는 가 있다. 주지적인 작품을 썼던 초기를 거쳐 ^6 236^흙의 사상^356 3^이라는 연작시를 통하여 물질문명에 얽매인 삶의 현실적 고뇌와 문명비판적을 표현하는 경향으로 시세계를 전환하고 있다.      사랑 잠언   누구나   몸에 걱정 하나   마음에 병 하나를   깊이 깊이 묻고 사나니.   그 몸 아픔,   그 마음 켕김.   걱정도 그윽해지면   영혼의 노래 되고,   병도 잘 다스리면   육신의 복음 되나니.   거기에 이르는 길은   오직 사랑뿐.   그 밖의 다른 구원을   얻으려 하지 말라.     김동현. 1944년 충남 서산 출생. 구명은 기종. 공주 사범대학과 영남대 졸업. 신춘문에로 문단에 데뷔(1977)한 그는 진솔한 자기 고백, 인생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의 모습을 보여 주는 한편, 정신의 심층에 동양적 자연관을 바탕으로 하는 시적 예지를 보여 주는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집 가 있으며, 현재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바람이   날마다 창 너머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보노라면   바람은 매일 와서 무얼 빚고 있을까.   부드럽게 쓸리는 나무들 위로   맑디 맑은 무언가가   열기를 여윈 서늘한 불꽃으로 피어 오르고   가끔 새가   불꽃 속을 날카롭게 날아간다.   이 세상 아닌 어느 하늘에서도   내가 보는 나무의 흔들림을 받아서   나무는 저렇게 흔들리고   거기 사는 이들은 눈이 맑아서   나 대신 바람이 빚는 것을 보고 있을까.   몇 굽이 몸살을 앓고 나면   바람이 무얼 빚는지   나도 알 수 있을까.   이제 저녁을 먹었으니   다만 고향바다를 내 안에 불러들여   바닷가에 꽃게나 한 마리 놀게 해야지.     김명수. 1945년 경북 안동 출생. 서독 푸랑크프르트대학에서 수학했으며,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데뷔. 제4회 을 수상했다. 시집으로과 가 있다.      월식   달 그늘에 잠긴   비인 마을의 잠   사나이 하나가 지나갔다   붉게 물들어   발자욱 성큼   성큼   남겨 놓은 채   개는 다시 짖지 않았다   목이 쉬어 짖어대던   외로운 개   그 뒤로 누님은   말이 없었다   달이   커다랗게   불끈 솟은 달이   슬슬 마을을 가려주던 저녁      우리나라 꽃들에겐   우리나라 꽃들에겐   설운 이름 너무 많다   이를 테면 코딱지꽃 앉은뱅이 좁쌀밥꽃   건드리면 끊어질 듯   바람불면 쓰러질 듯   아, 그러나 그것들 일제히 피어나면   우리는 그날을   새봄이라 믿는다   우리나라 나무들엔   아픈 이름 너무 많다   이를 테면 쥐똥나무 똘배나무 지렁쿠나무   모진 산비탈   바위틈에 뿌리내려   아, 그러나 그것들 새싹 돋아 잎 피우면   얼어붙은 강물 풀려   서러운 봄이 온다     김사림. 1939년 일본 대판 출생. 본명은 광수. 동국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을 통해 데뷔(1960)하여 자신을 찾는 진솔한 작업을 하고 있는 시인으로 등 시집이 있다.      가을   -송짓골 우화 6   해마다 여름 내내   박꽃이 지붕을 타고 놀다가   이맘 때쯤이면 주렁주렁 열리던   보름달만한 박들.   꽹과리 징을 두들대며   풍년이 왔다고 흥청거리던 동네,   그런 곳을 고향으로 둔 사람들은   이맘 때면 가슴을 앓는다.   할머니는 가마타고   할아버지는 나귀타고   시집 장가 들던 시절.   소나무 그늘로 쉬엄쉬엄 갔다는   소나무가 많아서   청솔 그늘이 푸르러서 송짓골이라는   그런 곳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내 주위에는 많다.   푸른 물줄기 낙동강이   송짓골을 지키고   동구밖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마을을 지키듯   내 아버지의 내 아버지의 아버지쩍부터   뿌리내려 사는   경주 김씨 우리집.   푸른 잎이 노랗게 되는 은행처럼   노랗게 찌들은 얼굴을 하고   도심지에서 살아가는   내 주변의 사람들.   푸른 하늘과 푸른 강물   푸른 소나무와 청솔 푸른 바람   그것들이 함께 모여 있는   송짓골 같은 고향을 품고 있는 나처럼   그런 고향을 가진 사람들은   풍년가 울리는 이 무렵이면   함께 가슴을 앓는다.     김상억. 1923년 함남 문천 출생. 동국대학 전문부 문학과 졸업. 을 통하여 데뷔하여 문단에 등장한 그는 인간 내면의 서정성, 자연의 속삭임 등을 상징적으로 포착하는 것이 특징. 제6회 수상. 현재 청주대 조교수로 재직.      성터에서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의지의 고독한 여백이었읍니다. 속으로 운 바위의 노여움이며, 그렇게 참은 이끼의 고요한 노래 더불어, 나는 성터에서 숨가쁘지 아니하였읍니다. 진작 그가 깃발을 묻고 황폐함으로 하여 그의 정력이 이념보다 더 아롱져 있는 곳. 허허히 산 이마에 휘불리면서 지평을 가꾸신 그의 시도가 있고자 한 높은 의미이며 일체였음과 같이, 나는 그의 태초의 자리에 나를 지우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김상옥. 1920년 경남 충무 출생. 호는 초정. 에 추천,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했다. 시집으로 등이 있다.      백자부   찬 서리 눈보라에 절개 외려 푸르르고,   바람이 절로 이는 소나무 굽은 가지,   이제 막 백학 한 쌍이 앉아 깃을 접는다.   드높은 부연 끝에 풍경소리 들리던 날   몹사리 기다리던 그린 임이 오셨을 제   꽃 아래 빚은 그 술을 여기 담아 오도다.   갸우숙 바위 틈에 불로초 돋아나고,   채운 비껴 날고 시냇물도 흐르는데,   아직도 사슴 한 마리 숲을 뛰어 드노다.   불 속에 구워 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결!   티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지다.   흙 속에 잃은 그 날은 이리 순박하도다.     김석규. 1941년 경남 함양 출생. 부산대 사대 졸업. 을 통해 문단에 데뷔한 그는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서민적 삶을 토속적으로 노래하며 현실적 상황에 대한 투철한 역사의식과 윤리의식으로 비판을 던지는 시세계를 갖고 있다. 시집으로 가 있다. 을 수상, 현재 경남교육위원회 장학사로 재직.      풀밭   해 설핏하면 풀밭에 나가 뒹굴었다.   힘 없고 가난해서 정다운 풀잎의 마을   청솔가지 타는 연기 냄새   뿌리쪽에서 숟가락 딸각거리는 소리도 들리고   양잿물 먹고 죽은 사람의 울음소리도 들린다.   어두워오는 속에 하얀 이빨 드러나는   아직 한 번도 이름 부르지 않은 풀꽃   머리 위에 묻어 있는 노란 가루를 털어주며   이 세상 가장 귀중한 목숨   착하게 살아라. 오래 오래 살아라.   여윈 볼이라도 마구 비벼대고 싶은 저녁 때   자전거 뒤에다 어머니를 태우고 가는 중학생도 보인다.      사랑에게   바람으로 지나가는 사랑을 보았네   언덕의 미루나무 잎이 온 몸으로 흔들릴 때   사랑이여 그런 바람이었으면 하네   붙들려고 가까이서 얼굴을 보려고도 하지 말고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만 떠돌려 하네   젖은 사랑의 잔잔한 물결   마음 바닥까지 다 퍼내어 비우기도 하고   스치는 작은 풀꽃 하나 흔들리게도 하면서   사랑이여 흔적 없는 바람이었으면 하네     김양식. 1931년 서울 출생. 호는 작이. 이화여대 영문과와 동국대학원을 졸업. 제1회 을 받고 문단에 데뷔하여 시집 와 수필집 이 있다. 현재 한국 타고르 문학회 회장.      눈바람   내가 펄펄 쏟아지는 흰 눈발에   서투른 눈바람 나서   너를 찾아 나섰더니   먼 발치에 네 집 바라뵈는 고갯길을   단숨에 뛰어오른 사슴의 숨결만큼   내 가쁜 발길이 채 넘어서기도 전에   너는 벌써 날 앞질러 눈바람 나서   그 싱그런 하늘 바람 왼통 품에 끼고   천년 푸르른 솔나무 위를   학이 되어 휠휠 날고 있었다.      조춘   눈 내리는 아침   솔잎의 시샘이   연두빛 불꽃을   훌훌 피울 적   너는 살짝 제비목욕을 하고   머리 뒤꼭지도 마르기 전에   맑은 눈빛으로 내게로 온다.     김여정. 1933년 경남 진주 출생. 본명은 정순. 을 통해 등단했으며 동인이다. 그의 시는 사물의 내면을 궁극에까지 추구하려는 정신으로 일관되어 있다. 시집으로 등이 있다.      돌   부산 태종대에서   청옥빛 파도를 타고   파도가 되던   둘째놈 세째놈이   해변에 밀려 와선   청옥의 돌이 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돌밭에 솟아난   사슴의 뿔을 만나고   나는 십년 수절을 헐어버렸다.   엄마의 황홀한 정사에   둘째놈 세째놈이 곁에서   들러리 서서   바다 한 자락을 끌어다가 덮어주고   덮어주고 있었다.   파도도   우리의 만남을 손뼉치며   흰 이빨 내어 웃어주고 있었다.     김영태. 1938년 서울 출생. 홍익대 서양화과 졸업. 를 통해 문단에 데뷔했으며 을 수상했다. 그의 시세계는 현실과 이상 그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초극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각기 고유성을 유지하면서 서로 보완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시집으로 등이 있다.      호수근처   그대는 지금도   물빛이다   물빛으로 어디에   어리고 있고   내가 그 물 밑을 들여다보면   헌 영혼 하나가   가고 있다   그대의 무릎이 물에 잠긴   옆으로, 구겨진 수면 위에 나뭇잎같이      한 잔 혹은 두 잔   시고 텁텁하고 쓴 잔 받으세요   같이 사는 세월 받으세요   한 잔 두 잔 석탄 백탄 받으세요   말탄 고추 가루 가랭이 좆대   이쁘다 이뻐 너는 이뻐 인마 너는 이쁘다 이쁘지 이뻐 받으세요   양복쟁이도 한 잔   한산모시 두루마기에게도 한 잔   수염단 풍각쟁이 한 잔   덕대같은 건너편 왈패에게 거푸 한 잔   총독의 소리 오동추야 우리 구보에게도 한 잔   이 거리 저 읍내에서 또 한 잔   웃으세요 웃으세요 오래 웃으며 많이 많이 속으로 우세요   개울가에서 멱 감다 한 잔 숲에서 한 잔   연탄광에서 한 잔 뜻 있는 곳에 뜻끼리 두 잔   이마를 맞대고 코가 비뜰어지게   겹잔 처마밑에 날나리들이   깜부기들 바지저고리 머리 위에   근사한 달이 조명이네요   조명 안주삼아 이판사판   뜻 있는 곳에 열 잔      비빔밥   입맛이 달아날 때   혀의 기능은 마비된다   비빔밥이라는 밥은   나물과 고추장에 발가락에   기름을 발라 비벼먹은 밥   찝찔한 눈물도 이 한숨   비빌 게 남아 있다면   김영석. 1945년 전북 부안 출생. 경희대 국문과 동대학원 졸업. 신춘문예(1970)와 신춘문예(1974)에 시가, 에 평론이 각각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그의 시세계는 인간의 고뇌 속에서 새로운 각성을 불러일으키며 도덕적 의지와 형이상학의 세계를 노래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현재 배제대학 국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감옥 3   우리들의 감옥은 너무나 멀리   서로 떨어져 있다   걸어도 걸어도 도달할 수 없는   적막한 모래의 시간   전화도 없고   별빛처럼   감옥의 불빛만 아슬히 멀다   별 하나 감옥 하나   별 둘 감옥 둘   별 셋 감옥 셋   ...     김요섭. 1927년 함북 나남 출생. 동화작가로 출발하여 60년대부터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했다. 동양적인 토속성을 초현실주의 수법으로 표현하고 있는 그는 과 동인이기도 하다. 시집으로 등이 있다.      음악   태초의 말씀과 함께   하늘에는 불과 음악이 있었다   하늘 기득히 울며 퍼졌던 음악   사람들을 찾아 마을 위로 거리 위로   휘날리며 오는 동안   소리는 스러지고 눈송이가 되었다   나뭇 가지 위   음악의 흰 그림자로 앉은 눈송이   눈송이로만 있기에는 심심했다   나무 속 심줄을 타고 녹아드는   뿌리 끝에서 소리가 나고   흙들이 귀를 기울였다   어느 태초의 아침 같은   아침   대지는 풀포기를 토하면서   허공에다 새를 날렸다   음악처럼      꽃   손을 대도 데지 않는다   그 불은   이슬이 떨어지면 더욱 놀라는   그 불은   태고적 이야기에 향기 입힌다   그 불은   태양도 꺼트리지 못한   이슬의   그 불은   별빛의 씨 땅위에서 눈을 떴다   그 불은   꽃     김용진. 1939년 출생.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등단했다. 시집으로 이 있으며, 시어의 공깐성을 추구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소네트   천 년 버리기 싫은   쪽삧 내 마음이라 하여도   어찌하면 유월   모래밭에 묻을까 내 사랑.   바람 설찬 그리움.   항아리처럼 갓도는 공허.   진종일   이마 앞을 보채다가   돌아 가는 아지랭이.   꽃이란 꺾이면    해바라기라 하지만    봄처럼    사슴처럼   눈짓 아름찬 별이고저.     김용팔. 1914년 출생. 을 통해 1953년에 데뷔한 그는 감성의 조화가 주조를 이루고 있는 시풍의 특징을 갖고 있다.      기원   바람이 울 때마다 가랑잎이 전율하면   나의 가난한 마음이 당신의 문을 두드립니다.   언젠가는 메아리도 없이 기화해 버린   내 가까운 사람들을 옆에 보면서   머언 뒷날 어느 하늘 가에서   아내와 만날 것을 믿어보는 건   이 허전한 마음이 마지막 남는   어쩔 수 없는 목숨의 소리입니다.   투명한 달빛인데   마음마저 얼어 붙은 밤이 옵니다.   스스로를 달래보는 저 이승은   목탁소리 코 골리며 조나 봅니다.   어김없는 윤회 속에 내일은 올 것인데   아 당신의 소리를 기다립니다.     김원호. 1940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졸업. 신춘문예로 등단한 그는 흐트러지지 않는 언어의 소박성과 단아함으로 시작생활을 하고 있는 시인. 시집으로 이 있다.      과수원   1   빈센트.반.고호의 ^6 236^과수원^356 3^을 아시는지요.   도깨비도 무서워 할 고목뿐인 올리브 숲이었지요.   불타다 남은 자리보다 더 쓸쓸한 곳이었지요.   어쩌면 내가 이런 숲을 생각하는지   나 자신 올리브숲의 도깨비가 되고 싶은 모양입니다.   2   벌레 먹은 가지를 하나씩 따 줄 때마다   나는 나 자신인 것을 잊어버리고   물 익은 과일이 달린 과수원의 나무가 되고   나도 가지에 벌레 먹은 과수원의 나무라고 생각합니다.   하니, 고독뿐인 이 숲이 도깨비보다 덜 무서워지는군요.   3   똑,똑, 가지꺾는 소리뿐   이 과수원은 너무도 조용합니다.   혹시 이런 곳에서 몸에 배인 병이나 씻어 버리며   도깨비가 될 때까지 살고 싶지는 않으십니까.   산골보다 더 조용한 것이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   4   잔잔하고 푸른 먼 이오니아 바다처럼   쓸쓸한 여름날 같은 하늘도 보입니다.   조용한 원색 속에서 생활을 하며   향기 푸른 과일밭에서 일을 하시면   어느 새 병도 깨끗이 나으실 것입니다.   5   푸른 달밤에 과일이 익을 때   과수원 옆에 초막을 짓고 지내시면   단물 고인 과일나무가 되시겠읍니다.   그러나 사람이 보고 싶으실 땐 언제라도 돌아가시지요.   그래도 우리 이 과수원에서 도깨비가 될 때까지 살고 싶지는 않으십니까.      조카딸에게   너를 아이로만 생각하던 건   바로 내 잘못   어느새 어른의 눈짓을 배워   섬세한 어깨를 슬쩍 내뵈는구나   춘정기의 도드라진 가슴   젖은 눈   누가 너에게 작은 허리띠를 거넬까   머리의 장식을 좀 숫되게   미로의 껄음걸이를 하지 말고   팔짱 낀 의젓한 모습에   나는 할 말이 없구나   숨가쁘게 뛰는 심장   한 마리 파닥이는 새   공중에 도는 피리소리를 좇아   너는 날아가려 하는구나   좀 이상해   옮기는 정은   벌써 계절이 바뀌는데   혓바닥에 느끼는 산초 열매처럼   언제나 너는 애띤 미련이구나.     김유신. 1944년 경기 안성 출생. 안성농고 졸업. 에 시가 추천되어 시단에 데뷔한 그는 농촌의 순수함과 자연에로 동화되어 나오는 시심의 세계로 작품을 이끌어 나가고 있는 시인. 현재 안성에서 농사를 짓고 있으며, 시집으로 가 있다.      천리향   차가운 땅에 피어   눈속에 뜨거운 잎을 펴는   그 속을 나는 안다.   향의 바다   출렁이며   끓어 오르는   혈기,   한쪽 가지로만 뉘워 놓는 바람.   겨울 한나절   순한 짐승들의 핏발선 눈동자로   솟아나는   너의 열망,   멀리서   너의 향그러움 듣는다.   바람에 흐르는   너의 영혼   뜨거운 몸짓을 본다.      바람에 기대어   서운산을 넘어   가슴에 젖어오는   빗방울.   푸른 잎 속   화안한 꽃송이 터지는   흙의 꿈.   속살까지 저려오는   빛의 향기   풋과일 성그는   바람에 기대어   한종일 한종일 빗소리 재운다.   밤 깊도록 빗소리 재운다.     김윤성. 1925년 서울 출생. 호는 조운. 동인지 을 운영하면서 시, 소설을 발표했다. 등에 많은 작품을 발표했으며 시집으로 등이 있다. 주간을 지냈으며,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이다.      나무   한결같은 빗속에 서서 젖는   나무를 보며   홤금색 햇빛과 개인 하늘을   나는 잊었다.   누가 나를 찾지 않는다.   또 기다리지도 않는다.   한결같은 망각 속에   나는 구태여 움직이지 않아도 좋다.   나는 소리쳐 부르지 않아도 졸다.   시작도 끝도 없는 나의 침묵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따.   무서운 것이 내게는 없다.   누구에게 감사 받을 생각도 없이   나는 나에게 황혼을 느낄 뿐이다.   나는 하늘을 찌를 때까지   자라려고 한다.   무성한 가지와 그늘을 펴려고 한다.      애가   담장을 끼고 기어오르던   덩굴이   담장 위에 와서   헛되이 허공만이 휘젓고 있다.   이 소리 없는 고요의 절규   썩은 장미가지 끝에   기척도 없이   앉아 있던 잠자리가   저 혼자 후르르 날아 오른다.   영원한 한숨의 포근한 햇살.     김윤희. 1939년 경남 진주 출생. 숙명여대 국문과 졸업. 출신으로 전통적 서정성에 바탕을 두기 보다는 존재에의 탐구나 생명의 내면적인 고통을 담고 있는 시를 쓰고 있다. 시집으로 이 있다. 현재 동인으로 활동중이다.      첫눈   오늘도 너의 힘으로 나는 걷는다   소식 끊인 지 석달 열흘   그 가을은 이제 겨울이 되었다   아직도 아무 소식은 없지만   첫 눈 오는 오늘도   너의 힘으로 나는 걷는다   내리는 눈은 머리 꼭대기를 지나   가슴으로 뜨겁게 뜨겁게 쌓이고   가슴에 쌓인 눈물 차갑게 녹아서   물이 되고 드디어   볼 수도 없이 날아가 버리지만   오늘도 나는 잃어버린 너의   힘으로 나는 걷는다.     김재원. 1939년 서울 출생.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데뷔하여 시 이외에 다수의 서사적 에세이를 발표하고 있다. 현재 의 발행인이다.      몸 부딪치는 비둘기   아내는 모를 것이다.   그 앞에선 유일의 왕자   우주의 제1조인 내가   출근시간 5분전   회사 근처의 횡단로   황새처럼 꺼부정한 신체로   시계 보며 뛰어서 건너가는 것을.   인생은 뛰어가도   그렇게 가끔 지각하는 것을.   아내는 모를 것이다.   그에겐 두 번째 아빠.   제 그림자 말고는 둘째인 내가   내 키보다 5분 낮은   어느 장관의 비서실,   빼랑빼랑한 말투 대신 서류를 읍하고   눈치 보며 힐끔힐끔 숙이는 것을.   인생은 그렇게 절을 해도   가끔씩 나보다는 상전인 것을.   그러나 아내는 알 것이다.   그대하고, 또 하나 득남의 셋이서   세 간짜리 전세방   착실한 오욕으로   시어머니가 사시는 구에   문패라도 걸려면 야근을 하고   인기보다 싼 글을 써야 하는 것을.   인생은 받은 명을   득남의 몸에 묻어 놓고 가는 것을.   구공탄으로 꽃을 피우고   눈물로 협박하는   아내는 아는 것, 모르는 것 합쳐서   내 인생을 빼고 더해 제자리에다   묶어놓고 정착시켜 가장이게 하고   양복 저고리에 단추되고 포케트 되어   심심한 낮, 대견스런 밤을   단둘이서 우리는 몸 부딪는 비둘기.      입만 다물면야   어머님, 걱정하지 마세요.   도둑질처럼 배운 취미는 함구 무언   입만 다물면야   세상은 산뜻합니다.   갈빗대 들춰낸 내 허파를   돌덩이로 내리찍는 아픔은   함구 무언의 휴유증이지만   어머님.   이발사가 된다면야   소리칠 갈대밭이 있는 게 야단이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도둑질처럼 배운 취미는 함구 무언.   입만 다물면야 남의 세상은   산뜻하고 고귀한 꽃밭입니다.   아, 그래도 입만 다물면   쑥밭인 내 세상이 안스러운 어머님.     김정웅. 1944년 경기 김포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을 통해 문단에 데뷔하여 동시대 시인들이 해결해야 할 생활의 일면들을 섬세하게 다루면서 더욱 더 선명한 목소리로 시세계를 형성해 가는 시인이다. 현재 농장을 경영하면서 시작에 전념하고 있다.      배우일지 5   멀리 수평선을 가로막으며 고딕체로 누워있는 긴 봇둑, 붉게 타는 나문재 질펀히 깔린 간척지의 갯바닥, 조수가 밀지 않는 갯고랑, 폐선 한 척- 공중에 뻔쩍 들린 고물이 아직도 녹슨 닻줄에 매어 있다.   연일 힘 없이 부는 바람이   낡은 밧줄이   부러진 마스트에 칭칭 감겨 있다.   해가 바뀌어도 물러가지 않는 몇 개의 황혼이   병풍처럼 둘러 서 있다.   조심스런 프롬프터의 목소리가   무언극의 저쪽에서 가늘게 떨린다.   들린다, 들린다, 안 들린다.      돌아온 편지   산 하나를 헐어낸다.   한 삽을 들어낼 때마다   들어내는 힘의 깊이로   발밑에 소인 찍히는 발자국   다른 한 삽을 뜨기 위하여   비켜서면   그 자리에 남은 어설픈 그림자가   삽을 든 채로 나를   노려보고 서 있다.   내 발자국 파내기 위하여   산을 헐어 내린다.   내가 딛고 서 있는 대지의 본향은 얼마나 되나,   발자국이 또 남는다.   진종일 산을 헐어 내린다.   진종일 발자국이 쌓인다.   날이 저물면   저무는 하늘의 깊이 만큼 헐려 있는 산   저무는 하늘의 깊이 만큼 쌓여 있는 산   아아, 되돌아 온 편지처럼 부끄러운 산.     김종길. 1926년 경북 안동 출생. 영국 세필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연구. 시집 로 문단에 데뷔하여 주지적 경향의 선명한 이미지에 주력한 시인. 시집으로 와 시론집 가 있다.      고고   북한산이   다시 그 높이를 회복하려면   다음 겨울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밤 사이 눈이 내린,   그것도 백운대나 인수봉 같은   높은 봉우리만 옅은 화장을 하듯   가볍게 눈을 쓰고   왼 산은 차가운 수묵으로 젖어 있는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까지는 기다려야만 한다.   신록이나 단풍,   골짜기를 피어오르는 안개로는,   눈이래도 왼 산을 뒤덮는 적설로도 드러나지 않는,   심지어는 장미빛 햇살이 와 닿기만 해도 변질하는   그 고고한 높이를 회복하려면   백운대와 인수봉만이 가볍게 눈을 쓰는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까지는   기다려야만 한다.      하회에서   냇물이 마을을 돌아 흐른다고 하회.   오늘도 그 냇물은 흐르고 있다.   세월도 냇물처럼 흘러만 갔는가?   아니다. 그것은 고가의 이끼 낀 기왓장에 쌓여   오늘은 장마 뒤 따가운 볕에 마르고 있다.   그것은 또 헐리운 집터에 심은   어린 뽕나무 환한 잎새 속에 자라고,   양진당 늙은 종손의 기침소리 속에서 되살아난다.   서애대감 구택 충효당 뒷뜰,   몇그루 모과 나무 푸른 열매 속에서,   문화재관리국 예산으로 진행 중인   유물전시관 건축공사장에서   그것은 재구성된다.     김종원. 1937년 제주 출생. 서라벌예대 및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과 를 통하여 문단에 데뷔하여, 시집 이 있다. 그의 작품 세계는 환상과 현실의 조화, 주지적 서정과 토속어의 형상화를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조선일보 주간부에 근무.      달팽이   처음   그의 궁전에는   우수에 잠긴 달이   가난히 떠올라 갔다.   이윽고   차다찬 숨그늘을 이루며   아득한 지층을 향하여   한 매듭 기어오른 그는   온 무게를 등에 지고   오직 금진 제 사랑을   소리 없이 갈아 가고 있었다.   이슬째 미끄러진 울타리에   사과나무   한   그   루.   오늘 타고난 이 터전으로   한 마디 우화를 모종해 나온   그는   아무도 열어 보지 못한 탑 안에   어느 새   이파리가 되어 가는 것이다.     김종해. 1941년 부산 출생.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데뷔하여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장편 서사시 '판우, 일어서다'로 제28회 을 수상했으며, 현재 주간이다. 시집으로 등이 있다.      향해일지.18   아구란놈에대해이야기하고자한다.아구란놈이해진에서입을벌리고물길을 가고있을때는오징어.전광어.칼치.고등어.가오리.게따위가통째로들어와뱃 속에쌓인다.힘없고왜소한것들이눈을뜬채삶의본전까지아구의뱃속에상납해 버린다.철벽위장을가진바다의낡강도아구란놈이빠르게물길을가고있을때,불 쌍한것들아무력한것들아가급적밑바바닥에더욱머릴쳐박고소리내지말라.   나는확신한다.바다의날강도아구란놈이반드시이도시의어느곳에몇백마리, 몇천마리가눈빛내며서식하고있는것을,이도시의가장기름진물목에서음흉하 게덫을놓아두고있는것을.   허전한 저녁나절   종로에서 입을 벌리고 앞으로 앞으로 물길을 나   아가면 아아, 내 뱃속에 와 쌓이는 것들.   몇 잔의 소주와 몇 잔의 적개심.   종삼 아구탕집의 아구찜을 어금니로 물어뜯고 뜯으며   씹고 또 씹을 분이다.     김지하. 1941년 전남 목포 출생. 서울대 문리대 미학과 졸업. 지를 통해 문단에 데뷔한 이후 어두운 시대를 가로질러 인간과 세계의 한 가운데서 온몸으로 몸부림쳐 온 시인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회의의 (1975)과 국제시인협회의 을 수상(1981)했다. 시집으로 과 이야기 모음집 이외에도 많은 작품을 발표한 민중시인이다.      황톳길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두 손엔 철삿줄   뜨거운 해가   땀과 눈물과 모밀밭을 태우는   총부리 칼날 아래 더위 속으로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밤마다 오포산에 불이 오를 때   울타리 탱자도 서슬 푸른 속이파리   뻗시디뻗신 성장처럼 억세인   황토에 대낮 빛나던 그날   그날의 만세라도 부르랴   노래라도 부르랴   대샆에 대가 성긴 동그란 화당골   우물마다 십년마다 피가 솟아도   아아 척박한 식민지에 태어나   총칼 아래 쓰러져 간 나의 애비야   어이 죽순에 괴는 물방울   수정처럼 맑은 오월을 모르리 모르리마는   작은 꼬막마저 아사하는   길고 잔인한 여름   하늘도 없는 폭정의 뜨거운 여름이었다   끝끝내   조국의 모든 세월은 황톳길은   우리들의 희망은   낡은 짝배들 햇볕에 바스라진   뻘길을 지나면 다시 모밀밭   희디흰 고랑 너머   청천 드높은 하늘에 갈리던   아아 그날의 만세는 십년을 지나   철삿줄 파고드는 살결에 숨결 속에   너의 목소리를 느끼며 흐느끼며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빈 산   빈 산   아무도 더는   오르지 않는 빈 산   해와 바람이   부딪쳐 우는 외로운 벌거숭이 산   아아 빈 산   이제는 우리가 죽어   없어져도 상여로도 떠나지 못할 저 아득한 산   빈 산   너무 길어라   대낮 몸부림이 너무 고달퍼라   지금은 숨어   깊고 깊은 저 흙 속에 저 침묵한 산맥 속에   숨어 타는 숯이야 내일은 아무도   불꽃일 줄도 몰라라   한 줌 흙을 쥐고 울부짖는 사람아   네가 죽을 저 산에 죽어   끝없이 죽어   산에   저 빈 산에 아아   불꽃일 줄도 몰라라   내일은 한 그루 새푸른   솔일 줄도 몰라라.      타는 목마름으로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네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김지향. 1938년 경남 양산 출생. 서울여대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했으며 한양여전에 교수로 재직중. 동인으로 쩨1회 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이 평범한 풍경이여   겨울 둥지를 풀고   창문을 열었다   눈이 닿는 곳마다   눈이 생각하는 만큼의   풍경들이 긴장해 있다   나와 눈이 마주친   풍경은 제 편에서 미리 미안해 한다   점점 크게 뜨고 따라가는   나의 눈에   머뭇 머뭇 안개를 따라 보내며   풍경이 하나 둘 미안해 하며   안개 뒤로 몸을 빼돌린따   우우우 저희끼리 모이는 잎진 나뭇가지가   가령 저 안개를 벗고 나와   사과나무는 사과 아닌 앵두 열매를   매화 나무엔 매화 아닌 진달래꽃을   피우는 일이라도 해 낸다면   나는 하루 열 번쯤   창문에 붚어 서서 신명이 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지독하게 정상인   구부린 허리 얄팍한 안개뿐   갈곳도 없는지   자꾸 내 눈에만 들어오는   안개 뒤에서 미안해 하는 나무들의   이 평범한 풍꼉이여.     김창영. 1922년 경기 강화 출생. 에 시 ^6 236^조광^356 3^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한 그는 동인으로 엔솔로지 에 참여했다. 시집으로 이 있으며 시각적 입체적인 추상의 세계를 기하학적으로 조형하여 현대화하는 시의 방법론을 추구하고 있는 시인.      부릅뜬 태풍의 눈   기억은 애매하다. 그리고   또 좀 모자랐다.   그래서 뭐라고 말할 수 없다든   여자는 레이즈비언을 자처했단다.   여자와 나는 팝콘 한 봉지를 사들고   어느 한계, 그 꼭대기를 향하여   에스파니아식 나선형 층계를   자꾸 올랐다.   그 곳, 하지선이 가까운 한낮의 절정   그 절정 허리춤으로 깔아 뭉개진   우리의 표고, 그 하늘의 한껏을   구름은 로코코풍 과거를 뭉뚱거려   지구 바깥   먼 대류권을 흘렀다.   그래 지금 어디 쯤에서   부릅뜬 태풍의 눈,   비바람 전부를 장전한 채   밝음, 너를 거역하는   어느 아열대의 해일이더냐?   -그게 무슨 상관이죠. 우라와...   너와 나 2인층의   저기, 하얀 공백의 모서리   낮달 반 쪼가리 해골바가지   부릅뜬 여자의 눈. 눈.   태풍의 그 눈.   -우리는 어쩌자는 거죠.     김창완. 1942년 전남목포 출생. 신춘문예로 문단에 데뷔했으며 동인으로 활동중인 그의 시세계는 강직한 남성적 시정신을 시 속에 용해하고, 서민적 정서를 바탕으로 하여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시인이다. 시집으로 가 있다.      수유리의 침묵   꽃샘바람 불리라 미리 알았다 해도 피고야 말   진달래 무더기로 져 길 위에 나뒹군다.   짓밟혀도 아프단 말 못하는 꽃잎 짓밟고   손등으로 눈 비비며 황사속 더듬어 수유리 찾아가니   꽃샘바람은 좁은 내 어깨 다시 움츠리게 하고   말라붙은 입술도 트게 한다 그러니 침묵해야지.   저물녘 두꺼워지는 산그늘 속으로 들어가는데 나에게   내 키보다 훨씬 큰 그림자 앞세우고 돌아오는 나에게   그러니 침묵해야지 아직은 침묵해야지 일러 주는 이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이냐는 물음에조차 입 다문다.   돌에 새긴 그대들의 주먹 만큼 내 주먹은 단단하지 못하고   돌에 새긴 그대들의 가슴 만큼 내 가슴은 뜨겁지 못해   쓰다듬어 보아도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는 내 손바닥엔   감옥에서 보내온 아우의 편지가 구겨져 있을 있을 뿐   형님, 형님이란 말이 돌멩이처럼 날아와 나를 때린다.   작은 돌멩이들아 너희가 왜   날아가 새 되지 못하고 떨어져 뒹굴며   이 외면당한 변두릿길에서 짓밟히고 있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러나 아직은 침묵해야지   돌멩이들조차 그렇게 일러주는 수유리   짙어지는 어두움.      돌멩이   척박한 땅일수록 여럿이 묻혀   개간의 괭잇날을 완강히 거부하던   너는 한때 보수주의자였다.   그러던 네가 어디를 떠돌이로 다니다가   고향 버린 막벌잇군들만 모여 사는   이 변두릿길에까지 굴러와서   취한 사내들의 발부리에 채거나   리어카아 바퀴에 밀리거나 하면서도   너는 그들과 같이 살고자 원한다.   흙먼지 뒤집어쓴 채   더러는 개굴창에 처박힌 채   추워도 절대로 떨지 않고   더워도 땀 흘리지 않는다.   할머니 좌판 위에 내리쬐는 햇살   순대집 나무 의자에 내려앉는 그늘   그들이 조금씩 조금씩 희망을 포기하고   순종조차 조금씩 조금씩 포기해 버려   아무 가진 것 없는 맨손이 되었을 때   무엇보다 먼저 너를 움켜쥐리라 믿는다.   너는 날개 없이도 날 수 있고   거만하게 번쩍이는 유리창을 깨트렸고   눈부셔 바로 보지 못하던   넓고 환한 이마도 깨트렸다.   겨울이 아무리 길고 추워도   네가 묻혀 있던 이 땅의 어느 어덩 하나   어깨 움츠린 걸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김춘수. 1922년 경남 충무 출생. 사화집 에 '애가'를 밢표, 이어 에 시 '온실' 등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했다. 릴케의 영향을 받은 그의 초기시에서 점차 산문적인 시의 형식으로 확대되어 나가고 있는데, 시집으로 등이 있다.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따.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꽃을 위한 서시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이 될 것이다.   ...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다뉴브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발의 소련제 탄환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바숴진 네 두부는 소스라쳐 30보 상공으로 뛰었다.   두부를 잃은 목통에서는 피가   네 낯익은 거리의 포도를 적시며 흘렀따.   -너는 열 세 살이라고 그랬다.   네 죽음 앞에서는 한 송이 꽃도   흰 깃의 한 마리 비둘기도 날지 않았다.   네 죽음을 보듬고 부다페스트의 밤은 목놓아 울 수도 없었다.   죽어서 한결 가비여운 네 영혼은   감시의 1만의 눈초리도 미칠 수 없는   다뉴브강 푸른 물결 위에 와서   오히려 죽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소리 높이 울었따.   다뉴브강은 맑고 잔잔한 흐름일까,   요한 쉬트라우스의 그대로의 선율일까,   음악에도 없고 세계 지도에도 이름이 없는   한강의 모래 사장의 말없는 모래알을 움켜쥐고   왜 열 세 살 난 한국의 소녀는 영문도 모르고 죽어 갔을까?   죽어 갔을까, 악마는 등 뒤에서 웃고 있었는데   한국의 열 세 살은 잡히는 것 한낱도 없는   두 손을 허공에 저으며 죽어 갔을까?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네가 한 행동은   네 혼자 한 것 같지가 않다.   한강에서의 소녀의 죽음도   동포의 가슴에는 짙은 빛깔의 아픔으로 접어든다.   기억의 분한 강물은 오늘도 내일도   동포의 눈시울에 흐를 것인가,   흐를 것인가, 영웅들은 쓰러지고 두 주일의 항쟁 끝에   너를 겨눈 같은 총부리 앞에   네 아저씨와 네 오빠가 무릎을 꾼 지금   인류의 양심에서 흐를 것인가,   마음 약한 베드로가 닭 울기 전 세 번이나 부인한 지금   다뉴브강에 살엏음이 지는 동구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발의 소련제 탄환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내던진 네 죽음은   죽음에 떠는 동포의 치욕에서 역으로 싹튼 것일까.   싹은 비정의 수목들에서보다   치욕의 푸른 멍으로부터   자유를 찾는 네 뜨거운 핏속에서 움튼다.   싹은 또한 인간의 비굴 속에 생생한 이마쥬 움트며 위협하고,   한밤에 불면의 염염한 꽃을 피운다.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늪   늪을 지키고 섰는   저 수양버들에는   슬픈 이야기가 하나 있다.   소금쟁이같은 것, 물장군같은 것,   거머리같은 것,   개밥 순채 물달개비같은 것에도   저마다 하나씩   슬픈 이야기가 있다.   산도 운다는   푸른 달밤이면   나는   그들의 혼령을 본다.   갈대가 가늘게 몸을 흔들고   온 늪이 소리없이 흐느끼는 것을   나는 본다.      처용   인간들 속에서   인간들에 밟히며   잠을 깬다.   숲 속에서 바다가 잠을 깨듯이   젊고 튼튼한 상수리나무가   서 있는 것을 뽄다.   남의 속도 모르는 새들이   금빛 깃을 치고 있다.                           김해강. 1903년 전북 전주 출생. 본명은 대준. 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여 한국의 전통적인 서정세계를 구축한 시인이다. 동인이며 을 수상했고 시집으로 (공저)와 이 있다.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학도 아니면서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춤을 모르는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날만 새면 뭇 참새   떼지어 지절대도   조으는 채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비바람   번개가 날리고 우뢰가 흘러도   천 년인 양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오욕과 허화의 도가니 속   어지럽고 시끄러운 실의의 나날에도   한가한 손님같이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어디를 가나   시장마다 악화가 판을 치고   흙탕물 도도히 거리를 휩쓸어도   오연히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해는 빛을 잃고   꽃밭은 향기를 잃고   눈이랑 무너지듯   하늘은 무너져도 무너져도   으젓이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금촉 화살에 심장이 꿰뚫려도   끝내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징그러운 비늘에 온 몸이 휘감겨도   그저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흙 썩는 냄새만   코를 찌를 뿐   바위틈 콸콸 샘 솟고,   하늘 한 자락 파랗게 깔린   아름다운 해뜨는 동산   삼삼한 솔밭도 아닌데   춤 너울너울   빛 풍요로운   눈부신 아침도 아닌데   언제나 고고히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춤도 못추는 학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김형영. 1944년 전북 부안 출생. 신인상을 받고 문단에 데뷔. 동인으로 활동한 바 있는 그는 한국인의 정서를 단형시의 구조 속에 용해하는 독특한 동물시편들로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시집으로 가 있고, 현재 샘터 기획실장으로 있다.      여우   흰 두루마기도   장죽도 없이   도사가 된 백여우야   어둠 속에 길로 서서 네가 기다리는 것,   이젠 다 둔갑해서 너를 노린다.   대지의 이름으로 킹킹거리며   킹킹거리며 너를 노리는   그들은 가졌다   이빨과 꼬리를,   백개의 얼굴을,   그들은 가졌다   죽일 수 있는 권리   더 만족할 만한 법을.      모기   모기들은 날면서 소리를 친다   모기들은 온 몸으로 소리를 친다   여름밤 내내   저기,   위험한 짐승들 사이에서   모기들은 끝없이 소리를 친다.   모기들은 살기 위해 소리를 친다   어둠을 헤매며   더러는 맞아 죽고   더러는 피하면서   모기들은 죽으면서도 소리를 친다   죽음은 곧 사는 길인 듯이   모기들,   모기들,   모기들,   모기들은 혼자서도 소리를 친다   모기들은 모기 소리로 소리를 친다   영원히 같은   모기 소리로...     김혜숙. 1937년 강원 강릉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했고 을 통하여 문단에 데뷔했다. 주요 작품으로 '문' '여담' '광화문 네거리' 등이 있고 현재 시작에만 전념하고 있다.      딸에게   걱정하지 말아라   광화문이 넓어진다   을지로도 넓어진다   걱정하지 말아라   어젯밤   밤새도록 네 잠자리를 어지럽히던   이제는   꿈을 깨어라   소경의 눈   그 눈을 또 감고 히히거리는   원수의 늪을 피하여   아! 네가 흘리는 눈물은   순백의 꽃이구나   걱정하지 말아라   종로가 넓어진다   을지로도 넓어진다   걱정하지 말아라     김후란. 1934년 서울 출생. 본명은 형덕. 서울대 사대 재학시 전국학생 작품모집에 소설로 입상한 후 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했다. 동인이며 을 수상(1977)했고, 시집으로는 와 수필집 등이 있다.      설야   흰 눈이 지상을   깨끗이   덮는 날은   대지의 침묵이   흰 눈에   겁탈당하는 날은   절반쯤 감은   신부의 눈으로   이 허구를 감내하는 날은   강물도 목이 잠긴   유연한 수묵화 한폭.      포도밭에서   내 입술을 장난스럽게 깨물면   입 안에 가득 고이는   감미로운 후회같은 것.   흑진주, 네 곤혹의 눈빛을 피해서,   넝쿨 사이로 빠져나오면   짙은 방향   어깨 너머로   앵도라진 눈을 모으네.     나태주. 1945년 서천 출생. 공주사범대 졸업.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제3회 을 수상했다. 그의 시는 전원적 서정이 생명 감각과 결합되어 자연애와 인간애를 보여주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는데 시집으로 등이 있다.      대숲 아래서   1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2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슬린 등피에 네 얼굴이 어리고   밤깊어 대숲에는 후둑이다 가는 밤소나기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소리.   3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 나니 눈두덩이엔 메마른 눈물자죽,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   4   모두가 내것만은 아닌 가을   해지는 서녘구름만이 내 차지다.   동구 밖에 떠드는 애들의   소리만이 내 차지다.   또한 동구 밖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밤안개만이 내 차지다.   모두 내것만은 아닌 것도 아닌   이 가을   저녁밥 일찌기 먹고   우물가 산보 나온   달님만이 내 차지다.   물에 빠져 머리칼을 헹구는   달님만이 내 차지다.     낭승만. 1933년 서울 출생. 동국대학 국문과 졸업. 과 을 통해 문단에 데뷔. 시집으로는 가 있다. 현재 한국불교문학가협회 시분과 위원장으로 있는 그는 뇌졸증으로 쓰러져 반산불구의 몸으로 시작 생활을 하고 있다.      가을의 기도   뜨거운 여름날의 강물소리를 보내며   가을 풀꽃들과 함께 죽게 하십시오.   아무 수확이이라곤 없는, 떨리는   손바닥뿐입니다.   그 주위로는 노을이 나리게 하여   가늘은 벌레소리와 함께   머리 위를 지나간   찬란한 가을비 소리를 잊게 하여 주십시오.   이 조그만 영토에 그대로 애잔할   한 가을 풀꽃의 뿌리밑을 흐를   맑은 물소리로 죽어지고   짙푸른 하늘 아래 나무가지마다 눈부신 과실의 빛으로 죽어져서   당신에게 드리는 제단 앞에 목메어 쓰러지겠읍니다.   바람에 불리는 나뭇잎으로 부서져   땅 속에 깊이 묻히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흐느껴우는 겨울엔 두터운 지층 위를 강설하면   죽어진 버레의 노래를 되살리며, 가슴 속으로   마구 뜨거운, 파도치는 목숨의 피를 조양하는 것입니다.   온화한 빛깔들로 취하게 하여...   가을엔   가을 풀꽃들과 함께 죽으며   미소짓게 하십시오.   눈물나는 죽음의 이야기 속에 다시 살아날   그들이 잠들어 누워있는 무덤 위에, 더 슬픈   사랑을 주십시오.   아침에는 눈뜨게 할 종소리를   뜨거운 드거운 빛을 던지십시오.     노영란. 1924년 경남 함양 출생. 일본제국여자전문학교 졸업. 동인이며 모더니즘의 수법으로 현대인의 의식풍경을 펼져 보인 작품을 써왔다. 시집으로 과 창작찝 이 있다. 현재 부산 동아대학교에 재직중이다.      초야   정열의 채단으로 커어튼을 내리어라   헤리오드로오프의 향내 같은 수줍음   비단 숨결은 보랏빛 연륜을 수놓는다   엷은 밤빛에 빛나는 너의 얼굴은   오오 이밤의 주피터어     노향림. 1942년 서울 출생. 중앙대 영문과 졸업. 에 당선되어 데뷔한 그는 동인으로 참가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유년' '여름밤' '바람부는 날' 등 다수의 작품이 있다.      가을 편지   안녕하세요? 가을입니다.   발끝까지 풀려버려 허한   빛으로 흩날리고 있군요.   발 밑에   흔적처럼 남은   물이나 쓸쓸함.   기댈 곳 없는 나는 재채기를 쏟아냅니다. 그동안 기대던 가난한 식구와 낡은 가구와 해골같은 한 편의 시를 버리고 등언저리를 모두 비워놓았읍니다. 아무 한 일 없이, 누구도 만날 일 없이 가을과 나는 한몸이어서 다 해진 하늘, 마른 햇볕은 자꾸 쏟아냅니다. 스물스물 빠져나가던 가을은 다시 무엇이 되어 누렇게 시들어가고 있는지 어디 들판에라도 적시고 있는지 선천성 약질인 폐를 부풀리는 나무 곁에 누워 있는지. 두리번대도 온통 가을뿐이예요. 씌어질 때 씌어지더라도 씌어지지 않는 단 한줄 우리 고통, 안녕!     마종기. 1939년 일본 동경 출생. 연세대에서 의학을 전공한 후 도미, 현재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방사선과 의사로 있다. 1959년 의 추천을 받아 등단한 그는 의사의 체험, 외국생활의 체험들을 아름답고 산뜻하며 착한 서정으로 수용, 맑은 지성과 세련된 언어로 승화시키고 있는 시인이다. 시집으로 등이 있고 (1976)을 수상하기도 했다.      연가 9   1   전송하면서   살고 싶네.   죽은 친구는 조용히 찾아와   봄날의 물속에서   귓속말로 속살거리지,   죽고 사는 것은 물소리 같다.   그럴까, 봄날도 벌써 어둡고   그 친구들 허전한 웃음 끝을   몰래 배우네.   2   의학교에 다니던 5월에, 시체들 즐비한 해부학 교실에서 밤샘을 한 어두운 새벽녘에, 나는 순진한 사랑을 고백한 적이 있네. 희미한 전구와 시체들 속살거리는 속에서, 우리는 인육 묻은 가운을 입은 채.   그 일년이 가시기 전에 시체는 부스러지고 사랑도 헤어져, 나는 자라지도 않는 나이를 먹으면서 실내의 방황, 실내의 정적을 익히면서 걸었네. 홍차를 마시고 싶다던 앳된 환자는 다음날엔 잘 녹은 소리가 되고 나는 멀리 서서도 생각할 것이 있었네.   3   친구가 있으면   물어 보았네.   무심히 걸어가는 뒷모습   하루종일 시달린 저녁의 뜻을.   우연히 잠깨인 밤에는   내가 소유한 빈 목록표를,   적적한 밤이 부르는 소리를.   우리의 내부는   깊이 물 속에 가라앉고   기대하던 그 웃음을   물어 보았네.      연가 12   1   이렇게 어설픈 도시에서 하숙을 하는 밤에는 월트디즈니의 장편 만화영화나 보자. 하숙이 허술해서 몽땅 도둑을 맞았으니 온돌을 때는 이 극장이 격에 어울리지. 총천연색의 세상에서 나도 메뚜기가 되어 보면, 밖에는 눈이 그칠 새 없고 혼자 보고 혼자 오는 발이 시리다. 친구야, 총천연색의 메뚜기가 되어 살자.   2   도서관을 돌다가 무심결에 호흡기 내과책 한 권을 뽑았더니, 겉장에는 알 케이 알렉싼드리아의 싸인이 있고 철필로 쓴... 보스든 메서츄세츠스에 1879년 8월 2일. 1879년 8월 2일은 날씨가 흐렸다. 흐려진 철필글씨, 무덤 속에 있는 내과 의사 알렉싼드리아의 손작국을 유심히 본다. 냄새라도 맡아서 코에 기억해 두자. 1966년을 내 책에 기입하고 나도 훌륭한 내과의사가 될 것이다.   3   현관이 있는 집을 가지면, 소리 은은한 초인종을 달고, 지나가던 친구를 맞으려고 했었지. 파란 항공엽서로는 연상 편지를 쓰면서 겨울을 사랑하고, 테없는 안경을 끼고 수염을 조금만 키운 뒤, 조용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헷세의 아우구스투스를 읽으려고 했었지. 이제 당신은 알고 말았군. 길어야 육개월의 대화만이 남은 것 육 깨월의 사랑, 육 개월의 세상, 육 개월의 저녁을, 그리고 나에게 남은 육 개월을, 육 개월의 눈물을 알고 말았군.     마종하. 1943년 강원도 원주 출생. 동국대학교 국문과 졸업. 와 신춘문예로 데뷔했으며 삶의 탄력과 미래의 꿈, 즐거운 예감을 노래한 시인으로 시집 를 갖고 있다.      비가   푸른 물에 떠 있는 구름이 울리네.   나를 흔들어 울리네.   물의 기류가 켜켜이 쌓이는   이 길게 뻗친 공간, 냇가에서   나는 잠긴 채 하늘을 보네.   저 포플러 사이로 구불구불 흐르는 바람,   나의 눈은 어리둥절 떠 있네.   왜 모든 것이 그리 막막하던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말들이며   흐리멍덩한 웃음 속에   눈알을 묻고 사는 일이며   이 정신 나간 시대에   나는 물 머금은 개천의   자갈 바닥이나 들여다 보며   온 몸에 햇빛이나 칠해 보네.   칠하면 칠할수록 살갗은 벗겨지고   벗겨지면 없어지는 몸.   바람은 물 위를 흐른다.   하늘 한가운데 걸리어 퍼지고   간간이 빛나는 눈물이나 떨구며   구름처럼 풀려 가는 몸.   울음 가득한 푸른 하늘 아래서.      배꽃이 피면   배꽃이 피면 내님은 돌아올까   은의 월쓰 반짝이는 달빛 속에   그대의 웃는 이빨 차고 시려서   배꽃이 피면 강물도 푸르러   불밝힌 열차가 서럽게 떠나는 밤   저녁 잠결에서 깨어나 앉으면   창 밖엔 어느새 희게 웃는 바람소리   빗발은 밝게 꽃잎에 부서지고   멀리서는 떠난 밤차의 긴긴 울음소리   배꽃이 피면 끊어질 듯 서러워   달빛은 흘러내린 산모래를 적시고   그대의 물빛 크림 상기도 싱그러워   그대의 밝은 손은 내 가슴에 어른거려   오 코를 묻네 눈을 감네 향기로 뜨네.     모윤숙. 1910년 평북 안주 출생. 호는 영운. 개성 호수돈 여학교와 이화여자 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동인으로 문단에 데뷔했고, 해방후 국제 펜클럽 한국 본부를 설립했다. 유엔총회 한국대표 외에도 국제펜클럽 한국대표를 역임. 시집으로는 과 수필집 및 전집 등이 발간되었다.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나는 광주 산곡을 헤매다가 문득 혼자 죽어 넘어진 국군을 만났다.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른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나는 죽었노라, 스물 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나는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바람이 미쳐 날뛰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나는 숨지었노라.   내 손에는 범치 못할 총자루, 내 머리엔 깨지지 않을 철모가 씌워져   원수와 싸우기에 한 번도 비겁하지 않았노라.   그보다도 내 핏속엔 더 강한 대한의 혼이 소리쳐   나는 달리었노라. 산과 골짜기, 무덤 위와 가시숲을   이 순신같이, 나폴레옹같이, 시이저같이,   조국의 위험을 막기 위해 밤낮으로   앞으로 앞으로 진격! 진격!   원수를 밀어 가며 싸웠노라.   나는 더 가고 싶었노라. 저 원수의 하늘까지   밀어서 밀어서 폭풍우같이 모스크바 크레믈린탑까지   밀어 가고 싶었노라.   내게는 어머니, 아버지, 귀여운 동생들도 있노라.   어여삐 사랑하는 소녀도 있었노라.   내 청춘은 봉오리지어 가까운 내 사람들과 함께   이 땅에 피어 살고 싶었었나니   아름다운 저 하늘에 무수히 나르는    내 나라의 새들과 함께   나는 자라고 노래하고 싶었노라.   나는 그래서 더 용감히 싸웠노라. 그러다가 죽었노라.   아무도 나의 주검을 아는 이는 없으리라.   그러나 나의 조국, 나의 사랑이여!   숨지어 넘어진 내 얼굴의 땀방울을   지나가는 미풍이 이처럼 다정하게 씻어주고   저 하늘의 푸른 별들이 밤새 내 외롬을 위안해 주지 않는가?   나는 조국의 군복을 입은 채   골짜기 숲속에 유쾌히 쉬노라.   이제 나는 잠에 피곤한 몸을 쉬이고   저 하늘에 나르는 바람을 마시게 되었노라.   나는 자랑스런 내 어머니 조국을 위해 싸웠고   내 조국을 위해 또한 영광스리 숨지었노니   여기 내 몸 누운 곳 이름 모를 골짜기에   밤 이슬 내리는 풀숲에 나는 아무도 모르게 우는   나이팅게일의 영원한 짝이 되었노라.   바람이여! 저 이름 모를 새들이여!   그대들이 지나는 어느 길 위에서나   고생하는 내 나라의 동포를 만나거든   부디 일러 다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조국을 위해 울어달라고.   저 가볍게 날으는 봄나라 새여   혹시 네가 날으는 어느 창가에서   내 사랑하는 소녀를 만나거든   나를 그리워 울지 말고 거룩한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 일러다고.   조국이여! 동포여! 내 사랑하는 소녀여!   나는 그대들의 행복을 위해 간다.   내가 못 이룬 소원, 물리치지 못한 원수,   나를 위해 내 청춘을 위해 물리쳐 다오.   물러감은 비겁하다. 항복보다 노예보다 비겁하다.   둘러싼 군사가 다아 물러가도 대한민국 국군아! 너만은   이 땅에서 싸워야 이긴다. 이 땅에서 죽어야 산다.   한번 버린 조국은 다시 오지 않으리라. 다시 오지 않으리라.   보라! 폭풍이 온다. 대한민국이여!   이리와 사자떼가 강과 산을 넘는다.   내 사랑하는 형과 아우는 시베리아 먼길에 유랑을 떠난다.   운명이라 이 슬픔을 모른 체하려는가?   이니다. 운명이 아니다. 아니 운명이라도 좋다.   우리는 운명보다는 강하다. 강하다.   이 원수의 운명을 파괴하라. 내 친구여!   그 억센 팔 다리 그 붉은 단군의 피와 혼,   싸울 곳에 주저말고 죽을 곳에 죽어서   숨지려는 조국의 생명을 불러 일으켜라.   조국을 위해선 이 몸이 숨길 무덤도 내 시체를 담을   작은 관도 사양하노라.   오래지 않아 거친 바람이 내 몸을 쓸어가고   저 땅의 벌레들이 내 몸을 즐겨 뜯어가도   나는 즐거이 내 나라 땅에 한줌 흙이 되기 소원이노라.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운 국군울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런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   가슴에선 아직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문덕수. 1928년 경남 함안 출생이며 호는 청태이다. 동인으로 시 '성묘' 등을 발표했으며, 에 시 '바람속에서' '화석'이 추천되어 문단에 대뷔했다. , 제1회 을 수상. 시집으로는 와 이론집 다수가 있다. 현재 주간이며, 현대시인협회 회장, 문인협회 부이사장이며 홍익대 사범대 학장으로 있다.      꽃꽈 언어   언어는   꽃잎에 닿자 한 마리 나비가   된다.   언어는   소리와 뜻이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진다.   꽃의 둘레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언어가   불꽃처럼 타다간   꺼져도   어떤 언어는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   된다.      손수건   누가 떨어뜨렸을까   구겨진 손수건이   밤의 길바닥에 붙어 있다   지금은 지옥까지 잠든 시간   손수건이 눈을 뜬다.   금시 한 마리 새로 날아갈 듯이   발딱발딱 살아나는 슬픔.     문병란. 1935년 전남 화순 출생. 조선대학 문리대 국문과 졸업. 지에 추천받아 시단에 나옴. 현실을 소재로 하여 풍자와 비판적 정서로서 민족의식을 승화시키고자 하는 시적 세계를 가지고 있는 그는 현재 학원강사로 재직중이다. 시집으로 (1970) 등 다수가 있으며 산문집으로 (1979) (1983)이 있다.      코카콜라   발음도 혀끝에서 도막도막 끊어지고   빛깔도 칙칙하여라, 외양간 소탕물 같이   양병에 가득 담긴 녹빛깔 미국산 코카콜라   시큼하니 쎄하게 목구멍 넘어간 다음   유유히 식도를 씻어내려가   푹 게트림도 신나게 나오는 코카콜라   버터에 에그후라이 기름진 비후스틱   비계낀 일등 국민의 뱃속에 가서   과다지방분도 씻어낸 다음   삽상하고 시원하게 스미는 코카콜라.   오늘은 가난한 한국 땅에 와서   식물성 창자에 소슬하게 스며들어   회충도 울리고 요충도 울리고   메시꺼운 게트림에 역겨움만 남은 코카콜라.   병 마개도 익숙하게 까제끼며   제법 호기 있게 거드름을 피울 때   유리잔 가득 넘치는 미국산 거품   모든 사람들은 너도나도 다투어 병을 비우는구나   슬슬 잘 넘어간다고 제법 뽐내어 마시는구나   혀끝에 스며 목구멍 무사 통과하여   재빨리 어두운 창자 속으로 잠적하는 아메리카   뱃속에 꺼져버린 허무한 버큼만 남아 있더라   혀끝에 시큼한 게트림만 남아 있더라   제법 으시대며 한 병 쭉 들이키며   어허 시원타 거드럭거리는 사람아   진정 걸리지 않고 잘 넘어 가느냐   목에도 배꼽에도 걸리지 않고   진정 무사통과 넘어가느냐   콩나물에 막걸리만 마시고도   달덩이 같은 아들을 낳았던 우리네   오늘은 코카콜라 마시고   시큼새큼 게트림 같은 사랑만 배우네   랄랄랄 랄랄랄 지랄병 같은 자유만 배우네   목이 타는 새벽녘 빈 창자에   쪼르륵 고이는 냉수의 맛을 아는가   언제부터 일등국민의 긍지로   쩍쩍 껌도 씹으며   야금야금 초콜렛트도 씹으며   유리잔 가득 쭉 들이키는 코카콜라   입맛 쩍쩍 다시고 입술 핥은 다음   어디론가 사라져 가는 허무한 거품이여   우리 앞엔 쓸쓸히 빈 병만 그득히 쌓였더라   너와 나의 배반한 입술,   얼음도 녹고 거품도 사라지고   시큼새큼 게트림만 남아 있더라      폐 염전   평생을 뻘밭에 바치고   대대로 소금 구워 먹던 김생원,   정든 고향의 뻘밭   폐염전만 길게 남겨 놓고   오늘은 어디론가 떠나가 버렸다.   뜨거운 유월의 햇빛 아래   미닥질로 익어가던 영롱한 보석,   산더미 같은 소금산 아래서   땀방울도 알알이 여물던   소금풍년 조개풍년 꼬막풍년   그날의 어부가는 들리지 않는다.   만선 소식 감감한 남해바다   시름처럼 길게 누워 있는 뻘밭 위에   햇살만 너훌너훌 춤을 추는데   어깨 실한 돌쇠도   궁둥이 실한 갑순이도   가난만 남은 뻘밭을 버리고   오늘은 어느 공단으로 떠나갔는가?   밀려왔다 밀려가는 검은 폐수 뿐   멈춰 버린 수차는 말이 없고   허옇게 죽어간 폐각 위에   기운 없는 갈매기만    폐촌의 적막을 쪼으고 있다.   공장 지어 번성한 땅 위에   소금까지 외국에서 사다 먹으니   실직한 김생원   뻘밭을 버리고 도시로 가서   오늘은 어느 공단 품팔이 되어   아스팔트 위에서 맥주를 마실까?   여기는,   여천 공단의 검은 연기가   간간 불을 뿜는   삼일만 가까운 어촌,   조개도 죽어가고   꼬막도 죽어가고   정든 갈매기도 죽어가고   마지막 김생원도 떠나간 마을.   주인 잃은 수차 위에   6월의 햇살만 눈부시게 곱고   근대화를 모르는   빈 뻘밭만 맨살로 타고 있다.   5남매 7남매 쑥쑥 뽑아내   아기 잘 낳아 자랑스럽던 아내   이제는 하나만 낳는 시대   그 누가 소금쟁이 어부를 낳을꼬?   먹는 입만 생각하고   일하는 손은 계산 안하니   새끼 낳는 것도 부끄러운 인생   바다는 옛정을 못잊어   뻘밭을 적시며 정답게 출렁거린다.   어매야 아배야   어디로 갔느냐   떠나간 사공의 배따라기도 없이   포구의 새악씨 이별의 손수건도 없이   멈춰 버린 수차 위에   병든 갈매기 시름없이 날 때   용왕님도 떠나 버린   텅 빈 사당 앞에   미쳐 버린 똥개만 컹컹 짖고 있다.     문충성. 1938년 제주 출생. 한국 외국어 대학 불어과 졸업. 에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제주도의 한과 더불어 토속적인 정서 속에서 독자적인 세계를 개척한 시인이다. 시집으로 등이 있고 현재 제주 대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이어도   이어 이어 이어도 사나   이어도가 어디에 시니 수평선 넘어   꿈길을 가자 이승길과 저승길 사이   아침 햇덩이 이마에 떠올리고   저녁 햇덩이 품안에 품어   노을길에 돛단배 한 척   이어 이어 이어도 가자   한라산을 등에 지고 제주   바다와 마주 서 보라   수평선은 하늘하늘   눈썹 밑으로 잠기어 들고   새 하늘 동터 올 내일을 열라, 이글대는   수평선이어, 이글대는 가슴을 열라   수평선 넘어 꿈길을 열라, 썰물나건 돛단배 한 척   이어 사나 이어도 사나   별빛 밝혀 노저어 가자   별빛 속으로 배저어 가자      제주바다 1   누이야, 원래 싸움터였다.   바다가 어둠을 여는 줄로 너는 알았지?   바다가 빛을 켜는 줄로 알고 있었지?   아니다, 처음 어둠이 바다를 열었다. 빛이   바다를 열었지, 싸움이었다.   어둠이 자그만 빛들을 몰아내면 저 하늘 끝에서 힘찬 빛들이 휘몰아 와 어둠을 몰아내는   괴로와 울었다. 바다는   괴로움을 삭이면서 끝남이 없는 싸움을 울부짖어 왔다.   누이야, 어머니가 한 방울 눈물 속에 바다를 키우는 뜻을 아느냐. 바늘귀에 실을 꿰시는   한반도의 슬픔을. 바늘 구멍으로   내다보면 땅 냄새로 열리는 세상.   어머니 눈동자를 찬찬히 올려다보라.   그곳에도 바다가 있어 바다를 키우는 뜻이 있어   어둠과 빛이 있어 바다 속   그 뜻의 언저리에 다가갔을 때 밀려 갔다   밀려오는 일상의 모습이며 어머니가 짜고 있는 하늘을.   제주 사람이 아니고는 진짜 제주 바다를 알 수 없다.   누이야, 바람 부는 날 바다로 나가서 5월 보리 이랑   일렁이는 바다를 보라. 텅벙텅벙   너와 나의 알몸뚱이 유년이 헤엄치는   바다를 보라, 겨울 날   초가 지붕을 넘어 하늬바람 속 까옥까옥   까마귀 등을 타고 제주의   겨울을 빚는 파도 소리를 보라.   파도 소리가 열어 놓은 하늘 밖의 하늘을 보라, 누이야.     민영. 1943년 강원 철원 출생. 부모를 따라 만주로 이주하여 부두노동자, 인쇄소 조판공을 하다가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했다. '시의 아름다움이란 곧 삶의 진실과 일치하지 않고 얻을 수 없다'고 말하는 그는 등의 시집이 있다.      냉이를 캐며   -귀염이 엄마에게   오늘은 언 땅의   냉이를 캐며   내 손톱이 여린 것을   서러워하네.   바람은 등에 업은   어린 것을 후리고   몸 묶인 그이로부터는   소식이 없네.   바람아 불어라   쌩쌩 불어라   들판에 햇살 비쳐   새 울 때까지.     민재식. 1932년 출생. 을 통해 문단에 데뷔한 그의 시세계는 감정의 직접적인 노출을 억제하고 정형 설정에 역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집으로 이 있다.      밤에 산엘   밤에 산엘 올라가면   어둠을 딛고 설 수 있다.   밤에 산엘 올라가면   어둠을 이고 설 수 있다.   어둠은 까만 스폰지   딛어도 소리 없는, 치켜도 소리없는   그러나 온몸에 밀착해 오는   죽은 탄력성   밤에 산엘 올라가면   하늘에도 바다에도 별이 뜬다.   밤에 산엘 올라가면   눈에도 가슴에도 별이 어린다.   별은 빛으로 통하는 스폰지의 구멍   후벼도, 헤쳐도, 꺼지지 않는   빛의 부스러기     박경석. 1937년 전남 나주 출생. 지에 추천으로 등단. 시집 가 있다. 판소리 패로디를 통해 응어리진 삶을 노래하면서 신화와 고전의 현대적 수용을 꿈꾸는 작품세계를 다져가고 있다.      졸본 꾀꼬리   보리밭 고랑에서 풀냄새 어머니는   꾀꼬리 사설을 풀이해 주셨다.   머리 빗고 물 건너 임 만나 볼까.   비 갠 뒤에 우는 뜻을 새겨 들었다.   삼대같이 키가 크면서   버들 그늘 머리 빗는 강의실이었다.   태자 유리왕의 참된 사랑은   고구려에 옮겨 심은 중원의 꽃,   치희의 슬픔에 뿌리내린 것이라고   열을 올렸다.   이 노래를 강의할 때마다   졸본 꾀꼬리가 와서 운다며   주임교수는 눈매가 엄숙했다.   사랑의 실습보다   눈물의 효시부터 먼저 배웠다.   성빈여숙 기숙사로 그대 떠나고   내 앞에는 텅 빈 보리밭만 남더니.   되돌아갈 궁전도, 버드나무도,   버드나무 선 토담집도 없더니.   꾀꼬리 사설 들을 적마다   불혹을 넘긴 이 나이에도   상처 아문 자국에   따끔따끔 그 아픔 살아나느니.   박근영. 1931년 출생. 호는 수매. 을 통해 문단에 데뷔한 그는 순수 형상미를 추구하면서, 서민적 생활미를 표현하고자 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집으로 가 있다.      동정의 시   밤을 새우면서 목숨을 앓다가도   고운 해 동산에 떠오르면   나는야 이름 없이도 창 앞에 고운 해   아침 두레박을 드리우듯   깊은 속 어둠에 잠겨 있는   당신의 목소리를 가만히 길어   갈한 목 축이고 나면   안으로 맑아오는 나의 목소리   옥통소처럼 곱게 울려   차가운 하늘 열어 주면   빨간 댕기 드리운 듯   적연한 햇빛의 가지 끝에   가을 과일처럼 익어 오는 건   어느 날엔가   꽃다이 주어질   당신의 은혜로운 언약이십니다.     박남수. 1918년 평남 평양 출생. 평양 숭인상업 및 일본 중앙대학을 졸업. 월남후 편집위원을 역임했으며 을 통해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 선명하고 안정된 이미지와 미적 표현의 작품을 보여주는 한편 이미지와 형상화에서 존재론적으로 다가서는 작품도 보여 주고 있다. 시집으로는 등이 있다. 한양대 강사 등을  지내다 현재 도미중.      새   1   하늘에 깔아 논   바람의 여울 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죽지에 파묻고   따스한 체온을 나누어 가진다.   2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하지 않는다.   3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종소리   나는 떠난다. 청동의 표면에서   일제히 날아가는 진폭의 새가 되어   광막한 하나의 울음이 되어   하나의 소리가 되어.   인종은 끝이 났는가.   청동의 벽에   ^6 236^역사^356 3^를 가두어 놓은   칠흑의 감방에서.   나는 바람을 타고   들에서는 푸름이 된다.   꽃에서는 웃음이 되고   천상에서는 악기가 된다.   먹구름이 깔리면   하늘의 꼭지에서 터지는   뇌성이 되어   가루 가루 가루의 음향이 된다.     박두진. 1916년 경기 안성 출생. 호는 혜산. 에 시 '묘지송'^외 4편을 정지용에게 추천받아 문단에 데뷔했다. 조지훈, 박목월과 더불어 시인으로 활동하면서 각 잡지와 신문에 많은 시를 발표했다. 특히 내면 생활의 정관에로 향하는 시적 의지가 강하게 담긴 외에도 10여권의 시집과 수필집 등이 있다.      해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어, 달밤이 싫어,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어,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어...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라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과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라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 자리에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 자리에 앉아, 애띠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도봉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 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빈 골 골을 되돌아올 뿐.   산그늘 길게 늘이며   붉은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갖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묘지송   북망이래도 금잔디 기름진대 동그란 무덤들 외롭지 않으이.   무덤 속 어둠에 하이얀 촉루가 빛나리, 향기로운 죽음의 내도 풍기리.   살아서 설던 주검 죽었으매 이내 안 서럽고 언제 무덤속 화안히 비춰 줄 그런 태양만이 그리우리.   금잔디 사이 할미꽃도 피었고, 삐이삐이 배 뱃종 뱃종! 멧새들도 우는데, 봄볕 포근한 무덤에 주검들이 누웠네.      청산도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둥 산을 넘어 흰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 하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너멋골 골짜기서 울어 오는 뻐꾸기...   산아, 푸른 산아. 네 가슴 향기로운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 울어라. 흐르는 골짜기 스며드는 물소리에 내사 줄줄줄 가슴이 울어라. 아득히 가버린 것 잊어버린 하늘과 아른아른 오지 않는 보고 싶은 하늘에 어쩌면 만나도질 볼이 고운 사람이 난 혼자 그리워라. 가슴으로 그리워라.   티끌 부는 세상에도, 벌레같은 세상에도, 눈 맑은 가슴 맑은 보고지운 나의 사람, 달밤이나 새벽녘, 홀로 서서 눈물어린 볼이 고운 나의 사람, 달가고 밤가고 눈물도 가고 티어올 밝은 하늘 빛난 아침 이르면, 향기로운 이슬밭 푸른 언덕을 총총총 달려도 와 줄 볼이 고운 나의 사람.   푸른 산 한 나절 구름은 가고, 골 너머 뻐꾸기는 우는데, 눈에 어려 흘러가는 물결같은 사람 속, 아우성쳐 흘러가는 물결같은 사람 속에 난 그리노라. 너만 그리노라. 혼자서 철도없이 난 너만 그리노라.      꽃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 번만의 어느 날의   아픈 피흘림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궈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꺼질 듯   보드라운   황홀한 한 떨기의   아름다운 정적   펼치면 일렁이는   사랑의   호심아      당신의 사랑 앞에   말씀이 뜨거이 동공에 불꽃 튀는   당신을 마주해 앉으리까 라보니여.   발톱과 손가락과 심장에 상채기 진   피 흐른 골짜기의 조용한 오열   스스로 아물리리까 이 상처를 라보니여.   조롱의 짐승 소리도 이제는 노래   절벽에 거꾸러짐도 이제는 율동   당신의 불꽃만을 목구멍에 삼킨다면   당신의 채찍만을 등빠대에 받는다면   피눈물이 화려한 고기 비늘이 아니리까 라보니여.   발광이 황홀한 안식이 아니리까 라보니여.     박봉우. 1934년 전남 광주 출생이며 호는 추풍령. 전남대 정치학과를 졸업. 신춘문예에 시 '휴전선'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여 (1957), (1962)을 수상했다. 초기의 시는 분단의 현실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으나, 차차 센티멘탈한 시적 정서로 승화되고 있다. 시집으로 등이 있다.      휴전선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같은 정신도 신라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 ...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는 여기에 있었던가.   모든 유혈은 꿈같이 가고 지금도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 광장. 아직도 정맥은 끊어진 채 휴식인가 야위어 가는 이야기 뿐인가.   언제 한 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같이 징그러운 바람이여.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살이를 또 한 번 겪으라는가. 아무런 죄도 없이 피어난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얼마나 더 살아야 하는가. 아름다운 길은 이 뿐인가.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눈길속의 카츄샤   어느 집을 갈거나 어느 집을 갈거나 푸른 하늘이 나에게 준 이 길을 밟고 어데로 갈거나.   달밤이 아니라도 좋아라 별이 나지 않아도 좋아라 해바라기 무거운 목을 숙이고 꽃같은 울음을 고요히 피우시고 계실 어느 창변에 갈거나.   캄캄한 무덤에서 부활한 소복한 내가 되어 오늘만은 피를 토할 슬픔, 괴로움 속에 모아온 눈물 잊고 꽃초롱 밤 늦도록 피워놓고 이 길을 준 푸른 하늘을 이야기 하자고 가다리실 어느 집을 갈거나.   하얀 길. 하얀 벌판을 밟고 무한한 지평선에 흰 비둘기 나래의 깃발이 되어 이 기쁨을 누리자고 어느 머언 창변에까지 들리게... 산산이 부서져 버릴 유리조각이 되게 허공을 향하여 목이 터져라 울어보고 싶어라.   달밤이 아니라도 좋아라 별이 나지 않아도 좋아라 푸른 하늘이 나에게 준 이 길을 사운사운 밟고 하얀 길. 하얀 벌판. 하얀 보자기를 지나서 어데를 갈거냐.   자꾸만 가는 길 달밤보다 흰 벌판에서 붉게 피어버린 꽃처럼 울어나 보았으면... 이 길을 이 하얀 길을 고이 고이 나려주신 풍경 속에 끝없이 젖어...   밤늦도록 꽃초롱이 켜진 집을 찾아서 푸른 하늘이 나에게 준 이 길을 밟고 진실한 노래와 내 맑은 눈물을 읽어줄 하늘 같이 넓은 기슴에 안기리 안기러 가리...     박성룡. 1932년 전남 해남 출생. 호는 남우. 을 통하여 문단에 데뷔했으며 자연의 사물을 철저히 추구하여 이것을 서정성과 서경성이 융합되도록 표현한 시인이다. 동인으로 활동. (1961)을 수상. 시집 이 있다.      교외   1   무모한 생활에선 이미 잊힌지 오랜 들꽃이 많다.   더우기 이렇게 숱한 풀벌레 울어 예는 서녘 벌에   한 알의 원숙한 과물과도 같은 붉은 낙일을 형벌처럼 등에 하고   홀로 바람 외진 들길을 걸어 보면   이젠 자꾸만 모진 돌틈에 비벼피는 풀꽃들의   생각밖엔 없다.   멀리 멀리 흘러가는 구름 포기   그 구름 포기 하나 떠 오름이 없다.   2   풋물같은 것에라도 젖어 있어야 한다.   풀밭엔 꽃잎사귀,   과일 밭엔 나뭇잎들,   이젠 모든 것이 스스로의 무게로만 떨어져 오는   산과 들이 이렇게 무풍하고 보면   아 그렇게 푸르기만 하던 하늘, 푸르기만 하던 바다, 그보다도   젊음이란 더욱 더 답답하던 것,   한없이 더워 있다, 한없이 식어가는   피비린 종언처럼   나는 오늘 하루   풋물같은 것에라도 젖어 있어야 한다.   3   바람이여,   풀섶을 가던, 그리고 때로는 저기 북녘의 검은 산맥을 넘나들던,   그 무형한 것이여,   너는 언제나 내가 이렇게 한낱 나뭇가지처럼 굳어 있을 땐   와 흔들며 애무했거니,   나의 그 풋풋한 것이여,   불어다오,   저 이름없는 풀꽃들을 향한 나의 사랑이   아직은 이렇게 가시지 않았을 때   다시 한 번 불어다오, 바람이여,   아 사랑이여.      바람 부는 날   오늘따라 바람이   저렇게 쉴새없이 설레고만 있음은   오늘은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여희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풀잎에   나뭇가지에   들길에 마을에   가을날 잎들이 말갛게 쓸리듯이   나는 오늘 그렇게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여희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아 지금 바람이   저렇게 못견디게 설레고만 있음은   오늘은 또 내가   내게 없는 모든 것을 깨닫고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풀잎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6 236^풀잎^356 3^이라고 그를 부를 때는   우리들의 입 속에서는 푸른 휘파람 소리가 나거든요.   바람이 부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몸을 흔들까요.   소나기가 오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또 몸을 통통거릴까요.   그러나,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6 236^풀잎^356 3^, ^6 236^풀잎^356 3^하고 자꾸 부르면,   우리의 몸과 맘도 어느 덧   푸른 풀잎이 돼 버리거든요.     박의상. 1943년생.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졸업. 신춘문예로 문단에 데뷔한 그는 삶의 뿌리를 조명하면서도 넓은 시야로 세게를 수용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집으로 등이 있고 동인으로 활동중이다.      풍뎅이   풍뎅이가 벽에 부딪쳐   바닥에 떨어진다.   바로 앉지 못하고 누워서 파닥이는 것이   등이 둥근 때문보다는   등이 무거운 때문이리라   열 두 회사의 사장 회장을 하는   모씨의 종합병원   벽에 날아와 부딪쳐 떨어진   풍뎅이 한 마리가   미국에서 온 것도 아니련만,   그것을 상징하는 듯한 것은 웬일인지?   풍뎅이의 작은 날개보다   더 작은 나의 날개   나의 이상.      아내와 함께   한 쪽 것이 큰 아내여, 새끼가 윗니 하나로 쪼아댄 그 검은 젖꼭지로라도 나를 짓눌러 주게. 뒷방에 쌓인 드라이 밀크 깡통을 누르는 먼지 같이 흐릿하게 말고, 맨 위의 깡통이 밑의 빈 깡통을 짓누르는 것같이.   새끼가 생기더라도 우리는 우리끼리라고 다짐하였지만, 그때의 내 말은 아직 내 자신에게도 달콤하지만, 아내여 푸른 비눗물에 손목이 부어서, 빨래를 내걸려고 내미는 손목이 햇볕에 너무 따가와서.   울고 섰는 아내여, 내가 짓는 죄는 그래도 새끼가 없을 때 지은 죄보다는 가벼우리. 도둑질도 간음도 죄가 아닐 때, 멸시만은 정말 죄가 된다고 하지. 내가 그대의 지아비가 되었을 때부터가 아니라, 그대가 아내가 되었다고 믿은 때부터지만.   신뢰하는 것, 긍정하는 것을 지나서 아내를 알고 나서부터는 무심하였네. 지난 시절이 그리웁기보다 짜증스러워서도 우리는 빨리 자고 더 많이 잤던가.   잠든 아내여, 두 젖이 보름밤 언덕처럼 떠 있네. 나는 또 불통을 휘두르며 달려갈꺼나. 작은 숲 사이로 더 어린 아이들이 따라나오고, 나는 달을 향해서처럼 이 불의 씨들을 우리 새끼 눈에 대어보여 줄꺼나.     박이도. 1938년 평뿍 함천 출생. 신춘문예와(1959) 신춘문예에 각각 시가 당선되어 등단(1962). 시집으로 등이 있다. 현재 경희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나의 형상   밤사이   하나님은 쉬지 않고   나의 형상을 새로이 지으신다.   이른 아침 뜰에 나서면   풀섶에 숨은 이슬   햇살에 꿰어 매듯   사랑을 엮어 주네   밤사이 진 감꽃들이   하얗게 웃음짓는따   못다한 결백의 생명으로   내 형상을 짓는다   아, 밤사이   내가 무엇을 꿈꾸었나   어둠에 빠져 허위적이며   먼 데만을 향해   손짓을 하였구나   이 아침의 밝음을 두고   이슬의 총명과   감꽃의 결백을 두고   나의 참 형상을 두고      바람의 손 끝이 되어   욕실에 든 여인을 위해   나는 창문을 연다   싱그러운 바람-   검은 빛깔 갈매기처럼   바다로 날아 가네   여인의 머리카락에선   바다 바람이 인다   젖은 입술 사이   흰 잇발이 파도 끝처럼 다가온다   아, 보이지 않는 것   바람의 손 끝이 그대를 어루만질 때   이미 나는 바람 속의   한 마리 갈매기     박이문. 1931년 서울대 및 동대학원 불문과 졸업. (1955)와 을 통해 문단에 데뷔한 그는 시작보다 주로 철학적 저술에 주력하고 있다. 현재 미국 시몬즈여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내 꿈속의 나비는   내 꿈속의 나비는   꿈   나비 속의 꿈에서   나를 보고   나는 나비 속의 그림자   나비의   꿈속의 나의   그림자   껍데기   나는   그늘   속의   그늘   껍데기   꿈으로 만들어진   현실   현실의 껍데기   속의   꿈의   꿈     박재륜. 1910년 충북 충주 출생. 호는 국초.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도일하여 수학한 뒤 귀국, 모더니즘 시인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시집으로 와 시문집 와 시선집 등이 있다.      편지   내 마음 적막한 때는   바다 저편 나라 벗에게 편지를 쓴다.   편지는 그 사람의 마음의 전신   오늘 내 쓰는 말도 이같이 애절하다   벗이여   어디에 나의 연인은 있느냐   어디에 나의 행복은 있느냐   아아   인생의 거치른 바다 위에   그 아름다운 섬은 헛되이 사라져 없어지고   오늘의 나는   기이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이름 모를 항구와의 무역엔 실패하다   다시 어느 지각을 저어   거치른 물결 이는 마음을 잠 재우리.   다만 여기에 남긴 인생은   사랑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그렇다고 방탕조차 아니어도   젊음은 헛되이 늙으려 하고   남은 가재는   홀로된 어머니의 마음 동산의   또 하나의 꽃의 향기를 뺏으려 한다.   얼마나 나는 불효자냐.   어느 지점에 이르르면   나에게도 말하고 남는 자랑을 얻으리.   벗이여   편지는 오늘 내 마음 싣고   너를 찾아 표박의 길에   아름답게 꾸며진 한 척의 범선.   벗이여   사람에게 말하고 남는   나의 큰 자랑이여   멀지않은 시일이 지나면   너에게서   감격에 넘친 글발이 올 줄로 믿는   오늘날 나의 적막한 마음의   바램을 끊지 마라.     박재릉. 1937년 출생. 을 통해 문단에 데뷔. 동인으로 샤마니즘적인 낭만주의가 그의 작품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시집으로 등이 있다.      서울   저렇게 하늘이 얕아서 쓰겠는가?   광화문부터 종로를 사뭇 걸어가노라면   지붕이며, 유리창이며, 간판이며, 모두들   저렇게 얕게 하늘 가까이 들러붙어...   연변의 경복궁은 저만큼 먼발치서 차라리   안 보이는 뒷뜰의 그 응향의 먼지 낀 냄새들을 쭈그리고 앉아   낡은 섬돌의 이끼 낀 침묵들을 묵묵히 맡고 섰다.   아, 그 누가 알 것인가?   머언 그 옛적 머언 그 조선 시절에   구중에서 안락하게 살다 간 이들이   지금은 무릎까지 시려 오는 그 제단에서 드디어는 떠나   저기, 저 눈부신 빛들을 화사히 줏어 입고들 나와 선 것을...   층층벽으로, 모퉁이로, 길가로   바람에 채일 듯이 싸늘히 선   낯선 저 얼굴들 위에, 눈빛 위에, 몸짓 위에.   그리고 그 예리한 빛들이, 지금은   지붕 위에서 다락키 만큼 높은 그 끝까지 다가붙어   위태로이 그 위를 닿으려고 저마다 날카롭게 빛이 선 것을...   그래도 그래도 꺼질 듯이 흩날려 버릴 듯한   이 서울이 끄덕도 않고 있는 것은   아마도 저 삼각이나 북악 만큼 든든한 마음끼리   이 바닥을 깊이 움켜잡고 있는   힘 있는 어느 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렸다.   돌이... 걸이... 돌이... 걸이 엇갈린 아우성들...   고층을 오르내리는 그믈을 뜨는 손짓과 손짓들...   앞뒤 물의 낯들... 엇갈린 선과 선들...   수연이 그리워, 눈물이 그리워, 슬픔이 그리워, 그늘이 그리워...   제 콧날 위의 하얀 제 별도 못 떠받아   서울은 나부껴, 하얗게 가루처럼 나부껴   ...     박재삼. 1933년 일본 도오꼬오에서 출생하여 경남 삼천포에서 성장했다. 와 에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한 그는 한국적 정한의 세계를 여성적인 톤으로 노래하는 것이 특징이다. 을 수상했고 시집으로는 등이 있다.      울음이 타는 가을강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것네.      아득하면 되리라   해와 달, 별까지의   거리 말인가   어쩌겠나 그냥 그 아득하면 되리라.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도   자로 재지 못할 바엔   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   이것들이 다시   냉수사발 안에 떠서   어른어른 비쳐오는   그 이상을 나는 볼 수가 없어라.   그리고 나는 이 냉수를   시방 갈증 때문에   마실밖에는 다른 작정은 없어라.      어떤 귀로   새벽 서릿길을 밟으며   어머니는 장사를 나가셨다가   촉촉한 밤이슬에 젖으며   우리들 머리맡으로 돌아오셨다.   선반엔 꿀단지가 채워져 있기는커녕   먼지만 부옇게 쌓여 있는데,   빚으로도 못 갚는 땟국물 같은 어린것들이   방 안에 제멋대로 뒹굴어져 자는데,   보는 이 없는 것,   알아주는 이 없는 것,   이마 위에 이고 온   별빛을 풀어놓는다.   소매에 묻히고 온   달빛을 털어놓는다.      천년의 바람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 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자연   뉘라 알리,   어느 가지에서는 연신 피고   어느 가지에서는 또한 지고들 하는   움직일 줄을 아는 내 마음 꽃나무는   내 얼굴에 가지 벋은 채   참말로 참말로   바람 때문에   햇살 때문에   못이겨 그냥 그   웃어진다 울어진다 하겠네.      가난의 골목에서는   골목골목이 바다를 향해 머리칼같은 달빛을 빗어내고 있었다. 아니, 달이 바로 얼기빗이었었다. 흥부의 사립문을 통하여서 골목을 빠져서 꿈꾸는 숨결들이 바다로 건다. 그 정도로 알거라.   사람이 죽으면 물이 되고 안개가 되고 비가 되고 바다에나 가는 것이 아닌 것가. 우리의 골목 속의 사는 일 중에는 눈물 흘리는 일이 그야말로 많고도 옳은 일쯤 되리라. 그 눈물 흘리는 일을 저승같이 잊어버린 한밤중, 참말로 참말로 우리의 가난한 숨소리는 달이 하는 빗질에 빗어져, 눈물고인 한 바다의 반짝임이다.     박정온. 1926년 전남 장흥 출생. 연세대에서 수학했으며 시집으로 등이 있다. 그의 시의 특징은 내부의 생명을 외부와 결부시키는 데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차에서   눈이 날린다   차가운 것이 유리에 와 닿는다.   제각기 가야 할 종점-   마음은 어느 하늘을 달리는가   무릎 위에 얼굴을 파묻고 가는   지친 몸짓도   어둡게 살아온 흐린 눈망울도   손을 잡으면 정다운 이웃들!   십 이월 하늘은 북구라파의 표정을 하고   눈발이 세차게 휘몰아 오는데   아무도 말이 없는   이 차가움 속에   누구의 기침소리인가   비늘처럼 가슴을 찌른다     박정희. 1936년 함북 길주 출생. 동국대 영문학과 및 건국대 대학원을 졸업. 을 통해 데뷔하여 시집으로 와 논문집 등이 있다. 현재 상명여사대에 출강하고 있다.      술래의 편지   겨울이 다 간 뒤에   나에겐 추위가 다가왔오.   하루에 한 번   봄에 앓던 학질은   하루에 두 세 번   여름 독감으로 이어졌오   쇳물 녹이는 불가마에   앉아서도   나는 춥고   또 추웠오.   주사 바늘에 꽂혀   파닥이는 검은 사지   살아날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거듭하던 죽음.   창 밖으로 떼지어 날으는 잠자리   눈부신 아이들의 술래잡기   발돋움해도 당치않는   높은 창 너머도   달려가 잡히는   술래가 되고 싶소.   영영 달아나지 않는   당신의 술래가 되고 싶소.     박제천. 1945년 서울 출생. 동국대학교 국문과 중퇴. 지에 시 추천으로 등단(1966)하여 동인. 한국 시인협회 상임위원이며 미 아이오아대 국제 창작 프로그램 객원 시인(1984)으로 참가했다. 현재 한국 문화 예술 진흥원에 근무하고 있으며 제24회 제14회 제4회 을 수상했다. 시집으로는 등 다수가 있으며 산문집으로 와 영역시집이 있다.      장자시   2   지나쳐가고지나쳐가는형상의아름다운음정들   고물께서소리죽이고흐느끼는바닷물문득   머리위에높이떠피어나는물보라꽃에저희넋을실으나   뉘라볼수있으랴   허공에서꽃잎날리고꽃잎날려꽃잎날리거니   바다아래꽃게의거품이그꽃잎들을삼킬뿐이네   10   정액처럼끈끈한손길의말을버리면   꿈의껍질이벗겨지고하이얀뇌골만햇빛에쪼그라드네   상상의날랜눈이슬그머니소매에가둔   천체의여러벌들그것들이이마를맞대어날으던죽음의   반짝인빛이었네   24   신경질의여윈그림자로고사리과식물의줄기끝에   신경질의줄은풀려엉기고삶을재는그림자마저도르르말리네   여러개의손가락이엮어세운십자가에지등의흐린불빛이걸려   내삶의편린을가벼이흔들어주네   천상의궤도마다장미밭을일퀐네   내생애는바람의도포를입었네   가다오다장미꽃가지를치는   오오인연의칼끝에길이놓였네   바람속으로바람속으로헤매이는내피의물살이여   흩날리는장미꽃이여      사기등잔과 함께   이미 불태운 것들은 사라져 버린 지 오래라   이제 불타고 있는 것들은 사라져 또 어디를 가리   닳아 버린 심지, 거뭇거뭇 남아 있는 석유찌꺼기, 군데 군데 흠이 간 싸구려   등잔 하나를 닦으며   불꽃 한 줄기 피워 손에 들고 있느니   불타오를수록   남아있는 뼈와 살이 무게를 또한 느끼느니   어느 별의 회답이 이리 더딘가   한밤중이면 깨어나 앉아   지난 시간의 그림자들을 개어 먹을 가느니   밤을 밝힐수록 검게 빛나는 이 어둠을 온몸에 받아들이며   내가 만들어 띄우는 불꽃   한 줄기   언뜻언뜻 별처럼 어려보여라.     박태진. 1921년 평남 평양 출생. 시 ^6 236^신개지^356 3^를 발표하면서 시작활동을 시작. 시집으로 와 합동시집 , 산문집 등이 있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이르는 우리 시를 낮은 목소리의 생생한 언어로 누비면서 개성적인 서정과 리듬으로 점철한 특유의 시인으로 알려지고 있다.      무교동   정말 그런가고 그렇다 치고   심각했던 말끝을 흐리어   약주잔이 뒤받은 뒤를 이어   비 오듯이 해 저물듯이   그것은 무교동 언저리   하루는 달력에 미끄러진 숫자   사람들이 변했다고 그는   가래 낀 목청, 술을 엎질렀다   달력의 숫자는 왜 속지 않느냐고   인생이 짧다뿐 잘못은   짧아서 초라하다 뿐   속는 것도 즐거움인 줄을   그는 미처 몰랐다고   이 지붕 밑은 그렇다 치고   웃음이 감도는 눈자위   주름이 거북한 눈자위   그는 나더러 나는 그더러   그런가고 그렇다 치고      한국인의 애송시 II            제1권   편집고문:서정주, 조병화, 이어령   발행인:장석주   발행처:청하   주소:서울시 강남구 역삼동 780-1   초판발행일:1985년 7월 25일   입력일:1992년 2월 15일   입력 및 교정자:임종욱     원로, 중견 125인 선 II   박화목   호접   박현령   지하여장군   박홍원   선인장의 역설   박훈산   보리고개   박희선   모악산 기슭 나그네   박희진   지상의 소나무는   골과 향수   회복기   변학규   목숨   서정주   동천   화사   국화 옆에서   푸르른 날   무등을 보며   문둥이   꽃밭의 독백   귀촉도   봄   대낮   석용원   겨울 명동   설의웅   외갓집 있는 마을 풍경   설창수   동백칠칠조   성찬경   나사, I   성춘복   나를 떠나보내는 강가엔   굳은 손으로   송선영   강강수월래   송수권   산문에 기대어   지리산 뻐꾹새   송영택   소녀상   신경림   농무   겨울밤   목계장터   갈대   신기선   역설의 꽃   신달자   뒷산   신대철   눈   사람이 그리운 날, 3   신동문   내 노동으로   신동집   목숨   눈   신동춘   꽃은 제 내음에   신세훈   잠실 개구리   신중신   회색 그림자   안장현   어느 정신병원에서   안혜초   달속의 뼈   양명문   명태   은행나무 산조   양성우   기다림의 시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양왕용   남강   양치상   목화바구니   오규원   한 잎의 여자   봄   겨울 숲을 바라보며   오세영   봄   너 없음으로   오순택   그 겨울 이후   유경환   나비   초설   유안진   청년 그리스도께   유영   수박을 먹으며   유자효   가을의 노래   유재영   유랑의 섬   유정   램프의 시, 1   램프의 시, 5   조그마한 무덤 앞에   진눈깨비   윤삼하   겨울의 첨단   이가림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반도의 눈물   이건청   망초꽃의 하나   추운 벌레   이경남   강 건너 얼굴   이경순   구름은 흐르고 뻐꾸기는 우는데   이광웅   달   이근배   냉이꽃   부침   이기반   산 너머 저 노을이   이기철   이향   너의 시를 읽는 밤엔   이봉래   단애   이생진   그리운 성산포   이성교   해바라기 피는 마을   이성부   벼   전라도, 2   누룩   어머니   이성선   나무 안의 절   이성환   그믐달   이수복   봄비   이수익   우울한 샹송   말   봄에 앓는 병   가을 서시   안개꽃   호롱   이승훈   지난날   당신   암호   이영걸   한가위, 1   이영순   크리스마스 이브   이우석   휘파람   이운영   이 가슴 북이 되어   이원섭   향미사   죽림도   이유경   형제의 울음   배반   이석   개나리   서시   이인해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이제하   단풍   노을   이종욱   꽃샘추위   돌   이중   타락사초   이창대   애가   이추림   바다처럼   이탄   구름   이태극   삼월은   낙조   이태수   낮달로 슬리며   옛꿈을 다시 꾸며   이하윤   들국화   이향아   음미   이형기   낙화   비오는 날   노년 환각   종전차   나의 시   호수   들길   이활   낙서가 된 앗시리아의 벽화   이희승   추삼제   이희철   낙엽에게   인태성   투우   임강빈   코스모스   장서언   이발사의 봄   밤   장순화   유방의 장   장윤우   나부   장호   파충류의 사상   전봉건   돌, 2   돌, 31   물   정공채   시는 술이다   망향   정대구   겨울나무의 진실   박문답, 5   정렬   꽃밭   정양   수수깡을 씹으며   날참새를 씹으며   정완영   조국   정의홍   자유, 2   정진규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바보의 살   정한모   어머니   나비의 여행   정현종   고통의 축제   사랑의 꿈   꿈속의 아모라   정훈   파적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어두운 지하도 입구에 서서   조남익   죄   조병화   오산 인터체인지   안개로 가는 길   하루만의 위안   결혼식장   분수   조상기   눈오는 날   조종현   나도 푯말이 되어 살고 싶다   의상대 해돋이   조태일   짝지어주기   수수께끼   주문돈   귀뚜라미   천상병   주막에서   새   천양희   꿈에 대하여   신이 내게 묻는다면   최원규   달   최재형   양지   최하림   시   산   한광구   심지 하나로 녹으면서   한기팔   가을비   한무학   어차피 못 부를 바에야   함윤수   수선화   허만하   꽃의 구도   데드마스크   허소라   10월의 노래   허영자   백자   감   봄   임   허형만   1월의 아침   홍신선   겨울섬   산을 오르며   홍윤숙   장식론   풍차   황금찬   보리고개   촛불   황동규   10월   즐거운 편지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조그만 사랑의 노래   황명   분수   황명걸   나의 손   한국의 아이   황선하   아버지의 연가   황운헌   난파선   신예신인 48인 선   감태준   흔들릴 때마다 한 잔   사모곡   강경화   늦가을 배추벌레의 노래   풍경   강은교   풀잎   우리가 물이 되어   강창민   비가 내리는 마을   시인에게   강현국   일장일막   고정희   상한 영혼을 위하여   사랑법 첫째   김명인   베트남, 1   동두천, 1   김승희   흰 여름의 포장마차   햇님의 사냥꾼   김옥영   죽은 날벌레를 위하여   말, 1   김원길   내 아직 적막에 길들지 못해   김은자   초설   김정환   마포 강변동네에서   유채꽃밭   김정   역사   김종철   서울의 유서   재봉   김준태   참깨를 털면서   천지현황을 뒤집어 쓴 그대들에게   김창범   봄의 소리   김혜순   납작 납작   마라톤   연기의 알리바이   노창선   섬   등 둘   마광수   우리는 포플라   망나니의 노래   문정희   편지   민용태   고려장   박남철   연날리기   첫사랑   박정남   빛이 드는 언덕에는 새 풀들이   박정만   잠자는 돌   아편꽃   박주관   벗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살던 광주, 5   서원동   달맞이꽃   송기원   회복기의 노래   안경원   통화   오승강   새로 돋는 풀잎들을 보며   윤석산   편지   원색의 잠   윤재걸   후여 후여 목청 갈아   전라도의 무등과 함께   윤후명   곰취의 사랑   명궁   이동순   개밥풀   연탄갈기   이성복   정든 유곽에서   그날   이세룡   빵   이시영   너   만월   이윤택   늑대   이하석   철모와 수통   핀, 2   이해인   민들레의 영토   가을 노래   석류꽃   장석주   등에 부침   숨은 꽃   장영수   메이비   그 여자   정호승   맹인 부부 가수   슬픔은 누구인가   조정권   돌이 돌 위에 돌을 내려 누르듯이   79년 가을   최승자   삼십세   즐거운 일기   최승호   대설주의보   하종오   풍매화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홍영철   바다 일부   작아지는 너에게   홍희표   섬에 누워    원로, 중견125인선. II   박화목.1923년 출생. 일명 은종. '죽순'과 '등불' 동인으로 작품활동을 한 그는 기독교적인 사상에 일종의 허무함을 풍기는 작품들을 많이 발표했다. 시집으로 "시민과 산양" "그대 내 마음 창가에" "주의 곁에서" 등이 있고, 수필집 "보리밭 그 추억의 길목에서"가 있다.      호접   가을 바람이 부니까   호접이 날지 않는다.   가을 바람이 해조같이 불어와서   울 안에 코스모스가 구름처럼 쌓였어도   호접 한 마리도 날아오지 않는다.   적막만이 가을 해 엷은 볕 아래 졸고   그 날이 저물면 벌레 우는 긴긴 밤을   등피 끄스리는 등잔을 지키고 새우는 것이다.   달이 유난하게 밝은 밤   지붕 위에 박이 또 다른 하나의 달처럼   화안히 떠오르는 밤   담 너머로 박 너머로   지는 잎이 구울러 오면   호접같이 단장한 어느 여인이 찾아올 듯 싶은데...   싸늘한 가을 바람만이 불어와서   나의 가슴을 싸늘하게 하고   입김도 서리같이 식어간다.     박현령.1938년 경남 마산 출생. 경희대 영문과와 동대학원 신방과 수료. "여원"지의 '여류 신인상' 수상(1958)으로 데뷔했다. '여류시' 동인으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그의 시 세계는, 새로운 서정을 위한 모색과 탈바꿈을 시도, 현대시가 담아야 할 새로운 가치관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시집으로 "상사초" "오소서 이 햇볕 속으로"가 있다.      지하여장군   장군님, 여장군님.   어디쯤 입니까   그곳은   할 수도 아니 할 수도 없이   끝없이 황량해가기만 하는   교외의 어느 간이역, 거기   넘쳐 흐르는 쉬르리얼리즘의 배반   밤차를 기다리며, 오직   사랑만이 남아있어   불타야하는   그런 충절의 밤의 간이역   꺼져들어가는 가등을   켜고 또 켜며   기다릴 쑤도, 아니할 수도 없는   끝없이 황량해 가기만 하는    거긴 어디쯤입니까.   지하여장군님!     박홍원.1933년 전남 무안 출생. 조선대학 문리대 졸업.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했다. 시집으로 "옥돌호랑이" 등이 있고 현재 조선대학교 사대 학장으로 있다. 시경향은 형식과 내용이 조화된 중용의 길을 지향하는 예술파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선인장의 역설   스스로의 뼈를 부수어 만든 마름쇠   살갗에 박고,   결식으로 발돋움하는 내핍의 사구   선인장은 혼신으로 부르짖고 있다.   발부리는 땅 속을 헤매지만   연륜을 몰라   가도가도 심해 빛 심해같은 마음으로   맹물을 마시며 푸르른 목숨.   능선인가, 골짜긴가,   아슬한 정점 어디인가,   몇 십 구비 그 끝에 피어나는   태초의 정적 속에 빛살 터지는   그러한 아침이 오기는 올까?   온 몸이 눈이요, 이파리요, 꿈   온 몸이 팔다리인   두리뭉수리,   포화 지나간 거리의   벽돌 조각 사이나   바람마저 메마른 어느 벌판에 던지워도   스스로의 샘물에 목 추기며   잃지 않는 균형으로 너는 있고,   한 발짝만 들어서면   너의 마음 언저리   피안에 잇닿아 출렁이는 강물은   태양을 부르는 풋풋한 육성인 양...     박훈산.1919년 경북 청도 출생. 본명은 유상. 일본 니혼대학 법과를 졸업했으며 1946년 문단에 데뷔하여 시작활동을 하다가 공군 종군 문인이 됨. '경북 문화상'을 수상(1958). 시집으로 "날이 갈수록" "박훈산 시집"이 있다. 자학의 고배를 마시면서도 육성으로 정신의 투영도를 그려 온 시인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보리고개   아지랭이는 손에 감돌 듯   저 언덕을   타 넘어 왔는데   볼수록   나의 얼굴은   추하여라.   버들피리 불면서   새싹을 주워 보려던   나의 어린 날은   이미   떨어진 꿈   봄은   보리 고개   숨가쁜   계절   꽃은   제 멋대로   피어라.   가난한 마음 골짝에   스며든   앓는 가슴아   나는 지금   어머니를 기다린다.     박희선.1923년 충남 강경 출생. '죽순' '별' 동인으로 시작활동을 하였으며, 1950 - 1963 전남대, 우석대 등에서 시학 강의를 했다. 장시집 "생쥐와 우표"외 불서 "선의 탐구" 등 10여권의 저서가 있다.      모악산 기슭 나그네   --충만에의 거액, 마침내 침묵을 깨고 가지끝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꽃 순수의 배반자여!   어쩌다가 눈을 뜨고 물소리를 생각하면서 다시 소년이고저 기리던   생각 순간으로 돌아와서 머웃 나를 잊는 때가 있다.   눈을 뜨고서, 물소리를 그려보는 것은   지리산 볍솔염,   내려오다가 만난 사람, 숫돌에 날을 세우던 그 중년 늙은이   수리개 빙빙 삿갓을 씌워놓고서 오르는   하늘 아래의 첫 마을, 날을 고눠   세워든 새을자로 휘어진   황새목 낟자루,   어쩌다가 헐어진 터 묵은 초가집 삼간에 세를 들고   살면서, 나는 이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갑을병정 누구라고 이름하여도 좋은 것이지만,   수리개 빙빙 돌던 하늘, 성 돌을 주워서 뫃아두고   시인이여, 시인이여, 누구도 없이 불러보던 이름들   백불목은 고스라니 죄다가 스러지고   개가죽나무 열매보다도 그늘이 없어서 슬프더라고(말하던)   젊음, 오늘은 귀신사에서 목욕탕 주머니   왼 손아귀에 꾸겨서 쥐고 드나드리로 나와서   뒤돌아보는 모악산, 너는 이제 한 사람의 시인   그 이름을 알리라. 개구리 모냥 빠그락 빠그락   늦 피기 비롯하는 자목련,   그 가지 끝에서 쉬어가던 목소리를 가다듬다가   떠난 사람들, 저승 소식과 같은   갈구리, 어쩌다가 눈을 뜨고   어쩌다가 다시 소년이 되고져   물소리 생각하는, 오늘은 한 모서리   그리하여 신문사의 데스크   경금속성 소리나는 유리판과 함께 생각하느니   오늘 새벽 바라보던 달 모악산 기슭의 새벽달   실눈, 벗이여 평상할지라 오늘은 4월   1984년, 즈문 날   문턱에서 피어난 태음력   푸른 산의 청솔가지 아궁이에 밀어 넣고서 생각하는   초가삼간, 가맛틀과 같이 기리운 초하룻날이다.     박희진.1931년 경기 연천 출생.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문학예술"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 '60년대 사화집' 동인으로, 생에의 외경을 바탕으로 하는 상징적 표현으로 현대인을 노래하는 것이 특징. '월탄문학상'을 수상(1976)했으며 시집으로는 "실내악" "청동시대" "미소하는 침묵" "빛과 어둠의 사이" "서울의 하늘 아래" 등이 있다.      지상의 소나무는   지상의 소나무는 하늘로 뻗어가고   하늘의 소나무는 지상으로 뻗어와서   서로 얼싸안고 하나를 이루는 곳   그윽한 향기 인다 신묘한 소리 난다   지상의 물은 하늘로 흘러가고   하늘의 물은 지상으로 흘러와서   서로 얼싸안고 하나를 이루는 곳   무지개 선다 인생의 무지개가   지상의 바람은 하늘로 불어가고   하늘의 바람은 지상으로 불어와서   서로 얼싸안고 하나를 이루는 곳   해가 씻기운다 이글이글 타오른다      골과 향수   골   어머니 자궁속에 태아와 같이   밀폐된 관 속에 그녀는 황골로 불만이 없었다.   그 볼을 곱게 물들이던 피 한 방울, 머리칼 하나,   살 한 점 안 남기고. 남 몰래 사랑으로   빛났을 눈동자, 아 한 번도 사나이 가슴을   대 본 일이 없었기에 수밀도처럼 익었을   젖가슴의 심장이나마 남은들 어떠리오. 허나   조찰히 골만 누웠네요. 땅 속에 자라난   무슨 기묘한 식물과도 같이. 아름다운 변신일까.   그녀가 묻힌지 십 오년 만에 발굴된 무덤,   이 제껴진 관 속에 쏟아지는 햇빛의 조롱이여.   무덤 파는 일군의 굵직한 손가락이 골에 닿자 마자   마디 마디 으러지는 그것은 가루, 보니 두골이   치워진 자리엔 반쯤 담겨진 향수병 하나.   향수   고승의 골회에선 영롱한 사리가 나온다지만   그녀의 고운 마음, 향수로 화함인가... 피도 힘줄도   내장도 살도 그 몸을 감았던 베옷과 함께   삭아서 검은 티끌 위에 호올로 숨 쉬는 향수병   투명한 그 속에 반쯤 담기어, 상기 은밀히 떨고 있는   향수의 내력을 어느 시인이 풀이할 수 있으리오.   별에 흘렸던 그녀의 눈물, 잠결에 새어난   한숨이 모여 향기로운 이슬다이 어리운 것일까.   이젠 영원히 새어날 수도 없이,유리의 그릇 속에   죽음을 뚫고 고여진 사랑. 허나 이 그지없이   고귀한 향수에게 햇빛은 잔인해라, 차라리 흙을   그 팍팍한 흙을 덮어라요. 다시 십 오 년이 지나간 뒤   이곳에 길이 나고 집들이 선들, 그녀의 고혼이야   깊고 어둔 흙 속에 보석으로 오롯이 맺히리니.      회복기   어머니, 눈부셔요.   마치 금싸라기의 홍수 사태군요.   창을 도로 절반은 가리시고   그 싱싱한 담쟁이넝쿨잎 하나만 따 주세요.   그것은 살아 있는 5월의 지도   내 소생한 손바닥 위에 놓인   신생의 길잡이, 완벽한 규범,   순수무구한 녹색의 불길이죠.   삶이란 본래 이러한 것이라고.   병이란 삶 안에 쌓이고 쌍인 독이 터지는 것,   다시는 독이 깃들지 못하게   나의 살은 타는 불길이어야 하고   나의 피는 끊임없이 새로운 희열의 노래가 되어야죠.   참 신기해요, 눈물이 날 지경이죠   사람이 숨쉬고 있다는 것이,   그래서 죽지 않게 마련이라는 것이.   저 창 밖에 활보하는 사람들,   금싸라기를 들이쉬고 내쉬면서.   저것은 분명 걷는 게 아니예요.   모두 발길마다 날개가 돋혀서   훨훨 날으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웃음소리, 저 신나게 떠드는 소리,   사람의 몸에서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날까요.   그것은 피가 노래하는 걸 거예요,   사는 기쁨에서 절로 살이 소리치는 걸 거예요.   어머니, 나도 살고 싶습니다.   나는 아직 한번도 꽃 피어 본 일이 없는 걸요.   저 들이붓는 금싸라기를 만발한 알몸으론   받아 본 일이 없는 이 몸은 꽃봉오리   하마터면 영영 시들 뻔하였던   이 열 일곱 어지러운 꽃봉오리   속을 맴도는 아픔과 그리움을    어머니, 당신 말고 누가 알겠어요.   마지막 남은 미열이 가시도록   이 좁은 이마 위에   당신의 큰 손을 얹어 주세요.   죽음을 쫓은 손,   그 무한히 부드러운 약손을.     변학규.1914년 경남 진양 출생. 호는 만춘. 진주 농고 졸업. "농은"지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여 시, 시조를 다수 발표하였다. 시집으로 "사계사" "불과 재의 대화" "몸살난 진주" "변학규 시집" 등이 있다.      목숨   엄마 눈 눈맞추는   젖꽃 문 아이같이   방울 물 움켜 받는   떨리는 손목같이   내 목숨 푸름에 젖어   날개 치는 저 높이.   흰 눈을 털고 있는   새움 튼 가지같이   별빛을 쓰다듬는   가슴 젖은 강물같이   내 목숨 머릿물 터져   출렁거리는 저 깊이.   [출처] [펌] 한국의 애송시 (2)|작성자 수위
209    애송시선 5 댓글:  조회:3448  추천:2  2015-02-13
서정주.1915년 전북 고창 출생. 호는 미당. "시건설"에 (자화상)을 발표하여 시작 활동을 했으며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시인부락' 동인으로 이른바 대담한 육욕과 천민정서를 바탕으로 하여 한국시의 한 봉우리를 이룬 그는 생명파 시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시집으로는 "화사집" "뀌촉도" "신라초" "동천" "질마재 신화" "떠돌이의 시" 등이 있으며, 그밖에 많은 저서가 있다.      동천   내 마음 속 우리 임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화사   사향 박하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 내던 달변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 뜯어라, 원통히 물어 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방초ㅅ길 저놈의 뒤를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 보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 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 스며라, 배암!      국화 옆에서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푸르른 날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네가 죽고 내가 산다면?   내가 죽고 네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무등을 보며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 가다 농울쳐 휘여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   내외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누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라도 자욱히 끼일 일인 것이다.      문둥이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꽃밭의 독백      --사소단장   노래가 낫기는 그 중 나아도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 오고,   네발굽을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가 멎어 버렸다.   활로 잡은 산돼지, 매로 잡은 산새들에도 이제는 벌써 입맛을 잃었다.   꽃아, 아침마다 개벽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낯바닥에 얼굴이나 비치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섰을 뿐이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귀촉도   눈물 아롱 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 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 삼 만리.   신이나 삼아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 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머리털 엮어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굽이굽이 은핫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봄   복사꽃 피고, 뱀이 눈 뜨고, 초록 제비 묻혀오는 하늬 바람   위에 혼령있는 하늘이여. 피가 잘 돌아... 아무 병도 없으   면서 가시내야. 슬픈 일 좀,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      대낮   따서 먹으면 자는 듯이 죽는다는   붉은 꽃밭 사이 길이 있어   아편 먹은 듯 취해 나자빠진   능구렁이 같은 등어릿길로   임은 달아나며 나를 부르고...   강한 향기로 부르는 코피   두 손에 받으며 나는 쫓느니   밤처럼 고요한 끓는 대낮에   우리 둘이는 왼몸이 닳아...     석용원.1931년 경북 영주 출생. 한국문협이사. 한국 크리스챤문협회장이며 숭의여전에 출강하고 있는 그는 기독교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을 풍자, 비판하는 한편, 인깐화에의 염원이 강력히 풍기는 작품을 쓰고 있다. 시집으로 "잔" "밤이 주는 가슴" "야간 열차" 등이 있다.      겨울 명동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당신은 그대로 하늘에 계십시오.   우리는 이대로 땅에 두십시오.   땅 위는 때로 아름답지요.   날이 날마다 좁아져 가는 한국의 서울   서울 한복판에 우뚝 솟은 남산탑   철갑을 두른 듯한 소나무는 없어도   우리 명동은 은하를 이루고   그 사이를 낮과 밤이 미끄러집니다.   태양은 볼 수 없지만   아직은 하늘 조각이 펄럭입니다.   성당도 예스럽게 잘 있읍니다.   밤이면 진짜 사람의 아들딸들이   서로 비비고 부딪고 따뜻하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자처하는 청년이   머리 길고 수염 긴 제자들을 거느리고   밤이 밤마다 최후의 만찬을 베풀다가   심각하게 자신의 십자가를 예언하는   참 좋고 참 행복한 사람들   모두가 이 땅 위에 있읍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목마를 타고   멋장이 시인 박 인환과 더불어   한 잔의 술을 기울입니다.   얼마나 얼마나 멋있읍니까.   우리는 이대로 땅에 두십시오   당신은 그대로 하늘에 계십시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설의웅.함남 이원 출생. 성균관 대학교 국문과와 단국대학교 대학원을 졸업. "현대시학"을 통해 데뷔했으며 시집으로 "소나기" "그대 떠난 자리" "설의웅 시집"이 있다. 그의 시는 대체적으로 한국의 민속문화에 뿌리를 둔 토속적인 시세계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외갓집 있는 마을의 풍경   개암도 까며 산에서 외갓집 마을을 굽어보면 초가집 몇 채 숲과 어우르고 있었다.   바랑 멘 중이 오르내리는 외딴 산길 큰절 마을 뒤에 있고 오일장 서는 읍이 앞에 있다.   숲머리 돌아나가는 강물에 노을 조각 저녁 가을걷이 끝낸 외삼촌이 흥얼흥얼 장에서 돌아오고 큰절 재 올리는 종소리 마른 풀 향기에 실려오는 곳   개암도 까며 산에서 외갓집 마을을 굽어보면 발 밑 땔나무 가지에 앉은 고추잠자리 야윈 가을 볕 꼬리를 서운히 물고 있었다.     설창수.1926년 경남 창원 출생. 호는 파성. 일본 니혼대학 예술과 2년 수료. 동인지 "등뿔"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한 그는 탈 주지적 정신주의를 추구하여 작품활동을 해왔다. 시집으로 "개폐교" 외에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으며 현재 한국문학협회 이사장으로 있다.      동백칠칠조   차마 이대로서야 피도 지도 못하는   몸짓들 가쁜 정을 가눌 수가 없구나   기름 똑똑 진 갈매 눈보라도 이겨서   꼭꼭 야문 봉지가 홍갑사 나부 댕기.   차마 이대로서야 풀도 맺도 못하는   열두발 삼단 머리 깎고 중이 될까나.   아낙네 품은 원한 오월에도 서리온다.   깊은 밤 잠꼬대로 불러주랴 내 이름.   속 태워 고인 기름 알알히 맺혔다가   옥비녀 화촉동방 새낭자에 풍기자.     성찬경.1930년 충남 에산 출생. "문학예술"을 통해 문단에 데뷔. '60년대 사화집' 동인이며 시집으로 "화형둔주곡" "벌레소리송" 등이 있다. '제11회 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한 그는 한국 고유의 서정적 비유에 대한 그 표현과 시조적 변형태로서 시종일관하여 동서를 결합하는 시경향을 갖고 있다.      나사.1   길에서 나사를 줍는 버릇이 내게는 있다.   암나사와 숫나사를 줍는 버릇이 있다.   예쁜 암나사와 예쁜 숫나사를 주으면 기분 좋고   재수도 좋다고 느껴지는 버릇이 있다.   쭈그러진 나사라도 상관은 없다.   투박한 나사라도 상관은 없다.   큼직한 숫나사도 쓸 만한 건 물론이다.   나사에 글자나 숫자나 무늬가   음각이나 양각이 돼 있으면 더욱 반갑다.   호주머니에 넣어 집에 가지고 와서   손질하고 기름칠하고   슬슬 돌려서 나사를 나사에 박는다.   그런 쌍이 이젠 한 열 쌍은 된다.   잘난 쌍 못난 쌍이   내게는 다 정든 오브제들이다.   미술품이다.   아니, 차라리 식구 같기도 하다.     성춘복.1936년 경북 상주 출생. 성균관 대학교 국문과 졸업. "현대문학"을 통해 데뷔(1958)한 그는 '제1회 월탄문학상' 및 '동포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성균관 대학 강사로 재직 중이다. 예술원 전문위원, 한국 문인협회 시분과 위원장이며 세계 시인회의 한국위원회 사무국장으로 있다. 시집으로는 "오지행"(1965), "산조"(1970), 장시집 "공원 파고다"가 있다.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아 지적 서정성을 노래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나를 떠나보내는 강가엔   나를 떠나보내는 강가엔   흐트러진 강줄기를 따라 하늘이 지쳐 간다.   어둠에 밀렸던 가슴   바람에 휘몰리면   강을 따라 하늘도 잇대어   펄럭일 듯한 나래 같다지만   나를 떠나보내는 언덕엔   하늘과 강 사이를 거슬러   허우적이며 가슴을 딛고 일어서는   내개만 들리는 저 소리는 무엇인가.   밤마다 찢겼던 고뇌의 옷깃들이   이제는 더 알 것도 없는 아늑한 기슭의   검소한 차림에 쏠리워   들뜸도 없는 걸음걸이로   거슬러 오르는 게 아니면,   강물에 흘렸던 마음이   모든 것을 침묵케 하는 다른 마음의 상여로   입김 가신 찬 스스로의 동혈을 지향하고   아픔을 참고 피를 쏟으며   나를 떠나보내는 강으로 이끌리워   되살아 오르는 게 아닌가.   강 너머엔   강과 하늘로 어울린   또 하나의 내가 소리치며   짙은 어둠의 그림자로 비쳐간다.      굳은 손으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리워하다가   드디어 서러운 자만이 갖는   그런 손으로 헤매어다니다가   미진 돌개바람마저 발을 묶는   그리 멀지 않은 곳,   무릎 일으킬 힘도 없는 너겁으로   나를 세우게 된다   어느 날   문득 나는 빈 손이고   길은 먼 데 있어   네가 내 곁이 아님을   내가 아무 의미 아님을   깨우치게 되어도   꼭 닫아 건 창 밖으로   마구 팔매질 해대는 너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근심만 쫓던 너의 열어젖힘 앞   난 또 신명을 다할 수 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사명으로 그리워 하다가   이내 사그라질 검정의   굳은 손으로나마   너를 빌고 있으마     송선영.1936년 전남 광주 출생. 본명은 태홍. 광주 사범 졸업. '한국일보'와 '경향신문' 신춘문예 출신으로 '전남도 문화상'을 수상(1974) 했다. 시집에는 "겨울 비망록"이 있다. 현재 국민학교 교사.      강강수월래   어쩔거나 만월일레 부푸는 앙가슴을   어여삐 달맞이꽃 아니면 소소리래도...   목뽑아 강강수월래 청자허리 이슬어져   얼마나 오랜 날을 묵정밭에 묻혔던고.   화창한 꽃밭이건 호젖한 구렁이건   물오른 속엣말이야 다름없는 석류 알.   솔밭엔 솔바람 소리 하늘이사 별이 총총   큰 기침도 없으렷다 목이 붉은 선소리여.   남도의 큰 아이들이 속엣말 푸는 잔치로고.   돌아라 휘돌아라 메아리도 흥청댄다.   옷고름 치맛자락 갑사 댕기 흩날려라.   한가위 강강수월래 서산 마루 달이 기우네.     송수권.1940년 전남 고흥에서 출생. "문학사상" 신인상을 수상하여 등단(1975)했다. 시집으로 "산문에 기대어" "꿈꾸는 섬"이 있는 그의 시 특징은 특이한 시적 구조로서 토착 정서를 담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현재 장시 "동학란"을 "금호문화"에 연재중.      산문에 기대어   누이야   가을산 그리매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즘믐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 같이   살아 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매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 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매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뭇돌 속에 비쳐옴을      지리산 뻐꾹새   여러 산 봉우리에 여러 마리의 뻐꾸기가   울음 울어   석 석 삼년도 몸을 더 넘겨서야 4  나는 길뜬 설움에 맛이 들고   그것이 실상은 한 마리의 뻐꾹새임을   알아냈다.   지리산하   한 봉우리에 숨은 실제의 뻐꾹새가   한 울음을 토해 내면   뒷산 봉우리 받아 넘기고   또 뒷산 봉우리 받아 넘기고   그래서 여러 마리의 뻐꾹새로 울음 우는 것을 알았다.   지리산중   저 연연한 산봉우리들이 다 울고 나서   오래 남은 추스름 끝에   비로서 한 소리 없는 강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섬진강 섬진강   그 힘센 물소리가   하동쪽 남해를 흘러들어   남해군도의 여러 작은 섬을 밀어 올리는 것을 보았다.   봄 하룻날 그 눈물 다 슬리어서   지리산하에서 울던 한 마리 뻐꾹새 울음이   이승의 서러운 맨 마지막 빛깔로 남아   이 세석 철쭉꽃밭을 다 태우는 것을 보았다.     송영택.1933년 전남 광주 출생. 서울대 독문과 졸업."현대문학"에 (소녀상)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한 그는 서정을 바탕으로 하는 시작활동을 하고 있다. 아울러 독문학 번역에도 힘쓰고 있다. 시집으로 "가난한 산책"이 있으며 현재 서울대 문리대 강사로 있다.      소녀상   이 밤은   나무잎이 지는 밤이다.   생각할수록 다가오는 소리는   네가 오는 소리다.   언덕길을 내려 오는 소리다.   지금은   울어서는 안된다.   다시 가만히 어머님을 생각할 때다.   별이 나를 내려다 보듯   내가 별을 마주 서면   잎이 진다. 나무잎이 진다.   멀리서   또 가까이에서...     신경림.1935년 충북 충주 출생. 동국대 영문과를 졸업했으며 "문학예술"에 시가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한 그는 60년대 중반 이후부터 농촌의 현실을 통한 인간의 정서를 노래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시인 중의 한 사람. '제1회 만해문학상'과 '제8회 한국문학작가상'을 받았고, 수상시집으로 "농무"와 "새재"가 있다.      농무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 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겨울밤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할거나.   술에라도 취해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냄새라도 맡아 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건 우리뿐.   올해는 닭이라도 쳐 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 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 다오 우리를 파묻어 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 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 편지라도 띄워 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 볼거나.      목계장터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 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지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갈대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 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신기선. 1932년 함북 청진 출생. 호는 범석.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문학예술"에 시가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60년대 사화집' 동인으로 초기에는 관념의 세계를 노래하다가 이를 현실 인식의 방향으로 전환하여 시를 쓰고 있다. 시집으로 "맥박" 외에도  작품 다수를 발표했다.      역설의 꽃   낙엽은 그냥이 아니다.   또 그냥 웃고   보는 것이 아니다.   가을에 찾아오는   영원한 꽃이다.   역설의 꽃이다.   공간을 은밀한 울음으로 뛰어다니는   움직이는 꽃이다.   우리들의 죽음도   그냥이 아니다.   인간의 뒤안에 남기는   현재는 찾아오는 꽃이다.   잔인한 역설의   꽃이다.   우수의 다레기에   독하고 아프게 피고 있는   고통의 알깐 꽃이다.   시간을 바람에 끓이는    새로운 고전의 꽃들이다.     신달자.1943년 경남 거창 출생. 숙명여대 국문과 졸업. 1970년 (빨래) (발) (에렙베타)로 문단에 나왔다. 주요작품으로는 (일기) (미로) (미인계) 등이 있으며 이들 작품을 통해 조화할 수 없는 인간의 외로움과 숙명적인  상실을 노래한 여류시인이다.      뒷산   외로울 적에   마음 딥답할 적에   뒷산에 올라가 마음을 벗는다.   나무마다 하나씩 마음을 걸어두고   노을을 받으며 드러눕는 그림자   돌아갈 것이 없는 빈 몸이다.   무겁게 끌어 온 신발의 진흙덩이   서리 감겨 살을 에는 하루의 바람   모두 모두 부려놓는   울먹이는 내몸이다.     신대철.1945년 충남 홍성 출생. 연세대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고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문단에 데뷔하면서 왕성한 시작활동을 한 그는 현대인의 내면정황을 포착하는 유니크한 시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시인이다. 시집으로 "무인도를 위하여"가 있고 현재 국민대에 출강하고 있다.      눈   자운영꽃이 꼭꼭 숨어 핀 풀숲을 헤맸어. 자운영꽃 같았어. 풀뱀이었어. 풋고추 같았어. 고추밭이었어. 빨간 고추만 골라 땄어. 고추를 씹다 보니 뱀이었어. 혹시 불꿈은 꾸지 않았어? 불을 움켜쥔 채 사람들이 쫓기지 않았어? 불만 버리라고 그러지 않았어? 불만 버리면 된다고 그러지 않았어? 불만 버릴 순 없다고 그랬지. 손가락이 타 뜰어가도 불을 놓지 않았어. 온몸에 불이 붙었어. 지글지글거리는 불덩어리였어. 불을 보고 싶어. 불을 키우는 아이를.      사람이 그리운 날.3   눈 쌓이지 않는 산모퉁일 몇 개 돌아 들면 이름 안 붙여진 계곡에 이름 안 붙여진 산 속이 있고 지리 모르는 길가엔 스스로 묻히려고 산 속에 드는 풀꽃들,파헤쳐진 애장 몇, 산 속엔 가을에도 인간은 살지 않았구나.   산이 키운 한 인간을 버리고   인간이 키운 한 인간을 버리고   한 인간을 찾아   떠도는 눈, 눈발.     신동문.1928년 충북 청주 출생.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 초기에는 전쟁의 파괴적인 요소를 노래하는 앙가지망의 시를 발표. 그후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 '제1회 충북뭉화상'을 수상했고 시집으로 "풍선과 제3포복"이 있으며, 현재 지방에서 농장을 경영하며 틈틈이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내 노동으로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결심을 한 것이 언제인가.   머슴살이 하듯이   바친 청춘은   다 무엇인가.   돌이킬 수 없는   젊은 날의 실수들은   다 무엇인가.   그 여자의 입술을   꾀던 내 거짓말들은   다 무엇인까.   그 눈물을 달래던   내 어릿광대 표정은   다 무엇인가.   이 야위고 흰   손가락은   다 무엇인가.   제 맛도 모르면서   밤새워 마시는   이 술버릇은   다 무엇인가.   그리고 친구여   모두가 모두   창백한 얼굴로   명동에 모이는 친구여   당신들을 만나는   쓸쓿한 이 습성은   다 무엇인가.   절반을 더 살고도   절반을 다 못깨친   이 답답한 목숨의 미련   미련을 되씹는   이 어리석음은   다 무엇인가.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결심했떤 것이 언제인데.     신동집.1924년 경북 대구 출생.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했다. 시집"대낮"을 출간하여 문단에 데뷔한 그의 시는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존재와 내면의식의 추구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아세아 자유문학상' '한국 현대 시인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서정의 유형" "제2의 서정" "모순의 물" "들끓는 모음" "빈 콜라병" "새벽녘의 사람" "귀환" "송신" "세 사람의 바다" 등이 있다.      목숨   목숨은 때 묻었다.   절반은 흙이 된 빛깔   황폐한 얼굴엔 표정이 없다.   나는 무한히 살고 싶어라.   너랑 살아 보고 싶어라.   살아서 죽음보다 그리운 것이 되고 싶어라.   억만 광년의 현암을 거쳐   나의 목숨 안에 와 닿는   한 개의 별빛   우리는 아직도 포연의 추억 속에서   없어진 이름들을 부르고 있다.   따뜻이 체온에 젖어든 이름들   살은 자는 죽은 자를 증언하라   죽은 자는 살은 자를 고발하라   목숨의 조건은 고독하다   바라보면 멀리도 왔다마는   나의 뒤 저편으로   어쩌면 신명나게 바람은 불고 있다.   어느 한많은 시공이 지나   모양할 수 없이 지워질 숨자리에   나의 백조는 살아서 돌아서라.      눈   아주 너를 떠나 보내고 돌아오는 길은 펑펑 눈이 오는 밤이었다. 돌아서는 모퉁이마다 내 자욱 소리는 나를 따라오고 너는 내 중심에서 눈의 것으로 환원하고 있었다.   너는 아주 떠나버렸기에 그러기에 고이 들을 수 있는 내 스스로의 자욱소리였지만 내가 남기고 온 발자욱은 이내 묻혀 갔으리라. 펑펑 내리는 눈이 감정 속에 묻혀 갔으리라.   너는 이미 나의 지평가로 떠나갔기에 그만이지만 그러나 너 대신 내가 떠나갔더래도 좋았을 게다. 우리는 누가 먼저 떠나든, 황막히 내리는 감정 속에 살아가는 것이냐.     신동춘.1931년 평북 정주 출생.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 "현대문학"을 통하여 문단 데뷔. '제6회 시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어느날" "집념아후" "거리에서 가설까지"와 수필집 "내 마음 열으시옵고" 등이 있다.      꽃은 제 내음에   꽃은 제 내음에   밤내 잠 못 이루고   나무는 해 저무도록   제 그늘을 떠나지 않네.   사랑이사 아쉬움일레   오래 곁하여   여운은 여울지어   메아리로 흘러라.     신세훈.1941년 경북 의성 출생. 중앙대 연극 영화과 및 동국대 대학원 수료. '조선일보' 신춘문예(1962) 출신이고 현재 '시인 회의' 동인이며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다. 시집 "베트남 엽서" "강과 바람과 산"이 있고 '제3회 시문학상'을 수상했다.      잠실 밤개구리      --잠실 연작시   잠실 밤개구리가 운다.   밤새도록 밤새도록 운다.   울음숲을 이루며 잠실잠실   실실실 잠실...   아파트가 더 들어서면   고향을 잃어버린다고 운다.   비 맞은 인디언 물귀신처럼 운다.   아스팔트가 덮히면   변두리 산으로 쫓겨나   숨 다할 거라고 무한정 밤을 운다.   잠실 밤하늘을 원망이라도 하듯   순하디순한 흙값이 금값임을   허공천에 대고 원망이라도 하듯   잠실 개구리가 새워새워 운다.   금구렁이들이 자꾸자꾸 몰려들면   이제 울 수도 없을 거라고 자꾸 운다.   울음시위와 울음화살로는   마른 번갯불로 빛나는 그림자 앞에서는   울어봐도 다 소용없을 거라고 자꾸 운다.   여름밤 인디언 물귀신처럼 그리 슬피 운다.     신중신.1941년 경남 거창 출생.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사상계"를 통해 문단에 데뷔했으며 시집 "고전과 생모래의 고뇌" "투창"과 수필집 "가난한 영혼을 위하여"가 있다. 그는 주변의 아픔과 고뇌에 대한 정감을 갖고 이를 표출하는 데 주력하고 있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회색 그림자   깊은 밤을 울리는 발자국 소리   땅 속으로 잦아들 듯 사라져 가는 회색의 그림자   지난 일에 대해서 입 다물고   어깨를 늘어뜨린 채   그렇게 해야했을 것을 늘 그만큼의   미진을 깨우쳐   혼자 밤을 향해 가는 사내.   손에 든 아무것도 없어   짐스럴 것 없는 허탈이 달무리로 걸리고   언젠가 어린 것에게 사다 준   완구쯤은 기억해 내기도 하며   여윈 목덜미 어둠으로 묻혀 간다.     안장현.1928년 경남 김해 출생.동아대학교 국문과 졸업. 시집으로 "내 가슴에 흐르는 샘"과 수필집으로 "사랑은 파도를 넘어" "달에게 묻는다" 등이 있다.      어느 정신병원에서   끝내 함께 미칠 수 없는 마음이 부른 곳.   그곳이 정신병원이다.   미친 놈이라고 욕하지 말라.   누가 미친 놈인가는 언젠가의 세월이 가름하리라.   세상이 지표를 잃고 미칠 때   함께 미칠 수 있는 사람   함께 미칠 쑤 없는 사람   밤을 앓는다.   진실로 살기를 바라던 사람들은 가고 사월에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사람들은 남아 돌아가지만   꽃은 살기를 바라던 사람들의 것.   말할 수 없는 분노와   가슴의 피가 뭉쳐 꽃핀 그곳--   그러나 지금도 어느 정신병원의 환자들은   이웃과   사랑을 위해   잠들지 않고 밤을 앓는다.     안혜초.1941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1967년 "현대문학"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다년간 기자 생활을 하다가 시집 "귤, 레몬, 탱자" "달속의 뼈"와 수필집 "사랑아,네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까 있다. 현재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국제 한국 펜클럽회원이다.      달속의 뼈   왜 그런지 모르겠다.   이즈음에 이르러선   밤으로 낮으로   이따금씩 달 생각이   떠오르고   비바람에 닳고 닳은   저 둥그러운 되쏘임 빛   얼기설기 드러나보이는   계수나무 뼈.   눈물의 뼈   원망의 뼈   분노의 뼈   인고의 뼈   용서함의 뼈   잊지못함의 뼈   이도 저도 재가 되어가는   가쟁이 뼈 가운데서   맨 마지막으로   삐걱대고 있는   사랑함과   사랑하지 않음의 뼈.   감사함의 뼈.     양명문.1913년 평남 평양 출생. 호는 자문. 시집 "화수원"으로 문단에 데뷔한 그의 시는 언어의 섬세하고 연약한 기교미를 배척하고, 솟구쳐 오르는 느낌과 생각을 직접적으로 토로함을 특징으로 한다. 시집으로 "화수원" "송가" "화성인" "푸른 전설"과 시선집 "이목구비"등 작품 다수를 발표했다.      명태   감푸른 바다 바닷 밑에서   줄지어 떼지어 찬물을 호흡하고   길이나 대구리가 클대로 컸을 때   내 사랑하는 짝들과 노상   꼬리치고 춤추며 밀려 다니다가   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   에지프트의 왕처럼 미이라가 됐을 때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쇠주를 마실 때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고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짝악 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은 남아 있으리라   '명태'라고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은행나무 산조   은행나무 그늘엔   노오란 음부들이 떨어진다.   은행 이파리들에다   내 귀여운 어휘들을 적어 본다.   적어 놓은 어휘들은   제법 노오란 발음들을 한다.   도라지, 말화부리, 살구씨,   도토리, 소금쟁이, 송이버섯   돌개바람, 귤, 토끼똥,   무서리 내린 마가을 저녁   소북히 쌓인 은행 이파리들은   졸지에 일어난 돌개바람에 실리어   하나씩의 음부로 도옹동 떠   저녁 노을에 화음하면서...   나붏나불 납신거리며 도동실 뜨는   하늘하늘 하느작이는 노랑나비 떼   허덕이는 기억을 시원히 털어 버리고   마가을 하늘로 팔을 벌리며 솟아오르는   아, 은행나무의 서글픈 산조!     양성우.1943년 전남 함평 출생. 전남대 국문과 졸업. "시인"지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시집 "발상법" "겨울 공화국" "북치는 앉은뱅이"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등을 간행한 그는 진정한 민족현실의 발견과 그것에 기초한 민족의 화합에 기여하는 시들을 쓰고 있다.      기다림의 시   그대 기우는 그믐달 새벽별 사이로   바람처럼 오는가. 물결처럼 오는가.   무수한 불면의 밤, 떨어져 쌓인   흰꽃 밟으며 오는   그대 정든 임. 그윽한 목소리로   잠든 새 깨우고,   눈물의 골짜기 가시나무 태우는   불길로 오는가. 그대 지금   어디쯤 가까이 와서   소리없이 모닥불로 타고 있는가.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총창뿐인 마을에 과녁이 되어   소리없이 어둠 속에 쓰러지면서   네가 흘린 핏방울이 살아 남아서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셔 준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골백번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이 진흙의 한반도에서   다만 녹슬지 않는 비싼 넋으로   밤이나 낮이나 과녁이 되어   네가 죽꼬 다시 죽어   스며들지라도   오는 봄에 나무 끝을 쓰다듬어 주는   작은 바람으로 돌아온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혹은 군화 끝에 밟히는   끈끈한 눈물로   잠시 머물다가 갈지라도   불보다 뜨거운 깃발로   네가 어느날 갑자기 이 땅을 깨우고   남과 북이 온몸으로 소리칠 수 있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엄동설한에 재갈물려서   여기저기 쫓기며 굶주리다가   네가 죽은 그 자리에 과녁이 되어   우두커니 늘어서서 눈 감을지라도   오직 한마디 민주주의, 그리고   증오가 아니라 포옹으로   네가 일어서서 돌아온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이 저주받은 삼천리에 피었다 지는   모오든 꽃들아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양왕용.1943년 경남 남해 출생. 경북대사대 국어교육과 졸업. "시문학"을 통해 등단한 그의 시재는 대부분 바다와 관련된 것이 특색이며 작품은 내면 세계의 분석과 관념의 구상화, 서정시의 감각화로 집약된다. '에스프리' 동인이며 현재 부산대학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연구실에 재직.      남강   대나무 숲은   강물 찍어내고 있다.   도동쪽에서   이른 봄 아침부터 늦가을 저녁까지   들리던   황소의 울음도   강물 찍어내고 있다.   다리 아래 떠 있는   또 하나의 다리.   판문점 댐 공사   아직 멀었지만   평거의 무우밭에는   서리가 내렸는데   강물은   모래알 깨물고 있다.   온 시가가 불 밝히는   그 하늘의 한 주간   곡마단의 나팔   어울리지 않게 울려도   강물은   모래알 깨물고 있다     양치상.만주 출생. 서독 뮌헨 뮬러 디자인 전문학교 수료.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1978)한 그는 섬세하고도 정감에 찬 육성으로 이미지를 심리속에 변형시켜 시 세계를 형성해 나가고 있는 시인이다.      목화바구니   구름 조각   머물다 간 언덕받이에   달빛이 치마를 벗는다.   분이의 목화바구니엔   늘   흰구름이 머문다.   파도 울어   지샌 지금   녹슨 대리석 기둥에   낡은 교회 종소리를 갈며   바람은   바람은 서로 기운다.     오규원.1941년 경남 삼랑진 출생. 동아대 법과를 졸업.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한 이후로 왕성하게 작품을 발표하고 있는 그는 일상적으로 보고 들을 수 있는 언어와 시각적 청각적 이미들로 가득찬, 그러면서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자나가는 삶의 뒷 모습까지도 예리하게 파헤쳐나가는 시인이다. 시집으로 "분명한 사건" "순례" "사랑의 기교"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이땅에 쓰여진 서정시"와 시론집 "현실과 극기" "언어와 삶" 등이 있다. 현재 서울예술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한 잎의 여자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 것도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시집 같은 여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야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같은 슬픈 여자.      봄   저기 저 담벽, 저기 저 라일락, 저기 저 별, 그리고 저기 저 우리집 개똥 하나, 그래 모두 이리와 내 언어 속에 서라. 담벽은 내 언어의 담벽이 되고, 라일락은 내 언어의 꽃이 되고, 별은 반짝이고, 개똥은 내 언어의 뜰에서 굴러라. 내가 내 언어에게 자유를 주었으니 너희들도 자유롭게 서고, 앉고, 반짝이고, 굴러라. 그래 봄이다.   봄은 자유롭다. 자 봐라, 꽃 피고 싶은 놈 꽃 피고, 잎 달고 반짝이고 싶은 놈은 반짝이고, 아지랑이고 싶은 놈은 아지랑이가 되었다. 봄이 자유가 아니라면 꽃 피는 지옥이라고 하자. 그래 봄은 지옥이다. 이름이 지옥이라고 해서 필 꽃이 안 피고, 반짝일 게 안 반짝이던가. 내 말이 웃으면 자, 자유다 마음대로 뛰어라.      겨울 숲을 바라보며   겨울 숲을 바라보며   완전히 벗어버린   이 스산한 그러나 느닷없이 죄를 얻어   우리를 아름답게 하는 겨울의   한 순간을 들판에서 만난다.   누구나 함부로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 누구나 함부로 완전히   벗어버릴 수 없는   이 처참한 선택을   겨울 숲을 바라보며, 벗어버린 나무들을 보며, 나는   이곳에서 인간이기 때문에   한 벌의 죄를 더 겹쳐 입고   겨울의 들판에 선 나는   종일 죄, 죄 하며 내리는   눈보라 속에 놓인다.     오세영.1942년 전남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여 시집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가 있고 '시협상' '녹원문학상'을 수상한 그는, 서정에 토대를 두고 사물 탐구를 통해 삶의 존재론적 문제를 다루고 있는 시인이다. 현재 서울대학교 인문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봄   봄은   성숙해 가는 소녀의 눈빛   속으로 온다.   흩날리는 목련꽃 그늘 아래서   봄은   피곤에 지친 춘향이   낮잠을 든 사이에 온다.   눈 뜬 저 우수의 이마와   그 아래 부서지는 푸른 해안선   봄은   봄이라고 발음하는 사람의   가장 낮은 목소리로 온다.   그 황홀한 붕괴, 설레는 침몰   황혼의 깊은 뜨락에 지는 낙화.      너 없음으로   너 없음으로   나 있음이 아니어라   너로 하여 이 세상 밝아오듯   너로 하여 이 세상 차오르듯   홀로 있음은 이미   있음이 아니어라,   이승의 강변 바람도 많고   풀꽃은 어우러져 피었더라만   흐르는 것 어이 바람과 꽃 뿐이랴   흘러 흘러 남는 것은 그리움   아, 살아 있음의 이 막막함이여,   홀로 있음으로 이미   있음이 아니어라.     오순택.1942년 전남 고흥 출생. 조선대학 중퇴. "현대시학"에 시가 추천되어 시작활동을 한 그는 서정성을 바탕으로 인간 본연의 심층을 노래 하고 있는 시인이다. '시법' 동인이며 시집으로 "그 겨울 이후"가 있다.      그 겨울 이후   겨울 나무들이 기다리고 있었지.   프로스트 마을처럼   채과를 마친 가지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지.   따다 남은 과일 한 알마저 또렷이 보인 과일나무 곁에서   우리는 오래오래 포옹했지.   철근같은 팔뚝에 조여지는   쿵쿵 뛰는 가슴.   진한 꽃물이 들었는가.   빛나는 눈썰미 깨끗한 눈가에   한 알 이슬이 어리었지.   (망가져도 좋아요.   그냥 이대로가 좋아요)   황혼녘 종소리에 놀라 깨어나는   빼마른 풀잎들의 귀를 밟으며   우리는 돌아왔었지.   그때 엄지손가락만한 굴뚝새 처마 끝에 숨고   순박한 호롱불 방문마다 켜지면   그윽하게 번져가는 겨울밤의 정수.   그 밤의 풍요를.   입가에 가느런 웃음 머금고   참귀목 통나무 귀 만큼   감미한 향기 스스로의 안에 가득 채웠지.   곰곰히 생각했지 고개 나직이   가장 고운 꽃을 꺾는 일이란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란는 것을.   아직은 갈구해야지   나의 이 집중이 뿌리를 내릴 때까지 견디어야지.   그러나 제신이여.   천부의 재능을 가슴 깊숙히 싹트게 하시고   묵중한 목소리로 다스리소서.   그해에도 가장 고운 눈이 오는 저녁에   우리는 얼마나 핳일이 많았는가.   할일이 많았는가.   겨울 나무들은 기다리고 있었지.   프로스트 마을처럼   남은 과일 한 알마저 팥빛 반점 또렷이 보이면서.     유경환.1936년 황해도 장연 출생.연세대 정외과와 믹국 하와이 대학을 연수. "현대문학"과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데뷔한 그는 반주지주의를 표방하는 시인으로 "생명의 장" "산노을" "새가 그리는 세월" "누군가 가는 땅을 일구고" 등의 시집을 갖고 있다. 현재 '에세이 80년대' 동인.      나비   나래를 쳐라 나래를 쳐, 청산가는 나비 훨훨훨 벌 지나 남빛 강 건너 또 계곡을 날고.   나래 아프면 청무우밭 쉬고 나래 지치면 절벽을 찾고 나래 부러지면 남빛 강에 떨어져  죽고...   나래... 그 부드러운 나래 한 쌍으로 하늘치며, 하늘로 거슬러 오르는 나비의 꿈, 눈부신 햇덩이 훈장으로 붙이고 하늘로 녹아 버릴 나비의 가슴.   비바람 가려서 달밤을 날고 달밤을 나를 땐 전설 꽃무늬, 노을 속 지날 땐 불꽃무늬, 남빛 강 건널 땐 청동무늬, 모래처럼 쏟아진 별무리 밤하늘이 흘리고 간 나비의 유언.   끝없는 잠, 숨 죽은 밤 하늘 어디서든지, 반드시 고운 여인 하나 죽어가리라는  어지러운 춤, 하늘에서 흩뿌리는 눈물 하늘에 흐느끼는 나비의 시.   뉘 시켜서 아니라 스스로 그 작은 목숨 걸고 나래치는 아름다운 넋 풀잎에 이슬지듯 소리도 없이 남 몰래 나래치며 사라질 너, 너에게 끝 있음을 노래 부르고 나에게도 끝 있음을 노래 불러라.   나래를 쳐라 나래를 쳐, 청산가는 나비 훨훨훨 벌 지나 남빛 강 건너 또 계곡을 날고 청산에 불 붙으면 나래에 불 당기고 불보래 속에서 나래를 쳐라.      초설   겨우 발자국 묻을 만큼   가는 초설 나부끼는 골목에   아들아이 신자국 칫수가   얼마나 자랐는지   한 뼘에 한 치나 모자라던 기억에서   옆으로 웃는 송곳니 귀엽던   고무신 한 켤레 사들고 온 적 없는   이 아버지의 허실이   초설의 골목길 들어설 때   아버지의 사계를 돌아본다.     유안진.1941년 경북 안동 출생. 미국 풀로리다 대학에서 박사학위 취득.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한 그는 '문채' 동인으로 활동중. 시집으로 "달하" "절망시" "물로 바람으로" "그리스도 옛 애인" "날개옷"과 수필집 "그대 빈 손에 이 작은 풀꽃을" 등이 있다.      청년 그리스도께   숱한 남성을 짝사랑한 후에   가을숲이 되어버린 내 머리터럭   흙먼지만 날리는 사막같은 가슴   그 어디쯤서   그대는 발견되었는가   내 미처   보아도 보지 못하던 눈   들어도 깨우치지 못하던 귀   그 누가 열어주어   아아 한스러운   이 몰골   이 형색   그대 어찌   이제사   내 앞에 뵈었는가   청년 그리스도   나의 사랑아.     유영.경기도 용인 출생. 서울대학교 문리대를 졸업했고 현재 연세대 명예교수로 재직중인 그는 사물의 본질을 역사의식으로 파악하여 시로 승화시키는 작품세계를 갖고 있다. 시집으로 "일월" "천지 서"와 논술저서 "밀톤의 서사시 연구" "타골의 문학", 산문집 "나의 대학의 오솔길" 등 많은 저서를 갖고 있다.      수박을 먹으며   이 물신한 수박의 살은 안토니오에게 손을 잡히고 홍조를 띠던 그 옛날 크레오파트라의 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야무진 씨앗은 내 하라버지이 하라버지 또 그 하라버지의 사복에 시달리던 머리털이었을지도 모른다.   고려청자 같은 이 껍질은 중국 땅에 웅비하던 저 고구려 무사의 근육이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물신한 단맛에서 봄 여름 내내 손길이 끊일 길 없던 어느 산골 아낙네의 따스한 입김이 서린다.   아낙네 옆에서 풀을 뜯던 갓난아이의 웃음이 피어오른다.   그리고 빛을 더하고 맛을 돋구고 부피를 가늠하던 조화의 안간힘이 땀이 혓가에 서린다.   그리고 흘러내리는 단물에서 신의 피가 번진다.   그리고 해와 달과 하늘과 땅이 각기 선물을 들고 수박으로 뛰어들던 고함소리가 들린다.     유자효.1947년 부산 출생. 서울대 사대 불어과 졸업. 그의 시는 감성을 적절히 객관화하고 지적으로 절제된 작품 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현재 KBS 뉴스센터 기자로 재직중이며 시집으로 "성 수요일의 저녁"이 있다.      가을의 노래   잃을 줄 알게 하소서.   가짐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잃음인 것을,   이 가을   뚝뚝 지는   낙과의 지혜로   은혜로이   베푸소서.   떠날 줄 알게 하소서.   머무름보다   더 빛나는 것이   떠남인 것을,   이 저문 들녁   철새들이 남겨둔   보금자리가   약속의   훈장이 되게 하소서.     유재영.1948년 충남 천원 출생. 1973년 "시조문학"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한 그는 서정적인 시보다는 역사의식에 기초한 현실인식을 단아한 시적 구조로 형상화하는 시를 쓰고 있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집으로 "한 방울의 피"와 4인 시조집 "네 사람의 얼굴"이 있다.      유랑의 섬   언제부터인지 내 몸 한구석   이름 없이 떠도는 유랑의 섬 하나   때때로 온 몸을 한 자루 피리로 울리다가   시름시름 은유로 돌아눕는 꽃!   어느 봄날 무슨 까닭인지   내 몸의 은유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고   그 죽임마저 가루가 되어   저문 강물로 돌아올 때   누군가 내 가슴 변방에 불을 놓고 있었다.     유정.1922년 함북 경성 출생이며 일본 죠오지 대학을 중퇴했다. 1941년에 일어로 쓴 시집 "춘신"을 간행한 그는 평이한 언어와 일상적인 소재를 통하여 생활적인 감정을 시화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시집으로 "사랑과 미움의 시" 외에 작품 다수를 발표.      램프의 시.1   날마다 켜지던 창에   오늘도 램프와 네 얼굴은 켜지지 않고   어둑한 황혼이 제 집인 양 들어와 앉았다   피라도 보고 온 듯 선듯 선듯한 느낌   램프를, 그 따뜻한 것을 켜자   얼어서 찬 등피여 호오 입김이 수심되어 갈앉으면   석윳내 서린 골짜구니 뽀얀 안개 속   홀로 울고 가는   갸날픈 네 뒷 모습이 아른거린다   전쟁이 너를 데리고 갔다 한다   내가 갈 수 없는 그 가물 가물한 길은 어디냐   안개와 같이   끝내 뒷모습인 채 사라지는 내 그리운 것아   싸늘하게 타는 램프   싸늘하게 흔들리는 내 그림자만 또 남는다   어느 새 다시 오는 밤 검은 창 안에--      램프의 시.5   --내 갱생의 등불인 아내 추임에게   하루해가 끝나면   다시 돌아드는 남루한 마음 앞에   조심된 손길이   지켜서 밝혀놓은 램프   유리는 매끈하여 아랫배 불룩한 볼류움   시원한 석유에 심지를 담그고   기쁜 듯 타오르는 하얀 불빛!   --쪼이고 있노라면   서렸던 어둠이   한 켜 한 켜 시름없는 듯 걷히어간다   아내여 바지런히 밥그릇을 섬기는   그대 눈동자 속에도 등불이 영롱하거니   키 작은 그대는 오늘도   생활의 어려움을 말하지 않았다   얼빠진 내가   길 잃고 먼 거리에 서서 저물 때   저무는 그 하늘에   호호 그대는 입김을 모았는가   입김은 얼어서 뽀얗게 엉기던가   닦고 또 닦아서 티없는 등피!   