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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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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사람의 이야기
2013년 12월 01일 13시 58분  조회:3491  추천:0  작성자: 넉두리
단편소설
 
미친 사람의 이야기

김희수
 
 
그 당시 그 미치광이는 머리가 피투성이 되여 쓰러져있었는데 주위에는 거울쪼각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고 곁에선 한 젊은 녀인이 목놓아울고있었습니다.
-목격자의 말
 
 
1
 
《저인 요즘 영 이상해요. 자꾸만 노란 웃음이요, 노란 행복이요 하며 정신없이 중얼거리는게 그저 일 같잖아요.》
나를 억지로 병원에 끌고 온 안해는 최박사앞에서 자못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노란 웃음, 노란 행복이라...거참 재미있는 말인데요.》
최박사는 무슨 괴물이라도 보듯 안경너머로 나를 건너다보았다. 최박사를 마주하고 환자의자에 앉은 나는 졸리는듯 하여 눈을 감아버렸다.
《오늘 아침에도 조밥을 했더니 글쎄 조밥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또 노란 웃음이요, 노란 행복이요 하며 중얼거리는게 정상적이 아니였어요.》
《아, 그런 일이였군요. 작가들은 가끔 작품을 창작할 때면 반상적인 때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령감이 떠오르거나 구상에 사로잡혔거나 또는 작중인물에게 큰 사건이 발생했을 때엔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기도 하고 고래고래 소리지르기도 하고 울고불고 야단치기도 하는데 이런 증상은 정상적인것이니 부인께서 안심하십시오.》
《절때 그런게 아니예요. 이전에도 숱한 작품을 써냈지만 한번도 그런 증세가 없었어요.》
《그렇다면 좀 다른 경우로 봐야겠습니다.》
제길, 너희들이 잘도 찧고 까분다. 뭐, 내가 정상이 아니라고? 나는 대작가야. 내 작품이 영문으로 번역되지 않아서 그렇지. 영문으로 번역되였더라면 10년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을거야. 이런 위인을 함부로 정상이 아니라고 주둥일 놀리는 너희들이야말로 진짜 미친놈이지.
《저…김작가님께 가르침을 좀 받읍시다. 노란 행복이란 어떤것입니까?》
최박사의 조소하는듯한 물음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네?》
《노란 행복말입니다.》
나는 안해를 바라보았다. 안해는 무표정하다. 왜 웃지 않을가? 이때 창으로 비쳐든 노란 해살이 안해의 얼굴을 노랗게 물들인다. 안해는 웃었다. 안해는 언제나 노랗게 웃는다. 안해가 노란 웃음을 머금고 나한테 시집왔을 때 나의 가슴엔 노란 행복이 물결쳤다. 나에게 노란 행복을 안겨준 안해는 시집 온 이듬해에 노랑머리 계집애를 낳았다. 맙시사! 노랑머리라니…이게 무슨 변고인고? 안해와 나의 머리는 그믐밤같이 까만데…
《노란 행복의 씨앗을 뿌렸기에 노란 열매가 달린겁니다!》
나는 큰 소리로 웨쳤다. 그러자 최박사는 안해와 놀란 눈길를 교환하더니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김작가님의 말씀이 너무 심오하여 리해하기 힘듭니다. 자세히 말씀해주십시오.》
나는 갑자기 흥분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부르짖었다.
《은주가 바로 노란 행복입니다!》
《은주는 누굽니까?》
최박사가 안해를 보자 《우리 딸년이예요.》 한다.
《집의 따님이라구요? 그런데 따님이 어째서 노-오-란 행복입니까? 행복은 어째서 노란 색갈입니까?》
최박사의 물음에 나도 어리둥절해났다. 행복은 왜 노란 색갈일가? 분명 다른 색갈이였을텐데…
《행복은 원래 노란 색갈이 아닙니다.》
《그럼 무슨 색갈입니까?》
무슨 색갈이였던가? 행복은 원래 무슨 색갈이였던가? 안해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무리 머리를 쥐여짜도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2
 
