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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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전기 설한 (11)
2014년 03월 08일 08시 20분  조회:2935  추천:1  작성자: 김송죽
 

11.

 

1911년 1월말. 시국이 좀 온정되자 집이 경주(慶州)에 있는 박상진이 다시 서울에 나타났다. 좌진이보다 나니 5섯살더많은 박상진은 대대로 문한(文翰)이 있고 덕망높은 량반가문의 출신이며 경상도치고는 손꼽는 대지주집의 자제이다. 백부의 양자로 들어간 그가 이번에도 생부모위안하러 온다고 길을 떠났지만 사실은 그런것이 아니라 생사를 함께나누고있는 동지들 처지가 근심되여 알아보기위한 걸음이였다.

<<모두들 어떻소?>>

<<덕분에 고비는 넘겼나보오. 그런데 스승산소는 자주가보오?>>

좌진은 방문열고 들어서자마자 동지들의 안부부터 물어보는 그의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는 표정을 보면서 화제를 돌렸다.

박상진은 이젠 거기로는 청명절에나 가볼 작정이라면서 그보다 동지들의 형편이 어떤지 몰라 상경하자 곧바로 여기부터 달려왔노라했다.

고마운 일이였다.

좌진이 념두에 두고 말하는 박상진의 스승이란 바로 령남유생으로서 1908년 10월 22일에 서울에서 사형당한 의병장 허위(許爲)를 놓고 말하는것이였다.

허위는 일제가 1895년 10월 민비를 시해하고 뒤이어 갑오갱장(甲午更張)내각이 2월 <<단발령>>을 공포하자 량세안 등과 의논하여 의병을 일으켜 무력으로 일본을 물리치고자 하였던 사람이다. 허위는 그때 위정척사(衛正斥邪)의 립장에 서있었다. 그런데 1899년 고종의 명(命)으로 원구단참봉(圓丘壇參奉)에 임명되여 서울에 온 이후에는 태도가 변하였다. 즉 장지연의 영향으로 신학문을 공부하게되여 마침내 애국계몽사상을 가진 인물로 탈바꿈하였던 것이다. 그는 1907년 9월, <<정미7조약>>과 군대해산 등을 게기로 경기도 여천 등지에서 다시 무력을 동원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의병을 일으켰다.

박상진은 16살때까지 경주 록동(鹿洞)에서 한학을 수업하고는 상경하여 문한이있던 유학출신인 허위의 문하(門下)에 다년간 공부하면서 그한테 영향받아 자신의 항일민족의식을 굳건히 키웠다.

허위가 처형되자 일제가 회장(會葬)하는것을 엄금했음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스승의 시신(屍身)을 산골짜기에 가져다 모시고 4일간이나 제를 지내였던 박상진이다.

그는 스승의 죽음을 다시한번 애석해하면서 한때는 그같이 열화세찼던 반일의병투쟁이 거진다 꺼지고있음에 대하여 가슴아파했다.

일본침략자들은 파렴치하게도 의병들에게 <<폭도>>, <<무뢰한>>, <<폭도의 수괴>>, <<폭도의 괴수>>라는 부당한 딱지를 붙여 그들을 학살하였는바 그자들이 기록해놓은 자료에 의하더라도 1907년 7월이후 12월사이에 3,627명. 1908년에 11,562명. 1909년에 2,374명. 1910년에 125명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조선폭도 토벌지>>일문, 조선주차군사령부. 1913년판 통계자료)

 

<<피는 피대로 흘리고도 왜적은 쫓아못냈으니 통탄할 일이요.>>

좌진은 자기역시 같은 심정이라 하고는 의병투쟁이 비록 실패로 끝나가고있지만 여기서 교훈이야 남지 않느냐 하면서 전날 채기두와 함께 의병들을 규합시켜보려고 사타구니에 바람이 일지경으로 동분서주했건만 헛수고만했던 일을 상기하면서 한탄했다.