세월은 덧없이 간다 하지만   우리들의 보람은 덧없다 말라   굶주려 그대는 구걸하지 않았고   배불러 나는   지나가는 동포를 넘보지 않았다   램프의 마음은 맑아서 스스롭다   거리에   동짓달 바람은 바늘같이 쌀쌀하나   우리들의 밤은   조용히 호동그라니 타는 램프!      조그만한 무덤 앞에   흰 나무패 눈에 아픈   임자 무덤 앞에 손을 짚으면   잊은 줄만 믿었던   슬픔이 파도처럼 밀리어 오오   임자 하얀 손이 여기에 있소   임자 푸른 눈동자가 여기에 있소   되살아 오는 가지가지 말씀   몰래 홀로 앓다가   몰래 홀로 눈 감은   임자는 지금도   먼 파도 소리에 홀로 귀 기울이고 있소이까   수풀 속에 소소로이 흔들리는 들국화   들국화 들국화   시월달 산바람에 마구 휘불리우는   연보라빛 가녈픈 네 모습을   오오 누구라 마음하여 나는 불러 볼 건가   임자 앞에 꺾고저   이 산허리 어느 비탈 어느 그늘에나   구름처럼 들국화만 피어 있음에   난 다시금 눈물이 솟아... 뜨거운 눈물이 솟아...   흙내음새도 새로와 가슴 막히는   임자 조그마한 무덤 앞에 얼굴을 묻고   언제나   언제까지나 순결하리라 맹세하는   나요   유정이요      진눈깨비   가는 곳곳이 길은 막다르고   가슴 속은 하늘처럼 어둡다   미친개같이 다랍게 고픈 배   배꼽까지 젖는 대로 어는데   염치 없이 양뺨을 흘러내리는   차고 짠 이것은 무슨 진눈깨비냐   그날 내 멱살을 잡고 쪼주하시던   아버지 당신의 불덩이 같은 눈초리   되살아오는 그런 이픔을 안고   오늘 또 바람 쌀쌀한 경상도 거리   흙탕길을 자꾸만 미끄러지며   아아 내 나이 서른 하나   이렇게 얼굴과 손이 추해졌으니---     윤삼하.1935년 전남 광주 출생. 서울대 사범대 및 동대학원 영문꽈 졸업. '조선일보' 및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1957). 시집으로는 "소리의 숲" 등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으며 '전남도 문화상'을 수상했다. 현재 홍익대 영문꽈 교수로 재직중이다.      겨울의 첨단   한겨울 얼어붙는 가슴   갈라놓는 날선 바람   잔가지 잔뿌리들을   더욱 움츠리게 하는 강바람이여   빙판 위를 굴르던지   거친 들판 질러서 가다오.   잿빛 하늘도 쏟아지게   흰 눈이나 펑펑 내려다오.   처마밑에 쌓이는   눈의 나랫소리   새벽이 와도   정갈한 눈의 마음.   이 겨울의 첨단에서   아둥그러진 노래들은 거두어다오.   아직 얼음에 덮힌 개울가   가시나무에 물이 오르는   봄은 까마득 보이지 않고   저만치 앞서가는   외로운 절기여     이가림.1943년 만주 출생. 성균관대 문과대 불문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프랑스 파리 제3대학에서 수학.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1966) 되어 문단에  데뷔한 그는 강렬한 현실의식으로 시의 특성을 살리고 있다. 시집으로 "빙하기"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가 있다. 현재 인하대학교 불문학과 부교수.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모래알 같은 이름 하나 불러 본다   기어이 끊어낼 수 없는 죄의 탯줄을   깊은 땅에 묻고 돌아선 날의   막막한 벌판 끝에 열리는 밤   내가 일천번도 더 입맞춘 별이 있음을   이 지상의 사람들은 모르리라   날마다 잃었다가 되찾는 눈동자   먼 부재의 저편에서 오는 빛이기에   끝내 아무도 볼 수 없으리라   어디서 이 투명한 이슬은 어는가   얼굴을 가리우는 차가운 입김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물방울 같은 이름 하나 불러본다      반도의 눈물   기러기여,눈물나게 아름다운 우리나라의   푸른 하늘에서 소총에 맞은 기러기여   울어다오 자유의 이마가 깨어져   반절의 지도보다 커다랗게 피가 얼룩지는 것을.   보이지 않는 저정의 뒤뜰에서는 날마다   더러운 무소들의 싸움이 들려오고   딴 아픔 딴 목소리의 털보들에게 밟혀   젊은 보리들의 배에 실려 팔려 간다 모르는 곳   캄캄한 자본의 구렁으로 죄수들처럼   아아 모가지여, 저당 잡힌 모가지여     이건청.1942년 경기 이천 출생. 한양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한국일보' 신춘문예와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이건청 시집" "목마른 자는 잠들고" "망초꽃 하나" 등이 있다. 현재 한양대 국문과 조교수로 있다.      망초꽃 하나   정신병원 담장 안의 망초들이   마른 꽃을 달고   어둠에 잠긴다.   선 채로 죽어버린 일년생 초목   망초잎에 붙은 곤충의 알들이   어둠에 덮여 있다.   발을 묶인 사람들이 잠든   정신병원 뒷뜰엔   깃을 웅크린 새들이 깨어   소리없이 자리를 옮겨 앉는다.   윗가지로 윗가지로 옮겨가면서   날이 밝길 기다린다.   망초가 망초끼리   숲을 이룬 담장 안에 와서 울던   풀무치들이 해체된   작은 흔적이 어둠에 섞인다.   모든 문들이 밖으로 잠긴   정신병원에   아름답게 잠든 사람들   아, 풀무치 한 마리 죽이지 않은   그들이 누워 어둠에 잠긴   겨울, 영하의 뜨락   마른 꽃을 단 망초.      추운 벌레   마른 풀섶에서 울고 있는   푸른 벌에의 다듬이는 밤새도록   허공을 향해 흔들린다.   저들에게 지상의 추위는 너무 가깝다.   저들의 노래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   수목들은 몇 개의 잎을 남기고   들판의 잡초들도 풀씨를 놓치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서 있다.   살아 있는 저들을 위해서 나는   귀를 열고 다가선다.   저들의 작은 알들이 겨울을 지날 때까지,   저들의 슬픔이 별빛에 닿을 때까지.     이경남.1929년 황해도 안익 출생. 평남사범대학 재학중 6.25를 만나 인민군에 응소, 군관으로 출동했다가 귀순했다. "현대문학"을 통해 데뷔한 그는 서정적인 정념에서 출범한 사회참여적인 상황시를 써왔다.      강 건너 얼굴   나의 시야를 가득히 채워 오는   너에 대해서 나는 안다는 것은   꽃의 의미를 모르는 거와 같다.   --사금파리에 맺히는 이슬 방울   --새벽창에 어리는 별의 속삭임.   그리고, 강 건너 살을 꽂은 무지개의 호선   내가 너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너의 동자와 너의 움성과 너의 미소가   우물 가득히 찰찰 넘치는 하늘이 되어   나의 시야를 덮쳐 오고 있다는   이 어쩔 수 없는 하나의 실재뿐.   아아 내가 너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저 꽃들이, 저마다 피고 지는 의미를 모르듯이   내가 나를 도무지 모르는 거와 같다.     이경순.1905년 경남 진주 출생. 호는 동기. 우라와시 코오호쿠치과의전 졸업. 유학시절부터 해방전까지 '혹우회'에 가담, 사상운동지 "니힐"에  관여하다가 '조선일보'에 시를 발표. 동인지 "등불"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한 그는 특유의 개성을 살려 시의 발상과 표현에 모던한 감각을 살리려고 노력하는 시 세계를 갖고 있다. 시집으로 "생명부" "태양이 미끄러진 빙판" "기중기" "낙엽송" 등이 있다.      구름은 흐르고 뻐꾸기는 우는데   우울한 날에   내 홀로   뒷산마루에 앉았노라면   뻐꾸기는 산에서 살자고   울음을 우는데   구름은 하이얀 테이프를 던져 주고   바다로 흘러간다.   산에서 살자니   구름의 손짓이요   바다로 가지니   뻐꾸기 울음을 어이하리?   눈물로 기름진 밭이랑에다   청춘의 씨앗을 묻어 놓고   권태의 맨트가 휘날리는 거리에서   우울한 츄잉검처럼 씹어 본다.     이광웅.1940년 전북 이리 출생. 원광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현대문학"을 통해 데뷔하여, 참뙨 지식인으로서 살며 시를 써온 그는 이른바 '오송회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시집으로 "대밭"이 있다.      달   네 눈꺼풀 안쪽에 고인 달빛   네 눈꺼풀 안쪽에 고인 달빛   약질의 내 체구에 떨어져 부서질 때,   이빨이 시리고   피가 얼고 그리던 달빛   손 안에 받아 보려 한들 이 무슨 헛짓거리랴.   눈사태같이 부서져 내려 앞 길을 차단하는   눈사태같이   차디찬 달빛   네 눈꺼풀 저쪽에 고인 달빛     이근배.1940년 충남 당진 출생. 호는 사천.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서울신문' '경향신문'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뜽단했으며 '신춘시' 동인으로 활동했었다. 그의 작품은 언어의 감각이 선명하고, 현실의식이 내면에 흐르고 있어 이미지의 승화를 보이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시집으로 "사랑을 연주하는 꽃나무" "노래여 노래여" 등이 있다.      냉이꽃   어머니가 매던 김밭의   어머니가 흘린 땀이 자라서   꽃이 된 것아   너는 사상을 모른다   어머니가 사상가의 아내가 되어서   잠 못 드는 평생인 것을 모른다   초가집이 섰던 자리에는   내 유년에 날아오던   돌멩이만 남고   황막하구나   울음으로도 다 채우지 못하는   내가 자란 마을에 피어난   너 여리운 풀은.      부침   잠들면 머리맡은 늘 소리 높은 바다   내 꿈은 그 물굽이에 잠겨들고 떠오르고   날 새면 뭍에서 멀리 떨어진 아아 나는 외로운 섬   철썩거리는 이 슬픈 시간의 난파   내 영혼은 먼 데 바람으로 밤새워 울고   눈 뜨면 모두 비워 있는 홀로 뿐인 부침의 날.     이기반.1937년 전북 전주 출생. 아호 월촌. 전북대학교 국문과 졸업. "자유문학"지의 추천을 받아 등단. '전북문학상', '한국예술총회장상' 등을 수상. 시집으로 "고향에의 기도"외 다수가 있으며 산문집 "은하의 모래알들", 논저로 "한국현대시연구" "문예창작론" 등 다수가 있고 현재 국제 펜클럽, 한국현대시협, 한국문협 회원이다. 그의 시세계는 뜨거운 인간애와 넘치는 향토애에서 우러난 서정을 기독교적 신앙의 조화로 생동감 있게 형상화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산 넘어 저 노을이   하늘에 뜬 바다   빠알갛게 속 태우다   살갗도 노오랗께 에이다가   하이얗게 아픔을 쓸어낸 그 자리   누구도 열지 못한 시원의 우주인가.   머나먼 수평에 뜬   씨줄 날줄을 청실 홍실로 엮는   뜨거운 시의 가슴이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순정을 앓다가   끝내는 벗어 보인 알몸같은 것.   무변의 공간   그득히 출렁이는   베토벤의 음정마저   신비의 층계를 오르내릴 때   산산이 부서지는 심장의 파편들이   저승으로 침몰하는가   이승으로 부상하는가   하늘에 뜬 바다   산 넘어 저 노을이   오늘을 살라 먹고 내일을 잉태하는   그 머나먼 나라   하이얗게 개벽하는 꿈밭에   꼬옥 둘이서만 태어나고 싶다.     이기철.경남 거창 출생. 영남대 문리대와 동대학원을 졸업.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 시집으로는 "낱말추적"(1974) "청산행" (1982)이 있으며 '자유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시경향은 차면서도 거칠고 투박한 현실을 온유의 정신으로 길들이고자 하는 감응력이 주축이 되고 있다. 현재 영남대학 교수로 재직중.      이향   제대를 하고 대학을 졸업하면   나는 개나리꽃이 한닷새 마을의 봄을 앞당기는   산란초 뿌리 풀리는 조그만 시골에서   시나 쓰는 가난한 서생이 되어 살려고 생각했다.   고급 장교가 되어 있는 국민학교 동창과   개인회사 중역이 되어 있는 어릴 적 친구들이 모두 마을을 떠날 때   나는 혼자 다시 이 마을로 돌아와 탱자나무 울타리를 손질하는   초부가 되어 살려고 생각했다.   눈 속에서 지난 해 지워진 쓴냉이 잎새가 새로 돋고   물레방앗간 뒷쪽에 비비새가 와서 울면   간호원을 하러 독일로 떠난 여자 친구의 항공엽서나 기다리며   느린 하학종을 울리는 낙엽송 교정에서   잠처럼 조용한 풍금소리를 듣는 2급정교사가 되어 살려고 생각했다.   용서할 줄 모르는 시간은 물처럼 흘러갔고   눈 속에 묻히는 봄보리들의 침묵이 나를 무섭게 위협했을 때   관습의 신발 속에 맨발을 꽂으며 나는   눈에 익은 수많은 돌멩이들의 정분을 거역하기 시작했다.   염소를 불러모우는 비음의 말들과   부피가 작은 몇 권의 국정교과서를 거역했다.   뒷산에 홀로 누운 조부의 산소를 한번만 바라보았고   그리고는 뛰는 버스에 올라 도시속의 먼지가 되었다.   봄이 오면 아직도 그 골의 물소리와 아이들의 자치기 소리가   도시의 옆구리에 잠든 나의 꿈 속에   배달되지 않는 엽신으로 녹아 문지방을 울리며 흐르고 있다.      너의 시를 읽는 밤엔   너의 시를 읽는 밤엔 마을의 불빛 꺼지고   동촌을 지나는 바람이 들깨꽃 잎새들을 땅으로 지게 했다.   세상은 고요하고 자성은 더디게 찾아와서   잠들어야 할 밤에 잠들지 못하는   나의 마음 속을 찢어 놓았다.   질경이 잎새가 뼈만 남기고 하얗게 선화지처럼 바래지는 날   나는 와이셔츠를 갈아입고 개념만 무성한 대학 노-트를 가방에 넣고   또 하나의 패배를 가꾸기 위하여   대동과 만촌동을 기계처럼 오고갔다.   작년의 겨울땅을 얼리고 녹인 이 바람도   물여뀌 잎새는 피었다 지고   떨어질 것 다 떨어져 흙이 되는 가을에도   은화와 지폐는 나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나의 관습은 허위와 껍질로 튼튼하게 잠겨 있어   질타의 물을 끓이며 풀리는 고뇌의 가마솥에 앉으면   참으로 헛된 일에 몸 바친 부질없는 시간들이   후회와 자책으로 밀려오지만   자책은 또 다른 새벽을 오게 하고   그러나 모든 사람 다 잠들고 나면   누가 이 가을 빈 들에 남아   쥐똥열매라고 불러 줄 수 있을까   너의 시를 읽는 밤엔   들판 가운데 초가 한 채가 무너지고   미처 귀소하지 못한 저녁새 한 마리   참담한 별빛 하날 하늘에서 따 내렸다.     이봉래.1926년 함북 청진 출생. 일본 닛꼬오 대학 문학 수학. 해방 이후 "신세대" "예술신보"에 시를 발표. '후반기' 동인에 참가하여 모더니즘 운동을 전개한 그는 40여편의 영화제작도 했고 시집으로 "이봉래시선" "영광의 신"과 평론집 "수직의 사상"이 있다.      단애   밤이면 갈증처럼   기억의 피부 속에   매몰되어 가는   바다   어느날 바다는   으스러진 기억을 적시며   남아 있는 땅 속으로   돌아갈 때   그것은   치욕의 화석으로   굳어 간다.   무너져 내리는   밤의 밑바닥에   깔리고 쌓인   모래알보다 작은   인내의 거품   억만 낱알의 거품을 물고   이쪽과 저쪽에서   밀려오는   피 묻은 바람   그날밤   바다는 피로 얼룩진   거울 속의   자화상이었다.   나는 서반아의 투우처럼   거울 속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거울은 닫혀진 문이었다.   나는   바다를 찾아   문의 둘레를 달렸다   번득이는 칼보다   더 광채나는 거품을   입에 물고   다음날 나는   피묻은 바람 속에서   허물 벗는 배암처럼   남루한 피부를   비수로 도려 낸다   아   풍선처럼   날아가는 화석의 바다   기억의 활 시위를   하늘에 겨냥하면   문에 반사되는   금빛 태양   나는 달리고 있다   단애와 같은   거울 속을 달리고 있다   무량의 거품 속을   피붙은 바람처럼   넘어지며 일어서며   마냥   달리고 있다.     이생진.1929년 충남 서생 출생. 국제대학 영문꽈 졸업.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등단한 그는 시집 "나의 부재" "바다에 오는 이유" "한국현대 시선"과 자살한 예술가의 생애를 분석한 "나의 길을 가련다"가 있다. 현재 보성고교에 재직.      그리운 성산포   2.설교하는 바다   성산포에서는   설교를 바다가 하고   목사는 바다를 듣는다   기도보다 더 잔잔한 바다   꽃보다 더 섬세한 바다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바다가 더   잘 산다.     이성교.1932년 강원 삼척 출생.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 '60년대 사화집' 동인인 그의 시경향은 소박한 서정으로 전통성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다. '현대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시집으로 "산음가" "겨울바다" "보리 필 무렵" "눈온날 저녁" 등이 있다.      해바라기 피는 마을   아무도 오지 않는 마을에   해바라기 핀다.   갇혀 있는 사람의 마음에도   노오란 햇살이 퍼져   온 천지가 눈부시다.   지난 여름   그 어둠 속에서   열리던 빛   눈물이 비친다.   이제 아무 푯대없이   휘청휘청해서는 안된다.   바울처럼 긴 날을 걸어서   까만 씨를 심어야 한다.   해바라기 피는 마을에.     이성부.1942년 전남 광주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전남일보' '동아일보' 신춘문예와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아 등단했으며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을 수상했다. 강인한 생명력의 시인인 그는, 황토색 짙은 육성으로 절망 속에서도 사랑을 줄기차게 노래하는 원숙한 시세계를 구축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집으로 "이성부시집" "우리들의 양식" "백제행" 외에도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벼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이 따가와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울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 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전라도.2   아침 노을의 아들이여 전라도여   그대 이마 위에 패인 흉터, 파묻힌 어둠   커다란 잠의, 끝남이 나를 부르고   죽이고, 다시 태어나게 한다.   짐승도 예술도   아직은 만나지 않은 아침이여 전라도여   그대 심장의 더운 불, 손에 든 도끼의 고요   하늘 보면 어지러워라 어지러워라   꿈속에서만 몇 번이고 시작하던   내 어린 날, 죽고 또 태어남이   그런데 지금은 꿈이 아니어라.   사랑이어라.   광주 가까운 데서는   푸른 삽으로 저녁 안개와 그림자를 퍼내고   시간마저 무더기로 퍼내 버리면   거기 남는 끓는 피, 한 줌의 가난   아아 사생아여 아침이여   창검이 보이지 않는 날은   도무지 나는 마음이 안놓인다.   드러누운 산하에는   마음이 안놓인다.      누룩   누룩 한 덩어리가   뜨는 까닭을 알겠느냐.   지 혼자 무력함에 부대끼고 부대끼다가   어디 한군데로 나자빠져 있다가   알맞은 바람 만나   살며시 더운 가슴,   그 사랑을 알겠느냐.   오가는 발길들 여기 멈추어   밤새도록 우는 울음을 들었느냐.   지 혼자서 찾는 길이   여럿이서도 찾는 길임을   엄동설한 칼별은 알고 있나니.   무르팍 으깨져도 꽃피는 가슴.   그 가슴 울림 들었느냐.   속 깊이 쌓이는 기다림   삭고 삭아 부서지는 일 보았느냐.   지가 죽어 썩어 문드러져   우리 고향 좋은 물 만나면   덩달아서 함께 끓는 마음을 알겠느냐.   춤도 되고 기쁨도 되고   해솟는 얼굴도 되는 죽음을 알겠느냐.   아 지금 감춰둔 누룩 뜨나니.   냄새 퍼지나니.      어머니   1   오랜만에 하나뿐인 이 아들 만나도   말씀 못하시네, 도무지 말씀을 못하시네.   모진 하늘이 또 어머니의 가슴에   들어와 박힌 것일까?   허물어진 흙담 너머로   주먹밥을 건네 주시는   손길은 뜨겁지만,   그 손길은 걱정스레 말을 품었지만,   어머니의 입 어둠처럼 닫혀져서   말씀을 못하시네.   이 집도 마을도 남은 가슴도   이제는 모두 내 것이 아니구나.   무슨 큰 무서움 하나를    저마다 저마다 지니고 선 이웃 사람들,   나를 보아도 큰 눈을 뜬 채   손 붙잡지 못하는 사람들,   겁에 질린 얼굴들.   2   밤이   그 큰 아가리 벌려   마을 삼키기 기다려서   나는 다시 정거장 가는 길을 벼와 함께 걸었다.   대낮에만 불타던,   나를 키운 그 넉넉하던 논길이   한밤에도 불타는 것을 나는 보았다.   벼 모가지를 뽑아   낟알을 맛보아도   내 어깨에는 가만히 가만히 힘이 솟았다.   어머니, 전 잘못을 범한 게 아니예요.   땅과 하늘에 한번도 부끄러워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지요, 어머니.   오늘 새벽 왼종일 느린 기차에 시달리고   고향에 내렸을 때,   고향은 그 첫마디를 돌아가 돌아가라고   내게 소리쳤었다.   다급한 목소리 떨리면서   한 손으로 나를 숨기고   다른 한 손으로 나를 떠다미는,   고향은 이미 제 몸을 잃고 있었다.   우리집 흙담에 다다를 수 있었음은   내 발걸음을   그래도 남도의 발이   숨 죽이며 대신 걸어 주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그러나 다시 돌아갑니다.   서울행 표를 사되, 서울로도 갈 수는 없읍니다.   결코 저는 죄지은 게 아닌데...   3   아직도 따스한 이 주먹밥엔   반쯤 목맺힘이 섞여 있다.   이십년 전에도 삼십년 전에도   눈물로 밥을 뭉쳐,   급할 때마다 만드시던 어머니를 나는 기억한다.   왜놈 순사를 때려 죽였다는 삼촌과   징용에 나가시던 아버지에게   만들어 주시던 주먹밥을 나는 기억한다.   어머니는 하나 뿐인 아들에게마저   또 이것을 만들어 주시었다.   거리에서 피투성이로 끌려갔다는 삼촌과   흰 상자로 돌아온 아버지를   나는 끝내 다시 뵈일 수가 없었다.   느린 기차는 이 밤에   나를 붙잡아 데려가는 것일까?   우리들은 모두 이대로   하나씩 하나씩 소문없이 사라지는 것일까?   기차는 밤을 찢어 밤의 고요를 찢어   나아가라고 소리치고 또 재촉하지만,   나는 어떻게   나를 더 감출 수가 없구나.   더 어떻게 누구를 찾을 수가 없구나.   혼자로도 혼자를 거느릴 수 없구나.   4   나주 배를 씹어도 나주 배 이미 슬픔 되어   내 목마름 참으라 한다.   물이 없고 다디단 시원함도 없고   그냥 굶주림을 먹으라 한다.   내가 비로소   어머니의 주먹밥 꺼내어   그 아픔 입맞추었을 때,   내 창자 속 깊이 어머니가 가꾸던   세월 스며들었을 때,   젖과 꿀이 나를 채웠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다른 힘으로 태어났을 때,   나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어둠 속에 마음을 열어 빌고 또 비는   어머니의 저 굳센 모습을.   기차는 달리고, 가야할 길은 잃었으나   나타날 길은 결코 멀지 않음을.   밝아오는 새벽의 흙투성이 얼굴을,   힘모아 싸우다가 싸우다가   죽어서도 이겨 나오는 사람들을.   5   어머니의 마음은 저렇게 참 많이 있구나.   남모르게 마을 떠나가는 사람들의   울먹이는 발길에도   숨고싶은 몸에도   그리하여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는 안간힘에도   어머니의 마음은 참 많이 있구나.   두려움 무릅쓰고 내 어찌 돌아가지 않으랴.   어둠을 뚫어 사슬을 끊어   나아가는 젊음 곁으로   피끓는 사람들의 곁으로   내 어찌 돌아가지 않으랴.     이성선.1941년 강원도 고성 출생. 고려대 농과대학 졸업. 그의 시세계는 자연과의 합일된 세계를 꿈꾸며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곳에 이르고자 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시집으로 "몸은 지상에 묶여도" "하늘문을 두드리며" 등이 있으며 현재 양양 깡현중학에 재직하고 있다.      나무 안의 절   나무야   너는 하나의 절이다.   네 안에서 목탁소리가 난다.   비 갠 후   물 속 네 그림자를 바라보면   거꾸로 서서 또 한 세계를 열어 놓고   가고 있는 너에게서   꽃 피는 소리가 들린다.   나비 날아가는 소리 들린다.   새 알 낳는 고통이 비친다.   네 가지에 피어난 꽃구름   별꽃 뜯어먹으며 노니는   물고기들   떨리는 우주의 속삭임   네 안에서 나는 듣는다.   산이 걸어가는 소리   너를 보며 나는 또 본다.   물 속을 거꾸로   염불 외고 가는 한 스님 모습.     이성환.1930년 경기도 시흥 출생. 동국대학을 거쳐 경희대학 대학원 졸업. 1956년 "현대문학"을 통하여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구름은 울지도 못한다"가 있다.      그믐달   그믐달은   마을에 상여 떠나기를 기다려서   저 혼자 어둠을 기대고 드러누웠다   몸은 비록 머얼리 떨어져 있으나   나 어린 상주의 울음 대신   그믐달은 조용히 머리를 풀어 띄웠다.   산설고 낯설고 바람 잔 뜰안   허전한 어느 비인 항아리 안에   남 몰래 소나기로 내려왔다가   이윽고 다다른 목숨   재 너머로 조용히 일러 보내고   그믐달은   상주가 잠이 들기를 기다려서   부엉이를 여지없이 성 밖에 두고 싶었다.     이수복.1924년 전남 함평 출생.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했다. 그의 서정시는 전통시의 한 전형으로 평가되며, 최근에는 언어의 절제와 생략을 통해 건전한 미를 창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시집으로 "봄비"가 있다.      봄비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그러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랭이 타오르것다.   이수익.1942년 경남 함안 출생. 서울대 사범대학 영어과 졸업.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떼뷔한 그는 '현대시' 동인으로 활동하며 이미지와 관념, 정감이 교묘하게 조직된 시를 써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시집으로 "우울한 샹송" "야간열차" "슬픔의 핵"이 있다. 현재 KBS 라디오국에 재직하고 있다.      우울한 샹송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풀잎되어 젖어있는   비애를   지금은 혼미하여 내가 찾는다면   사랑은 또 처음의 의상으로   돌아올까   우체국에 오는 사람들은   가슴에 꽃을 달고 오는데   그 꽃들은 바람에   얼굴이 터져 웃고 있는데   어쩌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얼굴을 다치면서라도 소리내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사람들은   그리움을 가득 담은 편지 위에   애정의 핀을 꽂고 돌아들 간다   그때 그들 머리 위에서는   꽃불처럼 밝은 빛이 잠시   어리는데   그것은 저려오는 내 발등 위에   행복에 찬 글씨를 써서 보이는데   나는 자꾸만 어두워져서   읽질 못하고,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기진한 발걸음이 다시   도어를 노크   하면,   그때 나는 어떤 미소를 띠어   돌아온 사랑을 맞이할까      말   말이 죽었다. 간밤에   검고 슬픈 두 눈을 감아 버리고   노동의 뼈를 쓰러뜨리고   들리지 않는 엠마누엘의 성가 곁으로   조용히 그의 생애를   운반해 갔다.   오늘 아침에는 비가 내린다.   그를 덮는 아마포 위에   하늘에서 슬픈 전별이.      봄에 앓는 병   모진 마음으로 참고 너를 기다릴 때는   괜찮았느니라.   눈물이 뜨겁듯이 그렇게   내 마음도 뜨거워서,   엄동설한 찬 바람에도 나는   추위를 모르고 지냈느니라.   오로지   우리들의 해후만을 기다리면서...   늦게서야 병이 오는구나,   그토록 기다리던 너는 눈부신 꽃으로 현신하여   지금   나의 사방에 가득했는데   아아, 이 즐거운 시절   나는 누워서   지난 겨울의 아픔을 병으로 앓고 있노라.      가을 서시   맑은 피의 소모가 아름다운   이 가을에,   나는 물이 되고 싶었읍니다.   푸른 풀꽃 어지러워 쓰러졌던 봄과   사련으로 자욱했던 그 여름의 숲과 바다를   지나   지금은 살아 있는 목숨마다   제 하나의 신비로 가슴 두근거리는 때.   이 깨어나는 물상의 핏줄 속으로   나는 한없이 설레이며   스며들고 싶습니다.   회복기의 밝은 병상에 비쳐드는   한 자락 햇살처럼   아, 단모음의 갈증으로 흔들리는 영혼 위에   맺힌 이슬처럼.      안개꽃   불면 꺼질듯   꺼져서는 다시 피어날 듯   안개처럼 자욱히 서려 있는   꽃.   하나로는 제 모습을 떠올릴 수 없는   무엇이라 이름을 붙일 수도 없는   그런 막연한 안타까움으로 빛깔진   초변의   꽃.   무데기로   무데기로 어우러져야만 비로소 형상이 되어   설레는 느낌이 되어 다가오는 그것은   아,   우리 처음 만나던 날 가슴에 피어오르던   바로 그   꽃!      호롱   골동품 가게에서   옛날을 생각하며 호롱을 하나 샀다,   어느 초가의 안방이나 사랑채   한 모서리에   밤마다 소중히 모셔졌을 이 빛의 도구를   국수 한 그릇 값으로 나는 가져왔다.   지금은 쓸모없는 퇴기처럼 버려진   골동 중에서도   대접이 서자 같은   이 고전의 기물을 바라보면서   그래도 마음 한가운데 보드라운   희열의 물살이 이는 것은,   아, 누군가   가물대는 이 호롱의 불빛을 이마에 쓰고   터진 식구들의 옷가지를 땀땀이 기웠을   그런 아낙과   이 호롱 아래서 조용히 책장 넘기며   불빛 따라 희미한 새벽의 여명 속으로 건너갔을   한 꿈의 소년과   이 호롱의 불빛으로 잠 못 이루는 해수의 밤을   혼령처럼 앉아 지샜을 그런 노인과   이 호롱 아래서 잠든 아이들 얼굴을 지켜보며   나즉이 두런대던 근심어린 대화의   한 부부와   이 호롱의 불빛에 부끄럼과 갈증을 느끼며   칠흑 어둠 속으로 자지러들던 초야의   한 신혼과...   아, 어쩌면 그들은 내 부모였고   할머니 할아버지 또는 증조부모   아니면 내 이웃들의 선친이었을 그런 가까운 사람들의   그립고 눈물겹고 간절한 사연들을   호롱,   이 침묵의 유물은   가만히 뿜고 있기 때문이다.     이승훈.1942년 춘천 출생. 한양대 국문과 및 연세대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그는 주지적 경향, 특히 초현실주의적 경향의 시들을 쓰고 있다. 시집으로 "사물 A" "환상의 다리" "당신의 초상"과 시선집 "상처"가 있다. '제29회 현대문학상'을 수상. 현재 한양대 국문과 부교수로 재직중이다.      지난날   지난날을 어떻게 잊으랴   새벽닭 울 때마다   삶은 노엽고 원통했다   해질무렵 귀머거리로   바다에 귀 기울여도   바다는 언제나 말이 없던   지난날을 어떻게 잊으랴   한사코 불빛 식어가던 방에서   그대 고운 손   차마 잡을 수 없었던   지난날을 어떻게 잊으랴   그대 눈물 고인 눈을   어떻게 잊으랴 통곡 뒤의 산들을   산 아래 마을들을 밤마다   그대 손이 켜던 램프를   어떻게 잊으랴 이른 새벽   눈길 밟고 도망치던 삶   도망치던 맨발의 날들을   소리도 없는 날들을   이렇게 또 다가오는 날들을      당신   고양이처럼 삵고 싶어라   엎드려 있고만 싶어라   고운 피 흘리는 마음   복사꽃 복사꽃은 지는데   어디로 가고만 싶어라   이 어두운 마음   밝아오는 해이고 싶어라   아무리 채찍이 갈겨도   그리움은 끝나지 않어라   당신 얼굴에 입맞추고 싶어라   하아란 돌이고 싶어라   파아란 구름이고 싶어라   모조리 버리고 오늘   바쁘게 명동을 걸어가면   바람부는 왕십리를 걸어가면   고양이처럼 살고 싶어라   언제나 다른 나라에 계신   당신 고개 한번 끄덕이면   복사꽃 복사꽃은 지는데      암호   환상이란 이름의 역은 동해안에 있읍니다. 눈 내리는 겨울 바다-- 거기 하나의 암호처럼 서 있읍니다. 아무도 가본 사람은 없읍니다. 당신이 거기 닿을 때, 그 역은 총에 맞아 경련합니다. 경련 오오 존재. 커다란 하나의 돌이 파묻힐 때, 물들은 몸부림칩니다. 물들의 연소 속에서 당신도 당신의 몸부림을 봅니다. 존재는 끝끝내 몸부림 속에 있읍니다. 아무도 가본 사람은 없읍니다. 푸른 파편처럼, 바람부는 밤에 환상이란 이름의 역이 보입니다.     이영걸.1939년 만주 신경 출생. 한국 외국어대 영어과 및 고려대 대학원 영문과 수료. 미국 세인트 루이스 대학에서 영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4년 "시문학"으로 데뷔한 그는 한국의 역사와 자연을 노래하면서 전통적 회화성을 적절히 결합하여 시세계를 형성해 나가고 있는 시인이다. 시집으로 "귀향" "목단강" "이 드넓은 산야"가 있다.      한가위.1   우련한 능선들은   안개 속에 이어지고   길 옆 코스모스   바람에 나부낀다   언제부터 내려오는   한가위 명절인가   묵직한 호박 덩어리   저 아래에 누워 있다   고향 잃은 사람들의   그리움도 간절하리   버얼겋게 익은 벼는   가을비에 젖고 있다.      땅 속 깊이 노래를   귀뚜라미...   해마다 이맘때면   놓치지 않고   귀중한 한때를   노래하지만   그리운 옛 시인의   노래 속에 자리잡고   무수한 사람들의   가슴도 울렸으니   찬바람 대지를   휘몰아 칠 땐   땅 속 깊이 노래를   묻어 뒀다가 해바라기   환하게 머리 쳐들   무렵이면 이렇게   또 한 번 맑은 노래   뽑아내니 밤 하늘   흩뿌리는 무수한   별빛처럼   너희들의 노래는   이어지리     이영순.1921년 충북 영똥 출생. 호는 파륜. 동경 제국대 경제학부를 다니다가 학병으로 입대, 해방 후 귀국. 장시집 "연희교지"를 발간했다. 현재 국제 펜클럽 한국지부 중앙위원.      크리스마스 이브      --죽음이 없는 사랑의 밀어라기보다      부활이 없는 사랑의 믿음이랄까...   쌓이는 눈 위로 더러 울고 있는 자   눈 멎는 눈 위로 더러 웃고 있는 자   눈 녹는 눈 위로 더러 담담한 자   대체 이 밤의 깊은 뒤에 어떤 취미의 의상으로 외출을 서두는 밤의 방향일까   이 시간 가슴소리 나란히 당신은 팔목에 꽃과 과일을 담은 바구닐 끼고   이 시간 발소리 나란히 나는 옆구리에 눈들 뜬 채 죽어가는 칠면조 날개와 암탉이 목에서 피가 흐르는 중국상자를 들었지만   ... 말갛게 풀리는 이 눈물의 종은 어느 벌판의 휘인 가슴에서 쫓겨온 사랑의 못자국일까   비인 사랑의 자리일까     이우석. 1942년 경북 상주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자유문학" 신인상과 '서울신문' 신춘문예, "현대문학"을 통하여 문단에 데뷔. 현대적 감각과 한국적인 이미지 재현에 주력하고 있는 시인. '신년대'와 '목마시대' 동인이다.      휘파람   나는 늘 휘파람을 불면서   입을 오무리고 걷는다.   오무린 입속에 봄 바람이 일어   버들개지가 푸릇 푸릇 싹을 띄운다.   휘파람은 늘 입속에서   버들개지의 대롱을 타고 밖으로 나온다.   나와 흡사한 사람을 나는 가끔 본다.   파밭을 지나면서   그것은 오히려 더욱 싱싱히   파잎을 타고 나오는 닐리리 닐리리   소리.   검은 커튼을 드리우고   깊이 방에 묻혀 있는 날   봄 볕을 타고 흐트러지는   수많은 피리 소리를 들으면서   나의 휘파람은 입속에 있는   가장 가벼운 침방울을 흔들어   홀홀 날려 보내는   일상인 것이다.     이운용.1938년 전북 진안 출생. 전북대 한남대 대학원 조선대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학중. "현대문학"지에 시가 추천 완료, "월간문학"에 문학 평론 당선으로 등단(1969)했다. 객관적 현실의 병적 증상에 대한 비판과 시적밀도를 간직함으로써 체질이 강한 시를 창출하고 있는 그는 시집으로 "이 가슴 북이 되어" 외 4권의 시집이 있으며 저서로 "지상에서의 마지막 고독" "김현승 시연구" 등이 있다.      이 가슴 북이 되어   이 가슴 울리지 않는 북이 되어   한 천년쯤 두들기면 소리 날까요?   멍들어 시펄시펄한 세월   먹피를 사발로 퍼내면서   한 주일 내내 두들겨 맞고   미사에 나가면   우리 하느님도 날 미워하시는지   악기소리가 안 난다고 짜증이고   소리 나면 곱지 않다고 윽박지르니   북이여, 나의 가슴이여   둥둥둥 둥둥둥 울려만 다오.   곤장을 맞으면 몇 개가 더 부러져야   이 가슴 북이 되어 울릴 것인지   억울한 울음에도 소리 나지 않고   혼자 코먹은 눈물 훌쩍이는 나의 북이여.     이원섭.1924년 강원 철원 출생. 호는 파하. "예술조선"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한 그는, 동양적 자연미의 재발견, 참신한 본연의 경지 등을 보여 크게 주목을 받았으며 한시 번역에도 탁월하여 역시집 "당시" "시경"은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시집으로 "향미사"가 있다.      향미사   향미사야.   너는 방울을 흔들어라.   원을 그어 내 바퀴를 삥삥 돌면서   요령처럼 너는 방울을 흔들어라.   나는 추겠다. 나의 춤을!   사실 나는 화랑의 후예란다.   장미 가시 대신 넥타이라도 풀어서 손에 늘이고   내가 추는 나의 춤을 나는 보리라.   달밤이다.   끝없는 은모랫벌이다.   풀 한 포기 살지 않은 이 사하라에서   누구를 우리는 기다릴거냐.   향미사야.   너는 어서 방울을 흔들어라.   달밤이다.   끝없는 은모랫벌이다.      죽림도   세상과 멀어   세상과 멀어   봄이온들 제비조차   안 오는 곳이었다.   사철은 푸르른   죽림 가운데서   죽처럼 마음만을   지켜 사는 곳이었다.   어찌 슬픔인들   없을까마는   북두같이 드높이   위치한 곳이었다.   세월조차 여기에는   만만적하여   한 판의 바둑이   백 년인 곳이었다.      바다   나로 하여 너와 함께 있게 하라   끝없이 짙은 네 외로움 속에   지나가는 기러기가 흘리고 간   핏방울처럼 꺼지게 하라   임께서 나를 찾아 오시는 날은   네 치마자락 안에 얼굴을 묻고   슬픈 노래 부르듯 타신 뱃전에   고요히 고요히 바서지리라     이유경.1940년 경남 밀양 출생. 외국어 대학교 불어과 졸업. "사상계"를 통해 데뷔한 그는 버려진 것들에 대한 모든 것을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 가장 진실하게 받아들이며 인간의 고뇌를 즐겨 표현하고 있는 시인이다. 시집으로 "밀알들의 영가"(1969) 등 다수가 있다.      형제의 울음   싸움을 하고 울면서 돌아온 아우의   어깨를 싸안고 나는 속으로 운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을   매일처럼 싸우고 돌아오는 그의   소망과 꿈을 풀어내지 못하는   형인 나의 무력을 탄식하면서   나는 지금 울 수밖에 없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아... 아우의 어깨나 싸안고 상처에   약이나 바르는 일   아침이면 밥상이나 차리게 하는 것   (겨울 바람이 사납게 골목을 지나고 시팔 세상은 무지하게 춥다)   내 어린 날 싸움에서 나는 한 번도   지고 울면서 오진 않았는데   오늘 울면서 돌아온 아우를 보고   내가 왜 속으로 울기만 하는가   대신 싸우지도 못하고 아우의   어깨나 싸안고 약냄새 속에 내가   왜 자꾸 목이 메이는가      배반   내 이름 불러주는  아이 하나 없다   여자도 그 잡년의 사랑도 없다   하남 벌은 지옥에 처박혀   바람에 휩쓸리고 있다   논길들이 쫓겨 다니고   벌레껍질들이 부질없이 흩어지고   (대낮에도 오가는 사람 없길래 길에 뿌연 오줌 깔기고 코를 풀고 이까짓 언 땅)   내 어린 날 더러웠던 아이들 자라   다시 더러운 아이들 낳고   잡년들 늙어서 앓아 눕꼬   지금 새 한 마리 날지 않는다   하남벌에 돌아와 한숨쉬는   내 십 년의 배반     이석.1925. 경남 함안 출생. 본명은 순섭. 서울 대학 사대 중등교원 양성소 졸업. "현대문학" 출신으로 "하초" "남대문" 등 시집이 있고 '목마시대' 동인으로 활동중이다. 현재 경기여고 교사.      개나리   삼월의 태양   둥그런 미소   어릴적 본 동화의 그림   노오란 개나리   맨 먼저 소원을 풀고   햇살이 간지러워 못견디는 나무들   몸살이 난다   오늘 하루   따스한 햇볕을 먹고   놀놀하게 낮잠을 잘까.      서시         --사연   방 안에서 살빛이 낡고   문 밖에서 바람을 느끼는 날   몇 번 더 불같은 아픔을 견디어야   썩돌이 숨트는 노래를 부르릿까   오늘도 저 하늘 뜬구름에게   마지막 열망을 던져보는   서글픈 하루   어찌하여 지금은   시와 술이 서로 의리를 끊고   그날의 징소리에 입맞이 쓸까   저 먼 하늘   누런 햇볕 속에 반짝이던   백마의 흰 갈기   그 빗질하는 바람을 타고   오늘을 살았는가   그 시정 어느 거리   황폐한 웃음 인족에 좇기어   절며 뒤퉁거리는 닭이 되어   중도 속도 아닌 시인이 되어   오늘 오늘을 살았는가     이인해.1945년 함남 북청 출생. 본명은 범사.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문단에 데뷔(1975)한 그는 지나친 기교주의, 소재주의, 실험주의를 배제한 삶과 모든 사물들을  깊은 애정으로 바라보면서 이것들을 담담한 이야기로 감성화시키는 시인이다. 시집으로 "사랑법"이 있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산에 오르면 알리라.   오르고 싶은 곳 산봉이 솟았고   쉬고 싶은 곳 나무 그늘이 있음을.   그 그늘에 잠시 쉬고 있노라면   바위 아래로 돌돌돌 흐르는 물개울.   그때, 그대의 시선은 자유롭고, 알리라.   오솔길에 아무렇게 펴있는 풀잎들도   저마다 한 몫으로 살아 있음을.   그러나 나는 아직 아지 못한다.   오솔길에 풀 한포기 흔들리는 까닭을.   풀 한포기 되어 보지 않고서는   풀 한포기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을,   바람 한자락이 되어 보지 않고서는   풀 한포기 흔드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바람이 지나가면 풀 한 포기 흔들리고   바람이 지나지 않아도 풀 한 포기 흔들린다.   바위 아래로 돌돌돌 흐르는 물개울   흘러서 어디 가는가.   물 한방울이 되어 보지 않고서는   물 개울의 흐름도 알지 못한다.   물개울로 흘러 보지 않고서는   저 강의 물방울들 모임도,   바다를 떠돌아보지 않고서는   바다의 출렁거림도 알지 못한다.   내가 물 한 방울이 되지 못하는데도   바다는 밤늦도록 출렁거린다.   밖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나는 학자들의 책을 밤늦도록 읽는다.   밤 새워 읽은 뒤   내 방종의 뜰에 핀 꽃 몇 송이   자기를 키운 가지를 떠나   옆으로 툭 불거졌다.   옆으로 툭 불거진 엉겅퀴는   바람이 웬만큼 불어도 흔들리지 않고   흔들리는 것은 거짓의 풀잎, 거짓의 바람,   나는 웃는다.   그때, 낙엽이 웃음처럼 지고   내 방종의 뜰에도 겨울이 왔다.   밤에 오는 눈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먼 곳에서   누가 눈을 눈이라고 하였는가.   아직도 비가 오지 않았는가.   밤새워 눈이 와도 녹아버리고   내가 찾은 한 마디의 말   아침에 아무런 흔적이 없다.   아직도, 비가 오지 않았는가.   겨울은 그러나 어김없이 왔고   이 겨울 나뭇가지를 떠나 방황하는 새   비로소 처음 추위를 느낀다.   새 울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내 한 때 방종의 뜰에도   겨울 짧은 해 빨리 지고   밤눈이 조금씩 쌓이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속으로 제 몸을 감추기 시작할 때   나는 무엇을 조금씩 알아가는가.   그러나 산에 오르면 알리라.   오르고 싶은 곳 산봉이 솟았고   쉬고 싶은 곳 나무 그늘이 있음을.     이제하.1938년 경남 밀양 출생. 홍익대에서 조각과 회화를 전공하다가 "현대문학"을 통해 데뷔. '60년대 사화집) 동인으로 활동하는 한편, 시, 소설, 동화 등을 발표하여 뚜렷한 개성의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창작집 "초식" "새" "기차, 기선, 바다, 하늘"과 시집 "저 어둠속 등빛들을 느끼듯이"가 있다.      단풍   가을이로다 가을이로다   생선처럼 뒤채며 살려던 목숨이   어째 볼 수도 없는 허공에서 아으으   쓰러지는 목숨이   나무마다 나붙어 닢닢이 토하는 핏줄기로다   그래도 못다한 숨결   바작바작 긁어대는 손톱 상채기로다   무엇을 바래 달음질했던 땅에서 하늘 끝까지   되돌아 아뜩 아뜩 달려오는 세상에   아! 단풍이로다, 어느 한군데 머리 숙이고   눈물마저 못뿌린 못난 마음이   쑥대밭으로 엉클리어 마구잽이   타오르는 불길이로다      노을   1   장돌뱅이 차림을 하고 꼭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이 저기만큼 걸어가고 있어,   어릴 적 동뫼로 산소 가던 일, 할아버지   상여 뒤를 따라가던 일들을 거푸 생각하며   낯이 붉어 재개재개 따라 언덕 마루   까지 와 보면 거기 고운 자줏빛으로   텅 비어 있는..... 텅 비어 있는...   2   처음에 말씀이 있었읍니다   저 푸른 하늘은   그 님의 맑으신   말씀입니다   어머니 날 낳으셨지만   어머니 또한 그 하늘의   따뜻한 말씀   세월이 자꼬자꼬 흘러가면은   그리운 여자는 허리 그늘에   긴 강을 두르고, 새끼들 머리 위론   포장이나 치고   나 죽으면 아무데도 안가겠어요   어굴한 누님의 설운 이웃의   숨결 어리어 떠도는 공중의   나도 자줏빛 한 덩이   말씀이 되어   그때처럼 멀 멀   밀리겠어요     이종욱.1945년 경북 예천 출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창작과 비평"에 시를 발표하년서 '반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인간 구원의 소명을 완수 하려는 깊은 열망에 가득 차 있는 젊은 시인 중의 한 사람. 시집으로 "꽃샘추위"가 있다.      꽃샘추위   살아서 갚을 빚이 아직 많다   새벽 공기를 돌려야 할 집이 아직 많다   두드려도 울리지 못하는 가슴이 아직 많다   죽어서도 물음을 묻는 무덤이 아직 많다   우리 발에 올가미가 걸릴 때   우리 목을 억센 손이 내리누를 때   마주보는 적의 얼굴   가거라   한치도 탐하지 말라   몇점 남은 우리 몸의 기름기를   겨울의 마지막에 아낌없이 불을 당겨   겹겹이 쌓인 추위 녹일 기름을   한치도 탐하지 말라   우리의 머슴이 되지 않으면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없다   가져가거라   마주잡는 손과 손을 갈라놓는 찬바람   꿈에까지 흉측한 이빨자국 찍고 가는 찬바람을   씨 뿌린 자가 열매 거둘 날이 가까왔다   번개가 번쩍이는 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안다   갚을 빚이 얼마나 많이 남았는지 안다   식중독으로 뜬눈으로 지새우는 밤   우리는 하늘의 뜻을 버렸음을 깨닫는다   무덤 속에서 살아 있는 불꽃과 만난다   바람이 셀수록 허리는 곧아진다   뿌리는 언 땅 속에서 남 몰래 자란다   햇볕과 함께 그림자를 겨울과 함께 봄을   하늘은 주셨으니      돌   화산의 입 안에서 지글지글 끓어오르다가   우리와 더불어 닳고 있다   장마에 씻겼다가 햇볕에 마르다가   천둥번개 삼키고 심장이 튼튼해졌다   돌 하나 품속에 간직하라   차고 단단한 목소리 하나   차고 단단한 슬픔 하나   꼿꼿이 자랄 것이다   한가닥 마른 번개 번쩍일 것이다   영생불로의 바람 한자락 펄럭일 것이다   곧게 내리꽂히는 햇살 한보자기 풀어놓을 것이다   돌을 던져라   우리의 가장 부끄러운 곳을 향해   거짓된 침묵의 심장을 향해   돌은 돌아온다   빛은 이미 오래 전에 어둠을 꿰뚫었으나   아직껏 거두어 가지 못하고 있다   어둠 속에 불끈 버티고 선 돌   뼈와  꽃도 숨기고 두 눈 부릅뜬 돌   돌 하나 꿈 속에 간직하라   차고 단단한 목소리 하나   돌을 던져라   우리의 가장 부끄러운 곳을 향해     이중.1935년 경남 마산 출생. 숭실대학 영문과 졸업.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은 그는 전후의 단말마적인 아픔을 종교적인 경건성으로 극복하여 시화시키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시' 동인이며 시집 "땅에서 비가 솟는다"를 출간했다.      타락사초      --사도행전편   1   내가 동정을 잃었을 때   아무도 웃지 않았다    내가 두려워 하는 것은   가을의 향기 아닌   가을의 무게   나의 비밀과   나의 키 높이와 몸무게와   마취된 현기와   그래서 더욱 두려운 것은   가을의 무게   내가 동정을 잃고 난 새벽에는   개도 안 짖더라   그째도   나는 곧 이어 잠이 들었지   3   어느 날   쮜틀에 잘못 걸린 내 왼손 엄지손톱   보랏빛 피멍이 들었다   오래 앓다가 새 손톱이 났다   어느 날   한밤에 깨어나 전등을 켜고   쥐를 잡았다   도망치다 피 토하고 죽어가는 쥐의 머리   그날 그때부터   탄해를 배운   아무나 붙안고 탄해하고픈   나의   머리   13   굶지 않고 살아가는 자의 시를   굶어 죽어가는 자에게 바치다   굶어 죽어가는 자의   마지막 음향-- 가녀린-- 들리던가-- 에   굶지 않고 사는 시인은   시계를 보다   일어서다   울음없다   15   팽이는 돌다가 멈춘다   그 곁에서 나는 울고 있다   무너지는 성 아래 수레는 멈추어라   구심의 오늘은 가고   우리는 이미 중력을 잃은 마을의   고아들이 아닌가?   팽이는 돌면서 멈춘다   그 곁에서 울고 있는 나의 목덜미에   하얀 물쭐기   솟구치다   바다로 솟아라   17   미래는 오는 것인가?   흰 장미처럼 부서져   유아들의 가슴에서 스러지고 마는 것인가?   아득한 날에 쌓인 패총   그 곁에서 내가 눈물로   미래를 달리던 외론 벼랑에서도   미래는 오지 않았다   뜨물 속에 버려진 보석같이   하수도로   미래는 바다에서 스러지고 마는 것인가?   난파 속에 산 혼은 어디 가고   죽어도 웃음만 도는 그 혼은 어디 가고   구걸의 하루 해도 또 어디로 가고   흰 장미는 그 외론 영으로   지각도 연착도 없이   끝내 아니 오고   마는 것인가?   ...   이름 없는 구름들의 무게에 매달려   어디서 웬 새   미지롭게 날아오듯   종일을 짖다가 가고 마는   개처럼 오는 것이다   개에게는 먹이를   새에게는 모이를   카이자에게는 절대의 이름을   절대에게는   앉을 자리 없이 떠도는   당신의 손끝까지 비어 있으시라   미래는   빈 의자에 방울지는 12월의   빗방울처럼   낮게 머리 위로   오는 것이다     이창대.1930년 함남 영흥 출생. 동국대 대학원 사학과 졸업. "사상계"의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하여 새로운 정서를 새 형식에 담아 현대시의 정립을 모색하고 있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집으로는 "무서운 유희" "전망대"가 있고, '60년대 사화집' 동인이며, 현재 홍익여고 교사로 있다.      애가   그대 떠난 마음의 빈 자리   아플지라도   숨 막히는 이별은 말하지 않으리.   여기로 불어오는 바람   서러웁고   저기서 울리는 종소리   외로와도   가만히 견디며 들으리라   커다란 즐거움은 아픔 뒤에 오는 것.   흐르는 강가에 가슴은 설레어도   말하지 않으리라 이별의 뜻을.   그대 떠난 마음의 빈 자리   아플지라도   나에게 잠들게 하라   너의 그림자를.     이추림. 1933년 전북 고창 출생. 본명은 동주.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 1962년 장시집 "역사에의 적의"로 문단에 데뷔. 전통적인 가치관의 부정, 문명 사회 역시가 저지른 악의 고발, 절망, 고독, 죽음 등의 감정을 토로함으로써 언어를 카타르시스화 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바다처럼   E선 위릃 부는 바람처럼 가늘어서 좋습니다   불길 위를 부는 바람처럼 더워서 좋습니다   나무 위를 부는 바람처럼 자라서 좋습니다   물 위를 부는 바람처럼 부드러워서 좋습니다   바위 윌 부는 바람처럼 되돌려 주셔서 좋습니다   구름 위를 부는 바람처럼 눈 부시어서 좋습니다   하늘 속을 부는 바람처럼 모가 없어서 좋습니다   노랠 수놓는 우아한 새 같은 당신   모래 윌 부는 바람처럼 바람이 많습니다   얼음판 위를 부는 바람처럼 당신은 맑습니다     이탄. 1940년 충남 대전 출생. 본명은 길형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데뷔하여 '월탄문학상'과 '한국시협상'을 수상했다. 시집 "바람 불다" "소등" "줄풀기" "옮겨 앉찌 않는 새" "대장간 앞을 지나며"가 있고 현재 외국어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구름   관운장은 마량하고 바둑을 두고   화타는 관운장의 팔에 스민   독을 뽑는다   관운장은 돌을 놓고 한잔하고   화타는 살을 헤쳐내고   뼈를 본다 푸르딩딩한 뼈, 독이 번진 뼈   화타는 독을 제거하고   관운장은 돌을 놓고 한잔한다   아 이젠 팔이 가볍구나   조조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는   피래미 등에도 묻어있고   독전이 빗방울처럼   추녀끝에서 떨어진다   팔 또는 어깨   심장   위에 떠 있는 구름   화타의 걸음   헤르만 헤세의 구름도   수염처럼 날린다.     이태극. 1913년 강원 화천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한국일보'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시작활동을 한 그는 국문학도로서의 고유한 시가 형식인 시조에 심취 창작에 전념하기 시작. 저서로 "꽃과 여인" "고전국문학 연구 논고" 등이 있다.      삼월은   진달래 망울 부퍼 발돋움 서성이고   쌓이던 눈도 슬어 토끼도 잠든 산 속   삼월은 어머님 품으로 다사로움 더 겨워.   멀리 흰 산이마 문득 다금 언젤런고   구렁에 물소리가 몸에 감겨 스며드는   삼월은 젖먹이로세, 재롱만이 더 늘어.      낙조   어허 저거, 물이 끓는다. 구름이 마구 탄다.   둥둥 원구가 검붉은 불덩이다.   수평선 한 지점 위로 머문 듯이 접어든다.   큰 바퀴 피로 물들며 반 남아 잠기었다.   먼 뒷섬들이 다시 환히 열리더니,   아차차, 채운만 남고 정녕 없어졌구나.   구름 빛도 가라앉고 섬들도 그림진다.   끓던 물도 검푸르게 숨더니만   어디서 살진 반달이 함을 따라 웃는고.     이태수. 1947년 경북 의성 출생. 영남대 철학과 졸업.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그는 '자유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보다 구체적인 체험을 통해 스스로 독자적인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시인. 시집으로 "그림자의 그늘" "우울한 비상의 꿈"이 있다.      낮달로 슬리며   서녘에 슬리는 낮달   섶나무 그늘에 내려와   푸새들과 흔들리는 푸새들의 꿈.   여름 한낮의   멎은 바람 가슴에 안기어   땀 흘리는 한동안   잠시 보이는 안개꽃, 지는 꽃보라.   섶나무 뿌리만하게 발 뻗는   나의 꿈, 뜬구름.   풀섶에 묻히고   낮달로 슬리는 내 이마의 그늘.      옛꿈을 다시 꾸며      --아우에게   자라봉이 걸어온다.   발목이 조금 삐인 채 다가서는   산자락의 당나뭇가지에는   우리가 걸어둔 눈물과 몇 개의 낱말들이 눈을 뜨고   그때 날려보낸 모습 그대로의   멧새 한 마리 파닥이며   옛집의 처마밑을 선회하고 있다.   눈을 들어라. 우리는 이제   턱수염이 거칠어지고   꿈도 몇 번씩이나 뒤집어 꾸게 되었지만   그때는 옛날, 옛날엔 꿈이 컸다고 투덜대는   그런 나이가 돼 버렸지만, 고향도 등졌지만   눈을 들어라.   시멘트 벽에 기대어 서서 자주 자주   한숨 쉬고, 눈물을 훔치고   이제 우리는 더 커진 눈으로 떠돌며   아파해야 하는 철도 들었지만   꿈은 아직도 왜 고향 하늘만 맴돌고 있는지.   하늘 보기가 왜 이리도 어려워만 지는지.   그러나 눈을 들어라. 오늘 나는   옛집의 낯선 불빛 앞에 서서   자라봉을 끌어안고 있으니,   우리가 걸어두었던 눈물빛과 몇 개의   낱말들을 부여안고   하늘 저켠, 흘러가는 구름에 떠 흐르는   희미한 꿈조각을 더듬고 있으니,   눈을 들어라.   언제나 우리는 헛돌고 있을지라도   헛돌지 않을 날을 꿈꾸며   밤을 건너면서, 옛꿈을 다시 꾸며...     이하윤. 1906년 강원도 이천 출생. 호는 연포. 일본 호오세이 대학 졸업. 1930년 "시문학" "문예월간"을 주관하면서 해외 문학을 소개했고 서정시를 발표했다. 시집으로 "물레방아" 등이 있으며 정선된 언어와 부드러운 서정성이 주조를 이루어 애상적인 정서를 보여주고 있다.      들국화   나는 들에 핀 국화를 사랑합니다.   빛과 향기 어느 것이 못하지 않으나   넓은 들에 가엾게 피고 지는 꽃일래   나는 그 꽃을 무한히 사랑합니다.   나는 이 땅의 시인을 사랑합니다.   외로우나 마음대로 피고 지는 꽃처럼   빛과 향기 조금도 거짓 없길래   나는 그들이 읊는 시를 사랑합니다.     이향아. 1941년 충남 서천 출생. 경희대 및 동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 전공.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황제여" "동행하는 바람" "눈을 뜨는 연습" "물새에게" 등이 있으며 '문채' 동인. 현재 호남대학 교수.      음미   한 잔의 커피를 마신다.   뜨거운 한 모금의 차는   발톱으로 흘러가고 코끝으로 흐른다.   발톱으로 가서는 내가 딛고 나설 땅이 된다지만   코끝으로 간 것은 울음만 된다.   울음이 부서지면 산그늘로 숨지만   내 하늘을 채우고도 되레 남는다.   백자같이 너그러운 한낮   수정같이 도도한 밤   풀길없는 갈증으로 남는다.   내가 마신 한 잔의 커피로는 안 될 것이다.   발톱에서 코끝으로 오르는 파란만장한 질곡을   귀먹은 아우성을   내 철 없는 열증을   나는 안다.   어림도 없는 것이다.     이형기. 1933년 경남 잔주 출생. 동국대 불교과 졸업. "문예"지 추천으로 등단. 초기의 전통 서정시에서 전환하여 최근에는 고정관념의 틀을 깨뜨리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보려는 시를 쓰고 있는 것이 특징. 시집으로는 "돌베개의 시" 등 다수가 있으며 현재 부산산업대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한국시협상' '부산시문화상' 등 수상.      낙화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비 오는 날   오늘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보다.   노을도 갈앉는   저녁 하늘에   눈 먼 우화는 끝났다더라   한 색 보라로 칠을 하고   길 아닌 천리를   더듬어 가면...   푸른 꿈도 한나절 비를 맞으며   꽃잎 지거라   꽃잎 지거라   산 넘어 산 넘어서 네가 오듯   이 나라에 가을이 오나보다.      노년환각   자라서 늙고 싶다   나는 한 그루 수목같이   먼 여정이 끝난 곳에   그늘을 느린 나의 추억   또 어느듯 하루 해가 저물어   그곳에 등의자를 내려놓고 쉴 때--   눈을 감고 있으면   청춘의 자취 위에 내리는 싸락눈   표백된 비극의 분말   --그러나 나는   겨울날 단양한 양지짝에   누워서 존다   육중한 대지에 묻힌   사랑과 미움   내 가고난 다음 천년쯤 후에   자라서 무성한 가지를 펴라      종전차   멀리서 삐걱거리며   종전차는 간다.   마즈막 기대가 실려 간다.   내 가슴에 역력한 차바퀴   여인아   그곳에 눈물을 쏟으라   약한 자의 침실에는   달이 비칠 것이다. 오늘밤   자비의 명월이   다사롭고나. 오히려   생활에 찌든 검은 손등을   어루만지는 자비의 월광   아아 인생의 희비는   가벼운 싸락눈이다.   또 그처럼 무심한 은혜다.   어디에서고 내가   팔을 벼고 누웠는 창 밖을   가는 종전차.      나의 시   나의 시는 참으로 보잘 것 없다.   먼 길을 가다 말고   잠시 다리를 쉬는 풀섶에   흐르는 실개천   쳐다보는 흰 구름   또는 해질 무렵 산허리에 어리는   저녁 안개처럼 덧없이 가볍다.   아, 보랏빛 안개 서린 희노애락   먼 길을 가며 보는 강산풍경...   일모와 더불어 귀로에 오르는   내 이웃들의 단란을 빌고   외로운 사람의   불을 끈 창변에   서늘한 달빛같이 스미고 싶다.   여류한 세월에 물같이 흐르는   흘러서 마지 않는 온갖 인연을   나는 참으로 사랑하고 싶다.      호수   어길 수 없는 약속처럼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다.   나무와 같이 무성하던 청춘이   어느덧 잎 지는 이 호수가에서   호수처럼 눈을 뜨고 밤을 새운다.   이제 사랑은 나를 울리지 않는다.   조용히 우러르는   눈이 있을 뿐이다.   불고 가는 바람에도   불고 가는 바람처럼 떨던 것이   이렇게 잠잠해질 수 있는 신비는   어디서 오는가.   참으로 기다림이란   이 차고 슬픈 호수 같은 것을   또 하나 마음 속에 지니는 일이다.      들길   고향은   늘   가난하게 돌아오는 그로하여 좋다.   지닌 것 없이   혼자 걸어가는   들길의 의미...   백지에다 한 가닥   선을 그어 보아라   백지에 가득 차는   선의 의미...   아 내가 모르는 것을,   내가 모르는 그 절망을   비로서 무엇인가 깨닫는 심정이   왜 이처럼 가볍고 서글픈가.   편히 쉰다는 것   누워서 높이 울어 흡족한   꽃 그늘...   그 무한한 안정에 싸여   들길을 간다.      송가   나는 아무것또 너에게 줄 것이 없다   다만 무력을 고백하는 나의 신뢰와   그리고 이 하찮은 두어 줄 시밖에.   내 마음 항아리처럼 비어 있고   너는 언제나   향그러운 술이 되어 그것을 채운다.   정신의 불안과 그보다   더 무거운 생활에 이끌려   황막한 벌판   또는 비내리는 밤거리의 처마 밑에서   내가 쓰디쓴 여수에 잠길 때   너는 무심코 사생에 주었다   토요일 오후의 맑은 하늘을.   어쩌면 꽃   어쩌면 잎새   어쩌면 산마루에 바람소리   흐르는 물소리   아니 이 모든 것은 전체와 그밖에   또 헤아릴 수 없이 풍성한 토지와   차운 대리석!   아 너는 진실로 교목같이 크고   나는 너의 그늘 아래 잠이 든   여름철 보채는 소년에 불과하다.     이활. 1925년 함북 온성 출생. 경성교보 졸업. "신천지"에 시를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한 그는 엔솔로지 (현대의 온도)를 비롯, '다이얼' 동인으로서 초창기 다다이즘에 심취 그 계통의 많은 시를 발표하였다. 현재는 함석헌 선생과 함께 노장사상에 대해 연구하고 있으며, 장미원 저택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낙서가 된 앗시리아의 벽화   애정에 괸해서   이야기한 기억이 없는 일력 밑에서   달은   거울 속에 부서지는   지구의 반란과 마주 서 있다.   홍소처럼   무너진 교당의 유적 위에   달을 불러다 놓고   그가 저지른 범죄를 심문하기 위하여   '메피스트'는 시의 여백에서   그를 고문하는 시인이었다.   그때도   실상은   꾸겨진 얼굴을 그대로 포장하고   달은   하늘에 목을 걸고 있었다.   옷을 베낀   '브르똥'의 진실처럼.     이희승. 1896년 경기 광주 출생. 호는 일석. 이화여대, 서울대 교수 및 성균관대학원장을 지냄. 시조집으로 "박꽃" "심장의 파편"과 수필집 "벙어리 냉가슴" "소경의 잠꼬대" 및 "역대 조선문학 정화" 등의 저서가 있다.      추삼제      벽공   손톱으로 툭 튀기면   쨍 하고 금이 갈 듯   새파랗게 고인 물이   만지면 출렁일 듯   저렇게 청정무구를   드리우고 있건만.      낙엽   시간에 매달려   사색에 지친 몸이   정적을 타고 내려   대지에 앉아보니   공간을 바꾼 탓인가,   방랑길이 멀구나.      남창   햇살이 쏟아져서   창에 서려 스며드니     동공이 부시도록   머릿속이 쇄락해라.   이렇듯 명창청복을   분에 겹게 누림은.     이희철. 1930년 전북 장수 출생. 호는 오천. 충남대 졸업. "문학예술"을 통해 데뷔(1956)하여 '60년대 사화집' 동인으로 시집 "종점부근"이 있다. 현재 중앙여고 교사로 재직.      낙엽에게   떨어져 가야 하는 까닭을   다시 알고 싶다.   마치 층계를 내려가는   얼마나 오랜 순간이기에   나의 눈이 머물러 있는 공간을 지나는지   알고 싶다.   공간은 너의 뒤에서 하나 둘 제 위치를 마련하고   텅 빈 배경을 이웃한   어디쯤 나는 있는가.   낙엽이여   나를 부르지 말라.   나의 안에서 넘치고 있는   엄숙한 가을을 향하여   참으로 가난한 환경에서 마련된   기도의 말씀으로   떨어져 오라.     인태성.1933년 충남 예산 출생. '동아일보' 신춘문예 출신이며 "문학예술"의 추천을 받기도 했다. 그의 시는 잔잔한 관조속의 날카로운 이성을 감각적으로 노래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며 '60년대 사화집' 동인으로 활약하고 있다. 시집으로 "바람 설레이는 날에" 외에 작품 다수를 발표.      투우   내닫는 검정소 무딘 발굽 아래   긁히는 땅거죽 먼지를 올린다   붉은 보자기 겨냥하는   세운 두 뿔, 속력을 달아 휙휙휙   훌렁대는 바람막 찢기는 소리   겹쳐드는 벽과 벽   공기는 숨구멍 틀어막는 투박한 마스크   설치고 치받아 끊일 새 없이   이승 저승을 가름하는 극한선 위로   몸뚱이를 반반씩 걸치면서 넘나든다   날쌘 몸짓 소리 없는 비명   그늘에 숨어 덮쳐오는 그   어둠을 꿰어 한 형체를 뭉쳐 내려는 그 그   그 아픈 숨결 돌틈으로 끼어 잦아들어   죄어드는 힘줄은 전신을 묶는 듯   두 도가니는 절절 생목숨을 끊이지만   곤두서는 서릿발이 살갗을 선뜩인다   밀물 썰물이 마주 당기고 밀치다가   차고 뜨겁게 솟구쳐 부서질 때   후두둑 끊기는 듯 이어지는 마음의 사슬   나간 넋을 불러들여   불에 불을 붙이는 눈   캄캄한 표적을 번갯날이 잡는다   죽음은 막 추상 속에서 뛰쳐나와   바위 덩어리 되어 나뒹군다   쾅--무너지자 이내   막판을 뒤덮는 더 크다란 그림자   삽시간에 하늘이 땅이 휑하게   함성을 쓸어내고 숨소릴 누르는 관중   손아귀에 승리를 틀어쥔 그는 비틀거린따   공허가 찌르는 칼을 받으며 비틀거린다   하아얀 낮달이 팽팽팽 어지럽게 돌아   쩡기 걷히는 눈에 장막을 치는 뽀오얀 안개   둘러 솟은 산들도 점점 나직이 가라앉는 듯   외치는 높은 물결도 꿈속처럼 귀에 멍멍하다     임강빈. 1931년 출생. "현대문학"에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한 그는 관조하는 자연과 사물과의 친근감을 승화시키는 시들을 보여 주고 있다. 시집으로 "당신의 손" "동목" 등이 있다.      코스모스   하얀 창 앞에   마구 피어 오르는 것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다.   바다 앞에   날리운 모닥불 같은 것으로   스스로 전율에 이어 온   사랑   여기 아무도 반거할 수 없는   하나의 지역에서   가을의 음향을 거두는 것이다.   [출처] [펌] 한국의 애송시 (3)|작성자 수위
208    세계 아름다운 화페 댓글:  조회:6032  추천:0  2015-02-13
  네덜란드. 해바라기가 느무 예쁘죠.  이것도 네덜란드. 등대랑 네덜란드 지도겠죠? 가봉. 동화책 속 그림 같아요. 아아..  남아공. 지폐 주인공이 모두 동물이래요. 코끼리, 사자 등.. 스웨덴. 앞에는 아마 작가인 라겔르뢰프인것 같고 뒷면은 "닐스의 모험" 중 한장면인것 같죠? 노벨 문학상 받은.. 어릴 때 좋아했던 책인데 백년 전에 나온 이야기라니.. 지폐에 사인이 들어가있는데 뭐라고 써 있는지 알아볼 수가 없네요.  벨기에. 색소폰 발명가인 아돌프 색스라고 합니다. 아래는 유명 연주자인듯. 스위스. 에펠탑을 세운 건축가 꼬르뷔지에와 작품 도안. 홀로그램이 들어가있군요. 음- 개인적으로 네덜란드랑 가봉,벨기에 지폐가 젤 마음에 드는데 새 지폐 도안이 나올 때 이런 것도 참고 했으면 하는 생각이 옴팡 듭니다.  전 해바라기 지폐 처음 봤을 때 그거 하나 때문에 '아 네덜란드에 가고싶다~'했었거든요. 헐헐 특히 네덜 란드와 가봉, 스위스의 색깔. 부럽습니다.만약에 단청을 넣으면 우리도 저렇게 화 려하고 예뻐보일텐데... 잘못하면 너무 키치에 가까워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도안은 닐스의 모험처럼 우리 민화, 민담이나 소설의 한장면, 인물을 넣는다면 장 영실, 광개토대왕, 이순신, 김구선생님.또 꼭 인물이 아니어도 좋잖아요.남아공은 인물대신 사자나 코끼리 얼굴인데 스위스처럼 국기 문양이 들어가도 괜찮을것 같 고..거북선도 아참 전 세계 고인돌의 절반 이상이 우리나라에 있는데 고인돌이 들                           어가면 안돼나? 그래픽 디자인의 나라,네덜란드 돈의 유혹에 제가 빠졌던 것 처럼                          잘 만든 지폐 도안으로 외화도 벌수있게(김칫국을.. ^^)...     [출처] [펌] 세계의 예쁜 지폐들 ... |작성자 수위
207    애송시선 4 댓글:  조회:2834  추천:0  2015-02-13
장서언. 1913년 서울 출생. 연희전문 문과 졸업. "동광"지를 통해 문단에 데뷔하여 모더니즘에 입각한 청신하고 감각적인 시를 써온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집으로 "장서언 시집"이 있다.      이발사의 봄     봄의 요정들이   단발하러 옵니다.   자주공단 옷을 입은 고양이는 졸고 있는데   유리창으로 스며드는 프리즘의 채색은   면사인 양 덮어 줍니다.   늙은 난로는 가맣게 묵은 담뱃불을 빨며   힘없이 쓰러졌읍니다.   어항 속에 금붕어는   용궁으로 고향으로   꿈을 따르고   젊은 이발사는 벌판에 서서   구름 같은 풀을 가위질할 때   소리없는 너의 노래 끊이지 마라.   벽화 속에 졸고 있는 종달이여.      밤   바람 불어 거스러진   샛대 지붕은   고요한 달밤에   박 하나 낳았다.     장순화. 1928년 전북 정읍 출생. 원광대학 국문과 졸업. "현대문학"에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문단에 데뷔한 그는 자연과 인생, 개인과 집단, 가정과 사회, 민족과 국가 등 다양한 진폭을 보여주고 있는 시인으로 평가 받고 있다. 시조집으로 "백색부"가 있다.      유방의 장     난 몰라,   모시 앞섶 풀이 세어 그렇지.   백련 꽃봉오리   산딸기도 하나 둘씩   상그레 웃음 벙그는   소리 없는 개가.   불길을 딛고 서서   옥으로 견딘 순결   모진 가뭄에도   촉촉이 이슬 맺어   요요히 시내 흐르는   내일에의 동산아!     장윤우. 1937년 서울 출생. 서울대 미대와 동 교육대학원 졸업.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신춘시' 동인으로 활약하고 있는 그는 시집으로 "4인 부락" "겨울 동양화" 등이 있다.      나부   벗긴 채 양접시 위에   뉘어 있는 물고기의   끄 싱싱한 몸집   나이프로   찍어   식욕을 돋구고 싶은   화실의 오전   난로 위에선   뜨거운 오차가   욕망을 뿜어 올리고   화가는   퍽 탐욕스런 눈으로   벌겋게 이곳 저곳을 핥는다.   뒤채는 누드의   밉게 볼록한 아랫께   검스레한   신의 애교를 시새워   밖엔   몸부림치는 눈발   흰 겨울에   하얀 접시 위에서   물고기는 그 흰 몸체를   뜨겁게 숨쉬고   있다.     장호. 1929년 부산 출생. 본명은 김장호. 동국대 문과 졸업. 1951년 (하수도의 생리)를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한 이후, '시작' 동인으로 활동했다. 시극 (수리뫼)와 (바다가 없는 항구)가 있고 현재 동국대학에 출강하고 있다.            파충류의 사상     언제부터인지 모른다   우리가 이러기 시작한 것은   언제까지일지 모른다   우리가 이러고만 있을 것은.   찌그러진 바위를 뚫고   불을 뿜는 숲을 지나   추상의 동굴을 내려다보며   죽은 놈의 팔뚝 같은 넘늘어진 거리를 건너   우리들 옆의 누구나처럼   우리들이 이렇게 기어엎대어   쑥스러운 눈길로 서로의 얼굴들을 치어다보며   해맑은 동체를 끄을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지 모른다   언제까지일지 모른다.   자궁에서부터 기어나와   무덤에까지 기어들어야 할   우리들의 포복은,   혹은 삶과 죽음의 가로 세로 교차하는   점의 작렬일지 모른다.   하이얀 양광이   백지 같은 얼굴을 내밀고 있는   엉뚱한 장마철에,   옆구리로는 검은 피를 쏟으며   굼돌아 비트는 지렁이같이   지각이 눈시울과 함께 붙어 버린 우리들의 망막에   풍선같은 불만을 안고 기어들 구멍이 비치지 않는 것은,   죽음의 예감이 맴도는 10월의 해안에   복징어 알을 주워먹고 나와 앉은 야윈 소년을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들에게는 슬픔이란 게 없다.   슬프다는 것은   즐거웠던 시절을 가져본 적이 있는   사람들의 입실이다.   우리들에게는 가을도 없고 겨울도 없다.   소슬한 가을 바람에 떨어뜨릴 잎새 한 잎 익혀 볼 여름을 우리들은 가진 적이 없고   꽃 한 포기 피워 볼 봄을 기다릴 구실을 우리들의 겨을은 가진 적이 없다.   우리들에게는 우수라는 사치스런 삽화가 없다.   우리들의 참회록엔 새까만 점액,   골짜기마다 실종자의 발자취만 남루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꺼지지 않을 신호등,   미묘한 바람결에도 굼돌아 비트는   빛의 대열이다 대열!   차알삭 땅바닥에 기어엎대어   소리없이 포복하라, 소리없이!   오만한 밤의 장막을 진 우리들의 생존은,   숨찬 응시다, 응시!   혹은 소리 없는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혹은 소리 나지 않는 입을 멍충히 열고   우리들의 침묵은 어느 아우성보다   더 높은 목청으로 역사의 문지기를   두들겨 깨운다.   풍경은, 현명한, 우리들의 예편네들을 닮아   고요한 위험에 파랗게 질렸고   소리라는 소리는 모두 바람의 방향을 거슬러   박물관에 갇혔다.   돌아다보면 아아 기어가는 이웃이 있고   이웃너머 이웃이 그 이웃너머 또 다른 이웃이   기어가는 이웃이 있다 우리들처럼.   우리들이 죽지 않는 것은   가혹한 하늘을 이고 있기 때문이다.     전봉건. 1928년 평남 안주 출생. "문예"에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한 그는 초현실적 수법에 신선한 이미지를 추구하는 작품들을 써왔다. 시집으로 "전쟁과 음악과 희망" "사랑을 위한 되풀이" "춘향연가"와 연작시 "고전적인 속삭임 속의 꽃"과 시론집 "시를 찾아서"가 있다. 현재 "현대시학" 주간.      돌.2     달밤엔   소문이 돌았다.   제주도   통영   마산   부산   또는   원산의   바닷가   젖은 모래톱에   달밤이면 달빛같은 색깔의   고운 돌 하나가 서서   달빛같은 소리로 운다는   소문이 돌았다.   더러는   대구나   서울의   달빛 스며든 뒷골목에서   그 돌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이중섭의 웃기만 하는 아이들 가운데   자지 달린 한 아이더라는 소문이었다.      돌.31   대나무로 만든   피리의 구멍은 전부 아홉 개다   사람의 몸에도 아니 뼈에도   아홉 개의 구멍은 날 수가 있다   아홉 개의 구멍 난 돌도 있다   그제는 30년 전 한 이등병이 피 흘린   강원도 깊은 산골짜기에 떠도는 피리소리를 들었고   어제는 충청북도 후미진 돌밭을 적시는   강물 속에 떠도는 피리소리를 들었다   오늘 내가 부는 대나무 피리소리는   그제의 피리소리와 어제의 피리소리가   하나로 섞인 소리로 떠돈다      물   나는   물이라는   말을 사랑합니다.   웅덩이라는 말을 사랑하고   개울이라는 말을 사랑합니다.   샘이나 늪 못이라는 말을 사랑하고   강이라는 말도 사랑합니다.   바다라는 말도 사랑합니다.   그리고 비라는 말도 사랑합니다.   또 있읍니다.   이슬이라는 말입니다.   삼월 어느 날 사월 어느 날 혹은 오월 어느 날   꽃잎이나 풀잎에 맺히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작은 물   가장 여리고 약한 물 가장 맑은 물을 일음인   이 말과 만날 때면   내게서도 물기운이 돌다가   여위고 마른 살갗 저리고 떨리다가   오 내게서도 물방울이 방울이 번지어 나옵니다.   그것은 눈물이라는   물입니다.     정공채. 1934년 경남 하동 출생. "현대문학"으로 문단에 데뷔했으며 '시단' '현실' '목마시대' 동인. '현대문학상' '시문학상' '한국문학가 협회상'을 수상한 그의 시풍은 현실 상황을 원시적인 힘의 응결로 다루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시집으로 "해점" "정공채 시집 있읍니까"와 수필집 "지금 청춘" "비에 젖습니다"가 있다.      시는 술이다     시를 읽는 동안에   나직이 따뤄지는   흰빛   술의 잔의 가득함.   시를 읽고 있는 동안에   오고 있는   따사로운 불빛의 가득한 점등.   시를 읽고 있는 동안   가버렸던   마차의 삐걱대는 바퀴가   싣고 오는 가을.   시끄럽지 않은   밤의   저 푸른 별의 얼굴.   잊어버린   도시의 밤하늘!   이 모두가 시를 읽고 있는 동안에   조용히 혼자의 술.   희디흰 혼자의 술.      망향   강원도에서 울던   새가   그 삼림 속으로 날아   가   버린다.   잠잠하게 가라앉은   청공은   저편 동해 물소리에   귀가   멀었다.   대한민국의 한쪽,   아직도   청청하게 푸르러   빛나는 목화의   기를   흔든다.   원목을 두들기는   통소리,   강원도에서 날던   새가   울며 가버린   아득한   삼림에   희디흰 빛이 자꾸 일면서   가만한   옛 고향의 소리도 살아나온다.   정대구. 1936년 경기도 화성 출생. 명지대 국문과 졸업.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됨으로서 문단에 데뷔한 그는 구체적 체험에서 얻어지는 평이하면서도 질박한 언어로서 삶 속에 박힌 슬픔과 소망을 드러내는 시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겨울나무의 진실     겨울나무의 진실은   남성적이다.   여자야 어디 견디겠느냐.   사내 대장부인 나의 참뜻을 알려거든   설한풍에도 빳빳하게 서 있는   겨울나무를 보아라.   일체의 장식을 떨구어 버리고   가슴팍을 가는 칼질 소리   선명하게 드러내 놓고   버티어 버티어서는 골격   겨울나무의 진실을 보아라.   절제를 보아라.   그 이상 사나이가 무슨 가식이 필요한가.   여자야, 견디겠느냐.   최소한의 표현으로   나는 너에게   살 한 점 붙지 않은   순 뼈로써 말할 뿐이다.      박문답.5   내가 죽은 김수영을 읽고 있을 때   까치가 세 번 혹은 네 번 울고 날아간다.   까치는 울면서도 날아갈 줄을 알지마는   김수영은 죽어서도 노래하고   노래하면서도 욕을 할 줄 아는 시인이다.   까치는 침묵할 줄을 알지마는   김수영은 죽어서도 침묵하지 않고   누워서 책을 보고 있는 나에게 욕을 퍼붓는다.   깍깍깍 이 제엔장할 밤중에도   까치 소리만 듣고 있는 나에게   된소리로 욕을 퍼붓는다.   나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처럼 또   깍깍깍 울고 있는 저놈의 까치 저놈의 까치   나로서도 된소리로 이 시를 끝내야 할까보다   끝내야 할까보다가 다 뭐냐 말야   이 시에서 끝에서 세 줄, 혹은 네 줄이   내 마음에 더욱 들지 않는다.     정렬. 1932년 전북 정읍 출생. 국학 대학 졸업. "문학예술"과 '사상계'를 통해 문단에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바람들의 세상" "어느 흉년에"(3인 공저)가 있다. 그의 시는 개인적인 순수한 서정의 탐구와 민족의 비극을 노래하는 것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꽃밭   한 보름만에 간   술이 덜 깬 아침   손님같이 집 한바퀴 돌고   꽃밭에 갔더니   꽃밭은 쥔 없어도   한 뼘쯤 더 키가 자라고   손주놈은 언제 깨었는지   꽃망울 속에 숨어 웃고 있었다.   감나무 삭정이에 한올 연실처럼 걸려 있는   할아버지 마른 기침소리도   아름드리 포플러 삭은 등걸 속에서   조금은 녹슨   아버지 날선 도끼소리도   내 전지가위 소리도 크고 있었다.   쉰이 넘어 더 헤퍼진   내 헛웃음소리도   한밤중 내 시의 속울음들도   내 전지가위에 잘려 나간   가지 끝에서   아픈 꽃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정양. 1942년 전북 김제 출생. 동국대 국문학과와 원광대 대학원 졸업.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를 통하여 문단에 데뷔한 그는 개인의 구체적인 체험 배후에 깔려 있는 사회 역사적 의미에 천착하여 이를 자연스럽게 형상화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집으로 "까마귀떼" "수수깡을 씹으며"가 있다.      수수깡을 씹으며      떡 한 쪼각 주면 안 잡어먹지      떡 한 쪼각 더 주면 너      안 잡어 먹지   이 땅의 호랑이들은 처음에는   떡 한 쪼각만 달라고 하더란다.   고개고개 너머 어쩌면 그리   고개도 많은지   호랑이가 으르렁대는 산모퉁이   첩첩한 고갯마다   안 잡아 먹히어 다행스러운   숨이 가쁘다.   굶어죽게 생긴 자식들   산 너머 두고   수수깡이나 씹으며 돌아가는 길   가진 떡을 다 주어도 소용없는 고갯길.      치마저고리 벗어주면 더      안 잡어 먹지      고쟁이까지 벗어 보이면 정말로      안 잡어 먹지   부끄럼도 욕됨도 잊어버린   이 고개의 알몸,   아무리 시달려도 소용없는 알몸,      팔뚝 하나 띠어주면      안 잡어먹지      정갱이 하나 띠어주면      안 잡어먹지   고개고개 너머 어쩌면 그리   고개도 많은지   소용없는 정갱이 소용없는 허벅지 소용없는   엉덩짝 소용없는 젖퉁이...   기다리다 지친 자식들   산 너머 두고   넋 달아났으므로 아픔도 없는   아무 소용없는 피비린내만   소름끼치며 흩어지더란다.   고을마다 피먹은 이야기들이   깨물어도 깨물어도 소용없는   수수깡으로 자라서 쓰러진다.      날참새를 씹으며   피묻은 입술을 닦아내면서   날참새를 씹어 먹는다.   오늘은 누구 흉을 볼꺼나   산산히 찢어발기며   웃어버리자, 참새집   지난 가을 노래도 부르고   철 지난 또 무슨 노래로   질긴 살맛을 뱉아버리자.   질기디 질긴 사랑은 원수는   날참새는 죽어도 못뜯는 박민평   이가 약하고 위가 약하고 비위 틀려서   더는 못견딜 피비린내를   내가 씹으마, 참새집   너는 마시고 노래하고   보고 싶으면 임방울이도 목이 쉬더라.   보고 싶어서 보고 싶어서 보고 싶어서   열두번도 더 목이 쉬는 술.   목이 쉬는 대목은 분질러 놓고   마셔라, 매운 재처럼 귀가 삭는다.   마셔라, 마시면 피가 썩는 술   가을 햇살 쪼아먹고 피가 썩은 새.   독한 햇살이 익어   네 가슴에도 피가 썩느냐,   술잔마다 목청마다 피가 묻는다.     정완영. 1919년 경북 금릉 출생. 호는 백수. "현대문학"과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그는 두권의 시조집이 있다.      조국   행여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 마디 에인 사랑   손 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 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메이면   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맺힌 열 두 줄은   굽이굽이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이   학처럼만 여위느냐.     정의홍. 1944년 경북 예천 출생. 동국대학교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현대문학"으로 문단에 데뷔(1967)한 그는 삶의 현장으로부터 격리된 상상력이나 언어 자체만의 환상적인 미학의 시를 가능한 배제하고 참신한 이미지의 시를 즐겨 쓰는 시인이다. 현재 대전대학 국문과 교수로 재직중.      자유.2   어젯밤엔 울분으로 뜨거워진 소줏잔을 퍼마셨어요. 귀가하는 길에는 저주스런 환영들이 거만하게 서 있는 그 집 담벽에 시원하게 오줌총도 쏘아 보았지요. 나같은 천한 놈이 이런 짓을 하는 걸 보니, 그래도 내 나라엔 자유가 참 많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어요. 자유란 사람보다 위대한 것, 그것은 상식을 구속할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어요.   어젯밤엔 자유의 진짜 얼굴을 처음 보았지요. 그것은 남을 세울 수도, 눕혀버릴 수도 있는 초능력의 얼굴이었어요. 기회가 오면, 참으로 위대한 자유의 기회가 오면 수백억의 욕망을 슬쩍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를 향한 위대한 업적의 제스처로 되돌릴 수도 있고, 아뭏든 이러한 새로운 법률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자유란 만물 앞에선 참으로 위대한 존재였음을 이제야 겨우 깨달았어요. 윤리, 윤리, 오늘날 윤리란 자유 앞에선 그까짓 별것 아닌 위신이며, 담배불처럼 꺼져버릴 위선자의 얼굴이었어요.   어젯밤엔 아내 몰래 남의 자가용을 탄 녀석과 남편 몰래 밤 풍선을 띄운 아주머니를 만났지요. 이들의 자유란 (서恕)자를 목에 걸고 다닌다는 점에서 도덕군자의 외침보다 높고, 그들의 마음보다 넓다는 걸 이제야 겨우 깨달았어요. 내 나라의 자유는 나의 핏발 선 주먹보다 힘이 세고, 나의 직언보다 아량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정진규. 1939년 안성 출생. 고려대 문리대 국문과 졸업.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1960). '현대시' 초기 동인으로 활동한 그의 작품 세계는 자기 인식을 통한 일상적 삶의 세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있다. 시집으로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비어 있음의 충만을 위하여" 등이 있으며 시론집 "한국 현대시 산고"와 시극 "빛이여 빛이여"를 공연했다.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어쩌랴, 하늘 가득 머리 풀어 울고 우는 빗줄기, 뜨락에 와 가득히 당도하는 저녁 나절의 저 음험한 비애의 어깨들. 오, 어쩌랴, 나 차가운 한 잔의 술로 더불어 혼자일 따름이로다. 뜨락엔 작은 나무 의자 하나, 깊이 젖고 있을 따름이로다 전재산이로다.   어쩌랴, 그대도 들으시는가. 귀 기울이면 내 유년의 캄캄한 늪에서 한 마리의 이무기는 살아남아 울도다. 오, 어쩌랴. 때가 아니로다, 온 국토의 벌판을 기일게 기일게 혼자서 건너가는 비에 젖은 소리의 뒷등이 보일 따름이로다.   어쩌랴, 나는 없어라. 그리운 물, 설설설 끓이고 싶은 한가마솥의 뜨거운 물. 우리네 아궁이에 지피어지던 어머니의 불. 그 잘 마른 삭정이들, 불의 살점들. 하나도 없이 오, 어쩌랴, 또 다시 나 차가운 한 잔의 술로 더불어 오직 혼자일 따름이로다. 전재산이로다, 비인 집이로다, 들판의 비인 지이로다. 하늘 가득 머리 풀어 빗줄기만 울고 울도다.      바보의 살   지난 몇해간은   날 잘 잠재우는 여자 하나 있어   날 잘 잠재우는 통달한 여자 하나 있어   바보의 살을 찌우면서   대낮의   깊고 깊은 잠 속으로   익사해 가기도 했읍니다만   또한 몇해간은   한 그루 목련을 심고   그것이 자라 꽃 피우고 잎 피우는   순서를 따라가 보기도 했읍니다만   소리 내지 않는 생장의 법, 침묵의 법,   그것이 거기 있기는 있었읍니다만   끝없이 푸르고 푸르게 출렁이는   바다가 그러나 나를 다시 일깨우고   내 피는 뜨거워, 뜨거워,   맑고 맑은 피는 다시 고이고 고이어   온 몸으로 일어서는 법,   뜨거운 목청으로 노래하는 법,   그걸 공부하려고   낡은 바랑 하나 짊어지고   안 간 데 없이 찾아다니는   이제 또다시 밤이 깊어갑니다.   천지 가득   바다의 출렁임 소리 드높고 드높습니다.   나의   바보의 살이 내립니다.     정한모. 1923년 충남 부여 출생. 서울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동인지 "백맥"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 '백맥' '시탑' '주막' 동인이며 인간 생명에 대한 긍정적 추구를 통하여 현대문명 속에서 인간의 문제를 극복해 나가고자 하는 휴머니즘을 기조로 하고 있는 것이 그의 작품 경향이다. 시집으로 "아가의 방" "새벽" 등 7권. 연구저서로 "한국현대시 문학사" 등 다수가 있다. 현재 한국 문화예술진흥원장으로 재직중.      어머니   어머니는   눈물로   진주를 만드신다   그 동그란 선택의 씨를   아들들의 가슴에   심어 주신다   씨앗은   아들들의 가슴 속에서   벅찬 자랑   젖어드는 그리움   때로는 저린 아픔으로 자라나   드디어   눈이 부신 진주가 된다   태양이 된다   검은 손이여   암흑이 광명을 몰아내듯이   눈부신 태양을   빛을 잃은 진주로   진주를 다시 쓰린 눈물로   눈물을 아예 맹물로 만들려는   검은 손이여 사라져라   어머니는   오늘도   어둠 속에서   조용히   눈물로   진주를 만드신다.      나비의 여행   아가는 밤마다 길을 떠난다   하늘하늘 밤의 어둠을 흔들면서   수면의 강을 건너   빛 뿌리는 기억의 들판을   출렁이는 내일의 바다를 날으다가   깜깜한 절망   헤어날 수 없는 미로에 부딪치곤   까무라쳐 돌아온다   한 장 검은 포지를 열고 들어서면   아비규환 하는 화약냄새 소용돌이   전쟁은 언제나 거기서 그냥 타고   연자색 안개의 베일 속   파란 강물은 발길을 끊어버리고   사랑은 날아가는 파랑새   해후는 언제나 어갈리는 초조   그리움은 꿈에서도 잡히지 않는다   꿈길에서 지금 막 돌아와   꿈의 이슬에 촉촉히 젖은 나래를   내 팔 안에서 기진맥진 접는   아가야   오늘은 어느 사나운 골짜기에서   공포의 독수리를 만나   소스라쳐 돌아왔느냐     정현종. 1939년 서울 출생. 연세대 철학과 졸업. "현대문학"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하여 '60년대 사화집'과 '사계' 동인인 그는 존재론적 인식이 강하여 사물을 현상학적으로 파악하는 시 세계를 갖고 있다. 시집으로 "사물의 꿈" "나는 별아저씨"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과 "정현종 문학선" 시선집 "고통의 축제"가 있다. 현재 연세대에 재직하고 있다.      고통의 축제   계절이 바뀌고 있읍니다. 만일 당신이 생의 기미를 안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말이 기미지, 그게 얼마나 큰 것입니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씬을 만나면 나는 당신한테 색쓰겠읍니다. 색즉공, 공즉. 색공지간 우리 인생. 말이 색이고 말이 공이지 그것의 실물감은 얼마나 기막힌 것입니까. 당신한테 색쓰겠읍니다. 당신한테 공쓰겠읍니다. 당신에게 공쓰겠읍니다. 알겠읍니다. 편지란 우리의 감정결사입니다. 비밀통로입니다. 당신한테 공쓰겠읍니다. 안그렇습니까. 당신한테 편지를 씁니다.   식자처럼 생긴 불덩어리 공중에 타오르고 있다.   시민처럼 생긴 눈물덩어리 공중에 타오르고 있다   불덩어리 눈물에 젖고 눈물덩어리 불타   불과 눈물은 서로 스며서 우리나라 사람 모양의 피가 되어   캄캄한 밤 공중에 솟아오른다.   한 시대는 가고 또 한 시대가 오도다, 라는 코러스가   이따금 침묵을 감싸고 있다.   나는 감금된 말로 편지를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금된 말은 그 말이 지시하는 현상이 감금되어 있음을 의미하지만, 그러나 나는 감금될 수 없는 말로 편지를 쓰고 싶습니다. 영원히. 나는 축제주의자입니다. 그중에 고통의 축제가 가장 찬란합니다. 합창소리 들립니다. '우리는 행복합니다'(까뮈)고. 생의 기미를 아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안녕.      사랑의 꿈   사랑은 항상 늦게 온다. 사랑은 생 뒤에 온다.   그대는 살아 보았는가. 그대의 사랑은 사랑을 그리워하는 사랑일 뿐이다. 만일 타인의 기쁨이 자기의 기쁨 뒤에 온다면 그리고 타인의 슬픔이 자기의 슬픔 뒤에 온다면 사랑은 항상 생 뒤에 온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생은 항상 사랑 뒤에 온다.      꿈속의 아모라   내 손이 그대 가슴을   시냇물처럼 흐른다, 아모라여,   내 눈 속에 뜨는 무지개의 한 끝이   그대 눈으로 폭포처럼 쏟아져   오색궁륭이 만월처럼 부풀 때, 아모라여,   그대는 들었는가   바닷물이 땅 위로 넘치는 소리, 혹은   상처입은 시간의 날개 소리를.   흐르다가 우리가 끊어지고   물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간다 해도   꿈 속의 아모라의, 나는 너를 듣는다   노예의 귀로.     정훈. 1911년 충남 대전 출생. 일본 메이지 대학 문과 중퇴. 1940년 시조가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한 그는 민족적 서정을 직유적인 방법으로 노래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호서 대학을 설립하였고, 현재 한의업에 종사하고 있다.      파적   부-- 부--   고동이 운다   부두가 운다.   항구와 항구에서   향수를 쓸어 담아라   떠날 때면   그렇게 우는 것이냐.   나도 이젠   피리를 깨뜰고   우람한 목청을 갖고 싶다.   커어다란 슬픔을 노래할   커어다란 기쁨을 노래할   이런 날이면 섹스폰이라도   한 아름 안고 서서   부부부-- 불고 싶다.     정희성. 1945년 경남 창원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우리가 처한 현실과 노동의 문제를 통하여 삶의 궁극적 가치를 묻는 시 세계를 보여 주고 있는 시인. 시집으로 "저문 강에 삽을 씻고"가 있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어두운 지하도 입구에 서서   저녁무렵, 박수갈채로 날아오르는   저 비둘기떼의 깃치는 소리   광목폭 찢어 펄럭이며   피묻은 팔뚝 함께 일어서   만세 부르던 이 광장   길을 걸으며 나는 늘   역사를 머리 속에 떠올린다   종합청사 너머로 해가 기울면   조선총독부 그늘에 잠긴   옛 궁성의 우울한 담 밑에는   워키토키로 주고 받는 몇 마디 암호와   군가와 호루루기와 발자국소리   나는 듣는다, 이상하게 오늘은   술도 안 취한다던 친구의 말을   신문사를 가리키며 껄껄대던 그 웃음을   팔엔듯 심장엔듯 피가 솟구치고   솟구쳐 부셔지는 분수 물소리   저녁무렵, 박수 갈채로 날아오르는   저 비둘기떼 깃치는 소리 들으며   나는 침침한 지하도 입구에 서서   어디론가 끝없이 사라지는 사람들을 본다   건너편 호텔 앞에는 몇 대의 자동차   길에는 굶주린 사람 하나 쓰러져   화단의 진달래가 더욱 붉다.     조남익. 충남 부여 출생.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한 그는 향토성과 토착적 세계를 바탕으로 해서 차츰 현실 의식과 역사의식이 결합되는 시 세계로 전환해 나가고 있는 시인이다. 시집으로 "산바람 소리" "풀피리" "나들이의 땅" 외에 다수의 저서가 있다.      죄   하필이면 길가에   태어난 죄   질경이의   하얀 뿌리가 밉다.   하늘에 닿지 못하는   어여차, 미치고 싶은 사랑   코리어에 태어난   나의 죄...   태평양 끝   높이높이 오른   우리들의 죄.   질경이야,   짓밟힌 질경이야   어여차, 미치고 싶은   밟히며 자란 사랑이야.     조병화. 1921년 경기 안성 출생. 호는 편운.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한 그는 도시적 멜랑콜리와 감미로운 고독의 세계에서 인간의 운명과 존재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는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자유문학상' '제2회 세계시인 대회상' '한국시인 협회상'을 수상했고 시집으로는 "하루만의 위안" "사랑이 가기 전에" "석아화" "기다리는 사람들" "딸의 파이프" 외에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마산 인터체인지      --고향에로 가는 길   자, 그럼   하는 손을, 짙은 안개가 잡는다.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산을 넘는   저수지 마을   삭지 않는 시간, 삭은 산천을 돈다.   등은, 덴마아크의 여인처럼   푸른 눈 긴 다리   안개 속에 초조히   떨어져 서 있고   허허 들판   작별을 하면   말도 무용해진다.   어느 새 이곳   자, 그럼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안개로 가는 길      --경인 하이웨이에서   안개로 가는 사람   안개에서 오는 사람   인간의 목소리 잠적한   이 새벽   이 적막   휙휙   곧은 속도로 달리는 생명   창 밖은   마냥 안개다   한 마디로 말해서   긴 내 이 인생은 무엇이었던가   지금 말할 수 없는 이 해답   아직 안개로 가는 길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면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면 저렇께   생각할 수도 없는 세상에서   무엇 때문에   이 길로 왔을까   피하여, 피하여   비켜서 온 자리   사방이 내 것이 아닌 자리   빈 소유에 떠서   안개로 가는 길   안개에서 오는 길   휙휙   곧은 속도로 엇갈리는 생명   창 밖은   마냥 안개다.      하루만의 위안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누구던가   그 사람도 잊어버려야만 한다   온 생명은 모다 흘러가는 강이 있고   흘러가는 한 줄기 속에   나도 또 하나 작은   비둘기 가슴을 비벼대며 밀려 가야만 한다   눈을 감으면   나와 가까운 어느 자리에   싸리꽃이 마구 핀 잔디밭이 있어   잔디밭에 누워   마지막 하늘을 바라보는 내 그날이 온다   그날이 잇어 나는 살고   그날을 위하여 바쳐 온 마지막 내 소리를 쌩각한다   그날이 오면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시방은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결혼식장   여자들이 모다 빨간 입술들을   긴목 위에 앉혀 놓고   만국기 아래 상품들처럼 나열한다   남자들은 모다 도야지 같은 입술들을 다물고   햇볕을 두려워하는 짐승처럼   목을 숙인 채 여자들을 마주 본다   신부와 신랑은 혼야의 예절을 생각하고   귀빈들은 축사를 길게 하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한다   크레오파트라보다 호사한 신부와   와이싸스가 커서 거북한 신랑을 위하여   빨간 입술들도   도야지 입술들도   금속제 훈장을 다는 가슴에   종이꽃들을 얌전히 달고   시인이라는 사람이   소용이 없는 시를 읽는다   이미 나에겐 그리운 것은 없지만   과자를 흘리는 아이들에 끼어   만국기 속에   남미제국의 소식을 듣고 싶어 한다.      분수   분수야 쏟아져 나오는 정열을 그대로 뿜어도   소용이 없다   차라리 따스한 입김을 다오   저녁 노을에 무지개 서는   섬세한 네 수줍은 모습을 보여라   향수는 없어도 좋다   긴 치맛자락 그대로의 냄새를 피워라   빨간 옷고름이 노을 바람에   다시 보고 싶은 편지 조각같이 휘날리는   아 네 모습 그대로 있어 다오   분수야 네게 어울리는 잔디밭에 영 있어라   너는 외로운 사랑을 부르지 않아도 좋다   외로움은 언제나 나에게 주어라   노을 바람이 스치기만 해도   수줍어 하네 옷고름 같은 그리운 것은   나에게 주어라   하두 그리워서 네 곁을 소리없이   오고가는 그 마음을 영 나에게 주어라   분수야 쏟아져 나오는 정열이란 말라   차라리 부끄러워 하는 입김을 내어   영 그리움일랑 나에게 다오     조상기. 1938년 충북 진천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그는 '신년대' 동인이며 동덕여고 교사로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밀림 이야기) (겨울 이야기) (눈 오는 날) 등이 있다.      눈 오는 날   오늘도 내 어린 동심은   눈꽃 핀 가지 위에서 떤다.   어둑한 종소리에   귀 밝은 내 사랑은   측백나무 그늘에 앉아 있더니   가랑잎 밟고 오던 기억이 아파   바람의 깃을 접어   등피를 닦는다.   얼마나 큰 무지개를 잡으면   바람의 뒷길을 따라갈 수 있을까.   여름내 무성했던   우리들 꽃밭에 가서   동그라미 음계를 그리고 오는   내 새끼 비둘기들이여.   오늘도 내 어린 동심은   눈꽃 핀 가지 위에서 떤다.     조종현. 1906년 전남 고흥 출생. 본명은 용제. 호는 천운. 일본 추우오오 불교 연꾸원 졸업. '조선일보'에 작품을 발표하면써 문단에 데뷔. 주요 작품으로 (천애의 고아) (파고다의 염원) (가을비 가을바람) 등이 있다.      나도 푯말이 되어 살고 싶다   1   나도 푯말이 되어 너랑 살고 싶다.   별 총총 밤이 들면 노래하고 춤도 추랴   철 따라 멧새랑 같이 골 속 골 속 울어도 보고.   2   오월의 창공보다 새파란 그 눈동자   고함은 청천벽력 적군을 꿉질렀다.   방울새 손가락에 건 채 돌격하던 그 용자   3   네가 내가 되어 이렇게 와야 할 걸,   내가 네가 되어 이렇게 서야 할 걸,   강물이 치흐른다손 이것이 웬 말인가.      의상대 해돋이   천지 개벽이야!   눈이 번쩍 뜨인다.   불덩이가 솟는구나.   가슴이 용솟음친다.   여보게,   저것 좀 보아!   후끈하지 않는가.     조태일. 1941년 전남 곡성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식칼론" "국토" "가거도" 등의 시집을 갖고 있는 그는 한국인의 정서를 바탕으로 살아 있는 시, 움직이는 시를 주로 발표하였다. 세상과 인간을 따스하게 포용하려는 휴머니즘이 돋보이는 시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짝지어주기   아무래도 우리는   짝짓는 데 나서야겠읍니다.   마음 하나로   세상을 굴복시키기 어려울지라도   그 마음 하나   짝지어 주고 싶은 그 마음 하나   갖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가령, 이런 짝지어주기는 어떨까요?   모래와 물을 짝지어주는 일 말입니다.   바람과 나뭇잎을 짝지어주는 일 말입니다.   데모와 진압을 짝지어주는 일 말입니다.   펜과 잉크를 짝지어주는 일 말입니다.   여당과 야당이 짝지어 있는 것 말고   남자와 여자가 짝지어 있는 것 말고   옷과 살결이 짝지어 있는 것 말고   입술과 거짓말을 떼어내어   귀와 침묵을 떼어내어   국토와 휴전선을 떼어내어   이남과 이북을 짝지어주는 일 말입니다.   마음과 마음을 짝지어주는 일 말입니다.      수수께끼   질문은 다소 강압적이겠지만   답변은 자유로와야 합니다.   질문은 다소 상상적이겠지만   답변은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첫번째 문제 풀어볼까.   태양에 붙어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낮?   두번째 문제 풀어볼까.   달에 붙어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밤?   세번째 문제 풀어볼까?   섬에 달린 것이 무엇인가요?   육지?   네번째 문제 풀어볼까.   풀잎에 축 처져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땅덩어리?   다섯뻔째 문제 풀어볼까?   말소리에 붙어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사람?   여섯번째 문제 풀어볼까?   팔다리에 붙어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몸뚱어리?   일곱번째 문제 풀어볼까?   대왕에 붙어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백성?   아이고 정신없어라.     주문돈. 1940년 경남 함양 출생. 성균관대 국문과 졸업.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시집 "잎핀 날에" "둘 혹은 하나"가 있고 (현대시) 창간 동인으로 활약했다. 현재 태평양화학에 재직중.      귀뚜라미   어둠이 깃들면서 들리게 말게 숨죽여 울기 시작한 귀뚜라미가 어둠이 짙어져서는 드러내놓고 목청껏 울어 좁은 뜨락을 온통 울음으로 채우고 말았다. 새벽녘에는 뜨락에 가득한 제 울음에 빠져 허우적거리더니 다급해져서야 이웃을 부르고 또 불렀으나 소식이 없자 게워놓았던 제 울음을 담장 밖으로 퍼내느라고 심하는 것을 지켜보던 시간이 눈흘기며 지나가 버린다.     천상병. 1930년 경남 창원 출생. "문예"지에 시 (강물) (갈매기) 등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그의 시는 어린 아이와 같은 천진스러운 서정을 바탕으로 한 신고전주의 경향을 특징으로 보여주고 있다. 시집 "새" "주막에서"가 있다.      주막에서      --도끼가 내 목을 찍은 그 훨씬 전에 내 안에서 죽어간 즐거운 아기를 '쟝주네'   골목에서 골목으로   거기 조그만 주막집.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저녁 어스름은 가난한 시인의 보람인 것을...   흐리멍텅한 눈에 이 세상은 다만   순하디 순하기 마련인가,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몽롱하다는 것은 장엄하다.   골목 어귀에서 서툰 걸음인 양   밤은 깊어 가는데,   할머니 등 뒤에   고향의 뒷산이 솟고   그 산에는   철도 아닌 한겨울의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 산 너머   쓸쓸한 성황당 꼭대기,   그 꼭대기 위에서   함빡 눈을 맞으며, 아기들이 놀고 있다.   아기들은 매우 즐거운 모양이다.   한없이 즐거운 모양이다.      새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무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천양희. 1942년 부산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현대문학"을 통하여 데뷔. 이후 침묵하다가 자기응시의 처절한 고뇌를 노래한 시집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을 출간했다. 그의 시 세계는 느끼고 생각한 것을 진실하게 표현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침묵을 깨고 현재 시작에 전념하고 있따.      꿈에 대하여   눈을 감아도 사방무늬로 번져 보이고   버리고 버려도 그림자처럼 따라오니   그대의 집요한 자유자재   동서남북 가로놓여   너의 푸념 나의 푸념 머리 들 곳 없다   벌집처럼 들쑤신 고통   한 시대 벌겋게 쏘고 지나갈 때까지   물불 안 가리고   여러번 죽고   여러번 태어나   평생 못 버릴 불치의 풍경 하나   어른 된 오늘까지 우릴 따라와서   우리와 함께 지병이 되어 앓고 있다.      신이 내게 묻는다면   무너진 흙더미 속에서   풀이 돋는다   신이 내게 묻는다면   오늘 내가 무슨 말을 하리   저 미물보다   더 무엇이라고 말을 하리   다만 부끄러워   때때로 울었노라   대답할 수 있을 뿐   풀은 자라   푸른 숲을 이루고   조용히 그늘을 만들 때   말만 많은 우리   뼈대도 없이 볼품도 없이   키만 커간다   신이 내게 묻는다면   오늘 내가 무슨 말을 하리   다만 부끄러워    때때로 울었노라   대답할 수 있을 뿐.     최원규. 1933년 충남 공주 출생. 충남대 국문과와 동대학원 수료. "자유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하여 '충남문화상'(1967)을 수상했다. '60년대 사화집' 동인으로 시집에 "겨울가곡" "순간의 여울" "자음송" 등이 있으며 현재 충남대학 교수로 있다.      달   그대 보이지 않는 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수미산이 가려있기 때문이리.   그대 미소가 보이지 않는 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잎새에 가려있기 때문이리.   그대 목소리가 들리지 않은 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바람 속에 묻혀있기 때문이리.   아 두고온 얼굴을 찾아   하늘로 솟구치는 몸부림   그대 가슴에 뚫린 빈 항아리에   담고 담는 반복이리.     최재형. 1917년 평남 안주 출생. 일본 코마자와대학 인문과 졸업.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문단에 데뷔한 후 침묵하다가 다시 시작에 전념. 현재 경제일보 공무국장으로 있다.      양지   양지쪽에 앉으면   인생이 행결 따뜻해 온다.   어렸을 때 헐벗고 배고파도   항상 즐겁던 양지   나는 혼자   오랫동안   그늘로 쫓기어 왔다.   여수는 절로   녹아 내리고   차라리   울수도 없는   이 막다른 골목에서   눈부신 햇살만이   옛날의 인정이었다.   외로운 이여 오라.   ...   와서 잠깐   해바라기 하며   쉬어서 가라.   이렇게   양지쪽에 앉으면   세상이 행결 정다와진다.     최하림. 1939년 전남 목포 출생. '산문시대' 동인을 거쳐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문단에 데뷔했다. 시집 "우리들을 위하여" "작은 마을에서"와 김수영 평전 "자유인의 초상" 미술 산문집 "한국인의 멋" 등이 있다. 현재 서울예술 전문대에서 시 강의를 하고 있다.      시   눈이 지천으로 오는 밤에 시를 써야지   머리를 눈에 박고 써야지   눈 속을 걸어가는 사내 몇   불을 찾는 사내 몇   겨울까마귀 몇   죽은 자들도 그런 밤엔 불을 찾아   몇날이고 몇밤이고 언덕을 넘겠지 그들의 목소리   벌판을 헤매겠지. 그들의 불을 찾으러? 꿈꾸는 불? 그 불 속에   밤차가 달리고 겨울까마귀들이 공중을 떠돌겠지   --겨울까마귀가 중부 지방엔 없어요, 여보.   중부지방이 아니야, 내가 말하는 건...   나는 그 살도 뼈다귀도 안다 바람이 그들 소리로   하늘을 울리는 걸 안다 당신도 그 소리를 알았으면 좋겠어   아이들도 이웃도 그 나라의 바다쪽으로   검은 머리를 빗겨내리며   붉은 불빛 속에서 마음을 드러내고   어머님이 나를 보시듯, 그래 어머님이...   오오 떠오르는 어머님이여   그날 저녁도 우리는 어둔 거리를 헤맸읍니다.   세종로 우체국 옆 담뱃가게에서 솔을 한갑 사고, 거스름돈을 받고, 어느 술집으로 들어갈까 망설이면서 거리 끝까지 걸어갔댔읍니다.      산   바람으로 천둥으로 또 설움으로 가야지   우리 뒤에 있고 지금은 앞에 있는 저   검은 산 붉고 푸른 산   옥수수잎이 하늘을 울리는 밭머리   몇날 며칠을 두고 소란스러운 마을을 지나서   시도 버리고 서쪽으로   뛰어간 사람도 버리고 썩어문드러진 천둥이   한꺼번에 쩌르릉쩌르릉 천지를 울리며   사람들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밤이 오기 전에   산 너머 구름 너머 그림자보다 빠르고 쓸쓸하게 가야지     한광구. 1944년 경기 안성 출생. 연세대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 "심상"을 통해 문단에 데뷔하여 시집으로 "이 땅에 비오는 날은" "찾아가는 자의 노래" 등 다수의 작품이 있다. 현재 추계예술대학에 재직하고 있다.      심지 하나로 녹으면서   말씀의 우유였으면 합니다.   조용한 축복이었으면 합니다.   따스한 입김이었으면 합니다.   마른 바람만 질주해오고   흔들리는 윤곽뿐입니다.   몇 번씩 마음으로 넘어지는   검은 그림자 넘실거립니다.   죽어가는 피톨들은 앙금으로 가라앉아   굳어져 갑니다.   부서지는 낱말들이 시나브로 떨어져   금속성 울림만 시끄럽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심지 하나로 녹으면서 가라앉는   지금은 중년,   하늘엔 구름 가고,   밤새 기울이던 술잔도 덧없이 넘어지고   분노하거나 슬퍼하던 일들도 하얗게 바랬으니   살아가는 일이 경건한 아침입니다.     한기팔. 1937년 제주 서귀포 출생. "심상" 신인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데뷔(1975)한 그는 정제된 언어로 향토적 서정을 노래한 시인이다. 시집으로 "서귀포" "불을 지피며"가 있고 '제주도 문화상'을 수상했다.      가을비   비 뿌려   마음 고요해지는구나.   고요한 마음이   하느님 나라 빗소리를 몰고 오는구나.   무덤가 하얀 모래밭,   깃털 고운 물총새   그의 발목이 연한 분홍빛이다.   오오!   누구라 말하랴.   내 마음 그리 쓰임이   빗소리로 말하고   빗소리로 들리나니   내가 사는 땅,   잠 자는 이의 젖은 눈꺼풀 사이   빗소리 알 수 없는 등불을 달고   깊은 잠 깨우고.     한무학. 1925년 일본 릿꼬오대학 철학과 수업. 1950년대 초에 문단에 데뷔한 그는 상황적인 현실의식을 비운율적인 수법으로 다루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재미중. 씨집으로 "시민은 목하 입원 중"이 있다.      어차피 못 부를 바에야   북으로 훈풍 따라   찬 개울 천이나 건너고,   남으로 아지랭이 따라   시린 산봉우리 천이나 넘어   봄이 먼 고향 산천에   연분홍 봄 심어 놓고는   말없이 훌쩍 떠나버리는 꽃   그것은 진정 진달래꽃인데,   여기 진달래를 진달래라고 못 부른다 해서   꽃 있는 마음에   어찌 꽃마중이야 못 나가랴.   어차피 못 부를 바에야   오는 마음 가는 옷섶에   검은 상장이나 달고 가게 해 주려무나.   형제사 있건 없건,   이웃 있어 내가 있고   내가 있어 이웃 있는 좁은 노정 위에   샘물모양 가늘게나마 솟아   36도 5부의 체온으로 이어지는 다리   그것은 진정 동무의 정인데,   여기, 동무를 동무라고 못 부르고서야   그리워 나눈 술인들   어찌 정 되어 돌아오랴   어차피 못 부를 바에야   오는 마음 가는 옷섶에   검은 상장이나 달고 가게 해 주려무나.   이름이야 옛 것이건 새 것이건,   그 이름 뒤에 두고, 살아서 유랑 천 리   그 이름 옷섶에 싸 안고 죽어서 귀향 천 리   그러면서 긴 세월 울고 웃고   그러면서 아린 세월 잃고 찾은 우리의 땅   그것은 진정 조선인데   여기 조선을 조선이라고 못 부른다 해서   석별의 인사 한 마디 없이   어찌 값없이 아무데나 넘겨야 주랴   어차피 못 부를 바에야   오는 마음 가는 옷섶에   검은 상장이나 달고 가게 해 주려무나.     함윤수. 1915년 함북 경성 출생. 동인지 "맥"에 (앵무새)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한 그는 상징적인 시 세계에 현실적인 비판 정신을 가미한 시풍을 특색으로 갖고 있다. 시집으로 "사향묘" "함윤수 시선" 등이 있다.      수선화   슬픈 기억을 간직한 수선화   싸늘한 애수 떠도는 적막한 침실.   구원의 요람을 찾아 헤매는   꿈의 외로움이여,   창백한 무명지를 장식한 진주 더욱 푸르고   영겁의 고독은 찢어진 가슴에 낙엽처럼 쌓이다.     허만하. 1932년 대구 출생. 경북의대 졸업 및 동대학원에서 병리학 전공, 의학박사. "문학예술"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했다. 시집으로 "해조조"를 출간(1969)했다.      꽃의 구도   당신은 빈 컵의 중심에   당신의 가장 아름다운   장미를 한 송이 꽂았다.   나는 그것을 당신의   피라고 생각했다.   한때는 허무가 가득했던 용적을   이제는 눈부신   화약이 차지한다.   꽃은 씨앗을 감추고 있지만   꽃은 이미 뿌리가 없다.   꽃은 죽음의 조형이다.   스스로가 감추고 있는 씨앗처럼    허무는 꽃을 감추고 있다.   죽음은 종자처럼 구체적이따.   빈 컵에 자리잡은 꽃의 위치가   묵시적인 창의 중심이다.   당신은 빈 컵에 꽃을 꽂았지만    그것은 적막한 바람의 언저리다.   나는 안다.   죽음을 배경으로 했을 때   비로소 한 송이 꽃은 산다.      데드마스크   바다 위에서 눈은   부드럽게 죽는다.   죽음을 덮으려   눈은 내리지만   눈은 다시   부드럽게 죽는다.   부드럽게 감겨 있는    눈시울의 바다.   얼굴 위에 쌓인   눈의 무게는   보지 못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허소라. 1936년 전북 진안 출생. 전북대와 고려대를 거쳐 경희대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 현재 군산대학 국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자유문학"지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1959년)한 이래 한국 문인협회, 국제 펜클럽회원으로 활동. 시집으로는 "풍장"이 있고 산문집 "흐느끼는 목마" "파도에게 묻는 말" 논서로 "한국현대작가연구"가 있으며 '전북문화상'을 수상했다.      10월의 노래   가늘고 긴 여름 노래 끝나고   이제 세상은 거대한 지휘봉,   사랑의 비밀구좌인 당신 앞에서   옷을 벗기 시작하였읍니다.   은박지에 새겨진 악보   한 음계씩 창을 닦으며 오를 때   어디선가 쿵, 울리는 당신의 기침   모든 그을음은 투명으로 빛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곁으로   가이사이 것은 가이사의 창고로   나뉘고 있었읍니다.   비로소 끝이 보이는 시간   어차피 날지 못하는 닭들은   그들의 자유를 알로 밀어내고   옷을 벗은 우리는   제 몸의 가장 단단한 곳에   피리구멍을 내고   가을의 노래를 불렀읍니다.   지은 죄 벗으려고   칼날 되어 불렀읍니다.     허영자. 1938년 경남 함양 출생. 숙명여대 국문과 및 동대학언 졸업. "현대문학"으로 데뷔했으며 '청미' 동인으로 연가풍위 그윽하고 섬세한 정적 세계를 아름답게 형상화시켜 독자들에게 호소력이 강한 시들을 보여 주고 있다. '제4회 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 시집으로 "가슴엔듯 눈엔듯" "친전" "어여쁨이야 어찌 꽃뿐이랴"와 수필집 "한 송이 꽃도 당신 뜻으로"가 있다.      백자   불길 속에   머리칼 풀면   사내를 호리는   야차 계집 같은   그 불길 다스려 다스려   슬프도록 소슬한 몸은   현신하옵신 관음보살님   --이조 항아리      감   이 맑은 까을 했살 속에선   누구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나이 먹고 철이 들 수밖에는   젊은 날   떫고 비리던 내 피도   저 붉은 단감으로 익을 수밖에는--      봄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시장끼   죽은 나무도 생피붙을 듯   죄스런 봄날   피여, 피여   파아랗게 얼어 붙은   물고기의 피,   새로 한 번만   몸을 풀어라   새로 한 번만   미쳐라 달쳐라.      임   그윽히   굽어보는 눈길   맑은 날은   맑은 속에   비오며는   비 속에   이슬에   꽃에   샛별에...   임아   이   온 삼라만상에   나는   그대를 본다.     허형만. 1945년 전남 순천 출생. 중앙대 국문과 및 숭전대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월간문학"으로 데뷔하여 '목요시' 동인으로 활동중이다. 시집으로 "청명" "풀잎이 하느님에게"가 있으며, 현재 목포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일상적인 사물을 대상으로 다루되 전혀 난해성의 부담을 주거나 생경한 표현 따위로 곤혹감을 주지 않는 시를 쓰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1월의 아침   세월의 머언 길목을 돌아   한 줄기 빛나는 등불을 밝힌   우리의 사랑은 어디쯤 오고 있는가.   아직은 햇살도 떨리는 1월의 아침   뜨락의 풀 뿌리는 찬 바람에 숨을 죽이고   저 푸른 하늘엔 새 한 마리 날지 않는다.   살아갈수록 사람이 그리웁고   사람이 그리울수록 더욱 외로와지는   우리네 겨울의 가슴,   나처럼 가난한 자   냉수 한 사발로 목을 축이고   깨끗해진 두 눈으로   신앙같은 무등이나 마주하지만   나보다 가난한 자는   오히려 이 아침을 만나 보겠구나.   오늘은 무등산 허리에 눈빛이 고와   춘설차 새잎 돋는 소리로   귀가 시려운 1월의 아침,   우리의 기인 기다림은 끝나리라   어머니의 젖가슴같은 땅도 풀리고   꽃잎 뜨는 강물도 새로이 흐르리라.   우리의 풀잎은 풀잎끼리 서로 볼을 부비리라.   아아, 차고도 깨끗한 바람이 분다.   무등산은 한결 가즉해 보이고   한 줄기 사랑의 등불이 흔들리고 있다.     홍신선. 1944년 경기 화성 출생. 동국대학교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시문학"을 통해 데뷔했으며 시집으로 "서벽당집" "겨울섬" "우리 이웃 사람들"이 있다. 변화와 함께 직접적인 정황묘사, 감각의 해부, 극적 독백의 독특한 시세계를 갖고 있는 그는 현재 안동대학에 재직하고 있다.      겨울섬   대교를 건넜다. 피나민 몇이 과거 버린 채 살고 있다   마을 밖에는   동체뿐인 새우젖 배들   빈 돛대 몇이 겨울 한기에 가까스로   등받치고 기다리고   물빠진 갯고랑, 삭은 시간들 삭은 물에 이어져 잠겨 있다.   일직선,버려진 마음들로 쌓아올린 방파제까지   나문재나무들 줄지어 나가 있다.   뻘에 두발 내리고 붙어 있는 목에 힘준 저들.   쓸리지 않으면   개흙으로 삭는 일   더러 쓸리면   닻으로 일생 내리는 저들의 일.   힘 힘 풀어놓고   공판장 매표소 회집들로 선착장에 힘 풀어놓고   두어걸음 비켜서서   말채나무 오그라든 두 손에   저보다 큰 겨울하늘 든 채 있다.   사는 일이 사는 일로 투명하게 보이고 있다.      산에 오르며   탕! 앞산에서 총소리가 울렸읍니다. 몰면서 앞산에서 어느새 몰이꾼이 된 소리들이 골짜기를 뒤지며 올라갔읍니다. 겨울이라 살아있는 것은 없었읍니다. 지나간 자리에 추위나 잔뜩 부둥켜 안고 서 있던 나무들이 그 시린 귀들이 풀썩풀썩 떨어져 굴렀읍니다.   서로의 어깨를 찍어 누르며 죽은 칡넝쿨이나 마른 새꼬치풀 시엉풀들이 무슨 흔적처럼 남아 있었읍니다. 망가진 몸짓, 망가진 정신만 가지고 여기저기 남아 있었읍니다. 무서움들이 정체 모를 사람들처럼 나타나곤 했읍니다. 가다가 어느 골짜기에선 소문없이 무서움이 된 19**년도 만났읍니다. 갈수록 무서움이 깊어지고 보이는 것은 없었읍니다.   보이는 것은 없었읍니다. 이 보이지 않는 일들만이 기침을 컥컥하며 판을 치고 있었읍니다. 마음 내버린 눈 코 내버린 때까치 새들이, 이상한 생들이 망가져 떨어져 있었읍니다. 맨 위에는 골짜기를 만들고 올라온 능성이만이 오똑 앉아 있었읍니다. 위는 위대로 가려서 보이지 않았읍니다. 보이지 않는 일, 무서움 속을 우리는 다시 걸어 내려왔읍니다.     홍윤숙. 1925년 평북 정주 출생. 호는 여사. "문예신보" 예술평론의 추천을 받아 데뷔. '시극 동인회' 동인으로 사물이나 관념을 통해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정감을 억제하는 것이 이 시인의 시풍이다. '제7회 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했으며 시집으로 "여사 시집" "풍차" "장식론" "일상의 시계소리" 등과 수필집이 있다.      장식론   여자가   장식을 하나씩   달아가는 것은   젊음을 하나씩   잃어가는 때문이다.   (씻은 무우) 같다든가   (뛰는 생선) 같다든가   (진부한 말이지만)   그렇게 젊은 날은   젊음 하나 만도   빛나는 장식이 아니겠는가   때로 거리를 걷다 보면   쇼우윈도우에 비치는   내 초라한 모습에   사뭇 놀란다.   어디에   그 빛나는 장식들을   잃고 왔을까   이 피에로 같은 생활의 의상들은   무엇일까   안개같은 피곤으로   문을 연다   피하듯 숨어 보는   거리의 꽃집   젊음은 거기에도   만발하여 있고   꽃은 그대로가   눈부신 장식이었다.   꽃을 더듬는   내 흰 손이 물기 없이 마른   한장의 낙엽처럼 쓸쓸해져   돌아와   몰래   진보라 고운   자수정 반지 하나 끼워   달래어 본다.      풍차   이제는 너 아닌 누구라도   함께 떠나야 할 마지막 시간인데   나는 아직 물풀같이 떠도는   기녀의 마음일까   그리움에 맴도는 나뭇잎 하나   붉은 색지처럼 손끝에 돌리며   멋없이 멋없이 배회하는 날   외로움이 진하면 거울을 보고   거울 속 눈물에 번져나는   희미한 얼굴   붉은 연지꽃처럼 진하게 칠하며   웃어도 보는   뉘라서 알까만 배율의 양심   보랏빛 새옷이랑 갈아 입고   검은 머리 꽃이랑 꽂고   나비 같은 마음으로 나서 보건만   짐짓 갈 곳이 없는...   너 없는 이 거리 어디로도   갈 곳이 없는   내 마음은 부칠 데 없는   가랑잎 엽서 한 장   바람에 돌고 도는 장난감 풍차   이제는 너 아닌 누구라도   함께 떠나야 할 마지막 시간인데   나는 아직 물풀같이 떠도는   기녀의 마음일까   붉은 양관 긴 층계를 내리면서   문득 내 나이 이미 젊지 않음을   생각하는 날     황금찬. 1918년 강원 속초 출생. "문예"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아 데뷔했으며 초기에는 황토색이 짙은 시를, 점차 현실성이 강해지면서 상징적 표현 수법을 쓴 그는 '청포도' '시단' 동인이다. '시문학상' '월탄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시집 "현장" "5월의 나무" "분수와 나비" "한깡" 외에도 많은 저서를 갖고 있다.      보리고개   보리고개 밑에서   아이가 울고 있다.   아이가 흘리는 눈물 속에   할머니가 울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할아버지가 울고 있다.   아버지의 눈물, 외할머니의 흐느낌   어머니가 울고 있다.   내가 울고 있다.   소년은 죽은 동생의 마지막   눈물을 생각한다.   에베레스트는 아시아의 산이다.   몽불랑은 유럽,   와라스카는 아메리카의 것,   아프리카엔 킬리만자로가 있다.   이 산들은 거리가 멀다.   우리는 누구도 뼈를 묻지 않았다.   그런떼 코리어의 보리고개는 높다.   한없이 높아서 많은 사람이 울며 갔다.   --굶으며 넘었다.   얼마나한 사람은 죽어서 못 넘었다.   코리어의 보리고개,   안 넘을 수 없는 운명의 해발 구천 미터   소년은 풀밭에 누웠다.   하늘은 한 알의 보리알,   지금 내 앞에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촛불   촛불!   심지에 불을 붙이면   그 때부터 종말을 향해   출발하는 것이다.   어두움을 밀어내는   그 연약한 저항   누구의 정신을 배운   조용한 희생일까.   존재할 때   이미 마련되어 있는   시간의 극한을   모르고 있어   운명이다.   한정된 시간을   불태워 가도   슬퍼하지 않고   순간을 꽃으로 향유하며   춤추는 촛불.     황동규.1938년 서울 출생. 서울대 영문과 대학원 졸업. 에딘버러대학 대학원을 수료. "현대문학" 추천과 동인지 "사계"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현대문학상'을 수상(1968)했고 "어떤 개인날" "비가" "삼남에 내리는 눈"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와 문학선 "풍장"이 있다.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도 동요함이 없이 지식인의 현실 인식을 엄격하게 통제된 서정성의 틀로 추구하는 시인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그는 현재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십월   1   내 사랑하리 시월의 강물을   석양이 짙어가는 푸른 모래톱   지난날 가졌던 슬픈 여정들을, 아득한 기대를   이제는 홀로 남아 따뜻이 기다리리.   2   지난 이야기를 해서 무엇하리   두견이 우는 숲새를 건너서   낮은 돌담에 흐르는 달빛 속에   울리던 목탁소리 목탁소리 목탁소리   3   며칠내 바람이 싸늘이 불고   오늘은 안개 속에 찬 비가 뿌렸다   가을비 소리에 온 마음 끌림은   잊고 싶은 약속을 못다한 탓이리.   4   아늬,   석등 곁에   밤 물소리   누이야 무엇하나   달이 지는데   밀물지는 고물에서   눈을 감듯이   바람은 사면에서 빈 가지를   하나 남은 사랑처럼 흔들고 있다.   아늬,   석등 곁에   밤 물소리.   5   낡은 단청 밖으론 바람이 이는 가을날, 잔잔히 다가오는 저녁 어스름. 며칠내 며칠내 낙엽이 내리고 혹 싸늘히 비가 뿌려와서... 절 뒷울 안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 보면 낙엽지는 느릅나무며 우물이며 초가집이며 그리고 방금 커지기 시작하는 등불들이 어스름 속에서 알 수 없는 어느 하나에로 합쳐짐을 나는 본다.   6   창 밖에 가득히 낙엽이 내리는 저녁   나는 끊임없이 불빛이 그리웠다   바람은 조금도 불지를 않고 등불들은 다만 그 숱한 향수와 같은 것에 싸여 가고 주위는 자꾸만 어두워 갔다   이제 나도 한 잎의 낙엽으로 좀 더 낮은 곳으로, 내리고 싶다.      즐거운 편지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 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자전거 유모차 리어카아의 바퀴   마차의 바퀴   굴러가는 바퀴도 굴리고 싶어진다   가쁜 언덕길을 오를 때   자동차 바퀴도 굴리고 싶어진다   길 속에 모든 것이 안 보이고   보인다, 망가뜨리고 싶은 어린날도 안 보이고   보이고, 서로 다른 새 떼 지저귀던 앞뒷숲이   보이고 안 보인다, 숨찬 공화국이 안 보이고   보인다, 굴리고 싶어진다, 노점에 쌓여 있는 귤,   옹기점에 엎어져 있는 항아리, 둥그렇게 누워 있는 사람들,   모든 것 떨어지기 전에 한 번 날으는 길 위로.      조그만 사랑 노래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 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환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 다니는   몇 송이 눈.     황명. 1931년 경남 창녕 출생. 동국대학 국문과 졸업.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많은 작품을 발표한 그는 생활 주변에서 소재를 얻는 지성적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휘문고 교사로 있다.      분수   1   오죽하면 하늘을 우러러 스스로의   노여움을 자제하는 저   묵시의 입김은   얼마나 거룩한   종교 같은 것이라 할까.   2   일찍 하늘로 승화하지 못한   먼 태고인 적 우리   어버이들의 눈물이 마침내   영원과 맞서는 자리에   찬란한 무지개를 피우듯   아기찬 우리들의   의욕으로 되살아 오르는가.   3   언제고 한 번은   끝없는 강물을 이루고 싶은 마음에서   우러러 오던   하늘이여,   해여,   달이여,   별이여,   지금은 모두가   나에게로 어울려 드는   이 창업의 경이 같은   아 청청히 나의 가슴을   굽이치는 강물아     황명걸. 1935년 평남 평양 출생. "자유문학"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한 그는 '현실' 동인으로 서민적인 소재를 평이하게 노래하는 시인이다. 시집으로 "한국의 아이" 외에 작품 다수를 발표했다.      나의 손   서른 하고도 넷   예수의 수명인 나이에   아직 철들지 못한 가장   몸은 약해빠졌고   마음은 모질지 못한데다   손까지 희고 가늘다   부끄러워라   어쩌다 아내보다 고운 나의 손이여   그 손으로   한 조각 목문패 한 뼘 땅이 없음을 개탄할 수 없다   오직 굵은 매듭에   소나무 등걸 같은 피부의   아내의 손을 찬양해야 한다   그리고 길 모퉁이   구두수선장이의 갈라지고 굳은 살 박힌 손을   닯아야 한다 닮아야 한다      한국의 아이   배가 고파 우는 아이야   울다 지쳐 잠든 아이야   장남감이 없어 보채는 아이야   보채다 돌맹이를 가지고 노는 아이야   네 어미는 젖이 모자랐단다   네 아비는 벌이가 시원치 않았단다   네가 철나기 전 두 분은 가시면서   어미는 눈물과 한숨을   아비는 매질과 술주정을   벼 몇 섬의 빚과 함께 남겼단다   뼈공이 부숴지게 일은 했으나   워낙 못사는 나라의 백성이라서   하지만 그럴수록 아이야   사채기만 가리지 않으면   성별을 알 수 없는 아이야   누더기옷의 아이야   계집아이는 어미를 닮지 말고   사내아이는 아비를 닮지 말고   못 사는 나라에 태어난 죄만으로   보다 더 뼈골이 부숴지게 일을 해서   멀지 않아 네가 어른이 될 때에는   잘 사는 나라를 이룩하도록 하여라   멀지 않아 네가 어른이 될 때에는   잘 사는 나라를 이룩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명심할 것은 아이야   일가친척 하나 없는 아이야   혈혈단신의 아이야   너무 외롭다고 해서   숙부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   외숙이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   그 누구도 믿지 마라   가지고 노는 돌멩이로   미운 놈의 이마빡을 깔 줄 알고   정교한 조각을 쪼올 줄 알고   하나의 성을 쌓아 올리도록 하여라   맑은 눈빛의 아이야   빛나는 눈빛의 아이야   불타는 눈빛의 아이야     황선하. 1931년 경북 월성 출생. 마산대 국문과 졸업. "현대문학"에서 시 (밤)이 추천된 후 시작활동을 한 그는 과념적인 경향의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진해시문학연구회'를 주관하고 있으며 현재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중이다.      아버지의 연가   잠 안 오는 아홉 밤   괴로운 그리스도   멍든 늑골   궂은 비 내리고,   궂은 비 들고   동그맣게 미소짓는 무구한 햇살.   구구구   콩 먹는 사랑스런 비둘기 떼.   외론 마음 먹은 귀 트이고,   둥둥둥   아득한 지심 축제의 북소리,   울먹이며 춤추는 망각의 쥐꼬리들.   한 점 힌 구름 뜬   어머니의 하늘,   비비배배   종달새   아버지의 연가.     황윤헌. 1931년 서울 출생. 연세대 영문과 졸업. "문학예술"에 시가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한 그는 문명 비평적인 시선으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형성해 나가고 있는 시인이다. 한때 '현대시' 동인으로 활약했으며, 시집으로 "불의 변주"를 출간했다.      난파선    7.불의 변주   ... 기적은 아름다웠다.   노오란 빛을 퍼뜨리는 달이 뜨고   불꽃처럼 아편꽃처럼 헤일 수 없이 별이 뜨고 달이 뜨고   밤이 차가운 손끝에 머물렀다.   마른 잎을 모아 불을 피웠다.   차가운 손에서 불이 부활을 변주하듯 익사한 늙은 수부가 소생하였다는 전설이 되풀이 되고, 묘패가 없는 짙푸른 바닷 속에서 숱하게 신화를 조상하던 늙은 수부의 손이 파아란 불을 피우며 아득히 침몰했던 범선을 꽃보라치는 풍토를 변모시킨다.   늙은 비둘기를 추방한 땅   먼 하늘에서   분노에 찬 제신의 북소리가 울려오고   산과 숲과 벌건 바위가   무너져내리더라도   ... 기적은 눈부셨다.   짙은 꽃내 풍기는 도취 속에서   늙은 수부는 범선을 타는 꽃보라치는 풍토로 간다.   ...   불로 변신하는 마른 잎에 쪼이는   차가운 손이 부신 기적에 떨고   --늙은 수부는 깊은 잠속에 묻혀 버린다.   하얀 꽃가루가   소리도 없이 휴식을 밟고 흩어진다.   [출처] [펌] 한국의 애송시 (4)|작성자 수위
206    세계 거장들 명화 댓글:  조회:2436  추천:0  2015-02-13
세계적 화가들 명화   고갱 Paul Gauguin1848~1903) 원시(原始)의 세계를 찾아 나선 예술가 레오나르도 Leonardo da Vinci(1452~1519) 인류의 역사가 낳은 천재(天才) 고야 Francisco Goya1746~1828) 서민(庶民) 감정을 자유롭게 표출(表出) 렘브란트 Van Rijn Rembrandt(1606~1669) 영적(靈的) 세계를 표출(表出) 달리 Salvador Dali1904~1989) 무의식의 위력(威力)과 기상천외의 발상 로트렉 Taulouse Lautec(1864~1901) 작품을 통하여 인생(人生)의 이야기를 드가 Edgar Degas(1834~1917) 철저하게 집착하는 데상의 명수(名手) 루벤스 Pater Paul Rubens(1577~1640) 숭고한 통속성(通俗性)의 샘 라파엘로 Sanzio Raffaello(1483~1520) 르네상스 정점에 선 거장(巨匠) 루소 Rousseau, Henri1844~1910) 환상과 전설의 소박파(素朴派)   루오 Rouault - Henri1871~1958) 신(神)을 찬미한 현대의 단테 모딜리아니 Amedo Modigiani(1884~1920) 고독한 혼의소리와 관능미(官能美) 르노와르 Pierre A Renoir(1841~1919) 감각적(感覺的)인 즐거움의 경지(境地) 뭉크 Edvard Munch1863~1944) 생(生).사(死).애(愛).증(憎)에 넓은 공감대(共感帶) 마네 Edouard Manet1832~1883) 이상미(理想美)를 뒤엎은 생활속의 미 미로 Joan Miro(1893~1974) 꿈의 세계를 보인 초현실주의 (超現實主義) 화가 마티스 Matisse Hemi1869~1954) 정신성을 높여주는 선(線)과 리듬 미켈란젤로 Buonarroti Michelangelo(1475~1564) 조각적(彫刻的) 회화공간의 창조(創造) 모네 Claude Monet1840~1926) 빛 위주의 자연을 창조(創造) 밀레 Jean F. Milet1814~1875) 토속적(土俗的)인 방언(方言)으로 영원한 지평을   반고호 Vincent w. Gogh(1853~1891) 태양(太陽)과 해바라기에의 정염(情念) 위트릴로 Maurice Utrillo(1883~1955) 백색(白色)속에찌든 서민(庶民)의 감정 샤갈 Marc Chagall1887~1985) 혼(魂)의 고향(故鄕)을찾는 색채(色彩)의 대교향곡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i(1866~1944) 추상(抽象)창조의 선구자 세잔 Cezanne Paul1839~1906) 자연(自然)의 재현(再現)을 넘어서 쿠르베 Gustave Courbet(1819~1877) 초자연적(超自然的) 즐거움을 자신감(自信感) 넘치게... 쇠라 Georges Seurat1859~1891) 신인상파의 진로와 완성의 대변자 클레 Paul Klee(1879~1940) 태초(太初)의 형(型)을 찾아서 와토 Jean A. Watteau1684~1721) [격조높은 사랑]의 아취(雅趣) 피카소 Picesso, Pablo Ruizy(1881~1973) 마르지 않는 조형(造形)의 샘   [출처] [펌] 세계 거장 명작 모음 |작성자 수위
205    애송시선 3 댓글:  조회:3116  추천:0  2015-02-13
