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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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인생 예순이 한창 나이 댓글:  조회:2397  추천:0  2017-08-16
《어이구 아무것도 해 놓은 것 없이 어느덧 예순이 넘어 정년퇴직하였네요. 남은 인생 얼마 남지 않았는데 지금까지 헛살았다고 생각하니 참말 한탄스럽기 그지 없네요.》 얼마전 정년퇴직한 친구가 찾아와서 소주 한잔 하고나서 이렇게 하소연하면서 푸념질하는것이였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이제 한창나이인데. 아직도 숱한 일을 할수 있는데도 말이야.》 내가 핏잔을 주자 그는 반신반의하면서 그냥 비관어린 말만 하는것이였다.   인생 예순에 한창나이라? 혹자는 내가 미친소리한다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결코 결기에 한 말, 무심코 던진 한 마디가 아니다.   저명한 사회학전문가 김남도선생은 자기의 저서 《아프니깐 청춘이다》에서 《인생시계의 계산법》을 이렇게 제시하였다.   하루는 24시간으로서 1,440분에 해당된다. 우리 겨레들의 일반 수명을 80세라고 할 때 이것을 80으로 나누면 18분으로 된다. 1년에 18분씩 10년에 3시간이 가는것으로 계산하면 20세는 오전 6시, 60세는 저녘 6시이다. 이제 인생 100세시대를 맞이하는만큼 평균수명이 늘어나는데 따라서 당신의 인생시계도 그만큼 더 여유로워질것이다.   아래에 로철학자 김형식교수(96세)의 인생관련 소견을 들어 보기로 하자.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은 무엇일가? 나이가 드니깐 나 자신과 내 소유를 위하여 살던 것은 다 없어진다. 남을 위해 살았던것만 보람으로 남는다. 만약 인생을 되돌릴수 있다면 60세로 돌아가고 싶다. 젊은 날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우리들이 그 시기에는 생각이 얕았고 행복이 뭔지 몰랐으니깐.   65세에서 75세까지가 삶의 황금기였다는 것을 그 나이에야 알게 되였다는것이다. 인생 예순이 되니 생각이 깊어지고 행복이 무엇인지,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되였다. 나이가 들어서 알게된 행복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함께 고생하는것, 사랑이 있는 고생이 행복이라는것이다.   맑은 정신상태로는 가본적이 없는 경지, 육신의 나이가 96세에 나는 거의 100세에 다달으는 그 석학이 60대, 70대에 이르는 젊은이(?)들에게 하는 이야기이다. 살아 보니, 지나고 보니 인생의 가장 절정기는 철없던 청년시기가 아니라 인생의 매운 맛, 쓴 맛 다 보고 무엇이 참으로 좋고 소중한지를 진정 음미할수 있는 시기, 60대중반에서 70대중반이 100세시대 인생에서의 절정기라는것이다.   이제 아래에 다른 각도에서 살펴 보기로 하자.   우리들의 인생 100세시대라고 한다면 20년이 5개뿐이다. 첫 20년은 공부하면서 재질을 키우는 시기이다. 다음 20년은 사업에 몰두하는 시기이다. 세번째 20년은 인생에서 가장 분망하고 번거로운 시기로서 회사와 가정을 챙겨야 한다. 집에서 위로는 로인들을 챙기고 아래로는 애들의 성장에 뇌즙을 짜야 한다. 이처럼 들볶고 나면 어느덧 정년퇴직할 때라 그 다음 네번째의 20년이야 말로 나의것이라는것이다. 이때에야 비로서 시름을 놓고 즐길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진정으로 그 나머지 20년도 즐기자면 반드시 3대요소가 구비되여야 할것이다. 곧바로 금전, 시간 그리고 건강이다. 하기에 첫 20년에는 돈이 든다면 제2, 제3의 20년에는 모자라는 것이 시간과 정력이다. 그리고 제5번쩨 20년에는 건강이 문제이다. 여든이 넘은후에도 제정신에 건강장수하면서 100세까지 산다는 것은 지극히 드문것이다. 하기에 유독 제4번째 20년이야 말로 3대요소가 구비되여 인생을 즐길수 있는 최적기인것이다. 그것도 극상해야 20년이다. 그 즐거움도 순식간이면 지나간다.   실상 우리 주변에도 정년퇴직한후 인생의 후반부에 평생 하고 싶었던 사업, 배우고 싶었던 공부,  가 보고 싶었던 명산 고적들을 유람도 하면서 인생을 느긋하게 즐기는 본보기들이 적지 않다. 유람, 관광도 걸어다닐수 있을 때이지 걷지도 못할때는 눈만 펀히 뜨고 아무리 여건이 좋아도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8.15로인의 날을 맞이하면서 충고하고 싶다. 나이가 들수록 《단순하게 사는 것이 더 편안하다》, 《마음을 비우면 나이가 들수록 더 행복해 진다》 이어서 《베자민 버튼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라는 영화의 명대사 한 마디도 선사한다. 《인생에 너무 늦었거나 혹은 너무 이른 나이는 없다.》 연변일보 2017-8-16
65    류두축제 좋을시구!!! 댓글:  조회:1960  추천:0  2017-07-24
“‘2017중국녕안류두문화축제’를 어김없이 8월 6일에 거행하게 됩니다. 특히 경사스러운 것은 류두축제가 국가문화부에서 선정한 올해 국가급중점축제의 하나로 선정된 것입니다. 이번 포럼에 참가하신 분들이 왕림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난 7월 9일 북경 중앙민족대학에서 펼쳐진 ‘2017년 중국조선족사학회 학술세미나’에 참가한 녕안시 원 상무부시장, 현임 시인대상무위원회 주임 김경진과 녕안류두문화축제 예술총감 김아인 교수가 정중하게 요청하는 말이다. 류두축제의 주무대인 녕안시 발해진 강서촌에는 재래로 전해온 류두풍습이 오늘까지 이어져 내려와 또 하나의 전통문화로 거듭나고 있다. 류두란 동류두목욕(東流頭沐浴)이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한다. 해마다 음력 6월 15일이면 온 마을 사람들이 남녀로소 할 것 없이 마을의 맑은 개울에서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한단다. 그뒤 류두음식을 먹으면서 여름에 더위를 타지 않고 나쁜 일도 생기지 않기를 기원한다고 한다. 고대조선 농경시대에 동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고 조상과 농신(农神)을 향해 제를 지냄으로서 귀신을 쫓고 건강과 풍년을 기원하는 뜻에서 발원되였다는 설도 있다. ‘흑룡강성문명촌’, ‘성급새농촌건설시범촌’으로 명명된 강서촌 촌민위원회가 주관하고 녕안시문체국, 녕안시조선족문화관, 발해진정부가 주최하는 류두축제는 2005년 음력 6월 15일에 제1회로 개최되였는데 류두축제를 통해 우리민족의 우수한 전통문화를 계승발전하고 민족화합과 민족사회경제발전을 도모한다는 것을 기본취지로 하였다. 그때로부터 해마다 줄곧 이어오면서 류두축제는 점차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우리 민족 전통민속문화행사로 자리매김하였다. 류두절행사는 일반적으로 국기게양식을 시작으로 개막식, 뒤이어 농신(农神)제, 류두연(流头宴), 류두의식(流头仪式)을 거행하고 의 대형가무표현이 이어진다. 이어 축구, 배구, 물동이 이고 달리기, 남녀이어달리기 등 다양한 문체활동으로 류두절의 분위기를 뜨겁게 달군다. 녕안시는 최근년간 독특한 산수자원과 생태환경, 특색산업, 문화민속 등 우세를 리용하여 류두축제와 농업관광, 향촌관광, 등 현대서비스업을 접목시켜 녕안시의 주요산업으로 일떠세우고 있다. 료해에 따르면 류두축제를 잘 조직하고 개최하여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고 민족단결과 지역홍보 등 면에서 괄목 할만한 성과를 올리면서 이 행사가 2007년에는 성급무형문화재로 등재되였고 녕안시는 ‘전국문화선진현’, ‘중국민간문화예술의 고향’으로 명명되기도 하였다. 녕안시당위 서기 정붕은 "녕안시는 유구한 력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 땅에서 생활하고있는 조선족주민들은 자신의 독특한 문화를 계승, 발양하고 대대손손 잘 지키고있는 민족이기에 다민족의 존경을 받고 있다."고 높이 평가한다. 그러면서 "앞으로 녕안에서는 류두문화축제를 잘 키워 목단강지역은 물론 더 나아가서 흑룡강성의 당당한 문화브랜드로 부상시킬 것"이라고 표시하면서 해마다 국내외의 더욱 많은 귀빈들이 축제를 찾아줄 것을 매체를 통하여 요청하였다. 류두축제가 시사해 주는 의미는 자못 중대하다. 류두축제를 비릇하여 중화의 광활한 신주대지에서 성공적으로 펼쳐지고 드팀없이 이어지고 있는 우리 민족의 수많은 민속문화축제들을 살펴 보면 자못 흥미로운 공성이 있다. 곧바로 강력한 리더가 있고 그 주위에 일심으로 해당축제를 추진하는 핵심그룹이 형성되여 있는 것이다. “자고로 강한 장수의 수하에는 약한 병사가 없다”고 하였다. 녕안류두축제의 경우를 봐도 그러하다. 김경진 주임을 핵심으로 그를 따르는 30여명의 똘똘 뭉친 그룹이 형성되여 있다. 이들은 그 어떤 보수도 명예도 리익도 추구하지 않고 오로지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를 고양하고 발전시키는데 일심하고 있다. 이들은 경상적으로 시민들과 소통하면서 자기들의 새로운 아이디어와 주장이 시민들의 자각적인 행동으로 이어지여 결실을 맺게 추진하고 있다. 타방으로 권위적인 전문가를 주축으로 한 전문인그룹으로 모든 과정을 통솔하는 것도 지극히 절실하다. 시정부는 국내외에 전문가, 인재들을 널리 구하였다. 특히 해내외에 널리 알려지고 크낙한 성공을 이룩한 중국두만강문화관광축제의 문화예술총감 김아인교수를 녕안시의 문화고문, 문화예술총감으로 영입한 것이다. 김아인 총감은 첫 과업으로 시정부의 지지하에 GK창의문화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이 연구소는 녕안의 실제에 알맞은 민속문화정책을 제안하고 문화콘텐츠를 기흭하고 그것을 산업화하고 실행하는데 수요되는 인재들을 영입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학자 전문가그룹은 당면은 물론이고 향후에도 기존사업을 지속적으로 이어갈수 있기에 녕안류두문화축제가 새로운 차원에로 승화될 수 있었다. 녕안류두문화축제만이 아니다. 연변지역의 두만강문화관광축제, 개산툰어곡전농부절축제, 연변진달래문화축제 등 연변지역의 축제는 물론이고 산재지역에서의 심양조선족민속문화축제, 대련조선족민속문화축제, 할빈겨레얼청소년전통문화축제, 주성조선족초복축제 등 수많은 축제들이 대를 이어 새롭게 펼쳐지면서 앞날이 더더욱 휘황찬란할 것은 의심할바 없다. 그래서 더욱 고무적이다. 길림신문 2017-7-23
64    1인 기업의 매력 댓글:  조회:1987  추천:0  2017-07-19
일전에 미국 뉴욕=연합뉴스에 따르면 미국에서 '1인 기업'이 뜨고 있다고 한다. 이런 1인기업이 지난 10간에 17%늘어났다는것이다. 사장이 직원을 전혀 고용하지 않고 '나홀로' 제조,경영을 도맡는 회사가 2004년부터 10년 사이 대폭 증가해 2014년에 35만 개를 넘었다고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보도했다.   뉴욕의 마고트 리스(54)는 20년 간 공중보건 분야에서 일한 경력이 있었지만 오랜 전업주부 생활 때문에 재취업에 실패하자 1인 기업을 창업했다. 평소 음식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키친 36'이라는 기업을 차리고 외부의 부엌 공간을 빌려 이틀에 한 번씩 수프를 만든 후 스스로 포장,냉동해 동네 시장인 '파머스마켓'에 납품하고 있다."작게 시작해서 성공했다"고 말한 그녀는 사업이 번창해 최근 직원을 고용하며 1인 기업에서 탈출했다. WSJ은 큰 경비가 들지 않기 때문에 오래 버틸 수 있다는 게 이런 기업의 최대 장점으로 꼽히고 있다고 전했다.   1인기업을 지향하고 성공가도를 이루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나만의 창업의 경로를 찾고 나만의 독특한 제품과 경영방식을 선택해야 할것이다. 나만의 개성과 특점만이 치렬한 경쟁가운데서 경쟁적수를 물리치고 자리매김할수 있다.   의 창업주 장청옥의 창업사도 이와 엇비슷하다. 화룡시 팔가자진 중남촌, 맛좋은 전통옹기된장에 창업의 꿈을 묻고 열심히 분투중인 주인공, 바로 화룡시흥농콩재배전업합작사의 사장 장청옥(45세)씨이다. 이제 그의 작업현장을 보기로 하자. 널직한  농가집마당이 말그대로 하나의 커다란 장독대가 되여있었다. 올 겨울들어 내린 하얀 첫눈을 뒤집어 쓰고 근 500개나 되는 크고작은 옹기들마다 재래식 방법으로 구수한 장맛을 익혀내고있는 모습은 진정 가관이였다.   《18살에 떠났던 고향마을을 마흔살이 돼서 돌아왔습니다.》18살 젊은 나이에 고향을 떠날때는 모두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떠났겠지만 마흔살이 넘어서 고향에 되돌아왔던것은 언제 어디서나 잊지못할 태줄묻은 고향마을에 대한 끊을수없는 미련때문이였다. 