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내 눈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저 유명한 쉐익스피어의《가련한자여, 너의 이름은 녀자다.》라는 말을 흉내내여《양이여, 너의 이름은 선량이다!》라고 락인을 찍고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기회에 공소하지 않고 그냥 죽어지내서야 어디 말이 되겠습니까? 이 시각, 가승속에 서리고 서린 만고의 원한과 분노를 터뜨리렵니다. 모두 짐작하겠지만 불공대천의 승냥이들과의 악연을 말하려는것입니다.
어느 날, 승냥이가 어린 양을 잡아먹을 구실을 대느라고 생트집을 걸어왔습니다. 어린양이 자기가 마실물을 흐려놓았다는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어린 양은 아래쪽에 있었거든요. 그야말로 언어도단이였습니다. 아니 강도론리였습니다. 할말이 없게 된 승냥이는 다른 트집을 걸었습니다. 《아, 이제 생각나누나. 2년전에 내 여기를 지나갈 때 네가 여기서 무례한 말을 하였다. 이놈아, 난 잊을수 없다!》하고 억지를 쓰면서 백번죽어도 마땅하다는것이였습니다.
어린양이 2년전에 세상에 나지도 않았다고 대답하자 승냥이는《오, 그렇지, 그럼 틀림없이 너의 형님이다.》《대왕님, 저에겐 형님이 없습니다.》《그렇지, 그럼 틀림없이 너의 친구, 아니면 너의 친척들이다. 아무튼 너희들 양들과 너희들의 사냥개, 그리고 너희들의 방목인들은 모두 나를 해치려하고 언제나 나를 죽이려 한다. 그렇기때문에 나는 너에게 그 원한을 풀겠다. 》어린양이《그런데 나에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하고 따지고 들자《닥쳐!넌 하루종일 종알거렸다. 나에겐 너의 그 죄상을 따질겨를이 없다. 너의 죄상은 바로 내가 너를 잡아먹으련다는 그것이다. 》라고 하면서 무작정 어린양을 깊은산속으로 끌고들어갔습니다.
이 장면은 내가 직접 목격한것인데 로씨야의 유명한 우화자가 끄릴로브선생이 어데서 얻어듣고 그 유명한《승냥이와 어린양》이라는 우화를 써냈던것이지요. 지금도 소학교교과서에서 읽을수 있을것입니다. 약자는 강자앞에서 언제나 죄인으로 된다 는 비정한 인간사회라는것, 이러한 실례는 력사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속에서도 재연되고 있다는것을 까밝히고 있지요. 하지만 인간은 력사를 적은것이 아니라 승리자가 엮어내였습니다. 그러나 끄릴로브선생은 우화로써 인간을 깨우치고있습니다
나의 주인도 어릴때 선생님의 해석을 듣고 무도한 승냥이에게 의분을 토하느라 침을 튕기고 정의감이 북받쳐 작은 주먹을 내흔들었답니다. 하긴 우리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교과서의 거의 모든 동화들에서 현실이 외곡되여 있습니다. 작은 흰토끼가 저기 사자님의 조부를 우물에 처넣은 이야기, 재빛승냥이를 지혜로 이긴 이야기 등, 권선징악, 인과보응의 동화들에서 지금도 아이들은 약자는 선량하고 강자는 악하다는 관념을 굳혀가고있습니다. 선량한 약자는 언제건 강자의 악을 전승한다는 불변의 진리를 주입하려는것입니다.
인간은 정의와 진리는 언제나 선량한 약자의켠에 서있다는 리념이 얼마나 무기력한가를 반성할때가 언녕되였습니다. 이런 전통적계몽교육속에서 자신에게 정의의 홰불이 쥐여져있기에 능히 강자를 타승한다는 신념을 잔혹한 현실은 비웃는데도 그냥 기치선명합니다. 동방식의 이런 오도로 하여 인간사회에는 많은 력사비극들이 빚어지지 않았던가요?.
토끼가 풀을 뜯어먹고 승냥이가 토끼를 잡아먹는 약육강식의 법칙만이 인간세상에서 통합니다.《정의》의 승리는 약자의 환각일뿐이요 희망사항입니다. 중국의 동화교육과 미묘한 대조를 이루는것은 미국의 동화입니다. 중국아이들의 넋을 사로잡았 던《사자왕》에서 사자왕이 한번 포효하면 작은 흰토끼는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을 놓는습니다. 이 동화는 동물세계의 잔혹한 진실을 곧이곧대로 반영하고 있지요.
