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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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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덕수 장시; <우체부>
2015년 02월 19일 17시 46분  조회:2598  추천:0  작성자: 죽림
 

* 이 시는 월간 <시문학> 2008년 11월, 12월호에 발표되어 만네리즘에 빠진 21세기 한국 현대시단에 충격과 함께 각성을 일깨워 주면서, 하이퍼텍스트 기법의  문제작으로 거론되고  있는 원로 시인 문덕수(예술원회원)의 470행 장시 <우체부>전문입니다. *

 

 

 

                     우체부

                         -다시 태어나 우체부 되고 싶네

 

 

 

문 덕 수

 

 

 

 

Ⅰ 조셉 룰랭

 

 

고향 뒷산 기슭에 옥으로 박힌 호수 그

어머니의 양수(羊水)에서 너는 물장구쳤네

잉어 가물치와 놀고 물밤 먹고 자랐네

어느날 서낭당 나무에 몸 칭칭 묶어놓을 듯이

노끈 한 줄 날아와 네 어깨에 걸리고

고무줄처럼 늘어져도 나긋나긋 끊이지 않는

우체부 ‘가방’ 하나 달랑 달렸네

지구의 궤도 같은 빈 동그라미

달마상처럼 눈에 잘 띄게 또렷하네

물결 서로 부르며 몸 섞고 짙푸른

우발수(優渤水) 가에서 금와를 만난 유화

미쓰 고구려 유화(柳花)의 침실에

햇빛이 들어와 좇으니 태기 있어

닷되들이만한 큰 알을 낳으니

네 가방 그 알만 하네

네 가방 그 알만큼 불룩거리네

나라를 밴 첫 어머니의 배만큼 둥글해지네

사문(沙門)의 ‘바랑’ 이네

 

 

반 고흐의 ‘우체부 조셉 룰랭’

반짝이는 노란 수염발

코 밑과 두 볼때기에서 입술을 둘러

용수철처럼 고불고불 곰실거리며 두 갈래로 갈라져

내려와 가슴을 덮고, 그 새로

청색 유니폼의 넓은 목깃이 언뜻 비치네

두 줄의 웃옷 금단추 두 점

‘포스트(postes)’ 모표가 또렷한

앞 차양 짤막한 캡을 썼네

눈동자는 박아 끼운 녹색 구슬이네

 

아무래도 그 유니폼은 네게 어울리지 않네

그의 연인도 그의 가방도 맞지 않겠지

개울가로 떠내려온 누더기를 줍거나

포로수용소의 포로들이 입다가 버린

군복 누더기가 맞겠네

올 굵고 거친 무명의 임란 때 융의(戎衣)가 좋겠네

 

 

바위를 종이처럼 가볍게 밀어내거나

태평양을 개천처럼 건너뛸 듯이

먼저 한 발을 앞으로 살풋

나비처럼 가벼이 떼어 내미네

턱밑이나 코끝을 넘을 만큼 수평으로 높이 뻗은 보폭은

상체를 실어 앞으로 옮긴 뒤

그 발끝을 살짝 땅바닥에 내려 놓네

힘껏 던진 긴 창대가 멀리 날아 한 지점에 박히듯

그 반동으로 지렛대의 뒷발은

얼른 번갈아 맡아 다시 창대처럼 뻗으며 앞으로 뛰네

9.96초의 두 다리네

 

종아리 허벅지 엉덩이 가슴

알 배듯 힘줄 통글통글 뭉쳐

거인이 지구를 히끈 들어 올리네

두 발로 지축을 딛고 꼿꼿이 서서는 무릎을 펴고

천년을 벼른 듯 벌떡 일어서네

186kg이 일순 두 팔에서 가슴과 허리로

다시 무릎을 거쳐 내려온

긴장의 위험을 입 꼭 다물고

두 발이 받쳤네

장미란(張美蘭)이 당당히 해내네

 

