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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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꽈배기인생
2020년 09월 07일 11시 24분  조회:1115  추천:0  작성자: 넉두리
단편소설
 
꽈배기인생
 
김희수
 
내 인생은 태여날 때부터 꽈배기처럼 비비 꼬여있었다. 꽈배기는 중국말로 마화(麻花)라고 하고 함경북도 방언으로 타래떡이라고 한다. 꽈배기건 마화건 타래떡이건 나는 이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릴 때에는 무척 즐겨 먹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꽈배기를 너무 좋아해서 엄마는 로임을 타는 날이면 꼭꼭 꽈배기를 사다주곤 했다. 꽈배기를 먹을 때면 언제나 꽈배기처럼 땋아내린 뒤집 명희누나의 외태가 생각났다. 나는 명희누나의 외태를 풀듯이 꽈배기를 한가닥씩 길게 풀어 가지고 한입씩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곤 했다.
그런데 어느날인가 내가 꽈배기를 맛있게 냠냠 먹는 것을 지켜보던 명희누나가 “자 똥 먹는 걸 좀 봐라. 창지 똥 먹는다”하고 익살스럽게 웃으며 놀려주었다. 내 이름은 조선말로 창길(昌吉)이지만 조선족들은 중국어 발음대로 “창지”라고 불렀다. 명희누나가 꽈배기를 똥이라고 한 다음부터 나는 꽈배기가 정말 똥같아서 다시는 먹지 않았다.
그 것은 아마도 내가 다섯살 때라고 기억된다. 나는 내가 먹는 꽈배기를 똥이라고 한 명희누나한테 보복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명희누나의 하교길에 기다리고 있다가 명희누나가 나타나자마자 바지를 벗고 오줌을 갈겼다. 뜻밖에 오줌세례를 받은 명희누나는 평소에 그렇게 예쁘던 눈을 무섭게 지릅뜨며 화를 벌컥 냈다.
“야, 임마! 내 오늘 니 고토리를 쑥 빼먹겠다!”
“빼먹어봐라, 빼먹어봐라!”
명희누가 쫓아오자 나는 바지춤을 붙잡고 줄행랑을 놓았다.
사흘후였다. 내가 집마당에서 혼자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명희누나가 달려오더니 무작정 내 바지를 벗겼다. 손에는 가위를 들고 있었다.
“야, 임마! 내 오늘 니 고토리를 쑥 잘라버리겠다. 다시는 오줌을 누지 못하게.”
“누나, 하지 마. 제발……”     
이러다가 정말로 고추가 명희누나의 가위에 썩둑 잘리는 게 아닌가 하는 공포에 질려 온몸이 덜덜 떨렸다. 때마침 엄마가 와서 말렸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내가 사내구실을 못할 번 했다.
엄마는 내가 첫돌이 지난지 얼마 안되여 새마을 조선족동네로 이사를 왔는데 당시 뒤집에 명희누나네가 살고 있었다고 했다. 명희누나네는 색다른 음식을 하게 되면 언제나 우리 집으로 들고 왔고 우리 엄마도 그 보답으로 꼭꼭 채소를 보내주곤 했다. 할머니네가 채소밭을 가꾸고 있었기에 우리 집에는 채소가 좀 여남이 있었던것 같다. 우리 집은 한족이였지만 만두나 젠빙(煎饼)보다는 된장국이나 김치를 더 즐겨 먹었다.
명희누나가 내 고추를 자르려고 했던 그 사건이 있은후 나는 얼마동안 명희누나를 멀리했지만 달포도 지나지 않아 곧 명희누나와 화해했고 명희누나가 하교하면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곤 했다. 그때마다 명희누나의 친구들은 늘 명희누나와 나를 놀려주었다.
“야아, 어떤 애는 엉뎅이에 꼬리 달렸다. 창지 명희 꼬랑대구나!”
하지만 명희누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옥자누나만 늘 나를 쫓으려고 애썼다.
“야, 창지야, 넌 남자라는게 남자들과 놀아야지 왜 부실하게 자꾸 녀자들과 놀려구 하니? 저리 가라, 가!”
옥자누나가 쫓으면 나는 명희누나의 뒤에 피했고 명희누나는 그런 나를 두둔하고 나섰다.
“창지 아직 어려서 그러니 여기서 놀게 하자꾸나.”     
나보다 세살 년상인 명희누나는 “똑똑한 애”라고 동네어른들로부터 늘 칭찬을 받았다. 공부도 잘했고 말도 잘했고 돌차기(망차기), 공기놀이, 고무줄놀이, 실뜨기 등 못하는 놀이가 없었다. 돌차기를 할 때면 명희누나의 발은 신들린 것 같았다. 명희누나가 한 발은 들고 한 발로만 뛰여가면서 돌을 차면 돌은 바로 목표하는 칸의 가장 적중한 곳에 떨어지곤 했다. 공기놀이를 할 때면 공기돌 하나를 우로 던지고 그 사이에 땅바닥의 네개의 공기돌을 몽땅 손안에 쥐고 우에서 내려오는 공기돌마저 착착 받아쥐는데 조그마한 손이 어찌 그리 예쁘고 빨리 움직이는지 보는 눈이 다 뒤집힐 지경이였다. 명희누나가 고무줄놀이를 할 때면 곡마단의 곡예공연을 보는듯 아슬아슬했다. 두 아이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량쪽에 서서 각각 고무줄의 량끝을 잡고 손을 머리우로 뻗쳐 고무줄을 높이 들어올리면 명희누나가 중간쯤에서 다리를 쭉 들어올려 고무줄을 착 발목에 걸어 내려 두발을 감아치는데 넘어질듯 하면서 균형을 잡는 그 동작이 얼마나 잽싸고 우아한지 모른다.
