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문학
나의카테고리 : 名詩 공화국
(랑송하기 좋은 시)
그대는 새날에 살아라 / 문태준
새날이 왔다 샘물 같은 새날이 왔으므로
그대는 하루의 마음을 또 허락받았다
그대는 돌아보는 사람이 되어라
비가 연못과 작은 돌과 우는 사람을 위로하듯이
꽃이 담장 아래와 언덕과 사랑을 밝히듯이
눈이 댓잎과 다리와 지붕을 덮는 이불이 되듯이
그대는 모두에게 공평하여라
둥근 과일과 쌀과 생선을 나누라
초승달처럼 공손하라
수행자들처럼 용서하라
그대의 말이 의자가 되게 하라
가난한 사람에겐 내일을 선물하라
어머니가 어린 누이를 업고 가듯이
그대는 하나의 생명을 업고 가라
미소가 주렁주렁 열리는 얼굴로 보아라
강물이 흘러가듯이 우연하게 하라
그래도 남는 마음이 있거든
혹여 가 닿지 않은 곳이 있을까
그 마음을 거울에게 물어보라
그대는 이 마음으로 새날에 살아라
그대는 이 일이 삼백예순날의 일이 되어라
------------------------------------
설날 아침에 / 김남주
눈이 내린다 싸락눈
소록소록 밤새도록 내린다
뿌리뽑혀 이제는
바싹 마른 댓잎 위에도 내리고
허물어진 장독대
금이 가고 이빨 빠진 옹기그릇에도 내리고
소 잃고 주저앉은 외양간에도 내린다
더러는 마른자리 골라 눈은
떡가루처럼 하얗게 쌓이기도 하고
닭이 울고 날이 새고
설날 아침이다
새해 새아침이라 그런지
까치도 한두 마리 잊지 않고 찾아와
대추나무 위에서 운다
까치야 까치야 뭣하러 왔냐
때때옷도 색동저고리도 없는 이 마을에
이제 우리집에는 너를 반겨줄 고사리손도 없고
너를 맞아 재롱 피울 강아지도 없단다
좋은 소식 가지고 왔거들랑 까치야
돈이며 명예 같은 것은
그런 것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나 죄다 주고
나이 마흔에 시집올 처녀를 구하지 못하는
우리 아우 덕종이한테는
행여 주눅이 들지 않도록
사랑의 노래나 하나 남겨두고 가렴
-----------------------------------------
(시조)
백자부 / 김상옥
찬서리 눈보라에 절개 외려 푸르르고
바람이 절로 이는 소나무 굽은 가지
이제 막 백학(白鶴) 한 쌍이 앉아 깃을 접는다.
드높은 부연(附椽) 끝에 풍경 소리 들리던 날
몹사리 기다리던 그린 임이 오셨을 제
꽃 아래 빚은 그 술을 여기 담아 오도다.
갸우숙 바위 틈에 불로초 돋아나고
채운(彩雲) 비껴 날고 시냇물도 흐르는데
아직도 사슴 한 마리 숲을 뛰어 드노다.
불 속에 구워 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결
티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지다.
흙 속에 잃은 그 날은 이리 순박(淳朴)하도다.
----------------------------------------
새해 / 피천득
새해는 새로워라
아침같이 새로워라
너 나무들 가지를 펴며
하늘로 향하여 서다
봄비 꽃을 적시고
불을 뿜는 팔월의 태양
거센 한 해의 풍우를 이겨
또 하나의 연륜이 늘리라
하늘을 향한 나무들
뿌리는 땅 깊이 박고
새해는 새로워라
아침같이 새로워라
-------------------------------
해 / 박두진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맑갛게 씻은 얼굴 고은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 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 자리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
사랑해야 하는 이유 / 문정희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세상의 강물을 나눠 마시고
세상의 채소를 나누어 먹고
똑같은 해와 달 아래
똑같은 주름을 만들고
산다는 것이라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세상의 강가에서 똑같이
시간의 돌멩이를 던지며
운다는 것이라네
바람에 나뒹굴다가
서로 누군지도 모르는
나뭇잎이나
쇠똥구리 같은 것으로
똑같이 흩어지는 것이라네 !
