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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1000권 읽기 86
2015년 02월 11일 16시 50분  조회:2319  추천:0  작성자: 죽림

851□오라, 거짓 사랑아□문정희, 민음의 시 102, 민음사, 2001

  시집 한 권을 처음부터 한 호흡으로 쓰기도 어려울뿐더러, 한 호흡으로 읽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 시집은 그런 시집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처럼 읽힌다.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시집이다. 중요한 말을 간추리고 거기에 맞는 상황을 설정하여 읽는 사람이 아무런 부담 없이 받아들이도록 할 줄 아는 방법을 터득했다. 아니 방법이라기보다는 태도라는 것이 더 옳겠다. 여자들이 흔히 갖는 여성성의 함정이나 그 반발로 인한 과격함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현실을 맨눈으로 정직하게 볼 줄 아는 아주 힘있는 세계를 갖추었다.

  이 시인의 저력은 제3부에서도 드러난다. 외국에 나가서 쓴 시들을 모은 듯한데, 외국의 풍물에 빠져들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는 것은 여간한 능력 가지고는 되는 일이 아니다. 다만 너무 내면 성찰 쪽으로 방향이 고정된 데다가, 본래부터 있어서 그렇게 집착하지 않아도 되는 모순을 많이 보는 것이 흠인데, 이것은 지식으로 뭉쳐진 세계 안에 갇혀있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그 모순 너머에 서린 어떤 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태도만 가미된다면 정말 훌륭한 시를 쓸 시인이다. 시집 제목은 그리 적절한 것 같지 않다.★★★★☆[4337. 10. 13.]

 

852□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허만하, 솔, 2000

  오랜만에 보는 유미주의의 시다. 증발한 현실이 어렵다. 시인이 시를 절대의 선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논리상 이상한 점이 전혀 없는 것 같지만, 그런 전제는 대부분 현실을 삭제하고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어렵다. 예술 전반에 대한 상당한 감식안이 없으면 감상하기 힘든 시가 많다. 특히 그림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으면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시가 많다. 무지한 독자를 기죽일 일이지만, 그것을 기죽는 독자의 탓으로 돌릴 수 있는 자의 여유가 유미주의의 폐해이니, 최소한 경계는 해야 할 일이다. 사물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성실한 태도가 시 곳곳에서 확인되는 시집이다. 그런 성실성이 체험의 특수성을 정당화하는 쪽으로 작용하면 시에는 씁쓸한 맛이 남는다. 아마도 김수영이 제일 먼저 그 쓴맛을 느낄 것이다. 한자 역시 씁쓸한 맛을 낸다.★★★☆☆[4337. 10. 13.]

 

853□아담, 다른 얼굴□조원규, 민음의 시 106, 민음사, 2001

  이런 압축에 이르기까지 들였을 공과 배움은 상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너무 압축을 하면 내부 공간이 졸아들어 메아리가 생기지를 않는다. 울림이 없는 시는 갑갑하다. 결론이 먼저 추려져 나오기 때문이다. 행동을 발라내고 사유만 남기면 철학이 되는데, 관념으로 기우뚱거리는 모습은 시로서는 위험한 일이다. 말랑말랑한 살의 맛에 익숙한 사람에게 뼈를 우린 곰국의 뼈는 어쩐지 아쉬운 메뉴이다.★★☆☆☆[4337. 10. 14.]

 

854□공놀이하는 달마□최동호, 민음의 시 108, 민음사, 2002

  제목 때문에 엉망이 된 시집이다. 제목도 그렇지만 모든 시마다 <달마는 왜 동쪽으로 왔는가>라는 부제를 달았는데, 이게 문제다. 동일한 부제를 연달아 달아두면 독자는 그것을 전제로 시를 읽는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굳이 그 연장선에서 읽어야 할 필요가 거의 없는 시들이다. 그냥 그대로 두어도 한 그림이 되는 그런 괜찮은 시라는 말이다. 그런데 불필요한 부제가 이미 모든 살아있는 이미지들을 사구가 되어버린 선불교의 죽은 비유 속으로 쑤셔 넣고 있는 형국이다. 화두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언어로 나타나면 사구가 된다. 활구가 되어도 부처가 될까 말까인데, 사구가 되어서는 중생은커녕 제 한 몸 구제도 못하는 것이다. 좋은 시들이 많은데도 부분부분에서 언어를 마감하는 데 미숙한 곳이 많이 눈에 띈다. 단 한 글자라도 한자는 혹이다.★★☆☆☆[4337. 10. 15.]

