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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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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조선족 시인 김선희 篇
2024년 08월 23일 06시 04분  조회:620  추천:0  작성자: 죽림
가을앓이(외 6수)/ 김선희(윤형) /평론 두편
2021년 10월 29일 09시 00분  작성자: 문학닷컴
 
가을앓이  
 
윤형  (김선희)
 
더이상 청운의 빛을 더듬지마라
몸살을 앓는 꽃들의 빛깔만으로는 
생의 진수를 가늠할수없기에
달빛의 밋밋한 숨결을 받아들여야지
바람에 흩어지는 숲의 아우성처럼
뿌리 내리지못한 잎새들의 비명이 무너지고나면
옹이를 품은 천년송목*에도
피빛 저녁노을이 물살져오더라
그 차분하면서도 벅찬 윤슬앞에
나는 늘 가슴 텅 빈 죄인이 된다
육신에 스며드는 푸른 어둠이다가
만개한 빛자락의 여백이다가
가을은
천상의 향기를 남겨놓은채
저문 들녘의 침묵속으로
휘영휘영 나를 끌고 가는구나
 
달이 기우는것을 탓하지마라
 
* 송목 = 松木明子
 
 
채워도 채워지지않는것 

 
세상의 한끝이다
허상들만 가득찬 도시의 언저리에
피빛을 태우다 남은 노을이 진다
붐비는 인파속에서도
날개안으로만 그림자를 드리우는 도시의 자세를 스케치해본다
이방인에게 쉽게 허락하지않는 하늘과
땅속 어딘가라도 파헤치면
길이 열릴것같은 막연한 기대들에 부풀어오르다보면
꿈을 향한 구멍들은 열릴수있을가
색이 바랜 달이 뜰때쯤
작은 부끄러움마저 여미고
희미한 뜬구름이라도 잡아보고싶지만
내 여린 손을 뻗을 여백은 어디에도없다
 
채워도 채워지지않는 가슴 빈자리
 
 
 락화의 흔적
 
 
지구 반대편으로부터
지축을 울리며 뼈들이 부서지는 소리
마지막 울음마저 토해버린
음지와 양지의 피를 쏟는 군무
한바탕 소나기 지나고나면
날개잃은 새들처럼 꽃이 추락한다
세상의 모든 희노애락을
가슴 깊이에까지 끌어모아
품은것 이상으로 생을 갈무리하는
꽃들의 순수앞에 무슨 말이 위로가 될가
락하하는 순간
탈바꿈하며 한톨의 씨앗이되어
탄생을 알리는
죽어서도 죽지 않는 생의 원혼이여
 
 
 
 
►싸리문 밀고 들어서면
 
 
시린 가슴으로 싸리문 밀고 들어서면
뭉클해지는 엄마의 살내음이
뿌리 깊은 숨결로 꽃을 피우고있었네
울다 지는 부상화(扶桑花)꽃잎처럼
굽이굽이 차오르는 여러겹의 빛깔사이
그대의 능선을 딛고 
그대의 강을 넘어 
억겹으로 요동치는 생의 빛살이
내게로 전해지고있었네
새삶을 위해서만 가랑비는 내렸네
싸리문 너머로 멈추듯 흐르던 
부드러운 샘이 
바위끝 심장을 뚫고있었네
빛 고운  엄마의 치마자락이
천상의 날개를 펼치고있었네
 
 
►돌의 아리아 
 
 
원점으로 돌아가는 길은 없습니다
영겁의 시간
몸 속 응어리는
슬픈 구멍으로 뚫리고
가장 먼곳으로부터 달려와 반겨주던 
피빛 노을은 온기를 잃어가고있습니다
더 이상 낮아질수없는 육신은
담벼락 기여드는 잎새처럼
한잎 두잎 석화들이 모여
작은 위로를 주지만
그것 또한 옛노래처럼 흘러갈듯
아파도 돌아갈 길이 없습니다
슬퍼도 가랑비는 내리지 않습니다
바람을 거슬러 단 한번이라도
고개를 쑤욱 쳐들고싶지만
전생에 무슨 업보 그리도 많이 쌓았는지
인과율의 그림자는 운무에 접힌채
만추 끝자락에 촛대바위로 
멈춰섰습니다
 
