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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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5월 기행 (3) - 하지장과 리백의 문인인연 댓글:  조회:4411  추천:51  2009-08-05
                하지장과 리백의 문인인연   귀가한후 나는 인차 하지장관련 서적들을 펼치였다. 흥미로운것은  여러 서적의 주장이 서로 다름이다. 절강인민출판사에서 2006년 12월에 펴낸 “절강명인옛집” 하지장옛집편에는 하지장이 오늘의 항주소산인 월주 영흥사람으로 알려지고 소산 림포진에 하지장의 조각상까지 세워졌는데  소흥문화총서인 “소흥명사(名士)”에는 회계산 산음(山陰)현, 즉 오늘의 소흥현 동포진 경내의 도사장이라고 한다. 이와 달리 소흥시문물관리국에서 펴낸 “하지장세가(賀知章世家)”는 학술연구서로서  하지장의 고향 영흥이란 회계산아래 대우릉 남진묘(南鎭廟) 부근의 영흥촌이라고 밝히였다. 력대의 력사자료를 렬거하면서 그 리유가 론리정연하여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소흥시 학사거리(學士街)에 하지장옛집까지 복원되여 있다니 더욱 그러했다.    그럼 하지장이란 어떤 사람이고 왜 내가 하지장에 이다지도 빠져 드는걸가, 알고보면 하지장은 당나라 시절의 일대명사, 당조의 고관으로 나타난다.    하지장(659년~744년)은 호가 계진(季眞)이고 만년에 사명광객(四明狂客)으로도 불리였다. 그는 삶의 거의 모든 시간을 성당(盛唐)시절에 보낸 행운아인데 이 성당시절은 대체로 나라가 통일되고 평화로운 시절로서 사회가 안정하고 정치가 밝은 편이고 생산이 발전하여 호시절로 불리운다. 이런 사회환경은 한패 또 한패의 인재들을  배출하기 마련이고 하지장은 그런 인재들가운데의 귀재였다. 하지장의 서울 장안에서의 관직생활만도 50여년, 태자빈객(太子賓客)으로부터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겸 비서감(秘書監) 또는 하비감(賀秘監)으로 활동했으니 나라 황제로부터 일반 평민에 이르기까지 모두의 존경을 받았다는 사람이다.    하지장의 위인됨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라 하겠다. 하기에 모택동주석은 하지장의 시 “귀향우서(回鄕偶書)을 친필로 쓰기에 이르렀는바 2001년에 소흥 도심에 당나라 소흥적 시인 하지장의 행관(行館)—하비감사(賀秘監祠)가 수건될 때 본채의 중심부 하지장소상(塑像)뒤면에 모택동주석의 이 친필서를 새기기에 이르렀다.   어려서 집 떠나 늙어서 돌아오니 고향은 변한게 없건만 귀밑머리만 희여졌네 아이들은 서로 바라보나 알지 못하고  웃으며 어디서 왔느냐 물어보겠지   안해가 번역한 하지장의 이 시는 중국문학사에서 고향애수를 그린 시에서의 걸작이고 대를이어 전해지는 유명짜한 시로서 모택동주석의 찬양을 받을만도 했다.    하지장은 그 시절 당나라 대시인 리백과도 서로의 인연을 가지고있었다.    리백(701년~762년)의 조상들은 워낙 롱서성기(감숙 진안)에서 살다가 선조가 수나라 말엽에 죄를 지어 중앙아시아의 쇄엽(碎葉)으로 이주살이를 한 사람들로 알려진다. 그 시절의 쇄엽은 당나라 안서도후부(安西都護府)에 속한 안서사진(安西四鎭)중 가장 서쪽의 한개진으로서 리백은 거기서 태여났다가 다섯살 때 일가식솔과 더불어 아버지를 따라 오늘의 사천 강유현으로 이사하여 왔다. 가정생활이 부유한데서 리백은 어려서부터 유가의 경전, 백가의 학설을 배우며 검술 등을 닦을 수가 있었다.    그러던 리백이 사천의 명승고적을 유람하면서 고향의 산천을 노래하는 시를 수두룩히 창작하기 시작한것은 20살 때이고 집을 떠나 방랑생활길에 오른것은 26살 때인 개원14년(726년)이다.    장강남북 각지로의 방랑생활속에 리백의 나이 어언 42살, 이해 천보원년(742년)에 리백은 벗 오균의 추천에 의해 당현종의 조서를 받고 서울 장안행에 나서게 되였다. 당현종은 인차 리백을 만나주지 않았고 사람들도 리백에 대해 모르고있었다.    이 나날에 리백은 하지장의 위인됨을 알고 자기의 시작(詩作)을 갖고 자극궁(紫極宮)에 가서 나라의 태자빈객 하지장을 만나 보았다. 하지장은 리백의  시 “우서곡(烏栖曲)을 보고 “이 시는 귀신도 울게 할 시로다!”하고 높이 평가한다. 이어 리백의 시 “촉도난”을 보다가 시인의 기발한 상상, 예술적 과장에 련속 찬탄해 바지 않게되고 다 읽은 후에는 기쁨에 겨워 그대는 “선재(仙才)외다”, 하늘에서 내려온 “적선인(謫仙人)이외다” 하고 극찬하기에 이른다. 리백이 후에 적선인으로도 불리운것은 이 때문인데 둘이 술상에 앉으나 지닌 은전이 없으매 하지장은 자기의 금거인(金龜印)을 담보금으로 하고 술이 거나하도록 즐긴다.    그때부터 84살의 하지장과 42살의 리백은 나이 격차에 구애되지 않고 하루가 멀다하게 정을 주고받고 시를 주고받는다. 하지장이 이 40대 시인을 당현종께 천거하여 만나게 하니 리백의 벼슬이 황제신변의 한림(翰林), 리백은 온나라에 이름이 뜨르르하고 금귀인 도장으로 술을 바꿔먹은 이야기는 천고의 문단미담으로 떠올랐다.    하지장은 천보3년(744년)정월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젖어 결연히 벼슬을 버리고 86살에 환고향하였다. 당현종은 태자한테 명하여 문무대신들을 배동하여 하지장을 배웅하도록 하고 친히 시를 지어 하지장을 찬미하였다. 고향떠나 수십년만에 월주로 돌아오니 하지장은 시와 그림같은 고향의 회계산과 감수(監水)에 도취되여 시흥에 빠져버렸다. 그러다가 환고향 1년이 되지 않아 별세한다.  그해 744년 봄이후 리백도3년간 한림생활에 종지부를 찌고 또다시 방랑길에 올라 나라의 명산대천을 유람하던중 락양에서 두보를 만나 깊은 우정을 맺은뒤 가을에 강남 월주에 이르러 하지장을 찾으니 하지장어른이 이미 하늘나라 사람이 된 뒤다. 리백은 놀라움과 처량함에 잠기다가 “대주억하감이수(對酒憶賀監二首)을 지어 하지장을 심심히 그리였다. 그중 한수를 내가 우리 글로 번역하여 보니 이러하다.   사명에 광객이 있어 풍류 하계진이니 장안에서 처음 만나 적선이라 불러주었네 어제날 술로 나누던 정 오늘은 소나무아래 먼지 금거북으로 술 바꾸니 그리는 눈물 수건 적시누나   시에서 사명광객(四明狂客)은 하지장이 자기로 부른 호이고 계진(季眞)이 호, 사명은 하지장 고향의 명산이거늘 리백과 하지장 사이 두터운 믿음과 우정을 잘 보여준다. 또 하지장이 걸어온 인생행로의 한 에피소드라 하겠다. 이런 하지장이 회계산의 완위산아래 양명동에 발자취를 남기고 완위산 동쪽자락의 양명동 한 우람한 바위에 불멸의 룡서궁기(龍瑞宮記)를 남기니 그로부터 1200여년이 흐른 오늘날 6000리밖 북방사람 내가 강남의 하지장 바위글씨 앞에 서니 감수가 비할데없이 새롭기만 하다.    보시라, 당나라 하지장어른이 당나라 대시인 리백과 이어지고 리백이 또 당나라 그 시절 신라인 지장보살 김교각님과 이어진다.    보시라, 여기 당나라 하지장어른이 후세의 명나라 대성현 왕수인 양명선생과 이곳 회계산 양명동에서 이어지니 양명선생이 또 구화산에서 전세의 당나라 지장보살 김교각님과 이어진다……                      
310    5월 기행 (2) - 왕양명과 양명동을 찾아서 댓글:  조회:4849  추천:28  2009-07-27
                왕양명과 양명동을 찾아서     안휘 구화산답사, 그때부터 지장보살 김교각님과 더불어 김교각님을 존경하며 김교각님의 동암안좌를 본받은 양명선생의 거룩한 형상이 나의 마음을 파고 들었다. 절강 소흥은 력래로 수많은 명인들이 배출된 곳이라 명인들을 기리는 동상,  석상들이 여러 풍경구들에 세워져 있다. 소흥  남하에 일떠선 명인광장과 명인기념관이 그러하고, 가암풍경구의 월중명사원(越中名士苑)이 그러하고, 대향림풍경구내가 그러하다. 그런 곳에는 소흥사람들이 존경하는 명나라 성현 왕양명이 한자리를 차지하는데 왕양명의 형상은 대단하다고 할수있다. 더우기 절강의 명산이요, 불교성지로 불리우는 회계산에 양명선생의 부름을 단 양명동(陽明洞)이 있다는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수가 없다. (양명동이면 하나의 바위동굴이 아닌가?!) 양명동을 모르던 시절의 나의 리해였다. 내가 보배처럼 아끼는 최신판 “소흥관광지남”에 “산우에는 양명동이 있는데 우리 나라 고대 이름난 36동천(洞天)의 하나”라고 밝히여 더욱 그러했다. 회계산의 주봉 향로봉 동남과 남쪽가, 주봉아래 완위산 정상부 동쪽가 전체가 천야만야한 절벽강산을 이루어 양명동이란 나에게 바위산의 하나의 동굴로만 안겨들었던것이다. 이 잘못된 리해가 나를 오리무중에 잡아두었다. 절강월수외대로 온 지난 3년래 사방 수십리 둘레를 가진 회계산의 산정마다, 골골마다 수십차례 답사의 길을 이어갔지만 양명동을 안다는 사람하나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도 맥을 버리지 않고 우리 지장보살님과 관련되는 왕양명인물, 양명동을 기어이 찾아내리라 결심한 나.  유감이라면 인적을 모르는 강남특유의 수풀속을 헤칠수가 없어 절벽강산을 이룬 회계산 주봉의 동남쪽과 남쪽가, 완위산 동쪽가 절벽강산 밑에 접근할수 없는것이라 할까. (아하~~양명동아, 너는 회계산의 어느 바위산에 숨어 있는냐?”) 이번 2009년 5.1연휴를 앞두고 나는 탄식에만 머물수 없어 “소흥관광지남”을 다시 펼쳐들었다. 소흥관광지남의 한편의 글에는 소흥에는 옛스럽고 신비로 차넘치는 벽계수—약예계가 있다고 하면서 이 벽계수는 완위산아래라고 소개하였다. 또 완위산 아래에는 옛 룡서궁(龍瑞宮)이 있고 중국의 황제시절 이곳에 후신관(候神館을 지었다고 밝히였다. 당나라 초에는 회선관(懷仙館)으로 불리다가 당나라 개원 2년(714년)에 룡이 출현하였다하여 룡서궁으로 부름이 바뀌였다고 이어졌다. 양명동은 바로 룡서궁 측면이라고 한다. (약예계 벽계수라 하면 완위산 동쪽자락이 아닐까?!) 홀연 뇌리를 때리는 생각에 나는 5.1절날 쉬다말고 오후잡아 아들애를 끌고 택시타고 완위산 동쪽자락 완위산풍경구로 갔다. 이곳 완위산풍경구엔 지난 2~3년 기간 얼마나 다녔는지 모른다. 이번에도 행여나 하여 풍경구 문지기로인들과 양명동을 물으니 역시 모른다는 대답뿐이다. 완위산풍경구내를 어느정도 알고있는 나는 오늘도 헛걸음이라고 탄식하며 골안따라 들어가는데 골안구내를 지나 본격적으로 산에오르는 돌계단길 어구에 오른쪽으로 빠지는 또 하나의 돌계단이 이어졌다. 아들애가 오른쪽 돌계단길에 들어선다. 내가 그길이 아니라고 소리치다가 내버려두고 앞으로 나아가니 돌계단길은 숲속을 가로지르며 두계단 올리막 계단길을 이룬다.  첫계단 올리막은 내리 산비탈이 크지 않은 평지를 이루는 곳인데 돌계단길 왼쪽가에 풍경구를 건설하며 만들어놓은 옛 박우물이 하나 발목을 잡는다. 뭔가 발견되리라는 조짐이다. 옛 박우물을 사진찍고 두번째 올리막계단을 오르니 또 하나의 평지를 이룬 산비탈에 남향으로 앉은 크나큰 옹군 하나의 바위가 나진다. 남향받이 바위는 밑으로 경사를 이루며 바깥쪽이 허궁들린 신령스러운 바위다. 경사진 바위아래에 돌로 만든 관광안내표시패가 나타난다. 