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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서 인식의 혁명
2015년 02월 19일 15시 32분  조회:4401  추천:0  작성자: 죽림

인식의 혁명

 

                                                      

                                                                  문 덕 수(시인, 예술원회원)

 

 

 

 1.

 거의 1세기가 지난 한국시는 현재 한계의 벽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벽의 정체는 시인마다 달리 보일지 모르나, 지각 있는 시인이면 그것이 무엇인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쉽사리 극복하기 어려울 것 같다.

나는 언젠가 “ 시는 언어 예술이면서 언어를 넘어 선다”고 말한 바 있다. 언어를 넘어 선다는 뜻은 지각 레벨에서의 사물의 인식 문제이다. 사물에 대한 지각(知覺)은 복잡한 문제를 내포한다. 유럽의 근대적 자아의 표징으로 간주할 수 있는 단일시점(單一視點)은 예술을 오랫동안 지배해 왔다. 그 뒤를 이어 단일 시점이냐, ‘복수로서의 나’를 공관화하는 다시점(多時點)이냐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다시점은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에게서 시도되었고, 이 시도는 다시점 자체가 원근법을 뒷받침해 온 초월적인 단일시점의 붕괴를 가져왔다.

 테이블 위의 ‘술병’은 누구에게나 ‘술병’으로 보인다. (먼 거리를 두고 보면 달리 보일 수도 있겠지만) 여기까지는 같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그 앞의 세계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달리 보인다. 아마도 알코올 중독증과 투병하고 있는 사람에겐 ‘악마’로 보일 수도 있고, 그러한 중독증과 관계없는 사람에게는 ‘감로(甘露)’로 보일지도 모른다. 창문을 ‘창문’으로 보고, 꽃을 ‘꽃’으로 보고, 소나무를 ‘소나무’로 보아야 할 텐데, 그렇지 않고 주관적인 생각(선입관)이나 자의적 분별(分別)로 인해서 미혹의 세계 즉 ‘언어의 세계’에 빠진다.

 보는 사람의 위치, 조명(照明)의 가감이나 장애물의 유무 등도 큰 영향을 미친다. 보는 사람의 위치가 산정(山頂)이거나 지하철역, 그리고 햇빛이나 기상의 조건 등에 따라 사물이 달리 보인다. 원추(圓錐)나 입방체 같은 3차원의 입체도, 바로 밑이나 바로 위에서 보면 2차원 평면으로 보인다. 동일한 대상의 현상이 이같이 달라지는 것을 ‘퍼스펙티브 현상’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러한 퍼스펙티브 현상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각설하고, 본론에 직접 관련되는 사례를 하나 들어 보자. 창문을 열고 도시의 바깥 풍경을 바라보자. 전신주와 전선 위의 비둘기, 주택가 지붕의 연연(連延), 고층 아파트의 입립, 올막졸막한 높고 낮은 빌딩들, TV안테나와 그 너머의 산들, 산 위의 구름과 하늘 이런 바깥 도시의 풍경은 언어의 성질상 선조적으로 열거되겠지만, 사실은 우리의 시계에 한꺼번에 들어온다. 일망무제라고나 할까, 우리 망막에 한 순간 동시다발적 현상으로 비치는 것이다. 우리의 조그마한 시각에 이같이 광대하고 방대한 사상들의 양이 한꺼번에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우선 이러한 지각현상 또는 인지(認知) 시스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 마치 수많은 특수한 컴퓨터들이 동시에 작동하는 것처럼, 이러한 동시다발현상의 지각은 인간의 신경회로망의 성질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신경)회로망 모형에 따르면 인지는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는 병행처리과정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모든 마디들이 각자가 하는 일을 동시에 수행한다는 점이다. 신경회로망 모형을 병행분산처리 모형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앞에 예시한 창밖의 도시풍경의 순간적 동시다발적 지각은 이러한 인지관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앞으로 우리 시에 있어서의 인식의 변화를 가져올 결정적 조건들이 이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창문 밖의 도시풍경의 지각은, 인간의 신경회로망(neural network)이 동시적이며 다발적인 시스템임을 보여준다. ‘동시적’이라 함은 계열적, 순차적, 선조적이 아님을 말한다. 심적현상이 형식적 시스템이거나 구문론적 법칙을 가지고 있다면, ‘주어+서술어+목적어’와 같은 성분의 선조적, 시간적 연결구조로 지각 될 수밖에 없지만, 동시다발적 지각에서는 계열적 인식이 불가능하다. 또 ‘다발적’이라 함은 사물들이 분산되어 동시적으로 한꺼번에 그 지각이 이루어짐을 말한다. 흔히 신경회로망의 인지할동이 ‘병렬분산처리’를 한다고 하는 것도 이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한 대상이나 유니트가 앞뒤의 차례대로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동시병렬적으로 일어나며, 지각기능을 가지는 인간의 뇌도 이와 같은 구조라는 것이다.