찌든 내 껍질은
어둠의 뿌리에 헝클어지고
꽃이 시들어가는 초화언덕에 
오늘도
가난한 뻐구기는 울다갑니다
 
 
►석류
 
유리창 너머로 
석류가 아프게 매달려있다
몇오리 바람이 찾아와
무어라 귀엣말 전해주듯
찌르륵
찌르륵
어디선가 
풀벌레소리 땅을 울리고있다
떨어지면 
금새 눈물날것만 같아
 
유리창 밖 !
우주를 손바닥에 내려놓은 잎새 하나
햇살이 감겨들며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황칠나무
 
 
태줄 묻어 
몸의 조각들을
어둠속에 깔아놓았습니다
얽혀있는 매듭들을 
노오란 수액으로 
한올씩 풀어내며
버려야할 세상 찌꺼기들을 걸러냈습니다 
 
천혜의 숨결이 닿는곳에
여울치는 물살에 씻기다
주상절리의 넉두리에 귀를 잃다
세상의 빛에 뿌리를 내린다지요
 
나무잎 흔들릴때
천년의 달은 어둠을 더듬어
지상에서 가장 령롱한
열매를 맺습니다
 
꽃은 꽃으로만 피지않고

아래 김선희 시에 대한 두편의 평론을 게재한다.
 
▣ 비평 / 우상렬
생명, 혈연, 현대성 찍고―
 
 
윤형(김선희)의 근작시를 몇수 읊어보았다. 생명노래가 가장 진하게 울려퍼진다. 〈락화의 흔적〉, 〈홍시〉, 〈원일초〉, 〈바람의 언덕에서〉가 이에 해당한다.
 
〈락화의 흔적〉을 좀 보자. 여기서 〈락화의 흔적〉은 무엇이든가? 그것은 “한톨의 씨앗이 되여 / 탄생을 알리는 / 죽어서도 죽지 않는 생의 원혼이”다. 그것은 죽으면서 삶을 잉태하는 죽음과 삶의 변증법이다. 그런데 이런 변증법은 처절한 ‘음지와 양지의 피를 쏟는 군무’를 통해 나타난다. 그것은 또한 ‘세상의 모든 희로애락’을 갈무리하는 ‘꽃들의 순수’한 생명의 승화에 다름 아니다. 모든 생명은 죽음을 딛고 탄생한다. 죽음과 삶의 변증법이 되겠다. 이것이야말로 우주생명탄생의 보편적인 리치다. 이 시는 바로 이런 생명탄생을 노래하고 있다. 
 
〈홍시〉를 좀 보자. 여기서 ‘홍시’는 생명의 상징. 그것은 ‘초불 같은 심장’을 가진 뜨거운 존재. 그리고 생명의 ‘새빨간 생각을 주고 받’는 존재.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허위와 거짓존재는 존재할 여지가 없다. “주변을 강타하던 무수한 소문들은 / 스멀스멀 그림자로 멀어져간다”고 하지 않던가. 이제 “가지마다 감도는 / 생의 물결이여 / 빛의 세례를 온몸으로 받으라”에서 생명의 고양은 최고도에 달한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불행하고 아픈 존재들을 보듬고 감싸안는다. “물오르는 참꽃들의 애환과 / 비슬산 울다간 동박새의 꿈과 / 숲으로 돌아가고픈 / 령토들의 아픈 심사까지도 / 뜨겁게 감싸 안아준”다고 하지 않던가. 아름다운 기원을 한다. “서서히 타오르는 땡볕의 품으로 / 새빨간 날개를 활짝 펼치라”하지 않던가. ‘새빨간 날개’, 그것은 생명의 날개여라! 〈홍시〉는 생명의 찬가, 생명에 대한 아름다운 기원을 노래하고 있다. 
 
〈원일초〉를 좀 보자. 여기서 생명은 ‘아기 꾀꼬리들’로 상징된다. 한 겨울 “아기 꾀꼬리들 뽀시시 / 날개짓을 시도한다”. 그런데 “푸르름은 아득하고 / 다른 세포들을 흔들어 깨우기에는 / 아직 밤이 길다”. 그리고 “부리를 쪼아 새 계절을 불러오고 싶지만 / 길을 열어간다는 것이 / 천년고목에 꽃을 피우듯 / 숨 가쁜 일”인 것이다. 그러나 희망을 잃지 않는다. “시나브로 날개짓에 익숙해질 때 쯤 / 하늘을 쪼개볼려”는 포부를 갖고 있지 않는가. 그것은 원일초―설련화처럼 눈속에서 아름답게 피여나는 꽃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보다시피 이 시는 생명의 끈질긴 힘, 생명의 역경 및 희망, 포부를 노래하고 있다. 
 
