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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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전기 설한 (10)
2014년 03월 07일 12시 02분  조회:2740  추천:2  작성자: 김송죽
 

10。

조선의 백성들은 지쳐버렸다.일본침략자의 피비린 탄압과 무서운 질병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 그들은 오로지 편견모르는 자연의 너그러운 자비나 받아보려고 했다. 하건만 이해의 마지막달 12월의 날씨는 너무나 음산하고도 차거웠다.

이런 때에 <<대한협회>>와 대립면에 서서 줄곧 반대곡조만 불러오던 <<일진회>>의 기염은 극도로 창궐했다.

1904년에 <<로일전쟁>>이 벌어지자 친일파 송병준(宋秉俊)이 윤시병을 추겨서 <<유신회(維新會)>>라는것을 조직하게 하여 일본군에 협력하고 그 당시 동학(東學)간부였던 리용구(李容九)를 꾀여 이와 합류케하였은즉 그 조직이 바로 <<일진회>>였다.

1909년 그해의 일진회 회장은 리용구였다. 일찍이 <<로일전쟁>>때로부터 일본을 도와나서면서 <<천도교(天道敎)>>에 맞서서 <<시천교(侍天敎)>>까지 만들어낸바가있는 이 친일주구가 인제는 정부에 향하여 로골적으로 한일합방을 건의해나섯다. 그래서 여지껏 어두운밤 작경을 놀아대던 도깨비가 번개불에 흉측스러운 제 몰골을 드러내듯이 그지는 더러운 매국노의 흉악상을 백일하에 드러내고야말았다.

이 일을 알게된 <<대한협회>>와 <<국민대회>>를 비롯한 애국단체들은 한결같이 <<일진회>>를 성토해나섰다.

<<네녀석들은 나라를 망하게 만들어놓고 제조상까지 바꿀참이냐, 잡아치울 매국역적놈들아!>>

분노한 좌진은 일진회분자들과 더 날카롭게 맛서싸웠다.

바로 이럴때에 <<을사오적>>의 괴수로서 만민의 지탄을 받고있던 리완용이 병동성당에 가 벨기황제 데오폴드2세의 추도식을 마치고 나오다가 습격받아 하마터면 개목숨을 잃을번했다.

이것이 뉴스거리되여 온 서울시내판을 한번다시 웅성거리게 만들어놓았다. 선교사를 따라 미국류학을 하고나서 울라디보스또크에 가 있다가 귀국한지 며칠 안되는 20살의 리재명이란 청년이 기회를 엿보다가 그를 칼로 찔렀는데 아쉽게도 죽이지 못했다. 두해전에는 대종교의 홍암대종사(弘岩大宗師) 라철 등이 <<을사오적>>을 암살하려다가 역시 실패하지 않았던가.

<<만고역적 그놈도 이또모양이 돼야 속시원하겠는데.>>오씨는 아주 맹랑해하였다.

그러는 안해를 보면서 좌진은 의연히 침묵을 지키면서 맘속으로 거사를 이루지 못하고 붙잡혀 아까운 목숨만 잃게 된 열혈청년을 몹시 아까와했다.

1910년이 돌아왔다. 이해는 조선이 생겨서 가장 큰 불운이 덮치는 한해였다.

1월에 김윤식(金允植)과 송병준이 일진회회장 리용구를 처형할것을 건의해나섰다.

이 일은 진상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했다. 동사자를 잡아먹다니?

당년 75살나는 학자 김윤식로인의 립장으로 놓고보면 온건개화파에 속하는 그가 대한협회 회장을 지내고있는 김가진(金嘉鎭)과 가깝게지내는 사이니 반일감정이 생겨 그러겠지만 송병준이야 리용구와 어울려붙은지 오랜 동당으로 알려져있지 않은가? 대체 무슨 리해관계에서일가? 하는것이였다.

 

안중근의사가 3월 26일에 려순감옥에서 순국했다는 비보가 전해왔다.

좌진은 동지들과 함께 구천에 간 의사의 안식을 빌어 기도했다.

