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대 두 교수 소흥 유람기 소흥은 수천년의 문명을 자랑하는 력사문화도시요, 명인들의 고향이라 소흥하면 선참 떠오르는것이 치수영웅 대우, 와신상담의 주인공 월왕 구천 그리고 로신성생이 아닐까. 연변대 김해수, 리민덕 두분 교수를 모신 유람길은 소흥의 명소 대우릉, 로신 옛집, 월왕전으로 이어졌다.
첫 유람길—대우릉
김해수 교수, 리민덕교수의 대학원생 교수는 오전오후로 나뉘여졌다. 오후교수를 맡은 리민덕교수라 하루 오전시간을 타서 회계산 향로봉 로봉선사를 다녀 왔다더니 대우릉을 가보고 싶어한다. 1월 18일 오전, 나와 리민덕씨는 절강월수대 남대문 부근의 대우릉을 찾았다.
둘만의 입장료가 인민페 100원으로 나왔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연변도 아닌 잘강 소흥에서 30년전 대학동창과 동행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 대우릉 첫 입구 문지기가 나를 알아 보자 리민덕씨는 “형님은 여기를 잘 다니는 모양이구만!”하고 머리를 끄덕인다. 그래, 한해에도 수없이 찾아보는 대우릉이 아니던가.
우린 대우릉 첫 입구와 대우릉 구간 연도의 구룡탄에서, 대우릉 하마(下马)자리에서 발길을 멈추었다가 대우릉 제사광장을 거닐었다. 대우릉의 9000근 짜리 동종이며, 대형 북이며, 원 제사자리며 모든것이 신선하게 안겨들었다.
대우릉 구내에 들어서자 대우릉비와 제사전으로 지어진 옛식 건물이 우릴 맞아준다. 여기 구간에서도 리민덕씨의 흥미를 자아내는것은 구간 산기슭을 덮은 대나무림, 북방에서 대할수 없는 대나무림이 인기도가 부쩍 오른다. 내가 리민덕씨를 대나무밭으로 안내하여 카메라를 들자 연변대 교수동창의 웃음진 얼굴이 카메라에 잡혀든다.
대우릉 주체건물 대우묘는 우의 아들 계가 첫 노예제 국가 하나라의 천자로 즉위한후 세워졌다고 하나 현존하는 대우묘 시초는 기원 545년의 량 대동시절, 그나마 새월의 풍상고초속에 옛 모습 사라지니 대우묘가 다시 일어선것은 1934년의 일, 내가 치수영웅으로 불리운 대우묘지가 수수께끼로 남아 부근이라고 하자 리민덕씨는 유감을 표시한다.
대우릉구내 유람에 이어 우린 산정인 회계산 석범산에 모셔진 대우동상을 찾아보기로 했다. 돌계단 1000여개를 오르니 높이 21메터의 거대 대우동상이 하늘을 떠이고 서있다. 그아래 평단에서 내려다보니 소흥 시가지가 발아래 펼쳐져 자못 인상적이다. 리민덕씨의 흥분은 절정을 톺는다. 그 모습은 “연변의 리민덕이 소흥에 올줄 뉘알았으리오!”하고 말해주는상 싶다.
“민덕씨, 저 대우님과 고조선의 단군님이 연계가 있다면 믿을수 있겠는가?” “글쎼~전설이겠지.”
“물론 전설이겠지만 한반도의 고서들에 그렇게 기록되여 있다네. 그래서 내가 회계산을 문앞 다니듯 다니며 답사하고 있지. 회계산은 우리 고대 겨레의 발자취가 스며있는 성스러운 산이야. 대우동상을 세울 때 한국의 단양 우씨들도 참여했거든.”
리민덕씨는 고대 우리 겨레와 관련되는 회계산과 대우에 대해 짙은 흥미를 보이였다. 산정구간의 12개 띠 광장에서 웅위로운 회계산을 둘러본뒤 나와 리민덕씨는 대우동상 남쪽골 백조락원 구내를 따라 산을 내리였다. 휘넓은 남하구간에서 발길을 멈춘 리민덕씨는 대우릉이며, 대우동상이며, 푸른 산야를 둘러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한다. 그 감탄은 고스란히 로신 옛집으로 이어간다.
