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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즐거운 일기□최승자, 문학과지성시인선 40, 문학과지성사, 1984 좀 경망스럽다. 그 경망스러움은 불필요한 과장에서 나오고 불필요한 과장은 내가 보고자 하는 세계 밖에도 내가 알 수 없는 세계가 있음을 짐작하면서도 그러한 짐작에 대해 스스로 외면을 하고 내가만 아는 세계로 용감하게 나아갈 때 생긴다. 그러나 내가 그쪽으로 나아가도 내가 나가지 못한 곳에 나와는 다른 세계가 있음을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안다. 외면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안다. 그러나 가수는 신념만으로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나의 신념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내 신념이라고 굳게 믿는 오만이 때로는 필요한 법이다. 그 문법에 충실한 시집이다. 이때 가장 큰 문제는 그 문법이 내 삶에 굳건히 뿌리내리지 못하고 허공에 떠있게 된다는 사실이다. 마치 잘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말이다. 해골이 신사복을 입은 형국이다. 관념이 여과를 거치지 않은 채 마구 쏟아진다. 그것을 새로운 형식이라고 우긴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흉하다고 꼬집어주는 벗들이 없기에 더욱 문제인 것이다. 기형도한테서 한 수 배우면 좋을 텐데, 그렇게 되면 시를 쓸 밑천이 남지 않을 것이다. 같은 얘기가 계속 반복되는 것을 보면 이제 한 번 옷을 갈아입어야 할 때가 왔다. 그리고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에 눈을 주는 노력이 필요할 때다. 큰 것 때문에 작은 것을 잃는 일을 이미 많이 해왔기 때문이다. 한자는 가장 먼저 벗어야 할 옷이다.★★☆☆☆[4336. 12. 2.]
242□우리 이웃 사람들□홍신선, 문학과지성시인선 39, 문학과지성사, 1984 시의 참맛을 아는 시인이다. 무엇보다도 시가 어떤 발상에서 나와서 어떻게 형상화되어야 하는가를 아는 시인이다. 그런 시인은 대개 게으른데, 이 시인은 그러면서도 아주 꼼꼼하고 성실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글자 한 자 놓치지 않고 그것이 이미지와 잘 맞도록 조탁한 흔적이 역력하다. 비슷비슷한 내용으로 시를 쓰다보면 발상이나 이미지 전개 수법도 일정한 틀을 보이게 마련이어서 그와 함께 시인의 능력도 대충 드러나는데 워낙 성실하게 작품을 다듬고 만들어서 그러한 타성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놀라운 일이다. 안타까운 것은 세계에 대한 비전이 없어서 이 뛰어난 재능과 성실로 보여줄 세계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지금 보여준 세계는 이러한 기교로 보여주기에는 너무 하찮은 것들이다. 이것은 시인을 탓해야 할지 시대를 탓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시대는 늘 있어온 것이니 시인 자신의 탓이라고 하는 것이 옳은 일이리라. 이 꼼꼼함과 성실함이 한자를 허용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4336. 12. 2.]
243□살풀이□홍희표, 문학과지성시인선 34, 문학과지성사, 1982 두 가지가 눈에 띈다. 풍자의 어조와 운율. 연을 나눈 시가 많은 가운데 각 연이 어떤 운율을 지향하는 것이 눈에 뚜렷이 드러난다. 운율 때문에 이미지가 잘 살아나지 않는데 이것은 운율이 그만큼 강하게 시를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변화는 제법 있지만 주로 2음보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 2음보는 상당히 무거운 음보이다. 무거운 음보에 실리는 세계는 스케일이 큰 것이어야 잘 어울린다. 그런데 이 음보의 무거움이 풍자와 야유로 연결되고 있어서 묘한 불협화음을 낸다. 세계를 보는 시각이 세계의 저편에 대한 탐구도 들어있지만 주로 이 세계를 구성하는 것들에 대한 풍자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운율보다도 이 풍자의 태도를 읽는 데 온 신경이 쏠린다. 태도와 운율이 서로 간극을 보인 채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보는 운율의 움직임이다. 한자는 풍자에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운율에는 쥐약이다.★★☆☆☆[4336. 12. 2.]
