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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황보재의 죽음은 염왕산에다 풀기어려운 수수께끼 하나를 만들어놓았다. 그도 다른날이면몰라도 공교롭게도 딱 서은괴가 처형된 날에 그도 죽었거니와 그 죽음이 너무도 이상했던 것이다. 황보재는 왜 죽어야하고 흉수는 누구일가? 어떤 사람은 민호라느니 어떤 사람은 진사해라느니… 저마다 생각나는대로 짚어댔다. 그런데 뽐창을 보면 그것은 다른 누구의것인게 아니라 바로 황보재 그 본인의것이니 더욱 이상했다. 황보재가 제 뽐창으로 자결했단말인가? 무엇때문에?…아무리 생각해봐야 그럴 리유가 없는 사람이였다. 그렇다면 이것은 타살이란말인가. 십중팔구가 그런 것 같기도한데 그렇다면 살인자는 대체누구일가? 추측과 의논이 백출하는 중에 진사해를 살인혐의로 짚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심에 불과 할 뿐 그렇다고 꼬집을만한 근거도 없었던것이다. 게다가 진사해본신도 자기는 절대 살인을 하지 않았다고 나선다. 그는 자기가 술을 마시자고 장령감의 후근사양실에 갔는데 마침 황보재가 느닷없이 나타나 말도 없이 남먹자고 부어놓은 술을 다 마셔버렸다 그리고는 그결에 그만 취해버렸다 그런걸 자기는 제자리에 눕히려고 부축해갔을 뿐이라 자변하면서 완강히 나섰던것이다. 다가 알다싶이 그와 황보재는 자별한 사이였다. 본인의 말마따나 어느때보나 둘은 다정한 사이요 마찰이란건 없었는데 무슨 리유로 친구를 죽인단말인가?… 리유가 이러한즉 진짜흉수는 과연 그가 아닌상싶기도했다. 그렇다면 그를 죽인게 누구란말인가? 사이가 줄곧 나빴던 정민호란말인가? 말을 들어보니 그도 아니다. 사자가 뽐창을 맞은 그 시각에 민호는 분명 제 숙사에서 잠을 잤다하지 않는가…
이것은 향란이 하나만을 내놓고는 귀신도 모르는 일이였다. 이렇든 저렇든 의심의 대상으로 지목되고 있는 진사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자기를 사멸의 궁지에 빠뜨려 넣고 있음을 깨달으면서 이 험악한 수렁에서 빠져나오려고 버둥이쳤다.
많은 새자들이 이제 더는 그를 친근하고 부드럽게 대해주지 않았다. 만나면 인사도 없이 딴눈으로 보면서 경계하기 시작했다. 따돌리우고있음이 분명한데야 어찌 기가 죽지 않으랴. 이제는 꾀도 지혜도 핍진해 거의 탈진상태에 빠지나답지 않은 그는 우거지상이 되고말았다. 이러한 형편에서 안달고 당황하기도 한 그는 에라 한 번 죽지 두 번죽겠냐하면서 차라리 달아나버릴가고 생각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막궁리도 잠시였을 뿐. 하늘에도 땅에도 그가 숨어버릴데라곤없었다. 악마가 못찾아내는 것을 위삼포는 찾아낼 것이다. 일단 달아만난다면 그건 제 스스로 죄를 승인하는것으로밖에 안되는 것이다. 그러면야 목숨은 다 살려낸게 아닌가.
불한당이 악행을 하기는 천만쉬운것이였다. 이거 내가 악한짓 너무해서 홀벌로 죽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나기도 하는 진사해. 그는 올해만도 무고한 사람을 둘이나 죽이였다. 봄에 황보재와 같이 목단강쪽으로 쟁반밟으러갔을적이다. 둘은 가다가 한 곳에 이르러 저기 앞에서 만삭이 되어 배가 남산만큼한 임신부 하나가 뚱기적거리며 마주오고있는 것을 발견했다.
진사해가 입을 먼저열고 지벌이였다.
《보재, 저것봐라. 저년의 배속에 뭐가 들어있겠냐?》
《아따 임신부의 배속에 뭐가 들었겠소. 사람의 새끼가 들었겠지아무렴 두꺼비가 들었겠소.》
《아니다. 내 말은 그게아니구 저년의 배속것이 남자겠냐 녀자겠냐 그거다.》
《오―나더러 그걸 알아맞히라는거요.》
《그렇다. 네 투시력이 어느정돈갈 오늘 시험쳐보자꾸나.》
《투시력시험이라. 그렇다면 가만있자…그렇지! 남자야!》
《아니다. 녀자야!》
《남자요!》
《녀자다!》
《남자란데두그러네. 배가 물항아리만한걸 보란말이요.》
《쳇! 알긴 잘안다. 그럼좋다. 네 말이 맞는가 어디볼가.》
진사해는 서슴없이 권총을 꺼내여 단방에 그 임신부를 쏴죽이고칼로 배를 갈라 태아를 끄집어냈던 것이다.
그 다음번은 연수쪽으로 쟁반밟으러 갔을적이다. 그때도 그가 황보재와 같이가게 되였었는데 그번에는 가다가 길에서 도붓장사를 하나 만나게 되였다. 그날도 진사해가 말을 먼저끄집어냈다.