사자왕의 적라라하고 후안무치한 강권변호가 미국의 이미지이며 미국인들의 사유방식이고 인생태도입니다. 세계와 대화할 때 도탄과 핵폭탄을 휘두르며 오직 힘, 자체가 리론의거이며 엄연한 진리로 되고있어 자기네만 세계질서와 자유와 민주, 평화를 지키고 순종하지 않는 나라는 작은나라라도 위협도발이며 세계질서를 파괴한다고 강변합니다.
오직 승냥이만이 승냥이의 승인을 받고 사자만이 사자와 공존할수 있는 이 세계 입니다. 토끼는 승냥이앞에서, 양은 사자앞에서 아무발언권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의연히《흰토끼》를 흔상하며 최후승리를 믿어마지 않는 민족이라면 사자왕을 숭배하는 대서양건너쪽에 코가 큰 민족앞에서 감히《아니!》라는 말을 감히 번지지도 못할것입니다.
인류의 력사는 인간의 지혜와 예지를 앞세워 벌린 일이 아니라 힘과 힘의 대결로 밀고밀리며 기록한 승패의 력사가 아니던가요? 어떻게 시비하든 자연의 생존법칙인 양육강식, 우승렬패, 이것이 절대지배의 권리로 되여진 인간세계이고 동물왕국이기도 합니다. 국제사회도 법과 도덕, 인도주의, 리성은 단변주의를 내흔드는 강권앞에서는 너무나 창백합니다. 하긴 인간도 역시 역어빠진 동물일뿐이니까요.
오직 힘센자만이《진리》의 외투를 입고 구세주의 월계관을 쓸수 있을뿐이요 정의란 약자의 막연한 기대치이고 언제 부러질지 모를 정신지팽이였을뿐입니다. 인류는 문명을 부르짖었지만 피는 피대로 흘렀습니다. 미국의 이라크침략도 아프카니스탄점령도 이스라엘의 레바논침공도 다 강도론리의 체현이지만 어느 나라도 아니라고 거부하지 못하니 힘이란 얼마나 위대한 것입니까?
총명한 모략은 문맹자의 손에 있는 핵무기보다 못한법입니다. 지식과 모략이 더는 긴요하지 않으며 정의와 도의가 납함할 자리가 없게 되였습니다. 강자의 론리는 곧“힘의 숭배”입니다. 어느 국가, 어느 민족군체이든 강대해지는 길이 살아남는 길이라는 다른 말입니다. 엎드려 말하는것은 누구도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가슴을 펴고 서서 대방을 정시하며 말할수 있어야 합니다.
강대한 문명이 없으면 자유로운 인생이 있을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야만적인 무차별폭격에도 감히 큰소리 한번 쳐보지 못한 레바논정권이 이를 너무도 잘 보여주 었습니다. 소위《힘》은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을 억제할수 있는 힘이 되고있습니다. 지혜가 정의와 손잡으면 창조를 낳지만 악과 손잡으면 비극을 낳을수밖에 없지요.
눈감고 아웅하는식으로 평화요 민주요하는 미사려구를 흘리며 지구촌 촌민들을 롱락하고있는 미국의 강도론리가 곧 진리입니다. 강자에게는 시행착오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장차도 양육강식의 법칙은 의연히 무수힌 양들앞에 군림할것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지혜와 승리를 자랑하지만 철두철미한 악의 실천자로서 웃으면서 살륙하고 파괴하고있으며 기아와 질병을 초래하는 만행을 저지르고고있습니다.
인류는 동물이 되지 않기 위해 자연생산법칙을 문화법칙으로 만들어 그 규범대로 인간답게 살아갈 날이 있을가요? 오직 강자가 되는것만이 생존법보가 된 현실세계에서 사자가 살찌는것은 별로 구애될것이 없지만 만약 돼지나 양이 살찌는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라고 말한 로신선생의 말은 도처에서 실증되고있다. 나는 양이지만 이 세계의 모든 인간들을 향해 웨치고 싶습니다.《인간들아, 맑은 정신으로 돌아가라.》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