관광안내글을 보니 “절강성문물보호단위 하지장룡서궁기(賀知章龍瑞宮記) 마애각석(摩崖刻石),  절강성인민위원회 1963년 3월 11일 공포 소흥시인민정부 립”이라고 씌여있다. 하지장이면 월주, 즉 옛 소흥사람으로서 당나라 대시인을 일컿지 않는가,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경사진 바위벽을 보니 온통 바위를 반듯하게 깎아내고 글들을 새겨 놓았는데 당나라 시절 하지장의 글이라는것이 쉽게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 하지장의 생활년대를 보면 지금으로부터 1200여년전의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장의 마아각석은 립석이 아니고 밑으로 경사진 바위에  구간구간 바위를 갈고 룡서궁기 등을 활달한 필치로 새겨놓은 것이였다. 그런 구간이 10여개는 잘되여 보이는데 밑받침대에 머리를 우로 향하여 누워 글을 새기였다는 것이  수월해 보이지 않는다. 옛 룡서궁기에 이곳은 “…36동천의 제11동천, 성인들이  하늘나라사람들과 만나는 곳이다”라고 밝히였다고 한다. 관련자료에 따르면 하지장의 마아각석을 이룬   바위의 높이는 4메터이고 너비가 8.8메터이다. 밑으로부터 우로  경사를 이루어 규칙적이지는 않지만 “룡서궁기”는 하지장이 직접 쓴것이고 12행을 이루고 매행이 15자의 글로 엮어졌다. 고대 중국 마아각석의 진품으로, 절강성문물보호단위로,   회계산풍경구의 한 인문관광지로 받들리고있는 당나라 시절의 마아각석이다. 그만큼 신령스런 곳인데 주변에는 여기 엄청 크기의 옹군 바위덩어리외 산비탈 수풀일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룡서궁측면은 양명동이라지만 양명동 동굴은 오늘도 헛걸음이다. 했으나 1200여년전 하지장의 마아각석 바위글씨를 찾아냈다는것은 엄청 큰 발견이 아닐수 없다. 나와 아들애는 마아각석 구간을 지나  다시 완위산으로 오르는  산중턱 돌계단길에 들어섰다.                                     2009년 5월, 강남땅 두앵원에서   
309    5월 기행 (1) - 구화산서 알게 된 양명선생 댓글:  조회:4203  추천:41  2009-07-24
                 구화산서 알게 된 양명선생     세월은 류수와 같다더니 지장보살 찾아 안휘 구화산에 다녀온지도 어언 옹근 2년철이 흘렀다. 구화산행에서 고대 우리 겨레 지장보살—김교각님의 발자취를 추적답사한것이 엄청 성과라면 지장보살님을 존중하면서 구화산에 두번이나 올라 동암안좌에서 지장보살님 안좌기도를 그대로 몸소 행한 명나라 시절 대성현 왕수인—양명선생을 알게 된것도 엄청 성과라 하겠다. 북방사람인 내가 생소하기만 했던 옛 강남사람 왕수인—양명선생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한것은 2007년 7월 초 지장보살—김교각님의 발자취 좇아 안휘 구화산으로 갔을 때였다. 구화산을 찾은 이튿날 7월 10일, 나는 첫 스케줄을 화성사 동쪽의 동애선사부터 잡아두고 산아래서 관광전동차에 앉아 산우로 올라갔다. 전기로 끌어올리는 관광전동차여서 아츠랗게 보이는 산비탈길을 12분만에 끝내주었다. 희한한것은 상승고도가 높아지면서 짙은 안개가 바닥쪽으로 몰려가는것이라 할가. 삽시간에 비행기에 앉아 구름우에 오른듯 산아래 경치가 죽여준다. 산의 정상 “백세궁”에 이르자 나는 지체할세라 동쪽의 깊은 골짜기며 바깥산을 일별했는데 안개가 골짜기를 덮어주는 경치는 그야말로 신선세계였다. 아뿔싸, 부지런히 디지털사진기 셔터를 누르는 사이 짙은 안개가 다시 산천을 덮어버린다. 시무룩해진 나는 안개 흐르는 운무속에 나 자신을 내맡기다가 산의 정상 따라 남쪽의 동애선사로 발걸음을 터벅터벅 옮겨놓는데 사방으로 10여메터밖에 보이지 않는 안개는 도무지 걷힐줄 모른다. 어쩔수 없이 안개속 산정의 바위우 동애선사요, 지장전이요 발가는대로 돌아보다가 동애선사 층계아래 어구에 세워진 “동암안좌”소개표를 보고 발길을 멈추었다. 소개표에는 분명히 “김지장님이 처음으로 구화산에 와서 늘 암두(巖斗)에 앉아 경을 외우면서 경치를 감상”하였다고 씌여있었다. “석굴이라, 안좌라……” 불현듯 나의 시야에는 동애선사 바위아래 서쪽가 석굴에서 도를 닦다가 여기 반석같은 기반석에 올라 계속 경을 외우면서 사방경치를 바라보며 사색에 잠긴 김지장님이 보이는듯 싶었다. “그러면 그렇겠지, 구화산에 오른 내가 동암에서 퉁을 맞을수야 없지!” 흥분에 잠긴 나는 동애선사가 자리잡은 바위 아래우를 깐깐히 훓어나갔다. 동애선사가 바위우공간을 다 앗아간데서 동애안좌의 참모습을 볼수없음이 안타까왔으나 동애안좌는 거대형 바위로 이루어졌고 남쪽가에서 볼 때 불쑥 하늘에 치솟은 기암괴석이요, 북쪽가에서 볼 때 점차 경사져 돌을 가득 채워올려 넓은 평지를 만들고 동애선사를 일떠세웠다는 정도는 알아낼수 있었다. 뒤늦은 발견은 나를 흥분의 절정에로 떠밀어올렸다. 안내패말에는 “동암은 절벽위에 우뚝 솟은 하나의 거석으로 창룡이 머리를 쳐들고 있는듯한 모양과 흡사, 암벽이 치솟은듯한 자세를 하고있다.”고 밝히였는데 동암의 남쪽가에서 바라보는 동애안좌는 과연 이 모습이요, 동쪽기슭에서의 동애안좌는 수십길 높이를 이루는 절벽강산이였다. 동애의 여기저기를 눈주어보니 유독 동애안좌구간만이 하늘에 떠오른 바위무리인데 이런 절경을 선택해 도를 닦으며 안좌하신 김지장님이 그지없이 우러러 보인다. 김지장님의 이런 모습을 상상하여 청나라때 한 시인은 시 “동암”에서 이렇게 읊조렸다.   나 홀로 구름우에 올라서니 동암이 뭇봉우리보다 기이하구나 안개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참모습 하늘에 핀 련꽃과 흡사하거늘 밀림속에 금빛과 푸른빗 현란한데 멀리서 종소리 은은히 들려오누나 위인이 안락히 앉아있으니 어찌 신선과 흡사하지 않으랴.   동암우에 안좌하여 열심히 경을 읽는 김지장님의 참모습을 신선에 비유한 그럴듯한 시이다. 나는 시속경지에 완전히 빠져들고말았다. 안개속 거니는 나도 시인의 감수 그대로이며 서쪽가 수직바위에 새겨진 운승방(雲昇方), 비신처(飛身處), 운심처(雲深處) 모두가 안개속 운무의 경지를 가리키고있었다. 해당자료를 보면 동암선사는 구화산 중봉의 정상에 우뚝 솟아 올랐는데 해발은 871메터를 기록했다. 당나라 때 김지장님이 신라에서 구화산에 이르러 동암에 안좌하여 경을 읽거나 사방경치를 바라보며 “비신처” 등 거룩한 발자취를 남긴 력사의 고장이다. 이런 성스러운 고장을 두고 명나라때 사찰이 일어서고 청나라에 이르러 대웅보전, 만불루, 지장전 등으로 크게 확건되더니 1933년에 의외의 화재로 훼멸, 1995년에 다시 수건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것이 쭈욱 펼쳐진다. 나는 동애선사 최정상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다가 동쪽가 벽을 채운 “동애력대시선”들을 오래오래 눈박아보았다. 1200여년전의 김지장님이 여기 동암에 안좌한후 력대의 허다한 문인들이 그 본을 받으며 안좌하면서 많고많은 불후의 시편을 남겼음이 한눈에 안겨들었다. 그중에서도 나의 마음을 무척이나 끄당긴 이는 우리에게 양명선생으로 다가서는 명나라 대성현 왕수인이다. 왕수인(王守仁)은 절강 여요사람, 자는 벽안, 명나라때 철학가, 교육가, 관직은 명나라 남경의 병부상서다. 이런 사람이 세상에 양명(陽明)선생으로 알려지며1501년과 1620년 선후 두차례나 구화산 동암에 안좌하여 김지장님을 그지없이 존경하며 본받은 진지한 모습을 보이였다. 그는 시 “바위에 앉아 내키는대로 쓰노라”에서 “온종일 바위에 앉아/락화를 바라보고나니/어디가 내 집인지 도무지 알수가 없어라”라고 시작하면서 주위 모습을 시에 담다가 나중에 부패한 정권, 부패한 벼슬아치들을 단죄한다.   멍청이같은 벼슬아치들은 무슨 일이 저토록 다사하단 말인고 나의 일생도 끝났음을 믿지 않을수 없는가 하노라   왕수인이 시까지 써가며 당대의 벼슬아치들을 단두대에 올려놓을 때 시인은 십상팔구는 청관(淸官)으로 알려진다. 자료가 없어 구체적인것은 파악할수 없으나 벼슬에 뜻이 없음이 한 자료에서 잘 알려진다. 정덕 15년, 즉 기원 1520년 정월부터 3월에 이르기까지 왕수인은 두번째로 구화산 동암에 올랐는데 조정의 환관은 금의석(錦衣石)이라는 심복을 파견하여 가만히 뒤따르며 왕수인의 일거일동을 감시한다. 왕수인은 그래도 모른척하며 동암에 안좌하여 김지장님의 모습을 취한다. 금의석이 동애의 한 바위우에 앉아 왕수인을 감시하던 자리를 후세에 “금의석”으로 불렀는데 내가 그토록 주의를 돌려도 금의석을 찾아볼수가 없었다. 왕수인을 알리는 자료요, 구화산서 알게 된 양명선생 이해 전부. 그때부터 당나라 시절 일대 문화거장--지장보살 김교각님의 동암안좌를 본받은 양명선생의 거룩한 형상이 나의 마음을 파고들었으니 2년전 구화산행은 2009년 5월을 하지장, 왕양명 답사의 달로 떠올린 전주곡이였다. 이땅의 고대 우리 겨레와 이어지는 명나라  시절 일대 성현이였다.                                                  2009년 5월, 강남땅 두앵원에서  
308    【남방기행】 회계산 자락에도 사꾸라꽃 흐드러져 댓글:  조회:5094  추천:36  2009-03-26
 편자의 말:   3월 20~25일 쯤은 강남땅에서 먼저 피여나는 5옆짜리 홀옆  흰 사꾸라가 만개하는 계절이다.  2007년 3월 하순과 4월 초순 기간 소흥 제1회 사꾸라축제 때 며칠 늦은데서 흐드러진 5옆짜리  흰 사꾸라꽃을 보지 못함이 원으로 남아 이달 3월 25일과 26일 련속 흰 사꾸라꽃 축제현지를 찾았다. 이 사진과 글을 조글로포럼에 올리여 본다.  글은 2007년 3월 29일,  회계산 동쪽자락 사꾸라축제현지를 처음 찾았을 때의 기행이다. 이즘 5옆짜리 홀옆 흰 사꾸라꽃은 곧 지게 되고 이어 떨기떨기 희한한 겹꽃 흰 사꾸라꽃과 겹꽃 연분홍 사꾸라꽃이 또 강남땅을 덮게 된다.  아래 글을 보노라면 강남에 핀 일본 사꾸라꽃의 이모저모를 알게 된다. 【남방기행】       회계산 자락에도 사꾸라꽃 피여나 1   주어진 삶은 살다보면 때때로 마음을 움직이는 예감이란 있는가보다. 3월 24일 회계산 향로봉 산행답사시 나와 아들 경원이는 끝끝내 미지의 미궁속 회계산 동쪽기슭을 답사하고야 말았는데 그날 안개 자오록한 비바람속 회계산 동쪽 산중턱 이름모를 무인정자에서 향로봉으로 오르는 또 하나의 동쪽소로길을 발견한후 강하게 끌려드는 마음을 어찌할수가 없다. 무언가 부르는듯한 예감을 떨쳐버릴수가 없어 며칠후 아들놈을 새 자전거에 태우고 회계산너머 동쪽자락에 가보니 제1회 소흥 사꾸라축제가 한창이 아니겠는가. 그날은 3월 29일 목요일 오후, 주봉 향로봉을 끼고있는 회계산이 산세가 웅장하여 휘트인 아스팔트길 따라 북쪽가를 크게 타원으로 돌아 동쪽자락에 이르매 향로봉으로 오르는 골안어구 길가에 관광정문이 보란듯이 모습을 드러낸다. 시간이 급하매 입장권을 사고 정문가에 다가가니 문지기 녀직원은 향로봉쪽 산에 오르내리자면 두어시간은 소요될거라고 알려준다. 이미 오후 2시를 바라보는 시점이라 자전거를 그대로 타고 한참 골안 따라 들어갔더니 3월 24일 지나쳤던 회계산동쪽 산중턱 무인정자에 이르는데 반시간쯤밖에 걸리지 않는다. 