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는길
전병칠
연길에서 떠난 봉고차는 일매진 포장도로를 따라 쏜살같이 달렸다. 길가의 전주대와 가로수들이 미끄러지듯 뒤로 흘렀다.
조양천진에서 불과 몇 리 떨어지지 않은 합성촌의 큰거리에는 오늘 거행되는 저명한 조선족가수 조종주선생님의 입비식(立碑式)에 참가하려고 연길, 용정, 도문 등지로부터 온 손님들로 삼삼오오 떠를 이루고있었다. 나는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봉고차에서 내려 마중나온 선생님의 자제분들께 따뜻한 문안을 올리고 여러 곳에서 모처럼 찾아오신 지도자들과 선생님들께 일일이 인사를 드렸다.
《참 훌륭한 생각을 했습니다.》
《장한 일을 하십니다.》
여러 사람들이 나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고 똑 같은 내용의 말을 반복했다. 칭찬이랄가 책망이랄가 기쁨보다는 무거운 자책이 가슴 아프게 휘감겨 들었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연변예술집성판공실은 국가문화부의 직접적인 지도아래 국가예술과학연구 중점쩨마로 편찬되는 《중국민간가곡집성》 등 7부의 대형저서 출판을 위하여 중국 경내 조선족의 역사적으로 흘러내려온 민간예술을 수집,정리,편집하는 예술연구전문기관이다. 그러다보니 조종주선생님과 같은 민간예인들을 떠나 사업을 운운할수 없는 실정이었다. 1993년 9월 연변록음록화출판사로부터 사업상 전근을 한 나는 꼭 어느땐가는 조종주, 박정렬, 심옥화 등 연변의 예술집성사업에 공헌이 있는 민간예인들을 만나보리라 다짐했었다. 그런데 그 시기 출판된 《중국희곡지 · 길림성권》(조선족 창극 수록), 《중국민간가곡집성 · 길림성권》 , 《중국민족민간무용집성 · 길림권> (조선족무용 20종 수록)의 최종 편집사업을 마무리 짓는데다가 《중국민족민간기악곡집성 · 길림성권》, 《중국구연음악집성 · 길림성권》, 《중국희곡음악집성 · 길림성권》 을 발행하게 되고 또 《중국구연지 · 길림성권》의 편집사업이 전면적으로 전개되어 출장과 회의가 빈번하고 집필해야 할 글들이 많다보니 그만 그일을 등한시하고 말았다. 이듬해인 1994년 봄, 우리 사업일군들이 조종주 선생님의 댁을 찾아갔을 때는 선생님께서 이미 뇌혈전에 걸려 79세를 일기로 별세하여 고인이 된지 일년이 가까와 오는 때였다. 곰곰히 따져보면 선생님은 내가 만나보려고 생각했을 때에 벌써 저 세상의 사람으로 되였었다
우리들은 연변 《서도소리의 밝은 별》이 떨어진것으로 하여 슬픔이 가슴 한구석을 도려내는것을 어쩔수가 없었다. 뒤늦게 비보를 접한 문화예술인들이 나를 찾아와서 선생님의 세 돐 제사에 기념비를 세울것을 건의하였다. 가수에게 기념비를 세운다? 연변에는 물론 전 중국에 선례가 없는 일을 하자니 주저하는 마음이 앞섰지만 서류를 작성하여 주 문화국에 보냈다. 결국은 뜻대로 서류에 공인이 날인되고 오늘과 같은 행사가 이루어졌다.
(좀더 일찍 서둘렀다면…) 남모른 안타까움이 흰 구름처럼 가슴 한복판을 가로질러 갔다.
선생님의 묘지를 올라가는 길옆의 초목들이 간밤에 내린 비로 싱싱하게 탈바꿈을 하고 활력에 찬 생명들을 자랑하고 있었다. 무성한 숲사이를 휘돌아올라간 오솔길에서 나는 연변민족악기연구소 김석산소장의 소개로 박수관박사를 만났다. 훤칠한 키에 한쌍의 정기있는 눈, 젊음과 생기가 끓어넘치는 한창 나이의 젊은이였다. 김소장의 소개에 따르면 그는 한국 해양대학교대학원 산업공학과 박사공부를 마치고 현재 갑우정밀, 갑우기술연구소 대표, 영남전문대학 겸임교수를 맡고있는데 일찍 대한민국과학기술상 기능부분의 대통령상을 수여받은 분이라고 했다. 그는 또 문학에도 남못지 않은 재질이 있어 《박가의 X소리’》등 소설책을 네 권이나 썼는가 하면 서도민요를 잘불러 소문나 있다고 했다. 박사는 이번 중국출장길에 연길로 왔다가 우연하게 남한테서 조종주선생님이 생전에 서도민요에서 《명창》 이였다는 소개를 듣고 어제 곧바로 합성촌에 와 선생님의 자제분들을 만나 애기도 나누고 소리도 몇가락 뽑았다고 한다. 그런데 연분이랄가? 《어쩌면 우리 아버님의 목소리와 신통하게 같아요.》하며 조종주 선생님의 자제분들이 그의 손목을 잡고 감격해마지 않았다. 마침 그 자리에서 오늘 행사를 알게 된 그는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남보다 먼저 여기 합성촌에 이르렀다고 했다.
