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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절 현대시론
1. 현대시의 의미
현대시란 20세기라는 세계적상황에 수반하여 타나난 시를 통털어 이르는 말이다. 세계적정신적상황이란 니체의 사상과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등에 지배된 철학사유정황을 말한다. 20세기 이전까지 인간의 정신상황을 투시하며 흐르던 합리적사고방식의 심연에서 마침내 허위를 독파하게 되였을 때 시인들은 현대성이라는 말과 만나게 되였다.
현대파시의 경우, 넓은 의미에서는 제1차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나타난 상징주의, 미래주의, 다다이즘 등 여러 리즘을 포함하는 시들을 현대시라 부른다. 이런 시들은 세기말의 대표적시의 양식이였던 상징주의의 변용이거나 거부를 그 특성으로 한다. 이런 점에서 반랑만주의가 곧 주지주의라고 하였다.
광의적주지주의는 서구문명의 경우, 르네쌍스시대를 기점으로 종교개혁후 랭보의 의식 및 20년대 시운동의 공통한 특질을 지향해 왔다. 그것은 결국 죽은 인습의 손아귀에서 해방되였음을 의미함과 동시에 전통, 신념, 의미의 상실을 의식화하는 개념이였다. 협의적의미의 주지주의는 시적인습에 대한 저항에 더 큰 비중을 두었는데 감정보다 지성을, 청각보다 시각을, 불명료보다 명료와 정확성을 강조한, 이름 그대로의 주지주의인 상징주의 및 이 주의에 영합하는 시들을 의미하였다.
19세기말 시학의 개념은 차차 달라지기 시작하였는데 쉘리나 말라르메나 발레리에게 있어서는 “시인이 꿈꾸는 시의 리상”을 의미하였다. 상징주의시인 들이 그러했는바 20세기에는 엘리어트와 파운드같은 시인들에게서는 상상력과 감정의 시학으로부터 구성의 법칙과 기술적책략의 시학으로 돌아가는 경향이 나타났다. 1950년대말기 현대시의 흐름에 파국적인 돌변이 일어났는데 바로 후 기주지주의, 일명 반주지주의라는 신주지주의 현대파시가 나타났다.
그러나 미국의 당대 문학비평가 M. H.에이브럼즈(M. H. Abrams)에 의하여 문학에 대한 모든 론의가 모방론, 실용론, 표현론, 형식론으로 규획되면서 작품과 대상, 작품과 독자, 작품과 작가, 작품자체의 내적관계에 따라 시를 론의할수 있는 새로운 시각이 제시되였다.
모방관점이란 원래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나타난것으로서 후에 복합개념으로 쓰인 문학관념이였다.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 세계에 사물들은 실상이 아니라 허상으로 나타난다. 수면이나 거울에 비치는 영상 혹은 훌륭한 예술작품의 세계가 이 범주에 든다. 결국 예술세계는 본질의 세계도 현상의 세계도 아닌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모방적관점에서 시는 자연을 반영하는 거울에 비유된다. 표현적관점에서는 시가 시인에 의해 새롭게 조합되는 하나의 대상이며 반드시 독자에게 어떤 실제적효과를 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시를 자연이나 시인의 기술적측면 혹은 지식적측면에서 론의되지 않고 시인의 창조적정신능력이 직접적으로 표출된 시인의 내면세계가 주요한 론의대상이였다.
한편 당시의 문단을 지배하던 신고전주의시론에 불만하여 제기되고 후에 랑문주의문학의 골격이 된 영국의 랑만파 시인 윌리엄 워즈워즈의 견해는 근현대적이였다. 그는 자기의 ≪서정민요집≫서문에서 시를 고요속에서 회상되는 강력한 감정의 자발적류출이라고 정의했다. 이것을 자발성시론이라 하였다.
류출이란 흘러넘치는다는 말그대로 당시의 직접적진술이라는 용어와 함께 모방적 관점과는 상반되는 관점이였다. 그는 시인은 시인들만을 위해 시를 쓰지 않고 인류를 위해서 쓴다고 했다. 시인은 우주속에 나타나는 현상으로서의 의지와 격정을 관조하기때문에 우주적인 격정을 창조한다고 했다. 시의 근원은 이제 더는 외부세계에 있는것이 아니라 시인 자신속에 있다는 표명이다. 이는 보다 현실적이고 진보적인 주장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하여 시가 정서의 자발적류출이라는 워즈워즈의 정의에서 시인의 내면성이 더욱 중시되였고 후에는 영국의 철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의 독백시론으로 정립되였다. 그러나 영국의 비평가 코울릿지(Samuel Taylor Coleridge)에게서 시는 감정이나 보편적욕망의 표현이 아니라 시인의 종합적이고 마술적인 능력 즉 상상력의 산물로 요약되였다.
쉘리에게서는 시인은 비록 비리성적인 상상력에 의거한다해도 그 상상력을 통해 일상 세계의 뒤면에 도사리고있는 절대관념의 세계와 직접 접촉할수 있기에 실제에도 도달할수 있다고 하면서 시인은 은유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며 존재, 자각, 표현관계에서 나타나는 진선미를 리해하는 자로서 이 진선미는 어떤 경우에도 “파괴할수 없는 질서의 세계”이기에 이를 표현하는 시인은 새로운 세계의 립법자요 문명사회의 건설자이며 미래에 대한 예언자라고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시란 영원한 진리로 표현된 인생의 이미지이다.
