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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천재 련애대장", 명시인 - 바이런
2015년 03월 21일 21시 03분  조회:6523  추천:0  작성자: 죽림

 

바이런

1788~1824

 

영국의 시인

 

런던에서 태어났다. 1798년 제5대 바이런 남작이 죽음으로써 제6대를  상속하여, 조상 대대로 내려 오는 노팅엄셔의 뉴스테드애비의 영주가 되었다. 1805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들어갔고, 시집 《게으른 나날》을 펴냈다.

 

 그는 슬프고 애절한 서정성, 날카로운 풍자성이 있는 시들로 근대 유럽 문학의 발전에 공헌하였고, 낭만파 시인의 대표로 꼽힌다.《차일드 해럴드의 편력》이 예기치않은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 때 “자고나니 유명해졌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해적><라라><돈주안> 등이  있다.

 

 

추 억

 

 

 아아, 모든 것은 끝났도다!-

 

꿈이 보여준 그대로,

 

미래는 이제 희망에 빛나지 않고

 

나의 행복의 나날은 끝났노라.

 

불행의 찬 바람에 얼어

 

내 삶의 동트는 새벽은 구름에 가렸구나,

 

사랑, 희망 그리고 기쁨이여 안녕!

 

내 이제 또 하나 잊을 길이 없을까,

 

추억을!

 

 

 

 

아, 꽃처럼 저 버린 사람

 

 

오, 그 아름다움 한창 피어날 때 저버린 그대

 

잠든 그대 위엔 묘석일랑 놓지 못하게 하리라.

 

그대를 덮은 잔디 위엔 오직 장미를 심어

 

봄이면 새싹 트게 하고

 

야생 실백편나무 수심어려 휘청거리게 하리라.

 

때로는 또 저기 푸르게 흐르는 시냇가에

 

슬픔의 여신 찾아와 고개 숙이며

 

갖가지 꿈으로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하고

 

혹은 머뭇거리고 혹은 사뿐히 걸음 옮기게 할지니

 

상냥한, 가엾은 그대여!

 

혹시나 그 발걸음이

 

고이 잠든 그대를 깨울까 하여이니라.

 

 

 

시용성 

 

 

 

 

사슬 없는 마음의 영원한 정신! 자유여,

 

그대는 지하 감옥에서 가장 찬연히 빛난다.

 

그대 사는 곳은 사람의 마음 속이기에

 

그대를 묶어 놓는 것은 그댈 사랑하는 마음 뿐,

 

그대 아들들이 족쇄에 채워져 얽매일 때-

 

그리고 축축한 지하 감옥 햇빛 없는

 

어둠 속에 던져질 때,

 

그들의 조국은 그들의 순교로 승리를 얻고

 

자유의 명성은 그 날개를 널리 펼친다.

 

시용이여! 그대의 감옥은 오히려 성스러운 곳

 

그대의 슬픈 돌바닥은 제단이다.

 

보니바르가 한 때 그 차디찬 돌바닥이 잔디인 양

 

그의 발자국이 그 모두에 남을 때까지

 

그 돌바닥을 짓밟고 거닐었기에

 

아무도 그 발자국들을 지우지 말지어다!

 

그 발자국들이 폭정을 신에게 호소하는

 

증거가 되기에.

 

 

바벨론 강가에서 앉아서 우리는 울었도다.

 

                   

우리는 바벨의 물가에 앉아서 울었도다.

 

우리 원수들이 살육의 고함을 지르며

 

예루살렘의 지성소를 약탈하던 그 날을 생각하였도다.

 

그리고 오 예루살렘의 슬픈 딸들이여!

 

모두가 흩어져서 울면서 살았구나.

 

 

우리가 자유롭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볼 때에

 

그들은 노래를 강요하였지만,

 

우리 승리하는 노래는 아니었도다.

 

우리의 오른 손, 영원히 말라버릴지어다!

 

원수를 위하여 우리의 고귀한 하프를 연주하기 전에

 

 

버드나무에 하프는 걸려있고

 

그 소리는 울리지 않는구나. 오 예루살렘아!

 

너의 영광이 끝나던 시간에

 

하지만 너는 징조를 남겼다.

 

나는 결코 그 부드러운 곡조를

 

약탈자의 노래에 맞추지 않겠노라고.