누나들이 고무줄놀이를 할 때면 나는 곁에서 지켜보다가 나도 함께 놀자고 떼를 쓰곤했다. 고무줄놀이에서 가장 쉬운 것이 “혁명을 틀어쥐고 생산을 촉진하자(抓革命促生产)”는 놀이였다. 이 놀이는 고무줄의 량끝을 이어서 두줄로 만든후 두 아이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량쪽에 서서 고무줄을 두발목에 걸고 있으면 다른 아이들이 하나, 둘씩 놀이동작을 한다. 고무줄놀이는 발목에서부터 무릎, 넓적다리, 궁둥이, 허리, 겨드랑이, 어깨, 목, 귀, 머리와 머리 위 한 뼘, 머리 위 두 뼘, 마지막에는 손을 뻗친 높이에까지 점점 고무줄의 높이를 상승시키는데 두줄놀이는 외줄놀이처럼 높이 뛸수 없기에 외줄놀이보다 높이를 몇단계 낮춘다.
두줄놀이를 할 때는 두 아이가 고무줄을 걸고 있고 다른 아이들은 차례로 한 아이씩놀이를 한다. 고무줄을 걸고 있는 두 아이가 “쫘(抓)”하고 소리치면 고무줄 한켠에 두발을 모으고 대기하고 있던 아이는 토끼처럼 깡충 뛰여서 두발이 두줄의 고무줄 안으로 들어오도록 내려선다. 그리고 “거(革)”하고 소리치면 개구리처럼 폴짝 뛰여서 두 다리를 벌려가지고 두발이 각각 두줄의 고무줄밖에 닿도록 내려선다. 다시 “밍(命)”하고 소리치면 원숭이처럼 잽싸게 뛰여올랐다가 두 발이 고무줄 안에 들어오도록 내려서고 “추(促)”하고 소리치면 벼룩처럼 훌쩍 뛰여 오르는 순간 몸을 90도로 돌려서 처음에 서있던 고무줄 한켠으로 내려서고 “썽(生)”하고 소리치면 바람처럼 씽하니 뛰여오르는 순간 두 발등에 고무줄의 한줄을 걸어가지고 건너편으로 넘어내리고 “찬(产)”하고 소리치면 캥거루처럼 껑충 뛰여오르는 순간 발등에 걸었던 고무줄에서 벗어나며 고무줄 건너쪽으로 살짝 내려선다. 잘하는 아이가 먼저 한 동작씩 하면서 뒤따라 하는 아이에게 고무줄높이를 낮춰주기도 한다. 두줄놀이는 상대적으로 쉽기에 유치원아이들이나 소학교 저학년아이들이 놀고 외줄놀이는 소학생이나 중학생들이 논다.         
나는 명희누나네가 전투영웅 황계광, 구소운을 구가하는 한족노래에 맞추어 고무줄놀이를 하는것을 많이 보았다. 그 노래는 지금도 기억에 남는데 내용이 대략 이러했다.
……쓰얼 쓰얼쑈링땅(十二、十二小铃铛), 짠떠우잉쓩 황지광(战斗英雄黄继光), 황지광, 츄쏘우윈(黄继光、邱少云), 타먼씨썽 워이워먼(他们牺牲为我们), 둬씨라쒀 미라쒀(哆唏啦嗦咪啦嗦).
나는 명희누나가 놀이를 할 때면 곁에서 구경하면서 “누나 잘 한다!”하고 손뼉을 치면서 응원했다.
어느날, 내가 외가집에 갔다 오니 여러명의 녀자애들이 동네공터에서 편을 나누어 꽃찾기놀이를 하고 있었다. 두 편이 서로 팔짱을 끼고 일정한 거리를 사이두고 마주 서서 있다가 명희누나의 편에서 먼저 한 발작씩 전진하며 노래를 부르자 상대방의 편에서 또 한발작씩 전진하며 노래로 대답했다.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
꽃을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무슨 꽃을 찾겠니 찾겠니 찾겠니
명희꽃을 찾겠다 찾겠다 찾겠다
 
상대방 편에서 명희꽃을 찾겠다고 하자 명희누나가 나서서 상대방의 한 사람과 가위바위보로 승부를 결정했다. 아쉽게 명희누나가 져서 명희누나는 상대편으로 넘어갔다.
이겨서 좋구나 좋구나 좋구나
져서두 좋구나 좋구나 좋구나
 
두 편은 한 판을 결속짓고 다음 판으로 넘어가 또 노래를 부르며 다시 시작했다. 아이들이 “명희꽃”을 찾는 회수가 제일 많았다. 그만큼 명희누나는 애들 속에서 인기가 높았다. 아이들 무리에서 리더격인 명희누나는 재치있는 리더십으로 아이들을 쥐락펴락 했고 아이들은 명희누나가 하는대로 고분고분 따랐다. 그 덕에 나는 무난히 녀자애들속에 끼워서 놀수 있었다.
나는 열살전에는 딱지치기, 유리구슬치기, 땅따먹기, 살구씨따먹기, 땅에 여러가지 형태의 금을 긋고 겨루는 놀이 등 남자애들의 놀이보다 공기놀이, 고누, 고무줄놀이, 실뜨기 등 녀자애들의 놀이를 더 좋아했다. 물론 이런 녀자애들 놀이는 모두 명희누나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명희누나한테서 배웠다. 하지만 열살이 되던 해에 명희누나의 날벼락 같은 말을 듣고 마음의 상처를 받은후로 더는 명희누나의 뒤를 따라 다니지 않았다.
사람들은 나를 조선족보다 조선말을 더 잘하는 한족이라고 한다. 내가 조선어를 류창하게 술술 구사할라치면 조선족아줌마들은
“저는 어떻게 조선말을 그리 잘하오?”
하고 묻는다. 나는 “저는”하는 말이 리해되지 않아 얼른 대답을 하지 못하고 “예?”하고 되묻는다.