244□시간은 이미 더 높은 곳에서□장영수, 문학과지성시인선 28, 문학과지성사, 1983 어떻게 쓰면 시다운 것으로부터 멀어질까 하는 고민을 갖고 쓴 시들 같다. 시가 늘어지고 자신의 문법을 어그러뜨리는 것은 시인의 의도 때문이다. 그 의도가 그럴만한 어떤 이유를 일그러진 시 안에서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의 주제는 자신의 체험이고, 그 체험들이 일반화되기 어려운 것들도 있다. 시는 자신만의 체험에 의존하지만 그렇더라도 거기서 나온 시는 독자가 지닌 감성의 안테나를 건드려 반응하도록 해야 한다. 만들어 놓는 데에만 의미를 찾는 것은 들어와 살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는 집짓기와 같다. 그것이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건축사가들의 몫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들어와 사는 것은 현실이다. 그 현실이 어디인가를 이 시는 말하지 않고 있다. 이것을 말하려면 시의 출발점을 정해야 한다. 그것이 현실 속이냐 나의 관념 속이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시가 어디서 출발하는 갈래인가 하는 근원에 대해 고민해야 할 일이다. 시에 산문의 진술을 남기는 것은 잘 정돈된 침실에 흙 묻은 군화발로 들어서는 것과 같은 일이다. 한자는 문설주에 남은 흙덩이 같은 것이다.★☆☆☆☆[4336. 12. 2.]
245□이 시대의 아벨□고정희, 문학과지성시인선 30, 문학과지성사, 1983 중무장한 전사의 날렵한 몸매가 연상되는 시들이다. 적들도 분명하고 나의 목표도 분명하다. 공격을 하기 위해서 펼치는 전략도 좋고 전술도 좋다. 무엇보다도 힘찬 기세가 보기 좋다. 어떤 벽도 뚫어버릴 듯한 의지와 투지가 시 전체를 맹렬하게 불타오르게 하고 있다. 하고자 하는 말의 의지 때문에 시가 길어지는 흠이 있지만, 그런 흠조차도 작은 티끌로 만들 만큼 주제가 강렬하다. 강렬함은 형식을 뭉갠다. 그 과정에서 운율이 전면으로 떠오르는 양상이 이루어지는데 남도의 구성진 가락이 연상된다. 한 시대의 절실한 문제가 개인의 정서에 이렇게 깊이 드리울 수도 있다는 것이 놀랍다. 그런 세계관 속에 한자가 낑겨있다는 것은 참 이상하다. 근데 이 시집이 왜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왔을까?★★☆☆☆[4336. 12. 2.]
246□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마종기, 문학과지성시인선 55, 문학과지성사, 1986 시에서 외로움이 물씬 묻어난다. 이것이 시를 만든다. 잃어버리지 못하는 작은 꿈들이 어둠 속으로 사뿐히 날아올라 별빛을 낸다. 그러니 그 별빛은 그리움의 산화일 뿐, 산화에 어찌 형식이 필요하겠는가? 형식이 필요하다면, 그래서 끝내 시인으로 남고자 한다면 사물의 내면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자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4336. 12. 2.]
247□결혼식과 장례식□김영태, 문학과지성시인선 54, 문학과지성사, 1986 물렁한 고무푸대 안에 알 수 없는 짐승이 하나 들어있다. 그 짐승이 움직일 때마다 고무푸대의 가장자리가 이리로 몰렸다 저리로 몰렸다 한다. 그 고무푸대는 시인데 가장자리가 미술로 갔다가 연극으로 갔다가 쌍욕으로 갔다가 저잣거리로 갔다가 하늘로 솟았다가 뒷간으로 갔다가 어지럽다. 시가 이리로 쏠렸다가 저리로 쏠렸다가 하는 바람에 그 안에 든 짐승도 상처받고 시도 상처받는다. 고무푸대의 중심에 대해서 말하자면, 시의 영역을 넓히는 것과 갈래의 어중간한 곳에 서있는 것하고는 다른 것이다. 연극이 아니라면 연미복을 입었을 때는 언행도 연회 분위기로 맞추는 것이 좋을 듯하다. 연미복에 육두문자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 한자는 연미복에 묻은 흙자국 같다.★★☆☆☆[4336. 12. 2.]
