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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칠/저 하늘의 찬란한 태양과 별 그리고 풍요로운 이 땅을 소유하고 있는 나는 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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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수필] 보내지 못한 편지 댓글:  조회:679  추천:0  2013-11-27
보내지 못한 편지                                                         전병칠    민들레 한포기가 새파란 이파리를 펼치고 봄바람에 한들한들 춤추고있다. 뜨락 한 모퉁이에 선 앵두나무도 봄맞이를 하느라 봉긋봉긋 꽃봉오리들을 부풀어 올리고 있었다. 말 그대로 싱그러운 봄기운이 한뜨락 가득 담겨있다.    나는 겨우내 책장에서 곰팡이가 낀 책들을 아름아름 안아다 뜨락에 펼쳐놓았다. 미끄러져내리는 책더미속에서 유표(有表)하게 눈에와 닿는것이 있었다. 두 통의 편지였다. 순간 잊을수 없는 추억이 포장마차를 타고 서서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재작년 여름이었다.   “아이구, 풍성해. 잔치라도 치를셈인가보지.” 밥상위에 쌓이는 반찬그릇을 보며 하는 딸애의 경탄이다. 두부전, 계란프라이, 잉어볶음, 닭고기…짜장, 육해공군이 밥상에 다 오른것이다. 큼직한 단설기에는 ‘전순화 생일축하’란 빨간 글씨가 찍혀있었다. 열여섯개의 촛불에 불을 붙이고 딸애가 한창 입김을 모으고 있을 때 아들애가 불현듯 소리질렀다.   “누나 잠깐만” 그리고는 등 뒤로부터 노란 색종이로 깔끔하게 싼 두가지 물건을 누나한테 내밀었다.  “누나한테 주는거야!”  “뭔데?” 딸애가 그 물건들을 받아 하나하나 포장을 풀었다. 하나는 생일축하 카드였고 다른 하나는 까만 비닐상자에 정교하게 포장된 만년필이였다.    “아빠와 엄마가 주는 용돈을 절약해서 산거야!” 우리 세 사람의 놀라는 눈길을 둘러보며 아들애는 싱글벙글 웃었다.  “공부에서 1등인 누나, 내 앞의 밝은 등물인 누나, 생일을 축하합니다.”  딸애가 동생에게서 받은 생일축하카드를 소리내어 읽더니 감격한 눈길을 아들에게 쏟으며 동생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아이참 고마워라, 이제부터 나한테 존칭을 쓰는거지, 그렇지?”   아들애는 올해 아홉살, 자기 누나와는 일곱살 차이다. 그런 나이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응석받이로 자란 애라 늘 누나앞에서는 ‘누나’라고 불러 놓고는 ‘야’,’자’하며 ‘하대’ 언어를 써왔었다. 몇번이고 꾸지람을 했지만 어쩐지 그 버릇이 고쳐지질 않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였던지 누나와의 대화에서 “누나 밥을…”, ”누나, 아빠 전화왔…”하고 말끝을 중둥무이 해버렸다. 그런데 오늘 끝내 ‘합니다’하고 누나에게 존칭을 써주었으니 딸애로서는 감사할만도 했다.   “그러기오. 자~ 약속!”  아들놈이 누나와 손깍지를 걸었다.  오누이가 힘차게 걸고 흔들어대는 손깍지를 따라 하나의 기억이 생생하게 나의 머리에 떠올랐다.  아들애가 금방 돐을 넘긴 때였다.  80고령의 어머님 집에 설을 쇠러 간 나는 그만 조카들에게 붙잡혀 한창 트럼프치기에 열을 올리고있었다. 삼촌이다보니 자연 돈을 잃어야 하는 형세였다. 여덟살인 딸애가 옆에 앉아있다가 보다 못해 자꾸만 내 옷깃을 당기면서 “아버지 이제 그만 쳐요.”하며 보챘다. “왜이래, 장난으로 노는건데.”  나는 참다 못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딸애가 훌쩍훌쩍거리며 눈물을 훔쳤다. 그런데 그때까지 집안의 여기저기를 기어다니며 제놀음에 정신을 팔던 아들놈이 갑작스레 딸애의 무릎 위에 안기며 “와…”하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그러자 누나는 동생을 안고 더 서럽게 울었다. 딸애와 아들애가 함께 흐느끼며 우는통에 트럼프판은 그만 끝장이 나 버렸다. 어머니가 애들을 달래며 혀를 찼다.  “쯧쯧쯧, 제 핏줄을 어떻게 속이겠니, 요렇게 밤알만한것두 제 누이가 운다고 정신없이 달려와 함께 끌어안고 이렇게 우니, 원…”  전등를 끈 아들애가 “생일 축하해요”의 선창을 떼자 나와 아내도 손뼉을 치며  따라했다.  초불이 꺼지고 다시 전등불이 환해졌다.  “이걸 먹으렴,네가 산나물을 좋아한다고 준비한거다.” “이 닭고기는 단백질이 많아.” 네 식구가 식사를 하게 되자 아내는 이런식으로 딸애의 밥 그릇에 반찬을 집어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온 가정이 단란히 모여 화목한 기분으로 저녁을 먹으니 내 마음도 몹시 기뻤다. 그러면서 한가닥 자책이 회오리바람처럼 무겁게 가슴을 쳤다.  며칠전, 밤마다 사업을 핑계로 다방이나 나이트클럽을 다니다가 밤 늦게나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아예 이튿날 새벽까지 마작치기를 하고 집에 들어서는 나를 책망하다 못해 아내가 ‘이혼’이란 흰 기를 내들었다. 나도 남자의 자존심을 꺾고 싶지않았다. 그래서 딸애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빠와 엄마가 리혼하면 너는 누구를 따라 가겠니?