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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1000권 읽기 19
2015년 02월 09일 14시 13분  조회:1972  추천:0  작성자: 죽림

 

181□좀팽이처럼□김광규, 문학과지성시인선 73, 문학과지성사, 1988

  문학이 인식과 형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이미 다 알려지고 합의 본 사실이다. 그런데 때때로 이 둘 중의 하나로만 되어있거나 넙치처럼 어느 한쪽으로 몰려서 이루어진 작품들이 있다. 그럴 경우에는 반드시 그렇게 된 무슨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한쪽으로 몰리면 그건 이상한 것이다. 이 이상함을 우리는 졸작이라고 말한다.

  이 시집의 특징을 이루는 요소는 형상이 아니라 인식이다. 세상을 보는 어떤 작은 깨달음이 먼저 오고 그것을 ‘서술’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그 서술이 인식의 형상성을 전혀 뒷받침해주지 못해서 일기문으로 전락한 경우이다. 새로운 깨달음만 있으면 그 모양새야 어떻든 상관없다는 식이다. 그래서 수영장에 뛰어드는데 잠방이 차림으로도 나서고, 윗도리만 입고도 나서고, 알몸으로도 나서는 것이다. 미니스커트는 한 때 입는 것이다. 늙은 것의 종아리를 예쁘다고 하는 사람은 그의 애인뿐이다. 칭찬도 봐가면서 해야 할 일이다. 자기 입맛에 맞는다고 칭찬하는 것은 칭찬 받는 그 사람을 아예 죽이는 것임을 새삼 깨달을 필요가 있다. 서술의 평이성이 형상성을 보장하진 못한다.★☆☆☆☆[4336. 11. 24.]

 

182□참 이상한 상형문자□이승욱, 민음의 시 68, 민음사, 1995

  대체로 너무 서둘러서 쓴 시들이다. 그래서 시들이 대체로 짧고 할 말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까닭에 너무 뼈만 앙상하다는 느낌이다. 이것은 이미지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려서 쓰지 않고 한 순간에 온 깨달음에 집착한 결과다. 그렇기 때문에 시가 건조해졌다. 시에 살이 없는 건 단점이 아니지만, 너무 깡마른 것은 단점이다. 비슷한 이미지들도 많고 비슷한 내용들도 많다. 이런 것들은 묶어서 한 시로 용해시키는 것이 좋겠다. 한편으로 얘기할 수 있는 것을 열 편으로 얘기한다고 해서 내용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어떻게 살을 붙여야 맛있는 시가 되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할 때인데, 한자는 전혀 맛을 내지 못하는 물건이라는 것을 먼저 생각할 일이다.★★☆☆☆[4336. 11. 25.]

 

183□서랍 속의 여자□박지영, 민음의 시 73, 민음사, 1995

  발상의 경쾌함도 있고, 이미지를 다루는 솜씨도 그런 대로 괜찮은데, 너무 서둘러서 쓴 작품들이 많다. 시는 발상만 가지고 되는 것도 아니고 말만 가지고 되는 것도 아니다. 할 말이 생겼으면 그것을 싣고 갈 수레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일상의 관념과 삶을 분해하려면 웬만큼 날카로운 칼 가지고는 어림없다는 것이다. 아주 날카로운 칼로 한 꺼풀씩 벗겨내야 하는데, 그 날이 너무 무디다. 인식의 힘을 좀 더 날카롭게 하고 그것을 어느 곳으로 들이밀어야 이 무거운 일상이 쪼개질 것인가 하는 것을 먼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뒤쪽의 무거운 걸음걸이 때문에 앞쪽의 경쾌한 발걸음마저 같이 둔탁해졌다.★★☆☆☆[4336. 11. 25.]

 

184□내 귓속의 장대나무 숲□최정례, 민음의 시 66, 민음사, 1994

  시가 대체로 차분하게 가라앉아서 안정된 인상을 준다. 시상을 전개시키는 수법도 무난하고 이야기를 전하는 목소리도 고만고만하다. 그러나 시들이 소품인 데다가 대부분 자신의 과거에 무겁게 묶여 있어서 독자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별로 없다. 사회 인식이 없다는 것은 문제가 안 된다. 내면의 고민이나 사고를 해도 독자들이 따라 들어가 섞일 수 있는 어떤 공간이나 인식이 있어야 하는데, 그 공간이 아주 좁다. 이 공간을 넓히는 것이 성공의 열쇠가 될 것이다. 이 작업에 한자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4336. 11. 25.]

 

185□우수의 이불을 덮고□이기철, 민음의 시 17, 민음사, 1988

  흥분된 감정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안정된 시선과 안정된 마음으로 세상을 읽는 태도는 높이 살만하다. 그러나 너무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시가 꼭 탄탄한 구조 위에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많은 말들을 늘어놓으면 설명이 되고 설명이 끼어들면 긴장을 잃게 된다. 부분부분의 빛나는 구절들이 그런 넋두리에 파묻혀서 시 전체가 설명문으로 떨어지고 있다. 시의 경제와 언어의 경제를 생각해야 할 일이다. 불필요하게 끼어있는 한자는 그 흠을 더욱 크게 한다.★★☆☆☆[4336. 11. 25.]