이달에 조선의 각지에서는 의병들이 다시금 발랄해졌다. 형세가 이러했건만 그 정황을 좌진이나 동지들은 제때에 알기어려웠다. 원인은 일본이 조선국내외에서 애국적인 지식인들이 발간하는 신문을 이런저런 구실을 대고 대량적으로 압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론사의 채기두의 활동량이 이전만 썩 많게되였다. 그는 좌진의 지시를 받고 의병들의 정황을 알아보기 위해 조선일판을 누비기 시작했다.

이런때에 교주 라철을 비롯하여 박찬익(朴贊翊), 윤세복(尹世復), 백순(白純), 리;상설(李相卨), 신규식(申圭植) 등을 중심으로 한 대종교도들이 북간도와 서간도, 연해주와 상해 등지에서 선교활동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종교적방식으로 항일투쟁을 추진하고있었는데 이는 특히 괄목할만한 일이였다.

그리고 우국우민의 애국지사들이 많이 모여든 로씨야 연해주의 신한촌(新韓村)에서는 의병들이 단결하여 항전을 견지할 목적으로 5월에 들어와 <<13도의군>>이 편성되여 단일군단이 이루졌다. 13도군은 류린석을 도총재(都總裁)로 받들고 리범윤을 장의총재(獐義總裁)로, 함경북도의병장이였던 리남기를 장의총재(壯義總裁)로 하고 황해도의병장이였던 리진용을 동의원(同義員)으로 하여 씨비리에 있는 의병들을 통솔케하였다.

조국본토를 떠나간이들이 동산재기를 노리고 해외에서 이같이 행동하고있음은 좌진이처럼 국내에 남아서 투쟁을 견지하는 혁명자들에게 용기와 시심을 한결 북돋우어주고있었다.

좌진은 국내외의 항일이 호흡이 맞고 보조가 맞기를 바랐다.

 

5월하순에 경상북도에 갔던 채기두는 거기서 의병대가 희생이 참중한 정황하에서도 굴함없이 항쟁을 계속하고있다면서 의병대가 영양군 복초면과 방곡면의 면장들에게 보낸 <<통보>>와 각동리에 보낸 <<통문>>의 내용을 베껴가지고왔다. <<통문>>에서는 국왕을 퇴위시킨 일본이 중요한 곳곳에 군대를 배치하고 마을을 들이치며 민재를 략탈하고 인민의 껍질을 벗기고있다면서 의병들이 해를 거듭하여 싸우는데도 인명만잃고 아지 공을 이루지 못하고있음은 다만 인심이 돌아서지 않은데잇기때문이라했다. 그러면서 조선인민은 다같이 본심을 지켜야한다, 2천만동포가 어찌 가만히 보고만있겠는가, 나라안의 모든 사람들이 한데뭉치여 일제히 군사를 일으켜 왜놈의 본거지를 들이치고 종묘사직을 보존한 뒤에 다같이 살자고했다.

이 <<통문>>의 마지막에는 애국적인민들에게 의병들의 전투활동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품들을 요구하는 내용이 있었다.

좌진은 우선 <<통문>>을 읽고 그 격정에 감동되면서 풍찬로숙하며 간고하게 싸움을 견지하는 그들을 물질적으로 도와못주는것이 안타까왔다. 그는 동지들과 같이 의연금을 모으고 총을 구하고 약을 구하여 보내려했지만 이전만 퍽 어려웠다. 적들의 감시와 통제가 우심했던것이다.

일본은 5월 30일에 소네를 내려놓고 그대신에 일본 조슈군벌출신인 륙군대신 데라우찌를 조선통감으로 임명했다. 그자들은 안중근이 이또를 처단한것을 <<조선합방>>의 구실로 리용하려고 하면서 데라우찌에게 조선강점의 임무를 맡기였다. 데라우찌가 통감으로 올라앉기 두주일전인 5월중순부터 일본군은 조선에 밀려들기 시작했다. 경찰을 보충한다는 구실로 들어온 헌병만도 1,000여명이였다.

조선땅에 왜의 군화소리 높아갔다.

6월 16일에는 조선경찰권이 완전히 일본사람손에 넘어가버렸다. 그래서 조선일판은 일본군대와 일본경찰의 활무대로 변해버리였다.

 

서울은 갑자기 경게가 심해졌다.