신예시인 48인선   감태준. 1947년 경남 마산 출생.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월간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한 그는 성급히 이해의 포우즈를 취하지 않음은 물론 정교하면서 침착한 언어로 도시민으로 편입된 지방 출신계층의 서민적 정서에 초점을 맞춘 시세계를 형성해 나가고 있는 시인으로 평을 받고 있다. 시집으로 "몸 바뀐 사람들"이 있다.      흔들릴 때마다 한 잔   포장술집에는 두 꾼이, 멀리 뒷산에는 단풍 쓴 나무들이 가을비에 흔들린다 흔들려, 흔들릴 때마다 독하게 한잔씩, 도무지 취하지 않는 막걸리에서 막걸리로, 소주에서 소주로 한 얼굴을 더 쓰고 다시 소주로, 꾼 옆에는 반쯤 죽은 주모가 죽은 참새를 굽고 있다 한놈은 너고 한놈은 나다, 접시 위에 차례로 놓이는 날개를 씹으며, 꾼 옆에도 꾼이 판 없이 떠도는 마음에 또 한잔, 젖은 담배에 몇 번이나 성냥불을 댕긴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포장 사이로 나간 길은 빗속에 흐늘흐늘 이리저리 풀리고, 풀린 꾼들은 빈 술병에도 얼키며 술집 밖으로 사라진다 가뭇한 연기처럼 사라져야 별 수 없이, 다만 다같이 풀리는 기쁨, 멀리 뒷산에는 문득 나무들이 손 쳐들고 일어서서 단풍을 털고 있다      사모곡   어머니는 죽어서 달이 되었다   바람에게도 가지 않고,   길 밖에도 가지 않고,   어머니는 달이 되어   나와 함께 긴 밤을 같이 걸었다.     강경화. 1951년 충남 공주 출생. 연세대와 동대학원 영문과를 졸업했다. '조선일보' 신춘문예와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한 그는 지나간 과거의 일들을 오늘의 어두움, 불안, 쓸쓸함, 슬픔의 모습으로 승화시킨 시 세계를 형성해 나가고 있는 여류시인. '성좌' 동인이며 시집 "늦가을 배추벌레의 노래"를 갖고 있다.      늦가을 배추벌레의 노래   서리내린 저 밭의 배추잎 끝에서   이제 나는 가을 하늘을 볼 테다.   추위가 몰려 오면 흙벽에   제 눈만한 창문을 내고   울며 울리는 사람들.   날 부르는 뜨거운 눈물이 안 보일지라도   이제 나는 꿈을 꿀 테다.   삽날이 밀려와   내 집 밑둥을 자르고   밤마다 흙더미 사이로 별이 보이면   내 사랑은 흐르는 한 줄기 강물   가을 빛도 남겨두고 떠나야 한다.   잘 있거라. 누런 들판아, 탱자나무야   속삭이는 낙엽소리와 연기 내음도 두고   캄캄한 땅 속에서   이제 나는 꿈을 꿀 테다.      풍경   이상하다. 어제 지나온 황혼이 다시 지평선에 걸려 어두움을 이루는 것은. 거기서 만났던 사람들, 죽어가는 사내들, 꽃과 새들이 오늘의 숲과 거리를 지나친다.   이상하다. 우리 손아귀에 잡힌 것은 모두 우리만큼 작아진다. 우리들의 두려움만큼, 인색한만큼.   비명을 지르며 오늘 숲에서 어제의 새들이 날아간다. 황혼과 어둠 속으로.     강은교. 1946년 서울 출생. 연세대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사상계" 신인문학상 당선(1968)으로 문단에 데뷔하여 시집 "허무집" "풀잎" "소리집"이 있으며 산문집 "추억제" "그물 사이로"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등이 있다. 그는 인간의 죽음과 유전이 만들어내는 허무적 삶의 인식을 탁월한 시적 감수성과 전통 무과의 주술적 리듬에 담아 노래하는 시인이다. 현재 부산 동아대학에 재직.      풀잎   아주 뒷날 부는 바람을   나는 알고 있어요.   아주 뒷날 눈비가   어느 집 창틀을 넘나드는지도.   늦도록 잠이 안와   살 밖으로 나가 앉는 날이면   어쩌면 그렇게도 어김없이   울며 떠나는 당신들이 보여요.   누런 베수건 거머쥐고   닦아도 닦아도 지지않는 피를 닦으며   아, 하루나 이틀   해저문 하늘을 우러르다 가네요.   알수 없어요, 우린   땅 속에 다시 눕지 않아도.      우리가 물이 되어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강창민. 1947년 경남 밀양 출생. 연세대 국문과 졸업.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했으며, '성좌'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현실은 늘 어둡고 죽음과 가까운 것을 배경으로 깔면서도, 상승과 발산의 의지로 충만된 상상력은 그것을 새로운 현실로 재구성하는 탄력성을 보여 준다. 시집으로 "비가 내리는 마을"이 있다.      비가 내리는 마을   회화선생 윌리암은   비가 올 때마다 '피'가 온다고 한다.   그에게 내리는 피는 비지만   우리에게 오는 비는 피였다.   온 몸이 온 마을이 피에 젖는다.      시인에게   그대가 잠들어 쓰는 시   떨리는 신경을 몰래 늘이어   어제는 어떤 꿈을 서럽게 짰는가   가난한 만큼 확실한 꿈을 꾸라, 그대여   꾸어도 빼앗기지 않고   빼앗겨도 더욱 넉넉해지는   그것이 무엇인가 말하라   가위에 눌려   그대가 소리쳐 부르던 이름은   눈 뜨면 늘   노란 나비처럼 사라지고 말았지.   다시 잠들려 애쓰는 그대여   뜰에 나가 겨울 비를 맞으며,   통금에 잠긴 어둔 골목을 보고 섰으면   누가 보고 싶은지 말하라.   그대가 잠깨어 쓰는 시   무서워무서워 고쳐 썼다가   다시 적고 만 그 노래   그것을 불러라, 바보야     강현국. 1948년 경북 상주 출생. 경북사대 국어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현대문학"(1976)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는 "봄은 가고 또 봄은 가고"가 있고 현재 '자유시' 동인이며 대구 교육대학 국어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그의 작품세걔는 보다 명료한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영혼의 울림을 주는 한편 삶을 반성하게 하는 정서적 울림을 일으킨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일막이장   구석을 빠져나온 하나의 구석이   또 하나의 구석과 어느날 만나서   악수를 한다. 온 몸을 흔들며   펼치는 풀밭의 푸른 힘으로   일년초 꽃들은 피어난다.   산그림자 잠시 바다로 눕고   시들기 위하여 피어난 개똥쑥꽃,   떡쇠 속눈썹이 빛난다.   (전화벨소리 빌어먹을 정전)   벽 속 철근들이 힘주는 소리 들린다.   들린다. 개똥쑥은 시들고   떡쇠 사라지는 발자욱 소리   하늘로 번진다.   서산 노을이 몸을 태우며   좌중의 미간을 밝히는 동안   산짐승 소리 점점 커다랗게   큰 산 그림자를 일으켜 세운다.   (초인종 소리 빌어먹을, 빌어먹을 다시 정전)   우리는 헤어지고   구석은 구석끼리 몸을 떨지만   창경원 늑대의   이빨없는 눈물처럼   비가 내린다. 비에 젖어 번져가는   좌중의 박수 소리   궂은 날은 옆구리를 결리게 하므로   떡쇠 속눈썹이 다시 빛난다.     고정희. 1948년 전남 해남 출생.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했다. "현대시학"에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 '목요시' 동인으로 활동하는 그는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투시와 비판을 힘찬 언어로 승화시켜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시집으로 "누가 술틀을 밟고 있는가" "실락원 기행" "초혼제" "이 시대의 아벨"이 있다.      상한 영혼을 위하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에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에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리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리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사랑법 첫째   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에 내 기대 높이가 자라는 쪽으로 커다란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해서 내 이름 짓무른 밤일수록 제 설움 넘치는 밤일수록 크고 무거운 돌덩이 하나 가슴 한복판에 매달아 놓습니다.     김명인. 1946년 경북 울진 출생. 고려대 문과대 및 동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중앙일보' 신춘문예 (출항제)가 당선(1973)된 이후 왕성한 시작 활동을 했으며 '반시' 동인으로 참여해왔다. 그의 작품세계는 약소 민족의 설움이 기본 모티브가 되고 있다. 비애와 비극의 정서가 고도의 감수성으로 용해되어, 현실극복 의지와 열망으로 표출시키는 데 주력하고 있다. 시집으로는 "동두천"이 있다.      베트남.1   먼지를 일으키며 차가 떠났다, 로이   너는 달려오다 엎어지고   두고두고 포성에 뒤짚히던 산천도 끝없이   따라오며 먼지 속에 파묻혔다 오오래   펼칠 수 없는 나라의 여자, 로이   너는 거기까지 따라와 벌거벗던 내 누이   로이, 월남군 포병 대위의 제3부인   남편은 출정 중이고 전쟁은   죽은 전남편이 선생이었던 국민학교에까지 밀어닥쳐   그 마당에 천막을 치고 레이션 박스   속에서도 가랭이 벌여 놓으면   주신 몸은 팔고 팔아도 하나님 차지는 남는다고 웃던   로이, 너는 잘 먹지도 입지도 못하였지만   깡마른 네 몸뚱아리 어디에 꿈꾸는 살을 숨겨   찢어진 천막 틈새로 꺾인 깃대 끝으로   다친 손가락 가만히 들어올려 올라가 걸리는 푸른 하늘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행복한가고   네가 물어서   생각하면 나도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다   잊어야 할 것들 정작 잊히지 않는 땅 끝으로 끌려가며   나는 예사로운 일에조차 앞날 흐려 어두운데   뻑뻑한 눈 비비고 또 볼수록, 로이   적실 것 더 없는 세상 너는 부질없이도 비 되어 내리는지   우리가 함께 맨살인데 몸 섞지 않고서야 그 무슨   우연으로 널 다시 만날 수 있겠느냐   로이 만난대서 널 껴안을 수 있겠느냐      동두천.1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신호등   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   내 급한 생각으로는 대체로 우리들도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이리라 혹은 떨어져 남게 되더라도   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 눈에 파묻혀 흐려지면서   우리가 내릴 눈일 동안만 온갖 깨끗한 생각 끝에   역두의 저탄 더미에 떨어져   몸을 버리게 되더라도   배고픈 고향의 잊힌 이름들로 새삼스럽게   서럽지는 않으리라 그만그만했던 아이들도   미군을 따라 바다를 건너서는   더는 소식조차 모르는 이 바닥에서   더러운 그리움이여 무엇이   우리가 녹은 눈물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   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느냐   바라보면 저다지 웅크린 집들조차 여기서는   공중에 뜬 신기루 같은 것을   발 밑에서는 메마른 풀들이 서걱여 모래 소리를 낸다   그리고 덜미에 부딪쳐 와 끼얹는 바람   첩첩 수렁 너머의 세상은 알 수도 없지만   아무것도 더 이상 알 필요도 없으리라   안으로 굽혀지는 마음 병든 몸뚱이들도 닳아   맨살로 끌려 가는 진창길 이제 벗어날 수 없어도   나는 나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을 지나   떠나야 되돌아올 새벽을 죄다 건너가면서     김승희. 1952년 전남 광주 출생. 서강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으며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데뷔했다. 그의 시세계는 오직 빛으로만 향해 내닫고 있는 참신한 언어와 밝은 톤으로 죽음의 빛을 형상화시킨 엑스레이 빛꽈 대조를 이루면서 백열의 광도를 보여주고 있는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집으로 "태양미사"와 "왼손을 위한 협주곡"이 있다.      흰 여름의 포장마차   나에게는 집이 없어.   반짝이는 먼지와 햇빛 속의 창대가,   훨, 훨, 타오르는 포플린 모자.   작은 잎사귀 속의 그늘이   나의 집이야.   조약돌이 타오르는 흰 들판.   그 들판 속의 자주색 입술.   나에게는 방도 없고   테라스 가득한 만족도 없네.   식탁가의 귀여운 아이들.   아이들의 목마는 오직 강으로 가고   나는 촛불이 탈 만큼의   짧은 시간 동안   아이들이 부를 노래를 지었지.   내 마차의 푸른 속력 속에서   그날리는 머리카락.   머리카락으로   서투른 음악을 켜며.   하루의 들판을 무섭게 달리는 나의 마차는   시간보다도 더욱 빠르고 강하여   나는 밤이 오기 전에   생각의 천막들을 다 걷어버렸네.   그리고 또한 나의 몇 형제들은   동화의 무덤 곁에 집을 지었으나   오. 나는 그들을 경멸했지.   그럼으로써 낯선 풍경들을 잃고 싶지 않아서   나에게는 꿈이 없어.   해가 다 죽어버린 밤 속의 밤이   별이 다 죽어버린 밤 속의 정오가   그리고 여름이 다 죽어버린   국화 속의 가을이   나의 꿈이야.   콜탈이 눈물처럼 젖어 있는 가을들판.   그 들판 속의 포장마차의 황혼.      햇님의 사냥꾼   다이아나 언니.   마차를 매요.   바람이 좋으니 사냥나가자.   요정 1. 요정 2. 요정 3. 요정 4   그리고 어린 모짤트도 불러   사슴과 거미와 토끼와 나비를   표범과 매와 태양과 절망을   언니는 쫓고 나는 잡고.   언니는 활쏘고 나는 겨누고.   영혼의 마차에는   네 개의 바퀴가 반짝이고 있다.   숲의 정. 벌의 정. 꿈의 정. 활의 정   우리는 정비하여   해 가까이 나가는데   지금 누런 들판에서는   엑스레이빛, 엑스레이빛으로   마른 개들이 죽고 있다.   죽고 있다.   나는 알지.   긴 어둠의 창작을 내가 할 때   흰 물결. 검은 물결. 파랑 물결 사이에서   언제나 다시 시작되는 황야를.   메마른 의식의 침엽수 이파리와   필생의 그 든든한 어둠소리를   나는 알고 나는 견디리   나는 활쏘고 나는 밝히리.   돌아오는 마차엔   햇님의 머리칼.   눈부시게 타오르는 요정들의 옷자락.   어둠은 이제 말을 몰고 돌아가고   밝아지는 뼛속과 태양 취한 일센티.   다이아나 언니.   햇님을 매요.   반짝이는 사냥노래 나의 노래를.     김옥영. 1952년 경남 마산 출생. 마산교대를 졸업했으며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데뷔했다. 시집 "어둠에 갇힌 불빛은 뜨겁다"를 갖고 있는 그는 감상적 서러움 혹은 그와 완전히 다른 인간성을 완전히 배제한, 언어인식의 시가 갖는 건조성읗 뛰어 넘은 시세계를 갖고 있는 시인이다. 현재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다.      죽은 날벌레를 위하여   어둠에 갇힌 불빛은 뜨겁다.   뜨겁다고 그들은 속삭인다.   전등 갓 안쪽에 까맣게 타 죽은 날벌레들.   들끓는 한낮의 태로부터 태어난   날개들은 죽었다. '밤을 이해하지 못한' 그들.   제 그리움에 쫓겨   작은 불빛의 덫에 머리를 처박고   어둠에서 달아나왔던 그들의 배는   멋대로 다시 어둠에 밀려 다닐 뿐.   겨드랑에 아직 묻어 있는 햇볕의 분가루는,   흔들리며 구름 속으로 빨려오르는 무더운 수증기의 내음은,   잃은 것이 많아서 꿈 많은 사람들의 꿈 속에 들어가   자꾸 날개가 투명해진다.   어둠이 무서웠던 그들.   불을 켜서, 밤마다 우리는 외면했다. 보이지 않는 무서움을.   어둠이 모든 길들을 이장하고   알 수 없는 그의 복면만을 보여 줄 때   소름 돋쳐 뛰어간 우리.   에비! 에비!   겨자씨만한 불씨에 겨자씨만한 두 눈을 가리고   에비! 헛짚은 우리.   두 눈이 먼 날벌레들은   뜨겁다고 속삭인다. 이제,   꺼 버려. 작은 불빛들을 불어 버려.   돌아서, 어둠의 허허벌판을 바라보고   바라보며 말하라.   불을 끄면 별이 보인다고.   불 끈 자리에 에워싸는 어둠에도 낯이 익으면   어둠의 맨 밑바닥에서부터 가볍게, 가볍게   떠 오르는 별빛.   불을 끄면 밝은 별이 보인다.   어둠에 조금씩 날개를 비비며 날아오르는 것들이.   비로소 더 날아오르는 것을 배우는 것들이.   밤의 유영에 익숙해지고 마는 어떤 힘찬 팔들이.      말.1      --내가 '사랑'이라고 말할 때   네가 '사랑'이라고 혹은 '슬픔'이라고 말할 때   상아의 이빨이 가지런한 네 말   네 말이 씹는 과질 속으로   몇 마리 건어가 텀벙 뛰어들기도 하지만,   네가 '사랑'이라고 혹은 '슬픔'이라고 말할 때   지상에 일어서는 것은   빈 집 하나다.   단단한 골격을 두른 말의 어깨 너머   말이 부려 놓은 공간,   우기의 긴 골목으로   깊이 발이 빠지면   목소리들은 안개에 머리를 부딪고   스스로 체중을 벗어   들의 공복에 살을 섞는다.   들의 그림자 들의 뿌리께 물을 주며   오 허깨비들이   이 들을 키운다.   허깨비를 본 자는   허깨비의 나라로 밖에 갈 수 없어   네가 '사랑' 혹은 '슬픔'이라고 말할 때   가시엉겅퀴들은 흔들리지만   살아 있는 은빛 독사는 보이지 않고   흰 공터만 눈을 뜬다.   유리창마다 자옥히 성에 끼는 겨울날   (때로 성에를 꿰비치는 날카로운 햇빛의 파견)   벌목된 주검 몇 구 뛰어넘어   두어 점 깨끗한 웃음이   울렸다 사라지는 쪽으로   왜 고개가 돌려지지 않을까?   서쪽 하늘에 서성이며 떠나는 공기의 맨발이   오래도록 가슴을 밟고 밟을 뿐.   네가 '사랑'이라는 혹은 '슬픔'이라는   빈 집을 세울 때.     김원길. 1942년 출생. "월간문학"으로 문단에 데뷔(1971)하여 절제와 염결들을 갖춘 서정시를 쓰고 있는 그는 시집으로 "개안" "내 아직 적막에 길들지 못해" 등이 있다. 현재 안동대학 강사로 출강 중.      내 아직 적막에       길들지 못해   미닫이에 푸른 달빛   날 놀라게 해   일어나 빈 방에   좌불처럼 앉다   내 아직 적막에   길들지 못해   버레소리 잦아지는   시오리 밤길   달 아래 그대 문 앞   다다름이여.   그대 뜨락 꽃내음만   훔쳐 맡다가   달 흐르는 여울길   돌아오나니   내 아직 적막에   길들지 못해.     김은자. 1948년 경남 충무 출생.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문단에 데뷔(1975)하여 현재 중앙대 문예창작과에 재직하고 있다.      초설   하릴없이 숫눈발 속에 다시 서노니 초경의 비린내 풋풋한 순수함이여. 너의 심부에 언제나 깊고 어둔 발자취를 남겼으되, 이 눈길 위에 다시 새로운 발자국. 오오 편편으로 흩어지는 하늘의 전신이 흰 북소리 둥둥 울릴 때 과거가 어찌 남김없이 용서받고 기억들이 어찌 위무 받느뇨.   모든 만남은 언제나 영원한 첫번째 만남이듯 흰 눈썹 부비며 낯선 미명의 거리를 가노라. 미진한 기억 속에 흰 북소리 낮게 질주하고 빈 나무등걸은 바람에 부풀면서 시간 밖으로 무수한 기억의 휴지부를 날려보내도다.   해마다 한차례 심령 속에 하늘이 갈갈이 찢어지나니 묵은 기억의 모서리를 이지러뜨리며, 미지의 경험 속에 나를 미끄러뜨린다. 새로운 시간의 숫눈길 속에 그날의 풋풋한 순수로 유입하리라.     김정환. 1954년 서울 출생. 서울대 영문과 졸업. "창작과 비평"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시작활동을 한 그는 시대의 진실을 밝혀내려는 결의와 열린 감성으로 우리 시대의 언어에 일대 변혁을 몰고온 젊은 시인이다. 시집으로 "황색 예수전" "지울 수 없는 노래" 등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다.      마포 강변 동네에서   해마다 장마때면 이곳은 홍수에 잠기고   지나간 물살에 깎인 산허리 드러낸 몸을 보면서   억새는 자란다 그 홍수 치른 여름 강가 태우는 땡볕   억새는 자란다 떠내려가는 흙탕물은 한없어   영영 성난 바다만 같아 보이고   움켜도 움켜도 움켜잡히지 않는 발 아래 한줌의 흙   뿌리는 이대로 영영 이별만 같아 보이고   죽음같이 빨려들어가고만 싶은 진흙창 속으로   그러나 억새는 자란다 기어들 듯 말 듯   모기 같은 속삭임으로 땅에게 마지막 이별에게   가지 마셔요 저는 당신의 애기를 가졌어요 당신처럼 설움뿐이지만   당신처럼 활활 타오르는, 당신처럼 언제나 떠나가고 싶어하지만   당신처럼 제 뇌리에서 지워드릴 수 없는   질긴 생명의 씨앗이 제 안에서 꿈틀대고 있어요   모두 단신 거예요 이 흠뻑 젖은 제 육신의 꿈과 숙명   그리고 당신의 모질지 못했던 과거 이제 돌이킬 수는 없어요   억새는 자란다 그 여름 홍수 지난 온 몸이 뜨거운 검은 땡볕 의연히   알고 있는 걸까 억새는 아지 못할 고통이 주는 삶의 참뜻을   알고 있는 걸까 억새는 이젠 헤어져 있는 모든 사람들의   다시는 헤어질 수 없음이   그녀의 가슴 속에서 만나서   다시 한번 그녀의 가슴을 도려내고   다시는 떠나갈 수 없음이   다시 한뻔 떠나가고 있는 줄...?   가난하고 피난 내려온 사람들의 판자집만 들어선   히필이면 이 마포, 강변동네에서.      유채꽃밭   내가 그대의 허망함을 눈치채기도 전에   그대가 나의 미망의 눈앞에 펼쳐논 온통 샛노란 불볕, 벌판   그대는 내 앞에서 그대의 몸가짐을 흐트리며 출렁이면서   그대의 마음도 눈이 부시게 흔들리고 싶을 때   그러나 그대가 일용의 양식으로 머금고 배앝아 낸   입술에 배인   고운 피, 거친 숨결이   나는 보일 것도 같애 반란으로도 모자란, 학살로도 모자란   그대는 아직도 동요하지 않는 한라산 슬하에서   이제껏 조바심내며 출렁거리며 바람에 몸 식혀 왔나니   아아 그대가 내 앞에 마련해논 광대한 벌판은 벌써 미쳐버린 색깔로   내 앞에서 끝도 없어라   내 앞에서 끝도 없어라   마침내 강심장으로 돌아온 사랑 앞에서     김종. 1948년 전남 나주 출생. 조선대학교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데뷔한 그는 삶의 좌절과 회의를 승화시켜낸 역사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시세계를 형성해나가고 있는 시인이다. 현재 조선대학교 국문과 부교수로 재직중.      역사   사람들은 초롱초롱한 눈을 뜨고   언제나 변함없는 것은 역사라고 한다.   어두운 상처 밑에 신음하는 사람도   모두 모두 역사라고 한다.   그것이 뭐길래 그리 믿어쌌느냐   무슨 부모 자식간이나 되는냐 아니면   제삿상 받아먹는 선영이기라도 하느냐 묻지는 않았지만   목숨이 붙어있는 한 일편단심 믿고 또 믿는 것,   그것은 틀림없는 역사라고 한다.   못 볼 것을 보여 쥬고 주먹을 쥐면서도   역사가 말하리란다. 저녁 끓일 것이 없는 시인나라도   큰 배를 앞세우고 근엄하게 말씀하시는 분네도   역사가 반드시 반드시 말해준다고 한다.   어느 누구이건 절로 터진 입이면 늘 은혜롭고 향긋한 역사   분하고, 뒤가 구리고, 몸을 또아리 틀어 사리는 사람 모두   떳떳하게 당당하게 역사는 늘 위대하고 거룩하단다.   사람들은 잠을 자면서도, 이빨을 갈고 잠꼬대하면서도   역사를 베고, 깔고, 숨쉬고, 보듬고 산다.   친구도 부모형제도 보이지 않아 무섬증이 든 허허벌판에서   역사를 앞세우고 그 뒤에 숨어서 식은 땀을 흘린다.   가랑잎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오뉴월 물꼬속에도   역사는 숨쉬고 살아서 하늘을 날아다닌다 한다.   하다못해 돌멩이나 껴안고 물에 빠진 어느 촌놈도   남강에 몸을 던진 논개가 되려고   충향이 남편 이도령이라도 뙤려고 설레이고 쌩방귀를 뀐다   이 시시한 시를 쓰는 나도 역사를 들먹거리며 휘파람을 분다.   그러나 역사는 얼굴 깊이 흘러가는 주름살이다.   몸부림도 잊어버리고 화석 속에 누워 지내는 공룡이다.   모랫바람 속에서 사라지는 사하라 사막의 신기루다.   우리들의 비어있는 뼈마디 아련히 차오른   흐린 얼굴 갖가지 모양새다.   저기 저 사는 일이 신물난 사람들의 꽁무니에   산사태의 요란한 소리로 무너져내리는 흙탕물이다.   불꺼진 토담집 모퉁이에서 우리의 어깨를 덮는 채알귀신이다.   역사는 토란잎 위에 굴러내리는 아침 이슬이 아니다.   쌩방귀는 어떨지 모르나 큰 바위 얼굴은 아니다.   어제 진 달 다시 돋아 삼천리 강산을 비추는 시간에   서로 껴안고 딩굴던, 사랑하는 청춘들의 밀어가 아니다.   역사는 역사일 뿐 어느 누구의 노래도 포부도 아니다.   떠도는 혼들이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시간에   태연히 코를 고는 하나님의 참으로 민망한 사투리다.   눈만 크게 떠도 무한히 작아지는 몇몇 사람의 마스코트다.   들여다보면 무심히 알아지는 허망하디 허망한 돼지쓸개다.     김종철. 1947년 부산 출생.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한국일보'와 '서울신문' 신춘문예(1970)로 문단에 데뷔한 그는 작품을 통해 삭막하고 무망한 현대의 기적 정신적 상황, 현대인이 갖고 있는 비극적인 꿈과 처참한 현실을 파헤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신춘시' 동인이며 한국시인협회 회원이다.      서울의 유서   서을은 간을 앓고 있다   도착증의 언어들은   곳곳에서 서울의 구강을 물들이고   완성되지 못한 소시민의   벌판들이 시름시름 앓아 누웠다   눈물과 비탄의 금속성들은   더욱 두꺼워 가고   병든 시간의 잎들 위에   가난한 집들이 서로 허물어지고   오오 집집의 믿음의 우물물은   바짝바짝 메마르고   우리는 단순한 갈증꽈   몇개의 죽음의 열쇠를 지니고 다녔다   날마다 죽어서 다시 살아나는   양심의 밑둥을 찍어 넘기고   헐벗은 꿈의 알맹이와   약간의 물을 구하기 위하여   우리는 밤마다 죽음의 깊은 지하수를   매일매일 조금씩 길어 올렸다   절망의 삽과 곡괭이에 묻힌   우리들의 시대정신에서 흐르는 피   몇장의 지폐에 시달린 소시민의 운명들은   탄식의 밤을 너무나 많이 싣고 갔다   오오 벌거숭이 거리에   병들은 개들이 어슬렁거리고   새벽 두시에 달아난 개인의 밤과   십년간 돌아오지 않은 오딧세우스의 바다가   고서점의 활자 속에 비끌어매이고   스스로 주리고 목마른 자유를   우리들의 일생의 도둑들은 다투어 훔쳐 갔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죽음의 눈들은   집집의 늑골 위에서 숨죽이며 기다리고   콘크리트 뼈대의 거칠거칠한 통증들은   퇴폐한 시가의 전신을 들썩이고   오염의 찌꺼기에 뒤덮인   오딧세우스의 청동의 바다는   몸살로 쩔쩔 끓어 올랐다   그때마다 쓰라린 고통의 서까래는   제풀에 풀석풀석 내려앉고   우리가 앓는 성병 중의 하나가   송두리째 뽑혀 나갔다   어디서나 단순한 목마름과   죽음의 열쇠들은 쩔렁거리고   세균으로 폐를 앓는 서울은   매일 불편한 언어의 관절염으로 절뚝이며   우리를 소시민의 가슴에 들어 와 몸을 떨었다.      재봉   사시사철 눈오는 겨울의 은은한 베틀 소리가 들리는   아내의 나라에는   집집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마을의 하늘과 아이들이 쉬고 있다.   마른 가지의 난동의 빨간 열매가 수실로 뜨이는   눈 나린 이 겨울날   나무들은 신의 아내들이 짠 은빛의 털옷을 입고   저마다 깊은 내부의 겨울바다로 한없이 잦아들고   아내가 뜨는 바늘귀의 고요의 가봉   털실을 잣는 아내의 손은   천사에게 주문받은 아이들의 전생애의 옷을 짜고 있다.   설레이는 신의 겨울,   그 길로 먼 복도를 지내나와   사시사철 눈오는 겨울의 은은한 베틀 소리가 들리는   아내의 나라,   아내가 소요하는 화잉의 고요 안에   아직 풀지 않은 올의 하늘을 안고   눈부신 장미의 알몸의 아이들이 노래하고 있다.   아직 우리가 눈뜨지 않고 지내며   어머니의 나라에서 누워 듣던 우뢰가   지금 새로 우리를 설레게 하고 있다.   눈이 와서 나무들마저 의식의 옷을 입고   축복받는 날.   아이들이 지껄이는 미래의 낱말들이   살아서 부활하는 섬조의 방에 누워   내 동상의 귀는 영원한 꿈의 재봉,   이 겨울날 조요로운 아내의 재봉일을 엿듣고 있다.     김준태. 1949년 전남 해남 출생. 조선대학교 사대 독어과 졸업. "시인"지로 문단에 데뷔한 그는 야생적인 기백의 순발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목소리와 형식으로 우리들의 기슴속에 참신하게 와 닿는 특징을 갖고 있다. 시집으로 "참깨를 털면서"가 있다.      참깨를 털면서   산그늘 내린 밭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핳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내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도시에서 십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   기가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낸다.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번만 기분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 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천지현황을 뒤집어 쓴          그대들에게   봄이 오면   먼 산의 바람   먼 산의 구름   먼 산의 꽃   모두 우리 님이어라   모두 우리 가슴이어라   봄이 오면   먼 벌판의 불빛   먼 벌판의 뼈부딪침   먼 벌판의 푸르른 뒤엉킴   모두 우리 아픔이어라   모두 우리 노래이어라   봄이 오면   먼 바다의 물결   먼 하늘의 새들   먼 강 기슭의 풀잎   모두 우리 사랑이어라   모두 우리 그리움   모두 우리 몸부림이어라.   김창범. 1947년 서울 출생. 동국대학 국문과 졸업. "창작과 비평"을 통해 문단에 데뷔한 이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추구를 애증의 자취로 노래하는 민중시인이다. 시집으로 "봄의 소리"가 있다.      봄의 소리   누가 재가 되었다고 했는가   부러져 말라버린 나뭇가지가 되었다고 했는가   모래틈에서 터진 민들레 꽃잎 속에서   명주실같이 감기는 물소리가 되어   아 누구에게나   숨 넘어갈 듯이 달려오는 것   꽃들이 흐드러지게 웃어 댄다고 모르겠느냐   바람들이 수선을 떨며 쏘다닌다고   누가 잊어버리겠느냐   생각해서야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다   고함쳐야 들리는 것은 더욱 아니다   모두 모두 떠나고 만 봄날   길고 긴 낮잠 속에서도   자꾸만 흔들리며 밀리며 일어나는   저 수많은 소리     김혜순. 1955년 경북 울진 출생. 건국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고 현재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입선(1978). "문학과 지성"지에 (담배를 피우는 시인) 외 4편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단했다. 현재 서울 시립대 강사로 재직 중이며 시집으로는 "또 다른 별에서"가 있다. 그의 시는 잃어버린 기억 속에 풍요한 서정을 부풀어 넣어 사물과 감정에 새로운 활기를 불러 일으키는 독창적인 수법을 갖고 있다.      납작 납짝      --박수근 화법을 위하여   드문드문 세상을 끊어내어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걸어 놓고 바라본다.   흰 하늘과 쭈그린 아낙네 둘이   벽 위에 납작하게 뻗어 있다.   가끔 심심하면   여편네와 아이들도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붙여 놓고   하나님 보시기 어렵습니까!   조심스럽게 물어 본다.   발바닥도 없이 서성서성   입술도 없이 수근수근.   표정도 없이 슬그머니.   그렇게 웃고 나서   피도 눈물도 없이 바짝 마르기.   그리곤 드디어 납작해진   천지 만물을 한 줄에 꿰어 놓고   가이없이 한없이 펄렁 펄렁.   하나님, 보시니 마땅합니까!      마라톤   밤 기차의 이빨 사이로   시리게 기어나갔다   하, 하, 하, 하 웃으며 달리는   밤 기차의 입술 가장자리에   나무들이 박혔다.   따라오던 바람이   밤 기차의 머리채를    송두리째 강바닥에 던졌다.   밤 기차의 이빨 사이로 시리게   시리게 기어 나갔다.   안개가 목 위로 차올라 왔다.      연기의 알리바이   자 연기를 내놓으시지   음험한 구름기둥을   엇갈린 약속의 그림자를   냄새나는 굴뚝의 알리바이를   감춰둔 손길의 행방을   모두 대 보시지   창문을 열어놓고   선풍기를 틀어놔도 아무 소용없어   동분서주 해봤자야   저기 날리는 검댕이 좀 봐   깔고 앉아도 난 다 알아   두 무릎 사이로 푸른 연기가   풍선처럼 튀어나오잖아   게다가 손바닥마저 시커멓잖아   어서 고백해 보시지   아가리를 찢어 놓기 전에   아가리 속에서 냄새의 긴 끈을 꺼내   조사해 보기 전에   대는 게 신상에 좋을 거야   모두 불었어 정말이야 너만   남았어   그래도 나는 연기를 피워 본다   집안 가득히 피워 본다   음험한 구름기둥 불기둥을   사라지며 부서지는 지난날의   날개 그림자를 가슴에 품어 보려   연기를 피워 본다 헛되이   손짓하며 몰래몰래 온 집을   허우적 거리며 뛰어올라 본다   한 웅큼의 연기를   끌어 안으려 애써 본다.     노창선. 1954년 출생. 청주대학교 영문과와 경희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한 그는 "한국문학"을 통해 문단에 등단했다. '뒷목' 동인으로 활동중이며 같은 세대를 살아가는 동시대인과 아픔을 같이 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시집으로 "섬"이 있다.      섬   우리는 섬이 되어 기다린다 어둠 속에서   오고 가는 이 없는 끝없이 열린 바다   문득 물결 끝에 떠올랐다 사라지는   그러나 넋의 둘레만을 돌다가 스러지는   불빛, 불빛, 불빛, 불빛   외로움이 진해지면   우리들은 저마다의 가슴 깊이 내려가   지난날의 따스한 입맞춤과 눈물과   어느덧 어깨까지 덮쳐오던 폭풍과   어지러움 그리고 다가온 이별을 기억한다   천만 겁의 일월이 흐르고   거센 물결의 뒤채임과 밤이 또 지나면   우리들은 어떤 얼굴로 만날까   내가 이룬 섬의 그 어느 언저리애서   비둘기 한 마리 밤바다로 떠나가지만   그대 어느 곳에 또한 섬을 이루고 있는지   어린 새의 그 날개짓으로   이 내 가슴속 까만 가뭄을   그대에게 전해줄 수 있는지      등 둘   우리가 우리 삶을 버린다 한들   내 어머니 뼛 속에 숨은 눈물까지야   우리가 우리 목숨을 버린다 한뜰   분노로 회한으로 다져진 이 땅이   우리네 이름없는 죽음까지야   누구는 사랑할 때 창자까지 나눈다지만   모질게 부대끼며 익은 우리네 사랑   미치도록 환하게 살아 목숨을 버리는 일   뼛속물까지 나눠 마시며   맑게 비치는 시냇물처럼   우리들의 썩은 살을 도려 내는 일   그리한 상처로 돌아 서서도   먼지처럼 흩어진 죽음까지 찾아서   녹두꽃을 피우다가 그 넋을 달래다가   우리도 이름없이 스러지는 일   모질게 부대끼며 익은 우리네 사랑   미치도록 환하게 살아 목숨 아주 버리는 일   우리가 우리 삶을 버린다 한들   뼛속으로 숨어온 입김까지야     마광수. 1951년 서울 출생. 연세대학교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1977)한 그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대한 푸념꽈 배설로서 순수한 자유와 해방에의 동경을 창출하고자 하는 의지적 성향을 잘 그려내고 있는 시인이다. 시집 "광마집" 이 있으며 현재 연세대학 국문과 조교수로 있다.      우리는 포플라   포플라는 오늘도 몸부림쳐 날아오르고 싶어 한다.   놓쳐버린 그 무엇도 없이   대지의 감미로움만으로는 아직 미흡하여   다만 솟구쳐 날아오르는 새가 부러워   끝간 데 없이 뻗어나간 하늘이 부러워   바람이 부러워   포플라는 자유의 의미도 모르는 채   언제껏 손을 쳐들고   흔들고만 있다.   날아오르라, 날아오르라, 날아오르라!   땅 속에 묻어버린 꿈, 역사에 지친 생활의 빛에   체념, 권태로 하여 잃어버린   네 생명의 자존심 섞인 의지에!   아무리 흔들어 보아도 손에 잡히지 않지만   아픔도 잊고 세월도 잊고 사랑도 잊고   포플라는 오늘도 안타깝게 손을 휘저어 본다.   명백히 놓쳐버린   그 무엇이라도 있다는 듯이      망나니의 노래   떨어져 내리는 것은 너만이 아니다.   긴 한낮 태양을 비집던 태양,   제 미처 바다에 못가 미처버린 폭포,   모든 게 운명처럼 떨어져 내리나니   아, 어찌 모든 것들은 떨어져 가야만 하는 것이냐   시간의 힘은 이리 무섭기만 한 것이냐   어쩔 수 없이 울긋불긋 휘황한 치장을 하고   내 한껏 신명나게 칼을 휘둘러대면   칼끝은 본능처럼 선그어 떨어져 내린다.   --늠름하던 네 모가지는 어찌 그리도 힘없이 떨어져 버리는 거냐   내 마음 난파당한 어느 쇠배마냥   스스로 무거움겨워 가라앉아 버렸나니   나를 휘감는 건 죽음같은 고독일 뿐.   네 목을 찾지 말라, 날 욕하지 말라.   억겁 이전 인연으로 우리는 만났거니   죽이는 것도, 죽는 것도 단 한번뿐   짧은 생, 우리 업보를 누가 막으랴.   그래도 우리는 소매끝 인연보다   피엉겨 다붙은 찬구되어 만났으니   천년, 만년 뒤 저 세상에서   우리, 다시 한번 합하게 될지 그 뉘 알리?     문정희. 1947년 전남 보성 출생. 동국대학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월간문학"으로 문단에 데뷔(1969)한 그는 시대와 현실에 대한 애착을 언어가 주는 최대의 미적 감각과 가락을 이용하여 노래하는 시인. '제21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시집으로 "꽃숨" "새떼"가 있고 산문집으로는 "사랑의 그물을 던지리라"가 있다.      편지      --고향에서 혼자 죽음을 바라보는 일흔 여덟 어머니에게   하나만 사랑하시고   모두 버리세요.   그 하나   그것은 생이 아니라   약속이예요.   모두가 혼자 가지만   한 곳으로 갑니다.   그것은 즐거운 약속입니다 어머니   조금 먼저 오신 어머니는   조금 먼저 그곳에 가시고   조금 나중 온 우리는   조금 나중 그곳에 갑니다.   약속도 없이 태어난 우리   약속 하나 지키며 가는 것   그것은 참으로 외롭지 않은 일입니다.   어머니 울지 마셔요.   어머니는 좋은 낙엽이었읍니다.     민용태. 외국어대학교 서반아어과 졸업. 스페인 마드리드 국립대학에서 수학. 시집으로 "시비시"가 있는 그의 시세계는 경직된 우리 시의 틀을 깨버림으로써 죽은 언어에 생기를 불어 넣어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던지고 있다.      고려장   구름은 팔 수 없다.   삼천 예순 날을 비가 내려도   구멍 뚫린 우리 지붕에   구멍 둟린 내 가슴에   내가 빠져 죽어도   우리는 종이 아니다.   우리는 종이다. 눈감고 귀먹은   종이어도 좋은 종이다.   하얀 종이다.   두들겨 맞을대로 두들겨 맞은 쇠붙이 하얗게 목쉰   얕은 한숨으로만 남은 종   그것은 차라리 천 년을 닳은 무릎   억 년을 다듬이질 당한 무명베   맞고 용서하고 맞고 용서하고   칼을 맞고 칼 끝을 어루만지는   비루하리만큼 따스한 가슴팍   증오만큼 늘 따스한 가슴팍   나는 할머니를 묻어야 했다.   할머니를 묻고 어머니를 묻고 계집을 묻고   가슴 속에 가슴을 묻고 핏 속에 피를 묻고 흙 속에 흙을 묻고     박남철. 1953년 경북 영일 출생. 경희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문학과 지성"으로 문단에 데뷔한 후 활발한 시작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시집으로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공저)와 "지상의 인간"이 있다. 그는 기존의 질서, 도덕률, 시 형식 등을 파괴하면서 섬뜩한 비극성을 시에 도입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연날리기   한번 날아 보구 싶어라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오온 동네방네 쏘다녔던 그 어릴 때처럼   훌훌훌 코 흘리면서 한번 날려 보구 싶어라   이 고요한 언덕배기 위에 두 다리 벌리고 서서   높이 날려 올리고 싶어라   언젠가 바람은 불어 오리라   흔들리지도 않는 높은 산봉우리를 그저 바라보며   소리도 없이 그저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돌아다보면 오 광활한 세계   평평하고 푸른 세계의 잔잔한 침묵   언젠가는 숨막히는 함묵은 깨어지고   순하고 순하지도 않은 바람은 저도 모르게   갑자기 느닷없이 일어나리라   저 낮은 곳의 푸르른 벌판으로 빽빽한   수천 수백만의 착한 벼포기들이   한꺼번에 술렁술렁 흔들리면서   바람은 이 호젓한 언덕 위로   멍멍멍 잡초들만 무성한 이 언덕배기로   슬픈 사랑처럼 달려오리라   아직 미처 고개 수그리지 못한   수천 수백만의 착한 벼포기들이   어느날 갑자기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면   익은 열매 터지듯이 툭툭툭 깨어나면서   웅성웅성 흔들리면서 바람은 일어나리라   언젠가 바람 불어 오면 한번 날려 보구 싶어라   이 부끄러운 언덕배기 위에서 날려 보구 싶어라   너무 기뻐서 마구 웃으면서 울면서   먼지 쌓인 얼레를 풀어 주고 싶어라   달달달 풀어 주고 혹은 서서히   조금 잡아다녔다 다시 풀어 주고   자유롭게 더 자유롭게 풀어 주고   그러다 실이라도 그만 툭 끊어지면   가물가물 허물어지며 멀어지는 연을 따라   아아아 고함지르며 달려가고 싶어라   돌아다 보면 저 광활한 세계   함께 숨쉬고 함께 자라면서   동화 속의 난장이들처럼 함께 잠자는   평평하고 푸른 세계의 말 없는 약속   언젠가 바람 불어 오면 그 바람을 마시면서   끝도 없이 바람 잔잔한 이 뜨거운 계절을   지루하고 지루한 닫혀 있는 시간들을   두 발로 버티고 서서 추억하고 싶어라   너무 기뻐서 마구 울면서 웃으면서   정직한 역사처럼 텅 빈 허공 위로   날려 올리고 싶어라 방패연   날려 올리고 싶어라 가오리연   질긴 생명의 가느다란 실을 풀어   한번 날려 보고 싶어라 한번   날아 보고 싶어라      첫사랑   고등학교 다닐 때   버스 안에서 늘 새침하던   어떻게든 사귀고 싶었던   포항여고 그 계집애   어느 날 누이동생이   그저 철없는 표정으로   내 일기장 속에서도 늘 새침하던   계집애의 심각한 편지를   가져왔다.   그날 밤 달은 뜨고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그 빈터엔 정말 계집애가   교복 차림으로 검은 운동화로   작은 그림자를 밟고 여우처럼   꿈처럼 서 있었다 나를   허연 달빛 아래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밤 얻어맞았다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그 빈터에서 정말 계집애는   죽도록 얻어맞았다 처음엔   눈만 동그랗게 뜨면서 나중엔   눈물도 안 흘리고 왜   때리느냐고 묻지도 않고   그냥 달빛 아래서 죽도록   얻어맞았다.   그날 밤 달은 지고   그 또 다른 허연 분노가   면도칼로 책상 모서리를   나를 함부로 깎으면서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자꾸 책상 모서리를   눈물을 흘리며 책상 모서리를   깎아댔다.     박정남. 1951년 경북 서산 출생. 경북대 사대 국어과 졸업. "현대시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하여 '자유시' 동인으로 활똥하고 있는 그는 생명 탄생의 눈부신 감동과 생명체 사이의 건강한 교감을 시속에 담으려 노력하는 여류시인이다. 시집으로 "숯검정이 여자"가 있으며 현재 대구 효성 여고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빛이 드는 언덕에는          새 풀들이   빛이 드는 언덕에는 새 풀들이 돋고 있었다.   노랑 나비는 은빛 못을 박고   셀로판 종이 상자 안에 와서   가지런히 날개를 펴서   끝없이 날았다.   가을은 더 깊고 무거운 서릿발의 낮은 보리밭에 엎드려서 봄으로 갔고   가장 푸른 하늘은 먹구름 끝에서 왔다.   수녀원의 저녁 미사에서 울고 있는   검은 옷 입은 핏빛 노을도   진흙밭으로 가서   이마가 맑은 연꽃으로 피었다.     박정만. 1946년 전북 정읍 출생. 경희대 국문학과를 졸업했고 '서울신문' 신춘문예와 '문공부 문예창작공모'에 각각 당선하여 문단에 데뷔한 그는 한국의 전통적 운율과 정서를 성실하게 추구하여 돋보이려는 개성파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집으로 "잠자는 돌" 외에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잠자는 돌   이마를 짚어다오,   산허리에 걸린 꽃같은 무지개의   술에 젖으며   잠자는 돌처럼 나도 눕고 싶구나.   기시풀 지천으로 흐드러진 이승이   단근질 세월에 두 눈이 멀고   뿌리 없는 어금니로 어둠을 짚어가며   마을마다 떠디니는 슬픈 귀동냥.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는데   반벙어리 가슴으로 바다를 보면   밤눈도 눈에 들어 꽃처럼 지고   하늘 위의 하늘의 초록별도 이슥하여라.   내 손을 잡아다오,   눈부신 그대 살결도 정다운 목소리도   해와 함께 저물어서   머나먼 놀빛 숯이 되는 곳.   애오라지 내가 죽고   그대 옥비녀 끝머리에 잠이 물들어   밤이면 눈시울에 꿈이 선해도   빛나는 대리석 기둥 위에   한 눈물로 그대의 인을 파더라도,   무덤에서 하늘까지 등불을 다는   눈 감고 천년을 깨어 있는 봉황의 나라.   말이 죽고 한 침묵이 살아   그것이 더 큰 침묵이 되더라도   이제 내 눈을 감겨다오.   이 세상 마지막 산, 마지막 선 모양으로.      아편꽃   저만큼 나를 놓고 달아나는 첫사랑이여.   내 피의 아득한 급류의 산맥 위에   오늘은 초롱의 꽃그림자 자지러지고   속마음 타넘고 일렁이는 능구렁이,   짙은 아내의 푸른 불로 타오르도다.   이 내 몸도 징그러운 꿈이 되어   또한 푸른 불 한가지로 타오르도다.     박주관. 1953년 전남 왼주 출생. 동국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을 수료. 고교졸업과 동시에 "풀과 별"지로 데뷔했지만 한동안 침묵했다가 다시 "세계의 문학"으로 작품 활동을 제개했다. '5월 시' 동인인 그의 시세계는 우리 시대를 이루어온, 죽어간 이들과 살아있는 이들의 순수한 사랑을 엮어 노래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벗은 사람을 위하여   태어날 때부터 벗었고   죽어서도 안경을 벗었으므로   나무는 언제든 잎사귀가 없었다.   지금은 갈 수 없는 땅에서 돌아와   창신동 언덕받이에서 미군들   초상 그리며 끼니 때우던   키 크고 목이 흰 사내는   아내의 발을 씻겨 주며   거짓말 하지 않았고   큰 소리 한번 쳐보지 못했지만   오늘도 살아서 우리들 앞으로   예수처럼 나타나는 환쟁이   박수근 당신 앞에   벗은 나무들이 헐벗은 채로   지금도 동네 어귀마다 걸어가고 있구려   갖기 위하여 남를 해치지 않아도   행복은 올 수 있고   사랑을 찾지 않아도   가슴 속에 이미 있는 것   바라보리라 바라만 보리라   당신의 안경 너머로   떠가는 흰구름 바라보며   벗고 서서 떠나간 사람들의 목소리 그리고   돌아오는 발소리에   아낙과 더불어 한 밤을 지새우리라.      내가 살던 광주.5      --물길을 건너지 않아도   어젯밤 꿈 속에서   물길을 건너가는   학 한 마리를 보았지요   산허리를 휘어 감은   살아있는 눈을 보았지요   호젓하게 춘설차를 끓이는 당신을 만났지요   호미를 농민들이   무등산으로 몰려오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생에 단 한번 화갑 때 붓을 쉬었다는   당신의 의연함을   이즈음 사람들은 잊고 있지요   정신을 배우던 그 옛날도 가고   이제는 살아가는 맛도 잃어버린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사   언제든 밤이면 내려와   시도 읽어주고 차도 끓여 주세요   의제여   이제는 물길을 건너지 않아도   만날 수 있겠지요.     서원동. 1950년 경남 창녕 출생. 대구대 교육학과 수학. "문학과 지성"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 서정적인 감수성 속에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가하면서 생존적 탐구를 계속하여 비극적 진지성을 보여준 그는 "우리들의 왕"이라는 시집을 갖고 있다.      달맞이꽃   1   이 어둠 속에는 귀신도 보이지 않고 방금 눈뜬 달맞이꽃만 웃고 있어요 낄낄낄 웃고 있어요 달빛 아래 빛나는 꽃의 이빨 자국만 빈 허공에 가득해요 밤새들도 깊이 깊이 숨어 버렸나 봐요 손을 벌리면 손바닥 깊숙이 꽃잎의 살이 닿아요 뼈도 없는가 봐요 피 흘리는 꽃잎 속에 내가 보여요 내 얼굴도 힐힐힐 웃고 있어요 맨살이예요 맨가슴이 춤추고 있어요 자세히 보면 하늘 한 끝이 깨어져 있어요 뿌리로는 미친 노래 부르고 있어요   2   나는 밤이 두려워요 떨리기만 해요 눈을 감아도 눈속 가득히 바늘같은 공포가 몰려오곤 해요 무서워요 무서워요 나무 줄기보다 질긴 어둠을 보세요 내 허리를 붙잡고 뒹구는 저 달빛을 보세요 깔깔거리며 세상 헤매는 그림자들을 보세요     송기원. 1947년 전남 보성 출생. 중앙대학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동아일보'와 '중앙일보' 시와 소설이 각각 당선되어 문단에 화려한 데뷔를 한 그는 이 시대의 진실을 진지하게 파헤치는 시인으로 소설에 있어서도 탁월한 민중적 정서를 보여주고 있는 작가이다. 시집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 창작집 "월행" "다시 월문리에서"가 있다.      회복기의 노래   1   무엇일까.   나의 육체를 헤집어, 바람이 그의 길고 부드러운 손가락으로 꺼내는 것들은. 육체 중의 어느 하나도 허용되지 않는 시간에 차라리 무섭고 죄스러운 육체를 바람 속에 내던졌을 때, 그때 바람이 나의 육체에서 꺼낸 것들은.   거미줄 같기도 하고 붉은 혹은 푸른 색실 같기도 한 저것들은 무엇일까.   바람을 따라 한 없이 퓰려나며 버려진 땅, 시든 풀잎, 오, 거기에서 새어나오는 신음을 어루만지며, 어디론가 날려가는 것들은.   저것들이 지나는 곳마다 시든 풀잎들이 연초록으로 물들고, 꽃무더기가 흐드러지고, 죽어있던 소리들이 이슬처럼 깨쳐나 나팔꽃 같은 귓바퀴를 찾아서 비상하고...   2   누님 저것들이 정말 저의 육체일까요? 저것들이 만나는 사물마다 제각기 내부를 열어 생명의 싱싱한 초산냄새를 풍기고 겨드랑이 사이에 젖을 흘려서, 저는 더 이상 쓰러질 필요가 없읍니다. 굶주려도 배고프지 않고, 병균들에게 빼앗긴 조직도 아프지 않습니다. 저의 캄캄한 내역마저 젖물에 녹고 초산냄새에 스며서, 누님, 저는 참으로 긴 시간 끝에 때묻은 시선을 맑게 씻고 모든 열려 있는 것들을 봅니다. 모든 열려 있는 것들을 노래합니다.   격렬한 고통의 다음에는 선명한 빛깔들이 일어서서 나부끼듯이 오랜 주검 위에서 더 없는 생명과 빛은 넘쳐오르지.   깊이 묻혀 깨끗한 이들의 희생을 캐어내고,   바람의 부드러운 촉루 하나에도   돌아온 사자들의 반짝이는 고전을 보았어.   저것 봐. 열린 페이지마다 춤추는 구절들을.   익사의 내 눈이 별로 박히어 빛을 퉁기는 것을.   모든 허물어진 관련 위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질서를.   내가 품었던 암흑의 사상은 반딧불 하나로 불 밝히고   때묻은 환자들은 밤이슬에 씻어냈어.   수시로 자라는 번뇌는 은반의 달빛으로 뒤덮고   눈부신 구름의 옷으로 나는 떠오르지.   포도알들이 그들 가장 깊은 어둠마저 빨아들여   붉은 과즙으로 융화하는 밤이면, 그들의 암거래 속에서   나도 한알의 포도가 되어 세계를 융화하고.   3   무엇일까.   밤마다 나를 뚫고 나와 나의 전체를 휘감아도는 은은한 광채는. 숨기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스며나는, 마치 보석과도 같은 광채는.   스스로 아름답고, 스스로 무서운 저 광채 때문에 깊은 밤의 어둠 속에서도 나는 한 마리 야광충이 되어 깨어 있어야 하지. 저 광채 때문에 내 모든 부끄러움의 한 오라기까지 낱낱이 드러나 보이고, 어디에도 감출 수 없던 뜨거운 목소리들은 이밤에 버려진 갈대밭에서 저리도 뚜렷한 명분으로 나부끼지. 두려워 깊이 잠재운 한덩이 뜨거운 피마저 이밤에는 안타까운 사랑이 되어 병든 나를 휩쓸지, 캄캄한 삶을 밝히며 가득히 차오르지.   무엇일까.   밤마다 나를 뚫고 나와 나의 전체를 휘감아도는 은은한 광채는. 숨기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스며나는, 마치 보석과도 같은 광채는.     안경원. 1951년 인천 출생. 연세대학교 영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현대문학"으로 데뷔한 그는 근원에 대한 관조 인식의 깊이에서 나오는 시 본래의 서정성을 잃지 않고 삶의 의식을 튼튼히 세우고 뻗어나가는 작품경향을 가지고 있다. 시집으로 "분지"가 있으며, 현재 강릉대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통화   또한 속절없이 풀꽃이 진다.   오접된 수화기 저쪽 끝에선   밤비 쏟아지는 소리   여윈 들판 가득 헛되라고 헛되라고   우는가, 그대는 우는가   그대의 깊은 꿈마다 떠다니는   빈 섬들과 그리로 떠나간 사랑을 위하여   그러나 아직도 멀다   눈물 속에 섞여 내리는 붉은 녹물과   빗 속에 날름거리는 저 불빛들의 혀를 보면   안다. 알겠지. 저만큼 흘러가버린   지난날의 날내나는 고통이   밤비 속으로 투신하던 날   그때도 그대는 마지막처럼 울었으니   지평선 가까이 짓다만 집뜰은   벽이 뚫린 채 또 한번 마지막 꿈을 꾸고 있다.   오, 곤고한 그대는 그리로 가거라.   아닙니다. 잘못 거셨어요.   그대는 눈물 속으로 스며들었어요.   헛되다고 헛되다고   시든 오동잎 몇 개가   끊긴 수화기 속으로 뚝뚝 떨어진다.     오승강.1953년 경북 영양 출생. 안동교육대학 졸업. '동아일보' 신춘문예와 "시문학"으로 데뷔한 그는 우리의 삶을 억압하고 붕행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근원적 물음에 대해 진솔하게 노래하는 시인. 시집으로 "새로 돋는 풀잎들을 보며" 외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다.      새로 돋는 풀잎들을 보며   누이는 영해로 시집가고 재행길   일가붙이 모여   신랑을 다루며 웃고 들썩일 때   서른 한 살 처녀인 고모는   외딴 방에서 그 소리 귓전으로 들으며   쓸쓸히 피 쏟아가며 죽어   우리 식구들 경황없어   이리뛰고 저리뛰며 그 죽음을 숨길 때도   오늘처럼 세상은 봄이 와서   주검 아래서도 풀잎 돋는 소리   새들 두런거리는 소리 들렸었고   내 살고 죽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 생각하며   침묵속으로 또 빠져들 때   세상엔 더 많은 꽃들이 피어   내 더 쉽게 슬퍼지던 것을   또한 무엇엔가 홀린듯   경황도 없이.     윤석산. 1947년 서울 출생. 고교 3학년 재학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 후에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그는 한국 현대시의 큰 줄기의 하나인 모더니즘 계열의 시적 전통을 계승하면서 감성과 지성의 유연한 조합을 통하여 나름대로 독특한 세계를 구축해오고 있는 시인으로 시집으로 "바다속의 램프"가 있다.      편지   오뉴월 꽃그늘이 드리우는 마당으로 우체부는 산골 조카의 편지를 놓고 갔구나, 바람 한 점 흘리지 않고 꽃씨를 떨구듯.   편지는 활짝 종이 등을 밝히며 서로들 파란 가슴을 맞대고 정겨운 사연을 속삭이고 있구나.   찬연한 속삭임은 온 마당 가득한데, 꽃씨를 티우듯 흰깁을 뜯으면 샘재봉 골짜기에 산딸기 익어가듯 조카는 예쁜 이야길 익혀 놨을까.   모두 흰 봉투에 숨결을 모두우며 꽃내음 흐르는 오뉴월 마당으로   '석 산 이 아 저 씨 께'   아, 좈카가 막 기어다니는 글씨 속에서 예쁜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구나.      원색의 잠   마른 풀잎이 몰려온다   잠 속으로,   죽은 말 하나가   뛰어든다.   세멘 마당에 엎질러진   물끼, 혹은   어둠 속에 하양게   박혀버린 자갈돌.   하얗게 죽어버린   사내들이   마른 육체를 불사른다.   몰켜오는 풀잎 마다엔   꺼지지 않는 램프,   심지를 밟으며   달려나가는 수천 두의 말굽,   동해남부선   어디   적재의 화차가   하나 어둠 속,   오래오래 이마를 부딪는다.     윤재걸. 1946년 전남 해남 출생. 연세대학교 정외과를 졸업했고, "월간문학"을 통하여 문단에 데뷔했다. 그의 시세계는 철저히 자기 자신을 확대하여,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들을 야무지게 비판하고 해부하는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시집으로 "후여 후여 목청 갈아"가 있다.      후여 후여 목청갈아...   후여 후여 이삭 쪼는 새떼들을 날린다.   새떼 쫓는 후여 후여 목청 속에서   물 말아 넘긴 보리알 반쪽이 일어선다.   푸른 하늘이 내 편을 들어 새떼들을 쓸어간다.   무심히 고개 숙인 이삭이여,   허구헌 날 그런 몸짓으로 죽을 순 없어.   삼베 적삼 입은 허수의 어미 아비   이젠 당신네들도 후여 후여 목청 갈아   사지 흔들며 푸른 하늘하고 손잡을 것이며.      전라도의 무등과 함께   앙금이 밑바닥으로 갈앉듯   불씨는 늘 아랫녘으로 도사린다.   눈 부릅뜨고 곧추 서 있는 무등처럼   예사로 일어서는 물건 하나 있어   언제나 쇠 잠긴 조선의 사타구니--.   이 땅의 인총처럼 사철로 무성한   우리네 음모의 강기슭엔   땀내 나는 빤스와 더불어   어두운 만큼 힘을 지켜가는,   아끼는 만큼 자랑스러운   두알의 불알과 함께   꼿꼿한 이 땅의 남근이 숨어 있지 않느냐.   잠겨서 혼자 일어서고   일어서서 홀로 평정하는   몽정의 밤마다   함께 일어서는 물건 하나 있어   전라도의 부릅뜬 눈빛을 본다.   빤스에 묻어나는 내 나라의 하혈을 보면서   우리들은 아작껏 중요한 것을 써먹지 못하고 있다.   앙금이 밑바닥으로 갈앉듯   불씨는 늘 아랫녘으로 도사리고   이 땅의 은총만큼이나 우리네의 음모는 사철로 무성타--.     윤후명. 1946년 강릉 출생. 연세대 철학과 졸업. '경향신문' 신춘문예(1967)에 시가 '한국일보' 신춘문예(1979)에 소설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한 그는 언어의 미학과 겨레 정신의 뿌리를 조화시켜 억압 속에서 살아온 역사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시인이다. 시집으로 "명궁"이 있으며 '녹원문학상'(1983)과 '소설문학작품상'(1984)을 수상했다.      곰취의 사랑   눈 속에서도 싹을 내는 곰취   앉은 부채라고도 부른다   겨울잠에서 갓 깬 곰이   어질어질 허기져 뜯어먹고   첫 기운 차린다는   내 고향 태백산맥 응달의 고취 여린 잎   동상걸려 얼음 박인 뿌리에   솜이불처럼 덮이는 눈   그래서 곰취는 싹을 낸다   먹거리 없는 그때 뜯어먹으라고   어서 뜯어먹으라고 힘내라고   파릇파릇 겨울 싹을 낸다   눈오는 겨울밤 나도 한 포기 곰취이고 싶다   누군가에게 죄 뜯어먹혀 힘을 내줄 풀      명궁   잡목 숲은 무덤처럼   어둠의 둘레를 무지개로 감고   별빛을 모아 물결의 장단에 따라   바람이 하늘거렸다,   날새의 제일 유심히 반짝이는   두 눈깔을 꿰뚫음에   공명하며 하룻밤을 흔들린 이의   사무치는 뜬 눈의 웃음   드넓고 광포해라,   새가 온 들을 채어 쥐고   한 기운으로 푸드드득 오를 때   활짝 당겨 개이는 먼오금   숲과 들을 벗어나 휘달려   그는 죽음의 사랑에 접근한다   이동순. 1950년 경북 금릉 출생. 경북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문단에 데뷔하였으며 '자유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섬세한 감각, 언어의 운율적 조직을 통해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지향하는 시세계를 갖고 있다. 시집으로 "개밥풀"이 있다.      개밥풀   아닌밤중에 일어나   실눈을 뜨고 논귀에서 킁킁거리며   맴도는 개밥풀   떠도는 발끝을 물밑에 닿으려 하나   미풍에도 저희끼리 밀고 밀리며   논귀에서 맴도는 개밥풀   방게 물장군들이 지나가도   결코 스크램을 푸는 일 없이   오히려 그들의 등을 타고 앉아   휘파람 불며 불며 저어가노라   볏집 사이로 빠지는 열기   음력 사월 무논의 개밥풀의 함성   논의 수확을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함부로 버리며   우리의 자유를 소중히 간직하더니   어느 날 큰 비는 우리를 뿔뿔히 흩어놓았다   개밥풀은 이리저리 전복되어   도처에서 그의 잎파랑이를 햇살에 널리우고   더러는 장강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어디서나 휘몰리고 부딪치며 부서지는   개밥풀 개밥풀 장마 끝에 개밥풀   자욱한 볏집에 가려 하늘은 보이지 않고   논바닥을 파헤쳐도 우리에겐 그림자가 없다   추풍이 우는 달밤이면   우리는 숨죽이고 운다   옷깃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귀뚜라미 방울새의 비비는 바람   그 속에서 우리는 숨죽이고 운다   씨앗이 굵어도 개밥풀은 개밥풀   너희들 봄의 번성을 위하여   우리는 겨울 논바닥에 말라붙는다.      연탄갈기   무엇이 다른가 불타고 지는 모습은   쪼그리고 앉아서 연탄 갈아 넣으며   우리들 살과 피의 왕래 없음이여   이 밤을 헤매이는 개짖음만 못하리   바람결에 살의 분노 소란한 땅에   한 줄기 이름 없는 풀잎이 산다   아무나 와서 보라, 저절로 자란 초목   그대 목침에 깔려 신음하는 신문지   가까운 들판에는 푸른 개똥이 마르고   지하의 풀뿌리에 서릿발 친다   내 살을 차고 노는 자여   아픈 머리 찬 물에 담그는 자여     이성복. 1952년 경북 상주 출생. 서울대 불문과 졸업. "문학과 지성"에 시를 발표함으로써 뜽단한 그는 개인적 삶을 통해서 얻은 고통스런 진단을 보편적인 삶의 양상으로 확대하여 우리의 아픔으로부터 깨어나게 하려는 작품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깨는가" 외에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정든 유곽에서   1   누이가 듣는 음악 속으로 늦게 들어오는   남자가 보였다 나는 그게 싫었다 내 음악은   죽음 이상으로 침침해서 발이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잡초 돋아나는데, 그 남자는   누구일까 누이의 연애는 아름다와도 될까   의심하는 가운데 잠이 들었다   목단이 시드는 가운데 지하의 잠, 한반도가   소심한 물살에 시달리다가 흘러들었다 벌목   당한 여자의 반복되는 임종, 병을 돌보던   청춘이 그때마다 나를 흔들어 깨워도 가난한   몸은 고결하였고 그래서 죽은 체했다   잠자는 동안 내 조국의 신체를 지키는 자는 누구인가   일본인가, 일식인가 나의 헤픈 입에서   욕이 나왔다 누이의 연애는 아름다와도 될까   파리가 잉잉거리는 하숙집의 아침에   2   엘리, 엘리 죽지 말고 내 목마른 니신에 못박혀요   얼마든지 죽을 수 있어요 몸은 하나지만   참한 죽음 하나 당신이 가꾸어 꽃을   보여 주세요 엘리, 엘리 당신이 승천하면   나는 죽음으로 월경할 뿐 더럽힌 몸으로 죽어서도   시집 가는 당신의 딸, 당신의 어머니   3   그리고 나의 별이 무겁게 숨 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혈관 마디마다 더욱   붉어지는 신음, 어두운 살의 하늘을   날으는 방패연, 눈을 감고 쳐다보는   까마득한 별   그리고 나의 별이 파닥거리는 까닭을   말할 수 있다 봄 밤의 노곤한 무르팍에   머리를 눕히고 달콤한 노래 부를 때,   전쟁과 굶주림이 아주 멀리 있을 때   유순한 사명처럼 깃발 날리며   새벽까지 행진하는 나의 별   그리고 별은 나의 조국에서만 별이라   불릴 것이다 별이라 불리기에 후세   찬란할 것이다 백설탕과 식빵처럼   구미를 바꾸고도 광대뼈에 반짝이는   나의 별, 우리 한족의 별      그날   그날 아버지는 일곱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 점 치는 노인과 편통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세룡. 1947년 서울 출생. 1974년 "월간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했다. 그의 시는 개인적인 처지와 형편을 노래하면서도 심한 절망이나 좌절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낙관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여유를 보여주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집으로 "빵"이 있으며, 현재 잡지사에서 일하고 있다.      빵   이것이 희망으로 보일 때   어리석은 사람들은   집을 담보로 잡히고서라도   끝까지 간직하려고 애쓰겠지요   또 이것이 불만으로 보일 때   똑똑한 사람들은   밤을 새우더라도   끝까지 씹으려고 덤비겠지요   그러나 이것이 밀가루 빵으로 보일 때   사람들은    제조한 날로부터 사흘이 경과되면   대체로 상하기가 쉽다는 걸 알게 됩니다   희망에 대해서도   불만에 대해서도 알게 됩니다     이시영. 1949년 전남 구례 출생. 서라벌예대 문창과 및 고대 대학원 국문과 수학. '중앙일보' 신춘문예 및 "월간문학"을 통해 문단에 등단했다. 시에 강렬한 민중적 메세지를 담으려는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드물게 뛰어난 정서와를 조합시켜 감동어린 시세계를 구축한 시인이다. 시집 "만월"을 춝간, 현재 창작과 비평사 주간으로 있다.      너   불러다오   밤이 깊다   벌레들이 밤이슬에 뒤척이며   하나의 별을 애타게 부르듯이   새들이 마지막 남은 가지에 앉아   위태로이 나무를 부르듯이   그렇게 나를 불러다오   부르는 곳을 찾아   모르는 너를 찾아   밤 벌판에 떨면서   날 밝기 전에   나는 무엇이 되어 서고 싶구나   나 아닌 다른 무엇이 되어   걷고 싶구나   처음으로 가는 길을   끝없는 길을      만월   누룩 같은 만월이 토담벽을 파고들면   붉은 얼굴의 할아버지는 칡뿌리를 한 발대   가득 지고 왔다   송기를 벗기는 손톱은 즐겁고   즐거워라 이마에 닿는 할아버지 허리에선   송진이 흐르고   바람처럼 푸르게 내 살 속을 흐른다   저녁 풀무에서 달아오른 별들,   노란 벌이 윙윙거리면   마을 밖 사죽골에 삿갓을 쓰고   숨어사는 어매가   몰매 맞아 죽은 귀신보다 더 무서웠다   삼베치마로 얼굴을 싼 누나가   송기밥을 이고   봉당으로 내려서면   사립문 밖 새끼줄 밖에서는   끝내 잠들지 못한   맨대가리의 장정들이 컹컹 짖었다   부엉이 울음소리가 쭈그리고 앉은   산길에는 썩은 덕석이 내다버린 아이들과 선지피가 자욱했다   어둠 속에 숨 죽인 갈대덤불을 헤치고   늙은 달이 하나 떠올랐다     이윤택. 1952년 부산 출생. 서울연극학교 중퇴. '제1회 방송통신대 문학상' 시부문 당선. "현대시학"으로 데뷔하여 '열린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시는 서민적 삶의 양상에 대한 구체적 탐색을 보여 주고 있다. 시집으로 "시민"이 있고 현재 부산일보 기자로 있다.      늑대   빈들 마구 달렸어   갯바닥 풀섶 꾀꼬리알 훔치고   낮게 나는 새 모조리 잡아 먹었어   표범과 만나 돌밭 당당히 뒹굴었고   없는가   숲이 썩고 있어   부러진 상수리 옆구리 불 새고 있어   보이지 않아   도사리고 앉은 나무들 웅웅 매맞는 소리   어디 있는가   생솔가지 불타는 불   황홀하게 쓰러지는 휘파람소리   밤에 핀 포도알 알알이 삼키며   눈부신 아랫도리 벗어 던졌어     이하석. 1948년 경북 고령 출생. 경북대 사회학과를 수학했으며 "현대시학"의 추천을 받고 문단에 데뷔한 그는 현대문명의 반인간성에 대한 인식을 광물질의 상상력으로 드러내는 한편, 소외되고 사물화된 인간의 모습을 냉혹하게 그려내고 있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자유시' 동인이며 시집으로 "투명한 속" "김씨의 옆얼굴" 등이 있다.      철모와 수통   철모와 수통은 우연히 만나, 조수 속 기우뚱 거리며   쓸려내려간다, 굴 껍질 딱딱한 바위 기슭에   때로 휴전처럼 쉬며, 탄혼의 질린 표정을   굴 껍질 밑에 서로 숨기면서. 망가뜨려진 몸으로 갖는   그들의 휴식과 비탄은 공허하다, 전쟁도   그 이상의 평화도 수고의 값도 없이.   오직 쓸려갈 뿐, 차가운 동해의 깊이 속에   내던져진 채, 끊임없이 밑바닥으로만 내려가면서.   몇 마리 광어 새끼들 눈 비비며 철모 속에   숨어든다. 밤, 인광의 흰 소금물 속에서   문득 철모의 한 끝이 떨어져 나간다, 붉은 녹의 껍질로만   사라져간 어둠 속만이 아프다. 광어 새끼들의   잠 속으로 몇 개의 불덩이가 지나갔다.   불덩이 쪽으로 열린 광어 새끼들의 꿈을 향해   수통은 막연히 속이 출렁거림을 느낀다.   죽음과 함께 병사의 목줄기를 타고 넘어가 버렸던   물. 광어 새끼들의 잠깬 눈을 숨기는   바위 기슭, 수통의 헤진 구멍 틈으로   몇 방울 물이 고즈너기 흘러내렸다, 전쟁도   그 이상의 평화도 갈증도 남김 없이   오직 쓸려갈 뿐인 거대한 소금의 밑바닥에서.      핀 2   그들은 반짝거린다 눈만 날카롭게 뜬 채,   흰눈 속 노을 묻은 어깨 묻힌 채, 엷은 푸른 하늘 속에   두 손 든 나무 밑에서. 봄도 오기 전   백치의 땅 밑에 누워 질퍽한 잠을 자는   모든 것들의 정수리를 찌르며, 그들은 때로 풀처럼   싱싱하게 땅에서 솟으며, 노을 묻은 몸이   사악한 반짝임만으로 일어선다.   세상 모든 그들 반짝이며 노는 곳마다   우울하게 뒤로 일어서는 구름의 노을빛.     이해인. 경기도 이천 출생. 필리핀 세인트 루이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고 현재 수녀로서 수도생활과 사회봉사활동을 하면서 서강대학교에서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시집 "민들레의 영토" "내 혼에 불을 놓아"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가 있는 그는 투명한 종소리처럼 소박하고 순수한 시들을 쓰고 있어 많은 독자들의 호응을 받고 있는 수녀 시인이다.      민들레의 영토   기도는 나의 음악   가슴 한복판에 꽂아 놓은   사랑은 단 하나의   성스러운 깃발   태초로부터 나의 영토는   좁은 길이었다 해도   고독의 진주를 캐며   내가   꽃으로 피어나야 할 땅   애처로이 처다보는   인정의 고움도   나는 싫어   바람이 스처가며   노래를 하면   푸른 하늘에게   피리를 불었지   태양에 쫓기어   활활 타다 남은   저녁 노을에   저렇게 긴 강이 흐른다   노오란 내 가슴이   하얗게 여위기 전   그이는 오실까   당신의 맑은 눈물   내 땅에 떨어지면   바람에 날려 보낼   기쁨의 꽃씨   흐려오는   세월의 눈시울에   원색의 아픔을 씹는   내 조용한 숨소리   보고 싶은 얼굴이여      가을노래   가을엔 물이 되고 싶어요   소리를 내면 비어 오는   사랑한다는 말을   흐르며 속삭이는 물이 되고 싶어요   가을엔 바람이고 싶어요   서걱이는 풀잎의 이마를 쓰다듬다   깔깔대는 꽃 웃음에도 취해도 보는   연한 바람으로 살고 싶어요   가을엔 풀벌레이고 싶어요   별빛을 등에 업고   푸른 목청 뽑아 노래하는   숨은 풀벌레로 살고 싶어요   가을엔 감이 되고 싶어요   가지 끝에 매달린 그리움 익혀   당신의 것으로 바쳐 드리는   불을 먹은 감이 되고 싶어요      석류꽃   지울 수 없는   사랑의 화인   가슴에 찍혀   오늘도   달아오른   붉은 석류꽃   황홀하여라   끌 수 없는   사랑--   초록의 잎새마다   불을 붙이며   꽃으로 타오르고 있네   [출처] [펌] 한국의 애송시 (5)|작성자 수위
204    애송시선 2 댓글:  조회:2865  추천:0  2015-02-13
장석주. 1954년 충남 논산 출생.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한 그는 청순한 의식과 탄력있는 상상력으로 타락한 세계 속에서의 대립과 갈등으로 얼룩진 삶과 찢긴 자아를 비극적으로 드러내는 시인이다. 시집으로 "햇빛사냥" "완전주의자의 꿈" "그리운 나라" 외 많은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등에 부침   1   누이여, 오늘은 왼종일 바람이 불고   사람이 그리운 나는 짐승처럼 사납게 울고 싶었다.   벌써 빈 마당엔 낙엽이 쌓이고   빗발들은 가랑잎 위를 건너뛰어 다니고   나는 머리칼이 젖은 채   밤 늦게까지 편지를 썼다.   자정 지나 빗발은 흰 눈송이로 변하여   나방이처럼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유리창에 와 흰 이마를 부딪치곤 했다.   나는 편지를 마저 쓰지 못하고   책상 위에 엎드려 혼자 울었다.   2   눈물 글썽이는 누이여   쓸쓸한 저녁이면 등을 켜자.   저 고운 불의 모세관 일제히 터져   차고 매끄러운 유리의 내벽에   밝고 선명하게 번져나가는 선혈의 빛.   바람 비껴불 때마다   흔들리던 숲도 눈보라 속에 지워져 가고,   조용히 등의 심지를 돋우면   밤의 깊은 어둠 한 곳을 하얗게 밝히며   홀로 근심없이 타오르는 신뢰의 하얀 불꽃.   등이 하나의 우주를 밝히고 있을 때   어둠은 또 하나의 우주를 덮고 있다.   슬퍼 말아라, 나의 누이여   많은 소유는 근심을 더하고   늘 배부른 자는 남의 아픔을 모르는 법,   어디 있는가, 가난한 나의 누이여   등은 헐벗고 굶주린 자의 자유   등 밑에서 신뢰는 따뜻하고 마음은 넉넉한 법,   돌아와 쓸쓸한 저녁이면 등을 켜자.      숨은 꽃   1   너... 숨은   꽃이 아름답다   겨울 잠에서 깨어난 뱀들이 또아리를 틀고   짓누르는 땅거죽 헤집고 돋는 초록의 들판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그냥 태연히 떠나갈 수는 없다   핏방울 떨어지듯 앙징맞게 맺힌 꽃망울이여   숨어서 앙칼지게 쏘아보는 꽃이여   2   징그러워라, 상처 아문 뒤 철죽보다 더 짙은 붉음으로   타는 이 삶이 괴로움은 죄보다 더 가시같다   세상에 태어나 이 괴롬보다 더 큰 괴롬은 없었다   널 향한 미친 피의 참을 길 없는 줄달음질에   난 서릿발 풀린 흙덩이마냥 부서지고 싶었다   그러나, 보라... 삶은 징그럽고도 다정한 것,   가량비 흐릿한 저 들녘에 하염없는 꽃상여 행렬을...   우린 더욱 살아봐야 하리, 삶은 포기할 수 없는 것   살아서 타는 괴롬으로 더욱 생생히 빛나야 하리     장영수. 1947년 강원도 원주 출생. 서울대 사범대 불문과 졸업. "문학과 지성"에 시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단한 그는 삶에 상처를 받는 인간의 고뇌를 드러내면서 그것을 우리 모두의 아픔으로 확산하는 시작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 장훈고 교사로 재직중이며 시집 "메이비" "시간은 이미 더 높은 곳에서"가 있다.      메이비   (천막교실, 가마니 위에 비는   내리고)   우리는 고무신으로 찝차를   만들었다. 미군 찝차가   달려왔다 네가   내리고.   미군들이 쑤왈거리다가 메이비,   하고 떠나고, 그리하여 너는   메이비가 되었다.   미제 껌을 씹는 메이비. 종아리 맞는   메이비.   흑판에 밀감을 냅다 던지는   메이비. 으깨진 조각을 주으려고   아이들은 밀려 닥치고.   그 뒤에, 허리에 손을 얹고 섰는   미군 같은 메이비.   남자보다 뚝심 센 여자애보다   뚝심 센 메이비. 여자애를 발길로   걷어 차는 메이비.   지금은 비가 내리고.   어느 틈엔지 미군들을 따라   떠나 버린 메이비.   바다 건너 가 소식도 모를   제 이름도 모를 메이비. 어차피   어른이 되어서는 모두가 고아였다.   메이비. 다시는 너를   메이비라고 브르지 않을 메이비.      그 여자   그 여자. 중년의 갈잎처럼   타버린 살결에. 흐트러진 축축한   머리칼.   소년원에 잡혀간 아들과.   아는 집 아이를 보아주는   딸과. 거쳐도 없이, 세 식구가   헤매이는 서울의 새벽은 안개와   연기에 휘감기었다.   그 여자. 겨울이면 식모를   살고. 더운 한철은 채소를   팔고. 노점단속에 걸리면   닷새를 살고.   어느날. 소년원을 도망친 아들은   찾아와, 돈 오백원을 졸랐다.   어머니가 가진 돈 천이백원은 내일   채소를 살 돈이었건만. 아들은   그날 밤, 그 돈을 훔쳐   달아났다.   그 여자. 나는 그날 이후. 길을   걷다가. 뻐스를 탔다가. 또는   저 남쪽 어느 부두에 이르렀다가.   수없는 그 여자를 보았다. 세상은   첩첩, 안개와 연기에 덮여.   아무도 깨뜨리지 못한다, 안개와   연기.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다. 세상은, 불현뜻 돌아선다.     정호승. 1950년 경북 대구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한국일보, 대한일보' 신춘문예와 "현대시학"으로 데뷔한 그는 민중적 감각의 부드러운 일깨움의 시들을 발표했다. '반시' 동인이며 시집 "슲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가 있고, 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기도 했다.      맹인 부부 가수   눈 내려 어두워서 길을 잃었네   갈 길은 멀고 길을 잃었네   눈사람도 없는 겨울밤 이 거리를   찾아오는 사람 없어 노래 부르니   눈 맞으며 쎄상 밖을 돌아가는 사람들뿐   등에 업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달래며   갈 길은 먼데 함박눈은 내리는데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하여   눈 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네   세상 모든 기다림의 노랠 부르네   눈 맞으며 어둠 속을 떨며 가는 사람들을   노래가 길이 되어 앞질러 가고   돌아올 길 없는 눈길 앞질러 가고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건질 때까지   절망에서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   함박눈은 내리는데 갈 길은 먼데   무관심을 사랑하는 노랠 부르며    눈 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며   이 겨울 밤거리의 눈 사람이 되었네   봄이 와도 녹지 않을 눈 사람이 되었네      슬픔은 누구인가   슬픔을 만나러   쥐똥나무 숲으로 가자.   우리들 생의 슬픔이 당연하다는   이 분단된 가을을 버리기 위하여   우리들은 서로 가까이   개벼룩풀에 몸을 비비며   흐느끼는 쥐똥나무 숲으로 가자.   황토물을 바라보며 무릎을 세우고   총탄 뚫린 가슴 사이로 엿보인 풀잎을 헤치고   낙엽과 송충이가 함께 불타는 모습을   바라보며 가을 형제여   무릎으로 걸어가는 우리들의 생   슬픔에 몸을 섞으러 가자.   무덤의 흔적이 있었던 자리에 숨어 엎드려   슬픔의 속치마를 찢어내리고   동란에 나뒹굴던 뼈다귀의 이름   우리들의 이름을 지우러 가자.   가을비 오는 날   쓰러지는 군중들을 바라보면   슬픔 속에는 분노가   분노 속에는 용기가 보이지 않으나   이 분단된 가을의 불행을 위하여   가자 가자   개벼룩풀에 온몸을 비비며   슬픔이 비로소 인간의 얼굴을 가지는   쥐똥나무 숲으로 가자.     조정권. 1949년 서울 출생. "현대시학"에 추천을 받아 시작활동을 시작한 그는 시집 "비를 바라보는 일곱가지 마음의 형태"(1972)와 "시편"을 출간했다. 1985년 '녹원문학상'을 수상한 그의 시세계는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사고로, 퇴화되기 이전의 서정적 자아만이 볼 수 있는 사물과의 원초적 관계를 드러내고 있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문예진흥원에 재직중이다.      돌이 돌 위에 돌을        내려 누르듯이   돌이 돌 위에 돌을 내려 누르듯이   혼자이오나 혼자가 아니옵니다.   혼자이오나 여전히 혼자가 아니옵니다.   돌이 돌 위에 돌을 내려 누르듯이   이 마음 오랫동안 혼자 향하고 있었아오나 향하지 아니하였읍니다.   이 마음 오랫동안 혼자 물굽이 일었아오나 응결하지 아니하였읍니다.   어느 고적한 밤의 어깨에 기대어 그 침묵의 물굽이를 향하고 있었아오나 향하지 아니하였읍니다.   돌이 돌 위에 돌을 내려 누르듯이   내 스스로 이룬 근심이니 내 스스로 순종하라고 그분은 타이르십니다.   내 스스로 향한 불길이니 내 스스로 순종하라고 그분은 타이르십니다.   정결하게, 그리고 공손하게, 내 스스로 순종하라고 그분은 타이르십니다.   혼자이오나 이 마음 아직 혼자에 이르지 못했읍니다   혼자이오나 이 마음 아직 혼자 이루지 못했읍니다   혼자이오나 이 마음 아직 혼자 향하지 아니하였읍니다   혼자이오나 이 마음 아직 혼자 응결하지 못했읍니다   혼자이오나 이 마음 혼자로서 그득하지 못했읍니다   돌이 돌 위에 돌을 내려 누르듯이   이 마음 비어 있으나 가득히 차 넘치옵니다   이 마음 비어 있으나 가득히 넘치고 있아옵니다.   이 마음 비어 있으나 가득히 비어서 넘치옵니다.   돌이 돌 위에 돌을 내려 누르듯이   오늘은 그분이 지긋한 마음으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읍니다.   오늘은 그분이 힘겨운 짐을 내려놓고 앉아 계시는 모습을 뵈었읍니다.   오늘은 그분이 하늘에 기대어서   육신도 짐도 다 벗어놓은 채 가슴만으로 앉아 계시는 모습을 뵈었읍니다.      77년 가을   이삿짐을 꾸리다가 장롱 뒷벽 먼지 구덩이에서 찾아낸   결혼 사진첩을 아내는 애지중지 책더미와 함께 싸기 시작한다.   육개월에 한 번씩 소동을 벌일 때마다 들쑤셔지는 세간살이 속에서도   책과 사진첩은 의례 따라 가야 되는 것이라고 아내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과는 일체 상관할 바 없이   안심하고 허리에 매달려 따라오는 어린 것들과 같이   그러나 나는 반대다.   우리가 미련을 가지고 끌고 다니던 것   한사코 소중하게 모셔 놓았던 것들 가운데도   버려야 할 것은 너무 많고   이제부터는 그런 것들과는 무관하게 지내야 하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그런 것들과는 무관하게 또다시 긴 겨울을 나야 하는 것이다.   당신이 애지중지 정돈하려 하는 책과 기념사진첩   그 속에 있는 우리들의 과거는 지나치게 정돈되어 있고   정이 되어 있는 과거가 우리들의 생활에서 장식이 되는   그런 이로움은 이제부터는 막아야 하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그런 것들과 무관하게 한 겨울을 나야 하는 것이다.   살아보면 살아 볼수록 더 좁디 좁은 방으로 이사를 가게 되는 사람에게는 이삿짐이란 가벼워야 하고 간편해야 하지 않겠는가.     최승자. 1952년 충남 연끼 출생. 고려대 독문꽈에서 수학. "문학과 지성"을 통해 데뷔한 그는 철저한 긍정에 도달하기 위해 세계 전체에 대한 부정을 수행하는 시세계로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젊은 시인. 시집으로 "이 시대의 사랑" "즐거운 일기"가 있다.      삼십세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 세포가 싹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어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 우리 철판깔았네      즐거운 일기   오늘 나는 기쁘다. 어머니는 건강하심이 증명되었고 밀린 번역료를 받았고 낮의 어느 모임에서 수수한 남자를 소개받았으므로.   오늘도 여의도 강변에선 날개들이 풍선돋힌 듯 팔렸고 도곡동 개나리 아파트의 밤하늘에선 달님이 별님들을 둘러앉히고 맥주 한 잔씩 돌리며 봉봉 크랙카를 깨물고 잠든 기린이의 망막에선 노란 튤맆 꽃들이 까르르거리고 기린이 엄마의 꿈속에서 포니 자가용이 휘발유도 없이 잘 나가고 피곤한 기린이 아빠의 겨드랑이에선 지금 남 몰래 일 센티 미터의 날개가 돋고...   수영이 삼촌 별아저씨 오늘도 캄사 캄사합니다. 아저씨들이 우리 조카들을 많이 많이 사랑해 주신 덕분에 오늘도 우리는 코리아의 유구한 푸른 하늘 아래 꿈 잘 꾸고 한판 잘놀아났읍니다.   아싸라비아   도로아미타불     최승호. 1954년 춘천 출생. 춘천교육대학 졸업. "현대시학"으로 데뷔했으며 '제6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그는 사실적 관찰, 단순하지 않은 사려, 허덥지 않은 언어의 세계로 시풍을 다져나가고 있는 시인이다. 시집으로 "대설주의보"가 있다.      대설주의보   눈 덮인 채   해일처럼 굽이치던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 마을 길 끊어 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 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하종오. 1954년 경북 의성 출생. 한사대를 졸업했으며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했다. 맑은 감성과 순결한 언어로 이 땅에 서린 한과 소망을 노래한 시인으로 '반시' 동인으로 활동중이다. 시집으로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가 있다.      풍매화   떠돈들 어떠리 떨어진들 어떠리   언제든지 떨어지면 움 돋겠지   진달래가 골백송이 흐득흐득 울어도   풍매화는 바람 따라 날아다닌다.   골짝에 죽어 있는 메아리를 살려내고   벌목꾼이 버리고 간 도끼소리 찾아내고   땅꾼이 잃어버린 휘파람도 찾아내어   그 덧없는 소리들 데불고 무얼 하는지   풍매화는 이곳저곳 기웃거린다.   혼자서 싹틀 힘도 없으면서   어디든지 뿌리내리면 숲이 이뤄지겠지   풍매화는 득의양양 산맥을 날아다니지만   대포알 묻힌 땅 버릴 수 없고   녹슨 철조망 무사히 바라볼 수만 없어   머뭇거리니 마침내 바람도 잠잠해진다.   이제는 묻혀야지, 몸 바쳐야 할 자리는 여기.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우리야 우리끼리 하는 말로   태어나면서도 넓디넓은   평야 이루기 위해 태어났제   아무데서나 푸릇푸릇 하늘로 잎 돋아내고   아무데서나 버려져도 흙에 뿌리박았는기라   먼 곳으로 흐르던 물줄기도 찾아보고   날뛰던 송장메뚜기 잠재우기도 하고   농부들이 흘린 땀을 거름삼기도 하면서   우리야 살기는 함께 살았제   오뉴월 하루볕이 무섭게 익어서   처음으로 서로 안고 부끄러워 고개 숙였는기라   우리야 우리 마음대로 할 것 같으면   총알받이 땅 지뢰밭에 알알이 씨앗으로 묻혔다가   터지면 흩어져 이쪽 저쪽 움돋아   우리나라 평야 이루며 살고 싶었제   우리야 참말로 참말로 참말로   갈라설 수 없어 이 땅에서 흔들리고 있는기라     홍영철. 1955년 대구 출생. 계명대 국문과 졸업. '대구매일' 신춘문예와 "문학사상"을 통해 문단에 데뷔했다. 자연과 시인의 유기적인 교감 속에서 발견되는 자아의 신선한 시세계를 갖꼬 있는 그는 시집 "작아지는 너에게"가 있다.      바다 일부   1   내 사랑은 우리집 책상 속에 잠들어 있어요. 고운 노래를 들으면 그것은 하늘 위로 날아갔다 돌아오곤 해요. 꿈꾸는 바다가 보여요. 깨울 수 없는 그 바닷가에는 고기떼들만 하얗게 죽어 있어요.   2   새들의 지붕 위로 푸른빛 저녁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어요. 발가락을 간지르던 새앙쥐도 떠나가고 나는 심심히 오래된 그림책을 펼쳐요. 잠든 때에도 오렌지빛 바다는 얘기해요. 흩날리는 거리에서 돌아오면 피곤한 손을 닦아 주기도 해요.   3   나는 모른다고 했어요. 책상 위 제라늄이 왜 자꾸 시드는지를. 내 낡은 머리칼 위에는 왜 늘 겨을 바람이 펄럭이는지를. 이따금 열린 창틈으로 새틀구름이 지나가고 지금 내 귀에는 어둠 소리만 가득해요. 떨어져 쌓이는 쓸쓸한 바닷가도 보여드릴께요.      작아지는 너에게   말이 달려오다.   연갈색 갈기 뒤에는   알몸인 너의 그대가 숨어 있다.   바람이 분다.   어디에도 불빛은 보이지 않는다.   냇물은 어디로도 흐르지 않는다.   뒷산이 가라앉는다.   너는 흰꽃을 꺾는다.   못에 찔린 발가락이 너는 몹시 아프구나.   가라, 절룩거리며.   달려오는 너의 그대와   너의 그대의 말에게로 가서   그 꽃묶음을 건네주려므나.   너의 그대와 너의 그대의 말은   꽃향기에 취해   더욱 거센 숨소리로 달려가리니.   쥐들이 너의 다친 발가락을 물어뜯는구나.   너는 모르느냐.   동해에는 폭풍 경보가 내려졌다.   고기떼들이 다 땅 위로 올라와   너와 네 이웃의 집뜰을 범하고   거친 비린내를 세우고 있다.   너는 또 부서진 기타를 치는구나.   그러나 그런 시시한 노래 소리로는   돌멩이들의 달콤한 새벽잠만 깨워 놓을 뿐   한 마리 개똥벌레의 날음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드디어 흰 꽃묶음을 건네주었구나.   잘했따.   너의 발가락은 이제 다 나았다.   너의 그대의 등허리는 너무나 눈부시다.   잊어버리자.   일전의 일들은 슬로우 비데오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너는 잠시만 울어야겠따.   너의 그대와   너의 그대의 말은   가라앉은 산으로 가서   함께 가라 앉았다.   아침이 올 것이다.   나뭇가지 너머가 훤하지 않느냐.   그런데 너는   왜 자꾸 작아지느냐.   왜 자꾸만 작아지느냐.     홍희표. 1946년 대전 출생. 동국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현대문학"을 통하여 문단에 데뷔(1967)한 그는 시집 "마음은 구겨지고" "한방울의 물에도" "살풀이"가 있다. 언어와의 싸움에서 풍자적인 것을 살려 전통적 시형식에 팽팽한 긴장을 부여하고 그 긴장으로 인해 그의 시세계를 형성해 나가는 시인이다.      섬에 누워   섬이 날 가두고   회오리 바람으로 날 가두고   원산도 앞에는 삽시도   삽시도 앞에는 녹도.   파도가 날 가두고   피몽둥잇 바람으로 날 가두고   프랑크톤 위에는 조각달   조각달 위에는 왕보리나무.   젖은 예수님 걸어오고   다리꺾인 게 걸어오고   오, 열 두 입이 목메인 섬   오, 하늘로 흘려보낸 섬.      한국인의 애송시 III            제1권   편집고문:서정주, 조병화, 이어령   발행인:장석주   발행처:청하   주소:서울시 강남구 역삼동 780-1   초판발행일:1985년 7월 25일   입력일:1992년 4월 22일   입력 및 교정자:임종욱     서문   강말주   5월이 오면   설정   강방영   집으로 가는 길   해바라기   강성일   꽃망울 통신   일요일에 죽은 붕어   강신용   못질   그리움   강안희   저녁 노우트 5   빨래   강정화   바느질   맷돌의 염원   강형철   해망동 일기 1   광명리에서   고경희   개화   귀향   고광헌   신중산층 교실에서 1   낙골 산동네 101번 종점   고운기   동대문   예수가 우리 마을을 떠나던 날   고형렬   쓰레기장불   대청봉수박밭   곽문환   촛불   소리   곽재구   사평역에서   20년 후의 가을   구중회   물방울 튀기는 노래   장마기   권오욱   은비   겨울 안개   권태현   공백기   미술시간   기형도   어느 푸른 저녁   안개   김경미   비망록   임진강이 말하기를   김경옥   비만 1   햇빛 부신 날은   김기문   발견   토함산 그늘   김기홍   일터에서   겨울인사   김대구   말씀   잠적   김동원   너의 겨울 뒤에서   연두색 하느님   김동호   죽은 바둑이   복숭아   김명이   탈춤   간이역   김백겸   구리   비를 소재로 한 서정별곡   김사인   한강을 보며   고향의 누님   김상길   그릇   그 목소리   김상윤   입소 28 고지   월남에 계신 오빠에게   김상환   영혼의 닻   산비둘기   김선굉   아리랑 1   김세완   눈물에 대하여   허수아비   김소원   그림자   조춘   김송배   바람   흩꽃잎 뒤풀이 2, 닻   김순일   서산 사투리 1   서산 사투리 16   김영안   한수이북   민중선언   김용락   송실이 누님   4.19날 육사시비 앞에서   김용옥   산문에서   흐린 저녁   김용주   노래   작업대 앞에서   김용택   섬진강 3   섬진강 18   김유선   가족   봄바람   김윤현   만적   봉양동   김재진   아침을 위하여   그대   김정숙   이 강산 돌이 되어   이 강산 유월은   김정원   6월의 기억   차 한잔   김종목   찻집에서   1961년의 강설   김종섭   환상조   달맞이꽃   김종희   까치가 오지 않는 집   매장   김진경   E.T   풀잎   김창규   비무장지대   동지를 위하여   김필곤   편지   섬진강 강물을 먹고   김해화   우리들은   어디만치왔냐   나종영   화해에 대하여 5   양화진에서   나해철   무등에 올라   강강수월래   남진우   그 새벽나라로   잠자는 바다   노진선   다시 굴리고 싶은 주사위   한 발로   도종환   고두미 마을에서   울타리꽃   류후기   소지   유두   명기환   목포항 1   가을 여행   문형렬   꿈에 보는 폭설   눈물사위   박귀래   등대   시냇가   박기동   산죽 그늘 아래   콘체르토   박기영   물의 역사   숲에 대한 응시 1   박남준   들판에 서서   마을   박남철   오랑캐꽃을 위하여   엽서 1   박노해   노동의 새벽   손무덤   박덕규   기러기 남매   빈 살을 채우기 위하여   박만기   황토 1   황토 11   박몽구   우체국에서   빈잔   박상봉   자정의 꿈   다시 그리운 사랑   박상우   안경흔들기   해맞이   박상일   빈차   그 새 한마리   박상천   열대어의 유전인자   단 한번만이라도   박선욱   그때 이후로   오월 초하루 신새벽에   박양진   어느 여름날 아침에   일절유심조   박영근   철거민 1   박일   나무에게   겨울이 오면, 시여   박일규   감나무   목련을 보며   박정숙   추억에서   동화의 나라   박진관   우리가 기다린 님은   우리가 죽음으로   박진숙   죄   다른 새들과 같이   박찬   상리 마을에 내리는 안개는   이 땅에 무슨 일이   박태일   그리운 주막 1   선동 저수지   박현서   제막식   서림사 2   박혜숙   가을 저녁에   5월에   배경란   나는 잠들고 싶어요   내가 우는 까닭을 묻지 말아요   배인환   길잡이   나의 방   배찬희   민들레   고향   배창환   아이들이 가고 없는 빈 교실에 남아   오리걸음   백남천   산낙지를 씹으며   고층빌딩 유리닦이   백미혜   공구르기   정적 2   백준찬   감각   겨울잠   백창수   어떤 처용   헌화가유감   백추자   돌아오는 길   현명한 새   백학기   봉천   눈   서경온   실내악   숯불   서소로   언덕을 넘어   땅   서은숙   폭죽   분수   서홍관   금주선언   넋건지기   석병호   낯잠속 얼굴 11   편지   성낙희   겨울 나무   불을 켜며   소재호   장미   석고상   손동연   우리 선생 백결   선에 대하여   송무   옛날의 금잔디   배를 바라보며   송재학   섬 1, 편지   얼음시   송희철   가을 노래   발을 씻으며   안도현   고추밭   빈논   안초근   사막   가을   안혜경   무너지기 위하여   전화를 끊은 후   양애경   베스트 셀러   물   양준호   칸딘스키   파이프   엄승화   탈옥자   후레지어   오재동   운암리 시편   베짜기   오정환   채광기   모래벌판   오태환   공옥진 1   최익현   오환영   처용무 79   처용무 80   우미자   내소사 연가   겨울 강가에서   원용문   중추절   청자송   원재길   한자락의생   사진찍기   원태희   겨울이 간다   비의 꿈   유혜목   안개   이주   유화운   겨울바다   겨울 아침 강가에서   윤성근   황진이 서설   평일의 관심   윤승천   유언   목마   윤여홍   돌멩이를 위한 시   꽃   윤인영   생물선언   고 과거에게   윤재철   피뢰침   대자보   윤지용   노래   봄잠   윤형근   사냥   해와 달 이야기   음예원   뜻밖의 추억   해마   이난수   문   고향에   이능표   풍장   스물여섯번째의 산책   이륭   잠행 1   해방춤   이문재   우리 살던 옛집 지붕   낙타의 꿈   이병천   선사의 잠   물의 계율 1   이복웅   걸어가는 아파트   바다의 시간   이상백   누가 끝을 보았나   목마름으로   이상호   바다로 나가볼까   이선관   애국자   자화상   이세일   비   구름   이수정   물구나무서기   역사 앞에서   이숙희   고향 1   새   이승철   정든 임   오월비   이승하   내림굿   백수광부의 차에게   이신강   손   기차역에서   이영유   자유에 대하여   사슬 6   이우영   그해 겨울   편지   이은경   나무가지 사이로 흐르는 바람   속도제한 구역   이은미   보길도의 5월   슬픔   이은봉   사루비아   남새갈기   이정숙   편도선   문상   이창기   문득 고요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파문이듯   이충이   당신의 자리   무심사로   이해영   기억 속의 바다   우리들의 의식에서   이현암   산   곱사춤   이혜선   후예들   한가윗날   이효윤   거울 앞에서   함곡관 밖으로 가는 길에서   이희목   보리밭   4월   이희자   천천리의 새벽비   미륵사 오층석탑   이희찬   리브울만의 사랑을 노래하기 위한 비망록   사랑을 위한 독후감   임문혁   물의 비밀   딱 둘만 남게 된다면   임석래   겨울   4월   임승빈   세 개의 유년   입술들   장경린   허리운동   인물화   장정일   강정간다   지하인간   장종권   바람불   안테나   전광옥   신정동 1   관법 4   전연옥   곤충채집   제비붓꽃   전원책   동해단장   정대호   레미에게   미국으로 입양가는 아이들에게   정동주   이삭줍기   전설   정두리   테레사 씨 꽃가게   우리들의 이름자   정명자   잊지 못할 1978년 2월 21일   정상현   운동장을 바라보며   동두천에서   정인섭   이 땅에 모여 3   오늘 저녁 우리나라의 절망 우물들이   정일근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 편지   시월의 기도문   정재희   유년 시절   봉원사 가는 길   조남야   그믐밤   보리밟기   조석구   리어카와 생선   시인과 농부   조석현   천목   6병동   조원규   밤의 노래 1   밤의 노래 2   조윤호   풀잎의 영혼   빈자여행   차정미   여의도 83   피아노를 치면서   채희문   가을 레슨   자기 빨래하기   최건   마을까치   청량리 역에서   최동현   어전리 3   어전리 4   최명자   쑥   천생연분   최문수   식   출항기   최병준   바람으로 멱 감으며   연   최영   개구리   희화   최영철   나무   지금도 지금도   최준   가을장래   섬 7   최창렬   톱니바퀴   벽시계   최휘웅   어느날   환상도시 9   하남길   현상붙은 시   꽃   하일   주민등록   동행   하재봉   숲의 전설   한기찬   아가야 2   칠월   한상원   소망   오늘 2   허영선   인동일기   추억처럼 나의 자유는   홍석하   청동 항아리   첫눈   홍일선   오산장 시오릿길   동탄행 버스   황영순   봄 편지   길   황인숙   추락은 가벼워   새를 위하여        서문   "한국인의 애송시" 3권을 펴내면서   사실 한편의 시가, 창조적인 자아 표출의 계기가 철저하게 봉쇄되어 있거나, 제도적 강제에 의해 고립. 분산된 좁은 경험세계의 참호 속에 갇힌 삶을 강요당하는 위기의 벼랑에 선 인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란 거의 없다. 그것은 굶주린 자에게 한 조각의 빵이 될 수도 없고, 부당한 폭력 앞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힘없는 자에게 자기방어를 위한 한 자루의 칼이 될 수도 없다. 그렇게 시는 무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에 동아시아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캄캄한 역사 속에 삶의 자리를 마련한 숱한 우리의 젊은이들이 시를 위하여 자신의 한 생애를 바치기로 결심하고, 온 몸으로 한편의 시가 되어 그 캄캄한 역사를 헤쳐나가는 불꽃이 되는 대열에 서고 있다. 이것은 감동적인 일이다. 거대한 활화산의 분출과 같은 젊은 시인들의 끝없는 '시의 폭발'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경이감은, 우리 시대의 상처에 대한 아픔, 그 고통과, 예민한 슬픔과 기쁨, 그리고 허무와 절망을, 단순한 추상성을 넘어서서 생동감 넘치는 현실적, 구체적 형상으로 우리에게  되돌려줄 때의 놀라움에 다름아니다. 1980년대는 시의 시대이다. 한 시인이 표현했듯이, 그들의 시에서 우리는 우리 시대의 삶과 상처의 참모습과 진실을 발견한다.   우리는... 느낀다   상처의 고통을   우리를 찌른 창의 고통을...   젊은 시인들의 '상처의 고통'은 바로 우리들의 그것이다. 시인들은 '종족의 더듬이'인 것이다. 우리 시대의 젊은 시인들이 세계의 억압과 모순의 싸움 끝에 얻은 '상처의 고통'을 그 내면 속에 가두어 사유화 시키지 않고, 의미 있는 형태로 표출시켜 공적 지평 속에서 그것의 진정성을 물을 때, 우리는 놀라고, 감동하고, 반성하고, 절망 속에서도 새롭게 희망을 갖는다. 왜냐하면 시는 예언이니까. 우리는 시가 그 안에 감추고 있는 '예언적 기능'을 읽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선집은 "한국인의 애송시" 1, 2권에 쏟아진 당초의 기대를 훨씬 넘어선 열띤 반응과 찬사에 힘입어 기획된 것이다. 이 시선집에 작품을 낸 시인들은 1980년 이후 각 지면을 통해 정식으로 등단의 절차를 밟은 거의 모든 시인들을 망라하고 있다. 각 일간지의 신춘문예, "현대문학" "한국문학" "문학사상" "월간문학" 등의 문예지와, "심상" "시문학" "현대시학" 등의 시전문지, 그리고 개인 시집과 각 동인지, 무크지 등을 통해 등단하여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하고 있는 200여 명의 시인들이다. 우리는 이 시인들을 선정하는데 특별한 기준을 만들지는 않았다. 시인들 각자의 다양한 삶의 경험과 감수성은, 시에 표현된 이념과 세계관의 다양화와, 시적 방법론 및 그 질적인 성취의 다양화로 드러나 있다. 물론 그 다양성을 쉽게 무방향성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막 출발한 대다수의 시인들의 시세계를 편자들의 일방적인 안목과 척도에 의해서 재단함으로서 자칫 아직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젊은 시인들의 무한대의 잠재적 가능성마저 잘라버릴 수도 있다는 우리의 염려와 신중함이 그런 비난에 대한 변호가 될 수 있으리라. 작품을 보내주고, 책이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을 인내심 깊게 기다려준 시인들께 우리의 고마움을 보낸다. 그리고 이 시선집을 만드는 과정에서 혹시 누락된 시인들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부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분들께 사과를 드리며, 앞으로 새로운 기획에서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인의 애송시" 1, 2권에 뜨거운 성원을 보내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새로 출간되는 80년대 시인들의 작품들을 수록한 이번 책에도 변함없는 애정을 가져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린다.   1986년 여름에   "한국인의 애송시" 편집고문   서정주, 조병화, 이어령     강말주. 1928년 황해도 출생. 1982년 "시문학"지를 통해 등단했으며 국학대학 전문부 국문과를 졸업했다. 우리말의 고유함에 내포된 섬세하고 다감한 정서에 현대적인 의미를 부야하는 작업과 함께 한국적인 서정이 전달될 수 있는 시어의 선택에 유의하여 시를 쓰고 있다. 월간 "새교육"지의 편집장을 역임하였다.        5월이 오면   고운 가슴 쥐어짜   뿌려 놓은 정성으로   5월은 오는 것.   산에도 들에도   아씨의 마음.   시냇물에 머리 씻어   곱게 빗은 실버들도   훈풍에 솟는 정   전하고파   릴리리야 피리소리   흘러간단다.        설정   1   눈이 내려   내 가슴에도 내려   소복이 쌓이는 고향 생각   밟고 가면 지워질까   마냥 걸어도   그래도 좇아오는   길고 긴 행렬.   눈길은 철길처럼   산모퉁이 돌아서 갔다.   2   가도 아니 가도   고향길은 먼 천리길   천리길 시린 한이   발길에 맺혀   나, 눈사람이 되어 주저앉겠네.   할 말이 많아 눈이 오는가   오도가도 못하는   눈사람도 고향은 있어.     강방영. 1956년 제주도 출생. 1982년 "시문학"지의 추천을 받고 등단하였다. 그의 시는 일상에서 지나치기 쉬운 순간적인 것을 포착, 강렬한 서정으로 응축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 대학원 영어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집으로 가는 길   1   바람과 놀고 있는   시골 아이들   머리카락 살랑일 때마다   부서지는 오후의 햇살   진분홍 분꽃을 따   꽃술 당겨 씨방으로   귀걸이하고   부모님 계신   집으로 가는 길.   공기마저 살쩌 있구나!   가슴 가득   맛있어라   맛있어라   전나무 사이 길   아직도 풍성한   남은 여름의 노래   눈을 뜨고   걸어 가다가   눈을 감고   걸어 가다가.   2   밤의 숲에   안겨   어둠은 잠이 들고   깜박깜박   하늘에서   시간을 재는   푸른 별들   아가들의 꿈길 지켜   두어번 낮게 짖는   검둥개   불빛 새는 마당에는   감꽃 홀로   깨어 귀 기울이고   심해처럼   갈앉는 밤   먼 사막에서 일어나   파리하게 불어 오는   바람 소리   마을 한 귀퉁이   소리 없이 부서져   잠든 이들의 이마에   눈썹에 내리는   밤의 가루   검은 재와 같이   조용히   내려 앉는다.   3   바람을 재우며   내리는 가랑비   수북이 동백꽃 떨어져   노랗게 꿀물 씻기는   마당   다시 담장은 푸르게   이끼를 입는다.   지나는 자리마다   안개는 고사리 새순   세우고   산으로   꿈 속에서도   산으로   달리는 아이들   아이들과 함께   물결치는 산   아이들이 웃는 소리   산이 웃는 소리   골짜기를 오르며   빛나는 꼭대기를   휘어 감으며   돌굽이에 나무 등걸에   울리는 메아리   쉬임 없이 당기는   시간의 홠시위에서   솟구치는 빛의   화살들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아이들은 춤춘다   아이들은 노래한다.        해바라기   바다 건너서   언니가 부쳐 온   해바라기 씨   봄내 싹나고   대 올라   마디마디   피어나는 꽃   한치 꽃대 자라면   한송이 더 달린다고   마당에서 아버지는   금빛 꽃송이를   세신다   구름이 뜨고   바람이 불고   흰 빨래가 날리는   해바라기의 하늘   황금의 시간 이울어   달빛 빠져 나가는 밤   잎 시들고   대 마르면   산이 멀리 가고   가을이 멀리 가고   해바라기도   하늘을 이고   멀리 가지만   언니의 하늘   아버지의 하늘에서   해바라기는 꽃 핀다   시간의 바퀴 자국 속에   금빛으로 해바라기는   피어난다.     강성일. 1946년 경북 출생. "중원문학"의 동인이기도 한 그는 1985년 "시문학"지의 추천을 받고 등단하였다. 분명하고 획실한 경험에 의해 자연을 인식하고 그 속에서의 참모습을 주지적인 순수시로 형상화시키는 데 주력하고 있다. 현재 청주 운호고등학교에 재직하고 있다.        꽃망울 통신   지난 밤 그대로부터   까만 꿈을 새긴 어둠 한 장   전통을 받고   이내 흰 종이로 답신하였오.   그 흰 종이 위에   내 맘의 화신인   흰 나비 한 마리   그림 한 장 부탁했는데   아직까지도 무소식이오.   봄비에   당신의 꿈을 씻으며   더욱 긴급한 통신   하얀 회신의 나비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오.   오늘 아침도   꽃술같은 기대로   내 마음 쫑긋   그대 문전에 나가 있오.        일요일에 죽은 붕어   천 근 늘어진   일요일 오후 한낮,   투명한 의식의 그늘 아래   붕어 한 마리.   하늘의 낮달처럼   정신을 식히고 있다.   바람개비 섞바뀌는   오늘은 모든 것을   신에게 맡긴 날,   극과 극   머리와 발 끝인   이승과 저승까지   오수 한 잔에 취한 날,   날개 접힌   일상의 푯대 끝 신호등에   사명처럼 빌붙는   빨강불의 숨소리,   세단 같은   정신의 질주 속에   눈을 뜬 평생이여.   그대   숱한 돌멩이로   내 가슴을 겨냥한들   이 목숨   새 떨어지지 않는   새.     강신용. 1954년 춤남 연기 출생. 1981년 "현대시학"지를 통해서 문단에 데뷔한 그는 간략한 표현과 여백의 미를 추구하는 순수 서정시를 쓰고 있다. "백수문학" 동인이며 시집으로 '가을 성'을 갖고 있다. 현재 도서출판 "창학사"에 근무하고 있다.        못질   못질을 한다.   험물어져 가는 나의   가슴,   바르고 곧은 것들만을 골라서   못질을 하지만   상처로 되돌아오는 나의   일상,   못질을 한다.   출근길, 퇴근길 혹은   모진 세상 언저리   내 모진 것들을 모아서   못질을 하지만   매일같이 빗나가는 나의   하루.        그리움   길을 거닐다 보면   혼자인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누군까 꼭   올 것만 같은   길을 거닐다 보면   잊었던 친구가 생각나고   어디선가 꼭   불러줄 것 같은   그대   목소리   길을 거닐다 보면   혼자인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강안희. 1961년 경남 거창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84년 "심상" 신인상을 수상, 등단하였다. 생활 주변의 일들을 일상적 사물을 빌어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저녁 노우트.5        -- 대화법   때 가 되 면시집은가야지어머니는외 제다리미와외 제후라이팬외 제믹서기손가락을꼽으며슬금슬금나를살피신다어머니어디호두딸집없을까요? 고무장갑없이그많은호두껍질이나까 고 싶 어 요쯧쯧이추위에무슨놈의호두가 맺힐까무 엇 보 다다리미는외제가좋아글쎄 요글쎄요라니써 보 면 다차암어 머니는쓸데없는소리마라뒷집선이서울시댁에서외제안해왔다고애 낳 은지금도 오 금을건다더라삼성금성대우것들도쓸만 해 요그런대로수명도길 구요그 런 대로어머니의숨소리가길 길어졌다.      7.어느 듯   주인여자가 머리 볶으러 간 사이 신나게 빨래해 널고   방으로 온 나는 고향집 생각을 더듬는다   베란다에선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는 옷가지들이   스스로 수분을 뱉으리라 어느듯   가랑잎처럼 바스락거리며 증발할 수 있으까   꿈 꾸겠지만   무거운 나의 마음을 뱉을 수 없어 어느듯   어둠은 문 틈에 조롱박같이 매달린 채 어느듯   방울방울 떨어질 듯 말 듯.      8.벌판   어느 날 갑자기 나는 허허   벌판에 서 있었다 가뭇가뭇한 벌판의 끝   을 향해 나는 달리고 있었다 가도가도 드러나지 않는   왠일일까 벌판의 끝에 소스라치게   뻗은 벽   그 벽의 밑바닥을 향해 뛰어내리고 있었다   뛰어내리면서 보니 하늘이 낮게낮게 벌판에 엎드린다   엎드려 별을 뿌린다 도리깨에 흩어지는   참깨같은 저 별이 어느 날   벌판 어딘가에 걸려 있었다.        빨래   빨래를 합니다 섬유 낖숙이   잡히지 않는 곳에 침투한   일상의 때를   두 손으로 휘어 흔들어 헹굽니다   비누 방울은 웃으며 웃으며 사라지고   손가락 마디에 부딪혀 질컥이는   하루의 웃음이 혹은 아픔들이   물통에서 푸득거립니다   빨래를 합니다 나일론처럼 빳빳한   아버지의 옷가지   까마득히 손 끝에 드러눕는   옷가지를 건져 올리면   가슴 부푼 비눗방울처럼 부풀대는 나의 하루   빨래를 합니다 좁은 골목을   빠져나온 세월이 느닷없이   발등을 밟고는 쏜살같이 달아나고 아   물통 가득히 비어 있는 하늘의 중심   물통 속의 거친 숨소리가   비어 있는 중심마저 흔들어 놓읍니다.     강정화. 1947년 경북 영일 출생. 부산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1984년 "시문학"지의 추천을 받고 등단한 그의 작품세계는 고전적인 것을 바탕으로 한 서정성을 통해 뜨거운 인간애를 추구하고 있다. '배토'와 '한국여성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바느질   한땀 두땀   옮긴 손끝에   때때옷 되어 빛나던   어린날의 깃발.   한올 두올 엮으신   매듭진 옷고름이   풀지 못한 인연인 것을   어느 뉘가   풀어 헤쳐 이 자리를 채우리까   명주올 매만지신   고운 손   세월이 걸려   굵은 삼베옷 되어   갈라져 가니   실꾸리처럼 길게   살자 하신   언약 날아가고   서러움만 올올이 배이네.        맷돌의 염원   쉼 없는 노역의 권태 속에   천년을 휘감고 돈다   보석같은 꿈들은 부서져 가루가 되고   체증처럼 갑갑한 가슴앓이는   연륜의 껍질을 벗기는 지문이다.   입다문 불상처럼 앉아서   혹은 기적의 비상을 꿈꾸면서   끌고온 긴 생애   세월에 갈리어 부서지는   희망과 절망, 사랑과 증오가   지워지지 않는 멍울로 남는다.   돌다가 닳아버릴 돌   끝없는 소멸의 아픔을 염주로 엮으며   활활 타오르는 불꽃도 삼키고   삶의 굴레를 도리어 거역하지 않는   끝내 뜨거운 맷돌이기를...     강형철.  1955년 전북 옥구 출생. 가난한 이웃들의 외롭고 어두운 삶, 분노와 아픔을 긴장된 시어로 구사하고 있는 그는 주로 '민중시'를 통해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현재 숭전대학교 강사로 있다.        해망동 일기.1   떠밀려 오는 것이 뻘뿐이면 어떠랴   금강 구비구비 절망 외엔 할 것이 없는   우리들의 이웃이 툇마루에 걸터 앉아   보리밥 깨물어 바라보던 눈빛이   흙과 버무러져 갯물과 버무러져   칙칙한 뻘물인 것을   게를 잡으러 나갔다가   밀물 때도 잊고   꽃발게 울음소리 뒤쫓다 잠이 들어   둥둥 떠가는 양동이   위태론 손짓만 남기고   뻘구덩이 빠져죽은 친구가   아직 잠들지 못하고   나왕나무 등허리에 기어오르다   미끄러져 다시 죽는   늦은 해변   깃발 없이 돌아오는   새우젖배 그물코의 매듭   마디마디 햇빛 때려 눈부신 것을   떠밀려 오는 것이   파란 강물이 아님으로 오히려   우리, 곁에 머물러 있을 수 있고   아직 살아남아 너왕나무 엮음의   밧줄에 출렁이며 살아있는 것을        광명리에서   명도소송을 집행한 집에서   우리는 고스톱을 쳤다   전세돈, 그 돈은 내 목숨이라며   한 푼도 안 주느냐고 개인은 죽어도 좋으냐고   핏발 서린 원망을 던지던 아줌마는   곡괭이로 방 구들을 찍고 나갔지만   똥통을 망가뜨리고 나갔지만   우리는 전기난로를 설치하고   유입물건 관리한다며 주질러 앉아   메주와 흑싸리와 팔공산 십끗짜리를   서로 따먹기 위해 눈을 붉힌다   집달리는 매일 하는 일이라며   눈 하나 끔뻑 않고 솥단지를 던지며   대문에다 못질을 하고   지방법원장 명의의 판결문을   흔들고 있었지만   돈을 뺏기고도 죄지은 사람처럼   쫓겨간 사람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어떤 집에서 명도집행을 하는데   똥바가지를 앵겨   잽싸게 붙이고 나왔다며   이 집은 양호한 편이라고 집달리는 웃고 있었지만   함부로 던져진 솥단지는   다시 어느 곳 부엌에 걸려   식구들 밥그릇을 채울까   방 구들 쪼개진 돌멩이는   이제 어떻게 이어져   끊어진 허리를 녹일 것인까   우리는 묻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도망칠 수도 합세할 수도 없다   캄캄한 여기는 광명 7동   자본주의의 밤   천민들의 밤     고경희. 1950년 강원도 강릉 출생. 1980년 "현대시학"지의 추천을 받고 등단한 그는 현재 '삼악시'와 '산까치'의 동인으로 활동중이며 객관적 묘사를 통한 선명한 이미지의 시적 형상화에 주력하고 있다.        개화   내,   숨은 사랑을 놓아주면   흰, 배꽃이겠네.   봄, 한철   각피에 쌓였다. 매디마다 트는   흰,   배꽃이겠네.        귀향   산 구비 돌면   오리나무 숲   하루 저무는   그림자를 드리우고   잎보다 많은 산새가 울었다   시가지가 보이는   언덕에   남빛 달개비꽃   보조개처럼 숨어 있고   서울가서   쌍가풀 수술 받았다던   매자 언니네   울 밑을 지나는   오솔길에는   감꽃이 융단같이 깔려 있었다.   내 창에   불 꺼지는 것을 지켜 보았다던   소년이   은날개 반짝이는   (비닐 하우스) 앞에서   구리빛 중년으로 맞아 주던 날.   먼 -- 거리를 돌아와   뜨락에 선   내 낯선 여인의 허울,   이끼 낀   뒷켠 바가지 우물에   댓잎 하나 흔들리지 않고   떠, 있었다.     고광헌. 1954년 전북 정읍 출생. 경희대 체육과와 동대학원 국문과를 졸업. 1983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와 "시인"지에 시 '흔들리는 창 밖의 연가'와 '신중산층 교실에서' 등으로 문단에 나온 그가 다루고 있는 시적 주제는 분단이 가져오는 삶의 아픔과 고통에 있으며, 특히 '신중산층 교실에서'와 '안개 마을의 자장가' 연작은 우리의 교육과 스포츠 현실을 형상화시킨 것으로 주목받고 있다. 현재 '5월 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시집으로 "신중산층 교실에서"가 있다.        신중산층 교실에서.1        -- 단 몇 개의 귀   아카시아 향기가 결코 토종꿀을 낙태하지 못하는 길들여진 못난 황무지의 일벌들을 유혹하던 오월 나는 나의 무조건반사는 숨겨 놓고 그녀들에게 묻는다   왜 아카시아 향내에 피냄새가 섞여 있을까?   그녀들은 한결같이 꽃대궁 깊숙이 더듬이를 박으며 나의 질문을 정신병원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한결같이 나는 그때서야 나의 비글함을 고백하며 그녀들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연대, 아동기의 놀이, 팝송과 텔리비전 그리고 학교 수업시간의 설득력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녀들이 한결같이 이 나라의 가장 큰 희망과 절망, 가장 큰 사랑과 증오, 가장 작은 민주주의와 파시즘, 그리고 서양사의 구린 곱똥 한 토막씩을 책받침 가운데 끼워 갖고 다니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나는 어느 날 보강시간에 내 말들의 어처구니 없음도 눈치채기 시작했다 나의 말들은 마른 수수깡이 부서지는 소리를 내면서 사방의 콘크리트 벽에 혈관이 터져 그녀들의 실내화 밑창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고 나는 잠시 그녀들 앞에 서 있어야 되는 당위성에 대해서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시간은 가끔 바늘 끝 위를 밟으며 단 몇 개의 귀속에 재빨리 낱말들을 챙겨 넣고 있었따 이러한 시간의 재빠른 동작을 맹종의 태극기 맞은 편 벽에 화석이 되어 붙어 있는 한복 입은 십육 세 소녀가 동지처럼 훔쳐보고 있었다   한편 실내화 밑창을 물들이던 내 말들은 번화가 쇼윈도우의 명도 높은 채색혁명이 되어 그녀들의 책받침 속 우상인 시스터 보이의 얼굴에 밑화장을 시키고 있었다 나는 정색을 하고 책받침을 빼앗아 둥그렇게 휘어 보인다   오! 놀랠만한 금속성 휴머니즘   나는 책받침의 유연성을 통해서 그놈이 제 조국에서 노래부를 때 수 명이 깔려 죽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는 토픽 뉴우스와 신식민지 처녀들이 먹물 속으로 익사하는 것을 감동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말했다. "너 그동안 너희 학생들에게 얼마나 거짓말 시켰냐?" 나는 당당하게 원색이 된 내 말들의 설 땅과, 설 땅의 확보와 교과서와 책받침 그리고 팝송이 만들어 내는 함수관계를 변명처럼 풀어보였다 그것은 만세 부르다 죽은 처녀가 훔쳐 본 몇 개의 귀의 부활   그후 나는 그 몇 개의 귀와 오월 날벼락에 떨어진 아카시아 꽃잎을 주워 모아 질긴 항아리에 막소주를 풀어 밀주를 담았다 그 밀주는 지금 발효중이다        낙골 산동네 101번              종점   더러는 일당을 손에 쥐고   더러는 하루종일 일거리를 찾아 헤매다가   빈 손 가득   솟구치는 노여움 퍼쥐고 돌아오는 밤   더 이상 뿌리 내릴 곳 없어   막막한 그리움   낮게 엉겨붙은 산비탈 무허가 모퉁이   무성하게 널려 자란 잡초밭 위에   어쩌다 궂은 비라도 쏟아지는 밤이면   눈물겨운 사람들   튕겨오르는 흙탕물에   아랫도리를 적시며 비포장도로 양 옆   값싼 우산의 행렬로   값비싼 마음들을 기다리는   끈끈한 사랑의 도열을 보았는가   팍팍한 가슴   시퍼렇게 타오르는 칸델라 불빛 밑에   가난처럼 설익은 과일 몇 알,   단칸방 여섯 식구의 누런 웃음을 담아   못난 마누라   마른 버짐 가득한 꿈 꾸는 눈동자를 찾는   못난 시대 풋풋한 희망을 보았는까   젖어가는 세상   늦은 저녁 빗줄기 사이로   저 아래 평지의 불빛 몸살나게 반짝이고,   그렇다   바라는 건 다만   하루하루의 일자리나 더 이상 쫓겨갈 수 없는   마지막 보금자리가 아니라   그대의 질긴 노동의 불빛이   몸살나 뒤척이는 땅   정직하게 갈아 뉘는 것이다     고운기. 1961년 전남 벌교 출생. 한양대 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재학중 "동아일보" 신춘문예(1983)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남도 특유의 정서를 바탕으로 하는 그의 시는 역사와 현실이 주는 진실을 포착, 형상화하는 장점을 갖고 있다. "시힘" 동인. 학부졸업기념으로 낸 시집 "예수가 우리 마을을 떠나던 날"이 있으며 현재 연세대학원 국문학과에 재학하고 있다.        동대문   이 문이 열리면 조선의 동쪽이 열리고   이 문이 닫히면   조선의 동쪽 사람들은 이문동이나   신설동에 와 머물러야 했따   조선의 동쪽은   동대문의 문짝만큼만 했을까   소나 나귀도   사람이나 화물도   동대문 하나면 족했다, 조선의 동쪽은   이 문이 열리면 열리고   상감께 올리는 공물도   서울 시민 먹일 옥수수며 감자도   족히 들어왔다   어둠을 맞고 이 문이 닫히면   소도 나귀도 잠들고   들어올 사람도 짐도 문밖에서 잠들었다   잠든 마을은 평화로왔지만 이제   종로는 힘차게 달려오다 여기서 멎고   건널목도 지하로 숨어   사람들은 속삭이며 지하도 어디로 사라지는데   이 문은 닫혀 있다   버스도 사람도 문을 두고 돌아   돌아서 어디로 가고 있다   닫힌 것은 동대문만이 아니며   돌아가는 것은 자동차 뿐만이 아닌 것 같이.       예수가 우리 마을을           떠나던 날       -- 도성 밖 대장장이의 노래   진달래 꽃 피면 돌아오겠네   벚꽃 만발하면 만나보겠네   그리운 이름들 어디 가도   불러서 모이면 쑥 캐러 가자   봄비라도 내리면 알맞게 맞고서   사랑하던 사람 등에 업고도 가리   허기사 봄도 오면 무엇하리   그대 떠날 때 우리에게 남겨준 것이   서울로 가던 밤 피흘리며   기도해 준 일   가슴마다 허전함으로 슬픔 그득하여   개나리꽃 터쳤어도 눈물만 뿌릴 뿐   그대의 아비도 나만큼이나 천한 사람   일생을 목수질하며 살아왔을 땐   아들이 장차 자라 로마의 군인이나 제사장이나   세리가 되어 돈을 벌고   좋은 집에 살며 세상 일은 잊으라고   그렇게 바란 것은 아니었을 테지   허기사 봄도 오면 무엇하리   나귀 새끼 한나리에 몸을 싣고   그대는 가서 서울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그리운 고향 봄이 피어 오른 산천 뒤로 두고   진달래꽃 같은 붉은 피 흘린다니   나는 아직 도성 밖 대장간에 앉아   불에 담근 쇠를 꺼내 망치질 하면서도   이 못이 장차 그대의 손을 뚫고 발을 뚫고   이 만드는 창으로 그대의 가슴을 찌르게 될지   알 수 없다네   알 수 없다네.   고형렬. 1954년 전남 해남 출생. 1982년 "현대문학"지를 통해 등단한 그는 시적 대상에 대해 자유로운 존재론적 접근과 맑고 튼튼한 남성적 서정으로 가난한 삶의 근저를 따뜻하게 노래하는 시인이란 평을 듣고 있다. 특히 설화조의 변설은 시의 영역을 넓히는 것으로 주목받으며 '갈뫼'와 '시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으로 "대청봉 수박밭"이 있다.        쓰레기장불   쓰레기장에 빨간 불을 놓았다.   이것은 옛날 몽둥발이의 모닥불이 아니고   집채로 들고 갈 태풍이 아니다.   타는 그 옛새끼오리, 헌신짝, 짚검불... 개터럭이   아니라, 거진 50년 가까운 세월에   맥주 캔, 나일론, 시집, 말, 지갑, 지루하다. 병, 소, 지루하다   무슨 여름 낮이 15시간이나 되나   구름장이 떨어져 이 쓰레기장불.   뭐가 타서 다시 기름이 된다는 무슨 불사조같은 헛소리다. 손찌검을 하거라   타는 건지 죽는 건지 알 길이 없는   이 쓰레기장불. 어떤 것들의 혼귀가 묻혔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활화산이나   50년 갖다 버린 구역질 나는 악취   밀크, 초컬릿, 화장품, 프라스틱, 병균,   흙도 쇠도 가죽도 유리도 똥도 시체도 음식물 찌꺼기도.   갑자기 어깨를 물지게를 벗듯 벗고 싶다.   여기서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쓰레기장, 한 번 불꽃을 보지 못했던 쓰레기장 연기를 바라본다   샛강 여닐곱 둑을 건너는 그곳에   오리무중 속에 보인다   석유 한 초롱 갖다 붓고 올까, 창자 속에 들어가 불이 되는 소주   쓸어가자. 쓰레기장 그리로 그리로   없을 때까지. 대비와 잔털 잘린 몽당 비와 갈퀴와, 아니면 불도우저로 쓸어   태워서 묻자. 청산하고 싶어, 나도   사랑, 노래, 비, 언어, 양말, 시멘트, 피, 눈물, 칼, 술, 책, 집... 집, 집   내 몸 속의 쓰레기장 불   쓰레기장 불        대청봉 수박밭   청봉이 어디인지. 눈이 펑펑 소청봉에 내리던 이 이름밤   나와 함께 가야 돼. 상상을 알고 있지   저 큰 산이 대청봉이지.   큼직큼직한 꿈 같은 수박   알지. 와선대 비선대 귀면암 뒷 길로   다시 양폭으로, 음산한 천불동   삭정이 뼈처럼 죽어 있던 골짜기 지나서   그렇게 가면 되는 거야. 너는 길을 알고 있어   아무도 찾지 못해서 지난 주엔 모두 바다로 떠났다고 하더군   애인이라도 있었더라면, 그나 나나  행복했을 것이다.   너는 놀라지 않겠지. 누가 저 산꼭대기에   수박을 가꾸겠어   그러나 선들거리는 청봉 수박밭에 가면 얼마나 큰 만족 같은 것으로 겁 속에   하룻밤을 지내고 돌아와서   사는 거야. 별 거겠니 겨울 최고봉의 추의를 느끼면서   걸어. 서릿발 친, 대청봉 수박밭을 걸어.   그 붉은 속살을 마실 수 있겠지.   어느 쑥돌 널린 들판에 앉듯, 대청봉   바다 옆에서 모자를 벗으면 가죽구두를 너도 벗어 놓고 시원해서   원시 말아야. 그 싱싱한 생명 말이야   상상력을 건든다.   하늘에서 들리는 파도소리로   삼경까진 오겠지 기다리지 못하면 시인과 동고할 수 없겠고   그게 백두산과 닮았다고 하면 그만큼 이해할 수 없고   그래서 맨발로 눈이 새하얗게 덮인, 아니지, 달빛에 비친 흰 이슬을 밟으며   나는 청봉으로 떠난다.   독재로 너의 손목을 잡고   나는 굴복시켜야 돼 너는 사랑할 줄 아니.   한 가마 옥수수를 찌는 여인의 밤   그 밤만 가지고, 너와 나 우리 모두 노래할 수 있는가   가구를 두고 청봉 수박 마시러 나와 간다, 세상은 다 내 책임이었냐는 듯이 가기로 했다.   이 (대청봉 수박밭) 속에 생각이 있다고 털어놓건   비유인지 노래인지, 그것이 표명인지   거짓같지 않은 뜬소문 때문에   나는 언제고 올테니까.   대청봉에서 너와 가슴을 내놓고   여행을 왔노라며, 기막힌 수박인데 하고 뭐라고 할까.   설악산 대청봉 수박밭!   생각이 떠오르지 않다니   그것이 공산 아니면 얼음처럼 녹고 있는 별빛에 섞여서 바람이 불고, 수박 같은 달이다. 아니다   수박만한 눈송이가 펑펑 쏟아지면   상상이다 아니다   할 수 있을까.     곽문환. 1935년 전북 익산 출생. 1985년 "시문학"지의 추천을 받고 등단한 그는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순수 서정의 세계와 함께 소시민적 의식, 자의식에 대한 의지를 내면화시켜 시화하고 있다. 1983년도에 시집 "통곡하는 밤바다"를 간행하였다.        촛불   새도록   마주 앉아 사루는   정념의 끄트머리.   가슴 가득 날리는   불티의 색깔을   나와 그는   여태껏 알지 못한다.   어둠 속에   눈 감으면   창백한 얼굴로   지켜보는 이 있어   수줍게 외면하면   멀리 달아나는 그림자   그리운이여.   네 하이얀 숨결 번지는   까마득한 옛노래를   이 밤은   굳이 듣고만 싶다.        소리   강물처럼   파문이 여울지는   숨결   가슴 풀어 잠재우고   불에 그을린   몸짓으로   먼 지평을 달리는   이단자...   어디엔들   머물 곳 없으랴만   쫓고   쫓기우는   시류의 둘레만   맴돌다   끝내 되돌아오는   애절한 여운.   단 한번   항변의 그 서슬찬   목소리로   가슴마다 녹슬은   실어증을 지워줘야겠다.     곽재구. 1954년 전남 광주 출생. 전남대 국문학과 졸업.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등단하였따. '오월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이름없이 살아가는 이웃들의 사랑과 슬픔을 응축시킨 시를 쓰고 있다. 시집에 "사평역에서"와 "전장포 아리랑"이 있다.        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20년 후의 가을   내 어릴 적 산골 학교 미술 시간에   나는 푸른 크레용으로 옥토끼 모양 우리나라   지도를 그려 놓고 그 안에 울긋불긋 우거진   단풍잎과 맑은 시내를 그렸었다   산머루향이 교실까지 날아들던 오후   사범학교를 갓 졸업한 처녀 선생님은   내 그림을 보고 울으셨다   가을 산꽃이 피고 해으름이 일고   그 가을내 나는 선생님의 눈물방울과 같은   단풍잎과 맑은 시냇물 속에 뛰놀았지만   돌아서서 눈물 훔치던 선생님의 뒷모습과   나를 쳐다보던 충혈된 눈동자를 잊을 수 없었다   그래 단풍잎은 지고 세월은 가고   이제는 선생이 된 내 앞에서   아이들이 땀을 흘리며 그림을 그린다   똑같은 얼굴 똑같은 슬픔의 푸른 크레용으로   둘러친 동강 난 내 땅 내 그리운 하늘   아이들은 평상의 얼굴로   반쪽의 땅 위에 단풍잎을 채우고   나는 출혈된 눈으로 아이들을 보았다   눈을 뜨고 모른다며 살아온 날들이 가슴 후비는 날   가만히 손가락으로 그려 보는 내 땅 내 그리운   하늘 아래 나는 이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내 손으로 그린 내 땅 안에 허름하게 시든   단풍잎 하나 떨구는 것을 거부하면서   끝내는 잊혀진 옛선생님의 눈물마저 되살아나   동강 난 눈물방울들이 산과 바다와   아이들의 웃는 얼굴을 뒤덮었다.     구중회. 1946년 전북 완주 출생. 1980년 "심상"지로 문단에 데뷔. 시를 통해 자기 자신과 당대 사회의 자리를 찾고 확인하고자 하는 그는 현재 공주 사범대에 근무하고 있으며 시집으로 "은하수 건너가며 스치는 여름밤"을 갖고 있다.        물방울 튀기는 노래   물방울 튀기는   물가에 섰다.   벼랑이 보였다가   바닥이 드러났다가   수런거리는 물.   지금 물은   매우 위험한 어린애다.   권투를 하듯이   물방울 튀기는 물가에   사람들이 지나갔다.        장마기   수증기와 편승하는   물방울들은   구름만 되면   이미 소나기로 쏟아진다.   자갈밭에 자라는 들풀   황톳물로 뿌리 채 뽑아   싣고 떠나간다.   물방울들은 바다에 가도   왜 바다가 못 되는가.   또 수증기로 피어오른다.     권오욱. 1941년 충북 음성 출생. 명지대 국문학과와 서울대 보건대학원 졸업. 1985년 "시문학"지의 추천을 받고 등단한 그는 현재 '동강시'와 '시소리'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으로 "겨울 안개"가 있다.        은비   작은 섬 하나 보이지 않고   떠도는 갈매기도 여기는 없는   바다와 하늘의   동그란 울안   시원하여 슬퍼지는   짐승의 눈 속처럼   순하게 밀리는   물살 위로   별빛보다 고운   은비가 온다   빛의 소낙비가   온다   깨어지는 빛방울의   아득한 순도   부시어 파닥이다   뒤채는 심장에   반짝이며 꽂혀오는   빛바늘   아픔조차 눈부시어   내뽑는 목에   배암처럼 감기는   빛오라기        겨울 안개   얼어붙은 겨울강에   움직이는 적막을 보아라   떠오르는 태양빛을 차단한   미명의 늪지   얼음장 밑으로   살아서 흘러가는 물소리 들리고   상실한 살과 뼈의 기억으로   강폭을 더듬어 일렁이는   얼어붙을 한 방울 피도 없이   얇은 바람에 날리어 흩어지는   쓸어안고 엎디어 부벼보아도   얼어붙은 겨울강을 녹이지 못하는   영롱한 순간의 반짝임도   이제는 싫은   잔존의 자욱한   입자들   얼어붙은 겨울강에   움직이는 적막을 보아라     권태현. 1958년 대구 출생. 1983년 동인시집 "국시"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1985년 동인시집 "잠시 나가본 지상"을 펴낸 그는 어려운 구조로 짜여진 현실로부터 이탈, 자연인을 꿈꾸는 내적 갈등을 형상화시키기 위한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현재 월간 "여학생"에 근무하고 있다.        공백기   아내가 죽었다. 아내가 죽던 날   나는 처음으로 햇빛을 보았다.   금빛 지느러미를 흔들며 나를 흔드는   아내의 유물을 깊이 껴안았다.   아내가 죽었다. 아내를 묻고 돌아올 때   산은 부쩍 키가 자라 있었고   새 한 마리가 강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물살이 두 팔 벌리는 강의 하단에 이르러서야   나는 알았다. 산이 제 빛깔을 떼어내   강물에 띄워보내고 혼자 황폐해지는 것을.   아내가 늘 강가에서 살고 싶어하던 이유를.   그러나 아내는 죽어서 산이 되었다.   아무도 찾아와 잡아주지 않는 손을   온몸으로 흔드는 작은 풀잎이 되었다.   내가 바다로 합류하는 강의 하구를 딛고   등을 돌리자 비로소 산은 산의 소매로   내 발길에 매달려 쿨쩍쿨쩍 울기 시작했다.   아내가 죽었으므로 나는   더이상 집을 짓지 않았다. 오히려   집을 허문 빈 터로 돌아와   젖은 몸을 벗어도 벗어도   더욱 안쪽으로 젖어드는 바람을 만났다.   아내가 죽었다. 아내의 등을 밀어낸   눈초리들만 시퍼렇게 살아 있는 길을   나는 아내와 함께인 듯이 걸었다.   열려 있는 문들 모두 지나고   돌아볼 것이 너무 많은 숲가에 이르러   내 몸의 나뭇잎들을 하나씩 떼어냈다.        미술시간   새가 날지 않았으므로 하늘은   비어 있었다. 비어서   스스로의 깊이로 푸르렀다.   새의 깃털 같은 구름이 잠시   떠다니고 그 사이로 새의   부리 같은 햇살이 새어나왔다.   처음 백지 위에 맨손을 펼쳤을 때   조심스럽지 않은 땅이   없었다. 모서리 한 곳도   다치지 않으려고 화판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실핏줄 모두 벌려   산만한 높이의 산은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아 허전하게 엎드리고   구부린 등이 알맞게 곡선을 그었다.   드믄드문 제 키를 자랑하는 나무 몇 그루   뿌리내리는 동안 산의 허리가   튼튼해지고 일어서는 풀빛 울음에   풍경 전체가 흔들렸다. 계곡을 적시며   흐르는 물줄기는 약속대로   하류로 흘러 산의 연장선을 그었다.   부러진 크레용을 던지자   놀라 흩어지는 산짐승들   좇으며 산 깊숙이   들어서면 비로소 한 마리씩   바위, 혹은 동굴 안쪽으로 숨어들고   헐벗은 꿈을 숨기려면 무슨 색깔이   제일 안전할까. 온 산을 뒤져야   오두막 한 채 보이지 않는데   아무리 색칠해도 채워지지 않는   빈 무덤 위로 노을이 지고 그 너머   돌아올 수 없는 거리에서 새울음   몇 마디 산등성이를 넘어왔다.     기형도. 1960년 경기도 연평 출생.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 문단에 데뷔했다. 재학 당시 '윤동주 문학상'을 받은 바 있는 그는 가시적 혹은 비가시적 사상의 법칙성을 추구하는 시세계를 갖고 있다. 현재 "중앙일보" 기자로 근무하고 있다.        어느 푸른 저녁     1   그런 날이면 언제나   이상하기도 하지, 나는   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을 걷고   있는 것이다, 검고 마른 나무들   아래로 제각기 다른 얼글들을 한   사람들은 무엇엔가 열중하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혹은 좁은 낭하를 지나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 가는   나는 그것을 예감이라 부른다,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숨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가듯   그런 때를 조심해야 한다, 진공 속에서 진자는   곧,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씩 흔들리는   것은 무방하지 않은가   나는 그것을 본다   모랫더미 위에 몇몇 사내가 앉아 있다, 한 사내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쓰다듬어 본다   공기는 푸른 유리병, 그러나   어둠이 내리면 곧 투명해질 것이다, 대기는   그 속에 둥글고 빈 통로를 얼마나 무수히 감추고 있는가!   누군가 천천히 속삭인다, 여보게   우리의 생활이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   세상은 얼마나 많은 법칙들을 숨기고 있는가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느낌은 구체적으로   언제나 뒤늦게 온다, 아무리 빠른 예감이라도   이미 늦은 것이다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2   가장 짧은 침묵 속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결정들을 한꺼번에 내리는 것일까   나는 까닭없이 고개를 갸우뚱해 본다   둥글게 무릎을 기운 차가운 나무들, 혹은   곧 유리창을 쏟아버릴 것 같은 검은 건물들 사이를 지나   낮은 소리를 주고 받으며   사람들은 걸어오는 것이다   몇몇은 딱딱해 보이는 모자를 썼다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 가는   나는 그것을 습관이라 부른다, 또다시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그러나   안심하라, 감각이여!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느 투명한 저녁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모든 신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안개     1   아침 저녁으로 샛상에 자욱히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따.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군단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동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 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듯이 흘러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는,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성성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 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 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총신을 겨눈다. 상처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히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김경미. 1959년 서울 출생. 한양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으며, 1983년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문단에 데뷔했다. '시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서정성을 잃지 않으면서 여하한 삶의, 문학의 기성 근거나 규범 강령 혹은 구호보다 넓으면서도 최소한의 진실도 외면하지 않는, 인간의 살아가는 본바탕이 진하게 담긴 시를 쓰는 젊은 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현재 방송국에 근무하고 있다.        비망록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보니 스물 네 살이었다. 신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조리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ㅎ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인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 네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 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유잣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 네 살엔 좀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날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런지. 아무 일 아닌 듯 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 다섯이면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읍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읍니다. 아무 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임진강이 말하기를   보름달빛이나 덮으며 초승달빛이나 고르며   바늘귀에 스산한 풍문만 꿰차니 하 좋더냐   내라면 한달음에 산맥 넘고 평야 질러 갈 길   두발 짐승 두손 짐승으로 태어났거든   무거운 그리자 벗어 땅 속에 묻고   머리끝 하늘 닿기 전 쿵쿵 땅 꺼지기 전만큼만   가랭이 돋우어 뛰어라   오가는 철새들 깃털이라도 빌려 입어라   친형제들끼리 눈흘김 미친 행각 그리 즐겁더냐   말로 말할 수 없거든 울부짖음으로 말하며 오라   이복 유복 서자 사고무친 아닌 누가 있어   끄잡거든 잡힌 옷 벗고 가로서거든 메다꽂아 오너라   발톱 검은 때 누가 흉보랴   시궁창 진흙에 신발 들러붙거든 던져버려라   오물이란 똥오물 끼얹겨도 그대로 오라   숨결만 묻힌 바람이 전할 수 없어   바람 탄 풀씨 몇 점이 피울 수 없어   견우별 직녀별 오작교별로 이을 수 없어   뼈를 가져와 살을 묻혀와   따뜻한 혈맥 심긴 흙발로 몸소 와   어린 실개천들 갈 길 몰라 목타하거든   오종종 앞길 물길도 파주며 데불고   집짐승들아 여기도 생솔 타는 구들방 있으니   들짐승들아 이녘에도 손발 넓은 논밭 있으니   가슴짐승들아 이 언덕들도 헤어짐을 시시철철 해후로 바꾸며 살았노니   친형제 살아낸 또 하루 덧없음을 생각해보라   이 깊은 폐토를   어이 나 혼자 건너라고     김경옥. 1956년 경북 경주 출생. 경북대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1980년 "월간문학"지로 등단하여 '미래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시의 서정성 회복에 역점을 두고 작품 활동에 임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비밀.1   붉은 빛깔 잊지 않고 피우기 위해 동백이 내 비밀 깊숙이 뿌리를 감아 왔던 그 겨울. 그대에게 떠나 보낼 수 없는 말들은 내 따뜻한 핏줄 속에 몇 송이씩 벙글어 나는 홀로 동백으로 피고 지고 그러면서 외로왔다. 한밤에 눈뜨면 바다는 우리들 운명을 만지다가 돌아서고 낮동안 반짝였던 우리 사이 마음의 길은 어둠에 헐려, 절망과 위안을 밤바람 속에서 짚곤 했다.   아아, 우리가 밀물처럼 설레이며 처음으로 서로의 기슭에 닿을 수 있기를, 그런 후에 만조가 된 바다처럼 서로 가득 찰 수 있기를. 위태롭게 꿈꾸는 내 비밀은 동백의 뿌리를 물들이고 줄기를 타고 올라 어느 날 그대는 뜰에서 부끄럽게 서성거리는 내 고백 알게 되리라.        햇빛부신 날은   나는 한 식물이 화분에서 자란다는 것이 슬펐다. 비바람으로부터 보호받는다는 것은 햇빛과 꿈과 자유까지 보호받아야 하는 것이므로 화분에 핀 적동백 한 그루의 그 보호받은 빛깔은 나를 슬프게 했다.   낙동강 어귀의 나무들이 때때로 거센 폭풍우와 홍수에 떠밀리면서도 그 어두운 대지 아래로 조금씩 불 밝히며 들어가 낙동강의 작은 물줄기를 찾아내는 기쁨을 4월의 저 봄비는 안다 그 기쁨을 흔드는 실바람은 안다.   언제부턴가 스스로 흘러가는 시냇물처럼 나를 놓아 주고 싶었다. 흘러가며 어딘가서 대지를 사랑하므로 고독한 뿌리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우리 모두의 화분 속에 갇힌 사물도 그대도 떠나 보내주고 싶었다. 오늘처럼 햇빛부신 날은 세계가 화분 밖에서 스스로 꿈꾸었으면 좋으리라.     김기문. 1945년 경북 경주 출생. "심상" "시와 의식"지를 통해 등단한 그는 전통적인 흐름에 서구적 경향의 시를 접목시켜 현대인의 아픔을 절실하게 노래하고 있다. 현재 출판사에 근무하고 있다.        발견   석굴암 교무 일법 스님과 토굴을 나와 나란히 걸을 때, 신유년 소슬바람에 그해 무성ㅎ던 나뭇잎 바람 따라 굴러오네.   떨어지기 위하여 맺혀 있음이어 우리들 발길에 밟히기까지 수백 생의 인연의 덧없는 바스라짐, 대저 산을 넘고 시간의 장막 저편 나 또한 누군가를 기다리는 낙엽이로다.   석굴암 교무 일법 스님과 이 나라 온 승려가 다 각기 한 조각 크고 작은 이파리임을, 각자의 업에 맞는 비탈을 택해 반짝이며 떨고 있는 일순의 매달림.   마음이 머물다 간 빈 가지마다 만유는 인연이요 바람이요 굴러옴이요 또한 매달림이요 기다림임을.        토함산 그늘        -- 오줌싸개   경주시 진현동 중리마을은   산그림자 내려와   아침이 늦다.   소금은 무슨 소금   주걱으로 뺨만 맞고   울며 오는 길   타박타박 키를 쓰고   바라보는 토담 밑에   감자꽃 나팔꽃 까닭없이 서럽더니   손가리고 웃고 있는   뒷집 새댁이   문득문득 떠오르는 그리움인 걸     김기홍. 1957년 전남 승주 출생. 생활에서 얻어진 체험적인 아픔과 그것을 버티게 하는 힘을 진솔하게 표현, 감동적인 시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실천문학"의 "노동시선집" "민중시선집" "지평" 등을 통해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일터에서   우리는 귀 막히고 말 막힌 사람   두 손 열 손가락으로   뜨거운 그리움을 말하는 사람   철근때 묻은 옷을 걸치고   하늘을 바라보며 파랗게   가슴을 적시는 사람   섣달 눈보라 마음마다 몰아친다   잠실종합운동장 3층 난간   피티 * 를 꽂아 올리며 하늘로 간다 (* 피티:철제 조립식 아시바)   무엇이 우리들을 열망하게 하는지?   하늘로 올라갈수록 바람은 거세다   얼마나 올라가야 찾을 수 있을까   우리들의 말도 노동의 근사치도   내려다보는 땅엔   개미같은 사람들이 각목을 메고   합판을 메고   저곳에 우리들의 사랑도 함께 있다   하늘에 발을 딛고 땅을 우러러 볼 수는 없을까...   내일 우리 죽어서도 귀 막힌 사람   살아 있는 오늘은 더욱 말 막힌 사람   이 높은 곳에 푸른 별을 매달며   몇은 저 낮은 땅   기다림도 모르는 아내를 사랑하고   철부지 자식을 사랑한다   목숨의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어제 다친 조장이 피우는 모닥불에   손을 던지고 발을 던져도 뜨겁지 않다   우리들은 더욱더 뜨거운 불길이다        겨울인사   만나지 말세.   만나지 말세.   부러진 손 절뚝이는 다리로는   다시는 우리 만나지 말세.   작업복을 챙겨 메고 오는 밤   강 상류의 불빛은 모두 꺼지고   눈발에 기억을 풀며   흘러서 우리는 어디로 가랴   미칠 수만 있다면   생명 부지하고 미칠 수만 있다면   미쳐서 날뛴 짐승 모조리 때려잡고   역류하는 하수구에 누워   무너져 간 세월을 풀피리에 흘려놓고   과일 껍질 북데기도 비단보에 싸갈걸   어허이 어허이 어야디야 넘자 어이하나   추워. 겨울은 우리에게 너무 추워   질척이는 발자욱이 얼어붙고   헤진 옷 땀방울로   넘어사제. 닭뼉다귀 끓여주는 한바 심사   삼국지 묘수들을 십장 소장 넘어 뛸 때   바람이 불어도 날릴 낙엽 없고   구르는 몸뚱이 새파란 미나리 몸뚱이   -- 맑은 물 콩나물보다는   흙탕물 연꽃이 될래요--   가소. 가소. 잘도 가소.   정씨 유씨 오지 마소.   9천 원 만 원 일당에   가슴 맑은 마누라 청상과부 만들지마소.   꽝꽝 언 공사판 길   깡깡 마른 몸뚱이    철근 공구리 인장통에   발 담그면 발 깨지고 손 담그면 손 깨지고   코 대면 코 깨지네.   삼월이면 물 오르겄제   사월이면 꽃 피겄제   작업복 담살이복 거센 물에 휙 던지고   십만 원 공장에 가더라도   내년엔 만나지 말세.     김대구. 1947년 경북 의성 출생. 한양대 신문학과 졸업. "시문학"지를 통해 등단하였다. 성경 속에 나오는 인물의 행적을 통해 오늘의 현실을 재조명하고 있는 그는 현재 월간 "크리스찬 라이프"사의 편집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말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성서 요한복음 1장 1절)        잠적   이 세상에 (말씀)은 어디에 존재합니까?   허약한 몸을 가누며 저 황량한 바다에 주저앉아서   철썩 철썩 가슴을 치고 있나요   산촌 어느 가난한 농부의 뜨락에서   졸고 있는 가을 햇살인가요   아니면 도시의 음침한 지하밀실에 갇혀서   콜록콜록 기침을 하면서   하루에도 몇 잔씩 커피를 마시고 있나요   우울증에 걸린 도시   움츠린 자세로 빌딩의 그늘을 할일 없이   배회하는 겨울 바람인가요   폭우가 쏟아진 오후   오색영롱한 무지개를 비추시던 하늘   우렁찬 뇌성과 폭풍우로 말할 수 없는   울분을 토하시며 이 여름을 수장하시고   우리들의 (말씀)은 비참한 이 도시 속에서 잠적   김동원. 1937년 충남 예산 출생. 공주사범대 화학과를 졸업. 1980년 "현대시학"지를 통해 등단한 그는 인간의 삶꽈 그 방식을 파헤치고 죽음에 대한 확인을 통하여 모든 유한한 것들의 생명에 대한 외경과 그리움을 노래한다. 시집으로 "유적지" "바람의 끝에서"가 있으며 현재 충북대 화학과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너의 겨울 뒤에서   너의 빨간 목도리 뒤에 서 있는   가늘고 하얀 겨울,   겨울 따라 찾아가면   하얀 눈꽃은 지고,   붉은 입술에 모여 있는   너의 옥같은 소리를 만난다.   너의 분홍빛 가슴에 감추어진   눈물같은 사랑,   사랑 따라 찾아가면   하얀 강물은 눕고,   자주빛 사탕처럼 무너지는   너의 하얀 이빨을 만난다.   하얀 지체를 뿌리면서,   눈을 감은 채   금빛으로 물드는 언덕이여.   하늘과 땅을 건너   맨발로 달려오는 슬픈 봄이여.   너, 이조의 여인처럼 울고 있는   수직의 분화구여.   나는 지금,   하얀 눈꽃이 되어   너의 따뜻한 겨울 속으로   죽음처럼 떨어져 간다.        연두색 하느님   나의 연두색 하느님,   탄생의 조건을 땅에 내려놓지 마시고   죽음의 조건을 하늘에 올려놓지 마십시오.   제한없는 조건을 던져   낯선 거리를 방황하게 하지 마시고,   이 세상 눈물이   칠월의 홍수같이 넘치는 것을   손으로 감추지 마십시오.   천근의 돌을   당신의 언덕으로 나르게 하지 마시고,   만길도 넘는 바닷물을 기르게 하지 마십시오   또한 무릎을 꿇고는   세상을 살게 하지 마십시오   맨발로   꽃피는 언덕을 밟게 하여 주시고,   속살을 다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조건없는 물의 순결을   나애개 주십시오.   사랑의 조건   혹은 죄의 조건을 만들지 마시고,   꽃 혹은 열매의 조건을   만들지 마십시오.   조건으로 다스리는 천한 땅,   황제의 얼굴을 하지 마십시오.   당신과 너무 친하지 못하도록   나를 멀리 떨어져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햐여   당신과 너무 친밀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이 세상 모든 죄악을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하늘의 조건 혹은 땅의 조건을   만들지 마십시오.   타인을 죄인처럼 갈라놓는   눈먼 개인이 되지 마십시오.   어느 개인의 하늘이 되지 마십시오.   나의 연두색 하느님.     김동호.본명 김익배. 1934년 충북 괴산 출생. 성균관 대학교 영문과 졸업. 1978년 "현대시학"지를 통해 등단한 그는 "바다" "꽃" "피뢰침 숲속에서" 등의 시집을 출간한 바 있으며 현재 성균관대학교에 재직하고 있다.        죽은 바둑이   그것은 네가 아니다.   눈깜짝할 사이   번개를 타고 간   너는   정말 네가 아니다.   교통   지옥   막바지 낭떠러지를   독기를 곤두세운   쇠바퀴가   너의 급소를 후려치고   달아났을 때   죽어서도 백리를 달려온 사랑이여.   피 한 방울 겉으로 내뱉지 않고   속으로 속으로만 토하며 간   순결이여.   벼락치는 문명을   조용히 조용히 땅 속에 묻고 간   혼령이여   아버지   개도 심장마비가 있나요?   막내가 울면서 물었을 때   나는 울면서 대답했다.   암 있고말고.   나무도 있는데   돌도 있는데.   왜 나는 지금   죽음 앞에 맑게 서 계시는   은사 C선생을 생각하는 것일까?   왜 나는 지금   십 년 전에 간 고우   K형의 그 마지막 조용한 눈빛을   생각하는 것일까?   교통이 두절된 밤거리를 활보하는   도적고양이가   쥐약 먹고 죽은   쥐를 먹고 죽은   개를 무한히 힐난하는 오후.   먼 하늘가   어데로부턴가   별빛이 날아와   바닷속의 말간 눈빛과   너의 빛나는 마지막 침묵을 엮어   프리즘을 만든다.   쏟아지는 프리즘 사이로   사라지는 그림자들   시간의 그림자가 사라진다.   바둑아   죽어서도 백리를 달려온   바둑아   나는 오늘 너에게서   영원히 사는 법을 배운다.        복숭아   복숭아야 복숭아야   가슴이 고와서   얼굴이 빨간 소녀야   비밀이 고와서   입술이 빨간 소녀야.   네 꼭 담은 꼭지   젖뺨 하늘에   내 가슴이 이렇게도 뛰는 것은   내 작은 가슴에 박힌    너의 화살 때문이 아니다.   문둥이도 너를 보고   백옥이 되었다는   백치도 너를 보고   하늘이 되었다는   옛날 옛날   아주 옛날   이 세상 최초의 이야기 때문이다.     김명이. 1959년 대구 출생. 1984년 "현대문학"지를 통해 등단한 그는 시를 눈앞에 전개되는 언어의 현실이기 이전 그 궤적들을 언어라는 집게로 끄집어 내는 과정으로 인식, 시작에 임하고 있다.        탈춤   1   나의   어머니로부터   정월 열나흗날의 생일을 물려받던 날   나는 풍만한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여러개의   탈을 준비했다   시간의 입자들이   젖은 목관악기의 가지런한 신음 속으로   침몰하는 동안 나는 하나이기를 거부하는   서너개의 몸짓을 만난다   내가 지닌 여러개의 탈과   내가 만난 서너개의 몸짓을   더한다뺀다곱한다나눈다   내 방 모서리에서 성큼성큼 자라나는 순열   넘치는 하나와   모자라는 하나를 정리하기 위해 나는   가끔씩 간이역 주변이나 점등 안 된 가로등 아래서   우울한 손가락들을 펼쳐든다   2   아직도 나의 침실에서 서성대는 숫짜들        간이역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십세기 메카니즘의 멀미를 함께 앓으며   우리는 모두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한잔의 인스턴트 커피에도 취하여 비틀거리며   이 화려한 질주의 시대에 폐허를 꽃으로 달고   우리는 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는 메시아의 부활을 꿈꾸며   포기하며, 게으른 시간의 양떼를 몰아 우리는   회부의 땅 가나안으로 어쩌면 가고 있는 것일까   가파른 사유의 안데스, 갠지즈를 모두 지나   피 묻은 한점 사리의 날반, 그 날개 돋치는   피안까지 우리는 어쩌면 달려가고 있는 것일까   어디로 가는 것일까   저마다의 바이블을 옆구리에 낀 채   생사의 현기증을 아프도록 베어 물며   우리는 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김백겸. 1953년 충남 대전 출생. 198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하면서 데뷔한 그는 '시힘'과 '신인문학' 등에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사물의 정신을 드러내 보이는 이미즘을 추구하는 한편 일상적인 삶의 문제까지 폭넓게 수용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다. 현재 '한국에너지연구소'에 근무하고 있다.        구리   어느 산 어느 바위 틈에서 깨지 못할 꿈 깨다가   곡괭이에 뼈혀 나왔는지   용광로에 뼈와 살 녹여내고 마음만 남아   휘저으면 티끌 하나 걸리지 않는 마음만 남아   낙랑 공주 얼굴 비친 동경이 되었다가   자명고 찢은 사랑도 무덤에 잠든 오늘은   문고리가 되어 바람에 심장을 내맡겼구나   햇빛에 달그락달그락거리는 고요 속   검은 녹 사이사이로 빛나는 시간은   명희, 고사리같은 손가락으로 잡아당기는 조카의 눈망울 속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생각으로 살아나는구나   그것은 장인이 두드려 만든 기다림이었을까   담금질에서 꺼내면 가난도 금이 되고   한평생 칼날 한번 세우고자 벼르던   상민의 집념이었을까   임금을 베어 자신이 임금이 되는 대신   형장 망나니 칼 끝에 목을 얹은 홍경래의 슬픔이었을까   바람부는 오늘은 전신주 위에서 울고 있구나   플라스틱 피복관 속에 갇혀 불과 물이 만든 힘 도시에 보내고   역사에 다이알 돌려 수신인 찾는   내 호출부호도 실어 보내면서   수은등에 스윗치 누르면 파랗게 질린 얼굴 어둠 속에 켜는   마음만 남아 울고 있구나        비를 소재로 한 서정별곡   1   바위를 베고 누워   나무 뿌리와 금광석에 닿는 꿈꾸는   물줄기의 잠이다.   목마른 풀잎 끝 적시는 시간의 어둠이다.   창살에 자욱한 안개로 피어오르는   비는   애기씨꽃나무 잎새를 두드리는 울음이다.   2   허리에 닿는 신열 몇개를 제련하여 얻어낸다.   산너머 바다에 몰려 있는 구름떼   흐르려 하는 힘의 방향을   숲속 어둠의 눈썹 떨리게 하며   멥새 날갯소리 죽여 접게 하는 이상한 느낌을   지상에서 하늘까지 안테나를 세우면   걸린다. 벼랑 끝에 선 저기압의 음모   선을 건드리는 빗방울   손톱 끝까지 파고 들어 신경을 태운다.   3   사랑, 흐르지 않아도 어제나 흐르는 물줄기.   열쇠를 가지고 숲의 문 열면   심장에 흘러드는 비가 보이고   물오른 애기씨꽃나무   불씨로 살아오르는 숨껼이 보인다   꿈, 비가 내리지 않아도 언제나   바닥까지 생을 적시게 하는 빗줄기.     김사인. 1956년 충북 보은 출생. 서울대 국문학과 졸업. 1981년 '시와 경제'의 동인으로 참가하면서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 그는 힘 없고 버려진 것들의 애환이나 분노를 사실적으로 표현, 시적 형상화에 주력하고 있다. 현재 '실천문학사'에 근무하고 있다.        한강을 보며   가거라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이 때   그러나 눈 있는 이들 숨죽이며 지켜보는 이 때   떠나거라 묵묵히   움직이지 않는 듯   뜨겁게 땅에 몸을 붙이고 굳굳하게   돌아올 수는 없을 것이다 한번 가면   죽은 넋 바람에 실려 빗물로는 몰라도   샛푸른 한으로 번뜩이는 신새벽 이슬로는 몰라도   서릿발로는 몰라도 통곡처럼 퍼붓는 우박, 눈발로는 몰라도   떠나가면   살아서 우리   다시 만나기 어려우리라   흐르거라 이 밤이 새기 전에   버림받은 모든 것들   모멸과 안타까움 속쓰림을 부둥켜 안고   가거라 속 시원히   밤 깊어 고요할 때 이 때   저 어둠의 복판으로        고향의 누님   한 주먹 재처럼 사그라져   먼 데 보고 있으면   누님, 무엇이 보이는가요   아무도 없는데요   달려나가 사방으로 소리쳐봐도   사금파리 끝에 하얗게 까무라치는 늦가을 햇살뿐   주인 잃은 빈 지게만 마당 끝에 모로 자빠졌는데요   아아 시렁에 얹힌 메주덩이처럼   올망졸망 아이들은 친하게 자라   삐져나온 종아리 맨살이 찬 바람에   차라리 눈부신데요   현기증처럼 세상 노랗게 흔들리고   흔들리는 세상을 손톱이 자빠지게 할퀴어 잡고 버텨와   한 소리 비명으로 마루 끝에 주저앉은   누님   늦가을 스산한 해거름이네요   죽은 사람도 산 사람도 떠나 소식 없고   부뚜막엔 엎어진 빈 밥주발   헐어진 토담 위로는   오갈든 가난의 호박넌출만 말라붙어 있는데요   삽짝 너머 저 빈 들끝으로   누님   무엇이 참말오고 있나요     김상길. 1955년 서울 출생. 강남사회복지대 기독교 문학과 졸업. "시문학"지를 통해 문단에 데뷔한 그는 순수 의식과 현실의식을 종교적인 언어로 탐색하여 존재확인으로 이어지는 시세계를 형성해 나가고 있다. '창조시작' 동인이며 "우리 아버지 집"(5인 동시집) "뜨거운 언어를 너의 가슴에" "변화받은 사람들"(수필집 공저)이 있다. 현재 "현대목회"의 주간으로 재직하고 있다.        그릇   비울 줄 모르고   채우기에만 허둥거렸읍니다.   남보다 앞서서    수북이 쌓아 놓았읍니다.   그 부패하여 냄새나는 떡 덩어리를   은택의 향기로 알고   이웃을 불러들여 자랑했읍니다.   채울 줄 모르고   비우기에만 바둥거렸읍니다.   그 귀한 보배들을   실속 없는 선물,   그릇을 상하게 하는 티끌로 알고   사람들이 잠든 사이   소리내지 않고 비웠읍니다.   별이 만발한 이 새벽   당신의 음성에 잠을 치우고   비로소 눈을 떠   비워서 얻는 것과   채워서 버리는 것을 보았읍니다.        그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들으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 목소리에 날마다   새순으로 돋아나고 싶습니다.   겨우 잠 재운 슬픔이 깨어나   손 때묻은 품목들이 흐려질 때   그 목소리를 들으며   창을 열고 싶습니다.   붙잡은 사람들이 총총히 떠나고   허락하지 않은 사람들이 들어올 때   그 목소리를 들으며   들길을 걷고 싶습니다.   계절을 쓰러뜨리는 저 바람에 쫓기고 쫓겨   어두운 골목에서 주저앉을 때   그 목소리를 들으며   다시 일어나고 싶습니다.   봄 들녘처럼.   날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이 정겨운 계단을 오르고 싶습니다.   그 목소리 없이   이 시린 마음을 뎁힐 수 없읍니다.   그 목소리 없이   이 어두운 밤을 걸어갈 수 없읍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늘 깨어있다가   끝내 내 호흡이 가장 평화로와질 때   영원의 눈을 뜨고 싶습니다.     김상윤. 1959년 경북 영일 출생.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인간성의 상실과 마모에 따른 소외감, 절망과 불안을 다양한 이미지의 시적 결합을 통해 드러낸다. '국시' 동인으로 활동하며 상업은행에 근무하고 있다.        입소 28고지        --사이공, 사이공 5   야자수의 어깨에 걸려 있는 밤의 음울한 흐느낌소리를 들으며 우리들은 사타구니의 습진과 투이호아 우체국에서 어머님께 송금한 10불의 무사를 근심했다. 식스틴(M16)의 젖은 총구에서 초조와 긴장은 최루가스처럼 피고,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기다려도 새벽은 좀처럼 얼굴조차 내밀지 않았다. 수통에 가득 담아 온 고량주 썩은 냄새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는 소대장과 이하사의 희뿌연 이마에서 불안은 훈장보다 분명하고 당당하였다. 우리들은 엎드려서 빌어먹을 생각했다. 단 한 번 맛본 사이공 여자의 가짜 산호목걸이와 고국에서 온 편지와 봉투에 쓰인 충남 보령군 웅천면 관당리... 눈시울이 시큰하게 저려 오는 머언 하늘과 목선 바라크와... 전갈좌의 발톱이 머리 위로 우수수 떨어지는 흉한 꿈과... 소스라쳐 깨어나면 정글화는 천근인 양 무거웠다. 저만큼 베트남공화국의 민가에서 불빛은 새어 부드럽게 대지를 적시고, 어쩌면 지겨운 --서야-- 내일도 우리들의 몫일 수 있는 매복을 위하여 나는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슬며시 흔들었다.        월남에 계신 오빠에게        --사이공, 사이공.7   사월이 가고... 뿌옇게 흙먼지 뒤집어 쓴 대자리행 버스가 툴툴거리며 잠시 멈추어 섰다가 떠난 빈 자리, 웅천면 합동버스정류장 뒤켠의 미장원에서 머리를 자르며... 문득 고개들어 바라보는 거울 속에서 새까만 머리칼을 실밥처럼 풀어 내리며 늙은 미용사는 시종 분주하였고... 미용사의 머리 위에 얹혀 있는, 가득한 먼지와 하릴없이 삐거덕거리는 못자국, 파리똥 쌓여 있는 판넬을 보며... 무심코 흘려 듣는 라디오 방송은 용감한 따이한 군대와 잔악한 베트콩, 고 강재구 소령에 대하여 이야기하지만... 시사해설하는 김교수의 열띤 주장에도 야자는 익고... 아오자이를 입은 소녀들이 페이브먼트를 걸어 가는 배경으로, 배경에서 꽃처럼 피어 있는 시크로(삼륜 인력거)... 어깨에 묻은,미련같은 머리칼을 떨며 미장원을  나설 때, 유리문 선반에 놓인 1967.3.2.월남에서 호가 어머님께 목조군함의 갑판에 새긴 육군 상병의 씩씩한 이름을 대하며... 미장원의 유리문을 밀 때 한층 따듯하게 울려 퍼지는 목선의 기적소리... 뿌옇게 먼저 날리는 신작로를 걸어 집으로 돌아오며 오빠, 오빠 생각하며... 이기고 돌아와요, 건강한 모습으로... 1967.5.9.     김상환. 1957년 경북 영주 출생. 1981년 "월간문학" 신인작품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에 데뷔한 그는 내성적 자아로서 느끼게 되는 존재 탐구와 궁핍한 땅위에 뿌리내리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애정을 담담하면서도 조용하게 노래하고 있다. 현재 영광여중에 재직하고 있으며 '미래시' '전통시'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영혼의 닻   달 뜨지 않은 밤에 나는   심천 미류나무 숲속에   슬픈 짐승처럼 쭈그리고 앉아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타는 음성을 듣는다.   원무를 그리며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간증의 불꽃은   삼경을 지나   더욱 간절한 몸부림으로 떤다.   나는 살을 쥐어뜯어며   본향을 생각하다,   꿈에만 출항하는 영혼의 뱃고동 소리에   시선이 멎다   어차피 모래알처럼 부서질   너와 나는   일어나 숲속을 헤매이다, 새벽녘   깊이도 모를 바다의 숲속에    닻을 내린다.        산비둘기   이야기처럼 첫눈이 내리는   산마을의 겨울 창가로   전나무 숲이 요요(괴괴하고 쓸쓸함)하고   우리는 어쩌다   카키색 마루를 사이에 두고   서로가 닫힌 방 안에서    떠나 있음에 대해 골몰하며   조금씩   야   위   어   갔   다.     김선굉. 1954년 경북 영양 출생. 대구대학교, 영대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하였으며, 1982년 "심상"지를 통해 등단하였다. '일요문예' 및 '네 사람'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구미 금오공고에 재직하고 있다.        아리랑 1   이건 너무 큰 그리움이다.   우리의 가슴엔 무시로 장고 소리가   설장고 소리가 둥두둥 울려오고 있는 게 아니냐.   참 많은 고개를 넘어 또 아득한 세상   하늘은 너무 푸르러 슬펐고   때로는 낮은 땅으로 내려와 저만치   강물이 구비구비   흘러가고 있었다.   끝이 없겠구나 이렇게 자꾸 흐르다 보면   무궁하겠구나. 그렇겠꾸나.   흰 옷에 붉게 배이던 소리없는 아픔을 어루만지며   바람은 넘실 끝이 없고   끝이 없겠구나. 그렇겠구나.   참 많은 그리움과 참 많은 안타까움과 참 많은 설레임과 참 많은 아픔과 흰 몸과 붉은 마음이   아! 작은 가슴에 너무 많이   흐르고 있다.   걸어가자. 고개 마루나 강가에서   이 뜨거운 흙에 앉아 잠시 쉬기도 하며.   몸보다 먼저 마음이   어느날은 어쩌면 마음보다 먼저 몸이   푸르게 흐를 수도 있으리라.   온통 우리 몸이 귀가 되어 귀 기울이면 들려오리라.   이건 참 너무 큰 그리움이다.   우리의 가슴엔 무시로 장고 소리가   설장고 소리가 둥두둥   울려오고 있는 게 아니냐.     김세완. 1953년 전북 남원 출생. 1984년 "월간문학" 신인상을 수상, 등단한 그는 '남원문학' '미래시'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우리가 공동체적으로 의식하고 있는 삶의 시를 위해 현실의 구조적 모순을 폭넓게 수용, 시화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현재 '국정교과서' 편집부에 근무하고 있다.        눈물에 대하여   모든 눈물은   빛나는 나라에서 올 것   그리고 돌아보지 말 것   스스로 거두지 말 것이며   다만 눈물로 빛나기만 할 것.   눈물은 눈물끼리   껍데기는 껍데기끼리 모여   하나가 될 때   눈물은 어두워지지 않고   살아서 빛나는 튼튼한   이름 하나를 남길지니   껍데기뿐인 눈물은   껍데기의 나라로 돌아가고   모든 돌아보는 것들은 다시 오지 말고   스스로 거두는 것들만 어둠의 땅에 오래 남아   씨앗을 뿌릴 것.   그리하여 부르면 대답하는   눈물 하나로 우뚝 솟을 것.        허수아비   모든 빛들이 잠쩍해 버리고   죽은 풀들마저 쓰러져 마른 몸을 뒤척일 때   너는 절망의 끝에서 홀로 돌아왔다.   