《아빠, 해해 나 곱지?》
보던 신문을 내려놓으니 노란 행복이 내앞에서 생글생글 웃고있었다. 책가방을 멘 채로인걸 보아 방금 학교에서 돌아온 모양이다.
《그래 응, 곱다곱다.》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다시 신문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노란 행복이 신문을 홱 나꿔채며 응석을 부린다.
《응응…아빠 나 좀 봐. 뭐, 달라진게 있지?》
《그제야 찬찬히 여겨보니 노란 행복의 앞가슴에서 빨간 물체가 불타고있었다.
《오, 우리 은준 홍소병…》
《소년선봉대야.》
창으로 비쳐드는 해빛을 받아 그 빨간 물체는 더욱 눈부시게 빛나고있었다.
《아빠, 나 행복해!》
노란 행복이 깡충깡충 제 어미가 밥을 짓고있는 주방으로 뛰여간다.
아, 갑자기 생각났다. 빨간것! 행복은 원래 빨간 색갈이였지. 동년시절 그렇게도 동경하던 빨간 행복, 왜서 나에겐 빨간 행복이 없었을가? 동학들의 앞가슴마다에 빨갛게 불타는 그것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던 가슴 아픈 추억. 새끼부농이라는게 무엇인지, 어째서 새끼부농은 빨간 행복을 향수할수 없어야 하는지 리해할수 없었던 불운의 그 시절…
밤에 자리에 누워서도 빨간 물체가 그냥 눈앞에서 불타오른다. 손으로 내 물건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던 안해는 정겨운 눈길로 나를 바라본다.
《자기 병원에 갔다온후 많이 나아졌지?》
《빨간 행복이야!》
문뜩 내가 이렇게 부르짖자 안해는 덴겁한듯 내 물건을 놓아버리고 홱 돌아눕는다. 순간 내 물건이 이상한 충동을 일으킨다. 나는 번개같이 안해의 몸우에 올라탔다. 그리고 적진을 향해 돌진해들어가는 용사마냥 안해의 몸속을 뚫고 들어가 총을 쏘고 나왔다. 그런데…매양 일을 끝낸후이면 뭔가 모자라는것 같은 느낌이다. 무엇일가? 문뜩 눈앞에서 빨간 물체가 불타오른다. 바로 그거야. 빨간것! 나에겐 빨간 행복이 없었지.
모두들 신혼의 첫날밤엔 빨간 행복이 꽃핀다고 했다. 그런데 나에겐 첫날밤 시트 우에 꽃펴야 할 빨간 행복이 없었다. 다른 사내에게 빨간 행복을 던져준 안해는 노란 행복만 갖고 왔다.
순이가 떠오른다. 번마다 안해와의 정사가 있은후에는 꼭꼭 순이가 떠오른다. 순이의 얼굴엔 언제나 진달래가 꽃핀다. 부끄럼을 잘 타는 순결하고 수집은 순이는 손목을 쥐여도 빨갛게, 입술을 빨아도 빨갛게, 그저 빨갛게 웃는다. 순이는…그래 순이는 빨간 행복이였지. 그런데 순이는 어데로 갔을가? 나의 빨간 행복은…
 