그리고 외지에서 이루지 못한 독자창업의 길을 걸어 보려는 리상에서 비릇되였다.   《고향에 돌아와보니 원래는 60세대도 넘어되던 익숙한 얼굴들이 모두 다 떠나가고 겨우 6~7세대밖에 남지 않았더군요, 모두 로인들뿐이였죠...농촌의 집들이며 밭들도 모두 타민족 농민들에게 넘어갔구요...》 순박한 농촌농민의 딸이였던 정청옥씨는 황페화되여가고있는 고향마을이 안타까웠고 결국 사라져가는 고향마을에서 새로운 창업을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귀향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장청옥씨는 농촌에서 할수있는 창업을 고민하던중 혼자서 독자창업을 할수 있는 조선족 전통민족음식인 된장생산에 눈길을 돌렸다. 된장에 필요한 원재료인 콩도 쉽게 구할수있고 발효식품인 된장 역시 상품이 적치돼 상할가봐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청옥씨는 또 장을 맛있게 담그기로 소문난 할머니손맛을 느끼면서 자랐던 까닭에 맛좋은 전통된장에 관심이 많았다. 지난 2010년 10월, 《갓 마흔에 첫 버선》이라더니 장청옥씨는 40대의 문턱에 올라서면서 고향마을인 중남촌에 돌아와 전통된장생산을 시작했다.이와 함께 전통된장임을 강조하는 의미를 담은 《옹기된장》이라는 토속적인 상표도 함께 신청,허가받았다. 그리고 생산원자재구입, 된장생산, 예약과 판매를 일체화한 독자경영기업을 창설하였다.   전통을 내세운 옹기된장의 질과 맛때문에 장청옥씨가 만들어낸 장류식품들은 빠른 시간내에 팔가자와 서성, 투도, 룡수 등 부근 향진들에서 소문을 놓기 시작하더니 불과 2년도 안되는 사이에 화룡, 룡정, 연길 등 기타 주내 여러 현시들에까지 급속도로 퍼져나가면서 환영받는 전통옹기된장으로 소비자들의 각광을 받고있다.   1인기업에서 성공한 업주들은 대부분 개인창업의 스타들로서 저마다 나름대로의 창업사를 가지고있다. 저마다 한 부의 읽을 만한 장편소설이라고 할수있는것이다.지난 제11회 중국연길·두만강지역국제투자무역박람회 행사장인 연길국제회의전시쎈터에는 430여개의 부스가 설치돼 연변주를 비롯해 해내외기업의 특색식품류, 농축산물, 의약보건제품, 공예품, 의류, 장신구 등이 전시되였다. 여기에 전신한 대부분 기업들이 바로 1인기업 혹은 소규모적인 귀향창업개인기업들인것이다.   "작게 시작해서 크게 성공한다" 정말 귀맛 당기는 창업격언이다. 오늘날 치렬한 시장경제의 격랑속에서 무턱대고 크게 하고 거창하게 하고 규모를 이루기보다 소형적이고 경비가 들지 않고 오래 버틸수 있고 쉽게 경영방향을 조정할수 있는 것이 최대장점인 1인기업, 소형개체기업들의 창업전형사례가 귀향창업하고 개인사업을 펼치려는 이들에게 훌륭한 귀감이 될것이라 믿어마지 않는다. 연변일보 2017-7-19
63    상부상조 우리 민족의 전통 미덕 댓글:  조회:1977  추천:0  2017-06-22
상부상조하면 혹자는 이 단어가 최근년간에 특별히 성행하니깐 근대나 현대의 사회산물인가 하고 오해할수도 있다. 실상 상부상조는 우리 민족의 전통미덕으로서 모종의 의미에서 말하면 민족의 산생과 군체의 형성, 발전, 부흥의 전 력사적과정에 시종일관 제창하고 고양한 전통미덕이 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말 속담에 이라는 말이 있다. 력래로 우리 민족은 동네에서 이웃과 친척보다 더 절친하게 지내온 것은 사실이다. 그 원인은 바로 줄곧 친척 못하지 않게 상부상조하면서 동고동락한데 있을것이다. 지난날 우리 동네에는 명문화하지는 않았지만 조상때부터 전해내려 온 비슷한것이 있었다. 그것을 보면 이웃과 마을간에 화목할것을 권장하고, 일이 있으면 자기일처럼 돕고 좋은 음식이 있으면 절대 혼자 먹지 않고 그릇에 담아서 이웃에 돌리는 것이 였다. 서로 다투는것도 엄격하게 금하였다. 그 밖에도 주민들이 지켜야 할 여러 가지 약속사항이  있었는데 이를 위반할 경우 책벌까지 정해놓았다. 그중에서 가장 중한 책벌의 하나가 바로 불통화수(不通火水)였다. 당시의 미풍량속인 불씨 나눔과 한우물을 길어먹는 유무상통을 단절시킴으로써 이른바 마을에서 왕따를 시킨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웃과의 단절은 곧 죄악이며 형벌을 뜻하는 것임을 알수 있다. 설 명절이나 련휴일을 맞으면서 고향을 찾은 분들이 많아지는데 저마다 친구나 친척 그리고 피붙이를 만나 얼싸안고 반가움을 나누었을거고 마음속에 옛정 키워온 다정했던 이웃들과도 만나서 회포를 풀었으리라 믿는다. 이제 상부상조의 주요한 표현형태의 하나인 계(契)를 그 일례로 들어 보기로 하자. 사람들은 계하면 흔히 자금의 호조관계를 말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것만은 아니다. 우리 나라 절강대학 한국연구소에서 교편을 잡고있는 력사학, 문화인류학교수 안성호선생에 따르면 흔히 한국에서 전하여온 작금의 호조관계를 말하는 경우가 많다. 실상 계(契)는 우리 민족마을공동체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었다. 계는 조선반도에서 오래동안 전하여온 애니미즘(신령숭배)를 기초로 하는 상호지원시스템으로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있는 단순한 서로간의 자금지원형식이 아니다. 마을주민들이 상호부조, 친목, 통합, 공동리익 등 부동한 수요에 따라 구성하는 민간협동체였다. 우리 민족은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로의 이주초기에 조선족사회에는 농무계 등 다양한 계조직들이 존재했다. 례컨대 상여계는 특정된 장례를 위한 상부상조조직이지만 가풍을 다스리고, 문풍을 단정히 하고, 민족의 우량한 전통을 대대로 전승하는 역할을 하고있다. 집집마다 참여하고 마을에서 위망이 높은분이 도감을 맡으며 상여를 통한 마을주민들의 상부상조와 해마다 한번씩 모이는 계원들의 모임을 통하여 마을주민들의 응집력을 강화할수 있었다. 현재 상여계의 전통을 안도현 이도백하진 내두산촌에서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10월 23일까지 이틀간 중국조선족상여문화협회(사이버두레모임)가 주최하고 연변주 안도현 이도백하진 내두산촌에서 후원한 “제1회 중국조선족상여문화축제”가 장백산아래 첫동네로 불리우는 내두산촌에서 펼쳐졌었다. 중국조선족상여문화협회 회장 김춘택씨는 상여문화제를 개최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 중국경내에서는 소실되다싶이 하였지만 장백산원시림속에 자리잡은 내두산촌에는 아직도 토장문화가 시행되고 상두막(곳집)은 물론 촌에 상여계가 존재하기에 조선족전통상여문화를 보여줄수 있는 이곳에서 개최하게 되였으며 이주민으로서의 중국조선족 전통장례문화를 발굴, 보존하고 그에서 발산하는 효문화와 민족전통례의를 널리 알리고 세세대대 전해가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내두산촌에서는 이처럼 해마다 향도(상여계의 별칭)기념일에 총회를 조직하여 한해의 행사를 총화짓고 다음해 계획에 대하여 의논한다. 일년간 행사에서 계원들의 구체적의무 수행에 대한 장려와 징계처분이 이루어진다. 이날 마을사람들은 누구도 외출하여서는 안되며 외출하게 되면 벌금을 내야 한다. 한해는 촌장이 향토기념일에 공무로 이도백하진에 가게 되였지만 리유는 어떠했든지 외출한것은 사실이였기에 마찬가지로 어김없이 벌금을 내였다고 한다. 그만큼 상여계가 마을에서 권위성을 가지고있고 마을 성원들 사이의 상호 관계를 유지시키고 련대를 강화함에 있어서 커다란 역할을 하고있음을 설명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내두산촌로인협회의 경우, 이 협회는 화투치기, 단체무, 마을청결 등 활동들을 조직하고있는바 마을공동체내에서의 두 조직의 위상을 엿볼수 있다. 내두산촌처럼 중화의 신주대지에 사는 우리 민족이 집거지마다에서 형식이야 어떠하던지간에 상부상조하는 민족전통이 날이 갈수록 더더욱 고양되고 발양되였으면 하는 마음에서 오늘 화제로 올렸다. 연변일보 2017-6-21
62    당신은 조숙한 열매를 따고있는 것이 아닐가? 댓글:  조회:2109  추천:1  2017-05-25
오라지 않아 다가오는  6.1국제아동절을 맞으면서 아무리 일상이 다망하더라도 이 한 달만은 자라나는 어린아이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배려를 돌려야 하지 않을가? 우리 민족의 젊은 세대의 가정을 살펴 보면 거의 매일이다싶이 아침이면 이런 이 벌어진다. 하고 련휴일을 맞아 어린 자식이 사정사정한다. 하지만 나젊은 엄마는 매정하게 오늘도 아침일찍 아이를 과외에로 내몰았다. 그 리유는 당당하였다. 오늘의 고생은 모두 그 애들의 래일의 참행복을 위해서란다. 오늘 하루 더 고생하면 래일이 더 보장이 있는거란다. 자식은 문을 박차고 나가며 잔뜩 불만이다. 쾅-문닫기는 소리와 함께 엄마의 입에서도 한탄이 저도 모르게 흘러나다. 련휴일이라 필경 쉬는 날인건만 휴식일이라도 늦잠 한번 잘수 없는 불쌍한 내 새끼, 학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소학교에 들어가서도  휴식일 한번 제대로 놀아보지 못했던것 같다. 영어과외, 수학과외다 거기에 또 피아노를 배우고 그림그리기를 배우고... 멀고 먼 미래의 성공을 위해 아들애는 팽이처럼 돌아쳐야 했다. 어느덧 소학교 6학년, 그의 동년도 다 가고 있는것이다. 지금와서 우리들의 동년을 뒤돌아보면 지금 애들에 비해 먹을거리나 입을거리는 비할수도 없었다. 장난감들도 초라하기 그지없었지만 고무줄넘기, 공기놀이 그리고 전쟁놀이다, 숨박꼭질이다, 반두질이다  아무 곳에서나 마음껏 뛰놀수 있었다.  함께 놀아준 친구들이 있었기에 더없이 즐거웠던것이다. 필경 우리들의 동년은 구차하였지만 그래도 이런저런 부담이 없이 즐겁고 자유로웠다. 이처럼 우리 동년을 떠올려봐도 사실 공부보다도 놀음이 더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는데 오늘날의 애들은 그렇지 못하다. 이 애들의 동년은 배우고 또 배우는것외 무엇이 더 기억이 남을가? 부모로서 애들에게서 동년의 즐거움을 빼앗아가는 것이 가슴이 아프기도 하다. 하지만 또 어떡하랴? 다른 애들은 이것저것 다 배우는데 우리애만 놀게 할 수는 없잖는가? 그러다가 나중에 커서 아무것도 할수 없을 때 결국엔 부모만 원망하지 않겠는가? 옛날 우리부모들은 조건이 안돼서 자식한테 신경을 못썼다면 지금은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키우면서 남에게 뒤질수는 없는거잖는가? 그렇다면 이런 부모들의 지나친 을 받으며 우리 애들은 구경 얼마나 행복할가? 하는 것은 부모들이 항상 입에 달고 있는 말이다. 하지만 진정 오늘날 동년의 행복을 희생했어도 이 애들의 미래에 행복이 보장되는걸가?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자식을 룡으로 키우고 다른 집 자식들보다 더 잘 키우려는 부모님들의 치렬한 경쟁의식속에서 애들은 너무 이르게 부모들이 정한 성공모식의 틀에 매여 성장하게 된다.  댓 살이 되기전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고대 당시, 송시를 외우고 외국어를 배우고 소학교에 입학하면 글짓기다 올림픽수학이다 바삐 돌아쳐야 한다. “발묘조장(拔苗助长)”이란 성구가 있다. 한 어리석은 농부가 자기 집의 밭 곡식이 이웃집것보다 못한것을 보다 못해 빨리 자라라고 한포기 한포기 잡아당겨놓았는데 결국 모두 말라죽고말았다고 한다. 우리에게 맹목적이고 어리석은 조기교육이 되려 아이를 망치게 한다고 타이르는 옳바른 가르침이라고 생각된다. 저명한 아동교육학자 변기원박사는 그의 저서 《두뇌야 놀자》에서 “아이의 두뇌와 마음은 단계적으로 성장한다”고 지적하면서 “그래서 시기에 맞춰 순차적으로 발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력설하고있다. 신체의 변화는 목을 들고 몸을 뒤집고 서고 걷는 등 눈에 확연히 보인다. 하지만 두뇌의 변화는 눈에 보이지 않기때문에 단계적으로 발달하고있는지 확인하기가 어렵기에 아이의 변화를 정확히 관찰하는것이 필수적이다. 옆집 아이에 비해 말을 빨리 배우는것에 기뻐할것이 아니라 아이의 발달단계가 말할줄 아는가 하는것을 확인하는것이 중요하다는것이다. 우리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와 주변의 또래 아이를 비교하기를 즐긴다. 그래서 자기 아이가 또래 아이들보다 말을 늦게 하거나 표현력이 못하다면 걱정이 커지고 마음이 조급해 단순하게 그것만 치료한다. 혹은 다른 애들보다 더 훌륭하게 키우려는 욕심에서 조기교육에 몰입하면서 아이들의 발달단계를 무시하고 요구를 높인다. 이런 조급성은 절대 금물이다. “아이는 아이로 보아야 한다. 대자연은 아동이 성인으로 되기전에 아동다울것을 요구한다. 만약 우리가 이 순서를 혼란시킨다면 너무 조숙한 열매를 따게 될것이다.” 프랑스의 걸출한 계몽사상가, 교육가 루쏘가 부모들에게 한 경고이다. 활발하고 단순하고 구속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행동하는것이 바로 아이들의 천성이다. 하기에 부모들은 맹목적인 조기교육으로 아이를 급히 성숙시키려 하면서 채 익지 않은 과일을 너무 일찍 따려고 덤빌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점차적으로 건실하게 키우는데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할것이다.  두뇌발달단계를 무시하고 아이들의 상태를 감안하지 않고 어른들의 욕심으로 어른들의 방식에 따라 진행하는 조기교육, 맹목교육은 아이의 발달장애를 일으키게 된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교육의 중심에는 부모의 기대가 아니라 아이다운 아이가 있어야 하는것이다. 한창 자라나는 후대들에게 진정 행복한 동년을 선물하자면 우리 부모들부터 어떤 자세가 필요할가? 역시 심사숙고가 절실한 시점이다. 연변일보 2017-5-24
