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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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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詩壇과 그 뒷소문... 댓글:  조회:4376  추천:0  2015-02-11
시단에 떠도는 소문들에 대하여(2012년)                                     정 성 수(丁成秀)        이번엔 대한민국 시단(문단)에 떠도는 몇 가지 소문들에 대해 얘기하려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 소문은 시단 전체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 일부에 해당되는 것이다.    언제 어느 시대 어느 분야에서나 전체가 아닌 일부의 문제는 항상 존재해 왔다. 왜냐하면 지구인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불완전한 만물의 영장’이기 때문이다.     1.시인 등단에 대한 소문      잘 아시다시피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한 사람의 공인된 시인이 되는 데는 몇 가지 길이 있다. 우선 중앙(서울)의 각 신문사에서 공모하는 ‘신춘문예’가 있다(지방 신문 신춘문예 당선은 원칙적으로 등단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중앙 일간지라 할지라도 ‘당선’이 아닌 ‘가작’ 입선은 등단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신문은 그 대중적 특성상 대량 인쇄되는 출판물이기 때문에 신춘문예에 당선하면 일단 한 시인의 등단 사실이 빠른 시간 내에 여러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다. 거기다가 상금(원고료)도 다른 등단 관문에 비해 그런대로 두둑(?)하다.    또한 수많은 시인 희망자(응모자)들을 제치고 당선했다는 긍지와 자부심, 그 나름의 쾌감도 작지 않을 것이다.    물론 다 좋다. 그런데 문제는 일부 신춘문예 당선자들이 선배 시인들, 혹은 다른 사람들(아마추어)의 작품 일부를 슬쩍해서, 말하자면 남의 작품을 표절해서 당선됐다는 얘기가 가끔 심심치 않게 솟아나온다.    신춘문예 심사위원들이 신이 아닌 이상 세상에 발표되는 그 많은 시들을 평소에 한 편도 빠짐없이 모두 다 읽을 수는 없다. 그래서 표절에 관한 기본적 허점은 언제나 존재하게 마련이다.    표절이 심할 경우, 당선 취소도 되고 때로는 말만 무성했다가 그냥 넘어가기도 한다. 그 중에는 당선 뒤 환골탈태,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여 좋은 시를 쓰거나 남기고 죽은 시인들도 없지 않다.    그런가하면 표절 시비에도 불구하고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간판을 적절히(?) 이용, 석사나 박사 과정을 거쳐 대학 교수가 되거나 사회적 감투를 쓰거나 문단 권력층의 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물론 그런  사람들은 본인의 터무니없는 이론과 주장과는 달리 끝까지 ‘좋은 시’는 쓰지 못한다. 그저 안정된 직장인 대학 교수로, 한 사람의 시인으로, 무슨 단체의 임원으로 적당히 사회적 대우만 잘 받다가 어느 날 이 땅에서 소리없이 사라져버린다.    살아있을 때와 달리 그는 사망하는 순간 시인의 족보에서 자동 삭제된다. 다시 말하자면 시인이나 독자, 평론가, 학자 등 그 누구도 그를 한 사람의 훌륭한 시인으로 기억하지 못한다. 생존 시에 부당하게 과대평가, 과대대우를 받고 살았으니,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순리일 것이다.    또 시단(문단)에서는 이런 소문도 떠돌아다닌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신춘문예 응모자와 심사위원의 사전 결탁 문제이다. 보다 젊잖게 말하자면 응모자와 심사위원간의 이심전심이다. 이것은 대학이나 문화센터나 그밖의 공적 사적인 사제지간의 경우 가장 심하고 물론 특별한 예외도 있다.    이렇게 되면 당선돼야 할 사람이 낙선하고 낙선해야 할 사람이 당선되는 우스꽝스러운 비극이 연출된다. 전자의 경우, 즉 표절의 경우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이런 경우, 그 시인은 당선 후에도 대개는 지지부진, 그저 평범한 시만 가끔 써서 시인이라는 이름만 겨우 유지할 뿐 그에게는 훌륭한 시인으로서의 아름다운 미래가 없다. 그래도 죽는 날까지 자신이 신춘문예 출신이라는 그 자부심만은 절대로 놓지 않는다.    아주 드물게 역시 개과천선(?), 나중에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신춘문예 출신 시인들의 경우, 이상하게도 수준 높은, 혹은 개성적인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이 예상보다 그리 많지 않다. 왜 그럴까?    우리 현대 ‘시 문학사’를 보더라도 그렇고(필자가 다른 평론에서 그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지금 생존해 있는 시인들을 봐도 역시 그렇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혹시 신춘문예 출신자들의 쓸데없는 ‘자만심’ 내지는 ‘오만’ 때문이 아닐까?    혹시라도 그것이 그들의 보다 고양되어야 할 시 작업을 망치고 있는 게 아닐까? 피나는 노력보다는 화려하게 등단했다는 긍지와 자부심, 선민의식, 뭐 이런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것들이 신춘문예 당선 시인들을 그저 그렇고 그런 평범한 시인으로 타락시키는 게 아닐까? 이것은 나의 추측이 아니라 시단에 떠도는 소문이다.  며칠 전 대학 교수(문창과) 몇 사람과 술을 마시면서 나온 얘기도 이와 똑같다.      다음엔 ‘문예지’를 통해 시인이 되는 경우를 보자. 월간 문예지, 계간 문예지 등 전국에서 발행되는 정기 간행 문예지들이 적어도 300종이 넘는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문예지(지난 ‘80년대만 해도 중앙 문예지는 10종 내외였다)들마다 1년에 몇 번씩 시인들을 양산한다. 1년이면 엄청난 숫자이다. 물론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시인이 돼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어느 정도 시인다운(?) 시인, 즉 그 나름대로 시인으로서의 역량을 갖춘 사람이라야 한다는 단서조항을 전제조건으로 한 경우이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점 중의 하나는 잘 아시다시피 거의 대부분의 문예지가 모두 적자 운영이라는 것이다. 지난 1980년대 말 전후에도 필자 친구인 와 (대한민국 최장수 종합 문예지)의 김필식 사장이 점심을 먹으면서 나에게 이렇게 개탄한 적이 있다.    “이 지금 1,000부(판매부수)가 안 나간다…!”  “그래에…?”    그 당시 나는 깜짝 놀랐었다. 은 자타가 공인하다시피 문자 그대로 살아있는 ‘한국 현대문학사’가 아닌가. 중앙 일간지 신춘문예 당선자가 다시 에 추천을 받는 사건(?)이 발생할 정도였다. 그런 조차도…!    적자 운영중인 일부 문예지들이 그 문예지의 수명을 연장하는 수단으로 아직 문학독자 수준을 넘지 못한 함량미달의 평범한 문학 애호가들을 한 사람의 시인(문인)으로 무리하게 등단시키면서 해당 문예지를 100부씩(?) 강매하거나 후원금을 받는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문예지 경영난 상황이 안타깝고 속상하긴 하지만 이것은 한 마디로 말이 안 되는 짓이다. 그 무엇보다도 너무나도 당연히 우선 등단 시인(문인)은 시인(문인)으로서의 역량(실력)을 갖추고 있어야 하고 또한 한 사람의 시인(문인)을 등단시키는 해당 문예지가 자기 지면으로 등단하는 시인(문인)에게 상금이나 원고료를 건네주지는 못할망정 그 문예지를 등단 시인(문인)에게 대량으로 강매한다는 것은 글을 쓰는 소위 선비의 행위로서 너무나도 파렴치한 짓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신진시인(문인)에 대한 모독이자 시인(문인)들의 등단에 대한 모독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더욱 소름 끼치는 것은 누군가가 등단 희망자의 작품을 대폭 손질해 줘서 등단시키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이것은 엄연히 말도 안 되는 부정행위이다.    그렇게 해서 시단(문단)에 나온들 그 시인(문인)이 제대로 좋은 작품을 쓰는 훌륭한 시인이 되겠는가. 슬프고 쓸쓸한 일이다.    또 다른 등단 방법은 ‘시집(소설집, 수필집 등)’을 출판하고 등단하는 경우이다. 8.15 해방 이후의 경우, 조병화 시인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당선이나 추천으로 시 1편(혹은 여러 편)을 들고 시단(문단)에 나오는 것보다 시 50~70편을 들고 문단에 나오는 것이 그 시인의 시적 능력을 평가하는 데 더욱 효과적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야말로 한 시인의 시적 역량을 정확하게 제대로 가늠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문에 의하면 그 중에는 시적 역량이 부족한 사람들도 더러 있다고 한다. 작품 수준이 낮은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인정을 받았는지 하여간 무리하게(?) 등단하는 경우이다. 그런 시인들은 대개 어물어물 시인 행세만 하다가 역시 소식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때문에 시적 역량도 없이 그저 등단만 하는 것이 최선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일종의 문화적 사기일 수도 있다.    또한 ‘동인지’를 통해 등단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경우, 그 동인지의 구성원들이 지니고 있는 시적 수준이 문제이다. 훌륭한 역량을 갖춘 동인이 한 사람의 시인으로 인정받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러나 문단에서 시적 역량을 인정받지 못한 동인지 출신들이 언제부터인가 문단 등단의 질서가 해이해진 틈을 타서 젊은 시절의 동인 활동이 끝나고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아무 문예지에나 대충 작품을 발표하고 나서 그것도 신인이 아닌 중진이나 대가 행세를 하려고 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우스꽝스러운 행태가 아닐 수 없다.     2.각종 ‘문학상’에 대한 소문   ‘  상은 주어서 즐겁고 받아서 즐겁다’는 말이 있다. 물론 ‘상’이란 것은 말 그대로 좋은 것이다. 우리나라의 문학상에는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한국시인협회’ ‘한국현대시인협회’ ‘한국소설가협회’ 등 역사와 전통이 있는 각종 문학단체에서 제정한 문학상들이 있다.    또한 ‘예술원상’ ‘서울시 문화상’ 등 정부 산하기관에서 제정한 문학상들도 있다. 그리고 작고문인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김소월 문학상’ ‘윤동주 문학상’ ‘만해 문학상’ ‘지용 문학상’‘편운문학상’. ‘동리 문학상’ ‘목월 문학상’ 등 수많은 상들이 있다.    그 가운데서 가장 많은 것은 여러 문예지에서 제정한 문학상들이다. 상의 종류도 적지 않다. 너무 많아서 일일이 그 이름을 다 기억할 수도 없다. 더구나 난생 처음 들어보는 문학상이 하나 둘이 아니다. 하지만 문학상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시인(문인)들의 숫자를 당할 재간이 없다.    상을 타고 싶은 사람은 많고 상은 적다 보니 수요와 공급이 원활할 수가 없다. 그러다보니 상에 얽힌 여러 가지 소문들이 떠돈다.    누구는 상금은 받지 않을 테니 상만 달라고 하고, 누구는 아예 상금을 자기가 내고 상을 타겠다고 하고, 누구는 상금도 받지 않고 후원금도 낼 테니 상을 달라고 하고, 누구는 상을 주면 문단 선거운동을 잘 해주겠다고 하고…사연도 가지각색이다.    또 어떤 문학상들은 크든 작든 상금을 내걸어놓고 실제로는 상금 없이 상패만 주고 만다고도 한다. 상금용으로 수상자에게 빈 봉투만 준다고 하던가. 그야말로 말도 많고 탈도 많다.    하지만 그 어떤 문학상이든 상금이 있든 없든 상을 탈 만한 역량을 갖춘 시인(문인)이 그 상을 탔다면 그것은 아무 하자가 없다. 문제는 상을 탈 만한 역량도 갖추지 못한 함량 미달의 시인(문인)이 문학상을 탔을 때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기본적으로 너무나도 잘못된 것이다.    그런 문학상은 상 자체가 치욕이고 따라서 그 문학상을 받는 것 또한 치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상이라면 아무 거나 덮어놓고 타려고 하는 상 중독증(?) 시인(문인)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쓸쓸한 일이다.    모든 문학상은 상금이 많고 적고 간에 받아서 즐겁고 당당하고 영광스러워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상이 아니라 다만 구차스럽고 수치스러운 구걸 행각이자 역시 일종의 문화적 사기일 뿐이다.     3.문단 권력, 그리고 문단 선후배에 대한 소문      우리나라에는 ‘문단 권력’이라는 것이 있다. 문단 중진이나 원로로서 권위있는 각종 문학상의 심사를 자주 하는 문인들, 유수한 문예지의 주간(혹은 발행인)이거나, 문단에 적지않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대학 교수들, 일부 유명한 평론가들, 혹은 역사와 전통이 있는 각종 문학단체의 장이나 고위직 임원을 맡고 있는 경우 등이다. 아마도 그런 문인들의 힘을 ‘정치권력’과 대비해서 ‘문단권력’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이밖에도 전국 방방곡곡의 크고 작은 문학단체들은 부지기수이고 각종 문예지 또한 부지기수이다. 그쪽에서 자기들 나름대로 문단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문인들 역시 물론 ‘문단권력’의 일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 모두가 대한민국 문단에서 일정 부분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하다. 사실은 그 문단권력 모두가 살신성인(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의 정신으로 한국문단에 그야말로 양심적으로 좋은 영향력만을 발휘한다면 대한민국 문단은 훨씬 더 풍요롭고 넉넉해질 것이다.    하지만 우선 먼저 문단에서 풀어야 할 시급한 문제 중의 하나가 좀 거창하게 얘기하자면 일부 문단권력들의 권력투쟁이다.    특히 권위있는 큰 문학단체들의 이사장이나 회장을 뽑는 선거에서 일부 입후보자들이 선거 과열을 넘어서 그야말로 후안무치, 상식을 초월한 중상모략, 권모술수를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파렴치한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야말로 경악하게 한다.    그 모습은 아무리 좋게 보려 하고 그 입장을 충분히 이해해 보려고 노력을 해 봐도 역시 정상적인 문인의 얼굴이 아니다. 물론 이것도 어디까지나 일부 문인들의 경우이다. 일부를 전부로 생각하거나 착각하는 것은 전혀 온당치 못하다.    그것은 마치 일부 공무원이나 일부 성직자나 일부 교육자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 집단 전체를 매도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하지만 그 일부가 저지르는 폐해는 엄청나다. 더구나 그들의 상황이 언론을 타거나 인터넷, 또는 법정 쪽으로 이동했을 때, 문인 전체, 문단 전체에 끼치는 이미지 손상, 그 악영향은 그 무엇으로도 메우기 힘들다.    더구나 나쁜 소문은 늘 확대 재생산되는 못된 습성을 지니고 있어서 더욱 큰 문제이다. 적어도 문단선거는 언제나 사회의 모범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문인이 무엇인가. 인간의 ‘아름다운 영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이 세상 모든 것은 상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상식에 어긋나는 방법으로 문단의 무엇이 되겠다는 말도 안 되는 발상은 적어도 문인의 발상은 아니다. 졸렬한 소인배 정치 모리배나 정치 야바위꾼들이나 하는 짓이다.    문단의 질서를 흐리게 하는 문제 중의 하나는 문단 선후배 관계이다. 나이 들어 뒤늦게 어물어물 문단에 나온 지 불과 몇 년밖에 안 되는 신인이 자신의 역량으로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한 지 40년이 넘는 비슷한 나이의 대선배에게 모두 다 명찰을 달고 다니는 문인 모임에서 “당신, 언제 등단했어?”라고 묻는 해괴한 일이 발생한다는 것은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오랫동안 문학을 포함하여 최소한 인문학 전반에 걸친 폭 넓은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문단 선배들의 작품을 열심히 읽어보지도 않은 채, 피나는 문학수련도 하지 않은 채, 그냥 어떻게 적당히 등단 절차를 마치고 문인 행세를 하면서 누가 선배인지도 모르고 어떤 작품이 좋은 작품인지 작품의 가치 판단도 할 줄 모르면서 그저 여기저기 얼굴이나 내밀고 다니면서 아무 데서나 대우나 받으려고 하고 자기 혼자서 대단히 훌륭한 문인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적지 않다고 한다.    시인(문인)이 이승을 떠나면 남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히 오직 하나, ‘좋은 시(작품)’뿐이다. 그의 사회적 지위가 아무리 대단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저 일종의 참고 자료일 뿐이다.    따라서 그 누구나 시인에 대한 평가는 공평하게도 오직 ‘시(작품)’ 한 가지로 받을 뿐이다. 어디로 등단했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고, 수많은 문학상 수상도, 대단한 문단권력도, 요란한 사회적 지위도, 넘치는 경제적 부유함도, 많은 나이도 모두 다 아무 소용이 없다.    김소월 시인이나 이상 시인이나 윤동주 시인이나 김영랑 시인이나 한용운 시인이나 정지용 시인이나 서정주 시인이나 그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그들이 발표한 ‘시’로써 평가받을 뿐이다.    만약 그들의 시가 그냥 그저 그렇게 평범하였다면 지금 이 시간 아무도 그 시인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시인은 아무 때나 시인이 아니라 ‘좋은 시’를 썼을 때 비로소 시인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훌륭한 시를 남긴 시인의 그 눈부신 탄생은 영원히 반복된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것이 ‘시(문학)’의 위대한 힘이다!               -일당산 곰지기 계곡에서
98    詩의 10개 봉우리 댓글:  조회:4333  추천:0  2015-02-11
내가 올라본 한국시의 10 봉우리                                   정진명  1.시와 정신  시집을 읽는 것은 시인의 정신을 만나는 일이다. 이 점을 잊을 때 가끔은 상상이 시의 전부가 아닐까 하는 착각에도 빠져들지만, 상상력은 연과 같아서 지상에 드리운 끈이 끊어지면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  그런데 나는 시집을 읽을 때마다 꼭 등산을 하는 기분이 난다. 골짜기로 들어서면 나무들만 보이고 한 골짜기를 올라서면 내가 읽어온 숲들이 나타난다. 그리고는 마침내 시집을 덮으면서 정상에 올라온 기분으로 시집 전체를 돌아보게 된다. 어떤 시집은 바위산처럼 무겁고 당당한가 하면, 어떤 시집은 또 침엽수가 빽빽하여 장관을 이루기도 하고, 또 어떤 시집은 험하기만 했지 정작 올랐을 때의 풍경은 볼품이 없는 경우도 있다. 밋밋한 산, 가파른 산, 깎아지른 산, 황폐한 산, 촉촉한 산, 파릇파릇한 산, 감미로운 산 이루다 헤아릴 수 없다. 이와 같이 오르고 난 뒤의 시집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여러 가지이다.  이때 돌아보는 나의 몸을 떠받치고 있는 산봉우리의 정점은 시인의 정신이다. 그러고 보니 정신은 산을 닮았다. 시의 상상력에는 높낮이가 없다. 산에서 제 각기 색깔을 내는 단풍들처럼 자기 자리에서 빛을 내면서 아롱진 무늬를 보여주는 것이 상상력이다. 그러나 정신에는 높이가 있다. 쉽게 가늠하기 어려운 그 어떤 높이가 각기 있다. 높은 정신이 장대한 상상력을 만날 때 우리는 오르기 즐거운 한 거대한 봉우리를 본다.  시집을, 혹은 시인을 산으로 본다면 우리나라에는 정말 많은 산이 있다. 실제 우리나라 땅의 7할이 산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우리나라의 시인들이 쓴 시집은 이루 다 헬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러니 그 만큼 많은 산들이 여기저기서 솟아있는 것이다.  시집이 산이라면 비슷비슷한 군락을 이룬 시집들의 행렬은 산줄기일 것이다. 실제로 시들은 시대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서로 닮는 측면이 많기 때문에 줄기줄기 이어지는 산줄기로 표현해도 그리 어리석은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런 유추에 힘입어 한국의 근대시를 굳이 비유한다면 백두대간을 닮지 않았나 싶다. 해방 전후의 시기와 그 이후의 시기에 쓰여진 시들을 보면 이런 생각을 더욱 절실하게 한다. 해방 후의 시들이 보여주는 높이는 해방 전의 시들이 보여주는 높이를 따라가지 못한다.  어떻게 보면 해방 전의 시기는 자유시가 막 실험을 시작하던 시기이기 때문에 형식 면에서도 내용 면에서도 불안정한 시기이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시들이 그런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최초의 자유시라는 수식어가 붙는 주요한의 경우에도 결국은 새로운 틀을 보여주지 못한 채 라는 엉거주춤한 수식어만 받고서는 끝내 피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근대시 초기의 3∼40년 동안, 그 후에 나타날 모든 시의 원형이 완벽에 가깝게 실험되어 어떤 전형을 만들어버렸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그 후에 계속 본받도록 배운 정지용, 김소월, 한용운, 이상, 이육사, 김기림, 백석, 이용악 같은 시인들이 나타나서 자유시라는 이름의 틀을 주물 지어버렸다. 그리고 시대의 탓이지만, 해방 후에는 남북 양쪽에서 불구의 모습으로 시의 역사가 진행되다가 1980년대의 노동문학을 거치면서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런 흐름을 보면 꼭 백두대간을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백두대간은 조선후기의 이른바 '실학자'들이 설정한 지리개념이다. 한민족의 지리를 한반도로 지형을 확정지은 다음 그것을 전제로 설정한 개념이다. 그래서 백두산 천지에서 시작하여 반도의 오른쪽을 따라 높은 봉우리들을 연결하고 태백산을 거쳐 지리산에 이르면서 국토의 뼈대를 이루었다는 발상이다. 모든 줄기는 여기서 가지치면서 벌판을 지나 바다까지 달려간다.  그러니까 출발점인 백두산 천지와 그 아래쪽에 펼쳐진 해발 1000미터 이상의 고원지대가 해방 전후의 시기에 해당하는 셈이다. 이미 이 고원지대에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어떤 정신의 형식은 거의 완성됐다. 이 시기에 시를 쓴 시인들의 정신이 너무 높아서 그 후의 시인들이 따라가기 어려운 상황이 돼버렸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그러한 정신이 분화되면서 어느 한쪽으로 몰리는 경향을 띠었다. 그리고 분단 정국이라는 분위기를 타고 기우뚱한 사상의 편향에 말려들면서 시는 쇠퇴 일로를 걸어왔다. 아마도 이것이 추가령 지구대가 지나가면서 만든 낮은 산들의 지역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1980년대의 노동문학을 기점으로 산들이 다시 높아지기 시작해서 이제는 상상력의 백가쟁명 시대를 열기에 이르렀다. 좋게 말해 백가쟁명이지 한 마디로 어지럽다.  그렇다면 지리산은커녕 태백산 언저리에나 와있는지 어쩐지도 모를 일이다. 분명한 것은 백두대간의 가장 큰 축인 지리산에 이르려면 멀어도 한참을 멀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고매한 정신이 바라보는 태평양으로 뻗은 무한한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은 아직 꿈도 못 꾸고 있는 것이 20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바라보는 시의 지형도이다.  결국 상상력이 넓이라면 정신은 높이인데, 산의 높이를 결정하는 것은 정신이다. 그런데 정신은 가만히 죽어있는 것이 아니라 흐른다. 그래서 정신은 시대의 한 복판을 흐르고, 그 흐름 위에서 가장 높은 파고를 만드는 것은 개인이다. 따라서 시대를 잘못 만난 시인이 자신의 능력을 초과하는 높이를 이룰 수는 없는 것이고, 이것은 우리가 딛고 있는 어떤 정신 문명의 현재 위치를 점검하지 않으면 애초부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해방 전후의 시인들에게는 그 이전부터 흘러오던 유학이라는 도도한 정신의 관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사라져버린 이 유학의 관성 밖 어느 곳에서 그 도도한 흐름을 찾아낼 것인가 하는 것이 가장 절실한 문제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 시대의 모순을 묻는 물음과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이 요구하는 정신의 문제를 검토하는 일이 될 것이다. 결코 단순하지가 않다.  2.시의 열 봉우리  나는 지난 한 해 동안 시집 1000권을 읽었다. 말하자면 마음 단단히 먹고 등산을 한 것이다. 물론 아주 많은 봉우리가 그전에 올라가 본 곳이기는 했지만, 새로 올라본 느낌은 또한 숙고해볼 만한 것이었다. 이렇게 산을 오르면서 우리나라에도 만만치 않은 산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일이 즐거웠고, 이 글은 그 중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10개를 내 나름대로 뽑아서 간단히 정리, 소개해보자는 뜻으로 쓴다. 이런 정리만으로도 문학사를 조감하는 한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1)가락의 창조와 완성, 김소월  근대 이전에 시는 노래의 가사였다. 이것은 시가 가락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전의 전통에 반발하면서 출발한 근대시가 자유라는 이름으로 제일 먼저 벗어 던진 것이 이 운율이었다. 그만큼 시에서 가락은 굉장한 관성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른바 '자유시'라는 이름으로 시도된 근대시를 보면 여전히 운율의 강한 구속력을 확인할 수 있다. 김동환, 김동명을 비롯하여 1920년대, 30년대에 활동한 시인들의 시를 보면 정형률에 가까운 운율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근대시는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었으므로 일부러 운율에 매달린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이런 가운데 시의 가락을 오히려 더 강하게 실험한 시인들도 있다. 김소월과 김영랑의 경우가 그렇다. 그 중에서도 특히 김소월은 우리 문학사에서 전무후무한 위치에 오른 시인이다.  유럽의 언어 같은 경우에는 액센트 언어이기 때문에 리듬이 발달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어 역시 사성이 발달해서 운율이 말에 잘 살아있다. 그런데 그런 말과 달리 우리말은 음의 고저장단이 아주 불분명한 말이다. 이런 말에서 가락을 의식하고 조절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그 방편으로 이용하는 것이 호흡의 길이이고, 그것은 음수율로 나타난다. 글자수의 개수에 따라서 리듬이 결정되는 방식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것들이 어떤 도식에 의존해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점을 김소월의 시는 아주 잘 보여준다.  김소월이 전무후무한 위치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그가 가락이 잘 살아있는 노래 시의 시대를 산 사람이라는 것과, 앞으로 오는 세대에는 김소월이 겪은 그런 가락을 겪을 수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시대가 디지털 시대이기 때문에 앞으로 자라는 세대는 영상 이미지로 세계를 인식한다. 그러면 다른 감각이 후퇴하기 마련이다. 특히 청각은 점차 쇠퇴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시에서 김소월 같이 가락을 살려놓기 어렵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김소월은 그 이전의 가락을 그대로 반복한 것이 아니고, 근대시라는 한 형식의 실험기 속에서 한 정형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는 특징이 있다. 시가 버려야 할 근대의 속성 속에서 오히려 시가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것이 가락이라는 것을 증명한 경우이다. 민요에는 2음보와 3음보가 기본을 이루면서 우리말의 가락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이 단조로운 가락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활용하여 그의 시에 적용시켰다. 우리에게 익숙한 '진달래꽃', '산유화' 같은 작품들을 보면 시에서 가락이 얼마나 잘 살아있는가 하는 것을 역력히 볼 수 있다. 따라서 옛날의 가락에 근거를 두면서도 그 가락을 시에서 살아있는 것으로 만든 희귀한 경우이다. 그래서 전통의 계승과 창조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경우이다.  이 가락의 전통은 해방 후로 오면 거의 후퇴한다. 1960년대로 접어들면 가락이 시에서 현저히 쇠퇴한다. 김춘수는 가락 대신 시각 이미지를 이용하는 극단의 방향을 선택하여 나아가고, 김수영은 관념화된 세계로 나아가면서 전통 시에서 느껴지던 가락에 일대 혁신을 일으켰다. 어쩌면 가락을 무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경우일 것이다. 다른 시인들도 가락을 특별히 활용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시에서 가락은 운명 같은 것이어서 그 후의 시인들에게서도 가락의 특징이 잘 살아나는 경우가 많다. 문병란, 박정만, 양성우, 정호승, 김용택, 곽재구 같은 시인들의 시에서 가락이 잘 살아나고 있다. 가락은 여전히 시에서 중요한 활력을 일으킬 수 있는 요소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형식이란 어찌 보면 공동사회의 조건이다. 혼자 있을 때라면 형식은 필요치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 둘만 모여도 의사소통의 조건은 형식을 요구한다. 시의 가락 역시 그런 형식의 일종이다. 가락이란 사회성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 시의 가락이 민중시, 노동시 계열의 시인들한테서 많이 그리고 우세하게 나타나는 것은 이런 특성과 관련이 없지 않음을 보여준다.  시각 이미지는 아주 고급스러운 속성을 지니고 있다. 선승과 선비들의 시가 고도의 절제된 시각 이미지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 역시 그런 속성의 한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의 내면으로 파고드는 사람들의 시에서 시각 이미지가 우세하게 나타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시의 역사 전체를 운율 지향의 세계관과 시각 이미지 지향의 세계관으로 나누어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김소월은 이미 사라지는 시의 전통인 가락을 시에 아주 잘 살려서 운율의 한 모범을 보인 시인이고, 이 점 앞으로도 김소월을 뛰어넘을 만한 시인이 나오기 어렵다는 점에서 김소월은 우리 근대시의 초기에서 가장 우뚝 솟은 봉우리이다.  2)새로운 의식 실험의 선봉, 이상  신비평가들이 지적한 는 역사가 짧은 우리 시에서 산삼 노릇을 훌륭히 하고 있다. 모든 시에 이런 속성이 있는 것이지만, 이 속성을 가장 강렬하게 자극하는 방법이 해방 후에 전개된 현대시의 한 줄기를 이루었고, 시인의 공력을 평하는 잣대가 되어버렸다. 이상은 이런 수법의 원조랄 수 있다.  이상의 시를 보면 당혹스럽다. 그 전에 이어진 시의 전통과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그 판이함은 그가 일본의 시를 구경한 데서 말미암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것을 나름대로 소화한 것을 보면 이상 역시 대단한 시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껍데기를 핥는 데에 그치지 않고 수박의 씨까지 뱉은 사람이다.  자유시가 그 전에 이어져온 전통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에서 얻은 이름이었다면, 당시로서 이상은 가장 완벽한 자유시를 구가한 사람이다. 이전의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가락인데, 읽는 이의 마음속에서 가락을 방해하려고 띄어쓰기를 무시한다거나 숫자나 부호를 끌어들인 것이 그런 경우이다. 김소월과는 등을 맞대고 걸어간 셈이다. 그러나 시의 형태만을 일그러뜨려서는 진정한 자유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은 이상 자신이 더 잘 알았을 것이다. 괴팍한 그의 삶은 그 한계에서만 설명될 수 있다. 그런데 그 정신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어서 이상은 그 정신의 문턱에 도달하기 전에 삶을 마감해버린 셈이다. 유학의 전통이 단절되고 그것을 대체할 만한 것이 이상이 살면서 가고자 했던 방향의 세상에서는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의 수법으로 주목을 받으려는 속셈을 가진 사람들이 극복해야 할 것은 바로 이상의 시가 남긴 정신의 영역임은 말할 것도 없다. 해방 후 그런 점을 시의 목표로 설정하고 가장 과감하게 밀고 나간 사람이 오규원이다. 그리고 그 후에 형식을 흔드는 시도를 한 사람들 역시 이상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1980년대의 황지우, 이성복, 박남철과 그 이후의 문명비판에 계보를 대고 있는 시인들이 그들이다. 그러니까 이들을 평가할 때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상이 못 본 세상의 자유를 누리면서 과연 이상을 넘어섰는가?  3)정신의 절정에 서리는 무지개, 이육사  이육사는 한시의 장점을 가장 많이 살린 시인이다. 그리고 스스로 한시를 쓴 시인이다. 그래서 이나 같은 시는 아예 절구의 원리인 기승전결을 그대로 이용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바깥 모양만을 닮은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이육사의 시에서 볼 것은 그의 시에 서려있는 정신의 강렬함이다. 이 강렬함이 느닷없이 땅에서 솟은 것이 아니라 굽이치는 한시의 흐름 끝에서 하늘로 치솟은 것이라는 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한시는 조선 지배층의 양식이다. 지배층은 나라를 통치하는 자들이고, 그들의 통치는 어떤 관념 위에서 존재한다. 그리고 그 관념은 이미 성리학이라는 절대 학문으로 조선을 짓눌렀다. 바로 그 무게에서 그의 시는 치솟는다. 한시는 이들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한 도구로 수 천 년 동안 변함없이 그들의 정서를 담아낸 형식이었다. 이 경우 형식은 아주 정제되어서 감정의 지도 노릇도 한다. 지도란 현실마저 그렇게 바꾸는 힘이 있다. 한시의 경우가 그렇다.  따라서 이육사의 시에 서린 그 강렬한 느낌은 일제라는 시대 상황의 산물일 것이지만, 그 바탕에는 한시의 절제된 세계관이 짙게 드리웠다는 사실을 함께 보아야 한다. 강해야 한다는 믿음과 그 강함이 내면으로부터 밖으로 관철되어 일정한 형식을 드러내는 그 지점에 이육사의 시가 서린다. 강함은 시대와 사람의 산물이지만, 형식은 정신의 산물이다. 이 경우 정신은 바깥으로 투쟁의 동력이지만, 안으로는 단련의 힘이 된다. 그 내면의 단련이 바깥으로 형식을 요구한 것이 시이다.  4)언어와 의미의 정확한 아귀 물림, 박남수.  시를 읽다보면 두 가지 방향성을 느낀다. 언어가 앞서나가는 경우와 의미가 앞서나가는 경우가 그것이다.  언어가 앞서나가는 경우는 현란하다. 의미를 될수록 감추고 상상력을 최대한 부풀려서 시의 공간을 확대하려는 시도 때문이다. 그 때문에 때로는 의미가 사라지기도 한다. 그러면 언어만 남는다. 언어만 남으면 윤리를 배우지 않은 청소년들이 어떤 게 불륜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듯이 상상력의 동종교배가 이루어져서 혼란으로 빠져든다. 다행히 그 혼란의 밑바닥에 무의식의 세계가 연결되어 있다면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는 차원의 문학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어지러울 뿐이다.  의미가 앞서나가는 경우는 멀미난다. 언어가 희생당하기 때문이다. 무언가 전달하기 위해서 언어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달하고자 하는 그것이 잘 전달되기만 하면 언어가 어떤 형태로 일그러지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멀미가 난다. 언어가 제 자리에 정확히 자리잡지 못하고 횡설수설하기가 쉽다. 도구인 언어가 초래하는 부작용이다. 대부분 어떤 사상을 전달하려는 의도를 가진 시들이 그러하다. 1920년대의 카프 시나 1980년대의 노동시들이 그런 경향을 강하게 띤다.  그런데, 이 둘을 정확하게 양분하는 중간지점에서 이루어지는 시가 없을까? 즉 이미지가 의미를 끌고, 의미가 이미지를 밀어서 어느 한 쪽이 조금만 허물어지면 시 전체가 맥이 빠지는 그런 경우 말이다. 이 경우 언어는 이미지를 따라서 전개되고 언어의 이미지는 의미의 테두리 밖으로 무리하게 빠져나가지 않는다. 언어가 정해주는 테두리 안에서 의미가 살아 숨쉬고 의미가 가져가는 크기 안에서 이미지가 움직이는 것이다. 나는 박남수를 그런 경우라고 본다.  물론 박남수의 경우도 실험을 계속 했기 때문에 이미지가 너무 월등해서 의미가 희생당한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그가 추구한 목표지점은, 중간에 드러난 실패작들에서 보이는 이런 경우가 아니라, 언어와 의미가 정확히 맞물려서 서로 부담을 주지 않는 그런 것이었다. 그것이 성공을 했느냐 못 했느냐 하는 것을 떠나서 그런 경계에 든 시인이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성공한 박남수의 시에서는 의미와 언어가 톱니바퀴처럼 정확하게 맞물린다. 그래서 언어가 의미를 꼭 그 만큼만 싣고 가면, 의미는 또 언어에 실려 자신의 뜻만큼만 빛을 낸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 시가 드러내는 것은 그 둘의 교묘한 조화와 그 조화가 빚는 빛나는 언어들의 행진이다. 아귀가 꼭 맞아서 선후를 따질 수 없는 경우이다. 이 점을 처음으로 분명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박남수의 공은 어떤 시인보다도 우뚝하다.  5)민족 반역자가 노래한 신화의 세계, 서정주  서정주는 교과서 시인의 대표주자이다. 그렇기에 한국 현대시의 모순을 가장 잘 드러내는 시인이기도 하다. 시의 역사성을 논할 때마다 거론되는 그의 친일행각과 그 후의 묘한 행적 때문이다.  카아의 이론을 빌지 않더라도 역사는 어떤 시각을 전제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에서까지 그런 시각으로 재단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회의론이 들 수도 있지만, 그런 회의론조차도 어떤 시각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는 사실 없다.  그런 점에서 서정주의 시를 평가할 때 반드시 그의 행적을 소개하는 것이 시인과 독자 양자에 대한 예의이다. 그의 친일 행적을 거론하지 않고서 시만을 감상한다는 것은 그의 시를 나 편한 대로 이해하겠다는 발상이다. 그건 수용미학으로 접근해볼 일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유일한 이론이 아니라면 독자는 모든 것을 알 권리가 있다. 이 권리를 무시하면서까지 서정주론을 쓴다면 그건 고약한 일이다.  서정주는 신화의 세계에 산 사람이다. 신화는 현실의 반영이지만,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둔다. 그래서 치열한 현장으로부터 이탈하기에 치열한 현장의 정서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는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신화가 재미있다. 게다가 신화는 인간의 본성에 깃들어 있는 영역이기 때문에 울림 역시 깊다. 바로 이 점을 서정주 시에서는 놓쳐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의 세계가 서정주 시의 가장 핵심 세계라고 본다. 물론 시만을 놓고 보면 그 이전의 시들이 오히려 긴장감 있고, 절실한 아름다움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의 세계는 설익는 냄새가 나고 외국물도 흐른다. 그리고 과 는 유장하지만 질마재에 도달하기 위한 중간 과정이다. 신라 어쩌구 하는 세계는 말장난이나 정신 장난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을 들어올린 신화를 빼면 서정주의 시에 남는 것은 별로 없다. 현실로부터 신화로 상승하기 위한 몸부림이 그의 시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한국시의 신화가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6)한국시가 쏘아 올린 자유의 불꽃, 김수영  김수영은 4.19를 빼놓고서는 말할 수 없는 시인이다. 얼떨결에 이루어놓고서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혁명이 4.19다. 그렇기에 1년만에 다시 군홧발에 밟혀버렸지만, 행동과 사고가 자신에게서만 말미암는 의지를 자유로 규정한다고 한다면 4.19는 한국의 역사에서 자유가 처음으로 실현된 사건이었다.  영문학을 전공한, 그래서 삶에서도 시에서도 자유의 개념을 분명히 알았던 김수영은 바로 이 점을 자신의 시에 담는다. 그리고 그 성공 여부를 판단하기 전에 시를 마감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판단은 지금껏 내려지지 않았다. 김수영의 시는 자유의 완성을 향해 나가는 어떤 정신의 움직임이었고 그의 문제 제기에 한국시가 답을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움직임은 그대로 한국시의 유산이 되어 지속되었다. 7-80년대를 갈랐던 참여와 순수 양쪽에서 그의 후계자임을 자처한 것이 그런 징후이고, 그것은 그의 시가 완성이 아니라 과정에 있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김수영에게 빚지고 있는 이 양대 산맥이 한국시의 지형을 결정지은 것이라면 이후 한국시는 김수영으로부터 벗어나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일이 시의 발전을 이루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의 시를 완성하는 것임은 자명해진다. 한국시는 김수영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났는가? 이것은 시의 물음이면서 동시에 현실의 물음이다. 시는 현실이고, 김수영의 시는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7)뿌리뽑힌 자의 길, 신경림  신경림의 시에 길 이미지가 유난히 많이 나온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길은 사람이 다니는 곳이다. 그러니 한 곳에 머물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시선은 농촌에서 도시로 옮아왔다가 다시 자신의 문제로 돌아왔다. 농촌의 풍경을 묘사하는 화자도 역시 대부분 뿌리뽑힌 떠돌이의 시각을 지닌다. 그리고 이후는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시의 행로 전체가 길과 맞물린 것까지는 좋은데, 그 원인이 자신의 방랑벽에 있지를 않고 사회의 변화에 있다는 점이다. 농촌이 붕괴되면 자연히 사람들은 도시로 몰리고 도시는 도시대로 농촌은 농촌대로 격심한 변동을 겪는다. 신경림의 시는 바로 그 점을 잘 잡아내고 있다.  농자천하지대본은 우리 사회의 수 천 년 약속이고 근거였다. 그런데 그 근거가 무너지는 지점이 근대이고, 그 근대의 한 복판에 시인이 서있으며, 그 붕괴의 완성은 1994년 우르과이라운드 타결이고, 현재는 그 지진의 여진이 남은 자들의 삶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상태이다. 바로 이 변화를 그의 시는 잘 보여준다. 그의 시는 방법론에서도 분명하다. 철저하게 묘사 중심으로 시를 이끈다. 그래서 자칫 흥분하기 쉬운 내용도 냉정한 시각으로 돌아보면서 자신을 성찰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변혁 운동과 연계된 시들이 필요 이상의 목소리를 내면서 독자로 하여금 등을 돌리게 만든 것과는 달리 신경림의 시는 자신의 내면 성찰까지 연결시켜서 육화된 사상의 한 정점을 보여준다. 방법의 일관성은 지키기 대단히 어려운 일이고, 그것을 지킨다는 것은 큰 시인한테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일이다. 그 방법 속에 무엇을 담느냐는 시인의 몫인데, 그는 자신의 선택에 충실한 경우이다.  8)노동해방의 진군나팔, 백무산  자본이 발생한 이래, 노동 해방은 인류의 가장 큰 숙제가 되었다. 그것은 소수의 독점을 다수에게 돌려준다는 명제인 만큼 소유가 유발하는 투쟁의 한 복판에 시가 서게 됨을 말한다. 우리 나라에서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은 1920년대의 카프 운동과 1980년대의 현실 참여 논쟁이다. 해방 전의 운동은 냉전으로 이상하게 종식되었지만, 1980년대의 문제는 여전히 남한 문학의 숙제로 진행 중이다. 백무산은 그 가운데서 가장 두각을 드러낸 시인이다. 물론 그 직전에 박노해가 있지만, 노동해방의 진의에 비추어 볼 때 백무산이 한 단계 더 높은 곳에 있다.  사회 운동의 일환으로 시를 파악할 때 시는 선전선동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해방 전의 카프 시인들이 쓴 작품을 보면 카프 시의 대표라고 칭찬 받은 임화마저도 형편없는 시들을 써댔다. 이것은 시인들의 능력이 없는 것도 한 이유겠지만, 그들이 시에 대해서 갖고 있는 생각이 다른 시인들의 생각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노동 투쟁의 현장에서 선동을 잘 하는 것이 시의 본 임무라고 보는 시인들에게 무슨 수사가 필요하고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러나 백무산의 시는 이런 단계를 넘어서 성숙한 노동자들의 정신을 대변할 수 있는 아름다운 모습까지 갖추었다. 목적이 있지만, 그 목적 때문에 의상을 상하지 않고 오히려 의상을 잘 차려입음으로써 그 목적마저 빛나게 하는 성취를 이룬 것이다. 노동 문학의 단계를 한층 끌어올린 그 정점에 백무산이 서있다. 노동 해방의 현장에서는 계속 같은 이야기의 시가 반복되겠지만, 백무산은 그런 이야기들의 정점에서 새로운 해방을 향해 나아가는 세력에게 희망을 노래하는 진군나팔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9)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은 시인, 기형도.  철학 쪽에서 사회학 쪽으로 옮겨간 개념 중에 '소외'라는 것이 있다. 쉽게 말하자면 주체의 왕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체가 주체 밖의 조건에 의해 따돌림당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마르크스 쪽으로 오면 만든 물건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그 물건의 노예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 왕따가 정신의 영역이든 사물의 영역이든 현대 사회의 가장 흔한 징후가 되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다.  그런데 그런 문제점을 개인의 생활 속에서 가장 처절하고 철저하게 보여준 경우가 기형도이다. 기형도는 이 문명을 흉기로 파악한 듯하다. 그리고 그 흉기 앞에 스스로를 내맡겼다. 말하자면 난도질당하는 자신을 관찰하면서 그것을 시라는 양식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 점이 참 불사사의한 일이다. 한 인간이 삶에 대한 자신의 욕구와 본능을 포기하고 그런 자세로 세상을 살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 만큼 그는 이 문명의 폐해 앞에 정면으로 서서 그것을 자신의 내면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이상하게도 욕망의 가장 강력한 의지인 '표현'을 했다. 자신을 죽음의 아가리 속으로 내던진 자가 이 점마저 포기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 시에 나타난 상황을 보면 죽음에 대한 어떤 의지, 말하자면 그것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욕망 같은, 것들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 역시 기형도한테서 느끼는 두 번째 불가사의이다.  그렇다고 죽음을 어떻게 해보자고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런 가운데 그의 시에서 줄기차게 느끼는 정서는 외로움이다. 그것도 뼈저린 외로움. 그런데 외로우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짓을 하기 마련인데, 그의 시에서는 별로 그런 기미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그 뼈저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관찰하고 관조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의 시가 그리는 냉정한 묘사의 이면에는 그런 것이 엿보인다. 바로 이 점이 아무나 따를 수 없는 부분이다. 뼈저린 외로움이 아니면 도달할 수 없는 것. 그것이 삶이든 시간이든 현실이든 사상이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을 황폐한 쪽으로 몰고 가는 문명이 나를 에워싸고 있는 한 이 뼈저림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외는 이 문명의 구조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형도 이후 한국시에서는 외로움을 말하지 말 일이다. 젊은 시인들로부터 시작되어 중견시인들까지 가세한 최근의 '곶감 빼먹기 파' 모두 합쳐봤자 기형도 높이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그는 외로워서 죽은 사람이다. 죽은 척하는 자들하고는 근본부터가 다르다. 기형도 이후 새로운 시의 방향은 송찬호의 시에서 희미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송찬호는 지금 새로운 방향만 바라보며 그대로 멈추어있다.  10) ?  지금까지 아홉 명을 소개했다. 마지막으로 한 명을 더 결정하려고 할 때 언뜻 떠오른 시인은, 윤동주, 한용운, 백석 같은 옛 시인들 말고도 시삶일여(詩-一如)의 문정희, 해골빛 자기 관조의 최승호, 숙명의 그물을 드러내려는 송찬호, 밑바닥 훑기의 김신용 등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시에서는 무언가 2% 부족이 느껴진다는 생각을 끝내 거둘 수 없었다. 나머지 2%를 채울 때까지 기다려 볼 일이다.  게다가 나머지 한 명까지 결정해버린다면 스스로 우리나라의 최고라고 생각하던 많은 시인들이 실망할 것 같아서 마지막 한 칸은 비워두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독자 여러분이 나머지 한 명을 채우기 바란다.  3.맺으며  시집 뒤에 붙어있는 해설을 읽다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해마다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해설의 내용은 훌륭한 시인을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정작 노벨 문학상은커녕 외국에 우리 시의 현황을 제대로 알릴 기회조차 없는 것이 엄연한 우리의 현실이다. 그런데도 해설에 훌륭한 시만 나타나는 것은 해설가의 능력이 너무 탁월한 까닭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정실비평이 판을 치고 있다는 결론에 지나지 않는다. 장사도 잘 안 되고 읽을 사람도 별로 없는 판국에 좀 그럴 듯하게 설명한들 어쩌랴 싶은 생각도 들 수 있다는 동정론에 동정을 표하고 싶은 바가 없는 것은 아니나, 좀 더 길게 내다보면 그런 동정론과 정실비평이 결국 자신이 들어갈 무덤자리를 파는 짓이 된다는 것은 정신을 차려도 될똥말똥 한 디지털 시대 앞에서 단순한 기우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시가 현실을 직시하는 자리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솟구친 정신이 이루는 우람한 산이라면 이런 동정론은 시인들에게 현실에 안주하도록 하는 달콤한 속삭임에 지나지 않는다. 속삭여주면 좋아하는 자들은 소인배들이다. 소인배들의 특징은 자신만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칭찬을 좋아하는 것이고, 그들의 허영심에 맞장구를 쳐주는 자들이 있을 때 시는 가서는 안 될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 결과는 그들만의 몰락이 아니라 전체의 몰락에 이른다는 점이 사람 사는 사회의 속성이다. 이 사실을 시인들만이 모를 까닭이 없다.  세상에 칭찬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칭찬과 아첨을 구별하지 못하는 자에게 칭찬이란 복어의 맹독과도 같다. 복용한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독을 뿌려 감성의 싹을 말려버린다. 그러니 자신에게 돌아오는 쓰디쓴 말을 넉넉히 받아들여 자신의 시에 발전의 원동력으로 활용할 줄 아는 것이 진짜 시인의 태도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는 쓴 소리 비평이 너무 없다. 쓴 소리를 하면 그것을 인신공격으로 받아들이는 의식의 후진성이 그런 풍토를 만든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그 자리에 주저 물러앉는 것은 늪에다가 돗자리를 펴는 것과 같다. 자신에 대한 채찍만이 한국시의 구원이 될 것이고, 그것이 바닥 없는 질퍽한 현실로부터 저 고고한 정신의 산으로 솟구치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이다. 여기 10 봉우리처럼.     
97    시집 1000권 읽기 25 댓글:  조회:2076  추천:0  2015-02-09
  241□즐거운 일기□최승자, 문학과지성시인선 40, 문학과지성사, 1984   좀 경망스럽다. 그 경망스러움은 불필요한 과장에서 나오고 불필요한 과장은 내가 보고자 하는 세계 밖에도 내가 알 수 없는 세계가 있음을 짐작하면서도 그러한 짐작에 대해 스스로 외면을 하고 내가만 아는 세계로 용감하게 나아갈 때 생긴다. 그러나 내가 그쪽으로 나아가도 내가 나가지 못한 곳에 나와는 다른 세계가 있음을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안다. 외면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안다. 그러나 가수는 신념만으로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나의 신념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내 신념이라고 굳게 믿는 오만이 때로는 필요한 법이다. 그 문법에 충실한 시집이다.   이때 가장 큰 문제는 그 문법이 내 삶에 굳건히 뿌리내리지 못하고 허공에 떠있게 된다는 사실이다. 마치 잘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말이다. 해골이 신사복을 입은 형국이다. 관념이 여과를 거치지 않은 채 마구 쏟아진다. 그것을 새로운 형식이라고 우긴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흉하다고 꼬집어주는 벗들이 없기에 더욱 문제인 것이다. 기형도한테서 한 수 배우면 좋을 텐데, 그렇게 되면 시를 쓸 밑천이 남지 않을 것이다. 같은 얘기가 계속 반복되는 것을 보면 이제 한 번 옷을 갈아입어야 할 때가 왔다. 그리고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에 눈을 주는 노력이 필요할 때다. 큰 것 때문에 작은 것을 잃는 일을 이미 많이 해왔기 때문이다. 한자는 가장 먼저 벗어야 할 옷이다.★★☆☆☆[4336. 12. 2.]   242□우리 이웃 사람들□홍신선, 문학과지성시인선 39, 문학과지성사, 1984   시의 참맛을 아는 시인이다. 무엇보다도 시가 어떤 발상에서 나와서 어떻게 형상화되어야 하는가를 아는 시인이다. 그런 시인은 대개 게으른데, 이 시인은 그러면서도 아주 꼼꼼하고 성실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글자 한 자 놓치지 않고 그것이 이미지와 잘 맞도록 조탁한 흔적이 역력하다. 비슷비슷한 내용으로 시를 쓰다보면 발상이나 이미지 전개 수법도 일정한 틀을 보이게 마련이어서 그와 함께 시인의 능력도 대충 드러나는데 워낙 성실하게 작품을 다듬고 만들어서 그러한 타성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놀라운 일이다.   안타까운 것은 세계에 대한 비전이 없어서 이 뛰어난 재능과 성실로 보여줄 세계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지금 보여준 세계는 이러한 기교로 보여주기에는 너무 하찮은 것들이다. 이것은 시인을 탓해야 할지 시대를 탓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시대는 늘 있어온 것이니 시인 자신의 탓이라고 하는 것이 옳은 일이리라. 이 꼼꼼함과 성실함이 한자를 허용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4336. 12. 2.]   243□살풀이□홍희표, 문학과지성시인선 34, 문학과지성사, 1982   두 가지가 눈에 띈다. 풍자의 어조와 운율. 연을 나눈 시가 많은 가운데 각 연이 어떤 운율을 지향하는 것이 눈에 뚜렷이 드러난다. 운율 때문에 이미지가 잘 살아나지 않는데 이것은 운율이 그만큼 강하게 시를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변화는 제법 있지만 주로 2음보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 2음보는 상당히 무거운 음보이다. 무거운 음보에 실리는 세계는 스케일이 큰 것이어야 잘 어울린다. 그런데 이 음보의 무거움이 풍자와 야유로 연결되고 있어서 묘한 불협화음을 낸다.   세계를 보는 시각이 세계의 저편에 대한 탐구도 들어있지만 주로 이 세계를 구성하는 것들에 대한 풍자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운율보다도 이 풍자의 태도를 읽는 데 온 신경이 쏠린다. 태도와 운율이 서로 간극을 보인 채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보는 운율의 움직임이다. 한자는 풍자에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운율에는 쥐약이다.★★☆☆☆[4336. 12. 2.]   244□시간은 이미 더 높은 곳에서□장영수, 문학과지성시인선 28, 문학과지성사, 1983   어떻게 쓰면 시다운 것으로부터 멀어질까 하는 고민을 갖고 쓴 시들 같다. 시가 늘어지고 자신의 문법을 어그러뜨리는 것은 시인의 의도 때문이다. 그 의도가 그럴만한 어떤 이유를 일그러진 시 안에서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의 주제는 자신의 체험이고, 그 체험들이 일반화되기 어려운 것들도 있다. 시는 자신만의 체험에 의존하지만 그렇더라도 거기서 나온 시는 독자가 지닌 감성의 안테나를 건드려 반응하도록 해야 한다.   만들어 놓는 데에만 의미를 찾는 것은 들어와 살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는 집짓기와 같다. 그것이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건축사가들의 몫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들어와 사는 것은 현실이다. 그 현실이 어디인가를 이 시는 말하지 않고 있다. 이것을 말하려면 시의 출발점을 정해야 한다. 그것이 현실 속이냐 나의 관념 속이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시가 어디서 출발하는 갈래인가 하는 근원에 대해 고민해야 할 일이다. 시에 산문의 진술을 남기는 것은 잘 정돈된 침실에 흙 묻은 군화발로 들어서는 것과 같은 일이다. 한자는 문설주에 남은 흙덩이 같은 것이다.★☆☆☆☆[4336. 12. 2.]   245□이 시대의 아벨□고정희, 문학과지성시인선 30, 문학과지성사, 1983   중무장한 전사의 날렵한 몸매가 연상되는 시들이다. 적들도 분명하고 나의 목표도 분명하다. 공격을 하기 위해서 펼치는 전략도 좋고 전술도 좋다. 무엇보다도 힘찬 기세가 보기 좋다. 어떤 벽도 뚫어버릴 듯한 의지와 투지가 시 전체를 맹렬하게 불타오르게 하고 있다. 하고자 하는 말의 의지 때문에 시가 길어지는 흠이 있지만, 그런 흠조차도 작은 티끌로 만들  만큼 주제가 강렬하다. 강렬함은 형식을 뭉갠다. 그 과정에서 운율이 전면으로 떠오르는 양상이 이루어지는데 남도의 구성진 가락이 연상된다. 한 시대의 절실한 문제가 개인의 정서에 이렇게 깊이 드리울 수도 있다는 것이 놀랍다. 그런 세계관 속에 한자가 낑겨있다는 것은 참 이상하다. 근데 이 시집이 왜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왔을까?★★☆☆☆[4336. 12. 2.]   246□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마종기, 문학과지성시인선 55, 문학과지성사, 1986   시에서 외로움이 물씬 묻어난다. 이것이 시를 만든다. 잃어버리지 못하는 작은 꿈들이 어둠 속으로 사뿐히 날아올라 별빛을 낸다. 그러니 그 별빛은 그리움의 산화일 뿐, 산화에 어찌 형식이 필요하겠는가? 형식이 필요하다면, 그래서 끝내 시인으로 남고자 한다면 사물의 내면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자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4336. 12. 2.]   247□결혼식과 장례식□김영태, 문학과지성시인선 54, 문학과지성사, 1986   물렁한 고무푸대 안에 알 수 없는 짐승이 하나 들어있다. 그 짐승이 움직일 때마다 고무푸대의 가장자리가 이리로 몰렸다 저리로 몰렸다 한다. 그 고무푸대는 시인데 가장자리가 미술로 갔다가 연극으로 갔다가 쌍욕으로 갔다가 저잣거리로 갔다가 하늘로 솟았다가 뒷간으로 갔다가 어지럽다. 시가 이리로 쏠렸다가 저리로 쏠렸다가 하는 바람에 그 안에 든 짐승도 상처받고 시도 상처받는다. 고무푸대의 중심에 대해서 말하자면, 시의 영역을 넓히는 것과 갈래의 어중간한 곳에 서있는 것하고는 다른 것이다. 연극이 아니라면 연미복을 입었을 때는 언행도 연회 분위기로 맞추는 것이 좋을 듯하다. 연미복에 육두문자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 한자는 연미복에 묻은 흙자국 같다.★★☆☆☆[4336. 12. 2.]   248□프리지아 꽃을 들고□권혁진, 문학과지성시인선 65, 문학과지성사, 1987   시가 모든 장식을 버리고 짧아질 때는 무기로 쓰일 때다. 그때는 창칼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창칼은 극도로 짧기 때문에 급소를 정확히 찔러야 한다. 그리고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끝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자살행위이다. 급소를 정확히 찌르지 못 했다면 그것은 무기를 잘 못 고른 것이다.   이 시집에서는 급소가 아니라 허벅지를 찔렀다. 결국 형식을 잘못 선택한 것이다. 이렇게 짧을 경우 그 짧은 시 속에 들어있는 것은, 그것이 형식이든 내용이든 독자의 눈에 닿는 순간 보석처럼 빛을 발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 있는 시들은 몇 편을 빼놓고는 흐리멍덩하다. 인식의 단련이 덜 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방법을 잘못 선택한 경우가 되겠다. 그래서 시의 소재를 나열해놓은 꼴이 되었다. 시를 쓰는 방법은 대개 살을 붙이는 경우이지만, 이 경우는 살을 빼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시집에 실린 모양새를 보면 반대로 나아간 것이다. 한자 역시 칼날을 무디게 한다.★☆☆☆☆[4336. 12. 2.]   249□지리산의 봄□고정희, 문학과지성시인선 64, 문학과지성사, 1987   신들린 무당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신의 목소리가 된다. 마치 신들린 무당처럼 이 시인의 손끝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은 관념어, 추상어를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시로 쏟아져 나온다. 이것은 정신의 승리 때문이다. 정신이 옹골차게 빛나는 사람한테는 언어가 조아리며 다가간다. 다가가서는 순한 강아지처럼 그의 지휘를 받는다. 이상한 일이다.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난다. 김남주나 김수영 같은 경우가 그렇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그런 시를 본다. 이미지들도 그렇고 논리의 비약이나 지루한 말들도 그렇고 모두 위태위태한데, 그 위태위태함을 넘어서 묘하게 시로 살아난다. 이것은 정신이 형식을 끌고 가기 때문이다. 작두날 위에 올라선 무당에게는 모든 존재를 한 몸짓으로 휘어 감는 이상한 힘이 있는 법이다. 이 시집에서는 불굴의 의지가 불타오르고 있는데, 그 중간 중간에 이상하게도 죽음의 그림자가 물씬 드리워져있다. 관념으로 표상된 죽음이 아니라 삶을 밀어 올린 죽음의 실제이다. 곳곳에서 옆구리 터지듯이 설명이 맨살로 드러나고 있지만, 한자까지 깔끔하게 청산한 세계의 박동이 우렁차다.★★★☆☆[4336. 12. 2.]   250□물구나무서기□최석하, 문학과지성시인선 63, 문학과지성사, 1987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이 우선 아주 독특하다. 인식이 그런 정도로 남다른 특색을 띠면 필연코 그런 특이성으로 인해 기존의 시 형식을 깨고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내게 된다. 그런데 이 시집들은 너무나 충실하게 기존의 시 형식을 고수하려고 하고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인식의 특이성은 세계에 대해 할 말이 많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할말이 많은 바를 기존의 시 형식에 담으려고 하면 반드시 이야기를 동반하게 되고 시가 그 때문에 길어진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식의 새로움이 끝까지 지탱되면 문제가 커지지 않지만 새로움의 강도가 점차 떨어지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넋두리로 변하는 것이다. 이 시집의 후반부로 갈수록 이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설명과 이야기가 시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어서는 시가 성공할 수 없다. 따라서 이야기를 하되 산문의 어법이 갖는 무거운 발걸음을 버리고 시의 산뜻한 발걸음을 유지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 이런 류의 시를 살리는 대안일 것이다. 한자는 발걸음조차 무겁다.★★☆☆☆[4336. 12. 3.]    