《보재야 저녀석봐. 저녀석 돈 많겠냐 적겠냐?》
《저 따위가.... 가랑잎에 똥싸먹을 장사꾼인데두?》
《그래 두 내 가질거야있겠지.》
《그렇다구 털겠소 째째하게스리.》
《챠 이거, 그놈의 입에서 별소리 다 나온다. 날 째째하다니. 네가 그래 어느때부터 보살이됐냐.》
《내가 보살루돼서가 아니라…혼자길가는 사람이나 중이나 장돌뱅이따위는 건드리지 않기루돼있지 않소. 아무리어째두 규률이야 지켜야지.》
《규률은 무슨눔의 개나발같은 규률이야. 위삼포는 쓸데없는 그따위거나 만들어 제 사람의 손을 묶어놓고있지 뭐야. 그런다구 백성들이 우릴 착하다구할가. 우린 정인군자가 아니구 토비야, 토비! 본직이 살인하구 빼앗각질하는 강도란말이야!》
이러면서 진사해는 그 도부상을 잡아세워놓고 몇푼안되는 돈을 말끔히 털어냈다. 그리고는 그가 자기의 눈두덕에 난 흉터를 보았으니 아무때건 소문이 나서 시끄러우리라 여기고는 아예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기까지했던 것이다. 산채에서는 호인풍의 사나이란 평을 받아온 그가 밖에 나와서는 바로 이러했다. 자기가 간담상조하게 된 사람이 실은 사람을 파리잡듯해온 진짜살인광임을 황보재는 미처몰랐던것이다.. 그가 청보산패에 있을 때였다. 사람의 생간을 먹으면 처음은 눈이 빨개졌다가 점차 파래지면서 나중에는 해리의 눈처럼 밝아진다는 말을 주어듣고는 거울까지 갗춰놓고 들여다보면서 련거퍼 다섯사람이나 죽이고 간을 빼먹었다. 온 관동땅을 들썽케했던 《당벽진참안》을 빚어냈을 때는 방향잃고 헤매는 나젊은 조선독립군전사를 붙잡아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깨고 대골을 빼먹었다. 그런짓을 했길래 그는 민호를 볼때마다 자기가 그때 저질러놓은 죄행이 다시금상기됐고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기분이 잡치군했다. 한 것은 눈이 밝아지기는커녕 그후부터 이뿌리가 통세나는 무서운 병만 얻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따위짓은 다시는 하지 않고있는건데 어쩐지 민호가 자기를 뒤쫓고있는 독립군의 유령같기도해서 내가 과연 아무때건 저놈의 손에 잘못되지 않을가 하는 무서움에 가슴이 떨려나기도했던것이다.
산채에는 전에 진사해의 절름발이 할애비가 다 호적질을 해먹었다는 사이비한 얘기가 나돌아 심심해죽자는 류자들의 무료증을 풀어주고 있었다.
전에는 로씨야에서 정배살이하는 죄인들이 적잖게 변경지대에 몰려와있으면서 그곳의 한인(漢人)도적과 배가 되어 료략질을 해먹었다. 한데 그 이방인들은 동양인과는 유전인자가 달라서인지 거의가 붉은 수염이 얼굴을 덮고 있어서 퍼그나 이색적이였다. 그렇다해서 항간에서는 그자들을 몰잡아 홍호자(紅胡子)라불렀다. 수염이 붉은 마적이라는 거다.
함풍(咸豊)년간(1831년ㅡ1861년)에는 악질토호들이 사사로이 검객을 모아 그들이 붉은수염을 달고다니면서 백성집을 털게 했다.
진사해의 할애비도 그렇게 살고싶었다. 그런데 사지가 남처럼 성하지 않고 절름발이가 돼놔서 처음에는 퍼그나 고민했다. 내가 왜 이렇게 병신이 됐느냐고 신세를 한탄하기도 하고 팔자를 원망하기도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어떤 벌이로 생계를 유지하고푼 맘은 없어서 머리통을 다시굴려본 끝에 결국은 일확천금을 꿈꾸고 나도 한 번 홍호자노릇을 해보자고 맘을 먹었던것이다.
민호가 있는 산채의 류자들이 그를 입길에 올려놓고 굴리였다.
《어떻게 했는질아나. 그도 붉은 수염을 만들어달았대.》
《절름발이가? 그리구는?》
《그리구는 길목에 앉아서 지켰지 뭐야. 그리구있다가 지나가는 행인이 나지면 <너 이놈, 그 물건 냉큼 놓고가!>하구 고함을 쳤다는구나.》
《그래서?》
《그래서 어쨌겠나. 행인은 <엑크, 호자구나!>하면서 화뜰놀라는건 사실일거구.... 그러면서도 내빼려구하지.》
《그러겠지. 아무렴 다리각이 졸아붙었다구 그저 당하기만 하겠냐. 우선 달아나구봐야지.》
《체, 달아나? 그게 그리쉬울가. 이쪽은 <빨리 놓질못해, 내가 일어나면 없다, 이놈아!> 한단말이야. 그가 절름발인걸 아는 사람이면야 어디…문제는 그런 경우를 당하면 거개가 쥐나 토끼새끼모양으루 담이 작아지는데 있는거야. 안그래? 행인은 그눔의 으름장에 넋담떨어져서 그만 꾸레미를 팽가치구 걸음아 날살리라 이거야.》
《하하하하…》
모두들 귀맛당기는 이야기가 소가지를 간지렵혀서 웃어댔다.
한쪽에서 꿩망태를 틀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볼만장만 듣고만있던 민호가 한마디 참견했다.
《쓴오이덩쿨에 쓴오이밖에 달릴게 있나. 원체 종자가 나뻐.》
염왕산은 주위의 골짜기에 곡식밭 뙈기들이 있어서 그런지 꿩도 많고 자고새도 많았다. 민호는 때로는 살구씨를 구멍뚫어 우레를 만들어 그것을 켜서 꿩을 얼려잡기도했다. 여기는 잡아먹을만한 새가 적잖았다. 하건만 민호 한사람을 내놓고는 웬 일인지 술먹고 육담이나 했지 손꿉을 놀려 그런걸 잡아먹을 궁리를 하는 사람이라곤 거의 없었다. 언젠가 그런 짐승을 잡아먹으면 묘동때 좋지 않다는 소릴들었는데 아마 그래서 그모양인것 같았다.
민호가 꿩망태를 방금 다 만들자 밖으로부터 말소리들려왔다.
《위아가씨 오셨구만! 민호형을 찾겠죠! 어서들어가시오!》
《그이가 있나요. 있으면 얼른 나오시라해요.》
향란이가 날 왜 또 찾을가? 민호는 들어와 이르기전에 나갔다.
둘은 북쪽골로 향했다.
