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향수□정지용,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9, 미래사, 1991
시어 조탁의 한 절정을 보여주는 시집이다. 앞부분의 시들은 좀 거칠고 혼란스럽지만, 뒤쪽의 시들은 바다의 흰 물거품에서 갓 뽑아 올린 인어들 같이 싱그럽고 아름답다. 무엇보다도 감정을 절제하면서 그것을 이미지로 대체하려는 감각이 대단하다. 마치 한시에서 영탄조의 내용을 제거하고 보조관념만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 것 같다. 그런데 운율도 살아있어서 어떤 경우에는 운율이 이미지와 잘 어울려 분위기를 고양시키는데 반해 어떤 경우는 운율이 이미지의 흐름을 방해하는 경우도 있다. 운율은 당시 시인들이 갖던 공통 요소인데, 이렇게 과감하게 이미지로 전환하여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이 놀랄 만하다. 다만 할말에 비해 너무 많은 이미지들을 거느린 것이 시의 행보를 무겁게 한다. 할 말을 이미지로 대신하려고 하다 보니 생기는 불가피한 일이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여건이 시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의 경지는 여건을 뛰어넘는 데 있다.★★★☆☆[4336. 12. 10.]
312□광야□이육사,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18, 미래사, 1991
시우쇠처럼 단련된 정신의 소유자가 아니고는 쓸 수 없는 시다. 어디 하나 건드릴 수 없을 만큼 완결성을 갖추고 있고 정신 또한 강건하다. 시가 가냘픈 여자의 감성에 많이 기울어져있는 양식이지만, 이토록 우렁찬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 역시 이 시집이 보여준다. 형식은 정신에 어울리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시의 주제가 견고한 정신의 그것인 만큼 시들의 형식 또한 아주 견고하다. 아마도 한시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싶은데, 시들이 마치 정형시처럼 단단하고 어느 시도 처지는 것이 없이 똑 고르다. 운율도 살아있으며 이미지들 역시 제 위치에서 꼭 맞는 옷을 입고 있다. 마음속에 이미 자유시의 어떤 정형성을 나름대로 갖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런 경향은 정신의 절제력과도 관련이 있다. 오로지 멸사봉공의 정신만을 요구하는 독립운동은 그 안에 스스로 벗어나면 안 될 어떤 정신의 영역을 갖추지 않으면 버티기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이 경우 어떤 정신의 영역이란 목숨과도 바꾸어야 하는 최고의 기준이고 생존의 조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행동은 물론 사고의 패턴까지도 그 정신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없다. 자유분방함은 이미 존립하기 어려운 상태가 진짜 독립운동가의 정신이다. 시의 형식성과 규칙성은 이러한 절제의 정신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이 시의 형식은 금강석처럼 빛나는 시인의 역사 정신이 만든 것이다. 얼마 안 되는 작품 속에서 그러한 정형성에 묶여 그곳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단점인데, 그것은 작품의 문제이기보다는 작품 수의 문제이다. 그리고 작품의 수는 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문제이다.★★★★☆[4336. 12. 10.]
313□가난한 이름에게□김남조,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43, 미래사, 1991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생각난다. 평생 미니스커트를 디자인 한 적이 없는데, 그 이유는 우아함만이 아름다움이라는 고정관념을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어서 화려한 것만을 디자인하느라고 그랬다는 것이다. 라는 등식을 철저히 지킨 셈이다. 이 시집이 그렇다. 절망과 찬양, 감사 같은 감정들이 뿌리가 없다. 뿌리가 없기 때문에 깊이 없는 허무, 깊이 없는 절망, 깊이 없는 희망이 시를 가득 채우고 있다. 절망이나 허무에 무슨 뿌리가 있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천만에 만만에 말씀이다. 거기에도 뿌리가 있고 깊이가 있다. 그 뿌리가 딛고 있는 곳이 어디냐에 따라 깊이가 달라진다.