-----------------------------------
오늘의 약속 / 나태주
덩치 큰 이야기, 무거운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조그만 이야기, 가벼운 이야기만 하기로 해요.
아침에 일어나 낯선 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든지
길을 가다 담장 너머 아이들 떠들며 노는 소리가 들려 잠시 발을 멈췄다든지
매미소리가 하늘 속으로 강물을 만들며 흘러가는 것을 문득 느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만 하기로 해요.
남의 이야기, 세상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우리들의 이야기, 서로의 이야기만 하기로 해요.
지난밤에 쉽게 잠이 들지 않아 많이 애를 먹었다든지
하루 종일 보고픈 마음이 떠나지 않아 가슴이 뻐근했다든지
모처럼 개인 밤하늘 사이로 별 하나 찾아내어 숨겨놓은 소원을 빌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만 하기로 해요.
실은 우리들 이야기만 하기에도 시간이 많지 않은 걸 우리는 잘 알아요.
그래요, 우리 멀리 떨어져 살면서도
오래 헤어져 살면서도 스스로
행복해지기로 해요. 그게 오늘의 약속이에요.
-------------------------------------------------
고고(孤高) / 김종길
북한산(北漢山)이
다시 그 높이를 회복하려면
다음 겨울까지는 기다려야만 한다.
밤 사이 눈이 내린,
그것도 백운대(白雲臺)나 인수봉(仁壽峰) 같은
높은 봉우리만이 옅은 화장(化粧)을 하듯
가볍게 눈을 쓰고
왼 산은 차가운 수묵(水墨)으로 젖어 있는,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까지는 기다려야만 한다.
신록(新綠)이나 단풍(丹楓),
골짜기를 피어오르는 안개로는,
눈이래도 왼 산을 뒤덮는 적설(積雪)로는 드러나지 않는,
심지어는 장밋(薔薇)빛 햇살이 와 닿기만 해도 변질(變質)하는,
그 고고(孤高)한 높이를 회복하려면
백운대(白雲臺)와 인수봉(仁壽峰)만이 가볍게 눈을 쓰는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까지는
기다려야만 한다.
--------------------------------------
겨울행 / 이근배
1
대낮의 풍설은 나를 취하게 한다
나는 정처없다
산이거나 들이거나 나는 비틀걸음으로 떠다닌다
쏟아지는 눈발이 앞을 가린다
눈발 속에서 초가집 한 채가 떠오른다
아궁이 앞에서 생솔을
때시는 어머니
2
어머니
눈이 많이 내린 이 겨울
나는 고향엘 가고 싶습니다
그곳에 가서 다시 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름날 당신의 적삼에 배이던 땀과
등잔불을 끈 어둠 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타고 내리던
그 눈물을 보고 싶습니다
나는 술취한 듯 눈길을 갑니다
설해목 쓰러진 자리 생솔 가지를 꺽던 눈밭의
당신의 언발이 짚어가던 발자국이 남은
그 땅을 찾아서 갑니다
헌 누더기 옷으로도 추위를 못 가리시던 어머니
연기 속에 눈 못 뜨고 때시던 생솔의, 타는 불꽃의, 저녁나절의
모습이 자꾸 떠올려지는
눈이 많이 내린 이 겨울
나는 자꾸 취해서 비틀거립니다.
