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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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    백포 서일장군 (3) 댓글:  조회:3096  추천:25  2010-09-14
백포 서일장군(3)  (1881~1921)     4     사관련성소는 서일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1920년 3월 1일에 정식으로 개학하였다. 소장은 김좌진이였다. 사관생은 300여명이였는데 주로 대종교산하의 청년들과 덕원리 명동중학교의 학생들로 이루어졌다. 나이는 보통 20~40살사이였다. 학습내용은 군사교육과 군총취급방법, 체조 등이였다. 1919년 12월에 《대한군정부》가 《대한군정서》 즉 북로군정서로 개칭된후 북로군정서 앞에는 대오를 보다 늘이고 각종 무기장비를 충족히 마련하며 군사적중견들을 키우는 번중한 과업이 놓여졌다. 하여 서일은 사관련성소를 세워 군사골간을 양성하는 한편 재무부장 계화와 함께 병력확대와 무기구입에 전력을 다하였다. 1920년 6월, 총재 서일과 계화가 무장경비대를 인솔하여 로씨야연해주에 가서 무기를 많이 운반해옴으로 하여 사관생들은 전부가 무장을 지니게 되였다. 일제측의 자료—《간도에 있어서의 불정선인단의 상황》에 의하면 1920년 8월 현재로 북로군정서의 무력은 독립군 약 1,600여명, 군총 1,300자루, 기관총 7정이라고 밝히였다. 동북에서의 독립군의 흥기는 일본제국주의의 지대한 불안을 자아냈다. 이자들은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에서 참패한 뒤 7월에 《간도지방불정선인초토계획》을 꾸리고 동북군벌 장작림에게 압력을 가하여 서북간도에 대한 련합토벌을 강요하였다. 장작림이 길림성 성장과 연길도윤에게 일본군과 협동작전하여 조선인 반일무장대오를 취체하라는 령을 내린것은 두말할것도없다. 그러나 조선인의 반일활동을 언녕부터 동정하고있던 연길도윤과 륙군퇀장 맹부덕은 우리 독립군이 일본군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빨리 퇴각할것을 바랐다. 1920년 9월 5일에 맹부덕퇀장산하의 중국군 160여명이 십리평 잣덕에 가서 북로군정서 부총재 현천묵, 사령관 김좌진 등을 찾았다. 그들은 일본측의 강경한 교섭하에 중국측에서는 부득불 토벌하지 않을수 없음으로 연길도윤 도빈과 맹부덕퇀장의 명령에 좇아줄것을 간곡히 권유하였다. 군정서간부들은 처음 이에 동의하지 않았으나 중국측에서 북로군정서의 철퇴를 방해하지 않겠다고 답복하니 그들의 권유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럴 때 국민회계통의 독군부사령관 홍범도한테서도 일본군이 대거침공해오는 형편에서 국민회계통의 독립군부대가 장백산방향으로 진출하니 같이 이동하다가 기회를 보아 침략자들을 섬멸하자는 밀서를 보내왔다. 9월 7일 무기구입에 나섰던 총재와 재무부장 등이 들어오자 북로군정서는 9월 9일 오전 10시에 본영에서 제1회 사관생졸업식을 앞당겨 가지고 298명을 졸업시켰다. 이날 졸업식은 군정서산하 성원들과 래빈들이 운집한 가운데 열리였다. 사관졸업생 일동이 군례를 올리고 《독립운동가》 등을 높이 부르자 대회장은 들끓었다. 이어 소장의 졸업식례식과 서일총재, 부총재의 훈시, 래빈의 축사, 최우등생 김옥현의 답사가 있은뒤 김좌진소장이 졸업증을 수여하였다. 마지막에 만장일치의 《만세!》소리가 터져올랐다. 저녁 7시엔 또 무대를 꾸미고 《독립혼》이란 연극을 공연하였다. 철거전의 분위기는 자못 긴장하였으나 제1회졸업식은 이토록 성황을 이루었다. 북로군정서의 1000여명 무장대오는 서일총재의 령에 좇아 선발대와 본대로 나뉘여 총과 탄약 등 군수품을 4대의 소수레에 싣고 9월 17일부터 근거지를 떠나기 시작하였다. 처음 선발대는 대감자로, 본대는 유수천방면으로 떠나기로 하였다. 이때 유수천방면에 이미 중국군이 동원되였다는 정보가 전해지게 되여 본대는 서대파의 세번째 부락에서 숙영하고 18일에 대감자의 한 마을에 이르렀다. 부대는 이곳에서 땅속에 묻은 총기 50여자루와 탄약 1000여발을 파냈다. 또한 군정서 간부들은 회의를 가지고 당지에 100여명 대오를 남기였다. 부대가 다시 머무른곳은 위자구였다. 21일 부대는 위자구를 떠나 남양촌을 거쳐 연집의 신흥동에 이르러 숙영하였다. 다음날 부대는 팔도구부근을 거쳐 차조구일대로 우회하면서 화룡현청산리 일대로 움직이였다. 서일은 후방부대 등을 이끌고 동으로 진출, 수차의 전투속에서 많은 일제침략군을 쓰러눕힌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의 6일간에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부대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 등 부대와 더불어 백운평부근전투, 천수동전투, 왈리거우전투, 어랑촌전투, 고동하전투 등 대소 10여차의 전투를 진행하여 일제침략군 약 1200명을 섬멸했다. 근 1000명이라고도 한다. 항일운동사상 유명한 청산리전투, 이 전투는 서일장군의 전이방침과 전략부서에 따라 진행한 불멸의 전투였다. 1920년 10월의 청산리전투후 서일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과 신민단, 도독부, 의군부, 혈성단, 야단, 대한정의군정사 등 9개 독립무장단체의 3500여명 대오는 밀산에 모여 대회합을 이루고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였는데 서일이 신생한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로 추대되였다. 3500여명 독립군부대들은 밀산현 당벽진에서 여러개 부서로 편성된후 로씨야의 원조를 받으며 새로운 투쟁을 도모하고저 로씨야 원동지구의 자유시로 전이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일부는 원지에 남아 활동하고 일부는 해산의 길을 걷는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로씨야 자유시로 간 리청천, 안무 등 부대는 뜻하지 않게 로씨야군의 무장해제를 당하게 되며 무력충돌에서 많은 독립군전사들이 쓰러지고 만다. 이 사건을 자유시사변 또는 흑하사변이라고 하는데  서일을 총재로 하는 대한독립군단은 치명적 타격을 입고 산산히 흩어지고만다. 그래도 서일은 홀홀히 맥을 버릴수가 없었다. 밀산에 남았던 그는 당지에서 둔병제(屯兵制) 를 실시하여 다시힘을 키우려 했으나 마적의 습격은 남아있는 근거지마저 훼멸의 일로에로 몰아넣었다. 로씨야 자유시사변, 밀산에서의 마적의 습격 등은 서일에 대한 타격이 너무도 컸다. 이 모든것을 자기의 밀어버릴수 없는 책임으로 느낀 서일은 1921년 8월 27일, 밀산현 당벽진에서 대종교의 수양법의 하나인 조식법(调息法)으로 자결하고 만다. 서일, 북로군정서 지도자와 결책자이고 동북반일무장운동의 저명한 지도자의 한분이고 당시 반일무장투쟁진영에서 《찾아보기 힘든 문무겸비의 인물》이였던 서일장군은 이렇게 갔다.   ----“겨레 항일지사들” 제1권, 민족출판사, 2007년 10월                    
350    백포 서일장군 (2) 댓글:  조회:3172  추천:27  2010-09-12
                               백포 서일장군(2)   (1881~1921)     3     서일은 북로군정서 본부를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 잣덕에 설치하고 사관련성소도 이 부근에 세웠다. 십리평은 지금의 왕청현성 서쪽가인 덕원리에서 동으로 강을 거슬러 수십리 상거한 산간지대인데 잣덕은 십리평에서도 동쪽으로 몇리 떨어진 산언덕에 위치하고있었다. 헌데《북로군정서》의 본영문제에서 개별적인 저서와 자료들은 왕청현 십리평이라고 하고 채근식의 《무장독립운동비사》를 비롯한 대부분 저서와 자료들은 왕청현 서대파라고 하고있다. 서대파촌은 왕청현성에서 동쪽으로 25킬로메터 가량 되는 곳에 자리잡은 산간마을이다. 현성에서 뻐스를 타고 약 한시간쯤이면 서대파에 이르게 되는데 서대파는 온통 산으로 둘러쌓이고 골짜기는 동서로 유유히 뻗어갔다. 1989년 여름 서대파를 처음 찾은 연변력사연구소 필자일행은 서대파의 산야를 둘러보며 흘러간 력사의 갈피갈피를 되새겼으나 마을에 이른 우리는 서대파마을 로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만 실망하고말았다. 당지 로인들은 독립군의 근거지가 십리평이라는 말은 들어보았지만 서대파가 본영이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하였다. 군사적요새지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찬탄해마지 않던 우리의 열정은 대번에 사그라졌다. 그래도 내친 걸음이라 우리는 서대파촌에서 20킬로메터 가량 떨어진 십리평향으로 가보았으나 안내자를 찾지 못한데서 역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후 우리는 다방면으로 각종 자료를 헤아리며 선색을 더듬고 일면 왕청현에서 다년간 현안의 력사와 교육사연구에 종사해 온 문호갑 등 로선배들을 찾아뵙는 가운데서 북로군정서의 본영은 서대파가 아니라 왕청현 십리평향 잣덕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개별적 자료들에서 본영을 십리평에 두었다고 하는것은 다소 차이가 보이긴 하나 일리가 있는 말이였다. 1991년 12월 7일 우리는 십리평을 다시 찾았다. 십리평향 십리평촌에서 발길을 멈추니 도로켠의 지명패는 《장영촌》이라고 박혀있었다. 후에야 안일이지만 이 촌은 워낙 향소재지였는데 몇년전에 향정부를 태평촌으로 옮긴후 지난해 마을 이름도 장영촌으로 고치였다. 장영촌과 향소재지와의 거리는 1킬로메터반 정도밖에 안되였다. 우리는 이 구간을 걸으면서 십리평의 이모저모를 익혀두기도 했다. 그날따라 매서운 칼바람이 일신을 사정없이 강타했지만 북로군정서의 본영—잣덕을 찾아냈다는 희열은 우리의 걸음을 재우쳐 주었다. 십리평향소재지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이 향의 간부들한테서 향안의 경작지는 420헥타르로서 인구당 16.7아르 돌아가며 죄다 척박한 모래불땅이여서 강냉이, 콩, 조이의 아르당 소출은 내내 10킬로그람을 벗어나지 못했다는것을 알았다. 행정구역은 22개사로 나뉘여지고 인구는 2887명에 달하는데 조선족은 겨우 20여세대밖에 안되였다. 광복전에 십리평이란 이 버덕안에 조선인 약 200세대가 살고있었다는것에 비해볼 때 너무도 적은 수자가 아닐수 없었다. (여기엔 필경 원인이 있을텐데?) 우리의 의문은 68살인 백원옥 안로인의 집을 찾은데서 스스로 풀리였다. 우리는 함경도식의 수수한 조선집 가마목에서 이 로인과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백원옥은 조선 평안도 순천군태생으로서 그가 십리평에 들어선것은 광복직전이였다. 그해 그는 18살이였는데 한해 먼저 십리평에 와 자리잡은 시아버지를 따라 이주길에 올랐었다. 시할아버지는 본세기 10년대에 벌써 십리평사람이된데서 백원옥으로 말하면 십리평이 그리 생소한 지대가 아니였다. 당년 십리평의 조선사람은 약 200세대에 달했다. 그때 이 일대는 밀림지대였다. 일제놈들은 여기에 큰 목재판을 앉혔는데 조선사람 거개가 목재 채벌과 가공판에서 막벌이일을 하고 있었다. 큰 목재판이라 지금의 장영촌에 일본분주소가 도사리고 앉아 여기(향소재지)에 경찰대대를 세우고 사금구에 경찰소대를 세웠다. 8.15광복을 맞은후 조선으로 돌아가고 여기저기 흩어진데서 조선사람 수십세대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나마 나가는 사람은 있어도 들어오는 사람이 없으니 20여세대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십리평이란 이름은 언제부터 생긴건지요?》 《듣자니 독립군 때 부터라오. 그때는 이 지대가 나무로 꽉 찼는데 독립군이 들어오면서 소생했다더구만. 십리평이란것도 이 벌의 길이가 10리라 해서 생긴 이름이라오.》 《그렇다면 잣덕이란 어디를 가리킵니까?》 《그젯날 여기(향소재지)를 잣덕이라 했소. 보다싶이 저 북쪽산기슭은 온통 잣나무로 덮였고 또 이 지대가 저 아래 십리평마을에 비해 언덕진곳에 자리잡았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지. 잣덕이란 지명도 독립군이 들어오면서 지은거라오.》 백원옥 안로인과의 이야기에서 우리의 시야는 훨씬 넓어졌다. 그의 말에 의하면 몇해전에 향소재지가 들앉기까지 이곳을 태평촌이라 했는데 그것도 광복직후 그의 시할아버지 조병선로인(당시 60여살)이 지은것이다. 그때까지 이 일대의 사람들중에 중병으로 앓거나 때이르게 죽어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해서 시할아버지가 태평촌이란 이름을 제기했는데 당지의 한족들도 이구동성으로 동의를 표했다고 한다. 마을가의 서쪽언덕에 오르니 잣덕의 북쪽산과 펑퍼짐한 산기슭, 그 아래변두리에 자리잡은 향소재지의 전경이 눈앞에 환히 펼쳐졌다. 저기 건너편 북쪽산엔 그제날의 잣덕유래를 나타내는듯 잣나무들이 듬성듬성 서있었다. 북로군정서는 바로 이곳 잣덕의 저 북쪽 펑퍼짐한 산기슭 밭가운데 자리잡고있었다. 어느 한 자료에 의하면 본부와 병영은 5~6헥타르에 달하는 산허리를 평지로 만들어 건설했는데 나무를 찍어만든 중국식 6칸집 5개와 5칸집 2개로 이루어졌다. 본부와 조금 떨어진 남쪽의 광활한 평지에 사방 100메터 좌우의 련병장 두개가 건설되였다. 독립군전사들은 이 두개의 련병장에서 매일 긴장히 군사훈련을 진행하였다. 그들은 일본군의 모형을 만들어 놓고 창격술을 익히며 실탄훈련에 뛰여들었다. 당년 십리평에서 잣언덕까지는 소수레가 다닐만한 길이 한구간 있고 그 나머지는 한사람이 다니기도 불편한 오솔길이였다. 한데서 북로군정서는 숱한 인부를 동원하여 소수레가 다닐수 있는 길을 닦았다고 한다. 사관련성소는 잣덕에서 7~8킬로메터 떨어진 동북쪽계곡에 설립했다고도 하고 잣덕에 설립했다고도 하며 본부부근에 설립했다고도 하는데 딱히 어느곳이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력사학가들은 자료를 놓고 의론할 따름이지 그 누구도 준확한 지점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우리가 자료에 의거하여 동북쪽계곡을 따라 산굽이까지 올라가 보아도 묘연하기만 했다.          
349    백포 서일장군 (1) 댓글:  조회:4647  추천:28  2010-09-11
편자의 말: 1919년 룡정 3.13반일운동이후 연변을 중심으로 한 동북각지에는 30여개의 조선인반일무장단체들이 활동하고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북로군정서는 주요한 반일무장단체중의 하나였다. 이 반일무장단체의 지도자 및 결책자는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徐一)로서 서일장군은 북로군정서와 청산리전투를 조직지도하며 광명과 승리에로 이끈 력사의 주역이였다. 그러나 력사는 편견으로 흘러 북로군정서 무장대오를 마치도 다른 사람이 조직하고 지도하며 청산리전투를 이끈 것으로 흔히 서술한다. 오늘 필자는 민족출판사 2007년 10월 출판, 필자의 저서—"겨레항일지사들(전4권)"의 제1권 첫 분으로 오른 서일장군을 조글로에 다시 올리면서 북로군정서와 청산리전투 등에서의 비뚜러진 력사를 바로 잡고저 한다.       백포 서일장군   (1881~1921)   1   1919년 룡정 3.13반일운동이후 연변을 중심으로 한 동북각지에는 30여개의 조선인반일무장단체들이 활동하고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북로군정서는 주요한 반일무장단체중의 하나였다. 이 반일무장단체의 지도자 및 결책자는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徐一)로서 서일은 북로군정서와 청산리전투를 광명과 승리에로 이끈 력사의 주역이였다. 1910년대 독립운동의 력사속으로 들어가보면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은 반일독립운동 진영에서 찾아 보기힘든 문무겸비의 인물로서 북로군정서의 전신은 서일이 1911년에 왕청현 덕원리에 세운 《중광단》(重光團)이였다. 서일장군의 력사는 1881년부터 시작된다. 이해 2월 26일, 서일은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김희동에서 인류력사속에 등장하였다. 그의 본명은 서기학이고 초명(初名)은 서정학(徐正學)이요, 호는 백포(白圃), 본관은 리천(利川)이다. 족보속에서는 아간공(阿干公) 36세손이고 량경공파(良景公波), 양근(楊根) 계렬의 함흥문중 사람으로 알려진다. 1992년 6월 29일부 한국《리천서씨종보》 4면에 따르면 서일의 선친은 서재운이고 아들은 서윤제(1969년에 62살로 사망), 손자로는 서경섭(중국 할빈에 거주), 서만섭(1991년 9월 한국가서 인천거주) 두분이 있었다. 서일은 소년시절에 고향의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배웠다. 몇년 서당공부끝에 경성함일사범학교 전신인 《유지의숙》에 입학하여 배움에 몰두하였다. 유지의숙은 함경북도 근대화운동의 선구자 리운섭선생이 창설한 의숙인데 몇해후에 경성함일사범학교로 개칭되였다. 이 학교는 많은 민족운동가들을 키운 의로운 학교이기도 한데 간도국민회군 사령 안무, 북로군정서 부총재 현천묵, 간부 김병철, 서대문순국자 김학섭 등 독립운동가들이 바로 이 학교 출신들이다. 1902년 봄에 서일은 경성함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10년 한일합방 때까지 10년간 지방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0년은 조선민족(한민족)이 일제에 의해 나라잃은 경술국치해, 이해 서일은 30살의 열혈남아였다.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랠길없은 서일은 이듬해 1911년 가족과 함께 결연히 두만강을 건넜고 연변의 왕청현 덕원리에 자리를 잡았다. 