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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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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중국 력사상 위대한 시 中 몇수, 그리고 력사는 력사로... 댓글:  조회:2833  추천:0  2015-02-04
      중국 력사상 위대한 시  中  몇수   靜夜思(정야사)   -       이백   床前明月光     머리맡에 밝은 달빛 疑是地上霜     땅에 내린 서리인가. 擧頭望明月     머리 들어 밝은 달 바라보다 低頭思故鄕     고개 숙여 고향을 생각한다.   ‘고향’을 떠올렸을 때 중국인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백의 명시.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외우는 시이기도 하다. 독음과 뜻이 모두 명려하고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향수의 감정을 표현하였다. 이 때문에 천 년이 넘도록 중국인에게 가장 익숙한 시로 자리잡은 작품. 복잡한 사상이나 화려한 수식 대신, 가장 담담하고 소박한 필체로 풍부하면서도 섬세한 감정을 묘사한 시.   遊子吟(유자음)   -       맹교   慈母手中線     인자하신 어머니 손에 실을 드시고 游子身上衣     떠나는 아들의 옷을 짓는다 臨行密密縫     먼 길에 해질까 촘촘히 기우시며 意恐遲遲歸     돌아옴이 늦어질까 걱정이시네 誰言寸草心     한 마디 풀 같은 아들의 마음으로 報得三春暉     봄 볕 같은 사랑을 어이 갚으랴.     모정을 읊은 송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정인 어머니의 사랑을 기리고 있다.특히 어머니의 사랑을 봄 볕에 비유한 마지막 두 구는 지금도 널리 쓰이는 비유. 화려한 시어는 없지만 담백하고 소탈한 어투 속에 배어 나오는 아름다움은 진하다.   賦得高原草送別(부득고원초송별)   -       백거이     離離原上草     우거진 언덕 위의 풀은 壹歲壹枯榮     해마다 시들었다 다시 돋누나. 野火燒不盡     들불도 다 태우지는 못하니 春風吹又生     봄바람 불면 다시 돋누나. 遠芳侵古道     아득한 향기 옛 길에 일렁이고 晴翠接荒城     옛 성터엔 푸른빛 감도는데 又送王孫去     그대를 다시 또 보내고 나면 萋萋滿別情     이별의 정만 풀처럼 무성하리라.     백거이의 이 시는 ‘들불도 다 태우지는 못하니, 봄바람 불면 다시 돋누나’는 구절이 가장 유명하다. 시의 흐름이 매우 자연스럽지만 또한 한 구절 한 구절 세심하게 공들인 흔적이 엿보인다.     七步詩(칠보시)   -       조식   煮豆燃豆萁     콩을 삶는데 콩대를 베어 때니 豆在釜中泣     솥 안에 있는 콩이 눈물을 흘리네 本是同根生     본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는데 相煎何太急     어찌 그리도 세차게 삶아대는가     조식은 조조의 셋째 아들인데 재주가 워낙 출중해 아버지인 조조에게서 총애를 받고, 형인 조비에게서는 심한 질시와 견제를 받았다. 조비는 왕위에 오른 후에도 조식을 견제하며 해치울 기회만 엿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조비는 조식에게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에 시를 지으라고 명령하며 만약 그 동안에 시를 짓지 못하면 중벌에 처하겠다고 말한다. 이 때 조식이 지은 시가 바로 ‘칠보시’로, 조비는 이 시를 듣고 부끄러워하며 동생을 놓아주었다고 한다.     登鹳雀樓(등관작루)   -       왕지환   白日依山盡     눈부신 해는 서산에 기대어 지려하고 黃河入海流     황하는 바다를 향해 흘러 간다 欲窮千裏目     천리 저 멀리까지 바라보고 싶어 更上壹層樓     다시 한 층 누각을 오르노라.     ‘천리 저 멀리까지 바라보고 싶은’ 시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 층 더 누각을 올라가는 것’이다. 더 멀리 보고 싶다면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일깨워주는 시.     九月九日憶山東兄弟(구월구일억산동형제)   -       왕유   獨在異鄕爲異客     홀로 타향서 나그네 되니 每逢佳節倍思親     명절 때마다 고향 생각 더욱 간절하다 遙知兄弟登高處     형제들 높은 곳에 올라 遍插茱萸少壹人     산수유 꽂으며 놀 적 한 사람이 적음을 알 것이니     고향과 가족을 향한 떠도는 이의 그리움을 노래했다. 반복해 읽을수록 의미가 새롭게 곱 씹히는 시. ‘명절만 되면 고향 생각 더욱 간절하네’란 구절은 천여 년 간 나그네의 그리움을 나타내는 명언으로 쓰였으며, 고향을 떠난 수많은 이의 가슴을 울렸다. 명절 때마다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중국인 특유의 문화가 배어있는 시.    關雎(관저)   -       시경 중 제 1수   關關雎鳩,在河之洲。     꾸우꾸우 물수리새 모래섬에 정답듯이 窈窕淑女,君子好逑。     아리따운 아가씨는 군자의 좋은 짝이로다. 參差荇菜,左右流之。     올망졸망 마름열매 이리저리 헤쳐찾듯 窈窕淑女,寤寐求之。     아리따운 아가씨를 자나 깨나 구하고저 求之不得,寤寐思服。     구하여도 얻지 못해 자나 깨나 생각하니 悠哉悠哉,輾轉反側。     아득하고 아득하여 이리 뒤척 저리 뒤척 參差荇菜,左右采之。     올망졸망 마름열매 이리저리 따노라니 窈窕淑女,琴瑟友之。     아리따운 아가씨 금을 타면 나는 슬을 타리 參差荇菜,左右毛之。     올망졸망 마름열매 이리저리 골라내니 窈窕淑女,鍾鼓樂之。     아리따운 아가씨 종을 치면 나는 북을 치리      중국 최초의 시가문학으로 일컬어지는 시경은 수천 년 전의 시구임에도 아직까지 전해지는 명구가 많다. 시경 중 제 1수로 가장 유명한 는 중국 애정시 중에서도 후대의 영향력이 지대했던 시.   夏日絶句(하일절구)   -       이청조   生當作人傑     살아서는 당연 사람들 중 호걸이었고 死亦爲鬼雄     죽어서도 역시 귀신들 중 영웅이리라 至今思項羽     지금도 항우를 그리워함은 不肯過江東     그가 강동으로 후퇴하지 않았기 때문이니.   중국의 여류시인 이청조의 작품으로 인생의 가치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사람은 살아서는 사람들 중의 호걸이 되어 국가를 위해 업적을 세우고, 죽어서도 국가를 위해 몸바쳐 귀신들 중의 영웅이 되라는 애국의 격정이 절제된 시어 속에 그대로 들어가 있다.     送杜少府之任蜀州(송두소부지임촉주)   -       왕발   城闕輔三秦     삼진이 둘러싸고 있는 장안 성궐에서 風煙望五津     바람과 안개 아득한 오진을 바라본다. 與君離別意     그대와 이별하는 이 마음 각별함은 同是宦遊人     나 또한 벼슬살이로 떠돌기 때문일 터. 海內存知己     세상에 자기를 알아주는 친구만 있다면 天涯若比隣     하늘 끝에 있어도 이웃과 같으리니. 無爲在岐路     헤어지는 갈림길에서 兒女共沾巾     아녀자같이 눈물로 수건을 적시지 마세.     중국 송별시의 걸작. 시 속에 이별 당시의 슬픔이 절절히 전해진다. ‘세상에 자기를 알아주는 친구만 있다면 하늘 끝에 있어도 이웃과 같으리니’는 지금도 쓰이는 명구.///     1989년 6월 5일, 텐안먼 광장에서 전진하는 18대의 전차 행진을 가로막는 남성의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되면서 텐안먼 사건을 상징하는 장면, 나아가 중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남게 됩니다. 영국 선데이 타임스에 의해 19세의 왕웨이린이라고 보도했지만 정확히 그의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처형설, 망명설 등이 있었으나 2017년 신원을 숨긴채 중국에서 은거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출처] 텐안먼(천안문) 사건 30주년, 탱크맨은 어디에...| =================================================/// 중국 텐안먼 광장의 "탱크맨" 1989년 6월 5일, AP통신의 사진기자 제프 와이드너는 중국 비밀경찰들의 눈을 피해 텐안먼 광장이 잘 보이는 호텔 6층 객실 발코니에 카메라를 들고 서 있었습니다. 탱크들이 줄지어 이동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 청년이 쇼핑백을 들고 천천히 걸어오더니 탱크를 가로막고 섰습니다. 굉음을 내며 질주하던 4대의 탱크는 그의 앞에 멈춰 섭니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그 순간을 와이드너는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그는 필름을 함께 있던 유학생을 통해 AP통신으로 보냈고, 일명 ‘탱크맨(Tank Man)’으로 이름 붙은 이 사진은 텐안먼 민주화 시위를 전세계에 알렸습니다. ‘탱크맨’은 지금도 국가폭력에 대한 저항을 이야기하는 상징적인 단어로 쓰입니다.      2019.09.13  찰리 콜이 찍은 ‘탱크맨’ 사진. /월드프레스포토 재단 홈페이지 /갈무리   1989년 중국 톈안먼 민주화 운동 당시 집안군의 탱크 행렬을 가로막은 중국 남성 ‘탱크맨’의 모습을 사진에 담은 미국인 사진기자 찰리 콜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64세.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2019년 9월 13일(현지시간) 콜이 지난 15년간 거주해온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지난주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콜은 1989년 6월5일 톈안먼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베이징의 한 호텔 발코니에서 남성의 모습을 포착했다. 사진에는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은 채 홀로 탱크와 맞서는 남성의 모습이 담겼다. 콜 외에 제프 와이드너 등 당시 4명의 기자가 같은 장소에서 이 시민의 모습을 찍었다. 사진은 미 시사잡지 뉴스위크를 통해 보도됐고, 탱크맨은 텐안먼 민주화 운동을 대표하는 상징이 됐다. 남성이 누구인지,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중국에서 이 이미지는 여전히 금지돼있다. 콜은 이 사진으로 1990년 세계보도사진상을 수상했다. 찰리 콜은 생전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그(탱크맨)의 행동은 모든 곳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그 순간을 정의했다고 생각한다”며 “그 이미지(사진)을 만든 것은 그이고, 나는 사진기자 중 한 명이었을 뿐이다.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찰리 콜은 이 사진을 찍은 뒤 필름을 비닐봉지에 넣어 화장실 변기 물탱크 안에 숨겼다. 중국 공안이 호텔 방에 들이닥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공안은 그의 필름들을 훼손했지만 숨겨둔 필름은 AP통신 도쿄 지국으로 보내졌고, 마감시간에 맞춰 뉴스위크로 전송될 수 있었다. 콜은 1980년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프리랜서 사진기자로서 아시아의 민주주의 현장 곳곳을 취재했다. 1985년 필리핀 민주화 운동과 1987년 한국의 6월 항쟁 등을 기록했다. =======================/// 홍콩 경찰을 맨몸으로 막아서고있는 홍콩 시민 ​ 2019년 8월 25일 일요일 홍콩 시민들은 홍콩 송환법의 완전 폐지를 주장하는 시위를 했고, 이 과정에서 홍콩 경찰은 실탄을 공중에 사격하며 시위대를 진압했는데 격해지는 분위기를 온몸으로 막으며 총을 쏘지 말아달라 말하며 경찰을 막아선, 우산을 든 중년의 남자. 이 남자를 "피스톨맨"이라 부르고 있다. ​ "피스톨맨" - 앤서니는 과거 중국의 천안문 사태 때 탱크를 막아섰던 "탱크맨"과 비교되고 있다. ​ [출처] 피스톨맨은 누구일까?|     홍콩시위서 맨몸으로 권총과 맞선 ‘피스톨맨’ 등장… ‘제2의 탱크맨’  2019.08.27. 오전 11:47  좋아요  슬퍼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홍콩 경찰을 막고 있는 피스톨맨. 사진=트위터경찰이 물대포와 실탄을 이용해 시위대를 진압하는 등 격해진 홍콩 시위 현장에 천안문 사태의 ‘탱크맨’을 연상시키는 ‘피스톨맨’(pistol man)이 등장해 현지인들의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CNN 등 외신들은 25일 시위대를 향해 총구를 겨눈 경찰을 맨몸으로 막아선 중년 남성의 사진을 보도했다. 사진 속 민소매 차림의 남성은 별다른 방어나 공격수단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의 양손에는 각각 휴대전화와 비닐우산 하나가 쥐어져 있을 뿐이다. 이날 홍콩에서는 시위대가 쇠파이프를 들고 경찰을 쫓는 등 폭력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이에 경찰은 처음으로 실탄 사격을 하고 물대포를 동원하며 시위를 강경 진압했다. 이 상황에서 시위대 앞에서 경찰의 총구와 맞선 남성은 “저들을 쏘지 마라!”고 연신 외친 것으로 전해진다. 남성의 사진이 보도를 통해 공개되자 홍콩 시민들은 “1989년 베이징 탱크맨이 2019년 홍콩 피스톨맨으로 돌아왔다”며 그의 용기에 박수를 보냈다. 천안문 사태서 맨몸으로 탱크를 저지하고 있는 시민. 사진=바이두 탱크맨은 1989년 중국 천안문 사태서 중국 정부가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시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보낸 장갑차를 맨몸으로 막은 남성에게 붙여진 별명이다. 홍콩 가수 데니스 호는 자신의 트위터에 “이 홍콩 남성에게 큰 존경을 표한다”고 전했다. 그는 7월 홍콩 정부의 송환법 추진과 관련해 “홍콩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면서 유엔인권이사회에 중국의 회원국 퇴출을 요구한 바 있다. 피스톨맨을 발로 차서 진압하는 홍콩 경찰. 사진=트위터 반면, 이날 홍콩 경찰은 자신을 맨몸으로 막은 이 남성을 발로 차는 등 과도한 진압으로 비난을 받았다. 홍콩 경찰 대변인은 이러한 과잉진압 논란에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며 경찰을 옹호하는 발언을 해 홍콩 시민들의 반발은 더욱 거세졌다. 현지 외신에 따르면 요란다 위 대변인은 “경찰은 저항에 맞서 영웅답게 행동했다”며 “그 상황에서 무력 진압은 필수였으며 합당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함나얀 /동아닷컴 기자 ========================================/// . 이 사람은 왕웨이린(王維林)이라는 가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천안문 6.4 항쟁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주인공이다. 악몽의 1989년 6월 3일 밤부터 6월 4일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유혈진압이 마무리되고, 탱크가 천안문 광장으로 본격적으로 전개를 하는 상황이었다. 시민들은 당연히 겁에 질려 도망쳤으나, 수십 미터 밖에서 진격해오는 59식 전차들을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양 손에는 검은 비닐봉투와 옷가지를 든 어떤 사람이 단신으로 막아냈다. 영상을 보면 저 사람이 막은 전차가 한두 대가 아니었고 가만히 서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전차 조종수들이 차마 저 사람을 깔아뭉개고 갈 수 없었는지 옆으로 피해서 지나가려하자, 이번에는 전차가 피하는 방향으로 뛰어가면서 그야말로 몸을 던져 막았다. 그런가 하면 전차 위로 올라가서 조종사석에다 대고 무언가 말을 하려 했으나, 몇몇 시민들이 달려와 데려가면서 위험한 상황이 끝난다. 이 상황에 대해서는 주변에 포진해있던 사복 공안들이 위험한 상황을 막기 위해 달려와서 떼어놨다는 설도 있지만 최근 공개된 6.4 항쟁 관련 사진 중에 동료로 보이는 자신과 똑같은 흰색 셔츠를 입고있는 사람과 함께 몸을 피하고 있는 모습이 찍혀있었다. ​ 이른바 탱크맨으로 불리는 왕웨이린은 대만으로 건너가 살아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다만 이는 중화권 언론을 인용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 여부는 100% 밝혀진 바 없고 오히려 진압 직후 중국 당국에 체포되어 복역중이라거나 이미 처형당했다는 설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     1990년 미국 ABC 방송의 유명 베테랑 앵커인 바바라 월터스(Barbara Walters)가 강**과 단독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다. 월터스가 대놓고 당시의 사진을 제시하며 왕웨이린을 언급하자 강**은 너털웃음을 짓는 등의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며, 그 남자가 어떻게 되었느냐는 월터스의 질문에 중국어와 영어를 번갈아쓰며 답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중국어로 사진 속 장면 자체에 대해서만 얘기하면서 말을 돌리다가, 갑자기 영어로 "그 사진이 증명해준다. 그는 탱크에 깔려죽지 않았다."는 답변을 한다. ​ 그러자 월터스는 좀 더 직설적으로 체포 혹은 처형에 대한 질문을 하고, 이에 표정이 굳어진 강**은 중국어로 "그 사람이 체포되었는지 여부는 확인해줄 수 없다."고 답한다. 재차 질문을 받은 강**은 마침내 "하지만 내 생각에는...죽지 않았다.(But I think...never killed.)"라고 영어로 답변하고, 그것을 확인하는 월터스를 향해 다소 신경질적인 어조로 다시 한 번 똑같은 답변을 한다. ​ 즉, 왕웨이린에 대한 서방측의 의구심을 분명하게 부정한 셈이다. 무엇보다도 중국 정부의 수반이 구태여 사망설을 부정했다는 것은 결국 해당 인물이 중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음을 암시하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never라는 표현을 쓴 것을 눈여겨봐야 한다. never는 일반적인 부정문에도 쓰이지만, 결코 혹은 절대로 등의 강조형으로도 쓰이는 표현이기 때문. 강**이 영어에 매우 능통한 인물이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다분히 의도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 그러나 2017년 6월 탱크맨이 중국에서 안전하게 살아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 탱크맨 최근 수정 시각:  2021-06-04 23:41:24   분류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물 덩샤오핑 시대 민주운동가 1989년/사건사고 중국의 검열 생년 미상 몰년 미상 신원불명자   다른 뜻에 대한 내용은 탱크맨(동음이의어) 문서 를  참고하십시오.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 펼치기 · 접기 ]                                             별칭 탱크맨(坦克人, Tank Man) 이름 왕웨이린(王維林) 또는 장웨이민(張爲民) 국적 중국 관련 사건 천안문 6.4 항쟁 생몰년도 ? ~ ? 생존 여부 2017년 기준 생존. 1. 개요2. 상세3. 생존 여부 3.1. 장쩌민의 발언3.2. 2017년 보도 4. 용기에서 비롯된 행위5. 기타6. 갤러리   1. 개요[편집] 1989년 천안문 항쟁 직후 인민해방군 전차를 막아선 시위대 측 남성을 가리키는 말. 일명 '탱크맨'. 이 사람은 왕웨이린(王維林)이라는 가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천안문 6.4 항쟁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아이콘으로 오늘날도 회자되고 있다. 1998년,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TIME)이 선정한 20세기의 지도자들 & 혁명가들[1] 20명 중 한 사람으로 등재되었다. # 2. 상세[편집] 악몽의 6월 3일 밤부터 6월 4일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유혈 진압이 마무리되고, 6월 5일 탱크가 천안문 광장으로 본격적으로 전개를 하는 상황이었다. 시민들은 당연히 겁에 질려 도망쳤으나, 수십 미터 밖에서 진격해오는 59식 전차들을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양손에는 검은 비닐봉투와 옷가지를 든 어떤 사람이 단신으로 막아냈다. 영상을 보면 저 사람이 막은 전차가 한두 대가 아니었고, 가만히 서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전차 조종수들이 차마 저 사람을 깔아뭉개고 갈 수 없었는지 옆으로 지나가려 하자, 이번에는 그 방향으로 달려가 그야말로 몸을 던져 막았다.  그런가 하면 전차 위로 올라가서 조종사석에다 대고 무언가 말을 하려 했으나, 몇몇 시민들이 달려와 데려가면서 위험한 상황이 끝난다. 이 상황에 대해서는 주변에 포진해있던 사복 공안들이 위험한 상황을 막기 위해 달려와서 떼어놨다는 설도 있지만, 최근 공개된 6.4 항쟁 관련 사진 중에 동료로 보이는 자신과 똑같은 흰색 셔츠를 입고 있는 사람과 함께 몸을 피하고 있는 모습이 찍혀있었다.  한편 중국 CCTV에서는 당연히 탱크맨을 맹비난하면서도, '그대로 짓밟고 갈 수도 있었지만 정부의 자비심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보도했다. 3. 생존 여부[편집] 이른바 탱크맨으로 불리는 왕웨이린은 대만으로 건너가 살아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다만 이는 중화권 언론을 인용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 여부는 100% 밝혀진 바 없고, 오히려 진압 직후 중국 당국에 체포되어 복역 중이라거나 이미 처형당했다는 설도 제기되었다. 3.1. ***의 발언[편집] 위 영상은 1990년 미국 ABC 방송의 유명 베테랑 앵커인 바바라 월터스(Barbara Walters)가 장쩌민과 단독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다. 월터스가 대놓고 당시의 사진을 제시하며 왕웨이린을 언급하자 장쩌민은 너털웃음을 짓는 등의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며, 그 남자가 어떻게 되었느냐는 월터스의 질문에 중국어와 영어를 번갈아 쓰며 답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중국어로 사진 속 장면 자체에 대해서만 얘기하면서 말을 돌리다가, 갑자기 영어로 "그 사진이 증명해준다. 그는 탱크에 깔려죽지 않았다."는 답변을 한다. 그러자 월터스는 좀 더 직설적으로 체포 혹은 처형에 대한 질문을 하고, 이에 표정이 굳어진 장쩌민은 중국어로 "그 사람이 체포되었는지 여부는 확인해줄 수 없다."고 답한다. 재차 질문을 받은 장쩌민은 마침내 "하지만 내 생각에는... "확실히" 죽지 않았다.(But I think never... never killed.)"라고 영어로 답변하고, 그것을 확인하는 월터스를 향해 다소 신경질적인 어조로 다시 한 번 똑같은 답변을 한다. 즉, 왕웨이린에 대한 서방 측의 의구심을 분명하게 부정한 셈이다. 무엇보다도 중국 정부의 수반이 구태여 사망설을 부정했다는 것은 결국 해당 인물이 중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음을 암시하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never'라는 표현을 쓴 것을 눈여겨봐야 한다. never는 일반적인 부정문에도 쓰이지만, '결코' 혹은 '절대로' 등의 강조형으로도 쓰이는 표현이기 때문. 장쩌민이 영어에 매우 능통한 인물이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다분히 의도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3.2. 2017년 보도[편집] 결국 장쩌민이 단언한 대로, 2017년 6월 탱크맨이 중국에서 안전하게 살아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 홍콩에 있는 중국 인권민주화운동정보센터 창립자인 '프랭크 루(盧四淸)'의 인터뷰에 따르면, 탱크맨은 망명하거나 감옥에 가지 않고 중국에 그냥 평범하게 살고 있으며 왕웨이린이 본명도 아니고 굳이 해외에서 유명해지고 싶지도 않고 중국이 민주국가가 되기 전까지는 조용히 살고 싶다고 밝혔다. 그가 정말 중국에 있다면 신변의 안전 때문에 자신이 진짜 탱크맨이라고 밝히기는 어려울 것이며, 공산당 1당독재가 끝나야 비로소 탱크맨의 정체를 알 수 있게 될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가 감옥에서 복역 중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 뉴시스의 보도와 달리 복역 중인 장웨이민이 탱크맨이 아니라는 주장도 존재한다.[2]# 4. 용기에서 비롯된 행위[편집] 6.4 항쟁 당시 인민해방군의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들이 속출했다. 고로 군인들이 별 생각 없이 탱크맨을 진짜로 밟고 지나가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3] 혹은 짓밟지 않더라도 탱크에서 나온 군인이 총으로 쏴버리고 옆으로 지나갔을 수도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국제적 위상이 바닥으로 추락하고 국내에서는 반발이 더욱 거세져 시위 진압에 실패했을 것이다. 그야말로 탱크맨은 죽으려고 그 무서운 곳에 혼자 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전차 부대가 본인을 밀고 지나가게 하는 것이 탱크맨 본인의 의도였을 수도 있다. 게다가 컬러 사진으로 보면 길이 피로 물들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그가 서있던 바로 그 길은 몇 시간 전만 해도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던 곳이었다. 같은 위치를 몇 시간 전에 같은 구도로 찍은 사진을 보면 미처 수습되지 못한 수많은 시신들과 부서진 자전거들이 널려있다. 시민들이 학살된 바로 그 자리에서 탱크맨 자신도 "날 죽여 봐라"는 마음을 가지고 죽을 각오를 하고 선 것이다. 군인들도 차마 시민을 눈앞에서 전차로 짓밟지 못할 양심[4]이 있었겠지만, 단순히 전차 앞에 서는 데만에도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하며, 죽음을 무릅쓴 자세가 가히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당장 땅이 울리도록 자신을 압도하며 서있는 몇십 톤짜리 살상무기를 상상해보자. 탱크라는 건 보통 무게가 아니기에 빠른 속도로 움직일때 바로 근처에 서있으면 진짜 지진이 느껴지고 넘어질 수도 있다. 그냥 서 있는 것만도 엄청난 집중력이 요구된다. 살벌했던 당시의 상황과 거대한 폭력 앞에 단신으로 서서 막아내는 그의 용기가 인상깊게 표현되어 위 사진은 퓰리처상 후보작으로 선정된 것이다. 5. 기타[편집] 천안문 6.4 항쟁 30주년을 앞둔 시점에서 독일의 라이카 카메라가 자사 홍보 영상도(한글자막영상) 올렸는데, 탱크맨을 묘사한 장면이 있어 중국에서 반발하기도 했다. # 천안문 6.4 항쟁 당시 탱크맨을 촬영했던 찰리 콜 CNN 기자는 2019년 별세하였다. 향년 64세. 기사. 여러 스마트폰 제조사들 중에 화웨이의 스마트폰은 화질이 남다르다. 레고도 이 상황을 구현했다(A man has been spotted protesting in Lego city). 스타크래프트의 커스텀 중에 이를 반영한 것이 있다. 나는 베이징의 천안문을 사랑해(유즈맵)라는 이름이다. 6. 갤러리[편집] 넓은 화각의 사진.   탱크가 다가오기 전 근거리에서 찍은 것. 페이로더 왼쪽에 있다. 위 사진은 AP통신의 사진기사 제프 와이드너가 찍은 사진이다. 그는 3일에서 4일을 기점으로 무력 진압이 거세지자 기록을 남기려 창안제가 내려다 보이는 베이징 호텔로 향했다. 호텔은 경비가 삼엄했고, 가까스로 6층 호텔방에 투숙 중이던 미국 대학생 커크 마첸을 설득해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사진 촬영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한다. 원래 사용하던 니콘 F3 카메라는 2일 전 장안대로에서 취재 중 날아온 돌에 맞아 부서져서 니콘 FM2로 촬영을 진행해야 했고, 와이드너 본인도 뇌진탕에 걸려서 당일에도 두통에 시달리던 중이었다고 한다. 필름도 촬영 중 떨어져서 호주인 여행객에게서 간신히 한 롤을 빌려 촬영했고, 그래도 화각이 나오지 않자 사용하던 400mm 렌즈에 2X 컨버터를 급히 끼워 찍었다고 한다. 필름 자체도 사진 촬영용 고감도 필름이 아닌 ASA100짜리 필름이라 1/60~1/30까지 셔터 속도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간신히 세 장을 찍었다고. 손떨림 보정 기능이 있는 현대적 DSLR로도 핸드헬드 상태에서 저 정도 셔터 속도를 유지하면서 800mm 장망원 렌즈로 흔들리지 않게 촬영하는 것이 매우 힘든 것을 감안하면 정말 기적적으로 나온 사진이었다. 사건 당시 CNN 스탭이 촬영한 영상. 주변 기자와 시민들의 반응을 들을 수 있는데, 전혀 예상 못한 상황에 놀라고 난 뒤에는 박수와 환호를 보낸다. [1] 탱크맨 이외에도 블라디미르 레닌, 호찌민, 넬슨 만델라, 윈스턴 처칠, 요한 바오로 2세등이 있다.[2] CP/IFC has no professional ability to assess the media’s report about the Tank Man, nor can we confirm if Zhang Weimin is indeed real. But the purpose of our Finding Tank Man campaign is to seek truth, which we believe is the critical basis to clear the name for the 1989 pro-democracy protests and to achieve transitional justice. To resolve the mystery of the Tank Man once and for all, CP/IFC calls all our friends to provide Mr. Zhang Weimin's information or give any clues that may help reveal the truth of the Tank Man.[3] 훗날 자칭 이슬람 국가 ISIL은 실제로 포로를 탱크로 뭉개서 처형했다.[4] 근데 이것도 확실하게 장담할 순 없다. 상부에서 시위 계속하면 죽이라고 시켜서 하는 거라 탱크사건 전에도 여러사람들을 참혹하게 죽인 것이므로, 탱크맨 역시 사실 탱크를 운전하던 군인이 그냥 죽인다 해도 이상할게 없는 상황이었다. 단지 평범한 사람이 그런 무서운 용기를 내는 걸 본적이 없을 것이고(전설에는 이런 사건들이 꽤 있지만, 20세기부터 증거가 남는 인류의 영상기록 역사가 시작되고는 이렇게 혼자 신념만으로 생명을 건 사건이 매우 적다.), 몇명만 쏴도 나머지가 도망가는 걸 많이 봐왔을테니, 당당한 모습에 탱크맨이 들고 있는 것이 자폭용 폭탄인가 생각하고 당황해서 일단 멈춘 것일 가능성도 있다. ===========================================/// 톈안먼 민주화시위 상징 '탱크맨', 아직 중국에 살아있다 2017-06-05 10:47   인쇄 톈안먼사태 28주년 웨이보 해외사용자 사진·영상 포스팅 금지 (상하이=연합뉴스) 정주호 특파원 = 중국의 6·4 톈안먼(天安門) 시위사태의 상징적 인물이 된 '탱크 맨'이 여전히 중국에서 이름을 숨기고 생존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대만 중앙통신은 당시 베이징(北京) 창안제(長安街)에서 시위진압을 위해 진입해오던 탱크 4대의 행렬을 맨몸으로 막아섰던 사진 속의 청년이 지금도 중국에 거주하고 있다고 5일 보도했다. 그간 왕웨이린(王維林)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청년의 행방은 알려진 바 없었다. 당일 탱크에 깔려 숨졌다는 말도 있었고 당국에 체포돼 수감 중 사망했다는 소문도 흘러나왔다.   통신은 홍콩에 있는 중국 인권민주화운동정보센터를 인용해 이 청년이 중국을 한 번도 떠나지 않은 채 여전히 안전하게 생존해 있으며 왕웨이린이 그의 본명도 아니라고 전했다. 정보센터 창설자인 프랭크 루(盧四淸)는 왕웨이린이 탱크 행렬과 대치한 사진으로 자신이 해외에서 유명해진 것을 알고 있었으며 "중국이 민주국가가 되기 전까지는 단지 평안한 생활을 하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는 또 왕웨이린이 자신의 본명도 아니라면서 중국을 떠나 해외에서 거주하면서 유명인이 되고 싶지도 않다고도 했다. 프랭크 루는 "그는 중국이 민주국가가 되기 전까지는 단지 평안한 생활을 하고 싶고 고 말했다"고 전했다. 정보센터가 지난 1999년 5월 톈안먼 시위진압의 영상을 인터넷에 올린 뒤로 왕웨이린의 안전과 근황을 묻는 수많은 중국인들의 문의가 끊이지 않았다. 개인이 국가의 폭력에 항거하는 이미지의 이 사진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진 중 하나로 꼽혀왔다. 프랭크 루는 "지난 수년간 각종 채널을 통해 이 청년의 소재를 파악해왔다"고 전했다. 톈안먼광장에 진입하는 탱크 행렬을 맨몸으로 막아선 청년   미국 워싱턴에 설립된 중국 민주화 단체인 '공민역량'(Citizen Power)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탱크 앞에 선 왕웨이린과 그를 밀어붙이지 않고 피해 움직였던 탱크 조종사를 두 '탱크 영웅'이라며 이들의 소재를 전 세계에서 찾는 운동을 시작한 바 있다. 이 단체는 그러면서 시...중국 국가주석에게 탱크맨 2명의 행방을 묻기로 하는 서명운동을 시작하기도 했다. 지난 2011년엔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 공원에 왕웨이린과 함께 에이브러햄 링컨, 마틴 루터 킹, 넬슨 만델라 등 인권 공헌자 25명의 조각상 공원이 들어서기도 했다. 최근 재미 중국교포들은 이곳에서 톈안먼시위 28주년을 기념하는 추도 집회를 열었다. 톈안먼 사태 28주년이었던 전날 중국 당국은 웨이보(微博·중국판 트위터)의 해외 사용자들이 사진과 영상을 올리는 것을 차단하는 등 인터넷 및 소셜미디어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고 홍콩 명보(明報)가 전했다. 웨이보가 이날 오전 돌연 시스템 업그레이드 통지를 올리며 5일까지 일부 기능이 제한받을 것이라고 통지한 뒤로 웨이보 해외사용자들은 사진과 영상을 올리거나 댓글을 붙이고 자신의 프로필을 수정하는 것도 제한받았다. 아울러 인터넷엔 톈안먼 사태와 관련된 소식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6·4'(六四) 등이 금지 검색어로 지정됐으며 민감한 정치 평론을 해왔던 학자나 블로거가 웨이보, 웨이신에 올리는 댓글이 삭제되기도 했다. 홍콩의 톈안먼시위 추모 거리행진[AP=연합뉴스] ================================================///          
58    애송시 100선 댓글:  조회:8581  추천:0  2015-02-04
[애송시 100편 - 제1편]  해- 박두진          [현대시 100편-2편]    풀 -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 전집 1' (민음사)       ▲ 일러스트=권신아 풀은 이 세상에서 제일로 흔하다. 풀은 자꾸자꾸 돋는다. 비를 만나면 비를 받고 눈보라가 치면 눈보라를 받는다. 한 계절에는 푸르고 무성하지만, 한 계절에는 늙고 병든 어머니처럼 야위어서 마른 빛깔 일색이다. 그러나 이 곤란 속에서도 풀은 비명이 없다. 풀은 바깥에서 오는 것들을 긍정한다.   풀은 낮은 곳에서 유독 겸손하다. 풀은 둥글게 휘고 둥글게 일어선다. 꺾임이 없는 ‘둥근 곡선’의 자세가 풀의 미덕이다. 느리지만 처음 있던 곳으로 되돌리는 이 불굴의 힘을 풀은 갖고 있다. 풀은 이변을 꿈꾸지 않는다. 제 몸이 무너지면 그 무너진 자리에서 스스로 제 몸을 일으켜 세운다. 풀은 솔직한 육필이다. 풀은 ‘발밑까지’ 누워도 발밑에서 일어선다. 바닥까지 내려가 보았으므로 풀은 이제 벼랑을 모른다.   새날이 왔다. 새날을 받고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은 어제에 있다. 어제의 슬픔과 어제의 이별과 어제의 질병과 어제의 두려움 속에 있다. 그러나 어제의 곤란은 어제의 곤란으로 끝나야 한다. 열등은 어제의 열등으로 끝나야 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내심에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다. 이것을 잘 아는 사람은 만 명의 적이 와도 무서움이 없으며 물러섬이 없을 것이다. 자존(自尊)과 자립(自立)의 에너지가 우리의 자성(自性)이다.   나아지고 있다는 믿음, 일어서고 있다는 믿음, 넓고 큰 세상으로 향해 가고 있다는 믿음, 당신을 더 사랑하게 되리라는 믿음, 우리는 이 다짐으로 새날을 살아야 한다. 눈사태를 뚫고 산정(山頂)을 찾아가는 산악인처럼.   타계한 해에 발표된 ‘풀’은 김수영(1921~1968)의 마지막 작품이고, 우리 시대 100명의 시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시이기도 하다. 올해로 40주기를 맞은 김수영은 전위적 모더니즘으로, 4·19 혁명 이후에는 참여시(詩)로 한국 현대시의 지평을 넓혔다. 그의 시는 사람들 가슴 속에 눕고 울고 일어서며 푸르게 살아 있다.     [애송시 100편 - 제3편]  남해 금산 - 이성복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 일러스트=잠산   돌 속에 묻힌 한 여자의 사랑을 따라 한 남자가 돌 속에 들어간다면, 그들은 돌의 연인이고 돌의 사랑에 빠졌음에 틀림없다. 그 돌 속에는 불이 있고, 목마름이 있고, 소금이 있고, 무심(無心)이 있고, 산 같은 숙명이 있었을 터. 팔다리가 하나로 엉킨 그 돌의 형상을 ‘사랑의 끔찍한 포옹’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런데, 그런데 왜, 한 여자는 울면서 돌에서 떠났을까? 어쩌자고 해와 달은 그 여자를 끌어주었을까?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한 남자를 남긴 채. 돌 속에 홀로 남은 그 남자는 푸른 바닷물 속에 잠기면서 부풀어간다. 물의 깊이로 헤아릴 길 없는 사랑의 부재를 채우며. 그러니 그 돌은 불타는 상상을 불러일으킬밖에. 그러니 그 돌은 매혹일 수밖에.   남해 금산, 돌의 사랑은 영원이다. 시간은 대과거에서 과거로 다시 현재로 넘나들고, 공간은 물과 돌의 안팎을 자유롭게 드나든다. 과거도 아니고 현재도 아닌, 안(시작)도 없고 밖(끝)도 없는 그곳에서 시인은 도달할 수 없는 사랑의 심연으로 잠기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돌이 되고 바위가 되는지 남해의 금산(錦山)에 가보면 안다. 남해 금산의 하늘가 상사암(相思巖)에 가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불길 속에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채 돌이 되는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돌의 고통 속에서도 요지부동으로 서로를 마주한 채 뿌리를 박고 있는지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을 들여다보면 안다.   모든 사랑은 위험하지만 사랑이 없는 삶은 더욱 치명적이라는 것을, 어긋난 사랑의 피난처이자 보루가 문득 돌이 되어 가라앉기도 한다는 것을, 어쩌면 한 번은 있을 법한 사랑의 깊은 슬픔이 저토록 아름답기도 하다는 것을 나는 ‘남해 금산’에서 배웠다. 모든 문을 다 걸어 잠근, 남해 금산 돌의 풍경 속. 80년대 사랑법이었다.   80년대 시단에 파란을 일으킨 이성복의 첫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1980)는, 기존의 시 문법을 파괴하는 낯선 비유와 의식의 초현실적 해체를 통해 시대적 상처를 새롭게 조명했다. ‘남해 금산’은 그러한 실험적 언어가 보다 정제된 서정의 언어로 변화하는 기점에 놓인 시다.      [애송시 100편 - 제4편]  즐거운 편지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일러스트=잠산 황동규 시인은 올해로 등단 50주년을 맞는다. 반 세기 동안이나 그는 우리말을 정갈하게 빚었고 우리말의 숨결을 세세하게 보살펴 고아(高雅)하게 했다. 놀랍게도 ‘즐거운 편지’는 황동규 시인이 1958년 ‘현대문학’에 발표한 그의 데뷔작이다. 영화 ‘기쁜 우리 젊은 날’과 ‘편지’ 등에서 낭송되어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이 시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의 원 제목도 ‘즐거운 편지’였다고 한다. 이제 이 시는 한국인의 애송시가 되었다. 만남과 이별의 회전 속도가 이처럼 빠른 시대에 이 시는 왜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가. 왜 여전히 막막하게 하는가. 헤어져 돌아가던 옛사랑의 뒷모습을 보게 하는가.   하늘이 먹먹하게 어두워지고 주먹눈이 막 내리는 날이면 어디 먼 산골이나 바닷가 민박집에라도 가고 싶어진다. 작은 넝쿨에 말라붙는 붉은 열매 같은 눈빛을 하고서 눈이 내리는 그 시간을 살고 싶어진다. 눈이 그치면 순백의 설원과 설원 위를 유행(遊行)하는 바람의 노래를 듣고 싶어진다. 그리고 멀리 두고 온 사람을 ‘가까스로’ 떠올릴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적막한 시간에 나를 선택하지 않은 사랑을 떠올리는 일은 아주 사소한 일이 될 것이다.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이 될 것이다. 너무 사소하여서 손을 놓고 아무 일도 하지 못할 것이다. 너무 사소하여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그렇게 이 세상에서 잊혀진 듯 살 것이다. 폭설에 갇힌 순한 산짐승처럼 우는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그대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건넨 이별의 말은 나의 가슴에서 깨끗하게 씻어낼 것이다. 겨울 하늘에 뜬 달이 천강(千江)을 비추어도 그대는 나를 생각하지 말라. 그대가 나의 사랑을 다시 받아 안는 날이 와도 내가 아직 저 산골짜기 깊은 산막에서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하는 그런 아주 짧은 후일에도 그대는 나를 생각하지 말라.     [애송시 100편 - 제5편]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일러스트=권신아 김춘수 시인은 릴케와 꽃과 바다와 이중섭과 처용을 좋아했다. 시에서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의미의 두께를 벗겨내려는 '무의미 시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교과서를 비롯해 여느 시 모음집에서도 빠지지 않는 시가 '꽃'이며 사람들은 그를 '꽃의 시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1952년에 발표된 '꽃'을 처음 읽은 건 사춘기의 꽃무늬 책받침에서였다. '그'가 '너'로 되기, '나'와 '너'로 관계 맺기, 서로에게 '무엇'이 되기, 그것이 곧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이구나 했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것이구나 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게 존재의 의미를 인식하는 것이며, 이름이야말로 인식의 근본 조건이라는 걸 알게 된 건 대학에 와서였다. 존재하는 것들에 꼭 맞는 이름을 붙여주는 행위가 시 쓰기에 다름 아니라는 것도.   백일 내내 핀다는 백일홍은 예외로 치자. 천 년에 한 번 핀다는 우담바라의 꽃도 논외로 치자. 꽃이 피어 있는 날을 5일쯤이라 치면, 꽃나무에게 꽃인 시간은 365일 중 고작 5일인 셈. 인간의 평균 수명을 70년으로 치면, 우리 생에서 꽃핀 기간은 단 1년? 꽃은 인생이 아름답되 짧고, 고독하기에 연대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면, 서로에게 꽃으로 피면, 서로를 껴안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늦게 부르는 이름도 있고 빨리 부르는 이름도 있다. 내 꽃임에도 내가 부르기 전에 불려지기도 하고, 네 꽃임에도 기어코 네가 부르지 않기도 한다.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부르는 것의 운명적 호명(呼名)이여! '하나의 몸짓'에서,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는 것의 신비로움이여!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꽃은 나를 보는 너의 눈부처 속 꽃이었으나, 내가 본 가장 무서운 꽃은 나를 등진 너의 눈부처 속 꽃이었다.   세계일화(世界一花)랬거니,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세계는 한 꽃이다. 만화방창(萬化方暢)이랬거니,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세계는 꽃 천지다. 꽃이 피기 전의 정적, 이제 곧 새로운 꽃이 필 것이다. 불러라, 꽃!   [애송시 100편 - 제6편] 서정주 '冬天(동천)'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은 눈썹을     지난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일러스트=잠산 겨울 밤하늘을 올려 본다. 얼음에 맨살이 달라붙듯 차갑고 이빨은 시리다. 문득 궁금해진다. 미당(未堂) 서정주 시인은 왜 한천(寒天)에 사랑의 일과 사랑의 언약과 사랑의 얼굴을 심어 두었을까. 손바닥으로 쓸어보아도 온기라고는 하나 없는 그곳에 왜 하필 사랑을 심어 두었을까. 매서운 새조차 '비끼어 가'는 사랑의 결기를 심어 두었을까.   생심(生心)에 대해 문득 생각해본다. 처음으로 마음이 생겨나는 순간을 생각해본다. 무구한 처음을, 손이 타지 않아서 때가 묻지 않은 처음을. 부패와 작파가 없는 처음을. 신성한 처음을. 미당이 한천을 염두에 둔 것은 처음의 사랑과 처음의 연민과 처음의 대비와 처음의 그 생심이 지속되기를 바랐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심어 놨'다고 한 까닭도 생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심는다는 것은 생육(生育)한다는 것 아닌가. 여리디 여린 것, 겨우 자리 잡은 것, 막 숨결을 얻은 것, 젖니 같은 것 이런 것이 말하자면 처음이요, 생양해야 할 것들 아닌가. 미당은 초승달이 점점 충만한 빛으로 나아가듯 처음의 사랑 또한 지속되고 원만해지기를 기도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미당의 시에는 생명 없는 것을 생장시키는 독특한 영기(靈氣)가 서려 있다. 그는 시 '첫사랑의 詩'에서 '초등학교 3학년때 / 나는 열두살이었는데요. / 우리 이쁜 여선생님을 / 너무나 좋아해서요. / 손톱도 그분같이 늘 깨끗이 깎고, / 공부도 첫째를 노려서 하고, / 그러면서 산에가선 산돌을 줏어다가 / 국화밭에 놓아 두곤 / 날마다 물을 주어 길렀어요.'라고 하지 않았던가. 산돌을 주워 와서 물을 주어 길렀듯이 이 시에서도 미당은 '고은 눈썹'을 생장시키는 재기를 보여준다.   미당의 시에는 유계(幽界)가 있다. 그는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라며 황홀을 노래했지만 그는 우주의 생명을 수류(水流)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흘러가되 윤회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 운행에서 그는 목숨 받은 이들의 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노래했다. 목숨 없는 것에는 목숨의 숨결을 불어 넣었다. 미당의 시의 최심(最深)은 삶 너머의 이승 이전의 유계를 돌보는 시심에 있다. 이 광대한 요량으로 그는 현대시사에수많은 활구(活句)를 낳았다.      [애송시 100편 - 제7편] 사평역(沙平驛)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일러스트=권신아  조그만 간이역에 눈은 푹푹 내려 쌓이고, 푹푹 내려 쌓이는 눈 때문에 막차는 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대합실에서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고 있다. 부려둔 보따리나 꾸러미에 기대 누군가는 졸고, 누군가는 담배를 피우고, 누군가는 웅크린 채 쿨럭이기도 한다. 털모자에 잠바를 입은 사내는 간간이 난로에 톱밥을 던져 넣으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 난로 위 주전자는 그렁그렁 끓는 소리를 내며 수증기를 내뿜고, 시계는 자정을 넘어서고….   시대적 아픔을 서정적으로 그려냈다고 평가되는 곽재구 시인의 데뷔작 '사평역에서'(1981)를 읽을 때마다 나는 울컥한다. 아름다우면서 서럽고, 힘들지만 따뜻했던 그때 그 시절의 풍경을 소중한 흑백사진처럼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에는 지난 시절의 희망과 절망이 눈보라로 흩날리고 있다, 모래처럼 톱밥처럼. 그 울컥함이 소설(임철우 '사평역에서'), 드라마(TV문학관 '사평역', '길 위의 날들'), 노래(김현성 '사평역에서')로 장르를 달리하며 독자들의 공감을 얻게 했으리라.   이십대에 쓴 시답게 감각과 묘사가 풋풋하다. 깜깜한 유리창에 쌓였다 녹는 눈송이들은 흰 보라 수수꽃(라일락꽃)빛이다. 사람들이 그믐처럼 졸고 있다는 표현은 절묘하다. 확 타올랐다 사그라지는 난로 속 불빛은 톱밥을 던져 넣는 청색의 손바닥과 대조를 이룬다. 간헐적으로 내뱉는 기침 소리는 '눈꽃의 화음'을 강조하고, 뿌옇게 피어올랐다 사라지는 담배 연기는 회억(回憶)처럼 떠올랐다 가라앉곤 한다.   한줌의 톱밥을 던지는 '나'는 무슨 사연을 간직한 걸까? 기다리는 막차는 올까? 모든 역들은 어디론가 흘러가기 위한 지나감이고 경계이다. 하여 모든 역들이 고향을 꿈꾸는 것이리라. 사평은 나주 근처에 있는 조그만 마을이다. 그 사평에 사평역이 없다니, 그토록 울컥하게 했던 사평역이 어디에도 없다니, 그래서 더욱 우리를 울컥하게 하는 것이겠지만.      [애송시 100편 - 제8편] 묵화 (墨畵) - 김 종 삼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일러스터=잠산 김종삼(1921~1984) 시인의 시는 짧다. 짧고 군살이 없다. 그의 시는 여백을 충분히 사용해 언어가 잔상을 갖도록 배려했다. 그리고 아주 담담하다. 언어를 우겨넣거나 막무가내로 끌고 다닌 흔적이 없다. 사물과 세계를 대면하되 사물과 세계의 목소리를 나직하게 들려준다.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물안개가 막 걷히는 새벽 못을 보고 있는 듯하다.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작은 여울에 누군가가 정성스레 놓아 둔 몇 개의 징검돌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묵화(墨畵)'의 목소리도 자분자분하다.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막 돌아와 쌀 씻은 쌀뜨물을 먹고 있는 소를 보여준다. 그의 시선은 소의 목덜미에 가 있다. 하루 종일 써레나 쟁기를 끌었을, 멍에가 얹혀 있었을 그 목덜미를 보여준다. 목덜미에는 굳은살이 박였을 것이다. 그리곤 소의 목덜미와 할머니의 손을 교차시킨다. 할머니도 노동을 마치고 돌아와 소와 함께 날이 저무는 저녁을 맞고 있다. 할머니는 겹주름처럼 고랑이 나 있는 밭에 쪼그려 앉아 풀을 뽑고 돌을 캐내고 종일 호미질을 했을 것이다. 시인의 시선은 소와 할머니의 부은 발잔등으로 옮아간다. 부은 발잔등을 보여줄 뿐이지만, 우리는 소와 할머니의 하루가 얼마나 고단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시인이 눈여겨본 대목은 소와 할머니의 관계일 것이다. 소는 할머니를, 할머니는 소를 마주하고 있다. 이 둘 사이에 조용하고 평화롭고 안쓰러운 대화와 유대가 오가고 있다. 낮의 소란과 밤의 정적이 합수(合水)하는 성스러운 시간에 마치 삶이란 본래 비곤하고 외롭고 쓸쓸한 것이라는 듯 소와 할머니는 잠시 멈춰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하여 이 둘의 '서로 돌봄'은 훈훈하면서도 슬프다. (우리는 얼마나 이 '쓸쓸한 돌봄'을 자주 잊고 사는가) 이 시를 다 읽고 나면 우리는 얼굴 가득 흐뭇하게 피어나던 웃음이 천천히 묽어지는 감정의 변화를 겪게 된다. 본래 삶이란 웃음과 슬픔으로 꿰맨 두 겹의 옷감이라는 듯.   김종삼 시인은 등산모를 곧잘 썼고 파이프 담배를 자주 물었고 술을 좋아했고 고전음악을 즐겨 들었다. 그에게 삶은 '방대한 / 공해 속을 걷는' 일처럼 여겨졌다. 그는 '하늘나라 다가올 때마다 /맑은 물가 다가올 때마다 /라산스카 /나 지은 죄 많아 /죽어서도 /영혼이 /없으리'라며 인간의 원죄를, 불구의 영혼을 아프게 노래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는' 사람들과 세상을 좋아하고 동경했다. 그의 시는 말이 적었지만 정직했다. 언어의 낭비가 많고 외화(外華)에 골몰하는 시대를 살수록 언어를 지극히 아껴 쓴, 먹그림같이 실박하게 살다 간 김종삼 시인이 그립다.     [애송시 100편- 제9편] 한 잎의 여자 - 오규원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病身) 같은 여자, 시집(詩集) 같은 여자, 그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 일러스트=권신아 오규원(1941~2007) 시인은, 보통 사람이 호흡하는 산소의 20%밖에 호흡하지 못하는 '만성폐쇄성폐질환'을 앓다 작년 겨울에 타계했다. 임종 직전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라는 마지막 문장을 손가락으로 제자 손바닥에 써서 남겼다.   나는 이 시를 대학교 1학년 때의 여름, 한 남학생이 보낸 대학학보의 주소 띠지 속에서 처음 읽었다.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 여자에게 이 시를 옮겨 나르곤 했던가. 이 시는 시집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1978)에 실린 작품이다. 그러나 시집 '사랑의 감옥'(1991)에 3편의 연작시 중 1편으로 다시 실렸다. '언어는 추억에 걸려 있는 18세기형 모자'라는 부제가 첨가되었고, 2연의 끝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와 3연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가 바뀌었다. 부제를 첨가하여 '여자'는 '언어'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는 것을,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를 뒤로 배치하여 여자나 언어 모두 소유할 수 없는 존재임을 강조하였다.   나무껍질을 벗겨 물에 담그면 물빛이 푸르스름해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물푸레, 이 시 덕분에 물푸레나무와 그 잎이 보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커다란 나무에 비해 여릿하고 포릇하고 정말 '쬐그만' 둥근 잎이었다. 천생 '여자'를 닮은, 이를테면 눈물 하면 떠오르는 글썽임이라든가, 슬픔 하면 떠오르는 비릿함이라든가. 병신 하면 떠오르는 어리숙함이라든가, 시집 하면 떠오르는 아련함이라든가….   그런 '여자'를 반복해 나열하면 할수록, 묘사하면 할수록 '여자'의 실체는 사라지고 '여자'는 신비의 옷을 입는다. 세상의 절반이 여자다. 물푸레나무에 달린 '쬐그만' 잎처럼 하고많은 여자와 '여자'라는 보통명사를 이토록 입에 척척 달라붙도록, 혀에 휘휘 휘감기도록 구체화시켜 놓고 있다니!   여자는 남자의 '여자'다. 남자의 엄마이고 누이이고 애인이고 아내이고 딸이다. 남자의 과거이고 미래이다. 남자의 부재이자 심연이고, 선물이자 폭력이다. 그러니 시작이고 끝이다. 그런 여자를 어찌 정의할 수 있으랴. 모두 가지지만 결코 가질 수 없는 그런 한 '여자'를 누가 가졌다 하는가.     [애송시100편-제10편]사슴- 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내곤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쳐다본다       애송시 100편-제11편] 대설주의보 - 최 승 호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 일러스트=권신아   눈은 어떻게 내리는가. 어디서 오는가. 어디로 사라지는가. 머언 곳에서 여인의 옷 벗는 소리로 내리는 김광균의 눈이 있는가 하면, 쌀랑쌀랑 푹푹 날리는 백석의 눈이 있다. 기침을 하자며 촉구하는 김수영의 살아있는 눈도 있고, 희다고만 할 수 없는 김춘수의 검은 눈도 있다. 괜, 찮, 타, 괜, 찮, 타, 내리는 서정주의 눈도 있고, 갑작스런 눈물처럼 내리는 기형도의 진눈깨비도 있다.   그리고 여기 '백색계엄령'처럼 내리는 최승호(54) 시인의 눈이 있다. 1980년대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이념의 시대였고 폭압의 시대였다. 그는 '상황 판단'이라는 시에서 '굵직한/ 의무의/ 간섭의/ 통제의/ 밧줄에 끌려다니는 무거운 발걸음./ 기차가 언제 들어닥칠지 모르는/ 터널 속처럼 불안한 시대'라고 일컬었다. 그의 시는 선명하고 섬뜩하게 '그려진다'. '관(觀)'과 '찰(察)'을 시 정신의 두 기둥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와 현실을 '보면서 드러내고', 자본주의와 도시문명을 '살피면서 사유한다'.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골짜기에 눈은, 굵게 힘차게 그치지 않을 듯 다투어 몰려온다. 눈보라의 군단이다. 도시와 거리에는 투석이 날리고 총성이 울렸으리라. 눈은 비명과 함성을 빨아들이고 침묵을 선포했으리라. 백색의 계엄령이다. 쉴 새 없이 내림으로써 은폐하는 백색의 폭력, 어떠한 색도 허용하지 않는 백색의 공포! 그 '백색의 감옥'에는 숯덩이처럼 까맣게 탄 '꺼칠한 굴뚝새'가 있고, 굴뚝새를 덮쳐버릴 듯 '눈보라 군단'이 몰려오고, 그 군단 뒤로는 '부리부리한 솔개'가 도사리고 있다. 분쟁과 투쟁, 공권력 투입, 계엄령으로 점철됐던 시대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골짜기에 굵은 눈발이 휘몰아칠 때 그 눈발을 향해 날아가는 굴뚝새가 있었던가. 덤벼드는 눈발에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췄던가. 꺼칠한 굴뚝새의 영혼아, 살아있다면 작지만 아름다운 네 노랫소리를 들려다오! 다시 날 수 있다면 짧지만 따뜻한 네 날개를 펼쳐 보여다오!      [애송시 100편-제12편] 저녁눈 - 박 용 래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 일러스트=잠산    박용래(1925~1980) 시인은 과작의 시인이었다. 그는 우리말을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기워 시를 써냈다. 그의 시는 가난한 것과 세상이 거들떠보지 않는 작고 하찮은 것들을 세필(細筆)로 세세하게 그려내고 돌보았다.   '저녁눈'을 읽으면 허름한 말집(추녀를 사방으로 삥 두른 집)에 앉아 '탁배기'를 한 잔 하고 있는 박용래 시인이 보이는 듯하다. 말집에는 마차꾼과 지게꾼이 흥성흥성하고, 먼 길을 터벅터벅 걸어온 나귀와 노새가 급한 숨을 내쉬느라 투루루 투레질을 하고, 누군가는 구유에 내놓을 여물을 써느라 작두질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해는 떨어지고 추운 밤은 오는데 눈발은 삭풍에 내려앉을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호롱불 불빛을 받으며 떠도는 눈발을, 조랑말의 정처 없는 걸음처럼 난분분한 눈발을, 여물 써는 소리처럼 내리는 눈발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이 시에서 '붐비다'라고 써서 목탄화처럼 평면적인 풍경에 동선(動線)을 끌어넣는가 하면, 한 곳 한 곳 짚어가던 시선을 들어 올려 퀭한 빈터로 옮김으로써 시의 공간을 일순에 넓게 확장하는 재주를 선보이고 있다.   그는 물러나 앉아 늦은 저녁 눈발 내리는 그 풍경을 하나의 '공터'로 읽었을 것이다. 마차꾼과 지게꾼의 떠도는 삶과 내일이면 또 먼 길을 떠나야 하는 그네들의 노심초사와 나귀와 노새의 공복(空腹)을 읽었을 것이다.   박용래 시인은 술판에서 엉엉 잘 울던 마음 여린 시인이었다. 천진하게 잘 울어 '눈물의 시인'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박용래 시인과 절친했던 소설가 이문구는 '박용래 약전(略傳)'이라는 글에서 박용래 시인의 잦은 눈물에 대해 이렇게 썼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언제나 그의 눈물을 불렀다. 갸륵한 것, 어여쁜 것, 소박한 것, 조촐한 것, 조용한 것, 알뜰한 것, 인간의 손을 안 탄 것, 문명의 때가 아니 묻은 것, 임자가 없는 것, 아무렇게나 버려진 것, 갓 태어난 것, 저절로 묵은 것…. 그는 누리의 온갖 생령(生靈)에서 천체의 흔적에 이르도록 사랑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사랑스러운 것들을 만날 적마다 눈시울을 붉히지 않은 때가 없었다."   박용래 시인이 생전에 살았던 대전시 오류동 17번지의 15호를 찾아가면 "감새/ 감꽃 속에 살아라"라고 노래했던 선한 그가 "윤회 끝/ 이제는 돌아와" 다시 살고 있을까     [애송시 100편- 제13편] 빈집 - 기 형 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일러스트=권신아 기형도(1962~1989) 시인의 마지막 시다. 1989년 봄호 문예지에서 이 시를 읽었는데 일주일 후에 그의 부음을 접했다. 이제 막 개화하려는 스물 아홉의 나이에, 삼류 심야극장의 후미진 객석에서 홀로 맞아야 했던 그의 죽음에 이 시가 없었다면 그의 죽음은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초라했을 것인가.   어릴 적부터 살던 집에서 이사를 계획하고 쓰여졌다는 후일담도 있지만 이 시는 사랑의 상실을 노래하고 있다. 사랑으로 인해 밤은 짧았고, 짧았던 밤 내내 겨울 안개처럼 창 밖을 떠돌기도 하고 촛불 아래 흰 종이를 펼쳐놓은 채 망설이고 망설였으리라. 그 사랑을 잃었을 때 그 모든 것들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이 되었으리라. 실은 그 모든 것들이 사랑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떠나보낸 집은 집이 아니다. 빈집이고 빈 몸이고 빈 마음이다. 잠그는 방향이 모호하기는 하지만 '문을 잠근다'는 것은, '내 사랑'으로 지칭되는 소중한 것들을 가둔다는 것이고 그 행위는 스스로에 대한 잠금이자 감금일 것이다. 사랑의 열망이 떠나버린 '나'는 '빈집'에 다름 아니고 그 빈집이 관(棺)을 연상시키는 까닭이다. 삶에 대한 지독한 열망이 사랑이기에, 사랑의 상실은 죽음을 환기하게 되는 것일까.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고 나직이 되뇌며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을 하나씩 불러낸 후 그것들을 떠나보낼 때, 부름의 언어로 발설되었던 그 실연(失戀)의 언어는 시인의 너무 이른 죽음으로 실연(實演)되었던가. 죽기 일주일 전쯤 "나는 뇌졸중으로 죽을지도 몰라"라고 말했다던 그의 사인은 실제로 뇌졸중으로 추정되었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오래된 서적')이라 했던 그가, 애써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정거장에서의 충고')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했건만.   그가 소설가 성석제와 듀엣으로 불렀던 팝송 'Perhaps Love'를 들은 적이 있다. 플라시도 도밍고의 맑은 고음이 그의 몫이었다. "Perhaps, love is like a resting place…"로 시작하던 화려하면서 청량했던 그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질투는 나의 힘')라는 그의 독백도.          [애송시 100편-제14편]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 정 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 일러스트=잠산 이 겨울에 사랑이 찾아온 연인들에게 이 시를 읽어보라고 권한다. 우선 어렵지가 않다. 쉽고, 리듬이 있어 흐르는 물처럼 출렁출렁한다.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눈이 쌓여 무게가 생기듯이 어느 순간 이 시는 우리들의 가슴께를 누르며 묵직하게 쌓이기 시작한다. 한 편의 시를 읽는 경험에도 '뜻밖의 폭설'은 내린다. 폭설이 내려 우리는 압도되어 이 시 안에 고립된다.   큰 고개를 넘으면서 느닷없는 폭설을 만나고 싶다는 말은 사실 좀 도발적이다. 우리는 그 불편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못 잊을 사람하고' 폭설에 갇히고 싶다고 말한다. 폭설에 갇히는 것이 고립의 공포로 엄습해오더라도. 사실 사랑만이 실용적인 것을 모른다. 사랑은 당장의 불편을 모른다.   모든 사랑은 고립의 추억을 갖고 있다. 서랍 깊숙이 넣어둔 연애편지가 있거든 꺼내서 다시 읽어보라. 연애편지는 고립의 기억, 고립의 문장 아닌가. 둘만의 황홀한 고립. 그러니 사랑에게 고립은 고립이 아니다. 우리는 사랑을 지속시키는 한 기꺼이 고립을 선택할 것이다. 그것이 후일에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무너뜨리더라도. 그것이 모든 길을 끊어 놓더라도. 사랑은 은밀하고, 은밀해서 환하다.   문정희(61) 시인은 여고 시절부터 전국의 백일장을 휩쓸었다. 백일장 당선시들을 모아서 여고 3학년 때 첫 시집을 냈다. 타고난 재기를 미쁘게 본 미당 서정주 시인이 시집의 서문을 썼고, '꽃숨'이라는 시집 제목도 달아주었다. 그녀는 여성의 지위와 몸을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가두려는 것들을 거부하면서 한국시사에서 '여성'을 당당하게 발언해왔다. 그러면서 여성 특유의 감수성으로 사랑의 가치를 활달하고 솔직하게 표현해왔다. '한 사람이 떠났는데/ 서울이 텅 비었다'라는 그녀의 문장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랑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활동이다. 톨스토이가 말한 대로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있어보라. 사랑은 소멸하고 말 것이다."        [애송시 100편-제15편] 목마와 숙녀 -  박 인 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등대(燈臺)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일러스트=권신아 시냇물 같은 목소리로 낭송했던 가수 박인희의 '목마와 숙녀'를 옮겨 적던 소녀는 이제 중년의 '여류' 시인이 되었다. '등대로(To the lighthouse)'를 쓴 버지니아 울프는 세계대전 한가운데서 주머니에 돌을 가득 넣고 템스강에 뛰어들었다.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 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하며'라는 유서를 남긴 채. '목마와 숙녀'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페시미즘의 미래'라는 시어가 대변하듯 6·25전쟁 이후의 황폐한 삶에 대한 절망과 허무를 드러내고 있다.   수려한 외모로 명동 백작, 댄디 보이라 불렸던 박인환(1926~1956) 시인은 모더니즘과 조니 워커와 럭키 스트라이크를 좋아했다. 그는 이 시를 발표하고 5개월 후 세상을 떴다. 시인 이상을 추모하며 연일 계속했던 과음이 원인이었다. 이 시도 어쩐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일필휘지로 쓴 듯하다. 목마를 타던 어린 소녀가 숙녀가 되고, 목마는 숙녀를 버리고 방울 소리만 남긴 채 사라져버리고, 소녀는 그 방울 소리를 추억하는 늙은 여류 작가가 되고…. 냉혹하게 '가고 오는' 세월이고,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로 요약되는 서사다.   우리는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생명수를 달라며 요절했던 박인환의 생애와, 시냇물처럼 흘러가버린 박인희의 목소리와, 이미 죽은 그를 향해 "나는 인환을 가장 경멸한 사람의 한 사람이었다"고 쓸 수밖에 없었던 김수영의 애증을 이야기해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인 것을, 우리의 시가 조금은 감상적이고 통속적인들 어떠랴. 목마든 문학이든 인생이든 사랑의 진리든, 그 모든 것들이 떠나든 죽든,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바람에 쓰러지는 술병을 바라다보아야 하는 것이 우리 삶의 전모라면, 그렇게 외롭게 죽어 가는 것이 우리의 미래라면.       [애송시 100편-제16편] 우리가 물이 되어 -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處女)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의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萬里)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人跡)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 일러스트=잠산 물은 선하다. 물은 그 자체로 흐르는 모습이다. 흐르는 에너지이다. 물은 작은 샘에서 솟고, 뿌리에게 스미고, 하나의 의지로 뭉쳐 흐르고, 환희로 넘치고, 작별하듯 하늘로 증발하고, 우수가 되어 떨어져 내리고, 다시 신생의 생명으로 돌아와 이 세계를 흐른다.   우리가 태어나고 사귀고 웃고 슬프고 울고 아득히 사라질 때에도 물은 우리보다 먼저 이 세계에 왔으며 우리보다 먼저 사라졌으며 우리보다 먼저 다시 태어났으니, 유한한 우리에게 물은 한 번도 태어난 적이 없고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다. 물은 불과 흙과 공기와 더불어 이 세계가 온존하는 한 온존할 것이다. 해서 물은 모든 탄생과 소멸을 완성하며, 그 자체로 소생하고 순환하는 생명이다.   이 시를 읽을 때면 '선한 물'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불이 어떤 부정과 대립이라면 물은 그마저도 끌어안는 어떤 관용. 물은 사랑. 자주 침묵하지만 한 번도 사랑을 잊은 적이 없는 마음 큰 이. 우리도 서로에게 물이 되어 서로의 목숨 속을 흐를 수 없을까. 우리는 그렇게 만날 수 없을까. 물과 같고 대지와도 같은 침묵의 큰 사랑일 수 없을까.   강은교(62) 시인이 '사랑法'이라는 시에서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중략)//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라고 노래했듯이.   강은교 시인은 1968년에 등단해 올해로 등단 40주년을 맞았다. 초기에 발표한 시들이 강한 허무 의식을 드러냈기 때문에 그녀를 '허무의 시인'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그녀의 시는 민중적인 서정에도 가 닿고, 사소하고 하찮은 생명들을 끌어안기도 하는 등 아주 큰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 나는 어느 해엔가 그녀가 시의 낭송과 울림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 속 질병과 상처를 치료하는 '시 치료' 공연을 하는 것을 감명 깊게 본 적이 있다. 그때에도 지금에도 강은교 시인은 이 세계의 순례자로서 이 세계의 구원을 위해 생명수를 구해오는 바리데기의 현신이다.      [애송시 100편-제17편] 별들은 따뜻하다 -  정호승                           하늘에는 눈이 있다   두려워할 것은 없다 캄캄한 겨울   눈 내린 보리밭길을 걸어가다가   새벽이 지나지 않고 밤이 올 때   내 가난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나에게   진리의 때는 이미 늦었으나   내가 용서라고 부르던 것들은   모든 거짓이었으나   북풍이 지나간 새벽거리를 걸으며   새벽이 지나지 않고 또 밤이 올 때   내 죽음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 일러스트=권신아정호승(58)시인만큼 노래가 된 시편들을 많이 가진 시인도 드물다. 안치환이 부른 '우리가 어느 별에서'를 비롯해 28편 이상이다. 그의 시편들이 민중 혹은 대중의 감성을 일깨우는 따뜻한 서정으로 충만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뜻한 슬픔'으로 세상을 '포옹'하는 그의 시편들을 읽노라면 좋은 서정시 한 편이 우리를 얼마나 맑게 정화시키고 깊게 위로할 수 있는지를 새삼 깨닫곤 한다.   그는 별의 시인이다. 그것도 새벽 별의 시인이다. 별이란 단어를 그보다 더 많이 쓴 시인이 또 있을까. 그가 바라보는 별에는 피가 묻어 있기도 하고 새들이 날기도 한다. 그의 별은 강물 위에 몸을 던지기도 하고, 그 또한 별에 죽음의 편지를 쓰기도 한다. 어쨌든 그런 별들도 어둠 없이는 바라볼 수 없으며, 밤을 통과하지 않고는 새벽 별을 맞이할 수 없다.   이 시는 '하늘에는 눈이 있다'라는 단언으로 시작한다. 눈은 '보리밭길'을 덮는 눈(雪)이기도 하고 '진리의 때'를 지키는 눈(眼)이기도 할 것이다. 눈 내린 보리밭길에 밤이 왔으니 '캄캄한 겨울'이겠다. 겨울의 캄캄하고 배고픈 밤은 길기도 길겠다. '가난의 하늘'이니 더욱 그러하겠다. 진리의 때가 늦고 용서가 거짓이 될 때, 북풍이 새벽거리에 몰아치고 새벽이 다시 밤으로 이어질 때 그 하늘은 '죽음의 하늘'이겠다. 그런데 그런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얼마나 따뜻할 것인가.   우리 생의 팔할은 두려움과 가난과 거짓으로 점철된 어둠의 시간이다. 눈물과 탄식과 비명이 떨어진 자리에 피어나는 꽃, 그것이 바로 별이 아닐까. '슬픔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의/ 새벽은 언제나 별들로 가득한('슬픔을 위하여')' 법이다. 어두운 현실에서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시인의 의지가 '별'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리라. 그래서인지 그의 시는 가장 낮은 곳에서 밝다.   눈 내리는 보리밭길에 흰 첫 별이 뜰 때부터 북풍이 지나간 새벽 거리에 푸른 마지막 별이 질 때까지 총총한 저 별들에 길을 물으며 캄캄한 겨울을 통과하리라. 그 별들의 반짝임과 온기야말로 우리를 신(神)에 혹은 시(詩)에 가까이 가게 만드는 것이리라.        [애송시 100편-제18편] 님의 침묵 -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는 차디찬 띠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러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골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얏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일러스트 = 잠산만해(萬海) 한용운(1879~1944)은 식민지 시대를 살다 간 혁명가요, 시인이요, 수행자였다. '님의 침묵'은 1926년에 펴낸 그의 유일한 시집 '님의 침묵'의 표제시이자 서시이다. 이 시는 님과의 이별과 이별의 슬픔을 재회(再會)로 역동적으로 바꿔놓는다. 이런 극적 구성은 불교 특유의 유심적 상상력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마음의 중심을 돌이키는 것으로써 만해는 있음과 없음, 좋음과 그렇지 못한 것,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 만남과 이별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아마도 만해의 시를 올연히 뛰어나게 하는 힘은 한쪽 극단으로 치우치려는 마음의 편당(偏黨)과 굴복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 그의 수행자적 기풍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역설의 화법이 생겨났을 것이다.   만해는 시집의 맨 앞에 놓인 '군말'에서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薔薇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라고 썼다. 만해는 님을 절대적인 추앙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았고, 님과 나의 관계를 적극적이고도 능동적으로 해석했다. 만해는 내 안에서 님을 발견하고 완성하고자 한 실천가였다.   조선의 땅덩어리가 하나의 감옥인데 어떻게 불 땐 방에서 편히 살겠느냐며 만해는 냉골의 거처에서 꼿꼿하게 앉아 지냈다. 해서 '저울추'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돌집(조선총독부)이 마주 보이는 쪽으로 당신의 집을 지을 수 없다며 심우장을 북향으로 지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만해는 깨달음을 얻은 후 오도송에서 "사나이 이르는 곳 어디나 고향인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그네의 수심에 잠겼던가. 한마디 소리쳐 우주를 설파하니 눈 속의 복숭아꽃 붉게 붉게 나부낀다"라고 읊었다. '눈 속에 핀 복숭아 꽃송이'가 바로 만해의 시요, 만해의 정신이었다 할 것이다.      [애송시 100편-제19편] 겨울 바다 - 김남조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버리고   허무의 불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 일러스트=권신아 기도하는 사람을 본 적 있다. 새벽 교회당 구석에서, 간절히 내뻗은 자신의 두 손을 부여잡고 고개를 떨군 채였다. 소리 없이 일렁이는 가파른 등에서 겨울 바다 냄새가 났다. 지난밤 내내 뚝 끊긴 생의 절벽 앞에 서 있다 온 사람의 등이었다. 인간은 기도할 줄 아는 사람과 기도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구분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구나 가슴에 새를 품고 산다, 미지라는 한 마리 새를. 삶에 대한 자신의 의지 혹은 희망을 우리는 그렇게 부르는 것이리라. 그 새를 잊지 않고 간직한 사람은 미지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자이다. 그러나 미래의 새를 잃어버린 사람은 '겨울 바다' 앞에 서기도 한다. 그곳은 절망의 끝 혹은 허무의 끝일 것이다.   보고 싶던 미지의 새들은 죽어 있고 매운 바닷바람에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버린, 허무라는 마음의 불(心火)로 불붙은 겨울 바다. 그 죽음의 공간에서 시인은 시간의 힘을 깨닫는다. 시간은 모든 걸 해결해 준다는 말도, 세월이 약이라는 말도,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우리를 맑게 깨우치고 우리를 키우는 건 세상을 항해 '끄덕이게' 하는 보이지 않는 시간이다.   기도는 시간을 견뎌내는 데서 비롯된다.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해달라는 심혼(心魂)의 기도는, 저 차디찬 바다를 수직으로 관통하는 '인고의 물기둥'을 세우는 일이었으리라. '허무의 불'을 '인고의 물'로 버텨내는 것이야말로 시간의 힘이고 기도의 힘이다.   김남조(80) 시인은 기도하는 시인이다. 팔순을 맞이하여 어언 60여 년의 시력(詩歷)으로 간구해온 그의 시편들은 사랑과 생명과 구원으로 충만한 기도들이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설일(雪日)')를 낭독하는, 떨리는 듯한 그러나 결기 있는. 시인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애송시 100편-제20편] 삽 - 정진규                       삽이란 발음이, 소리가 요즈음 들어 겁나게 좋다 삽, 땅을 여는 연장인데 왜 이토록 입술 얌전하게 다물어 소리를 거두어들이는 것일까 속내가 있다 삽, 거칠지가 않구나 좋구나 아주 잘 드는 소리, 그러면서도 한군데로 모아지는 소리, 한 자정(子正)에 네 속으로 그렇게 지나가는 소리가 난다 이 삽 한 자루로 너를 파고자 했다 내 무덤 하나 짓고자 했다 했으나 왜 아직도 여기인가 삽, 젖은 먼지 내 나는 내 곳간, 구석에 기대 서 있는 작달막한 삽 한 자루, 닦기는 내가 늘 빛나게 닦아서 녹슬지 않았다 오달지게 한번 써볼 작정이다 삽, 오늘도 나를 염(殮)하며 마른 볏짚으로 한나절 너를 문질렀다         ▲ 일러스트=잠산 시인은 언어의 맨살을 만진다. 말과의 상면과 말의 '한 줄금 소나기'를 만나는 순간의 경이를 시인은 표현한다. 우리의 마음에서 세상에 대한 경이가 사라지는 일은 슬픈 일이다.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혀를 대보고 생각을 만드는 이 날것의 감각에서 소위 맛이 사라지면 살맛이 가실 것이니 이 세상은 얼마나 캄캄한 절망이겠는가. 이 세상을 다시 맞는 아침에는 당신도 "아, 세상이 맛있다!"라고 말해 보라. 애초에 생(生)에는 무력감이 없으므로.   시 '삽'에는 경이가 있다. 나도 '삽'을 발음해 본다. 입술이 모시조개처럼 예쁘게 모인다. 손으로 목화를 따들이는 느낌이 있다. 시인은 이 발성의 쾌감에 희열한다. 그리고 거기서 좀 더 들어간다. "젖은 먼지 내 나는 내 곳간"에 작달막한 삽 한 자루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여준다. 언젠가 제대로 한 번 써볼 생각으로 연일 '마른 볏짚으로' 문질러 놓아 녹슬지도 않았다. (나도 나의 아버지가 들일을 마친 해질 무렵에 마른 볏짚으로 삽날을 문지르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 저녁 풍경의 숙연함이여!)   시인은 무슨 일에 이 삽을 사용하려 하는 것일까. 당신의 사랑을 얻을 때에 한 번 뜨고, 종국에 닥칠 나의 죽음을 내 스스로 거두어들일 때 한 번 뜨겠다고 한다. 생의 한 경이를 포착한 이 시가 참 좋은 이유는 시 전반부의 발성의 쾌감이 후반부의 비장함으로 진행되는 데에 있다. 비장하지만 마구 심각하지는 않다. 다가올 시간에 대한 기다림이 있기 때문이다. 이 또한 경이다. 경이가 없다면 기다림도 없을 것이므로. (연애에 경이가 사라지는 순간 우리의 애인들이 내일을 기다리지 않고 당장 모두 떠나가 버리는 것처럼)   시 전문지 월간 '현대시학'의 주간을 맡고 있는 정진규(69) 시인은 산문시의 성공적인 전형을 제시하고 있는 시인이다. 그의 산문시는 영혼을 한순간에 탁, 부려 놓는다. 그리하여 산문시 아닌 시들보다 오히려 더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낸다. 시 쓰는 일을 비유하길 세상을 배알하는 일이라고 겸손하게 말하는 그는 올해로 칠순을 맞았다. 그의 시는 종심(從心)이되 어긋남이 없으니 무량무변하다.     [애송시 100편-제21편] 귀천 -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영화 '박하사탕'에서, 돌아갈 곳 없는 설경구는 철교 위에서 하늘을 향해 절규한다. "나 다시 돌아갈래." 그러나,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은 '빽'이 있는 사람이다. 그 '빽'이 하늘이라면 그는 천하무적으로 세상을 주유하는 사람이다. 하늘을 믿으니 이 땅에서는 깨끗한 빈손일 것이다. 하늘을 믿는데 들고 달고 품고 다닐 리 없다. 그러니 새벽빛에 스러지는 이슬이나, 저물녘 한때의 노을이나, 흘러가고 흘러가는 구름의 손짓 등속과 한패일밖에.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 더구나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라며 스스로를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시 '행복')라 일컬었던, 왼쪽 얼굴로는 늘 울고 있던 시인, 천상병!(1930~1993) '귀천'은 1970년 발표 당시에는 '주일(主日)'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다.   그의 시는 생(生)의 바닥을 쳐본 사람들이 갖는 순도 높은 미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의 언어는 힘주지 않고, 장식하지 않고, 다듬지 않는다. '단순성으로 하여 더 성숙한 시'라 했던가. 이 시에서도 그는 인생이니 삶이니 사랑이니 죽음이니 하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도 무욕이니 초월이니 달관이니 관조니 하는 말로 설명하지 말자. 이슬이랑 노을이랑 구름이랑 손잡고 가는 잠깐 동안의 소풍이 아름답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그런 소풍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 가볍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그러니 소풍처럼 살다갈 뿐.   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전도유망한 젊은이였으나 '동백림 사건'(1967)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고 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 후유증은 음주벽과 영양실조로 나타났으며 급기야 행려병자로 쓰러져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 그가 죽었다고 판단한 친지들에 의해 유고시집 '새'(1968)가 발간되었는데, 그 후로도 천진난만하게 25년을 더 살다 갔다.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 내가 죽는 날/ 그 다음날"이라고 노래했던 그는 분명 새가 되었을 것이다. 가난하고 외롭게 살다 갔으니, 자유롭고 가벼운 새의 영혼으로 다시 태어났을 것이다.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새')!      [애송시 100편-제22편] 푸른 곰팡이-산책시1 - 이문재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 일러스트=잠산 이문재(49) 시인의 시들은 치열하고 내부가 끓고 있다. 그의 시들은 결사(結社)를 한다. 주로 도시와 문명의 급소를 공격해 단숨에 제압한다. 시 '푸른 곰팡이'가 실려 있는 두 번째 시집 '산책시편'(1993)은 시단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는 이 시집을 통해 우리가 유토피아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도시적 공간의 무서운(파시스트적인) 속도에 대항해 '게으르고 어슬렁거리고 해찰하는' 8편의 산책시(散策詩) 연작을 발표한다. 그는 '아파트단지가/ 웨하스처럼, 아니 컴퓨터칩처럼/ 촘촘하게 박혀' 있는 곳을 느릿느릿 걷는다. 그는 '도시는 단 한 사람의 산책자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느림보는/ 가장 큰 죄인으로 몰립니다/ 게으름을 피우거나 혼자 있으려 하다간/ 도시에서 당하고 말지요/ 이 도시는 산책의 거대한 묘지입니다'('마지막 느림보-산책시 3')라고 썼다.   시 '푸른 곰팡이'에서도 느림을 예찬한다. 사랑도 산책 같아야 한다고 말한다. 사랑이 산책 같아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사랑은 불꽃처럼 일어나는 것이지만 기다림과 그리움의 시간을 살면서 사랑은 무르익고 완성된다는 뜻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써 보라. 아무리 격렬한 사랑에 휩싸인 사람일지라도 백지를 앞에 두면 말문이 막힐 것이다. 그러나 머뭇거림이 편지의 미덕. 지우고, 생각을 구겨버리고, 파지(破紙)를 내는 시간에 우리는 사랑의 감정을 솔직하게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나흘을 또 기다려 보라. 나의 편지가 사랑하는 이의 안뜰과 마루와 품에 전달되기까지의 그 시간을 마른 목으로 가슴 설레며 살아보라. 푸른 강이 흘러가는 그 기다림의 거리를 살아보라. 그러는 동안 사랑은 푸른 강의 수심처럼 깊어질 것이다.   요즘 이문재 시인은 따뜻한 체온의 '손'을 주목하고 있다. 나와 당신 사이에 '내미는 손'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근년에 발표한 시 '손은 손을 찾는다'에서 '손이 하는 일은/ 결국 다른 손을 찾는 것이다/ 오른손이 왼손을 찾아/ 가슴 앞에서 가지런해지는 까닭은/ 빈손이 그토록 무겁기 때문이다/ 미안함이 그토록 무겁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그의 시는 도시와 문명에 단호하게 맞서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만 그 속내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괸, 그리워하고 연민하는 사랑의 마음이 산다.      [애송시 100편-제23편]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   백 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여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내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일러스트=권신아 평북 정주하면 소월이 있고 백석(白石·1912~1995)이 있다. 1988년의 월북시인 해금 조치 이후 '백석 붐'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백석 시인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현대시에서 드물었던 북방 정서와 언어의 한 정점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는 그의 절친한 친구가 소장하고 있다가 1948년에 발표했다. 해방 공간에 발표된 백석의 마지막 작품이다. '남신의주 유동에 있는 박시봉 집에서'라는 제목의 뜻에 주목해볼 때 친구에게 편지 형식으로 보낸 고백시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그래서일까. 소리 내어 읽노라면 그가 나직이 말을 건네는 듯 '가슴이 꽉 메여 오'고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이곤 한다.   '나'라는 맨 얼굴의 시어나 '-이며' '-해서' '-인데'와 같은 나열 혹은 연결어미나 '것이었다'라는 종결어미 등의 반복이 내뿜고 있는 독특한 산문적 리듬이야말로 이 시의 백미다.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한다는 직유며,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직설이며,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다는 역설 등 사무치지 않는 구절이 없다.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생각하기까지의 의연한 회복 과정이 유장한 리듬과 어우러져 한 편의 인생 서사를 떠올리게 한다.   1942년 일본 시인 노리다케 가즈오는 기자와 교사생활을 작파하고 만주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히 살고 있던 그를 찾아간다. 그는 가즈오에게 '나 취했노라'라는 시를 헌정했다. 20년 후 가즈오는 "파를 드리운 백석./ 백이라는 성에, 석이라고 불리는 이름의 시인./ 나도 쉰세살이 되어서 파를 드리워 보았네."('파')라는 시를 그에게 헌정했다. 파를 들고 우두커니 서 있었을 그를 생각한다. 쌀랑쌀랑 소리를 내며 싸락눈을 맞는다는, 이름만으로도 가슴 뻐근한 갈매나무를 생각한다.      [애송시 100편-제24편] 산문(山門)에 기대어 - 송수권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 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옴을             ▲일러스트 잠산     하마터면 이 시는 세상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유성처럼 사라질 뻔했다. 송수권(68) 시인이 서대문 화성여관 숙소에서 이 작품을 백지에 써서 응모를 했는데, 잡지사 기자가 "원고지를 쓸 줄도 모르는 사람의 원고"라며 휴지통에 버렸다. 당시 편집 주간이었던 이어령씨가 휴지통에 있던 것을 발견해 1975년 '문학사상' 지면에 시인의 데뷔작으로 발표했다. 이 일화로 '휴지통에서 나온 작품'이라는 '입소문'을 타 문단에서 화제가 되었고, 발표 이후에는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누이'를 애타게 호명하고 있지만, 이 시는 남동생의 죽음에 바치는 비가(悲歌)였다.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비어 있는 맞은편을 망연히 바라보았을 그 시방(十方)의 비통함은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시인은 무엇보다 죽은 동생의 환생에 대한 강한 희원을 드러낸다.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등의 역동적인 문장은 적극적인 환생을 바라는 시인의 마음을 엿보게 한다. 산문(山門)은 속계(俗界)와 승계(僧界)의 경계이고, 이승과 명부(冥府)가 갈라지는 경계인 바, 산문에 기대어 생사의 유전(流轉)을 목도하는 것은 큰 고통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생사의 감옥에 갇혀 살아도 죽은 사람은 산 사람의 마음속에서 영생을 살아 이처럼 마음을 절절하게 울리는 노래를 낳았다.   