아줌마들이 “제 말이요.”하고 한마디 더 해서야 나는 “아, 예. 저는 조선족학교에 다녔습꾸마.”하고 대답한다. 그리고 꼬치꼬치 캐여묻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 부모가 원래 조선말을 잘하는데다가 조선족마을에서 태여나 줄곧 조선족들과 이웃하고 살았습꾸마”라고 말해준다.
내가 어릴 때에는 조선족마을과 한족마을이 따로 따로 있었다. 그때는 한족들은 한족들끼리, 조선족들은 조선족들끼리 동네를 형성하고 저마끔 한 동네에서 살았는데 간혹 조선족동네에 한족집이 한둘이 있는 동네도 있었다. 우리 집이 바로 그랬다. 우리 집은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새 마을 조선족동네에서 유일한 한족집이였다.
명희누나의 엄마는 우리 집에 놀러올 때면 언제나 “이 집 가무떼기 있습둥?”하고 소리치면서 노크했다. 그러면 우리 엄마는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명희 엄맘둥? 날래 들어옵소”하고 반긴다. 나는 “가무떼기”라는 것이 가정주부라는 뜻이란 걸 나중에야 알게 되였다.    
나의 부모는 왜서 조선족동네에서 살았고 왜서 나를 조선족유치원, 조선족학교에 붙였을가? 이런 의문이 있었지만 나는 부모한테 물어본적이 없다. 나는 외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지만 외할머니가 조선족이였다고 한다. 외할머니가 조선족이여서 엄마가 조선말을 잘했고 나 또한 반은 조선족인 엄마에게서 배워서 조선말을 잘했던 것 같다.
어릴 때 나는 외할머니가 조선족이니 내 몸에서 4분의 1이 조선족피가 흐르고 있는 줄로 알았다. 그러다가 나중에 내가 입양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난 진짜 한족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출생의 비밀에 대해 알려준 것은 명희누나였다. 내가 열살이 되던 해에 명희누나는 자그마한 일로 나하고 다투다가 “야 창지야, 너는 주어온 아이다. 너네 엄마가 널 검은 철다리 밑에서 주어왔다”하고 놀려주었다. 그 날벼락 같은 말을 듣고 나는 “아니야, 난 우리 엄마가 낳은 아이야!”하고 소리쳤다. 그리고 나는 그 즉시 울면서 집으로 달려가 엄마를 붙잡고 “명희누나가 그러는데 내가 다리 밑에서 주어 온 아이래. 엄마, 이게 정말이야?”하고 따져 물었다. 순간 엄마는 당황해 하며 “누가 그런 허튼소리를 줴치던?”하고 되물었다.
“명희누나가 그랬어.”
“그건 거짓말이야. 우리 창지는 이 엄마가 낳은 아이야.”
“정말이야?”
“그럼. 정말이지.”
그제야 안심이 된 나는 다시 명희누나를 찾아가서 “누나는 왜 거짓말을 했어?! 우리 엄마가 다 알려줬어. 난 다리 밑에서 주어 온 아이가 아니라 엄마 배속에서 나온 아이래.”하고 따지듯이 말했다. 명희누나는 그런 나를 째려보며 소리쳤다.
“야, 이 멍청아! 너네 엄마야 당연히 아니라고 하겠지 실말을 하겠니?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너네 친엄마가 널 낳아서 검은 철다리 밑에 버렸대. 그 걸 지금의 너네 엄마가 주어다 키웠대.”
“거짓말이야!”
“정말이야. 너네 원래 살던 동네의 왕아줌마가 말하는 걸 우리 엄마가 직접 들었대. 왕아줌마는 네네 엄마가 다리 밑에서 널 주어 오는 걸 직접 보았대. 왕아줌마가 나중에 알아보니 너네 친엄마는 처녀의 몸으로 널 낳았기에 키울수 없어 갓난 널 다리 밑에 버렸대.”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나는 내가 버림받은 아이라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정말로 버림받은 아이라면 괴로워 미칠것 같았다. 나는 한참 울다가 물었다.
“그럼 우리 친엄마는 지금 어디 있대?”
“그야 누구도 모른대. 널 다리 밑에 버리고 간후 누구도 소식을 모른대.”
“아니야! 거짓말이야!”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 그날밤 나는 열살 어린 나이에 처음 외박을 했고 룡정역 대합실에서 밤을 지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에 집으로 달려가 친엄마가 어디 있느냐고 발광을 해서 엄마를 당황하게 했다. 엄마는 곧장 명희네 집에 찾아가서 “이 집 명희가 왜 당치않은 말을 해서 우리 창지를 버림받은 아이로 만드냐”고 명희 엄마를 보고 야단을 쳤다. 명희 엄마는 어른들끼리 하는 말을 명희가 잘못 알아듣고 그런 말을 했다고 사과했다. 엄마는 명희 엄마와 함께 우리가 원래 살았던 동네에 찾아가 왕아줌마를 데려왔고 왕아줌마는 내 앞에서 “주어 온 아이란 건 쉬창지(许昌吉)를 말한 거야. 넌 쉬창지(徐昌吉)잖아? 난 너네 엄마가 널 임신해서 배가 불룩한 것도 보았고 널 낳는 것도 직접 보았다. 넌 너의 엄마가 낳은 아이가 틀림없어”하고 해석했다. 결국 “허(许)”와 “서(徐)”는 중국어로 발음이 같아서 명희누나가 오해했다는 것이였다.
그날 어른들이 다 물러간후 나는 명희누나를 보고 “들었지? 난 주어 온 아이가 아니야.”하고 아주 떳떳하다는 듯 배를 쑥 내밀었다. 그런데 명희누나는 그런 나를 비웃으며 반박했다.
“다른 집 애들은 다 형이나 누나, 동생들이 있는데 너만 혼자인 게 이상하지 않니? 네가 주어 온 아이가 아니면 왜 네네 집엔 아이가 하나뿐이겠니?”
