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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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1    추모(1) 먼곳에서 찾아온 류연산 친구 댓글:  조회:5505  추천:25  2011-01-23
【편자의 말】  오늘은 새해 2011년 1월 23일, 아침에 방룡남박사와 연길의 우광훈 동갑친구한테서 어제 오후 3시 37분 병환으로 시달리던 류연산친구가 연길에서 우리 곁을 영영 떠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확인하고 가슴이 와그르르 무너져 내립니다. 어떤 사이인데, 어떤 친구인데 해종일 연산친구 생각뿐이고 안절부절 일손이 갚히지 않습니다.  6000리 밖이여서 금시 달려가지는 못하고 가슴을 잡아 뜯다가 친구의 명복부터 빌어야 겠다는 생각에 친구와의 이왕지사를 돌이키며 서로의 사진들을 정리하며 2009년 5월 1일에 쓴 수필 글도 찾아 보았습니다. 추모글은 따로 쓰기로 하고, 이미 쓴 글과 연변대 재학시절 사진과 2009년 4월 강남행 사진들을 먼저 조글로에 올리며 눈물속에서 친구의 명복을 빌어 봅니다.  친구여, 친구의 구천길 평안하소서 !!!                먼곳에서 찾아 온 류연산 친구     중국“론어”를 펼치면 첫 구절이 “유붕자원방래불역락호”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는 명구가 안겨든다. 그뜻인 즉 “벗이 있어 먼곳에서 찾아오니 이 아니 기쁠손가”라는 말인데 6000리 멀리 내 고향 연변에서 소흥으로 찾아온 대학시절의 고향친구 류연산과 그의 안해 박희옥씨의 경우가 그러한것 같다. 며칠전 연변대 교수로 지내는 류연산친구한테서 관련 학술세미나 참가차 절강 가흥으로 온다는 전갈이 왔다. 4월 24일부터 26일까지 세미나가 끝나면 곧추 소흥으로 달려오겠단다. 너무도 흥나서일까, 친구가 오련다는 날—-4월 27일 오후가 무척 기다려지기만 한다. 돌이켜보면 나와 류연산친구와의 본격적인 친구인연 은 대학입시제도 회복후 두번째로 연변대학 조문학부에 입학하던 32년전의 일. 이해 1978년 10월에 나와 류연산은 행운스럽게도 연변대학 조문학부 78년급 대학생으로 되여 대학공부를 시작하였다. 둘다 고향이 연변의 화룡현이고, 그것도 목도고개 하나를 사이둔 해란강반이여서 둘사이의 인연은 남달랐다. 어느날 학급동창들인 료녕 무순의 리봉국이랑 같이 몇몇이 평강벌 상단에 자리잡은 류연산친구의 고향집을 찾았는데 아래 웃방을 가진 아담한 농촌초가집에 웃음이 넘치여났다. 한뉘 농사로 잔뼈를 굳히여온 순박한 류연산의 부모님들은 아들의 대학친구들이 왔다고 두부를 앗는다, 새 이밥을 짓는다 지성이 넘쳐났다. 30여년이 흐른 지금에도 친구부모님들의 살뜰한 보살핌에 따끈따끈한 하들하들 두부에 토장국, 입맛을 돋구는 김치에 근들이 술잔을 나누던 그 나날이 눈에 선하다. 나와 류연산~~우린 이같이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는, 내가 몇살 우이라고 형님동생간으로 지내는 막역지우였다. 그러던 1979년 12월에 나는 연변대란 이 과학의 전당에서 지금의 안해—-77년급 한어학부 여대생을 만나 사랑에 빠져 들었는데 류연산친구가 기어이 보자고 한다. 련애초라 사절하니 먼발치에서 모습이라도 눈동냥하자고 보챈다. 고로 우리 둘은 새로 든 새 기숙사 2층의 호실에서 창문밖으로 지나는 여자친구를 곁눈질하게 되였는데 류연산이 “아매같은 여자구만!”하며 손사래를 치지 않는가. 나이보다 숙성해 보이는 20대 중반의 처녀여서 “아매”같이 보인 모양이다. 그만큼 우리 사이는 허물도 없이 믿고지내는 끈끈한 형님동생 사이, 대학을 마친 근 30년 세월속에서도 우리 우정은 드팀없다. 그런 류연산친구가 멀지않은 가흥까지 왔다가 소흥으로 온단다. 론어의 “벗이 있어 먼곳에서 찾아오니 이 아니 기쁠손가”라는 말이 나의 경우를 두고하는 말이렸다. 일각이 삼추같이 기다려지는 나를 어찌할수가 없다. “집떠나  며칠이라 토장국에 우리 멋의 봄나물, 김치가 생각날테지!” “글쎄요!” 나는 안해와 주고받으며 섬섬거리다가 졸업반애들의 졸업론문지도수개를 팽개치고 아들애를 끌고 소흥 북쪽변두리의 매산으로 달려갔다. 매산은 국가급 경호습지풍경구의 중심에 우뚝 솟아오른 나지막한 산인데  이 산자락의 어디나 강남의 특유한 곰취가 널리 자라난다. 곰취를 등산가방 하나에 채우고 귀가하니 안해가 미나리김치, 배추김치, 물김치들을 맛갈스레 만들어 놓았다. 무우와 콩나물로 된 물김치에 달래가 들어가야 제격인데 캐온 달래가 동강이 났다는데. 내친김에 나는 잠간 휴식을 취하고는 월수대 캠퍼스 남대문밖 회계산 호수풍경구를 다시 찾았다. 흔하던 달래는 우리 류은종교수님이랑 싹 캐간 모양인지 달래다운 달래가 보이지 않는다. 나무숲속을 샅샅이 헤치며 헤둥거려서야 달래 두어줌을 캐여 들었다. 상상외의 성취라면 유독 한곳뿐인 한마당에서 내 고향 연변의 세투리와 똑같은 생신한 세투리를 처음 발견하고 가득 캐여든 것이라 할까. 집에는 강남 봄나물들인 미나리, 곰취, 고사리, 달래, 세투리 등이 구전하여 기분이 별로이다. 잇따라 4월 27일 오후 늦은 때에 가흥에서 류연산친구가, 상해서 부인되는 사람이 선후로 소흥땅을 밟고 월수대 교수아빠트 우리 집에서 고향 봄나물을 주식으로 하는 만찬이 이루어졌다. 손님으로 모신 분들은 우리 절강월수외대 한국어과의 류은종교수와 부인 량복선, 김성숙교수와 서재학교수, 김덕모교수와 부인 리옥금교수 등. 그중 김성숙, 김덕모, 서재학 교수분들은 류연산 연변대교수와 처음이지만 류은종교수 부부는 남다른 사이였다. 나와 류연산씨가 류은종은사님의 연변대 조문학부 제자라면 류연산씨의 부인과 류교수님의 부인님은  한 직장인이고, 류연산씨와  량복선교수님은 또 화룡서성 한고향에, 1949년에 세워졌다는 서성중학교 선후배 사이였다. 재미나는 것은 안해가 류연산친구한테 술을 부으면서 그젯날 연변대시절 “아매”라고 놀린 에피소드를 꺼내들고 “따진”것, 류연산씨는 나 안해의 돌연습격에 그런 일이 없다고 변명하고, 한자리 손님들은 그런 류연산씨의 말과 행동이 유머를 이루어 한바탕 폭소판이 벌어졌다. 이튿날 점심상과 저녁상은 류은종교수님 댁에서 치러지고 류은종교수님이 돼지순대를 하겠다며 소흥 온시가지를 일주하는 사이 나는 관련 90분강의를 뒤로 미루고 류연산부부를 안내하여 월수대 가까이 대우릉과 대우릉 구역내 석범산정의 대우동상, 소흥도심의 로신선생 고향집을 두루 돌아보았다. 소흥에 처음 오는 이들부부는 연변서 아직 볼수없는 강남의 푸른 록음세계, 아름다운 장미꽃, 월계화 등이 만발한 강남대지, 강남의 특이로움을 드러내는 산과 들, 유구한 력사문화도시—소흥의 대우릉, 로신옛집을 유람하며 내내 감개에 젖어 있었다. 정말이지 머나먼 타향 강남 소흥에서 30년지기 고향친구 부부를 만난다는것이 그리도 좋을수가 없다. 친구따라 강남으로 간다는 말이 실감나는 시각이다. 친구란 무얼까, 세상사를 헤아리는 40대 그 나이에는 세월속 한때 친구란 개념조차 삭막해 가더니만 50대의 언덕에 올라서면서부터는 친구란 존재가 그지없이 소중한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머나먼 강남땅 친구하나 가까이 없는 생활환경이여서 더욱 그러한지, “벗이 있어 먼곳에서 찾아드니 이 아니 기쁠손가”가 피부로 느껴진다. 인생 50대에 이르면 속마음을 벽이없이 털어놓을 친구가 전에없이 소중해지는 가부다. 그래서 한국의 한 박사는 “50대 이후를 편안하게 보내려면 가족과 친구, 취미 이 세가지 마중물을 준비해 둬야 한다”고 이른다. 로후 세가지 마중물의 하나가 친구, 친구의 소중함을 알리는 인생명언이라  받들고싶다. 론어“위정편(爲政篇)”에는“오십이지천명(五十而知天命)”이란 명구도 있다. 인생 50십에 하늘의 뜻을 깨달았다는 공자님의 얘기인데 공자님의 인생  50십이해와 나의 인생50십 이해가 어울려 돌아가는것 같다. 중년의 생활속에서 몸부림치며 친구의 소중함을 한때는 잊고살다가 50대 언덕에 오르매 친구가 맘속에 꿀맛같이 흘러드니 나도 인제야 사람이 되여가는 모양이다. 먼곳에서 찾아온 내 고향 친구 류연산과 그의 안해, 강남땅 소흥에서 만나 어울리는 그멋 왜 좋기만 할까. 형으로 모시는  서재학교수가 “동생한테 류연산친구와 같은 30년지기가 있다는 것이 부럽기만 하다”고 하니 어깨가 잔뜩  으썩해 난다.   2009년 5월 1일, 강남땅 두앵원에서    
370    새해 벽두에 림해설원 회계산에 올라 댓글:  조회:4498  추천:22  2011-01-22
편자의 말:    새해 벽두에 폭설이 쏟아져 림해설원을 이룬 강남의 회계산에 올랐습니다. 조글로 "남방아리랑"코너에서 더 많은 사진을 대할수가 있습니다.          새해 벽두에 림해설원 회계산에 올라   1   예로부터 림해설원이라 하면 이 나라 북방, 그것도 눈내린 겨울의 동북대지를 일컿는 부름으로 알려져 왔다지만 북방이 아닌 남방에도 림해설원이 펼쳐졌다면 믿을수 있겠는가. 새해 잡아 1월 18일 아침부터 21일 아침까지 내린 큰눈—폭설은 남방의 산야는 물론 강남의 회계산을 온통 황홀경 림해설원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림해설원이란 부름은 북방만의 부름이 아닌가 부다. 새해 1월 17일 오후, 나는 긴한 일로 기말시험의 한때를 타서 항주 림평행에 올랐다. 이튿날 아침 7시 40분 중형버스로 귀로에 올랐는데 누군가 밖에서 눈꽃이 날린다고 소리 지른다. 차창밖을 내다보니 과연 성긴 눈꽃들이 하늘하늘 흩날린다. 때론 하늘을 메우며 내리기도 한다. 이때라고 차장 역을 맡고있는 청년운전사가 일기예보에 따르면 이제부터 내리는 눈은 남방 넓은 범위에 걸쳐 21일까지 내리며 교통대란이 들이닥칠것이니 음력설맞이 길떠날 사람은 빨리 떠나야 한다고 떠들어댄다. 바깥 흐린 날씨 눈꽃을 보아 제법 눈이 내릴 잡도리다. 항주 림평에서 소흥까지 달리는 두어시간 내내 그러하다. 그렇게 해종일 눈발을 세우며 들볶던 하늘은 1월 18일 저녁부터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한다. 1월 19일 아침에 일어나니 벌써 눈은 바깥대지를 하얀 세계로 만들어 놓았다. 1월 20일에 이르러 회계산풍경구의 눈은 이미 20센치미터를 넘어섰다. 가장 많이 내린 곳은 한자도 넘는것 같다. 처음 보는 남방의 큰눈이 그렇게 희한할수가 없다. 겨울방학 기간 내 고향 연변에 가 있은데서 2008년 2월 남방을 강타한 일대 폭설을 대하지 못했으니 희한할 수밖에 없는거지.   2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카메라가방을 둘러메고 절강월수외국어대 캠퍼스를 지나 풍경이 수려한 회계산풍경구 구내에 들어 섰다. 어딜 보나 절경이라서 어느 설경부터 찍어야 할지 모르겠다. 연도 이모저모 설경들을 찍고 또 찍으며 회계산 향로봉 아래 로봉선사 정문에 이르니 봉산(封山)이란다. 큰눈에 유람길들이 막히였으니 로봉선사 구내를 지나 향로봉 정상에 오를수 없다는데야. 나는 별수없이 로봉선사 남쪽 산언덕 등산로를 택했다. 산언덕 등산길 어구에 들어서니 산언덕 길에서 내려다 보는 큰눈속 로봉선사 천왕전이며 종루며 고루며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큰눈을 들쓴 산언덕길 설경은 보다 황홀경을 이룬다. 그 황홀경이 오죽하면 나의 앞에서 등산하던 소흥출신 한 처녀애가 처음 보는 희한한 설경이라며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을까. 산언덕 중턱 반석 구간에 이르니 사방이 환히 펼쳐진다. 눈덮힌 회계산 서쪽 구간 전체가 림해설원을 이루며 마음이 둥둥 뜬다. “야~야” 경탄이 절로 나는데 이곳 반석구간을 지나 정상으로 올랐던 젊은 부부 패들이 향로봉 아래 구간도 봉산이라며 향로봉 정상에 오를수가 없다고 한다. 그들 말에 소흥출신의 처녀애는 아쉬운대로 돌아서지만 나는 향로봉 정상행을 포기하지 않았다. 산중턱 반석구간을 지나 수풀을 이룬 산비탈 길에 들어서니 회계산 설경이 절경을 이루는데 나의 정상행 결단이 천만 옳음을 말해 주고도 남음이 있다. 보시라, 풋눈도 아니고 자국눈도 아닌 자눈이 숲속 남방나무들과 아지들에 담뿍담뿍 쌓이여 가관인데 백옥을 뿌려 놓은듯 티끌 한점 없는 정갈한 숲속의 눈은 그야말로 숫눈 그대로이다. 산아래 인간사회에서는 보기가 어려운 정갈한 눈들, 우리 북방이라면 앙상한 나무가지들에 포근히 내려 앉았으련만 남방속 여기 강남은 겨울철에도 푸르싱싱한 나무가지들과 잎들을 마구 덮어 버렸으니 이색적인 눈속세계가 매력적이기만 하다. 나는 산중턱 비탈숲속길을 지나 정상구간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왜 회계산을 이토록 사랑하는 걸까. 말하자면 2006년 가을 강남으로 처음 진출한 그때로부터 말해야 하는데 때도시도 없이 절강의 명산이라는 회계산을 오르내리다가 회계산이 그저 홀홀히 지나쳐 버릴 산이 아니라는것을 보아냈다.   3   먼저 지리적 위치로 말하면 광의적 의미의 회계산은 지구급 소흥시 경내의 소흥, 제기, 승주, 상우 등지에 걸치는 엄청 크기의 강남땅 산맥이라지만 협의적 의미의 회계산은 소흥 경내의 완위산, 향로봉, 석범산 등 만을 말하니 소흥 시구역에서 동남으로 6킬로미터 떨어진 회계산 향로봉 구간이 명실공히 회계산의 중심구간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회계산이 중국의 첫번째 왕조를 이루는 하나라의 등장과 관련되니 회계산에 이르러 대홍수를 다스리던 대우님이 이땅에서 회계(소흥)출신의 현숙한 안해를 얻고 낳은 아들이 하나라의 첫 천제—계이니 4000여년의 장구한 세월속 중화민족 립국시조의 신분으로 력대 통치자들한테 높이 받들리고 세번이나 집문앞을 지나면서도 들리지 않은 치수영웅의 형상으로 많고많은 민중의 경모와 애대를 한몸에 받을만도 했다. 어디 그뿐인가, 회계산은 2500여년전 월나라 문화의 발상지로 이름 높거니 기원전 494년에 월왕 구천이 군대를 일으켜 오나라를 진공중 패해 회계산 산중으로 몰리다가 투항하여 왕후와 대신 범려와 더불어 오나라에 가서 노예살이 3년, 기원전 490년에 풀려나 회계산에 은거하여 오랜 세월 와신상담하다가 끝끝내 오나라를 뒤엎고 한때 전국시대의 패왕으로 군림했으니 춘추전국시대의 회계산은 시종 월나라 군사상의 복지와 보루로, 경제상의 생산기지와 정치문화상의 종교성지가 아니던가. 기원전 210년에는 강산을 통일한 진시황이 좌승상 리사 등과 더불어 회계산에 이르러 대우님께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회계산은 동한 말년에 벌써 도교의 련단활동으로 이름이 났다. 예로부터 월중(越中) 도교성지로 뜨르르한 회계산 동쪽자락의 룡서궁은 먼먼 옛날 황제시절에 이미 이름난 후신궁(候神宫)으로 불리다가 당나라 신룡원년(705)에는 회선관(怀仙馆)으로, 당나라 개원 2년(714)에는 룡서궁(龙瑞宫)으로 불리며 도가(道家) 72복지 제 17복지로, 도교 36동천(洞天)의 제11동천으로 받들린다. 룡서궁 바로 옆이 명나라 성현 왕양명과 관련되는 양명동이니 양명동은 실은 동의 동쪽이 어구로 트이고 삼면이 산으로 둘러있는 골안이렸다. 회계산의 불교력사 또한 유구하다.  남송시절에 이미 곳곳에 사찰이 일어서고 향불이 그칠줄 몰랐다고 하니 력사속에 흥망성쇄를 거듭하다가 1990년에 로봉선사가 일어서고 1993년에 확건되여 부지면적 1만 5000천 평방미터, 산문, 구룡벽, 방생지, 종루, 고루, 천왕전, 대웅보전, 량켠을 이룬 배전들, 장경루 등을 고루 갖춘 불교사찰로 떠오르니 오늘의 회계산이 절강의 이름난 불교명산으로 불릴만도 하다.   4   내가 회계산을 사랑함은 이에만 그치지 않는다. 회계산은 월중(越中) 산수심미문화의 중심부로서 륙조시기에 시작되여 당송시절에 성행했다는 중국 산수시의 중요발상지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런 산수시 발상명산에 당나라 대시인 리백이 오르고 동진시절의 대서예가 왕희지가 오르고 시를 남기였으니 과시 명산은 명산이로다. 명산 회계산에는 또 4000여년전 대우님과 단군님 관련 전설이 서리고, 당나라 시절 리백과 더불어 중국문화의 2대 거장으로 불리우는 1000년전 지장보살 김교각님의 바위불상이 나타나니 회계산에 깊이깊이 빠질만도 하지 않는가. 올해 2011년 새해 벽두에는 또 회계산이 절강의 불교명산만으로가 아니라 예로부터 5악5진(五岳五镇), 특히 서진인 섬서 오산, 중진인 산서 곽산, 북진인 료녕 의무려산, 동진인 산동 기산과 더불어 5진가운데의 하나인 남진으로 중국 10대 명산에 올라 있다는 력사자료를 대우릉 화하5진 실에서 보아내고 크게 놀라마지 않았다. 고로 강남에 온 나는 이 몇년래 회계산과 끈끈한 인연을 맺아오니 인연이면 큰 인연이렸다. 향로봉 아래 산비탈 숲속구간을 지나고 대문구간에 이르니 바깥문이 활 열리여 있다. 안문은 닫힌대로인데 마침 대문지기가 안문을 빠끔 열고 바깥을 내다 본다. 대문지기와 청을 드니 입장료 15원만 내면 향로봉에 오를 수가 있단다. 이런 행운이라구야, 나는 제꺽 입장료를 내고 대문안에 들어섰다. 그리고는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먼저 몇몇 패들이 퉁을 맞고 돌아선데 비하면 나는 행운아였으니까. 미구하여 부연 눈서리가 사방을 자욱하게 덮으며 천지간을 희끄무레하게 만든다. 그래도 나는 물러서지 않고 새해 벽두의 정상으로 오르고야 말았다. 온 정상에, 아니 온 로봉선사에  사찰의 스님들과 관련 일군들을 제외하고는 타인으로는 나 혼자 뿐이다. 나는 향로봉 정상의 관음보전과 삼성불전을 돌며 맘속 기도—새해 안녕과 순리를 빌기도 하고, 동서남북 사방을 한없이 내려다 보면서 티없이 맑은 회계산의 눈산, 눈봉우리처럼, 림해설원처럼 새해도 나의 마음이 바르기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2011년 1월 22일    
369    2011년 첫 태양 대우릉에서 떠오릅니다 댓글:  조회:5936  추천:40  2011-01-01
         2011년 첫 태양 대우릉에서 떠오릅니다   2011년 새해가 밝아 왔습니다.   2010년 한해 저의 글을 보아 주시고 사랑하여 주신 모든 님들께 새해 가장 진지한 축복을 드리면서, 2011년 새해도 보다 건강하시고 보다 유쾌하시기를 소망하여 봅니다.   2011년 새해 대우릉 첫 해돋이와 첫 태양을 여러 님들께 드립니다.
368    상해 김염탄신 100돌 기념 소감 댓글:  조회:2956  추천:29  2010-12-10
             상해 김염탄신 100돌 기념소감   상해 김창석작가가 지난해 10월 출판한 인물 상해조선족발자취 “동방명주를 빛낸 사람들” 김염전기 취재후기에서 김염연구회 발족을 기대한다고 하더니 그것이 내내 맘에 걸린다. 남방창작위원회로 통하는 우리 연변작가협회 절강창작위원회가 도와주지 못할까? 마음에 성산이 잡힌 뒤  상해의 김창석작가와 전화로 이 일을 터놓았더니 전적인 찬성이다. 김염 탄신 100돌맞이 기념추모회와 김염연구회 설립은 급물살을 탔고 시간은 11월 27일 토요일로 잡히였다. 11월 27일은 이제 한주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김염 100돌 기념추모회와 김염연구회 설립은 상해 남방아리랑에서 맡아 보기로 했으니 근심할 일이 아니나 상해 복수원 김염묘소에서의 기념행사는 절강창작위원회 남방아리랑과 연변인민출판사 상해지사의 공동주최로 열리는데서 참석자문제가 선참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았다. 그것도 남방아리랑 지역사회 대표들은 항주, 소흥, 상해, 무석, 남경 등지에서 활동함으로 쉬운 일이 아니였다. 벌써 항주의 현충혁(절강창작위원회 부주임)과 무석의 남방아리랑 대표 황춘옥이 회사와 대학 한국어과 일로 참석할수가 없는데, 소흥의 절강월수외국어대 한국어과 방룡남박사마저 한국어과의 일로 요즘은 류은종교수 등 분들과 더불어 대학밖으로 뛰여야 했다. 다행히 항주 남방아리랑  남연대표와 남경 아리랑 유성운대표가 백사불구하고 참석하겠다니 큰 위안. 그러면 항주, 소흥, 남경, 상해의 남방아리랑 대표들이 참석한다는 말이니 이쯤이면 상해 행사는 더 근심하지 않아도 된다. 원래 참석자들을 청일색 남방아리랑 문인 10명 쯤으로 잡았으니까. 일이 될라니 강소 의흥에서 도자기 화분업을 벌리는 상해 성심수석관 최성호관장이 11월 27일을 하루이틀 앞두고 참석이 결정되고 절강 이우쪽으로 일보러 나갔던 방룡남박사가 참석을 알려 왔다. 게다가 강소 의흥 최성호관장 쪽에 연변서 홍콩행에 올랐던 연변의 룡정시 정협 리문선주임과 한국서 사업차 최성호관장한테로 온 한국인 서씨까지 있어 상해밖 참석자문제는 다 풀린 셈이였다. 방룡남박사(79년급)와 리문선주임(79년급), 최성호관장(80년급) 그리고 항주 남연대표는 모두 중앙민족대학 조문학부 출신들이였다. 연변대학 조문학부 출신인 유성운대표도 박사공부는 중앙민족대 박사생 도사이신 리암교수의 문하를 거치였으니 절반은 중앙민족대 출신인 셈이다. 남경, 항주, 강소 의흥, 소흥의 여러 대표들은 기념추모회날 오전으로 상해에 모이기로 했다. 11월 27일 고속렬차로 소흥서 상해까지 가니 상해밖 참석자 일행이 선후로 상해에 모이고 상해의 남방아리랑 문인들인 김창석, 전은종, 홍순범 등과 합류하였다. 상해쪽에서는 우리 남방아리랑 문인들과 상해로 온 리문호시인 외에도 상해 남방아리랑의 초청을 받은 상하이조선족여성기업인회 안귀선회장, 상해아반경제무역유한회사 장동진씨, 상해세종래국제물류유한회사 오송학리사장에 여러 상해 기업들에 몸을 담은 리걸, 황문호, 리완수, 최홍일, 리경 등 젊은이들이 가세하여 김염 탄신 100돌 참석자들은 제법 20여명을 이루었다. 이들 20여명 모두가 고향 연변을 중심으로 동북각지에서 상해, 남경, 항주, 소흥 등지로 삶의 일터를 옮긴 조선족 대학출신들, 사회성분을 말할라치면 우리 남방아리랑 문인들과 남방아리랑과 이어지는 상해 기업계의 엘리트들과의 만남이라 함이 옳으렸다. 드디여 상해 복수원 김염묘소에서의 김염 탄신 100돌 기념추모회와 김염연구회 발족은 상해 기업계 장동진대표의 사회와 참석자들 헌화, 3분간 묵념, 영화황제 김염 생평 소개, 운남 곤명 섭이기념관 김염-섭이 관련 사진발굴소개, 시인 홍순범의 김염 추모시 랑송, 각자의 소감 발표, 안시제—애주가였던 고인에게 술 부으며 절하기, 기념촬영, 김염 연구회 발족 등 식순으로 순조로이 풀리였다. 참석자 모두가 상해, 남경, 항주, 소흥, 심양, 연변 등지에서 상해 김염 묘소에 모여 김염 탄신 100돌 기념행사를 가진다는 것이 벌써 장한 일이라며 앞으로 겨레를 위한 일에 너도나도 힘을 합치자고 맘을 터놓았다. 나의 소감도 깊기만 하다. 년말이 코앞인데다 남방아리랑 문인들이 강남의 여러 지역사회들에 널리여 있어 쉬운 일이 아니였으나 우리 남방아리랑은 김창석 상해지사장과 전은종 대표, 홍순범시인의 남다른 노력하에, 항주, 소흥, 강소 의흥, 남경 남방아리랑 대표들의 전적인 협력밑에 이땅의 겨레사회에서는 처음으로 상해 김염묘소에서의 김염 탄신 100돌 기념추모회를 성공적으로 일궈냈다. 올해 4월, 소흥에서의 남방아리랑 결성과 5월의 중앙민족대학 서영섭교수 조선어특강, 9월 연변문학 편집부와의 항주필회에 이은 또 하나의 주요한 행사라 하겠다. 상해 김염 탄신 100돌 기념추모회와 김염연구회 발족은 절강창작위원회 남방아리랑이 발기하고 내밀었다지만 호응해 주고 구체적 조직지도를 맡은 이는 상해 연변인민출판사 상해지사 김창석지사장. 김창석작가와 상해 전은종 남방아리랑 대표, 상해 홍순범시인이 손을 잡으니 상해쪽 일은 우리가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일이였다. 여기에 남방아리랑 항주 남연대표, 남방아리랑 남경 유성운대표에다 방룡남박사, 최성호관장 등이 한맘으로 받들어 나서고 상해 기업계의 오송학리사장 등 조선족엘리트들이 후원을 맡아 나서니 상해 복수원 김염묘소에서의 김염탄신 100돌 기념행사는 뜻대로 풀려간것. 종이장도 맞들면 가볍고 한송이 꽂도 푸른 잎들에 받들려야 아름답다는 말이 이래서 생겨난 것이 아닐까. 어찌하든 상해 기념행사는 김염 일가족과 친족들이 아닌 겨레지성인들이 자발적으로 기념행사를 가졌다는데서, 잊혀진 김염 탄신 100돌이 아니라는데서 그 의의를 찾아 볼수가 있다고 느껴진다. 상해에서의 기념행사가 지난지도 이슥한 이 시각에도 나의 마음이 오래오래 설레임은 이런 연고에서 이리라!!!   2010년 12월 9일                
367    강남서 다시 떠올리는 현채미화백 댓글:  조회:4022  추천:33  2010-12-07
               강남서 다시 떠올리는 현채미화백     어제 상해의 김창석작가님이 메일로 보내온, 12월 4일 상해에서 백발의 조선족 녀화가 현채미화백 100돌 축수연을 가졌다는 글과 사진을 접하고 남방아리랑 코너에 올리면서 나는 김창석작가님이 지난해 출판한 “동방명주를 빛낸 사람들”을 펼치고 현채미화백 전기부분을 다시 읽어 보았다. 사실 나로 말해 현채미란 화백존함은 오늘어제의 일이 아닌 20여년전으로 거스른다. 20여년전 80년대 시절 안해되는 집사람은 한준광소장님의 배려로 연변력사연구소에서 연변예술학원 예술연구소로 전근하여 학원의 학보를 편집하며 예술론문집도 맡아 편집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집사람은 “이걸 보세요. 대단한 미인 원로화가입니다.”라고 하면서 나한테 자기가 직접 편집한 예술론문집을 내밀었다. 예술론문집을 받아보니 예술학원의 림무웅교수님이 공필화가 현채미를 쓴 글, 상해서 생활한다는 조선족 녀화백의 발자취를 다룬 글이였다. 그때 나이로 현채미화백은 7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내가 현채미 녀화백의 존함과 전기를 처음 접하게 된 때라고 하겠다. 그 인생의 한창 시절에 나는 안해를 통해 림무웅교수님도 알게되고 예술학원 학보나 예술론문집, 조선족예술사 관련저서들을 통해 현채미 녀화백을 보다 리해하게 되였다. 세월은 또 살같이 여러 해가 흐르고 내가 나중에 현채미 녀화백의 전기를 대한것은 민족출판사에서 1995년 1월에 펴낸 “근대중국조선족녀걸”에서였다. 이 책은 “당대중국조선족녀걸”의 자매편으로서 이땅의 우리 겨레의 자랑인 64명 녀걸의 사적을 실었는데 그중의 한편이 바로 림무웅교수님에 김재옥까지 곁들인 “중국화단의 옥란꽃”—공필화가 현채미화백을 다루고 있었다. 이 책은 또 나의 수집정리로 된 연변의 첫 조선족 녀당지부서기 홍혜순, 중공동만특위 부녀위원 김영신 등 10여명의 항일녀렬사들을 실었기에 나는 이 책을 무척 아끼고 있었다. 그후 또 세월은 20세기의 력사언덕을 넘어 21세기 비탈을 톺으면서 빨리도 흐르고, 하는 일이요 전공분야가 달라 부끄럽지만 현채미 녀화백을 까맣게 잊고있었다. 아마도 이 잊음이 10여년은 잘 되는것 같다. 거의 모든 정력이 우리 력사연구와 항일렬사전기정리에 있었으니 어찌할수 없이 그렇게 되여 버린것이리라. 내 고향 연변을 잠시 떠나 강남사회로 진출한지도 어언 만 4년, 만 4년철을 잡은 지난 봄에 여기 로신선생의 고향 소흥에서 연변작가협회 절강창작위원회 회원님들이 모여 산하 “남방아리랑”을 결성하게 되고 오랜만에 연변인민출판사 상해지사 지사장으로 뛰는 후배 김창석작가님을 만나게 되였다. 그때 김창석작가님은 “동방명주를 밫낸 사람들”을 넘겨 주었고, 책속의 10여명 중 한 인물이 현채미 녀화백이였다. 이때의 현채미 녀화백은 70대에서 90대로 뛰여 올라 90대 후반을 열심히 살아가는 분으로 나의 주의를 끌었다. (참 세월의 흐름이란 빠르기도 하구나!) 나는 저도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70대의 현채미화백을 전기로 알게 된것이 지난 80년대 중후반의 일인데 20여년이 지나 내 고향 연변도 아닌, 상해 가까이 강남땅에서 현채미 화백전기를 다시 접하게 되니 감개가 그지없이 무량하였다. 지금 나의 앞에는 1995년 1월 민족출판사 출판으로 된 “근대중국조선족녀걸”과 2009년 10월 연변인민출판사 출판 “동방명주를 빛낸 사람들”이 놓여있다. 15년을 사이두고 서로 다른 정리자에 의해 씌여진 조선족 녀화가—현채미화백의 일대 전기를 보며 마음 후더운데, 금방 보내온 김창석작가님의 메일을 보니 상해서 현채미화백 100돌 축수연을 가졌다나. 아직도 흐트럼없이 젊음이 싱싱한 겨레미인의 밝은 모습을 대하면서 감탄이 절로 나온다. 김무웅교수님의 글에서는 현채미화백을 “중국의 걸출한 녀류화가이며 덕망높은 사회활동가, 우리 민족의 뽐낼만한 원로화가”라고 높이 평가한다. 김창석작가님의 글에서는 현채미화백을 “중국조선족화단에서 쟁쟁한 실력을 겸비한 녀류화가요, 한생을 예쁜 꽃이나 인물화만을 그리는 공필화가, 세월은 흘러도 화백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고 높이 평가한다. 나는 이러한 우리 겨레 현채미화백이 많고많은 사람들의 받들림속에서 오래오래 건재하면서 황혼빛인생을 보다 빛내가시기를 두손 모아 빌어본다.   2010년 12월 7일, 강남땅 두앵원에서        