송수권 시인은 전통 서정시의 맥을 이어오면서 황토와 대(竹)와 뻘의 정신에 천착해 왔다. 그는 '곡즉전(曲卽全·구부러짐으로써 온전할 수 있다)'을 으뜸으로 받든다. "곡선 속에 슬픔이 있고, 추억이 있고, 들숨이 있지요. 시간이 있고, 희망이 있고, 공간이 있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시는 "고깔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 같아서 사람의 마음을 '애지고 막막'하게 하지만 남도 특유의 가락과 토속어의 사용으로 슬픔과 한을 훌쩍 넘어서는 진경을 보여준다.      [애송시 100편-제25편] 잘 익은 사과 - 김혜순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 일러스트=잠산   여름 여치가 운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가을 정미소를 지난다. 차가운 (겨울) 구름이 떠있다. 그렇게 자전거는 골목 모퉁이를 돈다. (아가였던) 할머니가 구멍가게 평상에 앉아 있다. '잘 익은 사과'는 이런 일상적인 풍경을 다채로운 감각의 성찬으로 펼쳐놓고 있다.   백 마리의 여치 울음 소리는 자전거의 바퀴 도는 소리, 정미소에서 나락 빻는 소리와 겹쳐진다. 처녀 엄마가 낳은 입양 가는 아가의 뺨은 구름의 차가움으로 전이되고, 그 구름은 천년 동안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로 확장된다. 고향 마을은 금세 큰 사과로 축소되고, 마을을 달리는 자전거 바퀴는 사과를 깎는 칼날 소리를 낸다. 차르르차르르(사각사각)!   자전거 바퀴가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그때마다 고향 마을만큼이나 큰 사과가 깎인다는 발상과 그 큰 사과를 노망든 할머니가 숟가락으로 파내 잇몸으로 오물오물 잡수신다는 발상은 사뭇 상징적이면서 동화적이다. 노망든 할머니가 숟가락으로 야금야금 파먹는 사과는 시간의 신(神)이 돌리는 물레의 실타래에 비견할 만하다. 기발하면서도 유쾌하다. 아가, 처녀 엄마, 할머니로 숨가쁘게 이동하는 시간을 '천년 동안 아가인 그 사람'으로 정지시켜 놓는 것도 흥미롭다.   차르르차르르 돌던 한 세월이 발갛게 잘 익었겠다. 누군가 고향 마을에서 그 한 세월을 잘 놀다 갔겠다. 껍질이 홀라당 깎인 노르스름한 사과 속살 같았겠다. 군침 가득 돌았겠다. 그렇다면, 이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는 '밤낮을 만드시고 이 지구를 세세년년토록 운항하시는' '숫자 나라의 시간 윤전기 노동자인 우리들 앞에서/ 감독을 게을리하신 적이 한 번도 없으신', '세상의 모든 달력 공장 공장장님'을 낳은 바로 그 처녀 엄마 아니었을까.   김혜순(52) 시인은 8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 시인이다. 그는 겹침의 시학을 즐겨 구사한다. 시간과 공간을 확장시키는가 하면 수축시키고, 감각과 시점을 겹쳐놓는가 하면 뚝 떨어뜨려 놓는다. 여성의 환상적 내면을 몸의 감각과 경험으로 그려냄으로써 일견 초현실주의적 색채를 떠올리게 한다. 그를 최근 유행하는 '환상시'의 대모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애송시 100편-제26편] 산정 묘지 - 조정권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산정(山頂)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天上)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天上)의 일각(一角)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同列)에 서는 것.   그러나 한번 잠든 정신은   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리.   (중략)   어둠은 존재의 처소(處所)에 뿌려진 생목(生木)의 향기   나의 영혼은 그 향기 속에 얼마나 적셔두길 갈망해 왔던가.   내 영혼이 내 자신의 축복을 주는 휘황한 백야(白夜)를   내 얼마나 꿈꾸어 왔는가.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누르지 않는다면.       ▲ 일러스트=잠산 시집 '산정묘지'를 펼쳐 자서(自序)를 대신하고 있는 시 '독락당'을 읽는다. "독락당(獨樂堂) 대월루(對月樓)는/ 벼랑꼭대기에 있지만/ 옛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 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 내려오는 길을 부셔버린 이." 아주 짧지만 고절이 있다. 찬 서릿발 속에 핀 국화 같고, 차돌처럼 향기를 돌돌 말았다 피는 매화 같다. 시집에 수록된 서른 편의 산정묘지 연작시들을 꿰는 시가 바로 '독락당'이라는 시이다.   산정묘지 연작시들은 협소한 한국시의 정신적인 영역을 광대하게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프랑스의 좌파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불어로 번역된 산정묘지 시편들의 성과를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시인의 고백에 따르면, 시인이 동양적인 정신주의의 극점을 보여주는 이 시편들을 쓰게 된 것은 한학자이면서 불교학자였던 김달진 시인과의 만남이 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로 시인은 세속적인 욕망을 덜어내고 영혼의 품위와 위엄을 지향하는 '고사(高士)의 시'를 선보인다.   '산정묘지 1'은 설산의 꼭대기에 정신의 처소를 마련해 두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눈이 다 녹아버린" 질척질척하고 비루한 세계가 아니라 얼음이 꽝꽝 언 침묵의 세계에 살겠다는 결의를 드러낸다. '정신적인 공해'의 공간을 떠나 무서운 고요가 사는 산정에 오르겠다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지켜내야 할 정신적인 기품을 잃지 않겠다는 속뜻을 내보인다.   조정권(59) 시인은 언어감각이 예민할 뿐만 아니라 고건축과 고전음악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다. 평소에 그를 만나면 그는 "자기를 잘 견뎌내는 일 하나만 잘해도 아주 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모두가 성자가 될 수는 없지만, 세속적인 욕망을 버리고, 시끄럽고 험악한 곳을 버리고 고독하게 물러나 앉아 스스로의 마음을 보살피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자.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인 몸을 끌고 저 산정에 오르는 성스러운 즐거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애송시 100편-제27편] 광야 -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진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러스트=권신아 시집 한 권으로 '현대시 100년'에 길이 남은 시인들이 많다. 김소월과 한용운과 김영랑이 그렇다. 특히 유고시집 한 권으로 길이 남은 시인들도 있으니, 이상과 윤동주와 기형도 그리고 여기 이육사(1904~1944) 시인이 그렇다. 그의 이름 앞에는 많은 수식이 따라 다닌다. 지사(志士), 독립투사, 혁명가, 아나키스트, 테러리스트, 의열단 단원 등. 1928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수감되었을 때 수인번호가 264(혹은 64), 이를 '대륙의 역사'라는 뜻의 한자 '육사(陸史)'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가 어떤 항일운동을 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다. 단지 17회 정도 감옥을 들락거리며 심한 고문을 받았다는 것, 만주·북경 등지를 부단히 왕래했다는 것, 북경 감옥에서 40세의 나이로 옥사했다는 것 정도.   닭 울음소리가 들렸다는 것인지 안 들렸다는 것인지, 초인이 있을 거라는 것인지 초인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인지, 이 광야에 목놓아 부르는 사람이 초인인지 나인지, 초인을 목놓아 부르는 것인지 노래를 목놓아 부르는 것인지,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왜 천고(千古)의 뒤에야 오는 것인지 해석 이 애매한 부분이 많은데도 이 시가 이토록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늘이 처음 열렸던 날부터 다시 천고 후까지, 휘달리던 산맥들도 범하지 못했으며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어준 이곳! 이 신성불가침의 시공간 속에서 흰 눈과 흰 말(馬), 매화 향기와 초인의 이미지는 돌올하다. 특히 까마득한 날부터 천고 뒤로 이어지는 대서사적 시제와 감탄하고 묻고 명령하는 극적인 어조 속에서 '광야'의 고결한 미감과 강렬한 정서는 한결 고무된다. 웅대하다는 말, 장엄하다는 말이 이만큼 어울리는 시도 드물 것이다.   감옥에서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유시 '꽃'에서도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보노라"라고 노래했다. 오천 년의 역사가 시작된 이 광야에서, 지금-여기의 눈보라 치는 겨울 추위를 이겨내고 찬란한 꽃을 피울 미래의 그날을 떠올려본다. 시인이 기꺼이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렸던 이유일 것이다. 기름을 바른 단정한 머리에 늘 조용조용 말하고 행동했다는, 올곧은 시인이 올곧은 삶 속에서 일구어낸 참 올곧은 시다.      [애송시 100편-제28편]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 오탁번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 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년 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탄부(炭夫)의 손으로   화차에 던져지는,   원시림 아아 원시림   그 아득한 세계의 운반소리.   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의 발언.   연통을 빠져나간 뜨거운 기운은   겨울 저녁의   무변한 세계 끝으로 불리어 가   은빛 날개의 작은 새,   작디작은 새가 되어   나뭇가지 위에 내려 앉아   해뜰 무렵에 눈을 뜬다.   눈을 뜬다.   순백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 번째 눈을 뜨듯. (후략)             ▲ 일러스트=잠산  겨울 서정시의 대표격인 이 시는 평론가 이숭원씨의 표현대로 '찬란한 시간의 금비늘'이 반짝반짝한다.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는 섬세한 감각이나, "순백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 번째 눈을 뜨듯" 같은 투명한 언어감각을 보라. 시인은 다른 행인들처럼 나뭇가지에 내린 눈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의 묘미는 자연 현상인 눈의 적설을 생명의 큰 순환으로 읽어낸 데 있다. 눈이 쌓인 원시림이 석탄이 되고, 탄부의 손에 의해 채탄이 되고, 이층방 스토브의 꽃불이 되고, 하늘로 올라가는 기운이 되고, 다시 숲으로 내려앉는 눈이 되는 그 시간의 돌고 돎-둥근 궤적을 시인은 읽어내고 있다. 이 '돌아옴'의 발견이 이 시를 빼어나게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우주의 모든 존재가 돌아온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세계는 얼마나 신비롭고, 얼마나 기특하고, 얼마나 황홀하겠는가.   오탁번(65) 시인은 1966년에 동화 당선, 1967년에 시 당선, 1969년에 소설 당선이라는 신춘문예 3관왕의 화려한 등단 이력을 갖고 있다(김은자 시인을 아내로 둔 시인 커플로도 유명한데, 김은자 시인도 신춘문예 2관왕 출신이다). 이 시는 그의 시 데뷔작이다. 너무 가난해서 고등학교 3학년 2학기를 다니지 못했는데 담임선생님이 졸업장을 우편으로 보내주었다는 일화를 나는 언젠가 들었다. 대학에서 시 창작 수업을 진행하는 방식도 독특했다. 가끔은 밤새 쓴 시를 칠판에 적어놓고 학생들로부터 터놓고 평가를 받기도 했다. 나도 시 창작 수업을 들었는데 기말시험에 '학교에 자목련나무가 몇 그루인가'를 묻는 문제가 있었을 정도였다.   요즘 오탁번 시인은 고향으로 내려가 살고 있다. 그의 고향은 충북 제천시 백운면으로 천둥산과 박달재 사이에 있는 조그만 마을. 폐교된 모교를 사들여 '원서헌'이라는 문학관을 차렸다. 그곳서 그는 시골 아이들에게 시를 읽히는 훈장님이다. 그곳서 그는 우리가 잊어버린 토박이 우리말을 되살려내는 시를 쓰고 있다. "산 속에 큰 항아리를 하나 묻고 그 속에 들어앉아 글을 쓰고 싶다"는 그는 "아기를 낳는 산모의 지독한 아픔과 숨찬 기쁨이 바로 시"라고 말하는 순은의 시인이다.      [애송시 100편-제29편] 성탄제 - 김종길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러히 잦아지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설어운 설흔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 일러스트 권신아 김종길(81) 시인의 '성탄제'를 읽는 일은 내게 유년의 흑백 사진을 보는 일처럼 애틋하고 살가운 일이다. 겨울밤, 열에 시달리며 칭얼대던 어린 내게 아버지의 코트 자락은 서늘했다. 겉옷을 벗으신 아버지는 물에 만 밥 한 숟갈 위에 찢은 김치를 씻어 올려놓으시고는 아, 아, 하셨다. 하얀 가루약도 그렇게 먹이셨다. 어머니가 방을 치우고 이부자리를 펴는 사이 오래오래 나를 업고 계셨다.   산수유 열매는 고열에 약효가 있다. 열에 시달리는 어린것을 위해 산수유 열매를 찾아 눈 덮인 산을 헤매셨을 아버지의 발걸음은 얼마나 초조했을까. 할머니가 어머니의 부재를 대신하고 있으니 아버지 속은 얼마나 더 애련했을까. 흰 눈을 헤치고 따오신 산수유 열매는 혹한을 견디느라 또 얼마나 안으로 말려 있었을까. 눈 속의 붉은 산수유 열매는, 바알간 숯불과 혈액과 더불어 성탄일의 빨간 포인세티아를 떠올리게 한다. 아버지가 찾아 헤매셨던, 탄생과 축복과 생명과 거룩을 염원하는 빛깔이다. 생을 치유할 수 있는 약(藥)의 이미지다.   김종길 시인은 명망있는 유학자 집안의 후예다. 한학과 한시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가 선택한 것은 영문학이었다. 우리나라에 영미시와 시론, 특히 이미지즘을 소개하는 데 선구적 역할을 했다. 유가적 전통과 이미지즘이 어우러진 그의 시는 명징한 이미지, 절제된 표현, 선명한 주제 의식을 그 특징으로 삼고 있다. 이를 일컬어 '점잖음의 미학'이라 했던가.   차가운 산수유 열매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이 어린것의 열을 내리게 했을 것이다. 특히 산수유, 서느런, 성탄제, 숯불, 설어운 설흔 살의 'ㅅ' 음이 서늘한 청량제 역할을 한다. 그 서늘한 청량제 속 따스한 혈맥이 우리네 가족애일 것이다. 그 따스함은,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는 그의 시 '설날 아침에'에서도 만날 수 있다.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마음으로 설날 아침을 맞이하자. 매운 추위 속에서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맞이하자. 그 한가운데 가족이 있음을 기억하자     [애송시 100편-제30편] 사라진 손바닥 - 나희덕   처음엔 흰 연꽃 열어 보이더니   다음엔 빈 손바닥만 푸르게 흔들더니   그 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 들고 서 있더니   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   수많은 창(槍)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   거대한 폐선처럼 가라앉고 있네       바닥에 처박혀 그는 무엇을 하나   말 건네려 해도   손 잡으려 해도 보이지 않네   발밑에 떨어진 밥알들 주워서   진흙 속에 심고 있는지 고개 들지 않네       백 년쯤 지나 다시 오면   그가 지은 연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빈 손이라도 잡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흰 꽃도 볼 수 있으려나       회산에 회산에 다시 온다면               ▲ 일러스트 잠산  이별이 이별의 사건으로만 완성된다면 사람에겐 애초부터 마음이라는 게 없었을 것이다. 이별 뒤에 오는 축축한 망각의 시간이 훨씬 고통스럽다. 서서히 잊어가며 다시 시간을 거슬러 돌아가 축음기처럼 생생하게 이별 이전의 일까지를 재생시키는 모든 과정을 아울러 우리는 이별이라는 사건의 전모(全貌)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잊는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생명 없는 사물처럼 안색 없이 돌아서기만 하면 될 것이다. 생명 없는 사물의 안색으로 헤어진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괴로움을 겪을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큰 사랑은 사랑이 소멸하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것. 꽃 이후의 꽃다발 혹은 열매 이후의 열매처럼 쇠잔하게 말라가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어떤 것이 바로 사랑 아니겠는가.   무안의 회산 백련지를 찾아가 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연꽃이 만개한 그 시간을 찾아가겠지만. 시인은 연못이 폐선처럼 가라앉는 시간에 거기를 찾아간 모양이다. 흰 연꽃도, 푸른 손바닥 같은 연잎도, 따뜻한 한 공기의 밥 같은 연밥도 없는 시간. 시인은 뒤늦게 그 연못을 찾아간 모양이다. 마치 애별리고(愛別離苦)를 겪고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간 사람처럼. 그 연못에서 시인은 연밥과 연잎과 연꽃의 시간을 다시 살려낸다. 우리의 습관인 순차적인 짐작과는 다른 방식으로.   누군가의 말대로 나희덕(43) 시인은 '울음의 감별사'이다. 그녀는 한 산문에서 마른 석류를 들여다본 일에 대해 쓴 적이 있다. 붉은 석류가 마르면서 바람 빠진 공처럼 물렁물렁해지고 거기서 작은 벌레들이 기어나오는 것을 보면서 "삶이란 완벽한 진공포장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오히려 안도했다"라고 적었다. 세상의 통증 하나하나와 만날 때 투덜대고, 서운해하며 토라지고, 대놓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그녀의 시편들은 시원시원하게 정직해서 비옥하다. 그녀는 복숭아나무 같은 시인이다. 가까이 다가가면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을 펼쳐놓는 복숭아나무. 복숭아나무가 그토록 눈이 부신 나무임을 처음 알게 해준, 복숭아나무와 친족인 시인.      [애송시 100편-제31편] 혼자 가는 먼 집 - 허수경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 일러스트 권신아  '그대'는 어떻게 '당신'이 되는가. 허수경(44) 시인은 "그대라는 자연의 달이 나에게 기대 와 저를 부빌 때"라고 한다. '사내'가 아름다울 때, 그 아름다움에 기댈 수 있을 때 '당신'이 되기도 한다. 부빈다는 것, 기댄다는 것, 그것은 다정(多情)이고 병(病)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병자처럼 당신을 묻은 마음의 무덤에 벌초하러 간다. 사실은 슬픔으로 이어진 '살아옴의 상처'와,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을 추억하며 한 병의 맨 술을 마시는 중이리라. 백수광부처럼 돌아올 수 없는 강을 훌쩍 건너가 버린 당신! 당신이 먼저 당도해버린 그곳은 나 또한 혼자서 가야 할 먼 집이다. 그러니 남겨진 나는 참혹할밖에.   참혹은 '당신'으로 상징되는 모든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총체적 참혹이다. 사랑을 떠나 보낸 실연의 참혹, 아버지를 여읜 망부의 참혹, 신념을 잃은 한 시대의 참혹.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고 무를 수도 없는, 죄다 마음에 묻어야 하는 당신들이다. 그런 당신을 웃으면서 울면서 혹은 취해서 부르는 이 시의 언어는 언어 이전이거나 언어 이후다. 단속적인 말줄임표와 쉼표,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오는 '킥킥'이라는 의성어에는, 참혹인 줄 알면서도 참혹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자의 내면풍경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나와 당신, 사랑의 마음과 마음의 무덤, 환후와 치병이 '각각 따로'이기에, 당신과 함께했던 세월과 사랑과 상처와 그 상처의 몸이 모두 적요이고 울음이다. 그런 울음을 짊어지고 가는 시인, 세간의 혼몽을 잘 먹고 잘 노래하는 시인이야말로 자신의 불우함을 다해 노래하는 시인의 지복(至福)일 터, 이 시는 그 지복의 한 자락을 걸쳐 입고 있다.   허수경 시인은 울음 같은, 비명 같은, 취생몽사 같은 시집 '혼자 가는 먼 집'을 낸 직후 독일로 휘리릭 날아가버렸다. 1990년대 초반이었고, 시인의 생부가 돌아가시고 난 직후였다. 동안(童顔)에, 대책 없는 맨몸이었다. 고고학을 공부한다 했다. 잘살고 있다고 했다. 독일로 날아간 지 벌써 16년째다. 당신… 당신이라는 말은 언제 불러도 참 좋다, 그리고 참 참혹하다, 킥킥 당신….      [애송시 100편-제32편] 소 - 김기택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 일러스트 잠산   쟁기와 써레와 달구지를 끌던 소, 두꺼운 혀로 억센 풀을 감아 뜯던 소, 송아지를 낳아 대학 공부를 시켜주던 소, 추운 날 아버지가 덕석을 입혀주던 소, 등을 긁어주면 한없이 유순해지던 소, 코뚜레가 꿰어 있는 소, 우시장에 팔려가는 아침에는 주먹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던 소….   소에게 들일이 점점 없어지면서 소의 쓸모는 이제 비육에만 있다지만 소만큼 오랫동안 농가를 살려온 짐승도 드물다. 일하러 갈 땐 강한 무릎으로 불끈 일어서던 소. 뿔이 솟아 있으나 뿔을 사용하는 일이 거의 없는 소. 소의 느린 걸음걸이와 큰 눈과 우직함을 생각해본다.   김기택(51) 시인은 소에 관한 시를 네 편 썼다. 꾀는 파리를 쫓아내지도 못하는 무력한 소, 무게를 늘리기 위해 강제로 물을 먹인 소, 도살되는 순간 바람이 빠져 나가서 빈 쇠가죽 부대가 되어버린 소에 대해 썼다. 시집 '소'의 표제작인 이 시는 소에 관한 그의 네 번째 시이다. 전작들이 소의 비극적인 몸에 관한 시라면 이 시는 소라는 종(種)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인의 슬픈 시선이 있다. 한마디의 말도 사용할 줄 모르고 다만 울음이 유일한 언어인 소. 오직 끔벅거리고만 있는 소의 눈. 우리가 최초에는 가졌을 혹은 오히려 우리를 더 슬프게 내내 바라보았을 그 '순하고 동그란 감옥'인 눈. 당신에게 내뱉으면 눈물이 될 것 같아 속에 가두어 두고 수천만 년 동안 머뭇거린 나의 말….   김기택 시인의 시는 무섭도록 정밀한 관찰과 투시를 자랑한다. 그는 대상을 냉정하고도 빠끔히 묘사한다. 그는 하등동물의 도태된 본능을 그려내거나 사람의 망가진, 불구의 육체를 고집스럽게 그려냄으로써 역설적이게도 생명이 고유하게 가지고 있던 생명의 '원시림'을 복원시켜 놓는다.   시 '신생아 2'에서 '아기를 안았던 팔에서/ 아직도 아기 냄새가 난다/ 아가미들이 숨쉬던 바닷물 냄새/ 두 손 가득 양수 냄새가 난다// 하루종일 그 비린내로/ 어지럽고 시끄러운 머리를 씻는다/ 내 머리는 자궁이 된다/ 아기가 들어와 종일 헤엄치며 논다'라고 그는 노래했다. 이런 시를 한껏 들이쉬면 어지럽고 시끄럽던 머리가 맑아진다. 선홍빛 아가미가 어느새 새로 생겨난다.         [애송시 100편-제33편] 저녁의 염전 - 김경주     죽은 사람을 물가로 질질 끌고 가듯이   염전의 어둠은 온다   섬의 그늘들이 바람에 실려온다   물 안에 스며 있는 물고기들,   흰 눈이 수면에 번지고 있다   폐선의 유리창으로 비치는 물속의 어둠   선실 바닥엔 어린 갈매기들이 웅크렸던 얼룩,   비늘들을 벗고 있는 물의 저녁이 있다   멀리 상갓집 밤불에 구름이 쇄골을 비친다   밀물이 번지는 염전을 보러 오는 눈들은   저녁에 하얗게 증발한다   다친 말에 돌을 놓아   물속에 가라앉히고 온 사람처럼   여기서 화폭이 퍼지고 저 바람이 그려졌으리라   희디흰 물소리, 죽은 자들의 언어 같은,   빛도 닿지 않는 바다 속을 그 소리의 영혼이라 부르면 안 되나   노을이 물을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노을 속으로 물이 건너가는 것이다   몇천 년을 물속에서 울렁이던 쓴 빛들을 본다   물의 내장을 본다              ▲ 일러스트 권신아   바닷물을 끌어다가 삼일 정도 가둬두면 바닥에 소금 알갱이가 뭉치기 시작한다. 가만히 고인 바닷물이 제 안의 소금을 응결시키고 있는 저녁의 염전을 볼 때면 마음이 쓸쓸해지곤 한다. 스러지는 햇빛, 슬어가는 어둠, 남루한 생의 얼룩, 비늘 같은 욕망의 흔적, 서늘한 죽음의 그늘… 흩어져 있던 그리 어두컴컴한 것들이 가라앉곤 했던가.   흰 눈이 내리는가 싶더니 상갓집 밤불처럼 노을이 내리는 염전. 그곳에서 시인은 소금의 소리, '죽은 자들의 언어'와 같은 그 '희디흰 물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소금의 빛, 그 '몇 천  년을 물속에서 울렁이던 쓴 빛'을 본다. 소금의 근원인 '빛도 닿지 않는 바다 속'은 모든 생명의 시원이자 종말이다. 그러니까 존재의 끝과 시작을 듣고 보는 셈이다. 우리의 내장이 이리 어둡고 이리 쓴 이유일 것이다. 물의 내장이 그러하고, 생의 내장이 그러한 것처럼.   노을 속으로 바닷물이 건너는 염전에 서면, 죽음과 소멸을 견뎌내는 법을 배우는 것만 같다. 실리고, 스미고, 비치고, 번지고, 가라앉고, 퍼지는 술어의 움직임 속에서 하얗게 증발하는 허공 속 흰 눈같이. 아니 깊은 바다 속 소리의 영혼같이, 아니 아니 온갖 사랑이 밀려왔다 밀려간 사람 속 쓰디쓴 내장같이. "나 없는 변방에서 나오는 그 시간이 지금 내 영혼이다 나는 지금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부재중')라는 그의 시 구절이 떠오른다.   김경주(32) 시인은 젊다. 2003년에 등단하여 2007년에 첫 시집을 냈으니 시력 또한 젊다. 한 시인은 "이 무시무시한 시인의 등장은 한국 문학의 축복이자 저주다"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스무 살 이후, 이 대학 저 대학에서 이 공부 저 공부 하며 밥벌이를 위해 대필작가, 학원강사, 광고일, '야설' 작가까지 했다는 기이한 이력이 인상적이었던가. 수려한 외모에 여행, 사진, 에세이, 영화, 연극을 넘나드는 전방위적 재능이 또 신인류(!)적이었던가.      [애송시 100편-제34편] 어떤 적막 - 정현종     좀 쓸쓸한 시간을 견디느라고   들꽃을 따서 너는   팔찌를 만들었다.   말없이 만든 시간은 가이없고   둥근 안팎은 적막했다.       손목에 차기도 하고   탁자 위에 놓아두기도 하였는데   네가 없는 동안 나는   놓아둔 꽃팔찌를 바라본다.       그리로 우주가 수렴되고   쓸쓸함은 가이없이 퍼져나간다.   그 공기 속에 나도 즉시   적막으로 一家를 이룬다―   그걸 만든 손과 더불어.               ▲ 일러스트 장산   들꽃을 따서 엮은 둥근 꽃팔찌. 그 반짝이는 꽃팔찌를 말없이 만들었을 당신의 낮과 당신의 손. 가는 손목에 차고 다니다 탁자에 벗어놓은 당신의 꽃팔찌. 들꽃 같은 시간의 꽃팔찌. 쓸쓸함과 적막이라는 삶의 시간을 견디게 해 준 꽃팔찌.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존재의 쓸쓸함과 적막함. 당신은 없고 이제 나의 팔목에 차 본 둥근 꽃팔찌. 오, 들꽃처럼, 들꽃으로 엮은 꽃팔찌처럼 온기와 생기(生氣)의 일가를 이루려 했던 당신의 마음.   이 시처럼 정현종(69) 시인은 작품을 통해 삶의 생기를 발견해내는 노력을 보여준다. 그는 전후의 한국 시단에 팽배해 있던 허무주의를 극복하려는 경향을 내내 보여주었다. 그는 사물들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었고, 만물과의 우주적인 교감을 노래했다. 그는 탄력 있는 생각의 샘을 소유한 시인이다. 그의 언어는 은유적이고 율동적인데, "가벼움, 경묘(輕妙)함이 나의 시론의 하나"라고 스스로 밝힌 바 있다. 가볍다는 것은 자유롭다는 뜻. 자유로운 정신은 고통을 뼈저리게 느낀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축복일 터. 해서 정현종 시인은 "가슴이 고만 푸르게 푸르게 두근거리는" 시인이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라고 단 두 줄로 짧게 쓴 시 '섬'은 많은 독자들이 여전히 사랑하는 시이며, 그가 번역해 국내에 소개한 네루다와 로르카, 옥타비오 파스 등 외국 시인들의 시집과 시론서들도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우리의 영혼은 어둠 속에서도 샛별처럼 빛나야 하는 것. 우리의 영혼은 바닥에 떨어져도 다시 튀어오르는 공처럼 생동해야 하는 것. 시인은 한 대담에서 "이 세상이 내 앞에 처음으로 있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라. 그렇게 살라"고 당부한다. 오늘은 그의 시 '꽃시간'을 함께 읽어보자. 당신에게도 오늘이 꽃시간이기를, 안팎이 둥근 꽃팔찌의 시간이기를. "시간의 물결을 보아라./ 아침이다./ 내일 아침이다./ 오늘밤에/ 내일 아침을 마중 나가는/ 나의 물결은/ 푸르기도 하여, 오/ 그 파동으로/ 모든 날빛을 물들이니/ 마음이여/ 동트는 그곳이여."      [애송시 100편-제35편] 그릇1 - 오세영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盲目)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魂)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 일러스트 권신아   시력 44년을 맞는 오세영(65) 시인은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이자 국문학 박사이자 교수로 시작과 평론과 시학을 병행해 왔다. 지금까지 17권의 시집으로 출간된 그의 시들은 물질과 정신, 문명과 자연, 철학적 지성과 감성적 정서가 상응하는 '잘 빚어진' 서정시를 견지하고 있다. 이를 '전통의 토대 위에 형성된 철학화된 서정시' 혹은 '모순의 시학'이라 했던가.   일찍이 노자는 말했다. 도는 빈 그릇과 같다고. 얼마든지 퍼내서 사용할 수 있고, 언제나 넘치는 일이 없고, 깊고 멀어서 천지 만물의 근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릇은 하나인데 그 하나로 인해 안과 밖이 나뉘고, 그릇에게는 밖인데 그 밖이 안을 품고 있고, 비어 있음으로 다른 것을 채운다. 그릇에 대한 시인의 통찰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시인은 '절제와 균형'을 긴장된 힘으로 유지하고 있던 그릇의 '깨짐'에 주목한다.   깨진다는 것은 긴장하고 날카로워진다는 것이다. 모와 날을 세운다는 것이다. 겨냥하고 노린다는 것이다. 때로 상처를 내고 피를 부르기도 한다. 그릇은 비어 있음으로 충만한 둥금의 세계지만, 언제나 깨질 위기에 처해 있고 깨졌을 때 이면을 드러낸다.   그러한 파괴는 이전을 벗음으로써 이후를 여는 파탈(擺脫)이 된다. 스스로뿐 아니라 타자의 파탈을 이끌기도 한다. 스스로뿐 아니라 타자를 상처냄으로써 상처 깊숙한 곳에서 혼(魂)의 성숙을 이끌기도 한다.   그러므로 깨진 그릇이야말로 끝이면서 시작이다. 시작의 '눈뜸'은 바로 끝의 '깨짐'과 한 몸을 이룬다. 때문에 시인에게 '깨진다는 것'은 갇히기를 거부하는 움직임이다. 공간을 뛰쳐나온 존재의 환희다. 빈 공간이며 허공이고 무(無)다. "깨지는 그릇./ 자리에서 밀린 그릇은/ 차라리 깨진다./ 깨짐으로써 본분을 지키는/ 살아 있는 흙,/ 살아 있다는 것은/ 스스로 깨진다는 것이다"('살아 있는 흙 -그릇14').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모순의 그릇', 깨져서 새롭게 완성되는 '깨진 그릇'이야말로 오세영 시인의 가장 개성적인 개인 상징이라 할 만하다.      [애송시 100편-제36편] 우리 오빠와 화로 - 임화       사랑하는 우리 오빠 어저께 그만 그렇게 위하시던 오빠의 거북 무늬 질화로가 깨어졌어요   언제나 오빠가 우리들의 ‘피오닐’ 조그만 기수라 부르는 영남(永南)이가   지구에 해가 비친 하루의 모―든 시간을 담배의 독기 속에다   어린 몸을 잠그고 사온 그 거북 무늬 화로가 깨어졌어요     그리하여 지금은 화(火)젓가락만이 불쌍한 영남(永男)이하구 저하구처럼   똑 우리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남매와 같이 외롭게 벽에 가 나란히 걸렸어요     오빠……   저는요 저는요 잘 알았어요   왜―그날 오빠가 우리 두 동생을 떠나 그리로 들어가신 그날 밤에   연거푸 말은 궐련[卷煙]을 세개씩이나 피우시고 계셨는지   저는요 잘 알았어요 오빠   언제나 철 없는 제가 오빠가 공장에서 돌아와서 고단한 저녁을 잡수실 때 오빠 몸에서 신문지 냄새가 난다고 하면   오빠는 파란 얼굴에 피곤한 웃음을 웃으시며     ……네 몸에선 누에 똥내가 나지 않니―하시던 세상에 위대하고 용감한 우리 오빠가 왜 그날만   말 한 마디 없이 담배 연기로 방 속을 메워 버리시는 우리 우리 용감한 오빠의 마음을 저는 잘 알았어요   천정을 향하여 기어올라가던 외줄기 담배 연기 속에서―오빠의 강철 가슴 속에 박힌 위대한 결정과 성스러운 각오를 저는 분명히 보았어요   그리하여 제가 영남(永男)이의 버선 하나도 채 못 기웠을 동안에   문지방을 때리는 쇳소리 마루를 밟는 거칠은 구둣소리와 함께―가 버리지 않으셨어요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우리 위대한 오빠는 불쌍한 저의 남매의 근심을 담배 연기에 싸 두고 가지 않으셨어요   오빠―그래서 저도 영남(永男)이도   오빠와 또 가장 위대한 용감한 오빠 친구들의 이야기가 세상을 뒤집을 때   저는 제사기(製絲機)를 떠나서 백 장에 일 전짜리 봉통(封筒)에 손톱을 부러뜨리고   영남(永男)이도 담배 냄새 구렁을 내쫓겨 봉통(封筒) 꽁무니를 뭅니다   지금―만국지도 같은 누더기 밑에서 코를 고을고 있습니다     오빠―그러나 염려는 마세요   저는 용감한 이 나라 청년인 우리 오빠와 핏줄을 같이 한 계집애이고   영남(永男)이도 오빠도 늘 칭찬하던 쇠같은 거북무늬 화로를 사온 오빠의 동생이 아니예요   그리고 참 오빠 아까 그 젊은 나머지 오빠의 친구들이 왔다 갔습니다   눈물 나는 우리 오빠 동무의 소식을 전해 주고 갔어요   사랑스런 용감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세상에 가장 위대한 청년들이었습니다     화로는 깨어져도 화(火)젓갈은 깃대처럼 남지 않았어요   우리 오빠는 가셨어도 귀여운 ‘피오닐’ 영남(永男)이가 있고   그리고 모든 어린 ‘피오닐’의 따뜻한 누이 품 제 가슴이 아직도 더웁습니다   그리고 오빠……   저뿐이 사랑하는 오빠를 잃고 영남(永男)이뿐이 굳세인 형님을 보낸 것이겠습니까   ?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고마운 청년 오빠의 무수한 위대한 친구가 있고 오빠와 형님을 잃은 수없는 계집아이와 동생   저희들의 귀한 동무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다음 일은 지금 섭섭한 분한 사건을 안고 있는 우리 동무 손에서 싸워질 것입니다     오빠 오늘 밤을 새워 이만 장을 붙이면 사흘 뒤엔 새 솜옷이 오빠의 떨리는 몸에 입혀질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누이동생과 아우는 건강히 오늘 날마다를 싸움에서 보냅니다     영남(永男)이는 여태 잡니다 밤이 늦었어요     ―누이동생               ▲ 일러스트 잠산   임화(1908~1953)는 일제강점기에 사회주의 문학운동을 표방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의 핵심 멤버로 카프의 서기장을 지낸 시인이자 평론가였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임화는 모던 보이였다. 영화 '유랑'과 '혼가'에서 주연을 맞기도 해 '조선의 발렌티노'로 불리었다. 그는 계급주의 문학의 선봉에 서서 카프를 이끌었지만, 막상 1935년에는 카프 해산계를 직접 내야 했다. 해방 직후에는 서울 종로 한청빌딩에 조선문학건설본부라는 간판을 내걸어 좌익 계열 문인들을 규합했다. 그 후 박헌영을 따라 월북했으나 '미제의 간첩'으로 몰려 처형당했다.   이 시는 사건적이고 소설적인 데서 시의 소재를 찾았고, 소박하고 '된 그대로의 말'을 사용했고, 노동자들의 낭독에 편한 리듬을 씀으로써 카프문학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단편 서사시'라는 평가를 받았다. 제사(製絲) 공장 여직공이었다가 이제는 백 장의 봉투를 붙이면 일전을 버는 일을 하는 화자가 오빠에게 보내는 애틋한 편지글 형식이다. '밤을 새워 이만 장을 붙이면 사흘 뒤엔 새 솜옷이 오빠의 떨리는 몸에 입혀질 것입니다'라는 표현으로 봐서 오빠는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화로에 '오빠' 혹은 '혁명가의 정신'을 빗대어서, 역경―거북무늬 화로가 깨어지는―이 지금 닥쳐왔지만 굴하지 않고 이겨내겠다는 뜻을 밝혀 놓았다.   임화는 올해로 김기림, 김유정, 최재서, 백철과 함께 탄생 100돌을 맞았다. 임화는 1936년에 '오오 적이여, 너는 나의 용기다'라는 자신의 묘비명을 미리 썼다. 고은 시인은 '만인보 20'에서 '임화'라는 시를 통해 '아직껏 한국문학사에는 버려둔 무덤이 있다/ 마른 쑥대머리 무덤/ 그 무덤 벙어리 풀려 열리는 날/ 그 무덤 속 해골/ 뚜벅 걸어나오는 날/ 임화는 오리라// 아름다운 얼굴 다시 오리라 부신 햇살 뿜어 오리라'라고 써 왕양(汪洋)한 기상의 소유자였던 그를 추모했다.      [애송시 100편-제37편] 문의(文義)마을에 가서 - 고은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소백산맥 쪽으로 벋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꽉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 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文義)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주(註) : 문의(文義)-충북 청원군의 한 마을.                 ▲ 일러스트 권신아  중학생 때 길에서 주운 한하운 시집을 읽고 시인이 되기로 결심했다는 시인.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시인. 출가와 환속, 숱한 기행, 폐결핵, 자살시도, 군법회의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기도 한 반독재 민주화운동 등 열정적인 삶을 살아온 시인. 시, 소설, 평론, 평전, 번역, 수필 등 150여 권에 이르는 신화적 글쓰기로 유명한 시인. '젊은 시인이여 술을 마셔라'라고 일갈하는 말술의 시인. 격정적인 시낭송이 일품인 시인. 낭만적인 허무의식에서, 역사와 민중에 대한 첨예한 현실인식으로, 그리고 선적(禪的) 초월의식으로 시적 변모를 거듭해온 시인. 올해로 등단 반세기를 맞이하는 시인. 여러 의미로 고은(75) 시인은 '큰' 시인임에 분명하다.   이 시는 신동문 시인의 모친상을 조문하러 문의에 갔다가 쓴 시라고 알려져 있다. '문(文)'과 '의(義)'의 마을, 문사(文士) 혹은 지사(志士)들이 꿈꾸었을 유토피아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지명이다(실제의 문의마을은 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으며 그 일부가 문의문화재단지에 복원되었다). 문의마을에 눈은 만났다가 갈라지기를 거듭하는 삶과 죽음, 산과 들, 마을과 길의 경계를 덮으며 내린다. 경계를 덮으며 내리는 눈은 온 세상을 낮게 그리고 가깝게 만들고, 적막하게 그리고 서로를 껴안아주고 받아줄 듯 내린다. 시인에게 그 눈은 죽음처럼 내리는 것이다. 우리 삶 속의 죽음처럼.   그의 다른 시 "싸락눈이 내려서/ 돌아다보면 여기저기 저승"('작은 노래'), "쌓이는 눈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눈길')라는 시에서도 눈은 '대지(大地)의 고백(告白)'이나 '위대한 적막(寂寞)'처럼 내린다. 한 평자는 그러한 눈을 '아름다운 허무'라고도 했다. 그러나 눈은 금세 내리고 금세 녹아버리듯, 우리가 삶에서 죽음의 의미를 깨닫기란 높고 먼 일이다. 상여(喪輿)의 길처럼, 마을에서 산에 이르는 길은 삶에서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 겨울 문의에 가서 시인이 본 것은 그 길이 '가까스로 만난'다는 것이고, 너무 가깝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덮으며, 가깝게 낮게 내리는 눈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으리라.      [애송시 100편-제38편] 긍정적인 밥 - 함민복       시(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 일러스트=잠산 "아무리 하찮게 산// 사람의 생(生)과 견주어 보아도// 시(詩)는 삶의 사족(蛇足)에 불과"('詩')하지만 시인은 시를 써서 세상의 돈을 쥔다. 끙끙대고 밤을 새우며 쓴 노력에 비하면 원고료는 박하고, 몇 년 만에 펴내고 받는 인세로 꾸리는 생활은 기궁하다.   그러나 이 가난한 시인은 원고료와 인세를 교환하면 쌀이 두 말, 국밥이 한 그릇,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이나 되니 든 공에 비해 너무 많은 게 아닌가라고 묻는다. 쌀이 두 말이 되기까지의 노동, 한 그릇의 국밥이 되기까지의 노동, 굵은 소금 한 됫박이 되기까지의 노동에 비하면 내 노동의 대가는 얼마나 고맙고 큰 것인가 라고 말한다. 땡볕 속에서 몸으로 얻어낸 그것들에 비할진대. 이 세상 정직한 사람들의 숭고한 노동에 비할진대.   함민복(46) 시인의 초기 시는 거대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공포를 노래했다. "이 시대에는 왜 사연은 없고/ 납부통지서만 날아오는가/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절실한 사연이 아닌가"('자본주의의 사연')라고 노래했고, 서울을 문명을 주사하는 '백신의 도시'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1996년 그는 보증금 없이 월세 10만원인, 마당에 고욤나무가 서 있는 강화도 동막리 폐가 한 채에 홀로 살림을 부렸다. 동네 형님 고기잡이배를 따라다니며 망둥이, 숭어, 농어를 잡고, 이제는 뻘낙지를 잡을 줄도 아는 어민후계자 시인이 되었다. 뻘에 말뚝을 박으려면 힘으로 내려 박는 것이 아니라 "뻘이 말뚝을 품어 제 몸으로 빨아들일 때까지/ 좌우로 또는 앞뒤로 열심히 흔들어야 한다"('뻘에 말뚝 박는 법')는 것도 배웠고, 그물 매는 것을 배우러 나갔다 배를 타고 돌아오면서 "경진 아빠 배 좀 신나게 몰아보지/ 먼지도 안 나는 길인데 뭐!"('승리호의 봄')라며 농담을 할 줄도 안다.   강화의 서해 갯바람과 갈매기와 뻘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의 시는 단단한 문명에 맞서는 '부드러움의 시학'으로 나아가면서 우리 시단에서는 한동안 드물었던 '섬시(詩)' 명편들을 낳고 있다. 강화도의 '물때달력'을 오늘도 들여다보고 있을 시인아      [애송시 100편-제38편] 전라도 가시내 - 이용악       알룩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전 무섭지 않다만   어드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 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이 잠거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도 외로워서 슬퍼서 초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어 울어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양 유리창이 흐리더냐   차알삭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 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줄께   손때 수집은 분홍 댕기 휘 휘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 일러스트=권신아   "거리의 뒷골목에서 만나거든/먹었느냐고 묻지 말라/굶었느냐곤 더욱 묻지 말라"(시 '나를 만나거든')던 시인 이용악(1914~1971)! 그는 한반도의 최북단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났다. '두만강 너 우리의 강'을 건너 할아버지는 소금을 밀수입했고 친척들은 그 강을 건너 아라사(러시아) 연해주 등지로 이민을 갔다. 그 두만강을 건너 밀무역 행상 중 아버지는 객사하였으며, 홀로 된 어머니는 국숫집을 하며 어린 자식들을 키웠다. 시인 또한 서울에서 동경에서 품팔이 노동을 하며 고학했다. 이야기성과 체험의 구체성이 두드러진 그의 시들을 읽는 일은 일제강점기의 불행한 개인사, 가족사, 그리고 우리의 근·현대사를 읽어내는 일이기도 하다.   북간도 어느 술막에서 함경도 사내와 전라도 가시내가 만났다. 사내는 언 발로 눈보라를 뚫고 두만강을 건너왔으며 날이 밝으면 다시 흔적도 없이 떠나야 한다. 가시내는 석 달 전에 북으로 달리는 '불술기(기차)' 속에서 치마를 뒤집어쓴 채 이틀을 울며 두만강을 건너 이곳으로 팔려왔다. 그런 두 남녀가 국경 너머에서 만나 겨울밤 내 지나온 내력을 이야기하며 술잔을 주고받고 있다.   그 밤 내 사내가 '가시내야' '가시내야'라고 부를 때, 그것도 함경도 사내가 '전라도 가시내야'라고 부를 때, 그 전라도 가시내는 한없이 차고 한없이 차진 느낌이다. 고향을 떠나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고 울었던 가시내, 지금은 남실남실 술을 치는 가시내. 때로 싸늘한 웃음을 보조개를 소리 없이 새기는 가시내, 까무스레한 얼굴에 눈이 바다처럼 푸른 가시내, 간간이 전라도 사투리가 섞이는 가시내…. 이 함경도 사내처럼 나는, 그 전라도 가시내를 만난 것만 같다. 전라도 개펄의 바지락 조개 같고 세발낙지 같고 때로 꿈꿈한 홍어 같기도 했으리라.   그 밤 내내 함경도 사내가 피워 올리는 북쪽 눈포래 냄새와, 전라도 가시내가 피워 올리는 남쪽 바다 냄새에 북간도 술막이 흥성했겠다. 그 술막의 술독 바닥났겠다. 눈에 선한, '흉참한' 시대를 살았던 그 전라도 가시내. "너의 노래가 어부의 자장가처럼 애조롭다/너는 어느 흉작촌(凶作村)이 보낸 어린 희생자냐"(제비 같은 소녀야-강 건너 주막에서)!      [애송시 100편-제40편] 박꽃 - 신대철       박꽃이 하얗게 필 동안   밤은 세 걸음 이상   물러나지 않는다       벌떼 같은 사람은 잠 들고   침을 감춘 채   뜬소문도 잠 들고   담비들은 제 집으로   돌아와 있다       박꽃이 핀다   물소리가 물소리로 들린다                   ▲ 일러스트 잠산   꽃의 개화를 본 적이 있으신지. 그 잎잎의 열어젖힘을 본 적이 있으신지. 불교에서는 이 세상에서 최고의 일을 씨앗이 움트는 일이라고 했다지만, 꽃의 '열린 앉음새'라 불러도 좋을 꽃의 개화는 사람을 압도한다. 대개 꽃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핀다.   천천히 진행되는 개화 파노라마를 관심있게 시종 지켜볼 만큼 여유롭고 섬세한 마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은 아마도 많지 않겠지만.   이 시에서 사람을 '벌떼 같은 사람'이라고 비유한 부분은 압권이다. 정신없이 분주하고 시끌시끌 작당(作黨)하여 몰려다니며 입으로 바늘 같은 독설을 내뱉는 세간의 사람들을 잉잉거리는 벌떼 무리에 비유했다. 인간의 시간이 깊은 잠에 빠져들고 소란이 뚝 그쳤을 때 자연의 시간은 도래한다. 그리고 오, 하얀 박꽃은 피어난다. 물소리는 물소리로 들린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들린다.   자연의 시간에는 살기(殺氣)가 없다. 자연의 시간은 인간의 세계를 맑게 회복시킨다. 씻어낸다. 시 '무인도'에서 "인간을 만나고 온 바다,/ 물거품 버릴 데를 찾아 무인도(無人島)로 가고 있다"라고 했을 때의 무인도처럼. 하산(下山)한 당신도 '죄(罪) 짓지 않고' 어슬렁어슬렁 자연의 시간에 살고 싶지 않으신지.   이 시는 '산(山)의 시인'이라고 불러도 좋을 신대철(63) 시인의 첫 시집 '무인도를 위하여'에 실려 있다. 신대철 시인은 1977년 첫 시집을 출간하고 23년간 절필을 했다. 2000년 시작 활동을 재개한 후 근년에는 알래스카, 시베리아 평원, 바이칼호, 몽골, 두만강 등 원시적이고 광활한 자연에 대한 시들을 발표하고 있다. 그곳에 정착하게 된 사람들의 이산의 역사와 고통을 부각시키면서. 신대철 시인은 북파 공작원 부대의 학군장교로 군복무를 했고, 그 당시의 기억을 토대로 전쟁과 남북 분단의 아픈 현대사를 시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 충청도 청양의 깊은 산에서 화전민으로 살았던 그만의 체험은 붉은 혈액이 되어 신대철 시의 몸을 움직인다. 그의 시는 큰 산이요 큰 숲이다. 더 깊숙이 평화롭고, 깨금이 떨어지고, 아그배가 떨어지는 그런 곳. 당신도 가서 살고 싶지 않으신지.       [애송시 100편-제41편] 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번째는 전화기 - 박상순       첫번째는 나   2는 자동차   3은 늑대, 4는 잠수함   5는 악어, 6은 나무, 7은 돌고래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열번째는 전화기   첫번째의 내가   열번째를 들고 반복해서 말한다   2는 자동차, 3은 늑대   몸통이 불어날 때까지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마지막은 전화기   숫자놀이 장난감   아홉까지 배운 날   불어난 제 살을 뜯어먹고   첫번째는 나   열번째는 전화기             ▲ 일러스트=권신아   말문이 트인 아이는 어느 날 선언한다. "엄마, 오늘부터 엄마는 아지, 아빠는 끼리, 언니는 콩콩이, 나는 밍밍이야, 이제 그렇게 불러야 돼, 꼭." 또 어느 날은 이렇게 선언한다. "오늘부터 식탁은 구름, 의자는 나무, 밥은 흙, 반찬은 소라라고 해야 돼, 알았지?" 난감, 황당 그 자체일 때가 많은 박상순(46) 시인의 시는 이런 네 살배기 놀이의 사유로 들여다보았을 때 쉽게 이해되곤 한다. 그러니 주의하시라! 그의 시를 향해, 이게 무슨 말이지 하고 묻는 순간 당신은 헛방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니.   'A는 B'라는 반복으로 이루어진 시다. A와 B의 관계는 무연하고 또 우연하다. 인과관계가 없는 '관계 맺기' 혹은 '이름 바꾸기' 놀이다. 그러니 왜 첫 번째가 나이고 6이 나무이고 7이 돌고래인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독자들도 A에 혹은 B에 마음껏 다른 단어를 넣어 읽어도 무방하다. 또한, 이 시는 앞에는 숫자가, 뒤에는 낱말이 새겨진 아이들의 카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6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나무라고 씌어 있고, 7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돌고래라고 씌어 있다. 십진법에 따르면 세상 혹은 세상의 모든 숫자는 1부터 10까지의 숫자로 환원된다. 현실과 언어의 관계가 그러한 것처럼 숫자와 낱말의 관계도 무연하고 우연한 약속에 불과하다면, 세상의 모든 관계도 그러하다는 것일까?   이 시의 핵심은, '내'가 이 순서와 관계를 (외우듯) 반복하는 그 리듬에 있다. '자, 아무 생각 말고 따라 해 봐'라는 식의 폭력적인 우리의 교육 현실 혹은 성장 과정을 암시하는 것일까?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 내지는 언어(혹은 제도)의 감옥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일까? 아니면 유년의 로망이 담긴 단어의 나열이라는 점에서 상실한 본향에 대한 향수를 그리워하는 것일까? 아무것이면서 아무것이 아니기도 할 것이다. 언뜻 보면 천진난만한데 읽다 보면 슬쩍 공포스러워지는 까닭들이다.   박상순 시인은 회화를 전공한 미술학도다. 유능한 북(표지)디자이너이자 편집자이며 출판인이기도 하다. '무서운 아이들'의 유희적 상상력, 신경증적 반복, 파격적 시 형식, 의미의 비약적 해체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시에 대해 다 알려고 하지 말자. 다 알려고 하면 박상순 시는 없다. 박상순보다 시를 잘 쓰는 사람은 많을지 모르지만 그 누구도 박상순처럼 시를 쓰지는 못한다. 그게 중요하다.      [애송시 100편-제42편]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 황지우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零下) 십삼도(十三度)   영하(零下) 이십도(二十度) 지상(地上)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裸木)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 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 받은 몸으로, 벌 받는 목숨으로   기립(起立)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零下)에서   영상(零上)으로 영상(零上) 오도(五度)   영상(零上) 십삼도(十三度) 지상(地上)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 일러스트=잠산 황지우(56) 시인의 시 '손을 씻는다'를 함께 읽는다. "하루를 나갔다 오면/ 하루를 저질렀다는 생각이 든다/ 내심으로는 내키지 않는 그 자와도/ 흔쾌하게 악수를 했다/ 이 손으로/ 만져서는 안 될 것들을/ 스스럼없이 만졌다"라고 쓴 시. 한 점 오점 없이 살 수는 없다. 저질러가면서 우리는 산다. 좌충우돌하면서 난동을 부리면서.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시대가 진화해가는 것은 우리가 내부적으로 가진 자기 반성과 좀 더 나아지려는 희망의 추구 같은 것 때문이다.   이 시는 솔직하다. 나무는 꼭 나무를 지칭하지는 않는다. 헐벗고 무방비이고, 때로는 벌 받고, 긴가민가 하는 사람으로 읽어도 좋다.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라고 중얼중얼할 줄은 아는 사람이다. 아주 숙맥이거나 속물적이지는 않아서 현재의 환멸을 볼 줄은 아는, 앙가슴이 뛰는 그런 사람. 바깥 세상이 영하인지 영상인지 구별할 줄 알아 드디어 버틸 줄도 거부할 줄도 알게 된 사람. 마침내 싹도 잎도 틔우면서 불쑥 기립하여 봄의 나무가 된 사람. 자력의 운동성을 가진, 스스로를 혁명하는 사람. 자기 몸을 쳐서 바다를 건너가는 새 같은 사람. 의지의 사람… 우리는 이런 봄나무를 기다리는 것 아닌가.   황지우 시인은 1980년대를 날카로운 풍자로 노래했다. 그는 1980년대의 독재와 살해와 검열에 맞선 '시의 시국사범'이었다. 한 대담에서 1980년대의 시대적 상황에 대해 "시대가 우리를 건드렸다"고 표현했는데, 그의 시는 권력의 중증(重症)을 처절하게 해체하려한 양심이었다. 설령 그가 시 '뼈아픈 후회'에서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폐허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라고 써 지나온 삶의 궤적을 돌아보고 있지만, 이 혹독한 자기 검열의 고백이 황지우 시의 미덕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시대와의 불화와 선적(禪的)인 기개를 넘나드는 그의 시는 한국시사에서 푸릇푸릇한 '방풍(防風)의 대밭'이다.      [애송시 100편-제43편] 쉬 - 문인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 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였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땅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2006〉)       ▲ 일러스트=권신아   해방둥이 문인수(62) 시인은 마흔이 넘어 등단한 늦깎이 시인이다. 하지만 시적 성취는 어느 시인보다 높아 환갑 지나 시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이 시는 정진규 시인의 부친상에 문상을 갔다가 선친에 대한 회고담을 듣고 쓰인 시인데, 바야흐로 문인수 시인의 대표시가 되었다. 문상을 다녀와 순식간에 쓰였을 것이다. 그만큼 이 시는 막힘이 없이 활달하다.   환갑이 지난 아들이 아흔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뉘고 있다. 정신은 아직 초롱한 아버지가 '생(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떠나버린 스스로의 몸에 난감해 하실까봐 아들이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겄다아"며 농 반 어리광 반을 부리고 있다. 상상만으로도 그 모습은 흐뭇하고 뭉클하다. 이 '쉬'는 단음절인데 그 뜻은 다의적이어서 긴 여운을 남긴다. 일차적으로는 오줌을 누시라는 말이겠고, 그것도 쉬이(쉽게) 누시라는 말이겠고, 아버지가 힘겹게 오줌을 누시는 중이니 우주로 하여금 조용히 하라는 말이겠다. 아버지를 향해, 우주를 향해 그리고 신을 향해 내는 울력의 소리이자 당부의 소리이고 주술의 소리일 것이다.   오줌발을 '길고 긴 뜨신 끈'으로 비유하는 부분은 압권이다. 계산해 보지는 못했지만 한 사람이 평생 눈 오줌발을 잇고 잇는다면 지구 한 바퀴쯤은 돌 수 있지 않을까. 그 길고 뜨신 오줌발이야말로 한 생명의 끈이고 한 욕망의 끈이다. 그 '길고 긴 뜨신 끈'을 늙은 아들은 안타깝게 땅에 붙들어 매려 하고 더 늙으신 아버지는 이제 힘겨워 땅으로부터마저 풀려 한다. 아들은 온몸에 사무쳐 '몸 갚아드리듯' 아버지를 안고, 안긴 아버지는 온몸을 더 작게 더 가볍게 움츠리려 애쓴다. 안기고 안은 늙은 두 부자의 대조적인 내면이 시를 더욱 깊게 한다.   마지막 행의 '쉬!'는 첫 행의 '상가(喪家)'를 환기시킨다. 이제 아들의 쉬- 소리도, 툭 툭 끊기던 아버지의 오줌발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 '길고 긴 뜨신 오줌발'도 쉬!, 이렇게 조용히 끊기기도 하는 것이다. 때로 '시가 뭘까' 라는 고민을 할 때 이런 시는 쉬운 답을 주기도 한다. 삶의 희로애락을 한순간에 집약시키는 것, 그 순간에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통찰이 녹아 있는 것이라는. 이 시가 그러하지 않는가.        [애송시 100편-제44편] 너와집 한 채 - 김명인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었네   저 비탈바다 온통 단풍 불 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연기는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잣겠네   쪽문을 열면 더욱 쓸쓸해진 개옻 그늘과   문득 죽음과, 들풀처럼 버팅길 남은 가을과   길이 있다면, 시간 비껴   길 찾아가는 사람들 아무도 기억 못하는 두천   그런 산길에 접어들어   함께 불 붙는 몸으로 저 골짜기 가득   구름 연기 첩첩 채워넣고서   사무친 세간의 슬픔, 저버리지 못한   세월마저 허물어버린 뒤   주저앉을 듯 겨우겨우 서 있는 저기 너와집,   토방 밖에서 황토흙빛 강아지 한 마리   키우겠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아주 잊었던 연모 머리 위의 별처럼   띄워놓고       그 물색으로 마음은 비포장도로처럼 덜컹거리겠네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   매봉산 넘어 원당 지나서 두천   따라오는 등뒤의 오솔길도 아주 지우겠네   마침내 돌아서지 않겠네           ▲ 일러스트=잠산 흔하게도 인생은 여행에 비유된다. 우리는 흘러가면서 만난다. 사람과 붐비는 시장과 웃음과 꽃밭과 폭풍의 바다와 벼랑과 사막을 만난다. 그러므로 삶에는 여독이 있다. 이 시를 읽으며 나는 내 여행의 종착지를 생각한다.   이 시는 우리의 마음을 적적한 곳으로 데려간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골짜기로 가서 살자고 한다. 종일을 살아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을, 개옻 그늘과 늦가을만이 살고 있는 곳. 세상의 쓸쓸함을 다 살아본 듯 벌써 무욕을 알고, 골짜기보다 더 깊은 눈으로 속리(俗離)한 우리를 맞아줄 여인이 살고 있는 곳. 그러나 그런 곳이 있을까. 잇속이나 명리나 부귀 같은 것은 손을 털 듯 탁, 탁 털어버린 곳. 더 움켜쥐려는 근욕(根欲)이 사라져 알몸의 자아를 비로소 만날 수 있는 곳. 퇴폐도 맑게 씻기어서 별처럼 빛나는 곳. 삶을 탕진한 사람도 다 받아줄 것 같은 마지막 성지(聖地). 그곳서 우리의 여행이 끝난다면 후회는 없으리니.   많은 독자들은 김명인(62) 시인의 첫 시집 '동두천(東豆川)'을 기억할 것이다. 기지촌에서 혼혈아에게 국어를 가르치던 시기의 경험을 쓴 동두천 연작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니. "그 아이는 지금 대전 어디서/ 다방 레지를 하고 있는지 몰라/(…)/ 지금도 기억할까 그때 교내 웅변대회에서/ 우리 모두를 함께 울게 하던 그 한마디 말/ 하늘 아래 나를 버린 엄마보다는/ 나는 돈 많은 나라 아메리카로 가야 된대요"('동두천 4')라고 써 수많은 독자를 여지없이 울먹이게 한 시!     김명인 시인은 동두천 연작 발표 후에도 지금까지 '욕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그 막막한 표랑을 강한 연민으로 감싸 안아온 시인이다. 그는 한국의 서정시가 실험과 해체와 생각의 과잉과 포즈의 유행을 탈 때에도 흔들림 없이 서정시를 지켜내는 수문신장(守門神將)의 역할을 맡아 왔다. 그의시에 대해 이승훈 시인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한마디로 김명인의 시는 마음이 놓인다"라고. 동감이다      [애송시 100편 - 45] 향수-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 일러스트 권신아   시간은 가고 기억은 쌓인다. 잃어버린 시간의 기억을 우리는 추억이라 하던가. 향수(鄕愁)란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추억이자 그리움이다. 상처나 슬픔조차도 지나간 것이기에 아름답고 생의 근원에 대한 동경을 일깨워주는 고향. 마음의 고향은 늘 그렇게 잃어버린 시간에 자리하고, 향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게 한다.   이동원과 박인수가 노래로 불러 더 유명해진 정지용(1902~1950)의 '향수'는 이십대 초반의 시인이 일본으로 유학 가기 전 고향인 충북 옥천을 다니러가며 쓴 시다. 이제 곧 떠나야 할 고향이기에 더욱 간절했을 것이다. 검정 두루마기를 즐겨 입고 정종을 좋아했던 그는 몇 순배의 술잔이 돌고 나면 낭랑한 목소리로 이 '향수'와 함께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로 시작하는 '고향'을 즐겨 낭송했다 한다. 신석정 시인은 "지용같이 시를 잘 읊는 사람은 보지 못했노라" 회고한 바 있다.   "시의 신비는 언어의 신비"라고 믿었던 그는 우리 현대시사에서 언어와 감각의 탁월한 경지를 보여주었다. 이 시 또한 소리내어 읽노라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는 ㅂㅂㅂ 말을 달리는 듯하고,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함추름 휘적시던 곳'은 ㅎㅎㅎ 흩어져 있는 듯하다. 실개천을 '옛이야기 지줄대는' 소리로, 황소를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으로, 아버지를 '엷은 졸음'으로 감각하는 솜씨 또한 일품이다. '해설피'가 해가 설핏할 무렵인지 느리고 어설프게(혹은 슬프게)인지, '석근' 별이 성근(성긴) 별인지 섞인 별인지 애매하지만 그 질감만은 새록하다.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아버지와 검은 귀밑머리를 날리는 누이와 사철 발벗은 아내가 집안에 있고 집밖으로는 넓은 벌과 실개천이, 파란 하늘과 풀섶 이슬이, 석근 별과 서리 까마귀가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이미 마음의 고향이다.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를 후렴처럼 노래하며 '그곳'을 그리듯 보여주는 단순한 시 형식은 음악적 울림은 물론 애틋한 향수의 정감을 쉽고 실감나게 전달하기에 안성맞춤이다. '흙에서 자란 마음'을 서늘옵고 빛나게 '이마받이'해보는 아침이다. "얼음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름 절로 향기"('춘설(春雪)')롭지 아니한가.      [애송시 100편 - 제46편] 어디로? - 최하림       황혼이다 어두운   황혼이 내린다 서 있기를   좋아하는 나무들은 그에게로   불어오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있고 언덕 아래 오두막에서는   작은 사나이가 사립을 밀고   나와 징검다리를 건너다 말고   멈추어 선다 사나이는 한동안   물을 본다 사나이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어디로?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 일러스트=잠산 최하림(69)은 한글 세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1962년 평론가 김현·김치수, 소설가 김승옥과 한글 세대 최초의 동인지 '산문시대'를 함께 냈다. 최하림 시인의 시는 점점 그윽하다. 그는 내면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본다. 조금 걸어나가면 강이 바라보이는 양수리 그의 집에   갔을 때에도 그는 어둠이 내리는 거실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그의 말은 "참 좋지요"가 전부였다. 그에게는 오연(傲然)함이 없다.     최하림 시인은 빛과 어둠, 정지와 운동 사이의 미묘한 오고 감을 살피는 데 놀라운 실력을 보여준다. 이 시를 읽어도 그렇다. 황혼이 내리는 무렵에 나무들이 있고 바람이 있고 오두막이 있고 사내가 있고 징검다리가 있고 흐르는 물이 있다. 이 존재들의 뒤에는 커튼처럼 황혼이 있다. 황혼은 아래로 하강하고, 바람은 직립한 나무들에게 수평으로 이동하고, 오두막과 사내는 수직으로 서 있거나 수직으로 움직이고, 물은 옆으로 흐른다. 존재들은 내려오고 올라가고 옆으로 이동한다. 움직이는가 했더니 곧 멈추어 선다. 동작을 보여주지만 격하지 않다. 시인은 돌보듯이 존재들 하나하나에 시선을 건넨다. 하나만을 전유하려는 못된 버릇도 없다. 해서 존재들은 하나하나가 언뜻언뜻하고 얼핏얼핏하다. 어느 것 하나가 도드라질 양이면 그 윤곽을 살짝 지워놓는다. 마음은 곧잘 뛰쳐나가길 좋아하는데 여기서는 그렇지가 않으니 갸륵하다. 마음은 이렇게 우묵하고 참할 때가 있다.   자작나무 껍질을 머리에 쓰고 너덜너덜하게 옷을 입고 다녔다는, 숨어 살았다는 한산(寒山)은 "우스워라, 나의 길이여/ 거마(車馬)의 자국조차 없네/ 돌고 도는 시내의 굽이를 알 수 없고/ 첩첩의 산은 그 겹을 모르겠네/(…)/ 내 여기에 이르러 길 잃고 헤매느니/ 그림자를 돌아보며 '어디로?' 물어보네"라고 썼는데, 이 시에서는 나아갈 길의 향방조차 묻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라도 있는 것이냐"고 잘 묻는다. 그러나 "어디로?" 라고 보채며 질문하지 말자. 다만 거기에 여기에 있을 뿐. 무릎을 모으고 앉아 있을 뿐.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오래도록 걸음을 멈추고 있어야"('십일월이 지나는 산굽이에서')할 뿐. 그럴 때 손결이 한 번 스치고 지나간 듯 삶에는 빛이 인다. 그 빛에 무엇을 더 보태겠는가.      [애송시 100편-47]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조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 일러스트 잠산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로 시작하는 기미(己未) 독립선언문에는 시 못지않은 리듬과 비장한 여운이 있다. 고교 시절, 이 선언문과 함께 짝패처럼 좔좔좔 암송해야 했던 시가 이상화(1901~1943)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다. 1919년 서울에서 3·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3월 8일 장날을 기해 대구에서 학생만세운동을 모의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그는 상화(相和)라는 이름을 상화(尙火)나 상화(想華)로 쓰곤 했는데, 정녕 그의 시와 삶이 '항상 불' 같았으며 '만주를 오가며 늘 독립운동을 생각'하곤 했다. 그러니 3월이 되면 이 시가 떠오를 수밖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고, 오는 봄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그것이 천지만물을 들썩이게 하는 봄의 '신령'이고 봄의 '풋내'이고 봄의 '푸른 웃음'이다. 그러나 들을 빼앗긴 자에게 오는 봄은 절박하다. 봄조차 빼앗기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봄의 '답답'함이고 봄의 '푸른 설움'이다. 들의 봄과 인간의 봄, 자연의 봄과 시대의 봄은 이렇게 갈등한다. 그리고 시인은 '지금은'에 담긴 이 봄의 혼곤 속을 '다리를 절며 걷'고 있다.   이 시의 매력은 굳세고 비장한 의지와 어우러진 섬세한 감각에 있다. 가르마 같은 논길, 입술을 다문 하늘과 들, 삼단 같은 머리를 감은 보리밭, 살진 젖가슴 같은 흙 등 빼앗긴 들을 온통 사랑스런 여성의 몸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니 온몸에 햇살을 받고 이 들(판)을 발목이 저리도록 실컷 밟아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야말로 내 나라 내 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관능적인 연애시의 옷을 입은 지극한 애국애족의 저항시다.      [애송시 100편 - 제48편] 서시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일러스트=잠산 너무나 아름다운 이 시를 통째로 암송할 수 있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서정적이고 여성적인 말씨와 어렵지 않은 입말로 쓴 시. 무엇보다 이 시는 우리의 삶을 성찰하게 한다. 천상의 별과 지상의 잎새에 걸쳐 있는 넓은 공간의식도 놀랍다. 삶은 잡목림 같은 것. 해서 번뇌와 의혹과 부정의 바람은 그치지 않고 불어와 잎새와 같은 우리를 교란시키는 것. 부끄러움은 하루 걸러 오는 것. 그러나 어둠을 배경으로 별은 빛나고, 바람과 같은 시련을 만날 때 큰 사랑은 움트는 것. 다만 우리는 나의 부끄러움으로, 나의 양심으로 나와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고고함과 지순함과 강직함으로 사랑하자.   윤동주(1917~1945) 시인은 맑은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는 일제강점기의 어둠과 황폐를 의식의 순결함으로 초월하려고 했다. 그는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또 다른 고향')고 써 스스로를 반성했고,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고 쓰며 자신을 끊임없이 돌이켜 봤다.   종교적인 순교의 의지로도 읽히고 독립에의 의지로도 읽히는 등 다양한 해석의 층위를 갖고 있는 이 시를 쓴 것은 1941년 11월로 알려져 있다. 윤동주는 1941년 자선 시집을 내려고 했으나 주변에서 시국을 염려해서 시집 출간 연기를 권함에 따라 뜻을 미루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1943년 7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고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출감을 기다렸지만 불운하게도 해방을 불과 반년 앞둔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의 차디찬 바닥에서 옥사했다.   윤동주 시인은 생전에 한 편의 시도 발표하지 못했다. 다만 이 시가 포함된 원고뭉치가 국문학자 정병욱의 어머니에 의해 장롱 속에 몰래 보관되다가 194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유고시집으로 발간되었다. 정지용 시인은 유고시집의 서문에서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라고 써서 청년 윤동주의 죽음을 애도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별 헤는 밤')고 노래한 영원한 청년 윤동주. 생전에 그는 자기 성찰로 뒤척이는 한 잎의 잎새였으나, 이제 보석처럼 빛나는 천상의 별이 됐다.       [애송시 100편 - 제 49편] 바람의 말 -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 일러스트=권선아   바람을 생각하는 일이란 마음이 울렁거리는 일이다. 바람 불면 그곳이 어디든 따라 나서고 싶고, 바람 들면 온몸이 저절로 살랑살랑 나부끼게 되고, 바람나면 불타는 두 눈에 세상 보이는 것 아마 없으리. 바람을 생각하는 일이란 사무치는 일이다. 빈자리를 어루만지는 부재와 상실, 추억과 그리움으로 가슴이 시리고 뼛속까지 시리리. 그리고 바람을 생각하는 일이란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다. 물처럼 세월처럼,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지나고 나면 흔적도 없으리.   삶이, 사랑이, 시(詩)의 말이 바람이라고 생각한 적 있다. 바람(願)이라서, 바람(風) 같아서 간절한 것들이다. 이 시를 읽노라면 간절하게 그리운 부재가 떠오르고, 간절하게 따뜻한 배려가 떠오른다. 몸을 떠나 영혼으로 떠돌며 사랑하는 사람 곁을 지키던 영화 '사랑과 영혼', 그 애틋한 바람의 영혼도 떠오른다. 서로 떨어져 있어도 사랑의 괴로움, 사랑의 피로까지를 함께하는 바람의 마음. 그렇게 따뜻한 바람이라면 '가끔'이 아니라 매일매일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고 싶다. "목숨을 걸면 무엇이고/ 무섭고 아름답겠지./ 나도 목숨 건 사랑의/ 연한 피부를 쓰다듬고 싶다"('성년의 비밀')   이 시는 조용필이 부른 '바람이 전하는 말'의 노랫말과 흡사하다. 물론 이 시가 5년쯤 먼저다. 의사이기도 한 마종기(69) 시인은 고희를 앞두고도 여전히 젊고 댄디(dandy)하다. 어떤 선입관과 고정관념과 권위로부터 자유롭다. 동화작가 마해송과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여성 무용가 박외선 사이에서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서울에서 성장해 의과대학 재학 시절 시인으로 등단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40여 년간 방사선과 전문의로 지내며 시를 써왔다.   그는 올해로 시력 49년을 맞는다. 투명하면서 울림이 깊은 그의 시에 유난히 위로받고 행복해하는 마니아들이 많다. 오롯한 그리움과 따뜻한 진심이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누군가 말했다. 그의 시는 '맹물' 같다고. 어느 날 마시면 상쾌하고 시원하고, 어느 날은 목이 메고 어느 날은 아무 맛도 나지 않는다고. "나는 이제 고국에서는/ 바람으로만 남겠네"('산수유')라는 그의 최근 시의 구절이 떠오른다.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라는 이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과 함께. 그는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시민임이 분명하다, 저 바람처럼.       [애송시 100편 - 제 50편] 봄 -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 일러스트=잠산 봄! 살찐 볼을 만지는 것 같다. 입안에 쑥 냄새가 돈다. 노란 산수유 그늘도 펼쳐진다. 연못가 버들개지도 눈을 뜬다. 볕은 보송보송하다. 옷은 가볍고 걸음은 경쾌하다. 찬 없이 따뜻한 밥과 냉잇국 한 그릇을 받고 싶다. 차닥차닥 빨랫방망이 소리가 들리던 옛날의 빨래터도 다시 가보고 싶다.   봄! 자연에게만 봄이 다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마음에도 그것은 돌아온다. 인심에도 계절이 있다. 정치가 싸움판을 걷어내거나, 경제가 잘 돌아 보통사람의 주머니 사정이 좋아지면 훈풍 부는 봄이 왔다고 한다. 넉넉하고 화창하면 모두 봄이다. 그러므로 봄은 우리의 일상에서 제일로 선호하는 비유의 언어이다. 봄에는 게정게정 불평하는 소리가 싹 사라진다.   이 시의 맛은 봄을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으로 빗댄 데 있다. 그러나 이 시에 등장하는 봄의 비유로서의 사람은 순박하고 좀 어수룩하다.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 아니다. 저기서 기웃거리는 것을 좀 보라. 무리에 끼어서 한눈도 팔고 궂은 데서 뒹굴기도 한다. 자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줄을 모르고 한량처럼 '나자빠져' 있기도 한다. 느려터졌지만 한판 싸움질도 하는 것을 보니 강퍅하니 나름으로는 고집도 센 듯하다. 대처를 떠도느라 산전수전 다 겪었다. 몸고생 마음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아, 그러나 사람 냄새가 나는 그는 '마침내' 돌아온다. 민주주의의 도래처럼. 격전지에서 생환한 용사처럼. 봄의 백성이 되어 꿈에도 못 잊고 기다리고 있던 사람의 품으로.   이성부(66) 시인은 남성의 굵직한 목소리를 지닌 민중시인이다.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울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라고 쓴 시 '벼'는 민중서정시의 한 경지를 보여주었다. 광주 출신의 그는 '80년 광주'를 겪은 후 죄의식으로 방황을 하다 산(山)에서 정신적인 위안을 얻는다. 그는 산행을 통해 "처음에 울적하게 막혔던 것이 나중에는 쾌함을 얻는다"라는 퇴계의 글귀에 공감하게 되었다고 한다. 근년까지는 지리산과 백두대간을 종주한 경험으로 '내가 걷는 백두대간' 연작시를 발표했다.   그가 돌아오고 있다. 오늘은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오는 봄을 마중 나가자. 들길과 거리와 사람 사는 동네에, 그리하여 이 세상에 봄볕 그득할 때까지.      [애송시 100편 - 제 51편] 타는 목마름으로 - 김지하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국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 일러스트 권신아   출간되자마자 금서(禁書)가 된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를 구하기 위해 책방을 뒤지고 다녔던 것도, 최루 속에서 금지곡(禁止曲)이었던 '타는 목마름으로'를 불렀던 것도, 시보다 운동을 택했던 선배가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주점에서 결혼식을 했던 것도, 지금도 김광석이 부른 '타는 목마름으로'를 들으면 뭉클해지는 것도 다 이 시 때문이다.   쫓고 쫓기는, 맞고 때리는, 울고 신음하고 비명을 지르는 소리의 중첩을 통해 지난 70년대의 공포와 고통을 날카롭게 드러낸 시다. 누군가는 그렇게 피를 흘리며 뒷골목으로 쫓겼고 누군가는 유명을 달리하기도 했다. 자정부터 신 새벽 사이, 뒷골목과 뒷골목 사이, 소리와 소리 사이에서 타는 목마름으로 열망했던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 이 시가 뜨거운 것은 잊혀져 가는 '민주주의'를 노래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노래했기에 더욱 뜨겁다. 오래 가지지 못한 아니 너무도 오래 잃어버린 그 모든 목마름의 이름을 '타는 목마름'으로 남 몰래 쓰고 있는 한, 이 시는 여전히 뜨겁게 살아오는 것이다. 우리에게 되살아오는 것이다.   그의 본명은 '영일'(英一, 한 꽃송이)이다. 거리 입간판에 조그맣게 써있던 '지하'라는 글자를 보고 지었다는 필명 '지하'(地下가 芝河로 바뀌었다). 시위, 필화사건, 긴급조치 및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선동죄 등으로 체포, 투옥, 사형 및 무기징역 선고, 석방을 거듭하면서 김지하(67) 시인은 70년대 내내 박정희 정권과 맞섰다. 감옥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암살 소식을 듣는 순간, 무상함에 휩싸여 "잘 가시오. 나도 뒤따라가리다"라는 혼잣말이 저절로 나왔다고 한다. 이후 '투사' 김지하는 '생명사상가' 김지하로 변신한다. 감옥 창틀에 싹을 틔운 민들레를 보고 생명의 신비와 소중함에 눈을 떴다는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시(詩)란 어둠을/ 어둠대로 쓰면서 어둠을/ 수정하는 것// 쓰면서/ 저도 몰래 햇살을 이끄는 일"('속 3')임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던 시인, 그리고 이제 자신의 시와 삶이 우주 저편으로까지 이어지는 '흰 그늘의 길'에 서기를 꿈꾸는 시인, 그가 있어 우리 시는 또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지 않은가.      [애송시 100편 - 제 52편]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 김선우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 일러스트=잠산 '입아아입(入我我入)'이라고 했다. 저것이 나한테 들어 있고, 내가 저것 속에 들어 있다고 했다. 이 세계는 서로가 연결되어 주고받는 중중무진(重重無盡) 연기의 세계이다. '법화경'을 보면 입아아입을 몸소 실천한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이라는 이가 있다.   그는 길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공경합니다. 나는 당신을 가벼이 여기지 않습니다"고 말하면서 살았다. 막대기나 돌멩이로 때릴 때도 피해 도망가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후일에 많은 사람은 상불경보살의 큰 사랑을 알고 그를 예배 공경했다지만.   김선우(38) 시인은 90년대 여성시의 흐름을 이어오면서 여성의 '육체성'을 재발견하는 작업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그녀의 시를 읽으면 상불경보살이라는 이가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의 시는 너와 나의 차별이 없는 큰 화해와 사랑의 세계를 발언한다. 해서 그녀의 시에는 "너의 영혼인 내 몸"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나 아닌 것들이 나를 빚어/ 그대 아닌 것들로 빚어진 그대를 사랑하오니"와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젊은 여성 시인인 그녀가 우주 생명에 대한 무차별적 사랑을 가붓한 어조로 고백하는 이유는 이 물질세계를 "고맙고 미안해하던 마음의 떨림이 없고 (상품과 화폐만 있고) 자못 괴로운 포즈만 남았다"고 인식했기 때문인 듯하다.   아무튼 그녀의 시는 딱한 생명을 뱃속에 품고 강보에 받아내고 젖을 먹여 길러내는 모성을 보여준다. 오르가슴을 느끼는 여성의 몸을 과감하게 등장시켜 관능적이기도 하지만, "아프지 마, 목숨이 이미 아픈 거니까/ 아파도 환한 벼랑이 목숨이니까"라고 말할 때 알 수 있듯이 그녀의 시는 사바세계의 가엾은 목숨을 살려내는 천수관음(千手觀音)의 마음을 지녀 몸을 섞고 탐하는 쾌락을 넘어선 자리에 있다.   개화(開花)를 모티프로 삼고 있는 이 시는 그 뜻이 비교적 쉽게 읽힌다. 그러나 꽃피는 꽃의 몸과 내 몸을 교차시키면서 이 시는 의미의 확장을 얻는다. 꽃과 꽃벌의 혼례가 꽃과 나와의 혼례로 얽혀 읽히면서 이 시는 심상치 않은 의미를 낳는다. 그것은 성애적인 열락을 넘어선다. 그러나 "사랑이여 쓰러진 것들이 쓰러진 것들을 위해 울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랑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더 "밥알을/ 서로의 입에 떠 넣어주"며 살아야 하는가      [애송시 100편 - 제 52편] 바다와 나비 - 김기령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청산(靑山)이라면 몰라도 바다는 나비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거대한 바다에 비해 흰나비는 얼마나 작고 어리고 가냘픈가. 이 무구한 흰나비는 바다를 본 적이 없다. 알 수 없는 수심과 거센 물결에 대해 들은 적도 없다. 흰나비에게 푸르게 펼쳐진 것은 청(靑)무우밭이고 그렇게 푸른 것은 꽃을 피워야 마땅하다. 흰나비가 삼월의 바다에서 청무우꽃을 꿈꾸는 까닭이다. 그러나 짜디짠 바다에 흰나비의 날개만 절 뿐, 삼월이어도, 바다가 푸르긴 해도, 바다는 꽃을 피우지 않는다. 나비의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만 비친다. 삼월의 바다, 어린 나비, 초생달은 모두 이른 것들이다. 시작인 것들이다.   허공을 나는 것들은 날개가 중요하고 땅을 걷는 것들은 허리가 중요하다. 헌데 '나비의 허리'라니! 공주의 아름다움은 춤에 있고 나비의 아름다움은 비상(飛翔)에 있다. '공주처럼 지쳐서' 바다에서 돌아온 나비. 바다로의 비상에 실패하고 뭍으로 귀환한 '나비의 허리'는 상징적 의미가 깊다. 이제 흰나비는 청무우 꽃그늘을 노니는 그런 나비가 아니다. 짜디짠, 바다의 깊이와 파도의 흔들림을 맛본, 허리가 실한 나비다. "땅을 밟고 하는 사랑은 언제고 흙이 묻"('주피터 추방')기 마련이다. 새롭고 먼 곳을 향해 비상하다 날개가 절어본 적이 있기에, 흰나비는 이제 흙이 묻더라도 땅을 밟는 사랑을 알았으리라.   이 시의 꽃은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이다. 하얗고 가늘고 기다란 나비의 몸과 초생달이 그려지고, 새파란 바닷물에 새파랗게 전 흰나비의 허리가 그려지고, 지쳐 돌아오는 흰나비 허리를 비추는 저물녘 초생달이 그려지기도 한다. '시린' 풍경들이다. 어쨌든 '바다'가 냉혹한 현실이라면 '나비'는 순진한 꿈의 표상이다. 꿈은 언제나 현실의 냉혹함을 모른 채 도전한다. 근대 혹은 서구문명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 지식인의 자화상이 떠오른다. 역사 혹은 시대의 흐름 앞에 무력했던 시인의 모습도.   김기림(1908~?) 시인의 탄생은 현대시 탄생과 그 햇수를 같이 한다(얼마 전 출생연도가 1907년으로 기록된 학적부가 발굴되어 탄생 101주년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는 30년대 이상(李箱)과 더불어 한국 문단의 모더니즘을 주도하면서 서구문명 지향하는 '새로운 생활'을 동경했다. 그는 기자, 문학비평가(이론가), 번역가, 대학 교수를 겸한 모더니즘 선봉에 선 시인이었으나 분단과 전쟁은 그를 납북 이후 생사조차 알 수 없는 '비운의 모더니스트'로 만들어버렸다.      [애송시 100편 - 제 54편] 나그네 - 박목월       강(江)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南道) 삼백리(三百里)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일러스트=잠산   이 시는 박목월(1916~1978)이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펴낸 3인 시집 '청록집'(1946)에 실려 있다. 임시 정가 30원의 '청록집'을 발간한 이후 세 명의 걸출한 시인들은 '청록파'로 불리게 되었다. 한국 서정시의 큰 산맥을 이룬 이 3인은 모두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나왔다.   경주에 살고 있던 박목월을 조지훈이 처음 만난 것은 1942년. 이 시는 박목월과 조지훈의 각별한 관계에서 태어났다.   '목월에게'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조지훈의 시 '완화삼(玩花衫)'에 대한 화답으로 이 시를 썼기 때문이다. '완화삼'의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의 한 부분인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를 부제로 삼았다. '완화삼'의 시어인 나그네와 구름과 달과 강마을과 저녁 노을을 그대로 받아서 썼다. 다만 '완화삼'이 나그네의 구슬픈 우수(憂愁)를 더 드러내면서 가야 할 앞길의 정서적 거리를 '물길은 칠백리(七百里)'로 표현했다면, '나그네'에서는 물처럼 바람처럼 걸림 없이 '남도(南道) 삼백리(三百里)'의 길을 표표히 가는 나그네의 심사를 부각시켰다.   이 시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접한 최초의 시였다. 외할머니가 벽에 붙여져 있던 이 시를 '가갸거겨'를 배우던 방식으로 흥얼흥얼하는 것을 곁에서 들었다. 그처럼 이 시는 우리말의 가락이 아주 잘 살아 있다.   조지훈은 박목월의 시에 대해 "압운(押韻)이 없는 현대시에도 이렇게 절실한 심운(心韻)이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이 시를 읽으면 역시 그 평이 그르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시를 쓸 때에는 꼭 연필을 깎아 썼다는 박목월. 아이들에게 공책을 사주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지만 한지를 묶어 공책을 만들어줄 정도로 다정다감한 아버지였던 박목월.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 어느 짧은 산(山)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산이 날 에워싸고')고 노래한 박목월. 시를 알게 되면서부터 본명 박영종(朴泳鐘) 대신 '木月'이라는 큰 자연의 이름을 스스로 붙였던 그. 식민지 현실을 외면했다는 지적이 있지만, 박두진의 말대로 청록파에게 자연은 "온갖 제약을 타개하기 위한 시의 유일한 혈로(血路)"였는지 모른다. 그 한가운데에 '애달픈 꿈꾸는 사람' 박목월이 있다.      [애송시 100편 - 제 55편] 봄바다 - 김사인       구장집 마누라   방뎅이 커서   다라이만 했지   다라이만 했지       구장집 마누라는   젖통도 커서   헌 런닝구 앞이   묏등만 했지   묏등만 했지   그 낮잠 곁에 나도 따라   채송화처럼 눕고 싶었지   아득한 코골이 소리 속으로   사라지고 싶었지       미끈덩 인물도 좋은   구장집 셋째 아들로 환생해설랑   서울 가 부잣집 과부하고   배 맞추고 싶었지         ▲ 일러스트=권신아 구장집 마누라는 방뎅이도 크고 젖통도 크고 잠도 푸지게 잘 자니 미끈덩 아들 쑥쑥 낳겠다. 역시나 셋째가 제일 미끈덩하겠다. 미끈덩 인물 재산이겠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라도 되는 양 바람깨나 피우겠다. 도망치듯 상경해 이양저양 살피다 부잣집 과부 만나 한몫 챙기기도 하겠다. 살집 좋은 과부 곁에서 시름시름 늙어가며 이모저모 기웃대다 '인생 탕진하'겠다. 저리 생생(生生)한 구장집 마누라 몸을 거쳐 미끈덩 셋째 아들로 환생하는 것, 사내들의 로망이겠다. 이 시의 묘미는 현실 속 구장집 마누라가 아니라, 상상 속 셋째 아들의 부잣집 과부로 튀는 오지랖의 '쓰리 쿠션'에 있겠다.   이 시를 읽노라면 김 시인의 '심성'을 엿볼 수 있는 이시영 시인의 재미난 산문시 하나가 떠오른다. 내용인즉슨 이렇다. 술자리에 김사인 시인이 폭우 속 흰 고무신을 신고 와 합류했다는 것. 새벽 즈음에 이 시인의 처가 천둥치듯 "복희년 나오라고 그래!" 소리치며 들이닥쳤다는 것. 바로 그때 "나와 송 사이에서 묵묵히 고개를 떨구고 있던 사인이가 갑자기 일어나 문밖으로 내빼는데 흰고무신 신은 발이 비호처럼 빨랐다. 그리고 빗속을 번개처럼 가르며 사라졌다. 복희씨가 졸린 눈을 뜨기도 전에, 송과 나의 처가 시퍼렇게 걷어붙인 팔을 풀기도 전에 일어난 아주 순식간의 일이었다"('김사인의 흰고무신')는 것.   김사인(52) 시인은 사람 좋은 충청도 양반이다. 떠듬떠듬 어눌하게, 천천히 길게, 그러나 뜨겁게 시를 쓰는 시인이다. 첫 시집을 내고 19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을 냈으니, 시 한 편을 길게는 30년을 쓰고 썼다니 '곡진'하다는 말, '지극'하다는 말은 그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다. 그런 그가 1980년대의 혁혁한 문화운동가이자 날카로운 논객이었다는 건, '노동해방문학'사건에 관여해 수배되기도 했다는 건 다 아는 전력(!)이다. "시는 크고 요란한 것이 아니라 작고 나지막한 섬김"이라고 말하는 그는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시를 높이고 세상과 사물을 높이는 드문 미덕을 가진 시인임에 틀림없다.   봄은 남쪽으로부터 오고, 남쪽 끝 바다로부터 온다. 구장집 마누라 방뎅이 같이 방방한 저 들판에, 구장집 마누라 젖통 같이 봉긋한 저 능선에, 구장집 마누라 코골이 같이 달디단 봄바람으로 온다. 바다 내음 향긋한 천지가 무릇 봄바다다. 물 맑은 봄바다에 두둥실 떠가는 저 배를 타고 미끈덩 풋것들로 환생하고 싶다. 어쨌든 봄이고 하여튼 봄밤이고 바야흐로 봄바다다.      [애송시 100편 - 제 56편]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 일러스트=잠산 시름 많은 사람들과 "어두운 땅 한 평 가꾸다 갈래요/ 우리나라 하늘 한 평 비추다 갈래요"라고 노래했던 시인 고정희(1948~1991). 