 

 

 

우리 둘 헤어질 때

 

          

말없이 눈물 흘리며

 

  우리 둘 헤어질 때

 

여러 해 떨어질 생각에

 

  가슴 찢어졌었지

 

그대 뺨 파랗게 식고

 

  그대 키스 차가웠어

 

이 같은 슬픔

 

  그때 벌써 마련돼 있었지

 

 

내 이마에 싸늘했던

 

  그 날 아침 이슬

 

바로 지금 이 느낌을

 

  경고한 조짐이었어

 

그대 맹세 다 깨지고

 

  그대 평판 가벼워져

 

누가 그대 이름 말하면

 

  나도 같이 부끄럽네

 

 

남들 내게 그대 이름 말하면

 

  그 이름 조종처럼 들리고

 

온몸이 한 바탕 떨리는데

 

  왜 그리 그대 사랑스러웠을까

 

내 그대 알았던 것 남들은 몰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걸

 

오래 오래 난 그댈 슬퍼하리

 

  말로는 못할 만큼 너무나 깊이

 

 

남몰래 만났던 우리--

 

  이제 난 말없이 슬퍼하네

 

잊기 잘하는 그대 마음

 

  속이기 잘하는 그대 영혼을

 

오랜 세월 지난 뒤

 

  그대 다시 만나면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할까?

 

  말없이 눈물 흘리며

 

 

 

길 없는 숲에 기쁨이 있다

 

     '해럴드 공자의 편력' 중에서, 캔토 4, 시 178

 

 

길 없는 숲에 기쁨이 있다

 

외로운 바닷가에 황홀이 있다

 

아무도 침범치 않는 곳

 

깊은 바다 곁, 그 함성의 음악에 사귐이 있다.

 

난 사람을 덜 사랑하기보다 자연을 더 사랑한다

 

이러한 우리의 만남을 통해

 

현재나 과거의 나로부터 물러나

 

우주와 뒤섞이며, 표현할 수는 없으나

 

온전히 숨길 수 없는 바를 느끼기에

 

 

 

 

테네의 아가씨여, 우리 헤어지기 전에

 

                  

 

아테네의 아가씨여 우리 헤어지기 전에

 

돌려주오, 오, 내 마음 돌려주오

 

아니 기왕에 내 마음 떠난 바엔

 

이젠 그걸 가지고 나머지도 가져가오

 

나 떠나기 전 내 언? 들어주오

 

"내 생명이여, 나 그대 사랑하오"

 

 

에게해 바람마다 애무한

 

흘러내린 그대 머리칼에 맹세코

 

그대의 부드러우 뺨에 피어나는 홍조에 입마주는

 

까만 속눈썹이 술 장식한 그대 눈에 맹세코

 

어린 사슴처럼 순수한 그대 눈망울에 맹세코

 

"내 생명이여, 나 그대 사랑하오"

 

 

애타게 맛보고 싶은 그대 입술에 맹세코

 

저 허리띠 두른 날씬한 허리에 맹세코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사연도

 

전해주는 온갖 꽃에 맹세코

 

교차되는 사랑의 기쁨과 슬픔에 맹세코

 

"내 생명이여, 나 그대 사랑하오"

 

 

아테네의 아가씨여! 나는 떠나가리라

 

님이여! 홀로 있을 땐 날 생각하오

 

몸은 비록 이스탄불로 달려갈지라도

 

내 마음과 여혼은 아테네에 있소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리까? 천만에요!

 

"내 생명이여, 나 그대 사랑하오"

 

 

 

 

그녀는 아름답게 걷는다

 

                    

별이 총총한 구름 한점 없는 밤하늘처럼

 

그녀는 아름답게 걷는다.

 

어둠과 빛의 순수는 모두

 

그녀의 얼굴과 눈 속에서 만나고,

 

하늘이 찬연히 빛나는 낮에는 주지 않는

 

부드러운 빛으로 무르익는다.

 

그늘 한 점이 더하고 빛이 한 줄기만 덜했어도 

 

새까만 머리칼마다 물결치고

 

혹은 부드럽게 그녀의 얼굴을 밝혀 주는

 

형언할 바이 없는 그 우아함을 반은 해쳤으리라.

 

그녀의 얼굴에선 사념이 고요히 감미롭게 솟아나

 

그 보금자리, 그 얼굴이 얼마나 순결하고 사랑스런가를 말해 주노라.