366    (1) "영화황제" 김염과 첫 부인 왕인미 댓글:  조회:3769  추천:19  2010-11-23
 【편자의 말】        올해는 "영화황제"로 불리우는 조선족 김염 탄생 100돌이 되는 해입니다. 김염 탄생 100돌을 기념하면서 몇해 전에 써서 발표한 적이 있는, "영화황제 김염과 첫 부인 왕인미"를 다시 올립니다. 김염 탄생 100돌 시리즈의 첫편입니다.             《영화황제》 김염과 첫 부인 왕인미                                                                       1        중국영화 100년사를 돌이켜 보면 지난세기 30년대 상해는 중국영화사상 첫번째 황금기를 기하며 동양의 《할리우드》로 불리우던 번영의 년대였다. 이 년대에 활동한 연예계 거물급 스타들가운데는 《영화황제》로 불리운 조선족 김염이 있었는데 그의 첫 부인은 상해 연예계의 스타로 떠오른 중국인 왕인미이다. 왕인미는 1985년에 상해문예출판사에 의해 자서전— 《나의 명성과 불행 — 왕인미 회고록》을 펴냈는데 회고록은 들은 바를 적는 형식으로 씌어졌기에 독자들에게 왕인미가 독자와 말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이 회고록에서 왕인미는 자기 첫 남편이었던 김염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김염은 … 1927년에 상해 민신영화회사에 들어가 기록원이 되었지만 다음해 해고되고말았지요. 그는 1929년 손유감독의 《풍류검객》에 주역으로 데뷔해 스타의 자리를 굳히게 되었습니다. 다음해 손유감독은 연화영업회사에서 《야초한화》를 찍게 되어 다시 김염을 주연으로 캐스팅했습니다. 이 역으로 김염은 영화계에 충격을 던지게 됩니다. 사진은 잘 받는 김염의 균형잡힌 키, 크고 날씬한 스타일,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연기 그리고 청춘의 숨결 ㅡ 둥근 중국모자를 눌러쓰고 연신 추파를 던져댈 뿐 될성 부른 기미라곤 전혀 없어보이는 영낙없는 철부지 역이였습니다. 모두들 낯빛이 변해 버렸지요. 이 작품이 진정한 의미에서 김염의 스크린 데뷔작품이였습니다. 이것으로 새로운 타입의 남자배우로서 단숨에 1930년대의 영화황제의 자리에 등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1932년의 일이였어요. 상해에 《전성》(電聲)이라는 영화신문이 있었는데 판매를 늘이기 위해 영화팬들이 영화황제를 투표로 선출하는 기획란을 시작했어요. 《전성》에는 매주 투표결과가 발표되고 김염이 그 영광을 획득했던 것이지요.  김염의 매력은 솔직하고 성실한 성격이였습니다. 그는 오락보다도 농구, 사격, 수영, 사냥 등 몸을 단련하는 스포츠를 좋아했어요. 교제술이 서툴러서 사장이나 기자패거리들의 기분을 맞추어줄줄 몰랐고 남들이 자기를 추켜세우는 것도 싫어했어요. 《전성》이 김염을 영화황제로 선출한 뒤 어느 영화팬이 《페하!》하고 부르며 싸인을 부탁한 일이 있었지요. 김염은 깜짝 놀라 그 팬을 외면한 채로 달아나다싶이 했어요.  김염은 친구들에게 몹시 성실했습니다. 친구가 어려울 때는 늘 힘이 되어주었지요. 생활고에 시달리는 친구가 있으면 집으로 데려와 침식을 제공하고 일도 소개해주었습니다. 친구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느꼈던 거지요.         왕인미는 이 길지 않은 몇단락 회상에서 20년대 후반기, 30년대 초반에 걸치는 김염의 상해에서의 연예활동과 영화데뷔, 영화황제의 내력, 사람됨됨이를 보는 듯이 그려내고 있다. 또 자기가 김염을 즐기게 되고 앞으로 결혼에 이르게 됨을 암시하기도 했다.                                                                          2    영화황제 김염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 그는 에누리없는 조선인으로서 본명이 김덕린이고 1910년 4월 7일에 서울에서 태여났다. 그의 부친 김필순은 서울 한 병원의 의사이고 반일지사로서 1912년에 일본의 지명수배를 피해 가족을 이끌고 중국 동북 통화로 이주했다가 1916년에 치치할에 옮겨앉았다.  김염의 집식구는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그의 형제자매 일곱 등 열식구로 알려지는데 김염은 형제중 셋째였다. 1918년에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뜨자 늙은이와 철부지들만 남은 일가식솔들은 제각기 흩어져 살길을 찾아야 했다. 이런 고로 김염은 한 동생과 함께 상해에 있는 둘째고모와 셋째고모네 집에서 자라게 된다. 김염은 둘째고모네 집에서 2년간 공부하다가 13살에 제남에 있는 맏형님네 집에 가서 중학교를 다니게 되고 15살 때에는 천진북양대학에 초빙된 둘째고모부 김규식을 따라 천진에 가서 남개중학교에서 계속 학업에 몰두한다. 이 시기의 김염은 청년학생운동에 휘말리게 되고 로신선생을 아주 존경하며 이름을 김염으로 고친다.  17살 되던 해에 김염은 남개중학교를 마치게 되었지만 자체로 생활의 길을 개척해야만 했다. 몇해동안 치치할, 상해, 제남, 천진 등지에서 생활하던 김염은 《밑천이 들지 않는 돈벌이》로 영화배우를 생각했다. 제일 밑천이 들지 않는 돈벌이 같았다. 그래서 친한벗들이 모아준 단돈 로비 7원을 달랑 갖고 1927년 봄에 천진에서 윤선을 타고 상해로 갔고 앞에서 왕인미가 말 한것처럼 상해 민신영화회사 기록원으로 취직하게 되었다.  김염의 연예계데뷔에 손유감독의 지지가 컸다면 김염의 은사이고 길잡이는 중국현대연극의 창시자이며 걸출한 극작가인 전한선생이였다. 김염이 민신영화회사에서 《목란참군》, 《열혈남아》 두부의 영화에서 군중역을 맡다가 해고된후 열혈남아의 연출 만뢰천이 소개해준 것이 남국예술극사의 전한선생, 제1차 상해사변, 즉 1932년 《1.28》사변에서 전한선생의 집이 소실되였을 때 전한선생은 국민당의 체포를 피해 김염의 방에서 거처하게 되고 김염은 영화계의 유명스타들인 원령옥, 왕인미 등과 합작하여 민신, 명성, 연화, 예화 등 영화회사에서 연속 영화를 찍게 되었다. 1931년과 1932년 2년 사이만 해도 김염이 “연애와 의무”,  “도화읍혈기”, “들장미꽃”,  “황금시대”, “원대한 포부” 등 10부의 영화에서 주역으로 출연했다고 하니 김염은 드디어 상해 연예계의 유명 스타로 떠오르게 되고 1932년 상해의 영화신문 — 전성에 의해 상해 영화황제로 군림하게 된다.   그때 후에 김염의 첫 부인으로 된 왕인미는 상해연예계의 스타로서 주선, 호접과 함께 상해의 톱4미인 중 한사람이였다. 김염도 만만치가 않아 영화황제라면 1933년 2월 상해에서 중국영화문화협회가 조직되었을 때 전한선생과 같이 위원으로 되었고 왕인미는 이런 김염한테 점점 끌리게 되다가 나중에는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3    1933년도 막가던 시절에 김염과 왕인미는 결혼을 서둘렀다. 그때 김염의 말.  “화려한 결혼식을 삼가하고 소박하게 합시다!”  왕인미도 절대 찬성, 그래서 결정한 결혼식이 1933년 섣달그믐날밤이였다. 마침 이날 밤, 연화회사에서 새해맞이 망년파티를 가지였다. 김염과 왕인미는 모두 보통 옷차림으로 손유 등 연예계인사들과 함께 웃으며 회장에 들어섰다.  “땡, 땡, 땡……”   드디어 종소리가 12시를 알리자 김염과 왕인미는 호주머니에서 신랑신부라고 쓴 빨간 비단쪼각을 꺼내 옷 위에 둘렀다. 이에 따라 손유감독이 그들 둘의 결혼을 선포하였다. 그때 결혼을 두고 왕인미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때와 같은 간단한 식은 없겠지요. 우리 두 사람의 간소한 결혼식은 당시 젊은이들사이에 미담으로 전해졌어요.》  김염과 왕인미의 결합은 그들 둘에게 행복도 갖다주고 고민거리도 안겨주었다. 연화회사의 주인은 여배우가 일단 결혼만 하면 광채를 잃는다면서 왕인미와의 계약을 사절했다. 허나 왕인미는 찍고 있던 《어광곡》을 다 찍고야말았다.   왕인미는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집에만 있기를 달가와하지 않은 왕인미는 의연히 테니스장과 수영장에 다니다가 결국 조산하고말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아기는 이 세상에서 며칠밖에 살지 못했》다고 한다. 이 일이 김염을 매우 상심케 한 모양이다.  아기가 조산할 무렵 김염은 《대로(大路)》촬영에 바쁜 몸이었다. 대로는 항일전쟁을 위해 군사도로를 닦는데 힘쏟는 청년로동자들의 우정과 중국인민들의 항전결의를 그린 영화인데 손유감독이 늘 김염을 찾아 씨나리오를 의논했고 영화주제가 《위대한 길》의 작곡을 맡은 섭이는 자주 김염의 집에 가서 피아노를 치며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듣군 했다고 한다.  영화 《대로》의 촬영시작은 1934년 7월, 이때를 두고 왕인미는 이렇게 회상한다. 《나의 출산일에는 철야촬영이였어요. 그는 새벽에 잠간 집에 들어왔다가는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인지 낮에도 다시 보러왔어요. 아이가 태어나자 김염은 몹시 좋아했어요. 그렇지만 아이가 곧 숨을 거두고말았으니 고통스런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두사람이 결혼한 후 친구들은 왕인미를 보고 《들고양이가 집고양이로 되여버렸다.》고들 말했다. 가정에 파묻히며 쾌활한 야성이 사라져가니 그럴만도 하였다. 왕인미에게 있어서 김염은 남편이기에 앞서 《나보다 뛰어나고 진보적이었으며 나의 사고에도 낡은 점이 적잖게 있었으니》 그야말로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 시절 손유감독이 《사랑이란 받드는 것》이라고 말했듯이 왕인미는 《여자는 자기의 전부를 사랑하는 사람을 잠자코 받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엇이든 김염이 말하는대로 했다는 왕인미다.  1937년 11월, 일본침략군이 상해 주변지역을 점령하고 상해가 고도로 된후 일본 측에서 김염더러 일중합작영화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일제놈들을 위해 절대 영화에 출연하지 않는다고 결심한 김염은 1938년 가을에 안해와 같이 일본 측의 감시망을 피해 상해를 탈출해 홍콩에 이르렀고 후에는 홍콩마저 일본군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자 또 홍콩을 빠져 1942년 2월에 계림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김염은 일을 찾아 중경으로 떠나고 왕인미는 계림의 친구집에 남아 김염의 연락을 기다렸다.   중경중앙전영활영소에서 출연하기로 한 항일영화가 뜻대로 되지 않았다. 1943년말에 김염은 성도의 중화극예사인가 하는 극단에 들어갔고 왕인미도 성도에 가서 부부상봉을 이루었다. 극단에는 이들 부부와 아는 사람이 많아 둘의 결혼 10돐 축하파티를 마련해주었다.   왕인미의 영어수준은 수준급이라고 한다. 그녀는 생계를 위해서 1945년 3월 미군 곤명기지 타자원으로 취직을 했다. 헌데  이 일이 김염의 노여움을 자아냈고 왕인미가 자기를 망치려 든다며 야단을 부렸다. 외국인을 위한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김염이였다. 내성적이고 고집이 센 김염에 비해 왕인미는 활발하고 쾌활했는데 김염은 드디어 리혼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서로간의 이해는 너무도 부족하여 드디어 1945년 여름에 이혼하고야 말았다. 김염은 강렬한 애국심을 갖고 나라를 사랑한 사람이라면 왕인미는 가정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후에 그들의 친구들은 이것이 그들을 갈라놓은 원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4    그후 김염은 중경, 성도에서 무대배우로 인기를 누리던 진이와 가까이 지내다가 1947년에 홍콩에서 두번째 결혼식을 올리었다. 그때 김염은 36살이고 진이는 24살, 이들의 결합은 항일전쟁이 끝나면 김염과 다시 가정을 이룰 것을 기대하던 왕인미에게는 치명적인 충격이었다.  새중국이 탄생한 후 이들 세사람은 상해영화촬영소에 배치를 받았다. 한 직장 근무생활은 왕인미로 말하면 정신적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왕인미는 우울 속에서 나날을 보내다가 정신질환에 시달려야 했다. 병이 나은후 왕인미는 문화부에 의해 북경영화촬영소에 전근하게 되고 10년간이나 외롭게 지내던 유명한 만화가 엽천여와 재혼하게 된다.   엽천여와의 재혼생활도 왕인미의 맘속에 뿌리내린 김염이를 잊지 못하게 하였다. 1985년에 왕인미는 자기가 구술하고 타인이 정리한 회고록 — 《나의 명성과 불행》을 펴내었다. 이 회고록은 자신의 출생부터 69살에 이르는 1983년까지의 생애를 술회한 것인데 책속의 많은 부분은 김염에 관한 회상으로 이루어졌다.   왕인미는 만년에 이르기까지도 김염을 잊지 못한 사람이었다. 왕인미의 가까운 친구 려은에 의하면 인미는 이혼후에도 김염에 대한 나쁜 말을 한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자기의 회고록을 펴낸후 왕인미는 뇌출혈이 왔고 식물인간이 되었다. 조산한 통에 그녀에게는 자식이 없었는데 1987년에 파란많은 한생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에 앞서 김염은 1983년에 73살을 일기로 병으로 세상을 떴다. 김염은 일생동안에 도합 34부의 영화와 많은 연극에 출연한 30년대영화황제이고 왕인미는 30년대의 연예계에서 스타로 인기를 누리던 상해 톱4미인 중 한사람이었다.    
365    력사의 진실 (8) 북로군정서 지도자 결책자는 서일장군 댓글:  조회:3481  추천:23  2010-11-18
  【편자의 말】    청산리 대첩 90돐을 둘러 싼  "력사의 진실"--우리 력사 바로 잡기는 이 글을 계기로 여기에서 한단락을 고하려 합니다. 한마디 부언하여 둠은 이 글은 지난 9월에 련재로 올린 서일장군의 중복이지만 력사의 진실 련재의 수요로 다시 올린다는 점입니다. 너그러운 리해를 기대하면서 그 동안 이 련재글을 열성껏 보아주시고 성원하여 주신 여러 분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            북로군정서 지도자  결책자는 서일장군     1919년 룡정 3.13반일운동이후 연변을 중심으로 한 동북각지에는 30여개의 조선인반일무장단체들이 활동하고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북로군정서는 주요한 반일무장단체중의 하나였다. 이 반일무장단체의 지도자 및 결책자는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장군으로서 서일장군은 북로군정서와 청산리전투를 광명과 승리에로 이끈 력사의 주역이였다. 그러나 사상과 리념의 편견, 력사시각의 차이로 말미암아 한국독립운동사나 한국 국내 출판물들에는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장군이 력사의 저편으로 몰리고 서일장군이 북로군정서군 사령관으로 초빙한, 장군의 수하 장령 김좌진장군이 마치도 북로군정서를 이끈듯이 나타나며 청산리전투를 승리에로 이끈 주장으로, 절세의 영웅으로 나타난다. 력사는 외곡되여도 너무도 외곡되였다. 실상 력사는 덮어감추지 못하거늘 서일장군과 김좌진장군의 대비속에서 보면 서일장군은 북로군정서와 청산리전투를 광명과 승리에로 이끈 력사의 주역이였음을 어렵지 않게 보아낼수 있다. 1910년대 독립운동의 력사속으로 들어가보면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은 반일독립운동 진영에서 찾아 보기힘든 문무겸비의 인물로서 북로군정서의 전신은 장군이 1911년에 왕청현 덕원리에 세운 《중광단》(重光團)이였다. 서일장군의 력사는 1881년부터 시작된다. 이해 2월 26일, 장군은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김희동에서 인류력사속에 등장하였다. 장군의 본명은 서기학이고 초명(初名)은 서정학(徐正學)이요, 호는 백포(白圃), 본관은 리천(利川)이다. 족보속에서는 아간공(阿干公) 36세손이고 량경공파(良景公波), 양근(楊根) 계렬의 함흥문중 사람으로 알려진다. 1992년 6월 29일부 《리천서씨종보》 4면에 따르면 서일장군의 선친은 서재운이고 아들은 서윤제(1969년에 62살로 사망), 손자로는 서경섭(중국 할빈에 거주), 서만섭(1991년 9월 한국가서 인천거주) 두분이 있었다. 서일장군은 소년시절에 고향의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배웠다. 몇년 서당공부끝에 경성함일사범학교 전신인 《유지의숙》에 입학하여 배움에 몰두하였다. 유지의숙은 함경북도 근대화운동의 선구자 이운섭선생이 창설한 의숙인데 몇해후에 경성함일사범학교로 개칭되였다. 이 학교는 많은 민족운동가들을 키운 의로운 학교이기도 한데 간도국민회군 사령 안무, 북로군정서 부총재 현천묵, 간부 김병철, 서대문순국자 김학섭 등 독립운동가들이 바로 이 학교 출신들이다. 1902년 봄에 서일장군은 경성함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10년 한일합방때까지 10년간 지방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0년은 조선민족이 일제에 의해 나라잃은 경술국치해, 이해 장군은 30살의 조선남아였다.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랠길없은 서일장군은 이듬해 1911년 가족과 함께 결연히 두만강을 건넜고 연변의 왕청현 덕원리에 자리를 잡았다. 왕청현 덕원리는 천교령 부근에 발원지를 둔 가야하와 십리평, 소왕청쪽에서 흘러나오는 대왕청하와 합수되는 부근 동북쪽 산기슭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이주 그해(1911년) 3월에 서일장군은 대종교인들인 독립운동가 현천묵, 계화 등을 골간으로 반일독립단체—중광단을 조직하고 동지획득투쟁과 반일투쟁에 나섰다. 중광단을 말하자면 대종교를 떠올리지 않을수 없다. 대종교의 전신은 단군교로서 조선의 유구한 민족종교로 나타난다. 전하는데 의하면 상원(上元) 갑자 10월 3일에 단군이 령산 백두산에서 탄생한후 3천단부를 설치하고 고조선을 건립했는데 고조선의 태양숭배의 원시신앙이 종교로 발전하니 이 종교가 곧 단군교라 한다. 이 단군교가 력사속에서 력대로 부름이 서로 달리 불려지며 고려에서는 왕검교로 불리우다가 고려원종 시절에 몽고의 침입으로 페교되고말았다. 그러다가 1909년 음력 정월 15일에 이르러 애국자이며 독립운동가인 라철선생에 의해 단군교가 재생되였다. 이날 라철선생은 동지들은 오기호, 강우, 최전, 류동, 정중모, 리기, 김인식, 김춘식, 김윤식 등 수십인과 함께 서울의 취운정아래 6간초가집에서 단군교 포명서를 공포하였으니 이날 정월 보름날이 단군교의 중광절로 되였었다. 1910년 8월 5일에 단군교는 일제놈들의 시선을 따돌리고저 대종교로 개칭되고 1911년에 대종사 라철선생 등에 의해 대종교 총본사는 서울로부터 두만강 북안 화룡현 청파호에 자리를 옮기였다. 력사는 라철선생의 전이나 서일장군의 이주가 모두 1911년임을 알리였다. 1912년 10월에 서일장군은 대종교에 입교하고 이듬해 10월에 대종교 시교사로 떠올랐다. 시교사를 알자면 다시 총본사로 돌아가야 한다. 라철선생은 화룡현 청파호에 총본사를 둔후 총본사 산하에 동도본사(왕청현), 서도본사(상해), 북도본사(로령 소학령), 남도본사(조선 경성)등 4개 도본사를 설치하고 각지에 시교당 48개소 (연변에 22개소) 하였는데 서일장군이 왕청현의 동도분사를 주관하며 시교사로 나섰으니 장군의 위인됨을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다.  대종교의 력사는 중광된 그날부터 일제의 식민정책과 날카롭게 대립한 력사이고 피로 물든 반항의 력사임을 알려주고있다. 서일장군이 자기 반일독립단체의 이름을 중광단이라고 함도 대종교의 중광을 환호하고 단군을 숭상하며, 나라는 잃어도 조선의 혼, 민족의 혼은 앗아가지 못함을 선언하는 뜻에서였다. 서일장군은 1912년에 명동학교를 꾸리고 인재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대종교 교리저술사업에 몰두하여 짧디짧은 몇년사이에 《삼일신교》, 《회삼경》, 《구변도설》(九變圖說), 《진리도설》, 《신리주해》(神理注解), 《5대종지강연》, 《3문1답》상하편, 《신사기의절안교정》 등을 저술하였다. 그중 《삼일신고》와 《회삼경》은 대종사의 《신리대전》, 무원종사의 《신단설기》와 더불어 대종교의 4대경서로 받들리였다. 1916년 8월에 제1세교주 라철이 구월산 삼성사에서 순교하고 제2세교주로 김헌이 등극하였다. 1919년 초에 무원종사로 있던 김헌이 교통을 서일에게 전수하려하니 서일장군은 교주의 간곡한 권유를 5년간 보류키로 하고 무장투쟁준비에 심신을 쏟아부었다. 교통이란 대종교를 떠메고나갈 교주를 말한다. 서일장군이 교주추대를 잠시 미룬것은 무장투쟁을 위해서였다. 1919년 이해 조선에서 3.1운동이 폭발하고 룡정에서 3.13운동이 일어나자 마침내 10년만에 력사의 기회를 만났다. 1919년 3.1운동직후 서일장군은 중광단을 《대한정의단》으로 확대, 개편하고 단장으로 나섰다. 대한정의단은 《민보》와 《신국보》를 꾸리며 결사대원을 모집하였는데 응모, 등록한 결사대원이 1037명을 이루었다. 대한정의단은 1919년 8월에 산하에 독립무장단체—《대한군정회》를 조직하고 신민회계통의 무관출신들인 김좌진, 조성환, 리장녕을 초빙하여 군정회를 맡아보도록 위임하였다. 독립군편성을 위한 서일장군의 전략적결책이였다. 1919년 봄에 상해에서 대한림시정부가 수립된후 서일장군은 그 지도를 받기로 하고 이해 10월에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를 통합하여 대한군정부로 개편하였다. 대한군정부의 창립에 기여한 주요인물로는 서일, 현천묵, 김좌진, 조성환, 리장녕, 계화, 리범석, 박성태, 정신, 박두희, 리홍래, 윤창현, 라중소, 김성 등으로 알려진다. 1919년 12월에 대한군정부는 《국무원 제205호》 지시에 따라 《대한군정서》로 부름을 바꾸었다. 남만으로 불리운 서간도에 《서로군정서》가 있은데서 대한군정서는 그 대칭으로 북로군정서로 불리였다. 북로군정서 간부진영은 아래와 같다.   총재 서일 부총재 현천묵 참모장 리장녕 사단장 김규식 려단장 최해 련대장 정훈 련성대장 리범석 사관련성소장 김좌진   서일장군은 북로군정서 본부를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 잣덕에 설치하고 사관련성소도 이 부근에 세웠다. 십리평은 지금의 왕청현성 서쪽가인 덕원리에서 동으로 강을 거슬러 수십리 상기한 산간지대인데 잣덕은 십리평에서도 동쪽으로 몇리 떨어진 산언덕에 위치하고있었다. 현지답사와 력사고증에 의하면 사관련성소 예비훈련반은 북로군정서와 약 300메터 떨어진 남쪽의 넓은 평지에 자리잡았고 사관련성소는 잣덕에서도 동북쪽골안을 따라 약 15리 들어간 곳에 자리잡았다. 사관련성소 소장은 상기에서와 같이 김좌진장군이 맡아보았다. 김좌진장군은 자는 정원, 호는 백야(白冶)로서 1889년 11월 24일, 충청북도 홍성군 고도면 갈산리 량반가정 출신이다. 선친 김형규는 30여명의 머슴을 두고 2000여쌍 땅을 가진 갈산리의 갑부로 헤아려진다. 김좌진장군은 5살때 벌써 서당에서 공부하고 《삼국연의》, 《손자병법》, 《륙도삼략》 등 병서까지 읽으며 래일의 위인으로 자라났다. 장군의 위인됨을 이 세상이 잘 알기에 따로 설명은 하지 않겠지만 1906년에 80여간 집을 내서 《호명학교》를 꾸리고 교장으로 나서 빈부귀천없이 학생을 받아들였다는것은 그지없이 존경심을 자아낸다. 서울시절의 대한협회 골간으로, 서울무관학교의 입학생으로, 리동휘가 이끄는 서북학회의 주동자로, 오성학교의 교감으로, 광복단의 일원으로 뛰고뛴 발자취가 력력하다. 그러던 김좌진장군은 1917년 11월에 조국을 떠나 중국 동북방명길에 올라야 했다. 길림에서 대종교에 가입하고 려준, 조소앙 등과 함께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 1919년 초에는 김교헌, 려준 등 39인과 더불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혈전독립의 무장투쟁기치를 드니 그 위상이 돋보이기만 한다. 1919년 8월, 김좌진장군은 길림을 떠나 왕청행에 올랐다. 장군은 왕청땅에서 서일장군이 조직한 대한정의단에 가입하고 서일장군에 의해 대한정의단 산하 독립무장단체—대한군정회의 지도자의 한사람으로 초빙된다. 여기에서 지적하고픈것은 김좌진장군은 길림서 왔고 서일장군의 초빙을 받아 대한군정회에 나섰고 사관련성소 소장으로 임명되였다는 것이다. 그뒤의 북로군정서도 총재가 서일장군이고 김좌진은 그 수하의 한 장령으로 활동했을 뿐이다. 김좌진장군은 사관련성소 소장직무를 충실히 리행했다. 사관련성소는 선후로 400여명의 학생을 받아들이고 1920년 9월 9일에 제1회 졸업생 298명을 배출하여 북로군정서의 무장력량건설에 큰 힘을 보태였다. 이들이 그해 10월에 있은 유명한 청산리전투에서 중추적 역할을 놀았다고 하니 김좌진장군의 군사적재질을 너무나 잘 헤아릴수 있다. 하기에 서일장군은 이에 앞서 1920년 7월 초에 김좌진장군을 사관연성소 소장 겸 북로군정서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기에 이르렀다. 또 지적할것이 있다. 북로군정서 사령관도 김좌진장군이 조직자, 결책자로 되고 사령관으로 된것이 아니라 서일장군이 산하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제1선에서 군사를 통솔하게 한 력사사실이다. 이쯤하면 서일장군과 김좌진장군과의 관계를 리해할수 있으리라 믿어진다. 한마디로 개괄하면 북로군정서 지도자와 결책자는 총재 서일장군이였고 김좌진장군은 그 수하의 한 충실한 장령이였을 따름이다. 서일장군은 북로군정서의 총재일뿐만 아니라 군사총지휘, 군통수, 동북반일무장독립운동의 저명한 지도자의 한분으로서 말그대로 당시 독립무장투쟁진영에서 《찾아보기 힘든 문무겸비의 인물》이였다. 이제 다음 글에서 서술하겠지만 유명한 청산리전투도 서일장군의 전이방침과 전략부서에 따라 진행한 전투였다. 1920년 10월의 청산리전투후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신민단, 도독부, 의군부, 혈성단, 야단, 대한정의군정사 등 9개 독립무장단체의 3500여명 대오가 밀산에 모여 대회합을 이루고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였을 때 그 총재는 서일장군이였다. 이것이 력사이며 이것이 서일장군의 참 모습이다. 이런 력사현실을 무시하고 북로군정서와 청산리전투의 성과를 서일장군의 수하 장령인 김좌진장군 한사람에게 분칠하는것은 옳바른 력사사관이라고 말할수가 없다. 외곡된 력사를 바로 잡아야 할 때가 된것 같다.                
