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민족 언어에 ‘서방’, ‘서방임’, ‘서방질하다’, ‘서방노릇하다’, ‘기둥서방’ 등 ‘서방’에 관한 말이 있는데, 이 ‘서방’이란 낱말은 성인남자가 성인여자와 이루어지는 성적결합행위에서 유래되었으며, 그래서 남자가 여자를 취(娶)하는 것을 ‘서방 간다(북한과 중국연변에서는 지금도 남자가 결혼하는 것을 서방 간다고 말하고 있음)’고 표현하고 남편을 ‘서방’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 ‘서방’이란 낱말은 풍속학적으로나 민속학적으로 매우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우선 중국 쪽의 ‘서방’에 관한 유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은 은나라 때부터 오색, 오방, 오행의 관념이 있었으며, 주나라 때부터는 모든 현상을 음양오행설에 꿰맞추고 풀이했다. 따라서 음은 서쪽이고 양은 동쪽이요, 여자는 서쪽이고 남자는 동쪽이요, 여자는 오른쪽이고 남자는 왼쪽이라는 관념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동남서녀, 남좌우녀이다.
중국역사에서 왕모전설이 유명한데, 가장 유명한 왕모는 곧 서왕모이다. 그녀는 동왕공(東王公)과 대응되는 여신이며 장생불로약을 지니고 있다든가, 남자들의 정력제를 갖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주나라 목왕(穆王)이 서왕모와 로맨스가 있었다든가, 그 유명한 한무제가 7월 7석에 서왕모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는 등등의 전설이 생겨난 것으로 보아, 동남서녀 관념에 의해 서방에 위치해 있는 왕모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미화되었으며 유명한 인물들과 사랑을 나누는 것으로 이야기가 꾸며졌다.
농경문화에서 견우와 직녀는 남경여직(男耕女織)의 상징이다. 그들이 7월 7석에 은하수에서 만나는데 견우는 동쪽에 위치해 있고 직녀는 서쪽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왜 하필이면 7월 7석 날에 만나는가? 그것은 여름에 왕성했던 양기가 음기를 만나게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우리민족도 역사적으로 동남서녀의 관념이 굉장히 뿌리 깊었다. 특히 전설과 민담에 여자가 등장하면 십중팔구는 서방(서쪽)이 따라서 나타난다. 여기서 <<삼국유사>>에 등장한 여자와 서쪽에 관한 기록들을 간추려 열거하면 아래와 같다.
가. 노파와 하서지촌(下西知村) 남해왕 때에 가락국해 중에 어떤 배가 와서 닿았다. 수로왕이 백성들과 함께 북을 치고 맞아들여 머물게 하려 하니, 배가 곧 달아나 계림 동쪽 하서지촌 아진포에 이르렀다. 마침 포변에 한 노파가 있어 이름을 아진의선이라 하니 혁거왕(신라초대왕)의 고기잡이 할미였다.
나. 흰닭과 서쪽마을(西里) 영평삼년 경신년 8월 4일 박공이 월성 서쪽마을을 가다가 큰 광명이 시림 속에서 나타남을 보았다. 자색구름이 하늘에서 땅에 뻗치었는데 구름 가운데 황금궤가 나무 끝에 걸려 있고 그 빛이 궤에서 나오며 또 흰닭(여자를 상징함)이 나무 밑에서 우는지라 이것을 왕에게 아뢰었다.
다. 보희와 서악(西岳) 춘추공의 비(妃)는 문명황후 문희니 즉 유신공(庾信公)의 둘째 여동생이다. 처음에 문희의 언니 보희가 꿈에 서악에 올라가 오줌을 누니 서울에 가득 찼다. 이 꿈을 해괴하게 여긴 보희가 동생 문희에게 말했다. 영리한 동생 문희가 비단치마를 주고 그 방뇨몽을 산 덕분에 춘추공과 가연을 맺고 왕비가 되었으며 자식을 수두룩하게 낳았다.
라. 선도성모와 서란산(西鸞山) 신모는 본시 중국제실의 딸로 이름을 사소(娑蘇)라 하며 일찍이 신선의 술법을 배워 해동에 내왕하였다. 사소가 부황이 보내온 편지를 보고 소리개를 놓은 후 소리개가 멈추는 곳에 자리 잡았고 신이 되었다. 그래서 서란산이라 하였다.
마. 호녀와 서산기슭 신라 원성왕 때 흥륜사를 돌던 김현이 자신을 따라 돌던 한 처녀와 정을 통한 후 그녀를 따라 갔더니 집은 서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바. 백호광(白毫光)과 서쪽 부득과 박박이 심산계곡에 들어가 도를 닭고 있던 어느 날밤 꿈에 백호광이 서쪽으로부터 와서 빛 가운데서 금색 팔이 내려와 두 사람의 이마를 만지었다. ...... 백호광은 후에 부득과 박박으로 하여금 목욕재계를 통해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게 한 여자이다.
사. 선덕여왕과 서교여근곡(西郊女根谷) 선덕여왕이 영문사 옥문지(玉門池)에 숨어 있는 500명의 백제병이 잠복해 있는 것을 예지하여 소문났다. 신하들이 그 비결을 물었더니 “개구리의 노한 형상은 병사의 형상이며, 옥문은 즉 여근(女根:생식기)이니 여자는 음이요 그 빛이 희고 또 흰 것은 서쪽이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음을 알고 있으며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 법이라 그러므로 쉽게 잡을 수 있음을 알았다.”고 왕이 말했다.
이상 <<삼국유사>>에 실린 일곱 가지 이야기로부터 알 수 있듯이 고대한민족은 여자를 반드시 서쪽에 연계시켜놓았다.
또 고대에 풍요다산을 기원하는 축제 때 남근과 여음의 모의물 놀이가 있었는데 동쪽에 남자, 서쪽에 여자가 위치해서 놀이를 하였다.
결론을 말하자면 고대 우리민족은 여자는 서쪽, 서쪽은 여자라는 관념이 매우 강하게 또 매우 깊게 뿌리내리게 되었다. 이런 관념으로부터 남자가 여자를 취(娶)하는 행위(결혼)를 남자가 서쪽, 즉 서방에 가는 것으로 형용되었으며 비유되었다. 따라서 남자가 결혼하는 것을 ‘서방 간다’고 표현하고 갓 결혼한 남자를 ‘서방쟁(북한과 중국연변에서 쓰는 말)’이라 하며 남편을 ‘서방’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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