3
봄은 미치는 계질이다. 농사군은 밭갈이에 미치고 련인은 사랑에 미치고 시인은 령감에 미친다.
시인 박군은 봄언덕에서 시 한바구니를 주어가지고 우리 집을 방문했다. 박군은 해마다 한번씩 봄철이면 시채집을 나갔다가 우리 집에 들리군 하는데 나는 그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그저 그렇다할 리유도 없이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박군의 세귀눈은 언제나 내 딸년을 잡고 놓지 않는다. 요모조모 찬찬히 여겨보는 품이 마치 로버트구조를 뜯어보는듯 했다. 그것이 역겨워 나는 딸년을 밖으로 내보내며 역정을 냈다.
《왜 그래, 걔 몸에 뭐 시라도 숨어있나?》
《허허, 시?…시는 몰라도 소설은 있을것 같네.》
《그런가? 그럼 자네 써보게.》
《나야 뭘. 소설가인 자네가 써내야지. 흐흐…쟤 노랑머린…》
《노랑머리가 어쨌다는겐가?》
《헤헤, 참 예쁘단 말일세. 서양계집애처럼.》
사실 내 딸년은 무사람들에게 미인이라고 불리우는 안해보다 더 예뻤다. 나는 박군을 흘겨봤다. 이새끼 내 딸년에게 반한게 아니야. 미친 새끼, 성변태가 아니야. 전문 유녀만 탐내는…
《쟨 팔삭둥이지?》
박군이 세귀눈을 꺼벅거리며 신비하게 웃는다. 행동마저 밉살스럽다. 이 녀석은.
《아…저…의사가 조산이라던가?》
《그랬어》
《거참. 허어…쟨 아주 건강하고 총명하던데…》
나쁜 새끼! 내 딸년이 무슨 병집이 있기를 바랐던가.
순이를 잃은 나는 한평생 결혼을 하지 않기로 맹세했다. 그러다가 5년후에 지금의 안해와 번개식결혼을 했고 그래서 태여난것이 때이르게 해빛을 본 지금의 딸년이다.
오늘따라 어쩐지 박군의 웃음이 의심스럽다. 그 신비한 웃음속에 무슨 비밀이 숨어있는듯 싶다. 딸년의 비밀? 그렇지! 그와 동시에 나는 경악으로 몸을 떨었다. 박군은 슬그머니 내 딸년이 팔삭둥이가 아니라는것을 암시해주었다. 조산이라고 한건 안해와 의사가 짜고든 거짓말일게고 그러니깐 건강하고 총명한 딸년은 기필코 정상적인 산아이다. 딸년이 정상적으로 열달배기라면 시간적으로 도저히 내 아이가 될수 없다. 그렇다면 안해가 나한테 시집올 때 벌써 배속에 다른 사내의 씨를 품고 왔다는 론리가 선다. 박군은 내 딸년의 노랑머리에 흥미를 갖고있었다. 이러고보면 딸녀은 분명 안해와 노랑머리사내(?)의 창작품으로서 내 새끼가 아니다. 은주가 내 딸이 아니라니?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생벼락인가!
《아빠, 이 문젤 어떻게 풀어?》
딸년이, 아니 안해의 딸년이 산수숙제 책을 내 앞에 들이민다. 나는 박군이 하던것처럼 눈에 쌍심지를 켜들고 아이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짧게 땋아 어깨에 드리운 노랑머리, 옥으로 다듬은듯 보동보동한 얼굴, 크고도 맑은 머루알같은 눈, 오똑하면서도 동그스럼한 코, 모란꽃판 같은 빨간 입술, 아무리 여겨봐도 어디 한곳도 나를 닮은데라곤 없다.
《아니다. 내 씨가 아니다!》
내 가슴이 터지는 소리!
그 날밤, 나는 안해의 눈을 피해 살금살금 안해의 딸년의 방으로 기여들었다. 노란 행복은 침대머리등을 켜놓은채 단잠이 들어있었다. 나는 잠든 아이의 이마에 덮인 노랑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주었다. 그러던 내 손이 차츰차츰 아이의 목으로 옮겨졌다. 온몸에 피가 역류하는듯 전률을 느꼈다. 나는 두 눈을 꼭 감고 두손에 힘을 주어 아이의 목을 꾹 눌렀다. 목을 조이던 손을 풀고 눈을 떴을 때 아이는 두눈이 말똥말똥하여 나를 빤히 쳐다보고있었다.
《아빠, 왜 그래?》
어느새 깨여났는지 아이는 인형아기를 꼭 끌어안고 의아한 눈길로 나를 바라본다. 내가 방금 학대한건 아이가 밤마다 껴안고 자는 노랑머리 서양아기였다.
《넌 왜 아니지? 넌 왜 아니지?》
 