이런 조용한 만남이 민호는 좋았다. 아느새 가다가 그가 먼저 황보재의 괴이한 죽음에 대해서 말을 꺼냈다.
《황보재가 왜 그모양으루 죽었는지 참…아무리 생각해봐두 귀신이 곡할일입니다.》
《그게 그리두 이상한가요.》
《이상하잖구요. 그게 그래…》
민호가 머리를 살살 젓는걸 보고 향란이는 웃었다.
《그깟일같아나 머리앓지 말아요. 거치장스럽던 혹을 떼버리면 홀가분할거고 그 사람 없어지니 마음 더 편하잖아요.》
《하기야 그렇습니다만… 날 내놓구서는 여기서 그하구 척지은 사람이 없는줄로 알았는데 그런 흉사가 생겼으니… 대체 누가 뭣땜에 그랬는지 그게 의문스럽기만해서.》
《그걸 그리두 알고푸나요?》
향란이는 민호를 말끄러미 보면서 입가에 실웃음을 그렸다.
민호는 이제야 짚혀지는지라 걸음을 뚝 멈추고 서서 그녀를 다시 눈여겨봤다.
향란이는 고개를 외로 꼬았으나 더는 숨기려 하지 않았다.
《이젠 아버지께서도 알고계셔요. 보재는 내가 빼버렸어요.》
《뭐라?!…》
《내가 빼버렸어요. 왜요. 잘못됐나요?》
《난 위아가씨가 그렇게 독할줄은.... 지난날정을 봐서두 어찌…》
《그걸 모르는 내가 아니얘요. 하지만 죄없는 목숨이야 건지고봐야지. 안그래요.》
향란이는 이러면서 어느날 밤 보재가 취중에 한 짓을 알려줬다. 보재가 그렇게까지 됐단말인가. 자칫하면 내가 소리한번 못쳐보고 죽을번했구나. 민호는 그녀가 자기를 살리기 위해 손을 먼저쓴 것을 알았다. 한데 안도의 숨은 나가나 민호는 그녀한테 고맙다는 말은 하고싶지 않았다. 어쩐지 맘이 그리 석연치않았던것이다.
얼마간 틔여진 골안. 여기는 면적이 10여헥타르되는 콩밭이 골을 따라 길게 누워있었다. 그리고 해마다 풋것을 먹느라 후근의 부지런한 류자들이 강냉이를 심어놓은 자그마한 뙈기밭도 있었다. 곡식밭이 이같이 있으니 짐승이 모여들기마련이다.
오늘도 공탕은 아니다. 그사이 콩밭머리에 놓고갔던 착고에 자고새 한 마리 끼여 있었다. 민호가 그것을 벗기자 향란이가 제꺽 받아들고 보면서 좋아했다.
《우릴 행복하게 해주느라 찬거리생기는모양이네. 어쩔가요. 오늘 저녁상도 제가 차려야겠죠. 같이 조용히 몽두춘도 하고요.》
《그러지. 좋은 안주에 반강자없는 식사는 멋없지요. 난 아가씨가 아주 깔끔한 주부같아서 좋네요.》
민호는 흔연히 동의하고는 하하 웃었다.
가을절기가 바야흐로 끝나가고있는 조용한 골안에는 기분이 한결명랑해진 이들 두 사람이 간단없이 주고받는 말소리뿐이였다.
민호는 갖고 간 착고를 마저 다 놓았다. 그리곤 산채로 돌아가려고 향란이보고 자고새를 넣은 꿩망태를 달라해서 어깨에 멨다.
《뭘 그리급해해요. 좀 놀다가자요.》
향란이는 말라가는 풀을 깔고 앉았다. 몇 번 일깨워줬더니 지금은 몸가짐이 이전과 완연히 달랐다. 그의 앞에서는 전혀 오만을 부리지 않거니와 몸가짐도 퍽 조심했다. 그녀의 몸매는 단아한 용모에 어울려 한결 매력이 있었다.
《꺼겅―꺼겅―》
어디선가 장끼의 울음소리 들려온다.
향란이는 일어나 사방을 둘러보곤 얼른 제자리에 도루주저앉는다. 사내가 멘 꿩망태를 슬쩍 건드려놓고. 윤기도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긴 눈섭이 요염하게 그림자를 떨어뜨렸고 미소를 머금은 입술은 감추지 못할 욕정에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처녀가 늙으면 망짝지고 산에 오른다더니! 민호는 속으로 뇌이면서 그녀를 다시봤다. 오빠가 기생을 안해로 맞아들이면 자식을 못봐 위씨가문은 대가 마를거라 근심하던 녀인, 그러면서도 저는 평생 아이를 낳지 않으리라 결심까지 내렸다는 녀인―전에 엄마의 늙은 녀종이 남겨놓고 간 밀방으로 약을 써서 자신을 스스로 불임하게 만들어버린 이 돌계집은 내놓고 말은 하지 않지만 실은 이성지간의 육체결합을 가장 즐거운 오락으로 여기고 갈망하는 성애주의자(性愛主義者)였다. 그리고 그녀는 출중한 무예와 더불어 나무릴데 없는 글래머 걸(glamour girl)― 육체적으로 아주 매혹적인 녀인임에 틀림이 없었다.
민호가 그녀의 정부라는건 이미 공개되나답지 않은 비밀이였다.
사나이가 망설이는 것 같자 녀인은 꿩망태를 다시한번 건드렸다. 민호는 오늘만은 그러고싶지 않았다. 어쩐지 잃어진 안해에게 미안하고 여지껏 찾지 못해 죄를 짓는것만같아서. 안해를 꼭 찾겠다며 떠난 녀석이 여기에 갇혀 멀쩡하게 해를 거듭넘기면서 공전만하고 있었다!
향란이는 민호의 이러한 속내를 제꺽 짚어 보고 짚어보고 낯색이 어두워졌다.
《갑자기 또 각시생각나는가요?》
《점 잘 치는구만!》
민호는 솔직히 승인하면서 눈길을 건너산쪽에 던졌다.