데라우찌는 일본장교들에게 두가지 밀령을 내렸다.

<<현재 수비대는 전력을 다하여 예방경비를 하라.>>

<<조선사람들로 하여금 정치적변동의 전제와 같은 감촉을 주지 않게 행동하라.>>

그리고는 8월 15일까지 극비밀리에 경비배치를 끝내도록했다.

적잖은 서울시민들은 오밤중이건만 일본군은 야음을 타서 도적놈같이 살금살금 시내로 기여들었다.

흑운이 꽉 내리덮인듯 숨가쁜가운데서 서울시민들은 그저 답답해나는 가슴을 안타깝게 쥐여뜯기만했다.

각 성문, 왕궁, 통감부, 조선주차사령부와 정부, 대신들의 집에 이르기까지 완전무장한 경찰과 수비대들이 지키고있었다.

좌진이도 동지들도 마음대로 자유롭게 나다닐수가 없었다. 서울시내는 8월 15일부터 계엄상태에 처했던 것이다.

일본침략군에 완전히 포위된 서울시내의 거리에는 30메터의 간격으로 일본헌병대와 수비대가 줄지어 늘어서있었다. 그자들은 길가는 사람들이 잠깐동안 이야기만 해도 붙잡아 엄중히 심문했다.

8월 16일 오전 9시. 데라우찌는 리완용을 자기집에 불러다놓고 <<합병조약문>>과 함께 국왕, 대신들과 관리들에 대한 차후처리문제를 알려주었다. 즉 일본이 조선을 완전강점한 후 국왕에 대한 대우와 보상문제, 친일대신들에 대한 명예와 생활보상문제, 구한국관리처리에 관한 문제 등이였다.

하루지나 그 다음날인 8월 18일 리완용은 내각회의를 열고 합병에 대한 문제를 상정시켜 토의하였다.

데라우찌는 일이 마음과같이 되어감을 보자 리완용과 이미 계획이 잇은대로 8월 22일 오후 5시에 창덕궁에서 조선완전강점을 위한 <<한일합병조약>>을 극비밀리에 체결하였다.

<<합병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어전회의에 참가한 자들로는 총리 리완용,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내부대신 박제순, 탁지부대신 고영희, 황족대표 중추위원 김윤식, 시종무관 리병무 등이였다.

학부대신 리용익은 <<합병조약>>을 반대했으므로 알리지도않았다. 그자들은 그가 22일 오전을 자기 집에서 보내도록하기 위하여 인본통역관 가와가미를 그의 집에 보내여 잡담을 늘여놓게 하였다.

그뿐만아니라 <<합병조약>>의 체결내용을 신문기자들이 모르게하기 위하여 경무총감 아까이시의 집에 술좌석을 차려놓고 기자들로 하여금 여기에 모여앉아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게하였던 것이다. (<<일한합방사>>일문 하)

일본침략자가 강요한 망국조약의 서문은 아래와같이 되었다.

 

<<일본국왕페하 및 환국황제페하는 량국간의 특수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보아 서로 행복을 증진시키고 동양의 평화를 영원히 확보할것을 바라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하지 않을수 없다고 확신하여 량국간에 합병조약을 체결한다.>>

 

일본침략자들은 8월 22일에 <<합병조약>>을 강제체결해놓고는 이를 극비밀리에 붙였다가 한주일이 지난 8월 29일에야 비로소 공포하였다.

근조(近朝)가 519년, 27대만에 나라는 이렇게 망하고말았다.

이날은 하늘이 류달리 맑게 개인 좋은 날시였다. 하건만 <<합병조서>>가 발표된 뒤의 서울장안은 하나의 커다란 상가집모양이 되고말았다. 시민들은 문을 닫아걸고 집안에서 울었다. 길거리에는 무장사, 배추장사 하나도 나다니지 않고 헌병대의 말발굽소리만 요란할 뿐이였다. 그 시끄러운 말발굽소리에도 집집에서 울려나오는 울음소리는 점점 높아지면서 밀물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다만 통곡소리.....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는 동안 그 통곡소리는 온 삼천리강산을 덮고말았다.

