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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1000권 읽기 49
2015년 02월 11일 15시 32분  조회:2023  추천:0  작성자: 죽림

 

481□지도에 없는 섬 하나를 안다□임영조, 민음의 시 94, 민음사, 2000

  이 시인의 시는 마치 시의 교과서를 보는 듯하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관계를 50:50으로 맞추어서 보조관념이 제시하는 영역 안에서 완벽하게 원관념을 전달하는 그런 방법으로 시를 쓴다. 시가 교과서 같다는 것은 두 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방법론이 확실하여 실패할 확률이 거의 없는 안정된 시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보조관념이 주는 한계 때문에 자유시가 주는 형식의 자유를 누리기 어렵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그럴 듯해도 정말 큰 시인이 되려면 이 원칙론에서 균형이라도 좀 허물어야 한다.

  그런데 이 시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을 지킨다. 마치 넥타이를 단정히 맨 교장 선생님 같은 태도로. 그런데 이 시집 안의 시들은 그런 원칙을 잘 지키고 있지만, 그 밖으로 나가려는 충동이 강하게 나타났다. 그것은 보조관념만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세계를 만났기 때문인데, 그 세계는 바로 죽음의 세계이다. 죽음은 어떤 보조관념으로도 전달이 잘 안 된다. 그래서 직접 서술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원칙론 바깥으로 나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시가 좀 늘어진 듯한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앞서 보여준 원칙론의 테두리를 많이 벗어난 것도 아니어서 여전히 넥타이를 맨 교장 선생님임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하필 죽음이란 말인가? 첫 시는 절창이다. 죽음을 피부로 느끼지 않고서는 쓰기 어려운 시이다. 이런 분위기가 시집 뒤쪽까지 짙게 드리워있다.★★★☆☆[4337. 2. 18.]

 

482□비천한 빠름이여□한영옥, 문학동네 시집 59, 문학동네, 2001

  주제는 분명하게 잡혔는데, 시는 어느 정도 어려워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내용을 잘 읽어보면 쉽게 얘기할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인데, 이상하게도 말들이 많이 꼬여있다. 이것은 쉽게 얘기하면 시가 맥없는 것이 되고 만다는 생각 때문이거나, 그 상황에 맞는 명징한 이미지를 잡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따라서 주제를 정했으면 그것과 관련이 있는 이미지들이 나타날 때까지 집요하게 기다렸다가 쓰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지 않으면 재미도 없는 얘기를 중언부언 계속 반복하게 된다. 시 쓰는 일은 말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내용을 명징한 이미지를 통하여 쉽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일이다. 어려운 말은 철학 책 한두 권만 읽으면 충분히 체험할 수 있다. 때로 시에서 이미지가 어려울 수 있지만, 내용의 진술이 어려워서는 안 된다. 한자는 군더더기이다.★☆☆☆☆[4337. 2. 18.]

 

483□그의 눈빛이 궁금하다□한정원, 푸른 시떼 7, 시와시학사, 2003

  이미지 묘사력도 뛰어나고 관찰에서 의미를 발라내어 살을 입히는 능력도 뛰어나다. 언어감각도 나무랄 데 없다. 그런데 방법상의 일관성을 잃어버려서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있다. 즉 많은 시들이 상황의 제시를 통해서 독자가 의미를 파악하도록 하는 수법을 쓰고 있는데, 굳이 자신의 감정을 토로함으로써 이런 효과를 반감시키고 있는 부분이 눈에 띤다. 시들이 매끄럽게 잘 빚어졌는데도 이 불협화음 때문에 시집 전체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다. 그리고 이미지 묘사에 너무 성실하다. 이미지는 꼭 그렇게 지켜야만 하는 어떤 의미를 따라갈 필요는 없다.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 실으면 된다. 그렇게 하려면 이미지에 대해서 그것이 뻗어 가는 방향을 좀 자유롭게 풀어놓을 필요가 있다.★★☆☆☆[4337. 2. 18.]

 

484□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허만하, 솔, 2002

  아주 특이한 시집이다. 거의 인식으로만 이루어진 시이다. 이것은 시인의 시에 대한 규정 때문이다. ‘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풍경에 대한 추억이다.’라는 것이 시인의 규정인데, 물론 착각일 따름이다. 그건 시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편견과 오해가 아주 특이한 시세계를 만들었으니, 시를 쓰는 사람이 시의 보편성을 모를 리 없을 것으로 보아 아마도 다른 시들과 차별을 두기 위한 계산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거의 배제하고 자연물을 보는 시각과 비유만을 드러낸 시들이다. 그런데 그 인식이 아주 독특하고 다른 사람들이 흉내내기 어려운 방법으로 되어있다. 특히 소재가 물과 가을, 고개, 나무 같이 몇 가지로 극히 제한되었는데도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은 정말 놀라울 만큼 다양하여, 시인의 상상력과 사고가 어디까지 뻗어갈 수 있는가 하는 한 극점을 보여주는 시들이다. 시가 특이하다 특이하다 하지만 이처럼 특이할까? 소설의 박상륭이 특이하듯이 시에서는 이 시인이 그런 자리를 차지할 듯하다.★★★★☆[4337. 2. 19.]