-------------------------------------------
백련사 동백숲길에서 / 고재종
누이야, 네 초롱한 말처럼
네 딛는 발자국마다에
시방 동백꽃 송이송이 벙그는가
시린 바람에 네 볼은
이미 붉어 있구나
누이야, 내 죄 깊은 생각으로
내 딛는 발자국마다엔
동백꽃 모감모감 통째로 지는가
검푸르게 얼어붙은 동백잎은
시방 날 쇠리쇠리 후리는구나
누이야, 앞바다는 해종일
해조음으로 울어대고
그러나 마음속 서러운 것을
지상의 어떤 꽃부리와도
결코 바꾸지 않겠다는 너인가
그리하여 동박새는
동박새 소리로 울어대고
그러나 어리석게도 애진 마음을
바람으로든 은물결로든
그예 씻어 보겠다는 나인가
이윽고 저렇게 저렇게
절에선 저녁종을 울려대면
너와 나는 쇠든 영혼 일깨워선
서로의 無明무명을 들여다보고
동백꽃은 피고 지는가
동백꽃은 여전히 피고 지고
누이야, 그러면 너와 나는
수천 수만 동백꽃 등을 밝히고
이 저녁, 이 뜨건 상처의 길을
한번쯤 걸어 보긴 걸어 볼 참인가
2002년 제16회 소월시문학상 수상작
---------------------------------------------
만들 수만 있다면 /도종환
만들 수만 있다면
아름다운 기억만을 만들며 삽시다
남길 수만 있다면
부끄럽지 않은 기억만을 남기며 삽시다
가슴이 성에 낀 듯 시리고 외로웠던 뒤에도
당신은 차고 깨끗했습니다
무참히 짓밟히고 으깨어진 뒤에도
당신은 오히려 당당했습니다
사나운 바람 속에서 풀잎처럼 쓰러졌다가도
우두둑 우두둑 다시 일어섰습니다
꽃 피던 시절의 짧은 기쁨보다
꽃 지고 서리 내린 뒤의 오랜 황량함 속에서
당신과 나는 가만히 손을 잡고 마주서서
적막한 한세상을 살았습니다
돌아서 뉘우치지 맙시다
밤이 가고 새벽이 온 뒤에도 후회하지 맙시다
만들 수만 있다면
아름다운 기억만을 만들며 삽시다
---------------------------------------------------
나 당신을 그렇게 사랑합니다 / 한 용운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사랑한다는 말을 안 합니다.
아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 사랑의 진실입니다.
잊어버려야 하겠다는 말은
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정말 잊고 싶을 때는 말이 없습니다.
헤어질 때 돌아보지 않는 것은
너무 헤어지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웃는 것은
그만큼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떠날 때 울면 잊지 못하는 증거요
뛰다가 가로등에 기대어 울면
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잠시라도 같이 있음을 기뻐하고
애처롭기까지 만한 사랑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주기만 하는 사랑이라 지치지 말고
더 많이 줄 수 없음을 아파하고
남과 함께 즐거워한다고 질투하지 않고
그의 기쁨이라 여겨 함께 기뻐할 줄 알고
깨끗한 사랑으로 오래 기억할 수 있는
나 당신을 그렇게 사랑합니다
-------------------------------------
인연 / 최영철
오백년 여기 서 있는 동안
한번은 당신 샛별로 오고
한번은 당신 소나기로 오고
그때마다 가시는 길 바라보느라
이렇게 많은 가지를 뻗었답니다
오백년 여기 서 있는 동안
한번은 당신 나그네로 오고
한번은 당신 남의 임으로 오고
그때마다 아픔을 숨기느라
이렇게 많은 옹이를 남겼답니다
오늘 연초록 잎벌레로 오신 당신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이렇게 많은 잎을 피웠답니다
---------------------------------
설야(雪夜) /김광균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의 호롱불 여위어가며
서글픈 옛 자췬양 흰 눈이 나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나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나려 나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우에 고이 서리다
----------------------------------------
들길에 서서 / 신석정
푸른 산이 흰 구름을 지니고 살 듯
내 머리 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하고 산삼(山森)처럼
두 팔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냐.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거니…….
--------------------------------------------
겨울 내소사 / 김문주
세상에 수런거리는 것들은
이곳에 와서 소리를 낮추는구나, 변산
변방으로 밀려가다 잠적하는 지도들이
일몰의 광경 앞에 정처없는 때
눈내린 오전의 내소사 전나무 숲길은 아름답다
전부를 드러내지 않고도 풍경이 되고 어느새
동행이 되는 길의 지혜
작은 꺾임들로 인해 그윽해지고 틀어앉아
더 깊어진 일은
안과 밖을 나누지 않고도 길이 된다
나무들은 때때로 가지들어 눈뭉치를 털어놓는다
숲의 한쪽 끝에 가지런히 모여앉은 장광같은 부도탑들
부드러운 육체들이 햇빛의 소란함을 안치고 있다.