364    력사의 진실 (7) 북로군정서가 빚은 실책 댓글:  조회:3070  추천:25  2010-11-09
력사의 진실 (7)   북로군정서가 빚은 실책     력사는 흔히 북로군정서부대와 김좌진장군이 청산리전투를 승리에로 이끌었다고 하고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라는 말을 곧잘 하지만 통합을 반대하여 나선 김좌진부대가 자기가 빚은 실책으로 청산리 어랑촌 전투에서 전군복멸 당할번한 일은 잘 모르고 있다. 이를 알자면 력사의 현장으로 돌아가 보지 않을수 없다.  다 알다싶이 1919년 룡정 3.13 반일운동이후 동북의 조선족반일단체들은 분분히 무기를 잡고 무장투쟁의 길로 나아갔다. 한데서 1920년 여름에 이르러 동북경내에는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 한족회, 대한독립단, 군무도독부, 신민단, 의민단, 의군부, 광복단, 광복군총영, 대한독립군비단, 보합단, 의성단, 간도국민회, 대한정의군정사, 창의단 등 30여개의 반일단체와 무장대오가 건립되여 활동하고있었다. 해당통계 자료에 의하면 1919년 말까지 동북경내에 이미 45개의 반일무장대오가 실재했고 그 인수가 8450명에 달했다고 하니 경이롭지 않을수가 없다. 연변경내에만 해도 반일무장대오가 24개, 인수가 4650명에 달했다는 기꺼운 현실이다. 상기 반일무장단체들 가운데서 연변경내에서 조직된 주요한 무장단체들은 이러하다.   간도대한국민회(회장 구춘선, 사령관 안무) 북로군정서(총재 서일, 사령관 김좌진) 훈춘한민회(회장 리명순, 군사부장 황병길, 후에 최경천) 신민단(단장 김규면, 사령관 량정하) 도독부와 군무도독부(총재 최명록, 참모장 박영) 광복단과 의군부(단장 김성극, 군무 국장 리동수) 의민단(단장 방우룡) 라자구의사부(의사부장 김리근) 대한의군단(단장 홍범도)   주요한 무장단체들이 이러하다면 1920년 해당통계수자는, 연변각지에서 조직된 반일단체(일부 단체는 무장단체의 성격을 띠지 않음)는 26개에 달했다고 알려준다. 이 가운데서도 주도적역할을 한 단체는 구춘선이 이끄는 간도국민회였다. 《일본외무성 경찰서》(간도부분) 《조선총독부경무국조사자료》에 의하면 연변지구의 무장단체 24개에 권총 390자루, 기관총11정, 수류탄 120개를 가지고있었다고 하는데 간도국민회에 보총 200자루, 의군부 보총 600자루, 신민단 보총 600자루, 군무독독부 보총 100여자루 갖고있었다고 한다. 다음은 일본군에 대한 반일무장단체들의 빈번한 습격인데 1920년 중조변경 지구에서만도 연인수 1651명이 일본군습격전투에 가담하였다. 1921년에는 일본군과 602차의 전투를 벌려 연인수로 3184명이 전투에 뛰여들었다고 한다. 그중 조선서 벌린 전투가 87차, 동북경내서 벌린 전투가 87차, 동북경내서 벌린 전투가 73차로 나타난다. 일본외무성보존서류(고경)과 조선총독부 경무국 자료에 반영된 수자들이다. 이에따라 연변의 여러 반일무장단체들은 서로간의 통합과 협동작전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였다. 그 선두에 나선것이 간도국민회라고 볼수 있다. 1919년 하반기에 홍범도부대는 중조국경지구에 출격하여 일본군과의 작전공세를 벌리였다. 간도국민회에서는 이파저파의 계선을 타파하고 홍범도부대의 작전을 적극 받들어나서는 한편 이해 11월에 《고유문》(告諭文)을 발표하여 정의단내부의 분렬과 일부 단체들에서 각기 자금을 모집하여 민중부담을 가중케 하는 등 행위를 비판하고 일치단결하여 싸우자고 호소하였다. 1920년 1월에 홍범도부대가 조선국내진공작전에서 개선하여 왕청현 북하마탕 국민회본부에 이르렀다. 간도국민회에서는 홍범도부대를 뜨거이 맞이하고 통합문제를 의논하여 일치한 견해를 가져왔다. 그후 국민회의 주도아래 제1차하마탕회의(2월 21일), 제2차 하마탕회의(3월 8일~10일), 제3차하마탕회의(3월 25일)가 련이어 소집되였다. 이런 속에서 서로 의견이 같은 국민회와 최명록의 도독부, 훈춘한민회, 홍범도의 대한의군단 등 4개단체의 련합이 이루어졌다. 련합부대는 《군무독군부》로 불리우면서 두만강대안의 온성, 종성, 회령 일대에서 빈번히 활동하며 군자금을 모금하고 일본군의 초소를 습격하였다. 1920년 1월부터 6월 7일전까지의 해당 통계수자를 보면 군무독군부는 온성, 종성, 회령 등 조선국내지구에 26여차나 출몰하며 적들을 타격하였다. 이 시기에 군무독군부는 북로독군부로 개편되였다. 개편후의 진영은 아래와 같다.   부장 최명록 부관 안무 정일제1군 사령 홍범도 부관 주건 참모 리병채 군무국장 리원   이밖에 정일제1군사령부산하에 4개대대와 1개 헌병대를 두어 무장력량을 집중하고 강화하였다. 이런 통합에 힘입고 신민단부대까지 힘을 합친데서 정일제1군은 홍범도사령의 지휘하에 1920년 6월 7일 봉오동에서 유인, 매복전을 벌려 일본침략군 야스가와소좌가 이끄는 《월강추격대》에 섬멸적타격을 주는 휘황한 승리를 거둘수 있었다. 실천은 서로간 통합의 힘이 크다는것을 사실로 보여주었다. 이에 토대하여 국민회는 6월 21일, 7월 1일, 7월 7일에 또 련속 3차의 통합회의를 가지였다. 어떤 자료에는 4월 2일과 5월 7일에 봉의동(鳳儀洞)에서 제1차, 제2차회의가 열리고 5월 15일에 왕청현 가야하 대지동(大地洞), 수전동(樹田洞)회의, 6월 21일에 장암동회의가 열리였는데 모두가 간도국민회의 주장과 창도결과라고 한다. 어찌하든 간도국민회가 통합주장의 선두에 나선것만은 자명한 일이다. 상기 6월 21일, 7월 1일,  7월 7일의 3차 련합회의에 앞서 국민회에서 먼저 통합방안을 작성하고 상해림시정부 측에서 파견된 류동렬, 리용과 안정근 등이 5월이래 여러 반일무장단체를 찾아 대량의 설복사업을 앞세운데서 통합문제는 비교적 순리로왔다. 결과는 하나였다. 로씨야와 연변경내 대소 반일부대들을 모두 해산하고 무기는 모두어 통일분배를 하며 군사와 행정은 2부제로 나누어 실시하고 통합명칭은 7월7일에 토의, 결정하기로 한것. 했으나 순탄하지 못한 일도 없지 않았다. 북로군정서의 실책이였다. 통합을 앞두고 북로군정서에서 《조선진공계획은 시기상조》라고 주장하면서 등을 돌리고 독립성을 강조한데서 북로군정서만이 통합의 밖으로 물러났다. 이해 1920년 7월 7일, 연길현 의란구 신계동회의에서 북로군정서가 통합에 동의하고 서명하였다고 하나 이는 표면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북로군정서의 크나큰 력사실책이였다. 물론 실책의 모든 원인은 북로군정서에만 돌릴수 없고 간도국민회에서 상해림시정부가 승인하는 《유일한 지방행정, 군사기관》으로 자처하고 일을 처리하는데서 오는 불만도 있겠지만 북로군정서는 그번 실책의 대가를 그뒤 청산리전투에서 톡톡히 치러야 했다. 통합과정에서의 문제는 이뿐이 아니였다. 군사령도권문제를 둘러싸고 홍범도와 최명록간에도 갈등이 생기였다. 1920년 9월이후 여러 독립군부대들이 분분이 원 근거지들을 떠나 동쪽으로, 서쪽으로 전이할 때 최명록의 행위에 격분한 홍범도는 부대를 이끌고 명월구를 거쳐 화룡현 이도구방면으로 이동해버렸다. 대부분 부대들은 홍범도를 따라 이도구 어랑촌 부근에 집결하였다. 봉오동주둔 최명록부대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여 왕청현 라자구로 이동한 부대는 소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해당 력사자료를 펼치면 1920년 9월 26일좌우에 이도구 어랑촌 일대에 집결한 부대는 홍범도와 안무의 국민회군 외에도 신민단, 의민단, 훈춘한민회 등 부대 대다수병력이였다. 총병력은 도합 850명좌우로 알려졌다. 1920년 9월 17일과 18일에 김좌진장군은 서일장군의 명령을 받고 북로군정서부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군하여 10월 12일과 13일에 화룡현 삼도구 일대로 이동하였다. 10월 21일 오전에 북로군정서군은 청산리 백운평일대 직소부근에서 청산리대첩에서의 첫 승첩—백운평전투를 치른후 10월 22일 새벽 2시 30분에 어랑천 갑산촌에 전이하였다. 김좌진부대는 이곳에서 이른 아침밥을 지어먹고 아침 5시경에 천수동의 적기병 한개소대를 섬멸한뒤 어랑촌 서쪽 야계골 부근에서 아침 7시부터 일본침략군 아즈마지대 주력부대와 혈전을 벌리였다. 북로군정서부대는 적들의 수차 진공을 물리쳤으나 아군의 손실도 적지 않아 아군은 전군복멸의 위험한 처지에 빠지였다. 이때 봉밀구방면으로 이동하던 홍범도련합부대가 천병마냥 야계골에 나타나 적들을 족치였다. 이것이 전반 청산리대첩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치렬한 어랑촌전투였다. 적토벌대는 합계 1000명좌우를 이루어 오전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전투가 자못 치렬하였다. 허나 홍범도부대가 힘을 합친데서 북로군정서군은 사경에서 헤여났고 어둠이 깃들자 홍범도부대와 회합한후 어둠속에 자취를 감추었다. 북로군정서군은 그해 6월과 7월의 통합회의에 등을 돌렸다가 청산리 어랑촌전투에서 전군복멸을 초래할번 했다. 홍범도장군이 이끄는 련합부대가 때맞게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그 후과는 상상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김좌진장군 등은 뒤미처야 통합에서 빠져나간 실책을 심장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363    력사의 진실 (6) 청산리대첩 전후관계 댓글:  조회:3936  추천:17  2010-11-03
력사의 진실 (6)                      청산리대첩 전후관계   1920년 8월 중순부터 10월 중순사이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서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 안무의 대한국민회군 등 여러 독립군부대들은 새로운 기지를 찾아 선후로 명월구, 십리평, 의란구 등지의 본영을 떠나 화룡현 이도구와 삼도구의 밀림지대로 전이하였다. 우리의 답사길도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그젯날 삼도구와 이도구에로 이어졌다. 지난해(1991년) 5월 20일, 우리는 연길서 열린 중국조선민족사학회 년차회의 참가자들과 함께 전용뻐스를 타고 청산리와 그 일대의 답사길에 올랐다. 연길을 떠난 전용뻐스는 두시간도 못되여 화룡에 이른후 서쪽으로 해란강을 거스르며 부흥향변두리와 송하평을 뒤에 남기더니 청산리로 통한 굽이굽이 산길에 들어섰다. 우리는 마치 연길현 의란구의 깊은 산길과 로투구령, 장인강, 이도구, 대진창을 지나 200여킬로메터 험로를 헤치며 한달만에 송월평에 이른 북로군정서부대를 찾아가듯 마음은 하냥 설레이였다. 《저 마을이 송월평이요!》 누군가 소리치자 우리의 시선은 약속이라도 한듯 일제히 왼편 차창밖으로 쏠리였다. 아담하고 오붓하게 자리잡은 산간마을이 한눈에 안겨왔다. 조선민족사연구일군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마을이다. 1920년 10월 중순, 송월평으로부터 청산 증봉리에 이르기까지 북로군정서 등 독립군부대들로 쫙 덮히였다. 북로군정서부대는 워낙 충신장(즉 삼도구)아래 토산자 관문에 진을 치고 뒤따르는 일제침략군을 일망타진하려다가 그 일대 군중들이 피해를 입는다고 싸움터를 청산리쪽으로 돌리였다. 그들은 충신장(지금의 화룡현성) 대진창에서 점심을 치르고 이 늘찬 수십리 서쪽골짜기에 들어섰는데 삼도구일대 국민회계통의 군중들은 국민회와 군정서간의 계선을 타파하고 독립군에 초신, 의복, 정보 등을 전하고 식량 등을 거두어 부대주둔지로 운반하였다. 송월평의 조선사람들은 큰 소 한마리까지 잡았다. 그때 적들이 계속 뒤쫓는데서 김좌진장군은 송월평군중들이 피해를 입게 해서는 안된다면서 부대를 인차 해란강을 거슬러 계속 올라가게 하였다. 우리가 력사를 거슬러 당시의 전경을 담론하는 사이에 전용뻐스는 어느덧 해란강상류지역의 송월평과 라월평, 십리평을 지나 청산촌에 멈춰섰다. 시계를 보니 화룡현성에서 청산리까지 2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20킬로메터 거리를 반시간안에 달린것이다. 전용뻐스는 청산에 잠간 멈춰섰다가 베개봉밑으로 뻗은 서쪽산길을 들추더니 10분만에 청산촌에서 7~8킬로메터 떨어진 백운평마을 옛터에 이르렀다. 백운평마을터는 베개봉밑의 좁은 개활지에 놓였는데 개활지바닥으로는 작은 개천에 지나지 않는 맑은 해란강물이 골따라 졸졸 흐르고 북쪽켠엔 북쪽골이라 할만큼한 골이 가로 뻗어있었다. 백운평은 우리 겨례의 반일독립사상 잊을수 없는 력사의 고장이다. 송월평을 급급히 떠난 북로군정서부대는 백운평마을에 잠간 머물렀다가 베개봉아래 직소(直沼)부근에서 밤을 새웠다. (직소란 로일령에서 발원한 해란강이 이 계곡사이로 흐르다가 이곳 바위에 이르러 곧추 떨어져 꽤나 큰 소를 이룬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때는 마가을이라 독립군장병들은 저마다 오스스한 한기에 시달려야 했다. 적의 대부대를 지척에 두고 모닥불 한무지 피울수 없었던것이다. 긴장한 격전대기중에 시간은 더디게만 흘렀다. 이때 한시를 곧잘 짓는 사령부 비서 리정이 장병들의 심정을 그대로 한수의 즉흥 5언률시에 담아 읊었다.   나무잎 떨어져 산모습 조용한데 하늘은 높고 달빛 더욱 밝구나   장사의 마음속엔 만마가 달리는데 새아침 기다릴제 밤이 이리 길구나   당년 력사견증자들의 회억자료에 의하면 새날이 밝아오자 백운평마을의 조선사람들이 아침밥, 초신 등을 갖추어가지고 몇킬로메터 떨어진 계곡의 부대주둔지를 찾았고 식사가 끝난후 어떤 군중들은 돌아서다가 골안의 웃북골 다리목에서 조선 라남주둔 제19사단 73련대의 400여명 일제토벌대놈들과 맞띄웠다고 한다. 적들이 어디로 갔다오는가고 물으니 그들은 안도로 갔다온다고 했고 독립군을 못 보았는가고 하니 모르쇠를 댔단다. 결과 놈들은 시름놓고 골안으로 올라가다가 우리 독립군부대의 매복에 들어 불과 얼마안되여 전멸당하고 겨우 마병 셋이 살아달아났다고 백운평마을 사람들이 말했다. 해당자료들도 약 400명이 전멸당했다고 전하고있다. 10월 21일 아침 8시경에 야스가와 (安川)소좌가 인솔한 야마다(山田)련대의 전위부대가 백운평을 지나 얼마안되여 북로군정서부대 매복에 들어 거의 반격도 못하고 약 200명이 무리죽음을 당했다. 야마다련대의 주력부대도 기관총, 산포 등 중무기를 앞세우고 발악적으로 달려들다가 역시 200~300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하고말았다. 이러고보면 당년 백운평사람들의 증실이 력사자료와 기본상 어울린다. 김좌진의 독립군부대는 청산리대첩 첫 전투에서 휘황한 승리를 얻었다. 이것을 흔히 백운평전투라고 한다. 일본침략군은 미쳐 날뛰였다. 적후원부대는 백운평사람들 때문에 저들 부대가 녹아났다면서 백운평마을에 달려들어 그 분풀이로 이 마을 22-23세대의 녀자들을 모두 밖으로 나오게 하고 남자로 생긴건 어른이고 아이고 몽땅 집안에 가두고 불을 질렀다. 집안에서 뛰쳐나오는 사람은 총창으로 사정없이 찌르고 기관총을 내둘렀다. 김응준이라는 어린이와 마을의 민간의사 리희보 및 그의 셋째아들 등 셋이 겨우 살아났을뿐이다. 김응준의 집은 마을 뒤켠의 외딴집이였는데 아버지가 가슴으로 원쑤의 총창을 막아나섰기에 나무밭에 몸을 숨길수 있었다. 리희보는 그날 쟈피거우에 왕진을 갔기에 살았으며 6살난 그의 아들은 안해가 녀자옷을 입힌데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하였다. 그외 남자라는건 전부가 불속에 꺼꾸려졌다. 그때로부터 71년이 지났건만 지금도 이 마을 터전에서는 드문드문 백골이 발견된다고 한다. 백운평마을 옛터에서 웃켠을 바라보니 계곡은 점점 좁아만졌다. 헌데 전용뻐스가 돌아설수 없다하여 더 나가지 못하고 말았다. 우리들은 점심식사를 하며 청산리전투이야기로 꽃을 피웠으나 직소를 지척에 두고도 가보지 못하는 서운함은 항시 가셔지지 않았다. 그날 우리 일행은 전용뻐스로 50킬로메터를 조여 서성진에 이른다음 서쪽방향으로 다시 10킬로메터쯤 달려 와룡향소재지에 이르렀다. 향소재지 웃쪽의 계남촌에서 서쪽골로 10분 푼히 달리니 천수동이였다. 안내자인 연변박물관의 김철수 부관장은 천수동이 바로 당년 김좌진부대가 일제놈들과 싸운 전적지라고 소개했다. 주위는 온통 산이고 골이 동서로 뻗은 산속에 지금은 림장이 자리잡았다. 력사자료에 의하면 10월 21일 북로군정서부대는 직소부근에서 뒤따른 일제침략군을 통쾌히 무찌른후 밤을 패가며 30~40킬로메터 밖의 이도구 갑산촌으로 강행군했다. 리범석 등이 지휘한 제2지대가 앞서고 김좌진이 직접 인솔한 제1지대가 뒤따랐다. 갑산촌에 닿으니 이튿날 이른새벽이였다. 뒤미처 갑산촌에 이른 김좌진은 아즈마지대의 기병중대 40여명이 천수동마을에 숙영하고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김좌진장군의 령에 좇아 북로군정서부대는 다시 10여킬로메터를 급행군하여 잠간새에 천수동의 적 기병을 거의다 소멸했다. 겨우 기병 네놈이 도주에 성공했을뿐이다. 사학계에서는 이 전투를 천수동전투라고 일컫는다. 귀로에서 우리는 야지골어구에서 내려 이 일대 옛전적지를 둘러본다음 어랑촌에 이르러 발길을 멈추었다. 당년 이 일대에서 홍범도장군이 지휘한 대한독립군이 련일 처절한 전투를 벌렸는데 그중 어랑촌 왈리거우전투에서만도 400여명 적들을 무리로 쓸어눕혔다고 한다. 그만큼 홍범도장군은 걸출한 조선민족영웅이며 저명한 독립군사령관이였다. 독립군부대가운데서 제일 먼저 이동길에 오른것은 홍범도부대였다. 1920년 6월 봉오동전투후 홍범도장군은 휘하의 독립군부대를 왕청현 대감자에서 연길현 의란구(오늘의 연길시 의란향)로 전이시켰다가 다시 명월구로 옮기였다. 도중에 로투구곡에서 간도일본총령사관 경찰서 고등계형사부장 쯔바이가 인솔한 경찰대 20여명과 조우전을 벌려 대부분을 소멸한 전과를 올리였다. 당시 명월구에는 사관학교까지 있었다. 허나 홍범도장군은 일제의 대거출병을 예견하고 8월 하순에 부대를 백두산쪽으로 이동시켜 9월 20일경에 화룡현 이도구 어랑촌부근에 이르게 했다. 아군의 대한국민회군도 8월 31일에 의란구를 떠나 9월 말경에 이도구지방에 이르렀다. 홍범도장군은 이도구의 한 마을에서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신민단, 의민단, 한민회 등 독립군부대지휘관회의를 소집하고 련합부대 (총병력 1000여명)를 뭇는데 성공하였으며 청산리일대의 북로군정서부대와도 련합작전을 토의했다. 한편 이도구일대의 련합부대는 어랑촌에서 매일 군사훈련을 다그쳤다. 일제침략군 약 2만명은 10월초부터 연변에 대한 대거출병을 개시했는데 아즈마지대의 약 5000명이 이도구와 삼도구일대에 투입되였다. 여러 독립군부대의 총병력은 약 2000명이였다. 1920년 10월 21일, 김좌진장군이 북로군정서부대를 지휘하여 백운평 직소부근에서 적과 싸울 때 홍범도장군은 독립군련합부대를 지휘하여 어랑촌 왈리거우에서 아즈마소장이 지휘하는 아즈마지대의 주력부대와 격전중에 있었다. 이날 아즈마지대의 주력부대는 도처에 불을 지르며 두갈래로 나뉘여 북왈리거우와 남왈리거우에 달려들었다. 이 무렵에 홍범도장군은 적정을 간파하고 이왕과는 달리 주력부대를 측면고지에 매복시키고 예비대를 중앙고지에 배치하는 전술을 썼다. 이에 속히운 적들은 중앙고지를 주공방향으로 삼았는데 전투는 해질녘까지 계속되였다. 어스름이 기승을 펴자 에비대의 독립군용사들은 홍범도장군의 명령에 좇아 감쪽같이 고지를 떠나 적의 측면에 숨어들었다. 아즈마지대의 한개 대는 중앙고지를 점령했으나 우리 예비대의 측면공격과 독립군주력부대의 협공속에 들었다. 북왈리거우로 진격하던 아즈마지대의 다른 일대도 중앙고지의 자기편을 홍범도군으로 오인하고 맹렬한 진공을 들이댔다. 하여 적의 일대는 홍장군의 계교에 빠져 거의 전멸당했는데 그수가 400여명에 달했다. 어랑촌 남쪽 큰길에 나선 우리에게는 이 고장에 깃든 홍범도장군의 전설이 떠올랐다. 1920년 10월의 어느날 저녁식사를 마친 장군의 부대는 어랑촌 누이성마을에서 단잠에 들었다. 새날을 잡자 장군은 번개치는 예감에 소스라쳐 깨여났다. 《포위되였다. 빨리 산에 오르라!》 장군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전사들은 벌떡 벌떡 일어나 산으로 치달았다. 허나 후위를 서던 홍장군은 일본군의 겹겹한 포위속에 빠졌다. 이때 손에 작탄을 쥔 장군은 문을 박차면서 《나를 잡아라!》고 웨치더니 오간데없이 사라졌다. 그후 적들은 홍범도란 말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 장군은 대뜸 전설속의 인물로 되였고 조선사람들속에서 신망이 하늘처럼 높았다. 어랑촌 전투 때 13살로서 여기 북왈리거우에 살았던 김극성로인(1908년생, 연길시에 거주했음)은 홍범도를 하늘이 낸 인물이였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홍범도장군을 제눈으로 보았는데 평소 일본제 〈마상대〉한자루를 메고 배낭을 지고 물통하나를 차고있었는데 병사들이 입은 옷보다 더 헐망한 옷을 입고있었다.》 이어 그는 그 나날의 정경을 보는듯이 그려내면서 《홍범도부대가 와서 약 보름후에 김좌진부대가 오니 홍범도부대는 자리를 내여주고 어랑촌 동화동으로 옮겨갔다.》고 했다. 그때 어랑촌 동화동에서 홈범도부대를 가까이 대했던 류덕규로인(1911년생, 연길시에 거주했음)은 1920년 10월 초순에 홍범도장군이 100명좌우의 부대를 이끌고 동화동으로 왔는데 이 부대전사들은 낮에 초신을 삼기에 여념없었다고 우리와 터놓은적이 있다. 그리고 그후 불과 며칠 안되여 청산리전투가 벌어졌다고 덧붙였다. 그러던 홍범도장군은 어랑촌 왈리거우전투에서 적들을 여지없이 쓰러눕힌다음 들미동쪽으로 부대를 귀신같이 움직이다가 김좌진의 부대가 어랑촌부근에서 아즈마지대의 주력부대와 결사전을 벌리고있다는 급보를 받았다. 사실은 이러했다. 김좌진부대의 천수동습격은 어랑촌에 총지휘부를 둔 아즈마소장의 본영을 놀래웠다. 이를 예견하고 북로군정서군은 천수동 북쪽의 고지에 올랐는데 과연 아즈마지대의주력부대 수천명이 천수동골짜기를 덮으며 밀려들었다. 김좌진의 제1지대는 유리한 지세에 의지해 적들을 거듭 물리쳤지만 병력과 화력 등의 현저한 차이로 하여 아군의 처지는 갈수록 어려워졌다. 김좌진과 그 휘하장병들은 발악적으로 달려드는 우세한 적앞에서 결사의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럴 때 홍범도의 독립군련합부대가 천병마냥 싸움터 우측 산마루에 나타난데서 북로군정서군 고지로 달려들던 적들이 밑둥부러진 나무처럼 여기저기 나부러졌다. 생사의 시각에 홍범도부대를 맞이한 김좌진부대장병들은 사기충천하였다. 적들은 거듭 패배의 고배만 마시다가 땅거미가 든후 저들 부대를 어랑촌쪽으로 물러세우지 않을수 없었다. 이 전투에서 적들은 또 수백명의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그후 두 독립군부대는 아즈마지대의 포위를 승리적으로 헤치고 서남방향으로 가뭇없이 사라졌다가 25일과 26일 고동하강반에서 또 적들에게 섬멸적타격을 안기였다. 귀로에 서성진 명암촌부근을 지날 때 우리는 명암촌쪽에도 잠간 눈길을 돌리게 되였다. 당년 명암촌은 간도국민회서지방부(西地方部)소재지였는데 한때 홍범도장군이 이 촌에 머물렀었다. 지금 연길시에 거주하고있는 량환준로인이 그대 11살이였는데 일찍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느날 저녁 홍범도장군이 량씨네 집 퇴마루에 걸터 앉았다가 방문을 빠끔히 연 량환준을 보고 오라고 손짓했다. 어린 량환준이 주춤주춤 나서자 홍장군은 제꺽 들어 무릎에 앉히고는 이름은 무엇이고 공부를 하느냐고 자애롭게 물었다. 이때 어린또래들이 모여든다고 호위병이 막으니 장군은 다 저애들을 위해 싸운다면서 어린이들을 가까이 앉히고 로투구령에서 적경찰대를 본때스레 족쳤던 전투이야기를 신나게 들려주었다. 장군의 발자취가 스친 고장이여서인지 우리에게는 명암촌도 무심히 보이지 않았다. 백운평과 어랑촌, 이 일대들은 이렇듯 유서깊은 력사의 고장이였다. 이 력사의 한복판에는 홍범도장군과 김좌진장군이 서 계시였다. 이들은 여러 독립군부대를 지휘하여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의 6일간에 백운평부근전투, 천수동전투, 왈리거우전투, 어랑촌전투, 고동하전투 등 대소 10여차의 전투를 진행하여 일제침략군 약 1200명을 섬멸했다. 중국조선족연구가들의 통설은 1000명 좌우로 오르내린다. 당년 삼도구지방과 독립군부대사이의 통신련락을 한적있은 황필항로인(연길시에 거주했음)은 우리와 이야기를 나눌 때 백운평 계곡에서 일본군은 저들 장병의 대가리를 세마차나 실어내렸다고 증실했다. 1988년에 88살이였던 리형권로인은 어랑촌싸움후 일군은 죽은 군인의 대가리를 떼서 네바퀴중국마차에 실었는데 이런 마차 세대가 투도구를 경유하여 룡정에 내려갔다고 하였다. 이러고보면 청산리대첩 전반기간에 일제침략군이 독립군부대의 뒤를 물다가 1000여명이 죽어나갔다는것은 일리가 있는것 같다. 청산리전적지 첫 답사후 이해(1991년) 8월, 우리는 다시 백운평계곡을 찾았다. 청산리 대첩의 첫 전투를 치른 직소를 보지 못한것이 내내 마음에 걸린 우리들이였다. 허나 두번째 답사도 헛수고였다. 이미 직소답사를 했던 연변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의 강룡권선생이 우리의 안내자로 나섰는데 맹랑하게도 그도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던것이다. 1992년 5월 6일, 우리는 연변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의 답사일행속에 섞이여 세번째로 청산리전적지답사길에 올랐다. 이날도 안내자가 없이 좁은 계곡을 소형뻐스로 달린데서 또 헛탕을 치고말았다. 직소는 마치 우리와 숨박꼭질을 하는것만 같았다. 했으나 세번째 답사에서 얻은 수확은 대단했다. 우리는 직소를 찾느라 이 골안치기까지 거의 올라가게 되였는데 이 골안을 손금보듯 환히 헤아릴수 있었다. 청산리마을부터 계곡치기까지 장장 20킬로메터 거리인데 백운평마을 옛터 우로부터 이 계곡의 중턱까지는 불과 수십메터 너비의 길고좁은 계곡이였다. 후에 당지의 사람들을 통해 안바이지만 직소는 바로 이 길고좁은 계곡안에 있었는데 백운평옛터에서 2~3킬로메터 상거한 거리였다. 위치로 말하면 베개봉(해발 1616.6메터)동북쪽 바로 산밑이였다. 직소의 물이 락차 높은 바위에서 떨어지는것이 아니고 2~3메터 높이의 바위란다. 그나마 새길을 닦는 등 원인으로 이 바위까지 없어졌다니 말이다. 광복직후까지 벌목군들이 떼목류송을 하였다는 해란강 최상류이기는 하나 수십년 세월이 흐른 오늘 계곡에 아름드리 나무가 우거지고 새길이 산비탈로 뻗었으니 달리는 차우에서 직소를 내리본다는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그리고 해내외의 여러 자료와 전문저서들에서 싸움터 좌우켠에 《깎아지른듯한 절벽》이 솟아있고 그 사이에 백운평이라는 공지가 있다고 했는데 이는 현지특징과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이 계곡의 20킬로메터 안에는 깎아지른듯한 절벽은 그만두고 낮다란 바위산 하나 없었다. 있다면 좌우켠에 수림으로 덮친 우중충한 산들뿐인데 이 계곡사이로 해란강물이 흐르고 산비탈로 울퉁불퉁한 소수레길(지금은 새길이 닦아지고 자동차가 씽씽 달림)이 올리 뻗었다. 당년 북로군정서부대가 이런 곳에 진을 치고 계곡에 들어선 일제침략군을 내리 족쳤으니 놈들은 날개가 없는한 솟아날 구멍이 없었다. 세번에 걸친 청산리전적지답사는 이로써 마무리져야 했다. 계곡을 내리는 우리의 귀전에는 청산리싸움후 당지 조선족들속에서 널리 불리웠다는 《원쑤 너를 다 베이리》란 노래(안중근 작사)가 방불히 들리는듯 싶었다.   만났도다 만났도다 원쑤 너를 만났도다 너를 한번 만나려고 로청(로씨야와 청나라를 말함) 량지 지날 때에 앉은 때나 섰을 때나 살피소서 살피소서 구주 여주 살피소서 너의 짝패 몇만이냐 오늘부터 시작하여 몇해든지 작정하고 대한 칼로 다 베이리                                                                                                                     1992년 5월        
362    력사의 진실 (5) 청산리전투 진상과 백운평"대참안" 댓글:  조회:4757  추천:35  2010-11-02
