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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기행
2015년 10월 20일 07시 45분  조회:2778  추천:0  작성자: 최상운
대만(臺彎) 기행(1)
 
 
                     1,  대만유람을 떠나다.
 
          대만하면 익숙히 안다고 하면서도 알지못한다고 곳이였다. 나를놓고 말하면 대만에 대한 지식은 근근히 학생시절에 교과서에서 배운것이 남아 일을 뿐이였다.

         나는 대만관광을 떠나면서 아세아에서 싱가포르, 향항, 대만, 한국이 발달한 네개 룡이란 말은 들있었으나 먼저 대만에 다녀온 사람들은 대만은 그닥지 않으며 볼게 없다고 했다. 정말 대만이 그럴가?  “백문불여일견이라고 이번에 집적 대만을 돌아보니 생각외로 긍정적이 답을 찾았다. 대만은 확실히 경제가 발전하였고 문화의식이 높은곳이였다. 한나라의 경제 발전을 보려면 그 나라가 도시화로 되였는가?를 보면 알수있다. 대만은 일찍이 산업화인 도시를 구축하였었다. 

         201478 1630 연길공항을 떠난 연길- 광주행비행기는 2230분이 되여 광주 공항에 착륙하였다. 광주 공항에서 뻐스를 타고 주숙지인 신세기 호텔로가니 23시30분이였다.

         광주 신세기호텔에서 기분좋게 하루밤을잤다. 이튼날 1020분에 280명의 려객을태운 중국 남방항공기는 서서히 광주 비행장을떠나 고추 대만해협을 건너 1150분이되자  대북 송산 국제 공항에 안전하게 착륙하였다. 비행기에서 내리니 얼굴이 확근해났다. 찜통 더위가 덮친것이다. 섬도의 땅이였건만 그날 대북의 기온은 섭시40도였다우리는 잰걸음으로 대합실에 들어가 몸에 달은 열기를 식히였다.

        대합실에서 뚱뚱한 체구에 이마가 벗겨진 40(38) 되여보이는 남성이 친절히 웃으며 우리들을 반겨 맞아주었다. 그는 자신은 대만 국제 려행사에서 파견한 안내일군 하유례(何維禮)이라 자아소개를 하였다. 우리는 하씨의 안내를 받아 다바(려행뻐스) 올라 대북시로 고추들어갔다.

         하씨는 말도 잘하고 아는것도 많았다. 중국의 력사와 지리에 대하여 통달한 사람이였다. 그는 때로 우리를 향하여 중국 력대 황제중에서 어느황제가 가장 장수했으며 어느황제가 집권기간이 가장 길었는가? 대만이란 이름을 어느 조대부터 가졌는가? 하는 까다로운 질문을 자주 던지였다. 중국력사와 지리에 대하여 안다고 자부 하여온 나도 말문이 막힐때가 많았다. 박식한 하씨를 보고 나는 하선생이라 불렀다.

         대만으로 왔으니 대만에 대하여 알아야 할것 같다. 대만성은 예로부터 중국령토의 부분이다. 중국 고대 력사책에는 한때 대만을 이주라고 하였다. 남송(南宋)시기에는 팽호는 이미 복건로에 속해 있었고 명대(明代)에는 대만이라 불렀다. 대만은 력사상 여러번 외세의 침략을 받았다. 1662년에 정성공이 군대를 인솔해서 화란 침략자를 물리치고 대만을 수복하였다. 청나라 초기에는 대만부를 설치하고 복건성에 속하게 하였다. 1895 중일 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는 대만을 일본에 넘겨주었다. 50년간 일본침략군이 대만을 강점하고 있다가 1945 항일전쟁이 승리후 중국에 귀한하였다. 대만성은 팽호렬도와 나서, 녹도, 팽가서, 조어도, 적미서 크고 작은 80 섬들로 이루어졌다.
 