《그럴거얘요. 한달을 살아도 정들었던 안해였을테니.》
《솔직히 말해 그렇습니다. 현숙한 안해로 되어서 백로해로할 녀자였던걸요.》
《오, 그런가요! 저의 말을 격하게 들을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남편이면야 그녀는 눈을 감아도 무척 행복할거얘요.》
《그럴가?》
《그렇잖구요.》
비웃음이 아니였다. 조롱도 아니였다. 향란이는 진정으로 감오하여 하는 말이였다.
민호의 구리빛나는 얼굴에 웃음이 피여올랐다. 질투하여 소가지를 낼줄로 알았던 녀인이 그러지 않고 선의적으로 나오면서 참답게 대해주고있음에 고마왔다. 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러지 않을 것이다. 남을 리해할 줄 아는 녀자다. 그같은 리해심은 두말할 것 없이 우의를 돈독히 하고 보다 진지한 신뢰를 촉구하게 될게 아닌가. 서로간 사이가 이정도로 됐는데야 더 주저할것 뭔가. 민호는 입을 다시열었다.
《향란아가씨!》
《왜 그래요?》
《아가씨가 날 좀 도와줄수 없을가.》
《뭘말인가요?… 제가 그대를 도와드릴 수 있는게 뭔가요?》
《진사해는 내 안해가 어떻게 됐는지를 알고있을텐데…》
민호는 지난때 발생한 일을 내놓고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향란이는 내심히 들어주었다. 그녀는 까딱하지 않았다. 비상한 흥미를 가지면서 어느덧 그 이야기에 빨려들고 있었다. 가끔가다 《아, 그런가요!》하고 감탄사를 발하여 자기의 감정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그녀는 깊은 동정을 품고 사나이를 다시금 여겨보기도했다. 이 용감한 조선독립군인이 겪어온 풍상과 경난은 절대 가볍게 들어둘 이야기가 아니였던것이다. 투쟁으로 엮어내는 인생! 하지만 지겨움도 고민도 없었다. 어쩌면 그는 자기가 타고난 불운과 맛서싸우는 것을 천직으로 여기는 사나이 같기도했다. 사람이 용감하지 않구야 그렇게 할수있는가. 전에는 미처몰랐던 이런 깨달음이 그녀로 하여금 한결 짙은 련민과 동정을 품게 하면서 숭경에 가까운 심정으로 그를 지지해나서게 만들었다.
향란이는 맑은 이슬이 미음도는 고운 눈을 들어 사나이를 올려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안해는 꼭 찾아봐야해요. 어쩌면 찾아낼수있을 것 같네요.》
《그래서 난 아가씨께 도움을 청하는겁니다.》
《저더러 진사해한테서 안해의 행방을 알아보란거겠죠.》
《그렇지. 바로 그겁니다.》
《그러면요…》
향란이는 문득 말을 끊더니 한식경이나 입을 닫아걸었었다.
왜 이모양이냐? 이 녀자가 나하구 뭘 말하자는걸가?… 민호는 수삽스러운 대방의 속내를 짚어내지 못하고 침묵속을 방황했다.
갑갑해났다. 그냥 이러구있을수는 없었다.
《그러면 어떻다는 겁니까? 왜 말하려다가 그만둡니까? 시원히 해야 나도알지.》
《한가지 요구있어서 그래요.》
《요구?》
《그래요. 요구라기보다 차라리 협약이라는 편이 더 났겠네요.》
《협약이라? 무슨소린지…향란아가씨가 그래 나하구 협약을 맺자는겁니까.》
《그렇지요. 동의하면 나도 힘써보고…》
《동의하면 힘써보겠다…?》
《그래요.》
《뭔데 어디 말해보시오.》
《말하지요. 만약 민호씨께서 안해를 찾아낸다해두 여기를 나가기전에는…생각해봐요. 워낙 녀자가 있다해도 아무나 맘대로 여기에 데려다 살수야 없잖아요. 그러니까 내 말인즉은…》
말을 다 들어봐야 알가. 민호보고 염왕산을 나갈때까지는 자기를 버리지 말고 만족시켜달라는 그 소원이였다. 그깟거야 못들어줄게 뭔가. 민호는 그 요구를 선선히 수락했다. 한데 설사 안해를 찾았다쳐도 여기를 빠져나갈 수 있겠는가가 문제다. 도적놈 배에 오르긴 쉬워도 내리긴 참으로 어려운것이다.
한편 일불이살륙통(一不一殺六通)이라 서은괴가 일을 설치고 죽어버린데다 황보재마저 괴사(怪死)를 하는 통에 혐의자로 몰려 궁지에 떨어진 진사해는 어떻게 하면 목전의 처지를 돌려세울건가고 그냥 머리통을 앓고 있었다. 적중한 방도가 나지지 않았다. 어쩌면 백사가 여의치않아 자기는 이젠 촌보를 헛디뎌도 나락에 떨어져 분신쇄골이 되고 말 백척간두에 서있는것 같기도 했다. 내가 이놈의데다 발을 들여놓을건 뭔가 아예 여기로 올 궁리도 말았어야했을건데 하고 그는 후회가 막심해갔다. 이제 무슨 방법이 있으랴. 세상에 후회를 치료해 주는 약은 없었다.
가철군은 전에 벌써 그가 염왕산에다 발을 붙이고 동산재기를 꿈꾸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면서 극구말렸던 것이다. 그자식 그땐 머리가 어쩜 그리두 잘 돌았을가!