력사의 진실 (5)                          청산리전투 진상과 백운평“대참안”         일전에 필자는 《바로 잡아야 할 우리 력사》순위로 《〈해란강대혈안〉진상》 이란 글을 문화산맥 사이트에 올린바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이른바 《해란강대혈안》자체에 의문을 던지면서 이 《대혈안》에서 간악한 일본침략자들에 의해 살해된 해란구의 혁명자와 백성이 1700여명이 아니라 170여명이라고 밝히였다. 헌데 올(2005년) 여름이래 청산리전투나 경신년대토벌을 엮은 글들이 가끔 발표되면서 이런 과대서술이 다시 란무하는데 대하여 경악하지 않을수 없다. 아래 청산리전투를 취급한 두편의 인용문을 보기로 하자.   —백운평전투때에도 적들은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마을사람들을 젖먹이까지도 빼놓지 않고 죄다 집안에 가두어 놓고 불을 질렀으며 뛰쳐나오면 총창으로 찌르고 기관총을 휘둘러 쏴죽이고는 시체를 불속에 집어넣었다.    —당시 백운평에는 인가가 50,60세대가 살고있었다고 한다. 한세대당 5명으로 쳐도 백운평참안에서 살해된 사람은 300여명 된다. 오붓한 조선족마을은 일제의 야수같은 만행으로 하루아침사이에 이 세상에 종적을 감추고말았다. 놈들은 청산리마을뿐만아니라 그 일대 마을을 모조리 불사르고 만나는 사람마다 모조리 죽였다.   백운평참안을 다룬 두편 글의 해당 인용문이다. 참으로 놀라운 과대서술. 웬간한 참안이면 그러려니 하고 지나치겠지만 우리 겨레의 항일투쟁사에 중요한 획을 그은 청산리전투의 백운평 주요전적지이니 단순히 스쳐 지날수가 없다. 백운평은 우리 겨레의 반일투쟁사상 잊을수 없는 력사의 고장이여서 더욱 그러하다. 그럼 어찌하여 백운평대참안은 놀라운 과대서술이라고 하는가? 이는 당년 력사의 진실을 펼쳐보이면 스스로 풀리는 문제이다. 당년 오늘의 화룡시소재지—삼도구, 즉 충신장(忠信場)에서 청산리 백운평까지는 27-28킬로메터 거리였다. 이 50여리 구간은 충신장과 지금의 송하평사이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수십리 골짜기였다. 이 골짜기에는 송월평, 라월평, 십리평, 평양평(즉 오늘의 청산촌), 백운평 등 조선이주민들 마을이 있었고 백운평 동북쪽에 베거우 (北沟)와 쟈피거우 등 조선인마을이 있었다. 그중 평양평은 조선의 평양이주민들이 이주한 고장이여서 평양평이라고 불리였는데 1984년에 출판된 《화룡현지명지》에 의하면 평양평이 청산리로 이름을 바꾼것은 1932년이라고 한다. 백운평은 평양평(청산촌)에서 서쪽으로 7~8킬로메터 떨어진 산간마을이였다. 백운평마을의 형편과 청산리 전투때의 형편은 연변주보관서류국(당안관)의 혁명력사자료-3061에 잘 반영되였다. 이 3061에 반영된 자료는 당년 1920년 10월 백운평참안을 겪은 이 마을의 력사의 견증자들이 직접 구술한 자료들인데 이 자료들에 의하면 당년 백운평마을의 인가는 50~60세대가 아니라 22~23세대였다. 유감스러움은 연변보관서류국의 이 진귀한 력사자료를 본 연구가들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청산리전투과정을 서술한 허다한 조선족연구글들에 이것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를 잘 말해 준다. 력사를 펼치면 1920년 10월, 송월평으로부터 청산리백운평에 이르기까지 북로군정서 등 독립군부대들이 쫙 덮히였다. 서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부대는 워낙 충신장아래 토산자 관문에 진을 치고 뒤따르는 일제침략군을 일망타진하려다가 그 일대 군중들이 피해를 입는다고 싸움터를 지금의 청산쪽으로 돌리였다. 그들은 충신장의 대진창에서 점심을 치르고 청산골이란 이 늘찬 수십리 서쪽골짜기에 들어섰는데 삼도구일대 국민회계통의 군중들은 국민회와 군정서간의 계선을 타파하고 독립군에 초신, 의복, 정보 등을 전하고 식량을 거두어 부대주둔지로 운반하였다. 송월평의 조선사람들은 큰 소 한마리까지 잡았다. 그때 적들이 계속 뒤쫓는데서  김좌진장군은 송월평군중들이 피해를 입게 해서는 안된다면서 부대를 인차 해란강을 거슬러 계속 올라가게 하였다. 일제침략군이 새까맣게 밀려든것은 독립군부대가 떠난뒤였다. 통역 한놈이 송월평의 한 군중을 붙들고 독립군이 어디로 갔는가고 물으니 그 군중은 《우리 백성들이야 어찌 알겠소.》하고 대꾸하였다. 이때 마을 뒤켠에서 떠들썩하는 소리가 들리였다. 적들은 김좌진과 동성동명인 한사람을 묶으며 야단법석이였다. 애매한 군중이 욕을 보는 판이였다. 이때 일본말을 아는 마을의 김천일농민이 일본군장교한테 다가가 경례를 굽석하고 무어라 여차여차 하자 일본군장교는 고개를 끄떡이며 김좌진군중을 풀어놓게 하였다. 이는 청산리전투를 앞두고 송월평에서 전해진 일화이다. 이미 전에(즉 송월저수지가 앉기전에) 전용뻐스로 수차 답사해보니 그때의 화룡현성에서 청산리까지 2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20킬로메터를 반시간안에 달린 것이다. 우리 연변력사연구소 연구일군들이  탄 전용뻐스는 청산에 잠간 멈춰섰다가 베개봉밑으로 뻗은 서쪽 산길을 들추더니 10분만에 청산촌에서 7-8킬로메터 떨어진 백운평 마을옛터에 이르렀다. 백운평 마을터는 베개봉밑의 좁은 개활지에 놓였는데 개활지바닥으로는 작은 개천에 지나지 않는 맑은 해란강물이 골따라 졸졸 흐르고 북쪽켠엔 북쪽골이라 할만큼한 골이 가로 뻗어있었다. 다시 력사의 현장에 다가서면 송월평을 급급히 떠난 북로군정서부대는 백운평마을에 잠간 머물렀다가 베개봉아래 직소(直沼)부근에서 밤을 새웠다. 직소란 로일령에서 발원한 해란강이 이 계곡사이로 흐르다가 이곳 바위에 이르러 내리 꼰지며 꽤나 큰 소를 이룬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때는 마가을이라 독립군장병들은 저마다 오스스한 한기에 시달려야 했다. 적의 대부대를 지척에 두고 모닥불 한무지 피울수 없었던것이다. 당년 력사견증자들의 회억자료에 의하면 새날이 밝아오자 백운평마을의 조선사람들이 아침밥, 초신 등을 갖추어가지고 몇리 떨어진 계곡의 부대주둔지를 찾았고 식사가 끝난후 어떤 군중들은 돌아서다가 골안의 웃북골 다리목에서 조선 라남주둔 제19사단 73련대의 400여명 일제토벌대놈들과 맞띄웠다고 한다. 적들이 어디로 갔다오는가고 물으니 그들은 안도로 갔다온다고 했고 독립군을 못 보았는가고 하니 모르쇠를 댔단다. 결과 놈들은 시름놓고 골안으로 올라가다가 우리 독립군부대의 매복에 들어 불과 얼마안되여 전멸당하고 겨우 마병 셋이 살아달아났다고 백운평마을 사람들이 말했다. 해당자료들도 약 400명이 전멸당했다고 전하고있다. 10월 21일 아침 8시경에 야스가와 (安川)소좌가 인솔한 야마다(山田)련대의 전위부대가 백운평을 지나 얼마안되여 북로군정서 부대매복에 들어 거의 반격도 못하고 약 200명이 무리죽음을 당했다. 야마다련대의 주력부대도 기관총, 산포 등 중무기를 앞세우고 발악적으로 달려들다가 역시 200~300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하고말았다. 이러고보면 당년 백운평사람들의 증실이 력사자료와 기본상 어울린다. 김좌진이 이끄는 서일의 북로군정서 부대는 청산리대첩 첫 전투에서 휘황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을 흔히 백운평전투라고 한다. 일본침략군은 미쳐 날뛰였다. 적후원부대는 백운평사람들 때문에 저들 부대가 녹아났다면서 백운평마을에 달려들어 그 분풀이로 이 마을 22-23세대의 녀자들을 모두 밖으로 나오게 하고 남자로 생긴건 어른이고 아이고 몽땅 집안에 가두고 불을 질렀다. 력사의 진실이 바로 이러하다. 온 마을 남녀로소가 아니라 남자들만 말이다. 집안에서 뛰쳐나오는 남자들에 대해 적들은 총창으로 사정없이 찌르고 기관총을 내둘렀다. 허나 남자들이라하여 모두가 죽은것이 아니였다. 김응준이라는 어린이와 이 마을의 민간의사 리희보 및 그의 셋째아들 셋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이는 어찌된 일인가, 백운평사람들의 증실자료에 따르면 김응준어린이의 집은 마을 뒤켠의 외딴집이였는데 그의 아버지가 가슴으로 원쑤의 총창을 막아나서며 시간을 지연시켰기에 김응준은 달아나 나무밭에 몸을 숨길수 있었다. 리희보는 북쪽의 쟈피거우에 왕진을 갔기에 살았으며 6살난 그의 아들은 리희보의 안해가 재빠르게 녀자옷을 입힌데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였다. 그외 남자라는건 전부가 불속에 꺼꾸러졌다. 이는 당년 일본침략군의 만행에서 살아난 백운평마을과 그 주변마을사람들의 진실한 증언이다. 이 자료가 지금 연변주보관서류국에 보관되여 있다. 하기에 필자는 백운평의 당시 인가를 50~60세대로, 한세대당 5명으로, 전체 살해를 300여명으로 지적한것이 어처구니가 없다고 말한다. 모르면 추측으로 밝히지 말아야 하는 것이 사학자의 준칙아닌 준칙이건만 때로는 그렇지가 못하다. 남자셋에 녀자들이 살아남은것은 백운평의 당시 현실이다. 그리고 백운평일대와 청산리일대 마을을 모조리 불사르고 만나는 사람마다 모조리 죽였다는것은 모르는 소리이다. 20여년간 이면에 주의를 돌리였어도 백운평을 제외한 마을들에서 피해를 입었다는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송월평 등지 군중들의 증실자료에도 이런 말은 일언반구도 없다. 백운평의 민간의사 리희보가 북쪽의 쟈피거우에 왕진을 갔다가 살게 되였다는것도, 송월평, 라월평, 십리평 등 마을의 군중들이 청산리전투와 경신년대토벌을 증실한 자료를 보아도 이런 마을들이 일본놈들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좋은 근거로 된다.                          
361    력사의 진실 (4) 노루바위골 참변 진상 댓글:  조회:2722  추천:15  2010-10-27
력사의 진실 (4)   노루바위골 참변 진상                                                           1   1920년 11월 9일부 “길장일보”의 뉴스에 따르면 “최근 3주일내에…연변일대에서 살해된 조선인은 2000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해 10월의 경신년참변을 말하는것인데 일본제국주의는 근 2만명에 달하는 저들 정규부대를 연변에 내몰아 전대미문의 피비린 대살륙을 감행하였다. 뉴스와 같이 일제살인귀들에 의해 연변과 그 일대는 불바다에 잠기고 무고한 조선족들이 원쑤의 총칼아래 쓰러졌다. 연길현 장암동, 즉 노루바위골이 겪은 참변이 그 대표적인 실례라 하겠다. 허나 지금까지의 연구자료들을 보면 누구나를 막론하고 간단히 언급하고 지날뿐 노루바위골 참안의 현장에 대해 상세히 서술하지 못하고있다. 서술한 자료들도 참변날자, 살해된 수자, 살해된 장소 등이 력사현실과 다소 다르게 반영되는 점이 보이기도 한다.                                                                2   그럼 먼저 경신년 “대토벌”때 노루바위골이 겪은 력사현장에 대한 대표적인 자료 몇가지를 떠올려 보기로 하자. 가장 먼저 기록된 자료는 당시 룡정촌 카나다장로파 장로교회의 제창병원 원장 마띵의 “견문기”라고 보아진다. 이 견문기는 당시 서방 각국 신문에 널리 보도되였다고 하는데 우리에게 력사의 진실한 기록을 남겨주고있다.   나는(마띵) 10월 31일 일요일 마차로 12마일 떨어진 비암촌(실제는 장암촌이다)을 향해 룡정에서 출발했다. 10월 29일에 벌어진 일을 조사해보려는 데서였다. 그날 날이 채 밝기전 무장한 일본군이 이 촌락을 포위하고 낟가리에 불을 지르고 집안의 사람들을 밖으로 나오라고 명령하였다. 밖으로 나온 사람은 모두 총살당하였다. 채죽지 않으면 그 위에다 불붙는 곡식단을 들어다 무지군하였다. 가까운 거리에서 세번이나 사격한 후에도 불속에서 숨이 붙어 일어나는 자가 있게되면 총창으로 찔렀다. 부녀들은 마을 성년남자들이 한사람도 남지 못하고 학살당하는 광경을 옆에서 보도록 강박되여 끝까지 있어야 하였다. 이런후 일본군은 유유히 돌아가서 천장절(天長节)을 축하하였다. 나는 19채의 집이 불탄것을 사진찍고 총살당한 시체도 사진찍었는데 이는 일본군이 방화한지 36시간이 경과한 후였다.   이 견문기 인용문은 연변대 고영일교수의 “조선족력사연구” 제228-229페지에 그대로 기록되여 있다. 이 글을 보면 노루바위골 참변은 10월 29일로 되여있고 살해된 장소가 알려지지 안고 집밖으로 내다가 죽인것으로 되여있다. 어찌하든 최초의 자료, 그것도 참변 36시간후 답사기록이라 할때 그 력사적가치가 대단히 높다고 해야 할것이다. “상해시보” 1920년 11월 9일부터 13일까지의 보도에 따르면 연길현 장암동(오늘의 룡정시 동성용진 동명촌일대, 조선말로 노루바위골인데 이것이 한자어로 번지여 장암동이 됐음)은 이해 10월 29일 새벽에 참변을 겪었다. 살인귀들은 마을의 청장년 31명을 붙잡아 례배당에 처넣고 불을 질렀으며 뛰쳐나오는 사람들에겐 다시 총알을 안기였다. 이 보도를 지난 80년대에 벌써 출판된 “조선족백년사화”(1)에서 그대로 인용하고있다. 이 책은 당시 연변대학 조문학부의 현룡순, 리정문, 허룡구 세 선생이 지은것인데 필자 대학재학시절이여서 출판상황을 잘 알고있다. (필자는 대학시절에 백년사화의 제2책에 두편의 글을 올린바 있다.)   룡정에서 약 30리 떨어진 장암동(즉 노루바위골)이란 마을이 10월 29일 새벽에 일본놈들의 토벌을 맞았다. 놈들은 이 마을에 들어서자바람으로 예수교신자들인 마을사람들을 몽땅 붙잡아놓고 그중 31명 청장년들을 례배당에 몰아넣은후 불을 질렀다. 수난자의 부모처자들은 두눈을 뻔히 뜨고 바라볼뿐이였다. 불붙는 례배당에서 뛰쳐나오는 사람만 있으면 총을 쏘았다. 총에 맞았으나 죽지 않았으면 조짚에 석유를 쳐 불을 달아 부상자의 몸에 덮어놓았다. 몸에 불이 붙은 사람들이 몸부림치는 바람에 붉은피가 사처에 뿌리였다. 노루바위골은 시내물을 끼고 올라가면서 마을들이 여럿이 있었는데 이날 이곬의 마을마다 몽땅 불에 타버렸다. 재만 남은 마을에서 살아남은 부녀, 늙은이, 어린아이들은 재무지 속을 헤쳐 타다남은 친인들의 뼈를 주어서 마을밖에 파묻었다. 페허로 된 마을밖에는 갑자기 새로운 무덤들이 가득 일어섰다. 아들을 빼앗긴 부모들, 남편을 잃은 녀인들, 아버지를 여읜 아이들, 갑자기 과부가 되였고 고아가 되였으며 무자식 늙은이로 된 사람들은 목을 놓아 울었다. 곡식마저 모조리 불에 탔으니 장차 살아나갈 길도 막막하였다.   “조선족백년사화”(1) 제 208-209페지에 오른 글이다. 이 “상해시보”의 인용문은 노루바위골 참변을 10월 29일이라고 했고 살해장소를 례배당이라 했다. “이날 이곬의 마을마다 몽땅 불에 타버렸다.”는 것은 어처구니없이 과대된 서술임을 밝혀든다. 심여추선생이 쓴 “연변조사실록”에서도 노루바위골참변을 스치고있다. 선생은 경신년대토벌에서 피해가 가장 깊은것은 동성용서남(필자주: 응당 동성용 동남으로 되여야)의 장암동이라면서 이렇게 썼다.   일본군은 10여리 장암동 촌락을 단꺼번에 불태워 텅빈 땅으로 만들었는데 우마계견도 한마리 남지 않았다. (日军将十余里之獐岩洞村落, 一把火烧成空地, 牛马鸡犬一无所留)   이 단락은 심여추선생의 유작 “연변조사실록”에 실린 글이다. 그대로 밝히면 이 실록은 모두 다섯개 장으로 되고 상기단락은 제4장 제23절—“연변한인 정형”에 밝혀졌는데 지난세기 20년대 연변에서 발행된 신문 “민성보”에 실리였었다. 심여추(沈茹秋)선생은 북평정법대학 재학시절에 친히 조사한 자료와 중외 해당문헌에 의해 이 실록을 써냈는데 지난 1988년 연변력사연구소에서 내부용으로 펴낸 “연변력사연구” 제2집에 원문 그대로 실리였다. 지금 보면 10여리 산재마을들이 몽땅 불타고 집짐승 한마리도 남지 않았다는것은 력사의 진실과 어긋난다. 상기 “상해시보”의 인용문과 같이 역시 과대된 서술이 아닐수 없다.                                                                3   연변박물관 관원 김철수선생과 김중하 서명으로 된 “일제의 ‘경신년대토벌’에 대하여”도 노루바위골 참변을 언급하고있다.   10월 30일 새벽, 룡정에 주둔해있던 일본군 제19사단 73련대 제3대대의 오오마보병대대장은 스즈끼대위가 거느린 70여명의 군대와 헌병 그리고 3명의 경찰관을 연길현 룡정 동성용의 노루바위골에 파견하여 남양평에 주둔한 수비대와 합세한후 마을을 포위하고 주민들을 교회당마당에 집결시킨후 성년남자 33명을 반일부대와 내통한다는 리유로 결박하고 교회당안에 가두어넣고 불을 질렀다. 놈들은 불속에서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모두 총창으로 찔러죽였다. 가족들은 넋을 잃고 울부짖다가 일본놈들이 물러간 뒤에야 육친들의 시체를 찾아 장사지냈다. 그런데 며칠후 일본놈들이 또다시 마을에 뛰여들어 유가족들을 모아놓고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한데 모으라고 강요한후 시체무지를 조짚단우에 올려놓고 석유를 쳐 태워버렸다. 그리고 또 11채의 가옥과 영신학교에다도 불을 지르고 물러갔다. 마을사람들은 누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33명의 유체를 마을 뒤언덕에 합장하였다.   이는 “룡정 3.13반일운동 80돐기념문집” (연변인민출판사, 1999년 9월)에 실린 글이다. 이 글의 원 출처는 현천추의 “ ‘경신년대토벌’ 참안지연구”에 두고있다. 여기에서 문제로 되고있는것은 성년남자 33명이라는것과 가두어 불을 지른것이 교회당이라는 점이다. 다음 2004년 7월 2일부 “연변일보” 3면에 실린 글 “피로 물든 장암동”을 보기로 한다. 이 글은 연변일보 기자 김철호선생이 연변대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을 취재하고 선생이 제공한 자료를 주요근거로 쓴것인데 “박창욱선생은 일본국학 자료원에서 출판한 두툼한 ‘현대사자료’집에서 장암동사건에 관련된 페지를 찾아 펼친후 그대로 번역하면서 읽어내려갔다.”면서 아래와 같이 원문내용을 서술하였다.   1920년 10월 30일 새벽 0시 30분, 룡정에 주둔하고있던 일본군 제4사단 28려단 보병 제15련대 제3대대 대대장 다이오까의 명령을 받은 스즈끼대위는 보병 70여명, 헌병 3명, 경찰관 2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거느리고 장암동에 파견되였다. 4시경에 그들은 남양평수비대와 합세하여 새벽 6시 30분에 장암동을 포위하고 마을주민들을 강박하여 교회당마당에 집결시킨후 청장년 33명을 반일부대와 내통했다는 리유로 포박하여 교회당안에 가두어놓고 불을 질렀다. 교회당은 즉시로 화염이 충천하였는데 놈들은 불속에서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총창으로 마구 찔러죽이고 불속에 던져넣군 하였다. … … … 며칠후…악마같은 일본군은 또다시 마을에 쳐들어왔다. 간악한 놈들은 유가족들을 강요하여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한데 모아놓으라고 했다. 놈들은 다시 파낸 시체를 조짚단우에 놓고 석유를 쳐 재가 되도록 태워버리면서 이중살해를 감행했다. 일본군은 장암동에서 민가 11채, 영신학교와 교회당을 불태워버렸다.   지금까지 여러 대표적 자료로 보아 가장 설득력있는 글이라 하겠다. 력사사실을 그대로 반영하였다고 보아진다. 다만 일본의 “현대사자료”인용이다보니 교회당이라든가, 33명이라든가가 의연히 문제시 될뿐이다. 그리고 지금의 모든 연구가들이 자료인용에만 매달리고 력사현장취재와 답사를 홀시하였기에 제한된 자료를 그대로 간략히 서술할수 있을뿐 력사현장의 실태를 생생히 드러낼수 없음을 부언해둔다. 지난 80년대 연변력사연구소 근무시절에 필자는 연구소후배 박경재씨와 같이 연변내 주요 항일독립유적지들을 전면답사하면서 계렬 글을 “문학과 예술”지에 련재한적이 있는데 봉오동전투의 전주곡으로 되는 삼툰자전투 등등 력사현장 기재에서 일본측 “현대사자료”가 실제와 어긋나거나 틀리게 서술했거나 외곡된 부분이 있다는것을 발견하게 되였다. 노루바위골참변 언급도 례외가 아님을 지적하는바이다. “현대사자료”에 따라 유적지들을 답사하면 실제사실과 어울리지 않는 부분이 가끔 나타난다.                                                                4   하다면 력사자료와 현지답사와 방문을 통해 본 노루바위골 참변 상세한 력사현장은 어떠할가, 아래 수차의 답사와 방문, 연구를 거친 력사현장을 그대로 소개해 보기로 하자. 당년의 연길현 장암동은 조선말로 노루바위골인데 경신년대토벌 그해 심한 토벌란을 겪었다. 당시 룡정촌 카나다장로파 장로교회의 제창병원 원장이였던 마띵의 노루바위골 현지답사 견문기가 이를 시사하고있다. 그후 이 견문기는 서방 여러나라 신문에 널리 실려 강렬한 반항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인지 노루바위골은 필자의 마음을 몹시 끄당기였다. 1991년 12월 10일 필자 일행은 마침내 노루바위골 첫 답사길에 올랐다. 연길에서 뻐스를 타고 그때의 동성용향소재지로 간 우리는 7~8킬로메터를 좋이 걸어서야 이 향의 동명촌(동명 2대)에 이를수 있었다. 이 촌은 노루바위골 원골의 중간쯤에 위치한 마을로서 일명 삼구촌이라고도 불렀다. 해당조사자료에 의하면 지형은 여기서 다시 남북방 세개골로 갈라지는데 원골을 남골이라 하고 북쪽골을 북골, 중간골을 새골(사이골이란 말)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삼구촌이라 부르게 된 유래이기도 하다. 이날 우리는 동명촌에서 1.5~2킬로메터 떨어진 북골의 북동(동명3대)에 가서 김흥섭(1991년 72살) 로인을 취재하는가운데서 세개골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였다. 그것은 남골, 북골을 각기 남노루바위, 북노루바위로 부른다는것과 새골은 다시 새골과 웃새골 2개 마을로 갈라지는데 경신참변을 당한 마을이 바로 웃새골이라는것이였다. 여러 자료들에서 말하는 장암동과는 거리가 있었다. 큰 의미로 볼때 장암동이라고도 할수 있지만 엄격히 따지면 《웃새골》이라고 해야 옳을것이다. 왜냐하면 참변을 당한것이 이 마을이고 당년 이 일대의 중심지가 웃새골이였기 때문이다. 김흥섭로인의 아버지 김경흥(광복직전에 70살로 사망)이 조선서 이고장으로 이주할 때는 19살이였다. 지금 살아계신다면 119살(1991년)이 된다. 100년전에 벌써 북노루바위에 자리잡았다는 말이다. 그때 이 일대에 조선인이 몇세대 되였으니 이곳 개척은 19세기 90년대 이전으로 되고있다. 조선인으로서 지금의 룡정에 첫발을 들여놓은것이 1884년이라고 할 때 이와 비슷한 시간이 된다. 김로인은 이런 일화도 들려주었다. 19세기 90년대초의 일이다. 수수를 좀 심어야겠는데 씨종자가 없었다. 마침 서남으로 35리쯤 가면 조선이주민마을이 있다고 하기에 그리로 가니 과연 우물가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이 다름아닌 우리가 일컫는 룡드레촌(룡정)인데 그때까지만 해도 북노루골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였다. 하여 그때로부터 노루바위골에도 수수를 심게 되였다. 이주초기의 한 모퉁이를 보여주는 귀맛당기는 일화였다. 김로인은 경신년태생이다. 그가 태여나던 해에 웃새골에 20세대가량의 조선이주민들이 살고있었는데 7~8살 될 때에는 30여세대로 늘어났다. 후에 김로인은 자기마을력사에 짙은 흥미를 가지고 마을의 허창호 등 로인들한테서 늘 이야기를 들었는데 인상깊은것은 경신참변이였다. 당시에 노루골에는 경신참변을 앞두고 한 엿장사가 나타났다. 그는 엿을 파는척하면서 조무래기들과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아는가고 물었다. 그곳을 지나던 마을의 한 청년이 이 말을 듣고 의심이 들어 인차 국민회조직에 알리였다. 하여 마을청년들은 엿장사를 불러다 따지고 들었다. 그자는 모르쇠를 대였다. 그러자 청년들은 그자를 뻐드러지게 때려주었다. 그러다가 어두워지니 더 어쩌지 못하고 내버려 두었다가 이튿날 아침에 가보니 《시체》가 오간데 없었다. 이때 룡정에서 조사가 온다는 소문까지 파다히 퍼졌다. 독립운동투신자들은 분분히 피신하였다. 그러던 음력 9월 20일, 양력으로는 10월 30일이다. 이날 이른아침에 웃새골에 이른 일제토벌대놈들은 동살이 잡히자 일제히 마을에 덮쳐들었다. 마을의 남정들은 모두 결박당한채 학교마당으로 끌려갔다. 토벌대놈들은 32명 남자들을 학교마당에 꿇어앉히고 독립운동을 안하는 사람들은 일어서라고 호통쳤다. 뒤이어 학교안에 떠밀어넣고 기관총소사를 들이대고는 학교에 불을 질렀다. 뛰쳐나오는 사람은 가차없이 다시 떠밀어넣었다. 일제놈들은 그러고도 성차지 않아 남자라고 보이는것은 무턱대고 총질했다. 그 서슬에 남쪽 령너머 덩때마을(동명 5대)에서 웃새골로 다니며 토기막을 하던 김씨(약 40살)가 총에 맞아 죽었다. 지금의 동명촌(당시 삼구촌으로서 물건너에 있었음) 남쪽밭에서 일하던 늪지골(북노루바위의 뒤너머 마을)의 리관준(30여살) 농민은 물건너 3호동네로 내달아 3부자가 사는 농막에 뛰여들었다가 뒤문으로 빠져나갔다. 그러자 뒤미처 농막에 이른 놈들은 악이 나서 그 농막과 곡식가리에 불을 질렀다. 이것이 웃새골이 당한 경신참변의 대체적상황이다. 마띵의 《견문기》등에는 10월 29일이라고 하나 마을사람들은 10월 30일로 가슴속에 아로새겼으니 구태여 캐고싶지 않은 마음이다. 일제놈들에 대한 피의 원한이 가슴 한가득 괴여오른다. 김로인과 이야기를 나눈후 우리는 집마당에 나가 동쪽산을 바라보았다. 산기슭엔 과연 노루를 방불케하는 바위무리가 있었다. 노루바위라고 한것은 저 바위에서 인기되였다고 김로인은 덧붙였다. 이어 우리는 김로인의 안내하에 마을앞 개우물을 건너 새골에 접어들었다. 어구가 새골마을 옛터라고 하는데 지금은 밭으로 변했다. 동으로 뻗은 새골을 따라 1킬로메터 남짓이 걸으니 웃새골옛터였다. 웃새골은 새골치기였는데 역시 밭으로 되여있었다. 밭가운데로 나가니 사기와 질그릇쪼각들이 가끔 눈에 띄웠다. 김로인은 당년의 살림살이 그릇쪼각들이라고 하였다. 밭 웃쪽의 낮다란 산밑에 자리잡은 교회당 자리도 보이였다. 지금도 옛 모양이 력연했으나 터자리와 주위는 온통 나무판이였다. 아름드리나무도 가끔 섞이였다. 흘러간 력사속에 묻히며 해당조사자료를 펼치니 마을의 주민 모두가 예수교를 믿었다. 당시 국민회계통에서는 예수교를 외의로 지반을 닦았는데 웃새골은 노루바위일대의 중심을 이루는 마을로 되였다. 마을의 지방국민회책임자는 한국룡(당시 약 60살)과 그의 아들 한두현(당시 약 30살)이였다. 그시절 웃새골과 그 일대에서 《조선독립만세!》,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등 구호소리가 터져올랐다. 이 마을조직은 간도국민회 계통으로서 왕청현 봉오동과 련계를 가지였다. 이들이 모은 군자금과 무기 등은 지체없이 봉오동으로 넘어갔다. 우리는 발길을 학교자리로 돌리였다. 금방 마을자리를 지나니 골짜기 왼켠에 있는 마른 옛 박우물터가 발목을 잡았다. 70여년 세월이 흘렀으나 박우물터는 돌하나 파손없이 그대로 보존되여있었다. 골짜기를 건너니 학교자리가 나타났다. 옛터가 그대로 드러났다. 항일로간부 량환준 등 로인들이 이 학교를 1914년에 예수교계통에서 세웠고 학교이름을 《사립영신학교》라고 했다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경신참변후 학교는 령너머 원골(동명 4대)로 옮겨갔다지만 옛모습은 여전했다. 산기슭에 닦은 터, 그 터를 받들어주는 돌담들이 정답게 안겨들었다. 필자 일행은 학교자리에서 이윽토록 떠나지 못하고 남쪽켠의 학교밭(당지 사람들이 이렇게 부름)자리와 골짝너머 웃새골옛터, 교회당자리, 32인무덤산 그리고 웃새골의 정경을 한껏 되새겼다. 일제침략자들과 불요불굴하게 싸운 우리 겨레가 장하게, 장하게만 안겨왔다. 이곳 학교터가 바로 당년 노루바위골 참변의 력사 현장이였다. 노루바위골 로인들과 력사현장이 이를 알려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것이 치떨리는 1920년 10월 30일 노루바위골 참변의 진실한 전후관계로서 첫 답사때로부터 벌써 14년 세월이 흘렀다. 그후 필자는 연구차로 이 력사의 현장을 수차 다녀왔다. 참변날자는 상기 연변대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의 지적처럼 1920년 10월 30일이 옳았다. 그날 살해된 장소는 영신학교 학교터자리이고 살해된 사람은 32명 또는 33명으로 나타난다. 모두가 자료출처를 가지고 있는데서 어느 수자가 옳다고 딱히 찍어말하기가 어렵다.                                                                      5   력사의 진실한 현장으로 돌아와서 보면 노루바위골 청장년 30여명은 일제 측 립장에서 “무고한” 백성들만이 아니다. 침략자들에게는 저들께 반항하는 “불령선인”, “불령단”으로 보이였다. 사실 노루바위골, 즉 장암동은 당년 간도국민회 제2동부지방회 제4분회 소속으로서 마을 주민 대다수가 국민회 회원들이였다. 이런고로 노루바위골에서는 3.13운동후인 1919년 후반기에 벌써 간도국민회 동북지방 총회장 량도헌(梁道憲)한테서 총과 탄약을 받아 경호대를 조직했고 반일무장단체인 봉오동 최명록의 도독부 그리고 의군부와도 련계를 가지였다. 노루바위골은 국민회 등 반일무장단체들의 주요한 활동지구였다. 한데서 일제놈들은 노루바위골을 “불령선인의 책원지”의 하나로 점찍고 대토벌을 저지르기에 이르렀다. “현대사자료”에 따르면 상기 일본군토벌대는 10월 30일 0시 룡정촌 병참부에 모였고 그 전날 붙잡은 5명의 조선인을 자암동안내자로 내세웠다. 도중에 이들 5명이 저들 뜻대로 하지 않고 도망을 시도한다고 죽여버리고 남양평에서 1명의 조선인안내자를 찾았다. 노루바위골에 이른것은 오전 6시 30분전으로 알려진다. 토벌 그날, 일본침략자들은 노루바위골에서 민가 11채, 영신학교 그리고 교회당을 불태워버리고 간도국민회 동부총회 회장이며 무장부대 군무청장인 량도현 등 30여명을 살해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적들은 저들 상부에 바치는 보고서에서 “적의 시체는 우리 나라 풍속대로 화장하고 부락의 생존자들을 모아놓고 우리 군대의 토벌취지를 말하고 장래에 있어서 불령행동을 하지 말것을 경고하고 동지방에서 철퇴” 하였다고 뻔뻔스럽게 뇌까리면서 이렇게 서술하였다.   그후 시체의 화장이 충분하지 못하다는것을 알고 군대, 경찰 등 인원을 파견하여 협력하게 하여 완전히 타지 않은 시체 및 유골들을 유족, 친지들 혹은 부락대표자들에게 부탁하고 령수증을 받았다.   김철수의 “연변항일사적지연구”에 인용된 일제토벌대측 보고서 단락이다. 저들 죄악을 덮어감추려는 침략자의 론조가 아닐수 없다.   이쯤이면 노루바위골 참변현장, 참변진상이 그런대로 밝혀진것 같다. 아직까지 누구도 노루바위골참변에 대해 더 상세한 진상을 내놓지 못하고있다. 그 이상 더 알수도 없는 실정이다.