봉래루 설선당 해우소 산사의 마당에는
천년의 할아버지 당산과 요사까지
저마다의 높낮이로 중심을 나누어 가진 집채들
부푸는 고요
몸으로 스며드는 시간의 숨들
숨길이 되고 집채 사이를 오가다, 아
바람의 꽃밭, 열림과 닫힘의 자리에
바래고 문드러진 수척한 얼굴들
슬픔도 연민도 모두 비워낸 소슬무늬꽃문
난만한 열망들이 마른꽃으로 넘는 저, 장엄한 경계
대웅보전 앞마당에 발자국들 질척거리고
진창을 매만지는 부지런한 햇빛의 손들이여
내소사 환한 고요 속에 오래도록 읽는다
서해 바람의 이 메마른 문장을
---------------------------------------------
너의 하늘을 보아 / 詩 박 노해
네가 자꾸 쓰러지는 것은
네가 꼭 이룰 것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지금 길을 잃어버린 것은
네가 가야만 할 길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다시 울며 가는 것은
네가 꽃피어 낼 것이 있기 때문이야
힘들고 앞이 안보일 때는
너의 하늘을 보아
네가 하늘처럼 생각하는
너를 하늘처럼 바라보는
너무 힘들어 눈물이 흐를 때는
가만히
네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닿는
너의 하늘을 보아
--------------------------------
내 마음을 아실 이 / 김영랑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 같이 아실 이 그래도 어데나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과 속임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밤 고이 맺는 이슬 같은 보람을 보밴 듯 감추었다 내어드리지.
아!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 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맑은 옥돌에 불이 달어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 |
편 지
황 금 찬
소리 없이 날아온
편지
사연은 잠이 들고
추억은 눈 떴는데
아득한 수평선
먼 고향일네.
하이얀 손길
피어오르던
아침 장미
긴 사연에 돌아서고 돌아오지 않는
사람아
아지랑이
바다 위에
천년의 꽃잎 지고 있는가
오늘 다시 지고 있는가
본 웰리암스의
화상곡 (로망스)
날아오르는 종달새
보리밭 이랑이랑
파란히 잠든 5월의 하늘빛
눈 뜨는가
다시 눈 뜨는가
추억의 사람일따
어디가야 너를 만날까
눈뜨고 기다림이
아득한 수미산
이틀이나 걸려
쓴 편지
보낼 곳이 없구나.
추억 안의 사람아.
내가 사랑하는 서울
황 금 찬
누가 묻거든 말하리라
서울은
나의 조국의 가슴이라고
“서울이 대단히 아름답다고 들었습니다.”
85년 그리스에서
폴란드 시인이 말했다.
아름답습니다.
우리들이 자랑할 수 있는 것 중에서
내가 가장 자랑할 수 있는 곳이
서울입니다.
“연잎 같습니다. 서울이”
서울은 계절의 옷을 입고
구름은 사랑의 집이 됩니다.
연인들의 대화는
한강에 꽃잎처럼 떠 있고
별들이 잠든 강심에서
맑은 인정을 낚아 올리는 곳이지요.
옛날에도
이 한강에 사랑의 이야기가 있었다네.
고구려의‘사록’이라는 청년과
신라의‘꽃녀’라는 처녀가
강을 사이로 사랑하게 되었다네.
강 이쪽과 강 저쪽이지만
다 같이 서울의 땅
오동잎을 엮어 배로 띄우고
사랑을 싣고 세월을 싣고
어느 봄날 그들은 두 마리의 새가 되어
날아가고 말았다네.
서울로 오라.
묻거든 대답하라
서울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라고……
새해 첫날에
최 은 하
동녘이 밝아옵니다.
새해 아침이 열려옵니다.
새로운 하늘이 펼쳐집니다.
귀하기 만한 저마다 출발의 마당입니다.
이 아침엔 동해 수평선 너머
눈부시게 떠오르는 해를 맞습니다.