〈바람의 언덕에서〉를 좀 보자. 여기서 바람의 언덕은 어떤 곳인가? 그 곳은 ‘꽃을 피우는 곳’. 이 시는 령토, 바다, 섬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령토는 ‘가을 들녘을 살찌우’고 바다는 ‘전설 같은 매듭을 풀어내’며 섬은 ‘작은 몸짓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여기서 령토는 물산, 바다는 정신, 섬은 천, 지, 인 합일의 문화를 지향하면서 인간 삶의 기본 지표를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결국 ‘꽃을 피우는 곳’으로 수렴되고 있다. 보다시피 이 시는 생명이 펼쳐지는 인생, 인간 삶의 기본 지표를 노래하고 있다. 
 
혈연, 피는 무엇보다 진한 것이다. 인간은 혈연의 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 누구도 비껴갈 수 없다는 말이 되겠다. 그런데 이 혈연 가운데서도 부모자식 간의 정이 가장 끈끈하다. 따라서 문학의 영원한 주제가 되기도 한다. 김선희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노래한 시를 좀 보자. 〈싸리문 밀고 들어서면〉을 좀 보자. 여기서 ‘싸리문 밀고 들어서면’ 누가 보이지? 엄마가 보인다. 그런데 엄마는 가슴을 시리게 한다. 그 살내음이 뭉클해지게도 한다. 엄마는 ‘새삶을 위해서만 가랑비’가 되여 내렸고 ‘부드러운 샘’이 되여 ‘바위 끝 심장을 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엄마는 ‘뿌리 깊은 숨결’로 생명의 ‘꽃을 피우고 있’기 때문이다. 보다시피 이 시는 끈질긴 생명의 희생과 헌신으로 생명을 보듬고 키우며 인생을 마감하는 엄마를 노래하고 있다.
 
〈싸리문 밀고 들어서면〉이 어머니의 노래였다면 〈겨울에 피는 꽃잎처럼〉은 아버지의 노래이다. ‘겨울에 피는 꽃잎’은 누구지? 아버지! 아버지는 바로 ‘겨울에 피는 꽃잎처럼’ 사셨다. 그럼 ‘겨울에 피는 꽃잎’은 무엇이지? 그것은 희망이고 행복이다. 아버지는 “흔들리는 바람에도 빛을 잃지 않”았고, “허허로운 벌판에서도 씨앗을 키워오셨”으며 “엄동을 이겨내는 법을 가르쳐주시”였고 “세상의 빛을 당겨주셨”다. 한마디로 아버지는 등대고 생명이고 스승이고 희망이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아버지는 “내 비여있는 길에 / 영생의 빛을 열어주고 계신”다.
 
현대성, 우리 인류가 고대를 넘어 추구해온 삶의 지표. 현재는 포스트모던시대라 현대성도 어지간히 실현된 듯하다. 그런데 삐긋 문제가 생긴 듯하다. 애초에 문제성을 내포한 현대성임에라! 적어도 과학성과 도덕성의 괴리가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세계적 범위에서 현대성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 문학도 례외가 아니다. 이른바 모더니즘문학은 전형적인 한 보기가 되겠다. 김선희의 시도 이런 반성을 보여주고 있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것〉을 좀 보자. 여기서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가. 그것은 ‘가슴 빈자리’. 그럼 왜 가슴이 비지? ‘내 여린 손을 뻗을 여백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여린 손’만큼 가냘프다. 그리고 ‘이방인’이다. 철저히 소외되고 주변화된 이방인이다. 그는 ‘세상의 한끝’에 서 있지 않은가. 그리고 ‘허상들만 가득 찬 도시의 언저리’에 말이다. ‘붐비는 인파 속에서도’ 그를 품어줄 곳은 아무 곳도 없다. 한 쪼각의 하늘과 땅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 하여 희망을 버릴 수 없다. ‘어딘가라도 파헤치면 / 길이 열릴 것 같은 막연한 기대들에 부풀어오르’기 때문이다. ‘꿈을 향한 구멍들’에 대한 기대를 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색이 바랜 달이 뜰 때 쯤’ ‘희미한 뜬구름이라도 잡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서 ‘나’의 기대는 간절한 만큼 처절하다. 둥근 달이라도 모르겠는데 ‘색이 바랜 달’, 흰 구름 두둥실도 모르겠는데 ‘희미한 뜬 구름’이 아닌가. 그것은 애초에 허무맹랑한 기대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것은 차마 미련을 버리지 못해 물에 빠진 사람 지푸래기라도 잡는 마음에 다름 아니다. 이 시는 도시에 융합될 수 없는 한 이방인을 통해 현대 도시생활의 소외(異化)를 고발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 사이에 응당 있어야 될 소통과 온정, 융합이 증발된 사막화인 것이다. 따라서 이 시는 현 단계 현대성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세계 보편적으로 보다 더 거론되고 있는 모더니즘문학의 기본주제와 통하고 있다.    
 