 

저 뺨과 이마 위에서

 

상냥하고 침착하나 힘차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미소, 환히 피어나는 얼굴빛은

 

말해 준다. 착하게 보낸 지난날을

 

이 땅의 모든 것과 화목한 마음,

 

순결한 사랑이 깃든 마음을. 

 

 

 

 

이제는 더 이상 헤매지 말자

 

                  

 

이제는 더 이상 헤매지 말자,

 

이토록 늦은 한밤중에

 

지금도 사랑은 가슴 속에 깃들고

 

지금도 달빛은 훤하지만.

 

칼을 쓰면 칼집이 해어지고

 

정신을 쓰면 가슴이 헐고

 

심장도 숨 쉬려면 쉬어야 하고

 

사랑도 때로는 쉬어야 하니. 

 

밤은 사랑을 위해 있고

 

낮은 너무 빨리 돌아오지만

 

이제는 더 이상 헤매지 말자.

 

아련히 흐르는 달빛 사이를......

 

 

 
출생일 1788. 1. 22, 런던
사망일 1824. 4. 19, 그리스 메솔롱기온
국적 영국

요약 시 작품과 특이한 개성으로 유럽인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시집 〈게으른 나날〉을 출판하며 시인의 길로 들어선 그는 상원의원이 된 뒤 그리스를 방문하는 동안 깊은 인상을 받았다. 1812년 상원의원으로서 첫 연설을 했으며, 그해 〈차일드 해럴드의 여행〉이 출판되어 순식간에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이 시는 이국땅을 생생하면서도 시적으로 그려낸 데다가 당시 문학으로서는 처음으로 낭만적인 이상과 현실세계 사이의 불균형을 표현했다. 
한때 그는 방탕한 생활에 빠졌으나 테레사 백작부인을 만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그는 런던의 그리스 위원회로부터 독립전쟁을 하고 있는 그리스인들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는 이 전쟁에 열성적으로 참여해 그리스 병사들을 직접 통솔하기도 하고 비용도 댔다. 하지만 열병에 걸렸고 곧 죽었다. 그는 사사로운 욕심없이 한 나라를 구하고자 애쓴 자의 상징이자 그리스의 국가적 영웅이 되었다.

개요

시 작품과 특이한 개성으로 유럽인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대표작으로 〈차일드 해럴드의 여행 Childe Harold's Pilgrimage〉(1812~18) 과 〈돈 주안 Don Juan〉(1819~24)이 있다. 그리스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가 열병과 출혈로 죽었다.

초기생애와 여행

바이런은 태어날 때부터 다리가 휘어 있었다.

어린시절 어머니와 함께 스코틀랜드의 애버딘으로 가서 적은 수입으로 세를 얻어 살았다. 절름발이라는 사실에 매우 민감했던 소년시절에 애버딘 그래머 스쿨에 다녔다. 조숙해 9세 때 벌써 유모 메이 그레이에게 애정을 느끼게 되었다. 이때의 경험과 먼 친척인 메리 더프와 마가렛 파커에 대해 머리 속에서 그려낸 사랑 때문에 여성에 대해 모순된 태도를 갖게 되었다.

10세 때 '부도덕한' 큰아버지 바이런 경의 칭호와 재산을 물려받게 되자 어머니는 자신에 차서 잉글랜드로 데리고 갔다.

바이런은 오래전에 헨리 8세가 바이런 집안에 준 뉴스테드 저택의 유령이 나올 것 같은 홀과 넓은 정원을 좋아해서 어머니와 함께 폐허가 된 그곳에서 한동안 살았다. 노팅엄에서 개인교습을 받았으며, 라벤더라는 돌팔이의사로부터 다리 치료를 받았다. 어머니의 변호사 존 한슨은 바이런이 메이 그레이의 나쁜 영향과 엉터리 치료사 라벤더, 어머니의 변덕스러운 성격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었다. 또 그는 바이런을 런던으로 데리고 가서 유명한 의사가 지시한 특수한 교정기를 쓰게 했으며 1799년 가을 덜위치에 있는 학교에 보내주었다.

1801년 해로 스쿨에 입학해 그곳의 소년들과 친해지면서 학교에 낭만적인 애착을 갖게 되었다.