산중턱 무인정자—회계산 동쪽기슭 산야가 한눈에 안겨든다. 해맑은 날씨는 이곳 산천을 더더욱 푸른 모습으로 단장시켜 며칠전 안개속 산야와 또 다른 모습을 토해낸다. 우린 우거진 수풀과 기암절벽에 취하며 산의 정기를 맘껏 받아안다가 록음이 우거진 돌계단길을 내리는데 아들 경원이는 수자에 능한지라 계단을 헤느라 여념이 없다. 나도 아들에 감화되여 함께 따르니 930여개로 헤아려졌다.         2     어느덧 골안동쪽어구다. 아들놈에게 정문기념사진을 남겨주고싶어 정문가로 다가갔다가 나는 주춤 멈춰서고 말았다. 정문 웃쪽켠 붉은 프랑카드에는 “제1회 완위산사꾸라축제”라고 씌여있으니 말이다. 사꾸라라 하면 일본의 사꾸라를 뜻하지 않는가, 뒤늦게야 사꾸라축제를 알아본 나는 정문지기 녀직원과 사꾸라축제를 어디서 하는가고 물었다. 녀직원은 정문안 오른쪽을 가리키면서 저기 피여있는 흰꽃이 사꾸라꽃이라고 한다. “그래요?!” 나는 어이없이 피식 웃고말았다. 금방 내려오면서 지나쳤는데도 몰랐으니 자기무지를 탓할수밖에 없었다. 하긴 무지만이 아닌것 같다. 인생 50대초반을 잡아도 사꾸라꽃 한번 보지 못했으니 우물안의 개구리라고 할가, 사꾸라라하면 일본을 떠올리고 그때마다 10여년전 1990년 8월 학술교류차 일본행을 상기하지만 사꾸라꽃을 단 한번도 대하지 못했으니 휘넓게 분포된 사꾸라밭을 가까이 지나치면서도 알아볼리가 만무했지. 나는 급기야 아들놈을 앞세우고 정문안 사꾸라밭을 찾았다. 유감스럽게도 5개의 꽃잎을 가진 흰사꾸라꽃은 막물이여서 흐드러지게 활짝 피고있는 어여쁜 모습을 찾을수가 없었다. 다행히 그 시각까지 깨끗이 지지않은 흰사꾸라꽃이 가담가담 피고있어 꽃생을 마감짓는 초라한 모습이나마  디지털카메라에 담을수 있어 천만유감만은 피해갈수 있었다. 이어 나는 꽃잎 5개의 흰사꾸라꽃은 개화기가 겨우 며칠뿐이여서 제일 희한한 시기를 놓치였다는것, 한창 흐드러진 시기가 바로 며칠전이고 갓 지난 3월 25일 일요일 하루만도 10원짜리 입장권 2만여장이 팔리였다는것을 알았다. 예감에 끌린 사꾸라꽃과의 만남이였다. 우리 앞에는 대면적의 사꾸라나무밭이 펼쳐진다. 중국에서 중문으로 “영화”(樱花)라고 부르는 이 아릿다운 꽃을 일본에서는 사꾸라꽃이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벚꽃이라고 하는것쯤은 조금만 상식이 있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렸다. 일본을 상징하는 이 나라 국화가 일찍 일본에 의해 36년 수난사를 치려야 했던 한민족으로 말할진대 정서상 받아드릴수 없다는것도 자명한 일이 아닐까.          3     해당 사꾸라, 한국서 말하는 벚꽃 지식을 모아보면 세계적으로 약 2000여종을 이룬다고 한다. 한라산을 비롯한 한국내에 자생하는것이 20여종이라 해도 꽃잎 5개의 흰꽃은 눈부시게 피여있는 기간이 겨우 3일 정도란다. 이같이 꽃잎 5개를 망라한 벚꽃에 흰꽃도 있고 분홍색꽃도 있으니 개화기는 3~5월사이, 겹벚꽃만은 개화기가 꽤나 길어 한 20일정도 된다지 않는가. 일본, 사꾸라종류 300~400종을 가지고있다는 이 나라는 예로부터 사꾸라꽃이 화사하게 피여나면 풍년을 예고하오, 사꾸라꽃이 시들사하면 흉년을 예고하오~ 이런 식으로 믿고있는것으로 알려진다. 그럼에도 사꾸라나무가 워낙 일본자생이 아니라는것을 당신은 알고있는지?! 흘러간 력사는, 일본은 여기 당나라 시절에 저들 사신을 통해 사꾸라나무를 가져갔고 시초 궁정에 심기 시작했다고 일깨워준다. 처음에 일본서는 사꾸라를 매화, 즉 일본어로 “우매”라고 부르다가 차차 사꾸라로 부르면서 나라를 상징하는 꽃으로 떠올렸다. 그러던 사꾸라는 20세기 초엽 쇼와시대 이후 일본군국주의 정치적도구로 토라지는 비운속에서 2차대전의 피비린 전쟁터에서 일본국 천황을 위해 화려하게 산화(散花)하는것을 상징하게 된다. 산화란 무얼까? 산화란 다름아닌 일본의 젊은이들이 사꾸라처럼 화려하게 죽는것을 미화하는 전문용어로 통한다. 일본군국주의자들은 전쟁터에서 산화하는 장병들을 다시 사꾸라처럼 화려하게 피여난다고 극력 고취했으니 어여쁜 사꾸라는 침략을 일삼은 일본제국주의의 정치오염물을 들씌게 되고 배일사상에 의한  한국인의 배척을 당해야 했다. 어여쁜, 아릿다운 사꾸라의 참담한 비극사가 아닐수 없다. 한국 네티즌들의 말을 빈다면 사꾸라나무는 나무일 뿐이고 사꾸라꽃은 사꾸라꽃일 뿐인데 대자연속의 일개 식물—사꾸라꽃에 무슨 죄가 있을가, 사꾸라나무—어디까지나 대자연속 하나의 식물류에 지나지 않을진대 국화면 어떻고 어여쁘면 어떠하랴, 누구든지 그 어여쁨에 취해보고 맘껏 감상한다면 미적 향수를 하지 않을가.       4         사꾸라에 대한 이해는 비약의 나래를 펼친다. 그럴수록 제1회소흥 사꾸라축제의 사꾸라나무 산지가 어딜가 하는 물음이 자꾸만 떠오른다. 이튿날 3월 30일 오후, 만사불구하고 사꾸라 축제현지를 다시 찾아서야 나는 절강 소흥일대서는 사꾸라자생을 찾아보기 어렵다는것, 7년전에 일본서 묘목을 인입하고 그 재배면적이 무려 150무에 달해 4000~5000그루에 달한다는것, 일본품종이기에 그대로 사꾸라로 부른다는것을 비로소 알게 되였다.     그뿐이 아니다. 5엽짜리 흰사꾸라꽃이 진 대신 겹꽃으로 알려지는 흰사꾸라, 연분홍사꾸라는 이자 한창이여서 그 감동이 진해만 간다. 떨기떨기 어우러져 있는 사꾸라꽃의 어여쁨은 그 무엇으로도 묘사하기가 어렵다. 나는 디지털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또 눌렀다.그 속에 갖가지 모양의 겹사꾸라꽃들이 자리잡고 또 자리 잡아간다. 3월 20일부터 4월 10일까지 사꾸라축제, 10만명 접대계획—나는 소흥사람들의 앞서가는 의식에 탄복하지 않을수 없다. 어제도, 오늘도 사꾸라꽃을 보려고 찾아오는 사람들, 청춘남녀들이 그칠줄 모른다. 그속에는 두개의 대형뻐스에 나누어타고 달려온 100여명의 중학생들도 섞인다. 미지의 세계로만 알았던 회계산 동쪽자락은 열려진 품으로 그들을 얼싸안는다. 산행의 이음속에서, 마음을 끄당기는 그 어떤 예감으로 미지의 세계 돌파속에서 뜻하지 않게 사꾸라꽃과 사꾸라축제를 보아낸 나, 나는 어느덧 사꾸라꽃--벚꽃에 반해 버리고말았다. “회계산 동쪽자락에도 사꾸라꽃 피여났어요!”   (2007년 3월 30일)
307    여러 분들 댓글 답변 인사글입니다 댓글:  조회:3300  추천:24  2009-03-23
          여러 분들 댓글 답변 인사글입니다     여러 분들의 열성적인 참여로 하여 기본 견해가 기본적으로 도드라진것 같습니다. 이미 단상이랍시구 글 한편을 썼으니까, 또 여러 분들이 리플을 달았으니까 여러 분들의 립장과 견해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답변과 인사를 올림도 옳은 태도라고 보아집니다. 단, 늘 일에 쫓기는 사람이니까 시비를 할 생각도 없고, 그럴 시간도 없어 이 글로 마무리를 지으려고 합니다.    워낙 “이래도 되는 걸까?”를 쓸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조선족사회에서 만연되고, 우리 조글로 글쓰는 이들께도 나타나는 한민족이나, 북한, 북조선 부름의 현실을 두고 필요한 충고를 주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우선, “나원참”님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나원참님의 존댓말이 아닌 반말쓰기만은 따끔한 침을 놓으니, 나원참님이 실례라는 점을 밝힙니다. 그러면서 “조선족을 포함해서 한국과 조선, 세계는 같은 민족”이라는 점은 시비할 나위도 없는 옳은 말입니다. 나도 이점을 글에서 명백히 밝히였는데 다시 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도 50대 중반으로서 우리 력사와 씨름한지도 30년이 됩니다. 그럼에도, “조선족은 한반도에서 모두 이주한 이주민족이다. 즉 같은 민족이란 말이다”고 쓰고 있는데 이 말 역시 옳은 말입니다. 다만 대방을 모르고 글을 쓰니까, 무시가 들어갔다 이말을 하고싶습니다.    나원참님과  한마디 나누고싶음은 나원참님이 짧은 댓글에서 한민족, 한반도를 거들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국과 거래할 때는 한민족, 한반도라고 할수는 있으나 우리 중국조선족으로 말할 때는 너무도 똑똑히 조선민족, 조선반도라고 써야 합니다.  이해가 됩니까?  이해가 되지 않아도 이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로서는 중국의 조선족이고, 조선민족입니다. 우리로서는 한반도가 아닌 조선반도로 불러야 합니다. 이는 중국에서 사는 조선족들이 모두가 지켜야 할 원칙입니다.    민족은 하나의 사회범주입니다. 오늘날 중국의 조선족은 조선반도(한반도)에서 이주한 이주민족이고, 조선과 한국, 해외를  망라하여 하나의 민족(겨레)으로 통하고 있지만 같은 민족이라 해도 국적이 다름에 따라 그 부름이 다를수 있습니다. 또, 소속 나라가 다르고 력사시기가 다름에 따라 그 부름이 다를수도 있습니다.    중국의 조선족과 조선에서 조선민족이라고 부르는것이 그러하고 한국에서 한민족이라고 하는것이, 일본에서 재일동포라고 하는것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구쏘련에서는 자기들을  고려인이라고 부릅니다. 쏘련이 해체되던 시절 1992년 경에 연변일보 기자로 있으면서 연길에 온 국제고려인협회 협회장을 인터뷰한적이 있습니다. 그분과  고려인 연유를 물으니 “조선인이라고 하면 한국이 좋아 하지 않을것이고, 한국인이라고 하면 조선이 좋아하지 않을것이다. 그래서 어디에도 인심을 잃지 않을 고려인을 따오게 되였다”고 말씀하는 것이였습니다. 원래의 한 나라가 두 나라로 갈라지니 조선이나 한국 밖의 우리 민족들의 부름도 같은 민족일지라도 그 부름이 이렇게 달라질수 밖에 없었다는 말이지요.    이면에서 “직시님”의 견해가 적시적입니다. 1991년 9월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여 각자가 독립적인 국가로 존재하니 그것을 인정해야 하고 따라서 조선, 한국이라고 제대로 불러 주자는 것, 천만 지당한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조선과 한국도 서로 북한이요, 남조선이라고 무시부터 할것이 아니라 서로를 존중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우리 조선족들까지 어느 일방에 서서 어느 일방을 무시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연암님의 말씀처럼 “조선 남북의 어느 한쪽을 맹목적으로 따라 다녀서는 안”될 것입니다.  아니면 언젠가는 골탕을 먹게 됩니다.    한마디 말하고 싶음은 조선이나 한국이나 모두가 우리 중국조선족의 고국이라는것, 고국을 어머니에 비유할때 어머니가 잘 살아도 어머니고, 어머니가 가난에 쪼들려도 어머니라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잘 살면 어머니라 부르고 어머니가 가난하다하여 천대하거나 무시할수가 있어요? 어머니는 잘살아도 어머니고 못살아도 어머니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국이 우리보다 잘 산다하여 한국에 엎어지고 조선이 우리보다 못하다하여 얕잡아 본다면  취할 태도가 못되지요.    직시님이 한국과 거래시 한민족, 조선과 거래시 조선민족으로 나서야 한다는 견해  실제적이지요. 다만 우리가 조선과 거래시만 조선민족인것이 아니라 우리의 부름이 조선족—조선민족으로 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중국의 조선족들은 한반도를 조선반도라고 해야 하고, 한민족을 조선민족이라고 해야 합니다. 한국을 상대할 때는 한반도, 한민족이라고 함이 옳지만 글에 옮길시는 한반도(조선반도), 한민족(조선민족)이라고 밝힘이 옳습니다.    연암님, 락동강님, 현장님의 이해와 동조에 감사한 마음입니다. 이 글을 통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앞으로도 어느 때나 조언을 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잘못이 있을 때는 기탄없이 채찍질을 안기기를 기대합니다. 나원참님도 서로 지기로 지내며 서로 어울려 돌아갔으면 좋겠구요.   2009년 3월 23일  