96    시집 1000권 읽기 24 댓글:  조회:2196  추천:0  2015-02-09
  232□제주바다□문충성, 문학과지성시인선 12, 문학과지성사, 1978   상상의 가벼움과 상상력의 진지함에 대해서 생각할 시집이다. 진지함은 무겁다. 그러나 그 무게에 매달리면 상상은 풀리지 않는다. 나비처럼 가벼운 동작으로 날아오르는 것이 상상이다. 제주도가 지닌 상징성은 시에서 무한정으로 클 수 있다. 그리고 그걸 의도한 듯 시집 곳곳에서는 제주의 정서와 이미지가 등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특수성이 시로 승화되려면 그 특수성을 감쌀 수 있는 보편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조건에 상상의 가벼움이 사물과 접촉하여 나비를 날릴 수 있는 순발력까지 갖추어야 한다. 한 번 더 허물을 벗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끝까지 남는다. 소재를 선택하는 것과 그것을 시발점으로 시상을 풀어 가는 노력과 집착은 대단한데 상상력의 무게를 상상의 가벼운 몸짓이 끌고 올라가지를 못하고 있다.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제주에 대한 집착을 끊던가 역사의 고리를 잡던가. 그래야만 상상력이 제자리를 잡을 것이다. 제주의 특수성에 대한 천착은 그 다음의 과제일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한자는 도움이 되지 않을 돌덩어리이다.★★☆☆☆[4336. 12. 1.]   233□메이비□장영수, 문학과지성시인선 11, 문학과지성사, 1977   과장되지 않게 사물을 보고 한 사물에 집착하여 그 내면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이 가상하다. 그런데 방법상에서는 아직도 혼돈을 겪고 있다. 주로 보여주기 수법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지만, 말 그대로 줄거리를 가진 것들이 특별한 장치의 여과 없이 그대로 보여지거나 설명으로 대신하려는 듯한 구절들이 많다. 대개 이것은 주제가 빈약한 데서 오는 경우가 많다. ‘메이비’ 같은 작품이 그런 애매함을 말끔히 걷어내고 선명한 이미지로 다가오는 것과 비교하면 다른 작품들의 한계가 저절로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연작들이 일부만 제시되는 것도 문제가 된다. 시는 원래 한 몸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존재하지만 생각의 고리가 연결되어 있는 경우, 앞의 것이 뒤의 것을 이해하는 전제가 되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자는 도움이 안 된다. 한자는 내용이 애매한 것을 더욱 애매하게 만드는 수가 많다.★★☆☆☆[4336. 12. 1.]   234□무지리 사람들□정대구, 문학과지성시인선 49, 문학과지성사, 1986   무엇보다도 시를 아는 시인이다. 크지 않은 목소리로 결코 과장이나 허세를 부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시의 한계까지도 잘 아는 시인이다. 한계를 알 때 경건해지고 겸손해진다. 지금까지 읽은 시들 가운데에는 이것을 아는 시인이 너무 적었다.   그러나 그 한계를 안다고 해서 그 한계에 주눅이 든 것은 그 한계를 아는 것보다 더 큰 병폐이다. 한계를 알고 그 한계를 뚫으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진짜 시인 것인데, 몸부림까지 가지를 못하고 그냥 그 한계 안에 머물러있다. 그것이 안타깝다. 나이 탓만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시 전체의 내용에는 나이 문제가 들어있지만, 시에서는 나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계에 구애되지 않고 시의 형식조차도 버릴 줄 아는 과감성과 신념이 필요하다. 그 출발점은 지금 서있는 그 자리이다. 삶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 문이 열린다. 끈기가 필요한 일이다. 한계 앞에서 스스로 무너지지 않는 끈기. 드문드문 섞인 한자는 제일 먼저 넘어야 할 한계이다.★★☆☆☆[4336. 12. 1.]   235□악어를 조심하라고?□황동규, 문학과지성시인선 53, 문학과지성사, 1993   시대가 복잡할수록 시인은 말을 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리고 그런 시들이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말이 세월의 침식을 견디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것은 산문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시에서 말을 하려 하면 반드시 그 말이 거느린 배경이 필요하게 마련이고, 그 배경 때문에 반드시 이야기가 나오게 되며 이야기는 산문의 것이기에 시로서는 보통 부담이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 시집에서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 이야기는 산문으로 떨어지지 않고 시의 긴장 속으로 아슬아슬하게 솟아올랐다. 아마도 그 커다란 구조가 시집 전체를 건지고 있다. ‘풍장’ 연작은 압권이다. 어쩌면 이 풍장이 후배 시인들에게 한 벽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집 전체의 정신에 투철함은 있을지언정 처절함이 없다. 그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죽음의 문제는 늘 개인의 것이지만, 죽음이라는 사건은 개인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굳이 남의 이야기를 죽음에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죽음이 갖는 어떤 그늘에서 사회의 영향이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는 것은 폭이 좁은 시인의 시각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 좁은 폭이 깊이를 만들지만, 정말 깊은 깊이는 넓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좁게 쌓기 시작하면 높이 쌓을 수 없듯이 좁게 파기 시작하면 깊이 들어갈 수 없다. 그것은 공법의 문제이지만, 공법도 어느 한계가 있는 법이다. 도는 돈오로 온다. 돈오는 걸림이 없어야 한다. 어느 한쪽으로 걸려있으면 활연(豁然)하지 못하다. 한자는 깨달음의 한 장벽이다.★★★★☆[4336. 12. 1.]   236□그림자 없는 시대□이영유, 문학과지성시인선 47, 문학과지성사, 1987   풍자가 사회의 내면을 울리지 않고 겉면만을 흔들면 초라하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더라도 그것이 사회의 어떤 의식을 향한 집중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집중 속에는 무엇이 나와 내가 담긴 사회를 이끌고 가는가 하는 근본에 대한 물음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야유에 그치고 나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편에 그칠 뿐이다. 아버지에 관한 문제라든가 한국인의 특성에 관한 문제를 파고드는 것은 방향도 잘 잡았고, 깊이도 어느 정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의 근본을 이루는 그 어떤 것에 대한 성찰이 아직 잡히지 않는다. 말하자면 아직 덜 들어간 것이다. 덜 들어간 상태에서 야유를 하면 쾌감은 있을지언정 적들은 꿈쩍도 않는다. 적들은 의외로 강하다. 그들의 생리를 간파하는 것이 공격의 첫 조건이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 이 시집의 큰 맹점이다. 그리고 빙글빙글 돌려 말하는 것은 풍자가 아니라 회피이다. 회피도 풍자의 일종이지만, 약간 다르다. 그 색깔을 빨리 알아채는 것이 중요하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내내 김수영이 생각났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4336. 12. 1.]   237□전쟁과 평화□이기철, 문학과지성시인선 43, 문학과지성사, 1985   시인은 수리나 매와는 달라서 너무 높이 떠있으면 지상의 작은 물건들이 보이지 않는다. 시인의 조리개는 매의 그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너무 높이 올라가면 뜬구름 잡기가 된다. 바로 이 시집이 그렇다. 큰 구도와 아름다운 말들을 잘 꾸몄지만, 그러한 뜬구름들이 발원하는 작고 미세한 것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전쟁이라고 하는 거대한 구름은 지상을 덮고 있지만, 그것을 걷는 방법은 해를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해를 노래하기보다는 구름의 분자를 분석하여 강제강우를 실시하는 것이 더 빠를 수도 있다. 아니면 구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던가. 구름은 우리 집 앞을 흐르는 개울에서 생긴 안개가 다른 곳의 안개와 뭉치면서 생기는 것이고, 그 가벼움이 폭풍우를 만나서 빗방울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 순환의 원리를 깊이 살펴보아야만 구름에 대한 해결책이 보인다. 드물게 섞인 한자는 구름인가 평화인가?★★☆☆☆[4336. 12. 1.]   238□대꽃□최두석, 문학과지성시인선 42, 문학과지성사, 1984   상징을 잘 이해하지만 시는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야기라고 선언한다고 해서 시의 법도를 무시할 권리까지 갖는 것은 아니다. 시에도 이야기가 있고, 이야기 시는 지켜야 할 매무새가 있다. 그 매무새는 딱히 이렇다고 정할 수는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상황에 대한 요약으로 그치지 않고 그것이 상징으로 승화해야 한다는 것과 이미지의 리듬을 타야 한다는 것이 요결이다.   이미지의 리듬이란 주제의 주변으로 초점을 몰고 가서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가 어렴풋이 떠오르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흩어져있던 이미지들이 어느 순간 그 주변에 한꺼번에 서려서 어느 순간 주제가 한 덩어리로 달려들듯이 머릿속에서 지펴지도록 하는 방법을 말한다. 골짜기로 파고 들어간 비행기가 어느 순간 하늘로 치솟으면서 그 밑으로 그때까지 보아온 모든 골짜기 풍경들이 내면까지 펼쳐 보이면서 한 눈에 들어오도록 하는 것과 같다.   무엇보다도 언어가 사물을 1:1로 지시하는 경직성을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이곳의 시들은 될 듯 될 듯하면서도 몇 편을 빼놓고는 그 수위에 이르지 못하였다. 대부분 잘 정돈한 쪽지소설(掌篇小說)이나 수필 수준이다. 그리고 시가 지향하는 방향과 한자는 서로 다를 듯한데, 봉건유산인 한자가 이따금 돋아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다.★★☆☆☆[4336. 12. 1.]   239□머나먼 곳 스와니□김명인, 문학과지성시인선 71, 문학과지성사, 1988   김명인 시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단단하고 복잡한 구조이다. 그 복잡하고 단단한 얼개 속에 인생의 깊은 깨달음을 걸어놓으면 시인의 내면 풍경이 그대로 살아나면서 그 이상의 것이 전해온다. 그런데 이번 시집에서는 그 단단한 구조에 비해 들어있는 내용이 알차지 못하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동두천”에서 느껴지는 구조에 담긴 정서가 동두천의 그것만큼 치열하지 못하기에 무언가 얼이 빠진 듯한 느낌이다. 새로운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으면서 옛날의 관성으로 작품을 쓰기 때문이다. 새로운 털갈이를 할 철이 온 것이다. 한자는 제일 먼저 갈아내야 할 털이다.★★★☆☆[4336. 12. 1.]   240□그리운 주막□박태일, 문학과지성시인선 41, 문학과지성사, 1984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태도가 맹목에 점점 가까워질 때 그 증상이 시에 드러나는 양상은 내용의 빈곤이다. 아름다움에 기운 마음 때문에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를 때도 있고, 한 가닥 실낱같은 내용이라도 있어서 그 아름다움을 버텨준다면 그 때는 용기 있게 밀고 나간다. 이 시집이 그런 지경에 와있다.   그러나 시의 아름다움은 낱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낱말이 이미지의 근원이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가 아름다울 수는 없는 것이다. 언어들이 만나서 이루는 조합이 아름다우려면 그것을 그렇게 하는 사람의 마음이 아름다워야 하며, 그 아름다움은 혼돈 속의 질서정연함과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본 뒤의 심리변화를 언어에 실어내는 능력에 딸린 것이다.   이 시집의 시들은 대부분 내용의 빈사상태에 있다. 풍경을 묘사할 때도 그것이 대상을 담거나 정서를 환기시켜주어야 하는데, 곳곳에서 난조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런 원인은 대부분 자신이 직접 뛰어들어서 캐낸 조개가 아니라 부둣가에서 일하는 아줌마들의 손에 들어있는 조개를 보는 태도에 있다. 그 거리가 내용의 빈곤을 낳고 이미지의 몽롱함을 낳는다. 높이 살 만한 것은 각주처리를 해서라도 한자를 배격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그런 태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낱말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일이다. 시는 낱말과 낱말 사이에 있다.★★☆☆☆[4336. 12. 2.]    
95    시집 1000권 읽기 23 댓글:  조회:2097  추천:0  2015-02-09
  221□나무는 즐겁다□송욱, 오늘의 시인총서, 민음사, 1978   글쎄, 그때 당시에 보면 좀 신선해 보였을지 모르나, 20년도 한참 넘은 지금 보면 겨우 습작기를 지났을까 말까 한 수준이다. 우선 쉬운 말을 어렵게 하는 것이 시라는 잘못된 생각이 곳곳에 보이고,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결합 관계가 너무 가까워서 민망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민망함을 덜려고 과장된 제스쳐를 취하지만, 그건 더 민망하다. 그리고 그나마 독자들이 이해하지 못할까 보아서 불안했는지, 바로 뒷구절에서 설명해주고 마는 경우가 많다. 더 문제인 것은 시가 노래할 것이 무엇인가를 모른다는 사실이다. 역사의식이 없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문학을 무슨 진열장 속의 장식을 보는 일이라는 어이없는 설정까지 해놓고 만다. 그러니 제대로 된 치열한 정신의 불꽃이 시에 당겨질 리 만무하다. 한자는 씻지 못할 얼룩이고, 김현이 붙인 해설은 꿈보다 해몽이다. 가당찮은 일이다!★★☆☆☆[4336. 11. 28.]   222□나를 깨우는 우리들 사랑□정인섭, 문학과지성시인선 21, 문학과지성사, 1981   방향은 잘 잡았는데, 운전실력이 영 시원찮다. 말들이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자신을 죽이고 전체의 질서에 순응해야 하는데, 말들이 행마다 자기 갈 길을 주장하고 나서서 전체의 뜻이 잘 전달되지 않는 경우에 해당한다. 이것은 어눌함이라 하겠는데, 그 어눌함이 시에서 꼭 필요한 요소라면 좋겠지만, 여기서는 그 어눌함이 독자들의 이해를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이지미가 어디서 어떻게 촉발되어 다른 이미지로 건너가고 그런 건너뜀이 의미를 어떻게 싣고 가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을 심각하게 해야 할 시집이다.   그리고 주제도 정말 중요한 곳까지 깊이 도달하지 못하고 정작 해야 할 말들의 주변에서 겉돌고 있다. 이 점이 사실 더 큰 걱정거리다. 그리고 이미지 문제도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풀릴 수 있는 문제이다. 아니 갈 거라면 모르되 이왕에 나선 길이라면 인식의 칼을 좀 더 날카롭게 벼려야 할 일이다. 한자는 그 길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4336. 11. 29.]   223□작아지는 너에게□홍영철, 문학과지성시인선 25, 문학과지성사, 1982   시가 주제 없이 이미지만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꿈이라는 것을 이 시집은 보여준다. 무언가를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는 순간 말들은 긴장을 잃는다. 긴장을 잃은 말은 어디서 서술어를 마감해야 할지 그것을 몰라서 갈팡질팡한다. 그렇다고 자유롭게 흐르는 연상작용을 따라서 자신의 진폭을 펼쳐 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저 주변의 그럴 듯한 이미지들을 동원하여 홀로 설 수 없는 이미지의 외로움과 서러움을 달랠 뿐이다. 이미지들이 자신의 존립을 견디기 위하여 희박한 의미들을 끌어당기는 애처로운 상황이 곳곳에서 벌어진다. 이것은 애초에 시에 의미를 두려 하지 않는 의도에서 나온 숙명이다. 이 숙명을 시집은 원죄로 안고 있어서 끝내 그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끝내 독자에게 보여줄 것이 없다. 무엇을 써야 하는가 하는 것부터 고민할 일이다. 의미 없는 세계에 의미를 강요하는 한자가 끼어 든 것은 더더욱 이상하다.★☆☆☆☆[4336. 11. 29.]   224□섬에서 부른 마지막 노래□문충성, 문학과지성시인선 20, 문학과지성사, 1981   시를 쓰는 마음이 허황하지 않다는 것이 우산 살 만한 일이다. 자신의 삶 주변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모든 것을 시로 만들려는 마음이야말로 시인의 마음이다. 특히 특정 지역을 염두에 두고 이런 작업이 진행된다면 그것은 시의 새로운 경지를 열 수 있는 특이한 환경이 되기도 한다. 그것을 그렇게 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것은 시인의 재능이다.   그런데 이 시집의 대부분이 갖는 한계는 일상 속에 파묻혀서 일상의 그늘을 극복하지 못 한다는 점이다. 일상의 애환을 시로 다룰수록 시인의 정신은 더욱 빛나서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닌 것을 찾아내어야 한다. 그래야 시에 생기가 돈다. ‘나팔꽃’ 연작 같은 수준만 되어도 좋을 뻔했다. 일상이 시의 중요한 출발점이지만, 그 중력으로부터 벗어나야만 일상을 돌아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구는 지구 밖에서 볼 수 있다. 지구 안에서는 지구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땅이 보인다. 땅만 보아 가지고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 수 없다. 일상과 시의 관계가 그러하다. 한자는 중력의 무게만 더할 뿐이다.★★☆☆☆[4336. 11. 29.]   225□불꽃놀이□박이도, 문학과지성시인선 26, 문학과지성사, 1983   이곳 저곳으로 눈 돌리지 않고 한 세계를 깊이 천착하여 꾸준히 밀고 가는 것은 보기에도 좋다. 그러나 시에 대한 고정관념이 시의 세계를 답답하게 만들고 있다. 방법 역시 고전 중의 고전이어서 다음 행과 다음 연에서 무슨 내용과 이미지가 등장할까 다 예상이 될 정도다. 이것은 세계에 대한 인식이나 방법이 상투화되어서 독자에게 새로움을 주기 어렵다는 뜻이다. 새로움이 없으면 시는 쓰나마나 한 것이다. 그 새로움은 내용이든 형식이든 인식에서 오는 것인데, 스스로 시의 함정과 범주에 빠져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다.   먼저 시에 대한 고정관념부터 버릴 일이다. 그리고 일상의 의미에 좀 더 치열한 정신을 작동시켜서 시삶불이(詩-不二)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시에다가 내 삶을 맞출 것이 아니라 삶을 먼저 열어서 그 안에서부터 시가 쏟아져 나오게 할 일이다. 한자가 섞이면 열렸던 삶조차도 닫힌다. 시의 언어에 오래도록 고민한 흔적이 있는 시집에서 한자가 서슴없이 등장한다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4336. 11. 29.]   226□또 다른 별에서□김혜순, 문학과지성시인선 17, 문학과지성사, 1981   장면 전환이 너무 빨라서 따라 읽기 숨찬 시집이다. 그것은 이 시인의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원관념 쪽에 서거나 보조관념 쪽에 서서 그 연관을 지워버리는 수법은 일견 새로운 방법인 것 같지만, 아주 구태의연한 방법이다. 그 구태의연함을 새롭게 하려는 시도는 높이 살 만하다. 그런 훈련을 거치고서 상징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때 중요한 것은 언어와 상황의 정확한 쓰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틀린 지식이 한 군데라도 발견된다는 것은 이러한 방법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장면 전환이 빠른 시일수록 아 다르고 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시집에서 방법을 너무 많이 바꾸는 것은 시인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빈약한 내용을 가리려는 유치한 방법이나 마무리를 덜한 것으로 충분히 오해받을 수 있다. 문제는 그러한 오해들에 대한 곡해이다. 시는 정신의 문제이다. 형식과 내용에 대한 변혁은 인식에서 오는 것이지만, 그것을 떠받치는 것은 정신의 치열함이다. 그리고 그 치열함은 진실 쪽에서 점화될 때 아름답게 타오른다. 그리고 타오름에 의미가 있다.   진실이 있느냐고 묻는 오만은 자신만의 진실 이외에는 모두 가짜라는 모순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그 모순을 시에서 드러낸다면 그것이야말로 미숙한 짓이다. 시에서 드러내지 않아도 독자는 그것을 알아낸다. 시 몇 편에 속아넘어가는 독자들 몇을 만나보고서 나머지 독자들까지 그럴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완전범죄를 꿈꾸다가 잡히는 똑똑한 범인들의 생각이다. 잡히지 않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애초에 죄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세상은 시 몇 편에 농락 당할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한자 역시 머지 않아 그러한 죄가 될 것이다.★★☆☆☆[4336. 11. 29.]   227□이 시대의 사랑□최승자, 문학과지성시인선 16, 문학과지성사, 1981  날카롭고 튼튼한 송곳이 하나 시집 속에 들어있다. 어느 벽이든 뚫리지 않을 수 없는 대단한 송곳이다. 그러나 송곳은 날만 가지고 쓰는 물건이 아니다. 자루가 있어야만 그 힘을 제대로 쓸 수 있다. 뚫어야 할 것이 관념의 벽이기에 손잡이의 모양새는 더욱 중요하다. 그 손잡이는 미래를 내다보는 힘이다.   이 송곳이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것을 고민해야 할 일이다. 송곳의 흐름과 어긋나는 시들이 들어있다는 것은 이 시집의 큰 취약점이다. 그러나 그것은 직유가 너무 많은 불편함에 비하면 그리 큰 것은 아니다. 직유는 날카롭기는 하지만 깊이를 갖기 어렵다. 조심해서 써야 한다. 이 모든 허점을 다 덮을 수 있는 것은 치열한 정신이다. 그리고 그 치열함을 퇴색시키지 않는 순수함이다. 한자는 송곳의 날을 무디게 할 뿐이다.★★☆☆☆[4336. 11. 29.]   228□예레미야의 노래□박두진, 창비시선 29, 창작과비평사, 1981   해방 전후에 쓰여진 앞의 시 몇 편을 빼면 특별히 볼 만한 작품이 없는 시집이다. 그러나 험난한 역사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그 분노를 시로 발언할 수 있는 정신은 시의 모자람을 덮고도 남는다. 남들이 다 늙어갈 때에 늙은 사람이 늙지 않은 정신을 갖는다는 것은 형상화의 문제 이전에 시인이라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이 되는 요건이다. 그 요건을 못 지키는 자들이 시인 행세를 하고 다니기에 모자람조차도 빛나는 것이니 이것은 이 시인의 뛰어남이기보다는 문단의 못남이 더 큰 증거이다.★★★☆☆[4336. 11. 29.]   229①□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이성복, 문학과지성시인선 13, 문학과지성사, 1980 230②□남해 금산□이성복, 문학과지성시인선 52, 문학과지성사, 1986 231③□그 여름의 끝□이성복, 문학과지성시인선 86, 문학과지성사, 1990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관계는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된다. 1:1 대응이 기본이 되기는 하지만 사물과 사물, 이미지와 이미지, 상황과 상황, 정서와 정서, 세계와 세계, 추억과 추억이 만나는 변화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시 발상의 고전인 것만은 틀림없다. 이미지의 흐름이 초현실주의 비슷한 분위기를 내기도 하지만, 위의 시집들은 이 같은 시 발상의 고전 형식을 고스란히 지키고 있다. 그래서 문제가 된다. 원칙에 너무 충실하기에 그 한계 안에 갇혀서 답답함을 주고 있는 것이다.   ①은 상황이 만든 원관념의 세계를 보조관념만으로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그 원관념이 현실 속이 아니라 과거의 추억 속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기에 시간과 공간이 뒤섞여서 겉으로 보기에는 혼란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이 혼란스러움은 방법의 혼돈까지 겹쳐서 독자들의 접근을 더욱 어렵게 한다. 그러나 사실은 시인으로서는 독자들을 배려하고자 한 흔적이 여기저기 보인다. 이것은 자신의 방법이 먹혀들지 않을까 보아서 불안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②와 ③에서는 그런 배려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시의 긴장은 ②나 ③보다 ①에서 더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러한 불안함이 보조관념을 어떻게든 원관념에 드리게 하려고 하는 성실함 때문이다. 따라서 ②와 ③은 방법상으로 보면 성실성을 결여한 오만한 태도에 가깝다. 이 오만함이 시의 성취로 이어지면 별 문제인데, 추억은 울궈먹을 수 있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이미 ①에서 울궈먹을 대로 다 울궈먹었기 때문에 ② 이후에는 동어반복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고, 그것이 시의 발상에서 나타나는 매너리즘과 결합하여 시의 긴장까지도 떨어뜨린 원인이 된 것이다. ②나 ③에서는 무언가 ①과는 분명히 다른 세계관으로 나아갔어야 했던 것이다. 삼류 유행가에도 다 들어있는 ‘사랑’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말만 가지고는 안 된다. 실천까지는 못 가더라도 개념이라도 만들어서 나아가야 그 그릇 안에서 시가 나오는 것이다. 말만 바꿔 가지고는 시가 되는 것이 아니다.   ②에서는 원관념을 버리고 보조관념만을 등장시켰기 때문에 그나마 ①에서 원관념에 드리우려던 연결의 긴장이 사라졌기 때문에 시가 매끄러워졌어도 늘어진 것이고, ③에서는 ②의 방법을 청산하지 못한 상태에서 같은 추억과 세계를 울궜기 때문에 원관념을 ‘당신’이라는 관념으로 대체한 것인데, 그래도 당신이라는 것 자체가 관념 덩어리이기 때문에 어떤 보조관념을 대체해도 시가 몽롱해진 것이다.   결국 방법의 문제이기보다는 세계관의 문제이다. 세계관을 그대로 두고서 방법을 바꾼들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매너리즘의 반복만이 남을 뿐이다. 정말 좋은 씨를 쓰는 것은 방법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뜯어고치는 일이다. 치열하지 않고서야 어찌 시인이라 하리오! 한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꽃이 되지 않는다.★★★☆☆[4336. 11. 30.]    
94    시집 1000권 읽기 22 댓글:  조회:1964  추천:0  2015-02-09
  211□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황동규, 문학과지성시인선 1, 문학과지성사, 1978   전에 읽을 때는 구조가 탄탄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근 15년만에 다시 읽어보니 탄탄한 게 아니라 딱딱하다. 이미지들이 의미의 고리에 단단히 묶여서 쥐죽은듯이 숨죽이고 있다. 이것은 시를 논리로 쓰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가 자꾸 사건화 하려고 하고, 많은 이미지가 동원됐는데도 시를 읽고 나면 잔상이 의미에 집중된다. 이것은 시집의 앞부분으로 올수록 더하다. 그리고 이른 시기에 쓴 뒷부분은 당시의 시대상황이 연상되는 구절과 분위기 때문에 어떤 암시성과 상징성까지 울림을 갖는데, 앞부분으로 올수록 그런 울림의 진폭이 적어진다.   생각건대 이것은 시가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의 강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무료한 일상에 대한 비판인지, 그 일상 속의 의미 찾기인지, 아니면 일상 건너편의 어떤 세계에 대한 동경인지 그것이 분명치가 않다. 이 모든 것들이 섞여있다. 결국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뚜렷한 신념이 없다는 얘기다. 이런 태도가 시를 모호하게 만들고 탄력을 잃게 만든다. 집이 크면 살기는 편하지만 썰렁한 게 흠이다.★★☆☆☆[4336. 11. 27.]   212□투명한 속□이하석, 문학과지성시인선 8, 문학과지성사, 1980   시각 설정의 통쾌한 승리라고 할 수 있겠다.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을 확고하게 정한 뒤의 아름다운 질서가 시집 한 권속에 오롯이 담겨있다. 너무 확고하다. 첫 시집이 갖는 몽롱함이 없고 너무나 당당하다. 그 당당함이 좋다. 광물질은 시의 소재로 꺼리는 것인데, 이러한 광물성을 가지고 문명의 중요한 측면을 끄집어내어 사람의 상상을 끌어들일 수 있는 능력은 대단한 힘이다. 그런데 소재를 몇 가지로 국한시키다 보니 답답한 것이 흠이다. 그러나 그 속으로 깊이 파고드는 능력은 놀랍다.★★☆☆☆[4336. 11. 27.]   213□무인도를 위하여□신대철, 문학과지성시인선 7, 문학과지성사, 1994   자연에 대한 관찰이 순수한 시각과 만나서 묘한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다. 자연을 대하는 마음이 자연에 대한 묘사 자체로 끝나거나 관념의 이입으로 그치기 일쑤인데, 여기서는 자연을 이야기하면서도 자연의 모습을 훼손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감정을 실어내고 있다. 묘한 재주이다. 결국은 관념을 이야기하게 마련이지만 그런데도 자연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자연을 생각이 아닌 몸으로 체득하지 않으면 가닿을 수 없는 세계이고, 도시화가 진행될수록 만나기 어려운 세계여서 더욱 돋보인다.   말들은 그 말들이 거느리는 배경이 있다. 낱말 하나를 선택하면 그 낱말이 거느리는 배경의 언어들이 동시에 떠올라야 한다. 이 질서를 파괴하면서 시를 쓰는 수법이 있고, 이 질서를 잘 살리면서 시를 쓰는 수법이 있는데, 이 경우는 후자이다. 말 한 개가 숱한 배경의 언어를 끌어올리면서 독자를 자연 속으로 안내하고 있다. 뒤로 가면서 관념이 강해져서 그런 분위기가 많이 깨졌지만, 이 정도의 성과만으로도 칭찬 받아 마땅하다. 관념이 강해지면 자연 경관이 훼손당한다. 관념이 강해진 것은 자신의 방법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고 곁엣사람들이 동조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시인의 줏대는 보통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곁엣사람들은 함부로 입방아 찧을 일이 아니다. 한자는 청산해야 할 군더더기이다.★★★☆☆[4336. 11. 28.]   214□모기들은 혼자서도 소리친다□김형영, 문학과지성시인선 6, 문학과지성사, 1979   미늘이 시원치 않은지 애써 바늘을 문 고기가 수면 밖까지 끌려나왔다가 빠지고 빠지곤 한다. 이미지도 그렇고 말도 그렇고 한 단계만 더 들어가면 될 것 같은데, 찔러야 할 그곳까지 가지를 못하고 바깥에서 걸리고 만다. 이미지로 말하는 것도 아니고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서 의미를 전면에 내세운 것도 아니다. 이미지를 따라가다 보면 의미가 사라지고, 의미를 따라가다 보면 이미지가 흐려진다. 시상을 어디에서 잡아서 어디로 끄집어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명확히 해결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이다. 자못 심각한 문제이다. 그것이 해결되어야만 시가 나아갈 방향도 잡힌다. 한자 역시 부실한 미늘 노릇을 한다.★☆☆☆☆[4336. 11. 28.]   215□신들의 옷□안수환, 문학과지성시인선 23, 문학과지성사, 1982   이 시집에서 눈을 끄는 것은 사상이다. 형식은 거의 무시되고 있다. 그나마 시가 되는 것은 나름대로 치열한 고민이다. 그것이 인간 속에 내려온 신의 존재나 신이 방관하는 세상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몸부림과 연결되어 독자에게 반추의 계기를 제공한다. 그러나 시의 형식에 대한 고민이나 노력이 거의 드러나지 않아서 읽는 이로 하여금 맥이 빠지게 한다. 이따금 저절로 생겨난 형식이 어떤 단계까지 올라선 경우도 적지 않지만 많은 시들이 도달해야 할 수준에 못 미치고 있다. 한자는 그 무거운 발걸음을 더욱 죄고 있다.★☆☆☆☆[4336. 11. 28.]   216□작은 마을에서□최하림, 문학과지성시인선 22, 문학과지성사, 1982   무엇이 시를 쓰게 하는지 그것이 분명치 않다. 시 전편이 시를 써야 한다는 어떤 절박한 동기가 있어서 쓴 것이 아니라 쓰다 보니 쓰게 된 것들이다. 그러니 긴장이고 이미지고 거론할 것도 없다. 거의 넋두리에 가깝다. 언어가 사물을 어떻게 촉발시켜야 그것이 읽는 사람의 감성을 건드리는지 아니면 이야기라도 있으면 그것을 어디서 풀어가야 하는지 하는 시의 그런 동기에 대한 고민도 찾아볼 수 없다. 있다면 시간뿐인데, 그 시간마저 자신 속에 갇혀있다.   이것은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고민을 덜 한 데서 오는 현상이다. 시가 무엇을 써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시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시에 겨울 이미지가 많이 나오는데, 이 겨울이 시집을 위해 어떤 기능을 맡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시인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한 것 같다. 그리고 그 냉랭한 겨울을 인생의 후반부 어디쯤일 꺼라고 막연히 설정하는 것은 차라리 아니함만 못한 일이다. 풍경을 통해 독자에게 말을 시킬 때에도 선택의 감각과 절제가 필요한 일이고, 그건 정말로 어려운 것이다. 시의 기본을 생각할 때다. 정말 버려야 할 것은 한자이다.★☆☆☆☆[4336. 11. 28.]   217□안개와 불□하재봉, 민음의 시 20, 민음사, 1988   세계 없이 이미지만 가지고 시를 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하는 것을 새삼 생각한다. 차라리 앞 부분의 세 편, 그러니까 어린 시절을 되살려놓은 시들은 아기자기 하고 고만고만한 이미지들이 모여서 정말 아름다운 신화를 되살려놓을 뻔했다. 그것은 시인이 살아온 그것의 실감나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에 펼쳐진 세계는, 이미지와 구조는 서구신화의 그것인데, 내용은 서구 신화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 전통의 어떤 기슭에 기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복원할 신화세계도, 본 적이 있는 신화세계도, 가야 할 신화세계도 아닌, 이미지로만 치장된 신화 비슷한 세계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이미지들이 계속해서 등장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지 못하고 지루하게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글을 다루고 짜임새를 만들어가는 저력은 경탄할 만하다. 그러나 시는 그러한 능력보다 현실의 어디에 뿌리를 내려야 하는가 하는 지극히 간단한 사실에 진지할 때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갖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을 전혀 고민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는 불필요하게 장황하고 길어지는 것이다. 세계를 못 갖춘 말들은 거품처럼 흩어지기 마련이며, 세계를 갖추지 못한 시인은 자신의 현실 속에 뿌리내릴 때까지 시를 쓰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기에 이 같은 몽환의 세계에서 빠져 나와 현실로 돌아올 때 부딪힌 세계가 바로 문명이라고 하는 껍데기였으니, 껍데기를 진실로 알고 밀어붙이면 나중에는 아예 시가 아닌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이 시인이 시를 버리는 것은 어쩌면 처음부터 예정된 길이었다.★☆☆☆☆[4336. 11. 28.]   218□대설주의보□최승호, 오늘의 시인총서 22, 민음사, 1983   시인의 섬세한 관찰력이 사물에 접촉할 때 어떤 기적을 가져오는가 하는 것을 잘 보여준다. 사물의 질서를 일부러 일그러뜨리지 않으면서도 그 관찰이 가져온 인식의 변화와 그 변화 속의 의식이 저절로 드러내는 인간 보편의 감성까지도 보여준다. 시인이면 통과해야 할 첫 번째 관문이 이렇게도 영롱하게 빛을 발할 수 있다는 놀라움을 보여준다.   이런 세계는 이미 시인학교의 기본 과정이 되었지만, 이 시집이 발간되던 즈음의 상황에서는 한 놀라움이었다. 20년이 다 된 지금에 보아도 그 인식의 팽팽한 힘과 그 확산력은 아직도 싱싱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초점이 한 곳으로 모이지 않고 여러 곳으로 흩어져서 주제가 좀 산만해졌다는 점이다. 한 곳에 집중하는 힘만 갖추면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겠지만, 주제나 관점이 한 곳으로 집중될 경우 필경 인식의 긴장이 허물어지는 것은 인간이 지닌 불가피한 내력이다. 어느 곳으로든 이 긴장이 따라만 간다면 그야말로 위대한 시인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한 장애 중의 하나가 한자이다.★★★☆☆[4336. 11. 28.]   219□농무□신경림, 창비시선 1, 창작과비평사, 1975   시에 거짓이 없다는 것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자신의 가슴속에 할 말이 가득해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독자가 그것을 눈치채게 하는 방법을 이 시인은 알고 있다. 그것은 시각을 객관화시키는 것이다. 남의 이야기처럼 묘사해주는 것, 자신의 눈에 보이는 대로 전해주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 그러면서도 카메라에 포착하는 그 대상들을 통해서 가슴속의 울분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것, 그것이 이 시를 성공하게 하고 있다.   이 시를 읽는 사람은 시인이 처해있는 곳으로 따라가게 되는데, 그곳은 시인의 삶을 쓸쓸하게 만드는 그 어떤 손길이 지배하는 곳이다. 그곳을 지배하면서 불행하게 만드는 그 어떤 손을 독자는 저절로 감지하게 되며 그 존재에 대한 분노를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느끼게 된다. 눈에 비치는 광경을 가볍고 선명하게 요약하여 포착하는 것이 이 시인의 능력이다. 풍경 묘사라고 해서 함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 시들은 보여준다. 몇 군데 남은 한자는 끝내 옥의 티다.★★★★☆[4336. 11. 28.]   220□가난한 사랑노래□신경림, 실천문학의 시집 50, 실천문학사, 1988   시골에 머물러 있던 “농무”의 시각이 그대로 도시로 옮아왔다. 변두리에 머물러서 농무의 주인공들이 서울로 올라온 삶과 현실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있다. 방법도 시각도 20년 전 그대로다. 그러나 약간 달라진 것이 감지된다. 보여주는 수법은 똑같지만 그 속에서 하는 말의 농도가 같지 않다. 하고자 하는 말이 앞으로 많이 나섰다. 그리고 지은이의 말이 시의 겉으로 많이 드러났다. 시인만을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니, 아마도 도시 생활이 그렇게 만든 것이리라. 그렇다면 이제는 이 방법 가지고는 어렵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뭔가 달라져야 하겠는데, 그 변화의 조짐은 드러나지 않는다. 옷은 아직 옛날 옷이다. 한자가 청산된 것이 반갑다.★★★☆☆[4336. 11. 28.]  
93    시집 1000권 읽기 21 댓글:  조회:2102  추천:0  2015-02-09
  201□사랑의 위력으로□조은, 민음의 시 38, 민음사, 1991   말을 다듬고 이미지를 배치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젊은 사람이 갖는 패기도 돋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시에서 하고자 하는 내용에 비해 이미지가 너무 많이 동원되고 있다. 반짝이는 이미지들을 아껴두었다 써야 할 곳에 쓰는 것도 시인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요소이다. 작은 깨달음이 소중해 보여도 그것이 인생의 큰 궤도 안에서 어떤 울림을 갖고 있을 것인가 하는, 좀 더 큰 고민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소품만 낳다가 만다. 한자는 그러한 소품을 더 왜소하게 만드는 요인이다.★★☆☆☆[4336. 11. 26.]   202□김씨의 옆 얼굴□이하석, 문학과지성시인선 35, 문학과지성사, 1984   한 인물을 작품 속에 등장시켜서 관찰자 시각으로 서술하는 것은 시에서는 낯선 것이다. 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말하는 사람과 작가가 일치한다. 관찰자가 존재하는 것은 대개 소설 쪽에서 많이 쓰는 수법이다. 그런데 그런 방법을 시속에 도입시켜서 크게 성공한 경우이다. 물질화 되고 비인간화 된 도시 문명의 잔혹함을 이야기할 때는 감정을 싣게 마련인데, 그렇게 되면 불가피하게 싸우게 된다. 목소리를 높이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 감정 때문에 잔혹함이 가려지기 십상이다. 바로 이 같은 거품을 걷어내는 방법으로 관찰자 기법을 끌어들였고, 그것이 대성공을 거두었다. 부분부분 표현까지 신경 쓴 것이 눈에 보인다.★★★☆☆[4336. 11. 26.]   203□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박상순, 세계사시인선 65, 세계사, 1996 204□6은 나무 7을 돌고래□박상순, 민음의 시 55, 민음사, 1993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미래를 확신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힘든 일이다. 그런 확신에 잠시 회의가 올 때 남의 눈치를 살핀다. 앞으로 한 참 나아간 사람이 너무 나간 탓일까 불안해서 잠시 뒤돌아보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인다. 어차피 환영받기는 어려운 일이다. 가는 곳까지 힘차게 가고 볼 일이다. 관계에 대한 파괴와 파탄은 읽기에 즐거운 바가 있다.★★☆☆☆[4336. 11. 27.]   205□뿔□문인수, 민음의 시 42, 민음사, 1992   절대의 이미지를 노래하려고 한 것인지 일상의 자잘한 감정을 이미지로 대체하려 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아서 선뜻 마음이 가지 않는다. 이미지에 집착하고 있는 듯한데 중간중간에 관념들이 내비친다. 그 관념들은 일상의 체험을 반영하는 것들이다. 이것들이 서로 맞물려서 상승작용을 하는 것이 아니라 따로따로 논다. 그래서 난삽해 보이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난삽할 것도 없다. 평이한 것들이 난삽해 보이면 그건 방법상의 문제이다. 이미지가 감정을 빨아들이게 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야 할 일이다. 아니면 이미지에게 말을 내맡기던가……★☆☆☆☆[4336. 11. 27.]   206□황금 연못□장옥관, 민음의 시 44, 민음사, 1992   관념을 이미지로 빨아들여 생생한 힘으로 살아나게 하는 힘이 있다. 멀뚱하게 나자빠져있던 낱말들의 꽁지에 불을 붙여서 팔딱팔딱 살아나게 하는 묘한 재주가 있다. 관념 덩어리를 생활 속의 친근한 이미지로 분해하여 독자를 깊은 사유의 골짜기로 끌어들여 함께 가는 방법이 눈에 확 들어온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삶의 근원에 대해 오래 생각하고 그것을 말하는 방법까지 깊이 고민한 뒤에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시가 차분하고 냉정하면서도 온기를 잃지 않는다. 그 따스한 태도와 마음이 이 시집을 황금으로 만든다. ‘두레박’, ‘꽃잎 필 때’ 같은 경우는 절창이다. 그런 류의 사색을 해본 사람은 이것이 왜 절창인가를 알 것이다. 군더더기도 없지 않다. ‘수련’ 같은 경우는 뒷부분은 자살골이다. 그렇게 친절하지 않아도 알 사람은 다 안다. 시집 곳곳에 그런 군더더기가 많이 끼어있다. 특히 시가 이야기로 전락하는 것을 막는 것이 급선무다. 이 군더더기만 걷어낸다면 정말 상큼한 시를 쓸 것이다. 한자야말로 걷어내야 할 첫 번째 군더더기이다.★★★☆☆[4336. 11. 27.]   207□바퀴소리를 듣는다□장옥관, 민음의 시 67, 민음사, 1995   시가 선명해졌다. 그러나 이것은 비극이다. 주제가 뚜렷해지면서 이미지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독자를 빨아들이던 흡인력이 현저히 떨어지면서 의미의 철골구조만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런 방향으로 성공하려면 의미가 깊고 단단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의미체계는 그전과 다름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사물을 바라보는 긴장이 그 전보다 훨씬 더 떨어졌다는 얘기다. 시의 구조는 나름대로 튼튼한 것으로 보아 어쩌면 그 전의 뿌연 세계에 대해 주변으로부터 잔소리를 들었던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만약에 그렇다면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의 얘기는 다 들을 일이 아니다. 한자부터 버린 뒤에 다음 행로를 신중히 결정할 일이다.★★☆☆☆[4336. 11. 27.]   208□잠든 그대□배창환, 오늘의 시인총서 25, 민음사, 1984   잘 썼다 못 썼다고 말하기가 참 곤란한 시다. 왜냐하면 시를 끌어가는 저력이나 말솜씨를 보면 분명 한 가락 하는 사람인데, 막상 나타난 시를 보면 그런 절제나 형식에 기대어 말한다는 것조차도 사치로 여기는 듯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한 시대의 뜨거운 지점에서 불에 데인 듯한 그 심정을 화산처럼 분출시키는 사람들 앞에서 불기둥의 모양이 어떻다느니 하는 말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건 시 이전의 문제이다. 시 이전의 문제와 시 이후의 문제를 구별해야 하는 이 껄끄러움을 이 시집은 제공한다. 시대라는 것이 문학을 이 모양으로 만들기도 한다.★★☆☆☆[4336. 11. 27.]   209□북치는 소년□김종삼, 오늘의 시인총서 15, 민음사, 1979   ‘북치는 소년’이 서양 노래의 제목이라는 것을 모르고 제목과 내용의 연관성을 억지로 해석하려 하던 어느 원로시인의 글을 보고서 실소를 금치 못하던 생각이 난다. 이 시는 ‘북치는 소년’이라는 캐롤송을 듣고서 그 느낌을 시로 적은 것이다. 노래의 ‘의미’를 제거하고서 이미지만으로 보려고 하니 어디 풀릴 까닭이 있는가? 그런데도 열심히 해석하는 것을 보고 한참을 웃었다. 그렇다고 애숭이 독자가 문단을 대표하는 시인에게 전화를 해줄 수도 없고…….   이미지와 의미의 극단을 오간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지들의 표정도 극단으로 치우쳐있다. 이미지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일에만 몰두하는가 하면 마당쇠가 되어 의미를 열심히 전하기도 한다. 특히 의미를 싣고 가는 말들에 외국인 이름이나 노래 이름 같은 것들이 많이 등장해서 시다움을 이곳이 아닌 저곳의 그 어떤 취향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언어가 빛을 발하는 것은 이미지 쪽으로 쏠린 시들이 아니라 의미 쪽으로 쏠린 시들이다. 이 시집이 시선집이므로 끝내 시인은 어느 쪽으로도 결단을 내리지 못한 모양이다. 끝까지 갈팡질팡하고 있다. 한자는 그 시대 시인들의 원죄이리라. 원죄라고 해서 용서받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4336. 11. 27.]   210□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오규원, 문학과지성시인선 4, 문학과지성사, 1978   인류가 지금의 고생을 두고 아담과 이브를 탓할 필요 없듯이 현대인이 지금의 고생을 두고 영국을 탓할 필요는 없으리라. 자본을 앞세운 물신이 지금 그 시를 쓰게 하고 있으므로. 다만 독자도 나와 같다고 생각하고 독자를 꾸짖는 것은 머리 물들였다고 지나가는 청년의 뒤통수를 맥주병으로 까는 노인과 같다. 병이야 깨지면 그만이지만, 병은 너무 억울하지 않겠는가? 독자와 싸우는 일이 재미있을지 몰라도 그 싸움은 끝이 없고 결국 내가 지친다. 그리고 독자들이 그만큼 싸움을 즐기지도 않는다. 그런 불편한 싸움 대신 외면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의도와 상관없이 시는 재미있다. 싸움의 방식 때문이다. 누구나 다 싸우지만 이런 식의 싸움도 있을 수 있구나 하는 그런 즐거움을 준다. 바로 이 영역이 이 시인의 자리이리라.   그러나 싸움은 누구와 싸우는가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위해서 싸우는가가 더 중요하다. 오로지 싸움의 본능 때문에 싸우는 사람이 있고, 남을 위해서 싸우는 사람이 있고, 자신만을 위해서 싸우는 사람이 있으며,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그 무엇을 위해서 싸우는 사람도 있다.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그 무엇이 무엇인가를 자신에게 되물을 일이다.★★★☆☆[4336. 11. 27.]    
92    시집 1000권 읽기 20 댓글:  조회:1957  추천:0  2015-02-09
  191□호랑가시나무의 기억□이성복, 문학과지성시인선 128, 문학과지성사, 1993   시에도 예의가 있다. 그 예의는 성실함에서 온다. 그 성실함을 생각해야 할 시집이다. ‘높은 나무 흰 꽃들은 등을 세우고 12’ 같은 뛰어난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사이를 한껏 벌려놓고서 그 사이를 연결시키든 말든 독자더러 알아서 하라는 식의 태도는 시의 기교라기보다는 게으름과 오만이다. 늘어질 대로 늘어진 생각의 삼겹살들을 처치하는 뭔가 깔끔한 처리가 있을 법한데, 그걸 하기가 귀찮아서 한 꺼풀 덜 벗겨진 그대로 내보냈다. 미숙한 마감의 인간미를 보여주는 우리 건축의 심오한 원리를 갑자기 터득하기라도 한 것일까? 모를 일이다. 당상관의 복장을 하고 등장한다고 해도 머리 조아릴 백성이 없는 세상이다. 신분을 드러내고 싶거든 제대로 된 옷을 입을 일이다. 한자는 청산되지 않은 봉건 같다.★★☆☆☆[4336. 11. 25.]   192□몸나무의 추억□박진형, 민음의 시 61, 민음사, 1994   나무와 숲을 소재로 사용하여 한 상상의 집을 지어 올린 것이 돋보인다. 그런데 나무를 심었을 때 그 나무가 영혼의 어느 부분으로 가지를 뻗으며 자라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시들이다. 가지가 이곳저곳으로 마구 뻗어서 단정한 맛이 나지를 않고 산만한 흠이 있다. 그리고 시의 곳곳에 필요 이상으로 수식과 수사를 동원한 곳이 많다. 부분에서는 참신해 보일지 몰라도 그것이 전체의 이미지에서 돌출하면 좋은 표현이 될 수가 없다. 시는 부분이 아니라 전체에 의해서 의미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것은 군더더기랄 밖에 없다. 시 전체의 매무새와 시집 전체의 초점을 한 번 검토해야 할 시집이다. 한자는 불필요하게 과장된 이미지 같아서 어느 경우에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4336. 11. 26.]   193□반달곰에게□김광규, 민음의 시 18, 민음사, 1981   시가 독자에게 성찰의 짧은 계기를 제공하는 도구라면 이 시집이야말로 가장 높은 시청률을 높일 수 있는 시집이다. 시가 갖추어야 할 모든 옷을 벗어버렸으니 솔직해 보인다. 그 솔직함이 시의 관행에서 볼 때 문제가 되는 부분이든 그렇지 않든 어쨌거나 이 시집은 초지일관이다.   인식으로 이루어진 시. 그 인식을 남들이 뻔히 예상하는 방법으로 전개시켜서 독자에게 전달하는 시. 시작도 끝도 너무 뻔해서 반가운 시. 독자를 기죽이지 않는 시. 한국시가 다양성을 필요로 한다면 이런 시집도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묘한 고민을 하게 하는 시. 그런데 그런 시에서 한자를 청산하지 못하는 것은 끝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벽을 허는 자가 스스로 그 벽 위에 올라앉다니!★☆☆☆☆[4336. 11. 26.]   194□처용□김춘수, 오늘의 시인총서 2, 민음사, 1974   시가 해탈이기에, 모든 언어는 존재의 죽음이다. 존재를 버린 언어들의 현란한 춤사위와 아직 해탈에 이르지 못한 존재들의 안타까운 몸부림이 시가 되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재미있는 건 자기모순에 직면한 이 말장난에 김수영이 반응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시는 풍자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해탈의 반대가 풍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해탈의 반대는 풍자가 아니라 만행, 또는 연꽃의 삶이다. 그런데도 풍자라고 한 것은 언어가 존재를 버릴 수 없다면 풍자야말로 연꽃의 유일한 발현 양식이기 때문이다. 불이문 밖은 모두가 모순이다. 그건 뚫어야 할 화두지만, 결코 뚫리지 않는다. 뚫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즉 침묵인데, 침묵하지 못하는 자의 넋두리는 그렇기에 단조롭고 지루하다.★★★☆☆[4336. 11. 26.] [추신] 내가 가해한 기억이 없다고 해도 가해자가 되는 수가 있다. 그런 상황을 부인하는 것은 순진둥이나 무식쟁이, 둘 중의 하나이다. 그 중간은 없다. 그런데 이 시집은 그 중간이 있다고 자꾸 주장한다. ‘처용단장’은 그 절창이며, 부다베스트 어쩌구 한 시는 차라리 해프닝이다. 겸손할 일이다.   195□청산행□이기철, 오늘의 시인총서 20, 민음사, 1982   길든 언어를 다시 다듬고 닦고 빛내는 일이 또한 시인의 몫이라면 이 시집은 그런 점에서 충실하고, 이 점은 칭찬 받아 마땅한 일이다. 이미지를 다듬고 거기에 적당한 의미를 넣기 위해서 애쓴 모습이 역력하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맛있게 살아있다. 바로 이 매끈함과 정성 때문에 의미를 탐색하는 일이 무색할 지경이다. 여기서 의미로 한 발짝만 더 나아간다면 시에 때가 묻을 것이다. 그것을 경계한다. 굳이 나아가려 한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법을 택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자는 이런 아름다운 성취에 무책임한 낙서처럼 섞여 있다.★★★☆☆[4336. 11. 26.]   196□서울로 가는 전봉준□안도현, 오늘의 시인총서 30, 민음사, 1985   80년대 정서의 한 절정을 노래한 작품집이다. 적당한 역사의식과 적당히 신선한 표현, 정당한 죄의식과, 적당한 이야기,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절묘한 절창들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등장한다.   그러나 의욕이 앞선 까닭에 곳곳에서 부담스러운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야기는 줄거리를 갖게 되고 줄거리는 시의 긴장을 이완시키며 나아가 이미지를 버리고 의미만을 전달하게 한다. 이런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또 시집 전체를 밀고 가는 역사의식은 좀 위험스러운 데가 있다. 넘어가지 말았으면 하는 선에서 아슬아슬하게 놀고 있다. 시에서 역사란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세월의 침식까지 이겨낼 수는 없는 것이기에 종종 허망한 몸짓으로 끝나는 수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이런 건장한 역사의식이 유독 한자에 대해서 이상하리만치 관대한 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4336. 11. 26.]   197□월식□김명수, 오늘의 시인총서 17, 민음사, 19890   시들이 모두 깔끔하다. 할말과 이미지들이 서로 적당한 거리에서 긴장을 주도 받으며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시집 전체에 뚜렷한 흐름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를 시로 다룬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모여서 흐르고자 하는 어떤 방향과 의지가 있는 법인데, 이것이 분명하지 않다. 이것은 시인의 꿈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를 쓰는 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무엇을 써야 하는가 하는 결심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 시에서 투지가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앞으로 시를 쓰기 어렵다는 뜻이다. 매우 위험하다. 꺼져 가는 촛불을 보는 듯하다. 심지를 똑바로 세우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한자는 불빛을 갉으면 갉았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4336. 11. 26.]   198□나는 조국으로 가야겠다□백학기, 문학과지성시인선 45, 문학과지성사, 1985   한 관념이 시집 전체에 서려있는 것은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그 관념 덩어리가 언어와 이미지들을 먼지처럼 떠있게 한다면 문제가 된다. 관념 덩어리에 휘둘려서 언어들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먼지처럼 떠있다. 이미지들은 국가와 역사에 죄의식이라는 투명한 끈을 드리우고서 물거품처럼 떠돈다. 이것은 마음이 앞서간 까닭이다. 시가 어차피 관념을 나를 수밖에 없지만, 어떤 곳에서 어떻게 출발해야 그 전달이 잘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 그러한 고민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는 까닭에 황톳길에서 속도를 내는 자동차 바퀴처럼 매캐한 흙먼지를 날리는 것이다. 그 흙먼지를 뭉게구름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이미지와 관념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고 그것을 어디에다 묶어야 시가 아름다운 애드벌룬을 이루면서 두둥실 떠오를 것인가를 숙고해야 할 것이다. 한자는 무거운 짐이다.★★☆☆☆[4336. 11. 26.]   199□우리들의 왕□서원동, 문학과지성시인선 31, 문학과지성사, 1983   다루는 주제가 관념이라면 관념의 끄트머리를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야 그 나머지 전부가 저절로 드러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 끄트머리가 미약하다고 하여 관념을 다른 관념어로 대체한다든가 관념의 연관성을 보여주지 않은 채로 이미지를 끌어들이면 한 행 안에서 그것의 연관은 파악될지 몰라도 한 행만 넘어서면 다른 영역으로 넘어가 버려서 시 전체에서는 아주 혼란스러운 양상을 보이게 된다. 당연히 시가 어수선하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 시집이 그런 오류를 범하고 있다. 시를 쓰게 된 사고와 발상의 출발을 분명히 하고 그것에서 매개된 이미지들이 일정한 방향으로 표출되도록 유도하는 것이 이 혼란을 조금이라도 없애는 방법이 될 것이다. 한자를 없애는 것도 그런 혼란을 줄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4336. 11. 26.]   200□홀로서기□서정윤, 청하시선 28, 청하, 1980   시가 의미를 전달할 때 이미지를 주로 사용하느냐 말을 직접 하느냐 하는 것은 방법의 문제이다. 대부분 이 두 가지 중 어느 한 가지가 시를 이끌고 간다. 그리고 주가 된 하나가 나머지 하나의 도움을 받으면서 독자에게 의미를 전달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서로에게 장애를 일으키는 수가 있다. 이미 말로 의미전달을 마쳤는데, 뒤늦게 이미지가 나타나서 그 의미를 흐리게 하거나 이미지가 의미전달을 마쳤는데 뒤늦게 설명을 해준다던가 하는 식이다. 이건 불필요한 일이고, 이런 일이 시에서 반복되어 일어나면 그것은 시인이 시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이 시집에서는 이러한 혼동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그래서 의미 전달의 효율성과 그 해결방법을 고민해야 할 단계에서 나온 시들이다. 그리고 인생에 대해 나름대로 너무 확고한 결론을 내놓고 있어서 어떤 주제와 이미지로 시를 쓰더라도 그 갈 길은 훤히 내다보인다. 이것이 시의 맛을 많이 줄이고 있다. 확고한 신념이 문제가 될 리는 없지만 그것이 더 이상 두고 볼 것 없다는 쪽이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한자는 그런 옹고집을 위한 장식 같다.★☆☆☆☆[4336. 11. 26.]    
91    시집 1000권 읽기 19 댓글:  조회:1966  추천:0  2015-02-09
  181□좀팽이처럼□김광규, 문학과지성시인선 73, 문학과지성사, 1988   문학이 인식과 형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이미 다 알려지고 합의 본 사실이다. 그런데 때때로 이 둘 중의 하나로만 되어있거나 넙치처럼 어느 한쪽으로 몰려서 이루어진 작품들이 있다. 그럴 경우에는 반드시 그렇게 된 무슨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한쪽으로 몰리면 그건 이상한 것이다. 이 이상함을 우리는 졸작이라고 말한다.   이 시집의 특징을 이루는 요소는 형상이 아니라 인식이다. 세상을 보는 어떤 작은 깨달음이 먼저 오고 그것을 ‘서술’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그 서술이 인식의 형상성을 전혀 뒷받침해주지 못해서 일기문으로 전락한 경우이다. 새로운 깨달음만 있으면 그 모양새야 어떻든 상관없다는 식이다. 그래서 수영장에 뛰어드는데 잠방이 차림으로도 나서고, 윗도리만 입고도 나서고, 알몸으로도 나서는 것이다. 미니스커트는 한 때 입는 것이다. 늙은 것의 종아리를 예쁘다고 하는 사람은 그의 애인뿐이다. 칭찬도 봐가면서 해야 할 일이다. 자기 입맛에 맞는다고 칭찬하는 것은 칭찬 받는 그 사람을 아예 죽이는 것임을 새삼 깨달을 필요가 있다. 서술의 평이성이 형상성을 보장하진 못한다.★☆☆☆☆[4336. 11. 24.]   182□참 이상한 상형문자□이승욱, 민음의 시 68, 민음사, 1995   대체로 너무 서둘러서 쓴 시들이다. 그래서 시들이 대체로 짧고 할 말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까닭에 너무 뼈만 앙상하다는 느낌이다. 이것은 이미지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려서 쓰지 않고 한 순간에 온 깨달음에 집착한 결과다. 그렇기 때문에 시가 건조해졌다. 시에 살이 없는 건 단점이 아니지만, 너무 깡마른 것은 단점이다. 비슷한 이미지들도 많고 비슷한 내용들도 많다. 이런 것들은 묶어서 한 시로 용해시키는 것이 좋겠다. 한편으로 얘기할 수 있는 것을 열 편으로 얘기한다고 해서 내용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어떻게 살을 붙여야 맛있는 시가 되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할 때인데, 한자는 전혀 맛을 내지 못하는 물건이라는 것을 먼저 생각할 일이다.★★☆☆☆[4336. 11. 25.]   183□서랍 속의 여자□박지영, 민음의 시 73, 민음사, 1995   발상의 경쾌함도 있고, 이미지를 다루는 솜씨도 그런 대로 괜찮은데, 너무 서둘러서 쓴 작품들이 많다. 시는 발상만 가지고 되는 것도 아니고 말만 가지고 되는 것도 아니다. 할 말이 생겼으면 그것을 싣고 갈 수레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일상의 관념과 삶을 분해하려면 웬만큼 날카로운 칼 가지고는 어림없다는 것이다. 아주 날카로운 칼로 한 꺼풀씩 벗겨내야 하는데, 그 날이 너무 무디다. 인식의 힘을 좀 더 날카롭게 하고 그것을 어느 곳으로 들이밀어야 이 무거운 일상이 쪼개질 것인가 하는 것을 먼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뒤쪽의 무거운 걸음걸이 때문에 앞쪽의 경쾌한 발걸음마저 같이 둔탁해졌다.★★☆☆☆[4336. 11. 25.]   184□내 귓속의 장대나무 숲□최정례, 민음의 시 66, 민음사, 1994   시가 대체로 차분하게 가라앉아서 안정된 인상을 준다. 시상을 전개시키는 수법도 무난하고 이야기를 전하는 목소리도 고만고만하다. 그러나 시들이 소품인 데다가 대부분 자신의 과거에 무겁게 묶여 있어서 독자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별로 없다. 사회 인식이 없다는 것은 문제가 안 된다. 내면의 고민이나 사고를 해도 독자들이 따라 들어가 섞일 수 있는 어떤 공간이나 인식이 있어야 하는데, 그 공간이 아주 좁다. 이 공간을 넓히는 것이 성공의 열쇠가 될 것이다. 이 작업에 한자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4336. 11. 25.]   185□우수의 이불을 덮고□이기철, 민음의 시 17, 민음사, 1988   흥분된 감정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안정된 시선과 안정된 마음으로 세상을 읽는 태도는 높이 살만하다. 그러나 너무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시가 꼭 탄탄한 구조 위에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많은 말들을 늘어놓으면 설명이 되고 설명이 끼어들면 긴장을 잃게 된다. 부분부분의 빛나는 구절들이 그런 넋두리에 파묻혀서 시 전체가 설명문으로 떨어지고 있다. 시의 경제와 언어의 경제를 생각해야 할 일이다. 불필요하게 끼어있는 한자는 그 흠을 더욱 크게 한다.★★☆☆☆[4336. 11. 25.]   186□낯선 길에 묻다□성석제, 민음의 시 39, 민음사, 1991   인식의 깊이가 남다르고 세계를 보는 눈이 확립되었다. 게다가 군더더기 없이 필요한 말만을 동원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독자의 눈을 잡아끄는 요령과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방법도 긴장을 갖고 있다. 다만 설명하는 듯한 구절이 간간이 눈에 띈다는 점인데, 그것은 인식의 방법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니, 큰 단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사소한 사건이나 사물을 통해서 세계의 본질을 보여주고 드러내는 수법이 능수능란하다. 사건을 축약하여 상징으로 만드는 뒷부분의 시들 역시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다. 드물게 나타나는 한자는 문제지만, 큰 작품을 쓸 수 있는 조건이 고루 갖추었다. 이 긴장을 잊지 않고 세월과 싸우는 일이 남은 숙제일 것이다.★★★☆☆[4336. 11. 25.]   187□입국□사이토우 마리코, 민음의 시 53, 민음사, 1993   세계를 보는 시각도 확립되었고, 시상을 전개하는 힘도 적당한데, 시가 좀 메마르다는 느낌이 가시지 않는다. 이 느낌은 언어의 감각이 주는 것인데, 여기서는 인식이 주된 흐름을 이루고 있는 탓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이야기가 끼어 들고 그 때문에 시가 느슨해졌다. 말에는 그 말에 스민 묘한 정서가 있다. 외국인이 그 말의 정서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사람은 그러한 특수성 이외에도 보편성이라는 것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가 지닌 그런 특수성을 살리기보다는 보편성에 의존하는 것이 시를 쉽게 쓰는 방법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의 구성을 다양하게 만들고 화법을 변화시키며, 상징이나 비유를 활용하여 시의 역동성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이 시집은 너무 조용하다. 그러나 외국인이 남의 나라 말을 배워서 이만큼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비록 우리나라의 적지 않은 시인들이 한자를 섞어 쓰는 묘한 관행이 남아있지만 남의 나라 말로 시를 쓸 때 그 나라 말이 아닌 것을 섞어 쓰는 것은 그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것은 알 필요가 있다. 허긴 시인을 탓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시인의 언어는 그를 가르친 사람에게 배웠을 것이니!★★☆☆☆[4336. 11. 25.]   188□물 위를 걷는 자 물 밑을 걷는 자□주창윤, 민음의 시 23, 민음사, 1989   단순한 풍경을 상징으로 만들어 내는 능력이 돋보인다. 상징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뒷면까지 드러나게 하는 것은 좋으나 장난스런 표정을 섞어 넣는 것은 의미 전달의 장애가 된다. 상징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지 않으면 설명하게 된다. 짧은 시안에서 설명을 하려하면 시가 번거로워지고, 길게 시를 만들면 긴장이 떨어진다. 말을 하기보다는 제시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이 시집의 분위기에 어울린다. 한자는 잘못 박힌 못 같다.★★☆☆☆[4336. 11. 25.]   189□에로스의 반지□민음의 시 76, 민음사, 1995   앞부분의 긴장이 뒤쪽까지 연결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아쉬움이다. 앞부분의 상황설정과 이미지들이 서로 얽혀 도는 짜임새는 거의 현란한 수준이었는데, 뒤로 가면서 설명이 많아지고 관념 덩어리가 그대로 드러나서 균형을 잃고 있다. 너무 서둘러서 시를 쓴 까닭인데, 진득하게 기다리는 것이 시인의 큰 저력이라는 것을 새삼 생각케 한다. 또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주제가 한 가지로 집중되지 않고 흩어진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미지가 분산되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4336. 11. 25.]   190□땅의 뿌리 그 깊은 속□배진성, 민음의 시 24, 민음사, 1989   선택된 이미지들이 모여서 한 사건을 재구성하면서 그 속으로 독자를 불러들이는 특이한 능력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추억의 공간 속에서 모든 고통도 두려움도 아름답게 되살아난다. 이미지들 역시 단정한 모습으로 안개처럼 추억을 들어올리며, 메마른 가슴을 촉촉이 적셔준다. 묘사가 빼어나며 깊은 울림을 갖는다. 요컨대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러나 추억을 시의 중요한 소재로 삼을 경우, 투명하지 못한 기억과 그것이 재구성한 막연한 추억에 가려 현실의 중요한 모순이 가려져 버리기 쉽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 시집 역시 그러한 위험을 곳곳에 안고 있다. 가족사의 비극과 그 주변의 고통들이 추억이라는 안개 속에 가려서 드러나지를 않는다. 시가 끝내 개인의 넋두리 속에 남아있게 될 운명이다. 넋두리가 시의 큰 장점이고 또 그래야 할 부분이 있기 마련이지만 거기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빨리 벗어나야 할 곳에 시인이 서있고,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방법론이 필요하다.★★☆☆☆[4336. 11. 25.]    