<<목숨을 그렇게 많이 잃어가며 싸웠건만 왜 승리못하고 실패했겠소? 그건 바로 의병장들이 저가끔 모래알같이 흩어져갖구 파벌싸움을 했기때문이란말이요. 그러지를 말고 전반적인 통일적군사지휘하에서 싸웠더면 얼마나좋았겠소. 제가끔 제 지반이나 지키구 옆에서 뚜드려맞아 소멸이 되는데두 도와줄념은 안하구... 참 이런때두 왜 우리 민족은 단합을 모른단말인가?>>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사실이 그러했다. 전국각지에서 그많은 의병장이 나타났지만 그네들은 다가 지방범위의 의병장으로 될수는 있었지만 전국의 의병을 통일적으로 지휘할만한 의병장으로는 하나도 되지 못했다.

그렇게 많은 반일의병대들은 모드가 다 협애한 지방주의에 기초하여 투쟁을 벌리였다. 즉 자기 고향과 마을을 지키기위한 투쟁으로 국한시킨것이다. 홍범도의 경우만봐도 그러했다. 삼수, 갑산, 풍산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활동하던 그는 일제로하여금 <<후치령이북으로 들어오지 못하게하자>>는 구호를 들고 싸웠길래 가까운 고원지방에서 활동하는 윤동섭의 의병대와는 외면하고 련계도짓지 않았다. 한즉 서로 도우면서 싸우지 않은건 사실이다. 이는 협애한 지방주의관념에서 투쟁했음을 말한다. 전국각지에서 수많은 의병들이 조직되여 활동하였으나 거의다 그러했다.

류린석은 평산반일의병대를 조직할 때 자기 제자들만을 중심으로 하여 의병을 조직했다. 이는 지방주의와 함께 문벌주의도있었다는것을 말하지 않는가. 다른 한사람, 강제해산당한 군인들의 반일의병대를 조직하여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지방의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활동한 민긍호는 군인출신의 세력집단을 중심으로 하여 반일의병대를 조직했다.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에는 수많은 반일의병대들이 조직되여 활동하고있었다. 그런 조건하에서 민긍호는 다른 의병대들과 련합하여 싸웠더면 훨씬 더 좋았을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고 군인출신세력중심으로만 투쟁을 벌리였다. 자기 세력집단으로만 투쟁하려는 이런 파벌주의적경향이 결국은 모든 의병대들에 있었고 또 그로인하여 자체의 붕괴를 가속화했다.

지난 한때 전인흥, 김중환, 홍유철, 리순하 등을 비롯한 친일매국노들이 <<선유사>>로 되어 각 도에 내려가 반일의병대를 와해시킨 일을 박상진이 말하자 좌진은 의병들, 특히는 유생출신의 의병장들의 머릿속에 박혀있는 충군충의사상이 전반의병투쟁에 막대한 해독을 끼친것을 상기하면서 의병장들의 우유부단한 행위에 대해 비난했다.

<<리인영 하나만 놓고봐도 그렇지, 그게뭐요, 수많은 의병을 동원해서 서울공략에 참가케하곤 저는 아버지가 죽었다고 부고오니 집에가버렸단말이요. <총에 죽은 의로운 충혼이 될지언정 놈들의 수하에서 고기밥이되지 말자>고 부르짖은게 누구였소, 바로 리인영 그였단말이요. 아무렴 어떻게 자기가 다진 맹세를 헌신짝같이 내던질수가 있는가말이요.>>

<<그러게말이네. 공과 사의 무게도 가늠할줄 모르니 중임이야 어떻게 떠메겠소.>>

박상진은 이러면서 연해주의 1,000명결사대는 지금 무엇을 하고있는가, 두만강의 결빙기를 기다려 의병을 200명 단위의 부대로 나누어 북한지방으로 국내진군작전을 벌려 총병력 1만명에 달하면 독립전쟁을 개시하리라던 리범윤의 계획은 어떻게 된판이냐고 했다.

좌진이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수포로된것 같구만. 한데 류린석은 왜 심양에 가고 정경운은 왜 천진에 갓을가? 그곳 지방관을 통하여 봉건중국의 원조를 받아보자구? 흥. 외세에 의지해 망해버린 나라를 구하자구하면야 그건 또 헛궁리지요.>>

박상진은 자기도 동감이라는데서 머리를 끄덕이였다.