쉘리는 독자를 보이지 않는 음악멜로디에 매혹된 사람들로 규정했으며 시인은 하나의 나이팅게일(새이름)과 같은 존재로 보았다. 그는 어둠속에 앉아 향기로운 목소리로 자신의 고독을 즐기기 위해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시의 근원은 이제 더는 외부세계에 있는것이 아니라 시인속에 있음을 표명하고있다. 그리고 시로써 구체화되는 요소들인 시의 제재는 시인의 감정이고 시는 시인으 감정을 표현하는것이였다.
20세기 30년대 중국에서 산생된 현대파시는 보편적으로 프랑스의 상징주의시의 계발과 영향을 받은것이였고 동시에 리금발(李金发)을 대표로한 20년대 중국 상징파 의 모종 예술추구를 계승한것이였다. 30년대의 중국현대파시가 특별히 추구한것은 시창작에서 총체적으로 산생된 몽롱미였고 기특한 관념과 번다한 이미지결구시의 내함이였다.
현대파시인들은 특유한 청춘의 병태적심리로 혼탁한 세상에 대한 애탄과 불만, 항쟁심리를 표현하였으며 인생의 허무와 적막감 망연자실을 토로했다.《현대》,《신시(新诗)》《소아(小雅)》등 잡지들이 당시 현대파시인들의 주요한 진지였다. 대망서(戴望舒)가 30년대 중국의 “현대파시의 대표”였다. 그는 당시 서구의 문단을 한창 휩쓸던 상징주의와 모더니즘 등의 영향아래 나타난 현대파시를 이끌었다. 대망서는 서구의 각종 문학조류와 전통문학을 가장 지혜롭게 조화시킨 시인이라 칭송한다.
2. 현대시의 양상
모노 스피어즈는 자기의 주지주의문학론 ≪디오니소스와 도시≫에서 현대사회의 특성을 “단절”이라는 말로 요약했다.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 인간과 사회의 관계, 나아가 인간과 신의 관계마저 그렇다고 한다. 이런 현상을 “소외”라고 불렀다.
현대인들이 보여주는 삶의 단절현상 혹은 소외현상이 현대시에서 어떻게 표출되는가? 현대인이 서있는 자리가 단절의 공간이라면 그 공간을 시인들은 어떻게 인식하고 형상화해야 하는가? 현대시속에서 단절의식은 스피어즈는 대체상 여섯가지 류형으로 제시한다.
첫째로 인간과 자연사이에는 어떠한 련속성도 없다는 인식을 주제로 한 형이상학적단절이다. “특히 예술의 경우 유기체와 무기체의 단절, 곧 인간과 우주의 단절은 자연 공포라는 심리적공포를 빚고 이러한 심리적공간을 견디기 위한 예술양식으로서 소위 추상예술을 낳는다.” (김재근 역 “휴머니즘과 종교적태도”≫에서 재인용함)
두번째 단절은 심미적단절이다. 심미적단절이란 예술과 인생사이에 어떤 련속성도 없음을 의미한다. 19세기만 하더라도 시인과 시의 화자 즉 현실적자아와 허구적자아사이에는 다른 단절이 없었다. 한수의 시에서 노래하는 자아, 시의 화자는 그대로 현실적자아는 곧바로 시인이였다.
그러나 19세기말 시인인 보들레르에 이르러서 현실적자아와 허구적자아의 분렬이 나타났다. 시인과 시적자아의 단절이 나타난것은 많은 시인들이 예술과 인생, 시와 현실사이에 극복하기 어려운 심연이 가로 놓여있음을 이 시대에 와서 똑똑히 깨달았기때문이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 인생을 모방한다고 말했지만 보들레르에 와서는 이미 예술과 인생사이에는 어떤 관계도 없게 된다. 예술과 인생이 단절된것이다. 때문에 그가 모방하려 한것은 인생이나 현실이 아니라 어떤 인공락원, 그야말로 도취와 꿈과 상상의 공간이였다.
나아가서 이러한 단절의식은 시인자신의 경우 자아가 두개로 분렬된다는 아픈 인식을 동반한다. 현대인의 자아분렬은 심미적단절의 측면에서는 현실적자아로서의 시인과 시적자아로서의 화자가 서로 무관하다는 인식을 토대로 하고있다. 리상의 ≪거울≫에서 보여주는 세계가 어떻게 시화되고있는가를 보기로 하자.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라오
내握手도받을줄모르는—握手를모르는 왼손잡이라오
이 시에서는 거울은 현실적자아가 분렬됨을 나타내고자 하였으며 거울밖에 자아와 거울속의 자아를 그리고자 한다. 그러나 단절을 꾀한 인위적인 리해의 장벽만이 독자를 마주한다.
네번째 류형은 시간적단절이다. 시간적단절이란 전통적시간관념에 대한 파괴를 의미한다. 20세기에 와서 많은 시인들이 시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것은 계기성으로서의 시간이 아니라 동시성으로서의 시간, 시간의 공간화가 아니라 시간ㅡ공간의 상호확신이라는 개념으로 드러난다. 동시성 시간이란 과거ㅡ현재ㅡ미래의 계기적질서의 파괴를 의미한다. 리상의 ≪선에 관한 각서5≫가 이런 시간관념을 보여주고있다.
未来로달아나서过去를본다, 过去로달아나서未来를보는가,
未来로달아나는것은过去로달아나는것과同一한것도아니고
未来로달아나는것이过去로달아나는것이다. 扩大하는宇宙를
우려하는者여, 过去에살으라. 光缐보다도빠르게未来로달아나라.