보라, 보리수 밑의 앉은이

두 발을 무릎에서 꺾고 접어 결가(結跏)하였네

오른발을 왼발의 넓적다리 위에 얹어

바위처럼 꾹 누르고

아래로 내린 두 손가락 끝으로 두 세계 잡아 이으셨네

포탄이 날아올 땐 인지(人指)를 펴어 밑을 가리키고

전란과 굶주림 속의 모든 염원과 기도를 도맡아

손바닥을 위로 하고 다섯 손가락 다 펴니

두 발의 결가부좌가 받드네

 

어버이 부축한 외나무다리 길도

5백킬로 상공의 무중력 궤도도

묵직한 가방을 어깨에 메고 뛸 우체부도

두 다리네

 

 

 

 

Ⅱ 격군들

 

 

 

격군(格軍)의 노는 탱크의 캐터필러

사부(射夫)의 화살은 105미리 155미리 야포네

 

쇠나팔이 울돌목을 휘감아 길게 세 번 울고 그 꼬리 허공으로

풀리니 발진 명령이 복창으로 전군에 하달되네

배의 노가 일제히 물위로 치솟다가 내려가고

이물에 덤비는 물결은 길길이 뛰며 달라들고

부딪친 물결이 깨어져 갈리며 소용돌이치네

노 한 자루에 네 사람이 붙어

서로 마주보며 몸을 숙이고 젖히네

온 몸이 북소리 한 번에 앞으로 밀고

또 한 번에 뒤로 당기네

노를 질타하는 북소리 다급해지니

빠른 뇌고(雷鼓)로 바뀌고

역류로 달라드는 물결과 북소리 틈새에서

격군들 몸은 으스러지네*

 

 

펜대를 쥐었던 연약한 손이

MI을 받들어총의 자세로 잡고

하낫 둘 하낫 둘 역사의 구령에 길들여지네

구슬땀이 염주알로 익어 한 겹 두 겹 모가지를 두르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한 시대가 그대로 시뻘건 용광로로 달구어지네

바로 네 턱 앞의 헉헉거리던 한 병사의

묵직한 MI총대가 두 손아귀에서 빠질듯 미끄러져 내리니

어디서 번갯불처럼 채찍이 날아와 다그치네

행진을 이끄는 구령이 더 촉박해지고

움찔 놀라 추스러 끌어올리나, 그뿐 다시

미끄러져 내리네, 땀 훔치며 히끈 들어올리니

아이고매 죽여줍소 아이고매 죽여줍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유고매 죽여줍소 데이고매 죽여줍소로도 들렸지**

옴마니밧메훔으로도 들렸지

그 소모품 육군소위 지금 더욱 궁금하네,

에카스민 사마예 에카스민 사마예***

 

 

밤비가 주룩주룩 죽죽 내리네 퍼붓네

한낮의 찐 더위도 밤에는 오히려 초겨울

지옥보다 더 캄캄한 비의 산길을 더듬어

헤드라이트를 끈 군용차들이 앞차의 반딧불만한 미등을 따라

진흙이 튕겨서 유리에 칙칙 뿌리는 도로를 꼬불꼬불 도네

네 우체부 가방도 진흙 투성이네

병사들은 군복 위로 둘러쓴 판초에 머리만 내어놓고

덜커덩 덜커덕 흔들리는 자세를 가누면서

전방을 보고 두 눈을 부릅뜨고 가네

 

가느다란 쇠소리의 저 철모는 안전할까

풀과 잎사귀와 나뭇가지로 위장했네

한 손에는 소총을 들고 어깨는 기관총을 메고

가슴에는 수류탄이 달렸네

구릉이나 언덕을 돌처럼 굴러서 오르내리고

비오듯 쏟아지는 포화 속

고지를 오르며 진격하는 보병이라는

이름의 저들은 누구일까

임란 때 사부 격군의 아들들일까

 

허리에 권총을 찬 소대장도

어깨는 한 자루 카빈 등에는 포탄 1발

한 병사는 포신(砲身)을 들고

또 한 병사는 포가(砲架)를 메고

또 다른 병사는 포반(砲盤)을 짊어지고

헐떡거리는 저들은 누구일까

발사의 반동으로 후진하는 포신에 부딪쳐

마냥 스스로 닦고 아끼던 105미리 야포 밑에

제 몸 영원히 눕고 싶네

 

 

 

*김훈의 <칼의 노래>(2005), 84~85쪽 참고. 임란 때 울돌목에서의 조선 수군 해전의 한 광경.