현대성의 문제는 도덕성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것은 무지막지한 ‘과학성’에 의한 자연의 황페화로도 나타난다. 생태평형파괴, 환경오염, 지구온난화… 생태문제가 그 어느 때보다 돋보이는 문제로 되였다. 세계의 지성들이 여기에 눈길을 돌리고 있다. 따라서 우리 문학에서는 세계적인 범위에서 생태주의문학이 산생되였다. 김선희도 이 생태주의문학에 동참하고 있다.
 
〈네모나방〉을 좀 보자. 나비효과라는 것이 있다. 현재 세계는 하나로 얼기설기 련결되여있다. 세계 한쪽 끝의 미세한 움직임이더라도 그것이 파노라마처럼 번져가며 결국 다른 한쪽 끝의 큰 반응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윈윈효과일 때는 더 없이 반가운 것이겠지만 도노미현상을 일으키며 서로에게 상처를 입힐 때 그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시는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다. 첫 시작 “천애지각 땅끝마을에서 / 너는 반갑지 않은 기별처럼 왔구나”는 바로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전반 시에 관통된 이상한 ‘네모나방’의 상징이미지가 이것을 밑받침해주고 있다. ‘만신창’이 되여 ‘천지간을 켜켜이 들추’는 네모나방, ‘시나브로 모닥불이 서서히 피여오르’면 쉬여야 정상이건만 ‘어둠의 발자국’의 재촉 때문에 출발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네모나방은 정상이 아니다. 그래서 ‘가여운 미물’인 것이다. 여기에 시적 자아는 ‘너만의 계절을 담은 / 안식처에로 날아가 주’기를 기원한다. 이것은 모든 존재가 자기의 ‘안식처’로 돌아가 이 세상이 정상적인 질서를 회복하기를 바라는 아름다운 기원에 다름 아니다. 보다시피 이 시는 미물인 네모나방을 다룬 것 같지만 실은 생태평형 및 세계질서라는 거창한 문제를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현 단계 가장 민감하고도 중요한 생태주의라는 세계적 담론에 가닿고 있다. 
 
윤형의 근작시 몇수를 생명, 혈연, 현대성 차원에서 살펴보았다. 모두 만만치 않은 담론들이다. 영원성을 띠는 담론이기도 하다. 그녀의 근작시의 1차적 의미는 여기서 찾게 된다. 그녀의 시는 긍정적이고 밝아서 좋다. 요새 말로 하면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친다. 그녀에게 있어서 생명은 시련은 있어도 굴복은 없다. 그것은 죽음조차 딛고 일어나는 끈질김을 갖고 있거늘! 그녀에게 있어서 혈연은 생명의 깊은 뿌리를 알려주고 생명의 영원한 등대가 된다. 그녀에게 있어서 현대성은 문제가 있으되 우리가 그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반성하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전반적으로 볼 때 윤형의 근작시 가운데 〈락화의 흔적〉, 〈홍시〉, 〈원일초〉, 〈바람의 언덕에서〉 같은 생명 관련 시는 현대 상징시로 나아가고 있다. 이미지 및 이미저리를 통하여 전반 시의 상징적인 경지를 잘 엮어내고 있다. 세부적으로 볼 때 〈바람의 언덕에서〉의 ‘꽃’, ‘령토’, ‘바다’, ‘섬’이미지의 상징적 의미 및 ‘비여있는 바람’, ‘시린 령토’, ‘허기진 생각’과 같은 역설적 표현이 돋보인다.
 