306    【단상】이래도 되는 걸까? 댓글:  조회:4217  추천:34  2009-03-22
【단상】   이래도 되는 걸까?     이밤에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두만강 사랑”이란 블로그를 보고 크게 놀랐다. “두만강”이란 필명작자가 또 나타난것도 그러하겠지만 “두만강 사랑”네가 자기가  중국조선족이란 것을 망각하고 한국인인양 “한민족” “북한” “북조선”이란 말을 거리낌없이 쓴다는 데서였다.   보매 이곳 두만강은 연변의 도문시에서 산다고했다. 중국의 조선족이란 말이다. 그러면서 블로그에서  “한민족의 두만강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간”이라고 밝히였다. 한민족이란 무엇인가? 이는 한국국적을 가진 한국인만을 가리키지 중국의 조선족 등을 포함시키지 못한다. 왜서? 우리 조선족은 중국의 조선족이고 한국국적을 가진 한국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민족이라는 범주에서는 우리는 조선, 한국 그리고 세계의 여러 나라들에서 살고있는 겨레들과 하나같이 같은 말과 글을 쓰는 하나의 겨레이지만 나라가 다름에 따라 그 부름은 엄연히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분들은 “한민족”이라는 부름이 중국의 조선족을 포함한 해내외 모든 겨레를 칭한다고 보는것 같은데 이는 틀려도 크게 틀린다.   그리고 중국에 살면서 한국분들처럼 조선을 “북한”이나 “북조선”이라해서 될까? 중국에서는 북한이나 북조선이라고 부르지 않고 조선이라고 부른다. 이 부름을 망각하지 말아야 할것이다. 우리가 중국의 조선족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것이다.   또, 중국의 조선족으로 살아가는데 북한이나 북조선이라고 하며 구류장이 어떻소, 교화소 철문이 어떻소 하면서 조선현실글을 되는대로 올리는 점이다. 선의적으로 권고하건대 우선 자중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인터넷 공간이 마음대로 글을 올려도 되는 무릉도원이 아님을 명기하기를 천만 바라는 마음이다.   아직도, 아직도 놀라움을 금할수가 없다. 중국의 조선족이면서도 한민족이라고 칭하는 이들, 북한이요 북조선이요 되는대로 부르는 이들—더는 이런 맹동을 하지 말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가 글을 씀에 있어서 한민족이라 할때 (  )를 치고 조선민족이라고 밝히고, 한반도라 할때 (  )를 치고 조선반도라고 밝힘은 왜서인가를 우리 조선족들은, 우리 글쓰는 이들은 잘 알아야  할것이다.   2009년 3월 22일  
305    【겨레발자취】(27) 당송 김지장과 김씨 자취 찾아서 댓글:  조회:4557  추천:38  2009-02-09
             당송  김지장과 김씨 자취 찾아서     1 2월 2일 오전 10시 쯤 나는 아들애를 데리고 다시 대향림풍경구 답사길에 올랐다. 겨울방학 연변에로 귀가하지 않은 류은종교수님과 사모님이 동행한데서 우리 대오는 두가족 4명으로 늘어났다. 시내 600선 버스편으로 대향림풍경구에 이르니 정문내 벽체글발이 우리 첫 발목을 잡는다. 남송의 위대한 애국시인 륙유의 시 “서로(西路)계화를 읊노라”여서 류은종교수님은 남송 륙유의 시가 어떻게 대향림풍경구 첫 인상으로 되는가고 물으신다. 이어 소흥출신의 륙유가 수차에 걸쳐 여기로 왔고, 여러 편의 시를 지었다는 소개글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한다. 정문을 지나 관광안내차로 계화나무 고목림에 이르자 “중국 최대 계화나무고목군”석비가 환히 시야에 안겨 들었다. 기념사진을 남기고 서너개 돌계단을 오르니 남송시기 걸출한 녀류시인 리청조시비가 우릴 기다린다.. “대향림, 대향림하더니 여기에 리청조시비도 있구나!” 류은종교수님은 상상외 시비를 두고 자못 기뻐하시며 홀로, 부부동반으로 기념사진을 남긴다. 풍경구 정문안 륙유시비와 계화나무 첫 구간 리청조시비가 우리 기분을 둥둥 띄워준다. 2 이번은 기분을 바꾸어 보았다. 계화나무 숲속 언덕가에 련이은 옛 묘소가  나타나는데 묘소안내비에는 소흥현 문물보호단위 “신록공묘”(新祿公墓)가, 묘소석비에는 “신록공뫼계”가 씌여져 있다. 어제 소홀을 념두에 두고 좌우 석비문을 보니 묘소의 주인공은 이름이 김신록이고 남자, 청나라 계농(桂農), 형당서로촌(型塘西路村)사람, 계화나무 재배에 뛰여나 뭇사람들의 찬양을 받으매 그의 자손 김복서 등이 청나라 광서 19년, 즉 1893년 3월에 묘비를 세운것으로 나타난다. 대향림으로 불리우는 이곳 계화나무는 그들 김씨의 조상들인 옛 송나라 김씨와 그리고 포씨 두집이 1000년전 송나라시절에 심은 것이였다. 류은종교수님은 김씨라면 광인이 말하는 송나라시절의 고려김씨가 아니겠는가고 물어온다. 내가 100% 긍정할수는 없어도 가능성이 풍부하다고 하니 교수님은 “광인한테 또 연구과제가 나졌다”며 유머를 튕기신다. 1000년전 남송의 위대한 애국시인 륙유가 계화나무 계곡에 이르러 고려국에서 온 김씨네와 만났다면 얼마나 흥나는 일일까. 두번째 구간 계화나무 고목 숲속에서 우린 또 발길을 멈추었다. 어제는 아무 예비지식조차 갖추지 못하여 지나치고 말았더니 이 구간 입구의 첫 계화나무가 남송의 위대한 애국시인으로 받들리는 륙유가 몸소 심은 나무로, 다음 나무가 또 남송의 걸출한 시인 양만리가 심은 나무로 알려진다. “오늘은 정말 기쁨만이 둥둥 뜨는 날입니다. 어제는 륙유와 양만리가 심었다는 나무도 모르고  지나쳤지요.” 사제간인 우리는 웃고떠들며, 복새판을 피우며 연변대 조문학부 시절 중국문학사배우기로 돌아가도 보았다. 내가 남송시인 양만리는 인상이 없고 이름도 생소해 보인다고 하자 사모님은 양만리가 남송의 대단한 시인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는 내가 부끄럽지만 교수님이 무척 고와하는 아들애가 가끔 우리 셋 사진을 찍어주며 길동무, 말동무를 해주어 다행이다.   3 계화나무 고목림 유람에 이어 찾은곳은 계화나무림 어구 가까이 향림선사(香林禪寺).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벽체글 첫 인상속에 향림사 절지기의 가리킴에 따라 향림사 뒤언덕가 지장전을 찾으니 “남무지장왕보살”이란 커다란 글씨와 함께 골안을 가로지른  2층옥사가 나타난다. “끝내 이곳 지장전을 찾고야 말았지!” 나는 희열에 넘쳐 지장전 입구를 찾고찾는데 2층에서 한 중국녀인이 개가 낯선사람을 보면 달리니 가까이 다가서지 말라고 소리 지른다. 아니나 다를가,  2층란간에 검은 황둥개 한마리가 나타나 길길이 뛴다. 그 서슬에 지장전에는 접근할수조차 없다. 지장전을 찾아 달려온 걸음이 맹랑하기만 하다. 하긴 허망만이 아니지, 대향림 불교사원내에 지장전이 독립적으로 존재함을 보아낸것도 위안이리면 위안이렸다. 향림사를 지나 골안따라 한참 나아가면 골안 시내물을 가로막은 저수지언제가 나타난다. 저수지언제에 올라서면 오염하나 모르는 맑고푸른 저수지가 반겨주고 푸른 수풀이 우거진 뭇산들, 언제아래 향림사와 대향림 시골전경이 펼쳐져 가슴이 후련하다. 뜻하지 않은 일로 골몰도 해야 했다. 저수지를 지나 왼쪽 산기슭을 톺다가 산등성이를 넘으면 불교사찰 집중구내여서 보림사요, 자암사요, 적정사요, 향림각이요 있다더니 첫 산등성이에 올라서니 산등성이는 또 늘찬 올리막 골안길을 이루며 끝이 보이지 않는다. 사모님과 아들애가 골안에 떨어지고 교수님과 내가 내친걸음을 이어가는데 이미 정오도 훨씬 넘어서 배가 촐촐한데 우리한테는 먹을만한것이 하나도 없다. 풍경구내에서 식사를 하면 될줄 알았는데 우리가 가는길은 가도가도 대중이 없다.   4 류은종교수님이 걱정이다. 원체 식사가 좋은 교수님이 아침식사를 대충 치르고 길을 떠난데서, 골안 늘찬 올리막 돌계단길을 가고가는데서 몹시 시장기를 느끼시는것 같다. 이러구러 길을 조여 정상의 산등성이에 오르니 관광안내도에 소개된 불교사찰은 어디가고 대규모 불교사찰—산서 오대산, 안휘 구화산, 주산군도 보타산, 사천 아미산 4대불교명산, 4대불교성지와 어깨겨룸하는 거대건설이 한창이다. 부근 어디서 먹거리를 구할수도 없다. 이런 경우를 가리켜 무어라 형용하면 좋을는지. 그래도 아직 사지(死地)는 아닌가부다. 산등성이 길가 빈 공지에 인적이 있는것 같다. 식당이랍시고 빈집이기는 하나 한사람이 어른 거려 찾아물어보니 오늘내일 사이 이곳으로 일군들이 많이 밀려 들고, 이해로 여기 불교사찰 대거건설을 마무리한다고 한다. 체면불구하고 먹을만한것이 없냐고 하니 달걀이 있단다. 그러면서 우리 요구대로 전기밥가마에 물을 넣어 끓이고 달걀 8개를 깨서 넣는다. 허기찬 류교수님이 생달걀 하나를 깨서 우르륵 입에 넣는다. 나도 주춤하다가 그대로 했더니 대번에 효과가 있다. 속이 든든하고 정신이 난다. 소년시절에 생달걀을 먹어본후로는 처음인것 같다. 식당주인은 전기밥가마 달걀을 두사발에 담아 내여놓는다. 감사는한데 우리식 달걀먹이가 아니고 물에 탄 설렁죽이여서 저아래서 기다리는 사모님과 아들애한테 가져갈수가 없다. 막무가내로 달걀죽을 한사발씩 들이켜고는 라면 3개와 짭짤한 돼지고기, 물고기 몇점을 얻어들고 골안따라 내려갔다. 촐촐한 아들애는 마른 라면 하나를 게눈감추듯 다 먹어버리고 우리 어른 셋은 교수님이 지닌 약술에, 고기점을 안주로 술상을 대신하는데 알달달 산중의 술놀음이 그리도 좋을수가 없다. 허허, 강남땅에 와서의 첫 산중허기, 초라한 행색의 우리만의 점심에때우기—두고두고 옛말로 남을것 같다. 돌계단길 밑으로는 시내물이 촐랑촐랑 봄을 알리며 흘러 내리고, 그 사이로 좌우 산기슭의 대마무숲이 약속이라도 하듯 시내물가로 머리를 숙여 있다. 지난해 2월인가, 남방 특유의 폭설피해지만 류은종교수님은 대향림을 찾은 우리를 맞이하여 일제히 머리를 숙인다며 유머를 터드린다. “하하하”, “허허허”, “호호호” 희열의 웃음소리 산간의 계곡속에, 대나무숲속에 퍼져 오른다. 겨레발자취를 찾아가는 길은 이렇듯 힘겹기도 하고, 허기지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끝없는 길의 연장이라고 말하는상 싶다. 2009년 2월 1일, 강남땅 두앵원에서                  