61    물부족, 남의 일 아니다 댓글:  조회:2010  추천:0  2017-04-13
얼마전 을 맞으면서 지구촌의 곳곳마다에서 경축행사가 다채롭고 성대하게 펼쳐졌다. 유엔이 1992년에  을 제정하면서 이어진것이다. 올해는 25회를 맞으면서 물 부족과 수질오염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물의 소중함을 되새기기 위해 주제를 "하수의 재발견, 그리고 지속가능한 발전"으로 정하였다.  가정, 공장, 농업현장 등에서 한 번 사용한 물을 다시 자원화해 재사용하고 깨끗한 물을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나라들도 다시 한 번 되돌아 보자는데 그 의미를 담고 있다.   영화 로 잘 알려진 고(故) 리태석씨의 감동적인 삶과 업적이 내년부터 불볕더위의 땅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학교의 교과서에 실린다고 한다. 남수단의 슈바이처, 톤즈의 성자 등 다양한 애칭으로 불리고 있는 리태석씨는 내전으로 폐허가 된 아프리카의 작은 마을 톤즈에 의료시설과 학교 설립, 우물 등을 통해 기적을 선물한 분이다. 4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는 말기암 선고를 받고 사망직전까지도  “톤즈에서 우물 파다 왔어요. 마저 다 해야 하는데…”라고 걱정을 했다고 한다.   리태석씨의 걱정처럼 현재 지구촌에서 물이 가장 부족한 곳은 아프리카 대륙이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는 전 세계에 심각한 물 부족 현상이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유니세프가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기후변화로 인해 전 세계 아이들 4명 중 1명은 ‘물 없는 세상’에 살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 그리고 2040년에는 전 세계 아이들 600만명이 극심한 물부족에 시달릴 것으로 전망됐다.   앤서니 레이크 유니세프 총재는 얼마전 기자회견에서 “만일 지금 당장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이런 위기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며 “안전한 물을 취할 수 없는 세계 수백 만명의 아이들이 삶과 건강, 미래를 위협받고 있다”고 경고했다.   보고서는 전 세계 36개국이 현재 극심한 물 부족에 시달리고 있으며 세계 인구의 3분의 2 가량은 매년 1개월정도 물 부족을 경험하고 있다고 전했다. 전 세계적 물 부족 현상의 원인은 지구 온난화, 해수면 상승, 홍수와 가뭄, 빙하 붕괴 등 지구 순환 시스템이 망가졌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여기에 인구증가, 산업화와 도시화 등으로 물 자원의 황페화 등도 포함됐다.   지난 세기 50년대에만 해도 물 공급이 적거나 극히 적어 사회적인 문제로 인기된 지역이 지구촌에 극히 드물었다. 1950년에 세계인구는 25억명이였으나 2013년에는 71억명으로 늘어 물 수요량이 5배나 급증했고 또 기후에 따른 강수량 변화도 물 수요의 폭발적인 증가의 빌미로 분석되고있다. 그외 각종 페기액의 방출로 지하수의 오염도 많은 문제를 야기했고 또 공장에서 생산되는 물품들은 모두 엄청난 량의 물을 사용하고있다. 1톤의 철을 생산하는데는 280톤가량의 물이 필요하고 1킬로그람의 종이를 생산하는데 물이 최대 700킬로그람 정도 있어야 한다는 통계가 나와있다. 사회가 발전, 진화하면서 물의 수요는 수없이 늘었지만 공급은 상대적으로 따라가지 못해 물 부족은 이미 인류사회의 미룰수 없는 과제로 남아있다. 그래서 오늘날 지구촌에서는 는 국제문제전략가들의 예언도 무리는 아닌가 보다.   ,중국의 대도시들에서도 이런 공지가 나온지가 20여년이 된다. 우리 나라에서 라는, 저 멀리 장강의 물을 끌어 황하를 넘어서 북경에 수송하는 력사적인 거대한 공정을 벌린것도 이미 수십년전의 일이다.   당시 우리 연변에서는 아득히 먼 고장이거나 아득히 먼 장래의 일인가고 여기였었다. 헌데 벌써 10여년전부터 연변지역에서도 물문제가 당면한  민생현안으로 급부상하고있다. 자치주수부도시 연길의 경우30년전까지만 하여도 공원가 우장거리, 원 연길빈관자리에 있던 자그마한 수원지 하나로 해결되였는데 그후 팔도에 오도저수지를 앉히고 10여년후 석인구에 연집저수지를 수건하였는데도 또 다시 급수난이 눈앞에 닥치는 민생현안으로 대두하고있는것이다.   요즘도 연변 지역에서는 물이 모자라는 상황이 종종 나타나고있다.  연길시의 경우 금년에도 강수량이 지속적으로 감소되고 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연길시의 식수수원지인 오도저수지와 연하저수지 상류구역의 저수량도 락관할수 없는 상황이다. 물을 물처럼 쓰던 지난 시기처럼 흥자만자할정도로 물을 공급할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지난 몇 년간에도 시민들은 물공급제를 하면서 갑작스레 물이 부족할 때면  물을 큰 대야에 담아둬야 하고 물을 아끼라고 집집마다 야단이다. 불편의 련속이 이어지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수도물로 세차하고 공중목욕탕에서 샤와 끝난 뒤에도 수도꼭지를 닫지 않는 등 물을 랑비하는 현상이 적지 않다.   우리들은 갈수록 물이 부족한 대환경속에서 살고있다.  우리의 후손들이 물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우리는 지금부터라고 더는 미루지 말고 평소에 수도꼭지가 잘 잠겨 있는지 새는 곳은 없는지 한 번 더 살펴봐야 할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물을 아껴 쓰고 물의 랑비를 막는 그런 사소하지만 지극히 필수적인  실천을 생활화하고 습관화해야하는 시점이다.  일상에서 물을 아껴쓰는 노력이 절실하며 그런 풍토를 만들어가는것이 바람직하다. 연변일보 2917-4-12
60    물림옷 댓글:  조회:3709  추천:1  2017-03-06
직장에서 녀성동료들이 주고받는 이야기에 깊은 감명을 받은적이 있다. 특히 집 아이한테 물림옷을 입히는 문제를 두고 말하던 한 후배의 이야기가 퍽 인상적이였다.   그녀가 잘 나가던 남편의 회사가 불경기를 겪으면서 사업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겪을 때였다. 줄곧 돈 걱정을 모르던 그녀는 오누이 둘을 키우면서 빠듯한 살림을 꾸려나가야 했다. 그런데 그녀의 집안 먼 친척중에 한 언니가 있었는데 바로 그 집의 딸애가 그 녀의 딸보다 세 살 더 위였다. 어느날 그 언니가 이쁜 옷 몇벌을 들고 그 녀앞에 나타났다.   “집의 딸애가 입던 옷인데  1년도 채 못입었으니 너네애가 이쁘게 입을수 있을것 같다”며 그 녀앞에 조심스레 내놓더라는 것이였다. 그렇잖아도 한창 계절이 바뀔때라 애들의 옷도 장만해야 할텐데 걱정하고있었는데 그 녀에게는 가물에 단비였다. 그녀는 친척 언니한테서 반갑게 옷을 받았다.그뒤로 그 친척언니는 딸애가 입다가 작아진 옷들을 잘 보관했다가는  깨끗이 씻어서는 그 녀에게 갖다주었다. 그냥 입던 옷만 건네주는것이 미안하다며 가끔 옷보따리속에 별로 비싼건 아니지만 새 옷도 한벌씩 넣어서 보내오군 했단다…   그렇게 그녀는 거의 2년간 언니 딸애의 옷을 받아 딸애에게 물려입히면서 제일 힘든 고비를 넘겼다. 그뒤 남편의 회사가 생기를 되찾고 그 녀네도 살림이 펴이기 시작했단다. 어느 한번 친척들 모임에서 친척언니가 또 딸애의 옷보따리를 들고 왔더란다. 사람 마음이란 참 뒤간에 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더니 그때는 그 옷보따리가 반갑지 않더란다. 그래도 내색하지 않고 앉아있는데 남편이 글쎄 한참후 술이 거나해지자 큰 소리를 해댈줄이야, “아주머니, 이젠 우리도 남의 옷을 물려받아 입을 신세가 아닙니다. 그깟거 이젠 들고 다니지 마십시오.”   사실 2년동안 그 언니에게서 딸애 옷을 받아입히면서 그 녀 역시 따뜻한 인사 제대로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녀의 남편한테서 감사는커녕 이런 싫은 소리까지 듣게 됐으니 언니 마음이 오죽했겠는가? 그때로부터 친척언니는 그들과 거리를 멀리 했고 그녀도 언니 볼 면목이 없어 몇 번이고 언니에게 사과하려고 하다가도 말이 떨어지지 않아 랭가슴만 앓는다는것이였다.   우리는 종종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감사한 마음보다는 쉽게 불평불만을 부리고 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선의나 친절속에 살지만 스스로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것이다. 앞의 녀성분의 친척언니는 2년동안이나 작은 도움을 베풀면서 감사하다는 인사는 한마디 못듣고 싫은 소리를 들었으니 얼마나 서운하였겠는가!   “물림옷문제”는 주로 관념문제이고 인식문제라고 본다. 다시 말하면 “물림옷”을 어떤 시각에서 어떤 태도로 대하느냐에 따라서 다르다고 본다. 지난 세기 50년대, 60년대는 그런 물림옷도 일종 향수였다. 당시 우리 동네에 한 친구는 연길에서 직장 다니는 사촌형님이 있었는데 방학만 되면 연길에 갔다가 오면 옷이랑 신이랑 모자랑 새것을, 그것도 보지도 못하던것을 가지고 와서는 자랑하였다. 그 친구가 하는 말이“야, 이건 우리 연길형님이 입던거다.” “야, 이건 말이야, 우리 연길형님이 쓰던거다.  이건 연길형님이 신던거구”하면서 우리 앞에서 실컷 자랑하였었다. 그때 우리가 그 친구의 “연길형님”을 얼마나 부러워 하였던지. 그리고 그 애의 옷이랑, 신이랑, 모자랑 정말 얼마나 갖고싶었던지 모른다.   예전부터 우리는 동네나 집안에서 일반적으로 잘 나가는 친척이나 집안이 번창한 이웃의 집에 가서 옷이나 기타 생활필수품들을 우정 가져다가 자기자식들에게 입히는 경우가 종종 있다.그 잘가나는 집 애들처럼 되라는 거다. 하다못해 그 체취라도 받아서 우리 애들도 남 못지 않게 건실하게 당당하게 자라나 달라는 그런 심리였을것이다. 우리 집 아들애나 딸애도 미국이나 한국이나 일본에서 친구들이 가져 온 “물림옷”을 많이 입었었다. 지난 세기 90년대 그 애들이 어릴 때는 물론이고 조금 커서 새 천년에 들어서서도  말이다.   필자는 “물림옷” 현상은 실상 기부문화의 한 일례라고 본다. 물질기부인것이다. 자기에게 있는 것, 쓰지 않는 것을 필요로하는 이웃이나 친척이나 직장동료 등에 선사하는것이니 말이다.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기부문화가 많은 사람들속에서 자리를 굳혀가고 있다. 그와중에도 가끔 안타까운 사연들을 접하게 된다. 어려울 때 주위 사람들의 사랑의 손길을 받고도 감사의 마음을 제대로 표달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더욱이는 도움을 주는 쪽에서 그 어떤 사정으로 더는 따뜻한 손길을 내밀수 없을 때 되려 도움받는 쪽에서 목소리가 높아진다든가 하는 사례들도 목격되면서 말이다.   내가 못 살때는 혹 난경에 처했을 때는 기부나 방조나 배려를 당당하게 받아 들이고 내가 후에 셈평이 펴이면 사회에 되려 갚으면 되는것이다. 자기는 못살면서 난경에 처해가지고도 못할 짓을 하는것처럼 외면한다면 이는 한참 잘못 된것이다. 이 면에서는 우리 민족이 더욱 그러하다. 손바닥만한 낯이 가려워서 그럴것이다. 그래서 우리 민족에게는 “선비는 굶어도 밥 빌지 않는다”거나 “량반은 덜덜 얼어도 곁불을 쬐지 않는다”는 속담도 생겨난것이리라. 이것도 나라와 민족과 종족간에 문화의 차이라면 차이일것이다. 그래서 화제에 올려 보았다. 연변일보 2017-3-1
59    씨줄과 날줄 댓글:  조회:2291  추천:1  2016-11-24