정말 그랬다. 다른 집들은 형제자매가 네댓씩 되였고 명희누나도 동생이 둘이나 있었다. 내가 정말로 주어 온 아이일가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나는 더는 엄마에게 따져 묻지 않았다. 엄마가 상심할가봐 그런 것도 있었지만 혹시나 정말로 나를 주어 온 아이라고 승인할가봐 더욱 겁났던 것이다. 그날밤 나는 혼자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울면서 밤을 지새웠다.
이튿날 새벽에 쪽잠을 자고 일어나보니 정주간에 밥상이 차려져있고 그 옆에 어머니가 누워 계셨다. 우리 집은 웃방과 정주 두간이 있는 조선족 온돌을 놓은 집이여서 웃방의 미닫이문을 열면 정주간과 부엌이 한눈에 드러나 보인다. 우리 집은 세 식구인데 나는 웃방에서 자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정주간에서 주무셨다.  
“어머니, 어디 아프신가요?”
“네 어머니는 네가 괴로워하는 모습이 가슴 아파서 지난밤에 눈물로 밤을 새웠다.”
아버지가 대신 하는 말에 나는 가슴에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며 눈물이 나왔다. 어느새 일어났는지 어머니가 나를 와락 껴안았다.
“창지야, 누가 뭐래도 넌 내 아들이야! 우리가 널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지 알지?”
“압니다. 어머니, 미안해요!”
나는 양부모의 넘치는 사랑을 알지만 갓난 나를 버린 생모를 용서할 수 없었다.  
다음날 나는 엄마가 나를 주어왔다는 검은 철교를 찾아갔다. 집에서 5백보가량 걸으면 기차길이 나타나고 그 기차길을 건너 다시 2백보가량 걸으면 또 새로운 기차길이 나타나는데 그 기차길을 따라 잠간 걷노라면 해란강우에 놓인 검은 철교에 다달을 수 있다. 이 검은 철교에는 내 발자국이 수없이 남아있다. 학교밭이 검은 철교 건너쪽에 있었기에 반아이들과 함께 학교밭에 일하러 다닐 때도 건너 다녔고 여름철에 동네 아이들과 함께 수영하러 다닐 때도 건너 다녔고 가을철에 동네 아이들과 함께 과수원에 과일서리를 하러 다닐 때도 건너 다녔고 겨울철에 동네 아이들과 함께 썰매를 타러 다닐 때도 건너 다녔다.   
나는 검은 철교의 한 끝에 멍하니 서서 검은 철교의 저쪽 끝을 바라보기도 하고 강물을 넋없이 바라보기도 했다. 다리밑에 버렸다면 가운데는 강물이니 시작점이나 끝점 어디에 버렸을 것이다. 수없이 건너다닌 검은 철교지만 어쩐지 낯설어보였다. 그런데 이쪽에 서면 이쪽이 시작점 같고 다리를 건너 저쪽에 서서 보면 저쪽이 시작점 같다. 시작점이던 끝점이던 어느 한쪽에 버렸을 것이다. 계단을 내려가 강뚝에서 경사지게 돌로 쌓은 다리아래를 내려가보니 첫 교각주위에 자그마한 백사장이 있었지만 아이를 버릴만한 장소는 아니였다. 다리건너쪽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아이를 버릴 마음을 먹은 모진 엄마라지만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여름철이나 겨울철이라면 수영이나 썰매 타러 나온 아이들이 빨리 발견할수 있었겠지만 내 생일이 4월초이니 군데군데 살얼음판이 남아있는 이 계절에 강가로 놀러 나온 아이들이 없었을 것이다. 비록 이른 봄이라지만 빨리 발견하지 못하면 아기는 얼어죽을 것이 아닌가? 그러니 사람의 눈에 잘 띄는 곳에 버렸을것이다. 아마도 다리 맨 밑이 아니라 다리 조금 밑인 강뚝 어딘가에 버린것 같았다. 귀를 기울이니 가까운 곳에서 응아응아 하는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점점 더 처량하게 들렸다. 저렇게 애달프게 우는 아이를 버리고 어떻게 발걸음이 떨어졌을가? 엄마라는 사람은…… 
나는 몸서리치는 다리 밑을 피해 다시 검은 철교에 올라섰다. 갑자기 호각소리가 들려왔다. 철교 저쪽을 바라보니 당직실로 쓰고 있는 일제 때의 또치카에서 나온 철도원아저씨가 기차가 온다는 신호로 푸른 기발을 높이 들고 호각을 불고 있었다. 호각소리에 이어 뿡 하는 기차의 기적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이내 다리란간에 몸을 기댔다. 순간 기차가 기적소리 높이 강풍이 몰아치듯 지나갔다. 기적소리에 귀가 먹먹했고 기차바람에 내 몸이 날려갈 것 같았다. 순간 나는 갓난아이가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에 얼마나 무서웠을가, 얼마나 공포에 떨었을가 하는 생각이 스쳐지났다.    
왜 하필 다리밑에 버렸을가? 차라리 강물에 버렸더라면 이처럼 고통스럽지 않았을것을. 키우지도 못하고 버릴거면 왜 나를 낳았어? 나는 나를 낳은 엄마가 죽도록 미웠고 내가 버림받은 아이란걸 알게 한 명희누나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그렇게 죽이고 싶도록 밉던 명희누나였지만 몇년이 지난후에는 지난 일을 잊고 다시명희누나를 좋아하게 되였다. 단순히 좋아한 정도가 아니였다. 나는 청소년기 이성에 어섯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명희누나를 사랑하게 되였다. 많고도 많은 녀자들 중에 왜 하필 세살이나 년상인 명희누나만 녀자로 보였을가? 내 눈엔 명희누나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게 보였다. 명희누나만 보면 공연히 가슴이 설레이고 하루라도 명희누나를 보지 못하면 미칠 것 같았다. 어느날은 명희누나와 섹스하는 꿈을 꾸면서 처음 몽정을 하기도 했다. 다음날 젖은 속옷을 누가 볼가봐 두려워 몰래 빨래했고 그후 명희누나를 보기가 민망했다.