“  그러지 않아도 티걱태걱하고 있는 부모들 싸움에 권태를 느꼈던 딸애는 맺고 끊듯이 대답했다.  “누구도 따라가지 않겠습니다. 우리에게 이 집만을 주십시오. 난 여기서 동생하고 살겠습니다.”   이윽고 똑 같은 물음을 아들애한테 했다.  “누나가 가는데로 나도 따라 가겠습니다.” 쳐다 보지도 않고 하는 아들놈의 울음섞인 대답이었다. 순간,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나는 그날 애들을 피해 밖에서 집 벽을 짚고 황소울음을 울었다. 아빠란, 아니 부모란 이름의 무게를 난생 처음으로 깨달은것 같았다.  아들애가 미리 준비해 둔 사진기를 꺼내들고 이쪽 저쪽 다니면서 찰칵찰칵 하고 셔터를 눌렀다.  “아이참 깜빡이야!“ 딸애가 급작스레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자기 침실로 가더니 무엇인가 손에 들고 나왔다.  “도와주세요 아빠! 조선이나 한국에서 오는 손님들을 자주 대하는 아빠니깐 이 편지를 그분들한테 주어 전하도록 해주세요. 믿겠어요. 아빠!”  딸애는 두통의 똑같은 편지봉투를 나에게 내밀었다. 주소도 없는 봉투에는 또박또박 정자로 “대한민국대통령 김영삼할아버지 앞“, “조선민주주의공화국주석 김일성할아버지 앞”이라고 각기 씌여있었다. 당돌하게 접한 일, 나는 어리둥절해서 속지를 꺼내 읽었다.    김영삼대통령할아버지  안녕하십니까?  남북고위급 회담의 희소식을 듣고 너무 반가와 이 글을 씁니다.  아버지 팔베개에 누워 “해와 달”  옛말을 듣던 때, 품팔이 간 엄마를 잡아먹은 범이 느티나무에 올라간 오누이를 잡아먹으려고 뒤집 도끼 얻어다가 느티나무 밑둥부터 딱 딱 자국을 내면서 엉큼 엉큼 올라오는데까지 듣고 나면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습니다. (내 동생, 내 누나를 범이 물어가면 어찌나?) 떨어져서는 살수 없다고 생각한 우리 오누이였습니다. 금시 시답지 않는 일로 옥신각신 다투다가는 ‘누나’ , ’동생’ 하며 해죽거리는 우리 오누이입니다. 이래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들 하겠지요.  대통령할아버지, 우리와  같은 오누이들이 갈라져서 50년, 오늘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건만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한번 얼굴조차 보지못하고 있다는것이 얼마나 큰 고통입니까?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납니다. 오늘 우리 오누이가 함께 찍은 사진을 두 쪼각으로 나누어 따로 보내니 회담하시는 날 부디 우리 오누이를 만나게끔 하여주시옵고 밝으신 웃음으로 회담에 성공하시여 헤여진 형제들에게 만남의 기쁨을 마련해 주시기를  백번 부탁드리겠습니다.  손꼽아 그날 - 7월 25일의 아침을 기다리겠습니다.  대통령 할아버지의 옥체만강을 기원합니다.   1994년 3월 오누이 전송호, 전홍화   중국 연길에서 올림  다른 한 봉투의 속지를 꺼내보니 첫 머리에 ‘김일성주석 할아버지’란 글 외에는 똑 같은 내용이었다. 그리고 편지 내용대로 조각난 사진장들이 나왔다. 나는 사진 두 조각을 맛붙였다. 흰 목마가 포장마차를 끄는 놀이차, 흰 목마엔 아들애가 앉았고 꽃천으로 꼭대기만 포장한 마차에는 딸애가 공주처럼 앉아있었다. 사과처럼 고운 두 얼굴에 웃음이 물결치고 있었다. ‘6.1’ 아동절날, 딸애와  아들애가 연길공원아동유희장에서 찍은 사진이였다. 그날도 아들애는 남자라고, 누나는 호사만 받으면 된다고 자기가 목마에 앉았었다. 어른들도 감히 엄두를 못내는 편지를 읽고 나는 마음을 진정할수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아이들이 행동이 기특했고 장했다.  7월 25일, 남과 북의 수뇌자들이 평양에 회동하여 27일까지 3일간 력사적인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했다는 뉴스를 보고 쓴 아이들이 엉뚱한 편지, 벌써 내 피줄, 내 겨레를 알고 사회를 포용할 줄 아는 아이들, 그 아이들 행동이 코날이 시큰하도록 고마웠고 자랑스러웠다 “옜다. 이 닭고기는 네가 먹어라. 남자니깐.” “아니,누나 잡수” 딸애와 아들애는 그냥 좋아서 찧고 까불고 하며 떠들었고 아내는 그 애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행복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딸애가 넘겨준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좀처럼 잠들수 없었다. 남북 분단 50년 -  반세기가 넘도록 마음에 두터운 장벽을 쌓아놓고 형제자매, 부모, 처자간 이별의 눈물을 흘려야 하는 우리 겨레 현실에 가슴이 저렸다. 이념이란 뭔가, 정치란 이렇게 혹독할가? 총칼을 들고 서로 살육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지금은 아예 한 피줄 한 형제가 서로 문을 닫아걸고 땅크요, 대포요, 유도탄이요며를 가득 장만해가지고 호시탐탐 상대방을 노리며 서로 비방하고 중상하고…너무나도 수치스러웠다. 우리 민족에게 천추에 잊지 못할 재난을 들씌웠던 그런 타민족에게도 돌렸던 등을 되돌려 친절하게 악수를 하면서도 자기 형제, 자기 자매와는 반세기 넘도록 서로 인정하나 베풀지 않는 내 민족, 소리쳐 호소라도 하고 싶었다. 용서를 배우자, 그리고 서로 넓은 가슴으로 용서하며 살자! 그래도 내 형제 내 피줄이 이 세상에서 제일이 아니던가? 