《약소하지만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행사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박박사는 붙임성 있게 나와 인사를 나누며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보니 백워짜리 인민폐 열장이 들어있었다. 감지덕지했다. 바다건너 머나먼 외국 땅에 와서 한겨레 문화예술인들을 얼마만이라도 돕고자 변변치 않은 호주머니를 털어 내놓는 내 피줄, 내 형제의 그 갸륵한 마음, 이래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는 것있가?
《성의로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도란도란 허물없는 이야기와 함께 우리는 서로 이끌고 당기며 산굽이 오솔길을 돌아 올라갔다.
선생님의 묘지는 동남방향으로 멀리 모아산이 바라보이는 경사가 크지않은 펑퍼짐한 산허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변두리에 파란 잔디로 널찍하게 터를 잡은 묘지는 앞으로 소나무와 같은 나무들을 심기에 적합하였다.
10시 30분, 나는 개회를 선포하였다. 래빈소개에 뒤이어 원 연변예술집성판공실 부주임 김남호선생과 연변민간문예가협회 부주석 김재권선생님이 제막을 하고 연변민간문예가협회 주석 박창묵선생이 묘비명을 선독하였다.
《저명한 조선족가수 고 조종주지묘 연변예술집성판공실 연변민간문예가협회 경립》
《중국민간가곡집성 · 길림성권》 편집부의 전보문 랑독이 끝나자 록음기로부터 천재적 가수소질을 갖춘 선생님의 목소리가 《엮음수심가》의 노랫가락을 타고 처절하게 사람들의 심금을 파헤치며 묘지에 휘몰아쳤다.
《유유장천은 호상지덕이라 / 북망산천아 말 들어라 / 육대지황영열하는 모두 네게로 돌아 가누나 / 경기안색을 살피니 / 검은머리 곱던 낭자 어언 지간에 백발이로다…》
고인은 갔지만 노래는 살아있었다. 짙은 향토맛을 풍기는 서도소리가락, 재치있는 목굴림, 밝으면서도 우렁찬 목소리…, 선생님의 평생역사가 눈앞에 화면처럼 펼쳐졌다.
선생님은 1914년 7월 21일, 조선 평안남도 순천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셨다. 11세부터 서당공부를 한 그는 당시 평양 명창 김인숙과 순천 명창 채순진의 노래를 즐겨들었다. 그때부터 명창이 되려는 꿈을 가진 그는 노래 공부에 열중하여 남다를 가창재질로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다. 명절이나 군일이 있을 때엔 온 마을에 불려다니며 노래를 불렀다. 가정생활이 구차하여 서당공부를 근근히 3년밖에 못하고 14세부터 집에서 농사일을 한 선생님은 농사일과 관계되는 로동요와도 많이 접촉했다. 18세부터 일본인 부설 조선 평원선가설로동에 참가하여서는 공정소리, 로동소리와 같은 일소리를 많이 불렀는데 목청이 좋고 먹임소리가 능란하여 자주 선소리군으로 활약하였다. 21세부터는 소작농으로 있으면서 마을의 모임터거나 술집에 다니며 타령이나 서도잡가를 불렀는데 이 시기는 그의 가창예술의 황금시기였다. 선생님은 비록 높은 수준을 가진 스승을 모시고 계통적으로 소리를 배우지는 않았지만 재질이 특출하고 총명하여 그 어떤 노래일지라도 한 두번 들으면 그대로 따라 부를수 있었다고 한다. 29세였던 1943년 그는 일본인들의 근로봉사를 피해 고향을 떠나 중국 길림성 안도현 북흥양에 왔다. 이곳에서 광복을 맞은 선생님은 1947년 인민해방군에 참가했고 1952년에 퇴역하여 고향에 돌아와 농업에 종사하였다. 그후 1954년부터는 용정시 태양향과 조양천진합성촌 등에서 민정, 고급사 주임, 생산대 대장 등 사업을 하면서 여러 차레 선진사업가로 표창을 받았었다.