248□프리지아 꽃을 들고□권혁진, 문학과지성시인선 65, 문학과지성사, 1987 시가 모든 장식을 버리고 짧아질 때는 무기로 쓰일 때다. 그때는 창칼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창칼은 극도로 짧기 때문에 급소를 정확히 찔러야 한다. 그리고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끝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자살행위이다. 급소를 정확히 찌르지 못 했다면 그것은 무기를 잘 못 고른 것이다. 이 시집에서는 급소가 아니라 허벅지를 찔렀다. 결국 형식을 잘못 선택한 것이다. 이렇게 짧을 경우 그 짧은 시 속에 들어있는 것은, 그것이 형식이든 내용이든 독자의 눈에 닿는 순간 보석처럼 빛을 발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 있는 시들은 몇 편을 빼놓고는 흐리멍덩하다. 인식의 단련이 덜 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방법을 잘못 선택한 경우가 되겠다. 그래서 시의 소재를 나열해놓은 꼴이 되었다. 시를 쓰는 방법은 대개 살을 붙이는 경우이지만, 이 경우는 살을 빼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시집에 실린 모양새를 보면 반대로 나아간 것이다. 한자 역시 칼날을 무디게 한다.★☆☆☆☆[4336. 12. 2.]
249□지리산의 봄□고정희, 문학과지성시인선 64, 문학과지성사, 1987 신들린 무당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신의 목소리가 된다. 마치 신들린 무당처럼 이 시인의 손끝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은 관념어, 추상어를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시로 쏟아져 나온다. 이것은 정신의 승리 때문이다. 정신이 옹골차게 빛나는 사람한테는 언어가 조아리며 다가간다. 다가가서는 순한 강아지처럼 그의 지휘를 받는다. 이상한 일이다.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난다. 김남주나 김수영 같은 경우가 그렇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그런 시를 본다. 이미지들도 그렇고 논리의 비약이나 지루한 말들도 그렇고 모두 위태위태한데, 그 위태위태함을 넘어서 묘하게 시로 살아난다. 이것은 정신이 형식을 끌고 가기 때문이다. 작두날 위에 올라선 무당에게는 모든 존재를 한 몸짓으로 휘어 감는 이상한 힘이 있는 법이다. 이 시집에서는 불굴의 의지가 불타오르고 있는데, 그 중간 중간에 이상하게도 죽음의 그림자가 물씬 드리워져있다. 관념으로 표상된 죽음이 아니라 삶을 밀어 올린 죽음의 실제이다. 곳곳에서 옆구리 터지듯이 설명이 맨살로 드러나고 있지만, 한자까지 깔끔하게 청산한 세계의 박동이 우렁차다.★★★☆☆[4336. 12. 2.]
250□물구나무서기□최석하, 문학과지성시인선 63, 문학과지성사, 1987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이 우선 아주 독특하다. 인식이 그런 정도로 남다른 특색을 띠면 필연코 그런 특이성으로 인해 기존의 시 형식을 깨고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내게 된다. 그런데 이 시집들은 너무나 충실하게 기존의 시 형식을 고수하려고 하고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인식의 특이성은 세계에 대해 할 말이 많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할말이 많은 바를 기존의 시 형식에 담으려고 하면 반드시 이야기를 동반하게 되고 시가 그 때문에 길어진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식의 새로움이 끝까지 지탱되면 문제가 커지지 않지만 새로움의 강도가 점차 떨어지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넋두리로 변하는 것이다. 이 시집의 후반부로 갈수록 이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설명과 이야기가 시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어서는 시가 성공할 수 없다. 따라서 이야기를 하되 산문의 어법이 갖는 무거운 발걸음을 버리고 시의 산뜻한 발걸음을 유지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 이런 류의 시를 살리는 대안일 것이다. 한자는 발걸음조차 무겁다.★★☆☆☆[4336.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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