왕청현 덕원리는 천교령 부근에 발원지를 둔 가야하와 십리평, 소왕청쪽에서 흘러나오는 대왕청하와 합수되는 부근 동북쪽 산기슭에 자리잡은 마을 (지금의 왕청역에서 북으로 약 7~8리 되는 곳)이다. 주민의 대부분이 조선이주민들이였다. 서일은 이곳에 발을 붙인후 이해 3월 재기를 도모하는 반일의병들과 대종교인들인 현천묵, 계화 등 동지들을 규합하여 독립단체 《중광단(重光團)》(중광이란 대종교의 중광을 환호하고 단군을 숭상하며 민족의 혼이 의연히 살아있다는 뜻)을 조직하고 본영을 덕원리에 두었다. 중광단을 말하자면 대종교를 떠올리지 않을수 없다. 대종교의 전신은 단군교로서 조선의 유구한 민족종교로 나타난다. 전하는데 의하면 상원(上元) 갑자 10월 3일에 단군이 성스런 령산 백두산에서 탄생한후 3천단부를 설치하고 고조선을 건립했는데 고조선의 태양숭배의 원시신앙이 종교로 발전하니 이 종교가 곧 단군교라고 한다. 이 단군교가 력사속에서 부여에서는 대천교, 신라에서는 숭천교, 고구려에서는 경천교, 발해에서는 진종교, 고려에서 왕검교로 불리우며 1000여년을 내려오다가 고려의 제24대 임금 원종 때에 이르러 몽골의 침입으로 하여 문을 닫았었다. 그러다가 1909년 음력 정월 15일에 이르러 애국자이며 항일독립운동가인 라철선생에 의해 단군교가 재생되였다. 이날 라철선생은 동지들은 오기호, 강우, 최전, 류동, 정중모, 리기, 김인식, 김춘식, 김윤식 등 수십인과 함께 서울의 취운정아래 6간 초가집에서 단군교 포명서를 공포하였으니 이날 정월 보름날이 단군교의 중광절로 되였다. 1910년 8월 5일에 단군교는 일제놈들의 시선을 따돌리고저 대종교로 개칭되고 1911년에 대종사 라철선생 등에 의해 대종교 총본사는 서울로부터 두만강 북안 화룡현 청파호에 자리를 옮기였다. 력사는 라철선생의 전이나 서일장군의 이주가 모두 1911년임을 알리였다. 1912년 10월에 서일은 대종교에 입교하고 이듬해 10월에 대종교 시교사로 떠올랐다. 시교사를 알자면 다시 총본사로 돌아가야 한다. 라철선생은 화룡현 청파호에 총본사를 둔후 총본사 산하에 동도본사(왕청현), 서도본사(상해), 북도본사(로령 소학령), 남도본사(조선 경성)등 4개 도 본사를 설치하고 각지에 시교당 48개소 (연변에 22개소) 를 두었는데 서일이 왕청현의 동도분사를 주관하며 시교사로 나섰으니 그의 위인됨을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다.  대종교의 력사는 중광된 그날부터 일제의 식민정책과 날카롭게 대립한 력사이고 피로 물든 반항의 력사임을 알려주고있다. 서일이 자기 항일독립단체의 이름을 중광단이라고 함도 대종교의 중광을 환호하고 단군을 숭상하며, 나라는 잃어도 조선의 혼, 민족의 혼은 앗아가지 못함을 선언하는 뜻에서였다.     2     1912년 10월, 서일은 대종교에 정식으로 입교한뒤 일부 동지들을 대종교의 포교활동에 내세워 왕청현 덕원리와 그 일대의 적지 않은 사람들을 대종교에 포섭하였다. 한편 1913년 4월 1일에 5년제 《명동학교》를 창설하고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시초의 학생은 32명이고 교원은 2명, 서일이 직접 교장을 맡아나섰다. 1917년 명동학교에 중학부를 설치하였다. 교사는 토목구조로서 소학부는 류수하 동쪽기슭에, 중학부는 서쪽기슭에 자리잡았다. 중학생이 가장 많을 때는 외지 류학생들을 포괄하여 100여명에 달하였다. 1913년 10월 서일은 대종교의 시교사를 맡아보게 된후 학교교육에 정진하는 한편 교리저술에 뛰여들어 짧디짧은 몇년사이에 《삼일신교》, 《회삼경》, 《구변도설》(九變圖說), 《진리도설》, 《신리주해》(神理注解), 《5대종지강연》, 《3문1답》상하편, 《신사기의절안교정》 등을 저술하였다. 그중 《삼일신고》와 《회삼경》은 대종사의 《신리대전》, 무원종사의 《신단설기》와 더불어 대종교의 4대경서로 받들리였다. 이로하여 서일은 3년반만에 7년반이 되여야 승진할수 있는 상교로 되고 한달후에는 또 사교로 되였다. 1916년 4월 13일에는 경각의 특선사교로 되였다. 1916년 8월에 제1세 교주 라철이 구월산 삼성사에서 순교하고 제2세 교주로 김헌이 등극하였다. 1919년 초에 무원종사로 있던 김헌이 교통을 서일에게 전수하려 하니 서일장군은 교주의 간곡한 권유를 5년간 보류키로 하고 무장투쟁준비에 심신을 쏟아부었다. 교통이란 대종교를 떠메고 나갈 교주를 말한다. 서일이 교주추대를 잠시 미룬것은 무장투쟁을 위해서였다. 1919년 이해 조선에서  전민족적인 3.1운동이 폭발하고 룡정에서 3.13운동이 일어나자 지대한 고무를 받은 서일은 1919년 4월에 원 《중광단》의 토대우에서 대종교교인들을 핵으로 하고 반일의병과 공교회 회원들을 더 규합하여 《대한정의단》으로 확대하고 단장으로 취임하였다. 서일은 정의단내에 조선글신문 《민보》와 《신국보》를 꾸리고 반일사상을 널리 고취하면서 결사대원을 모집하였는데 응모, 등록한 결사대원이 1037명을 이루었다. 대한정의단은 1919년 8월에 산하에 독립무장단체—《대한군정회》를 조직하고 신민회계통의 무관출신들인 김좌진, 조성환, 리장녕을 초빙하여 군정회를 맡아보도록 하였다. 독립군편성을 위한 서일의 전략적결책이였다. 서일에 의해 새로 초빙된 김좌진은 1889년생으로서 부유한 가정출신이였다. 근대개화사상에 물젖은 그는 15살 때 벌써 30여명의 가노(家奴)를 전부 해방시키고 곡식 2천여석을 지을수 있는 토지를 소작인들에게 분배하여 개혁의 선구자로 불리웠다. 을사조약이 체결된후에는 기호학회, 청년학우회 등의 골간으로 활약하다가 1913년에 《대한광복단》에 가입했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고저 조선을 누비다가 1915년에 체포되여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김좌진은 바로 이런 경력의 소유자로서 김좌진 등을 맞이한 《대한정의단》은 부글부글 끓었다. 이를 전후하여 《대한정의단》은 본영을 왕청현 서대파구에 두고 연변각지에 5분단, 70여지단을 설치하였으며 《단지(斷指)결사대》1천여명을 두었다. 그들은 주야로 군자금, 군량 등의 모집과 무기구입에 전력하면서 유력한 항일독립군단으로 발족하였다. 1919년 봄에 상해에서 대한림시정부(상해림시정부)가 수립된후 서일은 그 지도를 받기로 하고 이해 10월에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를 통합하여 대한군정부로 개편하였다. 12월에 《대한군정부》는 상해림시정부의 명령에 의해 그 명칭을 《대한군정서》로 개칭하였다. 서간도에 《서로군정서》가 있는데 비추어 《대한군정서》는 《북로군정서》라는 별칭을 가지였다. 북로군정서 간부진영은 아래와 같다.   총재 서일 부총재 현천묵 참모장 리장녕 사단장 김규식 려단장 최해 련대장 정훈 련성대장 리범석 사관련성소장 김좌진   당시 북로군정서는 동북의  겨레 반일독립단체가운데서 가장 정규적이고 가장 유력한 무장단체로서 500~600명 병력에 보총 500여자루, 권총 40자루, 기관총 3정을 가지고있었다. 북로군정서 군사 《기전사가》는 일제에 대한 무비의 증오를 그대로 담았다.   하늘은 미워한다 배달족의 자유를 억탈하는 왜적들을 삼천리강산에 열혈이 끓어 본연히 일어나는 우리 독립군   백두의 찬바람은 불어거칠고 압록강 얼음우엔 은월이 맑아 고국에서 불어오는 피비린 바람 갚고야 말리라 골수에 맺힌 한을 …  …  …  
348    나 겨레의 서하객 되고 파 댓글:  조회:3037  추천:29  2010-09-06
                나 겨레의 서하객 되고파   1   운남 대리바이족자차주에 이르러 대리를 에워싼 창산 19봉 중 제1봉이라 일컿는 운롱봉에 올라 기이한 동굴로 불리우는—천룡동을 유람하고 산아래 명화구역을 유람하는데 앞선 쌍둥이 딸애들이 소리 지른다. “아빠, 여기 서하객유람기비가 있어!” “뭐라구?” 한달음에 달려가니 내앞에는 명나라 대려행가이고 지리학자로 명망높은 서하객의 석상과 함께 “서하객유람기비”가 나타난다. 나는 일순 멍해지고 말았다. 서하객의 석상과 유람기비가 어떻게  대리의 창산아래 있느냐고 말이다. 나의 의문은 서하객유람기비를 보고서야 비로소 풀리였다. 오늘의 강소 무석사람인 서하객은 옛날 그시절 전국 답사려행중 운남에 이르고 대리에 이르렀고 자기의 유람기에 대리에는 4대경관이 있고 상관화(上关花)가 이름나다고 밝히였었다. 눈앞의 명화구역은 바로 서하객이 발자취 남긴 상관화구역이여서 대리사람들은 서하객의 석상을 세우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하긴 서하객 석상경과가 어찌하든 운남 대리에서 서하객을 만나리라곤 상상도 못한 나였다. 그로부터 운남, 귀주 등지 서남 답사길에서 사하객이란 이 명나라 대려행가, 지리학가가 머리에서 떠날줄 몰랐다.   2   나로 말해 서하객이란 이 력사인물은 지난해 이전까지만도 이름이나 기억할가말가하는 생소한 인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나에게 한국에 가서 학술연찬을 하고있던 연변대 신철호박사가 조글로사이트에 올린 나의 겨레발자취 글과 사진을 보고 나를 서하객에 비유하여 댓글을 단바 있다. “서하객이 누구더라?” 어리벙벙한 나는 인차 관련 인터넷을 검색해 보고 흥분해 마지 않았다. 서하객은 일찍 나라의 명산대천을 려행답사하겠다는 뜻을 세우고 22살 때부터 사망하기 한해 전 55살 때까지 30여년간 오늘로 보는 중국의 19개성과 시를 답사하고 60여만자에 달하는 “서하객유람기(徐霞客游记)”를 써내여 후세에 명나라 대려행가요, 걸출한 지리학자로  받들리고 있었다. 신철호박사의 일깨움이 무지 고마왔다. 그로부터 서하객은 한나라 때 발로 전국을 뛰며 불멸의 “사기”를 써낸 사마천과 더불어 50대 나의 본보기로 모셔지고 겨레의 서하객이 되고픈 마음으로 자신을 달래왔다. 그러던차 운남 대리에 이르러 서하객의 발자취를 보아내고 석상을 대하게 되니 어찌 놀라지 않으리오. 운남 대리에서 서하객 석상을 처음 대하게 된후 나는 영화 “다섯금화”의 사랑얘기가 깃든 대리의 “나비샘”에서 다시 서하객석상을 보게 되고 운남 곤명의 아름다운 풍경구 서산에서 “서하객기념관”을 답사하게 되였다. 내가 서하객기념관의 일군 보고 운남에서는 왜 강소 무석사람인 서하객을 이토록 존경하며 모시는가고 물으니 그 일군의 대답 또한 실제적이다. “서하객은 나라 19개성과 시를 답사하고 63만자에 달하는 서하객유람기를 써냈는데 63만자 중 20여만자가 우리 운남을 쓴 거랍니다. 그러니 운남에서 서하객을 존경함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어요?!” (오, 그래서 운남 곳곳에서 서하객의 석상을 대할수 있구나!) 나는 감탄해마지 않았다. 서하객기념관에서 또 “천고기인 서하객”과 2009년 3월 중화서국 출판 “서하객유람기”를 사게 되였으니 나 운남, 귀주 등지 서남지구 답사길 또 하나의 성과가 아닐수 없다.   3   알고 보면 서하객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개성의 괴짜였다. 서하객은 철부지 그 시절부터 총명과 천부가 과인하여 5살에 벌써 서당에 들어가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어찌도 총명하던지 배우는 시문을 그 자리에서 척척 암송하고 시문을 글로 써낼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제자를 두고 서당선생은 기뻐할만도 한데 실망하지 않을수 없었다고 하니 어린 제자가 늘 정규적인 과문—“정서(正书)”에 묻히지 않고 과문밖 잡가 책들에 매혹되고 있었다. 어린 제자가 즐겨보는 책들로는 력사이야기, 명산대천을 기재한 지리관련 책들이 아니면 옛 사람들 업적을 기재한 문학류 책들이였다. 어린 시절의 서하객의 어린이 모습, 이 어린이가 자라면서 더더욱 상기 관련책들에  파묻히니 맘에 드는 책이 있을제 주머니에 돈이 없다면 입었던 옷을 벗어 돈으로 바꾸어 책을 샀으니 그의 집은 하나의 도서관을 방불케 했단다. 서하객은 개성도 특이하여 출세와 벼슬에 흥취 없고 남다른 인생—유람탐험과 과학고찰을 필생의 인생목표와 추구로 정하였다. 오늘의 중국에 있어서 서하객은 대단한 인물로 받들리고 있다. 그의 “서하객유람기”는 중화민족의 문화를 대표하는 력대 20부 저작의 하나로, 그는 중국력사상 가장 걸출한 40명 중화문화명인의 하나로 칭송을 받는다. 하기에 2007년 11월에 서하객의 조각상이 수도 북경의 “북경세기단”에 일어서고 그의 고향 무석 강음 마진진을 서하객진으로 명명하고 서하객이 처음 려행답사길에 오른 음력 3월 3일을 “무석도시관광일”로 정하였다. 서하객 옛집과 묘소가 관광지로 부상한것은 두말이면 잔소리. 또한 운남 각지말고도 강소 무석 태호와 의흥, 복건 무이산과 쌍양진, 절강 천대산 석량과 녕해, 귀주 황과수와 반현 등지에 서하객 석상이 세워졌다.   4   “천고기인 서하객”으로부터 보는 서하객현상. 이런 서하객을 내가 어찌 존경하며 따르지 않을수 있으리오. “나 겨레의 서하객 되고 파”는 이런 마음에서 우러나오게 된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을 잘 알고있다. 나같은 일개 변강소인을 어찌 서하객에 비기리오마는 내가 감히 비김은 명나라 대려행가이고  걸출한 지리학자, 중화문화명인 40명중의 일원으로서의 서하객이 아니라 22살부터 55살 때까지 30여년간 오직 하나의 신념, 하나의 마음으로 꾸준히 중국의 19개성을 답사려행한 그의 고매한 정신과 신념, 헌신적 노력이다. 나도 이같은 정신과 신념, 헌신적 노력으로 살고있는 인간으로 되기 위해 힘쓰고 있으니 명나라 서하객과 비슷한 괴짜면은 있는것 같다. 서하객이 나한테서 강렬한 공명을 일으킴은 이런 연유가 아닐까. 수년전에 나는 잠시 삶의 무대를 강남으로 옮겨 보았다. 시초는 살기 위한 어찌할수 없는 떠밀림이었다. 강남의 중심지에 오니 전국 방방곡곡 겨레발자취가 환히 안겨지고 전국으로의 답사가 완전가능한데 우리 연변에 있으면 감히 행동할수 없는 일이렸다. 그래서 강남 교수생활을 헛보내지 않으려고, 강남생활 기간 맘껏 뛰여보려고 전국으로의 겨레발자취 답사목표를 세워 보았다. 이 목표를 맘에 안고 지금 나는 뛰고 또 뛰고 있다. 이 목표에는 고대 겨레발자취도 있고 현대 발자취도 있다.   5   돌이켜보면 지난 3-4년래 순 과외시간으로 나는 많은 력사현장을 답사하고 많은 글들을 썼다. 우리 동북으로 말하는 중국 관내에서의 겨레발자취 따라 운남강무학당, 광주 황포군관학교, 해남도, 북벌전쟁, 남창봉기, 광주봉기, 하북과 산서, 강소에서의 팔로군과 신사군 내 우리 겨레, 강서 남창과 서금, 홍군장정길 운남, 귀주, 사천 관련현지, 태항산항일근거지, 로신과 우리 겨레관련 답사차 소흥, 상해, 북경, 광주, 하문 등지 국내 로신기념관, 박물관 전체 답사 등등 력사현장들을 답사하여 보았다. 고대 우리 겨레로는 신라인 지장보살 김교각님, 고려명승 의천대각국사님, 고려와 송나라 고대 중한문화교류를 중심으로 안휘, 절강, 강소 등지를 누비여 마무리 단계에 있다. 김교각은 전기나 평전으로 한부, 연구자료집으로 10권쯤 타산하고 내미는 대형 프로젝트고 의천대각국사는 중국내 발자취 연구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고려와 송나라 관계는 전문 연구저서를 이룬다. 이제 기어이 완수해야 함은 중국 연해지구 당나라 신라방 답사와 연구, 절강, 복건을 중심으로 하는 고려김씨 답사와 연구. 신라방 답사는 눈이 뜨이게 내밀고 있으나 아직 고려김씨 답사는 손도 대지 못하고 있다.   6   한사람의 힘과 노력은 제한되여 있기에 나 혼자의 힘으로 전국 각지에 널린 겨레의 발자취 모두를 추적할수는 없다. 그래서 끝없는 욕망을 많아 비워가면서 다치고 밝힐것은  힘자라는대로 내밀어가고 있는데 이 과정 하나하나에 애로와 외로움도 없지 않다. 첫째는 아직은 대학 한국어교수란 이 직에 부끄럼없이 충실해야기에 방학이나 토일 휴식일 과외시간을 리용해야만 한다. 둘째는 나의 겨레발자취 답사 전부가 자부담에 의거한다는 점이다. 나의 로임 거의 전부를 털어내야 하니 정말 쉽지가 않다. 그럼 내가 무엇을 위해서, 대가를 바라고 하는 걸까, 나는 그 무엇을 바라는 것이 없다. 바란다면 오직 고대 겨레발자취나 피어린 현대 겨레발자취가 모두 력사사실 그대로 빛을 보며 후세에도, 먼먼 후세에도 우리 겨레사회서 길이 전해가기를 바랄 뿐이다. 나 겨레의 서하객이 되고 파—나의 마음속에서 우러 나오는 진심의 발로이다. 명나라 서하객처럼 하나의 신념, 하나의 목표 안고 뛰고 뛴다면 우리 겨레사회가 잘 모르는 전국내 겨레발자취 답사연구와 책으로 출판은 하나하나 현실로  펼쳐져 갈것이 아닐까.   2010년 9월 6일,  강남 두앵원에서      
347    양림 무정 장군 평전집필 맡고서 댓글:  조회:3858  추천:42  2010-09-05