그들과의 우정을 통해 성적(性的)으로 이중적인 경향을 갖게 되었으며, 이러한 점은 뒷날 케임브리지나 그리스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1803년 여름을 어머니와 함께 노팅엄 근교의 사우스웰에서 보냈지만 곧 뉴스테드로 달아나 차가인(借家人)인 그레이 경과 함께 지내면서 그레이 경의 먼 친척인 메리 초워스에게 구애를 했다. 그러나 그녀가 '절름발이 소년'에 대해 싫증을 느끼자 우울한 시를 써 슬픔에 빠져들었는데 이 시에서 그녀는 이상화된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상징이 되었다.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1학기를 보낸 뒤, 런던에서 방탕하게 생활했기 때문에 많은 빚을 졌다.

1806년 여름에 사우스웰로 돌아와 초기시를 책으로 묶어서 11월에 〈덧없는 시편들 Fugitive Pieces〉이라는 제목의 시집을 자비(自費)로 인쇄했다. 이듬해 6월에는 처음으로 시집 〈게으른 나날 Hours of Idleness〉이 출판되어 정식으로 선보였다. 트리니티로 돌아와 존 캠 호브하우스와 밀접한 교류를 하게 되면서 진보적인 휘그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08년초 런던에서 '관능의 심연'에 빠져 건강을 해쳤다.

1809년 1월에 상원의원이 되었으며, 익명으로 풍자시 〈잉글랜드 시인과 스코틀랜드 비평가 English Bards and Scotch Reviewers〉를 출판했다. 그뒤 하브하우스와 긴 여행길에 올랐다. 배로 리스본에 가서 스페인을 횡단해 지브롤터를 지나 몰타까지 갔다. 그곳에서는 어떤 유부녀를 사랑하게 되어 그녀 때문에 결투를 벌이기도 했다.

그뒤 두 사람은 그리스의 프레베자에 와서 내륙여행을 시작해 자니나(요아니나)로 갔으며 알리 파샤를 방문하기 위해 알바니아의 테펠레네에도 갔다. 돌아오는 길에 자니나에서 자전적인 시 〈차일드 해럴드의 여행〉을 쓰기 시작해 아테네까지 여행할 동안 계속 썼다. 그들이 하숙한 집 과부의 딸 테레사 마크리를 바이런은 '아테네의 처녀'라고 찬미했다. 1810년 3월 하브하우스와 함께 스미르나를 거쳐 콘스탄티노플에 갔으며, 헬레스폰트 어귀에서 바람이 자서 배가 더이상 갈 수 없자 트로이의 옛터를 방문하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레안드로스를 흉내내 해협을 헤엄쳐서 건넜다.

바이런이 그리스에서 지내면서 받은 인상은 오래도록 남았다. 그는 햇빛과 그리스인들의 도량을 즐겼다.

1811년 7월 14일 런던에 도착했으나 뉴스테드의 어머니 곁에 가기 전 8월 1일 어머니가 죽었다. 1812년 2월 27일 상원의원으로서 첫 연설을 했으며, 3월초에 〈차일드 해럴드의 여행〉이 존 머리에 의해 출판되어 순식간에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이 시는 이국땅을 생생하면서도 시적으로 그려낸 데다가 프랑스 혁명이 끝난 뒤 나폴레옹 통치기간 동안의 우울함과 환멸을 표출했다.

당시 문학으로서는 처음으로 솔직하게 낭만적인 이상과 현실세계 사이의 불균형을 표현했다. 바이런은 휘그파 모임에서 명사 취급을 받았으며, 이 절름발이 미남 시인은 정열적인 캐롤라인 램 부인, 중년의 옥스퍼드 부인, 이복누이인 오거스타 리, 프랜시스 웹스터 부인 등과 사귀었다. 연애로 인한 흥분과 묘한 죄책감과 기쁨이 이무렵에 쓴 동방의 이야기에 반영되어 있다. 결혼해 도망갈 계획을 세우고 1814년 9월에 앤 이사벨라(안나벨라) 밀뱅크에게 청혼했고, 1815년 1월 2일 결혼했다.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닌 신혼여행을 마치고 3월에 런던에 정착했다. 뉴스테드를 파는 문제가 지연되어 재정적인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곧 집이 압류되었고 자신의 출판업자인 존 머리의 집으로 피신했다. 오거스타 리가 찾아오자, 빚과 안나벨라의 신경과민 때문에 화난 바이런은 술김에 횡설수설하며 자신의 과거 죄에 대해 암시하기도 했다.

