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연구 빈구석】(2)
이등박문 암살 총지휘는 김치보
20세기 10년대 겨레항일운동사를 펼치면 열렬한 독립운동가로 되여 묵묵히 제2선에서 독립운동을 지지, 성원하면서 이등박문 암살지휘부 총지휘로 싸운 한 투사가 있다. 투사의 이름은 김치보(1860~1941, 金致甫)이고 당년의 러시아 연해주에서는 《한민회》회장이고 《로인단》 단장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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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보는 원적이 조선 평양이고 1860년 음력 9월 17일 태생이다. 조선서는 김성준으로도 통하고 만주와 로씨야에서는 김감령으로도 불리웠다. 그의 경력으로 보면 김치보는 조선 리조말기의 4품관으로서 선후로 평양군수와 종성군수로 지내기도 했다. 지난 90년대 초반에 필자가 훈춘시 춘화진에 가서 김치보의 가족을 찾았을 때 이 사실을 다시 확인하여보았다. 그들 가족에서는 김치보의 종성군 군수 임명장을 1968년도까지 줄곧 정히 건사하였었는데 창호지(백지)에 씌여진 임명장은 길이가 600미리메터, 너비가 400미리메터였다고 한다. 임명장에는 구한말의 외부대신, 학부대신이였던 리완룡의 도장(길이와 너비 각기 90미리메터)까지 찍히였단다.
1905년 일본침략자들에 의해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리완룡이 《을사오적신》(乙巳五賊臣)으로 떠오르자 김치보의 분노는 절정에 달하였다그는 결연히 러시아 연해주로 가서 신한촌에 반일독립단체 《한민회》를 꾸리고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한민회지휘부는 김치보가 독립운동후원을 목적으로 꾸린 《덕창약국》(德昌葯局)에 설치되고 김치보가 친히 한민회의 재무와 후근, 무기공급을 도맡았다.
한민회는 항일구국의 기치를 든 철저한 독립운동단체로서 안중근, 우덕순, 조군선, 김성화, 탁공규 등이 주요회원으로 나섰다. 1909년 새해 첫날 그들 11명은 회장 김치보와 함께 연해주 연추(즉 노오끼엽스크)부근의 카리란 마을(김치보가족사에는 신한촌으로 되여있다)에 모이였다. 자연히 1908년 한해동안의 로고가 회고되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토론은 나중에 결사대를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으며 일제놈들과 계속 싸우자는데로 모아지면서 저마다 조막도끼로 왼손무명지의 손마디를 자르고 흐르는 피로 태극기에 《조선독립》이란 네글자를 쓰고 서명하였다.
그러던 나날 1909년 10월 20일, 일본 추밀원원장이고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이 러시아의 재정대신 꼬꼬브체브를 만나려고 10월하순에 할빈에 간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김치보와 그의 동지들인 안중근, 우덕순, 조군선, 김성화, 탁공규, 황병길 등이 신한촌 덕창약국에 모여 이등박문을 죽여버릴 거사를 의논하였다. 이어 김치보를 총지휘로 하는 이등박문암살지휘부가 세워졌다. 하지만 이등박문의 할빈행이 어느길인가가 밝혀지지 않은데서 그들은 여러 개 소조로 나뉘여 할빈, 장춘, 심양, 수분하쪽으로 가서 대기하기로 결의하였다.
그해 10월 26일, 이등박문이 끝내 할빈역두에서 안중근의 총에 맞아죽었다. 이날을 위해 김치보는 안중근 등과 더불어 얼마나 신고하였는지 모른다. 지난 2년간 안중근은 줄곧 김치보의 집에 머무르면서 대사를 도모하며 피어린 항쟁에 나섰고 사격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었다. 허나 력사는 편면적으로 안중근에게만 기울어져 안중근이 주도한것으로만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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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에 들어선후 무력으로 조선을 병탄하려는 일제놈들의 야욕은 날따라 백일하에 드러났다. 국내의병항쟁이 일제의 야만적인 무력탄압으로 쇠잔해진데서 반일애국지사들은 국제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조선의 립장을 밝히면서 일제의 병탄야욕을 폭로, 저지시키려고 서둘렀다.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려는 운동이 러시아 연해주를 중심으로 상해, 미주의 애국지사들 사이에서 재빨리 형성되였다. 운동과 밀사파견에 필요한 자금은 연해주, 간도, 상해, 미주 등지에 사는 동포들에 의해 풀려갔다.