달빛 속에 우울하게 깨어 있는 길 위엔   울며 몰려가는 가랑잎뿐   까닭없이 바람은 불고   온종일 고단한 허리를 풀고   귀가를 서두르는 저문 벌판에서   너를 기다린다.   돌아오지 않는 새들의 안부와   죽은 꽃들을 버리지 못하는 꽃대궁의 슲픈 임종   또는 이 땅의 마지막 길손이 되기 위하여.   무엇인가   햇빛을 꿈꾸며   간간이 모였다 흩어지는 바람 속에서   뿔뿔이 흩어져 가는 별빛을 갈아 꽂으며   빛나고 있는 저것은.   깊은 밤에도 쉬지 않는   적막한 길 위에   살아 남기 위한 잡초들만   서로의 목숨을 굳게 껴안고   어둠에 묻혀 갈 대   불꽃처럼 확실히 빛나고 있는   저것은 무엇인가.   이제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 되어 떠오르리라   우리가 만나지 못한   새벽을 그리워하며 너는 언제까지나   사라진 것들을 그리워하고 있을 것인가   침묵의 뿌리를 뽑아 들고   마침내 너의 영혼은   눈물 빛깔의 꽃으로 승천한다.   남루에 드러나는 굽은 등으로   이 하늘의 높이   이 땅의 끝까지 견디고 있는   울음 소리만 홀로 세워 둔 채.     김소원. 1942년 전남 출생. 전남대 국문과 졸업. 1982년 "월간문학"지를 통해서 데뷔했으며 '미래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역사적인 흐름의 한을 간결한 시행으로 정감있게 표현,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림자   목마른 가슴에   봄비로 내려   아픔으로 건져낸   한 방울 눈물같은   그대는   가득 차 오는 가슴   바다의 울음소리가 되어   끝없이 안아도 안을 수 없는   해일의 무인   그대는   맞바람 창을 열고   눈에서 눈으로 건너는   깊게 취한 가슴으로    그대는   살아서 오는 나의   그림자.        조춘   타래진 햇살   하오를 엮어   기도하는 마음으로   붓끝을 모으면   향 스민 자국마다   숨결이 돌아   초서 머문자리   조으듯 일어서는   난향 바람에   놀라는   세상.     김송배. 1943년 경남 합천 출생. 1984년 "심상"지로 문단 데뷔. 토착적인 자연꽈 풍경을 서정성으로 환치하여 인간성 회복과 삶의 재정립을 담은 글들을 발표하고 있다. '심상시인회' 상임위원이며 시집으로 "서울 허수아비의 수화"가 있다.        바람   멀리서 쓰러진따.   누군가 마른 풀씨만 씹다가   썩지 않은 마음 한쪽 남겨놓고   한 생의 막을 내리는가.   하늘이 엷게 흔들린다.   흔들리는 저 언저리   시린 시야 밖으로   돌아가 눕는 저녁 새떼   바람만   빗살고운 무늬로 어른거린다.   오늘밤   귀에 젖은 물소리는   밤의 중심으로 흐르고   홀로 잠들지 못하는 섬 하나   거기에 나는   그리움처럼 남아 있다.        홑꽃잎 뒤풀이 2. 닻   기다림은   오래도록 끝나지 않은   서러움   그래도 기다려야 한다.   올 수 없는 발걸음 소리   갯펄에 꽂힌 채   밤새도록   피를 토하는   아픈 꽃망울   피어나기 위한 기다림은   아름다운 사랑의   약속이다.     김순일.1939년 충남 서산 출생. 대전사범학교 졸업. 1980년 "현대시학"지를 문단에 데뷔한 그는 반 도시, 반 문명적으로 고향과 자연 상실에 대한 아픔과 인간 실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는 시인이다. '백지' 동인이며 시집 "서산 사투리"가 있다. 현재 서산여중에 재직하고 있다.        서산 사투리 1   내 얼굴에는 늘 바보스럽게 헤에 웃는 웃음이 붙어다녀서 사람되기는 다 틀렸다고 한다 피사리를 가서도 피대신 벼를 뽑아 놓고도 헤에 웃는다고 주인한테 퇴박맞고 이른 새벽부터 논두렁에 나와 웃는 그 웃음소리만 들어도 하루종일 재수없다고 사람들은 투덜댄다. 막거리 냄새만 맡고도 절로 나오는 그 바보스런 웃음 때믄에 술맛이 없다고 잘 끼워주지도 않고 초상집 시신 앞에서까지 웃는다고 뺨을 맞으면서도 헤에 웃는다.   병원엘 가 보았지만 별 이상이 없다고 한다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절에도 갔었지만 헤에 웃는 나를 내려다 보시던 부처님이 한바탕 웃어대더니 지성들릴 게 따로 있지 어서 가라고 한다.   '무슨 웃음이 그렇지 부처님도 꼭 바보스럽구먼'   나는 시무룩한 어머니의 뒤를 따라 산을 내려오면서 별 희한한 일이라도 엿본 듯이 헤에 웃는다.        서산 사투리 16   눈이 내리는 밤   시골은   눈빛만으로도 훤했다   등잔불 및에서   콧구멍이 까매지도록   '흙'을 읽었고   어쩌다   촛불을 켰을 때   너무 환해서 황송했다   요즈음은   그믐밤도   대낯처럼 밝은 세상   30W 불빛에서는   아예 일손을 놓는다   세상은 점점   밝아지는 것일까   어두워지는 것일까     김영안. 1958년 경기도 양주 출생. 1985년 "나는 작은 영토에"를 출간한 바 있는 그의 시는 냉철한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한 날카로운 비판의시식과 농민에 대한 진한 애정을 담고 있다.        한수이북   강북의 하늘엔 쌕쌕이 두 마리   곡예를 부리고   파주 문산 동두천 포천   자꾸만 죽음 같은 전선이 남하한다.   그린벨트 +   이전촉진지역 +   작전지역이면    하늘 밑 지표에   감히 발댈 곳이 없다.   태아가 머리 밀고 나올 곳이 없다.   녹음 속에 있던 갈비집은 하나 둘   문을 닫고   꿩 토끼 은여우 농장뜰도   강남으로 쫓겨가고   발칸과 헬기장이   형제봉 일곱 봉우리를   여대생 유방처럼 도려 내고   북이 막히고   남이 터진   명당을 잡아   우물 파고 마당 들여 살라치면 금방   탄약고가 들어와 진을 치고   봄이 와도 철물점이 뇌졸증처럼 잠을 잔다.   버려진 땅   남쪽의 자본주의와   북쪽의 공산주의를 베고   시꺼먼 침묵으로 죽어 누운 땅   나로 하여금 뜨거운 조국애로   동네를 지키며 살게 하라   활화산 같은 자유의 이념으로   민주주의의 농토를 갈며   북진하게 하라 조국의 땅   휴전선 155마일까지   도처에 애국 청년들이 살아숨쉬게 하라   그리하여 해주 사리원 신의주까지   훌륭한 민주주의를 갈고   북진 운산 용원 금광을   우리 손으로 캐 나르게 하여라.        민중선언   시대는 확실히 좋아졌다.   농민 열 명 노동자 다섯 명만 모이면   비싼 대학물 먹고 나와 할일없는 놈들   어느 놈이든 한 놈 끼어들어   이름을 만든다   명예를 만든다   기구를 만든다   전봉준을   전태일을   진리라는 책갈피 속에 모신다.   4월 5일 팔아먹은 놈들   노동자가 투신자살을 하면   재야는 투쟁거리가 생겨 좋고   농민이 폭삭 망하면   야당은 발언감이 생겨 좋으리라   어림없는 놈들   우리가 논밭에 엎으러져   이 뜨거운 여름을 지고 있을 때   위원은 그의 마누라와 2명인   '강경민주투사선두주자연합회'   '극렬민중운동가범세계적협의회'를 만들어 놓고   너희는 이곳저곳 얼굴을 내밀고 다니며   삶보다 먼저 투쟁을 교육시켰다   눈물이 많고 맘이 보드란 사람들   그대들의 더 온당한 투쟁은   이들의 이름 없는 시간 속에  들어와   아름다움을 발견해 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라고 불렀던 해직교수는   우상이 가고 난 봄날 아침 학교로 돌아가고   땅을 빼앗겨도   국졸인 이유로 나는 야를 벗어나지 못하는데   손목을 잃어도 우리는   국졸인 이유로 기계를 떠나지 못하는데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와도   끝까지 우리의 투쟁은 멈출 수 없는데   노조와 농민회 사무실을 들락거리는   시회과학을 공부하고 온 학생의 애국심만을 믿고   우리는 계속 유인물만 받아 보고 있을가   아니다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고   노동자의 각성   농민의 역량이 필요하다고   그대들은 애써 말하려 하지 말라   전봉준을 전태일을 뺏어   책갈피 속에 가두지 말고   저임금   저곡가에   목숨이 모져 살아 있다고   안일하게 생각해 두지도 마라   기독교회관 금요기도회에서   자유실천문학회 맨 뒷자석에서   외로이 울다   외로이 울다 도망쳐 온   우리 불쌍한   쌩 알몸들   이젠 우리가 모여 할 때다   농약 먹고 목 매고 분신자살로 죽지 말고   우리들의 어둑한 거리에 혼으로도 살지 말고   이젠 우상놈 다리 후려칠   낫 놓고 기역자 한자 한자 쓰는   기 터지는 시로 살아날 때다   수천년 알몸으로 뜨겁고 차운 것 배운   양심의 소리로 살아   분노로   선언으로 살아   너희들의 오래도록 긴   책갈피 속   십자가 속   부처님 마빡 속   가을비 우산 속 룸싸롱의 계집 속   남산 위의 둥근 달 단상 위의 대머리   그 철판보다 두꺼운 철판바닥을   용서할 것인가   어림없다 땀 흘리지 않는 놈 공자 맹자 따위는   함석헌도 강원용도 김대중도   노동으로만 먹고 살고   죽음으로만 말해 온 우리에게   한낱 티끌이다   어이 할 것인가   어이 할 것인가   전태일이 노동자 약혼 반지 속에 있고   전봉준이 농민의 제상 위에 있을 터인즉   교회는 하나님을 석방하고   학문은 진리의 포승줄을 풀어   그것들이 일하는 사람 등 아무데나 가 붙게 하고   그것들이 일하다 죽은 혼 아무데나 가 절하게 하고   목사 중놈 신부 다   군인과 학생과 교수 다   그런 신 앞에 횡으로 서 절하게 하고   우리가 노동하다 지쳐 여름이 지겨울 때면   우리도 사무실로 가 동지의 전화도 받고   자전적 에세이도 쓰고   세상은 그런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이라고   거침없는 논문도 써 돈도 받고   우상은 없으되 민중은 무섭고   율법이 없으되 세상은 고른   참말로 믿어도 되고   참말로 하나이 되는   삼청교육대 애들이 들고 뛰던 통나무처럼   우리 이 미치게 뜨거운 역사를 이고 져야겠지 않은가   벗이여 동지여 친구여   우리들의 크나큰 사랑이여   김용락. 1959년 경북 의성 출생. 계명대 영문과 졸업. 1984년 창비 17인 신작시집 "마침내 시인이여"를 통해 문단에 데뷔한 그의 시는 분단으로 인해 훼손되고 단절된 민중들의 삶을 노래함으로써 시적 진실에 접근하고 있다. '분단시대'의 동인이며 계명대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송실이 누님   시오리 갑티재 넘어   달밤의 박꽃 같이 환한 얼굴   비단결같이 고운 마음씨 속에는   항상 물고기 몇 마리쯤은 넉넉히 기를 여유를 갖고 사는   송실이 누님   태어나던 기축년 그 이듬해 여름 전란통에   젖배 곯고 돌림병 돌아 벌써 죽었을 목숨   아직도 그때 흔적으로 코 밑에 두어 개 마마자국을   훈장처럼 달고 다니는   가끔씩 부끄럽지 않느냐고 내가 묻기라도 하면   콩타작하다가 넘어져서 생꼈다고   슬쩍 웃어 넘기는 재치도 보이곤 하던 누님이   시집가던 날   나는 집모퉁이 흙담벽에 얼굴을 묻고 참 많아도 울었었지   마을을 몇 개 지나고 큰 강을 건너   실배기 마을 송가 성을 가진 더벅머리와 혼인을 치르니   드디어 송씨 가문의 지체 있는 맏며느리요   그 호칭도 송실이로 바뀌었는데   더벅머리 총각 마음씨 순박하기가 또한   시월 첫서리에 무른 감홍시 같으니   두 사람은 필시 하늘이 맺어준 천생연분이라   낢마다 밤마다   서로 얼르고 위하여 아들딸 낳고   한 살림 일궈 너른 들판의 쑥대같이 사는데   어느 날부터 마을에 이상한 풍문이 돌기 시작하더니   드디어는 물 막고 댐을 만들어   온 마을이 물 속에 잠긴다고 하니   정든 집 땀흘려 가꾼 논밭 전지 두고   고향땅을 떠나야 하는   하루 아침에 수몰민 신세 된 송실이 누님   어린 남매 손목 짭고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   타향이 다 타향인지라   그래도 친정집 가까운 갑티재 넘어   갈대 마을에 터를 잡으니   제 값 제대로 받은 보상금은 아니지만   시골에서는 난생 만져보기 힘든 큰 몫돈이라   괜히 마음 설레어   마을 주막에 출입을 시작하던 송서방이   어깨 너머로 배운 솜씨로 노름판에 끼어들어   하룻밤 새 전재산을 몽땅 털리고   풀죽은 모습으로 돌아와 며칠을 앓아 누워도   묵묵부답 상한 속마음을 나타내지 않고   다시 논밭 일궈야겠다며   집안 식구들 뒷바라지에만 열중하던   속 넓고 이해심 많던 누님   나는 그 송실이 누님을 볼 적마다   어쩐지 한국판 '여자의 일생'을 보는 것 같아   코끝이 찡하기도 하지만   오늘도 갑티재 위로 흰 구름이 떠가고   갈대꽃이 바람에 춤추는 것이   가난하지만 평화롭게 살 줄 아는   송실이 누님의 지혜를 보는 것만 같다        4.19날 육사시비 앞에서   4.19날 아침   내리는 빗속을 걸어서 육사시비 앞에 당도했다   이 외진 곳까지   찾아오는 이 아무도 없고   '지금 눈내리고'라고 음각된 비면이 비에 젖어   더욱 깊게 보인다   오늘이 바로 4.19 사반세기라는데   길가의 풀들은 비에 젖어 청청하게 솟아오르고   뒹구는 돌조차도 힘이 올라 소리치는 듯하지만   아는지 모르는지   사람들은 어깨를 맞대고 무심히 거리를 오간다   비를 맞으며   나는 잠시 고개를 숙여본다   그때. 당신이 북경의 차디찬 감방 속에서   젊은 한시절을 보낼 때   그날, 또다른 당신들이 서울 한복판 거리에서   젊은 한시절을 송두리째 날려 보낼 때도   아무 울분없이 강은 저렇게 잔잔히 흘러갔고   역사도 무표정한 얼굴로 우리를 그냥 스쳐갈까   이 소도시에서   그날의 참뜻을 새기며 고개를 숙인 아침   강건너 보리밭이 푸른 깃발을 흔들며 다가오고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 아이들에게 무어라고 기르칠 것인가   어느 선배 시인의 말처럼   편하게 살라하면 도둑놈이 되라는 말이 되고   정직하게 살라하면 구차하게 살라는 말이 되는   이 땅의 논리 위에서   여전히 나는 아이들에게 편하게 살라고만 가르칠 것인가   어느덧 속옷마저 후줄근히 비에 젖는   4.19날 아침 육사시비 앞에서 말을 잊은 채   나는,     김용옥. 1954년 서울 출생. 동국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82년 "심상"지를 통해 데뷔한 그는 고독, 허무, 어둠을 수용하는 시인으로 서정 양식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며 이미지의 참신한 연결을 통하여 시의 아름다움을 지속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다. 현재 성산여중에 재직하고 있으며 "풀무치 울음에 오는 비"를 출간한 바 있다.        산문에서   길이 끝나는 곳에   돌아앉아 면벽한 겨울의   흰 이마가 보인다.   차갑게 말문을 닫은 바람이   석간수 아래 얼어붙고   눈 맑은 산새는 아침마다   빛의 울음을   눈 속에 물고 온다.   동안거에 들어간   선방 앞 댓돌에   햇빛 한자락   혼지 비추다 돌아가고,   흰 고무신이   달빛 고인 뜨락에 내린다.   아랫마을의 등불이   뿌옇게 번져보이는 이 산속,   제 안으로 빛을 내리는   촛불의 흔들림에   어디선가   얼음이 깨어진다.        흐린 저녁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문을 열고 나서면   뾰족한 첨탑 끝에 와   얼어붙은 흐린 바람.   아픔마저도 잊고 지낸 날.   경부가도 지나   잡목림 너머   희미하게 슬리는 낮달,   나직한 언덕으로도   늘 초조히   기다리던 것들은   오지 않는다.   나무 사이의 간격이   선명히 떠오르는   어스름 사이로   선회하는 겨울 철새의   낮은 울음에 맞서   등이 굽은   우리 뒷모습이   지워지고 있었다.   기다림보다   먼저   윤곽을 지우며 오는   어둠에    우리의 관계가   묻히고 있었다.     김용주. 1962년 경기도 양주 출생. 뿌리 내리지 못한 이들이 갖고 있는 억눌린 힘에 관심을 가지고 보다 깊이 천착하고자 노력하는 시인으로 198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데뷔했으며 현재 국민대 대학원 국문학과에 재학하고 있다.        노래   여름이네요.   땀에 밴 목소리로   매미가 울고   부드럽게 흔들리는 나뭇가지들.   사람은 땅에 끼어 있고   산은 바위에 눌려 있고   내 앞에서는   둥근 하늘이 떠올라 샛노랗게 익어 터지네요.   무슨 일이죠?        작업대 앞에서   낮일을 하고, 7시   구멍가게로 몰리는   캄캄한 눈발   우리는 서로 볼을 비비며 지하실로 들어간다.   '우리의 머리 위에서   다른 이들은 지금 무슨 일을 끝내고 있을까'   엉켜붙은 실뭉치 사이로   때에 절고 닳아진 원판   가득히 널려 있는 작업대 앞에서   너는 졸고, 몸판만 남은 꿈에 시달리고   나는 봄 옷감에 싸여 재봉틀 바퀴마다 굴러 다닌다.   옷들은 짐차에 실려   신평화 새벽장으로 나간다.   눈이 아린 불빛 속에서   조각조각 우리를 박으면   내 것도 네 것도 아닌 누구의 옷이 되는가.   밖에는 얼음이 맺히고 숨겨질 얘기들이 숨겨 들고   우리는 조용히 걸어온 길 앞에 선다. 발바닥를 핥으며 발바닥 깊숙히 얼굴을 묻는다. 모든 것이 육체의 일부로 남는다. 허리, 머리, 눈 그 위에 손 댈 수 없이 구겨져 있는 정신.     김용택. 1948년 전북 임실 출생. 순창농고 졸업. 1982년 21인 신작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섬진강.1'외 8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농촌 시인으로 탁월한 감성과 예리한 현실인식을 기반으로 한 독특한 농민시의 세계를 펼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1985년 첫시집 "섬진강"을 펴냈다.        섬진강 3   그대 정들었으리   지는 해 바라보며   반짝이는 잔물결이 한없이 밀려와   그대 앞에 또 강 건너 물가에   깊이깊이 잦아지니   그대, 그대 모르게   물 깊은 곳에 정들었으리.   풀꽃이 피고 어느새 또 지고   풀씨도 지고   그 위에 서리 하얗게 내린   풀잎에 마음 기대며   그대 언제나 여기까지 와 섰으니   그만큼 와서 해는 지고   물 앞에 목말라 물 그리며   서러웠고 기뻤고 행복했고   사랑에 두 어깨 깊이 울먹였으니   그대 이제 물 깊이 그리움 심었으리.   기다리는 이 없어도 물가에서   돌아오는 저녁길   그대 이 길 돌멩이, 풀잎 하나에도   눈 익어 정들었으니   이 땅에 정들었으리.   더 키워 나가야 할   사랑 그리며   하나둘 불빛 살아나는 동네   멀리서 그윽이 바라보는   그대 야윈 등   어느덧   아름다운 사랑 짊어졌으리.        섬진강 18        --나루   섬진강 나루에 바람이 부누나   꽃이 피누나   나를 스쳐간 바람은   저 건너 풀꽃들을   천번만반 흔들고   이 건너 물결은 땅을 조금씩 허물어   풀뿌리를 하얗게 씻는구나   고향 산천 떠나보내던 손짓들   배 가던 저 푸른 물 물 깊이 아물거리고   정든 땅 바라보며   눈물 뿌려 마주 흔들던 설운 손짓들   두고   꽃길을 가던 사람들   지금 거기 바람이 부누나   꽃이 피누나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던 뱃길   뱃전에 부서지며 갈라지던 물살을 보며   강 건너 시집 간 누님도 객지로 가고   공장 간 누이들은 소식도 없다가   남편 없는 아기엄마 되어   밤배로 몰래 찾아드는   타향 같은 고향 나루   그래도 천지간에 고향이라고   이따금 꽃상여로 오는 사람들   빈 배가 떠 있구나   기쁜 일 슬픈 일 제일 먼저   숨가쁜 물결로 출렁이던   섬진강 나루에   지금도 물결은 출렁이며   설운 가슴 쓸어   그리움은 깊어지는데   누가 돌아와서 이 배를 저을까   오늘도 저기 저 물은 흘러, 흘러서 가는데   기다림에 지친 물결이 자누나   풀꽃이 지누나.     김유선. 1950년 경기도 용인 출생. 1983년 "현대문학"지로 등단한 그는 현재 숙대 대학원 국문과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으며 경기대 강사로 출강하고 있다. 자잘한 일상사까지 폭넓게 수용, 시의 영역을 넓히는 일에도 주목하고 있는 그는 따뜻한 인간애를 바탕으로 한 작품들을 발표, 훈훈한 정서를 일깨우고 있다.        가족   싸우지 말아라   남편은 우리에게 타이르고 나가지만   나가서 그는 싸우고 있다   한번도 말한 적이 없지만   그가 현관문을 들어설 때   우리들은 안다   그가 옷을 털면   열두 번도 더 넘어졌을 바람이   뚝뚝 눈물처럼 떨어진다   싸우지 말아라   아침이면 남편은 안스럽게   우리를 떠나지만   그는 모른다   아이들의 가볍고 보드라운 입김이   따라가는 것을   그가 싸울 때   그러지 마세요 그러지 마세요   떨고 있는 것을        봄바람   철없는 니 춤바람 신바람이   외진 산등성이 무덤잔디   새순을 키워도   가슴구렁 그 언저리만   건드리고 건드릴 뿐   목마른 나뭇가지 축이지 못하고   시든 풀머리에   꽃비녀 얹어주지 못하누나.   바람아, 실성한 듯   밖으로만 내도는 바람아     김윤현. 1955년 경북 의성 출생. 경북대 사대 국어과 졸업. 1984년 '분단시대'의 동인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그는 역사 위에 당당히 서 있을 수 있는 참다운 인간상을 시화하고 있다. 현재 영진 고교에 재직하고 있다.        만적   너무 오랫동안 가라 앉았어   너무 깊이 잠들었어   어둡고 칙칙한 성왕성대 동구 밖에서   이젠 사람 가운데 살고 싶어   때가 되면 다리를 펴고 살 수 있어   배우고 익히면 정승도 우리 것이야   원님 배부르면 우리도 등 따신 시절 다 지났어   우리도 눈을 떠야 돼   개는 개만이 알아 주는 거야   가는 막대기도 함께 모이면 꺾이지 않아   초전에서는 반란군이 전멸되었다는 풍문도 들려오고   북산에서는 관군이 몰려온다는 소문도 떠돌지만   가랑비도 많이 오면 보는 터지는 거야   콩밭머리 혹은 허리 굽은 논배미에서도   잡초끼리 꼭 껴안으면 들불은 죽지 않는거야   생각해 봐 모여 가슴 맞대 봐   우리들 흔뜰림은 빛이 되지 못했어   우리들 흔들림은 구원이 아니었어   세상은 구름 오늘은 안개   우리의 소매자락 혹은 숨결을 되찾기 위해   모여! 내일이면 늦어        봉양동   수업이 끝나자   책보자기 등에 울러메고   뛰었다 좁은 등하교길 십오리   산굽이 돌아 쉬지 않고 뛰었다   이끼 끼고 말없는 앞산 돌성은   6.25때 아군적군 없이   우리눈 우리가 찔렀던   싸움의 흔적을 보여줄 뿐   주위에 흩어진 탄피   주우려 배고파도 뛰었다.   썩은 풀속 말없는 뼉다귀   푸른 하늘 쳐다보는 해골   사이로 녹슨 탄피 주워   장난감 딱총을 만들 때   불발탄 탄창 모아 엿바꿔 먹을 때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징용 갔던 삼촌도 멀리서 바라나 볼 뿐   이 땅에 살아 있는 자들 아무도   남아 뒹구는 뼉다귀의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적개심만 가르치고 요구할 뿐   통일에 대한 희망과 의지는   우리 손에 쥐어진 탄피처럼   녹슬어 있었다.     김재진. 1955년 경북 대구 출생. 계명대 음악대학 졸업. 1976년 "영남일보" 신춘문예와 "월간문학", 1978년 "시와 의식"지에 당선되면서 데뷔한 그는 현재 '오늘의 시' 동인으로 활동중이며 KBS대구 방송국에 근무하고 있다.        아침을 위하여   잠들지 말아야지 이 추운 밤   눈사람도 지친 듯 눈꽃에 싸여 조는 밤   같이 걷던 친구마저   동태가 뙤어 얼어붙은 밤   입김을 호호 불며 걸어가야지   잠들지 말아야지 두 눈 동그랗게 밝혀   어둠이 깊어도 멀잖은 아침   햇살 이야기 나누며 걸어가야지   머리 위엔 눈꽃이 쌓여   관처럼 인고의 십자가처럼   어깨 위엔 눈꽃이 쌓여   별처럼 이 밤의 순교자처럼   잠들지 말아야지 숨막히고 안타까운 밤   모르는 곳에서 누눈가 촛불 밝혀   빛나며 기다리는 밤   숨죽여 들으면 얼음 밑을 흐르는   시냇물 소리 들려 오는데   잠들지 말아야지 추운 밤 모두모두   노래하며 걸어야지   손 잡고 걸어야지 이 하얀 밤   눈사람도 지친 듯 눈꽃에 싸여 조는 밤   잠들지 말아야지   세상의 은빛 지붕들 모두   눈 무게에 내려앉은 밤        그대   나는 그대를 위해 많은 것을 바치려 한다   우리 젊음의 전부를 함께 보냈던 그대   아무것도 없던 영하의 밤을 견디며   서로의 체온을 나누던 그대   그러나 한때 내가 잊어야 했던 그대   나는 이제 다시 돌아와   그대를 위해 멀고 긴 길을 가려고 한다   별이 없던 밤에도 그대여   강 건너 불빛 더욱 빛나고   모질게 우리를 다그치던 밤바람도 그치고   돌을 던지던 사람들도 잠드는데   모든 것이 일체 멈추어 버린 순간 앞에   거울 앞에 서 있는 듯 숨죽인 그 순간 앞에   팽팽해진 수면을 적시며   시린 손등을 적시며   하나씩 내려와 부풀어 가던   액체도 고체도 슬픔은 더욱 아닌   마치 우리의 체온과 같이 녹아내리는   절대의 소망 앞에서 우리는   숨죽여 노래라도 불러야 하지 않으리   돌을 던지던 사람들도 잠들고   이제는 다시 돌아와   거친 물결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 않으리   그대여 나는 그대를 위하여   숨가쁘고 눈물 많은 기다림을 위하여   다시 뛰는 이 심장을 열어 보이리   불러도 메아리 없던 노래를   목이 잠기도록 소리소리 불러야 하리     김정숙. 1960년 강원도 강릉 출생. 경희대 국문학과 졸업. 1983년 "문예중앙"지를 통해 데뷔한 그는 지고의 삶꽈 최저의 생존 보장을 포괄하는 인간다움을 시로서 갈구하고 있다. 한동안 잡지사에 근무하였으나 현재 작품에만 전념하고 있으며 소설작업도 함께 하고 있다.        이 강산 돌이 되어   나도 이전엔 한 그루 나무나 날아가는 새였는지 몰라   치술령 고개마루 기다림 한에 얼어 서 있꺼나   동굴 속 부처의 형상으로 가부좌튼 내 동료들도   먼먼 예전엔 사람이었나 몰라   관가마루 높은 기둥 받치던 내 동료 불타 죽고   앉은뱅이 누구는 대궐 잔치판에서 녹두를 갈고   또다른 누구는 성곽 벽에서 총알받이 되고   손바닥만한 텃밭 지키다 군화발에 짓밟히기도 해도   그 부릅뜬 눈으로   두고 보는 게야 만수산 드렁칡이 서로 엉겨 즐거이   개미떼 벌떼 떼서리로 긁어 모으며 즐거이   이 강산 살찔 때   저들이 다시 살아 무엇이 되는지   처음 태어났던 사과나무 아래 징그런 몸뚱이의 뱀으로   거꾸로 매달린 넓은 손의 박쥐로   물 위를 딛고 선 긴 다리의 소금쟁이로 그런 것들로   허공에 다시 삶을 펄럭일지     두고 보면서 한 천 년 누워   할 말 뜨거운 마음 땅 가까이 가라앉히면   내 이마에서 푸른 달빛 푸른 노래 솟아날까 몰라   푸른 들판 홀로 지키는 푸른 솔이 될까 몰라   죄 많은 인간의 자식을 다시 태어나   그들의 아버지 할아버지 뼈 묻힌 바로 그 자리에서   저들이 또 싸우지 않으면 무얼 하는지   다시 한 천 년쯤 두고 보려고        이 강산 유월은   고추나무에 받침대를 세운다 비가 와야지 큰아버지   사촌형 없는 큰어머닌 오늘도 일손이 달린다   묘비 없는 뒷산 구덩이를 아카시아 뿌리 휘감아 들 때   못박아야지 살아남은 죄   손바닥에 아카시아 가시라도 박아야지   고추나무에 받침대를 세우며   혼자 남아 너무 오래 살았어 큰어머니 한숨소리   자잘한 고추꽃 위로 낮게 깔리며 고추나무 흔들 때   삼십년이 지나도 못 감은 눈 몇 개   밭기슭에 누워 우리를 본다   참꽃 지고도 아직 칡꽃 피지 않은 이 강산 유월은   보리고개 넘어 내리막길   보리밥과 풋고추에 뒤가 급한 내리막길   비탈에 기대어 잠든 조카들의 식곤증 속   마을마다 대순이 자란다 조카들의 잠을   쿡쿡 쑤시는 오래된 해골의 뼈마디   이마를 타고 내리는 그들의 희석된 피   저 대나무를 못 자라게 하자 자라면 꺾일 뿐   꺾이면 온몸 피묻힐 뿐 네 피 내 피 없이   더위에 흐르는 네 땀 내 땀 없이 유월 가뭄에   쓰러지지 마라고 고추나무에 받침대를 세우면   이 강산 천지 벗어놓은 뱀 허물이 흐느적거린다   삼십년이 지나도 못감은 눈들 불을 켜고   대나무처럼 곧게 자라지는 마라 속삭이는 마읆마다   아직도 대순이 자라는 이 강산 유월은     김정원. 1932년 경북 포항 출생. 연세대 및 동교육대학원을 졸업. 1985년 "월간문학" 신인상을 받고 등단한 그는 현재 '미래시'의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성대에 출강하고 있다.        6월의 기억   염천의 비탈에   날마다 곤두선 목숨   빈 냄비엔   단호박 씨앗 너댓   허기진 천리길도   해질녘이면 닿을 듯   길은 돌아 강물을 쫓고   새벽꿈에 젖은   두려움의 성 하나를   우린 기대며 걸었다.   길의 피바다   불씨의 고동   뙤약볕의 매미 울음마저   거듭 앓으며   열 여덟 같은 또래의 유령들이   주검으로 널브러진   6월의 남행길   너는 종내 말이 없었다   만에 하나   내 살아 남는다면   살아 다시 돌아온다면   버린 내 집 뒤켠   한갓진 터 골라 앉아   목 놓아 너를 울마.        차 한잔   물빛이 도는 창가   짐을 풀어 놓은 큰 섬 하나를   잔으로 내려놓는다   하루 나그네의   흔들리는 땅 위에   한 순간 고요를 저어 본다   철이 들 무렵   어머니의 용서를 구하던   그날의 다사로움을 담고   아껴   한 모금씩 들며   깊은 겨울산의 명상을 부른다   떨리던 하루해가   빈 잔 속에서   바람개비로 돈다.     김종목. 1938년 경북 의성 출생. 198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와 "현대문학"지의 추천으로 시단에 데뷔한 그는 인생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한이나 애수를 곱게 다듬어 아름다운 차원으로 승화시킨다. 현재 부산진중학교에 근무하고 있으며 시집으로 "겨울바다"와 "아기의 하루"가 있다.        찻집에서   방금 배달된 코피잔에서   따뜻이 뎁혀진 겨울을 보며   나는 외투깃으로 스치는 비발디의 음악을 듣고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고,   약속한 시간을   뚝뚝 부러뜨리는 성냥개비마다,   잠시 그리움이 찌직찌직 타오르다   하얀 재로 꺼진다.   차는 식어가고   음악은 누군가의 목청에서 피를 적시며   끝없이 끝없이 흐르는데,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한다는   삶의 비애를 달래며   석꼬처럼 앉아 있는 많은 사람들.   때로는 기다림에 지쳐   쓸쓸한 표정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시인이나 작가처럼   하루의 허무를 만지작거리다가   돌아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산다는 것이   더러는 이러한 아픔과의 부딪힘 속에서   무쇠처럼 단련되고   또 단단한 뼈대를 갖춘다는 것을,   스스로 조용히 받아들이면서   나는 또 언제까지나 기다려야만 하는지.   낙엽같은 창문에서   누군가가 붉게붉게 흐느끼고   하얗게 삭아 있는 코피잔 위로   약속의 껍질을 소리없이 만지작거리면서   또 얼마를 기다려야 하는지.   얼마를 기다리며   살아가야 하는지.        1961년의 강설   1   어둡고 질긴 밤이   연탄 난로 위에서 지글거릴 즈음,   우리는 술잔을 앞에 놓고   한 시대의 비밀을 꺼집어내고 있었다.   녹쓴 손가락 끝에 집히는   이 시대의 아픔을 나누어 들고   확실하게 다가오는 절망이라든가   혁명적인 우리의 피도 이야기하고   서로의 눈 속에 숨은 비밀도   손바닥을 뒤집듯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미리 준비된 약간의 눈물을 보이기도 하고   그저 목이라도 조르고 싶은 우리의 가난을   탁탁 소리내어 떨어내기도 하면서   한 시대의 울음을 어루만지듯   뻘꺽뻘꺽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2   약한 바람 앞에서도   자주 삐꺽거리는 싸구려 대포집에서   가장 고귀한 우리의 대화는   때로는 위험한 어둠을 동반하기도 하였다.   애국자가 어떻고 독재자가 어떻고   그저 주먹을 쾅쾅 내리치던   그해 겨울 밤,   우리는 추위 속에서 떨고 있는 자유를 보았다.   연탄 난로 곁에서 피에 젖은 눈물을 흘리며   사람들의 귀를 피하고   저 순하디 순한 눈발의 귀를 피하면서   우리의 대화는 날카롭게 움직였다.   3   잠시 침묵이 흐르고,   우리는 몸에 흐르는 애국심을 정돈하였다.   지껄이고 또 지껄여도   술집을 나오면 변함없이 눈이 내리고   한 겨울 내내 눈이 내리고,   우리의 가슴은 늘 비어 있었다.   순결한 눈은 우리의 가슴을 적시며   신음하는 우리의 한 세대를   내면 깊숙이 잠재우고 있었다.   우리가 찾는 부끄러운 단어들이   눈의 나라에 천천히 묻혀가고 있음을 보면서   귀가길에 날리는 내 슬픈 영혼은   그해 겨울 내내 잠들지 못했다.     김종섭. 1946년 경북 경주 출생. 1983년에 "월간문학" 신인상을 받고 등단하였다. 그의 시는 본질적으로 서정이나 민족적 정서를 지향하고 있지만, 그의 언어들은 정서적인 성질의 것이 아니라 그 정서적인 몽롱함을 거부하는 이성적 논리구조에 의하여 뒷받침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현재 '미래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산내고교에 재직하고 있다. 시집으로 "환상조"가 있다.        환상조   비가 천년의 석탑을 적시고   오늘은 또 삼복의 지열을 적시고   꺼져가던 환상의 조각들을 씻으며   이미 빈 공원의 의자에서   십년은 젊어진 내 얼굴의 때를   벗기고 있었다   점점 밝아지는 아랫도리마저 젖어 선   내 곁엔 어느새 잊혀졌던 과거의 장미가   환히 웃으며 섰다.   어쩌면   울고 선 아사녀의 전설을 읽고 있다   저쯤에서 비는 비껴 선 꽃잎을 찢으며   그 잔인한 웃음을 던지다 사라지고   문득 번개가 우뢰소리 더불어   천년의 종을 울리고 있다   탑신들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에   놀란 장미꽃 이파리들이   내 발등을 덮고 있다   열기에 젖었던 아랫도리는 말라들고   다시 지열은 들떠서 비를 걷어가고   백랍같던 시벌의 하늘이   한때의 꿈처럼 구름을 태워가고 있다   내 곁엔 이국소녀가 석탑을 향해   연신 카메라의 셔터를 쏘아대고   놀란 한 마리 금오조가   염천의 햇살 속으로 날아간다   잠자는 내 먼 눈을 쪼으며        달맞이꽃   풀잎이 찬 바람에 누워   별들을 세고 있는 강둑에서   꽃처럼 기운 달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슴에 한 점 온기도 없이   이슬에 젖은 꽃잎을 떨굴 때   언덕은 조용히 일어나   마른 대궁이를 꼿꼿이 세우고   감기저린 바람을 막아내고 있엇다   비틀대던 욕망은   강둑에 떨어져 잘려나면서   손을 저었다, 너를 향하여   그림자 지운 적막한 언덕에선   시든 닮맞이꽃 그날을 웃고 섰는데   어쩌란가, 정말 어쩌란가   꺼지지 않는 불씨 하나   끝나지 않은 사랑의 연습을   강물이 열리고   잠든 평원에 강물이 열리고   우수 같은 첫눈이 녹아지면서   또 내리고 있는데   달맞이꽃, 그날 우리는   다시 역류의 언덕에서 바라보겠네   잃어버린 세월 마디를 풀며   조용히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김종희. 충북 청주 출생.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1983년 "시문학"지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했다. 그의 작품은 수직적인 시간과 수평적인 공간이 교차되는 순간을 포착, 한계성을 초월하고자 하는 의식을 담고 있다.        까치가 오지 않는 집   요즈음은   우리집에도 까치가 오지 않는다   뜰엔 까치가 와 앉을 나무가   아직은 있는데도.   햇살을 부풀리어   까치의 청결한 목이나   하이얀 앞가슴을   적셔줄 맑은 이슬   한 방울도 못맺는 아침.   반가운 손님도 기쁜 소식도 없는 우리집   밤 낮으로 대문은 안으로 잠겨 있고   새벽마다 눈만 뜨면   시퍼런 칼 자국이 난 신문이   잿빛 뜰에 널브러져 있을 뿐   신문을 들어올리는 나의 손 끝에선   언재나   까맣게 탄 하늘이 보인다.   까치는 없고.        매장   숨을 쉬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아버지를 꽁꽁 묶어서 땅 속에 깊이 묻었다.   발로 꾹꾹 밟아가며 단단히 묻었다.   삽으로 때려가며 봉분도 만들었다.   우리는 향을 피우고   두 번 절했다.   '부디 안녕히 계셔요'   나는 작별인사까지 했다.   아버지를 등지고 산을 내려올 때는   수많은 무덤들을 만났다.   허물어진 낡은 무덤, 새 무덤   큰 무덤, 작은 무덤, 초라한 무덤.   나는 몇 번이나 뒤돌아보고 또 보면서   아버지의 무덤을 확인했다.   무섭다, 우리는 무슨 짓을 했는가   --아버지를 메어다 산에 묻어버린 자식들--   나는 몸을 떨며 차에 올랐다.   그러나,   아버지는 우리보다 먼저 거기에 와 계셨다.   우리는 모두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아버지와 함께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안고--   어둡기 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김진경. 1953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과 및 동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한 그는 1974년 "한국문학" 신인상에 시 '보리피리' '부엉이 울음' 등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1980년 역사적인 사건을 거치면서 민족과 역사적 현실이 형상화된 시들을 주로 발표하고 있다. 시집으로 "갈문리의 아이들" "광화문을 지나며"가 있으며 '5월 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E.T   어릴 때 나는 검은 타이야표 통고무신을 신은 채   까맣게 그을린 배가 툭 튀어 나와 있었고,   동네 논에 불시착한 헬리콥터에서   쑤알라거리면서 내리는 미군은   사랑이니 평화니 말하기에는 우주인처럼 생소해서   내 친꾸의 아버지는 망가진 벼값을 받을 수 없었다.   군에서 휴가나왔을 때에 빌리 그레함이 왔고   여의도엔 300만 인가가 모였고, 어머니도 그 중에 하나였고   비가 오려고 했으므로 우산을 들고 어머니를 찾으러 갔고   300만은 기도하고 있었다.   사할린, 만주 등등에 있는 동포들을 구원해 주시옵소서.   그때 가까이 서울에 있는 동포 중에는   밀린 임금을 받으려 단식하다 떨어져 죽기도 했으므로   나는 사람들이 갑자기 멀리 있는 것을 사랑하기 시작한 데 놀랐고   빌리 그레함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헬리콥터에 올라 여의도를 한 바퀴 돌았고,   사람들은 무슨 신음 소리를 냈으므로   나는 그가 대단한 우주인처럼 생각되었다.   그리고 빌리 그레함은 다시 왔다.   이번에는 어릴 때의 나처럼 배를 툭 내밀고   눈에서, 심장에서, 손끝에서 번갈아 불빛을 반짝이며   광화문에서, 종로에서, 영등포에서   사랑과 평화의 대군단을 이루었다.   더욱 멀리 있는 것을 사랑하라.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과 평화를 우주인에게   그때 서울에서는 모처럼의 봄이 지나갔고   사람들은 고개를 움츠리며 코트 깃을 세웠고   가까이 있는 것들은 무관심 속에 죽어가고 있었다.        풀잎   풀잎 속엔 찰랑찰랑 강물소리 들린다.   얼음 밑을 시리게 흘러가는 강물   이상하다. 쨍쨍한 햇볕 속에서도   풀잎 속엔 흰 눈을 밟고 오는 발자국 소리   엄니야, 네가 돌아오는 벌판의 어둠이 보인다.   돌아보면 세상은 언제나 흰 눈으로 등 뒤에 멈추어 있고   빨갛게 젖은 귀가 비인 바람소릴 듣고 있을 뿐   세상 어디에 언 손을 녹일 한 뼘 지붕이라도 있었느냐.   엄니야, 풀잎 속엔 찰랑찰랑 강물소리 들린다.   힘없는 글줄에 매달려   농약 공장 하루 일   물집 잡힌 네 손보다 못한 것을 시라고 부끄러워질 때   흰 눈을 밟고 오는 발자국 소리   이상하다. 쨍쨍한 햇볕 속에서도   시린 강물소리 들리고   매운 바람에 쏠리는 따가운 불티   시리고 뜨거운 한 점 사랑.   무수히 쨍쨍한 햇볕 속을 흔들려 온다.     김창규. 1954년 충북 보은 출생. 한국신학대학 졸업. "창작과 비평"사의 16인 신작시집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그는 '분단시대'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분단이 낳은 상황을 절실하게 시화하고 있다. 현재 교회 담임 전도사로 있다.        비무장 지대   전쟁의 포화가 멈춘   저격능선 무명고지에   바위 모서리 진달래꽃   피어 있다.   밤골마을 허물어진 담장   여기저기 뒹구는 깨어진 가마솥   조니워커병이 함께   순이가 닦던 꽃무늬 접시와 어울려   폐허의 마을을 지키고 있다.   수색정찰조가 지나가면 그뿐   노려봐야 할 아무것도 없는 우리땅   휴전선을 넘어서   이데올로기란 휴전선을 넘어서   자유로운 그날   죽일놈 하면서도   서로가 죽여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을 때   미군도 쏘련군도 중공군도 물러가고   이 땅에 평화가   참된 세상에 우리가 주인으로 남는   비무장 지대        동지를 위하여   너와 나의 가슴 속에   반만년을 이어온 뜨거운 사랑   가난한 판자촌 꼭대기에   깃발처럼 펄럭이는   우리들의 그것   바람부는 날   험산 준령 넘어 온 손님을 맞아   죽을 때까지   그것 때문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그것을 위해 살아   가난하게 살다가   가난하개 죽더라도   가슴과 가슴으로 문 열고   소문이라도 좋은 소문 들리는 날   목청껏 외쳐 부를 노래   아! 만주     김필곤. 1946년 경남 하동 출생. 1983년 "시문학"지를 통해 문단에 데뷔한 그는 물질문명을 비판하는 한편, 종교적인 작품세계를 추구해 가고 있다. '시뿌림'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도서출판 '뿌리'에 근무중이다.        편지   편지를 쓰겠읍니다   내 고향 산수유꽃   향그러운 편지를 쓰겠읍니다   민들레한테도   종달새에게도   강가에서 만난 밝은 바람과   그리고 그날의 흰 구름에게도   아득한 편지를 쓰겠읍니다   저승의 어머님께   속죄의 편지를 쓰겟읍니다   신문배달 소년과   청소부 아저씨와   지하철 공사장의 박형에게도   심청이 누이와 '쏘냐'에게도   억새풀 편지를 쓰겠읍니다   그리고   고요가 소소히 익는 밤이면   내가 나에게도   포도주빛 편지를 쓰겠읍니다   가시나무 편지를 쓰겠읍니다        섬진강 강물 먹고   일어서거라   겨우살이 댓닢처럼 일어서거라   병자년 산사태에 죽은 넋이랑   피아골 전투의 전우들 넋이랑   겉보리 까스라기처럼 일어서거라   경상도 보리문동이 바람아   전라도 호랑이 바람아   지리산 화전민의 화난 바람아   섬진강 강물 먹고   반야봉 고사리 날것으로 먹고   억새풀 울음으로 일어서거라   도시것들   노고단 언추리꽃 다 파가기 전에   눈 속에 피어나는   화개 칡꽃 향기로 일어서거라   바람아   바람아   섬진강 강물 먹고 일어서거라.     김해화. 1957년 전남 승주 출생. 1984년 "실천문학"사가 펴낸 "시여 무기여"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활동을 시작하였다. '두엄자리' 회원이며 현재 공사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시작활동을 펴나가고 있는 시인이다.        우리들은        --인부수첩 1   우리는 별을 지우고   우리는 별을 그릴 수 있다.   하늘을 그리고 땅을 그리고   우리는 모두를 지울 수 있다.   우리는 우리들을 지우고   그렇다 우리들의 비겁 우리들의 가난을 지우고   우리는 우리들을 그릴 수 있다.   우리들의 길들지 않은 노동으로   건강한 혁명도 그릴 수 있다.   어둠이여   어둠보다 깊은 체념이여   우리가 휘두르는 망치 아래 휘어지고 끊기는 철근   그것들과 함께 묶여   뼛속까지 스며서야 비로소 멈추는 아픔을   원색의 욕설과 독한 술로 지우듯   우리는 어둠을   어둠보다 깊은 체념을 지울 수 있다.   우리는 노래를 지우고   우리는 노래를 그릴 수 있다.   우리는 눈물을 지우고   우리는 눈물을 그릴 수 있다.   우리는 모두를 지우고   우리는 모두를 그릴 수도 있다.        어디만치왔냐   1      어디만치왔냐 당당 멀었다      어디만치왔냐 당당 멀었다   내가 눈을 감고 너의   참꽃내나는 어깨 위에 그냥 손을 얹고만 있으면   그 봄날      어디만치왔냐 감나무 밑에 왔다      어디만치왔냐 당산 밑에 왔다   순이야 감나무가 있고 당산나무   푸른 방솔나무가 있고   나물바구니 깔망태 아이들 우우 몰려가며      어디만치왔냐 개굴창 건너 간다      어디만치왔냐 논두렁길 간다   그러면 꽃 지는 소리 꽃 피는 소리   복사꽃 살구꽃 앵두꽃 우우우 피는 소리 우우우   지는 소리      어디만치왔냐 어디만치왔냐      어디만치왔냐, 다 왔다   눈을 뜨면 니가 있고 참꽃무데기 있고   아아 내가 눈을 감고 꿈 꾸듯이   니를 믿고만 있으면   그 봄날   2      어디만치왔냐 어디만치왔냐      어디만치갔냐 어디만치갔냐   찬 바람만 휭휭 가슴을 때리고   대답도 없이 어둠은 깊어만 가고      어디만치왔냐 어디만치왔냐      아아 어디어디있냐 어디어디있냐   순이야 니는 어둔 길 저 쪽 어디서   살을 팔고 웃음을 판다는데   낯익은 길은 모두 파헤쳐져 버린 세상   꿈 꾸듯이 믿을 사람 하나 없이   나는 어둠 앞에 몸을 팔고 젊음을 파는데      어디만치왔냐 새마을에 다 왔다      어디만치왔냐 선진조국 다 왔다   캄캄한 어둠 속에 신음소리 한숨소리   울음소리, 소름끼치게 비명소리      어디만치왔냐 정의사회 다 왔다      어디만치왔냐 통일조국 다 왔다   풀냄새 꽃냄새 풀풀나는 어깨도 없이   믿고 붙잡을 어깨도 없이 어둠 속에서   언제부터 그냥그냥 들려오는 달디 단 목소리   가다보면 길을 막는 날카로운 가시철망   소리도 없이 다가와 손목을 묶고   발을 거는 세상      어디만치왔냐 자유 평등 다 왔다      어디만치왔냐 복지사회 다 왔다   가도가도 끝도 없이 캄캄한 세상   달디 단 목소리는 멀리서만 웅웅대고   가파른 길 가시밭길 넘어지며 피 흘리며   아아 목이 마른데, 목이...      어디만치왔냐 당당 멀었다      어디만치왔냐 당당 멀었다 [출처] [펌] 한국의 애송시 (7)|작성자 수위
203    애송시선 1 댓글:  조회:2951  추천:0  2015-02-13
이수정. 1934년 경남 남해 태생. 원광대 졸업. 1984년 "현대시학"지의 추천으로 등단하였다.        물구나무서기   따분할 땐 물구나무서기를 해 보아라   어린 날 기쁨들이 줄지어 달려온다   발까지 매만져주는 체온 같은 세상인 걸...   23.5도 기울기로 돌아가는 지구본   그대로 두 지축을 물구나무 세우면   부황증 앓는 생명들이 허물벗고 환하랴.        역사 앞에서        --분단조국   오뉴월이 이러하랴   숨막히는 무풍지대   동강 난 메아리는   빛 바랜 채 나뒹굴고   비릿한   어둠의 계곡만   죄어드는 저 밀실.   광기의 시간들이   앗아갈 것 다 앗아가   한 시대의 오지랖은   공동으로 얼룩지고   하늘엔   쿨럭이는 강만   덩그렇게 걸렸다.     이숙희. 1950년 경북 안동 출생. 1983년 "현대시학"지의 추천을 받은 바 있는 그는 자연 속에서 향유할 수 있는 순수한 감성의 제요소를 원초적인 삶에 교차시켜 감각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현재 대구 동덕국민학교에 근무하고 있다.        고향 1   방학이면 할머니 사는   아버지 고향으로 간다   겨울 벌판에 채곡히 쌓인 짚더미   앙상하고   허허한 나무까지도 우리에겐   싱그러웠다   몇 개의 개울을 건너고   송림 우거진 숲에서   도깨비는   후두둑 떨어지는 솔방울에 자지러지고   더러는   때깔 고운 감이 예닐곱 남은   마을들을 지날 때   까치가 먹을 양식이라고 오빠는   말했지   고운 감이 떨듯 달린 외로움도 사랑   하라고   농부들이 빈 들을 건너   나뭇짐 한다발씩 지고 오고   촌 아이들 언덕에서 연을 날린다   기름먹인 한지에 할아버지는   방패처럼 활을 휘어 명주실 매고   꽁꽁   언 강을 지나 뒷산 오르면   멍석처럼 펀펀한 구름떼 위에   하늘은 선명한 얼굴로 다가오고   날이 저물면   노을이 되어 돌아오는 연의 그림자   날이 저물면   노을이 되어 돌아가는 나의 그림자        새   우리의 시작은 날개를 흔드는   거기서 이어진다   우리의 울음은   노래로 살아 남아   석자 혹은 넉자 그 이상 크기의   나무 위에서 날개 부비며   생사의 확인을 위해   이녁의 물동이에 나뭇잎 하나   띄우고   그리움을 표현하기도   부리로 벌레 또는 나무의 진을 쪼며   달빛에 몸 적시는   생존이 끝날 때   다시   긴 노래로 몸을 태우기도 한다     이승철. 1958년 전남 함평 출생. 1983년 "민의" 2집에 '평화시장에 와서' 외 8편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현재 광주에서 활동하는 "글과 현장" 기획간사로 있으며,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분단으로 야기된 동족의 아픔과 현실의 고통에 주목, 시적 형상화에 주력하고 있다.        정든 임   저기 붉은 흙 황토산 마루에   정든 임, 살고 있어   우리가 꿈물결 굽이 속일망정 잊으랴.   이젠 차마 압삔으로도 못 누를 애절함   마디마디 엮어,   그토록 긴긴 밤 상처뿐인 나날에   기다렸던 사람아.   오직 단 한분, 황토산 임   모진 목숨 부여잡고 에헤라 돌자갈 길 지나오며   지금껏 그 누굴 위해 살았나, 눈물겨운 사람들.   찬 서리 강산마다 몰려와 찢기어진 분단 깊어만 가고   침묵뿐인 산천에 받은기침 울려 퍼지는 지금   이내 청춘에 쌓인 그리움 확확 불타오르는데,   꽃 지고 새떼마저 떠난 들녘에 당신 오려는가.   그때까지 내 못 기다려,   오직 단 한분, 황토산 임 찾아   설움 많은 시대에 살다가   넘어져도 일어서서 눈 흡뜨고 다리 절며   에헤 간다 에헤 간다 에헤야 간다.   가을 억새 울음에 사무친 숨결 실어   막막한 세상 모진 파도에 타고 가네   오늘 이 출발에는   저 거리 저 등 굽은 사람들 함께 하느니   얼마나 많은 기다림에, 설레임 속에   아픈 넋을 깨물며 참고 진저리치며   서슴없이 젊은 목숨 부대껴 쌓는데,   우리야 청청하게 살아오는 정든 임 못 보겠느냐   살아서 한세월 못 맞이하겠느냐, 이 사람아.        오월비   저 비를 알아, 오월비   오월산에 오월강에 더러운 것 다 벗어 꽃물 지는 비   움츠러든 넋쪼가리 있어 한풀한풀 적시며   육신에 그대 부끄러운 육신에 저며파고 떨구는 비   저 부르짖음을 아는가, 당신   오월의 자식들이 죽음을 마다 않고 각목 든 손길에   뼈마디에 움푹 패인 아버지 잔주름에 머리칼에 꽂혀   천년 원한에 시름겨운 비   때론 송곳처럼 때론 솜털처럼 살과 살의 그늘에 나려   아스팔트에 대인시장 좌판대에 와서 머무는   비, 그날의 결단이었다   죽음을 넘어 끝내 압제를 거부하기에 죽음과 한몸이 되던   오월의 아들딸들이 맞이하던 비   광주천에 가서는 피 맑은 강물이 되던 우리여   그 누가 총칼을 두려워하지 않으랴   그렇지만 그걸 송두리째 녹슬게 하던 너--옥빛 함성 실비여   너무 시련에 가득차다 이 삶   눈매 서글픈 외론 비문에 쓰디쓴 소주를 붓고   망월리에 붙박혀 못 떠나는 사람아   너무 곤혹스럽다 오월비   젖은 새처럼 힘겹게 파닥거리지만, 이걸 우리 손으로 깨부셔야 하는 시절에   너는 무얼 하느냐   싸움터에 와서 쌈 싸우느냐   유복자는 살아, 지금도 싸워 싸워 싸우는데   어쩜 녹두의 부릅뜬 눈으로 흰옷자락의 피묻음으로 오는   오월비여, 너는   두번 다시 탄식이 아니었다 더더욱 그건   빗물이 아니었다 진달래꽃보다 더 붉은   피의 뒤범벅 생명의 깨어남이었다   오월 광주에 내리는 저 억척같은 비는.     이승하. 1960년 경북 김천 출생.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였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상황의 압력을 아이러니로 드러내는 그는 소홀히 하여 묻히거나 잊혀져 가는 '우리것'에 대한 질긴 애정을 풍자와 해학을 통한 시세계로 접근하고 있다. 현재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에 재학하고 있으며 '대중시'의 동인이다.        내림굿   찔레꽃 떨어지는 새벽의 마을에서   살아왔다 앓아왔다 내 사람아   계면조의 울음일랑 묻어 두고   한 손엔 부채 한 손엔 방울을 흔들며   내 애간장 태울 대로 다 태워, 에라   되집고 돌아서 널뛰듯 춤을 추랴   헤매던 넋 하나 돌아오고 있다   서러움에 지펴 이렇듯 몸 쑤시면   차라리 악에 받쳐 세찬 도리질이야   같이 죽어 영원히 같이 살 것을   눈 못 감고 죽은 너는 먹장구름이야   내 얼굴에 퍼붓는 너는 굵은 빗방울이야   고샅을 돌아나오면 꼭 네 생각이 났다   피었다 지고 졌다 또 피어나는   찔레꽃 산길에서 하나가 되었던들   오냐, 남치마 일월대 홍철릭 신칼   내가 살아 삶의 내력을 풀어 간다면   너는 다가와 죽음의 내력을 들려주어   보았다 아무것도 안 보여 팔 휘저으며   왔느냐 어디를 갔다가 예 왔느냐   수많은 영육 밤의 수렁에 빠졌는데   얼마를 더 살겠다고 굿당 앞에 서   튀는 율동이 되어, 만개한 꽃송이 되어   햇살을 향한 인무라니... 내 사람아.        백수광부의 처에게   새도록 누워 뒤척이던 저 강이   새벽을 향해 흘러 내 가슴께에 차오른다   숙취의 새벽이다 내 아낙이여   감당할 수 없는 세월을 흘러   마을을 하나씩 일으키고   들판의 곡식을 마저 익게 하라   산은 그대 잘 익은 젖가슴처럼   솟아있도다   야밤에 융기되는 그대 젖에 의해서   한 사내가 튼튼히 완성되어 왔다   도도히 흐르는 시간   말릴 수 없는 시간의 물결이 흘러간다   내 검은 머리칼 휘날리며 몸을 던졌다 아낙이여   마디마디 쑤시고 저린   노래를 불러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노래라도 불러 취해서 바라보면   죽은 것도 산 것도 다를 게 없도다   하나의 계절이 온전히 저물어   말술과 땀으로 온 누리가 젖을 것이다   희끗희끗 세어질 것이다 다 잊자고 그대 그토록   마셨는가 마셨다 취하였다 다만 내 이대로   잠들고 싶다 기나긴 잠   죽음과 삶이 어우러진 잠을 향해   단호한 몸짓으로 백수의 사내가 도하하는 날   아낙이여, 오래 울어   아름다운 이여   강이 되어 산 아래 그냥 드러눕는구나   그를 사랑한, 그가 사랑치 않은.     이신강. 1943년 오사카 출생. 숙명여대 국문과를 졸업했고 1985년 "시문학"지를 통해 문단에 데뷔했다. '동강시' 동인으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혼돈과 무질서의 현실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자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시집에 "밤의 기행"이 있다.        손   울음소리 요란하게   세상을 다 잡아보겠다는   신생아의 손   독립선언서를 들고 서 있는   손병희선생의 손   소리가 들리는   유관순의 손   손기정의 손   약지를 자른   안중근 의사의 손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사들의 손   이순신의 손   혜초스님의 손   우장춘 박사의 손   한석봉과 그 어머니의 손   율곡을 길러낸 신사임당의 손   논개의 손   아아, 나라를 망치는 장여의 손   박영호의 손   안희태의 손   하늘에 떠도는 KAL 승객의 손   버마로 출발하며 흔들던 열 일곱 사람의 손   부들부들 진땀나는 사천만의 손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의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은 나의 손.        기차역에서   창밖엔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기차역 층계를 사람들이   몰려 내려가고   몰려 올라가고 있었다.   떠나는 사람들이 흔드는 손과   보내는 사람들이 흔드는 손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가벼운 가방을 든 사람들과   무거운 가방에 매달려 가는 사람들   역마다 사람은 넘치고   지네같은 기차가 마술처럼   사람을 토해내고   사람을 들이 마시며   슬금슬금 기어가고 있었다.   승차역이 다른 사람들이   같은 역에 내리기도 하고   함께 탄 사람들이   다른 역에 내리기도 하고   종착역을 가려다가   도중에 내리기도 하면서...   멀리 갈수록 자리는 비어갔다.   역마다 내린 많은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버스나 택시를 갈아타고 혹은 걸어서   얼마나 더 가 보았을까.   새가 노래하는 아름다운 동산으로 갔을까.   모래바람 숨막히는 사막으로 갔을까.   마지막 한 사람도 쓸쓸하게 종착역의 홈을 빠져나갔다.   그 사람이 빠져나간 종착역, 거기서부터   출발하려는 사람들이 또 올라오고 있었다.   가벼운 가방을 들었거나   무거운 가방을 끌면서   결국은 내리고야 말 승차를 시작하고 있었다.   내리는 사람과   오르는 사람의 어깨와 어깨가 비껴가고 있었다.   창밖엔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낯익은 얼굴로 기웃기웃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이영유. 1950년 서울 출생. 건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연극 연출과 소극장 연극운동에도 참여하고 있는 그는 1982년 "우리세대의 문학"지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활동을 시작하였다. '시가 언어로 만드는 연극이라면, 연극은 육체로 조립하는 시'라는 독자적인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시집으로 "그림자 없는 시대"가 있으며 현재 "한글세대 시인과 시"를 책임편집하고 있다.        자유에 대하여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말만으로는 살 수 없다   배나무는 시원하다 봄에   싹이 돋는 모든 식물은 시원하다   시원한 것은 배고픈 것이다   배고픈 것은 서양적인 자유에   해당되는데,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밥이 필요하다   움트는 배나무 가지가 저절로   흔들리는 데에도 자유가 필요하다   말이 없음은 그것이 아주 많은 말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숨기고   몸부림치는 것도 자유이다.   배가 고플 때 비로소 밥을   생각한다는 것은 봄바람에   떨림의 이유를 감춘 싹트는   배나무의 욕망과 같다.   모름지기 떨림이란 자유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사슬 6        --잠들면 아무것도 모른다. 꿈과 더불어 밤을 이야기할 뿐   저녁이다, 해가 기울어지는 도시의 저녁이다. 바로 누우면 해가 오른쪽으로 행로를 잡는 저녁이다. 벌판 가운데 잡풀들과 잡풀들의 이름 없는 흔들림으로 바람이 부는 것을 ?깨닫는 저녁이다. 벌판의 변경과 눈을 뜨고 바로 볼 수 있는 가시권 안의 떨림과 기시권 밖의 요란함과 익명의 아우성이 땅거미를 내어쫓는 벌판과 잡풀들의 사망으로 익숙해진 도시이다. 그렇다. 아무 말도 하지 말자. 누가 말을 걸어도. 모르는 사람이 어깨를 잡아도 대꾸를 하지 말자. 그냥 가는 거다. 흔들리지 말고 빛 속으로 빛 속으로, 어둠이 젖는 빛 속으로 물방울의 아우성처럼 사라지는 거다. 이유가 없다. 이유를 대지 말자. 어둠이 조급한 것처럼 빛도 여유있는 것은 아닐 것. 흔들리는 모든 것은 두렵다. 빛이 여유를 갖지 못한다는 사실이 내심 즐겁다. 아, 그러나 괜찮다. 즐거움은 그것 말고도 (저것에 대해서) 또 있다. 열심히 빛을 읽자. 눈이 부시나 눈이 부신 만큼 빛을 읽어서 외어 두자. 저녁이라고 말한다. (저녁이어야 한다) 결코 초조하지 않았으므로 강제로라도 여유를 갖게 됐으므로 즐겁다. 볼 수 없는 모든 것들의 흔들림, 흔들거림--접시는 사기로 만드는 것이다--사기다. 사기는 스스로 비약하지 않는다. 다만 침묵하는 가운데 말과 말 사이를 유성처럼 떠돌 뿐. 아이는 즐겁다.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쳐다보며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쳐다본, 그 하늘 만큼 엄마는 즐겁지는 않다.   아들은 타살당한 애비의 원수를 갚는다. 그러나 아내는 타살된 남편의 복수를 하지는 않는다. 단지 제 목숨이 즐거울 뿐이다. 불이 탄다. 불에 타는 것은 밤이다. 밤은 타지 않는다. 어두움의 밤은 처음처럼 스스로 어둠 속에서 홀로 검정색일 뿐. 별로 할 말이 없다. 나는 즐겁지 않다. 즐겁지 않은 나는 기쁘지도 못하다. 오로지 무엇엔가 열중할 수 있는 일에 스스로를 붙잡아 매둘 것 (또 이런 메모도 보인다) 한 사내가 우연찮게 태어나 제맛을 잃어갈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리게 될까 하는 게산. 그러나 이런 것들까지도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 별 이유 없이 도시는, 한낮의 도시는 잡초처럼 잡초에 묻은 이슬처럼 밤을 기다린다. 이 얼마나 기다림이란 산문적인지 기겁을 할 지경이다. 모든 것을 모두에게 말하고 말하고, 한 말을 또 되풀이해야 하는지. 차라리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새로 배우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죽어 버리겠다.   이 부질없는 얽어맴. 얽혀서 얽히는 재미. 재미가 없으면서도 스스로 풀지 못하는 사슬. 말에 대하여 말이 지시하는 사물과 사물 사이의 인사.     이우영. 1941년 경기도 이천 출생. 중앙대와 고려대학 대학원을 졸업했고 세종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80년 "현대시학"지를 통해 데뷔했으며 간결하게 조여진 언어로 원형에의 회귀를 노래하고 있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집으로 "대합실에서 만난 사람들" "하나를 위한 서곡" "귀향일기"가 있으며 현재 한국체육대학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해 겨울   이야기를 즐겨 들으면   자라서 가난하다고   옛날에 할머니 말씀   그해 겨울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렸지   꾸리를 감으며 하시던 말씀   세월은 잠깐이라고   너도 커서 어른이 되면   아버지  된다고   그해 겨울 유난히도   바람이 매웠지   이제 나는 아버지 되고   할머니 말씀처럼 헛그지 못하지만   이 겨울 돌아갈 곳이 없어   돌아가 들려 줄 말이 없어   오늘처럼 눈이 많이 내렸지   그해 겨울   할머니 가시던 날        편지   지금은 밤이고 가을입니다   저 달도 시름겨운 밤이옵니다   새벽달이 홰를 치는 모꼬지거든   놋양푼에 정한수를 떠놓옵시고   구름이 저 달을 가리우거든   가락지를 정한수에 띄우옵소서.      이은경. 1953년 경남 함안 출생. 1981년 "시문학"지의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한 그의 작품은 무한한 우주 안에 일회성을 인식한 유한자가 느끼는 삶의 편린을 소박한 언어로 표현하여 주목받고 있다. 현재 작품에 전념하면서 '배토'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나무가지 사이로         흐르는 바람   한 치씩 더 자란 나무가지와 한 치씩 더 뻗은 바람의 머리칼이 어울렸구나 동해 앞바다 몰래 빠져나와 나풀나풀 생모시를 흔드는 바람아 새벽이면 엎드려 두 손 모으고 나무야 나무야 높이 솟아라 천 번 만 번 외우는 소망의 뜰에 말쑥한 몸매로 여린 가지 흔들려고 너는 왔구나 치솟는 빌딩의 모서리 토막토막 잘린 칼바람 무서워 무서워 왁자지껄 끓어 오른 전열 속의 불바람 지겨워 지겨워 달려 와서 등 식히는 고가 대청마루에 쏴아 하고 울음 쏟는 동해 바람아 주름접힌 내 눈 언저리 적셔 놓고 문지르고 다시 적시는 나무가지 사이로 흘러 온 바람아.        속도 제한 구역   눈발 흩날림.   경부 고속도로 쾌속시야   안개에 포위됨.   생사의 분개점   안막이 흐림.   천리 밖 컴퓨터   동동발 굴림.   단절의 체온   급하강.   백기의 행렬   낮은 음성의 고해성사.   영하의 심장   파도 타기   껄껄 웃음.   멀리 뜨거운 피   텔레파시 복선만 그음.   구원은 통 트는 아침   햇살 위에 얹혀 있음.     이은미. 1961년 인천 출생. 홍익대 국문학과 졸업. 1984년 "시문학"지의 추천을 받고 등단한 그는 '내항 문학회'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작고 평범한 것들에 대한 진한 애정이 소박하고 다감한 언어로 표현되는 시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현재 대우전자에 근무하고 있다.        보길도의 5월   갠 날이면 멀리 남끝섬이 보인다고들 했다.   거룻배가 삐걱삐걱 들어서는 날이면   수선스레 뭍 풍물이 섞여 들고   어쩌다 하늘이라도 갈앉을라치면   물먹은 자갈밭은   창자 빠지는 소리로 하늘을 불러댔다.   그때가 5월이라   동백이 진다고들 했다.   그때가 5월이라   유채도 샛노랗게 흐드러지고   그때가 5월이라   왼섬이 가랑비 속에 흐르기도 했다.   그렇게 보길도엔 5월이 묵어갔다.   불쑥 소리없이 찾아든 사람닮은 6월이,   보길도의 5월에 그만 가슴을 비우고는   우지근한 열풍만을 안은 채   섬을 돌아 뭍으로 돌아와 앉은 후.   보길도엔 아직도 5월의 순한 사람들이   까치발로 서서 남끝섬을 보고 있으리라.        슬픔   하늘로 오른다면 어떨까   덩어리져 쏟아지는 유성의 물결.   긴 장마 끝   지붕 위로 떠어지는 후박잎의 추락.   시선도 젖어드는 늦가을 밤   코 끝에서 만나보는 첫눈의 감촉.   그것도 아니면,   여위신 아버님   휘저으며 가시는 당신의 걸음   그 폭폭마다 묻어나는   시리디 시린 눈물.     이은봉. 1954년 충남 공주 출생. 숭전대 국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84년 17인 신작시집 "마침내 시인이여"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활동을 시작하였다. "삶의 문학" 편집동인으로 리얼리즘에 바탕을 둔 민족, 민중 문학에 참여하고 있는 시인이다. 현재 대학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으며 시집 "좋은 세상"을 갖고 있다.        사루비아   골목길 어디   부서져 딩구는 장난감 병정들   그 먼 장난감 병정나라로   즈의 사내   오오, 미운 사랑을 찾아서 떠난   누이야   네 아이 슬픈 보조개   네가 남긴 설움이   여기 이렇게 한점   붉은 눈물로 피었고나.        남새갈기   남새를 갈아보려는 것이다   장독대 옆 두어 평 남짓   그것도 땅뙈기라고 흙을 고르다 보면   연탄재만 풀풀 날려다니고   그저 콘크리트 비닐조각들   그래도 그냥 말 수야 있겠냐며   뭣이라도 좀 심어보자는 것이다   하기는 요만치의 농사라도   이 산번지에서나 지을 수 있는 일   누이와 뒷방 아줌마와 함께   치닫는 가슴 옥죄며   되지않게 나는   둑을 치고 이랑을 돋워보는 것이다   아직은 건강한 지구의 뒤켠   오래오래 지켜나가야 하지 않겠냐며   도시의 한쪽 끝   버티고 서서   한바탕 신명을 돋워보는 것이다.     이정숙. 1939년 만주 태생. 198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와 같은 해 "한국문학"의 신인상을 수상, 등단한 그는 이승과 저승 사이를 오가는 절박함을 시로서 승화시키고 있다. 현재 "소설문학"에 근무하고 있다.        편도선   고달픈 신열이었읍니다.   육신이 먼저 까부라지면   정신도 고개를 못 추스르고   어찔어찔 쓰러지는 입원이었읍니다.   티끌처럼 작은 이 몸 하나,   쓰러져도 더하기 빼기엔   흔적도 없을 삼라만상.   온몸 성하게 돌아갈 적엔   삼천 번을 넘게 외던 이야기도   첫구절부터 외국어였읍니다.   영혼이 날개를 달아도   헐벗은 몸 하나는 짐짝같아서   도솔천 가는 길은 멀었읍니다.   육신의 아픔, 사지의 즐거움이   혼백까지 다스려 버려서   찍어 바를 미안수도 없는 날이면   산천초목은 주근깨투성이.   팥알만한 편도선 한 알이   부처님도 예수님도   못 부르게 했읍니다.   몸살이 팔다리를 꺾어오는 밤이면   베드로처럼 세 번 이상 도리도리   어려울 것 없는 파문.   나에겐 맡기지 마십시오.   춤추는 혼백의 날렵한 심지는   소관 밖으로 밀려납니다.   고달픈 신열이었읍니다.   육신이 먼저 까부라지면   정신도 고개를 못 추스르고   어찔어찔 쓰러지는 입원이었읍니다.        문상   그 영혼이   나들이를 떠났다고 합니다.   주인 없는 자리에   명함 놓고 돌아서듯   향 피우고 일어설 때   답례로 만장이 펄럭였다고 합니다.   격식이 수월찮은 죽음은   남아 있는 사람을 당황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도착한 모든 사람이 떠난다는   합의가   파약처럼 여겨지면   상주는 짐승처럼 슬프다고 합니다.   사씨댁 상가라고   등불 켠 골목에서   산 사람이 만난 죽음은   얼굴이 없었다고 합니다.   영혼을 신이 데리고 나가서   얼굴은 없는 채   곡성으로만 남아 있는 죽음은   수월찮은 격식이라고 합니다.   처음에 만난 죽음에서   마지막 만난 죽음까지   죽음은 그저 어디서나   내 세상 얘기는 아니라고 합니다.     이창기. 1957년 인천 출생. 서울예전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였다. 1984년 "문예중앙"지를 통해 등단한 그는 새로운 경험의 세계를 독특하고 개성있게 표현하여 주목받고 있다.        문득 고요하게          하옵소서   귀뚜라미는 늘 귀뚜라미가 우는 저녁을   가지고 있었지만 끝내 이별은   돌아오지 않았다 강물 위를   뛰어다니던 이름도 기억의 밖에서   문득 고요하다   잠자는 바람의 내부에 촛불이 켜지면   안경을 벗어도 죽은 사람들의 꿈이   보인다 그 꿈과 어울리면   창을 부수고 반짝이는 죽음의 나라에 애인들   가자 아무 이름도 없는   모래 위를 발자국도 들고 가자   그림자도 벗어버리고 꿈에 묻혀   문득   이   순   간   에        우리가 파문이듯   1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견디세요 소주 반 병과 약간의 안주   오이 한 조각과 쇠소리 노련한 안전을 말이 말이 아니라는   말의 처지와 아버지가 악이라는 사무침을 치약 냄새나는   웃통을 벗고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토하세요 일기를 외쳐대듯   어제도 내일도 이해되지 않는 황홀함 역력한 울음이   오래도록 숨어서 날이 새도록 깊어지는   밤,   무릎, 물렁뼈, 불굴의 묘   2   절벽을 밀면서 엿장수가 가고 있어요 무딘 가위 소리에   절벽이 점점 날카롭게 갈라지고 있어요 주위에 나뭇잎들도   반씩 잘라져요 속고 있는 거예요 잘린 부분마다 온통   낙인이 찍혀 있어요 기념 우표처럼 세 살 버릇이지만   이미 사랑도 세 살 버릇이지만   3   파란 불은 가시고 노란 불은 돌아 가시고 빨간 불은 서시고   숨쉬고 마치고 느끼고 묻고 따오고 말줄이고 하는 표와   할 말 없음표 웃김표 조용함표 구속시킴표   자유스럼표 술취함표 춤추기표 잠자기표 헤어짐표   겉돌기표 박수침표 말속임표 등의 아직 탈옥하지 않은   표들과 함께 살게 하자 우리 말 속에 쌍소리처럼   영원하게 살게 하자 아 살게 하자 정식형   불빛도 없는 열 + 자 복판에 나도 섰소   4   내 이름이 황인종으로 위장한 나를 의심하지 않듯   나무는 개처럼 자라고   나는 입사용 이력서의 위 사실과 틀림없이   자거나 깨어 있으며   술을 마시면 술에 취하고   담배를 피우면 담배를 피우는 자세를 취하며   잠을 자면 눈을 감아야 하는 줄도 아는   종종 병신 같은 나를   김 회장님의 친구이면서도 눈꼽만큼도   의심할 줄 모른다   5   사람들이 살아가는 순간에도 TV드라마처럼   음악이 나왔으면 좋겠다   우리가 헤어지거나 사랑할 때   또는 복통이 일거나 현기증이 날 때도   그에 어울리는 색깔의 음악이   유유히 흘러나왔으면 좋겠다   거짓말처럼 사는 우리가 파문이듯   이충이. 1943년 전남 목포 출생. 1984년 "월간문학" 신인상을 수상, 등단하였다. '미래시'의 동인이기도 한 그는 투명한 서정과 이미지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토속성 짙은 시를 쓰고 있다. 현재 출판사에 근무하고 있다.        당신의 자리   세상 밖으로만 늘 가신다   안에서는 살 수 없다며   돌다리 밑 잡초더미 깔고 누워   남은 이들에게도 고생 남기지 않겠노라   아버지는 혼자 다짐하신다   마른 검불로 짓눌린 당신의   아픈 목울음을 누가 알랴   시린 가슴 속에 인줄 치고   사립문짝 미시며   부끄럼 하나 없는 백발로   수십 년 해오던 일   아침에 작파해 버리시고   그저 가는 거라며   밖으로 나가는 데는   노잣돈도 필요없고   널짝이불도 필요없고   둘둘 거적으로 말아버리듯   늘 떠나신다   재로 뿌려   냇물에 흐르라며   당신의 가시는 길   저녁의 고샅길에   내가슴 속 빗금을 떨구고 있다   엄동설한   맨발도 게염치 않으시니   가져갈 게 무어 있느냐며   그냥 떠나신다   꺼억꺼억 하늘 우러러   나는 울고 섰고   당신의 어둠 끝에서   당신은 흰 무명으로 빛나고 있다   오   정녕 당신도 아무것도 세울 수 없으며   내게 남길 것도 없사옵니다.        무심사로   간천을 따라 내려갔다   구겨진 아내의 가슴   마름질하듯   무심천변   사월의 꽃잎 한둘   떨어진다   들리지 않는 신음소리려니   마른 손 놓고   자갈밭에 앉아 있다   아내는 지금 설운 산행   땅속 그루터기 그 밑에   묻어버리는 것이려니   죽어서야 기른 새끼 모여들듯   뒷날   이 땅에서 꽃으로 피어   색색 나비나 모으려니   이제서야 한 세상 등짐으로 하고   간천을 건너간다.     이해영. 1948년 서울 출생. "시문학"지의 추천으로 등단한 그는 현재 시작에만 전념하면서 "전북일보" "전북문학" 등에 활발히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풍부한 감성이나 감각적인 아름다움 대신 내면의 세계를 깊이 통찰하면서 가능한 인생의 본질을 관념적으로 개성있게 표현하고 있다.        기억 속의 바다   바다로 가는 길목에서   나는 그대를 만났다.   다리가 없는   긴 바다는   허리띠처럼 풀리어져   누워 있었다.   강물처럼   댓님처럼   드러누운 기억 속의   바다.   그 흐름 속에   그대와 나는 떠 있었다.   한 마디 말도   나눔이 없이   오직 전생의 눈짓만 교차한   그대와 나   그 헛헛한 욕기를   부채질하며   바다는   장강인 양   다리도 없이 누워 있었다.      우리들의 의식에서   우리들의 의식에서   그 죽음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삶의 통로를 통해 본   우리의 예견이   그 죽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자욱히 연기가 내리듯   우리 생의   암울이 내리고   그것이 커져서 마침내   우리의 사랑을   덮고 있었다.   오직   피맺힌 생생함으로   밝혀 든   명부의 등불.   암울히 빛나는   그   빛둘레에서   우리는   어둡게 타오르는   죽음에의 의지를   읽고 있었다.   이미   깨쳐 버릴 수 없는   크나큰 기대로   타오르는   죽음에의 원망을   보고 있었다.   --우리들의 의식에서   그 죽음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이현암. 1944년 청주 출생. '미래시'의 동인이기도 한 그는 1982년 "월간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전통적인 정서를 현대시의 양식과 접촉시키는 작업에 몰두하면서 삶의 의미를 재확인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현재 충북 장연국민학교에 근무 중이다.        산   가만히 있지만   가만히 있는 게 아니다.   발 끝을 움찔거려   콩 밭 하나 일궈 놓고   어느덧 뒤꼍에 내려와 섰다.   말이 없지만   말이 없는 게 아니다.   겨우내 울고 싶어서   붉은 진달래도 피워내고   목소리 가다듬어   골짝 물 내려 보낸다.   보아도 보아도   합장하고 섰다.   바람을 불러   정자 하나 지어 놓고   먼먼 하늘만 우러르고 있다.        곱사춤   젓가락 장단에 집힌 신명   수숫매디 분질러 입술에 끼우고   희멀겋게 웃는 일그러진 얼굴.   글쎄, 남 다 클 때 키도 못컸남.   백 오십을 다 못 채운 체구   구부러진 등에 나이롱 바가지 넣어   앙징한 두 팔로 허공을 그러쥐며   한 순배 술이 돌아라   춤 사위마다 흔들리는   어지러운 세상사여.   귀 먹고 등 굽은 설움   서른 네 해 전 울던 산 마루 위로   흰자위만 허연 눈이 쏟아지며   지금은 뻐꾸기 소리만 자지러지는데   얼쑤, 얼쑤, 어께를 들먹이며   와락 울 것 같은 하늘의 푸르름을   찢어진 외눈으로 치어다 보고   일어설랴 힘 쓰는 그는 천사여.   그를 보고 웃는 내사 곱사여.     이혜선. 1950년 경남 함안 출생. 동국대 국문과와 세종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 1981년 "시문학"지를 통해 문단에 데뷔한 그는 역사와 공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민족의 동질성을 강조하면서 인간존재의 본질을 찾으려는 작품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시인의 집' 동인이며 현재 명성여고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후예들   함박꽃이 피는 덕수궁 뒷뜰에 한마당 벌어진 사당패 춤을 본다. 꽹과리 소리에 열두 발 상모, 쾌자자락 너풀대며 환한 대낮에 춤추는 칼. 푹푹 인왕산 허리춤 찔려 피 보면 미치는 승냥이같이 바람 으르릉으르릉거려 앞발을 두드린다. 양반님네 상투끝 산호 동곳의 누런 해가 진다. 한 치씩 내려앉는 청자하늘 아랫도리. 강변 탈바가지 닮은 할머니가 아파트창에 젖은 눈을 내다본다. 긴 막대기로 지구같은 접시를 돌리는 사내 웅크린 저승 몇 계단 쯤에서 웃고 있다.        한가윗날에   오늘은   햇빛 밝은 가을날   오곡이 무르익어 더욱 밝은 날   이 나라 하늘 땅 하그리 많은 새들이   하늘빛 닮아 마음 흰 학들이   달빛같이 흰 날개를 달고   산마다 들마다 무리지어 만나는 날   이 나라 황토흙 분이라도 피어   언덕 위의 새빨간 감 가지의 감같이   저마다 한 덩이 쪼대흙되어   저마다 한 뿌리 진달래되어   만나서 껴안고 정에 겨워 웃는 이   만나서 볼 부비며 울음 우는 이   오래 전 흙으로   고이 돌려보낸 피 한 사발   오늘 비로소 새 한 마리 오누나   이 나라 하늘 떠도는 맑은 빛되어   이 나라 기름진 땅 흐르는 물되어   돌아와 볼 부비는 날   껴안고 불타오르는 날   산에서   들에서   떨어지는 잎새 위에   햇빛 밝은 풀꽃 위에   한 줄기 향연되어 타오르는 날   저 어둠에 잠긴 혼불도 불러   밝디밝은 보름달로 떠오르는 날   오늘은   조선사람들을 만나는 날   장롱 깊이 간직한 날개옷 꺼내 입고   남쪽나라 북쪽나라 넘나들며 만나는 날   하나되어 만나는 날     이효윤. 1949년 전남 강진 출생. 1982년 "시문학"지의 추천을 받고 등단한 그의 시는 담담한 서술로 자연의 순리를 드러내며 이미지의 자연스런 결합으로 시적형상화에 성공적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거울 앞에서   시냇물이 시냇물을 보고 싶으면   시냇물을 따라 시냇가로 간다   사슴이 사슴을 보고 싶으면   사슴을 따라 사슴한테로 오듯이   서리매가 서리매를 보고 싶으면   서리매를 따라 서리매한테로 가고   순이가 순이를 만나지 못해   순이가 보고 싶어 순이를 그리워하며   순이가 죽어가는 밤   솔바람이 솔바람을 보고 싶으면   솔바람을 따라 솔바람한테로 온다.      함곡관 밖으로       가는 길에서   지게를 지고 산길을 오르다가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는 배암 한 마리를 본다.   산하는 이미 청색 깃발을 내리고 황색 깃발을 게양하는 여름도 끝 그금밤 어디쯤인가 본데.   한 뿌리에서 태어난 콩은 솥에서 울고 콩깍지는 아궁이에서 울며 오늘 아침도 이름만이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긴 행렬의 발자욱 소리.   날아오는 돌멩이를 피해 징그러운 언어들의 비늘을 달고 2연과 4연 사이를 빠져나가는 시냇물의 그림자여.   작대기를 들고 쫓아가서 단번에 두 동강 내버리고 다시 휘파람 불며 함곡관 밖으로 길을 재촉한다.     이희목. 1938년 경북 월성 출생.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83년 "시문학"지를 통해 문단에 데뷔한 그는 소박하고 간결한 문체로 전원적인 풍경을 노래하는 시인이다. 현재 무산중고등학교에 재직하고 있다.        보리밭   보리밭 물결 사이   밝고 오는 여인의   나들이 옷자락   강은 비로소 제 얼굴을 가진다.   연두빛 바람에   눈을 뜨는 풀꽃의   꽃자리마다   열려오는 청명   하늘.   놀란 멧새   흘린 울음   한 점 구름으로 날고 있다.        4월   바람은 종일   검불만 날리고   갈래산 중턱   삭정이 패는   소리 들린다.   대밭으로 몰리는   새떼들의   한낮   호밀밭 혼잣길에   아지랭이가 타고   4월은 환하게   환하게 비어 있다.     이희자. 1947년 충남 금산 출생. "월간문학"지를 통해 데뷔했으며, '미래시'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어찌보면 산다는 것이 기다림의 연속인 듯싶다는 그는, 초록이 움트는 계절을 딛고 파지로 뒹구는 가을 잎새를 그리며, 서 있는 자리에서 갈망을 넉넉한 기다림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에 임하고 있다.        천천리의 새벽비   말했다   밤새 옹크리고 내가   고하지 못한 말    문 밖에서 그가   전하고 있었다   어둠의 목을 감고   진종일 기다리던 조바심을   천천히 식히며,   숨겨온 말 낱낱이   쏟아놓고 있었다   아침이 가까워올수록   비는 점차 거세어지고   천천리 마을로 치닫는 그의   말소리도 빨라져 갔다   이젠,   어떤 것으로도 지킬 수 없는   기도실 안의 나   쉬임없이 부서져 내리는   사랑의 젖은 발길질에   온몸 내맡기고 있었다        미륵사 5층석탑   다시 바람이 와 흔들어도   돌은 두께로 앉은   이끼만 쌓고   언덕의 막바지에서   더는 나아갈 길 없어   마련없는 약속만 목을 늘어뜨린다   지등 몇   초파일의 하늘에다   명줄을 올려   상수리나무의 단잠을 깨우고,   벽층 타고 오른 질경이풀들   내 기다림을 올려준다   내려다 보아도 닿지않는   산 너머 그 너머 마을   앉아서 버티는 궁금증에   탑은 또 조금씩 또 조금씩   제 몸을 헐어가고 있다     이희찬. 1954년 전북 전주 출생. 198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면서 등단한 그의 작품은 인류의 고통에 대한 연민, 불가항력적인 자신의 고뇌에 대한 실존주의적 문제 제기 등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현재 인쇄소에 근무중이다.      리브 울만의 사랑을     노래하기 위한 비망록   1   난 알지   스웨던 여배우 리브 울만이   동아프리카 피난민촌을 방문했을 때   유리파편 같은 충격이   그녀 눈동자에 박힌 것을   세상에서 제일 풍요한 나라 미국   미국에서도 톱스타인 그녀가   불안한 전쟁 속   목마른 한발 속   죽지 못해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무엇을 생각했을지   난 알지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 쓰고   하루종일 길에서   구호식량을 기다리고 있는 여인들   야위고 쭈글쭈글한 할머니 같은 여인들   나중에 나이를 알아보니   마흔 한 살 자기보다도 젊은 여인들   내 아들이 배고파 내 아들이 배고파 내 아들이 배고파   일이십 명도 아니고   일이백 명도 아니고   일이천 명도 아니고   내 딸이 배고파 내 딸이 배고파 내 딸이 배고파   떼뭉쳐 그릇을 들고   우두커니 서서 거지가 되어   난 알지   그녀 입술 차마 열리지 않았을 것을   당장 마실 한 방울의 물이   당장 먹을 한 조각의 빵이   눈 앞에서 아른거리는 사람들에게   희망이란 말 아예 꺼내지도 못했을 것을   한 노인을 만나 그 모자 참 좋습니다   칭찬말 들려주니까 오히려   자기 모자를 찢어 발겨   씹어버리는 것을 보고   크게 당황 암말도 못했을 거라는 거   난 알지   난 말하고 싶어   그녀가 돌아 본 이 주일의 끝   쫓기듯 뉴욕으로 돌아오던 날   그녀가 자기의 아파트에서 가졌던   기자와의 인터뷰를   보통 마음을 가진   보통 사람들의   보통 이상의 주의를 기울일 만한   보통 이상의 메시지가 있었다고   굳게 굳게 믿고 싶어 난   2   지금까지 누려온 풍요로움에 대하여 당연하게 여겨 왔는데 이제 마음이 편하지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데레사 수녀처럼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은 아주 드문 것 같습니다   나 자신은 전적으로 남을 위해 살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세계의 저쪽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하지는 않겠습니다   목격한 참상을 리포터로 발표함은 물론 내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유명도를 이용 사람들의 관심을 동아프라카 사람들에게 돌리게 하겠읍니다   올 가을까지는 일체 영화일을 쉬겠읍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가난함과 부유함의 불균형에 대한 책을 쓸 계획입니다   3   나는 노래하고 있네   기근의 고통을 싸우고 있는 이들에게   동정심 가득   맑고 깊은 눈동자를 가질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을   나는 노래하고 있네   내 동족은 아니지만 내 동족처럼   내 슬픔은 아니지만 내 슬픔처럼   따뜻한 마음의 심지불 태워 줄   네 사람 다섯 사람 여섯 사람을   나는 노래하고 있네   이 순간 뼈만 앙상한 한 명이 죽고   이 순간 뼈만 앙상한 열 명이 죽고   이 순간 뼈만 앙상한 백 명이 죽고   이 순간 뼈만 앙상한 천 명이 죽는   동아프리카의 처절한 비탄에 대하여   함께 이마를 짚고 고민할   일곱 사람 여덟 사람 아홉 사람을   4   리브 울만 여사님   편지 늦어 죄송합니다   당신의 연민의 정은 참으로   온 인류 가족이 함께 할   양심의 깃발입니다   오늘 마음의 문이 열리면   내일 눈의 문이 열리고   내일 눈의 문이 열리면   다음 날 사랑의 문이 열립니다   게속 수고하여 주십시오   건투를 빕니다        사랑을 위한 독후감   1   솔로몬의 아가서를 읽으면 술람미 마을 양치는 목동과 포도원을 지키는 처녀 두 사람의 가슴 속에 하얗게 꽃핀 첫사랑이 참 아름답네   죽음 같이 강한 사랑이 되려고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사과나무를 지나 예루살렘 궁궐로 날아가는 산비둘기 울음 소리가 들리네   사랑을 방해하는 모든 사상을 대적하는 화염검도 보이고 생명 나무 동산을 지키듯 오직 한 사랑을 지키는 무화과 속살같은 심장도 보이고   이글이글 불꽃이여 거룩하고 거룩한 불꽃이여 평범한 사람들에겐 참 무섭고도 무서운 사랑이여   닮아보려고 닮아보려고 애를 써도 온전히 채울 수가 없어서 한 평생 감동적인 모범 사랑으로 남겠네   2   나는 당신을 사랑하겠읍니다   당신을 위하는 순결한 마음   날마다 배양되는   해맑은 사랑으로   내 생명이   당신의 생명이라 해도 좋고   당신의 생명이   내 생명이라 해도 좋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겠읍니다   당신을 위하는 진실한 마음   날마다 성숙하는   크낙한 사랑으로   내 영혼이   당신의 영혼이라 해도 좋고   당신의 영혼이   내 영혼이라 해도 좋습니다     임문혁. 1949년 충남 당진 출생. 방송통신대학과 국제대 국문과를 졸업. 198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자연과 사물과 특히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를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고 싶다는 원을 가지고 시작에 임하고 있으며, 현재 경기여고에 재직하고 있다.        물의 비밀   모올래   너를 만나면   뜨는 무지개   부드럽게 휘어지며   내게로   가슴에 꽃이   꽃이 피었네   다년간 창문이 열려 있고   열매, 열매가 맺히네   곁에서 울리는 목소리, 아하   나는 풀이란다   네 오면 금새 푸르러지는   풀잎이란다   알 듯   모를 듯   은밀한 비밀   창문만 열리면   속삭임만 스치면   산도   들판도   싱싱하게 일어서는   신비한 비밀이란다        딱 둘만 남게 된다면   이 세상에   딱 둘만 남게 된다면   하나에게 있어   하나는   얼마나 소중할까   이 세상에   딱 둘만 남게 된다면   하나의 고독은   하나가 덜어주고   하나의 병고는   하나가 보살펴주고   하나의 열매는   하나와 나누어 먹고   하나의 일은   하나가 도울 수밖에 없는데   그러므로   하나는 하나가 아니요   둘이며, 둘은 둘이 아니고   하난데   이 세상에   딱 둘만 남았을 때   하나가   없다면?   그런데, 우주에는   딱 하나씩만 살고 있는 별도   있다고 한다.     임석래. 1946년 함남 흥원 출생. 건국대 국문과 졸업. 1981년 "현대시학"지의 추천을 받고 문단에 데뷔한 그는 언어의 조율이 영혼의 반향에 리얼리티를 증폭시키고 또 그 역반응에 의한 삶의 확대가 가능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작업하고 있다.        겨울   바람 앞에 바람   바람이 맞붙었음   바람과 바람이 서로   엉키고 뒤엉켜 넘어지고   쌓인 눈가루가 휘말려   하늘로 솟구쳐 바람기둥이 되고   나는 바람기둥에 기대어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휘날리며   이 겨울 기침 한번 못하는   재주도 재주씩이나 쳐주고 있는   어금니 썩은 이빨로   치과에 나가   아-- 하고   입 벌리고 있음        4월        --진달래 앞에서   내가 네   살 속에 들어가   있을 때   네가 내   살 속에 들어와   머물 때   불 놓은   동토의 신열   문드러진 동상   살점 속에서   절정에 오른   그대, 그대들의 불꽃   세상   너절한 살 속의   확실한 포옹     임승빈. 1953년 충북 보은 출생. 청주대 국문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하고 있으며, 1983년 "월간문학"지를 통해 등단하였다. 존재론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경향을 지닌 그의 시는 종래의 전통적이고 향토적인 소와 함께 소재의 영역을 넓히고 수용하고자 하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으며, 현재 청주 대성중학에 근무하고 있다.        세 개의 유년     1. 가을산   갈참나무 잎 하나가 떨어지면서 산 가득히 하늘은 내려와 앉았읍니다. 꼭 갈참나무 잎만이 하늘을 내려오게 할 수 있는지는  내가 산빛으로 크는 갈참나무가 되어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갈참나무와 하늘이 그토록 가깝게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읍니다.   그 후로 나는 내가 하나의 잎사귀되어 내려 앉으면 우리가 사는 마을 가까이 하늘도 아주 내려와 앉으리라는 꿈을 아무래도 버릴 수가 없는 것이죠.     2. 우리들의 힘   관직을 버리셨다는 우리 할아버지는 가끔 낚시를 즐기셨는데요 해질녘 무연히 찌를 보시다 힘차게 낚시대를 채어 올리면   문득 어깨 위로 푸른   조각달 하나   그 순간 나는 보았어요   앞산 양지봉이 부르르 몸을 떠는 모습을   새벽녘 돌아오신 할아버지 손에 들려진 것은 보퉁이 하나의 무게, 그러나 거기엔 팔딱이는 '고승리' 내 고향 숨결이 담겨 있었어요.   지금은 못도 없고 세월도 없어 하늘엔 비늘 푸른 달도 없구요, 할아버지 낚싯대만 뾰족이 서서 솔개가 맴을 도는 푸른 하늘만 지그시 눈 감은 채 찌르고 있는 거예요.     3. 아버지는 두릅나무 새 순만 따고   장대를 들고 아버지는 두릅나무 새 순을 따고 저만큼 물러앉은 까치 한 마리 고즈너기 아버지를 내려다 보고 있어요.   아버지와 까치를 나는 함께 두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까치 때문에 아버지는 당신의 어머니를마음 그리고 있을 거라는 추측은 아무래도 버릴 수가 없는 거예요.   새 순을 따는 아버지의 이마 가득히 밀려와 푸르게 부서지는 하늘. 그것이 더욱 높아 보이는 것은 저만큼 떠나지 않는 까치 때문.   아버지는 이제 새 순 끝에 묻어 있는 봄 햇살도 따고 기억의 먼 유역에 핀 바람도 잡아 당기면서, 딸 수 없는 세월만 더 높은 가지에 매달아 놓은 것이죠.        입술들   비   내리고 있다   세워 둔 포크레인이 한 대   녹슨 날끝으로 꿈에 젖는다   꽃의 눈자위가 짙다   그 짙은 그늘 속으로 쓸리는   쓸리는 몸짓 가득   돋아나는 상처   도망하지 못한 하늘 한 구석   세월마저 다 거부한 입술들이   허공에 뜬 슬픔으로 만나고 있다   슬픔도 아닌 것으로   울고 있다     장경린. 1957년 서울 출생. 방송통신대 졸업. "문예중앙"지를 통해 등단한 그는 자유와 자유에 대한 책임에의 강한 의지를 표명한다. 현재 한국은행에 근무하고 있다.        허리운동   이 얼 싼 쓰   유 류 치 빠   명동 2가 83번지 화교소학교   열 살 남짓   스무 명 남짓한 아이들이   앞으로 굽혔다가   뒤로 젖혔다가   허리운동을 합니다   뽀얀 모래먼지 이는 운동장   담장을 타고 넘는   이 얼 싼 쓰   우 류 치 빠   조국은 크고 머나먼 나라   굽혀도 굽혀도   손 끝에 발등이 닿지 않는   머나먼 나라        인물화     1   두 다리 덜미잡힌 방아깨비처럼   온몸을 주억거리며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로   고려에서 코리아로   고무신을 꺾어신고 달리는   사람을 보았읍니까?   쿵 쿵 쿵 쿵   그들이 달리는 시간은   언제나 삼경이고   역사와 역사 사이   사랑과 사랑 사이를   교묘히 빠져나온 그들의 이목구비는   오늘 따라 유난히 수려합니다.   무교동에서   영등포에서   비어홀에서     2   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수초 그늘에 고개를 처박고 죽은 달   젠장.   바람이 불면 쩍 쩌억 금이 가던데   위험해. 그저 앞만 보고 가라니까   어른어른 거리다 사라져 버리는 저 달빛 속으로?     3   06시 40분. 부활하려면 20분이나 남은 시간. 숙면으로 완벽하게 무너진 그 사내의 나이는 그런대로 아직은 쓸만 합니다. 먼지 털고 방수액을 바른 다음, 눈 코 입 귀를 틀어 막으면 누가 보더라도 번듯한 항아리 같습니다. 불만과 욕정 또는 소주와 소시민성을 담기에 편리한 자루 같습니다.   07시.   자, 일어나 부활하십시요.   출금을 서두르십시요.     4   지하철을 타고   꾸벅꾸벅   통조림 속 고등어 건데기처럼 꿀렁이면서.     장정일. 1962년 경북 성서 출생. 성서중학을 졸업했고, 동인지 "국시"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성, 아침"(공저)이라는 시집을 출간하기도 한 그는 사회의 수많은 부조리에 대해 냉소를 보내는 한편 지나친 엄숙주의나 혈기방장의 의협심을 극복하고 일상적인 즐거움으로 가득찬 시세계를 갖고 있는 시인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시운동' 동인이며 현재 대구에서 시작에만 전념하고 있다.        강정간다   알고보면 사람들은 모두 강정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같이 환한 얼굴 빛내며 꼭 물어보면   금방 대답이라도 해줄 듯 자신있는 표정으로   토요일 저녁과 일요일 아침, 내가 아는 사람들은   총총히 떠나간다. 울적한 직할시 변두리와 숨막힌   스레이트 지붕 아래 찌그러진 생활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제비처럼 잘 우는 어린 딸 손 잡고 늙은 가장은 3번 버스를 탄다   무얼하는 곳일까? 세상의 숱한 유원지라는 곳은   행여 그런 땅에 우리가 찾는 희망의 새가 찔끔찔끔 파란   페인트를 마시며 홀로 비틀거리고 있는지. 아니면   순은의 뱀무리로 모여 지난 겨울에 잃었던 사랑이   잔뜩 고개 쳐들고 있을까   나는 기다린다. 짜증이 곰팡이 피는 오후 한때를   그리하여 잉어비늘 같은 노을로 가득 처진 어깨를 지고   장석 들그럭거리는 대문 앞에 돌아와 주름진 바짓단에 묻은   몇 점 모래 털어 놓으며, 그저 그런 곳이더군 강정이란 데는   그렇게 가봤자 별 수 없었다는 실망의 말을 나는 듣고 싶었고   그러나 강정 깊은 물에 돌팔매 하자고 떠났거나   여름날 그곳 모래치마에 하루를 누워 즐기고 오겠다던 사람들은   안 오는 걸까, 안 오는 걸까 기다림으로 녹슬며 내가 불안한 커텐   젖힐 때. 창가의 은행이 날마다 더 큰 가을우산을 만들어 쓰고   너무 행복하여 출발점을 잊어버린 게 아닐까   강정떠난 사람처럼 편지 한 장 없다는 말이   새롭게 지구 한 모퉁이를 풍미하기 시작하고   한솥밥을 지으신 채 오늘은 어머니가, 얘야 우리도   강정 가자꾸나. 그래도 나의 고집은 심드렁히   좀 더 기다렸다. 외삼촌이 돌아오는 걸 보고서, 라고 우겼지만   속으로는 강정 가고 싶어 안달이 난 지경.   형과 함께 우리 세 식구 제각기 생각으로 김밥의 속을 싸고   골곡 나설 때, 집사람 먼저 보내고 자신은 가게   정리나 하고 천천히 따라가겠다는 김씨가   짐작이나 한다는 듯이 푸근한 목소리로   오늘 강정 가시나 보지요. 그래서 나는 즐겁게 대답하지만   방문 걸고 대문 나설 때부터 따라온 조그만 의혹이   아무래도 버스 정류소까지 따라올 것 같아 두렵다.   분명 언제부터인가 나도 강정가는 길을 익히고 있었던 것 같은데   한밤에도 두 눈 뜨고 찾아가는 그 땅에 가면 뭘하나   고산족이 태양에게 경배를 바치듯 강둔덕 따라 늘어선   미류나무 높은 까치집이나 쳐다보며 하품하듯 내가   수천 번 경탄 허락하고 나서 이제 돌아나 갈까 또 어쩔까   서성이면, 어느새 세월의 두터운 금침 내려와   세상 사람들이 나의 이름을 망각 속에 가두어 놓고   그제서야 메마른 모래를 양식으로 힘을 기르며   다시 강정의 문 열고 그리운 지구로 돌아오기 위해   우리는 이렇게 끈끈한 강바람으로 소리쳐 울어야 하겠지   어쨌거나 지금은 행복한 얼굴로 사람들이 모두 강정간다          지하인간   내 이름은 스물 두 살   한 이십 년쯤 부질없이 보냈네.   무덤이 둥근 것은   성실한 자들의 자랑스런 면류관 때문인데   이대로 땅 밑에 발목 꽂히면   나는 그곳에서 얼마나 부끄러우랴?   후회의 뼈들이 바위틈 열고 나와   가로등 아래 불안스런 그림자를 서성이고   알만한 새들이 자꾸 날아와 소문과 멸시로 얼룩진   잡풀 속 내 비석을 뜯어먹으리   쓸쓸하여도 오늘은 죽지 말자   앞으로 살아야 할 많은 날들은   지금껏 살았던 날에 대한   말없는 찬사이므로     장종권  1955년 전북 김제 출생  성균관 대학을 졸업했으며 1983년 "현대시학"지를 통해 문단에 데뷔했다  현재 인천 광성중학교에 재직하고 있으며 "3막 7장"(공저)이라는 책을 펴낸 바 있다        바람불   내가 돌이었으면 나무였으면 산아   항상 네 살 속에 나를 섞을 수 있었다   내가 꽃이었으면 산호였으면 여자여   항상 네 살냄새와 함께 할 수 있었다   눈감고 내가 아니기를   너를 떠나는 내가 아니기를   바다여 깊은 뜻으로 이해한다   이해한다   속살 다 비치도록 고운 네 옷   얼굴 붉히며 들여다보는 발톱   머릿결로 치마폭으로   흩날리는 본능   나는 너의 한 묶음 꽃이 되지 못하고   너의 부끄러운 타인이 되어   배암이 되어        안테나   어른들이 십자가 밑에서   두 손 모으는 일요일   아이들은 골목에 모여   안테나를 세운다   손 칼 삼아 구덩이 만들고   개똥 모아 거름 묻고   이놈 실례 저놈 실례 물을 삼고   발길로 씨팔 흙 돋우어   꽁꽁 다진 안테나   외계인아 와라, 오지 않고   하나님아 와라, 오지 않고   할아버지도 와라, 오지 않고   잠자리나 와라, 오지 않고   잎이 돋는다   서슬 푸른   거짓말이 돋는다   참말이 돋는다   전광옥  1956년 서울 출생  1984년 "현대문학"지에 시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나왔으며, 꿈과 현실 사이의 안타까운 거리를 좁히기 위한 노력을 보여주는 시를 쓰고 있다  현재 출판사에서 편집일을 맡아 보고 있다        신정동 1   오늘은 비 그리고 조금씩   바람 모두가 우울 조금씩   버스를 타고 그 옛날 논두렁   밭고랑 너머 신정동 친구   찾아온 진창길 골목   골목을 지나며 아직도 판자집   비탈진 그들의 삶을 끓이며   자식으로 어둠을 낳아   아들 딸로 키우며   자꾸 구석 구석으로만 몰아세우는   바람 속에서   술에 안주를 내는 친구는 한잔   안녕 안녕 모두가 무사 웃으며 쓸쓸히   사시나무 그늘로 흔들리면서 친구는 한잔   이제는 괜찮다 그렇게   힘차던 패기 하나가 밀리고 눌려 오늘은   책상다리를 틀고 앉아 술을 따른다   친구여   비탈길에서도 달려 내려가야 하는   리어카처럼   밑불 때문에 자기도 타 버려야 하는   나중된 구공탄처럼   결국은 익사할 금붕어의 아가미처럼   어지럽게 돌므로써 살아가는 팽이처럼   이제   우리는 우리로서 산다   버스를 타고 그 옛날 논두렁   밭고랑 너머 신정동 친구   찾아온 진창길 쓸쓸히   술오른 친구의 여윈 눈 속에   가깝게 쪽박산이 솟아오르고   그 어깨 위로 비가 내리고 잇다   마른 풀잎들 흔들거리며 온몸을 내맡긴 채   흔들리며 비에 젖고 있다        관법 4        --별에게   1   이제는   눈을 감지 않아도   보인다   깊이 모르게 넓은 어둠의 냄새에 젖어   출렁이는 너는, 난파선의 돛대   끝에 매달려 부서지는 수기^256^ 색 바랜   어머니의 이마   우표 없는 편지   어디서부터 읽어내려가야 하나   2   아버지,   만주로 떠나시던 새벽의 바짓가랭이를 붙잡고   늘어지던 이슬방울들 여전히   아무것도 붙들지 못하고^256^ 나는   떠나왔어요  유해처럼 돌아온   육십평생 아버지의 세월 위로 터벅   터벅 아버지를 마나기 위해^256^ 나는   떠다녔어요, 그 터벅거리는 절망과 희망 사이로 흐르는 입만   살아남은 흙먼지들이 튀기는 침 같은   피의 강물 위에서 나는 수없이   만났어요, 제가 어둠인 줄도 모르고   그늘을 쓸면서 살고 있는 누이를^256^ 때도 없이   가래 끓는 소리로 기우는 썰물의 가난한 등줄기를, 언제나   밀려나는 자만 밀어내는 바람 속에서^256^   함께 밀리면서 나는 보았어요 취하여   비틀거리는 골목의 끝에서 밀리고   밀려서 이제는 더 밀려날 데 없는 사랑을^256^   바닥이 없는 누이의 방을 돌아 나오며   보았어요, 신학대학을 따라 둘러친 철조망을   부끄러운 양심의 아랫도리를 지키는 정조대   도난경보기가 달린 사랑의 치욕스러움을   보았어요, 바람은 어디서나 불고 골목을 따라   골목의 끝보다 더 깊이 내려앉은 하늘을   봄이 보고 싶어요 오늘, 석간신문 위로   죽은 황새가 흘러 지나가고 내 몸에서   폐수 냄새가 나요  때아닌   박쥐가 날아오르고 있어요 어디까지   가야 하나^256^ 어둠이 날개 치는 소리를 지나   --떠나올수록 갈 길은 멀어져요,아버지   3   피 토하며 사는 것이 어디   네 가슴뿐이냐 까욱  누이 이마 위로   깃 빠진 까마귀 울음   몇 방울 지나가고^256^ 그 눈물방울을 따라가면   어깨를 끼고도 낯선 사람들   피를 토하며 살고 있더라 바람에   밀리면서^256^ 혹은 버티면서, 오늘밤   너의 편지를 답장으로   다시 너에게 부친다  그러나   (잊지 마라, 바람은 언제나 밀려나는 자만 밀어낸다)     전연옥. 1961년 충남 아산 출생. 서울예전 문예창작과를 졸업. 198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데뷔한 그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에 애정을 갖고 그것을 시화함으로써 진솔한 시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곤충채집   생물학을 전공한다는 조카의 자연공책 속엔 무엇이 들어있을까 나는 궁금했지만 기도해야지 못박혀 움직이지 못하는 몸뚱이 한줄기 자유로운 바람결에도 날개 부비지 않는 적막을 위해 푸른 곰팡이 꽃처럼 피어나는 표본실 찬 담벼락에 이마를 기대고 이 강산 호랑나비 목청 좋은 말매미를 위해   자정이 넘자 내 몸을 뚫고 들어오는 예리한 핀침에 의해 나는 표본되었다 숲에는 아직도 곤충들이 살고 있는지 굳어오는 손끝을 움직이며 나는 황홀하지만 풀 한포기 없는 이곳에서 나는 무얼 먹고 사나 포충망 가득히 날아오르는 날개를 바라보며 조카는 내 몸 깊숙이 또 한 개의 핌침을 박고 한 방울의 에테르로 나를 잠들게 하지만 무엇일까 자꾸만 살고 싶어지는 이 이유는        제비붓꽃   친구를 따라 강남에 가서 살꺼나   애인을 따라 섬에 가서 살꺼나   이대로 서로의 경계선이 되어   석삼년 애간장을 태워도 오지 않을   엽신을 기다리며 살아갈꺼나   기다림 하나만으로 일생의 안부를 묻고   내것이 아닌 침잠의 슬픈 얼레도 풀다가   맨발 아래 차가운 물소리와 함께   한평생 고질병에 이를 갈며 살아갈꺼나   아아 내일이 되어도 아지 못할   이 징그러운 소망의 잔뿌리들이여   이제 나는 홀로 자유로와야 하겠네     전원책. 1953년 경남 울산 출생. 경희대 법대를 졸업하고 군법무관으로 재직하고 있는 그는 1977년 연작시 '해동다작'으로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남이에게"가 있다.        해동단장(초)     1. 내 어머니 두레박 속   내 어머니 두레박 속엔   살아 퍼덕이는 바다가 담겨 있읍니다   내안으로 질풍처럼 달아나던 하늘로 그득합니다   내려다 보면 그냥 허공일 뿐이지만   좀더 다가가서 보면   고조선의 잠의 뿌리가   예까지 뻗어 수초처럼 일렁입니다   나는 그 실뿌리를 타고 들어가   관능의 질긴  육질의 끝까지 올라가   황홀했던 소년으로   깊이 잠긴 장인의 잠을 두드립니다   정갈하게 다듬어지는 노래를 듣습니다   음계의 맨끝에 쌓인 숲에는   풀풀 날리는 햇덩이의 살도 있읍니다   온 세상은 그냥 잠든 채입니다   내 어머니 바다 속에는   아름다운 진주로 만들어진 마을이 있어   내 팔매질로도 다하지 못한   하늘만으로도 그득합니다   나는 그 속에서 이른 아침이면   눈부셨던 아이로 일어나   이만큼 자라날 수 있읍니다     2. 해동청 일수   불어도 불어도 당신은 더는 커지지 않는 풍선입니다   이 세상 강풍을 다 쏟아 넣었읍니다   내 잠 어느 귀퉁이쯤   당신은 온 누리에 내리는 햇살의 중량을   홀로 감당하고 있읍니다   그 감동을 받들고 섰읍니다   나는 문득   바람이고 싶다가   폭풍우이고도 싶다가   터질 듯 터질 듯한 꽃봉오리이기도 합니다   그 위를 밤새 실눈 뜬 꽃뱀이 넘어가고   십년이 뭉텅 지났읍니다   그 십년을 또 일순에 뛰어넘는   해동청 일수가 있읍니다   나는 그냥 당신의 종이기도 하다가   영겁을 날아 화석이 되기도 합니다     4. 신라의 아이들은   오는 비 맞으러 뛰어나간 아이는   신라의 하늘 밑을 내닫고 있읍니다   학교에서 돌아와   수로부인의 기슴팍까지 걸어 들어가   음악책이나 그네 사독 어디에서쯤   소나기 한줄기를 쏟아 놓습니다   개나리 꽃송이 환한 속살마다   투명했던 하늘에서   왜 먹구름은 울까요   개운포 가는 신라 성왕의   터벅대는 발자국소리도 들려옵니다   그 발자국마다 폭우가 그득합니다   열릴 듯 열릴 듯 열리지 않는   홍수같은 내 잠 근원입니다     6. 불의 눈   싯붉은 불 뿜어내고   말라죽은 신석기시대가 누워 있읍니다   잠은 많은 세월을 퇴적하여   긴 해안선이 되어 있읍니다   무시로 불어내리는 태백의 바람이   숱하게 지워가지만   만조의 아침이면 다시 솟읍니다   이 바다가 다시 한 바다가 되어   빛나는 불의 눈 되쏟으려면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합니까   더러는 깊이 모를 잠 속으로   더러는 행방모를 바람에 품어져   달아난 관능입니다   설령 이 바다가 꿈꾸는 중이라   아이들의 밝은 눈엔 형형하게 되살아나는   고조선의 동해라 하더라도   동세의 동해라 하더라도   아무도 그 세월을 건질 수 없읍니다   그 심연을 건질 수 없읍니다     9. 별밭   땅 위에도 별은 숱합니다   줄기마다 굵은 놈들이 듬직해져 있읍니다   별 하나마다 쏟아놓은 푸른 빛이   이내 바다로 변해 한 마을을 넘실댑니다   나는 매일밤 별밭에 가서   조금씩 떨리며 가라앉는 눈물을 봅니다   눈물도 이내 바다로 변해   꿈 하나   세상 하나를 넘실대고 있읍니다   아마 삼킬 것이지요     정대호. 1958년 경북 청송 출생. 경북대 국문학과 졸업. "분단시대"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그는 일개인의 갈구와 열망이 부분적인 것에서 전체적인 것으로 확산, 보편적 차원에서의 자유와 사랑에 대한 소망으로 승화되고 있는 시세계를 갖고 있다. 1983년에 시집으로 "다시 봄을 위하여"를 출간한 바 있다.        레미에게 *   ( * 레미:레바논 평화를 호소하는 다섯살의 여가수)   너는 레바논의 철부지 다섯살   기독교가 무엇인지 회교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인종이 종교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죽어가는 네 아저씨 오빠들을 보면서   이제 그만 총을 쏘세요 우리가 장미를 심을 테야요 *   ( * 조선일보 84년 7월 29일)   장미가 그립긴 하여도 총알이 왜 먼전지 모르는 레미에게   평화가 좋긴 하여도 총알이 왜 먼전지 모르는 레미에게   레바논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총알을 말할 수 있겠지   이제는 자라서 어른이 되어 다시 총을 잡은 레미와   아직 더 어려서 총알이 무언지 모르는 레미들도   살 부비는 종교도 이념도 벌거벗은 생활을   그렸고 그릴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총을 잡았고 잡을 것이라 생각하며   레바논의 많은 레미들은 평화를 노래할 것이다   노래하고 총을 잡으면서도 행복한 레미야   너는 이념이나 사상을 말하지 않는구나   머리 뒤에 더 큰 주먹이 보여도   네가 그런 평화를 노래할 수 있는 레미야   너도 자라 민족이 무언지 땅이 무언지 알면서   다시 총을 잡을 레미야   평화가 좋긴 하여도 아저씨 오빠가 쏘는 총알을   미워하지 말아라 레미야   네가 선 땅이 부끄럽지 않고 자랑스러움은   총알에 피가 묻은 네 땅에 서 있기 때문이지   조국에서도 이방인이 된 팔레스타인 이웃을 보면서   민주는 유태인의 말이 아니라는 이웃을 보면서   그래도 네 땅에서 평화를 말할 수 있는 레미야   네 아저씨 오빠가 종교도 이념도 벌거벗고   잡은 총 쥐고 머리 위 주먹을 쏠 수 있을 때   응원가라도 불렀으면 좋겠지 레미야   네가 부르는 평화의 노래로 네 아저씨의 총알이   자랑스럽지 레미야   하지만 지금은 누가 누굴 쏘느냐   총알 잡고 울어라 레미야 네 눈물이 막을 수 있다면   더 깊은 노래를 불러라 네 노래가 사랑의 총알이 될 수 있다면        미국으로 입양가는           아이들에게   좋아하지 말아라 이 땅을 떠나면서   누가 길러줄지 모르며   반도를 떠나는 아이들아   굶주림을 위하여 삶을 위하여   이 땅을 떠나는 너희들   신문은 쉽게 적응하고 온순하다고   너희들을 자랑하며 말하지만   그건 결코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움이다   감사할 때 감사해야지 내 땅에서 쫓겨나   남의 밥을 먹는다고 기마저 죽어서야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움이다   떳떳하게 말하지 못하는 너희들   이 땅에서 먹여주지 못하고 보내는 우리들   부끄러움과 죄 지은 마음으로   무어라 말할 수도 없지만   코 높은 백인들 양육보증 요구할 때   말 한마디 못하고 떠맡기는 우리들   늘 죄스럽고 미안하지만   너희들의 뜨거운 피 속에   우리들의 얼음같은 염치가 숨어 있음을   우리들의 부끄러운 피 흐르고 있음을   아시아의 동쪽 작은 반도 너희들이 태어난 강물임을   머리 속에 남겨서 기 죽어서야   떳떳하게 살아라 이 땅을 떠나서도   밥그릇을 위해서 양육을 위해서 떠나가는 너희들   떠나서도 이 땅의 강물을 잊지 말았으면   먹여주지 못하고 내 땅에서 보내는 우리들   염치같은 부탁이지만   좋아하지 말아라 내 땅을 떠나면서   울지는 말아라 살아가는 쓰라림 속에서   그 땅의 강물도 너희 몸속 흐르며   때로는 거부를 일으키지만   흐르고 흐르면 흑, 백의 명암 속에서   그 물도 너희 살이 될 수 있음을   살아가면서 너희들의 눈과 귀도 염색하여 줄 수 있음을   너희들도 깨닫게 되지만   너희들이 울면 내 땅에서 보내는 사람들이야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으로 얼굴을 들 수 없단다   울지는 말아라 내 땅에 쫓겨난대서   기뻐하지 말아라 내 땅에서 쫓겨나면서     정동주. 1949년 경남 진양 출생. 1983년 시집 "농투산이의 노래"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제8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바 있다. 산업화의 혼란 속에서 잃어버린 인간성을 찾기 위해, 찾아낸 인간성의 승화를 위해 과거의 역사와 현실 상황 속을 넘나들며 문제의 근원을 찾고 있는 그는 시집으로 "순례자"와 "논개"가 있다.        이삭줍기   앞서거니 뒷서거니 풀잎에 가을 듣는 날   바인더가 흘려버린 벼이삭을 줍는다   기계를 믿은 어리석음의 흔적을 줍는다   맨손으로 먹이를 집어먹던 날부터   숟가락 혹은 젓가락으로 식사를 하는   오늘까지의 거리는 손바닥과 손등의   그저 거기서 거기까지일 뿐   원시채집경제는 아직도 흙에 살아 있고   벼이삭 줍는 뜻은 목숨의 노래   이삭 하나에서 한 계절이 열린다   이슬이 발목 적시고   달콤한 바람 불던 날 아침의   들길에서 만난 김씨와 나누는 인사는   원시보다 낮은 곳에서   문명보다 높은 곳으로 소리없이   와닿는 곡식들의 키를 짐작하는   들새들 눈매만큼이나 아름다운 것인데   이삭 하나에서 한 시대가 보인다   오지그릇 장수였다던 고조할아버지   짚세기 자욱마다 괴어 있는   사람 아래 사람들 목이 진 눈물이   떨리며 숨어 삭아 어룽진 거,   참봉댁 머슴이었던 증조할아버지   거덜난 삶의 팍팍한 황톳길   낮도 밤 같은 한평생 주름살이   무잠뱅이 기운 자욱으로 드러나는 거,   일제 때 징용 가서 객사한   빈혈 묻은 할아버지의 조국 하늘과   6^256^25 때 탄알 지고 가다 행방불명된   울 아버지 검정고무신에 흥건하게   괴어 있을 피냄새에 엉겨붙는 파리떼   파리떼처럼 그날 그날의 높이를   날아보다 사라지는 하루살이 같은 거,   월남땅 정글에서 전사한 큰형의 그   비폭력 논리가 방위세로 부정되는 것과   중동땅 어느 모래펄에서   산소용접기를 손에 쥔 채 죽었다는   작은형 적금통장에 쓸쓸하게 남아 있는   빈 공간 같은 거   이삭 하나에서 이상기류가 흐른다   들바람이 농약 냄새에 시들고   열어놓고 살던 사립문 뜯어낸 그 자리   철문 달아 굳게 닫은 채 이웃 사람들   빚더미 위에서 의료보험카드를   그리워한다   씨 뿌리는 사람들 단속하는 문서들과   말 잘 듣는 사람들 다스리는 구호들이   피임약을 팔고 냉장고를 팔며   곡식값을 주무르고 대학은 자꾸   인가되는데 자꾸 높아지는데   거친 손바닥에 앙금진 노동은   목타는 침묵일 뿐 술이 취하면   논값과 서울의 아파트값을 자꾸   견주어보며 깊어지는 막소주의 유혹   그래도 그냥은 죽을 수 없는 까닭이 있어   지난 여름 병든 들녘 바라보며 흘리던   땀의 이름을 씹으며 씹으며,   입 없는 농투산이 처진 어깨로 지고   가는 국제적인 무게의 채무를 생각하며,   아이들 키보다 빨리 자라는   이자의 속도를 생각하며,   컬러로 꾸며진 정책에 가리워져   아직도 흙 속에서 영양분을 빨다가   흙 속에 묻히는 20세기 문명을 생각하며,   기계의 시꺼먼 이빨자욱마다   짓무른 생존의 살냄새가   가마니로 포장되어 팔려가는 이 시대,   이 시대의 구석지고 메마른 땅에서   오늘도 허리 굽혀 이삭을 줍는다        전설   바람 난 처녀 총각   단오 무렵 보리밭에서 껴안고 뒹군다   지나던 밭 임자 먼산 보며 하는 말   풍년이로다 어허, 만사 풍년이로다     정두리. 1947년 경남 마산 출생. "한국문학"지에 시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새싹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그는 개인적인 경험을 인식의 단위로 단순화시키고 재구성함으로써 스스로를 재발견하고 진정한 자아를 확보한다. 시집으로 "유리안나의 성장" "겨울 일기" "낯선 곳에서 다시 하는 약속"과 동시화집 "꽃다발"이 있다.        데레사씨 꽃가게   마르면서 붉어지는 분홍 장미는   물구나무로 매달린 채   벌써 한 달째다   한 웅큼 잽싸게 따라와 뿌려진 바람과   알맞게 고루 배인 햇살로 피어난 꽃도   여기서는 가끔 기가 죽는다   시들어빠진 마른 꽃이 팔려나가는 곳도   이곳이다   반쯤 피다 만 나리꽃   하루에 두세 번 피고 지는 알라딘 꽃   꽃들은 절대로 소리내며 웃지 않는다   근시인 데레사씨   꽃말 따위로 부질없는 야담을 만들지 말라고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요즘은   제 냄새 풍기며 사는 법을 배우노라고   피는 꽃은 다르지만   지는 꽃은 닮았더라고   꽃들이 못 알아듣게시리   가만가만 이야기하곤 하였다        우리들의 이름자   뉴욕 라구아디아 공항에서 만난   내 언니는 눈화장이 흐미하도록 울었다   무엇인가 우리는 서로 달라진 것을 살피고   확인한 지난 밤   엇갈리는 밤과 낮을 탓하며   해가 중천에 이르도록   빨간 집 이층에서 잘수록 모자라는 잠에 항복이다   길 건너편 집   제약회사 그만 두고 이민 온 부부와   과일주를 마시며 이야기한다   그 남자는 무교동의 저녁을 추억하고   그의 아내는 그런 일쯤이야 일축하고 웃는다   못 견딜 미움도 없어져 버리는   뜨내기 기분이   더러 다행일 수 있겠다 싶은 식탁엔   석필로 썼다 지웠던 우리들의 이름자   이적지 잊고 있던 어릴 때의   아명까지 버젓이 나타나고   되물릴 수 없는 하얗고 동그란 얼굴의   계집아이 하나가   목소리가 달라져서 턱을 괴며 앉았고   쥐포 굽는 냄새 질펀한 사투리   우리의 몸은   허드슨 강을 질러   막을 길 없이 밀려가고 있었다     정명자. 1958년 전남 목포 출생. 노동현장에서의 생생한 체험을 형상화시키고 있는 그의 시는 저항의 순간마다 겪고 치뤄야하는 의식의 극한 상황 속에서도 포기할 구 없는 고통스런 인간 선언의 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시집으로 "동지여 가슴 맞대고"가 있다.        잊지 못할     1978년 2월 21일   떼때로 지난 일들이 지금 진행되는 일처럼   생생하게 역력히 되살아난다   1978년 2월 21일 대의원 선거날   선거 한번 민주적으로 해보자 기대에 부풀었던 날 새벽   낯익은 동료들   술냄새를 풍기던 보전반 박씨의   촛점 없이 하얗게 변색된 얼굴을 뒤따라   대의원 선거장은 똥물로 아수라장   "똥 먹고 싶지 않으면 싹 나가!"   부라리며 고함지르며 덤비던 광란의 눈동자   "아저씨 진정해요 이럴 때가 아니에요!"   뜨거운 눈물 애절한 호소   "비켜! 니년들이 뭐 잘났다고...   시키는 대로 일하지 않고 까부는 년들에게는 똥물이 약이야"   폭력 남발   악성범죄의 현장   작업은 거부되고 범죄자들은   자율을 부르짖던 모두를 몰아내기 위한 시도 단행   지부장의 자격을 박탈하고   동일방직 민주노조는 사고지부로 낙인찍고   민주노동조합을 때려잡는   조직행동대라 칭하는 200여 명의 깡패를 현장으로 난입시키고   아 -- 자율은 똥물 진창 속에 묻혔고   노동조합법은 권모술수의 앞잡이로 둔갑   견딜 수 없는 치욕의 날들   살아 숨만 쉬는 허깨비 아닌 우리 모두   우리의 정당성을 밝히기로 하고 단식으로 항의농성   똥물 먹고 살 수 없다   우리가 빨갱인가   자율적인 노동조합 보장하라   대의원 선거 치르게 하라   백날 같은 하루 백날 같은 한 시간   정신 잃고 들것에 실려나가고   가족들의 아우성은 더욱 커지고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의 동맹단식이 이어지기를 13일   사태는 급속도로 위급해지고   현장으로 복귀만 하면 모든 문제는 백지화시킨다   정부의 고급관리와 종교계 인사들께서 합의   대의원 선거도 무사히 치르게 한다   아 -- 가슴 터지는 승전가   얼싸안고 얼싸안고 웃고 울고 나딩굴고   솜먼지 자욱한 일터로 가자   선진조국 잉태하는 기계 앞으로 가자   그런데 맑은 하늘에 개벼락?   무단결근으로 사칙 위반한 죄   소요를 유발시켜 회사의 위신을 추락시킨 죄   생상량을 50P 감소시키고 불량품의 급증으로 막대한 손해를   유발시킨 죄로 124명 해고   또 범죄 유발 악성범죄 재유발   "우린 어떻게 살아요?"   "입 닥쳐"   입술은 곤봉에 짓이겨지고   "같이 살아 봅시다"   허우적거리는 손과 발은 쇠사슬에 조이고   범죄자들은 버젓이 어깨에 힘주어 행세하기를   선량한 노동자들은 전과자   피보다 진한 우리 모두의 눈물   피보다 진한 우리 모두의 한   아-- 식모살이 버스 안내양 봉제공장 시다   들통나면 가차없이 해고 해고...   차라리 웃음 팔고 몸을 파는 창녀짓을 해서라도   목구녕에 풀칠해야 살지   질서 정연한 공단거리   찢어진 무심한 모집공고 앞에서 피를 토하는 듯한 애절한 한숨   그러나   이대로는 죽을 수 없어   죽는다면 이 세상을 떠도는 원귀라도 되어   진실을 위반한 범죄자들 가슴과 머리를 도려내고   전과자 된 양심과   핏빛보다 진한 눈물로 목욕시켜   사랑 앞에 무릎 꿇고 과오를 번성시키는   이런 각오로 살아야 한다   때때로 이런 생각만 하면 나는   가슴이 뜨거워지고   정신이 맑아지고   아-- 살아야 한다   진실과 정의의 기치를 들고 끝까지 살아야 한다     정상현. 1961년 경남 함안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고 1985년 "문예중앙"지를 통해 문단에 데뷔했다. '시의 뿌리는 생활 그 자체'라는 시관을 갖고 있는 그는 더 크고 내밀한 생활의 나이테를 보여줄 수 있는 시를 쓰고자 노력하는 시인. 현재 서울 중앙중학교 교사로 근무중이다.        운동장을 바러보며   추억에 젖은 사람처럼 봄볕에 몸을 말리며   결국 못 쓰고 말 편지를 펼쳐놓고 운동장을 바라본다   빨간 베레모 학생들의 기합소리를 끌어 올리며   비둘기떼는 도서관 지붕위로 날아 오른다   봄볕을 마중하러 나오는 피아노 소리와   늘 뒤로 물러앉아 푸르기만 한 하늘과   모두와 모두가 실성한 것처럼 어우러진다   아직 포플러 앙상한 운동장 구석에는   초록빛 아이들이 농구공을 쏘아올리고   멀리 남산탑에서 운동장을 내려보는 시선들이 보일 것 같다   돌아서면 작은 가슴 하나 되지 못하는   나날들의 주장을 새삼 동여매면서   오수에 잔긴 한 여자의 무릎에   눕고 싶은 마음이 부끄러워진다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 아득해지는 이맘때쯤   그리운 마음들에게   그동안 죄송했읍니다 라고 고개 숙이면서        동두천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중등 2급 정교사가 되어   신탄리행 기차에 올랐다 김명인을 읽으며   도착한 동두천은 꽃샘 추위에 막막히 잠겨 있고   교문 앞을 행진하는 흑인 병사의 탱크 행렬에   핫도그를 먹는 꼬마들이 거수 경례하고 있었다   정 선생, 여기는 어려운 도시니까 열심히 해 보도록!   첫수업부터 나는 너희들의 기를 잡겠다며 설치고   한문 숙제 때문에 발바닥을 맞은 너희들   마침내 교실문을 박차고 나갔지만   나는 체벌 이유를 합리화, 끝까지 정당화했다   이유없는 선생의 위신과 분필가루 같은 사랑을 앞세워   부기와 타자 급수로 여상 3학년을 점수 매기고   5분 늦은 지각생을 벌 주면서   그러나 나는 무엇에 대해 선생이 될 수 있을까   퇴근길 동두천 별빛이 부끄러워   생연동 숲 속을 고개 숙여 걸을 때   흐느끼는 눈망울이 가슴에 별처럼 찍혀 왔고   숲 끝난 논둑에서 봄벌레 자지러지는 소리 들으며   작고 연약한 것에 나는 왜 이렇게 강하고 난폭해지는지   가듭 자문했지만 대답하지 못한 채   교단 위의 인격과 카아네이션이 오래 오래 미안했다     정인섭. 1955년 전북 남원 출생. 전북대 국문과를 졸업한 그는 시집 "나를 깨우는 우리들 사랑"으로 문단에 데뷔, 주목을 받았다. "남민시"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한말 이후 우리 민족에게 다가온 참담한 비극들에 대해 뜨거운 분노와 애정이 담긴 목소리로 시화하고 있으며 선비적 음성과 남성적 한으로 충만된 시세계를 갖고 있는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현재 전주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이 땅에 모여 3   겨울이 오고 논이 비었다   이 한 해 흙을 파다가   다친 손이며 뒷목 살기낀 나락씨들 단단히   논바닥에 묻혀 가고   검불 줍던 눈들 어디론지 가서는   검불 가리며 침침한 불을 밝히고^256^   우리에게 남은 일은 오래 잠 깨어   새떼를 부르거나 우물을 파며   온 나라 들을 모으는 일뿐   얼며 흐르며 두껍게 근심 쌓는 일뿐   지금 쑤시는 허리와 그슬린 얼굴들 모아   서로 덮는 일뿐   담양 곡성 장성 화순   새들은 하늘에 멈추어 울고   물은 남북으로 다시 갈라져   오늘은 탈곡기 밑에서 마른 손가락이 나오고^256^   논바닥에 넘치며 길들을 끊으며   겨울비가 내린다, 모두   조선 들에 모여 흘러내린다      오늘 저녁 우리나라의         절망 우물들이   서로 눈뜨고 있네   오늘 저녁 우리나라의 절망 우물들이   밤바람을 견디며 새 절망 부르고 있네   어디에 곤한 고향땅 두고 와 있네   저 들에 하룻길   흙을 파다 돌아가네   이 사람아, 지금은 마른 풀에   내 적신 우물 가득하네   길어 올려 네게 마시우는 이 단 물   우리 드러난 몸의 뼈 부끄러워 단단하고   물 없이 가는 내일 해 아래   이 쓰디쓴 발바닥에 두리니   포근하다 썩어가는 풀무덤가여   뉘어 보아라   오래 내리지 않는 하늘에 내비치는 우물들   여기서 닿는 저 산 어둠   부르며 져 나르면 날이 새는가,   동트기 전에 절망 우물들   함께 우리 땅 밑으로 손잡고 있네   이 사람아, 부르고 있네     정일근. 1958년 경남 양산 출생. 경남대 사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84년 "실천문학"지와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그는 역사와 현실에 대한 깊은 인식과 날카로운 비판 의식을, 뛰어난 서정성으로 노래함으로써 진실한 감동을 주는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마산의 시학" 동인이며 현재 진해 남중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제1신   아직은 미명이다. 강진의 하늘 강진의 벌판 새벽이 당도하길 기다리며 죽로차를 달이는 치운 계절, 학연아 남해바다를 건너 우두봉을 넘어오다 우우 소울음으로 뫃아치는 하늬바람에 문풍지에 숨겨둔 내 귀 하나 부질없이 부질없이 서울의 기별이 그립고, 흑산도로 끌려가신 약전형님의 안부가 그립다. 저희들끼리 풀리며 쓸리어가는 얼음장 밑 찬 물소리에도 열 손톱들이 젖어 흐느끼고 깊은 어둠의 끝을 헤치다 손톱마저 다 닳아 스러지는 적소의 밤이여, 강진의 밤은 너무 깊고 어둡구나. 목포, 해남, 광주 더 멀리나간 마음들이 지친 봉두남발을 끌고와 이 악문 찬 물소리와 함께 흘러가고 아득하여라, 정말 아득하여라. 처음도 끝도 찾을 수 없는 미명의 저편은 나의 눈물인가 무덤인가 등잔불 밝혀도 등뼈 자옥히 깎고 가는 바람소리 머리 풀어 온  강진 벌판이 우는 것 같구나.     제2신   이 깊고 긴 겨울밤들을 예감했을까 봄날 텃밭에다 무우를 심었다. 여름 한철 노오란 무우꽃이 피어 가끔 벌, 나비들이 찾아와 동무해 주더니 이제 그 중 큰 놈 몇 개를 뽑아 너와지붕 추녀 끝으로 고드름이 열리는 새벽까지 밤을 재워 무우채를 썰면, 절망을 썰면, 보은산 컹컹 울부짖는 승냥이 울음소리가 두렵지 않고 유배보다 더 독한 어둠이 두렵지 않구나. 어쩌다 폭설이 지는 밤이면 등잔불을 이루어 시경강의보를 엮는다. 학연아 나이가 들수록 그리움이며 한이라는 것도 속절이 없어 첫해에는 산이라도 날려보낼  것 같은 그리움이, 강물이라도 싹둑싹둑 베어버릴 것 같은 한이 폭설에 갇혀 서울로 가는 길이란 길은 모두 하얗게 지워지는 밤, 사선제에 앉아 시 몇 줄을 읽으면 세상의 법도 왕가의 법도 흘러가는 법, 힘줄 고운 한들이 삭아서 흘러가고 그리움도 남해바다로 흘러가 섬을 만드누나.        시월의 기도문   시월에는 무신이게 하소서   천고마비보다 시고시인비이게 하소서   서정성으로 둔갑하는 누이의 가을 사랑 속에서도   번번이 결별의 비수는 빛나고   안경을 벗은 안맹의 여린 내 시선으로도   반도를 움켜쥐는 바람의 손길이며   한반도의 툭툭 불거진 슬픔의 힘살들이 환히 보입니다   하여 시월 속으로 떠나간 사람들의 길을 따라   이제는 당당하게 걸어가게 하소서   시월에는 유신이게 하지 마소서   가을이 주는 넉넉한 풍요로움으로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즐거이 일하고 놀이합니다   하누님 당신은 늘 그대로 하늘에서 쉬시고   시월에는 무신이게 하소서   그리하여 시월의 공산 같은 달밤이 오면   아이들, 낙엽, 대통령, 바보, 눈물, 풀꽃 모두 모여   고운 시를 읽게 하소서   높은 더욱 낭낭히 높은 목소리로 시를 읽게 하소서     정재희. 1944년 서울 출생. 경기대 졸업. 1983년 "월간문학"지로 데뷔하였으며 "미래시"의 동인이다. 본향에의 추구, 향수, 그리움을 주지적으로 드러낸다는 평을 듣고 있다.        유년시절   지울 수 없는 유년의 기억을 들고   아직도 나는 서 있다   시절을 잃어버린 텅 빈 앨범 속에 버려두었던 나를   때 묻은 날들이 가끔은 고개들어 새삼 부르고   사라진 그때의 사람들만 빼앗긴 계절을 돌아 온다   아는 자만이 아는 그늘진 모퉁이를   수없이 돌며 안으로 삼킨 우리들의 아픔을   헹구던 시간만 가고   아무래도 남은 것은 남는   지울 수 없는 유년의 기억을 들고   아직도 나는 살아간다   까마득히 멀어져간 날을 말없이 돌아와   때 없는 비바람을 다스려 앉으면   꿈결처럼 그날들은 가고   또 헤쳐가야 할 이 시대의   아득한 강 줄기를 타고   소리 없이 지나는 이야기가 있다        봉원사 가는 길   강이 바라다보이는   양지 바른 언덕   그곳에 영원의 집을 짓고   오늘도 무심한 날을 기다림으로   버티어 선,   비문 한 줄   흔적의 흙 한줌 세우지 못한   그대의 영혼   새들이 번나들고   계절이 때마다 오가지만   발길 멈춘 외로움에   활활 사르지 못한 짧은 생애   아픔마저도 가져가 버린   망각의 먼 추억이 불을 켜면   아슴한 기억으로 달려와   못 견디게 하는 그대의 모습   안아 일으키는 불꽃   꺼질줄 모르는 어제들이   흔들리며 떠가는 아쉬운 손짓으로 여기   헐벗은 남루를 가슴 여미게 할 뿐   봉원사 가는 길은 멀고 멀어서   지척에 이 발길 그리 더디고   못내 잊혀진 그림자 밟고 오르는   매정한 세월만 쏜살같이 멀어 간다     조남야. 1947년 충북 청주 출생. 1983년 "월간문학"지를 통해 등단하였다. 현재 청주 신흥고등학교에 재직하고 있으며 "뒷목"의 동인이기도 한 그의 시는 문명비판적이거나 현실비판적인 내용을 평이한 시어로 표현, 독자적 시세계를 구축해가고 있다.        그믐밤   무서리 지는   그믐밤   오동 울리는   바람 소리에   하얀 무명에 싸인   달 그림자   울섶을 지나   빈 마을 돌면   수수꽃같은 만초   달 가리고   문풍지 스산한   소리마다   홀로 사위는 수절곡 한 곡   달빛 속으로 간다        보리 밟기   나는 보리 밟기가 아주 좋아서   외숙네서 닷새를 지내는 동안   내처 보리 밟기만 하였어요   투명한 햇살을 등에 지고   잔설의 흔적이 쬐금씩 남아 있는   가파른 산등의 몇십평쯤은   아주 재미난 일이었지요   첫돌 지난 놈의 잠지처럼   봉곳이 솟아오른 푸른 청보리   초장이 웃자라면 안된다고   엽수를 잘 가려야 한다고 해   짧은 섣달 한 나절을   사방 팔방으로 돌아다니며   삐쭘이 쳐들은 초움들을   싹수부터 암팡지게 밟았지요   외숙은 여러 번 말했어요   보리는 그렇게 밟으면 밟을수록   보숭보숭한 속살이 오르고   동토를 헤집고 솟아오르는   강한 힘력이 길러진다고   그러니 폭설이 언땅을 내리치고   만상이 길게 동면을 해도   보리만은 쑥쑥 솟아올라   이 땅의 산천을 누비고 누비며   그 푸르른 힘력을 자랑하지요   나는 그것이 참 신기하여   외숙네서 닷새를 지내는 동안   내처 보리 밟기만 하였어요   조석구. 1941년 경기도 화성 출생.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했고 "시문학"지를 통해 문단에 데뷔했다. 현대 물질문명에 대한 비판으로 인간상실을 회복하려는 그의 시들은 소시민의 비애와 고독을 노래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시집으로 "땅이여 바다여 하늘이여" "허리 부러진 흙의 이야기"가 있으며 현재 평택 한광고등학교 교사로 있다.        리어카와 생선   어느 날 시장에서   문득 들려오는   유년의 고향 소리   더 이상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닻을 내리고 모여 사는 곳   리어카에 얼굴 붉힌 사과들이   시펄시펄 멍들은 알몸을 비벼대며   외침질을 하고 있다   튼튼한 어둠   눈을 부릅뜬 생선들이   좌판에 일렬 횡대로 서서   최근의 바다 소식을 모른 채   열병식에 참가하고 있다   헹가래로 일고 있는 파도   빛은 이단의 뜨락에서   썩은 냄새를 풍기며   따갑게 흩어진다   군중은 허위였다   오호, 화려한 모순        시인과 농부   비인칭 주어로   살고 있는 그리움   불규칙 동사로 저무는 하루   그대 슬픔이 누워 있는 언덕에   잡초로 꺾인 서러운 꿈이   들꽃으로 서 있다   향기도 없이 쓸쓸하게   바람에 기대어   들빛을 꺾어   들바람을 꺾어주던 그대의 손엔   물꼬를 보고 오는   저문 삽이 들려 있구나   아, 나는 들꽃을 안고 울었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 울었다   누군가 가지고 놀다버린   이 시대의 상황이 노을에 젖고   가난이 강물로 흐르는   황토흙 길 끝 그대 집에   해바라기 노오랗게 피고   은빛 램프 켜지는 날   나는 다시 한번 울고 싶다     조석현.1953년 경북 출생. "시문학"지를 통해 등단한 그는 서정성을 바탕으로 한 절제되고 간결한 시어를 선택, 낭만적인 경향의 작품세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 현재 근로복지공사 산업재활원에 근무하고 있다.        천목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쩌면 천둥   갈라지고 있었다   어쩌면 번개   도자기에   내 눈물을 찍어 바르고   먼 산울림   기왓골마다에   마른 비늘이   살아있는 붕어가   바람불면   때로는 천둥   때로는 번개   곰 나루   얼음 밑에서도        6병동   꽃잎없이 피는 꽃   꽃 속에서 울어요   어릴적   어둠 속에서 별을 본 듯이   과거는 꿈 같은 기억 속에   꿈은 과거였던가   내 눈빛 녹슬어 가고   눈물처럼 무너지는 침묵   종이 울리면   이 아픔 건너   흩어질까나   수면제 한 알만큼   바람 속으로     조원규. 1963년 서울 출생. 서강대 독문과를 졸업했고 동대학원 독문과에 재학중이다. 1985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문단에 데뷔한 그는 시적감응과 발화의 주체 및 수용자의 단위를 개인으로 하여 초보적 시작법을 엄수하는 시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밤의 노래 1   오늘 지는 해가   저토록   빛나는 것을   어느 누가 기억하랴   질병의 흙에 뒤엉키며   터뜨려지며   결코 인간의 역사를 장식치 않는   늦장미와 여윈 바람을   훗날   어느 또 한 눈 먼 인간이 있어   살려는 자와   살고 싶지 않은 자의   하루와   역사 이래의 서럽고도   서러운 인간들의 욕정을   막막한 오후   백열의 뇌세포 속에   못박아   새기기를 원할 것인지   나는 생각치 않으련다   무한히 살고 싶다   손끝까지 빛에 감싸이면   엎드린 도회의 어깨 너머로   다함없는 저 시간의   약속들 속에서        밤의 노래 2   밤은 존재하고   나도 존재한다   황량한 진리를   누구든 기억해다오   인간이 변하고   거듭 변치 않을 수 없음이란   서럽고도   아름다운 일이라고   나는 기억하련다   왜 죽고 싶었던가를   푸른 하늘 쏟아지던   어느 새벽 어느   도회의 일몰들을   파헤쳐진   모래와 같이   살기 시작했음을   밤이 존재한다 하여   나까지 존재하는 것은   도회의 쇠못과   망치를 노래하기 위함   온갖 쓸모없는 것들을   한 세계의 경계로   내팽개쳐진   쇠와 피의 아버지들을   저토록   차가운 세상에 누워   내 과거를 지키는 눈초리들을     조윤호. 1947년 경남 하동 출생. 1983년 "문예중앙"지를 통해 등단하였다. 순진무구한 동화적 세계에 시적 동기를 두고 있으며, 냉소적인 시선과 함께 감정 조절에 탁월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현재 석유회사에 근무하고 있다.        풀잎의 영혼   풀잎의 영혼은   풀잎의 머리 위에   돋아난다   풀잎의 영혼은   풀잎의 머리 위에   그러나 그리 높지 않게   돋아난다   풀잎이 바람에 흔들리면   풀잎의 영혼도   흔들리고   풀잎이 비를 맞으면   풀잎의 영혼도   비를 맞는다   풀잎이 푸르를 때   풀잎의 영혼은   더욱 푸르지만   풀잎이 시들어 질 때   풀잎의 영혼이   먼저 시들고   풀잎이 뽑히면   풀잎의 영혼도   뽑혀진다   다시 돋아날 풀잎을 위해        빈자여행   월수 이십만원 못되는 사람끼리   우주여행을 떠나자   철새는 남북으로 날고   잘 사는 사람들은 동서로 날고   날지 못한 사람끼리   우주여행을 떠나자   카운트다운은 필요 없다   유산균음료병 같은 우주선에   시내버스처럼 가득 타고   우주여행을 떠나자   둥둥 하늘로 치솟아   빙글빙글 돌면서   웃자웃자   하루종일 웃고웃다   저녁 때 슬그머니 내려오자   내려올 때 조심하자   이북땅에도 내리지 말고   미국땅에도 내리지 말고   변두리변두리 정류장에   잊지말고 내리자     차정미. 1958년 전남 보성 출생. "시인"3집(1985)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활발한 시작활동을 펴고 있는 그는 리얼리즘 경향의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현재 방송통신대학 학보사에 근무하고 있다.        여의도 83   겨울은 봄 속에서 싹을 틔워   겨울은 여름 속에서 가을 속에서 성숙되리   봄은 겨울 속에서 반죽되는 봄   하여   겨울 그 겨울 속에서 봄은   한덩어리의 풀빵으로 부푸리   베이킹 파우다여!   봄이 오거든 내친 걸음으로   재빨리 봄이 오거든   너의 공로를 어찌할거나   북에서 동으로 불던 바람   서에서 남으로 불던 바람   6, 25에 영락없이 죽은 줄만 알았던   뒷날의 무수한 비극처럼   까무라쳐 죽은 줄만 알았던   말숙이, 상돌이, 갑식이, 언년이   가슴팍에 박힌 점하나로   너를 찾았구나  영락없이 찾았구나   붐빠빠   꽹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풍악소리 높이 울려   30년 불던 미풍   오늘 돌풍으로 몰아치니   바람이여   너의 공로를 어쩔거나   어쩔거나        피아노를 치면서   나의 윤택한 일상을 위해서   일곱개의 옥타아브   피아노 건반을 두드릴 적마다   생각하지   피로 얼룩진 항거의 깃발   나부끼던   기미년 삼월 일일 점심무렵   터지던 만세의 함성들을   국사교과서 위인전에서나마   간간이   그때의 현장   그때의 울분   혹은 그때의 감격   전율로 느껴 알 수 있지만   부끄러워라   나의 윤택한 일상을 위해   일곱개의 옥타아브   피아노 건반을 두드릴 적마다   도레미파솔라시도   도시라솔파미레도   다시   도레미파솔라시도   도시라솔파미레도   종횡무진   쉰두개 피아노건반   몽땅 두들겨대도   기미년 삼월 일일 점심무렵   피맺힌 그날의 절규   그날의 함성소리를   그릴 수가 없구나   그릴 수가 없구나     채희문. 1938년 서울 출생. "월간문학" 신인상을 수상 등단하였다. 주로 인간의 고독과 죽음, 그리고 이 시대의 불안한 상황의식에서 비롯된 자아의 깊은 고뇌와 한을 현장감 있는 말이나 구도적인 소박한 언어로 표현하며 독자와의 교감에 유의, 공감의 확대를 도모하고 있다. "미래시"의 동인이며 현재 한국일보사 편집국에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 "꽃과 시" "세계 명작 영화 100년", 역서 "문 밖에서" "쉬쉬푸쉬" 등이 있다.        가을레슨   가을이 가기 전에 한번쯤은   떠나 볼줄도 알아야지   좀 돌아서 갈줄도 알아야지   좀 천천히 갈줄도 알아야지   점점 높아지는 하늘   점점 얕아지는 땅   그 사이에서 점점 흔들리며 작아지는   나   새삼 느껴 볼줄도 알아야지   떨어지는 잎, 다시 볼줄도 알아야지   싸늘한 바람에 손만 흔들고 서있는   나무들도, 다시 볼줄 알아야지   좀 멀리 볼줄도 알아야지   좀 가까이 볼줄도 알아야지   깊은 것도   얕은 것도   함께 볼줄 알아야지   가을이 가기 전에 가을비   아침 이슬같은 빗물로 만나   한번쯤 썰렁한 가슴   젖어 볼줄도 알아야지   가을이 가기 전에, 한번쯤은...,        자기 빨래하기   하루 종일 남의 겉살만 닿으며 살다   누구에게도 깊이 닿지 못하고   나에게도 깊이 이르지 못하고   늦은 저녁에 돌아와   나의 하루를 빨래한다   빈 시간의 한가운데 고인   맑은 고요의 물   내 모두를, 잔가지에서 밑뿌리까지   하나 하나 지우듯 담그고   확인하듯 만지며   버리듯 비비며   자꾸만 나를 물에 헹군다   나의 안을 뒤집어 짠다   하루의 구정물 줄어들 때까지   내 얼굴 맑은 물에 보일 때까지   그렇게 다시금 건져진 나의 안팎   잠의 줄에 걸고   꿈의 바람결에 널어   한밤내내 나를 말린다   그러나 끝내 마르는 것은   겉자락뿐인가   또다시 다음날 밤이면   어느새 나의 가슴은    여전히 그날의 줄에 걸린 채   밤 이슥토록 젖어 울고...     최건. 1940년 전남 순천 출생.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한때 기자로 몸을 담았었던 그는 1983년 "시문학"지의 추천을 받고 시단에 데뷔했다. 서로 다른 음색과 음계를 감동과 질서의 음악으로 조율하려는 시세계로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 심양사에 근무하면서 "백지"의 동인과 "시정신"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마을 까치   소식 나르며 살아 왔었지   기쁨을 울음으로 살아 왔었지   수백의 하루가 들고 나는 하구 느티나무나   수천의 생애를 기적으로 돋구는   철로변 키 큰 미류나무 높이   분교의 가지에 둥지를 틀고   아침 저녁 인가로 나들이하며   인정의 담장 안을 기웃거리는   혈연의 족속   새벽별 서둘러 제 몸 사르고   아침햇살 제일 먼저 너의 집 들어서자   눈 비비며 부스스 일어나   밤새 두근대던 소식   지붕 위에 내리어 목청 베푸니,   살이 옹ㅅ길을 나서는 꼭두새벽   가랑잎 대신   발 끝에 채이는 동전 한 닢 우울과   청소차가 쓸고 갈   간밤의 어수선한 휴지조각 딩구는   네모창 빌딩의 숲 찾아가   죽음을 곡예하며 세상사 거느릴지언정,   적막한 빈 산은 매어달린 조롱   그곳에서는   다정한 햇살조차 추워라   밤마다 꿈길도 머뭇거리겠네   애옥한 사람들 오늘도   고향 길에 오르질 못했다   깊은 숲 침묵의 골짜기는 죽음보다 싫어   온종일 하구 밖 사위에서 빙빙 돌다가,   해거름 전   남의 소식 부지런히 전해 주고   제 집 소식 남이 가져 오는   우체부와 고샅길 동행하며   남기고 돌아갈 저녁 소식 더듬으니,   흥겨운 방아찧듯 주둥이와 꼬리 흔들어   뽑는 목청이야 슬픔 많은 세상에서   모진 기다림이 변해 된 가락   기쁨의 가락   기쁨을 울음으로 살아 왔었지   소식 나르며 살아 왔었지   두고두고 세월을 함께 하는   동거의 무리, 마을의 새는   밤 새워 흐들히 달빛으로 갈고 닦은   소식 노래 부르며   오늘도 잊지 않고 부지런히   오지 않는 내일을 물어 나르네        청량리 역에서   쾌청쾌청일요일청량리역아침   하늘의신호등도파란불내걸었다   광장에는물고일어나는유행처럼   배낭배낭의물결술렁거리고   햇살쪼아대는비둘기의몇발치뒤에서는   여행자한사람   담배꽁초하나줍고있었다   아침을일으켜세우듯빨아들이려   꽁초하나줍고있었다   가시오어서가시오   낡은빌딩음습한그늘빠져나가   신개발지편입지구푸석푸석먼지이는   마을도떠나고프로야구프로축구도떠나   산그림자밟고밟으면서   멧새울음싱그러운청솔바람마시어   오장육부만말고   변비처럼꽉막힌오살놈의양심훤칠하게   번영된시대의고속도로처럼   통로도뚫고   익숙해진만성류머티즘쯤고칠수있게스리   아파트뼈대같이직각처럼딩구는우리들미움   어둠속음모의칼날까지   데불고가시오슬은녹닦으면서   홀홀가시오   해기웃어스름청량리역광장   풀어헤쳐놓고담아온것풀어젖힐것도없이   시들어가는유행처럼훌쭉해진   배낭배낭들이꾸역꾸역기어나와   지하철입구쪽으로빨려들어가고있었다   비둘기이미둥지로들고여행자의모습간데없이   역사안에는제몸체보다더큰   반도의슬픔같은것저혼자   오지않는막차를기다리고있었다   밤깊도록웅크리고앉아   기다려도기다려도막차는오질않았다     최동현. 1954년 전북 순창 출생. 전북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하였다. 한 산촌 풍경의 묘사를 통해 근대화의 그늘을 드러내고 있는 그의 작품은 적절한 감정이입으로 감동의 폭을 넓혀주고 있다. "남민시"의 동인으로 전주 동암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다.        어전리 3   냉해가 들고, 아이들이   무리지어 가출을 했다   학부형이 소환되고   닷새만에 죄인이 되어   붙들려 온 아이들을 벌 주면서   종아리를 치면서   다문 이를 악물었다   끝끝내 학교를 다닐 수 없다며   한 아이가 퇴학을 하였다   회초리를, 그 질긴 아픔을    휘두르며   겨울이 가고   학기가 바뀌면서 더러는 잊혀도 갔지만   수첩을 펴면 명렬표 끝에   아프게 남아 있는 이름, 성^256^ 순^256^ 애^256^   아직도 너는 우리 반이다        어전리 4        -- 미자에게   생활기록부를 정리하다가   색인표 위 지워진   네 이름을 보았다   너는 열 다섯   늘 찌끄래기 옷만 입어서   언니가 밉다고 했다   그 미운 언니를 따라 울먹이며   공장으로 가더니   한 달 뒤에는 퇴학이 되었고   나는 그 날   어느 교과서에도 없는 네 이야기를   생각하며   가슴이 마구 뛰었다   책상이 치워지고   이름이 지워지고   그러나 그 누가 네가 남긴 기억마저를   지울 수 있으랴   밤마다 너는 내 불면으로 와서   생각의 마디마디를   아프게 했다   길은 보이지 않지만, 모두들   어디로든 가야만 하리라   그렇게 떠나서 너는 지금   어느 눈길을 가고 있느냐   어전리, 어두운 하늘 아래   열병처럼 너를 잊지 못하는   찬 눈이 내려   함부로 쌓이고 있다     최명자. 1957년 강원도 화천 출생. 가난한 자신의 삶과 이웃의 아픔을 잔잔한 음성으로 표현, 시화하고 있는 그는 1985년 안내원 생활을 하면서 엮은 책 "우리들 소원"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현재 가정주부로서 고향인 화천에 거주하고 있다.        쑥   쑥밭, 쑥밭이 되어 버리던 날에   고향을 떠나   슬픈 여행을 시작했다   무작정 길을 떠났다   쑥쑥 자라야 할 봄날에   한약방으로 쑥탕으로   온몸을 태우고 바스라지면서   태어남을 원망했다   난 왜 장미가 아니라 쑥이며   왜 목련이 아니라   흔코 천한 쑥이 되어   귀함보다 천함을   보살핌보다 뜯김을   더 많이 받아야 되는거냐며   서럽게 물었다   붉은 꽃잎 하나 피우지 못하고   스러져 죽어가면서   한스럽게 울었다   쑥밭에서 쑥이 조상인 내가   살아감에 순응하지 못하고   서러워할 때   넌 내게 대답했다   보리고개에 가난한 역사가   널 먹었고   단오날 새벽에 촌색시   널 찾아오리니   희망과 사랑 속에   항상 푸르러라!        천생연분   아버진 엄마보고   예펜네란다   우리 예펜네, 저 예펜네   저 주책없는 예펜네   절대로 마누라가 아니다   울 엄마 아버지보고   웬수란다   저 웬수 술주정뱅이   저놈의 웬수   단 한번도 당신이 아니다   웬수와 예펜네가 단칸방에서   새끼를 다섯이나 낳고   한평생을 같이 살았다   난 이제야 깨닫는다   웬수와 예펜네는   전생에 인연으로 맺어진   천생연분이란 것을!     최문수. 1957년 전북 정읍 출생. 198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여 등단하였다. 자유로운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그의 작품은 짜임새 있는 구성과 신선한 감각이 돋보인다는 평을 듣고 있다. 현재 "갈밭"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식   이제 나는   허리를 더 구부리며 살아야 한다고,   하루를 발갛게 물들인   서쪽의 황혼이 두 눈알을 찌를 땐   더 더욱 팔근육에 힘을 당겨야 할 꺼라고   셋이레 지난 내 씨알 연호가 운다   소젖먹고 자라는 녀석의 눈동자에서   이슬젖은 풀잎들의 발성을 들으며   나는 비로소 아늑해야 할 땅이 되었음을 안다   군용담요 위, 비취타올을 들판 삼아   한 웅큼씩 싸고 누워있는 녀석의   싱싱한 풀밭을 볼 때마다   나는   시가 한 그릇 일용할 양식이었으면 좋겠다고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다        출항기     1   새벽을 퍼올리는 밤안개를 헤치며   노를 저었다, 서서히   불안의 바다 한 쪽을 열어   빙하기를 딛고 선 나의 입지를 저었다   눈물의 풍어가를 부르며   잠의 흰 등뼈를 타고   수없이 별똥이 빠지던 동경의 나라에   아, 불시착을 위하여   전생애만큼이나 힘닿는 노를 저어   멀리 수평선에 보이던 유빙을 만났다   저으면 저을수록 겨울 속으로 한없이 자맥질하며   눈발을 녹이던 건강한 물떼들   빙산의 일각, 시계의 끄트머리는   빙산의 하얀 비늘을 벗기고   매운 눈물에 풀 한 포기 자라나지 않는   돌덩이처럼 무거운 어둠을 통째로 씹고 있던   섬을 보았다     2   접혀 돌아누운 기억과 꿈 쪽,   진실로 모든 것은 멈추어   태고로부터 찾아드는 굳은 잠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 유년으로 지칠 줄 모르게 흘러드는   성좌들의 장엄한 행렬을 맞으며   20세기의 서러운 작은 돛 하나 마지막 불길 지피어   한 줄의 시를 담고 침몰한 목선의 이야기와   바다에 잠긴 일몰의 전설이   바람으로 불어왔을 때,   손끝에 느껴오던 팽팽한 시위   나는 힘차게 닻을 던졌다  한 해의 맨 끝에 서서   내일을 위하여 중량 없이 낙하하던 별빛 속으로   그때 서서히 안개를 걷으며   어둠은 타올라 은백색으로 빛나는 거대한 산을   보았다, 마치 내 유년의 영산처럼   육중하게 떠오르던 바다의 뿌리   원시의 눈발 위를 달리던 예지의 날개를 꺾고   수 세기 전 빙하 속으로 곤두박질치던   시조 한마리   섬의 흰 등뼈를 쪼고 태초의 폭설 위를 훨훨 날자   잿빛 바다로 우수수 떨어지는 수천의 꽃다발    아, 키가 모자라 깨금발로 보았다   내 어린 한 살은 점점 붉어져 아침 바다로 황홀히 빛나는 것을...     3   돌아오는 길에   나는 원양을 안고 있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한 마리 싱싱한 정어리로   파닥거리며   이제사 아침을 몰고 오는 겨울 새떼들의   나직한 비상을 보았다   물보라를 일으키며   은빛으로 반짝이는 수평선   나는 뱃머리에   날짐승의 흰 날개를 달아 주었다   만선의 깃발에 미끄러지듯이   풍어의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마침내는 흰 눈을 따라   여명의 폭설로 쉴 새 없이 흩어 내리는 날개를, 날개를     최병준. 1939년 충남 천원 출생. 단국대대학원 국문과 졸업. "월간문학"지로 데뷔한 그의 작품은 생활 자체를 가슴으로 표현, 진솔한 감동을 준다는 평을 듣고 있다. 현재 강남사회복지대학에 재직하고 있다.        바람으로 멱감으며   눅눅한 이부자리에서   이상과 뭉기적이다가   산에   오르면   마음은 바다   깊숙이 침잠되고   억새, 솔내음을 만지며   알몸이 되면   헐렁헐렁해지는   긴장에   신명이 은밀하게   고여 온다   화장품 냄새에   불순하게 배설했던,   주택복권을 겸연쩍게 샀던,   모두의 기억들을   휴지통에 넣고   덕지덕지한 누더기를   벗고   구멍마다   가득한 고름을   바람으로   날리면   끈끈한 일상과는   유쾌한   이별이다   수렁에서 피어나는   한 송이   연꽃   모두 잊어먹고, 잃어먹고   아무것도 안 느끼고, 안 바라고   절대절명의   허심, 무화   아!   이 성스러운 작업   알몸인 채   바람으로 빗질하면서   무명에서   벗어나는 희열   없는 자유가   있는 모두보다   훨씬   개운하다는 것을...   어디서   이렇게   징이 울린다        연   바람맞이에서   영원한   바램으로,   정월 보름   서걱대는   벌판에서   연을 날린다   액막이 연   하늘 추스르는   처용아비   팔다리 휘감아   너훌너훌   서울 밝은 달 아래   이슥히 노닐다가   핑그르   돌아가는 얼레야,   안에 들어 자릴 보니   가랭이가 넷이고나   새촘하게 긴장하는   실의 감촉   둘은 내 것이었는데   둘은 뉘 것이냐   아아라히 먼   아리 아리 아리랑 아리랑아   본디 내 것이었지만   빼앗긴 걸 어쩌리   절씨구   닐리리야 니나노 얼씨구   비상하는 연,   점으로 이어지는   처용아비, 처용아비   텅빈 벌판에서   순리대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쥐불 이는 논두렁에서   표표롭게   연을 날린다   위대한   해체   최영. 1946년 전북 순창 출생. "시문학"과 제5회 "한국시학" 신인상을 수상하여 문단에 데뷔한 그는 현실에의 비판의식을 내포한 선명한 사물이미지와 체험을 바탕으로 한 풍자와 풍속 모더너티를 지향하는 시세계를 갖고 있다. '청록두' 동인이며 현재 군상시청에 근무하고 있다.        개구리   경장동   주택가는   개구리들의 터밭을   나누어 가졌다   무논에서만   살아야 할 그들이   도자에 깔려 죽고   농토마저 모두 빼앗겼다   살아 있는   목숨들은 흩어져   건폐율의 그늘에 숨어   정원수 이파리 이슬로 연명한다   정원수에 묻어나는   달빛의 그늘에 숨어 살다가   이슬비가 오는 밤이면   살아 있는 목숨들을 알아 낸다   울면서 확인을 한다   소낙비가 뿌리는 밤이면   독립만세를 외친다   죽은 목숨들도 함께 울어댄다        희화   김씨는   토지구획이 고시된 후로   지주가 되었다   이제는 김사장이란 말을   땡감처럼 씹지도 아니하고   발밑에 새어나는   논배미 물고 소리도 잊은 채   경장동 골목을 어슬렁거리다가   이발소에 들러   머리를 감고   머리카락 속의 농약 냄새를   열심히 드라이한다   가뭄처럼 타들어간 얼굴에   이슬비처럼 로숀을 뿌리고   무논에서 피를 뽑듯이   무성한 수염을 면도질한다   농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맛사지까지 하고   이발소를 빠져 나와   주막을 밟고선 관광호텔   그 스카이 라운지에 앉아   열심히 아주 열심히   목구멍에 양주맛을 길들이고 있다     최영철. 