304    【겨레발자취】(26) 계화나무 고목림서 옛 김씨 만나 댓글:  조회:4895  추천:53  2009-02-09
           계화나무 고목림서 옛 김씨 만나   섣달그믐날 603호버스편으로  소흥 서북쪽 12킬로미터 지대에 위치한 천하절경—가암풍경구에 다녀온후 603호버스로 이어지는 대향림풍경구가 내내 머리에서 떠날줄 모른다. 며칠뒤 2월 1일 오후 안해와 아들애, 나 일가족 셋은 종내 소흥 도심의 탑산 가까이서 다시 603호 시내버스에 오르고야 말았다. 유람지는 603호버스 종착역이고, 소흥시 구역에서 25킬로미터 떨어진 대향림(大香林)풍경구. “크다는 대에 수풀림이라, 그속에 향기 향자가 들어간걸 보면 계화나무 향기를 뜻하는것 같구만!” “글쎼요, 십중팔구는 그러한것 같기두 하구.” 부부간의 버스안 얘기, 과연 버스에서 내려 대향림풍경구 구내에 들어서니 산과 산사이를 누비는 계곡구내는 어디라없이 계화나무들로 꽉차 있었다. 그것도 수년, 수십년생 계화나무가 아니라 골안어구의 석비 “중국 최대 계화나무 고목군”이 알리는 것처럼 보기 희한한 고목림이 우릴 맞아 준다. “고목이라면서 전혀 고목다운 느낌을 받을수 없어요.” “그럴수도 있지. 계화나무는 다른 나무들과 달리 고목이라도 수년, 수십년 나무처럼 저 모양이라니까. 절강의 천도호(千島湖)갔을 때도 천도호 계화섬의 800여년생 고목이 수년생 나무로밖에 안 보였다오.” 또 부부간 주고받음인데 저앞에 보다 희한한 장면이 펼쳐졌다. 계화나무 고목 한그루가 란간으로 둘러있고 석비까지 있어 발길이 끌리는데 가까이 다가가니 하늘을 덮으며 우산처럼 펼쳐진 계화나무의 수령은 놀랍게도 987년으로 밝혀져 있었다. 돌 표시비가 1997년에 세워진것으로 미루어보면 2009년 올해 이 계화나무의 수령은 999년으로 헤아려진다. “와, 천년 계화나무왕을 보니 마음부터 경건해지네” 1월 27일 회계산 자락의 소흥현 계동진 구내 산비탈에서 수령이 1200여년에 달하는 중국 비자나무왕을 볼때도 마음이 경건해 진다더니 중국 계화나무왕으로 불리우는 눈앞의 계화나무 고목을 두고 또 경건함이 쏟아진다. 우린 첫 계화나무 고목구내를 지나 두번째 계화나무고목 구내에 들어섰다. 산간의 계곡구간은 거듭 계화나무 고목으로 안겨지는데 몇리 잘되는 계곡을 오르내리는 유람길이나 나무숲속 어디나를 막론하고 풍경구로 잘 꾸려져 있질 않은가. 그속에는 공산범음(空山梵音), 향림화우(香林花雨)도 있고, 화전월하(花前月下), 유곡청운(幽谷淸韵)도 있고, 월로사(月老祠), 화신묘(花神廟)도 있는가 하면 두쪽 산중턱까지 덮은 대면적의 대나무숲까지 어우러져 꿈속을 거니는듯한 기분을 떨쳐버릴수가 없다. 과시 산좋고 물좋고 자연이 아름다운 천년 계화나무 숲속이렸다. 그때에야 대향림풍경구 소개비들에 눈길을 돌리니 대향림풍경구는 중국의 또 하나의 불교성지—회계산 여맥과 이름난 강남땅 옛 감호 사이, 항주와 소흥 사이에 위치했는데 그 면적이 약 4평방킬로미터, 현재 재배중 계화나무 1만 4000여그루라 한다. 그중 중국의 계화나무왕이라고 불리우는 푸르싱싱 고목은 나무 높이가 18미터, 밑변 나무둘레의 길이 4.3미터, 옆으로 퍼진 차지면적이 360평방미터라면 계곡 동서남북에 모두 계화나무왕들이 있어 동계왕의 수령만도 800년 쯤으로 알려진다. “유엔 유네스코 식물등록 중국전문가들이 계화나무고목으로 전세계 규모 최대, 력사 가장 유구라 한다더니 과연 그른데가 없구나!” 나는 나혼자 중얼거리며 연신 고개를 끄떡이였다. 대향림 계곡치기에 이르니 바위와 바위사이로 맑은 물이 돌돌 흐르고 “감호 제1원천”이라는 정자가 시야에 잡혀온다. 정자우 산중턱을 가로 지르는 유람길에서 내려다 보이는 대향림 계곡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유감이라면 시간이 모자라 불교사찰 구내를 돌아볼수 없음인데 앞서간 안해는 계곡어구 첫 구간 계화나무 고목림속 옛 무덤의 주인공이 김씨로 나타나더라고 말을 건넨다. “뭐~김씨라구, 김씨라면 고려김씨들이 아닐까?” 다른데 정신을 팔다가 옛 무덤을 지나친 나에게는 대뜸 고려김씨로 다가선다. 고려와 송나라 시절 반도땅에서 많은 고려김씨들이 바다를 건너와 절강, 복건 연해지구에 퍼지였고, 1000년 쯤으로 헤아리는 회계산 서쪽골 어구 지장보살 바위불상 서명에 김씨들이 박혀 있는것—그저 지나칠 일이 아니였다. “어이유, 대향림 구내 불교사찰에 지장전이 있고, 이곳 계화나무 고목을 심은 이들이 김씨로 나타나니 다시 한번 걸음을 걸어야겠네요.” 안해의 앞지르는 놀림말에 나는 “어험, 두말이면 잔소리렸다!”하고 능청을 떨었다. 벌써부터 마음이 싱숭생숭해 오전에 떠나오지 못한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여기 대향림 마지막 귀가버스가 오후 5시라 우리는 급급히 귀로에 올라야 했다. 2009년 2월 1일, 강남땅 두앵원에서      
303    【겨레발자취】(25) 항주 뢰봉탑 오월왕 고대겨레와 이어져 댓글:  조회:5152  추천:48  2009-01-29
       항주 뢰봉탑 오월왕 고대겨레와 이어져                                               1 여름방학이 되자 금방 대학시험을 치른 쌍둥이 딸애들이 절강 소흥으로 왔다. 처음 강남땅을 밟은 쌍둥이를 데리고 일가족 모두가 항주 서호를 유람한것은 2008년 7월 4일. 그날따라 날씨가 흐리터분하고 안개가 자욱하여 뭐가뭔지 모르겠는데 서호가의 뢰봉탑에 오르니 짙은 안개가 가담가담 물러 갈때가 있어 두루 사방을 둘러 볼수가 있었다. 뢰봉탑은 서호의 남쪽가 나지막한 석조산(夕照山) 산우에 일어섰는데 탑밑에 이르니 웅위한 뢰봉탑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왔다. 뢰봉탑은 탑 기초부분이 2층으로 되고 탑 몸체의 높이가 5층, 61.90메터, 탑의 전체면적은 6089평방메터를 이루는 거대한 현대적 건축물이였다. 곧게 뻗은 경사진 엘리베이터로 산아래서 탑의 1층에 이르니 무너져 내린 뢰봉탑유적지가 두터운 유리벽 너머로 그대로 시야에 안겨 들었다. 뢰봉탑 건설자들은 원 유적지를 보호하기 위하여 강철결구를 도입하여 탑 기초부분을 2층으로 만들어 탑 1층공간을 유적지 공간으로 꾸려 놓았는데 이런 강철결구 도입은 유적지를 그대로 생생히 보호하여 관광용으로 하고 탑이 든든하고 실용적이고 현대적 미감이 넘치게 하였다. 남송시기의 서호그림과 뢰봉탑의 구식사진들을 대비적으로 펼치여 뢰봉탑의 어제와 오늘을 동시적으로 보니 좋은데 슬프고도 아름다운 백사(白蛇)의 사랑전설을 목판에 조각하여 더욱 좋았다. 뢰봉탑 2층은 전체 탑내 차지공간이 가장 큰 곳으로 나타난다. 이곳에서는 뢰봉탑유적지를 평면으로가 아니라 발아래로 전체 모습을 헤아릴수가 있어 유적지유람 최상의 관찰공간이였다. 게다가 오월국 전홍숙왕이 탑을 만든 과정을 그림으로 처리하여 쌍둥이는 뢰봉탑의 현대적 미와 공간적 미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3층은 뢰봉탑 관련 력대 시문들을, 4층은 뢰봉탑 바깥의 경치를 탑내에 그에 걸맞게 돌아가면서 조각하여 흥미로왔다.  2 탑내 엘리베이터로 최상의 5층에 이르니 탑의 천정에는 새탑이 일떠선 2002년을 대표하는 모양으로 불교의 불사리탑이  순금도금 상태로 2002개가 새겨지고 부처님의 일대기를 조각하여  실감이 났다. 뢰봉탑 불교문화의 상징의의를 그대로 나타내는 교묘한 조치라 하겠다. 탑밖은 서호와 서호주변의 산야가 짙은 안개속에 가끔 모습을 드러내 환성이 절로난다. 뢰봉탑 5층은 서호와 그 주변을 한눈에 굽어볼수 있는 가장 리상적인 장소였으니 우리 일가족, 더우기 쌍둥이들은 서호의 풍경에 취하여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뢰봉탑이 일어선 산이 석조산이름을  띠며 뢰봉락조란 이름을 가지리만큼 석양이 아름답다더니 그른데가 없다. 락조속에 어린 쌍둥이의 모습이 카메라에 고스란히 비껴든다. 그런 모습의 쌍둥이 딸애들에게 뢰봉탑의 유래를 들어 보겠는가고 물으니 좋다고 야단이다. “시초 뢰봉탑을 세운 사람은 오월국의 왕 전홍숙이야. 오월국이 항주서 처음 일어선것은 기원 907년인데 제1대 왕 전류립과 그의 아들, 손자에 이르기까지 3대 다섯왕에 걸치며 항주를 다스려 86년, 나라가 존속 72년이지. 뢰봉탑은 오월국의 말대  왕 전홍숙이 자기의 비 황씨를 위해 세운 것이라 하여 황비탑, 왕비탑으로도 불렀는데 불교도인 전홍숙의 재위기간 항주일대에 불교사찰을 대대적으로 신축하니  여기 뢰봉탑을 망라하여 서호가의 보숙탑, 령은사의 쌍석탑 등 허다한 사찰들은 모두 전홍숙시절에 일떠섰거든.” 나의 말에 귀를 기우리던 쌍둥이는 전홍숙은 어떤 왕인가고 물어온다. “전홍숙은 오월국의 말대 왕으로 등장하자마자 나라를 다스리는 수완을 나타내 나라의 번영을 일궈낸 일대 국왕이야. 전홍숙의 최대공적은 기원 960년에 조광윤이 북송을 세우자 대의를 기리여 몇해후에 오월국 13주, 한개 군, 86개현 모두를 송나라에 귀속시킨거지!” “전홍숙은 대단한 왕이야!” 서로서로 전홍숙왕을 치하하는 쌍둥이 그모습 사랑스러워 내가 “전홍숙은 우리 고대겨레와 이어지는 사람이야.”라고 했더니 무등 호기심을 가지며 들려 달라고 조른다.  3 기원 10세기 시절에 오월국에서 불교가 성행, 중국불교 8개류파의 하나가 천대파로 나타난다. 천대파는 절강 천대산을 발상지로 하고있는데 천대파의 제1대 시원을 연 조사가 의적스님이였다. 헌데 당나라 말기와 그에 이은 5대10국의 대혼란시기 불교발전은 치명적인 쇠퇴를 보인다. 당나라 때 무종이 이미 페불을 강행하더니 5대10국 존속 반세기는 극도의 혼란기여서 헤아릴수 없는 불교사찰과 전적이 사라지고 만다. 천대종의 불경들도 소실되는 운명을 면치못한다. 다행히 5대10국 시절 오월국에서는 불교를 보호하고 장려한데서 불교가 번영의 일로를 걸을수 있었다. 이에 힘입어 불경의 소실을 안타가와 하던 의적스님은 오월국 전홍숙왕에게 고려와 일본에 사신을 보내여 잃어진 불경을 찾아보자고 요청을 드린다. 이에 독실한 불교신자인 전홍숙은 고려와 일본에 사신을 보낸다. 이때가 기원 961년인데 이해에 고려임금은 고려의 명승 제관을 시켜 천대종을 론술한 천대종 경전 여러부를 오월국에 가져가게 한다. 한편 고려임금은 오월국에 가서 불경공부에 보다 정진하여 경문의 묘리를 깨달으면 관련불경을 가지고 돌아오라고 령을 내린다. 제관은 천대종의 교리에 덕망이 높아 고려임금의 높은 례우를 받던 고려명승이였다. 그시절 제관스님은 오월국에 이르게 되고 절강 천대산 라계 전교원에 가서 의적스님을 만나게 된다. 고려임금은 경문의 교리를 깨달으면 귀국하라고 했지만 의적스님의 넓은 학식에 끌리니 제관은 의적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 문하에서, 천대산 라계 전교원에서 10년간 불도를 닦다가 입적한다. 불교의 입적이란 죽음을 말하는데 제관이 죽은후 그의 상자에서 제관이 친히 저술한 “천대사교의”(天臺四敎義)가 발견된다. 제관의 이 유고—천대사교의는 전파가 빨라 불교에 입문하는 중국 천대종학의 기본교의서로 떠올랐고 일본에까지 전해져 성망이 높다. 이책에 대한 연구서들도 줄을 잇는다. 불교계에서는 이책을 “천대교의 관건”(臺敎之關钥)에 비유한다. 그만큼 제관스님이 오월국 전홍숙왕의 요청과 고려임금의 파견으로 중국에서 산실된 천대종 관련경전을 오월국에 전함으로써 오월국에서는 이미 산실된 천대종의 교리를 다시 보충, 완비할수 있었으며 중국 천대종의 부흥에 크나큰 기여를 하게 된다.  4 나의 얘기를 주의해 듣던 쌍둥이는 항주 서호에도, 서호가의 오월국 뢰봉탑에도 옛시절의 우리 고대 겨레발자취가 스며있다며 경탄해마지 않는다. 이자 세상사에 눈을 뜨기 시작한 18살 쌍둥이로 말하면 놀라운 얘기가 아닐수 없었으리라. 뢰봉탑을 내리면서도 쌍둥이는 뢰봉탑지식을 알고, 서호전경을 보았고, 뢰봉탑과 탑을 세운 오월국 국왕과 우리 고대겨레 관련 력사지식을 얻었다며 소곤거린다. 그러한 쌍둥이 딸애들이 그지없이 대견스럽기만 하다. 2008년 7월 8일, 소흥에서  