            양림 무정 장군 평전집필 맡고서   이태전이던가 북경의 민족출판사로부터 기획 계렬도서들 중 양림, 무정 장군 평전쓰기를 맡을 때만 하여도 어렵사리 아니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였다. 양림, 무정 장군을 각기 한편의 전기로 가장 충실하다, 훌륭하다는 평으로 정리하여 발표한 저자라지만 우리 겨레의 두 불멸의 장군을 각기 20만자 이상의 책으로 써낸다는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였다. 오늘 현재 대할수 있는 겨레사회의 모든 연구성과와 자료들을  집대성해도 어물도 없는 일이어늘 이를 타개하자면 오직  하나의 방도—장군들의 발자취 따라 현지 답사길에 오르는 수밖에 없다. 이 현지답사길이 내 고향 연변이 아닌 하북성, 산서성, 섬서성, 강서성, 귀주성, 운남성, 사천성 등지 북방과 남방으로 이어가야 하니 웬간한 결심과 희생, 헌신, 신념이 없이는 행하기 어려웠다. 나 평생목표—전국으로의 겨레발자취 답사에서도 가장 어려운 부분이였다.   1.     2009년 여름방학 답사 (1)    강서 남창 서금 행 지난해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나는 남방의 모 대학에 재학중인 쌍둥이 딸애 설이를 데리고 선참 강서로 달려갔다. 강서에서도 첫 답사지는 1927년 위대한 남창봉기의 력사현장—남창봉기기념관, 양림장군의 당년 남창봉기 참가여부를 확인하는 것이였다. 상상외로 나는 우리 연구의 모든 자료들에 없는, 양림이 남창봉기 참가자 명단에 버섯히 올라있음을 보아냈다. 첫 걸음부터 양림은 다시 연구해야 했다. 남창에서 남창봉기기념관과 더불어 남창봉기의 력사현장들인 엽정지휘부와 하룡지휘부 등 여러 유적지, 전적지들과 강서혁명렬사기념당 등을 답사하면서 더욱 그러했다. 지난 80년대  첫 남창답사에서 보아내지 못하고, 중시하지 못한 부분이였다. 강서에서의 두번째 답사지는 당년의 홍색 수도로 불리우는 서금. 서금에서 제1차, 제2차 전국쏘베트대표대회 개최지들인 엽평과 사주패, 중앙홍군대학 옛터와 무정장군이 제2임 교장으로 근무한 홍군특과학교 유적지, 2만 5000리 장정의 개시로 되는 서금의 운석산 등지를 답사하면서 나는 가슴이 활 열리는 기분이였다. 1934년 10월, 홍군장정이 시작될 때 양림은 중앙군위 간부퇀 참모장이고, 무정은 중앙군위 제3제대 사령원 겸 정위인데 서금에서의 이들 발자취가 또렷하고 여러 장군들 회억록과 장정 관련 책들에서 지금껏 대하지도 못한 양림, 무정 장군의 관련자료를 적잖게 수집할수 있었으니 두 장군의 평전은 희망이 보이였다.   (2)    하북 산서 태항산행   강서 남창, 서금에서의 답사를 마치고 일단은 연변으로 귀향했다가 다시 단신으로 조선의용군의 발자취—태항산항일근거지 답사길에 올랐다. 태항산은 우리 조선의용군이 활동한, 하북성과 산서성의 경계를 이루는 불멸의 력사현장이다. 태항산 답사에 앞서 나는 무정장군이 다니였던 하북 보정륙군군관학교 옛터와 석가장 화북렬사릉원, 하북성 원씨현 호가장 마을—호가장전적지, 원씨현 황북평촌 호가장전투 조선의용대 4렬사 묘소, 한단의 진기로예렬사릉원 등지를 차례로 찾아 보았다. 더우기 한단 진기로예렬사릉원에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책임자들인 진광화렬사묘소와 석정 윤세주렬사 대리석묘비를 찾아 내니 나는 한동안 들먹이는 가슴을 진정할수가 없었다. 상기 보정, 석가장, 원씨현, 한단 등지의 답사지들을 거쳐 태항산항일근거지의 중심을 이루는 하북성의 섭현과 산서성의 좌권현으로 직행하였다. 당년 조선의용군과 의용군 사령원 무정장군의 발자취 어린 섭현 하남점진 남장촌, 하남점진 하일촌, 팔로군 129사 유적지 적안촌, 조선청년련합회 제2차대회 개최지 중원촌, 진광화-윤세주의 진짜 묘소가 자리잡은 섭현 석문촌 등지와 조선의용군 옛 주둔지들인 산서성 좌권현의 마전진 운두저촌, 좌권현 동욕진 상무촌, 마전진의 팔로군총부기념관 등지를 차례차례 답사하여 보았다. 무정장군의 거룩한 형상이 우렷히 솟아오르는 순간순간들이였다. 유감도 없지않아 혁명의 성지—연안은 1988년 10월에 이미 답사한 터라지만 시간과 기후의 등 여러 제조건으로 양림장군의 희생지로 되는 산서성 석루현을 답사하지 못한 것, 지금도 천만유감으로 남지만 석루현에는 양림의 소개가 곁들인 홍군동정기념관이 있고 당년 홍군의 황하도하작전지, 양림의 희생지 하가와촌 등이 있어 필자의 답사를 기다리고 있다.   2.     2010년 여름방학 답사   해마다 그러하듯 2010년 올 여름방학은 나로 말해 얻기 어려운 절호의 기회다. 이 여름방학에 나는 지난해 여름방학의 계속으로 답사의 주선률 양림, 무정 장군의 발자취 좇아 나라의 서남지구들인 운남, 귀주 등지 답사길에 올랐다.   (1) 운남 경내에서   운남 답사려행은 가족과의 동반 답사려행이였다. 곤명에서 양림이 다닌 운남륙군강무학당을 선참 찾고 풍경구 곤명 서산에서 섭이묘와 섭이기념관을 답사하면서 섭이와 영화황제—김염 관계자료와 사진을 찾아 보았다. 곤명의 석림, 전지 등 풍경구도 답사려행의 일과들이였다. 곤명에 이어 대리바이족자치주, 금사강이 흐르는 려강, 적경장족자치주 수부—샹그리라 등지를 돌아 보며 려행과 홍군장정, 겨레발자취 답사에 열을 올려 보았다.   (3)    사천 경내에서   사천부터 답사는 가족을 떠나 보낸 나 홀몸답사였다. 사천에서의 주되는 답사는 중앙홍군이 운남 경내서 금사강을 강행도하하여 사천경내에 들어선후의 사천내 로정교탈취, 설산과 초지를 지난 로정으로 되여야 했지만 정력과 시간의 부족으로 일단은 후일로 미루고 운남과 사천의 변계 천험지대를 흐르는 금사강 교평도를 선참 답사하여야 했다. 운남 샹그리라에서 장거리 사천 판즈화행 버스에 올랐다. 금사강 량안 산악지대에 자리한 판즈화시는 금사강이 길게길게 흘러 금사강을 리해할수 있는 둘도 없는 황금지대였다. 금사강 따라 근 10리 걸으며 금사강 리해를 앞세운후 판즈화시에서 홍군장정의 발자취 사천 회리현성, 양림 관련 회리현 통안진전투 현지를 답사하고 곧추 통안진 가까이 금사강 교평도를 찾았다. 금사강 교평도에서 하루 묵으며 금사강 북안 사천쪽과 금사강 남안 운남쪽 리해를 깊이하였다. 우리 중앙홍군이 어떻게 운남땅에서 금사강 교평도로 진격하였고, 금사강 교평도를 어떻게 도하하였는가에 대해서도 보는듯이 그려낼수가 있었다.   (4)    귀주 경내에서   금사강 교평도에서 다시 곤명에 이르고 곤명에서 귀주 귀양행에 올랐다. 귀양에서는 주로 우리 고대 겨레와 관련되는 명나라 성현 왕양명의 발자취--수문현 양명동, 귀양시안 양명사를 답사, 다음 인차 준의시로 가서 준의회의기념관, 홍군장정대오 관련 시안의 모든 유적지들을 찾았다. 여기에 장정관련 많은 책들을 사들여 장정도중의 양림, 무정의 발자취가 머리에 환히 안겨 들었다. 장정도중의 양림과 무정, 그들의 역할에 대해서도 손금보듯 리해를 깊이하였다. 준의답사에 이어 대오강진에 가서 오강천험 현장을 속속들이 들여다 보았다. 관광뽀트를 차고 관련구간 오강을 오르내리며 오강돌파 현지를 생생히 머리에 박아 두었다. 시간의 제한으로 귀주 준의에서도 운남성내 귀주와의 변계지대인 짜시 정치국회의 지점(위신현성), 적수하를 네번 건너다 현지, 준의 루산관전투 현지 등을 답사하지 못한 유감을 남기기도 하였다.   3.     양림  무정 평전집필 조건이 마련되여   지난해와 올해 두번 여름방학의 태항산항일근거지와 홍군장정길 관련 답사를 거쳐 양림, 무정 장군 평전을 집필할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였다. 물론 아직도 사천 경내 로정교탈취 현지와 설산초지 현지, 1936년 2월 홍군동정항일에서의 황하도하작전과 양림 희생지 등 력사현장을 계속 답사할 필요는 있으나 두 장군의 평전집필에서는 큰 문제로 나서지 않는다. 두 여름방학기간 답사를 거쳐 홍군장정 시절, 조선의용군 시절 양림, 무정 장군 전기는 실로 다시 새롭게 쓰게 된다. 아니 두 장군의 전기가 새롭게 탄생하게 된다. 이에 나는 말할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 내 한생에 우리 겨레를 위해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한다면 그중 주요한 하나가 양림, 무정 평전으로 될것이다. 겨레의 빛나는 두 별—양림 무정 장군, 겨레와 더불어 천추에 길이 빛나시라 !!!   2010년 9월 5일, 강남 두앵원에서        
346    안중근연구 빈구석 (3)-이른바 안중근의 문안골 사격연습문제 댓글:  조회:3851  추천:51  2010-03-31
【안중근연구 빈구석】(3)     이른바 안중근의 문안골 사격연습문제                                                                                        일전(2005년)에 “안중근의거 한민회의 조직적기사”를 쓰면서 해당자료를 훓다가 명동촌 출신인 한국 경희대 문리대학장 윤영춘선생의 글 “황무지에 세운 기폭”에서 “안중근이 이또오를 저격하기 위해 명동 문안골에 와서 사격연습을 한 일이 있었다. 문안골의 바위를 가상적으로 하여 연습을 했다.”는 대목을 읽고 머리를 가로 저었다. 오늘의 룡정시 지신땅 명동일대에는 근본 문안골이란 마을이 없거니와 이 일대서 안중근이 사격연습을 한적이 없기 때문이였다. 여하튼 이는 필자의 신경을 모았다. 안중근관련 해당자료들에도 이런 취급이 가끔 보이여 주의를 돌리지 않을수 없었다. 아래 이런 자료들을 먼저 언급해 보기로 하자. 연변 해당학자 2명의 서명으로 된 “간도반일민족 교육의 선구자—김약연”론문 ﹝“북간도 민족운동의 선구자 규암 김약연선생 서거 55주년 기념학술대회 문집”﹞에는 “그후 안중근의사 역시 명동에 머물면서 반일무장투쟁을 계획하고 문안골에서 권총사격연습까지 하고 떠났다.”고 밝혀져 있었다.  룡정문화총서 “일송정” 제5기에 올려진 론문“룡정의 명동—중국조선족근대문화의 발상지”에서도“1909년 봄, 그는 훈춘으로 하여 명동에 왔다. 안중근은 명동에 와 있으면서도 자기의 무장투쟁론을 력설하면서 문암동에 가서 권총사격연습을 하였는데 그가 천주교도이면서도 천주교마을인 삼원봉에서 류숙하지 않고 기독교촌인 명동촌에서 류숙한것은 그만큼 그가 명동촌을 신임하였기 때문이며 또 어려서부터 수렵, 사격과 기마에 큰 흥취를 가졌기때문이다.”라고 서술하였다.   중국조선민족발자취 1—“개척”에 실린 “이등박문을 쏴죽인 안중근”이라는 한편의 글에서는 문암동서술과 달리하여 아예 “룡정에 온 안중근은 명동에 자리잡고 팔도하자 만진기에서 땀을 흘리며 무예를 익혔다.”고 지적하였다. 사실 이런 서술들은 모두 한국 해당자료의 재현이지 이곳 학자들의 창조물이 아니다. 하다면 안중근의 사격연습 진실한 력사는 어떠한가, 이면에서 연변대학 교수 최홍빈선생이 비교적 실사구시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최홍빈교수님은 연변대학 원 민족연구소 소장이였다. 교수님은 안중근의거 80돐 되던 해인 1989년 12월 15일 부 “연변일보”에 실은 글 “항일독립투쟁의사—안중근”이라는 장편 글에서 “안중근은 일곱살때부너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혀 열두살 때부터는 백발백중의 소년포수로 린근에 이름을 날리였다.”고 모를 박았다. 선생은 이 글에서 또 “안중근은 1907년 깊어가는 가을에 사랑하는 가족과 학생들의 눈길을 뒤로 하고 민족의 래일을 위한 투쟁의 전선—간도로 길을 재촉하였다… 북간도에 도착한 안중근은 룡정에 머물러있으면서 3개월동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의병부대양성기지를 물색하”다가 “로씨야 령토인 연추를 지나 울라지보스또크에 도착하였다.”면서 이른바 안중근의 문안골 사격연습문제를 회피하였다. 존재하지도 않은 문제이니 그럴수밖에 없었다. 일본 추밀원 원장이고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은 제정 러시아의 재정대신 꼬꼬브체브와 현안문제를 토의하려고 1909년 10월 16일에 일본을 떠나 대련, 려순, 봉천(심양)을 거쳐 26일에 할빈에 도착하기로 하였다. 안중근 등이 이 소식을 해당신문을 통하여 알게 된것은 이해 10월 20일이다.   한민회 회장인 김치보와 그의 동지들인 안중근, 우덕순, 조군선, 김성화, 탁공규, 황병길 등은 인차 울라지보스또크 신한촌 덕창약국에 모여 이등박문을 죽여버릴 거사를 의논하였다. 이어 김치보를 총지휘로 하는 이등박문암살지휘부가 세워지고 여러 개 소조로 나뉘여 할빈, 장춘, 심양 쪽으로 가서 대기하기로 결의하였다. 결과 이해 10월 26일, 이등박문은 할빈에 대기중이던 안중근의 권총에 맞아 황천객이 되였다. 이 짧은 기간내에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죽이기 위하여 로씨야땅에서 북간도 명동에 와서 사격연습을 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1909년 봄, 명동행도 문제투성이다. 항일독립단체—한민회의 주요성원인 안중근은 회장 김치보 등 11명과 함께 1909년 새해 첫날 연해주 연추부근의 카리(김치보가족사에는 신한촌으로 되여있음)란 마을에서 단지혈맹을 결성하고 의병을 다시 일으키려고 작심하였다. 그뒤 명동에 다녀갈 기회는 없지 않으나 1909년 봄에 천주교도인 안중근이 기독교촌인 명동촌에 머물렀다는 서술은 사실과 퍼그나 어긋난다. 왜냐하면 이해 봄까지 명동과 그 일대에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동에 교회가 선것은 1909년 5~6월경이다. 이해 5월경에 신민회간부이고 리동휘의 동지인 정재면이 명동학교에 선생으로 부임하면서 기독교력사가 시작된다. 다시 안중근의 권총사격연습에로 돌아오면 명동일대에는 문안골이란 마을이 없다. 문안골이 아닌 문암동은 오늘의 룡정시 개산툰진 회경 6대(개산툰시내 서쪽 부근 마을)를 가리키는데 명동촌과는 곧게 쳐도 20~30리 거리가 잘된다. 여기서 지적하고 넘을것은 원 룡정시 덕신향 석문촌 석문구간이 문암동이 아니라는것이다. 그리고 열두살 때 백발백중의 소년포수로 소문이 났다는 안중근이, 사냥의 모습을 자주 보인 안중근이 여기저기서 권총사격연습을 했다는 자료가 보이는데 그 자체가 의문점이 없지 않다. 최근에 필자는 항일독립지사이고 연해주 한민회 회장이고 그후의 로인단 단장이였던 김치보의 자료를 정리하면서 또 이러한 자료와 맞띄웠다. 1905년에 일본침략자들에 의해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후 종성군수를 지냈던 김치보는 군수고 뭐고 내동맹이 치고 결연히 러시아 연해주로 가서 신한촌에 항일독립단체 한민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상기와 같이 안중근은 한민회의 주요성원이고 김치보와 뜻을 같이 하는 동지로서 김치보의 집에 2년간이나 머무르면서 김치보가 울라지보스또크에서 조선인학교를 꾸리며 단체의 후근일에 몸을 잠글 때 안중근은 그를 도와 대업을 받들며 매일 륙절포(권총) 사격연습을 늦추지 않았다고 한다. 그 진가는 단언하기 어려우나 한국독립사 해당자료가 그렇게 말하고 김치보가족사에 그렇게 씌여져있었다.   지난 90년대초 김치보항일투쟁사 자료수집과 조사결과도 그러했다. 안중근이 하도 이악스레 접어드니 술병을 공중에 던지고 쏘아도 백발백중이였단다. 안중근이 사격에 숙달하여 작은 산새들도 쏘아 맞혔다는 것은 이런 연유였다. 그러니 안중근은 잠도 포근한 모양이였는데 잠잘 때면 굳잠에 빠져 베개를 빼내도 세상모르고 잠만 잘 잤다고 한다. 그런 안중근한테 이등박문은 끝내 당하고야 말았던것이다. 우와 같이 본 글에서 이른바 “안중근의 문안골사격연습문제”를 가지고 두루 검토하여보았다. 긍정적인것은 안중근의 문안골사격연습문제가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안중근이 항일무장투쟁의 대업을 위해 명동촌에 이르러 한때 동만의 대통령으로까지 불리여진 김약연과 대사를 도모했다는것은 력사사실인것 같다. 단 명동촌에 간 시간문제가 오차를 보일뿐이다.
345    안중근연구 빈구석 (2)-이등박문 암살 총지휘는 김치보 댓글:  조회:3278  추천:39  2010-03-30
【안중근연구 빈구석】(2)     이등박문 암살 총지휘는 김치보     20세기 10년대 겨레항일운동사를 펼치면 열렬한 독립운동가로 되여 묵묵히 제2선에서 독립운동을 지지, 성원하면서 이등박문 암살지휘부 총지휘로 싸운 한 투사가 있다. 투사의 이름은 김치보(1860~1941, 金致甫)이고 당년의 러시아 연해주에서는 《한민회》회장이고 《로인단》 단장이였다. 1   김치보는 원적이 조선 평양이고 1860년 음력 9월 17일 태생이다. 조선서는 김성준으로도 통하고 만주와 로씨야에서는 김감령으로도 불리웠다. 그의 경력으로 보면 김치보는 조선 리조말기의 4품관으로서 선후로 평양군수와 종성군수로 지내기도 했다. 지난 90년대 초반에 필자가 훈춘시 춘화진에 가서 김치보의 가족을 찾았을 때 이 사실을 다시 확인하여보았다. 그들 가족에서는 김치보의 종성군 군수 임명장을 1968년도까지 줄곧 정히 건사하였었는데 창호지(백지)에 씌여진 임명장은 길이가 600미리메터, 너비가 400미리메터였다고 한다. 임명장에는 구한말의 외부대신, 학부대신이였던 리완룡의 도장(길이와 너비 각기 90미리메터)까지 찍히였단다. 1905년 일본침략자들에 의해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리완룡이 《을사오적신》(乙巳五賊臣)으로 떠오르자 김치보의 분노는 절정에 달하였다그는 결연히 러시아 연해주로 가서 신한촌에 반일독립단체 《한민회》를 꾸리고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한민회지휘부는 김치보가 독립운동후원을 목적으로 꾸린 《덕창약국》(德昌葯局)에 설치되고 김치보가 친히 한민회의 재무와 후근, 무기공급을 도맡았다. 한민회는 항일구국의 기치를 든 철저한 독립운동단체로서 안중근, 우덕순, 조군선, 김성화, 탁공규 등이 주요회원으로 나섰다. 1909년 새해 첫날 그들 11명은 회장 김치보와 함께 연해주 연추(즉 노오끼엽스크)부근의 카리란 마을(김치보가족사에는 신한촌으로 되여있다)에 모이였다. 자연히 1908년 한해동안의 로고가 회고되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토론은 나중에 결사대를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으며 일제놈들과 계속 싸우자는데로 모아지면서 저마다 조막도끼로 왼손무명지의 손마디를 자르고 흐르는 피로 태극기에 《조선독립》이란 네글자를 쓰고 서명하였다. 그러던 나날 1909년 10월 20일, 일본 추밀원원장이고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이 러시아의 재정대신 꼬꼬브체브를 만나려고 10월하순에 할빈에 간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김치보와 그의 동지들인 안중근, 우덕순, 조군선, 김성화, 탁공규, 황병길 등이 신한촌 덕창약국에 모여 이등박문을 죽여버릴 거사를 의논하였다. 이어 김치보를 총지휘로 하는 이등박문암살지휘부가 세워졌다. 하지만 이등박문의 할빈행이 어느길인가가 밝혀지지 않은데서 그들은 여러 개 소조로 나뉘여 할빈, 장춘, 심양, 수분하쪽으로 가서 대기하기로 결의하였다. 그해 10월 26일, 이등박문이 끝내 할빈역두에서 안중근의 총에 맞아죽었다. 이날을 위해 김치보는 안중근 등과 더불어 얼마나 신고하였는지 모른다. 지난 2년간 안중근은 줄곧 김치보의 집에 머무르면서 대사를 도모하며 피어린 항쟁에 나섰고 사격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었다. 허나 력사는 편면적으로 안중근에게만 기울어져 안중근이 주도한것으로만 알려졌다.   2   1909년에 들어선후 무력으로 조선을 병탄하려는 일제놈들의 야욕은 날따라 백일하에 드러났다. 국내의병항쟁이 일제의 야만적인 무력탄압으로 쇠잔해진데서 반일애국지사들은 국제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조선의 립장을 밝히면서 일제의 병탄야욕을 폭로, 저지시키려고 서둘렀다.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려는 운동이 러시아 연해주를 중심으로 상해, 미주의 애국지사들 사이에서 재빨리 형성되였다. 운동과 밀사파견에 필요한 자금은 연해주, 간도, 상해, 미주 등지에 사는 동포들에 의해 풀려갔다. 