         대만은
중국의 제일 섬이다. 대만도의 남북 길이는 394킬로메터, 동서의 제일 너비는 144킬로메터이다. 중앙산맥이 남북으로 가로 질렀는데 옥산(玉山) 해발 2997메터로서 중국 동부에서 제일높은 산봉오리이다. 대만은 사계절이 분명한데 열대 아열대 계절풍 기후에 속하여 여름이 길고 겨울이 짧으며 고온에 비가 자주내린다. 평균기온이 섭시22도로서 중국에서 제일 비가 많이 내리는 곳이 하나이다. 대만에는 많은 희귀한 보석이 매장되여 있으며 3000여년자란 홍희수란 고목이 있다. 대만에는 많은 공원과 사원이 있다. 하씨의 말에 의하면 대만의 면적은 3.6만평방킬로이고 인구는 대략 2300만명(자료에는 2228)이라했다. 한족을 위주로 고산족 14개소수민족이 살고있다고 하였다. 대만에서는 두가지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대만의 본지방 말과 대륙에서 사용하는 표준말을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정치적 성향으로 대만에서는 중화대만성이라 부르고 대륙에서는 중국대만성이라 부른다고하였다
 
                              2, 대만성의 수부 대북시
 
           우리 일행은 송산 비행장을 떠나 대북시(臺北)중심으로 들어갔다. 대북시는 대만도의 북쪽에 있다하여 대북이라 불렀다. 대북시는 대만성에서 제일 도시로서 대만성 소재지였다. 전시의 면적은 272.2평방킬로메터이고 인구는 280여만명으로서 대만인구의 13.4프로를 점한다. 대북시는 예전에는 고산족이 집거구였다. 이곳은 땅이 비옥하고 해운이 편리하여 도시 건설이 급속으로 발전하였다.

         명나라의 명장 정성공이 화란 식민주의자들을 물리치고 대만을 수복할때 이곳으로 상륙하였다. 청나라 광서 원년에 (기원 1875) 대북부를 이곳에 두었다.

         우리는 대북시에서 유명한 101 빌딩을 먼저 찾아갔다. 대만의 자랑인 101빌딩은 101층에 높이 508메터로서 아세아에서 말레시아 쌍탑 빌딩 다음으로 높은 건축물이였다. 실제적으로 철탑 높이를 계산하면 아세아에서 제일 높은 빌딩이라 할수있었다. 하늘을 찌르듯이 높이 솟은 빌딩은 밑에서 처다보면 아찔하여 뒤로 넘어질것 같았다. 빌딩안에서 엘리베터를 타고 89층까지 5분이면 올라간다. 89층에서 층층대를 따라 올라가면 90층까지 올라 갈수있다. 90층에는 전망대가 있었다. 소개에 의하면 101 빌딩은 높이가 508메로서 자연적으로 건축물이 좌우로 조금씩 움직인다고 했다. 움직이는 것을 조절하기 위하여 빌딩 88층에 무게가 400톤에달하는 원심 조절기구를 안장하여 놓았다. 아무리 바람이 세차게 불어도 원심기가 드놀지않게 조절하여 주고 있었다. 90 전망대는 널직하여 백명 사람들을 용납할수있고 전망대에서 대북시의 전체를 환히 볼수있었다. 대만사람들은 빌딩을 대만의 상징물로 간주하고 있었다. 빌딩 엘리베터의 속도는 세계 일류라고 자랑하고 있었다.
         
        101
빌딩을 보면서 이런생각이 들었다. 대만의 일부 사람들은 대만 독립을 주장하였을가? 빌딩에서 해답을 찾은것 같다. 대륙에서 쫓기워 대만으로간 국민당 정부는 실패를 승인하지않고 여전히 자신들을 중화민국의 중앙 정부라고 여기며 국민당을 중화민국을 거느리는 집정당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장개석의 집권하였을때는 대륙에서 가지고간 은보화들을 국방건설에 투자하여 대륙과 맞서는 정책을 취하였다면, 장경국의 대만을 통치하던 시기에는 국방 건설보다 대만의 실제적 현황에 따라 경제건설에 총력을 집중하였다. 경제건설은 곧바로 대륙과 맞설수 있는 유일한 정책이였던 것이였다. 장경국의 실시한 경제정책은 좋은성과를 거두었으며 대만경제를 급속도로 발전시키였다. 80년대말에 대만은 인구당 수입 2만딸라로 되여 아세아의 네마리 작은 룡에 속하였다. 경제건설이 성과를 알리는 상징물인 101빌딩은 대만의 경제 발전의 리정표로 되였다. 다른곳으로 돌아 보지않고 101빌딩만 보아도 대만의 경제 실력을 보아낼수 있었다.