다섯번째 류형으로 심리학적단절이다. 심리학적단절이란 소위 심리세계가 분렬됨을 의미한다. 심리세계가 분렬된다는것은 한 인격체로서의 자아가 스스로의 심리적동일성을 상실함을 의미한다. 시의 경우 감수성의 통합은 하나의 훌륭한 시적이미지가 보여준다.
여섯번째 단절의 류형으로 력사적단절이 있다. 력사적단절이란 반역주의적세계관을 뜻한다. 반역주의란 세계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을 등진 새로운 인식태도라 할수 있다. 지금이 바로 최후라고 인식하는 반역주의적태도는 흔히 종말론적사상 혹은 신화주의적구조속에서 파악하며 따라서 영원한 삶의 원형을 현재속에서 해독하고 그럼으로써 삶의 고통을 포용한다.
벌판한복판에꽃나무하나가서있소. 近处에는꽃나무가하나도없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를热心으로생각하는것처럼热心으로
꽃을 피워가고있소.
이 시는 영원한 귀양살이 땅에 한그루 나무가 있고 그 나무의 한가지에 달이 걸려있다고 노래한다. 그러나 이런 감상력은 아무나 가지는게 아니고 전문 현대시를 연구하는 전문가나 가능하다. 해석은 과학적인식에 대한 도전으로 수용된다지만 수수께끼를 푸는것같다.
현대시의 이미지가 지성과 감성을 융화시킨다는것은 곧 꽃나무가 시의 흐름속에서 하나의 비유, 이미지가 될 때, 이미 거기에는 지적의미와 정서적의미 혹은 지적의미와 감성적의미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여 공존하고있음을 의미하며 바로 여기에 전통시가 미칠수 없는 시적매력이 있다는것이다. 그러나 공상가적인 시인의 일종 비현실적인 “문화적리념”일뿐이다.
3. 현대시의 구조
상상력을, 심미적능력을 지적륜리적능력보다 우위에 놓고있는 디드로에게 있어서 시란 애초부터 대상에 대한 진술이 아니며 자유자재한 은유와 아울러 음향을 사용하여 자신을 극단속으로 내던질수도 있도록 허용받을 감정의 운동이다. 이런 견해는 보들레르의 시에 의해 실현되며 “추상시”라고 부르는 시의 현대성의 근거로 된다.
랑만주의시에 대한 해석을 목표로 미래의 시문학이라는 개념을 구상한 노발리스에게 있어서 시는 일상의 삶에 대항하는 방벽이며 예감과 마술을 그 본질로 하는 시적인간들이 관습의 세계에 맞서서 노래하는 저항이다. 그러므로 시어는 전달이라는 목표가 없는 자족적인 언어가 되며 수학공식과 같이 스스로의 세계를 만들고 그 자신으로서만 작용한다.
여기에서 현대시의 주요특징인 공작성의 개념이 생긴다. 정감이 아니라 중성적인 내면성, 현실이 아닌 상상력, 세계의 통일성이 아닌 파편성, 이질적인것들의 혼합, 혼돈, 모호함과 언어마술에 의한 매혹, 익숙한것을 낯설게 만드는 수학에 비유할만한 랭철한 작업방식, 이러한것들이 보들레르의 시론, 랭보, 말라르메와 현대시인들의 작품의 토대를 이루는 그 구조이다.
시인 보들레르의 특성은 무엇보다 시와 개인의 심정을 철저히 분리시켰다는데 있다. 이른바 “탈개성화”라는 미래의 발전방향은 보들레르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였다. 하여 ≪악의 꽃≫에 수록된 대부분 시들의 주제는 보들레르 자신의 경험적자아가 아니라 오히려 현대성을 대표하는 중성적인 자아가 시창작의 주체가 되였다. ≪악의 꽃≫은 이러한 방식에 따라 건축공학적으로 구축되였으며 현대시에서의 형식의 힘을 극도로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말라르메는 예술적상상력의 본질은 현실의 탈형상화에 있다는 보들레르이후 정립된 견해를 총화지으면서 예술적상상력에 존재론적토대를 해명한다. 개념적인 설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절대적존재 혹은 무를 가장 단순한 사물들에 각인시켜 수수께끼를 만들어 버림으로써 낯선 령역으로 빠져든다 할지라도 령혼이 그앞에서 전률하게 되는 말과 형상에 의한 노래인 시가 탄생한다.
이들 시인들의 창작행위는 근대화과정에 대항하는 개인적인 생산양식 즉 물량화(物量化)가 되여가는 세계속에서의 질의 회복이고 합리화된 시장체계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할수 있는 감정의 피난처를 마련함이며 삶의 파편화와 개인의 단자화에 대한 지향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그 과정의 내면화이기도 하다고 피력한다. (장희창역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의 구조≫서론에서)
구조주의 독창성을 몇개 면에서 고찰할수 있다. 첫째로 언어라는 기호를 형성하는 두요소인 개념과 음성상징가운데서 음성상징만을 분리시키는데 이는 소쉬르에 의하면 언어적기호는 개념과 음성상징이 결합됨으로 성립되지만 이 두요소는 자의적으로 결합된다는것이다. 이것이 소쉬르의 언어적제1원리이며 음성상징은 오직 시간적으로만 전달되는데 선험적이라고 한다.