나는 아이들의 꿈이 실현되기를 천만번 기도드렸다. 25일 그날은 곧 우리 겨레 서광의 날이리라. 그래서 기어코 이 두 통의 편지를 인편에 부탁하리라 마음 먹었다. 오호애재라! 인편을 찾기전 7월 8일, 역사의 유감이 신문,방송,텔레비젼을 통해 전해올줄이야. 두통의 편지는 이렇게 응당 가야 할 곳을 가지 못하고 내 서재의 책장속에 숨어버렸었다. ‘삐약 삐약’ 볕 쪼임하며 즐겁게 울어대는  햇병아리들의 울음소리에 나는 추억의 포장마차에서 내렸다. 나는 보내지 못한 편지 두 통을 곱게 접어서 다시 ‘백두산’이라고 쓰여진 책의 책장에 끼웠다. 멀리서 아지랑이가 아물거린다. 온 누리에 가득차 흐르는 봄, 자연은 유정하여 해마다 봄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인간세상은 무정하여 우리 겨레에게 50여년을 봄 한번 가져다 주지를 않았다. 아, 그 화창한 봄이, 평화의 봄이 정녕 그립다.                                                 1996.4
3    [수필] 내가 가는 길 댓글:  조회:770  추천:0  2013-11-27
                                   내가 가는길                                                                                                            전병칠   연길에서 떠난 봉고차는 일매진 포장도로를 따라 쏜살같이 달렸다. 길가의 전주대와 가로수들이 미끄러지듯 뒤로 흘렀다.  조양천진에서 불과 몇 리 떨어지지 않은 합성촌의 큰거리에는 오늘 거행되는 저명한 조선족가수 조종주선생님의 입비식(立碑式)에 참가하려고 연길, 용정, 도문 등지로부터 온 손님들로 삼삼오오 떠를 이루고있었다. 나는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봉고차에서 내려 마중나온 선생님의 자제분들께 따뜻한 문안을 올리고 여러 곳에서 모처럼 찾아오신 지도자들과 선생님들께 일일이 인사를 드렸다.  《참 훌륭한 생각을 했습니다.》  《장한 일을 하십니다.》  여러 사람들이 나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고 똑 같은 내용의 말을 반복했다. 칭찬이랄가 책망이랄가 기쁨보다는 무거운 자책이 가슴 아프게 휘감겨 들었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연변예술집성판공실은 국가문화부의 직접적인 지도아래 국가예술과학연구 중점쩨마로 편찬되는 《중국민간가곡집성》 등 7부의 대형저서 출판을 위하여 중국 경내 조선족의 역사적으로 흘러내려온 민간예술을 수집,정리,편집하는 예술연구전문기관이다. 그러다보니 조종주선생님과 같은 민간예인들을 떠나 사업을 운운할수 없는 실정이었다.  1993년 9월 연변록음록화출판사로부터 사업상 전근을 한 나는 꼭 어느땐가는 조종주, 박정렬, 심옥화 등 연변의 예술집성사업에 공헌이 있는 민간예인들을 만나보리라 다짐했었다. 그런데 그 시기 출판된 《중국희곡지 · 길림성권》(조선족 창극 수록), 《중국민간가곡집성 · 길림성권》 ,  《중국민족민간무용집성 · 길림권> (조선족무용 20종 수록)의 최종 편집사업을 마무리 짓는데다가 《중국민족민간기악곡집성 · 길림성권》, 《중국구연음악집성 · 길림성권》, 《중국희곡음악집성 · 길림성권》 을 발행하게 되고 또 《중국구연지 · 길림성권》의 편집사업이 전면적으로 전개되어 출장과 회의가 빈번하고 집필해야 할 글들이 많다보니 그만 그일을 등한시하고 말았다. 이듬해인 1994년 봄, 우리 사업일군들이 조종주 선생님의 댁을 찾아갔을 때는 선생님께서 이미 뇌혈전에 걸려 79세를 일기로 별세하여 고인이 된지 일년이 가까와 오는 때였다. 곰곰히 따져보면 선생님은 내가 만나보려고 생각했을 때에 벌써 저 세상의 사람으로 되였었다  우리들은 연변 《서도소리의 밝은 별》이 떨어진것으로 하여 슬픔이 가슴 한구석을 도려내는것을 어쩔수가 없었다. 뒤늦게 비보를 접한 문화예술인들이 나를 찾아와서 선생님의 세 돐 제사에 기념비를 세울것을 건의하였다. 가수에게 기념비를 세운다? 연변에는 물론 전 중국에 선례가 없는 일을 하자니 주저하는 마음이 앞섰지만 서류를 작성하여 주 문화국에 보냈다. 결국은 뜻대로 서류에 공인이 날인되고 오늘과 같은 행사가 이루어졌다.   (좀더 일찍 서둘렀다면…) 남모른 안타까움이 흰 구름처럼 가슴 한복판을 가로질러 갔다.  선생님의 묘지를 올라가는 길옆의 초목들이 간밤에 내린 비로 싱싱하게 탈바꿈을 하고 활력에 찬 생명들을 자랑하고 있었다. 무성한 숲사이를 휘돌아올라간 오솔길에서 나는 연변민족악기연구소 김석산소장의 소개로 박수관박사를 만났다. 훤칠한 키에 한쌍의 정기있는 눈, 젊음과 생기가 끓어넘치는 한창 나이의 젊은이였다. 김소장의 소개에 따르면 그는 한국 해양대학교대학원 산업공학과 박사공부를 마치고 현재 갑우정밀, 갑우기술연구소 대표, 영남전문대학 겸임교수를 맡고있는데 일찍 대한민국과학기술상 기능부분의 대통령상을 수여받은 분이라고 했다. 그는 또 문학에도 남못지 않은 재질이 있어 《박가의 X소리’》등 소설책을 네 권이나 썼는가 하면 서도민요를 잘불러 소문나 있다고 했다. 박사는 이번 중국출장길에 연길로 왔다가 우연하게 남한테서 조종주선생님이 생전에 서도민요에서 《명창》 이였다는 소개를 듣고 어제 곧바로 합성촌에 와 선생님의 자제분들을 만나 애기도 나누고 소리도 몇가락 뽑았다고 한다. 그런데 연분이랄가? 《어쩌면 우리 아버님의 목소리와 신통하게 같아요.》하며 조종주 선생님의 자제분들이 그의 손목을 잡고 감격해마지 않았다. 마침 그 자리에서 오늘 행사를 알게 된 그는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남보다 먼저 여기 합성촌에 이르렀다고 했다.   