         대북은 땅값이 엄청나게 비싸다고 했다. 하씨의 말에 의하면 101빌딩 주위의 부지값은 평방메터에 (인민페로)15만원이라 했다. 그러니 일반 서민들은 여기에 땅을 엄두도 못낸다 했다.

         101빌딩을 돌아본 우리는 국부기념관(國父記念館)으로 찾아갔다. 대만에서는 손중산을 국부라 높이 불렀다. 중화민국의 창시자이며 삼민주주의를 제창하신 손중산선생을 국민정부의 국부로 우러러 모시고 있었다. 중국공산당의 친밀한 벗이며 중화민국을세우고 봉건 청조정부를 뒤엎은 손중산 선생은 중화인민 공화국 공민이라면 잊지않고있다. 대륙에서 유람을 유람객들은 숭건한 마음으로 송중산선생의 동상 앞에 묵례를 드렸다.

         국부전을 돌아본 대북에 있는 고궁박물관(故宮博物館) 참관하였다. 고궁박물관이라고 하니 웅장하고 거대한 북경 고궁박물관이 올랐다. 북경에 고궁박물관이 원상태로 있는데 대만에 별도로 고궁박물관있어 뭘하냐 싶은 의혹이 들었다. 대체  대만사람을은 무슨 정신으로 고궁박물관을 건설 하였으며 또 얼마나 규모가 클가? 그리고 력사 유물이 얼마나 수장되여 있기에 고궁박물관이라 할까? 하는 의문 부호를 달고 찾아갔다.
 
          대만 고궁박물관은 대북시 북토림정의 쌍계 부근에 자리잡고있었다. 대북 고궁박물관에 들어서면 매사람에게 하나씩 수화기를 준다. 관람하는 사람이 많기에 소음이 많아 해설원의 말을 똑똑히 들을수없다. 하여 반드시 수화기를 귀에걸어야 제대로 들을수 있었다. 대북 고궁박물관은 1962년에 건설하였는데 부지면적은 1.03 평방킬로메터이다. 중국 궁전식 건축으로서 4층으로 되여있으며 백색 벽에 푸른 기와를옛다. 대북 고궁박물관을 북경 고궁박물관에 비하면 협소하기로 말이 됐다. 대만 사람들은 비록 북경 고궁박물관에 범위를 비할바는 되지만 대북 고궁박물관에 수장되여 있는 문물은 북경 고궁박물관에 비하여 진짜가 많다고 자랑하였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국민당군이 대만으로 가기전에 이미 계획적으로 북경 고궁의 력사문물을 가만히 대만으로 옮기였다고 했다. 박물관에는 고대의 석기시대의 유물과  , , , 청시대에서 남긴 유물이 있었으며 5천년 중화문화 발전과정에 사용하였던 문물들을 시대별로 분별하여 정리되여있었다. 나는 그들이 소개하는 문물을 보면서 어쩐지 반신반의 하였다. 내가 반신반의 리유는 내가 추리하건대  국민당군이 대만으로 도망칠 은보화는 가지고 갈수는 있어도 력사문물을 가지고 도망칠 여건이 없다고 여기였다. 다른 의혹점은 진렬되여 있는 문물을 상세히 보면 진품이 아니고 모작품으로 보이였다. 물론 보안상 문제로 진짜는 내놓지 않고 모작품을 내놓을수 있지만 오랜 세월에 문물들 변하지않고 새것같이 보이는것은 오히려 진픔이 아니라는 의혹만 남겼다. 여하튼 진짜던 모작품이던 고궁박물관을 건설한데 대해 대만사람들의 력사를 존중하고 젊은 세대들에게 력사지식과 문화를 전하려고 의도는 좋다고 보아졌다.

         대북 고궁박물관을 돌아본 나는 이런감이 들었다. 대만사람들이 자존심은 강했다. 비록 대륙에서 쫒기워 대만으로 왔지만 대륙에 지려하지않고 국방건설과 경제 건설을 병진하였다는 점이였다. 아세아에서 제일높은 101빌딩과 불광사, 고궁박물관, 국부기념관, 고속 철도와 고속 도로를 건설한것을 보면 그들의 속내를 알수있었다.