302    섣달 그믐날 소흥 소감 댓글:  조회:3989  추천:44  2009-01-26
              섣달 그믐날  소흥 소감 1 외로움과 쓸쓸함, 고향애를 달래려고 다녀온 유람이 소흥에서 서북으로 12킬로미터 떨어진 감호-가암풍경구이다. 귀로에 다시 603호 시내버스를 타고 도심의 금시대 호유뒤(好又多)에 들어서니 설명절 물건을 가득히 들고 나오는 소흥사람들로 북적인다. “소흥사람들의 구매력이 상상밖이구만!” “소흥출신의 월수대 여선생들이 얘기로는 여기 사람들은 평소에는 돈을 무척 아끼다가도 설만 되면 대범히 나오며 한번에 돈을 톡톡히 쓴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럴까?!” 나는 반신반의하면서 설명절 물건들을 푸짐히들 챙겨들고 귀가하는 구매자들을 진한 호기심으로 바라 보았다. 구매자들마다 물건 가득, 웃음 가득, 중국사람들 돈쓰기에 대한 나의 편견이 흔들리는 시각이다. 2 금시대 호유둬에서 나와서 35선 버스를 기다리는데 가족과 친인들로 보이는 한패의 소흥사람들이 사찰에 갖고갈 향대 등을 가득 들고 회계산 향오봉 쪽으로 달리는 2선버스에 오른다.  “불교도들인 모양인데 향로봉 아래 로봉선사에 섣달 그믐날 불교행사가 있는것 같소. 아니면 섣달 그믐날 밤에 사찰을 찾는 무슨 풍습이 있을테고.” 안해도 동감을 표시한다. 보매 사람마다 향대 등을 많이 들었는데 돈으로 따져도 적은 돈이 아니였다. 밤에 회계산 향로봉과 로봉선사와 마주하고 있는 우리 6층아빠트에서 보니 산과 산아래 줄줄이 환한 등불이 밤을 밝힌다. 명절 때나 불교행사가 있을 때만 보이는 희한한 가관이다. 여기 남방사람들의 불교신앙에 우리 북방사람들로서는 놀라지 않을수 없다. 소흥만 보더라도 회계산 하나 산에만도 불교사찰이 여러개에 이르고 곳곳에 불교사찰들인데 불교도들이 얼마인지 모른다. 교인들 거의가 불교를 믿는것 같다. 그만큼 불교가 대단히 성행함을 보이고 있다. 불교사찰이 거의 없다시피 하고 제한이 심한 우리 연변에서는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다.  3 어스름이 깃들자 소흥시내 곳곳에서 명절을 즐기는 폭죽이 터져 오르고 꽃불들이 밤하늘을 아름답게 장식한다. 내 고향 연변에서도 흔히 보는 명절놀이지만 소흥은 우리 연변과 많이 다른것 같다. 초저녁부터 밤중까지 몇시간 내내 폭죽이, 꽃불이 터져오른다. 내 고향 연변이라면 이다지도 온 시가지가 모두, 동시에 연속 몇시간씩 법적이는것 같지는 않다. 무엇보다도 우리 조선족들은 이렇게까지 엄청 돈을 들여가며 폭죽이나 꽃불에 애착을 가지지 않는다. 꼭 행해야만 하는 무엇이 아니고, 사더라도 애들 성화에. 혹은 개인취미로 얼마씩 사서는 놀아볼 뿐이다. 그나마도 전체적이 아니고 장난놀이에 그친다. 연길시만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조선족인 우리 연길에서 이러하니 그 규모나 시간면에서 이곳 소흥과 같은 한족지구에 비기지 못한다. 소흥은 가담가담이 아니라 온 시가지가 동참되여 몇시간을 두고 끊임이 없다. 모두가 한족들이니 자기 풍습에 따르기 때문인데 한집에서 보통 1000원 이상, 수천원씩 팔아가며 폭죽놀이, 꽃불놀이에 신경을 쓴다니 힘들게 버는 적잖은 돈을 한순간에 날리는 풍습이 랑비로만 보이지만 그네들에게는 결코 랑비가 아닐것이다. 우선, 온시가지가 일어나는 폭죽, 꽃불 놀이는 설명절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켜 주니 좋은것 같다. 그네들의 명절전통을 이어가는 흥나는 민속놀이가 아닌가. 다음 나라에 돈을 벌어주고 나라경제를 활성화시키니 좋고. 그다음 곳곳에서 잡귀를 쫓고 새해의 상서로움을 기원하며 묵은 해를 보내며 기쁘게 새해를 맞이하니 이 아니 좋을손가. 섣달 그믐날에 느끼는 소흥소감 몇가지. 이러구러 이번 겨울방학 연변에 귀가하지 못하고 강남땅에서 무자년의 한해를 마무리고 기축년의 새해를 맞이하게 되니 보고듣고 느끼는 점이 새롭기만 하다. 이것도 인생공부라면 공부인거지. 강남의 소흥과 북방의  연변이 다르고 한족과 조선족이 다른 섣달 그믐날의 풍경에서 느껴지는 섣달 그믐날의 새로운 소감이 아닐까. 2009년 1월 25일 섣달 그믐날, 소흥에서
301    【유람기】(4) 타향 6000리 섣달그믐날 댓글:  조회:4088  추천:48  2009-01-25
【유람기】(4)                     타향 6000리 섣달그믐날
300    【유람기】(3) 타향 6000리 섣달그믐날 댓글:  조회:4148  추천:33  2009-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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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9    【유람기】(2) 타향 6000리 섣달그믐날 댓글:  조회:4797  추천:47  2009-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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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    【유람기】(1) 타향 6000리 섣달그믐날 댓글:  조회:4015  추천:47  2009-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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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7    【겨레발자취】(24) 연변대 두 교수 소흥 유람기 댓글:  조회:5127  추천:49  2009-01-22
               연변대 두 교수 소흥 유람기   소흥은 수천년의 문명을 자랑하는 력사문화도시요, 명인들의 고향이라 소흥하면 선참 떠오르는것이 치수영웅 대우, 와신상담의 주인공 월왕 구천 그리고 로신성생이 아닐까. 연변대 김해수, 리민덕 두분 교수를 모신 유람길은 소흥의 명소 대우릉, 로신 옛집, 월왕전으로 이어졌다. 첫 유람길—대우릉 김해수 교수, 리민덕교수의 대학원생 교수는 오전오후로 나뉘여졌다. 오후교수를 맡은 리민덕교수라 하루 오전시간을 타서 회계산 향로봉 로봉선사를 다녀 왔다더니 대우릉을 가보고 싶어한다. 1월 18일 오전, 나와 리민덕씨는 절강월수대 남대문 부근의 대우릉을 찾았다. 둘만의 입장료가 인민페 100원으로 나왔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연변도 아닌 잘강 소흥에서 30년전 대학동창과 동행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 대우릉 첫 입구 문지기가 나를 알아 보자 리민덕씨는 “형님은 여기를 잘 다니는 모양이구만!”하고 머리를 끄덕인다. 그래, 한해에도 수없이 찾아보는 대우릉이 아니던가. 우린 대우릉 첫 입구와 대우릉 구간 연도의 구룡탄에서, 대우릉 하마(下马)자리에서 발길을 멈추었다가 대우릉 제사광장을 거닐었다. 대우릉의 9000근 짜리 동종이며, 대형 북이며, 원 제사자리며 모든것이 신선하게 안겨들었다. 대우릉 구내에 들어서자 대우릉비와 제사전으로 지어진 옛식 건물이 우릴 맞아준다. 여기 구간에서도 리민덕씨의 흥미를 자아내는것은 구간 산기슭을 덮은 대나무림, 북방에서 대할수 없는 대나무림이 인기도가 부쩍 오른다. 내가 리민덕씨를 대나무밭으로 안내하여 카메라를 들자 연변대 교수동창의 웃음진 얼굴이 카메라에 잡혀든다. 대우릉 주체건물 대우묘는 우의 아들 계가 첫 노예제 국가 하나라의 천자로 즉위한후 세워졌다고 하나 현존하는 대우묘 시초는 기원 545년의 량 대동시절, 그나마 새월의 풍상고초속에 옛 모습 사라지니 대우묘가 다시 일어선것은 1934년의 일, 내가 치수영웅으로 불리운 대우묘지가 수수께끼로 남아 부근이라고 하자 리민덕씨는 유감을 표시한다. 대우릉구내 유람에 이어 우린 산정인 회계산 석범산에 모셔진 대우동상을 찾아보기로 했다. 돌계단 1000여개를 오르니 높이 21메터의 거대 대우동상이 하늘을 떠이고 서있다. 그아래 평단에서 내려다보니 소흥 시가지가 발아래 펼쳐져 자못 인상적이다. 리민덕씨의 흥분은 절정을 톺는다. 그 모습은 “연변의 리민덕이 소흥에 올줄 뉘알았으리오!”하고 말해주는상 싶다.    “민덕씨, 저 대우님과 고조선의 단군님이 연계가 있다면 믿을수 있겠는가?”    “글쎼~전설이겠지.”  “물론 전설이겠지만 한반도의 고서들에 그렇게 기록되여 있다네. 그래서 내가 회계산을 문앞 다니듯 다니며 답사하고 있지. 회계산은 우리 고대 겨레의  발자취가 스며있는 성스러운 산이야. 대우동상을 세울 때 한국의 단양 우씨들도 참여했거든.” 리민덕씨는 고대 우리 겨레와 관련되는 회계산과 대우에 대해 짙은 흥미를 보이였다. 산정구간의 12개 띠 광장에서 웅위로운 회계산을 둘러본뒤 나와 리민덕씨는 대우동상 남쪽골 백조락원 구내를 따라 산을 내리였다. 휘넓은 남하구간에서 발길을 멈춘 리민덕씨는 대우릉이며, 대우동상이며, 푸른 산야를 둘러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한다. 그 감탄은 고스란히 로신 옛집으로 이어간다. 두번째 유람길—로신 옛집 로신선생의 옛집은 소흥의 해방남로 로신거리에 위치하고, 전체면적 50헥타를를 헤아리는 어마어마한 범위로 나타난다. 1월 19일 오전, 나와 아들애는 김해수교수와 리민덕교수를 안내하여 로신 옛집 구내에 들어섰다. 로신 옛집 문화광장에 일어선 로신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고 우리는 선참 로신 옛집의 삼미서옥을 찾았다. 삼미서옥 입구가 강물에 뜬 검은 갓배—오봉선(乌蓬船)이 흥미로운데 로신선생이 어린시절 글을 읽었다는 삼미서옥, 그것도 소년 로신이 앉았다는 책걸상자리가 보다 흥미롭다. 책에서만 보며 가르치던 로신선생이 눈앞에 살아 움직이는 시각이다. 로신선생의 조부네가 살았다는 주가로대문에 들어서면 서쪽채와 동쪽채로 나누어진 옛 건물들이 복원되여 생생히 살아 움직인다. 가난한 출신들로서는 상상도 할수 없는, 대지주 장원을 초월하는 규모여서 보는 이들은 입을 딱 벌린다. 