어제까지의 온갖 어둠 살라버리고
넘실대는 바다 물결 위로
태초의 솟아오름 그대로
한아름의 햇덩이가 솟구쳐 오릅니다.
이 아침엔 정결히 손발을 씻고
두 손 모은 기도자리로부터
저마다 밝은 앞길만 바라보게 하소서.
지나가버린 이야긴 돌아보지 않게 하소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한마디
곱고 힘찬 한마디 고르고 골라
새겨 간직하며 한 해를 살게 하소서.
뜨거운 소망으로 넘쳐나게 하소서.
우리 가까이 사소한 사랑법을 깨우치게 하소서.
안팎으로 모두가 제 탓임을 알게 하소서.
우선 저만을 챙기는 아집을 버리고
하찮은 이웃을 찾아 함께 하게 하소서.
짜고 매운 눈물의 기도를 익히게 하소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눈 뜨고 숨쉬며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하루하루가 되게 하소서.
새해 아침을 펼치는 종소리
종소리 따라 하늘과 땅이 밝아옵니다.
누구에게나 소중하기만한 생애의 한가운데
축복의 은총이 내리는 시간입니다.
이 아침엔 동해 수평선 너머
눈부시게 떠오르는 해를 맞습니다.
넘실대는 바다 물결 위로
한아름의 햇덩이가 솟구쳐 오릅니다.
거기 우리네도 따라 마주하고 솟아오릅니다.
간밤 불구경
최 은 하
엊저녁부터 줄곧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불구경하느라 꼬박 밤을 밝혔다.
타오르는 불은 소릴 내고 치솟아 불꽃을 날리고
외우침인지, 탄식인지 꺾어넘기지 못하는
사람의 목소리도 불길 한가운데서
위로 위로만 뻗치어 솟구쳐 오르다가
사라지는 모습은 어둠자락이었다.
저마다 활기찬 승천의 용솟음은
제 무게 떨쳐버릴 수 없는 지상에
휘황한 묵언의 들어올림일까.
자리 바꿔 피우던 수다 따위가
모양새 없이 스러졌다.
불더미는 반공의 먹구름을 뚫고
별자리로 오르려 휩싸도는 몸짓
불의 품 안에서 잠들지 못하고
신새벽을 맞았다.
살아있는 불꽃들의 기침 소리
아침이 오는 언덕에서
불길은 꺼지지 않고
각기 다른 시늉으로 이글거렸다.
여기선 누구나 무엇이나 불의 주인이었다.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ㆍ1
黃 松 文
김소월 시인의 시작품 생산지
진달래 불타던 영변의 약산이
핵시설 총본산이 될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진달래꽃 만발하여 불이 붙던
관서팔경 경승지가
핵시설의 기지로 돌변할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김일성이 13세 때
조선공산당을 조직했던 박헌영은 25세
그로부터 10년 세월이 흐른 후
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고
김일성이 박헌영을 처형할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박헌영이 감금되어 고문 받던 곳
평안북도 철산이
장거리 미사일을 쏘아올린
동창리 발사장이 될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진달래꽃이 만발하게 불붙던
영변에 핵 공장이 들어서고
박헌영 한맺힌 철산 동창리에
핵 발사장이 들어설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ㆍ2
黃 松 文
신석정 시인의 촛불은 어디가고
명동 데모꾼 괴물들이 득세할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돈 없으면 죄가 되고
돈 있으면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나라 배가 구멍이 났는데도
진흙 밭에 개싸움질만 한다는 것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얼굴 두껍고 속 검은 흑룡(黑龍)이
사드 반대로 대한민국을 겁박할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한국의 자위권에 왜 간섭을 하는지
어찌하여 감 놔라 배 놔라 하는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자유는 방종으로 무질서로 바뀌고
평화의 비둘기가 휴지처럼 구겨질 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가면을 벗고
―목욕탕에서
김 년 균
알몸은 아름답다
먼지와 때를 씻은 몸은 아름답다.
겉치레를 버린 몸은 아름답다.
곱게 여문 햇살이 눈앞에 쏟아진다.
하늘을 나는 깃털이 몸 밖에 돋아난다.
세상 풍파 뛰어넘을 용기가 솟구친다.