1957년 겨울, 태양향에서는 삼도만으로 목재채벌을 가게 되었는데 선생님께서 인솔자 책임을 맡으셨다. 설남, 오락판이 벌어졌는데 그의 소리재질이 소문이나 현성에까지 선생님의 이름이 알려졌다. 그리하여 1958년 그는 연길현대표로 전 주 민간예인가수대회에 참가하여 《물레타령》, 《배노래》등 민요를 불러 절찬을 받았고 1962년에는 제 2차 전 주 민간예인가수대회에 참가하여 다시 한 번 천재적 가창소질을 과시하였는바 1963년, 선생님은 연변가무단에 초빙되어 반년동안 민요교원을 담임하고 배우들에게 많은 민요를 가르쳐주었다. 1979년, 세월이 흘러 선생님은 어느덧 65세에 난 로인이었지만 전국소수민족민간가수대회에 참가하여 《목도소리》 , 《풍구타령》 등 민요를 불러 북경관중들과 음악계의 호평을 받았다.
선생님은 후세에 200여수의 귀중한 민간음악유산을 남겼는데 1982년에 중국민간문예연구회에 가입하였고 1983년에는 길림성문화청과 중국음악가협회 길림분회로부터 민가집성사업《공헌상》을 탔으며 1988년에는 중국민간문예가협회 길림분회로부터 《민간가수》 칭호를 수여받고 국가 문화부, 국가 민족사무위원회로부터 전국 민간음악집성사업 《공헌상》을 수여받으셨다.
원 예술집성판공실 부주임 김남호선생의 추모사를 이어 제전이 시작되었다.
선생님의 장자 조영선씨와 부인 이영자양이 아버님의 령전에 술을 따르고 큰절을 올렸다.
주 문화국, 연변문련, 연변예술집성판공실, 연변조선족음악연구회, 연변음악가협회, 연변예술학원, 연변가무단, 연변민족악기연구소, 룡정시문련, 룡정시문화예술센터, 도문시문예창작실, 조양천진정부, 조양천진문화소, 합성촌지도부 등 단체의 지도자들과 문화예술가들의 뒤를 이어 선생님의 제자 현춘월, 박수관박사, 선생님의 차남 조영식씨와 부인 이정희양 그리고 딸, 사위, 조카들이 연이어 선생님의 령전에 술을 따르고 절을 올려 고인에 대한 애도를 표했다.
고인의 생전에 여러번 찾아뵌적이 있는 원 주문화국 부국장 김창호선생님이 비석 앞에 나서서 추모의 연설과 함께 연변민가집성의 역사를 회고하였다.
《연변에서의 민가집성사업은 60년대 초부터 일찍 시작했습니다. 당시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이었던 주덕해동지는 민간예인들이 연세가 많아 하나 둘 타계의 객이 되는 사정에 비추어 불끄러 가는 소방차의 속도로 민간문예수집사업을 추진할것을 호소하셨습니다. 그때로부터 몇 해 전까지 우리 연변예술집성사업일군들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덤불길을 헤치며 연변을 비롯한 동북 3성 200여개 마을 500여명의 민간예술인들을 찾아다니며 근 천여수에 달하는 민요를 수집, 정리하였습니다. 그 가운데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얘기들도 많습니다》
선배님의 추억과 함께 감회 깊은 민가집성사업의 과거의 일들이 구슬 알처럼 하나하나 줄을 이어 눈앞을 스쳐갔다.
문화대혁명의 대동란기간 때였다.
오래동안 민가수집사업을 해온 리황훈선생은 숱한 민족문예유산자료들이 나이 어린 홍휘병들에 의해 재가루가 되는것을 보고 《내가 수집한것은 불태울수 없다!》며 민간예인들의 춤동작을 찍은 사진필름과 민가기보자료들을 땅속에 파묻었다. 그런데 그후 어느날, 미처 간수하지 못한 자료들이 검은손에 의해 불 속에 던져졌다. 《태우면 나를 태웠지 이것만은 못 태운다.》 비판투쟁을 받으면서도 그는 불더미속에 뛰어들어 그것들을 집어냈다. 한번은 이런 일까지 있었다. 맹인민간예인 한분을 만나 민가를 수집하였는데 밤중이 되니 그 맹인이 배가 고프다면서 개고기를 먹고싶다고 하였다고 한다. 한밤중에 어디에 가서 개고기를 사온단 말인가. 그 사람은 개고기를 사오지 않으면 노래를 안 부르겠다고 딱 잡아뗐다. 울지도 웃지도 못할 일이었다. 이황훈 선생님은 입씨름하다 못해 그 맹인한테 무릎을 끓고 사정하고 또 사정하였다.