“쟤는 언제면 다 클가?” “쟤 언제면 셈이 들가. 성숙되자면 멀었어.” 우리는 주변의 어른들이 젊은이한테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자주 듣게 된다. 하다면 인간은 언제면 성숙되였다고 할수 있을가? 물론 여기에는 기성답안이 없다고 생각된다. 나이가 들었다고, 가방끈이 길고 먹물을 많이 먹었다고 아는것이 많다고 등등 이러면 성숙되였다고 할수 있을가? 필자의 옅은 소견으로는 “한 인간이 개인의 노력과 재능으로 그 나름대로의 인생행로를 개척해 가는 때면 성숙된것이 아닌가”고 생각한다. 얼마전 청년창업특강시 한 30대초반의 나젊은 기업가의 창업경험을 소개되였다. 자기가 대도시에 진출하여 새로운 재질도 키우고 돈도 벌고 이를 토대로 귀향하여 재창업, 새로운 산업을 개척하여 성공가도를 달리고있다는 얘기였다. 특강후 청중의 찬사를 듬뿍 받으면서 질문에 대답하였는데 실로 계발이 컷다. 창업담도 인상적이지만 창업경험도 전수하고 산업정보도 제공하고 건의나 해석도 실용적이여서 흡인력이 강하였다. 혹자는 자기도 그렇게 답습하겠다고 표하는가 하면 또 자기와 대비하면서 반성하는 그런 모습도 보였다. 그런 와중에서 혹자는 강연자의 성공을 축하하고 긍정하는 동시에 이를 거울로 삼아 자기특색, 나름대로의 창업을 꿈꾸고 개척하려는 강한 의욕을 과시하는 그런 젊은이들도 보여서 심히 존경스러웠다. 한 인간이 단순 타인의 인생행로에 몹시 감탄한 나머지 그대로 답습하려 한다면 그 젊은이는 미래가 없다. 반대로 전인들이나 성공자들의 경험을 계시와 가르침으로 간주하면서 이를 거울로 삼아 자기창업의 길을 찾았다면 진정 이야말로 성숙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이미 다 자라서 시름을 놓을수 있는 경지에 이르렇다는 얘기로 된다. 일부 사람들은 인생을 “씨줄과 날줄”의 유기적조합으로 완성된다고 인정한다. 이들에 따르면 한 사람의 인생은 개인의 노력과 재능이라는 씨줄과 시대의 흐름과 시대정신 그리고 운이라는 날줄이 합쳐서 펼쳐져 간다는것이다. 헌데 적지 않은 사람들은 나의 의지와 노력과 재능이라는 씨줄만 믿고서 미래를 기다리기만 하는데 그럴것이 아니라 시대적흐름과 추세에 맞추어 자기도 치고들어가 인생을 완성해야 하는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대정신, 시대적흐름에 적응하면서도 자기개성이 분명하고 자기특점이 나타나는 그런 자기만의 인생행로를 개척해야 하는것이다. 자기인생은 자기가 걸어가는것이지 다른 사람이 대신 걸어줄수 없다. 그리고 이는 필경 나 자신의 인생이지 다른 사람의 인생이 아니다. 나만의 인생행로를 개척해 가자면 자기를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내안의 “나”를 잘 알아야 하지만 내가 처하고있는 바깥세상도 잘 알아야 한다. 그러자면 세상을 보는 공부, 시대를 읽는 공부, 시대적흐름과 시대적정신을 파악하는 공부는 필수적이다. 자고로 나를 알고 세상을 알아야 실패를 적게 할수 있고 실수를 적게 범하며 고배를 적게 마신다고 하였다. 그래야 인생의 씨줄과 날줄이 잘 매여진 나의 인생행로에서 활보할수 있다. 우리는 살다보면 흔히 남과 비교하기를 즐긴다. 그것도 부질없다 하겠다. 괜한 걱정거리, 근심거리를 만든다는것이다. “저 사람은 운이 좋은데 나는 왜 그냥 운이 따르지 않을가?” “싸리긁에서 싸리난다고 저 친구는 원래 조상부터 머리좋은 집안이였으니깐. 나같은거야 어림도 없지!” 이처럼 남을 부러워하는 마음이나 자신을 한탄하는 생각이 스멸스멸 고개를 드니 그것에 마음이 사로잡혀 자기스스로를 가치 없다고 평가한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들꽃은 해빛을 찾아 옮겨 다니지 않는다. 해빛도 들꽃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는다. 모든 때가 지금이다. 그 지금의 나의 삶의 주재자가 바로 나이다. 따사로운 해빛을 듬뿍 받으면서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면서 나의 생각에 옳아보이는 나만의 인생행로를 활보하자! 락점해 버린다. 실상 따지고 보면 이런 비교도 무슨 쓸데가 있는가? 괜히 기분만 잡치고 마는데도 말이다. “깨닫고 나면 좋고 나쁜게 없다”는 격언이 있다. 인간세상에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절대 좋고나쁨이 없다는 얘기다. 객관적으로 사실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한다면 남과 비교하면서 좋거나말거나 하는 그런 감정에 휩싸이는 일이 없게 된다.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길을 꾸벅꾸벅 황소처럼 소리없이 걸어가게 된다. 연변일보 2016-11-23  
58    내두산작가공원의 의미 댓글:  조회:2483  추천:0  2016-09-01
지난 7월 9일, 온라인계간 백천문학사가 주최하고 안도현 이도백하진 내두산촌이 후원한 내두산작가공원이 내두산촌입구에 정식으로 락성되여 현판식을 가졌다. 연길시 의란진 두레마을에 터를 잡은 현지작가창작기지 그리고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가 화룡시 서성진 진달래마을을 “시인의 집” 창작기지로 선정한데 이어 세번째로 되는 중국조선족문인들의 현지체험, 창작, 탐구, 교류를 일체화한 전문성활동터전이라는데서 그 참뜻이 한결 심원하다. 1920년대초 조선 함경북도 갑산지역 사람들이 살곳을 찾아 이곳 원시림으로 이주하기 시작, 이 산골 저 골짜기에 숨어들어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지었다. 그러던것이 첩첩산중에 항일유격대가 근거지를 개척하면서 이에 불안을 느낀 일본침략자들이 1936년 유격대 소탕 목적으로 화룡현에서 100여명 규모의 자위단을 조직해 내두산촌에 주둔시키고 부근 산속에 흩어져 사는 농가들을 모두 내두산집단부락으로 집중시켰다. 그때로부터 내두산촌은 점차 100호가 넘는 큰 부락으로 되였던것이다. 내두산은 장백산밀영에서 활동하던 항일유격대의 홍색관광기지이기도 하다. 1936년—1937년 사이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6사가 내두산에 진주하여 항일근거지를 개척했는데 이 시기 동북항일련군의 명장 왕덕태도 내두산에서 활동했으며 현재 항일유적비가 세워져있다. “내두산촌이 가장 흥성했던 때는 지난 세기 60년대 초기부터 70년대말이였습니다. 100세대가 넘는 마을에 소학교, 중학교는 물론 농중까지 있어 제법 흥성했습니다.” 내두산촌 전호산주임의 말이다. 해외로무와 도시진출 바람은 이곳에도 어김없이 불어와 사람들이 하나둘 고향을 떠나버렸다. 2001년에 내두산촌은 학교가 페교되였고 현재는 마을에 주민들이 50세대도 채 안되게 남아있는데 마을을 지키고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60세 이상 로인들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촌민들이 떠나가고 마을은 비워졌지만 내두산촌에서는 지금까지 타민족 이사호는 단 한 세대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선조들이 개척한 소중한 마을과 땅을 열심히 지키고 가꿔나가려는것이 바로 이네들의 철석같은 신념이란다. 내두산은 우리 민족의 얼을 고이 간직하고 때묻지 않은 민속문화전통기지이기도 하다. 내두산촌로인협회 회장 김종국로인에 따르면 내두산촌에서는 지금까지도 중국조선족전통장례문화를 지켜가고있는데 촌에서 상여회를 운영하면서 마을에 상사가 났을 때는 상여로 장례를 치른다. 내두산사람들이 지금껏 상여장례를 고집하는것은 조선족장례문화에 담긴 효와 례에 대해 매우 중시하기때문이란다. 내두산촌에서는 중국조선족 무형문화재인 상여장례문화를 적극적으로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향후 상여장례문화를 정기적인 표현문화로 승화시키면서 내두산촌을 연변의 유일한 중국조선족전통장례문화촌으로 만들어나갈 타산이라고 한다. 내두산촌은 최근년간 전국특색농촌건설에 힘입어 마을환경이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관광객을 상대로 한 촌로인들의 전문공연무대도 마련됐다. 큰 규모는 못되지만 관광객들에게 숙박과 식사를 제공할수 있는 농가식봉사시설도 마련됐다. 최근에 내두산촌은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서 전국적으로 첫 진으로 공개한 중국소수민족특색마을이다. 내두산촌은 력사문화적 잠재력도 무궁하다. 이에 촌에서는 이 귀중한 유산, 독특한 우세를 살려 지금 한창 내두산촌의 력사문화적인 발굴에 한창 열을 올리고있다. 실상 이 고장은 장백산아래 첫 동네로서 원시림과 조선족촌이라는 독특한 인문경관으로 여러번 영화촬영지로 선정되였는데 조선예술영화촬영소에서 1991년에 제작한 예술영화 “하얀 꽃”중의 일부 장면은 내두산촌에서 촬영되였고 장춘영화촬영소에서 제작한 “장백의 아들”도 이곳에서 촬영되였다. 이처럼 귀중한 현장에 내두산작가촌을 건설한다는것은 바로 금상첨화, 아주 의미심장한 새로운 도약이 아닐수 없다. 백천문학사 사장인 소설가 김춘택씨는 “내두산작가촌은 ‘백천문학’이 성산 백두산 기슭에 세운 중국조선족문인들의 창작기지로 그 취지는 성산 백두산 기슭에 자리잡은 하늘아래 첫 동네 내두산촌에 생태창작기지와 민혼창작기지를 세워 중국조선족작가들이 청정자연속에서 스스로 뜨거운 민혼을 격발시켜 민족문학의 성스러운 사명을 완성하는 과정에 정품문학작품을 창작하는 문학창작공간을 마련해드리려는것이다”고 하면서 향후 많은 작가들이 내두산작가촌을 적극 리용해줄것을 희망했다. 김춘택작가는 내두산작가공원은 중국조선족문학의 대표작품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지는 문학공원으로 그 취지는 우리 중국조선족문학의 정품문학작품을 시비, 소설비 등 문학비의 형식으로 성산 백두산 기슭에 조성하여 널리 기리는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내두산작가공원에 50편의 중국조선족문학의 정품문학작품 및 50명의 작가를 선정하여 50점의 문학비를 세울 타산이란다. 내두산작가공원에는 이번 내두산작가촌 설립 현판식을 계기로 이미 관솔나무로 된 내두산작가공원편액, 내두산작가촌기념비, 림원춘의 “몽당치마” 소설비, 김응준의 “진달래” 시비, 김학천의 “장백송” 노래비가 세워졌다. 이를 토대로 내두산작가공원에 50편의 중국조선족문학의 정품문학작품 및 50명의 작가를 선정하여 50점의 문학비를 세울 타산이란다. 내두산의 장미빛 래일이 더더욱 찬연해질것은 의심할바 없다. 그래서 한결 흥분되는것이 아닐가! 연변일보 2016-8-31
57    내두산작가공원의 의미 댓글:  조회:2293  추천:1  2016-09-01
지난 7월 9일, 온라인계간 백천문학사가 주최하고 안도현 이도백하진 내두산촌이 후원한 내두산작가공원이 내두산촌입구에 정식으로 락성되여 현판식을 가졌다. 연길시 의란진 두레마을에 터를 잡은 현지작가창작기지 그리고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가 화룡시 서성진 진달래마을을 “시인의 집” 창작기지로 선정한데 이어 세번째로 되는 중국조선족문인들의 현지체험, 창작, 탐구, 교류를 일체화한 전문성활동터전이라는데서 그 참뜻이 한결 심원하다. 1920년대초 조선 함경북도 갑산지역 사람들이 살곳을 찾아 이곳 원시림으로 이주하기 시작, 이 산골 저 골짜기에 숨어들어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지었다. 그러던것이 첩첩산중에 항일유격대가 근거지를 개척하면서 이에 불안을 느낀 일본침략자들이 1936년 유격대 소탕 목적으로 화룡현에서 100여명 규모의 자위단을 조직해 내두산촌에 주둔시키고 부근 산속에 흩어져 사는 농가들을 모두 내두산집단부락으로 집중시켰다. 그때로부터 내두산촌은 점차 100호가 넘는 큰 부락으로 되였던것이다. 내두산은 장백산밀영에서 활동하던 항일유격대의 홍색관광기지이기도 하다. 1936년—1937년 사이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6사가 내두산에 진주하여 항일근거지를 개척했는데 이 시기 동북항일련군의 명장 왕덕태도 내두산에서 활동했으며 현재 항일유적비가 세워져있다. “내두산촌이 가장 흥성했던 때는 지난 세기 60년대 초기부터 70년대말이였습니다. 100세대가 넘는 마을에 소학교, 중학교는 물론 농중까지 있어 제법 흥성했습니다.” 내두산촌 전호산주임의 말이다. 해외로무와 도시진출 바람은 이곳에도 어김없이 불어와 사람들이 하나둘 고향을 떠나버렸다. 2001년에 내두산촌은 학교가 페교되였고 현재는 마을에 주민들이 50세대도 채 안되게 남아있는데 마을을 지키고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60세 이상 로인들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촌민들이 떠나가고 마을은 비워졌지만 내두산촌에서는 지금까지 타민족 이사호는 단 한 세대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선조들이 개척한 소중한 마을과 땅을 열심히 지키고 가꿔나가려는것이 바로 이네들의 철석같은 신념이란다. 내두산은 우리 민족의 얼을 고이 간직하고 때묻지 않은 민속문화전통기지이기도 하다. 내두산촌로인협회 회장 김종국로인에 따르면 내두산촌에서는 지금까지도 중국조선족전통장례문화를 지켜가고있는데 촌에서 상여회를 운영하면서 마을에 상사가 났을 때는 상여로 장례를 치른다. 