 

485□영혼은 오래 되었으나□허수경, 창비시선 203, 창작과비평사, 2001

  자신만이 알고 있는 한 세계를 미리 설정해놓은 채 흐르는 의식의 발동에 상상을 맡기고서 떠오르는 대로 그리는 것은 거의 실험에 가깝고, 그것을 특별히 이해해야 할 어떤 의무가 없는 사람에게 그런 방법은 때로 폭력이나 게으름으로 비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후진국에서는 그것이 틀림없이 나태나 불성실로 비친다. 말하자면 모자이크 방식으로 마음이 상태를 드러내서 독자들이 그것을 머릿속에서 재구성해주기를 기대하겠다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그려낸 것을 독자들이 읽든 말든 개의치 않겠다는 결심은 가상하나 전제된 관념이 너무 강렬하면 독자에게 스며드는 확산력이 감소한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내가 이런 세계를 보고 노래하니 알아서 연결시키라는 투는 결코 칭찬 받을 일이 못 된다. 더구나 앞의 시집과 확연히 다른 세계관을 드러내면서 그런 태도를 보이면 독자는 틀림없이 우롱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게다가 누군가한테서 낯익은 바이러스가 시의 형식에 스며있음을 확인한다. 비난할 일은 아니로되 칭찬 받을 일도 못된다. 한자가 외롭다.★★☆☆☆[4337. 2. 19.]

 

486□너무 아름다운 병□함성호, 문학과지성 시인선 259, 문학과지성사, 2001

  이 시인은, 내가 아는 모든 지식이 구원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그러기에 그 어떤 해답을 찾기 위해서 자신의 의식과 사고를 첨단으로 몰고 가면서 그곳을 향해 가는 자신에게 질문을 하는 방식인 것이다. 그리고 철학이라면 그건 허무맹랑한 질문이지만 바로 시이기 때문에 그 질문이 유효한 것이고, 그것은 답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시인의 구원은 끝내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 참에서 필요한 것은 아이스맨이다.★★☆☆☆[4337. 2. 19.]

 

487□두고 온 시□고은, 창비시선 213, 창작과비평사, 2002

  격정의 시학이랄까? 격앙된 감정이 사그라드니 고은 고유의 시작법이 드러난다. 감정이 언어를 밀고 가는 방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행시에서도 자신의 생각만이 또렷이 빛난다. 눈이 현혹되는 곳에 가서도 장소만 빌린 것이지 자신의 이야기로 모든 배경까지 채울 수 있으니, 그 또한 능력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도 할 말의 뼈만 발라내어 늘어놓을 줄 안다. 그 뼈들의 진행을 보며 읽는 사람은 울트라사우르스, 티라노사우르스를 맞추면 된다. 아직도 군더더기가 많이 남아있지만, 그것은 격정의 시학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로 두고 볼 수밖에 없다.★★★☆☆[4337. 2. 19.]

 

488□늦게 온 소포□고두현, 민음의 시 97, 민음사, 2000

  이미지를 잡아내는 능력도 좋고, 그것을 꾸려 가는 힘도 뛰어나다. 무엇보다도 장황스럽지 않고 직접 추려내는 능력이 돋보인다. 그런데 시집을 구성하는 시들의 전체 방향이 모호하다. 여러 갈래로 흩어져 있고, 작품의 경향도 두 세 가지로 갈라진다. 이런 것들을 한 공간에 모은 것이 흠집으로 보인다. 맨 뒤쪽의 발해 관련 시들은 애매하다. 역사가 시로 들어올 때는 그 필연성을 반드시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는 해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해석은 자신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필 시에서 역사의 의미가 왜 필요한가 하는 것에 대한 검증이 스스로 필요한 일이다. 이 시인의 능력은 유배시편에서 절정을 보인다. 김만중에 대한 역사의 의미도 생각해보아야 할 일이다.★★☆☆☆[4337. 2. 20.]

 

489□얼음 수도원□고진하, 민음의 시 100, 민음사, 2001

  인식으로 쓰는 시들이 종종 범하는 오류는 상상력의 체계를 드러내는 데 게으르다는 것이다. 물론 시가 인식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인식만으로도 훌륭한 시를 쓸 수 있지만, 그 인식이 세상을 깜짝 놀랠 만한 것이 아니라면 그런 인식을 하게 된 과정에서 드러나는 상상력의 줄기를 보여주는 것이 시를 아름답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삶을 곧 시로 풀어내는 능력은 원숙한 맛까지 난다. 그러나 바로 그런 태도 때문에 시가 늘어지고 말았다는 것이 이 시집의 흠이다. 이것은 늙어 가는 징조이다. 그리고 그런 인식이 탄력을 갖기 위해서 종종 기대는 것이 종교의 세계인데, 거기에 기대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것이 때로 나태한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일이다.★★☆☆☆[4337. 2. 20.]

 

490□격포에 가면 누구나 섬이 된다□공로, 한국현대시인선 9, 문학마을사, 2001

  말을 이리저리 교묘하게 바꾸는 것이 시 전체의 흐름에 도움을 주면 그것이 한 기교로 인정을 받고 칭찬 받을 만한 일이지만, 그것이 이미지 전체의 흐름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면 그것은 말장난만도 못한 치기가 된다. 시 곳곳에서 불필요한 말 비틀기가 이루어져서 이미지의 흐름을 방해한다. 전체의 주제를 생각하고 그 주제를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라면 과감하게 버릴 필요가 있다.★☆☆☆☆[4337.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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