그러다가 어느날부터는 명희누나의 손을 잡고 정처없이 걷고 싶었고 명희누나의 입술에 키스를 하고 싶었다. 그렇게 련며칠 밤잠을 설치면서 젊은 날의 짝사랑 고민을 하다가 마침내 내 마음을 고백해야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그날은 날씨가 화창한 일요일이였다. 명희누나를 향한 사랑의 불길이 훨훨 타오르는던 그날 나는 낚시대를 들고 명희누나를 찾아갔다. 말이 낚시대이니 그건 대나무가지로 만든 비자루에서 단단한 가지를 골라내여 낚시대랍시고 만들어 거기에 낚시줄과 낚시바늘을 맨것이다. 또 치약의 웃부분을 녹인 납으로 봉돌을 만들어 달아놓았는데 당시 아이들에게 이런 낚시도구가 류행이였다.
“누나, 낚시하러 갈가?”
내가 낚시대를 흔들어보이자 명희누나는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눈을 곱게 흘겼다.
“오늘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낚시 낚자만 들어도 싫어하던 네가 낚시야?”
“나도 한번 낚시 배워볼려구. 누나, 같이 가줄래.” 
“사내애들 하는 낚시를 내가 왜 가?”
“날씨도 좋은데 낚시도 하고 미역도 감고 좋잖아?”
“그럼 애들 불러 함께 가자.”
“애들은 무슨…… 우리 둘만 가자.”
“너랑 나랑 둘이서만?”
“응.” 
“우리 둘이서 무슨 재미야?”
명희누나는 기어이 애들을 부를 작정이였다. 급해난 나는 핑계거리를 찾았다.
“사람이 많으면 물고기가 달아나. 우리 둘만 가자.”
그러나 명희누나는 애들을 부르러 이집 저집 찾아다녔다. 마침 일이 잘 되느라 그런지 애들이 모두 어디로 멀리 놀러 갔는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명희누나는 단념했는지 나를 따라 나섰다.
명희누나와 내가 강가에 이르니 빨래 하러 나온 아낙네들과 수영하러 나온 아이들이 많았다. 우리는 룡문교를 건너 강뚝을 따라 계속 올라가다가 버드나무가 있는 조용한 곳에 자리잡았다. 명희누나와 나는 버드나무 아래에 나란히 앉아 낚시질을 했다. 나는 어설픈 동작으로 낚시바늘에 미끼를 끼워서 강물에 던졌다. 원래부터 낚시에는 흥미가 없었던 차라 나는 낚시대를 잡은 채 홀린듯이 명희누나의 얼굴만 넋없이 바라보았다. 명희누나는 희고 보동보동한 손으로 산들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었다.
“야 창지, 너 왜 낚시엔 집중하지 않고 나만 보니? 그래 가지고 물고기를 낚기나 하겠니?”
명희누나는 가까이 다가와 나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탁 튕겼다. 나는 바보처럼 씩 웃었다.
“누나가 너무 이뻐서……”
“너 녀자 이쁜 것두 아니?”
“응. 누나 너무 이뻐. 정말 이뻐! 누나 나랑 련애할래?”
“뭐라구?!”
“누나 우리 약혼하자!”
나는 불의의 습격을 했다. 전광석화와 같이 순식간에 명희누나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갑작스럽게 당한 명희누나는 당황해다가 나를 콱 밀치고 주먹을 내들었다.
“나보다 나이도 어리고 키도 더 쬐꼬만게 이 누나랑 련애하겠다구? 누나랑 련애하려면 10년은 더 자라야 할걸.” 
나는 련애하겠다고 명희누나한테 덤볐다가 머리에 꿀밤 한 대를 맞았다. 명희누나가 또 꿀밤을 먹이려고 하자 나는 황급히 피하며 소리쳤다.
“내 지금은 키가 작지만 몇년후엔 누나보다 더 클수 있어. 누나, 10년 기다려줘.”
“야, 임마! 10년후엔 누난 시집가서 애 엄마가 될거다!”
명희누나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깔깔 웃어댔다.
그렇게 내 청춘의 첫 고백은 실패로 끝났고 실련의 아품이 너무 컸지만 나는 명희누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명희누나와 나는 모두 대학에 입학하지 못했다. 명희누나는 대학시험제도가 회복되기 전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하향지식청년으로 농촌에 내려가 집체호 생활을 했기에 대학에 갈 꿈조차 꾸지 못했다. 나는 대학시험제도가 회복되던 해에 중학교를 졸압했지만 그 당시 대부분 아이들이 그랬듯이 나 또한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기때문에 대학에 붙지 못했다. 그 대신 나는 3년동안 군복무를 하고 나와 백화공사에 취직했다. 군대에서 제대하던 날 나는 집에 잠간 들렀다가 곧 명희누나가 있는 집체호로 찾아갔다.
명희누나는 뜻밖에 찾아온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너 군대 갔다 오더니 진짜 사내대장부 됐구나!”
명희누나가 내 손을 잡아주고 집체호의 다른 누나들도 키 크고 잘 생긴 군대총각이 왔다고 기뻐했다. 그런데 내가 명희누나의 신랑감이라고 롱담을 했을 때 남자들쪽에서 한 형이 적의에 찬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형이 명희누나를 짝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집으로 돌아갈 때 명희누나는 동구밖에까지 따라 나오며 나를 배웅해주었다.
작별인사를 나눌 때 나는 갑자기 명희누나의 손을 잡으며 고백했다.
“이제 내가 누나보다 키도 더 컸으니 우리 진짜로 련애하자.”