**‘아이고매’는 ‘아이고머니’와 같은 감탄사. 음을 따서 ‘I go 어머니’의 축약형으로 보고, ‘유고매’, ‘데이고매’도 ‘You go 어머니’, ‘they go 어머니’도 축약형으로 본 펀(pun).

***‘옴마니밧메훔’(om ma-i pa-dme hūm)은 산스크리트어. 불교의 육자대명주(六字大明呪). 에카스민 사마예:ekasmin samaye. 산스크리트어인 듯. ‘일시’ ‘한때’의 뜻. 불교에 관련된 말.

 

 

 

 

Ⅲ 불의 기호

 

 

 

열길 물 속은 알고 한길 사람 속은 몰라도

붓다는 보았네 네 보석 눈에서

타오르는 불기둥을 보았네 네 차디찬 샘 같은

눈 속에 들어 앉은 시뻘건 불가마를 보았네

눈 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못갑니다고 막았으나

라이오스 왕은 나라의 재난은 내탓이라며 신전을 찾아 길을 떠났네

으슥한 갈림길에서 전날에 산중에 버린 아기 오이디푸스를

만나 길을 비켜라 옥신각신 실랑이 중에

수레의 말발굽에 발등이 밟힌 오이디푸스는

들고 있던 막대기로 그를 쳐죽였네 아버지를 죽였네

어린 조카의 울부짖는 눈에서 수양(首陽)은 불의 칼을 보았을까

어린 아들 사도의 눈에서 영조는 불의 왕관을 보았을까

영월의 청령포에는 강물 위로 화염이 U턴을 하네

푸른 소나무 숲을 이글이글 타는 욕망의 불꽃이 안고 휘감아 도네

아 저 불의 막대기 불의 칼 불의 포탄 불의 핵……

굴뚝새는 깊은 숲속에 둥지 트나 가지 한 개요

두더지는 황하(黃河)를 탐하나 쬐그마한 제 배 채울 뿐이네

누가 투덜거렸나 쯧쯧

 

 

우체부 ‘가방’은 평촌(坪村)에도 갔지

인제를 지나 원통리(元通里)부터는 개천

쏟아져내려 덮칠 듯한 험준한 절벽밑 길이었지

개 한 마리 지나도 무너질 듯한 다리와

빗물 먹은 길바닥이 갈라지고 허물렁한 산길을

가다서다를 거듭했네

삽으로 마른흙을 떠 던지며 길을 다시 다지고

범람한 곳에 다리를 다시 놓는 흙투성이 공병(工兵)도 보았지

차에서 내려 진창을 휘감고 헛도는 트럭 장갑차

타이어 밑에 짚을 깔고 차를 밀었지

12시간 우중의 행군 끝에 평촌이 보였네

 

우체부 가방은 다시 ‘개(犬)고개’를 넘었지

가전리(加田里)로 가는 구불구불한 산길에 솟은

‘개고개’ 왼편에는 저 멀리

흰 거품을 뿜으며 산골을 굽이굽이 적시는 소양강 상류가 보이고

그 앞의 나즈막한 구릉 기슭에 제1소대 제2소대

제3소대 순으로 진을 쳤네 박격포 12문을 방렬(放列)했네

호를 깊이 파, 더 깊이

머리를 내어 멀리 지평선까지 투시할 수 있도록

호를 2층으로 파라구

포탄이 날아들면 자라처럼 머리를 옴츠려넣고 몸을 옹크려야

탄약도 충분히 준비해

중대장의 이런 다급한 소리 들었지

 

남북이 갈린 숨막히는 포격전도 겪었지

전쟁은 안 돼 총을 쏘지마를 내심으론 외치면서 보았지

사단 CP 후방에서 포물선의 포성이 메아리치고

FDC 에서는 기어이 발사명령이 떨어졌네

발사준비 편각(偏角) 1635 고각(高角) 777 장약 20호!