네델란드(화란)에서 열리는 국제회의밀사는 리상설과 리준이였다.  《세계인명대사전》 리상설 조목에 의하면 그는 1905년에 일제에 의해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통분을 금치못해 가두에 나서서 울면서 대중에게 연설하고는 두문불출하다가 1906년에 울라지보스또크에 망명》 하고있었다. 그때 《한민회》회장으로 있은 김치보는 리상설과 가까운 모양이였는데 그는 국제회의 밀사파견의 적극적인 추진자였다. 리상설이 리준과 함께 밀사로 파견되자 김치보는 그들 둘의 모든 경비를 지출하였고 그해 4월, 씨비리렬차로 울라지보스또크를 떠날 때 역에 나가 바래였다. 김치보는 뒤미처 리상설과 리준이 도중에 러시아 수도에서 러시아 주재 한국공사의 아들 리위종을 대동하여 네델란드의 헤이그(海牙)에 닿았으나 일본측 대표의 무리한 방애를 받았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더우기 회의참석자격마저 얻지 못한데 분격한 리준이 머나먼 이역땅에서 순국했다는 비보에 접하고 통분하기 그지없었다. 그뒤 류랑길에 올랐던 리상설이 미국을 거쳐 울라지보스또크로 돌아왔을 때 김치보는 마음을 활열어 뜨거이 맞아주었다. 또한 1910년 성명회에서 취지서, 즉 성명서를 내여 이른바 일제의 《한일합방》을 세계만방에 호소하며 규탄할 때 그들은 힘을 합쳐 밤낮으로 헌신하였다. 사실이 그러했다. 1910년 경술국치의 비보가 러시아 연해주에 전해졌다. 이해 8월 17일(음력 7월 13일), 울라지보스또크에 체류중인 조선의 반일지사들은 분노하여 《성명회》(聲鳴會)를 결성해가지고 일제침략자들의 조선병탄의 부당성을 각국 정부에 통절히 호소하면서 조선병탄반대운동을 드세게 벌리였다. 이 운동의 진두에는 류린석, 리범윤, 리상설, 김학만, 차석보, 김좌두, 김치보 등이 서있었는데 김치보는 명실공히 성명회의 중심인물의 하나였다. 리상설도 끼이였는데 그들은 힘을 합쳐 격문을 산발하고 동지를 모집하는 한편 유일한 독립운동기관지 《대동공보》에 일제놈들을 단죄하는 전문기사를 실었다. 성명회에서 발표한 취지서는 일제침략의 부당성을 폭로하면서 각국 정부와 사랑하는 동포들에게 강렬한 호소를 내품었다. 취지서는 《저 아름다운 삼천리강산은 우리 시조 단군께서 전하신바이며 신성한 아 2천만동포는 단군의 자손》이라면서 《차라리 2천만의 생명을 희생하는 일이 있더라도 5천년의 조국을 버릴수 없》기에 《조국을 사랑하고 중국을 사랑하는 우리 동포》들은 《속히 힘을 합하고 소리를 같이》하기를 희망하였다. 나중에 취지서는 《아아! 주저하지 말지어다. 우리들의 사랑하는 동포여, 아아!》를 련발하면서 끝을 맺었는데 찬동자의 주의사항과 더불어 류린석, 리범윤, 김학만, 차석보, 김좌두, 김치보 등의 이름이 정히 적혀있다. 이해 8월 23일, 조선이 병탄당했다는 비보가 확실해졌다. 김치보는 성명회의 동지들과 함께 격문 1천매를 인쇄하여 러시아와 간도 각지에 배포하면서 류혈적인 방법으로 조선병탄을 저지하자고 호소하였다. 그후에도 김치보의 활동은 멈추어지지 않았다.   3   1919년 3월, 조선반도(한반도)에서 위대한 《3.1》독립만세운동이 활화산마냥 터져올랐다. 잇따라 간도, 연해주 등지에서도 독립만세시위행사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독립만세운동이후 연해주의 항일독립운동은 러시아 볼쉐위크파의 힘있는 후원아래 부문별 비밀결사를 무어 항일구국활동의 길로 나아갔다. 그중 주요한 단체는《로인단》(1919년 10월), 《대한국민의회》, 《독립단》, 《림시위생회》 등이였는데 《로인단》의 단장이 바로 김치보였다. 1919년 이해 김치보는 60살이다. 그는 1910년 경술구치를 전후하여 조직된 《로인회》의 토대우에서 이름을 로인단으로 바꾸고 본부를 울라지보스또크에 설립하였다. 해당자료에 따르면 로인단의 단원들은 46살이상 70살까지의 조선인남녀들이였는데 독립운동에 뛰여든 조선청년들을 받드는데 그 취지를 두었다고 한다. 김치보의 책임은 무거웠다. 그는 이에 못지 않게 로인단의 명의로 장서(長書)를 작성하고 일본정부에 보내여 독립권 환부를 요구하는 한편 리발, 정치윤, 윤여옥, 차대유, 안태수 등으로  대표단을 무어 서울에 파견하여 조선총독부에 떳떳이 독립요구서를 제출하고 서울 종로에서 독립연설을 발표하게 하였다. 김치보《로인단》의 활동은 이에만 그치지 않았다. 한때 세상을 들썽케 한 로의사(老義士) 강우규의 남대문밖 일제총독 사이또습격사건은 그 돌출한 실례라 하겠다. 1910년 일본침략자들은 조선 삼천리강산을 병탄한후 피비린 무단적통치를 강행하였다. 1919년《3.1》독립만세운동이후부터는 수단을 바꾸어 문화적통치를 시도하였다. 그야말로 양의 탈을 뒤집어쓴 승냥이의 심보였다. 제2대 조선총독인 륙군대장 하세가와(長谷川)가 일본으로 소환되고 해군대장 사이또(齊藤)가 제3대 총독으로 파견되였다. 이 소식에 접한 로인단단원들은 의논이 분분하다가 사이또란 이 섬나라 승냥이를 불벼락으로 영접하자고 입을 모았다. 결과 64살의 강우규(1856년생) 가 나서게 된다. 그가 떠나는 날 김치보와 로인단의 단원들은 서로 붙안고 작별인사를 하였다.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에 새로 부임한 사이또는 동부인하여 서울 남대문역에 내리였다. 플래트홈에는 영접하러나온 사람들로 붐비였다. 사이또는 점잖은 미소를 지으며 환영군중들에게 연신 답례를 하였지만 그 자리에 나선 강우규에겐 침략자의 우두머리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가 맨 마지막에 선데서 틈탈수가 없었다. 나중에 강우규는 기회를 찾다가 사이또부부가 역전앞에서 쌍두수레에 오르려고 할 때 주저없이 수류탄(작탄, 폭탄이라고도 하여 엇갈린다)을 던지였다. 사이또는 부인을 부축하여 수레에 오르게 한후 디딤대에 올라서려다가 불벼락을 맞았다. 하늘이 도왔을가, 사이또는 천명으로 살아나고 대신 30여명의 사상자가 났다. 강우규는 혼란한 틈을 타서 그 자리를 빠지였지만 뒤따른 대검거에 수많은 조선청년들이 끌려들어가 시달리는것을 듣고있을수만 없었다. 그는 류치장에 갇힌 청년들을 구출하려고 떳떳이 남대문헌병대를 찾았고 떳떳이 단두대에 올랐다. 한때 일제 놈들을 경악케 했던 일본총독 사이또습격사건, 반일독립력사의 한페지를 빛내인 강우규는 김치보가 이끄는《로인단》의 단원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1918년 8월이후 러시아 원동지구에 출병한 일본침략자들은 도처에서 조선의 애국지사들을 학살하며 미쳐 날뛰였다. 김치보의 로인단도 여러 독립단체들과 마찬가지로 일제놈들의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으나 김치보는 결코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했으나 1922년 말을 계기로 정세는 갑자기 돌변을 가져왔다. 바로 일본군의 철병이였다. 원동지구에서 1918년 6월의 체코군의 봉기와 뒤를 문 일, 미, 영, 불 등 련합군의 출병으로 말미암아 씨비리전쟁은 4년동안이나 지속되였는데 1920년 이후 고국작전하고있던 일본군은 드디여 울라지보스또크를 마지막으로 철병하지 않을수 없었다. 1922년 11월 15일에 원동정부(극동공화국)가 레닌의 쏘베트정권에 통합되고 씨비리전역에 쏘베트정권이 수립되면서 연해주의 조선인무장들은 력사사명을 끝내고 분화되기 시작하였다. 1923년 이후 씨비리에서 쏘베트 사회주의건설이 시작되면서 쏘련공산당과 정부는 조선인 각파지간의 파벌투쟁이 날따라 치렬해지는데서 그 시기 흑백을 가리지 못하고 조선인의 일체 무장활동에 금지령을 내리였다. 따라서 조선인 각파책임자들은 잠시 강금되였다가 풀려나오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김치보도 의례 갇히기도 하고 풀리기도 하였다. 1922년 말을 계기로 러시아는 쏘베트사회주의공화국련맹(즉 쏘련)으로 세계에 나타났다. 쏘베트체제하에서 항일독립무장이나 독립단체들이 독자적활동을 한다는것은 대중없는 일이였다. 이런 형편에서 김치보는 야밤에 독립운동가 엄인섭이와 같이 일가식솔을 데리고 쏘중국경을 너머 중국의 훈춘현 동흥진에 와서 자리를 잡았다. 중국땅에서의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였다. 그때부터 그는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이어갔는데 시끄러움을 피해 이름을 김감령으로 바꾸었다. 그가 사망된것은 1941년 11월 18일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 때 김치보는 안해와 자식들에게 쏘련에서 갇고온 종성군수임명장과 혈서, 시, 여러 문건 등 50여점을 맡기면서 이제 조선이 독립하면 나라에 바치라고 신신당부하였다. 인생을 다하면서도 그는 이런 문건들은 자기 생명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4   김치보는 생전에 안해 김선녀와의 사이에 5남매를 두었다. 그들로는 맏아들 꼬랴, 둘째 김철수, 셋째 김갑수, 큰딸 유바, 작은딸 김순덕이다. 1923-1924년경에 김치보는 일가식솔을 거느리고 가만히 국경을 넘어설 때 동행한것은 안해 김선녀와 큰딸 유바, 둘째아들 철수, 셋째아들 갑수였는데 그때 맏이 꼬랴는 대학공부중이여서 따라서지 못하였다. 그는 쏘련의 어느 대학인가 졸업하고 쏘련 중앙 조선인대표위원회에서 사업하다가 쓰딸린이 서거한후 4년간 옥살이를 하였다고 한다. 풀리여나온후《우수또부》에서 생활하다가 사망(꼬랴의 안해 사망원인은 모름) 했는데 필자가 취재할 때 그 자식들이 우수또부(?)에 살고있다고 했다. 그외 자식들은 아래와 같다. 둘째 김철수는 흑룡강성 이춘시 대풍구에서 살다가 1968년에 사망, 셋째 김갑수는 역시 흑룡강성 이춘시 대풍구에서 생활, 림업국의 자동차운전수로 일하다가 1990년에 사망. 큰딸 유바(쏘련이름)은 훈춘시 동알라에서 생활하다가 사망. 작은딸 김순덕(중국 태생)은 필자가 방문할 때 60살이고 남편 김려병은 67살로서 도문시 향상가에 살고있었다. 이 막내딸이 슬하에 두 아들과 두 딸을 두었는데 필자는 이들 막내 딸의 남편 황병만의 알선으로 훈춘시 춘화진에 가서 이들 가족을 만나보고 김치보의 투쟁력사와 가족사에 접하게 되였다. 황병만은 그때  연변일보사 인사처 처장사업을 하고있었었다. 유감스러운것은 김치보가 목숨처럼 아끼였던 50여점 문부가 뜻하지 않게 전부가 소각되였다는 점이다.  1961년 경에 김치보의 안해 김선녀는 막내 딸 김순덕의 집에 약 2년간 거처했는데 모든 문부를 가지고있었다. 1963년에 이 문부는 셋째 김갑수한테 넘어갔다. 1968년 말 문화대혁명기간에 김갑수의 친척되는분이 붙들려 투쟁을 맞게 되였다. 이 친척은 바로 김갑수의 집앞에 자리 잡고있었는데 이로하여 김갑수는 사상투쟁이 치렬하였다. 부득이한 형편에서 그는 어느날 저녁 50여점의 문부를 꺼내다가 부엌에서 태워버렸는데 가마안의 물이 끓어번졌다고 한다. 이는 필자가 지난 90년대초에 김순덕과 그의 일가족을 방문하고 들은 이야기와 해당자료들이다.   (주: 김치보의 셋째아들 김갑수가 말했다는데 의하면 리조말년에 조선에서는 이름난 사람들의 이름을 평양의 대동강변 바위절벽에 새기였다고 하는데 거기에 새겨진 김성준이 바로 김치보라고 한다.)                    
편자의 말:    오늘은 안중근 순국 100돐이 되는 잊을수 없는 날이다.  안중근 순국 100돐을 기념하면서 필자는 “안중근연구 빈구석”  (1~2~3)을 조글로에 륙속 올리게 된다. 안중근연구는 우리 피어린 항일투쟁사에서 한국을 중심으로 하여 국내외에서 활발히 벌어지고 있는 하나의 연구분야이고 그 성과는 이루다 말할수가 없다. 그러나  그 연구흐름에 있어서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에 의한 이등박문 격살이 흔히 안중근이 혼자서 주도하고 행동한 것으로만 흐르고 있어 유감을 자아내고 있다. 이등박문 격살은 러시아 연해주 울라지보스또크에 본부를 둔 항일독립단체 한민회의 소행이였고 그 총지휘는 이름난 항일독립운동가 김치보건만 연구가들은 흔히 이를 잘 모르거나  외면하여 안타까움을 주는 실정이다. 안중근연구의 빈구석이 아닐수 없다. 이에 필자는 지난 2009년 10월 안중근 할빈의거 100돐을 맞으면서 조글로에 한편의 글을 올린바 있다. 또, 이에 앞서 2005년이든지 “흑룡강신문”에 이미 실은 바도 있다. 오늘 다시 조글로에 올리면서 한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내외 관련연구가들의 주시를 기대하는 바이다. 이제 필자는 안중근연구의 빈구석을 전문 여러 편의 론문으로 완수하여 안중근연구에 힘을 보태고저 한다.         【안중근연구 빈구석】(1)      안중근의거 개인적 행동이 아닌 조직적 행동     1909년 안중근의사의 할빈의거를 두고 중국, 한국, 로씨야를 비롯한 학계에서는 같지 않은 견해가 존재하고있다. 이런 견해들 가운데서 안중근을 비롯한 우덕순 등 《대동공보》직원들이 중심이 돼 이뤄졌다는 견해와 최재형, 리범윤 등 의병련계속의 조직적거사라는 견해가 주축을 이루는것 같다. 허나 필자의 견해는 이와 다르다. 필자는 상기 두가지 견해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안중근의사의 할빈의거는 항일운동가 김치보를 회장으로 한 한민회 관계속의 조직적거사가 주축이고 이등박문  격살 때 파견된 소조가 안중근 할빈소조 뿐이 아닌 장춘, 심양 등 여러 개의 소조가 파견되였다는 것을 강조하고싶다. 이를 헤아리자면 무엇보다도 먼저 이등방문 격살 총지휘 김치보부터 말해야 할것이다.   김치보는 원적이 조선평양이고 1860년 음력 9월 17일 태생이다. 조선서는 김성준으로도 통하고 만주와 로씨야에서는 김감령으로도 불리웠다. 그의 경력으로 보면 김치보는 조선 리조말기의 4품관으로서 선후로 평양군수와 종성군수로 지내기도 했다. 지난 90년대 초반에 필자가 훈춘시 춘화진에 가서 김치보의 가족을 찾았을 때 이 사실을 다시 확인하여 보았다. 그들 가족에서는 김치보의 종성군 군수 임명장을 1968년도까지 줄곧 정히 건사하였었는데 창호지(백지)에 씌여진 임명장은 길이가 600미리메터(mm), 너비가 400미리메터였다고 한다. 임명장에는 구한말의 외부대신, 학부대신이였던 리완용의 도장(길이와 너비 각기 90미리메터)까지 찍히였단다. 1905년 일본침략자들에 의해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리완용이 《을사오적신》(乙巳五賊臣)으로 떠오르자 김치보의 분노는 절정에 달하였다. 그는 군수고 뭐고 죄다 내동맹이 치고 결연히 로씨야 연해주로 가서 신한촌에 항일독립단체 《한민회》를 꾸리고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한민회지휘부는 김치보가 독립운동후원을 목적으로 꾸린 《덕창약국》(德昌葯局)에 설치되고 김치보가 친히 한민회의 재무와 후근, 무기공급을 도맡았다. 한민회는 항일구국의 기치를 든 철저한 독립운동단체로서 안중근, 우덕순, 조군선, 김성화, 탁공규 등이 주요회원으로 나섰다. 1909년 새해 첫날 그들 12명은 회장 김치보와 함께 연해주 연추(즉 노오끼엽스크)부근의 카리란 마을(김치보가족사에는 신한촌으로 되여있다)에 모이였다. 자연히 1908년 한해동안의 로고가 회고되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토론은 나중에 결사대를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으며 일제놈들과 계속 싸우자는데로 모아졌다. 일이 이쯤 번져지자 안중근은 피로써 서약하는 혈맹을 맺자고 제의하여 나섰다. 모두가 호응할것은 불보듯 뻔하였다. 그들의 앞에는 인차 안중근이 품에서 꺼낸 태극기가 놓여졌다. 안중근이 먼저 조막도끼로 왼손무명지의 손마디를 자르고 흐르는 피로 태극기에 《조선독립》이란 네글자를 쓰고 서명하자 모두가 그대로 행하였다. 지금까지 력사자료 서술이 이러하다. 하지만 필자는 이에 짙은 의문점을 갖고있다. 김치보의 집에서 그의 한민회수하에서 활동을 벌린 안중근은 김치보와 19년의 격차를 두고있는데다가 회장인 김치보와의 사전토의도 없이 김치보가 앉은 자리에서 안중근이 먼저 단지혈맹을 제의하면서 주도했다는것은 믿기가 어렵다. 알고보면 김치보와 안중근은 뜻이 맞는 동지이자 막연한 지기였다. 그들은 나이 거의 20년 격차에도 불구하고 서로 어울려 돌아갔다. 어느덧 한민회에서 반일독립을 도모한지도 옹근 2년, 김치보가 울라지보스또크에서 조선인학교를 꾸리며 단체의 후근일에 몸을 잠굴 때 안중근은 그를 도와 대업을 받들며 매일 륙절포(권총)사격연습을 늦추지 않았다. 하도 이악스레 접어드니 술병을 공중에 던지고 쏘아도 백발백중이였다. 사격에 숙달하여 작은 산새들도 쏘아맞혔다는것은 이런 연유였다. 그러니 잠도 포근한 모양이였는데 잠잘 때면 베개를 뺴내여도 그는 세상모르고 잠만 잘잤다고 한다. 드디여 기회가 왔다. 1909년 10월 20일, 일본 추밀원 원장이고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이 로씨야의 재정대신 꼬꼬브체브를 만나려고 10월하순에 할빈에 간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김치보와 그의 동지들인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김성화, 탁공규, 황병길 등이 신한촌 덕창약국에 모여 이등박문을 죽여버릴 거사를 의논하였다. 이어 김치보를 총지휘로 하는 이등박문암살지휘부가 세워졌다. 하지만 이등박문의 할빈행이 어느길인가가 밝혀지지 않은데서 그들은 여러 개 소조로 나뉘여 할빈, 장춘, 심양쪽으로 가서 대기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등박문이 어디에서 나타나면 어디에서 죽여버릴판이였다. 력사는 안중근에게 기회를 내주었다. 이해(1909년) 10월 26일 오전, 이등박문은 끝내 할빈역두에서 안중근의 권총에 맞아죽었다. 이 희소식이 전해지자 김치보는 누구보다도 더 기뻐하였다. 이날을 위해 김치보는 안중근 등과 더불어 얼마나 신고하였는지 모른다. 지난 2년간 안중근은 줄곧 김치보의 집에 머무르면서 대사를 도모하며 피어린 항쟁에 나섰고 사격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었다. 허나 력사는 편면적으로 안중근에게만 기울어져 안중근이 주도하고 의거한것으로만 알려졌고 이등박문격사를 위해 김치보를 수령으로 하는 한민회에서 면밀히 짜고들었고 한민회 소속 여러 개 소조가 할빈, 장춘, 심양 등지로 파견되였다는것을 외면하고있다.
