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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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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되여 나는 처녀 (1)
2013년 10월 29일 19시 47분  조회:3254  추천:1  작성자: 넉두리

중편소설

새되여 나는 처녀 (1)

김희수

 

1. 탈출

 



 

쇼핑을 핑계로 백화청사의 승강기계단을 오르내리며 귀녀는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한주먹》을 떼여버릴 기회만 노리고있었다. 한걸음도 뒤질세라 바싹 따라붙는 《한주먹》을 떼여놓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존슨의 다리를 가진 그 앞에서 달음박질로 도망친다는건 어림도 없는 일이고 타이슨의 주먹을 가진 그를 완력으로 밀어낸다는것은 더구나 엄두도 못낼 일이였다.

이제 전 어린애가 아니예요. 제발 절 혼자 다니게 놔주세요. 이런 사정도 목석같은 그 앞에선 전혀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 귀녀는 영웅호걸이라고 숭배해오던 《한주먹》이 이때처럼 미워본적이 없었다. 이《한주먹》과 《만사통》이 오기전엔 얼마나 자유로웠던가. 마음껏 뛰놀아도 간섭하는 사람이 없었지. 하지만 《한주먹》과 《만사통》이 오면서부터 귀녀는 지금까지 10년동안 조롱속에 갇힌 새로, 고삐 매인 송아지로 되였다. 지긋지긋한 10년이 지나고 귀녀는 고급중학교를 졸업했다. 아버지의 기대엔 어긋났지만 대학시험에서 락방된 귀녀는 날뜻이 기뻤다. 이제부터 해방됐다싶었다.《한주먹》과 《만사통》의 력사적 사명도 끝났으니 그들이 곧 돌아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였다. 컴퓨터를 몰라선 안된다, 영어를 배워야 한다하며 그냥 귀녀를 조롱속에 가둬둘 심산이였다.

정말 지겨워. 이젠 이 굴레와 고삐를 벗어던져야지! 탈출을 작심한 귀녀는 친구 옥이와 짜고 든 계획대로 아버지한테서 쇼핑을 허락받았다. 한주먹이 직접 운전하는 호화로운 벤츠에 앉아 가면서 귀녀는 머리속에 탈출방안을 다시 한번 검토해 보았다. 빈틈이 없을것 같았다.

승용차에서 내린 귀녀는 백화청사로 바싹 따라오는 한주먹을 곁눈질하며 가슴이 도근도근 뛰기도 했다. 패션진열대에 가서 이옷저옷 입어보며 시기를 기다리는데 마침 건너쪽에서 옥이가 눈짓하는것이 보였다. 귀녀가 고개를 까땍하자 옥이가 인차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한주먹이 등지고있어 옥이를 볼수 없는것이 다행이였다.

오빠, 나 좀 화장실 다녀와야겠어요.

귀녀는 고르던 옷을 놓고 화장실로 사뿐사뿐 걸어갔다. 한주먹이 화장실 출입구까지 따라와 버티고 서있는것을 보며 귀녀는 잰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옥이가 벌써 와서 기다리고있었다. 계획대로 옥이는 준비해온 가발과 선글라스를 꺼내 놓고있었다. 둘은 재빨리 옷을 바꿔 입었다. 그들은 머리양식이 같고 몸매가 비슷해서 학교때 교복을 입고 나란히 선 뒤모습을 얼핏 보고는 누가 누군지 가리기 힘들었다. 옥이의 옷을 입고 가발을 쓰고 선글라스를 낀 귀녀는 낯선 모습이였고 귀녀의 옷을 입은 옥이는 뒤모습, 옆모습이 귀녀와 너무나 닮았다.

귀녀가 고개를 숙이고 나가자 출입구에서 지키고있던 한주먹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화장실쪽만 응시하고있었다. 귀녀는 부리나케 백화청사를 빠져나왔다. 옥이의 정체를 발견한 한주먹이 곧 쫓아올것 같아 귀녀는 황급히 택시를 잡아탔다.

아가씨, 어디로 모실가요?

, 아무데나…

?!

택시기사가 이상하다는듯 힐끗 돌아다본다. 그제야 귀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탈출계획을 세울 때 탈출후의 목적지까지 생각지 않았던것이다. 그저 한주먹의 손에 잡힌 고삐를 끊어버리고 자유의 세계를 갖고싶었을뿐이다.

남산까지 실어다 주세요. 귀녀는 얼떨결에 그렇게 말했다. 한주먹으로부터 멀리 빠져 달아나고싶은 심정이 그런 행선지를 생각해냈을것이다.

택시는 어느새 도심을 벗어나 교외에 들어섰다. 포장도로도 끝나고 울퉁불퉁한 흙길이 시작된다. 차가 더 갈수없는 남산아래 발치에서 택시는 멈춰섰다.

택시에서 내린 귀녀는 굴레 벗은 망아지마냥 오솔길로 깡충깡충 뛰여갔다. 만세라도 부르고싶었다.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의 품에 안긴것이다. 자유의 품은 끝없이 넓고 포근했다. 귀녀는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중턱까지 오른 귀녀는 할래발딱거리며 풀숲에 주저앉았다. 타고 왔던 택시는 어느새 돌아가고 눈에 보이지 않았다. 군데군데 성냥갑을 쌓아놓은듯한 도시가 한눈에 안겨왔다. 여태껏 저 《성냥갑》속에 갇혀 살았다고 생각하니 갑갑하고 지긋지긋했다.