360    력사의 진실 (3) 치떨리는 경신년 대살륙을 두고 댓글:  조회:3568  추천:19  2010-10-27
력사의 진실 (3)     치떨리는 경신년 대살륙을 두고       1920년 10월, 일본제국주의는 근 2만명에 달하는 정규부대를 연변 등지의 조선인집거구에 파견하여 전대미문의 피비린 대살륙을 감행하였다. 사람들은 이 피비린 대살륙을 말할 때 일제놈들은 이르는 곳마다 무고한 백성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하였다고 말한다. 그 전형적 개괄이 바로 《3광정책》, 즉 모조리 빼앗고 모조리 불사르고 모조리 죽이기이다. 허나 력사를 보면 닥치는대로 모조리 죽인다는 말은 통하기가 어렵다. 이른바 《3광정책》은 력사학가들이 후에 당년 일제놈들의 간악한 행위를 세가지로 개괄한것이지 일제놈들이 그때 3광정책을 이미 만들어내고 그대로 행한것이 아니다. 이는 경신년 대토벌을 보면 리해할수가 있다. 본문에서는 경신년대토벌 견증자들에 대한 현지취재를 통하여 치떨리는 경신년 대살륙을 력사의 진실 그대로 보여주고자 한다.                                                                1   《일본놈들 때문에 숨도 바로 쉬지 못했습니다.…》 1989년 6월 17일 오후, 연길시 새마을(新村)에서 순난렬사의 후대 조애숙(그해 77살)을 찾았을 때 그는 이렇게 허두를 떼였다. 그리고는 가슴이 막히는듯 인차 말을 잇지 못하다가 한참 지나 천천히 이야기를 터놓았다. 조애숙은 충청북도 충주군의 한 천주교가정에서 태여났다. 그가 7살나던 해 겨울에 아버지의 이불짐우에 앉아서 두만강을 건너 자리집은 곳이 연길현 팔도구 수북천(룡정시 팔도향 팔도촌부근)이였다. 그때 애숙의 아버지 조병일은 신의질을 하면서 천주교를 믿었지만 실상은 조선에서부터 활약한 열렬한 독립운동가로서 팔도구일대 독립무장단체의 책임자였다. 1920년 10월 하순에 일제토벌대가 팔도구일대에 덮쳐들었다. 이에 앞서 친분이 두터운 팔도구경찰서의 백순사(백인칠의 아버지)가 수북천에 와서 조병일을 보고 어서 피하라고 하였다. 그때 조병일은 누구나 다 피신하면 독립운동은 누가 하겠느냐며 피하지 않았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무리 일본군이 그의 집에 주숙을 정하게 되였다. 그러자 그의 안해는 안절부절 못했다. 집안천정에는 독립군부대에 주려고 모은 양말, 신, 의복, 약품 등 물건이 있었던것이다. 다행히 물건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조병일의 신분이 드러났다. 어느날 저녁 놈들은 조병일을 붙잡아 학교로 끌고갔다. 이튿날 오후 그의 안해와 딸 애숙이가 호출을 받고 가보니 조병일은 놈들의 혹독한 고문으로 머리가 터졌는데 강당엔 피가 질벅했다. 그의 안해는 구해낼 방법이 없음을 직감하고 남편의 부탁대로 교회당의 최신부를 모셔왔다. 천주교의 종부성사가 끝난후 국수집에 가서 국수 한그릇 받아왔지만 조병일은 물도 넘기지 못했다. 그들 모녀가 집에 와서 얼마안되여 총소리가 세번 울리였다. 애숙이는 이렇게 8살에 아버지를 여의였다. 이튿날 조병일의 안해는 가을한 조이밭에서 남편의 시체를 찾아 딸 애숙이와 함께 대충 묻어놓았다. 그리고는 경찰서 백순사를 찾아 성당묘지에 모시도록 도와달라고 청들었다. 일본놈들은 《조선독립만세》를 세번 부른 사람이여서 다치지 못한다고 했다. 백순사가 이듬해 밭갈이에 시끄럽다며 재삼 제기해서야 겨우 허가를 받았다. 조애숙은 69년전의 일을 회상하며 손등을 자주 눈굽에 가져갔다. 6월 21일, 우리는 조애숙, 심태순(조애숙의 외손녀)과 함께 팔도구를 찾아갔다. 그날 우리는 조병일의 순난터와 수북천마을자리, 천주교회당, 성당자리 등을 답사하고 팔도촌의 권오승로인집에서 이 촌의 몇몇 로인들과 자리를 같이했다. 그들은 팔도구일대서 성망높은 독립투사—조병일을 잊을수가 없다며 혀를 찼다. 그 자리엔 또 당년 일본토벌대에 피살된 리경찬투사의 딸 리기순(1989년에 74살)도 있었다. 리기순은 팔도구 수커리(쌍봉촌)출신인데 경신년대토벌 때 6살이였다. 그해 그의 아버지 리경찬은 30대의 사나이로서 조병일의 련락원이였다. 그는 팔도촌 건너 마을 수커리에서 일본토벌대놈들에게 체포되여 수북천으로 끌려갔다. 그는 수북천에서 조병일의 집마루기둥에 묶이워있다가 교회당 웃쪽 3층대바위에 가서 학살당하였다. 시체는 한달만에 찾아서 수커리뒤산에 겨우 매장했다고 한다. 우리는 또 독립투사 김병렬에 대한 이야기도 감명깊게 들었다. 김병렬의 며느리 박복실(그해 69살) 등 로인들의 소개에 따르면 김병렬은 성당촌 사람으로서 조병일의 수하에서 활동했었다. 그는 일제토벌대의 심사를 받을 때 정신병자로 가장했다. 낮에는 분별없이 《애국가》 등 노래를 부르며 다니고 밤에는 자다가도 일어나 소리치며 다니니 놈들은 깜짝 속히웠다. 김병렬은 늘 술에 취한척하면서 영어로 일본놈들을 욕했다. 이 무렵에 경찬의 안해도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야수들은 갓 해산한 그를 수북천 버들방천에 끌고가서 옷을 홀딱 벗기고 군도로 찌르는 형용을 하며 악랄하게 위협하였다. 넋이 날아날지경이였지만 녀인은 뻗쳐냈다. 그만큼 팔도구는 당년 독립운동의 주요한 활동지구였다. 1988년 10월 21일과 22일 왕청현 춘양진에서 전명준(그해 88살)로인을 취재할 때 그는 당년 팔도구에서 홍범도장군을 여러번 보았다고 했다. 전명준로인은 당년 지방독립운동단체의 련락원이였다. 그는 조선 강원도 평강군태생인데 18살 때 부모를 모시고 두만강을 건너왔다. 그의 일가가 팔도구 수커리에서 살다가 목단천을 거쳐 의란구학교촌에 이사한 때는 1920년 가을이였다. 그때 마을의 호주인(戶主人)은 리씨라고 하는 60살좌우의 로인이였다. 모두들 그를 리주사라 불렀는데 원근에 성망이 높았다. 그때 그는 늘 팔도구로 다니였다. 후에야 알고보니 그는 조선독립운동가로서 그가 팔도구로 다닐 때는 꼭 회의하러 갈 때였다. 1920년 10월 어느날, 리주사 등 12명이 팔도구에 가서 긴급회의에 참가하고 돌아오다가 의란구쪽에서 나오는 일제놈들에게 몽땅 붙잡혔다. 놈들은 그들을 결박해가지고 가다가 어느 산에서 살해하였다. 리주사와 끌끌한 장정이 잃어지자 온 마을이 동원되여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행방이 묘연했다. 이듬해 봄 햇풀이 머리를 들때에야 겨우 시체를 찾았는데 이 생매장된 시체들마다 온통 칼자리뿐이였다. 하늘도 저주할 만행이였다. 그럼 팔도구와 의란구부근의 산에서 귀축같은 만행을 저지른 자들이 대체 일본군 어느 부대일가? 로인들은 머리만 가로 저었다. 기억난다면 일본군이 노랗게 밀려들더라는것뿐이였다.                                                                2   1919년 《3.1》운동이후 동만을 중심으로 한 동북각지의 조선인반일독립 지사들은 직접 손에 무기를 들고 조선독립의 길에 나섰다. 통계에 따르면 동만지구만 해도 규모가 비교적 크고 무기가 겸비한 조선인독립무장단체가 7개 있었는데 대원은 2900여명에 달하고 두만강남부에서 일제침략군과 싸운 차수는 1920년 한해만 해도 1651차에 달했다고 한다. 적들은 피눈이 되여 날뛰였다. 언녕 1919년 하반년부터 준비를 다그쳤던 조선강점군사령부는 1920년 8월에 전면적토벌계획을 제정하고 조선 라남주둔 제19사단을 토벌조직자로 내세웠다. 그때 로씨야 울라지보스또크파견군— 제14사단을 토벌에 끌어들일 타산도 계획에 들었다. 그리고는 10월 2일에 이른바 《훈춘사건》을 조작해내고 이를 구실로 10월 6일부터 전면동원령을 내리였다. 토벌에 투입된 총병력은 1만 8000~2만명에 달했는데 그 주력부대는 라남주둔 제19사단이였다. 19사단은 또 이소바시지대, 아즈마지대 3개지대와 사단직속부대, 국경수비대 등으로 나뉘여 물밀듯이 동만각지에 덮쳐들었다. 19사단소속 기무라지대는 10월 20일 밤에 조선의 온성부근에서 두만강을 넘어섰다. 22일에는 독립군 《북로군정서》의 근거지였던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일대를 소탕하고 배초구와 왕청, 훈춘 등지 그리고 연길현 의란구, 팔도구 등지에서 150명의 무고한 조선사람들을 살해했다. 우에서 언급한 팔도구와 의란구의 수난자들은 바로 기무라지대의 놈들에게 무참히 살해된것이다. 동만을 중심으로 한 두만강, 압록강이북의 조선인집거구는 삽시에 살벌한 기운이 꽉 찼다. 심여추가 쓴 《연변조사실록》에서는 《일본침략자들은 도처에서 조선인촌락에 대하여 위협공갈하여 남녀로소 할것없이 모조리 집안에 가둔채 불을 질러 태워죽이였다. 무릇 불속에서 뛰쳐나오는자 있게 되면 즉시 총칼로 찍어 죽이거나 땅굴을 파서 생매장하였다.》고 밝히였다. 1920년 11월 9일부 《길장일보》는 《최근 3주일내에…연변일대에서 살해된 조선인은 2000여명에 달한다.》고 썼다. 훈춘시는 경신년대토벌에서 심한 재난을 당했다. 1988년 11월 22일 훈춘에 갔을 때 우리는 먼저 마천자향 포태촌의 김하익로인(그해 75살)을 찾았다. 《나는 경신향 회룡봉태생인데 경신년토벌때 백부 김홍석이 회룡봉에서 붙들려 금당에서 죽는것을 직접 보았수다.》 그는 이렇게 허두를 때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백부 김홍식은 회룡봉 현립8소 교원으로서 지방에서 독립선전활동을 벌리며 의연금을 모았는데 놈들에게 살해될 때 29살쯤밖에 안되였다. 그날 놈들은 회룡봉과 그 일대에서 김홍석, 박현규 등 7명을 붙잡아 금당촌(경신진 금당촌) 숭실학교에 끌고가서 불태워 죽이였다. 김하익로인은 먼발치에서 이 비장한 장면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한다. 1992년 2월에 필자는 녀류작가 리혜선씨와 함께 두만강이주답사차로 방천에 갔다가 그때의 경신향 금당촌에도 가보았는데 당년의 순난터—숭실학교자리에는 그때의 기초돌하나가 그대로 박혀있었다. 당지 사람들은 혁명자들의 넋이 스며있다 하여 이 기초돌을 《귀신돌》이라고 불렀다. 훈춘시가지에는 당년 국내외에 이름떨쳤던 반일독립투사 황병길의 딸 황정일(1913년~1989년)이 살고있었다. 필자는 일찍 황정일로인을 찾아 황병길과 그의 일가를 둘러싸고 옹근 3일이나 이야기를 들었었다. 1920년 음력 4월 중순 황병길이 불행히 사망된후 그의 안해 김숙경은 남편이 남긴 유물인 권총과 태극기보따리를 목숨처럼 아끼며 잘 간수하였다. 그해 음력 9월 초나흗날 훈춘애국부인회 회장인 그녀는 남편의 유물을 다른 곳에 옮기자고 내놓았다가 토벌대놈들과 맞띄웠다. 위급한 찰나 그녀는 남편의 유물을 제꺽 집안의 돼지물통에 넣었다. (유지로 쌌기에 탈이 없었음) 뒤미처 집안에 들어선 놈들은 아무것도 뒤지지 못하자 황병길이 죽지 않았다면서 무덤까지 파헤쳤다. 이날 아무것도 얻지 못한 놈들은 동네의 남자들만 열댓을 연통라자의 빈학교에 가두고 불을 지르려고 서두를 때 김숙경이 척 나섰다. 《이 사람들은 죄없는 사람들이얘요. 〈죄〉는 나에게 있으니 이 사람들을 어서 내놔요.》 이렇게 붙잡힌 사람들은 모두 죽음의 고비에서 벗어났다. 다만 한 30살 되는 최현숙이라는 남자가 이에 앞서 뛰다가 총에 맞아죽었을뿐이였다. 이날 그녀는 놈들에게 끌려갔다가 36명 우리동지들과 함께 마적달아래에서 적들 총구앞에 나섰다. 기관총소사가 곧 시작될무렵 말발굽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더니 한 일본군장교가 소리치며 달려왔다. 그가 뭐라고 지껄이자 놈들은 36명 동지들을 순순히 내놓았다. 일본놈들은 무고한 백성들을 마음대로 죽이지 못하는 모양이였다. 김숙경이 한족형제들의 마차에 실려 연통라자의 자기집에 도착한것은 집떠난지 10여일후였다. 그해 음력 9월 초엿새날 일본군은 대황구에도 달려들었다. 마침 대황구 북일학교 천정에서 당년에 안중근, 황병길 등이 이등박문을 암살하려고 결의한 《단지동맹 (斷指同盟)》의 도끼, 목데기, 손가락마디가 발각되였다. 이는 그들이 손가락마디를 도끼로 자를 때 쓰던 물건들이라 한다. 결과 학교의 명예교장 김남극과 교원 량병칠, 김하정이 체포되였다. 마을에서도 20여명이 붙잡혀 학교마당에 나왔다. 이때 김남극이 나서서 《이 물건들은 내가 감추어둔것이니 쏠테면 나를 쏘라. 다른 사람들과는 관계없다.》고 비호해 나섰다. 놈들은 김남극, 량병칠, 김하정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모두 내놓았다. 이날 놈들은 김남극과 량병칠 두 사람을 북산기슭의 말뚝에 묶어놓고 기관총으로 쏘아죽이고 학교에도 불을 질렀다. 놈들이 물러간후 사람들이 모여들어 불을 껐기에 학교는 한쪽켠이 좀 탔을뿐이였다. 그후 사람들은 다시 학교를 수건했는데 그때부터 이학교를 《3.1》학교라고 불렀다. 황정일은 후에 김남극의 며느리로 되면서 대황구에서 항일활동에도 종사하였기에 대황구의 정황도 잘 알고있었던것이다. 일본침략군은 연통라자, 대황구, 회룡봉외에도 훈춘각지에서 대토벌을 일삼았다. 조선강점군 제19사단 이소바시지대는 훈춘에서 다시 3개 토벌대로 편성된뒤 10월 14일 밤중부터 훈춘일대에서 행동을 개시하였다. 제1토벌대는 10월 14일부터 18일까지 훈춘 동부와 동북부의 28개 부락을 토벌하였다… 제2토벌대는 10월 14일부터 19일까지 훈춘 일대의 허다한 부락을 토벌하였다… 제3토벌대는 15일 훈춘 동북부와 동남부의 많은 부락을 토벌하였다… 로씨야 원동지구에서 투입된 제11사단(울라지보스또크 파견대)의 토문자지대(12월 15일 로씨야경내로 퇴각)와 제13사단(울라지보스또크 파견대)은 제19사단의 이소바시지대와 배합하여 토문자, 로흑산과 라자구일대를 토벌하였다. 했으나 일제토벌대놈들은 가는곳마다에서 조선인반일독립투사들의 견결한 반대를 받았다.                                                                3   당년의 연길현 장암동(룡정시 동성용향 동명촌)은 일명 노루바위마을이라 하는데 경신년대토벌 그해 심한 토벌란을 겪었다. 당시 룡정촌 카나다장로파 장로교회의 제창병원 원장이였던 마띵은 노루바위골을 현지답사하고 《견문기》를 썼는데 그가운데 한토막은 이러하였다.   (노루바위골 참상 진상은 전문 글로 따로 소개하려 한다)   청산리전투후 연변의 독립군부대들은 활동무대를 잠시 지금의 로씨야경내로 옮기였다. 전국인민들의 견결한 항전과 연변인민들의 무장항격에 의해 일본침략군은 1920년 말에 주력부대를 연변에서 철거(전부 철거는 1921년 5월) 시키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치떨리는 경신년대토벌, 대살륙의 전후관계이다. 일본침략군은 이르는 곳마다에서 《무고한 백성》들을 잡아죽이고 불사르고 지랄했지만 닥치는대로 모조리 잡아죽인것이 아니다. 어느 한 마을에 진주할 때엔 사전의 정보에 따라 반일에 나선 청장년 남자들을 어느 빈집이나 학교, 교회당에 처넣고 불지르고 기관총소사를 하였지 애매한 부녀자들이나 반일단체밖의 남자들에 대해서는 별로 손을 대지 않았다. 청산리 백운평에서 보이는 남자들에 대해 아이건, 어린애건 모조리 집안에 떠밀어넣고 살륙한것은 백운평사람들 때문에 저들군대가 잘못되였다고 판단하고 피비린 보복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이같이 남자로 생긴건 모조리 잡아 죽인 경우는 많지가 않다. 이것이 력사이며 이것이 력사의 진실이다. 력사는 어디까지나 진실로 말해야지 간악한 일본침략자들이고 한 하늘을 떠이고 살수없는 족속들이라 하여 모조리 잡아죽이지 않은것을 모조리 잡아죽였다 해서는 안될것이다. 중국을 망라한 조선, 한국 등 일제의 철제아래 허덕인 아세아나라들이 일본정부가 력사교과서를 마음대로 외곡하는 현실을 두고 규탄할 때 규탄하는 우리들이 우리들로부터 사실을 과대하며 력사를 외곡해서야 되겠는가?! 흘러간 력사를 제대로 정시하며 진실로 말하는것만이 맑스주의유물론자의 립장과 태도가 아닐가, 사학가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리라!
359    력사의 진실 (2) 봉오동 대첩은 말한다 댓글:  조회:3500  추천:15  2010-10-21
력사의 진실 (2)   봉오동 대첩은 말한다     봉오동전적지 답사는 두만강변의 삼툰자로부터 5호동네, 남봉오골, 북봉오골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이 답사의 첫 목적지 삼툰자를 찾은것은 1990년 11월 20일! 도문시를 벗어난 뻐스는 두만강변을 따라 달리더니 한참만에 오늘의 월청향 마패7대에 이르렀다. 예가 바로 봉오동전투의 서막으로 펼쳐진 그젯날의 삼툰자마을이다. 마을어구에 이르니 《간평(間坪)》이라고 새겨진 지명패가 우리들의 시야에 유표하게 안겨왔다. 이날 우리는 많은 호기심을 갖고 이 마을의 진생봉(1990년 73살, 광복후 향안의 삼동촌에서 고빈농퇀장, 농회장, 당지부서기 등 사업을 하다가 1952년부터 1980년까지 줄곧 마패대대 주임, 부주임으로 사업.)로인을 만났다. 진생봉로인은 자기의 농가에서 우리와 허물없이 이 고장의 흘러온 력사에 대해 이야기를 터놓았다. 진로인이 살고있는 이 고장은 마패일대에서의 첫 개척마을로서 130년의 력사를 기록하고있다고 한다. 따져보니 조선이주민이 두만강을 건너 이땅에 첫 곽지를 받은것은 1861년경, 말하자면 기사년 대흉년(1869년) 직전으로 헤아릴수 있었다. 처음으로 이땅에 농막을 짓고 개척을 시작한것은 종성군 삼봉일대에서 이주한 김씨, 박씨, 최씨 세 일가이고 이들 세일가를 중심으로 세개의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하여 《세마을동네》라 부르다가 중국인들이 삼툰자(三屯子)라고 불렀다는것을 진로인을 통해 알게 되였다. 일명 간평이라고도 부르는것은 이 고장의 두만강가의 두 산, 두 바위사이에 끼운 벌판이라는데서였단다. 처음에는 사이벌로 부르다가 새볼로 입에 오르고 이를 한자로 번역하니 간평으로 되였단다. 벌판이라야 동남으로 길이 약 1500메터, 너비 약 300~400메터에 불과하였다. 개척후 반세기가 흐르는사이 간평—삼툰자는 이름없는 산간마을에 불과했다. 그러던것이 1919년 《3.1》운동이후 독립투사들이 자주 이 마을을 통해 조선으로 나들면서 이름이 나게 되였다. 1920년 10월 12일 상해림시정부 군무부의 전과발표에 의하면 이해 6월 4일 새벽, 즉 오전 5시에 약 30명으로 무어진 조선독립군의 한 소대가 삼툰자에서 두만강을 건너 조선 종성군 북방 5리지점에 위치한 강양동에 진출하여 일본헌병군조(軍曹) 후구가와가 거느린 일제헌병순찰소대를 본때스레 까눕히고 어스름이 깃들 때 유유히 두만강을 건너서고 뒤따른 적병을 급사격으로 파멸하자 그 잔병이 삼툰자 북방으로 패주했다고 밝히였다. 허나 일제측의 《군사전투보고서》는 강양동에서의 참패를 언급하지도 않았다. 삼툰자전투의 경과는 언급했으나 적들의 참패와 피해사실을 회피하고있다. 《6월 4일 아침 두척의 쪽배가 조선측 강기슭에 머물러있음을 보아냈다. 이는 전날 밤에 잠입한것임을 알고 정착하던중 대안 삼툰자로부터 17~18명의 불령선인(不逞鮮人)들이 무기를 갖고 침입하려는것을 발견한 일군초소에서는 이를 발포격퇴시켰다. 그들이 대안의 지물(地物)를 리용하여 맞총질하였음으로 급히 남양수비대, 헌병경찰단에 보고하였다. 서로간의 사격은 그리 심하지는 않았으나 두만강을 사이두고 게속되였다. 한편 급보를 접한 수비대, 헌병, 경찰관들은 교전지점에서 약 1리(중국 리수로 8리) 떨어진 하류로 월강우회하여 삼툰자후방에 이르렀다.…불령선인이 도주함을 목격하고 발포 교전하게 되였다.》 보다싶이 량측에서는 전과나 손실을 확대하거나 회피하고 있다. 어느것이 옳은지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쌍방이 삼툰자에서 교전한것만은 틀림없다. 지금의 간평에 당년 우리측 사상자와 견증자의 후손들이 살고있지만 쌍방군대의 사망에 대해선 들은적이 없다고 하였다. 우리는 무척 흥미를 가지고 일본측자료—관련 현대사자료를 다시 펼쳐보았다. 자료에서 불령선인(독립군을 말함)드링 기와를 얹은 큰집에서 휴식하고있다가 급보를 받고 싸우면서 퇴각하였는데 지방민 가운데서 사망자 2명, 부상자 3명이 나타났다고 씌여졌다. 우리가 자료를 가리키며 사망자 2명가운데 김향철의 장남인 김봉룡(12살)이 있는데 사실인가고 묻자 진생봉로인은 박장대소했다. 《봉룡이 죽다니 웬말이오. 그는 맏이도 아니고 향칠의 아들도 아니오.. 그는 김씨의 후손인 김경보의 둘째 아들이오. 봉룡은 물론 그의 아버지 경보도 문화대혁명후에 사망했소. 이 마을에 봉룡의 아들 김명산이 살고있는데 올해 34살쯤 될거요.》 《그렇다면 그날 부상당했다는 봉길은 어떠한지요? 일제측자료에는 봉길의 나이도 12살로 되여 있군요.》 《엉터리 없소. 봉길이와 봉룡은 친형제간인데 봉길이 맏이고 봉룡이 둘째요..》 《? ? ?》 엄청난 사실앞에서 우리는 어안이 벙벙해지고말았다. 그날 우리는 김명산씨를 만나지 못했다. 허나 김봉길이 있으면 약 80살이고 봉룡이 있으면 약 76살이라는데야 더 캐여 뭘하겠는가? 지금 간평에는 개척때의 3세대중 김씨후손이 2세대, 박씨 후손이 1세대, 최씨후손이 1세대 살고있다고 한다. 그중 최씨 후손 최송봉로인(64살)을 만나보았는데 자기 아들까지면 벌써 5대가 이땅에서 살아온다고 한다. 두 로인한테서 우리는 당년 독립군이 휴식했다는 큰 기와집이 주인이 다름아닌 김경보농민이였고 1989년도에 이집을 허물었다는것을 알았다. 김경보로인의 아버지가 한다는 포수로서 별명이 《족돌포수》였다는 말에 우리는 귀가 솔깃하였다., 《족돌포수라면 여기엔 꼭 그럴만한 사연이 깃들어있겠는데 들려줄수 없을가요?》 우리의 청구에 진로인은 쾌히 응하였다. 《김경보의 할아버지 때였다오. 그때는 이 고장에 범이 가끔 출몰했는데 글쎄 마을아래 드레바위에서 경보의 할아버지가 범에게 물려 사망되지 않았겠소?! 바로 저 아래 두만강가를 따라 뻗은 바위무리가 드레바위라오. 드레처럼 생겼다해서 드레바위라 하지. 경보 할아버지의 죽음은 김씨네로 말하면 실로 청천하늘의 마른 벼락이였소. 경보의 아버지는 자기 아버지의 원쑤를 갚는다며 사냥총과 조막도끼를 가지고 드레바위로 갔다는구만. 헌데 드레바위틈에 숨어있어도 범이 나타나질 않더라오. 동네서 그만 돌아오라고 해도 들을리가 만무하지. 그러던 그분 이 련일 드레바위 틈에 숨어있다가 끝끝내 그 범을 잡았다오. 그후부터 사람들이 그분을 족돌포수라 한거요.》 《대단한 분입니다!》 우리는 전설처럼 들리는 이야기에 감탄을 금치못했다. 《그렇소. 그런 헌헌 대장부였기에 자식들을 휘동하여 독립군후원에 힘다할수 있었지.》 이렇게 말하는 진생봉로인은 그젯날의 기분에 푹 젖어있었다. 정녕 존경이 가는 분들이였다. 