몸에 쌓이는 온갖 장식,
양말과 팬티와 셔츠와 옷을 벗고
목걸이 귀걸이 팔걸이 머리빗을 벗고
손목시계와 안경과 목도리와 모자를 벗고
어깨에 걸쳐 둔 허례허식을 벗고,
찌든 먼지와 때와 절벽에 놓인 허영과 욕심과
이웃 사람들이 놓고 간 음탕한 생각까지,
물속에 들어가 말끔히 씻고 나오면
얼마나 기쁨이 샘솟고 출렁이랴.
물속에서 나오는 사람은 아름답다.
몸 씻고 마음 씻은 사람은 아름답다.
껍데기를 벗은 사람은 아름답다.
너는 제발 그렇게 살아라.
몹쓸 것은 버리고, 썩은 것은 땅에 묻고,
그러면 향기로운 꽃이 될 수 있으니.
하늘까지 오르는 별이 될 수 있으니.
시간의 유희
김 년 균
단 일초도 아닌 듯한데
문이 닫히고 열리더니
일은 벌써 끝났다. 한 생애도 끝났다.
몇 천 광년도 뒤돌아보면,
불과 몇 년쯤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즐겁고 신기한 시간의 유희.
과연 이것이 관행인가, 착각인가.
그래도 용케 한 치가 다르지 않게 운행되는
우주의 질서를 지켜보노라면,
살아가는 이의 모습이 더없이 초라하다.
살아 있는 목숨 또한 애처롭기 그지없다.
이렇게 짧은 순간인데도, 우스워라,
어제는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할아버지가
오늘은 또 아들이 손자가 꿈꾸며 일어나
길가에 높다란 팻말을 꽂고,
잘 살았노라, 또는 행복했노라,
지껄이며 큰소리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그 순간도 역겨워서 못 견디며,
세상 밖으로 떨어져 내린다.
단 일초도 아닌 듯한 그 사이에
사람들은 온갖 소란을 떨며,
발버둥 치다 별 수 없이 주저앉는다.
여울목 안개
―백담사
박 정 희
산자락 끌어내린
백담사 우유빛 새벽안개
풀섶에 찾아들면
물 풀빛 숨결
끝없이 풀어내
얼룩진 시간 채우고
석양빛 머리에 인
여울목 따라
수묵빛 그리운 안개꽃
은비늘 번득인다.
영랑생가에서
―사진
박 정 희
호박넝쿨 기왓골 타넘고
앞마당 새암 뚜껑 위
깨진 살구 하나 뒹군다.
주인을 기다리던
사랑채 아궁이 앞 낡은 풍로
바람도 그냥 지나가고
모란은 봉오리 꽃빛 머물러있다.
누굴 기다리는 것일까
처마 밑 까치집에 봄이 매달렸다
우묵한 가슴 하나만 남았다.
찰칵
한 생의 문이 닫혔다
이른 봄날에
정 명 숙
산 아래 바람은
물 머금은 나뭇가지 마디마디에
실눈을 틔운다.
햇살 따라 오솔길 걷노라니
누군가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아
귀를 세우고 살펴보니
산까마귀 울어 제치고
양지 바른 길섶에
갓 돋아난 새싹 하나
내려쬐는 햇살 받아
소리 없이 흔들린다.
돌아보고 싶지 않은
지난 겨울 이야기는
다져밟아 묻어두기로 하자.
계곡 물소리 밟으며
산허리 돌아서니
연두빛 향기가 눈 시리게 반짝인다.
꿈자리에서
정 명 숙
어젯밤 강가에 서있었다
저 멀리서 나룻배는
나를 향해 다가왔다.
어머니의 어머니는
내 몸을 강가 풀숲으로 밀어내시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손짓하셨다.
선장은
기다리고 있던 몇 사람을
불러 태우고
어떠한 말이나 표정 없이
배는 떠나갔다.
아침이 오자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일상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다.
오늘도
낮과 밤을 오가는
꿈 속인가보다.
사자반신사터
민 미 옥
주춧돌은 가슴에서 살고
햇살은 주춧돌을 다듬는다.