343    해당화 즐기신 인민의 총리 댓글:  조회:5496  추천:31  2010-03-24
                해당화 즐기신 인민의 총리   나는 지금  소흥의 주은래기념관 뜰안 해당화 나무가를 거닐고있다. 꽃피는 강남의 3월을 맞아 곱게곱게 피여난 해당화를 보노라니 인민의 총리—주은래총리를 한없이 그리게 된다. 주은래총리는 생전에 해당화를 그토록 사랑하신 일대 위인이시였다. 해마다 3월은 우리 북방으로 말해 가끔 눈도 내리는 겨울의 연장이라 하지만 북방 내 고향 연변에서 5000~6000리 떨어진 강남땅은 개나리, 목련화, 봄동백, 오얏꽃, 벚꽃, 유채꽃 등 뭇꽃들이 다투어 어여쁨을 뽐내는 호시절로 나타난다. 이 강남 뭇꽃들 중의 하나가 아름다운 해당화거늘 3월 하순의 해당화를 찾아 소흥의 후산풍경구, 회계산풍경구, 탑산풍경구, 주은래기념관을 두루 돌아 보며 꽃사진찍기에 정신을 팔아본다. 이 겨를에 이른것이 주은래 조부 옛집과 옛집구내 주은래기념관이고 기념관 뜰안에는 마침 해당나무 몇그루에 해당화가 환하게 피여올라 발목을 잡는다. 소흥 주은래기념관 관련 소개에 따르면 수도 북경의 중남해 서화청에는 해당나무가 수두룩하여 해마다 봄이면 아름답게 피여나고, 주은래총리는 나라 일로 분망한 속에서도 시간을 내여 부인 등영초와 더불어 해당나무 아래를 산책하며 해당화를 즐기셨다고 한다. 그런 모습의 주은래 부부한테는 해당나무 아래 산책이 단순한 산책을 위한 산책만이 아니였다. 부부 같이 식사를 나눌 시간도 별로 없는걸로 알려진 주은래총리는 그 소중한 시간을 타서 마음을 주고받으며 이 나라 중국인들 심목속에 꽃과 같이 순결하고 고귀한 인격의 상징으로 나타나셨으니 옛날의 도연명이 무릉도원을 그린 리상의 세계--“도화전기”를 써내고 국화를 지극히 사랑하며 자기 마음을 기탁했듯이 해당화 사랑속에 온 나라가 꽃피는 새봄이기를 바라는 총리 부부의 고상한 정조와 인생경지의 아름다운 추구를 담고있었다. 해당화사랑 일대 위인의 고상한 정조와 인생경지의 추구를 잘 보여주는 것이 주은래기념관 2층에 잘 배치된, 중남해 서화청 해당화 앞에서 찍은 주은래 부부의 정다운 사진모습이다. 사진 오른쪽에는 “해당이 고인을 그린다”(海棠思故人) 는 문자설명을 달아 우리 인민의 총리 주은래와 등영초의 위인 형상이 그지없이 돋보이게 한다. 그 감동은 그 무엇으로도 비길수 없으리만치 마음을 끄당기며 보는 이들의 발목을 잡고 놓질 않는다. 뜰안에 한창 만발한 해당화 구간과 더불어 발길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 가슴을 쾅쾅 울리는 감동의 구간이라 하겠다. 대자연의 아름다운 꽃들, 인공이 가미된 꽃들을 사랑하는 이들이면 누구나가 알수 있듯이 해당화는 장미과의 락엽 활엽 관목으로 알려지지만 여기 강남의 해당나무들은 한반도(조선반도)에서 말하는 해당나무와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해당나무의 자람 키나 가시를 이룬다는 점들이 그러한데 꽃의 경우를 보아도 여기 중국 강남에서는 3월을 잡아 이루 헤아릴수 없는 꽃망울들을 이루다가 3월 중순이후 만개하여 아름다운 3월의 꽃의 하나로 강남대지를 아름답게 수놓는다.  해당화 꽃 품종도 다양하여 대자연속 꽃과 화분꽃들은 붉은 꽃으로부터 연분홍꽃, 흰꽃, 노르스레꽃 등등 갖가지로 헤아려진다. 강남 해당화는 이같이 갖가지 아름다운 꽃으로 피여나고 있었지만 지난 3월 중순 이전까지만도 나는 강남속 소흥에 해당화가 있음을 알아보지 못하고 누가 알려줄수 있는 사람도 만나지 못하여 주은래기념관에서는 해당화하면 주은래총리를 떠올려 보지만 자연속에서는 해당화를 해마다 익숙히 대하면서도 그 이름을 알수가 없었다.  나 스스로 “망울꽃”이라 지어 부르니 만개하기전 숱한 꽃망울을 가진 꽃이라는 의미였다. 이 3월, 꽃을 즐기며 꽃사진에 열중하는 절강월수외국어대 서방언어학원의 한 녀교수한테서 해당화소개를 들어서야 해당화를 알아보게 된 나는 그동안 무지와 소홀로 인한 실수를 미봉하고저 련일 회계산풍경구 남하가와 도심의 탑산풍경구 꽃시장 등지를 찾으며 여러가지 자태의 해당화들을 이모저모로 찍어 보았다. 여기엔 나만의 이야기도 있다. 3월 18일 날 오전 강의가 끝나 후산복숭아절 보러 소흥 후산풍경구로 갔더니 나의 앞에 느닷없이 키가 한미터 정도되는 꽃나무가 나타났다. 그것도 외홀로 한그루로 자란것이 아니라 한포기내 숱한 그루를 가진 무더기 꽃나무, 이런 꽃나무에 이름모를 붉은 꽃이 많이도 피여 사진을 두어장 찍어 보았다. 귀가후 그날 찍은 사진을 정리하다가 인터넷에서 이 사진과 꼭같은 사진을 보게 되니 이 꽃이 내가 그토록 알고프던 해당화였음에랴. 뒤를 이어 며칠전 회계산풍경구 남하가 꽃사진찍기에 나섰다가 월수대 상기 녀교수를 만나 현지에서 남하가를 덮은 꽃들도 품종이 다른  해당화임을 알게 되였으니 수확이면 큰 수확이였지. “강남땅 소흥에도 해당화가 많고 많구나!” 뒤늦게 알게 된 해당화, 해당화를 알아보고  감탄한 나머지 그 이름을 모른데서 강남꽃 사진찍기에서 소외시했던 해당화에 미련을 두고 3월의 철을 놓일세라 여가시간을 타서 여기저기를 부지런히 다니며 갖가지 모습의 해당화를 디지털 카메라에 담고 담은 나, 그 와중에 소흥의 주은래기념관을 수차 찾았을 때 보았던 해당화와 인민의 총리—주은래총리가 상기되여 오늘 또 1~2교시가 끝나기 바쁘게 아들애를 데리고 주은래기념관을 다시 찾게 되였으니 이왕에 해당화하면 주은래총리와 이어 보며 해당화 배경속 주은래 부부사진이 너무도 인상적이였는데 오늘 또 찾아도  그 인상, 그 감수가 새롭기만 하다.   중남해 서화청에는 해당나무들이 많다. 1976년 1월 8일 서화청의 해당나무가 엄동에서도 새로운 생명을 배태하며 화창한 봄의 꽃피기를 기다리는데 그들의 주인은 총총히 떠나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으셨다. 수십년래 해당화는 피였다가는 지고 지였다가는 다시 피여나며 방불히 자기들을 사랑해 주던 주인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것 같았다.   해당화와 주은래 부부사진 문자화 소개의 첫 부분이다. 너무나도 가슴을 치는 글이여서 나는 이 첫부분을 몇번이나 보고 또 보았는지 모른다. 그러노라니 제1차 국공합작 시절, 황포군관학교 시절의 정치부 주임 주은래와 조선족 양림 상위 대장의 우정이 떠오른다. 그러노라니 중앙쏘베트 강서 서금시절 중공중앙국 서기 겸 로전위원회 주임 주은래와 로전위원회 참모장 양림이 떠오른다. 그러노라니 1930년대 후반 무한 팔로군판사처 책임 겸 국민혁명군 군사위원회 정치부으로서 조선의용대의 조직과 탄생에 불멸의 기여를 하신 주은래가 떠오른다. 팔로군, 신사군에서 활동하는 우리 조선의용군에 사랑과 배려를 돌려주신 주은래가 떠오른다. 그러노라니 40년대 초반의 중경시절 어느 한 축사에서 “자기의 학생시절과 황포군관학교시절 이후 혁명군대 시기에 모두 조선동지들과 같이 어울렸다”며 조선동지들을 높이 평가하신 주은래가 떠오른다. 그러면 경애하는 인민총리—주은래총리가 해당화 꽃속에서 환히 웃으시며 걸어 나오시며 이 나라 56개 형제민족을 포옹하며 나아가시는 것만 같다. 해마다 3월 해당화 피여 나는 시절이면 더더욱 주은래총리를 그리게 됨은 이 나라 인민들의 마음속에 영생하는 인민의 총리이기 때문이리라.   2010년 3월 23일                  
342    겨레발자취(37)-명주는 의천 대각국사님 구법 종착지 댓글:  조회:4449  추천:30  2010-03-17
【겨레발자취】(37)    명주는 의천 대각국사님 구법 종착지   1   천대산을 출발한 의천 대각국사님이 설두산의 설두사를 거쳐 오늘의 녕파—명주 이르고 다시 명주 근처의 아육왕사를 찾은것은 1086년 음력 5월 10일 경, 그로부터 근 1000년이 흘러 녕파시 지도에서 아육왕사를 찾아내고 녕파행에 오른것은 2009년 2월 4일의 일이다. 아육왕사가 어디인지 어느 방향인지 분간할수가 없어 녕파역 버스시발점에서 무작정 아육왕사 쪽으로 가는 버스를 잡아타니 아육왕사는 녕파에서 동쪽으로 고작 20여킬로미터 되는 녕파시 은현 동향보당 높은산 아래 기슭 큰길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나와 아들애가 버스에서 내려 동남불국이라고 불리우는 아육왕사 산문(山門)에 들어서니 시침은 벌써 오후 1시를 가리킨다. 산문내 좁다란 구간을 지나 사찰내에 들어서면 산문안 왼쪽구간이 환히 펼쳐지며 널다란 방생지가 나타나고 방생지와 접한 첫 사찰건물이 웅장한 천왕전. 천왕전 뒤 사찰이 대웅보전인데 천왕전과 대웅보전 사이 좁은 구간에 수령을 알수 없는 굉장한 두 그루의 고목—녹나무가 잇어 옛스러운 색채를 더해 준다. 아육왕사 안내글을 보면 아육왕사는 405년이 아닌 서진 태강(西晋太康)3년 , 즉 기원 282년에 처음 세워진것으로 나타난다. 예가 “팔길상지”(八吉祥地)라고 하는걸 보아 대단히 길하고 상서로운 땅으로 보이는데 사찰내에는 인도의 아쇼카왕이 만들었다는 8만 4천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가 모셔져 그 의미를 더해준다. 이런 사찰을 기원 522년에 량나라 무제가 아육왕사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남송시절에 벌써 “선원오산”(禪院五山)중 하나로 이름이 뜨르르하고 1983년에 국무원에서 전국 한족지구 불교중점사찰로 확정하니 아육왕사는 강남땅서 내가 본 그 어느 불교사찰들에  비해 사찰로의 방대한 규모를 갖춤이 돋보인다. 아육왕사 평면도가 사찰의 방대함을 잘 알린다. 먼저 보는 바와같이 담장밖 큰길쪽으로부터 산아래 쪽으로 방생지, 천왕전, 대웅보전, 사리전(舍利殿), 장경루가 차례로 들어서고 주체사찰들 오른쪽으로는 념불청, 사리단,선각당(先覺堂), 대비각 등이, 왼쪽으로는 조사전(祖師殿), 대단(大壇), 운수당(云水堂), 벽오헌(碧梧軒),승은당(承恩堂) 등 하많은 사찰부서들이 허리를 펴며 일떠섰으니 이처럼 방대한 규모의 불교사찰은 강남에 온 이래 처음 보는 진풍경이였다.   2   나와 아들애는 사찰 이모저모를 부지런히 돌며 보고보았으나 말타고 꽃구경하기지  사찰의 진면모를 제대로 보아내기는 자못 어려웠다. 더구나 의천스님이요, 의통스님이요 하는 고려명승들에 대해서 사찰내 스님들이 모르고 있음이 안타깝기만 하다. 점잖고 유식해 보이는 한 젊은 스님과 아육왕사에서 왜 자기 사찰의 대외교류사도 모르는가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건네니 류례없던 문화대혁명 속에서 마구 파괴된 사찰을  개혁개방후 복구하고 지금도 의연히 복구중이여서 많은 력사자료들이 소실되여 말이 아니라고 한다. 이에 리해할만하다며 북송과 고려시절, 고려의 명승들인 의통스님이나 의천스님들이 아육왕사와 관련교류를 가지고 천대종의 16대조사인 고려 의통스님은 아육왕사에서 입적한 줄로 안다고 하니 앞으로 이에 꼭 주의를 돌려 가겠다고 내심을 내비친다. 사실 귀국길 음력 5월 10일 경에 명주에 이른 의천 대각국사님은 고려로 떠나는 배를 기다려야 했다. 그사이 시간도 있고하여 의천스님은 명주에서 20여킬로미터 떨어진 이름난 사찰—아육왕사를 찾았다가 일대  명승—대각회련(1009-1090)님을 만난다. 회련스님으로 말하면 계행에 뛰여난 운문종의 승려로서 북송시절 북송의 제4대 황제인 인종황제의 사랑으로 서울인 개봉 최초의 선종사찰로 알려지는 시방정인선원에 머물면서 황제와 조정의 대신들인 당대의 문장가 소식 등과 널리 교류할 기회를 가지였다. 그러던 회련스님이 1085년 은퇴하여 강남지방으로 내려오게 되였는데 이 소식을 알게 된 사명지방을 맡아 관리하던 사명군수가 회련스님을 아육왕사에서 만년을 보내도록 깊은 배려를  돌려 주었다. 바로 의천스님이 명주에 나타나기 1년전의 일이다.   3   아육왕사를 찾은 의천 대각국사는 깍듯한 례절로 회련스님을 대하면서 폭넓은 교류를 가진다. 음력 5월 12일 의천과 그의 일행이 명주를 떠나게 되자 짧은 기간이나마 지극한 정을 나눈 회련스님은 석별의 정을 이기지 못해 귀국길 안녕을 바라는 시 한수를 지어 의천스님께 드리였다.   에잇 쯔쯔 상하동서의 네 귀퉁이를 끊어버리니 들은 자 그 누가 삶을 귀둥하게 여기랴 오직 계림에 승통스님 계시여서 해동의 큰 보위를 아끼지 않고 머리와 수염 깎고 가사를 입었도다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법을 희롱하게 되니 하하하 동해 바다 큰배는 파도에도 안전하네   회련스님은 그러고도 마음을 다하지 못한것 같아 여러 고승스님들과 함께 명주를 떠나 귀국배에 오르는 의천 일행을 멀리멀리 바랜다. 아육왕사에서 동으로 더 나아가면 주산군도로 넘어가는 부두였다. 이밖에 북송 조정에서 파견한 주객원외랑 양걸이 시종 의천 대각국사의 안내를 맡아 나섰으니 의천스님의 일거일동에서 일대 대각국사의 위인됨을 깊이 느낄수가 있었다. 고로 양걸도 석별이 아쉬워 의천 대각국사를 찬미하는 꽤나 긴 시 한수를 지었으니 그는 시에서  “동방 고려국에 고승이 계시는데 순수한 도덕을 오래도록 입으셨”다고 쓰면서 그 시 해석에서 “1년 사이에 화엄종의 현수스님의 리론, 법상종의 자은 규기스님의 가르침, 선종, 률종, 천대종의 가르침을 통달하였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4   실로 의천 대각국사는 1085년 음력 5월 2일 북송의 판교진(오늘의 산동성 교주시)에  등륙해서부터 밀주, 해주, 숙주를 거쳐 서울 개봉에 이르고 다시 대운하를 따라 회수, 사수, 진강, 운주, 항주를, 또 천대산, 설두산, 명주를 거쳐 귀국선에 오르기까지 북송에서 보낸 14개월 기간 50여명의 고승들을 만나 배우며 교류하며 항주일대 화엄종, 천대종의 중흥에 불멸의 기여를 했다. 그러다가 1086년 음력 5월 12일에 명주항을 떠나 관음성지인 주산군도 보타산에 이르고, 보타산에서 계절풍을 기다리며 며칠간 묵다가 드디여 보타산을 출발해 망망바다에 나서게 되니 중한 고대불교문화교류에 기여한 의천스님의 업적은  대서특서할만도 하다. 그래서, 그래서 나는 그젯날 명주로 불리운 녕파의 아육왕사를 찾아 의천 대각국사의 발자취를 추적하며 스님의 발자취 따라 이제 강남을 떠나 산동 판교진으로, 하남 개봉으로, 강소 진강으로 달려 갈것이다. 고려명승 의천 대각국사님의 중국내 발자취 기행, 연구문집을 기어이 펴내고야 말것이다.   2010년 1월 21일      
341    목련화는 울고 있다 댓글:  조회:4040  추천:34  2010-03-12
                   목련화는 울고 있다     3월 10일 , 장장 열흘만에 해를 보는 날이다. 이날 오전 2교시 교수를 마치고 아들애와 같이 시내에 가고 시가지 남쪽변두리의 아름다운 남하를 따라 산책하다가  눈앞에 펼쳐지는 목련화 백련의 현실에 놀라마지 않았다. 의례 곱게곱게 피여 있거나 희디힌 옷을 입으며 망울을 터뜨려야 할 백련들이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가까이서 자세히 관찰해 보니 선참으로 활짝 피여나 생기로 넘치던 꽃들은 거의 전부가 누우렇게 죽어버리고 망울상태로 피여나려던 꽃망울들은 누르끄레 반점들이 박히여 말이 아니다. (오호, 3월 9일 새벽 최저기온이 령하 3도로 떨어지며 산간지대들에 큰눈이 내리더니 된 얼굼을 맞았구나. 목련화 백련들은 강남 령하의 추위를 피해가지 못하는구나.) 나는 사랑하는 자식이 뜻밖의 추위를 만나 떠는것처럼 가슴이 쓰려남을 어찌할수 없었다. 몇해전에 강남에 와서 월수외국어대 한국어과에서 교편을 잡게 된후 나는 수년을 하루와 같이 강남 사계절을 관찰하며 보이는 사계절 꽃들을 전부 사진에 담으며 강남꽃들에 무척이나 빠져 버렸는데 강남 목련화는 지극히 사랑하는 꽃들중의 하나였다. 고운 흰살결 안고 활짝 핀 목련화 백련은 순결하고 순박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나에게 안기여 들었으니 나만이 아닌 한국의 경우 목련화처럼 시인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꽃은 없다고 할 정도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는 강남에 온후 해마다 목련화 피여나는 계절이면 목련화들을 사진에 담고 또 담으며 진한 사랑을 물부어왔다. 올해 목련화 백련 첫 꽃을 대한것은 지난 2월 9일 방룡남부부와 우리 부부에 아들애까지 후산풍경구 산행유람에 나섰을 때였다. 해마다 2월 하순이면 피여나기 시작하여 3월 한달을 목련화의 달로 부를만치 내내 련달아 피여나는데 후산풍경구의 목련화 백련 선구자는 벌써 터진 망울 상태요, 피여난 꽃상태였으니 다른 곳에 비해 열흘이나 앞당기고 있었다. 그런고로 나는 강남의 이 봄에 목련화 개화에 무척 신경을 써왔다. 보편적으로 2월 20일 직후부터 피여나는 시가지 목련화들과 월수대 캠퍼스의 목련화들, 회계산 대우릉 구간과 회계산 서쪽아래 남하의 목련화들이 말그대로 순결하고 순박하고 우아한 모습 그대로 나의 디카에 고스란히 담겨졌다. 그런데 비극의 조짐이 알려진다. 3월 1일부터 강남 소흥의 날씨가 흐리며 때아닌 찬비가 때때로 내리기 시작하더니 며칠이고 지꿎게 끝이 없다. 3월 초순 후반엔 최저기온이 령상 3도로, 2도로, 1도로 떨어지다가 3월 8일엔 령하권으로 곤두박질한다. 강남으로 말해 겨울이 다시 돌아옴이니 3월 9일에는 끝끝내 최저기온이 령하 3도로 떨어지며 찬비가 눈으로 번지여 이곳 회계산을 망라한 산간지대에 큰눈으로 내리니 겨울꽃이 아니요, 추위를 이겨내는 동백꽃류나 매화류가 아닌 목련화는 령하3도의 된추위 강타를 이겨낼수가 없다. 보는바와 같이 남하가는 한두그루가 아니라 거의 전부의 목련화 백련들이 죽어있거나 울고 있다.  남하뿐이 아닌 소흥의 목련화들의 불쌍한 신세.   3월 11일은 기온이 20도를 웃돌아 화창한 봄날이 다시 강남땅을 찾아왔다. 사유로 오전 2교시 관련 교수를 끝내고 소흥시가지로 나가보니 수풀로 우거진 도시의 도시광장 목련화들도 그상이 장상이다. 그렇게도 3월을 장식하며 아름다운 자태로 발목을 잡던 목련화 백련은 생기를 잃고있었다. 얼굼이 경한 꽃이라해도 겉을 둘러싼 꽃잎들은 누르끄레한  반점들로 얼룩져 있으니 뜻하지 않은 한류—찬기운이 빚어낸 비애가 아닐수 없다. 불행중 다행은 목련화의 홍련들은 백련보다 개화가 조금 늦은데서 얼굼의 피해를  그다지 입지 않은것. 게다가 망울상태로 터지고 흐드러지게 피여나지 않은 백련들은 겉 꽃잎들이 피해를 입은 정도여서 날씨가 다시 따뜻해지자 상처입은 몸으로도 피여나는 강의한 모습을 보인다. 강남으로 말해 령하권은 한겨울의 된추위를 말하지만 이번 찬기운 남하추위도 바람막이 양지바른 곳이거나 청사들로 둘러싸인 캠퍼스내 백련들에 그닥 영향을 미치지 못하여 이런 백련들은 다시 찾아온 화창한 날을 맏아 만개를 시작한다. 해도해도 이런 류의 목련화 백련은 전반 목련화중의 소수에 지나지 않으니 올해 3월은 백련 목련화가 3월을 아름답게 덮는 달이 아닌 무더기 죽음의 달, 비애의 달, 울고있는 달이렸다. 내 그래서 마음이 쓰리고 3월 12일이후 또다시 찬기온이 몰린다니 마음을 졸이거니 울고있는 목련화여, 어서 상처 가시며 피여나렴아, 아니 천천히 피여나 다시 추위에 휘말려들지 말려므나, 아름다운 꽃으로 활짝 피여나 3월초순 후반의 비애를 가시여 가렴아, 속으로 기대 또 기대를 가져 본다. 겨울은 필경 새봄에 자리를 내기 마련이거늘, 찬기운은 필경 꽃샘추위에 지나지 않거늘……   2010년 3월 12일                      
340    겨레발자취(36)-설두산 설두사서 의천님 떠올려보다 댓글:  조회:4319  추천:28  2010-03-05