“창지, 너 또 그런 롱담을……”
“롱담이 아니야.”
나는 일생에 두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명희누나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이번에는 사춘기의 키스가 아니라 정열에 불타는 청춘의 키스였다. 뜻밖에도 명희누나는 나를 물리치지 않고 키스를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그후 나는 명희누나의 집체호로 뻔질나게 다녔다. 우리는 집체호에서 500메터 떨어진강가의 버드나무아래를 비밀장소로 만들었고 명희누나는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살금살금 비밀장소로 나왔다. 어느날 명희누나는 불쑥 생뚱한 말을 했다.
“창지야, 미안해.”
“갑자기 미안하다니?”
“내가 널 주어온 아이라고 놀려준 일이……”
“다 지나간 일을 새삼스럽게. 난 다 잊었어.”
그 순간 갑자기 스치는 생각이 나서 나는 바보같은 물음을 던졌다.
“날 낳아준 엄마가 왜 하필 다리밑에 날 버렸을가?”
“너 바보야? 지금도 다리밑에 버렸다고 생각하는 거야?”
“……”
나의 진지한 눈길에 명희누나는 깔깔 웃어댔다.
“그건 어른들이 아이를 놀려주는 말투야. 어른들은 흔히 아이들이 말을 잘 듣지 않으면 ‘넌 다리밑에서 주어온 아이야’하고 놀려주는데 정말 아이를 다리밑에 버리는 부모가 있을가? 누군가의 집앞에 버리면 버렸겠지.”
그럼 나의 생모도 날 지금의 양부모가 살던 집앞에 버린 걸가? 다리밑이 아니라……
몇년후 명희누나는 집체호생활을 결속짓고 도시로 돌아와 제지공장에 취직했다. 명희누나가 취직하자 나는 정식으로 청혼하고 부모님께 결혼의사를 밝혔다. 한족들은 녀자가 세살쯤 년상인 것을 개의치 않아서 그런지 부모님은 “명희 그 아이를 오래동안 곁에서 지켜보아서 잘 아는데 현모량처가 될수 있을 것 같다.”고 하면서 통쾌하게 동의했다. 그런데 내가 년하이고 한족이라는 리유로 명희누나의 부모님이 심하게 반대했다. 그렇게 되자 어머니는 명희누나의 부모님을 찾아가서 사정했다.
“우리 창지는 비록 한족이라 하지만 조선족이나 다름없습꾸마. 말이나 습관이나 완전히 조선족입꾸마. 명희를 친딸처럼 잘 대해줄테니 우리 창지한테 줍소.”
“그게 아니 될 말입꾸마. 아무리 조선말을 잘 한다고 해도 민족이 다른데……게다가 창지는 우리 명희보다 세살이나 어리지 않습둥?”
명희누나의 어머니는 손사래를 치며 반대했다. 어머니는 명희누나의 어머니한테 다시 한번 사정했다.
“민족이 다르다고 결혼 못하는 게 아니꾸마. 우리 어머니도 조선족인데 한족집에 시집와서 잘 살았습꾸마. 사실 한족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여러 민족이 융합되여 하나의 민족으로 된 게꾸마. 먼 옛날에 황제를 수령으로 하는 하족(夏族)과 염제를 수령으로 하는 화족(华族)이 련맹을 맺은후 점차 하나로 융합되여 화하족(华夏族)이 되였고 후에 화하족은 장면족(藏缅族), 토화라인(吐火罗人), 동이족(东夷族), 초족(楚族), 통고사인(通古斯人), 서융(西戎), 치우(蚩尤)의 후대, 흉노족(匈奴族), 선비족(鲜卑族) 등과 융합되여 새 민족 즉 한족이 산생되였다고 합꾸마.”
“창지 엄마 유식한 건 알겠는데 안 되는건 안 되는 겠꾸마!”
명희누나의 엄마가 그렇게 안 된다고 하는데도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무릅까지 꿇고 사정했다.
“애들이 서로 좋아하는 걸 봐서 결혼시키깁소!”
사정이 사촌보다 낫다고  하지만 명희누나의 아버지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
“내 딸을 한족한테 주느니 차라리 절에 출가시키겠다!”
그야말로 딸을 녀승으로 만들지언정 나한테는 시집보내지 않겠다는 비장한 결단이였다. 게다가 명희누나의 아버지는 한마디 경고를 더 붙였다.
“네 놈이 다시 내 딸을 만나봐. 다리를 분질러버릴 거야!”
삭발하고 비구니가 된 명희누나와 다리가 분질러진 내 모습을 상상하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하지만 나는 다리가 분질러질 위험을 무릅쓰고 남몰래 명희누나를 만나서 변함없는 사랑과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었으나 명희누나는 녀승이 되는 것이 두려웠던지 리별을 선언했다. 내가 아무리 매달리고 애걸복걸해도 헤여지자는 명의누나의 결심을 꺾을 수 없었다.
“누나, 난 10년이고 20년이고 누나를 기다릴 거야!”
나는 터져나오는 눈물을 참으며 애타게 소리쳤으나 명희누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그렇게 내 첫사랑은 내 가슴에 아픈 상처만 남기고 끝나버렸다.
그후 명희누나는 이사를 갔고 이듬해에 다른 남자한테 시집을 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신랑은 명희누나와 한집체호에 있던, 나를 적의에 찬 눈길로 바라보던 그 남자였다. 우리는 명실상부한 갑돌이와 갑순이의 신세가 된 것이다. 명희누나가 시집을 간 이듬해에 나도 한족처녀를 만나 장가를 갔지만 화가 나서 간 것이 아니였다. 장가간 날 첫날밤에 달을 보긴 했지만 울지는 않았다. 그저 명희누나의 얼굴이 희미하게 떠올랐을 뿐이다.