내두산사람들이 지금껏 상여장례를 고집하는것은 조선족장례문화에 담긴 효와 례에 대해 매우 중시하기때문이란다. 내두산촌에서는 중국조선족 무형문화재인 상여장례문화를 적극적으로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향후 상여장례문화를 정기적인 표현문화로 승화시키면서 내두산촌을 연변의 유일한 중국조선족전통장례문화촌으로 만들어나갈 타산이라고 한다. 내두산촌은 최근년간 전국특색농촌건설에 힘입어 마을환경이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관광객을 상대로 한 촌로인들의 전문공연무대도 마련됐다. 큰 규모는 못되지만 관광객들에게 숙박과 식사를 제공할수 있는 농가식봉사시설도 마련됐다. 최근에 내두산촌은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서 전국적으로 첫 진으로 공개한 중국소수민족특색마을이다. 내두산촌은 력사문화적 잠재력도 무궁하다. 이에 촌에서는 이 귀중한 유산, 독특한 우세를 살려 지금 한창 내두산촌의 력사문화적인 발굴에 한창 열을 올리고있다. 실상 이 고장은 장백산아래 첫 동네로서 원시림과 조선족촌이라는 독특한 인문경관으로 여러번 영화촬영지로 선정되였는데 조선예술영화촬영소에서 1991년에 제작한 예술영화 “하얀 꽃”중의 일부 장면은 내두산촌에서 촬영되였고 장춘영화촬영소에서 제작한 “장백의 아들”도 이곳에서 촬영되였다. 이처럼 귀중한 현장에 내두산작가촌을 건설한다는것은 바로 금상첨화, 아주 의미심장한 새로운 도약이 아닐수 없다. 백천문학사 사장인 소설가 김춘택씨는 “내두산작가촌은 ‘백천문학’이 성산 백두산 기슭에 세운 중국조선족문인들의 창작기지로 그 취지는 성산 백두산 기슭에 자리잡은 하늘아래 첫 동네 내두산촌에 생태창작기지와 민혼창작기지를 세워 중국조선족작가들이 청정자연속에서 스스로 뜨거운 민혼을 격발시켜 민족문학의 성스러운 사명을 완성하는 과정에 정품문학작품을 창작하는 문학창작공간을 마련해드리려는것이다”고 하면서 향후 많은 작가들이 내두산작가촌을 적극 리용해줄것을 희망했다. 김춘택작가는 내두산작가공원은 중국조선족문학의 대표작품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지는 문학공원으로 그 취지는 우리 중국조선족문학의 정품문학작품을 시비, 소설비 등 문학비의 형식으로 성산 백두산 기슭에 조성하여 널리 기리는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내두산작가공원에 50편의 중국조선족문학의 정품문학작품 및 50명의 작가를 선정하여 50점의 문학비를 세울 타산이란다. 내두산작가공원에는 이번 내두산작가촌 설립 현판식을 계기로 이미 관솔나무로 된 내두산작가공원편액, 내두산작가촌기념비, 림원춘의 “몽당치마” 소설비, 김응준의 “진달래” 시비, 김학천의 “장백송” 노래비가 세워졌다. 이를 토대로 내두산작가공원에 50편의 중국조선족문학의 정품문학작품 및 50명의 작가를 선정하여 50점의 문학비를 세울 타산이란다. 내두산의 장미빛 래일이 더더욱 찬연해질것은 의심할바 없다. 그래서 한결 흥분되는것이 아닐가! 연변일보 2016-8-31
56    버림의 미학 댓글:  조회:2265  추천:5  2016-07-21
인간은 늙어가면서 일반적으로 하나의 비슷한 페단이 있는데 바로 버리기 아까워하는것이라 하겠다. "일단 나의 손에 들어온것이면 어지간해서는 놓지 않는다." 버리지 못한다는 얘기다.   한번은 부인이 나의 낡은 옷들을 정리할 때였다. 그는 낡았거나 시체가 지난 옷가지들을 던질 보따리에 퍼그나 싸놓았었다. 나는 그중 아직도 입을 만한것들이 적지 않은 것을 보고 못내 아쉬웠다. 그로부터 며칠후 부인은 내가 입은 쟈크를 보고 "내가 던져버린줄 알았더니 당신이 빼돌렸구려!라고 하면서 "얼마 입지 않고 묵여둔 새옷들도 많은데 언제 다 입겠다고 그러세요, 새로운 양식도 날마다 나오는데… "하면서 책망하는것이였다. 실상 나더러 사회구역에서 마련한 낡은 옷 상자에 던져버리라는 것을 내가 부인 모르게 몇견지 되가져 왔던것이다. 이외에도 외출하였다가는 가져오는 자질거레한 물건들이 많다. 실상 얼마 쓰는 일도 없는데도 말이다. 그젯날 집안의 로인들이 던질 것은 던지지 않고 자꾸 걷어오고 곳간에 장져두고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던져 버리라"고 하던 것 옛말, 나이가 드니 나도 그런 전철을 뒤따라 밟는가보다. 젊은이들의 집과 늙은이들의 집은 일반적으로 그 집에 척 들어서자마자 금방 알린다. 젊은이들의 집은 흔히 깔끔하고 산뜻한데 늙은이들의 집은 이런저런 잡동사니들로 발을 디뎌놓을 자리조차 없기 일수다. 실상 이런 늙은이들의 집도 갓 이사를 왔을 때는 그래도 한때 넓은 공간이 있고 쾌적하였겠지만 20-30년 지나고나니 언제부터인가 고물창고로 변모한것이다. 쥐고 온 물건은 던지지 못하는데 밖에 나가기만 하면 또 그 무엇이든지 들고 들어오는데서 였다. 분명한 원인은 곧바로 버리지 못하는데서 인기된것이다.   "희사(喜捨)"라는 말이 있다. "아까워하지 않고 기쁘게 내놓는다"는 뜻일게다. 사회생활에서 기부가 그러하다. 순수한 마음으로 그 무엇을 바라지 않고 즐거운 기분으로 그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베푸는 것을 말한다. 돈이든 물자든, 그렇찮으면 지식이든 예술이든 유형적인것일수도 있고 무형적인것일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소중한것들을 어떻게 순순히 내놓을수 있을가? 힘들게 얻고 귀중하게 혹은 정중하게 받은것인데 훌렁 내버릴수야 없지.   이런 분들에게 정중하게 권장한다. "버리는 순간 그의 집착에서 해탈될수 있다." 곧바로 그에 대한 집착과 속박과 예속에서 "해방된다"는 말이다. 집착과 예속은 흔히 심신을 흐리우고 걱정꺼리를 만든다. 우리는 그 무엇을 소유한 순간 그 소유물로부터 집착이 따라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할것이다.   나의 책장에는 김철시인의 시집 "세별전"이 두권 있다. 지난 세기 70년대는 책이 귀한 때라 서점에서 새로운 시집을 접하자 즉시 한권을 샀다. 책이란 빌린 것이면 제꺽 보고 돌려 주지만 산 것, 자기의 소유물로 된것이면 "후에 틈이 나면 보지"하면서 장져 두는 습관이 있다. 마찬가지로 상기시집도 줄곧 보지 않다가 2년후 서점에 가서 또 삿던것이다. 사둔것은 까맣게 잊고서 말이다. 이처럼 우리들의 옷장이나 서랍을 정리해 보면 깜짝 놀랄것이다. 입지 않는 옷, 쓰지 않는 물건, 쓰지 않는 가방 등 한두번 쓰고서 장져두고 자리만 차지하는 그런 잡동사니들이 얼마인지 모른다.   "언제쯤 쓸일이 있을거야." 잡동사니들을 버지지 못하면서도 이를 정당화하는 변명들이다. 그러나 수년이 지나후 보면 한번도 쓰지 않고 그냥 이 구석에서 저 구석으로 이 상자에서 저 상자로 수차례 이사다니면서 자리만 차지한 그런 물건들이 적지 않다. 정작 시간이 지난후 그 물건을 다시 쓰자고 보면 구식이고 낡았고 너무 하잘 것 없어서 그때에야 허허 웃으면서 던져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물론 던지기 아깝고 소중한 물건은 그냥 던져버리는것도 랑비이다. 하다면 그 처리방식만은 다르다면 그런 페물, 고물들의 가치도 충분하게 살릴수 있는것이다. 바로 기부이다. 친구나 지인이거나 이웃이 필요로 한다면 그냥 넘겨주면 되는것이고 그렇찮으면 동네에 갖고가서 누구네가 수요하는가고 탐문해도 되는것이다. 자원봉사단체에 기부하여도 되고 그냥 벼룩시장에 내놓아도 되지 않겠는가? 우리 집에는 시꺼멓게 그을린 무쇠냄비가 있었다. 부인이 대학생시절에 그처럼 어렵게 살면서도 한푼두푼 모아서 산 것, 우리들이 결혼해서도 30년동안 같이 한 단순 취사도구를 벗어나 살림의 동반자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헌데 어느때인가 보이지 않았다. 어느 우연한 기회에 저의 친구가 우리집에서 술놀이를 한후 연회상을 거두면서 "이 잘난 것 무었이 아까워서 그냥 쓰는가"고 하면서 던져버렸다는것이다. 이 말을 들은 부인은 몹시 서운해 하였다.   상기한것처럼 가치여부 사용여부를 떠나서 버리지 못하고 버려서도 안되는 그런 고물이나 기념물들도 있을수 있다. 부모님들로부터 대물림한것이나 대학교시절 반급에서 집단으로 나누어준 기념품이나 친구, 지인들이 증정한 소중한 기물 이런것들은 가격이 문제가 아니다. 아무리 낡아도 아무리 볼품없어도 두어야 하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물상자에 잘 보관해두는 것이 마땅하다. 버릴물건이 아니니깐.   필자도 정작 이렇게 설교하지만 이 시각에도 의연히 과감하게 버리지 못한다. 버리는 순간 홀가분한 심태를 얻는다는 철리를 알면서도 말이다. 그래서 재삼재사 결심한다. 나한테 소용없는 것은 단호하게 버리겠다고. 이 세상을 살아 오면서 그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던 그런 마음도 말이다. 그러면 마음도 한결 맑아지고 아름다워질것이다. 연변일보 2016-7-20
55    하마래에 비낀 장미빛노을 댓글:  조회:2376  추천:1  2016-07-13
  당나라의 저명한 시인 륙유는 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조렸다.   농가의 세주를 텁텁타 웃지 마라 풍년에 놀려 가니 가효도 푸짐터라. 산은 첩첩 물은 겹겹 갈길이 없나 하였더니 버들 푸르고 꽃핀곳에 또 한 마을 나타났네. 풍악소리 흥겨우니 춘사가 닥쳤는가 검박한 의복관대 옛풍이 여구토다. 한가한 날 달빛 안고 놀러 와도 된다시면 밤에도 지팽이 짚고 때없이 문 두드리리.   중국고대 태평성대를 이루었던 당나라 번영기라 시인은 산간벽지 농촌마을에서 아름다운 경치, 흥성거리는 명절의 풍경, 손님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순박하고 어진 심성을 그린듯,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장면에 시인의 무릉도원을 동경하는 념원을 그대로 반영하였다.    오늘날 두만강반의 중류지역에 이런 무릉도원이 있으니 바로 룡정시 삼합진 부유촌, 일명 하마래마을이라 할수 있다.   우선 하마래의 터전부터 살펴 보자. 그젯날에는 룡정시 소재지에서 남켠의 오봉산을 바라보면서 굽이굽이 아흔아홉구비의 오랑캐령을 넘어 80여리, 삼합진 소재지에서 두만강기슭을 따라 물길을 길잡이로 령마루를 서너개 넘는다. 말그대로 산이 첩첩 물이 겹겹 갈길이 없는가 하였는데 깊고깊은 산간벽지에 한 마을이 나타났다. 하마래마을이다.   라는 촌명도 특이하다. 먼 옛날부터 전해 내려 온된데 의하면 청나라 개국황제 누르하치가 군사를 이끌고 두만강변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이 부락에 들어가는데 하도 험준하고 가파로워서 부득불 말에서 내려 걸었다는데서 인기된 지명, 그때부터 이 고장을 글자그대로 하마래(下马来)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마래, 멀리 동남쪽으로 누르하치가 주둔해 있었다는 한왕산성을 한눈에 바라보며 천불지산의 남쪽기슭에 몸을 기대고 유유히 흘러가는 두만강에 시원하게 발을 잠근 이 고장은 예로부터 하늘을 쳐다보면서 송이를 뽑는 천혜의 명승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다. 이 고장의 자연산송이는 일본이나 조선반도 그리고 운남, 사천 등지에서 자라는 송이와 다르고 더욱 특이하다. 일년 사계절이 분명하고 겨울에 깊게 얼었다가 녹는 비옥한 땅에서 돋아나는 이 고장 천불지산의 송이는 세계적으로도 질이 으뜸이라고 한다.   부유촌 당지부서기 리종국씨에 따르면 이런 으뜸송이를 하마래마을에서만 하루 평균 1톤이상 채집, 밭이 많은 집들에서는 하루 100킬로그람이상 채집한다고 한다. 지난해처럼 송이가 많이 돋는 해에는 년간 30톤이상 뽑을수 있는데 촌의 총수입은 500만원--600만원 될것이라고 전망하였다.  그러면 부유촌에 100여 가구가 사는데 가구당 5--6만원의 순수입을 올린다는 얘기다.   하마래사람들은 바로 이 리종국서기가 있어 든든하단다. 이 리종국서기의 경력도 남다르다. 그는  대학생으로서 1980년대에 할빈대학을 졸업하고 밀산조중에서 교편을 잡다가 90년대에 하해하여 관내에 진출, 산전수전을 겪은후 고향에 돌아와 촌 주임으로 선거되였다. 그는 촌민들을 이끌고 열심히 일하여 집집마다 번듯한 벽돌기와집에서 살게 하였다. 수십만원 저금을 가지고 있는 집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새로 지은 널직한 촌정부청사 북쪽마당에는 인조잔디로 된 깨끗하고도 반듯한 문구장이 있다. 할 일없는 마을사람들이 매일 모이는 장소이기도 한 문구장에서 운동도 하지만 수시로 모여 세상만사를 나눈다. 비오는 날에는 넓직한 활동실에서 당구치고 화투 치고 썰썰하면 온 동네가 한 가마에 푸짐하게 음식을 차려 놓고 시원 컬컬 새노란 기름이 동동 뜨는 감주를 바가지로 퍼 마시면서 굿거리장단에 옹헤야를 부른다. 덩실덩실 도라지춤에 성수가 난다. 정녕 이들이야 말로 신선 같은 삶이 아니겠는가!   이미 50대에 진입한  리종국씨는 이 마을에서 가장 젊은 성인남성이다. 