로신선생은 확실히 명문가정 출신이기는 하나 아버지대에 이르러 몰락의 일로를 걸으니 사람들은 잠시 이를 망각하는가 부다. 이런 기분을 헤아려주기라도 하듯 주가로대문의 한 정원에 우산모양으로 자라난 한그루 동백나무가 숱한 빠알간 꽃을 피워올려 로신 옛집을 찾는 이들의 얼굴에 웃음을 피여 올린다. 그러나 우리 김해수교수와 리민덕교수는 아름다운 동백꽃을 보았는둥, 말았는둥 덤덤히 지나치기만 한다. 어학외통길을 고집하는 이들의 눈에는, 마음에는 수학처럼 엄밀하다는 어학사고방식만이 어른거리는 것인지 일순 가늠키 어렵다. 로신선생의 출생지—주가신대문의 아름다운 백초원에 이르니 기분이 전혀 다르다. 리민덕씨는 “백초원으로부터 삼미서옥까지” 로신선생 글을 거듭 떠올리며 로신선생이 어린시절 뛰놀았다는 백초원에서 삼미서옥까지 이리도 가까운 거리밖에 안되는가며 미소를 피여 올린다. “우리가 그 시절을 겪어 보았지만 어린이들 심령에는 멀어만 보일수 밖에 없지 않을까?!” 나의 말에 리민덕씨는 “옳아, 옳아!’ 연신 고개를 끄떡인다. 책에서가 아니라 눈으로 보는 로신선생의 어린시절 세계가 감미롭기만 하다. 나중에 우린 로신 옛집 구내의 신축 대형 “로신기념관”을 돌아보았다. 필자가 로신과 조선(한국)사람, 로신이 조선현대문학에 끼친 영향 등을 연구하면서 상해의 로신기념관, 광주의 로신기념관에도 다녀왔다고 하자 김해수교수는 누가 이면의 론문을 쓴것 같다고 하신다. “알고 있습니다. 유감이라면 로신을 연구한다는 중국학자들이나 기념관들에서 로신과 일본관계는 중시하나 로신과 조선(한국)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이제 로신관련 연구저서가 정식출판되면 여러 로신기념관들에 모두 보낼 생각입니다.” 필자의 말에 김교수는 이면의 연구를 다그쳐야 한다고 지지를 준다. 리민덕씨는 “소흥은 그저 그렇게 볼게 아니구먼. 곳곳에 우리 겨레발자취가 있으니 말일세.”하면서 소흥답사가 의미있다고 동을 단다. 우리는 로신기념관을 나와서 로신거리 구내 함형술집이며 소흥특산품을 경영하는 가게들을 산책하였다. 김해수교수는 로신선생 작품속의 공을기가 술을 마이며 맛보던 회향두를 보고 “많을소냐, 많지 않도다!”를 거듭 떠올린다. 그 모습이 천진한 소년을 방불케 한다. 그러던 김교수는 함형술집 구내를 지나며 흥미가 도도하다. 70대에 이르러도 술을 즐긴다는 김교수한테는 공을기가 살아 말을 건네였으리라.   세번째 유람길—월왕전 소흥도심의 도시광장 서쪽가에는 숲을 이룬 유구한 력사속 부산이 아름답게 솟아있다. 도심에 솟아난 저산이 2500여년 전 월나라 도읍이라고 하니 연변대 두 교수는 어서 가보자고 재촉한다. 로신 옛집 구내 로신거리에서 시내버스를 잡으니 다음 역에서 내려야 한다. 도시광장역을 앞둔 해방로 길복판과 길가에는 신해혁명시기 이름난 반청지사—추근렬사기념비, 추근 백옥상이 있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숙연케 한다. “해방로 길복판에 렬사기념비를 그대로 모시니 추근렬사의 위치가 돋보이는구만!” 김해수교수의 감탄의 말씀. 우리는 추근렬사기념비를 지나 서쪽골목을 따라 나아갔다. 부산 월왕전 부근은 소흥의 옛날 단층살림집들이 그대로 보전된 강물구간이여서 연변대 두 교수는 여기서는 기념을 남겨야 한다면서 포즈를 취해 주었다. 강남의 옛 생활멋이 물신 풍겨나는 모습은 김해수, 리민덕 교수를 기쁨에 둥둥 뜨게 만들었다. 이곳 다음이 옛날에 와룡산, 종산 등으로 불리우다가 부산(府山)으로 이름이 바뀌여진 소흥도심의 부산이다. 부산은 춘추전국시기의 월나라 도읍으로서 기원전 490년 월왕 구천이 오나라에서 돌아온후 대신 범려에게 명하여 건설하였다니 명실공히 2500여년전의 일, 이런 부산에 갖가지 기념건축물들, 명승고적들이 많지만 우리는 월왕대와 월왕전을 가진 월나라 도읍을 먼저 찾았다. 월나라 도읍지에 들어서면 선참 맞아주는것이 옛기운이 풍겨나는 웅위한 월왕대, 후세에 건설되여 방대한 규모를 가지였다지만 지금의 월왕대는 1981년에 수건되고 월왕대내에 월나라 시기를 보여주는 도편과 문물들이 전시되여 월나라 리해에 도움을 주고있었다. 월왕대에서 보면 저 맞은켠 산아래에 일떠선 월왕전이 마주 안겨진다. 그 사이에는 북송 말년의 고종황제 조구가 금나라의 침입으로 남으로 도주하였다가 월주 이곳에 이르러 친히 심었다는, 900년의 수령을 가진 룡두고백 마른나무가 높이 서있고 송백화석이며 청백천(清白泉) 등이 있어 옛스러움을 그대로 발산하고 있다. 월왕대는 또한 1939년에 소흥에 오신 주은래가 항일연설을 하던 곳이기도 하고 1961년에 모택동주석이 “로신 80돐을 기념하여” 시편을 날리면서 “감호월대명사향”(鉴湖越台名士乡)명구를 남긴 명구출처이기도 하다. 명구에서 말하는 월대(越台)가 바로 월왕대를 가리킨다. 월왕대에 이어지는 월왕전내는 와신상담하는 월나라 왕 구천의 그림 모습, 구천과 대신 범려, 문종 등의 화상과 소개가 있어 2500여년을 거슬러 월나라 도읍상을 목격하는 기분이다. “월왕 구천어른, 연변서 김해수가 어른을 보러 왔수다!” 김해수교수는 월왕전에 올라 흥분을 토한다. 소흥에 와서 월나라 도읍지를 둘러보는 기분이 좋기만 하단다. 필자가 들어있는 사진 모두를 아들애가 찍어주어 사진기념도 톡톡하다. 어느덧 하루길에 오른 저 하늘의 태양이 정오의 분계선을 넘어 오후길에 오른다. 70대 김교수님이 념려되여 부산을 더 돌아보지 못하고 귀로에 올라야 했다. “소흥에 와서 로신선생을 만나고 월나라 구천왕을 만나 보았으니 원이 없수다.” 김해수교수의 진정어린 말씀에 가슴이 후더워난다. 연변대 두 교수의 소흥 유람, 30년전 연변대 조문학부 시절 은사님과 동창을 소흥에서 모셔본다는것이 이리도 즐거울가, 거리의 한 조선족음식점에 가서 점심상에 앉아서도 우리는 대우님, 로신선생, 월왕 구천을 만나본 기분에서 쉽사리 헤여나질 못했다. 2009년 1월 21일, 소흥에서
【겨레발자취】(23)       회계산엔 단군전설도 있고, 지장보살 옛 돌불상도 있고 2008년 1월 1일, 아들애와 같이 회계산 향로봉 서쪽골 답사에 나서 보았는데 이해가 막가는 12월 31일 또 절강월수대 회계산연구소 젊은이들과 함께 향로봉 서쪽골 답사에 올랐다. 한해가 시작되고 한해가 마감되는 시점이라 감개가 무량하기만 하다. 회계산은 일명 모산이라고 하는데 평균 해발이 500메터쯤, 동서 너비 100킬로메터, 동남~서북 연장이 200키로메터, 그 산발은 산음, 회계(소흥)와 제기, 승주에 걸쳐있다. 소흥의 회계산 주봉은 향로봉으로서 여기에는 대우릉과 대우동상이 있고 대우가 대홍수를 다스리는 법보를 얻었다는 얘기가 깃들어있다. 또, 리조 세종 때 “팔도지리지”에 “우임금이 즉위함에 이르러 태자 부루를 거기에 파견”한바 있다고 밝히여, 조선반도(한반도)의 력사서들과 문학서들에 가끔 회계산이 튀여나와 회계산은 강한 자석마냥 나의 마음을 끌어 당기였다. 그래서 언젠가는 우리 겨레와 관련되는 무엇이 튕겨 나올것만 같아 사방 수십리 회계산을 수십번이나 오르고 또 올랐었다. 그러다가 회계산 향로봉 서쪽 큰골에서 신라, 백제 시기로 추정되는, 바위에 조각한 3존불상과 지장보살 돌불상을 끝끝내 찾아냈으니  정녕 꿈을 꾸는것만 같다. 이같이 엄청난 발견은 2008년의 일, 나는 회계산을 헛찾지 않았었다. 대우임금과 단군임금이 이어지고 지장보살과 고려 김씨 등과 이어지니 회계산을 둘러싼 중한우의  루루 4000여년이 아니던가. 이를 절강월수대 회계산연구소 상무 부소장 류훈화와 얘기했더니 한해가 막가는 오늘 12월 31일 오후, 이들 몇몇과 이대로교수님, 나 답사가 막을 올린 것. 회계산 향로봉 서쪽골 석옥사 암자와 3존불상, 지장보살 돌불상, 옛 흔적의 거듭 발견은 회계산연구소 젊은이들의 지대한 흥취를 자아냈다. 우스운것 같지만 회계산을 연구한다는 이들이 모르는 역사의 발자취가 6000리밖에서 온 우리들에 의해 발견되고 답사를 펼치게 되니 감개가 무량하지 않을수가 없다. 이제 절강월수대 회계산연구소와의 회계산 공동연구가 시작되고 그 진전이 크게 추진될것 같다.나는 또 하나의 고대 우리 겨레 관련 회계산역사를 밝히게 되겠으니 나 한생에 우리 겨레를 위해 무언가 기여를 할것 같다. 이것이 나 삶의 보람이리라. 2008년 12월 31일                                              
【겨레발자취】(22)       회계산서 지장보살 옛 바위 조각불상 나타나  동지날부터 2~3일간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더니 오늘 2008년 12월 23일은 햇살이 퍼지면서  퍼그나 푸근해진다. 마음이 들뜬 이대로교수님과 나는 다시 회계산 향로봉 서쪽골 답사길에 나서 보기로 했다.   절강월수외국어대 남대문에서 향로봉 서쪽큰골 어구까지는 약 30~40분간의 도보거리. 큰골어구의 법인사 구내에서 모자를 쓴 모양의 지장보살님을 확인하고 다시 석옥사 암자에서 3존불상을 유심히 살피다가 우리는 또 환성을 질렀다. 바위에 조각한 옛 동자승 오른쪽 조각인 서명글씨에 쇠금자 “김”자가 중문으로 보이더니 왼쪽 조각인 서명에서도 “김”자가 두자나 알린다. 중국 송나라와 조선반도(한반도)고려시기 고려김씨들이 절강, 복건 연해지구에 엄청 정착하더니 십상팔구는 그들 김씨의 소행이 아닐가 싶다.  하다면 석옥사 암자 안팎의 두 3존불상과 그 위의 지장보살로 보이는 돌불상의 관계는 어떠할가, 우리는 흥분속에서 3존불상 위 구간의 바위 조각불상을 다시 찾아 보았다. 며칠전 답사시 이교수님이 지장보살 같다더니만 모자를 정히 쓴 바위 조각불상이 지장보살로만 보임을 떨쳐버릴수가 없다.  그때다. 바위 조각불상 아래를 지나는 소로길에 중년의 중국인 한분이 나타난다. 그와 바위 조각불상이 누군지 아냐고 건네보니 지장보살이라고 히히 웃는다. 그것도 모르냐듯 던져주는 표정, 그것이 인상적이여서 어떻게 지장보살로 긍정할수 있냐고 한술 더 뜨니 이곳 사람들이 다 그렇게 알고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기는 골안어구아래 마을 사람이 아니고 대우릉 쪽에서 이사온 사람이라고 동을 단다.   묘소ㅡ지옥세계 관리인으로 내세운 바위 조각불상이 지장보살이란다. 그럴수 밖에 없다. 불교사찰이 있는 절에는 모두가 지장보살님을 지장전에 모시거나 종루에 모시며 죽은 사람들 위패를 관리하고 산 사람들을 위로하니 여기 지장보살님도 그런 의미가 있으리라. 흥분의 절정속에 소로길 아래 홈을 살피니 락엽에 묻혀 홈으로 이어내리는 돌계단 소로길이 나진다. 지장보살 바위불상으로 오르는 옛 소로길이다.  향로봉 서쪽 큰골에 들어서자면 이 옛 소로길로 내려야 함은 불보듯 뻔하다. 잇따라 저앞에 홈을 막은 자그마한 호수가 나타나고 호수 위켠에 홈을 가로지른 옛 돌다리 하나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역시 옛 사람들의 소행이고 여기 서쪽 큰골에서 뭔가 발견될것임을 예시한다. 그에 끌려 우린 무엇에 홀리기라도 하듯 자꾸자꾸 골안따라 들어가기만 했다.   그래 여기 서쪽 큰골은 생소하지만은 않지.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새해를 잡던 올해 1월 1`일, 나는 아들애 경원이를 데리고 서쪽 큰골 답사에 나서 보았었다. 