《약소하지만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행사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박박사는 붙임성 있게 나와 인사를 나누며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보니 백워짜리 인민폐 열장이 들어있었다. 감지덕지했다. 바다건너 머나먼 외국 땅에 와서 한겨레 문화예술인들을 얼마만이라도 돕고자 변변치 않은 호주머니를 털어 내놓는 내 피줄, 내 형제의 그 갸륵한 마음, 이래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는 것있가?   《성의로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도란도란 허물없는 이야기와 함께 우리는 서로 이끌고 당기며 산굽이 오솔길을 돌아 올라갔다.   선생님의 묘지는 동남방향으로 멀리 모아산이 바라보이는 경사가 크지않은 펑퍼짐한 산허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변두리에 파란 잔디로 널찍하게 터를 잡은 묘지는 앞으로 소나무와 같은 나무들을 심기에 적합하였다.   10시 30분, 나는 개회를 선포하였다. 래빈소개에 뒤이어 원 연변예술집성판공실 부주임 김남호선생과 연변민간문예가협회 부주석 김재권선생님이 제막을 하고 연변민간문예가협회 주석 박창묵선생이 묘비명을 선독하였다.   《저명한 조선족가수 고 조종주지묘 연변예술집성판공실 연변민간문예가협회 경립》   《중국민간가곡집성 · 길림성권》 편집부의 전보문 랑독이 끝나자 록음기로부터 천재적 가수소질을 갖춘 선생님의 목소리가 《엮음수심가》의 노랫가락을 타고 처절하게 사람들의 심금을 파헤치며 묘지에 휘몰아쳤다.   《유유장천은 호상지덕이라 / 북망산천아 말 들어라 / 육대지황영열하는 모두 네게로 돌아 가누나 / 경기안색을 살피니 / 검은머리 곱던 낭자 어언 지간에 백발이로다…》   고인은 갔지만 노래는 살아있었다. 짙은 향토맛을 풍기는 서도소리가락, 재치있는 목굴림, 밝으면서도 우렁찬 목소리…, 선생님의 평생역사가 눈앞에 화면처럼 펼쳐졌다.   선생님은 1914년 7월 21일, 조선 평안남도 순천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셨다. 11세부터 서당공부를 한 그는 당시 평양 명창 김인숙과 순천 명창 채순진의 노래를 즐겨들었다. 그때부터 명창이 되려는 꿈을 가진 그는 노래 공부에 열중하여 남다를 가창재질로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다. 명절이나 군일이 있을 때엔 온 마을에 불려다니며 노래를 불렀다. 가정생활이 구차하여 서당공부를 근근히 3년밖에 못하고 14세부터 집에서 농사일을 한 선생님은 농사일과 관계되는 로동요와도 많이 접촉했다. 18세부터 일본인 부설 조선 평원선가설로동에 참가하여서는 공정소리, 로동소리와 같은 일소리를 많이 불렀는데 목청이 좋고 먹임소리가 능란하여 자주 선소리군으로 활약하였다. 21세부터는 소작농으로 있으면서 마을의 모임터거나 술집에 다니며 타령이나 서도잡가를 불렀는데 이 시기는 그의 가창예술의 황금시기였다. 선생님은 비록 높은 수준을 가진 스승을 모시고 계통적으로 소리를 배우지는 않았지만 재질이 특출하고 총명하여 그 어떤 노래일지라도 한 두번 들으면 그대로 따라 부를수 있었다고 한다. 29세였던 1943년 그는 일본인들의 근로봉사를 피해 고향을 떠나 중국 길림성 안도현 북흥양에 왔다. 이곳에서 광복을 맞은 선생님은 1947년 인민해방군에 참가했고 1952년에 퇴역하여 고향에 돌아와 농업에 종사하였다. 그후 1954년부터는 용정시 태양향과 조양천진합성촌 등에서 민정, 고급사 주임, 생산대 대장 등 사업을 하면서 여러 차레 선진사업가로 표창을 받았었다.   1957년 겨울, 태양향에서는 삼도만으로 목재채벌을 가게 되었는데 선생님께서 인솔자 책임을 맡으셨다. 설남, 오락판이 벌어졌는데 그의 소리재질이 소문이나 현성에까지 선생님의 이름이 알려졌다. 그리하여 1958년 그는 연길현대표로 전 주 민간예인가수대회에 참가하여 《물레타령》, 《배노래》등 민요를 불러 절찬을 받았고 1962년에는 제 2차 전 주 민간예인가수대회에 참가하여 다시 한 번 천재적 가창소질을 과시하였는바 1963년, 선생님은 연변가무단에 초빙되어 반년동안 민요교원을 담임하고 배우들에게 많은 민요를 가르쳐주었다. 1979년,  세월이 흘러 선생님은 어느덧 65세에 난 로인이었지만 전국소수민족민간가수대회에 참가하여 《목도소리》 , 《풍구타령》 등 민요를 불러 북경관중들과 음악계의 호평을 받았다.   선생님은 후세에 200여수의 귀중한 민간음악유산을 남겼는데 1982년에 중국민간문예연구회에 가입하였고 1983년에는 길림성문화청과 중국음악가협회 길림분회로부터 민가집성사업《공헌상》을 탔으며 1988년에는 중국민간문예가협회 길림분회로부터 《민간가수》 칭호를 수여받고 국가 문화부, 국가 민족사무위원회로부터 전국 민간음악집성사업 《공헌상》을 수여받으셨다.   원 예술집성판공실 부주임 김남호선생의 추모사를 이어 제전이 시작되었다.   선생님의 장자 조영선씨와 부인 이영자양이 아버님의 령전에 술을 따르고 큰절을 올렸다.   주 문화국, 연변문련, 연변예술집성판공실, 연변조선족음악연구회, 연변음악가협회, 연변예술학원, 연변가무단, 연변민족악기연구소, 룡정시문련, 룡정시문화예술센터, 도문시문예창작실, 조양천진정부, 조양천진문화소, 합성촌지도부 등 단체의 지도자들과 문화예술가들의 뒤를 이어 선생님의 제자 현춘월, 박수관박사, 선생님의 차남 조영식씨와 부인 이정희양 그리고 딸, 사위, 조카들이 연이어 선생님의 령전에 술을 따르고 절을 올려 고인에 대한 애도를 표했다.   