둘째로 음성상징 상호간의 조직원리를 규명하면서 비언어적기호체계를 탐구대상으로 하지만 이러한 비언어적모델이 우선이다. 셋째로 기호체계 즉 문학과 신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언어분석이 음운론과 통사론적류형이다.
구조주의에는 동일성구조, 상대성구조, 비동일성구조, 초현실주의적구조가 있는데 동일성구조에도 은유와 환유, 두류형이 있다. 은유와 환유에서 전자는 비교성을 내포하지만 후자는 접촉성을 내포한다. 은유가 나타내는 비교성에서 류사성이 본질이다.
동일성구조란 시적구조의 기본원리인 은유적구조가 나타내는 첫번째 국면을 말한다. 동일성의 구조를 기호로 나타내면 곧 A=B이다. A는 은유를 구성하는 원관념 혹은 취의에 해당하며 B는 보조관념 혹은 매체에 해당한다. 상대성구조란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변증법적구조를 뜻하며 은유적구조가 나타내는 두번째 국면을 지시한다.
례: 꿈에서 본 몇집밖에 안되는 화사한 소읍을 지나면서
아름드리 나무보다도 큰 독수리가 날아가는것을 보면서
래日에 나를 만날수 없는 未来를 갔다.
소리없이 출렁이는 물결을 보면서 돌뿌리가 많은 广野를 갔다.
동일성구조란 은유적구조가 나타내는 세번째 국면을 지시한다. 낱말이 어떻게 선택되여 결합되는가를 리해하는 또 다른 방법으로서 이때 낱말은 비류사성 혹은 상반성의 원리를 기본으로 하여 선택되며 발산이라는 원리를 기본으로 결합된다. A≠B이다.
초현실주의적구조란 비동일성구조를 나타내는 가장 전형적인 시의 류형을 찾아내는것이다. 초현실주의시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명제는 고도의 전압을 나타내는 낱말의 발견이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것은 낱말들을 설명적인 련상이 아니라 계발적인 련상을 떠올리게 하는것인데 이것이 초현실주의시인들에게 있어서 시적이미지를 빚는 기본구조가 된다는것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선조인 르베디에 의하면 “서로 어떤 론리적관계도 없는 둘 혹은 그 이상의 요소들을 결합시킴으로써” 더욱 괴상한 이미지를 창조하며 오직 내면으로만 파악되는 두개의 조화될수 없는 사물들이 자발적으로 만남으로써 이루어지는 이미지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초현실주의적이미지의 가치는 류사성이나 등가성이 아니라 한 사물이 환기시킬수 있는 일련의 련상을 시인이 탈취함으로써 구성된다고 한다. 최초에는 황당한것같지만 시인은 궁극적으로 시로서의 진실을 드러나게 한다는것이다.
현대시의 류형과 이미지화를 살펴보자. 시의 속성은 곧 시적대상과 시인이 혼연일체가 되게 하는 근본요소이다. 시의 속성속에 지적이고 정감적이며 의미로움으로 현연되는 그 주체적견해와 색채의 강도와 객체성향에 따라 주지시(主知诗)와 주정시(主情诗)와 주의시(主意诗)로 분류되고있다.
시적대상에서 느끼고 전률하게 된 시핵의 폭발이 시의 생명이다. 그러나 주지시에도 정서가 포함되고 의지가 포함된다. 그것은 다시 등가성과 상이성으로 나뉘여진다. 결국 시적구조는 언어행위의 류사성, 상이성, 동의성, 반의성이며 결합기준은 린접성이다.
4. 현대시의 류형
1) 순수시
시에서 비시적인 요소들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시적인 차원을 개척하고자 한 시 즉 가고자 하는바가 절대적인 차원에 도달하고자 하는데 있다고 하여 절대시라고 한다. 발레리는 모든 예술이 음악의 상태를 동경한다는 전제아래 시로 완전히 음악화함으로써 순수시, 절대시 리념을 세우고자 했다.
좁은 뜻으로는 프랑스의 상징주의자들이 말하는 “의미가 완전히 배제된채 순수한 소리의 음악적 암시적 효과만이 있는 시”를 가리킨다. 넓은 의미의 순수시란, “일체의 사회적, 도덕적, 종교적 목적의식을 배제하고 오직 아름다운 서정의 세계만을 추구하는 시”이다.
2) 이미지즘(写象主义)
기실 이미지즘도 순수시의 한 례로 말할수 있다. 즉 상징주의자들이 순수시에 도움이 된다고 여겼던 모호성과 시사성을 이미지스트들은 구체적인 이미지를 재현하는데 있어서 최고의 정확성에 대한 요구에 반하는것으로 보고 시의 본질을 구체적이미지에 두고 다른 특성들은 불필요하다고 본 점이 그것이다.
이미지파시는 간결, 집중을 중시하며 이미지로 감정을 약속시키면서 이미지로 사고하고 감각한다. 그가 추구하는것은 시인의 주객관을 시속에 긴밀히 결합시키는것 즉 응결로 시이미지를 창조하는것이다. 전통시론의 관점에서 시의 직접적인 목적은 진리의 전달 혹은 쾌락의 전달이다. 시가 지향하는 진리는 쾌락과 결부되며 과학, 력사같은 산문세계에서 획득할수 없는 그런것이다.
보들레르는 시의 목적은 진리나 도덕을 노래하는것은 아니라고 선언하였다. 이런 시에서 이미지는 곧 시의 령혼과 육체의 결합이지 “복장”이 아니다. 이미지는 시에서 문장속의 수사의 작용처럼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그런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완정한 유기체로서 곧 신경이고 대뇌이며 사지이고 혈육이면서도 령혼이기도 하다.