 

855□장편 서정시 백두산□최문진, 4293

  아주 특이하고 희귀한 시집이다. 서문을 보면 자신의 회갑을 맞이해서 기념으로 낸 책이다. 그래서 그런지 출판사도 적혀있지 않다. 단기로 4293년이면 서기로는 1960년이다. 제목대로 백두산을 다녀오면서 쓴 기행시이다. 시라고는 하지만 운문으로 쓴 수필이라고 봐야 할 정도이다. 특정지역을 지나면서 마주치는 장면에 대한 자기 생각을 쓴 것이다. 3행을 한 연으로 해서 끝까지 같은 방식으로 썼다.

  내용은 최남선의 백두산근참기 분위기가 난다. 민족주의의 관점으로 자연을 보고 거기에다가 1960년대의 냉전논리까지 가미한 형태이다. 일제시대의 민족주의가 일본의 정치에 놀아난 것처럼 이 시대의 민족주의가 냉전의 논리에 놀아날 것인데, 그런 위험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작은 단락의 제목을 보면 이 저자가 돌아다닌 곳을 알 수 있다. 단표자, 백두영봉, 천지, 십장생, 잣나무, 백웅, 정계비, 송화강, 발해, 인공위성. 1960년대는 이북을 갈 수 없는 시대인데, 만주체험이 실린 것으로 보아 해방 전에 체험한 것을 그 후에 쓴 것으로 보인다. 백두산을 거쳐서 송화강을 따라 북만주의 독립운동 지역, 발해 지역을 답사하고 기차를 타고 서울까지 내려오면서 보고 듣고 생각난 것을 적은 시집이다.★☆☆☆☆[4337. 10. 15.]

 

856□인생□이승훈, 민음의 시 109, 민음사, 2002

  연기와 연기를 끊으려는 불교의 관념을 나름대로 잘 해석해서 그것을 시로 썼다. 그러나 너무 거기에 집착을 하면 시든 인생이든 남는 것은 없다. 불교가 갖는 관념체계와 불교가 현실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히 다른 것이다. 앞의 것은 철학의 영역이지만, 뒤의 것은 삶의 문제이다. 시는 삶의 문제 쪽이 가깝다. 시가 철학의 영역을 다루지 못할 것은 없지만, 그때는 대개 관념성을 동반한다.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문제인데, 시에서는 너무 관계와 언어의 문제에 집중된 것이 문제다. 집중력은 좋지만, 때로 특수한 집중은 독자의 관여를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시인이 의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의도를 더욱 드러내야 할 것이다. 한자는 혹이다.★★☆☆☆[4337. 10. 16.]

 

857□내 졸음에도 사랑은 떠도느냐□정철훈, 민음의 시 110, 민음사, 2002

  우리 시에서 북방의 정서는 아주 드문 편인데, 이 시에는 그런 정서가 살아있어서 아주 희귀한 느낌을 준다. 시집이 모두 4부로 구성되었는데, 그 방향이 서로 달라서 산만한 느낌을 준다.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이라도 그것이 어떤 통일을 향해 달리지 않으면 시집이 무기력해진다. 그리고 상상력의 걸음이 성실하되 둔탁하다. 좀 가볍게 할 필요가 있다. 가볍게 하는 것 중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남기지 않는 것이다. 시 전체의 흐름은 무난하지만 중간중간에 꼭 있을 필요는 없을 것은 것들이 끼어 있어서 부산스럽다는 느낌이 가시지 않는다. 한자 역시 부산스러움의 한 원인이다.★★☆☆☆[4337. 10. 16.]