그런분들의 아낌없는 후원이 있었기에 독립군부대가 도처에서 신출귀몰하며 일제침략자를 본때스레 족칠수 있은것이 아니였겠는가! 옛 집터가 우리의 발목을 잡고 놓칠 않았다. 우리는 이윽토록 그젯날에서 헤여나오지 못하다가 간평을 둘러싼 뒤산들을 바라보았다. 보매 뒤산들은 하나의 옹근 산이 아니라 네갈래의 골안을 이루고있었다. 진로인이 서쪽으로부터 첫번째, 두번째 골을 각기 백산골, 정삼골이라고 하고 세번째골을 원골로 부른다고 알려주었다. 이골(걸만도, 립봉도가 원골로 통함)로 수레길이 도문까지 뻗었는데 드레바위밑에 큰길이 닦아진후부터 다니는 수레는 거의 볼수 없다고 한다. 네번째 골이 도문행 오솔길이 통한다는 가파란 범진골인데 이 골에서 홍범도장군이 한개 소대병력을 지휘하여 일본놈 한개 중대를 몰살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것도 산중턱의 바위밑 샘물가에서 물마이느라 몰켜있는것을 몰살했다고 한다. 금시초문이였다. 아마 삼툰자전투 때 이 일대서 교전한 사실이 이러허게 번져진 모양이였다. 여하튼 우리의 마음을 끄당기는 범진골이였다. 산을 넘고 령을 넘어 한시간 정도면 도문에 닿을수 있다는 말에 우리는 한번 걸어보기로 작심했다. 때는 오후 2시반이였다. 우리는 진생봉로인과 뜨거운 작별인사를 나눈후 범진골에 들어섰다. 늘찬 령길이였다. 처음은 그래도 괜찮았으나 올라갈수록 힘에 부쳤다. 가까스로 산중턱의 바위밑에 이르니 과연 샘물이 쉼없이 솟아오르고있었다. 일제놈들을 전멸시켰다는 이야기가 깃들어선지 물마 또한 별미였다. 샘물터를 누빈 가둑나무잎들을 가셔내니 선경의 약수물 예아닌가 싶었다. 온몸에 새힘이 솟았다. 바위우로 치달으니 저아래 두만강가에 자립잡은 25세대의 아담한 농가들이 정답게 펼쳐졌다. 원쑤놈을 족친 우리 독립군전사들의 노한 함성이 금시 들리는것만 같았다. 며칠후 찾은곳은 도문시에서 북으로 5킬로메터가량 떨어진 후안산이였다. 해당자료를 보면 삼툰자전투와 이어진 6월 6일밤의 후안산전투가 이곳의 5호동네에서 벌어졌다고 한다. 허나 이 마을 로인들은 그런일이 없다고 긍정적으로 말했다. 그러면서 목도고개너머 전안산에 김룡손이라는 로인이 가능하게 알거라고 하였다. 일제측자료에 의하면 조선측의 강양동과 중국측의 삼툰자에서 독립군에게 얻어맞은 일제놈들은 독립군을 일망타진하겠다고 미쳐날뛰며 야스가와소좌가 인솔하는 월강추격부대(200여명)를 편성하여 남양부근에서 두만강을 건너게 하였다. 이 부대는 안산에서 삼툰자전투에 개입했던 아라요시중대와 합류한뒤 목도고개를 넘어섰다가 5호동네를 발견하였다. 적들은 길안내자 후병이 정주문을 여니 2명의 조선녀인이 있었는데 집주인이 없다는 품이 수상쩍어보였다. 그래서 방문을 열어제끼니 독립군 여럿이 이리저리 누워있었다. 찰나 한 독립군전사가 제꺽 총을 들어 적척후병을 쏘아눕혔으나 뒤이어 몰려드는 적을 당해낼수 없었다. 그러자 독립군들은 뒤문을 차고 뒤산으로 내달았다. 그번 전투에서 적들은 자기편 1명이 부상당하고 독립군 1명과 지방인 1명이 즉사했으며 6명을 포로했다고 하였다. 지방인즉사란 최진삼의 안해 김씨를 가리킨다. 그날밤 김씨는 시동생인 최진포(일명 최진국)의 집에서 동서와 함께 10여명 모연대의 새벽밥을 하다가 참변을 당했던것이다. 전안산(도문시 홍광향 안산촌)의 김룡손로인(78살, 당지 태생)을 찾으니 그번 전투에서 김씨녀인이 확실히 적탄에 맞아 사망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5호동네가 후안산이 아니라 전안산뒤 목도고개너머의 강건너편이라고 긍정적으로 말했다. 그리고 전안산과 후안산일대는 신민단부대의 주요한 활동지라고 덧붙혔다. 《당시 남봉오골과 북봉오골의 형편에 대해선 아는것이 없는지요?》 우리의 물음에 김로인은 몇개의 토막사건을 들추어냈다. —남봉오골이란 지금의 흥진을 말하는데 일명 고려툰이라고 하였다. 이골의 신선더기(흥진3대)에서 리인진이라는 사람의 안해가 독립군의 밥을 해주다가 그번 토벌에 사망되였다. —봉오동전투 때 북봉오골(봉오동전투가 벌어진 골짜기)군중 여럿이 피란중 생죽음을 당했다. 북봉오골은 지금의 흥진치기와 고개하나를 사이두고 있다. —당시 주인없는 말 한필이 안장을 지닌 채 흥진치기로 넘어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7~8살에 지나지 않았던 룡손이와 마을의 조무래기들이 그 말을 붙잡자고 야단을 부렸다. —봉오동전투가 벌어진 날 오후 1시쯤에 큰비가 내렸다. 김룡손로인이 꺼낸 토막사건 하나하나가 자료보충으로 되는 귀중한 력사사실들이였다. 더우기 남봉오골 부근 신선더기에서 밥짓던 녀인이 사망되였다는것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또한 도문시 서쪽가의 오공촌에 당년 5호동네에서 사망된 녀인의 아들 최상준이 있다는 귀뜸은 우리의 마음을 흥분케 해주었다. 했으나 갖은 노력끝에 최상준댁을 찾고 보니 최로인은 이미 사망되고 장년에 들어선 그의 아들이 출국친척방문을 가고없었다. 하여 우리는 최로인의 며느리한테서 력사부문에서 사업하는 한 선생이 시할아버지한테 몇번 다녀갔다는 것만 알았다. 누굴가, 연길에 돌아온후 여러모로 탐문해보니 연변력사연구소의 강룡권선생이였다. 강선생은 1985년과 1988년, 1989년에 걸쳐 세차례나 최상준로인을 방문했는데 세번째만에 끝내 최로인의 어머님존함을 알아내느데 성공하였다. 5호동네에서 사망된 녀인의 이름은 김숙정이였다. 1920년 6월 6일 밤에 김숙정녀인은 동서와 같이 밥을 짓다가 적들과 맞띄우게 되였다. 총싸움이 벌어진후 신민단의 13명전사들은 뒤문으로 빠지고 전안산의 최명극 등은 자리를 옮기였다. 동서인 최진포의 안해도 어느결에 김숙정의 집으로 피하고없었다. 홀로 남게 된 김숙정은 무섭기만 했다. 하여 자기도 집으로 가려고 나섰다가 두집 사이에서 적탄에 맞아 당장에서 숨졌다. 이는 어머님에 대한 최상준로인의 회억이다. 그는 피맺힌 그날의 참상을 두고두고 잊지 못하다가 강룡권선생한테 터놓고 말았다. 강선생의 록음테프에는 지금도 그날의 회억담이 소중히 간직되여있다.   삼툰자, 5호동네를 답사한후 1년이 지나서 봉오동전적지를 답사할 기회가 왔다. 1991년 11월 23일 오전 7시 30분에 우리 연변력사연구소의  연구원들은 소형뻐스를 리용해 동북방 봉오동으로 갔다. 연길에서 도문시 북쪽의 봉오동어구 수남촌까지 한시간, 거기서 다시 산길을 따라 봉오동전적지까지 반시간! 연길—봉오동 전체 로정은 약 70키로메터였다. 수남촌을 지나고 토성자마을을 지나자 봉오동저수지 검사소가 나타났다. 사전에 해당 수속절차를 밟은데서 검사소를 무사히 통과할수 있었다. 산골짜기를 따라 한참 달리니 골짜기를 가로막은 봉오동저수지땜과 눈뿌리 모자라게 뻗은 저수지가 시야에 안겨들었다. 《봉오동반일전적지》패말은 저수지입구의 길가에 세워져있었다. (이제부터 전적지구내에 들어서는구나!) 우리 모두의 가슴은 세차게 높뛰였다. 1920년 6월 7일에 있었던 봉오동전투가 신기루마냥 저앞에 펼쳐졌다. 1920년 6월 6일 밤 안산의 5호동네와 남봉오골 신선더기에서참상을 빚어낸 일제 《월강추격부대》는 새날새벽에 봉오동밖의 고려령 부근에서 독립군소대의 유인작전에 걸려들었다. 그때 봉오동골짜기—북봉오골에 주둔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 최진동의 국무도독부 등 독립군부대300~400명은 새로 《대한북로독군부》로 편성된뒤 봉오동 여러 마을의 주민들은 대피시키고 봉오동 상촌아래 호박골어구의 시루봉과 서산, 남산고지에 진을 치고 있었다. 6월 7일 아침 월강추격대놈들은 독립군의 뒤를 밟아 봉오동하촌에 기여들었다. 중촌에서 독립군의 그림자도 발견못한 놈들은 독립군이 저들 기세에 눌려 북으로 패주한줄로 알고 기고만장해서 상촌에 접근하였다. 하촌과 상촌사이는 약 10킬로메터의 거리였다. 점심때였다. 적 척후병이 독립군부대가 매복한 산밑의 홈채기에 들어섰다. 이어 적 주력부대가 따라들어서자 삼면고지에서 대기하고있던 독립군부대는 홍범도장군의 사격령에 좇아 일제히 맹사격을 들이댔다. 적들은 급기야 응전했으나 피동에 빠지고 말았다. 홍범도장군의 지휘부가 설치된 서산을 향해 달려들었으나 홈채기 복병의 몰사격을 면치못했다. 방향을 홈채기 복병들한테로 돌리자 동산 시루봉에 진을 쳤던 최진동부대가 일제히 집중사격을 개시하였다. 독립군의 일련의 유인작전에 들었다는것을 알았을 대는 이미 늦었다. 적들은 퇴각을 시도했다가 퇴로를 차단하여 나선 남산 신민단부대의 공격을 당했다. 적진은 일대 수라장을 이루었다. 말에서 곤두박질하는 장교놈들, 살겠다고 줄행랑을 놓는 놈들, 내 죽는다고 아우성을 치는 놈들—세시간 남짓한 응전도 기울어진 대세를 돌려세울수 없었다. 하늘이 도왔는지 천지가 어두워지며 소낙비까지 마구 쏟아졌다. 적들은 일시 적아를 분별하지 못하고 서로 란사하다가 퇴각길에서 또 맹추격을 받아 무리죽음을 당했다. 당시 《상해시보》와 《길장일보》의 보도에 의하면 일본군 사망자가 150명, 부상자가 수십명에 달한다고 한다. 독립군도 사상자 여럿을 냈다고 한다. 한 독립군의 시체앞에서 그의 고향친구가 설음에 북받쳐 지은 시가 있다.   내고향 몇천리던가 고향을 떠난후 만주벌판에 황혼에 싸여서 늦은 저녁에 사랑하는 내동기는 사직을 한다 적탄에 쓰러진 동기앞에서 이름을 부르며 끌어안으며 상처는 일없다, 정신차려라 동기야 이 산천아 암만 불러도 말없는 시체의 식은 팔목에 시계는 여지없이  돌아가누나 남자의 리별인가 수풀속인가 가난한 앞뒤지에 태여난 이몸인 나는야 승리의 기발 높이들고 때가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너를 두고 가는것은 아득하지만 결국에 네 원쑤는 내가 갚으리 동기야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것은 후에 민간에 널리 퍼진 독립군노래이다. 전적지를 답사하는가운데서 우리는 무장으로 일제를 항격한 우리 겨레의 독립운동이 겨레민중의 성스런 안받침과 갈라놓을수 없다는것을 새삼스레 느끼였다. 삼툰자와 5호동네, 남봉오골일대가 그러했다. 봉오동의 작전지역들이 그러했다. 봉오동과 그 연도의 간도국민회 소속 제1남지방회장 마룡하와 제2북지방회장 김정도는 산하 각 지회장앞으로 속보를 띄우며 전투전과를 알리는 한편 군사통신의  신속한 수행에 힘다했고 간호대의 파견과 군량, 군수물자의 공급을 시달하였다. 이렇게 두만강가의 삼툰자로부터 적을 끌어다가 봉오동골짜기에서 일망타진한 독립군의 장한 기상과 그 기상을 받들어나선 겨레민중의 헌신적투쟁열이 봉오동전쟁의 승리를 안아오게 하였다. 사책에서는 이 전투를 《독립전쟁의 개시》 또는 《독립전쟁의 제1회 회전》이라고 적고있다. 우리는 독립군부대가 이동했다는 북쪽골로도 들어가 보았다. 1킬로메터쯤 걸으니 페허로 된 사슴우리가 나타났다. 북쪽골은 여기서 또 두갈래로 갈라졌는데 오른쪽골—동골을 민간에서는 《도투묵은데골》이라고 불렀다. 그전의 삼개마을이 이 골안에 자리잡았다고 한다. 상촌은 왼쪽골 어구에 자리잡았는데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수 없었다. 상촌자리에서 보니 서쪽켠이 석현방향이고 동남쪽이 후안산방향, 남쪽이 봉오동전투지점이였다. 일행중 전투지점에 대해 다른 견해를 내놓는 사람도 있었으나 타인을 설복시킬만한 근거는 내놓지 못하였다. 봉오동전적지에 대한 답사는 끝났다. 일행중 누구하나 선뜻 차에 오를 념을 안했다. 싸움터의 산야를 보고 또 보는 그들, 적탄에 쓰러진 독립군전사의 영령을 추모해서일가 아니면 그날의 우리 독립군부대의 불멸의 위훈을 되새겨서일가……                                
358    력사의 진실 (1) 봉오동 청산리 대첩 공동작전의 소산 댓글:  조회:4179  추천:25  2010-10-21
【편자의 말】 오늘 10월 21일은 1920년 겨레 청산리대첩 90돐 되는 날이고, 올해는 겨레 청산리대첩 90돐 되는 해이다. 이날, 이해를 기념하면서 필자는 당년  6월의 봉오동전투로부터 경신년대토벌, 청산리대첩에 이르기까지 우리 력사의 진실을 몇회에 걸쳐 다시 펼쳐 보이고자 한다. 이런 과정을 지켜 보면 봉오동전투가 홍범도장군에게만 치우치고 청산리전투가 김좌진장군에게만 치우칠 일이 아니며, 더구나 북로군정서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라고 말할것이 못된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또, 김좌진장군은 북로군정서 서일총재가 초빙하고 서일총재 수하의 한 장령이라는 것과 청산리대첩에서 섬멸한 일본침략군은 2000여명이요,  3000여명이 아니라는 것을 잘 헤아릴수가 있다.     력사의 진실 (1)                      봉오동 청산리 대첩 공동작전의 소산     한국의 독립운동사를 보면 1920년도 봉오동, 청산리 전투가 대서특서 되면서 독립운동사를 빛내이고 있다. 허나 이해 6월의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장군한테 치우치고 청산리 전투는 흔히 김좌진장군한테 치우치는데서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진면모가 흐려지기가 일쑤이다. 한데서 봉오동, 청산리 전투를 승리에로 이끈 간도국민회와 국민회군의 역할이 잘 드러나지 않고있다. 이에 필자는 1910년대 연변일대의 겨레 항일무장투쟁사에서 주요역할을 논 간도국민회군을 점검해보면서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주력군으로 등장한 국민회군의 역할을 역사적으로, 진실하게 밝히고저 한다. 1919년 3.13운동 이후 간도국민회에서는 지령을 내려 명동, 정동, 광성, 창동 학교 중학부들에서 학생골간들로 연합 “맹호단, “암살대” 등 반일무장단체를 조직하여 용정, 국가가와 투도구 등지에서 친일주구를 체포하거나 경고문을 내어 이런 자들이 친일활동에서 손을 떼도록 하였다. 명동을 중심으로 조직된 충렬대, 단지동맹회, 결사대들도 맹활동을 보이었다. 간도국민회에서 이동휘 등의 지지 밑에 무장투쟁방침을 시달하기 위해 각 지회를 통해 연변 각지에서 결사대원을 널리 모집하여 러시야 연해주에 보내어 군사훈련을 받게 할 때 명동, 정동, 광성, 창동 학교들을 중심으로 한 수많은 학생들이 분분히 결사대에 참가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한데서 러시야 연해주 추풍지역의 도화동, 대지안, 사개정자 등지에서 훈련을 받은 결사대원들은 무려 3,000여 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은 대장 김하석, 교관 홍군표, 이흥삼, 김일, 오영선, 남공선, 러씨야 귀화조선인 김인수, 최와실린 등 장교들에게서 반일민족교육과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결사대의 외교와 재무는 연변서 간 박동원, 박경철이 담당하였다. 한편 간도국민회에서는 각 지방총회에 법무부를 설치하고 보편적으로 경호대, 맹호단을 조직, 지도하여 지방을 보위하게 하였고 모연대를 널리 조직하여 군자금 모연에 힘을 기울였다. 창동학교출신이고 철혈광복단 성원이고 간도국민회 총회의 통신원이며 와룡동일대 국민회 책임자인 정기선은 적의 손에서 권총 한자루를 빼앗아 경호대를 조직하였다. 일찍 함경북도 무산지구 진위대 교련관이었던 안무는 1919년 4월 이후 간도국민회와 연계하여 화룡현 덕화, 상화, 숭선, 로과 등지에 국민회조직을 확대하면서 부동 등지의 청년들로 경호대를 조직하여 군사훈련을 시키며 친일주구와 밀정들의 활동을 경계하였다. 각지 경호대는 각 지방총회와 지방회에 분산되어 지방보위에 전력을 다 했다. 1920년 봄 이후 간도국민회에서는 또 각지 경호대를 기초로 국민회군을 조직하였다. 국민회군을 결사대와 경호대의 군사훈련을 책임졌는데 경호대와 국민회군의 조직구성은 아래와 같다.   경호대 총사령: 이용         참모: 주건   국민회군 사령: 안무          부관: 최익룡          향관: 김석두, 허동규          중대장: 조권식, 임병극   국민회군은 본부를 화전자 명당모에 두고 부동, 명동, 명신, 화전자, 하마탕, 의란구 등지에 부대를 분산, 주둔 시키고 지방을 순회하면서 군사훈련을 내밀었다. 간도국민회에서 결사대를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시키고 국민회군, 홍범도의 의군단, 신민단, 도독부, 훈춘한민회 군사부 등 항일무장단체에 배치하니 국민회군의 병력은 크게 늘어났다. 1920년 6월의 통계에 따르면 국민회군의 총병력수는 400여 명(적절히 말하면 450명)이고 무기는 보총 400자루, 권총 160자루, 수류탄 다수였다. 간도국민회와 국민회군은 군사인재를 양성코저 상해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이용, 채영, 안정근 등의 협조하에 연길현 숭례향 이청배 심산 속에 사관훈련소와 군수창고, 피복공장, 18개 소의 병영을 수축하고 재봉침 13대, 군복용 포목 15필을 마련하였다. 1920년 초부터 항일무장단체들 간의 통합과 협동작전이 중시를 받았다. 1919년 하반기에 홍범도부대가 중조국경지구에 출격하여 연속 작전을 펼칠 때 간도국민회에서 적극 받들어 나섰고 1920년 1월, 조선 국내진공작전을 끝내고 돌아온 홍범도부대는 국민회본부가 설치된 북하마탕에 이르러 국민회간부들과 연합문제를 토의하였다. 그 뒤 2월 21일, 3월 8일-10일, 3월 25일, 간도국민회는 각 항일무장단체 대표들이 참가한 제1차, 제2차, 제3차 하마탕 회의를 연속 소집하고 먼저 의견이 같은 국민회군, 최명록의 도독부, 훈춘한민회, 홍범도의 대한의군단과 연합하여 군무독군부를 조직하였다. 같은해 5월 11일에는 봉오동에서 군무독군부, 신민단, 광복단, 의군단 4개 무장단체 지도자회의를 가지고 연합작전합의를 보았다. 5월 28일에는 군무독군부를 북로독군부로 개편하고 북로독군부의 각급 지휘관을 임명하였다. 임명명단은 아래와 같다.   북로독군부 부장: 최진동            부관: 안무 정일 제1군 사령: 홍범도             부관: 주건             참모: 이병채             향관: 안위동         군무국장: 이원 군무국 군무과장: 구자익 군무국 회계과장: 최종하 군무국 검사과장: 박시원 군무국 통신과장: 박영 군무국 치중과장: 이상수 군무국 향무과장: 최서일 군무국 피복과장: 박병극 제1군 산하 제1대대장: 이천오               제2대대장: 강상모               제3대대장: 강시범             제4대대장: 조권식   북로독군부는 사령부 본부를 봉오동 상촌에 설치하고 병력을 도독부의 병영인 봉오동에 집결시키었다. 신생한 연합부대는 두만강 남안의 온성, 남양, 종성, 회령, 무산 등지에 빈번히 출몰하면서 군자금을 모금하고 일제군경 초소를 습격하였다. 1920년 1월부터 6월 7일까지 해당 통계에 의하면 연합부대는 상기 조선 국내지구에 26여 차나 진출하였다. 연변 땅에서 일본정규군을 족치는 첫 전투도 무르익어갔다. 동년 6월 4일, 일본군 남양수비대 아라요시중위가 인솔한 부대는 두만강남안 남양의 강양동일본군초소를 습격한 원 기독교계열의 훈춘 신민단출신인 북로독군부 박승길 등 30여 명을 추격하여 두만강을 건너 삼툰자를 들이쳤다. 제19사단 73연대 야스가와소좌가 인솔한 월강추격부대도 남양부근에서 두만강을 건너섰다. 이 부대는 안산에서 삼툰자전투에 개입했던 아라요시중대와 합류한 뒤 아군의 종적을 찾아 목도고개, 고려령을 넘어 봉오동일대로 진격하였다. 원 국민회군 사령이며 북로독군부 부부장인 안무는 홍범도사령을 도와 6월 7일 일본군월강부대 200여 명을 봉오동상촌에 끌어들이는데 성공하였다. 1920년 6월 7일, 안무 등은 홍범도사령과 함께 봉오동 여러 마을의 민중을 대피시키고 400여 명 반일부대를 봉오동 상촌 아래 호박골어구의 시루봉과 서산, 남산 고지에 진을 쳤다. 이날 반일부대의 뒤를 밟아 후안산으로부터 쳐들어 온 야스가와소좌와 아라요시중위가 인솔한 일본군 200여 명은 아군의 매복권 내에 들어섰다가 섬멸성적인 타격을 받았다. 당시 《상해시보》와 《길장일보》의 보도에 의하면 일본군 사망자가 150명, 부상자가 수십 명에 달한다고 한다. 연변 땅에서 일본정규군을 족친 첫 전투는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안무가 이끄는 국민회군과 신민단부대는 이 전투에서 큰 역할을 놀았다. 적들의 퇴각시 퇴로를 막아 답새긴 부대가 바로 신민단부대었다. 동년 8월 말 안무는 소속부대를 거느리고 이청배병영에 주둔하고 있다가 9월에 중국군 맹부덕부대가 일제의 강박으로 토벌에 나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화룡현 어랑촌일대로 전이하여 홍범도부대와 힘을 합치었다. 안무부대는 화룡현 삼도구, 맹가동, 부동과 강장동 등지 지형정찰을 하고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집하면서 홍범도부대와의 배합작전을 도모하였다. 10월 21일 일본군 제19사단 37려단장 아즈마소장이 지휘하는 일본군은 도처에 불을 지르며 두갈래로 나뉘여 북왈리거우와 남왈리거우에 달려들었다. 홍범도와 안무는 주력부대를 천리봉의 측면고지에 매복시키고 예비대를 중앙고지에 배치하는 전술을 썼다. 이에 속히운 적들은 중앙고지를 주공방향으로 삼고 진공하다가 크게 얻어맞았다. 적 수백 명이 전멸당한 왈리거우(曰日沟) 전투이다. 싸움의 그 나날에 안무부대는 홍범도사령의 지휘하여 봉밀구골안으로 철퇴했다가 천병마냥 아즈마지대의 주력부대와 격전하고 있는 천수동 우측 산마루에 나타났다. 대단히 어려운 처지에서 결사의 각오로 싸우던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부대는 사기가 충천하였다. 적들은 거듭 패배의 고배만 마시다가 땅거미가 든 후 저들 부대를 어랑촌 쪽으로 돌려세웠다. 이 전투에서 적들은 또 수백 명의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두 독립군부대는 아즈마지대의 포위를 승리적으로 헤치고 서남방향으로 가뭇없이 사라졌다가 25일 고동하강반에서 또 적들에게 섬멸적 타격을 안기었다. 고동하전투를 치른 후 안무는 부대를 이끌고 맹가골 방향으로 이동하고 홍범도부대는 안도현 황구령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안무는 맹가골일대서 북상지시를 받고 소속부대를 여러 소부대로 나누어 돈화, 목릉을 거쳐 밀산으로 철퇴했다. 안무가 이끄는 국민회군은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여러 반일부대와 더불어 불멸의 위훈을 세웠다.                              