촌민들의 친자식같은 시중군으로 되여 촌민들을 위해 앞뒤로 뛰여다니는 리종국씨의 로고에 라고 하면서 한결같이 입을 모은다.   이웃챙기기, 하마래마을의 미풍량속으로서 세세대대 이어 내려 온 로전통이다. 그어느 고장보다 특이하다. 그 일례로 송이밭에서 볼수 있다. 하마래사름들은 는 철같은 신조가 있는데 누구나 절대 범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 천부지산에서는 산봉을 따라 혹은 골자기를 경계로 소나무에 붉은 칠을 한것도 있고 붉은 천을 매여 놓은것도 간혹가면서 볼수 있다. 이것이 바로 경영호들이 나누어서 도급맡은 경계선이였다. 이런 경계선에서 곧바로 하마래의 인심을 읽을수 있었다. 참으로 감동적이였다. 살펴보면 송이밭지경에는 이미 피여난 송이도 있고 갓 움터나오는 송이도 있었지만 누구도 뽑지 않았다. 한 마을에 살면서 그곳에 돋은 송이때문에 서로 불쾌한 일이 생길가 호상 념려하는 마음으로 뽑지 않는다고 한다. 하마래의 사람들은 또 하나의 전통습관이 있는데 바로 서로 송이 뽑는 시간을 약정하것이다. 오늘 웃집에서 송이 뽑으러 오면 아래집에서는 래일 송이를 뽑는 방식으로 산에서 만나는것을 피한다고 한다. 서로 기분이 상하는 일이 없도록 배려하는 마음에서 란다. 이런 미풍량속은 더불어사는 오늘 세상, 조화로운 사회를 건설하면서 더욱 고양되고 널리 알려지면서 보급되여야 할것이다.   어찌 하마래마을 뿐이랴, 우리 연변에는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실상 우리 연변은 그 어디나 무릉도원이다. 우리 중화의 땅 960만평방킬로메터의 광활한 신주대지에서 유일하게 련속 3차나 공기질이 가장 으뜸으로 평가된 청정지역이다. 그처럼 좋다는 해남도의 산야나, 중원지역의 항주, 무석도 무색하게 제치고 단연 첫손 꼽는 고장이다. 그리고 거의 모든 마을에 리종국서기와 같은 그런 코기러기, 믿음직한 살림군이 있어 촌민들을 이끌고 있다. 화룡시 서성진의 진달래마을, 습근평총서기가 다녀가신 광동촌, 안도현 만보진의 장백산아래 첫 조선족민속홍기촌, 훈춘시 경신진 방천촌….보라 저마다 자기특색의 무릉도원을 꾸려가고 있다.   하마래에 비낀 장미빗노을, 나아가 오늘날의 연변대지에 장미빛래일은 더욱 아름다울것이다. 연변일보 2016-7-6  
54    밥과 법, 동전의 량면과 같다할가 댓글:  조회:2219  추천:1  2016-05-26
밥과 법, 내용으로 피끗 보면 상관없는 두 글자에 불과한 것 같지만 정작 깊이있게 따져 보니 서로 상응되기도 하였다. 인간이 홀로 산다면 법이 필요없겠지만 필경 군체를 이루고서 인간지간에 서로 관계를 맺고사는만큼 법은 인간공동체에서 서로를 제약하고 서로가 감독하고 또한 자기스스로 지키면서 사는 그런 신성한 규약이고 공약인것이다. 밥은 먹어야 하고 법은 지켜야 하는 것이 공성이다. 밥을 먹지 않으면 몸의 기력이 떨어지여 인간기능이 저하되듯이 법도 인간들이 지키지 않으면 국가와 사회의 기능이 떨어진다. 국가의 정체가 파괴되고 사회질서가 혼란에 빠진다. 그래서 모든 국가는 사회의 안정과 질서의 유지를 위하여 법을 제정하고 법으로 사회를 다스린다. 밥과 법은 동전의 량면과 같다고 할가! 밥을 먹지 않고서는 법을 지킬수 없고 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밥을 먹을 자격이 없다. 그래서 빅토르 유고의 명작 에서 주인공 쟝바르쟝의 인생이 제시하였듯이 인간이 법을 어기는 적지 않은 경우는 배고픔, 돈이 없어서 다시 말하면 인간의 기본적생존을 영위할수 없는데서 인기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이 밥 다시 말하면 먹을것이 없으면 생존할수 없는것처럼 동시에 법도 밥 못지 않게 필요하고 절실한것이다.   우리의 현실을 보면 항상 이런 경우가 많다. 인간지간에 혹은 법대로 해야하는 그런 순간에 각자의 리익과 눈앞의 리득과 자기령역을 위하여 무시로 법을 어기고 싸우며 지어는 살생도 마다치 않는다. 이를테면 가장 흔히 접하게 되는 음주운전을 보기로 하자. 사람들은 술 마시고 차를 몰면 법에 걸리고 자칫 큰 사고를 유발하여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도 해를 당할수 있다는 것을 몰라서일가! 그리고 음주운전과 관련된 법규나 규정이 그렇게 많다는것도 몰라서일가! 아니다. 그중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유혹적인것이 바로《간대루야》 혹은 《내사 뒤심이 든든한게》, 혹은 
53    아이들을 풀어놓자 댓글:  조회:2013  추천:1  2016-05-12
6.1국제아동절, 어린이의 날이 다가온다. 한국에서는 5월 5일이 어린이의 날인데 그 이튿날이 금요일 그리고 련휴일이라 그래서 정부가 특수결정을 내려 6일을 전국적인 림시국정휴식일로 정하여 사상 처음 4일간 련휴하는 진풍경이 마련되였다. 한국은 확실히 이다. 이번 어린이의 날,  4일간의 련휴를 맞으면서 서울에서는 곳곳에서 축제와 놀이, 음악회, 전시회가 벌어지여 어린애들과 부모들이 어울려 신나게 놀았다. 서울광장과 서울시청, 무교동거리, 청계로 일대에서는 '2016 지구촌나눔한마당'이 열렸고 세계 65개국 주한외국대사관이 참여해 세계음식전, 관광홍보전,  지구촌나눔전,  퍼레이드 등을 펼쳤다. 세종페스티벌 '봄소풍'이 개최되고  거리예술과 콘서트, 인형극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마련되였으며 어린이대공원 일대에서 동화를 주제로 각종 전시, 공연, 체험 등을 즐길수 있는 서울동화축제가 펼쳐졌다. 어린의 날에는 어린이대공원 앞 도로에 차가 다니지 않아 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놀수 있었고 세종대극장에서 온 가족이 즐기는 오페라 '사랑의 묘약'이 무대에 올랐다. 한 마디로 온 나라가 애들을 확 풀어놓아 맘껏 놀고 즐기였던것이다. 어린의 날을 맞아 어린이가 주체가 되고 어린이가 화제가 된것만큼 이 날을 맞아 이 날은 물론이고 평소에도 고 호소한다. 돌아 보면 일상생활가운데서 어른들이 아이들에 대한 간섭이 너무 많은것이 사실이다. 바로 , 등등 이런저런 규제가 너무 많다는것이다. 철리적으로 말하면 너무 많으면 없는것과 같다. 이런저런 요구가 너무 넘치면 실상 모자람만 못한것이다. 어린이는 말그대로 어린애이다. 그래서 호기심이 많아 이것저것 만져보고 흔들어보고  한다. 일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쏠락쏠락하면서 짓거리를 한다. 생각이 단순하고 간단하기에 너무 절대적이고 너무 규칙적인것에 대하여서는 항상 거부한다. 이런 어린단계를 무시하고 어른스러울것을 강요한다면 이는 실상 비극이다. 그렇치 않아도 요즘 애들은 너무 어른스럽다는 얘기가 많다. 지어 적지 않은 부모들은 자기애들이 어른스럽다고 하면 몹시 즐거워하는데 이는 실상 그리 기뻐할만한 희사가 아니다. 애들은 반드시 애다워야 하는것이다. 그렇찮으면 어른들은 앞당겨 덜 익은 과일을 따는 그런 결과물을 얻게 될것이다. 그 애들에게 후세에 잠재적결함을 심어주는것과 같을것이다. 어른들이 간섭하고 속박하는 가운데서 가장 빈번한것이 아마 , 는것이다. 아이들을 속박하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요하는 가장 부담스러운 당부이기도 하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외출하기를 즐기고 유람하기도 즐긴다. 이를 통하여 아이들에게 넓은 세상과 접촉하게 하고 안계를 넓혀주고자 함일것이다. 헌데 매번 외출할때마다 중점요구사항이 바로 ,   등등이다. 실상 학부모나 집안의 어르신들이 이러할뿐만 아니라 지어 교양원, 선생님, 교육전문가들도 항상 이런 요구를 제기한다. 어린애들을 유괴하거나 해치는 형사사건들이 수시로 발생하고 빈발하면서 그만큼 사회를 어지럽히고 혼란스럽게 만들고 아이들이 항상 위험에 로출되여 있기에 그럴법도 하다. 하지만 다 그런것은 아니다. 이런 현상은 필경 극소수이고 극히 개별적인것이다. 려행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세상과 접촉하는 취지가 무엇인가? 바로 아이들에게 너른 세상을 보여 주고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너른 세상을 알게 하고 창의력과 적응능력을 키워주기 위함이 아닌가. 그렇다면 아이들이 생소한 사람과 멀리하고 접촉하지 않고 어찌 예기한 목적을 이룰수 있겠는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흥취를 가져오지 못하고 오색찬연한 바깥세상에 나와서도 그 속에 잠기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실상 아이들이 바깥세상에 나와서 어른들의 지도와 보살핌을 받으면서 형형색색의 사람들과 어울리고 접촉하는것은 참으로 필요하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아이들은 개방형으로 외향형으로 자라나게 되고 개척정신도 양성하게 된다. 우리는 아이들이 흔히 어른들의 상상도 못할 정도로 재빨리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아주 짧은 시간내에 어른들을 릉가하면서 되려 어른들의 길잡이, 안내자로 변신하는것을 볼수 있다. 이로부터 볼수 있는바 어른들이 쩍하면 아이들한테 , 는 가르침이나 과도한 요구, 무리한 간섭이 얼마나 편면적이고도 교조적이고 판에 박은듯한 어리석음인가를 어렵사리 보아낼수 있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그 어떤 형태로든지 아이들을 속박하는것은 금물이다. 어린이의 날을 맞으면서 다시 한번 호소한다.    연변일보 2016-5-11
52    이웃 챙기기, 하마래의 미풍량속 댓글:  조회:2249  추천:0  2016-03-17
룡정정시 삼합진 부유촌, 일명 하마래마을이라고도 불리운다. 두만강변의 심산벽곡 오지에 자리잡은 이 마을은 그 이름부터 특이하다. 먼 옛날 청나라 개국황제 누르하치가 군사를 이끌고 두만강변을 따라 이 부락에 들어가는데 지세가 하도 험준하고 가파로워서 부득불 말에서 내려 걸었다는데서 인기된 지명, 그때부터 이 고장을 글자그대로 하마래(下马来)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마래,  일년 사계절이 분명하고 겨울에 깊게 얼었다가 녹는 비옥한 땅에서 돋아나는 이 고장 천불지산의 송이는 세계적으로도 질이 으뜸이라고 한다. 부유촌 당지부서기 리종국씨에 따르면 해마다 송이철이면 하마래마을에서만 이런 으뜸송이를 하루 평균 1톤이상 채집, 밭이 많은 집들에서는 하루 100킬로그람이상 채집한다고 한다. 지난해처럼 송이가 많이 돋는 해에는  30톤이상 채집할수 있는데 촌의 총수입은 500만원--600만원,  100여 가구가 사는 부유촌의 가구당 순수입이 5--6만원씩 간다는 얘기다. 지난해 송이철, 기자들이 이 촌에서 송이채집체험을 하는 행운이 마련되였다. 당시  리종국서기는 주의사항을 알려주면서 고 강조하였다. 그래서 다시 유심히 보았더니 천불지산에는 혹은 산봉을 따라 혹은 골자기를 경계로 소나무에 붉은 칠을 한것도 있고 붉은 천을 매여 놓은것도 간혹가면서 보였는데 이것이 바로 경영호들이 나누어서 도급맡은 경계선이였다. 이런 경계선에서 곧바로 하마래의 인심을 읽을수 있었다. 참으로 감동적이였다. 살펴보면 송이밭지경에는 이미 피여난 송이도 있고 갓 움터나오는 송이도 있었지만 누구도 뽑지 않았다. 한 마을에 살면서 그곳에 돋은 송이때문에 서로 불쾌한 일이 생길가 호상 념려하는 마음으로 뽑지 않는다고 종국씨가 설명해주었다. 하마래의 사람들은 또 하나의 전통습관이 있는데 바로 서로 송이 뽑는 시간을 약정하고 오늘 웃집에서 송이 채집을 가면 아래집에서는 래일 가는 방식으로 산에서 만나는것을 피한다고 한다. 서로 기분이 상하는 일이 없도록 배려하는 마음에서 란다. 이날 송이채집체험팀이 한창 송이채집을 하는데 리종국서기네 송이밭에서 들려오는 낯선 사람들의 인기척을 듣고 그와 이웃한 서쪽송이밭 주인의 도둑을 대하듯한 격앙된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남의 송이밭에 와서 뭘하오? 어서 내려가오!》 하마래사람들은 이처럼 서로 제것처럼 이웃들의 송이를 지켜주는것이다. 체험자들이 급기야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종국씨와의 관계를 낱낱이 해석해서야 그 이웃은 웃으면서 반겨주었다. 바로 이것이 하마래마을의 전통이며 하마래마을이 생겨서부터 이날 이때까지 한집안처럼 화목하게 사는 비결이였다. 사실 가족은 없어도 이웃은 있어야 산다. 그것이 인간 사회라는것이 현실이다. 의식주를 비롯한 모든 인생살이가 이웃이 있음으로써 가능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러니까 이웃은 고마운 존재다. 내게만 고마운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모두 고마운 존재다. 하지만 요즘은 옆집은 있어도 이웃이 없다고 한다. 그젯날 단층집에서 살 때는 옆집이자 훌륭한 이웃이였는데 지금은 한 단원에 두세집만 살다보니 자기집에 들어 간후 문만 꼭 잠그면 몇달이 지나도 옆집에서 무슨일이 생겼는지 모른다. 