이 시인이 평생에 걸쳐 만난 고난은 시간 밖에 없다. 우아한 삶에서 시간만이 그 우아함을 허무는 적인 것이다. 우아하게 늙어가는 것이 짜증나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그렇게 늙어가게 해준 이 생이 감사한 것이다. 역사와 삶이 제거된 이런 세계가 환영받는 것은 아마도 우리나라 시만의 특징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몽롱한 세계는 제도 교육의 강력한 뒷받침으로 국민들의 영혼을 마비시켰다. 그 관행의 가장 큰 수혜자가 이런 시를 쓰는 이른바 ‘여류’시인들일 것이다. 그런 특징은 언어를 보면 안다.
시인은 자신의 시가 지닌 경향에 따라 그 시인이 주로 쓰는 낱말밭이 있다. 그 낱말밭의 지도를 만들어보면 그 시인의 체험의 넓이와 영역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인의 낱말밭은 금새 그 넓이가 잡힌다. 세월, 눈물, 이슬, 향기, 바람, 허무, 그리움, 별, 구름, 바다 같은 말들로 압축된다. 우아한 삶의 세계를 나타내는데 굳이 다른 낱말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때로 뛰어난 비유가 나타나지만 관념의 세계를 노래하는 것들은 어차피 군더더기가 많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처음부터 없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남한테 혹평을 받은 적이 없는 행복한 시인이 누리는 고결한 시의 세계이다.★★☆☆☆[4336. 12. 10.]
314□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윤동주,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33, 미래사, 1991
오랜 세월 종교에 몸담은 성직자들의 지고지순한 영혼을 보는 것 같다. 고결한 영혼 뒤에 묘한 외로움이 서려있어서 읽을수록 맛이 나는 시들이다. 뒤쪽의 동시는 맑은 영혼의 결정판이다. 왕왕 시에서 보는 지나친 표현이나 감정과잉이 없이 삶을 꾸밈없이 관조하는 가운데 역사의 무거운 짐짝을 굳이 마다하지 않는 그런 성실함이 서려있다. 고독하되 절망하지 않는 것은 종교인들의 특징이다. 그런 특징이 시 곳곳에 서려있다. 세상의 더러운 욕망에 영합하기는 어려운 세계이니 아마도 이 시인이 오래 살았다면 틀림없이 종교에 귀의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시선이 자신의 내면에만 머물러 있어서 식민지 현실의 충격이 시의 표면에 구김살을 주지 않았고, 그것이 시를 단조롭게 만든 원인이기도 하다. 요컨대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한 가운데 순결한 영혼이 외로이 서있는 형국이다. 이것은 거친 시대의 압박을 받아들이는 한 개인의 태도일 것이다.★★★☆☆[4336. 12. 10.]
315□목마와 숙녀□박인환,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36, 미래사, 1991
뜻이 잘 통하는 몇 편을 제외하고는 도대체 의미가 통하지를 안고 말이 안 된다. 이렇게 된 데는 두 가지 요소가 작용한다. 먼저 시인의 시에 대한 그릇된 고정관념이다. 시는 일상의 체험을 나타내더라도 흔히 쓰는 문장이 아니라 남들이 알아듣기 어려운 특별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시를 처음 배울 무렵 표현에 한창 재미를 느낄 때에 한 번쯤 빠지는 유혹이다. 그 유혹은 이미 그러한 단계를 지나온 사람들의 지적이나 가르침을 통해 벗어나게 되는데, 이 시인은 그것을 자신만의 장기로 생각하고 있던 듯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러한 버릇이 시에 관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를 자세히 읽어보면 메시지는 아주 간단하고 단순한데 그것을 이리 꼬고 저리 틀고 해서 무슨 소리를 하려고 한 것인지도 모를 만큼 배배틀렸다. 이것은 시의 재능이 특별하지 못한 시인의 탓도 있지만, 그런 것을 지적해주지 않는 주변 사람들의 무관심이 더 클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런 경향을 모더니즘이라는 허울좋은 이념으로 착각하면 문제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박인환의 시력으로 보아 이런 것을 모더니즘의 한 기법이라고 착각했기 쉽다.