두번째 유람길—로신 옛집
로신선생의 옛집은 소흥의 해방남로 로신거리에 위치하고, 전체면적 50헥타를를 헤아리는 어마어마한 범위로 나타난다. 1월 19일 오전, 나와 아들애는 김해수교수와 리민덕교수를 안내하여 로신 옛집 구내에 들어섰다.
로신 옛집 문화광장에 일어선 로신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고 우리는 선참 로신 옛집의 삼미서옥을 찾았다. 삼미서옥 입구가 강물에 뜬 검은 갓배—오봉선(乌蓬船)이 흥미로운데 로신선생이 어린시절 글을 읽었다는 삼미서옥, 그것도 소년 로신이 앉았다는 책걸상자리가 보다 흥미롭다. 책에서만 보며 가르치던 로신선생이 눈앞에 살아 움직이는 시각이다.
로신선생의 조부네가 살았다는 주가로대문에 들어서면 서쪽채와 동쪽채로 나누어진 옛 건물들이 복원되여 생생히 살아 움직인다. 가난한 출신들로서는 상상도 할수 없는, 대지주 장원을 초월하는 규모여서 보는 이들은 입을 딱 벌린다. 로신선생은 확실히 명문가정 출신이기는 하나 아버지대에 이르러 몰락의 일로를 걸으니 사람들은 잠시 이를 망각하는가 부다.
이런 기분을 헤아려주기라도 하듯 주가로대문의 한 정원에 우산모양으로 자라난 한그루 동백나무가 숱한 빠알간 꽃을 피워올려 로신 옛집을 찾는 이들의 얼굴에 웃음을 피여 올린다. 그러나 우리 김해수교수와 리민덕교수는 아름다운 동백꽃을 보았는둥, 말았는둥 덤덤히 지나치기만 한다. 어학외통길을 고집하는 이들의 눈에는, 마음에는 수학처럼 엄밀하다는 어학사고방식만이 어른거리는 것인지 일순 가늠키 어렵다.
로신선생의 출생지—주가신대문의 아름다운 백초원에 이르니 기분이 전혀 다르다. 리민덕씨는 “백초원으로부터 삼미서옥까지” 로신선생 글을 거듭 떠올리며 로신선생이 어린시절 뛰놀았다는 백초원에서 삼미서옥까지 이리도 가까운 거리밖에 안되는가며 미소를 피여 올린다.
“우리가 그 시절을 겪어 보았지만 어린이들 심령에는 멀어만 보일수 밖에 없지 않을까?!”
나의 말에 리민덕씨는 “옳아, 옳아!’ 연신 고개를 끄떡인다. 책에서가 아니라 눈으로 보는 로신선생의 어린시절 세계가 감미롭기만 하다.
나중에 우린 로신 옛집 구내의 신축 대형 “로신기념관”을 돌아보았다. 필자가 로신과 조선(한국)사람, 로신이 조선현대문학에 끼친 영향 등을 연구하면서 상해의 로신기념관, 광주의 로신기념관에도 다녀왔다고 하자 김해수교수는 누가 이면의 론문을 쓴것 같다고 하신다.
“알고 있습니다. 유감이라면 로신을 연구한다는 중국학자들이나 기념관들에서 로신과 일본관계는 중시하나 로신과 조선(한국)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이제 로신관련 연구저서가 정식출판되면 여러 로신기념관들에 모두 보낼 생각입니다.”
필자의 말에 김교수는 이면의 연구를 다그쳐야 한다고 지지를 준다. 리민덕씨는 “소흥은 그저 그렇게 볼게 아니구먼. 곳곳에 우리 겨레발자취가 있으니 말일세.”하면서 소흥답사가 의미있다고 동을 단다.
우리는 로신기념관을 나와서 로신거리 구내 함형술집이며 소흥특산품을 경영하는 가게들을 산책하였다. 김해수교수는 로신선생 작품속의 공을기가 술을 마이며 맛보던 회향두를 보고 “많을소냐, 많지 않도다!”를 거듭 떠올린다. 그 모습이 천진한 소년을 방불케 한다. 그러던 김교수는 함형술집 구내를 지나며 흥미가 도도하다. 70대에 이르러도 술을 즐긴다는 김교수한테는 공을기가 살아 말을 건네였으리라.