고인의 생전에 여러번 찾아뵌적이 있는 원 주문화국 부국장 김창호선생님이 비석 앞에 나서서 추모의 연설과 함께 연변민가집성의 역사를 회고하였다.   《연변에서의 민가집성사업은 60년대 초부터 일찍 시작했습니다. 당시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이었던 주덕해동지는 민간예인들이 연세가 많아 하나 둘 타계의 객이 되는 사정에 비추어 불끄러 가는 소방차의 속도로 민간문예수집사업을 추진할것을 호소하셨습니다. 그때로부터 몇 해 전까지 우리 연변예술집성사업일군들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덤불길을 헤치며 연변을 비롯한 동북 3성 200여개 마을 500여명의 민간예술인들을 찾아다니며 근 천여수에 달하는 민요를 수집, 정리하였습니다. 그 가운데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얘기들도 많습니다》   선배님의 추억과 함께 감회 깊은 민가집성사업의 과거의 일들이 구슬 알처럼 하나하나 줄을 이어 눈앞을 스쳐갔다.   문화대혁명의 대동란기간 때였다.  오래동안 민가수집사업을 해온 리황훈선생은 숱한 민족문예유산자료들이 나이 어린 홍휘병들에 의해 재가루가 되는것을 보고 《내가 수집한것은 불태울수 없다!》며 민간예인들의 춤동작을 찍은 사진필름과 민가기보자료들을 땅속에 파묻었다. 그런데 그후 어느날, 미처 간수하지 못한 자료들이 검은손에 의해 불 속에 던져졌다. 《태우면 나를 태웠지 이것만은 못 태운다.》 비판투쟁을 받으면서도 그는 불더미속에 뛰어들어 그것들을 집어냈다. 한번은 이런 일까지 있었다. 맹인민간예인 한분을 만나 민가를 수집하였는데 밤중이 되니 그 맹인이 배가 고프다면서 개고기를 먹고싶다고 하였다고 한다. 한밤중에 어디에 가서 개고기를 사온단 말인가. 그 사람은 개고기를 사오지 않으면 노래를 안 부르겠다고 딱 잡아뗐다. 울지도 웃지도 못할 일이었다. 이황훈 선생님은 입씨름하다 못해 그 맹인한테 무릎을 끓고 사정하고 또 사정하였다.   《내일은 꼭 개고기에다 찰떡까지 사서 대접하겠으니 마저 불러주십시오.》 쇠로 만들어지지 않은 이상 그 누구라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랴. 맹인예인은 끝내 자기가 알고 있는 민가를 죄다 털어놓고 말았다. 기염만장(氣焰萬丈)해 달려드는 반란파앞에서 그처럼 도고했던 선생님이 어떻게 보면 남들한테 하잘것없이 보일수 있는 맹인가수앞에서 고스란히 머리를 수그리고 무릎을 끓는것까지 마다한 이유는 무엇일가?   유사한 일들은 너무나도 많다.   1978년 민가수집조의 리동구, 김봉관 두 선생님이 화룡현 숭선향 남석촌에 갔을 때의 일이다. 독보조에서 들으니 박남선로인이 민가를 잘 부른다고 하기에 찾아갔더니 미리 알고 슬그머니 하천에 있는 딸집으로 피신을 갔었다. 7 ~ 8리 되는 길을 걸어 로인을 찾아 상급의 문서들을 내놓으면서 찾아온 이유를 말하니 죽어도 민가는 안 부른다고 했다. 결국 수집조 사람들에 의해 설복되었는데 로인은 쌈지에서 담배종이를 꺼내놓으며 《내가 소리를 해도 죄가 없다고 여기에 쓰고 도장을 찍소.》라고 했다. 한심한 일 같지만 리해는 갔다. 이전에 민가를 많이 불렀다는 죄로 문화대혁명기간에 제재까지 당해 소리는 물론 술까지 끊고 조용히 살아간다는 로인이었기때문이다. 수집조사람들은 로인이 시키는대로 쓰고 민가집성판공실의 도장을 찍었다. 그날 로인은 《초한가》의 1절을 부르고 꺼억꺼억 울었다. 그토록 부르고싶은 내 민족 내 노래를 부른것이 죄가 되어 감시 당한 어제가 통분하고, 술대접까지 받으며 그 노래를 다시 통쾌하게 부르는 오늘이 눈물나도록 기뻣기때문이다. 정녕 민족이란 무엇이고 정통이란 또 무엇인데?   사실, 공화국창건 수십년간 수많은 사람들이 민간예술집성사업에 참가하여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수많은 농가의 문턱을 넘나들면서 수천명의 민간예인들을 만나 단절된 민간예술의 명맥을 이어놓고 사그러져가는 민간예술의 불씨를 되살리는데 기여를 하였다. 고심참담한 그 발자취를 어찌 한입으로 다 말할 수 있으랴?  우리는 함께 고인의 령전에 심심한 묵도를 드렸다. 아니, 저 세상으로 간 여러 민간예인들과 수십년간 민가수집사업을 해오다 쓰러진 이황훈, 김태감, 김승경, 김원창, 왕보림 등 선생님들께 오래오래 묵도를 드렸다.   《사회의 여러 지도자, 예술인 선생님들로부터 존경을 받은 아버지로 하여 저희들은 영광을 느낍니다...꼭 여러분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아버지의 묘지에 소나무도 떠다 옮기며 아버지 생전에 다하지 못한 효성을 하겠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장자 조영선씨의 비통한 회포를 자아내는 답사로 입비식은 막을 내렸다.   여러 선생님들이 고인의 령전에서 술과 안주를 들면서 고인의 제자 현춘월양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그런데 노래를 부르러 나섰던 그녀가 참았던 설움을 이때에야 터뜨릴 줄이야. 《선생님의 사랑이 잊혀지지 않는다.》며 그녀는 더 슬프게 흐느꼈다. 선생님은 일생을 참하고 근면하고 겸손하게 살았었다. 선생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가 그이를 생활이 소박하고 명예와 재물 앞에서 사리를 따지지 않는 분이라고 말했다.   끝내 현춘월양의 입에서 《장타령》이 흘러나왔다.   