90    시집 1000권 읽기 18 댓글:  조회:1924  추천:0  2015-02-09
  171□늙은 퇴폐□이승욱, 민음의 시 50, 민음사, 1993   ‘진홍빛 꽃’ 같은 빼어난 작품이 꽤 많다. 그리고 이런 작품들을 보면 이 시인은 상징의 기법을 알고 그것을 통해 독자들을 빨아들인다. 그런데 그에 반해 세계관이 너무 확고하고 고정되었다. 사물을 상징화시키는 것은 제시의 방법에 가깝다. 제시란 단정보다는 제안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징으로 잘 다듬어놓은 것에 군더더기를 붙여서 독자에게 제시하게 된다. 그 군더더기를 제거하는 것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열쇠이다. 생각을 제시할 뿐 말을 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면 정말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 시인이다.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외국어부터 추방해야 한다.★★☆☆☆[4336. 11. 24.]   172□저녁의 첼로□최계선, 민음의 시 54, 민음사, 1993   하고자 하는 말에 비해 너무 많은 말들이 동원되고 있다. 이것은 언어에 대한 감각은 뛰어난데, 인식의 깊이가 부족한 탓이다. 세계를 보는 눈을 좀 더 깊고 넓게 확립할 필요가 있다. 세계에 대한 명징한 깨달음에서 언어가 떠올라야만 그 언어는 연꽃 같은 신선함을 준다.   그리고 사물에 대한  슈퍼마켓 식 지식이 주제를 전달하는 도구로 충실한 기능을 하지 않고 오히려 주제 전달에 장애를 주는 수가 많다. 이 역시 할 말을 정하고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신선한 이미지 하나 때문에 할 말을 만든다는 증거이다. 대체로 어떤 사물에 감상이 촉발되어서 시를 쓴다. 시를 써야 한다는 시인의 의무에 충실한 것은 좋지만 그런 부담마저 벗어버릴 때 좋은 작품은 ‘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시에서 한자는 불필요한 지식 자랑과 같다.★☆☆☆☆[4336. 11. 24.]   173□딱따구리는 어디에 숨어있는가□최동호, 민음의 시 72, 민음사, 1995   풍경 묘사로 마음을 대신하는 시를 쓸 때는 될수록 자신의 위치를 시에 드러내지 않는 것이 좋다. 게다가 마음이 깨달음을 풍경으로 담아내려면 절제된 언어로 그 끝을 조금만 드러내주면 된다. 이 시집의 대부분은 몇 가지 방법론이 섞여 있어서 방법론으로도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마음을 풍경을 묘사로 대신하려고 한 시들은 대부분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은 스스로 주제를 말로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오히려 비유를 통한 시들이 더 깔끔하다.   그러나 이 시집의 본령은 실패한 시들이다. 그것이 시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질문은 가벼워지는 시의 환경 속에서 아주 값진 것이다. 이미 진리가 없는 것으로 판정 난 듯한 시인들의 무수한 발언 속에서 진리를 찾는 것은 그것의 성공 여부를 떠나서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그 진리의 문을 열 수 있는 한 가닥 희망이기 때문이다. 달마는 왜 동쪽으로 왔는가? 서쪽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한자 속으로 왔지만 지금은 한자 밖으로 벗어났다는 것도 알아야 할 일이다.★☆☆☆☆[4336. 11. 24.]   174□숨은 사내□박기영, 민음의 시 37, 민음사, 1991   보여주기의 수법이 아주 잘 살아있다. 마치 카메라로 찍은 듯한 풍경을 제시하여 그 뒤에 어리는 이 세계의 주재자를 보여주는 확실한 방법론이 눈에 띈다. 그 매개체로 문명의 이기인 전화와 텔레비전의 눈을 이용하는 발빠른 움직임까지 보여준다. 그러나 보여주는 늘 한계를 갖고 있다. 아무리 잘 보여주어도 카메라나 텔레비전처럼 보여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주재자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한다. 범을 잡으려면 범의 굴로 가야 하는 것과 같다. 범이 사는 동굴을 촬영해 가지고는 범을 결코 잡을 수 없다. 한자가 과연 범을 잡는 데 효용이 있는 그물인가 아닌가 하는 것도 생각해보아야 할 일이다.★★☆☆☆[4336. 11. 24.]   175□신은 망했다□이갑수, 민음의 시 34, 민음사, 1991   재치는 시가 아니라 발상의 몫이다. 시를 쓰기 위한 노트에 빽빽이 적어놓은 뒤 그것을 시를 읽어 가는 독자를 위해 살을 붙이고 완성하는 것이 시라는 형식이다. 그러나 재치 있는 발상을 적어놓는다고 해서 시가 되지는 않는다. 시에는 다른 예술 갈래와는 다른 겉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집은 전체가 인식으로만 구성되어있다. 시의 형식을 모르거나 무시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시의 형식으로는 전하기 어렵거나 시로 만들기 어려운 사금파리 같은 깨달음이 나열되어있다. 이것이 시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형상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형상 이전의 질료들이기에, 이 시인은 앞으로 시를 쓰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류의 깨달음은 형식을 아주 거추장스러워 한다. 만약에 시로 돌아오려면 엄청난 고생을 하고 난 다음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생을 감수하기에는 내용이 너무 발랄하고 경쾌하다. 이 발랄함은 시 같은 묵은 형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한자는 이 경쾌함과 묘한 부조화를 이룬다. 시는 깨달음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4336. 11. 24.]   176□침엽수림에서□엄원태, 민음의 시 36, 민음사, 1991   하고자 하는 말에 비해 동원되는 이미지들이 약간 많다. 그 군더더기 때문에 읽는 속도가 느려진다. 시집 전체의 내용이 두세 군데로 분산되는 것도 흠이다. 이것은 할 말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는 훈련이 아직 덜 된 까닭이거나 써놓은 시들을 별다른 생각이 없이 시집으로 모아서 그렇다. 시를 쓸 때와 시집을 엮을 때는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시가 벽돌이라면 시집은 집이다. 벽돌만 모아놓는다고 집이 되는 것이 아니다.★★☆☆☆[4336. 11. 24.]   177□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손진은, 민음의 시 43, 민음사, 1992   이른바 신춘문예 용 시라는 것이 있다. 매년 초, 각 신문사에서 과거 보듯이 시인 지망생들이 자원해서 보낸 작품을 평가해서 급제자를 뽑는 것이다. 거기를 통과한 시들에는 한 동안 뚜렷한 형식이 있었고, 그런 형식이 급제자들의 실력을 판가름하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심사라는 발상이 어쩔 수 없이 만드는 굴레이기도 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당한 깨달음과 그 깨달음을 포장할 수 있는 그럴 듯한 미사여구 역시 중요하다. 미사여구도 그 발상법과 배열법까지 갖추어야만 시인의 능력이 드러난다.   이 시집 속의 시들에서 그런 형식성을 느낀다. 너무나 원칙에 충실하다보니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곳에서까지 그렇게 해서 답답해지기도 한다. 똑같은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엔진소리 같다. 한자가 이따금 그 흐름을 끊지만, 그때는 덜컹거린다. 역시 시집이라는 것이 문제다. 시집은 내용의 구도가 없다면 형식의 요철(凹凸)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4336. 11. 24.]   178□여우를 살리기 위해□이학성, 민음의 시 58, 민음사, 1994   삶의 근원을 이루는 것들에 대한 성찰이 돋보이는 시다. 사고가 철학의 어떤 체계에까지 닿아있지만, 그것을 상상력의 옷으로 적당히 감쌀 줄 알고 이미지들을 상징화시켜서 어려운 개념을 녹이는 방법도 알고 있다. 이미지들이 지시어에 머물지 않고 정서를 환기시키도록 잘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시들이 너무나 명료해서 애써 만든 정서를 쫓아버리고 있다. 이 점만 극복한다면 좋은 작품을 쓸 것이다. 한자는 제일 먼저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4336. 11. 24.]   179□아름다운 사냥□박덕규, 문학과지성시인선 37, 문학과지성사, 1984   아름다운 이미지들이 모여서 숨바꼭질을 하면서 자기들끼리 재미있게 놀고 있다. 그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지만 언제까지나 그곳에 머물러 있기만 하면 끝내는 성장을 기피하는 아이에 그치고 말 것이다. 영원히 그대로 머물러 있다면 좋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동네가 아니다. 이미지도 그렇고 말의 구조도 그렇고 어디 하나 흠 잡을 데가 없는데 전후좌우로 꼭 막힌 것 같은 느낌이 가시지 않는 것은 원관념이 아주 엷기 때문이다. 이미지들의 조합이 전할 메시지가 뚜렷하지 않은 것이다. 당시 발표되던 치열한 현장 중심의 시에 대한 반발로 이미지 중심의 시상 전개를 의도했을 법한데, 아무리 그래도 그 이미지를 뒷받침해야 할 어떤 세계를 염두에 두었어야 하지 않았는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기 때문에 속 빈 강정처럼 거품이 많이 남은 상태로 시가 쓰여졌다.★☆☆☆☆[4336. 11. 24.]   180□얼음시집□송재학, 문학과지성시인선 75, 문학과지성사, 1988   시의 귀족화는 비난할 것이 못 되지만, 귀족화 한 그 문학이 자신의 위안거리로만 남아있던가 타인이 접근하기 힘든 한 개인의 과거에 고착되어 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이 시집은 동원된 시어들도 이미지들도 나름대로 무언가를 나타내기 위해서 잘 정돈되어있다. 그러나 그 안으로 접근해 들어가기는 쉽지 않다. 바로 기억의 폐쇄성 때문이다.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개인과 가족사의 특수한 관계와 정서 속에서 시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남들의 접근을 거의 막고 있다.   이것은 좋게 말하면 귀족화겠지만 반대로 말하면 능력부족이다. 실제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보다 불필요하게 많은 이미지들과 언어가 동원되고 있어서 살집이 무겁다. 체중 감량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려면 주제를 조금 더 선명하게 드러내야 한다. 그러나 드러내야 할 주제가 이미 드러난 것 이상으로 없기 때문에 거품이 생긴 것이다. ‘얼음시 2’와 ‘얼음시 4’조차도 숨가쁜 작품인데, 이를 능가하는 작품이 없다는 것은 이 시집의 비극이다. 이 비극에 풀무질하는 것이 바로 한자이다.★☆☆☆☆[4336. 11. 24.]    
89    시집 1000권 읽기 17 댓글:  조회:2049  추천:0  2015-02-09
  161□햄버거에 대한 명상□장정일, 민음의 시 7, 민음사, 1987   무거운 주제를 아주 가볍게 말하는 방법을 안다. 발상도 발랄하고 이미지를 밀고 가는 발걸음도 가볍다. 무엇보다도 사람의 눈길을 떼지 못하게 하는 표현과 말투가 뛰어나다. 이것은 시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다. 무언가 이야기를 꾸밀 줄 아는 그런 갈래의 흔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의 심리를 빨아들이도록 사건을 배치하고 말을 사용하는 그런 갈래이다. 그런 만큼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덩어리가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부수기를 즐기다 보면 방법만이 남는다. 방법만이 남으면 매너리즘에 빠지고 매너리즘에 빠지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으며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치열한 정신은 자살을 택한다.★★★★☆[4336. 11. 21.]   162□접시꽃 당신□도종환, 실천문학의 시집 37, 실천문학사, 1986   불에 데인 듯 뜨거운 감정에 휩싸여 그 고통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터져나오는 노래가 서정시라면 이 시집은 그러한 서정시의 본령을 보여준다. 가슴속에 고인 감정이 주변의 사물을 빨아들여 정서를 나타내는 도구로 변환한다. 게다가 부부관계는 인간의 삶 중에서 자연 현상에 가장 가까운 것인데, 그런 것이 자연물을 매개로 감정을 전달하기 때문에 더더욱 순수한 맛을 내며 읽는 사람의 심장을 두드린다. 이런 종류의 순수 서정시를 쓸 기회는 일생에 한 번 찾아올까 말까 하는데, 그런 기회를 알지도 못 한 채 흘려보내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 순간을 잡아서 시로 엮은 것이 시인의 영혼 속에 내장된, 시를 보는 안목이기도 하다. 감정을 쏟아내는 방법이 시였던, 진짜 시인인 것이다.★★★☆☆[4336. 11. 21.]   163□검은 소에 관한 기억□채성병, 민음의 시 32, 민음사, 1990   검은 소에 대한 연작 같은 빼어난 작품이 있고,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긴장도 방법도 확립돼있지만, 대체로 작품의 높낮이가 심하다. 중간에 섞여있는 말장난 같은 생각들은 발상의 유연함을 보여줄지는 몰라도 다른 치열한 정신과는 어긋난다. 치열한 정신이 뚫어야 할 화두를 정한 듯한데, 그 치열함이 마지막에서 조금 무뎌지면서 벽이 뚫리지 않는다. 치열함을 높이던가 방법을 높이던가 해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할 듯하다. 그러기 전에 한자부터 버려야 한다.★★☆☆☆[4336. 11. 21.]   164□고통의 축제□정현종, 오늘의 시인총서 3, 민음사, 1974   사색이 그대로 시가 될 수 있을까?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일이다. 그렇게 된다면 철학과 시는 구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철학의 사고나 행위가 그대로 시가 될 테니까 말이다. 철학이 시가 되려면 시에서 요구하는 옷을 입어야 한다. 물론 그 옷의 디자인이 어떠냐 하는 것이 시를 잘 쓴다 못 쓴다 하는 기준이 된다. 그것은 시 쪽에서 마련하는 것이지 철학 쪽에서 마련해서 시에게 넘기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 시집의 시들은 철학 쪽에서 디자인해서 시에게 넘겨준 꼴이다.   우선 문법이 제대로 안 지켜진다. 그것은 영어식 사고를 해서 그렇다. 제일 먼저 ‘의’의 쓰임이 잘못 되었다. ‘의’가 두세 차례를 넘어 서너 차례까지 반복되어 쓰이는 것은 우리말의 문법에는 없다. 일본어 문법이나 영어 문법에서 볼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잘못된 문법 위에 영어 번역체의 문장이 시집 전체에 넘쳐흐른다.   여기에다가 사고 방식의 혼란까지 겹치면 지금 보는 시집의 문장이 된다. 내용이 어려워서 이해가 안 가면 모르나 이 경우에는 문장의 구조가 이상해서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 시의 어려움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것이다. 시작을 위한 메모 수준의 시들이다. 한자와 일본어 문법과 영어 번역투 문장이 짬뽕 되어 시 이전의 사고 미숙과 언어 착란의 극치를 보여주는 시집이다. 그것을 시의 특징으로 여기고 자족하고 있다면 그건 신념이 아니라 뻔뻔스러움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이후의 시집이 증명할 것이다. 과연 그 이후의 시집들이 이 시집의 수준보다 더 높아졌는가? 어눌함은 단점이 아니다. 말이 안 되는 것이 문제이지…….★☆☆☆☆[4336. 11. 21.]   165□색동 단풍숲을 노래하라□김영무, 민음의 시 51, 민음사,  1993   시를 전문으로 하는 시인들이 낸 시집을 많이 읽다 보면 과장된 감정과 불필요한 말장난에 질리게 된다. 그런 때에 아무런 수식도 없이 일생생활의 느낌을 그대로 적은 글들을 보면 오히려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조미료에 지친 혀가 아무런 맛을 첨가하지 않은 물 한 잔에 감동하는 것과 똑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다. 이 점 시인들이 불필요한 말들을 많이 만들어내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런 감동이 곧 좋은 시라는 등식으로 연결될 수는 없는 일이다. 수필로 쓰면 더 좋았을 그런 내용들이 많다. 시의 문법을 좀 더 익혀야 하며 어느 것을 건드릴 때 생각이 시로 풀리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볼 일이다.★☆☆☆☆[4336. 11. 22.]   166□산화가□노혜봉, 민음의 시 57, 민음사, 1993   예술이 여러 갈래로 분화하면서 문화의 발전을 도모한 것은 갈래진 그것에 인간들이 즐거워하는 그 어떤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즐거움을 크게 하기 위해서 그런 갈래로 뻗어나간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갈래들이 서로 넘나들며 인식의 즐거움을 즐기려고 하는 시도가 예술사에서 끝없이 이어졌다. 주로 전위예술이라는 이름들이 그런 시도를 주도해왔다. 시가 다른 예술과 만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시가 다른 예술과 섞이지 못하고 그 스스로의 갈래를 수 천 년째 고집하는 것 역시 이유가 있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시가 다른 예술을 만날 때는 아주 조심해야 한다.   이 시집의 대부분은 음악과 만나고 있다. 음악은 시보다 훨씬 더 직접 본능과 감정을 자극한다. 그에 비하면 시는 언어의 환기작용에 의하기 때문에 한 단계 늦다. 이때 음악에서 자극 받은 것을 시라는 갈래로 담으면 그것이 음악에 대한 설명인지 감정에 대한 설명인지 분명치 않게 되고 이것은 읽는 자의 혼돈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접근법에서 혼돈을 주면 시는 실패하기 쉽다. 그리고 그 실패는 어렵다는 느낌으로 압축된다. 이 시집이 바로 그런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다.   앞부분의 시들은 아주 독특한 발상법을 갖고 있고, 그것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이 부분으로 살려야 할 일이다. 음악에 대한 지식이 음악 감상에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니듯이 시 역시 음악을 위한 해설 도구가 아니다. 한자는 호사 취미의 상징 같다.★☆☆☆☆[4336. 11. 22.]   167□아침 책상□최동호, 민음의 시 19, 민음사, 1989   시는 속세의 물건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인간의 애환을 담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선승들이 제자들의 깨우침을 돕기 위해 그것을 원용한 것은 그래도 세속의 물건 중에서 가장 긴하게 사용할 만한 물건이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그 선계(禪界)의 분위기가 그대로 시가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래서도 안 된다.   시집 앞부분의 분위기는 해서는 안 될 그 분위기에 닿아있다. 어설픈 땡중이라는 지탄을 받기 쉽다. 뒤로 가면서 그 분위기가 다시 저잣거리로 돌아오지만 버리지 못한 습관 때문에 역시 매끄럽지 못하다. 요새 세속의 이야기란 것이 원래 그런 솔바람 소리 들리는 양식 가지고 다루기에는 벅찬 것이기 때문이다.   선시나 한시의 가장 큰 특징은 간결함인데, 그 간결함은 자연물에 대한 취사선택의 시각과 절약 효과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절약된 그 대상들 뒤에 서려있는 주제들은 무지개처럼 뒤따라야 한다. 그리고 그 무지개는 개인의 단순한 체험이기보다는 한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가깝기에 우리 시대에는 어려운 수법인 것이다. 무언가 방법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할 것인데, 우선 한자부터 버릴 일이다.★★☆☆☆[4336. 11. 22.]   168□매장시편□임동확, 민음의 시 13, 민음사, 1987   꼭 나와야 할 시집이지만, 너무 일찍 나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광주항쟁은 한국사만이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기에 그것이 지닌 상징성은 문학의 훌륭한 주제가 된다. 그리고 그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문학 정신이 성립하기 어렵다고 할 정도로 문학하는 사람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상상력은 격앙된 감정 속에서는 오히려 얼어붙는다. 적당한 거리가 유지될 때 적당한 긴장이 생기고, 그러한 적당함이 상상력을 무한한 높이까지 뛰게 만든다.   이 시집에서는 아직 그 거리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 시인의 감정이 처했기에 시가 버리고 취해야 할 내용들에 대해서 분별하는 여유를 얻지 못했다. 장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설정과 시각의 문제이다. 어떤 시각으로 보고 어떤 상황을 설정해야만 내가 구상한 것 이상으로 독자들이 읽어주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광주를 살리려면 한자부터 버려야 한다.★★☆☆☆[4336. 11. 22.]   169□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황지우, 문학과지성시인선 32, 문학과지성사, 1983   문학작품을 이루는 요소가 형상과 인식이라면 이 시집은 형상은 없고 인식만 있다. 욕망과 의지를 모두 버리고 조리개만 남은 눈으로 세상을 비추다보면, 의지를 가진 자들의 눈이 놓친 부분이 포착되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형식으로는 담을 수 없고, 오로지 선입견 없는 조리개의 인식이 찾아낸 어떤 낯선 알몸만이 남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인식의 끝에서 나오는 발설은 그 자신만의 새로운 형식을 만든다. 이 시집은 그런 새로운 형식 실험이다.   그런데 그 형식은 인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인식이 형상을 만든 것이 이 시집이다. 놀라운 일이다. 보통 시는 어떤 형상을 전제로 하고서 그 안에서 옷을 입고 탄생하는데, 이 시집 속의 시들은 탄생 자체가 새로운 디자인으로 꾸며진 옷을 입혀서 이루어졌다. 그 옷에 대한 평가는 제 각각이겠지만, 인식의 방법과 깊이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새로운 형식으로 존중받을 것이다.★★★★☆[4336. 11. 22.]   170□귀골□마광수, 평민의 시 16, 평민사, 1985   인간은 스스로 모순을 갖고 있다. 그것을 극단화하여 추적한 것이 실존주의인데, 이 시집은 실존이랄 것도 없는 곳에서 인간과 사회의 모순을 파헤치고 있다. 고발은 르뽀의 형식이 알맞다. 효과가 좋기 때문이다. 르뽀는 관찰자의 시각으로 이야기를 꾸미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객관성으로 포장되지만 그 포장 속에 얼렁뚱땅 파묻히는 시각의 편협성이 문제이다. 이 시집 역시 그러한 문제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객관성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을 노래하는 것이 시이기도 하다.★★☆☆☆[4336. 11. 22.]    
88    시집 1000권 읽기 12 댓글:  조회:1887  추천:0  2015-02-09
  110□난간 위의 고양이□박서원, 세계사시인선 59, 세계사, 1995 111□이 완벽한 세계□박서원, 세계사시인선 80, 세계사, 1997   비유는 원관념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지만, 대체된 이미지가 원관념과 너무 멀리 있거나 아예 그 고리를 끊어버릴 때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무능력의 문제일 수도 있고, 형식사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 고리가 끊어지면 대개는 상징으로 휘발하거나 단순한 형식파괴의 쾌감으로 산화한다.   앞의 시집에서는 상징으로 휘발하던 이미지들이 뒤의 시집에서는 장렬하게 산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산화하는가 라고 질문을 해야 한다. 이 질문이 양식사의 거울에 비치면 잘 익은 사과를 줄 것이고, 비유사의 거울에 비치면 썩은 사과를 줄 것이다. 양식사의 거울에 비칠 것이라면 너무 얌전하다. 정신의 휘발은 형식마저 함께 날려버리기 때문이다. 형식이 휘발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지의 파괴를 시도하는 것은 의미의 변환이나 관념의 대체를 의도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되려면 독자의 관념체계를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점이 이 시집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이유이다. 하지만 앞의 시집에서 보여준 상상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이후의 작품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4336. 11. 15.]   112□오래된 골목□천양희, 창비시선 179, 창작과비평사, 1998   글을 다루는 재주가 수준급에 올라있다. 하고픈 말을 함부로 하지 않고 절약하며 조금씩 꺼내놓은 재주와 자연을 다루는 솜씨도 탁월하다. 그런데 자연을 시속으로 끌어들이다 보면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이 멀리 후퇴한다. 자연은 그만큼 시에서 다루기가 어려운 것이다. 더욱이 우리 조상들이 써온 시들의 대부분이 자연을 배경으로 한 것이어서 그 세계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자연이 우리게는 그리 많지 않다. 이 시집 역시 그러한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아주 엷어서 시 전체는 묘사 중심으로 가고 있고, 그 묘사가 실어야 할 원관념의 무게가 가벼워서 언어들이 제 빛을 내지 못하고 있다.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를 먼저 깊이 생각하고 정한 다음에 자연을 다루는 것이 좋겠다.★★☆☆☆[4336. 11. 16.]   113□비디오/천국□하재봉, 문학과지성시인선 88, 문학과지성사, 1990   의도가 너무 강해서 시가 망가진 경우이다. 영상매체가 갖는 괴력과 그것을 조종하는 세계의 배후에 대한 존재에 대해서 파헤쳐 보겠다는 의도는 잘 설정되었는데, 그 의지가 너무 강렬하여 의도만 드러났지, 각각의 시는 그 강렬한 의도에 희생당하여 연설문 비슷하게 변해버렸다.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할 일이다.   각각의 시에서 부릴 수 있는 재주가 좋아도 전체 의도에 너무 강하게 매달리면 그 집착 때문에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아주 간단한 사실을 간과한 결과치고는 너무 참혹하다. 그리고 TV를 나의 눈으로 갈아 끼웠으면 나타나는 것만을 보아야지 그것으로 마음까지 비추어 내려고 욕심을 부렸기 때문에 보여주어야 하는 것과 보이는 것 사이에 큰 불협화음이 생겼고, 그 불협화음이 억지라는 느낌을 계속해서 독자에게 주고 있는 것이다. 독자의 눈은 TV일지 몰라도 독자의 무의식과 느낌은 결코 TV가 아니다.   그리고 형태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지만, 시의 내용과 의지가 너무나 서정성이 짙다. 형식 파괴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기 전에 형식 파괴에서 서정이 어떤 의미를 차지하는가 하는 것을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이 시집의 시들은 노동해방의 수단으로 자처하는 노동시와 별반 다를 바 없는 기능으로 전락했다는 점도 놓칠 수 없다.★★☆☆☆[4336. 11. 16.]   114□구절리 바람소리□이향지, 세계사시인선 46, 세계사, 1995   체험이 시로 승화될 때는 그 체험의 미세한 부분이 개인의 체험만으로 남아있으면 안 된다. 그 특수한 체험은 어떤 정서를 환기하는 한 부분으로 기능해야 한다. 거기서 자신의 체험이나 발견이 그것을 전달하는 것으로 기능한다면 그것은 시에서 아주 중요한 결격사항이다. 그때는 정서가 아니라 의미가 시의 전면으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 시집에서는 많은 부분에서 뛰어난 인식을 보여주는 데도 그것이 곳곳에서 위와 같은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있기 때문에 독자가 시속으로 빠져들기 쉽지 않다. 개인의 체험이 중간중간에 솟아올라서 정서로 들어가려던 것이 그곳에서 자꾸 걸리곤 한다. 따라서 체험이 시로 형상화될 때 그 체험을 어떻게 활용하고 이미지화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검토해야 할 일이다. 그 과정에서 한자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하는 것 역시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일이다.★★☆☆☆[4336. 11. 17.]   115□의자와 이야기하는 남자□김형술, 세계사시인선 54, 세계사, 1995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관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양이다. 보조관념이 감당할 수 없는 만큼 원관념을 올려놓으면 마치 작은 옷을 입고 힘을 쓴 헐크처럼 돼 버리고 원관념이 너무 부실하면 뿌리를 내리지 못한 개구리밥처럼 이미지들이 허공에 떠돈다.   이 시집의 곳곳에는 정말 좋은 이미지들과 기발한 발상들이 널려있다. 그런데도 읽을수록 혼란스러운 것은 말하고자 하는 주제보다 너무 많거나 적은 말들이 동원되고 있어서 간결한 맛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간결함을 갖추지 못하는 것은 발견에 너무 정열을 쏟거나 집착하기 때문이다. 버릴 것은 버리고 남길 것은 남기는 균형감각 역시 중요한 시 창작의 기술이다. 다루고자 하는 세계는 세기말의 어지러운 세속인데, 시의 방법에 주로 사용된 것들은 농경시대의 농기구들이다. 이 불균형의 문제와 간결함의 미학을 조금만 더 고민한다면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을 것이다. 한자는 시에서 언제나 말썽꾸러기라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4336. 11. 17.]   116□저녁 6시의 나비□이혜영, 세계사시인선 98, 세계사, 1999   엉뚱한 상상력과 말을 빚는 솜씨가 탁월한데도 시집 안에 들어있는 시들의 경향이 서로 다른 것이 흠이다. 형식을 파괴하는 감정은 늘 격렬하기 마련인데, 이 시집을 지배하는 감정이나 발상은 의외로 전통 서정시의 범주 안에 있다. 이것은 시를 쓰는 의지에 비해 시집 전체를 조율하는 균형감각이 처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두 계열을 분리하여 정리한다면 훨씬 더 좋은 시집이 될 뻔했다. 형식에 대한 도전은 이미 많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뒤따라가는 사람들로서는 부담이 안 될 수 없다.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형식파괴와 한자가 연관이 없다면 한자를 굳이 쓰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생각해볼 일이다.★★☆☆☆[4336. 11. 17.]   117□뜯어먹기 좋은 빵□노혜경, 세계사시인선 95, 세계사, 1999   이미지가 원관념을 버리고 흩어지면 상징이 된다. 이 흩어진 상징들이 난해성을 만들게 되는데, 그때는 해석하는 자의 관념에 의해 재조립되는 것이 그의 세계이기도 하다. 답이 없는 것이다. 이런 시들은 특별한 시각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실험이다. 그 실험이 어떤 의도로 진행되느냐에 따라 평가는 달라지겠지만, 아직 드러나지 않은 세계를 갖고 평가를 하는 것은 모험에 가깝다.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4336. 11. 17.]   118□울음소리 작아지다□최문자, 세계사시인선 97, 세계사, 1999   감정의 미세한 떨림과 일상의 작은 변화에서 시의 소재를 찾아내고 그것을 시로 만드는 능력이 탁월하다. 적당한 이미지를 선택하고 거기에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알맞은 크기로 넣어서 독자를 자신의 생각으로 끌어들이는 수법도 아주 뛰어나다. 다만 깊이가 문제이다. 좀더 깊이 삶을 꿰뚫어보고 인간의 의식 깊은 곳으로부터 할 이야기를 끌어올려야 한다. 일상의 자잘한 감정들을 정리하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그것이 진정한 감동으로 이어지려면 정신을 좀 더 야무지게 담금질하여 인간의 저 깊은 내부에서 울리는 영혼을 퍼올릴 수 있어야 한다. 두레박의 모양은 좋은데, 끈이 좀 짧아서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시상전개의 단조로움은 그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4336. 11. 17.]   119□잠그는 것들의 방향은?□강문숙, 세계사시인선 47, 세계사, 1995   시에 들인 공과 그 결과들이 잘 돋은 이빨처럼 가지런하다. 그런데 무엇을 노래하면 시가 되며 무엇을 노래하면 시가 되지 않는가에 대한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할 필요가 있다. 시를 읽어가다 보면 그 매끈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허전한 느낌이 가시지를 않는데, 그것은 시의 내용이 삶의 깊은 통찰로 연결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써 얻은 귀한 표현들도 현실 속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어딘가 허둥지둥 마감된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따라서 한 이미지를 얻었으면 그것의 뿌리를 어디까지 밀어 넣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시의 표현은 반드시 그것이 환기해주는 어떤 세계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 세계가 얼마만큼 시의 밖으로 드러나느냐 하는 것은 시인의 선택 문제이지만, 그 세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한테나 다 해당하는 일이다.★★☆☆☆[4336. 11. 17.]   120□저 돌이 문을 열어□오선홍, 세계사시인선 45, 세계사, 1995   군더더기 하나 없이 명징한 세계가 높이 살 만하다. 인식의 새로움을 다루는 시들이 주의해야 할 것은 왕왕 설명으로 끝나기 쉽다는 점이다. 그리고 오랜 사색 끝에 제시된 이미지들이 한 번 노출되면 다시는 그 첫 빛깔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 빛을 끝까지 바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이미지가 삶의 깨달음을 오래도록 주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노력이 깃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동서양의 성현들이 태어난 지 2000년이 넘어서는 시점에서 시인의 깨달음이 얼마만한 성과를 거둘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그래도 그만 둘 수 없는 것이 시인의 운명이다. 깨달음만으로 감당하기에는 시는 너무 어려운 갈래이다. 시가 담아야 할 것은 느낌이기 때문이다. 명징한 세계에서 한자는 혹과 같다.★★☆☆☆[4336. 11. 17.]    
87    시집 1000권 읽기 11 댓글:  조회:2151  추천:0  2015-02-09
  101□기둥만의 다리 위에서□조원규, 세계사시인선 6, 세계사, 1989   문명을 보고 재단하는 시각과 능력도 갖추었고, 그것을 말하는 방법도 나름대로 터득했다. 문명의 구조와 그 속에서 견디기 어려운 자의 꿈 없는 삶이 만드는 순간 순간의 단면들을 노래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그때 그 순간의 심리상황일 뿐이다. 그러나 말은 듣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듣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문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명에 대한 진단서만으로는 공유가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시에 표정이 없다. 정서가 없다. 자신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독자 혹은 이 세계에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는 방법에 대해 점검해야 할 것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의지이기 때문이다. 의지를 가진 자가 대화의 통로를 스스로 차단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럴 수밖에 없어서 그렇겠지만 자신을 투명인간으로 만드는 문명과 사회에 대한 감정을 시에 싣지 않는다는 것은 무질서한 잠꼬대가 될 것이고 잠꼬대에 의미를 부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투명인간은 말을 하면 안 된다. 그 인간의 양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족하다. 투명인간에게 한자는 의지이자 혹이다.★★☆☆☆[4336. 11. 14.]   102□소돔성□윤성근, 세계사시인선 7, 세계사, 1990   소돔성은 파국을 눈앞에 둔 도시이고, 시인이 처해있는 현실의 도시일텐데, 자신이 딛고 있는 위치를 이미 그렇게 정해놓고 도시를 파악하기 때문에 그 도시는 소돔성 이외의 것으로 보지 못한다. 그러나 그 안에는 예루살렘도 있고, 청주도 있고, 파주도 있다. 그런 도시를 소돔성이라고 규정했을 때의 문제의식을 자꾸 남에게 설명해주려고 하는 태도가 이 시집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그것이 시를 딱딱하게 만든다. 시를 만드는 능력이나 재주는 이미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지만, 내 시의 근원에 대한 설정과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이 너무 일찍 결정돼 버려서 깊은 울림을 주지 못한 채 메아리처럼 떠돈다. 관념을 버리고 현실로 좀 더 낮게 내려올 때이다.★★☆☆☆[4336. 11. 14.]   103□모자는 인간을 만든다□김상미, 세계사시인선 32, 세계사, 1993   기묘한 상식에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 이 시 전체를 감싸고 있는 세계이다. 큰 논리의 단절 없이 담담하고 깔끔하게 시를 쓴다. 그런 점이 장점이다. 그러나 기묘한 상식에 도전을 내면 결국은 싸움으로 가게 되고 싸움을 하면 스스로 언어의 함정에 빠진다. 그 언어의 함정에 빠져서 공격대상과 뒤얽혀서 스스로 지치고 만다. 그렇게 하는 것이 문명비판의 한 방식이 될 수는 있지만, 문제의 근본을 해결하는 방법이 될 수는 없다.   여기에 인식이 이르면 이제는 언어의 바깥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다. 이러한 긴장을 잃지 않는다면 머지 않아 선시나 화두 같은 시를 쓰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공격하는 일상의 포로가 되고, 더 나아가면 시를 포기하게 된다. 어느 쪽으로도 만만치 않다. 그렇다면 공격 대신 젖어드는 법도 있다. 방법에 대한 고민을 할 때라는 얘기이다.   그리고 하고자 하는 말에 견줄 때 동원되는 상상력이 좀 둔한 맛이 있다. 시를 많이 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상력의 진폭을 크게 하는 것이 싸움에는 더 유리하다는 점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말의 모자에 갇혀 가지고는 뛰어난 상상을 하기가 쉽지 않다. 상상은 말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때 잘 나오는 것이다.★★☆☆☆[4336. 11. 14.]   104□그곳에도 사거리는 있다□이경림, 세계사시인선 49, 세계사, 1995   시를 많이 써본 사람이다. 이미 틀이 짜여있고, 아름다움이 어디서 오는지도 안다. 그러나 베잠방이 차림인데 마음은 명동에 가있다. 이 엉뚱함을 극복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일 것이다. 문명이 강요한 삶의 모순을 아주 담담하게 그림으로 그리는 방법이 있는가 하면 격렬한 반항으로 그 모순을 고발하는 방법도 있다.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그러나 이 시인이 나갈 길은 고발을 줄이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시를 쓰는 방법과 발상이 그쪽에 아주 가깝게 가있다. 이것을 구별하지 못한다면 한 동안 고생할 것이다.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말 일이다. 무뚝뚝한 겨울의 목련 가지에서 하얀 꽃잎이 나오기를 기다려야지 종이로 꽃을 만들어다가 나무에 얹지는 말 일이다.★★☆☆☆[4336. 11. 14.]   105□불멸의 눈꽃□양용직, 세계사시인선 48, 세계사, 1995   “양평역에서” 같은 빼어난 작품이 몇 있지만, 아직도 벗어야 할 마지막 꺼풀이 남아있다. 인식의 명료함이 드러나서 그것이 적절한 이미지를 얻어야 하는데, 곳곳에서 그런 작업이 순탄치 못한 흔적이 드러난다. 이것은 이미지가 잘 숙성될 때까지 기다린 것이 아니라 억지로 쓴 시들이 많았다는 얘기다. 정말 좋은 시인이 되려면 쓰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정말로 내용에 꼭 맞는 이미지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그때까지 한 올 마음의 긴장을 놓치지 않는 것이 가장 힘겹고 고된 작업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시인의 운명이다.★★☆☆☆[4336. 11. 15.]   106□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신현림, 세계사시인선 41, 세계사, 1994   무엇보다도 확고하고 강렬한 의지가 눈에 띈다. 시로 무엇을 말해야 하며,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안다. 시를 무기로 쓸 줄 알며, 작전을 짤 줄도, 어떤 대상을 정확히 골라서 찔러야 적이 쓰러지는가 하는 것까지도 잘 안다. 요컨대 전사의 시로서 나무랄 데가 없다.   시집에 실린 전체 시들이 아주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서 시를 꽤 많이, 그리고 오래 연습했음을 짐작케 한다. 여자의 운명과 그를 둘러싼 질곡의 세계를 정확히 포착해서 칼끝을 그리로 몰고 가는 집중력도 살 만하다. 그러나 중간중간에 들어있는 설명은 그 날을 무디게 하고 그림은 구차한 변명 같다. 게다가 한자는 칼날의 이빨 빠진 자국 같다. 남의 말에 솔깃하다 뿌리째 흔들리지 말고 자신의 세계와 시에 대한 확신을 갖는다면 아주 좋은 시, 특히 대작을 쓸 수 있는 저력이 엿보인다. 그렇게 하려면 칼끝이 지금 겨누어진 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4336. 11. 15.]   107□1차원 나라□박순업, 세계사시인선 25, 세계사, 1992   발상과 방법이 너무 선명하다. 한 개인의 체험이 녹아있지만, 시에서는 문명의 단층마저 드러난다. 어떻게 시를 써야 하며 무엇을 다루어야 하는 것까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시의 단점은 1회성으로 끝나기 쉽다는 점이다. 자칫하면 앞으로 시를 쓰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이 확고한 방법을 버리고자 할 때 새로운 방법을 얻기가 힘들뿐더러 옛 방법의 확고함이 벽이 되어 그것을 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기존의 형식을 흔들어서 무엇을 노래할 것인가 하는 부분에 대한 고민도 없지 않다. 그것이 형식을 흔드는 자의 고뇌이다.★★★☆☆[4336. 11. 15.]   108□모든 길은 노래를 부른다□김수복, 세계사시인선 90, 세계사, 1999   ‘연어’ 같은 빼어난 작품이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 마지막 한 꺼풀을 벗지 못하여 단순한 묘사에 머물고 말았다. 시로 풍경을 묘사할 때 체험이 어디까지 드러나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선이 없어서 어떤 때는 풍경묘사로 그쳤다가 어떤 때는 풍경을 묘사하다 말고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가 하면서 왔다갔다하는 바람에 풍경 묘사에 의한 상징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있다.   풍경으로 쓰는 시는 특히 개인의 체험이 섣불리 드러나면 안 된다. 개인의 체험은 체험일 뿐이다. 그 체험이 환기하는 어떤 정서를 담아줄 대상을 꼼꼼하게 골라서 등장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해야만 그 묘사가 묘한 상징을 이루며 정서를 전달한다. 굉장히 어려운 수법인데, 그것이 잘 안 되고 있다. 그 중에는 한자의 탓도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4336. 11. 15.]   109□갈대는 배후가 없다□임영조, 세계사시인선 23, 세계사, 1992   비유로 시를 쓸 때는 누구나 과장을 일삼기 마련이다. 제시된 대상이 품을 수 있는 내용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 한계를 초과하면 엄살이나 허풍이 된다. 결국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무게가 서로 비슷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집의 시들은 시의 원칙을 너무나 준수하고 있어서 오히려 답답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무게가 서로 다른 것들이 많아서 읽기에 불편한 것들도 있다. 단순한 방법으로 삶을 조명해보는 것이 어떤 때는 정말 시원한 느낌을 주지만 그 단순명쾌한 방법이 내용을 담아내는 어떤 한계가 된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원관념만으로 조합해서 본 세계가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있을 때에는 더더욱 문제가 된다. 그러나 순진무구할 정도로 깨끗한 시각은 본받을 점이 분명하다. 방법은 정말 단순하고 확고한데, 좀 위태위태하다. 한자는 그 위태함을 더욱 흔든다.★★☆☆☆[4336. 11. 15.]    
86    시집 1000권 읽기 10 댓글:  조회:2155  추천:0  2015-02-09
  91□나는 사랑한다□이승훈, 세계사시인선 76, 세계사, 1997   뒤샹이 장르를 파괴했으면서도 미술가로 남아있는 것은, 그의 파괴가 미술의 관행이 연장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별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푸른 하늘이 정답이라고 적는 것은, 사실일지는 모르나 옳은 것은 아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언제부터인지 모를 기원을 갖고 있으며 그 기원으로부터 변혁을 거치면서 이른바 발전을 해왔다. 모든 예술행위는 그러한 발전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옳고 그름, 잘함과 못함은 어느 한 시기를 기준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옳고 그름은 수시로 변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기준이 거짓인 것은 아니다. 세월에 따라서 그 거점이 달라진 것일 뿐이다. 그런 차이를 무(無)로 간주하는 것은 비약이고 말장난이다. 언어는 무언가를 전달하고자 한다. 시는 그러한 전달 양식 중의 하나이다. 뗏목을 버린다고 해서 뗏목이 가치 없다고 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없다면 저쪽에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뗏목이 정답은 아니지만 정답과 연관이 있다. 시는 그런 것이다. 쓰는 자와 읽는 자의 관계를 맺어주는 뗏목이니 그것을 탄 뒤에 버리든 금칠을 해두든 그건 그 시대 사람들의 몫이다. 어떤 자는 버리고, 어떤 자는 금칠을 한다고 해서 그 차이가 시가 될 수는 없다. 차이가 시가 아니라 버림당한 것과 금칠 당한 것이 시이다. 이런 종합의 근거가 시이다. 그 종합은 욕망에서 나온다. 욕망은 인간이다. 인간이 뗏목을 머리에 이고 있다. 색과 공은 같지 않다. 색은 곧 공이다.★★☆☆☆[4336. 11. 13.]   92□현미경으로 보는 하늘□이근호, 세계사시인선 75, 세계사, 1997   시들의 수준이 고르지 않고 높낮이가 다른 것이 흠이다. 사물을 관찰하는 눈이나 세상을 보는 눈이 나름대로 일정한 시각을 갖추었지만,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하고 어디까지 절약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선이 그어지지 않았다. 중간중간에 나오는 푸념이나 말들은 그런 까닭이다. 현미경으로 보려면 관찰에 머물러야 하는데, 관찰을 하다 말고 감정을 드러내면 현미경으로 보는 의미가 삭감된다. 게다가 한자는 현미경의 초점을 흐린다.★★☆☆☆[4336. 11. 13.]   93□유리에 가서 불탄다□노태맹, 세계사시인선 58, 세계사, 1995   아주 독특한 상징을 보여주는 시집이다. 그러나 독특함에 매달려서 허공 중에 떠버린다. 상징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건이 필요하다. 그래서 관념 속의 사건을 설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건의 인과관계 설정은 문제가 없지만, 그 무리한 설정이 사막처럼 물기를 제거한다. 무문관이나 벽암록이 사건 당사자들의 대화로 이루어진 것은 깨달음을 상징으로 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말과 말 사이로 건너뛰는 생각이 저절로 상징을 만들고 그것을 풀 기미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이야기로 꾸미면 장광설이 된다. 그 기백은 살 만하다. 그러나 한자표기에 기대는 사고는 해법을 더욱 어렵게 만들 뿐이다.★★☆☆☆[4336. 11. 13.]   94□내 몸이 동굴이다□박기동, 세계사시인선 83, 세계사, 1997   특별한 지식이나 사실이 시로 들어올 때 조심해야 할 것은, 그것의 특수함으로 인해 주제를 전달하는 데 그것이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남들이 잘 모르는 지식이나 내가 발견한 특별한 사실들을 통해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내가 하고픈 말이 그러한 사실들에 예속이 되면 시가 무거워진다. 이 무거움에는 설명하려는 의도도 들어있다. 간간이 빼어난 시들이 있지만 대체로 방법과 수단에 목적이 혹사당하고 있다. 이것을 역전시키려면 좀더 가혹한 긴장이 필요하다. 한자는 불필요한 긴장이다.★★☆☆☆[4336. 11. 13.]   95□모든 하루는 낯설다□김추인, 세계사시인선 82, 세계사, 1997   무기력한 일상과 큰 변화 없는 따분한 세상을 아주 꼼꼼하게 잘 그렸다. 그러나 일상을 꼼꼼하게 해부한다고 해서 그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해부 당하는 것들 중에는 일상의 문제가 아닌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해부해야 할 것이며, 해부해도 소용없는 것인지, 나아가 해부하는 방법은 어떤 것이 큰 효과를 내는지에 대한 고민을 한 번 더 해야 할 것 같다. 새로운 세계는 성실함 위에서 열리지만, 성실함만이 새로운 세계를 여는 것이 아니다.★★☆☆☆[4336. 11. 13.]   96□무지개가 되기까지는□박정만, 문학사상한국시선 18, 문학사상사, 1987   시가 노래라는 당연한 사실을 우리는 거의 잊고 산다. 아니, 아예 잊고 산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시는 노래였고, 지금도 노래이다. 이 사실을 박정만보다 더 정확히 보여주는 사람은 없다. 그의 시는 완전히 노래이다. 노래는 중간의 어느 한 구절이 애매모호해도 그 가락으로 인해 저절로 와 닿는 성질이 있다. 박정만의 시가 바로 그러하다. 중간에 나타나는 구절들의 애매함은 소리내어 읽으면 저절로 흡수된다. 김소월 이후로는 이런 시인이 없다. 이런 노래를 부르도록 영혼의 내면에서 닦달한 것이 허무와 죽음이었으니, 그런 노래의 주인공이 평탄한 삶을 산다면 그 시는 사기꾼의 말장난일 것이다. 김소월이 오래 살지 못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4336. 11. 13.]   97□단편들□박정대, 세계사시인선 81, 세계사, 1997   형식에 대한 파괴나 집착은 갈래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분히 의미의 관점이고 역사의 관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미 가나인, 황지우, 박남철 같은 시인들이 그런 쪽에서 카메라를 받았다. 아마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 시집도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형식에 대한 문제는 이야기가 아니라 보여주기가 되어야 한다. 앞의 시인들이 보여주기로 성공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집에서는 형식이 허물어지고는 있지만 이야기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자신의 정서에 대한 어떤 발언이다. 즉 보여주기보다는 말하기를 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이 이 시를 형식의 문제보다는 다분히 서정의 영역으로 붙잡아 놓는다. 사진과 만화가 들어가기는 했지만 단순한 서정시라는 얘기다. 형식에 대한 집착이었다면 심각하게 방법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4336. 11. 14.]   98□황금 가지□이중수, 세계사시인선 79, 세계사, 1997   생각을 글로 나타내는 재주는 나무랄 데 없다. 그러나 무엇을 쓰면 시가 되고 무엇을 쓰면 시가 되지 않는가 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 같다. 시는 개인의 사사로운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만들려면 개인 속에 숨어있는 어떤 공공의 인식을 다루어야 한다. 내 이야기가 그냥 내 이야기로 그쳐서는 시가 되기 어렵다. 그런 내용을 다룬 작품들이 의외로 많다. 그리고 이미 학계에서 설명이 끝난 개념을 시속으로 끌어들일 때는 아주 조심해야 한다. 그 개념은 이미 독자들을 감동시키고 난 후이기 때문에 그것을 내 삶 속에서 발견했다고 해서 독자들이 감동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시는 개념이 아니라 느낌이다.★☆☆☆☆[4336. 11. 14.]   99□따뜻한 길 위의 편지□박용재, 세계사시인선 11, 세계사, 1990   시가 거칠다. 그 거칢은 시에서 자주 이야기되는 시대의 분위기 때문인 듯하지만, 사실은 시가 삶의 어느 곳에 뿌리내려야 할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생겨난다. 시대의 고통은 시인의 삶 어느 곳에서 피어나야 하는데, 이 시들에서는 너무 광범위한 분위기로만 잡혀있어서 허황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시대를 이야기할 때 자신의 어느 부위에 닿아있는 시대를 이야기할 것인가 하는 것을 고민해야 할 일이다. 한자는 그런 허황함을 더욱 크게 만든다.★☆☆☆☆[4336. 11. 14.]   100□숲 속에서 묻는다□이사라, 세계사시인선 74, 세계사, 1997   내용도 괜찮고 표현도 적절한데, 무언가 그럴듯한 비유나 표현을 하지 않으면 시가 되지 않는다는 강박관념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그것 때문에 표현에 무리가 생기고 생소함이 서린다. 더 큰 문제는 절망도 우아하게 해야 한다고 하는 생각이다. 문명의 황폐함과 그 안의 절망을 다루고 있지만 그에 맞서자는 것인지, 즐기자는 것인지 분명치가 않다.   싸움이라면 싸움의 대상과 전략과 방법을 분명히 해야 할 것 같다. 흉내내기나 비꼬기 가지고는 싸움이 안 된다. 웃통 벗어부치고 칼로 내 배를 째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 것이 문명이고 삶이다. 내 몸을 망가뜨리거나 문명을 망가뜨리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게다가 한자는 이 싸움에 커다란 장애일 뿐이다.★★☆☆☆[4336. 11. 14.]    
85    시집 1000권 읽기 9 댓글:  조회:1976  추천:0  2015-02-09
  81□나는 독을 가졌네□안정옥, 세계사시인선 60, 세계사, 1995   소재가 시가 되지는 않는다. 어떤 일관된 소재가 나타나면 그 소재를 통해서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것을 이미지에 실어야 한다. 한 마디로, 소재를 극복하여 그것을 내가 말하고자 하는 데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재가 물고기와 낚시라는 통일된 내용에 머물러있지만, 그것이 내 말을 하는데 이용되지 못하고 나열되었다. 소재에 집착하느라 정작 내가 할 말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그 소재를 통해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을 먼저 분명히 해야 한다. 시는 나의 지식을 전달해주는 도구가 아니다. 결국 수필로 다루었어야 할 내용이라는 뜻이다.★☆☆☆☆[4336. 11. 12.]   82□화장실에서 욕하는 자들□박찬일, 세계사시인선 63, 세계사, 1995   무섭다고 시에다 썼을 때 무섭다는 말이 공포를 나타내면 그건 시의 언어가 아니다. 시의 언어는 그것이 직접 지시하는 것 외에 그것이 환기하는 어떤 것이 있다. 그것이 정서이기도 하고 상징이기도 하고 그렇다. 그런데 이 시집에 쓰인 대부분의 시들이 다른 것을 환기하지 못하고 시인의 말을 직접 전달하는 기능으로 쓰이고 있다. 행과 연 구분이 되어있지만, 시가  지닌 그런 기능으로 작용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말의 순서를 바꾼다고 해서 시가 되는 것이 아니다.★☆☆☆☆[4336. 11. 12.]   83□검은, 소나기떼□김상미, 세계사시인선 73, 세계사, 1997   시들이 거의 이야기 차원에 머물러있다. 시가 특별한 장치를 갖추지 않고 이야기에 머물러 있으려면 그렇게 해도 되는 시의 커다란 틀이 다시 마련돼야 한다. 그냥 말을 해도 시가 되는 그런 장치 말이다. 그 중에서 좋은 방법은 생각을 특별한 곳에 집중시키는 일이다. 그래서 그 생각의 단련이나 집중이 그대로 시가 될 만한 빛나는 정수를 낳는 것이다. 이 시집의 시들은 그렇게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시들이다. 그대로 두면 시라고 하기에 어려울 만큼 집중이나 단련이 늘어져있다.★☆☆☆☆[4336. 11. 12.]   84□하느님의 야구장 입장권□이만식, 세계사시인선 72, 세계사, 1997   일상을 요약하는 일은 쉽지만 그것이 시가 되는 것은 어렵다. 그 요약에 대한 성찰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일상의 작은 일에 감동하고 반응하지만, 그것이 남들이 다 느끼는 그런 것이라면 시라는 양식으로 담아봤자 아무런 울림을 갖지 못한다. 그것은 개인의 일기장에 들어있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같은 사건이나 주제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시인만의 각성과 느낌이 있어야 한다.★☆☆☆☆[4336. 11. 12.]   85□자작나무 내 인생□정끝별, 세계사시인선 64, 세계사, 1996   초점이 맞지 않는 환등기에 필름을 넣으면 영상 역시 뿌옇게 나타난다. 아무리 좋은 깨달음을 넣어도 나타나는 건 뿌연 환영이다. 따라서 어떻게 어떤 내용을 말할 것인가를 고민할 것이 아니라 이 초점을 어떻게 맞추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한 번 더 걸러내고, 그것을 어느 이미지에 맞추어서 꿰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군더더기가 너무 많다. 한자도 그런 군더더기 중의 하나이다.★☆☆☆☆[4336. 11. 12.]   86□텅 빈 극장□김정환, 세계사시인선 57, 세계사, 1995   시가 짧아진다고 해서 이미지나 이야기까지 짧아지지는 않는다. 이 시인은 시에서 어디까지 말을 하고 어디쯤에서 생각을 멈추어야 할지 그것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짧은 시안에 담아야 할 내용물의 크기를 가늠하지 못하고, 중간 중간에서 끊어놓는다. 끊긴 내용물을 읽는 이가 연결시켜서 읽어야 하지만, 그 연결 작업에서 아름다움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굳이 그런 작업을 할 의무를 독자에게 떠넘길 자격이 시인에게는 없다. 한자는 이미지간의 단절을 더욱 크게 만든다.★☆☆☆☆[4336. 11. 12.]   87□세상의 밥상에서□김은자, 세계사시인선 69, 세계사, 1999   시집의 처음부터 끝까지 고른 수준과 일정한 화법을 갖추었다. 시로 말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이것은 굉장한 장점이 아닐 수 없다. 이미 세상을 보는 눈이 정해졌으며 그것을 시로 나타내는 방법까지 확립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쉽게 쓰는 것 같지만, 이미지에 자신의 생각을 적당히 실어서 보내는 능력도 탁월하다. 내용에 잘 어울리는 이미지를 시의 적절하게 동원시키고 마무리까지 잘 해낸다. 인식과 형상이 아주 자연스럽게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다만 인식의 깊이가 문제인데, 인간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본래의 모습과 삶의 고민을 좀 더 깊이 파고든다면 정말 좋은 시가 나올 듯하다. 그러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한자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4336. 11. 12.]   88□한 바이올린 주자의 절망□마종하, 세계사시인선 55, 세계사, 1995   ‘두 길’ 연작은 빼어난 작품이다. 특별한 수사법을 동원하지 않았어도 적당한 긴장과 알맞은 호흡이 시의 맛을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다른 시들의 수준이 들쭉날쭉이다. 시가 긴장을 잃고 이야기 속으로 빠져서 할 말만 하고 마는 그런 위험들이 곳곳에 산재해있다.   말을 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말을 절약하거나, 아니면 말하는 방법을 바꾸어 볼 필요가 있다. 나이 들어가면서 할 말이 많아지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그것을 절제하지 못하면 시를 망친다. 시에서는 할 말이 있고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다. 시에서 할 말이 아니거든 수필로 할 일이다.★★☆☆☆[4336. 11. 13.]   89□개 같은 날들의 기록□김신용, 세계사시인선 9, 세계사, 1990   체험의 강도가 격렬하면 그 때문에 자제력을 잃고 과장을 일삼게 되는데, 여기서는 체험의 강도와 딱 알맞은 말들이 동원되어 형상과 인식이 정확히 맞물리고 있다. 흥분하지 않은 그 차분함이 돋보인다. 아무도 갈 수 없는 곳에서 아무도 할 수 없는 말을 혼자서 하고 있기에 시의 광채는 더욱 빛난다. 그러나 머지 않아 큰 벽을 만날 것이다. 파헤친 곳에 지어 올릴 것을 발견하는 일은 파헤치는 일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한자는 그런 어려움을 예고하는 전주곡이다.★★★★☆[4336. 11. 13.]   90□유토피아 없이 사는 법□서림, 세계사시인선 78, 세계사, 1997   관찰은 날카롭되 생기가 없다. 이것은 이미 주제를 먼저 정해놓고 거기에 맞는 것들만 현실에서 골라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을 이리저리 바꾸고 색깔을 덧칠해보지만 그것이 근원으로부터 올라오는 느낌이 없고 마치 조화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지식으로 시를 쓸 때오는 함정이다. 한자는 그런 덫 중의 하나이다.★★☆☆☆[4336. 11. 13.]    
84    시집 1000권 읽기 8 댓글:  조회:2151  추천:0  2015-02-09
  71□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이승하, 세계사시인선 13, 세계사, 1991   어떤 큰 주제에 집착하여 시를 그리로 몰고 가다보면 표현들이 그 주제 속으로 빨려들어 빛을 잃는다. 그리고 낱낱의 시도 그러한 관성에 파묻힌다. 마치 빛이 중력에 휘어지는 것처럼. 그 시대의 거대한 명제를 분석하기 위하여 시들을 동원하고 있기 때문에 낱낱의 시들이 생기를 잃었다.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다는 증거이다. 자신의 체험을 끌어들여도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워낙 크기 때문에 그것이 실감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욕심을 버릴 필요가 있다. 거대한 바위를 쪼는데 시는 그렇게 유용한 무기가 아니다. 그것을 알 때에 시는 대단한 무기가 된다. 한자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무기의 날을 무디게 할 뿐이다.★★☆☆☆[4336. 11. 8.]   72□외계인□황동규, 문학과지성시인선 196, 문학과지성사, 1997   나이가 들면서 또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은 인간의 삶을 반추하는 데 큰 효과를 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여행 모티브는 문학의 영원한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에 도착했을 때 자신이 딛고 있는 세계가 버려야 할 그 무엇으로 규정된다면 새로 도달한 세계 역시 별 볼 일 없는 것이다. 서로 다른 두 세계가 긴장을 하면서 상호 교섭할 때 여행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쪽을 버리고 저쪽을 얻으려 한다면 양쪽을 다 잃는 것이 삶의 속성이다. 게다가 여행 모티브는 시 속에 반드시 서사의 구조를 끌어들이기 마련이다. 당연히 시의 긴장을 해이하게 하고 늘어진 긴장 속에서 인생의 깨달음은 전달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시가 지닌 양식의 긴장과 아름다움은 살아나기 어렵다. 수천 년 시 형식의 역사가 이제 와서 버림받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버림받아야 할 양식이 시라면 그런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극서정시라는 새 호칭으로 이 무의미한 형식을 합리화시키려는 궤변들은 시인의 주변에 진정한 동지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인의 진정한 벗은 시인의 시에서 나이의 주름살을 없애라고 충고해주는 자이지 주름살이 아름답다고 얘기해주는 자가 아니다. 나이 들어서 받는 칭찬은 대부분 아첨이 아니면 궤변이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아첨과 궤변을 일삼는 자들은 무언가 다른 목적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4336. 11. 9.]   73□국어선생은 달팽이□함기석, 세계사시인선 86, 세계사, 1998   언어 감각이 아주 탁월하다. 그리고 그러한 탁월함이 자의식을 분해하는 데 집요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따금 자신의 밖으로 나온 시들이 있지만, 그런 것들은 맥이 빠진다. 따라서 이 시인의 시가 지향하는 바는 자신의 의식이고 자신의 의식을 낳은 가족사이다. 그 가족사가 독특한 상상력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장광설인 것이 문제이다. 필요한 것 이상으로 말들이 동원되고, 이것은 자신의 상상력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나온 타협안이다. 과연 독자들이 이것을 알아줄까 의심스러워서 중간중간에 설명을 해주고 마는 것이다. 특히 시집의 중간 뒷부분으로 넘어가면서 이런 설명이 자주 등장한다. 그것이 상상력의 독특함을 많이 깎아먹는다. 좀 더 자신감 있게 자신의 상상력을 펼칠 필요가 있겠다. 불필요한 말들을 제거하고 자신의 상상력에 확신을 갖는다면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이상 이후 이러한 노력이 성과를 보인 적이 별로 없다는 점에서 이 시인의 발상은 높이 살 만하다. 그런데 자신의 의식을 파 헤쳐보는 작업은 일정한 한계를 갖기 마련이다. 시집 한 권 분량이면 상상력이 바닥이 나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만약 이 시집이 공들인 것이라면 이 시인은 한 동안 시를 쓰지 못할 것이다. 내부에 집착한 시인이 밖으로 나오면서 긴장을 잃지 않으려면 새로 탄생하는 것처럼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이 힘겨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장르를 전환하게 된다. 소설이나 희곡으로.★★★☆☆[4336. 11. 10.]   74□대머리와의 사랑□성미정, 세계사시인선 71, 세계사, 1997   무엇보다도 이 시인은 상징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다. 그런 만큼 상징을 통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도 상징으로 담을 수 있는 것의 한계까지도 아주 잘 이해한다. 그런 점에서 아무나 도달하지 못할 한 경지에 이른 셈이다. 그러나 지금 사용하는 상징은 시의 상징 중에서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주로 인과관계와 논리로 상징의 틀을 만들고 풀어가고 있으나, 그렇게 한 방법으로만 사용하면 시가 딱딱하고 메마르게 된다는 것을 잘 알 필요가 있다. 상징은 이미지만이 아니라 정서로 만드는 상징도 있고 비유로 만드는 상징도 있으며 분위기로 만드는 상징도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으로 구사할 수 있도록 상징의 방법을 확산시켜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시의 세계가 자신의 내면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도 이 시집의 특징인데, 상징은 자신의 내면만이 아니라 자신 밖의 세계를 드러내는 데도 훌륭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 방법론을 확고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4336. 11. 10.]   75□뉴욕 드라큘라□이상호, 세계사시인선 67, 세계사, 1996   병원이라는 소재는 한 번 쯤 집중하여 다뤄볼 만한 소재이다. 거기에는 인간의 고통스런 기억이 똘똘 뭉쳐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고통의 가닥을 한 올 한 올 풀어낸다면 인간의 생과 사가 지닌 어떤 의미심장한 상징을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의미심장한 상징의 세계까지 가 닿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시가 소재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재가 주는 영역 바깥까지 생각을 확산시키지 못하고 발목이 잡혀있다. 안락사 연작의 경우도 안락사와 관련된 사람들의 상황만을 묘사하면 그저 개인 상징으로 머물고 만다. 안락사라고 하는 사회 현상의 저층과 그것이 한 개인의 삶과 무의식에 어떻게 연계되어 있으며 그것이 한 개인과 사회에 던지는 의미를 파고들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자리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안락사라는 한 현상이 불러일으키는 개개인의 심정을 노래했기 때문에 좀 더 깊은 의미로 환산되지 못하고 만 것이다. 중요한 체험이지만 이것이 명작이 되기 위해서는 인식의 방법과 깊이를 한 번 더 점검해야 할 듯하다.★★☆☆☆[4336. 11. 10.]   76□누이□유안진, 세계사시인선 68, 세계사, 1997   나이가 든다는 건 경계할 일이다. 나이는 추억 속에 사람의 사고를 붙들어놓기 때문이다. 특히 시에서 추억에 붙잡혀있으면 현실이 증발된다. 현실이 증발된 시는 영원성을 갖지만, 그 대가 또한 만만치 않아서 관념성을 띠거나 한 개인의 넋두리로 변하기가 쉽다. 이 시집 역시 이러한 관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도 연륜이 갖는 묘한 무게 때문에 나름대로 읽는 맛을 갖고 있다. 특히 시에서 우러나는 운율은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는 볼 수 없는 예스러운 맛이 있다.★★☆☆☆[4336. 11. 10.]   77□우주배꼽□고진하, 세계사시인선 69, 세계사, 1997   한 편 한 편의 완결성을 위해 들인 공은 살 만하다. 그러나 그런 공들을 모아놓았을 때 전체가 담고 있는 내용물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시들이 한 곳을 향해 초점을 모으지 못하고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다. 모여있는 시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어떤 의미의 성을 쌓아야 하는데, 낱낱의 벽돌로 남아있다면 그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벽돌을 모아놓는다고 해서 집이 되지는 않는 법이다. 무엇에 대한 고민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 화두가 될 단계이다. 그런 고민 이전에 해야 할 일은 한자표기가 시에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이다.★★☆☆☆[4336. 11. 10.]   78□날다람쥐가 찾는 달빛□유진택, 문학과지성시인선 228, 문학과지성사, 1999   시집을 낸다고 하면 나름대로 시를 쓰는 기교에 대한 자신이 있기 때문에 굳이 어려운 방법을 피하지 않는다. 많은 시들이 현란한 기교 때문에 빈 쭉정이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그런 가운데 아주 단순한 기교를 쓰는 시들이 돋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시집은 보여준다. 사물에 내 생각을 빗대는 것은 아주 단순하고 오래 묵은 방법이다. 그 낡은 방법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그런데 그 단순한 방법을 뒷받침하는 내용까지도 극히 단순해서 어떤 부분은 위태롭기까지 하다. 세상에 대한 비판의식을 드러내는 부분은 세상에 대한 이해가 너무 얕아서 아슬아슬하다. 깊이와 넓이 모두 확장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4336. 11. 10.]   79□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박남준, 문학동네시집 41, 문학동네, 2000   계륵이란 말이 있다. 먹자니 먹을 것이 없고 버리자니 아깝고 한 닭갈비를 이르는 말이다. 이 시집에도 지독한 닭갈비가 있다. 의미가 그것이다. 이 시집에 실려있는 분위기는 아주 독특하다. 꿈 없는 자의 몽롱한 내면 스케치인데, 그런 시에서는 의미를 정확하게 찾아내면 그 스케치가 오히려 망가진다.   시의 언어는 적막한 분위기를 나타내는 것으로 기능해야 한다. 그런데 많은 말들이 의미를 정확히 밝혀서 쓰이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시집 전체의 분위기를 해치고 있다. 안개 속의 희뿌연 풍경을 그리는 데는 선명한 선이 분위기를 망친다. 바로 의미가 그런 노릇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의미도 버릴 수도 없을 만큼 뚜렷하다. 어느 쪽인가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점에 와있다.   시의 정서는 우리 시에서 한 번쯤 도달해야 할 그런 곳에 닿아있다. 특히 자연물에서 인간의 고독을 읽고 그리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바로 이 점이 다른 시집과 이 시집을 구별짓는 뚜렷한 요인이다.★★☆☆☆[4336. 11. 10.]   80□세상의 모든 저녁□유하, 민음의 시 56, 민음사, 1993   보통 시인들의 경우 어떤 이미지에서 발상을 얻고는 그것을 시로 완성한다. 그런데 이 시인은 평상시에 눈 여겨 봐두었던 이미지들을 시를 쓸 때 모조리 끌어다 붙인다. 이미지들은 소용돌이치며 시속으로 빨려 들어가 시의 한 부속품이 되고 그 자리에서 반짝반짝 빛을 낸다. 결국 마음속의 이야기를 정한 다음에 그 주변에 있는 이미지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여 시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여타 다른 시인들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이고, 이 시인의 특징이다. 이런 힘이야말로 정말 시의 참맛이다.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여서 그 반대쪽인 화이트홀 바깥에 시의 꽃 한 가지를 툭 던져놓는 것이다. 이것은 웬만큼 노력해 가지고는 얻기 힘든 것이며, 자신의 사고와 정서를 늘 칼끝처럼 날 세워 놓지 않으면 또 안 되는 일이다. 아마도 이 부분을 다른 시인들이 따라하기 어려울 것 같다. 편히 살다가 이미지가 나타나면 그때 가서 시를 만드는 것하고는 차원이 다르다.★★★★☆[4336. 11. 11.]    