그후 세월이 살같이 흘러 내 딸도 시집을 갈 나이가 되였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내 딸, 천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내 생명과도 같은 그 아이에게만은 세상에 둘도 없는 좋은 신랑감을 골라주려고 했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느날 나와 안해가 텔레비죤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내 딸이 키가 큰 남자를 데리고 와서 결혼할 사람이라고 소개했던 것이다. 딸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한 나는 한동안 놀라서 아무말도 못했다.
“너 남자친구와 사귄다는 말도 없었잖아? 그런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결혼이라니……”
안해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딸이 데리고 온 젊은이가 조선족이였던 것이다. 준수한 외모에 품행이 단정한 젊은이였고 경제형편도 넉넉한 편이였지만 조선족이라니? 나는 내 아픈 과거가 생각나 딸이 좋다고 하니 크게 반대를 못했지만 안해는 절대 안된다고 딱 잘라 말했다.
“안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전에는 안된다!”
딸도 울며불며 그 젊은이가 아니면 시집을 안 간다고 야단을 쳤다. 딸의 눈물에 마음이 약해진 나는 안해를 달랬다.
“지금은 민족이 달라도 문제될 게 없잖소? 애들이 좋다는데…… 요즘은 조선족사위를 삼은 집이 적잖은 것도 현실이고……우리 단위의 서과장도 지난해에 조선족사위를 삼은 일을 당신도 알고 있잖소?”
“서과장은 돼도 난 안돼요.”
안해가 아무리 반대해도 딸을 이길 수 없었다. 내 딸은 우리를 속이고 결혼등록을 하는 날로 그 젊은이와 동거했다. 그리고 그해 말에 덜컥 임신까지 했다. 배가 불러오자 안해도 하는 수 없이 고집을 꺾고 딸의 결혼식을 치르는데 동의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딸이 임신까지 하는 동안 안해의 반대 때문에 우리는 사돈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가 결혼식을 앞두고 마주앉게 되였다. 사돈과 만나는 장소에서 안사돈을 보는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안사돈이 바로 나의 첫사랑 명희누나였던 것이다. 명희누나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서로 놀라기는 했지만 그 자리에서 정체를 밝히지 않고  모르는 척 했다. 그리고 나중에 둘이 따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명희누나는 아이까지 가진 상태에서 어른들의 문제 때문에 자식들의 결혼을 반대할 수 없다는 립장을 밝혔고 나도 생각이 복잡했지만 같은 생각이라고 의사를 표시했다. 이리하여 우리 둘이 이루지 못한 사랑을 자식들이 이루게 되였다.
결혼후 몇달만에 내 딸이 아들을 낳았고 나는 외손자를 보게 되였다. 그런데 외손자를 본 기쁨을 누려 볼 틈도 없이 안해가 말썽을 피웠다.
외손자의 호적을 올릴 때 일이 생겼다. 안해는 아이가 엄마의 성을 따르게 하고 민족도 한족으로 올려야 한다고 고집했다. 나는 허거픈 웃음을 지었다.
“글쎄 우리의 욕심은 그렇지만 아이가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것은 예로부터 내려온 법이요. 따라서 민족도 아버지의 민족을 따라야 응당한 것이요.”
“뭐가 응당하는 거예요? 지금 어느 시대인데 그 따위 말을 해요? 지금은 아이가 엄마의 성과 엄마의 민족을 따를 수도 있는 시대예요.”
“딸은 출가외인이라는 말도 있지 않소. 말도 안되는 그런 생각은 그만두는 게 좋겠소.”
내가 딱 잘라 말했지만 안해는 한마디도 지려고 하지 않았다.
“딸은 출가외인이란 말 옛말이 된지 오래예요. 우리는 자식이라곤 딸 하나밖에 없는데 외손자가 우리의 대를 잇게 해야 되잖아요?”
“자식이 하나인 건 사위네도 마찬가지요. 그쪽도 대를 이어야 할 게 아니겠소?”
“아이참, 당신은 누구 편이예요?”
“무슨 편이 따로 있겠소? 난 누구편도 아니요. 그저 공정하게 말하는 거요. 조선족이 자꾸 줄어든다고 하지 않소? 기왕에 딸을 조선족한테 시집보냈으니 외손자를 조선족으로 올려 조선족을 한명이라도 보태 게 하자구. 우리 한족은 세계에서 인구가 제일 많은 민족이 아니요? 그만큼 여유가 있기에 배포를 부려도 되잖겠소?”
내가 짐짓 배를 쑥 내밀었으나 안해는 어림없는 소리라는 듯 손사래까지 쳤다.
“인도인구가 중국인구를 거의 따라 오는데 우리가 방심해서야 되겠어요?”
“허허참, 조선족은 중국인구가 아니요? 그리고 인도의 주류민족인 힌두스탄족은 인도인구의 72%정도밖에 안 되지만 한족은 중국인구의 92%나 되오. 이러니 세계 최대의 민족답게 배를 쑥 내밀어도 될게 아니겠소?”
내가 아무리 구구절절이 설득을 해도 안해한테 내 말은 소귀에 경읽기였다. 안해는 사돈집에 찾아가서 수십가지 리유를 대면서 외손자의 호적을 한족으로 올려야 한다고 한바탕 야단을 치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사돈집에서 양보하지 않고 딸까지 시집편을 따르겠다고 하는 판에 독불장군이라 손을 들고 말았다.   
외손자의 호적문제 때문에 소란이 있은후 우리 집에는 또 약간의 소란이 일어났다. 집에 도둑이 들었던 것이다. 도둑은 집이 빈틈을 타서 좌물쇠를 부수고 침입해 서랍과 궤에서 현금과 보자기를 훔쳐갔다. 내가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땅을 치며 울어댔다.