1번 포수가 편각과 고각을 맞추고

2번 포수가 각도를 올렸다 내렸다 조정하고

3번 포수가 장약을 맡고

4번 포수가 포탄을 들어 포구(砲口)에 집어 넣으니

포강(砲腔)에 떨어져 바닥의 격침에 닿는 순간 쾅! 발사되네

병사들이 확 밀려와 덮치는 폭풍을 피해 몸을 옹크리고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조금 물러서네

이 모두가 눈깜작할 사이

 

북쪽에서 날아오는 포격도

소련제 122미리 152미리 중중포(中重砲)가 잇달아

쾅쾅쾅 불길을 길게 내뿜고

120미리 박격포탄이 얼레가 돌듯 연발하네

쉿쉿 쉬르르 쉿 무겁고 쇠를 끊는 철사줄 같은 긴 연음이

고압선을 타고 내려오네

포격이다 호 속으로 피해라

병사들이 벙커 속으로 날쌔게 뛰어들고, 쾅!

토사가 무너져 내려 앞을 막네

흙먼지와 포연에 숨이 막힌 한 병사

쿵킁 흑 기침을 짐짓 참으면서 쓰러지네

어서 물 가져와, 물!

덜덜덜 떨고 있는 부상병을 붙들어안고 물을 멕이며

괜찮아 안심하라 몸을 흔드니

머리는 한쪽으로 쳐지고 힘이 빠져 사지가 느러지네

 

죽음에는 남과 북의 구별이 없네

고지의 턱을 칼금처럼 판 구불구불 긴 벙커에는

기관총 다발총 따따따 탕탕 따따따 쿵 쾅 백병전의 불구덩이로 변하네

대검을 뽑아 형제의 목을 노리고

긴 총검이 가슴을 찌르네

핏방울은 확확 튀어 얼굴을 뿌리고

포반(砲盤)이 갈라지고 포가(砲架)가 녹을듯 굽으러지며

포신(砲身)은 벌건 불굴뚝이네

 

 

죽음에는 남과 북의 구별이 없네

974고지에는 이틀만에 비로소 주먹밥과 물이 왔네

노무대원 아저씨들이 가풀막 산길을 내며 져올렸네

위생병들의 부축을 받고 내려가는 부상병들의 행렬

두 눈만 빠끔 내놓고 붕대로 머리를 칭칭 감긴 자

흙투성 몸으로 막대기에 의지해 절뚝거리는 자

조금 성한 병사에게 엎이듯 끌려가는 자

들것에 누워 중얼거리듯 신음하며 내려가는 자

계곡에 머리를 박고 벌컥벌컥 물을 들이키는 자

 

주검들이 고지를 덮고 널렸네

해골 바가지들이 공처럼 두굴두굴 굴러가다가

발 끝에 채여 시커멓게 불탄 돌무더기에 걸리네

두개골 속에 갇힌 바람이 휘파람을 부네

반듯반듯 바랜 평평한 이마 밑을

두 개의 눈구멍이 펑 뚫리고

아래 위의 잇발이 뭔가를 더 씹을 듯 벌리고 가지런해지네

탄피와 불발탄에 섞인

팔뼈 턱뼈 무릎뼈 갈비뼈 척추 토막

 

병사들은 뭣인가를 중얼거리며 죽어갔네

으으이 윽, 말하기 전의 시니피앙

말이 끝난 뒤의 소리를 내지르며 죽어갔네

한숨 중얼거림 신음 절규 호곡

어머니 불효자 용서하세요

어머니 만수무강하세요

어머니 ‘빽’하고 죽습니다

불룩거리는 네 가방 속은 무슨 소리지

더그럭 덜그럭 쟁그랑 딱 딱

왁자그르 와글북적 미미발휼(浘浘浡潏)