코울릿지는 “이미지는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 자체로는 시인의 특징이 되는것이 아니다. 이미지가 독자적인 본능의 증거로 되는것은 훌륭한 정열 또는 그 정열로 잠깨어진 일련의 사상 혹은 이미지 여하에 따라 시, 그 자체가 변할만큼 그 중요성을 가지고있을때뿐이다.”라고 주장하고있다.
이미지시가 이미지로 사고하고 감각하기에 “호흡하는것은 사상이고 사상인즉 신체”라고 한다. 감성과 사상은 유기적으로 결합되여 감성적매력과 리성의 빛발로 차넘친다. 이미지형성은 리성으로 실현하는것이 아니라 주요하게 직각으로 실현한다. 환언하면 론리사유와 개념으로 시를 쓰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미지는 생활로부터 출발하여 특징적인 형상을 찾고 작자의 주관적사상감정을 주입시켜서 시적이미지를 형성한다. 시인은 직각으로 미를 포착한다.
이미지파시는 상징시의 초기단계이지만 그것의 출현은 특수한 공적이 있는바 일부 정교하고 이미지가 새롭고 기이한 단시들을 써낸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설치한 계률에 오히려 속박당하여 주관감수를 토로하지 않고 현실을 건드리지 않을것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왕왕 어떤 의미적인 무게가 없고 짙은 생활내함이 부족하게 된다.
이미지는 어떠한 정형하에서든 하나의 사상이 아니라 융화된 사상으로서 활력을 갖고있다. 이런 복잡한 이미지의 류동과 침투, 융합에서 감각, 정서, 잠재적의식, 몽환경같은 이미지의 포착을 너무 강구하기에 상규적으로 시를 리해하던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난해시로 만든다. 이미지파시인들에게는 “공간, 시간”이 일종 장애이고 이미지형성이 오히려 “공간, 시간”의 해방이라고 간주하는데 독특한 창조적일면이 있거니와 자체의 국한성도 가지고있다.
3) 주지시(主知诗)
주지시란 시인의 창조본연의 미적가치생산의 원천과 기준이 지성(知性=理性=合理性)에 의하여 생성된다고 보면서 그 미적가치 추구욕의 목적성취나 목표달성이 지성에 의하여 가능하며 정서적인것이나 의지적인것은 부수적인것으로 보고 그 사물속에 잠재해 있는 새로운 가치(진리)를 생산하거나 발견하여 그 개체 사물의 이미지를 새롭게 가미하여 감명과 감동을 주는 시를 말한다.
주지시는 감각과 정서보다 지성을 강조한다. 시는 감정만으로는 되지 않고 소재와 언어를 처리하는 지적능력이 함께 작용해야 하므로 모든 시는 어느 정도 지적인 요소가 들어있다고 할수 있으나 그중에서도 특히 지적요소가 강한 작품이 있을수 있는데 이는 주정시에 대립되는 개념이다.
4) 주정시(主情诗)
개인의 주관적립장에서 감정이나 정서를 노래한것을 주정시라 한다. 주정시는 인간의 지성이나 리성보다도 감정 또는 감성을 움직이게 하는 시로서 서사시도 이에 속한다. 서정을 지고무상의 시라고 보는 시인이 많다. 김소월, 서정주, 박목월 등이 대표적서정시인이다.
창조본연의 리상세계는 어떠한 존재이든 생명체존재로서 상호간 심정으로 얽혀져있으며 이 얽혀진 심정의 인연의 끈으로 주체와 대상이 상호간의 사랑과 아름다움을 주고받으며 만물만상이 혼연일체화되여 나름대로의 감성의 증폭에 따라 기쁨을 나타내고있는 세계를 말한다. 때로는 바위도 웃고 나무도 웃으며 독자도 웃고 개구리도 기뻐서 뛰는 그런 마음속에 이루어진 자연세계를 말한다. 정(情)으로 인해 모든 존재가 생성, 발전, 변화하게 된다는것이다.
5) 주의시(主意诗)
주의시란 피조세계의 삼라만상의 개체속에 존재하는 지, 정, 의의 실체적속성중에 감정이나 지성이 아닌 의지를 존재작용의 주체가 되는 근본원리로 느끼고 창작된 시를 말한다. 지(知)란 사물의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여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고 정(情) 이란 그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여 소유하고싶은 사랑의 마음이 일어남이요. 의(意)란 그 소유욕을 도의대로 시적자기화의 완성이다
20세기 유럽의 현대시는 한마디로 수수께끼와 모호함으로 특징지어진다. 시의 모호함이 독자를 혼란시키는것만큼이나 매혹하며 갈피를 못잡게 하지만 그 말의 마법과 신비스러움에 강제적으로 끌려간다. 엘리어트는 시는 리해되지 않고서도 전달될수 있다고 하였다. 이런 불가함과 매혹의 만남을 불협화라 부르는바 불협화적인 긴장은 현대예술 일반의 목표가 되였다.
현대시에서 모호함은 고의적인것이다. 보들레르는 “리해되지 않는것에는 그 어떤 명예가 있다.”고 말한다. 몽타넬리는 더욱 랭정하게 말한다. “시의 본질이 리해시키는데 있다면 그 누구도 시를 쓸수 없으리라.” 이처럼 현대시를 리해하려는 자에게는 무엇보다 시의 모호함에 자신의 눈을 익숙하게 하라는 충고외에 달리 해줄 말이 없다고 한다. 현대시들에서 우리는 구체내용의 전달로부터 가능한 먼거리를 유지하려는 경향을 목격하게 된다.