경남 창녕 출생. 1984년 무크지 "지평"에 '낮은 곳을 향하여' 외 다수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보는 사람과 보이는 것의 긴장 위에 세워져 있는 특이함과 해체와 복원, 무질서와 질서의 긴장을 시적 주제로 한 개성있는 작품을 쓰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나무   삭둑 잘라 불을 지르고   삭둑 잘라 다리를 놓고   삭둑 잘라 간판을 세우고   삭둑 잘라 이빨을 후빌 때   나무는 가만히 서 있다   그러므로 나는 나무를 심지 않는다 나무 이외의 뜬구름도   뜬구름만큼의 행복도 믿지 않는다 믿을 것이라곤   그래도 나무 뿐이다 싫으나 좋으나 제자리걸음의   뜬구름뿐이다 뜬구름처럼 가냘픈   행복뿐이다 그러나 나는 오래 전부터   나무따위는 그냥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인   흘러가거나 지겨울 뿐인 행복 따위는   믿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무엇인가 믿기 위해서는   나무라도 몇 그루 서있었으면 좋겠다 푸른 하늘에   뜬구름 둥실 떠있는 내일일지라도   그러나 나무들은 가만히 서 있지 않다   이제 나무들도 하품   일렬종대가 아니면 이열횡대로   이제 나무들도 바가지   근육통이 아니면 과민성대장으로   아니면 모두가 알다시피 만성빈혈이든가   이쯤에서 해산을 명령하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기강이 문제   설마 제까짓 것들이   돌을 던지거나 욕설을 퍼붓거나   성큼성큼 걸어와 내 목을 찍어누르지는 않겠지   더 이상 큰코 다치기 전에   그러나 나무들도 온몸이 가렵다        지금도 지금도   지금도 레미콘은 돌고 있다   그대들이 잠들어 있거나   명상에 젖어 온 밤을 지새울지라도   미묘한 음반처럼   레미콘은 돌고 있다   등돌린 그대들의 화합을 위하여   모래와 자갈은 아프게   물과 시멘트는 성질을 죽이고   레미콘은 돌고 있다   그대들이 까마득히 잊고 있을 때에도   길을 걷거나 걷지 않을 때에도   따뜻한 화합을 위하여   그대들 먼 발치에 우뚝 멈추어선   콘크리트는 위험하지   순하게 섞여 물에 물탄 듯   물에 물탄 듯 부서지지 않는   시멘트는 모래가 되고   모래는 자갈이 되어   지금도 레미콘은 돌고 있다   오랜 미아로 서성대는   그대들의 어깨너머   다시 만남을 위하여   알게 모르게   절망하지 않을 때에도     최준. 1963년 강원도 정선 출생. 1982년 "월간문학"지의 신인상을 수상, 등단하였다. '여름 환상' '겨울 일기도' 등의 작품에서 세련된 언어구사와 대상에 구애되지 않는 자유로운 시적 이미지의 발상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미래시'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장시 '봄부터 가을까지 피고진 꽃에 대한 기억'을 쓰고 있다.        가을장례   죽은 새를 땅에 묻고 돌아온다   새의 온기가 남아 있는 나의 손은 따스하다   마을 사람들은 읽던 역사를 덮고   덕장에서 마른 물고기를 마저 거두어 들이고   불 켜지 않은 주막에서 술을 마신다   가을이라고   한철 젊었던 바다와 고대의 여름을 넘나들던   그들은 내게 죽은 새를 이야기한다   나는 그들에게 새의 죽음을 상세히 말해 주었지만   새의 무덤에 함께 넣은 풀씨 얘기는 감춘다   가을 태양이 바다의 품으로 안겨들고   수평선을 건너온 목선들로   해안은 소란하다   발자국을 남기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떼지어 몰려 나오고   나는 돌아온다 문 잠긴 저녁 마을을 향하여   다친 햇살의 끝이 조심스럽게 기어가고 있다   이제는 정말 부활하지 않을 것인가   가을과 새의 죽음은   아이들의 말소리나 분명치 않은 손짓 속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이 없음이란 때로 가을산의 나뭇잎을   슬픔으로 물들인다 새가 사라진 지상에서   홀로 아픈 누이는 내게   마지막 눈물을 꺼내어 건네 준다   마을이 황혼에 젖어들기 전의 일이다   저물 무렵이라고밖엔 말할 수 없지만 임종한   새처럼 나는 문득 피리가 불고 싶어진다   아직도 하늘 어느 마을에선가   채 떠나지 못한 새의 울음소리가   저녁 황혼에 젖어 있을꺼라 생각하면서        섬 7   그 섬에 시계탑을 세우면서 사람들이   시계를 쳐다보고 바다에 나가는 시간을   앉아서 기다리고 무료한 기다림을 달래기 위하여   잠을 껴안는다 소나무 그늘을 찾아 그늘 속에 몸을 숨기고   잠든다 이제는 해시계가 필요 없으므로 사람들은   태양과 결별한다 날이면 날마다   굿당만 소란하고 섬의 이마에 얹힌 태양 녹슬고   바다에 이르는 언덕길만 길어지고 깊어져서   섬의 전신을 덮고 있는 그늘 살찌고   섬은 무거워진다 바다로 서서히 침몰해 간다   꿈속의 시계소리 속으로 사람들은 용해되고   거슬러 올라가는 태양의 길목에서 들숨 날숨   섬은 익사한다 시계탑과 더불어   태양이 마저 녹슬기 전에     최창렬. 1938년 충남 대전 출생. 중앙대 교육대학원 국어과 졸업. 1983년 "현대시학"지를 통해 등단한 그는 시란 진실이며 자아발견을 위한 고통이라는 기본명제를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다.        톱니바퀴   지하철 공사장에는   힘 좋은 기계들과   힘 좋은 사람들이 붙어   살고 있다   365일   밤낮도 없이 계절을 잊은 채   저들은   헛돌지 않는 톱니바퀴다   억척스런 기계는 수많은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돌아감으로써 무서운 힘이 솟아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들은   이 도시의 막힌 숨통을 뚫고 있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과 차들이   지금 그 옆과 위를 굴러가고 있다   거리에는   온통 톱니바퀴들이다   그런데 나는   몇 시간을 어디로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   지금 이렇게   강물은 늘 땅과 입맞춤을 하고   물고기들에게 사랑을 주고   말없이 흘러가는데   나는 나의 톱니바퀴에서 빠져나와   녹슨 톱니바퀴   헛돌고 있는 톱니바퀴   몇 십 년을 녹을 안고   또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벽시계   우리집 개들이   몰아 온   햇살 가득한 아침   주섬주섬 햇살을 걸치고   마당으로 나갔다   뽀삐의 재롱   늘 그렇듯   꼬리를 치며 몸을 뒤틀며 뛰어 오르며 마당 한 바퀴 도는 인사   개밥그릇 옆   두 마리의 쥐가 죽어 있었다   밤새   우리집 개들은   두 마리의 쥐를 놓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쥐 두 마리를 쓰레기통에 넣으면서 이들이 부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내 청소부가 들어 오더니 쓰레기통을 들고 나갔고 연탄재도 들려 나갔다   방으로 들어 오다가 무심히   벽시계를 보았다     최휘웅. 1944년 충남 예산 출생. 동아대 국문과 졸업. 1982년 "현대시학"지의 추천으로 등단한 그는 무한한 이미지의 자동기술적 변환을 통해 내면에 존재하는 꿈을 현시하며 새로운 언어미학을 추구하고 있다. '시와 의식'의 동인이면서 현재 부산 대동고등학교에 재직하고 있다.        어느날   새들이 날아와 빗장에 잠긴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느닷없이 무지개가 되어 날아갔다. 산과 들은 온통 바람이었다. 음악이었다. 넝마조각 위에 앉은 나는 나비였다. 백사장이 길게 누워 웃고 있었다. 아, 거기에는 황홀한 것들이 모여서 공깃돌을 던지고 있었다. 수평 저 끝 돌섬을 만지고 있었다. 솔밭에서도 여름은 부채를 흔들고 있었다. 만나는 것들마다 하늘의 안부를 물었다. 그럴 때마다 손끝에 닿는 별들이 호주머니 가득히 쌓였다.        환상도시 9   관객들은 커튼 밖으로 밀려났다   바깥에서는 바다가   깨진 올갠 곁으로 밀려오고   아이는 두 팔을 든다   침묵 속으로   사라지는 흉내를 낸다   저 멀리 눈송이 속으로   사라지는 흉내를 낸다   그때 쾌종시계가   은행잎으로 날은다   사라지는 스포트 라이트 뒤곁에서   무희의 발톱만 뒹굴고 있다     하길남. 1934년 일본 나가노에서 출생. "현대문학"지와 "현대시학"지를 통해 시단에 데뷔하고 '신문예'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의 시는 존재적 양상에의 서정적 궤적, 순수 미의식화 결정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작품집으로 "닮고 싶은 유산"과 "우정은 노을처럼"(공저)이 있으며 현재 경남대에 재직하고 있다.        현상 붙은 시   시를 한 편 쓰리라는 생각에서 시작 노트를 머리 맡에 펴놓고, 서재 한 가운데 벌렁 드러누웠더니        임의 정거장   이란 낱말이 퍼뜩 머릿 속에 떠올랐읍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하느님의 선거        귀 먼 안사돈        유언의 발기        나르던 인어상   따위의 말들이 속속 귓전을 때리는 것이었읍니다   그러나 나는 이 언어들을 가지고 끝내 한 편의 시를 쓰지는 못했읍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시를 써보겠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위에 예시한 글귀들을 토대로 해서시를 한번 지어보십시오  필요하다면 제가 현상금을 걸 수도 있읍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들이 이 시 한 편을 꼭 당대에 끝내야 하겠다고 무리를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서 언제까지나 기다려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애기들 돌잔치 때 산 인형들이 다시 임신한 몸이 되어 입덧이 날 때까지라도 기다려 줄 것입니다  또 그들이 자라서 하느님을 우리 손으로 다시 뽑겠다고 칭얼댈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려 줄 것입니다   귀 먼 안사돈이나, 유언의 발기 같은 것도 말이 통한다면, 나르던 인어상까지 영원히 기억해 두실 것입니다        임의 정거장에서        꽃   꽃은 피어 오르다가   잠시 생각해 본다   누구를 만날 것이냐고   깜짝깜짝 놀라면서   잠시 생각해 본다   낯선 사람을 보고 울던 아기처럼   낯선 사람을 보고 짖던 짐승처럼   꽃은 피어 오르다가   잠시 두리번거려 본다   이 세상 머리 위를   흐르던 바람같이   강보의 인연은 영 없는 것이냐고   안절부절하면서   꽃은 피어 오르다가   잠시 생각해 본다     하일. 1944년 경남 창녕 출생. 한신대에서 수학하였으며 1984년 "세계의 문학"지에 '가두어 놓기' 외 1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그의 시는 개인적 사정을 넘어선 복합적인 경험의 세계가 갖는 의미를 우리에게 펼쳐 보여주며 특히 개인적 체험의 절실함은 간절한 호소력을 갖게 한다는 평을 듣고 있다. 시집으로 "주민등록" "백두에서 한라까지"를 간행하였다.        주민등록   우리 가족은 주민등록도 못했읍니다  공식적으로 부산시 진구 초읍동 133번지에 거주한 것이 아니고, 월세방 한 칸 얻어서 서로 하늘같이 믿으며 살았읍니다  누가 죽어도 공식적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면 죽었다가 한 번만 더 비공식적으로 부활했으면 좋겠읍니다  그냥 비공식적으로 살다가 그냥 비공식적으로 죽어야 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무죄한 자입니까  뿌리만 남았다가 봄이면 다시 피는 들꽃같이 얼마나 얼마나 무죄한 자들입니까        동행   신문 방송에서 믿을 건 광고뿐이다, 아니다, 하고 때로는 다투었지 때로는 다투며 새벽까지 소주를 나누어 마시다가 교회의 잠긴 문밖에서 유행가를 불렀지  요즈음 잘 팔리는 게 예수냐? 아니면 그리스도냐? 서로 묻기도 했었지  그는 한 번도 손바닥을 펴서 내게 보이지 않았고, 헤어질 때 그냥 웃기만 했었지  목이 쉬어 그냥 웃기만 했었지     하재봉. 1957년 전북 정읍 출생.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와 "한국문학"지에 시가 당선되면서 활발한 시작활동을 하고 있는 그의 작품은 밤나무 숲들과 그 속의 까마귀 그리고 잠못드는 영혼을 노출시키면서 구원에 대한 강한 열망을 드러내고 있다  현재 '시운동'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숲의 전설   하눌님의 아내를 닮은 나는 새벽이슬과 함께   이 숲에 왔다 언제나 나뭇잎은 부드러웠고   맛있는 열매가 번갈아가며 열렸으므로   그는 나무 그늘 아래 누워 도끼를 놓고   땀을 씻고 있었다 내 투명한 옷은 아름다웠다   나는 안다 아직 내가 그를 충분히 길들이지 않았음을   공기만 먹고 살았는데 햇빛만 입고 살았는데   내가 나뭇잎을 보고 말을 건넸을 때   수런거리던 뿌리들의 마음처럼 그가   바위 뒤에 숨어 내 옷을 눈여겨 보고 있음을   나는 모두 투명하게 안다   두 아이를 잠재운 이 저녁 새삼스레   오막살이의 낮은 자리에 누워, 한때 내   나비처럼 살던 곳을 바라본다 모르는 사람이   오늘은 무척이나 많이 죽어 어지럽게   푸른 별이 켜지고 덩달아 달도 크게 웃는데   말못하는 나무 부둥키고 나는 울었다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내가 옷을 벗어   나무에 걸어놓고 맨살에 찬물을 끼얹을 때   왜 마른 번개가 숲을 태우고 천둥이   말 달리며 구름 위를 지나갔는가를   내가 그의 몸을 받아들이는 순간   내 투명한 살이 다른 그 무엇으로 변해버렸음을   나는 모른다 늙은 열매만 툭 툭   발등 위로 떨어져 내 몸은 자꾸 무거워지고   별들은 별들끼리만 이야기하고 내 귀는   나무껍질처럼 두꺼워져 알아 들을 수 없다   숯장수인 내 애인은 속도 모르고 밤새도록   불타는 아궁이 속으로 나무뭉치를 집어 넣었다   날이 새면 그는 허리춤에 도끼를 꽂고   더 높은 나무 찾아 나간다 성이 다른 짐승들   고함 질러 다른 숲으로 몰아내고 사정없이   밑둥을 찍어간다 그의 여자인 나는   태양보다 뜨겁게 숯가마에 불을 지펴야 하지만, 별아   네가 다시 내 뜰의 공기들이 될 수만 있다면   구름아 새야, 내가 다시 너의 잔등에 엎드려   서 있고 누워 있는 산이랑 들판이랑 굽어볼 수만 있다면   좀 먹고 색 바랜 궤짝 속의 날개옷   나는 날 수가 없구나 잠자는 아이들 품에 안고   옛날의 우물 곁에 다시 서 본다 나무짐을 진 그가   돌아오기 전에 아직도 두레박은 있을 것이다     한기찬. 1955년 서울 출생. 연대 국문과 졸업. 1980년 "현대문학"지의 추천으로 등단하였으며 전에는 비밀장부 같은 것을 만들어 시를 썼으나 지금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시간에 시를 쓰지만 때로는 종이에 옮기기 전 잊어버릴 때도 있다고 말하는 그는 시집 "나무오르기"를 갖고 있다. 현재 '현암사'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아가야 2   아가야 저건 느릅나무란다   나뭇가지 하나씩 모두 젖는,   너처럼 맨살로   공기뚫고 자라는   색연필로 그릴 수 있겠니   아름답지 않아도 좋으니   꾸밈 없이   뿌리 웅성대고   줄기 건장한 저것을   벌써 잎사귀는 모두   네 손가락 감지하고   빛나는구나   나는 느릅나무라고   명확히 뽐내고 있구나   넌 부정보단   긍정을 좋아하지   또렷또렷하게 꿈꾸기를 바라지   아가야, 우리가 닿으면   느릅은 비로소   말하기 시작한단다   뿌리끝 흠뻑 젖을 때까지   잎사귀빛으로 살아난단다        칠월   아침은 밤보다 더 심심하다   이슬 한 웅큼 머리에 끼얹고   빛이 되는 나무, 나무   달려드는 바람을 힘껏 뿌리치다   몸속 깊이 잠든 절벽을 깨우면   비로소 잎사귀는 모두 뿌리처럼 깊다   어린 힘은   어린 독수리, 자라려고   몸을 찢는다   피와 살이 한데 섞인   육혼 하나, 태아마냥   조용히 쉬고 있다   낮엔 알몸의 바닥까지 뒤집어서   흰 고무신 끌고   빛의 발톱 아래 선다   하늘은 어느 날개보다도 사나워   맹금 한 마리 땅에 내리지 못하고   벼랑에 산다   눈감은 그 안에 잠겨 있을   사나운 눈   실뿌리마다 매달려 있을 벼랑   먹이를 억누르는 힘으로   먹이를 물면   뒤틀리고 만다   몸을 움직여도 더는 자라지 않는다   그림자는 바위 속에서 부서지고   핏방울은 풀뿌리에서 멈춘다   이제 한줌의 평지도 가파르다   불에 닿은 천의 입술 스스로 다물려   다시 열리지 않는다   그 정신없음이 바람처럼 자유롭다   그 앉아있음이 햇살처럼 반듯하다   그 기울어짐이 빛줄기처럼 힘차다   빛에 싸인 바윗덩이는   산산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뿌리에 머리를 기대고 어두워지다   바람 한 줄기 마시고   저녁에 시든다   물보다 가벼운 꽃이   가슴에 떠서   평안히 흐른다   아아, 오늘 아   이마를 때리는   피 한 방울   누가 쥐었다 놓은 것인지   아프고   아직 따스하다     한상원. 1946년 전남 광주 출생. 서라벌 예대와 조선대 법대 졸업. 1985년 "정경문화"와 "신앙세계"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활동을 전개한 그는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웃을 따스하게 감싸 줄 수 있는 시를 쓰는데 주력하고 있다. 현재 삼성출판사에 근무하고 있으며 시집으로 "돈아더매치" "세일즈맨의 일기"와 수상집 "낙서수첩" 등이 있다.        소망   무성한 잡초밭 하늘을 서성거리다가   실이 끊겨 정처없이 흘러가다가   어드메 고목 가지에 걸려   파르르 꼬리를 떨고 있는   지연이 되었다가,   짙게 깔린 어둠 속 묘지   소름끼치게 무서운   맹수들의 울음을 들으며   묘석에 쪼그리고 앉아   저편 하늘을 응시하는   학이 되었다가,   이제 먹구름 비바람 천둥이 지나가면   한아름 목련을 안고 다가올   나의 봄,   그 땐 고고한 몸짓으로   휘파람을 불며   눈이 부시게 찬란한 하늘에   훨훨 비상하리라        오늘 2   겨울비 맞으며 오늘을 간다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   내 고독한 영혼의 안식처   구름다리에 오르면   잡힐 듯한데   공허뿐인가   어덴가 비추는 나의 얼굴   아, 주름살만 늘었구나   어차피 가야 하는   내 고독한 영혼의 안식처   오늘은 '그레고르 잠자' *   '디오게네스' **  의 몸짓으로   한 많은 산을 넘어   설움 많은 고개를 넘어   눈물의 골짜기에서   시의 날개를 펴볼까   날개여, 태양이여   저 푸른 창공을 한번만이라도   날아보자고   겨울비 맞으며 오늘을 간다   * 그레고르 잠자: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주인공 이름   ** 디오게네스:그리이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계통을 이은 '안티스테스'의 제자     허영선. 1957년 제주 출생. 제주대학 국문과를 졸업한 그는 1980년도 "심상"지로 문단에 데뷔했다. 시집 "추억처럼 나의 자유는"을 출간하기도 한 그의 시세계는 풀리지 않는 현상에 대한 물음과 확인 작업을 하는 한편, 화해보다는 부조화 속에서 호흡하는 시들을 발표하고 있다. 현재 제주신문 문화부에 근무하고 있다.        인동일기   강이 얼었다, 종이 비행기   맨발인 채   강을 건넌다   눈만 멎으면   바람 소리 풀 스치는 소리   섞이지 않는다   한사코 잠기지 않는다   발목끼리 발목 묶고   건너는 어둠은   깨어지는 법 없다   묶어 둘 수 있을까   소리들과   빈 강물과   날으는 종이비행기        추억처럼 나의 자유는   내가 아직 들풀이었을 때   벌판은 쏟아져 강으로 흐르고,   흘러서 나의 자유는   탓할 것 없었네   철든 바람과도 입 맞추고   목화처럼 번져,   하늘이 강물로 풀려서,   흘러서 돌아오는 강가에 서서   나의 자유는   오랑캐 꽃   미나리아제비   민들레 씨앗으로 날아오르던   내 살점의 꽃들   예감하는   소금기로도 남아 있었다     홍석화.1937년 강원도 횡성 출생. 청주사범학교 졸업. 1981년 "현대시학"지를 통해 문단에 데뷔한 이후로 서정성이 강한 한국 서정시의 재복원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시인. '제천문학' 동인이며 현재 백운국교 애련분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청동항아리   해와 달과   별이 잠들어 있읍니다   숱한 슬픔으로 지켜온 오늘   구름 잠긴 목으로   기러기가 울고 있읍니다   악랑과 임둔도 아침 나절   새싹이 보고 싶어 물을 주었읍니다   천년 새싹을 기다리며   동해 바닷빛으로   성천강이 흐르고 있읍니다        첫눈   낙엽지는 소리   네 관에   은장을 막는다   멀고도   가까운 길   지금   저승에서   구름 한장   돌아오고 있다   들리는 얘기론   올해   첫눈이   일찍 온다지   가슴을   떠나 버린   옥양목 두루마기   풀 비린내     홍일선. 1950년 경기도 화성 출생. 1980년 "창작과 비평"지에 작품을 게재하면서 문학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시와 경제'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투철한 역사의식과 함께 농민들의 애환을 담은 시를 리듬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시집 "농토의 역사"를 출간할 예정이다.        오산장 시오릿 길   어스름 풀무골 잡초 흔들어 훠어이 훠어이   부질없는 하곡 수매가도 흔들어 훠어이   새벽 꼴 한 짐 한숨 한 짐 베허놓고   반나절 행보 나선 장길 시오릿길   이젠 품앗이도 옛말이 된 마을   타동 일꾼을 사 보리를 털었지만   수확이 좋으면 무엇하랴   훠어이 훠어이 먼지만 뿌옇게 피어나 자갈길   저희끼리 드문드문 허기끼리 맞닿아 서 있는   미류나무도 훠어이 빈 달구지도 훠어이   등짐 진 보리자루마저 각박한 세월   우리네 무심함을 원망하는 것이냐   하루 너댓번 다니는 읍내행 버스   장날은 차장과 짐삯 싸움 진저리 넌저리   아예 걸어가는 삼일장 오산장 시오릿길   가엾긴 왼종일 이리 부대껴 저리 부대껴   꾸벅꾸벅 졸며 살아가는 저희들이나   농사지어 헐값에 내다 파는 우리네나   서럽기는 마찬가지인데 훠어이 훠어이   그렇구나 지난 봄 언 땅 갈아엎듯   모진 세월 속아 산 세월 갈아 엎어   우리들도 허리피고 살 날 언제일까   보리 서 말 등짐 메고 밀린 농약값 걱정   산자락 윗논 터진 물꼬 걱정   쉬엄쉬엄 걸어가면 다다를 읍내   똥값이여 보리가 똥값이여 급하지 않걸랑   다음 장날 내라던 구장 말이 선한데   그래도 장터엔 속고 살아가는 농민들로   지금쯤 한창 법석일텐데 훠어이 훠어이   사료값도 안나와 에미 소 한 마리   장터에서 제 손으로 죽인 죄밖에 없는데   경찰들에게 개처럼 끌려갔다는   어느 농민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오지만   오늘은 초사흗날 아버님 제삿날   쇠고기라도 한 근 사갖고 가야지   마른 하늘에 소나기가 쏟아지려나   대낮 천둥 번개가 훠어이 훠어이   선진 조국 입간판 벼락맞아 훠어이 훠어이   세상 다 속여도 흙은 못 속인다던   아버님 생전 말씀도 훠어이 훠어이   오늘 따라 말벗도 없이 홀로 가는   답답한 장길 오산장 시오릿길        동탄행 버스   동탄까지 들어가는   막차도 끊긴 지 오래   달빛이 지친 몸뚱이를   허옇게 감아   길가 아무데나   나를 팽개치지   동탄에 들어가면   일손이 없어 난리라던데   하루 세 끼 밥 먹여주고   품값도 일시불에다   모내기 일당으로는 괜찮다던데   공사판의 일거리도   이제는 다아 끝나   걱정이 태산같았는데   황톳물 무논의 못단이   꿈길처럼 아련하구나   동탄엔 논밭이 기름지다던데   왜 농사질 사람이 없을까   거기도 우리 고향처럼   정든 땅 버리고   밤길 떠난 사람 많은가   오늘 동탄 가긴 글렀으니   막소주나 한 잔 하고   오산역에서 밤을 새야지   쑥고개 백화점 지을 때   잡부로 몇 달 썩을 때   양키들 부랄 털럭거리는   이 거리가 더러웠지만   살찐 양키들이 부럽구나   아아 저 달빛이   우리집 안마당을 비추겠지   우리집엔 누가 살까   그냥 빈 집   명아주만 우리를 기다리며   무성히 피었을까   그때 그 몸서리나는 오월   형님은 어디서 죽었는지   돌아오지 않고   칼빈 소총 반납하고   이듬해 오월   우리는 고향 떠났지   내 고향 함평에도   지금쯤 물꼬대느라   정신들이 없을텐데   내일 새벽 첫차로   동탄에 들어가야지   농촌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난데   품값이 일시불이 아니라도   동탄에 가야지   함평의 오월을 생각하면   벌써 몸이 달아오지만   이 달 오월 한 달은   동탄에 들어가서   한없이 모나 심어야지     황영순. 1949년 전북 김제 출생. 원광대 가정학과 졸업. 1984년 "월간문학"지를 통해 데뷔하여 '미래시'의 동인으로 활동중이다. 그의 시세계는 어둠과 절망에 물들지 않고 맑고 지순한 목소리로 새롭게 우주를 열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봄 편지   나는 꽃씨입니다   아름다운 호미질을 기다려 온   흙 속의 꽃씨입니다   추운 들녁에서   얼지 않고   쓰러지지 않으려고   모진 결심으로 혈서를 쓰면서   긴 눈물로 왔읍니다   슬픈 내 피 늦게야 이곳   이곳으로 와서   저녁마다 금빛 도리깨로   곤한 잠 깨우고   어두움을 털어내고 있읍니다   오늘은   하나의 우주가 열리고   누군가 어둠 속에서   커다란 기침으로 올 것 같은   향그러운 새날입니다   꿈길로 바람소리 파도소리 밀려 오는   풍란처럼   풍란처럼   숨어서도 눈부시게 행복한   나는 꽃씨입니다        길   한 마음으로   하나가 되기 위해   홀로 가고 있으면,   두 마음   품지 않고   흠없이 가고 있으면,   높고 맑게   사는 법   향기로 흩날릴까   사랑이   헛되지 않음 믿고서   한없이 가고 있으면,   사계절이 왔다 그대로 가듯   서늘한 눈빛 하나   소리없이 가고 있으면,   푸른바람 칭칭 감고 봄이 오듯   끝내 잴 수 없는 아름다움   아픔의 뿌리는 깊고 깊어라     황인숙. 1958년 서울 출생. 서울예전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84년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한 그는 세련된 언어 구사와 참신한 감각이 돋보인다는 평을 듣고 있다.        추락은 가벼워          그렇도다! 살아서 천국에 갈 수 없는 법이로다.          --비용   그건 난다는 것   날으는 길은 허공   (허와 공으로 길이 나다니!)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시여   땅 속 깊이 저는 꺼지나이다   위로 난 길은 너무 멀어   저는 지름길을 찾았나이다   그건 난다는 것   (허공 거울에 비친 공허)   어쩌면 아버지   받침대를 잃고 담쟁이 덩굴이   밑으로 자지러드는 건   뿌리가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시여,   나의 어머니 뿌리   땅 전체가 뿌리이며 중력은 그녀의 애정입니다   그건 난다는 것   당신의 경멸과 그녀의 중력으로   아뜩한 허공으로 난 길   공기와 나는 서로에게서 빠져나와   담백해지려고 서두른다   날면서 나는 죄, 혹은 의식을 토해내고   끊임없이 나를 용서하고   세계의 운율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숨과 교체하고   날아오를 때 나는   내가 무거웠나이다   안녕, 아버지   빛처럼 가벼이 나는   터지나이다        새를 위하여   우리는 서로 얼마나 닮았는가, 새여   그대 날개에 돋는 소름으로   땅거미를 지나칠 때   나무들은 둥지를 기울여 보인다   일기장 갈피에서   잘 마른 시간이 너울너울 떨어져   부리 끝을 스친다   나무를 지워버리렴   그 둥지가 여기가 아니고   항상 저 너머인 나무   항상 한 가지에서 다른 가지로   날으는 순간만 (여기)일 새여   내 굴 입구의 금빛 나무가 쓰러지며   내뻗은 검지 손가락에   지평선이 걸려 터졌을 때   내가 방향을 버리고 고개를 쳐들었듯   그대 나무를 지워버리렴   글쎄 그대가 왜 날개에 소름이 돋아   땅거미에 걸려 바둥거릴 것인가?   나무를 지워버리렴   그러면 그대는   어디서나 자유   한 나무에서 다른 나무로   둥지를 위해서는 날을 것 없이   온 벽이 부드럽다    -- 한국인의 애송시 * III 끝 --   [출처] [펌] 한국의 애송시 (8)|작성자 수위    
202    현대시 400선 ㅁ 댓글:  조회:3141  추천:2  2015-02-13
  300. 역(驛)                                                                       - 한성기(韓性祺)   푸른 불 시그널이 꿈처럼 어리는 거기 조그마한 역이 있다.   빈 대합실(待合室)에는 의지할 의자(椅子) 하나 없고   이따금 급행열차(急行列車)가 어지럽게 경적(警笛)을 울리며 지나간다.   눈이 오고 …… 비가 오고 ……   아득한 선로(線路) 위에 없는 듯 있는 듯 거기 조그마한 역(驛)처럼 내가 있다. ({문예}, 1952.5)   301. 나비와 광장(廣場)                                           - 김규동(金奎東)   현기증 나는 활주로의 최후의 절정에서 흰나비는 돌진의 방향을 잊어버리고 피 묻은 육체의 파편들을 굽어본다.   기계처럼 작열한 작은 심장을 축일 한 모금 샘물도 없는 허망한 광장에서 어린 나비의 안막을 차단하는 건 투명한 광선의 바다뿐이었기에   진공의 해안에서처럼 과묵(寡黙)한 묘지 사이사이 숨가쁜 Z기의 백선과 이동하는 계절 속 불길처럼 일어나는 인광(燐光)의 조수에 밀려 이제 흰나비는 말없이 이즈러진 날개를 파닥거린다.   하얀 미래의 어느 지점에 아름다운 영토는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푸르른 활주로의 어느 지표에 화려한 희망은 피고 있는 것일까.   신도 기적도 이미 승천하여 버린 지 오랜 유역 그 어느 마지막 종점을 향하여 흰나비는 또 한 번 스스로의 신화와 더불어 대결하여 본다. (시집 {나비와 광장}, 1955)     302. 휴전선(休戰線)                                           - 박봉우(朴鳳宇)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火山)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姿勢)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高句麗) 같은 정신도 신라(新羅) 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 ……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意味)는 여기에 있었던가.   모든 유혈(流血)은 꿈같이 가고 지금도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 광장(廣場). 아직도 정맥은 끊어진 채 휴식(休息)인가, 야위어가는 이야기뿐인가.   언제 한 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 같은 징그러운 바람이여.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살이를 또 한 번 겪어야 하는가. 아무런 죄(罪)도 없이 피어난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얼마를 더 살아야 하는가. 아름다운 길은 이뿐인가.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火山)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姿勢)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조선일보}, 1956.1.1)     303. 램프의 시                                                                                 - 유 정(柳 呈)   날마다 켜지던 창에 오늘도 램프와 네 얼굴은 켜지지 않고 어둑한 황혼이 제 집인 양 들어와 앉았다. 피라도 보고 온 듯 선득선득한 느낌 램프를, 그 따뜻한 것을 켜자. 얼어서 찬 등피(燈皮)여, 호오 입김이 수심(愁心)되어 가라앉으면 석윳내 서린 골짜구니 뽀얀 안개 속 홀로 울고 가는 가냘픈 네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전쟁이 너를 데리고 갔다 한다. 내가 갈 수 없는 그 가물가물한 길은 어디냐. 안개와 같이 끝내 뒷모습인 채 사라지는 내 그리운 것아. 싸늘하게 타는 램프 싸늘하게 흔들리는 내 그림자만 또 남는다. 어느새 다시 오는 밤 검은 창 안에 . ({여원}, 1958.3)     304. 강 강 술 래                                          - 이동주(李東柱) 여울에 몰린 은어(銀魚) 떼.   삐비꽃 손들이 둘레를 짜면 달무리가 비잉 빙 돈다.   가아응 가아응 수우워얼래애 목을 빼면 설움이 솟고 ……   백장미(白薔薇) 밭에 공작(孔雀)이 취했다.   뛰자 뛰자 뛰어나 보자. 강강술래.   뇌누리*에 테이프가 감긴다. 열두 발 상모가 마구 돈다.   달빛이 배이면 술보다 독한 것.   기폭(旗幅)이 찢어진다. 갈대가 스러진다.   강강술래. 강강술래.   * 뇌누리 : 물살, 소용돌이의 옛말. (시집 {강강술래}, 1955)     305. 전라도 길 - 소록도로 가는 길 -                                           - 한하운(韓何雲)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天安)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千里), 먼 전라도 길. ({신천지}, 1949.4)       306. 보 리 피 리                                            - 한하운(韓何雲)   보리 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인환(人 )의 거리 인간사(人間事)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 - ㄹ 닐니리 (시집 {보리피리}, 1955)       307. 꽃                                            - 김춘수(金春洙)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 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현대문학} 9호, 1955.9)     308. 꽃을 위한 서시(序詩)                                            - 김춘수(金春洙)   나는 시방 위험(危險)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 드는 이 무명(無明)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新婦)여. ({문학예술}, 1957.7)       309. 능금                                            - 김춘수(金春洙)   1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2 이미 가 버린 그 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 날에 머문 이 아쉬운 자리에는 시시각각의 그의 충실(充實)만이 익어 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의 눈짓을 보낸다.   3 놓칠 듯 놓칠 듯 숨가쁘게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면은 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시집 {꽃의 소묘}, 1959)     310. 인동(忍冬) 잎                                           - 김춘수(金春洙)   눈 속에서 초겨울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다. 서울 근교(近郊)에서는 보지 못한 꽁지가 하얀 작은 새가 그것을 쪼아먹고 있다. 월동(越冬)하는 인동(忍冬) 잎의 빛깔이 이루지 못한 인간(人間)의 꿈보다도 더욱 슬프다.  (시집 {타령조․기타}, 1969)     311. 나의 하나님                                           - 김춘수(金春洙)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悲哀)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詩人)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女子)의 마음 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여리디 여린 순결(純潔)이다. 삼월(三月)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두빛 바람이다. (시집 {처용}, 1974)     312. 처용단장(處容斷章) 1의 2                                           - 김춘수(金春洙)   삼월(三月)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라일락의 새 순을 적시고 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를 적시고 있었다. 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옷 속의 일찍 눈을 뜨는 남(南)쪽 바다, 그 날 밤 잠들기 전에 물개의 수컷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삼월(三月)에 오는 눈은 송이가 크고, 깊은 수렁에서처럼 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의 보얀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 (시집 {처용}, 1974)     313. 정념(情念)의 기(旗)                                            - 김남조(金南祚)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 없는 것 모양 걸려 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 오는 네거리에 나서면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 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기(旗)는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나에게 원이 있다면 뉘우침 없는 일몰(日沒)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가는 그 일이란다.   황제의 항서(降書)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悲哀)가 맑게 가라앉는 하얀 모랫벌 같은 마음씨의 벗은 없을까.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서 때로 울고 때로 기도 드린다. (시집 {정념의 기},1960)     314. 너를 위하여                                                                               - 김남조(金南祚)   나의 밤기도는 길고 한 가지 말만 되풀이한다.   가만히 눈을 뜨는 건 믿을 수 없을 만치의 축원(祝願).   갓 피어난 빛으로만 속속들이 채워 넘친 환한 영혼의 내 사람아.   쓸쓸히 검은 머리 풀고 누워도 이적지* 못 가져 본 너그러운 사랑.   너를 위하여 나 살거니 소중한 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 이미 준 것은 잊어버리고 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 나의 사람아.   눈이 내리는 먼 하늘에 달무리 보듯 너를 본다.   오직 너를 위하여 모든 것에 이름이 있고 기쁨이 있단다. 나의 사람아.   * 이적지 : 이제까지, 이제껏. (시집 {풍림의 음악}, 1963)     315. 겨울 바다                                                                               - 김남조(金南祚)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海風)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 버리고 허무(虛無)의 불 물 이랑 위에 불 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시집 {겨울 바다}, 1967)     316. 밤바다에서                                                                          - 박재삼(朴在森)   누님의 치맛살 곁에 앉아 누님의 슬픔을 나누지 못하는 심심한 때는 골목을 빠져 나와 바닷가에 서자.   비로소 가슴 울렁이고 눈에 눈물 어리어 차라리 저 달빛 받아 반짝이는 밤바다의 진정할 수 없는 괴로운 꽃비늘을 닮아야 하리. 천하에 많은 할 말이, 천상의 많은 별들의 반짝임처럼 바다의 밤물결되어 찬란해야 하리. 아니 아파야 아파야 하리.   이윽고 누님은 섬이 떠 있듯이 그렇게 잠들리.   그때 나는 섬가에 부딪치는 물결처럼 누님의 치맛살에 얼굴을 묻고 가늘고 먼 울음을 울음을, 울음 울리라. ({현대문학} 27호, 1957.3)     317. 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                                          - 박재삼(朴在森)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사상계}, 1959.2)     318. 자연(自然)                                            - 박재삼(朴在森)   뉘라 알리 어느 가지에서는 연신 피고 어느 가지에서는 또한 지고들 하는 움직일 줄 아는 내 마음 꽃나무는 내 얼굴에 가지 벋은 채 참말로 참말로 사랑 때문에 햇살 때문에 못 이겨 그냥 그 웃어진다 울어진다 하겠네. (시집 {춘향이 마음}, 1962)     319. 추억(追憶)에서                                                                                - 박재삼(朴在森) 진주(晋州) 장터 생어물(生魚物)전에는 바다 밑이 깔리는 해 다 진 어스름을, 울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 빛 발(發)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은전(銀錢)만큼 손 안 닿는 한(恨)이던가. 울엄매야 울엄매, 별밭은 또 그리 멀리 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 안 되어 손시리게 떨던가 손시리게 떨던가, 진주 남강(晋州南江) 맑다 해도 오명 가명 신새벽이나 별빛에 보는 것을, 울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 (시집 {춘향이 마음}, 1962)     320. 멸입(滅入)                                           - 정한모(鄭漢模)   한 개 돌 속에 하루가 소리 없이 저물어 가듯이 그렇게 옮기어 가는 정연(整然)한 움직임 속에서   소조(蕭條)한 시야(視野)에 들어오는 미루나무의 나상(裸像) 모여드는 원경(遠景)을 흔들어 줄 바람도 없이   이루어 온 밝은 빛깔과 보람과 모두 다 가라앉은 줄기를 더듬어 올라가면   끝 가지 아슬히 사라져 하늘이 된다. ( 시집 {카오스의 사족}, 1958)       321. 가을에                                          - 정한모(鄭漢模)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으며 가볍게 가을을 날으고 있는 나뭇잎, 그렇게 주고 받는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微笑)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엄마의 치마 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 쥔 아가의 작은 손아귀 안에 당신을 찾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어제 오늘이 마침낸 전설(傳說) 속에 묻혀 버리는 해저(海底) 같은 그 날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달에는 은도끼로 찍어 낼 계수나무가 박혀 있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영원히 아름다운 진리(眞理)임을 오늘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어렸을 적에 불같이 끓던 병석(病席)에서 한없이 밑으로만 떨어져 가던 그토록 아득하던 추락(墜落)과 그 속력(速力)으로 몇 번이고 까무러쳤던 그런 공포(恐怖)의 기억(記憶)이 진리라는 이 무서운 진리로부터 우리들의 이 소중한 꿈을 꼭 안아 지키게 해 주십시오. (시집 {여백을 위한 서정}, 1959) 322. 나비의 여행(旅行) - 아가의 방(房) ․ 5 -                                            - 정한모(鄭漢模)   아가는 밤마다 길을 떠난다. 하늘하늘 밤의 어둠을 흔들면서 수면(睡眠)의 강(江)을 건너 빛 뿌리는 기억(記憶)의 들판을, 출렁이는 내일의 바다를 날으다가 깜깜한 절벽(絶壁), 헤어날 수 없는 미로(迷路)에 부딪히곤 까무러쳐 돌아온다.   한 장 검은 표지를 열고 들어서면 아비규환하는 화약(火藥) 냄새 소용돌이. 전쟁(戰爭)은 언제나 거기서 그냥 타고 연자색 안개의 베일 속 파란 공포(恐怖)의 강물은 발길을 끊어 버리고 사랑은 날아가는 파랑새 해후(邂逅)는 언제나 엇갈리는 초조(焦燥) 그리움은 꿈에서도 잡히지 않는다.   꿈에서 지금 막 돌아와 꿈의 이슬에 촉촉히 젖은 나래를 내 팔 안에서 기진맥진 접는 아가야! 오늘은 어느 사나운 골짜기에서 공포의 독수리를 만나 소스라쳐 돌아왔느냐. ({사상계}, 1965.11)     323. 어머니․6                                           - 정한모(鄭漢模)   어머니는 눈물로 진주를 만드신다.   그 동그란 광택(光澤)의 씨를 아들들의 가슴에 심어 주신다.   씨앗은 아들들의 가슴속에서 벅찬 자랑 젖어드는 그리움   때로는 저린 아픔으로 자라나 드디어 눈이 부신 진주가 된다. 태양이 된다.   검은 손이여 암흑이 광명을 몰아내듯이 눈부신 태양을 빛을 잃은 진주로 진주로 다시 쓰린 눈물로 눈물을 아예 맹물로 만들려는 검은 손이여 사라져라.   어머니는 오늘도 어둠 속에서 조용히 눈물로 진주를 만드신다. (시집 {새벽}, 1975)     324. 하루만의 위안                                             - 조병화(趙炳華)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온 생명은 모두 흘러가는 데 있고 흘러가는 한 줄기 속에 나도 또 하나 작은 비둘기 가슴을 비벼 대며 밀려 가야만 한다. 눈을 감으면 나와 가까운 어느 자리에 싸리꽃이 마구 핀 잔디밭이 있어 잔디밭에 누워 마지막 하늘을 바라보는 내 그 날이 온다. 그 날이 있어 나는 살고 그 날을 위하여 바쳐 온 마지막 내 소리를 생각한다. 그 날이 오면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시방은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시집 {하루만의 위안}, 1950)     325. 낙엽끼리 모여 산다                                           - 조병화(趙炳華)   낙엽에 누워 산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지나간 날을 생각지 않기로 한다. 낙엽이 지는 하늘가에 가는 목소리 들리는 곳으로 나의 귀는 기웃거리고 얇은 피부는 햇볕이 쏟아지는 곳에 초조하다. 항시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나는 살고 싶다. 살아서 가까이 가는 곳에 낙엽이 진다. 아, 나의 육체는 낙엽 속에 이미 버려지고 육체 가까이 또 하나 나는 슬픔을 마시고 산다. 비 내리는 밤이면 낙엽을 밟고 간다. 비 내리는 밤이면 슬픔을 디디고 돌아온다. 밤은 나의 소리에 차고 나는 나의 소리를 비비고 날을 샌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낙엽에 누워 산다.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슬픔을 마시고 산다. (시집 {하루만의 위안}, 1950) 326. 의자․7                                            - 조병화(趙炳華)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주듯이.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습니다. (시집 {시간의 숙소(宿所)를 더듬어서}, 1964)     327. 꽃과 언어(言語)                                           - 문덕수(文德守)   언어는 꽃잎에 닿자 한 마리 나비가 된다.   언어는 소리와 뜻이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진다.   꽃의 둘레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언어가 불꽃처럼 타다간 꺼져도, 어떤 언어는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 된다. ({현대문학} 74호, 1961.3)     328. 선(線)에 관한 소묘(素描)․1                                            - 문덕수(文德守)   선이 한 가닥 달아난다. 실뱀처럼, 또 한 가닥 선이 뒤쫓는다. 어둠 속에서 빗살처럼 쏟아져 나오는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선이 꽃잎을 문다. 뱀처럼, 또 한 가닥의 선이 뒤쫓아 문다. 어둠 속에서 불꽃처럼 피어 나오는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꽃이 찢어진다. 떨어진다. 거미줄처럼 짜인 무변(無邊)의 망사(網紗), 찬란한 꽃 망사 위에 동그란 우주(宇宙)가 달걀처럼 고요히 내려앉는다. (시집 {선(線)․공간(空間)}, 1966)     329. 낙화(落花)                                           - 이형기(李炯基)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시집 {적막강산}, 1963)     330. 산                                          - 이형기(李炯基)   산은 조용히 비에 젖고 있다. 밑도 끝도 없이 내리는 가을비 가을비 속에 진좌(鎭座)한 무게를 그 누구도 가늠하지 못한다. 표정은 뿌연 시야에 가리우고 다만 윤곽만을 드러낸 산 천 년 또는 그 이상의 세월이 오후 한때 가을비에 젖는다. 이 심연 같은 적막에 싸여 조는 둥 마는 둥 아마도 반쯤 눈을 감고 방심무한(放心無限) 비에 젖는 산 그 옛날의 격노(激怒)의 기억은 간 데 없다. 깎아지른 절벽도 앙상한 바위도 오직 한 가닥 완만한 곡선에 눌려 버린 채 어쩌면 눈물 어린 눈으로 보듯 가을비 속에 어룽진 윤곽 아 아 그러나 지울 수 없다. (시집 {적막강산}, 1963)     331. 폭 포                                                                        - 이형기(李炯基)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을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질주하는 전율과 전율 끝에 단말마(斷末魔)*를 꿈꾸는 벼랑의 직립(直立)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   그대 아는가 석탄기(石炭紀)의 종말을 그때 하늘 높이 날으던 한 마리 장수잠자리의 추락(墜落)을.   나의 자랑은 자멸(自滅)이다. 무수한 복안(複眼)들이 그 무수한 수정체(水晶體)가 한꺼번에 박살나는 맹목(盲目)의 눈보라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퍼런 빛줄기 2억 년 묵은 이 칼자욱을 아는가.   * 단말마 : 숨이 끊어질 때의 고통. * 석탄기 : 고생대 중엽으로 이 시기 후반에 파충류․곤충류가 출현하였다. (시집 {적막강산}, 1963)     332.성 탄 제                                           - 김종길(金宗吉)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山茱萸)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늘한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 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聖誕祭)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山茱萸)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血液)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시집 {성탄제}, 1969) 333. 설날 아침에                                          - 김종길(金宗吉)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險難)하고 각박(刻薄)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시집 {성탄제}, 1969)     334. 황사 현상(黃沙現象)                                            - 김종길(金宗吉)   그 날 밤 금계랍 같은 눈이 내리던 오한의 땅에   오늘은 발열처럼 복사꽃이 핀다. 목이 타는 봄가뭄, 아 목이 타는 봄가뭄,   현기증 나는 아지랑이만 일렁거리고,   앓는 대지를 축여 줄 봄비는 오지 않은 채,   며칠째 황사만이 자욱이 내리고 있다. (시집 {황사 현상}, 1986)     335. 봄 비                                          - 이수복(李壽福)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香煙)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랭이 타오르것다. (시집 {봄비}, 1969)   336. 북치는 소년                                          - 김종삼(金宗三)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이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양(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시집 {십이음계}, 1969)     337. 민간인(民間人)                                          - 김종삼(金宗三)   1947년 봄 심야(深夜) 황해도 해주(海州)의 바다 이남(以南)과 이북(以北)의 경계선 용당포(浦)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孀兒)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水深)을 모른다. ({현대시학}, 1971.10)     338.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 김종삼(金宗三)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물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아닌 시인이라고. (시집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1982)     339. 석상(石像)의 노래                                           - 김관식(金冠植)   노을이 지는 언덕 위에서 그대 가신 곳 머언 나라를 뚫어지도록 바라다보면 해가 저물어 밤은 깊은데 하염없어라 출렁거리는 물결 소리만 귀에 적시어 눈 썹 기슭에 번지는 불꽃 피눈물 들어 어룽진* 동정* 그리운 사연 아뢰려하여 벙 어리 가슴 쥐어뜯어도 혓바늘일래 말을 잃었다 땅을 구르며 몸부림치며 궁그르 다가 다시 일어나 열리지 않는 말문이련가 하늘 우러러 돌이 되었다   * 어룽진 : 얼룩진. * 동정 : 한복 저고리 깃에 꿰매어 다는 헝겊으로 대개 흰색이다.  (시집 {김관식 시선},1957)     340. 교외(郊外)․3                                           - 박성룡(朴成龍)   바람이여,   풀섶을 가던, 그리고 때로는 저기 북녘의 검은 산맥을 넘나들던 그 무형(無形)한 것이여, 너는 언제나 내가 이렇게 한낱 나뭇가지처럼 굳어 있을 땐 와 흔들며 애무(愛撫)했거니, 나의 그 풋풋한 것이여. 불어 다오, 저 이름 없는 풀꽃들을 향한 나의 사랑이 아직은 이렇게 가시지 않았을 때 다시 한 번 불어 다오, 바람이여, 아 사랑이여. (시집 {가을에 잃어버린 것들}, 1969)     341. 연시(軟柿)                                            - 박용래(朴龍來)   여름 한낮   비름잎에   꽂힌 땡볕이 이웃 마을   돌담 위   연시(軟柿)로 익다   한쪽 볼   서리에 묻고   깊은 잠 자다   눈 오는 어느 날   깨어나   제상(祭床) 아래   심지 머금은   종발로 빛나다. (시집 {강아지풀}, 1975)     342. 저녁눈                                           - 박용래(朴龍來)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 말집 : 추녀가 사방으로 뺑 돌아가게 만든 집.  (시집 {싸락눈}, 1969)     343. 겨울밤                                            - 박용래(朴龍來)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시집 {강아지풀}, 1975)     344. 월훈(月暈)                                           - 박용래(朴龍來)    첩첩 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습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 둑, 그 너머 강기슭에서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마을.  갱(坑) 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지, 콩깍지처럼 후미진 외딴집, 외딴집에도 불빛은 앉아 이슥토록 창문은 모과(木瓜)빛입니다.  기인 밤입니다. 외딴집 노인은 홀로 잠이 깨어 출출한 너머지 무를 깎기도 하고 고무를 깎다, 문득 바람도 없는데 시나브로* 풀려 풀려 내리는 짚단, 짚오라기의 설레임을 듣습니다. 귀를 모으고 듣지요. 후루룩 후루룩 처마깃에 나래 묻는 이름 모를 새, 새들의 온기(溫氣)를 생각합니다. 숨을 죽이고 생각하지요.  참 오래오래, 노인의 자리맡에 밭은 기침소리도 없을 양이면 벽 속에서 겨울 귀뚜라미는 울지요. 떼를 지어 웁니다, 벽이 무너지라고 웁니다.  어느덧 밖에는 눈발이라도 치는지, 펄펄 함박눈이라도 흩날리는지, 창호지 문살에 돋는 월훈(月暈)*.   * 허방다리 : 함정(陷穽). * 시나브로 :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 월훈 : 달무리.   ({문학사상}, 1976.3)     345. 하여지향(何如之鄕)․일(壹)                                              - 송욱(宋稶)   솜덩이 같은 몸뚱아리에 쇳덩이처럼 무거운 집을 달팽이처럼 지고, 먼동이 아니라 가까운 밤을 밤이 아니라 트는 싹을 기다리며, 아닌 것과 아닌 것 그 사이에서, 줄타기하듯 모순(矛盾)이 꿈틀대는 뱀을 밟고 섰다. 눈 앞에서 또렷한 아기가 웃고, 뒤통수가 온통 피 먹은 백정(白丁)이라, 아우성치는 자궁(子宮)에서 씨가 웃으면 망종(亡種)이 펼쳐 가는 만물상(萬物相)이여! 아아 구슬을 굴리어라 유리방(琉璃房)에서 윤전기(輪轉機)에 말리는 신문지(新聞紙)처럼 내장(內臟)에 인쇄(印刷)되는 나날을 읽었지만, 그 방(房)에서는 배만 있는 남자들이 그 방(房)에서는 목이 없는 여자들이 허깨비처럼 천장에 붙어 있고, 거미가 내려와서 계집과 술 사이를 돈처럼 뱅그르르 돌며 살라고 한다. 이렇게 자꾸만 좁아들다간 내가 길이 아니면 길이 없겠고, 안개 같은 지평선(地平線)뿐이리라. 창살 같은 갈비뼈를 뚫고 나와서 연꽃처럼 달처럼 아주 지기 전에, 염통이여! 네가 두르고 나온 탯줄에 꿰서, 마주치는 빛처럼 슬픔을 얼싸안는 슬픔을 따라, 비렁뱅이 봇짐 속에 더럽힌 신방 속에, 싸우다 제사(祭祀)하고 성묘(省墓)하다 죽이다가 염념(念念)을 염주(念珠)처럼 묻어 놓아라. '어서 갑시다' 매달린 명태들이 노발대발하여도, 목숨도 아닌 죽음도 아닌 두통(頭痛)과 복통(腹痛) 사일 오락가락하면서 귀머거리 운전수(運轉手) 해마저 어느새 검댕이 되었기로 구들장 밑이지만 꼼짝하면 자살(自殺)이다. 얼굴이 수수께끼처럼 굳어 가는데, 눈초리가 야속하게 빛나고 있다며는 솜덩이 같은 쇳덩이 같은 이 몸뚱아리며 게딱지 같은 집을 사람이 될 터이니 사람 살려라. 모두가 죄(罪)를 먹고 시치미를 떼는데, 개처럼 살아가니 사람 살려라. 허울이 좋고 붉은 두 볼로 철면피(鐵面皮)를 탈피(脫皮)하고 새살 같은 마음으로, 세상이 들창처럼 떨어져 닫히며는, 땅꾼처럼 뱀을 감고 내일(來日)이 등극(登極)한다. (시집 {하여지향}, 1961)     346. 산․9                                            - 김광림(金光林)   한여름에 들린 가야산 독경(讀經) 소리 오늘은 철 늦은 서설(瑞雪)이 내려 비로소 벙그는 매화 봉오리.   눈 맞는 해인사 열두 암자(庵子)를 오늘은 두루 한겨울 면벽(面壁)한 노승(老僧) 눈매에 미소(微笑)가 돌아. (시집 {학의 추락}, 1971)     347. 덤                                           - 김광림(金光林)   나이 예순이면 살 만큼은 살았다 아니다 살아야 할 만큼은 살았다 이보다 덜 살면 요절이고 더 살면 덤이 된다 이제부터 나는 덤으로 산다 종삼(宗三)*은 덤을 좀만 누리다 떠나갔지만 피카소가 가로챈 많은 덤 때문에 중섭(仲燮)*은 진작 가버렸다 가래 끓는 소리로 버티던 지훈(芝薰)도 쉰의 고개턱에 걸려 그만 주저앉았다 덤을 역산(逆算)한 천재들의 밥상에는 빵 부스러기 생선 찌꺼기 초친 것 등 지친 것이 많다 그들은 일찌감치 숟갈을 놓았다 소월(素月)의 죽사발이나 이상(李箱)의 심줄구이 앞에는 늘 아류들이 득실거린다 누군가 들이키다 만 하다 못해 맹물이라도 마시며 이제부터 나는 덤으로 산다   * 종삼 : 시인 김종삼(金宗三). * 중섭 : 화가 이중섭(李仲燮). (시집 {말의 사막에서}, 1989)     348. 목 숨                                           - 신동집(申瞳集)   목숨은 때묻었다. 절반은 흙이 된 빛깔 황폐한 얼굴엔 표정(表情)이 없다.   나는 무한히 살고 싶더라. 너랑 살아 보고 싶더라. 살아서 죽음보다 그리운 것이 되고 싶더라.   억만 광년(億萬光年)의 현암(玄暗)을 거쳐 나의 목숨 안에 와 닿는 한 개의 별빛.   우리는 아직도 포연(砲煙)의 추억 속에서 없어진 이름들을 부르고 있다. 따뜻이 체온(體溫)에 젖어든 이름들.   살은 자(者)는 죽은 자를 증언(證言)하라 죽은 자는 살은 자를 고발(告發)하라 목숨의 조건(條件)은 고독(孤獨)하다.   바라보면 멀리도 왔다마는 나의 뒤 저편으로 어쩌면 신명나게 바람은 불고 있다.   어느 하많은 시공(時空)이 지나 모양 없이 지워질 숨자리에 나의 백조(白鳥)는 살아서 돌아오라. (시집 {서정의 유형}, 1954)     349. 송신(送信)                                          - 신동집(申瞳集) 바람은 한로(寒露)의 음절을 밟고 지나간다. 귀뚜리는 나를 보아도 이젠 두려워하지 않는다. 차운 돌에 수염을 착 붙이고 멀리 무슨 신호를 보내고 있나.   어디선가 받아 읽는 가을의 사람은 일손을 놓고 한동안을 멍하니 잠기고 있다. 귀뚜리의 송신(送信)도 이내 끝나면 하늘은 바이없는* 청자(靑瓷)의 심연이다.   * 바이없는 : 어쩔 수 없는. (시집 {송신}, 1973)     350. 오렌지                                           - 신동집(申瞳集)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오렌지는 여기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 더도 덜도 아닌 오렌지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찹잘한* 속살을 깔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대는 순간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다. 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다. 시간이 똘똘 배암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에 한없이 어진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누구인지 잘은 아직 몰라도.   * 포들한 : 부드럽고 도톰한. * 찹잘한 : 차갑고 달착지근한. (시집 {누가 묻거든}, 1989)     351. 새                                            - 천상병(千祥炳)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 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週日),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시집 {새}, 1971)     352. 귀천(歸天)                                           - 천상병(千祥炳)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시집 {주막에서}, 1979)     353. 피아노                                           - 전봉건(全鳳健)   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서는 끊임없이 열 마리씩 스무 마리씩 신선한 물고기가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   나는 바다로 가서 가장 신나게 시퍼런 파도의 칼날 하나를 집어 들었다. (시집 {전봉건 시선}, 1985)   ========================================================================== 8. 새로운 역사의 지평을 열며 ========================================================================== 354. 푸른 하늘을                                           - 김수영(金洙暎)   푸른 하늘을 제압(制壓)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修正)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飛翔)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革命)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시집 {거대한 뿌리}, 1974년)     355. 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                                          - 김수영(金洙暎)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淫蕩)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越南) 파병(派兵)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悠久)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 수용소의 제십사 야전병원(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 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 소리를 듣고 그 비명(悲鳴)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뭇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 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장이에게 땅 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장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洞會)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난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시집 {거대한 뿌리}, 1974년)     356. 풀                                            - 김수영(金洙暎)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 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창작과 비평} 가을호, 1968)       357. 진달래 산천(山川)                                             - 신동엽(申東曄)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모서리엔 이름 모를 나비 하나 머물고 있었어요.   잔디밭엔 장총(長銃)을 버려 던진 채 당신은 잠이 들었죠.   햇빛 맑은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남햇가, 두고 온 마을에선 언제인가, 눈먼 식구들이 굶고 있다고 담배를 말으며 당신은 쓸쓸히 웃었지요.   지까다비 속에 든 누군가의 발목을 과수원 모래밭에선 보고 왔어요. 꽃 살이 튀는 산허리를 무너 온종일 탄환을 퍼부었지요.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그늘 밑엔 얼굴 고운 사람 하나 서늘히 잠들어 있었어요.   꽃다운 산골 비행기가 지나다 기관포 쏟아 놓고 가 버리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그리움은 회올려 하늘에 불 붙도록.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바람 따신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잔디밭에 담배갑 버려 던진 채 당신은 피 흘리고 있었어요. ({조선일보}, 1959.3.24)     358. 산에 언덕에                                            - 신동엽(申東曄)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시집 {아사녀(阿斯女)}, 1963)     359. 종로 5가                                           - 신동엽(申東曄)   이슬비 오는 날, 종로 5가 서시오판* 옆에서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는 군상(群像) 속에서 죄 없이 크고 맑기만 한 그 소년의 눈동자와 내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품고 그 소년의 등허리선 먼 길 떠나온 고구마가 흙 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었다.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 아니면 전라남도 해남땅 어촌(漁村) 말씨였을까. 나는 가로수 하나를 걷다 되돌아섰다. 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그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눈녹이 바람이 부는 질척질척한 겨울날, 종묘(宗廟) 담을 끼고 돌다가 나는 보았어. 그의 누나였을까. 부은 한쪽 눈의 창녀(娼女)가 양지 쪽 기대 앉아 속내의 바람으로, 때묻은 긴 편지를 읽고 있었지. 그리고 언젠가 보았어. 세종로 고층건물 공사장, 자갈지게 등짐하던 노동자 하나이 허리를 다쳐 쓰러져 있었지. 그 소년의 아버지였을까. 반도(半島)의 하늘 높이서 태양이 쏟아지고, 싸늘한 땀방울 뿜어낸 이마엔 세 줄기 강물. 대륙의 섬나라의 그리고 또 오늘 저 새로운 은행국(銀行國)의 물결이 뒹굴고 있었다.   남은 것은 없었다. 나날이 허물어져 가는 그나마 토방 한 칸. 봄이면 쑥, 여름이면 나무뿌리, 가을이면 타작마당을 휩쓰는 빈 바람. 변한 것은 없었다. 이조(李朝) 오백 년은 끝나지 않았다. 옛날 같으면 북간도(北間島)라도 갔지. 기껏해야 버스길 삼백 리 서울로 왔지. 고층건물 침대 속 누워 비료광고만 뿌리는 그머리 마을, 또 무슨 넉살 꾸미기 위해 짓는지도 모를 빌딩 공사장, 도시락 차고 왔지.   이슬비 오는 날,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그 소년의 죄 없이 크고 맑기만한 눈동자엔 밤이 내리고 노동으로 지친 나의 가슴에선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동서춘추}, 1967.6) 360. 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申東曄)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 초례청 : 혼인 예식을 치르는 곳.  (시집 {52인 시집}, 1967)     361.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신동엽(申東曄)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 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 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畏敬)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 항아릴 찢고 티없이 맑은 구원(久遠)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憐憫)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조아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고대문화}, 1969.5)     362. 금강(錦江)                                         - 신동엽(申東曄)       - 1 -   우리들의 어렸을 적 황토 벗은 고갯마을 할머니 등에 업혀 누님과 난, 곧잘 파랑새 노랠 배웠다.   울타리마다 담쟁이넌출 익어가고 밭머리에 수수모감 보일 때면 어디서라 없이 새 보는 소리가 들린다. 우이여! 훠어이!   쇠방울소리 뿌리면서 순사의 자전거가 아득한 길을 사라지고 그럴 때면 우리들은 흙토방 아래 가슴 두근거리며 노래 배워 주던 그 양품장수 할머닐 기다렸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잘은 몰랐지만 그 무렵 그 노랜 침장이에게 잡혀가는 노래라 했다.   지금, 이름은 달라졌지만 정오(正午)가 되면 그 하늘 아래도 오포(午砲)가 울리었다.    일 많이 한 사람 밥 많이 먹고    일하지 않은 사람 밥 먹지 마라,    오우우 …… 하고,   질앗티 콩이삭 벼이삭 줍다 보면 하늘을 비행기 편대가 날아가고 그때마다 엄마는 그늘진 얼굴로 내 손 꼭 쥐며 밭두덕길 재촉했지.   내가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그 가슴 두근거리는 큰 역사를 몸으로 겪은 사람들이 그땐 그 오포 부는 하늘 아래 더러 살고 있었단다.   앞마을 뒷동산 해만 뜨면 철없는 강아지처럼 뛰어 다니는 기억 속에 그래서 그분들은 이따금 이야기의 씨를 심어주고 싶었던 것이리.   그 이야기의 씨들은 떡잎이 솟고 가지가 갈라져 어느 가을 무성하게 꽃피리라.   그 일을 그분들은 예감했던 걸까. 그래서 눈보라치는 동짓달 콩강개 묻힌 아랫목에서 숨막히는 삼복(三伏) 순이 엄마 목매었던 그 정자나무 근처에서 부채로 메밋소리 날리며 조심조심 이야기했던 걸까.   배꼽 내놓고 아랫배 긁는 그 코흘리개 꼬마들에게.         - 2 -   우리들은 하늘을 봤다 1960년 4월 역사를 짓눌던, 검은 구름장을 찢고 영원의 얼굴을 보았다.   잠깐 빛났던, 당신의 얼굴은 우리들의 깊은 가슴이었다.   하늘 물 한아름 떠다, 1919년 우리는 우리 얼굴 닦아놓았다. 1894년쯤엔, 돌에도 나무등걸에도 당신의 얼굴은 전체가 하늘이었다.   하늘, 잠깐 빛났던 당신은 금세 가리워졌지만 꽃들은 해마다 강산을 채웠다. 태양과 추수(秋收)와 연애와 노동.   동해, 원색의 모래밭 사기 굽던 천축(天竺) 뒷길 방학이면 등산모 쓰고 절름거리며 찾아나섰다.   없었다. 바깥 세상엔, 접시도 살점도 바깥 세상엔 없었다.   잠깐 빛났던 당신의 얼굴은 영원이 하늘, 끝나지 않는 우리들의 깊은 가슴이었다. (이하 생략) (서사시 {금강}, 1967)     363-신동엽/ 봄은/ 생략     364. 갈대                                           - 신경림(申庚林)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문학예술}, 1956.2)     365. 겨울 밤                                           - 신경림(申庚林)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할거나. 술에라도 취해 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 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 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 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 다오 우리를 파묻어 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 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 편지라도 띄워 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 볼거나. ({한국일보}, 1965.4)     366. 파장(罷場)                                            - 신경림(申庚林)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먹걸리들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 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창작과 비평} 가을호, 1970)     367. 농무(農舞)                                           - 신경림(申庚林)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 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조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벼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 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 꺽정이․서림이 : 홍명희의 소설 에 나오는 인물. * 쇠전 : 우시장(牛市場). 소를 파는 시장. * 도수장 : 도살장. 짐승을 잡는 곳. ({창작과 비평} 가을호, 1971)     368. 목계 장터                                         - 신경림(申庚林)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靑龍) 흑룡(黑龍)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 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天痴)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있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 박가분 : 여자들의 화장품. (시집 {농무}, 1973)       369. 용인(龍仁) 지나는 길에                                             - 민영(閔暎) 저 산벚꽃 핀 등성이에 지친 몸을 쉴까 두고 온 고향 생각에 고개 젓는다.   도피안사(到彼岸寺)에 무리지던 연분홍빛 꽃너울. 먹어도 허기지던 삼춘(三春) 한나절.   밸*에 역겨운 가구가락(可口可樂)* 물 냄새. 구국구국 울어대는 멧비둘기 소리.   산벚꽃 진 등성이에 뼈를 묻을까. 소태*같이 쓴 입술에 풀잎 씹힌다.   * 밸 : '배알'의 준말. 창자 또는 마음. * 가구가락 : '코카콜라'의 중국식 표기. * 소태 : 소태나무 또는 소태껍질, 맛이 몹시 쓰며 한약재로 쓰임. (시집 {용인 지나는 길에}, 1977)     370. 눈 길                                                                                  - 고은(高銀)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들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 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 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써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기울여 들리나니 대지(大地)의 고백(告白)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寂寞)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시집 {피안감성(彼岸感性)}, 1960)     371. 문의(文義) 마을에 가서                                                - 고은(高銀)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는가.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 1974) 372. 화살                                               - 고은(高銀)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가서는 돌아오지 말자. 박혀서 박힌 아픔과 함께 썩어서 돌아오지 말자.   우리 모두 숨 끊고 활시위를 떠나자. 몇 십 년 동안 가진 것, 몇 십 년 동안 누린 것, 몇 십 년 동안 쌓은 것, 행복이라던가 뭣이라던가 그런 것 다 넝마로 버리고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이 소리친다.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저 캄캄한 대낮 과녁이 달려온다. 이윽고 과녁이 피 뿜으며 쓰러질 때 단 한 번 우리 모두 화살로 피를 흘리자.   돌아오지 말자! 돌아오지 말자! 오 화살 정의의 병사여 영령이여! (시집 {새벽 길}, 1978)     373. 기항지(寄港地)․1                                           - 황동규(黃東奎)   걸어서 항구(港口)에 도착했다. 길게 부는 한지(寒地)의 바람 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 긴 눈 내릴 듯 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 지전(紙錢)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 버리고 조용한 마음으로 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 정박(碇泊) 중의 어두운 용골(龍骨)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항구의 안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는 수삼 개(數三個)의 눈송이 하늘의 새들이 따르고 있었다. ({현대문학} 149호, 1967.6)     374. 조그만 사랑 노래                                           - 황동규(黃東奎)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 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가득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 다니는 몇 송이의 눈. (시집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1978)     375. 풍장(風葬)․1                                           - 황동규(黃東奎)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 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 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 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 몰래 시간을 떨어트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 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白金)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 다오   바람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 다오. (시집 {풍장}, 1984)     376. 벼                                                                            - 이성부(李盛夫)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워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 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시집 {우리들의 양식}, 1974)     377. 위독(危篤) 제1호                                                                           - 이승훈(李昇薰)   램프가 꺼진다. 소멸의 그 깊은 난간으로 나를 데려가 다오. 장송(葬送)의 바다에는 흔들리는 달빛, 흔들리는 달빛의 망또가 펄럭이고, 나의 얼굴은 무수한 어둠의 칼에 찔리우며 사라지는 불빛 따라 달린다. 오 집념의 머리칼을 뜯고 보라. 저 침착했던 의의(意義)가 가늘게 전율하면서 신뢰(信賴)의 차건 손을 잡는다. 그리고 시방 당신이 펴는 식탁(食卓) 위의 흰 보자기엔 아마 파헤쳐진 새가 한 마리 날아와 쓰러질 것이다. ({현대시} 13집, 1967)     378. 자수(刺繡)                                           - 허영자(許英子)   마음이 어지러운 날은 수를 놓는다.   금실 은실 청홍(靑紅) 실 따라서 가면 가슴 속 아우성은 절로 갈앉고   처음 보는 수풀 정갈한 자갈돌의 강변에 이른다.   남향 햇볕 속에 수를 놓고 앉으면   세사 번뇌(世事 煩惱) 무궁한 사랑의 슬픔을 참아내올 듯   머언 극락 정토(極樂淨土) 가는 길도 보일 상 싶다.  (시집 {가슴엔 듯 눈엔 듯}, 1966)     379. 말                                           - 이수익(李秀翼)   말이 죽었다. 간밤에 검고 슬픈 두 눈을 감아 버리고 노동의 뼈를 쓰러뜨리고 들리지 않는 엠마누엘의 성가(聖歌) 곁으로 조용히 그의 생애를 운반해 갔다. 오늘 아침에는 비가 내린다, 그를 덮은 아마포(亞麻布) 위에 하늘에는 슬픈 전별(餞別)이. (시집 {우울한 샹송}, 1969)     380. 옮겨 앉지 않는 새                                               - 이탄(李炭)   우리 여름은 항상 푸르고 새들은 그 안에 가득하다. 새가 없던 나뭇가지 위에 새가 와서 앉고, 새가 와서 앉던 자리에도 새가 와서 앉는다.   한 마리 새가 한 나뭇가지에 앉아서 한 나무가 다할 때까지 앉아 있는 새를 이따금 마음 속에서 본다.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 앉지 않는 한 마리의 새. 보였다 보였다 하는 새.   그 새는 이미 나뭇잎이 되어 있는 것일까. 그 새는 이미 나뭇가지일까. 그 새는 나의 언어(言語)를 모이로 아침 해를 맞으며 산다. 옮겨 앉지 않는 새가 고독의 문(門)에서 나를 보고 있다. (시집 {옮겨 앉지 않는 새}, 1979)     381. 국토 서시(國土序詩)                                           - 조태일(趙泰一)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야윈 팔다리일망정 한껏 휘저어 슬픔도 기쁨도 한껏 가슴으로 맞대며 우리는 우리의 가락 속을 거닐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불지필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보탤 일이다.   일렁이는 피와 다 닳아진 살결과 허연 뼈까지를 통째로 보탤 일이다. (시집 {국토}, 1975)     382. 사물(事物)의 꿈․1                                           - 정현종(鄭玄宗)   나무의 꿈   그 잎 위에 흘러내리는 햇빛과 입 맞추며 나무는 그의 힘을 꿈꾸고 그 위에 내리는 비와 뺨 비비며 나무는 소리 내어 그의 피를 꿈꾸고 가지에 부는 바람의 푸른 힘으로 나무는 자기의 생(生)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시집 {사물(事物)의 꿈}, 1972)     383. 우리가 물이 되어                                           - 강은교(姜恩喬)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시집 {우리가 물이 되어}, 1986)     384. 개봉동과 장미                                           - 오규원(吳圭原)   개봉동 입구의 길은 한 송이 장미 때문에 왼쪽으로 굽고, 굽은 길 어디에선가 빠져나와 장미는 길을 제 혼자 가게 하고 아직 흔들리는 가지 그대로 길 밖에 선다.   보라 가끔 몸을 흔들며 잎들이 제 마음대로 시간의 바람을 일으키는 것을. 장미는 이곳 주민이 아니어서 시간 밖의 서울의 일부이고, 그대와 나는 사촌(四寸)들 얘기 속의 한 토막으로 비 오는 지상의 어느 발자국에나 고인다.   말해 보라 무엇으로 장미와 닿을 수 있는가를. 저 불편한 의문, 저 불편한 비밀의 꽃 장미와 닿을 수 없을 때, 두드려 보라 개봉동 집들의 문은 어느 곳이나 열리지 않는다.  (시집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1978)     385. 그릇 1                                           - 오세영(吳世榮)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節制)와 균형(均衡)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理性)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盲目)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魂)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시선집 {모순의 흙}, 1985)     386. 서울 길                                           - 김지하(金芝河)   간다 울지 마라 간다 흰 고개 검은 고개 목마른 고개 넘어 팍팍한 서울 길 몸 팔러 간다   언제야 돌아오리란 언제야 웃음으로 화안히 꽃피어 돌아오리란 댕기 풀 안쓰러운 약속도 없이 간다 울지 마라 간다 모질고 모진 세상에 살아도 분꽃이 잊힐까 밀 냄새가 잊힐까 사뭇사뭇 못 잊을 것을 꿈꾸다 눈물 젖어 돌아올 것을 밤이면 별빛 따라 돌아올 것을 간다 울지 마라 간다 하늘도 시름겨운 목마른 고개 넘어 팍팍한 서울 길 몸 팔러 간다 (시집 {황토}, 1970)     387. 타는 목마름으로                                           - 김지하(金芝河)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통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국 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 소리 통곡 소리 탄식 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 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 1982)     388. 정님이                                           - 이시영(李時英)   용산 역전 늦은 밤거리 내 팔을 끌다 화들짝 손을 놓고 사라진 여인 운동회 때마다 동네 대항 릴레이에서 늘 일등을 하여 밥솥을 타던 정님이 누나가 아닐는지 몰라 이마의 흉터를 가린 긴 머리, 날랜 발 학교도 못 다녔으면서 운동회 때만 되면 나보다 더 좋아라 좋아라 머슴 만득이 지게에서 점심을 빼앗아 이고 달려오던 누나 수수밭을 매다가도 새를 보다가도 나만 보면 흙 묻은 손으로 달려와 청색 책보를 단단히 동여매 주던 소녀 콩깍지를 털어 주며 맛있니 맛있니 하늘을 보고 웃던 하이얀 목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지만 슬프지 않다고 잡았던 메뚜기를 날리며 말했다. 어느 해 봄엔 높은 산으로 나물 캐러 갔다가 산뱀에 허벅지를 물려 이웃 처녀들에게 업혀 와서도 머리맡으로 내 손을 찾아 산다래를 쥐여주더니 왜 가 버렸는지 몰라 목화를 따고 물레를 잣고 여름밤이 오면 하얀 무릎 위에 정성껏 삼을 삼더니 동지 섣달 긴긴 밤 베틀에 고개 숙여 달그랑잘그랑 무명을 잘도 짜더니 왜 바람처럼 가 버렸는지 몰라 빈 정지 문 열면 서글서글한 눈망울로 이내 달려 나올 것만 같더니 한 번 가 왜 다시 오지 않았는지 몰라 식모 산다는 소문도 들렸고 방직 공장에 취직했다는 말도 들렸고 영등포 색시집에서 누나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끝내 대답이 없었다. 용산 역전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던 내 팔 붙잡다 날랜 발, 밤거리로 사라진 여인 (시집 {만월}, 1976)   389. 큰 노래                                          - 이성선(李聖善)   큰 산이 큰 영혼을 가른다. 우주 속에 대붕(大鵬)의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설악산 나무 너는 밤마다 별 속에 떠 있다. 산정(山頂)을 바라보며 몸이 바위처럼 부드럽게 열리어 동서로 드리운 구름 가지가 바람을 실었다. 굽이굽이 긴 능선 울음을 실었다. 해지는 산 깊은 시간을 어깨에 싣고 춤 없는 춤을 추느니 말없이 말을 하느니 아, 설악산 나무 나는 너를 본 일이 없다. 전신이 거문고로 통곡하는 너의 번뇌를 들은 바 없다. 밤에 길을 떠나 우주 어느 분을 만나고 돌아오는지 본 일이 없다. 그러나 파문도 없는 밤의 허공에 홀로 절정을 노래하는 너를 보았다. 다 타고 스러진 잿빛 하늘을 딛고 거인처럼 서서 우는 너를 보았다. 너는 내 안에 있다. (시집 {절정의 노래}, 1991)     390.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정희성(鄭喜成)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 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 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문학사상}, 1978.2)     391. 산정 묘지(山頂墓地)․1                                           - 조정권(趙鼎權)   겨울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산정(山頂)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天上)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天上)의 일각(一角)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同列)에 서는 것. 그러나 한 번 잠든 정신은 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리. 하나의 형상 역시 누군가 막대기로 후려치지 않는 한 다른 형상을 취하지 못하리. 육신이란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 헛된 휴식과 잠 속에서의 방황의 나날들. 나의 영혼이 이 침묵 속에서 손뼉 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다면 어느 형상도 다시 꿈꾸지 않으리. 지금은 결빙하는 계절, 밤이 되면 물과 물이 서로 끌어당기며 결빙의 노래를 내 발밑에서 들려 주리.   여름 내내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하여 계곡을 울리며 폭포를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들은 얼어붙어 있다. 계곡과 계곡 사이 잔뜩 엎드려 있는 얼음 덩어리들은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해 있다. 결빙의 바람이여, 내 핏줄 속으로 회오리 치라. 나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나의 전신을 관통하라. 점령하라. 도취하게 하라. 산정의 새들은 마른 나무 꼭대기 위에서 날개를 접은 채 도취의 시간을 꿈꾸고 열매들은 마른 씨앗 몇 개로 남아 껍데기 속에서 도취하고 있다. 여름 내내 빗방울과 입맞추던 뿌리는 얼어붙은 바위 옆에서 흙을 물어뜯으며 제 이빨에 도취하고 바위는 우둔스런 제 무게에 도취하여 스스로 기쁨에 떨고 있다.   보라, 바위는 스스로의 무거운 등짐에 스스로 도취하고 있다. 허나 하늘은 허공에 바쳐진 무수한 가슴. 무수한 가슴들이 소거(消去)된 허공으로, 무수한 손목들이 촛불을 받치면서 빛의 축복이 쌓인 나목(裸木)의 계단을 오르지 않았는가. 정결한 씨앗을 품은 불꽃을 천상의 계단마다 하나씩 바치며 나의 눈은 도취의 시간을 꿈꾸지 않았는가. 나의 시간은 오히려 눈부신 성숙의 무게로 인해 침잠하며 하강하지 않았는가. 밤이여 이제 출동 명령을 내리라. 좀더 가까이 좀더 가까이 나의 핏줄을 나의 뼈를 점령하라, 압도하라, 관통하라.   한때는 눈비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한때는 바람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그리고 다시 한때는 물과 불의 형상으로 오던 나날의 어둠. 그 어둠 속에서 헛된 휴식과 오랜 기다림 지치고 지친 자의 불면의 밤을 내 나날의 인력으로 맞이하지 않았던가. 어둠은 존재의 처소(處所)에 뿌려진 생목(生木)의 향기 나의 영혼은 그 향기 속에 얼마나 적셔두길 갈망해 왔던가. 내 영혼이 내 자신의 축복을 주는 휘황한 백야(白夜)를 내 얼마나 꿈꾸어 왔는가.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누르지 않는다면. (시집 {산정 묘지}, 1991)     392. 슬픔으로 가는 길                                           - 정호승(鄭浩承)   내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낯선 새 한 마리 길 끝으로 사라지고 길가에 핀 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내 진실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으로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슬픔으로 걸어가는 들길을 걸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하나 슬픔을 앞세우고 내 앞을 지나가고 어디선가 갈나무 지는 잎새 하나 슬픔을 버리고 나를 따른다. 내 진실로 슬픔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으로 끝없이 걸어가다 뒤돌아보면 인생을 내려놓고 사람들이 저녁놀에 파묻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1979)     393. 동두천(東豆川)․I                                            - 김명인(金明仁)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신호등 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 내 급한 생각으로는 대체로 우리들도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이리라 혹은 떨어져 남게 되더라도 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 눈에 파묻혀 흐려지면서   우리가 내리는 눈일 동안만 온갖 깨끗한 생각 끝에 역두(驛頭)의 저탄 더미에 떨어져 몸을 버리게 되더라도 배고픈 고향의 잊힌 이름들로 새삼스럽게 서럽지는 않으리라 그만그만했던 아이들도 미군을 따라 바다를 건너서는 더는 소식조차 모르는 이 바닥에서   더러운 그리움이여 무엇이 우리가 녹은 눈물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 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느냐 바라보면 저다지 웅크린 집들조차 여기서는 공중에 뜬 신기루 같은 것을 발 밑에서는 메마른 풀들이 서걱여 모래 소리를 낸다   그리고 덜미에 부딪쳐 와 끼얹는 바람 첩첩 수렁 너머의 세상은 알 수도 없지만 아무것도 더 이상 알 필요도 없으리라 안으로 굽혀지는 마음 병든 몸뚱이들도 닳아 맨살로 끌려가는 진창길 이제 벗어날 수 없어도 나는 나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을 지나 떠나야 되돌아올 새벽을 죄다 건너가면서 (시집 {동두천}, 1979)     394.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金光圭)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 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1979)     395. 산문(山門)*에 기대어                                           - 송수권(宋秀權)   누이야 가을 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山多花)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 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 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 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 옴을 * 산문 : 절 혹은 절의 바깥문. * 그리메 : 그림자. * 즈믄 : 천(千).  ({문학사상}, 1975.2)     396. 그 날                                           - 이성복(李晟馥)   그 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 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 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 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 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그 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 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 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1980)     397. 세속도시의 즐거움 2                                          - 최승호(崔勝鎬) 상복 허리춤에 전대를 차고 곡하던 여인은 늦은 밤 손익을 계산해 본다.   시체 냉동실은 고요하다. 끌어모은 것들을 다 빼앗기고 (큰 도적에게 큰 슬픔 있으리라) 누워 있는 알거지의 빈 손, 죽어서야 짐 벗은 인간은 냉동실에 알몸거지로 누워 있는데   흑싸리를 던질지 홍싸리 껍질을 던질지 동전만한 눈알을 굴리며 고뇌하는 화투꾼들, 그들은 죽음의 밤에도 킬킬대며 잔돈 긁는 재미에 취해 있다.   외로운 시체를 위한 밤샘, 쥐들이 이빨을 가는 밤에 쭉정이 되는 추억의 이삭들과 침묵 속에서 냄새나는 이쑤시개를 들고 기웃거리는 죽음의 왕.   시체 냉동실은 고요하다. 홑거적 덮은 알몸의 주검이 혀에 성에 끼는 추위 속에 누워 있는 밤, 염장이가 저승의 옷을 들고 오고 이제 누구에게 죽음 뒤의 일을 물을 것인지 그의 입에 귀를 갖다댄다 죽은 몸뚱이가 내뿜는다 해도 서늘한 허(虛)  (시집 {세속도시의 즐거움}, 1990)     398.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황지우(黃芝雨)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1987)     399. 섬진강 1                                          - 김용택(金龍澤)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 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 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시집 {21인 신작 시집}, 1982)   400. 노동의 새벽                                                  - 박노해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아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 가지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 가도 끝내 못 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쳐진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시집 {노동의 새벽}, 1984)   --------------------------------------------- 400끝. 성장한 아들에게 작자미상 내 손은 하루 종일 바빴지. 그래서 네가 함께 하자고 부탁한 작은 놀이들을 함께 할 만큼 시간이 많지 않았다. 너와 함께 보낼 시간이 내겐 많지 않았어.   난 네 옷들을 빨아야 했고. 바느질도 하고, 요리도 해야 했지. 네가 그림책을 가져와 함께 읽자고 할 때마다 난 말했다. “조금 있다가 하자, 애야.”   밤마다 난 너에게 이불을 끌어당겨 주고, 네 기도를 들은 다음 불을 꺼주었다. 그리고 발 끗으로 걸어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지. 난 언제나 좀 더 네 곁에 있고 싶었다.   인생이 짧고,  세월이 쏜살같이 흘러갔기 때문에 한 어린 소년은 너무도 빨리 커버렸지. 그 아인 더 이상 내 곁에 있지 않으며 자신의 소중한 비밀을 내게 털어놓지도 않는다.   그림책들은 치워져 있고 이제 함께 할 놀이들도 없지. 잘 자라는 입맞춤도 없고, 기도를 들을 수도 없다. 그 모든 것들은 어제의 세월 속에 묻혀 버렸다.   한 때는 늘 바빴던 내 두 손은 이제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 하루하루가 너무도 길고 시간을 보낼 만한 일도 많지 않지. 다시 그때로 돌아가. 네가 함께 놀아 달라던 그 작은 놀이들을 할 수만 있다면.             [출처] [펌] 3. 한국현대시 400선|작성자 수위  
201    현대시 400선 ㄹ 댓글:  조회:3697  추천:3  2015-02-13
  200. 낙타(駱駝)                      - 이한직(李漢稷)   눈을 감으면   어린 시절 선생님이 걸어 오신다. 회초리를 들고서   선생님은 낙타처럼 늙으셨다. 늦은 봄 햇살을 등에 지고 낙타는 항시 추억한다. 옛날에 옛날에 낙타는 어린 시절 선생님처럼 늙었다. 나도 따뜻한 봄볕을 등에 지고 금잔디 위에서 낙타를 본다.   내가 여읜 동심의 옛 이야기가 여기 저기 떨어져 있음직한 동물원의 오후. ({문장} 7호, 1939.8)     ========================================================================== 5. 해방공간의 서정과 시적 인식의 확대 ========================================================================== 201. 그대들 돌아오시니 재외 혁명동지에게                       - 정지용(鄭芝溶)   백성과 나라가 이적(夷狄)에 팔리우고 국사(國祠)에 사신(邪神)이 오연(傲然)히 앉은지 죽음보다 어두운 오호 삼십육년!   그대들 돌아오시니 피 흘리신 보람 찬란히 돌아오시니!   허울 벗기우고 외오* 돌아섰던 산(山)하! 이제 바로 돌아지라 자휘* 잃었던 물 옛 자리로 새소리 흘리어라 어제 하늘이 아니어니 새론 해가 오르라   그대들 돌아오시니 피 흘리신 보람 찬란히 돌아오시니!   밭 이랑 문희우고* 곡식 앗어가고 이바지 하올 가음*마저 없어 금의(錦衣)는커니와 전진(戰塵) 떨리지 않은 융의(戎衣)* 그대로 뵈일밖에!   그대들 돌아오시니 피 흘리신 보람 찬란히 돌아오시니!   사오나온 말굽에 일가 친척 흩어지고 늙으신 어버이, 어린 오누이 낯서라 흙에 이름 없이 구르는 백골!   상기 불현듯 기다리는 마을마다 그대 어이 꽃을 밟으시리 가시덤불, 눈물로 헤치시라   그대들 돌아오시니 피 흘리신 보람 찬란히 돌아오시니!   * 외오 : '잘못'의 옛말. * 자휘(字彙) : 글자의 수효, 여기서는 이름을 의미함. * 문희우고 : 무너뜨리고. * 가음 : 감. 재료나 바탕. * 융의 : 옛날 군복의 한 가지.  (시집 {해방기념시집}, 1945.12)     202. 산상(山上)의 노래                      - 조지훈(趙芝薰)   높으디 높은 산마루 낡은 고목에 못박힌듯 기대여 내 홀로 긴 밤을 무엇을 간구하며 울어왔는가.   아아 이 아침 시들은 핏줄의 구비구비로   싸늘한 가슴의 한복판까지 은은히 울려오는 종소리   이제 눈 감아도 오히려 꽃다운 하늘이거니 내 영혼의 촛불로 어둠 속에 나래 떨던 샛별아 숨으라   환히 트이는 이마 우 떠오르는 햇살은 시월 상달의 꿈과 같고나   메마른 입술에 피가 돌아 오래 잊었던 피리의 가락을 더듬노니   새들 즐거이 구름 끝에 노래 부르고 사슴과 토끼는 한 포기 향기로운 싸릿순을 사양하라.   여기 높으디 높은 산마루 맑은 바람 속에 옷자락을 날리며 내 홀로 서서 무엇을 기다리며 노래하는가. (시집 {해방기념시집}, 1945.12)     203. 해                        - 박두진(朴斗鎭)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에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애띠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상아탑} 6호, 1946.5)     204. 꽃 덤 불                       - 신석정(辛夕汀)   태양을 의논하는 거룩한 이야기는 항상 태양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하였다.   달빛이 흡사 비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우리는 헐어진 성(城)터를 헤매이면서 언제 참으로 그 언제 우리 하늘에 오롯한 태양을 모시겠느냐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가슴을 쥐어뜯지 않았느냐?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여섯 해가 지내갔다.   다시 우러러보는 이 하늘에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오는 봄엔 분수(噴水)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그 어느 언덕 꽃덤불에 아늑히 안겨 보리라. ({신문학} 2호, 1946.6)       205. 슬픈 역사의 밤은 새다                      - 조영출(趙靈出)   눈 쌓인 허허 벌판 피ㅅ방울 흘리며 걸어간 발자욱 세찬 바람에 쏠리는 눈보라야 너는 이 발자욱 앞에 네 광란을 멈춘 일이 있었드냐.   눈싸락 차운 국경의 빙판 피 눈물 방울 흘리며 떠나간 발자욱   서슬이 푸른 아수라*의 별들아 너는 이 발자욱 뒤에 네 체포를 멈춘 일이 있었드냐.   오오 슬픈 압제의 밤은 가슴을 찔러 흐른 피에 사상(思想)이 꽃처럼 피다   눈보라 속에 파묻힌 님의 눈동자 마음의 광채   금ㅅ줄을 띠운 토방(土房)의 등불마다 강보의 어린 울음이 터져 올랐다.   님은 가고 여기 어린 생명은 살고 칼날이 선 울타리 속에 이 어린 목숨이 살어   지금 오오 지금 이 슬픈 역사의 밤은 새다   보라 저 푸른 하늘 저 태극기 꽂힌 지붕을 넘어오는 흰 비둘기 붉은 태양   오호 붉은 태양아 슬픈 역사의 밤은 영원히 밝었느냐.   * 아수라(阿修羅) : 불교에서 이르는, 싸움을 일삼는 나쁜 귀신. ({예술운동}, 1945.12)     206. 연가 (戀歌)                    - 김기림(金起林) 두 뺨을 스치는 바람결이 한결 거세어 별이 꺼진 하늘 아래 짐승처럼 우짖는 도시의 소리 피해오듯 돌아오면서 내 마음 어느 새 그대 곁에 있고나 그대 마음 내게로 온 것이냐   육로(陸路)로 천리(千里) 수로(水路) 천리 오늘 밤도 소스라쳐 깨우치는 꿈이 둘 가로수 설레는 바람소리 물새들 잠꼬대…… 그대 앓음소리 아닌 것 없고나   그대 있는 곳 새나라 오노라 얼마나, 소연하랴* 병 지닌 가슴에도 장미 같은 희망이 피어 그대 숨이 가뻐 처녀같이 수다스러우리라   회오리 바람 미친 밤엔 우리 어깨와 어깨 지탱하여 찬비와 서릿발 즐거이 맞으리라 자빠져 김나는 뭉둥아리* 하도 달면* 이리도 피해 달아나리라   새나라 언약이 이처럼 화려커늘 그대와 나 하루살이 목숨쯤이야 빛나는 하루 아침 이슬인들 어떠랴   * 소연(騷然)하다 : 떠들썩하다. * 뭉둥아리 : 몸뚱어리. * 달다 : 몸이 화끈해지다. ({중앙신문}, 1946.4.27)     207. 9월 12일 1945년, 또다시 네거리에서                         - 임 화(林和)   조선 근로자의 위대한 수령의 연설이 유행가처럼 흘러나오는 마이크를 높이 달고   부끄러운 나의 생애의 쓰라린 기억이 포석(鋪石)마다 널린 서울 거리는 비에 젖어   아득한 산도 가차운 들창도 현기로워 바라볼 수 없는 종로 거리   저 사람의 이름 부르며 위대한 수령의 만세 부르며 개아미마냥 모여드는 천만의 사람   어데선가 외로이 죽은 나의 누이의 얼굴 찬 옥방(獄房)에 숨지운 그리운 동무의 모습 모두 다 살아오는 날 그 밑에 전사하리라 노래부르던 깃발 자꾸만 바라보며   자랑도 재물도 없는 두 아이와 가난한 안해여   가을비 차거운 길가에 노래처럼 죽는 생애의 마지막을 그리워 눈물짓는 한 사람을 위하여   원컨대 용기이어라. (시집 {찬가}, 1947)     208. 깃발을 내리자                     - 임 화(林和) 노름꾼과 강도를 잡든 손이 위대한 혁명가의 소매를 쥐려는 욕된 하늘에 무슨 깃발이 날리고 있느냐   동포여! 일제히 깃발을 내리자   가난한 동포의 주머니를 노리는 외국 상관(商館)의 늙은 종들이 광목(廣木)과 통조림의 밀매를 의논하는 폐(廢) 왕궁의 상표를 위하여 우리의 머리 위에 국기를 날릴 필요가 없다   동포여 일제히 깃발을 내리자   살인의 자유와 약탈의 신성이 주야로 방송되는 남부조선 더러운 하늘에 무슨 깃발이 날리고 있느냐   동포여 일제히 깃발을 내리자 (시집 {찬가}, 1947)   209. 병든 서울                      - 오장환(吳章煥)   8월 15일 밤에 나는 병원에서 울었다. 너희들은 다 같은 기쁨에 내가 운 줄 알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일본 천황의 방송도, 기쁨에 넘치는 소문도, 내게는 곧이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저 병든 탕아(蕩兒)로 홀어머니 앞에서 죽는 것이 부끄럽고 원통하였다.   그러나 하루 아침 자고 깨니 이것은 너무나 가슴을 터치는 사실이었다. 기쁘다는 말, 에이 소용도 없는 말이다. 그저 울면서 두 주먹을 부르쥐고 나는 병원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어째서 날마다 뛰쳐나간 것이냐. 큰 거리에는, 네거리에는, 누가 있느냐. 싱싱한 사람 굳건한 청년, 씩씩한 웃음이 있는 줄 알았다.   아, 저마다 손에 손에 깃발을 날리며 노래조차 없는 군중이 만세로 노래를 부르며 이것도 하루 아침의 가벼운 흥분이라면…… 병든 서울아, 나는 보았다. 언제나 눈물 없이 지날 수 없는 너의 거리마다 오늘은 더욱 짐승보다 더러운 심사에 눈깔에 불을 켜들고 날뛰는 장사치와 나다니는 사람에게 호기 있이 먼지를 씌워 주는 무슨 본부, 무슨 본부, 무슨 당, 무슨 당의 자동차.   그렇다. 병든 서울아, 지난날에 네가, 이 잡놈 저 잡놈 모두 다 술취한 놈들과 밤늦도록 어깨동무를 하다시피 아 다정한 서울아 나도 밑천을 털고 보면 그런 놈 중의 하나이다. 나라 없는 원통함에 에이, 나라 없는 우리들 청춘의 반항은 이러한 것이었다. 반항이여! 반항이여! 이 얼마나 눈물나게 신명나는 일이냐   아름다운 서울, 사랑하는 그리고 정들은 나의 서울아 나는 조급히 병원 문에서 뛰어나온다 포장친 음식점, 다 썩은 구루마*에 차려 놓은 술장수 사뭇 돼지 구융*같이 늘어선 끝끝내 더러운 거릴지라도 아, 나의 뼈와 살은 이곳에서 굵어졌다.   병든 서울, 아름다운, 그리고 미칠 것 같은 나의 서울아 네 품에 아무리 춤추는 바보와 술취한 망종이 다시 끓어도 나는 또 보았다. 우리들 인민의 이름으로 씩씩한 새 나라를 세우려 힘쓰는 이들을…… 그리고 나는 외친다. 우리 모든 인민의 이름으로 우리네 인민의 공통된 행복을 위하여 우리들은 얼마나 이것을 바라는 것이냐. 아, 인민의 힘으로 되는 새 나라   8월 15일, 9월 15일, 아니, 삼백예순 날 나는 죽기가 싫다고 몸부림치면서 울겠다. 너희들은 모두 다 내가 시골 구석에서 자식 땜에 아주 상해 버린 홀어머니만을 위하여 우는 줄 아느냐. 아니다, 아니다. 나는 보고 싶으다. 큰물이 지나간 서울의 하늘아 그때는 맑게 개인 하늘에 젊은이의 그리는 씩씩한 꿈들이 흰구름처럼 떠도는 것을……   아름다운 서울, 사모치는, 그리고, 자랑스런 나의 서울아, 나라 없이 자라난 서른 해 나는 고향까지 없었다. 그리고, 내가 길거리에서 자빠져 죽는 날, '그곳은 넓은 하늘과 푸른 솔밭이나 잔디 한 뼘도 없는' 너의 가장 번화한 거리 종로의 뒷골목 썩은 냄새 나는 선술집 문턱으로 알았다.   그러나 나는 이처럼 살았다. 그리고 나의 반항은 잠시 끝났다.   아 그 동안 슬픔에 울기만 하여 이냥 질척거리는 내 눈 아 그 동안 독한 술과 끝없는 비굴과 절망에 문드러진 내 쓸개 내 눈깔을 뽑아 버리랴, 내 쓸개를 잡아 떼어 길거리에 팽개치랴.   * 구루마 : 짐수레. 달구지. * 구융 : '구유'의 사투리로 마소의 먹이를 담아 주는 나무 그릇. ({상아탑} 창간호, 1945.12)     210. 순 아                       - 박세영(朴世永)   순아 내 사랑하는 동생, 둘도 없는 내 귀여운 누이 내가 홀홀이 집을 떠날 제 너는 열 여섯의 소녀.   밤벌레같이 포동포동하고 샛별 같은 네 눈, 내 어찌 그 때를 잊으랴. 순아 너, 내 사랑하는 순아, 너는 오빠 없는 집을 버리려고 내가 집을 떠나자마자 서울로 갔드란 말이냐.   집에는 홀어머니만 남기고, 어찌하면 못살어 놈들의 꼬임에 빠져 가고 말었더냐. 어머닌 어쩌라고 너마저 갔더란 말이냐.   그야 낸들 목숨이 아까와 떠났겠니, 우리들의 일을 위하여 산 설고 물 설은 딴 나라로, 달포나 걸어가지 않었겠니.   어느듯 그 때도 삼년 전 옛 일, 내 몸은 헐벗고 여위고 한숨의 긴 날을 보냈을 망정, 조국을 살리려는 오즉 그 뜻 하나로 나는 양식을 삼었거니. 너, 내 사랑하는 순아! 빼앗긴 조국은 해방이 되여 왜놈의 넋이 타 버리고, 오빠는 미칠듯 서풍모냥 왔는데도 너는 병든 몸으로 돌아오다니.   딴 시악씨드냐, 그 고왔던 얼굴이 어디로 가고 내 그 옛날 순이는 찾을 길 없고나.   가여워라 지금의 네 모습 어쩌면 그다지도 해쓱하냐, 어린 너의 피까지 앗어가다니 놈들의 공장 악마의 넋이 아직도 씨였니. 그러나 너, 내 사랑하는 순아, 집을 돌보려는 너의 뜻 장하고나, 낮과 밤, 거리거리로 입술에 북홍칠*하고 나돌아다니는 오직 행락만 꿈꾸는 시악씨들보다야.   왜놈의 턱찌끼를 얻어먹고 호사하며, 침략자와 어울리여 민족을 팔아먹으랴던 반역자의 노리개가 아닌 너 순아 차라리 깨끗하고나, 조선의 순진하고 참다운 계집애로구나.   * 북홍(北紅)칠: 매우 붉은 색칠 (시집 {횃불}, 1946)     211. 3 ․ 1날이여! 가슴아프다                       - 김광균(金光均)   조선독립만세 소리는 나를 키워준 자장가다 아버지를 여읜 나는 이 요람의 노래 속에 자라났다 아 봄은 몇 해만에 다시 돌아와 오늘 이 노래를 들려주건만 3․1날이여 가슴아프다 싹트는 새 봄을 우리는 무엇으로 맞이했는가 겨레와 겨레의 싸움 속에 나는 이 시를 눈물로 쓴다 이십칠년전 오늘을 위해 누가 녹스른 나발을 들어 피나게 울랴 해방의 종소리는 허공에 사라진 채 영영 다시 오지 않는가 눈물에 어린 조국의 깃발은 다시 땅 속에 묻혀지는가 상장(喪章)을 달고 거리로 가자 우리 껴안고 목놓아 울자 3․1날이여 가슴 아프다 싹트는 새 봄을 우리는 무엇으로 맞이했는가 (시집 {3․1기념 시집}, 1946.3)     212. 해바라기 3                         - 설정식(薛貞植)   해바라기는 차라리 견디기 위하야 해바라기는 차라리 믿음을 위하야 너희들의 미래(未來)를 건지기 위하야   무심(無心)한 태양(太陽)이 사슴의 목을 말리고 수풀에 불을 질르고 바다 천심(千尋)을 짜게 하여도   해바라기는 호올로 너의들의 타락(墮落)을 거부(拒否)하였다   모든 꽃이 아름다운 십자가(十字架)에 죽은 날 모든 열매가 여지(餘地)없이 유린을 당한 날 그들이 모다 원죄(原罪)로 돌아간 날   무도(無道)한 태양(太陽)이 인간(人間) 우에 군림(君臨)하고 인간(人間)은 또 인간(人間) 우에 개가(凱歌)를 부르고 이기랴든 멍에냐 어깨마저 꺼저도   해바라기는 호올로 태양(太陽)에 필적(匹敵)하였다 (시집 {종}, 1947.4)     213. 종(鐘)                      - 설정식(薛貞植)   만(萬) 생령(生靈) 신음을 어드메 간직하였기 너는 항상 돌아앉어 밤을 지키고 새우느냐 무거히 드리운 침묵이여 네 존엄을 뉘 깨트리드뇨 어느 권력이 네 등을 두드려 목메인 오열을 자아내드뇨   권력이어든 차라리 살을 앗으라 영어(囹圄)에 물러진 살이어든 아 권력이어든 아깝지도 않은 살을 저미라   자유는 그림자보다는 크드뇨 그것은 영원히 역사의 유실물이드뇨 한아름 공허(空虛)여 아 우리는 무엇을 어루만지느뇨   그러나 무거히 드리운 인종(忍從)이여 동혈(洞穴)보다 깊은 네 의지 속에 민족의 감내(堪耐)를 살게 하라 그리고 모든 요란한 법(法)을 거부하라   내 간 뒤에도 민족은 있으리니 스스로 울리는 자유를 기다리라 그러나 내 간 뒤에도 신음은 들리리니 네 파루(破漏)를 소리없이 치라 ({문학}, 1946.7)     214. 봄 날                       - 여상현(呂尙玄)   논두렁가로 바스락 바스락 땅강아지 기어나고 아침 망웃 뭉게뭉게 김이 서리다   꼬추잠자리 저자를 선* 황토물 연못가엔 약에 쓴다고 비단개구리 잡는 꼬마둥이 녀석들이 움성거렸다   바구니 낀 계집애들은 푸른 보리밭 고랑으로 기어들고 까투리는 쟁끼* 꼬리를 물고 산기슭을 내리는구나   꿀벌떼 노오란 장다리* 밭에서 잉잉거리고 동구밖 지름길론 갈모*를 달아맨 괴나리봇짐*이 하나 떠나간다   성황당 돌무데기 우거진 찔레ㅆ엔 사철 하얀 종이쪽이 나풀거리더니 꽃이 피었네   느티나무 아래 빨간 자전거 하나 자는 듯 고요한 마을에 무슨 소식이 왔다   * 저자를 서다 : 장이 서다. 여기에서는 잠자리들이 매우 많다는 의미. * 쟁끼 : 장끼[수꿩]의 방언. * 장다리 : 무나 배추 따위의 꽃줄기. * 갈모 : 기름 종이로 만들어, 비가 올 때 갓 위에 덮어 쓰는 것. * 괴나리봇짐 : 걸어갈 때 등에 짊어지는 조그마한 봇짐. (시집 {해방기념시집}, 1945.12)     215. 분 수                       - 여상현(呂尙玄)   슬픈 역사가 오수에 잠긴 고궁   홰를 치며 우는 닭의 울음이 어데서 들릴 것만 같다   하늘을 쏘는 분수 지열과 함께 맹렬히 뿜는 의분이런가   장(墻) 넘어 불타는 아스팔트 거리에는 생활이 낙엽처럼 구르고   텅 비인 정원엔 성조기 하나 '공위(共委)'* 휴회후, 원정(園丁)*은 때때로 먼 허공만 바라볼 뿐   비둘기 깃드는 추녀 끝엔 풍경이 떨고 꼬리치며 모였던 금붕어떼 금새 흩어진다   노상 속임수 많은 여름 구름은 무슨 재주를 필듯이 머뭇머뭇 지나가는데 내 마음의 분수도 사뭇 솟구치려 하는구나 (덕수궁에서)   * 공위(共委) : 미소공동위원회. * 원정(園丁) : 정원사. (시집 {칠면조}, 1947.9)     216. 아버지의 창 앞에서                       - 김상훈(金尙勳)   등짐지기 삼십리길 기어 넘어 가쁜 숨결로 두드린 아버지의 창 앞에 무서운 글자있어 '공산주의자는 들지 말라' 아아 천날을 두고 불러왔거니 떨리는 손 문고리 잡은 채 물끄러미 내 또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고   태어날 적부터 도적의 영토에서 독(毒)스런 우로(雨路)에 자라 가난해두 조선(祖先)이 남긴 살림, 하구 싶든 사랑을 먹으면 화를 입는 저주받은 과실인듯이 진흙 불길한 땅에 울며 파묻어 버리고 내 옹졸하고 마음 약한 식민지의 아들 천근 무거운 압력에 죽음이 부러우며 살아왔거니 이제 새로운 하늘 아래 일어서고파 용솟음치는 마음 무슨 야속한 손이 불길에 다시금 물을 붓는가   징용살이 봇짐에 울며 늘어지든 어머니 형무소 창구멍에서 억지로 웃어보이던 아버지 머리 쓰다듬어 착한 사람 되라고 옛글에 일월(日月)같이 뚜렷한 성현의 무리 되라고 삼신판에 물 떠놓고 빌고, 말 배울 적부터 정전법(井田法)을 조술(祖述)하드니 이젠 가야할 길 미더운 깃발 아래 발을 맞추려거니 어이 역사가 역류하고 모든 습속이 부패하는 지점에서 지주의 맏아들로 죄스럽게 늙어야 옳다 하시는고 아아 해방된 다음날 사람마다 잊은 것을 찾어 가슴에 품거니 무엇이 가로막어 내겐 나라를 찾든 날 어버이를 잃게 하느냐   형틀과 종문서 지니고, 양반을 팔아 송아지를 사든 버릇 소작료 다툼에 마음마다 곡성이 늘어가던 낡고 불순한 생활 헌신짝처럼 벗어버리고 저기 붉은 기폭 나부끼는 곳, 아들 아버지 손길 맞잡고 이 아침에 새로야 떠나지는 못하려는가 …… 아아 빛도 어둠이련듯 혼자 넘는 고개 스물일곱 해 자란 터에 내 눈물도 남기지 않으리 벗아! 물끓듯 이는 민중의 함성을 전하라 내 잠깐 악몽을 물리치고 한거름에 달려가마 ({문학}, 1946.11)     217. 호 롱 불                      - 김상훈(金尙勳)   석유를 그득히 부은 등잔은 밤이 깊도록 홰가 났다* 끄으름을 까 맣게 들어마시며 노인들의 이야기는 죽구 싶다는 말 뿐이다   쓸만한 젊은 것은 잡혀가고 기운 센 아이들 노름판으로 가고 애당초 누구를 위한 농사냐고 이박사의 이름을 잊으려 애썼다   곳집에 도적이 들었다는 흉한 소문이 대수롭지 않다 삼백석이 넘어 쌓여 있다는 곡식이 그들의 아들이 굶어 죽는데는 아무 소용이 없었던 까닭이다 암탉이 알을 낳지 않고 술집이 또 하나 늘었고 손주 며느리 낙태를 했다고 등잔에 하소*해 보는 집집마다의 늙은이 잠들면 악한 꿈을 꾸겠기에 짚신을 삼아 팔아서라도 부지런히 석유만은 사 왔다   * 홰가 나다 : 불이 타오르다. * 하소 : 하소연의 준말. (시집 {대열}, 1947.5)     218. 그 리 움                            - 이용악(李庸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白茂線) 철길 위에 느릿느릿 밤새어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협동}, 1947.2)     219. 하나씩의 별                       - 이용악(李庸岳) 무엇을 실었느냐 화물열차의 검은 문들은 탄탄히 잠겨졌다 바람 속을 달리는 화물열차의 지붕 위에 우리 제각기 드러누워 한결같이 쳐다보는 하나씩의 별   두만강 저쪽에서 온다는 사람들과 쟈무스*에서 온다는 사람들과 험한 땅에서 험한 변 치르고 눈보라 치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남도 사람들과 북어쪼가리 초담배 밀가루떡이랑 나눠서 요기하며 내사 서울이 그리워 고향과는 딴 방향으로 흔들려 간다 푸르른 바다와 거리 거리를 설움 많은 이민열차의 흐린 창으로 그저 서러이 내다보던 골짝 골짝을 갈 때와 마찬가지로 헐벗은 채 돌아오는 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헐벗은 나요 나라에 기쁜 일 많아 울지를 못하는 함경도 사내   총을 안고 뽈가*의 노래를 부르던 슬라브의 늙은 병정은 잠이 들었나 바람 속을 달리는 화물열차의 지붕 위에 우리 제각기 드러누워 한결같이 쳐다보는 하나씩의 별   * 쟈무스(佳木斯) : 중국의 쑹화강(松花江) 상류, 러시아와의 국경 가까이에 있는 도시. * 뽈가 : 폴카(polka), 보헤미안의 경쾌한 무곡(舞曲). (시집 {이용악집}, 1949)     220. 불 길                          - 유진오(兪鎭五)   그리운 사람이 있음으로 해 더 한층 쓸쓸해지는 가을밤인가 보다   내사 퍽이나 무뚝뚝한 사나이 그러나 마음 속 숨은 불길이 사뭇 치밀려오면 하늘도 땅도 불꽃에 싸인다   아마 이 불길이 너를 태우리라 이 불길로 해 나는 쓸쓸하고 안타까운 밤은 숨막힐 듯 기인가 보다 불길이 스러진 뒤엔 재만 남을 뿐이라고 유식한 사람들은 말하더라만 더러운 돼지 구융*같이 더러운 것 징글맞게 미운 것들을 모조리 집어 삼키는 불길! 이것은 승리가 아니고 무엇이냐   나는 일찍이 이렇게 신명나는 그리고 아름다운 불길을 사랑한다   낡은 도덕(道德)이나 점잖은 이성(理性)은 가르친다 그것은 너무나 두렵고 위험(危險)하지 않느냐고   어리석은 사람아 싸늘한 이성 뒤에 숨은 네 거짓과 비겁을 허물치 말까 보냐   네가 생각지도 못한 꿈조차 꿀 수 없던 그런 것이 젊은이 가슴에 손에 담겨서 그득히 앞으로만 향해 간다   외곬으로 타는 마음이 있어 괴로운 밤 나의 사랑 나의 자랑아 나는 불길에 싸여버린다 * 구융: 구유의 사투리. 구유는 마소의 먹이를 담는 큰 그릇. (시집 {창}, 1948) 221. 향 수                      - 유진오(兪鎭五)   금시에 깨어질듯 창창한 하늘과 별이 따로 도는 밤   엄마여 당신의 가슴 우에 서리가 나립니다   세상메기 젖먹이 말썽만 부리던 막내놈 어리다면 차라리 성가시나마 옆에 앉고 보련만   아! 밤이 부스러지고 총소리 엔진소리 어지러우면 파도처럼 철렁 소금 먹은듯 저려오는 당신의 가슴 이 녀석이 어느 곳 서릿 길 살어름짱에 쓰러지느냐   엄마여 무서리 하얗게 풀잎처럼 가슴에 어리는 나의 밤에   당신의 옷고름 히살짓던* 나의 사랑이 지열(地熱)과 함께 으지직 또 하나의 어둠을 바위처럼 무너뜨립니다   손톱 밑 갈갈이 까실까실한 당신의 손 창자 속에 지니고   엄마여 이 녀석은 훌훌 뛰면서 이빨이 사뭇 칼날보다 날카로워 갑니다   * 히살짓다 : 헤살짓다. 짓궂게 훼방놓다. ({신천지}, 1949.2)     222. 곡(哭) 오호애재(嗚呼哀哉)                       - 이병철(李秉哲)   아들따라 손주놈들 앞뒤에 주렁주렁 거느리고 서울메누리 앞세우고, 날만 따스 해지면 남산공원으로 동물원으로 화신상회로 나들이 실컨 서울구경을 하시겠다는 어머니.   태백산 밑에서 나서 태백산 밑에서 여쉰 환갑투룩 밭갈기와 산에 산나물 이름 섬기기와 호박국에 농사는 천하지대본이라는 것과.   열두대문집 마름살이 한세월에 천한 사람의 말 두어 천 개쯤 귀에 익혔을 뿐, 흙빛 얼굴을 들어 유쾌한 웃음 한번 온전히 웃어 본적도 없이 느티나무처럼 늙은 어머니.   멧돼지보다도 더한 등살에 자식놈들 뿔뿔이 잃어 버렸든 자식놈들따라, 인제사 좋은 세상 왔으니 기와집 한 채쯤 지니고 서울 살겠다고, 서울에는 사래 긴 밭도 많고 논도 많을 줄 알았다고.   여름에 보리밥 먹기 좋은 상추쌈과 녹두랑 팥이랑 강냉이 당고추 같은 것이라든 지, 봄철 들면 뿌려야 할 가지가지 씨앗을, 뜨내기 이불 봇짐 속에 이어 오신 어머 니.   왜놈들 가고 또더한 왜놈들 등살에 예나제나 상기도 쫓겨다니기만 하는 둘째의 이름을 불러, 여느 때 참말로 좋은 세상이 와서 참말로 기와집 한 채쯤 지니고 살 겠느냐고 물으시던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날씨가 풀리어 채 따스해지기도 전에 화신상회 동물원 구경을 하시기도 전에, 쫓겨다니는 이 자식놈을 돌볼 겨를도 없이 어데로 어데로 이렇게 바삐 길을 채리시 는 것입니까.   목이 터지두룩 아모리 불러도 대답없이 하늘가 자꾸만 머얼리로 바삐 가시는 어 머니, 어디메 살기 좋은 나라 살기 좋은 번지수를 찾아 가시기에 이처럼 이처럼 바 쁜 길이옵니까.   가시든 길 돌아오이소 어머니, 왜놈들과 왜놈들의 붙이는 아주 사뭇 쫓아버리고 봄이 오면 틀림없이 이 땅에 봄이 오면, 이불봇짐과 함께 가지고 오신 어머니의 씨앗을 갈아 꽃 피우겠습니다, 꽃 피우겠습니다. ({문학평론}, 1947.4)     223. 역 마 차                        - 김철수(金哲洙)   설움 많은 밤이 오면은 우리 모두들 역마차를 타자   반기어주는 이 없는 폐도(廢都) 여기 별없는 거리 자꾸 그리운 합창이 듣고파 내 오늘도 또 한 잔 소주에 잠겨 이리 비틀거리는 사내이구나   흔들려 부딪치는 어깨 위에 저 가난한 골들이 형제요 동포이라는 나의 외로움 속에서는 우리 좀더 정다운 나그네여서 따뜻한 마을을 찾아가는 것이냐   이제는 통곡조차 잊어버린 사람들…… 열리는 아침을 믿어 가는 길인가   그러면 믿븐* 사람이여 어디 있는가 높은 곳에 기다리는 공화국의 문이여 어디 있는가 절름거리는 궤짝 위의 차거운 꿈에서도 역마야 너와 나와는 원수이지 말자   미친 채찍이 바람을 찢고 창살 없는 얼굴에 빗발은 감기는데 낙엽도 시월도 휘 파람 하나 없이 이대도록 흔들리며 폐도의 밤을 간다   * 믿븐 : 믿음직한. ({신천지}, 1948.2)     224. 지렁이의 노래                      - 윤곤강(尹崑崗) 아지못게라 검붉은 흙덩이 속에 나는 어찌하여 한 가닥 붉은 띠처럼 기인 허울을 쓰고 태어났는가   나면서부터 나의 신세는 청맹과니* 눈도 코도 없는 어둠의 나그네이니 나는 나의 지나간 날을 모르노라 닥쳐 올 앞날은 더욱 모르노라 다못* 오늘만을 알고 믿을 뿐이노라   낮은 진구렁 개울 속에 선잠을 엮고 밤은 사람들이 버리는 더러운 쓰레기 속에 단 이슬을 빨아마시며 노래 부르노니 오직 소리 없이 고요한 밤만이 나의 즐거운 세월이노라 집도 절도 없는 나는야 남들이 좋다는 햇볕이 싫어 어둠의 나라 땅 밑에 번드시 누워 흙물 달게 빨고 마시다가 비오는 날이면 땅위에 기어나와 갈 곳도 없는 길을 헤매노니   어느 거친 발길에 채이고 밟혀 몸이 으스러지고 두 도막에 잘려도 붉은 피 흘리며 흘리며 나는야 아프고 저린 가슴을 뒤틀며 사노라   (정해 여름 삼팔선을 마음하며)   * 청맹과니 : 겉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앞을 못보는 눈. * 다못 : 다만. (시집 {피리}, 1948)   ========================================================================== 6. 전통시의 계승과 변모 ========================================================================== 225. 은 수 저                      - 김광균(金光均)   산이 저문다 노을이 잠긴다 저녁밥상에 애기가 없다 애기 앉던 방석에 한 쌍의 은수저 은수저 끝에 눈물이 고인다   한밤중에 바람이 분다 바람 속에서 애기가 웃는다 애기는 방속을 들여다 본다 들창을 열었다 다시 닫는다   먼 들길을 애기가 간다 맨발 벗은 애기가 울면서 간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그림자마저 아른거린다 ({문학}, 1946.7)     226. 밀어 (密語)                      - 서정주(徐廷柱)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   굳이 잠긴 잿빛의 문을 열고 나와서 하늘가에 머무른 꽃봉오릴 보아라.   한없는 누에실의 올과 날로 짜 늘인 채일*을 두른 듯, 아늑한 하늘가에 뺨 부비며 열려 있는 꽃봉오릴 보아라.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   저, 가슴같이 따뜻한 삼월의 하늘가에 인제 바로 숨쉬는 꽃봉오릴 보아라.   * 채일 : '차일(遮日)'의 방언. 햇빛을 가리기 위해 치는 포장. ({백민}, 1947.2)       227. 국화 옆에서                      - 서정주(徐廷柱)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 무서리 : 그 해의 가을 들어 처음 내리는 묽은 서리. ({경향신문}, 1947.11.9)     228. 무등(無等)을 보며                      - 서정주(徐廷柱)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山)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 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午後)의 때가 오거든, 내외(內外)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 남루 : 헌 누더기. * 지란 : 영지와 난초. * 눙울쳐 : 기운을 잃고 풀이 꺾이어. * 쑥구렁 : 쑥이 자라는 험하고 깊은 구렁. 무덤.  ({현대 공론}, 1954.8)     229. 상리과원(上里果園)                      - 서정주(徐廷柱)   꽃밭은 그 향기만으로 볼진대 한강수(漢江水)나 낙동강(洛東江) 상류와도 같은 융융(隆隆)한 흐름이다. 그러나 그 낱낱의 얼굴들로 볼진대 우리 조카딸년들이나 그 조카딸년들의 친구들의 웃음판과도 같은 굉장히 즐거운 웃음판이다. 세상에 이렇게도 타고난 기쁨을 찬란히 터트리는 몸뚱아리들이 또 어디 있는가. 더구나 서양에서 건너온 배나무의 어떤 것들은, 머리나 가슴패기뿐만이 아니라 배와 허리와 다리 발꿈치에까지도 이쁜 꽃숭어리들을 달았다. 멧새, 참새, 때까치, 꾀꼬리, 꾀꼬리새끼들이 조석(朝夕)으로 이 많은 기쁨을 대신 읊조리고, 수십 만 마리의 꿀벌들이 왼종일 북치고 소고치고 마짓굿 울리는 소리를 하고, 그래도 모자라는 놈은 더러 그 속에 묻혀 자기도 하는 것은 참으로 당연(當然)한 일이다. 우리가 이것들을 사랑하려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묻혀서 누워 있는 못물과 같이 저 아래 저것들을 비취고 누워서, 때로 가냘프게도 떨어져 내리는 저 어린것들의 꽃잎사귀들을 우리 몸 위에 받아라도 볼 것인가. 아니면 머언 산(山)들과 나란히 마주 서서, 이것들의 아침의 유두 분면(油頭粉面)과, 한낮의 춤과, 황혼의 어둠 속에 이것들이 잦아들어 돌아오는 아스라한 침잠(沈潛)이나 지킬 것인가. 하여간 이 하나도 서러울 것이 없는 것들 옆에서, 또 이것들을 서러워하는 미물(微物) 하나도 없는 곳에서, 우리는 섣불리 우리 어린것들에게 설움 같은 걸 가르치지 말 일이다. 저것들을 축복(祝福)하는 때까치의 어느 것, 비비새의 어느 것, 벌 나비의 어느 것, 또는 저것들의 꽃봉오리와 꽃숭어리의 어느 것에 대체 우리가 항용 나직이 서로 주고받는 슬픔이란 것이 깃들이어 있단 말인가. 이것들의 초밤에의 완전 귀소(完全歸巢)가 끝난 뒤, 어둠이 우리와 우리 어린것들과 산과 냇물을 까마득히 덮을 때가 되거든, 우리는 차라리 우리 어린것들에게 제일 가까운 곳의 별을 가리켜 보일 일이요, 제일 오래인 종(鐘)소리를 들릴 일이다. ({현대공론}, 1954.11)       230. 광화문(光化門)                         - 서정주(徐廷柱)   북악(北岳)과 삼각(三角)이 형과 그 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 형의 어깨 뒤에 얼굴을 들고 있는 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 어느새인지 광화문 앞에 다다랐다.   광화문은 차라리 한 채의 소슬한 종교(宗敎). 조선 사람은 흔히 그 머리로부터 왼 몸에 사무쳐 오는 빛을 마침내 버선코에서까지도 떠받들어야 할 마련이지만, 왼 하늘에 넘쳐 흐르는 푸른 광명(光明)을 광화문 저같이 의젓이 그 날갯죽지 위에 싣고 있는 자도 드물다. 상하 양층(上下兩層)의 지붕 위에 그득히 그득히 고이는 하늘. 위층엣 것은 드디어 치일치일 넘쳐라도 흐르지만, 지붕과 지붕 사이에는 신방(新房) 같은 다락이 있어 아랫층엣 것은 그리로 왼통 넘나들 마련이다.   옥(玉)같이 고우신 이 그 다락에 하늘 모아 사시라 함이렷다.   고개 숙여 성(城) 옆을 더듬어 가면 시정(市井)의 노랫소리도 오히려 태고(太古) 같고 문득 치켜든 머리 위에선 낮달도 파르르 떨며 흐른다. ({현대문학} 8호, 1955.8)     231. 추천사( 韆詞) - 춘향(春香)의 말․1 -                        - 서정주(徐廷柱)   향단(香丹)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이 다수굿이 흔들리는 수양버들나무와 벼갯모에 뇌이듯한 풀꽃데미로부터, 자잘한 나비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산호(珊瑚)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채색(彩色)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 다오!   서(西)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 다오. 향단아. (시집 {서정주 시선}, 1956)     232. 다시 밝은 날에 - 춘향(春香)의 말․2 -                      - 서정주(徐廷柱)   신령님, 처음 내 마음은 수천만 마리 노고지리 우는 날의 아지랭이 같았습니다. 번쩍이는 비늘을 단 고기들이 헤엄치는 초록의 강 물결 어우러져 날으는 아기구름 같았습니다.   신령님, 그러나 그의 모습으로 어느 날 당신이 내게 오셨을 때 나는 미친 회오리바람이 되었습니다. 쏟아져 내리는 벼랑의 폭포, 쏟아져 내리는 소나기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령님, 바닷물이 작은 여울을 마시듯 당신이 다시 그를 데려가시고 그 훠 ㄴ한 내 마음에 마지막 타는 저녁 노을을 두셨습니다.   신령님, 그리하여 또 한번 내 위에 밝는 날 이제 산골에 피어나는 도라지꽃 같은 내 마음의 빛깔은 당신의 사랑입니다. (시집 {서정주 시선}, 1956)     233. 춘향 유문(春香遺文) - 춘향(春香)의 말․3 -                       - 서정주(徐廷柱)   안녕히 계세요. 도련님.   지난 오월 단옷날, 처음 만나던 날 우리 둘이서 그늘 밑에 서 있던 그 무성하고 푸르던 나무같이 늘 안녕히 안녕히 계세요.   저승이 어딘지는 똑똑히 모르지만, 춘향의 사랑보단 오히려 더 먼 딴 나라는 아마 아닐 것입니다.   천 길 땅 밑을 검은 물로 흐르거나 도솔천(兜率天)의 하늘을 구름으로 날더라도 그건 결국 도련님 곁 아니어요?   더구나 그 구름이 소나기 되어 퍼불 때 춘향은 틀림없이 거기 있을 거여요. (시집 {서정주 시선}, 1956)       234. 꽃밭의 독백(獨白) - 사소(娑蘇) 단장(斷章) -                                                         - 서정주(徐廷柱)   노래가 낫기는 그 중 나아도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가 멎어 버렸다. 활로 잡은 산돼지, 매[鷹]로 잡은 산새들에도 이제는 벌써 입맛을 잃었다. 꽃아, 아침마다 개벽(開闢)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낯 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 섰을 뿐이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海溢)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사조(思潮)} 창간호, 1958.6)     235. 동천(冬天)                      - 서정주(徐廷柱)   내 마음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즈믄 : 천(千)의 옛말. ({현대문학} 137호, 1966.5)       236. 신부(新婦)                       - 서정주(徐廷柱)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시집 {질마재 신화}, 1975)     237. 울 릉 도                      - 유치환(柳致環)   동쪽 먼 심해선(深海線)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금수(錦繡)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長白)의 멧부리 방울 뛰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창망(蒼茫)한 물굽이에 금시에 지워질 듯 근심스레 떠 있기에 동해 쪽빛 바람에 항시 사념(思念)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지나 새나 뭍으로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풍랑 따라 밀리어 오는 듯도 하건만,   멀리 조국의 사직(社稷)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 올 적마다, 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시집 {울릉도}, 1948)     238. 행복 (幸福)                        - 유치환(柳致環)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문예} 초하호, 1953)     239. 저 녁 놀                      - 유치환(柳致環)   굶주리는 마을 위에 놀이 떴다. 화안히 곱기만 한 저녁놀이 떴다.   가신 듯이 집집이 연기도 안 오르고 어린 것들 늙은이는 먼저 풀어져 그대로 밤자리에 들고,   끼니를 놓으니 할 일이 없어 쉰네도 나와 참 고운 놀을 본다. 원도 사또도 대감도 옛같이 없잖아 있어 거들어져 있어 하늘의 선물처럼 소리 없는 백성 위에 저녁놀이 떴다. (시집 {청마 시집}, 1954)     240.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 유치환(柳致環)   고독은 욕되지 않으다 견디는 이의 값진 영광.   겨울의 숲으로 오니 그렇게 요조(窈窕)턴 빛깔도 설레이던 몸짓들도 깡그리 거두어 간 기술사(奇術師)의 모자(帽子). 앙상한 공허만이 먼 한천(寒天) 끝까지 잇닿아 있어 차라리 마음 고독한 자의 거닐기에 좋아라.   진실로 참되고 옳음이 죽어지고 숨어야 하는 이 계절엔 나의 뜨거운 노래는 여기 언 땅에 깊이 묻으리.   아아, 나의 이름은 나의 노래. 목숨보다 귀하고 높은 것.   마침내 비굴한 목숨은 눈을 에이고, 땅바닥 옥엔 무쇠 연자를 돌릴지라도 나의 노래는 비도(非道)를 치레하기에 앗기지는 않으리.   들어 보라. 이 거짓의 거리에서 숨결쳐 오는 뭇 구호와 빈 찬양의 헛한 울림을. 모두가 영혼을 팔아 예복을 입고 소리 맞춰 목청 뽑을지라도   여기 진실은 고독히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동아일보}, 1960.3.13)     241. 풀잎 단장(斷章)                        - 조지훈(趙芝薰)   무너진 성터 아래 오랜 세월을 풍설(風雪)에 깎여 온 바위가 있다. 아득히 손짓하며 구름이 떠 가는 언덕에 말없이 올라서서 한 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풀잎을 바라보며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아 우리들 태초의 생명의 아름다운 분신으로 여기 태어나,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이 웃으며 얘기하노니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곳에 그윽이 피어오르는 한떨기 영혼이여. (시집 {풀잎 단장}, 1952)     242. 석문(石門)                        - 조지훈(趙芝薰)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뭇사람이 조바심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안에는, 석벽 난간(石壁欄干) 열두 층계 위에 이제 검푸른 이끼 가 앉았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다. 이 는 당신의 그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 앞에 어리울 때까지는, 천 년(千年)이 지나 도 눈 감지 않을 저희 슬픈 영혼의 모습입니다.   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운 이 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남긴 푸 른 도포 자락으로 이 눈썹을 씻으랍니까? 두 볼은 옛날 그대로 복사꽃 빛이지만, 한숨에 절로 입술이 푸르러 감을 어찌합니까?   몇 만리 굽이치는 강물을 건너와 당신의 따슨 손길이 저의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 그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 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어두운 밤 하늘 허공 중천(虛空中天)에 바람처럼 사라지는 저의 옷자락은, 눈물 어린 눈이 아니고는 보이 지 못하오리다.   여기 돌문이 있습니다. 원한도 사무칠 양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 이 있습니다.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 년(千年)토록 앉아 기다리라고, 슬픈 비바람에 낡아 가는 돌문이 있습니다. (시집 {풀잎 단장}, 1952)     243. 민들레꽃                       - 조지훈(趙芝薰)   까닭 없이 외로울 때는 노오란 민들레꽃 한 송이도 애처롭게 그리워지는데   아, 얼마나 한 위로이랴 소리쳐 부를 수도 없는 이 아득한 거리에 그대 조용히 나를 찾아 오느니   사랑한다는 말 이 한마디는 내 이 세상 온전히 떠난 뒤에 남을 것   잊어 버린다. 못 잊어 차라리 병이 되어도 아 얼마나 한 위로이랴 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 (시집 {풀잎 단장}, 1952)     244. 패강 무정(浿江無情)                        - 조지훈(趙芝薰)   평양(平壤)을 찾아 와도 평양성엔 사람이 없다.   대동강 언덕길에는 왕닷새 베치마 적삼에 소식(蘇式)* 장총을 메고 잡혀 오는 여자 빨치산이 하나.   스탈린 거리 잎 지는 가로수 밑에 앉아 외로운 나그네처럼 갈 곳이 없다. 십년 전 옛날 평원선(平元線) 철로 닦을 무렵, 내 원산(元山)에서 길 떠나 양덕 (陽德) 순천(順川)을 거쳐 걸어서 평양에 왔더니라.   주머니에 남은 돈은 단돈 십이 전(十二錢), 냉면 쟁반 한 그릇 못 먹고 쓸쓸히 웃으며 떠났더니라.   돈 없이는 다시 안 오리라던 그 평양을 오늘에 또 내가 왔다 평양을, 내 왜 왔 노.   대동문(大同門) 다락에 올라 흐르는 물을 본다. 패강 무정(浿江無情) 십 년 뒤 오늘! 아, 가는 자 이 같고나, 서울 최후의 날이 이 같았음이여!   * 소식(蘇式) : 소련식. (시집 {역사 앞에서}, 1959)     245. 꿈 이야기                      - 조지훈(趙芝薰)   문(門)을 열고 들어가서 보면 그것은 문이 아니었다.   마을이 온통 해바라기 꽃밭이었다. 그 훤출한 줄기마다 맷방석만한 꽃숭어리가 돌고   해바라기 숲 속에선 갑자기 수천 마리의 낮닭이 깃을 치며 울었다.   파아란 바다가 보이는 산 모롱잇길로 꽃 상여가 하나 조용히 흔들리며 가고 있었다.   바다 위엔 작은 배가 한 척 떠 있었다. 오색(五色) 비단으로 돛폭을 달고 뱃머리에는 큰 북이 달려 있었다.   수염 흰 노인이 한 분 그 뱃전에 기대어 피리를 불었다.   꽃상여는 작은 배에 실렸다. 그 배가 떠나자 바다 위에는 갑자기 어둠이 오고 별빛만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문을 닫고 나와서 보면 그것은 문이 아니었다.  ({사상계}, 1961.8)     246. 병(病)에게                        - 조지훈(趙芝薰)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生)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직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 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 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생에의 집착과 미련은 없어도 이 생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지옥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는 무슨 일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說服)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잘 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 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린 다시 인생을 얘기해 보세그려. ({사상계}, 1968.)     