그리고 혈연, 현대성 관련 시는 사실주의적으로 흐르되 상징적 이미지 및 이미저리로 잘 엮어져 시의 의미적 내연의 함축성을 확보하고 감칠맛을 돋구며 현대시의 격을 잘 갖추고 있다.
 
그녀의 근작시에는 일부 문제점도 노정하고 있다. 례컨대 〈홍시〉나 〈바람의 언덕에서〉의 일부 이미지 및 이미저리는 좀 자연스럽지 못하고 생경하며 난삽하다. 그리고 〈원일초〉의 이미지 및 이미저리는 보다 구체적으로 맞물리지 못하고 론리적으로 좀 긴밀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이번 근작시는 그녀의 끊임없는 시탐구에서의 새로운 한페지를 장식하고 있다. 그녀의 시탐구는 멈추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이미 시의 녀신과 함께 달리고 있거늘! 

《도라지》2019년 6호 br />

▣ 원숙의 우아함과 지는 미학
--김선희의 꽃과 바람과 빛과 그리고 시--
        박  은  희(일본)
 
    “돌의 아리아(외7수)”는 김선희시인이 대한민국방문길에 들고 돌아온 선물인듯 하다. 물론 독자들을 위한 귀한 선물이기도 하겠지만, ‘나를 찾아헤매는 려정’(“바람의 언덕”)이였으니 시인 자신을 위한 소중한 선물이기도 한듯 하다. 그런 의미에서 ‘꽃’과 ‘바람’, 그리고 ‘빛’을 모티프로 서로 내적 련관성이 있는 8수의 시를 하나의 정체적인 작품, ‘나를 찾기’ 려정(旅情)시라고도 볼 수 있다. 
 
    회화성(繪畵性)과 서정성이 강한 뚜렷한 특점을 보여주고 있는데 려정(旅程)에서 만나는 절경은 시인의 시정(詩情)을 불러일으키고 시인은 감정적색채가 짙은 언어와 적절한 수사법으로 산수풍경을 리얼하게 재현시키면서 내심에서 우러나오는 소리, 격정을 토로한다. 김선희시인의 작품에서 주관과 개관은 서로 분리되거나 대립된 존재인 것이 아니라 객관속에서 주관을 찾고 주관으로 개관을 확인하는, 서로 밀접히 련결된 존재이다. 
    
아니무스의 심상—초대바위
 
첫 시 “돌의 아리아”는 외7수의 내용을 통괄(統括)하고 있다. 19행의 제1련과 5행의 제2련으로 구성되였지만 제1련과 제2련은 물리적인 대칭을 이루고 있다. 제1련의 노을속에 서있는 낮은 초대바위와, 그와 좀 떨어진 곳에 있을, 제2련의 초화언덕의 시들어 가는 꽃, 그리고 뻐꾸기는 모두 시인 자신이다. 
 
‘원점으로 돌아가는 길은 없습니다’하고 시인은 누군가에게 호소하는듯한 높은 격조와, ‘슬픈 구멍’, ‘피빛 노을’등 간잡적표현이나 ‘아파도’, ‘슬퍼도’등 직접적표현으로 된 짙은 감정적색채를 띤 언어로 풍경을 그리고 력사를 읊고 있다. 그리고 ‘바람을 거슬러 단 한번이라도/고개를 쑤욱 쳐들고 싶지만/전생에 무슨 업보 그리도 많이 쌓았는지/인과률의 그림자는 운무에 접힌 채/만추 끝자락에 초대바위로/멈춰섰습니다’하고 의인화하여 초대바위의 모습에 자신을 겹쳐본다. 소설가든지 수필가든지 시인이든지를 막론하고, 그들이 의식적인 표현을 했든지 아니면 무의식적인 표현을 했든지간에 독자는 그 표현에서 표현자의 심층심리를 엿볼 수 있다. 문학작품이나 미술작품에서 돌이나 바위, 철같이 단단하고 강한 것이나 탑이나 기둥같이 우뚝 솟아 있는 것을 흔히 남성의 기호나 상징으로, 꽃처럼 여리고 아름다운 것은 녀성의 기호나 상징으로 표현되여 왔다. 심층심리학에서도 각기 남성성과 녀성성으로 풀이하고 있다. ‘초대바위’와 ‘꽃’을 구성상 대칭적으로 배치한 것이 김선희시인의 의식적인 것이였는지 무의식적인 것이였는지를 막론하고 여기서 심층심리학적으로 해석하면 ‘초대바위’는 시인의 아니무스(animus)의 심상(心像)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녀성의 내계(內界)에 존재하는 남성상이다. 여기서 말하는 남성상이란 꼭 남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성공이나 신분, 권력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시들어가고 있는 ‘꽃’은 즉 인생의 꽃시절을 끝마치고 있는 녀성상이다. 녀성상은 남성상과는 상대적인 것을 의미한다.
 