네델란드(화란)에서 열리는 국제회의밀사는 리상설과 리준이였다.
《세계인명대사전》 리상설 조목에 의하면 그는 1905년에 일제에 의해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통분을 금치못해 가두에 나서서 울면서 대중에게 연설하고는 두문불출하다가 1906년에 울라지보스또크에 망명》 하고있었다. 그때 《한민회》회장으로 있은 김치보는 리상설과 가까운 모양이였는데 그는 국제회의 밀사파견의 적극적인 추진자였다. 리상설이 리준과 함께 밀사로 파견되자 김치보는 그들 둘의 모든 경비를 지출하였고 그해 4월, 씨비리렬차로 울라지보스또크를 떠날 때 역에 나가 바래였다.
김치보는 뒤미처 리상설과 리준이 도중에 러시아 수도에서 러시아 주재 한국공사의 아들 리위종을 대동하여 네델란드의 헤이그(海牙)에 닿았으나 일본측 대표의 무리한 방애를 받았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더우기 회의참석자격마저 얻지 못한데 분격한 리준이 머나먼 이역땅에서 순국했다는 비보에 접하고 통분하기 그지없었다. 그뒤 류랑길에 올랐던 리상설이 미국을 거쳐 울라지보스또크로 돌아왔을 때 김치보는 마음을 활열어 뜨거이 맞아주었다. 또한 1910년 성명회에서 취지서, 즉 성명서를 내여 이른바 일제의 《한일합방》을 세계만방에 호소하며 규탄할 때 그들은 힘을 합쳐 밤낮으로 헌신하였다.
사실이 그러했다. 1910년 경술국치의 비보가 러시아 연해주에 전해졌다. 이해 8월 17일(음력 7월 13일), 울라지보스또크에 체류중인 조선의 반일지사들은 분노하여 《성명회》(聲鳴會)를 결성해가지고 일제침략자들의 조선병탄의 부당성을 각국 정부에 통절히 호소하면서 조선병탄반대운동을 드세게 벌리였다. 이 운동의 진두에는 류린석, 리범윤, 리상설, 김학만, 차석보, 김좌두, 김치보 등이 서있었는데 김치보는 명실공히 성명회의 중심인물의 하나였다. 리상설도 끼이였는데 그들은 힘을 합쳐 격문을 산발하고 동지를 모집하는 한편 유일한 독립운동기관지 《대동공보》에 일제놈들을 단죄하는 전문기사를 실었다.
성명회에서 발표한 취지서는 일제침략의 부당성을 폭로하면서 각국 정부와 사랑하는 동포들에게 강렬한 호소를 내품었다.
취지서는 《저 아름다운 삼천리강산은 우리 시조 단군께서 전하신바이며 신성한 아 2천만동포는 단군의 자손》이라면서 《차라리 2천만의 생명을 희생하는 일이 있더라도 5천년의 조국을 버릴수 없》기에 《조국을 사랑하고 중국을 사랑하는 우리 동포》들은 《속히 힘을 합하고 소리를 같이》하기를 희망하였다. 나중에 취지서는 《아아! 주저하지 말지어다. 우리들의 사랑하는 동포여, 아아!》를 련발하면서 끝을 맺었는데 찬동자의 주의사항과 더불어 류린석, 리범윤, 김학만, 차석보, 김좌두, 김치보 등의 이름이 정히 적혀있다.
이해 8월 23일, 조선이 병탄당했다는 비보가 확실해졌다. 김치보는 성명회의 동지들과 함께 격문 1천매를 인쇄하여 러시아와 간도 각지에 배포하면서 류혈적인 방법으로 조선병탄을 저지하자고 호소하였다.
그후에도 김치보의 활동은 멈추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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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조선반도(한반도)에서 위대한 《3.1》독립만세운동이 활화산마냥 터져올랐다. 잇따라 간도, 연해주 등지에서도 독립만세시위행사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독립만세운동이후 연해주의 항일독립운동은 러시아 볼쉐위크파의 힘있는 후원아래 부문별 비밀결사를 무어 항일구국활동의 길로 나아갔다. 그중 주요한 단체는《로인단》(1919년 10월), 《대한국민의회》, 《독립단》, 《림시위생회》 등이였는데 《로인단》의 단장이 바로 김치보였다.