 지각(신경회로망)의 동시다발성 병렬 분산처리 모형은 사물의 지각적 인식은 물론이요, 나아가 시쓰기나 작품의 구성방법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우리는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창밖의 도시 풍경에 대하여, 그 중 어떤 대상 하나(아파트면 ‘아파트’ 비둘기면 ‘비둘기’ 소나무면 ‘소나무’ 식으로)만을 선택하여 집중적으로 이미지화 하고, 집중적으로 표현하는 관습을 지니고 있다. 편협하고 국부적이다. 지각의 전체를 이같이 분할할 것이 아니라, 각각의 유니트들을 살리면서 전체를 집합적으로 조직하는 것은 불가능할까. 주제의 복수화보다 단일화, 형식의 다중구조보다는 단순화를 지향한 지금까지의 시쓰기의 관행을 부숴버릴 수는 없을까.

 

 

 2.

 그러면 한국시가 구문론적 요새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어떤 몸부림을 쳤던가 보기로 하자. 먼저 이상(李箱)의 시를 보자. 이상의 작품은 언어의 한계에 직면한 난파선의 비극상을 보여준다. “1+3/3+1”과 같은 숫자의 수식이나 그 변형형태의 혼용은 이미 언어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언어 자체에 대한 절망행위일까, 아니면 단순한 언어유희일까. 어쨌든 통사론적 구문구조를 깨려고 한 실례를 보기로 한다.

 

 

     오렌지

     大砲

     匍匐

萬若자네가重傷을입었다할지라도피를흘리었다고한다면참멋적은일이다

-----이상의 「BOITEUX·BOITEUSE」에서

 

 

「BOITEUX·BOITEUSE」는 시 전체가 구문구조를 벗어 난 것은 아니지만 위의 3행은 구문구조를 깬 것으로 보인다. “오렌지/대포/포복”의 열거는 주어인지, 보어인지, 또는 어떤 문법적 기능을 맡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구문구조와의 관계가 없는, 단지 세 단위(unit)의 병렬적제시가 아닌가로 생각된다. 오렌지는 ‘여성의 성기’, 대포는 ‘남성 성기’, 포복은 ‘성교의 상징’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이런 식의 폐쇄적 의미규정을 넘어서는 다양한 의미망의 지평을 열어두고, 그러한 의미의 병렬성, 다양성, 다중성을 살려야 할 것이다.

 같은 제목의 시 머리에 “긴 것/짧은 것/열십자”와 같은 세 단위의 제시도 있는데 이것 역시 구문구조를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시 「수염」에는 “홍당무”, “삼심원(三心圓)” 등의 한 단위 (한 어휘)가 하나의 연(聯)을 구성하고 있다. 이상(李箱)은 언어에도 절망했다고 말한 바가 있지만, 실제의 시쓰기에서 통사론적 구문구조의 제약에 빈번하게 직면하여, 이 구조의 법칙성을 깨기 위해 몸부림친 흔적이 그의 작품 도처에서 발견된다.

 그러면 김춘수(金春洙)의 경우는 어떠한가. “말의 긴장된 장난 말고 우리에게 또 남아 있는 행위가 있을까?”(김춘수 전집 시론, 문장사,1999,p.389)라고 말한 김춘수의 무의미 시의 실험은 완벽하게 구문 구조 안에서의 ‘언어유희’였다고 할 수 있다. 의미론과 통사론 구조 안에서의 언어유희가 정말로 가능할까? 자신의 무의미나 허무를 추구하는 실험이 언어유희라는 사실을 알면서 탐닉했지만, 실험한 언어가 구문론적 구조의 형식성이라는 사실에 대해선 한 마디도 없었고, 또 깨닫지도 못한 것 같다. 그의 한계성의 하나다.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있던 자리에

          군함이 한 척 닻을 내리고 있었다.

          여름에 본 물새는

          죽어 있었다.

          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

                      ----〔처용단장 제1부의 Ⅳ〕에서

 

 

 주목을 끄는 대목은 “바다는 가라앉고”와 “여름에 본 물새는 죽어 있었다./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이다. 무의미시의 실례다. “돌이 바다에 가라앉고”는 유의미인데, “바다는 가라앉고”는 무의미가 된다. “사냥꾼이 총으로 늑대를 쏘았다”는 유의미인데, “늑대가 총으로 사냥꾼을 쏘았다”는 무의미가 된다. 김춘수의 무의미시는 구조상으로 이러한 예와 큰 차이가 없다.

 이리로 오고 있는 한 사나이가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와 같은 대목은 관념세계에서는 가능한 물리적 실현의 불가능성을 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예는 이상의 시에서는 흔하게 발견된다. 무의미시야말로 가장 순수한 예술이라고 믿었던 이 시인이 ‘무의미시’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만들었는가의 일단을 보여 준다.