또 한 가지는 세대의 문제이다. 박인환은 해방 전에 일본어를 배워서 일본어 상용까지 나갔다가 뒤늦게 해방 뒤에 한국어를 배운 사람들이다. 그래서 일본어로 생각하고 한국어로 쓰는 언어의 이중국적자가 되었다. 이 시집의 시들은 마치 번역시를 읽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낱말들의 관계가 어설프다. 낱말 사이에는 그것들끼리 어울리는 매끄러운 관계가 있다. 그것을 낱말관계의 윤활성이라고 하자. 쑥은 뜯는 것이고, 냉이는 캐는 것이며, 두릅은 따는 것이다. 쑥을 뽑는다고도 할 수 있고 딴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건 정확한 것이 아니다. 바로 이런 특성 말이다. 이것은 언어를 무의식중에 사용하는 가운데서 저절로 익혀지는 것이다. 번역을 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이 이런 윤활성에 대한 감각이다. 그런데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을 읽어보면 이 낱말관계의 윤활성의 거의 없다. 시의 기교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사고언어와 생활언어의 차이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당할 것 같다.
같은 세대의 김수영과 김춘수의 시에서도 이런 것을 느낄 수 있다. 김수영은 자신은 전혀 시답지 못한 용어로 평생을 일관했다. 그것은 시 쓰는 그의 스타일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가 우리말의 윤활성에 자신이 없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다. 그가 그의 후배들의 시 중에서 이른바 참여시를 긍정하는 시각으로 보았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김춘수의 이른바 무의미시라는 것도 이 윤활성에 대한 자신이 없기 때문에 생긴 방편일 수도 있다. 평생에 걸쳐 썼다는 “처용단장”을 꼼꼼히 읽어보면 말들이 대패질 안 한 송판때기처럼 꺼끌꺼끌한 것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이것은 그가 우리말의 윤활성에 미진한 구석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가 무의미라는 의미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고, 그 간극을 이미지로 메우려 한 것이다.★☆☆☆☆[4336. 12. 10.]
316□푸르른 날□서정주,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23, 미래사, 1991
서정주의 시는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 같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탐내는 각종 꽃과 나무들이 아름답게 꾸며졌다. 누구나 감탄을 한다. 아름답다. 기괴하다. 그런데 거기엔 사람이 없다. 그냥 나무만 있고 꽃, 구름, 산, 하늘이 있다. 꽃을 그렇게 가꾸고, 나무를 그렇게 심고, 길을 내고 하여 사람이 깃들어 살 만한 공간을 만든 사람이 보이지를 않는 것이다. 우리가 왕왕 역사니 현실이니 하는 그런 공기와 같은 존재의 숨결들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은 시인이 타고난 천성으로 인하여 이 같은 공기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최소한의 인연인, 부모, 처, 자식 정도만이 그의 시 주변에서 멀리 숨쉬고 있을 뿐이다. 평생을 자신의 마당 바깥으로 걸어나가 본 적이 없는 한 천재의 자기마음 노래하기가 서정주의 세계이다.
이번에 이 시선집을 다시 꼼꼼히 읽으면서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그래서 마치 현실의 궤도 바깥으로 쏘아 올려진 우주선 같은 느낌이 든다. 시가 현실의 인력 밖으로 쏘아 올린 우주선. 세 살 먹은 아기한테 역사의 양심을 요구하는 형국이니, 이걸 어쩌란 말인가? 전두환이 세 살 먹은 아기한테 귀엽다고 사탕 한 알 준 것이고, 사탕을 받은 어린 아기가 단군 이래 가장 아름다운 웃음을 웃는 할아버지라고 찬양한 것이니, 누굴 탓해야 할까?