83    시집 1000권 읽기 7 댓글:  조회:2101  추천:0  2015-02-09
61□만국의 노동자여□백무산, 청사민중시선 33, 청사, 1988   노동에 관한 사상은 이미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본주의가 살아있는 한 변함 없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의 모순에 관한 시는 새롭다. 특히 이 시집 속에 실린 시들은 살아있다. 체험이 현실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의 모순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으며 그것을 현실 속에서 몸으로 찾아냈고, 그것을 아주 적절한 표현으로 나타냈다. 사상과 삶과 표현이 완벽한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다. ★★★★☆[4336. 11. 6.]   62□죽은 자를 위한 기도□남진우, 문학과지성시인선 185, 문학과지성사, 1996   죽음을 카메라로 찍을 수는 없다. 카메라는 색깔로 인식하고 눈으로 보여주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좋지도 않은 장비를 가지고 내내 그런 일을 하고 있다면 어떨까? 그러다 보니 카메라에 잡히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장례식 모습이다. 이것은 시인이 주제에 접근하는 시의 방법론을 전혀 모르는 사람임을 보여준다. 죽음을 시각 이미지로 묘사하는 것은 그림으로 그리는 것만도 못하다. 물감은 죽음의 색깔을 직접 보여주지만 문자는 주어진 문자정보를 통해서 머릿속에서 재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에서 죽음을 시각으로 접근해서는 전혀 효과를 볼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이런 기초조차 모르고 쓴 무기력한 시들이다. 그러니 수박 겉핥기가 될 수밖에 없다. 수박의 겉을 아무리 핥아야 수박 맛을 알 수는 없다.   죽음에 대해 백 날을 이야기해야 죽음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기형도가 죽은 자리에 가서 앉아본다고 해서 그의 죽음을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방법론이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쓴 시이기 때문에 뜬구름 잡기가 되어버렸다. 이미지 몇 개로 죽음을 그릴 수 있다는 생각은 큰 착각이다.★☆☆☆☆[4336. 11. 6.]   63□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있을 거다□황지우, 문학과지성시인선 220, 문학과지성사, 1998   시대의 몫이겠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환멸 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게다가 생각이나 상상의 방법이 아주 거칠어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주 불편하게 만든다. 아마도 시대와 시인 사이에 생긴 불화 때문이리라. 그렇다고는 해도 무언가 좀 더 편한 방법이 있을 듯한데, 거기에 이르지 못했다. 마감이 덜 된 듯한 시를 보는데, 이것을 시인의 태도라고 읽어야 할지 미숙이라고 해야 할지 구분이 잘 안 가는 시집이다. 이런 점이 장점으로 작용하기는 힘들 것 같다. 가장 심각한 것은 시가 이야기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시가 아닌 형식을 시로 만들기 위해서 이야기의 중간중간에 시의 인식이랄 만한 참신한 표현과 경구를 될수록 많이 넣었다. 그러나 경구가 몇 개 들어간다고 해서 시가 되지는 않는다. 여전히 이야기에 머물러 있다. 오히려 이런 경구들이 상상력을 붙잡고 늘어져 의미 전달의 흐름을 자꾸 동강낸다. 그런 단절들이 애써 얻은 귀중한 깨달음과 표현을 시 전체로 확산시키지 못하고 자꾸 부분에 얽매이게 만든다. 어눌한 중이 대단치도 못한 깨달음을 떠듬거리며 토해놓는 것 같다. 화두나 법어가 시와 친연성이 있지만 그것이 그대로 시가 되지는 않는다. 상황이 제거되면 오히려 봉창 두들기는 소리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환멸의 삶을 전하기 위해 화두 같은 말장난을 동원하는 것은 생각의 격렬한 반응이 빚어낸 결과물처럼 보이나 좀 더 냉정하게 보면 일종의 치기이고 습작기를 벗어날 무렵의 난봉 심리이다. 한자 표기는 여기에다 허영끼까지 덧칠하고 있다. 그런 표현보다 더 완벽한 건 1미터만 나가면 있다는 15층 베란다 밖이다. 거기에 기형도가 있다.★★☆☆☆[4336. 11. 6.]   64□불온한 검은 피□허연, 세계사시인선 53, 세계사, 1995   말하자면 절망의 늪에 빠진 자의 눈에 비친 세상 풍경이라는 뜻인데, 상관물이 단순히 개인의 넋두리로 그치지 않고 종 보편의 의식으로 연결되려면 그 고리에 대한 인식이 정확하고 투철해야 한다. 내가 이렇게 얘기하면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리라는 막연한 기대는 너무 태만한 태도라 아니할 수 없다.   특수한 체험이 특수한 모습 그대로 고정되어 버리면 그것은 시가 아니다. 특수한 체험이 특수한 방식으로 상상력에 연결되어야 하는데, 그 고리를 상상의 어느 부분에 걸어야 할지 선뜻 알 수 없다. 게다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흔하디 흔한 절망과 소외이다. 그리고 남들의 예술작품을 통해 무언가 할 말을 전하려 한다는 것이 벌써 한 수 접혀 들어가는 것이다. 남의 문자를 함부로 쓰는 것 역시 시의 세계를 전달하는 것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일이다.★☆☆☆☆[4336. 11. 7.]   65□나무들은 폭포처럼 타오른다□박용하, 세계사시인선 51, 세계사, 1995   표현은 요란한데 할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전달해야 할 내용에 비해서 너무 많은 말들이 동원되고 시가 길어지고 번잡해진다. 아직 습작기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다. 주제를 먼저 정확하게 정해야 하고 거기에 꼭 맞는 표현이 아니면 과감하게 잘라버려야 한다. 버리지 못하면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그런 중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은 한자이다.★☆☆☆☆[4336. 11. 7.]   66□저녁이면 블랙홀 속으로□오정국, 세계사시인선 19, 세계사, 1992   철지난 유행가처럼 내용도 그렇고 형식도 그렇다. 그렇고 그런 내용들이 빼곡하게 차 있다. 이 경우, 시가 새로워지려면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더욱 깊어지거나, 체험을 표현하는 방법이 달라져야 한다. 깊이가 없기 때문에 방법이 새롭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현실을 어떤 시각으로 보아야 인식이 신선하게 드러나는가 하는 것을 깊이 고민해야 한다.★☆☆☆☆[4336. 11. 7.]   67□막연한 기대와 몽상에 대한 반역□이윤택, 세계사시인선 5, 세계사, 1989   시집에 실린 시 전체가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우선 눈에 띤다. 이것은 중간중간에 보이는 희곡의 기획력과 관련이 있을 듯하다. 그런데 정치현실을 멀찌감치서 비판하고 있지만, 정작 그 정서나 내용은 정치와 역사에 상당히 깊이 꽂혀있다. 그것이 이율배반처럼 낯설다. 1980년대의 몫이겠지만, 그런 삭은 내용을 그나마 살려주고 있는 것은 말을 다루는 솜씨이다. 군더더기 없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살 만하다. 뒤의 장시는 너무 사실에 붙잡혀서 이미지와 말들이 무겁게 쓰였다.★★☆☆☆[4336. 11. 7.]   68□개□최준, 세계사시인선 14, 세계사, 1991   한 가지 소재를 가지고 시집 한 권을 낸다는 것은 시인이 성실성과 집중력을 지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점 하나만으로 이 시집은 칭찬 받을 만하다. 한 가지 주제에 집착을 하다 보면 내용이 자꾸 깊어진다. 깊어지면서 관념화된다. 그것만 극복한다면 한 주제로 묶은 시집은 대성공이다. 과연 얼마나 시인의 사고가 현실의 곳곳으로 삼투해들어갈 것인가 하는 것이 관심거리이다. 이 정도면 정말 많이 들어갔다. 이 시인이 신인이라면 기성시인들은 많이 부끄러워해야 한다.★★★☆☆[4336. 11. 8.]   69□매혹, 혹은 겹침□김정란, 세계사시인선 22, 세계사, 1992   내가 전봇대에 오줌을 깔기고 있는데, 어떤 점잖은 노인이 꾸짖는다면 그에 대해서 반응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겠지만, 제일 저급한 방법은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왜 남의 일이 끼어 드느냐고 욕을 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 노인은 그 노인 시대를 대표하는 한 종이 아니다. 그냥 노인일 뿐이다. 그 노인에게 욕을 할 때는 그 종에 대한 분노를 실을 필요가 없다. 그런 노인은 천지에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종을 대표하는 노인에게 분노의 근원을 드러내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이 시집에 실려있는 것들은 그 노인에 대한 욕들이다. 그 노인과 싸워서 내가 이길 수는 있지만, 한 노인을 이기는 것이 그 종 전체를 이기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하면 그 종 전체를 이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욕지거리나 멱살 드잡이 가지고는 안 되는 일이다. 말을 돌려도 욕은 욕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종들이 가진 가장 취약한 점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이 가장 좋은 효과를 내는 방법이다.   이 시집에서는 그런 지점을 찾지 못해서 전투가 별 효과를 내지 못 하고 있다. 그것은 사상 투쟁의 표적을 찾지 못함과 동시에 그 투쟁을 담보해줄 시의 방법론 역시 확보하지 못하였음을 뜻한다. 시의 형식을 비튼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다.★★☆☆☆[4336. 11. 8.]   70□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김승희, 세계사시인선 56, 세계사 1995   다작의 병폐는 할 말에 비해 형식이 다양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특히 한 가지 주제에 매달려서 그것을 악착같이 파헤치려고 할 때는 이런 문제점이 더욱 커진다. 바로 이 시집이 그런 모습을 잘 보여준다. 정형화된 것들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에 대한 분노, 그에 대한 반발이 격렬한데, 그 격렬한 감정이 자신에게 꼭 맞는 옷을 찾지 못하여 누더기를 걸치고 있다. 해진 옷 사이로 때묻은 살결이 희끗희끗 드러난다. 시가 굳이 고상하고 아름다운 형식을 고집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형식을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귀찮고 어렵더라도 감정을 조절해서 시를 아껴 쓸 필요가 있다.★★☆☆☆[4336. 11. 8.]    
82    시집 1000권 읽기 6 댓글:  조회:2280  추천:0  2015-02-09
  51□반딧불 보호구역□최승호, 세계사시인선 52, 세계사, 1995   시를 산문으로 쓴다는 것은 행을 가를 때 오는 긴장과 이미지 호흡의 장점을 버리겠다는 뜻이다. 산문은 비유의 긴장마저도 떨어뜨린다. 그래서 쓰기가 꽤 어려운 방법이다. 따라서 산문으로 쓰려면 시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시를 포기하면 물론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시의 기득권을 포기하면서 시이기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어떤 새로운 방법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 새로운 방법의 유일한 탈출구는 상징이다. 이 상징은 물론 앞 뒤 정황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산문시에서는 생각의 질서와 작용이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된다. 어떻게 생각이 전개되고, 또 전개시켜야 하는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고민거리가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은 일반 산문과 구별하기 어려운 요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미지를 배열하는 생각이나 발상의 방법만 가지고도 어렵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러한 발상에 의존하되 결국은 시 안의 이미지는 상징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산문과 같이 문장 하나하나 이미지 하나하나는 발언이 되고 만다. 시로서는 치명상이다.   이 시집의 산문성은 시의 산문성이 아니다. 산문의 산문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이른바 ‘깨달음’을 전달하는 도구로 문장이 쓰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에 이르렀더라도 그 깨달음의 어떤 비경을 이미지에 의존해서 노래해야 그것이 시가 되는 것이지, 그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과 그 결과를 이야기해서는 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시집의 내용 대부분은 그런 내용을 전달하는 것들이다. 그러니 시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일상의 깨달음이 시로 들어올 때의 모습이다. 이 시집의 대부분은 불교식 깨달음의 일상화라고 할 수 있는데, 굳이 선승 흉내를 내지 않아도 일상생활에서 늘 겪고 느끼는 것들이다. 시는 깨달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의 문제이다. 깨달음이 문제라면 굳이 시를 쓰지 않아도 된다. 수필을 써도 되고 소설을 써도 되고, 아니면 무문관이나 벽암록처럼 어록을 만들어도 된다. 그렇지만 시는 시이다. 시에는 그것을 읽는 사람의 문법이 있다는 것이다. 이 문법을 모르면 시라고 하기 어렵다. 대부분이 시집의 시라는 것들이 이 문법을 지키지 않고 있다.   깨달음 흉내를 내려면 그것은 인류 최고의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깨달음은 현재 내가 깨달은 것이 새로운 것 같지만, 이미 깨달음의 절정에 도달한 사람이 보면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도사 흉내를 내면 안 되는 것이고, 도사 흉내를 내려면 인류가 여태까지 도달해보지 못한 그 어떤 새로운 경지를 연 것이어야 한다. 말을 안 하고 있으려면 모르되 말을 하려면 그래야 하는 것이다.★★☆☆☆[4336. 10. 27.]   52□웃는 산□안정옥, 세계사시인선 93, 세계사, 1999   현상의 배후에 서린 어떤 원리와 세계를 노래하려고 집요하게 매달리는 노력은 높이 살 만하다. 더욱이 자연에서 인간의 어떤 구원을 탐구하려는 시각은 웬만해서는 좀처럼 갖기 어려운 발상이다. 그러나 생각에 집착하면 말하는 법을 잊는 법이다. 침소봉대하는 버릇과 문장을 굳이 어렵게 만드는 화법은 자연에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그러한 묘사를 통하여 접근한 자연은 그렇게 어려운 존재가 아니다. 어떤 관념을 해석한 끝에 문장이 어려워지는 것은 철학이지 문학이 아니다. 시는 어려운 해석을 아주 쉽게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다. 깨달은 내용이 아무리 어렵고 복잡하다고 하더라도 시에는 아주 간결하고 쉽게 담겨야 한다.   문장을 잘라먹고 난해한 화법을 쓰는 것은 능력이라기보다는 대상에 대한 인식이 철저하지 못한 까닭에 생긴 현상이다. 한 꺼풀 더 벗어서 내가 본 세계가 명징하게 드러나도록 한다면 좋은 시를 못 쓸 것도 없겠다. 여태까지 자연을 노래한 것이 허여멀건하다고 해서 거기다가 고춧가루를 퍼부은들 더 나은 맛이 나오지는 않는다. 맛은 조미료의 배합비율에 딸린 것이지 양에 딸린 것이 아니다. 언어의 절제력과 경제성을 깊이 생각해야 할 일이다.★★☆☆☆[4336. 10. 27.]   53□알 시□정진규, 세계사시인선 77, 세계사, 1997   일관된 주제를 가지고 거기에 매달려서 고만고만한 시를 꾸준히 만들어낸다는 것은 상당한 능력이다. 게다가 그런 이미지들이 형태를 규정할 수 없는 인간의 사고와 생명을 담으려고 한다는 점도 높이 살 만하다. 그러나 설명을 너무 많이 하려 한다는 것이 흠이다. 이미지 하나로도 끝낼 수 있는 것을 중언부언 설명하다 보면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까지도 잊어버릴 수 있다. 게다가 한자까지 많이 섞여 있어서 불필요하게 생각의 흐름을 흔들어 놓는다. 관념을 주제로 한 시들에서 한자를 쓰는 것은 치명상에 가깝다. 한자는 사고를 담는 뜻글자이기 때문이다. 그대로 설명이 되고 만다.★★★☆☆[4336. 10. 27.]   54□햇빛 속에 호랑이□최정례, 세계사시인선 85, 세계사, 1998   사물을 뒤집어 보는 반짝이는 시각과 연결되지 않는 것들 속에서 시간과 사건의 연결고리를 찾는 발상의 전환까지, 시를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 시인이다. 그러나 발상의 전환만 가지고는 시가 되기 어렵다. 전환의 그 축을 간파한 그 순간 그 시는 맥이 풀리기 때문이다. 발상이 그렇게 된 어떤 기반까지도 제공해주어야만 발상의 신선함은 끝까지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발상의 전환을 뒷받침하는 세계관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단순히 세상을 뒤집어보는 것만 가지고는 한 세계를 이루기 어렵다. 이것은 이 세계에 대한 비밀과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존재들에 대해 심도 있는 공부를 덜 해서 생긴 일이다. 내 시각이 땅에 견고하게 뿌리내리려면 안경 하나 바꿔 쓰는 것 가지고는 어렵다. 안경 속의 눈을 바꾸고, 시신경에게 명령을 내리는 뇌의 세계를 얘기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뇌는 말들만의 조합물이 아니라 역사와 철학과 현실의 복합물이라는 것을 얘기해줄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시각을 바꾸어서 말을 장황하게 할 게 아니라 간단명료한 것은 간단하게 말을 할 줄 하는 여유도 있어야 한다. 어려운 것은 시의 필요조건이지 필수사항이 아니다.★★☆☆☆[4336. 10. 27.]   55□살레시오네 집□송재학, 세계사시인선 20, 세계사, 1992   김춘수의 제자가 나타났다. 스승의 재주를 배워서 그것을 다른 분야에 적용시키는 것만 가지고는 스승보다 뛰어날 수 없다. 시에서 진정한 청출어람이 되려면 스승이 이루어놓은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는 방법을 만들거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스승은 밟고 넘어서는 디딤돌로 의미가 있는 것이지 섬기고 안주하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김춘수의 시에서는 이미지가 의미를 벗어버리려고 하는 팽팽한 긴장이 느껴지지만 이 시집에서는 그런 긴장을 이용하여 의미를 골라잡으려고 이것저것 눈치를 보고 있기 때문에 긴장이 현저히 떨어진다. 말이 정확한 의미를 담자는 것도 아니고 의미를 버리자는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꼴이어서 어수선하다. 이런 어수선함을 일러 난해라고 하는 것이다. 한자는 이러한 경향을 지닌 시인들이 당연히 누리는 권리라고 착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난해하다는 건 두 가지 뜻을 담고 있다. 쓴 사람 자신의 의식이 분화되지 않았다는 것과 분화되지 않은 의식이 제 몸에 꼭 맞는 언어를 선택하기는 어렵다는 것. 설령 꼭 맞는 언어를 선택했어도 의식이 분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가 그리는 세계는 뜬구름 잡기가 된다. 이런 것을 해석의 다양성이라고 강변하면 그럴 듯하겠지만, 실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은 시인 자신이 더 잘 아는 일이다. 여기서 한 발짝만 더 나아가면 말장난이다. 스승은 따라다니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라고 있는 것이다.★★☆☆☆[4336. 11. 5.]   56□슬픔의 힘□김진경, 문학동네시집 40, 문학동네, 2000   시가 말을 많이 하고 있다. 아마도 무언가 인식의 단계가 달라지는 상황에서 나온 것이리라. 깨달음의 적실성이나 진실성과 상관없이 시에서 말을 많이 한다는 큰 단점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형상성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때로 형식이 갑옷처럼 갑갑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때는 달라진 내용이 새로운 형식을 간절하게 요구하고 있는 시기이다. 그런데 형식은 옛날 것 그대로이다. 이 시집에서는 이런 모습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형상에 대한 인식은 짧고 할 말은 많다. 그러므로 어떻게 이미지를 잡아서 형상화시켜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이다.★★☆☆☆[4336. 11. 5.]   57□물 건너는 사람□김명인, 세계사시인선 21, 세계사, 1992   시집을 읽다 보면 살이 너무 쪄서 뚱뚱하거나, 아니면 너무 말라서 빼빼 마르거나 해서 적당한 몸매를 갖춘 것을 찾기가 아주 어렵다. 대부분 어느 한쪽으로 기우뚱 기울어있다. 애써 적당히 살도 있고 키도 있는 잘 빠진 몸매를 찾았다 싶으면 뼈와 근육의 균형이 깨져있다. 그런데 이 시집은 몸매도 아주 잘 빠진 데다가 근육과 뼈의 균형도 잘 잡혀있는 체집을 연상시킨다. 잘 빠진 몸매 속에 근육도 적당히 뭉쳐서 긴장할 곳에서는 긴장하고 풀어질 곳에서는 적당히 풀어지는, 말하자면 잘 다듬고 가꾸어진 몸매이다. 말하고자 하는 내용도 분명할뿐더러 그것이 적절한 이미지와 구조로 솟아올라 아주 깔끔하게 균형을 잡고 있다. 인식과 형상이 서로 어울려 빚은 것이 수준급이다. ‘여름 빗장’ 같은 경우는 시의 인식이 다른 갈래와 어떻게 다를 수 있으며 그것이 시인의 인식을 어떻게 형상화시킬 때 좋은 시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절창이다.   다만 빼어난 인식과 작품의 구조화가 짜임새를 잘 갖추었지만, 좋은 시는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그러한 것을 뒷받침하는 세계가 이미 있어온 것들이라면 맥이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나이 들어가면서 누구나 느끼는 인생무상이라는 단순한 주제만으로는 좋은 작품이 될 수 없다. 같은 인생무상이라도 또 다른 측면에서 자신의 삶을 되새김질해볼 수 있는 어떤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드문드문 섞인 한자는 시의 빈 구멍을 더욱 크게 만든다.★★★★☆[4336. 11. 6.]   58□검은 지층□최계선, 세계사시인선 8, 세계사, 1990   초점이 두 갈래로 찢어져있다. 시의 형식에 대한 고민과 문명 비판에 대한 고집. 어느 쪽으로도 분명한 선택을 못한 것이 흠이다. 하지만 낱낱의 발상에서 보이는 시각은 아주 참신하다. 그러나 작은 표현에 큰 것 전체를 다 담으려고 하는 것이 눈에 거슬린다. 발상이 담을 수 있는 크기를 넘었다는 것이고, 이것은 욕심을 부렸다는 얘기다. 문명에 대한 막연한 비판은 치열한 듯해도 실감이 잘 안 난다. 능선의 이쪽이 밋밋하다고 해서 능선의 저쪽이 가파르지 말란 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를 잘 써도 엄살 떠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런 느낌이 들지 않게 하려면 어떤 부분을 찔러야만 이 문명이 비명을 지를 것인가를 깊이 있게 고민해야 한다. 이렇게 찔러 가지고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게다가 한자는 전혀 무기가 될 수 없는 물건이다.★★☆☆☆[4336. 11. 6.]   59□나는 햄릿이다□윤성근, 세계사시인선 18, 세계사, 1992   인생은 어떤 것이라고 규정하려 들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규정할 수 없기 때문에 규정하려는 자로 하여금 절망하게 하고 절망은 몸부림을 낳으며 시인의 몸부림은 장광설로 이어진다. 시집의 대부분을 채우는 내용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노력이 안 통하기 때문에 나온 것들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보이지 않는다고 쓰는 것이 결코 정답이 될 수는 없다. 본디 아무 것도 아닌 인생을 보는 어떤 시각이 이 문명을 이끌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무언가 질서를 찾아내는 것이 시인의 운명이자 사명인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거릴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의 질서를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다만 시인의 감정은 정직하다는 것은 살 만한 일이다. 하지만 단순한 정직만 가지고는 시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한자까지 동원하는 현학 취미는 근원에 대해 몸부림치는 태도와는 상반된다.★☆☆☆☆[4336. 11. 6.]   60□모서리의 사랑□조윤희, 세계사시인선 94, 세계사, 1999   시집 안의 시들이 수준 차이가 심하다. 어떤 것은 아주 빼어난 이미지들을 잘 갈무리 한 반면에 어떤 것들은 내용이 잘 풀리지를 않아서 그것을 풀어내려고 너무 많은 말들을 동원한다. 이것은 시를 많이 써보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게다가 남의 상상력에 기대어 자신의 상상을 풀어 가는 것은 결코 좋은 버릇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들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내용이 분명치 않다. 분명치 않음도 한 세계가 될 수 있지만, 딱히 그런 것도 아니어서 일상의 자잘한 풍경들을 묘사하고 있다. 아마도 꿈이 없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런데도 여기저기 번뜩이는 발상들은 많은 가능성을 지닌 시인임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미지에다가 내용을 갖다 붙이면 안 되고 내용에 따라서 이미지가 올라오도록 기다리는 훈련이 필요하다.★★☆☆☆[4336. 11.6.]    
81    시집 1000권 읽기 5 댓글:  조회:2155  추천:0  2015-02-09
  41□내 마음의 솔밭□황명걸, 창비시선 141, 창작과비평사, 1996   사람이 특별한 어려움을 모르고 곱게 늙으면 화사하고 편안한 모습이 된다. 이 시집 속에는 많은 감정이 있지만, 그 감정들이 나이를 들어서 특별히 주목할 것도 받을 것도 없는 그런 풍경을 하고 있다. 마치 잘 진열된 옷장 속의 옷들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이런 시인에게 치열한 정신을 요구할 수도 없고 치열한 실험의식도 요구할 수 없다. 살아가는 대로 구경할 뿐이다. 시가 현실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있다.★★☆☆☆[4336. 10. 22.]   42□어느 별에서의 하루□강은교, 창비시선 154, 창작과비평사, 1996   시인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시각으로 특별한 생각을 노래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런 특수성을 독자들이 이해하지 못할까봐 불안해서 결국은 다 설명해버리고 만다. 그래서 애써 찾은 특수함의 값이 많이 떨어진다. 특수함과 참신함이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일치시키는 것이 시인의 능력인데, 이 시집에서는 그런 능력이 성공률이 그리 높지 않다.   특수함이 참신함으로 연결되려면 그 특수함을 감정이라는 보편성으로 감싸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특수함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곧 일반성 내지는 보편성의 인식으로 연결시켜주어야 한다. 바로 그 연결하는 법이 서투르다. 그래서 우연히 성공하는 작품은 절묘한 영상을 보여주지만, 성공하지 못하면 기괴하다. 이것은 시를 빚는 재주가 아직 서투르다는 이야기다. 서투른 시인에게 그 이상의 명성을 부여한다면 그것은 주변 사람들의 잘못이거나 작전이다.   수수께끼를 만들어서 숙제를 줄 것이 아니라면 마음속에서 생활 속으로 나오는 길을 좀 더 닦아야 한다. 사소한 것 같지만, 시 전체의 밑그림까지 바꾸는 그 간결한 방법 중에 하나는 한자표기도 섞여있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산책 나온 독자들에게 허들경기를 시킬 필요가 없다.★★☆☆☆[4336. 10. 22.]   43□빵냄새를 풍기는 거울□박형준, 창비시선 160, 창작과비평사, 1997   이미지를 조합하는 수완이 아주 탁월하다. 오랜만에 보는 재주꾼의 시이다. 그런데 그 이미지들은 시와 시집 안에서 독특한 상징을 띠고 있다. 그래서 의미 소통의 방법으로 이미지를 보아온 사람들에게는 아주 낯설다. 그리고 해독할 수 없다. 그것은 그의 추억을 구성하는 독특한 도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기호가 되려면 그의 과거와 체험이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곳으로 밝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현란한 이미지들의 조합은 끝내 독자들에게 의미를 전달해주지 못한다. 그런데 시인의 과거는 전혀 독자들 앞에 밝혀진 바가 없다. 그래서 독자는 시에 제공된 이미지들을 통해서 시인의 과거를 재구성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재구성한 그의 과거는 여전히 시인만의 독특한 과거사실로만 남아있다. 그것이 독자의 체험으로 연결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울림을 갖지 못한다. 말하자면 닫힌 시이다. 시가 닫힌 것은 그의 체험이 현실로부터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동떨어지게 만든 어떤 원인이라도 제공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것들에 대해서 전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이미지들은 아름답게 빛난다.   심리학이 문학을 위해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장비라면 바로 이런 곳에서 유효적절하게 쓰일 것이다. 화법도 독특하고 이미지도 독특하다. 그 조합법 역시 독특하다. 독특함은 시인의 생명이다. 그런 점에서 아주 뛰어난 능력을 지닌 시인이 나타났다. 그러나 현재의 자리에 머물러 즐긴다면 그 시는 울림을 갖지 못한다. 울림을 갖지 못하는 시는 발표하지 않은 시와 같다.★★★☆☆[4336. 10. 23.]   44□야간산행□이성부, 창비시선 147, 창작과비평사, 1996   이 시인은 언어의 간결성을 아는 사람이다. 자신의 느낌을 허풍선이 표현으로 과장하려 하지 않고, 평범한 말로 그려서 간결한 맛을 독자에게 주는 방법을 안다. 그만큼 농익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바위 연작으로 거의 꾸며진 이 시집의 내용물은 그 간결성의 맛을 못 따라간다. 어떤 사물에 너무 빠져들면 자신이 정작 해야 할 말을 잊는다. 자신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믿겠지만, 독자에게 전해지는 내용은 다소 황당한 내용들이다. 자신의 체험이 너무 확고하여 독자들도 수긍을 해주리라고 전제를 하고 도사처럼 말을 뱉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자는 냉정하다. 아무리 자신의 깨달음이 절실해도 그 깨달음이 인류가 도달한 절정의 그것이 아니면 수다스러움으로 듣는다. 산이 주는 깨달음은 언제나 울림이 클 수 있는 주제이다. 그러나 산이라는 이미지가 갖는 보편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자신만의 특수한 체험에 갇혀있기 때문에 산 이야기를 하고는 있지만, 세월 속에 늙어가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만이 담길 뿐이다. 산을 통해서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 하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시집이다.★★☆☆☆[4336. 10. 23.]   45□날랜 사랑□고재종, 창비시선 134, 창작과비평사, 1995   시골의 현실이 시골 생활이라는 관념성에 가려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묘사가 풍경으로 많이 치우쳐있고 사람들의 이야기도 농촌 현실의 준엄함보다는 몰락해가는 농촌의 현상에 머물러 있어서 그러한 현실의 모순을 절절하게 느끼기 어렵다. 어려운 주문이기는 하지만 농촌 문제가 시에서 제대로 다루어지려면 현재 농민들이 하는 고민과 그 고민이 어떻게 좌절하는가 하는 것을 노래해야 한다.   그런데 시인 자신이 농촌에 있을 뿐, 묘사된 농촌의 모습은 개개인의 삶에 머물러있다. 농촌을 묘사하는 데 그쳐서는 시가 되지 않는다. 농촌 사람들 사연만 담아 가지고는 시가 되지 않는다. 좌절하는 사람들의 심정과 그 원인을 노래해야 한다.★★☆☆☆[4336. 10. 23.]   46□인간의 시간□백무산, 창비시선 152, 창작과비평사, 1996   시를 쓸 때 가장 어려운 것은 냉정을 유지할 수 없는데 냉정을 유지해야 하는 때이다. 냉정을 잃으면 시는 감정을 남발하게 된다. 그러면 시는 선언문에 가까워진다. 그것을 알면서도 냉정한 이성의 편을 들 수 없는 경우가 없지 않다. 현장의 뜨거운 상황을 도외시할 수 없을 때이다. 그런 상황에서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될수록 정신을 단련시켜서 터져 나오는 말을 빛나게 하는 일이다. 이 시집에서는 그런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때로 위험한 곡예를 하기도 하고, 시의 바깥으로 뻗쳐나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어떤 본능이 담금질한 정신을 붙들고서 말을 아끼려고 하는 바람에 그나마 선언문까지 나아가지 않았으니, 이마저도 쉬운 일이 아니라면 그것은 시인의 탓이 아니라 시대의 탓이다.★★★☆☆[4336. 10. 23.]   47□당신은 누구십니까□도종환, 창비시선 111, 창작과비평사, 1993   자신이 어렵게 찾아낸 화두를 가지고 설명을 하려 들기도 하고 설득을 하려 들기도 한다. 그래서 찾아낸 이미지보다 많은 말을 하게 된다. 말들을 남발하는 것이 흠이다. 느낀 그 만큼 생각한 그만큼, 꾸미지 않고 그대로 보여줄 때 뭉클한 감동이 온다는 것을 잠시 잊었던 모양이다. 말을 많이 하면 도덕군자가 된다. 듣는 쪽에서는 잔소리로 들린다는 뜻이다. 시가 빛나는 것은 말을 많이 할 때가 아니라 꼭 필요한 말 이외에는 버리는 절약을 할 때이다. 이 평범한 진리로 한 번 되돌아가야 할 때이다.★★☆☆☆[4336. 10. 23.]   48□최대의 풍경□심호택, 창비시선 135, 창작과비평사, 1995   시가 무엇을 노래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단계에서 나온 시집이다. 무언가 노래하고 있지만, 그것은 개인의 노래에 그치고 있고, 그것을 따라 부를 사람이 없다. 그래도 시라면 시라고 하겠지만, 그 시가 담고 있는 세계는 지극히 사사로운 체험과 세계여서 남에게 보여주잘 것도 없는 것이다.★☆☆☆☆[4336. 10. 23.]   49□풀꽃은 꺾이지 않는다□조태일, 창비시선 131, 창작과비평사, 1995   시가 긴장을 잃고 말로 전락했다. 무언가 한 바퀴만 더 구르면 시가 될 듯한데, 그 마지막 재주를 부리지 않거나 못 부리거나 하고 있다. 감동이나 느낌을 적는 방법은 꼭 시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시로 쓰려면 시가 지닌 긴장이나 상징 수법을 지켜줘야 하는데, 거기에도 못 미치고 있다. 시어는 다른 의미를 함축하거나 정서를 안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는 이미지들이 너무나 많다. 이래가지고는 시가 되지 않는다.★☆☆☆☆[4336. 10. 23.]   50□유사를 바라보며□민영, 창비시선 153, 창작과비평사, 1996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고 자신의 신변잡기를 꼼꼼하게 기록한 시집이다. 그러나 옛날 방식대로 영탄조 일색이어서 무언가 새로운 사상이나 새로운 형상법을 기대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것도 줄 수 없다. 다만 나름대로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여기저기 엿보여서 그나마 시집의 꼴을 만들고 있다.★☆☆☆☆[4336. 10. 23.]    
80    시집 1000권 읽기 4 댓글:  조회:2160  추천:0  2015-02-09
  31□기차에 대하여□김정환, 창비시선 84, 창작과비평사, 1990   강의록이 그대로 시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이론에 무지한 노동자들을 앞에 놓고 강연을 한 발췌록에 가깝다. 강연은 뜨겁다. 군중들을 감동시킨다. 그들의 마음을 읽고 그들에게 필요한 논리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강연에 참가한 사람들의 마음이 새로운 정보와 정열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 발췌록을 그대로 시집으로 엮어놓으면 그 날 강의를 들었던 사람조차도 의아해할 것이다. 이미 자기화한 정보는 그 정보를 전해줄 당시의 정서를 떠났기 때문이다. 독자들 중에는 그 강의가 꼭 필요한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차마 볼 수 없는 장면이 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중간중간에 나타나는 한자표기이다. 한자가 봉건성의 한 지표가 된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과 그 발췌록들이 지향하는 방향과 일치한다고 믿는 것일까? 가당찮은 일이다.★☆☆☆☆[4336. 10. 21.]   32□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신석정, 창비시선 86, 창작과비평사, 1990   자연을 소재로 할 때 어려운 것은 시어 선택의 간결성이다. 자연은 본래 그 모습이기 때문에 어느 것을 버리고 어느 것을 취하는 기준을 세우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이 시집 속에 등장하는 자연물은 아주 적절하게 잘 선택되어 선택하는 자의 빛나는 감각을 잘 드러낸다. 자연을 선택하면서도 자신의 관념을 전해주기 위한 도구로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선택 그 자체의 시각이 깔끔하게 시로 치장되도록 해준다. 자연이 인간의 맑은 영혼을 비추는 거울 노릇을 톡톡히 한다. 자연물이 그런 기능을 하도록 시인이 시어를 잘 선택해서 배치한 경우에 해당한다. 세속 도시에 파묻힌 정서로는 감히 하기 힘든 일이다.★★★☆☆[4336. 10. 21.]   33□지리산 갈대꽃□오봉옥, 창비시선 69, 창작과비평사, 1988   이 시집은 독백체로 되어있다. 굉장히 많은 말들을 하지만 그것이 서사성을 띤 줄거리 이야기가 아니라 독백체의 넋두리로 되어있다. 그래서 산문성이 지닌 시답지 않은 요소를 없애고 있다. 할 이야기를 다 하면서도 산문으로 전락시키지 않고 시의 탄력을 유지하고 있으니, 이야기의 방식을 아주 잘 잡은 셈이다.   그리고 전라도 사투리의 억양이 시의 흐름을 아주 매끄럽게 잘 유도하고 있어서 사투리가 아주 잘 살아있는 특이한 시세계를 이루고 있다. 다만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새로운 인식이 다소 소홀한 점이 마음에 걸린다. 거대한 사상을 잘 형상화시키려면 그 사상을 담는 세세한 표정까지도 놓쳐서는 안 된다.★★★☆☆[4336. 10. 21.]   34□참된 시작□박노해, 창비시선 112, 창작과비평사, 1993   시가 균형 잡힌 모습으로 영롱한 빛을 발하는 것은 감정이 교묘하게 절제될 때이다. 절제란 현실의 격한 감정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 냉정함이 시의 깊이를 깊게 한다. 그 거리가 좁아질수록 격한 감정은 시라고 하는 형식의 절제를 받지 못하고 원액 그대로 솟구친다. 원액은 톡 쏘는 맛이 있을지 몰라도 자칫하면 몸에 해를 끼친다. 사람이 감정을 숨길 수 없는 순간이 없을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시에서 그렇게 한 것을 칭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뜨거운 감정을 그나마 통제하려고 형식을 간직하려 애쓴 것은 박노해만의 능력이자 본능일 것이다. 타고난 시인이 시대의 격랑 때문에 제 노릇을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4336. 10. 21.]   35□몸에 피는 꽃□이재무, 창비시선 144, 창작과비평사, 1996   삶의 성찰이 돋보이는 시다. 무엇을 일부러 말하려 하지 않고, 이미지가 찾아올 때까지 끈질기게 기다리는 힘도 대단하다. 한 번 잡힌 이미지를 놓치지 않고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하고픈 말을 싣는다. 다만 대상에 얽매어 좀 더 큰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 흠이지만, 그것은 시간이 가면 해결될 일로 본다. 한 관점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노력이 돋보이고, 그런 노력이 깔끔하고 신선한 이미지로 나타나니, 아주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었다. 한국에도 시인 대접받을 사람이 없지 않다.★★★☆☆[4336. 10. 21.]   36□별빛 속에서 잠자다□김진경, 창비시선 143, 창작과비평사, 1996   많은 줄거리를 간직한 이야기가 시로 성공하려면 거기에는 특별한 방법과 장치가 있어야 한다. 많은 시인들이 할 말은 가슴 가득 갖고 있되, 그 장치를 찾지도 못한 채 세상에 나와서 갖은 욕을 보는 것이 오늘 한국문단의 현실인데, 이 시집은 그런 능력 없는 사람들에게 한 전범을 보여줄 만한 방법을 구사한다.   “지상에 내리는 눈”과 “청동시대”라는 시를 보면 줄거리를 가진 이야기가 어떻게 시로 승화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아주 잘 보여준다. 할말을 생략할 줄도 알고 드러낼 줄도 알며, 그런 감춤과 드러냄을 통해서 거대한 줄거리를 보여주고 이야기를 완성한다. 독자의 상상력이라는 영사막에 낱말이라는 영상 몇 개를 던져줌으로써 이야기 전체가 꾸며지도록 하는 묘한 방법을 쓰고 있는데, 그것이 대성공을 거두었다. 게다가 상징도 아주 잘 되었고, 사물에서 발견해내는 인식의 수준도 놀라울 정도로 높고 깊다. 시가 요구하는 형상성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시인이다. 할 말과 표현이 아주 잘 어울려서 읽는 자로 하여금 같이 출렁이게 한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좋은 시들이다. 시집 전체가 어떤 한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고, 그 이야기에 알맞은 형식이 시집 전체를 얽고 있다. 형상성에 대해 조금만 더 고민한다면 머지 않아 우리는 네루다 못지 않은 시인을 만날 것이다.★★★★☆[4336. 10. 22.]   37□이기적인 슬픔을 위하여□김경미, 창비시선 104, 창작과비평사, 1995   무엇을 쓰면 시의 재료가 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잘 모르는 사람이 쓴 시이다. 시가 될 것 같지도 않은 감정을 글로 옮기기 위하여 사용된 수사가 아까울 따름이다. 바둑에서 사활을 배우다가 대국을 두게 되었을 때의 그 황망함 같은 것이 가득 차있다. 대국은 바둑판 전체의 흐름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부분부분에서 두 집 내고 사는 재주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들은 사활에도 미숙할뿐더러 전체 대국도 역시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시가 무엇을 노래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4336. 10. 22.]   38□복숭아뼈에 대한 회상□정종목, 창비시선 139, 창작과비평사, 1995   습작기 수준의 시들이다. 무엇을 써야 하는가 하는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그 고민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할 시들이다. 정작 해야 할 이야기들이 이미지 뒷편에 숨어서 겉으로 잘 드러나지를 않는다. 시어를 통해서 정서를 전달하는 훈련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묘사가 그저 묘사로 그쳐서는 시가 되지 않는다.★☆☆☆☆[4336. 10. 22.]   39□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박남준, 창비시선 38, 창작과비평사, 1995   시대가 험할수록 순수한 마음을 갖고 살기 힘든다. 그래서 순수한 서정시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서정시는 바깥 풍경이 아니라 마음속의 풍경을 그리기 때문에 그런 심리를 겪지 않은 사람에게는 애매모호한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순수한 서정시야말로 그 세계를 알아보는 사람끼리만 서로 주고받으며 감동하게 된다.   이 시집 전체가 그런 특수한 서정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좀처럼 밖으로 나오려 들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아무 것도 아닌 곳에 매달려서 눈물 질질 짜고 슬퍼한다. 그러니 관념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한 미치광이를 볼 수밖에 더 있겠는가? 그것이 궁상맞아 보이지 않는다면 시를 잘 쓴 때문이다. 이 순수 서정시를 시집 한 권 분량으로 담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저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시대가 험하지 않다면 이런 시들도 좋은 대접을 받아야 할 것이나, 그런 시대가 온다면 시도 종말을 맞을 것이다.★★☆☆☆[4336. 10. 22.]   40□철마의 꿈□이탄, 영언시선 40, 영언문화사, 1990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주조를 이루면서 거기에다가 분단이라는 소재를 함께 다루고 있는 시집이다. 서정성이 잘 살아있고 현실의 가장 중요한 문제에 맥을 대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시인이다. 그러나 단순하다는 느낌이 가시지 않는 것은 그런 큰 소재를 다루는 시의 방식이 너무 안이하다는 것과 이런 방식으로는 그런 류의 서정성이 갖는 회고 취미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이다.★★☆☆☆[4337. 12. 21.]    
79    시집 1000권 읽기 3 댓글:  조회:2152  추천:0  2015-02-09
  21□쓰러진 자의 꿈□신경림, 창비시선 115, 창작과비평사, 1993   이 시인은 시의 상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다. 단순한 풍경 묘사 같지만, 그것이 묘사로 끝나지 않고 사람의 정서를 나타내는 배경으로 작용하다. 이 점 아주 뛰어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세상을 향해서 말을 아껴야 한다. 나이든 사람이 말을 하면 잔소리로 들리고, 그것이 심하면 주책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시는 나이 먹어갈수록 말을 줄이고 이미지를 써야 한다. 특히 상징이 가장 중요한 비결이다. 시가 정갈하고 깔끔하면서도 할 말 다 할 줄 아는 것이 상징 수법이다.   신경림은 그런 비결을 누구보다도 잘 깨닫고 있는 시인이다. 다만 나이 든 자의 쓸쓸한 내면 묘사에 그칠 경우 초라해 보이는 것이 탈인데,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아쉽다. 그것은 남들이 우러러 쫓아갈 만한 좀 더 큰 세계를 갖추지 못한 자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저 나이 들어가는 시인일 뿐이다. 한국어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는 시인이 시에다가 한자를 남발한다는 것은 잘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다. 시에서만은 한자표기를 허용해야 하는 것일까? 그래야 시다워지는 것일까? 납득하기 어려운 묘한 관행이 창작과비평사 기획실의 한 뼈대를 이루고 있다.★★★☆☆[4336. 10. 20.]   22□꽃이, 이제 지상과 하늘을□김준태, 창비시선 123, 창작과비평사, 1994   시가 초점이 두 갈래로 갈렸다. 일상의 새로운 모습을 노래한 시들은 잠시 반짝하다가 시들해지고, 이념의 투쟁을 선동하려던 시들은 흐르는 세월 앞에 시들해졌다.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 시인 스스로 갈피를 잡지 못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있다. 새로운 시대는 오는데, 어디로 가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여 생각나는 대로 넝마주이를 한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인식과 방법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일이다. 중간중간의 한자는 이미 흘러간 세월을 바라보며 아직 벗어 던지지 못한 낡은 옷 같다.★★☆☆☆[4336. 10. 20.]   23□그래 우리가 만난다면□윤재철, 창비시선 102, 창작과비평사, 1992   똥차가 지나가면 똥 냄새가 나고, 미인이 지나가면 향이 코를 스친다. 어떤 시인이 지나갔다. 그러자 그 뒤에 무언가 냄새가 났다. 시인은 분노로 들끓는다. 온몸이 달아올랐다. 아마도 그 열기이리라. 그 열기를 느끼는 사람은 잠시 시의 형식을 따질 것인가 말 것인가 혼란스러워한다. 그 열기는 시 이전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들이 가득 찼다. 그러나 그것이 세월을 넘어 감동으로 연결되려면 그런 열기를 담을 어떤 난로를 만들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알불을 그대로 두면 쬐는 사람이 손을 데는 수가 있다.★★☆☆☆[4336. 10. 20.]   24□모닥불□안도현, 창비시선 74, 창작과비평사, 1989   할 말이 많으면 절제하기 쉽지 않고, 절제력을 잃으면 이야기를 하게 되며, 이야기를 하면 시는 줄거리를 갖는다. 그렇게 되면 시어들이 줄거리에 예속되어 빛을 잃는다. 줄거리를 갖는 시가 성공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이런 속성 때문이다. 이 시집에 실린 대부분의 시들이 줄거리를 갖고 있어서 그 정서를 나타내기 위해 동원된 훌륭한 표현들이 제 몫을 못 한다.   안도현의 반짝이는 표현이 살아있는 것은 ‘모닥불’ 같이 줄거리를 갖지 않는 시들이다. 그런데 이 시집의 대부분은 줄거리를 갖고 있다. 특히 학교 생활을 다룬 시들은 줄거리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 학교 생활이란 아이들과 맺는 관계가 주를 이루고 그런 관계를 표현하려면 줄거리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과도한 욕구불만이 말을 만들었고, 그 말이 표현을 갉았다. 표현이 일정한 높이에서 안정되게 자리를 잡았는데도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려운 것은 마지막 순간에 지켜야 할 이 절제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시 한편 한편에서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이것은 시의 전부일 수도 있다. 이런 것이 시인의 능력부족 탓만은 아닐 것이다. 그 일부분은 시대에 있으리니.★★☆☆☆[4336. 10. 20.]   25□차씨 별장길에 두고 온 가을□박경석, 창비시선 106, 창작과비평사, 1992   습작기 수준의 안타까운 시집이다. 무언가 얘기는 잔뜩 늘어놓고 있는데, 깊이가 전혀 없고 역사에 대한 인식도 수박 겉핥기 식이다. 게다가 시 쓰는 방법도 멀미나게 단순하여 어렵게 돌려 얘기하는 것을 함축성으로 오해하고 있다. 쉬운 것을 어렵게 얘기하는 것은 시가 아니라 말장난이다. 시인 자신은 아주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고 믿겠지만, 시들이 말장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어떤 것을 노래해야 시가 되는가 하는 것부터 스스로 되물어야 될 일이다. 한자는 벗어나진 못한 습작기의 버릇처럼 곳곳에 남아있다.★☆☆☆☆[4336. 10. 21.]   26□썩지 않는 슬픔□김영석, 창비시선 108, 창작과비평사, 1992   평범한 사물 속에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안목이야말로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시인의 능력인데, 이 시집에는 그런 안목이 곳곳에서 번득인다. 그리고 그것을 그냥 토해놓지 않고 적당히 꾸민 옷을 입혀서 내놓을 줄도 안다. 그러나 지식인의 관념성과, 풀리지 않은 것들을 설명으로 대신하려는 것은 스스로 능력의 한계를 드러낸 지점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념성만 조금 더 벗는다면 좋은 작품을 쓸 수 있겠다.★★☆☆☆[4336. 10. 21.]   27□우리는 읍으로 간다□이상국, 창비시선 103, 창작과비평사, 1992   차분한 시각으로 객관성을 잃지 않으려고 한 노력이 돋보인다. 그리고 농촌과 분단 이주민을 중심으로 소재를 묶은 것도 아주 괜찮은 발상이다. 그러나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이미지들이 제 구실을 하지 못 하는 것이 흠이다. 줄거리를 갖고 있어서 그 서사성 때문에 표현의 참신함이 많이 죽는다. 몇 글자 섞여있는 한자 역시 표현을 갉아먹는다.★★☆☆☆[4336. 10. 21.]   28□하늘밥도둑□심호택, 창비시선 109, 창작과비평사, 1992   한 개인의 잊을 뻔한 추억을 오롯이 되살려 놓았다는 점을 뺀다면, 시라고 할 것도 없는 시집이다. 어른이 단순히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어서 동시의 형식을 갖춘 것도 아니다. 잊기 아쉬운 옛 추억을 담아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는 과거를 그대로 노래하거나 그 과거가 환기하는 어떤 의도나 의미가 시에 담겨야 하는데, 여기서는 그냥 과거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울림이 없다. 시에 드러나는 것은 어떤 상징이 아니라 그저 그 당시의 사실일 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자는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하다.★★☆☆☆[4336. 10. 21.]   29□희망의 나이□김정환, 창비시선 107, 창작과비평사, 1992   습작기 수준에도 못 미치는 시다. 시라고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 쓴 글이다. 시에서 우리가 연상할 수 있는 것은 담금질이다. 그것이 비유가 됐든, 아니면 말이 됐든, 그것이 시라는 옷을 입고 나타날 때는 여러 번  두들겨서 뽑은 단단한 결정체가 되어야 하는데, 이 시집 속에서는 시도 아닌 말들이 득시글거리고 있다. 한 사물 또는 한 현상에서 연상되는 나의 생각을 무작위로 늘어놓고는 시라고 행가름을 한 것이다. 당연히 모든 말들이 넋두리이다.   그런 넋두리까지도 시라고 우긴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게 되면 똥 싸고 방귀 뀌는 것까지도 시라고 해도 된다. 시에는 시라고 할 어떤 범주가 있는 법이다. 그 범주의 테두리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이 중학교 때 배운 형식에다가 자기 생각을 어거지로 펼쳐놓은 것이 이 시집이다. 그러니 그런 것들이 시가 될 턱이 없다. 세계문학사에서 여태까지 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형식을 창안했거나 시 창작 요령에 대해 전혀 모르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4336. 10. 21.]   30□내일의 노래□고은, 창비시선 101, 창작과비평사, 1992   과잉된 감정이 통제 받지 않고 그대로 쏟아져 나왔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으되 새로운 형식을 아직 찾지 못 했는데, 누군가 말을 시켜서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떠들게 된 그런 경우라고나 할까? 침묵수행을 마쳤는데, 어쩐 까닭인지 언행이 깊어지지를 않고 수다쟁이로 변한 중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 시집의 시들은 그렇게 어수선하다. 침묵수행 동안 그가 깨달았는지 어쩐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깨달았다고 해도 세상을 향해 말을 할 때는 법도가 있어야 한다. 옷이 거추장스러운 물건임을 깨달았다고 해서 벌거숭이로 나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깨달았다고 제 멋대로 지껄이면 그건 말도 아니고 진언도 아니다. 이따금 보이는 반짝이는 시들이 그의 깨달음이 가짜만은 아님을 보여주지만, 그것이 시의 장황스러움과 수다스러움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게다가 거추장스러운 한자까지 뒤섞여서 이 장광설을 더욱 뒤틀어지게 하고 있다. 의미는 의미고 시는 시다. 깨달음이 그대로 시가 되는 것이 아니다.★★☆☆☆[4336. 10. 21.]    
78    시집 1000권 읽기 2 댓글:  조회:2020  추천:0  2015-02-09
11□숲은 어린 짐승들을 기른다□이영진, 창비시선 129, 창작과비평사, 1995   언어의 경제성을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시집이다. 자신이 나타내기 위한 정서보다 훨씬 더 많은 낱말들을 동원하고 문장을 동원하고 있다. 시가 길고 장황하다. 그래서 읽는 속도가 늦어지고, 그다지 분명하지 않은 메시지를 파악하는데 시간이 많이 든다. 여기다가 이따금씩 등장하는 한자표기는 시간을 더 지체시킨다. 현실에 대한 인식도 너무 아득하다. 머릿속에만 들어있는 생각이어서 관념성을 벗기 힘들다. 그러한 관념성을 자신의 체험에서 찾아내는 훈련이 더 필요하고 말을 좀 더 아끼는 버릇이 필요하다.★★☆☆☆[4336. 10. 18]   12□봄의 설법□이동순, 창비시선 133, 창작과비평사, 1995   선승의 깨달음이 법어가 되려면 인류 최고의 절정에 올라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애들 말장난 같이 들린다. 그런 점에서 깨달음을 전하는 시를 쓰려면 그 깨달음의 내용에 누구도 토를 달지 않고 복종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집 앞부분의 내용들은 모두 소품이다. 그런데 그런 소품들이 고승대덕의 입에서 나온다. 격이 안 맞는다는 얘기다. 그런 깨달음이 자신에게는 진실한 것이면서도 어설프게 들리는 것은 모든 깨달음의 언어가 대중 속으로 나올 때 갖는 울림 때문이다. 나 혼자만의 울림만 가지고는 독자를 감동시키지 못한다.   그리고 뒷부분의 동네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정서 역시 이러한 어법으로 나오기 때문에 어색하다. 묘사와 서술을 통해서 시를 쓰려고 하면 그 대상에 대해서 자신이 완전한 일체감을 이루어야 한다. 즉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나는 그들이 된 상태에서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감정이 잘 전달된다. 그러나 이 시집 속에 들어있는 나는 카메라와 같아서 단순히 풍경을 담고 있을 뿐이다. 그 풍경이 나의 내면 풍경으로 승화되려면 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시집의 편찬 의도를 시가 따라가지 못한 경우다. 이것은 시인이 너무 의도된 시만을 쓴다는 얘기다. 시인의 의도는 하늘 높은 곳에서 구름처럼 떠있어야 한다. 그 구름이 가렸다 말았다 하는 햇빛을 받으며 현실의 땅에 뿌리박은 시들은 자란다. 그 구름이 너무 땅에 바짝 붙어있으면 시들이 시들시들하다.★★☆☆☆[4336. 10. 18]   13□벽 속의 편지□강은교, 창비시선 105, 창작과비평사, 1992   감정 과잉과 선언식 자기 판결이 이 시집의 가장 큰 취약점이다. 판결은 남의 시선을 의존하지 않는다. 그것을 압도하면서 복종을 강요한다. 이 시집의 시들이 대부분 그렇다. 특정한 사실에 자신의 감정과잉을 싣고 그것을 남들이야 듣든 말든 선언하고 판결해버린다.   체험의 특수성은 이따금 ‘그의 초상’ 같은 빼어난 작품을 낳기도 하지만, 대부분 그것이 정답이라고 선언해버림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다. 동감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투다. 이것은 자기 인식의 특수성에 매달려서 개인의 특수한 감정을 토로하는 것이 시라고 착각하는 데서 온다. 그것이 잘 되면 아주 독특한 시 세계를 이루는 한 계기가 될 수는 있지만, 보편성의 지원을 받지 않으면 뜽금 없는 넋두리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 시집은 그러한 경계선에서 바깥쪽으로 쏠려있다. 그런 상황에서 골리앗 크레인, 노동 어쩌구 하는 제3부의 시들은 차라리 코미디라 할 만하다.★★☆☆☆[4336. 10. 18]   14□화개□김지하, 실천문학의 시집 141, 실천문학사, 2002   시집 제목에 한자가 섞여 있으면 한 동안 당황스럽다. 굳이 한자로 적은 사람은 나름대로 그 의도가 있을 것인데 그런 의도가 한글 전용을 고집하는 나의 의도와 충돌하기 때문이다. 한자 표기는 별로 존중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웬만하면 나는 무시하고 한글로 적는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시에 따라 수준이 많이 차이 난다. 그래서 쪽수대로 읽어가다 보면 울퉁불퉁한 도로를 덜컹거리며 운전하는 느낌이다. 속도를 내면 낼수록 이건 더 심해진다. 그래서 혹시 차 밑바닥이 긁히지나 않나 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천천히 읽게 된다. 이런 거칢은 시인이 시의 완성도에 힘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아니면 그럴 여유가 없이 시집을 묶게 된 까닭일진대 그건 뿌리치기 어려운 현실의 유혹이다. 그러나 그런 유혹을 통제할 수 없으면 대가의 반열에 오를 수 없다.   이런 점은 시의 내용에서도 마찬가지다. 현실의 고민과 삶의 애잔함을 나이 먹은 자의 시각으로 나직하게 이야기하다가는 느닷없이 주장자로 맨바닥을 땅! 치며 우주 밖까지 뛰쳐나가는 상상력은 중간중간에 섞인 한자들만큼이나 읽기 불편하게 한다. 이것은 ‘늬들이 시를 알어?’ 하고는 독자들을 약간 내려다보는 오만한 위치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는 만큼 이루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포기하는 달관의 삶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이런 오만은 그 만큼 조급해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시집 한 권 속에 들어있는 시들의 키가 제 각각이라는 것은 아무리 합리화해도 성실하지 못하다는 증거가 된다. 이발을 안 하고 사는 것은 자유지만, 그것을 보기 안 좋다고 하는 사회를 나무라는 것은 자신에 대해 결코 정직한 행위가 아니다. 독자들 중에는 바보만 있는 것이 아니다.★★★☆☆[4336. 10. 19]   15□섬진강□김용택, 창비시선 46, 창작과비평사, 1985   이 시들의 가장 큰 장점은 가락이 아주 잘 살아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남도의 냄새가 물씬 나는 가락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용이 느슨하고 장황한 줄거리를 갖고 있어도 읽는 사람이 그것을 참고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그 가락이 농촌의 정서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이미 도시의 정서에 묻혀버린 사람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런 곳에서 그 정서는 가락을 타면서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다. 재주는 부족하지만 가슴속에 쌓여있는 분노와 열정이 시의 형식을 압도하면서 화산처럼 분출하여 뜻밖의 생기를 시에 불어넣고 있다. 말하자면 형식이 흘려 넘쳐버린 내용을 따라서 만들어진 경우이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자신이 딛고 서있는 땅에서 올라오는 진솔한 정서를 떠나면 시는 공허한 느낌을 수반하게 된다.   “섬진강” 연작은 기교가 부족한 점을 이 같은 열정으로 극복했는데, 그 나머지 부분의 많은 시에서 실패를 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점 때문이다.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주제로 나가는 순간 시에는 공허함이 밀려든다. 형식에 사상을 담은 것이 아니라 내용에 밀려 형식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 늘 경계하지 않으면 이 시집에서 이루어놓은 공을 아주 쉽게 까먹게 된다.★★★☆☆[4336. 10. 19]   16□바닷가 사람들□강세환, 창비시선 124, 창작과비평사, 1994   이 시집의 시들은 바다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의 애환을 다룬 시인데, 시가 그들의 현실에 바짝 밀착해있질 못하고 기름처럼 둥둥 떠있다. 이것은 시인이 그들의 삶 어느 곳에 자신의 시각이 위치해야 할지를 터득하지 못한 것에서 온다. 그들의 삶을 묘사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들과 맺어진 내 삶을, 내 생활의 느낌과 정서를 담아야 한다. 그런데 그게 안 되고 있어서 느낌이 자꾸 겉도는 것이다. 소재는 참 잘 잡았다. 그렇지만 그 소재를 잡았다고 해서 그것이 그대로 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시의 묘사는 소설의 묘사와 달라서 시의 묘사에는 정서가 담겨야 한다. 그냥 카메라 비추듯이 해 갖고는 아무 것도 안 된다.   시가 대체로 어둡다. 어두운 것은 전망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눈에 보이는 그들의 삶이 아무리 절망스러워도 그들은 산다.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 절망의 순간에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좀더 깊이 찾아서 그 생명력의 원천이 되는 그것을 노래해야 한다. 그러기 전에는 지금까지 보여준 그런 오류와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시는 시체를 묘사해도 맥박이 뛰어야 한다.★★☆☆☆[4336. 10. 20.]   17□너는 꽃이다□이도윤, 창비시선 113, 창작과비평사, 1993   무엇보다도 사물을 보는 시각이 나름대로 잡혀있다.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시인의 첫 조건이라면 이 시집의 주인공은 그런 자질을 이미 갖추었다. 그런 시인이 실수를 할 때는 감정을 절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괴성처럼 시를 내지르는 것이다. 이 시집의 4할 가량을 차지하는 그런 시들이 단점으로 작용하지만, 그래도 무작정 고함치는 것은 아니라서, 그 정도라면 시대 탓으로 돌려도 무방할 것이다. 감정을 절제할 수 없을 때 절제 할 줄 아는 것이 대가의 능력이다.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그것은 어차피 시간이 걸릴 일이다.★★★☆☆[4336. 10. 20.]   18□아이들의 풀잎노래□양정자, 창비시선 114, 창작과비평사, 1993   시집을 읽고 나서도 별로 할 이야기가 없는 그런 시집들이 있다. 이 시집이 그런 경우이다. 소품들로 가득 차서 그 소품 가지고는 뭘 만들어내기 어려운 시들. 혼자서 읽어보고 빙그레 웃으면 되는 그런 시집. 이건 잘 쓰고 못 쓰고 한 문제가 아니다. 그런 시집을 창작과비평사에서 창비시선으로 냈다는 것이 놀랍다. 창비시선에 너무 많은 기대를 건 것이 더 큰 잘못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런 의미 없음을 추구하는 것도 의미가 있는 것일지 모르니까.★☆☆☆☆[4336. 10. 20.]   19□작은 새□김경희, 창비시선 118, 창작과비평사, 1994   우아함, 고결함, 아름다움 같은 것이 아니라면 시로 다룰 필요가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이따금 있어서 똥 싸고 토하며 거칠게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는 시들이 있다. 이 시집도 대개 이 영역에 속한다. 재주 있는 것이 오히려 화근이어서 재주를 부리면 부릴수록 더욱 경망스러워진다. 말을 아껴야 한다는 믿음이 문장을 잘라먹는 것으로 나타나고, 시는 아무나 알아보지 못하도록 적당히 어려워야 한다는 믿음이 상상의 고리를 끊어버린다. 현실의 진흙탕 속에서 진주를 캐던 창비시선이 갑자기 향기로운 촛불이 켜진 여신의 신전에 올라앉았으니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꼬?   시에서 한자가 가장 잘못 쓰이는 것은 한자의 형상성을 이용해서 이미지를 전달하려고 하는 경우이다. 그것은 소리글자인 우리말의 표기 원리를 정통으로 부인하는 아주 고약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소리글자는 소리 이미지를 통해서 그림을 전달한다. 이 시집의 곳곳에 쓰인 한자는 죄질이 가장 나쁘게 쓰였다.★☆☆☆☆[4336. 10. 20.]   20□말똥 굴러가는 날□이재금, 창비시선 119, 창작과비평사, 1994   언어를 잘 갈무리하여 시를 만드는 것보다 때로 더 중요한 것이, 과연 이 잡다한 삶의 체험 속에서 어떤 것을 시의 광장으로 끌어내느냐 하는 것이다. 이 시집에는 그러한 고민이 별로 들어있지 않다. 그래서 일상의 삶에 나름대로 충실한 묘사를 해보지만 그것이 울림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일상이 울림을 가지려면 남들의 성찰을 일깨우는 그런 것이 있어야 한다. 이 시집에는 그것이 별로 없다. 시가 담아야 할 그 어떤 것들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한 적이 없음을 의미한다. 이 점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4336. 10. 20.]    