이 시를 읽고 있으면 마치 그녀가 상한 영혼의 곁에 앉아 작은 목소리로 "흙에 심은 뿌리 죽는 법 보았나요"라고 묻는 것 같다.   평론가 김주연이 분석한 대로 이 시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신다"는 성경의 말씀과 겹쳐 읽힌다. '하늘 아래'라는 표현도 예수의 언약과 임재(臨在)를 둥글게 포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 넋으로 기댈 곳 없이 큰 고통에 놓여있는 사람들을 힘껏힘껏 껴안고 살겠다는 강한 의지를 이 시는 보여준다.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했고 다분히 기독교적인 신앙에 기초한 시편들을 써낸 고정희 시인은 기독교의 현실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칼을 들이댔다. "하느님을 모르는 절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이쁜 우매함인가"라고 질문했고, 동시에 "하느님을 등에 업은 행복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맹랑한 도착 신앙인가"라며 고민했다. 그녀가 비판하고 날카롭게 투시한 대상은 눈앞의 현실 그 자체였으며, 돌봄이 있는 따뜻한 공동체는 그녀가 꿈꾸는 세계였다.   고정희 시인은 한 생애를 정열적으로 살다 간 여성운동가이기도 했다.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을 지냈고, 여성주의 문화집단인 '또 하나의 문화' 창립 동인으로도 활동했다. "제도적 억압의 굴레를 극복하려는 힘, 그것이 자유 의지라고 말할 수 있다면 나의 시는 항상 자유 의지에 속해 있는 하나의 에너지"라고 자평했는데, 조금의 호락호락함도 없이 평소 신념을 시 창작과 생활에서 실천했다. 한 시대의 깊고 어두운 계곡을 묵상했으므로 그녀의 시는 미지근하거나 융융한 그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시는 80년대의 격문이면서 '우릉우릉 폭발하는 화산(火山)'이었다.   1991년 6월 지리산 뱀사골을 오르다 폭우로 불어난 물에 휩쓸려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충격적인 죽음을 생각하면 생전에 쓴 시 '지리산의 봄 1-뱀사골에서 쓴 편지'가 자꾸 떠오른다. "아득한 능선에 서 계시는 그대여/ 우르르우르르 우뢰 소리로 골짜기를 넘어가는 그대여/(…)/ 아름다운 그대 되어 산을 넘어갑니다/ 구름처럼 바람처럼/ 승천합니다"라고 쓴 시. 그녀의 시를 읽고 있는 오늘 새벽은 내 가슴이 아프다.      [애송시 100편 - 제 57편] 달은 추억의 반죽 덩어리 - 송찬호           누가 저기다 밥을 쏟아 놓았을까 모락모락 밥집 위로 뜨는 희망처럼   늦은 저녁 밥상에 한 그릇씩 달을 띄우고 둘러앉을 때   달을 깨뜨리고 달 속에서 떠오르는 노오란 달   달은 바라만 보아도 부풀어오르는 추억의 반죽 덩어리   우리가 이 지상까지 흘러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빛을 잃은 것이냐   먹고 버린 달 껍질이 조각조각 모여 달의 원형으로 회복되기까지   어기여차, 밤을 굴려가는 달빛처럼 빛나는 단단한 근육 덩어리   달은 꽁꽁 뭉친 주먹밥이다. 밥집 위에 뜬 희망처럼, 꺼지지 않는         ▲ 일러스트=권신아   동치미 무를 먹으며 아삭아삭 달을 베어먹는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팥죽에 뜬 새알을 떠먹으며 어두운 밤하늘을 들락날락하는 달을 떠먹는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달걀과 밀가루가 들어간 둥근 지짐이와 부침들을 먹을 때마다 달(빛)을 지져먹고 달(빛)을 부쳐 먹는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모든 알들은 달을, 하얗고 부드러운 가루들은 달빛을 닮았다. 그리고 흰 고봉밥이, 노란 달걀 프라이가, 토실한 감자가, 탐스럽고 둥근 빵이 죄다 달을 닮아 있지 않은가. 그뿐 아니다. 밥상에 뜬 온갖 달들을 만들어내는 엄마와 아내와 누이와 딸이 모두 달의 여인들이니, 우리는 밥상에 뜬 달을 먹고 자라는, 그 달을 만드는 이 달에 의해 키워지는, 달의 후예들이다. 그러니 밥이 달이고, 밥의 집이 달의 집이다.   '조각조각' 달집 아래를 걸을 때, '모락모락' 밥집 곁을 지나칠 때 그 집들이 우리를 먹여 살리는 부푸는 추억이자 꺼지지 않은 희망임을 깨닫는다. 저녁 밥상 앞에 둥그렇게 앉아 '한 그릇씩의 달'을 비우며 서로를 마주볼 때 '꼭꼭 뭉친 주먹밥'처럼 비로소 한 식구(食口)임을 확인한다. 그런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만'든다. "꽃의 향기를 구부려 꿀을 만들고/ 잎을 구부려 지붕을 만들고/ 물을 구부려 물방울 보석을 만들고(…) 이 세계를 둥글게 완성시켜 놓"('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만든다')는다. 달은 어머니처럼 둥글고, 이 둥근 것들을 우리는 끊을 수 없다. 밤의 어둠을 굴리는 달(빛)이 이울며 차며 '달의 원형'을 회복하듯, 우리도 그렇게 추억과 희망을 완성할 것이다. 그것들로 배가 둥그렇게 부르리라. 또 다른 달을 낳기도 하리라. 그것이 달의 역사(歷史)이고 달의 미래일 것이다.       80년대가 끝나갈 무렵에 출간된 송찬호(49)의 첫 시집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가 불러일으켰던 반향은 컸다. 그는 마치 연금술사와도 같이, 시대와 가족과 인간과 사물과 언어를 비극적이면서 비의적(秘儀的)으로 결합시키곤 한다. "나는 시를 무겁게 시작한다. 그리고 오래 매만진다"는 시작 태도는 시의 이미지를 돌올하게 하고 형이상학적인 깊이를 거느리게 한다. 소를 치던 어린 시절 '아이 지게'를 갖는 게 꿈이었다는, 고춧가루 몇 되를 들고 가출해 소설을 쓰기도 했다는, 군대와 대학 생활을 제외하고는 고향 보은을 떠나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떠나지 않을 거라는 그는 자신에게는 '시 쓰는 일'이 전부일 뿐이라고 일갈하는 몇 안 되는 시인이다. 이런 시인이라야 모름지기 전업시인일 것이다.      [애송시 100편 제 -58편] 수묵(水墨) 정원 9 - 번짐 - 장석남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 일러스트=잠산 번짐이라니. 바뀜이 아니라 번짐이라니. 목련꽃이 피는 일을, 꽃이 지고 열매를 맺는 일을, 계절의 순환을, 너와 나 사이 사랑과 이별의 사건을, 삶과 죽음이 돌고 도는 그 둥?을, 시간과 공간의 옮김을 번짐이라고 부르다니. 먹물이 화선지에서 고요하게 번지듯이. 그리하여 번짐은 환함이라니. 씨나 날로 결어서 천을 짜듯이 조촘조촘 가는 것이라니. 망설이고 머뭇거리며 나아가는 것이라니. 번짐이라고 부르면 나와 당신은 얼마나 가까운가. 이 생(生)을 받아 가꾸는 일이 얼마나 거룩한가.   장석남(43) 시인의 시는 강한 전염력을 갖고 있다. 그의 시는 '번지면서'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나아간다. 밀어내고 부드럽게 떠나고 밀려들어오는, 그 '어쩌지 못하는' 사랑의 감정을 잘 표현한다. 우리들 '마음 그늘을 빌려서 잠시 살다가 가는 것들'을 아주 잘 들여다보고 귀담아듣는 출중한 감각을 자랑한다. "찌르라기떼가 왔다/ 쌀 씻어 안치는 소리처럼 우는/ 검은 새떼들"('새떼들에게로의 망명')이라고 쓴다거나, "어미소가 송아지 등을 핥아준다/ 막 이삭 피는 보리밭을 핥는 바람/ 아, 저 혓자국!"('저녁 햇빛에 마음을 내어 말리다')이라고 쓸 때의 놀라운 감각이라니!   장석남 시인의 마음에는 '옹근 고요'가 살고 있는 것 같다. 옹근 고요 위에서 그의 시는 태어난다. 고독과 외면과 섭섭함과 흔들림과 설움과 간신히 잦아드는 것과 사소함과 곰곰 궁금함과 은밀함과 찬란함과 되비쳐옴과…… 그 모든 감정의 섬세한 자세를 그의 시는 그려낸다. '겨우'라고 수식될 세상 살림들의 속삭임과 혈육인 듯 함께 살면서 '물항아리에 물 차 오르면 거기에 어룽대는 물의 빛'과도 같은, 사람의 가슴에 도는 생(生)의 윤기를 발견해낸다. (삶에 윤기가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시에도 자원이라는 게 있다면 그건 갈증/ 그건 아무도 모르게 영혼을 찢어놓는,/ 남은 모르는 갈증/ 갈증"('시법(詩法)')이라고 말하는 그는 우리 시대에 아주 드문 서정시인이다.   첫 시집을 내고 "나는 춤꾼이거나 가수이거나 아니면 유능한 세션맨이 되었어야 옳았다"고 고백하는, 해서 한때는 전기기타를 배우러 사설강습소를 다녔다는, 해서 한때는 배우로도 활동한, 거문고를 안고 사치를 부리기도 한다는 시인. 장석남 시인을 만날 때마다 나는 확신하게 된다, 모르긴 몰라도 시인은 울림통 하나쯤은 지닌 근사한 악기여야 한다는 것을.      [애송시 100편 - 제 59편]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 장정일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무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깨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하며   스물 두 살 앞에 쌓인 술병   먼 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 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 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개 벨 것인데   한 켠에선 되게 낮잠을 자 버린 사람들이 나즈막히 노래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 흘렸지요         ▲ 일러스트=권신아 그늘! 나비 그늘, 꽃 그늘, 나무 그늘, 처마 그늘, 담 그늘, 당신 그늘, 심지어 위태롭게 서 있는 전봇대나 바지랑대에도 그늘은 있다. 그늘은 눈부시지 않고 어둡지 않다. 뜨거운 햇살은 가려주고 비바람은 대신 먼저 맞아준다. 여운, 깊이, 여유, 멋을 지닌다는 점에서 그림자와 다르다. 그래서일까. 그늘 아래 서면, 잠시, 시간도 잊고 이름도 잊고 일도 잊고 갈 곳도 잊는다. 그늘 아래 스스로를 부리듯 노동과 불안과 걱정을 부려두고, 잊거나 잃은 것을 떠올리며 눈물짓기도 한다.   시간과 계절은 너무 빨리 달아나고, 우리는 너무 빨리 늙고, 늘 배고픔과 실직의 공포에 시달리면서 출근과 스트레스와 피로와 시름과 술과 담배에 지쳐 있는데… 맨땅에 뿌리를 내린 채 사시사철 변함 없는 사철나무의 그늘이니 참 깊고 넓겠다. 시인 장정일(46)이 꿈꾸던 '사철나무 그늘', 누구나 그런 그늘 하나쯤은 꿈꾸기 마련이다. '가장 장정일답지 않는 시'임에도 가장 많이 애송되고, 시인 스스로도 첫 시집을 여는 시로 삼았던 까닭일 것이다.   이 시는 "By the rivers of Babylon/ there we sat down/ ye-eah we wept,/ when we remember Zion"이 반복되는 보니엠(Boney M)의 노래 '바빌론 강가에서(Rivers of Babylon)'를 들으며 읽어야 한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편, 137편)라는 성경 구절과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벨탑과 공중정원이 있었다는 번영의 땅 바빌론은, '시온(Zion·예수살렘의 도시로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을 생각하며 견뎌야 했던 이방의 땅, 고난의 땅, 타락의 땅이다. 원조 '디아스포라'의 고난과 희망이 담긴 디스코 풍의 이 노래는, 80년대 내내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쉬'던 공장노동자들의 휴식시간을 장악하기도 했던가.   불온하다는 말, 문제적이라는 말이 장정일처럼 잘 어울리는 시인이 또 있을까. 중졸의 학력과 방황의 청소년기, '삼중당 문고'를 읽으며 했다는 독학, 최연소 '김수영 문학상' 수상, 극작가, 소설가, 외설 시비, 무시무시한 독서량, TV 교양프로 진행, 교수…. 그는 정복자처럼 자신의 삶을 찬탈했으며 게릴라처럼 80년대 시단을 점령했다. 그리고 어느날 '시 쓰는 법을 까맣게 잊어버렸다'고 오리발을 내미는, 그가 이른바 '쉬인' 장정일이다. '동사무소 하급 공무원'을 꿈꾸며 들었을 '바빌론의 강가'를 다시 들으며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쉬는 마음'을 헤아려보는 아침이다.     [애송시 100편 - 제 60편] 울음이 타는 가을강(江) =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江)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 가는,   소리죽은 가을강(江)을 처음 보것네.         박재삼(1933~1997)은 생전에 '슬픔의 연금술사'로 불린 시인이다. 시 '눈물 속의 눈물'에서 "꽃잎 속에 새 꽃잎/ 겹쳐 피듯이// 눈물 속에 새로 또/ 눈물 나던 것이네"라고 노래했듯이 그의 시들은 눈시울이 촉초근하게 젖어 있다.   박재삼 시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이 시는 노을이 붉게 번지는, 굽이쳐 흐르는 강을 산등성이에서 내려다보며 썼을 것이다. '눈물'과 '울음'과 '강'과 '산골 물'과 '바다'로 연결되는 물의 이미지는 누선(淚腺)을 자극하고, '햇볕'과 '불빛'으로 연결되는 불의 이미지는 삶의 소진과 소멸을 두드러지게 하는 바, 이 시는 사랑의 비극과 고독과 생(生)의 무상(無常)을 동뜨게 드러낸다.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이라는 표현은 "뉘가 알리, 어느 가지에서는 연신 피고/ 어느 가지에서는 또한 지고들 하는/ 움직일 줄을 아는 내 마음 꽃나무"('자연(自然)')라는 표현과 쏙 빼닮았다. '눈물나고나'와 '보것네' 등의 종결어미에서는 그의 다른 시편에서도 예사인 전통적인 가락의 활용을 보여준다. 이 시가 처음 월간지에 발표된 후 박두진 시인은 "노도(怒濤)처럼 세찬 현대의 휩쓸림 속에서 배추 꽃목처럼 목이 가늘고 애잔한, 실개천처럼 맑고도 잔잔한 서정"이라고 평해 신예 박재삼을 주목했다.   박재삼 시의 가옥을 떠받치는 두 기둥인 '한'과 '가락'의 능수능란한 구사는 그가 자라난 생활환경과 관련이 있다. 일본 동경에서 태어나 막노동을 하는 아버지와 생선 장사를 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집이 가난해서 낮에는 중학교 급사로 일하면서 야간반에서 수학을 했다. 집 형편이 옹색해 책을 살 수 없어 '가람시조집'을 빌려다 공책에 베껴 쓰고 늘 외웠고, 중학 시절 김상옥 시인의 작문 지도를 받으면서 전통시의 낭창낭창한 가락에 눈떴다.   병을 얻어 직장을 그만둔 후로는 시를 쓰고 신문에 바둑 관전평을 써서 생계를 꾸렸다. '요석자(樂石子)'라는 이름으로 바둑 관전평을 썼는데 바둑계에서는 그를 '박국수(朴國手)'라고 불렀다. 병을 앓고 난 후, 가난한 시인은 새봄을 맞는 소회를 썼다. "눈여겨 볼 것이로다, 촉트는 풀잎,/ 가려운 흙살이 터지면서/ 약간은 아픈 기(氣)도 있으면서/ 아, 그러면서 기쁘면서…/ 모든 살아 있는 것이/ 형(兄)뻘로 보이는 넉넉함이로다."('병후(病後)에') 그러니 우리네 삶이 '햇볕 반(半) 그늘 반(半)'이라 하더라도 오늘 당신은 글썽임보다 반짝이는 쪽을, 촉트는 생동(生動)을 보아라.      [애송시 100편 - 제 61편] 노동의 새벽 - 박노해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아   이러다간 오래 못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가지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가도   끝내 못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쳐진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 일러스트=권신아 '박노해 노동의 새벽 20주년 헌정음반'(2004)을 들으며 시집 '노동의 새벽'(1984)을 읽는다. 장사익, 윤도현 밴드, NEXT 등이 '노동의 새벽' 시편들에 곡을 붙여 노래한 앨범이다. '노동의 새벽'은 어두운 새벽빛의 표지다. "노동형제들에게 조촐한 술 한 상으로 바칩니다"라는 시인의 헌사로 시작하고 있다. '노동해방'을 줄여 필명으로 삼은 '얼굴 없는 노동자 시인' 박노해(50)의 시에, 독설로 민중문학론을 설파했던 고(故) 채광석의 기획 및 해설과, 민중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고(故) 오윤의 판화가 어우러져 사회과학 출판사 풀빛에서 출간된 시집이다. '노동'과 '해방'과 '문학'의 접점에서 생산되고 소비되었던 이 시집은 1980년대를 대표하는 한 상징이다. 금서(禁書)로 노동문학의 전범이 되었고, 판매량이 100만부로 추정되고 있으며, 지난 20년간 우리 사회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친 책 중 한 권이 되었다.   이 시는 '시대의 새벽을 부른' 박노해의 명실상부한 대표시다. 조출(조기출근)-야근(야간잔업)의 노동현실에서 야근현장은 졸음과 사투를 해야 하는 전쟁터다. "드르륵 득득/ 미싱을 타고, 꿈결 같은 미싱을 타고/ 두 알의 타이밍으로 철야를 버티는/ 시다의 언 손"('시다의 꿈')으로, 조는 순간 "기계 사이에 끼어 아직 팔딱거리는 손을/ 기름먹은 장갑 속에서 꺼내"('손 무덤')야 하는 무참한 사고 없이 무사히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이면 속이 빈 '쓰린 가슴'에 '차거운 소주'를 부을 수밖에. '어쩔 수 없는' 분노와 슬픔 때문에 붓고, '기어코'의 깡다구와 오기의 힘으로 붓는다. 고통과 절망을 위무하기 위해 붓고, 연대와 희망을 고무하기 위해 붓는다. 차가운 소주가 뜨거운 소주로 변하는 '노동자의 햇새벽'에, 식히기 위해 붓고 태우기 위해 붓는다.   그는 열다섯에 상경해 야간 상고를 졸업하고 섬유·화학·건설·금속·운수 노동을 하며 노동운동과 노동문학에 투신했다. '사노맹(남한 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으로 체포되어 '반국가단체 수괴'로 무기징역이 선고되자 "나는 노동자이자 시인이며 혁명가입니다"라는 최후진술로 스스로를 변호했다. 지금은 세계의 빈곤 지역과 분쟁 지역을 돌며 생명과 평화와 나눔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수감 중에 썼다는 시 '그 해 겨울나무'가 떠오른다. "그해 겨울,/ 나의 시작은 나의 패배였다"로 시작해 "그해 겨울,/ 나의 패배는 참된 시작이었다"로 끝을 맺는다.      [애송시 100편 - 제 62편] 눈물 - 김현승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生命)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全體)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들이라 하올제,     나의 가장 나아중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 일러스트=잠산 이 시는 1957년에 펴낸 김현승(1913~1975)의 첫 시집 '김현승시초'에 실려 있다. 시집의 장정을 서정주 시인이 맡았다고 되어 있고, 가격은 육백환이라 적혀 있다. 시인은 "하나에서 열까지 전부를 주선하여 준 서정주 시백의 우의에 깊이 감사를 드린다"고 자서에 썼다. 서정주 시인은 김현승 시인에 대해 "사람 사이의 정(情)에 철저했던 그는 정의감을 큰 것이건 작은 것이건 고수하는 데서도 철저했던 것인데, 이것은 그의 고독(孤獨)의 원인일 것이다"라고 평가해 친근한 사이임을 자랑했다.   어린 자식을 잃은 참혹한 슬픔을 노래한 시들은 많다. 김광균의 시 '은수저'가 그렇고, 정지용의 시 '유리창'이 그렇다. 김광균은 "저녁 밥상에 애기가 없다./ 애기가 앉던 밥상에 한 쌍의 은수저/ 은수저 끝에 눈물이 고인다"라고 썼고, 정지용은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라고 썼다.   아들을 잃고 난 후 창작한 것으로 알려진 시 '눈물'은 독실한 기독교 신앙에 의지해 그 슬픔을 넘어선다. '들이라 하올제'의 대상이나 '당신'은 그가 신앙한 절대자였다. 그는 눈물이야말로 한 점 생명의 씨앗과도 같고, 더러움이 없으며, 인간의 마음이 가장 마지막 순간까지 순금처럼 지니고 살아야 할 것으로 보았다.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웃음'보다는 영혼을 정결하게 하는 '눈물'을 귀하게 보았다. 눈물의 참회 이후 인간이 지니게 될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옹호했다. 이 시가 기독교적 신앙시의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그가 정작 염원한 것은 더 심오한 가치였다. 그는 스스로 밝히길 "나는 또한 신앙에 순응하기만 하는 시인은 아니다"라며 "떳떳하고 참되고 올바른 인간정신을 나의 시에 스며들게 하는 데 더 큰 가치를 느낀다"고 했다.   눈물이 너무 흔해서 아무래도 천국엘 못 갈 것 같다고 한 김현승 시인의 자화상은 어떠했을까. "내 목이 가늘어 회의에 기울기 좋고", "연애엔 아주 실망(失望)이고" "눈이 커서 눈이 서러워,/ 모질고 싸특하진 않으나,/ 신앙과 이웃들에 자못 길들기 어려운 나"('자화상')라고 써 본인의 내·외형적인 기질의 근사치를 내놓았다.   현대시 100년의 역사에서 김현승 시인처럼 고독과 슬픔을 지독하게 노래한 시인도 드물다. '싸늘한 증류수의 시대'를 살다간 그에게 고독과 슬픔과 뜨거운 눈물은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것이었다. "슬픔은 나를/ 목욕시켜준다,/ 나를 다시 한 번 깨끗게 하여준다"며 "슬픔 안에 있으면/ 나는 바르다!"고 썼을 정도로. 숭전대학교(현 숭실대학교) 채플 시간에 기도 중 쓰러진 뒤 병석에서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눈물의 옹호자였던 시인은 영혼의 옷마저 벗고 우리 곁을 떠났다.      [애송시 100편 - 제 63편] 그리스도 폴의 강(江) 1 - 구상     아침 강에   안개가   자욱 끼어 있다.   피안(彼岸)을 저어 가듯   태백(太白)의 허공속을   나룻배가 간다.   기슭, 백양목(白楊木) 가지에   까치가 한 마리   요란을 떨며 날은다.   물밑의 모래가   여인네의 속살처럼   맑아 온다.   잔 고기떼들이   생래(生來)의 즐거움으로   노닌다.   황금(黃金)의 햇발이 부서지며   꿈결의 꽃밭을 이룬다.   나도 이 속에선   밥 먹는 짐승이 아니다.       ▲ 일러스트=권신아 구상(1919~2004) 시인은 강과 물을 유난히 사랑했던 시인이다. 당호를 관수재(觀水齋)라 하고 서재에 '관수세심(觀水洗心)'이라는 편액을 걸어놓고는, 그 글귀대로 여의도 윤중제방에 나아가 유유히 흘러가는 한강을 바라보며 마음을 씻어내곤 했다. 수(水)와 심(心)은 통하는 글자이기에 관수(觀水)와 세심(洗心)은 '마음을 바라보는' 일인 바, "마치 매일예배를 보듯/ 나는 오늘도 강에 나와 있"('겨울강 산조(散調)')곤 했던 것이리라.   무릇 물은 맑다. 흐르면서 넓어지고, 끊이지 않고, 거슬러 오르지도 않는다. 무엇이든 그 밑바닥으로 흘러들고, 다른 무엇에 스며들었을 때에는 이미 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물이었다./ 맑은 물이었다./ 맑은 물이 하염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흘러가면서 항상 제자리에 있었다./ 제자리에 있으면서/ 순간마다 새로웠다.// 새로우면서 과거와/ 이어져 있었다."('그리스도 폴의 강 11'). 강에서 사람을 업어 건네는 수행을 통해 예수 발현(發顯)을 체험했던 성자 '그리스도 폴'의 강처럼, 시인에게 강은 건너가야 하는 삶의 터였으며 구도의 방편이자 사랑의 궁극이었을 것이다.   흐르는 강물처럼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이기에, 오늘이 바로 영원이고 오늘 하루가 신비의 샘이다. 오늘 시방 그 영원을 살고 있기에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하고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하는('오늘') 것이리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꽃자리')인 것이리라. 그러니 내가 앉아 있는 지금-여기의 꽃자리가 '반갑고 고맙고 기쁠' 수밖에. 그는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파랑(波浪) 많은 삶을 살았지만 그의 시편들은 고요한 강물처럼 조용하고 편안하다. 진솔하고 정갈하다. 그의 삶도 시와 다르지 않았다.   이 시는 아침 강의 신비와 신성을 노래하고 있다. 자욱한 아침 안개는 물과 하늘, 여기와 저기, 차안과 피안의 경계를 지운 채 세계를 하나의 '허공'으로 만들고 있다. 그 허공 속을 저어 가는 나룻배는 이미 비승비속(非僧非俗)이다. 구불구불 휜 흰 백양목 가지에 앉은 검은 까치 한 마리, 여인네 속살 같은 물밑의 모래, 생래의 즐거움으로 노니는 잔 고기떼, 동터오는 황금의 햇발은 인간이 침범하지 않는 태고(太古)적 아침 강의 이미지들이다. 이런 강을 마음에 품고 하루의 아침을 시작한다면, 매일 매일의 밥벌이 터에서도 '밥 먹는 짐승'으로 전락하지 않을 것 같다.       [애송시 100편 - 제 64편] 섬진강1 - 김용택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 일러스트=잠산 김용택(60) 시인은 섬진강의 시인이다. 전북 임실군 덕치면 진메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전북 임실군 덕치면 덕치초등학교 선생님이다. 그는 하루도 섬진강을 보지 않는 날이 없이 섬진강과 함께 살아왔다.   그를 80년대 대표적 농촌시인으로 우뚝 서게 한 섬진강 연작시는 섬진강변의 새와 풀꽃과 흙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가득 담고 있다. 그에게 섬진강이라는 공간은 "치마폭에 쌓이는 눈물을/ 강물에 가져다 버리"('섬진강 2')는 누이가 살던 곳이요, "강 건너 산밭에 하루 내내 스무 번도 더 거름을 져 나르"면서 "해 저문 강 길을 홀로 어둑어둑 돌아오시는 어머니"('섬진강 9')가 살아온 곳이요, "누구는 이라자라 쟁기질 잘하고/ 소 잘 다루고/ 누구는 선일 잘하고/ 모 잘 심고 써레질 잘하고"('섬진강 13') 그리하여 다 사람 구실을 하고 인심에 변동이 없는 곳이다.   이 시는 섬진강 연작시의 말머리 시이다. 생명들의 이마에 꽃등을 달아주는 생명의 젖줄 섬진강을 노래했다. 지도에도 없지만 그네들만은 서로 아끼고 챙겨가며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사는 곳, 일어서서 껄껄 웃는 지리산과 훤한 이마 끄덕이는 무등산을 부모처럼 이웃처럼 모시고 사는 곳, 그런 큰 산들의 역사와 함께 살아온 까닭에 지금껏 마른 적 없는 도도한 흐름이 있는 곳, 크고 굳세고 건강한 살림 공동체…….   섬진강 연작시에는 시골 사람들의 투박한 입담이 들꽃처럼 곳곳에 피어 있다. '너무 그리 말더라고' 등의 전라도 방언과 '저런 오사럴 놈들' 같은 상말을 구사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툭 터놓고 말하는 그의 시는 맑고 정직하다. "나는 내 이웃들의 농사에/ 내 손이 희어서 부끄러웠고/ 뙤약볕 아래 그을린 농사군들의/ 억울한 일생이/ 보리꺼시락처럼 목에 걸려/ 때로 못밥이 넘어가지 않아/ 못 드는 술잔을 들곤 했다"('길에서')는 고해성사와도 같은 자기고백을 보라. 그럼으로써 "우리 어매 날 낳아/ 가난한 일 속에 날 기른/ 헐벗은 젖가슴 같은 산천"('섬진강 27')을 다 노래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다. 그럼으로써 그는 "아직도 두 눈 시퍼렇게 부릅뜨고/ 땅을 파는/ 농군"('마당은 비뚤어졌어도 장구는 바로 치자')의 편에 섰다. 살 아프고 맘 아픈 그들의 편에 서서 환장할 것 같은, 기가 차고 어안이 벙벙한 농촌의 현실을 다 발언했다.   그의 시에서는 포슬포슬한 흙냄새가 난다. 그의 시를 통해 은어 떼가 헤엄치는 푸른 강과 넓디넓은 평야를 본다. 가슴이 넓어지고 따뜻하다.      [애송시 100편 - 제 65편] 생명의 서(書) - 유치환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 일러스트=권신아 유치환(1908~1967) 시인의 작품 가운데 애송시 후보를 꼽으라면,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는 시 '행복'을 떠올릴 독자도 있겠다.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라는 구절은 우리에게 친숙하다. 그는 편지의 고수(高手)였다. 일본 유학시절, 주일학교에서 만난 소녀에게 매일같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후일 그 소녀와의 결혼식 때 들러리를 섰던 화동(花童)이 먼 훗날 '꽃'의 시인으로 유명해진 김춘수였다. 시조 시인 이영도에게 보냈던 편지들은 책으로 묶이기도 했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나,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더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드메 꽃같이 숨었느냐"('그리움')와 같은 절절한 연시들은 바로 사랑의 편지에서 비롯되었으리라.   그러나 이런 '사랑의 시인'과는 사뭇 다른, '의지의 시인' '허무의 시인'의 면모가 유치환의 진면목에 더 가깝다. 형이상학적인 역설을 근간으로 하는 '생명의 서'는 유치환 시 정신의 정수를 보여준다. 생명이 부대끼는 병든 상태에서 무생명의 공간, 바로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을 찾아간다는 것 자체가 역설이다. 사멸·영겁·허적 등의 관념적 시어가 사막의 무생명성을 강조한다. 또한 열사의 끝 그 '영겁의 허적' 속에 '호올로' 맞는 고독이 열렬하다는 것, 생명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회한 없는 백골'이 될 때까지 배우겠다는 것에서도 생명에의 역설은 두드러진다. 모든 생명의 본연은 무(無)다. 생명의 시작은 죽음의 끝과 이어져 있다. 그러기에 사멸의 땅 사막에서 근원적 생명을 배우려는 것이리라.   대낮의 태양이 이글거리고 영겁의 시간이 층층이 새겨진 사막의 적막, 그 열렬한 고독 한가운데서 영원한 생명에의 충동이 샘솟는 단독자(單獨者)가 있다. 물 한 줄기 찾을 수 없는 사멸의 사막 끝을 생명에의 의지를 등에 지고 낙타처럼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 그러기에 생명의 '서(書)'에는 생명이 충만한 삶의 서(序)와 서(誓)뿐만 아니라 경전의 의미까지도 담고 있다. 그의 시는 형이상학적 전통이 희박한 우리 현대시사에서, 드물게도 인간의 의지 혹은 정신적 높이의 한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를 '생명파 시인'이라 부르는 까닭이고 '사막' 하면 그의 시가 떠오르는 까닭이다.      [애송시 100편 - 제 65편] 의자 -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어른의 말씀을 받아 적기만 해도 시가 될 때가 많다. 주름살 사이에서 나온 말씀이기 때문이다. 짧고 두서없이 울퉁불퉁 불거져 나온 말이지만 마늘처럼 매운 맛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어머니가 무심코 던진 말씀으로부터 태어났다. 허리가 아픈 어머니는 앉아 쉴 곳이 눈에 밟혔을 것이다. 어디건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허리를 펴고 싶었을 것이다. 이 시가 심상찮은 것은 의자를 내놓을 데를 태연무심하게 열거하는 어머니의 품 큰 생각에 있다. 사람뿐만 아니라 꽃과 열매와 참외밭과 호박과 망자(亡者)에게도 의자를 내주어야 한다는 그 우주적인 마음 씀씀이에 있다. 공생과 배려에 기초한 이런 모성적 마음씨는 식구를 다 거둬가며 밥을 먹여온 삶의 연륜에서 생겨난 것이리라. (우리의 어머니가 아니라면 누가 인생을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것이라고 먹줄을 대듯 명쾌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이정록(44) 시인의 시에는 모자(母子)가 자주 등장한다. 시 '꽃벼슬'에서는 한식날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를 모자가 찾아간다. 아들은 무덤에 난 쥐구멍에다 꽃다발을 꽂아드린다. "꽃밥 한 그릇 바치는 것이다". 어머니는 쥐구멍에 술잔을 따르며 "새끼들이 술 갖고 올 줄 알고/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있구나"라고 익살맞게 말씀하신다. 아들이 "무덤 안에서 뭔 소리 들려요"라고 너스레를 떨자 어머니는 농(弄)으로 "그랴 니 불알 많이 컸다고 그런다"라시며 "아예 술병을 쥐구멍에 박아놓는다". (모자 사이에 오가는 이 능청능청한 대화여.)   이정록 시인의 시는 이처럼 곰살가운 살내가 수북하니 풍긴다. 그의 시를 읽으면 옷 벗고 대중목욕탕에 함께 들어앉아 있는 기분이 든다. "사랑은 울컥이란 짐승의 둥우리"라고 말하는 그는 안간힘을 쓰며 사는, 몸살 앓는 사람들의 머리맡으로 가 슬그머니 앉는다. 식은땀을 흘리는 자식의 머리맡에서 차가운 물수건을 들고 꼬박 밤을 새던 어머니처럼.   그는 시와 삶의 거리를 18.44미터라고 말한다. (18.44미터는 투수판에서 홈 플레이트까지의 거리이다.) 18.44미터가 곧 "너와 나, 사랑과 이별, 탄생과 죽음의 거리"라고 말한다. 그만큼 그의 시는 삶을 정면으로 팽팽하게 응시한다. 삶에 근거해 삶의 현장에서 그의 시는 발발한다.   "내 꿈 하나는 방방곡곡 문 닫은 방앗간을 헐값에 사들여서 술집을 내는 것"('좋은 술집')이라고 말하는 시인. 가난하고 쓸쓸한 사람들에게 공짜 술도 나눠주고 봉지쌀도 나눠주고 싶다는 시인. 그는 소년교도소에 가서 한문을 가르치기도 하는 천안 중앙고등학교 교사이다.     [애송시 100편 - 제 67편] 칼로 사과를 먹다 - 황인숙       사과 껍질의 붉은 끈이   구불구불 길어진다.   사과즙이 손끝에서   손목으로 흘러내린다.   향긋한 사과 내음이 기어든다.   나는 깎은 사과를   접시 위에서 조각낸 다음   무심히 칼끝으로   한 조각 찍어 올려 입에 넣는다.   "그러지 마. 칼로 음식을 먹으면   가슴 아픈 일을 당한대."   언니는 말했었다.   세상에는   칼로 무엇을 먹이는   사람 또한 있겠지.   (그 또한 가슴이 아프겠지)   칼로 사과를 먹으면서   언니의 말이 떠오르고   내가 칼로 무엇을 먹인 사람들이 떠오르고   아아, 그때 나,   왜 그랬을까……   나는 계속   칼로 사과를 찍어 먹는다.   젊다는 건,   아직 가슴 아플   많은 일이 남아 있다는 건데.   그걸 아직   두려워한다는 건데.         황인숙 시인은 좀체 변하지 않는 사람이다. 사는 방식도, 취향도, 생각도, 표정도, 말투도, 심지어 헤어스타일까지도. 황 시인의 절친한 후배 장석남 시인은 사석에서 이렇게 얘기한 적 있다.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이제 30년이 지나가는데도 정말 안 변하는 사람이 황인숙 선배라고, 그쯤이면 도(道)의 경지라고. 새들은 변하지 않는다, 늙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는 '새'과다.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는' 새처럼, 그는 명실상부한 '프리랜서'로 30여 년을 자유롭게 살고 있다. 글을 쓰며(맛깔스런 그의 산문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 세든 집에서 혼자 산다. 책과 음악과 식도락과 고양이(들)와 그의 단짝 벗들과 더불어 산다. "마감 닥친 쪽글을 쓰느라 낑낑거리며/ 잡문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부르짖는/ 가난하고 게으른 시인이/ 그 동네에도 살고 있을 것이다"('파두―비바, 알파마!')   타인에게 칼을 건넬 때는 반드시 칼등을 잡고 칼날이 자신에게 향하도록 건네는 것이 예의다. 이사 갈 때 칼을 버리고 가면 그 집과의 인연을 끊고 가는 것이고, 부엌에 칼을 아무렇게나 놓으면 가족이 다치거나 돈이 모이지 않는다고 한다. 칼(날)이 날카롭기 때문에 이런 금기들이 생겨났을 것이다. '칼로 음식을 먹으면 가슴 아픈 일을 당한다'는 금기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도 칼로 사과를 먹다가 언니에게 이 금기의 말을 들은 적이 있건만, 지금도 여전히 시인은 사과껍질을 깎던 칼로 사과를 찍어 먹는다. 칼로 사과를 먹으며 누군가에게 칼로 사과를 먹였던 일을 떠올린다.   이 시의 맛을 깊게 하는 건 마지막 연이다. "젊다는 건, 아직 가슴 아플, 많은 일이 남아 있다는 건데. 그걸 아직, 두려워한다는 건데." 오래 되짚어 보게 하는 구절이다. 젊지 않은데도, 여전히 가슴 아플, 많은 일이 줄지 않는 걸 보면 칼로 사과를 너무 많이 먹었나 보다. 칼로 주는 사과를 너무 많이 받아 먹었나 보다. 칼로 먹고 칼로 먹였던 게 비단 사과뿐이었겠나 싶다. 뭔가를 준다는 게 이렇게 위태로울 때가 있다. 그것이 자기에게든 타인에게든, 그것이 사랑이든 배려든. 젊음이 아름다운 건, 가슴 아플, 많은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않는 젊음은 그러기에 두려운 대상이다. 황인숙 시인은 여전히 젊고 경쾌하다. 계속 칼로 사과를 콕콕 찍어먹을 수 있을 만큼! 부리로 사과를 콕콕 쪼아먹는 새처럼, 아니 그의 시처럼.     [애송시 100편 - 제 68편] 이탈한 자가 문득 - 김중식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 일러스트=잠산 이 시를 읽고 있으면 미국의 대표적인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이 생각난다. 노란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으니, 나는 풀이 더 많고 사람이 다닌 발자취가 적은 외로운 길을 선택해서 걸어갔노라고 쓴 시. 그리고 그런 선택으로 인하여 나에게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쓴 시.   이 아침에도 우리의 목전(目前)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놓여 있다. 낯익고 평탄한 길이 있고, 그렇지 않은 길이 있다. 소의 잔등처럼 유순하고 완만하고 반듯해진 길이 있고, 나아갈 틈이 없는 가시넝쿨을 헤치듯 누군가 처음으로 개시(開示)해야 하는 길도 있다. 그러나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인 우리는 각지고 불규칙한 길보단 대열의 후미에서 앞의 궤적을 뒤따라가고 싶어진다. 은근슬쩍 길들여졌으므로, 이 순응을 등지고 뒤집는 일은 엄두를 못 낼 정도로 어렵다.   이 시는 우리 마음에 악착스레 붙어사는 순응주의를 되돌아보게 한다. 보통 사람들의 비겁과 안일에 대해 울화통을 터뜨린다. 앞선 행로에 기생하여 '꼬리를 물고 뱅뱅' 돌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야멸치게 묻는다. 좌충우돌이면 어떠냐고, 뒤죽박죽이면 어떠냐고 묻는다. 풍파(風波), 그것이 우리들 삶의 표정이며,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므로 안주(安住)하려 하거나 상처받지 않으려 하지 말라고 호통을 친다. 그러나, 이 야유는 좀 불편하다. "병 대신 병적인 것, 아픔 대신 아픔적인 것, 애인 대신 애인적인 것에서 우리는 위안받는다"('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그래서 만만히 볼 수 없는 이런 맹랑한 발언은 우리들의 속을 긁어 놓는다.   이 시가 실려 있는 김중식(41) 시인의 첫 시집 '황금빛 모서리'의 시편들은 길들여진 우리의 일상과 사고를 전복하려는 노력을 줄기차게 보여준다. 그의 시에는 우회(迂廻)가 없다. 그는 스스로 자초하는 존재들의 억센 자유의지를 격려한다. 시집 뒤표지 글은 이렇게 썼다. "자기 삶을 방목(放牧)시킨 그를 나는 존경한다. 자기 삶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목된 삶은 야생마처럼 갈기를 세우고 주인의 울타리를 넘어서려 한다. 그 고투의 흔적이 역력한 그의 연보를 읽을 때 나는 열등감을 느낀다."   사는 일이 지치고 가야 할 길이 막막할 때 스스로를 이렇게 불러보자. "주인공아!" 생념(生念)이라 했으니 엄두를 내보자. 박약한 의지를 다시 일으켜 세워보자. 당신은 당신의 삶의 후견인(後見人). 아무도 간 적 없는 길을 당신이 앞서가고 앞서간 당신을 당신이 뒤따라가는 것. 야단법석인 이 삶을 살아 가야 할 주인공아     [애송시 100편 - 제 69편] 농무 - 신경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주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 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 일러스트=권신아 '우리'라는 말은 참 오묘하다. '우리'라는 말에는 내가 들어있고 네가 들어있다. '지금-여기'라는 울 안에는 '너' 하나를 비롯해 무한한 '너'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다. 그 '안'에는 널따란 품 같은 수평적 친밀함은 있지만 수직적 높낮이는 없고, '한솥밥'이라는 공모와 공유와 공감의 연대가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일까.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 뜨끈뜨끈한 끈기가 우리의 어깨를 감싸곤 한다. 신경림(72) 시인은 '우리'라는 시어를 우리의 시와 현실 속에 말뚝처럼 세워놓았다.   긴급조치가 발령되기 시작했던 1974년,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된 시집 ≪농무≫는 '우리' 현실의 사실주의적 묘사 하나만으로도 크나큰 시적 발견이었다. 이를테면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이라며 민중의 삶과 민중들의 연대감을 살갑게 담아내곤 했다. 혹은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이라며 농민들의 애환과 정서를 일체의 수식 없이 단숨에 끌어올리곤 했다. 그리하여 이 시집은 '하나의 민중적 경사'로, 70년대 '민중시의 물꼬를 튼' 시집으로 평가되었다.   농무는 두렛일을 하며 두레패들과 함께 놀아야 하는 농악과 춤이다. 그러니 본래의 무대는 논두렁이나 밭두렁이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 시에서 농무는 운동장의 가설무대에서 분을 바르고 구경꾼들을 위한 볼거리로 전락해 있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비어가고 쇠락해가는 농촌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술과 노름과 빚과 주정과 싸움과 울음만 늘어나는 농촌의 현실이 답답하고 고달프고 원통해서 농사꾼인 '우리'는 소주를 마신다. 술잔이 돌고 술기운 취해서 걸립패의 후예인 '우리'는 보름달 아래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에 나선다.   소시장을 거쳐 도살장을 돌며, 임꺽정과 그의 배신자 서림이처럼 한패가 되어 놀아보지만, 쪼무래기 처녀애들이나 꼬일 뿐이다. 돌고 돌면서 점점 더해가는 '우리'의 신명에는 술기운과 분노와 원통이 묻어나고, 놀고 놀면서 점점 가벼워진 '우리'의 고갯짓에는 아직 흥과 신바람이 남아있다. 장삼이사(張三李四) 필부필부(匹夫匹婦)인 '우리'의 고단한 삶을 신명 난 가락에 실어, 치고 빠지는 슬픔과 해학의 정조가 일품이다.     [애송시 100편 - 제 70편] 방심(放心) - 손택수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뒤 문을 열어 놓고 있다가, 앞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지나가버렸다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버린 순간,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 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       '마음을 놓다'라는 말, 참 오랜만이다. 마음을 풀어 놓아 버린 일 얼마나 오래되었나. 마음 졸이며 염려하고 살아왔을 뿐. 시인은 대청마루에 큰 대(大)자로 누워 있었던 모양이다. 최대한 마음과 몸을 느슨하게 하고서. 바다처럼 편편하고 넓게 퍼져서. 그런데, 스윽, 칼날이 지나가듯 제비가 공중을 한 층 횡으로 서늘하게 자르면서 지나간 모양이다. 손가락을 퉁기는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에 벌어진 기습처럼.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보다 더 민첩한 한 줄기 바람으로.   집과 나의 중심부를 뚫고 지나갔으니 급소(명자리)를 맞은 듯 어이없고 어리둥절해서 말을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체험은 얼마나 시원한 것인가. 체증(滯症)이 가신 듯했을 것이다. 마음을 꼭 붙들어 매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터. 마음을 사방으로 허술하게 경계 없이 풀어놓는 것으로서 우리는 마음의 열림을 얻기도 한다. 그것이 무방비의 미덕이다. 좀 게으르게 혹은 별 준비 없이 멍청하게 있다가 한번쯤 당해보기도 해보라. 그런 당함에는 오히려 소득이 있다. 마음의 앞뒤 문을 다 열어놓고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을 볼 수 있었겠는가. 마음을 조급하게 각박하게 쓰느니 차라리 이처럼 마음에 장애를 아예 만들지 않음이 오히려 '심심(深心)'이요, '정(定)'에 가깝다.   손택수(38) 시인은 긍정심이 아주 많은 시인이다. 다른 존재들의 '빛나는 통증'을 그의 시는 받아 안는다. 그의 시는 그가 어렸을 때 그곳서 자랐다는 전남 담양 강쟁리 마을을 배경으로 태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곳 마을 사람들의 천문(天文)적인 상상력은 그의 시에 들어와 크게 빛을 발하면서 그만의 새로운 서정을 만들어낸다. "별이 달을 뽀짝 따라가는 걸 보면은 내일 눈이 올랑갑다"('가새각시 이야기')라고 말씀하시는 할아버지와 매달 스무 여드렛날은 "달과 토성이 서로 정반대의 위치에 서서/ 흙들이 마구 부풀어오르는 날"('달과 토성의 파종법')이자 "땅심이 제일 좋은 날"이라며 밭에 씨를 뿌리러 가던 할머니의 상통천문(上通天文)이 자주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콧구멍에는 흰 쥐와 검은 쥐 두 마리가 혼쥐로 살고 있다는 믿음, 임신한 몸으로 시큼하고 골코롬한 홍어를 먹으면 태어날 아이의 살갗이 홍어처럼 붉어진다는 믿음 등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한 마을에서 자연 발효된 이런 금기사항은 우리 시에서 어느덧 희귀해진 것이어서 각별하고 값지다.   그는 스무 살 무렵 안마시술소에서 구두닦이를 할 때 안마시술소 맹인들에게 시를 읽어주면서 시를 처음 알게 되었다고 했다. 이시영 시인은 그를 "송곳니로 삶을 꽉 물고 놓지 않는, '고향의 기억'을 잊지 않는 오랜만의 생동하는 민중서사적 시인"이라고 평가했다. 나는 그의 시를 읽을 때마다 '역린(逆鱗)'을 생각한다. "물고기 비늘 중엔 거꾸로 박힌 비늘이 하나씩은 꼭 있다고"('거꾸로 박힌 비늘 하나') 하는데, "유영의 반대쪽을 향하여 날을 세우는 비늘"인 역린을 생각한다. 그의 시에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생(生)을 펄떡이게 하는, '뽈끈 들어올려주는' 힘이 있다. 시에 있어서 가장 든든한 원군(援軍)은 역시 '삶 그 자체'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해준다.     [애송시 100편 - 제 71편] 진달래꽃 - 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 일러스트=권신아 소월(1902~1934)을 생각하면 노랫가락이라는 말이 먼저 떠오른다. 그의 시가 노래처럼 가락을 타고, 실제로 그가 노랫가락을 즐겨 듣고 그 노랫가락을 시로 썼고, 무엇보다 그의 시가 많은 노래로 불렸기 때문일 것이다. 동요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엄마야 누나야〉)에서 시작해 정미조의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개여울〉), 홍민의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부모〉), 장은숙의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못잊어〉), 건아들의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활주로의 "가고 오지 못한다는 말을"(〈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마야의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진달래꽃〉)에 이르기까지. 가히 '국민시인'이라 칭할 만하다.   그런 소월을 생각하면 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시가 〈진달래꽃〉이다. 소월은 외가인 평북 구성에서 태어나 그 가까운 정주에서 자랐으며 그 가까운 곽산에서 31세의 나이에 아편 과다복용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정주 가까운 영변에는 약산이 있고, 약산은 진달래꽃으로 유명하다. 그가 보았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은 약산의 진달래꽃이었을 것이다. 그는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꽃'으로 보통명사화시키고 있다.   '가실 때에는'이라는 미래가정형에 주목해볼 때, 이 시는 사랑의 절정에서 이별을 염려하는 시로 읽힌다. 사랑이 깊을 때 사랑의 끝인 이별을 생각해보는 건 인지상정의 일. 백이면 백, 헤어질 때 '말없이 고이' 보내주겠다고 한다. 죽어도 눈물만은 보이지 않겠다고 한다. 아무튼 그땐 그렇다! 그 사랑을 아름답게 기억해달라는 소망이야말로 이별의 로망인 바, 떠나는 길에 아름다운 진달래꽃을 '아름 따다' 뿌리려는 이유일 것이다. 특히 '아름'은 두 팔로 안았던 사랑의 충만함을 환기시켜 주는 감각적 시어다.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떠나는 건 아무래도 여자에게 더 어울린다. '말없이 보내드리우리다'나 '죽어도 아니 눈물을 보이겠다'는 결기야말로 남자다운 이별의 태도일 것이다.   나 보기가 역겨워 떠나실 그때, 눈물을 참기란 죽는 일만큼이나 힘겨운 일이지만 그래도 당신을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겠고, 당신이 '사뿐히 즈려 밟고' 떠날 수 있도록 눈물만은 보이지 않겠다는 것이 이 시의 전모다. 얼마나 애틋한 사랑시인가. 이 사랑시는 영혼을 다해 죽음 너머를 향해 부르는 절절한 이별시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초혼·招魂〉)에 의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리라. 이렇게 노래하는 시인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애송시 100편 - 제 72편] 마음의 수수밭 - 천양희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       머위잎 몇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       저녁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   개밥바라기별이   내 눈보다 먼저 땅을 들여다본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쪽도 볼 수 없다   논둑길 너머 길 끝에는 보리밭이 있고   보릿고개를 넘은 세월이 있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절골의   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   몇 번 머리를 흔들고 산 속의 산,   산 위의 산을 본다. 산은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   푸른 것들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   그래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   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 때마다 우짖는 내 속의 목탁새들   나를 깨운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산 옆구리를 끼고   절벽을 오르니, 천불산(千佛山)이   몸속에 들어와 앉는다.   내 맘속 수수밭이 환해진다.    - 천양희         ▲ 일러스트 잠삼 마음을 네모진 돌과 같이 하라는 말씀이 있다. 비가 떨어져도 깨지지 않고 바람이 불어도 움직이지 않는 네모진 돌. 그러나 우리네 마음이 어디 그러한가. 마음은 사나운 코끼리에 비유되고 번갯불에 비유되고 원숭이에 비유되니 그 분주함과 변화무쌍을 제어하기 어렵다. 시시각각 생기면 사라지니 붙잡으려야 붙잡을 수 없다. 마음에는 '차츰'과 '조용히'와 '차근차근'이 살지 않는다. 마음은 근심의 주머니여서 고통에 결박되므로 큰 병(病)의 뒤끝처럼 완쾌가 드물다.   이 시는 쉬지 않는 마음을 수수밭의 일렁임에 빗대었다. 시인의 고백에 따르면 이 시는 강원도 어느 마을에서 만난 수수밭이 시 창작의 모티프가 되었다고 한다. 시인은 "죽음을 각오하고 떠난 여행길에서 살아 돌아온 마음으로 쓴 시"라고 고백했다. 바람결에 서럽게 서걱대는 수수밭에 앉아 통곡을 했다고도 한다. 그런 일이 있은 지 8년 만에 이 절창의 시는 태어났다고 했다. 시인은 암처럼 깊어진 삶의 그림자를 끌고 보리밭과 수수밭과 계곡 초입에 있었을 절을 지나 산을 올랐을 것이다. 속 빈 고사목을 두들겨 쪼는 까막딱따구리도 도중에 만나면서. 절벽에 홀로 섰을 때 산 아래 저쪽에서 아직도 쪼그리고 앉아 수수밭처럼 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멀찍이서 보았을 것이다. 비로소 고통마저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고통과 안온과 증오와 자애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화엄의 생명세계를 보았을 것이다. 저속하고 용렬한 세상과의 불화가 사라졌을 것이다.   천양희(66) 시인은 1965년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올해로 시력 43년이 되는 그녀는 "고통에 함몰된 나를 시가 구원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럴까. 김승희 시인은 그녀의 시를 "고독 위에 새긴 존재의 찬란한 금속세공과도 같다"고 평했다. 아직도 원고지에 시를 쓰고, 시를 쓰기 전에는 꼭 손부터 깨끗이 씻는다는 시인.   "벌새는 1초에 90번이나/ 제 몸을 쳐서/ 공중에 부동자세로 서고"(〈벌새가 사는 법〉) 그녀는 혹독하게 그녀의 '몸을 쳐서' 시를 쓴다. 고통의 몸을 쳐서 쓴 시들이기에 그녀의 시편들은 존재들의 뒤편을 읽어낸다. 문득 생(生)의 뒤란으로 돌아가 만나게 되는 쓸쓸함과 욕됨과 근심의 얼굴을. 시 〈뒤편〉에서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라고 썼듯이.   시집 《너무 많은 입》에 실린 '시인의 말'은 그녀의 골똘한 시작(詩作)을 짐작하게 한다. "시 생각만 했다 시 생각만 하다가 세상에 시달릴 힘이 생겼다 생긴 힘이 있어 시 생각만 했다 그토록 믿어왔던 시 오늘은 그만 내 일생이 되었다, 살아봐야겠다."     [애송시 100편 - 제 73편] 반성 704 - 김영승     밍키가 아프다   네 마리 새끼가 하도 젖을 파먹어서 그런지   눈엔 눈물이 흐르고   까만 코가 푸석푸석 하얗게 말라붙어 있다   닭집에 가서 닭 내장을 얻어다   끓여도 주어보고   생선가게 아줌마한테 생선 대가리를 얻어다 끓여 줘 봐도   며칠째 잘 안 먹는다   부엌 바닥을 기어다니며   여기저기 똥을 싸 놓은 강아지들을 보면   낑낑낑 밍키를 보며 칭얼대는   네 마리 귀여운 강아지를 보면   나는 꼭 밍키의 남편 같다.  - 김 영 승           ▲ 일러스트 권신아 김영승(49)은 반성의 시인이다. 그는 술이나 잠에서 반쯤 깬 반성(半醒)의 시인이고 기존의 서정시로부터 반 옥타브쯤 들떠 읊조리는 반성(半聲)의 시인이다. 가난과 무능으로 일그러진 욕망의 고백을 일삼는 반성(反性)의 시인이고, 구도자적 치열함으로 당대와 스스로를 부정하는 형이상학적 반성(半聖)의 시인이다. 그는 이 모든 반성의 삶을 돌이켜 살피며 반성(反省)한다. 반성하는 기록자, 반성하는 반항인, 반성하는 백수(白手), 반성하는 주정꾼, 반성하는 폐인, 반성하는 시인이 바로 그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반성시는 취언(醉言)이고 포르노이고 일기이고 철학이고 종교이기도 하다.   '밍키'는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강아지 이름이다. "놀랍고 분(憤)해 죽겠다는 듯 밍키가 짖는다/ '저젓……영키야!'/ 하며 어머니가 소리치고 나서 웃는다// 영승이를 부르시려 한 건지/ 밍키를 부르시려 한 건지// 하긴 나를 밍승이라고 부르면 또 어떠랴"(〈반성 764〉), "우리 식구를 우연히 밖에서 만나면/ 서럽다// 어머니를 보면, 형을 보면/ 밍키를 보면/ 서럽다"(〈반성 673〉)에서처럼, 그는 스스로를 반성할 때 슬쩍 자신을 밍키에게 얹어놓곤 한다.   이 시에서도 병들고 구차한 밍키의 모습에 자신의 삶을 비춰보며, 스스로가 밍키의 남편 같다며 너스레를 떤다. 밍키도 아닌, 밍키의 남편 같다는 데서 날카롭고 쓸쓸한 유머는 더해진다. 밍키에 대한 사랑은, 설움과 누추함 속에 살아가는 스스로에 대한 동병상련일 것이다. 실은 아내도 없이 상처투성이로 뒹구는 백수의 외로움과 고독과 소외를 얘기하려는 것이리라. 그가 동병상련하는 것은 구차한 강아지, 밍키만이 아니다. 발로 눌러 끄는 선풍기(〈반성 743〉)나 똥통에 빠진 슬리퍼 한 짝(〈반성 827〉)이나 만신창이가 된 풍뎅이(〈반성 608〉)에게도 마찬가지다. "나는 늘 아름답습니다./ 자신있게 나는 늘 아름답습니다./ 그러기에 슬픈 사람일 뿐이지만/ 그렇지만 나는 갖다 버려도/ 주워갈 사람 없는 폐인입니다."(〈아름다운 폐인〉)라는 그의 자조와 위악과 오만은, 이렇게 '바닥'을 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리라.   그는 자신의 시를 "훔쳐보기만을 하는 변태성욕자처럼/ 자기자신과 세계에 대한 불연속적 보고서의 작성자로 전락한/ 사실무근한// 인간과 인간사와/ 그리고 '나'라고 하는 개체의 일들을/ 왜곡되게 기록한 것// 내가 인정할 수 있는 서정시"(〈반성·서(序)〉)라고 규정한 바 있다. 이렇게 반성의 끝을 향해 치달았던 그의 시는 개인과 젊음이 차압당한 폭력적이었던 80년대에 대한 저항이자, 그 회복을 위한 자존과 실존의 고해성사일 것이다. 우리 시사에서 드물게도 외설시비를 불러일으켰던 《반성》은 '아름다운 폐인'의 경지에서 '시인됨' 혹은 '시됨'의 가능성을 새롭게 모색한 시집이라 할 수 있다.     [애송시 100편 - 제 74편] 절벽 - 이 상         꽃이보이지않는다. 꽃이향기롭다.   향기가만개한다. 나는거기묘혈을판다.   묘혈도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묘혈속에나는들어앉는다.   나는눕는다. 또꽃이향기롭다. 꽃은보이지않는다.   향기가만개한다. 나는잊어버리고재차거기묘혈을판다.   묘혈은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묘혈로나는꽃을깜빡잊어버리고들어간다.   나는정말눕는다. 아아. 꽃이또향기롭다. 보이지않는꽃이―보이지도않는꽃이.         ▲ 일러스트=잠산 아마도 시인은 꽃이 핀 것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꽃잎이 둥글게 열리는 것과 꽃의 둘레를 달무리처럼 둥글게 감싸는 향기를 맡고 있었을 것이다. 시인은 그 둥근 공간에 들어가 자신의 몸을 눕힌다. 죽은 사람의 몸이 놓이게 되는 무덤의 구덩이 부분이 묘혈인데, 그처럼 오목하게 파인 곳에 자신의 몸을 눕힌다. 이 시는 시인의 다른 시에 비해 비교적 쉽게 읽히는 편이지만 문제적이기는 마찬가지다. 밝게 만개한 꽃과 비산하는 꽃 향기의 반대편에 차디찬 주검과 서늘한 묘혈을 배치하고 있다. 열린 공중과 유폐된 땅 속, 두 공간은 서로 차단되어 멀리 떨어져 있다. 시인은 이 이격된 거리를 가파르고 낙차가 큰 절벽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이 시에도 병이 든 육체를 바라보는 시인의 황폐한 자의식이 드러나고 있다.   이상(1910~1937·본명 김해경)은 실험적인 글쓰기를 보여준 시인이자 소설가이다. 기이한 발상과 국어 문법을 파기한 그의 작품들은 당시에도 지금에도 파격 그 자체이다. 절망적인 근대의 시공간을 살아가는 자아의 분열과 의식과잉을 그는 익히지 않고 날것 그대로 드러냈다. 해서 그의 작품들은 수많은 연구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독 불가능한 상태로 남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 〈오감도〉는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독자들의 거센 항의가 빗발쳐 연재 15회 만에 전격적으로 연재가 중단되었다. (독자들은 이상의 시에 대해 "개수작", "미친 놈의 잠꼬대" 등의 화포와도 같은 말들을 동원해 비난을 퍼부었다).   시인 이상에 대한 문단의 평가는 온도차가 뚜렷했다. 희대의 문제아였고, 모던 보이였고, 모더니스트였고, 천재작가였으며, "이상은 사람이 아니라 사건"(고은)이었고, "모국어의 훼손에나 기여한 시인"(유종호)이었으며, 그는 "잉크로 글을 쓰지 않고 스스로 제 혈관을 짜서 시대의 혈서를 썼다"(김기림).   그러나 이상은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는 미술에 솜씨가 있어 하융(河戎)이라는 이름으로 박태원의 신문연재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삽화를 직접 그렸다. 그의 시는 숫자와 도형의 사용, 공간 분할 등을 보여주는 바, 이것은 그가 한때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수로 일한 전력과 무관하지 않았다.     [애송시 100편 - 제 75편] 성북동 비둘기 - 김광섭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 일러스트 권신아 김광섭(1905~1977) 시인의 호는 이산(怡山), '기쁜 산'이다. 그는 시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창씨개명을 반대한 애국교육자, 광복 후 중앙문화협회를 창립한 우익 문단의 건설자, 이승만 대통령 공보비서관을 지낸 정치인, 언론사 편집국장을 지낸 언론인으로 현대사 100년을 정말 '산'처럼 살았다. 실제로도 그는 늘 산을 향해 있었다. "이상하게도 내가 사는 데서는/ 새벽녘이면 산들이/ 학처럼 날개를 쭉 펴고 날아와서는/ 종일토록 먹도 않고 말도 않고 엎뎄다가는/ 해질 무렵이면 기러기처럼 날아서/ 틀만 남겨 놓고 먼 산속으로 간다"(〈산〉), "목마른 아스팔트를 옆으로 빠져서/ 나는 계절이 풀리는 산으로 간다"(〈산바람처럼〉).   '남포 깐다' '남포 튼다'는 말이 있었다. 남포란 다이너마이트를 이르는 말이다. 이 개발 저 개발로 너도나도 산업화의 역군이었던 60~70년대 내내 대한민국 전역에 이 산 저 산을 깨는 남포 소리 울려 퍼졌었다. 산을 깎아 돌을 채취하고 도로를 만들고 빌딩을 올리곤 했다. 뻥 뻥 남포를 까면 산에 살던 뭇 짐승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고 강에 살던 뭇 물고기들은 기절을 하기도 했다. 뻥 뻥 남포 까는 소리에 밤 보따리를 싸들고 서울로, 서울로 몰려든 사람들이 산동네, 달동네로 몰리던 시절이었다. 이 시의 창작 배경에 대해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돌 깨는 소리가 채석장에서 울리면 놀라서 날아오르는 새들, 그러나 저것들이 우리에게 평화의 메시지를 전해 줄 것인가. 돌 깨는 산에서는 다이너마이트가 터지고 집들은 모두 시멘트로 지어서 마음 놓고 내릴 장소도 없는 저것들이란 데 생각이 머물렀어요." 고혈압으로 쓰러져 투병하던 중 성북동 집 마당에 앉아 하늘을 돌아나가는 비둘기떼를 보고 착상했다고 한다.   성북동 산과 산동네가 개발되면서 산비둘기는 둥지를 빼앗겼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인간들이 산을 깨는 것과 비둘기들 가슴에 금이 가는 것을 대비시키고 있다. 이제 산비둘기들은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그렇게 쫓긴 산비둘기들이 거리로, 광장으로, 고가 밑으로, 옥상으로, 창턱으로 흰 똥을 찍찍 내갈기며 뒤뚱뒤뚱 걸어다니고 있다. 산동네, 달동네 사람들도 그렇게 내쫓기곤 했다. 재개발과 산업화와 도시화와 문명화의 이면이었다. 유심초가 부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노래로 더 많은 사랑을 받았던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저녁에〉)라는 시를 읊조려 보는 아침이다.     [애송시 100편 - 제 76편] 조국(祖國) - 정 완 영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애인 사랑   손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 메이면 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맺힌 열두 줄은 구비 구비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이 학(鶴)처럼만 여위느냐. 1962년>         ▲ 일러스트 = 잠산7   정완영(89) 시인은 평생 한국의 정형시인 시조만을 위해 외길 인생을 살아왔다. 우리는 정완영 시인을 통해 "이 당대, 시조 분야의 숭고한 순교자적 상(像)"(박경용)을 만난다. 시조를 말할 때 가람 이병기와 노산(鷺山) 이은상을 먼저 말하고, 그다음에 초정(草汀) 김상옥, 이호우를 말하고, 그 뒤에 백수(白水) 정완영을 세워 말한다. "백랑도천(白浪滔天) 같은 분노도 산진수회처(山盡水廻處)의 석간수 같은 설움도 시조 3장에 다 담으셨다."(조오현)   박재삼 시인은 정완영 시인의 인간적인 면모를 숭앙해서 "조용하게 잘 참는 것이 있다"면서 "야단스럽지 않고 기다릴 줄 아는 성품이 그를 시조의 거목이게 했다"고 썼다.   이 시조는 196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정완영 시인의 초기 작품이다. 조국의 슬픈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절절하게 배어 있다. 시 〈만경평야에 와서>에서 "애흡다 열루(熱淚)의 땅 내 조국은 날 울리고"라고 썼을 때처럼. 조국을 한 채의 전통악기 가얏고(가야금)에 빗대면서 조국에 대한 큰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옛 시조의 행 배열을 살리면서 시종 장중한 어조로 감칠맛 나는 고유어를 사용했다. 청각에 시각을 한데 버무리는 감각적 이미지의 활용은 압권이다. 가얏고의 서러운 가락이 귀에 들리는 듯하고,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청사(靑史)를 보는 듯하고, 한 마리 학의 고고한 성품을 가슴으로 마주하는 것 같다.   정완영 시인의 시조는 천부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수사와 우주적인 상상력을 자랑한다. "내가 입김을 불어 유리창을 닦아내면/ 새 한 마리 날아가며 하늘을 닦아낸다/ 내일은 목련꽃 찾아와 구름 빛도 닦으리."(〈초봄〉)같은 시조를 보라. 무릎을 치며 저절로 감탄할밖에.   이뿐만 아니라 정완영 시인은 정겨운 동시조도 많이 써왔다. 〈분이네 살구나무〉는 대표적이다. "동네서 젤 작은 집/ 분이네 오막살이/ 동네서 젤 큰 나무/ 분이네 살구나무/ 밤사이 활짝 펴올라/ 대궐보다 덩그렇다."   "시조는 말로만 쓰는 시가 아니라 말과 말의 행간(行間)에 침묵을 더 많이 심어두는 시"라고 말하는 그는 요즘도 매일 간곡하게 시조를 창작한다. 원로 시조시인의 이 창창(滄滄)한 뜻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애송시 100편 - 제 77편] 국토서시(國土序詩) - 조 태 일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야윈 팔다리일망정 한껏 휘저어   슬픔도 기쁨도 한껏 가슴으로 맞대며 우리는   우리의 가락 속을 거닐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불 지필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보탤 일이다.   일렁이는 피와 다 닳아진 살결과   허연 뼈까지를 통째로 보탤 일이다.                                                                                                          ▲ 일러스트 권신아  육척 거구, 고집불통, 임전무퇴, 대의명분의 시인. '쑥대머리'를 부르며 '소주에 밥말아 먹던' 두주불사(斗酒不辭)의 시인. 국토와 식칼의 시인. 반골에 강골의 광주 시인. 의리와 정(情)의 시인. 조태일(1941~1999) 시인에게 붙여진 수식들이다. 그는 〈국토〉 연작시와 〈식칼론〉 연작시로 1970년대 우리시의 저항성에 일획을 더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에 대해 '몸도 크지만 마음이 더 큰 사람'이라고 입을 모은다. 스스로도 "이 조가야, 그 거창한 체구엔/ 노동을 하는 게 썩 어울리는데/ 시를 쓴다니 허허허 우습다, 조가야"(〈석탄·국토 15〉)라고 노래했다.   감옥에 갇힌 후배의 가솔들을 찾아 쌀과 연탄을 사주고, 언제나 제자들 밥부터 챙기는 격의 없는 스승이었다 한다. 술에 취한 야밤에 장독대에 올라가 혀 꼬부라진 소리로 독재자는 물러가라 물러가라 물러가라 삿대질 삼창을 일삼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어머니의 통장에 다섯 해나 더 용돈을 송금했다고 한다. 그의 대학 은사였던 조병화 시인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 먼저 간 제자를 추모하며 "조태일은 시인이다 착하고 정직하고 곧고 의리의 시인이다 어린이도 느끼는 시인이다"라는 글을 남겼다. 이념적 지향성은 서로 달랐으되, 스승은 젓갈 행상을 하던 홀어머니 밑에서 공부하는 제자의 형편을 알고 장학금을 받게 해주었고 제자는 두고두고 스승에게 극진했다는 미담도 잘 알려져 있다.   나라 국(國), 흙 토(土)! 국토는 우리 땅이다. 조태일 시인이 노래하듯, 우리의 하늘 밑이고 삶이고, 우리의 가락이고, 우리의 혼이고 숨결이다. 그뿐 아니다. 피와 살과 뼈에 이르는 우리의 온몸 그 자체이다. 그게 있어야 나라도 있고 국가도 있고 민족도 있다. 이 마땅하고 당연한 우리의 땅을 잃어버렸을 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상화),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더면"(김소월),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음으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한용운)라고 노래했다. 70년대 조태일에게 국토는 특히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혼'으로 상징되는 소외된 민중의 다른 이름이다. 이 땅의 주인인 그들을 위해 '일렁이는 피', '다 닳아진 살결', '허연 뼈'까지 보태리라는 시인의 뜨거운 의지가 돌올하다.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라고 국토에 대한 숙명적 사랑을 노래했던 시인은, 간암으로 99년 9월 7일, 58세의 나이로 "풀씨가 날아다니다 멈추는 그곳/ 그곳이 나의 고향,/ 그곳에 묻"(〈풀씨〉)혔다. '그곳'이 바로 우리의 국토이고, 오매불망 국토를 노래했던 시인의 유택이 되었다. 그는 28세에 "내가 죽는 날은 99년 9월 9일 이전"(〈간추린 일기〉)이라고 썼다. 미래를 예언한 그의 시참(詩讖)이 서늘하다.      [현대시 100년…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78) 일찌기 나는 - 최승자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 일러스트 잠산 1980년대 대표적인 여성시인의 한 사람인 최승자(56) 시인. 그녀의 시는 송곳의 언어로 위선적인 세계와 정면으로 맞선 하나의 살의(殺意)였다. 가장 최승자답다는 이 충격적인 일갈을 혹시 기억하시는지.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매독 같은 가을."(〈개 같은 가을이〉)   "시인은 여전히 컹컹거린다./ 그는 시간의 뼈를 잘못 삼켰다."(〈시인〉)라며 시인의 기본 성깔을 운운한 그녀는 삶의 고통과 세계의 위선을 거리낌 없이 폭로했다. 오직 자기 모욕과 자기 부정과 자기 훼손의 방식을 통해서.   이 시에도 폐광과 같은 유폐와 자기 방기가 있다. 시인은 '곰팡이'와 '오줌 자국'과 '죽은 시체'에 자기 존재의 흔적을 견준다. '나'라는 존재는 세상의 귓가를 정처 없이 떠돌다 사라지고 마는 '영원한 루머'일 뿐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삶을 저주받은 운명이라고 감히 말하며 아예 내 존재의 근거를 박탈해 버리려는 이런 듣기 거북한 발언은 그녀의 다른 시편에서도 흔하게 있다. 그녀에게 "이 조건 반사적 자동 반복적/ 삶의 쓰레기들.// 목숨은 처음부터 오물이었다."(〈미망(未忘) 혹은 비망(備忘) 2〉)   그러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아주 보잘것없는 일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이런 발언에는 위선의 세계에 대한 강한 혐오와 저주가 깐질기게 숨어 있다. 그녀는 이 세계가 치유 불가능할 정도로 깊이 병들어 있다고 보았다. 세계가 비명으로 가득 차 있고, 탐욕의 넝마이며, 치명적인 질환을 앓고 있는데 누군들 그곳서 생존을 구걸하겠는가. 그러므로 내 존재를 루머도 없게 치워달라고 할밖에.   그러므로 이 시에서 그녀가 독하고 날카로운 비유를 동원해 본인의 존재 자체를 혐오하고 스스로 욕되게 하는 것은 일종의 위악의 방식이다. 이 부패한 지상에서 더 이상 썩지 않으려고 '부정하는 법'을 그녀는 선택한 것이다.   세월은 길고 긴 함정일 뿐이며 오직 슬퍼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서슴없이 말하던 시인. '허무의 사제' 최승자 시인은 세상을 혹독하게 앓고 시를 혹독하게 앓았다. 시로써는 "밥벌이를 할 수도 없고 이웃을 도울 수도 없고 혁명을 일으킬 수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고독의 창 앞에 쏟아부을/ 충분한 피"(〈미망(未忘) 혹은 비망(備忘) 13〉)로 시를 써냈다.   "나는 아무의 제자도 아니며/ 누구의 친구도 못 된다./ 잡초나 늪 속에서 나쁜 꿈을 꾸는/ 어둠의 자손, 암시에 걸린 육신.// 어머니 나는 어둠이에요./ 그 옛날 아담과 이브가/ 풀섶에서 일어난 어느 아침부터/ 긴 몸뚱어리의 슬픔이예요."(〈자화상〉) 라고 읊었다. 그녀는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 《자살 연구》, 《침묵의 세계》 등 주옥 같은 역서를 낸 능력 있는 번역가이기도 하다. 그녀는 지금 병환 중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가 세상에 내놓은 신작시를 찾아 읽기가 쉽지 않다. 끔찍하게 독한 그녀의 시가 그립다. 그녀가 밤새 짜낸 '치욕의 망토'로 '귀멀고 눈멀은' 우리들은 따스함을 얻겠지. 그녀가 시 〈삼십세〉에서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우리 철판깔았네"라고 쓴 것을 읽고 기이한 쾌감을 느꼈었던 것처럼.     [애송시 100편 - 제 79편] 투명한 속 - 이하석         유리 부스러기 속으로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 어려온다, 먼지와 녹물로 얼룩진 땅, 쇠 조각들 숨은 채 더러는 이리저리 굴러다닐 때, 버려진 아무 것도 더 이상 켕기지 않을 때, 유리 부스러기 흙 속에 깃들어 더욱 투명해지고 더 많은 것들 제 속에 품어 비출 때,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는 확실히 비쳐 온다.   껌종이와 신문지와 비닐의 골짜기, 연탄재 헤치고 봄은 솟아 더욱 확실하게 피어나 제비꽃은 유리 속이든 하늘 속이든 바위 속이든 비쳐 들어간다. 비로소 쇠 조각들까지 스스로의 속을 더욱 깊숙이 흙 속으로 열며.    ▲ 일러스트 권신아   투명한 것은 비친다. 통과하며 통과시킨다. 더 많은 것들을 제 속에 '품어 비춘다'. 투명한 속은 제 속을 훤히 드러내며 더 많은 것들을 제 몸에 비추어낸다. 그리고 더 많은 것들은 투명한 속을 깊숙이 열며 '비쳐 들어간다'. 시간의 흔적과 문명의 찌꺼기를 받아들이고 뱉어내는 유리 부스러기의 투명한 속은 보호구역이다. 그 투명한 속은 끝이 없다. 투명한 유리 속 제비꽃처럼, 그 찬란하고 선명하고 쓸쓸하고 고요한 남빛 그림자처럼.   이하석(60) 시인의 〈투명한 속〉을 읽다보면 영화 《밀양(密陽)》의 '햇살이 시궁창을 비추는'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마당 한구석의 흙탕물을 비추는 그 비밀스런 햇볕 혹은 숨어있는 햇살에 카메라 시선은 오래 머물러 있었다. 이하석 시인의 시선이 그렇다. 그는 도시문명 속에서 구석지고 버려지고 망가지고 폐허화된 '것들'의 뒷풍경을, 클로즈업된 카메라 시선으로 보여준다. 인간을 편리하고 안락하게 해주는 현대문명의 뒷면에는 산업쓰레기와 비인간적 삶이 있다. 그는 1970년대 후반 그가 살고 있던 대구 주변에 널린 산업쓰레기 현장을 흑백사진을 찍어 그 사진을 바탕으로 시 작업을 했다고 한다. 사진처럼 감정 개입은 배제한 채. 쓰레기 가득한 이러한 낯선 시선은 '냉혹한 사실주의' '극사실주의'로 평가되었으며 1980년대 우리 시단에 잔잔한 반향을 일으켰다.   쇳조각, 폐타이어, 유리병, 깡통, 껌종이, 신문지, 비닐 등 산업화의 노폐물들은 흙과 풀뿌리에 뒤엉켜 덮여 있다. "폐차장 뒷길, 석양은 내던져진 유리 조각/ 속에서 부서지고, 풀들은 유리를 통해 살기를 느낀다./ 밤이 오고 공기 중에 떠도는 물방울들/ 차가운 쇠 표면에 엉겨 반짝인다,/ 어둠 속으로 투명한 속을 열어 놓으며"(〈뒷쪽 풍경 1〉)에서처럼, 그것들은 쉽사리 흙 속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풀과 더불어 성장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들, 오랜 시간 후 흙과 풀뿌리에 깃들어 투명해지고 흙과 풀을 제 속에 품어 비칠 때, 그것들의 투명한 속은 흙과 풀을 통과하며 통과시킨다. 먼지와 녹물과 날카로움과 독성을 잠재우며 또 다른 이슬의 반짝임 쪽으로 뻗어나간다.   이 시도 버려진 유리병(조각)에 카메라를 고정시켜 놓고 있다. 유리의 반짝임과 투명함 쪽으로 흙과 풀들은 뻗어나간다.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로 상징되는 '제비꽃'은 버려진 유리 부스러기의 '투명한 속'을 비쳐 오고 비쳐 들어간다. 봄의 기운 혹은 생명의 싹 혹은 자연의 힘이다. 우리는 날마다 보고 있지 않은가. 유리 부스러기 속, 제비꽃 같은 남빛 그림자를! 시멘트 콘크리트 틈으로 돋아나는 노란 민들레꽃이나, 타일 콜타르 틈으로 삐쳐 나온 연한 세 잎 네 잎 클로버의 경이 그 자체를!     [애송시 100편 - 제 80편] 갈대 등본 - 신 용 목         무너진 그늘이 건너가는 염부 너머 바람이 부리는 노복들이 있다   언젠가는 소금이 설산(雪山)처럼 일어서던 들   누추를 입고 저무는 갈대가 있다   어느 가을 빈 둑을 걷다 나는 그들이 통증처럼 뱉어내는 새떼를 보았다 먼 허공에 부러진 촉 끝처럼 박혀 있었다   휘어진 몸에다 화살을 걸고 싶은 날은 갔다 모든 모의(謀議)가 한 잎 석양빛을 거느렸으니   바람에도 지층이 있다면 그들의 화석에는 저녁만이 남을 것이다   내 각오는 세월의 추를 끄는 흔들림이 아니었다. 초승의 낮달이 그리는 흉터처럼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가장(家長)   아버지의 뼈 속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 일러스트 잠산  젊은 시인 신용목(34)은 "바람 교도(敎徒)"(시인 박형준의 말)다. 그의 시 곳곳에는 바람이 불어오고 멈추고 쌓이고 흐른다. 독특한 것은 그가 포착하는 바람의 속성인데, 그의 생각에 바람은 쌓이는 것이면서 강하게 '무는 힘'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바람이 비의 칼집을 잡고 서는 날"(〈바람 농군〉)에서처럼 바람을 정지시켜 묶어두거나, "느닷없이 솟구쳐 오르는 검은 봉지를/ 꽉 물고 놓지 않는/ 바람의 위턱과 아래턱"(〈새들의 페루〉), 혹은 "나는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에 물려 있다"(〈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라고 써서 바람의 '무는 힘'을 강조한다. 아무튼 '바람 교도'답게 그의 시집을 펼치면 바람이 와르르 쏟아진다.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는 문장이 모 기업의 에어컨 광고 문구로 사용되어 더 많은 이에게 알려진 이 시에도 바람이 등장한다. 시인은 폐(廢)염전을 걸어가고 있다. 저녁 무렵이었을 테고, 갈대가 있는 곳에서 멈춰 섰을 것이다. 바람 속에서 갈대는 갈대숲에 깃든 새들을 "통증처럼 뱉어내"고 있었을 것이다. 늦가을이었으므로 갈꽃이 진 갈대는 '촉'처럼 '화살'처럼 서 있고 시인은 그 갈대들을 보면서 세월의 한 참극과 풍파를 기억해 냈을 것이다. 아마도 가족사에 해당될 사건들을. (그래서 제목이 〈갈대 등본〉 아닌가. 우리가 동사무소에 가서 한 장씩 떼는 '주민등록등본'처럼.) 가족사 가운데서도 아버지와 관련된 과거의 일을 시인은 떠올렸을 것이다. 갈대처럼 누추를 입고, 뼛속까지 바람의 지층이 나 있고,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이제는 꺾인 아버지를 보았을 것이다. 지금 시인이 서 있는 공간, 즉 폐염전과 빈 둑과 꺾인 갈대와 바람이 부는 이 공간이 마치 아버지라는 존재의 영역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는 표현에는 개인적인 참회를 통해 아버지와의 관계를 복원하려는 결심이 담겨 있는 것이다.   노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연극 《나비 눈》의 대본을 쓰기도 한 신용목 시인은 우리 주변 사람들의 '허기'를 돌본다. 이주노동자, 구두수선공, 시장통 사람들이 등장하는 그의 시는 따뜻하고 서글서글하다. '등이 굽은 가축'인 우리를 돌보는 아파트 경비원 정씨는 "어제는/ 물통을 청소하고 오늘은/ 배설구를 씻는다 가축은/ 정갈해야 하므로 내일은/ 쥐똥나무를 전지하고 모레는/ 짜기철망을 손질한다 가축은/ 안전해야 하므로/ 정해진 시간마다/ 상한 데는 없는지 손전등을 들고/ 고삐를 훑으러 간다"(〈경비원 정씨〉)   신용목 시인은 한국 서정시의 계보를 잇는 젊은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음과 같은 시는 그런 평가에 대한 신뢰를 갖게 한다. "밤의 입천장에 박힌 잔이빨들, 뾰족하다// 저 아귀에 물리면 모든 죄(罪)가 아름답겠다// 독사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는, 별의 갈퀴// 하얀 독으로 스미는 죄(罪)가 나를 씻어주겠다"(〈별〉)     [애송시 100편 - 제 81편] 보리피리 - 한하운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ㄹ 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還)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ㄹ 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 닐니리.        ▲ 일러스트=권신아   사월이면 보리가 패기 시작한다. 초록이 지천으로 팬 보리밭을 지날 적이면 보리피리가 불고 싶어진다. 보리의 싹이 나오기 전의 보릿대를 꺾어 불면 피-ㄹ- 소리가 났다. 보릿대를 적당한 길이로 잘라 손톱으로 작은 구멍을 내 요령껏 불면 피-ㄹ 닐니리 소리가 나기도 했다. 청보리밭의 소리이자 고향의 소리 피-ㄹ 닐니리. 피-ㄹ 닐니리는 향수의 소리다.   〈보리피리〉의 시인 한하운(1920~1975). 그의 또 다른 이름은 '문둥이'였다. 본명은 태영(泰永). 함경남도 함주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1936년 17세의 나이에 한센병 진단을 받았다. 중국 베이징대학 농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해 도청에 근무하며 양양한 미래를 시작하던 25세에 다시 악화되어 직장도 그만 두고 숨어들었다. 이때 이름도 하운(何雲, 어찌 내 인생이 떠도는 구름이 되었느냐)으로 바꾸었다. 1946년 함흥학생사건에 연루되어 반동분자로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월남했다. 구걸을 하며 연명하다 명동거리에서 시를 파는 사람으로 유명해졌다. 1949년 《신천지》에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길."(〈전라도 길 -소록도 가는 길에〉) 외 12편이 실리면서, '불우의 시인' '천작(天作)의 죄수' '정처 없는 유리(遊離)의 가두(街頭)에서 방황하고 섰는 걸인'으로 소개되었다.   〈보리피리〉를 읽다보면 말 그대로 '천형(天刑)'을 짊어지고 살았던 그의 삶과 세월이 떠오른다. 보리피리를 불며 가는 '꽃 청산', '인환(인간의 세계)의 거리', '방랑의 기산하(많은 산과 들)'는, 그의 고향 함경도 함주에서부터 남쪽 끝 섬 소록도까지 이르는 과정을 상징하는 것만 같다. 사월의 고향 들판에서 불었던 보리피리를 불며 그는 내내 그 멀고 먼 거리를 떠도는 구름처럼 흘러온 것이다.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러 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파랑새〉)라고 노래하며.   시는 행간을, 행간의 여백을 읽는 일이다. 이 시는 신문사에 갔다가 즉석에서 써준 즉흥시다. 한 편의 시에, 가곡이나 가요로 가장 많은 곡이 붙여진 시이기도 하다. 그의 삶이 그토록 불우하고 파란만장하지 않았더라면, '인환'이나 '기산하' 같은 한자어를 제외한다면 동시라 해도 무방할 이 단순한 시가 그토록 많은 사랑을 받았을까. 기운생동 창끝처럼 패는 새파란 보리가, 지는 꽃처럼 문드러지는 붉은 살끝을 거느리고 있기에, 피-ㄹ 닐니리 봄의 보리피리 소리가 한층 깊고 서럽다.     [애송시 100편 - 제 82편]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함형수 청년화가 L을 위하여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거운 비(碑)ㅅ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 일러스트=잠산   함형수(1914~1946) 시인은 생전에 불과 17편의 시편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난해서 노동자 숙박소 등을 전전했지만 하모니카와 시 노트만은 꼭 갖고 다녔다. 한 여배우와 동거했지만 사랑에 실패하고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정신착란증에 시달리다 북에서 숨졌다. 그는 평생 한 권의 시집도 펴내지 못했지만, 만큼은 많은 사랑을 받았다.   《시인부락》은 서정주·김달진·김동리·오장환·김광균·함형수 등이 참여한 시 동인지였다. (《시인부락》 동인들은 '생명파'로 불렸다.) 함형수 시인은 이 시를 1936년 《시인부락》 창간호에 발표했다. 우선 이 시를 읽으면 후기 인상파 화가인 빈센트 반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나 《해바라기》 같은 그림이 떠오른다. '압생트'라는 싸구려 술을 많이 마셔서 물체가 노랗게 보이는 황시증에 시달렸다는 빈센트 반 고흐. (고흐는 술을 마시는 이유를 "노란 높은 음에 도달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정신착란증으로 권총 자살한 빈센트 반 고흐의 죽음도 함형수 시인의 불우한 죽음과 겹쳐 읽혀진다. 함형수 시인이 '청년화가 L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이 시를 창작하면서 빈센트 반 고흐의 열정적인 삶과 죽음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헤아릴 수 없지만, 적어도 둘 사이에 적잖은 영향관계가 있다고 분석하는 의견은 많다.   시인은 자신의 무덤 앞에는 묘비를 세우지 말라고 말한다. '차거운' 주검 앞에 세운 '차거운' 비석은 죽음을 완성하고, 죽음을 죽음으로 붙박는 것. 마치 널이 죽은 사람의 몸을 사방으로 서늘하게 가두듯이. 대신 노랗게 출렁이는, 태양처럼 열정적으로 타오르는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고 말한다. 다함이 없는, 대해(大海)와 같은 보리밭의 생명력과 공중으로 높이 날아오르는 노고지리(종다리)의 꿈과 자유를 달라고 말한다. 노란 빛깔과 푸른 빛깔의 색채대비가 인상적인 이 시는 식민지시대의 고한(苦恨)을 넘어서면서, 몸과 사랑과 꿈의 죽음을 완강하게 거부하겠다는 시인의 의지가 시종 넘쳐난다.   "눈앞에 보이는 삶의 미미(微微)한 즐거움은 선화륜(旋火輪)과 같다"고 했다. 선화륜은 횃불 같은 것을 손에 들고 빙빙 돌릴 때 생기는 불의 둥근 원(圓)을 말한다. 그만큼 삶의 즐거움은 허망하게도 머무르지 않고 흩어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가 삶을 지속시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수미산(須彌山) 같고 큰 바다 같은 꿈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마음에 해바라기가 자라고 보리밭이 출렁이고 종다리가 날아오르게 하자. 보리밭의 너비와 종다리의 높이를 사랑하자. 함형수 시인의 이 시가 우리에게 주는 불멸의 선물은 바로 그것일 것이다.         [애송시 100편 - 제 83편] 솟구쳐 오르기 2 - 김승희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날게 하지 않으면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솟구쳐 오르게 하지 않으면       파란 싹이 검은 땅에서 솟아오르는 것이나   무섭도록 붉은 황토밭 속에서 파아란 보리가   씩씩하게 솟아올라 봄바람에 출렁출렁 흔들리는 것이나   힘없는 개구리가 바위 밑에서   자그만 폭약처럼 튀어나가는 것이나   빨간 넝쿨장미가 아파아파 가시를 딛고   불타는 듯이 담벼락을 기어 올라가는 것이나         민들레가 엉엉 울며 시멘트 조각을 밀어내는   것이나   검은 나뭇가지 어느새 봄이 와   그렁그렁 눈물 같은 녹색의 바다를 일으키는 것이나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삶은 무게에 짓뭉그러진 나비알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존재는   무서운 사과 한 알의 원죄의 감금일 뿐   죄와 벌의 화농일 뿐         ▲ 일러스트=권신아 김승희(56) 시인의 시를 읽노라면 '시는 상처의 꽃'이라는 말이 입에 돈다. 상처에서 피처럼 피어나는 꽃, 그것이 시라는 생각에 미친다. 우리는 가족·사랑·출산·질병·밥벌이·이념·사회를 떠나 살 수 없기에, 우리들 상처는 우리들 보금자리에서 생긴다. 매일매일이 상처투성이다. 상처로부터 솟구쳐 오르게 하는 '용수철'이 없다면 우리는 상처로 짓뭉그러져 있을 것이다. 우리 몸에 내장된 '상처의 용수철'이 아니었다면 우리의 삶은 상처의 화농에 파묻혀 있을 것이다. 튕겨 오르는 힘, 솟구쳐 오르는 힘이 있기에 우리는 매일 새롭게 아침을 맞는다.   〈솟구쳐 오르기〉 연작시들을 통해 시인은 "활활 타오르는 상처의 꽃에서 훨훨 날아가는 새의 날개의 푸드득 솟구쳐 오름"(시집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의 자서)을 찾아 어둡고 지리멸렬한 일상의 삶 위로 튀어 오른다.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창을 장대로 삼아 장대 높이뛰기를 하듯 하늘 위로 솟구쳐 오르고(〈솟구쳐 오르기1〉), 상처의 힘을 깨닫기 위해 긴 머리에 성냥불을 당기고 싶어하고(〈솟구쳐 오르기3〉), 상처의 혼(魂), 아니 혼 속에 간직한 상처의 오케스트라에서 터져 나오는 황금 별들의 찬란한 음악을 듣기(〈솟구쳐 오르기10〉)도 한다. 상처를 비상의 날개로 삼아 날아 오르고자 한다. 그는 '시인은 천형을 앓는 무당'과 같은 존재라고 쓴 적이 있다. 무당이 고통의 칼날 위에서 춤추는 자라면, 상처의 작두를 타고 상처의 작두 위에서 공중부양을 하는 이가 시인일 것이다. 그 역시 고정희, 최승자, 김혜순과 더불어 1970년대 여성시의 새로운 솟구침을 주도한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시 쓰기 외에도 에세이, 평론, 장·단편 소설, 동화, 논문, 번역 등 분출하는 글쓰기를 펼쳐 보이고 있다.   이 시에서도 상처에 내재한 자기갱생 및 자기정화의 힘을 노래하고 있다. 봄은 겨울에서 솟구쳐 오른다. 파란 싹, 파아란 보리, 개구리, 빨간 넝쿨장미, 민들레, 나뭇가지의 새 눈의 몸을 빌려 솟아오른다. 땅속이나 바위 밑에서부터, 담벼락을 타고 시멘트를 뚫고, 텅 빈 허공을 일으키며 기어오른다. 떨어져야 다시 튀어 오르는 공처럼 내내 얼어 있던 것들이, 넘어져야 다시 일어서는 오뚝이처럼 내내 고통스러웠던 것들이, 당겨져야 다시 줄어드는 고무줄처럼 내내 아팠던 것들이, 오늘도 '상처의 용수철'을 타고 튕겨 오른다. 내일도 스카이콩콩을 타고 날아오른다. 아아 오오 우우~ 기지개를 켜며 솟구쳐 오르는 탄성(彈性)의 탄성(歎聲) 소리 가득한 아침이다. "쓰러졌던 바로 그 자리에서/ 바닥이여 바닥에서/ 무거운 사슬들이/ 짤랑짤랑 가벼운 빛의 음악이 되는 그날까지"(〈무거움 가벼움 솟아오름〉).     [애송시 100편 - 제 84편]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 일러스트=잠산   이 시는 4·19세대의 좌절과 절망을 노래한 4·19세대의 만가(輓歌)이다. 김광규(67) 시인은 한글로 교육을 받은 첫 세대로 4·19가 일어난 1960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이 시를 4·19혁명 18년 뒤에 썼다. 중남미 보컬그룹이 불러 1960년대 초반 크게 유행했던 노래와 동명의 제목이다.   터놓고 말하는 이 시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다. 변해버린 세상과 변해버린 사람들의 살풍경, 온데간데없는 열망과 초심(初心), 터럭만큼의 부끄러움조차 없게 된 양심, 판치는 속물주의와 물질주의. 이것을 시인은 부지불식간에 빠져들게 된 깊숙한 '늪'이라고 부른다. 크게 호통을 치지 않는데도 이 시를 읽고 나면 뭉근하게 가슴이 저민다. 왜 그런가.   