【겨레발자취】(36)   설두산  설두사서  의천님 떠올려보다        1   2009년 11월 13일, 항주의 현장님이 승용차를 몰고 소흥 절강월수외국어대로 왔고 우린 다시 녕파 봉화의 계구(溪口)진으로 달리였다. 계구진은 장개석어른의 고향으로 해내외에 널리 알려진 력사의 고장으로서 이 고장 사명산의 설두산에 고려명승 의천 대각국사가 귀국길에 참배한 설두사가 있었다. 천대산에 이은 설두산 의천 대각국사님 발자취 답사라지만 설두사를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난다.  절강으로 온지도 3~4년이 잘된다. 이 몇년래 의천 대각국사님이 참배한 설두사에 주의를 돌리였지만 설두사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알수가 없어야지. 그러던차 2009년 10월 5일 온가족과 더불어 두번째로 장개석고향 유람길에 올라 보았는데 장개석과 아들 장경국의 발자취 어린 설두산 산정의 천길 천장암(千丈岩)폭포와 묘고대(妙高臺) 부근 산정평지에 일어선 불교사찰이 설두사라고 하지 않는가. 설두사라면 근 1000년전 고려명승 의천 대각국사가 참배한 사찰을 말하는데 려행사 유람팀을 따라 설두산에 오르니 그날 관광코스가 아닌 설두사를 돌아 볼 시간상 여유가 주어지지 않는다. 설두사를 곁에 두고 지나쳐야 하는 그때 그 마음 어떠했는지는 나만이 알뿐이다. 두어시간을 달렸던지, 녕파시 구내 봉화시 계구진 설두산풍경구 정문이 눈앞에 나타난다. 때는 오전 11시경, 우린 설두산풍경구 정문 주차장에 승용차를 세우고 설두산행 관광버스를 바꾸어 탔다. 두루 문표만도 매인당 인민페 200원을 넘었으나 우린 개의치 않았다. 관광버스는 11킬로미터 산길을 한식경에 조여준다. 관광버스가 멈추어선 곳은 장개석과 송미령, 장경국이 일찍 거처, 산책, 휴식을 취하던 천길 벼랑가 묘고대 주차장. 묘고대와 묘고대에서 서북으로 약 5킬로미터 떨어진 이름난 폭포 관광명승지 삼은담(三隱潭)을 도보로 유람하고 돌아오니 오후 2시가 훨씬 넘어선 시점. 우리가 걸음을 멈춘 자리는 설두산 관광명승지의 산정평지로서 이곳 가까이에 천장암폭포와 묘고대가 있고 서안사변후 장학량장군 연금지와 중국내 제5대 불교명산 -- 미륵도장이라 불리우는 설두사 등이 있어 관광과 휴식의 리상적인 명소였다.        2   배가 촐촐해 난다.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이라고 어느 농가식당에서 대충 식사를 하고는  장개석과 비슷하게 생긴 분장장개석과 분장 장개석비서와 함께 사진을 찍으니 기분이 별로이다. 이어 설두사 쪽으로 움직이니 “사명제1산”이라는 금빛편액이 설두사 첫 정문에 걸리고, 드디여 설두사를 찾았다는 흥겨움이 가슴을 들먹인다. 설두사 정문에 들어서니 또 우람진 담장이 앞을 막아선다. 담장에는 “미륵도장”(彌勒道場)이라는 중문 네 글자가 박히여 여기가 둘레 400킬로미터를 이루는 절강의 명산 사명산, 사명산은 280개 봉우리로 이루어지고 봉화 구역에만 70봉우리 , 70봉우리 중 가장 이름난 봉우리가 설두산임을 알리어 주고있었다. 이런 이름난 설두산에 미륵도장 설두사가 있으니 설두사의 사찰시작은 유구하여 불교가 봉화에 들어오던 동진시기 설두산 첫 “폭포원”으로 거스른다. 사찰다운 사찰이 수건된것은 기원 841년으로 알려진다. 그후 세월속에서 수차 수건을 거치며 소실되고 하다가 1163년에 다시 확건되어 남송시기 천하선종(禪宗)10사찰중의 하나로 떠오른다. 1288년과 1643년에 두차례 또 훼멸되였다가 청나라 순치년간에 복원, 20세기 60년대 전례없는 문화대혁명 속에서 다시 훼멸의 운명을 거듭하니 오늘의 사찰규모로 수건된것은 1986년이라 한다. 설두사의 흐름으로 보아 고려명승 의천 대각국사가 천대산을 거쳐 사명산 설두사를 참배하던 1086년 여름은 999년 북송황제 송진종 조항이 “설두자성선사”(雪竇資聖禪寺)사찰편액을 하사한 뒤여서 설두사가 흥성의 일로를 걷던 시절이였다.        3   미륵도장 담장안에는 불교사찰의 기본을 이루는 미륵보전과 천왕전, 대웅보전, 장경루(藏經樓)가 차례로 나타났다. 인상적인 것은 미륵보전 앞 하늘을 떠인 두 그루 은행나무 고목에 이어 나타나는 장경루 앞 두 그루 녹나무라 할까. 이 두 그루의 녹나무는 1936년 화청지—서안사변의 주인공이였던 장학량장군이 도로 장개석에 의해 연금되여 설두산에 거처(1937.1ㅡ9)할 때 늘 설두사를 거닐다가 심어놓은 녹나무였다. 장학량장군을 연금한 장개석도 고향 계구로 오면 늘 설두사를 거닐군 하였다나. 하나 또 하나 이어서는 불교사찰 구내를 벗어나니 사방이 훤히 트인 넓고넓은 미륵대불 구간이다. 천하제1이라는 미륵대불은 평지에서 언덕따라 산아래 더기에 자리잡았는데 멀리에서도 그 웅장함이 그대로 안겨 들었다. 그때는 이미 오후  3시를 넘긴 때라서 온 하루 흐리던 날씨가 거무칙칙 번져오다가 차가운 비를 내리며 11월 잡아 첫 찬기운이 극성하여 카메라를 든 손이 어찌도 시린지 사진한장을 찍기도 쉽지가 않았다. 미륵대불 앞 올리막 층계를 올라 미륵대불 아래에 서니 그 웅장함은 이루 형용할수가 없다. 미륵대불의 전체 높이가 56.74미터, 그중 좌불의 높이 33미터, 불상존안의 높이만도 10.5미터, 미륵대불 전체 차지면적이 6600평방미터를 이룬다니 그 규모의 방대함을 알려주고도 남음이 있다. 미륵대불의 밑부분은 3~4 계단 높이를 이루는 원형모양으로 되여 있는데 유람객들은 제일 밑변에서 실내계단을 따라 미륵대불—좌불 발치에까지 오를수가 있다. 좌불의 몸체도 엄청이여서 좌불은 1200톤의 강재결구와 석, 청동으로 완미하게 주조되여 황금빛을 뿌리고있었다. 미륵대불 발치에서 설두사 산정의 평지와 그 평지에 자리잡은 설두사를 내려다보면 그 장쾌한 풍경앞에 뉘 감탄하지 않으랴 싶다. 그만치 미륵대불은 산정의 평지 설두사보다 높이높이 솟아 있는데 미륵대불을 이루는 수치 또한 보다 감탄을 자아낸다.   ㅡ 미륵대불의 전체높이 56.74미터는 56억 7천만년후에 미륵이 성불(成佛)이 되여 내림을 나타낸다. ㅡ 미륵대불의 불상높이 33미터는 미륵의 신체 33층천(層天)을 나타낸다. 봉화는 미륵불이 전세(轉世)했다는 불가의 땅이여서 봉화에서 전해지는 포대(布袋)미륵이 원적(圓寂)한 날이 3월 3일이기도 하다. ㅡ 미륵대불을 받쳐주는 56송이 련꽃은 중화  56개민족의 조화로운 공존을 나타낸다.   관련 수치로 보는 설두산 미륵대불, 눈으로 보는 미륵대불의 웅장함---그야말로 장관, 신성, 웅위, 높고큼을 일체화한 천하 미륵대불의 으뜸이 아닐수가 없다.        4   나와 현장님은 미륵대불을 받드는 56개 련꽃의 유람대에서 설두산 산정의 평지를 한눈에 내려다보면서 의천 대각국사님을 다시 화제로 삼아보았다. 설두산 산정에서 설두사가 보이는 평지를 내려다 보면서 의천 대각국사님이 무엇을 생각하였을까, 우리는 하나같이 귀국을 앞둔 의천 대각국사님이 천대산의 불룡---진각사 지자대사 육신탑 앞에서  서원한 것처럼 “고향에 돌아가면 목숨을 다해 크게 떨쳐 대사의 중생을 위한 가르침 베푸신 로고에 보답하고자”결의로 가슴을 불태웠을 거라고 입을 모았다. 진정 그러했으리라. 의천 대각국사님이 참배한 적이 있는 설두산 설두사는 절강 봉화의 사명산 70봉우리 중 가장 이름난 봉우리—설두산의 정상평지에 자리잡은  사찰이요, 절동(浙東) 제1명사찰(名刹)로 불리우니, 미륵의 도장으로도 이름높은 설두사거늘 고려명승 의천 대각국사님이 어찌 참배하지 않으리오. 설두사에서 의천님 떠올려보는 마음 뜨겁기만 하다. 다시 보면--설두산 설두사를 한품에 안은 강남의 사명산은 둘레가 400킬로미터, 봉우리만 280개, 절동 이름난 관광성지로 받들리는 봉화 계구진과 설두산 주위는 사명산 뭇산들로 둘러있으니 사명산 남록에 위치한 설두산에서 봉화현성까지는 서북 15킬로미터요, 녕파까지 서남 39킬로미터라 의천 대각국사님이 설두사에서 녕파, 그젯날 명주까지 39킬로미터 거리도 도보로 행했다니 그 옛날, 그 모습이 우렷히 안기여 든다. 어느덧 오후시간도 4시를 가리킨다. 설두산 설두사를 떠나야만 하는 우리는 찬바람, 찬기운 속에서 거닐다가 산아래 설두산 정문앞에서 다시 기념사진을 남겨서야 직성이 조금이나마 풀리는것 같다. 이제 가면 언제 다시 설두산에 올라 볼까, 언제 다시 설두사에서 설두사 참배 의천님 떠올려 볼까~~그러노라니 가슴이 아련히 아리어온다.   2010년 1월 13일            
339    인생소감--개학 첫날 한국 력사문화 가르치면서 댓글:  조회:4873  추천:28  2010-03-02
【인생소감】     개학 첫날  한국 력사문화  가르치면서     어제 3월 1일부터 강남에 찬비가 내리며 기온이 뚝 떨어지지만 개학 첫날부터 중국애들에게 한국 력사, 한국 문화를 가르치는 내 마음 후더워만 난다. 정기 흐르는 맑은 두눈으로 교단의 나를 응시하며 한국 력사, 한국 문화에 귀를 기울리는 중국 대학생들, 그애들을 대할 때면 온 몸에 샘솟는 새힘을 느끼며 청춘에 사는 기분으로 둥둥 뜬다. 벌써 몇해던가, 은사님 류은종교수님의 부름을 받고 강남땅 절강월수외국어대에 와서 대학의 교단에 나선지 엊그제 같은데 어언속에 햇수로 5년철—만 4년해를 잡아가니 정말이지 흐르는 세월이 살같기만 하다. 속셈을 터놓아 강남땅에서 중국애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수생활 신나는 일이기는 하지만 대학졸업후 근 30년세월 꾸준히 우리 력사와 씨름해 온 나로서는 하나의 고역으로 느껴지기가 일쑤였다. 춘하추동 많은 시간을 한국어교수에 바쳐야 할 때면 그만큼 우리 력사연구와 글쓰기를 멈추어야 하니 흘러버리는 세월이 아까워 죽겠다. 살기 위한 마음에 없던 선생노릇이여서 그러한가부다. 하면서도 자기 글과 말도 아닌 외국어—한국어 글쓰기와 말을 배우겠다며 시간마다 선생의 교수를 명심하는 중국애들을 볼 때면 흔들리던 마음이 누그러지며 저애들을 위해서라도, 중한 문화교류의 현장에서 뛸 저애들이 앞날을 위해서라도 한국어교수를 잘해야겠다는 다짐으로 가슴을 불태우군 하였다. 그런 속에 한해 또 한해가 흐르며 만 4년철을 잡더니 오늘은 2010년의 봄철 새학기를 맞이하게 되였다. 개학 이튿날인 3월 2일 오늘도 하늘은 찌뿌둥 자주 찬비를 내리 드리운다. 돌이켜 보면 강남의 한국어과 대학교수생활에서도 가장 신나는 일은 그래도 한국어열독과 한국문화를 가르치는 일인것 같다. 한국 조선시대의 력사인물과 력사사건속에 파묻혀야 하는 한국어열독과는 언제든지 싫은 줄 모르겠는데 중국애들에게 500여년 조선사의 가장 위대한 임금—세종대왕,  500여년 조선사의 가장 위대한 애국장령 이순신장군, 할빈역에서 조선침략의 원흉 이또 히로부미—이등박문을 격살한 의사 안중근, 광복의 그날 바라며 한생을 싸운 훗날의 상해림시정부 주석 김구선생, 한국의 첫 녀서예화가, 한국의 제일 어머니로 불리우는 신사임당, 조선이란 새 나라를 세운 조선조의 첫 임금—이성계, 한글운동의 탁월한 선구자 주시경선생 등등 쟁쟁한 분들을 가르칠 때면 진짜 성수가 난다. 이에 따라 한국어열독과를 통해 배운 조선시대의 인물들속에서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이요, 한국의 제일 어머니 신사임당이요, 한글의 중흥시조이기도 한 주시경이요 하면서 졸업론문으로 써내는 애들이 늘어가니 대학의 교단에서 한국어과 교수로 나선 마음 그지없이 뿌듯하기만 하다. 마음 뿌듯함은 이에만 그치지 않는다. 절강월수외국어대 한국어과에서 지금껏 한국문화 강의는 의례 나의 몫인데 안해와 나의 편저로 된 “한국문화산책”교과서로 대학생들에게 한국의 지리적 위치, 한국의 례절, 한국의 복장—한복, 한국의 음식, 한국의 민속놀이, 한민족의 력사 등등을 강의할 때면 매번 2시간 강의--90분이 언제 지나가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을 알리고  한민족(조선민족)을 중국애들에게 알리는 보람찬  교수여서 그러한가부다. 2010년 이해 9월 새학기 잡아 나는 또 이곳 대학생들에게 송나라와 고려와의 관계를 주선으로 하는 “중한 고대문화교류사” 첫 강의에 나서게 된다. 이번 학기내에 새 교과서를 만들어야 하니 이다지도 신날수가 있을까. 한국력사요, 문화요, 중한교류요 하는 이런 강의는 우리 력사와 씨름하는 나의 직성에 어울리는 일이고, 마음이 가는 일이고, 하고픈 일이여서 해도해도 또 하고만 프다. 개학 첫날부터 지난 지난 학기 2007년 07학번 60여명 대학생들에 이어 08학번 20여명 대학생들에게 한국문화를 다시 교수하게 된 기회를 가지게 되니 기분이 실로 짱이다. 강남의 대학생들이 맑은 정신으로 강의를 들으며 한국문화에 빠져드니 이 아니 가슴 뜨거울까. 오늘도 그러하고 래일도 그러할 절강월수외국어대 한국어과 성스런 교수생활, 힘자라는데까지 뛰고 또 뛰여 보리라고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그런 속에 황하이남 광활한 대지의 겨레발자취 좇아 가고 또 가리라고 채찍질해 본다.   경인년 3월 2일 강남 두앵원에서            
338    겨레발자취(35)-지지대사 육신탑 찾은 의천 대각국사님 댓글:  조회:4222  추천:26  2010-02-28
【겨레발자취】(35)            지자대사 육신탑 찾은 의천  대각국사님      1   천대산 국청사 북쪽 5킬로미터 되는 곳에 자리잡은 산등성이 불룡은 지자대사가 천대산에 이르러 천대종을 처음으로 하나의 종파로 일떠세운 발상지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이런 불룡에 고려명승 의천 대각국사가 귀국길에 올라 지자대사 육신탑을 참배하고, 근 1000년이 흐른 오늘 천대산 국청사와 신라원자리 답사를 마친 우리가 의천 대각국사의 발자취 따라 진각사를 찾아간다. 승용차는 국청사 오른쪽 골안을 따라 앞으로 달리는데 골안 따라 아스팔트길은 갈수록 고도를 높이다가 구비구비 갈지자를 이루며 펼쳐진다. 도중에 불룡으로 오르는 옛 소로길들이 가끔 나타나 우리를 옛날의 그 시절로 끌어간다. “이 소로길 따라 지자대사 육신탑에 오르는 의천 대각국사님을 보는것 같습니다.” “같은 마음이지. 저 앞에 의천 대각국사님이 우릴 보고 반가히 손을 젓는 환영이 떠오르는구만!” 나와 현장님은 서로 주고받으며 의천 대각국사님을 떠올려 보았다. 의천 대각국사가 송나라에서 많은 고승들을 만나며 왕성한 활동을 펼치여 갈 때 고려 선종이 모후의 간절한 뜻을 받들어 송나라 황실에 대각국사의 귀국을 바란다는 글월을 보내 왔다고 한다. 대각국사는 이에 응할수 밖에 없어 항주에서  배편으로 송나라 서울 변경에 이르게 된다. 변경이란 오늘의 하남 개봉을 가리킨다. 이 날이 1096년 2월 13일이라고 하는데 항주의 정원법사가 전송차 동승하게 된다. 의천 대각국사는 변경에 이른다음 계주의 진여사에 가서 장수법사 자예의 사리탑에 참배하는 모습을 보이고 백금 16성(星)을 내여 사리탑을 수건케 한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것이 천대산행이다. 의천님은 자기 나라 고려에 돌아가면 고려에 결심코 천대교학을 선양하겠다며 다지고 다진다. 그래서 행한것이 천대산으로 향한 걸음인데 국청사에 들러 국청사의 이모저모를 돌아보며 신라원자리에서 쉬이 떠날줄 모르다가 도보로 소로길을 조이며 불룡에 오른다. 그 모습이 근  1000년 세월이 흐른 오늘 나와 현장님께 비껴오며 우리 사이 대화를 이어준다.   2   승용차는 어느덧 10리 산길을 조이더니 우리를 불룡이라 불리우는 산등성이에 이르게 한다. 승용차에서 내리니 정상이 바로 눈앞인데 정상아래로 산등성이가 뻗어 내린다. 산등성이와 량켠은 흔히 밭들이여서 나무들이 별반 없이 밋밋한 모양을 이룬다. 그에 반해 불룡의 정상부로 보이는 마루 주위는 온통 수풀이 우거져 숙연한 감을 느끼게 한다. 뒤늦게야 안바이지만 산의 정상부는 지자대사 육신탑을 모신 “진각강사”(眞覺講寺)였다. 진각사에 오르자면 아스팔트 길에서 벗어나 정상부를 따라 돌을 깐 소로길을 따라 이저리 올라야 했는데 산에 오르는 의천 대각국사의 모습이 다시 어리여 오는 대목이다. 밋밋한 여기 소로길을 지나니 소로길은 왼쪽으로 구비를 타며 로송들과 대나무숲  우거진 아늑한 숲속이 나타난다. 그 숲속에 옛스러운 사찰이 비껴오니 그게 바로 우리가 그토록 찾고저 했던 진각사였다. 진각사는 천대종의 시조 지자대사 육신탑을 모신 사찰로 하여 탑원사(塔元寺) 또는 탑두사(塔頭寺)로도 불리였다고 관련 자료들은 말한다. 1086년 여름 의천 대각국사가 이곳 불룡에 나타났을 때는 대자사로 이름이 바뀌여 있었다고 한다. 그런 진각사 정문에 들어서니 각기 300년을 기록하는 계화나무 두 그루가 의좋은 쌍둥이처럼 서 있고 뜰안 정면으로 단층 지자육신탑이 마주하고 있었다. 허리를 구부정한 스님 차림의 로부인이 어른거려 여기가 지지대사 육신을 모신 진각사라고 귀뜸하는상 싶다. 현장님은 로부인이 산중에서 수고한다며 인민페 200원을 드리며 안녕을 기원한다. 우리는 조용한 걸음으로 지자대사 육신탑안에 들어갔다. 흰 대리석 모양의 백석 지자대사 육신탑이 선참 시야에 안겨드는 속에 탑의 높이가 7미터이고 륙면삼급(六面三級)으로 이루어졌음을 인차 알수가 있었다. 탑에는 지자대사의 금빛 화상이 모셔지고 조박초 중국불교협회 회장의 “천대지자대사진신보탑” (天臺智者大師眞身寶塔) 액면글이 새겨졌다면 대사의 유체는 탑아래에 모셔지고 탑내 정면과 좌우 삼면 벽에는 천대종 력대 17인 조사(祖師)의 화상이 문자설명과 함께 걸리였다. 유감스럽게도 여기 17인조사 화상에 주의를 돌리지 못한데서 천대종 16대조사로 알려지는 고려출신 의통스님(927~988)의 화상을 헤아려 보지 못한 것, 두고두고 후회가 한가슴 괴여오른다.   3   1086년 여름, 천대산에 오른 의천 대각국사는 모처럼 이곳 불룡의 지자대사 육신탑을 찾아 참배하기에 이른다. 스님은 지자대사 육신탑 앞에 경건히 서서 발원문을 올려 고려명승 제관스님(?~973)의 불후의 업적을 회고하면서 귀국하면 기어이 천대종을 창건하겠다고 굳은 맹세를 다진다.   “의천은 머리를 조아려 귀명(歸命)하오며, 천대교주 지자대사께 이룁니다. 일찌기 듣건대 대사께서는 오시팔교(五時八敎)로 동방으로 흘러 들어온 불법을 구별하여 해석하시매 극진함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후세에 불법을 배우는 이들이 어찌 이것으로 말미암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므로 저희 조사이신 화엄소주(華嚴疏主)께서 ‘현수대사의 오교는 천대대사의 가르침과 매우 같다’고 하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에도 옛적에 스님이 계셨으니 그 이름은 제관이며, 대사의 교관을 강의하였습니다. 이렇듯이 해외까지 유통되였으니 전하여 공부하는 계통이 끊어져 이제는 없어지고 말아 제가 몸을 버리면서까지 분발하여 스승을 찾아 도를 물었습니다. 이제 전당의 자변대사 종간의 문하에서 교관을 이어받고 거칠게나마 대략을 알았습니다. 훗날 고향에 돌아가면 목숨을 다해 크게 떨쳐 대사의 중생을 위한 가르침을 베푸신 로교에 보답하고자 이에 서원합니다.”   그때 그 시절 의천 대각국사님의 그 참배모습 방불히 서리여 오른다. 그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하듯 지자대사 육신탑 앞 뜨락에 비방울 어린채 망울졌던 흰매화가 첫 꽃송이를 터쳐 올려 깊은 감회를 자아낸다. 보매 진각사는 산문전(山門殿), 동서사랑채(東西廂房), 념불당(念佛堂), 방생지, 반약심경탑(般若心經塔) 등 불교건축물로 이루어진 자그마한 사찰이였다.   4   귀로에 진각사를 나서니 진각사로 오르는 소로길 한켠에 옛날 지자대사가 천대산에 처음으로 오셨을 때 세운 수선사(修禪祠) 옛터가 보이였다. 지자대사는 한생에 36개소의 사찰을 일떠세웠다고 하는데 그중 12개소가 천대산이고 수선사는 12개소 가운데의 하나, 1000여년 세월속에서 수선사는 옛터자리만 알리고 그 자리에 두어채의 낡은 빈 암자만이 댕그라니 서있을 뿐.  “천대산지”에는 수선사의 좌우언덕을 금지령(金地領)과 은지령(銀地領)이라고 하는데 은지령 쪽에 사찰의 정문이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는 진각사 산아래 1.5킬로미터 계곡에 위치한, 한창 확대건설중에 있는 고명사(高明寺, 지자대사가 손수 세운 천대산 12개 사찰중의 하나)를 돌아보고 귀로에 올랐다. 귀로 내내 지자대사 육신탑을 참배하며 서원하는 의천 대각국사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노라니 지자대사 육신탑을 떠나 귀국길 사명산 설두사로, 명주(오늘의 녕파)로 향하는 의천 대각국사님이 멀리 멀리 보이는것만 같았다.   2010년 1월 12일                