1919년 이해 김치보는 60살이다. 그는 1910년 경술구치를 전후하여 조직된 《로인회》의 토대우에서 이름을 로인단으로 바꾸고 본부를 울라지보스또크에 설립하였다. 해당자료에 따르면 로인단의 단원들은 46살이상 70살까지의 조선인남녀들이였는데 독립운동에 뛰여든 조선청년들을 받드는데 그 취지를 두었다고 한다.
김치보의 책임은 무거웠다. 그는 이에 못지 않게 로인단의 명의로 장서(長書)를 작성하고 일본정부에 보내여 독립권 환부를 요구하는 한편 리발, 정치윤, 윤여옥, 차대유, 안태수 등으로 대표단을 무어 서울에 파견하여 조선총독부에 떳떳이 독립요구서를 제출하고 서울 종로에서 독립연설을 발표하게 하였다.
김치보《로인단》의 활동은 이에만 그치지 않았다. 한때 세상을 들썽케 한 로의사(老義士) 강우규의 남대문밖 일제총독 사이또습격사건은 그 돌출한 실례라 하겠다.
1910년 일본침략자들은 조선 삼천리강산을 병탄한후 피비린 무단적통치를 강행하였다. 1919년《3.1》독립만세운동이후부터는 수단을 바꾸어 문화적통치를 시도하였다. 그야말로 양의 탈을 뒤집어쓴 승냥이의 심보였다. 제2대 조선총독인 륙군대장 하세가와(長谷川)가 일본으로 소환되고 해군대장 사이또(齊藤)가 제3대 총독으로 파견되였다. 이 소식에 접한 로인단단원들은 의논이 분분하다가 사이또란 이 섬나라 승냥이를 불벼락으로 영접하자고 입을 모았다. 결과 64살의 강우규(1856년생) 가 나서게 된다. 그가 떠나는 날 김치보와 로인단의 단원들은 서로 붙안고 작별인사를 하였다.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에 새로 부임한 사이또는 동부인하여 서울 남대문역에 내리였다. 플래트홈에는 영접하러나온 사람들로 붐비였다. 사이또는 점잖은 미소를 지으며 환영군중들에게 연신 답례를 하였지만 그 자리에 나선 강우규에겐 침략자의 우두머리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가 맨 마지막에 선데서 틈탈수가 없었다. 나중에 강우규는 기회를 찾다가 사이또부부가 역전앞에서 쌍두수레에 오르려고 할 때 주저없이 수류탄(작탄, 폭탄이라고도 하여 엇갈린다)을 던지였다. 사이또는 부인을 부축하여 수레에 오르게 한후 디딤대에 올라서려다가 불벼락을 맞았다. 하늘이 도왔을가, 사이또는 천명으로 살아나고 대신 30여명의 사상자가 났다.
강우규는 혼란한 틈을 타서 그 자리를 빠지였지만 뒤따른 대검거에 수많은 조선청년들이 끌려들어가 시달리는것을 듣고있을수만 없었다. 그는 류치장에 갇힌 청년들을 구출하려고 떳떳이 남대문헌병대를 찾았고 떳떳이 단두대에 올랐다.
한때 일제 놈들을 경악케 했던 일본총독 사이또습격사건, 반일독립력사의 한페지를 빛내인 강우규는 김치보가 이끄는《로인단》의 단원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1918년 8월이후 러시아 원동지구에 출병한 일본침략자들은 도처에서 조선의 애국지사들을 학살하며 미쳐 날뛰였다. 김치보의 로인단도 여러 독립단체들과 마찬가지로 일제놈들의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으나 김치보는 결코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했으나 1922년 말을 계기로 정세는 갑자기 돌변을 가져왔다. 바로 일본군의 철병이였다. 원동지구에서 1918년 6월의 체코군의 봉기와 뒤를 문 일, 미, 영, 불 등 련합군의 출병으로 말미암아 씨비리전쟁은 4년동안이나 지속되였는데 1920년 이후 고국작전하고있던 일본군은 드디여 울라지보스또크를 마지막으로 철병하지 않을수 없었다. 1922년 11월 15일에 원동정부(극동공화국)가 레닌의 쏘베트정권에 통합되고 씨비리전역에 쏘베트정권이 수립되면서 연해주의 조선인무장들은 력사사명을 끝내고 분화되기 시작하였다. 1923년 이후 씨비리에서 쏘베트 사회주의건설이 시작되면서 쏘련공산당과 정부는 조선인 각파지간의 파벌투쟁이 날따라 치렬해지는데서 그 시기 흑백을 가리지 못하고 조선인의 일체 무장활동에 금지령을 내리였다. 따라서 조선인 각파책임자들은 잠시 강금되였다가 풀려나오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김치보도 의례 갇히기도 하고 풀리기도 하였다.