그래서 옆집은 있어도 이웃은 없다는 말도 생기는것이다. 이웃이 없는 오늘의 삶, 오늘의 문화는 외형으로는 풍족해 보여도 너무나 삭막하다. 훈훈한 사랑과 정이 없어 마치 사막지대에 사는 것 같다. 예전에는 옆집뿐 아니라  온 동네가 나의 이웃으로 살았다. 온라인처럼 밤이나 낮이나 항상 대화와 정이 통했고, 특히 관혼상제같은 집안에 큰일이 생겼을 때는 이웃이 서로가 내 일처럼 적극 도와나섰다. 지난날 우리 동네에는 명문화하지는 않았지만 조상때부터 전해내려 온  비슷한것이 있었다. 그것을 보면 이웃과 마을간에 화목할것을 권장하고, 일이 있으면 자기일처럼 돕고 좋은 음식이 있으면 절대 혼자 먹지 않고 사발에 담아서 이웃에 돌리였다. 서로 다투는것도 엄격하게 금하였다. 그 밖에도 주민들이 지켜야 할 여러 가지 약속사항이  있는데 이를 위반할 경우 벌조까지 정해놓았다. 그중에서 가장 중한 책벌의 하나가 바로 불통화수(不通火水)였다. 당시의 미풍량속인 불씨 나눔과 한우물을 길어먹는 유무상통을 단절시킴으로써 이른바 마을에서 왕따를 시킨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웃과의 단절은 곧 죄악이며 형벌을 뜻하는것임을 알수 있다. 집은 뜨르르하게 현대가장집물을 갖추어 놓았고 먹는것도 산해진미 없는것이 없지만 이웃정은 그지없이 메말라간것이다. 경제는 더없이 성장하고 생활수준은 훨씬 높아갔지만 정신문화는 아주 피폐해진것이다. 도시는 물론 농촌에서도 자기나 자기집밖에 모르는 개인주의, 리기주의가 팽배하여 《이웃》이나 《공동체》의식이 메말라가고있음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초가집에서 살면서 흙을 밟고 자란 세대와 현대식아빠트에서 자란 세대간의 차이와 거리감을 절감하면서 우리 이웃이 정이 없다고 질타하기에 앞서 먼저 내가 이웃과 잘 지내려고 어느만큼 노력해보았는가고 자문해 볼 일이다. 이웃챙기기, 하마래마을의 이런 미풍량속은 더불어사는 오늘 세상, 조화로운 사회를 건설하면서 더욱 고양되고 널리 알려지고 널리 보급되여야 할것이다. 우리 주는 물론이고 신주땅에 사는 우리 민족의 집거지에서는 보편적으로 을 제정하고 즐겁게 쇤다고 하니 어느정도 안위가 되기도 하다. 이웃은 복! 그래서 더욱 챙기자!  연변일보 2016-3-16  
51    생각이 꽁꽁 닫혀진게 아닐가? 댓글:  조회:2527  추천:1  2016-02-18
지난 1월 25일 본지에 실린 김일복기자의 이란 기사를 읽고 새삼스레 떠오르는바가 적지 않다. 문장은 이렇게 쓰고있다. 방학에 들어간 중소학교 교정들이 고즈넉하다. 운동의 중요성이 갈수록 부각되고 청소년체질건강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으며 또 운동장소가 마땅치 않아 애로를 겪는 중소학생들이 많은 현실에 비추어보면 사뭇 대조적이다. 중소학교 운동시설을 방학에 학생들한테 개방해야 된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본교 학생은 물론 가까운 주변의 중소학생들이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즐기고 실내체육관에서 탁구, 바드민톤, 테니스 등 운동을 할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놓을수는 없는것인가? 그렇다. 학교운동장은 꽁꽁 잠가져 있을것이 아니라 진작부터 항상 활짝 열려져 있어야 할것이다. 그래야 학생들이 수시로 드나들면서 맘껏 뛰놀고 운동하면서 장기자랑을 하고 육체를 련마하고 튼실한 심신을 만들어낼수 있으니 말아다. 학교운동장을 학생들이 하학한후에 그리고 방학만되면 꽁꽁 닫아건다면 관리하기에는 편할지 모르나 필경은 아쉬운감이 없지 않다. 우리들의 중소학교시절에는 농촌은 더 말할것도 없고 도시에서도 학교운동장은 둘러막지 않고 항상 개방형이였다. 그래서 운동장은 언제나 학생들의 활무대였다. 방학이면 주변시민들의 활동공간으로도 활용되였다. 학생들이 교실에 박혀있지 않고 틈만나면 학교운동장에서 뛰놀게 하였던것이다. 50여년이 지났지만 소학생시절의 그 인상적이던 기억이 새롭다. 당시 우리 교장선생님은 등교하는 학생들이 곧바로 교실로 들어가는것이 아니라 모두가 학교운동장을 뛰여 돌아야만 교실로 들어갈수 있게 하였다. 저학년은 작은 바퀴, 고학년은 큰 바퀴로 운동장을 한 번 돌면 각자 받은 A4 크기 노란 카드에 찍힌 작은 동그라미 하나를 칠할 수 있었다. 색칠한 동그라미가 쌓이면 그 거리에 따라서 누구는 룡정이요 누구는 연길이요 누구는 더 멀리는 장백산까지 도달하게 그려진 카드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카드채우기 경쟁이 붙어 매일 두세 바퀴씩 뛰는 아이들도 생겼던 걸로 기억한다. 점심 시간이면 더욱 가관이였다. 누구든지 교실에 있어서는 안되였다. 전교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여 집단체조를 하거나 자기장기와 특성과 애호에 따라 제나름대로 운동을 즐길수 있었다. 축구, 배구, 기체체조, 그네, 널뛰기, 에어로빅은 기본이고 우리 춤사위로 만든 “덩더꿍 체조”, 무술동작을 살린 '운동체조'도 있었다. 요일별로 이렇게 다른 체조를 했다. 비 오는 날을 위한 체조도 있었으니 “눈(目) 체조”였다. 교실에 앉아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상하좌우로 움직이는 운동과 눈 주위를 마사지하는 동작을 따라 했다. 당시엔 너무 귀찮아서 때론 단 한번이라도 빼먹는게 소원이었지만 돌이켜보니 학교선생님들의 덕분에 대부분 학생들이 결석 한번 없이 학업을 마칠수 있었던게 아닐까 싶다. 그때는 잘 먹고 잘 입지 못하였지만 그처럼 간고한 환경속에서도 그런 선생님들이 학교마다에서 학생들의 건강을 우선 챙기시였다. 오늘날 중소학생시절에 학교체육활동을 통하여 이처럼 건강을 챙긴 이들은 성년이 되여서도 더구나 로년이 된후에도 그 덕을 톡톡히 보고있다. 게으름만 부리고 앓음자랑만 하던 이들은 결과적으로 그 후회가 적지 않다. 학생시기 운동에 게을렀던 그많은 “몸치” 혹은 “운동치” 들은 오늘날 어른이 되고 늙은이가 된후 뒤늦게 돈 써가며 운동 배우느라 애쓰는것을 보고 있노라면 라는 생각이 들면서 매우 안스러워 보인다. 그리고 방학이나 아침 저녘으로 학교운동장을 개방하는것도 무리는 아닌것같다. 정년퇴직한후 한국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면서 농촌이나 도시교외의 학교들은 물론이고 도심에 위치한 적지 않은 학교의 운동장을 방학은 물론이고 평소에도 아침이나 학생들이 하학한후 시민들이 틈을 봐가면서 공유하는 장면을 심심찮게 보았다. 물론 학교의 정상적인 운영이나 학생들의 공부와 기타 활동에 영향을 주지 않는것을 전제로 말이다. 우리 여기서도 방학기간만이라도 꽁꽁 닿혀 있지 말고 기성시설을 령활성있게 능란하게 활용하여 사회에 더욱 유용한 기지로 되였으면 하는 바램이다. 연변일보 2-16-2-17  
50    양보는 실상 나를 챙기는것 댓글:  조회:2469  추천:1  2016-01-21
“해외 여행을 마치고 귀국해서 ‘비로소 여기가 중국이구나’라고 느낄 때가 언제인지 알아요? 비행기에서 내려서 시내 도로로 접어들었을 때예요. 옆 차는 깜빡이도 안 켜고 끼어들지, 뒤차는 경적 빵빵 울려대지, 차들이 질풍같이 달리는 거리로 시민들이 불쑥불쑥 치고나와 횡단하지, 그런가하면 어지간한 도로에서는 승용차, 트럭, 삼륜차, 당나귀, 행인이 혼잡을 이루면서 제나름대로 직행도 하고 역행도 하지, 모든것들이 제마음대로예요. 이런 교통문화는 중국에서만 볼 수 있죠.” 선진국들에 다녀온 지인이 연길공항에서 나와 택시를 탔을 때를 회상하며 들려준 얘기다. 후진국에서만 볼수 있는 이런 도로상황이 바로 우리의 첫 인상이다. 우리가 아무리 고향자랑을 하고 수많은 자금을 들여가면서 홍보에 나선다한들 어찌하랴. 우리가 아무리 치장해도 가릴수 없는 시민 의식의 민얼굴이 이러한것을. 일전에 중앙급매체에서 본 기사이다. 도로안전특별취재팀이 교통선진국으로 꼽히는 나라들의 문화가 우리와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기 위해 스웨덴, 핀란드, 독일, 네덜란드, 카나다, 일본, 싱가포르 등 나라로 갔다. 이들이 현지답사에서 보고느낀 결정적인 차이는 이들 선진국에서는 국민들이 혼자서도 텅텅 빈 도로에서 신호와 정지선, 교통규칙을 준수하면서 한치의 규칙위반도 없다는 점이었다고 한다. 철저한 단속과 교육덕이다. 카나다 운전자들은 암행(暗行) 경찰이 어디서 지켜보고 있을지 모르니 신호와 제한속도를 자발적으로 지킬수밖에 없다고 한다. 독일 아이들은 교통안전을 초등학교 2학년부터 정규수업 시간에 배운다고 한다. “3초를 먼저 가려다가 30년 먼저 간다”는 격언이 있다. 살펴보면 규칙위반운전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 바로 과속운전이다. 그리고 이런 운전자들은 거지반 젊은이들이다. 한창 혈기가 왕성한 때라 무섭고 두려운것이 없다고 할는지. 아무튼 규칙위반운전이 아직도 비일비재이고 한두번쯤 걸려든 전과가 있지만 이들은 의연히 개의치 않는다. 규칙위반운전은 실상 목숨을 가지고 도박을 하는것이나 다름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사고를 낸 운전수들은 거지반 일을 저지른후 피해보려는 요행심리가 작간하는데 그중에는 사건현장에서 뺑소니치거나 그렇찮으면 이런저런 경로를 통하여 사건을 무마하거나 없애려는 현상이 극히 보편적이다. 큰 사고 특히 사람을 치였거나 지어 사람을 깔아 죽였다면 더욱 그러하다. 하다면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운전수가 규칙위반운전을 하였거나 사고를 쳤다면 이는 큰 일이 아닐수 없다. 만약 음주운전을 한후 사고를 냈다면 공직자라면 공직을 떼우고 형사책임을 추궁당하는 엄한 결과가 초래된다. 인명피해를 냈다면 그 후과는 더욱 엄청나다. 그리고 음주운전은 인신보험보상도, 차보험보상도 없다. 모든것이 손실로 결론난다. 타방으로 양보운전이 ‘손해 보는 일’이라는 그릇된 인식도 철저하게 없애야 할것이다. 양보의 결과가 자신에게 득으로 돌아온다는것을 알아야 한다. 네덜란드 드라흐턴시가 신호등과 교통표지판을 전부 없앤뒤 오히려 사고를 20분의 1로 줄일수 있었던 리유도 운전자들의 ‘양보 본능’을 일깨웠기 때문이다. 북경 상해와 맞먹을 정도로 교통량이 많은 일본 도쿄 신주쿠 사거리에서는 경적 대신 기다림을 택한 운전자들 덕에 모든 도로 리용자가 조용하고 쾌적하게 길을 오갈수 있다고 한다. 선진국들에서는 묵은 해를 보내면서 혹은 새해벽두부터 교통안전을 더욱 강화하고 안전교양을 년초부터 틀어진단다. 요즘 한국에서는 년말년시를 맞으면서 ‘시동 꺼! 반칙운전’ 캠페인을 펼치고있다. 교통선진국으로 꼽히는 호주에서는 경찰이 년말년시 장기 휴가기간을 맞아 희생자가 더 늘어날것으로 보고 사고 예방에 총력전을 펴고 있다. 호주 경찰은 지난 12월 23일부터 새해의 1월 3일까지 12일간을 년말년시 집중단속 기간으로 잡고 과속과 음주운전 등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다. 이네들이 내건 슬로건도 특이하다. 격조높은 구호나 아리숭한 선전용어인것이 아니라 바로 '살아 도착하자'라는 이름 아래 특별 단속활동이다. 우리 말 격언에도 이르기를 이라 하였던가. 하다면 도로안전이 온 나라 국민의 가장 중요한 국정현안의 하나로 부상한 오늘날 양보는 실상 자기를 챙기는것이란 관념을 확고하게 심어주어야 할것이다. 동시에 교통안전문제도 새해의 벽두부터 여론의 초점에 올리고 줄기차게 드팀없이 틀어쥐여야 하지 않을가하는 로파심에서 이처럼 화제에 올렸다.  연변일보 2015-1-20  
49    <어곡주> <천부지산>술의 참뜻 댓글:  조회:4866  추천:0  2015-12-10