언어가 아주 정제돼 있고, 운율이 잘 살아있다. 보통 시들보다 반 박자 정도가 늦은 아주 묘한 가락이 운율에도 살아있고 이미지에도 살아있고 발상법에도 살아있다. 그리고 언어의 확산력을 최대한 살릴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런 까닭에 인간에게 원초성이랄까 할 수 있는 관념들, 예컨대 죽음, 허무, 시간, 영혼, 절망, 사랑 같은 관념들도 묘하게 살아있는 살이 붙어서 살아 움직인다. 신라의 세계니 불교의 세계니 하는 것은 다 가짜다. 인간, 특히 개인의 본성 속에 숨어있는 어떤 세계를 이미 있는 세계 안에서 찾으려고 하다보니 그렇게 나타난 것이다. 결국 새로운 세계를 보고도 그것을 본 그대로 그려내야 하는 점에서 스스로 포기한 셈이다. 어쩌면 죽음의 얼굴을 정면으로 맞닥뜨리기 두려운 까닭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점이 아쉽다.★★★★☆[4336. 12. 11.]
317□산제비□박세영,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6, 미래사, 1991
표제시인 ‘산제비’를 빼놓고는 별로 보잘 것이 없는 시집이다. 이 시집은 2부에서는 제법 절제미를 보이고 있는데 나머지는 하고자 하는 말이 너무 강해서 시가 거칠고 선동문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호흡이 길고 시를 엮어 가는 힘이 아주 좋아서 장시를 쓰면 크게 장기를 발휘할 시인이다. 좋은 시대를 만난다면 좋은 작품을 쓰겠지만, 험한 시대를 만나서 그 물결에 휩싸이다 보니 정작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시간이 없었던 것이 안 됐다고 하겠다.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이 양심을 버리지 않았다면 누구나 겪어갔을 그런 일이니 새삼 문제삼을 것도 없겠다. 게다가 이 시인은 해방 후 월북하는 바람에 남쪽에서는 아예 잊혀진 시인이다. 그러나 해방 전의 어렵던 시절에 그나마 양심을 지키고자 한 흔적이 시집에 남아서 한 가닥 아쉬움을 달랠 수 있다.★☆☆☆☆[4336. 12. 11.]
318□강아지풀□박용래, 오늘의 시인총서 7, 민음사, 1975
언어로 그린 그림 같다. 앞부분의 몇 편은 절창이다. 언어가 어떤 사물을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존재함으로써 그 사물을 불러온다. 존재와 사물이 아주 가까이 붙어있다. 그래서 언어가 곧 존재가 되는 형국이다. 결국 언어를 어떤 사물을 전달하는 매개체로 쓴 것이 아니라 언어가 곧 그 사물이 되도록 전달의 기능을 배제하고 존재의 지표로 활용했다는 뜻이다. 이 경우는 언어의 선택이 곧 세계를 인식하는 창이 되고 세계가 된다. 그래서 다른 그 어떤 시보다도 선택의 안목과 선택된 언어들이 그려놓는 이 세상의 풍경이 중요하게 된다.
그런데 충남 일원의 어떤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뿐, 그 이상의 어떤 배경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단점이다. 시는 그림과 달라서 이미지가 딛고 있는 세계의 밑그림을 갖고 있어야 한다. 단순히 어떤 풍경을 그리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앞부분의 시들이 묘한 긴장을 갖고 있는 것도 그 시들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세계가 아주 선명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공에 의해 훼손되지 않는 그런 전통과 풍속을 갖고 있는 세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택된 언어가 곧 존재를 대치하면서 그대로 독자의 영혼 깊숙이 박혀버리는 것이다. 뒤로 갈수록 긴장이 떨어지는 것은 단순한 풍경묘사로 그치기 때문이다. 시는 어떤 형태로든 자신만의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게 된다. 풍경 묘사 뒤에도 역시 이데올로기는 없을 수가 없다.★★☆☆☆[4336. 12. 11.]