땀 흘리는 햇살을 불러다가
절 짓는 소리.....
대웅전은 가슴에서 살고
풍경소리는 하늘에 집을 짓는다.
밀어(密語)
민 미 옥
꽃상여가
조화를 날리면서 넘던 고갯길
아스라한 산허리 휘어
꼬부랑길을 이루더니
노을도 목을 길게 늘여 빼고
깊어진 하늘과 밀어를 나눈다.
그늘진 곳에 이름 없는 묘지들
영혼이 빠져나간 몸들
태양의 계절에는
묘지의 잡초들과 함께 산다.
사랑의 자물쇠
김 복 희
서울 타워 옆에는
수많은 사랑의 자물쇠를
걸어 놓았다.
그 언약은 담장이 되고
예쁜 트리가 되어 커플을 꿈꾼다.
정월 대보름날
간절한 마음을 달에게 보내던
그리움이 살아난다.
사랑의 방식은 변해도
풍물놀이는 여전히 이어지는 남산
자물쇠가 꿈과 사랑을 영원히
이어줄 수 있도록
밝은 달빛 아래서 두 손을 모은다.
왕벚꽃
김 복 희
상왕산 소나무 숲길을 가쁘게 오르면
고즈넉한 개심사가 왕벚꽃에 묻혀있다.
모두들 법당 안에 들어설 생각은 하지 않고
꽃송이만 바라보다 사진 속에 담긴다.
소란스러운 마음을 잠재우려고
기꺼이 속세를 떠나온 비구니스님
꽃등을 달아놓은 듯 탐스러운 불꽃 앞에
양 볼이 붉어지며 시린 기억 더듬는가.
법당에 다소곳이 번뇌를 털어내랴
눈결은 자꾸만 왕벚꽃에 머무르랴
허정의 달을 바라보다가
뜨거운 꽃 한 송이 꺾고야 말았다.
매생이 국
김 상 화
명주실에 청물 들인
비릿한 바다 냄새
보드라운 실오라기 한 뭉치
냄비 속에서
푸른 바다가 들끓어
저녁상차림에 파도가 내게 밀려온다.
한 그릇의 파도
물결 속에 휘말려
허기진 뱃속을 채우며
매끄럽게 넘어가는
푸른 꿈이 출렁이며
온 몸 혈관 속에서
신선한 파도 속에 빠져든다.
춘추벗꽃ㆍ2
김 상 화
깨달음의 고행 길
활활 타오르는 단풍잎 사이
고뇌 속에 핀 분홍빛 꽃송이
부처님의 자비의 미소인가
희망의 끈을 잡으며
법열의 꿈을 이루고자
웃음꽃으로 피어나는가.
마음 비운 자리에 곱게 핀
깨달음의 진리 앞에 합장하며
윤회로윤회로 피어나는 꽃송이
따뜻한 눈빛, 하늘 우러러
합장하고 또 합장을 한다.
자화상
서 순 보
비가 오면 빗물이
흘러가는 구름덩이에 밀리고
하늘이 높아지고
긴 바람이 불어오면
떨어진 검은 낙엽이랑
참을 수 없는 외로움에 밀리고
떠내려가고 뒹굴고
줄서다 코앞에 밀리고
내 인생은 바람이 절반을
그러면서 나는 여기까지 왔다.
빨간 사과를 좋아하는 여인을 사랑하고
굽은 허리에 돌팔매 맞아가며
악쓰고 떠들고
외롭고 그립고 헤어지고
더 이상의 아픔이 상처들이 슬픔이
허황과 영욕들이
밀려가고 밀리고
이제는 득도得道하여
다 버리고
당당하게 그 길을 간다.
그 섬이 되고 싶다
서 순 보
세상에는 섬이 많다
산에도 강에도
사람에게도 마음에게도
나는 그 섬이 되고 싶다.
구름을 뚫고 내려오는 빗방울이
봄날에 솟아나는
이름 모를 풀잎들이
가을을 알리는 흰 바람들이
떨어지는 별똥들이
잊혀진 여인들이
아무 때나 쉬어 가는
그 섬이 되고 싶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