77    시집 1000권 읽기 1 댓글:  조회:2454  추천:0  2015-02-09
[한국 현대시의 지형도] 시집 1,000권 읽기 1|시집1000권읽기 @@1    1□김포행 막차□박철, 창비시선 85, 창작과비평사, 1990   할 말들이 적당한 표현을 찾지 못하고 쏟아져 나왔다. 격한 감정들이 절제되지 못한 상태여서 시가 줄거리를 갖게 되었다. 줄거리를 가지면 설명을 하려 든다. 아직 시라는 갈래의 특징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시들이다.   ‘김포6’의 경우,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라는 제목으로 김포의 개울과 다리를 있는 그대로 묘사에 충실하면 현재의 김포와 그 주변의 풍경이 자신의 추억과 적당히 짜깁기되어 서구지향의 문명이 이 땅에 어설프게 적용되면서 빚어진 문명충돌의 메시지까지도 담아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전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자신의 고민만을 털어놓는 수준에 머물렀다. 자기 목소리를 내려면 더 벗어야 할 껍질이 있다는 뜻이다.★☆☆☆☆[4336. 10. 17]   2□가을의 시(詩)□김광렬, 창비시선98, 창작과비평사, 1991   다루고자 하는 대상이 너무 커서 감당을 못하고 있다. 자신의 체험은 조그만데 그 조그만 것에다가 거대한 것을 담으려고 하니, 트더진 푸대처럼 내용물들이 밖으로 비져 나온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거대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죄책감 비슷한 것이어서 변변치 못한 시에 대한 면죄부의 작용을 하면서 대신에 진부하다는 느낌을 준다.   두 번째 묶음으로 분류된 제주에 관한 시들이 그 중 나은데, 자신이 몸담은 곳이어서 그럴까? 제주도의 맛이 잘 나지를 않는다. 제주도의 특징과 정서를 실었다면 좋았을 텐데, 전혀 그런 쪽으로 접근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흠이다. 제주도 방언의 리듬이나 설화세계를 변주하면 아주 좋은 시들이 나올 법도 한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한 것 같다. 게다가 애써 찾은 소재에 주제를 역사 쪽으로 자꾸 몰고 가려는 버릇도 시를 일정한 그릇 안에 가두어 두고 있다. 껍질을 한 꺼풀만 더 벗으면 괜찮은 시를 쓸 듯하다.   제목에 라는 한자로 표기한 것은 출판사의 의도일지 시인의 의도일지 잘 모르겠지만, 아주 눈에 거슬린다. 시인도 그렇고 출판사도 그렇고, 역사를 깊이 생각하는 자들이 한자가 지닌 봉건성과 반역사성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일까?★★☆☆☆[4336. 10. 17.]   3□이슬처럼□황선하, 창비시선 67, 창작과비평사, 1988   빛나는 표현 몇 개 빼면 수필이다. 빼어난 구절 몇 개가 일기 문장을 무겁게 끌고 가는 형국이다. 표현에 군더더기가 많지 않아서 깔끔한 맛을 주지만, 산문의 그 무거운 걸음걸이를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중간중간에 한자표기까지 섞여있어서 이런 걸음을 더 무겁게 만들고 있다.   체계 잡힌 창작교육을 접하지 못한 것 같고, 순수한 열정으로 시를 다듬어서 쓰는 사람 같다. 빼어난 표현과 비유를 얻으면 그것을 시로 만들기 위해서 이야기하듯이 풀어썼기 때문에 문장이 탄력을 받지 못하고 느슨하게 늘어졌다. 그래서 원래 얻은 비유의 신선함마저도 길게 늘어진 화법 때문에 느슨해졌다. 결국 문장을 다듬는 수련이 덜 무르익었다는 얘기다. 아마도 민족 통일과 사회를 염려한 앞 부분의 시들 때문에 창작과비평사에서 선택한 것 같은데, 글쎄….★★☆☆☆[4336. 10. 17.]   4□어머니의 물감 상자□강우식, 창비시선 132, 창작과비평사, 1995   전에 “고려의 눈보라”를 읽을 적에는 뭐랄까, 속이 꽉 차지는 못 했어도 우렁찬 맛이 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번 시집은 매끈하게 잘 빼 입었지만, 경망스러워졌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다. 1부의 기행시들은 거의 일기 수준이다. 행을 가른다고 해서 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간단한 수필로 썼으면 오히려 감동을 주었을 만한 내용들이 시로 요약됨으로 해서 오히려 거드름을 피우는 듯한 느낌을 준다. 불교와 관련된 내용을 주제로 한 시들은 더 참혹하다. 말을 해서는 아니 될 것들을 말을 하려고 했으니 그럴 법도 하지만, 시와 이야기를 구별하지 못하는 부실한 안목에 선경(禪境)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경망스러움까지 겹쳤다. 시의 형식을 빌고 있고, 언어는 제법 시의 긴장을 풍기지만 시라는 형식이 담을 수 없는 것을 담으려 한 원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한자표기는 땡중의 옷자락을 더럽힌 흙자국 같다.★★☆☆☆[4336. 10. 17.]   5□우리들의 사랑가□김해화, 창비시선 94, 창작과비평사, 1991   이 시집에 담긴 정서는 활화산 같다. 뜨거운 불기둥과 시커먼 연기가 온 땅과 하늘을 뒤덮을 기세다. 용암이 마구 흘러내리며 거추장스럽고 잘 꾸민 것들을 모조리 삼켜버릴 것 같다. 가슴 밑바닥에서 들끓고 있는 마그마 같은 분노가 한 번 살 만하다. 그리고 그런 분노가 아무런 거침이 없이 여과장치 없이 시의 지평 위로 솟아올랐다. 그래서 오히려 신선하다. 형식조차 삼켜버릴 그런 분노야말로 시의 첫새벽에 볼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시는 뜨거운 가슴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시가 줄기차게 흘러온 강 같다면, 강물이 산으로 되올라갈 수는 없는 것이다. 강이라는 형식위로 넘쳐버리는 것이 위태롭다. 곳곳에서 서툰 표현이 나타나지만 그가 딛고 있는 세계관이 너무나 확고해서 시간이 가면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듯하다. 민중시라는 이름을 단 시들이 대부분 형식에 서툰데 이 시집은 나름대로 꼴을 갖추고 있다. 다만 역시 앞선 분노의 감정 때문에 곳곳에서 불필요한 트집이 잡혀있다.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노동현장의 시를 다루려면 박노해와 백무산을 비켜갈 수 없는데, 아직은 역부족이다. 소재 면이나 수법 면에서 앞의 두 시인은 그 후배들에게 너무나 큰 벽을 만들어놓았다. 이 시집 역시 이들의 아류를 벗어나기는 힘들다.★★☆☆☆[4336. 10. 17.]   6□맑은 하늘을 보면□정세훈, 창비시선 90, 창작과비평사, 1990   이제 시는 지식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이 시집은 보여준다. 일상 생활 속의 소품들이 장독대처럼 고만고만한 모습으로 한 그릇에 잘 담겼다. 그러니 이런 시들에서 표현을 읽고 의미를 따지고 한다는 것이 무의미한 일이다. 아직 아마튜어 티를 벗지 못한 시들이 대부분이나 그것을 탓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4336. 10. 17.]   7□떠돌이의 노래□김윤배, 창비시선 82, 창작과비평사, 1990   묘사는 그것이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것이 시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그 묘사가 보여줄 수 있는 어떤 세계가 있어야 한다. 남사당패를 묘사해서 시로 만들려면 남사당패의 목소리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들의 목소리만 있으면 그것은 산문이지 시가 아니다. 하다 못해 산문조차도 그것이 그 배경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어떤 세계가 있는 법이다. 시는 그것을 일러 상징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묘사 자체는 상관물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광대의 세계를 노래하는 이 시집은 단순한 묘사를 벗어나기 힘들다. 옛날 광대패들의 이야기를 하면 그건 그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들의 뼈아픈 과거가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하는 것을 시가 보여주어야만 그것이 감동으로 연결된다. 그들이 어떻게 살았다고 전달해 가지고는 시가 되지를 않는다.   형식도 내용도 현실의 감각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한다. 운율이나 묘사 모두 매우 정성을 들인 것이면서도 그것이 일정한 울림을 갖지 못하는 것은 그 탓이다. 게다가 서사시의 형식을 약간 빌고 있어서 더더욱 외계와 교감하기 어려운 구조를 띤다. ★★☆☆☆[4336. 10. 17.]   8□해뜨는 검은 땅□박영희, 창비시선 89, 창작과비평사, 1990   프레스에 손이 잘리고 탄광 갱도가 무너져서 사람이 죽었다고 적는다고 해서 그것이 시가 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러한 체험을 한 사람들과 그 주변 사람들만이 실감할 수 있는 것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의 체험을 기초로 하여 그러한 상황을 추리한다. 말하자면 조작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유추된 감정은 아주 강한 관념성을 띤다.   노동시가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은 그 생생한 현장성이다. 생생한 현장성은 현장의 바로 그 장면만 가지고는 안 된다. 그 장면을 묘사한 글을 읽고 그 현장을 실감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 현장의 생생함을 전달할 수 있는 상황을 읽는 사람에게 전해줄 수 있는 재주가 필요한 것이다. 박노해나 백무산은 그런 재주가 제법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감정은 격하되 그 감정이 잘 전달되지 않는 흠을 갖고 있다. 노동을 주제로 다룬 시가 영역을 넓혀가면서 일정한 형식 안에 갇히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감정과 감동 사이에는 아주 얇은 비닐막이 있다.★☆☆☆☆[4336. 10. 17.]   9□월동추□강세환, 창비시선 87, 창작과비평사, 1990   글을 다루는 재주는 이 정도면 손색이 없다. 그런데 모두가 남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남의 이야기를 해도 자신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데도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이 있다. 이 시집의 내용들은 대부분 남의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이 자신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이것은 역사라는 거대주제 속에서 자신이 어떤 자리에 거점을 잡고 들어앉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시각은 카메라처럼 냉정한데, 거기에 담기는 풍경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미리 감동을 준비하지 않으면 와 닿지 않는 공허한 풍경이다. 좀 더 현실 속에 뿌리내린 소재에서 글감을 찾아야 이런 공허함이 극복될 것이다.★☆☆☆☆[4336. 10. 18]   10□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김남주, 창비시선 128, 창작과비평사, 1995   칼을 단단하게 벼리는 방법은 얇은 쇠판을 여러 번 겹쳐서 두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얇지만, 그 얇음이 갖는 약점인 옆심을 한층 더 보강할 수 있다. 그래서 칼 만드는 사람은 벌겋게 단 칼몸을 쇠망치로 두드려대는 것이다. 김남주의 시는 이렇게 해서 몇 차례 다져진 칼이다. 웬만한 압력에는 부러지지 않을 만큼 충분한 옆심도 있다.   이 시집의 장점은 글이 체험을 담기 위해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체험이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글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선승의 입에서 나오는 화두 같다. 깨달음에서 나오는 진언(眞言)이다. 그러다 보니 특별한 형식에 집착하지 않아도 시는 신선하고, 형식은 그때그때 만들어진다. 경험으로 뭉쳐진 사상이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형식을 만들어낸다. 우리 사회와 현실에 대한 규정이 남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지만, 그의 시가 남들 시와 다른 것은 그러한 규정과 선언의 밑바닥에 남들이 겪지 못한 그만의 체험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체험한 자와 추리한 자의 언어는 어떤 문맥 안에 놓일 때 전혀 다른 빛을 낸다. 그 감각부터가 다른 것이다. 세상이 김남주 김남주 하더니,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다.   그러나 이것이 온전한 시가 되려면 전체 시에 일관된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용의 절실함으로 인해 시는 새로운 형식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시인 자신은 그 형식에 대한 관심이 아직 없고, 자신의 내면에서 올라오는 감정들을 쏟아내는데 급급하고 있다. 그런 완성된 형식에 대한 깨달음이 오려면 현실에서 한 발짝 물러나서 세상을 보는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이 시와 시인의 속성상 그것이 지금은 어려울 것이다. 좀 더 오래 산다면 가능한 일이지만,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안타까운 일이다.★★★★☆[4336. 10. 18]  
76    돼지행렬 댓글:  조회:1932  추천:0  2015-02-09
      2015년 2월 8일 
75    착시 모음 3 댓글:  조회:2340  추천:0  2015-02-09
  [재미있는 착시현상] 세계에서 가장 신기한 착시현상그림,              착시란 시각에 관해 생기는 착각으로 밝기와 빛깔의 대비, 원근에 의한착시, 기하학적 착시 등이 있습니다. 우리의 눈을 통해 들어오는 시각정보는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착시현상이 생기는데요,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을 모두 믿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신기한 착시현상     ▲ 당나귀그림 + 사진조합 착시현상 1               ▲ 화산그림 + 사진조합 착시현상 2               ▲ 팬더그림 + 사진조합 착시현상 3                 ▲ 화면이 압축되는 듯한 느낌의 착시현상                 ▲ 원근을 이용한 재미있는 착시현상                 ▲ 엘레베이터 착시현상 이런 엘레베이터 타실 수 있겠어요? ㅎ                 ▲ 해리포터 or 아인슈타인 컴퓨터 모니터에서 2m정도 떨어져서 보면 해리포터가 보여요.                 ▲ 그림자 착시현상               ▲ 예수님 착시현상 말을 타고 있는 남자 or 예수님 얼굴                 ▲ 착시현상사진 피사의 탑을 기울인 남자?               ▲ 그림속의 남자얼굴을 찾아보세요.               ▲ 둥근 기둥 or 네모난 기둥           ▲ 착시현상사진 달에 착륙한 낙하산?               ▲ 악마의 얼굴 or 서있는 여자               ▲ 얼굴이 없어진 듯한 착시현상사진               ▲ 예수님 착시현상 모니터에서 1m 정도 뒤에서 보면 예수님이 보입니다.                 ▲ 거울속에 비치 여자 or 커다란 해골             ▲ 착시현상사진 이사람들은 앉아있는 걸까요? 누워있는 걸까요?           ▲ 호랑이 착시현상 아기돼지한테 호랑이 옷을 입혔더니 호랑이가 자기 새끼인줄 아네요 ㅋㅋ                     ▲ 움직이는 착시현상 @.@       -------------------------------------------------------------------------------------------                               
74    착시 모음 2 댓글:  조회:6902  추천:0  2015-02-09
  2008.10.19 16:08 수정됨|신고 추천해요17 noblebong   추천해요7 n개다2n 추천해요10 신지식X피드 http://www.cyworld.com/cjc76 욱긴사진 잔뜩있으니까 놀러오세혀 모든자료 전체공개 2007.09.16 06:55|신고 추천해요5 재 추천해요2 손캉남 추천해요1 내공냠냥족   추천해요2 anstjr1216       2008.11.07 19:09|신고 추천해요1 IQ오십만 똑같은것도 있을거에요. 하지만 좋게 봐주세요   똑바른 선들이 경사져 보이죠?      직선에 엊갈린 사선을 더하자 휘어져 보이네요      직사각형 좌측의 직선과 연결되는 선을 찾아 보세요...      사각형들 사이에 회색점이 보이는 듯 하죠?          와인잔?... 혹은 두 개의 얼굴?...      색소폰을 부는 남성?... 아니면 소녀의 얼굴?...      숨어 있는 단어를 찾아보세요! 흰색부분을 잘보세요...LIFT입니다.      원 사이에 있는 사각형의 선이 휘어져 보이죠      푸른 면은 뒷면일까요, 아님 앞면일까요    좌우측 중앙의 원은 같은 크기랍니다. 왼쪽 중앙의 원이 훨씬 커보이죠?    이런 모양의 삼각형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좌우사선(V자)는 같은 길이라구요      실제로는 길이가 같은 두 사각형의 윗변... 위 사각형의 윗변이 훨씬 길어 보이죠?       직선을 위어 보이게 하는 두가지 방법          세 개 중 가장 긴 기둥은? 정답은 모두 같다!       완벽한 원이 형편없이 휘어져 보이죠?     와우!웃긴착시현상           바퀴가 이상해... 이뤄 질수 있을꺼라 생각하십니까??   이건 뭐야... 이건 있는줄도 몰랐는데.. 어디가 천장부분이야?? 어디가 땅이지
73    착시 모음 1 댓글:  조회:4230  추천:0  2015-02-09
  신기한 착시그림 모음 [착시그림/착시사진/신기한 그림/착시효과]       신기한 착시그림 모음 [착시그림/착시사진/신기한 그림/착시효과]   안녕하세요^^   오늘은 신기란 착시그림들을 모아봤는데요~  보고있는데도 알쏭달쏭 신기하고 이게 맞나저게 맞나 헷갈리기까지 하는데요! 재미있는 착시 사진들이 정말 많더라구요!!      어떤 것들이 있을지 함께 보실까요~?     헉! 엘리베이터바닥이 뻥 뚫려있네요!!  실제라면 정말 무서운거지만 뻥 뚫린 것 처럼 그림이 그려져있는건데요!  엘레베이터 탈때마다 아찔 할 것 같네요!!       차가 두대인가 깊었지만 뒤에 휜 큰차에 스포츠카를 그린거네요^^  진짜인 바튀는 흰차의 바퀴인데요!! 진짜 같네요^^  신기합니다.     헉! 트럭안에 물건들이 꺼꾸로 되었는데요!  이것도 착시 현상으로 보이는 그림이네요^^         잔으로 보이나요 아림 두사람으로 모이시나요~? 저는 잔이 먼저 보이고 사람이 둘이 보이더라구요 ㅎㅎ              범으로 보이는 데요!코의 부부위가 사람의 뒷모습이었네요!!!  알고보니깐 보이는데요!  진짜 신기한 착시 그림이네요^^             손에 부엉리응 그렸네요!!  진짜 신기하네요!!  살아있는 부엉이같죠~? 손가락을 접어 기린을 그렸는데요~ 진짜 기린같네요^^ 하늘로 날아가는 독수리~~~       손을 쫙피자 새끼 고양이가 보이네요^^  너무 신기합니다^^ 지붕위에서 악기연주를 하는 사람인데요~ 아래쪽를 보면 지붕으로 보여 쓸쓸해 보입니다. 하지만 사진의 위쪽을 보면 사람의 얼굴로 보여 관객들이 공연을 보는 것 처럼 보여지죠기           딱 봤을때는 한사람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도대체 몇사람이 있는거죠~?? 코에 눈에 두건에 찾으면 찾을 수록 많은 사람들이 보이네요!!         늙은 노부부처럼보이는데요 자세히 보면 많은 사람들이 있네요!  크게 앉아있는 두사람이 보이고 귀부위 목부위에도 사람들이 보여지네요!!           어떤것이 먼저 보이나??  저는 큰 남자사람이 제일 먼저보이고 그다음으로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이 보이네오^^             이것도 여러사람이 보이네요^^           힘차게 내려오던 폭포가 어느순간 사람으로 보이네요^^             향연하는 배가 보여지네요!! 정말 멋진데요~  뒤쪽으로 보면 다리가 보이네요^^ 넘 너무 멋집니다!!       퍼즐을 맞추는 건가요~ 아니 퍼즐속에 있는 집에 들어가고 있는 건가요~?         위에보이는 남자즐의 키는 모두 같다고 합니다.  하지만 3번째에 서 있는 남자가 제일 커보이죠?  이것또한 착시효과!  사슴이 한마리? 보면 볼수록 사람이 여러마리죠!!  도대체 몇 마리야!!     강가가 보이는 건가요~ 아님 물에서 나오는 여성이 보이는 건가요~? 헷갈린다 ~~~       단풍길에서 자전거를 타는 걸까요~ 아님 단풍나무 위에서 타는거죠? ㅎㅎ 너무 신기하네요^^           아래쪽은 기둥이 3개 위쪽은 기둥이 2개네요!   천천히 내려오면서 봐도 아래는 3개 위는 2개 우와~~           아래서 내려다보는 건다요~? 아님 당겨주는 건다??  으악~~ 뭔가 복잡하네요 ㅠㅠ     정말 착시현상은 무서울정도로 신기하네요^^  이렇게 많은 착시현상들을 보니 보는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이 느껴지는 것 같네요~! 오늘의 포스팅은 여기까지 입니다.   [출처] 신기한 착시그림 모음 [착시그림/착시사진/신기한 그림/착시효과]|작성자 비너스라인야옹미미  
72    짧은 시 몇수 댓글:  조회:3938  추천:0  2015-02-08
    얼굴 하나야 손가락 둘로 푹 가리지만   보고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수 밖에   정지용 - 호수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 풀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 - 흔들리며 피는 꽃           그대가 꺾어준 꽃 시들 때 까지 들여다 보았네 그대가 남기고 간 시든 꽃 다시 필 때까지   이윤학 - 첫사랑     그리움을 허물다 돌아 보니 더 많은 그리움만 쌓여 있군요 내가 정말 그대를 사랑 하고 있나 봅니다   윤보영 - 사랑쌓기         어쩌면 이토록 한 사람 생각으로 이 밤이 이다지 팽팽할 수 있느냐   이병률 - 몸살       꿈만 꾸지 않고 꿈대로 삻았더니 꿈이 이루워졌다   용혜원 - 꿈           너의 추억을 나는 이렇게 쓸고 있다   유치환 - 낙엽     [출처] 캘리그라피 글귀 / 짧고 좋은시, 좋은 시, 짧은 시 모음|작성자 JJINssem  
71    하루에 한가지씩... 댓글:  조회:4530  추천:0  2015-02-08
   
70    세계 명시 모음 댓글:  조회:3975  추천:0  2015-02-08
     세계의 명시.         1낙엽 / 구르몽   시몬, 나뭇잎들 떨어진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 낙엽은 버림받고 땅위에 흩어져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해질 무렵 낙엽 모양은 쓸쓸하다. 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상냥히 외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낙엽은 날개 소리와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니 가까이 오라,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2사월 / 엘리엇(미국-영국)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차라리 겨울은 우리를 따뜻하게 했었다.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싸 감고, 마른 球根으로 가냘픈 생명을 키웠으니.     3무지개 / 워즈워드 (영국)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 설레느니, 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 다 자란 오늘에도 마찬가지, 쉰 예순에도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노니 나의 하루하루가 자연의 믿음에 매어지고자.       4생활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 푸쉬킨(러시아)   생활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라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머지 않아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실은 언제나 설운 것 모든 것은 일순간에 지나가나 지난 것은 그리움이 되리니.         5배 / 지센   저 배 바다를 산보하고 난 여기 파도 흉용한 육지를 항해한다. 내 파이프 자욱이 연기를 뿜으면 나직한 뱃고동, 남 저음 목청.   배는 화물과 여객을 싣고, 나의 적재 단위는 ‘인생’이란 중량.     6바닷가에 / 타고르(인도)   아득한 나라 바닷가에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가없는 하늘은 그림처럼 고요하고, 물결은 쉴 새 없이 넘실거립니다. 아득한 나라 바닷가에 소리치며 뜀뛰며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모래성 쌓는 아이, 조개 껍질 줍는 아이, 마른 나뭇잎으로 배를 접어 웃으면서 바다로 떠보내는 아이, 모두들 바닷가에서 재미나게 놉니다.   그들은 헤엄칠 줄도 모르고, 고기잡이 할 줄도 모릅니다. 어른들은 진주 캐고 상인들은 배 타고 오가지만, 아이들은 조약돌을 모으고 또 던질 뿐입니다. 그들은 보물에도 욕심이 없고, 고기잡이 할 줄도 모른답니다.   바다는 깔깔대며 부숴지고, 바위는 흰 이를 드러내어 웃습니다. 죽음을 지닌 파도도 자장가 부르는 엄마처럼 예쁜 노래를 불러 줍니다. 바다는 아이들과 함께 놀고, 바위는 흰 이를 드러내어 웃습니다.   아득한 나라 바닷가에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하늘은 폭풍 일고, 물위에 배는 엎어지며 죽음이 배 위에 있지만, 아이들은 놉니다. 아득한 나라 바닷가는 아이들의 큰 놀이터입니다.   7동방의 등촉 / 타고르(인도)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촉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한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마음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는 곳, 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 벌판에 길 잃지 않는 곳, 무한히 퍼져 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당으로 나의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8가지 않은 길 / 프로스트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갈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이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고.       9나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푸쉬킨     나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사랑은 아직, 아마도 그럴겁니다, 나의 영혼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것이 더이상 당신을 괴롭히지 못하게 하겠어요. 나는 무엇으로도 당신을 슬프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말없이, 희망도 없이, 때로는 두려움으로, 때로는 질투로 괴로와하며. 나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그토록 진실되게, 그토록 부드럽게, 다른 이들에 의해 사랑받도록 신이 당신에게 부여하신대로.       10추수하는 아가씨 / 워어워스   보게나, 저 밭에서 홀로 곡식 거두며 제 흥에 겨워 노래 부르는 저 외로운 하일랜드 아가씨를. 잠시 여기 서 있거나 조용히 지나가게나. 홀로 이삭 자르고 다발 묶으며 애잔한 노래 부르는 아가씨. 오, 들어 보게나, 깊고 깊은 골짜기에 넘쳐 흐르는 저 노랫소리.   아라비아 사막, 어떤 그늘진 쉼터에서 지친 나그네 무리에게 잘 오셨다 노래 부른 나이팅게일 새가 이보다 더 고운 노래 불렀을까? 아주 아주 멀리 헤브리디즈 섬들이 모여 있는 곳 그 바다의 적막을 깨치는 봄날 뻐꾹새 노래가 이 목소리마냥 가슴 죄게 했을까?   이 아가씨 노래에 담긴 이야기 들려 줄 이 있을까? 아마도 오래 전 먼 곳의 슬픈 이야기, 옛날 옛날의 싸움 이야기를 이 서러운 곡조가 담고 있을까? 아니면 오늘날의 사연이 깃들인 좀더 소박한 노래, 지금까지 있어 온, 앞으로도 있을 일상의 슬픔, 여윔, 괴로움에 대한 노래일까?   담긴 이야기야 어떻든 아가씨는 노래 불렀지, 끝이 없을 듯 오래 오래. 그 여자가 일하며 노래 부르며 허리 굽혀 낫을 쓰는 것을 보았지. 귀 기울였지, 꼼짝 않고 서서. 내가 언덕에 오를 때, 이미 들리지 않은 지 오래건만 그 노래 마음에 들리고 있었지.         11나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푸쉬킨(러시아)   나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사랑은 아직, 아마도 그럴겁니다, 나의 영혼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것이 더이상 당신을 괴롭히지 못하게 하겠어요. 나는 무엇으로도 당신을 슬프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말없이, 희망도 없이, 때로는 두려움으로, 때로는 질투로 괴로와하며. 나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그토록 진실되게, 그토록 부드럽게, 다른 이들에 의해 사랑받도록 신이 당신에게 부여하신대로.         12눈 내리는 밤 숲가에 서서 / 프로스트 (미국)   이게 누구의 숲인지 나는 알겠다. 물론 그의 집은 마을에 있지만 눈 덮인 그의 숲을 보느라고 내가 여기 멈춰서 있는 걸 그는 모를 것이다.   내 조랑말은 농가 하나 안 보이는 곳에 일년 중 가장 어두운 저녁 숲과 얼어붙은 호수 사이에 이렇게 멈춰서 있는 걸 이상히 여길 것이다.   무슨 착오라도 일으킨 게 아니냐는 듯 내 작은 말은 목방울을 흔들어 본다. 방울 소리 외에는 조용한 바람과 솜처럼 부드럽게 내리는 눈송이 뿐.   숲은 어둡고 깊고 아름답다. 그러나 내게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잠들기 전에 몇 마일을 더 가야 한다. 잠들기 전에 몇 마일을 더 가야 한다.           13뻐꾸기에 부쳐 / W.워즈워스   오, 유쾌한 새 손[客]이여! 예 듣고 지금 또 들으니 내 마음 기쁘다. 오, 뻐꾸기여! 내 너를 '새'라 부르랴, 헤매는 '소리'라 부르랴?   풀밭에 누워서 거푸 우는 네 소릴 듣는다. 멀고도 가까운 듯 이 산 저 산 옮아가는구나.   골짜기에겐 한갓 햇빛과 꽃 얘기로 들릴 테지만 너는 내게 실어다 준다. 꿈 많은 시절의 얘기를.   정말이지 잘 왔구나 봄의 귀염둥이여! 상기도 너는 내게 새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하나의 목소리요, 수수께끼   학교 시절에 귀 기울였던 바로 그 소리, 숲 속과 나무와 하늘을 몇 번이고 바라보게 했던 바로 그 울음소리.   너를 찾으려 숲 속과 풀밭을 얼마나 헤매었던가. 너는 여전히 내가 그리는 소망이요 사랑이었으나 끝내 보이지 않았다. 지금도 들판에 누워 네 소리에 귀 기울인다. 그 소리에 귀 기울일라치면 황금빛 옛 시절이 돌아온다.   오, 축복받은 새여! 우리가 발 디딘 이 땅이 다시 꿈 같은 선경(仙境)처럼 보이는구나, 네게 어울리는 집인 양!           14안개 속에서 / 헤르만 헤세   안개 속을 헤매면 이상하여라! 숲이며 돌은 저마다 외로움에 잠기고 나무도 서로가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다 혼자다   나의 인생이 아직 밝던 시절엔 세상은 친구들로 가득했건만 이제는 안개가 내리어 보이는 사람 하나도 없다   어쩔 수 없이 조용히 모든 것에서 사람을 떼어 놓는 그 어둠을 조금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참으로 현명하다 할 수는 없다   안개 속을 헤매면 이상하여라!   인생이란 고독한 것 사람들은 서로 모르고 산다 모두가 혼자다     15채 사랑도 다 못하고서 / 라슬 감자토비치 (러시아)   너는, 꿈도 옛날 이야기도 아니다-   꿈이야 조만간 잊혀지게 마련이고,   옛날 얘기야 내가 너무도 잘 알고 있으니   너는 사랑의 빛, 그 살아 있는 양심,   아물지 않는 상처요,   아픔이자, 연민이며, 슬픔이라......   기대의 가물거림도, 대담한 소망의 열정도 아니다   열정이야 조만간 이뤄지게 마련이고,   기대는 쉬 부서지는 법!   두 가지 소망을 나는 지녔었네, 이상하긴 하겠지만;   언젠간 너를 보리라 소망했었지.   한 번 보고 나니-또 다시 보고픈 소망이 생겨났네   그렇게 나는 소망과 소망들 속에서 높이 떠올라 버렸네!     너는 노래가 아니지, 나는 노래가 잔잔하길 바라네. 내가 술을 마실 때 너의 말로도 취하지 않는 것은 네 말의 샘물이 그토록 신선하고 용솟음치는 까닭이지 그런데 너는 도대체 누군가? 나는 모른다. 답할 수없어   정의는 없고, 그리고 그 위. 자연의 법칙은 우리에게 진정 불공평해;   너를 만나지도 못한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왜 너를 채 다 사랑도 못하고서   내가 죽어야 하는지?     16이니스프리의 호도(湖島) /윌리암 예이츠   나 일어나 이제 가리, 이니스프리로 가리. 거기 나뭇가지 엮어 진흙 바른 작은 오두막 짓고 아홉 이랑 콩밭과 꿀벌통 하나 벌들이 윙윙대는 숲속에 나 혼자 살으리.   거기서 얼마쯤 평화를 맛보리 평화는 천천히 내리는 것 아침의 베일로부터 귀뚜라미 우는 곳에 이르기까지 한밤엔 온통 반짝이는 빛 한낮엔 보랏빛 환한 기색 저녁엔 홍방울새 날개 소리 가득한 곳   나 일어나 이제 가리. 밤이나 낮이나 호숫가에 철썩이는 낮은 물결 소리 들리나니 한길 위에 서 있을 때나 회색 포도(鋪道) 위에 서 있을 때면 내 마음 깊숙이 그 물결 소리 들리네.   I will arise and go now, and go to Innisfree, And a small cabin build there, of clay and wattles made; Nine beans rows will I have there, a hive for the honey-bee, And live alone in the bee-loud glade.   And I shall have some peace there, for peace comes dropping slow, Dropping from the veils of the morning to where the cricket sings; There midnight's all a glimmer, and noon a purple glow, And evening full of the linner's wings.   I will arise and go now, for always night and day I hear lake water lapping with low sounds by the shore; While I stand on the roadway, or on the pavements grey, I hear it in the deep heart's core.               17너는 날렵하고 청순하여 / 게오르게 (독일 시)     너는 날렵하고 청순하여 불꽃같고   너는 상냥하고 밝아서 아침 같고   너는 고고한 나무의 꽃가지 같고   너는 조용히 솟는 샘물 같다,       양지바른 들판으로 나를 따르고   저녁놀 진 안개에 나를 잠기게 하며   어둠속에 내 앞을 비추어주는   너는 차가운 바람, 나는 뜨거운 입김       너는 내 소원이고 내 추억이니   숨결마다 나는 너를 호흡하며   숨을 들이 쉴- 때 마다 너를 들이마시며   나는 네게 입맞춤 한다,       너는 고고한 나무의 꽃가지   너는 조용히 솟는 깨끗한 샘물   너는 날렵하고 청순한 불꽃   너는 상냥하고 맑은 아침,         18그대는 울고 / 바이런     그대 우는 걸 나는 보았네 반짝이는 눈물방울이 그 푸른 눈에 맺히는 것을 제비꽃에 앉았다 떨어지는 맑은 이슬방울처럼 그대 방긋이 웃는 걸 나는 보았네 푸른 구슬의 반짝임도 그대 곁에선 빛을 읽고 말 것을 그대의 반짝이는 눈동자 그 속에 담긴 생생한 빛 따를 바 없어라   구름이 저 먼 태양으로부터 깊고 풍요로운 노을을 받을 때 다가오는 저녁 그림자 그 아름다운 빛을 하늘에서 씻어 낼 수 없듯이 그대의 미소는 우울한 이내 마음에 맑고 깨끗한 기쁨을 주고 그 태양 같은 빛은 타오르는 불꽃같이 내 가슴 속에 찬연히 빛나네       19세상은 우리에게 너무하다 / 윌리엄 워즈워스     세상은 우리에게 너무하다. 밤낮으로 우리는 벌고 쓰는 데 우리의 힘을 탕진해 버린다. 우리 것인 자연에서 보는 것이 거의 없다. 모두가 마음마저 내버렸으니, 천박한 편익이다! 달빛에 젖가슴을 드러내는 바다 쉴 새 없이 울부짖으려 하지만 지금은 잠든 꽃처럼 움츠러든 바람 이들과 모든 것에 조화를 잃어버린 우리 무엇에도 감동받지 못하니, 신이시여! 차라리 낡은 신앙으로 길러진 이교도이고 싶습니다. 그러면 이 즐거운 초원에 서서 제 마음의 쓸쓸함을 달래줄 광경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프로테우스를 보거나 늙은 트라이턴이 소라고둥 부는 것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요.           20사랑하는 사람 가까이 / 괴테     희미한 햇빛 바다에서 비쳐올 때   나 그대 생각하노라   달빛 환히 샘물에 번질 때   나 그대 생각하노라       저 멀리 길가에 뽀오얀 먼지일 때   나 그대 모습 보노라   어두운 밤 오솔길에 나그네 몸 떨때   나 그대 모습 보노라       물결높아 파도소리 아득해질때   나 그대 소리 듣노라   고요한 숲 속 침묵의 경계를 거닐며   나 귀를 기울이노라       나 그대 곁에 있노라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대 내 가가이 있으니   해 저물면 별아   날 위해 곧 반짝여라   오오 그대 여기 있다면                   21첫사랑 / 수언 지에우(Ngô Xuân Diệu) -베트남명시   나는 첫사랑밖에 없다 너에게 주었다. 편지 한 통과 함께 너는 받지 않았고, 내 사랑은 사라졌다 주어버린 사랑은 결코 되돌릴 수 없으니.   편지는 삶의 몽상처럼 얄팍하고 사랑은 모든 이별처럼 슬프다 편지를 주머니에 깊숙이 감추고 수 백 번을 고쳐 쓴 다음에야 전한다.   부끄러운 마음이 어리석은 편지를 따라 너에게 다가가 돌아올 줄 모른다 너는 젊은 마음을 찢어버렸고 그날 구름은 계곡을 덮었다   운 좋게도 내 마음은 아직 젊으니 봄의 피는 꽃을 맺지 못했다 비 오는 정원에 아직도 새가 지저귀니 사랑도, 봉선화도, 석류도 필요 없다   그러나 꽃과 나비를 사랑할 때도 수 천 번이나 꿈을 꾸는 듯 하였고 두 눈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두 손은 감히 붙들지도 못했다   나는 아직도 어릴 때의 장난같이 생각되는데 언제 사랑이 깨졌단 말인가! 눈은 말랐지만 수천의 눈물방울이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첫 번째 꽃은 정백한 향을 담고 초봄은 깨끗하고 단조롭고 초향(初香)은 쇠처럼 단단히 새겨졌다 대보름 안개는 온 세상을 희미하게 한다.   사랑의 편지가 잘못 흘러갔으니 우울하고 아침 해도 빛을 잃고 나는 오직 첫사랑밖에 없었고 너에게 주었다. 나는 사라졌다.     22말해야 한다 / 수언 지에우(Ngô Xuân Diệu)   애끓도록 사랑해요, 그런데도 모자란단 말입니까? 당신은 욕심이 너무 많아요,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해요 안다, 네가 사랑한다고 말한 것을 그런데 왜 지난 얘기를 되새기는 건가요?   애끓도록 사랑하지만 여전히 충분치가 않구나 네가 사랑한다면서 마음속에만 두고 말하지 않으면 사랑은 없는 것이며 잘난 외모도 단지 돌과 같은 것이다. 나는 완전하고 무한함을 원한다 너는 아니? 내가 너를 찾았다는 것을 오늘의 사실은 내일까지 이르지 못하니 어찌 사랑이 헌것이 있겠나?   애끓도록 사랑하지만 여전히 충분치가 않구나 사랑한다고 말해야 해, 백 번 천 번이라도 영원히 봄밤을 지키도록 뜨거워야 해 사랑의 정원에 나비를 놓아줘야지   너는 말하고 또 말하고, 말해야 해 눈으로, 눈썹으로 사랑의 몸짓으로, 수줍은 자태로 의지하는 몸짓으로, 웃음으로, 손을 잡음으로   침묵으로, 내가 알 수 있는 것으로. 그러나 겨울처럼 차갑게 하지 말고 속 타는 이에게 무정하게 굴지 말며 잠자는 호수처럼 조용히 있지 마라   애끓도록 사랑하지만 여전히 충분치가 않구나             23황학루 / 최호   길손은 이미 황학을 타고 가버리고   허허로이 빈 터엔 황학루만 남았구려   황학은 한번 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건만(않는데)   유유히 흰 구름은(만) 긴 세월에 걸쳤세라   맑은 강심에 한양길 가로수 역력히 비쳐있고   긴 사연 앵무주엔 잡초들만 무심쿠나   어느덧 해 저물어 고향 땅 더욱 묘연하니   물안개 자욱한 강상의 나그네 수심 깊어 하노라           24月下獨酌 달 아래 홀로 술을 마시며 / 이백(701~762)   1.     花間一壺酒 꽃나무 사이에서 한 병의 술을     獨酌無相親 홀로 따르네 아무도 없이.     擧杯邀明月 잔 들고 밝은 달을 맞으니     對影成三人 그림자와 나와 달이 셋이 되었네.     月旣不解飮 달은 술 마실 줄을 모르고     影徒隨我身 그림자는 나를 따르기만 하네.     暫伴月將影 잠시나마 달과 그림자 함께 있으니     行樂須及春 봄이 가기 전에 즐겨야 하지.     我歌月徘徊 내가 노래하면 달은 거닐고     我舞影零亂 내가 춤추면 그림자도 따라 춤추네.     醒時同交歡 함께 즐거이 술을 마시고     醉後各分散 취하면 각자 헤어지는 거.     永結無情遊 무정한 교유를 길이 맺었으니     相期邈雲漢 다음엔 저 은하에서 우리 만나세.     2.       天若不愛酒 하늘이 술을 사랑치 않았다면     酒星不在天 주성이 하늘에 있지 않을 거고,     地若不愛酒 땅이 술을 사랑치 않았다면     地應無酒泉 땅에 주천이 없었을 거야.       天地旣愛酒 하늘과 땅도 술을 사랑했으니     愛酒不愧天 내가 술 사랑하는 건 부끄러울 게 없지.     已聞淸比聖 옛말에, 청주는 성인과 같고     復道濁如賢 탁주는 현인과 같다고 하였네.     賢聖旣已飮 현인과 성인을 이미 들이켰으니     何必求神仙 굳이 신선을 찾을 거 없지.     三杯通大道 석 잔이면 대도에 통할 수 있고     一斗合自然 한 말이면 자연과 하나되는 거라.     但得酒中趣 술 마시는 즐거움 홀로 지닐 뿐     勿爲醒者傳 깨어 있는 자들에게 전할 거 없네.         3.       三月咸陽城 춘삼월 함양성은     千花晝如錦 온갖 꽃이 비단을 펴 놓은 듯.     誰能春獨愁 뉘라서 봄날 수심 떨칠 수 있으랴     對此徑須飮 이럴 땐 술을 마시는게 최고지.     窮通與修短 곤궁함 영달함과 수명의 장단은     造化夙所稟 태어날때 이미 다 정해진 거야.     一樽齊死生 한 통 술에 삶과 죽음 같아보이니     萬事固難審 세상 일 구절구절 알 거 뭐 있나.     醉後失天地 취하면 세상천지 다 잊어버리고     兀然就孤枕 홀로 베개 베고 잠이나 자는 거.     不知有吾身 내 몸이 있음도 알지 못하니     此樂最爲甚 이게 바로 최고의 즐거움이야.       4.     窮愁千萬端 천갈래 만갈래 이는 수심에     美酒三百杯 술 삼백잔을 마셔볼거나.     愁多酒雖少 수심은 많고 술은 적지만     酒傾愁不來 마신 뒤엔 수심이 사라졌다네.     所以知酒聖 아, 이래서 옛날 주성이     酒감心自開 얼근히 취하면 마음이 트였었구나.     辭粟臥首陽 백이는 수양 골짝에서 살다 죽었고     屢空飢顔回 청렴하단 안회는 늘 배가 고팠지.     當代不樂飮 당대에 술이나 즐길 일이지     虛名安用哉 이름 그것 부질없이 남겨 무엇해.     蟹오卽金液 게 조개 안주는 신선약이고       糟丘是蓬萊 술 지게미 언덕은 곧 봉래산이라.     且須飮美酒 좋은 술 실컷 퍼 마시고서     乘月醉高臺 달밤에 누대에서 취해 볼거나.         25여인숙 / 잘랄루딘 루미 (페르시아)     인간이라는 존재는 여인숙과 같다. 매일 아침(저녁) 새로운 손님이 도착한다.   기쁨, 절망, 슬픔 그리고 약간의 순간적인 깨달음 등이 예기치 않은 방문객처럼 찾아온다.   그 모두를 환영하고 맞아들이라. 설령 그들이 슬픔의 군중이어서 그대의 집을 난폭하게 쓸어가 버리고 가구들을 몽땅 내가더라도...   그렇다 해도 각각의 손님을 존중하라. 그들은 어떤 새로운 기쁨을 주기위해 그대를 청소하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어두운 생각, 부끄러움, 후회 그들을 문에서 웃으며 맞으라. 그리고 그들을 집안으로 초대하라. 누가 들어오든 감사하게 여기라.   모든 손님은 저 멀리에서 보낸 안내자들이니까. 26나르키소스는 말한다 / 폴 발레리(프랑스) - 나르키사의 영혼을 달래기 위하여     오 형제들이여! 슬픈 백합들이여, 나는 아름다움에 번민한다 너희들의 나체 속에서 나를 갈망했기에. 하여 너희들을 향해, 요정, 요정이여, 오 샘의 요정이여, 나는 부질없는 눈물을 순수한 침묵에 바치러 온다.   크나큰 고요가 내게 귀기울이고, 거기에서 나는 희망을 듣는다. 샘물 솟는 소리 바뀌어 나에게 저녁을 이야기하고, 성스런 어둠 속 은빛 풀 자라나는 소리 들려오며, 못 믿을 달은 조용해 진 샘의 깊숙한 속까지 제 거울을 치켜든다.   그리고 나는 이 갈대밭 속에 기꺼이 몸을 던지고, 오 청옥이여, 내 서글픈 아름다움으로 번민한다! 나는 이제 마법의 물밖에는 사랑할 수가 없나니, 거기서 웃음도 옛날의 장미꽃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네 숙명의 순수한 광채는 얼마나 한스러운가, 그리고 부드럽게 내게 안긴 샘물이여, 필멸의 푸르름 속에서 내 눈은 젖은 꽃들의 화관을 쓴 나의 영상을 길어울렸어라!   아! 영상은 덧없고 눈물은 영원하도다! 푸른 숲과 우애로운 팔들 저 너머, 모호한 시간의 부드러운 미광이 있어, 남아 있는 햇빛으로 나를 벌거숭이 약혼자로 만든다 서글픈 물이 나를 유인하는 창백한 장소에서...... 환락의 악마여, 바람직하게 얼어붙었구나!   여기 물 속에 달과 이슬의 내 육체가 있나니, 오 내 눈과 마주 대한 순종하는 형태여! 여기 몸짓도 순수한 내 은빛 두 팔!..... 찬탄할 금빛 속에서 내 느린 두 손은 잎새들이 얽어맨 이 수인(囚人)을 부르다가 지치고, 나는 숨겨진 신들의 이름을 메아리들에게 외치노라!   잘 있거라, 고요히 닫힌 물결 위로 사라진 그림자여, 나르키소스...... 이 이름마저도 그윽한 가슴에는 부드러운 향기로다. 이 텅빈 무덤 위 망혼들에게 조문의 장미 꽃잎을 하나씩 떨어뜨려라.   내 입술이여, 장미꽃 되어, 사랑하는 망령을 차분히 달래줄 입맞춤 하나씩 흩날리게 하라, 가까이서 멀리서, 밤이 낮은 소리로, 그림자와 선잠 가득한 꽃받침에게 도란거리나니. 허나 달은 기름한 도금양들과 노닥거리도다.   이 도금양 아래에서, 나는 너를 경배한다, 고독 때문에 쓸쓸히 피어, 잠자는 숲속의 거울에 제 모습 비춰보는 오 무상한 육신이여. 난 너의 정겨운 현전(現前)에서 풀려날 길 없는데, 거짓말쟁이 시간은 이끼 위 사지에겐 부드럽고 어둑한 환희로 깊은 바람을 부풀린다.   잘 있거라, 나르키소스여...... 죽어라! 이제 황혼이다. 내 가슴의 숨결에 내 형태는 물결치고, 덮어 가려진 창공을 가로질러, 울며 가는 가축들의 아쉬움을 목동의 피리가 조율한다. 하지만 별이 불 밝히는 독한 추위의 수면에서, 완만한 안개 무덤이 생기기 전에, 숙명적인 물의 정적을 깨뜨리는 이 입맞춤을 받으라! 희망만으로 이 수정을 망가뜨리기에 족하리라. 잔물살이 나를 몰아내는 숨결로 나를 호리니, 내 입김이여 가냘픈 피리를 생동케 하라, 가벼이 피리 부는 이도 내겐 너그러우리라!......   사라져라, 혼란된 신들이여! 그리고 너, 겸손한 고독의 피리여, 달에게 쏟아주라, 우리의 다양한 은빛 눈물을.         27가을엔 유서를 쓰리라 / 네루타     가을엔 유서를 쓰리라. 낙엽 되어 버린 내 시작 노트 위에 마지막 눈감은 새의 흰 눈꺼풀 위에 흔이 빠져 나간 곤충의 껍질 위에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차가운 물고기의 내장과 갑자기 쌀쌀해진 애인의 목소리 위에 하룻밤 새하얗게 돌아서 버린 양치식물 위에 나 유서를 쓰리라. 파종된 책 아직 땅속에 묻혀 있는 몇 개의 둥근 씨앗들과 모래 속으로 가라앉는 바다가의 고독한 시체 위에 앞일를 걱정하며 한숨짓는 이마 위에 가을엔 한장의 유서를 쓰리라. 가장 먼 곳에서 상처처럼 떨어지는 별똥별과 내 허약한 페에 못을 박듯이 내리는 가을비와 가나한 자가 먹다 남긴 빵 조각 위에 지켜지지 못한 채 낯선 정유장에 머물러 있는 살아 있는 자들과의 약속 위에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가을이 오면 내 애인은 내 시에 등장하는 곤충과 나비들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큰곰별자리에 둘러싸여 내 유서를 소리 내어 읽으리라.         28가을 날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독일시)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드리우시고 들판 위엔 바람을 놓아 주십시오.   마지막 열매들이 영글도록 명하시어, 그들에게 이틀만 더 남극의 따뜻한 날을 베푸시고,   완성으로 이끄시어 무거운 포도 송이에 마지막 단맛을 넣어 주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더는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오래도록 혼자로 남아서 깨어나,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뭇잎 떨어져 뒹굴면 가로수 길을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매일 것입니다.           29이방인 / 샤를 보를레르 시(프랑스)     너는 누구를 가장 사랑하는가?   말해보라, 수수께끼 같은 사람이여   너의 아버지인가, 아니면 형제자매인가?   나에게는 부모도 형제자매도 없다   그러면 너의 친구인가?   지금 너는 뜻조차 알 수 없는 낱말을 쓰고 있다   그렇다면 너의 조국인가?   그것이 어느 위도에 자리 잡고 있는지도 나는 모른다   그러면 아름다운 여인이란 말인가?   아, 만일 불멸의 여신이라면   나는 그를 사랑할 수 있으련만   그렇다면 돈이란 말인가?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그것   마치 네가 신을 미워한고 있는 것처럼   그렇다면 너는 무엇을 사랑하는가?   세상에서도 귀한 에트랑제여!   나는 저 구름을 사랑한다......   저 부지런히 흘러가는 구름을 사랑한다   ....보라, 다시 보라..... 저 불가사의한 뭉게구름을.     30취하라 / 샤를 보들레르(프랑스)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   핵심은 바로 거기에 있다 이것이야말로   그대의 어깨를 짓누르고 그대의 허리를 땅으로   굽히게 하는 무서운 시간의 중압을 느끼지 않게 하는   유일한 과제이다 쉬지 않고 취해야 한다   무엇으로냐고   술 시 혹은 도덕 당신의 취향에 따라   하여간 취하라   그리하여   당신이 때로 고궁의 계단이나 도랑의 푸른 잔디 위에서   또는 당신 방의 삭막한 고독 속에서 취기가 이미 줄었든가   아주 가버린 상태에서 깨어난다면 물으라   바람에게 물결에게   별에게 새에게 벽시계에게   달아나는 모든 것 탄식하는 모든 것   구르는 모든 것 노래하는 모든 것   말하는 모든 것에 물으라 지금 몇 시냐고   그러면 바람은 별은 새는 벽시계는 대답하리라   지금은 취할 시간甄? 당신이 시간의 학대받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취하라   쉬지 않고 취하라   술로 시로   또는 도덕으로   당신의 취향에 따라           31내 사랑 너를 위해 / 자크 프레베르 (프랑스)     나는 새 시장으로 갔네 거기서 새를 샀네 내 사랑 너를 위해   나는 꽃 시장으로 갔네 거기서 꽃을 샀네 내 사랑 너를 위해   나는 고철 시장으로 갔네 거기서 사슬을 샀네 육중한 사슬을 내 사랑 너를 위해   그리고는 노예 시장으로 갔네 거기서 너를 찾았네 그러나 너는 없었네 내 사랑           32가 을 / 기욤 아폴리네르   안개속을 간다 다리가 구부정한 농부와 그의 소가 조용히, 가난하고 부끄러운 오막집들을 감취주는 가을 안개속을   그리고 저쪽으로 가면서 그 농부는 노래한다 반지와 상처입은 마음을 말해주는 사랑과 부정의 노래를   오! 가을 가을이 여름을 죽였다 안개속을 지나간다 재빛 실루에뜨가 둘         33가을의 노래 / 베를렌   가을날 바이올린의 긴 흐느낌. 단조로운 우울로 내 마음 쓰라려.   종 소리 울리면 숨막히고, 창백히 옛날을 추억하며 눈물짓노라.   그리하여 나는 간다. 모진 바람이 날 휘몰아치는 대로 이리저리 마치 낙엽처럼.         34이리 오세요, 눈에 보이지 않는 피리가 / 빅토르 위고   이리오세요! --눈에 보이지 않는 피리가 목장에서 한숨 쉽니다.-- 가장 평화로운 노래는 목동의 노래.   바람은 떡갈나무 밑에서, 물의 어두운 거울에 잔물결을 일게 합니다.-- 가장 즐거운 노래는 새들의 노래.   어떤 걱정에도 괴로워해선 안됩니다. 우리 사랑합시다! 사랑합시다 언제까지나!-- 가장 매혹적인 노래는 사랑의 노래.         35감 각 / 아르튀르 랭보       여름의 파아란 저녁때면 나는 오솔길을 가리라. 보리에 찔리며, 잔풀을 짓밟으며: 몽상가 나는 그 시원함을 발에서 느끼리. 바람에 내 맨 머리를 멱 감기리.   나는 말하지 않으리, 아무것도 생각지 않으리라: 그러나 무한한 사랑이 내 영혼 속에 솟아 오르리라, 그리고 나는 가리라, 멀리 저 머얼리, 보헤미안처럼. 자연속을, - 마치 여자와함께 가듯 행복히.         36인생 예찬(찬가) / 롱펠로우   슬픈 사연으로 내게 말하지 말아라. 인생은 한갓 헛된 꿈에 불과하다고 ! 잠자는 영혼은 죽은 것이어니 만물의 외양의 모습 그대로가 아니다.   인생은 진실이다 ! 인생은 진지하다. 무덤이 그 종말이 될 수는 없다. "너는 흙이어니 흙으로 돌아가라." 이 말은 영혼에 대해 한 말은 아니다.   우리가 가야할 곳, 또한 가는 길은 향락도 아니요, 슬픔도 아니다. 저마다 내일이 오늘보다 낫도록 행동하는 그것이 목적이요, 길이다.   예술은 길고 세월은 빨리 간다. 우리의 심장은 튼튼하고 용감하나 싸맨 북소리처럼 둔탁하게 무덤 향한 장송곡을 치고 있으니.   이 세상 넓고 넓은 싸움터에서 인생의 노영 안에서 발 없이 쫓기는 짐승처럼 되지 말고 싸움에 이기는 영웅이 되라.     37잊혀진 여인 / 로랑생 (1885~ 1956 佛 화가)   권태로운 여자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슬픔에 젖은 여인입니다   슬픔에 젖은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불행을 겪고 있는 여인입니다   불행을 겪고 있는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병을 앓는 여인입니다   병을 앓는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버림 받은 여인입니다   버림 받은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쫒겨난 여인입니다   쫒겨난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죽은 여인입니다.   죽은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잊혀진 여인입니다       38春望 봄날 고국 산천을 바라보며 / 두보   國破山河在, 고국은 엉망이어도 산천만은 의구하니   城春草木深. 온누리에 봄이 되어 초목이 무성하다   感時花濺淚, 시국이 어려우니 꽃을 봐도 눈물 나고   恨別鳥驚心. 생이별 한스러워 새소리에도 가슴 저려   烽火連三月, 전란(戰亂)에 휩싸인지 어언 석달째라   家書抵萬金. 고향 편지 한 통에 만금은 족히 되리   白頭搔更短, 흰머리는 긁을수록 자꾸만 빠져버려   渾欲不勝簪. 이제는 비녀조차 꽂기가 어렵구료     39악양루에 올라 / 두보     昔聞洞庭水 옛날에 동정호의 (절경을) 말로만 듣다가   今上岳陽樓 오늘에야 악양루에 오르는구나   吳楚東南坼 오나라와 초나라가 동쪽과 남쪽으로 갈라졌고   乾坤日夜浮 하늘과 땅이 밤낮으로 (동정호에) 떠 있구나   親朋無一字 친한 벗이 한 자 글월도 없으니   老去有孤舟 늘어가는 몸에 (의지할 곳이란) 외로운 배 한 척 뿐이로다   戎馬關山北 (아직도) 고향에선 전쟁이 계속되고 있으니   憑軒涕泗流 난간에 기대어서 눈물을 흘리노라     40국화 옆에서 / 서정주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도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69    연변방언 모음 댓글:  조회:7662  추천:2  2015-02-08