《종은 좌석에 / 춤도 춰야 놀 재미 있수다 / 니니니 닐니리리 / 닐리리 쿵 닐리리 닐리리 난 노나요…》   이윽고 여러 사람들의 요청에 의해 박수관 박사가 한곡 념겼다.   《어이야 불어라 / 불 불어주렴 / 슬근살짝 불어도 / 만대장이 나온다 / 삼수갑산풍구는 / 칠팔인이 불어도 / 구리무쇠 돌무쇠 / 쾅쾅 녹아서 나온다…》   봉고차는 오던 길을 되돌아 서서히 달렸다. 신록에 설레는 나무들이 언뜻언뜻 차창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러는 가운데 나는 방불히 고인의 묘지에서 기지개를 켜며 키돋움하는 아름드리 푸른 소나무를 보는것만 같았다. 나는 굳게 믿었다. 내가 가고있는 이 길이 잃어버렸던 금싸라기같이 귀중한 것들을 찾는 길이 되기를…                                                                                    1996년4월
2    어머니를 추모하여 댓글:  조회:811  추천:0  2012-10-15
어머니를 추모하여                      어머니 삼년제에 올립니다. 어머니! 푸른 생명이 약동하는 계절입니다. 산에 들에 랑만이 서있는 계절입니다. 여기저기 벌판에 기화요초들이 키돋음하기에 급급하고 산언덕의 창창한 소나무들이 싱싱한 가지를 뻗치며 활기찬 숨결을 자랑합니다. 인간의 생명은 유한이지만 자연의 생명은 무한인가 봅니다. 춘하추동이 바뀌여 다시 이 땅에 찾아온 이 여름과 함께 어머니께서 저희들을 찾아오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보고싶은 어머니! 어머니께서 저희들의 곁을 떠나시던 그날은 하늘도 비통을 참지 못하고 잔잔한 비방울을 눈물로 떨구며 저희들과 함께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 눈물속에 산천초목이 숙연히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백합처럼 깨끗하고 청죽같이 강직하게 살아오신 어머니!  해와 달이 바뀌여 93년 성상, 어머니는 고웁게 일광단 인생을 살으셨습니다. 한창 피여나는 15세 꽃 나이에 고농살이 하는 빈털털이 아버지를 만나 고스란히 사랑을 지키면서 짠 고생 쓴 고생 달게 하며 항상 넉넉한 마음가짐으로 가진것 없이 어머니는 풍족한  삶을 살으셨습니다. 고향의 오동지 밭고랑같이 길고 진 인생길을 어머니는 당신의 지혜와 힘으로 슬기롭게 이겨내시고 “주먹이 돈이다” 는 아버지의 신조를 따라 아버지와 함께 손을 맞잡고 열심히 일하여 연풍 자작농 촌의 작은 부자로 남부럽지 않게 살으셨습니다. 그리고 항상 “착한 사람”이 되라고 아들딸들을 교육 하셨습니다. 15리길을 다니며 통학하는 자식들의 아침밥을 위해 신새벽 잠자리를 차고 일어나 김이 서리는 구들목에서 분주히 “전투”를 하셨습니다. 당신은 한알이 낟알이라도 버릴세라 물이나게 세간살이 하면서 판난 옷견지와 신을 깁고 또 기웠습니다. 룡문향의 “근검치가” 모범이셨던 어머니는 당신이  힘들게 살면서도 항상 이웃의 가난을 도와 나서는 아량도 넉넉 하시여 항상 동네 사람들의 치하를 받으셨습니다. 가정을 위해 자식을 위해 사회를 위해 어머니는 평생 마른일 굳은일 가릴 겨를이 없었습니다. 달처럼 해처럼 둥글어가는 꿈을 무르익히며 해를 안고 고개고개, 별을 안고 굽이굽이, 어머니는 검은 머리 백발이 되도록, 꿋꿋하던 허리가 구부러지도록 열심히  꾸준히 일생을 살으셨습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해와 함께 달과 별과 함께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오늘도 어머니는 큼직한 산나물보따리를 가냘픈 머리에 이시고 해빛이 쨍쨍 내리 쪼이는 태양동골안의 작은 오솔길을 내리십니다. 달을 바라보며 어머니는 시골집 뜨락에 서시여 옥수수 키돋음하는 소리를 귀담아 듣습니다. 시골 시뿌연 창호지, 하나 등불이 반짝입니다. 어머니는 한점 그 빛을 동무합니다. 하루 빨래, 이틀 바느질, 한달 절구방아 ,한해 여름 베틀앞, 어머니는 평생을 그 빛을 동무해 당신의 고달픈 아리랑 삶을 다듬이질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지금 고향 시골집 팔간집의 정지에서 가마니를 짜고 계십니다. 어머니는 지금 룡정 문화가의 초가집 부엌에서 석탄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지금 도문 아파트의 가마목에서 쌀을 일고 계십니다. 설레이는 저 나무잎을 따라 우리들은 어머니 목소리를 읽습니다. 하얗게 빨갛게 노랗게 피여나는 꽃 이파리속에서 우리들은 어머니의 미소를 줏습니다. 어머니는 영원히 저희들의 가슴속의 빈 의자에 조용히 않아 계십니다! 인자하고 자애롭던 어머니! 어머니, 오늘 저희들은 어머니를 아버지 신변으로 모십니다. 어머니의 유언을 따라 어머니의 골회를 아버지 묘소의 산에 뿌립니다. 음침하고 어두운 장의관 보다는 아버지가 계시는, 한번 떠나 다시 못가 보신 당신이 태여난 홍원 땅이 한눈으로 바라보이는 일광산이  훨씬 낳을겁니다! 어머니, 천국에 계시는 어머니 ! 해빛 좋은 일광산에서 아버지와 함께 이승에서 못 다한 사랑을 나누면서 가끔은 홍원땅으로, 장인골로, 룡정, 도문, 연길 시가지로 아니, 일본 한국, 그리고 베이징, 동관, 청도를 유람 다니시며 생전의 모습대로 당신의 자식들과 손자 손녀 증손들이 바른 삶을 살도록 어깨를 다독여주시고 무병장수하도록 보살펴주시며 딸라며 유로며 엔이며 인민페가 불룩한 돈주머니를 챙기도록 하늘나라에서 많이 보살펴 주십시오! 하늘나라에 계시는 어머니! 어머니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어머니는 영원히 우리 마음에 살아 계십니다!                                                2005년 음력 4월 25일                                       