4
 
언제부터였는지 안해에게서 노란 웃음이 사라져버렸다. 내가 월급봉투를 던져줄 때마다 떠오르던 민들레 같이 노란 웃음이, 내가 원고료를 넘겨줄 때마다 반색하여 량볼에 노란 샘을 파던 볼우물이 사라져버렸다. 내 밥통을 지켜주던 사에서 석달째 로임을 못내주고 밀린 원고료도 언제 받을지 미결이다. 아마도 이때문에 안해의 얼굴에 노란 웃음이 사라지고 그대신 얼음장같이 싸늘한 기운이 서리발친것이다. 그밖에…
안해는 내 작품이 발표되면 첫마디에 《원고료는 얼마나 돼요?》하고 반색하지만 내 글을 읽어본적이 없다. 그랬다. 결혼하여 지금까지 8년을 줄곧 그랬다.
순이가 그립다. 내 첫사랑 순이가 그립다. 순이는 내 작품의 첫 독자이다. 초고로부터 읽어보고도 발표된 작품을 몇번이나 거듭 읽는 순이, 순이의 예쁜 얼굴에 빨간 진달래꽃이 핀다. 내가 원고료를 쥐여줄 때마다 《책이나 사세요!》 하며 꼭꼭 되돌려주군 하던 순이, 원고료대신 키스를 해주면 만족스레 달콤한 웃음 짓던 사랑스런 순이가 그립다!
나는 순이를 가지고싶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여 순이에게 빨간 행복을 요구했다. 그러자 순이는 지금은 아니라면서 결혼식을 올리는 첫날밤 그 귀중한 순결을 꼭 바치겠으니 그날까지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순이는 약속을 어기고 어느날 갑자기 내곁을 떠나버렸다.
나는 5년동안이나 순이를 목메여 부르며 찾았다. 꿈결에도 순이를 부르며 살아온 눈물겨운 5년! 하느님도 감동했는지 5년만에 마침내 순이를 찾았다. 기쁨에 겨워 만난지 사흘만에 동거하고 곧 결혼하고보니 나의 순이가 아니였다. 생김생김은 순이와 비슷했으나 순이가 아니였다. 빨간 웃음이 없었다. 노랗게 웃는 그 얼굴엔 처녀의 수집음이 없었다. 경험 많은 녀인처럼 침대에서도 능란했다. 그녀는 서투른 나를 그 신비의 세계에로 인도해주었다.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듯.
《순이!》
나는 안타깝게 웨쳤다.
《자기 왜 허공중에 대고 순이를 부르지? 자기 순인 여기 있어!》
안해가 차디찬 눈길로 나를 쏘아본다. 그렇지. 안해의 이름도 순이지. 그런데 내 첫사랑 순이는 어디로 갔을가?
 