많은 의병장들이 의병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고 두만강을 건너갔다. 이들가운데는 나라의 독립을 되찾기위한 힘을 기르자는 의병장도 있었지만 외세의존사상을 품고 강을 건너간 사람이 대부분이였다.

한편 국경을 넘어가지 않고 본국에 남아서 피어린 항전을 견지하는 의병들도 있었다. 바로 서북부에서 채응언이 지휘하는 곡산ㅡ성천반일의병대와 김정환이 지휘하는 평산반일의병대가 그러했다. 그네들은 극심한 어려운 조건하에서도  넓은 지대에서 이동하면서 일제강점자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고있었다.

그들은 소분대를 만들어 유격전을 벌리고있는데 그 전술이 좋거니와 아주 신출귀몰해서 이미 조선땅에 밀려든 16만명의 일본침략군이 마음을 놓을수 없게 하고있었다.

두 젊은이는 아무튼 이국에 간 이들이나 지금도 남아서 투쟁을 견지하고있는 이들이나 무사하고 승리하기를 기원했다. 그러면서 의병으로는 되지 않은 이들은 자기들이 비밀리에 싸워나갈 길을 계속 더듬었다. <<신민회>>의 사건은 이젠 계몽운동으로가 아니라 다른식의 출로를 찾게끔 깨우쳐주고있는 것이다.

이러구러 박상진이 만나볼 동지들을 다 만나보고 경주로 돌아간지 한주일이 채 안되여 이국에 가있는 로백린으로부터 밀사를 보내여 거기서는 벌써 무관학교를 세울 준비가 있다면서 이제 거기에 사용할 경비와 무기구입에 쓸 돈 10만원은 있어야할테니 어떻게 해서라도 인츰 만들어 보내달라고 했다.

좌진은 기쁘기는한데 돈을 보내라는 지령은 예상보다 빠른것이여서 바빠났다. 이때가 오리라는것을 예상해서 그동안 돈이 생기는 족족 모아두었지만 그것은 다해봤자 3만원푼했다.

(돈은 심지어 먹는 쌀까지 절약해가면서 모이다싶이하는건데 갑자기 어떻게한다? 게다가 물감가게도 경기가 그닥잖아 유야무야한판인데....)

좌진은 생각을 굴리다못해 우선 고향에 가보기로했다. 갈산 그의 집에는 아직 백여두락의 전답이 있는것이다. 그것들을 다 팔아봤자 만원돈이 못되지만 하는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북간도에서 온 밀사를 가회동 자기 집에 눌러앉혀놓고 즉시 갈산으로 향했다.

<<아니 네가 그렇게 하면 집사람은 명줄이 끊어지지 않겠냐? >>

어머니 리씨는 처음 아들의 말을 듣자 깜짝 놀랬다.

<<그 논 다 아니고도 우리 집 사람 입 몇쯤이야 얼마든 살려낼게 아닙니까? 어머니 그것을 팔아버립시다. ....그리고 동진이 너도 이제는 농사일에만 딱 매달려있지 말구 사회일에 눈 좀 뜨거라. 아무리 배불러도 왜놈의 노예되면 삶은 개 돼지로 되기만도 못하네라.>>

좌진은 이러고는 어머니를 설복해 전답을 거의다 팔아버리고 올라왔다. 그리고는 좀 여유있다고 생각되는 친구들의 현금이란 현금은 모조리 털어냈다. 그런데 그것은 모두 합해봤자 5만원밖에 안되였다. 5만원은 어디서 구한단말인가?

밀사는 초조해하는 낯빛이였다.

좌진은 아무리 생각해도 별로 뾰쪽한 수가 나서지 않아 먼저 5만원이라도 쥐여보낼가 궁리했다. 그랬다가 그는 머리를 가로젓고 말았다.

(안된다. 그래서는 안된다. 10만원이 수요되니 10만원을 보내라하는 것이니 이제 어떻게 해서든 내가 그 돈마저 만들어 보내야 한다.)

무관학교창립을 위하여, 무기구입을 위하여, 그것은 바로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바칠 돈이라 생각하니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든 꼭 해결해보내야겠다고 다시금 도슬려 마음먹었다.