337    겨레발자취(34)-천대산--의천 대각국사님 발자취 댓글:  조회:4803  추천:23  2010-02-22
【겨레발자취】(34)        천대산—의천  대각국사님  발자취       1   일요일인 2009년 2월 8일은 비가 내리는 으스스 날이다. 이날 나와 아들애는 항주 현장님과 함께 천대종 시조 지자대사 육신탑을 참배한 의천 대각국사의 발자취 좇아 절강 천대산 국청사를 찾았다. 국청사는 중국 불교 8대 종파의 하나인 천대종의 근본도장(根本道場), 경치가 수려한 천대산 남쪽기슭에 자리잡고있었다. 유서깊은 국청사 뒤로는 도솔대가 있고 도솔대 좌우로 다섯 봉우리가 병풍처럼 면면히 국청사를 둘러싸고 골안따라 흘러내리는 2개의 계곡물이 국청사 산문앞에서 만나 그림같이 아름답다. 천대산 국청사를 찾은 현장님은 련속 찬탄을 금치 못한다. 국청사 산문(山門)은 “수대고찰”(隨代古刹) 담장 저쪽 가까이 동향으로 열리여 있다. 여느 불교사찰 산문들은 남향인데 비해 국청사는 동향으로 앉아 흥미로운데 “국청강사”(國淸講寺)란 4개 금빛 액글이 산문에 걸리여 보다 흥미롭다. 국청강사의 “강”자는 이곳 사찰이 강경설법 (講經說法), 교리교의(敎理敎義)를 연구하는 남다른 사찰임을 알려준다. 천대종은 중국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불교종파, 이곳 천대산에서 발원하고 그 력사는 수나라 시절  지자대사로부터 시작된다. 지자대사는 법명이 지의, 속성이 진(陳)이고 자는 덕안(德安), 원적은 영천 (潁川, 오늘의 하남 허창)으로서 량무제 대동4년인 기원 538년 7월에 형주 화용(오늘의 호북 화용현)에서 해빛찬란한 세상을 보았다. 어려서 불교의 영향을 심히 받은 그는 18살에 출가하여 불경에 정통하더니 진문제(陳文帝) 천가 원년(560)에 광주 대소산(光州大蘇山, 하남성 남단) 에 가서 스님을 따라 “묘법련화경”(妙法蓮華經)을 배우며 수련의 길을 걷는다.  7년후에 지자대사는 스님의 명에 의해 금릉에 가서 불경을 전파하나 사람들이 법석이는 도회지가 싫어 진태건(陳太建 7년(575)에 제자 20여명을 이끌고 천대산에 이르러 천대산의 한 정상부를 이루는 불롱에 사찰을 세우고 불경에 전념한다.       2   10년 후에 지자대사는 부름을 받고 다시 금릉길에 오르게 되고  수나라가 진을 멸한뒤 려산에 은거하다가 수 개황11년(591)에 후날 수양제로 즉위한 진왕 양광(晋王 楊廣)의 청으로 양주에 가서 불경을 강의하며 진왕 양광으로부터 “지자”(智者)법호를 받게 된다. 그때로부터 지전은 지자대사로 불리우며 수 개황 15년(595) 9월에 떠난지 10년이나 되는 천대산에  돌아와 불경연구에 몸을 잠그는 한편 선후하여 천대산만도 12개의 사찰을 일떠세운다. 그러던 수 개황 17년(597) 11월 11일, 지자대사는 병든 몸으로 옥주(沃州, 오늘의 절강 신창) 대불사로 갔다가 11월 24일에 미륵불상 앞에 단좌하여 입적하니 그의 육체는 지자대사 육신탑으로 불리우는 천대산 불룡에 안치된다. 국청사 북쪽 산등성이에 자리잡은 불룡은 지자대사가 처음 천대산에 입산수행, 설법하던 천대종의 발상지로 유명하다. 지자대사는 기원 575년에 처음으로 이곳에 와서 수건사를 일떠세웠으니 천대종은 드디여 중국불교 8대종파의 하나로 떠오른다. 지자대사가 입적한 그해 598년 진왕 양광은 지자대사의 유언에 따라 풍경이 수려한 천대산 남쪽기슭에 사찰을 세우고, 수나라 황제로 된후에는 국청사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우리 셋은 국청사의 산문에 들어선후 유람길 따라 방향을 오른쪽으로 접으며 국청사의 산문전인 미륵전과 종루를 지나고 우화전이라 불리우는 천왕전, 석가모니를 기리는 대웅보전을 지나 의천 대각국사 불상을 모신 “중한시조기념당”中韓祖師紀念堂”을 참배하였다. 하면서도 의천 대각국사님이 귀국길에 천대산에   올라 참배한 지자대사 육신탑이 어디인지는 아리숭하기만 하다. 이 사람 저 사람 물어도 그상이 장상이다.       3   국청사를 돌아보고 국청사 산문을 나왔으나 마음이 내려가질 않는다. “오봉승경”(五峯勝景)이라고 부르는 국청사 밖 입구에서 서성이는데 마침 국청사의 한 스님이 지나간다. 지자대사 육신탑이 아니더라도 신라인들이 머물렀다는 국청사 앞 “신라원”자리를 알고퍼 스님과 물으니 수나라 옛탑이 일어선 그 아래 언덕받이가 옛날 신라원자리라고 한다. 너무도 흥분한 우리는 스님께 감사를 드리고 담장으로 막은 신라원자리를 들여다 보았다. 신라원자리는 아름드리 나무들로 우거지고 주위는 온통 수백년, 1000년으로 헤아리는 녹나무들이 가득하여 옛날 유적 아무것도 보아낼수 없지만 신라원자리를 찾은것만으로도 다행이였다. 현장님은 국청사 천대종 관련 1000여년전 신라원자리를 찾은것이 감개무량해 두고두고 옛말할거라고 속셈을 터놓는다. 항주 현장님은 천대산과 조선반도(한반도)와의 불교문화교류가 1600여년 전으로 거스른다는 것을 알고 오늘은 의미있는 걸음이라고 덧붙인다. 알고보면 조선반도 삼국시기의 일이니 그 시절 중국 남조시기에 이르러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스님들이 더욱 많았다고 한다. 허다한 스님들 가운데서 신라스님 연광과 고구려스님 반야는 지자대사가 천대산에 천대종을 개종하던 시기에 지자대사님의 문하에서 불경에 몰두했다지 않는가. 그후 시기 신라스님들이 천대산에 와서 불경을 공부하는 구법자들이 갈수록 많아 국청사 바로 앞 언덕받이에 신라원까지 세워 신라스님들이 거주하였다고 전해진다. 천대산 천대종 력사속을 산책하면 백제의 현광, 고구려의 반야, 신라의 도육과 연광 등으로부터 신라통일기의 법융, 이응, 순영 스님, 고려의 의통과 제관 스님 등에 이르기까지 실로 많고많은 겨레스님들이 천대산에서 수련하며 중국 천대종의 발전에 불멸의 발자취를 남김을 해아릴수가 있게 된다.       4   고려명승 의천 대각국사는 귀국길 1086년 여름 천대산 국청사에 들리여 이곳 신라원을 돌아보며 깊은 감회속에 빠져든다. 한국 동국대 불교학과 출신이고 철학박사인 차차석연구원은 자기의 저서 “의천 대각국사”에서 그날의 의천 대각국사의 심경을 두고 이렇게 서술하였다.   “수많은 동족들이 이국만리 중국에서 혁혁한 명성을 날리었다니 존경스럽기 그지 없었다. 한편 그들이 그만한 존경과 찬탄을 받기까지 흘렸을 남모르는 피눈물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여질듯 저며 들었다.”   우리가 바로 의천대각국사님의 그 심경 그대로이다. 1086년 여름의 천대산 국청사와 의천 대각국사, 그로부터 900여년이 흐른 오늘 나와 아들애, 현장님이 그젯날 의천 대각국사님이 남긴 발자취자리에 서 있다. 천대종은 “법화경”(法華經)을 주요교리로 하여 창제되였다하여 전에 “법화종”으로도 불리였는데 당나라 말기 안사지란과 회창법난(會昌法難)으로 하여 불교사찰들은 불바다로 되고 불교전적들이 그만 소실되고 만다. 다행이라 할까, 천대산에 와서 불경을 닦은 그네들과 의천스님 등으로 하여 조선반도(한반도) 고려시기 천대종의 흥성발전이 있었고, 이것이 제관, 의천 등 스님들을 통해 다시 중국에 전해져 중국불교 천대종의 일대 부흥이 인다. 중국불교 천대종발전에 기여한 고대겨레들, 의천 대각국사 등 그네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한껏 부풀어 오른다. 그네들의 발자취를 따라 가고 또 가리라는 결의로 한가슴을 불태우게 된다.   2010년 1월 12일            
336    겨레발자취(33)-천대산 국청사를 찾아서(2) 댓글:  조회:4183  추천:33  2010-02-18
【겨레발자취】(33) 천대산 국청사를 찾아서(2)    1   절강 천대산 국청사는 1400여년의 력사 가진 중국 불교성지의 하나로 “불국선경”이라고까지 불리우고 있다. 이런곳에 1086년 고려 명승 의천이 발자취를 남기게 되고 그 발자취 따라 일전에 천대산에 다녀왔지만 지장전이 있다는것은 금시 초문이다. 얼마후인 2006년 11월 18일 나는 다시 천대산행ㅡ지장보살 찾아가는 길에 올랐다. 부랴부랴 아침을 에때우고 소흥시 뻐스 중심부에 가서 뻐스에 오르니 발차시간은 오전 8시 50분이다. 어제 온하루 질금질금 비가 내리고 간밤에도 비가 내리더니 한시간반이면 달리던 300리 길을 두시간만에야 축냈다. 그래도 시간만은 넉넉하여 천대뻐스부에서 택시타고 5킬로메터를 달리니 택시가 멈춘곳이 바로 북쪽으로 천대산 국청사 풍간교다리가이다. 나의 흥미를 무척 끌어당긴것은 보기에 수수해보이는 풍간교 돌다리라 하겠다. 보기에는 수수해도 골안물을 건너 국청사로 이어지는 주통도(主通道)요, 송나라 때 산물이라 홀홀히 스쳐지날 다리가 아니였다. 하나 얼마전 천대산 국청사를 처음 찾을 때는 풍간교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돌아와서 사가지고 온 천대산 국청사 안내자료를 보고서야 나는 이 돌다리는 송나라 때에 만들어지고 청나라 건륭년간인 1765년에 수건되였다는 것을 알았다. 풍간교라는 이름도 당나라 때 국청사 고승 풍간승려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것임을 알았을 때 나는 나의 무지와 소홀을 개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택시에서 내리자 곧추 풍간교를 찾았고 돌다리 이모저모를 디지털사진기에 담아넣었다. 보기에는 길이가 14.4메터에 너비가 3.4메터밖에 안되지만 수백년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력사의 창상에서도 파괴됨이 없이 그 모습을 이어왔다. 그 모습을 이어왔다는 것은 세인의 감탄을 자아내지 않을수 없었다.    2   불국선경으로 불리우는 천대산의 국청사, 국청사를 답사함은 이곳 지장전을 찾자는것, 산문지기와 물으니 지장전은 대웅보전 왼켠이라고 한다. 산문은 국청사로 들어가는 정문인데 정문을 통과하고 북쪽으로 꺾어 국청사 산문전(山门殿)으로 불리우는 첫 불전(佛殿)ㅡ미륵전을 지나니 두번째 불전ㅡ우화전이 맞아준다. 우화전은 기실 불교의 4대천왕을 기리는 천왕전을 가리킨다. 천왕전이 우화전으로 불리기까지는 수나라 년간에 천대산에 온역이 돌발한데 기인되는데 이곳 천대종 5세로 불리우는 장안대사가 온역의 만연에서 평민백성들을 구출하고저 천왕전에 단을 설치하고 련속 7일간 경을 외우며 기도했다고 한다. 이에 하늘이 감동되여 법우(法雨)를 내렸다고 전해지는데 그 모습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꽃과 같더라나. 그래서 천왕전은 우화전으로 불리우게 되였단다. 아는것만큼 보인다더니 우화전도 무심히 지나칠 불전이 아님을 뒤늦게야 꺠달았다. 우화전을 지나면 불교의 조상 석가모니를 기리는 대웅보전이다. 우화전과 대웅보전 사이에는 수백년이나 묵은 고목 네그루가 하늘을 떠인 널직한 정원인데 이 정원의 왼쪽가 건물에 그쪽 어디론가 통하는 평범한 문 하나가 열려있다. 문가에는 국청사 불교연구소 나무패가 내리걸리여 기억하기 좋았다. 헌데 서쪽행 랑하에 들어서니 어둑스레하기만 한데 묘법당을 지나고 옥불각에 들어서도 지장전이 나타날 조짐이 알리지 않았다.   옥불각은 그 남쪽가의 라한당과 더불어 남쪽으로 자리하고있었다. 옥불각을 돌고 라한당을 돌아도 지장전은 묘연하기만 하다. 별수없이 라한당 젊은 중과 물으니 지장보살님을 찾자면 저기 동쪽의 종루로 가야한단다. (이거, 오리무중이다. 국청사의 중들 말이 엇갈리니 지장전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나는 맥없이 돌아서야만 했다. 뭔가 300리 길을 다시 달려올 때의 상상보다 거리가 멀어져가고 있음을 떨쳐버릴수가 없었다. 지장전이 있다면 옥불각이나 라한당 같은 그럴법한 건축물이겠는데 어이하여 눈에는 띄이지도 않느냐.       3   종루(钟楼)는 서쪽가의 고루(鼓楼)와 더불어 동서로 앉은 국청사의 주요건축물의 구성부분이다. 이런 종루가 국청사의 산문전인 미륵전 북문동쪽가에 일어섰는데 2층루각으로 지어진 종루에는 2층루각안에 청나라 가경년간에 주조되고 그 울리는 소리가 10리에 들린다는 청동종이 달려있을 뿐 외면상 무엇을 보아낼수 없었다. 종루동쪽가의 정원들과 건축물들을 샅샅이 뒤져도 지장전은 숨박꼭질이라도 하려는듯 나타나질 않았다. 고마운것은 길가던 한 나젊은 스님이였다. 그는 지장전은 개방하지 않은 전이지만 금방 가보았다는 옥불각 서쪽가 골목을 빠지면 찾아볼수 있다고 자상히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옥불각 골목가에 천대현 국청문물보호소 간판이 걸려있다고 동을 달았다. 나젊은 스님 덕분에 옥불각 서쪽가 좁은 골목을 지나 또 다른 대문가를 넘어서니 화분이나 엉성같은 풀들로 어수선한 정원이다. 정원가에는 “ㄴ”자형 2층건물인데 사람들이 살고있는 모양으로 살림짐맛을 다분히 풍긴다. 지장전은 바로 북쪽가에 앉은 길다란 궁전같은 기와집인데 기와집 정면에 걸린 “지장전” 간판이 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과연 개방되지 않은 미지의 세계가 옳았다. 기와집의 북쪽면 정면 모두가 유리창문으로 되여있어 들여다보니 자그마한 지장보살 불상이 정면 중앙대에 모셔져 있고 그 앞은 기도드리는 상이 놓여져있었다. 인적이 깃들지 않아 먼지와 복새판인데 불상 좌우켠은 죽은 사람 이름을 적어 놓은듯한 위패들이 가득 달려있어 뭔가 다른 세계같은 감이 들었다. 마침 지장전 정면 한켠에서 중차림의 한 중년이 걸상에 앉아 불경인가 보고있었다. 지장전이 왜 이런 모습인가고 물으니 워낙 외진 곳이고 지옥세계를 관리하는 보살이 아닌가고 되묻는다. 그러면서 좌우켠의 위패는 죽은 사람들의 명부가 적힌 위패가 옳다고 알려준다.     4   (아, 그렇구나!) 순간 뇌리에는 소흥 로봉선사의 남쪽가에 궁궐같이 일어선 지장전이 떠올랐다. (그 지장전 전당도 소흥의 릉묘구역내에 세워져 죽은 사람들을 관리하는 보살로 모셔지고 있었지!) 뭔가 알리는것 같았다. 소흥의 릉묘구내 지상전을 찾았을 때 릉묘의 한 중년관리일군은 관음보살은 지상세계를 관리하고 지장보살은 지옥세계를 관리한다고 말해준바 있었다. 고로 소흥에서는 릉묘구내에 뜨르르한 지장전을 일떠세우고 전내에 지장보살 불상을 정성스레 모시였다면 천대산 국청사에서도 불교신도들이나 유람객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외진곳에 지장전을 세우고 죽은 사람 위패를 관리하게 하고 있는것이구나. 허나, 허나 나의 마음은 납덩이처럼 무거워만 났다. 항주 령은사에 모셔진 지장보살님처럼 그 어떤 기대감과 희한한 상상을 안고 소흥에서 뻐스타고 두시간이나 달려왔건만 현실세계에 펼쳐지는 천대산 국청사에 모셔진 지장보살 불상은 너무도 초라한 모습의 불상이기만 했다. 위안도 없지 않았다. 초라한 모습의 지장보살 불상이나마 국청사의 한부분ㅡ지장전으로 남아있다는 점, 종루아래는 지장을 기리는 신성한 장소라는것, 천대산 국청사 안내책에 지장전이 전문 제목으로 소개되고 남방의 불교 신앙자들중 지장신앙자가 특별히 많은데 그 신앙자가 농촌들에 보편적이라는것ㅡ위안을 느껴도 괜찮을 성과물들이였다. 오늘도 나는 신라인 지장보살 찾아 가고간다. 그길에는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고 위안도 있고 리해도 있고 ……              
335    설날 소흥 폭설 단상 댓글:  조회:4468  추천:28  2010-02-14
                   설날 소흥 폭설 단상   잠결에 아내와 아들애가 주고받은 말속에 눈이 왔다는 말이 섞인것 같다.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나 남쪽 창문가로 다가가니 와ㅡ바깥은 온통 눈세계요, 눈이 무척 많이도 내리였었다. 나는 지체할세라 디카를 들고 밖으로 내달았다. 때는 2월 14일, 설날 아침 7시 직후다. 교수아파트 아래에 내리니 눈은 무던히도 강산같이 내리였다. 바닥이 눈물로 흥건한 눈이 발등을 추는데 잔디밭의 눈은 무려 10센치미터쯤을 톱고있다. 밤새 내린 모양인데 내려도 큰 눈이 내리였다. 엊저녁이다. 방룡남박사네가 겨울방학 귀향하지 않고 월수대에 남은 우리 네와 김덕모교수네 일가족 그리고 한국 젊은 교사ㅡ리상룡을 청했는데 가족만 해도 세집이 모이였다. 설맞이 모임이여서 흥이나는데 홀연 까아만 밤의 홍매화를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 조용히 물러서서 디카가지고 밖으로 나가니 때아닌 추위가 온몸을 엄습하는데 온몸이 와들와들 떨려난다. 절강 소흥에 와서 이같은 “겨울”추위 처음이다. 할수없이 집에 돌아와 겨울나이 옷차림에다 두툼한 웃옷 하나를 더 껴입어서야 밖에 다시 나갈수 있었다. 내 고향 연변의 겨울에도 두툼한 웃옷 두벌을 껴입어보지 못한 나였는데 강남의 2월의 첫봄에 이런 차림새이니 나로서도 우스워죽겠다. 바깥날씨는 령하 아래로 퍼그나 떨어져있었다. 2월 12일 오후, 상해에서 소흥행 쾌속버스로 귀로에 오르며 보니 상해를 떠나던 늦은 오후, 버스안 온도표시는 바깥 령상 2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가흥을 지나면서는 령상 1도, 다음은 0도로 떨어진다. 소흥에 돌아오니 요즘 날씨 최저온도가 2도, 1도, 0도로 떨어진다고 인터넷이 알린다. 적어도 2월 16일까지는 이런 수준이라고 한다. 그러던 0도선 날씨가 설 전날밤 급격히 떨어지더니 설날에 들어서면서 큰눈으로 변해 대지를 덮은것이다. 이 나라 산동, 하북, 산서, 섬서, 감숙, 녕하, 강소, 하남, 안휘 등 중국 북부 9개성과 자치구들에 큰눈이 아니면 폭설이 내렸다더니 한파는 상해와 절강도 지나치려하지 않는다. 강남땅 절강에도 큰눈이 내렸으니 이번 한파가 대단도 하다. 2008년 2월의 남방폭설이 크나큰 재해로 기록된다면 2010년 2월 중국 북부지방 큰눈, 폭설은 또 엄청 피해를 가져다주겠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 절강월수외국어대 캠퍼스만 해도 간밤에 내린 큰눈으로 겨우내 숱한 꽃봉오리를 만들며 이제 피여날 봄동백나무들이 눈에 쓰러지고 계화나무 등 푸르른 겨울나무들이 많이 처져내려 안타까움을 더해준다. 모르긴 해도 이번 소흥 큰눈피해가 간단할것 같지는 않다. 큰눈으로 인한 교통불편과 이따른 피해들도 나타나겠으니 리보다 페가 더 많은 눈이라 하겠다. 눈아, 이제 더 내리지 말렴아, 나의 설날바램이다. 헌데 소흥 일기예보를 보면 이제 며칠도 최저기온이 가끔 0도로 나타나고 눈내리는 표시가 되여있어 근심만 앞선다.                                                                   2010년 2월 14일 설날 아침      
334    강남 소흥의 봄은 후산에서 시작된다 댓글:  조회:4314  추천:32  2010-02-10