5
《어, 세상에!》
신문을 보던 나는 놀라서 부르짖었다.
《무서운 녀자야!》
나는 몸을 떨었다. 남편을 독살하다니! 음식에 독약을 넣어 남편을 죽인 녀자는 안해와 동갑나이! 어쩌면 살을 섞고 피덩이까지 키우며 살아온 제 남편을 살해할수 있단말인가. 아아, 무서운 세상이다!
《진지 드세요.》
밥상을 차려놓은 안해는 오늘따라 웬일인지 노란 웃음을 생긋 떠올린다. 말씨도 여느때와 달리 부드럽다. 신문을 놓고 다가간 나는 상우에 차려진 진수성찬을 놀란 눈길로 바라본다.
《아빠, 오늘은 내 생일이야.》
노란 행복이 생글생글 웃는다. 나는 안해의 딸년이라는것을 잠시 잊고 아이의 볼에 축하의 뽀뽀를 해준다.
《어서 드세요.》
안해가 재차 권하자 나는 숟가락을 들다 말고 맛나게 먹어대는 아이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본다. 아이는 완자를 특별히 즐겼다. 완자는 우리 세 사람 앞에 한그릇씩 놓여있었다. 자기 몫을 다 먹어버린 아이는 내 앞으로 저가락을 뻗쳐왔다.
《례모없이 어른들걸 다치면 못써!》
안해가 꽥 소리를 지른다,
《오늘은 걔 생일인데 놔두오.》
나는 웃으며 완자그릇을 아이의 앞에 놓아주었다. 그러자 안해는 홱 나꿔채서 내 턱밑에 받쳐들고 애교를 부리며 노란 웃음을 떠올린다.
《어서 드세요.》
안해의 거동이 내 의심을 자아냈다. 왜서 아이에게 내 그릇의 완자를 못먹게 할가? 불쑥 방금전에 신문에서 보았던 살인사건이 떠올랐다. 혹시 안해가 나를…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끼친다.
《어서요!》
안해가 또 들라고 재촉한다. 피할래야 피할수 없다. 이제 나는 꼼짝 못하고 죽을것이다. 나는 손이 떨려 완자를 집을수 없었다. 이때 상밑으로 기여들어온 발바리가 나를 구해주었다. 발바리를 끌어안은 나는 완자를 집어 발바리의 입에 넣어주었다. 그런데 발바리는 한동안 지나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내가 공연히 안해를 의심한게 아닐가? 아니야, 안해는 틀림없이 나를 독살하려고 시도했다. 완자에 뿌린 독약이 가짜여서 효력을 상실했을뿐.
나는 끼니마다 발바리를 안고 밥상에 마주앉았다. 밥과 반찬을 발바리에게 먹여 안전을 확인한후에야 숟가락을 들었다. 내가 발바리의 입에 음식을 넣어줄 때마다 안해는 한숨을 지었다. 나는 안해의 랑패상이 된 얼굴을 바라보며 흐뭇해났다. 내가 발바리를 방패로 삼으리라곤 생가도 못했겠지?
배불리 먹은 나는 텔레비죤앞에 마주앉았다. 뒤따라 온 안해도 말없이 내곁에 앉았다. 한창 드라마가 진행되고 있었다. 련인에게 퇴박맞은 남주인공이 술에 취하여 억망이 되여있다. 빈술병이 여기저기 놔뒹구는데도 남주인공은 련속 술을 병째로 들어 입속에 부어넣고있다. 나는 그만 구역질이 났다. 이런 장면을 벌써 몇십번이나 봤는지 모른다. 대륙이나 홍콩, 대만, 싱가포르의 드라마들은 모두가 천편일률적으로 이 모양 이 꼴이다. 오, 인간의 고통과 절망을 술이라는 이 한가지 수법으로 밖에 표현할줄 모르는 감독제씨들이 불쌍하다!
나는 리모콘의 단추를 눌러 채널을 바꾸었다. 이번에는 우리 말 뉴스다. 회의소식, 파산소식, 화재소식…그런데 저건 뭐야? 피, 피투성이가 되여 쓰러져있는 시체! 아, 끔직해라, 안해가 남편을 죽인 살인사건이다! 경찰에게 신문을 받고있는 녀살인범, 저렇게 음전한 녀자가 살인을 해? 그것도 잠든 제 남편을 도끼로 찍어죽이다니? 한번도 아니고 세번이나! 아아, 녀자가 무서워!
《얼마나 애가 났으면 제 남정을 죽였을가, 쯧쯧…》
안해의 탄식에 나는 가슴이 섬뜩했다. 살인범을 동정하다니? 아직도 안해는 암암리에 나를 살해하려고 벼르고있다. 이튿날, 그것이 실증되였다. 안해는 어디서 얻어왔는지 도끼를 벼르고있었다. 시퍼렇게 날이 선 도끼를 손으로 쓰다듬던 안해는 문뜩 나타난 나를 보고 흠칫 놀라더니 《쓸모없는 낡은 궤를 패때야겠어요.》하고 살짝 노란 미소를 짓는것이였다. 안해가 웃는다고 해서 내 눈을 속일수는 없다. 안해는 지금 살인음모를 꾸미고있다. TV에서 보도된 살인사건에서 계발을 받고 나를 도끼산장 해치우려고 암암리에 도끼를 벼르고있는것이다. 웃음속에 도끼를 품고있는 안해, 아아, 안해가 무섭다!
나는 잠을 자서는 안된다. 내가 잠든 사이에 안해가 도끼로 내 머리를 내리찍을것이다. 나는 날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시시각각 안해의 일거일동을 주시했다.
《좀 주무세요. 그러다 허약한 신체에 병나겠어요.》
안해는 몇번이나 권하다가 안되니 수면제까지 사다주었다. 나를 관심하는척 하면서 잠들게 한후 도끼산장 하려는 수작을 누가 모를가봐. 나는 그런 꾀임에 들지 않을것이다. 그렇다. 나는 자지 않을것이다. 영원히!
 