우리는 점점 어깨가 움츠러들고 왜소화되어 간다. "작아진다/ 자꾸만 작아진다/(…)/ 모두가 장사를 해 돈 벌 생각을 하며 작아지고/ 들리지 않는 명령에 귀 기울이며 작아지고/ 제복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작아지고/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며 작아지고/ 수많은 모임을 갖고 박수를 치며 작아지고/ 권력의 점심을 얻어먹고 이를 쑤시며 작아지고/ 배가 나와 열심히 골프를 치며 작아지고/ 칵테일 파티에 가서 양주를 마시며 작아지고/ 이제는 너무 커진 아내를 안으며 작아진다"(〈작은 사내들〉) 시인은 어느덧 소시민이 되어버린 우리에게 입장 없음과 순순히 따름이 정녕 우리들이 고대한 초상이었느냐며 정직한 질문을 던진다. 면구스럽다.   독문학자이기도 한 김광규 시인은 일상시(日常詩)의 영역을 새롭게 개척한 시인이다. "김광규의 시는 그 생각에 비뚤어짐이 없으며 그 어조에 격렬한 부르짖음이 없으며 그 은유에 현란한 모호성이 없고 그 관심이 소박한 일상을 넘어서지 아니한다."(문학평론가 이남호)   김광규 시인 스스로도 자신의 시는 오페라에 있어서의 레치타티보(서창)쯤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그의 시는 아리아처럼 목청을 높여 외치지는 않는다. 다만 낮게 중얼중얼거릴 뿐. 하지만 이 중얼거림은 살기 바쁜, 살기 위해서 살아가는, 배불리 먹는 일에 열중인 우리들을 거북하게 만든다. 마치 맨발로 사금파리를 밟은 듯하게. 일례로, 그는 우리를 '4월의 가로수'에 섬뜩하게 빗댄다. 우리의 모습이 "팔다리까지 잘려/ 봄바람 불어도 움직일 수 없고/ 토르소처럼 몸통만 남아"(〈4월의 가로수〉) 있는 수양버들이라니! 그러나 둘러댈 말이 없다.   4·19혁명 기념일이 다가오면 이 시를 다시 읽게 된다. 까슬까슬하게 카랑카랑하게 살자고 다짐하면서.      [애송시 100편 - 제 85편] 낙화 - 조지훈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 일러스트=권신아   천지에 꽃 피는 소리 가득하다. 등성이는 등성이대로 기슭은 기슭대로 봄꽃들 넘쳐난다. 껍질만 살짝 문질러도 생강 냄새가 확 풍기는, 산수유꽃 닮은 생강나무꽃, 사람 환장하게 하는, 산복사꽃, 개살구꽃, 제비꽃, 메꽃, 달맞이꽃, 애기똥풀꽃, 쑥부쟁이꽃 본 적 있다. 이 꽃들의 소요! 사람 홀린다는 흰 동백꽃, 바람 불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린다는 꿩의바람꽃, 아침이면 수줍은 듯 고개 숙이고 있다. 해가 나면 자줏빛 꽃잎을 활짝 연다는 바람난 처녀꽃, 엘레지꽃, 홀아비바람꽃, 너도바람꽃, 며느리배꼽꽃은 아직 못 보았다. 저 꽃들의 고요!   "어진 이는 만월(滿月)을 경계하고/ 시인은 낙화를 찬미하나니/ 그것은 모순의 모순이다"(한용운 〈모순〉)라고 했거늘, 꽃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세속의 분별과 속도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 있는 사람이리라. 올해로 40주기를 맞는 조지훈(1920~1968) 시인은 섭리로서의 소멸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보여준 시인이다. '지조(志操)'를 지킨 논객이자, '주정(酒酊)'의 교양과 '주격(酒格)'의 품계를 변별했던 풍류를 아는 학자였으며, 무엇보다 낙화를 찬미할 줄 아는 시인이었다.   이 시는 화두처럼 시작한다.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꽃은 바람에 지지 않는다. 피면 지고, 차면 이울기 마련이라서, 꽃은 꽃의 시간이 다해서 지는 것이다. 저 꽃을 지게 하는 건, 바람이 아니라 밤을 아침으로 바꾸는 시간인 것이다. 시인은 촛불이 켜진 방안에서, 주렴 밖으로 꽃이 지는 것을 보고 있다. 아니 꽃이 지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리라. 돋았던 별이 하나 둘 스러지는 새벽, 먼 산의 소쩍새가 울고, 뜰에는 꽃이 지고 있다. 달빛이 고즈넉했던지 꽃 지는 그림자가 미닫이에 비친다. 방 안의 촛불을 꺼야, 지는 꽃이 빛을 발한다. 인간의 촛불을 꺼야, 어둠 속에서 목숨이 지는 자연의 꽃이 내는 소리를 온전히 들을 수 있다.   그는 범종소리를, 과실이 가지에서 떨어지는 소리에 비유한 적이 있다. "허공에서 떨어진다. 떨어진 그 자리에서/ 종소리는 터져서 빛이 되고 향기가 되고/ 다시 엉기고 맴돌아/ 귓가에 가슴 속에 메아리 치며 종소리는/ 웅 웅 웅 웅……/ 삼십삼천(三十三天)을 날아오른다 아득한 것"(〈범종(梵鐘)〉)이라고. 그 새벽에도 꽃이 지는 소리 웅 웅 웅 웅…… 아득했으리라. 흰 창호지문을 물들이는, '우련(보일 듯 말 듯 은은하게)' 붉은, 낙화의 그림자! 지는 꽃의 그림자를 나는 이 시에서 처음 배웠다. 꽃이 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 꽃이 다시 보인다는 것도. 밤새 진 꽃들 한 치는 쌓이리라. 꽃은, 진 후에 더욱 꽃이기에, 지는 꽃의 슬픔을 이리 높고 깊게 맞을 일이다.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이 과묵한 슬픔 앞에 목이 멘다.      [애송시 100편 - 제 86편] 서시 - 이시영                                                  어서 오라 그리운 얼굴     산 넘고 물 건너 발 디디러 간 사람아     댓잎만 살랑여도 너 기다리는 얼굴들     봉창 열고 슬픈 눈동자를 태우는데     이 밤이 새기 전에 땅을 울리며 오라     어서 어머님의 긴 이야기를 듣자      ▲ 일러스트 잠산   이시영(59) 시인을 떠올리면 그가 늘 쓰고 다녔던 검고 둥글고 큰 뿔테 안경과 그 너머의 빛나는 안광(眼光)이 생각난다. 깡마른 체구와 또각또각 한마디씩 끊어가며 내놓는 정직한 말이 생각난다. 그는 1974년 문인들의 민주화운동 조직이었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결성에 참여한 이후 엄혹의 시대와 맞서는 문인의 길을 걸었다.   이로 인해 연행되고 구금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1989년 《창작과비평》 주간으로 있을 때 황석영의 북한 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잡지에 게재했다는 이유로 구속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유신 철폐를 위해, 구속 문인과 양심수 석방을 위해,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위해, 노동자의 살 권리를 위해 국가 폭력에 맞서고 분연히 일어나 싸웠다. 그런 체험과 시대에 대한 울분을 선혈(鮮血)의 언어로 기동력 있게 쓴 것이 그의 민중시였다.   첫시집 《만월》에 수록되어 있는 이 시에도 그의 발자취와 육성이 살아있다. 이 시는 어둠의 시대를 살다 실종되고 도피중인 동지가 돌아오기를 갈망하고 있다. 압수되고, 두들겨 맞고, 체포당한 자유와 민주주의와 인권과 평등과 평화가 어서 빨리 돌아오기를 열망하고 있다. 댓잎이 살랑이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숨막히는 고요가 기다림의 절절함이라면, 천지를 쿵쿵 울리는 역동적인 발자국 소리는 돌아옴의 당위에 해당한다. 저 폭압의 시대에는 자식의 생사도 모르는 채 하염없이 뜬눈으로 눈물로 밤을 지새운 어머니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시영 시인은 민중시를, 이야기시를, 우리말을 세공(細工)한 단시(短詩)를 선보여 왔다. 근년에는 질곡의 한국 현대사를 스크럼을 짜고 함께 통과해온 인물들을 전면에 등장시키는 시를 써내고 있다.   광주일고 1학년 생활기록부에 장래 희망을 법관으로 적어 놓은 해방전사 김남주, 휘파람 잘 부는 송영, 마포추탕집에서 쭈글쭈글한 냄비에 된장을 듬뿍 넣고 끓여 함께 먹던 조태일, 문단 제일의 재담가 황석영, 상갓집에 가면 제일 나중까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던 인심 좋은 이문구, 섬진강서 갓 올라와 창작과비평사 문을 벌컥 열고 사과궤짝을 쿵 하고 바닥에 내려놓던 김용택 등등.   그는 지나간 옛일들을, 고통의 역사를 애틋하게 따듯하게 불러낸다. 특히 송기원과의 두터운 교분을 자랑하는 시편들은 왁자하고 눈물겹다. (이시영 시인은 송기원, 이진행과 함께 '서라벌예대 문창과 68학번 삼총사'로 불리기도 했다.)   이시영 시인은 "마치 이 세상에 잘못 놀러 나온 사람처럼 부재(不在)로서 자신의 고독과 대면하며 살아온 사람"(〈시인〉)이 바로 시인이라고 말한다. 그의 시는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미풍'이 되어 서러운 사람에게로 불어간다. 가슴이 뭉클하다.     [애송시 100편 - 제 87편] 껍데기는 가라 - 신 동 엽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 일러스트 권신아   기운생동, 만화방창의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던 이는 엘리어트였다. 우리에게도 4월은 잔인한 달이었다. 부여의 시인, 금강의 시인, 신동엽(1930~1969)은 이렇게 노래했다. "미치고 싶었다/ 4월이 오면/ 곰나루서 피터진 동학의 함성/ 광화문서 목터진 4월의 승리여// 강산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출렁이는 네 가슴만 남겨놓고, 갈아엎었으면/(…)/ 그날이 오기까지는, 4월은 갈아엎는 달/ 그날이 오기까지는, 4월은 일어서는 달"(〈4월은 갈아엎는 달〉)이라고. 겨울 땅을 갈아엎어 줘야 싹들이 더 잘 일어서는 이 4월에.   4월 19일이 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 〈껍데기는 가라〉는 벼락같은, 천둥같은 시다. 이 시에 무엇을 더 덧붙일 수 있으랴. 덧붙이는 순간 사족이고 군말일 뿐이다. 그만큼 시 자체   로 명명(明明)하고 백백(白白)하다. 1967년에 발표된 이 시는 4·19 혁명의 실패, 5·16 군사 쿠데타, 6·3 사태, 베트남 전쟁 파병, 분단의 고착, 외세의 개입 등 1960년대의 구체적 시대상황을 시의 배면에 깔고 있다. 그러니 시인에게 삼천리 한반도의 사월은 껍데기들로 가득했을 것이다.   '껍데기는 가라'라고 반복적으로 촉구하고 있지만 사실 이 시의 핵심은 '껍데기'보다는 '중립의 초례청'에 있다. 이 '중립(中立)'에는 남과 북, 좌와 우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넘어서려는 시인의 의지가 담겨 있다. 백두에서부터 한라까지, 동학년(1894년) 곰나루에서부터 4·19(1960년) 광화문까지, 백제의 후손 아사달과 아사녀의 못다 이룬 사랑에서부터 신라의 석가탑(無影塔)과 영지(影池)까지를 아우르는 이 중립의 스케일은 얼마나 장쾌한지.   이 웅대한 중립의 시 공간을 시인은 '껍데기는 가라'라는 문장 하나로 관(貫)하고 통(通)해낸다. 이 중립이야말로 진정한 알맹이이자 흙가슴이며, '부끄럼을 빛내며' 두 몸이 맞절하여 새로운 생명이 잉태할 수 있는 화해의 장(場)이라고 말하고 있다. 60년대 참여문학를 대표하는 이 시는 이후 민중·민족 문학의 이정표 역할을 했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라고 짐짓 물을 때, 시인이 보고자 했던 '하늘'은, "이제 올/ 너그러운 봄은, 삼천리 마을마다/ 우리들 가슴 속에서/ 움트리라.// 움터서,/ 강산을 덮은 그 미움의 쇠붙이들/ 눈 녹이듯 흐물흐물/ 녹여 버리"(〈봄은〉)는 사월의 하늘이었을 것이다. 그런 하늘은 보지 못하는 한, 시인은 여전히 4월에는 껍데기는 가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고 싶은 것이고, 향기로운 흙가슴만 남겨놓고 갈아엎고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애송시 100편 - 제 88편] 낙화 - 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일러스트=잠산   꽃이 지고 있다. 손에 꼭 쥐었던 것을 놓아버리고 있다. 어떤 꽃의 낙화에는 만행을 떠나는 수행자의 뒷모습이 있다. 미련 없이 돌아서기 때문에 낙화에는 구차함도 요사스러움도 없다. 아쉬움이 없을 리 없다. 이별은 등 뒤를 허전하게 만들고, 며칠 눈물을 돌게 할 것이다. 그러나 제때에 떠나감은 말끔하고 쾌적하다.   새잎이 돋고, 줄기가 힘차게 뻗고, 꽃이 벙글고, 벌이 꽃의 외곽을 맴돌고, 비로소 어느 아침에는 꽃이 '하롱하롱' 지고, 꽃의 시간을 구구절절 기억하며 열매가 맺히고,… 우리의 몸과 마음도 이 큰 운행을 벗어나기 어렵다.   부귀는 빈천(貧賤)으로 바뀌고, 만남은 이별로 바뀌고, 건강은 늙고 죽음을 초래한다. 시시각각 바뀐다. 그래서 이런 것에는 견실성이 없다. 견실성이 없으므로 집착할 것이 못 된다. 불교에서는 "온갖 사물은 다 없어질 것이어서 공중의 번개 같고, 굽지 않은 질그릇, 빌린 물건, 썩은 풀로 엮은 울타리, 모래로 된 기슭과 같다"고 했다. 이형기(1933~2005) 시인의 초기 시에 속하는 이 시는 집착 없음과 아름다운 물러남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이형기 시인은 1950년 시 〈비오는 날〉을 잡지 《문예》에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그때 그의 나이 17세. 최연소 등단기록이었다. "시(詩)란 본질적으로 구축해 놓은 가치를 허무화시키는 작업이야. 시에 절대적 가치란 없어. 자꾸 다른 곳으로 가는 팔자를 타고난 놈들이 시인이야. 그 무엇이건 전적으로 수용하지 않으려는 정신의 자유 말이야." 그는 시 창작뿐만 아니라 소설, 평론, 시론, 수필 등에 이르기까지 열정적인 창작활동을 펼쳤다. 초기에는 자연 서정을 선보였으나 현대문명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악마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시 세계로 나아갔다. 그는 한국시사에서 사라짐에 대한 존재론적 미학을 선보였다. "빈 들판이다/ 들판 가운데 길이 나 있다/ 가물가물 한 가닥/ 누군가 혼자 가고 있다/ 아 소실점!/ 어느새 길도 그도 없다/ 없는 그 저쪽은 낭떠러지/ 신의 함정/ 그리고 더 이상은 아무도 모르는/ 길이 나 있다 빈 들판에/ 그래도 또 누군가 가고 있다/ 역시 혼자다."(〈길〉)   "고독과 고통은 시인의 양식"이라고 말했던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오랜 투병생활을 했다. 그러나 고통스런 병석에 있으면서도 그는 아내의 대필로 시를 계속 창작했다. 그는 슬픔에 휩싸인 사람들을 위로하며 이렇게 아포리즘을 남겼다. "슬퍼할 수밖에 없는 일이 이 세상에는 적지 않다. 그때는 슬퍼해 봐도 물론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슬퍼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슬픔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슬픔은 가장 순수하고 따라서 값지다."     [애송시 100편 - 제 89편] 철길 - 김정환       철길이 철길인 것은   만날 수 없음이   당장은, 이리도 끈질기다는 뜻이다.   단단한 무쇳덩어리가 이만큼 견뎌오도록   비는 항상 촉촉히 내려   철길의 들끓어오름을 적셔주었다.   무너져내리지 못하고   철길이 철길로 버텨온 것은   그 위를 밟고 지나간 사람들의   희망이, 그만큼 어깨를 짓누르는   답답한 것이었다는 뜻이다.   철길이 나서, 사람들이 어디론가 찾아나서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내리깔려진 버팀목으로, 양편으로 갈라져   남해안까지, 휴전선까지 달려가는 철길은   다시 끼리끼리 갈라져   한강교를 건너면서   인천 방면으로, 그리고 수원 방면으로 떠난다.   아직 플랫포옴에 머문 내 발길 앞에서   철길은 희망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끈질기고, 길고   거무튀튀하다.   철길이 철길인 것은   길고 긴 먼 날 후 어드메쯤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우리가 아직 내팽개치지 못했다는 뜻이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길이 이토록 머나먼 것은   그 이전의, 떠남이   그토록 절실했다는 뜻이다.   만남은 길보다 먼저 준비되고 있었다.   아직 떠나지 못한 내 발목에까지 다가와   어느새 철길은   가슴에 여러 갈래의 채찍 자욱이 된다.       ▲ 일러스트=권신아   '철길이 철길인 것은'하고 나직이 되뇌면 생각의 꼬리가 철길처럼 길게 이어지곤 한다. '철길이 철길인 것은'하는 순간 수수께끼라도 떠안은 듯 뒷말을 잇도록 한다. 김정환(54) 시인은 '철길이 철길인 것은'을 되뇌며 (철)길과 만남과 희망을 엮어 이렇게 노래한다. 만날 수 없음이 이리도 끈질기기 때문이고,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아직 내팽개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아닌 게 아니라 '철길이 철길인 것은'하고 되뇌면 신촌역, 성북역, 용산역, 서울역을 오가던 아련한 철길들이 떠오른다. 그러니까, 철로도 아니고, 철도도 아니고, 바로 '철길이 철길인 것은' 그 길이 인간 안쪽으로 뻗어 있기 때문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철길은 두 개의 길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의 길과 또 하나의 길, 한 사람의 길과 또 한 사람의 길! 그 두 길은 서로 마주칠 수 없음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서로 버팅김으로써 지나감의 속도와 무게를 견뎌내는 길이다. 지금 당장은 만날 수 없는 길이지만, 언제나 함께 나아가는 길인 것이다.   '철길이 철길인 것은' 시간의 누적인 역사(歷史)가 배어 있기 때문이다. 1899년 제물포에서 노량진을 오가는 경인선이 첫 경적을 울린 이후 철길은 격동의 근대사를 달려왔다. 수탈하고 징병하고 피란하고 산업하러 가는 길에 철길이 있었다. '철길이 철길인 것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따뜻한 핏줄이기 때문이다. 방방곡곡을 누비며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나서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돌아간다. 상경하고 귀경하고 입영하고 귀대하고 여행하는 곳에 늘 철길이 있었다. 그러니 '철길이 철길인 것은' 그 길에 자갈돌처럼 깔려 있는 기다림 때문이다. 그 기다림이 너무 길고 외로워서, 철길이 두 길이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철길이 철길인 것은' 끝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철길을 사랑하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는 "이 살아있음이 언젠가는 끝이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믿고/ 또 사랑하는 것이"(〈육교〉)고, "음침한 시대가, 끝났다는 듯이/ 기름 묻은 이슬이 검게, 선로 위에서 반짝인다/ 아직 젖어 있는 것은 무엇인가"(〈검붉은 눈동자〉)라며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이다. 고통도 절망도 이별도 끝이 있기 때문에 견딜 만한 것이고, 드디어 완성되는 것이고, 결국 희망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철길은 희망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끈질기고, 길고/ 거무튀튀한" 것이다. 당신이든 미래든 휴전선 너머든 완행이든 급행이든, 바로 그곳까지 달려가는 것이 철길인 것이다.     [애송시 100편 - 제 90편] 추일서정(秋日抒情) - 김광균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즈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 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가닥 꾸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우에 세로팡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버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을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간다.       ▲ 일러스트 잠산   김광균(1914~1993) 시인은 1930년대 후반 회화적 이미지즘의 새로운 문법을 선보였다. 그는 시에 '회화(繪?)'라는 웃옷을 입혔다. 모더니즘 시론가 김기림은 "소리조차를 모양으로 번역하는 기이한 재주를 가진 시인"이라고 평했다.   김광균의 시는 독자들의 눈앞에 한 장 한 장의 데생을 그려 보이는 작법을 구사했다. 이런 데에는 김광균이 미술에 관심이 많았고, 많은 화가와 직간접적으로 교우한 영향이 컸다. 김광균은 고흐의 그림을 처음 접한 충격을 이렇게 고백했다.   "고흐의 '수차(水車)가 있는 가교(假橋)'를 처음 보고 두 눈알이 빠지는 것 같은 감동을 느낀 것도 그 무렵이다. 그때 느낀 유럽 회화에 대한 놀라움은 지금도 생생하다. 세계미술전집을 구하며, 거기 침몰하는 듯하여 나는 급속히 회화의 바다에 표류하기 시작했다. 시집보다 화집이 책상 위에 쌓이기 시작했고, 내 정신세계의 새로운 영양(營養)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것 같다."   그는 섬세한 감각의 촉수로 "구름은/ 보랏빛 색지(色紙) 우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뎃상〉)로 표현했고, 흰 눈이 내리는 모습은 "먼―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설야〉)로 표현했고, 성교당(聖敎堂)의 종소리는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외인촌〉)로 빛나게 노래했다.   마치 먼지 낀 삽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시에서도 그는 공허하고 고독하고 스산한 마음을 '모양으로 번역'해 인상적으로 드러낸다. 시인은 낙엽을 보면서 망명정부에서 발행하는 무가치한 지폐를 떠올리고, 폐허가 된 도룬(토룬) 시(市)의 공백(空白)한 하늘을 떠올린다. 구불구불한 길은 '구겨진 넥타이'로, 잎이 다 떨어진 포플러 나목(裸木)은 초라한 '근골'로, 불투명하고 얇은 구름은 '세로팡지(셀로판지)'로 표현함으로써 아주 구체적으로 대상을 조형한다.   낙엽을 망명정부의 무용한 지폐에 비유하거나, 공장의 지붕을 단단하고 날카로운 이빨에 비유하는 대목에서는 도시적 문명에 대한 시인의 비판 의식도 엿볼 수 있다. 이 시에 나타나는 황량한 심사는 모색(暮色) 그득한 그의 다른 시편들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이러한 상실감과 창백한 감상(感傷)은 가족들의 죽음, 실향 등의 정신적 외상에서 비롯되었다. 해서 혹자는 김광균을 '엘레지의 시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926년 12세의 나이로 '중외일보'에 처음 시를 발표하면서 천부적인 시안(詩眼)을 자랑했던 김광균 시인은 1950년대로 접어들면서부터는 한동안 시를 쓰지 않았다. 납북된 동생의 사업을 인수해 사업가로 변신했다. 그렇지만, 그는 안개 자욱하던 한국 시단에 장명등(長明燈) 하나를 켜 놓았다. 아직도 그곳서 가늘고 고단한 불빛이 새어나오며 밤을 밝히고 있다.     [애송시 100편 - 제 91편] 거짓말을 타전하다 - 안현미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 산동네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건 한 달치의 방과 한 달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도 슬프지 않았다 가끔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만나면 말을 더듬었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던 날들은 이미 과거였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비키니 옷장 속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할 때도 말을 더듬었다 우우, 우, 우 일요일엔 산 아래 아현동 시장에서 혼자 순대국밥을 먹었다 순대국밥 아주머니는 왜 혼자냐고 한번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 높은 건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억울하진 않았다 불 꺼진 방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나 대신 잘 살고 있었다 빛을 싫어하는 것 빼곤 더듬이가 긴 곤충들은 나와 비슷했다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불 꺼진 방 번개탄을 피울 때마다 눈이 시렸다 가끔 70년대처럼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고 싶었지만 더듬더듬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내 이마를 더듬었다 우우, 우, 우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벌레 같았다 벌레가 된 사내를 아현동 헌책방에서 만난 건 생의 꼭 한 번은 있다는 행운 같았다 그 후로 나는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진짜 가족이 되었다 꽃다운 청춘을 바쳐 벌레가 되었다 불 꺼진 방에서 우우, 우, 우 거짓말을 타전하기 시작했다 더듬더듬, 거짓말 같은 시를!      ▲ 일러스트 권신아   "저질러라, 닥치면 겪는다, 긍게 긍갑다"를 인생의 3계명으로 삼고 사는 여성 시인이 있다. 실제로도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에서 살았으며, "치사량과 열정과 눈물 한 방울만큼의 광기와 고독/ 개미의 페로몬 같은 상상력"(〈짜가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을 재료로 '시 같은 거짓말'을 제조하고 '거짓말 같은 시'를 타전하여 시인이 되었다고 한다. 씩씩하고 싹싹한 안현미(36) 시인의 얘기다.   2006년에 엮어낸 그의 첫시집 《곰곰》은 이렇게 소개되었다. "활짝 핀 착란의 찰나에서 건져 올린 생짜의 시, 시라니!"라고. 그의 시를 읽는 일은 "막장에서 석탄을 캐내던 내 아버지"(〈고장난 심장〉)와 "까치밥처럼 눈물겨운 엄마"(〈우리 엄마 통장 속에는 까치가 산다〉)의 틈바구니에서 '생짜'로 캐낸, 캄캄한 그러나 반짝이는, 검은 조개탄을 들여다보는 일만 같다.   누구에게나 '젊은 날의 비망록'은 있는 것이어서, 그 비망록이 어둡고 고통스러울수록 그 젊음은 젊었음이 틀림없다. 이 시는 시인의 '젊은 날의 초상'이다. 여상, 산동네, 등록금, 비키니 옷장, 순대국밥, 번개탄, 연탄가스 중독, 헌책방 따위로 그려지는 90년대면서도 '여전히 70년대적인' 풍경이다.   거기에는 짐작되는 아픔이 있고 헤아려지는 가난과 고독이 있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라고 반복적으로 말할 때, '~이었지만'을 경계로 앞 문장은 뒤 문장에 의해 뒤집힌다. 경계는 해체된다.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 '죽고 싶었지만 더듬더듬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내 이마를 더듬었다'라고 말할 때, 앞 문장은 뒤 문장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벌레 같았다'라고 말할 때도 앞 문장은 뒤 문장에서 무참히 무너진다. 이렇게 앞과 뒤는 가파르게 반전하지만 사실은 동어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리듬감은 여기서 살아난다.   시인에게 '거짓말'은 '시'의 다른 이름이다. 그것은 진실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아이러니다. 그러므로 '거짓말을 타전하다'라는 말은 "목마른 시인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팔리지 않는 위독한 모국어로 시(詩)를 쓰고 있었다"(〈그해 여름〉)의 다른 표현이며, 그의 시에서는 거짓말을 제조하다, 환을 연주하다(보다), 몽유병에 꽂히다, 착란에 휩싸이다 등으로 변주된다.   그런데, 나를 울게 하고 결국은 가족이 되는,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란 무엇에 대한 은유일까? 야행성의 창녀들일까, 치한 혹은 사내들일까, 불안이나 공포일까, 죽음일까…… 어쨌든 "그녀의 더듬이는 쓴다 우우, 우, 우 그녀의 더듬이가 운다"(〈거짓말을 제조하다〉). 그것은 진행형이다.     [애송시 100편 - 제 92편] 참깨를 털면서 - 김준태         산그늘 내린 밭 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대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도시에서 십 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   기가 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댄다.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 번만 기분 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 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 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 일러스트=잠산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 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 우리들의 아들은/ 어디에서 죽어 어디에 파묻혔나/ 우리들의 귀여운 딸은/ 또 어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 있나/ (중략)/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아아 통곡뿐인 남도의/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5·18광주항쟁을 최초로 형상화한 이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썼던 시인이 바로 김준태(60) 시인이다.   이 시는 1980년 6월 2일자 전남매일 1면에 일부 게재되었고, 전 세계 외신을 타고 나라 밖으로도 알려졌다. 이 시 발표 후 전남매일은 강제 폐간되었고, 김준태 시인은 재직하던 전남고교에서 해직되었다. 이 일례는 그의 문학적 이력에 비하면 일부에 불과하다. 진보적 문인인 김준태 시인은 시를 통해 대동세상(大同世上)에의 열망을 노래해왔다.   남도의 입심을 잘 살려가며 시를 써내는 김준태 시인. 그의 시 세계의 원적(原籍)은 농민시이다. 첫 시집 《참깨를 털면서》에서도 그랬고, 그 이후 발표한 〈밭시〉 연작에서도 그랬다. "칼과/ 흙이 싸우면/ 어느 쪽이 이길까// 흙을/ 찌른 칼은/ 어느새/ 흙에 붙들려/ 녹슬어버렸다"(〈칼과 흙-밭시(詩) 52〉). 그는 흙의 건강한 생명력을 강하게 신뢰하는 시인이다.   시 〈참깨를 털면서〉는 김준태 시인의 데뷔작이다. 밭에서 할머니와 '도시에서 십 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가 참깨를 털고 있다. 할머니는 깻단을 슬슬 막대기질 하지만, '나'는 산그늘이 내려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조바심을 낸다. 명령하듯 깻단을 한번 내리치면 복종하듯 솨아솨아 쏟아지는 깨알들이 기막히게 신기하고 신이 난다. 그예 모가지까지 털다가 꾸중을 듣는다. 목숨 가진 것에 대한 조금의 외경도 포용도 없이 무턱대고 털어대는 쾌감에 정신없으니 왜 혼나지 않겠는가. 이 시를 읽으면서, 인간의 본직을 잘 잊고 사는 나도 할머니 곁에서 참깨를 털며 한 차례 꾸중을 듣고 싶어진다. 참깨농사뿐만 아니라 사람농사까지 원융(圓融)하게 지어온 그 할머니로부터 꺼끌꺼끌한 사투리로 꾸중을 듣고 싶어진다.   준엄한 역사의식으로 당대에 대응해 우직하게 노래하는 김준태 시인의 또 다른 관심사는 통일문학이다. 말을 구부리거나 곧은 문장을 비틀어서 만든 시가 아니라 '심장을 싸늘하게 감싸는' 시를 찾는다는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언제나 안테나의 촉수가 쉴 새 없이 작동되어야 하고 상황이 타전이 되어 오면 재빠르게 이웃에게 알려주어야 하는 혹은 예언의 나팔을 불어주어야 하는 사람들이 이름하여 시인이 아니던가." 현실로부터 비켜서지 않는 그의 열정은 폭포수 같다 할 것이다.     [애송시 100편 - 제 93편] 감나무 - 이재무         감나무 저도 소식이 궁금한 것이다   그러기에 사립 쪽으로는 가지도 더 뻗고   가을이면 그렁그렁 매달아놓은   붉은 눈물   바람결에 슬쩍 흔들려도 보는 것이다   저를 이곳에 뿌리박게 해놓고   주인은 삼십년을 살다가   도망 기차를 탄 것이   그새 십오년인데……   감나무 저도 안부가 그리운 것이다   그러기에 봄이면 새순도   담장 너머 쪽부터 내밀어 틔워보는 것이다        ▲ 일러스트 권신아   소설가 현기영의 발문을 빌려 말하자면, 좀 '지랄 같은 성깔'과 '흰 이를 드러내고 씨익 웃는 개구쟁이의 웃음'과, 그리고 '시적 허기증'이라 할 만한 왕성한 창작 욕구가 가장 그답다고 한다. 그가 바로 이재무(50) 시인이다. 그의 시는 어렵지 않다. 고향과 유년에의 기억, 도시와 문명의 피로 등 자신의 삶 체험을 진솔하게 담아내기 때문이다. 그는 "퇴고할 필요가 별로 없는 완전한 모습의 시가 초고부터 씌어진 경우 좋은 시가 많았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감나무〉야말로 단숨에 쓰여진 시임에 틀림없다.   고향을 버리고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에 감나무 한 그루쯤은 담고 산다. 흰 보석 같은 감꽃과 달착지근했던 그 꽃맛, 새파란 감잎과 툭 툭 떨어지던 풋감들이 만들어내는 그 그늘, 꽃보다 더 고왔던 붉은 감잎과 그 거름, 감과 곶감과 까치밥의 그 달콤한 맛…. 그것들이 있는 풍경이란 하나같이 정답고 포근하다. 이 고향 같은 '감'은 도무지 어디서 비롯된 이름일까.   15년 동안을, 주인이 도망치듯 떠난 빈집에서 꽃을 내고 잎을 내고 감을 내며 홀로 고군분투하는 감나무 한 그루가 있는 풍경은 애틋하다. 성큼 들어설 주인을 마중이라도 하려는 듯 사립 쪽으로 가지를 내뻗고 있다. 연초록 새순도 담장 너머 쪽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새순이 잎이 되고 그 잎이 질 때, 한 기다림을 다 살았을 때, 그렁그렁 붉은 눈물을 매달고 바람의 안부에나 귀기울이는 것이리라. 날렵하게 포착해낸 이 짧은 시의 여백에는 농촌의 붕괴와 이농 현상이 있고, 한 가족의 곡절 많은 삶이 있고, 녹록치 않았을 도시살이가 있고, 무작정의 세월이 있고 계절이 있고, 그리움과 기다림이 있고, 인정이 있고 섭리가 있다.   이런 감나무는 또 어떤가. "저물 무렵 밭둔덕에 외로이 서 있는/ 늙은 감나무와 나란히 서서/ 인생의 황혼을 억세게 갈무리하시는/ 아부지의 등허리엔/ 살아온 날의 높고 낮은 등고선이/ 가파르게 펼쳐져 있다"(〈아부지〉).   이 감나무는 주인과 함께 늙어가며, 뻗어가는 가지들을 잘 갈무리하고 있다. "초겨울 인적 드문 숲속/ 앙상한 가지에 매달려/ 위태위태한 빨간 슬픔의 홍시/ 하나의 마음으로 기다린다"(〈기다림〉). 이 감나무는 기다림을 완성시켜줄 '큰 입 가진 임자'를 기다리는 것이리라. 고향이란 이런 감나무처럼 애틋하게 기다려주는 곳이다. 고향에 대한 향수는 이런 감나무로 통하는 것이다.   새순이 돋았으니 감꽃마저 지고 나면, 감이 열리고 감잎이 물들 것이다. 그리고 까치밥 하나 오래 맺혀 있으리라. 고향 빈집에 남겨두고 온 저 감나무는 그렇게 삼십년을 알콩달콩 한 식구처럼 살았으니, 십오년에 또 십오년은 더, 피붙이처럼 그리워할 것이다. 속을 바짝바짝 태우며 그리 오래 기다렸던 감나무니 그 감은 또 오죽 달 것인가.     [애송시 100편 - 제 94편] 가지가 담을 넘을 때 - 정 끝 별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 일러스트 잠산   정끝별(44) 시인의 시는 경쾌하다. 언어에 용수철 같은 탄력이 있고 집중력 있게 나아간다. 그녀의 시는 '불붙는 것'을 읽어내는 솜씨가 있다. 시적 대상이 갖고 있는 상반된 성격을 동시에 읽어내는 놀라운 수품(手品). 하나 속에 들어있는 상반된 성격의 팽팽한 대립을 말할 때 그녀의 시는 유니크(unique)하다. 그녀의 시는 모임과 빠져나감, 격렬함과 멸렬함, 달아남과 풀어줌 등 이 세상의 모든 시적 대상이 아마도 갖고 있을 상반된 두 성격, 한데 엉킨 두 성격을 표현한다. 해서 "세상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열망을 추슬러서 세상 안으로 돌아와 자리잡을 때 정끝별의 시에는 물기가 번지고 리듬이 인다"(소설가 김훈의 말).   이 시에서도 시인은 허공에 혹은 담장에 맞닥뜨린 가지의 엉킨 두 마음을 읽어낸다. 사람에게도 그렇듯이 새로운 영역과 미래로의 진입을 위해 첫발을 떼는 순간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과 감행의 신명이 공존할 것이다. 다만 가지가 담을 넘어서는 데에는 혼연일체의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 그것을 범박하게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이 사랑의 배후로써 우리는 금단과 망설임과 삶의 궁기(窮氣)를 넘어선다. 사랑 아니라면 어떻게 한낱 가지에 불과한 우리가 이 세상의 허공을, 허공의 단단한 담을, 허공의 낙차 큰 절벽을 건너갈 수 있겠는가.   정끝별 시인은 시 에서 우리의 삶은 "조율되지 않은 건반 몇 개로 지탱하고" 서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낡아가는 악기는 쉬지 않고 음악소리를 낸다. 나 딸 나 애인 나 아내 나 주부 나 며느리 나 학생 나 선생 응 나는 엄마 그리고 그리고 대대손손 아프디아픈 욕망의 음계, 전 생을 손가락에 실어 도레토 라시토 미미미". 이 시에서처럼 그녀의 시는 삶의 상처를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그것을 딛고 나아간다. 길의 상처를 받아들이면서 나아가는 타이어의 둥근 힘처럼. 조율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도레토 라시토 미미미'가 없다면 우리 삶의 악보는 진혼곡 그 자체일 터. 그녀의 시가 각별한 것은 '도레토 라시토 미미미'의 음계를 연주하는, 이 특별한 식미(食味)에 있다.   바람을 표절하고, 싱싱한 아침 냄새를 표절하고, 나무를 쪼는 딱따구리의 격렬한 사랑을 표절하는 '불굴의 표절작가'가 되고 싶다는 정끝별 시인. 그녀의 시는 봄나물처럼 생기발랄하다. 부럽게 상큼한 맛으로 그녀의 시는 우리의 입맛까지 살려준다. "세상을 덜 쓰면서 살라"며 지친 이의 마음에 숟가락을 쥐여주는 이 시는 얼마나 푸근푸근한가.   "달아도 시원찮을 이 나이에 벌써/ 밥이 쓰다/ 돈을 쓰고 머리를 쓰고 손을 쓰고 말을 쓰고 수를 쓰고 몸을 쓰고 힘을 쓰고 억지를 쓰고 색을 쓰고 글을 쓰고 안경을 쓰고 모자를 쓰고 약을 쓰고 관을 쓰고 쓰고 싶어 별루무 짓을 다 쓰고 쓰다/ 쓰는 것에 지쳐 밥이 먼저 쓰다/(중략)/ 세상을 덜 쓰면서 살라고/ 떼꿍한 눈이 머리를 쓰다듬는 저녁"().      [애송시 100편 - 제 95편] 인파이터 - 코끼리군의 엽서 - 이장욱         저기 저, 안전해진 자들의 표정을 봐.   하지만 머나먼 구름들이 선전포고를 해온다면   나는 벙어리처럼 끝내 싸우지.   김득구의 14회전, 그의 마지막 스텝을 기억하는지.   사랑이 없으면 리얼리즘도 없어요   내 눈앞에 나 아닌 네가 없듯. 그런데,   사과를 놓친 가지 끝처럼 문득 텅 비어버리는   여긴 또 어디?   한 잔의 소주를 마시고 내리는 눈 속을 걸어   가장 어이없는 겨울에 당도하고 싶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   방금 눈앞에서 사라진 고양이가 도착한 곳.   하지만 커다란 가운을 걸치고   나는 사각의 링으로 전진하는 거야.   날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   넌 내가 바라보던 바다를 상상한 적이 없잖아?   그러니까 어느 날 아침에는 날 잊어줘.   사람들을 떠올리면 에네르기만 떨어질 뿐.   떨어진 사과처럼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데   거기 서해 쪽으로 천천히, 새 한 마리 날아가데.   모호한 빛 속에서 느낌 없이 흔들릴 때   구름 따위는 모두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들.   하지만 돌아보지 말자, 돌아보면 돌처럼 굳어   다시는 카운터 펀치를 날릴 수 없지.   안녕. 날 위해 울지 말아요.   고양이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잖아? 그러니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구름의 것은 구름에게.   나는 지치지 않는   구름의 스파링 파트너.       ▲ 일러스트=권신아   이장욱(40) 시인의 시는 몽롱하다 아니 명쾌하다. 난해하다 아니 낯설다. 좀 다르게 말해보자. 그는 낮을 사는 시인이다 아니 밤을 사는 시인이다. 그는 시인이다 아니 소설가다. 노문학자다 아니 (픽션)에세이스트다 아니 비평가다. 현대시 모더니티의 한 극점에 서 있는 '우울한 모던보이'다, 아니 서정시의 안부(內部)를 공략하는 '진정한 인파이터'다. 짐작하겠지만, 그는 그 모두이면서 단지 문학 그 자체이다. 이 시의 묘미도 이런 어울림에 있다. 대화와 독백, 여기저기서 끌어온 문장들의 인용과 변용, 절망을 농담으로 받아치는 경쾌함, 뜬금 없고 돌연한 조증(躁症)과 울증(鬱症)의 변주, 비극적이면서 냉소적인 다변(多辯)으로 날렵하게 치고 빠지는 잽이 장기인 시이다.   파이터!라는 말은 자극적이다. 인파이터! 라고 듣는 순간 단전에서부터 전의(戰意)가 꿈틀거린다면 당신은 사각의 링 위에서 난투극을 벌여본 적이 있거나 벌이고 있는 자다. 외곽을 돌면서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아웃파이터이거나 상대에게 바짝 달라붙어 저돌적인 공격을 퍼붓는 인파이터일 것이다. 1982년 겨울,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인파이터 맨시니의 강펀치를 맞고 맞고 또 맞으면서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던 복서 김득구, 그 경기에서 김득구는 분명 맨시니보다 더 인파이터였다. 그러나 김득구는 오는 펀치를 피해 되받아치는 카운터 펀치, 그 한 방의 나이스 펀치를 날리지 못했다.   "코끼리를 천천히 허물어지는 코끼리를/ 그대는 본 적이 있으십니까. (…) 그의 거대한 육체가/ 황폐하지 말라 황폐하지 말라 중얼거리듯/ 무심하지만 지극히 섬세한 자세로 무너져가는/ 그 아늑한 풍경을"(〈코끼리〉). 김득구는 그렇게 무너졌다. 가출해 구두닦이를 전전하다 헝그리 복서로 막 인생이 피려고 할 그때, 14회전까지 계속 얻어맞았지만, 그때까지 버텨온 김득구의 드림, 김득구의 땀과 눈물, 김득구의 피로, 김득구의 공포…김득구는 살아 생전 술을 마시면 노래했다. "권투란 무엇인가, 맞는 걸까, 때리는 걸까".   이 사각의 링에서 그 누군들 단 한 방의 펀치도 맞지 않으면서 단 한 방의 카운터 펀치를 노리는 아웃파이터가 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나는야 '지치지 않는 구름의 스파링 파트너'일 뿐, 이름하여 '인파이터 코끼리군'. 우리는 정말 밑도 끝도 없는 저 모호한 구름에 너무 바짝 붙어 싸우고 있는 게 틀림없어! 우리 삶이란 게, 그렇게 허무맹랑한 싸움임에 틀림없어!       [애송시 100편 - 제 96편] 비망록 - 김경미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보니 스물네 살이었다. 신(神)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졸이며 숨어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하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인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 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엔 좀 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 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는지. 아무 일 아닌 듯 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 일러스트=잠산 누구든 삶의 중요한 골자를 적는 하나의 비망록을 갖고 있다. 생(生)의 사건은 낙차가 있고, 중립(中立)이 없으므로, 그 자체로 강렬하지 않은 생(生)의 시간은 없다. 어떤 과거는 해약하고 싶어진다. 어떤 과거는 지금에라도 더 꽃피우고 싶어진다. 어느 때는 폭풍이 지나가는 바닷가처럼 스산하고 절벽처럼 위태위태해 시큰한 냉기가 돌기도 한다. 어느 때는 사랑이 붉은 가슴에게로 오지만 눈물의 손바닥이 얼굴을 덮는 밤도 있다. 우리는 이 사건들을 모두 속기할 수는 없다. 갈피를 잡지 못해 헤매는 미망(迷妄) 속에 살면서 잊을 수 없는 미망(未忘)만을 기록할 뿐.   김경미(49) 시인의 데뷔작인 이 시에는 스물네 살에서 스물다섯 살로 넘어가는 나이의, 섬세한 감성을 소유한 여성이 등장한다. 신(神)은 그녀의 절망을 구원하지 않았고, 그녀가 만나는 이들은 팔뚝으로 눈물을 훔쳤으며, '산두목 같은 사내'는 끝내 그녀의 사랑이 되지 못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 그러나 젊은 열정이 어딘들 못 나서랴.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그예 젊은 열정은 생의(生意)를 내는 것. 마치 견고한   배는 풍랑에도 해를 입지 않듯이.   미래에 대한 이 적극적인 의욕은 시 〈겨울 강가에서〉에도 드러난다. "딸아 기다림은 이제 행복이 아니니/ 오지 않는 것은/ 가서 가져 와야 하고/ 빼앗긴 것들이 제 발로 돌아오는 법이란 없으니/ 네가 몸소 가지러 갈 때/ 이 세상에/ 닿지 않는 곳이란 없으리". 그러나, 이 굽히지 않는 마음이 20대의 젊음에게만 있을쏜가. 우리는 또 내일을 만나고, 내일은 공백(空白)의 페이지이고, 내일은 새롭게 써야 할 비망록인 것을.   고형렬 시인의 표현대로, 김경미 시인은 "맵차고도 직정적인 여성시인"이다. 그녀는 자기 혐오와 자기 부정을 통해 자신과 전면전을 치르는 시인이다. 해서 그녀의 시는 이 세상의 패악함과 간활함에 맞선다. 시 〈나의 서역〉의 도발적인 허무는 또 어떤가. "서로 편지나 보내자 삶이여/ 실물은 전부 헛된 것/ 만나지 않는 동안만 우리는 비단 감촉처럼 사랑한다 사랑한다 죽도록/ 만날수록 동백꽃처럼 쉽게 져버리는 길들/ 실물은 없다 아무곳에도/ 가끔 편지나 보내어라". 이렇게 솔직하게 속내를 꺼내 보이는 시를 읽고 나면 우리는 다시 만나고 싶어진다. 다시 만나 동백꽃처럼 모가지를 꺾으며 서로를 외면하게 될지라도. 다시 만나 과거의 비망록을 다시 열람하려는 용기, 그것이 우리의 가슴에 아직 남아있는 그리움 아니겠는가.     [애송시 - 제 97편] 맨발 -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 일러스트=권신아 문태준(38) 시인의 시에서는 뜨듯한 여물 냄새가 난다. 느림보 소가 뱃속에 든 구수한 여물을 되새김질하는 투실한 입모양이 떠오른다. 잘 먹었노라고 낮고 길고 느리게 음매- 울 것도 같다. 21세기 벽두의 우리 시단에서 그의 시는 '오래된 미래'다. 찬란한 '극빈(極貧)'과 '수런거리는 뒤란'을 간직한 청정보호구역이다. '시인·평론가가 선정한 2003년 최고의 시'로 뽑히기도 했던 이 시는 겹겹의 배경을 거느리고 있다. 수묵의 농담(濃淡)처럼 그 그림자가 자연스럽다. 죽기 직전의 개조개가 삐죽 내밀고 있는 맨살에서, 죽은 부처의 맨발을 떠올리는 상상력의 음역은 웅숭깊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들 아버지의 맨발, 그 부르튼 한평생을 얘기하고 있다. 시를 포착하는 시적 예지와 시안(詩眼)의 번뜩임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세상에 제일 나중에 나와,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큰 하중을 견뎌내고서는, 세상으로부터 제일 나중에 거두어들이는 것이 맨발이다. 맨발로 살다 맨발로 돌아가는 모든 것들은 평속(平俗)한 세파를 화엄적으로 견뎌내는 존재들이다. 길 위에서 태어나 평생토록 길 없는 길을 '맨발'로 걸어 다니다 길 위에서 열반에 든 부처가,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가섭을 위해 관 밖으로 내밀어 보여준 두 발에는 천 개의 바퀴살을 하나로 연결시킨 바퀴테와 바퀴통의 형상이 새겨있었다고 한다. 부처는 무량겁 지혜의 형상을, 그리고 죽고 사는 것이 하나라는 것을 제자에게 일러주고 싶었던 것이다.   '바깥'에서 안으로 거두어들이는 이 맨발의 움직임은 적막하다. 어물전의 개조개가 무방비로 내놓았다가,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맨발을 거두어들이는 그 느린 속도에는 죽음이 묻어 있다. 무언가를 잃고 자신의 초라한 움막으로 되돌아와야 하는 '맨발'의, 적나라한, 온 궁리를 다한 뒤끝의 거둠이다. 탁발승의 벌거벗은 적멸이요, 개조개 속에 담긴 부처다. '조문'하듯 만져주는 시인의 손길 또한 애잔하다. 개조개가 슬쩍 내보인 맨발에서 천길 바다 밑을 걷고 또 걸었던 성스러운 걸인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가난한 우리의 아버지들과, 그 범속(凡俗)한 빈궁 속에서 세계의 아득한 끝을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생명의 끈을 놓아버린 차디찬 맨발을 만져본 사람에게 이 시의 적막함은 유난하다.   인연이든 시간이든 기적이든 순력(巡歷)을 다했기에 '바깥'에서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부르튼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기에, '아-' 하고 우는 것들을 채워주었기에, 느리고 느리게 제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 다시 생각해도/ 나는/ 너무 먼/ 바깥까지 왔다"(〈바깥〉)!     [애송시 100편 - 제 98편] 오산 인터체인지 - 조병화         자, 그럼   하는 손을 짙은 안개가 잡는다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산을 넘는   저수지 마을   삭지 않는 시간, 삭은 산천을 돈다   등(燈)은, 덴막의 여인처럼   푸른 눈 긴 다리   안개 속에 초초히   떨어져 서 있고   허허들판   작별을 하면   말도 무용해진다   어느새 이곳   자, 그럼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 일러스트=잠산 "시간은 마냥 제자리에 있음에/ 실로 변하는 건/ 사람뿐이다.// 시간에 집을 지으라/ 생각에 집을 지으라// 시간은 마냥 제자리에 있음에/ 실로 변하는 것은/ '오고 가는 것'들이다."(〈의자 6〉)   조병화(1921~2003) 시인의 시 〈의자 6〉을 읽고서 나는 망연히 물처럼 앉아 있다. 나의 바깥은 바람 가듯 물결 지듯 지나가는 것이 있다. 순간순간이 작별이다. 여관이 여관에 들었다 나가는 하룻밤 손님과 작별하듯이. 허공이 허공에 일었다 잦아드는 먼지와 작별하듯이.   그리고 〈오산 인터체인지〉를 다시 읽는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 보인다. 사랑이 갈라서는 것이 보인다. 맞잡았다 놓는 당신과 나의 손을 안개가 물컹물컹 잡아 쥔다. 안개를 두른 당신과 나의 행로에 대해 알 방도가 없다. 나는 동쪽으로 사십 리를 가지만, 당신은 남쪽으로 천 리를 가야 한다. 내가 가야 할 거리보다 당신이 가야 할 거리가 까마득하게 더 멀다. 당신이 나를 떠나 보내는 거리보다 내가 당신을 떠나 보내는 거리가 훨씬 멀다. "자, 그럼"이라는 대목은 또 어떤가. 가슴이 아프다. "자, 그럼"이라는 표현에는 뒤편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에게 당신은 나에게 단호한 듯 순응하는 듯 "자, 그럼"이라고 말하지만, 그 음색에는 애써 숨긴 슬픔의 기색이 역력하다.   이 시에서처럼 조병화 시인은 단독자인 인간의 숙명적인 고독과 밀통하고 내통했다. 꾸밈이 없는 어투로 그는 생애 내내 우리네 도시인들의 슬픔을 노래했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비밀을 아느냐// 나는 아직 어려서// 슬픔이 나의 빛/ 나의 구원/ 나의 능력"(〈너는 나의 빛〉). 그는 '편운(片雲)'이라는 호를 썼다.   1949년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의 발간을 계기로 등단한 후 유고시집을 포함해 총 53권의 창작시집과 시론집, 수필집 등 무려 160여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그는 럭비와 그림을 좋아했다. 럭비선수로 일본 원정까지 다녀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림에도 상당한 솜씨가 있었다. 여백을 넉넉하게 살린 그림을 즐겨 그려 여러 권의 화집을 냈고 여러 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그는 시를 쉽게, 빨리 쓰되 한 차례 쓰고 난 뒤에는 그냥 내버려두었다고 한다. (애써 쓴 시를 짐짓 모르는 척 내버려두는 시간은 참으로 적막하였을 것이다.) 내버려 둔 시가 며칠 후에 다시 눈에 밟히면 고쳐 썼고, 눈에 어른거리지 않으면 매몰스레 아예 버렸다고 한다.   박재삼 시인은 "조병화 시인의 시에서는 어디서든 난해한 데라곤 없다. 그저 술술 읽히는 마력(魔力)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시 〈어머니〉도 난해한 데라곤 없다. "어머님은 속삭이는 우주/ 속삭이는 사랑/ 속삭이는 말씀/ 속삭이는 샘"이라고 그는 썼다. 담담하게 말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담담함은 더 감당을 못하겠다. 나직하고 담담하게 말하는 사람의 내상이 더 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자, 그럼"이라고 말하며 작별을 고하는 사람, 그이에게는 "말도 무용해진다".     [애송시 100편 - 제 99편]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정 희 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일이 끝나 저물어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 일러스트 권신아 정희성(63) 시인은 해방둥이다. 올해로 38년의 시력에 4권의 시집이 전부인 과작(寡作)의 시인이다. "말이 곧 절이라는 뜻일까/ 말씀으로 절을 짓는다는 뜻일까"(〈시(詩)를 찾아서〉), 그의 시를 읽노라면 언(言)과 사(寺)가 서로를 세우고 있는 시(詩)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의 시는 나직하게 절제되어 있으며 민중들의 삶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쉽게 읽히되 진정하고, 단정하되 뜨겁다. "그는 자신의 시처럼 단정하고 단아하지만 단아한 외형 속에는 강철이 들어 있다"고 했던 신경림 시인의 말처럼, 시와 시인과 시인의 삶이 버성기지 않은, 참 보기 좋은 경우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는 "눈덮여 얼어붙은 허허 강벌/ 새벽종 울리면 어둠 걷히고/ 난지도 취로사업장 강바닥엔 까마귀떼처럼/ 삽을 든 사람들 뒤덮인다"(〈언 땅을 파며〉)나, "퍼내도 바닥이 흰 서러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놈이/ 팔다리만 성해서 무얼 하나/ 공사판엔 며칠째 일도 없는데/ 삽을 들고 북한산을 퍼낼까/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나는 북한산 바닥까지 눈을 퍼낸다"(〈눈을 퍼내며〉) 등의 시와 함께 읽을 때,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라는 핵심 구절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   '삽'이라는 한 글자에는 많은 의미와 뉘앙스가 담겨 있다. 파다, 덮다, 뜨다, 퍼담다, 퍼내다 등의 술어를 수반하는 삽질은 자신의 몸을 구부리고 낮춰야 하는 일이다. 한 삽에 한 삽을 더해야 하는 묵묵하고 막막한 일이다. 흙 한 삽, 모래 한 삽, 석탄 한 삽, 시멘트 한 삽이 모여야 밥이 되고 집이 되고 길이 되고 마을이 되고 무덤이 된다. 삽질의 정수(精髓)란 그 우직함과 그 정직함에 있다. 그 정직함을 배반할 때 삽은 무기가 되기도 한다. 농민이든 노동자든, 노동의 본질이 삽질에 있는 것이다.   공자는 냇물을 보며 "흘러가는 것들이 저와 같구나!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흐르는구나!(逝者如斯夫, 不舍晝夜)"라고 했다. 흐르는 것이 물뿐이 아니듯, 저무는 것이 어디 하루뿐이겠는가. 인생도, 세월도 다 그렇게 흐르고 저문다. 흐르다 고이면 썩기도 하고 그 썩은 곳에 말간 달이 뜨기도 한다. 두 번에 걸쳐 반복되고 있는 '우리가 저와 같아서'는 그러한 자연의 섭리를 불운한 삶 그 안쪽으로 순하게 끌어안는 모습이다.   '저와 같아서'라는 말에는 수다나 울분이 없다. 하루가 저물듯, 고단한 노동이 저물어 연장을 씻듯, 노동의 비애와 슬픔도 함께 씻어낼 뿐이다. 저물어 가는 삶의 비애와 슬픔도 함께 씻었으리라. 흐르는 것들은, 저물 수 있는 것들은 그러한 정화와 치유의 힘을 간직하고 있다. 해서 이 시를 읽고 나면 어느덧 '우리도 저와 같은' 마음이 되고 싶은 것이다. 흘러가는 것들이 저와 같으니!     [애송시 100편 - 제 100편]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일러스트=잠산   김영랑의 본명은 윤식(允植). 1915년 결혼했으나 일찍 상처(喪妻)했다. 아내를 잃은 슬픔을 "쓸쓸한 뫼 앞에 후젓이 앉으면/ 마음은 갈앉은 양금줄같이/ 무덤의 잔디에 얼굴을 부비면/ 넋이는 향맑은 구슬 손같이/ 산골로 가노라 산골로 가노라/ 무덤이 그리워 산골로 가노라"(〈쓸쓸한 뫼 앞에〉)라고 노래했다. 고향인 강진에서 만세운동을 모의하다가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일본 유학 때에는 무정부주의자 박열과 가깝게 지냈고,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했다. 1950년 9·28 수복 때 유탄에 맞아 애석하게도 운명했다.   영랑은 '내 마음'을 많이 노래했다. 초기 시에서는 '내 마음'을 빛나고 황홀한 자연에 빗대어, 주로 3, 4음보 4행시에 담아 은은하고 섬세하게 노래했다. 잡된 것이 섞이지 않은 깨끗한 자연에 순결한 마음을 실어 노래했다. 이것은 불순하고 추악한 식민지 현실을 대립적으로 드러내려는 속내가 있었다.   이 시를 김영랑은 나이 서른 살을 갓 넘긴 무렵에 썼다. 모란이 피기를 기다리는 나의 꿈과 그 시간의 보람, 모란이 지고 난 후의 설움과 불모성을 함께 노래했다. 이 시는 찬란한 광채의 '절정에 달한' 시간을 포착하듯 짧게 처리하면서 음울과 부재의 시간을 길고도 지속적으로 할애하는 데 시적 묘미가 있어 보인다. 시인은 낙화 후의 사건을 아주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떨어져 누운 꽃잎'의 시듦뿐만 아니라, 시듦 이후의 건조와 아주 사라짐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물론 이렇게 한 데에는 모란이 피는 희귀한 일의 극명(克明)한 황홀을 강조하기 위함이 있었을 것이다. 이 시는 감미로운 언어의 울림을 살려내는 난숙함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고, '눈물 속 빛나는 보람과 웃음 속 어둔 슬픔'을 특별하게 읽어낼 줄 알았던 영랑의 유다른 안목과 영리함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시가 사람이라면 그이는 무엇을 간곡하게 바라며 뛰는 가슴인가. 많은 시들이 울분과 슬픔의 감정을 표표하게 표현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삶이 더 찬란한 쪽으로 몰아쳐 가기를 바라는 열망에 기초해 있다. 한편 한편의 시는 그런 마음의 예감과 기미를 보여주는 것이기에 아무리 작은 것을 노래해도 이미 뜨겁고 거대하다.   애송시 100편의 연재를 오늘로써 마친다.    가쁘게 오면서 우리 시를 사랑하는 분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느꼈다. 열독에 감사드린다. 이제 당신의 마음은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살아라. '허리통이 부드럽게' 드러난 보리의 오월을 보아라. 신록의 눈동자로 살아라. 당일(當日)에도 명일(明日)에도 우리네 마음은 '향 맑은 옥돌'이요, 은물결이오니.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출처] 현대시 100년|작성자 옥토끼  
57    <<명시구>> 한바구니... 댓글:  조회:2244  추천:0  2015-02-04
한국을 대표하는 109명의 현역 시인들이 뽑은 ‘최고의 시구’     강은교 꽃을 주세요 우리의 고뇌苦惱를 위해서 꽃을 주세요 뜻밖의 일을 위해서 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시간時間을 위해서       ―― 김수영, 「꽃잎 2」에서 김수영, 이상한 모더니스트. 그에게 나는 참 많이 빚지고 있다. 그에게서 리듬이 왔기 때문이다. 시를 쓰는 새벽 어떤 때, 리듬은 모든 것이니까, 형식이면서 내용이니까. 그의 시는 매끄럽지 못하나, 그러므로 그의 시에는 ‘터억 걸리는’ 그런 리듬의 구절들이 있고, 그런 리듬들은 가끔 나를 시로 이끌곤 한다. 그 중의 하나. “꽃을 주세요 우리의 고뇌를 위해서/꽃을 주세요 뜻밖의 일을 위해서/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위해서”(「꽃잎 (2)」 중에서) ‘구체 추상’의 실마리, ‘리얼 모더니즘’의 실마리, 결국 ‘상황 서정’의 실마리…… 그가 던져준 셈이다.   강   정 사람이란 사람이 모두 고민하고 있는 어두운 대지를 차고 이륙하는 것이 이다지도 힘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것은 우매한 나라의 어린 시인들이었다     ―― 김수영, 「헬리콥터」에서 자유는 대개 비상과 통한다. 그러나 자유를 꿈꾸는 마음은 늘 비상에 대한 불가능성을 인지하는 데서 시작된다. 이 영원불멸하는 모순이 아니라면 나는 자유에 대해 아무 할 말도 없다. 시적 자유와 삶의 자유를 등가로 봤던 김수영에게 자유란 늘 새롭게 돌이켜야 하는 양심의 나침반이자 그 처참한 결론이어야 했다. 그럼으로써 시는 언제나 미완의 결론으로 남는다. 시인에게 정작 두려운 건 자유의 결핍이 아니라 자유의 완성이었다. 자유는 관념인 동시에 행동인 모종의 음험한 도덕률이다. 자유는 구속을 전제로 했을 때만 날아오를 수 있는 불구의 정신이다. 그 불구를 불구 자체로 인식했을 때 정신은 불굴의 것이 된다. 자유는 이렇듯 정신이 노정하는 궁극의 말장난과도 통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가 ‘이다지도 힘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시인들은 ‘우매’하고 ‘어린’ 종족일 수밖에 없다. 자유라는 관념은 인간을 전혀 해방하지 않는다. 해방 다음의 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혁명 다음의 꿈이 정치적 자족과 기만뿐이듯, 시인에게 ‘어두운 대지를 차고 이륙하는 것이 이다지도 힘이 들지 않는’ 일이라면 자유는 유보되어야 한다.   고두현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 서정주, 「자화상」에서 어디 ‘스물세 해 동안’뿐이랴.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던 청춘 시절부터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캄캄한 절망조차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듯이……   고   영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에서 은행원을 꿈꾸던 학생이 있었다. 어려운 가정을 일으켜 세우고자 마음먹고 스스로 상고에 입학해 책만 파던 학생이었다. 학교 밖은 시끄러웠다. 시국이 그랬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시위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귀가하던 학생에게 운명이 바뀔 만한 일대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형이 유인물을 나눠주기 시작했는데 얼떨결에 받아든 유인물에는 군부독재니, 민주화니 하는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그 유인물 내용 중에 학생의 마음을 벼락처럼 휘어잡은 글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였다. 아무튼 그 다음날 스스로 문예반을 찾아갔던 학생은 이후부터 교과서 대신 시집과 『노동법 해설』을 가방에 넣고 다녔다. 그리고 은행 근처에는 평생 가보지 못했다.    고영민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 김수영, 「그 방을 생각하며」에서 그 방을 생각한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스무 살 문청시절, 우리는 문학을 한답시고 그 컴컴한 방에 모였다. 놀란 눈으로 미제침략사를 읽고 어느 날은 하얗게 최루탄가루를 뒤집어쓴 채 가두에 나갔다가 돌아와 그 방의 차가운 바닥에 눕곤 했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며칠을 낯선 방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당시 우리의 교과서는 '형상과 전형'이라는 루카치의 문예미학서였다. 그리고 시를 사랑하던 한 친구 녀석은 새벽, 그 방을 걸어 나와 취한 채 술을 사러 나갔다가 차에 공중으로 들려져 영영 그 방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때의 우리들은 지금 아무도 없다. 모두 그 방안에서 전사했다. 혁명은 안되고 방만 바꿔버렸던 우리가 “방을 잃고 낙서를 잃고 기대를 잃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 잃어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풍성하다.” 나는 모든 노래를 그 방에 함께 남기고 왔다.   고운기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에서 1978년 가을이었다. 군부독재의 단말마斷末魔가 가까이 들리던 무렵, 나는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국어 시간이면, 작은 키에 단아한 모습, 눈빛이 맑은 선생님 한 분을 나는 기다렸다. 정희성. 그러나 그가 좀체 시국을 입에 올린 적은 없었다. 3학년의 한 선배가 어느 문학지에 실린 시를 보여주었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였다. 처음 넉 줄을 읽었을 때 ‘물’과 ‘삽’과 ‘슬픔’이라는 세 단어가 주는 울림에 떨었던 기억이, 30년도 넘은 오늘까지 선연하다. 그보다 먼저 정희성은 “흐를 수 없는 것은 우리뿐 아니라/저문 강 언덕에 떠도는 혼이여”(「유전流轉」)라고 노래한 적이 있었다. 몇 년의 정치적 신난辛難을 겪으며, 정희성에게저문 강 흐르는 물은 어느새 자기화自己化되어 있었다.     고진하 물 먹는 소 목덜미에 /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 김종삼, 「묵화」 전문 시인 김종삼의 「묵화墨畵」 전문이다. 언제 읽었는지 정확치 않지만, 이 시가 내게 벼락치듯 다가왔던 것 같지는 않다. 시를 읽고 나서 그냥 멍했던 것 같다. 하여간 이 시 때문에 나는 김종삼의 ‘시인학교’를 자주 드나들었다. 사물과 우주와의 교감을 이토록 짧은 시구로 표현하기가 어디 쉽던가. 진정한 교감은 신생의 통로이며, 자아 발견의 불꽃이다. 평화로운 풍경의 한 컷이지만, 삶의 비애와 슬픔과 적막이 부은 발잔등의 아픔처럼 스며 있다. 그 스밈은 치밀하여 시의 화자와 대상 사이에 ‘사이’가 없다. 그 사이 없음의 깊이와 넓이를 획득하는 일이 시의 지향이라면, 내가 가야 할 길은 얼마나 먼가.     권현형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 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 김수영, 「거미」에서 “너무 시퍼래서 어디 두어야 할지 모르는 저 스무살!”(김영태) 무렵에 만난 김수영의 문장은 강렬했다. 달디달았다. 빛과 어둠을 등에 짊어지고 다녔던 시절, 시지프스처럼 세계의 무게를 등짐지고 다녔던 시절, 갓 성인식을 치룬 내게 밖은 어쩐지 의뭉스러웠다. 의심스러웠다. 김수영의 설움이 나의 설움인 듯했다. 시퍼렇게 순결한 염결성을 무기로 지니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팔십년대 중후반. 왜 노랫말이 슬프냐고, 왜 행복하지 않느냐고 개인의 자의식을 검열받던 시기였다. 그때, 건전가요가 눈발 날리는 겨울 거리의 레코드 가게에서 불안하게 흘러나왔다. 하나, 어두울수록 환하고 싱그러운 문청 시절에 받아들인 설움은 외연일 수밖에 없다. 세월이 흘러 풍경이었던 설움은 육체성을 내면성을 띠기 시작한다. 시의 원천으로, 소금을 뿌린 듯 아린 자의식으로 내부에 굵은 똬리를 틀기 시작한다.    길상호 거울속의나는왼손잽이요 내악수握手를받을줄모르는… 악수를모르는왼손잽이요    ―― 이상, 「거울」에서 악수를 모르는 세상에 서 있었다. 그 세상은 다름 아니라 내가 만든 세상이었다. 볼 수는 있지만 손끝 하나 닿을 수 없는 사람들이 세상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언제나 나와 표정을 맞추면서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걷고 있었다. 그 중 내가 실체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의심하기 시작했다. 넌 왠지 허깨비 같아, 넌 너무 가득 차 보이니 실체가 아닐 거야, 그렇게 만나는 사람들을 의심해가다 보니 결국 손가락은 스스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무것도 파악해내지 못하는 너도 아닐 거야. 이제는 만나는 얼굴마다 주먹질이 시작됐다. 거울 속에 갇힌 얼굴은 깨져버릴 테니까. 그렇게 깨가다 보면 결국 남는 하나의 얼굴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주먹의 핏물 든 상처마다 박혀든 거울조각이, 조각마다 깨져 있는 얼굴이 꿈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도 실체야! 나도 실체야! 머리는 그들의 괴성으로 날마다 시끄러웠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머리 속이 맑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왜 꼭 그 손을 잡으려 했던 것일까? 가만히 손을 거둔다. 나는 나대로, 그는 그대로 마음이 참 편하다. 거울을 뒤로하고 걷는다. 가끔 돌아볼 때에도 거울 속 너는 뒷모습을 보이지 않아 좋다. 그때서야 와장창 냉담하던 거울이 깨진다.    김광규 그립다 / 말을 할까 / 하니 그리워 //  그냥 갈까 / 그래도 / 다시 더 한 번 //    ―― 김소월, 「가는 길」에서 1950년 정음사에서 나온 『작고시인선』(서정주 엮음)은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한국 시선집이다. 책이 귀하던 50년대 초반기에 일금 오백 환을 주고 샀다. 김소월, 윤동주, 한용운 등 한국 신시의 선구자 열 분의 대표작품들이 실려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특별히 사사한 시인이 없으므로, 이 얄팍한 책이 문학수업의 첫 번째 스승이었다. 여기에 수록된 김소월의 시 「가는 길」은  사춘기 청소년의 민감한 정서에 호소하는 바 크고, 3음보 율격도 친근한 매력을 풍겨 저절로 암송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내 문학교양의 기반으로 자리잡았다고 할까. 애틋한 그리움을 이처럼 짧은 3행 시연에 담은 예를 달리 본 적이 없다. 전통적 서정시의 전범은 오늘날 흔히 잊혀지거나 무시되기 일쑤다. 하지만 아직도 이런 시구를 쓰지 못한 부끄러움을 나는 항상 느끼고 있다.    김광림 온길 눈이 덮여 갈길 눈이 막아 이대로 앉은 채 돌 되고 싶어라    ―― 박경수, 「눈」  해방 직후 향토(원산) 시인들이 펴낸 『응향』 시집 속에 수록된 것. 이 작자는 시인이기 전에 사학자였다. 당시의 암담한 현실과 사회상을 이렇게 표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집을 가장 악랄하고 혹독하게 비판하고 나선 평자는 백인준이었다. 근자에 알았지만 그는 일제 말기 윤동주 시인과 친구였다고? 60년이 넘도록 청소년기에 읽은 이 시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뿐더러 ‘돌’에 관한 ‘바위’시까지 쓰게 만들었다.  “너에게 걸터앉으면/탐나는 것 부러운 게 없어져/벼슬자리 꽃자리 내갈겨 둔 채/듬뿍 술 한 잔 들이켜고/너마냥 잠들고 싶어져” 세상사 돌아가는 꼴이 돌 되고 싶은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 간혹 돌마냥 잠들고 싶은 심정임을 어쩌랴.    김규동 3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거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 김기림, 「바다와 나비」에서 경성고보 시절 영어시간에 기림 선생이 누차 당부하던 말이 생각난다. 담배 피우지 말아라. 책을 선택해서 읽어라. 새로운 문명에 접하는 생활태도를 중히 여겨라. 지금은 수학 영어 물리 화학 지리 기하, 이것을 공부 잘하고 글쓰는 일 같은 것은 기초학문을 마친 다음에 해도 충분하다. 대성하는 길이 그것이다. 이런 교훈만 하고 우리들이 만든 ‘동인지’ 따위는 봐주려 하지 않는 선생이 참으로 원망스러웠다. 빨리 시인이 되고 싶은데, 하지만 시인 스승은 그것을 절대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위 시구는 센티멘털·로맨티시즘의 시 풍토에서 지성을 건져올린 시작품의 한 보기다. 이미지 예술로서의 시가 여기에 암시되어 있다. 즉물적 객관적 회화적 구성적인 요소가 그것들이다. 이 시를 읽을 때 우리는 이 시가 나라를 잃은 암울한 시기에 씌어진 작품이란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김규성 이슬은 하늘에서 내려온 맨발 풀잎은 영혼의 깃털    ―― 정진규, 「화和」에서 내 침실 겸 서재에는 한 편의 시가 수채화처럼 걸려 있다. 예의 ‘활달한 유연柔然’이 특징인 경산체絅山體가 빚어놓은 우주시 속의 액자시이다. 그 도입부가 위 구절인데 혼의 상징적 거처인 하늘을 육감적으로, 몸의 텃밭인 대지를 정령적精靈的으로 탈바꿈한 전경화가 행여 낯설지 않다. 화급하게 “맨발”로 달려온 “이슬”을 “깃털”처럼 부드러운 설렘으로 맞는 “풀”의 조응은 원초적이면서도 그지없이 순결한 상생의 축제로, 그 정경유착情景癒着의 절경絶景이 볼수록 황홀하고 환하다.  산문시조차도 여느 정형시보다 더 맛깔스런 리듬을 자랑하는 정진규 시인의 시는 한 마디 오해도 허락지 않을 듯 수고롭지 않게 읽히면서도, 구구절절이 감미롭고 유장한 울림으로 청자聽者의 몸 속 깊숙이 녹아 흐르는 게 압권인데 위의 천지공사天地工事는 그 중에서도 백미이다. 각별한 인연일수록 ‘객관적 시 읽기’가 예의이겠지만 그런 상식과 기우쯤 무색하게 압도하는 두 행의 벅찬 은유가 내 일상의 삭막한 직유와 동거한 지도 꽤 날수가 찬 셈이다.    김남조 바다에두고 바다바래여 시인인것을……    ―― 서정주, 「시론詩論」에서 “바다속에서 전복따파는 제주해녀도 제일좋은건 님오시는날 따다주려고 물속바위에 붙은그대로 남겨둔단다. 시의전복도 제일좋은건 거기두어라 다캐어내고 허전하여서 헤매이리요? 바다에두고 바다바래여 시인인것을……” 명시, 명구절은 허다하련만 그 중에서 위의 6행시 한 편을 가려 뽑았다. 앞의 3행은 전치사인 셈이고 뒷부분 3행에 있어서도 끝줄이 나의 일상에 거의 유착되어 온다. 시인이 한 편의 새 작품을 마무리짓고 나면 흔히 존재의 공동空洞현상에 빠져 무력감에 시달리게 된다. 그 까닭은 일상의 수심이 얕았거나 비축해 둔 곡물창고가 가난했기 때문인 듯하다. . 나는 내 시정신의 빈혈현상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에 자주 있어오는 이 증상을 우려하고 겁먹어왔다. 한 편의 시를 얻었을 때 더 좋은 다음 시가 물속 바위에 그대로 남아 있는 그런 풍요로움이야말로 내 평생의 황홀하고 과분한 희구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시인에게 있어서도 시의 샘물이 다시금 그 전량으로 남아 부풀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고 바랄 것이랴.   김병호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     ―― 송기원, 「시」에서 시와 삶이 하나였던 시절, 오히려 생활이 시를 빛내 주리라는 믿음도 있었다. 재수 끝에 들어온 대학교에서 난생 처음 입어본 과티. 그 가슴팍에 찍혀, 시보다 먼저 옷으로 입었던 시구.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  스무 살의 우리들은 시를 입고 명동과 남대문시장, 평택역을 뛰어다녔다. 가슴팍에 찍힌 화인처럼, 남몰래 어루만지거나 조용히 읊조리기만 하여도 척추가 꼿꼿해지곤 했다. 양심만으로 양심을 지킬 수 없었고, 용기만으로 승리할 수 없었던 시절의 마지막 세대였다. 심판의 날 소돔을 탈출할 때, 유황 불벼락 속에 죽어가는 이웃들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뒤돌아본 채 죽어, 빛나는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처럼. 시인의 삶이란 그러해야 한다고 아직 믿는다. 그리고 여전히 한 편의 시가 천만인의 가슴을 격동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김상미 나도 감히 상상想像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 김수영, 「거대한 뿌리」에서 여고 시절, 나는 차비를 아껴 민음사에서 나오는 시집들을 한 권씩 사 모으는 게 크나큰 즐거움이었다. 그때 산 김수영의 시집 『거대한 뿌리』를 읽었을 때, 나는 시라는 운명이 기지개를 켜며 힘차게 내게로 달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그때 알았다. 내 길은 문학에 있으며, 언젠가는 누구의 의지도 아닌 내 의지로 그 길을 가게 되리라는 걸. 그 이후부턴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나는 내 안에서 자라나는 ‘문학’으로 인해 쉽게 기가 꺾이지 않았다. 남들이 볼 땐, 허허벌판 한복판에 혼자 꽃피우며 서 있는 이상의 「꽃나무」처럼 이상해 보였겠지만. 그 모든 세상일은 ‘나도 감히 상상想像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능히 견딜 만했으며, 스스로 힘이 되어 나를 지켜주었다.    김선태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중학교 1학년 시절, 시골집 형의 골방에는 달랑 책이 한 권 있었는데, 내 고향 강진 출신인 김영랑의 시집이었다. 달리 읽을 책이 없었거니와 당시 짝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던 나는 수십 번이나 그 시집을 읽어서 송두리째 외울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시라는 걸 쓰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김영랑 시인과 그의 시집은 맨 처음 나를 시의 길로 인도한 운명적인 스승이요 텍스트가 된 셈이다. 특히 그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에 나오는 ‘찬란한 슬픔의 봄을’이라는 역설의 시구는 지금도 나를 경탄과 전율에 떨게 한다. 슬픔의 빛깔이 어쩌면 이토록 찬란할 수 있단 말인가. 애이불비의 촉기를 머금고 있는 이 시구로 인해 영랑의 시가 저급한 감상으로 떨어지지 않았듯이, 나의 시도 어두운 과거사를 잘 다스려 승화된 시세계를 열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구는 아직도 내겐 불상의 광배光背처럼 환하게 남아 있다.   김   언 이 무언의 말/하늘의 빛이요 물의 빛이요 우연의 빛이요 우연의 말 죽음을 꿰뚫는 가장 무력한 말/죽음을 위한 말 죽음에 섬기는 말 고지식한 것을 제일 싫어하는 말/이 만능의 말 겨울의 말이자 봄의 말/이제 내 말은 내 말이 아니다    ―― 김수영, 「말」에서 여름밤이었나 겨울밤이었나. 흥건히 술에 취해 소설 쓰는 형의 집에 가서 보았던 말. 한동안 얼이 빠져서 보았던 말. 나무액자에 고이 걸려 있던 누구의 것도 아닌 그 말. 김수영의 말. 말에 대한 말. 말이 아닌 모든 것에 빚진 말. 빛이면서 우연이고 우연이면서 죽음을 꿰뚫는 말. 만능의 말이면서도 고지식한 것을 제일 싫어하는 말. 시인의 말이면서 범인의 말. 평범한 말이면서 죄를 짓는 말. 모두를 겨냥하면서 누구도 귀기울이지 않는 말. 저 혼자서 맴돌고 저 혼자서 죽음을 목격하는 말. “내 생명은 이미 맡기어진 생명/나의 질서는 죽음의 질서/온 세상이 죽음의 가치로 변해”버려도 탄생하는 말. 아무도 목격하지 않는 밤의 말. 이 무언의 말이자 유언의 말. 시체의 말이자 정확히 생명의 말. 감각의 말이자 침묵의 말.   김언희 벗겨내주소서아버지 나를아버지 콘돔처럼아버지 아버지의좆대가리에서아버지!”    ―― 김언희, 「벗겨내주소서」에서 한국현대시사 100년이거나 말거나, 가장 빛나는 표현이거나 말거나, 최근에 나로 하여금 ‘절정의 순간을 체험케’ 한 것은 위의 구절이었다. 십수 년 전의 글을 뜻밖에, 그것도 토막으로 지면에서 대면한 순간, 내장 속으로부터 차디찬 전율이 번져나왔다. 감동이 아니라 전율이, 살갗을 기는 지네 같은 전율이. 쓸 때는 무엇을 왜 쓰는지 모르고 썼던, 써 놓고서도 여직 깨닫지 못했던, 이 구절은 이상의 “義足을담은軍用長靴가내꿈의白紙를더럽혀놓았다”의 대구對句였으며, 김수영의 “한 가지를 안 속이려고 모든 것을 속였다.”의 대구였다. 나의 대구였으며, 나의 대꾸였던 것이다. 나의 온 몸과 마음, 온 생활을 건!   김왕노 아아 사시나무 그림자 가득 찬 세상    ―― 기형도, 「밤눈」에서 시인의 눈이 미모사보다 더 예민하고 말미잘보다 더 감각적인 촉수를 가졌음을 그리하여 내가 그보다 더한 감각체로 모든 사물을 바라보고 내통해야 함을 일러 준다. 시인은 누구나 쉽게 간과해가는 하찮은 것에서부터 미세한 것을 영혼의 세포 하나하나로 읽어간다. 뒷전에 있거나 잊혀지거나 소외된 존재를 인정하고 사랑한다. 그러므로 시인의 위대함은 완성된다. 나는 언제 아아 사시나무 그림자 가득 찬 세상을 읽어내고 노래할 수 있나. 시인이 예민한 감각의 영혼을 가졌다는 것은 그만큼 상처를 쉽게 입고 존재가 불안하다. 하지만 예민한 감각을 가졌기에 세상의 모든 어둠을 감지하며 어둠에 대해 고발해 온다. 그러므로 시인은 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존재임이 입증된다. 아아 사시나무 그림자 가득 찬 세상에서……   김이듬 거울속의나는왼손잽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잽이오    ―― 이상, 「거울」에서 ‘하루만 더, 하루만 더’ 중얼거리며 버티던 때였다. 나는 왼손잡이, 안경잡이에다 소위 말하는 결손가정의 병약한 소녀였다. ‘거울 속의 나는 정상/왼손잡이 아냐, 풀 같은 머리칼/거울 속에서 나는 두 개의 눈동자’. 나름 신경 쓴 몇 문장 때문에 국어선생은 화를 내셨다. ‘어디서 본 건 있어 가지고 베끼고 난리야!’ 출석부로 머리를 탕탕 치셨다. 증거물로 내민 이상의 시집이야말로 난생 처음 보았다고 아무리 해명해도 믿어주지 않았다. 나는 이름도 시도 이상한 이상이 나보다 빨리 태어나서 내가 할 말을 선수친 것에 분개했지만, 결국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나를 처음으로 당혹케 안절부절 못하게 한 시였으니까. (“벼락 치듯 나를 전율시킨 최고의 시구”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최고’는 없다. 그런 게 있다면 오라! 네 천둥벼락을 내 심장에 꽂아서 제발 나를 잠잠하게 해줘.)      김정인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     ―― 윤동주, 「서시」에서 단발머리 시절의 어느 여름밤, 툇마루에 누워 본 하늘의 별빛이 청명하게 가슴속을 파고든다. 바람에 스치는 별, 나의 별, 나의 존재, 불현듯,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별빛 쏟아지듯 내 몸을 덮친다. 모공마다 솜털 일제히 일어선다. ‘흔들리는 바람은 씨앗을 퍼뜨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했던가. 이후,「서시」의 날카로운 반성의 언어는 불안한 성취마다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낱낱의 길목에서 함께 서성이던 그 불안은 어느 극점에서 시를 엿보게 하고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 만화경을 흔들어 섞어 놓은 듯 미로를 헤매는 나의 시 쓰기. 지금도 나는 처음 감격 그대로 「서시」를 통해 끊임없이 채널링하고 있다.   김종길 이 말은 누가 난줄도 모르고 밤이면 먼 데 달을 보며 잔다.    ―― 정지용, 「말 1」에서 지용의 「말 1」은 동시풍의 작품인데 앞에서 인용한 두 행으로 끝난다. 나는 이 두 행을 지용시 가운데서 최고의 순간을 보이는 것으로 생각해왔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한국 현대시를 통틀어서도 시적으로는 최고의 시구일 수 있을 것 같다. 이와 같은 경우 그 이유를 이야기하기란 지난하다. 엘리엇이 젊었을 때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좋은 시를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올 여름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전시된 비엔나미술사박물관 소장 합스부르크 왕가 수집 작품들을 둘러보고 제일 마음에 들었던 작품이 책을 읽는 자기의 아들을 그린 렘브란트의 그림이었을 때도 그러했다. 그 화폭에 신운神韻이 감돌듯이 지용의 그 두 행에도 신운이 감돈다고나 할까.    김종철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 윤동주, 「서시」에서 중학교 까까머리 시절에 만난 시입니다. 스무여덟 살에 옥사한 그는, 시인으로서 시를 단 한 번도 쓴 적이 없습니다. 다만 유고 시집이 나오고 난 후 우리는 그를 시인으로 기리고 있습니다. 윤동주의 시는 그래서 더욱 정갈하고 곡진하게 내 마음 속에 와 닿는지 모르겠습니다. 단 한 줄의 표현에 괴로워했던 철없던 시절, 나도 윤동주의 잎새처럼 괴로워했습니다 ‘한 점 부끄럼’ 없었던 까까머리의 문청 시절이 바로 나의 서시입니다.     김종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김춘수, 「꽃」에서 캄캄하고 외로웠던 문청 시절, 부산은 어두웠다. 나는 혼자서 그 어두운 유적지에 남아 있었다. 내 호주머니 속엔 언제나 청산가리, 죽음도 무섭지 않았다. 그때 내게 투사되었던 한 줄기 불빛, 시詩였다. 칼릴 지브란은 속삭였다. “또 다른 여인이 나를 낳아 주지 않으리라.” 그의 음성은 나를 시에 눈뜨게 했다. 칼릴 지브란과 함께 김춘수의 시 「꽃」이 왔다. 「꽃」은 나를 적대적이었던 세상 속으로 부드럽게 연착륙시켰다. ‘세상 사는 법’과 ‘사랑하는 법’까지. 나는 당당하게 사랑하는 여자의 이름까지 부르게 되었다. 끊임없이 스스로 그 이름을 불러보고 각인시켜 보라. 어쨌든 “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김중식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 김수영, 「거대한 뿌리」에서 한갓 변명에 불과하겠지만, 1980년대 중반, 나의 습작시절은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브레히트)였다. 짐승이 인간을 지배한다고 믿고 있었다. 혼의 절창絶唱들인 소월과 미당은 너무 아름다웠으므로 욕이 나왔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아도르노)는 말에 공감하고 있었다. 나의 두개골을 반쪽으로 쪼갠 섬광 같은 시구가 어찌 한둘이겠는가. “날카로운 첫 키스”는 지금까지도 내 삶의 화두다. 그 가운데 “미국놈 좆대강”을 들이민 이유는 내 시의 화두이기 때문이다. 외우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외워지는 글, 남들이 지금껏 하지 못한 말이 시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지금까지 나의 시는 모두 그 구절의 표절이자 변주이다.   김   참 내왼편가슴심장의위치를방탄금속으로엄폐하고나는거울속의내왼편가슴을겨누어권총을발사하였다. 탄환은그의왼편가슴을관통하였으나그의심장은바른편에있다.    ―― 이상, 「오감도 시제15호烏瞰圖 詩第十五號」에서 고등학교 때 아주 두꺼운 시선집에서 이상의 시를 처음 읽었다. 그의 시는 시선집에 수록된 다른 시인들의 시와는 달리 무척이나 강렬했다. 지금까지 읽어본 수많은 국내외의 시 가운데 인상적인 작품들은 적지 않지만, 거울을 소재로 이상이 쓴 시만큼 독특한 느낌을 주는 시는 그리 많지 않다.  거울을 소재로 쓴 시도 그렇지만 나는 이상의 다른 시들도 대부분 꿈의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시를 잘 몰랐던 습작시절, 나는 간밤에 꾼 꿈을 노트에 옮겨두곤 했다. 그때 내가 옮겨둔 내 꿈들은 내 시의 일부가 되어 있다. 다른 사람들은 한갓 백일몽에 불과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꾼 꿈은 내 삶의 절반이다. 내가 꾼 꿈과 내가 쓴 시는 내 삶을 거꾸로 비추는 거울과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인은 꿈꾸는 사람이니, 그가 꾼 꿈들은 시가 아닌가?   김행숙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김소월, 「초혼」에서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소월의 이 구절이 아직까지도 내게 그 진동을 그만두지 않는 것은 산산이 부서진 이름,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 그것은 이름이랄 수도 없는 울림이자 파동 자체로 변용되어 내게 무한한 가능성의 지대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 시쓰기는 사라지는 중이면서 동시에 구성되는 과정인 그러한 상태를 체현하는 특이한 신체가 되는 일이다. 이제 내게 소월의 「초혼」은 절대적인 이별 앞에서 슬픔과 격정의 최대치를 실연하는 연인의 노래가 아니라, ‘하늘과 땅 사이’, 그 너무 넓은 공간 속에서 비껴가는 것, 희박해지는 것, 조밀해지는 것, 그러한 이질적인 흐름과 리듬을 부르는 행위와 연관되어 있다. 하늘과 땅 사이, 그 과도한 넓이를 몸으로 품은 이상한 내부에서 그 내부를 찢으면서 폭발하는 기쁨을 나는 부르고 싶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나태주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    ―― 박목월, 「산이 날 에워싸고」에서 중학교 3학년 때. 열다섯 살 때. 적산가옥으로 남겨진 썰렁한 다다미방 하숙집에서 겨울을 나며 고등학교 입학시험 준비를 하던 때. 함께 하숙하고 있던 동급생으로부터 얼핏 전해들은 한 편의 시, 그리고 그 첫 구절은 나의 어린 영혼을 흔들어주기에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가슴속이 쩌르르했다. 어쩌면 이리도 내 마음 그대로일까. 시란 이렇게 다른 사람 마음을 대신해서 표현해주고 또 그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주는 것인가 보구나. 막연히, 참으로 막연히 나는 이 한 편의 시를 앞에 두고 시인이 되어보고 싶었다. 만약 내가 중학교 시절 이 시를 만나지 않았다면 모르면 몰라도 나는 시인이 되지 않았어도 충분히 좋았을 것이다. 한 사람의 생애를 바꾸어 버린 한 편의 시, 그리고 한 구절. 그 사무치는 풋내기 소년의 감동 앞에 다시 한번 선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희덕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 김수영, 「사랑의 변주곡」에서 김수영의 시를 읽을 때마다 나는 월리스 스티븐즈의 시 「혼돈의 감정가」에 나오는 두 개의 명제를 떠올리게 된다. “A.폭력적 질서는 무질서이다”와 “B.위대한 무질서는 질서이다”라는 명제가 그것이다. 김수영에게 있어서도 폭력적 질서란 낡고 고정된 질서를 의미하고, 위대한 무질서란 무한대의 운동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김수영은 한국 현대시사에서 가장 예민한 혼돈의 감별사이자 창조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시에서 진정한 혼돈의 진원지를 ‘욕망’이라고 말하고 있는 그는 욕망의 검은 입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고 선언한다. 결국 이 구절은 거대한 뿌리, 또는 고요한 사랑의 발견에 도달하는 김수영의 시적 도정을 압축하고  있는 셈이다. 욕망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않고서는 사랑을 발견할 수 없다는 그의 전언은 혼란도가 낮은, 그리하여 폭력적 질서에 갇혀 있는 나의 시들을 화들짝 깨우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노향림 내가 많은 돈이 되어서 선량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맘놓고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주리니     ―― 김종삼, 「미사에 참석한 이중섭 씨」에서 김종삼 시인은 한 시대를 불행하게 살다 간 시인이었다. 가난과 알코올 중독으로 시달리다 끝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시를 발표할 무렵도 시인은 늘 소주병을 뒷주머니에 넣고 조선일보 뒷골목 지금은 없어진 아리스 다방에 나타나곤 했다. 차를 시키진 않고 컵을 달래서 소주를 마시곤 했다. 시는 이렇게 아름답고 황홀하게 읽혀도 과음에서 오는 자신의 육신의 망가짐을 미처 알지 못했을까. 그토록 버티기 어려운 환경에서 이처럼 놀라운 시를 쓰다니, 나는 이 시를 읽는 순간 번쩍 정신이 들었다. 병들고 가진 것 없는 자의 시혜를 말하기 위해 불행하게 살다간 이중섭의 혼을 빌어 시인은 말하고 있었다. 선택하지 않아도 불행은 예고되듯이 시인은 끝내 술로 세상을 떠났다. 육신의 스러짐을 알고도 오히려 시로써 우리에게 시혜를 베풀고자 했을까.   마경덕 집은 벽 속의 곳간에서 제 나이를 꺼내 먹으며 늙어간다 집은 저 벽을 부수고 나와야 한다     ―― 손순미, 「담벼락 속에 집이 있다」에서 집은 담쟁이덩굴 속에 갇혀 있다. 