    50후나 60후의 녀성이라면 남존녀비사상을 가진 부모의 밑에서 자랐거나 혹은 중남경녀의 부조리한 취급을 당한적이 있을 것이다. 녀자로 태여났기에 이루지 못했던 일, 얻지 못했던 것이 한이 되기도 했다. 하여 ‘몸속 웅어리는/슬픈 구멍으로 뚫’렸다. 그러나 시인은 ‘전생에 무슨 업보 그리도 많이 쌓았는지/인과률의 그림자는 운무에 접힌 채’ 하고,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항거할 수 없는 운명임을 받아들인다. 
 
    다시 정리해 말하면 시인인 ‘나’(‘가난한 뻐꾸기’)가, 녀자로서의 인생의 꽃시절을 보내고 있는 ‘나’(시들어가는 꽃)가, 지금 이 시각 이 곳에서 지난 반생을 인생의 세파속에서 씻기고 구멍 뚫리여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육신’이 된 ‘나’(초대바람)를 지켜보고 있음을 알리고(울고) 있다.
 
원숙의 우아함과 지는 미학
 
    “돌의 아리아”에서 시인은 ‘피빛 노을은 온기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꽃이 시들어가는 초화언덕에’하고 해가 서서히 져가거나 이미 진 뒤의 붉은 노을과, 져가는 꽃을 읊었다. 자연의 모든 사물은 지기시작하기 직전에 가장 원만하고 원숙한 모습을 보여준다. 하기에 지는 순간이 장렬하고 강렬하다. 이 순간이 지나면 두번 다시 볼 수 없기에 져가는 모습이 귀중하고 아름답운 것이며, 이를 지켜보는 마음이 애석하고 슬프고 아픈 것이다. 이것이 원숙의 우아함이고 지는 미학이다. 
 
    첫 시에 이어 시인은 두번째 시 “석류”에서 원숙한나머지 미풍이 불기만 해도, 아니면 풀벌레 울음소리가 나기만 해도 당장 떨어질 것만 같은 석류를 그리고 있다. 시 “석류”의 제1련은 유리창안이고 제2련은 유리창밖이다. 이 유리창은 시적주인공의 감정 즉 주관이다. 유리창너머로 석류의 원숙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떨어지게 될 미래를 걱정하고 있는 시적주인공의 마음은 아프다. 이런 감정속에 자신을 가두어 두면 ‘눈물 날 것만 같’다. 하여 마음의 유리창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거기에는 우주가 있고 해살이 있다. 시적주인공은 적극적으로 세상과 소통하려고 한다.
 
    시인은 세번째 시 “황칠나무”에서 ‘원숙’과 ‘짐’(또는 死)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의 굴레에서 벗어남을 보여준다. 마지막 련의 ‘꽃은 꽃으로만 피지 않고/나무는 바람에 길을 묻지 않습니다’는 명언이다. 꽃시절이 끝났다고 하여 인생이 끝난 것이 아니다. 자기의 삶은 자기가 정하는 것이지 외부의 영향을 받아서는 안될 것이다. 부(富)의 상징인 황칠나무는 껍질에 상처를 주면 노란색 진액을 흘러낸다고 하는데 그 노란 수액은 도료로 쓰이고 뿌리, 가지, 껍질, 잎, 열매는 약재로 쓰인다고 한다. 그러니 꽃이 진다고 슬퍼할 일이 아니고 열매가 떨어진다고 비통해할 일이 아니다. 황칠나무가 사시절 귀중하듯이 인간에게 있어서 인생의 어느 시절이 또한 귀중하지 않겠는가. 시인은 ‘천혜의 숨결이 닿는 곳에’ 뿌리를 내리는 성스러운 나무를 의인화하여 노래하고 있다.
 