247. 산도화(山桃花)․1                      - 박목월(朴木月)   산은 구강산(九江山) 보라빛 석산(石山)   산도화 두어 송이 송이 버는데   봄눈 녹아 흐르는 옥 같은 물에   사슴은 암사슴 발을 씻는다. (시집 {산도화}, 1955)       248. 불국사(佛國寺)                         - 박목월(朴木月)   흰 달빛 자하문(紫霞門)   달 안개 물 소리   대웅전(大雄殿) 큰 보살   바람 소리 솔 소리   범영루(泛影樓) 뜬 그림자   흐는히 젖는데   흰 달빛 자하문   바람 소리 물 소리 (시집 {산도화}, 1955)     249. 달                       - 박목월(朴木月)   배꽃 가지 반쯤 가리고 달이 가네.   경주군 내동면(慶州郡 內東面) 혹(或)은 외동면(外東面) 불국사(佛國寺) 터를 잡은 그 언저리로   배꽃 가지 반쯤 가리고 달이 가네. (시집 {산도화}, 1955)     250. 하관(下棺)                      - 박목월(朴木月)   관(棺)이 내렸다.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 내리듯. 주여 용납하옵소서.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 주고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하직(下直)했다. 그 후로 그를 꿈에서 만났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돌아보고 형님! 불렀다. 오오냐. 나는 전신(全身)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는 못 들었으리라. 이제 네 음성을 나만 듣는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 너는 어디로 갔느냐. 그 어질고 안스럽고 다정한 눈짓을 하고 형님!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 하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 (시집 {난(蘭)․기타}, 1959)     251. 적막(寂寞)한 식욕(食慾)                     - 박목월(朴木月) 모밀묵이 먹고 싶다. 그 싱겁고 구수하고 못나고도 소박(素朴)하게 점잖은 촌 잔칫날 팔모상(床)에 올라 새 사돈을 대접하는 것 그것은 저문 봄날 해질 무렵에 허전한 마음이 마음을 달래는 쓸쓸한 식욕이 꿈꾸는 음식 또한 인생의 참뜻을 짐작한 자(者)의 너그럽고 넉넉한 눈물이 갈구(渴求)하는 쓸쓸한 식성(食性) (시집 {난(蘭)․기타}, 1959)     252. 나 무                       - 박목월(朴木月)   유성(儒城)에서 조치원(鳥致院)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修道僧)일까, 묵중(黙重)하게 서 있다. 다음 날은 조치원에서 공주(公州)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귀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過客)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溫陽)으로 우회(迂廻)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문을 지키는 파수병(把守兵)일까. 외로와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黙重)한 그들의, 침울(沈鬱)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시집 {청담(晴曇)}, 1964)     253. 우회로(迂廻路)                      - 박목월(朴木月)   병원으로 가는 긴 우회로 달빛이 깔렸다. 밤은 에테르로 풀리고 확대되어 가는 아내의 눈에 달빛이 깔린 긴 우회로 그 속을 내가 걷는다. 흔들리는 남편의 모습.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메스를 가아제로 닦고 응결(凝結)하는 피. 병원으로 가는 긴 우회로 달빛 속을 내가 걷는다. 흔들리는 남편의 모습. 혼수(昏睡) 속에서 피어 올리는 아내의 미소.(밤은 에테르로 풀리고) 긴 우회로를 흔들리는 아내의 모습 하얀 나선 통로(螺旋通路)를 내가 내려간다. (시집 {청담(晴曇)}, 1964)     254. 이별가(離別歌)                         - 박목월(朴木月)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뭐락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락카노 뭐락카노 썩어서 동아밧줄은 삭아 내리는데   하직을 말자, 하직을 말자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 니 흰 옷자라기만 펄럭거리고……   오냐, 오냐, 오냐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음성은 바람에 불려서   오냐, 오냐, 오냐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시집 {경상도의 가랑잎}, 1968)     255. 가정(家庭)                       - 박목월(朴木月)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 문 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 문 삼(六文三)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 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憐憫)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 문 반.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 문 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 들깐 : 경상도 방언으로 부엌 가까이 설치되어 주로 주방 용품을 보관하는 곳간 (시집 {경상도의 가랑잎}, 1968)     256. 빈 컵                        - 박목월(朴木月)   빈 것은 빈 것으로 정결한 컵. 세계는 고드름 막대기로 꽂혀 있는 겨울 아침에 세계를 마른 가지로 타오르는 겨울 아침에. 하지만 세상에서 빈 것이 있을 수 없다. 당신이 서늘한 체념으로 채우지 않으면 신앙의 샘물로 채운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나의 창조의 손이 장미를 꽂는다. 로오즈 리스트에서 가장 매혹적인 죠세피느 불르느스를. 투명한 유리컵의 중심에. (시집 {무순}, 1976)     257. 청산도(靑山道)                                                               - 박두진(朴斗鎭)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둥 산을 넘어, 흰구름 건 넌 자리 씻기는 하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너멋 골* 골짜기서 울어 오는 뻐꾸기…….   산아, 푸른 산아. 네 가슴 향기로운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 울어라. 흐르는 골짜기 스며드는 물소리에 내사 줄줄줄 가슴이 울어라. 아득히 가버린 것 잊어버린 하늘과, 아른아른 오지 않는 보고 싶은 하늘에, 어쩌면 만나도질* 볼이 고운 사람이, 난 혼자 그리워라. 가슴으로 그리워라.   티끌 부는 세상에도, 벌레 같은 세상에도, 눈 맑은 가슴 맑은 보고지운 나의 사람. 달밤이나 새벽녘, 홀로 서서 눈물 어린 볼이 고운 나의 사람. 달 가고, 밤 가고, 눈물도 가고, 틔어 올 밝은 하늘 빛난 아침 이르면, 향기로운 이슬밭 푸른 언덕을, 총총총 달려도 와 줄 볼이 고운 나의 사람.   푸른 산 한나절 구름은 가고, 골 넘어 뻐꾸기는 우는데, 눈에 어려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 아우성 쳐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에, 난 그리노라. 너만 그리노라. 혼자서 철도 없이 난 너만 그리노라.   * 너멋 골 : 저 너머의 골짜기. * 만나도질 : 만나질지도 모르는. (시집 {해}, 1949)     258. 하 늘                      - 박두진(朴斗鎭)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머얼리서 온다.   하늘은, 머얼리서 오는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 몸이 안긴다.   가슴으로, 가슴으로 스미어드는 하늘 향기로운 하늘의 호흡.   따가운 볕, 초가을 햇볕으로 목을 씻고,   나는 하늘을 마신다 자꾸 목말라 마신다. 마시는 하늘에 내가 익는다 능금처럼 마음이 익는다. (시집 {해}, 1949)     259. 도봉(道峰)                                                         - 박두진(朴斗鎭)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 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人跡)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빈 골 골을 되돌아올 뿐.   산그늘 길게 늘이며 붉게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도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시집 {해}, 1949)     260. 강(江) 2                      - 박두진(朴斗鎭)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날 강물은 숲에서 나와 흐르리.   비로소 채색되는 유유(悠悠)한 침묵 꽃으로 수장(水葬)하는 내일에의 날개짓.   아, 흥건하게 강물은 꽃에 젖어 흐르리. 무지개 피에 젖은 아침 숲 짐승 울음.   일체의 죽은 것은 떠내려 가리. 얼룽대는 배암 비늘 피발톱 독수리의,   이리 떼 비둘기 떼 깃죽지와 울대뼈의 피로 물든 일체는 바다로 가리.   비로소 햇살 아래 옷을 벗는 너의 전신(全身) 강이여. 강이여. 내일에의 피 몸짓.   네가 하는 손짓을 잊을 수가 없어 강 흐름 핏무늿길로 간다. (시집 {거미와 성좌}, 1962)     261. 꽃                                                        - 박두진(朴斗鎭)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 번만의 어느 날의 아픈 피 흘림.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궈진 다시는 못 들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꺼질 듯 보드라운 황홀한 한 떨기의 아름다운 정적(靜寂). 펼치면 일렁이는 사랑의 호심(湖心)아. (시집 {거미와 성좌}, 1962     262. 유전도(流轉圖) 수석열전(水石列傳)․68                       - 박두진(朴斗鎭)   바람과 구름이 구름과 강물이 강물과 바다가 꼬리 물고 있다. 바다가 햇살을 달빛이 번개를 노을이 강바람을 꼬리 물고 있다. 언덕과 산악, 사막과 도시, 궁전과 움막들이 있는 것은 무너지고 무너진 것들은 흘러가고 있다. 아우성과 침묵이, 영화와 몰락이 횡포한 자와 비겁한 자, 빼앗는 자와 빼앗긴 자, 말하고 싶은 자와 말하지 못하게 하는 자, 아부하는 자와 바로 말하는 자, 파계자와 성도자가 천 년씩 천 번을, 만 년씩 만 번도 더 무너지며 일어서며 영겁 속에 사그러져 흙이 되고 물이 되고 바람이 되어 흐르고 있다. 노여움도, 자랑도, 오만도, 겸손도 사랑도, 미움도 아름다움과 추, 지혜와 어리석음, 쫓던 자와 쫓기던 자, 죽이던 자와 죽던 자, 총칼도, 보습도 비밀 암호도, 경서도 짐승의 뼈도, 사람의 뼈도 한데 묻혀 있다. 난 것은 모두 죽고, 죽은 것에서 다시 나, 소용돌이 소용돌이 저절로의 흐름, 침묵에서 침묵으로의 영원한 있음, 있는 것도, 없는 것도 모두 거기 있고 없는 해와 달, 하늘 땅이 꼬리 이어 도는 천의, 억의 영겁 천지 바람 불고 있다. ({현대문학} 225호, 1973.9)     263. 새                                                     - 박남수(朴南秀)   1 하늘에 깔아 논 바람의 여울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죽지에 파묻고 따스한 체온(體溫)을 나누어 가진다.   2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假飾)하지 않는다.   3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純粹)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傷)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신태양}, 1959.3)     264. 아침 이미지                       - 박남수(朴南秀)   어둠은 새를 낳고, 돌을 낳고, 꽃을 낳는다. 아침이면, 어둠은 온갖 물상(物象)을 돌려 주지만 스스로는 땅 위에 굴복(屈服)한다. 무거운 어깨를 털고 물상들은 몸을 움직이어 노동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 즐거운 지상(地上)의 잔치에 금(金)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 아침이면, 세상은 개벽(開闢)을 한다. ({사상계}, 1968.3)     265. 종소리                       - 박남수(朴南秀)   나는 떠난다. 청동(靑銅)의 표면에서 일제히 날아가는 진폭(振幅)의 새가 되어 광막한 하나의 울음이 되어 하나의 소리가 되어.   인종(忍從)은 끝이 났는가. 청동의 벽에 '역사'를 가두어 놓은 칠흑의 감방에서.   나는 바람을 타고 들에서는 푸름이 된다. 꽃에서는 웃음이 되고 천상에서는 악기가 된다.   먹구름이 깔리면 하늘의 꼭지에서 터지는 뇌성(雷聲)이 되어 가루 가루 가루의 음향이 된다. (시집 {새의 암장}, 1970)     266. 훈 련                      - 박남수(朴南秀)   팬티 끈이 늘어나 입을 수가 없다. 불편하다. 내 손으로 끈을 갈 재간이 없다. 제 딸더러도 끈을 갈아 달라기가 거북하다. 불편하다. 이제까지 불편을 도맡았던 아내가 죽었다. 아내는 요 몇 해 동안, 나더러 설거지도 하라 하고, 집앞 길을 쓸라고도 하였다. 말하자면 미리 연습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가시게 그러는 줄만 여기고 있었다. 빨래를 하고는 나더러 짜 달라고 하였다. 꽃에 물을 주고, 나중에는 반찬도 만들어 보고 국도 끓여 보라고 했다. 그러나 반찬도 국도 만들어 보지는 못하였다. 아내는 벌써 앞을 내다 보고 있었다. 팬티 끈이 늘어나 불편할 것도 불편하면서도 끙끙대고 있을 남편의 고충도. (시집 {그리고 그 이후}, 1993) 267. 플라타너스                      - 김현승(金顯承)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영혼을 불어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神)이 아니다!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플라타너스 너를 맞아 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 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窓)이 열린 길이다. ({문예}, 1953.6)     268. 눈 물                      - 김현승(金顯承)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시집 {김현승 시초}, 1957)     269. 가 을                                                - 김현승(金顯承)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시집 {김현승 시초}, 1957)       270. 가을의 기도                     - 김현승(金顯承)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시집 {김현승 시초}, 1957)     271. 견고(堅固)한 고독                       - 김현승(金顯承)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하게 마른 흰 얼굴 그늘에 빚지지 않고 어느 햇볕에도 기대지 않는 단 하나의 손발   모든 신(神)들의 거대(巨大)한 정의(正義) 앞엔 이 가느다란 창끝으로 거슬리고 생각하던 사람들 굶주려 돌아오면 이 마른 떡을 하룻밤 네 살과 같이 떼어 주며   결정(結晶)된 빛의 눈물, 그 이슬과 사랑에도 녹슬지 않는 견고(堅固)한 칼날 발 딛지 않는 피와 살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의 회유(懷柔)에도 더 휘지 않는 마를 대로 마른 목관 악기(木管樂器)의 가을 그 높은 언덕에 떨어지는, 굳은 열매   쌉쓸한 자양(滋養) 에 스며드는 에 스며드는 네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 ({현대문학} 130호, 1965.10)     272. 파 도                        - 김현승(金顯承)   아, 여기 누가 술 위에 술을 부었나. 이빨로 깨무는 흰 거품 부글부글 넘치는 춤추는 땅 바다의 글라스여.   아, 여기 누가 가슴을 뿌렸나. 언어는 선박처럼 출렁이면서 생각에 꿈틀거리는 배암의 잔등으로부터 영원히 잠들 수 없는, 아, 여기 누가 가슴을 뿌렸나.   아, 여기 누가 성(性)보다 깨끗한 짐승들을 몰고 오나. 저무는 도시와, 병든 땅엔 머언 수평선을 그어 두고 오오오오 기쁨에 사나운 짐승들을 누가 이리로 몰고 오나. 아, 여기 누가 죽음 위에 우리의 꽃들을 피게 하나. 얼음과 불꽃 사이 영원과 깜짝할 사이 죽음의 깊은 이랑과 이랑을 따라 물에 젖은 라이락의 향기 저 파도의 꽃떨기를 7월의 한 때 누가 피게 하나. ({현대문학} 154호, 1967.10)     273. 절대 고독                      - 김현승(金顯承)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하품을 하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 끝에서 아름다운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 끝에서 나는 무엇인가 내게로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스한 체온을 느낀다.   그 체온으로 내게서 끝나는 영원의 먼 끝을 나는 혼자서 내 가슴에 품어 준다. 나는 내 눈으로 이제는 그것들을 바라본다.   그 끝에서 나의 언어들을 바람에 날려 보내며,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 보낸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 무한의 눈물겨운 끝을 내 주름 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 없는 그 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 나의 시(詩)는. (시집 {절대 고독}, 1970)   274. 아버지의 마음                       - 김현승(金顯承)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英雄)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시집 {절대 고독}, 1970)     275. 생(生)의 감각                      - 김광섭(金珖燮)   여명(黎明)에서 종이 울린다. 새벽 별이 반짝이고 사람들이 같이 산다. 닭이 운다, 개가 짖는다. 오는 사람이 있고 가는 사람이 있다. 오는 사람이 내게로 오고 가는 사람이 다 내게서 간다.   아픔에 하늘이 무너지는 때가 있었다. 깨진 그 하늘이 아물 때에도 가슴에 뼈가 서지 못해서 푸르른 빛은 장마에 황야(荒野)처럼 넘쳐 흐르는 흐린 강물 위에 떠 갔다. 나는 무너지는 둑에 혼자 서 있었다. 기슭에는 채송화가 무더기로 피어서 생(生)의 감각(感覺)을 흔들어 주었다. ({현대 문학} 145호, 1967.1)     276. 성북동(城北洞) 비둘기                     - 김광섭(金珖燮)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 아침 구공탄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들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쫒기는 새가 되었다. ({월간 문학}, 1968.11)     277. 산(山)                       - 김광섭(金珖燮)   이상하게도 내가 사는 데서는 새벽녘이면 산들이 학처럼 날개를 쭉 펴고 날아와서는 종일토록 먹도 않고 말도 않고 엎댔다가는 해질 무렵이면 기러기처럼 날아서 틀만 남겨 놓고 먼 산 속으로 간다.   산은 날아도 새둥이*나 꽃잎 하나 다치지 않고 짐승들의 굴 속에서도 흙 한 줌 돌 한 개 들성거리지 않는다. 새나 벌레나 짐승들이 놀랄까봐 지구처럼 부동(不動)의 자세로 떠간다. 그럴 때면 새나 짐승들은 기분 좋게 엎대서 사람처럼 날아가는 꿈을 꾼다.   산이 날 것을 미리 알고 사람들이 달아나면 언제나 사람보다 앞서 가다가도 고달프면 쉬란 듯이 정답게 서서 사람이 오기를 기다려 같이 간다.   산은 양지바른 쪽에 사람을 묻고 높은 꼭대기에 신(神)을 뫼신다. 산은 사람들과 친하고 싶어서 기슭을 끌고 마을에 들어오다가도 사람 사는 꼴이 어수선하면 달팽이처럼 대가리를 들고 슬슬 기어서 도로 험한 봉우리로 올라간다.   산은 나무를 기르는 법으로 벼랑에 오르지 못하는 법으로 사람을 다스린다.   산은 울적하면 솟아서 봉우리가 되고 물소리를 듣고 싶으면 내려와 깊은 계곡이 된다.   산은 한 번 신경질을 되게 내야만 고산(高山)도 되고 명산(名山)도 된다. 산은 언제나 기슭에 봄이 먼저 오지만 조금만 올라가면 여름이 머물고 있어서 한 기슭인데 두 계절을 사이좋게 지니고 산다. ({창작과 비평}, 1968.여름호)     278. 시인                      - 김광섭(金珖燮)   꽃은 피는 대로 보고 사랑은 주신 대로 부르다가 세상에 가득한 물건조차 한아름 팍 안아보지 못해서 전신을 다 담아도 한 편(篇)에 2천원 아니면 3천원 가치와 값이 다르건만 더 손을 내밀지 못하는 천직(天職).   늙어서까지 아껴서 어릿궂은 눈물의 사랑을 노래하는 젊음에서 늙음까지 장거리의 고독! 컬컬하면 술 한 잔 더 마시고 터덜터덜 가는 사람.   신이 안 나면 보는 척도 안 하다가 쌀알 만한 빛이라도 영원처럼 품고 나무와 같이 서면 나무가 되고 돌과 같이 앉으면 돌이 되고 흐르는 냇물에 흘러서 자국은 있는데 타는 놀에 가고 없다. ({동아일보}, 1969.5.3)     279. 저녁에                                                        - 김광섭(金珖燮)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월간 중앙}, 1969.11)     280. 전아사(餞 詞)                                                       - 신석정(辛夕汀)   포옹(抱擁)할 꽃 한 송이 없는 세월을 얼룩진 역사(歷史)의 찢긴 자락에 매달려 그대로 소스라쳐 통곡하기에는 머언 먼 가슴 아래 깊은 계단(階段)에 도사린 나의 젊음이 스스러워 멈춰 선다.   좌표(座標) 없는 대낮이 밤보다 어둔 속을 어디서 음악(音樂) 같은 가녀린 소리 철그른 가을비가 스쳐 가며 흐느끼는 소리 조국(祖國)의 아득한 햇무리를 타고 오는 소리 또는 목마르게 그리운 너의 목소리 그런 메아리 속에 나를 묻어도 보지만,   연이어 달려오는 인자한 얼굴들이 있어 너그럽고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고 두 손 벌려 차가운 가슴을 어루만지다간 핏발 선 노한 눈망울로 하여 다시 나를 질책(叱責)함은 아아, 어인 지혜(智慧)의 빛나심이뇨!   당신의 거룩한 목소리가 내 귓전에 있는 한, 귓전에서 파도처럼 멀리 부서지는 한, 이웃할 별도 가고, 소리 없이 가고, 어둠이 황하(黃河)처럼 범람할지라도 좋다. 얼룩진 역사에 만가(輓歌)를 보내고 참한 노래와 새벽을 잉태(孕胎)한 함성(喊聲)으로 다시 억만(億萬) 별을 불러 사탄의 가슴에 창(槍)을 겨누리라. 새벽 종(鐘)이 울 때까지 창을 겨누리라. (시집 {산의 서곡}, 1967)     281. 대바람 소리                                                     - 신석정(辛夕汀)   대바람 소리 들리더니 소소(蕭蕭)한 대바람 소리 창을 흔들더니   소설(小雪) 지낸 하늘을 눈 머금은 구름이 가고 오는지 미닫이에 가끔 그늘이 진다.   국화 향기 흔들리는 좁은 서실(書室)을 무료히 거닐다 앉았다, 누웠다 잠들다 깨어 보면 그저 그럴 날을   눈에 들어오는 병풍의 '낙지론(樂志論)'을 읽어도 보고 …… 그렇다! 아무리 쪼들리고 웅숭그릴지언정   대바람 타고 들려오는 머언 거문고 소리 …… (시집 {대바람 소리}, 1970)     282. 바라춤                                                   - 신석초(申石艸)   언제나 내 더럽히지 않을 티없는 꽃잎으로 살어 여려* 했건만 내 가슴의 그윽한 수풀 속에 솟아오르는 구슬픈 샘물을 어이할까나.   청산 깊은 절에 울어 끊인 종소리는 아마 이슷하여이다. 경경히 밝은 달은 빈 절에 덧없이 비초이고 뒤안 이슥한 꽃가지에 잠 못 이루는 두견조차 저리 슬피 우는다.   아아, 어이 하리. 내 홀로 다만 내 홀로 지닐 즐거운 무상한 열반을 나는 꿈꾸었노라. 그러나 나도 모르는 어지러운 티끌이 내 맘의 맑은 거울을 흐리노라.   몸은 설워라. 허물 많은 사바의 몸이여! 현세의 어지러운 번뇌가 짐승처럼 내 몸을 물고 오오, 형체, 이 아리따움과 내 보석 수풀 속에 비밀한 뱀이 꿈어리는 형역(形役)의 끝없는 갈림길이여.   구름으로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 소리 지는 꽃잎도 띄워 둥둥 떠내려가것다. 부서지는 주옥의 여울이여! 너울너울 흘러서 창해(滄海)에 미치기 전에야 끊일 줄이 있으리. 저절로 흘러가는 널조차 부러워라.   (이하 생략)   * 살어 여려 : 살아 가려. (시집 {바라춤}, 1959)     283. 꽃잎 절구(絶句)                      - 신석초(申石艸)   꽃잎이여 그대 다토아 피어 비 바람에 뒤설레며 가는 가냘픈 살갗이여.   그대 눈길의 머언 여로(旅路)에 하늘과 구름 혼자 그리워 붉어져 가노니   저문 산 길가에 져 뒤둥글지라도 마냥 붉게 타다 가는 환한 목숨이여. ({시문학}, 11호, 1972.6)     284. 주막(酒幕)에서                       - 김용호(金容浩) 어디든 멀찌감치 통한다는 길 옆 주막   그 수없이 입술이 닿은 이 빠진 낡은 사발에 나도 입술을 댄다. 흡사 정처럼 옮아 오는 막걸리 맛   여기 대대로 슬픈 노정(路程)이 집산(集散)하고 알맞은 자리, 저만치 위엄 있는 송덕비(頌德碑) 위로 맵고도 쓴 시간이 흘러가고…….   세월이여!   소금보다 짜다는 인생을 안주하여 주막을 나서면,   노을 비낀 길은 가없이 길고 가늘더라만,   내 입술이 닿은 그런 사발에 누가 또한 닿으랴 이런 무렵에. (시집 {날개}, 1956)     285. 눈오는 밤에                      - 김용호(金容浩)   오누이들의 정다운 얘기에 어느 집 질화로엔 밤알이 토실토실 익겠다.   콩기름 불 실고추처럼 가늘게 피어나던 밤   파묻은 불씨를 헤쳐 잎담배를 피우며   "고놈, 눈동자가 초롱 같애."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할머니, 바깥엔 연방 눈이 내리고 오늘밤처럼 눈이 내리고.   다만 이제 나 홀로 눈을 밟으며 간다.   오우버 자락에 구수한 할머니의 옛 얘기를 싸고, 어린 시절의 그 눈을 밟으며 간다.   오누이들의 정다운 얘기에 어느 집 질화로엔 밤알이 토실토실 익겠다. (시집 {시원 산책}, 1964)   ========================================================================== 7. 전후의 현실과 시적 대응 ========================================================================== 286. 공자(孔子)의 생활난(生活難)                       - 김수영(金洙暎)   꽃이 열매의 상부(上部)에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작란(作亂)을 한다.   나는 발산(發散)한 형상(形象)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작전(作戰) 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 이태리어(語)로는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반란성(叛亂性)일까.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事物)과 사물의 생리(生理)와 사물의 수량(數量)과 한도(限度)와 사물의 우매(愚昧)와 사물의 명석성(明晳性)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1949)     287. 병풍(屛風)                                                  - 김수영(金洙暎)   병풍은 무엇에서부터라도 나를 끊어준다. 등지고 있는 얼굴이여 주검에 취(醉)한 사람처럼 멋없이 서서 병풍은 무엇을 향(向)하여서도 무관심(無關心)하다. 주검의 전면(全面) 같은 너의 얼굴 위에 용(龍)이 있고 낙일(落日)이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끊어야 할 것이 설움이라고 하면서 병풍은 허위(虛僞)의 높이보다도 더 높은 곳에 비폭(飛瀑)을 놓고 유도(幽島)를 점지한다. 가장 어려운 곳에 놓여 있는 병풍은 내 앞에 서서 주검을 가지고 주검을 막고 있다. 나는 병풍을 바라보고 달은 나의 등 뒤에서 병풍의 주인 육칠옹해사(六七翁海士)의 인장(印章)을 비추 어주는 것이었다. ({현대문학} 14, 1956.2)     288. 눈                     - 김수영(金洙暎)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문학예술}, 1957.4)     289. 달나라의 장난                      - 김수영(金洙暎)   팽이가 돈다 어린아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 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 한 번 팽이를 돌려 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都會) 안에서 쫓겨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小說)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生活)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 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 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餘裕)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別世界)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 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機) 벽화(壁畵)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運命)과 사명(使命)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放心)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記憶)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 년 전의 성인(聖人)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시집 {달나라의 장난}, 1959)     290. 폭포(瀑布)                      - 김수영(金洙暎)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楕)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시집 {달나라의 장난}, 1959)     291. 사령(死靈)                       - 김수영(金洙暎)   …… 활자(活字)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벗이여 그대의 말을 고개 숙이고 듣는 것이 그대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 마음에 들지 않어라.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어라. 이 황혼(黃昏)도 저 돌벽 아래 잡초(雜草)도 담장의 푸른 페인트 빛도 저 고요함도 이 고요함도.   그대의 정의도 우리들의 섬세(纖細)도 행동(行動)이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郊外)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어라.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시집 {달나라의 장난}, 1959)     292. 목마(木馬)와 숙녀(淑女)                                                           - 박인환(朴寅煥)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生涯)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庭園)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女流作家)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 한다. ... 등대(燈臺)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히미한 의식(意識)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는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버지니아 울프(1882 ~ 1941)  프루스트, 조이스와 함께 심리주의파를 대표하는 작가. '의식의 흐름의 기법'이라는 독특한 작풍으로 당시 영국 문단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 이 작가는 템즈강에 투신 자살하여 비극적 생애를 끝마침. 주요 작품으로는 여성주의 문학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평론 {자기만의 방}과 소설 {델러웨이 부인}, {세월},{삼기니},{등대로} 등이 있음. ({시작(詩作)}, 1955.10)       293. 세월이 가면                      - 박인환(朴寅煥)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시집 {박인환 시선집}, 1955)     294.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 박인환(朴寅煥)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은 아마 모두 미래의 시간에 존재하고, 미래의 시간은 과거의 시간에 포함된다. T.S.엘리어트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와 우리들의 죽음보다도 더한 냉혹하고 절실한 회상과 체험일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여러 차례의 살육(殺戮)에 복종한 생명보다도 더한 복수와 고독을 아는 고뇌와 저항일지도 모른다.   한 걸음 한 걸음 나는 허물어지는 정적(靜寂)과 초연(硝煙)의 도시(都市) 그 암흑 속으로…… 명상과 또다시 오지 않을 영원한 내일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유형(流刑)의 애인처럼 손잡기 위하여 이미 소멸된 청춘의 반역(反逆)을 회상하면서 회의와 불안만이 다정스러운 모멸(侮蔑)의 오늘을 살아 나간다.   …… 아 최후로 이 성자(聖者)의 세계에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분명히 그것은 속죄(贖罪)의 회화(繪畵) 속의 나녀(裸女)와 회상도 고뇌도 이제는 망령(亡靈)에게 팔은 철없는 시인(詩人) 나의 눈 감지 못한 단순한 상태의 시체(屍體)일 것이다…… . (시집 {박인환 시선집}, 1955)     295. 검은 강                      - 박인환(朴寅煥)   신(神)이란 이름으로서 우리는 최후(最後)의 노정(路程)을 찾아보았다. 어느 날 역전(驛前)에서 들려오는 군대의 합창(合唱)을 귀에 받으며 우리는 죽으러 가는 자(者)와는 반대 방향의 열차에 앉아 정욕(情欲)처럼 피폐(疲弊)한 소설에 눈을 흘겼다.   지금 바람처럼 교차하는 지대 거기엔 일체의 불순한 욕망이 반사되고 농부의 아들은 표정도 없이 폭음(爆音)과 초연(硝煙)이 가득 찬 생(生)과 사(死)의 경지로 떠난다.   달은 정막(靜寞)보다도 더욱 처량하다. 멀리 우리의 시선을 집중한 인간의 피로 이룬 자유의 성채(城砦) 그것은 우리와 같이 퇴각하는 자와는 관련이 없었다.   신이란 이름으로서 우리는 저 달 속에 암담한 검은 강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시집 {박인환 시선집}, 1955)       296.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 모윤숙(毛允淑)    나는 광주 산곡을 헤매이다 문득 혼자 죽어 넘어진 국군을 만났다.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른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식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 나는 죽었노라. 스물 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나는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바람이 미쳐 날뛰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나는 숨지었노라.   내 손에는 범치 못할 총자루, 내 머리엔 깨지지 않을 철모가 씌워져 원수와 싸우기에 한 번도 비겁하지 않았노라. 그보다도 내 핏속엔 더 강한 대한의 혼이 소리쳐 나는 달리었노라. 산과 골짜기, 무덤 위와 가시숲을 이순신같이, 나폴레온같이, 시이저같이, 조국의 위험을 막기 위해 밤낮으로 앞으로 앞으로 진격! 진격! 원수를 밀어 가며 싸웠노라. 나는 더 가고 싶었노라. 저 원수의 하늘까지 밀어서 밀어서 폭풍우같이 모스코바 크레믈린 탑까지 밀어 가고 싶었노라.   내게는 어머니, 아버지, 귀여운 동생들도 있노라. 어여삐 사랑하는 소녀도 있었노라. 내 청춘은 봉오리지어 가까운 내 사람들과 함께 이 땅에 피어 살고 싶었었나니 아름다운 저 하늘에 무수히 날으는 내 나라의 새들과 함께 나는 자라고 노래하고 싶었어라. 나는 그래서 더 용감히 싸웠노라. 그러다가 죽었노라. 아무도 나의 주검을 아는 이는 없으리라. 그러나 나의 조국, 나의 사랑이여! 숨 지어 넘어진 내 얼굴의 땀방울을 지나가는 미풍이 이처럼 다정하게 씻어 주고 저 하늘의 푸른 별들이 밤새 내 외롬을 위안해 주지 않는가?   나는 조국의 군복을 입은 채 골짜기 풀숲에 유쾌히 쉬노라. 이제 나는 잠시 피곤한 몸을 쉬이고 저 하늘에 날으는 바람을 마시게 되었노라. 나는 자랑스런 내 어머니 조국을 위해 싸웠고 내 조국을 위해 또한 영광스리 숨 지었노니 여기 내 몸 누운 곳 이름 모를 골짜기에 밤이슬 나리는 풀숲에 나는 아무도 모르게 우는 나이팅게일*의 영원한 짝이 되었노라.   바람이여! 저 이름 모를 새들이여! 그대들이 지나는 어느 길 위에서나 고생하는 내 나라의 동포를 만나거든 부디 일러 다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고. 저 가볍게 날으는 봄나라 새여 혹시 네가 날으는 어느 창가에서 내 사랑하는 소녀를 만나거든 나를 그리워 울지 말고 거룩한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 일러 다고. 조국이여! 동포여! 내 사랑하는 소녀여! 나는 그대들의 행복을 위해 간다. 내가 못 이룬 소원, 물리치지 못한 원수, 나를 위해 내 청춘을 위해 물리쳐 다오.   물러감은 비겁하다. 항복보다 노예보다 비겁하다. 둘러싼 군사가 다아 물러가도 대한민국 국군아! 너만은 이 땅에서 싸워야 이긴다. 이 땅에서 죽어야 산다. 한 번 버린 조국은 다시 오지 않으리라. 다시 오지 않으리라. 보라! 폭풍이 온다. 대한민국이여!   이리와 사자 떼가 강과 산을 넘는다. 내 사랑하는 형과 아우는 서백리아* 먼 길에 유랑을 떠난다. 운명이라 이 슬픔을 모른 체 하려는가? 아니다. 운명이 아니다. 아니 운명이라도 좋다. 우리는 운명보다는 강하다. 강하다.   이 원수의 운명을 파괴하라. 내 친구여! 그 억센 팔 다리. 그 붉은 단군의 피와 혼, 싸울 곳에 주저 말고 죽을 곳에 죽어서 숨지려는 조국의 생명을 불러 일으켜라. 조국을 위해선 이 몸 이 숨길 무덤도 내 시체를 담을 작은 관도 사양하노라. 오래지 않아 거친 바람이 내 몸을 쓸어가고 저 땅의 벌레들이 내 몸을 즐겨 뜯어가도 나는 즐거이 이들과 함께 벗이 되어 행복해질 조국을 기다리며 이 골짜기 내 나라 땅에 한 줌 흙이 되기 소원이노라.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운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른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식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 가슴에선 아직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 나이팅게일 : 지빠귀과의 새로 휘파람새와 비슷함. 밤꾀꼬리. * 서백리아 : 시베리아.(시집 {풍랑}, 1951) 297. 초토(焦土)의 시 ․ 8 - 적군 묘지 앞에서 -                                              - 구상(具常)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고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바른 드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이로다.   이 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삽십(三十) 리면 가루 막히고 무주 공산(無主空山)의 적막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램 속에 깃들여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北)으로 흘러 가고   어디서 울려 오는 포성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놓아 버린다. (시집 {초토의 시}, 1956)     298. 기   도                                             - 구상(具常) 땅이 꺼지는 이 요란 속에서도 언제나 당신의 속사귐에 귀 기울이게 하옵소서.   내 눈을 스쳐가는 허깨비와 무지개가 당신 빛으로 스러지게 하옵소서.   부끄러운 이 알몸을 가리울 풀잎 하나 주옵소서.   나의 노래는 당신의 사랑입니다. 당신의 이름이 내 혀를 닳게 하옵소서.   이제 다가오는 불 장마 속에서 '노아'의 배를 타게 하옵소서.   그러나 저기 꽃잎 모양 스러져 가는 어린 양들과 한 가지로 있게 하옵소서. (시집 {초토의 시}, 1956)       299. 국제열차(國際列車)는 타자기(打字機)처럼                                                                                          - 김경린   오늘도 성난 타자기처럼 질주하는 국제열차에 나의 젊음은 실려 가고   보랏빛 애정을 날리며 경사진 가로(街路)에서 또다시 태양에 젖어 돌아오는 벗들을 본다.   옛날 나의 조상들이 뿌리고 간 설화(說話)가 아직도 남은 거리와 거리에 불안(不安)과 예절(禮節)과 그리고 공포(恐怖)만이 거품 일어   꽃과 태양을 등지고 가는 나에게 어둠은 빗발처럼 내려온다.   또다시 먼 앞날에 추락(墜落)하는 애정(愛情)이 나의 가슴을 찌르면   거울처럼 그리운 사람아 흐르는 기류(氣流)를 안고 투명(透明)한 아침을 가져오리. (9인 시집 {현대의 온도}, 1957)   \\\\\\\\\\\\\\\\\\\\\\\\\\\\\\\\\\\\\\\\\\ [출처] [펌] 3. 한국현대시 400선|작성자 수위  
200    현대시 400선 ㄷ 댓글:  조회:3395  추천:0  2015-02-13
3. 순수 서정과 모더니즘의 세계 ========================================================================== 100. 떠나가는 배                                                                            - 박용철(朴龍喆)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군들 손쉽게야 버릴거냐. 안개같이 물 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아 사랑하는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 두 야 간다.   * 희살짓는다 : 훼방을 놓는다는 뜻으로 '헤살짓는다'의 전라도 사투리.  ({시문학} 창간호, 1930.3)     101. 싸늘한 이마                                           - 박용철(朴龍喆)   큰 어둠 가운데 홀로 밝은 불 켜고 앉아 있으면 모두 빼앗기는 듯한 외로움 한 포기 산꽃이라도 있으면 얼마나한 위로이랴   모두 빼앗기는 듯 눈덮개 고이 나리면 환한 왼몸은 새파란 불 붙어 있는 인광 까만 귀뚜리 하나라도 있으면 얼마나한 기쁨이랴 파란 불에 몸을 사르면 싸늘한 이마 맑게 트이어 기어가는 신경의 간지러움 길 잃은 별이라도 맘에 있다면 얼마나한 즐검이랴 ({시문학} 창간호, 1930.3)     102.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 김영랑(金永郞)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 오르는 아침날 빛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시문학} 창간호, 1930.3)       103. 오매 단풍 들것네                                         - 김영랑(金永郞)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 붉은 감잎 날아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 오매 : '어머나'의 전라도 사투리. * 장광 : 장독대. * 기둘리니 :'기다리니'의 전라도 사투리. * 자지어서 :'잦아서, 빠르고 빈번하여'의 전라도 사투리. ({시문학} 창간호, 1930.3)     104.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 김영랑(金永郞)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詩)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시문학} 2호, 1930.6)     105. 내 마음을 아실 이                                          - 김영랑(金永郞)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그래도 어디나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과 속임 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밤 고이 맺는 이슬 같은 보람을 보밴 듯 감추었다 내어 드리지.   아!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 맑은 옥돌에 불이 달아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 ({시문학} 3호, 1931.3)     106.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金永郞)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문학} 3호, 1934.4)     107. 북                                         - 김영랑(金永郞) 자네 소리 하게 내 북을 잡지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엇모리 자진모리 휘몰이 보아   이렇게 숨결이 꼭 맞아서만 이룬 일이란 인생에 흔치 않어 어려운 일 시원한 일.   소리를 떠나서야 북은 오직 가죽일 뿐 헛 때리면 만갑(萬甲)*이도 숨을 고쳐 쉴밖에   장단(長短)을 친다는 말이 모자라오. 연창(演唱)을 살리는 반주(伴奏)쯤은 지나고, 북은 오히려 컨덕터*요.   떠받는 명고(名鼓)인데 잔가락을 온통 잊으오. 떡 궁! 동중정(動中靜)이오 소란 속에 고요 있어 인생이 가을같이 익어 가오.   자네 소리 하게 내 북을 치지.   * 만갑 : 조선 시대의 이름난 명창 송만갑을 뜻함. * 컨덕터 : 지휘자(conductor). (시집 {영랑 시집}, 1935)     108. 오월(五月)                                         - 김영랑(金永郞)   들길은 마을에 들자 붉어지고 마을 골목은 들로 내려서자 푸르러진다. 바람은 넘실 천(千) 이랑 만(萬) 이랑 이랑 이랑 햇빛이 갈라지고 보리도 허리통이 부끄럽게 드러났다. 꾀꼬리는 엽태 혼자 날아볼 줄 모르나니 암컷이라 쫓길 뿐 수놈이라 쫓을 뿐 황금빛 난 길이 어지럴 뿐. 얇은 단장하고 아양 가득 차 있는 산봉우리야, 오늘 밤 너 어디로 가 버리련? ({문장} 6호, 1939.7) 109. 독(毒)을 차고                                            - 김영랑(金永郞)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害)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어도 머지 않아 너 나 마주 가버리면 억만 세대(億萬世代)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虛無)한듸!'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魂) 건지기 위하여. ({문장} 10호, 1939.11)     110. 춘향(春香)                                            - 김영랑(金永郞)   큰 칼 쓰고 옥(獄)에 든 춘향이는 제 마음이 그리도 독했던가 놀래었다 성문이 부서져도 이 악물고 사또를 노려보던 교만한 눈 그 옛날 성학사(成學士) 박팽년(朴彭年)이 오불지짐에도 태연하였음을 알았었니라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원통코 독한 마음 잠과 꿈을 이뤘으랴 옥방(獄房) 첫날밤은 길고도 무서워라 서름이 사무치고 지쳐 쓰러지면 남강(南江)의 외론 혼(魂)은 불리어 나왔느니 논개(論介)! 어린 춘향을 꼭 안아 밤새워 마음과 살을 어루만지다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사랑이 무엇이기 정절(貞節)이 무엇이기 그 때문에 꽃의 춘향 그만 옥사(獄死)한단말가 지네 구렁이 같은 변학도(卞學徒)의 흉칙한 얼굴에 까무러쳐도 어린 가슴 달큼히 지켜주는 도련님 생각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상하고 멍든 자리 마디마디 문지르며 눈물은 타고 남은 간을 젖어 내렸다 버들잎이 창살에 선뜻 스치는 날도 도련님 말방울 소리는 아니 들렸다 삼경(三更)을 세오다가 그는 고만 단장(斷腸)하다 두견이 울어 두견이 울어 남원(南原) 고을도 깨어지고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문장}18호, 1940.7)      111. 임께서 부르시면                                           - 신석정(辛夕汀)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호수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말없이 재 넘는 초승달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포근히 풀린 봄 하늘 아래 굽이굽이 하늘가에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파아란 하늘에 백로(白鷺)가 노래하고 이른 봄 잔디밭에 스며드는 햇볕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동광} 24호, 1931.8)     112.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 신석정(辛夕汀)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대(森林帶)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들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놓고 뛰어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내려오면 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 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그 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내리면, 꿩 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 까마귀 높이 날아 산국화 더욱 곱고 노오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그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 (시집 {촛불}, 1939)     113.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 신석정(辛夕汀)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 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 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 합니다.   언덕에서는 우리의 어린 양들이 낡은 녹색 침대에 누워서 남은 햇볕을 즐기느라고 돌아오지 않고 조용한 호수 위에는 인제야 저녁 안개가 자욱이 내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늙은 산의 고요히 명상하는 얼굴이 멀어 가지 않고 머언 숲에서는 밤이 끌고 오는 그 검은 치맛자락이 발길에 스치는 발자욱 소리도 들려 오지 않습니다.   멀리 있는 기인 둑을 거쳐서 들려 오던 물결 소리도 차츰차츰 멀어 갑니다. 그것은 늦은 가을부터 우리 전원(田園)을 방문하는 까마귀들이 바람을 데리고 멀리 가 버린 까닭이겠습니다. 시방 어머니의 등에서는 어머니의 콧노래 섞인 자장가를 듣고 싶어하는 애기의 잠덧이 있습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인제야 저 숲 너머 하늘에 작은 별이 하나 나오지 않았습니까? ({조선일보}, 1933.11.30)     114. 들길에 서서                                           - 신석정(辛夕汀) 푸른 산이 흰 구름을 지니고 살 듯 내 머리 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하고 산삼(山森)처럼 두 팔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不絶)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냐.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이어니…… ({문장} 5호, 1939.6)     115. 작은 짐승                                                                               - 신석정(辛夕汀)   난(蘭)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난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난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 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 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즈러지게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난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난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서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순하디 순한 작은 짐승이었다. ({문장} 7호, 1939.8)     116. 슬픈 구도(構圖)                                          - 신석정(辛夕汀)   나와 하늘과 하늘 아래 푸른 산뿐이로다.   꽃 한 송이 피어 낼 지구도 없고 새 한 마리 울어 줄 지구도 없고 노루새끼 한 마리 뛰어다닐 지구도 없다.   나와 밤과 무수한 별뿐이로다.   밀리고 흐르는 게 밤뿐이오, 흘러도 흘러도 검은 밤뿐이로다. 내 마음 둘 곳은 어느 밤 하늘 별이드뇨. ({조광}, 1939.10)     117. 어느 지류(支流)에 서서                                                        - 신석정(辛夕汀)   강물 아래로 강물 아래로 한 줄기 어두운 이 강물 아래로 검은 밤이 흐른다. 은하수가 흐른다. 낡은 밤에 숨막히는 나도 흐르고 은하수에 빠진 푸른 별이 흐른다.   강물 아래로 강물 아래로 못 견디게 어두운 이 강물 아래로 빛나는 태양이 다다를 무렵   이 강물 어느 지류에 조각처럼 서서 나는 다시 푸른 하늘을 우러러 보리……. ({문장} 24호, 1941.3)     118. 카페 프란스                                           - 정지용(鄭芝溶)   옮겨다 심은 종려(棕櫚)나무 밑에 비뚜로 선 장명등(長明燈) 카페․프란스에 가자.   이놈은 루바쉬카* 또 한 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비쩍 마른 놈이 앞장을 섰다.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먼트*에 흐느끼는 불빛 카페․프란스에 가자.   이놈의 머리는 비뚜른 능금 또 한 놈의 심장은 벌레 먹은 장미 제비처럼 젖은 놈이 뛰어간다.           *   "오오 패롵[鸚鵡]* 서방! 굳 이브닝!"   "굳 이브닝!"(이 친구 어떠하시오?)   울금향(鬱金香)* 아가씨는 이 밤에도 경사(更紗) 커튼 밑에서 조시는구료! 나는 자작(子爵)의 아들도 아무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희어서 슬프구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대리석(大理石) 테이블에 닿는 내 뺨이 슬프구나! 오오, 이국종(異國種) 강아지야 내 발을 빨아다오. 내 발을 빨아다오.   * 루바쉬카 : 러시아 남자들이 입는 블라우스 풍의 상의. * 보헤미안 : 집시(Gypsy)나 사회 관습에 구애받지 않고 방랑적이며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 * 페이브먼트: 포장도로. * 패롯 : 앵무새. * 울금향 :튤립(tulip)  ({학조} 창간호, 1926.6)     119. 향수(鄕愁)                                           - 정지용(鄭芝溶)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해설피 : 느리고 어설프게. * 함초롬 : 가지런하고 고운 모양. * 성근 : 드문드문한. ({조선지광} 65호, 1927.3)     120. 말                                         - 정지용(鄭芝溶)   말아, 다락 같은 말아, 너는 점잔도 하다마는 너는 왜 그리 슬퍼 뵈니? 말아, 사람 편인 말아, 검정콩 푸렁콩을 주마.   이 말은 누가 난 줄도 모르고 밤이면 먼 데 달을 보며 잔다. ({조선지광} 69호, 1927.7)     121. 유리창(琉璃窓)                                         - 정지용(鄭芝溶)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 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肺血管)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열없이 : 맥없이. ({조선지광} 89호, 1930.1)     122. 그의 반                                             - 정지용(鄭芝溶)   내 무엇이라 이름하리 그를? 나의 영혼 안의 고운 불, 공손한 이마에 비추는 달, 나의 눈보다 값진 이, 바다에서 솟아 올라 나래 떠는 금성(金星), 쪽빛 하늘에 흰꽃을 달은 고산 식물(高山植物), 나의 가지에 머물지 않고, 나의 나라에서도 멀다. 홀로 어여삐 스스로 한가로워 항상 머언 이, 나는 사랑을 모르노라. 오로지 수그릴 뿐. 때없이 가슴에 두 손이 여미어지며 굽이굽이 돌아 나간 시름의 황혼(黃昏) 길 위 나 바다 이편에 남긴 그의 반임을 고이 지니고 걷노라. ({시문학} 3호, 1931.10)     123. 고향(故鄕)                                           - 정지용(鄭芝溶)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港口)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동방평론} 3호, 1932.7)     124. 난초(蘭草)                                            - 정지용(鄭芝溶)   난초잎은 차라리 수묵색(水墨色).   난초잎에 엷은 안개와 꿈이 오다.   난초잎은 한밤에 여는 담은 입술이 있다.   난초잎은 별빛에 눈떴다 돌아 눕다.   난초잎은 드러난 팔굽이를 어쩌지 못한다.   난초잎에 적은 바람이 오다.   난초잎은 춥다. ({신생} 37호, 1932.12) 125. 바다 2                                            - 정지용(鄭芝溶)   바다는 뿔뿔이 달아나려고 했다.   푸른 도마뱀 떼같이 재재발렀다.   꼬리가 이루 잡히지 않았다.   흰 발톱에 찢긴 산호(珊瑚)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   가까스로 몰아다 부치고 변죽을 둘러 손질하여 물기를 씻었다. 이 애쓴 해도(海圖)에 손을 씻고 떼었다.   찰찰 넘치도록 돌돌 구르도록   휘동그란히 받쳐 들었다! 지구(地球)는 연(蓮)잎인 양 오므라들고 …… 펴고 ……. ({시원} 5호, 1935.12)     126. 구성동(九城同)                                           - 정지용(鄭芝溶)   골짝에는 흔히 유성(流星)이 묻힌다.   황혼(黃昏)에 누리가 소란히 쌓이기도 하고,   꽃도 귀양 사는 곳, 절터ㅅ드랬는데 바람도 모이지 않고 산 그림자 설핏하면 사슴이 일어나 등을 넘어간다. ({청색지} 2호, 1938.8)     127. 장수산(長壽山) 1                                           - 정지용(鄭芝溶)   벌목정정(伐木丁丁)*이랬더니 아람도리 큰 솔이 베혀짐즉도 하이 골이 울어 멩아리 소리 쩌르렁 돌아옴즉도 하이 다람쥐도 좇지 않고 뫼ㅅ새도 울지 않어 깊은 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조히보담 희고녀! 달도 보름 을 기달려 흰 뜻은 한밤 이 골을 걸음이랸다? 웃절 중이 여섯 판에 여섯 번 지 고 웃고 올라간 뒤 조찰히 늙은 사나이의 남긴 내음새를 줏는다? 시름은 바람 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오오 견디랸다 차고 올연( 然)히* 슬 픔도 꿈도 없이 장수산 속 겨울 한밤내   * 벌목정정: 나무를 베는 소리가 '정정'함. '정정'은 의성어. * 올연히 : 홀로 우뚝하게. ({문장} 2호, 1939.3)     128. 춘설(春雪)                                          - 정지용(鄭芝溶)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우수절(雨水節) 들어 바로 초하루 아침,   새삼스레 눈이 덮인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하다.   얼음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름 절로 향기로워라.   옹송그리고* 살아난 양이 아아 꿈 같기에 설어라.   미나리 파릇한 새 순 돋고 옴짓 아니기던 고기 입이 오물거리는, 꽃 피기 전 철 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춥고 싶어라.   * 서늘옵고 : 서느렇고. * 이마받이 : 이마를 부딪치는 짓. * 옹송그리다 : 궁상스럽게 몸을 옹그리다. * 아니기던 : 아니하던. * 핫옷 : 솜을 두어서 지은 옷. ({문장} 3호, 1939.4)     129. 백록담(白鹿潭)- 한라산 소묘                                             -정지용(鄭芝溶)   1 절정에 가까울수록 뻐꾹채 꽃키가 점점 소모(消耗)된다. 한마루 오르면 허리 가 스러지고 다시 한마루 위에서 모가지가 없고 나중에는 얼굴만 갸웃 내다본 다. 화문(花紋)처럼 판(版) 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함경도 끝과 맞서는 데서 뻐 꾹채 키는 아주 없어지고도 팔월 한철엔 흩어진 성신(星辰)처럼 난만(爛漫)하다. 산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렇지 않아도 뻐꾹채 꽃밭에는 별들이 켜 든다. 제자리 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기서 기진했다.   2 암고란(巖古蘭), 환약(丸藥)같이 어여쁜 열매로 목을 축이고 살아 일어섰다.   3 백화(白樺) 옆에서 백화가 촉루(壻?)가 되기까지 산다. 내가 죽어 백화처럼 흴 것이 숭없지 않다.   4 귀신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모롱이, 도체비꽃이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랗 게 질린다.   5 바야흐로 해발 육천 척(尺) 위에서 마소가 사람을 대수롭게 아니 여기고 산 다. 말이 말끼리, 소가 소끼리, 망아지가 어미소를, 송아지가 어미 말을 따르다 가 이내 헤어진다.   6 첫새끼를 낳노라고 암소가 몹시 혼이 났다. 얼결에 산길 백 리를 돌아 서귀 포로 달아났다. 물도 마르기 전에 어미를 여윈 송아지는 움매 - 움매 - 울었다. 말을 보고도 등산객을 보고도 마구 매어달렸다. 우리 새끼들도 모색(毛色)이 다 른 어미한테 맡길 것을 나는 울었다.   7 풍란(風蘭)이 풍기는 향기, 꾀꼬리 서로 부르는 소리, 제주 휘파람새 휘파람 부는 소리, 돌에 물이 따로 구르는 소리, 먼데서 바다가 구길 때 솨 - 솨 - 솔 소리, 물푸레 동백 떡갈나무 속에서 나는 길을 잘못 들었다가 다시 칡덩쿨 기어 간 흰돌배기 꼬부랑길로 나섰다. 문득 마주친 아롱점말이 피(避)하지 않는다.   8 고비 고사리 더덕순 도라지꽃 취 삿갓나물 대풀 석이(石 ) 별과 같은 방울 을 달은 고산식물을 색이며 취(醉)하며 자며 한다. 백록담 조찰한 물을 그리어 산맥 위에서 짓는 행렬이 구름보다 장엄하다. 소나기 놋낫 맞으며 무지개에 말 리우며 궁둥이에 꽃물 익어 붙인 채로 살이 붓는다.   9 가재도 기지 않는 백록담 푸른 물에 하늘이 돈다. 불구(不具)에 가깝도록 고 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쫓겨온 실구름 일말(一抹)에도 백록담은 흐 리운다. 나의 얼굴에 한나절 포긴 백록담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기도(祈 禱)조차 잊었더니라. ({문장} 3호, 1939.4)     130. 비                                             -정지용(鄭芝溶)   돌에 그늘이 차고,   따로 몰리는 소소리 바람.   앞섰거니하여 꼬리 치날리어 세우고,   종종 다리 까칠한 산새 걸음걸이.   여울 지어 수척한 흰 물살,   갈갈이 손가락 펴고.   멎은 듯 새삼 돋는 비ㅅ낯   붉은 잎 잎 소란히 밟고 간다. ({문장} 22호, 1941.1)       131. 인동차(忍冬茶)                                              - 정지용(鄭芝溶)   노주인(老主人)의 장벽(腸壁)에 무시(無時)로 인동(忍冬) 삼긴 물이 나린다.   자작나무 덩그럭 불이 도로 피어 붉고,   구석에 그늘 지어 무가 순 돋아 파릇하고,   흙 냄새 훈훈히 김도 사리다가 바깥 풍설(風雪) 소리에 잠착하다.*   산중(山中)에 책력(冊曆)도 없이 삼동(三冬)이 하이얗다.   * 잠착(潛着)하다 : 어떤 한 가지 일에만 마음을 골똘하게 쓰다. ({문장} 22호, 1941.1)     132. 정주성(定州城)                                               - 백 석(白石)   산(山)턱 원두막은 비었나 불빛이 외롭다 헝겊 심지에 아주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잠자려 조을던 무너진 성(城)터 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魂)들 같다 어데서 말 있는 듯이 크다란 산새 한 마리 어두운 골짜기로 난다   헐리다 남은 성문(城門)이 한울빛같이 훤하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조선일보}, 1935.8.31)       133. 여우난 곬족(族)*                                                - 백 석(白石)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로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 고무, 고무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李女)  열여섯에 사십(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後妻)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무, 고무의 딸 승녀(承女), 아들 승(承)동이  육십리(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 옷이 정하든, 말 끝에 설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洪)동이, 작은 홍(洪)동이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삼춘 엄매, 사춘 누이, 사춘 동생들    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 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뽁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오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 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 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 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우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츰 시누이 동세들이 육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 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 여우난 곬족 : 여우난 골 부근에 사는 일가 친척들. *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 아버지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 포족족하니 : 빛깔이 고르지 않고 파르스름한 기운이 도는. * 매감탕 : 엿을 고거나 메주를 쑨 솥을 씻은 물로 진한 갈색. * 토방돌 : 집의 낙수 고랑 안쪽으로 돌려가며 놓은 돌. 섬돌. * 오리치 : 평북 지방에서 오리 사냥에 쓰이는 특별한 사냥 용구. * 반디젓 : 밴댕이젓. * 저녁술 :저녁 숟가락 또는 저녁밥. * 숨굴막질 : 숨바꼭질. * 아르간 : 아랫간. 아랫방. * 조아질하고 - 제비손이구손이하고 : 아이들의 놀이 이름들. * 화디 : 등장을 얹는 기구. 나무나 놋쇠로 만듦. * 홍게닭 : 새벽닭. * 텅납새 : 처마의 안쪽 지붕. * 무이징게 국 : 민물새우에 무를 넣고 끓인 국. ({조광}, 1935.12)        134. 가즈랑집*                                              - 백 석(白石)    승냥이가 새끼를 치는 전에는 쇠메* 든 도적이 났다는 가즈랑고개    가즈랑집은 고개 밑의  산 너머 마을서 도야지를 잃는 밤 짐승을 쫓는 깽제미* 소리가 무서웁게 들려 오는 집  닭 개 짐승을 못 놓는  멧도야지와 이웃사촌을 지나는 집    예순이 넘은 아들 없는 가즈랑집 할머니는 중같이 정해서 할머니가 마을을 가면 긴 담뱃대에 독하다는 막써레기*를 몇 대라도 붙이라고 하며  간밤에 섬돌 아래 승냥이가 왔었다는 이야기  어느메 산골에선간 곰이 아이를 본다는 이야기    나는 돌나물김치에 백설기를 먹으며  옛말의 구신집*에 있는 듯이  가즈랑집 할머니  내가 날 때 죽은 누이도 날 때  무명필에 이름을 써서 백지 달아서 구신간시렁*의 당즈깨*에 넣어 대감님께 수영*을 들였다는 가즈랑집 할머니    언제나 병을 앓을 때면  신장님 단련이라고 하는 가즈랑집 할머니  구신의 딸이라고 생각하면 슬퍼졌다    토끼도 살이 오른다는 때 아르대즘퍼리*에서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고사리 두릅순 회순* 산나물을 하는 가즈랑집 할머니를 따르며  나는 벌써 달디단 물구지우림* 둥굴레우림*을 생각하고  아직 멀은 도토리묵 도토리범벅까지도 그리워한다    뒤울안 살구나무 아래서 광살구*를 찾다가  살구벼락을 맞고 울다가 웃는 나를 보고  밑구멍에 털이 몇 자나 났나 보자고 한 것은 가즈랑집 할머니다  찰복숭아를 먹다가 씨를 삼키고는 죽는 것만 같아 하루종일 놀지도 못하고 밥도 안 먹은 것도  가즈랑집에 마을을 가서  당세* 먹은 강아지같이 좋아라고 집오래*를 설레다가였다   * 가즈랑집 : '가즈랑'은 고개 이름.'가즈랑집'은 할머니의 택호를 뜻함. * 쇠메 : 쇠로 된 메. 묵직한 쇠토막에 구멍을 뚫고 자루를 박음. * 깽제미: 꽹과리. * 막써레기 : 거칠게 썬 엽연초. * 구신집 : 무당집. * 구신간시렁 :걸립(乞粒) 귀신을 모셔놓은 시렁. 집집마다 대청 도리 위 한구석에 조그마한 널빤지로 선반을 매고 위하였음. * 당즈깨 : 당세기. 고리버들이나 대오리를 길고 둥글게 결은 작은 고리짝. * 수영 : 수양(收養). 데려다 기른 딸이나 아들. * 아르대즘퍼리 : '아래쪽에 있는 진창으로 된 펄'이라는 뜻의 평안도식 지명. * 제비꼬리 - 회순 : 식용 산나물의 이름. * 물구지우림 : 물구지(무릇)의 알뿌리를 물에 담가 쓴맛을 우려낸 것. * 둥굴레우림 : 둥굴레풀의 어린 잎을 물에 담가 쓴맛을 우려낸 것. * 광살구 : 너무 익어 저절로 떨어지게 된 살구. * 당세 : 당수. 곡식가루에 술을 쳐서 미음처럼 쑨 음식. * 집오래 : 집의 울 안팎. (시집 {사슴}, 1936)     135. 모닥불                                               - 백 석(白石)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잎도 머리카락도 헌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짗*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門長)* 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수도 땜쟁이도 큰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 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한 이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 갓신창 : 부서진 갓에서 나온, 말총으로 된 질긴 끈의 한 종류. * 개니빠디 : 개의 이빨. * 너울쪽 : 널빤지쪽. * 짗 : 깃. * 개터럭 : 개의 털. * 재당 : 재종(再從). 육촌. * 문장 : 한 문중에서 항렬과 나이가 제일 위인 사람. * 몽둥발이 : 딸려 붙었던 것이 다 떨어지고 몸뚱이만 남은 물건. (시집 {사슴}, 1936)     136. 여승(女僧)                                               - 백 석(白石)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平安道)의 어느 산(山)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 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 가지취 : 취나물의 일종. * 금전판 : 금광. * 섶벌 : 재래종 일벌. (시집 {사슴}, 1936)     137.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 석(白石)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마가리 : 오막살이. ({여성}, 1938.3) 138. 고향(故鄕)                                             - 백 석(白石)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平安道) 정주(定州)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氏)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씨(氏)ㄹ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삼천리 문학} 2호, 1938.4)     139. 팔원(八院)- 서행 시초(西行詩抄) 3                                               - 백 석(白石)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 승합자동차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자성(慈城)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은 예서 삼백오십 리 묘향산 백오십 리 묘향산 어디메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새하얗게 얼은 자동차 유리창 밖에 내지인(內地人)* 주재소장(駐在所長)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임*을 낸 다. 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 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 해고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 내지인 : 일본 본토인이란 뜻으로 일본인이 스스로를 일컫던 말. * 내임 : 요금이라는 뜻의 일본말.  ({조선일보}, 1939.11.10)     140.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                                              - 백 석(白石)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 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학풍} 창간호, 1948.10)     141. 오감도(烏瞰圖) : 시 제1호                                              - 이 상(李 箱)   13인의아해(兒孩)가도로로질주(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오.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조선중앙일보}, 1934.7.24)1   142. 꽃나무                                              - 이 상(李 箱)    벌판한복판에 꽃나무하나가있소. 근처(近處)에는 꽃나무가 하나도없소 꽃나무는 제가생각하는 꽃나무를 열심(熱心)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열심으로 꽃을 피워가지고 섰소 꽃나무는 제가생각하는 꽃나무에게갈수없소 나는 막달아났소 한꽃나무를위하여 그러는것처럼 나는참그런이상스러운흉내를 내었소. ({가톨릭 청년} 2호, 1933.7)     143. 이런 시                                               - 이 상(李 箱)   역사(役事)를하노라고 땅을파다가 커다란돌을하나 끄집어 내어놓고보니 도무 지어디서인가 본듯한생각이 들게 모양이생겼는데 목도(木徒)들이 그것을메고나 가더니 어디다갖다버리고온모양이길래 쫓아나가보니위험하기짝이없는 큰길가더 라. 그날밤에 한소나기하였으니 필시그들이깨끗이씻겼을터인데 그이튿날가보니 까 변괴(變怪)로다 간데온데없더라. 어떤돌이와서 그돌을업어갔을까 나는참이런 처량한생각에서 아래와같은작문을지었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수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올 사랑인줄은 알면서도 나혼자는 꾸준히생각하리라. 자그러면 내내어 여쁘소서." 어떤돌이 내얼굴을 물끄러미 치어다보는것만같아서 이런시는그만찢어버리고 싶더라. ({가톨릭 청년} 2호, 1933.7)     144. 거울                                            - 이 상(李 箱)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 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事業)에골몰할께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反對)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診察)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가톨릭 청년} 5호, 1933.10)     145. 지비(紙碑)*                                             - 이 상(李 箱)   내키는커서다리는길고왼다리아프고안해키는작아서다리는짧고바른다리가아프니 내바른다리와안해왼다리와성한다리끼리한사람처럼걸어가면아아이부부(夫婦)는부축할수없는절름발이가되어버린다무사(無事)한세상(世上)이병원(病院)이고꼭치료(治療)를기다리는무병(無病)이끝끝내있다.   * 지비 : 이상(李箱)의 조어(造語)로서, 석비(石碑)의 돌을 '종이'로 환치한 것. 이로써 '기념(紀念)'에 대한 반어적 태도를 보여 준다. ({조선중앙일보}, 1935.9.15)     146. 가정(家庭)                                              - 이 상(李 箱)   문(門)을암만잡아다녀도안열리는것은안에생활(生活)이모자라는까닭이다. 밤이사나운꾸지람으로나를졸른다. 나는우리집내문패(門牌)앞에서여간성가신게아니다. 나는밤속에들어서서제웅*처럼자꾸만감(減)해간다. 식구(食口)*야봉(封)한창호(窓戶)어데라도한구석터놓아다고내가수입(收入)되어들어가야하지않나. 지붕에서리가내리고뾰족한데는침(鍼)처럼월광(月光)이묻었다. 우리집이앓나보다그러고누가힘에겨운도장을찍나보다. 수명(壽命)을헐어서전당(典當)잡히나보다. 나는그냥문(門)고리에쇠사슬늘어지듯매어달렸다. 문(門)을열려고안열리는문(門)을열려고.   * 제웅 : 짚으로 만든 모조 인형. * 식구 : 여기서는 아내의 호칭. (『가톨릭 청년』34호, 1936.2) 147. 기상도(氣象圖)                                            - 김기림(金起林)   세계의 아침 비늘 돋힌 해협(海峽)은 배암의 잔등 처럼 살아났고 아롱진 [아라비아]의 의상을 둘른 젊은 산맥들.   바람은 바닷가에 [사라센]의 비단폭처럼 미끄러웁고 오만(傲慢)한 풍경은 바로 오전 칠시(七時)의 절정(絶頂)에 가로누었다.   헐덕이는 들 우에 늙은 향수(香水)를 뿌리는 교당(敎堂)의 녹쓰른 종(鍾)소리. 송아지들은 들로 돌아가렴으나. 아가씨는 바다에 밀려가는 윤선(輪船)을 오늘도 바래 보냈다.   국경 가까운 정거장(停車場). 차장(車掌)의 신호(信號)를 재촉하며 발을 굴르는 국제열차. 차창마다 [잘 있거라]를 삼키고 느껴서 우는 마님들의 이즈러진 얼골들. 여객기들은 대륙의 공중에서 티끌처럼 흩어졌다.   본국(本國)에서 오는 장거리 [라디오]의 효과를 실험하기 위하야 [쥬네브]로 여행하는 신사(紳士)의 가족들. [샴판]. 갑판. [안녕히 가세요]. [다녀오리다] 선부(船夫)들은 그들의 탄식을 기적(汽笛)에 맡기고 자리로 돌아간다.   부두에 달려 팔락이는 오색의 [테잎] 그 여자의 머리의 오색의 [리본]   전서구(傳書鳩)들은 선실의 지붕에서 수도(首都)로 향하여 떠난다. …… [스마트라]의 동쪽. …… 5 [킬로]의 해상(海上) …… 일행 감기(感氣) 도 없다. 적도(赤道) 가까웁다. …… 20일 오전 열 시. …… ({기상도} 제1부, 1936)     148. 바다와 나비                                          - 김기림(金起林)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어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여성}, 1939.4)       149. 성호 부근(星湖附近)                                           - 김광균(金光均)   1. 양철로 만든 달이 하나 수면(水面) 위에 떨어지고 부서지는 얼음 소래가 날카로운 호적(呼笛)같이 옷소매에 스며든다.   해맑은 밤바람이 이마에 나리는 여울가 모래밭에 홀로 거닐면 노을에 빛나는 은모래같이   호수는 한 포기 화려한 꽃밭이 되고 여윈 추억(追憶)의 가지가지엔 조각난 빙설(氷雪)이 눈부신 빛을 발하다.   2. 낡은 고향의 허리띠같이 강물은 길 게 얼어붙고   차창(車窓)에 서리는 황혼 저멀 리 노을은 나어린 향수(鄕愁)처럼 희미한 날개를 펴고 있었다. ({조선일보}, 1937.6.4)     150. 설야(雪夜)                                            - 김광균(金光均)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에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衣裳)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조선일보}, 1938.1.8)     151. 와사등(瓦斯燈)                                           - 김광균(金光均)   차단 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 여름 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층(高層), 창백한 묘석(墓石)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夜景)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진 채 사념(思念)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고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고 왔기에 길 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 차단 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조선일보}, 1939.6.3)     152. 데생                                           - 김광균(金光均)   1. 향료(香料)를 뿌린 듯 곱다란 노을 위에 전신주 하나하나 기울어지고   머언 고가선(高架線)* 위에 밤이 켜진다.   2. 구름은 보랏빛 색지(色紙)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薔薇).   목장(牧場)의 깃발도, 능금나무도 부을면 꺼질 듯이 외로운 들길.   * 고가선 : 고압 전류를 송전하는 전선 ({조선일보}, 1939.7.9)   153. 외인촌(外人村)                                           - 김광균(金光均)   하이얀 모색(暮色) 속에 피어 있는 산협촌(山峽村)의 고독한 그림 속으로 파아란 역등(驛燈)을 단 마차가 한 대 잠기어 가고 바다를 향한 산마루 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 위엔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바람에 불리우는 작은 집들이 창을 내리고 갈대밭에 묻힌 돌다리 아래선 작은 시내가 물방울을 굴리고,   안개 자욱한 화원지(花園地)의 벤취 위엔 한낮에 소녀들이 남기고 간 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어져 있었다.   외인 묘지(外人墓地)의 어두운 수풀 뒤엔 밤새도록 가느단 별빛이 내리고,   공백(空白)한 하늘에 걸려 있는 촌락의 시계가 여윈 손길을 저어 열 시를 가리키면 날카로운 고탑(古塔)같이 언덕 위에 솟아 있는 퇴색한 성교당(聖敎堂)의 지붕 위에선   분수(噴水)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시집 {와사등}, 1939)     154. 추일 서정(秋日抒情)                                         - 김광균(金光均)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지러진 도룬 시(市)의 가을 하늘을 생각하게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 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판지(紙)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荒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帳幕) 저쪽에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인문평론}, 1940.7)     155. 달․포도․잎사귀                                          - 장만영(張萬榮)   순이(順伊) 벌레 우는 고풍(古風)한 뜰에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 왔구나.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아 있다.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 동해(東海) 바다 물처럼 푸른 가을 밤   포도는 달빛이 스며 고웁다. 포도는 달빛을 머금고 익는다.   순이 포도 넝쿨 밑에 어린 잎새들이 달빛에 젖어 호젓하구나. ({시건설} 창간호, 1936.12)     156. 비의 image                                           - 장만영(張萬榮)   병든 하늘이 찬 비를 뿌려…… 장미 가지 부러지고 가슴에 그리던 아름다운 무지개마저 사라졌다.   나의 「소년」은 어디로 갔느뇨. 비애를 지닌 채로.   이 오늘 밤은 창을 치는 빗소리가 나의 동해(童骸)*를 넣은 검은 관에 못을 박는 쇠마치* 소리로 그렇게 자꾸 들린다…….   마음아, 너는 상복을 입고 쓸쓸히, 진정 쓸쓸히 누워 있을 그 어느 바닷가의 무덤이나 찾아 가렴.   *동해(童骸) : 어린 아이의 뼈. *마치 : 못을 박거나 무엇을 두드릴 때 쓰는 연장으로 망치보다 작다.  ({조광} 25호, 1940.2)     157. 고화병(古花甁)                                            - 장서언(張瑞彦)   고자기(古磁器) 항아리 눈물처럼 꾸부러진 어깨에 두 팔이 없다.   파랗게 얼었다. 늙은 간호부(看護婦)처럼 고적한 항아리   우둔(愚鈍)한 입술로 계절에 이그러진 풀을 담뿍 물고 그 속엔 한 오합(五合) 남은 물이 푸른 산골을 꿈꾸고 있다.   떨어진 화판(花瓣)*과 함께 깔린 푸른 황혼의 그림자가 거북 타신 모양을 하고 창 넘어 터덜터덜 물러갈 때 다시 한 번 내뿜는 담담(淡淡)한 향기.   * 화판(花瓣): 꽃잎. ({가톨릭 청년} 10호, 1934.2)     158. 나비                                           - 윤곤강(尹崑崗)   비바람 험살궂게 거쳐 간 추녀 밑 날개 찢어진 늙은 노랑나비가 맨드라미 대가리를 물고 가슴을 앓는다.   찢긴 나래에 맥이 풀려 그리운 꽃밭을 찾아갈 수 없는 슬픔에 물고 있는 맨드라미조차 소태 맛이다.   자랑스러울손 화려한 춤 재주도 한 옛날의 꿈조각처럼 흐리어 늙은 무녀(舞女)처럼 나비는 한숨진다. ({시문학} 3호, 1930.5)     159. 내 소녀(少女)                                                                               - 오일도(吳一島)   빈 가지에 바구니 걸어놓고 내 소녀 어디 갔느뇨.   …………   박사(薄紗)의 아지랑이 오늘도 가지 앞에 아른거린다. ({시원} 4호, 1935.8)   ========================================================================== 4. 생명의 의지와 전통의 깊이 ========================================================================== 160. 문둥이                                         - 서정주(徐廷柱)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시인부락} 창간호, 1936.11)     161. 화사(花蛇)                                             - 서정주(徐廷柱)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던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 뜯어라, 원통히 물어 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芳草)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보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 스며라, 배암! ({시인부락} 2호, 1936.12)     162. 자화상(自畵像)                                           - 서정주(徐廷柱)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 흙으로 바 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 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 실제로 서정주의 아버지는 인촌 김성수 일가의 머슴살이를 하였다. * 한 주 : 한 그루. * 달을 두다 : 여자가 아이를 배다. ({시건설}, 7호, 1939.10)     163. 귀촉도(歸蜀途)                                          - 서정주(徐廷柱)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 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 리.   신이나 삼아 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굽이굽이 은하(銀河)ㅅ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춘추} 32호, 1943.10)     164. 깃발                                           - 유치환(柳致環)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조선문단}, 1936.1)     165. 생명의 서(書)                                            - 유치환(柳致環)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여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沙漠)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死滅)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孤獨)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동아일보}, 1938.10.19)     166. 일월(日月)                                           - 유치환(柳致環)   나의 가는 곳 어디나 백일(白日)이 없을소냐.   머언 미개(未開)적 유풍(遺風)을 그대로 성신(星辰)과 더불어 잠자고   비와 바람을 더불어 근심하고 나의 생명과 생명에 속한 것을 열애(熱愛)하되 삼가 애련(愛憐)에 빠지지 않음은 그는 치욕(恥辱)임일레라.   나의 원수와 원수에게 아첨하는 자에겐 가장 옳은 증오(憎惡)를 예비하였나니.   마지막 우러른 태양이 두 동공(瞳孔)에 해바라기처럼 박힌 채로 내 어느 불의(不意)에 짐승처럼 무찔리기로   오오, 나의 세상의 거룩한 일월(日月)에 또한 무슨 회한(悔恨)인들 남길소냐. ({문장} 3호, 1939.4)   167. 바위                                           - 유치환(柳致環)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黙)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忘却)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 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삼천리}, 1941.4)     168. 광야(曠野)에 와서                                                         - 유치환(柳致環)   흥안령(興安嶺)* 가까운 북변(北邊)의 이 광막(曠漠)한 벌판 끝에 와서 죽어도 뉘우치지 않으려는 마음 위에 오늘은 이레째 암수(暗愁)*의 비 내리고 내 망나니의 본받아 화툿장을 뒤치고 담배를 눌러 꺼도 마음은 속으로 끝없이 울리노니 아아 이는 다시 나를 과실(過失)함이러뇨 이미 온갖 것을 저버리고 사람도 나도 접어 주지 않으려는 이 자학(自虐)의 길에 내 열 번 패망(敗亡)의 인생을 버려도 좋으련만 아아 이 회오(悔悟)의 앓음을 어디메 호읍(號泣)*할 곳 없어 말없이 자리를 일어나와 문을 열고 서면 나의 탈주(脫走)할 사념(思念)의 하늘도 보이지 않고 정거장(停車場)도 이백 리(二百里) 밖 암담한 진창에 갇힌 철벽(鐵壁) 같은 절망(絶望)의 광야(曠野)!   * 흥안령 : 북만주의 지명. * 암수 : 어두운 수심. * 호읍 : 목놓아 소리 내어 욺. (시집 {생명의 서}, 1947)     169. 춘신(春信)                                            - 유치환(柳致環)   꽃등인 양 창 앞에 한 그루 피어 오른 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 작은 멧새 하나 찾아와 무심히 놀다 가나니.   적막한 겨우내 들녘 끝 어디메서 작은 깃을 얽고 다리 오그리고 지내다가 이 보오얀 봄길을 찾아 문안하여 나왔느뇨.   앉았다 떠난 아름다운 그 자리에 여운 남아 뉘도 모를 한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나니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작은 길이여. (시집 {생명의 서}, 1947)     170. 고독(孤獨)                                          - 김광섭(金珖燮)   내 하나의 생존자(生存者)로 태어나 여기 누워 있나니   한 칸 무덤 그 너머는 무한한 기류(氣流)의 파동(波動)도 있어 바다 깊은 그곳 어느 고요한 바위 아래   내 고단한 고기와도 같다.   맑은 성(性) 아름다운 꿈은 멀고 그리운 세계의 단편(斷片)은 아즐타.   오랜 세기(世紀)의 지층(知層)만이 나를 이끌고 있다.   신경(神經)도 없는 밤 시계(時計)야 기이(奇異)타. 너마저 자려무나. ({시원} 2호, 1935.4)     171. 동경(憧憬)                                            - 김광섭(金珖燮)   온갖 사화(詞華)*들이 무언(無言)의 고아(孤兒)가 되어 꿈이 되고 슬픔이 되다.   무엇이 나를 불러서 바람에 따라가는 길 별조차 떨어진 밤   무거운 꿈 같은 어둠 속에 하나의 뚜렷한 형상(形象)이 나의 만상(萬象)에 깃들이다.   * 사화(詞華): 아름답게 수식한 시문(詩文), 또는 뛰어난 시문. ({조광}, 1937.6)       172. 비 개인 여름 아침                                            - 김광섭(金珖燮)   비가 개인 날, 맑은 하늘이 못 속에 내려와서 여름 아침을 이루었으니 녹음(綠陰)이 종이가 되어 금붕어가 시를 쓴다. (시집 {동경(憧憬)}, 1938)     173. 마음                                             - 김광섭(金珖燮)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 위에 나리고 숲은 말없이 잠드느니   행여 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문장} 5호, 1939.6)     174.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                                            - 김상용(金尙鎔)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문학} 2호, 1934.2)       175.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 청년 화가 L을 위하여                                          - 함형수(咸亨洙)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비(碑)ㅅ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 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시인부락} 창간호, 1936.11)     176. 파초(芭蕉)                                                                             - 김동명(金東鳴)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을 향한 불타는 향수(鄕愁), 너의 넋은 수녀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조광}, 1936.1)     177. 내 마음은                                           - 김동명(金東鳴)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 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 주오. 나는 달 아래 귀를 기울이며,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깐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 ({조광}, 1937.6)     178. 밤                                                                 - 김동명(金東鳴)   밤은 푸른 안개에 싸인 호수, 나는 잠의 쪽배를 타고 꿈을 낚는 어부다. (시집 {하늘}, 1948)     179. 사슴                                            - 노천명(盧天命)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쳐다본다. (시집 {산호림}, 1938)     180. 푸른 오월                                           - 노천명(盧天命)   청자(靑瓷)빛 하늘이 육모정[六角亭] 탑 위에 그린 듯이 곱고, 연못 창포잎에 여인네 맵시 위에 감미로운 첫여름이 흐른다.   라일락 숲에 내 젊은 꿈이 나비처럼 앉는 정오(正午) 계절의 여왕 오월의 푸른 여신 앞에 내가 웬 일로 무색하고 외롭구나.   밀물처럼 가슴속으로 몰려드는 향수를 어찌하는 수 없어, 눈은 먼 데 하늘을 본다. 긴 담을 끼고 외딴 길을 걸으며 걸으며, 생각이 무지개처럼 핀다.   풀 냄새가 물큰 향수보다 좋게 내 코를 스치고   청머루 순이 뻗어 나오던 길섶 어디메선가 한나절 꿩이 울고 나는 활나물, 호납나물, 젓가락나물, 참나물을 찾던 잃어버린 날이 그립지 아니한가, 나의 사람아.   아름다운 노래라도 부르자. 서러운 노래를 부르자.   보리밭 푸른 물결을 헤치며 종달새 모양 내 마음은 하늘 높이 솟는다.   오월의 창공이여! 나의 태양이여! (시집 {산호림}, 1938)   181. 남사당(男寺黨)                                            - 노천명(盧天命)   나는 얼굴에 분(粉)칠을 하고 삼단 같은 머리를 땋아내린 사나이   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 날라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르고 나는 향단(香丹)이가 된다. 이리하여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어 램프불을 돋운 포장(布帳) 속에선 내 남성(男聲)이 십분(十分) 굴욕되다.   산 넘어 지나온 저 동리엔 은반지를 사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 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나는 집시의 피였다.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우리들의 도구(道具)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의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라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 조라치 : 원뜻은 절에서 청소 등의 일을 하는 하인이지만, 여기서는 남사당패의 구성원을 가리킨다. ({삼천리}, 1940.9)     182. 나그네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지훈(芝薰)                                         - 박목월(朴木月)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南道)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상아탑} 5호, 1946.4)     183. 윤사월(閏四月)                        - 박목월(朴木月)   송화(松花) 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고 엿듣고 있다 ({상아탑} 6호, 1946.5)     184. 청노루                      - 박목월(朴木月)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가는 열두 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3인 공동 시집 {청록집}, 1946)     185. 산이 날 에워싸고                          - 박목월(朴木月)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   어느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구름처럼 살아라 한다. 바람처럼 살아라 한다. (3인 공동 시집 {청록집}, 1946)     186. 묘지송(墓地頌)                      - 박두진(朴斗鎭)   북망(北邙)이래도 금잔디 기름진데 동그란 무덤들 외롭지 않으이.   무덤 속 어둠에 하이얀 촉루(壻?)가 빛나리. 향기로운 주검의 내도 풍기리.   살아서 설던 주검 죽었으매 이내 안 서럽고, 언제 무덤 속 화안히 비춰줄 그런 태양만이 그리우리.   금잔디 사이 할미꽃도 피었고, 삐이 삐이 배, 뱃종! 뱃종! 멧새들도 우는데, 봄볕 포근한 무덤에 주검들이 누웠네. ({문장} 5호, 1939.6)     187. 향현(香峴)                                                            - 박두진(朴斗鎭)   아랫도리 다박솔 깔린 산 너머, 큰 산 그 너멋 산 안 보이어, 내 마음 둥둥 구름을 타다.   우뚝 솟은 산, 묵중히 엎드린 산, 골골이 장송(長松) 들어섰고, 머루 다래 넝쿨 바위 엉서리에 얽혔고, 샅샅이 떡갈나무 억새풀 우거진 데, 너구리, 여우, 사슴, 산토끼, 오소리, 도마뱀, 능구리 등 실로 무수한 짐승을 지니인,   산, 산, 산들! 누거만년(累巨萬年) 너희들 침묵이 흠뻑 지리함 직하매,   산이여! 장차 너희 솟아난 봉우리에, 엎드린 마루에, 확 확 치밀어 오를 화염(火焰)을 내 기다려도 좋으랴?   핏내를 잊은 여우 이리 등속이 사슴 토끼와 더불어, 싸릿순 칡순을 찾아 함께 즐거이 뛰는 날을 믿고 길이 기다려도 좋으랴? ({문장} 5호, 1939.6)     188. 어서 너는 오너라                          - 박두진(朴斗鎭)   복사꽃이 피었다고 일러라. 살구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너이 오 오래 정들이고 살다 간 집, 함부로 함부로 짓밟힌 울타리에, 앵도꽃도 오얏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낮이면 벌떼와 나비가 날고, 밤이면 소쩍새가 울더라고 일러라.   다섯 뭍과 여섯 바다와, 철이야. 아득한 구름 밖, 아득한 하늘가에, 나는 어디로 향을 해야 너와 마주 서는게냐.   달 밝으면 으레 뜰에 앉아 부는 내 피리의 서른 가락도 너는 못 듣고, 골을 헤치며 산에 올라 아침마다, 푸른 봉우리에 올라 서면, 어어이 어어이 소리 높여 부르는 나의 음성도 너는 못 듣는다.   어서 너는 오너라. 별들 서로 구슬피 헤어지고, 별들 서로 정답게 모이는 날, 흩어졌던 네 순이도 누이도 돌아오고, 너와 나와 자라난, 막쇠도 돌이도 복술이도 왔다.   눈물과 피와 푸른 빛 깃발을 날리며 오너라. …… 비둘기와 꽃다발과 푸른 빛 깃발을 날리며 너는 오너라…….   복사꽃 피고, 살구꽃 피는 곳, 너와 나와 뛰놀며 자라난 푸른 보리밭에 남풍은 불고, 젖빛 구름, 보오얀 구름 속에 종달새는 운다. 기름진 냉이꽃 향기로운 언덕, 여기 푸른 잔디밭에 누워서, 철이야, 너는 늴늴늴 가락 맞춰 풀피리나 불고, 나는, 나는, 두둥싯 두둥실 붕새춤 추며, 막쇠와, 돌이와, 복술이랑 함께, 우리, 우리, 옛날을, 옛날을, 딩굴어 보자. (3인 공동 시집 {청록집}, 1946)     189. 고풍 의상(古風衣裳)                       - 조지훈(趙芝薰)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附椽)* 끝 풍경(風磬)이 운다. 처마 끝 곱게 늘이운 주렴(珠簾)에 반월(半月)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 가는 밤,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자주빛 호장을 받친 호장저고리 호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살살이 퍼져 내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곡선(曲線)을 이루는 곳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치마 끝에 곱게 감춘 운혜(雲鞋)* 당혜(唐鞋)*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古典)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胡蝶)* 호접인 양 사푸시 춤을 추라, 아미(蛾眉)를 숙이고…….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눈 감고 거문고 줄 골라 보리니 가는 버들인 양 가락에 맞추어 흰 손을 흔들어지이다.   * 부연 : 처마를 뒤쪽으로 올라가게 하여 멋을 내도록 쓰는 짧은 서까래. * 운혜 : 울이 깊고 작은 가죽신으로 앞 코에 구름 무늬를 수놓음. * 당혜 : 앞뒤에 당초 무늬를 놓은 여자의 가죽신. * 호접 : 나비. ({문장} 3호, 1939.4)     190. 승무(僧舞)                       - 조지훈(趙芝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빰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나빌레라 : 나비로구나. ({문장} 11호, 1939.12)     191. 봉황수(鳳凰愁)                     - 조지훈(趙芝薰)   벌레 먹은 두리 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風磬) 소리 날러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 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 石)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佩玉)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正一品), 종구품(從九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 둘 곳은 바이 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에 호곡(呼哭)하리라. ({문장} 13호, 1940.2)     192. 완화삼(玩花衫) 목월(木月)에게                      - 조지훈(趙芝薰)   차운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七百里)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 ({상아탑} 5호, 1946.4)     193. 낙화(落花)                     - 조지훈(趙芝薰)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 성긴 : 드문드문한. * 우련 : 보일 듯 말 듯 은은하게. * 저허하노니 : 두려워하노니. 마음에 꺼려 하노니. (3인 공동 시집 {청록집}, 1946)     194. 고사(古寺) 1                        - 조지훈(趙芝薰)   목어(木魚)를 두드리다 졸음에 겨워   고오운 상좌 아이도 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 웃으시는데   서역 만리(西域萬里) 길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진다. (3인 공동 시집 {청록집}, 1946)       195. 마을                       - 박남수(朴南秀)   외로운 마을이 나른나른 오수(午睡)에 조을고   넓은 마을에 솔개미 바람개비처럼 도는 날……   뜰안 암탉이 제 그림자 쫓고 눈알 대록대록 겁을 삼킨다. ({문장} 9호, 1939.10)     196. 초롱불                       - 박남수(朴南秀)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밤하늘 밑에 행길도 집도 아주 감초였다.   풀 짚는 소리 따라 초롱불은 어디로 가는가.   산턱 원두막일 상한 곳을 지나 무너진 옛 성터일쯤한 곳을 돌아   흔들리는 초롱불은 꺼진 듯 보이지 않는다.   조용히 조용히 흔들리던 초롱불 ……. ({문장} 10호, 1939.11) 197. 밤 길                       - 박남수(朴南秀)   개구리 울음만 들리던 마을에 굵은 빗방울 성큼성큼 내리는 밤 ……   머얼리 산턱에 등불 두 셋 외롭고나.   이윽고 홀딱 지나간 번갯불에 능수버들이 선 개천가를 달리는 사나이가 어렸다.   논둑이라도 끊어져 달려가는 길이나 아닐까.   번갯불이 스러지자 마을은 비 내리는 속에 개구리 울음만 들었다. ({문장} 12호, 1940.1)     198. 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                      - 김종한(金鐘漢)   능수버들이 지키고 섰는 낡은 우물가 우물 속에는 푸른 하늘 조각이 떨어져 있는 윤사월(閏四月)   아주머님 지금 울고 있는 저 뻐꾸기는 작년에 울던 그 놈일까요? 조용하신 당신은 박꽃처럼 웃으시면서   두레박을 넘쳐 흐르는 푸른 하늘만 길어 올리시네 두레박을 넘쳐 흐르는 푸른 전설만 길어 올리시네   언덕을 넘어 황소의 울음 소리도 흘러 오는데 물동이에서도 아주머님 푸른 하늘이 넘쳐 흐르는구료. ({조선일보}, 1937.1.1)       199. 풍장(風葬)                     - 이한직(李漢稷) 사구(砂丘) 위에서는 호궁(胡弓)을 뜯는 님프의 동화가 그립다.   계절풍이여 카라반의 방울 소리를 실어다 다오.   장송보(葬送譜)도 없이 나는 사구 위에서 풍장이 되는구나.   날마다 밤마다 나는 한개의 실루엣으로 괴로워했다.   깨어진 오르간이 묘연(杳然)한 요람(搖籃)의 노래를 부른다, 귀의 탓인지.   장송보도 없이 나는 사구 위에서 풍장이 되는구나.   그립은 사람아. ({문장} 4호, 1939.5)   \\\\\\\\\\\\\\\\\\\\\\\\\\\\\\\\\\\\\\\\\\\ [출처] [펌] 3. 한국현대시 400선|작성자 수위  
199    현대시 400선 ㄴ 댓글:  조회:2293  추천:1  2015-02-13
  51.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李相和)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개벽} 70호, 1926.6)     52. 병적 계절(炳的季節)                       - 이상화(李相和)   기러기 제비가 서로 엇갈림이 보기에 이리도 설은가. 귀뚜리 떨어진 나뭇잎을 부여잡고 긴 밤을 새네. 가을은 애달픈 목숨이 나누어질까 울 시절인가 보다.   가없는 생각 짬 모를 꿈이 그만 하나 둘 잦아지려는가. 홀아비같이 헤매는 바람떼가 한 배 가득 구비치네. 가을은 구슬픈 마음이 앓다 못해 날뛸 시절인가 보다.   하늘을 보아라 야윈 구름이 떠돌아다니네. 땅 위를 보아라 젊은 조선이 떠돌아다니네. ({조선지광} 61호, 1926.11)     53. 네거리의 순이(順伊)                                                        - 임 화(林 和)   네가 지금 간다면, 어디를 간단 말이냐? 그러면, 내 사랑하는 젊은 동무, 너, 내 사랑하는 오직 하나뿐인 누이동생 순이, 너의 사랑하는 그 귀중한 사내,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 …… 그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어디서 온단 말이냐?   눈바람 찬 불쌍한 도시 종로 복판에 순이야! 너와 나는 지나간 꽃피는 봄에 사랑하는 한 어머니를 눈물 나는 가난 속에서 여의였지! 그리하여 이 믿지 못할 얼굴 하얀 오빠를 염려하고, 오빠는 가냘픈 너를 근심하는, 서글프고 가난한 그 날 속에서도, 순이야, 너는 마음을 맡길 믿음성 있는 이곳 청년을 가졌었고, 내 사랑하는 동무는 …… 청년의 연인 근로하는 여자, 너를 가졌었다.   겨울날 찬 눈보라가 유리창에 우는 아픈 그 시절, 기계 소리에 말려 흩어지는 우리들의 참새 너희들의 콧노래와 언 눈길을 걷는 발자욱 소리와 더불어 가슴 속으로 스며드는 청년과 너의 따뜻한 귓속 다정한 웃음으로 우리들의 청춘은 참말로 꽃다왔고, 언 밤이 주림보다도 쓰리게 가난한 청춘을 울리는 날, 어머니가 되어 우리를 따뜻한 품속에서 안아주던 것은 오직 하나 거리에서 만나, 거리에서 헤어지며, 골목 뒤에서 중얼대고 일터에서 충성되던 꺼질 줄 모르는 청춘의 정열 그것이었다. 비할 데 없는 괴로움 가운데서도 얼마나 큰 즐거움이 우리의 머리 위에 빛났더냐?   그러나 이 가장 귀중한 너 나의 사이에서 한 청년은 대체 어디로 갔느냐? 어찌 된 일이냐? 순이야, 이것은 …… 너도 잘 알고 나도 잘 아는 멀쩡한 사실이 아니냐? 보아라! 어느 누가 참말로 도적놈이냐? 이 눈물 나는 가난한 젊은 날이 가진 불쌍한 즐거움을 노리는 마음하고, 그 조그만, 참말로 풍선보다 엷은 숨을 안 깨치려는 간지런 마음하고, 말하여 보아라, 이곳에 가득 찬 고마운 젊은이들아!   순이야, 누이야! 근로하는 청년, 용감한 사내의 연인아! 생각해보아라, 오늘은 네 귀중한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젊은 날을 부지런한 일에 보내던 그 여윈 손가락으로 지금은 굳은 벽돌담에다 달력을 그리겠구나! 또 이거 봐라, 어서. 이 사내도 네 커다란 오빠를 …… 남은 것이라고는 때묻은 넥타이 하나뿐이 아니냐! 오오, 눈보라는 '튜럭'처럼 길거리를 휘몰아간다. 자 좋다, 바로 종로 네거리가 예 아니냐! 어서 너와 나는 번개처럼 두 손을 잡고, 내일을 위하여 저 골목으로 들어가자. 네 사내를 위하여, 또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을 위하여 ……   이것이 너와 나의 행복된 청춘이 아니냐? ({조선지광} 82호, 1929.1)     54. 우리 오빠와 화로                                                                  - 임 화(林 和)   사랑하는 우리 오빠 어저께 그만 그렇게 위하시던 오빠의 거북무늬 질화로가 깨어졌어요  언제나 오빠가 우리들의 '피오닐'* 조그만 기수라 부르는 영남(永男)이가  지구에 해가 비친 하루의 모 든 시간을 담배의 독기 속에다  어린 몸을 잠그고 사 온 그 거북무늬 화로가 깨어졌어요    그리하야 지금은 화젓가락만이 불쌍한 우리 영남이하구 저하구처럼  똑 우리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남매와 같이 외롭게 벽에가 나란히 걸렸어요    오빠 ……  저는요 저는요 잘 알았어요  웨 그날 오빠가 우리 두 동생을 떠나 그리로 들어가실 그날밤에  연거푸 말은 궐련[卷煙]을 세 개씩이나 피우시고 계셨는지  저는요 잘 알었어요 오빠    언제나 철없는 제가 오빠가 공장에서 돌아와서 고단한 저녁을 잡수실 때 오빠 몸에서 신문지 냄새 가 난다고 하면  오빠는 파란 얼굴에 피곤한 웃음을 웃으시며  …… 네 몸에선 누에 똥내가 나지 않니 하시던 세상에 위대하고 용감한 우리 오빠가 웨 그 날만  말 한 마디 없이 담배 연기로 방 속을 메워 버리시는 우리 우리 용감한 오빠의 마음을 저는 잘 알았어요  천정을 향하야 기어올라가든 외줄기 담배 연기 속에서 오빠의 강철 가슴 속에 백힌 위대한 결정과 성스러운 각오를 저는 분명히 보았어요  그리하야 제가 영남이의 버선 하나도 채 못 기었을 동안에  문지방을 때리는 쇳소리 바루르 밟는 거치른 구두 소리와 함께 가 버리지 않으셨어요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우리 위대한 오빠는 불쌍한 저의 남매의 근심을 담배 연기에 싸 두고 가지 않으셨어요  오빠 - 그래서 저도 영남이도  오빠와 또 가장 위대한 용감한 오빠 친구들의 이야기가 세상을 뒤집을 때  저는 제사기(製絲機)를 떠나서 백 장의 일전짜리 봉통(封筒)에 손톱을 뚫어트리고  영남이도 담배 냄새 구렁을 내쫓겨 봉통 꽁무니를 뭅니다  지금 - 만국지도 같은 누더기 밑에서 코를 고을고 있습니다    오빠 그러나 염려는 마세요  저는 용감한 이 나라 청년인 우리 오빠와 핏줄을 같이 한 계집애이고  영남이도 오빠도 늘 칭찬하든 쇠 같은 거북무늬 화로를 사온 오빠의 동생이 아니어요  그러고 참 오빠 아까 그 젊은 나머지 오빠의 친구들이 왔다 갔습니다  눈물나는 우리 오빠 동모의 소식을 전해주고 갔어요   사랑스런 용감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세상에 가장 위대한 청년들이었습니다  화로는 깨어져도 화젓갈은 깃대처럼 남지 않었어요  우리 오빠는 가셨어도 귀여운 '피오닐' 영남이가 있고  그러고 모 든 어린 '피오닐'의 따듯한 누이 품 제 가슴이 아직도 더웁습니다    그리고 오빠 ……  저뿐이 사항하는 오빠를 잃고 영남이뿐이 굳세인 형님을 보낸 것이겠습니까  슳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고마운 청년 오빠의 무수한 위대한 친구가 있고 오빠와 형님을 잃은 수 없는 계집아이와 동생  저의들의 귀한 동무가 있습니다    그리하야 이 다음 일은 지금 섭섭한 분한 사건을 안고 있는 우리 동무 손에서 싸워질 것입니다    오빠 오늘 밤을 새워 이만 장을 붙이면 사흘 뒤엔 새 솜옷이 오빠의 떨리는 몸에 입혀질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누이동생과 아우는 건강히 오는 날마다를 싸움에서 보냅니다  영남이는 여태 잡니다 밤이 늦었어요                                 - 누이동생 * 피오닐 : 러시아 말로 영어의 pioneer에 해당됨. '개척자, 선구자' 라는 뜻과 함께 '공산소년단원'(9세~14세)을 일컫는 말이기도 함. ({조선지광} 83호, 1929.2) 55. 한 잔 포도주를                                                               - 임 화(林 和)   찬란한 새 시대의 향연(饗宴) 가운데서 우리는 향그런 방향(芳香) 우에 화염같이 붉은 한 잔 포도주를 요구한다   새벽 공격의 긴 의논이 끝난 뒤 야영은 뼛속까지 취해야 하지 않느냐 명령일하(命令一下)   승리란 싸움이 부르는 영원한 진리다 그러나 나는 또한 패배를 후회하지 않는다 승패란 자고로 싸움의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냐   중요한 것은 우리가 피로하지 않는 것이다 적*에 대한 미움을 늦추지 않는 것이다 멸망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지혜 때문에 용기를 잃지 않는 것이다   최후의 결별에 임하여 무엇 때문에 한 그릇 냉수로 흥분을 식힐 필요가 있느냐 벗들아! 결코 위로의 노래에 귀를 기울여서는 아니된다   동백꽃은 희고 해당화는 붉고 애인은 그보다도 아름답고 우리는 고향의 단란과 고요한 안식을 얼마나 그리워하느냐 아 이러한 모든 속에서 떠나가는 슬픔을 나는 형언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한 잔 냉수로 머리를 식힌 채 화려했던 희망과 꿈이 묻히는 무덤을 찾느니보단 아! 내일 아침 깨어지는 꿈을 위해설지라도 꽃과 애인과 승리와 패배와 원수까지를 한 정열로 찬미할 수 있는 우리 청춘을 위하여 벗들아! 축복의 붉은 술잔울 들자   * 적: 원 발표문에는 '그녀(彼女)'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시집 {찬가}(1947)의 발표를 따랐다. (청색지} 창간호, 1938.6) 56. 봄을 맞는 폐허에서                        - 김해강(金海剛)   어제까지 나리든 봄비는 지리하던 밤과 같이 새벽바람에 고요히 깃을 걷는다   산기슭엔 아즈랑이 떠돌고 축축하게 젖은 땅우엔 샘이 돋건만 발자취 어지러운 옛 뒤안은 어이도 이리 쓸쓸하여……   볕 엷은 양지쪽에 쪼그리고 앉어 깨어진 새검파리*로 성을 쌓고 노는 두셋의 어린 아이 무너진 성터로 새어가는 한떨기 바람에 한숨지고 섯는 늙은이의 흰 수염은 날린다   이 폐허에도 봄은 또다시 찾어 왔건만 불어가는 바람에 뜻을 실어 보낼 것인가 오- 두근거리는 나의 가슴이여! 솟는 눈물이여!   그러나 나는 새벽바람에 달음질치는 동무를 보았나니 철벽을 깨트리고 새 빛을 실어오기까지 오 그 걸음이 튼튼하기만 비노라 이 가슴을 바쳐   *새검파리 : 깨어진 사기그룻 조각. ({조선일보}, 1927.5.10)     57. 새 날의 기원                       - 김해강(金海剛) 1. 새해라, 첫 아침 동녘 한울엔 붉은 햇살이 뻗혀오르나이다 무릎꿇고 정성을 구을려 비옵는 마음 한껏 떨리옵니다 이 땅 겨레의 가슴에도 이 땅 겨레의 가슴에도 새로운 붉은 해가 돋아오르사이다 새로운 힘이 뛰고, 새로운 기쁨이 피어날 가장 경건한 아침이 열려지이다   2. 해마다 첫새벽이 오면 비옵는 마음 이해라 다름이 잇사오리까마는 팔짚고 정성을 구을려 비옵는 마음 더욱 두근거리옵니다.   주먹을 놓고 맹서하오니 주먹을 놓고 맹서하오니 적은 일이옵든 큰일이옵든 하고 많은 가운데 한 가지일지라도 이 해에만은 뜻대로 일우어짐이 있어주소서   3. 새해를 맞이하옵는 마음 가슴이라도 베여 정성을 다하고 싶으옵거든 어깨라도 끊어 정성을 다하고 싶으옵거든   오오 새 날이여! 이 땅에 열리소서. 힘차게 열리소서. 이 땅에 빛나소서. 아름다이 빛나소서.   -계유원단(癸酉元旦)에 ({동아일보}, 33.1.8)     58. 밤 차                        - 박팔양(朴八陽)   추방되는 백성의 고달픈 백(魄)을 실고 밤차는 헐레벌덕어리며 달어난다 도망군이 짐싸가지고 솔밭길을 빠지듯 야반(夜半) 국경의 들길을 달리는 이 괴물이여!   차창밖 하늘은 내 답답한 마음을 닮었느냐 숨맥힐 듯 가슴 터질 듯 몹시도 캄캄하고나 유랑(流浪)의 짐 우에 고개 비스듬히 눕히고 생각한다 오오 고향의 아름답든 꿈이 어디로 갔느냐   비닭이*집 비닭이장같이 오붓하든 내 동리 그것은 지금 무엇이 되었는가 차바퀴 소리 해조(諧調)*마치 들리는 중에 희미하게 벌려지는 괴로운 꿈자리여!   북방 고원의 밤바람이 차창을 흔든다 (사람들은 모다 피곤히 잠들었는데) 이 적막한 방문자여! 문 두드리지 마라 의지할 곳 없는 우리의 마음은 지금 울고 있다   그러나 기관차는 야음(夜音)을 뚫고 나가면서 '돌진! 돌진! 돌진!' 소리를 질른다 아아 털끝만치라도 의롭게 할 일 있느냐 아까울 것 없는 이 한 목숨 바칠 데가 있느냐   피로한 백성의 몸 우에 무겁게 나려 덥힌 이 지리한 밤아 언제나 새이랴나 언제나 걷히랴나 아아 언제나 이 괴로움에서 깨워 일으키랴느냐   * 비닭이 : 비둘기. * 해조 : 아름다운 가락. ({조선지광}, 1927.9)     59. 데 모                        - 박팔양(朴八陽)   납덩어리같이 무겁고 괴로웁든 우리들의 마음이 오늘은 엇지하야 이같이 가볍고도 유쾌하냐 5월의 한울 그 밑에서 부르는 우리들의 노래가 무슨 까닭에 참으로 무슨 까닭에 가슴 울렁거리도록 이같이 즐거웁게 들리느냐   시가(市街)가 좁다고 먼지 휘날리며 달리든 ×××× 자동차와 마차 그것이 오늘의 ×××× 무엇이란 말이냐 보아라 거리와 거리에 모혀슨 우리 ×××× 평소에 묵묵히 일하든 친구들의 오늘을!   가로(街路)에도 우리들의 데모 옥내(屋內)에는 경이(驚異)에 빗나는 저들 ××× 보혀주자 저 영리하고도 앞 못보는 백성들에게 미래를 춤추는 이 군중의 무도(舞蹈)를!   ×××××× 노래와 환호와 박수다 보조. 보조. 보조를 맞치라 ………… ………… ………… 5월의 향기로운 공기를 통하야 오오 울리라 우리들의 교향악을 ({조선지광}, 1928.7)     60. 너무도 슬픈 사실-봄의 선구자 '진달래'를 노래함                       - 박팔양(朴八陽)   날더러 진달래꽃을 노래하라 하십니까 이 가난한 시인더러 그 적막하고도 가녈픈 꽃을 이른 봄 산골짜기에 소문도 없이 피었다가 하로 아침 비비람에 속절없이 떨어지는 그 꽃을 무슨 말로 노래하라 하십니까   노래하기에는 너무도 슬픈 사실이외다 백일홍같이 붉게 붉게 피지도 못하는 꽃을 국화와 같이 오래오래 피지도 못하는 꽃을 모진 비바람 만나 흩어지는 가엾은 꽃을 노래하느니 차라리 붙들고 울 것이외다   친구께서도 이미 그 꽃을 보셨으리다 화려한 꽃들이 하나도 피기도 전에 찬 바람 오고가는 산허리에 쓸쓸하게 피어 있는 봄의 선구자 연분홍의 진달래꽃을 보셨으리다.   진달래꽃은 봄의 선구자외다 그는 봄의 소식을 먼저 전하는 예언자이며 봄의 모양을 먼저 그리는 선구자외다 비바람에 속절없이 지는 그 엷은 꽃잎은 선구자의 불행한 수난이외다   어찌하야 이 나라에 태어난 이 가난한 시인이 이같이도 그 꽃을 붙들고 우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의 선구자들 수난의 모양이 너무도 많이 나의 머릿속에 있는 까닭이외다   노래하기에는 너무도 슬픈 사실이외다 백일홍같이 붉게붉게 피지도 못하는 꽃을 국화와 같이 오래오래 피지도 못하는 꽃을 모진 비바람 만나 흩어지는 가엾은 꽃을 노래하느니 차라리 붙들고 울 것이외다   그러나 진달래꽃은 오라는 봄의 모양을 그 머리속에 그리면서 찬 바람 오고 가는 산허리에서 오히려 웃으며 말할 것이외다 '오래오래 피는 것이 꽃이 아니라 봄철을 먼저 아는 것이 정말 꽃이라' 고  ({학생}, 1930.4)     61. 오후의 마천령(摩天嶺)                        - 박세영(朴世永)   장마물에 파진 골짜기, 토막토막 떨어진 길을, 나는 홀로 걸어서 병풍같이 둘린 높은 산 아래로 갑니다. 해 질 낭*이 멀었건만, 벌서 회색의 장막이 둘러집니다.   나의 가는 길은 조그만 산기슭에 숨어버리고, 멀리 산아래 말에선 연기만 피어 오를 때, 나는 저 마천령*을 넘어야 됩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저 산을 넘다니, 산을 싸고 도는 길이 있으면, 백리라도 돌고 싶습니다. 나는 다만 터진 북쪽을 바라보나, 길은 기어이 산 위로 뻗어 올라 갔습니다.   나는 장엄한 대자연에 눌리어, 산같은 물결에 삼켜지는 듯이, 나의 마음은 떨리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빠삐론* 사람처럼, 칼을 빼어 든 무녀(巫女)처럼, 산에 절할줄도 몰랐습니다.   나는 기어이 고개길로 발을 옮겼습니다. 불긋불긋 이따금 고갯길 토막이 뵈는 듯 마는 듯, 이몸이 어디로 가질지도 모르는, 사로잡힌 마음이여, 이리구도 천하를 근심하였나, 스스로 마음먹습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은 갑옷을 입은 전사(戰士)와 같이, 성난 이리와 같이, 고개길을 쿵쿵 울리고 올라갑니다. 거울 같은 산기슭의 호수는 나의 마음을 비처 보는 듯, 올라가면 오를수록 겁나던 마음이야 옛일 같습니다.   나는 마천령 위에서 나의 오르던 길을 바라봅니다. 이리 꼬불, 저리 꼬불, W자, I자, N자, 이리하여 나는 승리의 길, WIN자를 그리며 왔습니다.   모든 산은 엎디고, 왼 세상이 눈 아래서 발버둥칠 때, 지금의 나의 마음은 나를 내려다보든 이 산이나 같이 되었습니다. 이 장쾌함이여, 이 위대함이여, 나는 언제나 이 마음을 사랑하겠습니다.   * 마천령 : 함경남도 단천(端川)과 함경북도 성진(成津) 사이의 고개. 해발 725m. * 해 질 낭 : 해 질 양, 해가 지려 하는 것. * 빠삐론 : 바빌론 ({학등}, 1936.3)     62. 산제비                                                               - 박세영(朴世永)   남국에서 왔나, 북국에서 왔나, 산상(山上)에도 상상봉(上上峰), 더 오를 수 없는 곳에 깃들인 제비. 너희야말로 자유의 화신 같구나, 너희 몸을 붙들 자(者) 누구냐, 너희 몸에 알은 체할 자 누구냐, 너희야말로 하늘이 네 것이요, 대지가 네 것 같구나.   녹두만한 눈알로 천하를 내려다보고, 주먹만한 네 몸으로 화살같이 하늘을 꿰어 마술사의 채찍같이 가로 세로 휘도는 산꼭대기 제비야 너희는 장하구나.   하루 아침 하루 낮을 허덕이고 올라와 천하를 내려다보고 느끼는 나를 웃어 다오, 나는 차라리 너희들같이 나래라도 펴 보고 싶구나, 한숨에 내닫고 한숨에 솟치어 더 날을 수 없이 신비한 너희같이 돼보고 싶구나.   창(槍)들을 꽂은 듯 희디흰 바위에 아침 붉은 햇발이 비칠 때 너희는 그 꼭대기에 앉아 깃을 가다듬을 것이요, 산의 정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를 때, 너희는 맘껏 마시고, 마음껏 휘정거리며 씻을 것이요, 원시림에서 흘러나오는 세상의 비밀을 모조리 들을 것이다.   멧돼지가 붉은 흙을 파헤칠 때 너희는 별에 날아볼 생각을 할 것이요, 갈범이 배를 채우려 약한 짐승을 노리며 어슬렁거릴 때, 너희는 인간의 서글픈 소식을 전하는,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알려주는 천리조(千里鳥)일 것이다.   산제비야 날아라, 화살같이 날아라, 구름을 휘정거리고 안개를 헤쳐라.   땅이 거북등같이 갈라졌다. 날아라 너희들은 날아라, 그리하여 가난한 농민을 위하여 구름을 모아는 못 올까, 날아라 빙빙 가로 세로 솟치고 내닫고, 구름을 꼬리에 달고 오라.   산제비야 날아라, 화살같이 날아라, 구름을 헤치고 안개를 헤쳐라. ({낭만}, 1936.11)     63. 시대병 환자(時代炳患者)                      - 박세영(朴世永)   솔개미가 빙빙 단엽기(單葉機)*같이 날른다. 소란한 도시는 떠는 듯 무장을 하였다.   청년단원들이 나팔을 불고 지나 가고 트럭이 쉴 새 없이 도심지대를 향하여 달리고 있다.   납작한 보루같이 그 병원의 집 위론 고사포(高射砲) 둘이 솟았다. 금방에 나르던 솔개미가 사라지니 연기가 무럭무럭 콩크리트의 굴둑은 길기도 하다.   내 눈이 미쳤나 보면 볼수록 늘어가는 고사포, 공장마다 솟는 굴둑, 이리하여 도시는 완연히 내일을 준비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독까스를 마신 질식한 사나이, 시대병 환자다. 그러나 나를 환자라고 보는 이가 없다. 보아주는 이조차 없다.   * 단엽기 : 몸체 양편에 한 개 씩의 날개가 달려 있는 비행기. ({풍림}, 1936.12)     64. 성씨보(姓氏譜)-오래인 관습, 그것은 전통을 말함이다.                         - 오장환(吳章煥)   내 성은 오씨(吳氏). 어째서 오가인지 나는 모른다. 가급적으로 알리워 주는 것은 해주로 이사온 일청인(一淸人)이 조상이라는 가계보의 검은 먹글씨. 옛날은 대국 숭배(大國崇拜)를 유심히는 하고 싶어서, 우리 할아버니는 진실 이가였는지 상놈이었는지 알 수도 없다. 똑똑한 사람들은 항상 가계보룰 창작하였고 매매하였다. 나는 역사를, 내 성을 믿지 않어도 좋다. 해변 가으로 밀려온 소라 속처럼 나도 껍데기가 무척은 무거웁고나. 수퉁하구나. 이기적인, 너무나 이기적인 애욕을 잊을랴면은 나는 성씨보가 필요치 않다. 성씨보와 같은 관습이 필요치 않다. ({조선일보}, 1936.10.10)     65. 성벽(城壁)                          - 오장환(吳章煥)    세세전대만년성(世世傳代萬年盛)하리라는 성벽은 편협한 야심처럼 검고 빽빽하거니 그러나 보수(保守)는 진보(進步)를 허락치 않어 뜨거운 물 끼언고 고추가루 뿌리든 성벽은 오래인 휴식에 인제는 이끼와 등넝쿨이 서로 엉키어 면도 않은 턱어리처럼 지저분하도다. ({시인부락}, 1936.11)     66. 모 촌(暮村)                        - 오장환(吳章煥)    초라한 지붕 썩어 가는 추녀 위엔 박 한 통이 쇠었다.    밤 서리 차게 내려앉는 밤, 싱싱하던 넝쿨이 사그라 붙던 밤, 지붕 밑 양주(兩主)*는 밤새워 싸웠다.    박이 딴딴히 굳고 나뭇잎새 우수수 떨어지던 날, 양주는 새 바가지 뀌어 들고 초라한 지붕, 썩어 가는 추녀가 덮인 움막을 작별하였다.   * 양주(兩主) : 바깥 주인과 안 주인, 즉 부부를 뜻함. ({시인부락}, 1936.11)       67. 황혼(黃昏)                         - 오장환(吳章煥)    직업소개에는 실업자들이 일터와 같이 출근하였다. 아모 일도 안하면 일할 때보다는 야위워진다. 검푸른 황혼은 언덕알로 깔리어 오고 가로수와 절망과 같은 나의 기-ㄴ 그림자는 군집의 대하에 짓밟히었다.    바보와 같이 거물어지는 하늘을 보며 나는 나의 키보다 얕은 가로수에 기대어섰다. 병든 나에게도 고향은 있다. 근육이 풀릴 때 향수는 실마리처럼 풀려나온다. 나는 젊음의 자랑과 희망을, 나의 무거운 절망의 그림자와 함께, 뭇사람의 웃음과 발길에 채우고 밟히며 스미어오는 황혼에 맡겨버린다.    제집을 향하는 많은 군중들은 시끄러히 떠들며, 부산히 어둠 속으로 흐터저버리고. 나는 공복의 가는 눈을 떠, 희미한 노등(路燈)을 본다. 띠엄띠엄 서 있는 포도( 道)우에 잎새 없는 가로수도 나와 같이 공허하고나.    고향이여! 황혼의 저자*에서 나는 아리따운 너의 기억을 찾어 나의 마음을 전서구(傳書鳩)*와 같이 날려 보낸다. 정든 고삿*. 썩은 울타리. 늙은 아베*의 하-얀 상투에는 몇 나절의 때묻은 회상이 맺어 있는가. 우거진 송림 속으로 곱-게 보이는 고향이여! 병든 학(鶴)이었다. 너는 날마다 야위어가는……    어디를 가도 사람보다 일 잘하는 기계는 나날이 늘어나가고, 나는 병든 사나이. 야윈 손을 들어 오랫동안 타태(墮怠)와, 무기력을 극진히 어루만졌다. 어두워지는 황혼 속에서, 아무도 보는 이 없는, 보이지 않는 황혼 속에서, 나는 힘없는 분노와 절망을 묻어버린다. * 저자 :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가게. 큰 길거리에서 반찬거리를 사고 파는 장(場). * 전서구 : 소식을 전하는 비들기. * 고삿 : 마을의 좁은 골목. 고샅이 표준말. * 아베 : 아버지. (시집 {성벽}, 1937)   68. 소야(小夜)의 노래                         - 오장환(吳章煥)   무거운 쇠사슬 끄으는 소리 내 맘의 뒤를 따르고 여기 쓸쓸한 자유(自由)는 곁에 있으나 풋풋이 흰눈은 흩날려 이정표(里程表)* 썩은 막대 고이 묻히고 더러운 발자국 함부로 찍혀 오직 치미는 미움 낯선 집 울타리에 돌을 던지니 개가 짖는다. 어메야, 아직도 차디찬 묘(墓) 속에 살고 있느냐. 정월(正月) 기울어 낙엽송(落葉松)에 쌓인 눈 바람에 흐트러지고 산(山)짐승의 우는 소리 더욱 처량히 개울물도 파랗게 얼어 진눈깨비는 금시로 나려 비애(悲哀)를 적시울 듯 도형수(徒刑囚)* 발은 무겁다. * 이정표 : 육로(陸路)의 이정을 기록한 일람표. 정리표(程里表). * 도형 : 조선 시대의 오형(五刑)의 하나. 곤장 10대와 복역 반 년을 한 등급으로 하여, 5등급까지 있었음. ({사해 공론}, 1938.10) 69. 고향 앞에서                         - 오장환(吳章煥)   흙이 풀리는 내음새 강바람은 산짐승의 우는 소릴 불러 다 녹지 않은 얼음장 울멍울멍 떠내려간다.   진종일 나룻가에 서성거리다 행인의 손을 쥐면 따뜻하리라.   고향 가까운 주막에 들러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 양귀비 끓여다 놓고 주인집 늙은이는 공연히 눈물지운다.   간간이 잣나비 우는 산기슭에는 아직도 무덤 속에 조상이 잠자고 설레는 바람이 가랑잎을 휩쓸어 간다.   예제로 떠도는 장꾼들이여! 상고(商賈)*하며 오가는 길에 혹여나 보셨나이까.   전나무 우거진 마을 집집마다 누룩을 디디는 소리, 누룩이 뜨는 내음새 ……   * 상고(商賈) : 장수. ({인문평론}, 1940.4)     70. 북(北)쪽                      - 이용악(李庸岳)   북쪽은 고향 그 북쪽은 여인(女人)이 팔려간 나라 머언 산맥(山脈)에 바람이 얼어붙을 때 다시 풀릴 때 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 마음은 눈감을 줄 모른다 (시집 {분수령}, 1937)       71. 풀버렛소리 가득차 있었다                      - 이용악(李庸岳)   우리집도 아니고 일가집도 아닌 집 고향은 더욱 아닌 곳에서 아버지의 침상(寢床) 없는 최후(最後)의 밤은 풀버렛소리 가득 차 있었다. 노령(露領)을 다니면서까지 애써 자래운 아들과 딸에게 한 마디 남겨 두는 말도 없었고 아무을만(灣)의 파선도 설룽한 니코리스크의 밤도 완전히 잊으셨다 목침을 반듯이 벤 채   다시 뜨시잖는 두 눈에 피지 못한 꿈의 꽃봉오리가 깔앉고 얼음장에 누우신 듯 손발은 식어갈 뿐 입술은 심장의 영원한 정지(停止)를 가르쳤다. 때늦은 의원(醫員)이 아모 말 없이 돌아간 뒤 이웃 늙은이 손으로 눈빛 미명은 고요히 낯을 덮었다   우리는 머리맡에 엎디어 있는 대로의 울음을 다아 울었고 아버지의 침상 없는 최후의 밤은 풀버렛소리 가득 차 있었다.   * 아므을만(灣) : 흑룡강 하류의 아무르 지역. * 니코리스크 : 시베리아 하구의 항구 도시 니콜라에프스크를 가리킴. (시집 {분수령}, 1937)     72. 낡은 집                        - 이용악(李庸岳)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에 물려줄 은동곳도 산호관자도 갖지 못했니라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래 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무도 모른다   찻길이 놓이기 전 노루 멧돼지 쪽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놓고 뛰어다니던 시절 털보의 셋째 아들은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털보네는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래두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 " 마을 아낙네들은 무심코 차가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보냈다는 그날 밤 저릎등*이 시름시름 타들어가고 소주에 취한 털보의 눈도 일층 붉더란다   갓주지* 이야기와 무서운 전설 가운데서 가난 속에서 나의 동무는 늘 마음 졸이며 자랐다 당나귀 몰고 간 애비 돌아오지 않는 밤 노랑 고양이 울어 울어 종시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어미 분주히 일하는 방앗간 한구석에서 나의 동무는 도토리의 꿈을 키웠다   그가 아홉 살 되던 해 사냥개 꿩을 쫓아다니는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데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북쪽을 향한 발자욱만 눈 위에 떨고 있었다   더러는 오랑캐령 쪽으로 갔으리라고 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 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탐스럽게 열던 살구 살구나무도 글거리*만 남았길래 꽃 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울안에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 무곡(貿穀) : 장사하려고 많은 곡식을 사들임. * 둥글소 : 황소. * 싸리말 : 싸리비. 함경도에선 아이들이 이것을 말 삼아 타고 놂. * 짓두광주리 : 바느질고리의 함경도 방언. * 저릎등 : 겨릅등의 함경도 방언. 긴 삼대를 태워 불을 밝히는 장치. * 갓주지 : 갓을 쓴, 절의 주지승(住持僧). 옛날에는 아이들을 달래거나 울음을 그치게 할 때, 이 갓주지 이야기를 했다고 함. * 글거리 : 그루터기. 풀이나 나무를 베고 남은 밑둥. (시집 {낡은 집}, 1938)     73.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 이용악(李庸岳)   나는 죄인처럼 수그리고 나는 코끼리처럼 말이 없다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너의 언덕을 달리는 찻간에 조그마한 자랑도 자유도 없이 앉았다 아무것도 바라볼 수 없다만 너의 가슴은 얼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안다 다른 한 줄 너의 흐름이 쉬지 않고 바다로 가야 할 곳으로 흘러내리고 있음을   지금 차는 차대로 달리고 바람이 이리처럼 날뛰는 강 건너 벌판엔 나의 젊은 넋이 무엇인가 기다리는 듯 얼어붙은 듯 섰으니 욕된 운명은 밤 위에 밤을 마련할 뿐   잠들지 마라 우리의 강아 오늘밤도 너의 가슴을 밟는 뭇슬픔이 목마르고 얼음길은 거칠다 길은 멀다   길이 마음의 눈을 덮어줄 검은 날개는 없느냐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북간도로 간다는 강원도치*와 마주앉은 나는 울 줄을 몰라 외롭다   * 강원도치 : 강원도 사람. (시집 {낡은 집}, 1938)     74. 오랑캐꽃                      - 이용악(李庸岳)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움에 살았다는 우리는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채를 드리운 오랑캐의 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띠집도 버리고 강건너로 쫓겨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  백 년이 몇백 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 줄게  울어 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 도래샘 : 빙 돌아서 흐르는 샘물. '도래'는 도랑의 함경도 방언. ({인문평론}, 1939.10)     75. 전라도 가시내                      - 이용악(李庸岳)   알룩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 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전 무섭지 않다만 어두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히 잠거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도 외로워서 슬퍼서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어 울어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양 유리창이 흐리더냐   차알삭 부서지는 파도 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 줄께 손때 수줍은 분홍 댕기 휘 휘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 호개 : 호가(胡歌), 호인(胡人)들의 노랫소리 * 눈포래 : 눈보라. * 불술기 : 불수레, 즉 태양 ({시학}, 1940.8)     76. 황혼(黃昏)                          - 이육사   내 골방의 커튼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 보련다. 그리고 네 품안에 안긴 모든 것에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 다오.   저 십이(十二) 성좌(星座)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소리 저문 삼림(森林) 속 그윽한 수녀(修女)들에게도, 시멘트 장판 위 그 많은 수인(囚人)들에게도, 의지 가지 없는 그들의 심장(心臟)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사막(沙漠)을 걸어가는 낙타(駱駝) 탄 행상대(行商隊)에게나, 아프리카 녹음(綠陰) 속 활 쏘는 토인(土人)들에게라도, 황혼아, 네 부드러운 품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地球)의 반(半)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 다오.   내 오월(五月)의 골방이 아늑도 하니 황혼아, 내일(來日)도 또 저 푸른 커튼을 걷게 하겠지. 암암(暗暗)히 사라지는 시냇물 소리 같아서 한 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나 보다. 5월의 병상(病床)에서 ({신조선}, 1935.12)     77. 연보(年譜)                             - 이육사   '너는 돌다릿목에서 줘 왔다'던 할머니의 핀잔이 참이라고 하자.   나는 진정 강언덕 그 마을에 버려진 문받이였는지 몰라.   그러기에 열여덟 새 봄은 버들피리 곡조에 불어 보내고   첫사랑이 흘러간 항구의 밤 눈물 섞어 마신 술, 피보다 달더라.   공명이 마다곤들 언제 말이나 했나 바람에 붙여 돌아온 고장도 비고   서리 밟고 걸어간 새벽 길 위에 간(肝) 잎만이 새하얗게 단풍이 들어   거미줄만 발목에 걸린다 해도 쇠사슬을 잡아맨 듯 무거워졌다.   눈 위에 걸어가면 자욱이 지리라. 때로는 설레이며 바람도 불지. ({시학} 창간호, 1939.4)       78. 노정기(路程記)                        - 이육사   목숨이란 마치 깨어진 뱃조각 여기저기 흩어져 마음이 구죽죽한 어촌(漁村)보담 어설프고 삶의 티끌만 오래 묵은 포범(布帆)처럼 달아매었다   남들은 기뻤다는 젊은 날이었건만 밤마다 내 꿈은 서해(西海)를 밀항(密航)하는 쩡크와 같아 소금에 절고 조수(潮水)에 부풀어 올랐다   항상 흐릿한 밤 암초(暗礁)를 벗어나면 태풍(颱風)과 싸워가고 전설(傳說)에 읽어 본 산호도(珊瑚島)는 구경도 못하는 그곳은 남십자성(南十字星)이 비쳐주도 않았다 쫓기는 마음 지친 몸이길래 그리운 지평선(地平線)을 한숨에 기오르면 시궁치는 열대식물(熱帶植物)처럼 발목을 오여 쌌다   새벽 밀물에 밀려온 거미이냐 다 삭아빠진 소라 껍질에 나는 붙어 왔다 먼 항구(港口)의 노정(路程)에 흘러간 생활(生活)을 들여다보며 ({자오선}, 1937.12)     79. 꽃                          - 이육사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約束)이여   한 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城)에는 나비처럼 취(醉)하는 회상(回想)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 맹아리 : 꽃망울의 경상북도 방언. (시집 {육사 시집}, 1946)     80. 자야곡(子夜曲)                          - 이육사   수만 호 빛이래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리라   슬픔도 자랑도 집어삼키는 검은 꿈 파이프엔 조용히 타오르는 꽃불도 향기론데   연기는 돛대처럼 내려 항구에 들고 옛날의 들창마다 눈동자엔 짜운 소금이 저려   바람 불고 눈보래 치잖으면 못 살리라 매운 술을 마셔 돌아가는 그림자 발자취 소리   숨막힐 마음 속에 어데 강물이 흐르뇨 달은 강을 따르고 나는 차디찬 강 맘에 드리라   수만 호 빛이래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리라 ({문장} 23호, 1941.4)     81. 청포도                                 -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찿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문장} 7호, 1939.8)     82. 절정(絶頂)                         - 이육사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 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문장} 12호, 1940.1)     83. 교목(喬木)                          - 이육사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 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인문평론}, 1940.7)     84. 광야(曠野)                            -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시집 {육사 시집}, 1946)     85. 초 한대                                           - 윤동주(尹東柱)   초 한대 내 방에 품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의 생명인 심지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려 버린다.   그리고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품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86. 오줌싸개 지도                                          - 윤동주(尹東柱)   빨래줄에 걸어 논  요에다 그린 지도 지난 밤에 내 동생  오줌 싸 그린 지도   꿈에 가 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 벌러 간 아빠 계신  만주 땅 지돈가?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87. 아우의 인상화(印象畵)                                            - 윤동주(尹東柱)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애띤 손을 잡으며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 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88. 자화상(自畵像)                                           - 윤동주(尹東柱)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89. 병원(病院)                                             - 윤동주(尹東柱)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90. 십자가(十字架)                                          - 윤동주(尹東柱)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91. 길                                             - 윤동주(尹東柱)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 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92. 또 다른 고향(故鄕)                                            - 윤동주(尹東柱)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 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魂)이 우는 것이냐   지조(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93. 별 헤는 밤                                            - 윤동주(尹東柱)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詩)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 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異國少女) 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란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北間島)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94. 서시(序詩)                                                - 윤동주(尹東柱)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 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95. 간(肝)                                             - 윤동주(尹東柱)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肝)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는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龍宮)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96. 참회록(懺悔錄)                                           - 윤동주(尹東柱)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滿)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97. 쉽게 씌어진 시(詩)                                          - 윤동주(尹東柱)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98. 그 날이 오면                                               - 심 훈(沈 薰)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 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 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頭蓋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恨)이 남으오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딩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 인경 : 밤에 통행 금지를 알리기 위해 설치한 큰 종.  (시집 {그 날이 오면}, 1949)     99. 만가(輓歌)                                            - 심 훈(沈 薰)   궂은 비 줄줄이 내리는 황혼의 거리를 우리들은 동지의 관을 메고 나간다. 수의(壽衣)도 명정(銘旌)도 세우지 못하고 수의조차 못 입힌 시체를 어깨에 얹고 엊그제 떠메어 내오던 옥문(獄門)을 지나 철벅철벅 말 없이 무학재를 넘는다.   비는 퍼붓듯 쏟아지고 날은 더욱 저물어 가등(街燈)은 귀화(鬼火)같이 껌벅이는데 동지들은 옷을 벗어 관 위에 덮는다. 평생을 헐벗던 알몸이 추울상 싶어 얇다란 널조각에 비가 새들지나 않을까 하여 단거리 옷을 벗어 겹겹이 덮어 준다.   ( 이하 6행 삭제 )   동지들은 여전히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인채 저벅저벅 걸어간다. 친척도 애인도 따르는 이 없어도 저승길까지 지긋지긋 미행이 붙어서 조가(弔歌)도 부르지 못하는 산 송장들은 관을 메고 철벅철벅 무학재를 넘는다. (시집 {그 날이 오면}, 1949)   ========================================================================== [출처] [펌] 3. 한국현대시 400선|작성자 수위  