         저녘이 되자 우리는 저녘을 먹으려고 대북시 화서가에 있는 야간시장(夜市)으로 갔다. 대북의 야간시장은 대륙의 야간시장과 별반 다를바 없었다. 등불이 휘황한 가운데 사람들은 북적거리며 자기들의 소원대로 음식을 찾아 자시였다. 대북의 야간시장에는 대만에서 생산되는 해삼물과 과일 야채가 있었으며 각종 료리들이 선보이고 있었다. 대만 료리중에서 해산물로 만든 료리가 인기를 끌었다. 나는 대만돈 오십원을 내고 훈둔 한그릇을 사먹었다. 새우탕으로 만든 훈둔은 별미였다.  

         대만에서는 대륙의 인민페와 대만돈을 동시에 사용하였다. 인민페를 대만돈으로 바꾸려면 환률이 4.6배였다. 인민페 100원이면 대만돈 460원을 바꿀수있었다. 훈둔 한사발 값이 인민페로 32 가량되였다. 대만의 음식은 구미에 맞았다. 약간 슴슴하고 달며 맵지 않았 좋았다.

         대만에 와서 처음으로 대화 호텔에서잤다. 호텔은 매우깨끝하고 설비가 좋았다. 작년에 싱가포르, 말레아시아. 태국으로 갔을때 그곳 호텔에는 끌신이 없어 불편하였는데 대만에는 생활 소지품(수건, 비누. 치약, 면도칼, 샴푸, 커피, 음료, 끌신, 잠옷 )등이 구전하게 있었다. 아침저녘은 호텔에서 먹었는데 각자의 취미에 따라 서양식 음식과 중국식 음식을 마음대로 골라 먹게 하였다. 호탤 시설물을 보면서 직감적으로 대만은 경제가 발달하였으며 서비스산업도 되고 있음을 감촉하였다

         이튼날 우리는 가이드의 인도를 받으며 구룡항으로 갔다. 구룡항 위치를 보니 묘하였다. 사람의 인의적으로 파놓은것처럼 륙지가 갈라지여 대만해협의 바다가 깊숙이 구룡항까지 들어와 있었다. 바다를 가운데 두고 산이 둘러있어 천연적 항구로 되였다. 구룡항에는 많은 크고작은 선박들이 있었다. 부두에 정박했거나 오가는 선박중에서 눈길을 끄는것은 대포를 갓고있는 군함들이였다. 군사 항구라면 기밀이여야 하는데 이곳에서는 군함을 맘대로 볼수있었다. 구룡항은 예전에 군용항구로 사용했는데 지금은 민용 군용을 동시에 사용할수있는 항구로 되였다. 장개석군이 대륙을떠나 대만으로 올때 대륙에서 가지고 물자의 대부분은 구룡항을 걸쳤다고 했다. 처음에는 군사기지로만 쓰던 구룡항이 대륙과 대만사이의 긴장국세가 완하되면서 군용과 민용이 동시에 사용할수있는 항구로 되였다.

         구룡항을 돌아보면서 하씨는 이상한 말을 하였다. 대륙에서는 모택동과 장개석 누굴 시대의 위인으로 보는가? 물었다. 물론 우리 일행은 장개석이 아니고 모택동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장개석도 시대의 위인이라 할수있지만 대륙에서 대만으로 쫓기여간 패자를 시대의 위인이라 할수없다고 말했다. 하씨는 허허 웃으면서 옳다고 하면서도 장개석을 위인이라 평가하는것이 적절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 주장을 피력했다. 하씨는 이렇게 말했다. 장개석은 젊어서 일본으로 류학가 일본 륙군사관학교를 다니였다고 했다. 장개석의 학습성적은 좋은편이 못되였는데 일본 류학을간 학생 60명중에서 항상 시험에는 5등을 하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씨는 장개석은 한시기 중화민국의 대통령이였으며 국민군의 총사령관이 였다고 하면서 시대의 위인이라고 주장했다. 문제를 놓고 우리는 하씨와 쟁론하지않았다. 수십년간 대만해협을 사이두고 해안 량안에서는 두가지 같지 않은 정치제도를 실시하였다. 부동한 정치제도하에서 자란 젊은이들은 같지않은 의식형태와 정치관념을 같고 있다. 대륙에서는 사회주의 교육을, 대만에서는 국민당의 자본주의 교육을 받았다. 이런 교육하에서 굳어진 정치관념과 의식형태가 단번에 변하기는 어려운것이다. 다행으로 어제날이 총칼을 들고 싸우던 사람들이 이만큼 자유자재로 자기의 정치관념을  숨김없이 솔직이 말할수 있는것만 하여도 대단한 발전이였다. 해안 량안의 공동 노력으로 막혔던 담을 허물고 서로 신뢰하고, 소통하며, 무역함으로서 해협량안이 공동 부유의 길로 나간다고 생각하니 가슴은 뿌듯하였다. 그러면서 언제가는 남북 조선도 남북 당국자들의 아량을 넓혀 대륙과 대만처럼 서로 신뢰하면서 화해한다면 좋은 결실을 얻으리라 믿었다.