    다음, ‘나무는 바람3에 길을 묻지 않습니다’를 이어 시인은 시 “바람의 언덕”을 쓴다. 사실 ‘바람’은 첫시의 ‘바람1을 거슬러 단 한번이라도/고개를 쑤욱 쳐들고 싶지만’(“돌의 아리아”)에서 ‘몇 오리 바람2이 찾아와/무어라 귀속말 전해주듯’(“석류”)로 이어져 내려왔다. 김선희시인의 작품을 읽음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키워드로 된다. 상술한바와 같이 ‘바람3’은 ‘외부적 영향’을 의미하는데 이와 비슷하게 ‘바람1’은 사회적이나 가정적, 또는 정치적으로 인한 인생세파 혹은 타자 등, 즉 ‘외부적 압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바람2’는 자연으로서의 바람, 또는 ‘외부적 압력’이다. “바람의 언덕”의 ‘바람4’은 위의 모든 의미를 포함함과 동시에 ‘내부적 갈등’의 의미가 첨부된다. 제1련의 ‘바람은 다가오는 봄을 막지 못하지/밑창마저 뜯긴 해살이/마른 풀잎을 꺾는 걸 본 적 있는가’는 위에서 렬거한 의미로 읽을수 있다. 제2련의 ‘뒤틀려버린 뿌리까지 가는 동안/심장판막 넘나들다/안팎으로 찢어지고 부서지고’는 ‘외적인 압력(또는 영향)’이 ‘내부적 갈등’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런 갈등에 의하여 생겨난 수많은 ‘나’들이 초봄에 파란 새잎이 돋기전인 겨울에 피는 산수유꽃으로 피고 있다.
 
    무언가 얻으려는 확답이 나오지 않은 가운데 시인은 잠시 “산다는 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산다는 건/꽃을 벙을게 하려고/흩어진 수액의 줄기를 모으고 있는 일’이라고 한다. 여기서 ‘꽃’은 성공이나 명예를 상징하는 것일가? 제3련의 ‘신열을 앓다/생의 몇바퀴 돌고서야/운무를 헤집고 만개하는 꽃불의 넉두리’를 읽고나면 비로서 ‘운무’(無知, 迷)의 상대적 의미로서의 ‘앎(知, 悟)’을 의미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끝으로시인은 ‘어떤 경우에도/길 밖의 길 앞에 헤매지 마라’고 호소한다. 길은 한자로 ‘道’로 쓴다. 특정된 어느 한 종교의 리치라기보다는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로 해석하고 따라서 ‘꽃’은 불교에서 쓰이는 련꽃의 상징적 의미를 따온 시적 표현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 ‘앎’에 대한 각성은 “바람의 언덕”의 ‘빈 가슴으로 울던 억새 앞에/무심코 쳐다 본 하늘/그 중후의 빛갈을 느끼게 된 건/불혹의 지나서 한참 후였지’에서 ‘불혹’의 상대적 의미로 쓰인 하늘의 ‘빛갈’에서부터 전개되여 왔다. 아직은 그저 ‘느끼게 된’ 단계이다. 사실 전 시편에 관통되여 있는 이 ‘빛’이 또한 중요한 키워드의 하나이다. “겨울 해변에서”의 해변은 그야말로 빛의 세계이다. ‘여울 치다 얼어붙은 저 물빛’, ‘극과 극으로 만난 령혼의 빛’, ‘물을 강타하는/저 역겹의 해살’, ‘세상에서 가장 맑은 물빛’. 이 ‘빛’들이 즉 ‘앎’이다. 이 ‘앎’으로 하여 모든 슬픔을 물아낼 수 있고, 모든 풍문들의 매듭을 풀 수 있고, 모든 것을 넉넉히 받아들이고 포옹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토록 찾아헤맸던 ‘나’는 어디로 가고 ‘앎’이 남았는가? ‘나’는 어디에도 없고 또 어디에나 있다. 다만 ‘없다’ 혹은 ‘있다’고 깨닫는 ‘앎’에 의하여 존재한다. 
 