6
최박사라고 하는 저 놈이 밉살스럽다. 안해는 또 나를 저놈앞에 끌고왔다. 최박사는 안해가 뭐라고 주절대는 말을 열심히 귀담아듣고있다가 안경너머로 나를 건너다보았다.
《김작가님은 왜서 안해와 아이를 죽이려고 했습니까?》
재미있는 말이다. 내가 안해와 아이를 죽이려고 했다구? 정말 그랬던가? 오, 생각난다. 그랬다. 나는 넥타이로 잠들어있는 안해의 목을 조이려다가 그만 안해의 딸년에게 발각됐지. 아이의 고함소리에 안해가 깨여났고 나는 다시 아이에게 덮쳐들었지. 아이의 목을 조이려던 나는 안해가 뒤에서 내리치는 어떤 물체에 뒤통수를 맞고 쓰러졌지…
《그렇습니다. 난 확실히 안해와 아이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어째서 그랬습니까?》
《어째선가구요? 압박이 있는 곳에는 반항이 있기때문이지요. 어느 어른의 말씀인데요.》
《누가 김작가님을 압박했습니까?》
《저 사람입니다!》
나는 안해를 가리켰다.
《저 사람이 나를 살해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음식에 독약을 넣어 죽이려다가 성사하지 못하니 또 내가 잠든후에 도끼로 찍어죽이려고 했습니다. 나는 련며칠째 자지 못해 미칠지경이 되였습니다. 그래서 반항한거지요.》
《안해가 왜서 김작가님을 죽이려고 했습니까?》
《그건…》
나는 안해의 살인동기에 대해 해석할수 없었다. 나는 안해를 바라보았다. 헝클어진 머리, 파리하고 해쓱한 얼굴…갑자기 안해가 낯설어 보였다.
《저 사람은 내 안해가 아닙니다!》
최박사는 머리를 절레절레 젓더니 안해인지 아닌지 모를 녀인에게 안경을 돌려댔다.
《작가들은 괴상하게 미치는 사례가 많지요. 고골리나 쟈크 런던은 하마트면 미칠번 했으며 플로베르나 모파쌍은 진짜로 정신병에 걸렸댔지요. 김작가님도 아까운 사람이…내 동생이 정신병원 원장인데 내 전화로 련계할테니 부인께서 김작가님을 그리로 모셔가십시오.》
내가 미쳤다구? 정신병원…아, 무서워!
나는 최박사가 전화를 거는 기회를 타서 정신없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안해인지 모를 녀인이 나를 부르며 쫓아온다. 나는 고양이에게 쫓기는 쥐처럼 허둥지둥 정신없이 내뛰였다. 어느 굴속이든 들어가 숨어야 했다.나는 술집인지 가라오케인지 하는 곳의 화장실로 뛰여들어갔다.
화장실엔 나 말고 또 한 사내가 있었다. 그 사내는 내가 헐레벌떡거리면 자기도 헐레벌떡거리고 내가 땀을 씻으면 자기도 땀을 씻는것이 똑 마치 미치광이같았다. 그 미치광이는 어디서 본것 같기도 했고 낯선 사내 같기도 했다.
이때 나는 문이 열리는 기척을 들은것 같았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미치광이의 곁에는 웬 녀인이 나타났다. 그 녀인이 두손으로 헐클어진 머리를 잡아얹자 나는 환성을 질렀다.
《아, 순이!》
내 첫사랑 순이였다. 순이가 내 앞에 나타난것이다. 나는 연신 순이, 순이! 하고 목메여 불렀다. 순이가 내 부름소리를 들었는지 뭐라고 말하는것 같았다.
《자기 순인 여기 있어. 정신 좀 차려. 자기 안해가 바로 자기 순이야! 자기는 모를거야. 그때 순이가 어째 자기곁을 떠났는지를. 순이는…순이는 그때 건달놈에게 정조를 빼앗겼던거야. 절망에 빠진 순이는 죽으려고 하다가 죽지 못하고 5년동안이나 방황했던거야. 그러다가 결국엔 자기곁에 돌아오고. 순이는 확실히 변했지. 하지만 그건 순이 탓이 아니야. 그 5년이란 세월이 순이를 변하게 한거야.》
나는 그 말을 알아들을수 없었다. 순이는 왜 미치광이의 곁에 서있을가? 아니, 순이가 울고있지 않는가. 애잔한 빛을 담은 순이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져 떨어지고있었다. 순이는 왜 울고있을가? 저 미치광이가 순이를 괴롭힌거야. 그래서 순이는 나보고 구해달라고 우는거겠지. 순이, 울지 마, 내가 구해줄게.
《순이!》
나는 정신없이 부르짖으며 순이한테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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