《내일은 꼭 개고기에다 찰떡까지 사서 대접하겠으니 마저 불러주십시오.》 쇠로 만들어지지 않은 이상 그 누구라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랴. 맹인예인은 끝내 자기가 알고 있는 민가를 죄다 털어놓고 말았다. 기염만장(氣焰萬丈)해 달려드는 반란파앞에서 그처럼 도고했던 선생님이 어떻게 보면 남들한테 하잘것없이 보일수 있는 맹인가수앞에서 고스란히 머리를 수그리고 무릎을 끓는것까지 마다한 이유는 무엇일가?
유사한 일들은 너무나도 많다.
1978년 민가수집조의 리동구, 김봉관 두 선생님이 화룡현 숭선향 남석촌에 갔을 때의 일이다. 독보조에서 들으니 박남선로인이 민가를 잘 부른다고 하기에 찾아갔더니 미리 알고 슬그머니 하천에 있는 딸집으로 피신을 갔었다. 7 ~ 8리 되는 길을 걸어 로인을 찾아 상급의 문서들을 내놓으면서 찾아온 이유를 말하니 죽어도 민가는 안 부른다고 했다. 결국 수집조 사람들에 의해 설복되었는데 로인은 쌈지에서 담배종이를 꺼내놓으며 《내가 소리를 해도 죄가 없다고 여기에 쓰고 도장을 찍소.》라고 했다. 한심한 일 같지만 리해는 갔다. 이전에 민가를 많이 불렀다는 죄로 문화대혁명기간에 제재까지 당해 소리는 물론 술까지 끊고 조용히 살아간다는 로인이었기때문이다. 수집조사람들은 로인이 시키는대로 쓰고 민가집성판공실의 도장을 찍었다. 그날 로인은 《초한가》의 1절을 부르고 꺼억꺼억 울었다. 그토록 부르고싶은 내 민족 내 노래를 부른것이 죄가 되어 감시 당한 어제가 통분하고, 술대접까지 받으며 그 노래를 다시 통쾌하게 부르는 오늘이 눈물나도록 기뻣기때문이다. 정녕 민족이란 무엇이고 정통이란 또 무엇인데?
사실, 공화국창건 수십년간 수많은 사람들이 민간예술집성사업에 참가하여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수많은 농가의 문턱을 넘나들면서 수천명의 민간예인들을 만나 단절된 민간예술의 명맥을 이어놓고 사그러져가는 민간예술의 불씨를 되살리는데 기여를 하였다. 고심참담한 그 발자취를 어찌 한입으로 다 말할 수 있으랴?
우리는 함께 고인의 령전에 심심한 묵도를 드렸다. 아니, 저 세상으로 간 여러 민간예인들과 수십년간 민가수집사업을 해오다 쓰러진 이황훈, 김태감, 김승경, 김원창, 왕보림 등 선생님들께 오래오래 묵도를 드렸다.
《사회의 여러 지도자, 예술인 선생님들로부터 존경을 받은 아버지로 하여 저희들은 영광을 느낍니다...꼭 여러분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아버지의 묘지에 소나무도 떠다 옮기며 아버지 생전에 다하지 못한 효성을 하겠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장자 조영선씨의 비통한 회포를 자아내는 답사로 입비식은 막을 내렸다.
여러 선생님들이 고인의 령전에서 술과 안주를 들면서 고인의 제자 현춘월양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그런데 노래를 부르러 나섰던 그녀가 참았던 설움을 이때에야 터뜨릴 줄이야. 《선생님의 사랑이 잊혀지지 않는다.》며 그녀는 더 슬프게 흐느꼈다. 선생님은 일생을 참하고 근면하고 겸손하게 살았었다. 선생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가 그이를 생활이 소박하고 명예와 재물 앞에서 사리를 따지지 않는 분이라고 말했다.
끝내 현춘월양의 입에서 《장타령》이 흘러나왔다.
《종은 좌석에 / 춤도 춰야 놀 재미 있수다 / 니니니 닐니리리 / 닐리리 쿵 닐리리 닐리리 난 노나요…》
이윽고 여러 사람들의 요청에 의해 박수관 박사가 한곡 념겼다.
《어이야 불어라 / 불 불어주렴 / 슬근살짝 불어도 / 만대장이 나온다 / 삼수갑산풍구는 / 칠팔인이 불어도 / 구리무쇠 돌무쇠 / 쾅쾅 녹아서 나온다…》
봉고차는 오던 길을 되돌아 서서히 달렸다. 신록에 설레는 나무들이 언뜻언뜻 차창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러는 가운데 나는 방불히 고인의 묘지에서 기지개를 켜며 키돋움하는 아름드리 푸른 소나무를 보는것만 같았다. 나는 굳게 믿었다. 내가 가고있는 이 길이 잃어버렸던 금싸라기같이 귀중한 것들을 찾는 길이 되기를…
1996년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