이렇듯 현대시는 사물 및 인간이라는 현실과의 접촉에 있어서 그것들을 묘사한다든지 또는 익숙한 시각과 느낌의 따스함으로써 다루던 방식을 포기해버렸다. 현대시는 그것들을 낯설게 만들며 변형시켜 버린다. 하여 시에 의해서 현실적, 공간적, 시간적, 객관적, 그리고 정신적인 질서로부터 해방되려 한다.
현대시는 종래의 의미와 인간성, 체험, 감상, 심지어는 시인 자신마저도 도외시한다. 시는 심정과는 다른 무엇이며 개별적인 감각들로 더 이상 분해할수 없는 순수한 주관성이 발하는 여러겹의 목소이자 무제약성이라 한다. 시창작에서 오랜 기법인 비유와 은유는 새로운 방식으로 다루어진다.
이를테면 자연적인 비유의 고리를 우회하고 객관적, 론리적으로 결합할수 없는것들사이의 비실제적인 결합들이 아무 주저심이 없이 나름대로 시도된다. 그런 시는 구체적인 전달내용은 없지만 어쨌든 언어이기에 그것을 대하는 사람을 매혹시키면서도 혼란스럽게 만드는 불협화음적인 결과를 안겨준다.
시의 완벽성은 명랑한 령혼에, 그 아름다운 형식은 련관의 영속성에 토대를 둔다. 그런데 이제 다른 류형의 시들이 나타남에 따라 다른 범주들이 제시되였다.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부정적인 범주들이였으며 게다가 내용적인 차원이 아니라 형식적인 차원의 범주들이 점점 우세한 지위를 점하게 되였다.
례하면 불안, 혼돈, 품격절하, 얼굴찌푸림, 진기함의 지배, 모호함, 격렬한 상상력, 음울과 흐릿함, 극단적대립으로부터의 분렬, 무에 대한 집착…그것에 뒤이여 방향성상실, 익숙함의 해체, 상실된 질서, 불일치, 파편적인 전도의 가능성, 라렬문체, 탈시화(脱诗化)된 시, 파괴된 섬광, 단절적인 형상, 야수적인 돌발성, 탈구, 난시적관점, 낯설게 하기, 그리고 스페인 시인 다마소 알롱소의 “지금 우리의 예술을 부정적인 개념들로써 명명하는것외에는 달리 다른 보조적수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 등등이다.
시인은 말을 마치 건반처럼 사용한다. 창작은 테마상으로 우연에 의존하며 방법상으로는 대수학적추상성에 의존한다. 하여 정감이 아니라 중성적인 내면성, 현실이 아닌 상상력, 통일성이 아닌 세계의 파편, 이질적인것들의 혼합, 혼돈, 모호함과 언어마술에 의한 매혹, 익숙한것을 낯설게 만드는, 수학과 어깨를 견줄만한 랭철한 공작, 이런것들이 현대파시의 토대를 이루는 구조이다.
18세기에 리론의 서곡을 울린 디드로는 시에서의 음향역할이 회화에서의 색채의 그것과 같다고 생각하고 둘사이의 공통점을 “리듬의 마술”이라고 칭했다. 이것은 객관적엄밀성보다 시각, 청각, 상상력에 더 깊이 호소한것이다. 명료함이란 오히려 해로운것이기때문이란다. 그러면서 “시인들이여, 모호해지라”고 웨치는데 그 의도는 시로 하여금 어둡고 요원하며 경악스럽고 비밀을 자아내는 대상들로 향하게 하는데 있다.
말라르메의 시의 본성을 감정 및 령감의 배제, 지적으로 통제되는 상상력, 현실성의 멸절 및 론리와 열정의 규범적질서파괴, 언어의 충동력조절, 리해가능성 대신에 암시, 문화의 종말기에 속한다는 의식, 인문주의 및 전통과의 단절, 탁월성의 표지로서 고독, 시의 창작과 시에 대한 성찰을 표현하려 하였다.
그의 시는 꽃병, 까치발, 테이블, 부채, 거울 같은 단순한 사물들을 소재로 한다. 이들은 탈사물화되고 부채속으로 말려들어가 불가시적인 긴장의 흐름을 담는 그릇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표상에 의해서 사물들의 의미는 예기치 않게 증대된다. 왜냐하면 저 불가시적인 긴장의 흐름이 그들속으로 파고들기때문이다. 세계의 단순한 사물들은 온통 비밀로 채워진다.
노발리스는 “모든 시작품속에는 혼돈의 미광이 가득해야 한다.”고 말한다. 시창작은 테마상으로 우연에 의존하며 방법상으로는 과도한 명료성의 병을 앓고있는 일상세계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동화의 추상화작용과 일맥상통하는 대수학적추상성에 의존한다.
례를 들면 “록두색의 코고는 소리”라는 표현에서 “록두색”은 청춘의 색채이다. 원래 색채감이 나는 소리는 움직이고있는 생동한 감각을 주기마련이다. 그리고 색채에는 따스한 느낌을 주는것과 차디찬 느낌을 주는것이 있다. 그러나 디드로에게 있어서 시는 애초에 대상에 대한 진술이 아니였다.
