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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시인, 평론가가 선정한 “10명의 시인”
1.김소월/ 진달래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宁边에 약산药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이별의 이유, 또는 또 하나의 반어 이 희 중 / 시인. 문학평론가. 전주대 교수
김소월의 시”진달래꽃’을 연시로 읽지 않을. 또는 연시 이상으로 읽을 도리는 없다. 그만큼 순정한 사랑 노래이다. 이 점이 연시이면서, 연시로 읽지 않을 수도 있고. 연시 이상으로 읽히는 한용운의 연시들과 선명히 구분되는 자리이다.
이 시의 주제는 ‘이별의 정한’도 ‘슬픈 헤어짐’도 아니다. 이 시의 내용은 가정된 상황에 기초한 미래의 각오이자 계획이다. ‘가실 때에는’ ‘가실 길에’에서 미래시상를 표시하는 “ㄹ”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또한 “보내드리우리다”, “뿌리우리다”, “흘리우리다”의 “-우리다”에서 “우”는 존대의 뜻을, “리”는 계획의 뜻을 표시한다. 셋째 연의, “가시는”과 “놓인”에 쓰인 현재시상은 가정된 미래 상황 위에 얹힌 제한적 현재로 보아야 한다. “가시옵소서”는 기원 또는 완곡한 명멸이므로 현재 실현되고 있는 행동과 상관 없다. 그러므로 이별은 목전의 일이 아니다.
시의 화자는 미래에 닥칠지도 모를 이별을 걱정하고 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하는 때는 언제인가, 현재 진행되는 사랑이 불행한 결말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다고 여길 때이다. 물론 이 판단은 주관적일 수 있다. 객관적 상황이 그럴 수도 있으나, 주체의 심리적 성향 때문에 과장 또는 왜곡된 것일 수도 있다. 사랑하는 ㅅㅏ람들의 대화에서 ‘내/네가 떠난다면’같은 유의 가정은 사랑의 현재를 환신하게 하고 이 확신을 공고히 하는 데에 자주 소용된다.
시의 문면에서 화자가 미래의 이벌을 걱정할 객관적 증거는 없다. 걱정하는 화자만 있다. 이별은 현재 징후로만 존재할 수도 있고 아무 징후도 없을 수 있다. 미래에 닥칠지도 모를 최악의 상황은 현재의 사랑이 소중하기 때문에 소심한 연인의 내면에서 반추되는 법이다. 그렇다면 이 시의 내용은 ‘이별을 당면한 연인의 각오’가 아니라 ‘사랑에 빠진 사람의 행복한 투정’이 될지도 모른다.
이 시를 읽으면서 우리는, 떠나는 연인의 발 아래 눈물 없이 꽃을 뿌리겠다는 화자의 태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놀라움은 ‘어쩌면 그렇게 거룩할 수 있는가’ 또는 ‘어쩌면 그렇게 독할 수 있는가’등의 질문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역설 또는 반어로 이 각별한 놀라움의 원인을 해명하려 애써 왔다. 좀더 풍요롭게 읽기 위해서 “나 보기가 역겨워”라는 구절을 더 살필 필요가 있다. 이 구절이 미래에 닥칠지도 모를 이별과 관련하여 화자가 문제삼는 유일한 이유로 보이기 때문읻. 헤어짐의 이유는 다양하다. 둘 사이의 감정 변화일 수 있고, 외부 조건일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에서 화자가 특히 걱정하는 이유는 바로 “나 보기가 역겨워”이다. 이는 사랑의 근원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상대가 보기 싫어지면 사랑은 없다. 사랑이 개재되지 않은 연인은 의미론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사랑이 소며로딘 자리이므로 그렇게 거룩할 수 있고, 그렇게 독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사랑의 상대 앞에서 주체는 부끄러워지고 초라해진다. 자신이 그에게 얼마나 부족한 상대인지에 집착하며 괴로워한다. 사랑 덕택에 밝아진 자의식의 거울이 그를 허무는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상대가 바로 그 이유, 즉 자신의 부족을 탓한다면 울지 않고 꽃까지 뿌리면서 고이 보내드리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욕망의 자아를 내면화한 윤리적 자아의 대표 발언으로서, 원망을 내면화한 축복의 몸짓으로 완성된다. 여기서 화자가 집요하게 추궁한 하나의 이유, “나 보기가 역겨워”는 그밖의 다른 모든 이유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은 아닌가. 그렇다면 이는 또 다른 반어 또는 역설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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