세번째 유람길—월왕전
소흥도심의 도시광장 서쪽가에는 숲을 이룬 유구한 력사속 부산이 아름답게 솟아있다. 도심에 솟아난 저산이 2500여년 전 월나라 도읍이라고 하니 연변대 두 교수는 어서 가보자고 재촉한다.
로신 옛집 구내 로신거리에서 시내버스를 잡으니 다음 역에서 내려야 한다. 도시광장역을 앞둔 해방로 길복판과 길가에는 신해혁명시기 이름난 반청지사—추근렬사기념비, 추근 백옥상이 있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숙연케 한다.
“해방로 길복판에 렬사기념비를 그대로 모시니 추근렬사의 위치가 돋보이는구만!”
김해수교수의 감탄의 말씀. 우리는 추근렬사기념비를 지나 서쪽골목을 따라 나아갔다. 부산 월왕전 부근은 소흥의 옛날 단층살림집들이 그대로 보전된 강물구간이여서 연변대 두 교수는 여기서는 기념을 남겨야 한다면서 포즈를 취해 주었다. 강남의 옛 생활멋이 물신 풍겨나는 모습은 김해수, 리민덕 교수를 기쁨에 둥둥 뜨게 만들었다.
이곳 다음이 옛날에 와룡산, 종산 등으로 불리우다가 부산(府山)으로 이름이 바뀌여진 소흥도심의 부산이다. 부산은 춘추전국시기의 월나라 도읍으로서 기원전 490년 월왕 구천이 오나라에서 돌아온후 대신 범려에게 명하여 건설하였다니 명실공히 2500여년전의 일, 이런 부산에 갖가지 기념건축물들, 명승고적들이 많지만 우리는 월왕대와 월왕전을 가진 월나라 도읍을 먼저 찾았다.
월나라 도읍지에 들어서면 선참 맞아주는것이 옛기운이 풍겨나는 웅위한 월왕대, 후세에 건설되여 방대한 규모를 가지였다지만 지금의 월왕대는 1981년에 수건되고 월왕대내에 월나라 시기를 보여주는 도편과 문물들이 전시되여 월나라 리해에 도움을 주고있었다.
월왕대에서 보면 저 맞은켠 산아래에 일떠선 월왕전이 마주 안겨진다. 그 사이에는 북송 말년의 고종황제 조구가 금나라의 침입으로 남으로 도주하였다가 월주 이곳에 이르러 친히 심었다는, 900년의 수령을 가진 룡두고백 마른나무가 높이 서있고 송백화석이며 청백천(清白泉) 등이 있어 옛스러움을 그대로 발산하고 있다.
월왕대는 또한 1939년에 소흥에 오신 주은래가 항일연설을 하던 곳이기도 하고 1961년에 모택동주석이 “로신 80돐을 기념하여” 시편을 날리면서 “감호월대명사향”(鉴湖越台名士乡)명구를 남긴 명구출처이기도 하다. 명구에서 말하는 월대(越台)가 바로 월왕대를 가리킨다.
월왕대에 이어지는 월왕전내는 와신상담하는 월나라 왕 구천의 그림 모습, 구천과 대신 범려, 문종 등의 화상과 소개가 있어 2500여년을 거슬러 월나라 도읍상을 목격하는 기분이다.
“월왕 구천어른, 연변서 김해수가 어른을 보러 왔수다!”
김해수교수는 월왕전에 올라 흥분을 토한다. 소흥에 와서 월나라 도읍지를 둘러보는 기분이 좋기만 하단다. 필자가 들어있는 사진 모두를 아들애가 찍어주어 사진기념도 톡톡하다.
어느덧 하루길에 오른 저 하늘의 태양이 정오의 분계선을 넘어 오후길에 오른다. 70대 김교수님이 념려되여 부산을 더 돌아보지 못하고 귀로에 올라야 했다.
“소흥에 와서 로신선생을 만나고 월나라 구천왕을 만나 보았으니 원이 없수다.”
김해수교수의 진정어린 말씀에 가슴이 후더워난다. 연변대 두 교수의 소흥 유람, 30년전 연변대 조문학부 시절 은사님과 동창을 소흥에서 모셔본다는것이 이리도 즐거울가, 거리의 한 조선족음식점에 가서 점심상에 앉아서도 우리는 대우님, 로신선생, 월왕 구천을 만나본 기분에서 쉽사리 헤여나질 못했다.
2009년 1월 21일, 소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