        구룡항을 돌아 본후 우리는 고추 중정기년당(中正記念堂)으로 갔다. 넓은 광장 정면에 웅장한 건물이 있었다. 장개석 기념당이였다. 우리일행은 기념당 대청으로 올라가지않고 1층에 있는 장개석의 유물전시관을 돌아보았다. 우리가 장개석 기념관 대청으로 올라 가지 않자 하씨도 강요하지않았다. 장개석 유물전시관에는 장개석의 평시에 입었던 , 신발, 서류, 사진 등이 전시되여있었다.

         우리는 중정기념당을 떠나 장개석이 살던집을 돌아보았다. 장개석은 대륙에서 대만으로 간후 장시기 동안 이집에서 살았다고 하였다. 산을등지고 꽃나무 숲이 우거진 아늑한 곳에 아담한 양옥 채가 보이였다. 대만에는 큼직한 꽃나무들이 많았다. 과거 이집으로 들어오려면 경비초소를 세번을 경과하여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경비가 삼엄하던 곳이 지금은 유람객들이 자유로이 드날들수 있는 곳으로 되였다. 장개석의 고거 안으로 들어가자면 문표를 사야했다. 우리는 들어가지않고 대문밖에서 해설사의 말만 들었다. 해설사의 말에 의하면 장개석과 부인 송미령 사이에는 나이 차이와 자란 경력과 생활 습관이 달라 부부 관계가 원만하지 하였다고 했다. 안에는 송미령 침실이 따로 있고 장개석의 침실도 따로 있었다고 했다. 그들 부처간은 집안에 살았지만 각방을 쓰고 있었다고 했다. 장개석은 일인용 침대를 사용했다고 했다. 송미령은 어릴때부터 미국에서 자랐으므로 서방문화에 물젖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으며 무도를 즐겼다고 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군인으로서 정직했으며 중국의 전통적 습관을 지켰다고 했다. 장개석은 , 담배를 금했으며 중국음식을 즐겨했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정치상에서 동반자였지만 생활상에서는 친밀한 배우자가 되였다고 했다.
 
 
                          3,  대만의 신흥의 공업도시 신죽(新竹)
 
          7 10일날 우리는 대북을 떠나 신흥 공업도시 신죽(新竹)으로 갔다. 신죽은 대만에서 새로 일떠선 신흥공업도시였다. 신죽시는 대만의 대표적인 전자공업과 의료기재공업기지였다.

         신죽으로 오면서 하씨는 이런 말을했다.  대만은 장개석이 집권할때에는 농업을 위주로 국방공업을 주요산업으로 하였다고 했다. 장경국이 집권하면서 농업위주로 부터 경공업을 위주로 전의 시키였다고 했다. 대만에서는 교육을 중시하여 많은 젊은이들을 해외 류학을 보냈다. 그들은 외국에서 배운 기술을 대만에 갖고와서 대만 기업들을 발전시키였다고 한다.

         대륙에서 한창 정치운동에 열을 올릴때 대만에서는 경제건설에 열을 올리여 경제 성장이 급속로 발전하였다고 했다. 신죽시가 바로 그때 발전한 신흥 공업기지이며 공업도시로 되였다고 했다. 대만정부에서는 수출산업도 중시를 돌렸지만 내수경제에 주의를 돌렸다고 했다. 대만사람들은 내수경제를 살리기 위하여 대만에서 생산된 산품을 즐겨 샀다고 했다. 대만 가정에서 사용하는 핸드폰, 텔레비죤, 컴퓨터 랭동기 새탁기 가정제품들은 대부분 신죽에서 생산되는 제품이라고 했다. 이런 제품들은 대만의 내수경제에도 도움을 주었을뿐만아니라 수출산업으로 되였다고 했다. 신죽에서 생산된 전자공업 산품과 의료기재들은 세계각국에서 팔리고 있다고 했다.  대북으로부터 신죽으로 오는 도로 옆에는 무수한 공장들이 있었다.