12월 10일 아내가 딸 오거스타 에이다를 낳았으나 다음해 1월에 딸을 데리고 친정으로 간 뒤 그에게 돌아오지 않겠다고 알렸다.

그녀가 이렇게 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소문만 무성했는데 주로 바이런과 오거스타 리의 관계에 관심이 모아졌다. 소문이 커지자 바이런은 법적으로 이혼을 하고 외국으로 간 뒤 영국에 돌아오지 않았다.

외국 생활

워털루 전투지를 방문한 뒤 스위스에 갔다.

제네바 근처의 빌라 디오다티에서 시인 퍼시 비시 셸리와 그의 아내이자 윌리엄 고드윈의 딸인 메리, 고드윈이 2번째 결혼으로 얻은 의붓딸 클레어 클레어먼트와 사귀었는데, 클레어먼트는 영국을 떠나기 전 바이런과 특별한 사이였다고 넌지시 말한 적이 있다. 셸리와 함께 보트로 호수 입구까지 간 것을 소재로 해 〈시용의 죄수 Prisoner of Chillon〉를 썼으며 디오다티에서 〈차일드 해럴드의 여행〉을 완성했다. 여름이 다 갈 무렵 셸리 일행은 영국으로 갔는데 클레어먼트는 바이런의 사생아인 딸(1817. 1. 12 출생, 이름을 알레그라라고 바이런이 지어줌)을 데리고 갔다.

하브하우스와 함께 한 베른 오버란트 산맥 여행은 〈맨프레드 Manfred〉의 배경이 되었다. 이 작품은 파우스트적인 시극으로서 내면에 깔린 죄책감과 회한, 인간은 "반은 먼지요 반은 신이며, 가라앉을 수도 비상할 수도 없다"라는 구절에 담겨 있다시피 낭만주의 정신의 좌절을 표현했다.

10월 5일 바이런은 하브하우스와 함께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는 베네치아 포목상의 집에 묵었는데, 검은 눈을 가진 안주인 마리안나 세거티와 사랑에 빠졌다. 산라자로 수도원에서 아르메니아어를 공부했으며, 가끔 그 지방의 문학모임에도 참석했다. 5월에 로마에서 하브하우스와 만나 유적을 돌면서 인상적인 부분은 〈차일드 해럴드의 여행〉 제4편에 기록했다. 브렌타 강변의 라미라에 있는 여름 별장에서 이탈리아의 풍습을 신나게 풍자한 〈베포 Beppo〉를 썼다. 이곳에서 빵 제조업자의 아내 마르가리타 코그니를 만났다.

그녀는 베네치아까지 그를 따라와 결국 마리안나 세거티를 물리치고 그의 사랑을 받았다. 1818년 여름 동안 자신의 경험과 직접 관련된 사실적인 풍자시 〈돈 주안〉의 제1편을 완성했다. 클레어는 사생아 알레그라를 그가 양육하라고 보냈으며 계속 충고를 해 귀찮게 했다.

뉴스테드 저택이 팔려서 마침내 대부분의 빚을 갚고 적은 수입도 얻게 되었다.

1818년에 셸리를 비롯한 사람들이 그를 방문했을 때, 그는 살이 찌고 머리는 길며 백발로 변해 나이보다 늙어보였으며 방탕한 생활에 빠져 있었다. 1819년 4월에 테레사 구이치올리 백작부인을 우연히 만나면서 인생의 방향이 바뀌었다.

19세 때 나이가 거의 3배나 많은 남자와 결혼한 테레사를 만나자 며칠 만에 사랑에 빠졌다. 바이런은 라벤나까지 쫓아갔으며 그들은 베네치아에 돌아와 남편이 데리러 올 때까지 함께 지냈다. 바이런은 테레사의 시종 자격으로 1820년 1월에 다시 라벤나에 갔다. 여기에서 테레사의 아버지, 오빠와 친해져서 그들의 소개로 비밀혁명단체인 카르보나리당에 들어갔으며 이탈리아인의 생활을 어느 때보다 가깝게 접할 수 있었다. 그는 카르보나리당에 무기를 주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호품을 주었다. 이때가 일생중에서 가장 행복하고 생산적인 시기였다.