연변과 함경도 방언    가두아주머니=전업주부, 직장을 가지지 않고 가정만 돌보는 여자                      (상류사회의 여성) 갈개다=남의 일을 방해하거나 남을 못살게 구는 것 '갈개꾼' 걸치다=싸움을 걸어오다. 시비를 걸다. 결나다=성내다. 화내다. 고급술어=시중 불량배들이 사용하는 은어들을 일컫는 말. 공격수=소매치기 좀도둑 등을 일컫는 은어. 구루빠= 그룹(GROUP) 구역= 대도시의 행정구역을 표현하는 말로 한국의 구(區)에 해당함. 구이칠(927)상무대=꽃제비들을 잡아들이거나 관리, 수용하는 사람. 기술역=열차 차량의 보수 교체 등 차량정비기능을 갖춘 역. 기차대가리= 기관차. 까드라지다=빳빳하게 되면서 오그라지는 현상을 말하는 방언. 깔개= 여자가 몸을 준다는 은어. 꼴림터=잠을 자는 숙소를 가리키는 은어. 꽃사시오=매춘부를 일컫는 은어. 나그네= 남편을 일컫는 방언. 늄가마= 알루미늄으로 만든 솥. 늄버치= 알루미늄으로 만든 대야. 독지= 종기. 뾰루지. 돈주= 돈이 많은 사람들을 일컫는 속어. 앞전=땅에 손을 앞으로 짚고 재주넘는 공중제비. 뒷전=뒤로하는 공중제비.         돼지가 앞전 뒷전 하다+ 못 볼 것을 보는 것        '별꼴을 다보다'리는 속담. 들양= 떠돌아다니며 몸을 파는 매춘부를 일컫는 은어. 뜨바이= 도둑질을 일컫는 은어. 량증,량표=식권이나 양식을 배급받을 수 있는 표. 레자= 중국제 장판지. 로동교화소=전과가 있는 죄수들을 수용하는 감옥. 로동단련대=6개월 미만의 단기 수나 경범 자들을 수용하는 곳으로                  집단적으로 사회 부역에 동원시키는 감옥. 로동자규찰대=직장에서 비교적 근무성적이 양호한 노동자들을                      모아 사회 규찰을 시키는 메따=날치기를 일컫는 은어. 몰아주다=왕따시키는 것 물세=장마당에서 장사를 하거나 기차를 탈 때 거래되는 뒷돈이나 뇌물. 미공급=배급이 나오지 않는 것 방통=기차의 차량 (객차나 화차 포함) 볶은국수= 라면 사끼=술을 가리키는 은어 새것=처녀를 가리키는 속어 색종 테이프=음란물 비디오 테-입 서이= 형의 방언 세대주=집주인을 말하는 북한의 표준어이다. 습격=도둑질을 가리키는 은어 승벽내기= 결사적으로 이기려고 하는 것                10호초소= 국가 보위부에 소속된 초소로서 인민들의                증명서나통행증을 검사하고, 불법무기 나 흉기를 단속한다.                주로 국경지역에 배치되어 있음. 쓰던물건=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부인을 가리키는 속어 씩닥거리다=잘 안 되는 일을 애쓰며하는 것. 안전원=치안 유지를 위한 한국의 경찰과 같음. 알받이=가방이나 배낭을 찢고 가져가는 행위. 압축=물건이나 돈을 착취하는 안전원들의 행위 . 야간작업=밤에 도둑질하는 행위. 어짜= 자기보다 크거나 나이 많은 사람. 언치 걸다=트집잡고 시비를 거는 것. 원주필=볼펜을 말함 중국 조선족들이 사용하는 말이 흘러들어 온 것임.            인민 무력부 경무초소=군인과 군대를 차량을            단속하는 초소 한국의 헌병과 같은 것. 재포=일본에 친척이 있거나 일본에서 귀국한사람. 조교=중국국적을 가지고 중국에서 사는 친조선 중국 교포.        (탈북자들과 선교사들이 체포되는 것은 대부분 이들의 밀고로 이루어진다.)  주패=트럼프. 진탕치다=잘 차려놓고 실컷 먹고 노는 것. 짼짼하다=음식을 잘 차렸다. 카바=도둑질하는 것을 주위 사람들이 못 보도록 막는 행위를 가리키는 은어. 테라미찐=설사를 멈추게 하는 약 토비= 때 강도, 비적들. 군인이나 안전원 등이 약탈하는 것을 일컫는 속어. 포탄=주로 군용담요. 이불. 풋조리=배추 추린 것 *연변과 함경도 지방의 방언   가는채(뭉근체)  가루(갈구,갈기)  가르쳐주다(알쾌주다)  간장(지렁)  갈비(갈배)  감기(순감,윤감)  감자(갱기)  강아지(강생이)  개으름뱅이(누진뱅이)  개피떡(씀바람떡)  거짓말(거집뿌리,도삽,부끼,얼레뿌리)  거품(버큼)  건방지다(염방지다)  걸핏하면(자삣하문)  검부레기(거부제기)  겁쟁이(겁재이 겹제기)  겨드랑이(겨댕이,자개미,자대,재개미)  겨우(재우)  계십니까?(기심둥? 계심까? 있씀다?) 계약체결(합동체결)  고드름(고조리,고주럼,고즈래미)  고등어(고마이,고마에,고망어)  고양이(고애,고앵이)  곰보(얼구뱅이,얼그뱅이)  곱슬머리(고수락머리,양머리)  공것(공째,공게)  광대뼈(볼뼈)  괜찮습니다(일없수구마)  괭이(곽지)  교환하는것(바꿈질,바꾸각질)  구두쇠(구데손이)  구멍(궁개,궁기,구먹)  구하기 어렵다,귀하다(긴장하다)  국수(국시)  굳은살(썩살)  굴뚝(구새통)  귀먹어리(구먹댕이,먹보)  귀찮다(영사하다,영상스럽다)  그러므로(그러니깐드루)  그림자(그럼지)  기웃거리다(찌웃거리다)  기저귀 (기상기)  깍쟁이(깍재,따꼽쟁이)  깔보다(알보다)  꼬락서니(줏사리,꼬락사이)  꼬리(꼬래,꽁대)  꼬치꼬치(오지오지)  꿩(산닭) 꽈배기(타래떡)  나 스스로(나절로)  나물(남새)  나비(나붕이)  남(냄)  남방셔츠(적삼, 퉁중이,잠배이)  남자(스나이)  남편(나그네)  내버려두다(내싸두다)  내장,속(벨,베리,배애리)  냉이(나상구,나숭개,나시) 너무,지니치게(진해)  넙적다리(신다리)  노란자위(노란자시,노랑젖)  노루(놀가지,놀기,놀갱이)  노을(나부리,나불,나오리,노부리,느블)  노하다(노바하다)  녹두나물(녹디질금)  뇌물(콧밑씻게)  누구세요(뉘기야,니기가)  누이(누부,누비,누애,누의,느비)  눈까풀(눈까줄,눈깝지)  눈보라(눈바라)  느슨하다(허슨하다)  늙은남자(아바이,노털)  늙은여자(아매)  다구치다(족치다,족대기다)  다듬다(검줄하다)  다시하다(되비하다)  단추(눈마구)  달무리(달머리)  닭(달기)  닭알(게랄,달기알)  담요(탄재,탄자)  대담하다(어버리크다)  대머리(번대머리,뻔들머리,)  대판싸움(대드리싸움)  더덕(더데기)  더부룩하다(듬뿌룩하다)  더위(더비,더우)  데굴데굴(두굴두굴)  도리어(데비) 도시락 그릇(밥곽) 도시락(곽밥)  독수리(닥수리,독소리,독술)  동그라미(동그랑이)  동생(애끼)  동침하다(동품하다)  돼지(뒈지,도티)  된장(떼장, )  두루마기(두루메기,둘메기,제마기)  두부(드비)  들락날락하다(풍개치다)  들리다(듣기다)  들석거리다(들멍하다)  등골뼈(염주뼈)  등마루(등말기)  등허리(등떼기)  딩굴다(궁글다)  딱따구리(가막두거리,가막조가리,닥닥새,뚝뚝새) 딸꾹질(피께데기,패기,패끼딸각질)  때문에(까타나)  땔나무(부수께나무,땔낭기)  떠벌이(말단지)  떡거머리 총각(덜머리총각)  뚜껑(다께,덕개,두벙)  뚜껑(뚜배)  마른오징어(낙지)  마른오징어(낙지)  마사다(마이다)  마음(맘세,맴,마암)  막내(막뒤)  만두(벤세)  말더듬이(더듬뱅이,더투아리,말더터리,말먹이,말버버리) 말라갱이(마른광이)  말썽 부리다(마새피다)  말투(말튀)  망아지(매지,메아지)  매끄럽다(매까지다)  매우(되게,되쎄우,쎄게)  머리(대강이,골)  머리를쓰다(골돌리다) 머리를 옆으로 돌리세요(골으 옆파리로 돌리기시요)  먹을것(머거리)  멍청이(멍쳉이)  메기(메사구)  메주(메지)  메추리(모치래기)  메케하다(웨하다)  멥쌀(닙쌀)  멱살(먹대기,멱투시,멕사리)  면구스럽다(민주스럽다)  모래(몰개)  목(모각지,모개지,모강지,목정이,목덜메,목대,)  못(모다구,모다귀)  몽둥이(몽딩이,몽치)  무(노배,무꾸) 묵직하다(무쭐하다) 문지르다(문질구다) 미닫이문(밀장지)  무시무시하다(왜왜하다)  무엇(무시기)  무엇합니까?(뭐시함둥?무스거함등? 무슥함까?)  무지근하다(무추룩하다)  무턱대고(덧대구)  물어징어(오중어)  미끈하다(매낀하다)  미워하다(미버하다)  미주알고주알(미주리고주리) 미지근하다(매시시하다)  민들레(둥글레,무슨들레,문들레)  민망스럽다(민주스럽다)  밀집모자(초모)  밑천(껑터리)  바둑(바독,바돌)  바람둥이(바람군)  반찬(질게,찬새,해미,햄,햄새)  발바닥(발바당)  방귀뀌다(똥뀌다)  배(배때기)  배꼽(배꾸녕,배꾸멍,배꾸비,배꿉,배뿍)  배추(배차,배채)  버르장머리(버르장물,버르재 ,버릇대기)  번창하다(번신하다)  베낭(질빵,짐뱅이,메끈)  복잡하다(시끄럽다)  봉숭아(봉새)  부끄러워하다(부끄러버하다)  부뚜막(부막,부수께)  부서지다(마사지다) 부엌(정지)  불티(불방울)  부추(염지)  불똥뛴다(불벼룩뛴다) 불끄세요(불죽이시오)  붉으락푸르랅(푸르락붉으락)  비누(비눌,비늘)  비탈밭(여부락밭,다락밭)  빈털터리(빈깍지)  빨래(서답)  빨래하다(서답질하다)  뿌리(뿌렁지,뿌럭지)  사기치다(얼리다)  사나이(스나이,선스나,스나)  사랑하다(곱아하다)  사위(싸웨)  사팔뜨기(힐뚝눈이,새뜨기)  산봉우리(뽕오라지)  삽(광쵸)  삿대질(상앗대질,시굿대질,사북대질,산대질)  상추(불구)  서운하다(서븐하다)  서케(세,써개)  설거지(거두매,서름질,식가시질,자시)  설사(배쏘개질)  성냥(비지께)  성질(소갈딱지,소갈지)  성함(명함)  세수대야(세시소래)  소경(눈먹재,세경)  소꼽장난(바꿈질)  속눈섭(눈꺼부지,살눈써피)  속옷(속입성)  손목(손목동아리)  솜 틀집(소캐마선집) 솜옷(소캐우티)  송곳니(앙니)  송사리(눈젱이,뾰돌치)  송아지(쇄지,새지)  송장(영장)  송편(조개떡)  수두룩하다(푸술하다)  수렁논(굴개논)  수레(술기)  수수(고량,밥수끼,밥쉬)  수준(수평)  술렁거리다(구성대다)  숨통(숨대)  숯(수껑)  쉽다(흥겁다)  시누이(스느비)  시동생(스애끼)  시범을 보이다.(뽄때,뽄새를 보이자)  시찰(고찰)  시찰(고찰)  식은땀(헛땀)  식충이(쉬티)  실눈뜨다(어섯눈뜨다)  싫증나다(애싹하다)  심다(숭구다)  심부름(시기막질)  쌀밥(이팝)  썩좋다(맵짜하다)  썰매(빙고,쪽발구)  쓰레기(짓거부레기쓰레미)  씨앗(씨가시)  아낙네(안까이,에미네)  아내(안까이=암개란 말에서 유래)  아니(앙이)아저씨(아재비)  아니꼽다(티껍다)  아주머니(아주마이)  아지랑이(아스랭이,아지래)  아직(상구,안직)  아침(아적)  안절부절하다(매쌈질하다)  알려주다(알귀아주다,알쾌주다)  알리다(알구다,알키다)  암내내다(상내내다)  암말(피매,피매말)  암소(암세)  암캐(앙캐)  암코양이(암쾌)  암퇘지(피게)  애꾸눈(눈싸퉁이,외통장이,외눈배기)  얌전하다(야굼하다)  양지쪽(남석쪽,낭짝)  어금니(검니,속니)  어느근방입니까(어디모템둥)  어디(어드매,어디매)  어떻게(어드렇케,어케)  어렵다(애나다,애빠지다,애떨어지다)  어른(자라이)  어린아이(어르나,간나)  어머니(오마니,어마이,오마이)  어설프다(어살궂다)  어이없다(엉이없다)  어째서(어드래서)  언덕(더거지,채뚝,)  얼떨떨하다(얼뜨르르하다)  엄벙덤벙(엄비덤비,엄베덤베)  업종,품목(항목)  엉덩이(엉더리)  엉망진창(진창만창)  엎치락뒤치락(업박잡박)  여관(려관,초대소)  여자아이(간나)  역사(력사)  역성들다(역세들다)  열매(여르매)  열쇠(열때)  염려하시마시오(시름노시라요)  염소(넘소,맴소,염쇠,염세)  염통(염티,념통)  엿듣다(여서듣다)  엿보다(여수다)  예쁘다(곱다)  오디(뽕여르매)  오붓하다(오토사하다)  오빠(오라바니,오라바이,오라브지)  오죽,여간(여사,오작)  옥수수(옥시기,강내)  옥신각신(올씬갈씬)  올가미(옥노)  올챙이(올채)  올케(오리미,오레미,올찌세미)  옷(닙성,우티)  옷(입성)  옷감(옷갬,우티감)  완전히(완우루)  외상(에상,외재,외통눈)  왼손잡이(온손재기,온재기)  요사이(요지간,이새,이어간)  욕설(욕새)  용돈(소비돈,용채)  우락부락(우리부리)  우선(위선)  우습다(우쁘다,우뿌다)  워낙(워낭,워느니)  원수(원쑤,웬쑤)  위쪽(우쪽)  위태,위험하다(삽하다)  의치(사기이)  이(니,니빨)  이모 또는 고모(아제)  이상하다(벨랏다,재별스럽다,페럽다)  이야기(니야기,내기)  이웃(니웃)  이튼날(이듬날)  일가집(지반집)  일곱(닐곱,닐구)  일깨우가(일쿠다)  일부러(제네니,우덩)  일찌감치(일쯔가니)  일흔(니른)  임금(님금)  임무(이무)  입(주두리,주둥아리)  입술(입녁)  잎담배(잎초)  자물쇠(쇠때)  작두(디디개)  잔소리(번다소리)  잔치(잔채)  잠투정(잠투재) 잠꾸러기(잠퉁이,잠페기,잠꾸데기,잠꿀게)  장가들다(서방가다)  장딴지(다리배)  장모(가시애미)  장인(가시애비)  장점(웃점)  재(불껌)  재봉틀(마선,자방침)  저녁(지악,저낙,나죄)  적당치않다(맞갖지않다,예전챙이다.) 바보(머저리,미쌔기,민퉁이,싸구쟁이)  전혀,도무지(막바이,미내,미두리,쇠퉁)  절뚝발이(절덩태)  절벽(청벽)  제비(지비)  조마조마하다(오시랍다,조파심)  조무래기(조물통이)  졸음(자부람)  좀처럼(조매,조무래)  종달새(종지리,예조리)  종아리(졸가리,종따리)  좋아합니까(반가라합네까)  주눅들다(중녹들다)  주름살(쭈그럭살)  주인(님재)  주전자(쥐전재)  죽도록...하다(썩어지게 하다)  지긋지긋하다(지기럽다)  지도히(독스레)  지붕(지벙)  진눈깨비(종구디,진갈비,진태)  진드기(진둥개)  집게손가락(지가락)  징(다갈,철,증)  짚신(머커리,초신)  쭈근깨(꺼문깨)  찜질(띰질)  찧다(쯧다)  차라리(찰코)  차례차례(책책)  채신없다(새시없다)  처가집(가시집,가스집)  처녀(에미나,색아)  천천히(나랑,츤츤히)  철사(쇠줄)  철죽꽃(철지꽃,철뚝,첩시꽃)  초가집(초집,초개집)  총각(총개기)  춥다(추비다,치비다)  친구(동무,동뮈)  칡(츨기)  코딱지(코찐재리)  콩나물(질금)  콩팥(오줌푸깨)  큰아버지(맏아바이)  큰어머니(맏아매) 특별히,매우(별로)  탯줄(배꼽줄,태끈) 턱(턱수가리,택사가리,택쉬)  톱(쾌마우재)  통나무(무투,무티)  퇴자(퇴찌기)  튀김(태금)  트럭(뜨락또)  특출하다(돌출하다)  팽이(골뱅이,골팽)  포대기(용,누데기)  표범(아롱범)  푸성기(푸새)  푼수없는사람(미사리,민충이,뻐새,언뒤)  풀무(풍구)  품삯(일품,공자)  핑계(피탈)  하루(할날)  하루종일(온할날)  하세요(...하기쇼)  하필(하상)  학교(핵꼬) 할 일없다(하릴없다)  할까요?(하람까?)  할머니(아매,큰마니,할마이)  할아버지(할아바이, 아바이)  해바라기(해자부리,해가우리)  행주(상걸래)  허드레옷(막레비옷)  허리띠(허리빠)  허수아비(허재비)  허파(부숭게,허페)  허풍선이(풍쟁이)  혀(세)  형님(헹님이)  호주머니(거루마니,옆차개,거르마)  호주머니(거름마)  홀래붙이다(새붙이다)  홀아비(호불애비,홀아배)  홀어미(가비,하불애미호불애미,과비)  홍역(홍되기,지구실,호역)  홑옷(하부옷) 화를내다(벨내다)  화장실(통숫간)  화장지(밑씻게,밑다께)  황소(둥글쇠) 휘파람(시파람)  흙(할기)  흥청망청(흥승생승)  흰자위(흰조시,흰젓)  힘없다(맥없다,맥짝하다)
68    방언, 그 재미... 댓글:  조회:6232  추천:2  2015-02-08
   제주도방언   ~서예 ​ 예)저옵서예(어서오세요), 하영봅서예(많이 보세요), 강옵서예(갔다 오세요), 쉬영갑서예(쉬어 가세요), 왕갈랑갑서.(와서 나누어 가지고 가세요.), 경허지 맙서.(그렇게 ​ 하지 마세요), 차탕갑서.(차를 타고 가세요.) ​ ~시냐 ​ 예)이시냐(있느냐), 햄시냐(하고 있느냐), 와시냐(왔느냐), 놀암시냐(놀고 있느냐?), 감시냐(가느냐?), 오라시냐(오라고 하느냐?), 가시냐(갔느냐?) ​ ~쑤과 ​ 예)좋쑤과(좋습니까), 있수꽈(있습니까), ​ ~쿠과 ​ 예)침대방 허쿠과(침대방하시겠습니까), 온돌방 허쿠과(온돌방하시겠습니까), ​ ~양 ​ 예)여기서 서울더레 해집주양?(여기서 서울에 전화할 수 있지요?), 제주엔 참 종거 만쑤다양,(제주엔 참 좋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저녁에랑 전복죽 쒀줍서양.(저녁식사때 ​ 는 전복죽을 쑤어주세요.), 다시 오쿠다 양.(다시 오겠습니다.), 영 갑서양.(이쪽으로 가세요.) ​ ~꽈 ​ 예)얼마나 사쿠꽈?(얼마나 사겠습니까?), 이거 얼마우꽈.(이거 얼마입니까.)   -라 : -해라 ​ -(어)아 : -해 ​ -밑서 : -세요 ​ -십서 : -세요     제주도 방언의 명령법 어미 체계는 표준어와 매우 다르다. 표준어에 쓰이는 대표적 어미 형태인 "-아라~어라"가 사용되지만 의의와 기능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제주도 방언 ​ 의 명령법 어미는 하대, 평대, 존대의 세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구체적인 형태는 '-라'와 '-아~-어', '-밑서','-십서'이다. '-라'는 하대의 어말어미이다. 어간에 직접 연결되 ​ 기도 하고 '-어시라/아시라','엄시라/암시라'처럼 선어말 어미와 결합된 형으로도 쓰인다. '-어시-~/-아시-'와 '-엄시-~/-암시-'는 동작상을 표현한다. 이들은 상호 대립되 ​ 는 의미 자질을 갖는다. 앞 것은 '완료 종속상'이고 뒤에 것은 '미완료 존속상'이다. 동작상이 체계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제주도 방언에서만 보이는 어미활용의 특징이다. 표 ​ 준어의 대표적 명령법 어미 형태인 '-아라','-어라','-여라'는 표준어에서와는 다른 기능으로 사용된다. ​  '-아/어/여-'는 회상법 선어말 어미이고, '-라'는 평서법 어미이다. 평대의 명령법 어미는 '-아~-어'이다. '-아~-어'는 여러 서법에 두루 쓰이는 추상적인 언어형식이다. 반 ​ 말체 어미 '-아~-어'가 구체적인 서법이 되는 데는 그 위에 얹히는 억양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존대 대상에게 하는 청원 명령에는 '-밑서'를 쓴다. '밑'은 상대자에게 존대의 ​ 자질을 부여하고, '-서'가청원 명령을 표시한다. 나이나 사회적 지위 차이가 많은 경우에 쓰이지만, 별 차이가 없는 경우에 쓰이기도 한다. 존대 명령법 어미에는 '-십서'도 ​ 있다. '-십서'는 '-밑서'에 '-시-'가 결합된 것으로 이중 존대법의 형태이다. ​ ​주체존대의 '-시-'는 제주도 원래의 방언에는 없었으나 표준어의 영향으로 사용된 것이다. 또한 용언의 원형, 시상, 변칙 용언, 활용어미에 있어서의 'ㄴ'과 'ㅇ' 등에 대하여 ​ 표준어 및 고어와 대비하면서 고찰하였다. 그 결과 제주 방언의 활용어미 가운데 상당수가 고어형 그대로 보존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 고어형 그대로인 것과 고어형과 관련되는 게 드러난다는 점이 주목된다. 또한, 제주 방언은 용언의 기본형이 표준어와 색다르다는 점이 확인된다. 제주 방언은 그 서술형 어 ​ 미 및 의미형 어미 역시 독특한 것이 드러나며, 변칙 용언 또한 표준어와는 차이가 있다. 시상보조어간(선어말어미) 또한 제주 방언에서는 유다른 모습을 드러내며, 종결어 ​ 미나 연결어미 밑에 맨 나중 발음이 'ㄴ' 혹은 'ㅇ'으로 된 경우는 흥미로운 과제를 던져 진다.   ​ 사람 제주 사투리 표준어 제주사투리 표준어 아방 아버지 아즈방 아저씨,아주버니 어멍 어머니 아즈망 아주머니 하르방 할아버지 오라방 오빠 할망 할머니 똘 딸   (친척) → 괸당(홀아비) → 홀아방(처녀) → 비바리   (남자) → 소나리(여자) → 지집아이   제주도 사투리로 가족,친척을 괸당이라는 말로 표현을 많이 합니다. ​ ◆ 아 방 : 아버지◆ 어 멍 : 어머니◆ 하르방 : 할아버지◆ 할 망 : 할머니◆ 다 슴 : 의붓◆ 다슴아덜 : 의붓아들◆ 다슴똘 : 다슴딸◆ 씨아방 : ​ 시아버지◆ 씨어멍 : 시어머니◆ 씨아주방 : 남편의 형제◆ 족은아덜 : 작은 아들 ​ ◆ 아덜      :  아들 ​ ◆ 메누리 : 며누리◆ 가시아방 : 장인◆ 가시어멍 : 장모◆ 동 세 : 동서◆ 예펜(예청) : 여편네◆ 소나이 : 사나이◆ 제집아이 : 여자아이◆ 비바 ​ 리 : 처녀◆ 촐람생이 : 남의 말에 잘 끼어드는 성급한 사람◆ 두가시 : 부부◆ 삼촌 조케 : 삼촌조카(삼촌과 조카)◆ 두린아이 : 어린아이◆ 괜당 ​ (방상) : 친족◆ 사농바치 : 사냥꾼◆ 꿩바치 : 꿩사냥꾼◆ 침바치 : 침을 넣는 사람 ​ 지지빠이, 비바리-처녀삼춘-삼촌아시-동생 ​ 가시아방-장인어른,장인가시어멍-장모님,장모셋아방,큰아버지-아버지의 큰형 ​ 괸당 : 친척아저씨 : 아주방아주머니 : 아주망 ​ 말젯놈 : 세쨋놈   - 할아버지(하르방), 할머니(할망), 아버지(아방), 어머니(어멍), 오빠(오라방), 형(성님), 누나(누나), 언니(성), 동생(아시) ​ - 남자: 첫째(큰놈), 둘째(셋놈), 셋째(말잿놈), 넷째(작은놈) ​ - 여자: 첫째(큰년), 둘째(셋년), 셋째(말잿년), 넷째(작은년) ​ - 삼촌(삼촌), 고모(고모), 이모(이모), 조카(조캐), 동서(동세), 장인(가시아방), 장모(가시어멍), 시아버지(씨아방), 시어머니(씨어멍) ​ - 부부(두가시), 남편의 형제(씨아주방), 홀아비(홀아방), 과부(홀어멍), 아주머니(아지망, 아주망), 남자(소나이), 여자(지지빠이), 처녀(비바리)   그리고 제주도에서는 '삼촌' 이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되는데, 이 호칭은 친척삼촌에게도 사용하지만 가까운 이웃들에게 사용하는데, 그 범위가 정해져있지 않고 남녀 관계없   이 전부 '삼촌'이라고 부릅니다.가령 님이 제주도에서 살면서 이웃집에 놀러 갈일 생긴다면 이웃집에 들어가는길에 그곳의 할머니를 만나면 "삼촌 안녕하세요" 그곳의 아버   지를 만나도 "삼촌 안녕하세요." 그곳의 어머니를 비롯한 나이가 연배인 다른사람들에게..."삼촌 안녕하세요....ㅡ.ㅡ;"이렇게 인사를 한다고 생각을 하면 되겠죠...^^     동물,식물 제주사투리 표준어 제주사투리 표준어 송애기 송아지 감저 고구마 몽생이 망아지 지실 감자 강생이 강아지 모물 메밀 도세기 돼지 어욱 억새 빙애기 병아리 태역 잔디 독세기 달걀 재배낭 구실잣밤나무 노리 노루 굴묵낭 느티나무 고냉이 고양이 가라지 강아지풀 꿩마농 산달래 숙대낭 삼나무 생이 새 폭낭 팽나무 ​ [ 동물 ] ​ 방언:표준어 ​ 고냥 독생이 : 굴뚝새 ​ 놀개기 : 날개 ​ 박생이 : 동박새 ​ 독(독새기) : 닭 ​ 고냉이 : 고양이 ​ 송애기 : 송아지 ​ 몽생이 : 망아지 ​ 돗(도새기) : 돼지 ​ 밭갈쇠 : 밭을 가는 소 ​ 부랭이 : 숫소 ​ 염송애기 : 염소 ​ 강생이 : 강아지 ​ 중이 : 쥐 ​ 갓돔 : 도미 ​ 겡이 : 게 ​ 구젱기 : 소라 ​ 물꾸럭 : 문어 게염지 : 개미 ​ 멩마구리 : 맹꽁이 ​ 베랭이 : 버러지 ​ 베염 : 뱀 ​ 빙애기 : 병아리 ​ 생이 : 새 ​ 나람쥐 : 다람쥐 ​ 쥉이 : 쥐 ​ 여호 : 여우 ​ 노리 : 노루 ​ 빙아리 : 병아리 ​ 쉐 : 소 ​ 쉐막 : 외양간 ​ 다세기 : 돼지 ​ 두테비 : 두꺼비 ​ 골개비 : 개구리 ​ 젱비리 : 올챙이 ​     [식물]   표준어-방언 ​ 깻잎- 유입                      ​ 나물-노물 ​ 느티나물-굴묵상 ​ 부추-새우리 ​ 잔디-태역 ​ 강아지풀-가라지 ​ 상추-부루 ​ 대나무-대낭 ​ 감나무-감낭 ​ 팽나무-퐁낭 ​ 녹두-녹디 ​ 잡초-검질 ​ 감자-지실 ​ 고구마-감저 ​ 달리-꿩마농 ​ 메밀-모물 ​ 산국수-도채비고장   ​ 삼나무-숙대낭 ​ 쑥-숙 ​ 억새 -어욱 ​ 양파-다마내기 ​ 열무- 초마기 열무김치(초마기 김치)   ​ ​ 제주도방언-곰세마리     동요(제주도 방언) ​ 곰 쉬모리가 혼집에 있어 ​ 아방곰 어멍곰 아기곰 ​ 아방곰은 뽕뽕해 ​ 어멍곰은 쭌쭌해 ​ 아기곰은 잘도 아꼬아 ​ 으쓱 으쓱 잘 혼다.     제주도방언-음식   ◆ 걸명 : 제사 끝에 잡귀에 주기 위하여 음식을 조금씩 뗀 것◆ 고적 : 장례 때 일가에서 부조로 드리는 떡이나 쌀◆ 돌래떡 : 메밀가루나 쌀가루 등으로 만 ​ 든 둥글고 납작한 떡(상가에서 만들어 역군을 대접하였다)◆ 둠비 : 두부◆ 비제기 : 비지◆ 누넹이 : 누룽이, 눌은 밥◆ 마농지 : 마늘 장아찌◆ 모몰죽 : 메 ​ 밀죽(*모몰범벅)◆ 반지기 : 쌀과 잡곡으로 반반 섞은 밥◆ 세미떡 : 만두(속에 팥이나 무채 등을 넣어 만든 반달 모양의 떡)◆ 송애기떡 : 고사떡, 말똥 모양 ​ 의 떡◆ 쉰다리 : 밥을 발효시켜 만든 단술의 일종◆ 오매기 : 술을 빚기 위하여 자조로 만든 떡◆ 은절미 : 메밀로 만든 네모난 떡◆ 조펌벅 : 조로 만든 범 ​ 벅(*조축· 조침떡· 조팝)◆ 고비리 : 증식(밤에 중간에 먹는 음식)◆ 체 : 생채소를 간 맞추어 만든 것◆ 양 석 : 양식◆ 곤 밥 : 쌀밥◆ 짐 치 : 김치◆ 촐 ​ 래 : 반찬◆ 송 키 : 채소◆ 바릇괴기 : 바닷고기◆ 식개태물 : 제사음식◆ 지 름 : 기름◆ 상외떡 : 밀가루로 만든 빵◆ 곤 떡 : 쌀떡◆ 친 떡 : 친떡(시루떡) ​ ◆ 죄기떡 : 밀가루 검칠을 가루로 만든 떡◆ 전기떡(쟁기떡) : 메밀가루로 만든 떡(빙떡)◆ 제 펜 : 쌀가루로 만든 찐떡◆ 솔 펜 : 쌀가루로 만든 반달같은 ​ 떡◆ 절 밴 : 쌀가루로 만든 원형의 떡◆ 우 찍 : 작은 원형 떡◆ 중 괘 : 네모난 지진떡◆ 약 괘 : 직사각형 지진떡◆ 돗괴기 : 돼지고기 ​ ​ ▣제주도 방언으로 음식이름   고구마 - 감저 ​  감자 - 지실   조배기 : 수제비개역 : 미숫가루것 : 동물먹이(예:도세기 것)괴기 : 고기바당괴기 : 바닷고기(생선)돗괴기 : 돼지고기쇠괴기 : 쇠고기돗괴기(도세기괴기): 돼지고기곤떡 : 쌀로만든떡곤밥 : 흰쌀로 지은밥독세끼 : 달걀 몰괴기 : 말고기놈삐 : 무우대사니 김치 : 마늘장아찌마농 : 마늘 , 파모몰 조배기 : 메밀 수제비촐래 : 반찬촘지금 : 참기름짐치(짐끼) : 김치촙쏠 : 찹쌀조팝 : 좁쌀로 지은밥독괴기 : 닭고기 tip 문장 제 주 사투리 표 준 어 혼저 옵서. 제주도 사투리로 말 호난 어서 오십시오.  제주도 사투리로 말 하니까. 무신 거옌 고람 신디 몰르쿠게? 뭐라고 말하는지 모르겠지요? 게메 마씀, 귀 눈이 왁왁하우다. 글세 말입니다. 귀와 눈이 캄캄합니다. 경해도 고만히 생각호멍 들으민 조금씩 알아집니다. 그래도 가만히 생각하며 들어면 조금씩 알 게 됩니다. 제주도 사투리 촘말로 귀하고 아름다운 보물이우다. 제주도 사투리 정말로 귀하고 아름다운 보물입니다. 펜안 하우꽈? 제주도엔 오난 어떵 하우꽈? 편안(안녕)하십니까? 제주도에 오니 어떠하십니까. 촘말로 좋수다. 공기도 맑고, 정말로 좋습니다. 공기도 맑고, 산이영 바당이영 몬딱 좋은게 마씀. 산이랑 바다랑 모두가 좋습니다. 서울에 갈 때랑 하영 담앙 갑서. 서울에 갈 때는 많이 담아서 가십시오. 게메, 양. 경 해시민 얼마나 좋코 마씀? 그러게 말입니다. 그렇게 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기, 물허벅 정 가는 거, 비바리덜 아니꽈? 저기, 물허벅(바구니)지고 가는 거, 처녀들 아닙니까? 맞수다. 비바리도 있고, 넹바리도 있수다. 맞습니다. 처녀도 있고, 시집 간 여자도 있습니다. 비바리덜 곱들락 호고 놀씬하우다 양 ! 처녀들도 곱고 날씬하군요 ! 안아 보곡 소랑호젠. 안아보고 사랑할려고. 호꼼만 이십서게. 조금만 계십시오. 몽케지 마랑 혼저 오라게. 꾸물대지 말고 어서 오너라. 이 조끄뜨레 오라게. 여기 가까이(옆에) 오너라. 무사 조끄뜨레만 오랜 햄수꽈? 왜 가까이(옆에)만 오라고 하십니까? 호꼼이라도 고치만 있구정 호연. 조금이라도 같이만 잇고 싶어서. 놈덜 우습니다. 남들이 웃습니다. 어떵 호느냐? 소랑에는 부치름이 엇나. 어떠하느냐? 사랑네는 부끄러움이 없단다. 조끄뜨레 하기엔 하영멍 당신. 가까이 하기엔 머나먼 당신. 혼저 왕 먹읍서. 어서 와서 먹으십시오. 맨도롱 하우꽈? 따뜻합니까? ff혼 게 먹기 똑 좋았수다. 따끈따끈한 것이 먹기에 꼭 좋았습니다. 맨도롱 홀 때 호로록 들여 싸붑서. 따뜻할 때 후루룩 마셔 버리십시오. 과랑 과랑혼 벳디 쨍쨍한 해볕속에 일 호젠 호난 속았수다. 일 하려고 하니 수고 했습니다. 속을 거 있수과? 호꼼, c은 났수다만, 수고 할 거 있습니까? 조금,땀은 났습니다만, 안트레 들어 왕, 저녁 먹엉 갑서. 안으로 들어 오셔서, 저녁식사 하고 가십시오.   제 주 사투리 표  준  어 혼저옵서. 빨리오세요 하영봅서. 많이보세요 강옵서. 갔다오세요 쉬영갑서. 쉬어서 가세요 이시냐. 있느냐 햄시냐. 하고있느냐 와시냐. 왔느냐 검절매레 안갈꺼과. 김매러 안가실겁니까. 좋쑤과. 좋습니까. 이쑤과. 있습니까. 알았수다. 알았습니다 침대방 허쿠과. 온돌방 쓰쿠과. 침대방 하겠어요? 온돌방 쓰겠어요. 여기서 서울더레 해집주양? 여기서 서울에 전화할 수 있지요? 제주엔 참 종거 만쑤다양, 제주엔 참 좋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저녁에랑 전복죽 쒀줍서양. 저녁식사때는 전복죽을 쑤어주세요.   제주사투리의 특징     제주의 사투리는 타지방 사투리와달리 일반인들이 이해하기가 힘들다. 말이 짧고, 대부분 줄임말로 되어있으며, 어미에 ‘시’가 많이 붙고 조선시대 아래아(·)가 발음상에 남아 있어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게 사실이다. 그러나 제주인들은 과거로부터 조상들의 삶에서 묻어온 사투리들을 생활속 깊숙이 간직하며 살아왔으며, 현재까지도 이러한 사투리들이 사용되어 제주도만의 아름다운 문화를 이어오고 있다.       단어별 사투리       동물명칭 송애기 >> 송아지 고냉이 >> 고양이 도새기 >> 돼지 강생이 >> 강아지 중이 >> 쥐 구젱기 >> 소라 골개비 >> 개구리 생이 >> 새 베랭이 >> 벌레 겡이 >> 게 몽생이 >> 망아지 물꾸럭 >> 문어     음식 곤밥 >> 쌀밥 돗괴기 >> 돼지고기 쇠괴기 >> 소고기 놈삐 >> 무우 마농 >> 마늘       호칭 소나이 >> 남자 지집아이 >> 여자 하르방 >> 할아버지 할망 >> 할머니 아방 >> 아버지 괸당 >> 친척 홀아방 >> 홀아비 좀녀 >> 해녀 비바리 >> 처녀 넹바리 >> 시집간처녀 작산거 >> 어른 정도의사람       신체 베야지 >> 배 대망생이 >> 머리 등땡이 >> 등 또꼬망 >> 똥구멍 모감지 >> 멱살 상판 >> 얼굴 구뚱배기 >> 귀쪽 뺨 임댕이 >> 이마 정강이 >> 종아리 야게기 >> 목 저깽이 >> 겨드랑이 허운데기 >> 머리카락     신체 펜중룽히 >> 태연히 오고생이 >> 고스란히 역불로 >> 일부러 게무로 >> 설마 금착 >> 놀라다 엄블랑호다 >> 엄청나다 느랏느랏 >> 느릿 느릿 맬록 >> 매롱! 몬딱 >> 모두 왁왁호다 >> 캄캄하다 조꼴락호다 >> 조그맣다 좀질다 >> 가늘다 패랍다 >> 까다롭다 간세 >> 게으름 봉끄랑 >> 빵빵하다 데싸지다 >> 넘어지다 고끼다 >> 숨막히다 들럭퀴다 >> 날 뛰다 조들다 >> 걱정하다 용심내다 >> 화내다 속솜허다 >> 잠잠하다 소도리호다 >> 소문내다 요망지다 >> 똑똑하다 갈라지다 >> 헤어지다 멘도롱하다 >> 뜨겁지 않고 적당하다 걸러지다 >> 거꾸러지다 괄락괄락 >> 물을 한번에 많이 마시다 어중구랑호다 >> 우유부단하다              대화       ㆍ어떵 살아 점쑤꽈? 펜안 햇수꽈? (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편안하십니까?)     ㆍ이거 얼마꽈? (이거 얼마입니까?)     ㆍ칼호텔이 어디 이쑤꽈? (칼호텔이 어디 있습니까?)     ㆍ와리지 말앙, 촌촌이 고르라 보게. ( 너무 서두르지 말고서, 천천히 말해 보아라.)     ㆍ무싱거 호미꽈? 도르멍 옵서. ( 뭐 하십니까? 뛰어서(빨리) 오십시오.)     ㆍ무사경 몽캐미꽈? 혼저 옵서게. (뭘 그리 늦장 부리십니까? 빨리 오십시오.)     ㆍ무사 경 다울렴디? (왜 그렇게 재촉하느냐?)     ㆍ기시린 도새기가 돌아맨 도야지 나무란다. ( 그을린 돼지가 달아맨 돼지 나무란다.)     ㆍ둥그리멍 키웁서. 경 해사 실호게 큽니다. ( 고생시키면서 키우세요. 그래야 튼튼하게 자랍니다.)     ㆍ혼저 왕 먹읍서. 맨도롱 했수과? 혼게 먹기 좋았수다. 맨도롱 홀 때 호로록 들여 싸붑서.     (어서 와서 먹으십시오. 따뜻합니까? 따끈따끈한 것이 먹기에 꼭 좋았습니다. 따뜻할 때 후루룩 마셔 버리십시오.)   생활도구   구덕 : 바구니고량착 : 대로 만든 채롱낭푼이 : 양푼, 그릇대배기 : 물긷는 그릇덩두룽 마깨 : 짚 두리리게물 구루마 : 마차 바농 : 바늘박새기 : 바가지숟구락 : 수저제끄락 : 젓갈주멩기 : 주머니허벅 : 물을 길어나르는 통 인사말   제주 사투리 표준어 혼저옵서 어서오세요 옵데강,혼저오십서. 오셨습니까,어서오십시오. 왕 봥 갑서 와서 보고 가세요 혼저 혼저, 재게 재게 옵서 어서 어서, 빨리빨리 오세요 도르멍 도르멍 옵서 뛰면서 오세요 놀멍 놀멍 봅서 천천히 보세요 또시 꼭 옵서양 다시 꼭 오세요 제 주 사투리 표 준 어 혼저 옵서. 제주도 사투리로 말 호난 어서 오십시오.  제주도 사투리로 말 하니까. 무신 거옌 고람 신디 몰르쿠게? 뭐라고 말하는지 모르겠지요? 게메 마씀, 귀 눈이 왁왁하우다. 글세 말입니다. 귀와 눈이 캄캄합니다. 경해도 고만히 생각호멍 들으민 조금씩 알아집니다. 그래도 가만히 생각하며 들어면 조금씩 알 게 됩니다. 제주도 사투리 촘말로 귀하고 아름다운 보물이우다. 제주도 사투리 정말로 귀하고 아름다운 보물입니다. 펜안 하우꽈? 제주도엔 오난 어떵 하우꽈? 편안(안녕)하십니까? 제주도에 오니 어떠하십니까. 촘말로 좋수다. 공기도 맑고, 정말로 좋습니다. 공기도 맑고, 산이영 바당이영 몬딱 좋은게 마씀. 산이랑 바다랑 모두가 좋습니다. 서울에 갈 때랑 하영 담앙 갑서. 서울에 갈 때는 많이 담아서 가십시오. 게메, 양. 경 해시민 얼마나 좋코 마씀? 그러게 말입니다. 그렇게 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기, 물허벅 정 가는 거, 비바리덜 아니꽈? 저기, 물허벅(바구니)지고 가는 거, 처녀들 아닙니까? 맞수다. 비바리도 있고, 넹바리도 있수다. 맞습니다. 처녀도 있고, 시집 간 여자도 있습니다. 비바리덜 곱들락 호고 놀씬하우다 양 ! 처녀들도 곱고 날씬하군요 ! 안아 보곡 소랑호젠. 안아보고 사랑할려고. 호꼼만 이십서게. 조금만 계십시오. 몽케지 마랑 혼저 오라게. 꾸물대지 말고 어서 오너라. 이 조끄뜨레 오라게. 여기 가까이(옆에) 오너라. 무사 조끄뜨레만 오랜 햄수꽈? 왜 가까이(옆에)만 오라고 하십니까? 호꼼이라도 고치만 있구정 호연. 조금이라도 같이만 잇고 싶어서. 놈덜 우습니다. 남들이 웃습니다. 어떵 호느냐? 소랑에는 부치름이 엇나. 어떠하느냐? 사랑네는 부끄러움이 없단다. 조끄뜨레 하기엔 하영멍 당신. 가까이 하기엔 머나먼 당신. 혼저 왕 먹읍서. 어서 와서 먹으십시오. 맨도롱 하우꽈? 따뜻합니까? 똣똣혼 게 먹기 똑 좋았수다. 따끈따끈한 것이 먹기에 꼭 좋았습니다. 맨도롱 홀 때 호로록 들여 싸붑서. 따뜻할 때 후루룩 마셔 버리십시오. 과랑 과랑혼 벳디 쨍쨍한 해볕속에 일 호젠 호난 속았수다. 일 하려고 하니 수고 했습니다. 속을 거 있수과? 호꼼, 똠은 났수다만, 수고 할 거 있습니까? 조금,땀은 났습니다만, 안트레 들어 왕, 저녁 먹엉 갑서. 안으로 들어 오셔서, 저녁식사 하고 가십시오. ​ ​ 방언                   표준어 하영봅서. 많이보세요 강옵서. 갔다오세요 쉬영갑서. 쉬어서 가세요 이시냐. 있느냐 햄시냐. 하고있느냐 와시냐. 왔느냐 검절매레 안갈꺼과. 김매러 안가실겁니까. 좋쑤과. 좋습니까. 이쑤과. 있습니까. 알았수다. 알았습니다 침대방 허쿠과. 온돌방 쓰쿠과. 침대방 하겠어요? 온돌방 쓰겠어요. 여기서 서울더레 해집주양? 여기서 서울에 전화할 수 있지요? 제주엔 참 종거 만쑤다양, 제주엔 참 좋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저녁에랑 전복죽 쒀줍서양. 저녁식사때는 전복죽을 쑤어주세요. 어디서 옵데가? 어디서 오셨습니까. 날봅서. 있쑤과. 여보세요. 계십니까? 예. 어서 옵써. 예 어서 오십시요. 얼마나 사쿠꽈. 얼마나 사겠습니까. 많이팝서 다시 오쿠다 양. 많이 파십시오, 다시 오겠습니다. 영 갑서양. 이쪽으로 가십시요. 이거 얼마우꽈. 이거 얼마입니까. 독새기, 놈삐, 콥데사니, 아방 달걀, 무우, 마늘, 아버지 어멍, 비바리 어머니, 처녀 왕갈랑갑서. 와서 나누어 가지고 가세요. 경허지 맙서. 그렇게 하지 마세요 차탕갑서. 차를 타고 가세요. 놀암시냐 놀고 있느냐? 감시냐 가느냐? 오라시냐 오라고 하느냐? 가시냐 갔느냐? 저디 산 것 말이우꽈? 저기 서 있는 것 말입니까? 이거 얼마우꽈. 이거 얼마입니까. 어디 감수꽈 어디 가십니까? 낼 오쿠꽈 내일 오시겠습니까? 골암수꽈 말하십니까? 맛조수다게 맛있습니다. 어느제 오쿠과 언제 오시겠습니까? 놀당 갑서양 놀다가 가십시요. 도르멍 도르멍 가다 뛰면서 뛰어가다. 볕이 과랑과랑 허다 햇볕이 쨍쨍나다. 폭싹 속았수다 정말 고생햅습니다 [출처] 제주 방언 (사투리)모음|작성자 도구리 된장
67    방언詩 모음 댓글:  조회:8114  추천:0  2015-02-08
진달래꽃(함경도판) 내가 베기시러서 가게쓰믄 조요이 보내주겠슴다   에미나와 가치가게쓰믄 진달래꼬츠 마이따다 까라주겠슴다   꼬라지 베기싫게 가는 기레 짜악 쁘레노은 꼬츨 쫑발처럼 스으슬 발브며 갑소   내가 베기시러워서 가게쓰믄 가다 뻬대기 끄너져도 눈물 아이 흘리겠슴다 ------------------------------------------------------------ 김소월의 시 "진달래 꽃 버전"| ♥╋━ ♡°          김소월의 시 "진달래 꽃 버전"   사투리 버전    원본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딜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내 꼬라지가 비기 실타고  갈라카모    내사마 더러버서 암 말 안코  보내 주꾸마  영변에 약산  참꽃   항거석 따다 니 가는 길에  콱 뿌리 주꾸마  니 갈라카는 데마다  뿌리둔 그 꼬철   존나게 삐대발꼬 가뿌리라  내 꼬라지가 비기 시러  갈라 카몬    내사마~ 존나게 패 직이 삔다 케도  조또 울 끼다 ~마 퍼떡 가삐리라 꼴도 비기실타!     이제는 지가 역겨운 감유  가신다면유 어서 가세유  임자한테 드릴건 없구유  앞산의 벌건 진달래  뭉테기로 따다가 가시는 길에  깔아 드리지유  가시는 걸음 옮길 때마다  저는 잊으시유 미워하지는 마시구유  가슴 아프다가 말것지유 어쩌것시유  그렇게도 지가 보기가 사납던가유  섭섭혀도 어쩌것이유  지는 괜찮어유 울지 않겄시유  참말로 잘가유  지 가슴 무너지겼지만  어떡허것시유 잘 먹고  잘 살아바유 ~~ 나 바레기가 권닥사니 벗어정  가고정 헐 때랑  속 숭허영 오고셍이 보내주꾸다  영변의 약산 진달레꽃  가득 토당 가고정헌 질에  뿌려주쿠다  가고정헌 절음절음  놓인 그 꼿을  솔때기 볼드명 가시옵서게  나 바레기가 권닥사니 벗어정  가고정 헐 때민  죽었자 아니 눈물 흘리쿠다게   나가 싫다고야  싸게 가부더랑께  워메~나가 속상하겨.  주딩 딱 다물고 있을랑께  거시기 약산에 참꽃  허벌라게 따다가 마리시롱  가는 질가상에 뿌려줄라니께  가불라고 흘때마다  꼼치는 그 꽃을 살살 발고  가시랑께요 나가 골빼기 시러서  간다 혼담서  주딩이 꽉 물고 밥 못 쳐묵을  때까지 안 올랑께  신경 쓰덜말고 가부더랑께  겁나게 괜찬응께 워메 ~  참말고 괜찬아부러~요 잉  뭣땀시 고로코름 허야 써것쏘이?  나가 시방 거시기가 허벌나게    거시기 허요이~~    나보기기 기 매해서  들구버질 저는  입두 쩍 않구 고대루  보내드릴 기래요    영변에 약산 빈달배기 참꽃  한 보뎅이 따더 내재는    질라루 훌훌 뿌레 줄기레요    내 걸리는 발자구발자구  내꼰진 참꽃을  지져밟고 정이 살페 가시우야  나 보는 기 재수바리웁서  내 툴저는  뒈짐 뒈졌지 찔찔  짜잖을 기래요 보기실타 앙 쿠나~~고마 날라가삐리자~섬발!                웃드르 놈과 갯거시 년 (제주방언시)     웃드르 놈과 갯거시 년 숲속의 천사 웃드르 놈이 똠을 딱으며 우연내 대밭디 강 야물고 좀진 대낭을 베어 온다. 고망우럭을 잡젠 혼팔 크기의 철사를 쫄라 체비를 한다. 각시는 식은 밥에 물외와 촐래를 챙기고 둘이서 혼시간을 걸엉 갯거시 바당에 간다. 한창 우럭이랑 보들락, 어랭이를 낚다가 식은 밥에 우럭을 회쳐서 된장에 찍어 먹는다. 각시는 조끝디서 보말과 구쟁기를 줍는다. 저 멀리서 갯거시 년이 앙작쉬를 하고 있다. 빨리 나옵서게...... 빨리 나옵서게...... 웃드르 놈은 들은 척도 안한다. 갯거시 년들이 다구리로 바당에 들어왕 나가라고 악다구니질을 한다. 웃드르 놈은 이 바당이 니네 바당이냐 하니 갯거시 년들이 목에 심줄을 세우며 우리 바당이우다.... 나갑써.... 한다. 각시는 서방 조끝에 성 쌉지 말라고 홀목을 끈다. 웃드르 놈은 각시가 이끄는 데로 나가면서 말한다. 앞으로 갯거시 년놈들은 웃드르에 와서 고사리 꺽으면 가만 안둔다고 욕지꺼리를 한다. 싸움 구경을 하던 어떤 놈이 빙세기 웃는다. 이 놈은 알드르 놈이다. [출처] 웃드르 놈과 갯거시 년 (제주방언시)|작성자 해피맨    제주방언 시-3| ♠▷ ▒☞  | 쏘곱에 든 거 하부난 쏘곱에 든 거 하부난 (속에 든게 많아서) 지들와젼 몸이 무겁다(눌러져 몸이 무겁다) 데멩이 쏘곱에 욕심(머리 속에 욕심) 눈 귀 쏘곱에 나잇살(눈 귀 속에 나잇살) 입 쏘곱에 능낙거리는 셋버닥(입 속에 잘난체하는 혓바닥) 배 쏘곱엔 똥덜(배 속에는 똥들) 초초 무거워져 가난(차차 무거워져 가니) 땅 쏘곱이 보뎌가는 셍인고라(땅 속이 가까워지는 모양인지) 자꼬 꿈에 시꾸왐쩌(자꾸 꿈에 나타나네)    제주방언 시 - 4| ,   어멍의 타령(어머니의 타령) 게난 마씀(그러게나 말입니다) 보리씨도 뿌려사 홀 건디(보리씨도 뿌려야 할 건데) 고실 고믐 질게 들언(가을 가뭄 길게 들어서) 영도 정도 못허연 오장 데와졈신디(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오장 비비꼬이는데) 작산 놈은(다큰 녀석은) 어느 죽산이가 들려신디사(어느 귀신이 달라붙었는지) 오널도 뺀주룽이 촐련(오늘도 번지레반듯 차리고) 기타 들르곡 허천더레 돌아나수께(기타들고 헛곳으로 달아났습니다) 어드레사 가신디 풀골개비 달믄것광(어디로 갔는지 청개구리 닮은것하고는) 무신 살을 이섬수과게(무슨 살아갈 일이나 있나요) 버슬어옴이랑마랑 먹성만 좋아 마씀(벌어오기는커녕 먹성만 좋습니다요) 부름씨라도 잘 들으카(심부름이라도 잘 들으랴) 무싱거엥 고르민 핏작만 허곡(뭐라 말하면 토라지기만 하고) 게고재고 장게라도 가블민 좋주마는(그러고저러고 장가라도 가버리면 좋지마는) 경허염뎅 호영 확(그리한다 해서 확) 돌라불지도 못 허곡(도로 바꿔버리지도 못하고)... 말 안드는 아들 때문에 어머니의 속은 타서 동네 삼춘 붙들고는 신세 타령하시나 봅니다. 이런 아덜 하여 나실거라예(이런 아들 많았을 겁니다) 제주에는 장마가 시작되네요~ 좋은 하루 되시고, 하루 감사히 만끽하시길....^^♥   @(추가 방언시_)ㅡㅡㅡ 영둥할마이가 올라갈라 카능강 날씨가 엄청 칩다   날씨가 칩어서 장사는 하낱도 안 되는데   옹기장사 할매는 옹구리고 앉았고   소깝장사 할배는 움추리고 앉았다   - 「남문시장」 전문    묻어 논 짐장독 하나를 새로 헐었다고 동네 아낙, 대여섯이 대청마루 양지 쪼오에 오복히 모있다   모락모락 짐이 나는 방금 해낸 따신 보리밥이 한 양푸이   허슬허슬한 보리밥을 누리끼리한 놋숙깔에다가 북태산겉치 퍼담고는   온통 군동네가 등청登廳을 하는 질쭉한 묵은 짐장뱁추짐치 한 잎사구를 두 손으로 부욱 찢어서 똥구락키 따배이로 틀어   보리밥 우에다가 얹고는 볼때기가 오볼티이겉치 미어터지두룩 아죽아죽 씹는데   그 맛이랑 기이 얼매나 기차 차던지   이때 망쿰은 사우가 꽃가매로 태야준다 캐도 싫고   늙은 배껕 영감이 주착맞구로 초지역 나절도 안 돼서 요대기 깔자 카는 것도 마카 기찮을 정도라 카이끼네   -「두 손으로 부욱 찢어서 묵는 짐장뱁추짐치 잎사구 맛」 전문       ## 고훈식 님 시.....우리 하르방.   우리 하르방은                          우리 할아버지는  우리 아방의 아방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 아방보다 제라헌                       아버지 보다 높은 하늘 아방                                하늘 아버지   물애기인 나를 도랑                    어린 나를 데리고 물모루가 봐지는 갯곳듸 상           수평선이 보이는 포구에 서서 해굴메에 물든 구름을 보래던        노을에 젖는 구름을 바라보시던 탑아래 보재기                           탑하동 어부   아꼬운 손지 웃는 놋 보젠             아까운 손자 웃는 얼굴 보려고 나 발꼬락을 조글리고                  내 발가락에 간지럼 주고 수염을 다듬던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던 손으로 나 조쟁이 타먹는 숭내허멍           내 꼬추를 따먹는 시늉하며 돌하르방고찌 웃단 하르방            돌하르방처럼 웃던 할아버지   풀오름 꿩 동산에 오꼿 누워내       풀오름 꿩 동산에 영원토록 누워 바당이 그리운 내 모음 소곱으로    바다가 그리운 내 마음 깊이 탑아래 보름 소리를 듣고 계시네.   탑하동 바람 소리를 듣고  글쓰기답글                ##고훈식님 시. (놈이 대동= 남과 똑같이)     하다 놈 추그리는 말에                         절대로 남 유혹하는 말에 앞이 나상 놉뜨지 말곡                         앞장서서 날뛰지 말고 놈 곧는 말은 곱갈랑                            남이 하는 말 잘 분별하여 놈의 대동(對同)허라                           남과 똑 같이 행동하라 줄을사도.모영 아자도                          줄을 설 때도.모여 앉아도 사름 한듸 붙으곡                                사람이 많은곳을 선택하고 혼 번 생각헐 거                                  한 번 생각 할거면 요라번 생각허영                                 여러번 생각 하면서 이루후제 어떵 될 것도                         앞날이 어찌 될 것인지 궁퉁이 내멍 여산 허영                         대처 방안을 구하고 놈도 솔피멍 새경보지 말곡                   상황따라 옳게 판단하면서 혼진내 맹심해사 헌다.                         항상 신중을 기해야 한다. ##고훈식 님 시 (돌우럭)     해초 왕상헌 제주 바당                             해초 우거진 제주 바다 원담 고망 고망                                       원담 구멍마다 자자 손손 대물린 집이 싯덴                      자자 손손 대물린 집이 있다고 튀어난 눈광 개작헌 입으로                       튀어나온 눈과 큰 입으로 요망진 체 허지 마라                                으시대지 마라   고망 우럭이                                           돌 우럭이 망망대해를 호령가달허는                         망망대해를 주름잡는 상어의 기십을 어떵 알멍                          상어의 기백을 어찌 알 것이며 물애기 적 고향을 촛아가는                       유년의 고향으로 달려가는 연어의 어진 모음을 어떵 아냐                   연어의 갸륵한 마음을 어찌 알까   게도 고망 우럭도                                    그러나 돌우럭도 아는 것이 싯주                                       아는 것이 있다 청정해역 바위 트멍에서 솟는                    청정해역 바위틈에서 솟는 천연 용수의 제라헌 맛을                          천연 용수의 깊은 맛을 먼 바당 물궤기덜은                                 먼 바다 물고기들은 잘 모루주기.                                          잘 모를 꺼다.                  ##고훈식 님 시...밀감이 익는 섬 동새벡 으남 읏어진 섬 소방에                       새벽 안개 걷힌 섬 둘레에 골메덜 노난 희여뜩허다                               갈매기 떼  어지럽게 날고있다 발동선이 통통통 기계 살룹자                        통통통 발동선 기계소리 나자 담베 폭세기 먹는 사름덜 욥이서                    담배 피우는 사람들 옆으로 김밥 먹단 여조덜이 손을 흥근다                    김밥 먹던 여인들이 손을 흔든다   어쳐냑 낚시질허노렌 왓단 난                        엊저녁 낚시질하러 왔던 나는 밤새낭 제우 돌돔 호나 나끄고                       밤 새워 겨우 돌돔 한마리 낚고 곰실 곰실허는 졸아움을 촘으멍                     졸음에 겨운 눈을 참으며 오상 오상 집더레 가는 질이였다                    슬몃슬몃 걸어 집에 가고 있엇다   개창에 삿단 아이덜도                                  포구에 서 있던 아이들도 배 앞더레 죽은 생이 놀리듯                          뱃전을 향하여 작은 새를 날리듯 호끌락헌 손을 하영 저신다                           작은 손을 자꾸 흔든다   붉은 하늘 웃터레                                        붉은 하늘 위를 노리롱헌 생이가 노는 것 닮안                       노란 새가 나는 것 같아 눈 버룽이 턴 촛안 보니                                눈을 크게 뜨고 돌아보니 곱닥헌 비바리가 벵그랭이 웃으멍                  젊은 처녀가 웃음 띤 얼굴로 아이덜신디 밀감을 데꼄서라                         아이들에게 밀감을 던지고 있었다   무사 섬을 떠냐냐고 골메는                           왜 섬을 떠나느냐고 갈매기는 걀걀 삐오삐오.설룹게 웨울럿지만                  걀걀 삐오삐오.서럽게 울었지만 먼동을 헤씨멍 놀아간 밀감은                        먼동을 가로질러 날아간 밀감은 나 머리 소곱에 오고생이 남안                       나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서 수왕수왕헌 바당광 고찌 살 거여.                   싱싱한 바다와 함께 저장될 것이다.     ##고훈식 님 시.....제주도 부자지간   우리 아방은                     나의 아버지는  우리 아덜 하르방                내 아들 할하버지 부자지간이주만                  부자지간이지만 범벅도                          범벅도 금읏 긋엉 먹는 제주도            금을 긋고 먹는 제주도 살림나민                        살림 따로 나면 아덜은 안거리                   아들은 안채 아방은 밖거리                   아버지는 바깥채 독 솖은 아덜이                    닭 삶은 아들이 "고찌 먹게 마씸" 허민          "같이먹읍시다" 하면 "느나 하영 먹으라"허는 아방     "너나 많이 먹어라"하는 아버지 밧 볼리젠 몰 끄성가당            밭 밟으려고 말 몰고 가다가 폭낭 아래서 잠지치멍            팽나무 아래서 엉덩이 치면서 넉동배기허는 아덜 봐져도 속솜    윳놀이하는 아들을 만나도 모른 척 짐진 사름이 팡을 촛듯             짐을 진 사람이 쉴 곳을 찾듯이 지 헐 일은                       자기일은  지가 알앙 허는거난.              자신 스스로 하는 것이기에.            ##고훈식 님 시 .....탑동 썰물                탑아래서 산지꼬지 쌀물이 질게 나민                         바당 소곱이단 듸가 신천지로 욜아진다           용왕이 맹그라 준 풍요로운 물땅 바당 좀녀들이 야생오리덜고찌 물에 텅 하늘 고득 바끄는 숨비 소리에 바당더레 터정돗단 나도 고찌 들엉 아!허고 감탄사가 지냥으로 나온다 먹돌 호나만 데싸도 먹을 것이 한한허던 탑아래 늘짝늘짝 걷는 폿깅이 모살 소곱에 곱앙 돌 서늉허는 돌킹이 겁이 하난 확 도라나는 듬북깅이 먹보말.수두리보말.메옹이.물도새기.솔치 구쟁기.오분재기.듬북.퍼래.김.톳.미역 바게쓰나 대구덕.주전자에 솜빡 담으멍 바당을 촛는 사름덜은 바롯잡이로 허기를 달랫주 이제도 보리낭 불에 불 췌는 좀녀들의 허벅다리가 생각남져 뭉게 뽈판에 물린 것고찌 울락 불락 제주도를 멕영살린 저 눈물나는 반점 먹돌 호나 데싸도 먹을 것이 푸진 바당 귀허고 귀헌 탑아래 쌀물이 내가 시기지 아니헌 오몽으로 요자락 몬짝 어서질 쭝 알아시민   사진 이라도 하영 찍엉 간직헐 것을.                                                                                     ##고훈식 님시....큰떡   어떵허민 조코? 어떻게 해야 좋을까? 무사마씸? 왜 그러시는 데요?   느영 살고판 너하고 살고 싶어서 큰일 남직허다 큰일 날것 같구나 무사 조드람수과? 왜 걱정 하십니까? 큰일나민 큰일나면 큰떡허영 먹곡 큰떡 만들어서 먹고 고찌 살민 되주. 같이 살면 되죠.  ##고훈식 님 시...우영밭 검질소리(텃밭 김 메는 소리)                                           어랑어랑헌 강알소시를                                                          야들 야들한 사타구니 근처를                                         와작착 와작착 또려부난                                                          힘차고 거칠게 때려 주니까                                         눈이 왁왁허멍 얼얼허연                                                          귀와 눈이 캄캄하고 얼얼하여                                         게미융헌 불이 베롱허다                                                          희미한 불빛이 겨우 보인다                                         놈 자는 밤이 햄도 햄쪄                                                          남들 자는 밤에 너무 지나치네                                         촘아가라 몬드글락 벗어둠서                                                          참말이지 홀라당 벗고서는                                         소나인 백몰탄 장군고찌                                                          사나이는 백마탄 장군처럼                                         와드랑 와들랑 들러퀴곡                                                          힘껏 날뛰고                                         하근디가 멜라진 지집년은                                                          이곳 저곳 찌그러진 여자는                                         행클랑이 갈라진 채로                                                          대책없이 드러누운 채로                                         바들랑 바들랑.                                                          발버둥 치느라고 꼼지락 꼼지락.                                                                                   ##고훈식 님 시-정낭     정낭은 제주도 대문이여     낭이 가로걸쳐정 이시민         와땅도 그냥 가사헌다. 정낭은제주도 대문이다                  나무가 가로 걸쳐 있으면                    출입을 삼가야 한다. 호나가 가로 걸청이시민     집안에 사름이 이서도            들어오지 말랜 허는 거고. 하나가 가로 걸쳐 있으면                집안에 사람이 있어도                        들어오지 말라는 뜻이고. 두개가 가로 걸청이시민     동네 잔치나 바릇잡이나         물질이나 검질매레 가부난 두 개가 가로 걸쳐 있으면               동네 잔치나 바릇잡이나                     물질이나 검질메러 가서 아무도 엇덴 허는 거고. 아무도 없다는 뜻이며. 세개가 몬딱 걸청 이시민    몰 촛으레 한라산더레 갓거나  배타고 먼듸 외방 가시난 세 개 다 걸쳐있으면                     말 찾으러 한라산 갔거나                    배타고 멀리 외방 갔기에 메칠 후제 돌아온덴허는 의미여 며칠 뒤 돌아온다는 뜻이다 놈이 집 정낭 앞이선          모음이 코콜해사 헌다            고찌고찌 살아사 허난 남의 집 정낭 앞에선                     마음이 깨끗해야 한다                        더불어 살아야 하니까 지네집 정낭 앞이선           모음이 너르닥해사 헌다         뽀근 안앙 살아사 허난. 자기 집 정낭 앞에선                     마음이 너그러워야 한다                      보듬고 살아야 하니까.                                     ##고훈식님 시 포마시(해꼬지)   커싱 커싱 나도 혼가락 헐 때              어진 내가 너미 좋은 각시는 힘이 넘쳐나도 한가락 할 때               착한 내가 너무 좋은 각시는 바당궤기 지정 먹을 때마다                고등어 대가리 골도 뽈아 먹곡 바다물고기 쩌서 먹을 때마다             고등어 대가리 골도 빨아 먹으라고 자리 대가리도 잘 씹어 먹곡               갈치 눈까리도 빠 먹으랭허멍 자리돔 대가리도 잘 씹어서 먹으라고   갈치 눈알도 빼먹으라고 하면서 정성아닌 정성이 지극헌 정성 정성이 넘치는 지극 정성   부지런히 살단 보난                          돈도 하영 벌어 져신게 부지런히 살다보니까                        돈도 많이 벌어지던데 세상에 나만 잘난 것 닮안                  각시 정성 옷꼿 잊어버리고 세상에 나만 잘난듯 착각하여             각시 정성 깡그리 잊어버리고 가름도세기고찌                               허천듸 놀래 댕기멍 발정 나서 떠도는 돼지처럼                허방으로 놀러 다니면서 늙언 죽을 벵이 드난                         늙고 죽을 병이 드니까   그 모진 세월에                                독해진 각시가 밥 거려 멕이는디 그 모진 세월에                                독해진 각시가 밥 떠 먹여 주는데 "세계 년들 다 어디 가시?                   멕여 주는 밥이라도 잘 쳐먹으라 "허멍 "세상 년들 다 어디로 갔냐?                먹여 주는 밥이라도 잘 받아먹어라."며 숫가락으로 나 입 팍팍 쥐어박는다. 숟가락으로 나 입 팍팍 찔러 박는다.        @@    고랑 몰라 봐사 알주                   서 안 나    아주방 고랑은 몰라 마씨 이년 창시 터지는 건 직접 바사 압니다게. 이 노무새끼가예 얼마나 사람을 저들리는지 사람새끼 안될거 닮아마씨. 술 처먹어 그네 놈 자는디 강 유리창은 무사 부수아불 말이꽈게. 집에도 한한한 미깡 놔둬그네 놈이 밭 가그네 미깡은 무사 땀광. 집안에 돈 이신거 알민 그날은 어떻행이라도 돈 팡강 술을 쳐 마셩오니 요 노릇을 어떻허민 조우쿠가. 이추륵 허다그네 나가 먼저 돼싸짐적 해여마씨. 아방 어신거 불쌍허영 물질허멍 울멍 시르멍 키우당 보난 학교도 졸바로 댕기지도 안행 요보록 써보록 매날 바당에만 강 술먹곡 노래 불렀덴 햄수게. 하도 기가 막형 그 놈새끼 잡아당 물어 봐십쥬마씨. 니 무사 겅햅시니. 날 봥이라도 학교 졸바로 댕겨사 헐거 아니라. 어멍 속터졍 죽는 꼴을 봐사 니가 정신을 차릴타. 귓구멍이 왁왁하게 골아도 듣질 않헴수다게. 아이가 눈이영 헤영 헤분 게 원 정신이 아쓱 나가분거 같수다게. 바당서 죽은 아방 귀신이 씌와 부러신가예. 아주방 어떡허믄 조으쿠가. 사람이 지 팔자 타고난데 헙디다만. 저 놈의 새끼도 후제민 정신차령 잘 살아질껀가예. 고등학교라도 졸바로 졸업해야 어디 직장이라도 댕기곡 눈까진 지지빠이라도 만낭 살꺼 아니꽈게. 나사 이제 뭐 볼꺼이수과. 찬바당물에 뛰어들엉 일하는 것도 다 그새끼 하나 잘키우젠 허는 거 아니꽈게. 내 눈물로 이 제주 바당 반착을 채워수다게. 그 새끼 하나 잘 되불민 눈 곰아도 원이 어수다게. 아이고 벌써 시간이 영 되꾸나양. 어떻헙니까게 집에강 그 새끼 미와도 밥이라도 줘사주마씨. 사람하나 맨들어봐야주 마씨게. 가이한티 잘 골앙 여기 보내크메 그 아이 이디 와 시민 잘 달랭 사람 하나 만들어 줍써. 겅해도 아즈방이 이 동네선 학문 젤 많이 헌 사람 아니우꽈게. 아주방이 말허믄 들을 꺼우다게. 이추륵 부탁헴수다.        말로해선 몰라요 직접 봐야 알지요                                 서 안 나    아즈버님 말로해선 몰라요, 이년 가슴 터지는 건 직접 봐야 안답니다. 아들 녀석 하나 있는 게 얼마나 복창 터지게 하는지 사람 되지 않을 성 싶네요. 단잠 자는 남의 집 술 취해서 유리창은 왜 부수는지. 집에 지천으로 쌓인 게 귤인데 남의 귤밭에서 귤은 또 왜 몰래 훔치는지. 집안에 돈 있는 거 아는 날이면 어떻게든 그 돈 찾아내어 밤새도록 술 마시고 들어오니 이 노릇을 어떡하면 좋을까요. 이러다간 내가 내 명에 못살것 같아요. 애비 없는 게 불쌍해서 물질하면서 키웠는데. 학교도 제대로 가지 않고 매일 바다에 가서 술 마시며 노래만 불렀다고 하더이다. 하도 기가 막혀서 그 녀석 잡아다 물어보았죠.  도대체 너 왜 그러니. 에미 속 터져 죽는 꼴 보고 싶냐고 수천 번을 말해도 애 눈동자 허옇게 휘휘 풀어진 것이 바다서 죽은 지 애비 귀신이 들러붙었는지. 아즈버니 이를 어쩌면 좋아요. 말로만 들어서는 몰라요 봐야 알죠. 사람 팔자 다 타고 태어난다고 하지만 고등학교라도 제대로 졸업해야 칠칠찮은 여자라도 만나 살림이라도 차리죠. 추운 바다에 뛰어드는 것도 다 그 녀석 잘되라고 하는 일인데. 내 눈물로 이 제주바다 반은 채웠을 거랍니다. 나야 다 산 인생이고 그 녀석 하나 잘되면 눈감아도 원 없지요. 마음이 썩어 문드러지네요. 아 벌써 시간이 이리 되었네요. 가서 그 미운 녀석 밥이라도 차려줘야지요. 할 수 있나요 그래도 사람 하나 만들어야죠. 아즈버님이 이 마을서 공부도 제일 많이 헌 분이니까 아즈버님 말은 들을 꺼에요. 녀석 잘 달래서 여기 보낼테니 녀석 왔으면 말 좀 잘해주세요. 사람 하나 만들고 봐야 되잖아요.     달래나 보지                김룡호     북간도라 연변, 용정에 가면 지금은 라 부르지만 본래는 라 불렀다는 이름 하나 괴상한 고개가 있쑤꾸마 옛날 뉘기네(어느집) 누애(누나)와 오래비가 비속에 저 재(고개)를 넘다가 누애의 비에 젖은 엉치(엉덩이)를 본 오래비가 아주 짜른(짧은) 순간이나마 당치않은 생각을 가졌다꾸마 자꾸자꾸 머리 쳐드는 그놈을 못이겨 재마루에 달려간 오래비는 그러는 자기가 너무 밉어서 그러는 자기가 너무 개씸해서 철없는 그것을 크다만 바위돌에 짓찧어 죽었다는 고개이꾸마...... 누기두 모르는 사연인데두 다만 누애라는 한가지 이유로 어쩌면  아 어쩌면 저럴수가 있슴두....... 죽은 오래비를 본 누애는 너무 너무 안타까와서 너무너무 맴(마음)이 아파서 이러메(이러면서) 그냥 통곡을 하다가 그대루 낭기가 되었다꾸마............ 지금두 비가 오구 바람 부는 날이문 고개마루 이깔나무숲에서 슬픈 흐느낌이 듣긴다는 저 고개 오래비덜이 넘기에는 너무 송구스러운 고개이꾸마 누애들이 넘기에는 너무 숨가쁜 고개이꾸마.......    [출처] [본문스크랩] 고랑 몰라 봐사 알주/서안나-제주 방언시|작성자 들사람  
66    한 찰나... 댓글:  조회:1887  추천:0  2015-02-08
[ 2015년 02월 06일 02시 27분   조회:1399 ]     2015년 2월 6일 살바도르(萨尔瓦多)에서 한 마리 작은 새가 "담대"하게 독수리의 잔등에 "무임탑승"하여 날아가고 있는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됐다./중국일보
65    영상시 제작 방법 댓글:  조회:6470  추천:0  2015-02-07
영상시 제작 이미지 가져가는 방법 아래순서에 따라 천천히 해 보세요~~ (일출사진)   (풍경사진) 1) 위의 이미지를 클릭하여 큰사진을 봅니다. 2) 클릭하여 나온 큰사진위에 마우스를 올려놓고 마우스우측에 버튼을 누릅니다. 3) 그러면 새창이 하나 뜹니다 새창이 뜨면 맨 아래 "속성" 을 클릭합니다. 4) 다시 새창이 뜨면   주소(URL) -  http://cfile279.uf.daum.net/image/196D6E144B9FD2221FCA81 이렇게 되어있는 것이 있을겁니다.주소옆에 복잡하게 생긴 영문주소 http:// 이렇게 된 영문주소를 마우스로 좌측버튼을 꾹누르면서 쫙 끍어서 퍼렇게 해놓고(이것을 드래그라고함) 다시 마우스 우측버튼을 눌러서 복사를 합니다. 그런다음 5) 영상시 주소를 넣는곳에 가져 가서 붙여넣기 합니다.     영상시 만들기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A.푸시킨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A.푸시킨 생활이 그대릉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하지말라 슬픈날에 참고 견디면 멀지 않은날에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을 바라느니 현재은 한없이 우울한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은 그리움이 된다     A) 위의 내용중에 청색부분이 영상시 사진주소를 넣는곳입니다. 1) 위의 내용중에 붉은색은 시의 제목과 시인이름입니다. 2) 녹색은 시의 본문내용입니다. 3) 시인의 홈페이지로가서 멎진 시하나를 가져와서 시의 제목과 시인의 이름을 바꾸면 멎진 영상시가 됩니다. 4) 위의 내용을 올릴때 게시판 상단 우측 HTML이라고 적혀있는곳에 마우스를 클릭하여 체크를 하고 올리면 멎진 영상시가 됩니다.   * 위의 복잡하게 생긴 영문으로 된 내용을 복사해서 청색.붉은색,녹색을 지우고 위의 설명대로 편집해서 올리면 멎진 영상시가 됩니다.     만든 영상시 견본보기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A.푸시킨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A.푸시킨 생활이 그대릉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하지말라 슬픈날에 참고 견디면 멀지 않은날에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을 바라느니 현재은 한없이 우울한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은 그리움이 된다     아래는 영상시용 액자자료 입니다. 처음에는 위의 영상처럼 그냥 영상을 만들다가 숙달되면 액자에 넣어 더 아름답게 꾸밉니다.   아래복잡하게 생긴것은 영상액자 자료입니다.   여기에 본문 내용을 넣습니다.     액자안에 넣은 영상 견본보기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A.푸시킨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A.푸시킨 생활이 그대릉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하지말라 슬픈날에 참고 견디면 멀지 않은날에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을 바라느니 현재은 한없이 우울한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은 그리움이 된다      
64    명시인- 김춘수 댓글:  조회:2829  추천:0  2015-02-07