       강남 소흥의 봄은  후산에서 시작된다             --우리 두 가족 후산풍경구 유람 인상   2월 8일 령상 17도, 2월 9일 령상 22도. 련일 내린 강남 겨울비에 오스스 찬겨울이 강남대지를 강타하더니 비가 지나고 맑게 개인 강남 소흥은 갑자기 계절을 바꾸며 봄에 들어선다. 거리에서는 겨울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옷을 내치며  거리를 유유히 산책하는가 하면 회계산 아래 남하가에서는 봄속 소흥녀인들이 홑옷바람으로 빨래하기에 바쁘다. 오는 봄은 소흥 후산풍경구에서 보다 진하게 시작되는것 같다. 2월 9일, 겨울방학 강남에 남은 방룡남부부와 나의 가족이 후산 봄나들이에 나서 보았는데 후산으로 둘러싸인 양지바른 복숭아밭 몇그루 목련화나무에 목련화가 겨우내 털옷망울에서 얼굴을 내밀거나 활짝 꽃펴나고 있었다. 계절을 앞당기는 신기한 대자연 앞에서 나와 방룡남친구는 사진촬영을 한다, 비디오촬영을 한다하며 재미를 부려 보았다. 이왕의 관측에 의하면 강남 소흥의 목련화는 해마다 2월 하순, 적절히 말하면 2월 말에 개화기를 맞이하여 3월 한달을 목련화의 달로 화려하게 꾸미여 간다. 그러던 2010년 이해 2월 목련화 선구자꽃은 후산풍경구에서 이왕에 비해 보름 정도 앞당겨 피고있으니 이해 강남 첫봄이 목련화 첫꽃에서 시작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테지. 강남 첫봄은 후산풍경구내 꽃망울 탱탱 영글어가는 강남 복숭아나무에서도 시작된다. 복숭아나무들은 미구하여 터질 꽃망울들로 맺혀있는데 선참 봄자랑하려는가, 복숭아나무들에서는 새봄맞은 새순들이 파릇파릇 얼굴을 드러낸다. 강남 첫봄은 봄동백에서도 확연히 시작된다. 겨울에 피는 동백꽃이 아닌 여느 봄동백들은 온 겨우내 꽃방울로 맺혀 있다가 2-3월에 어여쁘게  활짝 피여나는데 유독 후산풍경구내 붉은 동백꽃만이  벌써 아름답게 피여나기 시작하여 봄을 알린다. 강남 첫봄은 새눈에서 터뜨려지는 버드나무 새잎들에서 완연히 시작된다. 강남에 온후 버드나무는 겨울이 몰려오며 버드나무 잎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12월 하순부터 두달이 지나 새잎이 돋는 지난 2월 하순까지, 다시 말해 두달간의 짧은 겨울이 지나면 봄인 줄을 알았더니 올해 2월 초순 막바지 버드나무 새잎들을 보아 그게 아니다. 봄꽃이라 일컿는 목련화, 복숭아나무, 봄동백 그리고 버드나무가 2월 초순을 맞아 일제히 봄을 알린다. 여느 해에 비해 일제히 보름이나 앞당겨지는 눈앞 현실이 놀랍기만 하다. 그뿐이 아니지. 옛날 사람들이 돌들을 쪼아 채석한후 고도의 지혜로 인공으로 만들어낸 거대한 바위경관 구내에 이르니 이번에는 겨울꽃나무가 아닌 이름도 모를 한 부류 강남나무들에 노오란 꽃들이 와르르 피여나 오는 봄속에 호듯호듯 웃는다. 절강월수외국어대 캠퍼스에서, 소흥 거리에서, 회계산풍경구 남하에서 거의 느낄수 없는 대자연의 기묘한 걸작이  후산풍경구에서 소리없이 펼치여진다. 봄이 오는 소리, 봄이 오는 신비의 자연현상 앞에서 우리는 환성을 지르고 말았다. 저마다의 웃는 얼굴들에는 즐거운 봄이 그대로 묻어난다. 대자연의 힘이란 실로 신비의 조물주마냥 거대한 위력을 발산한다. 며칠을 내내 내렸던지, 찬기운을 몰아오며 가담가담 그칠줄 모르던 강남 겨울비에 대지가 잔뜩 움츠러 들더니 2월의 8일과 9일 돌연 기온상승에 월수대 캠퍼스내 홍매화가 봄소식을 알리며 선참 붉은 꽃을 피워 올리기 시작하는가 하면 후산풍경구에서는 목련화, 봄동백이 뒤질세라 철을 앞당겨 피여나기 시작한다. 발가벗은 버드나무들이 푸르른 새옷을 입기 시작한다. 그래 강남봄은 목련화, 봄동백, 복숭아나무, 버드나무 등에서 환히 웃으며 오고있었다. 오호, 그제서야 남하의 개나리가 때이르게 피여나는 원인을 알것 같았다. 2월 8일 봄이 오는 첫날 안해와 아들애와 같이 봄을 즐기며 월수대 남대문밖 남하로 나물캐러 나갔더니 개나리 선구자들이 노오란 꽃으로 피여나고 있질 않는가. 아직 개나리꽃 피는 시절이 아닌데도 이 꽃들은 벌써 피여나나? 이상하다 한때 얼뜨름해졌더니 기온이 돌변하자 봄기지개를 펴는것을. 강남땅에 봄이 온다. 아장아장 아니다. 성큼성큼 걸어온다. 내 고향 연변에 비해 꼭 두어달 앞당긴 강남의 새봄이다. 방룡남 부부와 우리 두 가족은 선경을 방불케 하는 소흥 후산풍경구에서 편한 봄차림으로 봄을 즐기며 봄에 한껏 취해 본다. 겨울속에 묻혀 살며 따스한 해를 바라다가 첫날 첫봄 해볕이 뜨거워 손으로 해볕을 가리는 멋 별멋이다. 그런 2월 9일 밤이 자정으로 넘어가며 하늘에서는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첫 무리번개가 하늘을 밝힌다. 이어 장엄한 첫 봄우뢰 봄이 왔다고 성수나게 대지를 뒤흔든다. 이해 첫 봄우뢰도 지난해에 비해 10여일 앞당겨진다. 오호라, 강남 소흥의 봄은  수풀이 우거지고 바위경관이 삐여나고 해솟는 동을 향해 가슴을 연 여기 류달리 양지바른 후산풍경구에서 선참 시작되는구나.   2010년 1월 10일 첫 새벽에            
333    겨레발자취 (32) - 천대산 국청사를 찾아서(1) 댓글:  조회:4821  추천:38  2010-02-09
【겨레발자취】(32)    천대산 국청사를 찾아서(1)                                                                                                  1   고려란 이름을 단 1000년 속 항주고려사를  답사추적하는 가운데서 나는 고려명승 의천대각국사의 발자취는 옛날 북송의 판교진(오늘의 청도 교주시 판교진)을 첫 시작으로 서울 변경(개봉)을 거쳐 항주 혜인사에 이르고 다시 천대산으로 미치였다는 것을 알았다. 의천 기념당이 있다는 천대산이 항주 서호 주변의 어느 산일줄로 알았더니만 그게 아니다. 절강지도를 펼치니 천대산은 소흥시와 이웃하고 있는 지구급 시인 대주시 행정구역내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디로, 어떻게 가는줄도 모르고 방향을 가늠하고는 무작정 소흥—천대행 버스에 올라 보았다. 그날은 2006년 11월 3일, 쾌속버스로 2시간 미만 달리며 신창을 지나고 천대에 이르니 천대산이 어디에 있는지, 의천기념당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한참 복새판을 피우며 돌아쳐도 고려인 의천을 아는 사람이 없다. 천대산엔 사찰도 많다는데 어디로 가야 하나, 택시 하나를 잡고 누구나 다 아는 천대산 국청사(國淸寺)로 몰라고 하니 천대산 어구 산기슭에 자리잡은 국청사는 5킬로미터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의 천대산 국청사는 불국선경 천대산의 중심사찰로서 사찰의 부지면적이 73만 평방메터, 전당 등 건물수가 800여칸, 건축면적이 2.4만 평방메터에 이른다는 것을 안것은 그뒤의 일이다. 알고보니 천대산 국청사는 이름난 력사문화 도시 소흥에서 서남으로 300여리 떨어진 곳, 절강성 천대현 경내에 위치한, 풍경이 수려한 국가중점풍경명승구였다. 발가는 대로 국청사로  이어진 풍간교를 지나 국청사 사찰안에 들어서니 국청사의 산문인 미륵전과 우화전이 차례로 맞아준다. 여느 불교사찰들은 일반적으로 산문 다음이 불교의 4대천왕을 기리는 천왕전인데 국청사는 우화전이 곧 천왕전으로서 관련 이야기를 갖고있었다. 국청사의 안내서를 보니 력사상 천대산에 사찰이 많을 때는 대소 110여개소의 불교사찰, 10여개소의 도교사원을 갖고있었다는데 지금도 그에 못지 않게 중국의 이름난 불교성지의 하나로서 “불국선경”이라고까지 불리우고 있었다.      2     (이곳 국청사가 천대산의 중심사찰이고 불국선경이라면 귀국을 앞둔 고려 명승 의천이 다녀간 사찰일 수도 있지 않을까?!) 무언가 뇌리를 때리는 찰나에 나 앞에서 걷고있는 젊은 스님과 물어보니 옛날 의천이 다녀간 사찰이 바로 이 국청사이고 국청사 제일 안쪽 산기슭에 중한천대종시조 기념당이 있다고 알려준다. 뜻하지 않은 소식에 나의 흥분은 절정에 달한다. 그로부터  어느결에 올리막 구간을 달아올라 맨 뒤에 자리잡은 의천기념당을 찾았는지 모르겠다.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중한천대종시조기념당”(中韓天臺宗祖師紀念堂)이다. 중한천대종시조기념당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있었다. 모두가 향불을 태우면서 무언가 열심히 빌고있는데 그 진지한 모습은 우리 북방에서는 거의 보지 못한, 소원을 바라는 모습들이다. 와중에서도 인상적인 것은 그들 모두를 열성껏 안내하면서 맞이하고 바래는 젊은 스님이다. 젊은 스님은 내가 의천님과 같은 겨레라고 하니 나한테 한부의 한국잡지를 내보이면서 잡지속 이 인물이 의천대사의 화상이라고 알려준다. 그러면서 기념당내 세 청동좌상중 중간 스님이 천대종의 시조 지자대사이고, 오른쪽 스님이 의천 대각국사, 왼쪽 스님이 현대 한국 천대종의 중흥시조—상월 원각대사라고 동을 단다. 알다시피 불교는 기원전 6세기에 고인도에서 불교시조 석가모니에 의해 산생되고 기원 67년 경에 중국 동한시기 중국에 전해지고 점차 8대류파로 자리를 잡아갔다. 그중 천대종은 1400여년 전 수나라 때 지자대사님이 천대산에서 창립하여 천대종의 시조사찰, 근본도장으로 불리우고 있다. 그만큼 천대종은 중국불교의 선구로 받들리면서 천대산은 천대종의 요람으로, 국청사는 천대종의 상징으로 칭송된다. 천대산과 조선반도(한반도) 사이  불교문화교류는 이보다 더 오랜 1600여년전 동진시기로 거스른다. 천대산의 명승 지돈(314~366)이 고구려 도승들과 서신거래가 있었다면 남조 시기에 이르러서는 불경을 구하러 오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스님들이 더욱 많았다. 백제의 현광(玄光)스님(533~631)은 지자대사의 가르침을 받고, 신라의 스님 연광(緣光)과 고구려스님 파약(波若)은 지자대사가 천대산에 거처하면서 천대종을 창설할 때 대사의 문하로 배운다. 귀국한 후 연광스님은 솔선하여 천대종을 신라에 전파한다. 의천 대각국사가 지자대사 육신탑을 참배한것은 그후 시절의 일이다.       3   1000여년전으로 거스르는 천대산과 천대종, 조선반도(한반도)사이 고대 불교문화교류사. 1995년 6월 17일에 한국, 일본 등 나라의 해외 천대종 스님 300여명이 국청사에 모여 중국 국내 각 명산의 장로, 승려들과 함께 성대한 기념당 락성법회를 가지고 지자대사, 의천대사, 상월대사 세분을 청동좌상으로 모시였다. 관련자료는 지자대사의 청동좌상 높이는 1.6미터, 좌우 두 청동좌상 높이는1.5미터라고 밝힌다. 청동좌상 뒤에는 천대종 세 시조의 비문이 새겨져 리해에 도움을 준다. 국청사 의천기념당을 답사하는 기간 젊은 스님은 내내 친구로 되여주었다. 스님한테서 나는 이 국청사는 1973년에 주은래총리께서 문화대혁명속 네가지를 짓부신다는 정치압력에도 불구하고 해당 문건을 비준하고 거금을 투자케 하여 수건하게 한데서 문화대혁명 가운데서 수건한 전국의 첫 사찰로도 이름이 높다는것을 듣게 되였다. 루루 1000여년의 유구한 력사 가진 절강 천대산 국청사, 불국선경 천대산의 중심사찰을 이루거니 그 1000여년 속 다녀간 고구려, 신라, 백제 한반도 세 나라의 스님들 얼마이며, 천대종의 시조 지자대사님의 문하로 뛴 스님들 또 얼마더냐. 그후 고려사람 의천은 또 선인들의 발자취를 이어 한국 천대종의 시조로 발돋음했으니 국청사  기념당에 이르러 항주고려사에 이어 두번째로 고려명승 의천대각국사 발차취를 답사추적하게 되니 감개가 무량하다. 지장보살과 더불어 중한 고대불교문화교류사, 중한 고대친선사에 불멸의 기여를 한 의천 대각국사님, 그의 중국내 발자취를 모두 답사하고야 말리라는 결의로 가슴을 불태워도 본다.   2006년 11월 5일 초고 2010년 1월 8일 보충수개      
332    겨레발자취 (31) - 룡정사는 바로 눈앞이구려 댓글:  조회:4208  추천:38  2010-01-30
【겨레발자취】(31)     룡정사는 바로 눈앞이구려                                                            1   새해 2010년 1월 이달 잡아 항주로의 두번째행은 북송시절 의천 대각국사님이 다녀간 항주 서호 주변의 상천축사와 룡정사를 답사하는것, 상천축사 제2차 답사를 마치자 현장님은 머리도 쉬울 겸, 새해도 즐길 겸 아름다운 서호변  등산을 해보자며 자가용을 곧추 어디론가 몰아간다. 차로 가니 어디가 어딘지를 알수가 있느냐만 목적지에 이르니 서호 서남쪽 룡정샘물터로 이어지는 계곡이렸다.    산아래 계곡어구에 이르자 현장님은 오늘 재미나게 룡정샘물을 따라 등산해 보자며 우리 부자를 계곡어구의 한 정자에로 안내한다. 정자가 “룡정팔영시비랑”(龍井八詠詩碑廊)으로 나타나 내가 의아해하자 현장님은 청나라 건륭황제가 선후 6차나 강남유람길에 올랐다가 4차나 이곳 룡정계곡을 유람한데서 세워진 정자라고 설명하면서 정자 옆 시비랑을 보면 내연을 알수가 있단다. 시비랑을 보니 시비들에는 과연 건륭황제가 네번 룡정계곡 여기를 유람한 시간과  친히 쓴 시들이 씌여져 있어 인상적이였다. 건륭황제가 네번이나 찾은 룡정계곡은 항주 서호의 사자산(獅子山) 아래 기반산(棋盤山)과 옹가산(翁家山) 사이에 위치하고 그 일대가 전부 룡정차의 원산지로 되여있었다. 룡정(龍井)이라고 불리우는 우물—샘물 자리는 두곳으로 알려지는데 하나는 풍황령 옹가산 북쪽편비탈의 깊이 10여미터를 이루는 로룡정이고 다른 하나는 오늘 우리가 등산으로 오르는 하룡정 샘물터였다. 건륭황제의 시비랑을 지나 산기슭에 이르면 처음으로 맞아주는것이 “과계정”(過溪亭)정자이다. 현장님이 정자 아래 안내글을 보라기에 카메라를 내들다말고 읽어보니 건륭황제가 친필로 쓴, 룡정팔경의 첫 경관이고 북송 승려 변재(辨才)와 항주 태수 소동파와의 만남이 깃들어 있어 무심히 지나칠 정자가 아닌가 부다. 전하는데 의하면 천축에서 룡정사로 은거한 북송시절 승려 변재는 찾아오는 객들이 많아 매일 손님접대에 바쁜데서 “산문송객, 최원불과호계”(山門送客最遠不過虎溪)란 알림글을 써서 룡정사에 붙이였다. 그럴 때 항주 태수로 부임한 소동파, 즉 소식은 변개의 위인됨을 듣고 하루 룡정사를 찾았는데 두 사람은 서로에 빠져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녁에 이르고 밤을 거친다.    이튿날 소동파가 떠나게 되어 변재스님이 바래게 되고, 이야기하며 걷다보니 저도 모르게 규칙선인 호계교(虎溪橋)를 넘어섰다. 옆사람들이 일러 알았을 때는 이미 규칙선을 넘어선 때라 두 사람사이에 웃음이 한바탕 터져 오르고 덕담이 오가는데 이곳에 정자를 세우고 과계정이라고 부르게 되였다. 또, 일명 “이로정”(二老亭)이라고도 한다며 소동파 친필체가 정자안에 걸려 있었다.       2   과계정을 지난후 척심소(滌心沼), 일련운(一片云), 룡홍동(龍泓洞), 신운석(神運石)등 룡정팔경들이 차례로 맞아준다. 나중에 이른 곳이 두 룡정의 하나인 하룡정(下龍井)구간인데 룡정샘물구간을 중심으로 주위는 여러가지 정자와 옛식 차집들로 옛스러움을 다분히 풍겨주어 기분이 난다. 신비로움은 석회암들을 가져다 인공석림을 만든 이곳 룡정샘물은 나무가지로 저어보면 샘물에 기묘한 무늬선이 생기는것, 무늬선은 처음 반원경을 이루며 밖으로부터 안으로 점차 작아지다가 없어지는데서 유람객들의 발목을 곧잘 잡는다.    우리 바로 앞에서 유람하던 어느 부자간이 나무가지로 저어보니 과연 그러하다. 그러노라니 1983년 5월, 남방 첫 답사차 항주에 처음 들리여 이곳 룡정차 구간과 샘물터를 돌아보던 일이 생각난다. 그때 그 시절은 룡정샘물 주변이 인공이 조금도 가미되지 않은 자연모습 그대로이고, 인공바위산이나 정자나 차집 따위는 더구나 없었는데 샘물이 층을 이루어 각전을 넣으면 각전이 물에 떠서 재미를 끌었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장장 27년 전의 일, 27년후 룡정샘터는 아름다운 관광지로  변해 나와 아들애를   맞아준다. 그해 5월은 아들애가 태여나지도 않은 시절, 몇달뒤 그해 8월에 이 세상에 나온 아들애가 27년이 지나 아버지와 더불어 룡정샘물터를 유람하게 되니 나의 감수가 어떠했으랴. 그래도 감수속에만 빠질수가 없어 현장님 보고 이젠 룡정사를 찾아 갈때도 됐다고 하니 현장님은 “허허허”웃으며 옛날 룡정사 자리가 바로 여기 눈앞이라고 하질 않는가. “뭐? 룡정사가 눈앞이라구?” 나는 나의 귀를 의심, 현장님은 우리 부자를 룡정사로 안내하면서도 내색을 내지 않고 등산하자며 잠시 비밀놀음을 벌려 보았었다. “그럼 언녕 그렇다고 할거지.” 내가 고운 눈길을 흘기자 현장은 또 사람좋게 “허허허”웃으며 옛날 룡정사는 더는 찾아 볼수 없고 그 자리에 옛스러운 차집들이 꾸려져 유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며 알리기를 잊지 않는다. 룡정샘물터 차집사진들은 이렇게 룡정사 대신으로 여러 장이 찍히여졌다.      3   의천 대각국사가 1085년 8월초 항주에 이르러 찾은 곳은 대중상부사이고 데중상부사에서 만난 스님은 오매에도 그리던 정원법사(1011~1088). 정원법사는 그 시절 항주 불교계의 대표적인 고승이고, 두 나라 두 스님은 서로 편지교류를 가지다가 정원법사가 송나라 구법류학을 권유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여 그들은 항주 대중상부사에서 첫 만남을 가지게 되였는데 의천이 송나라행을 결심한것은 정신적 스승인 정원법사를 만나 법사한테서 “바다와 같이 넓은 진리의 세계”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런 만남이  하도나 진지하여 의천스님은 훗날 귀국한후 그때의 심경을 “옛적 해동에 있으면서 외람되게 자기 몸처럼 생각해 주는 사랑을 받았”고 “이제 절강에 와서도 내 몸처럼 생각해 주는 은혜를 입었”다고 밝혀 본다. 그러나 그 시절 대중상부사는 오늘날 항주시내의 번화한 한 주택지여서 찾아 볼수가 없다. 대중상부사와 상천축사를 거치여 의천 대각국사가 찾고 머문 사찰은 1086년 정월에 대중상부사에서 혜인원으로 옮겨간 정원법사 사찰이지만 정원법사 아닌 원정스님을 찾은 사찰은 이곳 룡정사로 알려진다. 의천스님은 룡정사에서 원정스님을 만나고 원정스님의 알선으로 스님의 제자인 종간스님한테서 직접 천대종의 교리를 배우게 됨은 세상이 다 아는 력사사실이라 하겠다.      4   1085년 8월 의천스님은 북송 조정의 안내자 양걸과 더불어 항주 룡정사에서 원정스님을 만난 뒤 룡정 샘물터와 주변의 풍경지들, 사자봉 등을 유람했다고 전해진다. 고려로 귀국한후 의천 대각국사는 삼각산의 식암(息庵)을 찾아 보다가 식암의 경치가 북송 항주 룡정과 비슷함을 보아내고 맘속 시 한수를 지어본다.   절에서 강의를 마치고 식암을 찾으니 구불구불 솔밭길엔 아지랑이 피어난다 그때 룡정에서 천대종지를 담론하였으니 여기 경치 그곳 같아 그때 사람 생각나네   그 시절 그 시가 지금 메아리되어 나의 마음을 세차게 울려준다. 원정스님을 만난 룡정사와 그곳 사람들, 그곳 경치가 얼마나 사무치게 그리웠으면 시를 지어 자기 마음을 달랬으랴 싶어 마음이 보다 울렁인다. 그 옛날 룡정사 샘물터에서 머리들어 산우를 쳐다보니 사자봉이 저만치에 솟아있고, 산아래를 내려다보니 산아래 계곡이 그림처럼 아름답게 펼쳐진다. 현장님께 감사할 뿐이다. 현장님의 극진한 수고로 의천 대각국사님이 다녀간 상천축사와 룡정사를 드디여 원만히 답사하게 되니 항주에 선후 두번 머무른 의천님의 약 7개월 간 발자취 답사를 기본상  마무리게 되였다. 시름을 덜어도 큰 시름을 덜었다. 항주 고려사여, 안녕히~~ 항주 상천축사여, 안녕히~~ 항주 룡정사여, 안녕히~~~~                                               2010년 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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