319□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문덕수,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50, 미래사, 1991
앞부분의 시들을 보면 이 시인은 시와 수수께끼를 구별하지 못하는 대단한 오해를 하고 있었던 듯하다. 독자에게 어려운 지도를 내밀고 보물섬을 찾으라는 식의 요구를 하고 있다. ‘네 개의 막대기’나 ‘영원한 꽃밭’ 같은 작품들이 그런 것들이다. 결국 한 가지 답을 숨겨놓고서 그것을 숨기기 위해 여러 가지 낯선 이미지로 대체해가면서 독자의 눈을 현혹시키는 것이다. 시는 수수께끼 놀이가 아니다. 창작의 한 이론으로 합리화할 수 있는 방법론이기는 하지만 정말 시를 아는 사람에게는 우스운 짓이다. 물론 그 시기에 그런 작업을 시도한 것은 나름대로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시의 형식을 놓고 실험을 하면 시가 지녀야 할 본래의 기능을 회의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시의 본래 성질에서 시가 멀어질 수밖에 없다. 김춘수가 무의미시 운운하며 골짜기 하나 능선 한 폭 없는 지루한 벌판으로 나아간 것처럼 여기서도 그런 무미건조함을 발견하다. 즉, 언어가 그리고자 하는 대상과 가까이 밀착해서 독자의 무의식 속에 숨은 깊은 정서를 퍼 올리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표피만을 건드려 금새 감동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간간이 빛나는 비유체계도 그것이 심금을 울리는 깊은 반향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그냥 대체된 심상으로 그치고 있다. 이것은 언어의 기능에 너무 집착해서 생긴 현상이다. 언어와 사물 사이에는 묘한 간극이 있고, 그 묘한 간극은 독자의 체험에서 생기는 것이며, 그 간극을 사이에 두고 언어와 사물이 내진 설계된 건물처럼 흔들리는데, 그 흔들림을 잘 이용하면 상상의 깊이가 무한대로 펼쳐진다. 이 시집은 바로 이 간극이 거의 없다. 그래서 애써 얻은 비유도 그냥 비유로 그치고 마는 것이다. 뒤로 올수록 이런 경향은 많이 극복되는데 끝내 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고 있다.
‘만남을 위한 알레그로’는 상당히 공을 들인 대작인데, 여기서도 문제는 그대로 남아있다. 분단이라는 상황과 그것을 극복한 상황을 어떤 묘사로 대체만 할 뿐 본질까지 닿지 못하고 있다. 묘사가 잘 되었는데도 시가 겉도는 것은 대부분 세계관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문제가 되는 것은 분단이라는 상황의 근본에 대하 인식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분단의 원인과 그 극복의 방법은 다분히 역사의 전망과 세계의 변화에 대한 시 밖의 인식과 연관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와 현실을 바라보는 인식과 실천의 문제이다. 그에 대한 분명한 입지가 없이 분단상황이라는 어떤 ‘현상’에 대해서만 기술했기 때문에 시가 끝내 말만 번지르르 하게 끝나고 만 것이다. 시는 언어로 쓰여지지만 시인은 언어만으로는 시를 쓸 수 없다는 증거이다. 시인은 역사의 노예이자 주인인 것이다. 역사 앞에 구경꾼은 없다. 그러므로 구경꾼의 시 역시 없는 것이다.★★☆☆☆[4336. 12. 11.]
320□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상화,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3, 미래사, 1991
과잉된 감정이 여과 없이 쏟아져 나왔다. 긴 호흡을 이끌어가는 능력으로 보아 충분히 여과할 수 있을 법도 한데, 이로 보면 일부러 절제를 하지 않은 듯도 보이고, 뒤로 가서도 여전히 그런 것을 보면 절제하는 방법을 모른 듯도 보인다. 어쨌거나 지나친 감정 과잉을 절제하지 않아서 문제가 생겼다. 특별히 눈여겨볼 만한 표현도 없거니와 그런 것 몇 가지도 감정에 휩싸여서 홍수에 떠내려가고 말았다. 하나 살 만한 일은 시대 상황에 대한 울분이 들어있다는 점이다. 바로 그런 순수성이 표제시나 ‘나의 침실로’ 같은 뜻밖의 작품을 썼을 것이다.★☆☆☆☆[4336. 12.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