고집이 센 덩굴은 스스로 손을 풀지 않는다. 덩굴은 담벼락을 옥죄며 더 깊이 뿌리를 묻는다. 나는 그때 그 담쟁이 속에 갇혀 있었다. 담쟁이는 날로 그늘을 넓히고 오래된 몸은 자주 삐걱거렸다. 낙심이란 마음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바닥을 친 마음은 좀처럼 일어설 수 없었다. 나를 포기하고 나니 어느 날 그늘이 되어 있었다. 하릴없이 나이를 꺼내 먹으며 늙어 가는 그때 이 시구詩句가 내게 왔다. 벽을 부수고 나오라고 했다. 덩굴을 걷어내는 일은 벽을 부수는 일, 생각을 깨뜨리지 않고는 나를 벗어날 수 없었다. 나를 붙잡고 늘어지던 덩굴손의 마디가 툭툭 끊어지고 벽 속에서 새로운 내가 태어났다. 나는 오랫동안 나에게 갇혀 있었다.    마종하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    ―― 이육사, 「절정」에서 뼈를 추리자니 한 뼈로 순수한(!) 저항 시인 이육사를 떠올렸는데, 예수보다 짧게 주기의 「절정」을 밝힌 그와 더불어, 썩지 않은 육질로도 발라 일컫자면 유약한 김영랑의 “찬란한 슬픔”이 김현승의 견고한 “절대고독”으로, 박노해의 유연한 “강철의 풀잎”으로 맥을 잇는 것이다. 자리끼가 얼어붙는 오막살이에서 “강철로 된 무지개”는 섬광처럼 번개치는 작렬로 미친 듯이 나를 솟구치게 하였다. 그리하여 고1 때 나는 투쟁의 앞장에서 모든 부정한 봄(3·15)을 「절정」의 꽃(4·19) “무지개”로 터뜨렸던 것이다. 절대로 자랑일 수 없는 기름 뺀 당위로써.그 시대의 친일파나 다름없는 낭만적 낭인들에게 “시인이 되기 전에 인간이 되라” 이른 유치환의 촌철살인도 자못 서릿발 같은 결기가 서린 “소리 없는 아우성”의 「깃발」로서, 그들의 핏맥은 오늘도 단단히 눈부신 다리로 질러 우리를 둥글게 감싸고 있다.    맹문재 우리 세 식구의 밥줄을 쥐고 있는 사장님은  나의 하늘이다    ―― 박노해, 「하늘」에서 나는 아직도 ‘밥줄’이라는 말에 가슴이 아리다. 밥줄 때문에 자존심을 버리고 얼마나 세상 앞에서 허리를 굽실거렸던가. 내가 박노해의 시집 『노동의 새벽』에 들어 있는 시들에 감동한 것도,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다가 눈물을 흘리는 것도, 해진 신발 같은 인상으로 구걸하는 사람들을 쉽게 지나치지 못하는 것도, 바닥에 드러누워 농성하는 노동자들을 옹호하는 것도, 밥을 남기지 않고 악착같이 먹는 것도 밥줄 때문이다. 내가 문학의 지향점으로 삼는 근거이기도 하다. 밥줄을 쥐려고 몸부림쳤던 순간들, 나는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밥줄의 운명에 당당히 맞서자. 밥줄을 쥐지 못한 사람들을 품자.    문인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서 새떼는 계절풍, 바람에게서 몸을 배웠다. 새떼는 일체다. 새떼 속의 새는 그 한 마리 한 마리가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공중에 거구를 두는 일군의 세포, 세포다. 그것이 아니라면 군무는 없다. 산 너머 바다 건너 확신의 땅, 거기로 가는 길도 없다. 새떼는 바람을 입는다.어깨에 힘 빼고, 혀 꼬부리지도 않고 그저 한 마디 툭, 던진 이 말이 자주 날 들어올리곤 했다. 나는 늘 맥없이 그 자리에 다시 주저앉으면서도 욕망은 왈칵, 저 새떼의 일원이었다. 그야말로 서러운, 저 ‘새떼에게로의 망명’이었다. 그렇게 곧 그 바닥을 뜨고 싶었다. 이 시를 낳게 한 80년대 상황에 관해선 나는 할 말 없다. 다만, 시인이 발견한 이 한 마디 말, 그 힘이 굉장해서 놀라웠다. 늦깎이, 내가 절망하고 분발한 첫 구절이다.    문정희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 서정주,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에서 불행히도 나에게 “벼락치듯 나를 전율시킨 최고의 시구”는 없다. 나는 너무 어린 시절부터 시 애호가가 아니라 시 창조자가 되어버렸다. 눈부신 시구를 보면 감동과 전율보다는 질투에 온 입술이 파래지기 일쑤였다.  10대 때는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라는 발레리의 시구와 함께 미당의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라는 시구를 좋아했다. 그러나 후에 보니 미당에게는 황홀한 시구가 너무 많았다. “문열어라 꽃아”(「꽃밭의 독백」)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문둥이」) 등…… 나는 오늘도 기다린다. 내가 나를 전율시킬 한 줄의 시구를……    문태준 관 뚜껑을 미는 힘으로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 이성복, 「아주 흐린 날의 기억」에서 이성복 시인의 시집 『그 여름의 끝』이 출간된 1990년 5월에 나는 대학교 2학년이었다. 내 기억으론 이 시집을 몇 차례 산 것 같다. 나눠준 것도 있고 분실한 것도 있는데, 내가 지금 소중하게 갖고 있는 시집은 휴가를 나왔다 화천에 있는 군부대로 복귀하면서 산 것이다. 동보서적에서 구입한 것으로 되어 있다. 나는 이 시집을 사서 군복 속에 감춰 넣고 부대 위병소를 통과했던 것 같다. 위병소에서 물품 검사를 했었고 또 시집 같은 것을 부대로 갖고 들어가기가 그때는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시집을 또 군복 속에 감춰 넣어 주로 부대의 재래식 화장실에서 즐겨 읽었다. 검열을 피하느라 이 시집을 땅속에 몇 날을 묻어두기도 했다. 여름장마가 지나가던 때여서 나중에 땅을 열고 꺼내보니 흙물이 들었다. (사실 이 시집은 검열을 피해야 할 책은 아니었는데 나는 어쨌든 노루처럼 겁이 있었다.)  실탄사격을 하고 와서도 읽고, 행군을 마치고 와서도 읽었다. 강한 군대에 살면서 나는 여린 속잎 같은 이 시집을 꺼내 읽었다. 시 「아주 흐린 날의 기억」은 짧다. “새들은 무리지어 지나가면서 이곳을 무덤으로 덮는다//관 뚜껑을 미는 힘으로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이 시구를 읽으면서 나는 널 안에 매장된 나를 보았다. 막연하게 슬픔에 기대게 되었다. 군대 가서 나는 시를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곳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시집을 읽다가 이 일구를 만났다.    박남철 “아, 참, 그리고 선생님, 벌써 한 두어 달 됐네요? 저, 요즘 회사 못 나가고 있습니다.” “왜에?” “저, 위암 수술했습니다.” “요일아…… 너 지금 ‘위염’이라고 그랬니, ‘위암’이라고 그랬니?” “선생님, 저 ‘위암’ 수술했습니다.” “……”   ―― 2007년 8월 31일 저녁; 정병근 시인의 근황 때문에 해본 전화에서                                           흘러나온 김요일 시인의 육성시 갑자기, 눈물이 비오듯이 흘러내려서, 더 이상 말을 잇지도 못했었다. 어머님 타계 소식을 두어 달이나 지난 뒤에 법원에서 날아온 우편물을 통해서 알게 되었을 때도 눈물은 나오지도 않았었건만…… 지난 6월에 있었던 ‘시작문학상’ 뒤풀이에, 뒤늦게 참석해서는, 갑자기 뒤에서 나를 껴안고 볼을 부벼대면서, 처음으로, “사랑의 스킨십”을 다 표현해주었던 녀석이…… 고은경 시인은 《문학과사회》로 등단한 지 두어 달만에 위를 들어내서 나를 절망케 해주더니, 너는 이제 《세계의문학》으로 등단한 지 20년이 다 되어가니, 또 나를 절망케 해주는구나……     박제천 오오 견디련다  차고 올연兀然히 슬픔도 꿈도 없이    ―― 정지용, 「장수산」에서 한때 유엔 고지 밑에서 군생활을 하였다. 산으로 둘러싸여서 하늘이 손바닥만큼 보이는 분지였다. 어느 날 밤 동초를 서다가 정지용의 「장수산」이 떠올랐다. 그리고 누군가 내가 말해주듯 “오오 견디련다/차고 올연히 슬픔도 꿈도 없이”가 들려왔다. 그때나 이제나 시를 외지 못하는데 그냥 탄식처럼 내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아마도 중학생 무렵에 읽었던 시, 그때는 그냥 그저 덤덤한 구절이 내 가슴 어디에 잠복되었다가 나타난 것이다. 이 시를 쓸 무렵의 그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피폐했다 한다. 나 역시 그러했다. 그리고 40년 뒤, 또 이 구절이 떠오른다. 스무 살 무렵에는 비감하였다면, 늙마의 이제는 정신이 백골처럼 무심하여선가, 그냥 그저 무심한 내 자신에게 일러주는 말이 되었다.   박주택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서 백석의 시는 아련한 그리움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고향 같기도 하고 꿈 속 같기도 하고 태반 같기도 한 백석 시를 읽고 있노라면 아득한 시간의 수염을 만지며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이 시는 아내도 없고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부모며 동생들과도 떨어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을 헤매이다 가슴이 메여오고 눈에 뜨거운 것이 괴여 오는 것을 적막하면서도 낮게 노래한다. 크고 높은 것을 생각하며 눈을 맞는 정한 갈매나무는 그러나 나의 가슴에 자라며 쌀랑쌀랑 생애의 문창을 친다.    박형준 선량한 아버지와 볏짚단 같은 어머니, 티밥같이 웃는 누이와 함께 거기서 너는 살았다    ―― 이성복, 「모래내·1978년」에서 내가 이성복의 시를 처음 읽은 것은 고등학교 1학년(1982) 겨울이었다. 어느 날 인천 대한서림에서 계간 《세계의 문학》을 한 권 샀다. 페이지를 넘기다 김수영이 자기의 자화상 밑에 “시는 나의 닻(錨)이다’라고 써놓은 문장을 보고 석쇠에 올려진 생선구이처럼 온몸이 막대기로 관통당한 느낌 때문이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김수영의 자화상과 그의 단 한 문장에 이끌려 제2회 김수영문학상 수상자인 이성복의 시를 읽기 시작했다.  그 뒤로 나는 김수영 때문에 이성복의 시에 빠졌고, 이성복이 김수영의 이름으로 상을 받은 덕분에 김수영의 시를 탐독했다. 한동안 《세계의 문학》에 실린 이성복의 대여섯 편의 시를 뜯어내 호치키스로 찍어 수업시간에도 읽고 집에 와서도 읽었다. 그리고 나는 위의 시구절을 통해 내 가족 이야기를 시로 쓸 수 있게 되었다.   박후기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純粹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傷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 박남수, 「새」에서 일곱 살, 글을 깨치면서 가장 먼저 읽은 시가 박남수의 「새」라는 작품이다. 문학청년이었던 큰형님이 솜씨 좋게 그림까지 곁들여 마루에 떡하니 걸어놓았으니,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그냥 외워져 버린 것이다. ‘나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시원찮은 발음으로 종알종알!  다시, 「새」를 생각한다. 한 덩이 납의 마음을 가졌으면서도, 늘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 역할에 익숙해져 있는 나를 들여다보면, 참 우습다. 사랑이 떠나갔다. 납의 마음을 버리는 순간, 나는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로 남겨진다.    반칠환 비비새가 혼자서/앉아 있었다.  //(중략) 한참을 걸어가다/되돌아봐도  그 때까지 혼자서/앉아 있었다.    ―― 박두진, 「돌아오는 길」에서 엄마 품에서 떨어진 꿩에병아리 같던 때였다. 귀 기울이면 달맞이꽃 씨앗 터지는 소리가 들려오던 적막한 산골이었다. 해종일 외딴집 홀로 지키다 집안에 뒹굴던 형아들 초등학교 국어책을 읽던 일곱 살 무렵이었다. “마을에서도/숲에서도/멀리 떨어진/논벌로 지나간/전봇줄 위에 //혼자서 동그마니” 앉아 있던 ‘비비새’가 내 가슴으로 날아왔다. 젖은 손으로 피복이 벗겨진 전깃줄을 만진 듯하였다. 어린 속으로도 그렁그렁하여 중얼거렸다. ‘비비새도 혼자서 앉아 있구나.’ 머리 굵으며 나는 생각했다. ‘비비새가 혼자 있는 걸 아는 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시인이 되었다.    서규정 너는 살고 나는 죽고  이것으로 이번 생에서 우리는 비겼다    ―― 최영철, 「아버지와 아들」에서 초등학교 무렵 우연히 읽은 《아리랑》이란 대중잡지에서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란 시구는 어린 심중에 말뜻은 몰라도 그 한 줄은 스물여덟 처음 시를 쓰기 시작할 때까지 주문처럼 따라다녔다. 현실은 늘 불안하고 불만스럽고 불순한 것처럼 느껴졌다. 시인들의 공적지평이란 생활의 역경과 고통을 주변부에 두었을 땐 중창단의 합창처럼 한번 부르고 잊어버리는 일이 아니라 끝까지 각인인 것이다. “너는 살고/나는 죽고//이것으로 이번 생에서 우리는 비겼다” 윌슨병 앓는 오십대 아버지가 윌슨병 앓는 아들의 부탁을 받고 아들을 목졸라 죽였다는 처연한 단언이다. 위 시구가 아찔하고 아리고 섬뜩한 것은, 당뇨와 고혈압 거기다 신경계 질병을 앓는 팔십이 훌쩍 넘은 어미를 두고, 역시 수발을 들어줄 사람 하나 없이 당뇨와 고혈압을 안고 있는 내가 잘못되어 먼저 떠난다면…… 가족을 베고 황산벌로 나서는 계백처럼 나는 틀림없이 분기탱천하겠지만, 하여 빛나는 시구는 아포리즘적인 사유를 내포하기도 하지만 결국 삶은 견성이고 발견인 것이다.    성찬경 백금처럼 빛나는 노년을 살자.    ―― 구상, 「노경老境」에서 한국 현대시에 명시 명구도 많지만 문자 그대로 나를 벼락치듯 전율시키는 시구는 바로 이 구절이다. 이 시구를 처음 보았을 때도 그러하였지만 내가 노년이 된 지금에 와서는 더욱 그러하다.백금은 무게가 나가는 귀금속 중의 귀금속이다. 황금보다 더 귀하다. 그러나 그 빛은 황금처럼 요란하지 않고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 흰색이다. 노년의 은유로 이보다 더 들어맞는 것은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소리 높이 읊으며 아로새기는 것이다. 그렇다. 백금처럼 빛나는 노년을 살자!   손세실리아 여자는 함께 있으면 계집이 되고 헤어지면 어머니가 된다    ―― 정진규, 「이별」에서 나는 아직 이보다 슬픈 시구를 본 적이 없다. 한때, 누군가의 ‘계집’이었으나 이제는 헤어져 ‘어머니’로 돌아간 ‘계집’의 비애가 눈에 밟히기 때문이다. 여자의 입장에서 볼 때 시인의 별사別辭는 매정하기도 뭉클하기도 하다. ‘어머니’이기보다는 ‘계집’으로 남고 싶은 여자의 마지막 염원마저 꺾어버리는 단호한 이별통보인 까닭이다. 함께 있을 때 계집일지라도, 헤어지면 그 즉시 어머니가 되는 게 여자의 몸이라고 남자는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며 위안을 삼고 싶은 건지도 모를 일이겠다. 남자와 여자는 이렇게 서로 다르다. 여하튼, 살아오면서 지금껏 ‘계집’일 뻔했던 시절 나라고 왜 없었겠는가. 이 한 줄 시구로 말미암아 ‘계집’과 ‘어머니’ 중 후자를 택했을 뿐.    손현숙 그 누구도, 하느님도 따로 한 봉지 챙겨 온전히 갖지 못한 하루가 갔다    ―― 문인수, 「최첨단」에서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일 뿐이다. 어제의 당신이 오늘의 당신이 아니듯이,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원이라는 말. 변치 않겠다는 맹세. 이런 것들에 모든 것을 걸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지나간다. 시간은 누구의 울 안에도 갇히는 법이 없다. 달이 해를 따라가듯 언제나 시작 안에는 끝이 존재하는 거다.  봐라! 시인은 하느님도 하루는 온전히 챙겨 갖지 못한다고 일갈한다. 그러나 그 하루는 목숨이 끝나지 않는 한은 또다시 싹트는 미물, 송곳 끝 같은 느낌으로 가고, 또 온다. 가난도, 부귀도, 사랑도. 오랜 백수白手가 빚어낸 시간의 철학! 해일이다. 지진이다. 쓰나미다.       송승환 싱그러운 거목巨木들 언덕은 언제나 천천히 가고 있었다 나는 누구나 한번 가는 길을 어슬렁어슬렁 가고 있었다   ―― 김종삼, 「풍경」에서 등단 전에 나에게 주어진 화두는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있는 그대로의 사물의 이면에 내가 말하고자 하는 복합적 의미를 은연중에 담아내고 싶었다. 그 화두가 제기된 것은 해안의 저녁 노을 때문이다. 노을은 왜 우리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으면서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안겨주는가, 라는 의문이 새삼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나는, 진술과 묘사의 구분을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노을의 아름다움과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다시 읽은 김종삼의 시는 내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내가 써야 할 시의 스타일과 그  방향성을 제시해주었다.    송재학 새벽에 쫓아나가 빈 거리를 다 찾아도  그리운 것은 문이 되어 닫혀 있어라.   ―― 고은, 「작은 노래」에서 스무 살 미만의 고 3짜리가 이 구절을 섬광으로 문득 만났다. 만상은 물질이다. 개념과 추상을 포함해서 모든 것이, 만지고 구부리고 맛볼 수 있는 구체적인 물질이 된 것은 그 이후. 아마 처음 내 머리의 골통 물질에 들어왔던 희미한 자각은 범신론이거나 정령주의 주변이었을 것이다. 아니다, 라고 생각한 것은 고은의 시선집 『부활』을 몇 번 거친 후였다. 범신론이나 정령주의는 신비적 세계관, 대상을 만지고 씹어먹고 뱃속에 오래 삼켰다가 다시 똥을 누려면 시적 대상은 지척지간 친밀한 물질들이어야 하는 것이다. 뻔뻔한 물질들! 비의 속에 자신을 자꾸 숨기는 시/물질은 철면피하기도 하다.    신달자 어느날에사 어둡고 아득한 바위에  절로 임과 하늘이 비치리오    ―― 박목월, 「임」에서 천둥의 빗금이 내 가슴을 쫙 후비듯 금을 긋는 싯구는 결코 한 시인이나 한 구절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내 젊은날에 속절없이 시가 부풀어 올라 하루살이도 푹푹 빠지기만 했던 앳되고 물렀던 내 가슴에 쾅하고 천둥이 내려치던 시들 때문에 나는 각혈을 하지 않고서도 젊은날을 잘 보냈는지 모른다. 그 많은 시구 중에 만난 박목월의 시 「임」의 마지막 구절에서 나는 혼절할 뻔하였다. 내가 상상할 수 없었던 그것은 내가 무슨 백일기도 끝에도 닿지 못할 것 같은 선명한 이미지요, 손쉽게 가슴에 와 닿을 수 있는 무거운 의미의 밀착이었다. 언제 나는 저기에 닿을 수 있나! 그 충격은 지금도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고 그대로 살아 있다.   신대철 어서 너는 오너라    ―― 박두진, 「어서 너는 오너라」에서 어떤 기운이 갑자기 핏속을 흔들 때 나는 문득 시성을 느낀다. 그 시성은 물론 기발한 시구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억누를 길 없는 죄악에 몸부림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에게서도 온다. 이젠 차가운 대기처럼 온몸을 스쳐가는 시 전체에 집중하지만 그 순간이 오면 끝없는 갈망과 끝없는 결핍이 하나로 뭉쳐져 나는 잠시 정신의 균형을 되찾는다. 사는 게 무엇인지, 신념이 무엇인지 모르던 시절, 나는 데마(디모데후서 4:10 참고)처럼 세상으로 나가 보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오래 방황했다. 방황하는 곳이 그 어디든 밤마다 허공에서 푸른 목소리가 울려왔다. 이곳도 저곳도 아닌 길모퉁이에서 불안스레 듣던, 저 맑고 뜨겁고 목 타는 울림, “어서 너는 오너라”.    심재휘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에서 윤동주 시의 이 구절은 나에게 벼락처럼 왔다고 할 수 없다. 그의 시는 평범했고 안이했다.그리고 나는 시인이 되었다. 시를 쓰는 일은 시를 읽는 일과 같거나 달랐다. 가장 고통스럽게 정직할 때 최고의 절창이 나온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무엇이 부끄러운 일인지 모르는 세상에서 진짜 부끄러워할 수 있는 사소한 능력은 시 쓰기의 전부가 되었다.    “최후의 나”를 만나본 적이 있는가?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를 해 본 적이 있는가? 언젠가부터 이 너무나 평범한 구절이 나에게 벼락이 되었고, 시를 쓸 때마다 갈수록 더 강한 벼락을 치고 한다. 잘 보면 ‘부끄러운’이라는 말에 피가 비친다.     안도현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사랑하기 때문에 푹푹 눈이 내린다는, 이 말도 안 되는 구절 때문에 나는 백석을 좋아한다. 분명히 문장구조의 인과관계를 무시하는 충돌이거나 모순이다. 연애의 달인답다. 여기에 넘어가지 않을 여자는 없을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해서 이 우주에 눈이 내린다니! 그리하여 나는 가난하고, 너는 아름답다는 단순한 형용조차 찬란해진다. 첫눈이 내리는 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말은 30년대에 이미 죽은 문장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연인에게 산골로 가서 살자고 하면서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줄 아는 사내는 백석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듯하다.    오탁번 눈보라는 꿀벌 떼처럼  닝닝거리고 설레는데,  어느 마을에서는 홍역紅疫이 척촉??처럼 난만爛漫하다    ―― 정지용, 「홍역」에서 정지용이야말로 한국 현대시사의 본문本文이라고 할 수 있다. 시를 시답잖게 읽는 시러배들이야 알 수 없겠지만, 우리 말의 영혼에 가슴 저려본 이는 아무도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내가 현대시를 전공하면서 딱 맞닥뜨린 시인이 정지용인데 그것은 축복이면서 동시에 형벌과도 같았다. 와 으로 벼락치듯 섬광을 일으키는 언어의 막강한 힘은 쓰나미와도 같고 화산과도 같고, 내 운명의 바늘을 홱 돌려놓고는 무명無明 저편에 숨어서 ‘용용 죽겠지’ 나를 울리는 시의 여신의 잉걸불보다 뜨거운 젖꼭지와도 같다.    유안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김소월, 「초혼」에서 시인 아닌 아무것도 안되겠다고 스스로 맹세했던 중학생 적에는, 하교길 오뉴월 땡볕을 이고 걸으면서도 구르몽의 시구였던가 “시몽, 너는 좋아하니 낙엽 밟는 소리를” 이 구절이 알사탕처럼 입안에 굴러다니곤 했는데, 대전시를 가로지르는 목척교를 건널 때는 영락없이 입 속에서 굴러다니는 구절은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이 흐르고 우리네 사랑도 흐르네”였다고 기억되는데― 그 맹목과 무지와 순백의 백지 같은 어느 시점에서, 어떻게 해서 소월의 「초혼招魂」과 마주치게 되었던가? 분명하게 기억되진 않지만, 소월의 「산유화」에서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를 두고 계절의 순서가 바뀐 까닭을 질문했다가 문예반 선생님께 망신을 당하고, 「산」이라는 시에서 “산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에서 “산새도”의 “도”와, 왜 하필 “오리나무”였을까를 혼자 곰곰 생각하던 때와 거의 같은 때였을라?! 소월에 미쳤던 여중학생은 「초혼」을 만나자마자 까무라칠 것만 같았지. 부르다가 죽어도 좋을 이름 하나를 갖고 싶었고, 나에게도 내 이름을 부르다 죽을 누군가가 있었으면 소원했지.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붉은 피가 솟구치는 이 뜨거운 한 구절로 시인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기로 혼자서 약속하고 굳게굳게 맹세했는데― 성적이 올라가자 스스로 그 맹세를 깨뜨려버렸지만.    유영금 그러나 그보다는 차라리 빨리 나를 죽여주십시오.  ―― 최승자, 「오 모든 것이 끝났으면」에서  내가 나를!!, 찔러 죽이거나 목을 매달아 죽이거나 청산가리를 먹여 죽이거나 가스를 마시게 해 죽이거나 총으로 두개골을 쏴 죽이거나 달리는 열차 바퀴에 던져 죽이거나 고층건물 위에서 떨어뜨려 죽이거나 손목의 동맥을 잘라 죽이거나 신나를 뿌려 태워 죽이거나… 그 중 빠르게 죽여 버릴 수 있는 최고의 방법 선택 때문에 분열에 시달리던 오래 전의 내게 최승자의 시 “그러나 그보다는 차라리/빨리 나를 죽여주십시오”는 내가 죽음에 성공한 것처럼 황홀했다. 실패에 짓밟혀 구차스러운 숨을 끌고 가고 있지만 벼락같이 섬뜩한 이 시구는, 눈을 떠야만 하는 매일 아침의 나를 희망의 도가니로 밀어 넣는다. 누군가 나를 죽여 버리는 것이 더 빠르다.            유홍준 무수한 정적은 와글와글거린다    ―― 문인수, 「무수한 정적은 와글와글거린다」에서 “슬픔은 물로 된 불인 것 같다”고 할 무렵의 문인수는 한동안 내 텍스트였다. 글쎄 그런 시절이 있었다. 문인수의 『뿔』이라고 하는 시집을 나는 나달나달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내 안목이 그랬다. 그러니까 아직 늦깎이 시인 문인수가 뜨기(?) 전의 일이었다. 믿지 않으실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문인수는 나와 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말로는 할 수 없는 어떤 것, 묘한 정서적 일체감이었다. 하여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좌우지간 쓸데없는 말 필요 없고, 언제 시인과 매운 고추 다대기 왕창 푼 순대국밥이나 한 그릇 했으면 좋겠다. 무수한 정적은 와글와글거리는 것처럼, 슬픔은 물로 된 불인 것처럼, 겸상을 해 보았는데 문인수와 나에게 짜고 독하고 매운 것은 속이 다 시원한 것이다. 역설이다. 하여간……    이가림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 정지용, 「고향」에서 지금으로부터 45~6년 전, 그러니까 내가 전주고교에 다니던 시절, 국어를 가르치시던 신석정 선생으로부터 처음으로 정지용이라는 이름을 듣게 되었다. 당시 월북시인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는 탓에, 정○○으로 부르며 금기시했음에도, 석정 선생께서는 수업시간 중에 「유리창」,「고향」,「바다」 같은 작품을 받아쓰게 했다. 특히 「고향」에 나오는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이란 구절은 그때 이래 “바람 먹고 구름똥 싸는” 방랑아의 꿈을 늘 내 가슴에 심어주는 벅찬 출발의 신호가 되었다. 내가 프랑스 문학을 공부한답시고 파리를 어슬렁거린 것도, 최소한 5년 주기로 이국땅을 떠돌아다니게 되는 것도 다 이런 낭만적 역마살의 노래를 좋아한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 번 고향을 떠난 자는 항상 이곳이 아닌 저 먼 미지의 나라에 마음을 빼앗기기 마련인가 보다.    이건청 울음이 타는 가을 강    ―― 박재삼, 「울음이 타는 가을 강」에서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은 박재삼의 시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의 제목이 되어 있기도 하고 곡진하기 이를 데 없는 절창,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구절이기도 하다. 시를 읽다가 보면 공들여 힘들게 쓴 흔적이 나타나 있는 시가 있기도 하고, 시인의 내면에서 충분히 무르익어 저절로 흘러나온 듯하면서도 치밀한 구조를 이룬 시를 만날 수도 있다. 나는 물론, 뒤의 경우의 시를 훨씬 윗질로 보는 사람이다. 박재삼의 시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은 자신의 심적 정황을 ‘저물녘 노을 속으로 흘러가는 강물’로 치환하면서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으로 슬픔의 깊이를 인식해내고 있으며, “첫사랑 산골물소리”가 “사랑 끝 울음”을 거쳐 “미칠 일 하나로 흘러 바다”에 이르는 정서의 고양 과정을 치밀하게 끌어 담고 있다. 이렇게, 격정의 정서를 모두 포용하고 있으면서도 ‘소리 죽은 가을 강’이 되어 흘러간다.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은 그런 심회의 절정에서 만나게 되는 진한 감동의 언어이다.   이근배 나는 지낸 밤 꿈속의 네 눈썹이 무거워 그걸로 여기 한 채의 절간을 지어 두고 가려 하느니    ―― 서정주, 「기인 여행가」에서 영혼의 작은 숨결도 그려낼 수 있는 내 어머니의 나랏말씀은 어떻게 짚어 내야 시가 되는가? 이 물음 앞에서 나는 서정주 선생을 먼저 머리에 떠올린다. 해묵은 것이려니 하고 오래 덮어두었다가도 여기저기 자주 들춰지는 미당 시에 눈이 가면 내 머릿속은 회오리바람이 분다. 첩첩한 미당 시의 산맥 어디를 기웃거려도 마치 신들린 듯이 쏟아내는 낱말 하나 시구 하나에 내가 가진 말들은 삽시간에 꼬리를 감춘다.  미당이 시 속에 감추고 있는 ‘눈썹’은 우리 시문학사의 화두가 되고 있다. 「수대동시」(1941) 「동천」(1966) 「추석」(1966) 등에 나오는 ‘눈썹’의 절정은 아무래도 이 「기인 여행가」에서 보게 된다. 미당에게 있어 ‘눈썹’은 우주만큼이나 크고 영원한 사랑의 표상이다. 꿈 속에서 만난 ‘눈썹’으로 절간을 세웠으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향을 피우고 사랑의 공양을 해야 하는 걸까? 나는 지금 그 절간의 풍경소리가 자꾸 귀속에서 울리는 것을 듣고 있다.    이대흠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 이성복, 「그날」에서 “내가 없었을 때 세상은 짐승들의 것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도 세상은 짐승들의 것이었다. 오래도록 세상은 젓갈처럼 깊어가고 나는 아무런 문을 열지 않았다. 나는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고, 한 나라를 이루지도 못했다. 지네인 듯 발이 많은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고, 처음보다 부피만 더 커진 몸뚱이로 나는 외길에 서 있”었다. (졸시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에서 인용) 짐승들은 제 입으로 짐승이라 하지 않았고, 피 묻은 입을 다른 피로 닦았다. 미친 자들이 지배하였으므로 미치지 않는 자가 미친 것처럼 보였던 1980년대. 극약을 가지고 다녔지만, 순교할 기회조차 없었다. 미친개가 미친개를 물어 모두 미쳐갔던,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던, 이동순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상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 백석, 「모닥불」에서 1980년대 초반, 그 엄혹하던 시절에 나는 이름이 낯선 한 시인의 작품에 푹 빠져 있었다. 백석白石, 우리 문학사에서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특이한 존재였다. 하지만 뒤에 알고 보니 이미 1930년대의 찬란한 별이었다. 분단의 폭풍 속에서 가랑잎처럼 흩어진 그분의 작품을 하나 둘 모으고 정리하던 중 시 「모닥불」과 만나게 되었는데, 내 가슴 속은 그야말로 번개가 치는 듯 수백만 볼트에 감전이 된 듯 무서운 전율이 왔다. 모닥불 속에서 우리 민족사의 상처와 불구성을 읽어내다니…… 나는 미친 듯이 백석의 작품을 모았고, 마침내 분단 이후 최초로 한 권의 전집을 발간하였다. 이제 그분의 문학은 우리 문학사에서 당당한 위상으로 복원되었다. 백석과의 만남은 나의 감격이었고, 나의 행운이었으며, 이젠 나의 자부심으로 살아 있다.    이병률 나는 이렇게 한가하고 게으르고 그러면서 목숨이라든가 인생이라든가 하는 것을 정말 사랑할 줄 아는  그 오래고 깊은 마음들이 참으로 좋고 우러러진다    ―― 백석, 「조당?塘에서」에서 이상하다. 아직도 따뜻한 것에 연연해함은, 밋밋하게 편편하게 살아도 살아지는 세상에 자꾸 목 뒤에 뭔가가 켕긴 것이 있는 사람처럼 따뜻한 것을 찾아 자꾸 뒤돌아보게 됨은 부끄럽기조차 하다. 그래도 이 한 줄을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다 보면 나아진다. 목욕이라도 한 기분이 된다. 삶을, 인생을 저리 순연하게 ‘우러러’볼 수 있다니 백석은 참 인간으로서도 잘 살았다 싶다. 이 땅의 전부를 담고 있으며 한 생의 궁극을 집어낸 이 한없이 느리고 미쁘며 태연하고도 갸륵한 한 줄이여. 나는 이 한 줄이 참으로 애틋하고 뜨겁다.     이선영 가을 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 버렸다.   ―― 김수영, 「거미」에서 ‘바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기에, 또한 얼마나 절절하기에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그러다 ‘까맣게 몸이 타 버’린 김수영의 ‘거미’는 이후 내 뇌리에 각인된 하나의 강렬한 이미지였다. 본시 거미에 대해 생명으로서의 한치의 외경심이나 일말의 연민조차 가져본 적이 없던 나에게 김수영의 ‘거미’는 그대로 섬광 같은 시인의 실존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시인의 길을 가려던 나의 실존에 대한 섬뜩한 예감 같은 것이기도 했다.    이성부 먼 길에 올 제  호을로 되어 외로울 제  푸라타나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 김현승, 「푸라타나스」에서 열여섯 살의 여드름 투성이였던 소년에게 이 시구는 충격이라기보다 큰 그리움의 하나로 다가왔다. 그때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먼 길’과 ‘외로움’의 실체가 눈에 선하게 잡혀지는 것 같았다. 집을 떠나 어디론가로 가고 싶다는 여행에의 욕망, 그 여로에서 터득하게 될 고독의 본질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이런 생각들 때문에 나는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는데, 세계와 삶에 대한 어떤 각성이 비로소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정지된 나무가 하나의 영혼으로, 그리고 한 고독한 인간을 고독하지 않게 위무하는 손길로 되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수명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에게 갈 수 없소    ―― 이상, 「꽃나무」에서 이것을 읽었을 때, 시가 무엇인지 알았던 것 같다. 욕망과 함께 욕망의 불가능함을 말이다. 시는 이 불가능으로 시작된다.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는 또 다른 자아일까, 타자일까. 이상은 양자가 하나가 되는 어느 지점이 시의 뇌관임을 보여준다. 시인들은 안에, 혹은 밖에 꽃나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같은 이야기겠지만. 그곳에 “갈 수 없”다는 것, 거리감을 직관하는 것이 시이다. 그것을 채우는 것이 시이고, 또 내버려두는 것이 시이다. 나는 시의 이러한 운명을 사랑한다. 시는 “갈 수 없”음으로 도달하기 때문이다. 관통하기 때문이다.    이수익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 서정주, 「화사花蛇」에서 서정주 초기 시편의 휘황한 원초적 생명력은 나의 10대 문학소년 시절을 뜨거운 피로 세례하였다. 그 중에서도 원죄의 달콤한 유혹과 관능을 징그러운 배암으로 육화시킨 「화사花蛇」는 언제나 그 절정에서 나를 숨가쁘게 조여 왔다. 내 몸 안의 피의 유전자와 상통하는 ‘어떤 무엇’이 있었음이 틀림없었으리라. 특히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라는 구절에 이르면 나는 늘 숨막히는 희열을 전신으로 감싸 안곤 했다. 그런 내면적 뜨거움이 이후 나의 시에서 피, 절정, 죽음, 황홀, 비애 등의 언어로 채색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승하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 서정주, 「자화상」에서 미당은 23세 되던 해 가을에 「자화상」을 썼다. 나는 바로 그 나이에 미당 선생의 제자가 되어 있었다. 수업 시간에 스승은 호되게 꾸중을 하셨다. “이건 시가 아닐세!”라고. “이런 시는 앞으로 쓰지 말게!”라고. 스승의 시 수십 편을 이마 위에 얹고 있던 나는 스승의 몰인정에 학교 앞 주점 왕개미집에서 오랜 날을 살았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전시 체제로 바뀌어 가던 1937년, 스승은 죄의식에 사로잡혀 간질병 환자인 양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나 역시도 1982, 83년 그 언저리에서 분신자살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치를 떨고 있었다. 시대가 참으로 어두웠기에, 스승의 말마따나,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을 남몰래 꿈꾸며 시를 쓰고 있었다. 스승은 말더듬이 환자였던 나의 자화상인 「화가 뭉크와 함께」를 등단작으로 뽑아주셨다. 스승의 파안대소가 미치도록 듣고 싶은 2007년 9월의 어느 아침이다.    이승훈 캄캄한 공기를 마시면 폐에 해롭다    ―― 이상, 「아침」에서 고교 시절 처음 이상의 시를 읽고 충격을 받는다. 세상에 이런 시가 있다는 것도 충격이고 이런 시인이 있다는 것도 충격이고 이런 시인과 만난 것도 충격이다. 그가 노래하는 병든 내면은 당시의 나의 내면이고 그 후 나는 이상의 정신적 가족이 된다. 그는 폐결핵으로 시달리는 밤을 노래하고 이런 밤은 당시의 어둡던 가정, 나약한 감성, 우울한 사춘기의 은유가 된다.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결국 고독한 체념과 말라버린 사유와 초췌한 감성이 있을 뿐이다. 사는 건 병드는 것. 그렇게 고교 시절을 보냈다. ‘밤은 참 많기도 하더라.’ 이런 밤은 지금도 계속된다    이   원 노점의 빈 의자를 그냥 시라고 하면 안 되나    ―― 오규원, 「버스정거장에서」에서 1987년 3월 서울예대 문창과에 들어갔고, 1987년 10월 명동의 서점에서 오규원 선생님의 새 시집을 샀다. 「버스정거장에서」의 첫 구절인, 이 시구를 보는 순간 내 안에서 무엇인가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습작을 하던 1991년, 밥그릇을 소재로 시를 쓰게 되었다. 이런 것도 시가 되나요, 하고 여쭈었다. 이 세상에 시 아닌 것은 없다. 네가 쓰는 모든 것이 시다, 오규원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그 순간 즉각적으로 이 시구가 다시 떠올랐고, 이 시구를 처음 보았을 때 무너져 내렸던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짐짓 태연해 보이는 이 진술은 내가 시에 대해, 삶에 대해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한 번에 무너뜨렸던 것이다(내가 안다고 믿고 있던 것들은 내가 가장 모르는 것들이었다). 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시다, 언어도 삶도 벼랑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나는 언어가, 삶이 균형을 잡으려고 할 때마다 이 시구를 붙잡고 날아오르며 벼랑을 만든다.    이유경 내 너를 찾아 왔다. 순아 너 참 내 앞에 많이 있구나. 내가 혼자 종로를 걸어가면 사방에서 네가 웃고 오는구나.    ―― 서정주, 「부활」에서 ‘벼락치듯 나를 전율시킨…’은 아니지만, 최초로 나를 감동시킨 시 한 구절은 서정주의 「부활」의 도입부였다. 이 시를 처음 대한 것은 고교에 입학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시 공부를 한답시고 서정주 조지훈 박목월 공저의 『시창작법』(1954)이란 책을 사 읽으면서였다. 미당의 란 글에 시 전문이 실려 있었다.  열여섯 일곱의 사춘기를 갓 지난 나의 감성에 ‘순아 너 참 내 앞에 많이 있구나’는 황홀한 사랑의 풍경을 전개해 주던 것이었다. 슬프고 쉬운 시였기에 감동이 더했던 모양이다.  훗날 성인이 되어서도 한동안 나는 술에 취하면 노래 대신 이 시 전문을 소리쳐 외곤 했다.   이윤학 아침마다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씩씩하고 활기차게 ‘필승’ 또 ‘필승’/경례를 하는 사람이 있다//  당신은 무엇을 보고 그렇게 인사를 하십니까// 네, 저기 있는 까치를 보고 인사합니다/필승!    ―― 정용주, 「필승」 전문 3,4년 전 이 시를 처음 읽게 되었다. 한 남자가 아침마다 창문을 열어놓고 까치가 날아오기를 기다렸다. 남자는 부동자세로 까치가 날아올 나무를 아니면 지붕을 또는 전봇대를 힘주어 바라보았다. 왜 반드시 이겨야 하나, 왜 반드시 이겨야 하나, 왜 반드시 이기지 않으면 안 되나? 씩씩하고 활기차게 ‘필승’ 또 ‘필승’을 외치지 않으면 안 되나? 왜 하필 까치에게, ‘필승’ 또 ‘필승’ 경례를 붙이지 않으면 안 되었나?  처음에는 화자 자신에게 퍼붓는 ‘냉소冷笑’로 읽히더니, 종내는 자신에 대한 연민으로, 자기 암시暗示로 옮겨갔다. 까치를 보면 이 시가 생각나더니, 나무나 지붕이나 전봇대만 봐도 ‘필승必勝’이 들려왔다.  “……오직 하나, 나는 나 자신에게 승리했을 뿐이다.” 김산 평전에서 읽은 구절과 함께.     이윤훈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포근한 봄의 졸음이 떠돌아라.//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 이장희, 「봄은 고양이로소이다」 이 시는 젊다. 여든이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초월하여 신선한 감각이 살아나  시의 자장을 잃지 않고 있다. 이 시 속에서는 야사 하이페츠가 연주하는 바이올린 소리가 아련하다. 극도로 절제된 감정과 섬세한 감각이 어우러진 고즈넉한 시의 공간이 있다. 그 속에 고양이로 현현된 생생한 봄을 만난다.나른한 아침 봄볕 속 이 시를 진언처럼 읊조리면 이 시와 내 시의 한 접점에서 모를 새 한 마리 고양이로 변한 나를 발견한다   이재무 죽은 고기처럼 혈색 없는 나를 보고 얼마 전에는 애 업은 여자하고 오입을 했다고 한다    ―― 김수영, 「강가에서」에서 지금 읽어보면 지극히 평범한 진술이다. 하지만 30년 전 이 시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물 묻은 손으로 전선을 만진 듯 전율하는 충격에 휩싸였다. 그것은 이 시가 김수영의 다른 시편들에서도 보이고 있듯이(일테면 「거대한 뿌리」 「성」 같은 시편들) 시에 대한 일반적 통념을 크게 위반했기 때문이다. 시라면 응당 고상하고 아름답고 선하고 우아해야 한다는 고루한 생각에 갇혀 있던 내게 그의 시편들 속의, 정도를 넘어선 과감한 시적 표현들(비속어, 욕설 등 일상 언어의 과감한 창조적 차용)은 당혹감을 넘어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전복과 위반의 진술들은 막힌 것이 확 터지는 해방감을 가져다주었다. 제도와 이념의 금기를 훌쩍 뛰어넘으려는 시인의 고투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세계의 발견과 개진에 뒤따른 기법과 표현에서의 그의 이러한 과격한 도전과 실험이 있었기에 우리 현대시는 그만큼 영토를 실질적으로 확장해 올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정록 나무를 베면 뿌리는 얼마나 캄캄할까     ―― 이상국, 「어둠」 전문 가장 최근에 친 벼락이다.  봄이 되면, 나무는 깜깜한 어둠을 딛고 새싹을 밀어 올릴 것이다. 맨 처음, 씨앗 속의 어둠을 송두리째 끌어올려 초록지붕을 지었듯이, 다시 초록의 일주문 하나 세울 것이다. 발밑 어둠의 실뿌리를 더 깊게 박을 것이다. 잘려나간 그루터기의 겹눈, 칠흑 중의 칠흑은 발밑 어둠이다. 발바닥에 눈을 달고 세상을 읽자. 똥독에 빠진 쥐의 눈이 가장 반짝인다. 연필심은 종이보다 깜깜하다. 어둠의 핵에서 글이 나온다. 아버지가 누워 있는 방이 가장 어둡다. 새벽 일찍 쌀을 안치던 어두운 솥단지, 깜깜하기에 쌀보리는 더욱 희게 눈뜬다.    이진명 몸은 왜 있을까    ―― 김정환, 미상 김정환 시인의 시 구절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책장을 뒤졌으나 80년대에 읽으며 줄쳐 놨던 옛 시집을 찾을 수 없었다. 여러 사람한테 문의하였지만 이 시구가 있는 시집과 시의 제목을 결국 알아내지 못했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채로 이 시구를 만났을 때의 나를 불러보련다. 데뷔 이후 1992년 첫시집을 얼굴도 본 적 없는 김정환 시인께 부쳤다. “몸은 왜 있을까” 오직 이 한 구절을 허락도 없이 품고 있었던 오랜 빚을 갚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아아, 탄식의 수긍을 몸을 궁글리며 할 수 밖에 없게 만든 “몸은 왜 있을까”. 모든 오욕칠정과 생로병사와 살아 있다고 들고나는 이 물질적 숨의 현재, 이런 모욕이, 이런 치욕이 어디 다시 있을 수 있을까.  그때 내 나이 삼십 중반. 무슨 제1의 대문짝이라도 되는 양 모가지 위에 얼굴을 올리고, 걸음 같지도 않는 걸음을 끌며 길거리를 헤매고 직장으로 십수 년을 흘러다녔다. 왜 이토록 피로하게 밥을 벌어야 하는지 돈을 벌어야 하는지를 도무지 알아낼 재간이 없는 채. 그런데 답이 온 것이다. 몸은 왜 있을까, 질문이며 답인 이 시구를 받아올리자, 온 세월의 체증이 슬픔도 없이 녹아내리며 화장실에서 두루마리 화장지를 두 손 받쳐 지심으로 풀어 내리는 나를 보았다. 이 지난한 밥벌이의 되풀이가 똥 닦을 두루마리 화장지(세상 어디에 똥 닦을 휴지 하나를 거저 주는 데 있으랴) 한 뭉치를 사기 위해서라고 겨우 깨닫게 되자 화장실에서 돌아와 책상에 앉아 그날 오후의 나머지 일을 고요하게 마칠 수 있었다.  이   탄 아아, 늬는 산山ㅅ새처럼 날러 갔구나!    ―― 정지용, 「유리창」에서 정지용의 시 「유리창」의 끝연 10째줄이다. 이 시의 “산ㅅ새처럼 날러 갔구나”처럼 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사라진 정황을 볼 수 있다.이 시는 정지용이 죽은 아이를 보고 지었다고 한다. 9째줄의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만 보더라도 불길한 상징이 잘 되어 있다. 정지용은 시를 지을 때 아무리 슬퍼도 눈물을 흘리지 말라고 한다.슬퍼도 눈물을 흘리지 말라고 하는 말은 무슨 말일까. “날러 갔구나!” 이 한 구절이 내 마음 속에 오랫동안 맺히게 된 것은 내가 1960년대에 《새소년》 잡지를 만들 때부터였다. 잡지 《새소년》이 잘 나갈 때 마음 속에서 부정을 타서 《새소년》이 안 팔리면 큰 충격을 받을 것 같은 우려와 함께 “날러 갔구나!”와 같은 암시는 항상 내 마음을 불안케 했다. 새시대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 암시해준 시구였다.   이태수 저 금박金箔 바람,  저린, 낯선, 눈부신…    ―― 황동규, 「사라지는 마을」에서 우울하게 헤매면서 시에 이끌려 다니던 문학청년 시절, 유치환의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그리움」)라는 ‘절규’에 빠져들곤 했다. 현실과 꿈의 동떨어짐, 방황과 갈등 때문이었다. 그 뒤 박목월의 빼어난 언어감각과 조지훈의 의젓한 지사적 풍모에 매료되고, 김춘수와 황동규를 가까이 느끼게 됐다. 스승인 김춘수의 ‘꽃’을 노래한 시편들, 서정의 옷을 입은 그 인식론(또는 존재론)의 세계는 매력적이었다.  이어 황동규의 지성과 감성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시편들은 부러움과 극복의 대상으로 다가왔다. 황동규는 여전히 저만큼 가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감들이 황금빛 불을 켜고 있으며 그 금박 바람이 “저린, 낯선, 눈부신…”으로 읽는 그 황홀하고 서늘한 정신의 불빛이 전율을 안겨주고 있는 것 같다.    이하석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 한용운, 「알 수 없어요」에서 이 시구는 ‘한심하게 어둡고 쓸쓸했던’ 고등학생 시절에 ‘문득 내게 왔다’. 참 많이도 이 시구를 중얼중얼대며 다녔다. “시의 언어는 필연적인 것같이 보이는 것이어야 한다”는 예이츠의 말마따나 이 구절은 한용운이 살았던 삶의 한복판에서 필연적인 목소리로 나타났다고 믿으면서. “그래, 재는 불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지. 그건 다시 타오를 수 있는 것. 마치 이별이 끝이 아니라 만남의 시작인 것처럼 말이다”라고 믿으면서. 이 놀라운 전환, 끊임없는 부정으로 인해 열리는 큰 긍정의 꿈의 실현의지야말로 ‘한심하게 어둡고 쓸쓸했던’ 나를 밀어올리는 힘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장석남 산山에/산에/피는 꽃은/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 김소월, 「산유화」에서 미인이 좋은 건 그저 좋은 것이지 까닭이 있지 않다. 늘 명확한 그 사실 앞에 엉뚱한 까닭들을 늘어놓는다. 좋은 시가 왜 좋으냐고 하면 어떠한 답이 나와도 그 시가 가지고 있는 함량에 미달인 채로 구차하다.  뼈가 굳기 전부터 이 시가 좋았다면 거짓일 공산이 크다. 확실히 이 시는 천재의 산물보다는 달관의 산물이다. 이십대 후반쯤일까 이 시가 막 쳐들어왔다. 좋은 시는 막 달려 들어오는 것이다. 저 꽃은 하나의 절간이기도 하고 백골이기도 하다. 때로는 남모르는 연애이기도 하고 도피이기도 하다. 그래서 좋다. 흔히 도피를 현실 망각의 행태로 간주해 버리고 마는 경우가 있다. 예술이 현실 도피라는 걸 모르는 탓이다. 도피가 아니라 초월이라고 하면 책망에서 면할까? ‘저만치’ 피어 있으니 목마름이요 그것이 사랑의 속성이다. 늘, 궁극적으로는 저만치 혼자서 피다 지고 싶었다. 다시 구차하다!    장석원 날아간 제비와같이 자죽도 꿈도 없이/어디로인지 알 수 없으나/어디로이든 가야 할 반역反逆의 정신//나는 지금 산정에 있다―/시를 반역한 죄로/이 메마른 산정에서 오랫동안/꿈도 없이 바라보아야 할 구름/그리고 그 구름의 파수병인 나.    ―― 김수영, 「구름의 파수병」에서 여름의 산정에 삐쩍 마른 해골이 있다. 겨울 설산이 보낸 엄혹한 마른 바람이 보인다. 뽀개지는 듯한 통증이 몰려온다.시가 두려워질 때마다 김수영을 읽는다. 비애의 정점에 다다른 시인을 본다. 그의 얼굴은 구름에 먹혀 보이지 않는다. 그는 곧 산 아래로 내려갈 것이다. 그는 다시 시를 쓸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다시 반역할 것이다.‘가장 높은 정신’(조정권)의 거처, 산정에 서 있는 반역자, 시인. 그의 정신과 구름의 방향.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어디로든 가야 한다.청빈과 쓸쓸함이 노래가 되는 순간. 이 염결성이 시인을 지키는 도덕이라는 것을 안다. 사랑의 끝이 보인다. 고요하다.   장석주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비애悲哀를 알고 있느냐     ―― 김수영, 「비」에서 이 시구가 마음에 화살처럼 꽂혔다. 시인은 제 아내에게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고 묻는다. 놀라워라, “움직이는 비애”라니! 비와 비애의 음가音價가 겹쳐지며 한 순간에 눈이 번쩍 뜨인다. 비의 운동역학에 “비애”를 슬쩍 얹는 솜씨라니 ! 비애에 비의 운동성이 합쳐짐으로써 돌연 비애의 동학動學이 발생한다. 김수영은 아무런 운동성을 갖지 않은 정적인 것에 비의 운동성, 비의 속도를 부여한다. 대상적으로 존재하던 “비”라는 사물은 돌연 경계를 넘어 “움직이는 비애”라는 현존을 품는다.  시인은 음과 양이 하나로 포개지듯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이 하나로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인식하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거리가 지워질 때 움직이는 “비”는 움직이지 않는 “비애”를 품고 떨어지는 그 무엇으로, “비”라는 보편다수의 존재자에서 “움직이는 비애”라는 일자, 혹은 초월자로, 그리고 세계의 중심이 사물에서 사건으로 옮겨 간다.    장인수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波紋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 한용운, 「알 수 없어요」에서 시라는 놈이 나에게 기습한 경로는 아주 평범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국어 선생님은 교과서에 시가 나오면 무조건 외우라고 하셨다. 지금도 정철의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수십 편의 시를 달달 암송하고 있는 것은 그 분 덕분이다. 달달 외우기 위해서는 밥 먹다가도, 똥 싸다가도, 자전거를 타고 등하교하면서도 혀에 가시가 돋도록 연습해야 한다.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라는 시를 암송하면서 “수직垂直의 파문波紋”,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라는 글귀가 서서히, 자꾸 미꾸라지처럼 꿈틀거렸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렇게 시는 내게 엄습했다. 처음 읽을 때에는 싱겁거나 무덤덤했던 글귀였는데 어느 날 하루 종일 입술에 붙어서 팔딱이더니 전압이 세지면서 번개가 치고 온몸의 혈류가 범람하는 전율을 받게 된 것이다. 미토콘드리아 수천만 개가 새우 떼처럼 튀었다. 그 이후 장석주의 시편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전윤호 고한읍 어딘가에 고래가 산다는 걸, 나는 몰랐다.    ―― 이건청, 「폐광촌을 지나며」에서 이 나라에서 석탄이 가장 많이 나던 동네에서 자라며 광부의 아이들과 학교를 다니고 검은 산과 검은 강을 보며 자란 나였지만 나도 몰랐다. 고래를 잡으려면 동해바다로 가야 하는 줄 알면서 살았다. 내 친구가 고한초등학교에서 선생을 하고 가끔 도박에 미친 놈들이 손을 끌고 올라가 카지노를 찾을 때도 나는 몰랐다. 그곳에 고래가 있는지, 그곳에 있는 고래를 누군가 보고 있는지. 가끔은 내가 뭔가를 놓고 사는 게 아닐까 하는 허전함을 느낄 때가 있다. 이 시를 읽으면 그렇다. 시인은 내 척추를 지나 심장으로 파고든다. 이젠 나도 고래를 잡으러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든다.   정끝별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 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 한용운, 「당신을 보았습니다」에서 내 스무 살의 ‘그 어떤 포스와 비전’을 떠올리게 하는 구절! 스무 살 무렵, 학관의 전용(!) 화장실 벽에는 “님은 갔습니다. 지가 갔습니다. 그놈은 붙잡아도 갈 놈이었습니다”가 새겨져 있었다. 읽고 또 읽었으리라. 역시 그 무렵, 일요일의 나는 교회를 들락거렸고, 일요일을 뺀 허구헌날의 오전은 시와 사회과학을 한답시고 써클룸을 들락거렸고, 나머지 허구헌날의 오후는 술집을 들락거렸다. 시에 울고 사람에 울고 신에 울고 최루탄에 울고 술에 울었다. 초월과 역사와 현실 사이를 들락거리며 징징징 울던 그 무렵,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 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라는 구절은 얼마나 비장한 ‘포스’를 내뿜었던가. 얼마나 확고한 ‘비전’이었던가. 당신만 당신이 아니라 기리운 것이 다 당신이라는데……    정병근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 김수영, 「눈」에서 기침을 하자고?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나는 시인이 폐병쟁이인 줄 알았다. 마른 얼굴에 유난히 퀭한 눈을 가진 시인의 사진을 보면서 나도 기침을 하고 싶었다. ‘기침’은 살아 있고자 하는 자유의 분명한 언표임을, ‘눈雪’과 ‘눈目’이 다르지 않음을 지나오면서 더 절절히 공감하게 되었지만. 나는 기침을 자주 했다. 새벽녘 기침소리로 할아버지는 그 높은 존재를 알렸고, 아버지는 헛기침 끝에 우리를 나무랐다. 할 말이 없을 땐 자꾸 기침이 나왔다. 침묵이 나를 가로막을수록 기침은 더 날카롭게, 더 깊이 내장되었다.  기침은, 타성과 혼곤의 등짝을 후려치는 나 스스로의 죽비이면서 부조리와 억압에 항거하는 ‘한소리’일 것이다. 보라는 듯이. 들으라는 듯이. 하여, 기침은 지금도 저 희고雪, 퀭한目 ‘눈’과 함께 여태껏 내 폐부 속에 칼날처럼 살아 있는 것이다.    정일근 캄캄한 교실에서 끝까지 남아 바라보던 별 하나    ―― 김명인, 「동두천 2」에서 시인이 되고 국어선생이 되어 김명인 시인의 처녀시집 『동두천』을 다시 읽었다. 그 시절 나는 주당 45시간의 수업을 하는 교육노동자였고, 교실에서 교실을 떠도는 유목민이었다. 야학선생을 오래 한 나는 야학과 다른 분위기인 제도교육의 폭력에 가까운, 불합리한 제도에 적응하지 못했다. 대학 시절 필사를 하며 공부를 한 시집 『동두천』을 다시 읽으며 “캄캄한 교실에서 끝까지 남아 바라보던 별 하나”란 구절에 밑줄을 그었다. 그때까지 나는 미래의 ‘별’인 학생들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주장자처럼 나를 쳤다. 단지 분노에 차, 별을 보지 못한 나에게 별을 보게 만든 그 한 구절 덕분에 나는 「바다가 보이는 교실」 연작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 후 그 연작시가 내 처녀 시집의 제목이 되기도 했다.       정재학 캄캄한 공기를 마시면 폐에 해롭다. 폐벽에 끌음이 앉는다.    ―― 이상, 「아침」에서 폐병을 앓았던 시인의 재미있는 구절이다. 결국 폐결핵으로 자신의 목숨까지 잃었지만 이상에게 폐병으로 인한 고통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시는 찾을 수가 없다. 과거로부터, 앞으로도 시에 대한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들이 있겠지만 이상은 ‘시는 결국 이미지이며 유희’라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은 듯하다. 그것이 1930년대 시인들 중 그가 고립적인, 독자적인 위치를 갖는 이유일 것이다. 삶 혹은 고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진정성의 척도로 생각하는 것은 정말 답답하고 재미없는 일이다. 시인은 스스로 환자이자 의사이기도 해야 한다는 것을,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안목을 가진 시인이라면 다른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이상은 보여주었다. ‘시에서의 진정성’과 ‘시에 대한 진정성’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이 둘의 사이가 그리 먼 것은 아닐 것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에 나오는 어느 대사가,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잘 요약해 주는 것 같아 말미로 대신한다.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아. 그래서 더욱 잊혀지지가 않아.”    정진규 내 마음 속 우리님의 고운 눈썹을/즈문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놨더니/동지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서정주, 「동천冬天」 전문 1연으로 되어 있다. 그것도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 전문을 다 옮길 도리밖에 없다. 이미 분석이 완벽하게 끝나 있는 시랄 수 있겠으나, 오히려 오독誤讀이 내게는 정독正讀이 된 경우가 많다. 그만큼 벼락으로 다가왔다는 이야기다. 이 시도 내게는 그런 범주에 속하는 시가 아닌가 한다. 이 시의 벼락의 정체는 마지막 쉼표(,)다. 이토록 호흡(리듬)과 의미와 리듬에 모두 걸려 영향하고 있는 부호를 나는 여기서 처음 만났다. 마침표로 마감하면 이 시는 형식상의 리듬이 단절되고 산문적인 설명이 되어버린다. 꿈으로 맑게 씻는 이미지의 행위도 불가능해진다. 눈썹의 의미도 사실로 끝나고야 만다. 일거에 하나의 사물(반달)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개벽開闢이 벼락으로 왔다.    조말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 윤동주, 「길」에서 열일곱 살 때는 ‘13인十三人의 아해兒孩가 도로道路로 질주疾走하’(이상)느라 막다른 골목이 좋았고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도 좋았다. 재미없는 교과서 속에서 이상은 이상해서 좋았다. 그는 열둘이라는 딱 맞춤에서 벗어나고 싶은 나에게 그럴듯한 근거를 제시했다. 많은 제십삼 인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항상 줄을 잘 서는 학생에게 도주하기 좋은 막다른 골목은 쾌감이기에 충분했다. 윤동주는 너무 반성적이어서 거리를 두었다. 좀 쓸쓸해 보이기는 하였으나 그는 너무 정직했다. 그래서 얼마 전 드라마 자막에 떠오른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는 신선했다. 그것은 반성적이었으나 막다른 느낌이었다. 내가 한창 길에 심취해 있을 때였다. 아침에도 걸었고 저녁에도 걸었다. 그것은 막다른 길이었으나 아스라이 멀어서 내가 걸어가고 걸어오는 길이 한없이 연결되는 느낌이었다.    조정권 지난 여름은 줄곧 난행亂行만 당하고 겨우 한 줄의 시를 써서 수습하고…‥ 빈자貧者로다. 빈자로다. 나 이 땅의 일등 가는 빈자로다.”     ―― 정진규, 「곳곳에 가을이 당도하였으매」에서 젊은 시절 내가 외우고 다닌 구절이다. 이 시의 빈취貧臭를 좋아했다. 그와 나는 한동네에서 살았다. 거나해지면 그 앞에서 나는 이 시를 낭송했다. 아름다웠던 시절이다. 한국 가톨릭의 빈승貧僧 구상도 그의 시엔 쇠락성이 있다고 말했다. 시에 매달려 있음의 세상! 우리가 추구했던 순수시의 빈취성貧臭性에는 상처받을 수 없는 순결과 도도한 처녀성이 자만심으로 살아 있었다.  누가 일등 가는 빈자라 자부할 수 있겠는가. 시인은 빈자로 남는다. 시인은 상처받을 뿐 훼손되지 않는다.  조창환 누군가 목에 칼을 맞고 쓰러져 있다 흥건하게 흘러 번진 피 그 자리에 바다만큼 침묵이 고여 있다    ―― 이형기, 「황혼」에서 어느 위대한 영웅의 비장한 죽음과 그 자리에 흥건하게 흘러넘친 피를 연상시키는 황혼의 짙붉은 색감은 극한에 다다른 순수의 모습이다. 피와 죽음의 장면에 배음背音처럼 깔리는 절대침묵을 느끼는 순간, 나는 저 무서운 소멸과 황량한 무화無化에 대한 두려움 섞인 전율에 사로잡혔다. 일체의 잡음이 제거된 순수 그 자체인 죽음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나는 공포보다는 아름다움을 느꼈다. 시인의 내면에 깃든 극한적 순수지향의 의지가 빚어낸 이 장면의 미학적 전율은 내 심리의 저층에 잠들었던 원색적 비장감을 깨워 일으켰다. 이형기 시 「황혼」이 보여준 환상과 꿈의 실재화實在化에 대한 치열한 탐닉은 한때 이미지의 감각적 형상화를 추구하는 내 시의 지향점이 되기도 하였다.    조현석 귓속에/복숭아꽃 피고/노래가/마을이 되는/나라로/  갈 수 있을까/어지러움이/맑은 물/흐르고/  흐르는 물 따라/불구의 팔다리가/흐르는 곳으로  갈 수 있을까/죽은 사람도 일어나/  따뜻한 마음 한 잔/권하는 나라로/  아, 갈 수 있을까/언제는/몸도/마음도/안 아픈/나라로    ―― 이성복, 「정든 유곽에서」에서 엄마는 늘 아팠다. 시도 때도 없이 무릎 관절이 쑤셨고 머리가 지끈거린다고 했고 당뇨에 고혈압도 있는 것 같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도를 낸 아버지가 근 1년간 도피생활을 했다. 그 기간 중 엄마는 몇 개월 동안 병석에 있었다. 예전에 앓았던 결핵성뇌막염이 다시 도졌다는 말을 이모에게서 들었다. 그때 나는 숱한 밤을 앉은뱅이책상에서 울다가 지쳐서 엎드려 잠들었다. 커다란 이불짐과 옷보따리를 지고 메고 판자촌이 즐비한 청계천 옆 왕십리로 이사를 했다. 그 시절 아버지 없는 집에 앓아누운 엄마를 보며 “갈 수 있을까. 언제는 몸도 마음도 안 아픈 나라로”를 생각하며 병이 낫기를 기원했다. 지금은 15년 전 돌아가신 엄마가 “일어나 따뜻한 마음 한 잔 권하는 나라”를 떠올린다. 딱히 마음 한 잔이 아니더라도 찬 술 한 잔이라도 권하기를.   천양희 움직이는 비애悲哀를 알고 있느냐    ―― 김수영, 「비」에서 “시를 쓰지 않으면 살아 있는 이유를 찾지 못할 때 시를 쓰라(릴케)”는 말 앞에서 오래 마음이 들리던 시절, 움직이는 비애란 말은 “내 속엔 언제나 비명이 살고 있다(실비아 플라스)”라는 구절과 함께 내 정신을 내리치는 죽비였다.움직이는 비애가 내면을 훑고 지나갈 때 나는 시詩라는 위독한 병을 철저히 앓을 수 있었다. 정신의 지문指紋 같은 이 한 구절은 내가 초극해야 할 또 다른 절망이며 시작詩作에 가해야 할 박차이다. 오늘도 시가 내게 묻는다.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고.    최영철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시를 쓸 종이가 없어 날 지난 신문지 한 귀퉁이에 몇 줄을 끄적거려 그것을 천금인양 가슴 한편에 감추던 시절이 있었다. 시를 쓸 필기구가 없어 부러진 연필을 황급히 깎아 침 묻혀가며 눌러 쓰던 시절이 있었다. 멀쩡한 팔다리를 떼내어 버릴 수는 있어도 그렇게 얻은 시 몇 줄은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시절이 있었다. 호주머니에는 잘 해야 천 원 지폐 한 장이 고작이었다. 그것으로 낱담배를 사고 가락국수로 허기를 넘기고, 잔술 두어 잔이라도 마신 날은 찬바람이 씽씽 들어오는 어깨를 구부리고 두어 시간 집까지 걸어야 했다. 그리고 새롭게 뜬 아침 햇살 아래 지난밤의 모든 기대와 몽상을 찢고 불태워야 했다. 가난하고 외로웠으나 높고 뜨거울 수 있었던 동력은 얄궂게도 그렇게 진저리를 쳤던 가난과 외로움이었다. 그다지 가난하고 외롭지 않게 된 지금, 나는 그래서 그다지 높고 뜨겁지도 않게 되었다. 자업자득이긴 하지만 그것이 두렵고 절망스럽다.    최종천 그러나 누구하나 정작 보면서도 보지 못할 아득한 헤루크레스 성좌 부근 광막한 시공 속에 이미 환원한 나를    ―― 유치환, 「모년某年 모월 모일」에서 시를 읽다 보면 놀라우리만큼 닮은 구절을 만나게 된다. 청마 선생의 위 구절은 T.S. 엘리어트의 「게론쫀」의 끝에 나오는 다음 구절과 많이 닮았다. “바스러진 원자로서, 떨리우는 곰좌의 궤도 저편에 회오리치는 벨라슈 프레스카 캐멀부인은” 한창 시를 공부하던 시절 내가 좋아하는 시를 모아 놓고 보니, 박목월의 「하관」, 유치환의 「모년 모월 모일」, 정지용의 「유리창」 등으로 모두 죽음을 다루고 있는 시였다. 청마 선생의 이 작품은 우리 시단에서 보기 드물게 드높고 명료한 정신의 영역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닮은 상상력과 감수성을 만날 때는 경이와 전율을 느끼게 된다. 그 전율은 청년으로서 느끼는 좌절과 고독을 달래 주었던 것 같다. 나는 엘리어트의 시를 좋아해서 어느날 교보로 시집을 사러 갔다가 주머니에 돈이 없는 것을 알고도 훔쳐 가지고 나오다가 교보 직원에게 들킨 적이 있다. 내 호주머니 속에 든 것을 모두 꺼내놓으라고 하여 돈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책을 주면서 다음에 오면 갚으라고 했다. 그러나 정작 다음에 가서 책값을 갚으려고 하니 없었던 일이 되어 있었다. 탐구당 문고판 엘리어트 시집 당시 값은 2천 원이었다. 1978년의 일이었다.   최창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서 내 삶의 길을 크게 벗어났거나, 너무 멀리 나왔다는 생각이 들 때에 백석의 시는 엄하고도 얼마나 정감 어렸던지, 나는 그대로 꼭 따라 했던 것이다. 아궁이에서 불씨를 화로에 담아, 꼭같이 무릎을 꿇고… 시를 쓰거나보다, 시를 빚거나보다, 시를 산다는 일이 시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줄곧 내 우매한 정신의 불씨를 살려주는 싯구는 참으로 많으나, 일일이 열거하지 못하고 저 백석이 다가 낀 화로의 불씨로 보태보는 것이다.    최치언 너는 해바라기처럼 웃지 않아도 좋다 배고프지 나의 사람아 엎디어라 어서 무릎에 엎디어라    ―― 이용악, 「장마 개인 날」에서 모든 것이 다 엉망진창인 시절이 있었다. 엄마는 자꾸 꿈속에 찾아와 밥을 해주시며 ‘배고프지 않니, 배고프지 않니’ 그랬다. 그런 날이면 북쪽으로 머리를 둔 옥탑방에 누워 천장에 드리워진 두꺼운 구름장들을 보았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울면 지는 거니까. 그러나 울었다.“배고프지 나의 사람아/엎디어라 어서 무릎에 엎디어라” 되뇌이며 울었다.    한명희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 김광균, 「설야」에서 김광균의 「설야」와 신경림의 「갈대」를 놓고 망설인다. “머언 곳에 여인의 옷벗는 소리”와 “산다는 것은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 본다. 난독의 시절이자 남독의 시절이었고 사춘기로 접어들까 말까 한 시기였다. 눈 내리는 소리가 여인의 옷 벗는 소리로 들리다니! 이 구절은 야한 비디오 화면처럼 저절로 자꾸만 떠올랐고 나는 몰래 혼자 설레어하며 부끄러워했고 그러면서 몰래 이 구절을 계속 읊조렸다. 「갈대」를 읽고는 산다는 것은 결국 이런 것인 모양이구나 생각했다. 나는 내 삶에 대한 비극적인 예감으로 오랫동안 괴로워하는 한편 그 괴로움을 즐겼다. 오랜 망설임 끝에 나는 괴로웠던 기억보다는 설레고 부끄러웠던 기억에 한 표를 던지기로 한다. 세상에, 눈 내리는 소리가 옷 벗는 소리로 들리다니!      한미영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정현종, 「섬」 전문 스무 살이었다. 새내기 문학도였던 내게 정현종의 「섬」은 알 수 없는 힘으로 오롯이 내 가슴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알베르 까뮈에 심취해 있었고 까뮈가 스무 살에 읽었다던 그의 스승 장 그르니에의 산문집『섬』을 읽은 것도 스무 살, 그 무렵이었다. 가슴에 섬을 품고 첫사랑이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연애는 수없이 내 안에 떠 있던 섬으로 인해 좌초했다. 떠나간 사랑을 탓하느라 청춘을 소비했다.돌이켜보면 연애가 실패한 건 내 책임이었다. 섬은 내게 사랑의 은유와도 같았다. 왜냐하면 나의 연애는 끝없이 미끄러지는 운명을 반복하는 어떤 실현 불가능한 욕망의 치환이었으므로. 나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아직도……    함성호 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 윤동주, 「별 헤는 밤」에서   따는, 나는 내가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생명의 존귀함이 아니라 나라는 우주에 갇혀 있었다는 말이다. 그때 문득 이 한귀절로 나는 나라는 닫힌 우주에서 나라는 열린 우주로 귀환했다. 귀환이라는 것은 본래 그랬다는 말이다. 불가에서는 이 본래의 모습을 깨닫는 것을 ‘견성’이라고 한다. 견성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러고 보니 나는 참 못생긴 얼굴이었다. 폭력 앞에서 비겁하며, 이익 앞에서 이기적이고, 공동의 선 앞에서 게을렀다. 이것이 나의 본래의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이후 내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단지 이 본래의, 못생긴 내 얼굴을 보고 난 후 나는 비로소 내 시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 공자는 시경 삼백 수의 뜻을 한 마디로 말했다. “사무사思無邪!” ―생각에 삿됨이 없다는 이 말을 나는 시는 솔직해야 한다는 의미로 생각한다. 이 부끄러움을 통하지 않고 시는 없다.    허만하 도체비꽃이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    ―― 정지용, 「백록담」에서   망설임 끝에 시인 정지용의 「백록담」의 이 구절과 「향수」의“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울음 우는 곳…” 중에서 「백록담」 쪽 구절을 고른다. 의예과 학생시절 다방에서 문리대 친구가 읽던 시집을 어깨 너머 훔쳐 읽었을 때 만난 추억의 구절이다. “꽃도/귀향 사는 곳”(「구성동九城洞」)도 좋지만, 이 구절은 「백록담」 구절에 비해서 색채감이 덜하고 앞연에 기대어 비로소 그 빛남이 더해지는 듯해서, 홀로서기로도 반짝반짝하는 인용문을 든다. 도체비꽃이 어떤 꽃인지 모르지만, 어릴 때 아버지의 고향 뒷산에서 처음 보았던 도라지꽃의 신선한 푸름보다도 더 새파란 꽃인 것은 짐작할 수 있다. 릴케가 그의 「두이노의 비가」에서 말한 용담꽃도 이렇게 새파랄 수 없는, 나에게는 환상의 꽃이다. 도체비꽃이란 말이 그 앞 구절 “귀신鬼神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 모롱이”와 내통하는 것도 얄밉다.  “아름다움이란 무서움의 시작이다.”    허   연 교실내에 쌓인 두터운 먼지가 다정스러움 김소월  김수영 휴학계    ―― 김종삼, 「시인학교」에서   한 손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통닭 10마리를, 다른 한 손에는 김종삼의 시집을 들고 터미널에 서 있었다. 살기 싫은 휴가병이었다, 나는. 첫 휴가를 마치고 귀대하던 날 김종삼 시집 『북치는 소년』을 샀다. 덜컹대는 직행버스 안에서 시집을 읽었고, 다시 살고 싶었다. 그날 난 아주 나른한 계시를 받았다. 통닭 냄새를 맡으며 제외된 자들이 주는 눈부심을 알았다. 절창絶唱은 제외된 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시를 씀으로써 세상에서 제외되고 싶었다.    허영자 서으로 가는 달 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 서정주, 「추천사?韆詞」에서 열일곱 살 때 처음 읽은 미당의 이 시구는 지금 읽어도 나의 고개를 떨구게 만든다. 아니 절벽에서 툭 떨어지듯이 나의 고개를 절망적으로 꺾어지게 한다고 함이 더 옳을 것이다. 그만큼 이 구절은 비극적인 메시지를 나에게 전하는 시구이다. 인간의 한계― 유한한 목숨과 의욕에 못 따르는 능력의 한계, 찬란한 꿈에 비한 현실의 초라함 등을 이 한 구절은 절실히 감지케 하기 때문이다. 이 시구에서 역으로 읽어낼 수 있는 간절함 때문에 나는 수십 번, 수백 번 이 구절을 읊조려 왔으며, 아마 앞으로도 여러 번 같은 일을 되풀이하리라 생각한다.    허형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 한용운, 「알 수 없어요」에서   60년대 중반, 법대로 가기를 권하신 아버지의 명령을 배반(?)하고 시인이 되기 위해 국문과를 택하여 상경한 서울은 참으로 우울의 극치였다. 날마다 흑석동 연못시장 안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지지고 볶은 문학론만 해도 하룻밤이면 족히 서너 말은 될 성싶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고 정치사상사, 중소기업론, 동양철학 등 전공과 관련 없는 과목을 공부하면서도 청계천 헌책방을 뒤지며 시집은 닥치는 대로 사서 읽어 제쳤던 시절, 밤새 미당의 “꽃처럼 붉은 울음”을 울고 있던 어느 날 밤, 만해가 내게 와 나의 정수박이에 기름 한 바가지를 붓고 떠났다. 알 수 없는 시에 대한 희열을 맛본 순간이었다. 아마, 네루다의 시처럼 “사람은 날지 않으면 길을 잃는다”는 신념은 그 뒤의 일이지 싶다.    홍신선 귀신鬼神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 모롱이, 도체비꽃이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    ―― 정지용, 「백록담」에서 막 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였다. 그때까지도 문청 기분을 완전히 청산 못한 나는 천둥벌거숭이로 살았다. 대학 시절의 글 친구인 박제천이나 한국시 동인인 오규원 등등 숱한 사내들과 어울려 술과 시 이야기로 시간을 죽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무절제한 술과 젊음, 그리고 독서로 지새운 시절이었다. 학생들에게 어쩌다 그 시절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지금도 거침없이 ‘화류계 뜬 시절’이라고 말한다. 화류계라니?  말 그대로 술과 책에 빠져 살던 황음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시절 한편으로는 청계천 8가를 곧잘 혼자 헤매었다. 끼니도 거른 채 고서점, 헌 책방이 늘비한 그곳을 헤매며 책 구경 내지 낡은 책들을 열심히 사 모았다. 그렇다. 헌책더미에서 마침 해방 직후 을유문화사에서 낸 『지용시선』를 찾았던 날의 그 득의양양함이라니. 지금도 그날의 째지던 기분은 마냥 생생할 밖에…… 집에 돌아와 풍문으로만 듣던 지용의 시를 나는 감격에 겨워 읽었다. 그때만 해도 정지용은 풍문 속의, 이름 석 자조차도 복자로 표기해야 했던 때가 아니던가. 작품 「백록담」을 읽어가다 4번에서 만난 이 한 구절은 나에게 충격이었다. ‘쓸쓸함’이, ‘홀로됨’이 말 그대로 ‘파랗게 질려야 하는’ 공포 자체라니. 그러나 정신의 도저한 경지는 이 공포를 극복한 자만의 것임을 나는 이즈음 체감으로 새삼 깨닫는다. 어즈버, 나도 이미 별수없이 늘그막에 들어선 것이다.    황병승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 기형도, 「기억할 만한 지나침」에서 축축한 손길이 다가와 나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짓누르는 밤의 숲처럼. 처음 이 시를 읽어내려가던 스물일곱, 겨울, 나의 12월. 춥고 큰 방에서 혼자 울고 있는 서기와 유리창 너머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내의 고통스러운 침묵이 나의 입을 틀어막았고, 그것은 등 뒤의 짐승처럼 나를 두렵게 했었다. 그리고 다시 펼쳐든 페이지, ‘거의 고통스러웠다’고 말하던 그때의 사내는 여전히 축축한 손을 내밀어 스물일곱, 겨울, 12월 쪽으로 나를 질 질 질 끌고 간다.    황인숙 하늘나라 다가올 때마다 맑은 물가 다가올 때마다 라산스카 나 지은 죄 많아/죽어서도/영혼이/없으리    ―― 김종삼, 「라산스카」에서   그냥 하염없이 좋다. 김종삼 선생의 모든 시를 좋아하지만 내 머리와 혀에 그 맛이 가장 짙게 감도는 시는 이 「라산스카」다. 끝없이 울려 퍼지는 조종소리처럼 사무쳐서 온몸이 저리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설국』에서 “슬프도록 아름다운 목소리”를 얘기했는데, 「라산스카」는 아름답도록 슬픈 시다. ⓒ삶의 향기가 가득한 문화 [출처] 한국을 대표하는 109명의 현역 시인들이 뽑은 ‘최고의 시구’ |작성자 옥토끼    
56    시어록편 ㅡ 최룡관 정리 댓글:  조회:4990  추천:3  2015-02-04
최룡관 편저       서언       현대시어록은 유명한 현대시 시인이나 학자들을 핵심으로 일생을 분투하면서 새겨올린 영원한 야광주이다.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시인들이나 평론가들의 자대이며, 지남침이다.   시의 뿌리를 알게 하기위하여 고대서양의 아리스토 텔레스, 플라톤, 롱기누스의 명언들과 고대동향의 류협의 명언들을 현대시어록에 삽입하였다. 현대시는 하늘에서 떨어진것도 땅에서 솟아난것도 아니다. 현대시는 문학발전의 필연적 결과로서 한 단계이며 력사이다.   현대시어록은 오늘에는 물론 먼 장래에도 시를 학습하는 교과서가 되리라 믿는다.   시에 대한 필자의 천박성으로 하여, 자료의 부족으로 하여, 풍부한 내용의 일부를 다루었으리라 생각되여 부끄럽기도 하지만 이 일부라도 한마디 한마디가 죄다 금싸락이거나 다이야몬드이리라.       시인에 대하여     [시인이란 아는자, 즉 초월하는자, 그리고 그가 아는것을 증명하는자이다]... [절대적인 창조가 없다면 시가 없는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몽상의 시학]선언 [시의 리해] 293-294페지   [시인은 비균일적인것들의 상호 충돌에 의해 운동하게 되는 말들에 그 주도권을 양도한다]...[무한히 리듬이란 마치 말피아노건반들을 손가락으로 탐문하듯 연주는것과 같이, 적합한 심지어는 일상적인 말을 사용하는데서 생겨난다] 주지하다시피 말라르메는 그의 시들중 다수를 언어충동에 따라 썼거나 혹은 언어충동이 지시하는대로 갈겨쓴 초고를 다시 개작하였던것이다. ([]안에 말은 말라르메 말)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179페지   시인은 공포나 사랑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들을 보여준다. 옥타비오 빠스 [시와 력사] 동상 113페지   관습이나 , 복종이나, 법률의 평평한 바닥에서 썩는것이 무엇이든 그는 결코 썩지 않게 한다. 복종이 그를 지배하지 않고 그가 복종을 지배한다. 월트 휘트먼 [풀잎]서문 동상 120페지   가장 위대한 시인은 하찮음을 좀처럼 알지 못한다. 전에는 조그맣다고 생각되던였던것이 그가 입김을 불어넣어주면 그것은 우주의 웅장함과 활력을 가지고 팽창한다. 그는 예언자요 개인이요 완전자다. 동상동명 121페지   가장 위대한 시인은 미래의것의 일관성을 과거의것과 현재의것으로 형성한다. 그는 죽은자들을 관에서 끌어내여 다시 세워놓는다. 그는 과거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를 표현할수 있도록 일어서서 걸어가라. 그는 교훈을 배운다. 미래가 현재가 되는 곳에 자리를 잡는다. 가장 위대한 시인은 인격과 장면들과 정열에 눈부시게 빛을 던질뿐만 아니라 마침내 올라가 모든것을 끝마친다. 아무도 그것이 무엇을 위한것인지 그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말할수도 없는 철탑들을 보여준다. 제일 끝에서 잠시 빛을 발한다... 가장 위대한 시인은 도덕의 의의를 덧붙이거나 도의를 직용하지 않는다. 그는 령혼을 알고있다. 령혼은 그자체의 교훈이외에는 어떤 교훈도 인정하지 않는데에 있는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있다. 동명동상 124페지   작가, 학자, 음악가, 발명가, 미술가들의 특성중에서 새로운 자유형식으로부터 발전해 나오는 말 없는 도전보다 더 멋진것은 없다. 동명동상 125페지   시인들은 자유의 목소리이며 해설자이다. 시대를 초월하여 그들은 웅대한 생각을 가질만 하다. 도명동상 127페지   위대한 작가, 특히 위대한 시인을 내고있지 않는한 그들의 언어는 퇴화할것이며 그들의 문화도 퇴화하고, 그리고 보다 강대한 문화에 흡수당하는 일도 있을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있는것이다. 토마스 스턴즈 엘이어트 [시의 사회적기능] [시의 리해] 150페지     가장 위대한 시인들은 즉시는 빛을 발하지 않는 경향을 가지고있다. 수세기뒤의 시인들에게 직접 영향을 끼침으로써 그들은 계속해서 산언어에 영향을 끼치고있는것이다... 그자신이 처해있던 시기에 있어서 그 언어를 새롭게 만든 시인들을 잘 연구하여야 할것이다. 동상동명 151페지   곧 모든 시인은 그자신의 독자계층을 갖고있는 법이다... 시인은 독자의 수요를 최대한 제한하려고도 한다. (가령 몇몇 상징주의자들 같이) 얀 무카로브스키 [시인이란 무엇인가] [현대시리론] 39페지   시인은 매우 정당하게 추측의 매혹적인 미로에 자신의 사고를 방황하게 한다. 샤를르 보들레르 [빅토르 위고] [시의 리해] 221페지   있는것을 그대로 묘사하는 시인은 스스로를 타락하여 교사의 수준으로 내려간다. 동상동명 223페지   한편의 좋은 쏘네트를 완성하고 난후 작가는 10년의 휴식을 취할 권리가 있다. 폴 발레리 [시에 대한 담화록] [시의 리해] 245페지   시인에게는 특별한 자질, 일종의 고유한 개인적에너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무한한 가치의 순간에 그에게 나타나 자신의 존재를 일깨워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순간에 불과할뿐, 이 상위의 (다시 말해서 인간, 인간의 다른 모든 에너지를 합해도 그것을 구성할수 없고 대체할수도 없을 정도의) 에너지는 짧고 우발적인 발현에 의해서만 존재하거나 작용할수도 있습니다.   그것(에너지)이 우리의 령혼의 눈에 조명시켜주는 보물들, 그것이 우리 내부에서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개념이나 형태들을 외부적시선에 대해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합니다-을 덧붙혀야 하겠습니다.   무한한 가치를 지니는 이 순간들, 자신이 만들어내는 관계들과 직관에 보편적품위를 부여해주는 이 순간들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거나 전달할수 없는 가치를 역시 풍부하게 지니고있습니다. 우리에게만 가치가 있는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이것이 문학의 법칙입니다. 최고의 상태들은 진짜 부재상태들로서 , 그런 상태에서만 존재하는 자연 그대로의 경의들이 그안에서 서로 해후하는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의들은 여전히 순수하지 못한것들입니다. 천박하거나 쓸데 없는것들, 무의미하거나 외부의 빛에 저항할 힘이 없는것들, 열광의 섬광속에서 번쩍이는것이 모두 금은 아닙니다.   결국, 어떤 순간들은 우리가 최상의 상태로 존재하는 심원함으로서가 아니라 형상 없는 질료와 뒤죽박죽이 된 파편들, 이상하고 조야한 단편적인 형상으로 우리앞에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쓰레기더미에서 귀금속 성분을 분리해내고 , 그것들을 함께 용해시켜 어떤 보석을 만들어내는데 신경을 써야 합니다. 폴 발레리 [시에 대한 담론] [시의 리해] 246-247페지       우리 시대의 어떤 위대한 서정시인도 6편에서 8편이상의 완성된 시작품을 남긴 사람은 없습니다... 이 여섯편의 시를 위해서 30년내지 50년을 고행과 고통, 싸움을 벌이는것입니다. 고트프리트 벤 [서정시의 제문제] [시의 리해] 334페지   시인은 미지의것에 도달한다. 비록 자기자신의 환영들을 끝내 리해하지 못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시인은 그것들을 직관하였다. 시인은 전대미문의 그리고 이름을 붙일수 없는 사물들을 통한 거대한 비약의 과정에서 파멸해도 좋다. 왜냐하면 다른 무시무시한 일군들이 나타나서 그자신이 좌초해 버린 저 지평선에서 다시 시작하기때문이다. -랭보 후고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87-88페지   전언되는바에 의하면 랭보는 ‘나의 우월성은 어떠한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데 있다’ 라고 말한다. 랑만주의시의 느끼는 감정들은 그에게 역겨움을 준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96페지   현대시인의 탈 형상화의지는 추를 무연관의 세계로 내려보낸다. 동상108 페지   만질수 없는것을 포착할줄 모르는 사람은 시인이 아니라고 그(애드거 앨런포)는 단언하곤 했다. 자기 또한 기억의 주인이며 언어의 지배자인 사람만이, 그리고 언제나 훑어볼수 있는 자신의 감정들이 기록된 등록대장을 가진 사람만이 시인이라고 단언하곤 했다. 보들레를 [꿈꾸는 알바트로스] 98페지   하찮은것으로 치장할줄 아는 이 경의로운 특권을, 파리와 스페인의 녀인에게 주어진 이 특권을, 시인은 누구보다도 많이 갖고있다. 동상 99페지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렇겠지만, 참된 시인이란 기이하게 치장을 한 진실이며 겉보기에는 모순되게 보이는 존재이다... 석양의 불꽃놀이가 끝날무렵에는 아주 먼 동방의 나라로 달려가는 자이다. 동상 100페지   시인이 도덕목적을 추구했다면, 그는 자기의 시적력량을 감소시켰다고 나는 단언한다. 그의 작품이 형편 없을것이라고 내기를 걸어도 경솔한 짓이 아니다. 동상 102페지   비규범적인 언어로써 진술하기 위해 미지를 추구하는 시인은, 그러나 비웃음을 사거나 아니면 배척을 받아 고독속에 떨어지게 된다. 후고프리드리히 [현대시 구조] 196페지   모든 작가는 그 이름에 값하는자라면, 여태까지 씌여졌던 모든것을 대항해서 써야 한다.   -F.R. 퐁주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 구조] 220페지     시인이란, 뚜렷하게 심미지향적인 발화를 창조하는 사람이다. 얀 무카로브스키 [시인이란 무엇인가] [현대시리론] 21페지   만일 시인이 감동효과의 범위를 거부한다면 배타적인 시(상징주의 시와 같은) 시를 초래하게 된다. 시인의 영속성을 거부한다면 , 의도적으로 시사성이 강한 작품 (예컨대 정치적인 시)을 낳게 된다. 동상동명 29페지   우리가 개괄해온 시인에 대한 개념은 ,,, 모든 방면에서 압력을 가하면서 서로 대립되여가는 힘들의 변화가능한 교차점으로 다루고있는것이다. 따라서 문학적 주도권은 이들 수많은 대립들을 독자적인 배렬(이는 조화롭다는것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로 조직한다는 사실에 있다. 얀 무카로브스키 [시인이란 무엇인가] [현대시 시론] 40페지   시인은 의미상으로 분명하게 경계를 정하는 단어들을 피하고 이미지면에서 정서적으로 련상작용이 풍부한 표현을 택한다. 동상도명 55페지   시인은 불가시물의 설교자이다. w. 스티븐즈 [후기 작품집] [세계명언대사전] 752페지   시인의 과제는 참으로 막중하고 위대하다! 모든것을 파괴로부터 구해내며, 죽어야만 하는 인생들에게 영생을 부여한다. 루카누스 [시민전쟁] [세계명언대사전] 753페지   위대한 시인들의 작품은 이제까지 읽혀지지 아니하였다. 위대한 시인들만 그것들을 읽을수 있기 때문이다. H.D 도로우 [국가론] [세계명언 대사전] 753페지   시인들은 자신도 리해하지 못하는 위대하고 현명한것들을 지껄인다. 플라톤 [국가론] [세계명언대사전] 753페지   시인들은 모든 감각을 막대히, 오래, 신중하게 대폭교란시킴으로써 자신을 환상가로 만든다. A. 랭보 [P. 데메니에게 보낸 편지] [세계명언대사전] 754페지   아무도, 정신에 어떤 이상이 없으면 시인이 될수도 , 시를 즐길수도 없을것이다. T.B 머콜리 [수필집] [세계명언대사전] 754페지   그(시인)가 한번 붓을 대면 그가 하는 말은 움직인다. 자기가 데리고 가는 사람을 꽉 붙잡고 전에 가보지 못한 생생한 지역으로 데리고 간다. 거기서부터 휴식이 없다. 옛지점과 빛을 죽은 진공상태로 변화시키는 공간과 말로 표현할수 없는 광채가 보인다. 그와 동행하는 자는 별들의 탄생과 전진을 바라보고 하나의 의미를 배운다. 월트 휘트먼 [풀잎서언] [시의 리해] 131페지   시인의 의무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데 있는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 즉 개연성 또는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 가능한 일을 이야기하는데 있다는 사실이다. 아리스토 텔레스 [시학] 62페지   시인은 모방하기 때문에 시인이요 동상 65페지   현대적감각에 맞는 단어를 만들어내는것은 예나 지금이나 시인의 권리입니다. 계절이 바뀌면 나뭇잎도 바뀌여 옛것은 떨어지고 새것이 돋아나듯 단어도 낡은것은 시들고 새로운것이 나타나 마치 새로 태여난 사람들처럼 생(生)을 구하게 마련입니다. 호라티우스 [시학]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177페지   진짜 시인은 한편의 훌륭한 시를 창작해 내기위해서는 가난도 , 절망도, 세상의 랭담한 대우도 아부도 일체 상관하지 않고 말없이 참아가야 합니다. 이것으로 만족한다는 때는 없고 어디까지나 조금씩 더 좋은 시를 쓰려고 하는것입니다. 세실데이 루이스 현대인 교양전서 30권 261페지   시인이라는것은 원래가 천성적으로 신비스런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며 죽음은 더욱 큰 하나의 신비입니다. 동상동명 331페지       시에 대하여     모든 시는 잔치이며 순수한 시간의 응결이다. 옥타비오 빠스 [시와 력사] [시의 리해] 112페지   시는 또 하나의 이미지이며, 또는 분활할수 없는 이미지의 성좌이다. 동명동상 114페지   시는 모르는 곳으로 뛰여들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시가 만약 잔치라면 그것은 시기에 맞지 않는 때에, 사람의 발길이 드문 곳에서 행해진 잔치 - 지하축제이다. 동명동상 115   아름다움의 결실은 우연히 되는것이 아니다. 생명처럼 필연적인것이다. 중력처럼 정확하고 똑 바르다. 시각에서 또 하나의 시각이 생기고 청각에서 또 하나의 청각이 생기며 목소리에서 사물과 인간의 조화를 영원히 알고싶어하는 또 하나의 목소리가 태여난다... 시의 즐거움이 멋진 운률과 직유와 소리를 지니고있는 시들에 있는것은 아니다. 월트 휘트먼 [풀잎서문] [시의 리해] 123페지   위대한 시는 아주 오래동안 공동의것이고, 모든 계급과 얼굴색을, 모든 부문과 종파를, 남자만큼이나 여자를, 여자만큼이나 남자를 위한것이다. 동상동명 131페지   모든 시작품속에는 혼돈의 미광이 가득해야 한다. -노발리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45페지     시적창조는 해득할수 없는 신비지요. 사람이 태여나는 신비와 마찬가지입니다. 말하자면 어디서 오는지 모를 소리를 듣습니다. 그소리가 어디서 오는지 숙고하는건 쓸데 없는 일이지요. 내가 태여난것에 대해서 근심하지 않듯이, 죽는것에 대하여서도 근심하지 않아요. 옥타비오빠스 [바가리아와의 대화] [시의 리해]108-109 페지   시는 어둠속으로 들어가야 하며 인간의 심장을 만나야 하고, 여자의 눈, 거리의 나그네들, 황혼녘이나 별이 빛나는 한밤에 적어도 한수의 시의 필요를 느끼는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이렇게 예기치 않는 사람들을 방문하는 일은 가본일이 있는 먼곳, 잃은 모든것, 배운 모든것 전부에 값한다. 파블로 네루다 [시에서] 동상111페지   시는 이 주요목적 -즉, 해방-에 있어서 다른 예술들과 같다. 에즈라 파운드 [시의 지혜] [시의 리해] 133페지   교훈시는 점차 도덕적인 훈계시, 그렇지 않으면 독자에게 어떠한것에 대해 시인의 견해에 설복시키기 위한 시로 국한되여 버렸다. 토마스 스턴즈 엘리어트 [시의 사회적기능] [시의 리해] 145페지   그것은 맑게 개인 하늘을 날고있는 새나 비행기의 모습을 따라가면서 바라보는것과 같은것이다. 만일 그것이 아주 가까이에 나타났을 때 보기 시작해서 그것이 점점 멀리 가는대로 계속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본다면, 우리들은 굉장히 멀리 갈 때까지 그것을 볼수가 있는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우리가 그 위치를 가르쳐 주려고 해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는것이다. 동명동상 152페지   시는 다만 한 언어로써만 표현할수 있고 다른 언어로는 번역할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언제나 상기시키는것이다. 