그날 산비탈 숲속에 옛 암자가 있음을 멀리감치에서 보았지만 지나쳤고 골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때라 무엇을 보아낼수가 없었지만 그후 몇번 다녀간후의 오늘은 판이하게 다르다. 길도 없는 숲속 골홈에서 인적이 가미된 크고작은 돌들이 하나둘 나타나더니 누군가 약초를 캔답시고 숱한 돌틈을 뚜져놓아 살풍경을 이룬다.  “저 아래 구리촌 사람들이 판 자리 같은데요.”   나의 말에 이대로교수님은 아무말도 없이 여기저기 살피다가 “아닐텐데요…”하고는 입을 다무신다. 인적이  미치지 않은 심심골연이라 짐승—멧돼지의 흔적임을 말할수가 없어서임을 나는 알아 차렸지만 나는 그렇다고 믿고싶지 않았다.   골은 갈수록 좁아지고 어디라없이 수풀이 꽈악 우거져 한걸음 내딛기가 말째다. 힘겨운 대로 걸음걸음 옮겨 놓는데 바로 눈앞에 희한한 정경이 펼쳐진다. 좁은 골안홈을 가로막은 옛 돌담이고 한메터 정도를 이룬 구멍이 보이며 구멍우는 여러 사람의 힘으로 옮겨 놓을수 없는 큰돌이 덮개를 이루고있다.  “어딘가에 궁터나 옛집터가 나질것 같아.”  이대로교수님은 긍정적으로 말씀하시며 관찰의 눈길을 밝히신다. 이어 몇걸음앞 발밑에서 네모반듯한 깨여진 돌을 발견하고 중문 글씨가 박혀 있다고 하신다. 눈여겨 보매 중문자로“종”(钟)자로, 번체자 종(鍾)자임이 알린다. 나의 눈앞에는 회계산 여기 주봉—향로봉 옛절의 구리종이 펼쳐지면서 이 글자가 그 시절 구리종의 안내글자로 펼쳐진다.  “수십수백년을 여기에 누워 있었을까?”  이대로교수님은 숲속너머 정상이 보이는 향로봉 절을 올려다보며 혼자말로 되뇌이신다.  가파른 돌틈을 기다싶이 오르니 앞에 수메터 높이의 옹근바위—폭포구간이 나타나며 더 오를수가 없다. 옹근바위가에 이름모를 고목 한 그루가 있으며 세월의 창상을 고스란히 간직한것만 같다.   “골 북쪽에 평지모양의 둔덕이 보이던데 이제 내려가다가 찾아 봅시다!”  교수님의 얘기다. 얼마쯤 내려가니 과연 북쪽 둔덕진 언덕우에 평지모양의 구간이 나타나고 옛 사람의 손길이 미친 큰돌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둔덕이 산기슭따라 경사를 이루었으나 우리의 눈은 피해 갈수가 없다.   옛 사람들이 심었을 소행인 차나무도 끈질긴 생명으로 오늘에 이어져 여기저기 보인다. 향로봉 아래 산속 산자락에 있을수가 없는 차나무는 여기가 옛 궁터나 절터가 아니면 중요한 군사요충지였음을 알린다. 2500여년전 오나라에 밀린 월나라 왕 구천이 수천군사를 데리고 회계산 산속에 피해 있다가 종내 “투항”했다더니 그 옛자리가 아닌듯 싶다. 아니면 이곳 옛 석옥사, 지장보살 바위 조각불상과 관련된 옛 사람들의 삶의 터일테지.  회계산 서쪽 큰골 루루 천년을 일컿는 지장보살 바위불상의 발견에 련이은 옛 사람들의 흔적발견, 우린 흥분의 절정에 올라 “선인들이여, 우리가 왔노라!”하고 소리소리 지르고 또 질렀다. 그속에 옛 석옥사의 비밀, 옛 지장보살 바위 조각불상의 비밀이 륜곽을 드러매며 서서히 풀리기 시작한다. 2008년 12월 23일, 절강 소흥에서                
294    【겨레발자취】(21) 향로봉 서쪽골 새 발견 주렁주렁 댓글:  조회:4699  추천:49  2008-12-30
【겨레발자취】(21)        향로봉 서쪽골  새 발견 주렁주렁         오늘은 12월 20일 나와 아들애 그리고 이대로교수님과의 조용한 산행이다. 오전 9시에 절강월수대 남대문에서 만나 산행지를 운운하다가 교수님이 다녀보지 못한 회계산 서쪽 큰 골에 가보기로 얘기를 주고 받았다. 이렇게 선택한 산행이 엄청난 새 발견으로 주렁지리라고는 전혀 상상밖이다.   첫 발견: 대우릉과 향로봉 어구를 지나 향로봉아래 로봉선사에 이르니 사람과 자가용 천지이다. 동지날이 래일인데 오늘 따라 무슨 일인가? 택시기사와 물어보니 동지전날은 동야여서 해마다 이날이면 이곳 사람들이 조상의 묘소를 찾아 배알한다고 한다. 북방 연변에서나, 한국서는 볼수도 느낄수도 없는 민속행사의 하나라 호기심이 잔뜩 동한다. 벌써 로봉선사나 정문 앞 좌우켠 산에는 조상묘소를 찾는 중국인들이 수두룩하다. 한집에서는 “구천별장”이라고 쓴 꽤나 큰 집모형을 정히 모시고 묘소를 찾아갔다. 그 정성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정성은 대단한데 묘소를 이렇게 많이 쓰면 어떡합니까? 중국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화장한다더니 여기는 전혀 다른 세상입니다.” “글쎄요, 소흥사람들 조상숭배는 엄청입니다. 원 묘소는 다치지 못하고 돈있는 사람들은 자꾸만 새 묘소를 만들어가니 문제는 문제군요.” 우리는 묘소구역을 지나 로봉선사 오른쪽 산등성이로 접어들면서 혀를 끌끌 찼다.   두번째 발견: 향로봉 산등성이 중턱 너럭바위 구간에 이르니 사방이 환히 펼쳐지며 가슴이 활 열린다. “명당자리입니다. 명당자리지요. 나는 번마다 회계산에 오르면 여기서 쉬면서 숨을 돌립니다. 동지남북 어디나 한눈에 안겨들어 둘도 없는 휴식터지요. 여기에는 정자를 세워야 하는데요” 나는 이대로교수님의 말씀에 동감을 표시하며 이곳 너럭바위를 눈주어 보았다. 뒤미처 하마트면 소리를 지를번 했다. 바닥의 너럭바위가 완만한 경사를 이루기는 했어도 길이, 너비가 10여메터는 잘되어보이는 옹군 하나의 평평한 바위였다. 수차 이 산등성이 등반길을 지나긴 했어도 처음 주의를 돌려본 너럭바위였다. 옛 기와쪽각들이 흙과 같이 수북히 쌓인걸로 보아 전에는 정자나 암자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과시 명당자리로다!) 나는 참탄을 금치 못하였다. 경원이는 이교수님이 건네준 콜라를 마시며 제멋에 흥이 나 소리를 내 웃는다.   세번째 발견: 향로봉 산등성이 중턱 너럭바위에서 한참 더 나아가니 회계산 서쪽 큰골로 내리는 산간의 소로길이다. 인적이 그닥 미치지 않는 돌계단소로길에 락엽이 쌓이여 무척 조심해야 했다. 그런대로 산을 내리다가 첫 바위구간에 이르고 처마바위를 이룬 바위아래 옛 기와편을 촘촘히 박아세운 자리가 나타난다. 여러번 지나쳐도 보아내지 못한 새 발견인데 그전 어느 시절 인적이 깃든 자리임을 알려준다. 가까이 길지 않은 동굴어구도 한두사람으로는 움직일수 없는 돌을 다져 놓아 인적미를 풍겨준다. 하나 또 하나의 발견으로 이어지는 산행의 순간순간이다.   네번째 발견: 드디여 서쪽 큰골로 내리는 중턱의 허궁바위 구간에 이르렀다. 놀라지는 마시라, 엄청크기의 바위돌 한 부분이 바닥바위에 대이고는 바위전체가 허궁 들리여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그 큰 물체가 대인 그 부분이 바로 들수 있는 지칭점에 놓인 것인가 보다. 대자연의 오묘함이 알려지는 풍경이다. 이곳 바위구간은 옛 석옥사의 한 구성부분으로서 지금도 바위와 바위사이 공간에 허술한 옛 암자가 주인없이 비여있다. 북쪽 허궁바위 오른쪽 좁은 지대로 바위위에 오르니 회계산의 또 하나의 명당자리, 이교수님은 희열에 젖어 이 명당자리에서 점심참을 하자면서 몸에 지닌 약술을 내여놓는다. 회계산 서북 큰골의 여기저기가 시야에 맞혀 와 기분이 좋기만 하다. 그럴 때 나의 눈에는 바위우 한쪽에 무져놓은 옛 기와편들이 안겨지는데 처마끝에 놓여지는 기와편에 정교한 무엇인가 찍혀져있다. 기와편을 들고보니 봉황이 아니면 룡 조형이 아닌가. “봉황이나 룡 조형은 아무나 쓸수 없는것인데…”  우리의 느낌은 한곬으로 흘렀다. 십상팔구는 이곳 옛 석옥사가 법상치 않음을 예시하고있다.   다섯번째 발견: 옛 석옥사 바위구간 아래는 산우 산등성이 바위를 깍아 만든 평지, 이미 글에도 썼지만 절이 아니면 궁궐터가 들어섰던 옛 인적의 자리가 우리의 흥미를 끌만도 했는데 이 구간 아래 산비탈의 자그마한 바위에 모셔진 불상이 인기몰이다. 그것도 원 바위를 그대로 쪼아 만든 돌불상이여서 더욱 그러하다. 이대로교수님은 유심히 살펴보시더니 돌불상이 불교모자를 쓰고있음에 주위를 돌리면서 불상얼굴의 인자한 모습이나 모자 쓴 모습이 지장보살과 비슷하다고 하신다. “그래, 그렇지요.. 어딜 가나 보여지는 얼굴 모습이요, 모자를 쓴 모습입니다. 이제 알려지겠지만 지장보살 불상이 틀림없을것 같습니다.” 나의 수긍에 이교수님은 흥미가 도도하다. 지장보살이면 중국 불교 4대보살중의 한 보살이요, 당나라 시절 신라인이라 어찌 흥미가 도도하지 않으리오.. 중국불교에서는 지장보살을 지옥세계를 관리하는 신성한 보살로 높이높이 모신다. 그런 보살님이 회계산의 주봉 향로봉아래 서쪽 큰 골, 산간의 소로길 바위에 조각되여있다. 어림짐작으로도 천년쯤의 역사를 기록하는 옛 바위불상이다. 할진대 회계산 산속바위에 바위불상을 조각한 사람들은 누구며, 저 아래 석옥사 암자 안팎의 3존바위불상을 조각한 사람들은 또 누구일까? 의문이 의문을 낳으며 나의 흥취는 천년의 력사속으로 물결친다. 어쩌면 고대 우리 겨레의 소행같기만 하다. 여기에는 근거가 없지 않으나 뒷글로 미룬다만 우리는 벌써부터 마음이 둥둥 떠 있었다.                             2008년 12월 25일 성탄 저녁, 소흥에서                        
293    【새해축복】비방울 모여 진주마냥 반짝인다 댓글:  조회:4253  추천:44  2008-12-28
【새해축복】             비방울 모여 진주마냥 반짝인다                  ㅡ 저의 글을 보아주시는 이들께 새해 축복 새해선물로 드립니다
292    남경 모택동기념물 전시를 보고서 댓글:  조회:5857  추천:39  2008-12-26
           남경 모택동기념물 전시를 보고서                   ㅡ모택동주석 탄신 115돐에 제하여      오늘은 모택동주석 탄신 115돐 기념일이다.  이 뜻깊은 기념일에 제하여 나는 지난 2008년 11월 중순, 남경취재차 남경우화대를 찾다가 보게된 모택동주석 기념물 전시사진을 조글로에 올리면서 모택동주석 탄신 115돐을 숭엄한 마음으로 기념하는 바이다.      남경우화대 정문에 들어서면 산기슭 화강암렬사군체가 보이고 산우 우화대 주봉에 일어선 우화대렬사기념비가 한눈에 안겨든다. 우화대렬사기념비 밑은 지하청으로서 모택동주석기념물전시가 뜨거운 분위기속에 펼쳐지고 있었다. 보매 모택동주석 탄신 114돐을 기념하여 꾸려진 모습인데 전시청 첫 진렬실에는 높이 3.6메터의 모택동주석의 선모습의 동상이 있는가 하면 다음 주체진렬실에는 앉은 자세의 모택동주석 동상이 있었고 혁명을 위해 희생된 모택동주석의 6명 친인들 동상과 사진, 문자설명, 가족족보가 있었다. 전시물 모두가 문화대혁명 시기의 주석 동상, 마크, 도자기, 견직물들, 처음 공개한다는, 모택동주석이 홍위병을 접견하는 실황록화에 이르기까지 없는것이 없이 그토록 구전하다.       모택동주석 기념물 전시청에서의 한겻, 참관자들의 흐름이 그치지 않는다. 그들속에는 백발이 성성한 로인부부가 있는가 하면 생기발랄한 한창 나이의 젊은 세대들과 어린이들, 중로년 세대들이 섞이였다. 연속부절히 들어오고 나가는 중로년들의  얼굴들에서 나는 "격정으로 타오르던" 그 세월에 잠긴 회고를 읽을수 있었고,  참관을 통해 력사를 배우며 교육을 받는 젊은 세대들의 모습을 읽을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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