 

858□내 잠 속의 모래산□이장욱, 민음의 시 111, 민음사, 2002

  시에 대해서 배울 것은 다 배운 시인이다. 묘사력도 관찰을 표현으로 승화시키는 것도 어느 하나 탈 잡을 것이 없다. 그런데 미늘이 좀 션찮은 탓일까? 시어들이 이미지의 아가미에 정확히 꿰이지를 않아서 자꾸 빠져 달아난다. 걸릴 듯하다가도 미끈덩 하고는 빠져버린다. 묘사가 정확한 듯한데, 그 묘사들이 환기하고자 하는 것이 너무 흔한 것이거나 엉뚱한 것이다. 그러한 것들을 그럴 듯하게 얽어줄 주제도 너무 낯익은 것으로 귀착하고 있어서 애써 이룬 표현들이 낡은 빛을 낸다. 기교가 승한 시다. 그러니 무엇을 노래할 것인가 하는 것부터 정해야 하는데, 너무 분위기에 편승하다 보면 자신이 새로운 무언가를 노래하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미 그런 세계는 신물나게 노래된 것들이다. 젊은 시인의 시답지 않게 패기가 없이 너무 늙었다. 한자 역시 늙음의 징표다.★★☆☆☆[4337. 10. 21.]

 

859□사랑은 야채 같은 것□성미정, 민음의 시 115, 민음사, 2003

  시인이 시를 쓸 때 한 방법만을 고수하면 반드시 지루함이 시에 나타난다. 그것을 가장 좋은 방법으로 극복하는 것은 주제를 다양화하면서 깊이와 넓이를 동시에 만들어가는 것이다. 특히 상징이 시의 주요 수법으로 등장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려운 말을 자꾸 쓰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시가 어려워진다. 그리고 어려움은 곧 지루함으로 연결된다. 이 지루함을 극복하려는 방법으로 이 시인은 특별한 소재와 상황설정을 택하고 있는데, 이것은 잠시 신선할지는 몰라도 근본을 해결하는 방법은 못 된다. 자칫하면 시에 대한 자신감이 경망스러움으로 전락하기 쉽다. 상징이 주된 수법이 된 시집에서 소재의 특수성에 의존하는 것은 땜질에 불과하다. 좀 더 쉬워져야 하는데, 그 쉬움은 좀 더 깊어지는 것에서 이루어진다. 깊어지지 않는다면 쉬움은 경망스러움이 된다. 시집 후반부의 시들이 그런 기미를 드러낸다. 쉬움과 깊음, 그 점을 깊이 고민해야 할 시집이다.★★☆☆☆[4337. 10. 23.]

 

860□별의 집□백미혜, 민음의 시 112, 민음사, 2002

  표제로 뽑은 <별의 집>은 아주 빼어난 작품이다. 이 정도의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것은 시인의 능력이고 내공을 짐작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작품 전체에 들인 공도 만만찮다. 그런데도 확 와닿지 않는 부분이 많은 것은, 욕심이 과한 까닭이다. 욕심은 반드시 집착을 낳는다.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집착. 그러나 그것이 시인의 의식 속에서는 목숨을 걸 만큼 아주 중요한 것이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어쩐지 배부른 탄식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없지 않다. 프랑스 산 포도주를 마시며 사는 것을 탓할 필요는 없지만, 그 향기를 맡고 달갑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은 생각해야 할 것 같다. 개인의 절실함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절실함은 다른 것이다. 그렇다고 남들의 절실함에 자신의 감정을 맞출 필요는 없지만, 남들의 눈치는 보아야 하는 것이, 그렇지 않으면 종종 시가 넋두리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2만 가진 사람 앞에서 5밖에 못 가졌다고 투정부린다면 2만 가진 사람으로서는 황당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는 해도 작품집 전체의 수준과 균형을 고르게 유지하는 것은 여간한 능력이 아니다.★★★☆☆[4337.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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