“술, 이제 더는 단순히 중추신경을 마비시키고 말초신경을 흥분시키거나 기분전환을 하고 흥을 돋우고 정서를 결발시키기 위한 흥분제만이 아니다. 이제는 그 차원을 넘어 문화와 접목하고 우리 고장 특색의 관광브랜드상품으로 거듭나고 있는것이다.” 일전에 본지에 실린 룡정시 개산툰진정부와 오정묵선생의 합작으로 , 술이 출시하였다는 보도기사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상기 두 가지 술의 출시는 단순 경영이나 상술의 차원을 넘어서 우리 민족의 축제문화와 제례문화에 걸맞는 술문화를 접목하기 위한 독특한 시도라는데서 그 의미가 한결 심장하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우선 어곡주부터 론해 보기로 하자. 두만강지역에서 노란자위에 위치한 천평벌, 이 벌에 터를 잡은 어곡전기지에서 대량 생산되는 는 갈수록 세인이 알아주는 유명브랜드로 만방을 매료하고있다. 그제날 위만주국 강덕황제에게만 진상하는 어곡전에서 생산한 어곡미는 이미 길림성브랜드입쌀로 유명세를 타면서 문화적의미가 짙은 농업산업화모델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였다. 반드시 동시에 천리두만강홍색관광에서 중요한 관광점의 하나로 되고 역시 유명관광제품으로 승화되여야 한다. 하다면 이제 두만강지역발전이 국제적협력개발과 개방으로 새롭게 펼쳐지는 대환경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차원에로 부상할것인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어떻게 이 에 탑승할것인가하는 문제가 새로운 과제로 제기된것이다. 단순 개산툰지역의 개별적이거나 고립적인 행위가 아니라 글로벌화하는 이 시대적조류에 맞춰 새로운 도약을 하는 중대한 거동인것이다. 이에 개산툰지역의 지성인, 주역들은 먼저 어곡미를 연변지역에서 알아주는 유명입쌀로 부상시켰다. 개산툰어곡전관광상품개발유한회사는 최고품질의 어곡미를 생산하여 중경제품질센터(中轻产品质量中心)로부터 등 증서를 흭득하였다. 그리고 장춘위만황궁박물관에 력사자료 및 문물과 함께 전시관을 전문 설치하여 해내외에 더욱 널리 알려지고있다. 하지만 이에 어찌 만족하랴. 개산툰진정부는 문화단체와 손잡고 우리 민족의 전통명절 에 대한 문화적전승과 승화를 거쳐 2007년부터 행사를 해마다 진행, 이미 8년째 이어오고 있다. 과 축제는 길림성무형문화재로 등재되였다. 동시에 어곡전은 연변의 민속관광, 농촌체험관광명소로 되면서 새로운 농가축제를 창출한것이다. 연변지역에서 우리 민족의 또 하나의 일대장거, 일대창거가 아닐수 없다. 하지만 축제인데 어찌 술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시대에 부응하여 출시한 것이 바로 인것이다. 우리 민족은 재래로 관혼상제를 몹시 중시하였는바 이는 인지상정, 인간세상의 기본이라고 할수 있다. 특히 는 만천하에서 국가, 민족, 종족에 관계없이 흑인이든 황색인이든 백인이든 관계없이 전 인류의 공통분모이다. 이 지구촌의 그 어디에서 관혼상제를 중시하지 않은 이들이 있는가? 가장 발달한 민족이나 가장 락후한 민족이던지 그 규모, 그 풍격, 그 풍습과 그 형식이 다종다양할 따름이다. 하기에 제례문화에 대하여서도 더없이 뇌즙을 짯던것도 사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축제의 술, 어곡주에 이어 내놓은 것이 바로 표 제사술이다. 천불지산하면 사람들은 흔히 우리 나라 송이의 고향으로서 중국의 첫 진귀용균류 자연보호구, 중국의 유일한 송이 및 그 생태계를 보호하는 국가급자연보호구로서 그 가치가 무진장한 생태와 문화의 관광지로만 알것이다. 하지만 그 숨은 뜻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천불지산은 한어뜻풀이 그대로 하나님이 점지해준 명산이라, 먼 옛날부터 불교의 성지로 이름이 났다. 만백성이 잘 살고 해마다 풍년이 들라고 풍년제를 지내던 산, 조상들의 넔을 기리면서 가문이 번창하게 해달라고 그 높은 산을 톱아 올라가서 제를 지내던 성산인것이다. 사책의 기재나 전해 내려 온 설에 의하면 중국의 4대 승려의 한 분인 지장보살, 신라의 왕자 김교각이 중원으로 진출하면서 여기에서 제를 지내고 갔다는 설이 있는가하면 조선왕조의 기틀을 잡는데 책사역할을 한 무학대사가 천불지산에서 솟아오르는 불광을 보고 조선반도에서 새 왕조의 탄생을 점지하고 리성계를 열심히 보필하였다는 설도 있다. 이처럼 우리 민족의 전설도 수없이 간직하고있는 명산이다. 오정묵선생은 바로 이런 점을 감안하여 이 지역의 자연수로 만든 제사술을 고안해 냈던것이다. 술, 이제 더는 단순히 중추신경을 마비시키고 말초신경을 흥분시키거나 기분전환을 하고 흥을 돋우고 정서를 결발시키기 위한 흥분제만이 아니다.이제는 그 차원을 넘어 문화와 접목하고 우리 고장 특색의 관광브랜드상품으로 거듭나고 있는것이다. 여기에 와 술의 참뜻이 있지 않을가!  연변일보 2015-12-9
48    기자는 낯가죽 두꺼워야 한다 댓글:  조회:3564  추천:1  2015-11-12
  지난 11월 8일은 우리들이 맞는 16번째 기자절이다. 이 뜻깊은 날을 맞이하여 비록 기자직업에 30년간 종사하다가 3년전에 정년퇴직하였지만 의연히 감회가 깊다. 지금으로부터 33년전 그러니 1982년말 길림성청년간부양성반에 가서 학습하는데 연변일보사로부터 전근의향서가 왔다. 알고보니 당시 연변일보 리론편집으로 사업하던 장정일선생이 룡정주재기자를 물색하는데 나를 추천하여 당시 주재기자들을 주관하던 오태호부총편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나한테 보낸것이였다. 그때 리덕수서기가 룡정현당위서기로 갓 부임되여 온 때였다. 나는 일면지교도 없는지라 리덕수서기와 대학동창생이였던 장정일선생이 나한테 룡정주재기자로 추천하는 편지를 써 주면서 가서 찾아 보라는것이였다. 헌데 현당위서기가 나한테는 처음 대하는 고급지도간부인지라 감히 사무실로 찾아가지 못하고 그의 사무실부근에서 빙빙 돌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점심시간에 룡정빈관에 점심식사하려 가는 것을 목격하고 뒤쫓아 갔다. 거기서 한참 지켜보다가 비로서 큰 결심을 내리고 리덕수서기한테 자기소개를 하고 추천편지를 드렸더니 당장에서 하는것이였다. 이리하여 나의 전반생을 결정하는 기자생애가 시작되였다. 하다면 리덕수서기한테  첫 단독취재를 하던 것이 나의 기자직업생애에서 가장 영향력을 준 사건의 하나로 될줄이야. 당시 등소평동지가 연변을 시찰하면서 는 제사를 써주었는데 이를 계기로 룡정현당위서기였던 리덕수서기를 특별 인터뷰하게 됐다. 그런데 세번이나 찾아갔는데 그냥 일이 많다며 취재를 미루었다. 그래서 여섯번째로 부탁했을때는 아예 밤 9시까지 그의 사무실에서 기다린 끝에 겨우 취재임무를 마칠수있었다. 당시 취재를 접수하고나서 그는 나에게 이렇게 의미심장한 말씀을 주었는데 그때 인상깊었던 취재와 더불어 지금도 그 한마디가 기억에 오래오래 남아있다. 나는 그가 에 6번이나 찾아가서 헛탕을 치면서까지 그를 생각해주었는데 오히려 그 한테서 하는 절실한 충고를 받았던것이다. 리덕수서기의 이 말에는 끈질긴 기자정신, 한번 물면 놓지않는 그런 결사적인 직업적 풍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사료된다. 기자는 자기직책을 수행하는 책임과 임무앞에서는 주저함이 없이 대담하게 몸을 던져서라도 돌진해야 할것이다. 그 누가 나에게 지난 30년간 기자직업에 종사하면서 가장 기본적인 행동지침이 무엇이였는가고 묻는다면 나는 두말없이 , 는것이라고 말할것이다. 기자는 사건만 터지면 열두밤중이라도 종주먹을 부르쥐고 사건현장으로 달려가야 한다. 그리고 무엇도 가릴것이없이 가장 믿음직한 진실을 독점해야 할것이다. 그 과정이 얼마나 험난하든지, 얼마나 위험하든지 그것은 모두 도외시되여야 할것이다. 한것은 내가 바로 기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자는 바로 이기에 그럴수밖에 없는것이다. 이렇게 할수없다면 그는 기자로서의 최저한도의 자질도 갖추지못한것이라 할수있다. 오늘날 전국적으로 신문은 물론이고 라디오, 텔레비죤 등 모든 매체들이 현장으로 달려가는 의 활동을 전개하고있는데 아주 좋은 기상이라고 본다. 현장상황을 그림으로 그리면서 특징적인 사항을 약식으로라도 메모를 해두면 기사를 현장감있게 쓸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취재기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끈기있게 취재에 매달려야 한다는것. 취재기간 내내 단서가 잡히지 않아 헛품만 팔다가도 마지막 한 순간에 결정적인 정보를 접할수도 있는것이다. 뜻을 이루기전에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그런 결사적인 풍격의 소유자여야 할것이다. 오늘날 제16회기자절을 맞으면서 내가 지난 30년간 선배기자님들한테서 배우고 고양하고 계승한 것을 후배들한테 물려주고 충고하고싶은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것이다. 우선 기자도 하나의 직업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맡아서 할수 있다. 하지만 진정 책임감, 사명감을 안고 기자다운 기자, 진정한 언론인으로 되자면 결코 쉽지 않다. 자신이 일하고있는 보도사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고생을 두려워하는 사람, 위험감수에 약한 사람, 어떤 느낌이나 깨달음이 모자라는 사람이라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마땅하다. 단순 돈과 재부를 위한 기자, 직업해결을 위한 기자, 명예와 리해타산에 밝거나 그 어떤 특권을 생각으로 기자직업을 바란다면 당장 그만두라고 권하고싶다. 기자직업은 상기의 성격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기때문이다. 기자, 진정 력사의 기록자, 시대의 기록자, 대중리익의 대변자가 되고저 한다면 그리고 오로지 이를 위해 기꺼이 자기희생을 할수 있다면 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기자가 될수 있다. 연변일보 2015년  11월 12일자  
47    은발세계 맞이하는 마음가짐 댓글:  조회:2502  추천:1  2015-10-29
우리는 한창 , 다시 말하면 로령화사회를 맞이하고있다. 이 역시 사회발전의 필연적인 추세라고 할가. 헌데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우리 로인들을 포함한 전 사회적으로 준비가 부족한것으로 하여 경황망조한것만은 사실이다. 해당 부문에 따르면 2014년 우리 나라 60세이상 로령인구가 2억명에 달하는데 2050년에 이르면 총인구의 34%를 차지할것이라고 한다. 우리 연변이나 중국조선족사회도 마찬가지이다. 2014년 우리 주 60세이상 로령인구가 37.7만명, 총인구의 17.6%를 차지하였다. 그중 독거로인이 20만명, 능력상실, 반상실로인이 7.5만명에 달하였다. 이제 5년이 지난 2020년에 이르면 로령인구가 43만명에 달하여 총인구의 23%를 점할것으로 전망하고있다. 우리 주는 모종의 특점으로부터 보면 전국의 평균치를 릉가하여 더욱 빨리 로령화사회에 진입하고있다는것이 전문가들의 지론이다. 전통사회는 단명시대라 로인들은 평생 쌓은 경험과 년륜으로 젊은이들의 존경을 받고 사회적우대를 받으면서 여생을 마감하였다. 60세만 지나면 로인으로 취급되여 로인행세를 하였다. 하지만 지금은80세가 넘어야 로인으로 취급하는 것이 추세로 자리잡고있다. 로인수명의 연장으로 정년퇴직전은 인생의 전반전 그 이후는 인생의 후반전으로 획분하면서 그때부터 자기의 삶을 산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로령인구의 급증과 동반하여 로인들의 사회적지위가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세대간의 차이와 차별이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분야에서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전문가들은 과거 1000년의 발전이 지난 100년의 발전과 맞먹고 지난 100년의 발전이 지난 10년의 발전과 맞먹으며 지난 10년의 발전이 지금의 1년의 발전속도와 맞먹는다고 평가한다. 이런 과학문화의 급속발전에 따라 보건과 삶의 환경이 질적으로 개선되면서 자연수명이 연장되여 100세대에 진입하고있다. 헌데 따라서 문제시되는 것이 바로 로인들의 비참상이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것이 이다. 그렇다면 행복한 장수를 누리자면 준비가 필수적이다. 파죽지세로 닥쳐오는 로령화추세에 립각하여 정부와 사회는 물론이고 매개 가정과 자녀들도 응당한 대비가 있어야 할것이다. 제네바의 한 사회학교수는 《인생은 련속이다. 60까지 일해온 사람이 갑작스레 할 일이 없는 사람으로 돌아가는것, 그리고 모든 책임에서 제외되는것이 심리학적으로 보면 잘못된 일이며 경제학에서 보면 랑비다》고 하였다. 그러니 로인들의 후반생문제는 단순 그 본인들의 삶의 문제인 동시에 심각한 사회문제이며 중대한 민생문제라는 얘기다. 우리 민족은 력래로 효문화를 숭상하면서 조상들에게 효도하는 것을 천직으로 간주, 이를 세세대대로 물려왔다. 조상효도는 인간의 근본이며 인간도덕의 토대이고 가족교양의 기본출발점이기도 하였다. 자고로 로인부양은 가정을 기본단위로 하면서 효문화의 핵심이 부모들을 잘 부양하는 동시에 공경하여 모신다는것이였다. 여기서 부양한다는 것은 물질적담보이며 의식주가 우려없게 한다는것이다. 하다면 공양한다는 것은 생활상에서는 물론이고 정신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도 행복감에 도취되여 타계할 때까지 인생을 즐기게 한다는것이다. 성현이라 칭송하는 공자도 고 갈파하였다. 그러므로 한 가정 조손삼대 혹은 사대가 한 가정을 이루고 진행되는 가정양로든 경로원, 광영원 혹은 사회복지원 등을 통한 사화양로든간에 효도는 사회가치관념과 문화정신의 정수이고 령혼이며 사회의 기본토대이다. 공자는 을 대동리상으로 간주하였다. 맹자도 을 왕도사회의 기점으로 삼았다. 하기에 정부와 사회의 양로직능과 가정양로 자녀부양의 전통양로를 유기적으로 결부하면서 완벽한 양로시스템을 구축하는것도 현대화사회건설의 절실한 과제인것만은 의심할바 없다하겠다. 연변일보 2015-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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