      꽃을 위한 서시                                 나는 시방 위험(危險)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거리에 비 내리듯                                      거리에 비 내리듯  비 개인 다음의  하늘을 보라.  비 개인 다음의  꼬꼬리새 무릎을 보라. 발톱을 보라.  비 개인 다음의  네 입술  네 목젖의 얼룩을 보라.  면경(面鏡)알에 비치는  산과 내  비 개인 다음의 봄바다는  언제나 어디로 떠나고 있다.                 가을 저녁의 시                                         누가 죽어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가는가 보다 살을 저미는 이세상 외롬 속에서  물 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가는가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 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       시 1                                                        동체에서 떨어져 나간 새의 날개가 보이지 않는 어둠을 혼자서 날고 한 사나이의 무거운 발자국이 지구를 밟고 갈 때 허물어진 세계의 안쪽에서 우는 가을 벌레를 말하라. 아니 바다의 순결했던 부분을 말하라. 베고니아의 꽃잎에 듣는 아침 햇살을 말하라. 아니 그 울음과 굴뚝을 말하고 겨울 습기와 한강변의 두더지를 말하라. 동체에서 떨어져 나간 새의 날개가 보이지 않는 어둠을 혼자서 날고 한 사나이의 무거운 발자국이 지구를 밟고 갈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여리디 여린 순결이다. 삼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둣빛 바람이다.       네가 가던 그날은                                 네가 가던 그날은 나의 가슴이 가녀린 풀잎처럼 설레이었다 하늘은 그린듯이 더욱 푸르고 네가 가던 그날은 가을이 가지 끝에 울고 있었다 구름이 졸고 있는 산마루에 단풍잎 발갛게 타며 있었다 네가 가던 그날은 나의 가슴이 부질없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능 금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이미 가 버린 그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날에 머문  이 아쉬운 자리에는 시시각각의 그의 충실만이 익어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의 눈짓을 보낸다 놓칠 듯 놓칠 듯 숨가쁘게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며는 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분 수                                                        1 발돋움하는 발돋움하는 너의 자세는 왜 이렇게 두 쪽으로 갈라져서 떨어져야 하는가. 그리움으로 하여 왜 너는 이렇게 산산이 부서져서 흩어져야 하는가.  2 모든 것을 바치고도 왜 나중에는 이 찢어지는 아픔만을 가져야 하는가. 네가 네 스스로에 보내는 이별의 이 안타까운 눈짓만을 가져야 하는가.   3 왜 너는 다른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떨어져서 부서진 무수한 네가 왜 이런 선연한 무지개로 다시 솟아야만 하는가.       처 용                                                       인간들 속에서 인간들에 밟히며 잠을 깬다. 숲 속에서 바다가 잠을 깨듯이 젊고 튼튼한 상수리나무가 서 있는 것을 본다. 남의 속도 모르는 새들이 금빛 깃을 치고 있다.         인동(忍冬) 잎                                           눈 속에서 초겨울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다. 서울 근교(近郊)에서는 보지 못한 꽁지가 하얀 작은 새가 그것을 쪼아먹고 있다. 월동(越冬)하는 인동(忍冬) 잎의 빛깔이 이루지 못한 인간(人間)의 꿈보다도 더욱 슬프다.           처용단장(處容斷章)                                     - 1의 1 바다가 왼종일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이따금 바람은 한려수도에서 불어오고 느릅나무 어린 잎들이 가늘게 몸을 흔들곤 하였다.   날이 저물자 내 근골(筋骨)과 근골 사이 홈을 파고 거머리가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베꼬니아의 붉고 붉은 꽃잎이 지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다시 또 아침이 오고 바다가 또 한 번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뚝, 뚝, 뚝, 천(阡)의 사과알이 하늘로 깊숙히 떨어지고 있었다.   가을이 가고 또 밤이 와서 잠자는 내 어깨 위 그 해의 새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둠의 한쪽이 조금 열리고 개동백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었다. 잠을 자면서도 나는 내리는 그 희디흰 눈발을 보고 있었다.   - 1의 2 삼월(三月)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라일락의 새순을 적시고 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를 적시고 있었다. 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옷 속의 일찍 눈을 뜨는 남(南)쪽 바다, 그 날 밤 잠들기 전에 물개의 수컷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삼월(三月)에 오는 눈은 송이가 크고, 깊은 수렁에서처럼 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의 보얀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         내가 만난 이중섭                                        광복동(光復洞)에서 만난 이중섭(李仲燮)은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 동경(東京)에서 아내가 온다고 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눈을 씻고 보아도 길 위에 발자욱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뒤에 나는 또 남포동(南浦洞) 어느 찻집에서 이중섭(李仲燮)을 보았다.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진한 어둠이 깔린 바다를 그는 한 뼘 한 뼘 지우고 있었다. 동경(東京)에서 아내는 오지 않는다고,         부두에서                                                   바다에 굽힌 사나이들 하루의 노동을 끝낸 저 사나이들의 억센 팔에 안긴 깨지지 않고 부셔지지 않는  온전한 바다, 물개들과 상어떼가 놓친 그 바다.   꽃의 시인 ㅡ 김춘수   1.생애 그는 1922. 11. 25. 경남 통영의 부유한'수재집안"에서 태어났다. 통영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기중학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일본 동경의 예술대학 창작과에 입학했다. 1942년 일본 천황과 총독 정치를 비방했다는 혐의로 퇴학당하고 6개월간 유치되었다가 서울로 송치되었다. 통영중학과 마산중.고교 교사를 거쳐(1946-1952) 해인대학과 경북대,영남대 교수를 지냈으며(1960-1981),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국회의원을 역임했고, 이후 방송심의위원회 위원장 및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시작 활동으로는 1945년 '통영문화협회(유치환,윤이상,전혁림,김상옥 등)를 결성하면서 문화 계몽 운동을 하는 한편 본격적인 시 창작을 시작하였으며, 동인지 『로만파』(조향, 김수돈,1946),『시연구』(유치환,김현승,송욱,고석규,1956)를 발간한 바 있다. 시인은 초기에는 유치환,서정주,청록파의 시에 영향을 받았으며 30세가 넘어 비로소 자신의 시를 쓰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시인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 중에는 시쓰기와 관련된 몇개의 삽화들이 있다. 통영바다와 더불어 성장한 유년기의 기억, 유치원 선교사를 통해 경험한 이국풍의 세계,일본인 담임 교사와의 마찰 및 자퇴,일본 유학 시절 만난 릴케시집, 시인의 길로 들어서는 데 강한 영향을 준 일본인 시인 교수,사상 혐의로 투옥되어 고문을 당한 일 등이다. 생애의 이런 경험들 가운데 유년과 청년 시절에 겪은 두 경험은 김춘수의 시쓰기와 매우 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김춘수 시인은 1946년 해방 1주년 기념사화집에 시 "애가"를 발표하여 등단하였으며, 초기의 시경향은 라이너마리어 릴케의 영향을 받았고, 1950년경부터 사실을 분명히 지시하는 산문성격의 시를 써왔다. 그는 사물이면에 내재하는 본질을 파악하고 시를 써 으로 일컫어 졌다. 2004년 11월 29일 82세의 나이로 성남시 분당구 소재 서울대학병원에서 지병으로 치료를 받아오다 작고하였다. 영결식은 2004.12.1.10시경 위 서울대학병원에서 시인 김종길,정진규,조영서, 김종해,심언주,류기봉 제씨 등 생전의 절친한 시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시인장으로 치러졌다. 시인은 부인 명숙경이 묻혀있는 경기 광주공원묘지에 영면하였다. 2.시세계 김춘수 시인이 처음 시를 쓰게 된 계기를 릴케와의 조우이다. 시인은 시적 혜안을 열어 준 존재로 릴케를 꼽는데 이 운명적인 계기가 종국에 그의 시적 방향을 계시하는 것이기도 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즉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시라는 것을 릴케 시의 '햇살,꽃눈보라, 기도, 날개, 꽃피어 있는 영혼' 등의 표현들로 각인하고 이런 언어에 매혹되어 시쓰기로 들어선다. 그의 초기 시는 이런 인식의 세례 아래 쓰여진 다소 감수성 짙은 시들이 주조를 이룬다. 이후 시인인 '비로소 나만의 시를 쓰게 되었다'고 기억하는 꽃에 관한 일련의 시들은 이른바 대표작이다. 김춘수 만큼 '꽃'이라는 대상에 관념의 무게를 얹은 시인이 드물 정도로 의미가 과부하된 시들이다. 꽃이라는 존재가 인격화되고 극대화된 이 시들은 인식론적 깊이, 존재론적 탐구, 이데아의 세계관으로 해석되는 관념과 비의의 시 세계이다.       꽃에 대하여  [올해 들어 하동에 사는 친구 집을 몇 번 오가면서, 섬진강 주변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들을 오지게 바라보면서 여러 상념에 잠겼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꽃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제각각인 듯하다. …^^ 꽃은 꽃으로 바라보면 되는 것을, 나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생각으로 고운 꽃들을 저만치 버려두고 홀로 다른 꽃들을 감상하는 것이니… ㅜ.ㅜ . 오래 전에 써 둔 글을 다시 꺼내어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보낸다. 지루한 글 즐겨 읽어 보시길.^^;] 나는 시방 위험(危險)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  추억(追億)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新婦)여.  주지하다시피, ‘꽃을 위한 서시'는 김춘수 시인의 ‘꽃'을 제재로 한 많은 시편의 서시(序詩)에 해당하는 작품입니다. 사물에 내제되어 있는 의미(본질)를 ‘인식'하기 위해 고뇌하는 철학적, 사색적인 성격의 작품이지요.(사실, 나는 인식론(認識論)이라는 말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거립니다.) 인식론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 중의 하나는 과연 진리란 무엇인가, 내가 아는 것이 진리인가 하는 문제일진데, 이 문제에 대해서 다양한 철학적 관점이 존재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른바 고전적 진리론의 관점에서는 내가 아는 것이 실재와 일치할 때 나의 앎은 진리라고 봅니다. 항상 상식을 옹호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진리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있는 것에 대해서 있다고 말하고, 없는 것에 대해서 없다고 말하면 그 말이 진리이다.(형이상학)' 이 말에서 우리는 인식 내용이 객관적 실재와 일치하는 경우에 이를 진리라고 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이러한 입장을 ‘진리 대응설'(correspondence theory of truth)이라 합니다. 이 대응설은 동서를 막론하고 가장 오래된 진리관이지요. 이를테면 ‘눈은 희다'라는 나의 지식은 실제로 창문을 열고 내리는 눈을 확인했을 때 그 눈이 희다면, 그것은 진리인 것이지요.  그러나 고전적인 진리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실재를 알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대응설에서는, 우리 눈앞에 있는 한 송이 꽃이 원통의 줄기와 푸른 잎과 빨간 꽃잎을 가졌다고 할 때, 우리의 시각으로 파악된 표상 또는 관념(원통형, 푸르다, 빨갛다)은 앞에 있는 대상(꽃)이 ‘사실상 지니고 있는 성질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관념과 대상의 일치 내지 대응을 확인하려면 우리는 그 꽃을 다시 보아야 하는데, 이때 우리는 그 꽃에 대한 또 하나의 관념을 받아들일 뿐, 정작 꽃 자체에는 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처음 의 ‘원통형, 푸르다, 빨갛다'는 다시 보는 ‘원통형, 푸르다, 빨갛다'와 서로 다른 관념인 것이지요. 결국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대상의 실재가 아니라 대상에 대한 언어적인 관념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고전적인 진리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실재를 알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인데,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츠 같은 합리주의 철학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 ‘진리 정합론자'들은 수학이나 기하학의 지식을 자명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 외의 다른 주장들의 진리성을 ‘자명한 진리와의 일치 여부'를 근거로 판단합니다. 수학이나 기하학에는 젬병인 관계로, 다른 예를 들어보면,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주장이 하느님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에 부합되지 않으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이런 교조주의적 태도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많이 나타나는데, 이들은 어떤 주장의 타당성 여부를 마르크스나 레닌, 모택동 등의 권위자들의 말과 합치하느냐 여부에 따라서 판단하는 식이지요.  이러한 ‘진리 정합설(coherence theory of truth)' 역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사실과의 일치 여부에 진리성이 구애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정합의 기준이 되는 기성 판단을 계속 소급하여 올라간, 체계내의 최초 판단의 진리성은 정합 여부를 가려줄 더 이상의 판단을 갖지 않으므로, 정합설로 설명될 수 없을 것입니다. 정합설의 이러한 한계는 결국 진리 기준의 이중성이라는 또 다른 한계를 드러내 줍니다. 왜냐하면 정합설은 최초의 상위 판단의 진리성을 보장해 줄 정합설적 기준 이외의 ‘다른 기준'을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있습니다. 만약 서로 모순되는 최초 판단을 갖는 상이한 두 개 이상의 체계가 있고, 그 최초 판단 중 어느 것이 진리인가가 확정되지 않았을 경우, 어떤 판단은 두 체계와의 각각의 정합 여부에 따라 진리인 동시에 진리가 아니기도 하는 문제점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기존의 논리 체계와 논리적으로 정합하는 체계를 ‘상상'에 의해서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데, 이 경우에도 과연 오직 정합성만을 진리의 근거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사실상 정합설적 진리가 진리로서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정합의 기준이 되는 체계내의 맨 위의 판단은 반드시 ‘사실 과학적 진리'로 확정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최초 판단이 진리로 확정되지 않는 한, 아무리 그것에 정합된 판단이라도 그 판단들 역시 진리로 확정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정합설은 어떤 판단이 참이라면 그 판단에 모순이 되는 판단은 결코 참일 수 없다는 논리학의 기본법칙 가운데 하나인 ‘모순율'을 전제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모순율 자체가 정합설로 진위가 판정되지 않은 것입니다! 모순율은 사고 작용이 그 성립을 위해 필연적으로 참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일종의 ‘진리로 요청된 사고의 전제'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형이상학에 대한 공부를 한 지 십 수년이나 지난 오랜 일이라서, 이런 설명이 적확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정합론에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어서, 드디어 ‘진리 실용론'이 그 세를 넓혀갑니다. ‘진리 실용설'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 미국에서 영향력을 넓힌 실용주의의 진리설에 기원하고 있습니다. 실용주의란 용어는 퍼어스(C.S.Peirce)가 의미(意味)에 대한 이론을 전개하면서 미국의 철학에 끌어들였는데, 이 말은 그의 친구인 제임스(W. James)에 의해 19세기말 대중강연에서 자주 사용되어 처음으로 일반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쉴러(F.C.Schiller)와 미국의 듀이(J.Dewey)도 실용주의와 유사한 논리를 주장하였는데, 우리나라 조선후기 실학파의 실사구시(實事求是)와도 통한다고 하겠습니다.  실용주의는 지식을 그 자체로서 다루지 않고 언제나 생활상의 수단으로 본다는 것, 잘 아실 것입니다. 실용설에서는 지식이 실제 생활에 있어서 성공적이거나 만족스러운 결과를 낳거나 실제로 유용할 때 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고 보면, 실용주의라는 것이 물리학이나 생물학과 같은 실험 과학의 방법을 논리적 사고의 영역에까지 확대 적용시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실험 과학의 명제는 이론적으로 아무리 문제가 없더라도 실험의 결과에 의해서 실증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즉, 실험이라는 행위와의 관계에서 명제의 진위를 논하는 것이지요.  제임스는 “그것은 진리이기 때문에 유용하다.”라는 진술과 “그것은 유용하기 때문에 진리이다.”라는 진술을 비교하고, 두 진술은 같은 의미라고 말합니다. 유용한 관념은 참다운 것이요, 무용한 관념은 거짓에 불과한 것이므로, 진리는 완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져 가는 것이며, 때문에 만들어짐으로써 확인 가능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사랑의 비극이란 없다. 사랑이 없는 가운데서만 비극이 있다.(데스카)'  이 말은 진리일까요? 진리임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랑을 해 보고, 그 결과 비극적인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이 주장은 참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념은 우리의 행위에 영향을 끼치며, 행위의 지침을 마련해 주고, 행위자에게 그가 의도하는 목표로 나아가는 수단을 제시합니다. 만약 우리의 행위에 대한 신념이 이와 같이 영향을 끼쳐 행위를 효과적으로 만든다면 우리의 신념은 옳은 것일 겁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사랑을 했더라도, 나중에 그 사랑이 비극으로 결말을 맺었다면, 위의 주장은 진리가 아닙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진리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이러한 주장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리는 때로 집안에 화를 당한 사람이 점을 보거나 무당을 데려다 굿을 하고서 마음의 안정을 찾는 것을 종종 봅니다. 실용주의적 진리관에 따르면 점이나 굿 같은 미신도 그것을 믿는 사람에게 유용하므로 진리가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이 눈앞의 이익을 위하여 거짓말을 하고 그 목적을 실현하였다면, 그 거짓말도 유용하였으므로 진리가 됩니다. 그것 참!  이렇게 유용성이란 것은 사람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매우 주관적인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실용주의적 진리관에서 말하는 진리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매우 ‘주관적'인 것이 됩니다. 이 입장도 정합론처럼 진리가 인간의 주관으로부터 독립하여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주장입니다.  인간의 인식의 임무는 진리에 도달하는 것,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객관적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완전히 올바른 객관적 진리'는 ‘절대적 진리'라는 명칭을 부여받습니다. 이와 반대로 ‘일정한 범위에서만 올바른 진리'를 ‘상대적 진리'라 합니다. 절대적 진리란 완전히 올바른 지식이기 때문에 장래의 과학 및 실천의 진보에 의해 번복되지 않는 지식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절대적 진리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러한 의문을 간직한 채, 작년, 2004년 11월에 작고하신 김춘수 시인의 ‘꽃을 위한 서시'로 다시 돌아 갑니다. ‘꽃을 위한 서시'는 우리의 고민이 고스란히 묻어 있습니다. 사물의 본질(진리, 앎)에 도달하고자 하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不可知論)이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에서 ‘꽃'은 사물에 내재해 있는 본질 혹은 본질적 의미(진리)로 해석됩니다. ‘나'는 그것에 접근하여 해명하고자 하는 인식의 주체입니다.  ‘나'를 ‘위험한 짐승이다'라 한 것은 사물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한 존재를 의미할 것입니다. 그러한 내가 일상적 행위를 통하여 ‘너(꽃)'의 참된 의미를 잡으려고 손을 뻗치는 순간, 그 대상이 되는 사물의 본질은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은 허무일 수도 있고, 무(無)의 세계일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나'는 사물의 참모습을 잡으려고 하지만 그것은 영원히 불가능합니다.  그리하여 존재의 본질은 흔들리는, 불안정한, 가지 끝의 꽃처럼 나의 인식에 잡히지 않고 그저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집니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命名)은 사람이 사물을 인식하는 행위가 있어야 가능한데, 존재의 참모습으로서의 꽃은 인식될 수 없으므로 이름도 없이 머무르다가 사라지고 마는 것이지요.  그러나 시적 화자는 추구의 노력을 그만 둘 수 없습니다. 진리의 세계에 다가가고자 자신의 영혼을 팔았던 ‘파우스트'처럼 인간은 거역할 수 없는 진리에의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3연과 4연은 규명되지 않는 본질로 인한 슬픔과 함께, 그러나 그것을 추구하는 가열찬 노력이 나타납니다.  3연의 ‘무명의 어둠'이란 사물의 본질이 드러나지 않는 세계의 상황을 간결하게 압축한 구절입니다. 우리 세계의 무질서와 혼란은 그 깊은 어둠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꽃보다 열매가 먼저 열리고(무화과, 김지하),꽃이 열매의 상부(上部)에 피는(공자의 생활난, 김수영), 이 무저(無低)한 전도(顚倒)와 작란(作亂)의 세계는, 빛(진리)이 어둠에 묻혀있음입니다. 눈물이 젖어들듯, 젖어오는 어둠은 눈시울을 가리어, 카오스(chaos)는 ‘입을 벌리고(chainein)', ‘캄캄한 텅빈 공간'으로 내려 앉습니다.  그 속에서도 ‘나'는 알 수 없는 존재의 본질을 규명하기 위해 지난 삶의 모든, 그러나 하찮은, 경험과 지식들을 동원하여 끝없이, 끝없이 추구합니다..... 이 행간은 긴 휴지(休止)를 필요로 합니다. 화자는 길고 오랜 시간동안 그 노력을 계속했을 것이고, 그 노력은 숱한 방황의 연속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느니라. Es irrt der Mensch, solang er strebt.(파우스트)'...... 그렇지만, 그 노력은 차츰 돌개바람으로 변하여 ‘탑(규명되지 않은 사물의 본질)'을 흔들게 되고, 탑의 내부까지 파고 들어가 돌, 어쩌면 ‘돌(사물의 본질)'에까지 스밀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돌에까지 스미면...'이 가언적(假言的) 진술임을 확인할 때, 이미 불가지(不可知)는 예정됩니다. 그래서 ‘추구의 노력'만큼은, ‘금(金)과도 같은 소중하고 값어치 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서둘러 선언해버립니다! 작품은 모두 끝납니다. 이로써 시인은 자신의 생각을 모두 표현한 것이지요. 마지막, 널리 회자되는 마지막 구절은, 사실 의미상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합니다. 이미 앞에서 선언한 것의 확인, 반복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표현론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사물의 본질은 얼굴을 가린 신부와 같다'라는 이 은유는 과히 감동의 도가닙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돌에까지 스미면...'이 가언적(假言的) 진술이라는 것은, 인간이 사물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인정하지만, 그러나 아직은 스미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진술입니다. 그래서 현재는 불가지(不可知)의 상황이며, 무지의 상태이며, 위험한 짐승의 처지입니다. 다만, 인간의 그 지난(至難)한 ‘추구의 노력'만큼은, ‘금(金)과도 같은 소중하고 값어치 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아픔에 위안을 얹어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의 간절한 욕구와 시도에도 불구하고 사물의 본질은 결코 밝혀지지 않습니다. 사물의 본질은 언제나 인식의 가능성 저편에 있으며, 마치 영원히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와 같이 본질을 드러내지 않는 것입니다. 1행으로 독립시킨 5연은, 결국 ‘미지의 상태로 남는 본질'과 화자의 안타까움이 표현된 것이지요. 이 마지막 연에 대한 김재혁(고려대) 교수의 글을 잠깐 옮겨보면,  이 시의 가장 큰 묘미는 마지막 행의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라는 구절에 있다. 앞서 말했듯이 사물을 ‘여인'으로 파악하는 릴케의 사고에다가, ‘얼굴을 가리운'이라는 동양적 사고방식이 독특하게 결합되어 ‘꽃'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감정이 드러난다. 이 ‘가리운' ‘얼굴'을 펼쳐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시인의 사명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시인 자신이 ‘금'으로 화한 다음에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언어적 형상화의 문제와 직결된다. (시적 변용의 문제: 릴케와 김춘수)  ‘금'에 대한 생각이 나와는 사뭇 다르지만 - 위 논문은 비교문학적 측면에서 김춘수와 릴케의 작품을 고찰한 듯한데, 아시다시피 내 글은 학문적으로 책임질 일은 추호도 없는 심심파적 잡글인 관계로, 김재혁 교수의 학술논문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그런데, 이 논문처럼 “시인 자신이 ‘금'으로 화한 다음에야 가능하다는 것”이라는 주장은, 주장도, 사실은 한 학자의 개인적 견해일 뿐, 많은 평론가들의 일치된 견해가 아니라는 것, 또 일치될 수도 없다는 것, 아시죠? - ‘얼굴을 가리운'이라는 동양적 사고방식이 독특하게 결합되어 ‘꽃'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감정이 드러난다는 주장은 마음에, 내 마음에 아주 쏙 드네요!  아무튼, 이렇게 인식론적 관점에서 ‘꽃을 위한 서시'를 읽었을 때, 우리의 인식은 ‘사물의 본질에 다가갈 수 없다'는 안타까운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시는 추구의 ‘결과'가 아니라 추구의 ‘과정'을 표현한 시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때쯤에서 김춘수 시인의 대표작 ‘꽃'을 읽어보도록 합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잘 알려진, 별로 난해하지 않은 듯싶은, 이 시는 사랑의 시로 읽히기도 합니다. 내가 사랑하게 됨으로써 ‘너'는 아름다운 ‘꽃'이 될 수 있고, 네가 나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나도 너로부터 영원히 잊히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될 수 있다는 사랑의 열망을 상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연인들 사이에 이 시가 회자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시가 연시(戀詩)가 아니라는 것도, 역시 잘 아실 것입니다. 사물의 본질과 진실성은 시에 의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고 믿는 시인은 이 작품에서 ‘꽃'이라는 하나의 생명체를 통하여 존재하는 것의 의미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존재(存在)라는 인식을 토대로 사물을 존재의 밝음 속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인데, 이런 시를 존재론적인 시라고 부릅니다. 감정이나 정서를 중시한 연시와 달리, 지성과 이미지를 중요시하는 주지시 계열의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시를 짧게 검토해 봅시다. 꽃은 그 존재만으로도 충만하고 아름다우며, 실존하는 모든 가치 있는 존재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의 이름을 ‘꽃'이라고 불러주기(命名) 전에는 그는 많은 사물 중 하나로 무의미한 대상(하나의 몸짓)에 불과한 것입니다. 명명 행위(命名行爲) 이전 - 대상을 인식하기 이전에는 그는 무(無)와 다름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즉 대상을 인식하기 전의 사물은 부재하는 존재와 마찬가지이므로 나와는 전혀 무관한 사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즉 상대방을 인지하고 존재 이유를 긍정하고 그것에 실체를 부여했을 때, 그는 혼돈과 부재(不在)의 상태, 곧 존재의 은폐성(隱蔽性)으로부터 모습을 드러내고서, 하나의 뚜렷한 의미 있는 존재로 나에게 다가 옵니다. 이제 ‘나'와 ‘그' 사이에 의미 있는 관계가 형성되고 인식의 새로운 지평이 열립니다. 이는 하이데거가 ‘말은 존재의 집이다. 만물은 본질에 따라 이름지으며, 시인의 사명은 성(聖)스러운 것을 이름짓는 데 있다'고 한 말을 상기시켜 주기도 합니다. 여기서 ‘꽃'은 존재의 참모습, 의미 있는 존재의 상징물로서 찬연히 부활합니다.  그리고 시인은 소망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나의 이름을 누군가가 불러주기를... 정말로 누군가가 나의 빛깔과 향기에 맞는 이름으로 나를 부재(不在)에서 이끌어 준다면 그에게로 가서 나도 ‘꽃'이 되고 싶습니다. 그 ‘무엇'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마지막 연은 ‘나'가 1인칭 복수 ‘우리'로 변하면서 인간의 보편적인 욕구로 그 범위를 넓혀 갑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냥 있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에 의해 진정한 가치가 인식되는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한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김춘수 시인은 ‘꽃'이 지녀온 관습적인 언어의 질감을 지우고 관념화된 꽃을 통해 존재의 현현과 실존의 체득을 향한 인간의 욕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시에 대한 숱한 해설들이 있지만, 그러나 이 시는 결국 존재의 본질에 대해 그 무엇도 말해주는 것이 없습니다. 많은 평자들이 ‘빛깔과 향기'를 존재의 본질이라고 해석하지만, 사실 ‘빛깔과 향기' 역시 또 하나의 개념일진데, 도대체 ‘빛깔'과 ‘향기'의 본질은 또 무엇이란 말입니까!    아,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결국 은유와 상징의 세계일 뿐, 손에 잡히는 그 무엇 하나 가지지  못합니다! 나는 이 시의 행간에 묻혀 있는 무량 없는 슬픔을 슬퍼합니다!                   
63    詩碑는 말한다... 댓글:  조회:2186  추천:0  2015-02-07
  옛 동산에 올라  이은상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의 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버혀지고 없구료 지팽이 더저 짚고 산기슭 돌아서니 어느 해 풍우엔지 사태져 무너지고 그 흙에 해 솔이 나서 키를 재려 하는구료 에피소드 조  향 열오른 눈초리, 하찮은 입모습으로 소년은 가만히 총을 겨누었다. 소녀의 손바닥이 나비처럼 총 끝에 와서 사뿐 앉는다. 이윽고 총 끝에선 파아란 연기가 물씬 올랐다. 둟린 손바닥의 구멍으로 소녀는 바다를 보았다. -아이! 어쩜 바다가 이렇게 동그랗니? 놀란 갈매기들은 황토 산태바기에다 연달아 머릴 쳐박곤 하얗게 화석이 되어갔다. 가을과 삶의 장(章) 안장현 난 참 바보였다. -꿈울 쫓는 소년마냥 괴로을 피한다고 찾아 온 이 항구도 물결은 바람에 일고 내 옷깃은 싸늘하고 .... (삶이란 쓴 나물맛, -쓰다 뱉도 못하고.... 프라탄 가지에 앉은 작은 새의 소망처럶 잎잎이 다 떨어지면 오는 봄을 기다리고...) 나는 참 바보였다. 그래도 난 울잖는다. 서리 아침 웃는 국화 단풍 잎새 붉은 정열, 파아란 가을 하늘이 외려 다정찮는가! 낚시꾼 안장현 물이 그리워 물결은 밀려드는데 바위도 물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움을 한 아름 안고 밀려드는 물결 맞아주는 이 없어 다시 되돌아 가는데 낚시꾼은 고기를 낚지 않고 시간를 낚고 고독을 낚고 그리움을 낚는다
62    동영상 100편 댓글:  조회:2720  추천:0  2015-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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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명시인- 조향 댓글:  조회:2557  추천:0  2015-02-07
      시인 조향의 빛과 그늘  극우 이념성향… 문단'이단아' 낙인 군사 정권시 매카시즘 광풍 주도 스캔들 폭로·신문사 테러 전력도 현대시 업적, 저돌적 기질에 묻혀       조향은 항시 빨간 페인트 통을 들고 다니는 시인으로 보였다. 빨강 물감을 가득 채워놓고 필요할 때마다 뿌리고 칠하기 위해서다. 물론 그는 페인트공은 아니었다. 당대의 내로라하는 현대시의 전파자요, 창조자인데다 그 힘이 쩡쩡 구덕골을 울리는 동아대 교수였다. 아니 교수 중의 교수로 자부했던 사람이다. 그만큼 그 자신의 시나 쉬르레알리슴에 관한 강의는 딴 사람의 추종을 용납하지 않는 독보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가 어찌된 영문인지 기성문단에선 아예 기피당하거나 상종하지 않으려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었다. 부득불 그에 대한 사나운 인심의 근원을 찾자면 한국전쟁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두 가지 흐름으로 나눠 그가 인심을 잃은 얘기를 해야겠다. 그는 기회만 있으면 이념 문제를 들고 나와 동료나 선배 문인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더구나 5·16군사쿠데타 때는 군부가 지휘하는 사회정화운동에 적극 참여, 그 나름대로의 안목으로 대상자를 골라 빨강 리스트에 올리는 역을 맡았다. 이러한 사실은 그 보조역을 맡은 그의 제자 교수가 증언한 바 있다. 1970년대 어느 날, 서울의 박남수 시인이 부산에 내려왔다. 전화로 '부산 커피'에 좀 나오라는 것이었다. 광복동에 있는 이 다방은 조향이 잘 가는 곳이었다. 얼른 내키지는 않았으나 필자를 문단에 데뷔시켜 준 분의 말이라 거역할 길이 없었다. 그 자리에 놀랍게도 박남수는 조향과 마주 앉아 있지 않는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내색은 할 수 없고 차를 함께 마셨다. 비단 박 시인뿐 아니라 피란 온 북한출신 문인들이 그의 붉은 리스트에 올랐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기 때문이다. 당시로서 일단 빨간색으로 낙인찍히면 살아남기 어렵고 살아난데도 생존자체가 위협을 받는 때가 아니던가. 박남수는 부산에 내려올 때마다 맨 먼저 자신에게 페인트칠을 한 조향을 왜 만나는 것일까. 박남수 시인은 "그가 나에게 용서를 빌었기 때문"이라고 짤막하게 털어 놓았다. 용서를 빈 자에 대한 예우로써 부산에 오면 맨 먼저 만난다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관용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이데아 문제'로 다른 사람의 가슴에 페인트칠을 한 경우지만 다른 사례 하나는 얼굴에 페인트칠을 하여 창피를 준 일대 폭로사건이 있었다. 부산이 피란 수도 때이다. 당시 주간지에 한 페이지에 걸쳐 김동리와 손소희와의 스캔들이 대서특필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조향이 직접 제공하고 쓴 기사였다. 이들 두 작가는 정식으로 재혼이 이뤄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적잖은 파문이 일었다. 두 사람이 한낮에도 남포동 한가운데를 팔짱을 끼고 활보한다니, 그들의 아지트가 영주동 산기슭에 있다느니 하는 매우 구체성 있는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피란지 부산 문단이 곧 중앙문단이었던 시절이다. 피란 온 문인들은 물론 부산쪽 문인들까지 충격을 받을 만한 기사였다. 조향의 저돌적 기질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기성 문단의 우상에 대한 파괴적 행동양식이라고나 할까. 해석 나름의 폭로기사가 그를 일약 겁을 모르는 '부산의 나이트' 쯤으로 인식되게 했다. 그런가 하면 70년대에 와서 동아대의 캠퍼스 확장 문제와 구덕공원 점유관계를 둘러싸고 부산일보가 시민 편에 서서 동아대를 한창 공격하고 있을 때 그가 부산일보를 타도하는 일선에 나섰다. 윤전기에 모래 한 줌 뿌리면 끝장 보는 일이라고 부산일보 바로 뒤에 있는 마로니에 다방에 앉아 거의 공개적으로 테러를 지휘하기도 했다. 당시 동아대생들이 편집국에 난립, 곤봉을 휘두르고 집기를 부수는 등 일대소동이 벌어졌다. 위의 몇 가지 예를 보듯이 그가 극우적 행동 양식에 젖게 된 것은 해방공간에서 좌파인 건준(建準) 일부 적색인사와 투쟁한 전력 이후라니 그 속내를 소상히 헤아리기 어렵다. 결국 서울 등지의 예술인들에게도 이념적 공세를 가해 기피인물로 간주됨으로써 그의 쉬르레알리슴 운동조차 순수하게 바라보게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조향의 문학적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 그가 재직한 동아대에 대한 충성은 지극했다. 부산일보를 상대로 한 그의 행동만 봐도 총장이 탄복할 만한 일이 아니던가. 감히 신문사를 상대로 테러를 감행하다니…. 그러나 그는 그 자신이 차기 총장을 노린다는 모함에 휩쓸려 동아대를 떠난다. 그가 당시 병원에 입원중인 정재환 총장을 만나 해명하려 했으나 정 총장은 이미 결심을 한 터였다. 조향은 예닐곱 번이나 병상을 찾아갔다. 총장은 조향이 왔다하면 눈을 딱 감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쪽으로 오면 총장은 저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저쪽으로 다시 가면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고 자신이 설 자리를 잃은 것을 확인한 그 날 돌아와 짐을 꾸리고 무작정 서울로 떠나야 했다.     거침없는 연애 즐긴 고독한 별 여교수와 팔짱끼고 광복동 거리 활보 장례식때 젊은 여교사가 관 붙들기도 문단서는 냉대받아 쓸쓸한 말년 보내       쉬르레알리슴의 왕국에서 미완의 황제로 군림했던 조향. 그는 일상인으로서, 자기류 시학의 명교수로서 명성을 얻었으나 한 인간으로선 끝내 한을 품고 사라진 고독한 별이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여인들과 염문을 뿌리며 다닌 것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부산의 환락가는 광복동 거리였다. 서울의 명동과 진배 없었다. 조향은 이 거리를 너무 당당히 보란듯이 D대 체육과 여교수와 팔짱을 끼고 다니는 것쯤은 예사로 여겼다. 60년대는 지금의 시각과는 아주 딴판의 시대였다. 조향은 이 거리에서 제자들을 만나도 스스로 팔짱은 풀지 않는다. 언제나 푸는 쪽은 여인 쪽이다. 조향은 거리에서 제자를 만나 곁에 팔짱을 끼고 오던 여교수가 팔을 풀면 그 여교수를 향해 "좋아하는 사람의 팔짱을 끼고 걷는 것이 뭐가 부끄럽고 죄가 된다고 주저해. 여기 걸어 다니는 저 신사들도 알고 보면 다 위선자야." 그는 이렇게 사뭇 비분강개조로 설파한다. 도리어 제자들이 질려 그 자리를 뜨고 싶어 한다. 여류 시인 김춘방과는 아예 드러내놓고 팔을 끼고 다녔다. 필자도 여러 번 목격했던 사실이다. 김춘방과의 사이에 낳은 딸애를 집에 데려와 기른다는 말과 자기 큰딸이 그 애를 좋아해서 참 다행이란 말도 서슴지 않는다. 그 이전 50년대 후반에는 같은 과의 제주도 출신 J양과의 염문이 파다했다. 그는 23세 때 첫 결혼했으나 첫 부인과의 중매에 불만을 품고 초등학교 교사시절 동료와 사랑에 빠지고, 일본인 여교사와의 염문이 말썽이 되어 좌천되기도 했다. 줄곧 별거 해오던 첫 아내와 이혼하고 재혼하지만 그의 여성 편력은 그치지 않는다. 그가 자신의 속말을 숨기지 않고 털어 놓는 제자가 바로 신라대 총장을 역임한 시인 김용태다. 그의 전언에 따르면 여인들을 가까이 두는 이유를 물었더니 "이 사람아, 사랑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어. 사랑이란 삶을 살아가게 하는 위대한 힘"이라고 말했단다. 이를테면 명예나 돈이 아무리 있어도 애틋한 사랑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사느냐다. 김춘방이 늘 불쌍하다고 말해 왔다. 춘방이 일탈의 삶을 산 까닭도 6·25전쟁 중 중국인과의 뜻하지 않은 결혼이 가져온 결과였다. 그녀가 나중에 자살한 것도 결혼 생활의 불행과 더불어 아들의 걷잡을 수 없는 탈선이 복합되었기 때문으로 보고들 있다. 그녀는 경기여고를 나왔고 부산 최초로 부산극장에서 발레를 추었고 그 뒤에 시를 썼다.     용두산 공원 내 조향 시비.    그는 여인들과의 관계에 대한 나름대로의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초현실주의는 위선을 가장 혐오한다. 그것이 사실주의와 다른 점이다. 연애를 하려면 위선적으로 사실주의적으로 하지 말고 자기처럼 초현실주의로 당당하게 해야 옳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60년대의 일이니 망정이지 요즘 같은 세태였다면 조향은 여인 편력 그 하나만으로도 강단에 설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의 여인 편력은 서울에 가서도 쉬지 않아 기어이 장례 날 하관 때 일이 터졌다. 조향의 시신을 하관하려 할 때 26세의 초등학교 교사가 관을 붙들고 늘어졌다. 사랑은 당당히 초현실주의로 해야 가장 순수한 것이라는 교조적 신앙을 가졌던 그의 초현실주의의 연구회 회원이 주위의 눈을 전혀 의식치 않고 몸소 실천한 것이다. 대담하게도 관을 붙들고 "선생님! 저를 두고 어디로 가시렵니까." 그리고 "저도 함께 묻어 달라"고 울부짖었다. 그 울부짖음이 지나치다 보니 옆에 있던 부인이 "저 년도 어서 같이 묻어라"고 고함쳤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그의 시비는 사후에 용두산 공원에 '부산을 살다간 시인' 속에 포함되어 다음 시가 돌에 새겨졌다. '열 오른 눈초리, 한잔한 입모습으로 소년은 가만히 총을 겨누었다/ 소녀의 손바닥이 나비처럼 총 끝에 와서 사뿐히 앉는다. 손끝에선 파아란 연기가 물씬 올랐다./ 뚫린 손바닥의 구멍으로 소녀는 바다를 내려다 봤다. / -아이 어쩜 바다가 이렇게 똥구랗니? /놀란 갈매기들은 황토산태바기에다 연달아 머릴 처박곤 하얗게 화석이 되어 갔다.'('EPISODE' 전문) 시인 조향은 1917년 경남 사천군 곤양면에서 태어나 진주고보를 나와 대구사범 강습과를 거쳐 일본대학 예술학원에서 수학했다. 1940년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첫날 밤'이 입선되어 문단에 발을 디뎠다. 그는 일찍 동아대 국문과 교수와 문과대학장을 역임했으나 말년은 쓸쓸했다. 문단 쪽에서 그를 반기는 이가 거의 없다시피 해 서울로 온 뒤 그의 초현실주의 시학에 동조하는 모임이 있던 강릉 해변에서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 67세, 1984년의 봄이었다. 문학과 일상의 행위가 모순되는 일은 얼마든지 있는 법이다. 비록 그의 죽음은 릴케 같은 아름다운 모순의 죽음이 아니더라도 문학은 문학대로 평가해야 하는 경우다.   바다의 층계                                                                               -조 향-                                                               낡은 아코오뎡은 대화(對話)를 관뒀습니다.   ―여보세요!   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수화기(受話器)       여인(女人)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아란 기폭들   나비는 기중기(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1952)-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초현실주의적, 모더니즘적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현대문명과 상대적으로 무력하게 된 인간의 명암이 미묘하게 깔리면서, 도처에 극적인 이미지의 전개가 참신하다. 대개 이미지는 시인의 관념의 도구로써 쓰이게 마련인데, 이 시에서는 이미지 그 자체로 동원되어 한 편의 시를 이룬다. 이렇게 해서 순수시, 절대시가 되고 만다. 초현실주의 시가 난해하면서도 읽으면 매력이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 시는 1950년대 초현실주의 작품을 썼던 조향 시인의 대표작이다. 마치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평자들은 프랑스 초현실주의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원리를 도입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는 특이하게도 초현실주의 문학 운동에 평생을 바친 사람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근거한 무의식의 자동기술을 시작(詩作)의 근간으로 삼는 초현실주의 시들은 일반 독자에겐 매우 생소하고 난해하다. 그는 시에 외래어를 대담하게 도입하고, 산문적 · 설명적 요소를 철저히 배격하면서, 상상의 영역에 절대적 자유를 부여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의식의 심상을 발굴한 후 그것들을 비약 · 충돌하게 하는 초현실주의적 시풍을 우리 현대시에 실험한 대표적 시인이다. 그는 생전에 시집을 내지 않은 걸로도 유명하다. 앞서가거나 독창적인 사람은 대개 이단적이고 저항적이다. 그것이 도전과 공격에 대한 유일한 자기방어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귀재나 천재들의 이해하기 힘든 기벽이나 기행 등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과 문학적 이념이나 노선을 달리하는 다른 문학 집단이나 문학인들과는 아예 교류를 기피했다고 한다. 그는 철저하게 초현실주의 문학을 이론화 · 작품화하는 일에 정열을 기울이며 완고하고 집요하게 자기 영역을 고수했다. 1956년에 조봉제, 이인영 등과 '가이가(Geige)' 동인지를 내었으나 창간호가 종간호가 되었다고 전한다. 1961년 군사 쿠테타 이후 사회정화위원회의 악역을 맡아 부산지역 예술인들의 경원과 기피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특이하다. 그는 항상 당당하고 세속적 평판에는 초연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의 곁에는 늘 여인이 있었다고 한다. 비난하는 사람에겐 이렇게 응수했다고 한다. "나는 공개적으로 떳떳하게 연애를 한다. 겉으로 도덕군자연하면서 뒷전에선 온갖 부도덕을 자행하는 위선자들과는 다르다. 초현실주의는 가식을 가장 싫어한다. 사랑이란 삶의 원동력이자 흐르는 물처럼 머무를 수가 없는 것이다." 조향 시인의 장례식 장면을 신태범 작가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유족들과 조객들의 흐느낌 속에 천천히 고인의 관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손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닦어내며 흐느끼고 있던 한 여인이 갑자기 관을 붙들며 절규했다. "선생님! 이렇게 혼자 가시면 저는 어떡하란 말입니까!" 사람들은 잠시 의혹의 시선을 모았다. 첫눈에도 빼어난 미모의 그 여인은 모두에게 낯선 사람이었다. 여인은 관을 내리고 있는 사람의 팔에 매달리며 계속 울부짖었다. "저도 선생님과 같이 묻어주세요!" 1984년 여름 초현실주의 시인 조향(1917~1984, 본명 조섭제)의 장례식 도중에 일어난 일이다.'   ◆ 시를 왜 낯설게 써야 하는가 : 퍼온 글 낯설게 하기, 즉 데빼이즈망(depaysement)의 본뜻은 고향(paynatal)에 편히 길들어 있는 것들을 일부러 낯선 곳, 타향으로 보내 불편하더라도 낯가림을 겪도록 유도한다는 뜻을 지닌 불어의 어휘(de-paysement)에서 연원했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낯선 표현, 낯선 기법에 의해서만 독자나 감상자의 관심과 주의를 환기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낯익은 것들은 지겹도록 우리를 지루하게 만드는 속성이 있다. 그러므로 낯익은 것들은 낡은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우리의 지각을 자극시키기는커녕 우리의 의식을 게을러지게 하거나 무감각하게 만든다. 가령,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라는 농담을 처음 들었을 때는 재미있는 표현에 웃음이 났지만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들었을 경우는 다르다. 이런 관점에서 훌륭한 문학 작품이란 사물을 이화(異化), 끊임없이 낯선 관점으로 이끌어냄으로써 감상자, 관객, 독자의 의식을 혁신적으로 일깨워 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의식이나 언어 습관은 일상화되거나 기계화, 자동화되기 쉽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새로운 언어, 새로운 기법으로 기존의 의미나 의식을 파괴하고 자율적 언어에 의한 독창적 의미의 틀을 이끌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일상적인 언어와 자율적인 언어의 차이란 평범한 보행과 예술가의 춤, 안무를 비교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문학적 언어 표현, 즉 자율적인 언어란 무용가가 창의적인 동작을 만들어 안무하는 춤과 같다고 보면 된다. 이와 반대로 일상적인 걸음걸이는 누구나 타성에 젖어 다만 걸어다니는 것 그 자체, 보행만을 의미하므로 무용가가 취하는 낯선 걸음걸이나 예술적 동작, 무대 위의 스텝과는 아무 연관도 없고 목적의식 자체도 다른 것이다. 자율적인 언어란 새로운 표현, 새로운 의미망을 구축한다는 의의를 지닌다. 무기력한 언어습관에 의해 무뎌지고 무감각해진 세상을 새롭게 자극, 각성시킴으로써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가능케 한다는 사실에 깊이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2009. 06. 09. 김영찬) [출처] 바다의 층계-조향|작성자 꿈꾸는 섬 조향(趙鄕) 시인의 시,        에스뀌스 ESQUISSE                                        ―조향(趙鄕)               1 눈을 감으며. SUNA는 내 손을 찾는다. 손을 사뿐 포개어 본다. 따스한 것이. ―――― 그저 그런 거예요! ―――― 뭐가? ―――― 세상이. SUNA의 이마가 하아얗다. 넓다.              2 SUNA의. 눈망울엔. 내 잃어버린 호수가 있다. 백조가 한 마리. 내 그 날의 산맥을 넘는다.              3 가느다랗게. 스물다섯 살이 한숨을 한다. ―――― 또 나일 한 살 더 먹었어요! SUNA는 다시 눈을 감고. ―――― 그저 그런 거예요! 아미에 하얀 수심이 어린다.                 4 ―――― 속치마 바람인데.…… ―――― 돌아서 줄까? ―――― 응! 유리창 너머 찬 하늘이 내 이마에 차다.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됐어요.                 5 SUNA가 화장을 한다. ―――― 화장도 예술 아녜요? SUNA의 어깨 넘으로 내 얼굴이 쏘옥 돋아난다. 나란히 나와 SUNA의 얼굴이. 거울 안에서. ―――― 꼭 아버지와 딸 같아요.              6 SUNA의 하얀 모가지에 목걸이. 목걸이에 예쁜 노란 열쇠가 달려 있다. ―――― 이걸로 당신의 비밀을 열어 보겠어요.              7 STEFANO의 목청에 취하면서. 눈으로 SUNA를 만져 본다. 오랜 동안. ―――― 왜 그렇게 빤히 보세요? ―――― 이뻐서. ―――― 그저 그런 거예요!              8 나의 SUNA와 헤어진다. 까아만 밤 ․ 거리 . 택시 프론트 그라스에 마구 달겨드는. 진눈깨비 같은 나비떼 같은. 내 허망의 쪼각 쪼각들. 앙가슴에 마구 받아 안으며. SUNA의 눈망울이. 검은 하늘에 참은 많이 박혀 있다. 깜박인다. 「그저 그런 거예요」                *自由文學, 4월호(1960년) 조향(趙鄕)전집 1994년 간행(刊行).      ㅡㅡㅡ(추천글 한편 더...) 거의 반세기 전에 씌여진 조향 (趙鄕)의 시, 와 같이 다소 특이한 시를 이 시를 의도적으로 소개하는 저의 의도는, 쉽고 암송이 잘 되어 뭇 사람들에게 자주 읽히고 자주 거론되는 시들이라면 구태여 시간랑비하면서 시평하지 않으려는생각이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쉬운 주제로 쉽게 풀어간 시를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봅니다. 왜냐면 복잡한 현대문명 속에서 사는 저에게 이해인, 서정윤, 용혜원, 원재훈 등의 시인들이 노래하는 정서나 어법은 별천지 이야기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의 시는 진통제와 같은 효능이 있어서 이제 시를 좋아하는 독자들이 읽으면 마음 이 편해지고 정신적 위안과 기쁨을 준다는 사실에 저는 주목합니다. 이 시대를 사는 저는 , 그렇지만, 웬일이지 그들 시에서 위안이나 기쁨은커녕 미구에 닥쳐 올 예고 없는 불안만을 앞당겨 느낍니다. 이 시대는 분명 불합리, 모순, 불소통, 애매함, 불신, 모호한 시대로써 인간성 회복을 위 한 반문명 운동이라도 부르짖어야 할만큼 문명 자체가 위험 수위의 타락 지점에 와 있는 데 시인들은 그렇게 안이할 수만 있는가 하는 위기의식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시대에 맞는 오브제와 이 시대에 맞는 어법이 따로 있어야 하겠거니 하 며 이 땅에 등장할 위대한 시인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대중과의 소통? 실은, 그 것이 소통이 아니라 오해일 수도 있습니다. 안 읽히고 안 들어오며 이해 안 되는 시가 어쩌면 현대인이 처한 상황 그대로 이며, 그 불통과 불안, 미완성, 난해성, 애매함, 해석 안됨이야말로 소통 안 되는 문명자체의 속성이라 하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치료약 대신 진통제가 필요하듯이, 편안한 정서로 편안하게 노래하는 시와 시인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저는 의문을 갖음과 동시에 그렇지만 그럴 수 있다고 경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조향의 시에 녹아있는 이색적인 정서는 오늘날의 독자들에게조차(오늘날의 contemporary 한국현대시단에서조차도) 그렇게 낯익은 것은 아닙니다. 그는 순수 이미지즘 image pure을 주장한 보기 드문 모던이스트였지요. 그가 추구한 세계는 근대문명, 즉 메카니즘 속에서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겠습니다. 즉 기관차, 기중기, 아코디언, 전화기 등의 기계, 기계문명 속에서 인간이 향유할 낭만적 공간은 과연 어디란 말인가, 이 각박한 현대에 인간의 낭만이 병존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 에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도저히 들어설 수 없는 자리인 기중기 와 기관차, 전화 벨 소리에 자연의 일부라할 허약한 존재인 들국화와 나비를 끼워 넣는데 절묘한 기법 데뻬이즈망 을 도입하여 완성한 시가 바로 라고 생각합니다.   이 극한 대비에 의한 꼴라쥬기법의 완성은 조향 시인에게 적어도 희열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우리가 편안하게 읽어 내려간 시에서는 느끼지 못한 또 다른 기쁨과 성취를 어떤 독자들은 스스로 얻어냈을 것입니다. 전에 제가 소개한 박정대 시인의 시는 조향의 모던이즘 시에 일련의 맥이 닿아 있는 것 같다고 저는 파악합니다. (소개글)          
60    동시와 기호학 댓글:  조회:4892  추천:0  2015-02-04