동명동상 153페지   참다운 시는 개개 예술가의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자체이고 우주는 영원히 완성을 지향하는 하나의 예술이다 월리스 스티븐스 [가치로서의 상상력] [시의 리해] 156페지   시는 신앙을 그 내용으로 하지 않는다. 동상동명 163페지   시는 그러나 그러한 문맥속에서의 느낌과 태도에 특히 초점을 모으는것이지 있는 그대로의 행동이나 관념에 초점을 모으지 않는다. 그리고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하다. 클리언스 부르크스 [말하는 한 방법으로서의 시] [시의 리해] 177페지     시는 다양화될 때에야만 통합된다. 가스통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 선언 [시의 리해] 312페지   시란 실존의 모습뒤에 숨겨진 신비한 뜻을 자신의 본질된 음률을 되찾은 언어로써 표현한것이다. 시는 그래서 현세의 우리 머뭄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하나뿐인 령적업무의 근본을 이룬다. 스테판 말라르메 [서한] [시의 리해] 223페지   시는 자신의 형식속에서의 재생을 지향한다. 시는 우리의 령혼에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재구성하라고 부추긴다. 폴 발레리 [시에 대한 담화론] [시의 리해] 243페지   시가 금전의 종말을 포고하고, 혼자서 하늘의 빵을 이 지상을 위하여 쪼개여 나누어주는 때가 오리라. 앙드레 브르통 [초현실주의 제1선언] [시의 리해] 253페지   화가는 의미를 그리는것이 아니다. 작곡가는 음악에 의미를 붙혀주는것도 아니다... [의미]를 가지는 기호가 지배적인 힘을 누리는 령역-그것이 산문이다. 그러나 시는 차라리 회화나 조각이나 음악편이다. 장 폴 싸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시의 리해] 266페지   시라는것은 인간의 [신화]를 창조한다. 그런데 산문은 인간의 초상을 그린다. [시의 리해] 272페지 주해에서   시란 하나의 형태를 락서하는 령혼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시적이미지의 현상학] [시의 리해] 284페지   시는 끊임없이 그의 원천을 넘어서며 기쁨과 슬픔속에서 더 멀리 나아가 작품들을 빚어냄으로써 더 자유롭게 되는것이다... 시는 자유롭게 있는 법이다. 그의 운명을 우리는 결코 우리자신의 운명속에 가두어두지 못할것이다... 자기의 창조적인 령감이 자기의 욕망보다 더 멀리 자기를 이끌고 가리라. 피에르 장 주브 [대지와 시] [시의 리해] 293페지   시는 몽상가와 그의 세계를 동시에 구축한다. 가스통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 서문 [시의 리해] 303페지   한편의 시는 시를 꾸며진 대상과 시를 쓰고있는 자아와의 맞섬이며, 말하자면 외면의 풍경과 내면의 련관성인것입니다.   시의 모호함이 독자를 혼란시킴만큼이나 매혹시키며, 갈피를 못잡긴 하지만 그 말의 마법과 신비스러움에 강제적으로 끌려든다. 그러므로 엘리엇이 한 평론에서 [시는 리해되지 않고도 전달될수 있다] 라고 말한것은 그와 같은 의미에서이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28페지   시의 본질이 리해시키는데 있다면 그 누구도 시를 쓸수 없으니라. 동상   현대시는 그것들을 익숙하지 않는곳으로 데리고 가서 낯설게 만들며 변형시켜버린다... 시창작의 세가지 방식- 느낌, 관찰, 변형-중에서 현대에는 마지막것이 지배적이며, 그것은 객관세계에서뿐 아니라 언어와의 련관에서도 그러하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 구조] 29페지   현대시는 종래의 의미를 인간성, 체험감상, 그리고 심지어 개인적자아마저도 도외시해 버린다 동상 30페지   사물적인 소재 정신적인 소재 할것 없이 시는 이질적인 요소들을 혼합시키며, 변의의 인광을 발하도록 한다. 동상 43페지     시는 일상적 삶에 대한 방벽이며, 그 상상력은 모든 현상을 뒤섞어놓는 자유를 누린다. 시는 예감과 마술을 본질로 하는 시적인간들이 견디기 어려운 관습의 세계에 맞서는 노래하는 저항이다. 공허한 리상속에 토대를 둔 시는 불가사이한 신비성을 창조함으로써 현실로부터 리탈하게 되며, 그런만큼 언어마술에 의해 보상될수 있다. 동상 73-74   문제는 력사속에서 지닐수 있는 시적인것을 빼내는 일이다. 즉 일시적인것에서 영원한것을 끌어내는 일이다. 보들레를 [꿈꾸는 알바트로스] 49페지   모든 건강한 인간은 이틀동안 먹지 않고 지낼수 있지만 시 없이는 결코 지낼수 없다. 동상 97페지   시는 가장 큰 수확을 가져다주는 예술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시는 나중에야 리익금을 만지는 그런 종류의 투자다. 하지만 그 리익금은 두두룩하다. 동상 동쪽   서정시는 도약한다. 하지만 늘 탄력적인 움직임으로, 물결의 너울과 같은 움직임으로 도약한다. 동상 102페지   시는 사장(死葬)되거나 몰락하는 한이 있더라도 과학이나 도덕과 하나가 될수 없다. 시의 대상은 진리가 아니다. 시는 자기자신밖에 가지지 않는다. 보들레를 [꿈꾸는 알바트로스] 101페지   시의 순수성의 전제조건은 그러므로 탈 사물화이다 보들레르 [꿈꾸는 알바트로스] 180페지     현대시의 근본특성의 하나는 그것이 자연적인 삶과 점점 더 분리된다는데 있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 구조] 147페지   시는 은자의 예술이다. -코트 프리트 벤 후고 프리드리히[현대시구조] 195페지   파편문체는 현대시의 특징이 되었다. 동상 259페지   참된 시란 그 세계가 독창적이고 생동할수록, 은밀한 류사관계가 이루어지고있는 대립이 더욱더 상반적으로 된다. -체코의 랑만주의자 마챠 [현대시리론] 5페지   시 전체는 하나의 큰 거짓말이여서, 처음부터 넉살좋게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시인은 가치가 없다. 로만 야콥슨 [현대시 리론] 8페지   어떻게 시성이 시를 표현하는가? 시성은 언어가 언어로 느껴지고 이름 불리여진 대상이나 분출되는 정서의 단순한 표현이 아닌 경우에 존재하게 되며, 또한 언어들과 그 구성법, 언어의 의미, 언어의 외적형식과 내적형식등이 무심하게 현실을 가리키는 대신에 그것들 나름의 무게와 가치를 획득할 경우에는 존재한다. 로만 야콥슨 [시란 무엇인가] [현대시 리론] 18페지   세계의 수많은 시에서 가장 뛰여난것은 대부분 자유률로 창조된것이다. 현대시에서 가장 흥미로운 일련의 운동은 엄격한 률격 없이는 최악의것이였거나 최상의것이였다. 벤야민 흐루쇼브스키 [현대시의 자유률] [현대시 리론 ] 117페지   화려한 행위는 고도의 황홀경을 불어넣고, 모든 정복자는 시신을 창조한다. E.월터 [나의 보호자에게 보내는 송시] [세계명언 대사전] 743페지   시는 인류의 모국어이다. J.G.하만[투케이 아네스테티카] [세계명언사전] 746페지   시는 인간이 자기자신의 경의를 탐구하는 언어이다. C. 프라이 [타임]지에서 [세계명언대사전 ] 746페지   시는 그 주제가 진실이 아니라 진실과 같은 사물들의 시 G.채프맨 [부쉬당부와의 복수] [세계명언대사전] 746페지     시는 정서의 느슨한 변환이 아니라, 정서로부터의 도피이며,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의 도피이다. T.S. 엘리어트 [전통과 개인의 재능] [세계명언 대사전 ] 747페지   시는 인정받지 못한 세계의 립법자이다. M.W. 셀리 [시의 번호] 동상 [세계명언대사전] 747페지   시는 단순히 사물을 말하는 가장 아름답고 인상 깊고, 광범한 효력을 가진 양국이요, 여기 그 중요성이 있다. M. 아롤드 [비평론] [세계명언대사전] 747페지   소네트(14행시)란 무엇인가? 그것은 소곤거리는 먼 바다를 말해주는 진주조개요, 신비롭고 갈고 닦은 보석이며, 또한 잘 그린 예쁜 그림이다. R.W.길더 [소네트] [세계명언대사전] 747페지   참된 시는 리해하기전에 통할수 있다. T.S. 엘리어트[단테론] [세계명언사전] 750페지   시는 의미해서도 안되며, 있어야 한다. A. 머쿨리시 [달나라의 거리] [세계명언 대사전] 751페지   왜 이 모든것이 필요한가? 왜 기호가 대상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특별한 관심을 두는것이 필요한가? 왜냐하면 기호와 대상의 일치(A는 A1이라는)를 직접적으로 인식하는것말고도, 그러한 일체의 부적절성(A는 A1이 아니다)에 대해서도 직접적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기때문이다. 로만 야콥슨 [시란 무엇인가] [현대시리론] 18페지   시는 력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하다. 왜냐하면 시는 보편적인것을 말하는 경향이 더 강하고, 력사는 개별적인것을 말하기때문이다. 아리스토 텔레스 [시학] 62페지   그대들은 오랜 시간을 두고 꼼꼼히 손질하면서 잘 깎은 손톱으로 열번씩 음미해보지 않은 시일랑 물리치시라. -호라티우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195페지   시는 그림과도 같습니다. 어떤것은 가까이서 볼 때 더 감동적이고 어떤것은 멀리서 볼 때 그렇습니다. 동상 199페지   훌륭한 시라는것은 어느것이나 모두 실제로 평범한 일상생활의 기슭에서 저쪽 미지의 세계의 기슭으로 걸쳐놓은 교량같은것입니다. 세실데이 루이스 현대인 교양전서 30권 354페지     상상력에 대하여     파스칼은 상상력은 세계의 주인이라고 말했다. 월리스 스티븐스 [가치로서의 상상력] [시의 리해] 156페지   상상력은 사물의 가능성에 대한 마음의 힘이다 동명 동상 158페지   형의상학자로서의 상상력은 우리를 어느한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예술로서의 상상력은 또 그와는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동명동상 158페지   상상력은 위대한 인간의 능력의 하나이다. 랑만주의는 이것을 왜소한것이 되게 한다. 상상력은 마음의 자유이다. 랑만적인것은 자유의 활용에 실패한 경우를 지칭한다. 동명동상 159페지   상상력만이 최고의 천재이다. 그것은 대담하고 열렬하여 , 그 최고의 업적은 추상에 있다. 동명동상 160페지   상상과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토의는 삶의 목적을 위하기보다는 예술과 문학의 목적을 위한것이다... 삶에 중대한것은 실재 그대로 보여주는 진리인데 대하여, 예술과 문학에 있어서의 중요한것은 우리가 보는바의 진리이다. ... 예술과 문학에 있어서의 상상의 가치는 심미이다. 동명동상 165페지   시적가치는 ... 지식의 가치도 아니고, 믿음의 가치도 아니다. 그것은 상상의 가치이다... 시적가치는 직관적인 가치이며, 직관적가치는 정당화될수 없기 때문이다. 동명동상 166페지   상상력은 현실속에 비현실을 도입하는 기능이며 그 가치는 신의 리념을 인간의 리념에 투사하는 사고의 방책이 갖는 가치이다. 그것은 원본과 따로 있는 영상들을 만들어낸다...다양성은 상상력의 특성이다. 동명동상 167페지   상상력은 누를 도리가 없는 혁명가이다... 비정상속에서 정상을, 혼란속에서 혼란의 반대를 알아볼수 있게 하는 힘이 상상력이란 점이다. 동명동상 168페지   상상력은 론리의 기적이며, 그 미묘한 예감은 , 리성의 결론내의 계산이듯이, 분석을 넘어서는 계산이라고 할수 있다. 동명동상 169페지   문학의 입구 즉 상상의 입구를 정상적인 사랑, 정상적인 아름다움의 장면으로 볼수 있다는것자체가 대단한 상상력의 발휘이다. 동상동명 170페지   상상력에 의한 시는 물질계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날카롭게 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상황과 행위의 정서적, 지적, 도덕적 함축에 대한 감각을 깊게 한다. 동명동상 181페지   인간의 상상력이 만든것이면 진실되지 않는것이란 없다고 나는 믿는다 마르셀 레이몽 [보들레르에서 초현실주의까지] [시의 리해] 203페지   나는 소박한 환각에 길들었다. 앙르 튀르 랭보 [언어의 연금술] [시의 리해] 226페지   만약 그가 (철학자) 시적상상력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연구하려 한다면, 지금까지의 그의 지식을 잊어버려야 하고, 그의 모든 철학적연구의 습관들을 버려야 한다. 가스통 바슐라르 [이적이미지의 현상학] [시의 리해] 279페지   시의 철학이 있다면 ... 이미지의 새로움에서 오는 법열 그자체가운데, 태여나고 다시 태여나야 하는것이다. 동명동상 동페지   이미지를 재현하는게 아니라 현출(現出)하는 창조적상상력은 오직 한번 언급되여있을뿐이다. 동명동상 296페지   상상력은 그의 생동하는 활동력에 있어서 우리를 과거와 현실에서 동시에 떼여낸다... 비현실의 기능쪽이 완전치 못하면, 창조적인 정신활동은 얽매이게 된다. 상상함이 없이 어찌 예견할수 있겠는가?... 순수한 승화의 이 정상에서 바라본다면, 재현하는 상상력은 더 이상 대단한것이 아님을 알수 있다. 요한파울리히터는 이렇게 쓰고있지 않았던가?- 재현하는 상상력은 현출하는 상상력의 산문인것이다. 동명동상 297페지   상상력과 기억을 분명하게 구분하지 못한다면 창조적상상력의 심리학을 세우지 못하리라고 우리는 자주 말했다. 가스통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서문 [시의 리해] 307페지   상상되는 세계는 몽상의 깊은 일치를 야기시킨다. 동명동상 310페지   상상력의 산물을 객관적이고 론리적인 합당성의 척도로 잰다든지 혹은 단순한 공상과 애써 거리를 유지하여야 할 필요성은 없다. 상상력은 절대적인것이기 때문이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39페지   상상력은 공간의 질서를 전도시킨다, 례를 들면 다음과 같은것들이 있다. 마차들은 하늘위에서 달린다, 호수의 바닥에 살롱이 있고, 드높은 산정에서 태양이 출렁거린다. 철도레일이 호텔을 통해서 호텔위로 달린다.   그러나 상상력은 인간과 인간사이의 관계도 전도시킨다. 법무관이 그의 시계줄에 걸려있다.   상상력은 가장 련관이 먼것, 구체적인것과 상상적인것을 강제로 결합시킨다. 아침 우유의 중얼거림, 지난 세기밤의 중얼거림 때문에 죽도록 슬픔에 잠기다.   상상력은 실제 사실에 부합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더욱 낯설계 만드는 비실재적인 색채들을 창안하는데 이는 보들레르의 의도에 부합되는것이다. 푸른 화란냉이, 푸른 암말, 록색옷의 피아니스트, 록색웃음, 록색의 하늘빛, 검은 달들.   아득한 령역으로 돌진하는 상상력은 오직 단수로만 존재하는 사물들을 복수화시킨다. 애트나 화산들, 프로리다들, 말강들, 이런것들은 복수화 됨으로써 더욱 감각적이 되지만 그와 동시에 현실로부터 멀어진다...[모든 달과 모든 도살 모든 눈(雪)], 복수화 및 이러한 총칭화는 현실을 마음껏 헤집고 배척함으로써 새로운 초현실을 만들어내는 상상력의 강력한 수단이다. ... 상상력의 깊은 심층에서 마술적인 아름다움은 무와 하나가 된다 동상 111페지   어휘상의 날카로운 불협화 즉 이질적인 사실들이나 가치들을 극도로 좁은 언어공간에 몰아넣는 단어군들로 나타내기도 한다. 타르를 마시는 태양, 겨울에도 재맛이 나는 7월의 아침, 구리종려들, 비둘기 똥과 같은 꿈들, 아늑하고 안락한 느낌은 대개 시의 종결부에서 갑작스런 일격, 혹은 야수적이거나 비천한 말의 돌발적인 출현에 의해 저지된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 구조] 112페지   인간에게 색과 윤곽 소리와 향기의 정신적의미를 가르치는것은 바로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태초의 유추와 은유를 창조한다. 상상력은 모든 창조물을 해체하고 령혼의 가장 깊은곳에서만 그 기원을 찾을수 있는 법칙에 따라 축적되고 배렬된 자료들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며, 새것에 대한 감각을 만들어낸다. 보들레를 [꿈꾸는 알바트로스] 74페지   상상력은 사물의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관계를 , 그리고 사물의 조응과 류사함을, 철학 방법들을 떠나서 무엇보다도 먼저 감지하는 신과 같은 능력이다 동상 76페지   작품은 다 써놓고 보면 흔히 처음에 자기가 생각햇던것을 절반밖에 표현하지 못했음을 깨닫게 된다. 왜 이런가? 그것은 문학적구상은 흔히 상상에 의존하기에 아주 쉽게 기발한 생각들을 하게 되지만 언어는 비교적실재적이여서 교묘하게 구성하기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류협 [문심조룡] 397페지   상상력, 그것은 사실상 절대력의 변명에 불과하며, 명석한 통찰력이요, 마음의 너그러움이며, 승화될 상태에 있는 리성이다. w. 워즈워드 [서곡] [세계명언 대사전] 743페지   [가상을 만드는것에 불과하지 진실로 존재하는것을 만드는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좋은 말이야. 바로 맞추었네] 플라톤 [시론] 아리스토 텔레스 [시학] 219페지   그렇다면 모방술은 진실에서 멀리 떨어져있네. 동상동명 224페지   젊은이여, 말에 위엄과 장대함과 긴장감을 가장 많이 부여하는것은 상상이오. 롱기누스 [숭고에 관하여] 아리스토 텔레스 [시학] 313페지       변형에 대하여     알송달송한 의미의 가능성이 결국 아무 의미도 없는것으로 판명됨에 따라 순수한 언어의 효과가 뚜렷하게 두드러지게 된다. 올리언스 부르크스 [말하는 한 방법으로서의 시] [시의 리해] 171페지   소네트의 은유와 리듬은 그 진실이 우리에게 [산 진실]로 오도록 한다. 동상동명 182페지   직선의 규률에 복종해야 한다면 시란 존재할수 없으리란점을 지적해 둡시다. 사람들은 여러분들에게 가르쳐줍니다. 비가 온다고 말하고싶으면 , 비가 온다고 말하십시오! 라고. 그러나 시인의 목적이 비가 내린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것은 결코 아니며 또한 그럴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시가 언어의 기능을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함축하고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들지 않습니다. 폴 발레리 [시에 대한 담화론] [시의 리해] 242페지   무의식적 회상에 정주한채 , 직관의 대상주위에 떼지어 몰려드는 표상들을 대상의 분위기라고 한다. 발터 벤야민 [보들레르에 있어서의 몇 개의 모티브에 관하여] [시의 리해] 364페지   만일 그들이 그것을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유일한 현실성의 세계, 즉 개인의 고유한 감수성의 세계에 관련시킨다면 이런 환상은 진실이 될수 있는것이다 동명동상 367페지   모든 구조주의적활동의 목적은 , 그것이 사유적이든 시적이든 간에, 하나의 대상을 재형성하여 그 재형성가운데서 그 대상의 작용태규칙들(기능들)이 나타낼수 있게끔 하는것이다. 따라서 구조는 기실 대상의 모사simulacre인 셈인데, 그러나 어느 방향으로 관심이 지향되고 표명된 모사이다. 왜냐하면 모사로 이루어진 대상은 자연속에 보이지 않는것, 또는 차라리 불가능한것으로 머물러있던 어떤것을 나타내기때문이다. 구조적인 인간은 현실을 취해서 분해하고 재구성한다... 롤랑 바르트 [구조주의적 활동] [현대문학 비평론] 165페지   창조 또는 사유는 세계에 대한 독특한 ‘인상’이 아니라 정녕 그것과 닮은 한세계를 제작하는것이고, 그것은 전자의 세계를 복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리해가능한것으로 하기 위해서이다... 동명 동상 165페지   구조주의는 ... 구조의 유사성에 토대(사실주의라고 하는 예술에서처럼) 아니라 기능의 유사성(레비스트로스가 상동성이라 부르는)에 토대를 둔 그런 모사에 속하는것이다. 동상   예술을 정의하는것은 복사대상의 성격이 아니라 (그러나 그것은 모든 사실주의 끈질긴 편견인데) 인간이 그것을 재형성하면서 거기에 덧붙이는것인것이다. 기술이야 말로 모든 창조의 존재자체이다. 동상 166페지   대상을 재구성하는것은 기능들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며, 말하자면 방법이 작품을 만들어내는것이다. 구조주의적 작품이라기보다는 활동이란 말을 해야 하는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 [구조주의적 활동] [현대문학비평론] 166페지   단순병형의 경우에는 설명어가 하나밖에 없고 따라서 단 하나만의 주어가 있는데 반해, 복합변형의 경우에는 설명어 둘이 있어서 이것이 주어를 하나 또는 둘이 있게 하는것이다. 츠베탕 도토로브 [서술변형] [현대문학 비평론] 258페지   작품들이 그 섬세한 오묘함을 드러내고 우리를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움직이려면 상상적인 직관속에서 나타나기만 하면 족하다. 로만 인가르든 [현상학적미학, 그법위 설정을 위한 시도] [현대문학비평론] 291페지   독창적인 직관과 고된 작업의 로고는 병행되여야 하며 이들의 조화가 일치하지 않을 때에는 기법상으로 실패한 실체를 얻게 된다... 근본적인 직관이 상실되면, 아무리 기법이 뛰여나다 하여도 완성된 작품에는 그 직관이 불러일으킨 미적으로 가치있는 특성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동상동명 292페지   하나의 변형결과로 인해 아무것도 의미가 없던 단계로부터 모든것이 의미를 가지는 단계에로의 이행이 이루어진다. 자끄 데리다 [인간과학중심의 담론에 있어서의 구조와 기호놀이] [현대문학 비평론] 519페지   탈형상화된 현실소재의 모든 구성성분은 보통 감각특성을 가지는 단어군들로써 표현된다. 하지만 이러한 단어군들은 객관적으로는 결합불가능한것들을 비정상적으로 결합시키기때문에 감각적특성들로부터 비실재적인 형상체가 생겨난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108페지   별들의 숲에서 떠오르는 육고기꽃들, [목제 신발을 신은 목동의 시들이 정원에서 으르렁거린다] [옆방에서 램프가 선회할 때, 마치 거울처럼 붉고 검은 도시들의 불결한 진창] 이 모두는 감각적현실의 요소들이긴 하나 추측, 생략, 위치변경과 새로운 결합에 의해 초현실성을 획득한다... 그 현실성은 오직 언어속에서만 존재하는 세계안에 있는것이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109페지   무는 전적으로 리상주의적인 기원에서 나온 존재론적 개념이다. 말라르메가 주목한것은 모든 현실적존재의 불충분성이다. 리상주의적 사고만이 현실로 주어진 모든것을 불충분한것으로 경험할수 있다. 동상 166페지   1948년 르베르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인에게는 아무런 대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자신속으로 파고 든다. 시작품은 자신의 불연속성 그리고 결합 불가능한것을 서로 련결시키는 조작방식의 근거를 아무도 모르게 함으로써 더욱더 가치있게 된다]. 스페인 시인 살리나스는 순수의 조건은 시가 가능한 한 사물과 테마로부터 벗어나는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때서야 비로서 언어의 창조적운동이 자유로움을 가지기 때문이다. 대상은 시의 수단일뿐이다. 동상 199페지   중요한것은 탈인간화이다. 그것은 자연적인 감정상태들을 배제시키고 , 인간을 그이상 낮은 단계로 밀려나게 하며, 종래까지는 타당했던 사물과 인간사이의 단계질서를 역전시키고, 인간을 가능한 한 인간으로 보이지 않게 하는 시각에서 인간을 기술하게 한다. 현대예술가의 미적향유는 인간적인것에 대한 바로 그러한 제압(승리)에서 생겨난것이다. 동상 223페지   시정신을 자기 자유를 충분히 누리기 위해 자기자신의 자연성을 소멸시키고 , 세계로부터 추방되며, 또한 세계를 추방시킨다. 이것이 탈인간화의 기묘한 역설이다. 동상 227페지   문학적 사색을 잉태함에 있어서 그요체는 허심함과 조용함에 있으며 마음속의 선입관을 깨끗이 쓸어버리는데 있다. 바로 이렇게 해야만 정신이 순수하고 깨끗해지게 할수 있다. 또한 학식을 쌓음으로써 진귀한 보물을 저장하고 사리를 분명히 가리는것으로 재능과 학식을 풍부히 하고 경력을 연구하는것으로 철저한 관찰을 진행하고 문학적사색을 따라 아름다운 문학언어를 끌어내야 한다. 그런 다음에라야 신묘한 도와 깊게 통한 심령으로 하여금 성률에 맞춰 문학언어를 안배할수 있는데, 이는 마치도 식견이 있는 장인바치가 심상에 의존하여 창작을 진행하는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는 문학적사색을 구사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며 작품의 구성에서의 중요한 발단이다. 류협 [문심조룡] 377페지   비란 비부(比附)이고 기흥이다. 비부 즉 사물의 리치를 련결한다는것은 비유를 사용하여 사물을 련결한다는 의미이다. 기흥은 즉 사물에 의탁해서 어떤 정서를 불러일으킨다는것은 어떤 의미를 아주 은근하게 내포하고있는 사물에 맡긴다는 뜻이다...비란 격분의 감정을 품은채로 잘못을 지적하는것이고, 흥이란 완곡한 비유를 사용하여 그것에다 숨겨진 의도를 의탁하는것이다. 일반적으로 시간의 추이에 따라 감정과 생각은 변하기마련이니 , 시인들이 지향하는 표현수법에는 항상 그 두가지가 포함돼있었다. 동상 501페지   비라고 부르는것에 대하여 설명하자면 사물을 묘사하여 비유하는것으로써 자신의 의도를 명백하고도 정확하게 설명하는것이다. 그러므로 금과 석으로 아름다움을 비유하였고, 나나니벌이 명령을 양육하는것을 례로 자식을 깨우치는것을 비유했고 , 매미의 울음소리를 례로 시끄러운 웨침에 비유했고, 때묻은 옷을 마음의 근심에 비유했고... 동상 503페지   그것 (자연풍경)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 창조된 바로 그것이며, 인간에게 있어서는 미지의 섬의 아무도 발을 들여놓지 않은 밀림과 흡사한 감추어진 령역인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95페지   변형이란 일부분은 그대로 남아있고 일부분은 시인이 조작한 말이다. 아리스토 텔레스 [시학] 127페지   오직 한사람 당신만이 보거나 느끼는것이며 타인에게는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것을 비전이라고 합니다. 직관은 진실도 거짓도 아니며 오직 현존할뿐입니다. SK.랭거 예술이란 무엇인가 [현대인 교양전서] 제29권 281페지       언어에 대하여     사실 시인은 대뜸 [도구로서의 언어]와는 인연을 끊을것이다. 그는 단연히 말을 기호로서가 아니라 [사물]로 간주하는 시적태도를 선택할것이다... 전자에 있어서는 말은 이미 길들여져있다. 후자에 있어서 말은 야성 그대로다. 전자에 있어서는 그것은 유용한 약속이고, 차츰 소모되여 마침내 쓸모 없이 되어버렸을 때는 버리고 마는 연장이다. 후자에 있어서는 말은 초목과 같이 지상에 자연적으로 자라나는 자연물들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언어는 외부세계의 한 구조물이다. 장폴 싸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시의 리해] 267페지   시어는 그자체가 하나의 소우주인것이다... 말이라는 이상한 거울속에는 하늘과 땅과 작가자신의 생명이 비치고있었다. 마침내는 말이 [사물들] 자체로 된것이다. 동상동명 269페지   언어는 우리의 껍질이며 촉각인것이다. 언어는 남에게 대하여 우리를 보호해주고, 남에게 관한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그것은 우리이 감각령역이다. 우리들은 신체속에 있듯이 언어속에 있다. 동상동명 275페지   -그렇다. 정말, 말들이 꿈꾼다. 가스통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서문 [시의 리해] 305페지   말은 꿈꾸는걸 방해하는 아주 무거운 짐인양 의미를 던져버린다. 말들은 그때 자기들에게 그걸 짊어질 권리가 있다는듯 다른 의미를 띠게 된다. 말은 어휘라는 숲속으로 새로운 무리 나쁜 무리를 찾아간다. 동상동명 304페지   시적이미지는 언어의 떠오름이며, 언제나 의미하는 언어보다 약간위에 있는것이다... 실용적인 언어의 통상적인 선을 빠져나오는 그 언어의 도약들은 축소판생의 도약들인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시적이미지의 현상학] [시의 리해] 289페지   시적언어는 지배자의 이름을 전승시키기 위하여 그 언어를 리용하려고 하는 모든자를 거부하는것이다. 이러한 거부의 근거는 시의 밖에 있는것이 아니라 시 그자체안에 있다. 이로서 결정적인 론점에 이른것이다. 한스 마구누스 엔? 스버르거 [시와 정치] [시의 리해] 385페지   시의 작업은 시어의 일반적인 노력이 언어를 자연화하고 사물화하려고 하는만큼, 지적인 동기를 지워버림으로써 더 물리적인 따라서, 상상력에 대해서 더 직접적으로 매혹적인 련상을 가능케 하는데 있게 된다. 제라르 쥬네트 [낯. 밤] [현대문학비평론] 213페지   시행이란 [여러 말들을 가지고 , 언어에는 낯선 새롭고 전체적인 그리고 주술같은 한마디 말을 재창조하는]것이다. 동상동명 216페지   언어는 치료의 기구이기도 하다... 무질서가 정리되며 무의미가 의미를 갖게 되고 꿈은 현실적인 원천에까지 거슬러올라가게 된다. 이봉 발레리 [정신분석학과 문학비평]의 서문 [현대문학비평론] 368페지   시인은 말을 마치 건반인것처럼 사용한다. 후고 프리드리히[현대시구조] 44페지   신언어는 어떤 모습이여야 하는가? 아플리네르의 대답은 개략적으로 말하자면 난폭하고 불협화적인 언어, 그리고 다시 신성화된 언어를 암시하고있다. 모음이 없는 자음들, 무딘 폭팔음을 내는 자음들, 신언어는 돌발적이며 전율하는 신神이다. 동상 200페지   마술적작용, 주술적비법으로서의 언어와 글쓰기에 대하여 보들레르 [꿈꾸는 알바트로스] 102페지   말라르메의 시어는 현대의 조급한 읽기에 저항하면서 말이 그 원천과 항성속으로 되돌아가는 령역을 창조하려고 시도한다. 이러한것의 문장을 파편들로 파괴함으로써 가능해진다는것은 특기할 사실이다. 결합이 아닌 불연속성, 련결대신에 병렬, 이것들의 내적불련속성, 불가능의 경계상에 있는 진술의 문체적특성이다. 파편은 이룩되여가는 완전성의 상징이라는 지위를 획득한다. 파편들은 리념들의 결혼표징이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미학의 근본표징이기도 하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157페지   시속에서 언어자체가 무를 광범위하게 현재화시키는데 그것은 현실적소멸을 통한 무의 생성에 비례한다. 동상 67페지   경험의 외피를 벗어버린 현상들은 절대시선에 의해 좌우된다. 자신을 담아줄 그릇을 향하고있는 이 절대시선은 현상들을 상징으로만 사용하며, 이에 의해 자신의 운동을 자유롭게 조직하는것이다. 동상 182페지   언어는 시인의 재료이므로 예술적재구성의 대상이 된다 얀 무카로브스키 [시란 무엇인가] [현대시 리론] 29페지   시적언어는 감정이 표현을 드러내는 언어인 정서적언어와도 다르다... 표현의 정감에서 리탈한것이 문학에서 계획된 요구사항이 되는 시대조차 있었다. 동상동명 44페지   시적언어는 구상성에 언제나 이끌린다기보다는 구상성과 비구상성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고가는것이다. 이것과 련관해서 비유적본질도 무조건 시적언어의 특징이라고 말할수 없다는 점을 지적해야만 하겠다. 동상   시적언어는 기능에 의해서만 영속적으로 규정될수 있다. 그러나 기능이란 속성이 아니라, 어떤 주어진 현상의 속성들을 활용하는 방식이다. 동상 46페지   학자들은 시어를 표준적인 문어가 변형된것들중의 하나로, 즉 상부구조의 일반적규칙에 좌우되는 한 변형으로 론의함으로써 이 련관관계를 설명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정확히 언어장치들이 단 한가지 령역에 대한 제창은 문학에 어울리지 않는것이다. 동상 49페지   시에서 가장 놀랄만한 언어창조인 신조어가 표준문어에 뿌리내린다는것은 거이 어렵다. 얀 무카로브스키 [시적언어란 무엇인가] [현대시리론] 51페지   문학의 언어란 무엇인가? 조각의 금속이나 돌과 같은 ,또 미술에서 도료와 화판재질같은 재료다... 예술작품에서 언어 또한 다듬어지고 재구성되는 과정을 겪어야 하는것이다. 동상동명동쪽   시적언어의 갱신은... 언어에 대한 일종의 왜곡으로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시적언어의 변형적성격에 대해 언급하게 된다. 동상 54페지   시적인 신조어는 이러한 필요(소통가능한)에서 출현하는것이 아니고 ,오히려 거꾸로 신어의 창조라는 바로 그 사실에 주의를 끌 목적에서 이미 알려져있는 사물의 일반적명칭을 대치하는 경우가 흔하다. 동상 81페지   표현(과장-편자주)들이 마음속의 깊고도 신비한것들을 펼쳐보이면 울적한 마음을 날려보낼수 있으니 , 안맹한 소경으로 하여금 눈을 뜰수 있게 하는 빛남을 갖고있고, 귀머거리로 하여금 소스라쳐 놀라게 할 소리를 갖고있다고 하겠다. 류협 [문심조룡] 517페지   작품의 언어적표현속에 어떤 광채를 숨기게 되면 안광이 평범한 사람들은 어리둥절해 할것이고, 어떤 예리함이 언어적표현속에 드러나게 되면 식견이 높은 사람들은 크게 놀라게 될것이다. 동상 557페지   앞서 말한 여러가지 시어체와 복합어와 방언을 적절하게 사용하는것도 주요한 일이긴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것은 은유에 능한것이다. 이것만은 남에게서 배울수 없는것이며 천재의 표징이다. 왜냐하면 은유에 능하다는것은 서로 다른 사물들의 유사성을 재빨리 간파할수 있다는것을 뜻하기때문이다. 아리스토 텔레스 [시학] 134페지   상투적문구나 기술에 있어서는 잇단 은유만큼 표현력이 풍부한것은 아무것도 없소. 롱기누스[숭고에 관하여] 아리스토 텔레스 [시학] 356페지   말의 울림은 번쩍번쩍 빛난다 세실데이 루이스 [현대인 교양전서] 제 30권 264페지   언어의 끊임 없는 재창조라는것이 그 얼마나 중요한 작업인가 동명동상 265페지   단어는 시의 가장 기본적인 재료입니다. 시인이 단어를 망치로 다듬어 이것을 견고하고 아름다운 무늬로 단련시키는데 사용하는 방법을 [시적기술]이라 부릅니다 동명동상 279페지       기능에 관하여     시인이 그 시기의 한 대중적인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고 해서 나쁜 시가 일시적으로 유행하는 수도 있는것이다. 그러나 참다운 시는 대중적인 생각이 변화할뿐만 아리라 그 시인이 열정적으로 관여했던 문제에 대한 흥미가 완전히 사라진뒤에도 잔존하게 되는것이다. 호마스 스턴즈 엘리어트 [시의 사회적기능] [시의 리해] 146페지   첫째 우리들이 확언할수 있는것은 시는 즐거움을 주는것이여야 한다는것이다. 동상동명 147페지   우리는 시를 대중적인 시에만 국한해서는 안될것이다... 시인의 직접적인 임무는 그의 국어에 대한것이다. 즉 첫째로는 그의 국어를 보존하고 , 둘째로는 그것을 확대, 향상시키는 일이다. 동상동명 149페지   시인이 매우 급속히 많은 독자를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의심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들에게 그 시인이 진정으로 새로운 일을 하고있지 않고, 또 대중들이 벌써 알고있는것, 따라서 그들이 벌써 전시대의 시인들에게서 받은것을 다만 주고있는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만드는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올바른 소수의 독자를 가져야 한다는것은 중요한 일이다. 동상동명 151페지   문학은 철학이나 신학이나 종교의 애용물이 아니다. 문학은 자신의 고유한 임무를 가진다. 그러나 이 임무는 사변적인것이 아니고 감정적인것이기 때문에 문학은 사변적으로 결정될수는 없다. 엘리어트 [1927년 한 론문에서] [시의 리해] 376페지   독자에게 낯설은 사상이라고 생각되는 이상한 주제는 저자의 잠재적존재를 가리켜준다. 볼프강 이제르 [독서과정: 현상학적접근] [현대문학비평론] 247페지   문학의 기능의 하나는 바로 그 과학적언어를 정복시키는것이다. 그러므로 문학이 공격하는 바로 그 언어의 도움으로 문학을 완전히 읽어낼수 있다고 주장하는것은 지극히 모험스러운 일이다. 그런 주장을 한다는것은 문학의 실패를 전제하는것과도 같다. 츠베탕 토도로브 [어떻게 읽을것인가] [현대문학 비평론] 247페지   작품제작에 재주 없는것을 , 이목을 끌게 마련인 정치적암시로 벌충하는것이 특히 열등한 문인들의 버릇으로 점점 굳어졌다. 시, 소설, 평론, 희곡, 모든 문학생산품이 이른바 [경향]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엥겔스 1851년 10월 MEL.P.119)   ...재주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확신을 드러내려 극단적으로 경향성 쓰레기를 보여주는 하찮은 친구가 있는데 사실은 독자를 얻기위해 그러는것이다. (엥겔스 1881년 8월 MEL 123) 레이몬드 월리엄즈 [제휴와 참여] [현대문학 비평론] 569페지   경향문학은 ... 정치적제휴로서의 참여였다. 인간을 위해서로부터 인민을 위해서로, 다시 혁명을 위해서로, 당을 위해서, 그리고 (변화하는) 당로선을 위해서로 협소해져간것이다. 동상동명 571페지   참여는 이데올로기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것이다. 동상 573페지   공고라는 시가 외부세계와 내부세계의 정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질수록 그 가치가 증대한다고 확신한다. 그는 전달가능한 감정들이 배제될 때 비로소 나타나는 순수한 무용의 미를 사랑하였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197페지     시의 리해는 소수의 대가에게만 속하는 령역이다... 시는 아름다운 소리만 내며, 어떤 의미도 련관도 갖지 않는다. 기껏해야 각양각색의 사물들의 순전한 파편들인양 몇구절 정도 리해나 될뿐이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44페지   보들레르는 [악의 꽃]을 저항에의 열정적인 욕구, 그리고 증오의 산물로 칭하면서 시가 [신경쇼크]를 유발시키도록 권장하고 독자를 자극시켜 더 이상 리해하지 못한것을 자랑한다. 한때 기쁨의 무한한 샘이였던 시적인 의식은 이제 무진장한 고문도구들의 병기창이 되었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 구조] 64페지   [일루미네이션]은 독자를 고려하지 않는 시이다. 이 시는 리해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것은 환각적인 자기방출의 뢰우이며, 기껏해야 위험에 대한 사랑의 전원적인 위험에 대한 두려움을 일깨운것으로 만족한다... 어느 문장이 말하듯 [다른 모든 선구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업적을 남긴 창시자]임을 확인시켜준다. 이 시는 절대화한 현대적상상력의 최초의 위대한 기념비이다. 동상 113페지   나는 언제나 문학과 예술은 도덕과는 무관한 목표를 추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자신은 상상과 문체가 아름다운것으로 충분합니다. 보들레르 [꿈꾸는 알바트로스] 51페지   그리고 끝으로 몽상을 예술품으로 만드는 작업을 전혀 리해하지 못하는 이 무능력을 나는 결코 참아낼수 없었습니다. 동상 58페지 (1857년)   많은 사람들이 시의 목적은 어떤 교육적인것에 있고, 시는 때로는 의식을 강화시켜야 하고, 때로는 풍습을 향상시켜야 하고, 또 때로는 어떤 유용성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는 자기자신 밖에는 다른 어떤 목적도 가지지 않는다. 시는 다른 목적을 가질수가 없다. 단지 한편의 시를 쓰는 즐거움을 위해 씌여진 시보다 더 위대하고 고귀하며 진실로 시라는 이름에 값하는 시는 없을것이다 동상 102페지   언어행위의 시성(詩性)은 의사소통이 제일 중요한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백히 하기때문에 여기 ‘검열’은 느슨해지고 부드러워질수 있다. 로만 야콥슨 [시란 무엇인가?] [현대시리론] 13페지   시적표현의 목적은 미적효과에 있다. 그러나 시적언어를 지배하고 있는 (다른 기능언어에서는 부수적현상에 불과할뿐) 미적기능은 언어기호자체에 주의를 집중시킨다. 따라서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이라는 목표를 지향하는 실제의 방향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게 된다. 얀 무카로부스키 [시적언어란 무엇인가?] [현대시리론] 46페지   한작가의 작품이 갖는 진정한 가치를 정확하게 리해하는 지음을 만날수 있다는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음은 확실하게 리해하기 어렵고 또 그런 지음을 만나기는 더욱 어려운것이다. 작품에 대한 진정한 리해력을 갖춘 사람인 지음을 만난다는것은 천년에 한번 있을가말가한 일이다. 류협 [문심조룡] 685페지   지나치게 심오하다고 탓을 하랴! 문제는 식견과 감별력이 차한데 있다... 마음의 눈으로 작품의 사상과 감정을 관찰하는 일은 육안으로 사물의 형체를 관찰하는것에 비유될수 있다. 아주 밝은 눈으로 보면 분간할수 없는 사물이 존재하지 않을것이다... 오직 심원한 인식능력과 감별능력을 지닌 사람만이 작품의 심오함을 포착해 낼수 있고 그로인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희열을 느낄수 있을것이다. 동상 695페지   만일 작품전체에 함축적의미가 결여돼 있다면 그것은 마치 로유(老儒)에게 학문이 없는것과 같아서 경우에 따라서는 단 한번의 질문에 밑바닥이 드러나게 되고, 숱한 구절들이 경구가 없다면 그것은 마치도 고대광실에 진귀한 보물이 없는것과 같아서 몇번 묻게 될 경우에는 얼굴색이 질리게 된다. 류협 [문심조룡] 557페지   그가 사용했던 유사한 테마 주제들이 빅토르유고가 아닌 다른 시인의 손에 들어가면 너무 쉽게 교육적인 형태를 취하게 되는데 이는 진정한 시의 가장 큰 적이다. 샤를르 보들레르 [빅토르 위고] [시의 리해] 222페지   사람들은 공리 뻔한 사실의 방아를 찧고 또 찧는다. 그속에 들어갔던것밖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발생적사상을 위해 그 전통을 벗어나는 순간, 시, 지혜, 희망, 미덕, 학식, 일화 그 모든것이 몰려와서 도와준다. R.W.에머슨 [문학적윤리학] [세계명인 대사전] 743페지     시는 의미하지 않고 오직 존재해야 한다. 시의 매체는 말이기 때문에 시는 그의 의미를 통해서만 존재할수 있다... 시는 실용메세지와 다르다. W.K.윔사트 몬로 C.비어즐리 [현대문학비평론] 29페지   아름다운것은 성공적인 직관의 표현이고 추악한것은 그 표현이 성공하지 못한 례라는것이다. 동상동명 32페지   의미의 애매함은 ... 시의 필연적인 구결점인것이다. 우리는 엠프슨과 더불어, 의미의 애매함의 조작은 시의 뿌리의 자체에 있다는것을 되풀이해 말하고자 한다. 제라르 쥬네트 [구조주의와 문학비평] [현대문학비평론] 187페지   문학의 가장 높은 효률성은 독자들의 기대와 , [세계의 모든 기대를 릉가하는] 기대리탈의 놀라움, 독자들 바라고 예견한 [진실임직한것]과 창조의 예측불가능한것, 둘사이의 미묘한 작용에 놓여있다. 하지만 예측불가능자체가, 위대한 작품들의 무한한 충격자체가 그 온 힘으로 진실함의 음밀한 심층에서 반향하는게 아닌가? 보르헤스는 이렇게 말한바 있다. [위대한 시인은 창조하는자이기보다는 발견하는자이다.] 제라르 쥬네트 [구조주의와 문학비평] [현대문학비평론] 191페지   한 요소는 기능을 바꾸면서 유지될수도 있고 또한 반대로 제 기능을 다른 요소에 넘겨주고 사라져버릴수도 있다. 동상동명 194페지   문학작품을 이루는 참된 삶은 계속적인 기능의 변화가운데서 나타나는것이다... 유산은 통상아저씨에게서 조카로 전달되며, 발전은 하위갈래를 정통으로 해놓는다. 동상 195페지   한편의 시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물어보는것은 한송의 수선화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질문하는것과 마찬가지로 불필요한것입니다. 세실데이 루이스 [시를 읽는 젊은이들을 위하여] [현대인 교양전서] 제 30권 340페지       예술에 대하여       작품의 예술성여부는, 훨씬 높은 차원의 진동도에 기인하는것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107페지   예술의 기능은 지각의 능력을 만족시켜 그것을, 례컨대, 고정된 분위기라든가 고정된 사상, 인습과 같은 방해물로부터, 그리고 자연의 필연적법칙때문이 아니라 경험자의 우둔성때문에 유도된, 흔하지만 불필요한 경험들의 결과들로부터 해방시키는것이다. 에드라 파운드 [시의 지혜] [시의 리해] 135페지   불가사의란 언제나 아름답고, 그어떤 불가사의도 아름다운것이며, 불가사의가운데는 아름다운것만이 있을따름이다. 앙드레 부르통 [초현실주의의 제1선언] [시의 리해] 249페지   우주적몽상은 우리를 기획의 몽상에서 떼여놓는다. 그것은 우리를 세계속에 자리잡게 하지, 사회속에 자리잡게 하지 않는다. 가스통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 서문] [시의 리해] 302페지   몽상이 우리에게 한 넋의 세계를 보여준다는것, 시적이미지가 자기세계, 자기가 살고자하는 세계, 자기가 살만한 세계를 발견해 낸 한 넋을 증언한다는것을 입증하는것이다. 동상동명 303페지   우주에 대한 몽상가는 책임감이 필요 없는 몽상, 즉 증거를 요구하지 않는 몽상을 알게 된다. 끝으로 우주를 상상한다는것은 몽상의 가장 자연스러운 운명이다. 동상동명 311페지   개인이 학교에서 익힌 모든 습관들을 꿰뚫고 모든 느낌을 초월하여 자기소리의 저 깊숙한 바닥까지 내려갔을 때에야 비로소 그는 예술과 가까운 진정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즉 예술가가 되는것이지요. 이것이 유일한 척도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현대시] [시의 리해] 316페지   예술이란 하나의 방법이며, 목적은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예술이 외계의 모방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이러한 불행한 생각은 언제나 사라지지 않을것입니다. 사실, 그러한 상황이리면, 예술가들이란 , 남자들이 무장을 하러나가는 동안에 프럼프패로 집을 짓거나 알록달록한 유리공의 광채에다 멍청한 미소를 비춰보는 어린애들이거나 백치들과 같을테지요. 동상동명 316-317페지   예술은 부지중에 서둘러 삶과의 밀접하고 필연적인 관련성을 보이려고 애씁니다. 그래서 시대의 가장 눈에 띄는 현상들에 불안스러이 집착하고서, 전쟁을 찬양하고 , 왕을 찬양하여, 심지어는 사소한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당의 리해관계에 봉사하기까지 합니다. 즉 예술이 경향성을 띄게 되는것이지요. 그런데 예술이 바로 이렇게 하여 정당성을 부여받고-터놓고 이야기한다면- 유용성을 부여받기 시작한다면 가장 덜 예술적으로 되어버립니다. 왜냐하면 분노나 갈채의 몸짓으로 시대의 일시적인 의미없는 사건들을 따르는 예술이란 - 그것이 아무리 애국적이라 할지라도- 운을 맞추거나 색을 칠한 저널이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교육적이고 문화적인 가치를 덜부여할수 없지만- 그러나 예술은 아닌것입니다. 노래를 좋아하는 독일에서, 바로 서정시가 이런 교육적이고 문화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현대시] [시의 리해] 317페지   예술이 미를 추구하고 , 단순하게일지라도 그 미를 재현하는것인 점에서, 예술은 미를 (파우스트가 헬레나를 불렀던것처럼) 시간의 심연으로부터 불러낸다. 그러한것은 기술적인 복제속에서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복제 내에서는 미의 자리란 없다) 발터 벤야민 [보들레르에 있어서의 몇개의 모 티브에 관하여] [시의 리해] 366페지     미학에 있어서 체계의 강요만큼 해로운것은 없다. 신중한 현상학적방법이 가장 진척이 빠르다. 한스 애곤 홀투젠 [시문에 나타나는 아름다운 진실] [시의 리해] 378페지   예술가는 현실의 어느 한 요소도 자신이 발견한 그대로는 사용할수 없다. 쉴러 [현대문학비평론] 99페지   현실과의 불일치는 가상의 모습을 띠고있지만, 그러한 가상은 예술의 본질에 속하는 필수가결한 가상이다. 게오르기 루카치 [예술과 객관적 진리] [현대문학비평론] 104페지   예술작품의 완결성이란 운동과 역동성 상관관계속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과정의 반영이다. 동상동명 105페지   사진복사적인 삶의 디테일의 예술적진리는 순전히 우연적이고, 자의적이며 주관적인것이다... 그것은 객관적필요성이라는 심오한 문제를 지나치거나 객관적필연성의 존재마저 부인하는것이 된다. 가오르그 루카치 [예술과 객관적 진리] [현대문학비평론] 111페지   천재는 번쩍거리는 오류들을 주위에 흩뿌린다. 자신의 리념의 독수리 날개짓에 압도되여 천재는 어떠한 리성도 진입할수 없는 성곽들을 건설하며, 그의 창작품들은 시와 마찬가지로 그가 사랑하는 자유로운 결합으로써 나온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41페지   예술적충동은 일그러진 낯선 세계의 얼굴을 남긴다. 그것은 강제적행위이고 , 랭보의 말을 빌리면 잔인한 행위이다. 동상 48페지   끔직한것이 예술적으로 표현되여 아름다움이 되고, 고뇌가 박자와 운률을 얻어 정신을 고요한 기쁨으로 가득 채우는것은 예술이 가진 엄청난 특권가운데 하나이다. 동상 52페지   예술은 아름다움에 대한 일종의 자동기억법이다. 그런데 정확한 모사는 기억력을 손상시킨다. 동상 72페지   근대적개념에 따른 순수한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주체와 객체를, 그리고 예술가의 외적세계와 예술가자신을 동시에 내포하는 암시적인 마술을 창조하는것이다. 보들레르 [꿈꾸는 알바트로스] 123페지   철학적으로 명료해지기를 원할수록, 예술은 더욱 질이 떨어지고 유유한 상형문자로 거슬러 올라갈것이다. 반대로 한층 교육계로부터 멀어질수록, 예술은 한층 순수하고 초연한 아름다움을 향하여 상승할것이다. 동상 129페지   예술가는 자기자신에게만 귀속되여 있다... 예술가는 자식이 없다. 동상   작품을 제작할 때 선명성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꿈의 언어를 아주 명료하게 표현하기 위함이다. 동상   의혹 또는 신념과 소박함의 결핍은 이 시대의 독특한 결함이다... 소박함이란 기법에 있어서 기질이 집행한다는것으로, 거이 모든 이들이 상실한 신의 특혜인것이다. 동상 130페지   나는 무를 발견한후에야 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말라르메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154페지   우리 예술가는 모두가 나름대로의 표현형식을 취한다는 결단을 내려야 하는 사명을 띠고있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젊은 시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112페지   자유시는 자유를 웨치는 함성이지만 예술가는 자유가 없습니다... 이는 예술가의 언어재료를 조직하는데서 예술가의 내면적책임을 강조하고 있는것인데, 언어재료를 구성하는것은 - 많은 증거에 의하면- 률격적인 기본틀의 뒷받침이 없다면 상당히 힘든 법이다. 벤야민 흐루쇼브스키 [현대시의 자유률] [현대시의 리래] 115페지   항상 사색의 칼날을 방금 갈아놓은것처럼 유지해야 한다. 류협 [문심조룡] 595페지   예술은 세계를 뒤바꾸는 격렬한 반전(反轉)이며, 영원한것에 귀환하는것에 지나지 않는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97페지   예술속에 몰입하면 할수록 , 보다 촉박한것, 불가사이한것을 성취할 책임을 느끼게 된다는것이 예술의 무서운 점입니다. 동상 102페지   예술은 대상을 초월한 미묘한 전진이며 자연속의 모든것이 나타내고있는 [존재]라고 하는 기대의 차분하고 , 보다 고차원의 실현인것입니다. 동상 110페지   예술가는 모델보다 더 나은것을 그리지 않으면 안된다. 아리스토 텔레스 [시학] 156페지   예술의 특정한 발전기는 결코 사회일반적인 발전과는 직접적인 관계에 있지 않다. -맑스 [현대문학비평론] 124페지   예술은 예술작품이 현실로서 인정될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레닌 [현대문학비평론] 109페지   예술작품들이 보다 높은 차원의 질서를 갖게 되는것은, 예술이 현실세계와 분리되였기 때문이고 또 전체와 부분의 관계를 자신의 필요성에 따라 다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아도르노 [예술과 사회의 관계] [현대문학비평론] 145페지   예술작품이란 생생히 살아있는 그자체의 고유한 삶을 가지고있다는 점에 류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삶의 특성이란, 그것이 인간이나 자연이 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말을 한다는 점에 있다. 동상동명 145페지   예술작품이 외부세계와 소통한다는것은 실제로는 의사소통을 하지 않기때문에 가능하다고 할수 있는데, 왜냐하면 예술은 행복해서 그렇듯 아니면 불행해서 그렇듯 간에 외부세계로부터 자신을 차단시키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예술작품이란 현실과 차단되고 현실로부터 굴절된것이라고 할수 있다. 동상동명 146페지   예술적처리방식의 발전은 사회적발전과 맞아떨어진다는 주장은 나름의 론리가 없는것이다. 동명동상 147페지   모든 예술작품은 하나의 순간이다. 동명동상 149페지   일반체험과는 다른 예술의 측면을 함께 느껴야만이, 우리는 재료의 굴레에서 벗어날수 있고, 또 무차별적으로 현실세계에 빠져드는 경향으로부터 예술 그자체의 존재를 구제할수가 있는것이다. 동명동상 149페지   예술에서의 비현실적인 모멘트나 비존재적인 모멘트는 존재와 무관한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대로 설정된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유롭게 창안된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존재의 여러요소의 상호배합에 의해서 생겨난 일종 구조주의이다. 그리고 존재의 여러 요소사이의 이러한 배합은 스스로 현실적존재의 불완전성과 곤궁함, 현실적존재의 모순과 잠재 가능성을 지니고있다. 동상동명 151페지     심미적기법은 감정의 의식적객관화이며, 그중의 한 본질적부분에 비평적계기라고 말한다. 예술가는 객관화가 적절하지 못할 때 그것을 수정한다. W.K.윔사트 몬로 C. 비어즐리 [의도론의 오류] [현대문학비평론] 35페지   예술적인것이란 작가에 의하여 창작된 텍스트를 말하며, 미적인것이란 독자에 의해 이루어진 구체적실현을 일컫는다. 볼프강 이제르[독서과정: 현상학적접근] [현대문학비평론] 454페지   예술은 주관적 경험을 객관화하고 자연계의 외부적 경험을 주관화한다 S.K. 랭거 [예술이란 무엇인가] [현대인 교양전서] 제 29권 288페지           이미지에 대하여   시는 항상 사물과 사물을 비교하고있습니다. 세실데이 루이스 [시를 읽는 젊은이들을 위하여] [현대인 교양전서] 제 30권 279페지   이미지라는것은 독자의 상상력에 호소하는 것으로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묘사된 언어의 그림을 말하는것입니다. 세실데이 루이스 [시를 읽는 젊은이들을 위하여] [현대인 교양전서] 제30권 285페지     시적이미지의 고유한 기능은 우리에게 갈등하는것으로 보이고 바꿀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 이얼리티를 하나의 통일체로 변용시키는것이다. 옥타비오 빠스 [시와 력사]에서 [시의 리해] 113페지   [이미지]는 일순간에 지적이고 정서적인 복합체를 나타내는것이다... 그러한 복합체는 순간적으로 드러냄은 갑작스런 해방의 의식, 시간적한계와 공간적한계로부터의 해방의식, 그리고 우리가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앞에서 경험하는 갑작스런 성장의식을 고취시킨다. 많은 양식의 작품을 내놓는것보다 일생에 거쳐 하나의 이미지를 제시하는것이 낫다. 에즈라 파운드 [이미지즘] [시의 리해] 138페지   피에르 르베르디가 이런 말을 쓰고있다. 이미지란 순수한 정신적창조물이다.   이미지는 어떤 비유에 의해서 태여나는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멀리 떨어져있는 두가지 현실을 접근시키는데서 태여난다.   접근된 두가지 현실의 상호관계가 멀면서도 적절한것일수록 , 이미지는 더욱 강력한것이 될수 있고, 보다 더 강력한 감동력과 시적인 현실성을 얻게 될것이다... 문외한들에게는 수수께끼같아 보이겠지만 이 말은 대단히 강력한 시사성을 지니고있어 , 나는 이 말을 오래동안 숙고해 보았다. 앙드레 부르통 [초현실주의 제1선언] [시의 리해] 253페지   우리는 새로운 시적이미지와, 무의식밑바닥에서 잠자고있는 원형사이와의 관계에 언급할 때에라도, 우리는 그 관계가 엄밀히 말해 인과관계가 아니라는것을 리해시키도록 해야 하게 될것이다. 시적이미지는 충동적인 힘에 예속되여있는게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메아리가 아닌것이다. 사정은 차라리 그 역이다. 이미지의 번쩍임에 의해 먼 과거가 메이리로 울리고있는것이며, 그리고 그 메아리들이 얼마만큼의 길이에까지 반향하며 사라지게 되는지 우리는 거이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의 새로움과 그의 약동속에서 시적이미지는 그 자체의 존재와 그 자체의 힘을 가진다. 그것은 직접적인 존재론에 속하는것이며, 우리가 지금 연구의 노력을 기울이려 하는것은 바로 그 존재론에 대해서이다... 이미지가 인과관계를 벗어난다고 말하는것은 아마도 그나름의 중대성을 가지는 선언일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시적이미지의 현상학] [시의 리해] 280페지   시적이미지란 사실 본질적으로 변용적인것이다. 그것은 개념처럼 구성적인것이 아니다... 이미지는 그의 단순성가운데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미지란 사상에 앞서는것이란것을 정확히 밝히기위해서는 , 시란 정신의 현상학이 아니라 차라리 령혼의 현상학이라 말해야 할것이다. 동상동명 282페지   현상학적인 두 자매어 방향과 울림의 차이는 뚜렷해야 한다... 울림은 말하자면 존재의 전환을 이룩한다... 한 시작품의 표면적인 풍요로움과 내면적인 깊이는 언제나 자매적인 방향과 울림의 현상이다... 그의 새로움으로써 시적이미지는 전 언어활동을 흔들어 시작되게 한다... 그것은 우리자신의 언어의 새로운 존재가 되게 하고, 우리를 그것이 표현하는것으로 만듬으로써 우리자신을 표현하는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표현의 생성인 동시에 우리 존재의 생성이기도 하다. 이 경우 표현이 바로 존재를 창조하는것이다. 동상동명 285-286페지   위대한 시행은 그것이 속하는 언어의 령혼에 큰 영향을 줄수있는것이다. 그것은 잊혀진 이미지들을 다시 일깨워놓는다. 그리고 동시에 말의 예측불가능을 認可한다. 말을 예측불가능한것으로 한다는것, 그것은 바로 자유를 닦는게 아니겠는가! 시적상상력은 표현에 대한 검열을 무시해 버리는데 얼마나 큰 매력을 느끼는가! 동상동명 290페지   시행은 언제나 움직임을 가지며, 이미지는 시행의 선속에 살며시 끼여들어 상상력을 끌고 간다. 동상   언어위에, 통상적인 언어위로, 떠올라나타나는 이미지가 시의 의식을 남김없이 삼켜버리기 때문에, 시적이미지와 더불어 시적의식이 너무나 새로운 언어를 말하기 때문에, 인젠 과거와 현재의 상관관계를 살펴본다는것이 유용할수 없는것이다. 동상동명 292페지   시에 있어서 비지식은 하나의 근본적인 조건이다. (비지식이란 무지가 아니라 초월이라는 어려운 행위)... 이미지의 삶은 전적으로 그의 번개같은 치솟음속에, 이미지가 감수성의 모든 여건의 초월이라는 그 사실속에 있는것이다. 동상동명 295페지   이미지의 효능속에서 살아나는 추억들은 우리의 삶을 어느 순간에는, 특히 나이들었을 때는, 복잡한 몽상의 원천이며 자료이다. 기억은 꿈을 꾸며 몽상은 추억한다. 가스통 바슐라를 ([몽상의 미학]서문) [시의 리해] 307페지   이미지계기의 네단계는 다음과 같다.   1. 그것은 근본적현실의 반영이다. 2. 그것은 근본적현실을 감추고 도착한다. 3. 그것은 근본적현실의 부재를 감춘다. 4. 그것은 어떠한 현실에도 관계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자체의 모형이다.   첫번째경우, 이미지는 좋은 나타남이다. 표상은 성사(聖事)의 성격을 갖는다. 둘째번경우, 이미지는 나쁜 나타남이고 악사(惡事)의 성격을 갖는다. 세번째경우, 그것은 나타남의 놀이를 한다. 그리하여 요술의 성격을 갖는다. 네번째, 그것은 나타남의 세계에 속하지 않게 되고 시물레이션(흉내내기)의 령역에 속한다. 무엇을 거짓 감추는 기호로부터, 아무것도 없다는것을 거짓 감추는 기호에로의 변화는 결정적인 전환점을 이룬다. 장 보드리야르 [모양과 모양 만들기] [현대문학비평론] 546-547페지   모양의 흉내는 진리를 감추지 아니한다. 진리가 없다는것을 감추는것은 진리이다. 흉내낸 모양이 곧 진리이다. 동상 541페지   너의 노래로부터 현실을 추방하라. 그것은 비천한것이다... 시작품은 존재하지 않는 사물에 대한 말을 만들어내는것이다. -말라르메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164페지   가능하지만 믿어지지 않는것보다는 불가능하지만 있음직한것을 택하는 편이 좋다. 아리스토 텔레스 [시학] 144페지   이미지는 일종 의식이다. 싸르트르 [상상심리학] 22페지   걸상의 이미지가 걸상이 아니고 걸상일수도 없는것이다. 동상 24페지   지각에서의 인식은 서서히 형성되지만 이미지에서의 인식은 순간적이다. 동상 28페지   이미지의 대상이 최초에는 사물들의 세계속에서 형성된다고 가설되지만 이 과정이 지나가면 이미지는 이 세계를 떠난다. 동상 33페지   이미지는 일종 신앙이라고도 할수 있고, 가정적활동이라고도 할수 있다. 이 활동은 네가지 형식만 있을뿐 다른것은 있을수 없다. 그것은 대상이 존재하지 않거나 현장에 있다고 할수 없다. 그것은 자기속에 있는것으로서 대상이 존재한다고도 가정할수 없다. 싸르트르 [상상심리학] 33페지   그러나 직관은 인과성의 인식에 의하여 매개된다는 리유로서, 객관과 주관의 사이에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있다고 하는 엄청난 오해를 하여서는 안된다. 쇼펜하우 훗살 [세계사상대사전] 제 17권 84페지   직관은 오성에 의해서만이 또 오성에 의해서만이 존재한다. 동상 95페지   은유는 일종 지름길입니다. 세실데이 루이스 [시를 읽는 젊은이들을 위하여] [현대인 교양전서] 제 30권 282페지         기교에 대하여     시의 기술은 사고에 본질적인것, 이 역동적인 분자들, 또는 이런 말이 가능하다면, 이 라듐을 낱말들의 멜로디(듣는 이의 정서를 낱말들의 의미와 가장 일치하게끔 해주는)와 결합시키는데, 그것들을 형식(지(知)를 가장 즐겁게 해주는)과 결합시키는것이다. 내가 말하는 멜로디란 강세의 변형을 포함한 음질의 변형을 의미한다. 에즈라 파운드 [시의 지혜] [시의 리해] 136페지   무엇을 드러내지 않는 , 불필요한 낱말이나 형용사를 쓰지 말것, [어렴풋한 평화의 땅]과 같은 표현은 쓰지 말아라. 그런것은 이미지를 둔화시킨다. ... 아무런 장식도 쓰지 말거나 아니면 훌륭한 장식만 쓸것. 에즈라 파운드 [이미지즘] [시의 리해] 139페지   묘사적이 되려고 하지 말라... 쉐익스피어가 [가랑잎빛갈의 오후를 걸친 새벽]이라고 말할 땐, 그는 화가가 제시하지 못한것을 나타내려는것이다. 그의 이행에는 묘사라고 부를수 있는것은 없다-그는 나타내려한다. 동상동명 140페지   기억은 재생산의 힘을 필요로 하고, 앞을 내다보는 일은 창조의 힘, 즉 예상의 힘을 필요로 한다. 동상동명 163페지   인간은 세계를 파악하기 위해서 형식들을 창조한다. 심지어 지각행위조차도 아주 복잡한 경로를 통한 형식의 창조이다. 클리언스 부르스크 [말하는 방법으로서의 시] [시의 리해] 171페지   의미와 시 사이의 가장 확실한것은 은유이다. 동명동상 174페지   은어와 은유를 통해서 하나의 언어는 끊임 없이 그자체를 젊게 한다. 동상동명 175페지   시의 목소리는 필경 하나의 창조이지 자연적이고 자발적인 분출이 아니다. 쿨리언스 부르스크 [말하는 한방법으로서의 시] [시의 리해] 187페지   형식은 내용의 확장에 다름 아니다. 찰스올슨 [추진적임][진동적임][전망적임] [시의 리해] 190페지   어느 시에서건 언제나, 언제나 한지각은 [보다 다른 지각으로 움직여야만] 한다 한다 한다! 동상 동명 191페지   자신이 만들어낸 사물이 자연히 다른 사물들과 나란히 자리잡도록 하기에 충분한 정도의 진지성을 부여하는 일이다. 이는 쉽지 않다. 동상동명 197페지   나로서는 오래동안 무속에 깊숙이 내려가 본 경험이 있어 단언하지만 [그 밑에는] 오직 아름다움이 있을뿐이요. -그리고 아름다움의 완벽한 표현은 하나밖에 없소, 시뿐이요. 스테판 말라르메 [서한] [시의 리해] 235페지   몇개의 발성으로, 마치 주문(呪文)과도 같이 세속언어와는 별개의 새롭고 온전한 어휘를 재창조하는 싯귀는 말의 완전한 독립을 이룩한다. 스테판 말라르메 [언어론 서문] [시의 리해] 237페지   겉으로 모순되는 꿈과 현실이라는 두가지 상태가 언젠가는 일종의 절대현실, 말하자면 초현실로 해결될것임을 나는 믿는다. 내가 나가는것은 바로 이와 같은 초현실의 정복을 위해서이다. 앙드레 부르통 [초현실주의 제1선언] [시의 리해] 252페지   형식을 골똘히 생각하게 된다는것이, 기이하고 낯선 느낌을 주는 형식들을 만들어내게 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현대시] [시의 리해] 324페지   새로운 형식이란 단지 발견될수 있을뿐이지 모색될수 있는것은 아니다. 동상동명 325페지   [나는 작품자체보다 작품의 형상화나 완성에 훨씬 큰 흥미를 갖고있음을 고백합니다] 라고. 이것이 하나의 현대적특징이라는 점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트프리트 벤 [서정시의 제문제] [시의 리해] 328페지   형식이 바로 시입니다... 형식은 존재이며, 예술가의 실존적 당부이며 그 목적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슈타이거의 [형식은 최고의 내용]이란 말은 제대로 파악할수 있겠습니다. 동상동명 336페지   내면적방랑이란 시를 창출해낼수 있는 예술이 곧 현실적방랑과 변화이며 그효과는 수세대에 의해 계속되면서 이미 리해된것, 정지된것에서 보다, 자극하는것, 매혹하는것에서 훨씬 더 바람직스러운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됩니다. 동상동명 337페지   시인은 우연히 침입, 가능한 방해요소들에 맞서서 자신의 시를 밀페시켜야 합니다. 동상동명 339페지   매혹을 불러일으키는 형식속에는 정열, 자연, 그리고 비극적체험의 본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있습니다. 고트프리트 벤 [서정시의 제문제] [시의 리해] 340페지     우리 질서는 정신이며, 그 법칙은 표현, 각인, 문체라는것입니다. 다른것은 몰락입니다. 추상적인지, 조률이 없는지, 초현실적인지, 그것은 형식의 법칙이며 우리를 초월하는 표현창조의 필요성입니다. 동상동명 340페지   시문은 철학적 혹은 학문적판단속에서나 종교적인 신앙원칙들속에서 표현될수 있는것이 아니고 [아름다운 운률적창조]속에서만이 표현될수 있는 독특한 성향의 인식능력으로 리해되고있다. 한스에곤 홀투젠 [시문에 나타나는 아름다움과 진실] [시의 리해] 371페지   어떤 특정의 개념에 따라 운률적 음성적 배렬, 즉 [의미]가 불확실하면 불확실할수록 그 체험가치가 더욱더 확실한 감각과 직관의 억양이 시속에 환기되여야 한다. 동명동상 373페지   기법은 작가가 자기 주제를 발견, 탐색하여 발전시키고, 그 의미를 전달하며, 최종적으로 그것을 평가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따라서 어떤 기법은 다른 기법보다 더 예리한 도구로서 더 많은 주제를 발견할수 있고, 자기 주제를 기법상으로 엄격히 살필수 있는 작가가 가장 만족스러운 내용을 가진 작품, 가장 알차고 울림이 큰 작품, 반향을 일으킬수 있는 작품, 최대의 의미를 지닌 작품을 창작할수 있다는 확실한 결론이 나온다. 마크 쇼러 [기법으로서의 발견] [현대문학비평론] 49페지   기법만이 예술의 소재를 객관화한다. 따라서 기법만이 소재들을 평가할수 있다. 이것은 자명한 공리이다. 동상동명 56페지   내용이란 형식이 내용으로 전화된것에 다름 아니고, 형식 또한 내용의 형식으로 전화된것에 다름 아니다. -헤겔 [현대문학비평론] 113페지     형식이란 내용을 가장 집중적으로 응부하는 방식이고 내용의 최고도의 추상이며, 또 내용의 제규정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것이다. 형식이란 또한 개별적 제 규정사이에 적절한 비률을 만들어내는것이자, 예술작품이 반영하고있는 삶의 개별적모순들 사이의 중요도를 자리매김하는것이다. 게오르그 루카치 [예술과 객관적 진리] [현대문학비평론] 118페지   상징의 원천은 무의식속에 존재한다. 이봉 벨라발[정신분석학과 문학비평]서문 [현대문학비평론] 369페지   새롭다는것은 미적범주만이 아니다. 새로운것은 혁신, 놀라움, 릉가, 재편성, 혹은 소리와 같은 형식주의리론이 전적으로 그 의미를 부여했던 그러한 요소들을 통해 등장하는것이다. 새로운것은 또한 력사적범주가 되기도 한다. 한스 로버트 야우스 [문학리론에 대한 도전으로서의 문학사] [현대문학비평론] 433페지   만일 환상의 형성이 없다면, 친숙하지 못한 텍스트의 세계는 낯선채로 남게 된다. 환상을 통해서 텍스트에 의해 제공된 경험은 우리가 가까이 하기 쉬우니, 그 까닭은 그것이 다만 환상이기 때문이다. 볼프강 이제르 [독서과정; 현상학적 접근] [현대문학 비평론] 467페지   형식주의는 모든것을 흡수하는 전제적시신(詩神)으로 보인다. 폴드만 [기호학과 수사학] [현대문학비평론] 523페지   현대리론가들의 기본개념인 기습, 낯설게 함이 보조를 마춘다. 기습적으로 경악시키려는 자는 무엇보다도 비정상적인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31페지   문학의 핵심적인 두자질은 초자연주의와 반어법이다. 보들레르 [꿈꾸는 알바트로스] 103페지   령감이 나날의 노력과 자매지간임은 분명한 일이다. 동상   언제나 시인이 되라 산문을 쓸 때 조차도 동상   명사는 실제의 위엄성을 띠고, 형용사는 맑고 연한 덧칠처럼 명사를 덮고 단장하는 투명한 의상이 있고, 률동의 천사인 동사는 문장에 자극을 준다. 동상 121페지   주도적기법중의 하나는 한 단어의 의미에다가 그 가까이에 있는 단어의 의미를 섞어넣는것이다. 그가(말라르메) 강력적으로 선언한바에 의하면 단어들은 그 상호교체적인 투영에 의해서 빛을 발한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156페지   시작품과 그 영향의 알맹이는 그 기법에 있다. 에너지들은 거이 전적으로 문체에 집중된다. 문체는 언어를 통한 실행으로써 현실과 규범에 대한 거대한 변형을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낸다. 동상 198페지   은유는 인간이 소유한 가장 위대한 힘이다. 그것은 마술에 접근한것이며, 신이 그 피조물속에 잊어버리고 내버려둔 창조의 도구같은것이다. 마치 산만한 외과 의사가 수술환자의 몸속에 내버려둔 기구와 마찬가지로. 동상 270페지   문학행위에서 도식주의가 차지할 자리란 없다. 얀 무카로브스키 [시란 무엇인가] [현대시리론] 25페지   작가가 기교를 장악하여 작품을 다루는것은 바둑명수가 바둑두는 기술을 정통하고있는것에 비유할수 있다. 기교를 포기하고 주관적인 생각에만 따르는것은 마치 도박군이 놀음에서 요행수만 바라는것과도 같다고 할수 있다. 만약 도박군처럼 창작에 림한다면 우연적인 요행수에 의존하여 앞에서 한두번은 성공할수 있겠지만 그 성공을 뒤에서도 계속 지속시킬수는 없는것이다. 류협 [문심조룡] 617페지   문학의 사상에는 정해진 규범이 있을지 모르나 창작원리는 언제나 변함이 없는것이라네. 동상 621페지   비유의 수법에 있어서 비유의 대상이 언제나 일정하지 않다. 비유된 두 사물이 비록 북방의 호인이나 남방의 월인만큼이나 서로 관련이 없더라도 그것들 일단 합쳐지면 간과 슬개처럼 가깝게 된다네... 기흥은 외부의 형상을 묘사하여 그 뜻을 뽑아오므로 말의 사용은 반드시 과감하게 해야 한다... 다양한 종류의 비와 흥의 사물들을 노래속에 모아놓으니 문학적언어는 강물의 흐름처럼 생동하도다. 동상 509페지   호랑이나 표범의 가죽에 무늬가 없다면 그것은 개나 고양이의 가죽과 다르지 않을것이며, 코뿔소의 가죽으로 갑옷을 만들려면 거기에 붉은색을 올려야만 한다. 이는 내용이란 형식을 필요로 한다는것을 보여준다. 동상 437페지   정리는 문학작품의 날실이며, 언어적표현은 씨실이다. 날실이 올바르게 배렬되여야 비로소 씨실이 제대로 오가면서 천을 짤수 있듯이, 정리가 확정된 다음에라야 비로소 문장이 류통해질수 있다. 이것이 바로 작품구성이 기본이 되는것이다. 동상 443페지   문학작품들 가운데 정화라 곱힐만한 명작들에는 은隱 과 秀가 있기마련이다. 은이란 글밖에 함축된 말밖의 뜻을 가리키며, 수란 작품안에서 가장 두드러진 말을 가리킨다. 은은 문면에 드러나지 않는 의미의 복잡함과 미묘함을 통해 그 섬세함을 획득하고, 수는 한 작품안에서 여타 다른 부분들과 비교되는 특출함을 통해 그 아름다움을 획득한다. 동상 551페지   은의 특징은 글밖에 뜻을 갖고있다는것이다. 그것은 마치 은밀한 음향이 옆에서 들려오는것과 같고, 숨겨진 문채가 어둠속에서 반짝이는것과 같은데 이는 효상의 변화가 호체안에 포함돼 있는것에 비유될수 있고, 흐르는 강물속에 주옥이 숨겨져있는것에 비유될수 있다. 즉 호체안에서 호상의 변화가 사상 (四象은 사물의 음, 양, 강, 유를 표시)을 이루고, 주옥은 강물속에 깊이 감추어져있기에 물결이 여러가지 변화를 일으키는것과 같다. 동상 553페지   작품속에서 갑자기 일어나는 물결을 수라고 한다. 그것은 민첩하고 교묘한 손이 아름다운 악곡을 연주하며 표일한 자태가 밖으로 드러나고, 또 먼산에 구름과 노을이 피여오르고, 미녀들이 예쁜 용모를 드러내는것에 비유될수 있다. 동상 555페지   자기자신의 내면으로 깊숙이 들어갈것, 그리고 제마음의 한가운데 던져진 과제를 순간에 완성할것, 오직 이것뿐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시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106페지   표현은 사상의 의복이며, 잘 어울리면 더욱 고상하게 보인다. 포우 [비판론] [세계명언대사전] 743페지   첫번째이자 가장 중요한것은 ... 위대한 구상능력이요, 두 번째는 강력하고도 열광적인 감정이요. 롱기누스 [숭고에 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285페지     오직 한가지 주의점만 명심해 두어야 한다. 시인의 목표는 창작행위순간에, 즉 시의 기법자체에 의해서 판단되여야 한다. W.K.윔사트 C.비어즐리 [현대문학비평론] 29페지     기이성, 이것은 모든 아름다움의 필수불가결한 조미료이다... 아름다움은 언제나 기이하다..의도성이 없는 순진하고 무의식적인 약간의 기이성을 품고있고, 바로 그 기이성이 그것을 유난히도 아름답게 한다는것이다 보들레르 [꿈꾸는 알바트로스] 50-51페지     시적 엄밀성이란 다름 아닌 새로운 언어관용, 새로운 낱말들, 비정상적인 은유들을 추구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몽롱하게 되는것이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 구조] 235페지     비평에 대하여     그들자신이 주목할만한 작품을 쓰지 못하는 이들의 비평엔 귀를 기울이지 말아라. 에즈라 파운드 [이미지즘] [시의 리해] 139페지   문학비평가들이란 모두 이 시적이미지의 예측불가능성에 대해 충분히 명확한 의식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데, 바로 이 예측불가능이야 말로 통상적인 심리적설명안을 뒤엎어버리는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시적이미지의 현상학] [시의 리해] 293페지   문학사회학으로서의 문학비평은 그 대상에 눈이 멀어져서 오직 그것의 외적인 면만을 인지할뿐이요, 다루는 작품의 질에 대해서는 다루는 일이 행해지기도 전에 이미 그 범주들의 선택으로써 그 질의 판단을 포기해 버리는것이다. 한스 마그누스 엔 스버르거 [시와 정치] [시의 리해] 385페지   (브레히트 시 [바퀴갈기]를 례로들면서) 시는 정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이 시는 정치가 그것을 마음대로 할수 없다는것을 모범적으로 말해주고있나니, 그것이 이 시의 정치적내용이다. (바퀴갈기 /브레히트 나는 길가의 비탈에 앉아있다/ 운전사가 바퀴를 갈아끼운다/나는 내가 떠나온 곳이 싫다/나는 내가 가고있는 곳이 싫다/어찌하여 나는 바퀴를 갈고있는것을/초조하게 보고있는가 ) 동상동명 390페지   시와 정치는 사물령역이 아니라 력사적과정인것이다. 하나는 언어를 매개물로 한 과정이요, 다른 하나는 권력을 매개물로 한 과정이다. 동상동명 391페지   상황에 따라서 어떤 텍스트도 그것이 (차라리) 관상물로 받아들여지는가 또는 (차라리) 전언으로 받아들여지는가에 따라 문학일수도 있고 문학이 아닐수도 있게 된다. 제라르 쥬네트 [구조주의와 문학비평] [현대문학비평론] 176페지   비평이 그의 구조주의적인 소명을 뚜렷이 드러내여 구조적인 방법을 확립하도록 요청되여있지 않는가하는것이다. 동상동명 129페지   비평이 전적인 독자성을 가질 때 그것은 존재리유를 잃어버린것이고, 그와 똑같이, 그것이 일상적언어에 예속될 때에 그것은 어떤 불모상태에 떨어질것이다. 츠베탕 토도로브 [어떻게 읽을것인가] [현대문학비평론] 247페지   우리 세기는 시학의 연구가 러시아형식주의 , 독일의 형태학파, 잉글로잭슨의 신비성, 프랑스의 구조적연구(나타난 순서로) 등등 몇몇 비평의 류파에 결부되여 새롭게 나타남을 보았다. 위의 비평의 류파들은 (그들사이의 차이가 어떠할지라도) 그것들의 텍스트의 의미를 규명하려는게 아니라 그 구성요소들을 묘사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일체의 다른 비평의 경향이 위치하고있는 차원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에 놓여있다. 츠베탕 토도로브 [어떻게 읽을것인가]   만약 문학연구가 과학이 되려고 한다면 방식을 그 유일한 주역인물로 인정해야 할것이다. 즉 문학적언술의 작용태를 묘사하는 개념들로써 이루어질것이다. -야콥슨 [현대문학비평론] 236페지   시학의 대상은 개별적인 작품들로서 보다는 훨씬 더 문학의 방식들, 새로운 텍스트는 그것을 산출한 조합률 자체를 변모시키며, 규칙들의 적용순서만을 변화시킬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성격마저 변화시키는것이다... 이에 대한 유일한 례외는 [대중문학]이라고 부르는것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은 그앞서 이미 발현되였던 그대로의 그들 장르에서 출발하여 전적으로 연역될수 있는것이다. 작품이 그것을 산출시키는 체계를 어떻게 변형시키는지를 묘사한 수단을 가지지 못함으로써 , 묘사는 모든 문학이 [대중문학]에 속한다고 암암리에 주장하는 셈이다... 실제에 있어서 한 시작품의 묘사는 텍스트의 체계를 공간적인 조직의 형태로써 나타내보이는 도해로 귀결되게 된다. 츠베탕 토도로브[어떻게 읽을것인가] [현대문학비평론] 240-241페지   상황을 변화시키는 모티브는 역동적모티브라 불리고, 변화시키지 않는 모티브들은 정태적모키브라 불린다. -토마체프스키 [현대문학비평론] 252페지   계몽주의 기본적인 선입견은 계몽주의 선입견자체에 반대하는 선입견인것이다. 이는 계몽주의가 지닌 힘으로부터 전통을 빼앗는것이다. 한스 게오르그 가다미 [진리와 방법] [현대문학비평론] 307페지   해석의 본질은 하나의 기호체계(줄여서 말하면 텍스트)로부터 눈에 보이는것 이상의것을 읽어내는것이다. E.D.허쉬 [해석학의 세차원] [현대문학비평론] 328페지   해석의 기준은 리론에서 나오는것이 아니며, 리론은 우리가 이미 선호하는 해석의 기준을 사후에 체계화시키는것이라고 본다. 동상동명 329페지   십삼년전 (1934년) 지난번의 대회에서 나는 거울의 단계라는 개념을 제기했다. 자끄라깡 [[나][Je]의 기능형체로서의 거울의 단계] [현대문학비평론] 349페지   어떤 천재의 출현은 늘 지배적인 규범을 깨뜨리고, 그때까지 종속되여있는 과정이나 진행에 힘을 부여하는 문학적혁명과도 같다. [현대문학비평론]주해 446페지   문학사회학에 관한 흥미가 정당화될수 있는 중요한 방식에는 두가지가 있다. 정당화의 첫번째 형태는 (이 말의 형식론적의미에서) 이얼리스트의 그것이다... 둘째 형태는 실용주의자의 그것이다... 사회적인 요인을 강조하는것은 특수한 정치립장에서는 유용하며 소망스러운것이다... 사회산물이라는것은 너무나 태평스럽게 광범위한 범주로 보인다. ‘경제산물’이란것이 꼼짝 못하게 협착한 범주이듯이 말이다. 테리 이글턴 [문학사회학: 두접근] [현대문학비평론] 596페지   ‘사회학적’비평가는 력사와 문학 량쪽 모두에 대해서 실용주의자가 될수 있고, 력사에 대해서는 리얼리스트이지만 문학에 관해서는 실용주의자가 될수 있고, 량쪽 모두에 대해서는 리얼리스트가 될수 있다. 동상동명 597페지   정치를 위해 인식론을 포기한다는것은 소망스럽지 못한것이 아니라 불가능하다. 정치적관심자의 진술은 언제나 은밀한 현실리론이다. 동상동명 598페지   20세기 유럽시로 통하는 안락한 길은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수수께끼와 모호함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놀라울 정도로 생산적이다. 후기 릴케와 크라클에서 코트프리트 벤에 이르는 독일시인들 , 아폴리네르에서 생종페르스에 이르는 프랑스시인들, 가르시아 로르까에서 기엔에 이르는 스페인 시인들, 팔라체스키에서 운가레티에 이르는 이딸리아의 시인들, 예이츠에서 엘리엇까지 이르는 영국시인들, 이들의 작품의 중요성은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27페지   19세기전환기에 이르기까지, 부분적으로 그후에 이르기까지 문학은 사회의 공명상자였으며, 일정한 소재나 상황에 대한 리념적인 형성, 그리고 악마적인것을 표현함으로써 얻게 되는 효과적인 안으로서 기대되였다. 동상 33페지   시는 여타 문학과 반대립장을 취하면서 준엄한 상상력, 무의식으로 확대된 내면성 그리고 공허한 초월성과의 유희가 부여해주었던 모든것을 무제한으로 가차없이 말하는 자유를 자기것으로 하였다. 동상 34페지   독일, 프랑스, 스페인, 영국에서 간행된 현대시에 관한 글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핵심어들을 추려볼수 있다... 방향성상실, 익숙함의 해체, 상실된 질서, 불일치, 파편주의, 전도가능성, 라렬문체, 탈시화 (脫詩化)된 시, 파괴의 섬광, 단절적인 형상, 야수적인 돌발성, 탈구, 나시적관점, 낯설기하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스페인시인(다마소알롱소)의 명제인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예술을 부정적인 개념들로써 명명하는것외에는 달리 다른 보조적수단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1932년에 씌여진것인데 1955년에도 변함없이 적합한 견해로서 반복될수 있었다. 동상 36페지     그로데스크는 미술용어중의 하나였으며... 이제는 모든 령역에 걸쳐 기괴한것, 익살스러운것, 뒤틀린것, 그리고 비범한것을 포괄하게 되었다. 동상 49페지   불협화의 미, 심정을 시의 주제로부터 배제시킴, 비규범적의식상태, 공허한 리상성, 탈사물화, 언어의 마술적인 힘과 절대적인 상상력에서 생겨나서 수확의 추상성과 음악의 곡선에 접근하고있는 비밀성, 이것들에 의해서 보들레르는 미래의 시에서 실현될 가능성을 예비하였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79페지   좀 기형이 아닌것은 잘 감지되지 않는것 같다. 이로 인하여 파격성, 다시말해 예상밖의 현상이 주는 놀라움은 아름다움의 특징이자 본질적인 부분이 되는것이다. 보들레르 [꿈꾸는 알바트로스] 51페지   천재성이란 표현을 위해서 남성적인 강력한 기관을 갖춘, 확실하게 형성된 어린시절에 지나지 않는다. 동상 70페지   인간은 신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자 곧 불가항력적인 도덕률에 의해서, 그는 현재의 자기본성보다는 낮은 곳으로 추락했다. 동상 80페지   모든 인간에게는 신에 대한 기원과 악마에 대한 기원이 동시에 존재하고있다. 신에 대한 기원(또는 정신성)은 상승하려는 욕망이고, 악마에 대한 기원(또는 동물성)은 하강하는 즐거움이다. 여자에 대한 사랑과 개와 고양이같은 짐승과의 은밀한 대화는 바로 이 악마에 대한 기원에 귀속시켜야 한다. 동상 82페지   삶은 모든 환자들이 침대를 바꾸고싶은 욕망에 사로잡혀있는 병원이다. 동상 87페지   초현실주의자들의 직접적선구자는 아폴리네르이다. 초현실주의자라는것도 그에서 유래한것이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251페지   다양한 시대의 절충주의는 항상 자기가 옛날의 학설들보다 훌륭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런 공평한 태도는 절충주의자의 무능력을 입증한다. 그렇게 광범위한 사고의 시간을 갖는 사람들은 온전한 인간들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열정이 결여되여있다. 인간의 주의력은 편협할수록 그리고 관찰의 령역을 스스로 한정시킬수록 더 강렬하다는것을 절충주의자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보들레르 [꿈꾸는 알바트로스] 131페지   존재하는것을 재현하는것은 쓸모 없고 지겨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사실적인 천박함보다는 내 환상의 괴물들을 더 좋아한다. 동상 146페지   비평가가 시인이 된다는것은 엄청난 일이겠지만, 한 시인이 자기안에 어떤 비평가를 갖지 않는다는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동상 151페지     짧게 요약하면 유머는 비개연성을 고안하고 분리된 시간과 사물들을 강제로 결합시키고 모든 생존하는것을 낯설게 함으로써 현실을 파괴한다. 유머는 하늘을 찢고 공허의 바다를 보여준다. 유머는 인간과 세계사이의 불일치며 비존재자(존재하지 않는것들)의 왕이다. 우리는 그것이 현대시의 한 변이체에 다름아님을 보게 된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256페지   진실이니 본질이니 하는 미명으로 시인을 비난하는 평가를 믿지 말아야 한다. 실상 그가 행하는바는 모두 하나의 시파를 거부하려는것이다. 로만 야콥슨 [시란 무엇인가] [현대시리론] 8페지   우리가 표방하려는것은 (실생활 또는 사회와) 예술의 분리론이 아니라 미적기능의 자율성이다. 동상동명 17페지   진실성의 문제는 미적기능이 우세한 시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동상동명 48페지   문장의 사상과 감정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여섯가지 사항에 대해 검토해 보아야만 한다. 그 여섯가지란 첫째 작품의 전체의 안배를 볼것, 둘째 문장이나 말의 배치를 볼것, 셋째는 작품에서 전통과 계승과 새로운 변화의 추구를 볼것, 넷째는 표현상의 정아함과 기이함을 살필것, 다섯째는 사류의 응용에 대해 살필것, 여섯째는 성률을 살필것. 류협 [문심조룡] 693페지   문학에는 황소밖에 없다. 가장 큰 황소가 천재들이다. -즉 지치지 않고 하루에 18시간을 애쓰는 자들이다. J. 르나르 [일기] [세계명언 대사전] 743페지   그의 질서는 무질서가 되고 그의 무질서는 어떤 질선가를 갖게 될것이요. 롱기누스 [숭고에 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331페지   위대한 재능들은 다름 아닌 자신들의 위대성 때문에 늘 위험에 처해있는것이요... 위대한 탁월성이야 말로 설사 그것들이 작품전체에 걸쳐 같은 수준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언제나 상을 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동상동명 361페지   시대의 소동 한 가운데서 자기존재의 저 깊은곳에 있는 고독속으로까지 귀를 기울이려는 최초의 노력이후로, 현대시가 존재하고 있는것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현대시] [시의 리해] 316페지   사물들의 신비는 그의 내부에서 그자신의 심오한 감각들과 융해되여, 마치 그자신이 동경이나 한것처럼, 그에게 알려집니다. 이런 내밀한 고백의 풍성한 언어는 아름다움입니다. 동상동명 318페지   사실주의가 자연주의에서 퇴조하고 나자... 사람들은 슬며시 사물에 대하여 말하는 대신에 사물들을 가지고 말하기 즉 [주관적]으로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인간은 이전에 회적인 환경을 관찰할수 있었던것처럼 이제는 자신의 령혼을 관찰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고트 프리트 벤 [서정시의 제문제] [시의 리해] 320페지   기본적인 원칙으로서 [처럼]이 항상 지니고있는 소설적인 요소, 신문의 문예란적 요소가 서정시로 끼여든다는 사실, 언어의 긴장감이 이완되고 창조적인 변형이 약하다는 사실에 주목할수 있습니다. 동상동명 333페지   정결한 톤이란 어떤 세속적인 극복도 아닌 , 오히려 세속적인 앞에서의 도주입니다. 동상동명 334페지   [... 그리하여 옹색한 시대에, 시인의 사명은 무엇인가?] 여기서 시대라함은 우리자신이 아직도 매여있는 시대, 바꿔말하면 세계라는 때를 말한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나타났다가 희생이 되어 죽음으로써 신들이 지배하던 시대는 막을 내린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것이다. [삼위일체]를 이루고있던 헤라클레스, 디오니소스, 그리스도가 세계를 떠난뒤부터 세계라는 때는 땅거미가 짙어 밤으로 기울고있다. 세계의 밤은 어둠이 짙어간다... 신의 부재 신의 결여라고 이름 지을수 있다. 마틴 하이데거 [시인의 사명은 무엇인가?] [시의 리해] 341페지   세계의 밤이라는 옹색한 시대는 오래 걸린다. 동상동명 343페지   만일 신이나 다름 없는 이 한가닥 숨결이 우리 몸에 와닿지 않았던들, 아니 신비한 가락모양 우리 입술에 닿지 않았던들, 우리는 누구라고 가릴것 없이, 이제는 숲속에서 헤매고있는 짐승과 무엇이 다를바가 있겠는가 동상동명 351페지   선각자란 미래로 앞질러 들어가는 자가 아니다. 미래에서 찾아드는것이다. 그리하여 선각자의 말이 미래에서 찾아들 때라야만 진정 미래라는 시대는 제대로 현재에서 살게 된다... 선각자는 후세사람들이 따라 잡을수 없는 노릇이다. 마찬가지로 선각자는 불만의 존재이다. 동상동명 354페지   상상적차원에서 관념적차원으로의 이행은 항상 일종의 비약으로 이룩된다. 싸르트르 세계사상대전집(50) 302페지   상(象)은 언제나 하나의 사물이다. 싸르트르 세계사상 대전집(50) 305페지.     참고서   시학 ;아리스토텔레스 외. 한국문예출판사 현대시구조; 후고 프리드리히. (주)도서출판사 한길사 현대문학비평론; 김용권, 유종호, 이상옥 외 공역. 한신문화사 시의 리해; 정현종, 김주연, 유평근 편저. 민음사 현대시의 리론; 로만야콥슨 외. 지식산업사. 꿈꾸는 알바트로스; 보들레르 잠언집. 동아출판사. 상상심리학; 싸르트르. 중국 광명일보출판사 쇼펜하우어 훗살; 세계사상대전집(17). 대양서적 세계사상 대전집 (50) 대양서적 현대인 교양전서 (30) 금성출판사 현대인 교양전서 (29) 금성출판사 세계명언대사전;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55    <<동방문학>>에 실린 하이퍼시 한수 댓글:  조회:4110  추천:0  2015-02-04
  *아래 글은 동방문학 10월호에 소개될 작품들입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동방문학은 지면을 할애해 드리겠습니다.  미리 읽으시고 여러분들의 의견을 솔직하게 밝히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데 우리에게는 그런 문화가 없어 유감입니다. 껍데기만 요란스럽지 정말 한심한 문인들이 너무 많거든요. 그러나 뜻이 있는 분들은 하십시오. 문화란 만들어가는 것이지 그에 우리 인간이 종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하면 만들어가고, 그것이 좋으면 정착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 문화이지요. -이시환       중국 조선족 시인들의 하이퍼 실험시를 소개하며    김승종 박장길 허옥진 황정인 려순희 김철호 최룡관 정두민 방순애 심예란 김견 등 이상 11명이 펼치는 하이퍼 실험시를 선보이며 몇 자 적는다. 시를 쓰는 데는 세 가지 의식이 작용하는 것 같다. 현실의식, 잠재의식, 무의식. 시 쓰기에서 이 세 가지 의식은 칼로 물 베기와 같아서 혼용되어 작용하기도 하지만 어느 의식이 주류를 이루는가에 의하여 시의 형식과 내용이 달라진다고 하겠다. 이번 동방문학에 등재하는 시들은 무의식에 의하여 씌어진 시들이라고 하겠다. 그것도 하이퍼텍스트라는 새로운 기법을 도입하여 쓴 시들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한 수의 시에서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창출되면서 연결보다는 분열이 강하고, 의미 추구보다는 언어에 대한 새로운 추구가 강하고, 실태보다는 상상과 환상이 강하고, 추상성보다는 구상성이 강하고 , 다시점, 다초점, 다층차로 이루어진 시들로서  하이퍼시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이퍼시의 주요한 요소는 변형과 의식의 뜀질이라고 할 수 있다. 변형이란 새로운 이미지창출에 속하는 것이고 의식의 뜀질이란 동서고금의 천만종류의 사물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의식의 뜀질은 인과관계에 의하여 뛰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자유로운 상상에 의하여 나름대로 뛰는 일이다. 이러한 입지에서 이번 호에 싣는 연변 시인들의 하이퍼시를 보면 나름대로의 이해에 도달할 것이라고 믿는다.  -중국 조선족 문학평론가 최흔 주     녹색비닐쓰레기들  竹琳 김승종     떼까막까치들   무리춤,  왕문둥이들의 아우성,    사시절혁명의  역반란, 12간지 띠풀이    넋두리...   저 경쾌한 화폭과 저 장엄한 메아리가,- 오늘의 사슬과 내일의 사슬이   뚝  뚝 끊기는 한 찰나로 옮아가는,-    그리고  당신의,ㅡ  녹색평화 장바구니는  무사하니껴  
54    명동시와 그 해설(1, 2, 3, 4) ㅡ최룡관 (시인, 동시인, 평론가) 댓글:  조회:5382  추천:0  2015-02-04