          하씨는 대만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종교신앙, 등등에 대하여 짤막하면서도 조리있고 함축성있게, 쉽게 리해하도록 말을 했다하씨의 말에 의하면 대만에는 여러개 정당이 있으며 언론자유와 사람마다 평등한 권리를 행수할수있는 민주주의 사회라고 하였다. 정당정치를 하면서 정권 다툼이 치렬하다고 했다. 과거 수십년동안 대륙에서 건너간 국민당의 대만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했다. 대만의 본토인들은 국민당의 통치하게 많은 억눌림을 받았다고 했다. 대만 본지인들이 반항이 드세자 장개석 정부는 반항하는 많은 사람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고 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군사독재로 부터 민주화사회로 발전하면서 대만의 다수를 차지하는 본토인들의 지지를 받은 민건당(民建黨) 선거에서 다수표를 얻어 지금은 민건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다 했다.

         하씨는 대만의 경제건설이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것은 장경국시대라고 했다. 장경국은 아버지와 달리 군사독재로 부터 민주화를 실시했으며 농업과 국방공업을 위주로하던 전략을 바꾸어 산업화 공업화의 길로 나가도록 이끌었다고 했다. 장격국이 아버지로 부터 정권을 물려받을 당시 대만의 경제는 매우 비약했다고 했다. 장경국 정부는 중동의 사우디아라비아정부와 협약을 맺고 대만에서 사우디농업을 발전시켜주는 조건으로 자금을 얻어다가 고속도로를 건설하였으며 공업건설에 많은 자금을 투자하였다고 했다.
 
                            4,  아름다운 호수 일월담(日月潭)
 
           우리는 신죽을 돌아본후 일월담 구경을 떠났다.
            예로부터 “하늘에는 천국 있다면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는 말이 있다. 항주가 세상에 이름을 날리게 된것은 아름다운 서호가 있기 때문이다. 대만사람들은 서호를 아름다운 호수라 인정하면서도 대만에 서호와 라이벌이되는 아름다운 호수 일월담이 있다는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호기심이 많은 나는 대만사람들의 일월담이 서호와 비길수있는 아름다운 호수란 말을 듣고 보고싶은 충동을 느끼였다.

           드디어 일월담을 구경을 할수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7 9 우리 려행단은 대만의 이름난 풍경구인 대만성 중부에 있는 일월담(日月潭) 구경을 떠났다. 일월담은 남두현 어지향 수사촌에 위치해 있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일월담은 해발700메터에 달하는 고산준령에 에워싼  천연호수로서 풍경은 항주의 서호의 아름다움에 못지지 않다고 하면서 이제 가보면 알것이라고 했다. 일월담의 수면면적은 33평방킬로메터로서 서호보다 조금 크다고 했다. 일월담은 경치좋고 기온이 서늘하여 피서하기 좋은 곳이며 겨울철이라 하여도 물이 얼지않고 기온이 푸근하여 유람하기 좋은 곳이라 했다. 일월담으로 피서를 오거나 유람오는 손님은 일년내내 끊임업이 찾아온다고 했다.

           팽화시에서 떠난 뻐스는  두시간을 달리여 목저지인 일월담에 도착하였다. 일월담으로 오는길은 산길이였다. 산길따라 구비구비 에돌아 700메터의 고산지대에 이르자 높은산들이 에워싼 분지에  일만무제한 바다와같은 넓은 호수가 눈앞에 나타났다. 조물주는 용케도 이런 고산지대에 이렇게 호수를 만들어놓아  대만사람들이 자랑거리가 되게하였다.

          오늘은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피서객들과 유람객들이 일월담 선착장에 많이 몰려들었다. 선착장에는 배를 타려고 기다리는 유람객들로 북적이였다. 선착장과 주위에 몰려있는 사람들을 어림 짐작으로  만명이 넘을것 같았다. 선착장에는 여러가지 종류의 유람선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작은 배들은 30명좌우 태웠고 큰배는 100여명을 태웠다정원이 차면 배는 떠났다. 수백에 달하는 배들이 실북처럼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나는 행운의 88 유람선에 올랐다. 88 유람선은 아담지고 화려하게 꾸미였는데 30십명을태울수있었다. 우리를 태운 배는 물보라를 잃으키면서 물위를 질주하였다. 어디에서 왔는지 배가 떠나자 수백마리의 물새들이 배뒤를 선회하면서 따랐다. 사람들이 빵과 같은 먹이를 던지면 새들이 재치있게 먹이를 물어가는 모습이 보기좋았다.