《사해형! 제발 내말듣소. 다른데루는 가도 염왕산에는 가지마오. 사해형이 아무리 지혜령통해서 권모술수를 쓴대두 뼈속까지 독이 배여있는 위삼포를 그래 삶아낼만하겠소. 듣자는 그 수괴는 계모가 난당이라 여기 북만은 물론이거니와 온 관동땅에도 겨룰자가 없다는데 안그렇소. 공연히 섶을 쓰고 불가마에 뛰여들지마오.》
《모험이라는건 나도 안다만 방법있냐. 사실말해 내가 이제 국을 다시 만들기는 다틀려서 그런다. 염왕산이 대물림이라지만 그것이 영원히 위씨네거로만돼야한다는 리유야 없잖으냐. 그놈의 세습제를 내가 들어가 망가놓을테다. 처음 얼마간은 머리숙여야 하고 수모도 받겠지만 차츰지나누라면 달라지겠지. 결찌가 많아지면 그게 바로 내 성장이구 력량인거야. 때를 잡아 왈칵 뒤집어만놓으면 그때는 모든게 이 사해의 거로 될거란말이다. 알았냐. 그래서 난 거기를 놔둘 수 없단말이다.》
《생각은 좋지만 만사가 뜻대로되는건 아니잖소. 내가 꿈꾸면 남은 해몽한다는걸 사해형도 알아야하오.》
《아무튼 난 가련다. 산에 들어가잖구야 어떻게 범을 잡겠냐. 그깟거 눈감으면 한 번 감지 두 번 감을가. 넌 이 형님이 어떻게 성공하나 그거나 지켜보거라. 국이 밝아지면 그땐 내가 널 의례 부르지 않으리. 그때가 되면 우린 이 관동을 독천장으루 삼고 한 번 실컷 지랄발광 네굽질을 하면서 맘껏 살아보잔말이다. 백년행락은 못하더래두 그렇게… 인생이 한 번 뿐인거야.》
진사해는 이렇게 장담하면서 줴치곤 갈라졌던 것이다. 참으로 어리석었다. 여기다 발을 들여놓은 그 시각으로부터 자기가 금고종신(禁錮終身)이라는것을 알기나했으랴!
그자식이 지금 어디에 가 있을가. 진사해는 지금도 의연히 자기와는 사교지간이라여기는 가철군의 행방을 몰라 아타까와하면서 몹시 그리였다. 약삭바른 그를 장차 옆에 두고 지내려했다. 진사해는 아첨을 해가면서라도 자기의 감정을 발라마추는 인간이면 좋게 보고 믿어주는 위인이였다.
어느날 향란이는 후근마사에 가 장령감을 찾아 그보고 내가 진사해를 조용히 만날일이 있으니 가서 데려오라했다.
장령감은 가더니 얼마있지 않아서 진사해를 사양실로 데려왔다.
위두령의 딸님이 날 만나자구한단말이지… 대체 무슨일에?…술좌석이 벌어졌을 때를 내놓고는 그리 교제도 없이 지내는데…사나운 그놈의 암캐가 혹시 내 일을 냄새맡고 버르집자고 드는거나 아닌지?…종잡기어려운 의문과 의심이 갈마들면서 마음번거로와 진사해는 다소 주저하다가 따라온거다.
《아가씨께서 날 찾았습니까?》
《그랬어요. 들어와요.》
향란이는 말투를 봐서는 여전하지만 경계하는 낯빛이라 우선 긴장부터 풀게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웃음기어린 부드러운 태도로 그를 살갑게 맞아주었다.
그러나 상대측은 의연히 경계심을 풀지 않고 있었다.
《무슨일에 아가씨가 나를?…》
《호호호…아니 날 왜 그렇게 서먹하게 대하나요. 다른일아니얘요. 아침에 식당서 볼라니 아까운 분이 몰골이 영 말이 아니더군요. 그래 내가 찾은거얘요. 신외무물이라 사람은 누구나 몸이 중천금아닌가요. 무리하게 혹사말아요. 내 말은 너무 그렇게 고민하지 말라는거얘요. 그러다가 지쳐눕기나하면 어쩔라구요.》
뜻밖이였다. 녀인의 입에서 튀여나오는 이런 지극한 념려와 애틋한 관심에 사나이는 얼어들던 가슴이 화끈 더워나기시작했다.
《고맙습니다, 아가씨! 그래두 아가씨만은 날 믿어주는구만요!》
《왜 저만이겠어요. 아버지도 오빠도 다 믿어주는데요. 보재의 피살건을 우린 거기다 밀지 않아요. 흉수는 꼭 다른누굴테니까요.》
향란이가 내친 이런 확신에 가까운 림기응변은 효력을 냈다.
《그게 정말입니까! 과연 그러하다면 난 절이라도 올려야겠군요. 사실말이지 난 형제들이 나를 믿어주지 않구 그냥 의심하면서 백안시하는게 억울합니다. 향란아가씨도 알다싶이 내가 그하구야 그 누구보다도 극친한 사이아닙니까. 나도 인피를 쓴 놈인데 어찌 그런짓이야 하겠습니까. 안그렇습니까. 원 참 억울해서.》
진사해는 이러면서 죄는 도깨비가 짓고 벼락은 고목이 맞는다느니 어쩐다느니 자기의 억울함을 하소했다.
《그래요. 지은 죄도 없어갖고 바가지를 뒤집어써서야되나요. 억울할거얘요.》
녀인이 자기를 의심하지 않거니와 이같이 편을 서주기까지 하니 진사해는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허허 웃었다. 그리고는 지어 엉뚱한 생각에 단침을 삼키면서 죽어버린 황보재의 생전의 신세를 부러워하기까지 했다.
《보재가 그렇게 고기값을 못하구 갔지만두 생전에 아가씨께 남못받는 대접을 받았으니 운수야 참 대통한 녀석이였지.》
《그래요. 그인 생전에 나를 거의 독점하다싶이했거든요.》
《허던것이 어떻게 돼서 물러나구말았습니까?》
《그걸 몰라서 나하구 물는가요?… 생각해봐요. 끈짜른 드레박갖구야 어떻게 우물의 물을 길어먹나요. 안그래요. 안되겠으니 저절로 물러난거죠뭐얘요.》
《오, 그래!? 하하하…》
녀인이 추호의 부끄럼도 없이 내던지는 저돌적인 언동에 진사해는 눈이 휘둥그래지더니 입을 크게 벌리고 요란스레 웃어댔다.