357    론문--윤동주 시의 녀성 이미지 댓글:  조회:3924  추천:13  2010-10-06
【론문】  올해는 우리 시인 윤동주 서거 65주기가 되는 해이다. 시인의 서거 65주기를 기념하면서 올해 "연변문학" 8월호에 실린 필자의 론문--"윤동주 시의 녀성 이미지"를 올려 본다.           윤동주 시의 녀성 이지미   1.      들어가면서   오늘날 윤동주는 중국조선족시인이면서도 전체 우리 민족의 시인이며 세계적인 시인으로 평가 받으며 존경을 받고있다. 윤동주의 시세계는 맑고 청결한 기품이 흘러넘치면서 순결한 동심에 함뿍 젖어있다. 윤동주의 시는 또 맑지 만은 않고 슬프기도 한 이모저모의 이미지 그리고 여러 면으로 펼쳐지는 녀성 이미지 등을 내포하고있다. 본문에서 다루어보려는것이 바로 윤동주 시의 녀성 이미지이다. 이미지란 심상(心象)으로서 마음속에 그려지는 사물의 감각적영상(映象)을 말하며 또 형상으로서 사람들에게 비쳐지는 사람 또는 사물의 모습이나 느낌을 말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윤동주 시의 녀성 이미지는 아가씨, 언니 등으로 이어지는 녀인 이미지, 어머니와 같은 누나 이미지, 이 세상 어머니 이미지, 순이라는 시적화자 이미지 등으로 나누어볼수 있다. 이런 이미지를 통해 우리는 단적으로 윤동주시인의 녀성관을 헤아릴수도 있고 그의 순결성, 인간성을 헤아릴수도 있다.   2.      아가씨, 언니 등으로 이어지는 녀인 이미지   지금까지 전해지는 윤동주의 시작품은 100여수로 헤아려진다. 그중 누나와 어머니를 비롯한 녀성이 내비친 시작품은 약 30편쯤으로 거의 3분의 1를 차지한다. 시작품을 통한 윤동주의 녀성 이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라 하겠다. 녀성 이미지 시편들은 선녀, 아가씨, 해녀, 할머니, 언니, 그 여자, 녀인, 누나, 어머니 등 다양한 부름으로 이어지는데 시마다 시인의 녀성 이미지를 엿볼수 있다.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울언니 바닷가에서 주워온 조개껍데기   여기여긴 북쪽나라요 조개는 귀여운 선물 장난감 조개껍데기   데굴데굴 굴리며 놀다 짝 잃은 조개껍데기 한짝을 그리워하네   아롱다올 조개껍데기 나처럼 그리워하네 물소리 바다물소리               --- “조개껍질”, ( 1935. 12)   이 시작품은 현재 전해지는 윤동주의 시편들중에서 어린이를 화제로 하는 최초의 동시로 나타난다. 시의 화제가 보여주고저 하는 조개껍질은 “울언니”인데 언니는 바닷가에서 어린이--녀동생이 좋아하는 귀여운 물건—조개껍질을 주워왔다. 아쉽게도 어린이로 그려진 녀동생 화자는 마주 붙여진 조개껍질 한짝을 잃어버리고 그지없이 그리워한다. 아롱다롱한 조개껍질도 잃어진 한짝을 그리워하는데 그 그리움속에 조개의 고향 바다물소리가 들려온다. 참으로 동심이 그대로 흐르는 하나의 훌륭한 동시이다. 이 동시는 1935년 9월 1일에 윤동주가 룡정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평양숭실중학교 3학년으로 전학한 후인 숭실중학교시절에 쓴 동시인데 시인은 어린이 화자를 통해 나서자란 고향땅을 등지고 두만강 너머 북쪽에서 고향땅을 그리는 애수를 조개껍질화한 외로움, 그리움으로 그려내고있다. 시 전편에서 흐르는 기저는 조개껍질이나 그것을 주어온 이는 “울언니”이다. 언니가 바닷가에서 주어온 조개껍질이 동심의 세계에서 한 가족의 평화와 사랑을 이룬다. 그속에는 고향을 떠나 고향을 그리는 어린이의 애수가 담겨있다. 고향땅 바닷가에는 흔하디 흔한 조개껍질이 “여긴여긴 북쪽나라”에선 그리움의 향수물이니 윤동주의 시적재능을 알고도 남음이 있겠다. 1935년 12월에 최초의 동시—“조개껍질”을 쓴후 윤동주의 동시는 마구 쏟아진다. 1936년에 20살을 잡은 윤동주는 이해 3월에 일제의 참배강요로 평양숭실중학교를 자퇴하고 룡정 광명중학교 4학년에서 공부, 1938년 2월에 광명중학교 5학년을 마치고 이해 4월에 서울 연전문과에 입학한다. 이해 1938년에 윤동주는 동시를 비롯한 시창작의 황금기를 맞이하는데 이해 한해동안에만도 동시 “새로운 길” 외 7편, “산울림” 등 5편의 동시,  “달을 쏘다” 산문 1편을 써내게 된다. 연전에 입학해서 쓴 첫시는 “새로운 길(1938.5.10)”이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동시 “새로운 길”의 첫련과 두번째련의 인용인데 고개너머 마을로 가는 나의 길은 “새로운 길”이고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가는 길과 길가에는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하는 생기가 도는 약동하는  길이다. 소생하는 봄앞의 하늘아래 노오란 민들레 피고 까치가 나는 속에 아가씨 지나며 바람까지 이니 서울의 연전이란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생활을 펼치는 시인 윤동주의 삶은 파아란 활기로 넘쳐있다. 녀인의 이미지—아가씨의 등장으로 동시는 감칠맛이 보다 진하기만 하다. 윤동주 시의 녀성 이미지는 그의 풍자시—“그 여자”에서도 잘 드러난다.   함께 핀 꽃에 처음 익은 능금은 먼저 떨어졌습니다   오늘도 가을바람은 그냥 붑니다   길가에 떨어진 붉은 능금은 지나는 손님이 집어갔읍니다.   이 시는 윤동주가 아직 서울 연전이 아닌 룡정 광명중학교 5학년을 다니던 시절 1937년 7월 26일에 쓴 시이다. 시에서 녀성의 이미지는 그 녀자—붉은 능금으로 나타나는데 시의 흐름으로 보아 “붉은 능금”은 저들 또래들보다 먼저 성숙함을 보여 처녀티를 제법 풍긴다. 인생의 길가에서 처녀맛을 풍기며 달랑이니 “지나는” 길손이 집어갈수밖에 없다. 그것도 “윤동주 평전” 을 쓴 한국 송우혜의 말을 빈다면 “적당치 않은 자에게 유린당해버”①리게 되였다. 이 시는 윤동주가 젊음이 싱싱 피던 21살 되는 해에 쓴것인데 왜서 “붉은 능금”이 “지나는 손님”에게 유린당하는것으로 써야만 했을가, 한국 송우혜씨에 따르면 여기에는 원인이 있는바 그 원인은 일찍 희랍의 녀류시인 사포가 쓴 시 “한 처녀”에 기인된다.   저 높은 가지 끝에서 불그스레 익는 아름다운 사과와도 같으니 따지 않음은 잊은것이 아니요 높아서 손이 닿지 못함이다②   시에서 사포는 한 처녀가 있었으니 그 처녀가 “아름다운 사과”요, 도고하여 “높은 가지 끝”이요, 뭇총각들이 욕심을 내며 따려해도 높은 곳에 달려 딸수 없소 하며 시를 끌어간다. 윤동주는 이와 다르다. 그는 사포의 시에 불만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과라 해도 익으면 떨어질것이 아닌가? 그래서 윤동주는 사포의 “한 처녀”와 비슷한 “그 녀자”를 쓰면서 아무리 활짝 피여난 처녀라 해도 일제치하에서는 “지나는 손님”이 집어가듯이 자기 뜻대로 할수 없는 세상임을 까밝히고있다. 그리고 그 세상에 녀성이 처한 어찌할수 없는 수동적인 위치를 보여주였다. 그 녀자—붉은 능금을 통한 녀성 이미지 표현은 이같이 일제치하에 그 원인을 돌린다. 이러루한 예리한 표현은 윤동주의 산문시 “병원”(1940.12)에서도 잘 드러난다.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녀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녀자를 찾아 오는 이, 나비 한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이는 도합 3련으로 된  시 “병원”의 첫 련이다. 이 시는 윤동주가 서울 연전을 다니던 시절에 쓴 시로서 시속에서 보여지는 “젊은 녀자”를 그 시대속 외롭고 병든 모습으로 그려냈다. 일제치하서 살아가야만 하는 시인 윤동주의 마음의 내면고통이 너무나도 잘 반영되여있다. 보라, 젊은 녀자가 병원 뒤뜰의 살구나무 아래 누워있는 모습은 그가 살아가는 세상이 “병 든 사람들로 가득찬 곳”③임을 시사한다. 좀 더 깊이 말하면 윤동주가 살아가는 그 시대가, 그 세상이 바로 병원이다. “병원”,  “앓다”,  “한나절”,  “나비도 없다”, “바람조차 없다” 등의 낱말로 동적인 이미지는 없이 정적인 이미지만 부여하여 그냥 슬픔에 굳어져버린 그 병페적인 특정시대의 산물 병원을 그려냈다. “병원”이란 이 시, 젊은 녀자를 통한 이미지는 일제치하란 그 어두운 시대에 칼날을 대고있다. 윤동주의 시에서는 이같이 녀성 이미지가 제가끔의 역할을 놀아간다. 이번에는 어느 개개의 언니나, 아가씨나 녀자가 아닌 그 시대의 군상(群像)을 보기로 하자.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슬픈 족속” (1938. 9)   1938년 9월이라고 밝히니 윤동주가 서울 연전문과를 다니던 시절이다. 이해의 윤동주는 22살의 나이로서 자기가 살아가는 사회, 처한 환경을 보는 시선이 자못 예리하다. 어찌 보면 시는 흰 수건이요, 흰 고무신 등을 두르고 걸친 지극히 평범한 한 우리 녀인을 그린것 같다. “검은 머리”로 보아 그닥 늙지 않은 녀인이고 “거친 발”로 보아 고달픈 인생이라면 “슬픈 몸집”은 고달픈 인생의 계속, “가는 허리”는 풍만치 못한 볼품없는 모습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윤동주가 노리는 녀인은 고생속에 살아온 어느 한 녀인의 모습이 아니다. 윤동주는 시의 첫머리마다 “흰 수건”, “흰 고무신”, “흰 저고리”, “흰 띠”란 시어를 씀으로써 시의 “흰”자의 주인공이 우리 겨례의 녀인임을 강렬하게 표현하였다. 여기에다가 제목에 “슬픈 족속”이라고 밝히니 이는 일제치하의 한 녀인만이 아닌 우리 겨레녀성 모두를 가리킨다. “흰 수건” 등으로 의인화의 수법을 성공적으로 활용하여 시에다 민족의 아픔을 그대로 그리여냈다. 이밖에 윤동주의 시들에서는 선녀, 해녀, 할머니 등이 잘 조화되여 녀성 이미지를 가슴에 와닿게 잘 표현하고있다. 본고에서는 이런 개개의 화자를 통해 녀성 이미지를 부각해낸 윤동주의 시적재능, 사상경지를 더듬어본다.   3.      어머니와 같은 존재—누나 이미지   윤동주 시작품이 100여편으로 전해진다는것은 이미 우에서 밝히였다. 그중 약 3분의 1이 녀성이미지로 나타난다면 녀성을 내세우는 시들에서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누나 이미지도 잘 도드라지고있다. “해바라기 얼굴”, “사과”, “빗자루”, “편지”, “야행” 등 여러 편의 시들이 그러하다고 볼수있다. 먼저 동시 “빗자루”(1936, 9, 9)의 앞부분만을 보기로 하자.   요오리 조리 베면 저고리 되고 이이렇게 베면 큰총 되지 누나하고 나하고 가위로 종이 쏠았더니   어머니가 빗자루 들고 누나 하나 나 하나 엉뎅이를 때렸소   이 시는 어린 시절의 화자 나와 누나가 종이를 요리조리 베고노는 동심을 그려보았다. 철부지들의 한낱 소행이라지만 시골의 어머니는 빗자루로 “누나”와 “나”의 엉뎅이를 때려댄다. 우리의 어린 시절이 그러하고 부모들의 어린시절도 그렇지 않았던가, 시골의 화자만이 아닌 우리 개개의 어린 시절 모습을 보는것 같다. 그속의 “나”와 “누나”는 가족내에서 지극히 가까운 관계이다. “나”와 관계속 “누나”의 모습이 생활화폭처럼 펼쳐진다. “빗자루”속에서의 어릴 때 천진한 누나 화자모습이 이번에는 엄마격의 누나 형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1938년(추정)의 시작으로 되는 “해바라기 얼굴”이 그러하다.   누나의 얼굴은 해바라기 얼굴 해가 금방 뜨자 일터에 간다   해바라기 얼굴은 누나의 얼굴 얼굴이 숙어들어 집으로 온다.   시적구상이 참신하고 시어가 생활맛이 짙다. 생활에 찌들고 일에 찌든 누나의 얼굴을 꽃이 피여 굳어지면서 고개를 숙인 해바라기에 비유한 그 자체가 시인의 섬세한 관찰과 묘사를 바탕으로 하고있다. 부모를 대신하여 생활고의 중임을 떠메야 하는 우리 겨레의 누나 모습, 음미할수록 그 깊이가 보여진다. “나”의 누나, 겨레의 누나—이같은 시적 화자묘사를 윤동주는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재능이 뛰어나다. “해바라기 얼굴”이 “누나의 얼굴”이라면 이 얼굴은 해님 따르며 활짝 핀 “해바라기”가 아니라 더는 해바라기도 할수 없이 굳어지고 초췌한 “해바라기 얼굴”이다. 그러던 “해바라기 얼굴”이 생활고에 시달려 쓰러져야만 하니 윤동주는 “해바라기 얼굴”보다 이태나 앞서 쓴, 1936년 12월로 추정되는 시 “편지”에서 동심에 젖어 눈물겹게 그리고있다.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가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윤동주 연구가들이라면 다 알수 있듯이 윤동주가 평양숭실중학교를 자퇴하고 룡정으로 돌아와 광명중학교 4~5학년을 다니던 1936년과 1937년 2년동안은 무려 29편의 시작품을 쓰면서 시창작의 왕성기를 보여주던 시기였다. 특히 1936년은 윤동주가 동시를 많이도 쓴 해인데 이해에 쓴 16편중 10편이나 동시로 나타난다. 동시 “편지”도 1936년 동시 10편 가운데의 한편으로서 시인의 기발한 착상과 동시창작의 원숙함을 너무나도 두드러지게 알려준다. 서두에서 윤동주는 보이지도 않는 화자 “나”를 통하여 첫편 시작에서 왜 “눈이 가득히” 내린 겨울을 썼을가? 조금만 주의하면 우리는 이 겨울, 이 눈이 마지막 련—“하늘 나라”와 조응되여있음을 헤아릴수가 있다. 동시 “편지” 전편에 일맥되여 있는것은 눈이요, 흰 봉투와 같은 흰색이다. 흰색은 우리 겨레 백의민족을 뜻하면서도 사람이 운명을 달리하여 “하늘 나라”로 갈 때 입는 옷을 뜻하기도 한다. 윤동주는 시작에서 섬세한 필치로 겨울과 눈을 그려내면서 “흰 봉투”로 이어지고 어지러워질라, 때가 묻을라~ 글씨도, 우표까지도 붙이지 않은, 말쑥한 편지를 이끌어낸다. 하늘 나라에는 “눈이 아니 온다기에” 화자가 누나에 대한 그리움을 흰 봉투, 그안에 넣은 흰눈으로 표달한다. “겨울”, “흰눈”, “흰봉투”로 추운 랭색의 이미지를 펼치며 하얀 넋을 기리는것일가?    하다면 시속에서 그려지는 누나는 어떤 누나의 모습일가? 혹은 지지리 병고로, 혹은 무거운 생활고에 쓰러진—둘중의 어느 하나일것이다. 윤동주는 동시 “편지”를 통해, 동시의 하늘 나라 누나를 통해, 보이지 않는 화자 “나”를 통해 일제치하의 그 시대와 그 시대속 민족의 운명을 맥맥히 흐르는 동심에 담아 실감있게 형상적으로 수립하였다. 본고 제3부분에서 윤동주 시의 녀성 이미지중의 하나인 누나의 이미지를 개략적으로 훑어보았다. 누나의 이미지는 순결로 특징지어지는 동심의 세계에서, 동심에 받들린 민족의 정서속에서 유기적으로 빛을 발산하고있다.   4.      이 세상 어머니 이미지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간사회나 조국, 대자연의 위대함을 어머니에 비유하기를 즐긴다. 그만큼 어머니란 존재, 어머니란 부름은 기뻐도 기댈수 있고 슬퍼도 기댈수 있는 인간 따뜻함의 휴계소가 아닐가. 윤동주의 시속에 표현된 어머니의 이미지가 이를 잘 알려주고있다. 어머니란 시어로 씌어진 윤동주의 시는 녀성 이미지를 나타난 약 30편의 시에서 또 10편쯤으로 가려진다. “어머니”, “고향집”, “별 헤는 밤”, “밤”, “해빛·바람”, “버선 본”, “빗자루”, “병아리”, “오줌싸개 지도”, “사과”, “남쪽 하늘” 등 시편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고 할수 있다. 이 10편쯤의 시를 또 수수한 가정주부로서의 어머니 이미지와 승화된 어머니 이미지 두가지로 나누어 볼수 있다고 본다.   ㄱ.    가정주부로서의 어머니 이미지   본고에서 전개하고자 하는 가정주부로서의 어머니란 어려운 생활고에서도 부엌살림을  떠인 한낱 수수하고도 평범한 어머니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평범한 어머니들 이미지는 윤동주의 시속에서 애기들이 그리운 젖가슴이 아니면 애기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 장보러 가는 어머니, 빗자루 들고 엉뎅이 때리는 어머니 등으로 지극히 현실적으로 직감적으로 안겨오는 어머니이다. 여기에 속하는 시작품들로는 “밤”,  “해빛·바람”,  “버선 본”,  “빗자루”,  “병아리”, “어머니” 등 시들을 들수 있다. “밤”이 우선 그러하다고 보여진다.   오양간 당나귀 아--ㅇ외 마디 울음 울고   당나귀 소리에 으--아 애기 소스라쳐 깨고 등잔에 불을 다오   아버지는 당나귀에게 짚을 한키 담아주고   어머니는 애기에게 젖을 한모금 먹이고   밤을 다시 고요히 잠드오.   이 시에서 어머니의 이미지는 애기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으로 보여진다. 시골의 밤, 평화로운 밤의 정적속에 당나귀가 배고프다고 울고 애기 그 소리에 놀라 깨여난다. 아버지가 당나귀에게 짚을 한키 담아줄 때, 어머니는 애기에게 젖을 한모금 빨린다. 당나귀와 아이의 먹이 대비, 그 대비속에서 먹이의 만족을 느낀 당나귀, 애기는 원상태로 돌아간다. 이로부터 우리는 당나귀와 아기에게 있어서 먹는것보다 급선무가 없다는것을 알수 있다. 생의 첫째가는 수요가 식욕이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당나귀도 좋고 애기도 좋고 식욕이 으뜸가는 일임을 강조하면서 우선 애기에게 젖을 먹어야 하는 어머니의 젖가슴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가르치고있다. 생명을 기르는 장본인들을 두고 한국의 박민영박사는 그의 한 저서에서 우는 아기, 모성의 원리로부터 “어머니의 젖가슴은 세상으로부터 아기를 보호하는 피난처가 된다.” ④고 잘 개괄하고있다. 윤동주의 시에서 어머니들의 또 다른 이미지는 시 “병아리”(1936.1.6)에서 “엄마 젖 좀 주/병아리 소리”와 시 “해빛·바람”(1938년 추정)에서 “장에 가는 엄마 내다보려/문풍지를/쏘옥, 쏙, 쏙” 등에서도 이어볼수가 있겠다. 시 “버선 본”(1936.12)에서는 “어머니/ 누나 쓰다버린 습자지”, 시 “빗자루”에서는 가위로 종이를 요리조리 베는 어린 자식들을 빗자루 들고 “누나 하나/ 나 하나/ 엉뎅이를 때”리는 어머니, 이같은 어머니들의 모습에서 평범한 가정주부, 아니 위대한 어머니로서의 어머니 이미지가 실생활의 시적구성으로 보는듯이 그려진다 더우기 인상적인것은 시 “어머니”(1938. 5. 2)에서, 어머니의 이미지와 더불어 어릴 때로 돌아가는 시인 윤동주의 밝고 맑은 동심의 모습이다.   어머니! 젖을 빨려 이 마음을 달래여주시오 …………… 어머니! 그 어진 손으로 이 울음을 달래여주시오..   이 시를 두고 상기 한국인 박민영박사는 “어머니의 품속은 ‘고향’의 이미지와 연계되여 그리움의 대상으로 그려진다.”⑤ 고 말한다. 이 부류의 시들에서 윤동주는 티없이 순결한 동심의 세계를 쭈욱 나타내면서 아기보호 피난처로서의 어머니의 젖가슴, 고향의 이미지와 이어지는 그리움의 대상-- 어머니 품속을 찬미하고있으며 그속에서 그 시대 삶의 아픔을 시속에 재치있게 깔아가고있다.   ㄴ.  승화된 어머니 이미지   윤동주는 그의 시 “남쪽 하늘”, “고향집”, “오줌싸개 지도”, “별 헤는 밤” 등에서 온화하고 따뜻함으로 나타나는 어머니의 원초적 양육, 보호 등 이미지를 본래의 가정주부형상으로부터 보다 승화된 고향어머니로의 이미지로 부각시킨다. 시 “남쪽 하늘”과  시 “고향집”이 먼저  이면의 좋은 실례로 된다.   어머니 젖가슴이 그리운 서리 내리는 저녁— 어린 영은 쪽나래의 향수를 타고 남쪽 하늘만 떠 돌뿐—   --“남쪽 하늘”(1935.10)에서   남쪽 하늘 저 밑에 따뜻한 내 고향 내 어머니 계신 곳 그리운 고향집   --“고향집”(1936.1.6)에서   시 “남쪽 하늘”에서 어머니 젖가슴의 따뜻함과 서리의 차거움이 랭온대비를 보여주면서 어머니를 그리는 타향 어린 넋의 향수가 진하게 묻혀나온다면 시 “고향집”에서는 어머니가 고향의 화신(化身)으로 떠오르면서 “따뜻한 내 고향”, “그리운 고향집”으로 승화되고있다. 1936년과 1937년은 윤동주시인으로 말할 때 동시창작으로부터 시 창작의 원숙한 모습을 보이던 시 창작의 황금기로 된다. 그 가운데서 동시 “병아리”, “빗자루”, “오줌싸개 지도”, “무얼 먹고 사나”, “거짓부리” 등 5편은 그 시절 연변의 어린이 월간지—“카톨릭 소년”에 실린다. 5편중의 “오줌싸개 지도”는 1937년 1월호 “카톨릭소년”에 발표되는데 그 시는 이러하다.   빨래줄에 걸어 논 요에다 그린 지도 지난 밤에 내동생 오줌싸 그린 지도 꿈에 가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 벌러 간 아빠 계신 만주땅 지돈가?   ---“오줌싸개지도”(1936.초)에서   이 동시에서 무엇보다 의미로운것은 “요에다 그린 지도/지난밤에 내동생/오줌 싸 그린 지도”가 “꿈에 가본 엄마 계신/별나라 지도”, 즉 하늘 나라에 계신 엄마의 별자리지도로 보인다는 점이다. 별나라라는 그 자체가 벌써 동심이 흐르는 세계라 할 때 이 세계의 별은 비록 현실의 공간이 아닌 상상의 공간에 존재하는 별이라지만 시인 윤동주가 현실에서 풀수 없는 인식을 꿈, 별나라, 어머니와 이어나가는것은 별나라—어머니에 희망을 기탁한 적극적인 생활태도가 아닐수 없다. 한마디로 “오줌싸개 지도"에서의 시적 화자에게 있어서 저 하늘의 별은 어둠이란 이 현실을 가시는 새날의 희망으로 떠오른다. 확실히 일제치하 현실세게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윤동주에게 새 희망을 주면서 정신적인 승화를 보여주는것은 저 하늘의 별이다. 윤동주가 시 “산림”(1936, 6  26)에서 쓴것처럼 “나무 틈으로 반짝이는 별만이/새날의 희망으로 나를 이끈다.” 그런 별나라가 별나라—어머니로 승화하니 이 어머니는 위대한 어머니의 이미지일수밖에 없다. 윤동주는 서울 연전문과 졸업을 앞둔, 1941년 11월 5일에 쓴 참신하고 아름다운 시 “별 헤는 밤”에서 별을 어머니의 이미지로 보다 끌어올리고 있다. 그는 시에서 가을속의 별들을 하나하나 가슴속에 새기면서 이렇게 격조높이 쓰고있다.   …………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   이 시는 청신한 가을밤의 맑은 별빛이 넘치는 그지없이 아름다운 한편의 시이다. 시에서 윤동주는 별 하나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보는데 그속에서 달라자 현립 1교시절 한 학급에 다니던 패, 경, 옥 등 이국 소녀들이 곁들어지고 가난한 이웃들의 이름, 대자연의 동물군체까지 곁들어진다. 윤동주에게 있어서 일제치하의 암담한 시절에도 하늘을 우러러 별을 헤는 그 시각만은 잠간이나마 어지러운 세상을 잊어가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시각이였는데 그는 서울에서 멀리 북간도—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보면서 이제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온”다고 확신한다. 이 봄이란 바로 밝아오는 새 세상을 가리킨다. 윤동주는 이같이 맑고 청결한 기품으로 새 희망, 새 세상을 안고 산 뜨거운 열혈청년이다. 이 새 희망, 새 세상이 별나라—어머니로 나타나기에 윤동주 시의 어머니 이미지가 보다 승화되고 빛발치는것이 아니겠는가?!   5.   순이란 시적화자 이미지   우에서 윤동주 시의 녀성 이미지를 여러 면으로부터 살펴보았다. 하다면 시가 아닌 윤동주시인의 녀인관계는 어떠했을가, 이를 알자면 윤동주의 시로 다시 들어가 보아야 할것 같다. 윤동주는 자기의 시들에서 아가씨, 선녀, 해녀, 할머니, 울언니, 누나, 어머니 등 다양한 시적화자로 녀성이미지를 그리며 녀인에 대한 자기의 마음을 내비치고있다. 이와 더불어 공부차 고향—명동을 멀리 떠나 있을 때나 마음속에서 항시 그리움의 대상은 고향이요, 어머니이다. 여러 녀성 시적화자와, 고향과 어머니 외에 또 있다면 윤동주 녀성 이미지의 절정을 이루는 “순” 또는 “순이”란 마음의 부름이 있다.   순아 너는 내 전에 언제 들어왔던 것이냐? 내사 언제 네 전에 들어갔던 것이냐?   우리 들의 전당은 고풍한 풍습이 어린 사랑의 전당   순아 암사슴처럼 수정눈을 내려감아라 난 사자처럼 엉클린 머리를 고루련다 우리들의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   성스런 촛대에 불이 꺼지기 전 순아 너는 앞문으로 내달려라   어둠과 바람이 우리창에 부닥치기전 나는 영원한 사랑을 안은채 뒷문으로 멀리 사라지련다   이제 내게는 삼림속의 아늑한 호수가 있고 내게는 험준한 산맥이 있다   --“사랑의 전당”(1938, 6, 19)   이 시는 사랑의 유희, 상상의 유희가 아닌 “절절한 울림”으로 독자들의 심금을 울려주고있다. 또한 1938년 4월 서울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후 이성—순에 대한 절절한 사랑, 뜨거운 사랑, 영원한 사랑으로 씌여졌다는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끈다. 보는바와 같이 시 “사랑의 전당”은 순이를 노래한 최초의 시이다. 윤동주는 시에서 “너는”, “내사”가 “내 전”, “네 전”에 언제 들어갔더냐며 “우리들의 전당은/고풍한 풍습이 어린 사랑의 전당”이라고 격조높이 노래한다. 뒤에서 시인은  “암사슴처럼 수정눈”, “사자처럼 엉클린 머리”, “성스런 촛대에 열한 불”, 등 과장조로 넘친 사랑의 시어를 구사하면서 “우리들의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고 쓰고있다. 이는 사랑하면서도 사랑하는 녀인에게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 윤동주의 현실이 아니였을가고 필자는 생각하면서 맘속으로 그리는 사랑하는 녀인에게 맘속말을 쏟는 사랑의 마음고백이라고 본다. 사랑의 절절한 울림, 절절한 감정이 아니고서는 22살의 윤동주가 이런 시를 써낼수 있었을가. 시는 마음의 발로라고 하지 않는가. 윤동주시인의 서울 연전시절에 순이와 관련된 시를 쓴것은 “사랑의 전당”뿐이 아니다. “사랑의 전당”에서 이어지는 “소년”,  “눈오는 지도”를 보기로 하자.   ………………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                    --“소년”의 뒤부분(1939)    산문시 “소년”은 “단풍잎 떨어지는 슬픈 가을”에 손금의 맑은 강물가에 앉아 “나”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본다. 강물에 비쳐진것은 나로 나타나는 나 자기의 내면 모습이지만 그 모습에 어린것은 “나” 그리움의 대상—“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다. 순이를 그리는 마음은 시 “눈오는 지도”에서 보다 깊어진다.   순이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것처럼 창 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위에 덮인다……정말 너는 잃어버린 력사처럼 홀홀히 가는것이냐, 떠나기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밑, 너는 내 마음속에만 남아있는것이냐. …………                             --“눈오는 지도” (1941.3.12)   이 산문시 역시 서울 연전시절에 쓴 시로서 그 먼저 1939년에 쓴 시 “소년”의 계속임을 알수가 있다. “소년”에서 맑은 강물에 어리여오던 순이의 슬픈 얼굴이 “눈오는 지도”에서는 떠나가는 곳조차 알수 없는 슬픈 현실로 나타난다. 순이라는 맘속 사랑의 존재가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밑”에 있지 않으니 현실세게가 아닌 “내 마음속에만 남아있는” 존재가 아닐수 없다. 이번에는, 순이의 이미지는 순이의 형상인 “옛 소녀”의 모습으로 떠오른다.   청초한 코스모스는 오직 하나인 나의 아가씨   달빛이 싸늘히 추운 밤이면 옛 소녀가 못견디게 그리워 코스모스 된 정원으로 찾아간다 ………… 내 마음은 코스모스의 마음이오 코스모스의 마음은 내 마음이다.                     --“코스모스”(1938)   시에서 윤동주는 코스모스를 보며 자기의 “옛 소녀”를 상기하지만 “코스모스”에서의 “옛 소녀”도 현실인물이 아닌 “내 마음속에만 남아있는” 사랑의 녀인이다. 하기에 윤동주는 “코스모스”에서 “내 마음은 코스모스의 마음이오, 코스모스의 마음은 내 마음이”라고 실토한다. 윤동주는 서울 연전시절에 쓴 또 한편의 사랑시 “달같이”(1939)에서 “년륜이 자라듯이/달이 자라는 고요한 밤에/달같이 외로운 사랑이/가슴이나 빠끔히 년륜처럼 피어나간다”면서 이성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다. 이 시에서도 사랑을 그리는, 아니 순이를 그리는 마음이라 할수 있는 사랑의 흔적, 그리움의 흔적을 보아낼수가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윤동주의 시 “사랑의 전당”, “소년”, “눈오는 지도” 등 사랑시들에서 나타나는 순이가 어떤 사랑이겠는가를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면서도 순이를 사랑이미지로 한 윤동주의 시들은 하나같이 현실에서 찾아볼수 없는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이라는데서 우리의 보다 큰 감명을 불러일으킨다. 일종 슬픔의 미를 보여주었다고 할수 있겠다.   6. 나오면서      본문에서 필자는 나름대로 윤동주 시의 녀성 이미지를 보는대로 느끼는대로 더듬어보았다. 우에서 필자는 윤동주의 현존시 100여편 가운데서 녀성 이미지로 꿰여볼수 있는 시편들이 약 30편, 전체 시작품의 거의 3분의 1을 이루고있음을 밝히였다. 윤동주 시작품속의 녀성 이미지를 통하여 윤동주시인을 보다 더 리해하려는것이 필자의 시도이다.   주해: ① 송우혜, 윤동주 평전, 열음사, 1988년 10월 출판, 제213페지 ② 동상서, 제214페지 ③ 동상서, 제227페지 ④ 박민영, 현대의 상상력과 동일성, 태학사, 2003년 1월 출판, 제160페지 ⑤ 동상서, 제161페지 (6) 이 론문의 윤동주 시 녀성 이미지 시편통계는 윤동주의 시 110여편이 실리여 있고 전광하, 박용일 편저로 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2년 7월)에 준하였다.   (2007년 12월 3일)  
356    국경절의 이야기 댓글:  조회:4498  추천:29  2010-10-01
                   국 경 절 의  이 야 기    오늘은 2010년 10월 1일, 위대한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61돐생일날. 명절을 맞은 절강의 명산 회계산, 회계산풍경구는 환락으로, 유람객들로 들끓는다. 어제까지도 련며칠 찌뿌등한 흐린 날씨에 찔금찔금 비를 내리며 강남 기온을 마구 떨어 뜨리더니 오늘은 언제런듯 흰구름으로 감돌며 여름날씨를 련상시킨다. 나라의 생일날을 축복하는듯 갖가지 꽃들이 어여쁘게 피여나고 평소 보기 드물던 호랑나비들이 나타나 꽃을 찾아 탐화봉접하니 이 아니 평화로운 명절이오, 국경절날 회계산풍경구 산책, 국경절의 이야기는 이렇게 카메라로 시작된다. 