 

일제는 조선을 완전강점해놓고는 곧 헌병경찰제도를 통해 철저한 무단통치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하얀도포자락과 맑은 마음만을 자랑으로 삼고 살아왔던 이 나라의 선비들은 쇠약하여 쓰러져가는 나라를 어쩌지 못했다. 어떤사람은 나라가 망해버리자 왜놈의 노에가되여 사느니 보다 차라리 죽어버리는것이 나으리라면서 스스로 제 목숨을 끊어버리였다. 그러나 그것은 옳은방법이 아니였다. 그래도 배짱있는 사람들은 살아야한다. 살아서 잃어버린 내 나라를 되찾아와야한다면서 가족과 고국을 떠나 낯설고 물선 이국땅 멀리로 떠나기도했다.

그렇게 떠나는 사람들가운데 로백린도 들어있었다.

조선이 일본에 완전히 먹히운지 여칠안되는 어느날 가회동막바지에 있는 좌진의 집 건너방에는 집주인 좌진이가 차려놓은 자그마한 술상을 한가운데놓고 도지 여럿이 둘러앉았으니 거기에 모인이들로는 로백린을 위시해서 윤치성(尹致誠), 권태진(權泰鎭), 신현대(申鉉大), 신두현(申斗鉉), 림병한(林炳漢), 박상진(朴尙鎭), 김한종(金漢鐘), 최한영(崔漢榮) 등외에도 봄에 갈산에서 서울로 영올라온 호명학교의 교원 박성태역시 한자리 끼여있었다.

이같이 모이게되였음은 래일 곧 중국으로 떠나게되여있는 로백린의 출발을 앞두고 금후에 취하게 될 행동방략을 토론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동지중에 서상경(徐相京) 하나가 동석못해 유감이였다. 그는 합방이틑날밤 배를 가르고 자결했던 것이다.

로백린을 위한 간소한 송별연은 조용하고도 무거운 분위기속에서 조심스레 열리였다. 모인 사람들은 이 세상을 너무 조급히 하직한 동지를 생각하고 한숨지었고 앞날을 위해 중국으로 떠나는 선배의 앞길을 축원했다. 좌진은 자기는 백번죽더라도 광복의 그날을 위해 싸우리라했다. 이에 로백린은 그와같은 동지를 두고가니 마음 놓인다면서 남아있는 동지들이 일심으로 뭉치여 잘 싸워주기를 희망했다. 이쪽에서는 모두들 로백린이 망명한 후 그곳에다 정부를 세워줄것과 무기들을 있는힘껏 구해서 보내줄것을 부탁했다.

그들은 술잔을 나누면서 이야기를 하다가 밤이 깊어져서야 헤여졌다. 잊을수없는 뜻깊은 밤이였다.

이틑날 로백린은 동지들의 전송을 받으면서 의주행렬차에 몸을 실어 몰락한 고국을 떠나갔다.

그가 간후 좌진은 매일 관철동에 있는 물감가게에서 해를 보내였다. 박성태가 그를 돕고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어느덧 더 활발스럽게 동지들의 비밀련락소로 되고있었다.

박성태는 로백린이 월경했다는 편지를 하고는 왜 오래도록 소식없을가고 근심했다.

이에 좌진이 한마디했다.

<<요긴한 일외에는 편지하지 않기루 약속돼있잖우. 무사히 지내겠지. 아무 때나 이제 돈이 수요된다고 소식올텐데 그지간 우린 부지런히 벌어놓기요.>>

11월에 이르러 일본침략자들은 조선사람 저작의 교과서를 전부몰수했다. 대신 일본글을 배우라는거다. 이 일은 조선사람의 거대한 분노를 자아냈다. 허지만 일본의 총칼아래에서 어쩌는 재간이 없었다.

12월경에 안중근의 사촌아우 안명근이가 만주에다 사관학교세울 돈을 마련하러 뛰여다니더니 그 일은 집어치웠는지 데라우찌총독을 암살하려다가 그만 실패했다. 이일로해서 일본경찰은 <<혐의분자>>를 체포한다면서 총출동했다. 그리하여 600여명의 민족운동자를 체포, 투옥하는 소위 <<신민회>>의 <<105인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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