《아무때봐도 아가씬 가식없구 소탈해 좋구만. 완벽한 녀자는 아마 그런 천부 하나씩은 다 갖고있는모양이지. 정말입니다. 어찌보면 위아가씨는 설보채같기두해서 나는 볼때마다…》
《호호호…별소리 다 하네요. 내가 어쩜 설보채같겠나요. 칭찬이 과분해서 낯이 숯불에 익어드는 것 같네요.》
《정말입니다. 아가씨는 우선 자색부터 설보채만 못지 않지요. 진심의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가씨한테 그 고려놈도 반한거아니겠습니까. 참 어떻습니까, 아가씨를 끔찍히 사랑하겠지요.》
《그래요. 그인 날 지극히 사랑해줘요. 나도 그렇구요. 그런데 참 별일이지. 접촉은 잦건만 아직도 난 그일 리해할 수 없네요. 뭔가를 나한테 숨기고 있는 사람만같아서요. 그리구…난 보재를 살해한 흉범은 바로 그가 아닌가구 자꾸의심하게된단말이얘요.》
이러면서 향란이는 진사해의 앞에서 만약 제 예감이 맞아떨어지는 날이면 그를 극형에 처함이 옳다고 했다.
녀인의 입에서 이런 말이 거침없이 나오리라고는 생각못했던 진사해는 불시에 온 몸에서 심줄이 튀면서 용기가 솟아났다.
《아 어쩌면…아가씨의 생각이자 바로 내 생각이였구만! 난 어녕 그렇게…》
《보아하니 사람 잘못받아 산채만 소란케 만드는 것 같애요. 안그런가요. 그일 괘주시키지 말구 내쫓아 차라리 제 다즈각시나 찾게했더면 좋았을걸그랬네요. 안그런가요.》
《체, 제깟게 나간다구 찾을가. 못찾아, 못찾아!》
《아니 그걸 어떻게 장담하나요.》
《내가 왜 장담못해. 그건…》
진사해는 말끝을 그만 사리고 만다. 한 번 다시 녀인을 유심히 보는 눈, 웃음은 짖는다만 어쨌든 흉하게만 보이는 그 게뚜더기 눈은 이 시각 네년이 정말 민호를 의심하고 이러는거냐 아니면 사내맛 바꿔보자구이러는거냐 하고 속으로 점치고 있었다.
《왜요. 날 믿지 못해 말 못하는거죠. 정녕 그러하다면 관둬요.》
《아, 아닙니다. 그런게 아니라 저…》
진사해는 황급히 변명했다. 녀인이 제 속창을 빤히 들여다보고 이는것만같아서. 내가 이 녀자한테 배척당하면 어쩌나하는 생각에 당황해지기도했다. 하지만 그건 잠간사이. 자제력을 갖고있는 그는 마음의 평온은 찾으면서 얼굴에 웃음을 발랐다. 원인은 다른게 아니다. 이시각 녀인의 요염한 자태가 눈을 희롱해서 이성에 굶주리다못해 무감각해진 사내의 잠재한 의식을 못견디게 든장질하고있기 때문이였다. 고니의 고기를 먹고싶어하는 두꺼비랄가, 이 시각 그는 네년을 데리고 노는 놈 따로있다냐 이젠 내가 출마를 해봄도 괜찮은거야 하고 엉뚱한 궁리를 했다.
《아가씨 웃질마시오. 민호 그 녀석 각시잃어진건 제대루말해서…그건 내가 한 짓이외다.》
그는 끝내 괘방을 치고말았다.
《아유, 별소리 다하네! 아무렴 거기서 어찌…호호호!》
향란이는 우습다고 입을 싸쥐며 도리질했다.
진사해는 녀인이 제 말을 곧이듣지 않는 것 같자 헤벌려지는 입을 다물면서 거짓말이 아니니 믿어달라했다.
《정말입니다. 아무렴 혀가 무르다구 내가 아가씨앞에서 언감생심없는 일을 왕창꾸미겠습니까. 그 사람의 다즈각시는 나하구 철군이가 랍치해서… 앙갚음을 하느라구요. 본래는 잠재워버릴려다가 고년이 하두 고우니까 그만 살려뒀지요. 우린 한동안 오동하에 가 있다가…그러다가…보다싶히 난 여기로 들어오구만겝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 녀잔 지금도 살아있겠네요. 그렇죠?》
《그렇지. 내 생각은 철군이 그 녀석은 호색한이 돼놔서 거기서 그냥 데불구살거라는겁니다.》
《철군이란건 누군가요?》
《내 친굽니다.》
여기까지 말해놓고 진사해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이쪽도 그의 닫힌 입을 굳이 다시열려하지 않았다. 이만하면 민호가 얻으려는 정보와 비밀은 다 알아낸 것 같았다.
진사해는 녀인의 기만술에 보기좋게 넘어가고서도 그것을 감촉못한채 자기가 그녀를 손에 넣기라도한것같이 좋와했다.
한편 향란이가 발쇠를 서준 덕에 이제야 비로서 제 안해의 생사여부와 그녀가 가있는 곳 까지 알게된 민호는 위삼포를 찾아가 보름간의 외출허가를 받았다. 지지리 애태운 끝에 찾아온 기회였다.
그는 산채를 나오자 곧추 오동하에 갔다. 그런데 오동하에 가서 써캐훝듯했건만 거기에 츄얼이가 있기는 고사하고 가철군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민호는 산채로 되돌아오려다가 생각을 고쳐 발길을 곧추 어래무쪽으로 돌렸다. 그때 츄얼이를 찾아나간 나쟈형제와 치더룽을 만나보지도못하고 훌쩍 떠나온건데 혹시 그들이 후에라도 츄얼이를 찾아가지 않았을가 하는 생각이 머리에 돌아서였다.
그사이 어래무마을은 변하지 않고 궁상그대로였다.
린화의 각시가 마침 밖에 나왔다가 마을로 돌아온 민호를 발견하고는 달려들어가며 소리쳐 알려서 나쟈의 처가 나오고 뒤미쳐 장모도 달려나왔다.