“창지야, 도둑이 보자기를 훔쳐갔다. 보자기를……”
나는 어머니가 그렇게 슬프게 우는 것을 처음 보았다. 어머니는 내 손을 꼭 잡고 연신 “미안하다, 미안하다.”고 했다.
“어머니, 보자기에 무슨 귀중한 물품이라도 들었습니까?”
어머니는 울면서 머리를 끄덕이였다. 나는 보자기에 무엇이 들었는지 물어보지 않고 “어머니, 제가 돈을 많이 벌어서 드릴테니 울지 마십시오.”하고 위안했다.
웬 일인지 그날밤에 나는 나의 생모가 갓난아기를 버리는 꿈을 꾸었다. 그후 며칠동안 고요한 밤에 자리에 누우면 내가 누구일가, 하는 생각에 잠을 들 수 없었다. 생모는 왜 나를 버렸을가? 그리고 처녀를 임신시킨 나쁜 생부는 어떤 낯짝일가?
나는 몇번이나 양부모한테 물어볼가 하다가 그만두고 사처에 수소문하여 왕아줌마를 찾았다. 며칠만에 나의 생모가 나를 버리는 것을 목격했다는 바로 그 왕아줌마를 찾는데 성공했고 그날로 왕아줌마를 만났다. 이 때의 왕아줌마는 이미 주름살이 밭고랑처럼 깊게 패인 백발의 왕할머니가 되여있었다.
“절 알아보시겠습니까?”
“누군데?”
왕아줌마는 나를 찬찬히 뜯어보더니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가로저었다.
“쉬창지입니다. 내 친엄마가 날 버리는 걸 할머니가 보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오, 자네구먼. 개구쟁이 자네를 본 것이 어제같았는데. 참, 세월이 사람을 이처럼 늙게 만드는구먼.”
왕아줌마는 지난일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어있었지만 나는 그런 기분이 아니였다.
“내 생모는 어떤 사람이였습니까? 왜 나를 버렸답니까? 아는대로 다 얘기해주십시오.”
내가 무턱대고 질문을 던지자 왕아줌마는 당황해하다가 후, 하고 탄식했다.
“자네 여태껏 그 아픈 걸 가슴에 품고 살았구먼. 나도 사실 자네 생모에 대해 아는 게 얼마 없네. 그저 새파랗게 젊은 녀자가 갓난 아기를 자네 양부모네 집 문앞에 버리는 걸 보았을 뿐이네. 그때 이상하여 뒤를 밟았더니 영국더기에 있는 어떤 초가집으로 들어가더구먼. 그래서 이웃들에게 물어보니 이웃들도 그 녀자가 금방 이사해와서 잘 모른다더구먼. 누군가 그 녀자는 처녀인데 아이를 낳았다더구먼.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았네. 그후 자네의 양부모와 같이 가보니 그 녀자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었네. 동네사람들도 그 녀자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했네. 내가 아는 건 이뿐이네.”
이만한 단서를 가지고 생모를 찾는다는 건 하늘의 별따기일 것이 분명했다. 나는 생모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가장 알고 싶은 한마디를 물었다.
“내 진짜 성은 뭔지 아십니까? 내 생모는 한족이였습니까?”
“글세. 자네를 버렸을 때 보자기가 하나 있었는데 아마 그 안에 자네 출생을 증명할만한 글쪽지 같은게 있었을 거네. 아마도 한족집 문앞에 버린 걸 보아선 한족일 것 같기도 하지만 그 녀자가 조선말을 류창하게 하는 걸 보았다는 사람도 있네. 뭐 자네처럼 한족이 조선말을 잘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런데 자네 생모는 자네 양부모가 결혼한지 6년이 되도록 아이가 없다는 걸 알고 그 집 문앞에 아이를 버린 것 같네. 그러고 보니 한족일 수도 있고 조선족일 수도 있겠는데……”
모든 것이 애매했다. 나는 보자기를 도둑맞은 일이 떠올랐다. 왕아줌마가 말한 보자기가 그 보자기일가? 그래서 어머니가 그렇게 슬프게 울었구나. 집에 돌아간 나는 집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지면서 보자기를 찾아보았지만 결국 헛물만 켜고 말았다. 도둑맞은 보자기가 그 보자기임에 틀림없었다. 보자기가 없어졌으니 내 출생의 비밀에 대해서도 알수 없었다. 양부모한테 묻고 싶었지만 그들이 마음이 상할가봐 입을 열지 못했다. 내가 보자기를 찾던 그해 나의 양아버지가 사망되였다.
이제 양아버지가 사망됐으니 양어머니에게 물어보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차차 물어보자, 하고 내 출생의 비밀에 대해 묻는 일을 뒤로 미루었다. 그리고 그해 한국으로 돈벌이를 나갔다.
3년이 지나후 엄마의 병세가 위급하다는 전화를 받고 나는 급급히 귀국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 엄마는 림종을 앞두고 있었다. 엄마는 나의 손을 꼭 잡고 무슨 말을 했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수 없었다. 나는 엄마가 영원히 건강할줄 알았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어머니에게 꼭 묻고 싶었던 말이 있었지만 마음속에 넣어두고 있었다. 이 시각 나는 그 말을 묻지 않을수 없었다.
“어머니, 제가 입양아입니까? 어떤 처녀가 낳아서 버린 아이를 어머니가 안아다가 키우신 겁니까?”
엄마는 맥없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간신히 머리를 끄덕였다. 나는 다시 가장 묻고 싶었던 물음을 다그쳤다.
“어머니, 제가 한족입니까? 조선족입니까?”
엄마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기만 할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엄마가 말로 의사를 표시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물었다.
“어머니, 제가 한족입니까?”
나는 엄마가 머리를 끄덕이거나 가로젖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나는 엄마의 대답을 들을수 없었다. 엄마는 그 순간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한족인가? 조선족인가? 이는 영원히 알수 없는 비밀로 되였다. 
 
 
연변문학 2019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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