1922년 말을 계기로 러시아는 쏘베트사회주의공화국련맹(즉 쏘련)으로 세계에 나타났다. 쏘베트체제하에서 항일독립무장이나 독립단체들이 독자적활동을 한다는것은 대중없는 일이였다. 이런 형편에서 김치보는 야밤에 독립운동가 엄인섭이와 같이 일가식솔을 데리고 쏘중국경을 너머 중국의 훈춘현 동흥진에 와서 자리를 잡았다.
중국땅에서의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였다. 그때부터 그는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이어갔는데 시끄러움을 피해 이름을 김감령으로 바꾸었다. 그가 사망된것은 1941년 11월 18일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 때 김치보는 안해와 자식들에게 쏘련에서 갇고온 종성군수임명장과 혈서, 시, 여러 문건 등 50여점을 맡기면서 이제 조선이 독립하면 나라에 바치라고 신신당부하였다. 인생을 다하면서도 그는 이런 문건들은 자기 생명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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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보는 생전에 안해 김선녀와의 사이에 5남매를 두었다. 그들로는 맏아들 꼬랴, 둘째 김철수, 셋째 김갑수, 큰딸 유바, 작은딸 김순덕이다. 1923-1924년경에 김치보는 일가식솔을 거느리고 가만히 국경을 넘어설 때 동행한것은 안해 김선녀와 큰딸 유바, 둘째아들 철수, 셋째아들 갑수였는데 그때 맏이 꼬랴는 대학공부중이여서 따라서지 못하였다. 그는 쏘련의 어느 대학인가 졸업하고 쏘련 중앙 조선인대표위원회에서 사업하다가 쓰딸린이 서거한후 4년간 옥살이를 하였다고 한다. 풀리여나온후《우수또부》에서 생활하다가 사망(꼬랴의 안해 사망원인은 모름) 했는데 필자가 취재할 때 그 자식들이 우수또부(?)에 살고있다고 했다.
그외 자식들은 아래와 같다.
둘째 김철수는 흑룡강성 이춘시 대풍구에서 살다가 1968년에 사망, 셋째 김갑수는 역시 흑룡강성 이춘시 대풍구에서 생활, 림업국의 자동차운전수로 일하다가 1990년에 사망.
큰딸 유바(쏘련이름)은 훈춘시 동알라에서 생활하다가 사망.
작은딸 김순덕(중국 태생)은 필자가 방문할 때 60살이고 남편 김려병은 67살로서 도문시 향상가에 살고있었다. 이 막내딸이 슬하에 두 아들과 두 딸을 두었는데 필자는 이들 막내 딸의 남편 황병만의 알선으로 훈춘시 춘화진에 가서 이들 가족을 만나보고 김치보의 투쟁력사와 가족사에 접하게 되였다. 황병만은 그때 연변일보사 인사처 처장사업을 하고있었었다.
유감스러운것은 김치보가 목숨처럼 아끼였던 50여점 문부가 뜻하지 않게 전부가 소각되였다는 점이다.
1961년 경에 김치보의 안해 김선녀는 막내 딸 김순덕의 집에 약 2년간 거처했는데 모든 문부를 가지고있었다. 1963년에 이 문부는 셋째 김갑수한테 넘어갔다. 1968년 말 문화대혁명기간에 김갑수의 친척되는분이 붙들려 투쟁을 맞게 되였다. 이 친척은 바로 김갑수의 집앞에 자리 잡고있었는데 이로하여 김갑수는 사상투쟁이 치렬하였다. 부득이한 형편에서 그는 어느날 저녁 50여점의 문부를 꺼내다가 부엌에서 태워버렸는데 가마안의 물이 끓어번졌다고 한다.
이는 필자가 지난 90년대초에 김순덕과 그의 일가족을 방문하고 들은 이야기와 해당자료들이다.
(주: 김치보의 셋째아들 김갑수가 말했다는데 의하면 리조말년에 조선에서는 이름난 사람들의 이름을 평양의 대동강변 바위절벽에 새기였다고 하는데 거기에 새겨진 김성준이 바로 김치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