《아이고 이 사람아 살아왔고나!》
《이게 어찌된 일인가요! 엽때껏 어데가있었나요?》
《츄얼이 집에 있어유?》
민호는 일희일경 어쩔줄몰라하는 녀인들에게 마치 이웃집에 마실을 갔다가 돌아온 사람모양으로 오래간의 만남을 반가와하기에 앞어 안해의 정황부터 알아보았다.
《아니 이 사람아! 자넨 그래 엽때껏 츄얼이두 못찾고 이러나?…아이고 내 딸아!》
허저인장모는 사위가 딸을 못찾았다고 머리젖는 것을 보자 락담하여 한숨을 훌 내쉬더니 땅을 치며 울음을 텃뜨렸다.
처남 나쟈도 마침 집에 있었는데 유령처럼 불쑥나타난 사나이를 경아한 눈으로 이으토록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 매부는 그래 여태껏 어디가 뭘하고있었더랬소?》
《염왕산에서 토비노릇했소.》
《아니 뭐라?…다시말해봐. 토비노릇을 했다구?…제 녀편네는 찾잖구 그래 여직 백주창탈이나하구다녔단말인가?》
나쟈는 목청을 곤두세우며 발작적으로 부르짖더니 제 사냥총을 찾아 들었다.
넋이 나갈지경으로 경겁한 아낙네들이 새된 비명을 내지르면서 달려들어 그의 손에서 부덕부덕 총을 앗아냈다.
민호는 갈린 목소리로 웨쳤다.
《형님 날 죽이오! 제 색시두 하나 건사못한 이 불민한 놈을 차라리 없애주!》
나쟈는 숨을 거세게 톺았다. 량볼근육이 간헐적으로 실룩거린다. 장모가 사위의 손을 꼭 잡고 대체 어떻게 된거냐고 물었다.
《난 방정으루간다잖던가요. 여기서 떠나 동강서 배타고 열래진까지 갔습니다. 거기서 권총 한자루 사갖구는…바로이겁니다.》
민호는 품속에서 골트권통을 꺼내놓았다. 그는 그 권총을 사갖고 가목사와 의란을 거쳐 방정에 갔던 일, 거기서 려관에 머므르면서 여러날이나 안해를 찾아 헤맨 일, 그러다가 경찰의 수사에 들게되니 쪽배에 숨었다가 이틑날 말을 빼앗아 타고 현성을 탈출했던 일, 그랬다가 추격받아 가고가다나니 나중에는 염왕산토비굴에 떨어진 일, 거기를 나오려던 차 마침 원쑤가 들어오니 그를 잡자고 자기도 그만 류자로 되여 여지껏 눌러있은 일을 쭉 말했다.
《그래 그놈은 잡았는가?》
《아직 못잡고있습니다. 손쓸 기회를 종시 만나지 못해서요. 그러다보니 세월은 흘러서… 원쑤는 아무 때건 갚을겁니다.》
장모가 흐르는 눈물을 닦고나서 말했다.
《옹군 세해철이 되네 이 사람아. 츄얼이는 자네가 나간지 석달만에 돌아왔더랬네. 진사해라구 하는 놈허구 가철군이라구 허는 놈한테 잡혀간거라네. 저 오동하라는델 가서…강이 얼어붙으니까 도망쳤다네. 그래 집에서 자네가 돌아오기만 기다리고있는데 마침 자네허구 같이 여게 와 있었던 그 사람이 왔던거네.》
《아니 뭐랍니까. 내 친구가 왔더랬습니까?》
《그랬어. 그 사람 자네보러왔다가 없으니까 그만 가버렸지. 저 녕안쪽으루말이네. 거기메 자네네 사람의 군대가 모집돼서…그 사람 로씨야서 건너와갖구는 아마 다른데루갔던모양이지. 일은 이렇게 된거네. 그 사람이 가서두 오래도록 자네가 돌아오질 않고있으니 츄얼이가…닭한테 시집갔으면 죽더래두 닭을 따라야잖는가 이 사람아. 그래서 츄얼이는 떠나간거네 자네를 찾아서. 우리 생각두 그랬구. 자네가 혹시 그쪽갔다가 군대에나 들어가잖았을가했네. 그런데 인제보니 자넨 거기루두안가구 왕청같은델 가 있다가 인제야 이렇게 나타난게 아닌가. 원, 어쩜!… 귀신이 피똥쌀 일이지!》
한숨많은 장모는 한바탕 장탄을 늘여놓았다.
민호는 그날밤을 지내고 인츰 어래무를 떠났다.
두줄기의 실배암같은 레루장이 동에서 서로 한없이 긴 평행선을 그어놓고 있었다. 그우로 괴물같은 검은 장사가 나타나 달리면서 만고의 정적을 깨뜨린지 이제 겨우 20해포. 토비들의 준마와 비기는 그것이 생김으로하여 널다란 관동의 이 북만땅도 뒤늦게나마 인류문명의 새 장을 열어가고 있었다.
바로 이 철로연선에 있는 해림(海林), 산시(山市)와 석두하자(石頭河子), 그리고 목단강(牡丹江)과 그 이남의 녕안을 중심으로 해서 남쪽으로는 천리넘는 저 멀리의 백두산록(白頭山麓)에 닿으는 광활한 지역을 관할하는, 이름을 신민부(新民府)라 지은 조선족의 망명정부가 근년들어 생겨났으니 그것은 바로 일본놈께 제 나라를 잃고 살길을 찾아 국경넘어 이곳 북만까지 깊숙히 들어와 사는 동포들의 자치를 목적해서 이룩된 정부였다. 그것의 조직자와 지도자는 우국우민의 독립투사들이였다. 초라하긴하지만 준국가식의 그 정부는 중앙위원회와 더불어 혁명원로들로 참의원(參議院)과 검사원(檢査院)을 두어 삼권분립의 민주제도를 확립하고자 하면서 산하에 500여명의 보안대와 별동대까지 두어 자신을 보위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였다. 그들은 또한 서쪽으로 수백리되는, 로씨야와 가까운 국경지대인 십리평(十里坪)산골에다 사관학교까지 세워 군사를 양성하는 한편 자기의 관할내에서 군구제(軍區制)와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여 18세이상 40세이하의 청장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항전을 준비하면서 상비군을 보충하고 있었다.