198    현대시 400선 ㄱ 댓글:  조회:3367  추천:1  2015-02-13
한국현대시400선                                              목      차           1. 전환기의 좌절과 희망   1. 최남선(崔南善)   -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 2. 최남선           - 꽃 두고 3. 이광수(李光洙)   - 비둘기 4. 주요한(朱耀翰)   - 샘물이 혼자서 5. 주요한           - 불놀이 6. 주요한           - 빗소리 7. 김억(金億)        - 봄은 간다 8. 김억             - 오다 가다 9. 황석우(黃錫禹)   - 벽모(碧毛)의 묘(猫)               10. 오상순(吳相淳)    -방랑(放浪)의 마음 11. 변영로(卞榮魯)    - 봄비 12. 변영로            - 논개 13. 홍사용(洪思容)    - 나는 왕(王)이로소이다 14. 박영희(朴英熙)    - 월광(月光)으로 짠 병실(病室) 15. 박종화            - 사(死)의 예찬(禮讚) 16. 이장희(李章熙)    - 봄은 고양이로다 17. 노자영(盧子泳)    - 물결 18. 양주동(梁柱東)    - 조선(朝鮮)의 맥박(脈搏) 19. 김동환(金東煥)    - 국경(國境)의 밤 20. 김동환            - 눈이 내리느니 21. 김동환            - 북청(北靑) 물장수 22. 김동환            - 산(山) 너머 남촌(南村)에는 23. 김동환             - 송화강 뱃노래 24. 김소월(金素月)     - 엄마야 누나야 25. 김소월             - 금잔디 26. 김소월             - 진달래꽃 27. 김소월             - 접동새 28. 김소월             - 왕십리(往十里) 29. 김소월             - 삭주 구성(朔州龜城) 30. 김소월             - 산(山) 31. 김소월             - 가는길 32. 김소월             - 서도 여운(西道餘韻) - 옷과 밥과 자유(自由) 33. 김소월             - 길 34. 김소월             - 산유화(山有花) 35. 김소월             - 초혼(招魂) 36. 김소월             - 바라건대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37. 김소월             - 삼수갑산(三水甲山) - 차안서삼수갑산운(次岸曙三水甲山韻) 38. 한용운(韓龍雲)     - 님의 침묵(沈黙) 39. 한용운            - 이별은 미(美)의 창조 40. 한용운            - 알 수 없어요 41. 한용운            - 나룻배와 행인(行人) 42. 한용운            - 당신을 보았습니다 43. 한용운            - 복종(服從) 44. 한용운            - 정천 한해(情天恨海) 45. 한용운            - 찬송(讚頌) 46. 한용운            - 타고르의 시(詩) GARDENISTO를 읽고 47. 한용운            - 명상(冥想)   2. 식민지 현실의 폭로와 저항의 의지   48. 이상화(李相和)    - 나의 침실로 49. 이상화            - 가장 비통한 기욕(祈慾) 50. 이상화            - 통곡(痛哭) 51. 이상화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52. 이상화            - 병적 계절(病的季節) 53. 임화(林和)         - 네 거리의 순이(順伊) 54. 임화               - 우리 오빠와 화로 55. 임화               - 한 잔 포도주를 56. 김해강(金海剛)      - 봄을 맞는 폐허에서 57. 김해강             - 새 날의 기원 58. 박팔양(朴八陽)     - 밤차 59. 박팔양             - 데모 60. 박팔양             - 너무도 슬픈 사실-봄의 선구자 '진달래'를 노래함 61. 박세영(朴世永)      - 오후의 마천령(摩天嶺) 62. 박세영             - 산제비 63. 박세영             - 시대병 환자(時代病患者) 64. 오장환(吳章煥)     - 성씨보(姓氏譜) - 오래인 관습, 그것은 전통을 말함이다 65. 오장환             - 성벽(城壁) 66. 오장환             - 모촌(暮村) 67. 오장환             - 황혼(黃昏) 68. 오장환             - 소야(小夜)의 노래 69. 오장환             - 고향 앞에서 70. 이용악(李庸岳)     - 북(北)쪽 71. 이용악             - 풀버렛소리 가득차 있었다 72. 이용악             - 낡은 집 73. 이용악             -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74. 이용악             - 오랑캐꽃 75. 이용악             - 전라도 가시내 76. 이육사(李陸史)      - 황혼(黃昏) 77. 이육사              - 연보(年譜) 78. 이육사              - 노정기(路程記) 79. 이육사              - 꽃 80. 이육사              - 자야곡(子野曲) 81. 이육사              - 청포도 82. 이육사              - 절정(絶頂) 83. 이육사              - 교목(喬木) 84. 이육사              - 광야(曠野) 85. 윤동주(尹東柱)       - 초 한대 86. 윤동주              - 오줌싸개 지도 87. 윤동주              - 아우의 인상화(印象畵) 88. 윤동주              - 자화상(自畵像) 89. 윤동주              - 병원(病院) 90. 윤동주              - 십자가(十字架) 91. 윤동주              - 길 92. 윤동주              - 또 다른 고향(故鄕) 93. 윤동주              - 별 헤는 밤 94. 윤동주              - 서시(序詩) 95. 윤동주              - 간(肝) 96. 윤동주              - 참회록(懺悔錄) 97. 윤동주              - 쉽게 씌어진 시(詩) 98. 심훈(沈熏)           - 그 날이 오면 99. 심훈                - 만가(輓歌)   3. 순수 서정과 모더니즘의 세계   100. 박용철(朴龍喆)      -  떠나가는 배 101. 박용철              - 싸늘한 이마 102. 김영랑(金永郞)      -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103. 김영랑              - 오매 단풍 들것네 104. 김영랑              -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105. 김영랑              - 내 마음을 아실 이 106. 김영랑              - 모란이 피기까지는 107. 김영랑              - 북 108. 김영랑              - 오월(五月) 109. 김영랑              - 독(毒)을 차고 110. 김영랑              - 춘향(春香) 111. 신석정(辛夕汀)       - 임께서 부르시면 112. 신석정               -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113. 신석정               -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114. 신석정               - 들길에 서서 115. 신석정               - 작은 짐승 116. 신석정               - 슬픈 구도(構圖) 117. 신석정               - 어느 지류(支流)에 서서 118. 정지용(鄭芝溶)        - 카페 프란스 119. 정지용               - 향수(鄕愁) 120. 정지용               - 말 121. 정지용               - 유리창(琉璃窓) 1 122. 정지용               - 그의 반 123. 정지용               - 고향(故鄕) 124. 정지용               - 난초(蘭草) 125. 정지용               - 바다 2 126. 정지용               - 구성동(九城洞) 127. 정지용               - 장수산(長壽山) 1 128. 정지용               - 춘설(春雪) 129. 정지용               - 백록담(白鹿潭) 130. 정지용               - 비 131. 정지용               - 인동차(忍冬茶) 132. 백석(白石)            - 정주성(定州城) 133. 백석                  - 여우난 곬족(族) 134. 백석                  - 가즈랑집 135. 백석                  - 모닥불 136. 백석                  - 여승(女僧) 137. 백석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138. 백석                  - 고향(故鄕) 139. 백석                  - 팔원(八院) - 서행 시초(西行詩抄) 3 140. 백석                  -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 141. 이상(李箱)             - 오감도(烏瞰圖) : 시 제1호 142. 이상                  - 꽃나무 143. 이상                  - 이런 시 144. 이상                  - 거울 145. 이상                  - 지비(紙碑) 146. 이상                  - 가정(家庭) 147. 김기림(金起林))        - 기상도(氣象圖) 148. 김기림                - 바다와 나비 149. 김광균(金光均)        - 성호 부근(星湖附近) 150. 김광균                - 설야(雪夜) 151. 김광균                - 와사등(瓦斯燈) 152. 김광균                - 데생 153. 김광균                - 외인촌(外人村) 154. 김광균                - 추일 서정(秋日抒情) 155. 장만영(張萬榮)        - 달 포도 잎사귀 156. 장만영                - 비의 Image 157. 장서언(張瑞彦)         - 고화병(古花甁) 158. 윤곤강(尹崑崗)         - 나비 159. 오일도(吳一島)         - 내 소녀(少女)   4. 생명의 의지와 전통의 깊이   160. 서정주(徐廷柱)         - 문둥이 161. 서정주                 - 화사(花蛇) 162. 서정주                 - 자화상(自畵像) 163. 서정주                 - 귀촉도(歸蜀途) 164. 유치환(柳致環)         - 깃발 165. 유치환                 - 생명의 서(書) 166. 유치환                 - 일월(日月) 167. 유치환                 - 바위 168. 유치환                 - 광야(曠野)에 와서 169. 유치환                 - 춘신(春信) 170. 김광섭(金珖燮)          - 고독(孤獨) 171. 김광섭                 - 동경(憧憬) 172. 김광섭                 - 비 개인 여름 아침 173. 김광섭                 - 마음 174. 김상용(金尙鎔)          -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 175. 함형수(咸亨洙)          -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176. 김동명(金東鳴)          - 파초(芭蕉) 177. 김동명                  - 내 마음은 178. 김동명                  - 밤 179. 노천명(盧天命)           - 사슴 180. 노천명                  - 푸른 오월 181. 노천명                  - 남사당(男寺黨) 182. 박목월(朴木月)           - 나그네 183. 박목월                  - 윤사월(閏四月) 184. 박목월                  - 청노루 185. 박목월                  - 산이 날 에워싸고 186. 박두진(朴斗鎭)           - 묘지송(墓地頌) 187. 박두진                   - 향현(香峴) 188. 박두진                   - 어서 너는 오너라 189. 조지훈(趙芝薰)            - 고풍 의상(古風衣裳) 190. 조지훈                    - 승무(僧舞) 191. 조지훈                   - 봉황수(鳳凰愁) 192. 조지훈                   - 완화삼(玩花衫) 193. 조지훈                   - 낙화(落花) 194. 조지훈                   - 고사(古寺) 1 195. 박남수(朴南秀)            - 마을 196. 박남수                    - 초롱불 197. 박남수                    - 밤길 198. 김종한(金鍾漢)            - 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 199. 이한직(李漢稷)             - 풍장(風葬) 200. 이한직                    - 낙타(駱駝)   5. 해방공간의 서정과 시적 인식의 확대   201. 정지용(鄭芝溶)             - 그대들 돌아오시니 - 재외혁명동지에게 202. 조지훈(趙芝薰)             - 산상(山上)의 노래 203. 박두진(朴斗鎭)             - 해 204. 신석정(辛夕汀)             - 꽃덤불 205. 조영출(趙靈出)             - 슬픈 역사의 밤은 새다 206. 김기림(金起林)              - 연가(戀歌) 207. 임화(林和)                 - 9월 12일 - 1945년, 또다시 네거리에서 208. 임화                       - 깃발을 내리자 209. 오장환(吳章煥)             - 병든 서울 210. 박세영(朴世永)             - 순아 211. 김광균(金光均)             - 3.1날이여! 가슴아프다 212. 설정식(薛貞植)             - 해바라기 3 213. 설정식                     - 종(鐘) 214. 여상현(呂尙玄)             - 봄날 215. 여상현                     - 분수 216. 김상훈(金尙勳)              - 아버지의 창 앞에서 217. 김상훈                     - 호롱불 218. 이용악(李庸岳)              - 그리움 219. 이용악                     - 하나씩의 별 220. 유진오(兪鎭五)              - 불길 221. 유진오                      - 향수 222. 이병철(李秉哲)              - 곡(哭)-오호애재(嗚呼哀哉) 223. 김철수(金哲洙)              - 역마차 224. 윤곤강(尹崑崗)              - 지렁이의 노래   6. 전통시의 계승과 변모   225. 김광균(金光均)              - 은수저 226. 서정주(徐廷柱)              - 밀어(密語) 227. 서정주                      - 국화 옆에서 228. 서정주                      - 무등(無等)을 보며 229. 서정주                      - 상리과원(上里果園) 230. 서정주                      - 광화문(光化門) 231. 서정주                      - 추천사( 韆詞) - 춘향(春香)의 말 1 232. 서정주                      - 다시 밝은 날에 - 춘향(春香)의 말 2 233. 서정주                      - 춘향 유문(春香遺文) - 춘향(春香)의 말 3 234. 서정주                      - 꽃밭의 독백(獨白) - 사소(娑蘇) 단장(斷章) 235. 서정주                      - 동천(冬天) 236. 서정주                      - 신부(新婦) 237. 유치환(柳致環)               - 울릉도 238. 유치환                      - 행복(幸福) 239. 유치환                      - 저녁놀 240. 유치환                      -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241. 조지훈(趙芝薰)              - 풀잎 단장(斷章) 242. 조지훈                      - 석문(石門) 243. 조지훈                      - 민들레꽃 244. 조지훈                      - 패강 무정(浿江無情) 245. 조지훈                      - 꿈 이야기 246. 조지훈                      - 병(病)에게 247. 박목월(朴木月)               - 산도화(山桃花) 1 248. 박목월                       - 불국사(佛國寺) 249. 박목월                       - 달 250. 박목월                       - 하관(下棺) 251. 박목월                       - 적막(寂寞)한 식욕(食慾) 252. 박목월                       - 나무 253. 박목월                       - 우회로(迂廻路) 254. 박목월                       - 이별가(離別歌) 255. 박목월                       - 가정(家庭) 256. 박목월                       - 빈 컵 257. 박두진(朴斗鎭)                - 청산도(靑山道) 258. 박두진                       - 하늘 259. 박두진                       - 도봉(道峰) 260. 박두진                       - 강(江) 2 261. 박두진                       - 꽃 262. 박두진                       - 유전도(流轉圖) - 수석열전(水石列傳) 68 263. 박남수(朴南秀)               - 새 264. 박남수                       - 아침 이미지 265. 박남수                       - 종소리 266. 박남수                       - 훈련 267. 김현승(金顯承)               - 플라타너스 268. 김현승                       - 눈물 269. 김현승                       - 가을 270. 김현승                       - 가을의 기도 271. 김현승                       - 견고(堅固)한 고독 272. 김현승                       - 파도 273. 김현승                       - 절대고독 274. 김현승                       - 아버지의 마음 275. 김광섭(金珖燮)                - 생(生)의 감각 276. 김광섭                        - 성북동(城北洞) 비둘기 277. 김광섭                        - 산(山) 278. 김광섭                        - 시인 279. 김광섭                        - 저녁에 280. 신석정(辛夕汀)                 - 전아사(餞 詞) 281. 신석정                         - 대바람 소리 282. 신석초(申石艸)                 - 바라춤 283. 신석초                         - 꽃잎 절구(絶句) 284. 김용호(金容浩)                  - 주막(酒幕)에서 285. 김용호                          - 눈오는 밤에   7. 전후(戰後)의 현실과 시적 대응   286. 김수영(金洙暎)                  - 공자(孔子)의 생활난(生活難) 287. 김수영                         - 병풍(屛風) 288. 김수영                         - 눈 289. 김수영                         - 달나라의 장난 290. 김수영                         - 폭포(瀑布) 291. 김수영                         - 사령(死靈) 292. 박인환(朴寅煥)                  - 목마(木馬)와 숙녀(淑女) 293. 박인환                          - 세월이 가면 294. 박인환                          -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295. 박인환                          - 검은 강 296. 모윤숙(毛允淑)                  -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297. 구상(具常)                      - 초토(焦土)의 시 8 - 적군 묘지 앞에서 298. 구상                            - 기도 299. 김경린(金璟麟)                   - 국제열차(國際列車)는 타자기(打字機)처럼 300. 한성기(韓性祺)                   - 역(驛) 301. 김규동(金奎東)                   - 나비와 광장(廣場) 302. 박봉우(朴鳳宇)                   - 휴전선(休戰線) 303. 유정(柳呈)                        - 램프의 시 304. 이동주(李東柱)                    - 강강술래 305. 한하운(韓何雲)                    - 전라도 길 - 소록도로 가는 길 306. 한하운                            - 보리피리 307. 김춘수(金春洙)                    - 꽃 308. 김춘수                            - 꽃을 위한 서시(序詩) 309. 김춘수                            - 능금 310. 김춘수                            - 인동(忍冬)잎 311. 김춘수                            - 나의 하나님 312. 김춘수                            - 처용단장(處容斷章) 1의 2 313. 김남조(金南祚)                     - 정념(情念)의 기(旗) 314. 김남조                            - 너를 위하여 315. 김남조                            - 겨울 바다 316. 박재삼(朴在森)                     - 밤바다에서 317. 박재삼                             - 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 318. 박재삼                            - 자연(自然) 319. 박재삼                             - 추억(追憶)에서 320. 정한모(鄭漢模)                     - 멸입(滅入) 321. 정한모                             - 가을에 322. 정한모                             - 나비의 여행(旅行) - 아가의 방(房) 5 323. 정한모                             - 어머니 6 324. 조병화(趙炳華)                      - 하루만의 위안 325. 조병화                              - 낙엽끼리 모여 산다 326. 조병화                              - 의자 7 327. 문덕수(文德守)                      - 꽃과 언어(言語) 328. 문덕수                              - 선(線)에 관한 소묘(素描) 1 329. 이형기(李炯基)                       - 낙화(落花) 330. 이형기                               - 산 331. 이형기                               - 폭포 332. 김종길(金宗吉)                        - 성탄제(聖誕祭) 333. 김종길                               - 설날 아침에 334. 김종길                               - 황사 현상(黃沙現象) 335. 이수복(李壽福)                        - 봄비 336. 김종삼(金宗三)                        - 북치는 소년 337. 김종삼                                - 민간인(民間人) 338. 김종삼                                -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339. 김관식(金冠植)                        - 석상(石像)의 노래 340. 박성룡(朴成龍)                        - 교외(郊外) 3 341. 박용래(朴龍來)                        - 연시(軟柿) 342. 박용래                                - 저녁눈 343. 박용래                                - 겨울밤 344. 박용래                                - 월훈(月暈) 345. 송욱(宋稶)                             - 하여지향(何如之鄕) 일(壹) 346. 김광림(金光林)                         - 산 9 347. 김광림                                 - 덤 348. 신동집(申瞳集)                         - 목숨 349. 신동집                                 - 송신(送信) 350. 신동집                                 - 오렌지 351. 천상병(千祥炳)                         - 새 352. 천상병                                 - 귀천(歸天) 353. 전봉건(全鳳健)                         - 피아노   8. 새로운 역사의 지평을 열며   354. 김수영(金洙暎)                         - 푸른 하늘을 355. 김수영                                 - 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 356. 김수영                                 - 풀 357. 신동엽(申東曄)                         - 진달래 산천(山川) 358. 신동엽                                 - 산에 언덕에 359. 신동엽                                 - 종로 5가 360. 신동엽                                 - 껍데기는 가라 361. 신동엽                                 -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362. 신동엽                                 - 금강(錦江) 363. 신동엽                                 - 봄은 364. 신경림(申庚林)                         - 갈대 365. 신경림                                 - 겨울밤 366. 신경림                                 - 파장(罷場) 367. 신경림                                 - 농무(農舞) 368. 신경림                                 - 목계 장터 369. 민영(閔暎)                              - 용인(龍仁) 지나는 길에 370. 고은(高銀)                              - 눈길 371. 고은                                    - 문의(文義) 마을에 가서 372. 고은                                    - 화살 373. 황동규(黃東奎)                           - 기항지(寄港地) 1 374. 황동규                                  - 조그만 사랑 노래 375. 황동규                                  - 풍장(風葬) 1 376. 이성부(李盛夫)                           - 벼 377. 이승훈(李昇薰)                           - 위독(危篤) 제1호 378. 허영자(許英子)                           - 자수(刺繡) 379. 이수익(李秀翼)                           - 말 380. 이탄(李炭)                               - 옮겨 앉지 않는 새 381. 조태일(趙泰一)                           - 국토 서시(國土序詩) 382. 정현종(鄭玄宗)                           - 사물(事物)의 꿈 1 383. 강은교(姜恩喬)                           - 우리가 물이 되어 384. 오규원(吳圭原)                           - 개봉동과 장미 385. 오세영(吳世榮)                           - 그릇 1 386. 김지하(金芝河)                           - 서울 길 387. 김지하                                   - 타는 목마름으로 388. 이시영(李時英)                           - 정님이 389. 이성선(李聖善)                           - 큰 노래 390. 정희성(鄭喜成)                           - 저문 강에 삽을 씻고 391. 조정권(趙鼎權)                           - 산정 묘지(山頂墓地) 1 392. 정호승(鄭浩承)                           - 슬픔으로 가는 길 393. 김명인(金明仁)                           - 동두천(東豆川) I 394. 김광규(金光圭)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395. 송수권(宋秀權)                           - 산문(山門)에 기대어 396. 이성복(李晟馥)                           - 그 날 397. 최승호(崔勝鎬)                           - 세속도시의 즐거움 2 398. 황지우(黃芝雨)                           -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399. 김용택(金龍澤)                           - 섬진강 1 400. 박노해                                   - 노동의 새벽                                 ========================================================================== 1. 전환기의 좌절과 희망 ========================================================================== 1.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                                               - 최남선         1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2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내게는 아무 것 두려움 없어, 육상(陸上)에서, 아무런 힘과 권(權)을 부리던 자라도, 내 앞에 와서는 꼼짝 못하고, 아무리 큰 물건도 내게는 행세하지 못하네. 내게는 내게는 나의 앞에는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3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나에게 절하지 아니한 자가, 지금까지 있거든 통기(通寄)하고 나서 보아라. 진시황(秦始皇), 나파륜*, 너희들이냐. 누구 누구 누구냐 너희 역시 내게는 굽히도다. 나하고 겨룰 이 있건 오너라.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4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조그만 산모를 의지하거나, 좁쌀 같은 작은 섬, 손뼉만한 땅을 가지고, 고 속에 있어서 영악한 체를, 부리면서, 나 혼자 거룩하다 하는 자, 이리 좀 오너라, 나를 보아라.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5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나의 짝 될 이는 하나 있도다. 크고 길고 넓게 뒤덮은 바 저 푸른 하늘. 저것은 우리와 틀림이 없어, 작은 시비, 작은 쌈, 온갖 모든 더러운 것 없도다. 조따위 세상에 조 사람처럼.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6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저 세상 저 사람 모두 미우나, 그 중에서 똑 하나 사랑하는 일이 있으니, 담 크고 순진한 소년배(少年輩)들이, 재롱처럼 귀엽게 나의 품에 와서 안김이로다. 오너라 소년배 입 맞춰 주마.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 나파륜 : 나폴레옹 ("소년" 창간호, 1908.11)     2. 꽃 두고                                               - 최남선   나는 꽃을 즐겨 맞노라. 그러나 그의 아리따운 태도를 보고 눈이 어리어, 그의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코가 반하여, 정신없이 그를 즐겨 맞음 아니라 다만 칼날 같은 북풍(北風)을 더운 기운으로써 인정 없는 살기(殺氣)를 깊은 사랑으로써 대신하여 바꾸어 뼈가 저린 얼음 밑에 눌리고 피도 얼릴 눈구덩에 파묻혀 있던 억만 목숨을 건지고 집어 내어 다시 살리는 봄바람을 표장(表章)함으로 나는 그를 즐겨 맞노라.   나는 꽃을 즐겨 보노라. 그러나 그의 평화 기운 머금은 웃는 얼굴 흘리어 그의 부귀 기상 나타낸 성(盛)한 모양 탐하여 주책(主着)없이 그를 즐겨 봄이 아니라 다만 겉모양의 고운 것 매양 실상이 적고 처음 서슬 장한 것 대개 뒤끝 없는 중 오직 혼자 특별히 약간 영화 구안(榮華苟安)치도 아니고, 허다 마장(許多魔障) 겪으면서도 굽히지 않고, 억만 목숨을 만들고 늘어 내어 길이 전할 바 씨 열매를 보유함으로 나는 그를 즐겨 보노라. ("소년" 7호, 1909.5)     3. 비둘기                                               - 이광수   오오 봄 아침에 구슬프게 우는 비둘기 죽은 그 애가 퍽으나도 설게 듣던 비둘기 그 애가 가는 날 아침에도 꼭 저렇게 울더니.   그 애, 그 착한 딸이 죽은 지도 벌써 일년 하더니. ("조광", 1936.5)     4. 샘물이 혼자서                                                    -주요한   샘물이 혼자서 춤추며 간다. 산골짜기 돌 틈으로   샘물이 혼자서 웃으며 간다. 험한 산길 꽃 사이로   하늘은 맑은데 즐거운 그 소리 산과 들에 울리운다.     ("학우" 창간호. 1919.1)     5. 불놀이                                                   - 주요한 아아, 날이 저문다. 서편 하늘에, 외로운 강물 위에, 스러져 가는 분홍빛 놀 …… 아아, 해가 저물면, 해가 저물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4월이라 파일날, 큰 길을 물밀어 가는 사람 소리는 듣기만 하여도 흥성스러운 것을,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고?   아아,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시뻘건 불덩이가, 춤을 춘다. 잠잠한 성문(城門) 위에서 내려다보니, 물 냄새, 모래 냄새, 밤을 깨물고 하늘을 깨무는 횃불이 그래도 무엇이 부족하여 제 몸까지 물고 뜯을 때, 혼자서 어두운 가슴 품은 젊은 사람은 과거의 퍼런 꿈을 찬 강물 위에 내던지나 무정(無情)한 물결이 그 그림자를 멈출 리가 있으랴? 아아, 꺾어서 시들지 않는 꽃도 없건마는, 가신 임 생각에 살아도 죽은 이 마음이야, 에라, 모르겠다, 저 불길로 이 가슴 태워 버릴까, 이 설움 살라 버릴까, 어제도 아픈 발 끌면서 무덤에 가 보았더니, 겨울에는 말랐던 꽃이 어느덧 피었더라마는, 사랑의 봄은 또다시 안 돌아오는가, 차라리 속시원히 오늘 밤 이 물 속에 …… 그러면 행여나 불쌍히 여겨 줄 이나 있을까 …… 할 적에 '퉁, 탕', 불티를 날리면서 튀어나는 매화포*. 펄떡 정신을 차리니, 우구구 떠드는 구경꾼의 소리가 저를 비웃는 듯, 꾸짖는 듯. 아아, 좀더 강렬한 열정에 살고 싶다. 저기 저 횃불처럼 엉기는 연기, 숨막히는 불꽃의 고통 속에서라도 더욱 뜨거운 삶 살고 싶다고 뜻밖에 가슴 두근거리는 것은 나의 마음 ……   4월달 따스한 바람이 강을 넘으면, 청류벽(淸流碧), 모란봉(牡丹峰) 높은 언덕 위에 허어옇게 흐늑이는 사람 떼, 바람이 와서 불 적마다 불빛에 물든 물결이 미친 웃음을 웃으니, 겁 많은 물고기는 모래 밑에 들어박히고, 물결치는 뱃속에는 졸음 오는 '니즘'의 형상(形像)이 오락가락 어른거리는 그림자, 일어나는 웃음 소리, 달아 논 등불 밑에서 목청껏 길게 빼는 어린 기생의 노래, 뜻밖에 정욕(情慾)을 이끄는 불 구경도 인제는 겹고, 한잔 한잔 또 한잔 끝없는 술도 인제는 싫어, 지저분한 배 밑창에 맥없이 누우면, 까닭 모르는 눈물은 눈을 데우며, 간단(間斷) 없는* 장고 소리에 겨운 남자들은, 때때로 부리는 욕심에 못 견디어 번득이는 눈으로 뱃가에 뛰어나가면, 뒤에 남은 죽어 가는 촛불은 우그러진 치마깃 위에 조을 때, 뜻 있는 듯이 찌걱거리는 배젓개 소리는 더욱 가슴을 누른다 ……   아아, 강물이 웃는다, 웃는다, 괴상한 웃음이다, 차디찬 강물이 껌껌한 하늘을 보고 웃는 웃음이다. 아아, 배가 올라온다, 배가 오른다, 바람이 불 적마다 슬프게 슬프게 삐걱거리는 배가 오른다 ……   저어라, 배를, 멀리서 잠자는 능라도(綾羅島)까지, 물살 빠른 대동강을 저어 오르라. 거기 너의 애인이 맨발로 서서 기다리는 언덕으로, 곧추 너의 뱃머리를 돌리라. 물결 끝에서 일어나는 추운 바람도 무엇이리오, 괴이(怪異)한 웃음 소리도 무엇이리오, 사랑 잃은 청년의 어두운 가슴 속도 너에게야 무엇이리오, 그림자 없이는 '밝음'도 있을 수 없는 것을 오오, 다만 네 확실한 오늘을 놓치지 말라. 오오, 사르라, 사르라! 오늘 밤! 너의 빨간 횃불을, 빨간 입술을, 눈동자를, 또한 너의 빨간 눈물을 …… * 매화포 : 종이로 만든 딱총, 불꽃놀이 기구. * 간단(間斷) 없는 : 끊임없는. ("창조" 창간호, 1919.2)   6. 빗소리                                                   -주요한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 뜰 위에 속삭입니다.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같이.   이즈러진 달이 실낱 같고 별에서도 봄이 흐를 듯이 따뜻한 바람이 불더니, 오늘은 이 어둔 밤을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다정한 손님같이 비가 옵니다. 창을 열고 맞으려 하여도 보이지 않게 속삭이며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뜰 위에, 창 밖에, 지붕에, 남 모를 기쁜 소식을 나의 가슴에 전하는 비가 옵니다. ("폐허 이후", 1924.1)   7. 봄은 간다                                                  - 김억   밤이로다. 봄이다.   밤만도 애달픈데 봄만도 생각인데   날은 빠르다. 봄은 간다.   깊은 생각은 아득이는데 저 바람에 새가 슬피 운다.   검은 내 떠돈다. 종소리 빗긴다.   말도 없는 밤의 설움 소리 없는 봄의 가슴   꽃은 떨어진다. 님은 탄식한다. ("태서문예신보" 9호, 1918.11)       8. 오다 가다                                                        -김억   오다 가다 길에서 만난 이라고 그저 보고 그대로 갈 줄 아는가.   뒷산은 청청(靑靑) 풀 잎사귀 푸르고 앞바단 중중(重重) 흰 거품 밀려 든다.   산새는 죄죄 제 흥(興)을 노래하고 바다엔 흰 돛 옛 길을 찾노란다.   자다 깨다 꿈에서 만난 이라고 그만 잊고 그대로 갈 줄 아는가.   십 리 포구(十里浦口) 산 너먼 그대 사는 곳 송이송이 살구꽃 바람과 논다.   수로 천 리(水路千里) 먼먼 길 왜 온 줄 아나. 예전 놀던 그대를 못 잊어 왔네. ("조선시단" 창간호, 1929.11)       9. 벽모(碧毛)의 묘(猫)                                                     -황석우   어느 날 내 영혼의 낮잠터 되는 사막의 수풀 그늘로서 파란 털의 고양이가 내 고적한 마음을 바라다보면서 (이 애, 너의 온갖 오뇌(懊惱), 운명을 나의 끓는 샘 같은 애(愛)에 살짝 삶아 주마. 만일에 네 마음이 우리들의 세계의 태양이 되기만 하면, 기독(基督)이 되기만 하면.)     ("폐허" 창간호, 1920.7) 10. 방랑(放浪)의 마음                                                     -오상순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오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나의 혼(魂)…….   바다 없는 곳에서 바다를 연모(戀慕)하는 나머지에 눈을 감고 마음 속에 바다를 그려 보다 가만히 앉아서 때를 잃고……   옛 성 위에 발돋움하고 들 너머 산 너머 보이는 듯 마는 듯 어릿거리는 바다를 바라보다 해 지는 줄도 모르고   바다를 마음에 불러 일으켜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 깊은 바닷소리 나의 피의 조류(潮流)를 통하여 오도다.   망망(茫茫)한 푸른 해원(海原) 마음 눈에 펴서 열리는 때에 안개 같은 바다와 향기 코에 서리도다. ("동명" 18호, 1923.1)     11. 봄 비                                                     -변영로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졸음 잔뜩 실은 듯한 젖빛 구름만이 무척이나 가쁜 듯이, 한없이 게으르게 푸른 하늘 위를 거닌다. 아, 잃은 것 없이 서운한 나의 마음!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아렴풋이 나는 지난날의 회상같이 떨리는 뵈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자랑 앞에 자지러지노라! 아, 찔림 없이 아픈 나의 가슴!   나즉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이제는 젖빛 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 없고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실 같은 봄비만이 소리도 없이 근심같이 나리누나! 아, 안 올 사람 기다리는 나의 마음! ({신생활} 2호, 1923.3)     12. 논 개                                        - 변영로(卞營魯)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魂)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신생활} 3호, 1923.4)     13. 나는 왕(王)이로소이다                      - 홍사용(洪思容)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님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가장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  그러나 시왕전(十王殿)*에서도 쫓기어난 눈물의 왕이로소이다.  "맨 처음으로 내가 너에게 준 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면은  "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받은 것은 사랑이었지요마는 그것은 눈물이더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것도 많지요마는…….  "맨 처음으로 네가 나에게 한 말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면은  "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드린 말씀은 '젖 주셔요' 하는 그 소리였지마는, 그것은 '으아!' 하는 울음이었나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말씀도 많지요마는 …….    이것은 노상 왕에게 들리어 주신 어머님의 말씀인데요  왕이 처음으로 이 세상에 올 때에는 어머님의 흘리신 피를 몸에다 휘감고 왔더랍니다.  그 날에 동네의 늙은이와 젊은이들은 모두 '무엇이냐?'고 쓸데없는 물음질로 한창 바쁘게 오고 갈 때에도  어머니께서는 기꺼움보다는 아무 대답도 없이 속 아픈 눈물만 흘리셨답니다.  발가숭이 어린 왕 나도 어머니의 눈물을 따라서 발버둥치며 '으아!' 소리쳐 울더랍니다.    그 날 밤도 이렇게 달 있는 밤인데요,  으스름 달이 무리 서고 뒷동산에 부엉이 울음 울던 밤인데요,  어머니께서는 구슬픈 옛 이야기를 하시다가요, 일없이 한숨을 길게 쉬시며 웃으시는 듯한 얼굴을 얼른 숙이시더이다.  왕은 노상 버릇인 눈물이 나와서 그만 끝까지 섧게 울어 버렸소이다. 울음의 뜻은 도무지 모르면서도요.  어머니께서 조으실 때에는 왕만 혼자 울었소이다.  어머니의 지우시는 눈물이 젖 먹는 왕의 뺨에 떨어질 때이면, 왕도 따라서 시름없이 울었소이다.    열한 살 먹던 해 정월 열나흗날 밤, 맨재더미로 그림자를 보러 갔을 때인데요, 명(命)이나 긴가 짜른가 보랴고.  왕의 동무 장난꾼 아이들이 심술스러웁게 놀리더이다. 모가지가 없는 그림자라고요.  왕은 소리쳐 울었소이다. 어머니께서 들으시도록, 죽을까 겁이 나서요.    나무꾼의 산타령을 따라가다가 건넛산 비탈로 지나가는 상두꾼*의 구슬픈 노래를 처음 들었소이다.  그 길로 옹달우물로 가자고 지름길로 들어서면은 찔레나무 가시덤불에서 처량히 우는 한 마리 파랑새를 보았소이다.  그래 철없는 어린 왕 나는 동무라 하고 쫓아가다가, 돌부리에 걸리어 넘어져서 무릎을 비비며 울었소이다.    할머니 산소 앞에 꽃 심으러 가던 한식날 아침에  어머니께서는 왕에게 하얀 옷을 입히시더이다.  그리고 귀밑머리를 단단히 땋아 주시며  "오늘부터는 아무쪼록 울지 말아라."  아아, 그때부터 눈물의 왕은!  어머니 몰래 남모르게 속 깊이 소리없이 혼자 우는 그것이 버릇이 되었소이다.    누우런 떡갈나무 우거진 산길로 허물어진 봉화(烽火) 둑 앞으로 쫓긴 이의 노래를 부르며 어슬렁거릴 때에, 바위 밑에 돌부처는 모른 체하며 감중련(坎中連)*하고 앉았더이다.  아아, 뒷동산 장군 바위에서 날마다 자고 가는 뜬구름은 얼마나 많이 왕의 눈물을 싣고 갔는지요.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이로소이다.  그러나 그러나 눈물의 왕!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이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 시왕전 : 저승에 있다는 10여 명의 왕을 모신 절간의 법당. * 상두꾼 : 상여를 메는 사람. * 감중련 : '팔괘(八卦)의 하나인 감괘(坎卦)의 상형(象形).       방위는 정북(正北),'물'의 상징. 여기서는 '태연히 함'의 뜻. -('백조' 3호(1923.9)     14. 월광(月光)으로 짠 병실(病室)                      - 박영희(朴英熙) 밤은 깊이도 모르는 어둠 속으로 끊임없이 구르고 또 빠져서 갈 때 어둠 속에 낯을 가린 미풍(微風)의 한숨은 갈 바를 몰라서 애꿎은 사람의 마음만 부질없이도 미치게 흔들어 놓도다. 가장 아름답던 달님의 마음이 이 때이면 남몰래 앓고 서 있다.   근심스럽게도 한발 한발 걸어오르는 달님의 정맥혈(靜脈血)로 짠 면사(面絲) 속으로 나오는 병(病)든 얼굴에 말 못하는 근심의 빛이 흐를 때, 갈 바를 모르는 나의 헤매는 마음은 부질없이도 그를 사모(思慕)하도다. 가장 아름답던 나의 쓸쓸한 마음은 이 때로부터 병들기 비롯한 때이다.   달빛이 가장 거리낌없이 흐르는 넓은 바닷가 모래 위에다 나는 내 아픈 마음을 쉬게 하려고 조그만 병실(病室)을 만들려 하여 달빛으로 쉬지 않고 쌓고 있도다. 가장 어린애같이 빈 나의 마음은 이 때에 처음으로 무서움을 알았다.   한숨과 눈물과 후회와 분노로 앓는 내 마음의 임종(臨終)이 끝나려 할 때 내 병실로는 어여쁜 세 처녀가 들어오면서 당신의 앓는 가슴 위에 우리의 손을 대라고 달님이 우리를 보냈나이다 . 이 때로부터 나의 마음에 감추어 두었던 희고 흰 사랑에 피가 묻음을 알았도다.   나는 고마워서 그 처녀들의 이름을 물을 때 나는 '슬픔'이라 하나이다. 나는 '두려움'이라 하나이다. 나는 '안일(安逸)'이라고 부르나이다 . 그들의 손은 아픈 내 가슴 위에 고요히 닿도다. 이 때로부터 내 마음이 미치게 된 것이 끝없이 고치지 못하는 병이 되었도다. -('백조' 3호(1923.9)     15. 사(死)의 예찬(禮讚)                         - 박종화 보라! 때 아니라, 지금은 그때 아니다. 그러나 보라! 살과 혼 화려한 오색의 빛으로 얽어서 짜 놓은 훈향(薰香)내 높은 환상의 꿈터를 넘어서.   검은 옷을 해골 위에 걸고 말없이 주토(朱土)빛 흙을 밟는 무리를 보라. 이곳에 생명이 있나니 이곳에 참이 있나니 장엄한 칠흑(漆黑)의 하늘, 경건한 주토의 거리 해골! 무언(無言)! 번쩍거리는 진리는 이곳에 있지 아니하냐. 아, 그렇다 영겁(永劫) 위에.   젊은 사람의 무리야! 모든 새로운 살림을 이 세상 위에 세우려는 사람의 무리야! 부르짖어라, 그대들의 얇으나 강한 성대가 찢어져 해이(解弛)될 때까지 부르짖어라.   격분에 뛰는 빨간 염통이 터져 아름다운 피를 뿜고 넘어질 때까지 힘껏 성내어 보아라 그러나 얻을 수 없나니, 그것은 흐트러진 만화경(萬華鏡) 조각 아지 못할 한때의 꿈자리이다. 마른 나뭇가지에 고웁게 물들인 종이로 꽃을 만들어 가지마다 걸고 봄이라 노래하고 춤추고 웃으나 바람 부는 그 밤이 다시 오면은 눈물 나는 그 날이 다시 오면은 허무한 그 밤의 시름 또 어찌하랴? 얻을 수 없나니, 참을 얻을 수 없나니 분 먹인 얇다란 종이 하나로. 온갖 추예(醜穢)를 가리운 이 시절에 진리의 빛을 볼 수 없나니 아, 돌아가자. 살과 혼 훈향내 높은 환상의 꿈터를 넘어서 거룩한 해골의 무리 말없이 걷는 칠흑의 하늘, 주토의 거리로 돌아가자. -('백조' 3호(1923.9)     16. 봄은 고양이로다                      - 이장희(李章熙)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生氣)가 뛰놀아라. ({금성} 3호, 1924.5)       17. 물 결                        - 노자영(盧子泳) 물결이 바위에 부딪치면은 새하얀 구슬이 떠오릅디다.   이 맘이 고민에 부딪치면은 시커먼 눈물만 솟아납디다.   물결의 구슬은 해를 타고서 무지개 나라에 흘러 가지요……   그러나 이 마음의 눈물은 해도 없어서 설거푼 가슴만 썩이는구려. ({조선문단} 12호, 1925.10)     18. 조선(朝鮮)의 맥박(脈搏)                        - 양주동(梁柱東) 한밤에 불 꺼진 재와 같이 나의 정열이 두 눈을 감고 잠잠할 때에, 나는 조선의 힘 없는 맥박을 짚어 보노라. 나는 임의 모세관(毛細管), 그의 맥박이로다.   이윽고 새벽이 되어 환한 동녘 하늘 밑에서 나의 희망과 용기가 두 팔을 뽐낼 때면, 나는 조선의 소생된 긴 한숨을 듣노라. 나는 임의 기관(氣管)이요, 그의 숨결이로다.   그러나 보라, 이른 아침 길가에 오가는 튼튼한 젊은이들, 어린 학생들, 그들의 공 던지는 날랜 손발, 책보 낀 여생도의 힘있는 두 팔 그들의 빛나는 얼굴, 활기 있는 걸음걸이 아아, 이야말로 참으로 조선의 산 맥박이 아닌가.   무럭무럭 자라나는 갓난 아이의 귀여운 두 볼. 젖 달라 외치는 그들의 우렁찬 울음. 작으나마 힘찬, 무엇을 잡으려는 그들의 손아귀. 해죽해죽 웃는 입술, 기쁨에 넘치는 또렷한 눈동자. 아아,조선의 대동맥, 조선의 폐(肺)는 아가야 너에게만 있도다. ({문예공론}, 창간호, 1929.5)     19. 국경(國境)의 밤                    - 김동환(金東煥) 제 1 부   1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남편은 두만강을 탈없이 건넜을까?   저리 국경 강안(江岸)을 경비하는 외투(外套) 쓴 검은 순사가 왔다 갔다 오르명 내리명 분주히 하는데 발각도 안되고 무사히 건넜을까?"   소금실이 밀수출(密輸出) 마차를 띄워 놓고 밤 새 가며 속태우는 젊은 아낙네, 물레 젓던 손도 맥이 풀려서 '파!' 하고 붙는 어유(魚油) 등잔만 바라본다. 북국(北國)의 겨울밤은 차차 깊어 가는데.   2 어디서 불시에 땅 밑으로 울려 나오는 듯 "어 이" 하는 날카로운 소리 들린다. 저 서쪽으로 무엇이 오는 군호(軍號)라고 촌민(村民)들이 넋을 잃고 우두두 떨 적에, 처녀(妻女)만은 잡히우는 남편의 소리라고 가슴을 뜯으며 긴 한숨을 쉰다. 눈보라에 늦게 내리는 영림창(營林廠)* 산림(山林)실이 벌부(筏夫)*떼 소리언만.   3 마지막 가는 병자(病者)의 부르짖음 같은 애처로운 바람 소리에 싸이어 어디서 '땅' 하는 소리 밤하늘을 짼다. 뒤대어 요란한 발자취 소리에 백성들은 또 무슨 변(變)이 났다고 실색하여 숨죽일 때 이 처녀(妻女)만은 강도 채 못 건넌 채 얻어 맞는 사내 일이라고 문비탈을 쓰러안고 흑흑 느껴 가며 운다. 겨울에도 한삼동(三冬), 별빛에 따라 고기잡이 얼음장 끄는 소리언만.   4 불이 보인다, 새빨간 불빛이 저리 강 건너 대안(對岸)벌에서는 순경들의 파수막(把守幕)*에서 옥서(玉黍)장* 태우는 빠알간 불빛이 보인다. 까아맣게 타오르는 모닥불 속에 호주(胡酒)*에 취한 순경들이 월월월, 이태백(李太白)을 부르면서.   5 아하, 밤이 점점 어두워 간다. 국경의 밤이 저 혼자 시름없이 어두워 간다. 함박눈조차 다 내뿜은 맑은 하늘엔 별 두어 개 파래져 어미 잃은 소녀의 눈동자같이 감박거리고, 눈보라 심한 강벌에는 외아지* 백양(白楊)이 혼자 서서 바람을 걷어 안고 춤을 춘다. 아지 부러지는 소리조차 이 처녀(妻女)의 마음을 핫! 핫! 놀래 놓으면서.   (이하 생략) * 영림창 : 산림을 관리하는 관청. * 벌 부 : 뗏목을 타고서 물건을 나르는 일꾼. * 파수막 : 경비를 서기 위해 만들어 놓은 막사. * 옥서장 : 옥수숫대 * 호 주 : 옥수수로 담가 만든 독한 술. * 외아지 : 외줄기로 뻗은 나뭇가지. (시집 {국경의 밤}, 1925)     20. 눈이 내리느니                      - 김동환(金東煥)   북국(北國)에는 날마다 밤마다 눈이 내리느니, 회색 하늘 속으로 흰 눈이 퍼부을 때마다 눈 속에 파묻히는 하아얀 북조선이 보이느니.   가끔가다가 당나귀 울리는 눈보라가 막북강(漠北江)* 건너로 굵은 모래를 쥐어다가 추위에 얼어 떠는 백의인(白衣人)의 귓불을 때리느니.   춥길래 멀리서 오신 손님을 부득이 만류도 못하느니, 봄이라고 개나리꽃 보러 온 손님을 눈 발귀*에 실어 곱게 남국에 돌려보내느니.   백웅(白熊)이 울고 북랑성(北狼星)*이 눈 깜박일 때마다 제비 가는 곳 그리워하는 우리네는 서로 부등켜 안고 적성(赤星)을 손가락질하며 얼음 벌에서 춤추느니.   모닥불에 비치는 이방인의 새파란 눈알을 보면서, 북국은 추워라, 이 추운 밤에도 강녘에는 밀수입 마차의 지나는 소리 들리느니, 얼음장 트는 소리에 쇠방울 소리 잠겨지면서.   오호, 흰 눈이 내리느니, 보오얀 흰 눈이 북새(北塞)*로 가는 이사꾼 짐짝 위에 말없이 함박눈이 잘도 내리느니.   * 막북강 : 고비 사막 북쪽을 흐르는 강. * 발귀 : '발구'의 함경도 사투리로 마소가 끄는 운반용 썰매. * 북랑성 : 큰개자리별(시리우스, sirius). * 북새 : 북쪽 국경 또는 변방. ({금성} 3호, 1924.5)     21. 북청(北靑) 물장수                     - 김동환(金東煥)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물을 쏴 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북청 물장수.   물에 젖은 꿈이 북청 물장수를 부르면 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 온 자취도 없이 다시 사라져 버린다.   날마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북청 물장수. ({동아일보}, 1924.10.24)       22. 산(山) 너머 남촌(南村)에는                                          - 김동환(金東煥)   1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南)으로 오네.   꽃 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제 나는 좋데나.   2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저 하늘 저 빛깔이 저리 고울까.   금잔디 너른 벌엔 호랑나비떼 버들밭 실개천엔 종달새 노래,   어느 것 한 가진들 들려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제 나는 좋데나.   3 산 너머 남촌에는 배나무 있고 배나무 꽃 아래엔 누가 섰다기,   그리운 생각에 재에 오르니 구름에 가리어 아니 보이네.   끊었다 이어오는 가는 노래는 바람을 타고서 고이 들리네. ({조선문단} 18호, 1927.1)       23. 송화강 뱃노래                           - 김동환(金東煥) 새벽 하늘에 구름장 날린다. 에잇 에잇 어서 노 저어라, 이 배야 가자. 구름만 날리나 내 맘도 날린다.   돌아다보면은 고국이 천 리런가. 에잇 에잇 어서 노 저어라, 이 배야 가자. 온 길이 천 리나 갈 길은 만 리다.   산을 버렸지 정이야 버렸나. 에잇 에잇 어서 노 저어라, 이 배야 가자. 몸은 흘러도 넋이야 가겠지.   여기는 송화강, 강물이 운다야 에잇 에잇 어서 노 저어라, 이 배야 가자. 강물만 우더냐 장부(丈夫)도 따라 운다. ({삼천리}, 1935.3)      24. 엄마야 누나야                         - 김소월(金素月)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개벽} 19호, 1922.1)     25. 금잔디                        - 김소월(金素月)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深深) 산천에 붙는 불은 가신 님 무덤 가에 금잔디. 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 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 봄빛이 왔네, 봄날이 왔네. 심심 산천에도 금잔디에. ({개벽} 19호, 1922.1)     26. 진달래꽃                        - 김소월(金素月)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개벽} 25호, 1922.7)     27. 접동새                         - 김소월(金素月)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津頭江)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 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 나라 먼 뒤쪽의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습니다.   누나라고 불러 보랴 오오 불설워* 시샘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는 오랍동생을 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 잊어 야삼경(夜三更)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산 저산 옮아 가며 슬피 웁니다.   * 불설워 : 평안도 사투리로 '몹시 서러워'의 뜻. ({배재} 2호, 1923.3)     28. 왕십리(往十里)                      - 김소월(金素月)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朔望)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 가도 왕십리(往十里) 비가 오네.   웬걸, 저 새야 울려거든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 다고, 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天安)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히 젖어서 늘어졌다데. 비가 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구름도 산마루에 걸려서 운다.({신천지}, 1923.8) 29. 삭주 구성(朔州龜城)                         - 김소월(金素月)   물로 사흘 배 사흘 먼 삼천 리 더더구나 걸어 넘는 먼 삼천 리 삭주 구성(朔州龜城)은 산(山)을 넘은 육천 리요   물 맞아 함빡이 젖은 제비도 가다가 비에 걸려 오노랍니다. 저녁에는 높은 산 밤에 높은 산   삭주 구성은 산 넘어 먼 육천 리 가끔가끔 꿈에는 사오천 리 가다오다 돌아오는 길이겠지요   서로 떠난 몸이길래 몸이 그리워 님을 둔 곳이길래 곳이 그리워 못 보았소 새들도 집이 그리워 남북으로 오며가며 아니합디까   들 끝에 날아가는 나는 구름은 반쯤은 어디 바로 가 있을텐고 삭주 구성은 산 넘어 먼 육천 리 ({개벽} 40호, 1923.10)     30. 산(山)                        - 김소월(金素月)   산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산새는 왜 우노, 시메*산골 영(嶺) 넘어가려고 그래서 울지.   눈은 내리네, 와서 덮이네. 오늘도 하룻길 칠팔십 리 돌아서서 육십 리는 가기도 했소.   불귀(不歸)*, 불귀, 다시 불귀, 삼수갑산(三水甲山)에 다시 불귀. 사나이 속이라 잊으련만, 십오 년 정분을 못 잊겠네.   산에는 오는 눈, 들에는 녹는 눈. 산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삼수갑산 가는 길은 고개의 길.   * 시메 : 깊은 산골. * 불귀(不歸) :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뜻. 또는 죽음을 의미. (『개벽』40호, 1923.10)   31. 가는 길                      - 김소월(金素月)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 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 흐릅디다려 : '흐릅니다그려'의 준말.   ({개벽} 40호, 1923.10) 32. 서도여운(西道餘韻) - 옷과 밥과 자유(自由)                       - 김소월(金素月)   공중(空中)에 떠 다니는 저기 저 새여 네 몸에는 털 있고 깃이 있지   밭에는 밭곡식 논에 물벼 눌하게 익어서 수그러졌네   초산(楚山) 지나 적유령(狄踰嶺) 넘어선다 짐 실은 저 나귀는 너 왜 넘니? ({동아일보}, 1925.1.1)     33. 길                       - 김소월(金素月)   어제도 하로밤 나그네 집에 가마귀 가왁가왁 울며 새였소.   오늘은 또 몇 십 리 어디로 갈까.   산으로 올라갈까 들로 갈까 오라는 곳이 없어 나는 못 가오.   말 마소, 내 집도 정주(定州) 곽산(郭山) 차(車) 가고 배 가는 곳이라오.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공중엔 길 있어서 잘 가는가?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열 십자(十字) 복판에 내가 섰소.   갈래갈래 갈린 길 길이라도 내게 바이 갈 길은 하나 없소.   * 바이 : 전혀, 전연. ({문명} 창간호, 1925.12)     34. 산유화(山有花)                      - 김소월(金素月)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시집 {진달래꽃}, 1925)     35. 초혼 (招魂)                     - 김소월(金素月)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心中)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시집 {진달래꽃}, 1925)     36.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 김소월(金素月)   나는 꿈꾸었노라, 동무들과 내가 가즈런히 벌가*의 하루 일을 다 마치고 석양에 마을로 돌아오는 꿈을, 즐거이, 꿈 가운데. 그러나 집 잃은 내 몸이여,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이처럼 떠돌으랴, 아침에 저물손에* 새라 새로운 탄식을 얻으면서.   동이랴, 남북이랴, 내 몸은 떠가나니, 볼지어다, 희망의 반짝임은, 별빛의 아득임은, 물결뿐 떠올라라, 가슴에 팔 다리에.   그러나 어쩌면 황송한 이 심정을! 날로 나날이 내 앞에는 자칫 가느른* 길이 이어가라. 나는 나아가리라 한 걸음, 또 한 걸음, 보이는 산비탈엔 온 새벽 동무들, 저 저 혼자… 산경(山耕)*을 김매이는.   * 벌가 : 벌판가. * 보습 : 쟁기 끝에 달아 땅을 가는 데 쓰는 농기구. * 저물손에 : 저물녘에. * 가늘은 : 가느다란. * 산경(山耕) : 산에 있는 경작지 (시집 {진달래꽃}, 1925)     37. 삼수갑산(三水甲山) - 차안서삼수갑산운(次岸曙三水甲山韻)                     - 김소월(金素月)   삼수갑산(三水甲山) 내 왜 왔노 삼수갑산이 어디뇨 오고나니 기험(奇險)타 아하 물도 많고 산첩첩(山疊疊)이라 아하하   내 고향을 도로 가자 내 고향을 내 못 가네 삼수갑산 멀드라 아하 촉도지난(蜀道之難)*이 예로구나 아하하   삼수갑산이 어디뇨 내가 오고 내 못 가네 불귀(不歸)로다 내 고향 아하 새가 되면 떠가리라 아하하   님 계신 곳 내 고향을 내 못 가네 내 못 가네 오다 가다 야속타 아하 삼수갑산이 날 가두었네 아하하   내 고향을 가고지고 오호 삼수갑산 날 가두었네 불귀로다 내 몸이야 아하 삼수갑산 못 벗어난다 아하하   * 촉도지난(蜀道之難): 촉(蜀)으로 가는 길의 어려움. 촉도(蜀道)는 촉(蜀: 四川省)으로 통하는 험난한 길로 인정과 세로(世路)의 어려움을 비유하는 말 로 사용됨. ({신인문학} 3호, 1934.11) 38. 님의 침묵(沈黙)                        - 한용운(韓龍雲)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 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 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 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시집 {님의 침묵}, 1926)     39. 이별은 미(美)의 창조                      - 한용운(韓龍雲)    이별은 미(美)의 창조입니다.  이별의 미는 아침의 바탕[質] 없는 황금과 밤의 올[絲] 없는 검은 비단과 죽음 없는 영원의 생명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에도 없습니다.  님이여,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오오, 이별이여.  미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시집 {님의 침묵}, 1926)     40. 알 수 없어요                      - 한용운(韓龍雲)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에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구비구비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시집 {님의 침묵}, 1926)     41. 나룻배와 행인(行人)                       - 한용운(韓龍雲)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 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시집 {님의 침묵}, 1926)     42. 당신을 보았습니다.                      - 한용운(韓龍雲)    당신이 가신 후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 주는 것은 죄악이다." 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人權)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貞操)냐." 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 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永遠)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시집 {님의 침묵}, 1926)     43. 복종 (服從)                      - 한용운(韓龍雲)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시집 {님의 침묵}, 1926)     44. 정천 한해(情天恨海)                        - 한용운(韓龍雲)   가을 하늘이 높다기로 정(情) 하늘을 따를쏘냐. 봄 바다가 깊다기로 한(恨) 바다만 못 하리라. 높고 높은 정(情) 하늘이 싫은 것만 아니지만 손이 낮아서 오르지 못하고, 깊고 깊은 한(恨) 바다가 병될 것은 없지마는 다리가 짧아서 건너지 못한다.   손이 자라서 오를 수만 있으면 정(情) 하늘은 높을수록 아름답고 다리가 길어서 건널 수만 있으면 한(恨) 바다는 깊을수록 묘하니라.   만일 정(情) 하늘이 무너지고 한(恨) 바다가 마른다면 차라리 정천(情天)에 떨어지고 한해(恨海)에 빠지리라.   아아, 정(情) 하늘이 높은 줄만 알았더니 님의 이마보다는 낮다.   아아, 한(恨) 바다가 깊은 줄만 알았더니 님의 무릎보다도 얕다.   손이야 낮든지 다리야 짧든지 정(情) 하늘에 오르고 한(恨) 바다를 건느려면 님에게만 안기리라. (시집 {님의 침묵}, 1926)     45. 찬송(讚頌)                      - 한용운(韓龍雲)   님이여, 당신은 백 번이나 단련한 금(金)결입니다. 뽕나무 뿌리가 산호(珊瑚)가 되도록 천국(天國)의 사랑을 받으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아침 볕의 첫걸음이여.   님이여, 당신은 의(義)가 무거웁고 황금(黃金)이 가벼운 것을 잘 아십니다. 거지의 거친 밭에 복(福)의 씨를 뿌리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옛 오동(梧桐)의 숨은 소리여.   님이여, 당신은 봄과 광명(光明)과 평화(平和)를 좋아하십니다. 약자(弱者)의 가슴에 눈물을 뿌리는 자비(慈悲)의 보살(菩薩)이 되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얼음 바다에 봄바람이여. (시집 {님의 침묵}, 1926)     46. 타고르의 시(詩) GARDENISTO를 읽고                        - 한용운(韓龍雲)    벗이여, 나의 벗이여. 애인의 무덤 위에 피어 있는 꽃처럼 나를 울리는 벗이여.  작은 새의 자취도 없는 사막의 밤에 문득 만난 님처럼 나를 기쁘게 하는 벗이여.  그대는 옛 무덤을 깨치고 하늘까지 사무치는 백골(白骨)의 향기입니다.  그대는 화환을 만들려고 떨어진 꽃을 줍다가 다른 가지에 걸려서 주운 꽃을 헤치고 부르는 절망인 희망의 노래입니다.    벗이여, 깨어진 사랑에 우는 벗이여.  눈물의 능히 떨어진 꽃을 옛 가지에 도로 피게 할 수는 없습니다.  눈물이 떨어진 꽃에 뿌리지 말고 꽃나무 밑의 티끌에 뿌리셔요.    벗이여, 나의 벗이여.  죽음의 향기가 아무리 좋다 하여도 백골의 입술에 입맞출 수는 없습니다.  그의 무덤을 황금의 노래로 그물치지 마셔요. 무덤 위에 피 묻은 깃대를 세우셔요.  그러나, 죽은 대지가 시인의 노래를 거쳐서 움직이는 것을 봄바람은 말합니다.    벗이여, 부끄럽습니다. 나는 그대의 노래를 들을 때에 어떻게 부끄럽고 떨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내가 나의 님을 떠나 홀로 그 노래를 듣는 까닭입니다. (시집 {님의 침묵}, 1926)     47. 명상 (冥想)                                                          - 한용운(韓龍雲)   아득한 명상의 작은 배는 가이없이 출렁거리는 달빛의 물결에 표류(漂流)되어 멀고 먼 별나라를 넘고 또 넘어서 이름도 모르는 나라에 이르렀습니다.  이 나라에는 어린 아기의 미소(微笑)와 봄 아침과 바다 소리가 합(合)하여 사랑이 되었습니다.  이 나라 사람은 옥새(玉璽)의 귀한 줄도 모르고, 황금을 밟고 다니고, 미인(美人)의 청춘(靑春)을 사랑할 줄도 모릅니다.  이 나라 사람은 웃음을 좋아하고, 푸른 하늘을 좋아합니다.    명상의 배를 이 나라의 궁전(宮殿)에 매었더니 이 나라 사람들은 나의 손을 잡고 같이 살자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님이 오시면 그의 가슴에 천국(天國)을 꾸미려고 돌아왔습니다.  달빛의 물결은 흰 구슬을 머리에 이고 춤추는 어린 풀의 장단을 맞추어 넘실거립니다. (시집 {님의 침묵}, 1926)   ========================================================================== 2. 식민지 현실의 폭로와 저항의 의지 ========================================================================== 48. 나의 침실로                                                         - 이상화(李相和)   '마돈나' 지금은 밤도, 모든 목거지에, 다니노라 피곤하여 돌아가련도다. 아, 너도, 먼동이 트기전으로, 수밀도(水蜜桃)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오너라.   '마돈나' 오려무나, 네 집에서 눈으로 유전(遺傳)하던 진주(眞珠)는, 다 두고 몸만 오너라. 빨리 가자, 우리는 밝음이 오면, 어딘지 모르게 숨는 두 별이어라.   '마돈나' 구석지고도 어둔 마음의 거리에서, 나는 두려워 떨며 기다리노라. 아, 어느덧 첫닭이 울고 뭇 개가 짖도다. 나의 아씨여, 너도 듣느냐.   '마돈나' 지난 밤이 새도록, 내 손수 닦아 둔 침실로 가자, 침실로! 낡은 달은 빠지려는데, 내 귀가 듣는 발자욱 오, 너의 것이냐?   '마돈나' 짧은 심지를 더우잡고, 눈물도 없이 하소연하는 내 마음의 촛불을 봐라. 양털 같은 바람결에도 질식(窒息)이 되어, 얄푸른 연기로 꺼지려는도다.   '마돈나' 오너라. 가자, 앞산 그리매가, 도깨비처럼, 발도 없이 이곳 가까이 오도다. 아, 행여나 누가 볼는지 가슴이 뛰누나,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마돈나' 날이 새련다, 빨리 오려무나, 사원(寺院)의 쇠북이 우리를 비웃기 전에. 네 손이 내 목을 안아라. 우리도 이 밤과 같이, 오랜 나라로 가고 말자.   '마돈나' 뉘우침과 두려움의 외나무다리 건너 있는 내 침실, 열 이도 없느니! 아, 바람이 불도다. 그와 같이 가볍게 오려무나, 나의 아씨여, 네가 오느냐?   '마돈나' 가엾어라, 나는 미치고 말았는가, 없는 소리를 내 귀가 들음은 . 내 몸에 피란 피 가슴의 샘이, 말라버린 듯, 마음과 몸이 타려는도다.   '마돈나' 언젠들 안 갈 수 있으랴, 갈테면 우리가 가자, 끄을려 가지 말고! 너는 내 말을 믿는 '마리아' 내 침실이 부활(復活)의 동굴(洞窟)임을 네야 알련만…… . '마돈나',밤이 주는 꿈, 우리가 얽는 꿈, 사람이 안고 궁구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느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   '마돈나' 별들의 웃음도 흐려지려 하고, 어둔 밤 물결도 잦아지려는도다. 아, 안개가 사라지기 전으로 네가 와야지,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백조} 3호, 1923.9)     49. 가장 비통한 기욕(기욕) - 간도 이민을 보고                                                  - 이상화(李相和)   아, 가도다, 가도다, 쫓겨가도다 잊음 속에 있는 간도(間島)와 요동(遼東)벌로 주린 목숨 움켜쥐고, 쫓겨가도다 진흙을 밥으로,해채*를 마셔도 마구*나, 가졌드면, 단잠은 얽맬 것을 사람을 만든 검*아, 하루 일찍 차라리 주린 목숨, 뺏어 가거라!   아, 사노라, 사노라, 취해 사노라 자폭(自暴) 속에 있는 서울과 시골로 멍든 목숨 행여 갈까, 취해 사노라 어둔 밤 말없는 돌을 안고서 피울음을 울으면, 설움은 풀릴 것을 사람을 만든 검아, 하루 일찍 차라리 취한 목숨, 죽여버려라! *해채 : 시궁창에 고인 더러운 뻘물을 뜻하는 경상도 사투리, 또는 맵고 쓴 나물. *마구 : 마구간. *검 : 신(神) 또는 조물주.  ({개벽} 55호, 1925.1)     50. 통곡(痛哭)                      - 이상화(李相和) 하늘을 우러러 울기는 하여도 하늘이 그리워 울음이 아니다. 두 발을 못 뻗는 이 땅이 애닯아 하늘을 흘기니 울음이 터진다 해야 웃지 마라 달도 뜨지 마라  ({개벽} 68호, 1926.4)     [출처] [펌] 3. 한국현대시 400선|작성자 수위  
197    1960년대 녀성시 고찰 댓글:  조회:4768  추천:0  2015-02-13
/현대시론/ 한국현대여성시의 사적 고찰 - 1960년대 여성시| 평론마당     1960년대 한국현대여성시의 전개       한국 현대시사에서 60년대는 중대한 하나의 의미단락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60년대의 첫인상으로 치열했던 참여문학논쟁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4.19혁명과 5.16군사혁명으로 시작되는 60년대에 참여시의 당위성을 인정하면서도 현실과의 관계에서 문학의 본질과 기능을 재검토해보려는 문학관의 정립이 문제가 된 게 이 논쟁의 정체였다. 이것은 물론 비평사적 문맥에서 보다 커다란 의의를 띠지만 한국 현대시를 순수. 참여시의 2분법으로 하는 경직된 사고를 낳게 했다. 둘째로, 60년대 시의 또 하나 주된 초상으로 난해성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현대시의 난해성이 비로소, 그리고 본격적으로 문제가 된 것이 60년대였다. 모더니즘의 시로 흔히 명명되는 600년대 일부 순수시는 현대시가 필연적이면서 본질적으로 난해시라는 명제를 뚜렷이 표방하고 나섰다. 동인들에 의해 주도된 난해성은『문학사상』지 73년 2월호의 앙케이트 특집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듯이 70년대 시가 극복해야 할 큰 과제가 되었다. 난해성이 현대시를 특정짓는 미학임에도 불구하고 60년대 난해시는 서구의 현대시를 특정짓는 미학임에도 불구하고 60년대 난해시는 서구의 현대시를 흉내낸 의 애매모호함, 또는 시인의 부정직성으로까지 매도되기도 했다. 이런 난해성과 연관되어 셋째로, 60년대 시가 갖가지 실험을 시도한 사실을 시사적 의의로 지목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언어실험 또는 형식실험을 가리키지만 한 평자가 서정주의 예를 들어 이라고 적절히 지적했듯이 시의 소재가 되는 새로운 경험의 추구도 함축한다. 이 실험은 70년대에 나타난 전통 서정양식의 해체 징후만큼 두드러진 것도 급진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온건한 실험은 50년대 시와 확연히 구별짓게 하면서 70년대 시에 심화. 확대되는 씨앗이 되는 60년대 시의 변화의 몫이었다. 넷째로, 600년대는 시조문학의 전성기를 맞이한 점에서도 시사적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 다 잘 알고 있다시피 시조는 조선조 주류적 시가장르이고 현대시는 자유시형태가 그 대표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조는 신문학 초창기 최남선. 이병기. 정인보 등에 의해 부활되어 끈질긴 생명을 보이면서 60년대에는 자유시와 더불어 서정양식의 한 독립된 영역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시조의 이런 격상은 여러 가지 형식실험에 의한 자유시의 지나친 자기 방종과 산문화경향에 대한 반성과 그 맥을 같이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60년대 시에서 주목해야 할 유의사항은 이제 더 이상 한국 현대시사가 몇몇의 예외적인 시인들에 의해서 주도되지도 않고 따라서 우리가 쉽게 분류해서 자리매김할 수 없을 정도로 시가 다양하게 전개되기 시작한 점이다. 이것은 좌. 우 이데올로기의 격심한 대립으로 극도의 혼란을 빚었던 해방 공간과 6.25의 비극적 체험을 겪고난 뒤, 사회역사적 현실을 정신사적으로, 문화적으로 다양하고 심도 있게 극복해가는 자리에 60년대 시가 놓여 있었음을 의미한다. 60년대 시의 이런 특징들은 시사적 의의를 띠면서 동시에 극복되어야 할 과제들을 남겨놓았다. 1960년대의 여류시는 와 동인그룹을 중심으로 여류시의 질적이며 양적인 확대를 가져오게 되었다. 를 대표할 수 있는 정영자는 시어의 과감한 절제와 전통적 이미지에 집착하여 사랑의 문제를 부끄러움이라는 고통의식과 참회의식에 접맥하고 있다. 60년대의 여류시는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과 허무감, 그리고 지향없는 그리움과 일상사에 대한 깊은 탐구의 시선을 그 공통점으로 하여 섬세한 감각과 세련된 언어를 구사하였다. 그러나 비판의식을 앞세우고 사물을 투시하려는 지성적인 발상으로 시도되었으나 현실감의 결여와 애매성에 머물고 말았다. 이와 같은 여성시의 성장 시기에 때맞추어 허영자는 1963년『현대문학』추천으로 데뷔하였고, 30여 년 동안 전통 서정을 바탕으로 시의 운율적인 면과 언어의 간결한 압축미에 유의하면서 끈질기게 사랑을 노래한 시인으로 현대문학사에 자리잡고 있다. 오세영은 한국 시단의 경향을 리얼리즘의 시, 모더니즘의 시, 전통 서정시의 경향으로 분류하고 여류시도 이에 준한다고 평가하면서 김남조, 홍윤숙, 김후란, 김여정, 유안진, 신달자, 이향아, 문정희와 함께 허영자를 전통 서정파로 보았다. 김현자는 한국 여성시의 계보를 전통적 서정성을 바탕으로 한 시, 지성적 명상적 자아 탐구를 하는 시, 사물 중심의 언어 감각을 특성으로 하는 시, 일상성의 도입과 문명 비판적인 시각의 시, 현실과 사회, 역사의 수용을 중요시하는 시로 나누어 모윤숙, 김남조, 김혜숙, 추영수 등과 함께 허영자의 시를 전통적 서정파로 보았다. 대체로 한국시에서는 전통적 서정을 주조로 하는 여성성을 큰 특성으로 하여 사랑과 기다림, 한과 고독의 본질적인 인간 내면의 슬픔과 비애를 구가하는 것이 일반화되고 있다. 허영자의 시도 이와 같은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나 창작 과정의 원숙한 기법과 독특한 언어 절제의 압축미를 통하여 시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허영자는 1963년 박목월 선생 추천으로『현대문학』을 통하여 등단하여 다섯 권의 시집과 네 권의 시선집을 내고 많은 수필집을 발간하여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1960년대의 대표적 여성시인이다. 시집『가슴엔 듯 눈엔 듯』(중앙문화사, 1966),『친전』(문원사,1971), (범위사,1977), (열음사,1984), (문학세계사, 1990)을 내고 시선집 (열음사,1985),(자유문학사,1989)를 내고 1972년에는 제4회 한국 시인협회상과 1986년 제20회 월탄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1963년 문단 데뷔 이후 1963년 1월 그는 김선영, 김숙자, 김혜숙, 김후란, 박영숙, 추영수와 더불어 우리 나라 문학사상 처음으로 여성시인들만의 문학동인회인 청미회를 발족시켜 창립 동인으로 활약하며 한국 여성시의 발전에 기여하는 저력을 보였다. 1963년 4월, 동인지 제1집을 발간한 이후 1993년 30집까지 동인지로서는 최장수 발간을 기록하는 동안 그는 동인 활동에 적극 참가하고 있다. 최동호는 허영자를 ‘봄의 시인’이라고 지칭하였지만 전반적인 시의 흐름에서 보면 그는 분명 화사한 봄보다 가을을 더 많이 노래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첫시집 은 연애시의 절정을 이루며 상재되었다. 그의 사랑은 독특한 그만의 개성이라고 할 수 있는 ‘부끄러움’을 동반하고 있다. 첫시집에서 네 권째 시집까지 일관되게 흐르던 에로스의 열렬한 소유론은 다섯 권째 시집 에 이르면 관조적 세계관으로 바뀌어 훨씬 더 차분하고 그리운 사랑의 말을 아끼고 있다. “이 세상 갈수록 / 목이 메어라” ( 부분)와 에서 끝끝내 풀리지 않는 난감한 의문부호로써의 남성을 노래하면서 세상과 사람에 대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그의 모든 문학 정신의 근저는 사랑이다. 사랑 때문에 갖게 되는 부끄러움이며 참회이고 구원의식이다. 때문에 속죄와 순명을 거친다. 그의 시적 전개는 관조적 정관을 주축으로 하고 있지만 강렬한 욕망을 표출하면서 열렬히 그대를 향한 소유를 주창하고 휘발유 같은 여인상을 구가하여 공격적인 사랑의 획득을 보여 준다. 시적 기교 또한 압축미와 긴장미를 이루는 격조와 간결함 속에 화사한 고독과 외로움의 정서를 형상화함으로써 따뜻한 세상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정신을 담아내고 있다. 이상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그의 사랑은 소재면에서 생명력의 절정인 꽃과 수직 상승의 나무 계열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는 뜨거운 사랑이 확산되는 육욕적인 주제를 식물적인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아울러 그의 시는 서정적 부끄러움의 시학이라는 특성 위에 간결한 압축미가 서정적 긴장감을 고조하여 시적 효과를 높이는 점에서, 그리고 개관적 상관물을 이용한 이미지의 추구에서 높게 평가 할 수 있겠다. 다만 이제 역사성과 현실성이 만나는 도시 서정의 새로움이 그이 정서적 변용에서 나타나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투명하지만 따뜻한 정서를 거부하지 않는 가운데 허무의 시인으로 평가받아 온 강은교 시인은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으로 시단에 나왔다. 시집으로는 (70년대 동인회,1971), (민음사,1977), (창작과 비평사,1982), (문학사상사,1987), (실천문학,1982), (창작과 비평사,1992)가 있고 시선집으로는 (민음사,1974), (풀빛,1984),(문학사상사,1986) (미래사,1991)이 있다. 그의 초기 시의 세계는 삶의 허무와 맞닿아 있으면서도 낯설어 보인다. 놀라운 가운데 생동하는 상상력의 율동이 그 특성이 되고 있으며, 무속적 주술성이 고요한 광기로 세련되게 절제되어 있다. 삶과 세계 속에 묻혀 있는 허무의 의미를 끊임없이 찾고 해명하는 그의 독특한 문학의 세계는 차츰 개인의 관념적인 것에서 탈피하여 작은 것에 보내는 애정과 공동체의식으로 확대되는 사회성을 가진다. 허무와 어둠, 세상보기의 객관성, 평정성, 여유 그리고 생명과 삶에 대한 인식은 진실과 공동체의식을 엮는 사회와 현실인식으로 확대된 것이다. 보잘 것 없고 부질없는 작은 생명에 보내는 뜨거운 관심과 애정은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역동적인 삶과 사회에 대한 시인의 특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환상적 내용의 설정, 시어의 주술적 전개를 보여 주고 있으며 빛과 어둠의 시적 변증법으로 혹은 흐름의 상상력과 낙하의 상상력을 기초로 하는 부정적이 현실인식이 강하게 드러난다고 평가받고 있는 그의 시는 대체로 초기 시의 평가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되어 왔다. 때문에 죽음, 허무, 소멸, 등의 내면적 관념세계가 중심을 이룬 초기시의 성과를 강은교 시 세계의 중심이라고 보아 왔던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 사유에서 사회로 확대된 민중적이고 민족적인 시는 그의 세계를 더욱 확대시켰으며 시의 격을 높여 놓았다. 강은교의 초기 시의 주요한 모티브는 허무이다. 허무의식을 통하여 삶과 죽음의 심연을 천착해 간 그의 시는 항상 삶을 객관적으로 보는 여유와 의연함을 요구한다. 인간존재의 해명은 철학이나 문학쪽에서 끈질기게 던져 온 의문이다. 인간존재의 근원을 고통스럽게 보아 온 강은교의 해답은 허무이다.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고통과 하무, 그리고 죽음으로 인식하 그의 부정적인 세계관의 접근은 그의 시 전반을 흐르는 분위기이다. 인간존재의 실체를 허무로 파악한 그의 세계관은 주술적. 무속적 세계의 불확실한 믿음으로 퇴행하곤 한다. 의미의 분열화 속에 고립되고 서로 소외된 현대인들에게 있어 모든 개인은 그가 살고 있는 세계와 분리될 수 없다. 이 세계는 자기의 삶에 의미를 던지는 실존적 정황으로 관계되고 있다. 강은교 시인이 문학적 정열을 불태우던 1960년 후반은 4.19 5.16을 거치면서 산업근대화와 군사정치의 강성적인 장기집권이 진행되던 시기였다. 따라서 독재적 정치 이데올로기와 부조리한 사회현상이 팽창되면서 진정한 인간의 삶이 압박받는 것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 문제되던 시기에 그의 허무주의는 현실대응의 장치라고 말할 수 있다. 강은교 시의 세계는 허무와 어둠을 바탕으로 하는 주술적인 것으로 나타났지만, 그의 허무는 바른 세상살기의 한 장치였다고 해석할 수 있으며,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세상보기의 객관성과 평정성으로 공동체 삶의 진실에 뿌리내리고 있다. 허무를 따뜻하게 바라보고 인식하는, 살아 있는 자의 탈욕망의 가지를 늘어뜨리고 허무의 무성한 잎들을 즐거이 쳐다보는 시각 속에는 생명과 사랑에 대한, 특히 작은 것, 보잘 것 없는 것에 보내는 애정이 유별나다. 따라서 그의 허무는 생명과 사랑에 도전하는 치열한 세상 살기의 한 방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정하리만큼 획일성과 어지러울 정도의 다양성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한 시인의 특성을 고찰한다는 것은 어렵다. 특히 그 대상 시인이 다양한 관심으로 사람과 세상, 자연을 천착해 나가는 특성을 가졌다면 더욱 근접하는 시인, 전통성 고수나 현실참여적 정치성향, 시를 통한 존재탐구, 시어 구사의 탐미성, 현실고발을 통한 사회변화의 폭넓은 관심 등은 각 시인이 부분적으로 가지는 개성이다. 문정희는 이와 같은 한 부류의 개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당야한 관심사의 확대를 통한 부드럽고 섬세한 감수성과 저돌적이고 단호한 의지를 보이고 있은 시인이다. 그는 1969년 동국대 국문과 4학년 재학중에 신인상 당선으로 문단에 데뷔하여 (한국공판사,1965), (월가문학사,1973), (문학예술사,1984), (일월서각,1986), (예전사, 1987), (전예원, 1987), (나남,1988), (들꽃세상,1990), (미학사,1993)의 시집고 시극집 (민학사,1975)를 통하여 시문학의 장르적 확대를 꾀하여 온 시인이다. 또한 인기 여성시인들이 즐겨 발표해 온 수필집을 그도 많이 발표하였다. (관동출판사,1974), (관동출판사,1976), (학원사,1978), (신여원,1980), (문학사상, 1987), (현대문학,1990), (둥지,1992)에서는 삶과 사랑, 현실을 비판해 나간 그의 폭넓은 관심사가 묘사되어 있다. 김현자는 사랑. 그리움. 가난 등 다양한 주제를 보이고 있다고 문정희를 평가하였으며 오세영은 전통적 서정시 계열로 이희중은 사랑의 시인으로 김선학은 감각적 언어 구사로, 정규웅은 여성다운 섬세함과 남성적인 강한 힘으로 평가하였다. 이상호는 를 본격적 서사시로서의 가능성으로 보아 산문적 성향을 진단한 바 있다. 이와 같은 진단이나 평가로 볼 때 그의 다양한 특성은 사랑 내지 여성성의 성향에 머물고 있으며, 전통서정시인으로서 여류 일반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현실에 대한 저돌성, 여성해방, 존재탐구와 현실인식, 관능적 기법고 설화적 전개, 직설적인 단호함 등으로 뚜렷한 개성을 보이고 있는 시인이다. 그의 아홉 권의 시집을 고찰해 보면 내용상의 특성으로는 (1) 사랑. 고독의 정한, (2) 관조적인 인생의 성찰, (3) 현실인식과 인간성 회복,(4) 여성해방, (5) 향토성과 설화, (6) 이별. 죽음의 무상함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며 표현상의 특성으로는 (1) 단호함의 기법, (2) 관능적 기법, (3) 서사시의 가능성을 지적할 수 있다. 여성시의 사랑. 고독은 모든 시인이 가지는 인간적인 본질이라고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문정희의 시세계가 고독과 사랑을 구가하는 가장 인간적인 속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의 사랑은 낭만적인 사랑, 지고지순의 사랑과 함께 혈연적인 사랑, 거기에서 모성회귀를 통한 원형회복의 강렬한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다. 대개의 사랑이 정한의 애달픔을 수반하는 사랑이지만 그의 사랑은 적극적이고 때로는 도전적인 사랑을 노래한다. 문정희는 전통서정성를 가졌으되 넓고 폭 깊은 사회적. 역사적 관심과 함께, 당당학도 꾸밈없는 직설적인 수사법으로,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에 보내는 애정과 사라지고 썩어지는 것에 대한 찬사와 긍정적인 자세를 견지하는 시인이다. 죽음과 이별을 노래하고 있으나 삶의 깊이에서 회생화는 삶에 대한 건강함이 넘치고 박진감있는 시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시의 서두에는 당호한 의지를 보여 두괄식의 구성을 보이고 시의 결행에서는 언제나 미진한 여운을 가질 수 있게 풀어 놓고 있는 것이 특성이었다. 지향 없는 불안과 고독, 끝없는 사랑의 구가, 기도에서 기도로 끝나는 등의 상투적인 여성시가 아닌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삶의 철학이 시문학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196    竹林圖 댓글:  조회:3045  추천:0  2015-02-12
죽림(竹林)/대나무 그림모음| **★그림 감상★**   ※ 현대 중국화가 윤석(尹石)의 (2001年作)   萬頃琅?接檻前  淸風四節送琴絃 此君鬱密通?志  影掃階中塵自然 (만경낭간접함전 청풍사절송금현  차군울밀통소지 영소계중진자연) 드넓은 대밭이 난간 앞에 닿아 있어 사철 맑은 바람 거문고소리 보내주네 차군은 울밀하여 하늘의 뜻과 통하고 그림자 뜰을 쓸어도 먼지는 그대로일세 ☞ 나옹혜근(懶翁慧勤),   ※ 현대 중국화가 서한(徐寒)의 (2004年作) ※ 차군(此君)은 직역하면 '이 친구'라는 뜻으로 대나무의 별칭이다. 대나무를 '차군'으로 부르게 된데는 유래가 있다.   동진(東晉) 때의 명필 왕희지(王羲之)의 다섯 째 아들 왕휘지(王徽之/王子猷)가 한때 친구의 집을 잠시 빌려 살게 되었다.  그는 하인을 시켜 그 집 정원에 대나무를 심게 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휘지는 대나무를 가리키며 " 이 친구(此君)가 없으면 어찌 하루인들 살 수 있으랴" [何可一無此君邪!(하가일무차군야)]라고 대답했다. ≪진서(晉書)≫ 에 나오는 얘기다.    대나무는 '차군'말고도 고인(故人)이라고도 부른다. 당나라 시인 이익(李益)의 시(詩) 에서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이 시에서 開門復動竹  疑是故人來(문 닫으니 다시 대나무 흔들리길래 혹여 옛 친구가 찾아왔나 했네)라고 읊고 있다.       대나무는 군자(君子)로도 지칭된다. 최초의 기록은 ≪시경(詩經)≫에서 볼 수 있다.  ≪시경(詩經)≫ 에 瞻彼淇奧   綠竹??  有匪君子  如切如磋   如琢如磨(첨피기욱 녹죽의의 유비군자 여절여차 여탁여마)…라는      구절이 나온다. ※ 奧(욱): 따뜻하다. 덮다/후미 굽이         여기에서 匪君子(비군자)는 빛나고 고아한 군자라는 뜻이다.  주(周)의 무왕(武王)을 가리킨다. 높은 학덕과 인품을 대나무의 고아한 자태에 비유하여 칭송하고 있는 것이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에서 대나무의 속성으로  여물고(固), 바르고(直), 속이 비어 있고(空), 곧은(貞) 네 가지를 제시하고  여기에서 각각 수덕(樹德)·입신(立身)·체도(體道)·입지(立志)라는 네 가지 의미를 이끌어내고 있다.     ※ 현대 중국화가 임중(任重)의 . 화제(畵題)로 "含情傲 ?慰心目  何可一日無此君"이라 써놓고 있다.   ※ 이익(李益): 당나라 때의 시인. 대표작으로 , , 등이 알려져 있다. 다음은 의 전문.   微風驚暮坐  窓?思悠哉  開門復動竹  疑是故人來 時滴枝上露  稍霑階上苔  幸當一入幌  爲拂綠琴埃 cf: 月移花影動 疑是故人來      開簾風動竹 疑是故人來   ※ 근현대 중국화가 사치류(謝稚柳)의     ※ 근현대 중국화가 장대천(張大千)의  
195    윤동주는 누구?!- 댓글:  조회:3167  추천:0  2015-02-12
      ▲ 윤동주의 연희전문 졸업사진시인들은 말한다. '시는 삶과 꿈을 가꾸는 언어의 집'이라고. 여기서 말하는 언어는 두 말할 나위 없이 시인의 모국어다. 그렇다. 시인은 모국어로 생각하고, 모국어로 시를 쓴다. 모국어와 함께 태어나서 한 세상을 살다가 죽는다. 시인에게 모국어는 '또 하나의 목숨'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런데 모국어(한글)로 시를 쓰면 죄가 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죄로 감옥에 가고, 급기야 죽음까지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역사가 우리에게 있었다. 일본 유학 중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2년 동안 감옥에 갇혔다가 옥사한 윤동주 시인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지난주 2월 16일이 그의 62주기였다. 죽은 다음에 시인으로 불린 윤동주 1945년 2월, 조국의 광복을 불과 6개월 앞두고 조선 출신의 한 젊은이가 일본 검색하기">후쿠오카 감옥의 차디찬 마룻바닥에서 뜻 모를 외마디소리를 지른 후에 숨을 거두었다. 윤동주 시인이었다. 정확하게 27년 2개월의 짧은 생애였다. 그리고 그는 영원히 늙지 않는 '청년 시인' 윤동주로 한국인의 가슴에 또렷이 각인되었다. 그러나 그가 생존할 당시엔 아무도 그를 시인이라고 불러주지 않았다. 입을 꼭 다문 고등학생 교복차림으로, 학사모를 쓴 대학생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윤동주가 시인의 호칭을 얻은 것은 옥사하여 무덤에 묻히는 순간이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살아생전에 시인으로 등단한 적이 없는 그의 묘비에 '시인 윤동주지묘(詩人 尹東柱之墓)'라고 새겨진 것이다. 그의 할아버지 윤하현(1875-1948)이 "내 손자, 동주의 일생이야말로 진정한 시인의 삶이었다"고 평가하면서 그런 묘비를 만든 것이다. 이렇듯 윤동주 시인의 갑작스런 죽음과 비극적인 생애는 그의 고고한 시편들과 함께 윤동주를 순교자적인 이미지로 깊게 각인시켰다. 그가 시인으로 데뷔한 일도 없고 시집 한 권 남기지 않았지만 한국현대시 100년을 대표하는 시인 중의 한 명이 됐다. 또한 그의 시비가 한국, 중국, 일본 등지에 세워질 정도로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에서 가장 널리 사랑받는 시인이 됐다. 윤동주 시인이 시집을 출간하려고 시도했던 적은 있다. 본격적인 유학생활이었던 연희전문 4년을 졸업한 윤동주는 졸업 기념으로 19편의 자작시를 묶어서 문익환 목사.윤혜원씨는 1924년 생으로 동주오빠와는 일곱 살 터울이다. 윤혜원씨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오빠의 가장 어린 모습은 동주 오빠랑 문익환 오빠, 고종사촌인 송몽규 오빠 등이 외삼촌 김약연 목사가 시무하던 명동교회당의 맨 앞줄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다. 다음은 윤혜원씨의 회고다. 나중에 할머니께서 해주신 말씀인데, 어머니의 건강이 나빠서 젖이 부족하자 같은 해에 출생한 동주 오빠와 문익환 오빠가 문익환 오빠의 어머니 김신묵 여사의 젖을 함께 먹으면서 자랐다고 한다.나중에 은진중학교에 진학한 동주오빠는 뭐가 그리 바쁜지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늦은 밤까지 등사용지에다 글을 써서 등사를 하던 모습도 기억난다. 오빠의 손가락엔 늘 등사잉크가 묻어 있었다.이건 어머니로부터 전해들은 얘기인데, 동주오빠는 11살 때부터 이라는 어린이 잡지를 서울로부터 정기구독 했으며 명동소학교에서 이라는 등사판 학교잡지를 만들었다고 한다.오빠의 단짝이었던 문익환 오빠는 광명학교 시절 명동교회의 유년주일학교 선생님이었다. 나는 그 당시 유년주일학교 학생이어서 문익환 오빠의 지도로 성경이야기도 듣고 찬송가도 배웠다.또한 오빠가 아주 쓸쓸한 표정을 짓던 때가 기억난다. 오빠의 방에는 책이 상당히 많이 꽂혀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이광수의 소설 을 재미있게 읽은 내가 그분의 소식을 물어본 적이 있다.. 오빠가 갑자기 침통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분이 글쎄..."하면서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 교토 우지강에서 열린 윤동주(앞줄 왼쪽에서 두번째)의 송별회 사진. 사진속 검색하기">도시샤대학 동창들은 윤동주를 꿈 많고 수줍음타는 청년으로 회고했다.윤동주가 부른 마지막 노래는 '아리랑' 2006년 10월 어느 날, 기자는 윤혜원씨의 남편 오형범씨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그가 "윤동주 시인의 최후의 사진이 공개됐다. 한국에서 발간되는 9월호에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 재학시절에 찍은 윤동주 사진과 사진설명을 쓴 일본여성의 기고문이 함께 실렸다"고 전해주었다. 사진의 배경이 되는 우지강을 방문한 적이 있다는 오형범씨와 함께 기사를 읽어보니, 우지강의 아마가세 구름다리 앞에서 윤동주 시인이 도시샤대 영문과 동기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실려 있었다. 사진을 오랫동안 바라보던 윤혜원씨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리랑이 오빠가 부른 마지막 노래일 것 같다. 그 후엔 체포되어 죽을 때까지 감옥에 있었으니..."라며 윤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다음은 사진에 대해서 설명한 기타지마 검색하기">마리코(83)의 글이다. '사진은 1943년 초여름, 교토 우지강의 아마가세 구름다리 위에서 윤동주와 함께 도시샤대학에 다니던 남학생 일곱 명과 여학생 두 명이 담긴 기념사진이다. 그 중에 수줍은 듯 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학생이 있다. 이 남학생이 한국에서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그 유명한 윤동주 시인이다.강변에서 식사를 한 후 바위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노래 한 곡 불러주지 않겠어?'라는 급우의 부탁에 윤동주는 '아리랑'을 불렀다. 조금은 허스키한 목소리로.애수를 띤 조용한 목소리가 강물 따라 흐르고, 모두들 조용히 듣고 있다가 노래가 끝나자 모두 박수를 쳤다. 윤동주가 주저하지도, 사양하지도 않고 노래를 불렀던 것은 급우 전원이 자신의 송별회에 참석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었을 것이다.'윤동주는 이 기념사진을 찍은 후 약 한 달 뒤인 1943년 7월 14일,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됐다. 한글로 시를 썼다는 죄목으로 2년 형을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해방을 불과 6개월 앞둔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윤동주의 사망원인은 아직도 의문에 싸여 있다, 그해 같은 혐의로 같은 형무소에서 고종사촌형인 송몽규(교토제대 재학 중 윤동주와 비슷한 시점에 체포되어 1945년 3월 10일 사망)도 윤동주의 뒤를 따라 옥사했다. 죽기 직전 친척들에게 전한 송몽규의 증언에 의하면, 두 사람 모두 매일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았다고 한다. 나중에 확인된 사실이지만 검색하기">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윤동주의 유해는 북간도에서 달려온 아버지의 손에 의해 화장되었다. 유골함에 다 담지 못한 윤동주의 유해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한일해협에 뿌려졌다고 한다. ▲ 윤동주의 고향 룽징에서의 장례식 장면.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윤동주의 시들 윤혜원씨에게 "오빠의 시 중에서 어떤 시를 제일 좋아하느냐?"고 물어보면 아무 망설임 없이 를 꼽는다. "나라를 잃은 젊은이의 깊은 고뇌와 성찰이 순수한 모국어로 담겼고, 거기에다 시인의 결연한 의지가 읽혀서 늘 숙연해진다"고 말한다. 윤씨는 이어서 "오빠가 시를 쓰면서 의도하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적절한 시어를 골라 썼겠지만, 오빠와 함께 생활했던 내 기억으로는 오빠의 시와 삶은 정확하게 일치한다. 어떤 책에는 그걸 윤동주 시의 시적 자아와 현실의 자아가 일치한다고 썼더라. 맞는 말이다"면서 좀처럼 하지 않는 윤동주 시에 대한 소견을 밝히기도 했다. 한편 광명학교 시절, 윤동주 시인과 2년 동안 한 방에서 기거했던 검색하기">김태균(전 경기대 교수, 현재 캐나다 거주)씨의 다음과 같은 언급도 윤혜원씨의 소견과 일맥상통한다. "윤동주의 시 전반을 걸쳐서 볼 때 그는 '조선독립운동'이라는 죄명으로 죽었지만 그의 시에는 육사에게서 볼 수 있는 칼날 같은 투지라든가, 만해에게서 볼 수 있는 강철 같은 주의사상은 보이지 않는다. 윤동주의 시는 그것이 곧 그의 생활이고, 그리고 그것들의 바탕은 서정이다.그러므로 그의 시에서는 무슨 사상이나 무슨 주의주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시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시를 읽으면 사랑이 생기고, 눈물 나는 참회가 생기고, 그리고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동이 생긴다. 그의 시어는 대단히 평이하지만 그의 시심에 한 발짝 접근하면 우리는 옷깃을 여미게 된다."/
194    윤동주시인 재조명 댓글:  조회:2224  추천:0  2015-02-12
윤동주 최후 사진 1943년 초여름, 교토(京都) 우지(宇治)강 구름다리에 늘어선 9명의 청춘남녀. 이들 중 단정한 교복 차림에 눈매에는 우수가 깃들어 있지만 굳게 다문 입술에는 범상치 않은 단호함이 엿보이는 청년 윤동주(1917∼1945)가 유난히 돋보인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랐던 시인 윤동주가 일본 유학시절 남긴 유일한 사진이자 최후의 사진이기도 하다. 1995년 TV다큐멘터리 제작과정에서 발견된 이 사진을 찍은 후 윤동주는 일본 특별고등경찰에 체포되어 조국 해방을 한달여 앞두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일본인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모임 '윤동주의 고향을 찾는 모임'에서 활동하는 야나기하라 야스코씨가 이 사진에 등장하는 일본인 여학생 두명으로부터 윤동주가 체포되기 전 구체적인 삶을 취재, '현대문학' 9월호에 공개했다.   태평양전쟁이 다급해지면서 일본 각료회의는 조선인 징병을 의결했고, 상황이 악화되자 윤동주는 귀국 결심을 했다. 조선으로 돌아가는 윤동주를 환송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에서 윤동주는 도시샤(同志社) 대학 영문과 급우들이 노래를 청하자 "거절하지도 사양하지도 않고 곧바로, 앉은 채로 '아리랑'을 불렀다"고 여학생들은 회고했다. "조금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애수를 띤 조용한 목소리가 강물 따라 흐르고, 모두들 조용히 듣고 있다가 노래가 끝나자 모두 박수를 쳤다." 최후의 구름다리 위 사진은 송별회가 끝나고 돌아가기 직전에 찍은 것이다. 윤동주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기차표를 구입하고 짐을 소포로 부친 후 1943년 7월 14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다. "조선독립의 야망을 실현하려고 송몽규 등과 함께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고, 조선인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유발하는 데 전념했을 뿐 아니라 조선인 징병제도를 비판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야나기하라씨는 "60년이 넘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전쟁의 비참함과 평화의 소중함을 당신에게 이야기하는 이 청년의 사진을 다시 한 번 보라"며 글을 맺었다. 툴바 메뉴 \\\\\\\\\\\\ 윤동주 보기                                                                      리울 I. 서 론 1. 연구사 검토 및 문제제기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가 나온 이래 윤동주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다각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 연구가 실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 단선적인 구분에는 다소 무리가 따르지만, 그래도 그 동안의 연구 결과를 고찰해 보면 1) 시의 성격 연구, 2) 내면적 갈등(시정신) 연구, 3) 전기적 연구, 4) 기독교적 연구, 5) 기타 연구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로 저항성 여부이다. 초기에는 역사적 암흑기를 반짝이는 별처럼 살다간 그의 생애에 힘입어 자연스럽게 저항시인, 민족시인으로 자리잡았다가 吳世榮이 '윤동주 시는 과연 저항시인가' 라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한때 뜨거운 쟁점이 되기도 했다. 어쨌든 이 문제에 크게 관심을 가진 학자로는 白鐵, 金允植, 鄭漢模, 金宇鐘, 李尙斐, 洪起三, 任軒永, 金容稷, 全圭泰, 吳世榮, 金烈圭, 박삼균 등을 들 수 있다.  두번째로 로, 高錫珪는 "거의 표백적인 인간상태와 蕪雜한 상실을 비쳐내던 말세적 공백에 있어서 불후한 명맥을 감당하는 유일한 정신群"이라고 그 역사적 의의를 말한 후, 매우 추상적이고 모호하지만 나름대로 윤동주 시의 정신 구도를 파악하여 보여준다. 崔洪奎는 윤동주의 시세계를 '情景的 양상, 어둠의 양상, 죽음의 양상, 긍정의 양상'으로 나누어 이 네가지 양상의 전개 논리를 추구하고 있고, 김흥규는 '화해의 세계 - 갈등의 세계 - 미완의 緊張'이라는 보다 정밀한 변증법적인 논리로 발전시키고 있다. 申東旭은 윤동주의 시세계를 1940년을 전후하여 양분하고 전반부를 '외로움을 통한 자아 발견'이라 하고 후반부를 '부끄러움의 시학'이라 하였다. 그리고 '서정적 자아와 세계의 불협화'현상을 윤동주 시의 특질로 보았다. 金禹昌은 윤동주의 양심이 외부적 도덕률에 유도되어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대한 끊임없는 내적 성찰에서 얻어진 것이라 하고 이러한 명징한 자아의식은 한편으로는 나르시시즘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실존적 자기 확인행위인데 이러한 바탕에서의 양심이란 가혹한 시대적 상황에서 비극적 행동으로 귀결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윤동주가 추구한 심미적, 윤리적 완성은 궁극적으로 실천과 행동으로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당대의 사회가 넓은 의미에서 자기 완성의 추구를 허용하지 아니하기 때문이고 그 결과 현상타파를 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윤동주는 직접적인 의미의 애국심과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 사이에 갈등을 느낀 경우가 종종 있고 이것이 그의 시의 주요 모티프라고 하였다. 崔東鎬는 윤동주의 시적 의식을 내향적 의식과 외향적 의식으로 나누고 전자는 본절적이며 자아내적 탐구의 성향을 갖는 것이며 후자는 내향적 의식을 극화시켜 시대적 의미의 추구와 새로운 세계에로의 동경이라고 하였다. 이 두 가지 의식은 하나의 지향점으로 통합되는 변모과정을 보여주는데, 그 지향성의 통합을 보여주는 작품이 '서시'라 하였다. 그러나 윤동주의 이러한 통합적 지향성은 다시 내향적 의식으로 귀결되는데, 이러한 결론적인 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이 '참회록'이라고 하였다. 李南昊는 윤동주의 시는 아름다운 화해와 사랑의 세계를 지향하는 본질적 자아와 시대적 양심을 실천해야 한다는 현실적 자아가 갈등을 일으키다가 결국 그 두 자아가 통합되어 더 큰 하나의 자아로 탄생하는 과정의 기록이라고 보고 있다.  세번째 를 들 수 있다. 1949년 8월 30일 자유신문에 실린 유영의 '내가 잃은 삼재'를 필두로 윤영춘, 정병욱, 윤일주 등 실로 많은 사람들이 윤동주에 얽힌 인상기 내지 회고담을 쏟아 놓았다. 1968년 정음사 간행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증보판)에서도 그런 자리를 마련했고, 1973년에는 {크리스챤 문학}에서 윤동주 특집을 꾸미면서, 그리고 1976년 {나라사랑} 여름호에서도 전권을 윤동주 연구와 일화로 채웠다. 뒤이어 평전도 잇달아 나왔는데, 이건청 편저 {윤동주 평전}(문학세계사, 1981)을 비롯하여, 권일송의 윤동주 평전(민예사, 1984),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열음사, 1988), 김수복의 {윤동주-별의 노래} (한림원, 1995) 등이 그것이다.  네번째로 이다. 물론 초기부터 기독교적인 접근 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이 단편적 언급이나 피상적 연구에 그치고 있어 아쉬움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다가 1980년대 접어들면서 본적격인 기독교적 연구가 하나 둘씩 나오기 시작하는데, 곽동훈, 박이도, 정호승, 허규, 채현주, 박춘덕, 이영섭 등의 연구가 그것이다. 다섯번째 로 김열규와 마광수의 연구를 들 수 있다. 김열규는 윤동주의 시가 자아를 회복하지 못한 '오티즘'속에서 자아분열과 作爲體驗, 그리고 離人症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면서 거의 유일하게 윤동주의 시를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고, 마광수는 윤동주 시에 나타난 상징적 표현, 즉 자연표상으로서의 상징, 시대 및 역사적 상황의 상징, 내적 갈등과 소외의식의 상징, 사랑과 연민의 상징, 종교적 표상으로의 상징 등 다섯 가지의 상징 세계를 중심으로 문학적 의의를 구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색다르다.  그 동안 쏟아져 나온 수십, 수백 편의 연구 논문과 회고담을 통해, 윤동주라는 한낱 이름없는 문학청년이 한국 문학사에 있어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위치에까지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고, 그 시세계도 비교적 속속들이 밝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 것은 왜 일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윤동주-인용자 주)에 나타난 신앙적인 깊이가 별로 논의되지 않는 것이 좀 이상하게 생각되곤 했었다"는 문익환의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윤동주 시 연구에 있어서 기독교 신앙에 관한 연구는 필수적이다. 그의 시 전반에 걸쳐 있는 사상적 배경은 거의 기독교 신앙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어떤 의미에서 윤동주 시는 信仰的 告白의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윤동주 시를 신앙적 고백의 기록이라고 보는 관점은 그동안 이루어진 연구 업적의 미비한 요소를 보충하고 윤동주 詩世界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영섭의 이같은 지적처럼, 윤동주의 詩와 삶에 있어 그 핵심은 信仰이다. 적어도 윤동주의 詩는 그의 삶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고, 그의 삶은 다시 그의 신앙을 제쳐놓고 얘기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따라서 그의 시세계와 삶의 정체를 낱낱이 밝힐 수 있는 열쇠도 신앙이라고 여겨진다. 신앙이란 '개인이나 단체가 확고하게 믿고 움직이는 삶의 방향이며 그것에 우리의 삶을 위탁하는 것으로, 그것은 인간의 삶에 목표를 형성해 주며, 또 모든 사람이 목표를 향하여 움직여 삶을 하나로 일치시켜 우주 공동체를 형성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적 신앙으로 접근하면 마치 문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아닌 것으로 생각하여 피해가거나, 더러 기독교적인 잣대를 들었다 하더라도 윤동주 詩의 흐름을 꿰뚫지 못하고 그저 기독교적 요소 특성 몇 개를 줍고 마는데 그치고 있다. 다시 말해 기독교 사상을 작품 해석의 보조적 수단으로 이용하거나 단편적인 기독교 교리를 가지고 작품을 분석하다 보니 신앙적 변모 양상이나 美意識이 看過되는 愚를 범하고 말았다. 윤동주는 정상적인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신앙적 성장기, 그리고 회의 방황기를 거쳐 신앙적 성숙기로 접어들었다. 따라서 그는 자연스럽게 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기독교적 세계관 안에서 사유하고 판단하며 행동하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시는 신앙적 고백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그의 정신세계에는 기독교적 신앙이 깊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의식의 흐름에 입각하여 윤동주 시의 변모과정을 고찰할 때만이 윤동주의 시세계가 제대로 규명되리라고 믿는다.  T.S. Eliot는 '여러 작품들이 이루는 전체 시를 하나의 단일한 장시로 볼 필요가 있는 시인이 있다'고 했는데, 윤동주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고 보여진다. 윤동주의 시 가운데에는 물론 예술성을 목표로 씌어진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작품이 그것 못지않게 자신의 내적인 심리 상태를 진실하게 토로하고 있다. 다시말해 형식(언어적 기교)보다는 내용(사상)에 충실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만큼 그의 시는 개인적 고뇌의 기록인 셈이다. 그리고 그는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거의 詩作날짜를 적어놓고 있다. 이런 특성 때문에 그의 시는 "日記詩"로도 불린다.  2. 연구 목적 및 연구 방법 본 論文의 目的은 윤동주 시의 흐름을 신앙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윤동주의 의식세계가 어떻게 작품에 투영되어 있는가를 밝혀내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의 시를 지배하는 갈등의 논리와 시적 변모 과정, 그리고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자아상도 드러날 것이다. 이를 위해 本考에서는 윤동주의 시세계를 그의 삶과 동일선상에 놓고 기독교적 의식을 주된 열쇠로 하여 작품 하나하나에 대한 분석을 시도할 것이다. 가급적 창작일자 순으로 배열하여 그의 작품 세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가고, 또 어떤 모습으로 변모되어 가는지 그 과정을 일관된 흐름을 유지하면서 탐색하고자 한다. 또한 최대한의 객관성 확보를 위해 童詩부터 마지막 작품인 [쉽게 씌어진 시]까지 거의 모든 중요 작품들을 전부 다루고, 역시 論者의 편의에 따라 취사선택되는 주관성을 막기 위해 시의 部分이 아닌 全文을 실을 것이다. 윤동주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詩作날짜를 기록해 두고 있다. 그럼 윤동주는 왜 시작날짜를 밝혀 놓았을까.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의 詩가 내면세계의 기록이라는 점이다. 윤동주는 일기를 쓰듯 시를 썼다. 따라서 그의 시는 자기성찰적 경향이 강하다. 그 다음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자기 시의 성향이나 수준이 어떻게 변모되고 있는가를 나중에 쉽게 조감하기 위해서이다. 윤동주는 童詩에서 시작, 습작기를 거쳐 상당한 수준에 이르는 시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이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그리고 아주 열심히 문학수업을 했음을 그의 생애가 웅변해주고 있다. 한용운이 '以道得詩'한 시인이라면 윤동주는 '以詩得道'한 시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끊임없이 그의 의식세계가 변화되어감에 따라 그의 시세계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김영철의 지적처럼 윤동주의 시는 내면적 자아에서 사회적, 역사적 자아로 변전되는 과정을 밟아가고 있다. 윤동주의 시는 옴니버스 형식을 취하고 있어 부분부분 보면 각각 다른 세계를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조감해보면 일관적인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즉 그의 시는 목표와 지향점이 있다. 앞에서 윤동주의 시는 그의 삶의 기록이고 그의 삶의 핵심은 기독교적 신앙이라고 말했다. 윤동주가 목표로 삼은 삶의 모델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이다. 모든 크리스챤이 그렇겠지만 특히 신앙심이 강한 사람일수록 그리스도의 생애를 가장 이상적인 삶의 형태로 보고 부단히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려는 노력을 경주한다. 윤동주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도 무던히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그의 삶은 하나의 聖化의 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윤동주는 신앙적 성장기를 거쳐 회의 방황기를 맞이했고, 그러나 마침내 그 위기를 딛고 신앙적 성숙기로 접어든다. 그러한 그의 생애가 고스란히 그의 시 속에 담겨 있다. 이것을 파악하는데 그의 시작날짜는 상당한 도움을 주고 있다. 어쩌면 윤동주는 이것을 의식하고 시작날짜를 적어 두었는지 모른다. 이처럼 윤동주에게 있어 시는 일기와 같은 것이었다. 그때 그때의 삶을 반성하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앞으로의 방향을 모색하는 도정에서 그의 시는 나온 것이다. '윤동주에게 있어 시와 삶은 언제나 동질적 선상에서 수용되고 추구된 것이다. 더군다나 그의 옥사는 시와 삶이라는 희귀한 국면을 하나의 역사적 완성물로 결정지어 놓았다. 따라서 그의 시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있어 시대나 삶의 측면을 도외시하는 형식주의적 방법이나 속류 구조주의적 방법은 별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의 시는 숙명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 시대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평에서 의도의 오류라고 부르는 어리석은 실수를 회피해야 한다. "이것으로 작가는 무엇을 말했는가"라는 질문은 언제나 불합리한 것이다. 첫째, 우리는 그것을 결코 알 수 없다. 둘째, 작가가 그것을 알고 있었다고 가정할 이유가 없다. 셋째, 그 질문은 상상적 저서와 논증적 저서를 혼동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노드럽 프라이의 지적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윤동주 시 연구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견해로 보인다. 오히려 허쉬의 다음의 견해가 윤동주 시에 접근하는데 훨씬 큰 도움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의 무관련설을 주장하는 학문적 회의주의는 허다한 혼란을 가져 왔을 뿐이다. 일단 자신의 텍스트 의미의 결정자로서의 저자가 사정없이 추방당하자, 한 해석의 타당성을 판단할 적합한 원칙이 없음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중략) 의미의 결정자로서의 원래 작가를 추방하는 것은 한 해석에 타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강력한 규범적 원칙을 거부한 것이다. 텍스트의 의미가 작가의 의미가 아니라면 어떠한 해석도 그 텍스트의 의미에 부합할 수 없을 것인데, 그 텍스트는 어떤 결정된 또는 결정 가능한 의미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한때 우리는 절대주의 분석 비평의 영향으로 역사라든가 시인의 생애, 의도를 비평에 개입시키면 잘못된 것으로 알아 왔다. 그러나 적어도 윤동주를 논하는 자리에서는 절대주의 분석 비평의 논리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어진다. 그것은 단순하게 역사와 인간을 배제하는 문학론이 知的 靜寂主義에 떨어질 공산을 가진다는 경계심만으로가 아니다. 솔직히 윤동주의 경우 그의 시는 생활이며 현실 자체요, 그 역 또한 참이다.  시인은 개성을 지닌 개인이다. 따라서 세계를 보는 관점과 해석이 각양각색일 수 밖에 없다. 대체로 문학작품에는 시인의 개성적인 체험의 세계가 반영되기 마련인데, 이러한 개성, 곧 창의성은 오히려 작품의 예술성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한다. 윤동주는 그 어느 시인보다도 체험을 바탕으로 작품을 형상화했다. 따라서 그의 시 연구에는 그가 살았던 사회와 시대상황 등 전기적 사실 파악이 필수적이다. '윤동주의 경우처럼 그 작품과 삶과 지조가 완전히 구합일체화(具合一體化)된 예는 극히 드물다. 시와 사상, 사유와 지조, 그리고 시와 생애가 촌분의 괴리도 있을 수 없이, 그의 서정 정신과 저항 정신의 한 줄기 殉節에의 희생으로 일철화(一轍化)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본 연구에서도 윤동주의 성장 배경, 家系, 생활환경, 학교생활, 교우관계, 취미 등이 작품 창작에 영향을 주었다는 전제 아래 접근을 시도할 것이다. 특히 종교와 사상에 관해 면밀히 조사, 분석하여 그 토대 위에서 윤동주의 심리상태를 추리하면서 그가 창작한 작품의 의도를 파악해 나가고자 한다. 그러면 그의 세계관이 어떠하였으며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 밝혀질 것이다. 윤동주의 시세계 연구 2  - 기독교 의식을 중심으로  리울 김형태 II. 本 論 1. 基督敎 文學(詩)의 意義 한국 시문학사의 전개과정을 살펴볼 때, 우리의 近代詩, 現代詩가 傳統 詩歌의 계승에만 머물지 않고 서구의 신문예 사조의 영향권 아래에서 형성되었음과, 그리고 이때 기독교의 영향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창가 가사 신시 등 개화기 시가에 투영된 기독교 의식은 비록 미의식의 기반에서 자리잡지는 못했을지라도 사회적 문화적 기틀 위에 사상적인 큰 역할을 하였다고 보아진다.  한 작품이 시대의 사회 환경 시민의식을 이해하는 하나의 산물이라면 기독교가 우리의 근대화 시기에 큰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막스 베버가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데는 종교의 도움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했듯이 한 시대의 민족적 정신적 의식상태를 살피는 데는 예술 속에 투영된 종교를 살피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프로테스탄티즘이 서구 자본주의의 정신적 기저가 된다고 지적한 막스 베버의 종교사회학적 분석을 빌릴 것도 없이 종교가 그 시대의 가치관과 윤리관을 지배해 왔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또한 종교란 인간의 본질을 요약하며 역사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인간이 깊이 믿고 있는 것은 그의 행동의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문학과 종교는 물론 다른 것이다. 그러나 文學이 人間의 省察에 중대한 使命이 있다고 한다면 宗敎와 共通基盤을 가진다고 할 것이다. 문학과 종교가 만날 때 종교문학이 탄생한다. 이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훌륭한 예술작품일수록 위대한 사상이 담겨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문학이 종교를 담는 그릇은 아니다. 그렇게 될 경우 개화기 문학이나 공산주의 문학에서 보듯 계몽주의 문학이나 목적주의 문학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반대로 문학이 종교를 도구화할 수도 없다. 문학과 종교가 상보적인 관계 속에서 인간의 정신문명을 선도할 때 진정한 의미에서 문학과 종교는 바람직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문익환의 지적처럼 기독교인이 쓰는 문학은 신앙의 肉化이지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벗어 버려도 좋은 헌 옷과 같은 것은 아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그림이요, 예술은 그 그림을 넣은 액자라고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韓國基督敎文學'이라고 할 때에는 개념상 基督敎라고 하는 종교적 일반성과 韓國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이들 상호관계를 통하여 '한국기독교문학'의 개념설정 및 영역을 한계짓는 것은 신중하게 검토되어야 할 문제라고 본다. 김현승, 박두진, 구상 등의 시인을 기독교 시인이라고 아무 망설임없이 부르면서도 기독교 문학 또는 기독교 시 그러면 아직도 생소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국문학 속에 엄연히 기독교 시인, 기독교 작가가 존재함에도 이 분야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적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서구유럽에서 기독교 문학이 활발히 발전된 이유가 '성서와 문학을 분리시키지 않고 동일한 관점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이라는데 우리는 그런 노력이 부족해서일까.  기독교 문학 또는 기독교 시의 개념 및 정의에 관해서는 아직도 논의가 분분하다. 여러 사람들의 많은 견해가 있었음에도 아직까지 확실한 개념 정립이 되지 않은 것을 보면 문학에 대한, 혹은 종교에 대한 정의 만큼이나 기독교 문학 또는 기독교 시에 대한 개념 정립이 쉽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이런 관점에서 박두진의 다음 언급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基督敎文學 基督敎詩의 정의와 개념을 설정하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애매모호한 문제성이 있다. '基督敎精神'이나 '基督敎思想'이나 '基督敎神學'이란 용어의 내용 그 자체의 차이도 분별해서 받아들여야 하는 어려움도 있다. 또 사상이나 신학이란 면에서 다루지 않고 순전히 신앙정서, 기독교 생활적인 정서와 그러한 인생관 혹은 정신이 주가 되었을 경우, 마찬가지로 基督敎詩 혹은 基督敎 信仰詩라고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基督敎文學 基督敎詩는 기독교 자체, 기독교사상 자체, 그 신앙의 본질, 그 생활 정서의 본질의 문제이다. 한국의 基督敎詩는 전혀 이념적이고 문화운동적인 실제 경험을 갖지 못한 채, 그 존립 존재의 여부조차 詩壇的으로 인정되거나 거론된 바 없다. 기독교 신자가 있는 이상 기독교 문화가 있어야 하며, 그 기독교 문화의 토양 위에서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基督敎文學이며 基督敎詩여야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있으면 기독교의 생활이 있고 그 생활이 종교적 정서로 醇化되고, 기독교정신으로 昇華되고, 기독교 사상으로 토착 체계화될 때 그러한 정신적 이념적 골격과 정서적 정감적 혈육이 유기화 생명화되어 기독교 종교시로서, 기독교 신앙시로서, 기독교 생활정서의 형상화로서 발화 결실되어야 한다는 것은 마땅히 그래야 하고도 남을 필연성을 갖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 시의 개념에 대한 그동안의 개별적 견해를 보면, 먼저 명계웅은 '기독교 문학은 구제의 문학, 화해의 문학으로서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의 주제를 개성화하고 인간의 원죄의식과 화해의 가능성을 상황적 입장에서 추구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 金榮秀는 '基督敎詩의 본성은 종교적 신앙의 직접적인 표백이 아니더라도 현대인의 세계관 속에서 신앙적인 기갈증과 희구를 노래하는 데 있다'라고 보고 있으며, 金禧寶는 '크리스찬이라는 작가의 신분, 기독교적 시점(헤브라이즘의 영성, 덕성, 신에의 귀의), 문학작품으로서의 일반적 정의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라고 얘기하고 있다. 李商燮은 '기독교의 근본적 테마인 죄 구원 사랑 희생 화합의 공동사회 등의 문제에 대한 일반적 인식이 당장의 현실에서 깊은 의미를 띠울 수 있어야 기독교 문학은 가능하다. 그뿐 아니라 기독교 사상을 구현하는 전통적인 심벌과 드라마(예컨대 선악과, 아담과 이브, 그리스도와의 최후의 만찬 등)가 한국적 현실의 의미를 구현하도록 적절히 다듬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 李永傑은 '근본적으로 기독교적 감수성을 보이며, 기독교적 사상과 상징이나 우의를 사용하는 시를 뜻한다'고 보고 있으며, 申奎浩는 '기독교 문학은 성서적 복음을 토대로 보편적 예술성을 달성할 때 이루어진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주장이지만, 단편적 또는 부분적인 언급에 치우친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들 주장에서 공통분모를 찾아보면 기독교문학이란 개념이 손에 잡힐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노력이 丘昌煥에게서 보인다. 그는 基督敎文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 정리하고 있다. 첫째로, 基督敎文學은 言語藝術로서의 文學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基督敎文學이란 바로 基督敎思想의 예술적인 형상화인만큼, 想像力과 言語美學을 동원하여 하나의 예술작품을 창조해야 한다. 基督敎文學이라 하여 문학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基督敎文學은 基督敎精神의 구현이요 基督敎思想의 표현이어야 한다. 따라서 선악의 대결, 양심과 고뇌, 신앙과 구원에 대한 추구, 신에 대한 찬양과 삶의 환희, 사랑과 정서의 실현, 소망과 용기, 자기희생과 이웃에 대한 봉사, 인간성을 옹호하고 회복하려는 휴머니즘 등이 작품에 나타나야 한다. 인간의 가치를 높이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가는 인간화의 과제가 다루어져야 한다. 셋째로, 基督敎文學의 방법은 직접적인 경우와 간접적인 경우와 비판적인 경우의 셋으로 나눌 수 있다. 前者는 旣成敎理의 擁護와 信仰의 干證이요, 다음은 함축적 방법으로서 기독교사상을 溶解, 表現하는 경우이다. 그리고 끝의 것은 기독교의 모순과 비리를 풍자 비판하는 경우로서, 모든 제특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시할 것은 예술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기독교정신을 구현시키는 방법이다. 넷째로, 基督敎文學은 종교의식의 생활화와 체험적인 토착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구체적인 생활을 통하여 기독교적인 정서가 다듬어지고 사상이 익어가고 신념이 의지화되어갈 때 비로소 기독교문학은 형성되어 간다. 기독교정신을 생활화하지도 않고 관념적, 추상적 지식으로만 이해한다면 문학의 육화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기독교문학은 작가의 기독교적 생활체험과 크리스찬의 문학적 훈련이 행해져야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끝으로, 기독교문학은 存在의 문학이 아니라 當爲의 문학, 快樂의 문학이 아니라 敎訓의 문학, 慰安의 문학이 아니라 救濟의 문학, 消費의 문학이 아니라 創造의 문학, 遊閑의 문학이 아니라 苦惱의 문학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 시는 일반적인 시와 똑같은 예술성에다 신앙적 고뇌와 갈등, 그리고 기독교 의식이 담겨져야 한다. 기독교 의식에서 시적 출발을 하여 궁극적 목적인 구원 부활 사랑의 사상을 나타내며 여기에 도달하기 위해 어떻게 현실에 적응하며 구현했는가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좋은 기독교 시란 삶의 축복 모순 불합리성 아름다움 권태 죄악 회의까지도 나타내야 하며 또한 인간의 정신 세계의 본능과 무의식과 온 삶이 창조의 과정에 작용해야 한다. 문학은 윤리적 도덕적 사회적인 책임 의식을 거부할 수 있지만 종교는 여기에 국한되지 않을 수 없다. 표현에도 문학은 암시이지만 종교는 교훈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지만 종교성을 작품에 노출시키지 않고 심미적으로 승화시킬 때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있다. 기독교 작가가 관심을 가져야 할 점은 기독교 의식을 간접적 수단을 통해서 나타내야 하는 것이다. 관점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너무 추상적이거나 노골적이 될 경우는 문학적 효과를 감소시키는 것이다. 기독교 의식이란 기독교의 목표가 되는 속죄, 구원, 부활, 재림 등의 실현을 위해 일상생활에서 기도하고 간증하며 신과 교감하는 것을 말한다. 이같은 의식이 시인의 내부에 심화됨으로써 작품 속에 기독교 의식의 시정신이 드러나게 된다. 시인이 기독교 의식에 투철할 때 우리는 그를 기독교 시인이라고 지칭할 수 있다. 그 문학성이 고양되어 우리 시문학사에 비중을 둘 수 있는 상태로 발전될 때 기독교시로서의 의의가 있다. 성서적 사실에만 집착하지 않고, 체험의 종교로서 체질화된 시인을 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基督敎文學 또는 基督敎詩의 개념에 입각해 볼 때, 김현승, 박두진, 구상 시인 등의 반열에 윤동주를 올려 놓는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다시말해 윤동주를 기독교 시인으로, 그리고 그의 작품을 기독교 시로 보는데 전혀 하자가 없다는 말이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 누구 보다도 가장 모범적인 기독교인의 모습과 가장 훌륭한 기독교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생애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려는 기독교 정신으로 일관되어 있고, 삶의 고백인 그의 작품에는 기독교 의식으로 충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윤동주의 시 작품에는 그리스도와의 동일시, 원죄의식(부끄러움), 본향에 대한 동경, 속죄양(희생양) 의식, 부활사상, 소명의식, 박애정신 등 기독교 의식의 정화가 가장 아름답게 꽃피워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 더 덧붙이자면, 우연인지 신의 놀라운 섭리인지는 몰라도 윤동주와 그리스도의 닮은 점이 너무도 많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로마제국의 식민지인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예루살렘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갈릴리라는 지방에서 맏이로 성장하여, 비폭력, 무저항 정신, 곧 박애주의로 일관하다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십자가상에서 죽음을 당했다가 부활하여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다면, 윤동주는 일제치하 정치, 문화적으로 소외된 북간도에서 태어나 역시 장남으로 성장하여 누구보다도 시대를 아파하고 고뇌하다가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후쿠오카 감옥에서 요절했으나 민족시인으로 부활하여 우리들 가슴 속에 살아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둘다 조국을 사랑하는 식민 치하의 젊은이로서 수도가 아닌 비교적 소외된 지방에서 맏이로 태어나 자랐다는 점, 겸손하고 온유한 성격으로 비폭력, 무저항 정신으로 일관했지만 결국 위험인물로 낙인 찍혀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젊은 나이에 희생양이 되었다는 점, 그리고 사족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두 사람 주변에 막달라 마리아와 순이로 이름 불리워지는 여인이 있었다는 점 등이 닮은꼴이다. 이러한 여러가지 유사점으로 인해 윤동주는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에게서 심리적 친밀감을 느꼈을 것이고, 그리스도를 삶의 푯대로 삼아 할 수 있다면 그분처럼 살고자 애썼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가정은 윤동주의 삶과 詩를 조명해 볼 때 사실로 드러난다. 즉 그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암흑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끊임없이 고뇌하다가 마침내 그리스도처럼 살기로 결심한다. 따라서 윤동주의 일생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려는 치열한 몸부림이었다는 측면에서, 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 리울 김형태///        
193    특별사진 기획- 윤동주 댓글:  조회:1839  추천:0  2015-02-12
  일본 유학 첫 해인 1942년, 잠시 귀국한 윤동주(뒷줄 오른쪽). 앞 줄 중간은 송몽규.