          배를타고 사방을 둘러보니  일월담 호수와 호수주변의 산들은 너무나 조화를 이루어 한폭의 산수화를 보는것 같았다. 호수의 맑고 푸른 물이 잔잔한 파도를 이는것이 마치 세상의 모든 자식들을 한품에 안겨주는 현숙한 어머니들의 모습같아 보이였다. 호수 주위를 병풍처럼 둘러쌓여있는 우중충한 뭇산들은 녀인을 보호해주는 아버지 산과같아 보였다. 산위와 산기슭에는 무성한 나무숲이 우거져있어 유람객들이 더위를 피할수있는 좋은곳으로 되였다. 일월담 호수 안에는 여러개 섬이 있었다. 섬마다 특색있는 여러종류의 나무들이 자라고 있고 이름모를 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사람들은 인의적으로 화려한 꽃으로 인공섬을 만들에 물위에 띄워놓아 일월담의 아름다움을 가첨하였다. 호수주변의 산마루와 산기슭에는 호화로운 호텔과 별스럽게 지은 별장들이 여기저기에  있었다. 그런 호텔과 별장은 아늑하고 호화스럽고 산듯하게보여 일월담의 풍치를 돋구어주었다. 나는 어느사이 일월담의 아름다운 풍경에 매혹되여 기분이 들떠있었다.
 
         배가 한참 달리자 전망대가 있는 섬에 이르렀다. 전망대에 올라서면 일월담의 전체 경광을 볼수있었다. 전망대에 올라서서 보면 일원담의 넓은 수면은 마치 바다가의 높은 바위우에서 가없이 넓은 바다를 보는듯한 감이들어 가슴이 트이고 시원하였다. 전망대에는 유람 시설을 구비하게 갖추어져 있어 사진찍기 제법 좋았다. 우리 일행은 전망대에서 호수를 배경으로 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젊은이들은 멋있는 동작을 하면서 랑만적으로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은후 우리는 전망대의 휴식실에서 휴식도 할겸 일월담주변에서 생산되는 특수한 맞을 지닌 간의 음식을 먹었다. 일월담 주변에는 고산족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했다. 고산족들이 집적 가꾸어온 신토불이 산품들이였다. 그들이 손수 삶은 옥수수와 닭고기, 노오란 닭알은 별맞이였다. 옥수수는 유별나게 맞이 새콤하면서도 달큰하여 구미를 돋구어 주었다. 닭고기는 통채로 삶은것도 있고 부위를 가각 떼여 볶아 파는것도 있었다. 닭알을 파는데 별맞이였다. 닭알은 외형을 보면 보통 닭알과 다를봐 없지만 맞이 완전히 달랐다. 일반 닭고기와 닭알 맞이 달른지 궁금하여 물었더니 고장의 고산족들은 닭을 키울때 사료에 이곳에서 나는 약재를 배합해 먹여 닭고기가 부으럽고 향이 짓다고 했다. 닭알을 삶을때도 툭수한 조미료를 넣은 물에 삶는다고 하였다. 닭고기와 닭알은 어찌도 맞났던지 셋이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같았다.

         우리는 전망대에서 행사가 끝나자 왔던길을 뒤돌아 선착장으로 돌아왔다.
귀항길에서 아쉬운 생각이 하나 있었다. 일월담을 돌아 보면서 일월담 구경에 만족을 느꼈지만 가보기싶은 곳이 있어 마음이 알록하였다. 일월담 서쪽 산마루에는 흰벽채에 빨간 기와를 호화로운 별장이 보이였다. 하도 그별장이 멋이 있어 가이드 하씨한테 별장이 무슨 별장인가? 물었더니 하씨가 하는말이 별장은 장총재 령부인(송미령) 살던 별장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별장은 프랑스 설계사가 설게하고 프랑스 양식으로 지은 집이라 했다. 실내는 서구식으로 꾸미였는데 대만에서 최고급으로 이름을 날리는 호화로운 별장이라 했다. 그러면서 별장은 국비를 쓰지않고 송미령 개인 돈으로 지었다고 했다.