 

186□낯선 길에 묻다□성석제, 민음의 시 39, 민음사, 1991

  인식의 깊이가 남다르고 세계를 보는 눈이 확립되었다. 게다가 군더더기 없이 필요한 말만을 동원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독자의 눈을 잡아끄는 요령과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방법도 긴장을 갖고 있다. 다만 설명하는 듯한 구절이 간간이 눈에 띈다는 점인데, 그것은 인식의 방법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니, 큰 단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사소한 사건이나 사물을 통해서 세계의 본질을 보여주고 드러내는 수법이 능수능란하다. 사건을 축약하여 상징으로 만드는 뒷부분의 시들 역시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다. 드물게 나타나는 한자는 문제지만, 큰 작품을 쓸 수 있는 조건이 고루 갖추었다. 이 긴장을 잊지 않고 세월과 싸우는 일이 남은 숙제일 것이다.★★★☆☆[4336. 11. 25.]

 

187□입국□사이토우 마리코, 민음의 시 53, 민음사, 1993

  세계를 보는 시각도 확립되었고, 시상을 전개하는 힘도 적당한데, 시가 좀 메마르다는 느낌이 가시지 않는다. 이 느낌은 언어의 감각이 주는 것인데, 여기서는 인식이 주된 흐름을 이루고 있는 탓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이야기가 끼어 들고 그 때문에 시가 느슨해졌다. 말에는 그 말에 스민 묘한 정서가 있다. 외국인이 그 말의 정서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사람은 그러한 특수성 이외에도 보편성이라는 것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가 지닌 그런 특수성을 살리기보다는 보편성에 의존하는 것이 시를 쉽게 쓰는 방법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의 구성을 다양하게 만들고 화법을 변화시키며, 상징이나 비유를 활용하여 시의 역동성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이 시집은 너무 조용하다. 그러나 외국인이 남의 나라 말을 배워서 이만큼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비록 우리나라의 적지 않은 시인들이 한자를 섞어 쓰는 묘한 관행이 남아있지만 남의 나라 말로 시를 쓸 때 그 나라 말이 아닌 것을 섞어 쓰는 것은 그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것은 알 필요가 있다. 허긴 시인을 탓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시인의 언어는 그를 가르친 사람에게 배웠을 것이니!★★☆☆☆[4336. 11. 25.]

 

188□물 위를 걷는 자 물 밑을 걷는 자□주창윤, 민음의 시 23, 민음사, 1989

  단순한 풍경을 상징으로 만들어 내는 능력이 돋보인다. 상징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뒷면까지 드러나게 하는 것은 좋으나 장난스런 표정을 섞어 넣는 것은 의미 전달의 장애가 된다. 상징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지 않으면 설명하게 된다. 짧은 시안에서 설명을 하려하면 시가 번거로워지고, 길게 시를 만들면 긴장이 떨어진다. 말을 하기보다는 제시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이 시집의 분위기에 어울린다. 한자는 잘못 박힌 못 같다.★★☆☆☆[4336. 11. 25.]

 

189□에로스의 반지□민음의 시 76, 민음사, 1995

  앞부분의 긴장이 뒤쪽까지 연결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아쉬움이다. 앞부분의 상황설정과 이미지들이 서로 얽혀 도는 짜임새는 거의 현란한 수준이었는데, 뒤로 가면서 설명이 많아지고 관념 덩어리가 그대로 드러나서 균형을 잃고 있다. 너무 서둘러서 시를 쓴 까닭인데, 진득하게 기다리는 것이 시인의 큰 저력이라는 것을 새삼 생각케 한다. 또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주제가 한 가지로 집중되지 않고 흩어진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미지가 분산되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4336. 11. 25.]

 

190□땅의 뿌리 그 깊은 속□배진성, 민음의 시 24, 민음사, 1989

  선택된 이미지들이 모여서 한 사건을 재구성하면서 그 속으로 독자를 불러들이는 특이한 능력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추억의 공간 속에서 모든 고통도 두려움도 아름답게 되살아난다. 이미지들 역시 단정한 모습으로 안개처럼 추억을 들어올리며, 메마른 가슴을 촉촉이 적셔준다. 묘사가 빼어나며 깊은 울림을 갖는다. 요컨대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러나 추억을 시의 중요한 소재로 삼을 경우, 투명하지 못한 기억과 그것이 재구성한 막연한 추억에 가려 현실의 중요한 모순이 가려져 버리기 쉽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 시집 역시 그러한 위험을 곳곳에 안고 있다. 가족사의 비극과 그 주변의 고통들이 추억이라는 안개 속에 가려서 드러나지를 않는다. 시가 끝내 개인의 넋두리 속에 남아있게 될 운명이다. 넋두리가 시의 큰 장점이고 또 그래야 할 부분이 있기 마련이지만 거기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빨리 벗어나야 할 곳에 시인이 서있고,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방법론이 필요하다.★★☆☆☆[4336.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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