1    무지개 타고 소풍 오는날 기다리리 댓글:  조회:1012  추천:0  2012-10-12
                 무지개 타고 소풍 오는날 기다리리                        전병칠 청천벽력이 아닐수 없다. 영호형이 저세상을 가다니...내가 뜻밖의 비보를 듣고 연길에 전화를 했을 때 영호형은 이미 구급실에서 나와 사체실로 옮겨지고 있었다. “오호통재라,인간이 이처럼 무력하단말인가!” 작년 여름 우리는 함께 술을 마시며 롱담 반 진담 반으로 누가 먼저 이 세상을 떠나면 남아있는 사람이 상대방을 위해 추모문을 써준다고 약속을 했다. 그런데 그 약속이 이렇게 빨리 올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나와 영호형이 처음 만난것은 1985년 여름 “연변예술절” 때였다. 그때 그는 안도현문화관의 문학보도원이였고 나는 연변예술관의 문학보도원 겸 《해란강》잡지의 주필이였다. 서로간에 초면인지라 우리는 존칭을 써서 서로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 이듬해 봄, 연변군중예술관에서는 연변록음록화출판사(당시는 길림록음록화출판사 연변분사로 불렀음)와 함께 안도현에 가서 가요창작반을 하게 되였는데 우리는 자연 그곳에서 만나 낮에는 함께 창작토론을 벌리고 밤에는 함께 술을 마셨다. 하루 저녁 나와 영호형 그리고 당시 연변록음록화출판사의 음악편집으로 있던 김룡무가 함께 술을 마시게 되였는데 나이를 따지고 보니 나와 김룡무는 동갑이고 영호형은 우리보다 한살 더 많았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자치동갑이였다. 나와 김룡무는 자칫하면 동갑이 될 뻔한 자치동갑이니 서로 술잔을 마주치면서 너나들이 하는것이 어떤가고 영호형한테 제안을 했다. 영호형이 앞에 놓인 메추리알 통졸임반찬을 가리키면서 "이안에 있는 메추리알을  껍질채로 먹는 사람이면 너나들이를 할수 있다"라고 했다. 이미 술이 거나하게 된 때라 결국 나도 김룡무도 그 자리에서 깡통안의 메추리알을 꺼내서 껍질채로 와작와작 씹어넘겼다. 물론 영호형도 그렇게 했다. 우리는 서로 통쾌하게 웃으며 너나들이로 련속 술잔을 마주쳤다. 그후 나는 연변록음록화출판사에 전근하고 영호형이 나 대신 연변군중예술관에 전근해 왔다. 나와 영호형은 계속하여 나나들이 친구로 가깝게 보냈다. 1991년 겨울,  우리는 한국에서 연변에 장사를 온 강성용사장과 자주 술자리를 함께 하게 되였는데 어느날 강성용사장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술잔을 권하면서 형으로 모시겠다고 했다. 이미전에 강사장과 영호형이 형님 동생하는 사이인것을 아는지라 강성용과 형제를 맺으면 자연히 영호형을 형이라 불러야 하는판이라 난감했다. 하지만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었다. 결국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날부터 영호형을 형님이라 부르기로 했다. 직업이 같고 취향이 비슷한 나와 영호형은  이렇게 문학동인으로 만나 친구가 되고 의형제가 되였다.    내가 영호형과 마지막으로 갈라진것은 작년 10월 12일 북경의 왕징조선족탁구협회에서 조직한 영호형의 환송식이였다. 그날 환송식에서는 협회의 강태호회장이 환송사를 읽고 자리를 같이한 20여명 협회회원들이 일제히 영호형이 작사한 노래 “왕징조선족탁구협회 회가”를 불렀다. 그날 영호형은 술을 많이 마셨다. 3년 전에 떠난 고향으로 곧 귀향하게 되는 마음 그리고 새롭게 정을 붙힌 다정한 친구들과 혀여져야 하는 그의 심정은 얼마나 착잡하였을가? 나도 그날은 엄청나게 술을 마셨다.    영호형은 내부퇴직하여 연길에서 얼마간 보낸 후 안해와 같이2005년 상해에서 사업을 벌리고 있는 아들 동국이를 따라 상해에 갔다가 아들이 사업터를 옮기면서 2007년 11월에 북경에 왔다. 처음에는 아는 사람도 많지 않고 하여 집에서 독서나 하고 가끔 산책이나 하면서 조용한 선비생활을 하다가 후에는 망경에 조선족탁구협회가 있는것을 알고는 그들과 함께 친구로 보내면서 부인을 데리고 아침저녁으로 탁구를 쳤다. 그러면서 망경“조선족탁구협회회가” 를 써서 연길에 있는 김경애선생한테 작곡을 시켜서 탁구협회행사때마다 불렀다.    내가 북경에서 영호형을 처음 만난 것은 2008년 북경올림픽때였다. 그 이듬해 우리는 다시 북경에서 만났다. 내부퇴직한후 상해, 장춘, 제남 등 도시를 돌면서 한국기업에서 근무랍시고 일을 보다가 북경에 온 나를 영호형은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딸도 북경에 있는데 북경에 있으라고 권했다. 마침 조카딸이 인제는 그만 떠돌이하고 자기회사에 출근하면서 회사를 관리해 달라고 했다. 북경에 있는 딸도 나에게 북경에 있을것을 권했다. 결국 나는 북경에 머물게 되였고 영호형과 함께 망경에서 살게되였다. 같이 북경에서 살게되다보니 우리는 자주 만났다. 때로는 내가 창작한 시를 내놓고 토론하고 때로는 영호형이 자기가 쓴 가사를 갖고 나의 서무실에 와서 의견청취를 했다. 그리고 때로는 이름없는 망경의 광장에 신문지를 펴고 털석 주저않아 연변의 진미명태를 뜯으며  꿀꺽꿀꺽 인생을 마셨다.    영호형은 독서를 즐겼다. 