<<가만있자.....그렇지!>>

윗목 앉음뱅이책상에 기대여 앉아서 끙끙 거리던 좌진이 무릎을 툭 치곤 자리를 차며 일어나더니 서둘러 나들이차림새를 하고 집을 나갔다. 때는 2월 5일, 류달리 추운 날씨였다.

그런데 그렇게 나간 사람이 웬 일인지 그날 밤에도 이틑날에도 돌아오지 않더니 7일날 <<매일신보>>에 <<량반강도의 출현>>이라는 대서특필의 표제하에 대략 다음과 같은 보도 한편이 실리였다.

<<지난 5일저녁 돈의동(敦義洞) + + 번지에 사는 김종근(金鍾根)씨 댁에는 한명의 괴한이 나타나서, 때마침 사랑방에 있는 종근씨에게 현금 5만원을 요구하므로 이를 거절하였더니 괴한은 마침내 완력으로써 협박하는지라 주인이 큰소리로 고함을 치자 가족들은 알아듣고 즉시 이 급보를 경찰당국에 알렸다하며 급보를 받은 경찰에서는 현장에 형사대를 출동하여 일장격투 끝에 무사히 그자를 포박하여 방금 엄중한 취조를 받고있다는데 그자는 가회동 + + 번지에 주소를 둔 김좌진(23살)이라 하며 조사한바에 의하면 그는 일찍이 량반의 집 자제로 태여나서 사회적지위도 상당하였고 피해자 김종근씨와는 먼 친척의 관계까지 있는터로 그가 이번 이 책동을 취하게된것은 가산을 탕진한 궁여지책이 아닌가 하고 일반은 관측하고있다더라.>>

 

신문의 이러한 보도를 보고 들은 그의 친지와 가족들의 놀람과 당황과 의혹은 너무나도커서 이루 형언키어려웠다. 사리사욕이란 추호도없이 의롭고 인자하기가 두 번째가라면 서러워할 지경인 그런 사람이 신문에 씌여진 모양으로 그래 가산이 탕진된 궁여지책으로 그런짓을 하러 나섯느냐하는 것이 그를 좀이라도 알고있는 일반 사람들의 의혹이였다.

한편 그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신문을 보고나서 다가 욕질했다.

<<환장한 놈! 어디면 갈데가 없어 친척집에 뛰여들어 강도질을 해!>>

말할수 없이 놀란것은 좌진의 처 오씨와 북간도에서 온 밀사였다. 오씨는 이틑날 남편의 행방을 알수 없어 20년맞잡이로 지루하게 보내면서 내내 초조와 불안에 잠겨있다보니 속은 타서 재가루가 되었고 밀사역시 입술까지 초들초들 말라들면서 불안에 잠겨있었다. 그들이 그러고있는 중에 박성태가 <<매일신보>>한장을 얻어갖고 불쑥 나타났던 것이다.

오씨녀인은 치미는 울음을 억제못했다. 밀사역시 주인이 당한 불행에 의분이 끓어오르면서 가슴이 죄여들었다.

로백린이 보내달라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던 좌진이가 아니였던가, 보내야 할 10만원중 5만원이나 모자라니 그것을 어떻게 하면 구할것인가고 골머리를 앓던 좌진이, 그것을 기어히 마저구해서 보내리라던 그는 생각다못해 그런짓에 나선것이라는것을 오씨녀인은 물론 밀사나 성태도 잘 알고있었다.

오씨녀인은 3년전 갈산을 떠나올 때 남편의 눈에서 불덩이 이글거리던일을 상기하면서 신문을 쥐여 거기에 씌여진 <<형사대를 출동하여 일장의 격투끝에>>라는 구절과 <<엄중한 취조>>를 받고있다는 글구를 다시 읽어보았다. 남편 좌진은 홍성에서는 커다란 황소도 어렵잖게 메쳐놓군하던 힘장사였다. 그리고도 그는 무술 역시 이만저만이 아닌 것이다. 그런 사람이 경찰과 일장의 격투를 했다면 그 장면이야 어떠했겠는가? 인정이란 꼬물만치도없는 살인백정들의 손에 엄중한 취조를 당한다면 또 무슨 모양이 되겠는가... 오씨녀인은 가슴이 터지는 듯 했다.