‘바다가 가라앉는다.’는 표층구조의 의미는 현실적, 물리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없다. 오랜 세월이 지난 어느 때인가는 지진이나 지각의 변동으로 바다가 가라앉을 물리적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면, 이러한 가능성은 심층구조의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러나 김춘수는 이러한 심층구조의 의미보다는, ‘바다가 가라앉는다.’는 물리적 불가능성과, 그것을 뒤집어엎는 관념적 가능성과의 충돌에서 어떤 의미(언어유희)를 찾은 것으로 생각된다.

 김춘수가 “언어에서 의미를 배제하고”라고 한 말은 현실의 물리적 가능성을 배제한다는 뜻이다. 또 “언어와 언어의 배합, 또는 충돌”(동상)이라고 할 때, 언어의 지향성의 물리적 가능성과 비가능성과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김춘수의 무의미 시쓰기는 단출해 보인다. 이를 테면, 후속 시행(詩行)에 의한 선행시행의 차단(김춘수는 ‘차단’이라고 하지 않고 ‘처단’이라고 하고 있다.), 후속의 소리나 장면에 의한 선행 이미지의 차단, 연작시에서는 후속 시에 의한 선행 시의 차단 등이다. 이러한 무의미시 쓰기의 장치는 다양한 듯하지만 의외에도 단출하다. 즉, 그의 무의미시 쓰기의 장치는 주어+서술어라는 구문구조 안의 인과 관계거나, 아니면 구문(구문구조를 가진 센텐스)과 구문과의 관계 속에 갇혀 있다.

 그러니깐, 김춘수의 실험은 구문론적 구조를 넘어서지 못했다. 음운 규칙 일탈, 동음이의어, 의미의 중층형성, 독립어적 병치 이러한 구문구조 내의 다양한 실험 기능의 과제를 두고 실험을 중지했다. 그러나 문제는 실험의 이러한 협소성보다는, 의미 생산구조인 통사론 안에서의 무의미 추구라는 역리가 돋보인다는 점이다.

 

 

 3.

 유리컵, 탁자, 비둘기, 재떨이 등을 본다고 하자. 눈앞에 있는(혹은 우리의 심적 표상 속에 있는) 사물들 하나하나는 물론, 이것들의 상호연결에서도 어떤 법칙성, 규칙성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없다. ‘유리컵’이라는 물리적 표상에 주술 관계와 같은 통사구조가 내재되어 있을 리 없다. 처음부터 언어 구조를 가지고 빚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유리컵은 한 시간 전에 나타나고, 탁자는 30분 뒤에 나타난다는 선조적 계열성도 없다. 이러한 모든 법칙은 사람(시인)이 둘러씌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주술관계뿐만 아니라 동서남북, 상중하, 원근법 같은 규칙도 가지고 있지 않다. “유리컵은 탁자의 동쪽 모서리에 놓여 있다.”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이것은 주관이 그렇게 사고(思考)한 것이지 , 물체 자체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방위가 아니다.  

 이러한 모든 규칙은 우리의 주관, 즉 언어가 부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우리는 흔히 주관/객관, 의식/무의식, 나/타자 등으로 분할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유럽 근대 이성의 기반이지만, 그것의 분별력의 폭력은 엄청난 것이다. 이러한 근대 이성의 산물인 주관/객관이 유리컵이나 탁자나 비둘기의 실재(實在) 인식에 별 소용이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찾고자하는 실재는 주/객관의 문화이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유리컵, 탁자, 비둘기 등에 주객관이라는 구별이 있을 리 없다. 근대 이성이 그렇게 분류해 놓은 노선을 계속 맹목적으로 따라갈 필요도 없다. 또 유리컵, 탁자, 꽃 등의 사물에 의식/무의식의 구별이 내재해 있을까. 그러한 구별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사유의 판단 이전, 주객관이나 의식/무의식이나 구문론적 언어분별 이전의 ‘순수직관’으로 돌아 갈 수 없을까. 김춘수는 의식/무의식에 시달렸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한 사실은 결국 사유나 판단 즉 이성언어에 시달렸다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중도에서 사생(寫生)을 포기한 그로서는 도리 없이 ‘언어의 요새’ 속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고(思考)의 언어 (Language of Thought) 라는 개념이 인지관계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다. 자연언어라 할지라도 그것을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언중(言衆)의 마음속으로 서서히 가라앉아 이른바 ‘사고의 언어’를 형성하게 된다. 사고의 언어는 사물과의 직접적인 직관적 관계영역을 뭉개고 통사론과 같은 어떤 규칙으로 인식하게 한다. ‘마음’이라는 인식 기능까지 형식적 시스템으로 굳어져 버리게 한다. 우리는 구문론적 구조를 비롯하여 동서남북이나 상중하, 의식/. 무의식, 주관/객관 같은 이런 여러 가지 규칙들의 그물을 일단 무화 또는 폐기시킬 수는 없을까. 적어도 사고(思考) 레벨 이전인 지각(知覺) 또는 감각 레벨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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