우체부 조셉 룰랭의 금단추 벗는 소리

겉보리 찐쌀 된장 미역이 한데 섞이는 소리

논두렁에서 참 함지를 이고 가는 처녀의 속치마 소리

요강에 조용히 앉아 잠이 든 여인 요조숙녀

죽치고 마주 앉아 고스톱하는 친구 죽마고우

施發勞馬 始發奴無色旗

캥캥 캥 대굴대굴 팽이처럼 돌면서

찍 찍 찍 찌르르 윙윙윙 울면서 몰려오는 두개골들

발끝에서 어깨까지 차도르(chādor)를 들러쓴 주검들

피에타의 숨소리 피에타의 맥박 소리

깨어지는 사금파리가 아니라

불발탄과 파편들이 뼈다귀를 녹이는 소리네

편지와 엽서는 모두 불탔네

 

 

*崔極 <朝鮮戰爭>(東京:光人社 2004) 참고. 6.25 관련 장면은 이 저서에서 많이 참고함.

 

 

 

Ⅳ DMZ

 

 

 

야윈 엉덩이에서 춤추듯 덜렁거리는 가방 속에서

장총(長銃)은 막대기처럼 두 동강으로 부러지네

압록강 임진강 철교도 한갓 장난감이네

남쪽의 일요일 새벽을 놀라게 한 소련제 T34의 캐터필러도

종이네 납작 구겨지네

목에 걸려 되넘어간 유언은 많으나 그 사람 안보이고

받을 사람 다 어디로 갔는지

 

헬멧을 쓰고 검은 긴 장화를 신은이

임진강 입구에서 철원김화를 거쳐 고성 쪽으로

위도의 높낮이를 더듬는지 예사롭지 않네

마치 제 소유인 것처럼 발걸음 뚜벅뚜벅 당당하네

총을 겨누어 맞선 중간을 긋고

남북으로 2킬로씩 물러나게 하네

우악한 손이 쇠막대기를 차례로 박아나가고

묵직한 쇠망치로 탕탕 치니

허벅살처럼 물렁물렁한 땅에 깊이 들어가네 아프네

또 어디서 무장한 헬멧이 돌돌 말아온 쇠그물 다발을 세워서 돌리며

서에서 동에까지 144 마일을 빈틈없이 펴네

이러히 땅과 나라는 두 동강 나고

허리를 잘라 살붙이들 가르고 찢어놓으니

아픔 슬픔 원한 피눈물의 소용돌이

구름과 바람과 하늘은 남북이 없네

고니는 높은 소나무 가지의 둥지에 알을 낳고

다람쥐 멧돼지 산토끼 오가며 놀고

푸른 숲속 백로의 하얀 몸빛 유난히 눈부시지만

철조망 안의 DMZ네

 

 

공(空)이 한 시대의 밑바닥을 다 읽은 듯

탕 치고 튕기네

풍선처럼 점점 부풀다간 탁구공만해지면서 저쪽으로 굴러가네

축구 선수들 발 끝에 붙어 맨체스터 밀라노까지 갔다 오네

 

한 군데 가만히 머물지 못하지

배트에 맞아 지구를 한 번 돌면 궤도가 되지

네가 멘 그 우체부 가방의 불룩한 무(無)의 브랜드

인도인이 맨 먼저 발견한 ‘제로’지

지층의 깊은 벽을 뚫으면

 

그 틈에서 발원지의 먼 맑은 물소리 오줌발처럼 새어나오고

아이들처럼 응석부리고 흥얼대면서

곤히 잠자는 이 깨우네

공이 공(空)으로 굴러가네

그러나 해골로 굴러가는 것은 아니지 사막에서도 바다에서도

도글도글 토글토글 똥글똥글 통글통글

사막을 깊숙이 떠서 동그랗게 말고

바다를 두세 겹 비단으로 거두어 말아 굴러가네

바람 개스 굶주림 절망 포화(砲火) 핵버섯구름도

안으로 짓이겨 빻아서 가루로 다져 굴러가네

 

호주의 모랫바람에 숨구멍이 막히고

2004년던가 지중해 신화의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

바람둥이 파리스가 아프로디테 누나에게 준

탐스러운 사과도 맛보았지

그 사과 아내와 나누니

지중해의 물빛으로 익은 신화의 깊음이 서걱거리네

두 눈을 가리고 오른 손에 ‘저울’을

왼손에 시퍼런 칼을 든 여신 테미스도 힐끗 보았지

 