산바람이 살랑살랑 귀뿌리를 어루만지며 지나간다. 주위의 소나무들도 하늘하늘 춤을 춘다. 귀녀는 가슴이 열리며 마음이 상쾌했다. 산아래 가없는 옥야가 파릇파릇 물결치며 흘러간다. 옥야속에 묻힌 오붓한 초가마을이 그림같이 아름답다. , 저것이 이 도시교외의 마지막 초가집이란것이겠구나. 귀녀는 마음이 설레였다. 정든 님과 둘이 살짝 살아가는 초가삼간…문뜩 《초가삼간》이란 노래가 떠오르며 가슴이 울렁울렁 설레인다. 노래처럼 저기 저 초가집에서 살고싶다. 정든 님도 필요없이 홀로 자유롭게 밭을 갈며 살고싶다.

귀녀는 천천히 산에서 내렸다. 지금쯤은 한주먹이 귀녀를 찾아 헤맬것이다. 옥이의 정체를 발견한 한주먹이 깜짝 놀라 귀녀는?! 하고 미친듯이 뛰여다니며 찾는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듯 했다. 귀녀의 호위를 잘못했다고 아버지로부터 벼락이 떨어질것은 뻔했다. 한주먹은 아버지의 명령이라면 절대 복종이였고 또 그 명령을 에누리없이 집행했다.

귀녀는 걸어서 시내에 들어섰다. 한주먹을 만날가봐 골목길에 접어들었다. 지금쯤은 한주먹이 전화로 아버지한테 알렸을지도 모른다. 귀녀의 탈출소식을 접한 아버지의 얼굴표정은 어떤 모습일가? 바다의 폭풍? 하늘의 천둥? 생각만해도 가슴이 떨린다.

, 세상에! 이렇게 예쁜 아가씬 처음 보는데…

마주오던 세 청년이 감탄을 련발하며 음탕한 눈길로 귀녀를 노려본다. 귀녀는 못본체하고 그냥 지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녀석들은 의도적으로 귀녀의 앞을 막아선다.

우아! 죽인다! 죽여주는 기집이다. 이런 기집 맛보면 죽어도 좋아!

마른침을 꼴깍 삼키는 녀석들, 귀녀의 몸을 노리는 색마의 눈길들…위험한 순간이였지만 이 시각 건달들이 조금도 두렵지 않은게 이상했다. 비록 한주먹에게서 녀자호신술을 배웠다지만 세녀석이 한꺼번에 덮치면 당해낼 자신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녀는 건달들이 조금도 두렵지 않다. 치근거리는 건달들의 그 역겨운 행위마저 너그럽게 용서해주고싶다.

용서할수 없어! 한주먹이 곁에 있었다면 저 세녀석은 눈깜짝할 사이에 피투성이 되여 쓰러졌을것이다. 귀녀를 모욕하는 자에게 한주먹은 조금도 사정이 없었다.

예쁜 아가씨, 우리와 함께 조용한 곳에 가서 놀지 않겠소?

세 녀석이 지나가려는 귀녀의 앞을 막아선다. 이때에야 귀녀는 저으기 긴장했다. 소리쳐 구원을 청할가, 앞선 놈을 쓰러뜨리고 냅다 뛸가?

예쁜 아가씨, 말을 듣지 않으면 우린 억지로라도 아가씰 모시고 갈거요!

녀석들이 징글스럽게 웃으며 당장 덮쳐들 태세다. 그때 마침 두 순라경찰이 이쪽으로 걸어오고있는것이 보였다. 귀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저 경찰아저씨도 함께 모시고 가는게 어때요?

?! 경찰…

깜짝 놀라 뒤돌아보던 녀석들이 에씨, 재수없어! 하고 투덜거리며 꼬리 빳빳이 달아났다.

귀녀는 재빨리 골목을 벗어나 큰길에 들어섰다. 어느덧 해가 서산에 떨어졌으나 귀녀는 갈곳을 몰랐다. 십자로에 멈춰서서 어디로 갈가? 생각을 굴렸다. 친척이나 친구의 집엔 이미 전화련락이 오갔을 테니깐 그리로는 갈수없고…어디로 갈것인가? 엇바뀌는 붉은 신호등과 푸른 신호등을 멍하니 바라보며 궁리하다가 문뜩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어버이처럼 자애로운 얼굴! 상냥하고 친절하며 언제나 뜨거운 그분! 그분은 꼭 귀녀가 왔냐? 하며 반겨줄것이다. 그리고 이마에 키스도 해줄것이다. 그분은 해마다 한번씩 찾아올 때면 언제나 영화에서 나오는 서양신사처럼 귀녀의 이마에 살짝 키스를 해주곤했다. 그때마다 귀녀는 행복에 겨워 방긋 웃었다.

그래…그분을 찾아가자. 그런데…귀녀는 여태껏 그분의 주소를 똑똑히 모르고있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분은 어느 해변도시에서 엄청나게 큰 회사를 경영하고있다고 했다. 가자. 확실한 주소를 모르면 뭐라나. 가는데까지 가보는거다. 그분을 못 찾아도 별문제다. 난생처음 나홀로 세상을 돌아본다는것만으로도 가슴이 후련할거야.

귀녀는 정거장으로 가서 남방으로 가는 기차표를 끊었다. 출구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마침내 기차가 왔다. 막 검표를 하려는데 누군가 뒤에서 옷을 잡아당긴다. 뒤돌아보니 귀녀의 옷을 그대로 입고있는 옥이였다. 옥이는 풀이 죽어 고개짓으로 저쪽을 가리켰다. 옥이가 가리킨 쪽을 바라본 귀녀는 그만 날아가던 잠자리가 거미줄에 걸린듯 그 자리에 폴싹 주저앉았다. 거기엔 울상이 된 한주먹과 서리발치는 두눈을 뚝 부릅뜬 아버지가 맹수처럼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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