  한국명동시 감상시리즈 1                                      최흔     시를 어떻게 쓸가? 시는 참 재미있는건데 어떻게 쓰는지 모르겠다. 시가 또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시라하면 이런 생각이 들면서 앞이 새까매 나죠. 기실 시는 읽기도 재미나지만 쓰기도 재미나는거야.   시를 쓰자면 책을 많이 봐야 하지만 어떻게 하면 시를 쓰게 되는가를 생각할줄 알아야 해. 마음 준비가 있어야 하는거야. 한국의 김완기 시인님은 이런 시를 썼단다.   시를 쓸 때면 김완기   시를 쓸때면 내 귀는 청진기가 된다   새이야기 꽃이야기 돌이야기 벌레들의 숨소리 나무들의 맥박소리   시를 쓸 때면 내 눈은 만원경이 된다 해이야기  별이야기 눈이야기   무지개가 보인다 옥토끼가 보인다     요 시가 시 쓰는 비결을 알려주잖니. 시를 쓸 때 귀는 청진기가 되고 눈은 현미경이 되여야 한다는 거야. 귀가 청진기가 되여 남들이 듣지 못했던 소리를 듣고 눈은 현미경이 되여 남들이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아내는 거야.자기가 새로 듣고 자기가 새로 본 것을 쓰면 시가 되는 거야.  피ㅡ 새가 울지 어디 이야기를 하니? 울지. 입도없는 꽃이 또 어떻게 이야기를 하니? 그 땅땅한 돌이 무슨 말을 하니? 풀벌레들의 숨소리를 듣는 사람이 어디 있니? 나무가 뭐 동물이니? 피가 있니? 동물도 아니고 피도 없는데 어떻게 맥박이라는 게 있니? 맥박이라는 게 없는데 어떻게 맥박이 뛰는 소리를 듣니? 피ㅡ 다 거짓말이야. 그리구 해며 별이며 눈이며를 보는거지 어떻게 하면 그것들의 이야기를 본다고 하니? 이야기라는 건 듣는 거 아니야. 무지개는 보이지만 옥토끼야 어디 보이는 거니? 옛말에 그저 그런게 있었다는 얘기지. 으음 알았다. 시라는게 그래 거짓말 할래기구나!    얘 봐라. 그게 어디 거짓말이니? 그게 상상이라는거다. 상상이라는게 뭐니? 생각한다는거야. 상상한다는 것도 없는 것을 말하는 거면 거짓말이 아니고 뭐니? 거짓말이라는건 남을 깜박 속이기 위해 하는 나쁜 일이지만 상상한다는건 남들에게 아름다움을 주기 위하여 엉뚱한 생각을 해서 그것을 시로 쓴다는거야. 그러니까 거짓말과 상상은 완전히 성질이 다른거란다. 거짓말은 나쁜 습관을 배양하며 우리들을 잘못되게 만들지만 시를 상상해 낸다는건 우리들의 사고력을 키워주고 총명해 지게하고 우리들의 마음을 깨끗해지게 하고 우리들을 훌륭한 리상을 추구하게 하고 분발하게 하고 우리들을 곱게 자라나게 한단 말이다  그러니까 거짓말과 시적상상은 물과 불처럼 다른거야    야!ㅡ 듣고 보니 그럴듯하다 상상이라는게 좋기는 좋구나. 나도 눈을 현미경으로 만들고 귀를 청진기로 만들어야겠다 해해해,,,,                                          2     얘, 내 눈을 현미경으로 만들고 하고 내 귀를 청진기로 만들었는데 왜 시가 보이지 않니? 해해해... 임마 웃기지마. 눈을 크게 뜨면 현미경이 되고 귀를 도사리면 청진기가 되는 줄 아니. 요 아담아를 써야 해. 그래 시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그 말이지. 시는 어디나 다 있는거야. 니게도 있고 내게도 있고 ,풀에도있고, 돌에도 있고, 나무에도 있고, 새에게도 있고, 하늘, 땅, 해, 달, 병, 바다, 강, 시내물, 하여튼 없는 곳이없고 무슨 물건에나 다 있는거야 거짓말이라구? 신현득시인님이 시를 어떻게 쓰셨는가 볼가. 그분은 [시를 잡아라]는 시를 이렇게 쓰고있어.     시를 잡아라       신현득    풀잎에 파란색이 있듯이 풀에는 풀로 된 시가 숨었다   도랑물에 졸졸졸 소리가 나듯 물속에는 물로 된 시가 숨었다   꽃속에는 향기로운 냄새가 있듯 꽃에는 꽃으로 된 시가 숨었다   아이들아 너희 눈으로 풀잎의 시를 잡아라   너의 귀로 물속의 시를 소리 들어라 꽃속의 시를 냄새 맡아라   아이들아! 들판을 달리며 나비를 잡듯 시를 잡아라        어때. 시가 어디 있는지 좀 알리지. 물에는 물로 된 시, 풀에는 풀로 된 시, 꽃에는 꽃으로 된 시가 있다 그랬지 뭐야. [들판을 달리며 나비를 잡듯/ 시를 잡아라/]라고 했지 뭐야. 이건 어디나 어떤 사물에나 다 시가 있다는 말이야. 그런데 왜 보이지 않지. 그건 우리 눈이 아직 현미경이 안 되였고 우리 귀가 아직 청진기가 못 되였다는거야. 어떻게 현미경이 되고 어떻게 청진기가 되냐고? 거기엔 문장이 많아. 많은 문장에서 가장 주요한것은 상상이야.    상상이란 일종 기억을 떠올리는거야. 지나간 일을 생각해 떠올리는거야. 강하면 자기가 알고있는 강의 색갈, 모양, 소리, 특성들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뿐만 아니라 그 강의 위치, 흐름새 및 주위의 사물 그리고 주위사물들과의 관계랑 많구두 많다. 우린 이런걸 많이 생각해 낼수 있는데 그게 바로 상상이라는거야. 으응 그런거구나. 나도 그만쯤한 것은 생각할수 있는데 시를 쓰자면 안 되드라. 그래, 그런것을 생각할수 있으면 시가 되는것이아니야. 그것들을 적당하게 잘 주어 맞추어야 하는거야. 다시 말하면 그런것들을 생각한 다음 상상을 더해서 새로운 느낌을 더 생각해내야 되는거야. 아무도 느껴보지 못한 니만의 느낌을 말이다    야야야, 골이 아프다. 무스게 그렇게 복잡하니? 야, 시 쓰는것도 학문인데 복잡하지 않겠니! 복잡하길래 누구나 다 시 쓰는거 아니야. 꽥꽥거리지 말고 참고 들어봐. 응, 듣는다. 말해. 기억해. 새로운 느낌이 떠오르면 그느낌에 의하여 자기가 상상한것들을 다시 조합, 배렬하면서 수요되는 것은 쓰고 수요되지 않는 것은 버리는거야.나두 단김에 똑똑히 말하기 어렵다. 우리가 시를 공부하노라면 차차 알게 될거야.                                         3     봄이 왔구나. 개학도 하고 참 좋구나. 따스한 봄날 책가방을 메고 학교로 다닌다는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이니! 공부를 하고 들판에 나가면 아지랑이가 아롱거리고 들에도 나무에도 파아란 새싹들이 뾰족뾰족 돋아나고 따스한 바람이 머리를 살살 간지른다.  강물도 시내물도 새봄을 맞았다고 허리를 쭈욱 펴고 자유롭게 흘러가지. 이따금 노란 나비 갈색 나비들이 한들한들 하늘을 난다. 산기슭에 가면 다람쥐들이 제  세상을 만났다고 쪼르르 달아다닌다 오늘은 뒤산으로 진달래 구경을 가고 래일은 앞산으로 살구꽃구경을 다고 짝자궁을 친다. 진달래가 활짝핀 산에 가서 산아래를 굽어보면 아빠랑 엄마랑 봄일을 하는것이 환히 보이거든. 만물이 소생하고 생기를 띠는 이봄이 어떻게 왔으며 누가 보냈는가를 생각하면 고마운 생각에 눈물이 날지경이야. 이런 봄을 시로 쓴다면 얼마나멋지겠어. 얼결에 이런 생각이 들었지 뭐야. 또 멋진  시가 떠올랐어. 그런데 제목을 봄이라고 달지 않고 [온실]이라고 달았지뭐야 읽어보라구? 그래 읽을게   온실 김진태   봄이 큼직한 온실을 만들었다 집 보다도 공원보다도 산보다도 더 큰 온실이다   유리로는 덥개를 할수 없다 하늘도 파아란 뼁기칠한 하늘로 덮었다   때 맞추어 물을 준다 새순이 다치지 않게 고이고이 보슬비로 물을 뿌린다   엄마젖같은 단비물 촉이 솟는다 아가도 덩달아큰다     어디서 그런 시를 가져왔니? 야ㅡ멋있다! 그래 멋있지. 김진태선생님이 쓰신거야. 얼마나 잘 썼니 봄이 온 대지를 온상이라고 하였단말이다. 그렇지 집보다 공원보다 산보다 더 큰 온실, 그 온실유리는 파아란 뼁기칠한 하늘, 새싹에 내린는 비는 어머니 젖처럼 달콤한 비물, 풀싹들이 냠냠 맛있게 받아먹고 나무잎들이 냠냠 맛있게 받아머고 꽃봉오리들이 냠냠 맛있게 받아먹고 빨강꽃 노랑꽃 하얀꽃들을 히히 흐드러지게 피운단말이다. 새싹이랑꽃이랑 얼마나 좋겠니! 그것들만 좋겠니 우리도 좋지, 그래 우리도 좋지. 그래서 [아가도 덩달아 큼다]고 했단말이다.    [봄이 큼직한 온상을 만들었다]는것도 멋있지만 온실이 너무 커서 덮을 유리가 없으니까 [파아란 뼁기칠한하늘로] 온상을 덮었다는것도 상상이 묘하다야 하늘로 온상덮대를 하였다니까 우리 사는 대지가 온상이 되였단 말을 아니해도 온상이라는것을 금방 알수있지? 그렇지? 으응 어디 그뿐이니. 아빠랑 엄마랑 온상에서 새싹들에게 물초롱으로 물을 주는것을 생각하고 하늘에서 보슬비가 내리여 새순들에게 때를 맞추어 물을 준다고 하였재. 그것도엄마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것처럼. 얘 그런데 [촉]이란게 뭐야? 만년필촉처럼 뾰족한걸 [촉]이라 하거든.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촉은 새싹을 말하는거야. 새싹도 뾰족하게 돋거던 .맞다 그러고 보니까 시라는게 결국은 비기며쓰는게 아니야. 이것과 저것 저것과 이것을  서로 비기면서 쓰는것같아. 글세 그런같기도 한데 잘 므르겠다. 이제 시를 많이 읽고 배우면 알게 될거야.                     4     얘, 봄에 대해서 세가지로 나누는 같다 이른봄 ,봄 ,늦은봄 이렇게 말야. 내게 봄에 대한 시가 네것보다 다른게 있단다. 보자 . [이른봄]. 그래 이른 봄도  있지.  어떻게 썼는가보자     이른 봄      최춘애    암탉이 알을 품듯  봄님이 온 세상을 품고 있다 안개 낀 아침   닭의 체온으로 보송보송 예쁜 병아리가 깨이고   봄님의 품안에서 병아리처럼 고렇게 예쁜 연두빛 새싹들이 깨일테지   조올졸 내리는 비는 새 싹의 젖줄   새 싹이 눈을 감고 강아지처럼 젖줄을 빤다     야, 세상에. 김진태시인님은 봄을 [온실]이라던데 최춘애시인님은 이른 봄을 암탉이 알을 품는다고 했구나.암탉이 알을 품으면 병아리가 나오는것처럼 봄이 대지를 품고있으면 병아리처럼 예쁜 새싹들이 나온다고 했구나.정말 근사하구나. 맞아. 정말 근사하다. 참 묘하고 재밋다. 비를 쓰는것도 두시인님이 다 젖이라고 했는데 조금씩달라. 김진태 시인님은 엄마젖같은 비물을 뿌린다고 했지만 최춘애시인님은 .아예 비를 새싹의 젖줄이라면서 새싹이 눈을 감고 강아지처럼 빨아먹는다고 했재. 나는 춘애시인님이 쓴것이 더 재밋다. 강아지가 에미젖을 빨아먹는것처럼 새싹이 자기 어머니 하늘이 내려보내는 젖을 쫄쫄 빨아먹는것을 보는 것 같단말이다    옳지 그렇지! 뭐가 옳지 그렇지야? 전번에 우리 말한것이 맞단말이다. 시를 쓴다는것이 이사물과 저사물을비기면서 쓰지 않았나 했지 뭐냐. 이제 보니 정말 그렇단말이다. [온실]에선 봄을 온실이라고 했재. 그리고 하늘을 온실덮개라 하고 새싹을 촉이라 했재. 이게 그래 두 사물을 비기면서 한사물을 다른 사물로 만들어 쓴게 아니고 뭐야. [이른 봄]도 그래 이른봄을 알을 까는 암탉에 비기고 병아리와 새싹을 비기면서 썼고 비와 젖을 비기면서 쓰고 싹이 비물에 젖는것은 강아지가 에미젖을 빨아먹는것과 비기면서 썼재.    그것만도 아니다. 또 있다. 뭐야? 상상으로 짝을 맞추어 쓰는거야. [봄]과 [온실]을 짝을 맞추고 [하늘]과[온실덮개]를 짝을 맞추고 [비]와 [젖]을 짝을 맞추고 [새싹]과 [촉]을 짝을 맞췄다.  맞다. 그건 김진태시인님이 [온실]에서 짝을 맞춘거고 최춘해시인님은 [이른 봄]에서 [이른 봄]과 [암탉]을 짝을 맞추고 [새싹]과 [병아리]를 짝을 맞췄지뭐야. 그래 이러한 짝은 명사적으로도 짝을 맞출뿐만 아니라 비슷한 사실과 사실로도 짝을 맞추어 쓰고있는거야 [이른 봄]에 나오는 마지막이 그래,.  병아리 깨이듯이 [연두빛새싹]이 봄의 품속에서 깨여나온다는거나 새싹이 빗물에 젖는것을 [강아지처럼 젖줄을 빤다]고 한것들은 모두 사실과 사실을 짝을 맞추어 쓴거란말이다.     야!ㅡ 그럼 시 쓰기가 짝 맞추기라면 너무 틀리는것은 아니겠다. 그렇구말구. 짝을 맞추자면 짝을 찾아야하고 짝을 찾자면 상상을 잘 해야 한다. 히히 시란건 사람의 상상이 쓰는거구나 상상을 잘 하는 애가 시를 잘 쓰겠구나.                                                                    5      얘, 짝이 아니 드러나게 쓰는 시도 있다. 어느 시나 다 짝이 드러나는것은 아닌거야. 짝을 맞춘다는건 상상을하는 주요한 한가지 방법일뿐이야. 기어코 짝이 다 드러나야 된다는건 아니야. 피ㅡ 변작도 많구나. 우리가 이제까지 봄에 대한 시를 공부하였으니까 같은 봄이란 시를 례를 들어볼가 그럼 꼭 짝이 드러나게 쓴다는것이 아니라는걸 알게 돼. 보자       봄       허동인   누가 이처럼 세심하고 부지런 하리오   나무마다 풀마다 빠뜨리지 않고. 꽃 피우게 하고 잎 피우게 하고   땅속에 묻쳤던 씨앗들은 하나하나 움트게 하고   누가 이같은 엄청난 사랑을 지녔으리오   겨우내 잠들었던 곤충들의 알, 번데기 흔들어 눈뜨게 하고   땅속에 숨었던 뱀, 개구리들도 모두모두 일깨워주고     야ㅡ고게 재밋다. 그런데 정말 고게 누기야? 무르는가 해서. 고게 누긴 누구겠니? 고게 봄이지. 봄이 시치미를 뚝 떼고 입을 꼭 다물고 말한마디 하지 않지만 우린 알아. 봄이란걸.   봄이면 나무마다 풀마다 잎이 피여나고  꽃이 피여나고 흙에 파묻쳤던 씨앗들도 죄다 싹 튼다는걸 누가 모를라고. 봄이면 곤충들의 알이 곤충으로 깨여나고 번데기들은 살때가 왔다고 땅속에서 기여나오는걸 누가 모를라고.봄이면 뱀이랑 개구리랑 겨우내 동면하던 많은것들이 잠에서 깨여나 밖으로 어정어정 나온다는걸 누가 모를라구.웃기재이. 그외에도 많지 물새랑 옌지새랑, 개미랑, 기러기랑, 제비랑 다 겨울에는 보이지 않던것들이 봄이 되면모두 다시 나타나서 봄은 생생 끓는단다.    이 시에 어느게 짝이 있니? 없다. 그래 없지.이 시에 나오는 나무도 짝이 업고 풀도 짝이 없고 씨앗도 짝이없고 곤충의 알도 번데기도 뱀도 개구리도 모두 짝이 없는 외동고지들이야. 그런데 왜 재미 있지? 봄을 맞아 이러한것들이 살아나는것을 누군가가 부지런히 하고있다는바람에 재미가 무척 나게 된거야.  봄이 오니까 자연스럽게되는걸 가지고 어떤 대단한 사람이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놓는것처럼 시인이 상상하는바람에 우리가 저도 모르게시속으로 끌려들어갔지 뭐야    맞아 봄이란건 기후가 춥던데로부터 따스해지는것이 봄이거든. 기후가 따사로와지니까 얼었던것이 다시 살아나고 땅속에 들어가 추위를 피하여 죽은체 하고 있던것이 다시 나오고 강남에 갔던 철새들이 다시 돌아오고 하지. 엄마랑 아빠랑 새해농사를 시작하지. 봄은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멀리 갔다가 다시 온걸 우리들에게 알려주는거란 말이다   이 시가 참 묘하다. 시인은 짝을 생각하고 있으면서 짝을 드러내지 않고있지 뭐야. 봄의 짝을 누군지 알수 없는 사람으로 설정했단말야. 이 짝이 뭘가? 기실 사람은 아닌데. 하늘일가? 땅일가? 아니면,,,                                                  6     한국에  오순택시인님이 봄비를 어떻게 썼는지 알아, 참 재밋게 썼어. 봄비라 하면 시인님들이 오금을 못쓰는가봐. 거이 모든 시인님들이 봄비를 쓰고 계시거든. 봄비야 좋기는 좋지 농민들이 밭에다 씨앗을 심어놓으면 싹이 나오지 않다가 하루밤만 봄비가 오면 밤사이에 밭이 새파랗게 되는거야 길가에 풀들도 파랗게 돋아나고. 그런날 아침은 기분이 나재.     왕청같은 말을 했재. 오순택시인님의 시를 본다하구선     봄비    오순택   나직나직 꽃의 말에 귀 기울이는 봄비   꽃잎에  고운  발자국 놓고 간다   알몸이 되어 푸르르 푸르르 떨고있는 풒잎에 앉으면 초록 구슬이 되는 봄비   연못엔 음표를 놓고 간다       야ㅡ요고야 정말 깜찍하네. 어떻게 요렇게 깜찍한 상상을 끌어냈을가? 이제 좀 따져보자   나직나직  꽃의 말에 귀 기울이는 봄비   꽃잎에 고운 발자국 놓고 간다      요 1,2련이 한개 내용이구나.  소곤소곤 나직이 속삭이는 꽃의 말을 듣고 봄비가 꽃잎에 고운 발자국을 놓고 간다는것이 기막히게 재밋재. 봄비와 꽃이 짝궁이 같단말이다. [고운/발자국 놓고 간다]는 발자국이란게 뭐겠니? 봄비가 꽃잎에 내리면서 떨어지다 남은 이슬이지. 그런데 그것을 사람이 걸으면서 남기는 발자국이라고 했지뭐야. 정말 깜찍해. 고것들이 나직나직 말을 주고 받으며 하는짓이 시샘이 나! 두번째 내용이 어떤가 볼가   알몸이 되어 푸르르푸르르 떨고있는 풀잎에 앉으면 초록 구슬이 되는 봄비     첫두련은 봄비와 꽃의 사실을 표현하고 세번째련은 봄비와 풀의 사실을 표현한거야. 그래 비방울이야 옷이 따로 없으니까 알몸일수밖에 없지 [푸르르푸르르 떨고있는 풀잎]이라는것도 표현이 새롭재. 풀잎에 있는 비방울이[초록 구슬]이 된다는것도 재미나게 짝을 찾은거야 이 세번째련은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우리앞에 펼쳐주고있지뭐야.   연못엔 음표를 놓고 간다      네번째련은 요렇게 두줄이지만 쟁쟁 소리가 나게 여물었지 뭐야. 비오는 날 연못가에 서서 비방울이 떨어지는것을 바라보면 비방울이 떨어지면서 숫한 동그라미가 그려지고 연못물이  살작살작 튕기지. 그 동그라미와 튕기는 물을 도레미파솔라시를 펴현하는 음표라고 했지 뭐야. 시인이 관찰이 얼마나 세심하고 짝을 맞춘것이 얼마나기발하고 재미있는지 모르겠어    얘, 이 시에는 짝을 맞추는것보다 더 중요한것이 있재. 짝도 잘 맞추었지만 전반시에 등장하는 비가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구나 [귀 기울이는 봄비]라든지 [발자국을 놓고 간다]든지 [알몸]이라든지 [풀잎에 앉는다]든지 [음표를 놓고 간다]든지 모두가 사람처럼 표현하였단말이다. 비를 사람처럼 만들어놓으니까 참 비가 친구처럼사랑스럽고 다정하고 친절해 보이재. 마치 네나 나의 짝궁이 같단 말야    그래 의인법이라고 배워주던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나지 뭐야. 의인화수법을 쓰면 말도 부드러워지고 재미도난단말이다. 야, 이재 보니까 의인법을 잘 쓰면 재미나고 좋은 시가 되는거 아니야. 맞다! 마땅히 그래야 해. 우리와 세상 사물은 모두가 이 지구에서 함께 사는 친구거던. 사물을 의인화하는것도 히히 좋은 시를 쓰는 방법의한가지야.                                    7     시가 어디 있는가? 누가 이렇게 물을지 모르겠지만 시는 우리들이 있는곳에는 다 있는거야. 문제는 시가 있는것을 볼줄 모르고 캘줄 모르는거야. 시인들은 시시한것같은 일상생활에서 무우밭에 가서 무우를 뽑아내는것처럼시를 쑥쑥 뽑아내고 있는거야. 문제는 사물이나 사실을 어떻게 보는가와 관계된단 말이다.    이른 아침이나 비가 온뒤에 빨래줄에 비방울이 쪼르르 달리지. 그 빨래줄에 제비랑 참새랑 앉았다가 날아가면 물방울들이 주르르 떨어지지. 너 이런걸 보고 시를 쓸만 하니? 그게 어떻게 시가 되느냐고? 그래 우리는 못쓰거나 쓰기 바쁘지만 시인들은 우리가 보기에 시시한 이런 사건을 가지고 재미 있는 시를 썼단 말이다 김희정시인님이 쓴 시 [비 내린 아침]을 한번 읽어볼가.   비내린 아침 김희정    소리 없이 내린 이슬비 은빛 찬란히 빛난다   빨래줄의 수정구슬 하나하나에 작고 어여쁜 무지개가 선다   아침해살에  눈을 뜬 참새는 수정구슬 튕기며 포르르 날아간다        어떻니? 재밋니? 그래  재밋지. 무척 재미있는 시야. 그런데  이 시에는 특별한 언어도 보이지 않아.그저 수수한 언어로 구수하게 엮어내려갔어 무기교가 기교라는 말을 이런 시를 두고 말하는걸거야 [비방울]을 [구슬]이라는것쯤은 누구나 다 할수있는 말이잖아 물방울 하나하나에 [무지개가 선다]는것도 모르긴 해도 김희정시인이 발견한건 아닐거야. 시를 보느라면 이따위들은 많고도 많지뭐야. 다 수수한데 어떻게 좋은 시가 되느냐고? 수수한것 같지만 수수하지 않은 곳이 있지. 그건 이 시의 제3련이야 다시 읽어볼가   아침해살에 눈을 뜬 참새는 수정구슬 튕기며 포르르 날아간다       어떻니? 보이는게 있지 않니? 그렇지. 시골의 아름다운 아침이 보이재. 해살이 부채살처럼 산으로부터 마을로 내리비치는데 빨래줄의 이슬들이 해빛에 반짝인다. 금방 잠을 깬 참새들이 빨래줄에 조롱조롱 앉았다. 내가문을 열고나간다. 참새들이  포르릉 날아가며 째재잭 운다. 빨래줄에선 물방울이 아니라 구슬이 그것도 수정같이맑은 구슬이 해빛에 찬란한 구슬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개 아니 많이 주르르 떨어진다. 황홀한 정경이 아니고 뭐야!    참새! 고놈의 참새를 등장시키는것이 김희정시인님의 재치야. 참새가 날아가는 바람에 구슬이 떨어졌거던.실생활에 이런 일이 많단말이다. 문제는 어떻게  특징을 잡아서 표현하는가가 중요해.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시인자신만이 아름답게 체험한 생활을 가장 적절한 자리에 가져다 써먹는거야. 그러기만 하면 평소에 보기에는 아무리 수수한것일지라도 금빛 은빛이 반짝반짝 나지 뭐야. 고런 시는 한번 읽어보면 마음이 고소해 나고 두번 읽어보면 기억에 남는거야. 한두번 읽오봐서 아무런 느낌이나 재미가 나지 않는 시는 안돼.  여러번 읽어봐도 그저 그렇구나 하는 감정이 들면 그 시는 빵점이지 뭐야. 어디서 듣던 소리같은 시, 어디서 보던 같은 시, 한마디도 새로운 말이 없는시, 이러한 시는 아무리 말을 곱게 다듬어도 빵점이지 뭐야       8     봄이 오면 우리가 제일 감사하게 생각되는게 많지만 우선 봄바람이 감사하재.  봄바람이 솔솔 불어오면 겨우내 그렇게 지겹게 입고 다니던 솜옷을 활활 벗어서 팽개치는것만 하여도 거뜬한 심정이지뭐야. 봄바람이 솔솔 불면 아지랑이가 나울나울 춤을 춘다. 그러면 산골애들은 삽을 메고 밭으로 달려간다. 뭘 하냐고, 메를 파지. 삽으로 땅을 푹푹 파서 슬슬엎어놓으면 하얀 메뿌리가 나오지. 실한것은 손가락처럼 실해. 흙을 싸악 털어버리고 꽁꽁 씹어먹으면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르게 맛있어. 봄바람은 이렇게 우리에게 새로운 생활과 생기를 줄뿐만 아니라 이 크나큰 자연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는단말이다    리효선시인님이 쓴 시  [봄바람이]  어떻게 씌였는가를 한번 볼가   여보세요!여보세요! 그만 눈을 뜨셔요 봄바람이 버드나무가지를 쥐고 흐든다 어서 파란 싹을 틔우라고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만 잠을 깨셔요 봄바람이 개나리가지를 잡고 흔든다 어서 노란꽃을 피우라고   여보세요!여보세요! 내말을 좀 들어보셔요 봄바람이 귀에 대고 속삭인다 낼모레면 개나리가 필거라고     어떻니? 이 시의 내용에는 별로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어. 그렇지만 재미있는거야.봄을 노래할 때 새싹이요 꽃이요 봄비요 하는것들은 누구나 다 쓰는 사물이니까 시에 등장하는 사물이나 사실은 모두 수수한것들이야. 더구나 이 시에서는 상상으로 짝을 새롭게 맞추었거나 신비한 비유를 끌어온것도 없단말이다. 그런데 왜 요리 재미있을가?    왜 골을 빽빽 돌리니? 그렇지 바로 그게란말이다. [여보세요!여보세요!]하고 감동적으로 부르는거야. 요 언어가 참 매력이 기막힌거야. 봄바람이 버드나무가지를 쥐고 흔들며 어서 파란 싹을 틔우라고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고, 개나리를 붙잡고 어서 꽃을 피우라고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고, 랠모레 개나리가 필거라고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는것이얼마나 친절하고 매력적인지 모르겠다 한번 읽어보면 우리 가슴을 따스하게 하고 우리마음에 소올솔 차분하게 러든단말이다 마치 누나가 따뜻하고 정다운 목소리로 말하는것같잖아    비결이 어디에 있을가? 그렇지! 그래. 바로 그거야. 봄바람이 버드나무가지며 개나리 가지며를 다정하게 흔들며 직접 그들을 이깨워주기 때문이야 마지막련에서는 자기가 일깨워 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것처럼 랠모레 개나리가 필거라고 으쓱해서 속삭이기까지하지 뭐야      그러니까 시를 쓸 때 내용도 주요하지만 형식도 주요하단말이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형식이 따라가지 않으면 감칠맛이 약하거나 없게 된단말이다. 그런데 형식을 면바로 리용하면 수수한 내용도 재미있게 엮어진단다. 그렇다고 형식만 부려서 된다는건 아니야. 텅빈 내용은 아무리 좋은 형식이래도 안돼. 재간 있는 색시도 쌀이 없으면 밥을 못짓는다재.    형식과 내용의 통일, 이게 바로 동시에서 추구해야 하는거야. 형식이란건 어떤 수법으로 시를 쓰는가 하는것이고  내용이란건 누구도 느껴보지 못한 느낌을 가지고 시를써야 한다는거야. [봄바람]에서 리효선시인님은 [여보세요!여보세요!]하는 감동적인 언어로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고있지 뭐야. 처음 [여보세요]를 읽어보면 전화를 거는것같은감이 들지만 아래를 읽어보면 그런것이 아니지 뭐야. 친절하게 착각을 주었다가 독자를내용에로 끌어들이는것도 이 시의 또 하나의 성공의 비결이야.   우린 이 시에서 의인화수법의 매력과 위력에 다시 한번 깊은 감동을 받지 뭐야. 동시는 그래 .외로 쓰던 모로 쓰던 시에 의인화수법이 용해되여 있어야 해. 그래야 친절하고 감동적이고 재미있어야 한다는 목적에 도달되는거야.   한국명동시 감상시리즈 2     9       봄에 대한 시를 한수 더 볼가. 엉? 무슨 봄에 대한 시가 그리 많으냐고. 그래 봄에 대한시가 많아. 그건 시인마다 봄에 대한 느낌이 다르기때문이야. 같은 느낌이라도다르게 표현하면 좋은 시가 되거든. 그럼 리건호시인님이 쓰신 [봄]이라는 시를 한번 읽어볼가     봄     리건호   한마리  두 마리 ,,,,,,,,,,,,, 전기줄에 제비가 앉는다   하나 둘 까만 음표가 늘어간다   오르며 찌지굴 내리며 쪼조글 음표보고 부르는 종달새 노래   보리싹이 큰다 살구꽃이 핀다.     얼마나 재밋니.? 우리  이제부터 한개련씩 어떻게 쓰였는가 보자. 모두 네개련인데첫련은이렇게 썼어.    한 마리  두 마리 ,,,,,,, 전기줄에 제비가 앉는다      여기서 우린 두가지를 알수있어. 한가지는 시인이 봄을 쓰는데 제비를 노래하는것으로써 봄을 노래하려 한다는것을 알수있고 다른 한가지는 이 련에 있는 줄임표에서 한두마리 제비가 아니라 많은 제비를 노래하려 한다는것을 알수있단 말이다. 첫련은 한마디로 말하면 제비가 전기줄에 많이 날아와 앉는다는것을 쓴거야. 시인이 무엇을 쓰겠다는 마음의 준비를 표현했을뿐이야. 시적으로 말하면 이런것을 계기라고 해. 이런 시적계기는 시마다 다 한개련씩 차지하고 있는건 아니야. 시는 일반적으로 계기가 있지뭐야.계기는 모두 첫련에 있는데 한줄이 될 때도 있고 한개단어가 될 때도 있는거야. 구체적인건 후에 말하자.   제2련은 이렇게 썼어.   하나 둘 까만 음표가 늘어간다     음표란게 뭐지. 제비야. 제비가 2련에 와서 음표가 돼버렸지 뭐야. 왜 제비를 음표로둔갑시켰지. 짝을 찾은거야. 어떻게 찾은거냐고? 전기줄이 여러갈래가 쭉쭉 뻗어간것은오선보와 비슷한거고 그 전기줄에 제비가 앉은건 도레미파 솔라시 하는 음표와 비슷한거야. 그러니까 전기줄에 앉은 제비를 음표라고 했지 뭐야. 야, 거 묘하다. 제비가 5선4간에 있는 음이 되였구나! 정말 근사하다.    오르며 찌지굴 내리며 쪼조글 음표 보고 부르는 종달새 노래    이것이 제3련이야. 2련에서는 전기줄에 앉은 제비를 음표라 하고 3련에서는 그 음표를보고 종달새가 [찌지굴] [쪼조글] 노래를 부른다고 했지 뭐야. 제비는 음표가 되구 종달새는 그 음표를 보면서 노래를 부른다 얼마나 묘하고 재밋니!   리진호시인은 묘돌이야. 어쩜 이보다 더 재미있을수가 있겠니.봄이면 종달새가 봄이왔다고 즐겁게 우는것을 보고 제비가 전기줄에 앉은것을 음표로 알고 노래한다는 상상이야말로 신비하고 독창적이재.    마지막 4련은 간단하면서도 참 잘 썼어.[보리싹이 큰다/살구꽃이 핀다] 하고 말이야. 화창한 봄날의 아름다움과 생기가 우리 눈앞에 한폭의 수채화로 확 안겨오잖아. 이젠 우리도 별로 봄같은 제목으로 시를 쓸것 같지. 돌아가 한번 써볼가. 정말 쓰자면 바쁠지도 모르겠지만 별로 쓸것만 같아.                                      10      봄이 오느라고 날씨가 따뜻해지면 그리운것들이 많지. 그중에서도 제일 그리운것이 제비라고 할수있어. 폭발적인 새소식은 딴거야. 봄에 제비는 올 때 고작은 날개에다봄을 가득 싣고 와서 산과 들에다 부리우거든. 제비가 오면 나무잎들이 앞장 다투어 피여나고 꽃들이 앞장 다투어 피여나는거야. 제비야말로 천사지. 봄을 실어오는 천사란말이다. 그래서 봄이 오면 우리는 은근히 제비를 기다리게 되는거야.   아이들의 이런 심정을 표현한 시가 있어. 서덕출시인님이 쓰신 [봄편지]야. 어떻게썼는냐구? 한번 읽어볼가.       봄편지         서덕출   연못가에 새로 핀 버들잎을 따서요   우표 한장 붙여서 강남으로 보내면   작년에 간 제비가 푸른 편지 보고요   조선봄이 그리워 다시 찾아옵니다.      모두 여덟줄로  된 시야. 참새는 작아도 오장륙부가 다 있듯이 시는 짧아도 기승전결이 다 있어. 뭐? 기승전결? 듣지 못한 소린데. 그래 듣지 못한 소릴수도 있어. 이는옛사람들이 시를 분석해 보던 방법이야. 기승전결을 사전에다 이렇게 해석했더라. 시를짓는 격식인데 [시의 첫머리를 기, 이를 되받는것을 승, 중간에 뜻을 한번 바꾸는것을전, 전편을 거두어서 맺음을 결이라함] 이것이 기승전결에 대한 가장 간단하고 투철한해석이야. 이 방법으로 이시를 보는것도 나쁘지 않을거야.    연못가에 새로핀  버들잎을 따서요     이 시의 첫련이야.  이 시에서 연못가의 새로 돋은 버들잎을 딴다는것이 시의 시작이지뭐야. 사전에서 말하는 첫머리이며 [기]에 속하는거야. 이것이 앞에서 우리가 말했던 시의 계기와 같은거야. 이 시에서 새로운 버들잎을 씁니다 하고 알려주는거란 말이다. 그럼 버들잎을 따서 뭘 할가 하는 의문이 들지 뭐야. 그것을 2련에 쓰게 마련돼 있는게 아니겠니? 그래 2련을 보자.   우표 한장 붙여서 강남으로 보내면     이것이 2련이야. 버들잎에다 우표를 붙여서 먼먼 남방으로 보낸다는거야. [기]를 받는것을 [승]이라고 했재. 2련이에서 버들잎을 편지로 만들어 강남으로 보낸대. 버들잎이편지로 돼버린거야. 버들잎이 편지로 되였다는것이 [기]를 받은 [승]이란거야. 쉽게 말하면 기는 쓰려는 사물이나 사실을 제시하는거고 승이란 그런 사물이나 사실을 한보 발전시키는거야. 버들잎을 발전시켜 편지라고 한것처럼 우리가 앞에서 말한대로 하면 상상으로 짝을 찾은거야. 버들잎의 짝이 편지가 된거야.   작년에 간 제비가 푸른 편지 보고요     이 제3련이 [전]이란거야. [전]이란 중간에 뜻을 한번 바꾸는것을 [전]이라 했재.버들잎 편지를 보냈지. 편지를 보내면 받을 사람이 있어야 할거 아니야. 그 받는 사람이제비야. 편지던게 제비가 나왔으니까 내용이 바뀄지뭐야. 그래서 3련을 전이라고 해.   조선봄이 그리워 다시 찾아옵니다   마지막련이지. 이 마지막련이 [결]이란거야. 결은 총결인데 작자의 뜻이 있거든. 이시에서 작자의 뜻은 제비가 조선이 그리워다시 찾아온다는것을 통하여 제비도 조선을 그리워 하는데 조선사람으로서 어찌 조선을 그리워하지 않으랴 하는 애국주의 정신을 쓴거야. 결은 괘괄성이 있는거야. 일반적으로 결은 시의 전반 내용을 종합표현하는 작용을한다고 할수있어.     11      얘, 어떤 시를 보면 너무도 묘해서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너무너무아름다워서. 피ㅡ어디 그런 시가 있니? 있다. 바로 김사림시인님이 쓴 시가 그래. [꽃비]라는 제목으로 썼는데 제목부터가 너무너무 아름다운 언어지 뭐야. 세상에 비라는 말과 꽃이라는 말은 있지만 꽃비라는 말은 없단말이다. 꽃비라는 말은 김사림시인님이 만들어낸것이 틀림 없어. 꽃이 너무너무 많이 피니까 그것을 꽃비로 표현한거지 뭐야! 언어를 새로 조합한것이 돋보인단  말이다. 시인이 시를 쓰면서 새로운 언어를 만든다는것은 이러한 언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니. 꽃과 비는 서로  전혀 다른 뜻을 나타내는 언어이지만 하나로 묶어놓으니까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    그래 언어라는것은 워낙 어떠한것을 나타내는 표징이야. 고대로부터 흘러내려온표징인데 우리는 지금 그 표징들을 쓰고있잖아. 너나 나의 이름도 그렇지. 우리가 금방태여났을 때 네이름 순희를 해옥이라고 지었더라면 너는 지금 순희인것이 아니라 해옥일거야. 옛날에 제일 처음 지금의 아빠를 엄마라고 부르고 엄마를 아빠라고 불렀더라면 우리는 엄마와 아빠를 바꾸어서 부를거야. 그래도  아무런 불편함도 없을거야. 그러니까사회가 발전하고 문화가 발전함에 따라 새로운 말이 생길뿐만 아니라 언어와 언어를 새로 조합하여 [꽃비]처럼 고운 언어들을 많이 만들어낼수록 좋단 말이다. 아야, 말이 너무 빗나가재. 이만큼하고 김사림시인님이 쓴 [꽃비]의 원문을 보자.       꽃비        김사림    먼산에 꽃비 비그르르 돌아   마을에 내려서 살구꽃 된다   살구꽃 환한 마을을 비그르르 돌아   뜨락에 내려서 나비가 된다.      요렇게 깜직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울수가 없어. 언어가 물 흐르듯 조르르 흘러내려가재. 그것도 말짱 비단처럼 부드러운 언어가. 토라는게 ㄴ,ㄹ,ㅊ 세개가 있는데 [ㅊ]는꽃이라는 명사에 붙은것이여서 할수 없지만 나머지 둘은 모두 유향자음이여서 기막히게부드럽고 친절하단말이다. 첫두련을 먼저 보자. 첫두련은 한가지 내용을 표현하고 있어.   먼 산에 꽃비 비그르르 돌아   마을에  내려서 살구꽃 된다     봄이면 산에 하얀꽃, 빨간꽃, 노란꽃 벼라별 새갈의 꽃들이 가득 피는거야. 산은 꽃이불을 포옥 쓰고 있는거 아니겠니. 그런 오색찬란한 꽃들이 비그르르 돌면서 마을로 내려와 살구꽃이 된다하니 현실인게 아니라 아름답고 황홀한 동화세계지 뭐야. 그 꽃들이또 어쩌지? 삼련과 사련을 보면 알아.   살구꽃 환한 마을을 비그르르 돌아   뜨락에  내려서 나비가 된다       꽃비는 살구꽃을 마을에 가득 피워놓고 환한 마을을 비그르르 돌고 돈 다음 뜨락에 내려서 나비가 된다는거야.  이것도 동화지뭐야. 동화래도 이렇게 아름다울수가없어. [비그르르 돌아]를 발음할때 입안에서 사탕알이 사르르 녹는 같지 뭐야. 나비란뭐겠니? 꽃잎이 떨어진거지. 꽃잎의 짝이 나비인거야. 꽃잎이 다 떨어져 나비가 되면 살구나무에 애기살구들이 가득 열리지. 얼마나 평화롭고 아늑하고 아름다운 마을이니! 한번 이런 마을에서 살아보고싶잖니?                                    12     봄이요, 꽃이요 하는 봄에 대한 시들을 많이 보았는데 이번을 강에 대한 시를 보자.강이란 어떤거니? 봄이면 얼음을 깨고 나와 마가을까지 흘러가는 놀이터야. 낮이면 해랑구름이랑 와서 놀고 밤이면 달이랑 별이랑 와서 놀고. 어디 그뿐이야. 산도 제얼굴이 어떤가 비춰보고 새도 날아지나며 제모습이 어떤가 비춰보재. 물속에는 여러가지 고기들이자유로이 헤염치고 가재랑 물벌거지랑 벌벌 기여다니재. 산에서 노루가 내려와 물을 마시며 빙그레 웃고 우리들은 물장구치며 목욕하재. 이 세상 모든 사물이 물을 떠나면 살수 없는거야. 물은 모든 사물을 낳고 키우는 어머닌거야.    이런 물이 흐르는 강을 어떻게 쓰면 재미있을가? 강현호시인님이 해답을 주고있는거야.어떻게? 보면 알거야.       강물      강현호   작은 고기들이 떼를 지어 강물의 겨드랑이를 간지르고 있다.   강물은 온 몸을 뒤척이며 깔깔거리고 있다.   이따금씩 입술사이로 은이발이 몇 개 반짝이고있다.      이렇게 모두 세개련이야. 리건호시인님이 [봄]을 쓸 때 제비를 가지고 쓰던것처럼강현호시인님도 강을 쓰면서 물고기를 쓰고있지 뭐야. 그러니까 제목이 크더라도 그 제목에 포함되는 내용을 다 쓰는것이 아니라 자신있게 표현할수있는 한두가지 사실만 잘쓰면 되는거야. 우리 함께 기억하자.   작은 물고기들 떼를 지어 강물의 겨들랑이를 간지르고 있다      첫련이야. 히히 고기들이 물에서 헤염치는걸 [강물의 겨드랑이를 간지르고있다]고? 매짜다! 땡땡 여물었지뭐야. 강물엔 겨드랑이라는것이 없지만 강물을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겨드랑이가 있을게 아니야.  고기들이 몸을 흔들거리며 올라가고 내려오면서 헤염치니까 겨드랑이를 간지른다는것이 자연스럽재. 겨드랑이를 간지르니까 어찌겠니? 웃지. 그럼  강물이 어떻게 웃는가 보자. 그건 2련에 썼거던.   강물은 온 몸을 뒤척이며 깔깔거리고 있다      이 2련이 강물이 웃는 모습이야. 그저 웃는것이 아니라 [온 몸을 뒤척이며/깔깔거리고] 웃는거야. 강물은 흐를 때 모든 물이 다 흐르는거야. 한방울도 정지상태에 있는건없거든. 정말 온 몸으로 흐른단말야. 흐르느라면 몸을 마악 뒤번지게 되는거야. 흐르면서 소리를 내지 쐇솨ㅡ하고. 그것을 의인화해서 [깔깔]했지 뭐야. 강물이 대단히 간지러웠던 모양이야.   이따금씩 입술사이로 은이발도 몇 개 반짝인다      이것이 마지막 3련이야. 강물의 웃는 모습을 한번 더 자세하게 보여주는것으로 시를 마치고있어. 은이발도 몇 개  반짝인다 했어. [은이발]이란게 뭐지? 그렇지. 물이흐르면 물결이 일고 물결이 일면 하얗게 물이 부서지게 마련이지. 그 하얗게 부서지는짝을 찾은것이 [은이발]이야. 강물이 흐를 때 온 강물이 단김에 물결이 부서지는것이 아니라 드문드문 부서지거든. 그래서 [은이발이 몇개/반짝인다]고 한것이 아니겠니! 사람도 웃으면 이발이 보이니까 그렇게 한거지뭐야. 강현호 시인님은 강물을 쓰면서 강물이어떻게 웃는가 하는 한가지를 표현하였고 리건호 시인님이 을 쓸 때도 바줄에 앉은 제비만 썼어. 한 사물에서의 어느 한 측면을 틀어쥐고 잘 쓰는 것이 동시를 잘 쓰는비결이 아닐가 하는 생각을 해봐야겠어.                                        13     우리가 봄철의 동시를 어떻게 쓰는가를 보는 사이에 어느새 여름이 왔구나. 이제부터 그럼 여름에 대한 시들을 어떻게 썼는가 보자.    여름은 모든것이 무성하게 자라는 계절이야. 나무도 풀도 물도 곡식도,,,뭐나 다왕성한 생명력을 과시하는 계절이야. 시를 쓸것도 엄청나게 많은 계절이야. 먼저 리국재시인님이 쓴 [여름산]부터 보자.     여름산      리국재   여름산은  아직 덜익은 풋풋한 과일이다   한줄기  소나기 쏟아질 때마다 조금씩 익어가고 조금씩 커가고   얼마만큼 익었는지 한번쯤 두들겨 보고싶다 쪼개여 보고싶다        어때?, 참 멋있지. 시인의 상상이 대단하지 뭐야. 일련에서 여름산의 짝을 [아직/덜익은/풋풋한 과일]이랬단말이다. 산을 어떻게 상상하면 [풋풋한 과일]이 되는거야?정말 미치겠다  급해할것 없어. 벌판에 산이 하나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멀리서 보면평평한 곳에 둥그런것이 아니겠니. 우리가 여름에 수박밭에 가보자. 큼직한 수박이 달려있는것도 평평한 곳에 둥그런게 아니겠니. 둘이 다 둥그런것이니까 산을 수박이라고 할수있고 수박을 산이라고 할수있는거야. 수박이 과일에 속하니까 산도 과일이라고 해서안될거 없단말이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모양으로 짝을 찾은거야. 문학적 언어로 말하면 이러한것을 모양으로 시적상관물을 설정하였다고 하는거야. 또 산을 과일로 변형시켰다는거야.  왜 이제야 말하느냐고? 이런 말은 리해하기 바쁘니까 짝이라고 한거지. 모양으로 짝을 찾는다하면 얼마나 알기 쉽니? 기억하자 꼭 알았지. 히히ㅡ알았다!!   한줄기 소나기  쏟아질 때마다 조금씩 익어가고 조금씩 커가고    두번째 련이다. 여기서는 과일이 소나기를 맞으며 익어가고 커간다고 하재. 수박이랑여름에 커가고 익어가는데 여름에는 비가 많이 오재. 그러서 소나기 올 때마다 조금씩익기도 하고 크기도 한다는거야. 세번째련을 보자.   얼마만큼 익었는지 한번쯤 두들겨 보고싶다 쪼개여 보고싶다      이 마지막련에서 과일이 익었는가 두드려보고 쪼개여 보고싶다고 하였어. 어째 요런 표현을 썼느냐고? 그래 고것이 문제지. 수박이나 참외밭에 가면 사람들은 수박이나참외가 익었는가를 판정할 때 보통 참외나 수박을 두드려 보지 뭐야. 두드려 봐서 맑고쟁쟁한 소리가 나면 익은거고 무겁고 둔중한 소리가 나면 그건 익지 않은 생거야. 산을과일이라고 하였으니까 익었는가를 알기위하여 두드려본다는거지 뭐야. 그러나 수박같은것이 확실이 익었는가를 판정하는데는 속을 보아야 하는거야. 여름에 수박장사군들이 수박을 팔 때 수박을 칼로 쪼개여서 손님들한테 빨간 속을 보이는건 자기 수박이 잘 익었다는것을 증명하는것이 아니겠니. 그래서 시인도 과일을[쪼개여 보고싶다]고 한거야. 그럼 과일을 수박이라고 할거지. 그래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그렇다는건 수박이라고하면 확실히 더 좋은것은 맞아. 아니라는건 과일상점에는 남방에서 나는 야자랑도 있을거야. 아마 야자랑도 익었는가를 판정할 때 두드려보는지 몰라.  전면성을 기하기 위해그랬는지 몰라. 과일이라는건 류개념이여서 뻥뻥하재. 수박은 종개념이여서 인차 영상이떠오르지 뭐야. 시를 쓸 때면 종개념에 속하는 언어를 쓰는것이 제일이야.                                    14       얘, 시를 쓸 때 뭐가 제일 중요한건지 아니? 히히, 그걸 누가 모르게, 시적발견이지. 맞다.시적발견이란게 뭔지 아니? 같은 제목이라도 남보다 따게, 새롭게 쓰는게지.맞다. 남보다 따게 새롭게 쓰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건지 아니? 그야 남들이 못쓴것을 쓰면 되지. 맞다. 남들이 못쓴것을 쓰자면 어떤 방법으로 하지? 얘, 네가 날 심문하니? 글쎄 맞춰봐. 새로운 짝을 찾는거야. 맞다. 남들이 한번도 찾아내지 못한 새로운 짝을 찾아쓰는 시가 좋은 시고 그런 시인이 훌륭한 시인일거야. 시를 많이 쓰는게 시인인것이아니라 새로운 시를 쓰는게 시인이야. 말은 이렇게 하지만 정말 새로운 시를 쓴다는건 쉬운일이 아니야. 그런 시를 봤니? 봤다. 누구걸? 문삼석시인님걸. 제목이 뭐야? [이슬].   밝음을 토해내는 밝은 눈   맑음을 토해내는 맑은 눈.       요리 짧은거. 응, 짧아. 짧은게 시가 안되는것이 아니라 길어도 시적발견이 없거나짝이 없는게 시가 안되는거야. 이슬에 대해서 많은 시인들이 시를 썼지만 눈이라고 한시인은 없었어. 모두가 구슬이요 보석이요 진주요 하고 썼지만 눈이라고 한 시인은 없었지 뭐야. 문삼석시인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이슬을 눈이라고 했을가? 두가지 원인이 있어. 한가지는 이슬이 눈처럼 밝기때문이고 다른 한가지는 이슬이 티 하나 없이 눈처럼맑기때문이야. 또 한가지 중요한 원인이 있어. 눈도 모양이 동그랗고 이슬도 모양이 동그랗기 때문이야. 이 시는 문삼석시인님이 모양으로 짝을 찾은 시야.   문삼석시인님은 모양으로 짝을 찾는 능수야. 전문적으로 코풀레기 애들을 대상한 시를 쓰기를 즐기면서 모양으로 짝을 찾는데는 이골이 튼 시인이거든. 원숭이라는 시 한수를 더 보자.    원숭이   원숭이는  날 때부터 할아버지래 주름살  오글오글  할아버지래     원숭이는 새끼원숭이래도 이마에 주름살이 쪼글쪼글해. 우리 할아버지들도 늙으면이마에 주름살이 쪼글쪼글해. 문삼석시인님은 주름살이 쪼글쪼글한것이 같은것을 보아내시고 원숭이의 시적짝을 할아버지를 찾은거지 뭐야. 어때, 근사하니?   모양으로 짝을 찾는다? 전번에 말할 땐 좀 알빤하던게 인제 똑똑히 알려. 참 묘하구나! 세상 사물이 모양이 얼마나 많니? 생김새가 모두 다르거던. 우리들이 사는 집만 봐도 여러가지가 아니고 뭐야. 우리 친구들도 그렇지. 얼핏 보면 비슷한것 같지만 따지고보면 백이면 백이 다 다른거야. 같은 사물도 이렇게 다른데 다른 사물사이이야 더 이를데 있니? 그래 세상 사물의 모양이 각각이여서 세상이 아름다운거야. 모양이 다 같으면얼마나 따분하겠니.   시를 쓸 때 짝을 찾는것도 딱 같은것으로 찾으려하면 안돼. 모양이 비슷하면 되는거야. 그렇잖구. 어디에 백프로 같은게 있니? 아무데 다르나 조금씩 다르게 마련이지.   리건호시인님이 쓴 [봄]에서 제비를 [음표]라 한것도, 리국재시인님이 쓴 [여름산]을 과일이라 한것도, 문삼석시인님이 [이슬]을 눈이라 한것도 [원숭이]를 [할아버지]라한것도 모두 모양을 보고 짝을 찾은거야. 그러니까 널반대기에다 못을 딱 박아놓는것처럼 기억해.  알겠니?                                    15   여름이 오면 나무랑 풀이랑 무성하게 자라고 시내물도 강물도 모두 자라지 뭐야. 시골애들이 학교를 다닐 때 뚝뚝 뛰여넘던 개울물도 비가 자주 오는바람에 뛰여넘을수 없게 됐지 뭐야. 그래서 어느 마음이 고운 애가 신을 벗고 바지가랭이를 걷어올리고 개울물에뛰여들어 돌다리를 놓았지 뭐야. 그런 돌다리 몇 개를 보고 시를 쓴 시인이 있어. 함께볼가?    징검다리  리석장   개울물 오선지에 그려진  하나, 둘, 셋, 넷... 음표들   잠자리가 앉아서 무슨 음표일가 고개만 갸웃하다 그냥가고    앞산 소나무들이 들어보란 듯 몸까지 흔들며 솔솔솔   일곱 살 순이가 음표 하나씩 밟으며 도레미파... 팔짝팔짝 건너오며 도시라솔...   순이 친구 삽살이 따라부른다고  캉캉캉캉    얘, 동시란게 정말 재밋지. 읽으면 생각지도 못했던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나와. 1련부터 볼가.   개울물 오선지에 그려진  하나, 둘, 셋, 넷... 음표들       1련에서 리석장 시인님은 개울물에 놓여진 징검다리의 짝을 찾고 있지 뭐야. 개울물을 오선지라고 돌다리는 개울물에 그려진 음표라고 했지 뭐야. 비슷하재. 첫련에서징검다리를 음표라고 하면서 이제부터 음표를 표현한다는 것을 알려 준거야. 아래의 련들은 음표에 대한 부동한 사물들의 반응을 표현한거야. 처음에는 잠자리가 앉아서 무슨 음표인가 머리를 갸웃거리다가 숑 날아간 것을 쓰고 , 두 번째는 앞산소나무들이 제가 안다로 몸까지 흔들며 솔솔솔솔 한다고 썼지 뭐야. 기실 소나무도 잠자리처럼모르는거야. 시인이 바람이 불면 소나무가 흔들리는소리가  음표의 음 쏘처럼 소리난다고 생각되여 솔솔솔이라고  표현한거야. 세 번째는 순이가 징검다리를 팔짝팔짝 건너갔다 건너왔다 하는 것을 음표를 하나씩 밟으며 도레 미파 하고 시창을 부른다고 썼지 뭐야. 네 번째는 삽살이가 순이를 따라서 도레미 소리를 낸다는게 캉캉캉캉 짓는다고 그랬지 뭐야.     호호호...우습지. 실은 음표를 알이는 순이 밖에 없어.  음표는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치기 위하여 상징적으로 만들어 놓은거니까 . 그런데 시인은 소나무며 삽사리며가 아는 것처럼 의인화를 하는바람에 재밋게 됐지야. 잠자리는 소리를 못내니까 고개만 갸웃거렸다는거야.    리건호 시인님이 을 쓸 때 전기줄에 앉은 제비들을 라고 표현한적이 있잖니. 이번에는 리석장 시인님이 또 징검다리를 라고 표현했단다. 부동한  사물에서 똑같은 짝을 찾은게 아니고 뭐니. 이래도 되니? 되고말고. 두시인님이 찾은 짝은 같지만 표현하려는 사물이 다르거든. 또 표현하는 내용도 완전히 다르단 말이다. 그러니까 괜찮은거야. 만약 비슷한 사물이거나 비슷한 내용으로 쓰면 그건 문제야.그럴 땐 모방성이  있는거야. 시내물이 꼬불꾸불 흘러가니까 장난꾸러기라고 하고 오솔길이 꼬불꼬불 산으로 넘어가니까 장난꾸러기라고 하는 것 같은 것은   삼가하는것이좋아. 제일 좋기는 아무도 써먹지 않은 것으로 짝을 찾는거야. 그래야  최고 좋은거야.                  16     여름에는 모든 것이 푸르다. 산도 푸르고 들도 푸르고 하늘도 푸르고  해도 푸르고달도 푸르다. 물도 푸르고 지어는 바위도 푸르다. 그래서 여름은 푸르른 계절인거야. 푸르른 계절을 노래한 시가 있어. 김종영 시인님이 쓰신 시야. 내가 한번 읽을게 들어봐   여름의 문을 열고 푸른 나라를 걸어간다   초록빛 바다가 우쭐대며 가슴에 들어서 출렁이고 어깨동무 푸른 산이 정답게 가슴에 앉아 날개친다.   길을 가도 푸른 눈 책을 봐도 푸른 마음 꿈을 꿔도 푸른 생각   나는 이 여름 사람들속을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빛 심는 푸른 나라 푸른 새 되련다.      어때? 특색이 있지. 그래 여름의 모든 것을 푸르게 표현한 것이 특색이야. 시는그래 보이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 쓰는 것이 아니야. 생활에서 자기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새롭게 표현하는거야. 표현한다는게 어떤거지. 자기가 본것이나 느낀것을 그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그런 본것이나 느낀 것을 표현할수  있는 새로운 사물이나 사건이나 사실을 찾아서 쓴다는거야. 잘 알아 못듣겠다고. 제일 간단하게 말하면 짝을 찾아서 쓴다는거야. 그럼 그렇다고 할거지 왜 다람쥐 채바퀴돌 듯 뱅뱅 도니? 그건왜 자꾸만 짝을 찾아야 하는가 하는 도리를 강조하여 은이 배기에 하자는거야.    여름의 문을 열고  푸른 나라 걸어간다      첫련이야. 김종영 시인님은 처음부터 푸른 여름을 새롭게 표현하고 있지 뭐야. 이니 니 뭐니 하고 있잖아. 어디에 여름이란게 문이 있고 나라라는게 있니. 여름의 문을 열고는 여름이 왔다는 뜻이고 푸른 나라를 걸어간다는건 여름철이 온통푸르다는걸 표현한거야 . 이 첫련은 시의 기승전결의 기에 속하는것이고 시의 계기로서 시인이 여름의 푸르름을 노래한다는 표징이지 뭐야.   초록빛 바다가 우쭐대며 가슴에 들어서 출렁이고 어깨동무 푸른산이 정답게 가슴에 앉아 날개친다       이 두 번째 련은 여름날의 움직임을 표현한거야. 두가지를 틀어쥐였는데 한가지는 벌이고 한가지는 산이야. 벌은 초록빛 바다 산은 어깨동무로. 벌은 바다니까 출렁거릴건 사실인데 가슴에 들어와 출렁거린다고 했지 뭐야. 산을 어깨동무라 한 것은 의인화한 것이야. 산이 가슴에 와 날개친다는 것은 또 다른 맛이야. 산이라는건 봉우리가 제일높은것이고 봉우리밖의 줄기는 봉우리보다 낮게 멀리로 뻗어나간것인데 어찌보면 새가날개를 퍼덕인다고 할수도 있는거야. 가슴에 들어와 바다가 출렁이고 가슴에 앉아 산이날개친다는 것은 산이나 들과 가까이 노는 우리들 마음의 표현, 넓은 흉금의 표현인거야.   이 동시에서 2련은 승이고 3련은 전이고 4련은 결이야. 전에서 이라고 전개시키지 않고  등 언어와 길, 책, 꿈을 련계시킨 것은 여름의 푸르름을 우리와 더 가깝게 하고친절하게 하기위한 표현이야. 이런 표현을 함으로써 여름이 어린이들의 것이라는 것을알려주려는거야.   4연은 결이니까 종결이지. 사람들에게 푸른 노래 푸른 빛을 심어주는 푸른 새가 되어 날아다니겠다고 했지 뭐야. 왜 새가 되겠다고 했을가 ? 왜 심어준다고 했을가 ? 절로생각해봐.            17   이런 시가 있어. 리동식 시인님이 쓰신  동시야. 제목은 야.   내가에 갔었다 바람 따라 물길따라    동동 개나리꽃 하나 떠내려간다 외나무다리밑으로   하얀 나비가 떠가는 꽃위에 사쁜 앉았다   개나린 개나린 노란 배가 되었다 나비는 나비는 노란 손님되였다   물길따라 떠간다 멀리 멀리 떠간다      얘, 이 시의 특점이 뭐야? 두가지가 있다. 한가지는 시제목이 짝을 찾은거야.  하고. 개나리 짝을 노란 배라고 설정했어. 그러니까 제목부터 의문을주거던. 왜 개나리를 노란 배라고 했을가 하는 의문을 말이다. 그래서 인차 독자를 흡인하고 있어. 한번 읽어보면 답은 풀리는거야. 으응, 노란 개나리가 다리밑으로 떠내려가니까 개나리를 노란 배라 하였구나. 노란 나비는 노란 개나리가 떠내려가는데 앉았으니까 노란 손님으로 되었구나. 물이 개나리꽃을 싣고 멀리 멀리 가니까 로 결말을 지었구나. 이러한 시의 내용은 인제 한두번만 읽어봐도 알수있는거죠? 그렇죠.     이 동시에서 배울점은 짝을 찾는것보다 다른 것이 있어. 한가지는 짝을 찾을 때자연물의  짝을 인위적인 사물에서 찾는거야. 인위적인 사물이란 사람이 만든 것을 말하는거야. 개나리는 자연물이고 배는 사람이 만든 것을 말이다. 그러니 자연물의 짝을인위적인  사물에서 찾은 것이 아니고 뭐야. 이렇게 짝을 찾으면 찾은 짝이 우리와 가까이 있는사물이여서 더 친절해 보이고 사랑스러워 보이재.    두 번째로 배워야 하는 것은 이 시의 치명적인 결함이야. 결함에서 무엇을 배우느냐고? 시를 잘 쓰려면 남의 쓴 시의 우점도 알아야 하거니와 그 시의 단점도 알아야 해.우점은 따라 배워 자기가 시를 쓸 때 발양하고 단점은 시를 쓸 때 그런걸 범하지 않는거울로 삼는거야. 시는 기승전결이 우에서 있다고 말했는데 이건 옛날 리론 같지만 매우중요하단 말이다. 개나리 노란 배는 기에 문제가 있어.  이것이 시의 1,2연인데 문제가있어. 시란 가장 간결한 언어로 표현하는거야. 언제 느렁뱅이처럼 천천히 할사이가 없어. 이 시를 쓰려는 것은 노란 개나리가 노란 배로 되고 노란 나비가 노란 손님이 되어노란 배에 노란 손님이 앉아간다는 것을 쓰는거란 말이다. 그런데 시인은 화자가 어떻게강가로 갔는가하는 따위는 알릴것도 없는 것을 알리고 있다는거야. 표현하려는 대상이개나리와 나비인데 한 개련이나 할당해서 쓸데 없는 미사려구를 쓰고있단 말이다. 만약내가에 간 것을 꼭 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제2련의 의 앞에 를넣어서 하면 그만이지 뭐야. 이쯤만 하여도 큰 허물이 없이 시가 간결해지였다고 말할수 있겠진만 더 엄격하게 따지면 이것도 안되는거야. 필요없어. 1연의 언어는 한마디도 필요 없다는거야. 1련을 통채로 뽑아던져도 시적표현에는 안무런 손상이없지 뭐야. 2연부터 시작해 써도 이 시에서 표현하려는 시적대상이 나왔단 말이다. 2연의 내용이면 시적계기나 기승전결에서의 기가 충분하단 말이야. 그런데 1연을 해서 뭘하겠니. 뱀을 기다랗게 그려놓고 뱀한테 발을 그려넣는거나 마찬가지야.                                      18     여름산에 가면 청포도가 두룽기두룽기 달려있지 뭐야. 콩알같은 포도알들이 오롱조롱 달려있는게 정말 희한하지 뭐야. 포도원에 가면 더 굉장하지. 열콩알같은 포도알들이가득 달린게 보기만 해도 입안에 시쿤물이 확 돌거든. 우리 주먹 두 개만한  포도송이들이 두룽기 두룽기 드리워서 구경거리가 대단하단 말이다. 포도알들은 날때부터 고로로한게 정말 귀엽기도 하지. 이런 청포도를 정형택 시인님이 시로 썼어. 한번 읽어보자.   청포도 정형택   꼬오옥  고만고만한  애들끼리   동글동글  모나지 않은  마음   쉬엄쉬엄 꿈을  키워갑니다.   도란도란  꿈이 같은 애들끼리   초롱초롱  파아란 눈망울로   주렁주렁  꿈 엮어 매답니다.     동시는 재미있어야 하는데 이 동시도 참 고소한거야.   꼬오옥 고만곤만한 애들끼리      요게 첫련이야. 이란 자를 느려서 쓴거야. 크기가 비슷한 포도알들이 포도송이에 빽빽하게 달려있으니까 서로서로 끌어안고 있는 것 같다고  하여 꼬오옥 고만곤만한 애들이라고 묘사한거야.  작은 포도알들이니까 아이들이라고 의인화한거아니겠니! 아이들이라건 포도알의 짝이야. 시는 짝을 찾은 다음 원래의 사물과 관계있는사물들을 합리하게 결합시켜 표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단 말이야. 원 사물을 쓰는 것같지만 짝을 쓰고 짝을 쓰는 것 같지만 원 사물을 떠나지 않게 말이야. 정형택 시인님은바로 이런 방법으로 시를 전개하고 있지 뭐야.   동글동글  모나지 않는 마음     이게 2련인데 동글동글은 두가지 의미가 있어. 한가지는 포도알이 동글동글 하다는의미이고 다른 한가지는 애들이 마음이 모나지 않은 동그란 마음이라는거야. 왜 모가 나지 않는 동그란 마음이랬을가? 애들의 마음은 순하고 깨끗하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기때문이야. 모가 나면 어떻겠니? 마주 치면 아프지. 애들이 마음은 동그래서 마주쳐도 아프지 않거던. 그래서 싸우다가도 다시 돌아서면 희희 웃지 . 언제 다퉜거나싶게  싸웠나싶게 금방 서로 마음이 통하는거야.   3,4련은 서로 련계된단다.   쉬엄쉬엄 꿈을 키워갑니다   도란도란  꿈이 같은 애들끼리      포도들도 천천히 크고  애들도 천천히 크니까  했지 뭐야. 그들은서로 자기의 꿈이야기를 속삭이며 쉬엄쉬엄  자라는거야. 꿈이란게 뭐냐고? 포도들은커서 달콤하게 익을 궁리를 하고 아이들은 자라서 쓸모있는 사람이 되는거지. 청포도나애들이나 다 창창한 앞날이 있는거야. 그게 바로 꿈인거야.   5,6련도 한가지 내용이니까 함께 보는 것이 옳아.   초롱초롱  파아란 눈망울로   주렁주런  꿈 엮어 매답니다      초롱초롱은 포도알을 가리키기도 하고 애들의 눈을 가리키기도 해. 포도도 동그랗고 애들의 눈도 동그랗단 말이다. 이라고 한건 포도알의 색깔도 나타내지만희망찬 애들의 눈에 대한 표현이기고 한거야.   주렁주렁  꿈을 엮어 매답니다      마지막 련인데 참 잘 표현했어. 얼핏 보기에는 주렁주렁 달린 포도송이를 말한 것같지만 실제상에서 는 애들을 표현한거야. 애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며 자기 절로 자각적으로 자기의 리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 아니겠니! 어디서 그런 의미가 나타나느냐고? 에서야. 자각을 고려하지 않았다면 로 표현하였을 거야.                                    19                                   백두산 폭포를 본 기억이 나니? 얼마나 장쾌하고 어마어마한 폭포였니. 금벽과 옥벽사이로 하아얗게 부서지며 쏟아져 내리는 폭포. 하늘 땅을 울리는 장쾌한 폭포소리는 우리민족의 발걸음 소리같고, 하아얗게 일어나는 물안개는 우리 할머니들의 치마자락을 날리는 것 같단 말이다. 우리는 또 조물주의 재간도 보는거야. 어쩜 이런 폭포를 백두산에다만들어 놓아 수천수만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당기고 있는가. 폭포는 아무곳에 있으나 모두 자연의 경관을 이루기에  그곳은 자연적으로 유람지로 되는거야. 이런 폭포를 어린이들의 마음에 맞게 쓴 동시가 있어. 한번 읽어보자.   폭포 정춘자   떠밀지마! 겁먹은 소리로 애원을 해도   사정 없이 떠밀어대는 장난꾸러기들   으아아! 아이쿠!   엎어지고 자빠져도 아파할 사이 없이   산이 떠나갈듯한 웃음 하아얗게 부서지는 웃음      제목은 지만 지문에는 폭포라는 말이 한마디도 없고 폭포의 짝으로 내세운 애들이 어떻게 장난질을 하고 있는가를 표현하고 있을뿐이야. 이런 짝을 의인화수법으로 찾았다고 하는거야. 누구 말이지. 당연히 내 말이야. 의인화의 수법으로 짝을 찾을때, 동시의 경우에는 그 짝을 아이들로 설정하는 것이 좋아. 왜냐하면 동시의 대상이 아이들일뿐만 아니라 동시는 아리들의 심미세계를 그리기 때문이야. 어른들을 찾는 경우도있지만 일반적으로 아이들을 설정하는 경우가 많아.   구체적으로 시를 볼가.   떠밀지마  겁먹은 소리로 애원을 해도   사정 없이 떠밀어대는 장난꾸러기들       이것이 첫두련이다. 시인은 폭포를 쓰는 것이 아니라 장나꾸러기들의 떠밀내기를 쓰고있어. 밀지 말라는데 자꾸 밀어부치는거야. 남은 무섭다고 애원해도 상관 없어.마구잡이로 사정 없이 민다는거야.  장난이 심해도 한심하게 심한거야. 애들의 이 장난이 바로 뒤물결이 앞물결을 밀며 물이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직전의 폭포현상을 표현한거지 뭐야. 물은 낮은 곳으로 떨어지게 마련이야. 낭떠러지는 낮은 곳에 있단말이다. 떨어지기 싶어도 떨어지고 떨어지고 싶지 않아도 떨어진단 말이다.   으아아! 아이쿠!     이 3련의 표현이 얼마나 새치스럽니! 갑자기 놀라고 아파서 비명을 지르는 것 같지만 그속에는 기쁨이 넘친다는 것이 환히 보이지 않고 뭐야.   4,련이야말로 정채로운 표현이야.   엎어지고 자빠져도 아파할 사이도 없이      정말 그래 . 언제 떨어지며 아파할 사이가 있겠니! 뒤물결이 마구 앞물결을 밀며쏟아져 내리는데야. 정춘자시인님은 마지막련에다 이렇게 쓰고있어.   산이 떠나갈듯한 웃음 하아얗게 부서지는 웃음       이건 절창이야. 폭포의 소리에서 웃음을 찾은거야. 폭포를 웃는다고 표현하는것은 아무나 구사해낼수 있는 것이 아니야. 앞으로 기회가 있으면 자세하게 말하겠어.폭포가 어떻게 웃음으로 둔갑할수있는가는 잠시 비밀이야. 뭐 시뚝한다고. 아니야. 우선여기서는 시인의 기발한 상상을 보아내는 것이 중요해. 기발한 상상이란 아무도 보아내지 못한 것을 보아내고 아무도 들어보지 못한 것을 들어내는거야. 폭포를 쓴 시를 적잖게 보았는데 폭포를 웃는다고 한시는 이번이 처음이지 뭐야. 제일 처음 글에서 우리는시를 쓰려면 눈은 현미경이 되어야 하고 귀는 청진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했어. 그게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야.                                  20   야, 요기 재밋는 시가 또 있다. 무슨 시야. 해바라기야. 누가 썼니? 서효석 시인님이야.어떻게 썼나 보자.   해바라기     서효석   흙돌담위에  고개를 얹어놓고 빈 집을 지키는 해바라기   담 넘어로 얼굴 내민   빠알간 대추 누가 와서 따갈가봐 보살펴주고  추석 차례상에 올려질 홍시 행여나 떨어질라 쳐다봐 주고     하루종일 혼자서 살피느라고  눈알이 많아진 해바라기       어때 ? 특점이 있어. 사실 해바라기는 엄마랑 아빠랑 부탁을 받고 집을 지키고있는 아이로 되어있지만 서효석 시인님은 그렇다는 말씀은 한마디도 없단말이다. 이런뜻을 이미지로 밝히고 있는거야. 첫련에서부터 해바라기를 의인화시켜 놓아서 해바라기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친구로 되었지 뭐야. 나가 놀지도 못하고 대추랑 홍시랑 지키는외로운 아이가 되어 뜨락에 갇쳐있는 불상한 애가 되었단말이다.     1령에서 서효석  시인님은 해바라기가 어떤 해바라기인가를 밝히고 있는거야.    홁돌담위에  고개를 얹어놓고 빈집을 지키는 해바라기   해바라기는 절로 자라나는 해바라기인 것이 아니라 흙돌담위에   택을 고이고 빈 집을  지키고 있는거야. 집사람들은 모두  일하러가고 강아지도 없어. 닭들이 노는것도보이지 않는 빈집에서 해바라기만이 외롭게 서있는거야. 무엇 하느라고 혼자서 있을가?그건 2련에 해석 이 있어.   담 넘어로 얼굴 내민 빠알간 대추 누가 와서 따갈가봐 보살펴 주고   추석  차례상에 올려질 홍시 행여나 떨어질라 쳐다봐 주고   해해해...왜 웃니? 해바라기가 한다는 일이 우습지 뭐야. 담 넘어에 열려있는 대추를 누가 따가는가고 보초를 서고, 추석 차례상에 오를 익은 감이 떨어지는가를 쳐다본다재.웃을게 아니야. 서효석 시인님은 추석전야의 시골의 풍요롭고 아늑하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우리들의 눈앞에다 그려주고 있는거야. 그건 그래.   하루종일 혼자서 살피느라고  눈알이 많아진 해바라기      마지막 련이 정채롭단 말이다. 해바라긴 열심히 일하고 있는거야. 하루종일 혼자서 대추랑 감이랑 지키지 뭐야. 그러는 사이에 눈알이 많아졌다는거야. 얼마나 묘하니.눈알이 많아졌다는건 해바라기가 다 여물었다는 얘기야, 그런걸 눈알이 많아졌다고 했어. 꼭 여문 해바라기알을 알마다 집을 지키느라고 부릅뜬 눈이라고 한건 기막힌 절창인거야. 어찌 열심히 대추랑 감이랑 지켰으면 숱한 눈알이 생기였겠니.    동시를 배우면서 한가지 알아둘것이 있어. 시인은 자기의 의도를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의 이미지속에다 용해시켜 넣어야 한다는거야. 아까도 말했지만 이 시는 추석전의  시골마을의 평화롭고 아늑한 풍경을 쓴것이지만 그렇다는 말은 한마디도없는거야. 재간 없는 시인이라면 꼭 아름다운 시골이니 시골은 포근하다느니 하고 개념적인 말을 써넣었을 거야. 동시라는건 자기가 쓰려는 시적대상을 잘 그려놓으면 되는거지 의도적인 언어가 끼여들면 안 되는거야. 우리의 동시들은 개념을 끼워넣는 일이 너무많단 말이야. 우리의 동시가 한국의 동시보다 재미 없는건 바로 이때문이기도 해. 우리의 동시는 애들이 시를 보고 저절로 무엇을 느끼게 하고 게발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시인자신이 나서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하면서 어떤 의도를 내리멕이려 하는거야.선전을 하고 교육을 하고. 참 싱거운거지.   한국명동시 감상 시리즈 4
53    하이퍼시에 대한 탐색 ㅡ 최룡관 (시인, 평론가) 댓글:  조회:3969  추천:0  2015-02-04
       최룡관 - 중국작가협회 회원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저서 :시집 연변인민출판사    한국미래문화사 출판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북경 민족출판사   흑룡강 조선민족출판사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리천록공저)연변인민출판사  (종합시집)한국정보출판   한국정보출판   한국미래문화사   네권[제1권 시집. 제2권 시론평론. 제3권 아동문학. 제4권 에세이, 기행등]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하이퍼시(다선시)에 대한 탐색                                                     최룡관 들어가는 말 필자의 저서 [이미지시창작론]에는 이런 말이 기록되여 있다. [시적상관물을 설정하는 방법은 이외에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으리라고 생각이 든다. 필자는 이 일곱가지 방법을 치중하여 설명하였을 뿐이다. 이 일곱가지 방법은 어떤 근거를 잡으면서 한 방법이다. 그러나 시적상관물을 설정하는데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하는것들이 있다. 이미지란 현실을 초월하여 쓰는것이 중점의 하나인데 무슨 근거가 필요한가? 이 말은 맞는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시적상관물을 설정하는것은 지적인 지위를 삭감해버리는것으로서 우리들이 연구할과제라고 생각된다. 당대 영미 초현실주의자들이 이에 속한다고 생각 된다. 그들은 환상적이고 몽상적인 이미지를 제작해내고 파편문체를 많이 쓰는데 필자는 그런 이미지에 대한연구가 너무 천박하여 여기에서 피력하지 못하고 과제로 남기면서 독자들에게 량해를 구하는 바이다.] [이미지시창작론]을 쓰기 시작해부터10년이 지난후인 2007 년에 필자가 한 말이다. 그로부터 어느덧 또 여러해가 지난 2013년이 돌아왔다. 오늘은 2013년 2월 20. 오늘부터 [독자들에게 량해를 구하던것을] 나름대로 풀어보려고 펜을 들었다. 그답을 한국의 하이퍼시클럽시인들과 그들의 시에 대한 글에서 찾게 되였고 그 원천적인 근거를 조지P 란도의 [하이퍼텍스트]에서 찾아볼것 같다. 2011년에 한국의 김규화와 심상운이 편찬출간한 시집 [하이퍼시]시집과 심상운시론 및 문덕수의 많은 시론들이 해답을 주었다고 생각되여 나는컴퓨터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게 되였다. 그 고리는 다선 한국의 하이퍼시클럽에는 얼마나 많은 시인들이 있는지는 알수 없지만 그들이 [하이퍼시] 시집을 묶어낸데는 20명시인들의 얼굴이 보인다. 그들로는 강영은, 고종목, 김규화, 김금아, 김기덕, 김영찬, 김은자, 박이정, 손해일, 송시월, 신규호, 신진, 심상운, 안광태, 위상진, 이선, 이솔, 정연덕, 조명제, 최진영이다. 한국에 시인이 만명이라고 하는데 이20명시인들은 사막속에 있는 한알의 모래알에 불과할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혁신은 언제나 다수가 하는 일이 아니다. 언제나 한줌도 안되는 혁신자, 개혁자들이 먼저 시작을 하게되는것이다. 지금 연변도 그렇다. 다선시를 하는 시인들이 열명정도이다. 비례를 따지면 한국보다 많지만 한국보다 우리가 더 어려운것이다. 한국은 그래도 시문학이란 잡지를 거점으로 하지만 우리는 이런 시잡지가 없는 연고로 다선시를 연구하고 창작하는 시인들이 독안에 갇겨있다고 할수 있겠다. 갇겨있고싶어서가 아니라 여러가지 문화여건이 따라가지못하고있다. 다선시의 개념을 어떻게 인식할것인가? 다선시라는 언어는 우리로 말하면 너무 생소하다고 할수 있겠다. 하지만 확실히 다선시가 존재하였으며 존재하고 있다. 다선시라는 말은최근에 한국의 시인이며 리론가인 심상운이 내놓은것으로 알고 있다. 다선시는 지금 여러가지 명제로 해석되고 있는 같다. 하이퍼시라고도 하고 디지털시라고도 한다. 다선이란 쉬운 말로 하면 선이 여러개란 말이 되겠다. 한수의 시에서 한가지 이미지를 둘러싸고 쓰는 재래종의 시인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여러가지로 나타난다는 말이 되겠다. 필자가 알건대는 다선시를 제일 왕성하게 쓴 시인은 프랑스의 S.J 페르스인것 같다. 물론 보들레르나. 랭보나 몰리에르나 발레리나 엘리아르와 같은 시인들한테서 다선적인 시들이 나왔지만 다선으로 시를 쓰고 시집을 내고 노벨문학상을 받은 시인은 생종.페르스가(1960년노벨문학상) 아닌가 싶다. 독일 류학을 하고 외교관 시험에 합격되여 북경, 조선, 외몽골 등 나라에서 사업한적이 있는 외교관 생종페르스는 전문적으로 다선시를창작한것 같다. (필자가 보기에는) 독일의 후고. 프리드리히 말씀을 들어보면 오늘의 다선시를 당년의 파편문체시로 해석되는 같다. 필자는 다선시=파편문체시라고 생각한다. 2011년 수웨덴의 시인 토마스 트란스 트뢰메르 시인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는데 그의 시도 파편문체로 된 다선시였다. 그러고 보니 21세기 시의 시대는 다선시 시대가 도래한것이 아닐가 하고 필자는 생각해본다. 먼저 생종. 페르스의 시 [비]의 전문을 보기로 하자. 비 생종페르스 비의 용수(榕树)는 거리에 뿌리 내리고 때이른 호수가의 탁한 물속의 벌레들, 산호의 혼인을 향해 솟아오르고 그물로 싸우는 투우사와 같이 벌거벗은 ‘사고’ 공중의 뜰에서 헝클어진 녀인의 머리카락을 빗긴다. 파도의 웨침에 주제의 절박함을 노래하라 시여, 파도의 출렁거림에 도망하는 주제를 노래하라 시여 예언하는 처녀들의 허리에 지나친 애욕 밤에 황갈색의 늪에서 부화하는 금빛의 알 오 기만이여! 이같은 꿈의 기슭에도 나의 정돈된 잠자리 그곳에서 음란한 장미는 시로 선명히 자라 바퀴되여 돌기 시작한다. 나의 비웃음인 무서운 주여, 여기에 있는것은 짐승의 고기맛에 김 뿜는 땅과 처녀수밑의 과부의 점토, 잠 못 이룬 내 사내의 발에 다져진 땅이니 포도주처럼 가까이 가 냄새를 맡을 때 그 땅은 진정 기억의 상실을 시인할것인가? 주여, 내 비웃음의 무서운 주여! 여기에 있는것은 층을 이룬 바다의 겹쳐진 부분의 높은 모래언덕의 응답과 같은, 지상에서 표현되는 꿈, 여기 이곳에 있는 땅은 모두 씁쓸한 땅 새로 태여남의 시간, 그리고 알수 없는 모음의 방문을 받는 나의 령혼. 생종페르스의 [비]를 읽노라면 무엇이 무엇인지 알수 없다. 시행마다 거이 모두가 이질적인 이미지로 라렬되였다고 할수 있겠다.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는 련계되는것이 아니라 서로 단절되여 있고, 그런 단절들이 모여서 한수의 시를 구성하고 있는것이다. 시인은 독자에게 어떠한 통일적인 해석을 요구하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식의 흐름을 그림으로 그려놓고 있는것이다. 프랑스의 외교관이였지만 시에서 그가 추구한것은 어떤 윤리도, 사상도, 철학도 아니다. 그저 그의 령혼에 떠오른 이미지들을 집합하여 한수의 시로 만들었을뿐이다. 한국 태학당에서 출판한 생종페르스의 시집은 [이국의 녀인에게 바치는 시]라는 제목으로 되였는데 모든 시가 다 이런 파편문체의 시 즉 다선시다. [감각적 비 실재성이란말은 생종페르스 시에도 유용한 말이다. 그의 시를 내용상으로 리해하기란 거이 불가능하다] 하고 독일의 석학 후고 프리드리히는 론하고 있다. 주문처럼 흘러나오는 생소한 이미지들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진다. 반짝이는 이미지들이 장엄한 소리를 내면서 독자를 아연해지게 한다. 그것은 상상력에 대한 자극이다. 이미지들은 조밀하게 배렬되여 어느 한 이미지도 부정할수도 없다. 령혼속에서 끓고 있는 이미지들은 낯설고도 환각 적이여서 이방의 나라에서 온 사물들의 움직임이라고 밖에 할수 없다. 아래에 2011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토마스 트란스 트뢰메르 시를 한수 보기로 하자 기상도 토마스 트란스 트뢰메르 시월 바다가 신기루등지느러미를 달고 차갑게 반짝인다. 아무것도 요트경기의 백색 현기증을 기억하지 않는다 어슴프레한 호박빛이 마을위를 비추고 온갖 음향들이 천천히 날아다닌다 개가 짖는 소리는 정원위의 대기중에 그려진 상형문자다 정원에는 노란 과일이 나무를 바보 만들며 제 멋대로 떨어진다. [기상도] 전문이다. 기상도란 날씨를 알려주는 도해라고 해석할수 있다. 그런데 날씨를 알려준다는것이 오늘은 몇도며 바람이 몇급이며 구름이 어쩌며 하는 말은 한마디도 없다.비가 오는가 눈이 오는가 하는 말따위도 물론 없다. 기상도를 보면서 10월의 바다, 요트경기, 호박빛, 개짓는 소리, 정원의 과일나무들을 쓰고 있다. 사실 이러한 사실들은 또 너무 낯선 사물들로 변형되고 있다겠다. 10월의 바다는 신기루등지느러미로, 요트경기는 백색현기증으로, 호박빛은 음향으로 , 개짓는 소리는 상형문자로, 과일은 나무를 바보로 만드는것으로 변형되고 있다. 각련들은 하나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는데 이미지들마다 어떤 련계성도 보이지 않는다. 각자는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런 각자의 독존이 집합되여 한수의 시를 구성하고 있는것이다. 한국의 조향의 시 [바다의 층계]도 이러하다. 바다의 층계 조향 낡은 아코오뎡은 대화를 관뒀습니다 --여보세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手话机 녀인의 허벅지 낚지 까만 눈동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랑데부우 그웅에 손을 흔드는 하얀 기폭들 나비는 기중기의 허리끝에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조향의 의 전문이다.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는 단절되여 있고 아무련 련계성도 없다.. 우리는 아주 괴상하고 기이한 그림앞에 서있게 된다. 여러가지 기이하고 괴상한 사물들이 모여 한수의 시를 구성하고 있다겠다. 여기서 그 어떤 사상을 추구한다는것은 거이 불가능하다. 시인의 의식의 뛰여다니고 있다는것을 알수 있을뿐이라겠다. 의식은 그 어떤 장애도 받지 않고 한순간에 자유자재로 번개처럼 하늘을 가를수도 있고 산처럼 솟을수도 있고 물처럼 흐를수도 있고 천년만년을 거스를수도 있고 고금중외를 빛의 속도보다도 더 멀리 날아다닐수도 있는것이다. 조향의 가 바로 이런한 시라고 볼수 있을것 같다. 그래서 프랑스의 생종페르스의 나, 토마스 트란스 트뢰메르의  와 맥을 같이 하고 있는 시라고 볼수 있겠다. 이러한 시를 필자는 후고프리드리히 말로 하면 파편문체시라고 할수 있고 심상운의 말대로 하면 다선시라고 할수 있겠다. 모두어 말하면 시에 등장하는 사물이 하나인것이 아니라여러가지이다. 이 여러 가지 사물들은 다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으며 이미지들은 각각 홀로걷기를 한다고 하겠다. 다시 말하면 한수의 시에 하나의 주제가 있는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주제가 동시에 병존하고, 여러가지 주요 인물(혹은 사물)들이 활동한다고 하겠다. 뒤의 이미지는 앞의 이미지와 아무런 련계성도 없이 자신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미지들은 물결이 흘러가는것처럼 흘러간다고 하겠다. 료리로 말한다면 순수한 닭고기로만 된 료리인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고기와 여러가지 채소로 된 잡탕료리라 하겠다. 과거에 우리는 이러한것을 구성이 흩어졌소 째이지 못했소 이런 시가 어떻게 시로 되오 하면서 나무리였다. 그런데 그런 비난을 받아야 할 시가 오늘은 탐구되고 있다. 이러한 시를 심상운 시인과 김규화시인은 [하이퍼시발간사]에서 이렇게 긍정하고 있다. [한국현대시를 오래동안 지배해온 단선구조의 틀을 벗어나 다선구조의 틀로, 시인의 독백적서술을 객관적이미지로, 정적이미지를 동적이미지로, 시인을 시의 주체에서 이미지의편집자로, 고정된 관념에서 다양하게 확산되는 상상으로, 읽고 생각하는 시에서 보고 감각하고 사유하는 시로 바꾸어보려는 개혁성(改革性)이 들어있다.] 두 시인은 재래의 현대시와 하이퍼시(다선시)와의 다른점 6가지를 론하였는데 우리가 심사숙고할만한 문제를 제기하였다고 할수 있다. 이 여섯가지 구별을 잘 인식하고 리해하는것은 하이퍼시에 대한 리해에 도움이 될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것은 오늘의 시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되는가를 가리켜준다고 생각된다. 다선구조시를 일종 하이퍼시라고도 하는데 하이퍼시란 어떤것인가? 이에 대한 문덕수의 해석에 귀를 기울이면 꽤도가 올것같다. 문덕수는 [하이퍼(hyper)란 말은 ‘과도(过渡)한’, ‘과다(过多)한’, ‘초월하여’, ‘넘어서’, ‘초(超)…’, ‘3차원보다 높은’ 등의 의미로서 본래 그리스어에서의일종의 련결어]라고 밝히면서 이렇게 해석하고있다. [하이퍼는 본의의 세계에서 유의의 세계로 뛰여넘는(초월해서), 현실세계의 상식을 초과할 때 일컫는 일종의 하이퍼적특징입니다. 이 사실을 부정 하는것은 시의 본질적구조자체를 부정하는것과 같습니다… 하이퍼시는 ‘’현실세계’’의 경계를 넘어서 불연속성적 균열을 초월하여 ‘’상상세계’’와 연결하는 작시에서 얻어진것입니다… 하이퍼시는 초월세계와 연속하려고 하는 정신적, 언어적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이퍼시 209쪽) 문덕수는 하이퍼시에서의 현실과 초월의 관계를 극명하게 밝히면서 하이 퍼시에 대한 사유방식은 시의 본질적구조에서 나온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 특성은 현실세계의 경계를 넘어서 불연속성격 균열을 초월하는것이며 현실과 초월세계를 연속하는것이라고 하였다. 재래의 현대시는 이렇지 못하였다. 유추되는 사물이 꼭 어떤 련계성이 있어야 하고 한수의 시는 하나의 단선구조로 되여야 하였다. 시력사를 보면 우리 시가 백여년을 (아니 수백년동안이래도 과언이 아닐것임) 단선구조를 추구하여 왔다고 할수 있다. 오늘 21세기 디지털시대를 맞으면서 우리 시에도 그것을 타파하라는 나팔소리가 울리였다. 나팔소리는 그렇듯 우렁차다. 이는 시에서의 신생사물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신생사물은 력사의 근본 흐름을 대표하는것으로서 낡은것은 그앞에서 점차 자리를 내주고 사라지게 될것이다. 심상운 시인은 [하이퍼시]에서 조향의 [바다의 층계]와 문덕수의 [마릴린 몬로] 등 시를 례로 해석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집합된 이미지들은 서로 론리적맥락이나 인과를 맺지않는 당돌한 결합이라는 점에서 독립성을 가진다… 공간이동은 그들의 시를 의식의 세게에서 무의식의 세계로, 형이하의 세게에서 형의상의 세계로, 의미의 세계에서 영상(이미지)의 세게로 전환시키는 작용을 한다. 따라서 그들의 이미지결합방식은 김춘수의 ‘무의미시의 기법’과는 다른 ‘시의 무의미화 기법’이라고도 할수있다](하이퍼시224-225쪽)심상운은 하이퍼시를 아주 쉽게 [의식의 건너뛰기, 초월]이라고 명명하고있다. 초월성과 의식의 건너뛰기가 하이퍼시의 핵심이라고 해도 무방할것이다. 현대시와 다선시는 어떤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는가를 살펴보는것은 다선시를 리해하는데 큰 도움으로 될것이다. 문둥이 서정주 해와 하늘 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서정주시 [문둥이]에서는 전반시에 하나의 사물의 이미지에 대한 서술만 있는것이 특징적이라고 하겠다. 시는 문둥이가 어쩌는가만 쓰고있는것이다 아마 서정주시의 다른 시들도 이렇게 한가지 사물을 둘러싸고 씌여져있는 같다. 하지만 오늘의 하이퍼시를 쓰는 시인들의 시는 이와 구성이 완전히 다르다. 문둥이가 아주 짧은시니까 [하이퍼시]시집에서 짧은 시 한수를 보자 북소리 김은자 Scene# 8 고무줄놀이를 한다 엄마는 장사 나가고 저녁이 줄을 뛰여넘는다 나는 엄마를 기다린다 지구를 한바퀴쯤 돌면 아빠가 나올가 이 시는 [문둥이]보다 한줄이 더 많다. 하지만 시에 등장하는 이미지는 단선이 아니라 다선이다. 소제목부터 야릇하다. 영어에다 우물정자같은 글이 아닌 부호에다 아라비아수자8을 조합하여 쓴것이 이색적이 아니라 할수 없다. 시가 시작되자 북소리가 고무줄놀이를 한다는 변형부터 창의적이다. 청각을 시각화한 공감각의 응용이 이채롭다. 그아래에 엄마가 나오고 저녁이 나오고 지구가 나오고 아빠가 나온다. 시의 행마다 성질이 다른 사물들이 나타난다. 이 성질이 다른 사물들 자체가 련계성보다도 분리성이 강하다. 시에서 이런이미지들의 횡적배렬을 파편문체라고 할것이며 다선시라고 하지 않을가 생각된다. 이질적인 사물들의 이미지라렬이 시를 구성하고 있는것이다. 이미지와 이미지사이에는 일상적인사유로는 넘지 못할 벽이 장용하고 있다겠다. 북소리가 줄뛰기를 한다는것은 청각적이미지를 시각적이미지로의 전환이 이색적 이다. 그다음은 엄마는 장사 나가고 했으니 뒤에 엄마에 대한 해설이 있으려니 했는데 저녁이 줄뛰기를 한다고 한다. 엉뚱하다. 그담 엄마를 기다린다고 하는데 다음에 나오는것은 지구를 한바퀴도는 일이나오고 기다 리는 엄마대신 또 아빠가 나온다. 시를 통하여 어느 하나도 [나]라는 사람의 소원대로 이루어지는것이 없다. 좌절에 좌절을 거듭하다 생을 마감하게 되는 인간의 본질을 표현하는시라고 할가. 시의 구성이 여러가지 색갈의 쪽을 묶어서 하나의 담요를 만든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쪽들의 색갈이 다를 뿐만 아니라 성질이 다른 사물들의 현현이라는것이다. 다선시의 합리성 다선시가 왜 오늘에 우리의 훈민정흠시단에 나타나게 되는가를 필자는 생각해 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아마 아래와 같은 원인이 아닐가 생각한다 다선시는 오늘의 시대에 부응하는 시적구조가 아닐가 하는 생각을 해본 다. 지금은 생산이 다국적인것이 많다. 자동차공장하면 여러나라에서 부속을 끌여들여 하나의 차를 만드는가 하면 한나라에서 생산하는것도 여러지구에서 부속품들을 모아서 조립하는 경우가 있는같다. 유리는 어디서 생산하고 바퀴는 어디서 생산하고 엔징은 어디서 생산하고 모형은 어디서 생산하고 등등. 아마 어느 자동차공장이 한공장에서 모든 부품을 생산하여 차를 만드는 공장은 아마 없을것이다. 어느 한 나라에 어떤 큰 일이 벌어져도 영향이 그 나라에만 미치는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반응을 일으키거나 세계적인 참여를 초래하게 되는경우가 많다. 이런 이미에서 한시인이 시를 쓰자면 여러가지 인소들이 작동 하게 되는것이고 여러가지 사물과 사건들이 현실을 초월하여 상상도 되고 환상도 되는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사고의 바탕이 되여서 그런 같다. 인간의 사유는 언제나 다선적이다. 한사람이 동시에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는것이다. 누구와 대화하면서 그가 아닌 어떤 사람의 어떤 모습이나 일을 생각할수도 있고, 미국의 뉴욕이나 오스트라리아의 사자, 중국의 고궁…. 이러한것들을 거이 동시에 생각할수도 있고 련속적으로 생각할수도 있다. 이런 생각에 떠오른 사물들은 실제상 아무런 련계도 없고 성질이 완전히 이질적인것들이라고 아니할수 없다. 인간의 사유는 언제나 다각적이고 다시점이라고 할수 있다. 그것이 오늘의 다선시에 사유의 기교를 주지 않을가고 생각된다. 자연도 다종적으로 구성되였다고 할수 있다. 한마을이 있다고 하자. 거기에 사람이 있고 물이 있고 나무가 있고 흙이나 돌이 있고 또 도야지가 있고 닭이 있고 개가 있고 소가 있고,,,,,, 여러가지가 있다. 그것들을 종합하여 버들골이요 남평이요 도문이요 하고 말하게 된다. 손바닥만큼 자그마한 땅의 구조도 그렇게 된다. 거기엔 흙이 있고 풀이나 나무가 있고 또 귀뚜라미나 개미같은것, 지렁이, 혹시 토끼도 있게 마련이다. 이렇게 여러가지 사물을 통칭해서 어느한 자그마한 곳이 어떤 개념으로 존재하게 되는것이다. 다선시란 이런 자연의 특성과 무관한것이라고 말할수 없을것 이라고 생각할수 없게 된다. 인간의 문화는 또한 다층차적이다. 연길하면 고층건물이 즐비한 거리가 있고 거리에선 차들이 꼬리를 물고 다니고 여러가지 백화나 가계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게 된다. 백화에 들어가면 적어도 수천종에 달하는 여러가지 상품들이 있는데 이러한 상품들은 다 성질도 다르고 용처도 다르다는것은 자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진렬해 놓은 과자와 옷들, 전기제품들, 악세사리들, 시계들… 다 상품이라는 이름으로도는 통용으로 명명하겠지만 그 한종한종의 상품들의 용도와 성격들은 각각 다른것이라고 아니할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다선시는 현실문화에 부응하는것이라고 할수 있지 않을가 생각된다. 사람들의 얼굴마다에는 눈, 귀, 코, 입, 귀, 눈섭 등이 보인다. 이 눈귀코입눈섭은 다 성질이 다른 사물들의 모임이라고 할수 있으며 이것들이 모여 얼굴이라는 명명을 받게된다. 어느 한가지를 가지고는 얼굴이라는 이름을 받지 못할것이다. 한수의 시에도 눈이 있고 코가 있고 귀가 있고 입이 있고 눈섭이 있게 되는것이 오늘의 다선시라고 생각하게 되는것이 아닐가. 얼굴의 오관은 겉으로는 살에 의하여 련결되였고 안으로는 뼈에 의하여 련결되였다. 살에 의하여 련결되였다는것은 누구나 다 직감할수 있지만 뼈에 의하여 련결되였다는것은 조금은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보이는것과 보이지 않는것, 보아내는 사람과 보아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듯이 다선시의 이미지들이 어떤 련관성이있는가를 보아내는 사람과 보아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마 따로 있을것 같다. 실제는 이러한것을 따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의 사물은 모두 각자의 개성이 있지만 모두 이 세상에서 살아 간다는것만으로 벌써 련계되여 있는것이다. 더 나아가 말한다면 광활한 우주속에 있는것이며 한시인의 령혼속에서 산생되는 상상이나 환상일것이다. 사유하는 방법, 추구하는 예술기교가 다를뿐이라고 해야할것으로 알고있다. 오늘의 시대는 디지털시대라고 하는데 이 디지털시대는 컴의 시대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컴은 인간의 사유를 초월한 마술을 부리고있다하여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것이다. 쑤뾰로 툭 찍으면 술이 나오기도 하고 노루가 나오기도 하고 나비가 나오기도 하고 삼국연회소설이 나오기도 하고 북경이 나오기도 하고 미국이 나오기도 하고 단마르크가 나오기도 한다. 그외에도 현실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의 모든 상황이 그것도 미세한 상황까지 다 드러낸다. 이렇게 바뀌는 시간은 정말 눈깜박할사이이다. 툭찍으면 변하니까. 이러한 컴은 우리에게 다시각, 다시점 사유를 부여한다고 하겠다. 이것도 다선시의 한개 기초가 되지 않을가 나오는 말 21세기는 21세기의 문학이 있어야 하고 시가 있어야 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다선시가 21세기 시가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래에 조지P란도와 한국의 다선시주창자들의 어록이나 일부문장들을 중요한 참고서로 절록해 본다. 《하이퍼텍스트3.0>>의 말씀 조지p 란도 하이퍼텍스트와 문학리론에 관한 글을 쓴 [자크데리다. 롤랑 바르트, 데오도오 넬슨 안드리에스 반담을 가리킴.] 많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들 네명은 중심, 주변, 위계구조와 선형성에 대한 생각에 바탕을 둔 개념체계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다중선형성, 노드, 링크, 네트워크중의 하나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사고에혁명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이런 패러다임이다[2쪽] 바르트는 이렇게 주장한다. 이 리상적인 텍스트에서는 많은 네트워크가 상호작용 하며 그중 하나가 다른것보다 우위에 서지 못한다. 이 텍스트는 기의의 축조물이 아니라 기표의은하계이다. 이것은 시작이 없으며 되돌아갈수도 있다. 그리고 여러출입구를 통해 이 텍스트에 접근할수 있으며, 그 경로중 어떤것도 주된 출입구라고 강변할수 없다.[3쪽] 하이퍼텍스트[넬슨이 1960년도에 만들어낸 말]라고 할때 나는 비연속적인 쓰기를 의미한다. 즉 분기점이 있어서 독자가 선택할수 있도록 하며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하이퍼텍스트는 독자에게 다른 경로를 제공하는 링크들로 련결된 일군의 텍스트덩어리이다. [4쪽] 하이퍼텍스트는 비선형적, 아니 좀더 적절하게는, 다중선형적 혹은 다중순차적으로 경험되는 텍스트를 만들어내게 된다. [동상] 사람의 마음은 … 련상에 따라 움직인다. 한가지 생각을 부여잡게 되면 련상을 통해 제시되는 다음 생각을 바로 붙잡게 된다. 이때 뇌세포가 수행한 흔적들의 복잡한 거미줄구조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16쪽] 하이퍼텍스트는 현대문학과 기호학리론의 일부 주요 론점과 상당히 유사한 점을 갖고있다. 특히 탈중심성에 대한 데리다의 강조, 읽기텍스트와 쓰기텍스트라는 바르트의 개념이특히 그렇다. 실제로 하이퍼텍스트는 바르트와 데리다의 두 개념과 당혹스러울 정도로 유사한 문학적형상들을 창조해냈다. 그리곤 하이퍼텍스트가 만들어낸 문학적 형상물은 그개념들, 통찰과 력사적관련[혹은 새겨넣기]의 흥미로운 결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80쪽] 하이퍼텍스트에서 굉장히 중요한 인용과 분리가능성에 대한 암시는 데리다가 다음과 같이 추가할 때 잘 드러난다 “이렇게 해서 모든 주어진 문맥과의 관계를 끊을수 있으며, 전적으로 제한이 없는 방식으로 새로운 문맥을 무한대로 만들어낼수 있다[82쪽] 바흐친은 다의적문학에 대해 ”한가지 감각으로 구성한뒤 다른 감각을 객체로 끼워넣는 방식으로 구성된것이 아니라 여러감각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하나의 통일체를 구성한다 감각들중 어떤것들도 다른 감각의 객체가 되는 일은 없다.” [86쪽] 하이퍼텍스트는 무제한으로 재중심화할수 있는 시스템을 제공한다. 이 시스템에서 일시적인 초점을 어디에 맞추느냐는것은 독자에게 달려있다. 따라서 그들은 다른 의미에서 진정으로 능동적인 독자가 된다. 하이퍼텍스트의 기본적인 특징의 하나는 조직의 중심축이 따로 없이 링크로 련결된 텍스트 몸체들로 구성되여 있다는 점이다. [87쪽] 데리다는 “민족학은 탈중심이 생기는 순간에만 과학으로 탄생할수 있다” [89쪽] 표면적인 땅밑줄기를 통해 서로 련결접속되여 리좀을 형성하고, 확장해가는 모든 다양체를 우리는 고원이라고 부른다. [91쪽] 하이퍼텍스트의 읽기와 쓰기의 하나는 –인쇄본이 보관된 도서관을 탐구하는 것처럼- 아무곳에서나 시작해 서로 련결할수 있다는 점이다. 혹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주장처럼 “각고원은 어느 지점에서부터 읽어도 상관 없으며, 이들은 다른 고원들과 서로 련결되여 있다.” 이런 특징적인 조직 [혹은 그것의 결여]은 리좀이 기본적으로 위계질서와 반대되는 특징, 즉 들뢰즈와 가타르가 나무에서 발견했던 구조적형태로부터 유래된것이다. “나무나 나무뿌리와 달리 리좀은 자신의 어떤 지점에서든 다른 지점과 련계된다. 하지만 리좀의 특질 각각이 반드시 자신과 동일한 본성을 지닌 특질들과 련계되는것은 아니다. 리좀은 아주다른 기호체계들, 심지어는 비-기호상태를 작동시킨다.” [92쪽] 하이퍼텍스트는 위계보다는 무정부상태에 가까운 어떤것을 구현한다. 그리고 하이퍼텍스트는 가끔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정보를 결합하며, 또 가끔은 우리가 독립된 인쇄텍스트와 장르, 형태라고 리해하고 있는것을 위반하면서 “어떤 지점을 다른 지점과 련결한다” … 다의성은 리좀적이며, 그들이 무엇인지에 관해 수목적인 사이비다의성을 드러낸다. 객체에서 주측역활을 하거나 , 주체를 나눌수 있는 독립성은 없다”하는 들뢰즈, 가타리의론점에서 하이퍼텍스트와 유사한 점을 발견하게 될것이다. 따라서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고려되는 하이퍼텍스트와 마찬가지로 “리좀은 어떤 구조적 혹은 발생적모델에 순종적이지 않다. 계보학축이나 심층구조라는 생각에는 낯선 존재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설명하듯이 리좀은 “지도적이지 사본이 아니다” 【94쪽】 리좀을 담론의 한 모델로 묘사하면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의미작용이 없는 단절의 원리 즉 근본적으로 예측불가능하며 불련속적인 경향을 불러온다….들뢰즈와 가타리가 리좀은“시작과 끝이 없고 항상 중간뿐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성장하고 넘친다” [95-96쪽] 푸코는 사물의 질서에세 자신의 프로젝트는 동시대 사람들을 사로잡은 “찬양받을 론쟁”을 거절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동시적인 그리고 외견상으로 모순된 의견이 상호작용할수 있도록 하는 사고의 일반적인 시스템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논쟁이나 문제를 가능하게 만들고 , 지식의 력사성을 떠맡도록하는 조건을 규정하는것은 바로 이 시스템이다” [99쪽] 전자컴퓨팅, 특히 하이퍼텍스트와 과거 30,40년의 문학리론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힐리스 밀러는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그 관계는… 다중적이며, 비선형적, 비인과적,비 변증법적이고 몹시 과잉결정적이다. 그것은 관계를 결정하는 대부 분의 전통적인 패러다임에는 맞지 않는다”[101쪽] 하이퍼텍스트는 두가지 방식으로 텍스트를 조각내고 , 흩어놓고 원자화한다. 첫째, 인쇄물의 선형성을 제거함으로써 개별구절을 단일한 순서로 배치해야 한다는 원칙 -즉 련속성-에서 벗어날수 있도록 해준다. 그렇게 해서 텍스트를 혼란상태로 바꿔놓는것이다. 둘째, 하이퍼텍스트는 고정된 단일한 텍스트라는 개념을 파괴한다. 조각은 첫번째 형태를 만들어내는 부품과 관련하여 전체 텍스트를 고려하며, 변형적읽기와의 련관성상에서 그것을 고려하게 되는것이다. [152쪽] 텍스트를 설정하는 방식을 다르게 할 필요가 있다. 이같은 텍스트 다형태성은 텍스트가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있으며, 변화하고 , 역동적이며, 열린 형태를 갖게 된다는것을 의미한다. [167쪽] 시작과 끝이라는 개념[그리고 경험]은 선형성을 암시한다. 선형성의 주된 지배를 받지 않는 텍스트성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이퍼텍스트성에는 선형성과 련속성이란것이완벽하게 존재하지 않는다기보다는 다중련속성을 갖는다고 가정해보자. 이럴 경우엔 여러개의 시작과 끝을 갖고있다는것이 앞의 질문에 대한 한가지 대답이 될것이다.[169쪽] 간단하게 말해서 시작은 일반적으로 결과로 나타나는 의도라는 의미를 포함하는것이다. [171쪽] 마지막 단어라는것은 없다. 마지막판본, 마지막 생각도 없다. 항상 새로운 관념과 아이디어, 재해석이 있다. … 바흐친에게 전체는 종결된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항상 관계이다.따라서 전체는 종결지을수도 무시할수도 없다. 전체가 실현될 때 개념상으로는 벌써 변화를 면할수 없다…. 하이퍼텍스트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이전의 용어들로 규정하고 묘사하기 어렵다. [172-173쪽] 글쓰기는 결코 존재하기를 멈춰서서는 안되는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 즉 하나의 부속물, 사건, 그리고 잉여로 말이다. …. 우리는 플라톤적인 텍스트, 즉 그자체로 닫혀있으며 내부와 외부를 갖고있는 완성된 테스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텍스트라고 불리곤 했던것, 한때 이 단어가 동일시한다고 생각했던것-즉 작품의 시작과 끝, 한가지 총체의 통일성, 제목, 여백, 쪽지표시, 기본구성의 바깥에 있는 참고문헌령역 등- 의지속적인 경계를 형성하는 모든 한계를 무력화 한다.[174-175쪽] 중심성이란것은 오로지 순간적으로 존재한다. [189쪽] 하이퍼텍스트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저자를 재구성-재작성-한다 [190쪽] 상징으로서의 유추는 그것이 뛰여넘는 경계로부터 힘을 얻는다. 경계가 없다면 링크에 의해 만들어진 링크들은 혁명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할것이다. … 내가 빈약하거나 비효률적이라고 한것은 그것들이 명백하게 선형적인 텍스트에 멋대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308쪽] (소설에서) 개별 렉시아((돌진, 급격한 증가)는 독자를 만족시켜야 한다. 그러면서도 독자로 하여금 부가적인 링크들을 따라가길 원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결국 하이퍼텍스트는여전히 텍스트이며, 글쓰기이다. 우리는 좋은 글쓰기의 많은 장점들과 링크가 있는 글쓰기를 구분한는것이 쉽지는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른말로 하면 뛰여난 하이퍼텍스트는링크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것은 아니라는것이다. 링크를 둘러싸고 있는 텍스트가 또한 문제로 된다. 왜냐하면 개별 렉시아안의 글쓰기와 이미지의 품질이 하이퍼텍스트의품질에핵심적인 역활을 하기때문이다. 특정 렉시아의 콘텐츠(내용, 목록)에 만족한 독자가 그 렉시아에서 다른 렉시아로 향하는 링크를 따라가고싶어 하도록 만드는 능력이다. 하이퍼텍스트 작가든, 아니면 단순한 텍스트 작가든, 작가라면 누구나 직면하는 문제는 단순하게 정의하면 어떻게 하면 독자를 계속 읽게 만들것이냐로 요약할수 있다.[309쪽] 하이퍼텍스트시를 써왔던 월리엄 디키는 다음과 같은것들이 하이퍼텍스트시의 훌류안, 혹은 유용한 특징이라는 점을 발견했다. “하이퍼텍스트시는 그것의 부분, 연, 이미지 중어떤것으로부터 시작한 뒤 시의 다른 부분이 그것을 이어갈수 있을것이다. 이런 조직체계는 어떤 한 카드에 기술되는 시의 부분은 그 시에 포함된 다른 어떤 진술의 뒤나 앞에 나올 때도 시적의미를 생성할수 있도록 충분히 독립적인 진술이 되여야 한다 ” [340쪽] 시의 목적은 텍스트의 조건을 보여주는것이다. 시는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자신의 텍스트적활동을 자신의 기본주제로 삼는것이다. …시는 또한 하이퍼텍스트 웹내에서 가장예기치 않은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399-400쪽] 아래에 에서 인용한 하이퍼시 한수 영웅의 얼굴 조슈아 래파포트 늙은 바이나모이네넨이 노래부른다 호수에 잔물결이 일고, 지구가 흔들리며 구리산이 떨어진다 억센 옥석들이 덜커덕 굴러가며 절벽이 둘로 갈라지고 돌들이 해변을 철썩 때린다 그는 젊은 요우카하이넨을 노래한다 그의 칼라활에 묘목을 얹고 말의 멍에엔 버드나무 관목 발자국끝에는 호랑버들 그의 금테 두른 썰매를 노래하며 바닷가에 있는 갈대에 구슬로 매듭지은 그의 채찍을 노래한다 바이나모이넨; 영원한 현자라는 뜻, 칼레라바의 주인공 요우카하이넨; 바이나모이넨의 라이벌. 둘은 노래 경연을 한다. 요우카하이넨이 지면 녀동생을 바이나모이겐에게 주기로 한다. 요우카하이넨이 지고 그의 녀동생이 자살을 택하자요우카하이넨은 바이나모이넨을 죽이려고 하나 성공못함.  