그렇다해서 그러고만있을 때가 아니였다. 그녀는 눈물을 닦고 정신차리였다. 3년전 남편이 자기보고 무슨일이 있더라도 참고 견디라 부탁하던 일이 상기된 것이다.

(나는 이럴때 참고견딜뿐만아니라 남편이 하기 어려운 일을 내 기능껏 도와서 해야한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그녀는 남편이 있어도 이때는 이렇게 하리라면서 감추어둔 돈 5만원을 보자기에 싸서 밀사앞에 내놓았다.

<<저의 남편이 선생님께 전하려한것이 이건거같고 도 다 채우지 못한것 같습니다만 이대로라도 전해드려야 할것 같아 가져왔으니 받아주십시오. 그리고 보아하니 언제 순검들이 뛰여들지도 모르니 손님께서는 한시바삐 길을 떠나십시오.>>

녀인의 이런 처사에 밀사가 감격한건 더 말할것도 없었다. 그는 자기도 김좌진이 당한 불행에 가슴아프다는 것, 이 일을 그대로 이국에 있는 로백린에게 전하겠다는 약속을 남겨놓고 표연히 사라졌다.

(돈을 채우기에 오죽골몰했으면 그 구두쇠를 다 찾아갔던것인가? 그리고 그 구두쇠는 인정도 의리도 없이 남편을 왜놈에게 밀고하였단말이지!)

오씨는 이런 생각이 드니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을길 없었다. 그래서 이틑날아침 일찍이 그녀는 신문에 난 주소를 물어가며 돈의동에 있는 김종근의 집을 찾아갔다. 남편에게 강도의 루명을 씌운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어보고 될수만있으면 경찰에 나가서 사과하라고 권하고도싶어서.

그런데 김종근네는 그녀를 대문안에다 들여놓지도않았다. 그래서 오씨녀인은 되돌아오고말았다.

좌진은 본래 조카벌되는 그자가 린색한줄을 알면서도 찾아가 좋게 말하여 돈 5만원을 꾸자고 했다. 그런데 김종근은 그보고 미치지 않았느냐, 무슨까닭으로 나한테 그 큰돈을 청구하느냐, 돈 5만원이 누구네 집 아이 이름같은줄 아는가, 생전 낮바닥 한번 뵈이지 않다가 홍두깨처럼 나타나 조르다니 원 재수가 없을라니 별꼴을 다본다면서 손을 들어 얼굴에다 삿대질하며 큰소리했던것이다.

좌진은 그래도 끓어오르는 분을 억제하면서 내 그예 갚겟다는데 자네같은 사람이 그만한 돈 못 마련하겠느냐며 사정했다. 그러다가 김종근이 네가 누구를 협박하려드느냐, 낯짝도 좋다고하는 소리에 그만 터져나오는 분노를 더는 참을길 없어 그렇다 너를 협박한다, 구데기같은 놈아, 나는 강도질하러 왔다고 소리치면서 우악스런 두손으로 기겁한 김종근의 머리통을 방바닥에다 대고 눌렀던 것이다. 돈을 내놓으라고, 안내놓으면 오늘밤 너를 아예 죽여버릴테다고 하면서.

 

경찰이 들이닥쳤을 때 좌진은 아무런 반항도 없이 포승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나 가소롭게 보이여 입가에 조소를 머금었다가

<<이 싱거운놈아, 악!>>소리와 함께 기운을 써 포승을 썩은 새끼같이 끊어버렸다.

<<네놈들이 묶는다고 안도망가고 안묶는다고 도망할 내가 아니다. 가자, 경찰서로! 어서가서 네놈들의 법률이란걸 나한테 좀 구경시켜라!>>

경찰들은 하는수 없이 그를 묶는걸 단념하고 그대로 데리고갔다. 신문에 묘사된 <<일장의 격투>>란 바로 이것이였다.

좌진은 강도미수죄로 기소되여 2년반의 유기형을 언도받고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였다.

오씨는 4월초 남편을 면회하고 돌아와 짐을 꿍쳐갖고 갈산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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