    시 “겨을 철쭉”은 첫시 “돌의 아리아”에 대응되는 작품이다. 삼국유사에 실린 “헌화가”에는 신라 성덕왕 때, 강릉태수로 부임하는 남편 순정공을 따라 동행하던 절세미인 수로부인이 벼랑끝에 피여난 꽃에 반하였는데 누구도 꺽어다 줄 엄두를 못 내고 있을 때에 지나가던 한 로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꺾어와 노래를 부르며 바쳤다는 에피소드가 적혀있다. 그 꽃이 철쭉이고 그로부터 철쭉의 꽃말은 ‘사랑의 즐거움’으로 전해진다고 한다. 락조의 후광속에 한겨울의 맹추위에 몸부림치는 철쭉은 피빛 노을속에 세찬 바람에 구멍 뚫린 초대바위와 영상(映像)적으로 조응되고 또한 아니무스의 심상에 대응되는 시적형상이다. ‘다시 누군가에게 돌아갈 때는/꽃으로 남지 않으리!’, 어디까지나 시인 개인적인 선택이긴 하지만 이 또한 명언이다. 한 녀성으로서 꽃시절에 대한 아무런 미련도 집착도 없이 인생의 한 계절을 떠나보내고 홀가분히 다음 한 계절을 맞이하려는 결단이다. 
 
    시인 김선희의 ‘나를 찾아헤매는 려정’은 인생의 환절기에 아픔과 슬픔에 ‘나’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앎’으로 ‘나’를 확인하는 려정이였다. 이와 같은 인생과 삶에 대한 자세가 바로 인간 김선희의 ‘원숙의 우아함’이고 ‘지는 미학’이다.
 
그리고 시(詩)
 
 “돌의 아리아”에서 시작하여 “겨울 철쭉”으로 끝나도 구조상 내용상 완벽한데 시인은 위 7수의 서정시와는 전혀 다른 서사시 “오늘의 담시”를 추가한다. 담시(譚詩)는 물론 서사시에 속하겠지만 유럽의 발라드의 영향을 받아 정착된 전통적 서사시와는 달리 더욱 자유롭고 짧은 것이 특징이다. “오늘의 담시”는 텍스트(정확히는 위의 서정시)밖의 시인의 이야기를 펼쳐 보였다. 우선 텍스트밖의 시인의 일상언어는 ‘내 핸드폰 안 챙겼슴다!’와 같이 연변방언이다. 서정시의 엄밀한 계산에 의하여 선택된 시어와는 다르다. 다음, 생사를 구분하는 관건적인 시각에 담시의 시적화자 ‘내’는 무의식지간에 시를 쓰기 위한 재료나 초고가 들어있을 일기노트와 필기장들, 그리고 노트북보다는 먼저 려권과 돈지갑을 들고 도망친다. ‘나’를 찾는 려정에서 헤매이고 있는 서정시의 시적주인공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다. 담시의 사실과 서정시의 진실과의 차이이다. 거듭 되풀이되는 대사는 마자막끝에  ‘—과연 뭐다 그리 중한지?!’로 매듭되면서 사고의 여지와 여운을 남긴다. 
 
김선희시인이 담시를 부가하여 담시의 사실과 서정시의 진실과의 차이를 보여주려고 한 것은 서정시의 구조와 내용에 대한 보다 깊은 리해를 돕기 위한 것이 아니였는가 생각된다. “돌의 아리아”를 비롯한 7수의 서정시의 구조는 초령역적인 심적(心的)구조이다. 자연령역과 인류령역의 사이, 의식령역과 무의식령역 사이, 내적령역과 외적령역의 사이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마음의 구조이다. 대문에 상징성이 강하다. 한 사물에 부여된 상징적 의미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의미로 중첩된 것이다. 될수록 여러가지 가능한 상징적 의미로 해석하여 읽으면 시적세계가 보다 넓어지게 된다. 
 
김선희시인의 ‘나를 찾기’ 려정시를 읽고나면 의사(擬似)체험을 했다기보다는 시적주인공의 마음과 마음을 겹쳐서 실제에 가까운 체험을 한듯한 느낌이 든다. ‘나’가 이 순간 무슨 감정인지 인츰 깨닫는 ‘앎’에 의하여 ‘나’를 잃지 않는 것은 삶의 지혜이다
 
/연변문학 202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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