지진의 무너뜨린 암석을 들어올리고

깨어진 벽돌의 틈을 비집고 빛살처럼 스며들어

숨길을 빠끔 빠끔 튀웠지만

수마트라 이체에서도 쓰촨에서도

그래도 공은 바닥을 치고 솟네

네 키를 넘고 북한산을 넘네

2천 7백미터 백두산 맑은 물을 한 번 돌고

예수께서 맨발로 걸어오신 갈릴리 호수 위를 굴러

8천 848 미터 에베레스트 정상

룸비니에서 본 싯다르타의 시선이 상기 머무는 저 바위에도

 

공은 스스로를 지우네

굴러가면서 제 온갖 몸짓을 지우네

날아가면서 날아간 길을 지우네

폭발과 살육 속에서도

숨 쉬며 지우네

지우는 방식까지 지우네

사무실의 안팎과

도시의 미로에 가득차 넘실거리는 것

만지거나 볼 수는 없으나

나무와 꽃을 가꾸듯이 기르고 있는

300층을 300층으로 꼿꼿이 세우고 있는 것

213360 네 군번까지 지우네

피구슬 번호의 한 자 한 자

전선(電線)에 한 줄로 나란히 앉은 꽃새로 폴폴 날리네

 

 

 

 

Ⅴ 모데라토

 

 

 

공자님은 장난감 나무 수레바퀴를 혼자 끙끙거리며 돌리시고

예수님은 새끼 나귀 등에 안장도 없이 발끝 걸고 오르내리시고

부처님은 보리수 밑의 결가부좌로 눈떴다 감았다 하시네

너는 흙탕물 속에서 아직 칠삭둥이로 물장구 치네

 

 

바지 주머니에서 뭔가 툭 떨어져 굴러가네, 유리 조각의 ‘인장’(印章)

마루바닥의 틈새로 빠지기 전에 얼른 집어 꼭 쥐어 보네

다섯 손가락에 힘을 줘 마디마디 뭔가를 확인하듯이

포화(砲火)에서도 불붙지 않고

칼 맞아도 금 가지 않음을

 

지중해 땅속의 빨간 장미뿌리도

아프리카 밀림 속 코끼리의 상아도 아닌,

쓰레기로 내다버린 고물 헬리콥터의 유리조각

둥글고 매끈하게 자르고 다듬어 새겼네

새끼 손가락보다는 조금 더 동그란

아버님 짓고 어머님 품에 안고 기른 이름

지금은 모서리 닳고 획도 희미하네

제라늄 꽃빛 인주를 듬뿍 묻혀

꾹 눌러도 네 나이만큼 몽글었네

 

억새 바래기 무성한 풀덤불 속의 숨은 총탄

따따따 딱 쿵 딱 쿵 쾅 쾅

언덕 밑 흙고랑의 잡초 속으로 나무토막처럼 튕겨 날아갔네

넓적다리 뚫리고 허벅지뼈 두 동강으로 부러지고

눈썹을 가로질러 긁고 이마 앞머리 모두 찢어진 온 몸

피의 파편을 둘러썼네 죽음의 그물 둘러썼네 그때

 

너를 번쩍 들어 어깨에 멘 이는?

들것의 앞뒤 채를 덥석 잡고 들어올린 이는?

길가의 저 바위돌일까 풀꽃일까

그 쪽의 팔목을 접고 머리를 잘 받쳐 바로해

아직은 숨이 붙어 있어, 얼른 서둘러

 

포탄이 텐트를 물고 날아갈듯이 펄럭이는 야전 막사에서

수술의 칼을 잡은 이는 누구일까

깁스 붕대 속의 미라에게 계속 맥박이 살아 발딱발딱

뛰도록 신비의 바늘을 찌른 손은 누구일까 포격에 쫓기면서

경복궁 옆의 수도육군병원까지 실어 나른 이는 누구일까

신(神)을 보지 못했다고 함부로 입 열지 말라

이 세상에는 모르는 일이 너무 많네

 