52    합작파트너를 기다리는 가사묶음 댓글:  조회:1366  추천:0  2015-02-04
합작파트너를 기다리며... |   새벽, 그리고 죽림동 어머님                                                                         (中國 延邊 金勝鐘 사)                  자애로운 어머니 죽림동 어머니   그 언제나 어머님께선 새벽과 동무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죽림동 어머니   남들을 위한 종을 남들을 위한 종을   그 그렇게도 수천만번 수천만번 쳐주셨지요   수천만번 종쳐주신 죽림동 어머니...   그 언제나 어머님께선 새벽과 동무했습니다...     자애로운 어머니 죽림동 어머니   그 언제나 어머님께선 새벽과 동무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죽림동 어머니   자신을 위한 종은 자신을 위한 종은   단 단한번도 못쳐보고 못쳐보고 가셨지요   단한번도 못치고 가신 죽림동 어머니...   그 언제나 어머님께선 새벽과 동무했습니다...     어 ㅡ 머 ㅡ 님 ㅡㅡㅡ       하늘, 그리고 죽림동 아버님                                                                                                                                                    (中國 延邊 金勝鐘  사 )         다정다감하시던 아버님 죽림동 아버님   그 언제나 아버님께선 성스러운 사나이였습니다   아버님 아버님 죽림동 아버님   남들을 위한 하늘, 남들을 위한 하늘,ㅡ    그 그렇게도 찬란하게 만리창공 펼쳐주셨지요   만리창공 펼쳐주시던 죽림동 아버님   그 언제나 아버님께선 성스러운 사나이였습니다...       다정다감하시던 아버님 죽림동 아버님   그 언제나 아버님께선 성스러운 사나이였습니다   아버님 아버님 죽림동 아버님   자신을 위한 하늘, 자신을 위한 하늘,ㅡ   단 한자락도 아니 갖고 빈손으로 떠나가셨지요   빈손으로 떠나가신 죽림동 아버님   그 언제나 아버님께선 성스러운 사나이였습니다...     아  --- 버  ---  님  --- ... ...       열두살 진달래소녀                                                                                 (中國 延邊 金勝鐘 사)                소쩍새 울 때부터 열두살이였네   울 할머니 옛말할 때에도 열두살이였네   오늘도 열두살 소녀로 다가오는 진달래라네   래일도 열두살 소녀로 떠오를 진달래라네                음~ 랄라라~ 내 고향의 열두살 진달래소녀     음~ 랄라라~ 그 언제나 영원히 변치않는         내 고향의 열두살 진달래소녀...                  어버이날의 노래                                                     김승종   오늘도 정다운 고향과 함께 숨쉬는 아버지입니다 흐르는 세월속에 찬란히 솟는 아버지입니다 저 멀리 대안 향해 인생 쪽배 노저어 갈때 그 언제나 아버지는 등대불 되여 빨갛게 타오릅니다 아, 아버지, 오늘도 정다운 고향과 함께 숨쉬는 아버지 흐르는 세월속에 찬란히 찬란히 솟는 등대불입니다     오늘도 동구밖 느티나무처럼 떠오르는 아버지입니다 뜨거운 마음속에 영원히 솟는 아버지입니다 저 멀리 봉우리 향해 인생 등천길 힘겨워 할때 그 언제나 아버지는 버티목 되여 파랗게 세워줍니다 아, 아버지, 오늘도 동구밖 느티나무처럼 떠오르는 아버지 뜨거운 마음속에 영원히 영원히 솟는 버팀목입니다                            룡정송(龍井頌)     아득히 펼쳐진 만무과원에 웃음꽃 피여나는 곳 룡두레우물가에 아름다운 멜로디가 흘러흐르네 둥기당당 가야금의 고향 만방에 전해가는 곳 슬기로운 우리 민족 그 기상 떨쳐간다네 아, 유서깊은 문화의 고향 룡정이여 해란강의 새 전설 아리랑과 함께 천만년 울러퍼져라     기름진 세전이벌 록색입쌀 어공미로 소문난 곳 일송정기슭 너머 향기로운 사과배도 넘쳐난다네 천불지산 송이버섯의 고향 만방에 전해가는 곳 슬기로운 우리 민족 그 기상 떨쳐간다네 아, 유서깊은 행복의 고향 룡정이여 해란강의 새 전설 아리랑과 함께 천만년 울려퍼져라                     두만강사나이      백두의 절개 태고의 노래 지니고 해와 함께 달과 함께 숨쉬는 동해바다로 오늘도 래일 향해 떠나갑니다 쌍돛을 높이 올리고 떠나갑니다 아, 두만강 사나이 두만강 사나이 겨레의 넋 하얗게 부르며 세계로 나아갑니다     벼랑길 헤쳐 영원한 노래 부르며 해와 함께 달과 함께 숨쉬는 동해바다로 풍랑을 맞받아 따나갑니다 청춘의 마음 싣고 떠나갑니다 아, 두만강 사나이 두만강 사나이 쌍고동소리 하얗게 울리며 세계로 나아갑니다           엄마의 빈 자리      다정다감한 이웃들 설명절 만난 자리 그리운 얼굴들 한자리에 만났네 오고가는 인품속에 인정도 오가는 자리 만남에 서로들 밝은 모습 반갑네 음- 애닲아요 나는요 정말 애닲아요 비여있는 엄마의 한자리 누구도 메울수 없는 그 그리운 엄마의 자리     사랑스러운 이웃들 설명절 만난 자리 보고싶은 모습들 한자리에 모였네 오고가는 마음속에 사랑도 오가는 자리 만남에 서로들 찬란한 미래 그려가네 음, 애닲아요 나는요 정말 애닲아요 비여있는 엄마의 한자리 누구도 메울수 없는 그 그리운 엄마의 자리            엄마산 진달래동네     엄마산 동네는 진달래동네 우리 엄마 닮은 진달래 곱게도 피였네 탐스러운 꽃송이로 봄소식 알리며 너도나도 입매를 곱게도 물들였네 아리아리 아리랑 엄마산 동네는 진달래동네 스리스리 스리랑 엄마산 동네는 추억의 동네     엄마산 동네는 진달래동네 우리 엄마 닮은 진달래 곱게도 피였네 연분홍 저고리에 파란 치마 휘날리며 너도나도 꽃놀이로 해가는줄 모른다네 아리아리 아리랑 엄마산 동네는 진달래동네 스리스리 스리랑 엄마산 동네는 추억의 동네                     마음의 꽃 진달래     붉은 별로 머리우에 빨갛게 활짝 피였네 수많은 마음속에 하냥 살아 있었네 줄기줄기 한몸 바쳐 떨기떨기 한별로 떠올라 한마음 한뜻으로 평화를 위해 한마당 펼쳤네 아, 마음의 꽃 진달래 아, 마음의 꽃 진달래 오늘도 그언제나 마음속마다에 영원히 살아있네     그리움으로 언덕너머 빨갛게 활짝 피였네 인생길 험난속에 하냥 살아 있었네 줄기줄기 한몸 바쳐 떨기떨기 한별로 떠올라 한마음 한뜻으로 평화를 위해 한마당 펼쳤네 아, 마음의 꽃 진달래 아, 마음의 꽃 진달래 오늘도 그언제나 마음속마다에 영원히 살아있네         그리워라 그리워 할머니토장국     타향에서 고향의 얼굴들을 보고싶을 때면 스리슬슬 군침도는 구수한 토장국 찾으며 오늘도 올망졸망 아름다운 추억들을 떠올려 봅니다 성스러운 순결한 할머니 손맛 그리울 때면 스리슬슬 옛맛나는 향긋한 토장국 맛보며 오늘도 올망졸망 정다웠던 소꿉시절을 떠올려 봅니다 아, 세월이 흘러흘러 강산이 변해도 그리워라 그리워 또 다시 그리운 할머니 사랑이랍니다   이역만리 낯설음에 마음지쳐 입맛없을 때면 스리슬슬 군침도는 구수한 토장국 찾으며 오늘도 올망졸망 아름다운 추억들을 떠올려 봅니다 꿈결에도 서시장 사구려소리 듣고싶을 때면 스리슬슬 옛맛나는 향긋한 토장국 맛보며 오늘도 올망졸망 정다웠던 소꿉시절을 떠올려 봅니다 아, 세월이 흘러흘러 강산이 변해도 그리워라 그리워 또 다시 그리운 할머니 사랑이랍니다                      잘해나보세     여보게 친구 여보게 다정한 친구 빨갛게 번져오는 세월이요 노랗게 익어가는 세월이요 석양과 황혼이 모여모여 불길로 타오른다오   여보게 친구 여보게 친구 생각을랑 해보았댔소 인생길 동서로 다시 열어보려고말이요 인생길 남북으로 다시 틔워보려고말이요 해와 달이 다 하도록 해와 달이 다 하도록 아들딸 손자손녀들에게 그래 무엇 물려주려나   엇허, 어절씨구 여보게 다정한 친구 우리 모두 우리 모두 다정한 친구  저 높은 산아래 다정한 친구라네 엇허, 저절씨구 여보게 다정한 친구 우리 모두 우리 모두 다정한 친구  저 작은 이 되기전에 어서 잘해보세나 여보게 친구 여보게 다정한 친구 우리 모두 어서 잘해나 보세 어서 잘해나 보자구...                 인삼타령     인삼이로세 인삼이로세 진귀한 보물 인삼이로세 천리만리 기쁨을 전해주네 백두산 성산이 선물해준 묘약이로세 얼씨구나 에헹요 절씨구나 데헹요 명성이 높은 연변 인삼이라네 으흥으흥 온몸에는 장수힘 솟는다네     인삼이로세 인삼이로세 진귀한 보물 인삼이로세 이약 저약 모두다 비키세나 그래도 만병통치 연변인삼 명약이로세 얼씨구나 에헹요 절씨구나 데헹요 연변의 자랑 명표 인삼이라네 으흥으흥 벗님네들 찬탄이 끝없다네             검정귀버섯 풍년의 노래             풍년이 왔네 검정귀버섯 풍년이 왔네 산들바람 불어오네 검정귀버섯 따세나 기쁨을 따세나 구슬땀 흘린 보람일세 흥흥 따사로운 해볕아래 흥부박 절로 굴러오네 풍풍 풍년이 왔네 검정귀버섯 풍년이 왔네     풍년이 왔네 검정귀버섯 풍년이 왔네 풍년북 울리세나 검정귀버섯 따세나 사랑을 따세나 꽃피는 생활 노래하세 흥흥 따사로운 해볕아래 복된 세월 굴러오네 풍풍 풍년이 왔네 검정귀버섯 풍년이 왔네                        노오란 추억     찬란한 가을해볕 한가득 넘치네요 오늘도 달구지와 황소 구수한 이야기 펼치네요 저기 저 남촌기슭에선 옛말 굽는 냄새 스리슬슬 흐르네요 아, 그언제나 고향하늘 너머 그리운 추억 노랗게 떠오르네요 그언제나 고향하늘 너머 그리운 추억 노랗게 익어가네요     찬란한 가을달빛 한가득 넘치네요 오늘도 할머니와 누렁이 하아얀 그리움 오고가네요 동구밖 느티나무아래 화로불 감자를 몇번이나 데웠네요 아, 그언제나 고향하늘 너머 그리운 추억 노랗게 떠오르네요 그언제나 고향하늘 너머 그리운 추억 노랗게 익어가네요             그리워요 돌아와요 해란강처녀야     그리워요 그리워 또 다시 그리워요 돌아와요 그리워 어서 빨리 돌아와요 세전이벌 록색입쌀 먹고 자란 해란강처녀야 오빠 누이동생 하며 정 오고가던 해란강처녀야 타향살이 그만하고 정다운 내 고향으로 어서 돌아와요 음~ 해란강처녀야 우리 서로 함께 고향 살자 해란강처녀야 우리 서로 함께 고향 살자     그리워요 그리워 또 다시 그리워요 돌아와요 그리워 어서 빨리 돌아와요 일송정기슭 사과배 먹고 자란 해란강처녀야 앞집 뒷집 사돈 하며 떡국 나르던 해란강처녀야 이역만리 그만두고 정다운 내 고향으로 어서 돌아와요 음~ 해란강처녀야 우리 서로 함께 고향 살자 해란강처녀야 우리 서로 함께 고향살자          사과배꽃절 다시 만납시다     반가워라 사과배꽃절에 정든 벗님네들 다시 만날 기약을랑 잊지맙시다 성스러운 사과배꽃 웃음짓는 내 고향 룡정 사과배꽃 물결감도는 정다운 룡정입니다 아, 사랑이 흘러 넘치는 만무과원에서 뜨거운 마음으로 우리 다시 만납시다 뜨거운 마음으로 마음껏 우리 아리랑 부릅시다     그리워라 사과배꽃절에 정든 벗님네들 미풍량속 빛내이며 다시 만납시다 향기로운 사과배 반겨주는 내 고향 룡정 황금파도 설레이는 정다운 룡정입니다 아, 평화가 흘러 넘치는 만무과원에서 뜨거운 마음으로 우리 다시 만납시다 뜨거운 마음으로 목청껏 우리 아리랑 부릅시다       나래펼쳐라 쌍룡이여            유구한 력사를 자랑하는 룡두레우물가에서 겨레의 넋을 온 누리에 떨쳐간다네 우리 전통미풍량속 세세대대 전해가는 곳 사랑과 정성을 풍성하게 선사하는 사과배 고향이라네 아, 해란강의 새 전설 엮어가는 룡정 쌍룡의 나래 활짝 펼쳐라 룡정이여   가야금의 고향을 자랑하는 비암산기슭에서 백의 얼을 온 누리에 떨쳐간다네 우리 전통미풍량속 세세대대 전해가는 곳 사랑과 정성을 풍성하게 선사하는 송이버섯 고향이라네 아, 해란강의 새 전설 엮어가는 룡정 쌍룡의 나래 활짝 펼쳐라 룡정이여          선경대송(仙景臺頌)   천하 제일 선경 연변의 자랑 천하 제일 연변의 명산 선경대 연변의 명산 선경대 연변의 명산 선경대 연변의 명산 선경대 명승지일세   (방창; 우리네 명산 연변의 자랑이여라 연변의 명산 선경대 천하절경이여라...)   벗님네들, 어서 오세요 연변의 명산 선경대로 어서 오세요 북두칠성사에 목탁소리 똑딱똑딱 울린다 에헹 에헹요 데헹 데헹요  시원한 샘물 감로수 콸콸 솟는다 천연약수일세 처녀들이 꼴깍 마시면 미인선발 되구요 총각들이 꿀꺽 마시면 씨름판에 나간다 에헹 얼싸 좋다 얼씨구 좋다 절씨구 좋아 연변의 명산 선경대 천하 절승일세   벗님네들, 어서 오세요 연변의 명산 선경대로 어서 오세요 고려봉 삼형제봉 진달래봉 손짓하며 부른다 에헹 에헹요 데헹 데헹요 락타봉 슬쩍 타고서 오작교 건는다 칠선녀 마중일세 판룡송이 꿈틀거리며 하늘을 날아옌다 궁룡송도 반가워 너울너울 춤춘다 에헹 얼싸 좋다 얼씨구 좋다 절씨구 좋아 연변의 명산 선경대 천하 절승일세     (주);       kim631217@daum.net       13904481812     그리운 외태머리                                           (中國 延邊 金勝鐘 사)   황홀한 꿈속에 한일자로 드리웠었네   이 내 마음 한자락에 찬란히 새겼졌다네   사시절 그 언제나 무언의 웨침표와 함께               한마음 한뜻으로 나붓긴 외태머리   사시절 그 언제나 무언의 웨침표와 함께                한마음 한뜻으로 반겨준 외태머리   아 ~   외태머리 하나 외태머리 하나   이 내 마음속 불태우며 울긋불긋 나붓겼다네    이 내 마음속 불태우며 싱글벙글 반겼다네   루루루 나만의 떠올려보는 그리운 외태머리야   루루루 나만의 떠올려보는 둘도 없는 추억속의 외태머리야...   두만강아가씨             金勝鐘 사   산천경개 수려한 두만강가 옛곳에서 자라났네   달디단 감로천 마시며 목청 틔웠네   오고 가는 벗님들 반가워라 웃음 담뿍 안겨주는   랄라라 두만강아가씨 내고향의 아가씨   하얀 넋 꽃피워라 두만강아가씨야...       벼랑길 헤치는 억센 절개 가슴에 아로새겼네   두만강 물새와 함께 노래 불렀네   오고 가는 벗님들 반가워라 웃음 담뿍 안겨주는   랄라라 두만강아가씨 내고향의 아가씨   하얀 넋 꽃피워라 두만강아가씨야...      
51    가사;- 단풍잎 하나 박우물 하나 댓글:  조회:1060  추천:0  2015-02-04
  단풍잎 하나 박우물 하나                                                         빙글빙글 단풍잎 하나 빙글빙글 웃어요 생글생글 단풍잎 하나 생글생글 웃어요 박우물에 빙글 살짝쿵 실려요 시내물에 생글 살짝쿵 실려요   독백;-(...황활한 꿈속에 두쪼각이 나붓기며 서로서로 마음자락 차분히 차분히 드리운다 떨어지는 단풍잎의 빨간 무게를 달아보며 박우물속 깊이를 가만히 가만히 훔쳐본다 시내물의 흐름을 새하야니 느껴본다 시내물의 흐름을 새하야니 느껴본다 단풍잎 하나 박우물 하나 박우물 하나 단풍잎 하나... ...)   뚜루루 뚜루루 보고싶은 한여름이였어요 뚜루루 뚜루루 그리웠던 한가을이였어요...  
50    시;- 길에 길을 묻다 댓글:  조회:1362  추천:0  2015-02-03
길에 길을 묻다(외2수)   2014-02-14 09:38:11         ☞  (룡정) 김승종     길...   가끔,   사(寺)의 풍경소리와   시(詩)속에서의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철철철 들어보신적 있으십니까     길 하나...     재너머,   금싸래기의 긴 한숨과   은방울소리의 성스러움이   저기 저 보리밭을 꿰질러 간,   녹이 덕지덕지 슬은 오솔길을   너울너울 톺는것을 보신적 있으십니까     길 둘...     재너머너머,   유치원돌에서는 물짜장구치기-   일학년돌에서는 개발헤염치기-   이학년돌에서는 밴대헤염치기-   삼학년돌에서는 줄바헤염치기-   사학년돌에서는 메드레헴치기-   여보소, 헴 배워주시던   죽림동 후나미누나는   어디에 그 어디에 계십니까     길 셋...     재너머 또 너머,   한때는 소련홍군비행기가   이 구멍에서 저 구멍으로 들락거리던...   한때는 미군비행기(쌕쌔기)가   저 눈가에서 이 눈가에로 곤두박질하던...   수십년의 두만강 압록강 단교는   이 내눈굽의 티눈으로 꽃핀지 오래고...   천년의 침묵은 자유의 려정에 흐드러지고,ㅡ     길 넷...     재너머 또 너머 그 너머,   문을 안쪽에서 잠구는 이이다가   문을 바깥쪽에서 잠구는 이이다가   문고리를 잡은 이이다가   문고리를 잡자는 이이다가   문지기는 함구무언 묵묵부답...     길 다섯...     아희야, 재너머,-   산은 경계선 된것을 모른채   면면히 소리치고   강은 철책선 된것도 모른채   유유히 흐르고   호수는 허리가 반으로 잘리운지도 모른채   처절히 넘실대고   바다는 그 무슨 선이   새하야니 긋어져 있는지도 모른채   한악스레 한악스레 아우성친다...   길과 길은 길을 데리고   길과 길은 길을 물으며,-   거문고야 배낭을 챙겨라...   가야금아 보리떡도,-     길 ...     가끔,   이 섶다리를 싱겅싱겅 건너   저 징검다리로 건너보고싶어짐은 또,-   그리고,ㅡ   이   섬과   저   섬 사이에도...     여보소,-   당신의   길과 그 길속의 길은 무사하니껴...       넋 한점이라도...     오늘도 역시 흐른다   올리 흐르고   내리 흐르고   또,-   가로 흐르고   세로 흐르고   동서중남북 흐르고. ..   오늘도 찬란히 흐른다   빨갛게 흐르고   파랗게 흐르고   노랗게 흐르고   하얗게 흐르고   까맣게 흐르고...   신호등 숙제에 나머지공부하느라 드바쁘고...     오늘도 처절히 흐른다   왕방울눈이 되여 흐르고   뒷꽁무니 그으름내 피우며 흐르고   사타구니 피비린내 선보이며 흐르고   소리 소리도 소소리 장송곡속에서 흐르고...     쉿,ㅡ   량켠 인행도 기슭,-   빨강 바위   파랑 너설   노랑 바위장   하양 여울목   까망 옹두라지   문득 선뜩 요리조리 발부리를 잡는다...     온 하루 돌장 굽이굽이 돌아   반두질 투망질 낚시질해도   그으름내 피비린내 들숨날숨일뿐,-   돌쫑개며 버들치며 산천어며...   그 어떤 그림자꼬투리   넋 한점도 없다...     오늘도,   당신의 십자거리는 무사하니껴...       넋을 세탁하기     서시장에 갔다오면   명표 세탁기는 늘 바쁘다     소음을 꼬장꼬장 엿들은 귀이다가   그으름을 할금할금 훔친 코이다가   방부제에 꺼이꺼이 게발린 입이다가   금싸래기에 호락호락 홀리운 눈이다가   두루뭉실 썩썩 떼어내여   와락와락 세탁시킨다...     핫,-   이제 서시장에 갈 때면   아예 머리를 살짝쿵 떼어내여   녹스른 랭동고에 보관하기로 했다...     오늘도,   당신의 머리는 무사하니껴...   출처(연변모이자 )  
49    명시인- 김소월 댓글:  조회:2345  추천:0  2015-02-03
  명의 시인, 평론가가 선정한 “10명의 시인”     1.김소월/ 진달래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宁边에 약산药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이별의 이유, 또는 또 하나의 반어 이 희 중 / 시인. 문학평론가. 전주대 교수   김소월의 시”진달래꽃’을 연시로 읽지 않을. 또는 연시 이상으로 읽을 도리는 없다. 그만큼 순정한 사랑 노래이다. 이 점이 연시이면서, 연시로 읽지 않을 수도 있고. 연시 이상으로 읽히는 한용운의 연시들과 선명히 구분되는 자리이다.   이 시의 주제는 ‘이별의 정한’도 ‘슬픈 헤어짐’도 아니다. 이 시의 내용은 가정된 상황에 기초한 미래의 각오이자 계획이다. ‘가실 때에는’ ‘가실 길에’에서 미래시상를 표시하는 “ㄹ”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또한 “보내드리우리다”, “뿌리우리다”, “흘리우리다”의 “-우리다”에서 “우”는 존대의 뜻을, “리”는 계획의 뜻을 표시한다. 셋째 연의, “가시는”과 “놓인”에 쓰인 현재시상은 가정된 미래 상황 위에 얹힌 제한적 현재로 보아야 한다. “가시옵소서”는 기원 또는 완곡한 명멸이므로 현재 실현되고 있는 행동과 상관 없다. 그러므로 이별은 목전의 일이 아니다.   시의 화자는 미래에 닥칠지도 모를 이별을 걱정하고 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하는 때는 언제인가, 현재 진행되는 사랑이 불행한 결말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다고 여길 때이다. 물론 이 판단은 주관적일 수 있다. 객관적 상황이 그럴 수도 있으나, 주체의 심리적 성향 때문에 과장 또는 왜곡된 것일 수도 있다. 사랑하는 ㅅㅏ람들의 대화에서 ‘내/네가 떠난다면’같은 유의 가정은 사랑의 현재를 환신하게 하고 이 확신을 공고히 하는 데에 자주 소용된다.   시의 문면에서 화자가 미래의 이벌을 걱정할 객관적 증거는 없다. 걱정하는 화자만 있다. 이별은 현재 징후로만 존재할 수도 있고 아무 징후도 없을 수 있다. 미래에 닥칠지도 모를 최악의 상황은 현재의 사랑이 소중하기 때문에 소심한 연인의 내면에서 반추되는 법이다. 그렇다면 이 시의 내용은 ‘이별을 당면한 연인의 각오’가 아니라 ‘사랑에 빠진 사람의 행복한 투정’이 될지도 모른다.   이 시를 읽으면서 우리는, 떠나는 연인의 발 아래 눈물 없이 꽃을 뿌리겠다는 화자의 태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놀라움은 ‘어쩌면 그렇게 거룩할 수 있는가’ 또는 ‘어쩌면 그렇게 독할 수 있는가’등의 질문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역설 또는 반어로 이 각별한 놀라움의 원인을 해명하려 애써 왔다. 좀더 풍요롭게 읽기 위해서 “나 보기가 역겨워”라는 구절을 더 살필 필요가 있다. 이 구절이 미래에 닥칠지도 모를 이별과 관련하여 화자가 문제삼는 유일한 이유로 보이기 때문읻. 헤어짐의 이유는 다양하다. 둘 사이의 감정 변화일 수 있고, 외부 조건일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에서 화자가 특히 걱정하는 이유는 바로 “나 보기가 역겨워”이다. 이는 사랑의 근원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상대가 보기 싫어지면 사랑은 없다. 사랑이 개재되지 않은 연인은 의미론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사랑이 소며로딘 자리이므로 그렇게 거룩할 수 있고, 그렇게 독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사랑의 상대 앞에서 주체는 부끄러워지고 초라해진다. 자신이 그에게 얼마나 부족한 상대인지에 집착하며 괴로워한다. 사랑 덕택에 밝아진 자의식의 거울이 그를 허무는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상대가 바로 그 이유, 즉 자신의 부족을 탓한다면 울지 않고 꽃까지 뿌리면서 고이 보내드리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욕망의 자아를 내면화한 윤리적 자아의 대표 발언으로서, 원망을 내면화한 축복의 몸짓으로 완성된다. 여기서 화자가 집요하게 추궁한 하나의 이유, “나 보기가 역겨워”는 그밖의 다른 모든 이유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은 아닌가. 그렇다면 이는 또 다른 반어 또는 역설이 된다.  
48    이육사문학제 유치를 위해 뛰다 댓글:  조회:6741  추천:0  2015-02-03
중국 연변작가協 “올해 만주서 이육사 문학제 개최” 기사입력 2011-04-02 11:27   0  왼쪽부터 연변작가협회 김창희 작가, 허국화 연변일보 기자, 최국철 연변작가협회장, 이위발 이육사문학관 사무국장, 조영일 이육사문학관 관장, 이옥비 여사, 우광훈 연변작가협회 부장, 김승종 연변작가협회 이사, 연변작가협회 구호준 작가. 나라 빼앗긴 경술국치의 분노를 자정순국으로 보여주었던 안동지역 선비들이 ‘왜(倭)의 땅에서 하루라도 살 수 없다’며 엄동설한 칼바람 추위 속에 만주로 향했던 ‘도만(渡滿) 100주년’을 맞아 중국 연변 조선족 작가들이 안동을 찾았다. 도만 100주년을 맞아 올해 만주지역에서 ‘제1회 이육사문학제’를 마련할 계획으로 안동 이육사문학관과의 업무 협의와 매일신문사 및 의성군이 함께 마련하는 ‘의성 산수유 꽃바람 국제연날리기 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것이다. 지난달 30일 안동간고등어생산자협회 측의 안내로 안동을 찾은 중국 길림성 연변작가협회 최국철 회장 등 조선족 문인들은 31일 일제의 저항시인으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벌여 온 향토출신 이육사 시인의 도산면 생가와 이육사문학관을 둘러보았다. 이날 연변 조선족 작가들은 이육사문학관에서 육사의 딸 옥비 여사와 이영일 관장, 이위발 사무국장 등 문학관 관계자들과 만나 도만 100주년 기념행사로 만주지역에서 마련할 계획인 ‘제1회 이육사문학제’에 대해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양측은 이육사 선생의 나라사랑과 항일 저항운동이 스며있는 문학세계에 대해 폭넓은 의견을 교환했으며 만주지역 문학제에 서로 긴밀한 협의를 가지기로 했다. 이들은 한국국학진흥원과 도산서원, 의성국제연날리기대회장과 지역 특산품인 안동간고등어 공장을 차례로 방문하고 하회별신굿탈놀이 관람과 1일 안동문화원, 2일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을 찾아 100년 전 만주 항일투쟁 당시를 회고하는 시간을 갖는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향산 이만도 선생을 비롯해 숱한 선비들이 나라 잃은 슬픔과 분노를 자정순국으로 보여주면서 일제에 항거했으며 이듬해인 1911년 석주 이상룡, 백산 김대락 등 지역 선비들이 문중 식구들과 함께 만주로 향해 한국독립운동사 50년사에 길이 남는 해외 항일운동이 시작된 해였다.  조선족 시인 김승종(48) 씨는 “만주지역 항일투쟁이 시작된 지 100년째인 올해 이육사문학제를 만주에서 열 수 있게 된 것을 뜻 깊게 생각한다”며 “안동지역의 많은 문인들도 이육사 문학제에 함께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ㅡ안동`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제2회 이육사문학제 주최측과 수상자 일동이 합영.              제3회 중국 연변 이육사문학제가 9월12일 연변대학에서 개최                                                         제3회 이육사문학제 합영
47    한국 교보문고 시집 광고 댓글:  조회:5414  추천:0  2015-02-03
보리깜부기와 구혼광고와 흰 그림자의 삶   0.0 | 네티즌리뷰 0건리뷰쓰기 저자 김승종|신세림 |2004.12.30 페이지 128|ISBN  9798958000319|판형 B6, 128*188mm 도서6,000원   찜하기  
46    두만강여울소리 시탐구상 댓글:  조회:5868  추천:0  2015-02-03
  제24회 《두만강여울소리》 시탐구회 화룡서 편집/기자: [ 량영철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07-08-21 08:37:09 ] 클릭: [ ] 제24회 《두만강여울소리》시탐구회가 연변작가협회시가창작위원회와 연변작가협회평론분과의 주최하에 8월 18일부터 19일까지 화룡시에서 열렸다. 24년전 정몽호, 김파, 김성휘 등 시인들의 발기로 시작된 《두만강여울소리》시탐구회는 그동안 한해도 거르지 않고 줄곧 열려왔는데 특히 이번 제24회는 연변작가협회 제8차대표대회이후 처음으로 열리는 시가탐구회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자못 컸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이번 시가탐구회 역시 탐구, 화합, 조화, 정진, 창조의 정신을 추켜들고 전국 각지에서 온 60여명 시인, 평론가들이 참가하였다. 개막식이 있은후 전체 회의참가자들은 유람명승지 선경대를 답사했고 저녁에는 화룡출신 가수, 배우들과 화룡예술단의 배합으로 문예공연도 관람했다. 19일에 있은 응모작 합평회에서는 최삼룡의 《조선족시문학과 중국시문학의 비교에서 본 현대의식》, 전국권의 《우리 시에 대한 관조와 나름대로 사색》, 김경훈의 《두만강여울소리탐구시작품에 대한 조명》 등 론문이 발표되였고 최삼룡, 김경훈, 조룡남, 전국권, 최룡관, 리임원, 김영건 등 7명 심사위원과 연변작가협회 주석 허룡석과 저명한 시인 김철의 감독하에 김창희의 《짝퉁서비스 맛보세요》, 박장길의 《고목》, 김일량의 《가을밤》, 김승종의 《무루의 한 극에서》 등 4수를 우수작품상으로 양화의 《그대는 지금 어떤 옷을 걸치셨습니까》를 신인상으로 선정하고 시상하였다. 회의참가자들은 올해의 작품들이 예년에 비해 한층 세련되고 그 수준도 제고되였다고 입을 모았다. 이번 제24회 《두만강여울소리》 시가탐구회는 화룡민족호텔의 후원으로 진행되였다.   선경대를 답사 가수배우들과 시인들이 함께 하는 문예야회 한장면     수상자들 시가탐구회 전체 참가자들
45    시;- 나의 새 일기장 댓글:  조회:5381  추천:0  2015-02-03
사회·문화 나의 '새  일기장'
44    가사와 시;- 다시 만납시다... 댓글:  조회:5604  추천:0  2015-02-03
    동북아신문 기자  |  pys048@hanmail.net       사회·문화 다시 만납시다(외1수) 동북아신문 기자  |  pys048@hanmail.net 승인 2008.11.19  00:00:00   다시 만납시다   반가워라 이 가을에 정이 든 벗님네들 다시 만날 기약을랑 잊지 맙시다 단풍 꽃 피는 내 고향 단풍꽃 물드는 정다운 마음 사람입니다. 불타는 사랑입니다   그리워라 그 가을에 정이 든 벗님네들 미풍량속 빛내이며 다시 만납시다 단풍꽃 피는 내 고향 단풍꽃 물드는 정다운 마음 평화입니다. 성스러운 평화입니다   후렴: 단풍꽃 피는 내 고향에서 우리 다시 만납시다 사랑과 평화를 나누며 우리 다시 만납시다     백운계곡에서     용암도 뚫는 웅심입니다. 푸르디 푸른 하늘의 드넓음입니다 마냥 정다운 이파리와 꽃과 결실의 신선함입니다 고향 어머님의 풍만한 젖무덤입니다 굽이굽이 정기가 풋풋히 흐르는 백운계곡의 곡선미입니다… 그 언제나 경쾌하게 바다로 떠나는 시골나그네의 깨끗한 마음 마음이여!   그립고 찬란한 숲이여   그리워 그립습니다 스리슬쩍 푸렁에 시새움이 납니다 스리슬쩍 꽃바람에 늘 들떠 있습니다… 한 이파리 또 살아날 때 모든 것이 헐레벌떡 천리안 되고 모든 것이 새하야니 천문 열립니다 모든 것이 새록새록 이목지욕 꿈틀거리고 모든 것이 웅기중기 구각 세워집니다 모든 것이 굴러굴러 부활됩니다.   또 그리워 그립습니다 슬리슬쩍 백운계곡 소소리 단풍으로 꽃핍니다 재너머 한자락 또 한껏 펼쳐질 때 모든 것이 새롭게 초첨 맞추고 모든 것이 구멍난 바탕 없습니다 모든 것이 끝없이 등천길에 오르고 모든 것이 황금의 노래로 구성집니다 모든 것이 청정의 마음으로 흥겨웁기만 합니다   아, 그립고 찬란한 백운계곡의 숲이여!  
43    시;- 새벽(건), 새벽(곤). 댓글:  조회:5458  추천:0  2015-02-03
사회·문화 새벽(건) 김승종 시 2수 동북아신문 기자  |  pys048@hanmail.net 승인 2009.01.22  00:00:00 새벽(건)                                                           이제껏         이 내 몸에            성스러운 십자가가,      이렇게 짊어져 있는줄을 미처 몰랐습니다        이제껏         이 내 가슴속에            성금요일과 성심성월이,      그렇게도 효행효오와 함께 모자람을 참 너무 몰랐습니다...             아 ㅡ   버 ㅡ  님 ! ㅡ                    새벽(곤)          어머님             어머님                어머님은ㅡ         남을 위한 종을,               그렇게도 수천만번 쳐주섰소이다            어머님             어머님               어머님은ㅡ          자신을 위한 종은,                                단 한번도 못쳐보고 가셨소이다...                   어 ㅡ   머 ㅡ   님 ! ㅡ    < 동북아신문>에서
42    시; - 7천만 족보찾기 댓글:  조회:1398  추천:0  2015-02-03
사회·문화 '7천만' 족보찾기 (또 하나, 둘) (김승종 외2수)죽림 김승종 [편집]본지 기자  |  pys048@hanmail.net 승인 2009.07.14  00:00:00                                                                                                               봄우뢰 운다                                                    새하아얀 가슴 가슴마다에                                                               봄우뢰 운다                                                          뜨거운 맘, 맘 너머                                                     시꺼먼 금이 간 골짜기에                                                               봄우뢰 운다                                                              봄우뢰 메인다                                             오해 아닌 최대의 죄악의 오해 아니기를                                             시비 아닌 최대의 죄악의 시비 아니기를                                             슬픔 아닌 최대의 죄악의 슬픔 아니기를                                             고독 아닌 최대의 죄악의 고독 아니기를                                             랑비 아닌 최대의 죄악의 랑비 아니기를                                                                      ...                                                         의 번지는ㅡ                                                         의 족보는ㅡ                                                                 세상은?ㅡ                                                                 세상은?ㅡ                                                               봄우뢰 운다                                                              봄우뢰 메인다                                                     엇허, 살아서 한냥짜리 될가...                                                엇허, 죽어서 천만억조...냥짜리 될가...                                              모두들 종당엔 저ㅡ 높고 장중한 큰산아래                                                       자그마한 이 되련만...                                                               봄우뢰 운다                                                             봄우뢰 메인다...                                                                     비혼                                                       하양과 푸렁이 얼기설기 엇갈려                                                         그리움을 흠뻑 짓적셔 좋습니다                                                               독설이 하냥 무너지고                                                                    숙명마저 타작되여                                                                      광기와 함께 풋풋해 좋습니다                                                                         노을 한자락 베여내니                                                                         빛의 어느 하루 즐거워 좋습니다                                                                      부드러움으로 성묘하는 음역                                                                 비바람앞에 자그마한 비혼 눕혀놓고                                                              부드러움으로 성묘하는 음역                                                           비우는것과 잃는것에 흥겨워 좋습니다                                                        력력히 서려오를는 음역엔 휴전선은 없고                                                    하양과 푸렁이 입벌린 곳은 저 너머ㅡ                                    화석의 미                                                           할배, 뜯기웠네요                                                                                  아빠, 뜯기우네요                                                           동생아, (뜯기울 것이에요...)                                                                     달도 엉망진창,                                                     어미거미도 해쓱해지고 있고... ///< 동북아신문>에서.
    [편집] 동포신문 본지 기자  |  pys048@hanmail.net                     사회·문화 하늘,  그리고  죽림동  아버님                       ㅡ어버이날 노래  [편집] 동포신문 본지 기자  |  pys048@hanmail.net           2012.05.08                 다정다감하시던 아버님 죽림동 아버님 그 언제나 아버님께선 성스러운 사나이였습니다 아버님 아버님 죽림동 아버님 남들을 위한 하늘, 남들을 위한 하늘 그 그렇게도 찬란하게 만리창공 펼쳐주셨지요 만리창공 펼쳐주시던 죽림동 아버님 그 언제나 아버님께선 성스러운 사나이였습니다    다정다감하시던 아버님 죽림동 아버님 그 언제나 아버님께선 성스러운 사나이였습니다 아버님 아버님 죽림동 아버님 자신을 위한 하늘, 자신을 위한 하늘 단 한자락도 아니 갖고 빈손으로 떠나가셨지요 빈손으로 떠나가신 죽림동 아버님 그 언제나 아버님께선 성스러운 사나이였습니다...    아 ㅡㅡㅡ 버 ㅡㅡㅡ 님 ㅡㅡㅡ! … 작곡가님들께ㅡㅡㅡ 새벽, 그리고 죽림동 어머님| ━ ‥‥‥창작 가사방 김승종|조회 29|추천 0|2013.03.08. 21:06        새벽, 그리고 죽림동 어머님                                                          자애로운 어머니 죽림동 어머니     그 언제나 어머님께선 새벽과 동무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죽림동 어머니     남들을 위한 종을 남들을 위한 종을     그 그렇게도 수천만번 수천만번 쳐주셨지요     수천만번 종쳐주신 죽림동 어머니...     그 언제나 어머님께선 새벽과 동무했습니다...         자애로운 어머니 죽림동 어머니     그 언제나 어머님께선 새벽과 동무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죽림동 어머니     자신을 위한 종은 자신을 위한 종은     단 단한번도 못쳐보고 못쳐보고 가셨지요     단한번도 못치고 가신 죽림동 어머니...     그 언제나 어머님께선 새벽과 동무했습니다...         어 ㅡ 머 ㅡ 님 ㅡㅡㅡ    
40    가사;ㅡ 두만강아가씨 댓글:  조회:5818  추천:0  2015-02-03
사회·문화 두만강아가씨(中國 延邊) 金勝鐘 사 [편집]본지 기자  |  pys048@hanmail.net 승인 2012.07.07  00:00:00 산천경개 수려한 두만강가 옛곳에서 자라났네 달디단 감로천 마시며 목청 틔웠네 오고 가는 벗님들 반가워라 웃음 담뿍 안겨주는 랄라라 두만강아가씨 내고향의 아가씨 하얀 넋 꽃피워라 두만강아가씨야   벼랑길 헤치는 억센 절개 가슴에 아로새겼네 두만강 물새와 함께 노래 불렀네 오고 가는 벗님들 반가워라 웃음 담뿍 안겨주는 랄라라 두만강아가씨 내고향의 아가씨 하얀 넋 꽃피워라 두만강아가씨야    
사회·문화 개구쟁이들에게...竹琳 김승종 [편집]본지 기자  |  pys048@hanmail.net   2013.05.20  00:00:00                               ㄱ   요지음, 참 이상야릇해집니다. 기대치(期待値)와 소망치(所望値)를 너, 나, 그, 마음절구속에 넣고 찧고 빻고 하는 짓거리와 짓거리에 무척이나 넋을 빼앗깁니다… 그 무렵, 짓굳게 굳이 보리떡을 만들어 개구쟁이들에게 먹이고싶은 그 까닭은 또… 쯔즘쯔즘 까달까달 쩝쩝… 그 찰나, 그 옛적,- 모래톱소꿉놀이도 하냥 즐거웠고… 또 그립고… 하지만 요지음 개구쟁이공화국에선 모래톱소꿉놀이는 전혀 까막나라 이야기!-   요지음, 꾸겨지고 곰삭은 령혼들 앞에서 이 텁석부리의 마음은 늘 싹 사그러진 녹슬은 화로불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ㄴ     요지음, 너무나도 참 이상야릇해집니다. 이십사기(氣)와 칠십이후(候)와 함께 너, 나, 그, 마음과 마음이 징그럽게 눈언저리 핥으며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그 무렵, 짓굳게 굳이 보리떡을 만들어 개구쟁이들에게 먹이고싶은 그 까닭은 또… 쭈룩쭈룩 서섬서섬 냠냠… 그 찰나, 이 골목 저 골목 맛갈스럽게 누벼가며 늘 사시절 색다르게 놀던 놀이들은 인젠 새파아란 귀등에서 서리 맞은지 오래고… 그리고 요지음 개구쟁이공화국에선 그 무슨“…게임”에 귀여운 눈꼴 눈매마저 다아 빼앗겨 피빨에 성엉켜 비지땀 흐리고, 보리떡 대신 그 무슨 괴상한 이름으로 얼룩진“…먹기콩클”에 호들갑을 떨며,- 그렇게도 아롱지던 눈빛과 눈빛들 사이는 점점 헐벗고 굶주리여가고…   요지음, 녹쓸고 텅빈 령혼들 앞에서 이 텁석부리의 마음은 늘 싹 사그러진 녹슬은 화로불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ㄷ     요지음, 이눔은 운이 좋게 내몽고초원 한가운데의 썅싸만(向沙彎)에 갔다 돌아와서부터 더더욱 참 이상야릇해집니다. 염통방 닿기전 곰이 잔뜩 핀 그렇게도 찬란한 햇볕마저도 지리지리 무서워짐은 또… 그 무렵, 짓굳게 굳이 보리떡을 만들어 개구쟁이들에게 먹이고싶은 그 까닭은 또… 썅싸만 모래들의 소리는 이내 텁석부리 귀전에서 늘 찬란히 소소명명이 메아리치고… 웡-웡- 왱-왱- 쏴-쏴- 그 찰나, 쌍싸만의 모래들은 소리에 소리를 뭉쳐 몽고포속 개구쟁이들을 왕왕 불러내여 거치른 모래바람앞에서 말이며 양떼며 락타들과 함께 열심히 뛰게 하면서 빨주노초파남보 새 별유천지로 생생히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요지음, 색바래지고 굳어진 령혼들 앞에서 오늘도 이 텁석부리의 마음은 늘 싹 사그러진 녹슬은 화로불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ㄹ     느즈막, 25시 너머― 누우런 이끼 돋힌 침묵의 천년바위앞에서 개구쟁이들에게 보리떡을 정나미 정나미 먹이고싶습니다… 저― 높은 산아래 자그마한 이 되기전,―    ―모두들 무사함둥…  
38    시:- 3.8영탄조 댓글:  조회:1061  추천:0  2015-02-03
사회·문화 3.8의 영탄조(詠嘆弔)김승종 시 [편집]본지 기자  |  pys048@hanmail.net 승인 2012.08.15  00:00:00          ▲ 김승종 시인   백두산 세상 1번지 산천어 999 쫑- 쫑- 에 와 닿고...   한라산 세상 1번지 고등어 999 쏭- 쏭- 에 와 닿고...   두 세상 1번지 권커니작커니 산천어매운탕 얼쑤~ 간고등어구이 절쑤~ 아리아리 아리랑 쾌지나칭칭 그 정다운 맛,- 그 성스러운 멋,- 새하야니 새하야니 한누리 너머너머 끝 없 으련만...   후유,ㅡ 이날은 핫, 또 누런 이끼 끼며 루루 저물어만 가고 그리고, 저기 저 녹쓸어가는 쇠붙이를 또 서로서로 들어야만 하는... 아호 :竹林 일명:文钟 1963년 12월 17일(음력) 中国吉林省延边和龙市芦菓乡竹林村 출생 사범학교 졸업, 교원, 금융사업 종사, 현재 자유기고인. 전 연변 화룡시작가협회 주석; 중국 연변작가협회 이사; 중국 연변시인협회 회원; 중국소수민족작가연구중심 회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제3회 한국 세계계관시인문학회 본상 수상. 24회시탐구회 시우수상 수상 제1시집: 보리 한알과 등록되잖은 ® 와 일회용 삶. 중국,연변인민출판사 제2시집: 보리깜부기와 《구혼광고》와 흰 그림자의 삶.           한국,도서출판  신세림 현재 한국체류중
37    시;- 트렁크려행기 댓글:  조회:1340  추천:0  2015-02-03
사회·문화 [김승종 시]트렁크려행기竹琳 김승종 [편집]본지 기자  |  pys048@hanmail.net 승인 2013.02.25  00:00:00 트렁크려행기(1) 그 어느 때,- 트렁크란 이름표 달고 배불뚝이 빨갛게 자랑하고 연길 서시장 대문 버젓이 나서고 和龍 고향 삽짝문 활짝 뿌리치고 비행기 귀문 굳게 굳게 잡고 콩크리트 무덤- 서울행 하고 종횡무진 부산 광주 내리 끌리우고 위풍당당 강릉 파주 올리 끌리우고 우왕좌왕 안동 대전 가로 끌리우고 동서남북 대구 경주 세로 끌리우고 다시 한번 半에 반도를 들숨날숨과 함께 허파속에 억겁마저 마구마구 털어넣는... ...   그 어느 어느 찰나,- , 하며 하얀 딱지 덕지덕지 붙히고 떼며 떼며 붙이며 새까맣게 탄 가슴을 와락 제치며 그렇게 피비리게 날뛰고 날뜀을 끈풀며   성냥파는 처녀애와 함께 울먹울먹 하며 설한풍 맞고 우들우들 맞고 떨며 배훌쭉이 그 서슬푸른 소리 소리하며 두만강 저편 외할매네 굶주림을 귀동냥하며 이끼 누우렇게 메말라가는 문단을 떠올기도 하며 龍井 天星御花苑 1동 대문앞에 오며 다시 한번 半에 반도를 날숨들숨과 함께 폭탄주에 혼백마저 말아말아 마셔대는...   오늘도,- 두만강 저편, 무사함둥...       뜨렁크려행기(2)   龍井 天星御花苑 1동 대문앞에서 울고 있다 뜨렁크라는 이름표를 짓씹어버린채 울고 있다 설한풍을 듬뿍 껴안고 슬피디 울고있다 그믐밤, 오늘, 꺼이꺼이 울고 있다...       두만강 건너 저편을 넋두리하며 울고 있다 인천공항 앞바다의 한을 풀어내며 울고 있다 박달재를 허위허위 비웃으며 울고 있다 문경새재를 구비구비 황그리며 울고 있다...   두바퀴 처절이 짝사랑한채 울고 있다 끌손잡이도 산산이 주눅이든채 울고 있다 조르개도 후줄근히 탕개풀린채 울고 있다 구곡간장 얼키설키 곰피운채 울고 있다...   용두레우물가를 떠난채 울고 있다 용주사 목탁소리 뒤로한채 울고 있다 해란강여울소리 가슴에 품은채 울고 있다 새하아얀 얼 흑진주한테 전당잡힌채 울고 있다...        당신의 트렁크는,ㅡ 무사하니꺼...      트렁크려행기(3)       엊그제 버들고리트렁크는,- 울 할배와 함께 두만강 건너와 버빡골 달동네로 치켜세워 새하야니 나붓기다...   어제의 군복색트렁크는,- 울 누님 시집갈 때 길건너 팔간집 것 손이야발이야 빌어썼던 녹쓸음이 피멍으로 얼룩지다...   오늘의 호화트렁크는,- 버들방천 너머 이 벌 저 벌 벼꽃향기를 잃어가는 구김살 생긴 리산가족들을 서슬프르게 손짓하다...   래일의 록색트렁크는,- 무사함니껴...     트렁크려행기(4)         ㅡ 예사내기의 예쁘장스럽지 않는 소리 그 여파...25061950...들쑹날쑹 되기...   19101950후 쌕쌕기랑 딱정벌레랑 새총이랑... 압록강 두만강 낙동강 처철썩처철썩 건너가기 건너오기 斷橋 흔적남기   울 외삼촌 윤태갑은 고향집 샛바람같이 왔다가 마파람같이 그 무슨 지도원이라는 별달고 북부전선 앞장서기   그때 외삼촌의 손에는 트렁크란 물건짝은 전혀 들려있지 않았었다고 하며 분명 외할매의 눈가엔 뭔가가 또렷 달려있기   무산광산마을에 계시던 작은 아버지 박석관도 배낭메고 거제도포로수용소로 가기까지 중부전선 들락날락 하기   작은 아버지 손에도 트렁크란 물건짝은 전혀 들려있지 않았었다고 하며 작은 어머니의 눈가에도 뭔가가 초롱 달려있기   울 뒷집 김해김씨 김진수도 외둥이를 뿌리치고 심양을 걸쳐 丹東 관전 하구툰 청성교 건너 남부전선 橫草之功 하기   부패장인 애아빠 손에도 트렁크란 물건짝은 전혀 들려있지 않았었다고 하며 창림 엄마의 눈가에도 뭔가가 대롱 달려있기   어느 날 저녁, 고향 마을 합작사 앞마당 로천에서 콩닦개 냠냠 먹으며 (국내산)이란 전투영화 보기   그 어느 어느 어느 날 저녁, 龍井 天星御花苑 1동 한 안방의 TV엔 (외국산)이란 영화 눈길잡기   요지음, 엄마는 늘 먼지투성이인 트렁크를 뒤적뒤적 흑백사진들을 찾아내여 추억탕을 설설 끓이기   조카녀석은 하며 늘 쏭알쏭알 칭얼칭얼 꼬리 물어대기   젠장,- 오늘도 윤태갑 손자도, 박석관 손자도, 김진수 손자도... 동서남북 안부 전해도 嶺 다르게 하기 高地 낯설기   점점 녹쓸어가는 쇠붙이들과 탄약트렁크를 서로서로 맞들고 죄없이 마주 겨냥하기 력사앞에 웃음거리 만들기   ㅡ예사내기의 예쁘장스럽지 않는 소리의 여파가 지난지도 어언 60여년... 칠락팔락 되기...     모두들의 평화트렁크는,- 무사하니껴...    
36    한국 서울 교보문고 김승종 시집 광고란... 댓글:  조회:1199  추천:0  2015-02-03
    @중국동포타운신문 제137호 2008년 10월 26일 발행    중국동포타운신문 제136호 2008년 10월 10일 발행 ==================================================== 종이책 보리깜부기와 구혼광고와 흰 그림자의 삶 저자 김승종 지음 출판사 신세림 | 2004.12.30 형태 판형 B6 | 페이지 수 128 | ISBN 정가 가격확인중 찜하기   이 책은 어때요? 평점 :0.0 필독 비추12345678910필독   이 책을 언급한 곳 리뷰 0 | 서평 0 | 블로그 0 북토크(총 0건)  이 책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주세요. 이 분류 베스트 이 분류 새책   (0) (0)  (0) (0) 정보 제공 :교보문고 책소개     김승종의 시집. 소시민의 팍팍한 삶을 시어를 되풀이함으로써 빚어지는 운율에 실어 노래했다. 외롭고 쓸쓸하다는 말 없이 외롭고 쓸쓸한 세상살이를 비춰주는 시작들이다.   목차 머리말/시음병자와 얄미운 시란 놈과 그 잠언1  1.구혼광고  2.찬란한 대화  3.신 혈의 루  4.소리치는 계곡  후기/시음병자와 얄미운 시란 놈과 그 잠언2          
35    흑룡강신문 윤운걸 보도 댓글:  조회:5996  추천:0  2015-02-03
ㅁ[흑룡강신문]연변 김승종시인 '시천하루밤과 시작노트와 시지기 삶' 저서 출간     연변 김승종시인 '시천하루밤과 시작노트와 시지기 삶' 저서 출간 http://hljxinwen.dbw.cn   2013-06-19 17:16:46                        중국조선족시단의 중견시인 김승종씨가 사비로 '시천하루밤과 시작노트와 시지기 삶'이란 책을 펴내 조선족시단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해방이후, 중국조선족시단에서 많은 시론집이 출간되였지만 시의 정의, 시쓰기 정의, 시인의 정의 등을 잠언으로 집대성해 사상 처음으로 출간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9년간의 심혈을 거쳐 출간한 이 책은 총 280쪽,수록된 잠언 개수는 2200여개, 중국, 유럽, 한국 등등에서 출간된 시 리론들도 포섭되여 있어 그간 저자의 노력이 고스란히 적혀 있다.   또한 이 책은 책내용을 반반씩 갈라 앞과 뒤가 조응조화를 이루게 시잠언집을 만들었다는 점이 돋보인다.   김승종 시인은 이 책에서 "이 시공부노트’는 근 30여년간 시지기 삶의 시메모 쪼가리 여러 꾸레미들을 먼지 털어 내며 손에 손을 본것이다"라고 하고 나서 "이 시공부노트의 구성은 유명한 문호들의 원 명구가 있는가 하면 원 명구 일부분에 시문학에 관련하여 시지기의 소감을 반으로 한 사설도 있고 또한 시지기만의 '시의 설법'을 옹근 '시언록'으로 한 앙금"이라고 밝혔다.   1963년도에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죽림에서 태여난 김승종시인은 연변사범학원 졸업, 아호는 죽림(竹林), 1980년 '도라지'잡지에 시 '고추'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 현재 연변작가협회 리사, 중국소수민족작가연구중심 회원,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으로 활약하고있으며 '보리 한알과 등록되잖은 R와 일회용 삶', '보리깜부기와 구혼광고와 흰 그림자의 삶', '두 동네 은회색 카니발(공편저)' 등 시집을 펴냈다.   한편 김승종시인은 "두만강여울소리 시탐구 우수상', '한국세계계관시인문학회 시본' 등 다수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한국에 체류하는동안 중국조선족대학생 이륙사문학제를 연변에 유치하고 조선족시인 시집 출간에 사재를 터는 등 조선족문단의 정진을 위해 많은 일들을 해왔다.   /윤운걸 길림성특파원      
34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 댓글:  조회:4461  추천:0  2015-02-03
ㅁ[조글로미디어]"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에 김승종,  김일량, 정희경. CJ문학상에 김경애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에 김승종,  김일량, 정희경. CJ문학상에 김경애       (좌로부터 김일량, 김경애, 정희경, 김승종) 2013년 연변일보 CJ문학상, 해란강문학상  시상식이 24일 연길시백산호텔에서 있었다. 연변일보에서 주최하고 한국CJ그룹 중국본사의 후원으로 21회째 열리게 된 2013년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28회)과 CJ문학상은 2013년 한해동안 연변일보에 실린 문학작품가운데서 엄격한 심사를 거쳐 최종 4편(수)의 작품을 수상작으로 선정하였다. 김승종의 담시 "개구쟁이들에게 보내는 편지", 김일량의 영물시 "느릅나무"(외2수), 정희경의 수필 "한번쯤은 사랑했었다"를 "해란강문학상" 수상작으로,  김경애의 "무대우의 거대 초불"을 "CJ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하였다. 연변대학 김호웅교수의 수상작 심사평을 옮긴다. 김승종의 "개구쟁이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소꿉놀이와 숨박꼭질 대신에 진종일 컴퓨터 게임에 빠져있고 , 보리떡 대신에 이름 모를 인스텐트 식품만 먹고있는 요즘 "개구쟁이공화국"의 아이들을 근심하면서 여전히 말이며 양떼며 락타들과 함께 뛰놀고 있는내몽골초원의 아이들을 동경하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시적화자-"텁석부리 아저씨"의 인정미와 진정성을 통해 현실비판을 완곡적으로 시도한다. 김승종의 시는 다년간의 시적 실험을 거쳐 난해하고 난삽한 시를 지양하고 구수하고 친근한 담시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평했다. 김일량은 조선족 시단의 대표적인 농민시인으로서 주옥같은 영물시들을 선보이고 있다. 그의 시 "느릅나무"를 보면 시인의 철학과 인생관을 느릅나무라는 객관적상관물에 대상화하는 재치가 범상치 않다. 느릅나무는  연변시골에서 쉽게 볼수 있는 나무다. 하지만 "이름처럼 성품이 느릿한 나무"요, 거친 바람을 머금었다가 그것을 순화시켜 "하늘의 소리"로 승화시키는 나무이며 휘여질지언정 부러지지 않는 나무요, 높은 곳과 화려함을 탐내지 않고 자기 식대로 살아가는 "고집쟁이 나무"란다.시골에 파묻혀 아름다운 시편들을 펴내고 있는 시인 자신의 자화상이요, 굽은 나무 선산을 지킨다고 바람세찬 연변땅을 지켜 끈질기게 살아가는 우리 초민백성의 모습이 아닐수 없다. 정희경의 수필 "한번쯤은 사랑했다"는 연변대학 조문학부 학부생의 수필이다. 이 작품은 은행나무 락엽과의 대화를 통해 나젊은 녀대생의 여린 감수성과 깊은 깨달음을 생동하게 펼쳐보았다. 자아중심적이고 리기적인 생활을 해오던 작자는 어느날 자신의 발에 밟히는 은행나무 락엽들을 두고 깊은 사색의 우물을 길어올린다. 은행나무 락엽들을 두고 깊은 사색의 우물을 길어올린다. 은행나무 락엽들은 벌레들이 갉아먹고 땡볕과 비바람에 이기지 못해 볼품없는 모습으로 길에 떨어지지만 한때는 푸르싱싱하게 그늘이 되어 한번쯤은 남을 사랑했다고 자부하는것 같았다. 참으로 젊은 감수성과 상상력이 빚어낸 동화적인 수필이라 하겠다. "교정의 종소리"와 같은 아름다운 노래들을 작곡해 연변인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중년 녀성작곡가 김경애씨는 "무대우의 거대 초불"로 심사위원들의 각별한 주목을 받게 되였다. 이 수필은 청력을 상실한 후 지었다는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를 련상케 한다. 작자는 하나의 미약한 존재가 집단속에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무궁무진한 힘과 숭고한 세계를 만들어낼수 있다는 철리를 터득하게 된다. 이 작품은 서사수필로서 생활적계기를 통해 작자의 인식변화과정을 자연스럽게 펼쳐보였고 하나의 목표를 위한 인간들의 만남과 화합이 얼마나 소중한것인가를 설교를 아니라 생동하는 인물과 장면으로 보여주었다. 연변작가협회 창작련락부 우광훈 주임은 축사에서 "문학잡지도 아닌 신문에서 이렇게 야심찬 문학농사를 짓고 연변문단의 작가들과 기자들간의 화합의 장, 문학교류 실천의 장을 마련하다는 자체에 큰 문학적인 비약과 력동성이 내재되여 있다.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과 CJ문학상은 연변문단의 최장수 문학상으로서 몇십년래 연변지역은 물론 중국전역에 분포한 우리 민족 구성원들의 문학발전을 주도해온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리고 기성작가들의 문학터전이고 문학신인들을 양성하는 주요 활동진지로 언녕부터 각광을 받았고 큰 성과를 올렸다. 이런 성과는 해란강문학상,씨제이문학상을 이끌어오는 연변일보사 조선문판 여러기자와 연변일보 문화부의 노력이다"라고 말했다.  이날 시상식에는 연변일보사 책임자들을 비롯한 연변지역의 언론계, 문화단체에서 온 100여명 문인,언론인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조글로미디어 김성화기자        
33    시;- 빛의 하루 댓글:  조회:5519  추천:0  2015-02-03
[모닥불문학 가을시화전 출품시]김승종 시-'빛의 하루'| ◆[이달의 한국詩壇]
32    시;- 나는 두만강 하얀 물새 댓글:  조회:4222  추천:0  2015-02-03
[스파밸리 한민족시화전]김승종 시-'나는 두만강 하얀 물새' 나는 두만강 하얀 물새     하루에도 열번 스무번 해가 웃고 달이 웃는 곳으로 걷고는 달려가고 달려가다가는  또 날기도 하는 나는야 하얀 물새 두만강의 하얀 물새 풋병아리 그 아기작 걸음으로야 어찌 어림이 있으랴 날으리 날으리라 해노래 달노래 배워준 두만강의 풋풋한 정을 안고 이 새벽녘에도 깃을 털고 난다   떠오르는 아침 해님 금빛 해살을 잡고 두만강 맑은 물결에  새하야니 바랜 넋이 훨~훨~ 만리창공을 날은다 난다... 오늘도 래일도         (김승종시인:중국 화룡시작가협회 주석)  
31    시;- 연변산들은...(가야하인터넷문학상 수상작) 댓글:  조회:1140  추천:0  2015-02-02
[죽림 김승종 시] 연변산들은 (외4수) 제3회 가야인터넷문학상 대상 '수림문학상' 수상작       ▲ 김승종 시인 눈도 떼웠다 코도 떼웠다 입도 떼웠다 귀도 떼웠다 온통 모두 다 떼웠다…   소소명명히 아름다웠던, 그렇게도 면면히 유구하던, 푸-욱, 정과 혼백이 슴배인 전설마저도 몽땅 떼웠다… 그 옛적 그 메아리마저도 돌아오지 못하는-   여보게, 친구! 남은것이라도 잘- 보험궤속에 넣어두라구 그리구, 잘- 가꿔보자구!   ㅡ모두들의 록색평화는 무사함둥…   국자가 일기   핫, 좋다 오랜만에 국자가가 가슴을 열고있다   어느날  어느날 그 어느날인가 저 비좁던 다리로부터 가슴 여린 《+》까지 전족이 고린내 피우며 지긋지긋 걸어 다니던 길을- 《캉다》, 《홍색》, 《빠얼치》가 서로서로 바르케트를 쌓고 혁명 혁명한답시고 참 으시대던 모든 길들을-   핫, 좋다 오래만에 국자가가 가슴을 활짝 열고있다... 당신의 발길은,- 무사하니껴...    록색비닐쓰레기들    떼까막까치들                     무리춤, 왕문둥이들의                     아우성, 사시절혁명의                     역반란, 12간지띠풀이                     넋두리... 저 경쾌한 화폭과 저 장엄한 메아리가,- 오늘의 사슬과 래일의 사슬이                    뚝                    뚝 끊히는       한 찰나로 옮아가는,- 그리고 당신의,ㅡ 록색장바구니는 무사하니껴...   나의 그 어떤 위대한 육물(肉物)과 성스러운 령물(靈物)들이 쑥덕쑥덕 한다 쾅,ㅡ 백색쓰레기들의 잔치 한마당이다 그속에서 지렁이며 굼벵이며... 쥐며 두더지며 그리고 까마귀이며...가 너나없이 구수한 노래가락 춤사위 연출한다 또 그 순간 진종일 너머 넉사자 입으로부터 허리께까지 쭉- 째진 메카폰족들이 죽기살기 승벽내기 하며ㅡ 소리쓰레기를 새까맣게 두들겨패댄다 찬란한 숲우둠지를 반발자국만 비껴 디뎌도...   또 자정 너머 들 흐물흐물 근드리 싸구려를 발산하는,- ...   는 새벽녘, 눈꼽 께저분히 매달린 새 일력장 처절히 처절히 눈꼴 밟혀온다 ㅡ으악! 오늘, ! ㅡ 모두들, 들숨 날숨 안녕하시우...   그립다 그리워 또 다시 한번    외할머니 우리 집으로 놀려 오시면 그 언제나 삼베보자기엔 그윽한 가을향기 물씬 젖어 있고... 하얀 모시수건에선 알락다람쥐와 다투며 줍었다는,- 노오란 깸알이 어느새 요내 입속으로  똑또그르... 구수히 흘러든지 오래고,- 버들방천 앞내가에서 잡은 돌쫑개며  버들치며를... 해볕 몇오리와 함께 스리슬슬 군침돌게  응근슬쩍 말리웠다는,- 어느새 울 아빠 막걸리 들고 코노래 흥얼흥얼... 넉사자 입은 언녕 귀가에 걸린지 오래고,- ... 오늘도 이끼 누런 추억의 시렁에서 둘도 없는 고향을 정히 내리워  새하야니 새하야니 짓빻는다...
30    그림과 시 댓글:  조회:1203  추천:0  2015-02-02
                         그림과  詩                       @중국동포타운신문 제137호 2008년 10월 26일 발행                    
29    시;- 개와 개 그리고 개 댓글:  조회:1131  추천:0  2015-02-02
                                                   愚問 愚答                                                          한 마리 개도                                                             개                                                  두 마리 개도                                                             개                                                  천 마리 개도                                                             개                                                  한 마리 개가 짖어도                                                             개                                                  두 마리 개가 싸움해도                                                             개                                                  두 마리 개가 싸움하는 것 구경하는 것도                                                             개                                                             …                                                  누우런 이끼 낀 沈默을 깨면 소리가 난다…         녹색공룡                                                        눈, 모든 것이 고갈되어가고 있다 하꾸마                                                코, 모든 것이 여위어가고 있다 하니껴                                                입, 모든 것이 갈라터지고 있다 하잼두                                                귀, 모든 것이 훼멸되어가고 있다 하닌디ㅠ                                                알, 모든 것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청정, 모든 것이 末을 고하고 있소…                                                                                                 그 어느 날 새벽녘-                                                자연의 뒷소리여…                                                                                                 엇~허,                                                너도 밤나무를 심으며,ㅡㅡㅡ                                                                                                 여보소                                                    淸瀞 = 허공 = 10분의 1                                                무덤 앞에서 덥썩 절하며 비워보기                                                무덤 뒤에서 홀로 가토하며 비워보기                                                무덤右편에서 묵은 풀 베어버리며 비워보기                                                무덤左편에서 돌 주어내며 비워보기…                                                                                                 모두들 깻까잠둥…!…?…         녹색서점邊         위대하시고…                                                                              저명하시고… 세계의 최초이시고… 포에지(詩)묶음 500부 印刷,- … 서점가(邊) 詩 판매대는 먼지님의 잔치마당으로,ㅡ 서점가 詩 판매대는 곰팽이님의 향연으로,ㅡ … 엇~허~ 좋을씨구… 묶음 50000부 印刷,- … 눈매로 향한 입매로 향한 콧매로 향한 귓매로 향한 볼매로 향한 누드쇼로 향한,ㅡ … (文學 詩왕관은 어디에서 팔고사고 함둥!?)          
28    시;- 그 어느날의 빛 댓글:  조회:1210  추천:0  2015-02-02
[한글날 기념특집 김승종 시] 그 어느 날의 빛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글 소개 ]                                                        오늘도 흐른다...                                                맥(脈),                                                       맥과                                                            맥으로ㅡ                                  개굴개굴 ㅡ 복사꽃 피는 내 고향이다가                                옹기종기 ㅡ 꿀샘을 파는 초가삼간이다가                                새콤달콤 ㅡ 대추랑 감이랑 따주는 할배할매이다가                                시원컬컬 ㅡ 막걸리 빚는 시골의 향음이다가                                에루와 데루와 ㅡ 강강수월래 강강수월래이다가                                어절씨구 저절씨구 ㅡ 아리 아리 아리랑이다가                                              오늘도 흐른다...                                                 맥(脈),                                                        맥과                                                             맥으로ㅡ                                  진단(震檀)이다가                                이다가                                이다가                                이다가                                에루와 데루와 ㅡ 강강수월래 강강수월래이다가                                어절씨구 저절씨구 ㅡ 아리 아리 아리랑이다가                                              오늘도 흐른다...                                                 맥(脈),                                                        맥과                                                             맥으로ㅡ                                  이다가                                10월의 빛, 그 어느날의 찬란함이다가                                이다가                                백두대간 너머 너머 두만강 압록강 건너 건너이다가                                에루와 데루와 ㅡ 강강수월래 강강수월래이다가                                어절씨구 저절씨구 ㅡ 아리 아리 아리랑이다가                                               오늘도 흐른다...                                                   맥(脈),                                                          맥과                                                            맥으로 흐르는ㅡ                                그 마력(魔力)                                                  영원불멸, 영원불멸,                                아, 그 이름 세월과 더불어                                                       온 누리 만방에...                                누누천년 누누천년 새 푹풍                                                    새하야니 일으키는 훈민정음 !           ▲ 아호 :竹林 일명:文钟 1963년 12월 17일(음력) 中国吉林省延边和龙市芦菓乡竹林村 출생 사범학교 졸업, 교원, 금융사업 종사, 현재 자유기고인. 전 연변 화룡시작가협회 주석; 중국 연변작가협회 이사; 중국 연변시인협회 회원; 중국소수민족작가연구중심 회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현 재한동포문인협회 시분과 부장 제3회 한국 세계계관시인문학회 본상 수상. 24회시탐구회 시우수상 수상 제1시집: 보리 한알과 등록되잖은 ? 와 일회용 삶. 중국,연변인민출판사 제2시집: 보리깜부기와 《구혼광고》와 흰 그림자의 삶. 한국,도서출판 신세림 현재 한국체류중.  
무루(无漏)의 한 극(极)에서 ㄱ 그때는,- 그때는,- 이 마을 저 마을 아이들 모두다 미쳐버렸댔슈 핫, 시골길 허위허위 톺아지나는 트럭 뒤꽁무니 따라가며 그 그을음내 맡고 또 맡으면서 그렇게나마 새하야니 새하야니 코날개 벌름대던,-… ㄴ …… …… ㄷ 요즈음,- 요즈음,- 이 마을 저 마을 아이들 모두다 정말로 미쳐버렸는가보우 시퍼렇게 피멍꽃 옮아가던 18현(鉉)도 시허옇게 소금꽃 돋아나던 사물(四物)도 핫, 어절씨구 팽개치고 재너머로 떠나버린,-… ㄹ 요즈음,- 요즈음,- 참, 24기(氣)와 72후(候)도 모두다 미친다 생야단이유 황사바람에 죽림동(竹林洞) 떡갈나무들도 가슴 부여잡고 찬란히 신음하고 있는,-… ㅁ 성               다 스               정 러               다 웠               감 던 해빛도,- 했던 해볕도,- 그 그을음내에 지쳐버리고 그 구겨진 령혼에 찌들어버린채 저기 “무릉도원”의 무루(无漏)의 한 극(极)에서 버둥대고 있는 이때,-… ―모두들 무사함둥…
26    가야하문학상 댓글:  조회:4722  추천:0  2015-02-02
김승종(왼쪽 첫번째), 박장길(왼쪽 세번째)시인이 수림문학상과 가야햐문학상을 수상했다. 9월 2일 오후, 연변작가협회 제3회 《가야하》인터넷문학상 시상식이 연변작가협회 2층 회의실에서 있었다. 연변작가협회 상무부주석 최국철은 개회사에서 연변작가협회 《가야하》인터넷문학상은 연길가야하정보기술유한회사와 연변작가협회가 공동으로 제정한 인터넷문학상으로서 기성문인들에게는 문학터전이고 문학도들에게는 활동진지이며 문학의 엔세대와 중소학생들에게는 활동기지로 된다는데 의의가 크다고 지적하였다. 심사결과 중소학교조에서는 길림시조선족중학교 초중 3학년 2학급의 채해연, 녕안시조선족중학교 고중 1학년 2학급 김지애, 룡정시아송소학교 6학년 리성 등 10명 학생이 우수상을, 목단강시조선족중학교 초중 2학년 1학급의 박설, 연길시실험중학교 3학년 4학급의 김연 등 3명 학생이 동상을, 길림시조선족중학교 초중 3학년 2학급의 리은화, 연길시중앙소학교 5학년 김위민 등 2명 학생이 은상을, 화룡시제3중학교 3학년 2학급의 김철민학생이 금상을 수상하고 성인조에서는 김기덕, 김동진, 문설근이 공로상을, 리영, 림유경, 김은하가 신인상을, 배성란, 남영선, 김단이 우수상을, 함길자, 최려나, 최재문이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대망의 가야하문학상과 《수림문학상》은 박장길시인과 김승종시인이 각각 수상하였다. 시상식에서 연변대학 조선-한국어학원 리광일교수가 수상자 발표와 심사평을 하고 수림문화재단의 신경호 상임리사가 축사를, 연길가야하정보과학기술유한회사 김무경리가 격려사를 하였다.
25    조글로 보도 댓글:  조회:4315  추천:0  2015-02-02
  김승종《시천하루밤과 시작노트와 시지기 삶》펴내  2013년6월4일    조선족시단에서 자기만의 얼굴을 고집하면서 개성적인 시를 창작해오던 김승종시인이 최근에 조선족문단의 최초 시잠언집으로 알려진 《시천하루밤과 시작노트와 시지기 삶》를 펴내면서 또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앞쪽 138페지, 뒤쪽 138페지 총 276페지 분량에 2200여개의 시 관련 잠언이 수록된 이 저서는 김승종시인의 9년간의 로고와 시에 대한 그와 여러 지성인들의 철학, 견해가 고스란히 담겨져있다. 특히 이 책은 형식상에서 앞뒤로 반반씩 나누어져있고 러시아 초현실주의 화가 블라디미르 쿠쉬의 작품이 페지마다 장식되여있어 읽는이들에게 예술의 향연을 동시다발적으로 선사하고있다.   “...  그리고 그리고, 세종대왕님께도 합장하고 공손히 가장 성스러움을 드린다. 아마, 내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우리 말, 우리 글을 선사받지 못하였다면 차마 시공부이고 시란것 만져볼 엄두도 내지 못했을것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참 고맙고 감개무량하다. 그 성스러운 우리 말, 우리 글 배우기에서 천만다행, 마지막수업이 없기만을… 그와 더불어 시의 맥도 찬란히 영원히 이어지기만을… 력사와 실사앞에 한가지 고백할것이 있다. 부모님께서 정히 만들어주신 지라를 닭해(2005년6월22일)에, 무루(无漏)에게 먼저 바치나니 금싸래기같은 두번째 생명을 얻었다. 바로 그 두번째 생명의 뒤안 길,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삶의 길에서 돌멩이를 던지는 그 어떤 그림자따위들과 그 어느 한 극의 모두들 안녕하지 못한 형태소체들은 저의 시공부의 그라프를 끝까지 긋도록 이 텁석부리를 늘 채찍질하군 하였다.”고 시인은 출판경위에서 적고있다.   김시인은 아호가 죽림(竹林), 1963년 화룡 죽림에서 태여났다. 1980년 《도라지》잡지에 시 “고추”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 연변작가협회 리사, 중국소수민족작가연구중심 회원,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으로 활약하고있으며 《보리 한알과 등록되잖은 R와 일회용 삶》, 《보리깜부기와 구혼광고와 흰 그림자의 삶》, 《두 동네 은회색카니발(공편저)》 등 시집을 펴낸바 있다. 두만강여울소리 시탐구 우수상, 한국세계계관(桂冠)시인문학회 시본상 등 다수 문학상을 수상했다. .   김시인은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중국조선족대학생 리륙사문학제를 유치하고 조선족시인 시집 출간에 사재를 터는 등 우리 문단의 정진을 위해 많은 일들을 해왔다. 문인숙 기자        
24    길림신문 김태국 보도 댓글:  조회:5206  추천:0  2015-02-02
평론   김승종시인 시잠언집 출간   연변 모이자  2013-06-04 15:02:30         ☞  죽림·김승종시인(50세)의 30여년간 시공부 메모쪼가리가 향항파랑새출판유한회사에 의해 아름다운 책으로 출간되여 요즘 독자들과 만났다. 《시천하루밤과 시작노트와 시지기 삶》이란 제목으로 출간된 노트는 시인이 시공부를 하면서 메모한 잠언 2,200개를 수록하고있다. 길림성 화룡시 로과향에서 출생한 시인은 남평에서 고중을 다닐때부터 작가의 꿈을 키우며 문학공부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1980년 《도라지》잡지에 시 《고추》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 동북3성 문학도들의 모임인 《새별문학사》를 거쳐 《평강벌문우회》, 《두만강문우회》, 《천리봉문학중심》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한 시인은 선후로 화룡시청년시회 회장, 화룡시작가협회 주석을 력임하기도 하였다. 《두만강여울소리》 시탐구상, 한국세계계관시인문학회 본상 등을 수상한 시인은 《보리 한알과 등록되잖은 Ⓡ와 일회용 삶》, 《보리깜부기와 〈구혼광고〉의 흰 그림자의 삶》, 《두 동네 은회색카니발》(공저) 등 시집들을 출간하면서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시인으로 부상했다. 이번에 출간한 시공부노트는 시인의 문학활동에, 특히 시창작에 동력으로 되였던 명언들을 작가의 열독순서와 세계관의 변화에 따라 고스란히 담았다는데 그 의미가 크다. 노트를 펼치면 세계 유명시인들과 평론가, 철학가, 교육인들의 시에 유관된 명언이 주해없이 고스란히 한줄로 안겨와 보는이들이 손에서 놓기 아쉽게 한다. 《중국조선족시화선집》 출판기념식에서 김승종시인(오른쪽 첫 사람)이 시화선집을 보고있다. 출처(연변모이자)  
23    한국 경북매일 기사 댓글:  조회:4554  추천:0  2015-02-02
경북매일신문 '금쪽같은 내새끼들' 낳은 정 못지않은 암탉의 모정   [경북매일신문 2012.6.13 보도] 직접 품어 부화시킨 꺼병이들 지극정성 돌봐     ▲김승종씨가 자신이 기르던 암탉으로 부화시킨 야생 꺼병이들 을 돌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닭이 알을 품으면 병아리가 된다. 그러면 꿩이 알을 품어 부화시킨 새끼를 뭐라고 부를까. 국어사전에는 꿩의 어린 새끼를 `꺼병이` 라고 하고 있다. 꺼병이는 암수구분이 안되는데다 모양이 거칠고 못생긴 탓에,흔히들 사람의 생김새에도 꿩 새끼에 빗대어 꺼병이, 혹은 꺼벙이, `꺼벙하다`고 부르기도 한다.   안동의 한 양계장에서 야생의 꿩알을 품은 뒤 태어난 꿩 새끼를 자신의 새끼인양 정성껏 돌보는 꺼벙한(?) 암탉이 있어 화제다. 이 암탉을 어미인 줄 알고 마냥 졸졸 따라 다니는 `꺼벙한 꿩 새끼`들 또한 그 자체가 흥밋거리다.   안동 일직면 김승종 시인, 주운 꿩알 암탉둥지로 별도거처까지 마련… “자라면 야생으로 보낼 것”   안동시 일직면에 사는 김승종(50·시인)씨. 그는 지난달 초 인근 야산 경사진 곳에서 이리저리 흩어진 연갈색의 꿩알 10개를 주웠다. 비 때문에 알들이 토사에 떠내려 왔는지, 근처에 알을 보호할 둥지도 없었다.   메추리알 보다 크고 달걀 보다 작은 꿩알. 이대로 두면 자연 상태에서 부화되지 못한다는 것을 직감한 김씨는 고민 끝에 꿩알을 자신이 기르던 닭에 품게해 부화시키기로 했다.     ▲부화된 지 5일째 된 꺼병이들.     김씨의 거사(?)에 간택된 닭은 집에서 기르던 10여 마리 암탉 가운데 몸 전체가 하얀색인 실키오골계란 종이었다. 김씨는 비교적 유순한 이 암탉이 한 눈 파는 사이 이미 둥지에 품고 있던 달걀을 슬그머니 빼내고 꿩알을 대신 채워 넣었다.   이 암탉이 정성껏 품은 지 21일째 되던 지난달 31일, 드디어 병아리 아닌 꺼병이가 부화됐다. 그것도 10개의 꿩알 가운데 7개나 부화에 성공했다.   그런데 병아리 색깔이 이상한 탓인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존 닭 무리들이 꺼벙이들을 막 쪼기 시작했다.   때문에 김씨는 어미닭과 꺼병이들을 모두 피신시킬 별도의 거처를 마련했다. 고양이나 들짐승 습격도 막을 겸 촘촘한 울타리도 쳤다.   “삐삐, 삐약, 삐삐, 삐약….” 울음소리가 병아리 소리와 흡사한 7마리의 꺼병이들이 닭장 안에서 어미닭을 졸졸 따라 다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태어난 지 5일 째인 꺼병이들은 몸 전체 연갈색 보호색에 볏이 없고 야생 꺼병이처럼 엷은 줄무늬를 가졌다. 그래도 요놈들은 야생성이 강해 풀이 난 바닥에 좁쌀 등의 먹이를 줘야 그나마 먹는다. 어미닭은 자신이 품어 부화한 꺼병이들에게 벌레를 잡아 주기도 하고, 날개에 품기도 하는 등 자기 새끼인양 모든 것에 지극정성이다.   김승종씨는 “이런저런 연유로 야생 꿩알을 부화시키기는 했지만 앞으로 자라면 자랄수록 생김새가 점점 차별화돼 결국 기존 닭 무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미운 오리 새끼`가 될지도 모르겠어요. 적당히 자라면 야생으로 돌려보낼 생각입니다” 고 말했다.   안동 권광순기자    
22    <<연변모이자>>기사 댓글:  조회:5648  추천:0  2015-02-02
  모던시집 '두 동네 은회색 카니발' 출판 기념회 연길서   2011-01-27 10:26:47               김승종후원자가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 김영건주임에게 시집을 증정하고 있다. /김창희   (흑룡강신문=하얼빈)윤운걸 채복숙 기자 = 1월 26일 지린성 연길시 한성호텔에서 한춘시인과 최룡관시인 계렬의 모던시집 '두 동네 은회색 카니발' (연변인민출판사)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두 동네 은회색 카니발'은 최룡관시인과 제자 및 한춘시인과 한춘시인 계렬의 도합 22명 시인들의 모더니즘 시로 묶어진 시집이다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 주최로 되는 이번 출간기념회의에는 연변작가협회 최국철 부주석과 최삼룡, 장정일, 석화 등 원로작가와 시인들이 참석, 조선족 문단에서의 모더니즘 시의 현황과 앞으로의 추세에 대해 탐구하였다. 한춘시인은 '두 동네 은회색 카니발'의 출간은 조선족 시문학사의 배경과 새 시기의 문학현상 그리고 예술방식 등 다방면, 다각도에서 볼 때 심원한 의의가 있는 '시문학사적사건'이라고 짚었다.   본 시집의 출판과 출판기념회는 김승종시인의 후원으로 이루어졌다. 출처(연변모이자 )  
21    대구시인학교에서 댓글:  조회:5332  추천:0  2015-02-02
      대구시인학교, 한민족시인의 밤(2009년 10월 24일) ◀ 윤청남시인이 가지고 온 북한그림(출연자께 한장 씩 드림)     올해 제1회 한국 충북 괴산 흥천사 주관 나옹선사문화제「북방조선족문학상」 을 수상한 바 있는 길림성 연변지구 도문의 윤청남시인과 기림성 연변지구 화룡의 김승종시인이 10월 24일(토) 저녁 7시 대한민국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대일리 서지월시인의 집필실 '시산방 남서재' 대구시인학교 강의실에서 함께했다. 아쉽게도 구석본 대구문인협회장과 이구락대구시인협회장 그리고 혜봉스님, 이춘호 고희림 홍승우 강문숙 최문명시인 등이 여러행사 및 개인사장으로함께 하지 못했는데「우리말의 상상력」저자이며 국어학자인 정호완 대구대 명예교수님, 서강스님, 정이랑 황태면시인, 정경진 고안나 신표균 사림시 시인들 그리고 시낭송가 김명음님 등이 함께한 오붓한 자리였다. 연변문화예술연구소 소장  리임원시인은 충북 청주 포석 조명희문학제 행사 일정관계로 참여하지 못해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혜봉스님을 대신하여 한민족사랑문화인협회 공동의장 서지월시인이 중국 조선족 윤청남시인께 나옹선사문화제「북방조선족문학상」상장을 수여했으며 한민족사랑문화인협회 전문시낭송가 김명음님이 조선족 도문시인 윤청남 시 와 조선족 화룡시인 김승종 시  과 대구시인학교 고안나 문화부장이 서지월시인의 시 를, 정이랑시인이 자작시 을 낭송했다. 특히 시낭송전문가 김명음님 시낭송이 조선족시인들께 놀라움을 안겨주기도 했다.                         **한민족사랑문화인협회 제공     
20    흥천사에서 댓글:  조회:4026  추천:0  2015-02-02
              ◆2012' 흥천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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