이런때에 민호느 자기의 허저인 안해를 찾는 한편 독립진영의 형편을 알고자 그 구역에다 발을 들여놓았다. 그런데 운명이 이같이 희롱을 당할줄이야. 그는 안해를 찾지도못하고 적의 밀정으로 의심되여 어느날 해림에서 보안대의 손에 잡히우고말았다.
《넌 누구냐?》
《정민호올시다.》
《뭘하는 사람이냐?》
《안해를 잃어버려서 찾고있는중입니다.》
《또 그 소리냐, 이실직고를 해.》
《정말입니다. 거짓말아닙니다.》
《거짓말아니라? 그럼좋다. 네가 여기의 정황은 왜 탐지하는거냐?…넌 이것 저것 캐물었다지. 그리구 권총은 뭣에 쓰느라구 갖고다니는거냐? 솔직히 말해. 어디서 무슨 임무를 맡았는가말이다.》
《너무 그렇게 의심마시오. 사실은 나도 독립군인이였습니다. 반일투쟁을 해온 사람입니다. 첨엔 김원봉의 의렬단에 들었다가 북로군정서로 너머갔고 청산리싸움끝나서는 로씨야에 건너가…자유시사변에 그만....》
《가만! 그러니까 나도 독립혁명에 몸바친 사람이라는 소리냐?》 《그렇죠. 거짓말아닙니다. 조사해보시오. 그러면 알게될겝니다.》 《어디루가서 조사하란말이냐. 우린 뭐 할 일없어서 널 붇들구있는줄알어. 이실직고하면 될걸가지구 왜 이모양이냐. 그래 그것두 말이되기냐하느냐? 이제야 알구서 찾아왔다. 안해를 찾는다…오년철이나되는데 어데가있다가 인제야 나타났느냐말이다.》
《처음에는 어래무라는 허저인의 마을에 있으면서 거기서 장가를 갔구…그래 살다가 안해가 잃어져서…》
자초지종을 차견히 얘기했더면 이렇게 되진 않으련만 처음부터 저쪽에서 무턱대고 의심하면서 다구쳐 족치는통에 그대로 응변하다보니 점점 더 험하게 궁지에 드는 꼴이 되고말았다.
《어디서 뭘해먹었냐말이다.》
《저…》
언어도단이였다. 민호는 자기가 토비노릇해온 사실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미처 생각이 돌지 않아 어물거렸다.
보안대의 사나이가 발끈했다.
《넌 아무리봐도 문제있는 녀석이다. 걸어라!》
《어디루갑니까. 제 말 좀 자상히 들어보시오. 처음부터 차례로할텝니다. 그러면 알게될겝니다.》
《난 알만큼알았다.》
보아하니 그 사람은 이 민호를 에누리없는 적의 첩자로 인정하고 처리할 잡도리인 것 같았다.
세상에 이럴법이라구야! 내 목숨이 경각에 달린거아니냐. 고질된 의심은 풀기힘든것이니 대응책은 오로지 수단을 가리지 않는 강포한 행동뿐이였다. 내가 그러지를 않으면 여기서 볼장은 다보는 거야. 민호는 속으로 뇌였다. 얼마간걸어가다가 그는 자기를 어디론가 압송하고있는 젊은보안대원을 향해 나 오줌마려운데 어쩌라는가 하면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를 압송하던 보안대원은 마려우면 눌게지 무슨 투정질이냐했다. 민호는 돌아서서 띠를 푸는척하다가 앞배에 차고있는 뽐창 하나를 뽑아 돌아서며 훽 뿌렸다.
《앗!》
보안대원은 비명을 지르면서 땅에다 총을 떨구었다. 뽐창은 날가 가 견준대로 그의 팔목에 적중히 박혔던거다.
민호는 거기서 도망쳤다…
신수멀끔한 놈이 운수는 개코같구나. 무슨눔의 일이 오리변자모양으루 요렇개 배배탈리는거냐 제길할! 민호는 안해를 찾지 못하게된것도 그렇거니와 맘속에 두고 몹시 그려오던 독립군에서마저 자기를 랭혹하게 대해주니 야속했다.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렴 상세한 조사도 하지 않고 무턱대고 의심만하면서 사람의 생명을 함부로 취급하려드니…물론 적의 잠입과 파괴를 막느라 그러겠지만 거칠고 조폭한 그따위의 취급법은 커다란 기대와 희망을 품고 찾아간 사람의 정직과 선량함을 너무나도 몰라봐주고 우롱하며 타격하는것이였다. 개밥에 도토리라더니 내가 그 신세로 된거아니여. 지나친 의심과 배척에 민호는 정나미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여지껏 느껴보지 못했던 극심한 고독속에서 소외감을 절절히 느꼈다.
안해를 어떻게 하면 찾을수있을가? 녕안에 가 돌아봤더니 거기에 사는 동포가 몇년전의 어느 계절인가 민족을 분간키어려운 미모의 젊은 녀인이 제 조선인 남편을 찾아다닌적이 있었노라알려주었다. 하니까 츄얼이는 이 일대에 와서 민호를 찾은것만은 확실하였다. 지금은 어디에 가 헤매고있는지?…혹시 정의부(政義府)가 있다는 남쪽으로나 참의부(參義府)가 있다는 서간도쪽으로 가지나않았나싶었다. 민호는 이미나선바에 위험이 닥치더라도 그곳들을 한 번 돌아보고싶은 마음이 불붙듯했다.
그러나 염왕산을 나올 때 허가맡은 기일이 다되였으니 백수불구 우선 산채로 돌아가고봐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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