포성을 맞으며 새벽을 떠난 후송 열차는 느릿느릿

한밤의 대구(大邱) 제1육군병원이네, 들것은 다시 트럭으로 옮겨지고

닭도 울지 않는 달구벌에 내려졌네

전선에서 몰려든 부상병들이 누더기처럼 광장을 다 덮었네

하늘의 은하수처럼 빽빽하게 쏟아부었네

만발한 한겨울의 꽃밭이네

그때 네 인장은 저 별이 간직하고 있었을까

세상에는 모르는 일이 너무 많네

추위가 추위에 눌려 지층(地層)으로 켜켜이 쌓인

달구벌의 겨울밤은 차라리 원시적 아픔이었네

눈물과 신음이 얼어붙는 북극 도시였네

 

끊어지는 숨소리 헐떡거림 끙끙거림 울부짖음

아아 아야야 윽윽 음음 응응 비명의 격류

다리 잘린이 눈 잃은이 부러진 척추

잘린 발목 부여잡은이 팔 없는 어깨죽지

노호 탄식 통곡 읍소 절규……

탑 속에 유폐된 탄식도 들은 제우스, 이곳엔 없네

죽은 자는 고지에서 여기 오지도 못했네

가을 들판을 덮은 온갖 풀벌레 울음의 잔치

지옥은 아니지 아니지 아니지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바지에서 동그란 것이 툭 떨어져 제 홀로 굴러가네 끝없이

에카스민 사마예 에카스민 사마예

 

 

 

 

 

Ⅵ 지금 여기

 

 

 

 

무리들이 끌고 온 간음한 여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수는 몸을 굽혀 땅바닥에 손가락으로 글을 썼네

그때 치솟아 가래처럼 목구멍에 뭉클 걸린 신음

으음 으음 음 으으이 으윽 윽

죽음에 꾹 눌려 꿈틀거린 숫한 유언을

눈(雪)에 쓰니 다 녹아 버리네

바람이 물살에 뿌리고 달아나네

물 건너 이민 간 누나의 발자국은 하늘이 지우네

어둔 병실 구석에서 콜록거리다가 종적을 감춘 아버지

모깃불 피운 마당에 멍석을 깔고

밤하늘의 손주 별을 찾던 백발의 머리

든 채로 화석이 된 할머니

아들 만나려고 강 가의 나룻배 기다리는 동안

넋을 잃고 홀연히 실종된 어머니

네 가방, 해산한 어머니의 뱃가죽처럼 쭈그러들고

집히는 편지도 없고 받을 이도 없네

 

 

삿 삿 삿 삿각삿각삿각……

어디서 로봇 전사들의 군단이 몰려오네

먼 태풍 소리가 아니네 점점 다가오는

하낫둘 하낫둘 금속성 구령의 불협화음

복제 병사의 군단이 몰려오네

한손에는 단총 한손은 기관총

가슴에는 과일처럼 달린 수류탄 포탄들

손목의 맥박이 발사명령 신호를 받아 반짝하면

그들은 엎드리지 않네 선 채로

따따따따 타타타타 딱탕 딱탕

 

아버지 로봇과 아들 로봇

울돌목의 일자진 뒤에 배치한 가병(假兵)들이네

큰 로봇이 대장선의 좌현을 막아

칼을 빼고 다가오는 적병을 돌로 찍네

큰 로봇이 노를 맡고 작은 로봇이 돌을 들었네

칼을 빼어든 적의 배에 큰 로봇이 뛰어들

때, 적의 칼을 맞아 물 위로 꼬꾸라지네

작은 로봇이 애비를 벤 적의 머리를 돌로 치고

다른 적병이 그의 허리를 베었네*

 

전사한 할아버지 애비 손자의 두개골들이

고지(高地)를 왕릉처럼 덮네 공처럼 여기저기 굴러다니네

어깨에 멘 황갈색 가방에 부딪쳐 튀어나가

저쪽 불탄 나무 그루터기에 걸려서 멎네

솔제니친이 삽 들고 헐떡이다 남겨놓은 굴라그(Gulag)

으슥한 흥안령 기슭을 돌아 밤의 두만강을 건넌

굴라그 구라게 굴라그 구라게

갓 속에서 촉수의 쇠그물 늘여친 クラゲ 굴라그

 