기호 언어를 통한 동시 쓰기 / 김재수     1. 들어가면서  흔히 요즘을 정보화 시대라 한다. 이는 컴퓨터의 출현과 인터넷이 서로 연결됨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이러한 정보들은 어제의 지식이 오늘은 쓸모없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 새로운 지식들이 수없이 양산되고 있다. 이와 발맞추어 컴퓨터와 인터넷에 관계된 새로운 용어들도 매일 새롭게 나타나고 있다. 더구나 이러한 용어들은 우리말로 바꾸는 걸림 작용을 거치지 않고 외래어나 신조어 그대로 사용되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정보화 사회에서 왕따가 될 경우도 생기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인터넷 상에 활용되고 있는 여러 가지 언어들 가운데 컴퓨터를 활용하기위해서 사용하는 언어와 채팅에서 사용하는 특정언어들이 나타나 우리를 황당하게 하고 있는데 흔히 이를 컴퓨터․채팅언어라고 한다. 이러한 언어는 일상적인 언어에 비해 아직은 언어(言語)라기보다 은어(隱語)라고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은어들이 컴퓨터나 채팅에서는 이미 언어로 사용하고 있음을 관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은어 가운데는 특수한 의미를 갖는 용어 말고도 특정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기호도 생산되고 있는데 인터넷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에는 통신회사(천리안, 나우누리, 유니텔, 하이텔 등)에서 제공하는 채팅방을 통해 리얼타임으로의 나타나기 시작했다.  90년대 후반에서부터 개발되어 보급되기 시작한 음성채팅, 한걸음 나아가 영상채팅까지 가능해지긴 했지만, 아직도 채팅을 위해서는 워딩 작업을 통해 커뮤니케이션을 해결하는 것이 가장 고전적이면서도 가장 보편적인 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다.  워딩 작업은 채팅자의 능력에 따라 속도의 차이가 현저하고, 지금처럼 인터넷 전용선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전화선을 공동으로 사용하였으므로 전송속도가 한계가 있어, 장시간의 채팅은 경제적으로 많은 부담을 준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경제적, 시간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점차 채팅을 즐기는 동호인들은 자신들만의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서 긴 단어를 함축하여 생략하거나 특수한 기호를 사용하여 나름대로의 커뮤니케이션을 형성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채팅자들의 전유물처럼 사용되던 채팅용어는 어느 사이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게 되었고, 우리 국어의 순수성을 해친다는 비사회적인 측면이 강조되면서도 하나의 언어현상으로 자리 메김 하는 결과를 낳았다. 흔히 언어의 역사성이나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볼 때 언어는 사용하는 시대의 문화에 따라 살아남기도 하고 죽어 버리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용어에 대해서 옳고 그럼을 떠나 한번 쯤 관심을 가지는 일도 필요하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현실적인 측면에서 인터넷상의 대화 언어 중, 시로서 차용이 가능한 기호 언어를 살펴봄으로 그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이미 우리 시단이나 해외에서는 실험정신이 강한 이들이 숫자나 기호를 이용해 시를 쓴 경우들이 있다. 하지만 아동문학에서는 ‘아동문학’이라는 특성과 한계가 바른 언어사용에 대해 효용성이나 교육성에 배치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 환영받지 못했거니와 ‘채팅’이란 용어가 주는 어감이 아직은 부정적인 까닭에 이를 본격적으로 활용한 예는 드물었다고 본다. 다만 낱말의 크기, 형태, 배치의 방법, 글자의 방향을 변경 등 문자가 자리할 지면이라는 평면 환경에 변화를 주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 하려는 경우는 있지만 본격적으로 사용된 경우는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이미 오래 전부터 해 왔음은 사실이다.  “그 누가 새 붓을 잡아 강물 위에 저렇게 새을(乙)자를 썼나??”  이 시는 고려시대 문장가인 정지상이 어린 시절에 쓴 시의 한 구절이다.  강물에 헤엄을 치는 물오리들을 보면서 한자의 ‘乙’자를 연상했으니 가히 동심의 눈으로 포착한 기막힌 발상이 아닌가?  이 외에도 한 마리 한 마리의 개미가 기어가는 모습을 보고“ ‘3’이라는 아라비아 숫자와 같다”라고 표현한 프랑스의 르나르라는 시인의 관찰력도 그리고 개미와 ‘3’이라는 숫자와 관계 지음도 놀랍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천재시인 이상도 일찍이 이러한 시도를 했지 않았던가?  시는 감동의 형상화를 거쳐야 한다. 다시 말하면 시적 감동을 이미지 화 해야 시로서 생명력을 얻는다. 이를 위해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모든 감각기관을 총 동원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도 결국은 시각적인 문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한계에 부딪친다. 이럴 경우 일반적인 문자보다 형상화 된 기호를 사용함으로서 이미지의 포착에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2. 인터넷 채팅 언어들의 종류  우리가 일반적으로 채팅에서 사용하는 특정언어에 대해 채팅언어라고 말하고 있지만, 채팅언어에는 특수한 의미를 갖는 용어 말고도 특정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기호도 포함되어 있다. 즉, 채팅언어와 채팅문자를 하나로 묶어 채팅용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채팅용어는 다음 몇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 "조아(좋아)" "만타(많다)" "어뜨케(어떻게)" "추카추카(축하축하)" 등 소리 나는 대로 쓰기이다.  둘째,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의 단순 줄임이나 음절 축약의 경우이다.  강퇴:강제퇴장, 천랸:천리안, 방장:대화방의 대장, 안냐세요: 안녕하세요  비번:비밀번호, 낼:내일, 몰팅:몰래하는 채팅, 야녀:야한여자, 번개off-line:깜짝 만남  셋째, 현재 컴퓨터상에 사용되는 각종 이모티콘(emoticon)이나 기호를 하나의 언어로 인식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컴퓨터의 자판에 나와 있는 기호들을 조합함으로 새로운 느낌의 기호를 만든 경우이다.  ^^ = 미소, *^^*, ^_^, ^.^ = 스마일, 웃음, :-), :-( :*< : 에그머니나  1919 : 아이구아이구  20000 : 이만  2929 : 에구에구  50쇼 : 어서 오십시오  8-) : 안경잡이  -ㅅ- : 황당하다  BF : Best Friend. 좋은 친구  DB : 담배  GG : 좋은 게임. good game 의 약자  IBM : 이미 버린 몸  KIN : 즐(세워서 보면 한글 ‘즐’)  OTL : 좌절. 무릎을 꿇고 좌절하는 모습의 상형자.  P방 : 피시방  RG : 알지?  T_T, !_! : 우는 모습,  ☜=이쪽으로  ⁂=눈 내림  ☆=별  ☎=전화  ☼=해  ☾=달  ✉=편지  ㄱ- : 절망  ㄱ-- : 절망  ㄱㅅ : 감사  감4 : 감사  근D : 그런데  ㄳ : 감사  ㄴㄴ : 노노.,아니에요  ㅂㅂ : 마지막 인사말, 바이바이  ㅂㅂ,ㅂ2-잘가, 빠이빠이  ㅂㅅ : 병신  밥5 : 바보  ㅅㄱ = 수고 하세요,  ㅆㅂ : 씨발 (또는 ㅅㅂ)  ㅇ,ㅇ : 긍정적  ㅇㄷ? : 어디 위치를 뭇는 거  ㅗ : 엿 이라는 뜻 ㅋ 욕할 때  ㅜㅜ ,ㅠㅠ : 그냥 우는 거, 슬플 때  ㅜㅜ : 절망  ㅜㅡㅜ : 왠지 귀엽게 우는 표정  ㅉㅉ : 쯧쯧  ㅊㅋ : 축하  ㅋㅋ, ㅎㅎ : 웃을 때  ㅎ2 : 안녕  ㅎ2 : 하이 의 숫자와 한글 조합한 거  ㅎㄷㄷ : 후덜덜 무서울 때..  ㅎㅎ : 호호, 후후, 허허, 히히  4. 기호 언어로 쓴 동시  필자는 동시를 쓰면서 이미지의 선명함을 위해 문자나 기호를 사용해 본 경험이 있다. 다음 두 편의 시는 이러한 생각을 염두에 두고 쓴 시이다.  목련  새들이 수다를 떨어  아침을 열고 간  담장  무슨 소릴 하고 갔기에  그랬을까?  밤새  퉁퉁 부은 눈망울로  입 다물던 꽃가지마다  참다 참다가  한꺼번에 터져 버린  하,하,하,하,하,  하, 하,  하,하,하,  하  하,하, 하,하, 하,하,하  목련꽃의 모습을 ‘하’라는 웃음과 ‘하얗다’라는 꽃이 주는 색의 이미지와 점점 많이 피어나는 꽃송이를 ‘하’라는 문자로 이미지화 한 경우이다.  눈 오는 날  이메일을 열었다  깜박이는 커서가  반가움으로 다가온다  창밖을 보며  키보드를 친다  톡톡  톡톡톡  자판으로  네 마음을 두드린다  . .  .. ...  ...  .... ....  ...... ....  까만 역상의 화면에  하얀 글씨가  소복소복 쌓인다.  위의 경우는 까만 하늘에 하얗게 내리는 눈을 형상화 해 본 것인데 컴을 다루는 솜씨가 미숙해서 그 효과는 좀 그렇다.  위 두 편을 쓴 이후 보다 효과적으로 시각화 할 수 없을까 생각했다. 그러다가 ‘상주의 방언’을 연구하면서 ‘사회적 방언’에 눈길이 갔고 이 사회적 방언에서 요즘 유행하는 은어(隱語)를 정리하던 중 컴퓨터 대화 언어를 발견하였다.  다음 작품은 이를 바탕으로 최근에 의도적으로 쓴 시이다.  호박꽃  “너도 꽃이니?”  빨간 홍초가 놀려도  “ ^^ ”  “색깔도 촌스러워라”  장미가 빈정거려도  “ ^^~ "  “ 이 정도는 돼야지 ”  다알리아가 뽐내도  “ ^*^ ”  환하게 웃으며 꽃등만 달더니  “ ^^, ^^~, ^*^ ”  웃음만큼 조롱조롱 번지는  토담 위 호박꽃.  도토리(1)  떼구르르-  내 앞에 와서 멈춘다.  허리를 굽혀 주우려는데  누가 보는 것 같다  데록데록  오물오물  다람쥐와 눈이 마주쳤다.  “ ^*^ ”  “ ~^@^~ ”  못 본채 돌아서서  걸었다.  “ ~^@^~  안 봐도 보인다.  오물오물  좋아 하는 거.  도토리(2)  “톡-”  도토리 하나가 나무에서  떨어졌다.  쉿!  나무도 풀도 갑자기 숨을 멈춘다.  바람도 잠시 멈춰 섰다.  땅이 천천히 팔을 벌리고  앉아 쉬기 편하도록  자리를 펴고 있었다.  ☞ ◉ ☜  편안해 보였다.  봄  온 몸이 자꾸  간지러웠다.  어디 뾰루지라도 나려나  † ‡  @*@, #*# ...  여린 싹이 흙을 뚫고 나왔네  땅이 갈라지느라고  그랬나 보구나  풀과 나무 잎에도  총총  이슬이 맺혔다  --;  1919  힘들었나보구나.  전화  ☎~~~  ☎~~~  아무리 멀리 있어도  내 목소리가 달려간다.  금방  네 목소리도 달려온다.  소리만 들어도  얼굴이 보인다.  ^*^ ?  >*< ?  =_= ?  내 얼굴도 보일까봐  ^*^  ㅋ ㅋ ㅋ  가을걷이  손바닥 만 한  텃밭에 앉아  할아버지 할머니  타작을 하신다.  “나 여기 있어요.”  “나도 여기 있어요.”  들깨도 콩도  깍지에서 튀어 나온다.  ...˚․˚.  . ... .  .. .. ..  깨알은 쓸어 모아  ✉,  ○○○ ○  ○○ ○○○  까만 콩도 쓸어 모아  ✉✉✉  봉지는 달라도  두 분은 마주보며  ~^*^, ^*^~  맺는 말  시도한다는 건 조금은 용기가 필요하다. 더구나 은어가 사회적으로 환영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은어적(隱語的) 언어로 시를 쓴다는 건 모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은어들이 현실 생활에서 이미 생활언어로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이러한 기호로 어린이나 젊은이들은 자기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언어생활에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다. 이 말은 이 언어들이 대단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언어의 역사를 볼 때 생명력을 가진 언어는 살아남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죽어버린 경우를 많이 보고 있다. 모든 문화는 그 문화를 향유하며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이 많고 사회적으로 확산 될 때 생명을 가지는 것처럼. 앞으로 이런 추세라면 이러한 은어들이 새로운 언어로 자리매김할 것이라는 예측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내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써 온 것이라는 것을 밝힌다.  * 이 글은 신지영 동시인이 "오늘의 동시문학" 2010년 봄호에 위 글에 대한 "반론 토론"으로 제시한 글입니다. 토론  아동문학에 있어 한글 이외에 의미전달 기호 허용에 대한 탐구  -김재수 시인의 ‘기호 언어를 통한 동시 쓰기’를 읽고  신지영(동시인)  들어가며  2009년 ‘오늘의 동시문학’ 겨울호에 실린 김재수 시인(이하 경칭 생략)의 기고문 ‘기호 언어를 통한 동시 쓰기’에서 제기된, 문자 기호 이외의 기호를 사용하는 문제는, 동시 표현 방법의 외연 확대에 관한 것으로서 매우 흥미로운 화두라 할 수 있다. 아직까지 시도되지 않은 새로운 동시 쓰기의 방법 모색은, 필연적으로 새로움을 추구해야만 하는 시인들이 끊임없이 연구해야 하는 과제 중의 하나인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새로운 동시 쓰기를 위한 방법 모색에 앞서 염두해야 할 점은 외연을 넓히는 실험에 있어서 그것이 동시라는 장르적 틀의 허용범위 내에 있는지의 여부에 대한 숙고라 할 것이다. 격변하는 시대에 도태되지 않는 새로운 표현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장르의 범주를 넘어서는 순간 그 작품은 더 이상 그 장르의 내부에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더 이상 그 장르의 이름표를 붙일 수 없게 된다. 김재수는 기고문에서 자신의 ‘기로 언어’라고 표현한 것을 제시하며 그것을 다섯 가지 분류로 나누고 있다. 그러나 첫 번째로 제시된 ‘조아(좋아)’, ‘만타(많다)’ 같은 표현들은 단순한 연철(連綴)이나 소리 나는 대로 발음하는 것에 지나지 아니하고, 두 번째 제시된 ‘강퇴(강제퇴장)’, ‘천랸(천리안)과 같은 줄임의 말의 경우는 특정 언어 사용 집단의 은어(隱語)에 불과하다. 이 두 가지는 그 본질이 언어적 문자기호로서, 비언어적 기호와는 그 차이를 달리하는 선상에 존재하고 있다.  또한 그 활용 여부 역시 시적 허용 범주 하에 기성 시단에서 과거부터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어, 어떤 새로운 양식이라고 볼 수 없으므로 특별히 논의의 대상으로 볼 수는 없으며, 김재수 역시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 제시한 아이소타이프(Isotype)는 그 본질상 이모티콘과 동일하게, 의미를 전달하는 비언어적 시각기호라고 할 수 있으므로 이모티콘의 허용 여부와 동일하게 평가하면 될 것이다.  이하 본 글에서는 첫 번째로, 문맥상,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독자에게 혼돈을 줄 수 있는 ‘기호’라는 개념에 대해 우선적으로 통일 된 정의를 내린 다음 음성 기호의 시각적 변환인 언어적 문자 기호와 비언어적 감성 기호로서의 이모티콘을 구분하기로 하며, 그 후 동시에서 이모티콘의 허용 여부와 한글 자음으로만 구성된 초성조합이 허용될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나아가 동시가 아닌 어린이와의 커뮤니케이션 단계에서 그러한 비언어적 기호들의 사용 여부와, 보론(補論)으로 아동문학과 대비되는 지위로서의 성인문학에서 소위 해체시라 불리는 것들이, 동시에 있어 허용 가능하지의 여부에 대하여 논의를 펼쳐나갈 것이다.  1. 기호와 이모티콘의 정의  (1) 기호의 정의와 용어의 통일  기호는 어떠한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쓰이는 부호, 문자, 표지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음성, 표정, 몸짓, 문자, 그림, 음악, 이모티콘 등 지식, 의지, 감정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 일체가 기호의 부분집합에 해당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 기호는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수단이며, 따라서 모든 기호는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사용 될 수 있다 할 것이다.  대체적으로 기호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것은, 언어적 기호, 비언어적 기호를 모두 포함하지만, 김재수의 기고문에서 세 번째로 제시된‘기호언어’의 의미는 문맥상 비언어적 시각 기호를 통칭하는 것으로 보이며, 앞으로의 논의에서 필요한, ‘기호 언어’라고 제시된 것 중 세 번째 위치하는 이모티콘은 커뮤니케이션 이론에서 정의하는 대로 비언어적 시각 및 감성 기호로 표기하기로 한다.  (2) 이모티콘의 정의 이모티콘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대중문화와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환경이 접목되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모티콘(Emoticon:emotion과 icon의 합성어)의 어원에서 알 수 있듯 이 합성어는 새로운 형태의 시각 기호인 동시에 메시지에 포함되어 있는 발신자의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감성 기호로서 인터넷 채팅이나 휴대전화 문자 발신 시에 그 의미 작용과 역할을 수행한다.1)  2. 동시에서 이모티콘의 활용여부  아동문학이 문학이라는 이름표를 부착하고 있는 이상, 그것 역시 국문학의 하위 범주에 포함된다. 국문학이라 함은‘한국인이 한국어를 사용하여 한국인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한 예술 작품’을 의미한다. 이러한 국문학의 정의를 기호학적으로 접근할 때 의미있는 부분은 바로 ‘한국어를 사용하여’라는 부분이다. 한국어란, 음성 기호이자 언어기호로서 우리 겨레가 쓰고 있는 구체적인 말을 의미하며, 음성 기호를 기록으로 표현하는 수단으로 세종이 창제하여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문자 기호이자 언어 기로호서의 한글을 포함한다.(단 국문학의 범주에는 한글이 범용되기 이전의 향찰, 이두, 한문도 포함하다.)  그러기 때문에 일단 구비 전승되는 시가(詩歌), 전설(傳說)이 아닌 이상에야 국문학은 한글이라는 문자 기호로 이루어져야 하며, 마찬가지로 아동문학 역시 한글로 된 문자 기호로 이루어져야 한다(단 전체적으로 한국어로 씌어졌다고 볼 만한 분량의 작품에서 음성으로 전환될 될 수 있는 소량의 외국어, 아라비아 숫자 등은 사용되어도 국문학으로 본다.) 이제 이모티콘이라는 비언어적 시각 기호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지와 비언어 기로호서의 이모티콘과는 다르게, 본질적으로 언어 기호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한글 자모의 단독 사용이 과연 한글의 음소문자로서의 성격과 관련하여 동시에 허용되는지 여부를 살펴보기로 한다.  (1) 동시에 있어 독음(讀音)할 수 없는 비언어적 기호의 사용 여부  국문학상의 시의 정의는 ‘자연이나 인생에 대하여 일어나는 감흥과 사상 따위를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로 표현한 글’을 의미한다. 또한 국문학상에서 동시의 정의는 ‘주로 어린이를 독자로 예상하고 어린이의 정서를 읊은 시’를 의미한다. 이 정의에서 볼 수 있듯 동시 역시 어니이의 정서를 읊음과 동시에 ‘시’의 범주 안에 들어가기 때문에 시의 조건을 그대로 충족하여야 한다. 따라서 동시 역시 시가 가져야 될 핵심 징표인 ‘gkaa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를 가져야 한다. 그렇다면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라 무엇이가? 운율이란 ‘시문(詩文)의 음성적 형식, 음의 강약, 장단, 고저 또는 동음이나 유음의 반복으로 이루어진다.’고 정의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음성적 형식, 음의 강약, 장단, 고저 또는 동음, 유음의 반복 등 운율을 의미하는 것의 필수적인 선행조건은 바로 문자 기호의 소리 기호로의 전환, 즉 한국어의 음성 기호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동시 또는 시에서 독음을 할 수 없는 비언어적 기호하는 것은, 태생적으로 운율을 가질 수 없는 기호로서, 운문이라는 존재 징표를 필요로 하는 시의 구성 요소로 들어가기 어렵다는 것이다.  나아가 ‘함축적 언어’라는 부차적 시의 징표에서도, ‘언어’라는 문자 기호를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모티콘 같은 비언어적 시각 기호는 시의 구성 요소로 보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동시의 본령이라고 볼 수 있는 동요로 전환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활용 면에서도 그 이점이 크지 않다. 그러므로 이코티콘은 감정 전달이나, 이미지 전달에 있어 한글이라는 문자 기호보다 어느 측면에선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장점에도 불구하고 동시라는 장르의 한계 밖에 위치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만약 운율을 가질 수 없는 이모티콘이라는 비언어적 시각 기호를 동시라고 하여도, 그것이 왜 동시가 아닌지에 대한 논증 근거를 우리는 가질 수가 없다. 이는 동시의 외연을 넓히려는 실험이, 오히려 동시의 존립 근거를 사라지게 만드는 우려를 가져오게 할 수도 있다.  (2) 동시에 있어 조합되지 않은 한글 자모의 단독 배치 허용 여부  동시 역시 국문학이고 입말문학(口碑文學)이 아닌 기록된 형태의 문학이기 때문에 한글이라는 언어-문자 기호로 기술된다. 또한 동시는 대체적으로 아동이 시초부터 일정 부분까지 한국어와 한글을 익힐 때 그 수단으로 사용되는 빈도가 가장 높은 장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동시는 예술적 완성도와 함께 어린이에게 한글이라는 문자 기호와 그 문자 기호를 음소에 따라 발음을 낼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특수한 교육적 기능을 수행하는 장르이기도 하다.  한글을 포함한 대부분 문자는 표음문자이고, 한글은 그 안에 반드시 소리를 구성하는 부분을 가지고 있는 음소문자이다. 한글을 포함한 대부분 문자 체계에서 음소들은 자음과 모음으로 나뉜다. 문자의 발전사를 살펴 볼 대, 초기의 음소문자 체계는 히브리어에서와 같이 자음만으로 이뤄졌고 그 사용에 있어 매우 불편하였다. 예컨대 ‘ㅂ ㅂ’이라는 표기를 접했을 때, 김재수는 ‘ㅂ ㅂ’을 처음에는 ‘바이바이’의 소리를 가진 기호로 표기하고, 그 다음 목차에서는 ‘ㅂ ㅂ’를 ‘바보’의 소리를 가진 기호로 표기하듯이, 불안전하고 그 발음에 혼란을 가져오는 기호 체계였다. 그런 후에 인류의 지성이 발달하고, 문자가 발전함에 따라 모음문자가 나타나게 되며, 각 문화권의 음소에 적절히 추가되었고, 그러한 추가가 완성된 후 페니키아 문자를 비롯한 각종 알파벳이 등장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한글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음소문자는 자음과 모음이 규칙적으로 조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그들의 알파벳이 처음부터 어떤 규칙성을 가지고 창제된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필요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지금의 문자 구성을 이룬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church"같은 모음 하나에 자음이 다섯 개인 1음절의 소리는 알파벳의 성질로부터 어떠한 발음 규칙을 추측해 낼 수 없다. 그러므로 알파벳 사용자들은 모음과 결합하지 않은 새로운 신조어가 나왔을 경우, 그 발음은 누군가가 정의해 주기 전까지 통일된 발음을 이끌어 낼 수 없는 원시적인 문자 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세종이 창제한 한글만큼은 이런 한계를 극복한 것으로서 어떤 자음이든지 혼자만으로는 발음할 수 없고, 반듯이 모음과 어울려서 발음하도록 규정한 최초의 문자 체계이다. 세종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의 발음은 중성 모음 단독, 초성 자음, 중성모음, 종성 모음의 4가지 조합으로 가능하며, 그 조합에 따라 다양한 소리를 낼 수 있다. 이 조합의 배열에 숙련된 경우, 한글 사용자는 한글로 구성된 어떠한 배열이 나와도 그것을 동일하게 읽고, 발음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는 한글이 매우 진보된 문자 체계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한글에서는 ‘church"를’ ‘ㅊ ㅓ ㄹ ㅊ’라고 쓰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누구든지 한글로 의사소통을 하려는 자는 ‘처치’라고 쓰고 ‘처치’라고 발음하여야 그 용법에 혼란이 없다. 이러한 탁월한 언어학적 성취는 한글이 세계 문자 가운데 가장 과학적이고, 우수한 문자로 선정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한글 제자 원리로 자음과 모음의 조형을 접하고, 그 조형에 따른 음성 기로호서 한국어 발음으로의 전환을 배울 수 있는 곳이 바로 동시이다. 그러기 때문에 동시에서는 그 내용과 더불어 또 한 가지의 중요한 목표로서, 어린이의 국어 능력 소양의 발달에 일정부분 책임을 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작품 자체의 예술적 감흥 뿐 아니라 국어 능력 고양이라는 이중적 역할이 필요한 바, 국어사용 능력이 완전하지 못한 어린이에게 있어 최우선 순위의 의미 전달 기호는 올바른 의미의 한글이어야 할 것이다. 또한 그 제자 원리를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이 동시의 목표 중 하나일 것이다. 이는 어린이가 일정 정도의 국어 능력을 갖추기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것으로, 올바른 국어 생활을 위해서는 한글의 적확(的確)한 사용과 그 사용례를 가르치는 것이 아동문학의 목표 중 하나인 것이다.  ‘시인은 오직 모국어 속에서만 시인이다’ 라는 유종호의 선언처럼, 동시인 역시 최우선적으로 염두에 둬야 할 부분은 모국어의 정련일 것이다. 한글이라는 우수하고 진보된 문자 체계의 제자 원리를 무시하면서까지, 동시의 외연을 넓히려는 시도는 환영받을 수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동시에서 한글의 제자 원리를 무시하는 음소의 단독 사용은 장려받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3. 컴뮤니케이션의 도구로서의 이모티콘의 활용  어린이를 위한 커뮤니케이션의 범주는 매우 다양하다. 언어 기호로서 음성 기호와 문자 기호를 사용하는 아동문학뿐 아니라 몸짓 기호를 사용하는 아동극과 무용, 문자 기호와 회화 기호를 사용하는 아동 그림책, 음악 기호와 소리 기호의 결합인 동요 등 어린이와의 커뮤니케이션에 관련된 분야에서 커뮤니케이션에 사용될 수 있는 기호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볼 수 있다. 즉 커뮤니케이션의 범주 안에서는 모든 종류의 기호가사용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모티콘이라는 시각 감성 기호 역시 아동과의 커뮤니케이션의 영역에서는 상당히 강력한 의사 전달 수다으로 사용될 수 잇다. 예를 들어 한글을 모르는 외국 어린이와의 커뮤니케이션에서 바디랭귀지와 같은 몸짓 기호나, 이모티콘 같은 비언어적 시각 기호의 위력은 그 의미 전달에 있어 문자 언어보다 더 강력한 의사전달 기능을 발휘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모티콘 같은 비언어적 시각 기호의 활용은 언어 기호의 사용이필수적인 동시의 영역에서는 활용이 어렵지만, 그 외의 커뮤니케이션의영역에서는 김재수의 제언처럼 의사 전달의 측면에서 강력하게 활용될 소지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연구하는 것 역시 아동문학인으로서 역할 중 하나라 할 것이고, 그러한 새로운 양식의 개척이 곧 아동문학의 외연을 넓히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모티콘은 다른 문자 기호나 시각 기호에 비하여 감성 표현의 측면에서 강하지만,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기호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감정표현의 명확성, 메시지 이해의 편자, 메시지 내용 전달의 효용성 등 보완점이 필요하다.2)  본론  동시에 있어 해체시 운동이 필요한지 여부  김재수의 문제 제기와 더불어, 아동문학에 대비되는 지위로서의 성인문학에서는 이미 이러한 비언어적 시각 기호를 시에 사용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소위 해체시라 불리는 일련의 작품들이다. 해체(Deconstruction)란 프랑스의 쟈크 데리다가 주도한 비평 방법으로 서양의 형이상학적이며 로고스적인 ‘말 중심주의(Logocentrism)"의 허와 실을 여과 없이 보여줌으로써 언어를 개념과 대상으로부터 해방시키기를 시도했다.  데리다에게 해체란 뮈토스와 로고스를 엄격히 구별하는 플라톤 이래 모든 철학이 문학적인 것에 집요하게 반대 해온 투쟁의 종말이지도 모른다. 데리다는 이 작업을 통해 철학과 문학의 경계를 허물고 특정한 분야의 전문적인 텍스트마저도 시적이며 창조적으로 변형시킴으로서 무한한 자유놀이를 하는 텍스트로 번안해 낼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3)  한국문학에서는 1980년대 박남철과 황지우 등에 의해 씌어진 기존의 시 형태를 파괴한 아방가르드 실험 시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김준오가 1992년 펴낸 에서 사용되었다. 구체적인 작품으로는 황지우의 ‘한국생명보험회사 송일환 시의 어느 날’ 같은 것이 있다. 이 시(?)는 작품의 중간에 시사만화가 안의섭의 ‘두꺼비’라는 신문 만평을 그대로 지면에 옮겨 놓았다. 언어 기호가 아닌 시각 기호로서 회화 기호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은 위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시의 개념 징표로서 필요한 ‘운율을 가진 간결한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를 시라 불러야 할지에 대해 논의가 있으나 필자는 이 작품을 시라고 부르기 보다는 행위 예술적 측면에서 하나의 퍼포먼스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고 본다. 작품의 행위자 황지우 본인의 표현대로, 황지우의 ‘나는 말할 수 없음으로 양식을 파괴한다. 아니 파괴를 양식화한다’4)는 것처럼. ‘말 할 수 없다’는 것은 곧 음성 기호로 표현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말을 하는 양식을 파괴하겠다는 것은 곧 시의 조재 증명인 운율을 포기하겠다는 선언과 다름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황지우의 행위 예술은 시라는 양식을 해체함으로써, 파괴라는 새로운 양식을 설정한 것이고, 그것이 시가 아닌 해체시라 불리는 까닭이기도 하다. 따라서 황지우의 이 행위에 대한 지지와 반대를 떠나, 이 행위는 이미 시의 범주를 넘어선 새로운 양식의 한 갈래이기 때문에 더 이상 전통적인 시를 읽는 독법으로 읽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렇지만 해체시 역시 시의 한 갈래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존재하는 바, 이러한 견해를 다를 때, 과연 동시에서도 비언어적 시각 기호를 사용하여, 해체 동시(?) 라는 양식을 인정할 수 있는가의 가상적 논의 역시 한번쯤은 필요할 것이다. Deconstruction, 즉 해체라는 것은 Construction, 즉 건축한 것을 제거하는(De-)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해체를 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무언가가 구축되어 있어야 한다. 이를 시에 적용한다면 시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시에 대한 이해가 구축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동시에 있어 해체 동시가 필요하다면, 동시에 대한 이해가 구축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동시의 개념 징표에서와 같이, 동시는 ‘어린이를 독자로 예상’한 시이다. 그러므로 시인 자체는 동시에 대한 이해가 구축되어 있을 수 있지만 독자인 어린이는 아직 동시에 대한 이해가 구축되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기는 어렵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동시의 역할은 시에 대한 이해태도를 갖추기 위한 구축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아직 시에 대한 이해도가 완숙하지 않은 어린이에게 해체를 먼저 배우라는 것은 걷기도 전에 뛰는 법을 배우라는 것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동문학에서의 해체 동시라는 개념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본다.  나오며  급속도로 변화되는 현대에서 모든 예술은 시대의 정보와 유연성에 맞추어 자신의 몸을 변화시키며 동시대를 비평하거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거나 융합된다. 예술은 고유한 가치인 자신만의 아우라를 지켜내며 지나간 시대의 형식을 답습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 이유는 예술이 갖고 있는 태생적인 천성 때문일 것이다. 고루해지지 않으려는 본능, 상투적인 인습과 제도의 틀에 갇히지 않으려는 자유로움, 결코 시대를 변명하지 않는 자존감 등은 예술이 자신을 지켜내는 독자적인 생존 본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들이 모여서 발현할 때 한 가지 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가장 근본적인 장르의 틀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자신의 이름으로 가치를 창출해 내는 것은 오로지 자신일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 자신이 이미 자신을 버리고 다른 대상의 이름을 취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자신의 이름을 지킬 수 없게 된다. 새로움에 목말라 자칫 잊기 쉬운 이 기본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어느 순간 가장 지키고 싶었던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 아래 글은 동시인 신지영씨의 토론에 다시 반론으로 쓴 글입니다. 동시에서 기호언어 사용과 해체시  -아동문학에 있어 한글 이외의 의미전달 기호 허용에 대한 탐구-를 읽고  김재수  들어가면서  2009년 ‘오늘의 동시문학’ 겨울호(28호 p110~p123)에 “기호언어를 통한 동시 쓰기”란 제목의 글을 기고한바 있다. 이 글을 기고하면서 ‘채팅용어’가 사회적으로 아직은 긍정적으로 수용되지 않는 상태이고 이런 용어들로부터 만들어진 기호언어들이 아직 은어(隱語) 수준이며 더구나 아동문학에서 은어적(隱語的) 언어로 시를 쓴다는 건 모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은어들이 어린이뿐만 아니라 청소년과 어른들도 즐겨 사용하고 있으며 우리 국어의 순수성을 해친다는 일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언어현상으로 자리 메김 하고 있는 현실이다.  아동문학에서 이러한 기호언어의 사용이 과연 가치 있는 일이냐에 대해서는 섣불리 예단할 수 없다. 이러함에도 이 글을 편집자와 의논하여 기고하게 된 까닭은 이를 계기로 그동안 우리 아동문학계에 뜸했던 토론의 장이 열릴 것 같고 동시가 보다 새롭게 발전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다.  이 글이 ‘오늘의 동시문학’ 카페에도 등재되면서 온라인상에서 몇몇 분들이 격려와 우려의 댓글을 달아 관심을 가졌는데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이상 댓글이 달리지 않았다. 그러다 2010년 봄호(29호 p168~178)에 신지영 동시인이 “아동문학에 있어 한글 이외의 의미전달 기호 허용에 대한 탐구”가 토론의 주제로 게제 되어 고맙기도 하고 다행스러웠다.  신지영 동시인(이하 경칭생략)은 매우 논리정연하게 ‘기호와 이모티콘의 정의’를 시작으로 ‘동시에서 이모티콘의 활용 여부’, 특히 ‘동시에 있어 독음할 수 없는 비언어적 기호의 사용여부’, ‘동시에 있어 조합되지 않은 한글 자모의 단독 배치 허용 여부’,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서의 이모티콘의 활용’, ‘동시에 있어 해체시 운동이 필요한지’에 대해 해박한 시론과 구체적인 사례를 언급하였다. 그런데 필자의 견해에 다소 비판적인 측면에서 자기의 주장을 제시 하였다.  하여, 필자의 의도와 다른 견해는 다시 설명하고 간혹 논리의 비약이 심하다할 부분은 지적하여 오해를 바로 잡고자하며 편의상 신지영이 제시한 논의의 순서를 따라 이 글을 풀어나가고자 한다.  1. 동시라는 장르적 틀의 허용범위에 대하여  신지영은 이 글의 서두에서 기호언어 사용이 동시 쓰기를 위한 방법의 모색이라 해도 동시라는 장르적 틀의 허용범위 내에 있는지 여부를 고려해야 하고 새로운 표현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장르의 범주를 넘어서면 그 작품은 장르의 이름표를 붙일 수 없게 됨을 우려하였다.  우리나라 동시의 출발을 계간 ‘오늘의 동시문학’은 1908년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기점으로 잡고, 2008년을 ‘한국동시100주년’에 대해 집중 조명하였다. 이로 보면 우리 동시의 역사는 이제 100년에 불과하다. 동시라는 이름표를 달고 본격 동시가 씌어 지기 전엔 전래동요가 유일했고, 1923년 소파가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고 여기에 ‘형제별’, ‘늙은 잠자리’를 발표하면서 동요가 창작되기 시작하였는데 1925년 이전까지는 주로 창가 형식의 동요가 대부분이었다가 1933년 윤석중의 동시집 ‘잃어버린 댕기’가 나온 후 비로소 동시의 바탕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동시의 장르 문제는 전래동요 이후 요적(謠的) 동요, 시적(詩的) 동요라는 과도기적 형식에 머물러 있기도 했고 창작동요, 동요 시, 동시의 형태를 거쳐 오늘의 동시문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초창기에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전래동요, 창작동요, 동요시, 동시, 아동시가 장르적 경계를 확연하게 구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어왔다. 그러다가 이원수로부터 ‘동시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제시 된 1969년(이원수 아동문학전집 29권 동시작법 1969)을 전후해서 구체화되기 시작했고 그 이후 여러 아동문학가들-예컨대 이오덕, 이재철, 신현득, 김종상과 평론가 최지훈 등에 의해 정리되면서 최근에는 동요와 동시와 아동시를 각각의 장르로 구별하기에 이르렀다. 더구나 동요는 최지훈에 의해 동요시와 동요가사로 나누어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신지영이 서두에서 동시의 장르 문제를 거론한 것은 아마도 ‘기호언어를 사용한 동시쓰기’와 이를 바탕으로 쓴 6편의 동시가 자신의 동시라는 장르의 기준에 미흡했거나 모호했기에 서두를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함에도 필자는 예의 5편 동시가 동시라는 장르적 틀에서 벗어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탈 장르의 의미는 내 작품이 구체적으로 동시가 제시하는 장르적 기준에 맞지 않았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신지영의 말대로 장르적 틀의 허용범위에 벗어났다면 내 작품은 동시가 아닌 아동시 이거나 동요라는 말이 된다. 또한 이도 저도 아니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생아적 작품이란 의미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작품 속에 기존의 언어와 다른 생소한 기호언어가 부분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해서 동시의 장르까지 벗어났다고 예단하는 것은 지나친 속단이 아닐까 한다.  2. 독음(讀音)할 수 없는 비언어적 기호(이모티콘)활용 여부  신지영은 아동문학도 문학임에 국문학의 하위 범주이어야 하고 국문학의 정의에 충실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리하여 동시도 한국어 사용과 또 한글이라는 문자 기호 즉 음성으로 전환 될 수 있어야 함에 역점을 두었다. 이 역점은 곧 동시가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야 함을 드러내고자 함이었다. 그리하여 비언어적 시각기호인 이모티콘이 사용될 수 있는지와 언어 기호의 성질은 갖고 있으나 한글 자모의 단독 사용이 과연 동시에 허용되는지 여부를 살폈다.  가. 비언어적 기호는 운율을 표현할 수 없는가?  그는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란 무엇인가 묻고 ‘운율이란 시문의 음성적 형식, 음의 강약, 장단, 고저 또는 동음이나 유음의 반복으로 이루어진다.’라는 정의를 덧붙이면서 운율을 나타내려면 필수적 선행조건이 바로 문자 기호를 소리 기호로의 전환해야 함으로 독음할 수 없는 비언어적 기호는 운문이라는 존재 징표를 필요로 하는 시의 구성 요소로 들어가기에는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지영은 운율에서 음성언어만을 강조한 나머지 운율을 가져오게 하는 또 다른 요인들에 대해 간과하고 있다.  첫째, 과연 소리를 낼 수 없는 기호는 운율로 표현 될 수 없는 것인가?  대부분의 문학작품(시와 산문을 포함해서)은 필수적으로 음성 언어 외에도 여러 가지 기호들을 사용하고 있다. 바로 ‘문장부호’이다. 문장부호는 분명히 음성으로 표현 할 수 없는 비언어적 기호이다. 그러나 비언어적 기호인 문장부호가 어디에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시의 운율은 현저히 달라진다. 적당한 곳에 자리 잡은 쉼표(,), 또는 느낌표(!), 줄임표(.....)가 시의 운율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시인이라면 다른 설명이 더 필요하지 않다.  둘째, 시에서 운율을 이루는 요인에는 음성 언어 이외에도 또 있다.  다시 말하면 시의 구성요소 중 하나인 행과 연이다. 행과 연은 시각기호도 언어기호도 아닌 시인만이 느낄 수 있는 자유로운 운율의 공간이다. 마치 한국화의 여백이 감상자로 하여금 무한한 회화적 상상을 하게 하는 것처럼. 흔한 말로 자유시가 이용할 수 있는 운율의 원천은 기호소리 뿐만 아니라 문장 구성 방식, 소리와 낱말 및 어구, 행과 연의 체계적인 반복, 중간휴지(행의 중간에서 말의 흐름이 잠시 뚜렷하게 끊어지는 것), 행의 길이, 그 밖에 속도를 결정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로 인해 이루어지고 있지 단순히 음성 언어만으로 결정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행과 연도 없고(물론 산문시는 없을 수도 있다) 아무런 문장부호도 없는 동시를 마주한다면 갑자기 낯 선 사람을 만났을 때의 어색함을 느낄 것이다.  나. 동시의 동요로 전환 불가능에 대해  그리고 그는 비언어적 기호는 동시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동요로 전환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활용 면에서도 그 이점이 크지 않다고 했다. 이런 논리라면 모든 동시는 동요로 전환이 가능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동시가 동요로 전환해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동시가 초기 동요로부터 파생된 것은 사실이나 동요가 반드시 동시의 본령으로 전환해야 된다고 말 할 수 없다.  더구나 오늘 날 동요와 동시는 성격이 분명히 다른 장르의 문학이다. 다시 말하면 동시와 동요는 그 발상부터 다르며 운율 표현 형식도 같지 않다. 따라서 동시를 일부러 동요로 전환해야할 이유나 필요가 없고 본다. 물론 동시도 동요처럼 노래로 작곡이 되어 불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노래로 불리는 동시가 반드시 좋은 동시는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노래로 불리지 않는 동요는 또 얼마나 많은가.  다. 비언어적 기호와 회화기호에 대한 오해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비언어적 시각 기호를 동시의 구성요소로 인정하게 된다면 회화기호로서 그림을 동시라고 하여도 그것이 왜 동시가 아닌지에 대한 논증 할 수 없어 동시의 존립 근거를 사라지게 만드는 우려가 있다고 했다.  생각해 보자. 화가는 여러 가지 시각기호들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이러한 작품은 이미 보편화 되었다. 그러나 시인, 특히 동시인이 한 장의 그림을 그려놓는다거나 여러 가지 시각기호들로만 늘어놓고 이것이 동시라고 발표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고 행여 있다면 그것은 억지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필자가 예를 들어 쓴 작품 속에 나타난 몇 개의 기호로 인해 이것은 시가 아니라 그림이라고 오해 할 독자들이 얼마나 있을 것인가?  ‘오늘의 동시문학’ 봄호(29호 p192~p193)에 권영상 동시인은 이 계절의 동시 평 ‘익숙한 방식의 틀을 버린 시들’에서 ‘어린이들이 당당한 네티즌이 되었고 네티즌들이 즐겨 쓰는 온라인 부호나 기호를 동시 속에 접목해 본 이런 시도들은 분명 동시의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 주고 있다’라고 말했다. 내가 이 글을 인용하는 것은 권영상 동시인이 내 작품에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서가 아니라 신지영이 불안해하는 내 시를 그는 한 장의 그림으로 인식하지 않고 여전히 한편의 동시로 봐 주고 있다는 반가움 때문이다.  우리 지역의 예술인(문인, 화가)들에게 예의 시들을 제시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이게 웬 그림이냐?’라고 질문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렇다면 신지영의 견해는 기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3. 동시에 있어 조합되지 않은 한글 자모의 단독배치 허용 여부  가. 동시는 한국어와 한글을 익히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장르인가  신지영은 동시를 아동이 일정 부분까지 한국어와 한글을 익힐 때 그 수단으로 사용되는 빈도가 가장 높은 장르라 했다. 아울러 동시를 한국어와 한글을 익히는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다.  신지영은 세대 차이로 보면 나보다 어린이들의 상황을 더 잘 알고 있을 것은데 오히려 요즘의 어린이들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듯하다. 동시를 읽는 수준의 아이들에게 한글을 익힐 수단으로 동시를 읽힌다는 건 어딘가 맞지 않을 성 싶다. 요즘 어린이들은 대부분 조기교육 덕분(?)에 유아원에서 한글을 배우고 있으며 늦은 경우라도 유치원에서는 읽고 쓰기뿐만 아니라 셈하기까지 배우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지 않다 해도 초등학교에서 기성 작가들이 쓴 동시를 읽고 낭송해야 할 정도이면 동시를 한글을 익히는 수단으로 활용한다는 것은 수준에도 걸맞지 않는다.  왜 그런 오해를 하고 있을까? 초등학교 교육과정을 살펴봐도 동시는 어린이의 정서와 감정을 시로 표현하고, 표현 된 시를 자신의 정서에 맞게 느낄 수 있는 길잡이 역할을 하도록 한다고 했지 동시를 통해 한국어와 한글을 익히는 수단이 되게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나. 교육적 기능수행으로서의 동시  그리고 동시를 어린이에게 한글이라는 문자 기호와 그 문자 기호를 음소에 따라 발음을 낼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교육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조합되지 않은 자모의 활용, 예를 들어 ‘ㅋ ㅋ’, ‘ㅎ ㅎ’, ‘ㅂ2 ㅂ2’ 등의 사용은 교육적 기능 수행에 역기능이라는 우려를 나타내었다.  맞는 말이다. ‘시인은 모국어로 시를 쓰는 일이 하나의 사명이다’라고 할 만큼 모국어에 대한 사랑을 가져야 한다. 나 자신도 시를 쓸 때 외래어나 한자어를 삼가고 되도록 우리말로 풀어쓰거나 우리의 말을 찾는데 고심한다. 뿐만 아니라 성인 시와 달리 어린이들의 감정과 생각을 나타내야 하는 소재와 주제의 제약과 어린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써야 하는 표현 언어의 특수성이 있다. 그러므로 필요 이상 어려운 말이나 이미지의 비약은 동시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는 교육적 기능 수행의 한 부분일 뿐 전부는 아니다. 자칫 지나친 동시의 효용성 강조는 도덕 교과서처럼 일상적인 언어만을 고집하게 되어 시는 경직되고 재미가 없게 된다.  다. 동시의 재미  그래서 동시도 문학 작품인 만큼 재미를 관과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효용성과 서로 맞물려 경중에 관한 균형의 문제가 된다면 나는 효용성 보다는 재미에 더 무게를 두고 싶다. 그러기 위해 재미를 찾는 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동시인 전병호는 ‘동시에서 재미성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어린이들이 느끼는 재미가 무엇인지 곰곰이 살펴보면 동시를 쓰는 시인으로서 눈높이를 맞추지 못한 반성을 하게 될 때가 많다.”고 하였다. 이는 우리가 동시의 효용성을 강조하다가 저지르는 실수를 지적하는 말일수도 있다. 우리가 시를 쓸 때 사용하는 언어를 시어라 부른다. 그 까닭은 일상적 언어는 언어 기호가 의미하는 내용이 사전적 의미로 지시적 기능에 국한되지만 시어는 관습적인 때가 벗겨진, 보다 신선하고 새로운 의미의 언어이어야만 한다.  그러기에 시인은 아동의 세계(관념적인 동심이 아니라 살아가고 있는 아동의 현실 세계)에 대한 깊은 관심과 이해는 물론 아동의 생각과 감정을 읽을 수 있고 어린이들이 이해 할 수 있는 말을 찾는 일에 부단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럴 때 어린이는 보다 친근하게 시적 정서에 와 닿을 수 있다.  여기에서 어린이들이 현실적으로 즐겨 사용하는 언어는 무엇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신지영이 우려한 조합되지 않은 자모의 활용들인 ‘ㅋ ㅋ’, ‘ㅎ ㅎ’, ‘ㅂ2 ㅂ2’ 등은 국어교육이라는 효용성으로 보면 문제가 있지만 요즘 어린이들이 자기들끼리 의사소통에 즐겨 사용하는 용어들이다. 이 용어들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자기네들끼리는 소리 낼 수 있고 이해하는 것들이다. 그러하여 오히려 동시에 접근하는데 거부감보다는 친밀감을 더 할 수 있는 용어들이라고 생각한다.  라. 자음만의 음소는 소리 낼 수 없거나 이해 불가능한가?  신지영은 한글은 그 안에 반드시 소리를 구성하는 부분을 가지고 있는 음소문자임을 강조하면서 자음만으로 이루어 진 ‘ㅂ ㅂ’가 처음에는 ‘바이바이’의 소리를 가진 기호로 표기하고, 그 다음 목차에서는 ‘ㅂ ㅂ’가 ‘바보’의 소리를 가진 것으로 표기하여 그 발음이나 이해에 혼란을 가져온다고 했다. \그러나 신지영이 잘 못 본 내용이다. 실제 필자의 원고에는 ‘ㅂ ㅂ’가 두 번 사용되지 않았다.(p113 위에서 18줄 ‘마지막 인사말 바이바이’, p115 위에서 22째 줄부터 ‘ㅂ ㅂ’, ‘마지막 인사말 바이바이’ 23째 줄 ‘ㅂ ㅂ’, 또는 ‘ㅂ2’, ‘잘 가, 빠이빠이’, 24째 줄, ‘ㅂ ㅅ’, ‘병신’, 25째 줄, ‘밥5’, ‘바보’였다) 아마 ‘ㅂ ㅂ’와 ‘ㅂ ㅅ’을 혼돈 했거나 ‘밥5’, ‘바보’를 잘못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신지영의 표현대로 이것들이 무작위로 나열되어 있거나 하나의 독립된 표현으로 떼어 놓고 보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자음들이 문장 안이나 시의 행 안에 들어 있을 때는 단어나 행, 연, 문장의 상호작용을 통해 분명히 이해된다.  예를 들어 보자.  아무리 눈짓을 해도  눈만 껌벅이는 너는  아이 참  ㅂ ㅂ  라는 시가 있다고 하자. 이 때 어린이들은 ‘ㅂ ㅂ’를 모음이 없다고 해서 소리 낼 수 없을까? 아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소리를 낸다. 그리고 ‘바이바이’라고 말하거나 이해하지 않는다. 정말 바보가 아니라면. 당연히 글의 문맥으로 ‘바보’로 소리 내고 이해한다.  또 하나 더 보자.  헤어지기 싫어  얼굴은 돌리지만  발길은 차마 떨어지지 않아  무거운 손  빈 하늘에 들어 본다  ㅂ ㅂ  라는 글에서 마찬가지로 ‘ㅂ ㅂ’를 ‘바이바이’라고 소리 내고 이해하지 ‘바보’로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세종은 참 우리글을 우수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어떤 자음 혼자만으로는 발음할 수 없고 반드시 모음과 어울려서 발음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영어의 ‘church’를 ‘ㅊ ㅓ ㄹ ㅊ’라 쓰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처치’라 쓰고 ‘처치’라고 발음하여야 그 용법에 혼란이 없게 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꼭 자모를 조합하지 않아도 자음만 단순히 나열 된 것마저 어려움 없이 모음을 불러와 소리 내는 재주를 가지고 있지 않는가.  마. 동시의 역할이 어린이 국어 능력 소양 발달인가  동시 뿐 아니라 모든 문학 작품이 국어와 관련되고 또 국어 학습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신지영은 동시가 한국어 발음으로서의 전환을 배울 수 있는 곳이고, 동시가 중요한 목표로서 국어 능력 소양 발달에 일정부분 책임을 지고 있고, 작품 자체의 예술적 감흥 뿐 아니라 국어 능력 고양이라는 이중적 역할의 필요와 또한 한글 제자 원리를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이 동시의 목표 중 하나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국어 교육과정상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 문법, 문학 영역 중 문법 영역에 관한 목표는 될 지언 정 문학 즉 동시가 담당해야 할 역할은 아니라고 본다. 오늘의 동시문학 카페에 올라있는 진선희의 ‘시 텍스트에 대한 초등학생들의 학년별 인식 및 선호 양상 연구’ 중 ‘ 1. 시 교육에서의 텍스트’ 첫머리에 “시교육의 목표를 범박하게 말하면 ‘시적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시’라는 개념 혹은 문화적 관례, 가설들이 존재함과 독자가 그것들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교육적임을 전제로 한다.” 라고 밝히고 있다.  교육인적자원부 고시 제2007-79호(별책 2) 초등학교 교육과정과 교육인적자원부 고시 제2007-79호에 따른 초등학교 교육과정 해설(Ⅲ)(교육과학기술부.2008. 4.1)가운데 문학부분, 그 중에서도 시와 관련된 내용을 학년별 작품의 수준과 범위도 살펴보았다. 하지만 신지영이 제시한 동시의 목표와는 거리가 멀었다. 지면관계로 구체적인 수준과 범위, 성취기준, 내용요소는 생략하기로 한다.  결국 신지영의 주장은 동시의 역할에 지나친 확대 해석이라 할 수 있다.  바. 자음만의 음소와 이모티콘이 과연 불필요한 시도인가  신지영은 한글이라는 우수하고 진보된 문자 체계의 제자 원리를 무시하면서까지, 동시의 외연을 넓히려는 시도는 환영받을 수 없고 장려 받지 못한다는 부정적 견해를 피력하였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하고 넘어 가야 할 것은 자음들로 이루어 진 몇 가지 용어들이나 필자가 차용하여 동시에 사용한 것들은 대부분 글 전체에서 극히 제한적이고 보조적 이미지로서 사용되었을 뿐이다. 시나 산문에서 모든 단어나 문장이 모음을 무시한 자음만으로 글을 썼다면 이미 작품이 될 수도 없고, 쓸 수도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 이다.  신지영이 밝힌 바처럼 우리글이 우수한 자모관계를 가진 문자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오늘 날 어린이들이 ‘ㅂ ㅂ’, ‘ㅋ ㅋ’, ‘ㅎ ㅎ’를 모음이 뒤에 붙어 있지 않는다고 해서 소리 내어 읽지 못하지 않는다. 글을 읽는 이는 자연스럽게 문맥의 흐름에 맞추어 ‘크크’, ‘쿡쿡’, ‘킥킥’, ‘호호’, ‘하하’, ‘호호’ 등으로 오히려 자모가 결합하여 이루어진 ‘크크’, ‘하하’라는 글자보다 더한 다양하게 읽고 이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시라는 장르에서 제자 원리를 무시하면서까지, 동시의 외연을 넓히려는 시도는 환영받을 수 없고 장려 받지 못한다고 확대 해석하거나 매도 할 수 있을 것인가?  신지영이 말하는 우수하고 진보된 문자체계인 훈민정음도 맨 처음 만들어 졌을 때는 스물여덟 글자였다. 그러나 이 문자 체계도 시대에 따라 사용하지 않고 사라진 것이 네 글자나 있고,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각각 시대마다 사용한 문자와 말들이 오늘날 엄청나게 소멸, 생성하며 변화해 왔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4.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서의 이모티콘의 활용에 대해  커뮤니케이션의도구로서 이모티콘의 활용에 대해서는 비교적 긍정적이었다. 즉 이모티콘 같은 비언어적 시각 기호의 위력은 그 의미 전달에 있어 문자 언어보다 더 강력한 의사전달 기능을 발휘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역시 이모티콘 같은 비언어적 시각 기호의 활용은 언어 기호의 사용이 필수적인 동시의 영역에서는 활용이 어렵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우리의 일상을 살펴보면 필수만 존재하지 않는다. 필수가 존재하는 곳에는 당연이 선택도 있기 마련이고 필수를 보조하는 또 다른 역할들이 있게 마련이다. 동시가 언어기호 사용이 필수라 하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시적 이미지의 표현에 필요하다면 동시에도 선택적 보조 자류가 필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있어서 컴뮤니케이션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작가와 독자가 작품을 통해 서로가 소통한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오늘날 동시의 문제는 작가와 독자의 눈높이 문제, 생각의 차이, 문화와 경험의 차이로 인해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대 있다. 신지영이 긍정한 비언어적 시각 기호의 위력이 의미 전달에 있어 문자 언어보다 더 강력한 의사전달 기능을 발휘할 수도 있다고 한다면 단순한 비언어적 시각 기호라 하더라도 동시가 독자와 가까워지고 소통하는 일에 일조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5. 기호 언어와 낭송 동시에 대하여  신지영의 지적과 궤를 달리하지만 결과적으로 같이 논의해야할 ‘낭송’의 문제도 이 기회에 그 견해를 밝히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오늘의 동시문학’ 카페에 다음과 같은 눈둥그리님의 댓글이 달린 적이 있다.  “새로운 시도는 좋다고 생각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시는 낭송할 때 그 느낌이 더 생생하게 다가오고 시의 아름다움이 배가 되는데 기호언어들은 어떻게 낭송해야 할지 좀 고민이 됩니다. 09.12.16 11:45 ”  눈둥그리님의 우려는 ‘동시가 낭송될 때 음성기호가 아닌 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있다. 좋은 지적이다. 특히 시낭송은 동시가 낭송자를 통해 청중과 완벽한 컴뮤니케이션을 이루어야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위해서 낭송자는 청중에게 작품의 모든 것을 보다 입체적으로 전달하기위해 최선을 다한다. 여기에서 음성기호가 아닌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에 대한 우려는 당연하다고 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자. 낭송자는 최선의 낭송을 위해 배경음악, 음성의 고저장단, 강약의 조절 등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한다. 이때는 주로 음성에 관한 것들이다. 하지만 낭송자는 음성기호가 아닌 것에도 유의한다. 다시 말해 표정, 몸짓, 그리고 행과 연의 휴지부문, 그리고 작품 속에 그려진 문장부호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이미 위에서 밝힌 대로 센스가 있는 낭송자라면 자음 만 있거나 자음에 아라비아 숫자가 곁들여 있는 정도라면 낭송자가 자기의 개성이나 작품의 분위기에 따라 낭송이 가능할 수 있다.  이 뿐만 아니라 ^*^, -_-, 등과 같은 표정 기호까지도 자연스럽게 표정으로 표현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표정으로도, 음성으로도 나타낼 수 없는 회화적 기호가 있을 수 있는데 이때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좋은 동시가 좋은 낭송시로서의 조건을 갖춘다면 금상첨화이지만 꼭 낭송하기 좋은 동시가 좋은 동시는 아니지 않는가.  작가는 작품을 쓰는 일에 자유로워야 한다. 작가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시적 감흥이 일어날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직관으로 쓰는 것이지 첨부터 무엇을 목적에 두고 시를 쓴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 된다. 많은 동시 가운데 기호 언어로 쓰여 진 시가 아니어도 낭송에 적합하지 않는 시는 이외로 많이 있음을 본다.  6. 동시에 있어 해체시 운동이 필요한지 여부  다양하게 전개되는 현대 시론과 무관하게 창작해 온 나에게 갑자기 얼굴을 드려 민 ‘해체시’라는 용어 는 나를 당황하기에 충분했다. 창주문학상과 소년지 동시 추천으로(1974년) 등단한 필자는 의도적으로 작품에 논리적 접근을 하지 않은 채 작품을 써왔다. 물론 시론에 관계되는 책을 전혀 읽지 않은 것은 아니다. 변명 같지만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시론에 내 감성과 직관이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나와 같이 시론에 취약한 까닭은 논리를 생명으로 하는 평론과는 생태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의 미술 작품의 창작을 위해서는 회화나 디자인에 통일, 변화, 비례, 균형, 대비, 대조 등과 같은 원리들이 있다. 그러나 작가들은 첨부터 이 원리나 요소에 집착하지 않는다. 자신들에게 나타난 직관을 통해 창작 할 뿐이다. 다시 말해 작품을 창작하면서 이곳은 비례이고, 저곳은 통일이라는 등의 요소에 집착하지 않는다.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면 작품은 그 자체로 자연스럽게 원리와 요소들이 잘 어울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어딘가 이상한 부분이 있다면 작가의 예리한 직관이 미치지 못한 부분이 될 것이고 이는 또한 수정보완이 이루어지게 된다. 마치 시인이 퇴고를 하듯. 다시 말하면 내가 시를 씀에 있어 첨부터 시론이나 원리에 집착하지 않는 다는 말이다.  신지영은 내 작품 속에 표현된 몇 가지 비언어적 시각기호에 대해 ‘해체시’라는 틀을 갖다 대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해체시가 필요한가? 묻고 아직 시에 대한 이해도가 완숙하지 않은 어린이에게 해체를 먼저 배우라는 것은 걷기도 전에 뛰는 법을 배우라는 것과 동일하다고 내 작품을 일단의 행위예술적인 퍼포먼스로 취급하고 있다.  부끄럽게도 필자는 신지영을 통해 첨으로 해체시와 아주 낯선 대면을 할 수 있었다. 한국문학에서는 1980년대 박남철과 황지우 등에 의해 씌어 진 기존의 시 형태를 파괴한 아방가르드 실험 시들을 지칭하는 용어라는 것도, 김준오가 1992년에 펴낸 ‘도시와 해체시’에서 사용되었다는 것도, 황지우의 행위예술은 시라는 양식을 해체함으로써, 파괴라는 새로운 양식을 설정한 것이라는 것도, 또한 데리다로 부터 출발한 해체시에 대해 그 생성과 성격, 즉 기존의 제도, 전통, 관습 이러한 모든 것들이 잘못 굳어져 있으니 이를 해체(deconstruction)해야 한다는 목표와 방향성 등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내가 해체시에 대해 문외한이었지만 신지영이 깨우쳐 준 단편적인 지식만으로도 동시가 해체동시가 되려면 몇 가지 필요한 조건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첫째, 기존의 동시들에 대한 부정이다.  둘째, 기존의 표현 형식에 대한 파괴이어야 한다.  셋째, 이를 위한 구체적인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그렇다면 내 작품이 기존의 동시에 대한 부정으로부터 출발 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필자는 동시가 갖는 이미지의 명징성 확보를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기호언어를 사용하고자 하였을 뿐이지 기존 동시를 부정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둘째, 내 작품이 기존의 표현 양식을 파괴할 만큼 위험했다는 것인가? 자세히 살펴보면 문장부호는 세종이 한글 창제 때 함께 창제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느 때인가 필요에 의해 만들어 졌고 지금도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해 비해 최근에 생산된 이모티콘이 기성세대와 일반인에게 생경하다고 해서 과연 표현양식을 파괴하는 요인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가끔 어린이 사생대회에 참석할 기회가 있다. 우리가 어릴 때는 적어도 중학생이 되어야 사용하던 수채물감을 요즘은 초등학교 저학년도 사용하고 있다. 아이들 중에는 밑그림을 연필이 아닌 수성 싸인 펜으로 그린 후 그 위에 수채물감으로 채색하여 싸인 펜이 번지는 효과를 잘 이용하는 아이들도 있다. 이 때 우리는 밑그림을 연필이 아닌 싸인 펜으로 그렸다고 해서 수채화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인가?  셋째, 필자는 황지우의 ‘한국생명보험회사 송일환 씨의 어느 날’이라는 작품을 감상할 기회가 없어 그의 작품 중간에 시사만화가 안의섭의 ‘두꺼비’라는 신문만평이 어떤 의도로 들어 있는지 모른다. 추측하건데 분명히 그 만화는 시의 내용을 나타내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기존의 운율을 파괴하고자 하는 의도였거나 말하는 양식을 파괴하겠다는 선언으로 삽입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런 시도는 시라는 양식이 생태적으로 다양한 실험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에 가능하지만 동시는 그 특성상 어렵다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필자의 ‘기호언어를 통한 동시 쓰기’는 기존 동시를 부정하거나 파괴하기 위한 사상적, 이론적 근거조차도 마련되지 않았다. 거듭 말하거니와 동시의 명징성 확보를 위한 하나의 표현 방법이지 동시 표현의 방식을 파괴하려는 구체적이고 의도적인 행위가 아님을 분명히 하며 신지영의 ‘해체동시’ 운운은 적절하지 못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나오면서  신지영의 토론 주제를 읽고 답글을 다는 일을 조금은 망설였다. 그 이유는 문학 이론에 대해 지극히 일천한 내가 과연 논리적인 해명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고, 명료하지 못한 해명으로 신지영의 글에 누가 되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모처럼의 이루어 진 토론의 장에 한 번쯤 답변하는 것이 예의가 될 성도 싶어 용기를 냈다. 내 견해를 나름대로 정리하여 덧붙였지만 충분한 설명이나 명쾌한 이해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며, 경우에 따라 의도와는 다른 곁길로 가 버린 경우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한 점은 너그럽게 이해 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 글을 마무리 하면서 묘한 감정 하나를 지울 수 없다. 사실 맨 첨 이 글을 시도를 하면서 원로 아동문학가들로부터 질책을 당하지 않을까 우려하면서 그것은 회갑을 넘긴 사람이 주책에 가까운 객기를 부린 건 아닌가 했는데 이외로 문학의 효용성이라는 틀로 인해 퓨전(fusion)시대에 걸 맞는 자유로운 사고를 하지 않는 경우도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시도한다는 건 조금의 용기가 필요하다. 더구나 은어가 사회적으로 환영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은어적(隱語的) 언어로 시를 쓴다는 건 분명 모험이다. 그러나 필자는 당분간 여기에 더 머물러 끊임없이 변화하는 기호 언어들과 함께 소통하며 내 작품의 영역을 넓혀 볼 작정이다.    [출처] 기호 언어를 통한 동시 쓰기 / 김재수|작성자 옥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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