노발리스의 리론에 따르면 시는 우선적으로 “소리”에 따르면서 부차적으로 내용을 싣고가는 길을 지시하는 언어자극에서 생겨난다. 그러므로 내용은 더 이상 시의 본래의 실체가 아니며 음향의 힘 그리고 의미를 넘어서 존재하는 떨림을 담는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시는 자유자재한 은유의 창작과 아울러 극단적음향을 사용하여 자신을 극단속으로 내던질수 있도록 허용된 감정의 운동으로 되였다. 시에 대한 리해란 리상적인 경우에 있어서조차 오직 리해로서만 존재할뿐이다. 이에 반해 시와 독자사이의 접촉은 리해의 차원이 아니라 미적인 암시의 차원에서 성립된다.
보들레르의 등장으로 프랑스의 시는 전 유럽의 관심사가 되였다. 다른 랑만주의 주자들과는 다른 류의, 더욱 전위적인 사조들이 보들레르로부터 시작되여 랭보, 베를린, 말라르메를 관통하고있음이 곧 확인되였다. 보들레르와 함께ㅡ시적언어는 이제는 더 이상 시와 구체적인물사이의 통일에서 생겨나지 않는다는 최소한의 의미에서ㅡ 현대시의 탈개성화가 시작된다.
그는 “나의 시의 고의적비인간성”이란 말을 하였는데 그 의도는 시란 인간의 모든 가능한 의식상태, 그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것들을 우선적으로 진술할수 있다는것이다. 유명한 ≪악의 꽃≫의 대부분 시들에서는 자아가 진술의 주체이다. 현대성은 마치 금령과도 같이 그를 지배한다. 보들레르는 자신의 고통이 단순히 자기만의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내용상으로 볼때 ≪악의 꽃≫은 절망, 마비, 비실재로의 열광적인 비약, 죽음에로의 욕구, 병적자극이 유희로 이루어졌다. 보들레르는 형식을 통한 구제라는 말을 자주 한다. 례를 들면 “경악스러움조차 정교하게 표현하여 아름다움이 되게 하고 고통 또한 거기에 리듬과 질서를 부여하여 정신으로 하여금 평온한 기쁨으로 채워지게 하는것은 예술이 가진 놀라운 특권이다”라고 선언하고있다.
보들레르 자신의 본성이 불협화적이여서 부정적인것으로부터 또한 매혹의 대상을 만들어낸다. 이를테면 가련함, 타락, 악, 어둠, 인공성 등의 매력적인 소재들을 서로 포착하는것이다. 이것들은 시를 새로운 방향에로 인도하는 비밀을 내포하고있다. 그것을 밝혀내는것이 현대파시의 미적희열이 된다고하는것이다.
보들레르는 ≪악의 꽃≫을 저항에의 열정적인 욕구, 그리고 증오의 산물로 칭하면서 시가 신경쇼크를 유발하도록 권장하고 독자를 자극시켜 더 이상 리해하지 못하도록 한것을 자랑한다. “한때 기쁨의 무한한 샘이였던 시적의식은 이제 무진장한 고문도구들의 병기창이 되였다.” 시내부의 불협화는 또한 작품과 독자사이의 불협화가 되지만 독자의 심금속에서는 그처럼 감동적이다.
례하면 “더러운 위대성”, “붕괴된 그리고 매력적인”, “유혹적인 공포”, “검고 환한”같은 어휘상의 불협화들이다. 하여 공허한 리상성, 불확정적인 타자, 랭보와 더불어 더욱 불확실하게 되고 말라르메에게서는 무가 되며 그 자체내에서 선회하는 현대시의 비밀성, 이러한것들이 그에 상응하고있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은 결코 모호한 시가 아니다. 그리고 그의 시론은 매우 명료하다. 그리고 후에 곧 대두하게 되는 모호한 시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예전의 시들은 음향을 중시하는 경우에도 결코 내용을 희생시키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음향의 지배가운데서도 그 의미를 증대시키려고 했다. 언어의 음향요소는 암시적인 힘을 보유하고있다. 련상적울림에 동원된 언어요소와 함께 음향은 꿈과 같은 무한성을 열어준다. “잠에 취한 직공이 꿈을 꾼다.”라는 시구는 리해시키려는것 아니라 울려퍼지는 암시이고자 한다. 언어의 내재적인 자극들에 대한 집중이 시의 창작과정 자체를 규정하는것이다.
주제설정이 아니라 이러한 음향요소들로부터 불확정적인 의미가 생겨나는데 그 신비스러움은 말들의 핵심적의미보다는 음향의 힘과 부수적인 의미령역들에 의해 구체화된다. 이러한 가능성이 현대시의 지배적창작원리로 되였다. 시인은 이제 음향의 마술사가 되는것이다. 그것은 비전문적인 독자들에게는 분명 극복할수 없는 일종의 재난이 되였다.
현대시 자체의 반란은 과거에로 향하므로 전통을 파괴한다. 랭보는 “나의 우월성은 어떠한 감정도 가지고있지 않다는데 있다.”고 하였다. 그의 시에서 탈형상화된 현실소재의 모든 구성부분은 보통 감각적특성을 가지는 단어들로 구성된다. 하지만 이런 단어군들은 객관적으로 결합이 불가능한것을 비정상적으로 결합시키기때문에 감각적인 특성들로부터 비실재적형상체로 나타난다.