룩소르의 오벨리스크 꼭대기에서 나일강을 굽어보다 내려온 망령

9.11테러로 죽은 해골들과 얼싸절싸 어울리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서 해골들이 날아오네

파르테논 신전 주춧돌에 눌리다가 빠져나온 야윈 혼령들이

돌계단을 내려와선 올리브 숲으로 얼른 숨거나

북쪽의 에렉트리온 신전 담을 뛰어넘어 사라지네

로봇들이 924고지의 어둔 계곡을 다 덮네

토끼처럼 재빠르게 개울을 뛰고

지렁이로 몸을 비틀며 꾸물꾸물 산비탈을 기어오르고

원숭이로 변해 날쌔게 떡갈나뭇가지로 뛰어 올라가 숨네

탱크를 장난감처럼 뒤집어 던지는 로봇의 팔들

가을의 붉은 속치마를 두른 680고지 673고지 749고지

펀치볼을 두른 칼날의 능선바위도 오르내리네

지금 네 빈 가방에는 무엇이 울고 있느냐

파편이냐 보석이냐 두개골이냐 더그럭 덜그럭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

 

 

기사 양반 저짝으로 쪼깐 돌아서 갑시다

어찮게 그런다요 버스가 머 택신지 아요

아따 늙은이 물팍이 어링께 그라재

쓰잘데없는 소리 하지 마시오

저번 착에 기사는 돌아가듬마는

그 기사 미쳤는갑소**

이러히 그들은 연애하네

가끔씩 닭이 보이지 않으면

소가 목 빼고 두리번거리고요

소가 한 구석에 엎디어 있으면 닭은 소막까지

가서 갸우뚱갸우뚱하다가 뒤뚱뒤뚱 돌아나오지요

이러히 소와 닭은 연애하네***

저녁 바람이 이렇게 드세니 동백꽃도 뺨따구 맞듯 다 저버리겠어 진 꽃잎은 땅에서도 서성거리지 못해 바다로 쓸려 가버리겠고 동백꽃은 왜 선혈처럼 그렇게 붉고 붉은지…

그러면 보자 그 여자분 열 아홉 살 영감님 나이 수물 한 살에 만나가꼬 용초도에 동백꽃 필 때 동백나무 숲에서 오 년마다 미아이하기로 하고 마 헤어졌다는 그런 말씀 같으신데… 참말로 세상에 그런 기구한 곡절도 있다니 소매자락만 스쳐도 전생의 인연이라 말도 있드키 시상 오래 살고 볼 일임더****

이러히 그들의 연애 동백꽃도 붉네

 

 

PC TV 냉장고 에어콘 로봇 해골

하나님 손때 묻어 반질반질하네

지금 어디메 길바닥을 솟은 돌부리 빼시고 꽃씨

뿌리시네 병원 묘지 양로원 숲 바위 사이사이에

복권처럼 수상기 숨기시고 안테나 세우시네

휴대폰 좀 빌려줘 하나님과 통화하고 싶네

이러히 모두 연애하고 싶네

 

때때옷 꼬마 엄마의 손 꼭 잡았네

어머나 어쩌믄 저리도 쏙 빼닮았나

뭍과 섬 하나로 붙은 견내량(見乃梁) 울돌목[鳴梁]

동과 서 이어 백성 지킨 그 물길 더욱 푸르네

한 뿌리에서 뿜는 압록 한강 영산 낙동

멀리 태평양 대서양 감쌌네

제 타원형 궤도를 잡아 도는 이 초록별 알구슬

이브의 손 들어 올리니 온 몸 떨려 두렵네

 

 

 

 

*김훈의 <칼의 노래> 93쪽 참고. 임란의 울돌목 해전에 장흥 백성 정명섭과 해남의 오극신 부자가 고깃배를 몰고 참전하여 오극신 부자와 정명섭이 전사했다.

**이대흔의 시 「아름다운 위반」

***서정우의 시 「소 닭 보듯이」에서.

****김원일의 「용초도의 동백꽃」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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