연길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북경에 있을때도 집에 가보면 침대머리에 여러가지 도서며 신문과 월간지들이 수두룩하게 쌓여있었다. 그리고 침대머리에 항상 창작노트를 두고있었는데 가끔씩 떠오르는 시상을 메모해 놓군했다. 영호형의 문학재질은 이러한 수십년간의 끈질긴 독서와 갈라놓을수 없다. 전문학교를 졸업하지 않았지만 영호형은 중조,조중 문자번역도 잘했다. 이 모든 지식을 영호형은 독서에서 얻었다.   영호형은 1948년에 5남매 중 맏이로 안도현 석문향에서 태어났다.동년시절 가장 큰 유혹이 서점이였다고 했다. 하여 서점에 정연하게 진렬된 도서들을 볼 때마다 어린 마음에 항상 벅찬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저기 있는 책들이 다 내 책이라면?” 넉넉지 못한 가정형편에 맘 놓고 독서할 수 없어 늘 서점 앞에서 서성이며 눈요기로만 만족해야 했던 그에게 어느 날 아버지가 10전짜리 한 장을 쥐어 주었다. 처음으로 만져보는 "거액"에 잠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는 곧장 서점으로 달려가 7전을 내고 "양정우장군전"이라는 이야기책을 샀다고 한다. 단숨에 책을 다 읽은 영호형은 책의 매력에 깊이 빠졌다. 그 후 그는 돈이 생기는 대로 한푼 두푼  모아서는 그 돈으로 몽땅 책을 샀다. 그렇게 그는 소꿉시절부터 철저히 독서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그때 일을 회상하면서 영호형은 아버지가 준 10전을 갖고 자기는 네모난 보물상자를 샀다고 했다. 그 보물상자속에서 자기는 세상의 진리를 터득하게 되였고 삶의 아름다움을 배웠다고 했다.결국 영호형은 그 보물상자 덕분에 1969년 안도현 영경향고중 조선어문 겸 음악교원으로 취직를 했고 1979년에는 안도현문공단의 전직창작원으로 정식 초빙되였으며 1989년에는 연변군중예술관에 전근되어 《해란강》잡지 주필을 맡았다.    1990년에 창작한 “교정의 종소리”(김경애 작곡)는 "버스컵 대중가요창작콩쿠르"에서 1등의 영예를 따냈다. 노래가 발표되여 얼마 안되여 노래는 연변은 물론 전국 조선족들이 있는곳이면 어디나 파다하게 퍼지기 시작했고 연변 TV방송국과 라지오방송국의 요청무대프로에는 시청자들의 요청전화가 비발치듯 쇄도했다. 그리고 노래방 어디를 가더라도 쉽게 대중들이 열창하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이 노래 덕분에 가수 지망생이었던 허순금은 일약 인기가수로 발돋움했다.   1996년 창작한 “진달래 고향”(박학림 작곡)은 가수 권명이 불렀는데 나어린 가수의 애되고 발랄한 목청이 안받침 되면서 전국노래 콩쿠르에서 당당하게 1등의 영예를 따냈다. 진달래꽃은 우리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화이다.“앞 산에도 뒤 산에도 연분홍 물결”,우리 고향은 진정 진달래 고향임에 틀림없다. 고향을 멀리떠난 사람들에게 있어서 진달래는 이름만으로도 눈물이 나기에 충족하다.이 노래는 건드러진 선률과 함께 많은 사람들의 맘속에 잔잔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오늘도 멀리멀리 울려가고있다.    1999년 창작한 “무지개 인생”(윤강철 작곡)은 2000년 음력설야회에서 김향월가수가 특유의 매혹적인 목청으로 시청자들의 한결같은 사랑을 독차지하며 애창가요로 급부상했고 "연변인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 11수"중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영호형 인생의 가사창작에서 봉우리로 볼수 있는 이 가사에서 영호형은 무지개라는 자연의 한 매개물을 통해 사는동안 짧다해도 눈부시고 어여쁘게 살아가고싶은 자기 지향의 아름다운 인생을 그렸고 또 사회를 향해 우리가 사는 이세상을 색갈고운 마음으로 하나같이 뭉쳐 사랑이 넘친 꽃밭으로 가꾸자고 절절하게 호소를 했다.   영호형은 한때 시가 좋아 시인이 될 꿈을 꾸었었지만 그는 결국 시문학이 아닌 가사문학의 길을 선택했고 그 길에서 한곡, 한곡의  주옥같은 히트곡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명실공히 유명작사자로 발돋움했다. 영호형은 수십년의 창작생애에 600여수의 가사 그리고 100여수의 서정시를 발표했는데 그중 60여수는 시, 주, 성, 국가 급 영예를 따냈고 150여수가 방송과 TV 매주일가프로를 통해 방송되였다.   자신의 생애에서 “진달래 고향”, “교정의 종소리”, “무지개인생” 등 히트곡들이 광범한 대중들의 사랑을 받으며 애창가요로 널리 알려지는 현실을 실감할 때가 가장 가슴 뿌듯하다고 하던 영호형, 노래를 통해 사랑하는 마음을 나누고 노래를 통해 모두에게 희망을 부여해주며 노래와 더불어 영원히 대중들의 맘속에 불멸의 작사자로 남고 싶다던 영호형, 그는 자기의 창작과는 달리 자신의 몸건강에는 너무 소홀했다.      이미 손을 놓고 떠난 사람을 두고 이제 무슨 말을 더하랴!     비온 뒤 솟는   칠색무지개   사는 동안 짧다해도   눈부시게 어여쁘다고   그토록 동경하셨습니까?     세월의 하늘에선   인생도 방불히   한순간의 무지개라 하시더니   그 무지개 찾아   총망히 총망히 하늘나라 가셨군요!     이제, 무지개 타고   훨-훨 소풍 오는 날   가는 세월 잡아두고   함께 술 한잔 나누며  “진달래 고향”노래 통쾌히 부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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