랭보는 “나의 우월성은 어떠한 감정도 가지고있지 않다는것이다.”라고 말한다. 탈형상화된 현실소재의 모든 구성성분은 보통 감각특성을 가진 단어들로 표현된다. 하지만 이러한 단어군들은 객관적으로는 결합불가능한것을 비정상적으로 결합시키기때문에 감각적인 특성들로부터 비실재적인 형상체가 생겨난다.
그러므로 직관적으로 가능했던 형상들이 현대시에서는 문제로 된다. “거리의 두번 구운과자”, “자신의 배우에 서있는 왕”, “하늘의 코물” 등 이러한 형상들은 현실자체에 존재하는 특성들을 때로는 더욱 예리하게 드러나도록 만들기도 하지만 그 기본방향은 현실을 향하는것이 아니라 파괴의 역동성에 있다. 즉 불가시적인 “미지”를 대변한다고 할수 있는 파괴의 력동성은 형상경계들을 혼란시키고 극단적인것들을 강제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현실성자체를 감각적으로 자극 받고 자극하는 미지의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례하면 하나의 붉은 기발이 “피 흘리는 고기의 깃발”로 지칭되기도 한다. 이런 이미지를 실제로 알기는 어렵다. 또 “별들의 숲에 떠오른 육고기꽃들”이라든가 “목재의 신발을 신은 목동의 시들이 정원에서 으르렁거린다.”든가 “옆방에서 램프가 선회할 때 마치 거울처럼 붉고 검은 도시들의 불결한 진창”이 모두는 감각적현실의 요소들이지만 수축, 생략, 새로운 결합에 의해 초현실성을 획득한다. 하지만 시는 그로써 몽롱시도 아닌 난해시로 되고말았다.
현대시에서 전제적상상력은 공간의 질서를 전도시킨다. 례를 들면 “마차들은 하늘우에서 달린다.”, “호수바닥에 살롱이 있고 드높은 산정에서 태양이 출렁인다.”, “철도레일이 호텔을 통해서 호텔우로 달린다.” 등이다. 그러나 상상력은 또한 인간과 사물사이의 정상적관계도 전도시킨다. “법무관이 그의 시계줄에 걸려있다.”에서처럼 상상력은 이렇게 련관성이 가장 먼것, 구체적인것과 상상적인것을 강제적으로 결합시킨다. 더 례를 든다면 “아침우유처럼 중얼거림, 지난 세기 밤의 중얼거림때문에 죽도록 슬픔에 잠기다.” 등이다.
이런 상상력은 실제 사실들에 부합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더욱 낯설게 만드는 비실재적인 색채들을 창안하는데 이는 독자의 의도와는 별개이다. “푸른 화란냉이, 푸른 암말, 록색옷의 피아니스트들의 록색웃음, 록색의 하늘빛, 검은 달들” 등, 이런 막연한 령역에로 돌진하는 상상력은 오직 단수의 존재물들을 복수로 만들어버렸지만 상상의 결과물이라기보다 조작된 느낌만 준다.
그리고 종종 어휘상의 날카로움, 불협화 즉 이질적인 사실들이나 가치들을 극도로 좁은 언어공간에 몰아넣는 단어군들로 나타나기도 한다. “타르를 마신 태양”, “겨울의 재맛이 나는 7월의 아침”, “구리 종려들”, “비둘기 똥과 같은 꿈들” 등에서 아늑하고 평온한 느낌들은 대개 시어의 종결부에서 갑작스러운 비천한 말들의 조합에 의해 예술미가 차단되고 만다.
시는 시 자체로 보아야 한다는 엘리어트의 선언이 나오자마자 현시대의 문학적리념이 되여 국제적전파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그것은 유감스럽게도 선언자가 죽기도전부터 퇴색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관점을 앞장서서 표방했던 르네 웰렉까지도 종종 깊은 반성을 하였다는 사실은 문학의 전위파들의 인식령역이 얼마나 제한적이였는가를 반증하기도 한다.
무릇 어떠한 시이든지 고안되여 나온 의견이 아니라 하나의 상처에서나 혹은 웃음구멍에서 솟아나온 한수의 노래가 되여야 시로의 존재가치를 가진다. 령감은 언제나 노래하지만 또 어디까지나 해석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대시는 요란하게 인입되였지만 시간의 고험을 겪어내지 못한채 스스로 고독하고 사이비한 이화세계가 되고 말았다.
비록 현대시 선구자들인 랭보와 말라르메에 대한 해설이 수없이 쏟아져 나왔음에도 불구하고는 광범위한 독자층에 수용되지 않고있다. 비수용성이 결국 가장 현대적인 자들의 만성적인 징표가 되여버린것이다. 그것은 현대에 지속되고있는 일종 문학현상으로서 시간의 고험을 겪어야 한다는것을 제시하고있다. 말하자면 현대시의 지향성에만 매료되여서 아니라 력사적측면으로부터 보기보다는 시에서의 접근양식으로 받아들여야 바람직할것이다.
시인이 가장 아담하고 운치있는 존재의 집을 짓는 창조자라고 할 때 역시 언어의 기능을 념두에 두고하는 말이다. 현대시라도 괴이함, 애매모호함에 심취하기보다 시인나름의 관찰과 사색을 시에서 형상화하려 애쓰면서 자연과 고향과 주변의 인물들과의 정서합일을 이루어야 진정 서정시가 독자를 불러들이는 길이고 흉벽을 울리며 공명의 대문을 활짝 열어가는 길이며 시가 살아갈수 있는 확실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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