192    윤동주의 별 ㅡ 김철호 보도 댓글:  조회:2000  추천:0  2015-02-12
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                       연변이 낳은 시성 윤동주                                            ▲ 연전재학시절의 윤동주 부정의 현실을 순정의 자아로 응전하면서 절대적량심에 가닿으려도 분투한 시인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은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종주의 유명한 “서시”이다.   이 시로하여, 아니 이 시와 견줄만한 “별 헤는 밤”, “자화상”... 등 유명한 시로 하여 윤동주는 이미 조선문자를 알고있는 사람이면 거의 다 아는 시인으로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가 윤동주에게 눈길을 쏟고 있다. 일본의 명문대학인 와세다대학교의 교수 오오무라선생은 윤동주의 시작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그에 대한 아무런 예비지식이 없이도 누구나 감동할만큼 탁월하다. 쉬운 표현, 잘리해할수 있는 시어의 구사, 동요와 동시적인데다가 문학적향기가 짙은 그의 시속에는 그의 순수하고 순결한 심성이 그대로 녹아들고 스며들어있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서시”, “자화상”, “별헤는 밤”같은 시는 세계적인 명시라고 나는 본다.   7월 6일, 기자가 윤동주선양사업일환으로 연길에 와 잠시 거주하고있는 윤동주의 친녀동생 윤혜원녀사와 오형범선생의 저택을 찾아갔을 때 윤년사의 부군 오형범선생은 수두룩한 자료들을 내여보이는 가운데 윤동주가 9개월간 다닌적있는 일본 동지사대학교 교정에 세운 “윤동주시비”제박식자료를 손짚어주었다. 그를 죽음에로 몰라넣은 일본에서까지 그 시비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연변의 아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음력 11월 7일), 위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본관 파평인 윤영석씨와 독립운동가이며 교육가인 규암 김약연선생의 누이 김룡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여났다. 그때 명동촌은 김약연 등 선각자들에 의해 이미 민족의 혼을 깨우쳐주는 교육운동의 보금자리로 되고있었다. 1925년에 윤동주는 그 유명한 명동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게 된다. 소녀시기의 윤동주는 내성적인 인상이였지만 의연함과 씩씩함을 지닌 젊은이였다.   “오빠는 참 멋쟁이였습니다. 교복이 노란색이였는데 맞지 않으면 재봉틀로 스스로 고쳐입었습니다. 그보다도 항상 책속에 파묻혀있는 모습이 더 멋있었습니다. 오빠의 방 책상엔 언제나 아주 많은 책이 꽂혀있었는데 벌써부터 창작을 한거지요. 항상 등사기로 뭔가를 등사했는데 난 멋모르고 옆에서 등사되여나오는 종이를 받아주군 했습니다.”            고향 명동촌을 찾은 윤동주 녀동생 윤혜원녀사 (왼쪽 두번째)와 부군 오형범선생(왼쪽 첫번째)   윤혜원녀사는 연변억양이 다분한 말씨로 이렇게 말하면서 윤동주와 함께 지냈던 어린시절을 떠올린다. “우린 여섯 살 터울이였는데 지금도 잠자리랑 잡아주던 모습이 눈앞에 선합니다.” 동생들을 특별히 사랑했던 윤동주는 항상 동생들을 앞에 세워놓고 노래를 배워주기도 하고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려주기도 했다면서 윤녀사는 말한다.   1931년 3월, 명동소학교를 졸업한후 윤동주는 대립자의 한족학교에 편입하여 1년간 더 다니다 졸업했다. 대립자소학교를 맞힌 윤동주는 룡정의 은진중학교에 입학한다. 윤동주가 룡정에 가게 되자 일가는 아예 룡정으로 이사해버린다.   룡정에 자리잡은곳은 룡정가 제2구 1동 36호였다. 그때의 윤동주의 취미는 다방면적이였다.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교내잡지를 내느라고 등사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2학년때에는 웅변대회에서 1등한적도 있다. 그는 수학도 자러했으며 특히 기하학을 좋아했다.   동급생이자 고종사촌인 송몽규가 북경으로 떠나고 문익환이 평양 숭실중학에 가자 윤동주는 부모님을 설득하여 1935년 9월, 평양 숭실중학교에 옮겨앉게 된다. 그러나 신사참배문제로 숭실중학교가 페교되자 룡정으로 다시 돌아와 일본인이 경영하던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된다. 이 무렵 연길에서 발행되던 “카톨릭소년”지에 동주라는 필명으로 “병아리”, “비자루”, “거짓부리” 등 동요동시를 발표한 것이다.   연희전문학교시절 중학교졸업반이 되자 윤동주는 진학문제로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자신의 뜻과는 달리 아버지가 의과대학지망을 권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문학에의 굳은 신념을 지녀버린 윤동주는 자기 고집을 꺾을수가 없었던 것이다. 끝내는 단식투쟁까지 벌리는 극한 대립을 아버지에게 보이지 않을수 없었다. 하여 1938년 4월 9일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청운의 뜻을 품고 연희전문학교에 들어서게 되었다.   고향인 연변을 떠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면서 윤동주는 세계문학과 접하게 되며 훌륭한 스승들에 의한 학문이 세계 그리고 민족의식의 드높은 고취를 받아안게 된다. 윤동주의 관심분야는 력사, 문화 그리고 문학, 미술, 음악에 걸쳐 다방면적이였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모든 상황이 바뀌여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전장으로 끌려가고 전쟁물자 수급을 위한 착취의 손길이 사처에 뻗치면서 연희전문학교도 영향을 피치못했다. 졸업이 코앞에 다닿자 윤동주의 생각은 무척 복잡해졌다. 진학, 시국에 대한 불안 등은 윤동주를 무척 괴롭혔다. 윤동주의 년보를 보면 1941년 5월이후 대표작이라 할 많은 작품들이 씌여져있다.   이 무렵 윤동주는 퍽 신중하고 과묵한 성품으로 독서에만 몰두하였으며 국내외 많은 문인에 심취해있었다. 독서와 더불어 그는 창작의 붓을 시들게 하지 않았다. 떠오르는 시상을 며칠 몇주일씩 묵혀가면서 갈고 다듬어 완전한 작품이 이루어졌을 때에야 필을 들어 써내려갔다. 때문에 그의 작품은 다시 손대는 일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연희전문학교졸업을 앞두고 윤동주는 무언가 뜻깊은 것을 만든 것이 자필시집3부였다. 그것은 77부 한정판으로 출간하기 위한것이였다. 이 시집은 19편으로 묶어졌는데 1941년 11월 5일자로 “별 헤는 밤”이 마지막 작품으로 되어있었고 시집이 서문을 대신하여 쓴 “서시”가 11월 20일자로 되어있었다. 윤동주는 이 시집3부를 연희전문 영문과 교수였던 리영하선생과 후배였던 정병욱군 그리고 자신이 나누어가졌다. 시집제목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고 된 비교적 긴 제목이였다. 윤동주는 이 시집을 정병옥에게 주면서 시집의 제목이 길어진리유를 이렇게 밝혔다.   “‘서시’가 되기전에는 시집이름을 ‘병원’이라고 볼일가 했네. 지금 세상은 온통 환자투성이 아닌가?”그러면서 표지에 연필로 “병원”이라고 써넣어주었다.   이 시집을 받아본 리영하교수는 “슬픈 족속”, “십자갚 등 작품이 검열을 통과하기 힘들터이니 출판을 보류하고 때를 기다리라는 충고를 주었다. 일본류학을 앞둔 윤동주의 신변을 걱정해서였다. 후에 윤동주자신이 가졌던것과 리영하교수가 가졌던 시집은 행방이 묘연해지고 정병욱이 가졌던 시집이 어머니 장롱속에 깊숙이 감춰졌닥 결국 광복후 한국의 정음사에 의해 볕을 보게 된것이다.   일제감옥이 이슬 되었어도 1942년 26세의 윤동주는 드디여 일본에 건너가 도꾜 릿교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식민지인의 굴욕을 안고 지배국에 건너가 학문을 탐구한다는 것은 고통이였으며 끝없는 자책과 죄스러운 마음에 시달리는 일상이였다. 그러한 일상속에서도 창작의 붓을 놓지 않았는바 “쉽게 씌여진 시”등이 이때에 창작되였다. 아울러 일제가 지펴놓은 태평양전쟁의 불길은 미국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한층 격화되였고 부상자와 주검이 실린 차들이 꼬리를 물고 일본으로 들이닥치는통에 일본판도는 온통 불안속에 잠기였다. 다급해난 일제는 조선반도에서 징병제도와 학도병제도를 실시하여 40여만명 조선청년들을 전쟁의 희생물로 내몰았다. 그 광란적인 시국에 시작된 윤동주의 류학생활은 자연 고독과 외로움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1942년 여름, 연변에 돌아온 윤동주는 “앞으로 우리 말 인쇄들이 모두 사라질터이니 무엇이든, 심지어 악보까지도 사서 모으라”고 당부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시대적상황을 절박하게 느꼈는데 결과적으로는 윤동주의 예언이 적절히 맞아떨어진 것이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윤동주는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전학, 디케다 아파트에 하숙을 정했다. 그는 변함없이 독서에 열중하면서 시창작을 정진시켰다. 륙첩다다미방에서 밤가는줄 모르고 추위를 이겨내면서 시를 쓰는 일이 그때의 윤동주의 일상이였다.   1942년 겨울방학에 집에 오지 않고 1943년 7월 14일, 도시샤대학에서 첫 학기를 마치고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귀향길에 오르기 직전 윤동주는 “교도조선인학생민족주의구룹사건”에 련루되여 갑자기 체포되였다. 뒤늦게 공개된 일본경찰의 사상범을 다룬 극비문서 “특별월보”에 따르면 일본경찰의 윤동주에 대한 조사기록은 “요찰인물”로 주목받고있던 송몽규가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의 중심인물이고 윤동주는 그에 동조한 것으로 되어있었다. 결국 두사람은 12월 6일 검사국에 넘겨졌고 해를 넘겨 1944년 2월 22일에 기소되였다. 재판은 분리 진행되였으며 3월 4일, 윤동주는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소위 윤동주의 범법행위란 피식민상태의 량심있는 젊은이로서 마땅히 서야 할 자리에 서기 위한 당연한 자기발현임에도 불구하고 윤동주는 막연하고 악랄하기 그지없는 일제의 법에 의해 처벌된 것이다. 결국 윤동주는 후꾸오까형무소에 송치되여 비인간적인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러다가 민족해방의 날을 6개월 앞둔 1945년 2월 16일, 29세의 아까운 나이로 생애의 막을 내리게 된다. 그의 사인에 대하여 일제의 생체실험의 제물이라는 것이 주되는 주장이다.   한줌의 재로 변하여 윤동주의 유해가 돌아오는 날, 그의 혈육들은 두만강변 조선의 상삼봉역까지 마중을 갔다. 장례는 3월초순, 눈보라가 몹시 치는 날에 치러졌다. 집앞뜰에서 거행된 장례식에서는 연희전문학교졸업 무렵 교내잡지 “문우”에 발표되였던 “자화상”과 “새로운 길”이 랑독되였다. 장지는 룡정동산이였다. 연변은 4월초에나 겨우 해토되는 까닭에 5월의 따스한 날을 기다려 가족들은 윤동주의 묘에 떼를 입히고 꽃을 심었다. 단오 무렵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서둘러 “시인 윤동주지묘”라는 목비를 해세웠다. 이렇게 되어 고향에 돌아온 윤동주에게 가족들이 처음으로 시인이라는 호칭을 붙여준 것이다.   불멸의 시인 윤동주의 첫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간행되여나온 것은 1946년이다. 애초에 77부 한정판으로 연희전문졸업기념으로 출판하려던 것이 7년이나 지나 비로소 해빛을 본 것이다.   서울에서 윤동주의 시집이 출판되였다는 소식과 함께 있는 시고들을 다 가지고 오라는 기별이 윤일주로부터 전해오자 윤혜원녀사와 오형범씨는 윤동주가 연희전문하교에 다닐 때 집에 가져다 두었던 세권의 습작노트와 수많은 스크랩과 사진을 챙겨갖고 서울을 바라고 떠났다. 도중 스크랩과 사진이 든 보따리는 잃고 습작노트만을 겨우 보전하여 가지고 갔다. 1948년 12월 31일, 초간본 시집에는 정지용의 서문, “서시”를 비롯한 31편의 유고작품, 평소 가깝게 지내던 시인 유영의 추도시와 강처중의 발문이 순서대로 수록되였다. 그후 1968년 간행된 증보판 시집은 5부로 나뉘여져있는데 1부엔 윤동주가 졸업기념으로 출판하려던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그대로 실었고 2부엔 도꾜시절에 쓴 시 5편, 3부엔 습작기의 작품, 4부엔 동요, 5부엔 산문 5편이 실리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연변에서는 감감 모르고있다가 1984년 연변에 다녀온 한국 서울의 연세대학교 명예박사 현봉학씨로부터 처음 시인의 신상이 연변에 전격 소개되게 된다. 그후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을 읽고 크나큰 감동을 받았다는 일본의 와세다대학교수 오오무라선생이 도꾜히비야의 한 다방에서 윤일주씨를 만나 룡정에 있는 윤동주 묘소가 있는곳의 략도를 그려받고 급기야 연변에 와 윤동주묘소를 찾게 되면서 불멸의 시인 윤동주가 완정한 모습으로 연변에 나타나게 되었다. 고향은 윤동주로 하여 진동을 받았다. 연변이 낳은 윤종주가 세계적인 시인인줄을 깜박 몰랐으니 그럴만도 했다.   1980년대주엽부터 윤동주는 해마다 한국에서 “사랑받는 시인”, “좋아하는 시인”의 으뜸으로 뽑히고있고 그 기세는 세계에로 물결쳐 나가고 있다. 윤동주의 시집은 해마다 가장 잘 팔리는 책으로 되고 있다. 윤동주와 윤동주시를 연구하여 석사, 박사가 된 사람만도 이미 30~40명 된다고 한다.   “정본 윤동주전집”의 저자 홍장학씨는 “윤동주는 변절과 배신으로 신음해온 우리 현대정신사의 중심에서 민족적량심과 긍지를 상징해온 그리 많지 않은 인물중의 한사람이다”고 하고 있다. 연변대학 권철교수는 “윤동주의 시는 바로 겨레에 대한 진지한 사랑과 격정을 담은 노래이다”고 했고 연변대학 김호웅교수는 “그의 시는 자아성찰과 뉘우침을 통해 부단히 진실로 복귀하여 그 존재론적고뇌를 순수하고 순결한 심성의 투명한 서정으로 이끌어올림으로써 우리에게 따뜻한 위안과 아름다운 예지 그리고 우리 자신의 힘을 일깨워준데 그 감동의 비밀이 있다...   문익환목사의 말 그대로 오늘날 그를 회상하는것만으로도 우리 모두의 넋이 맑아진다. 또 그의 노래는 백의동포의 수많은 어린이, 젊은이들이 입을 모아 읊는바가 되었다. 아무튼 연변땅에 시심의 뿌리를 박고 자신의 결백하고 희생적인 자아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고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죽어가는것들을 사랑하면서 조국과 민족을 위한 제단에 자기의 젊은 몸을 조용히 바친 그 아름다운 시편들은 한줄기 밝은 별빛이요, 우리 청소년들이 삶의 거울이 될 것이다.” “난 지금도 ‘이랬슴둥’, ‘저랬슴둥’하는 연변사투리를 곧잘 씁니다. 우리 연변사람입니다. 윤동주도 연변사람입니다.” 윤혜원녀사의 말이다.   그렇다. 윤동주는 자랑찬 연변의 아들-조선족시인이다. 그러나 윤동주는 연변시인만이 아니다. 윤동주는 이젠 세계적시인으로 세인들앞에 나섰다. 윤동주로 하여 연변과 우리 겨레는 이제 더 큰 긍지를 느끼며 자랑을 느낄 것이다. 연변일보 김철호기자  
191    시와 서예 댓글:  조회:1739  추천:0  2015-02-12
      산             김광림   한여름에 들린 가야산(伽倻山) 독경(讀經) 소리 오늘은 철 늦은 서설(瑞雪)이 내려 비로소 벙그는 매화(梅花) 봉오리.   눈 맞는 해인사(海印寺) 열 두 암자(庵子)를 오늘은 두루 한겨울 면벽(面壁)한 노승(老僧) 눈매에 미소가 돌아.     백자라사 말 없느니                       최기호   스스로 물러앉아  자중함을 보여준다   차마나 다 못하고  깨우치는 아픔이여   내 한 생 바윗돌로싼  백자라사 말 없느니   아침나절 손을 맞아  비운 잔 추상인가   시인의 사는 양이  종일 토록 타는 핏빛   그 청정 입동이 들면  백자로나 구이리     숨쉬이는 목내이(木乃伊).                                      김형원. 오 나는 본다 숨쉬이는 목내이를   현대라는 옷을 입히고 제도라는 약을 발라 생활이라는 관에 넣은 목내이를 나는 본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이 이미 숨쉬이는 목내이임을 아 나는 弔喪 한다     섬진강 11-다시 설레이는 봄날에                                                                 김용택 당신, 당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곱게 지켜 곱게 바치는 땅의 순결. 그 설레이는 가슴 보드라운 떨림으로 쓰러지며 껴안을, 내 몸 처음 열어  골고루 적셔 채워줄 당신. 혁명의 아침같이,  산굽이 돌아오며 아침 여는 저기 저 물굽이같이 부드러운 힘으로 굽이치며 잠든 세상 깨우는 먼동 트는 새벽빛 그 서늘한 물빛 고운 물살로 유유히. 당신, 당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낙 화                  조지훈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사           슴                                          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族屬)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鄕愁)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쳐다본다.        저녁에                           김광섭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 본다  밤이 깊을 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향   수                                            정지용  넓은 별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가고 오지 않는 사람                                      김남조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더 기다려 줍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부끄러워 할 것은 없습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 없습니다. 요행이 그 능력 우리에게 있어 행할 수 있거든 부디 먼저 사랑하고 많이 사랑하고 더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 됩시다.                                사랑하는 까닭                                                                                      - 한용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紅顔)만을 사랑하지만은 당신은 나의 백발(白髮)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루어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만은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 이호우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단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누가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사월의 노래                                       박목월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목련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지를 쓰노라 클로버 피는 언덕에서 휘파람을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깊은 산골 나무 아래서 별을 보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진달래꽃 ㅡ 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마          음                                                            김 광 섭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가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리하여,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 위에 뜨고                 숲은 말없이 물결을 재우나니,                                                 행여 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가을 엽서                                     안도현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떠나가는 배                                  박용철    나두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두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구인들 손쉽게야 버릴거냐. 안개같이 물 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사랑하는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 거냐.   나두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두야 간다.         민들레꽃                                                  조지훈   까닭 없이 마음 외로울 때는 노오란 민들레꽃 한 송이도 애처롭게 그리워지는데,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소리쳐 부를 수도 없는 이 아득한 거리에 그대 조용히 나를 찾아오느니.    사랑한다는 말 이 한마디는 내 이 세상 온전히 떠난 뒤에 남을 것.    잊어버린다. 못 잊어 차라리 병이 되어도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         꽃자리     - 구상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 니라.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 니라.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다.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다.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묶여 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도 맛본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 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190    유명한 시인 222인 댓글:  조회:1890  추천:0  2015-02-12
★유명한 시인, 시 모음 (222인)좋은글 좋은시!!!★       ◐유명한 시인, 시 모음 (222인)◑ (보고픈 제목 클릭)   - 가-     산에 언덕에(신동엽) 가는길(김소월)   산유화(김소월) 가을에(정한모)   살구꽃 핀 마을(이호우) 가을의 기도(김현승)   살아있는 것이 있다면(박인환) 가정(박목월)   상리과원(서정주) 가정(이상)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김춘수) 간(윤동주)   새(박남수) 갈대(신경림)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황지우) 강강술래(이동주)   샘물이 혼자서(주요한) 개화(이호우)   생명의 서(유치환) 거울(이상)   생의 감각(김광섭) 검은 강(박인환)   서시(윤동주) 겨울바다(김남조)   석문(조지훈) 견우의 노래(서정주)   설날 아침에(김종길) 고풍의상(조지훈)   설야(김광균) 고향(백 석)   설일(김남조) 고향(정지용)   성북동 비둘기(김광섭) 고향 앞에서(오장환)       광야(이육사)   성탄제(김종길) 교목(이육사)   성호부근(김광균) 국토서시(조태일)   손무덤(박노해) 국화 옆에서(서정주)   쉽게 쓰여진 시(윤동주) 국경의 밤(김동환)   슬픈 구도(신석정) 귀천(천상병)   승무(조지훈) 귀촉도(서정주)   시1(김춘수) 그 날이 오면(심훈)   신록(이영도)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신석정)   신부(서정주) 기항지 1(황동규)   십자가(윤동주) 길(김소월)       깃발(유치환)   - 아 - 껍데기는 가라(신동엽)   아버지의 마음(김현승) 꽃(김춘수)   아우의 인상화(윤동주) 꽃(박두진)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신석정) 꽃(이육사)   아침 이미지(박남수) 꽃덤불(신석정)   알 수 없어요(한용운) 꽃을 위한 서시(김춘수)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김수영)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김영랑)   어머니(정한모) - 나 -   어서 너는 오너라(박두진) 나그네(박목월)   엄마 걱정(기형도) 나는 별아저씨(정현종)   여승 나는 왕이로소이다(홍사용)   여우난 곬족(백석) 나룻배와 행인(한용운)   연시(박용래) 나비와 광장(김규동)   오감도-제1호(이상) 나비의 여행(정한모)   오랑캐꽃(이용악) 나의 침실로(이상화)   오렌지(신동집) 낙화(조지훈)   오월(김영랑) 낙화(이형기)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도종환)       와사등(김광균) 난초(이병기)   외인촌(김광균)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에서(이용악)       우리가 눈발이라면(안도현) 낡은 집(이용악)   우리가 물이 되어(강은교) 남사당(노천명)   울릉도(유치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백석)   울음이 타는 가을 강(박재삼) 남으로 창을 내겠소(김상용)   위독(이승훈) 내 마음을 아실 이(김영랑)   유리창(정지용) 논개(변영로)   윤사월(박목월) 농무(신경림)   은수저(김광균)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신동엽)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김영랑)   이별가(박목월) 눈(김수영)   일월(유치환) 눈길(고은)   임께서 부르시면(신석정) 눈물(김현승)   입추(김현구) 눈이 내리느니(김동환)   - 자 - 능금(김춘수)   자모사(정인보) 님의 침묵(한용운)   자야곡(이육사) - 다 -   자연(박재삼) 달밤(이호우)   자화상(서정주) 달.포도.잎사귀(장만영)   자화상(윤동주) 당신을 보았습니다(한용운)   작은 짐승(신석정)       저문 강에 삽을 씻고(정희성) 뎃생(김광균)   적군의 묘지 앞에서(구상) 도봉(박두진)   절정(이육사) 독을 차고(김영랑)   접동새(김소월) 동천(서정주)   정념의 기(김남조) 들길에 서서(신석정)   정천한해(한용운) 떠나가는 배(박용철)   조국(정완영) 또 다른 고향(윤동주)   조그만 사랑 노래(황동규)     종(설정식) - 마 -   종소리(박남수) 마음(김광섭)   주막에서(김용호) 말(정지용)   진달래꽃(김소월) 머슴 대길이(고은)       모란이 피기까지는(김영랑)   - 차 - 목계장터(신경림)   참회록(윤동주) 목마와 숙녀(박인환)   청노루(박목월) 목숨(김남조)   청산도(박두진) 목숨(신동집)   청포도(이육사) 묘지송(박두진)   초혼(김소월) 무등을 보며(서정주)   추억에서(박재삼) 문의 마을에 가서(고은)   추일서정(김광균) 민간인(김종삼)   추천사(서정주) 민들레꽃(조지훈)   춘향유문(서정주) - 바 -   - 타 - 바다와 나비(김기림)   타는 목마름으로(김지하)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보습...(김소월)   - 파 - 바라춤(신석초)   파도(김현승) 바위(유치환)   파도타기(정호승) 밤바다에서(박재삼)   파랑새(한하운) 방랑의 마음(오상순)   파장(신경림) 백자부(김상옥)   파초(김동명) 벼(이성부)   폭포(김수영) 별 헤는 밤(윤동주)   폭포(이형기) 병원(윤동주)   푸른 하늘을(김수영) 보리피리(한하운)   풀(김수영) 봄비(이수복)   풍장1(황동규) 봄비(변영로)   플라타나스(김현승) 봄은(신동엽)   피아노(전봉건) 봄은 간다(김억)   - 하 - 봄은 고양이로다(이장희)   하관(박목월) 봉황수(조지훈)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김남주) 북(김영랑)   향수(정지용) 불놀이(주요한)   향현(박두진) 비(정지용)   해(박두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상화)   해마다 봄이 되면(조병화) - 사 -   해바라기의 비명(함형수) 사령(김수영)   화사(서정주) 사슴(노천명)   휴전선(박봉우) 사평역에서(곽재구)       사향(김상옥)   흥부 부부상(박재삼) 산(김광림)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189    한국 문학상들 모음 댓글:  조회:5615  추천:0  2015-02-12
전국 문학상 종류   시상명칭 시상기관 제정연도 시상분야  2001삼성문학상 삼성문화재단, 문학사상사 - 종합  21세기문학상 이수문학사 1998 소설  3.1문화상 동상 운영위원회 1960 종합  4.19문화상 동상 운영위원회 2000 종합  가람시조문학상 동상 운영위원회 - 시조  강원문학상 문협 강원지부 1982 종합  강원시조문학상 강원시조문학회 1995 시조  강원아동문학상 강원아동문학부 1981 아동문학  경기도문학상 경기도 1992 종합  경기문학상 문협 경기지부 1992 종합  경기수필문학상 경기수필문학회 2001 수필  경남도문학상 경상남도 1962 종합  경남문학상 문협 경남지부 1989 종합  경남시조문학상 경남시조문학회 1997 시조  경남아동문학상 경남아동문학회 1990 아동문학  경북도문학상 문협 경북지부 1988 종합  경희문학상 경희문인회 1984 시  공무원문예대전 행정자치부 1998 종합  공무원문학상 행정자치부 2001 종합  공초문학상 공초숭모회 1993 시  관동문학상 관동문학회 1991 종합  광주문학상 문협 광주지부 1988 종합  광주시문화예술상 광주시 2000 종합  광주전남아동문학상 광주전남아동문학회 1996 아동문학  교단문학상 한국교단문학회 1999 종합  교산허균문학상 동상 운영위원회 1999 종합  금호시조상 금호문화재단 1993 시조  기독교문학상 한국기독교문학가협회 1983 종합  김달진문학상 동상 운영위원회 1990 시  김동리문학상 동상 운영위원회 1998 소설  김수영문학상 민음사 1981 시  김영일아동문학상 동상 운영위원회 2000 아동문학  김유정문학상 동서문학사 1989 소설  김환태평론문학상 문학사상사 1989 평론  난고문학상 동상 운영위원회 2001 시  남명문학상 문협 전주지부 1989 시  남촌문학상 해남 남촌문학회 1996 시조  노산문학상 노산문학회 1976 시조  노천명문학상 동상 운영위원회 2001 시  농민문학상 농민문학사 1991 종합  농민문학작가상 농민문학사 1996 종합  눈높이아동문학상 (주)대교 1993 아동문학  대구문학상 문협 대구지부 1982 종합  대구시인협회상 대구시인협회 1991 시  대구시조문학상 대구시조문학회 1998 시조  대산문학상 대산문화재단 1993 종합  대산청소년문학상 대산문화재단 1993 청소년  대전문학상 문협 대전지부 1989 종합  대한민국예술원상 대한민국예술원 1966 종합  동국문학상 동국문학인회 1987 종합  동서문학상 동서문학사 1988 종합  동서문학신인상 동서문학사 1982 종합  동인문학상 조선일보사 1955 소설  동포문학상 동상 운영위원회 1984 종합  두리문학상 두리문학회 1995 종합  만해문학상 창작과비평사 1973 소설  만해상 문학부문 만해사상실천선양회 1997 종합  모악문학상 동상 운영위원회 1993 시  목정문학상 문협 전북지부 1992 평론  무등문학상 문등문학회 1998 종합  무영문학상 동양일보 2000 소설  문예사조문학상 문예사조사 1990 종합  문예사조시조문학상 문예사조사 1992 시조  문학과의식신인상 문학과의식사 - 소설  문학동네신인작가상 계간 문학동네 1996 소설  박영준문학상 문학과의식사 1988 소설  박용래문학상 동상운영위원회 1999 종합  박인환문학상 시전문지 시현실·내린문학회 2000 시  박홍근아동문학상 아동문예사 1990 아동문학  방정환문학상 아동문학평론사 1991 아동문학  백석문학상 백석문학기념사업운영위 1997 시  백양촌문학상 동상 운영위원회 1989 종합  번역문학상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1977 번역  복사골문학상 복사골문학회 1991 시  봉생문학상 동상 운영위원회 1989 종합  부산문학상 동상 운영위원회 1994 종합 부산작가상 부산민족문학작가회의 2000 종합 부산소설문학상 부산소설가협회 1996 소설  부산시인협회문학상 부산시인협회 1993 시  부산아동문학상 부산아동문학회 1979 아동문학  부산여성문학상 부산여성문학인회 1993 종합  부원문학상 동상 운영위원회 1991 종합  불교문학대상 한국불교문인협회 1992 소설  삼성문예상 문학사상사 - 소설  상화시인상 죽순시인구락부 1986 시  새천년문학상 동상 운영위원회 2001 종합  새천년한국문학상 새천년한국문학회 2000 종합  서라벌문학상 중앙대문인회 1991 종합  서포문학상 농민문학사 1991 종합  설송문학상 설송문학회 1999 종합  성균관문학상 성균관문인회 1988 종합  성파시조문학상 동상 운영위원회 1984 시조  세종아동문학상 소년한국일보사 1968 아동문학  소월시문학상 문학사상사 1986 시  소천비평문학상 동상 운영위원회 1989 평론  소천아동문학상 계몽사 1978 아동문학  솟대문학상 한국장애인문인협회 1996 종합  시문학상 시문학사 1976 시  시와반시신인상 시와반시 - 시  시와시학상 시와시학사 1996 시  시조문학신인상 시조문학 - 시조  시천문학상 시천문학회 1999 종합  신곡문학상 신곡문학회 1995 종합  신동엽창작기금 창작과비평사 1983 종합  심산문학상 동상 운영위원회 1985 종합  심훈문학상 동상 운영위원회 1987 평론  아동문예문학상 한국아동문예작가회 1982 아동문학  열린문학상 열린문학사 1995 종합  열린시문학상 열린문학사 1995 시  영광문학상 영광문학회 2000 종합  오늘의작가상 민음사 1977 소설  오늘의젊은예술가상 문화관광부 - 종합  오영수문학상 동상 운영위원회 1993 소설  오현문학상 동상 운영위원회 2001 종합  올해의시조문학작품상 시조문학사, 시조문학작가회 1983 시조  요산문학상 동상 운영위원회 1984 소설  우리문학상 우리문학사 1991 종합  원광문학상 원광대동창문학회 1996 종합  월탄문학상 동상 운영위원회 1966 시  윤동주문학상 한국문인협회 1985 시  율목문학상 문협 관천지부 1992 종합  이무영문학상 동상 운영위원회 2000 소설  이미륵상 이미륵추모사업회 1999 종합  이산문학상 문학과지성사 1989 종합  이상문학상 문학사상사 1977 소설  이육사문학상 동상 운영위원회 2000 시  이주홍아동문학상 동상 운영위원회 1981 아동문학  이호우시조문학상 동상 운영위원회 1991 시조  이화문학상 이대동창문학회 1997 종합  인천문학상 문협 인천지부 1989 종합  임실문학상 임실문학회 1995 종합  재외동포문학상 재외동포재단,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1999 종합  전라시조문학상 전라시조문학회 1996 시조  전북문학상 문협 전북지부 1989 종합  전북수필문학상 전북수필문학회 1988 수필  전북아동문학상 전북아동문학회 1982 아동문학  전북여류문학상 전북여류문학회 1996 시  전북예술상 전라북도 1997 종합  전태일문학상 동상 운영위원회 1991 종합  젊은평론가상 한국문학평론가협회 2000 평론  정지용문학상 계간 시와시학 1989 시  제주문학상 문협 제주지부 2001 종합  제주신인문학상 문협 제주지부 2001 종합  조선시문학상 조선시문학회 2000 시  조연현문학상 한국문인협회 1982 종합  중앙문학상 중대문인회 1975 종합  중앙시조대상 중앙일보사 1982 시조  중앙신인문학상 중앙일보사 2000 종합  지훈상 동상 운영위원회 2001 시  짚신문학상 짚신문학회 2001 종합  창비신인소설상 창작과비평사 1998 소설  창비신인시인상 창작과비평사 2001 시  창비신인평론상 창작과비평사 1994 평론  천상병문학상 동상 운영위원회 1999 시  천상병시상 동상 운영위원회 1999 시  청마문학상 청마문학상 2000 시  청주문학상 청주 문인협회 1999 종합  청하문학상 동상 운영위원회 2001 시  최인희문학상 동상 운영위원회 1998 시  충북문학상 문협 충북지부 1996 종합  충북수필문학상 충북수필문학회 1994 수필  탐미문학상 탐미문학사, 밀레21 2000 종합  투병문학상 인제대학교 백병원, 동아일보사 2001 종합  팔봉비평문학상 한국일보사 1990 평론  펜문학상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1987 종합  편운문학상 동상 운영위원회 1991 종합  평사리문학대상 토지문학재단 2001 종합  평화문학상 평화신문사 1986 종합  표현문학상 표현문학회 1986 시  한겨레문학상 한겨레신문사 1996 소설  한국가톨릭문학상 가톨릭신문사 1998 종합  한국가톨릭아동문학상 가톨릭신문사 1998 아동문학  한국기독교문학상 한국기독교문인협회 1983 종합  한국동시문학상 아동문예 1978 아동문학  한국동화문학상 아동문예 1978 아동문학  한국문학번역상 한국펜클럽 1960 번역  한국문학비평가협회문학상 한국문학비평가협회 2000 평론  한국문학상 문인협회 1964 종합  한국번역문학상 한국번역문학회 1997 번역  한국불교아동문학상 한국불교아동문학회 1983 아동문학  한국비평문학상 한국비평문학회 1992 평론  한국소설문학상 한국소설가협회 1975 소설  한국수필문학상 한국수필문학진흥회 1982 수필  한국시문학상 동상 운영위원회 1990 시  한국시조문학상 시조문학사, 시조문학작가회 1983 시조  한국시조작품상 한국시조사 1991 시조  한국시협상 한국시인협회 1969 시  한국아동문학상 월간 아동문학 1992 아동문학  한국아동문학작가상 한국아동문학회 1978 아동문학  한국일보문학상 한국일보사 1968 소설  한국크리스천문학상 기독교문인협회 1984 종합  한라문학상 한라문학동인회 1997 시  한려문학상 문협 여수지부 1993 종합  한림문학상 동상 집행위원회, 계간 문학춘추 1998 종합  한무숙문학상 동상 운영위원회 1995 소설  한민족문학상 동상 운영위원회 1997 종합  한정동아동문학상 동상 운영위원회 1969 아동문학  한하운문학상 한국시인연구협회 1998 종합  해양문학상 부산시 1997 종합  허균문학상 동상 운영위원회 1993 종합  현대문학상 현대문학사 1955 종합  현대불교문학상 불교문인협회 1996 종합  현대수필문학상 수필공원사 1990 수필  현대시동인상 현대시동인회 1995 시  현대시인상 한국현대시인협회 1978 시  현대시작품상 월간 현대시 2000 시  현대시조문학상 현대시조시인협회 1984 시조  현대시학작품상 현대시학사 1969 시  호서문학상 호서문학회 1996 종합  화순문학상 문협 화순지부 1996 종합  황금드래곤문학상 문화일보사, 황금가지 2001 소설  황진이문학상 탐미문학사, 밀레21 2000 종합  효석문학상 동상 운영위원회 2000 소설  후광문학상 우리문학사 1992 종합  SBS TV문학상 서울방송 1999 소설   ///청풍명월  
188    마광수 시평 댓글:  조회:4200  추천:0  2015-02-12
 <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 / 마광수(馬光洙)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꼭 금이나 다이아몬드가 아니더라도 양철로 된 귀걸이, 반지, 팔찌를 주렁주렁 늘어뜨린 여자는 아름답다 화장을 많이 한 여자는 더욱더 아름답다 덕지덕지 바른 한 파운드의 분(粉) 아래서 순수한 얼굴은 보석처럼 빛난다 아무 것도 치장하지 않거나 화장기가 없는 여인은 훨씬 덜 순수해 보인다 거짓 같다 감추려 하는 표정이 없이 너무 적나라하게 자신에 넘쳐 나를 압도한다 뻔뻔스런 독재자처럼 적(敵)처럼 속물주의적 애국자처럼 화장한 여인의 얼굴에선 여인의 본능이 빛처럼 흐르고 더 호소적이다 모든 외로운 남성들에게 한층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가끔씩 눈물이 화장 위에 얼룩져 흐를 때 나는 더욱 감상적으로 슬퍼져서 여인이 사랑스럽다 현실적, 현실적으로 되어 나도 화장을 하고 싶다 분으로 덕지덕지 얼굴을 가리고 싶다 귀걸이, 목걸이, 팔찌라도 하여 내 몸을 주렁주렁 감싸 안고 싶다 현실적으로 진짜 현실적  -- 시집 『광마집』(심상사, 1980) 중에서 마광수(馬光洙) 시인 1951년 경기도의 수원에서 출생. 연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1983년 로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음. 1977년 《현대문학》에 ,,,,,등 여섯 편의 시가 박두진 시인에 의해 추천되어 시문단에 데뷔. 문학이론서와 평론집을 출간해오던 그는 1989년 에세이집 와 시집 를 출간함으로써 세간에 화제를 모음. 《문학사상》에 장편 를 연재하면서 소설가로서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92년 장편소설 로 인해 구속되고, 교수이던 연세대학교에서도 해직당하지만 복직됨.  작품 해설  마광수(馬光洙) . 그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3월 10일, 가족들이 1.4 후퇴로 피난가서 잠시 머물렀던 경기도의 발안에서 태어났다. 그후, 종군사진작가였던 아버지가 전사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그는 서울 청계초등학교, 대광중학교, 대광고등학교를 거쳐 연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통해 1983년 로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그는 최초 1977년 《현대문학》에 , , , , , 등 여섯 편의 시가 박두진 시인에 의해 추천되어 시문단에 데뷔했다. 그리고 1980년 처녀시집인 『광마집』을 심상사에서 출간했다.  그는 홍익대학교 국어교육과 전임강사 시절도 있었지만 1982년 조교수로 승진한다. 1984년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조교수로 취임하고, 1988년 부교수로 승진했다. 문학이론서와 평론집을 출간해오던 그는 1989년 에세이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와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를 출간함으로써 세간에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문학사상》에 장편 를 연재하면서 소설가로서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92년 장편소설 로 인해 구속되고, 연세대학교에서도 해직당하지만 1998년 3월31일에 사면·복권되고 연세대학교 교수로 다시 복직했다. 익히 아는 바와 같이 교수와 작가로서의 마광수의 언행은 늘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구속\', \'수감\', 항소심\' 등이 말이 등장하는 마광수의 이력은, 그동안 그의 글들이 얼마나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으며 동시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모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마치 무슨 민주화 운동가의 이력을 보는 듯할 만큼 극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마광수가 정작 자신은 자신을 \'무슨 운동가\'로 규정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물론 마광수가 자신을 규정하는 사회적 주류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광수의 논리는 아주 단순하다. 자신은 자신의 하고싶은 말, 옳다고 생각한 말을 했을 뿐이고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 자신은 처벌받을 일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마광수는 무슨무슨 운동과는 거리가 먼 전형적인 자유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광수의 글과 생각은 그것이 발표될 때마다 일종의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어쨌든 그처럼 발표하는 작품마다 사회적 issue가 되었던 작가는 그리 흔치 않다. 그 때문에 그를 가리켜서 이른바 \'이 시대의 광인(狂人)\'이라 論하고 있음에도 이젠 그런 애칭이 오히려 더욱 잘 어울리는 작가인지 모른다.  오늘 소개하는 는 1979년도에 발표된 시로 그의 첫 시집 『광마집』에 수록되어 있으며 우리의 근엄한 엄숙주의 밑의 속물근성을 드러내고 폭로해주는 시이다. 1980년대 후반 또 하나의 엄숙주의가 유행하던 시기에 시인은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수필집을 내면서 법정시비에 휘말리고 대학에서 쫓겨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되었지만 정작 이 시가 씌어진 것은 1970년대 후반 시인이 대학원 다니던 시절이었다. 수필집과 더불어 즐거운 사라 등 소설에 손을 대면서 한 쪽 방향으로 멀리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지만 이 시는 나름대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화장한 여자에 대한 긍정과 화장기 없는 여자에 대한 비판을 통해 우리 문화 저변에 팽배해 있는 엄숙주의적인 태도의 허위성을 비판하고 폭로해주는 시이다. 연 구분 없이 전체 23행으로 되어 있는 이 시는 의미상으로 화장한 여자에 대한 예찬, 화장기 없는 여인에 대한 비판, 그리고 나도 화장하고 싶다는 내용의 세 단락으로 나뉘어질 수 있다.  첫단락에서 시인은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파격적인 발언에 이어 "꼭 금이나 다이아몬드가 아니더라도/ 양철로 된 귀걸이, 반지, 팔찌를/ 주렁주렁 늘어뜨린 여자는 아름답다", "화장을 많이 한 여자는 더욱더 아름답다", 다음 단락의 "덕지 덕지 바른 한 파운드의 분 아래서 순수한 얼굴은 보석처럼 빛난다"로 화장의 농도를 점층적으로 강화시켜 나가면서 화장한 여자가 좋다는 주장을 과장적으로 역설하고 있다. 첫 단락의 과장적인 어조는 시를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부분이 지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고 화장에만 신경을 쓰는 여인들의 천박한 속물성을 비꼬기 위한 언어적 아이러니가 아닌가 생각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시의 묘미는 그러한 상식적인 논리를 뒤집어엎는 마광수 특유의 어법에서 나온다. 시인은 순진한 척 하면서(실제로 순진하다) 화장한 여자가 좋다고 우겨댐으로써 실제로는 화장기 없는 메마른 여성보다 화장한 여자를 좋아하면서 겉으로는 화장한 여자를 천박하게 생각하는 엄숙주의적 태도의 이중성을 비웃고 있는 것이다. 웃음이 나올 정도로 어리숙한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진지하고 세상에 대해 비판적이면서도 그것에 부딪칠 만한 힘이 없는 시인의 자신에 대한 씁쓸한 시선이 반어적인 어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두 번째 단락에서 시인은 화장한 여자와 화장기 없는 여인을 대조시켜 화장한 여자의 얼굴에서는 순수한 얼굴이 보석처럼 빛나고 화장기 없는 여인은 독재자, 속물주의적 애국자 같다는 역설적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상식적인 의미에서 화장은 거짓이나 감춤, 속임수 등을 상징하기 때문에 "덕지덕지 바른 한 파운드의 분(粉) 아래서/ 순수한 얼굴은 보석처럼 빛난다", "아무 것도 치장하지 않거나 화장기가 없는 여인은/ 훨씬 덜 순수해 보인다"는 구절은 논리적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이 구절은 화장이라는 것이 남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인간의 자연스런 욕구의 표현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표면적인 논리 이면의 또 다른 진리를 드러내게 된다. 이성 중심적 사고에서 지상적 욕망이나 감정은 부정적인 것, 또는 억압의 대상으로 생각되기 쉽다. 그러나 감정과 욕망은 생명 그 자체의 자연스런 표출이며 어떤 의미에서 생명 자체와 동일시될 수도 있는 성질의 것이다. 시인이 보석에 비유한 순수한 얼굴은 바로 이성에 의해 억압되지 않은 원시적인 발랄한 욕구와 생명력을 의미한다. 화장은 인간의 자연스런 모습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생생한 원시적 생명력의 존재를 드러내주는 양식이기 때문에 화장한 여자는 아름다운 것이다.  억압되지 않은 발랄한 생명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다. 거기에는 자아와 세계 사이의 완벽한 조화와 통일이 있다. 현대의 이성 중심적 사회는 그러한 조화와 통일을 허용하지 않는다. 냉정한 가슴과 머리, 화장기 없는 얼굴만이 가득할 뿐 인간의 발랄한 생명력은 가슴 속 깊이 억압되어 묻혀 있다. 이성 중심적 사회에서 그것은 마치 땅 속 깊이 묻혀 있는 보석과 같은 것이 아닐 수 없다. 화장은 묻혀 있는 보석, 즉 억압되어 있는 자연 그대로의 순수한 인간적 욕망과 감정을 드러내주는 수단인 셈이다. 따라서 화장한 여자는 욕망을 억압하고 감추는 이성 중심적인 냉정한 가슴을 의미하는 화장기 없는 얼굴보다 훨씬 더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시인이 화장기 없는 여인을 독재자나 속물적 애국자와 비유하여 비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독재자나 속물적 애국자는 그들의 획일적 이데올로기를 강요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의 자유와 욕망을 억압한다. 그들에게 지상적 욕망은 부정적이고 천박한 것일 뿐이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숨기고 엄숙한 얼굴을 가장한다. 그들의 엄숙주의 밑에서 지상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생명과 욕망은 질식당한다. 화장을 한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 가장 인간적인 행위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남에게 자신을 잘 보이고자 하는 본능적 욕구와 관련된다. 따라서 그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인간 자체에 대한 부정과 같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만은 아니다. 화장을 기피하거나 천박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이성적 엄숙성을 가장하고 있을 뿐이다. 아무 것도 치장하지 않은 여인이나 화장기 없는 여인은 인간다운 욕망이 없거나 그것을 감추고 엄숙을 가장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에 똑같이 인간의 자연스런 욕망을 억압하는 독재자나 속물적 애국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마지막 단락에서 시인은 자신도 현실적으로 되어 화장을 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되어" 라는 구절은 시인 스스로 현실적으로 살고 있지 못하다는 것, 즉 엄숙주의적 세계에서 욕망을 숨기고 그것을 가장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인을 억압하고 있는 엄숙주의적 세계는 시인으로 하여금 자연 그대로 마광수로서의 삶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 속에서 시인의 자아는 질식당할 것 같은 위기에 처해 있다.  시인은 과장적인 어조로 "화장을 덕지덕지 바르고 귀걸이 목걸이, 팔찌로 주렁주렁 몸을 감싸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 데 이는 이성 중심적 사회 속에서 극도로 억압된 자아의 자기실현을 위한 애절한 몸짓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이성중심적 사회에서 엄숙주의의 탈을 쓰고 살아가는 시인의 지상적 자아는 극도로 위축되고 억압될 수밖에 없다. 분열 직전의 위축된 자아는 화장한 여자들처럼 화장을 덕지덕지 바르고 귀걸이, 팔지, 반지, 목걸이로 몸을 주렁주렁 감쌈으로써 자연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살고 싶은 것이다. 욕망이란 인간이 타고난 것이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욕망 역시 신이 만든 것이다. 모든 욕망이 긍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남을 불쌍히 여기는 것도, 도와주고 싶은 것도, 부처가 되고 싶은 것도 욕망이다. 욕망의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해서 욕망을 부정할 일은 아닌 것이다. 욕망이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살아있다는 증거이고 욕망이 없다는 것은 생명이 없다는 것, 즉 인간으로서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아름다울 수 있으며 욕망이 살아 있는 사회는 자유와 생명이 살아 넘치는 사회이고 욕망이 억제된 사회는 죽은 사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신적인 세계관과 지상적인 세계관 사이의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한 시대에 신적인 질서가 지배적이면 다음 시대에는 지상적인 질서가 들고 일어나게 된다. 신적인 질서가 지배적일 때 인간의 지상적 욕망은 억압된다. 반대로 지상적 질서가 지배적일 때 무질서와 혼돈이 초래된다. 그것은 또 다른 억압을 초래한다.  인류 역사가 시대별로 지향점을 바꾸는 이유는 이성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 신적인 것과 지상적인 것을 적절하게 조화시켜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필요성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인류 역사가 두 축을 중심으로 교체되기는 하지만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지상적인 질서와 욕망에 억압이 가해지지 않는 시기는 없었다. 지금까지 많은 문학들이 성적인 자유와 해방을 외쳤던 것도 이성주의적이고 신적인 세계관의 억압으로부터 지상적 존재로서의 인간 자유를 획득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적인 자유를 외쳤던 많은 문학들은 당대에는 외설로 지탄받고 법정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뒷날 그런 문학들은 고전으로 추앙받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훗날 문학史에 지금까지 발표했던 마광수의 많은 작품들이 어떻게 평가될지 현재로선 한마디로 단언하기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주목하고 늘상 우리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그도 바로 이 시와 소설 \'즐거운 사라\' 등의 작품들로 인해 구설수로 끊임없이 독자들의 입과 매스콤에 오르내리면서 사회의 비판과 혹독한 곤욕을 치루었고 \'즐거운 사라\'는 외설 소설이라는 비판과 함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으며 또한 향후에도 논란과 비판의 대상으로 여전히 주목받는 작가라는 점이다.  
187    중국 10개 별난 집 댓글:  조회:2146  추천:0  2015-02-12
외국인이 뽑은 중국의 이상한 건물 10개       중국에서는 매년 엄청난 기세로 기괴한 모양의 건축물이 세워지고 있다. 이런 기세를 반영하여 중국 전문가인 영국인 벤 헤지스(Ben Hedges)가 외국인의 시선으로 본 ‘중국의 이상한 건물 탑 10’을 소개해 화제가 ...        
186    괴상한 건축 모음 댓글:  조회:2556  추천:0  2015-02-12
1. Mind House (Barcelona, Spain) 스페인-바르셀로나 2. The Crooked House (Sopot, Poland)폴란드 3. Stone House (Guimar?es, Portugal)포르투갈    4. Lotus Temple (Delhi, India)인디아-델리  5. Cathedral of Brasilia (Brazil)브라질    6. La Pedrera (Barcelona, Spain)  ??/FONT>스페인-바르셀로나   7. Atomium (Brussels, Belgium)벨지움-브루셀    8. Museum of Contemporary Art (Rio de Janeiro, Brazil)리오데자네이로    9. Kansas City Library (Missouri, USA)미국   10. Low impact woodland house (Wales, UK)     11. Guggenheim Museum (Bilbao, Spain)스페인   12. Rotating Tower, Dubai, UAE - 아랍에미리트-두바이   13. Habitat 67 (Montreal, Canada)카나다-몬트리올     14. Casa da musica (Porto, Portugal)포르투갈    15. Olympic Stadium (Montreal, Canada)카나다-몬트리올   16. Nautilus House (Mexico City, Mexico)멕시코-시티   17. The National Library (Minsk, Belarus)벨라시아-민스크   18. National Theatre (Beijing, China)중국-베이징 19. Conch Shell House, Isla Mujeres, Mexico-멕시코     20. House Attack (Viena, Austria)오스트리아-비엔나   21. Bibliotheca Alexandrina (Egypt)   22. Cubic Houses (Kubus woningen) (Rotterdam, Netherlands)네델란드-로테르담     23. Ideal Palace (France)프랑스-파리    24. The Church of Hallgrimur, Reykjavik, Iceland BR> 25. Eden project (United Kingdom)    26. The Museum of Play (Rochester , USA)   27. Atlantis (Dubai, UAE)두바이    28. Montreal Biosphere (Canada)카나다    29. Wonderworks (Pigeon Forge, TN, USA)   30. The Basket Building (Ohio, USA)    31. Kunsthaus (Graz, Austria)오스트리아-잘즈    32. Forest Spiral (Darmstadt, Germany)독일    33. Wooden Gagster House (Archangelsk, Russia)러시아 щ같寃쎌?Midnight Bluo  / Louise TuckerBR>     6 7   8 9  10  11  12  13  강화도의 꺼꾸로 세운집           
185    별난 집들 모음 댓글:  조회:2107  추천:0  2015-02-12
                                                                                                       
184    이상한 집들... 댓글:  조회:3143  추천:0  2015-02-11
  [이상한집] 세계각국의 재미난 이상한집 모음    세계각국의 재미난 이상한집 모음             오늘은 세계 각국의 멋진 건축가들의 재미난 이상한집을 소개해드릴까합니다. 서두는 비록 " 이상한 집"이라 명명했지만, 동화속 엘리스의 이상한나라에서나 볼 법한 기발한 아이디어와 독창성이  빛나는 그야말로 보는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는 이상한집을 몇 점 소개해드릴텐데요. 그럼, 어디한번 영광건축과 함께 세계 각국의 이상한집을 살펴보러 떠나실까요?                   일본의 이데 코타로가 디자인한 "Shell House" 입니다. 아쉽게도 정면에서 촬영된 사진이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았을때 이 집의 뛰어난 곡선미를 눈으로 다 확인하실 수 가 없는데요.  이 집은 2개의 섹션으로 나뉘어지는데 이 분할된 섹션 하나하나는 "소라"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전면이 유리로 되어 자세히 들여다 보면 집안 내부 인테리어까지 알 수가 있는데요. 개인 사생활이 오롯이 노출된다는 것은 속상한 일이지만, 어찌되었든 전면 유리창을 통해 햇살이 풍부하게 들어온다는 어드벤티지는 누구라도 뿌리치기 힘든 유혹일텐데요..^^ 미니멀리즘이 돋보이는 현대적 감각과 주위 풍경과의 멋진 블렌딩이 인상적인 집입니다.                   일본하면 떠오르는 캐릭터 중 하나가 바로 헬로우 키티일텐데요. 헬로우 키티 제품을 전문적을 판매하는 일본의 한 산리오 제품 판매점 입니다. 아기자기한 매력이 돋보이는 이 집은 무려 20년도 전인 1984에 일본 도쿄에 세워졌는데요. 지금까지도 일본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하네요.   20년전에 딸기형상의 집을 지을 생각을 다 했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오늘은 어찌하다보니 간략하게 재미난 이상한집 두곳만을 소개하게 되었는데요. 다음번에는 더욱 풍성한 자료를 토대로 다시 한번 찾아뵐께요~^^       [출처] [이상한집] 세계각국의 재미난 이상한집 모음|작성자 영광건축  
183    수수께끼 유머 100선 댓글:  조회:5005  추천:0  2015-02-11
    수수께끼 유머 100선     1,계절에 관계 없이 사시사철 피는 꽃은? (웃음꽃) 2, 남이 울 때 웃는 사람은? (장의사) 3, 도둑이 가장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은? (보석바) 4, 도둑이 가장 싫어하는 아이스크림은? (누가바) 5, 헌병이 가장 무서워 하는 사람은? (고물장수) 6, 고기 먹을때마다 딸아다니는 개는? (이쑤시개) 7, 먹으면 죽는데 안 먹을 수 없는 것은? (나이) 8, 진짜 새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참새) 9, 붉은길에 동전 하나가 떨어져 있다. 그 동전의 이름은? (홍길동전) 10, 사람의 몸무게가 가장 많이 나갈 때는? (철들 때)   11, A젖소와 B젖소가 싸워 B 젖소가 이겼다 왜? (A젖소는 에이 졌소이고 B젖소는 삐 졌소) 12, 이혼이란? (이제 자유로운 혼자) 13, 고인돌이란? (고릴라가 인간을 돌맹이 취급하던 시대) 14, 엉성하다란? (엉덩이가 풍성하다) 15,동양을 영어로 하면 오리엔트 서양은? (미쓰서) 16, 눈치코치란? (눈 때리고 코 때리고) 17, 오리지날이란? (오리도 지랄하면 날수 있다) 18, 요조숙녀란? (요강에 조용히 앉아있는 숙녀) 19,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바다는 어디일까요? (열바다) 20, 세상에서 가장 추운 바다는 어디일까요? (썰렁해)     21,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집은? (똥집) 22,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집은? (닭똥집) 23, 보내기 싫으면? (가위나 바위를 낸다) 24, 땅투기군과 인신매매자를 7자로 줄이면? (땅팔자 사람팔자) 25, 도둑이 도둑질하러 가는 걸음걸이를 4자로 줄이면? (털레털레) 26, 식인종이 밥투정 할때 하는 말은? (에이 살맛 안나) 27, 임꺽정이 타고 다니는 차가 무엇일까? (으라차차차) 28, 양초가 가득한 상자를 세자로 줄이면? (초 만원) 29, 씨름 선수들이 죽 늘어서 있다를 세자로 줄이면? (장사진) 30, 서로 진짜라고 우기는 신은? (옥신 각신)     31, 여자가 가장 좋아하는 집은? (시집) 32,따님이 아버지를 기가 막히게 피하셨군요? (못생긴 아빠) 33, 재밌는 곳은 어딜까? (냉장고에 잼 있다.) 34, 개가 사람을 가르친다’를 4자로 줄이면? (개인지도) 35, 소가 웃는 소리를 세글자로 하면? (우하하) 36, 황당무계이란? (노란 당근이 무게가 더 나간다) 37, 천고마비이란? (하늘에 고약한 짓을 하면 온 몸이 마비된다) 38, 착한자식이란? (한국에서 살고 있는 성실한 사람) 39, 호로자식이란? (러시아를 좋아하는 사람) 40, 미친자식이란? (미국과 친하려는 사람)     41,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타는 차는? (중고차) 42, 왕이 넘어지면 뭐가될까? (킹콩) 43, 초등학생이 가장 좋아하는 동네는? (방학동) 44, 스타들이 싸우는 모습을 뭐라구 할까? (스타워즈) 45, 라면은 라면인데 달콤한 라면은? (그대와 함께라면) 46, 추운 겨울에 가장 많이 찾는 끈은? (따끈따끈) 47, 토끼들이 젤 잘하는것은 무엇일까? (토끼고 도망치기) 48, 길가에서 죽은 사람을 무엇이라 하는가? (도사: 道 길도 死 죽을사 니까) 49, 진짜 문제 투성이인 것은? (시험지) 50, 세 사람만 탈 수 있는 차는? (인삼차: 人三車)       51, 올림픽 경기에서 권투를 잘하는 나라는? (칠레) 52, 굶는 사람이 많은 나라는? (헝가리:hungry 헝그리:배고프다) 53, 경찰서가 가장 많이 불타는 나라는? (불란서) 54, 노총각들이 가장 좋아하는 감은? (색시감) 55, 먹고 살기 위해 하는 내기? (모내기) 56, 아무리 예뻐도 미녀라고 못하는 이 사람은? (미남) 57, 사람이 일생동안 가장 많이 하는 소리는? (숨소리) 58, 가장 알찬 사업은? (알(계란)장사) 60, 눈이 녹으면 뭐가 될까? (눈물)     61, 가장 더러운 강은? (요강) 62, 귀는 귀인데 못 듣는 귀는? (뼈다귀) 63, 말은 말인데 타지 못하는 말은? (거짓말) 64,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제비는? (수제비) 65, 세상에서 제일 큰 코는? (멕시코) 66, 수학을 한글자로 줄이면? (솩) 67, 세상에서 가장 빠른 닭은? (후다닥) 68, 세상에서 가장 야한 닭은? (홀닥) 69, 가슴의 무게는? (4근(두근+두근)) 70, 간장은 간장인데 사람이 먹을 수 없는 간장은? (애간장)     71, 감은 감인데 먹지 못하는 감은? (영감, 옷감, 대감, 상감) 72, 병아리가 제일 잘 먹는 약은? (삐약) 73, 개중에 가장 아름다운 개는? (무지개) 74, 걱정이 많은 사람이 오르는 산은? (태산) 75, 공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공은? (성공) 76, 다리중 아무도 보지 못한 다리는? (헛다리) 77, 누구나 즐겁게 웃으며 읽는 글은? (싱글 벙글) 78, 눈은 눈인데 보지 못하는 눈은? (티눈, 쌀눈) 79, 다 자랐는데도 계속 자라라고 하는 것은? (자라) 80, 닭은 닭인데 먹지 못하는 닭은? (까닭)     81, 떡 중에 가장 빨리 먹는 떡은? (헐레벌떡) 82, 똥은 똥인데 다른 곳으로 튀는 똥은? (불똥) 83, 똥의 성은? (응가) 84, 먹고 살기 위하여 누구나 한가지씩 배워야 하는 술은? (기술) 85, 목수도 고칠 수 없는 집은? (고집) 86, 묵은 묵인데 먹지 못하는 묵은? (침묵) 87, 문은 문인데 닫지 못하는 문은? (소문) 88, 물고기 중에서 가장 학벌이 좋은 물고기는? (고등어) 89, 물은 물인데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물은? (괴물) 90, 물은 물인데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물은? (선물)     91, 바가지는 바가지인데 쓰지 못하는 바가지는? (해골바가지) 92, 바닷가에서는 해도 되는 욕은? (해수욕) 93, 발이 두개 달린 소는? (이발소) 94, 배울 것 다 배워도 여전히 배우라는 말을 듣는 사람은? (배우) 95, 벌레 중 가장 빠른 벌레는? (바퀴벌레(바퀴가 있으니까) 96,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거리는? (걱정거리) 97, 사람이 즐겨 먹는 피는? (커피) 98, 아홉명의 자식을 세자로 줄이면? (아이구) 99, 약은 약인데 아껴 먹어야 하는 약은? (절약) 100, 낭떠러지 나무에 매달려 있는 사람이 싸는 똥은? (떨어질똥 말똥, 죽을똥 쌀똥)    
182    하늘이 주는 세번의 기회... 댓글:  조회:5015  추천:0  2015-02-11
             하늘은 세번 기회를 준다                                   정진명     하늘은 누구에게나 공평합니다. 그래서 인생역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모두 3번 줍니다.    첫번째 기회는 학교 때의 공부능력입니다.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은 자신의 미래를 개척할 좋은 기회를 얻는데,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첫번째 기회입니다. 그 기회를 잘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기회는 결혼입니다. 특히 여자의 경우는 어떤 짝을 만나느냐에 따라 삶이 완전히 뒤바뀌는 수가 많습니다. 그것은 여자의 탓이 아니라 남자의 탓입니다. 여자들은 현실성이 강한 성품이어서 요모조모 따집니다. 모험을 하지 않으려고 하죠. 그래서 남자의 외부 조건을 많이 보는 편입니다.   그러나 남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눈에 든 여자가 있으면 그 여자가 잘 사느냐 못 사느냐 하는 외부 조건은 전혀 따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자에게 인생역전이 더 또렷하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세 번째 기회는 자기 안의 천재성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학창시절에는 공부가 최고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공부 이외의 조건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졸업을 하고 어른이 되면 학창시절에는 전혀 몰랐던 자신의 내면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쪽으로 나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글을 잘 쓰고, 어떤 사람은 맛에 민감하고, 어떤 사람은 패션에 뛰어납니다. 그래서 그 분야에서 신나게 일합니다. 그러면 성공하죠. 이것이 자신의 내면에 잠든 천재성을 깨우는 것이고, 성공하는 길입니다.     세 번째 인생역전은 순전히 자신의 몫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에 달렸습니다. 그러니 학창시절에 공부가 뜻대로 안 된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패배자로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내부에는 하늘이 자신에게만 준 어떤 천재성이 잠자고 있습니다. 그 천재를 건드려 깨우는 것이 여러분에게 남은 마지막 인생역전의 기회입니다.
181    디지털 시대와 시의 전망 댓글:  조회:4966  추천:0  2015-02-11
  디지털 시대 시의 위상과 전망 정진명(시인) 1 한 분야가 몰락을 맞이하는 것에는 내부의 모순과 외부 환경의 변화라는 두 가지 요인이 동시에 작용한다. 어떤 환경의 변화가 들이닥쳤을 때 그런 변화에 재빨리 적응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갖추지 못하면 몰락에 이른다. 그 유연성은 대부분 그 분야의 흐름을 좌우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을 지도층이라고 하는 것이다. 문학이라고 해서 이 법칙의 예외일 수는 없다. 언제부터인가 문학의 위기를 논하는 일이 낯익은 일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런 담론이 무르익기도 전에 시의 몰락은 코앞에 닥쳤다. 그리고 점점 더 속도를 내고 있다. 이런 상황으로 변한 데는 앞서 지적한 두 가지 요인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그 두 가지 여건이란 문학계 내부의 경직성과 그러한 경직성을 악재로 만든 디지털 시대의 도래를 말한다. 문학계 내부의 경직성은 문학 스스로 택한 것이라는 점에서 더 이상 논할 가치가 없다. 어떤 분야의 몰락은 외부의 힘이 아무리 강고하더라도 내부의 호응이 있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부의 문제는 내부의 논의로 두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의 도래 문제는 다르다. 그건 엄연히 외부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눈을 잡아끈다. 그리고 이 문제는 한 10여년 전부터 꾸준히 문학인들의 말밥에 오르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워낙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대처는 무력하기까지 하다. 진단이 아무리 정확해도 치유할 수 없는 병이 있듯이, 사태를 정확히 파악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바로 이런 문화의 변혁기에 등장하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등장이다. 현실의 문제를 접근하는 방법은 대체로 두 가지이다. 그 문제를 패러다임의 교체로 보고 그에 걸맞은 세계관과 이론으로 무장하여 새로운 흐름의 방향을 논하는 방법과, 현실 속의 변화를 감지하여 새로운 전망을 찾는 방법이 그것이다. 물론 거시와 미시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이 두 가지가 잘 조화를 이루면 그보다 더 완벽한 대책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쉽사리 일어나기 어려운 것이, 디지털 시대의 도래란 문학에게는 처음 겪는 전대미문의 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디지털 시대의 도래와 그로 인한 문학의 위기에 대한 담론은 학자나 교수들 중심으로 이루어져 현실 속의 변화를 포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변화의 핵은 그것을 바라보는 이론이나 관념이 아니라 현실 속에 숨어있는 법이다. 현실은 관념으로 대체할 수 없고, 오직 현실 속에서만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현실 속의 변화를 논하는 것은 기준도 없고 방법도 없어서 실제로 논의하기는 아주 어려운 일이다. 맨땅에 헤딩하기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수수방관할 수만도 없는 일이다. 그것은 문명의 변화가 우리의 현실을 얼마나 바꾸어놓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어림짐작이라도 있어야만 그 후의 변화를 뜬구름 잡기 식으로라도 헤아려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몸부림마저 없다면 몰락은 그대로 현실이 된다. 이 글에서는 뜬구름 잡기가 되더라도 내가 겪은 디지털 시대의 양상을 정리하여 새로운 담론의 한 재료로 삼고자 한다.   2 나는 현직 교사이다. 2005년 현재 충청북도의 한 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친다. 나는 1979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1985년에 충북대 사범대에 입학했으며, 1989년에 졸업하여 8월에 첫 발령을 받았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선생님들은 시험문제를 ‘가리방’이라는 방식으로 출제했다. 가리방이란 기름이 묻지 않는 바탕 종이에 송곳처럼 날카로운 펜으로 글씨를 써서 수동식 인쇄기에 붙인 다음, 잉크를 묻힌 롤러로 밀어 눌러서 찍는 방식이다. 그런데 내가 첫 발령을 받은 1989년에는 일본식 프린터를 들여놓고 원안지를 손으로 써서 넘겨주면 그것을 자동으로 스캔하여 복사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1979년과 1989년은 10년 세월이다. 이 10년 사이에 선생님들 일의 방법이 바뀌고 그 결과 업무량이 크게 줄어든 것이다. 그래서 B4용지에 손으로 쓰건 타자로 찍건 컴퓨터로 찍건 상관없이 시험 문제를 출제해서 행정실로 넘기면 쉽게 프린트가 되어 나온다. 이때의 교무실 환경은 컴퓨터는 없고 타자기가 몇 대 있었다. 손의 힘으로만 치는 타자기가 주종이었고, 내가 발령 받은 1989년에 처음으로 전동타자기가 들어왔다. 그래서 나는 전동타자기로 시험을 출제했다. 대학 때 손으로 노트에 썼던 시를 타자기로 옮긴 것도 그때였다. 육필 원고를 기계로 찍어놓으니, 어쩐지 시가 더 잘 써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것도 그 무렵이다. 활자의 마술이다. 1992년이 되자 교무실에 일대 혁신이 일기 시작했다. 다른 도는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충청북도 교육청에서는 교수 방법과 교육환경을 크게 개선하기 위한 방법으로 시청각 기기를 학교에 엄청난 양으로 공급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에 나는 제천상고에 있었다. 제천상고는 실업계이기 때문에 컴퓨터가 다른 학교에 견주면 일찍 들어와 있었다. 정보과가 두 학급 있었고, 이 학생들이 실습을 할 수 있도록 386 컴퓨터가 30대 가량 전산실에 들어와 있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486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축제 때가 되면 포토샵 같은 프로그램을 열어놓고 그것에서 사진 보정작업을 하는 것을 본보기로 보여주고는 했다. 몇 년 뒤에 상고에서도 사라진 주판을 퉁겨서 계산하는 법을 수업하던 때의 일이다. 1993년에 인문계인 단양고등학교로 옮겼다. 실업계와는 달라서 인문계 고등학교인 이곳에는 상업과 한 학급이 개설되었는데, 그 학생들을 위해서 많은 타자기와 286컴퓨터 10대 가량이 있었다. 286은 속도가 늦는 데다가 날이 덥거나 추우면 컴퓨터가 작동이 안 되는 일도 많아서 담당 선생님이 한 겨울에 난로도 켜놓고 한 여름에 에어컨도 켜야 하는 고충을 안던 시절의 일이다. 그러다가 한 해가 지난 1993년도부터 연차로 교수학습 매체가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행정실에 컴퓨터가 한 대 교무실에 두 대가 놓여 공동으로 쓰던 386 컴퓨터를 밀어내고 날로 486을 거쳐 팬티엄 급까지 불과 몇 년 사이에 컴퓨터가 보급되었다. 실물화상기와 대형 텔레비전이 학 학급 교실마다 보급된 것은 몇 년 뒤이다. 그리고 2000년을 기점으로 전 교사에게 개인 컴퓨터가 보급되었고, 전산실도 어마어마한 규모로 확대되어 학생들도 언제든지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불과 10년 사이에 세상은 온통 컴퓨터 천지로 바뀌고 디지털 체계가 된 것이다. 2000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컴퓨터는 국가 전체를 움직이는 동력이 되었다. 모든 행정 업무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다 이루어지며 국가 공무원들 전체가 컴퓨터로 전자결제를 하고, 마침내 세계 최초, 최대로 전자정부를 실현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것은 교직에 몸담은 한 개인이 바라보고 겪은 것이다.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10년 전의 나를 돌이켜보면 이런 변화의 물결에 근근이 올라타서 그나마 처지지 않고 따라가는 것은, 나의 능력이나 여건이 아니라 나를 담은 교직 사회의 몫이라고 본다. 실제로 개인 사업을 하거나 다른 분야에서 근무하는 내 친구들을 만나보면 이런 변화의 물결에서 한 발 비켜나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만큼 정부 주도의 영향이 강한 결과라고 보는 것이다. 물론 개인 기업이나 컴퓨터 업계의 변화는 정부의 이 같은 변화보다는 한 발 빨랐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것은 기업의 생리에서 오는 것이다. 이런 변화를 대중화시켜 개인의 삶을 변화시키고, 그것을 사회 전체의 흐름으로 만든 것은 정부 주도의 정책이었다. 그리고 평범한 삶을 운영하는 우리 집의 변화를 보더라도 컴퓨터를 사는 일이나 컴퓨터를 운용하는 속도는 언제나 학교의 뒤를 따라갔고, 현재도 그렇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정부가 가정을 앞질러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3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가 문학과는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당연하게도 문학의 앞날과 연관된다. 문학의 앞날이란 현재의 시인들과 독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장래의 독자와 시인들이 처할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디지털 시대의 담론은 이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디지털은 이미지로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을 말한다. 그것도 시각이미지가 주를 이룬다. 앞으로 올 세대는 이미지로 세상을 읽고 사유하고 살기 때문에 이런 행태는 시의 독자에게 직접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우리의 현대시는 모더니즘이라는 이름 아래 계속 시각 이미지를 강조해왔다. 물론 시각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이 곧 모더니즘인 것은 아니지만, 이미지즘의 출현 이래 이미지는 시의 본류라 할 만큼 우리 시에 큰 영향을 미쳐왔다. 이렇게 된 데는 시각 이미지의 유용성이 크게 작용했다. 보통의 문장이나 말은 의미전달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그래서 이런 전통을 이은 시에서는 가락이 중요하다. 그러나 시의 기법과 의미전달 방식이 시각 이미지로 건너가면 시의 부분부분에서 주제가 감지되는 것이 아니라 시 전체를 읽은 다음에 한꺼번에 한 영상으로 다가오면서 이해된다. 바로 이 점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그런 극대화를 통해서 카타르시스에 가까운 감정이 한꺼번에 몰려들도록 시에 장치를 해놓았다. 이른바 ‘객관적 상관물’이 강조되고, 실제로 그것을 잘 활용한 시인들이 좋은 평가를 받곤 했다. 그리하여 이런 이미지즘 기법이 이끄는 시의 흐름이 모더니즘의 전방에 배치되었다. 물론 이것은 그 전에 내려온 시의 전통을 벗어나 새로운 전통을 수립하려는 의지 내지는 욕망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10년 전부터 변수가 등장했다. 바로 디지털 시대의 도래이다. 디지털은 이미지로 말하는 세상이다. 그런데 시의 이미지보다 훨씬 더 분명하고 강한 자극을 주며 생각의 굴절을 거치지 않고 직접 몸으로 와 닿는다는 특징이 있다. 이런 경향은 시의 존재에 가장 큰 위험이 된다. 결국 이미지 대결에서 시는 퇴장을 당할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더군다나 같은 자판을 이용하면서도 이모티콘이나 문자 도안으로 놀라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신세대의 발랄한 상상력을 보면 시가 지닌 둔중한 이미지는 수영선수의 발에 달린 모래주머니가 연상될 지경이다. 이 속도와 발랄함은 핸드폰에 와서 절정을 보여준다. 물론 시의 이미지와 디지털의 이미지는 분명히 다르다. 그러나 그런 차이점을 구별하면서까지 시에 대해 자비를 베풀어줄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시의 이미지와 디지털 이미지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이미지즘의 기법이 모더니즘의 첨단에 서 있는 한 이는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모더니즘이 부정했던 옛날의 시 전통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다. 폼잡고 도달한 곳에는 시의 본 영역이 사라지고,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는 곳에 시는 와있다. 이것이 이미지를 보약으로 택했다가 진퇴양난에 빠진 근대시의 현주소이다. 따라서 앞으로 시가 차지하는 위치는 디지털과는 다른 이미지의 영역인데, 그런 영역을 확보하기란 쉽지 않다. 미래의 독자는 디지털의 이미지로 시를 오독하기 쉽다. 그리고 그런 오독도 시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이 있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최소한의 애정이 시의 이미지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어떤 장치를 만들고 기회를 여는 것이 시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 희망이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기회가 시의 특성을 강제로 배우는 학창시절이다. 현직에서 중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치고, 그 중에서 시 창작을 지도하면서 느끼는 것은, ‘절망 속의 희망 찾기’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절망이라는 것은 디지털 시대의 도래라는 시대문명의 대세와 공교육 체계 안에서 시 교육이 갖는 두 가지 문제점이고, 희망이라는 것은 그런 절망 속에서도 방법에 따라서는 일말의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 창작이 아닌, 시 비평을 가르치는 학교의 현실은 이런 가능성에 대한 기대마저 물거품으로 만들고 만다. 학교 현장의 시 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지적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을 살피는 것은 따로 새로운 장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구태의연한 문제가 디지털 시대의 도래라는 또 다른 거대한 악재와 겹치면서 생기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영상 매체 때문에 그러잖아도 어려운 시는 소외되기 마련이다. 이 소외를 안에서 부채질하는 것이 학교 현장의 시 교육이다. 실제로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쳐보면 굉장히 어려워한다. 그 어려움은 우리 세대가 자라면서 느끼는 것하고는 또 다른 영역에 닿아있다. 즉 지금의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텔레비전을 보고, 초등학교에 입학 전에는 게임에 빠져들다가 학교에 갈 때쯤 되면 벌써 컴퓨터의 세계로 빠져든다. 텔레비전, 게임, 컴퓨터의 공통점은 가상세계를 그림으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생각할 겨를이 없다. 눈을 통해서 직접 가슴까지 연결되는 체계이다. 이들이 사춘기를 겪고 사회에 진출할 때까지 영상 이미지가 만든 세계는 이들의 현실이 된다. 이러한 매체에 익숙한 아이들에게 언어의 세계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더구나 학년이 올라갈수록 책상 앞에 붙잡아 두는 교육 현실은 이러한 디지털의 영향을 더욱 강화시킨다. 아이들이 접할 수 있는 현실의 조건마저도 학교 교육은 제거해버렸다. 시를 지도하려면 ‘이미지’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지가 현대시의 아주 중요한,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도구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이 이미지라는 말과 개념을 너무 어려워한다. ‘언어가 머릿속에 그려놓은 그림’이라고 설명을 해주어도 어려워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들에게 이미지란 화면에서 그대로 가슴에 와 닿는 ‘직접전달물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언어라는 매개과정을 거치는 연상물이 이들의 욕구를 만족시켜줄 리 만무하다. 게다가 시의 이미지는 개인마다 다 다르다. 그러나 게임이나 인터넷의 세계에서 만나는 이미지는 한 치 오차 없이 정확하다. 그리고 정교하다. 섹스 장면이나 전투 게임 장면에서 의심 가는 부분은 전혀 없다. 그대로 완전히 노출된다. 상상력이 개입할 틈을 준다는 사실 자체를 이들은 불편해하고 두려워한다. 시를 가르칠 때 이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이 이 부분이다. 이렇게 보면 이미 언어라는 매개체는 이들에게는 불편한 구식장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광선검의 시대에 낫이나 호미를 들고 날뛰는 격이다. 이 세대는 자라면서 계속 사회의 관심을 받아왔다. 한 10여 년 전에 학교의 현장을 개탄하면서 ‘교실 붕괴’라는 말을 낳은 세대가 이들 첫 세대이다. 그리고 이들이 자라면서 계속 사회의 근간을 흔들었다. 대학에 가기보다는 컴퓨터 게이머를 꿈꾸면서 부모들과 극한 대립을 벌이더니, 이제는 군대에 가서 자신의 소대원을 향해 총을 갈기고 수류탄을 까 던지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2005년 현재 이들은 20초반에서 중반으로 막 넘어가는 그런 세대들이다. 이들을 욕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문화 환경이 그 이전의 세대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며, 나아가 이런 아이들을 상대로 언어라는 것을 도구로 사용하도록 가르쳐야 하는, 이미 한물 간 세대의 현실을 짚고자 하는 것이다. 이들 세대의 언어는 글이 아니다. 이미지이다. 바로 이 점을 시는 직시해야 한다. 이 점 때문에 문학은 존재의 큰 전환기에 와있다는 것이며, 마침내 머지않아 몰락에 이를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벌써 문학의 가을은 왔다. 이제 겨울이 코앞에 닥친 것이다. 텅 빈 객석을 바라보며 노래를 해야 하는 것이 시인의 운명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일 아침 당장에 문을 닫지는 않을 것이다. 문화란 흐름이어서 본류가 있고 지류가 있다. 지금까지 언어가 본류였다면 이제부터는 영상이미지가 본류이고, 언어는 지류로 전락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지류의 물줄기가 얼마나 굵고 가느냐 하는 문제일 것이다. 결국 디지털 시대에 시를 논한다는 것은 정도의 문제에 관한 것이고, 그 정도는 미래를 맞는 시인들의 태도에 달린 것이다. 말하자면 지류라고 하더라도 흔적조차 없는 그런 것이 되지 않고 본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 되려면 문학 내부의 체질 개선이 급선무라는 것이다. 이때 체질 개선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당연히 대중화의 문제일 것이다. 대중화는 결국 독자 확보의 문제이다. 이것은 시가, 문학이 여태까지 이어져온 관성을 바탕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이끄는 활력을 지녀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두 가지 방향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제도를 통한 체질개선과 디지털 시대의 틈새시장을 노리는 방향이 그것이다.   4 제도를 통한 체질 개선은 수천 년의 전통을 지닌 언어의 활용 방법을 강제하는 것이다. 우선 떠오르는 것은 학교 교육을 통해서 문학의 사유에 익숙할 수 있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 학교에서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의 효율성과 방법론에 대한 논의는 다른 장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다만 여기서 강조할 것은, 지금처럼 입시 위주로 강제하는 방식이 아니라 학생들이 문학을 스스로 즐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려면 삶을 바라보는 틀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당연히 이것은 단순히 문학의 문제가 아니라 삶과 사회, 나아가 국가 전체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일로 연계되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한두 마디로 잘라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학교 교육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시에서 쓰이는 이미지를 정확히 알려주는 일이다. 그것은 디지털 이미지와는 또 다른 기능이 시의 이미지에 숨어있어 그것이 세계를 이해하는 아주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과, 바로 그런 점을 기반으로 하여 시의 맛과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시는 분명 신세대에게 쓴 약이지만, 먹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 학창시절이다. 이 시절의 쓴 약을 통해서 시의 이미지를 배우지 못 하거나 잘못 배우면 시는 이들로부터 영영 멀어지고 이것은 시의 몰락을 확정하는 일이 된다. 시의 1차 생존 가능성은 학창시절에 있다. 그리고 이 1차 기회는, 틀림없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이다. 또 한 가지는 자꾸 위축되는 문예의 전통을 기관의 힘에 기대서 장려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국가의 시책에 문예가 중요한 정책으로 책정되는 것을 뜻하고 그것은 동시에 정치권으로 넘어가는 문제임을 지적하는 것으로 논의를 미룬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부의 문제, 즉 당사자인 문인들의 체질을 바꾸는 것이다. 사회는 어차피 덩어리로 뭉칠 수밖에 없다. 경계선을 그어놓고 그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것이 모든 사회의 공통점이다. 그러나 그 선이 어디까지냐 하는 것은 의외로 중요한 것일 수 있다. 자칫하면 선이 아니라 성을 쌓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문단은 틀림없이 선이 아니라 성을 쌓아놓았다. 선은 한 발이면 넘나들 수 있지만 성은 문이 아니면 드나들 수 없게 된다. 문에는 당연히 사천왕 같은 문지기들이 지키고 서서 아무도 허가해준 적 없는 통행료를 받는다. 그런 쾌감을 즐기는 동안 스스로 폐쇄된 채 바깥 환경에 대응력을 상실하고 안에서 썩어가다가 고목처럼 쓰러진다. 현재의 시 추천 제도를 비롯한 문예지 중심의 흐름은 이러한 모습의 전형이다. 문예지와 학벌을 중심으로 끼리끼리 뭉쳐서 코딱지만한 이익을 노리는 집단들이 존재하는 한 시의 몰락은 가속도를 탄다. 이게 철부지들의 장난이라면 크게 상관없는 일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결과는 의외로 참담할 수 있다. 당장의 꿀맛이 좋은 자들 때문에 전체의 몰락에 이르는 법칙이 문학만을 예외로 비켜갈 리 없다. 이런 구태의연한 발상을 버리지 않으면 시는 살아남기 어렵다. 스스로 숨통을 조이는 행동을 멈추는 것만이 새로운 전기를 맞는 지름길이다. 그리고 문단의 책임 있는 자들부터 이 사실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디지털 시대의 틈새시장이란 디지털 문화가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을 말한다. 디지털 시대는 영상으로 존재하고 시공을 초월한다. 접속지점은 은밀한 공간이지만, 그 움직임과 양상은 다국적 기업의 생태를 닮았다. 전 세계를 순식간에 넘나들며 엄청난 양의 정보를 공유한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으로 그 정보를 재구성하여 독특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그리하여 실재하지 않는 곳에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고, 경향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가상공간에서 공존한다. 이들이 현실 밖으로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주 예외로 ‘붉은 악마’ 같은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특수한 경우이다. 그리고 설령 그것이 현실 속으로 나온다고 해도 그들이 갖는 유대는 오늘날의 인간관계처럼 끈적할 리가 없다. 그러니 이런 존재형태가 갖는 맹점 또한 지극히 자명하다. 사람은 사회 속에 살 수밖에 없고, 그것은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지 못하면 자신의 존재 또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디지털 세계의 소통방식 또한 이러한 내용을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디지털 시대가 만든 가상공간의 세계 또한 현실세계로 이어지는 부분이 존재할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가상공간이 아무리 실감나더라도 그것은 그 역방향의 반대급부를 전제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디지털 문화가 놓치기 쉬운, 놓칠 수밖에 없는, 반대의 현실세계이다. 그 반대란 실재하는 현실세계의 자각화 운동과 소규모 문화운동이다. 문학에 국한시켜 보면 이것은 지역별 문학 모임의 활성화가 가장 중요한 대안이 될 것이다. 어느 사회든지 그 구성의 형태는 피라미드형이 가장 안정되고 오래 간다. 그런데 디지털 시대의 도래는 이런 틀을 바꾸어버렸다. 세월이 흐르면서 새로운 세대가 피라미드의 아랫부분을 저절로 채워야만 그 꼭대기까지도 안정되는 법이다. 그러나 새로 유입되는 층이 없으면 이 피라미드 구조는 저절로 다이아몬드 구조로 바뀐다. 그리고 앞서 보았듯이 10년 전부터 갑자기 문학의 지형이 바뀌면서 현재 문학계는 다이아몬드 구조로 바뀌었다. 신세대는 문학에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런 까닭에 피라미드의 아랫부분을 채울 수 없다. 그런데도 문예지는 근대 문학사 이후 가장 왕성하게 불어났고, 시인 역시 엄청나게 불어나서 아파트 동마다 시인 한둘이 산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왕성해진 문학 판의 변화를 주변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문학의 중앙집권화와 맞물려있다. 문학은 자생력을 갖추지 않으면 말 그대로 사상누각이다. 자생력이란 사람들 스스로 즐기는, 그래서 그 즐거움을 바탕으로 생활 속의 시를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시 풍토는 추천제도와 문예지의 생존 방식에 긴밀히 맞물려있다. 시를 써서 누군가의 칭찬을 받고 싶어 하고 시 쓰는 능력을 추천제도와 문예지 지면 차지하기로 드러내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런 욕구 본능을 잘 자극시켜서 문예지는 자신들의 생존을 꾀한다. 이런 중앙 집권화가 가속화될수록 주변의 지역 문예는 생기를 잃기 마련이다. 중앙을 향해 목을 길게 늘이고 있다가 연이 닿으면 중앙의 문예지로 달려가서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문예풍토와는 전혀 상관없는 시인이 돼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대안 또한 간단하다. 중앙으로 달려가는 관행을 버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문화에 자신의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다. 중앙에 대한 환상을 버리는 것,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역 문예의 활동으로 나타날 것이고,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시 낭송회, 시화전, 사화집 발간 같은 형태의 문예운동으로 구체화된다. 그리고 이것은 직접 사람을 부딪치면서 해야 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가상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디지털 문화에는 없는, 디지털 시대의 사람들이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앞의 방법이 문학이 위기에 처할수록 문학다운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는 방법이라면 오히려 디지털 문명의 이기를 문학에 활용하는 방법이 있다. 가장 손쉬운 것은 인터넷 매체를 이용하여 문학의 확대를 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은 현재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고 본다. 즉, 시 전문 카페나 사이트를 운영하여 시의 대중화를 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우리의 주변으로 아주 가까이 와있다. 나 같은 인터넷 동호인 모임을 보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인터넷 문화는 문학에도 호재가 될 수 있다. 문예지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작품의 소통 체계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이것은 작품과 책의 구매력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그런 매력을 주지 못한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그러나 인터넷 체계는 즉각 세계 어느 곳이든 접속된다. 따라서 시 역시 이러한 환경을 이용하여 독자에게 얼마든지 쉽게 다가갈 수 있다. 다만 전문성의 결여로 인한 질의 저하라는 문제점이 있지만, 그것은 인터넷의 본질이기보다는 운영 방식의 한계일 따름이다. 오히려 인터넷은 지나친 중앙집권화로 말기 암 환자의 상태에 이른 현재의 문단 행태를 교정하는 아주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   5 디지털 시대를 맞이하여 문학의 생존이 위협 당하는 까닭은 거기에 일정한 비용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그에 반해 인터넷 소통 과정에서는 부대비용이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 독자의 구매력을 전제로 하고 있는 문예지 중심의 작품 소통 방식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기존의 방식에 의존할 경우, 틀림없이 시인은 이 구태의연한 방식이 갖는 재정의 압박을 느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문학의 생존 문제는 결국 재정의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맥을 대고 있다.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하여 시인들이 취하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이다. 팔리는 장사가 가능한 출판사에 의존하여 무료로 출판하는 것이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정부기관을 비롯하여 각종 단체에서 지원하는 지원금(예를 들면 문예진흥기금)을 받아서 출판하는 경우이고, 세 번째는 자비로 내는 경우이다. 그러나 현저히 감소하는 독자들이 문화의 관심도를 결정하고, 관심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상황에 이르면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경우 역시 점차 쇠락을 길을 걸을 것은 불 보듯 훤한 일이다. 따라서 시간이 흐르면 결국 세 번째인 경우만이 남게 될 것이다. 결국 시인 자신이 작품을 발표하는 창구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리고 설령 이렇게 한다고 해도 그것을 독자들이 읽도록 하는 일이 남는데 이 역시 결국 시를 쓰는 당사자들의 몫으로 남고 만다. 이제 시는 존재의 유형 면에서 최악의 국면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결코 원하지 않는 바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러 가지 여건으로 인하여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 다다랐다. 어떤 상황이 최악에 이르면 대개 최선의 방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파멸을 겨우 면하는 최악의 방법이 최선의 방법이 되고 만다. 이 상황에서 최선의 방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시인들이 구매력에 의존하는 문학의 존재 방식에 대한 환상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생존의 조건을 스스로 만드는 방법이다. 그 과정에 따르는 재정의 압박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다. 그것만이 피라미드의 바닥을 확장하고 건전한 생존을 오래 지속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 이에 대한 대책은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본다면, 동인 활동을 활성화하되 거기에 두레의 방식을 적용하는 것이다. 동인 형태는 중앙집권화에 대한 거의 유일한 대안이다. 그리고 소규모라고 해도 스스로 독자를 확보하고 독자와 교류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식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은 구매력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동인들 스스로 분담해야 한다. 대개 지역을 근거로 해서 결성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경우 특정 지역에 일정한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국제성으로 대변되는 인터넷 문명에 대해 국지성이라는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당연히 이 국지성은 국제성을 담보하는 값진 조건이다. 두레의 방식이란 시인들 간의 상부상조를 말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촌지 문화가 아주 발달했다. 그것은 옛날의 농경 사회에서 품앗이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사정 때문에 생긴 것인데, 이 꼬리를 잘라버리지 못하고 도시 문명사회에서도 인간관계를 규정하는 잣대 노릇을 하고 있다. 그래서 문인들의 애경사가 있으면 돈 봉투를 들고 찾아다니는 것이 흔한 일이 돼 버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촌지 풍속이 작품집 발행에는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특이한 일이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한 시인이 시집을 내면 그 주변의 시인들은 그 시집을 공짜로 받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여긴다. 그리고 자신이 시집을 낼 때에도 역시 공짜로 돌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이런 습관은 결국 구매력이 발생하지 않는 조건에서는 시인의 부담으로 남는다. 그리고 재정이 열악한 조건이라면 시집을 내기 어렵다는 말이 된다. 만약에 팔리지 않을 시집은 낼 필요가 없다는 어이없는 발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시의 대중화와 생존 문제는 아예 꺼낼 필요도 없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촌지문화를 시집 발간의 경우에도 적용하는 것이다. 한 시인이 시집을 내면 어떤 시인의 아들 결혼식에 돈 몇 만원을 넣어서 촌지를 주듯이 시집을 내면 그 시인에게 일정 액수의 촌지를 건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시집을 내는 당사자는 재정에 대한 부담이 없이 독자의 구매력을 얼마간 미리 확보하는 것이다. 이보다 더 큰 다행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동인간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이것은 저절로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누군가 나서서 이런 일을 주선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동인 활동이 중요한 것이고, 생존의 희망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매년 이라는 사화집을 내는 ‘시문관’ 동인의 경우, 회원이 13명이다. 회원 중에서 시집을 내면 모임을 운영을 맡은 ‘일꾼’이 1인 당 5만원씩 갹출을 하여 당사자에게 전달한다. 본인을 빼고 12명이면 60만원이다. 물론 많은 액수는 아니지만, 이 돈이 당사자에게 주는 것은 엄청난 격려와 희망이다. 발행 비용부터 발송비용까지 모두 시인이 떠 안아야 하는 현실에서 주변 사람들의 이런 도움은 단순히 돈의 액수로 그치지 않는다. 동인이란 그런 희망을 주는 관계이어야 한다. 현재 시집 한 권에 드는 발행 비용은 200만원 정도이다. 만약에 회원이 20명이면 한 번 시집 출간에 100만원이 충당되는 셈이다. 회원이 40명이면 공짜로 낼 수 있다는 결론이다. 이런 식이라면 시집 출간도 누구나 한 번 해 볼 만한 일이 될 수 있다. 사정이 이렇다면 문학의 위기가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넋 놓고 앉았기에 위기인 것이지, 행동하는 자에게 위기는 그냥 말일뿐이다. 문학판의 동인 모임은 너무 많아도 너무 적어도 문제이다. 대략 2-30명 선이면 적당하다. 이런 모임이 두레의 성격을 활용하여 문학의 생존을 도모한다면 디지털 문명이 아무리 높고 크게 밀려와도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본다. 또 한 가지는 시집을 받아보는 사람들의 태도이다. 하도 많은 시집이 나오다 보니 좀 유명세를 탄 사람은 도착하는 시집을 다 읽어주기도 벅찰 지경이라고 한다. 그러니 그 이상의 기대를 그에게 거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겠지만, 사람이 책을 선물로 받으면 그에 대한 보답을 하는 것이 당연지사이다. 그것이 자신을 기억하고 책을 건네준 사람에 대한 예의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시인이 보내준 시집을 몇 권 사서 주변의 문학도나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는 것이다. 한 시인이 나에게 선물을 했는데 그걸 받아서 읽고는 다섯 권을 사서 돌렸고, 그런 사람이 50명이라면 250권이, 100명이라면 500권이 간단히 소비되는 셈이다. 사서 돌리는 사람은 비용이 발생하겠지만, 그것이 문학의 저변을 확대하고 잠재 독자를 확보하는 일이 되며 나아가 문학의 생존을 좌우하는 일이 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 자신을 포함해서 내 주변에서 그렇게 한다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조차도 듣지 못했다. 그러나 한 번 해볼 만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확실하게 보장하는 방법은 앞서 말한, 두레의 성격을 동인에 접목시키는 것이다. 시인이 시집을 사지 않는다면 독자 역시 시집을 사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시의 몰락으로 연결된다. 그 고리를 푸는 사람은 독자가 아니라, 시인 자신이다. 또 동인 조직이 잘 운영되면 보급 문제 역시 걱정할 필요가 없다. 동인들의 손을 통해서 각 지역의 독자들에게 배포되기 때문이다. 의 경우, 2004년에 낸 제1집은, 충북지역에 150권, 충남 부산지역에 각각 30권, 대구 지역에 50권, 서울 경기 지역에 80권이 배포되었고, 인터넷 동호회로 70권, 우편으로 200부가 배포되었다. 그리고 제2집의 경우에는 회원이 전국 단위로 확대되면서 부산 100권, 대구 100권, 서울 경기 180권, 충북 150권, 대전 충남 50권, 인터넷 동호회 100권, 우편으로 200권 정도 배포되었다. 이 정도면 웬만한 문예지보다 훨씬 더 안정된 보급로를 확보한 셈이다. 그리고 이 책들은 중앙의 권력집단보다는 일반 독자에게 더 많이 보급되는 까닭에 시의 대중화라는 목적에도 훨씬 더 부합된다. 결국 디지털 시대에 시가 살아남으려면 발행부터 보급까지 시인 스스로 발 벗고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혼자가 아니라 두레로 묶인 동인 활동이 가장 큰 희망이 될 수 있다.   6 인터넷 시대에 문학의 존재 방식과 근거는 가상공간을 떠도는 영혼들에게 현실의 감각을 일깨우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동일한 방식으로 수천 년 동안 존재해온 시라는 양식을 통해 시공을 초월한 영혼의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점과, 그것은 디지털 방식과는 또 다른 방식이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질을 높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새로운 세대에게 일깨워주는 것이다. 그러자면 가장 급한 것이 우리 삶의 주변에서 언제든지 부딪치고 만날 수 있는 것으로 시의 위상을 바꾸어야 한다. 아파트 단지 안에서 시화전이 이루어져야 하고, 사람들이 만나는 장소에서 시 낭송회가 열려야 하며, 자신의 시를 어렵지 않게 활자화시킬 수 있는 합동시집이나 사화집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경로와 작업이 우리 삶의 주변에서 손쉽고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주변의 사람들이 그런 풍속에 익숙해질 때 시의 대중화는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디지털 시대에 문학이 살아남는 거의 유일한 비결일 것이다. 결국 아마튜어리즘의 부활이 전제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1980년대를 주름잡았던 씨름이 프로팀 운영에만 전념하다가 마침내 몰락을 맞이했듯이, 문학 또한 아마튜어리즘을 전제로 하지 않은 프로란 공염불이다. 문학의 체질을 근본부터 뜯어고치는 이 같은 일이 이루어지려면 문학을 이끄는 집단이 중앙집권화 된 형태의 질서를 스스로 헐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고질병이 된 학연과 지연, 그것도 아니면 문예지 중심으로 뭉쳐서 신라시대에나 있을 성골과 진골 그룹을 형성하여 그 특권을 바탕으로 권력과 이익을 꾀하는 유치한 발상을 버리지 않으면 문학사회 전체의 몰락은 머지않아 현실로 들이닥칠 것이다. 자신들의 둘레 밖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거대한 성을 쌓아놓고 주인행세를 하는 것은 그 바깥에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 보고 부러워 할 때에나 의미 있는 일이다. 이제는 보아줄 사람도 없는 시대가 왔다. 이끼 낀 중세의 성에서 관객도 없이 끼리끼리 꾸는 헛된 꿈을 이제는 버려야 할 때이다. 어리석은 지도자들이 공동의 몰락을 예방하려는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을 때, 이런 일그러진 구조를 바꾸는 방법으로는 인터넷 매체의 장점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대안이다. 거꾸로 선 피라미드는 곧 쓰러지기 마련이다. 피라미드가 정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도 뒤집힌 피라미드는 쓰러져야 하며, 그 방법과 대안은 인터넷이다. 각 지역에 구축된 문학인들을 하나로 엮어서 권력화 되지 않으면서 문학의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그리고 제도화를 통해서 강제하는 방법 역시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이 부분은 이곳에서 다룰 수 없는 부분이다. 이것은 국가 행정과 연관된 부분이기 때문에 따로 장을 마련하여 당사자들의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디지털 매체로 인하여 시의 위기는 현실이 되었다. 그 현실을 문학에서 얼마나 더 늦추느냐 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은 숙제이며, 속도를 늦춘 후에 어떻게 생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그 다음의 과제이다. 이 숙제를 풀 자들은 신세대가 아니다. 이빨 썩은 내 나는 문학권력을 틀어쥐고 그 쾌감을 즐기는 자들과 그들 주변에서 그들을 멍청히 바라보는 시인들과 이 시대 최후의 독자들이다. 100년 후 시는 과연 박물관이 아닌 현실 속에 살아있을 것인가? 그에 대한 확답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붓을 놓는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4338. 10. 28.)  
180    90년대 이후 시흐름... 댓글:  조회:5087  추천:0  2015-02-11
 1990년대 이후의 한국 시                                                                                                                                                                 정진명 1 예술은 인식과 형상으로 이루어진 약속체계이다. 문학과 시 역시 이 점에서는 예외일 수 없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부레와도 같아서 한쪽을 누르면 한쪽이 커지고, 다른 쪽을 누르면 반대쪽이 커지는 법이다. 그래서 이 무게가 어느 쪽으로 쏠리느냐에 따라서 사실주의와 현대주의의 논쟁이 불붙기도 하고, 또 길게는 문예사조의 흐름을 결정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그런데 새로운 변화가 어느 쪽에서 촉발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논의의 성격 때문에 인식과 형상이라는 개념으로 갈라서 보지만, 사실 이 두 가지 요인은 따로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 이 때문에 구조라는 틀로 형식과 내용의 상충성을 극복하려는 꾀를 발휘해보기도 하지만, 상대성의 가치체계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그 어떤 것도 없기에, 문제는 늘 그 자리를 맴돈다. 맴도는 그 자리를 치고 들어오는 것이 시대의 상황이다. 모든 예술행위가 자신의 완고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듯하면서도 언제나 시대의 문제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그래서 문제가 늘 어렵고 복잡하게 꼬인다.  형상은 늘 고정성을 수반한다. 그런 반면에 인식은 제 자리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곳을 향해서 더듬이를 뻗는다. 만약에 이미 찾아서 안주한 형상에 더 이상 안주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면 인식은 새로운 형상을 낳기 위해 마치 매미처럼 껍질 벗기를 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을 대부분 시대가 제공하며 그런 자극에 따라 문학은 뜻하지 않은 방향에서 새로운 모색을 한다. 그리고 그 모색이 유달리 격렬한 시대가 있기 마련이고, 그런 상황은 틀림없이 문학 내부의 문제라기보다는 외부에서 가해진 충격에 따라 전개된다. 그런 전형을 1980년대에서 본다.  따라서 1990년대의 한국 시가 흘러간 방향을 더듬으려면 그 앞 세대인 1980년대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다른 그 어느 때보다도 1990년대 이후의 시는 1980년대의 반동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묘한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최초의'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알려준 수업시간의 가르침대로 최초의 근대시라는 주요한의 '불노리'로부터 셈한다고 해도 100년에서 조금 빠지는, 어떻게 하면 길고 어떻게 하면 짧은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역동성이 가장 넘치는 두 시절을 꼽으라면 가장 먼저 눈길 가는 것이 1920년대와 1980년대일 것이다. 10년 단위로 끊는 버릇으로 끊어본 이 두 시대는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가히 격동이랄 만한 변화가 감지되던 시절이다. 물론 이런 변화는 문학 내부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의 급박한 변화와 충격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었다.  한 갑자인 60년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이 두 시대는 이상하게도 닮은 점이 많다. 경직된 지배체제가 붕괴되면서 역사의 전환점이 된 큰 사건이 일어났다는 점, 그에 따라 기존의 세계관이 몽땅 흔들려 백성들 스스로 새로운 활로를 찾았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많은 부분 실패로 귀결되었다는 점, 그 실패의 체험이 귀중한 문학의 자양분으로 작용했다는 점이 그런 것들이다.  1920년대의 정국은 당연히 1919년의 3.1운동에서 시작되었고, 1980년대는 광주민중항쟁에서 시작되었다. 둘 다 조선 독립과 민주화의 가능성을 한껏 높였다가 일본제국주의의 무자비한 탄압과 미국이 묵인한 군부 쿠데타로 희망이 꺾여버렸다. 이런 사건은 당시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정신의 공황상태에 빠지게 했고, 그 와중에서 올바른 길을 찾는 방법을 두고 격렬한 사상논쟁이 벌어지면서 각기 자신의 원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활로를 찾아 나섰다.  문학에서도 이런 징후는 아주 뚜렷하게 나타난다. 1920년대의 카프와 1980년대의 노동문학은 변혁운동 전반에 돌풍을 일으키면서 당시 사회의 가장 중요한 주제로 떠올랐다. 그리고 문학사에 가장 뜨거운 논쟁을 일으키면서 문학의 새로운 형태를 만드는 창의성을 발휘했다. 이 역동성은 물론 문학 내부의 것이기보다는 당시 사회를 개혁하려는 사상의 움직임에서 파급된 것이다. 문학이 사상과 현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그리고 이런 것은 그 이후의 문학들이 보이는 행태로부터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일제의 탄압을 견디지 못한 카프는 스스로 해산계를 내면서 힘을 상실했고, 사회의 밑바닥에서 활화산처럼 솟구친 변혁운동을 무력화시킨 일본제국주의 세력으로 인하여 1930년대 이후의 문학은 문학 바깥의 흐름을 반영하지 못한 채 문학 내부로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문학으로서는 가장 치욕스런 '조선어말살'이라는 상황에 부닥쳐 대부분의 시인들이 일제의 앞잡이로 변절을 하거나, 극히 일부이기는 하지만 침묵으로 자신을 지키기에 급급한 상황에 이른다. 문학이 스스로 바깥과 교류를 끊고 자기만의 영역으로 퇴화할 때 어떤 결과에 이르는가를 아주 잘 보여주는 일이다. 이때의 변화는 문학 내부의 선택이기보다는 바깥의 거대한 힘에 저항하는 힘을 상실하고 굴복한 경우이다.  겉으로 보면 1980년대의 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아서 미국의 묵인 하에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부도덕한 정권에 대한 극심한 반발이 당시의 문학을 이끈 원동력이었다. 이 원동력은 물론 그 이전부터 꾸준히 이어져온 현실참여 문학의 확대를 뜻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문학의 주류로 바꾸어놓은 공은 당시의 사회의 부조리를 좌시하지 않고 정직하게 현실의 문제로 받아들인 양심 세력이라 할 것이다. 1980년대를 산 문학인은 광주 앞에 모두 죄인이었고, 그 죄를 어떻게 떨어낼 것이냐 하는 것이 의식의 밑바닥에서 꿈틀거렸으며, 그것이 새로운 문학의 동력으로 분출했다. 3.1운동의 좌절로 인하여 당시 백성들이 느낀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후의 상황은 두 시대가 서로 다르다. 1930년대의 문학은 일본제국주의의 강고한 힘 앞에서 굴복한 문인들이 하는 수 없이 받아들인 불가피한 면이 있지만, 1990년대 이후의 문학은 문학 내부의 선택이라는 점이다. 물론 그 강고한 힘을 '변화된 새 문화환경'이라고 강변할 수 있지만, 아무리 그런다고 해도 그것을 1930년대의 상황과 동일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1990년대 이후의 변화는 문학의 위축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1980년대의 왕성한 창조력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지 못한 문학 내부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여기에 작용한 '디지털 시대의 도래'라는 문제는 따로 논의해야 할 주제로 남겨둔다.) 3 문학은 사회의 산물이다. 사람은 사회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게 되며 그것은 문학에서 독자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형식으로 정착한다. 그러나 사회 변화와 관련하여 문학이 현실참여 기능을 스스로 축소하거나 어떤 계기로 하여 위축되면 문학은 자신의 내부로 눈을 돌린다. 1930년대 이후에 문학이 자의든 타의든 사회 변혁에 등을 돌리고 문인들이 농촌소설이나 서구문예사조를 소개하는 것으로 자족하던 흐름은 이런 경향을 분명히 보여준다. 격렬한 사회 변화의 태풍이 쓸고 지나간 뒤에는 문학의 자기성찰이 시작된다는 공식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문학의 도구성에서 예술성으로 새로운 탐색을 떠나는 것이다.  이 점 1990년대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1980년대의 사회 변혁 열풍이 문학을 한 바탕 쓸고 간 뒤, 그러한 행위에 동의하지 못하거나 반대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문학의 자기성찰이라는 해묵은 경향이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서 싹을 틔우는 것이다. 따라서 1990년대 이후 시에 나타난 변화는 두 가지로 요약되는 바, '현실인식의 퇴조'와 '유미주의 경향의 강화'가 그것이다. 유미주의는 언어를 재료로 하는 문학이 자신의 상상력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여 거기에 탐닉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타고나면서부터 무언가 의미를 전달하게 되어있다. 그 의미는 곧 주제이고 관념이고 사상이다. 그런데 작품에는 이런 것을 전달하는 데 필요한 어떤 아름다움이 있다. 그것이 미일진대, 거기에 탐닉하여 언어가 지닌 본래의 기능으로부터 가장 멀리 물러나는 것을 미의 완벽한 형태로 파악하는 것이 유미주의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내용이 부실해진 것을 상상력의 빛깔로 메우려는 애절한 시도이다.  그런데 한 가지 특징은 이런 변화가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 급격하게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불과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노동문학은 한물 간 유행이나 천덕꾸러기로 간주되어 출판하기조차도 힘든 그런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것은 출판사들의 '전향'에서 쉽게 확인된다. 1970년대부터 꾸준히 민중 민족문학 계열의 작품을 내던 '창작과비평사'와 '실천문학사' 같은 회사들이 10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경향의 작품집을 내기 시작하여 그것을 출판사 운영의 주된 사업으로 여기고 있다. 불과 10년 전의 힘찬 기백과 전망은 시집 어디에서도 찾아볼 길이 없다. 그저 옛 시절에 대한 회고나 환멸이 꼬리뼈처럼 남아 '문학사에 한때 그런 일이 있었구나!'하는 정도의 정서를 환기한다.  따라서 1990년대 이후의 문학사는 1980년대로부터 얼마나 멀어지느냐 하는 것에 마치 시의 성과가 있기라도 한 양 사회 변혁의 중심으로부터 잽싸게 멀어지는 발걸음들만 어지럽다. 사회 변혁에 집중했던 문학의 에너지가 그 반작용으로 문학의 내부로 시선을 돌린 것이다. 이 자리에서는 1990년대 이후에 나타난 그런 경향들을 몇 가지로 추려서 정리해본다.  1) 곶감 빼먹기 시가 다루는 내용은 무한정이다. 시는 오래 묵은 한 형식이고 그 형식의 대상은 인간이 바라보는 모든 대상들이면서 또한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인식이 시에서 사라지면 대상은 아주 단순해진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전통은 시가 발생한 이래 꾸준히 이어진 것이기도 하다. 시가 현실을 버리면 남는 것은 내면의 정서이다. 내면의 정서 중에서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것은 절망, 고독, 사랑 같은 것이다.  1990년대가 1980년대의 반동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으로 본다면 이런 경향은 아주 강한 전통을 지니면서 제일 먼저 시의 전면으로 등장할 내용이다. 예상대로 그간의 변화에서 이런 점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현실로부터 한 발 물러서서 자신의 내면에 서린 고독과 절망과 힘겨움 같은 것을 시로 그려낸 시인들이 앞 세대의 거친 현실 인식을 비웃으며 나타난다. 그 대표주자는 나희덕일 것이다.  나희덕은 첫 시집에서 나름대로 현실 인식을 성실하게 다룬 시인이다. 그러다가 두 번째 시집부터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돌변하여 자신의 내면으로 눈을 돌리고 거기서 고독을 찾아내어 좌절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자신의 독자로 확보한 경우이다. 무엇보다도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자신의 상처받은 내면을 잘 드러내었다. 그런 점에서 재주꾼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비슷하게 눈여겨볼 만한 시인은 장석남과 김선우이다. 장석남 시의 주제는 쓸쓸함과 원인 모를 상실감 같은 것이다. 그것을 아주 섬세한 관찰로 주변의 사물에서 읽어내어 깔끔하게 보여주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김선우의 경우는 '엎지르기 시학'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좋을 만큼 감정을 과감하게 노출하여 성공한 경우이다. 그 전까지 서정시의 미덕은 넘치는 정서를 절제하려고 사물에 빗대거나 과장을 자제함으로써 그 자제하려 애쓰는 옆모습에서 고독과 절망과 우울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김선우는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버렸다. 단 한 방울도 남김 없이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이 시인의 기법을 엿보면서 찾아내야 하는 서정시의 전통을 넘어서 시인이 왕창 보여주는 모든 것을 느끼게 만드는 기묘한 과감성이 있다. 기존의 서정시가 슬픔을 감추려는 가운데 독자의 눈물을 짜낸 것이라면 김선우는 대성통곡을 해서 구경꾼을 함께 울린 경우가 되겠다. 이 점은 특별히 새로울 것 없는 주제를 아주 확실하게 보여줌으로 해서 얻은 효과이다.  이런 경향이 갖는 한계는 자명하다. 수천 년 동안 반복해온 내용을 또 다시 반복하는 지루함을 극복할 길이 없다. 잠시 스쳐 가는 유행가 같은 것이어서 거기에 들인 공에 비해 별로 남을 것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재주가 아깝다는 탄식을 듣지 않으려면 그 자리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2)상상력의 자기 만족 앞의 것이 내용에 대한 반동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와 달리 형식에 대한 반동에서 나온 시들이 있다. 이 경우에는 시가 지닌 본래의 상상력의 질서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이라는 거대한 주제가 빠져나간 자리를 상상력의 극대화로 메워보려는 시도이다. 그런 시인 가운데 눈여겨볼 만한 경향은 이윤학, 이정록, 박정대 같은 시인들이다. 이윤학의 경우는 묘사 뒤로 자신을 숨기는 경우이다. 그 전까지 시의 특징은 대부분 화자와 화자가 바라보는 대상이 동시에 드러난다. 그것이 비유라는 독특한 시만의 표현법을 형성해온 것이지만,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관계에서 이 둘이 서로 밀고 당기는 관계를 이루는 것이 시라는 화법의 공통점인데, 이 경우에는 원관념을 될수록 줄이고 보조관념 속에 원관념이 포함되도록 한 방법이다. 그래서 시에서 화자는 냉정한 풍경 묘사 뒤로 숨어버린다. 물론 그 전에도 그런 방식을 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방식으로 한 독특한 세계를 이룬 것은 이 시인의 큰 업적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시인이 묘사의 뒤편으로 숨으면 시가 어려워진다는 점이 큰 문제이고 이것은 어렵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어려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 본래의 기능을 제약하는 악재로 작용하기도 한다. 머지 않아 이런 경향은 시의 귀족주의화와 유미주의화를 면하기 어렵다. 오히려 그런 경향을 강화하여 다른 시인들을 타자화함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차별화하여 구축하려고 한다. 그런데 묘사 뒤로 숨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사람의 눈은 카메라가 아니다. 세상을 본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자의 관념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그리고 냉정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에는 불가피하게 선택이라는 방법이 놓이게 된다. 이 방법은 자연이 본래 부여한 것이 아니라 시인 자신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선택한 것이다. 이런 선택을 묘사 뒤로 숨기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아무리 신선한 시각으로 세상을 본다고 해도 결국 이 부분에서는 시인 자신의 판단과 가치관이 드러나고, 이 부분에 대한 성찰과 숙고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애써 이룬 성과는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묘사는 방법일 뿐이다. 방법이 본질을 대체할 수는 없다.  이정록의 경우는 시의 전통 문법에 더욱 충실한 경우이다. 전통 서정시의 방법 내에서 새로운 시도를 한 경우라 할 것이다. 서정시에서 가장 중요한 기법은 비유이다. 비유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관계를 통하여 새로운 세계를 드러내고자 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이 비유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간격과 그 관계의 적절성 여부이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간격이 엉뚱하고 멀수록 독자는 강한 상상력의 자극을 받는다. 바로 이 점을 가장 분명하게 파고든 시인이 이정록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벌려놓았을 때의 관계가 얼마나 적절한가 하는 것이다. 비유는 본래 두 사물 사이의 공통점에 기반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그 상이성을 드러냄으로써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은 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가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그 둘 사이의 관계를 그럴듯하게 합리화시켜주어야 한다. 바로 이 합리화 부분에서 이정록은 무리를 범하고 있다. 둘 사이의 간격을 한껏 벌려놓아서 감탄을 하는 순간, 그것을 수습하느라고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이다. 그리고 애써 수습을 해놓은 것이 어거지로 갖다 맞춘 듯한 미숙함을 결국은 씻지 못한다. 바로 이 부분이 큰 숙제로 남은 것이다. 그러나 상상력이 얼마나 황당무계한 관계로 사물을 엮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유감 없이 보여주었다는 점은 칭찬 받아 마땅한 일이다. 이런 경향은 한시의 영향이다. 우리나라 시인 중에서 한시의 영향을 확인하기란 쉽지 않는데, 이 시인의 상상력은 많은 부분 한시에서 확인되는 발상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겠다. 추구집의 같은 상상력을 보면 이 시인이 벌려놓고자 한 두 사물 사이의 관계에서 느껴지는 발상과 긴장의 출처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한시에서 정말 배워야 할 것은 이런 조충소기가 아니라 그런 엄청난 기교를 낳게 한 거대한 사상과 정신의 흔적이다. 이것을 수용하지 못한 한계로 인하여 억지춘향의 느낌을 씻을 수 없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눈여겨볼 것은 박정대의 경우이다. 다른 사람들의 시는 모두 현실 속의 어떤 사물이나 현상과 연관을 맺고 있다. 즉 언어가 그 대상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박정대의 경우는 시 안에 완전히 허구의 세계를 만들고 있다. 특히 무가당 담배클럽이라든가 하는 것들의 세계는 현실 속의 그 어떤 현상과도 관련이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있다. 환타지의 세계와 비슷한 면이 있다. 이것은 상상력이 자기 만족을 꾀하는 절정의 세계이다. 시는 더 이상 현실의 어떤 고리에 매달려있기를 거부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세계가 또 위험한 것은 끊어진 풍선은 하늘 꼭대기로 올라감으로써 아무런 존재도 아니게 된다는 점이다. 시가 현실로부터 가볍게 떠올라서 상상력의 형태만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시가 자신의 종말을 향해 치닫는 것이다.  3)관찰의 미학 어찌 보면 필연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우연 같기도 한 한 가지 경향이 큰 물줄기를 이루었다. 허만하로부터 시작된 현미경식 관찰력이 그것이다.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와 “물은 목마른 쪽으로 흐른다”라는 두 시집을 연달아 내면서 허만하는 이후 시의 한 경향을 결정해버렸다.  시는 섬세한 관찰과 명민한 시각이 요구되는 갈래이다. 특히 섬세한 관찰은 세상을 재편하는 기초가 되는 것인데, 바로 이 점의 중요성을 한껏 강조하고, 또 성공했다는 점에서 허만하의 공은 실로 만만찮다. 그리고 이런 작품으로 하여 이후의 시에서는 정밀하고 정교한 관찰이 시인의 능력을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어버렸다.  물론 이런 경향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시는 본래 가장 작은 사물을 통해서 가장 큰 문제를 간단히 설명하는 갈래이다. 그래서 너무 세밀한 부분에만 집착하면 오히려 쉽게 전할 수 있는 큰 주제를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이후의 시인들이 세밀함의 늪에 빠져서 정작 큰 것을 보지 못하는 안 좋은 영향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현실에 대한 무관심을 강화시키는 한 기제로 작용한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현실 인식은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사상과 가치관이 분명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야 옳고 그름이 서고 그에 따라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밀한 부분보다는 거대주제가 이들의 관심사다. 노동문학의 경우가 그런 것이다. 그런데 그런 거대주제를 놔두고 다슬기의 껍데기 색깔에 관심을 집중한다면 적절치 못한 집중의 반대급부로 삶의 가장 중요한 요인인 거대주제는 어디론가 증발하고 만다.  어쨌거나 허만하 이후에 극세밀 묘사는 문단의 한 흐름으로 정착했고, 그 흐름은 다양한 방식으로 분화하면서 시인의 한 조건으로 작용한다. 그런 흐름 가운데서 최근에 김기택과 조용미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소화하여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점이 눈에 들어온다.  4)세월과 함께 사그라드는 꿈의 노래 지금까지 새 경향을 얘기했지만, 이미 그 전부터 이어져오던 경향 역시 무시할 수 없는 흐름을 형성했다. 전통 서정시의 문법을 착실하게 지키면서 현실의 생활 속에서 시인의 시각을 적극 살리는 경우이다. 문정희, 박미라가 그런 전통을 잘 지키고 있다. 문정희는 시인의 긴장이 무엇인가를 아주 잘 보여주는 시인이다. 이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소재는 모두가 생활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만큼 삶을 중요시여기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상상력의 특별함이나 소재의 독특함에 의존해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느낄 수 있고 확인할 수 있지만, 간과하기 쉬운 곳에서 삶의 의미를 한 번쯤 되돌아보게 하는 묘한 능력이 있다. 이 점이 사실 어려운 것이다. 일상 속에서 초심을 잃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것보다 더 탁월한 능력도 없다. 이런 점에서 문정희야말로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면서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에 오른 셈이다. 대시인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아깝지 않은 경우이다. 박미라의 경우는 이름이 잘 안 알려진 시인인데, 시가 모두 일상생활 속에서 소재를 찾으면서도 지루하지 않고 그렇다고 늘어지지도 않는 대단한 긴장을 품고 있다. 서정시의 문법에 가장 충실한 시인이다. 서정시라는 것이 원칙에 너무 충실하면 지루한 법인데, 이 시인의 시에서는 그런 충실성이 느껴지면서도 지루함이 묻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정말로 정신이 긴장을 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런 점에서 대단한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능력이 있으면서도 그에 준하는 대우를 받지 못하는 이런 시인을 보면 왕따가 비록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런 경향의 시인들은 성실하다는 점이 쉽게 느껴지는데, 문제는 꿈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무기력한 일상 속의 느낌을 시로 표현하는 것인데, 어떻게 보면 과장 같이 느껴지는 것은 그들의 태도가 전제하는 무기력증 때문이다. 이 무기력과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는 끝내 화합할 수 없다. 이 점을 극복해야 할 것이다.  5)문명비판 노동시의 대척점에서 빛을 되비치던 경향이 문명비판이라는 넓은 명칭으로 아우르던 경향은, 노동시가 궤멸 당한 후에 유일한 절대강자가 되어 온 세상을 비추고 있다. 이 경향 안에는 생태주의, 여성주의가 모두 포함된다.  그러나 노동시의 대자로서 존재하던 경향은 그 대극점이 사라짐으로 해서 자기분화를 시작해야 했지만, 아직 그런 경향이 뚜렷이 감지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게으르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그리고 이 비판은 주류가 주류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모습에 대한 성찰로 이어져야 하는데, 그것조차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국 시의 앞날을 아득하게 하는 경우이다. 디지털 시대를 맞이하여 시의 몰락이 예견되는 바, 이에 대한 책임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이 경향의 시인들의 받아야 할 것이다. 어느 누구라 할 것 없이 이 경향의 시인들이라면 깊이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오규원, 황동규 같은 낡은 세대의 경향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는가 하는 것이 이 경향에 대한 잣대가 되겠지만, 김정란의 수다스러움이나 이원의 장광설 가지고는 발전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 경향의 문제점이다.  6)실험 시의 새 경향 이런 가운데 눈여겨볼 만한 시인이 이수명이다. 이수명은 넓게 보면 실험의식이 강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전의 실험이라면 보통 이상이나 박남철 황지우처럼 형식을 깨면서 시작되는 것이 보통인데, 이수명의 경우는 시의 형식을 그대로 두면서도 그 안에서 시의 와해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도라고 할 것이다.  이수명의 새로움은 관계의 도착과 혼란에서 비롯된다. 언어는 어차피 고정관념이다. 사회의 약속체계이기 때문이다. 시는 그러한 체계를 전제로 하고서 그 쓰임의 일부를 변용한다. 그것이 우리가 흔히 보는 시이다. 그리고 그런 의도의 밑에는 시의 메시지가 관념이 아니라 정서라는 불가피한 사정이 있다.  그러나 이수명의 시에서는 이 전제를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관계는 시인의 의식 속에서 완전히 재편된다. 그리고 시인 자신만의 질서로 바깥으로 드러난다. 그렇게 드러난 관계가 독자의 눈에 제대로 비칠 리 만무하다. 이것이 이수명 시가 어려워 보이는 이유이다. 두 시집에서 이런 관계의 긴장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러나 세 번째 시집인 “붉은 담장의 커브”에 이르면 이 시인이 실험을 포기했는가 싶을 정도로 시가 안이해졌다. 그래서 말장난이라는 느낌이 가시지 않는다. 이것이 어쩐 연유인지 알 수 없다. 자신의 시에 자신감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큰 패착이다.  더 큰 문제는 문단에 그의 시를 제대로 평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의 시집 해설을 두 번 다 황현산이 썼는데, 그나마 이 평론가 정도가 이수명의 시를 좋게 봐주는 정도이다. 이 경우 다른 이들의 침묵은 채찍이 아니라 돌팔매질이다. 그러니 반성할 것은 시인이 아니라 시인 주변의 무책임한 자들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수명의 세계는 한국 시가 뚫어야 할 한 방향이다. 7)현실참여의 또 다른 방향 노동시가 지리멸렬한 가운데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징후가 있다.  노동시는 현실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고 현실 인식은 거대담론으로 귀결된다. 거대담론은 거대사회를 먼저 변화시킨 다음에 그것을 사소한 삶의 영역까지 확대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따라서 거대담론의 밑바탕에는 개인이 속한 현실과 그 현실의 무대인 사회가 있다. 그렇다면 시는 인생 전반의 거대담론을 거론하는 가운데,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관심이 들어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관심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자신이 속한 사회의 문제를 만나는 것이다. 이런 만남이 시에 등장한다. 그런데 이런 만남은 그 개인 속한 지역과 연관되는데, 이상하게도 우리 시에서는 이런 지역과 정확한 점접을 갖고 만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시가 한 지역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은 그것의 성과 여부를 떠나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여기다가 시가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이때 지역의 문제는 지역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한국 시의 넓은 바다와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접근법은 거대담론이 놓치기 쉬운 부분이다. 거대담론은 뿌리를 잃으면 늘 허황함을 시에 남기고 만다. 그런데 이런 허황함을 극복하는 한 방법이 바로 지역에 뿌리를 드리우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거대담론인 노동시가 썰물처럼 퇴각한 시점에서 이것은 유일한 대안이기도 하다. 바로 이 지점에 서있는 시인이 박세현이다. 박세현은 강원도 출신이다. 저절로 강원도라는 산악지대와 연줄을 댄 셈이다. 그런 시인이 노동시가 퇴각하는 그 시점에서 원주에 정착을 하면서 원주와 정선을 잇는 강원도 지역의 현실에 시의 초점을 맞춘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지역에 드리운 역사와 현실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는 점이다. 그럼으로써 시가 현실과 가장 가깝게 밀착되는 놀라운 경지를 연다. 그것은 현실을 도외시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에 끌려 다니지도 않는, 현실과 시가 정확히 맞물리는 방법상의 지점이다. “정선 아리랑”의 성과를 말하는 것이다. 노동시가 지리멸렬한 시점에서 이런 절묘한 해법은 이 시인이 이룬 큰 성과라고 하겠다. 그리고 한 시인의 성과에 그치지 않고 한국 시의 새로운 방향을 열 수 있는 가능성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여러 군데서 감지되지만, 일단 눈에 들어오는 시인은 우포의 상상력을 잡고 늘어진 배한봉이 있다.  4 1990년대 이후의 시는 그 앞 세대인 1980년대의 시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격렬한 사회 변혁의 의지에 휘둘렸던 시대이기에 형식의 문제보다는 인식의 문제가 시의 전면으로 떠올랐고, 인식은 종종 형식의 조건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런 징후가 1980년대의 가장 큰 상처이자 부족한 점일 것이다. 바로 이 점을 분명히 한 것이 1990년대 이후의 시에서 보인다. 그것은 문학 내부의 상상력을 성찰하는 것이다. 따라서 1990년대 이후의 시는 그 앞 시대의 현실 인식으로부터 후퇴하여 시의 자기성찰을 깊게 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따라서 내용의 결핍 대신 형식의 다양성과 충실성에 시인들의 노력이 집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형식에 대한 집착이 1980년대의 시가 지닌 문제점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런 경향은 오히려 역사의 퇴보요 시의 퇴행이라고 악평을 할 수도 있다. 한 쪽이 너무 강조된다고 해서 그것을 악으로 설정하는 것은 논리상의 모순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 이후의 시에는 그런 혐의가 너무 짙게 깔려있다. 그리고 1980년대에 목청을 높였던 시인들이 아직도 새파란 젊은이로 살아있다는 점에서 이 모순에 대한 자기 책임을 어떤 식으로든 공론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1990년대 이후의 시에서 보이는 가장 큰 문제점을 두 가지만 짚고서 마무리하겠다. 먼저 ‘현미경 증후군’이다. 허만하의 등장 이후, 그 방법의 명확성이 매력으로 작용했는지, 이것이 문단에 한 유행이 돼버렸다. 아주 작은 것을 세밀하게 관찰하려는 경향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기법은 잘 하면 좋지만 조금만 허술하면 시 전체를 우습게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이런 기법이 시 한 편에 발견의 재미를 주는 데 치중해 시집 전체의 큰 흐름을 답답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많은 시인들이 잊는다.  시는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노래하는 데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하는 양식이다. 그러나 작은 것에 너무 집착하고 그것을 그리는데 정력을 소진하면 정작 큰 것을 담지 못하는 비극에 도달한다. 한국의 시는 지금 바로 이 마술에 걸려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시는 몇 행으로 인생을 요약하기도 하는 엄청나게 큰 양식이다. 큰 것을 담을 수 있는 데도 작은 것에 집착해서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잔재주에 매달리는 것이다. 작은 것에 집착하여 그리느라 큰 것을 정작 말하지 못하는 ‘현미경 증후군’이야말로 한국시가 넘어야 할 한 벽이다. 물론 이것이 거대담론을 놓친 시대의 상황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규정할 수 없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 조건마저 뛰어넘지 않는다면 시인의 영혼은 죽은 것이다. 죽은 자들이 쓸 수 있는 시는 쓰나마나 한 시이다. 다음으로 ‘애늙은이 증후군’이 있다. 인생의 달관을 노래하려는 경향이 그것이다. 이것은 세밀한 것을 만들려는 앞의 경향과 맥을 대고 있다. 사회 변혁은 어찌 보면 꿈이다.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몸부림 친 것이 1980년대이다. 그런데 그런 몸부림을 허황한 것으로 보면 그 나머지 시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인생의 달관이나 꿈 없는 노인들의 목소리이다.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에 꿈이 없고 늙은이들이나 볼 수 있는 희망 없는 달관의 표정들은 이런 경향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달관들이 정말 삶의 깊은 내면에서 울린 것이라면 그것이 독자의 감동으로 이어지지만, 정말 많은 젊은 시인들의 그런 표정이 어쩐지 어거지로 만들어 낸 조작품 같다는 느낌이 가시지 않는 것은, 그것이 그런 유행의 한 흐름을 타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젊은 시인에게 아픔 없는 꿈의 상실은 치명상이다. 시대의 그 무엇을 아파하기도 전에 달관부터 하고 60대가 된다면 누가 거기에 동의하고 함께 슬퍼하겠는가? 이 무기력한 마술을 젊은 시인들이 풀어야 할 일이다.  이 두 가지 증상은 그러잖아도 심화되는 시의 소외 현상을 자초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한국 시가 새로운 방향으로 자기 혁신을 시도하여,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디지털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이러한 내부의 무기력증부터 극복해야 할 것이다.(4338.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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