        알고 보니 일월담은 서호와 다른 점이 몇가지 있었다. 천백년을 내려오면서 서호의 수려한 풍경은 수많은  문인과 국내외 유람객은 찬탄을 자아 내였다. 그들은 격정을 금할수없어 필묵을 날이게 하였다면, 일월담의 아름다움도 서호에 못지지않게 많은 문인들과 유람객들 찬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일월담이 서호와 다른점이라 한다면 일월담은  유람지일뿐만아니라 농업 관개도하며, 도시물공급도하면서 발전도 하는 종합성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호수인것이다.

        일월담의 물래원은 장백산 처지의 물처럼 지하에서 솟아나는것이 아니라 호수 주변의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들이 모이여 호수로 된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를 썼다. 발전소에서는 평시에는 적은량의 발전을 하다가도 큰비가 내린뒤에 많은 전력을 생산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발전할수있는 물래원은 주요하게 비물에 의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여기에서 잠간 언급해야 말이 하나 있다. 태풍 하면 사람들은 두려움이 앞서며 엄청난 재앙이 덮친다고 여긴다. 사실은 그러했다. 어느나라던 태풍이 지나간곳은 풍지박산이난다. 태풍으로 인해 입게되는 손실은 어마어마하게 크다. 그런데 하씨는 대만사람들은  태풍이 오기를 바란다고 했다. 태풍이 오기를 바란다니? 나는 하씨의 말을듣고 머리를 저었다. 하지만 하씨의 해설을 듣고나니 리해가 같다. 대만은 물이 적은 곳이다. 사면이 바다인 섬도여서 비가와도 오래동안 잠겨있지않고 인츰 흘러버린다고 했다. 기온이 높아 인츰 물이 류실 된다고 했다. 하기에 태풍이 비록 재앙을 가져오지만 대신 많은 물을 가져다주어 대만에서 물이 부족한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했다. 하기에 대만사람들은 태풍이 오기를 바란다고 했다. 대만 현지에서 태풍피해를 받은 현장과 잔해들을 보면서도 그말을 믿었다. 일월담도 태풍의 헌례를 받는다고 했다. 태풍이 몰고오는 많은 물이 일월담이 전기를 생산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했다.

          일월담을 돌아보고 오는 길에서 나는 하씨에게 일월담물이 관개용수로 된다고 했는데 농경지가 보이지 않는가? 물었다. 하씨는 허허 웃더니 도로옆에 있는 풀밭을 가리키면서 풀밭이 밭이라고 했다. 풀밭을 논밭이라니? 나는 무슨 감투끈인지 몰라 멍해 있었다. 내가 의아해 하자 하씨는 이렇게 해설했다. 대만에서는 기온이 높기때문에 뙈기 밭에서 3모작할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3모작을 련속 하지않고 륜작을 한다고 했다. 한뙈기 밭에서 일년에 3모작 농사를 짓고는 다음해에는 그밭을 일년을 휴전(休田)한다고 했다. 한해를 휴전하고는 다음해에 다시 부친다고 했다. 어쩜 우리고장에서 한가지 품종만 몇해 련속 재배하지않고 구루밖움을 하던일과 비슷한 도리라고 생각되였다. 대만의 입쌀은 상당히 좋았다. 동남아의 이밥은 코바람에 날리지경이였는데 대만의 이밥은 연변 이밥보다 못하지 않게 미질이 좋았다.

          나는 일월담 구경을 마치고나니 이런 감수가 올랐다. 일월담은 비록 서호처럼 찬란한 력사문화와 명승고적이 없지만 대신 산과 호수가 어울이고 산기슭에 신설된 호텔과 별장들이 호수와 어울려 신선하고 산듯하고 신생한 감을 주었다. 마치 서호와 일월담이 신구 대비를 하는것 같았다. 일월담의 또한 맑고 깨끝하여 서호의 물보다 깨끝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보고싶던 일월담을  맘껏 구경하고 나니 기분이 좋았다. 일월담을 떠날 시간이 되였다. 나는 아쉬운 심정을 지닌채  일월담을 향하여 “잘있거라 일월담아”를 높이 웨치며 귀로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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