355    답사기(3)-엄동속 십리평 잣덕 답사기 댓글:  조회:4567  추천:22  2010-09-22
【편자의 말】    올해 추석에 즈음하여 우리 력사속에 잘 알리어 지지 않았던 백포 서일장군 전기와 관련 답사기를 몇편에 나누어 올리어 보았습니다. 추석 한가위날 답사기 (3)은 마지막 회입니다.  여러 네티즌들이 우리 서일장군을 리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새해 추석엔 여러 분들 앞에 서일장군 전기를 책으로 보여 드리리라고 신들메를 조여 봅니다......                               엄동속 십리평 잣덕 답사기     그날 2008년 2월 4일은 살을 마구 베여가기라도 하듯 혹독한 날씨였다. 오전 10시 지나 왕청현성에서 동으로 쭈욱 빠진 아스팔트길 따라 서대파촌 구간을 경유하다가 길가의 서대파촌 도로표식패를 카메라에 담느라고 잠간 내렸는데 차바깥 날씨가 어찌도 찬지 별반 지체할수가 없다. 그런 추운 날씨에도 마을가를 흘러 내리는 꽁꽁 언 강물에서 빨래질하는 서대파촌의 한 사나이를 보고 찬탄이 절로 난다. “이곳 시골사람들은 여간내기가 아니군!” “얼어 죽을 사람은 나오라는 바깥 추운날씨에 겨울강에서 빨래질 하다니?!” 승용차에 다시 올라 담소하는 사이 목장님—서군선님의 승용차는 서대파촌 구간을 씨엉 지나 왕청현성에서 동으로 근 백리 떨어진 십리평에 들어섰다. 지난해 8월 11 일 여름방학 연우산악회 님들과 더불어 화룡 청파호촌 부근의 서일장군 등 삼종사묘소를 답사참배한 후의 계속이다. 십리평행 답사는 종친성씨라고 서일장군에 대해 특별한 감정과 흥취를 가진 목장님이 손수 자가용 승용차를 몰아 나와 상공님 우리 셋이 연길에서 왕청 십리평에 이른 것, 그 열성을 아는지 모르는지~~승용차를 십리평 마을에 세워두고 마을 뒤 잣덕---북로군정서 옛터를 찾는데 마침 바람받이라 십리평 북쪽골로부터 불어치는 찬바람이 정면으로 얼굴을 답새긴다. 그젯날 조선이주민들이 말하던 만주광야 겨울추위를 좀 알것 같았다.겨울 옷을 꽁꽁 입었어도 온 몸이 와들와들 떨리여 남을 무엇으로 설명할까, 바람받이 왕청 산간에서 잠시도 지체할수가 없다. “이눔의 날씨가 왜 이다지도 추울까?” 나는 하늘을 푸념하며 동행한 상공님 보고 마을 뒤 경사진 이 밭들이 그젯날 북로군정서 옛터라고 말하고는 부랴부랴 현지사진 몇장을 찍었다. 때는 정오를 바라보는 오전 11시가 넘어선 시각, 나보다 옷을 엷게 입은 상공님은 온몸이 다 얼어든다면서 얼굴색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더 지체하지 못하고 마을로 내려 오니 찬바람이 더는 기승을 부리지 못한다. 그제서야 기색이 돌아선 나는 상공님과 잠간 말을 나누었다. “세월이 무섭긴 무서워, 근 20년 세월속에 잣덕이 변했다구, 1991년에 찾을 때는 잣덕이 퍼그나 둔덕지고 경사진 야외모습으로 보이더만 지금은 마을과 붙어서 마을의 터밭으로 밖에 안 보여.” “그래서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거의 20년 세월이면 두번이나 변해야 하는 강산인데 잣덕도 변할수 밖에 없지요.” 이렇게 시작된 우리 대화는 귀로의 승용차 안에서 계속 이어진다. 대화라야 말짱 북로군정서와 서일장군 관련 십리평의 옛말들, 1991년의 답사이야기, 그럴 때 목장님과 상공님은 극히 적은 부류의 연변의 력사학가들과 관련 분들만 알고있을 십리평 북로군정서 옛터와 서일장군의 발자취, 력사가들도 아닌 우리가 찾아 보았다는 건 너무나 행운이라면서 앞으로 산악회 회원님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께 알리겠다고 속셈을 터놓았다. 그 속셈이 고마왔다. 전에 모르던 엄동속 왕청 십리평 답사가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후더워났다. 목장님의 자가용은 귀로에 다시 왕청현성을 거치면서 현성의 서북쪽 덕원리 마을 옛터가 들여다 보이는 산굽이 올리막 길가에 멈추어섰다. 날씨는 십리평 골안쪽보다는 어느 정도 부드럽다지만 춥기는 매일반이다. 차에서 내린 나는 목장님과 상공님께 저 북쪽에 보이는 산기슭 평지쪽이 덕원리마을 옛터라고, 마을이 1932년 봄 일제놈들 토벌에 언녕 초토화되고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고 소개하였다. 다른 글에 서일장군 관련 덕원리마을 유래를 상세히 소개하겠지만 덕원리마을 옛터까지 후배들인 목장님과 상공님께 알려 드린 나는 한시름을 덜었다. 내 고향 연변도 아닌 6000리 밖 강남땅 타향살이를 하는 나로서는 더욱 그러했다.   2010년 9월 10일, 강남땅에서      
354    내가 찾은 심양 9.18사변지 댓글:  조회:3680  추천:29  2010-09-17
                        내가 찾은 심양 9.18사변지     9월 29일 오전 8시, 나는 심양 서탑에 자리잡은 주숙지 서울호텔을 떠나 택시를 잡아타고 곧추 9.18사변지로 향하였다.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의 일원으로 나는 조성일 회장, 한정자 사무국장 등과 더불어 한국 주심양총령사관의 특별초대로 심양에 가서 국경초대연에 참가하는 행운을 지니였는데 이 기회를 놓칠수가 없었다. 약 반시간만에 이 거리 저 거리 동북방으로 6킬로메터 달려 심양시 대동구 망화남가 9.18사변지에 이르니 그제날 철길가 풀밭은 언제런듯 새로 일어 선 《9.18력사사박물관》이 반겨맞았다. 9.18력사박물관은 심양북역에서 할빈으로 통한 철길과 시내신작로사이에 길이 500메터도 훨씬 넘게 뻗어있었다. 출입구 첫 구간은 휘넓은 광장이였다. 나의 첫발목을 잡은것은 광장의 출입구 맞은켠에 세워진 거대한 종이였다. 동으로 주조된 종에는 9.18사변기록과 함께 《국치를 잊지 말자》(勿忘国耻)는 한자 네글자가 박히여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심양 동융신형건축자료유한회사에서 1999년 9월 18일에 헌납한 《경세종》(警世钟)인데 9.18사변지를 찾는 사람마다 선참 찾아보고 기념촬영을 남기는 곳이라고 한다. 경세종 오른쪽가에 《9.18사변 류조호폭파지점비》가 옛 력사 모습대로 누워있었다. 너무도 눈에 익은 류조호폭파지점비였다. 내가 심양 9.18사변지를 처음 찾은것은 9.18사변 50돐을 맞던 해인 1981년으로 거스른다. 졸업을 한해 앞둔 우리 연변대 조문학부 78년급 심양소조는 그해 9월 14일부터 10월 16일까지 심양시 조선족1중에서 졸업실습을 하게 되였는데 조문학부를 다니며 언녕 우리 력사에 빠져 버린 나한테 심양의 9.18사변지가 어제 오라 손짓하는 것만 같았다. 10월 12일, 주제반회 재검토를 마치고 나는 끝내 홀몸으로 9.18사변지를 바라고 떠났지만 물어보는 심양시민들마다 거의가 9.18사변지를 모르고 있었다. 시내뻐스를 세번이나 갈아타며 묻고 물어서야 마침내 《류조구》와 북대영을 찾을수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것은 철길가 풀숲에 처박힌 지금의 9.18사변류조호폭파지점비이고 주위에는 북대영 낡은 건물들과 농촌채소밭들 뿐이였다. 콩크리트로 된 류조호폭파지점비는 9.18사변지의 유일한 견증물인것 같았다. 지점비에는 《9.18를 잊지 말고 피눈물의 원한 아로 새기자!》 (不忘九一八,牢记血泪仇)는 검은 붓글씨가 씌여 있었다. 별수없이 처박힌 지점비를 사진찍고 귀로에 오르다가 부근의 류조호대대를 찾아 선후로 한족로인 세분을 방문하였는데 뜻밖에도 수확이 컸다. 모든 력사책들과 력사서술에서 9.18사변지는 류조구(柳条沟)로 되여 세상사람들은 류조구로 알고있었지만 세분 로인들은 9.18사변 그때를 망라하여 여기는 류조호(柳条湖)로 통했지 류조구가 아니였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 새로운 발견이였다. 그때부터 나는 누가 뭐라하든 9.18사변 관련 모든 글들에 류조호라고 썼는데 이번에 보니 9.18사변지 주위  도로표식이나 소개글들에 모두 류조호라고 밝혀져있었다. 이런 연고로 류조호폭파지점비는 인상깊은 력사의 고장이라 하겠다. 허나 다시 찾은 사변지에서  지점비를 아무리 훑어보아도 20여년전의 검은 붓글씨는 보이지 않았다. 흔적조차도 알리지 않아 그 앞에 세워진 안내글을 보고서야 9.18사변 류조호폭파지점비가 옮음을 확인했다. 안내글에는 이렇게 씌여져 있었다.   1931년 9월 18일 밤에 일본군은 저들이 남만철도 심양류조호구간을 폭파하고 중국군대의 소행이라고 중상하고는 이것을 구실로 무장으로 중국 동북을 침점하였다. 후에 폭파지점 옆에 목제표식패를 세우고 《소화 6년 9월 18일 지나병선로 폭파지점》이라고 하였다. 1938년에 또 이곳에 작탄꼬리깃형 세멘트비를 다시 세웠는데 비의 높이는 7메터이고 아래 제형받침자리에 《폭파지점》이라고 썼다.   폭파지점비 오른쪽 광장복판에 9.18사변의 시간을 알려주는 《잔력비(残历碑)》가 웅장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잔력비, 즉 일력비는 네모반듯한 돌들로 쌓은 웅위로운 건축물이였는데 비의 정면에는 1931년 9월 18일 일력이 그대로 새겨지고 왼쪽켠에 밤 10시라고 밝힌 모습이였다. 일력비를 에돌면 또 광장이고 광장 동북쪽켠은 철길따라 길게 뻗은 9.18력사박물관 주체건물로 이어진다. 박물관내에 들어서면 널다란 대청—서정(序厅),  서정은 사면벽을 감싼 흰색의 산모양조각품과 검은색의 대리석지면이 조화되여 백산흑수(白山黑水)의 장려한 경상을 그대로 나타내면서 아름답고 부요한 동북의 산천을  상징하고 있다면 대청 한쪽가에는 동으로 주조된 누운비가 있고 비의 중간에는 꺼질줄모르는 화염이 불탄 모습으로 나타나며 동북인민들의 불굴의 투쟁정신과 민족기개를 상징하고 있었다. 그다음부터는 8개전람청과 10여개 대형장면들이 줄줄이 이어선다. 9.18력사박물관 안내글을 보니 이 력사박물관은 원명이 《9.18》사변박물관으로서 1991년 9.18사변 60돐을 계기로 착공하기 시작했는데 그때의 건축물이라야 9.18를 나타내는 웅장한 일력비뿐이였다. 그래서 일력비 건설시간을 1991년이라고 밝힌것이였다. 그로부터 수년후인 1997년 9월에 심양시에서는 9.18력사박물관을 확건하기로 결정짓고 2년간의 간고한 시공을 들여 신관을 일떠세우고 1999년 9월 18일에 정식으로 대외에 개방하였었다. 새로 일떠세운 신관은 9.18사변일력비, 경세종정(警世钟亭),  주관(主馆), 승리기념비 등 특이한 풍격의 건축군들로 구성되여 있었다. 이런  신관은 총 점유면적이 3만 5000평방메터, 건축면적이 1만 2600평방메터, 전람면적이 9180평방메터로 헤아려진다. 상기와 같이 전람청은 8개전람청에 10여개 대형장면으로 이루어졌다면 관내 진렬연장선은 510메터로서 진귀한 력사사진 800여점, 문물과 자료 500여건, 대소 력사장면 재현 19개이고 담당구내 방송계통, 중앙에어콘계통, 영시(影视)보고청, 전자열람실, 다매체 인터넷계통, 네트워크 등 시설이 구전하다. 그만큼 관내 진렬은 1931년 9.18사변 이전으로부터 1945년 일제패망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력사가 재현되여있어 그 교육가치와 감상가치가 대단히 높았다. 나의 마음을 사로 잡은것은 신관(新馆) 진렬청 여기저기에 꾸며진 우리 조선족들의 영용한 투쟁모습이였다. 나의 시선은 《동북군민의 항일투쟁》 진렬청 동북항일련군 각군 장령 18명 사진에 멈추어졌다. 양정우, 주보중 등과 더불어 우리 겨레인 항일련군 제7군 대리군장이며 참모장인 최석천(최용건), 항일련군 제3로군 총참모장 허형식 두분의 사진이 모셔진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르겠다. 진렬청의 한쪽벽에는 또 조선족항일련군전사들이 총닦는 모습의 사진, 밀영의 조선족전사들, 남만의 철도선에서 전투하는 항일련군전사들 등 세 사진이 다른 사진들과 함게 진렬되여 있었다. 세 사진 모두가 조선족항일련군전사들의 모습들인데 김일성장군의 부인 김정숙녀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사진에  남만철도선의 항일련군 전사들이라고 밝히니 유감스럽기도 했다. 그 자리에 있는 강사한테  이 점을 지적했더니 그런가고 대꾸할 뿐이였다. 《동북군민의 항일투쟁》부분에는 3개조로 묶어진 소형 립체 조각품이 붉은 색 조화속에 실모습처럼 진렬되여 있었다. 인상적인 것은3개조 중 2개조가 우리 조선족항일전사들의 생생한 모습.《<토벌대>를 매복습격하다》립체조각상은 그 설명에 1933년 3월에 조선족 량성룡, 김일성의 령솔하에서 왕청유격대가 소왕청근거지에 기여든 적 토벌대 300여명과 이틀간이나 싸워 20여명을 소멸하고 적들을 격퇴시키는 모습이고 《항일화장(化裝) 선전대를 조직하다》 립체조각상은 1932년 음력설기간에 중공탕원현위서기 배치운(조선족) 등 항일화장선전대가 반일선전을 벌리면서 항일의 불길을 지피는 모습이였다. (우리 조선족의 투쟁모습도 끼이였구나!) 나는 다소 마음의 위안을 느낄수 있었다. 그것이 쌀속의 늬라해도 좋았다. 조선족의 투쟁모습이 없는 동북군민의 항일투쟁은 상상할수도 없기 때문이였다. 어느덧 두시간이 훌쩍 지났다. 귀로에 올라야 하는 나는 웅장한 일력비 앞 광장에서 서성이였다. 수백으로 헤아리는 한패 또 한패의 붉은넥타이들 답사행렬이 그칠줄 몰랐다. 답사자들속에는 중년과 로년들 40대~60대가 가끔 보이였고 공청단기를 앞세운 공청단원들의 모습도 보이였다. 9.18를 잊지 않으려는 그들, 대를 이어나아가려는 그들이 그지없이 고마왔다. (그래, 오늘의 우리 행복은 쉽게 오지 않았지, 그속에는 우리 조선족투사들의 피와 생명도 섞이였지…) 9.18사변 50돐 첫 답사에 이은 24년만의 광복 60돐 맞이 9월의 두번째 답사였다.   2005년 10월 3일      
353    답사기(2)-서일장군 묘소 참배하던 날 댓글:  조회:4548  추천:33  2010-09-16
                서일장군 묘소 참배하던 날     여름방학차 연길에 돌아 간 나는 연변연우산악회 리경호회장과 상의하고 합동등산지를 화룡시 관문산으로 정하고 부근의 서일장군 묘소를 참배하기로 하였다. 서일장군 묘소는 반일종교로 불리운, 대종교 제1대와 제2대 교주들인 라철, 김교헌 묘소와 함께 “삼종사 묘소”를 이루고 있었다. 그날은 2007년 8월 11일이였다.    연길—화룡행 버스가 연길을 떠나 화룡시 동쪽 청파호 남쪽길가에 이른 것은 오전 9시 직전. 버스에서 내려 내가 길가 남쪽 언덕가를 가리키며 저기가 서일 등 항일운동가들을 모신 삼종사묘소라고 알리자 일행 11명 회원님들 모두가 술렁거리였다. 그들로는 상공으로 통하는 회장 리경호와 목장님, 보통님, 미소님, 건강님, 햇살님, 란란이님, 푸른산님, 백마님과 백마님 부인님, 소나무님 등이였다.    연우산악회로 말하면 나 등산생활과 이어지는 잊을수 없은 산악회다. 2005년 12월 모아산서 발족한 연우산악회는 상공—리경호, 옥저—김삼을 주축으로 한 산악회인데 시초부터 나까지의 합심으로 산행과 력사문화의 어우름을 주창하는 한패의 지성인들로 무어져 두만강 사이섬, 성자산의 자매섬 욕지산 산행으로 걸음마를 떼였다. 2005년 11월과 12월 사이만도 “내 고장 연길부터 알자!”는 취지로 연길 주변과 외곽의 마반산, 뾰족산, 소하룡 동산, 평봉산 옛 장성, 청차관, 대돈대, 와룡동 등지를 차례로 찾으면서 루루 2000여년의 력사를 거스르다가 모아산 옛 봉화대에 이르러 2005년 하반기 산행을 마감지으며 모아산서 정식 발족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후에도 숱한 력사문화 답사산행길에 오르다가 이번에는 또 겨레항일운동가들인 서일 등 삼종사묘소를 찾아 화룡 관문산 너머로 달려 왔으니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오른다.    아스팔트길을 벗어나 남쪽 언덕가로 이어진 수레길에 들어서자 잘 익은 밭가운데 참외가 발목을 잡는다. 누군가 참외지기한테서 참외 한구럭을 사서 우리 일행이 골고루 맛보도록 한다. 그날 이후 3년나마 흐른 뒤여서 누가 참외를 샀던지 딱히 기억은 없지만 깎아까지 주는 참외를 시가지도 아닌 야외서 맛갈스레 먹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이윽고 우리 일행은 남쪽의 둔덕진 언덕가에 올랐다. 남쪽 언덕우에는 겨레 반일종교—대종교 삼종사로 불리우는 서일, 라철, 김교헌 묘소가 차례로 모셔져 있어 일행은 삼종사묘소의 비문이요, 비석들을 뜯어 본다, 사진을 찍는다 북적이였다. 이어 일행한테 삼종사 세 위인과 그 래력을 개괄적으로 소개하는 나한테는 20세기 10년대 그 옛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라철, 김교헌, 서일을 보는 듯 위인들의 형상이 우렷히 떠오른다.    대종교 제1대 교주 라철— 대종교 제2대 교주 김교헌—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장군—    그 시절 쟁쟁하던 항일운동가인 라철은 1916년 추석날 황해도 구월산에서 페기법으로 자결한 후 대종교 교인들은 제1대 교주 라철의 유언에 좇아 그의 유해를 북간도로 불리운 연변 화룡 청파호에 이장하고 1923년 11월 18일에 녕안현 남관 총본사에서 병사한 제2대 교주 김교헌을 1924년 1월에 그의 유해를 역시 화룡 청파호에 옮기였다. 서일장군은 1921년 1월 27일 밀산현 당벽진에서 자결, 1927년 봄에 장군의 유해도 이곳 청파호에 이장된다.    대종교 삼종사 묘소 형성. 그로부터 여러 해가 흐른 1934년 경에 정의감이 넘친 청파호 갑장 오두악이 사람들을 시켜 삼종사묘소 주위에 락엽송—이깔나무를 심게 했으나 어느 땐가 모두 베여버리는 비극을 겪어야만 했다. 세월속 1989년에 화룡시 룡성진 청호촌 로인회에서 삼종사묘소를 수선하면서 잃어진 김교헌의 비석을 다시 세우니 대종교 삼종사묘소는 다시 빛을 보게 되였다. 그뒤 1991년 9월 1일, 화룡시인민정부 공고로 되는 삼종사묘소—반일의사무덤이 화룡시 문물보호단위로 됨에 따라 삼종사묘소는 비로소 오늘의 모습으로 우리한테 나타난다.    화룡시 삼종사묘소 참배속에서 우리 일행은 목장—서군선님 등이 몸소 준비한 술을 붓고 삼종사묘소에 절을 올리였다. 그러는 일행 모두 당년 쟁쟁한 항일운동가 세분, 더우기 북로군정서 총재로 통한 서일장군 묘소를 찾아 참배한다는 경건한 마음에 휩싸이였다. 그네들은 진정 일제치하의 험악한 시절에 항쟁의 기치들고 진두서 싸운 겨레 위인들, 그날따라 활짝 피여 난 주변의 해바라기꽃들이 우리 참배를 지켜보고 있었다.    삼종사묘소 답사참배가 끝난 후 우리는 동쪽 산비탈을 따라 풀밭을 헤치며 화룡시가지와 토산자 사이 관문으로 되는 관문산에 올라 화룡시 소재지와 화룡시 소재지 서쪽 베개봉 쪽을 바라보며 당년의 청산리전투를 떠올려 보기도 하였다. 그로부터 옹근 3년철이 흘렀으나 그날 우리 연우산악회 회원님들 화룡 청파호 남쪽언덕가 삼종사묘소 답사참배하던 날, 그날의 관문산 산행인상이 금시런듯 새롭기만 하다.   2010년 9월 9일, 강남 두앵원에서            
352    답사기(1)-서일--밀림속의 메아리 댓글:  조회:3467  추천:24  2010-09-14
                           서일--밀림속의 메아리   1   1919년 3.1운동이후 이땅의 조선인반일지사들은 각지에서 반일독립단체를 무어가지고 무장항쟁의 길로 나아갔다. 우리가 이번 1989년 여름 답사길에서 조사한 《북로군정서》가 바로 그 시기의 유력한 반일독립단체이다. 경술국치직후에 조직된 북로군정서는 대종교의 《중광단》이 발전한것,1910년 8월 이른바 《한일합방》에 의해 삼천리강산이 빛을 잃은후 후날의 북로군정서—총재 서일은 일제와의 항전을 도모하다가 1911년 초에 일가식솔을 거느리고 두만강 이북 망명길에 올랐다. 백포 서일은 1881년 2월 26일 조선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출생하였다. 소시적에 고향에서 서당공부를 하며 한학을 배웠던 그는 반일운동의 요람으로 불리운 경성함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가 10년간 계몽교육에 종사하며 반일의 힘을 키웠다. 그러다가 경술국치를 당하여 두만강을 건너와 왕청현 덕원리에 자리잡게 되였다. 덕원리는 지금의 왕청역에서 북으로 약 7~8리 되는 곳에 자리잡은 마을인데 주민의 대부분이 조선이주민들이였다. 서일은 이곳에 발을 붙인후 이해 3월 재기를 도모하는 반일의병들과 대종교인들인 현천묵, 계화 등 동지들을 규합하여 독립단체 《중광단(重光團)》(중광이란 대종교의 중광을 환호하고 단군을 숭상하며 민족의 혼이 의연히 살아있다는 뜻)을 조직하고 본영을 덕원리에 두었다. 그에 따라 우리가 답사한 서일관련 첫 답사지는 왕청현성 북쪽 가까이 덕원리. 대흥구 쪽으로 향하는 산언덕 길가에서 옛 마을들이 언녕 사라진 북쪽 산밑의 덕원리 옛터를 바라보는 우리한테는 서일장군의 모습이 환히 안겨오는듯 싶었다.   2   1912년 10월, 서일은 대종교에 정식으로 입교한뒤 일부 동지들을 대종교의 포교활동에 내세워 덕원리와 그 일대의 적지 않은 사람들을 대종교에 포섭하였다. 한편 1913년 4월 1일에 5년제 《명동학교》를 창설하고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1917년 명동학교에 중학부를 설치하였다. 교사는 토목구조로서 소학부는 류수하 동쪽기슭에, 중학부는 서쪽기슭에 자리잡았다. 중학생이 가장 많을 때는 외지 류학생들을 포괄하여 100여명에 달하였다. 1913년 10월 서일은 대종교의 시교사를 맡아보게 된후 학교교육에 정진하는 한편 교리저술에 뛰여들어 《삼일신교》, 《회삼경》등 방대한 경전을 지술하였다. 《삼일신교》와 《회삼경》은 다른 두 경서와 더불어 대종교의 4대경서로 되였는데 이로하여 서일은 3년반만에 7년반이 되여야 승질할수 있는 상교로 되고 한달후에는 또 사교로 되였다. 1916년 4월 13일에는 경각의 특선사교로 되였다. 1919년초에 대종교의 제2세 교주 김헌이 서일에게 교통을 전수하려 하였으나 서일은 제2세 교주의 권유를 5년간 보류키로 하고 무장항쟁준비를 활발히 퍼나갔다. 덕원리는 이같이 서일과 관계되고 서일을 통해 반일종교—대종교가 뿌리 내린 유서깊은 고장으로 알려진다. 그때 전민족적인 《3.1》운동이 터지였다. 이에 지대한 고무를 받은 서일은 1919년 4월에 원 《중광단》의 토대우에서 대종교 교인들을 핵으로 하고 반일의병과 공교회 회원들을 더 규합하여 《대한정의단》으로 확대하고 단장으로 취임하였다. 서일은 정의단내에 조선글신문 《민보》와 《신국보》를 꾸리고 반일사상을 널리 고취하면서 독립을 위한 대가는 오직 혈전항일뿐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뒤 서일은 구한국무관학교 출신이며 신민회 계통의 무관인 김좌진 등을 초빙하여 1919년 8월 7일에 《대한정의단》산하에 《대한군정서》를 설치하고 그 책임을 김좌진에게 맡기고 군사훈련과 독립군편제를 다그치게 하였다.   3   이를 전후하여 《대한정의단》은 본영을 왕청현 서대파구에 두고 연변 각지에 5분단, 70여지단을 설치하였으며 《단지(斷指)결사대》1천여명을 두었다. 그들은 주야로 군자금, 군량 등의 모집과 무기구입에 전력하면서 유력한 항일독립군단으로 발족하였다. 같은해(1919년) 10월에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는 《대한군정부》로 개편되여 서일을 총재로 추대하고 김좌진을 군사령관으로 추대하였다. 12월에 《대한군정부》는 상해림시정부의 명령에 의해 그 명칭을 《대한군정서》로 개칭하였다. 서간도에 《서로군정서》가 있는데 비추어 《대한군정서》는 《북로군정서》라는 별칭을 가지였다. 그 부서를 보면 총재에 서일, 부총재에 현천묵, 참모장에 리장녕, 사단장에 김규식, 려단장에 최해, 련대장에 정훈, 련성대장에 리범석, 사관련성소 소장에 김좌진이였다. 당시 북로군정서는 동북의 조선인 반일독립단체가운데서 가장 정규적이고 가장 유력한 무장단체로서 500~600명 병력에 보총 500여자루, 권총 40자루, 기관총 3정을 가지고있었다. 헌데,《북로군정서》의 본영문제를 두고 개별적인 저서와 자료들은 왕청현 십리평이라고 하고 채근식의 《무장독립운동비사》를 비롯한 대부분 저서와 자료들은 왕청현 서대파라고 하면서 시비가 엇갈렸다. 하여 우리는 덕원리에 이어 서대파로의 답사길에 올라 보았다. 서대파촌은 왕청현성에서 동쪽으로 25킬로메터가량 되는 곳에 자리잡은 산간마을이다. 현성에서 뻐스를 타고 약 한시간만에 서대파에 이른 우리들은 서대파의 지리적위치에 매혹되고말았다. 서대파는 온통 산으로 둘러싸였는데 골짜기는 동서로 유유히 뻗어있었다. (군사적요새지로선 제격이구나!) 우리는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서대파의 산야를 둘러보며 흘러간 력사의 갈피갈피를 되새기면서 마을에 이른 우리는 서대파마을 로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만 실망하고말았다. 당지 로인들은 독립군의 근거지가 십리평이라는 말은 들어보았지만 서대파가 본영이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하였다. 군사적요새지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찬탄해마지 않던 우리의 열정은 대번에 사그라졌다. 그래도 내친 걸음이라 우리는 서대파촌에서 20킬로메터 가량 떨어진 십리평향으로 가보았으나 안내자를 찾지 못한데서 역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후 우리는 다방면으로 각종 자료를 헤아리며 선색을 더듬고 일면 왕청현에서 다년간 현안의 력사와 교육사연구에 종사해 온 문호갑 등 로선배들을 찾아뵙는 가운데서 북로군정서의 본영은 서대파가 아니라 왕청현 십리평향 잣덕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개별적 자료들에서 본영을 십리평에 두었다고 하는것은 다소 차이가 보이긴 하나 일리가 있는 말이였다.                                                                     4   이러구러 세월은 살같이 흘러 어느덧 3년이 지났다. 1991년 12월 7일 우리는 십리평을 다시 찾았다. 십리평향에 이르러 도로켠의 지명패를 보니 《장영촌》이라고 박혀있었다. 후에야 안일이지만 이 촌은 워낙 향소재지였는데 몇년전에 향정부를 태평촌으로 옮긴후 지난해 마을 이름도 장영촌으로 고치였었다. 장영촌과 향소재지와의 거리는 1킬로메터반 정도밖에 안되였다. 우리는 이 구간을 걸으면서 십리평의 이모저모를 익혀두기도 했다. 그날따라 매서운 칼바람이 일신을 사정없이 들이박았지만 북로군정서의 본영—잣덕을 찾아냈다는 희열은 우리의 걸음을 재우쳐 주었다. 십리평향소재지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이 향의 간부들한테서 향안의 경작지는 420헥타르로서 인구당 16.7아르 돌아가며 죄다 척박한 모래불땅이여서 강냉이, 콩, 조이의 아르당 소출은 내내 10킬로그람을 벗어나지 못했다는것을 알았다. 행정구역은 22개사로 나뉘여지고 인구는 2887명에 달하는데 조선족은 겨우 20여세대밖에 안되였다. 광복전에 십리평이란 이 버덕안에 조선인 약 200세대가 살고있었다는것에 비해볼 때 너무도 적은 수자가 아닐수 없었다. (여기엔 필경 원인이 있을텐데?) 우리의 의문은 68살인 백원옥 안로인의 집을 찾은데서 스스로 풀리였다. 우리는 함경도식의 수수한 조선집 가마목에서 이 로인과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백원옥은 조선평안도 순천군태생으로서 그가 십리평에 들어선것은 광복직전이였다. 그해 그는 18살이였는데 한해 먼저 십리평에 와 자리잡은 시아버지를 따라 이주길에 올랐었다. 시할아버지는 본세기 10년대에 벌써 십리평사람이된데서 백원옥으로 말하면 십리평이 그리 생소한 지대가 아니였다. 당년 십리평의 조선사람은 약 200세대에 달했다. 그때 이 일대는 밀림지대였다. 하여 일제놈들은 여기에 큰 목재판을 앉혔는데 조선사람거개가 목재채벌과 가공판에서 막벌이일을 하고 있었다. 큰 목재판이라 지금의 장영촌에 일본분주소가 도사리고 앉아 여기(향소재지)에 경찰대대를 세우고 사금구에 경찰소대를 세웠다. 8.15광복을 맞은후 조선으로 돌아가고 여기저기 흩어진데서 조선사람 수십세대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나마 나가는 사람은 있어도 들어오는 사람이 없으니 20여세대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십리평이란 이름은 언제부터 생긴건지요?》 《듣자니 독립군때부터라오. 그때는 이 지대가 나무로 꽉 찼는데 독립군이 들어오면서 소생했다더구만. 십리평이란것도 이 벌의 길이가 10리라 해서 생긴 이름이라오.》 《그렇다면 잣덕이란 어디를 가리킵니까?》 《그젯날 여기(향소재지)를 잣덕이라 했소. 보다싶이 저 북쪽산기슭은 온통 잣나무로 덮였고 또 이 지대가 저 아래 십리평마을에 비해 언덕진곳에 자리잡았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오. 잣덕이란 지명도 독립군이 들어오면서 지은거라오.》 백원옥 안로인과의 이야기에서 우리의 시야는 훨씬 넓어졌다. 그의 말에 의하면 몇해전에 향소재지가 들앉기까지 이곳을 태평촌이라 했는데 그것도 광복직후 그의 시할아버지 조병선로인(당시 60여살)이 지은것이다. 그때까지 이 일대의 사람들중에 중병으로 앓거나 때이르게 죽어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해서 시할아버지가 태평촌이란 이름을 제기했는데 당지의 한족들도 이구동성으로 동의를 표했다고 한다.   5   마을가의 서쪽언덕에 오르니 잣덕의 북쪽산과 펑퍼짐한 산기슭, 그 아래변두리에 자리잡은 향소재지의 전경이 눈앞에 환히 펼쳐졌다. 저기 건너편 북쪽산엔 그젯날의 잣덕유래를 나타내는듯 잣나무들이 듬성듬성 서있었다. 북로군정서는 바로 이곳 잣덕의 저 북쪽 펑퍼짐한 산기슭 밭가운데 자리잡고있었다. 어느한 자료에 의하면 본부와 병영은 5~6헥타르에 달하는 산허리를 평지로 만들어 건설했는데 나무를 찍어만든 중국식 6칸집 5개와 5칸집 2개로 이루어졌다. 본부와 조금 떨어진 남쪽의 광활한 평지에 사방 100메터 좌우의 련병장 두개가 건설되였다. 독립군전사들은 이 두개의 련병장에서 매일 긴장히 군사훈련을 진행하였다. 그들은 일본군의 모형을 만들어 놓고 창격술을 익히며 실탄훈련에 뛰여들었다. 당년 십리평에서 잣언덕까지는 소수레가 다닐만한 길이 한구간 있고 그 나머지는 한사람이 다니기도 불편한 오솔길이였다. 한데서 북로군정서는 숱한 인부를 동원하여 소수레가 다닐수 있는 길을 닦았다고 한다. 사관련성소는 잣덕에서 7~8킬로메터 떨어진 동북쪽계곡에 설립했다고도 하고 잣덕에 설립했다고도 하며 본부부근에 설립했다고도 하는데 딱히 어느곳이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사학가들은 자료를 놓고 의론할 따름이지 그 누구도 준확한 지점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우리가 자료에 의거하여 동북쪽계곡을 따라 산굽이까지 올라가 보아도 묘연하기만 했다. 1919년 12월에 《대한군정부》가 《대한군정서》 즉 북로군정서로 개칭된후 북로군정서 앞에는 대오를 보다 늘이고 각종 무기장비를 충족히 마련하며 군사적중견들을 키우는 번중한 과업이 놓여졌다. 하여 서일은 사관련성소를 세워 군사골간을 양성하는 한편 재무부장 계화와 함께 병력확대와 무기구입에 전력을 다하였다. 1920년 6월, 총재 서일과 계화가 무장경비대를 인솔하여 로씨야연해주에 가서 무기를 많이 운반해옴으로 하여 사관생들은 전부가 무장을 지니게 되였다. 일제측의 자료—《간도에 있어서의 불정선인단의 상황》에 의하면 1920년 8월 현재로 북로군정서의 무력은 독립군 약 1,600여명, 군총 1,300자루, 기관총 7정이라고 밝히였다.   6   동북에서의 독립군의 흥기는 일본제국주의의 지대한 불안을 자아냈다. 이자들은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에서 참패한 뒤 7월에 《간도지방불정선인초토계획》을 꾸리고 동북군벌 장작림에게 압력을 가하여 서북간도에 대한 련합토벌을 강요하였다. 장작림이 길림성 성장과 연길도윤에게 일본군과 협동작전하여 조선인 반일무장대오를 취체하라는 령을 내린것은 두말할것도없다. 그러나 조선인의 반일활동을 언녕부터 동정하고있던 연길도윤과 륙군퇀장 맹부덕은 우리 독립군이 일본군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빨리 퇴각할것을 바랐다. 1920년 9월 5일에 맹부덕퇀장산하의 중국군 160여명이 십리평 잣덕에 가서 북로군정서 부총재 현천묵, 사령관 김좌진 등을 찾았다. 그들은 일본측의 강경한 교섭하에 중국측에서는 부득불 토벌하지 않을수 없음으로 연길도윤 도빈과 맹부덕퇀장의 명령에 좇아줄것을 간곡히 권유하였다. 군정서간부들은 처음 이에 동의하지 않았으나 중국측에서 북로군정서의 철퇴를 방해하지 않겠다고 답복하니 그들의 권유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럴 때 국민회계통의 독군부사령관 홍범도한테서도 일본군이 대거침공해오는 형편에서 국민회계통의 독립군부대가 장백산방향으로 진출하니 같이 이동하다가 기회를 보아 침략자들을 섬멸하자는 밀서를 보내왔다.   7   9월 7일 무기구입에 나섰던 총재와 재무부장 등이 들어오자 북로군정서는 9월 9일 오전 10시에 본영에서 제1회 사관생졸업식을 앞당겨 가지고 298명을 졸업시켰다. 이날 졸업식은 군정서산하 성원들과 래빈들이 운집한 가운데 열리였다. 사관졸업생 일동이 군례를 올리고 《독립운동가》 등을 높이 부르자 대회장은 들끓었다. 이어 소장의 졸업식례식과 총재, 부총재의 훈시, 래빈의 축사, 최우등생 김옥현의 답사가 있은뒤 김좌진소장이 졸업증을 수여하였다. 마지막에 만장일치의 《만세!》소리가 터져올랐다. 저녁 7시엔 또 무대를 꾸미고 《독립혼》이란 연극을 공연하였다. 철거전의 분위기는 자못 긴장하였으나 제1회졸업식은 이토록 성황을 이루었다. 북로군정서의 1000여명 무장대오는 선발대와 본대로 나뉘여 총과 탄약 등 군수품을 4대의 소수레에 싣고 9월 17일부터 근거지를 떠나기 시작하였다. 처음 선발대는 대감자로, 본대는 유수천방면으로 떠나기로 하였다. 이때 유수천방면에 이미 중국군이 동원되였다는 정보가 전해지게 되여 본대는 서대파의 세번째 부락에서 숙영하고 18일에 대감자의 한 마을에 이르렀다. 부대는 이곳에서 땅속에 묻은 총기 50여자루와 탄약 1000여발을 파냈다. 또한 군정서 간부들은 회의를 가지고 당지에 100여명 대오를 남기였다. 부대가 다시 머무른곳은 위자구였다. 21일 부대는 위자구를 떠나 남양촌을 거쳐 연집의 신흥동에 이르러 숙영하였다. 다음날 부대는 팔도구부근을 거쳐 차조구일대로 우회하면서 화룡현청산리 일대로 움직이였다. 우리는 북로군정서의 뒤를 따라 청산리에 대한 답사를 계획하면서 십리평을 떠났다.  1991년 12월 18일, 다른 5편 답사기와 더불어 1991년 전후 "문학과 예술"지에 련재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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