〈단테의 예언 The Prophecy of Dante〉과 〈돈 주안〉의 3편(canto), 시극(詩劇) 〈마리노 팔리에로 Marino Faliero〉·〈사르다나팔로스 왕 Sardanapalus〉·〈포스카리 The Two Foscari〉·〈카인 Cain〉 등은 모두 1821년에 출판되었으며, 시인 로버트 사우디를 풍자한 〈심판의 계시 The Vision of Judgment〉를 썼다. 그러나 반란이 실패하여 테레사의 아버지와 오빠가 추방되고 남편과 헤어진 테레사도 그들을 따라 가버리자 바이런은 어쩔 수 없이 피사로 와서 셸리가 빌려준 아르노 강변의 카사랑프란치에서 살게 되었다.

1821년 11월 1일 그는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딸 알레그라를 라벤나 근교의 수녀원에서 교육받도록 맡기고 왔는데 그녀는 이듬해 4월 20일에 죽었다. 테레사의 아버지와 오빠가 피사에서 임시 피신처를 마련하고 있어서 바이런은 매일 그녀를 방문했고, 그해 초여름에 그들이 레그혼에 가버리자 바이런도 셸리가 사는 레리치 만 가까이에 별장을 빌려놓았다. 레그혼에서는 시인 리 헌트가 셸리와 바이런의 새 잡지 참여를 권유하기 위해 영국에서 찾아와 7월 1일 바이런과 만났다.

헌트와 그의 가족은 피사에 있는 바이런의 집 아래층에 머물게 되었고 바이런과 테레사도 그녀의 아버지와 오빠가 토스카나에서 쫓겨난 뒤에 피사로 돌아왔다. 7월 8일 셸리가 물에 빠져 죽자 헌트는 바이런에게 완전히 의지했고, 바이런은 그의 여행비와 아파트 얻을 돈을 빌려주었다. 헌트는 좋은 친구였지만 그의 아내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아이가 6명이나 되어서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다. 9월말 바이런은 테레사의 가족이 피신해 그가 살 큰 집을 마련해놓은 제노바의 교외로 이사했다.

셸리의 부인 메리는 헌트가(家)와 함께 살 집을 그 근처에 따로 얻었다. 헌트의 형제 존이 런던에서 간행한 새 잡지 〈리버럴 The Liberal〉의 첫호에 〈심판의 계시〉를 기고했다(1822. 10. 15).

바이런은 잡지에 대한 관심이 식었으나 헌트를 계속 도왔고 〈리버럴〉에 원고를 보냈다. 출판업자인 존 머리와 다툰 뒤에는 〈돈 주안〉의 제6~16편과 〈청동시대 The Age of Bronze〉·〈섬 The Island〉 등 후기작품도 존 헌트에게 주었다. 테레사와 함께 가정을 꾸리고 쉬면서 조국에 자신의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열망하던 중, 1823년 4월에 런던의 그리스 위원회로부터 투르크에 대항해서 독립전쟁을 하고 있는 그리스인들을 돕는 요원으로서 활동해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였다(그리스 독립전쟁).

바이런은 7월 16일 전세배를 타고 제노바를 떠나 8월 2일 이오니아 제도의 케팔로니아 섬에 도착해 메타사타에 자리잡았다.

그는 그리스 군함을 마련하려고 4,000파운드를 보냈으며 12월 29일에 서부 그리스 부대의 지도자인 알렉산드로스 마브로코르다토스 왕자와 합류하려고 메솔롱기온으로 갔다.

그는 투르크가 장악한 레판토 요새를 공격하는 계획을 세우는 데 매우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포병대에 발사전문가를 고용하고, 그리스에서 가장 용감한 솔리옷 병사들을 직접 통솔했으며 비용도 댔다. 또한 파당을 화해시켜 그리스 서부와 동부를 통합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1824년 2월 15일 심한 병과 통상적인 사혈(瀉血)요법에 의해 몸이 약해진 데다가 솔리옷군이 일으킨 반란을 통해 그들의 탐욕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리스를 위한 열정이 줄지는 않았지만 좀더 현실적으로 문제를 보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케팔로니아에서 데려온 시종이며 마지막 고통에 찬 시를 써서 보내기도 한 그리스 소년 루카스 찰란드리트사노스와 가끔 불화가 생겨 정신적인 고통을 느꼈다. 그는 살로나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할 계획을 세웠으나 열병에 걸렸고 의사가 고집한 사혈요법으로 병이 더 악화되어 곧 죽었다.

그리스 전체가 그의 죽음을 슬퍼했으며, 그는 사사로운 욕심없이 한 나라를 구하고자 애쓴 자의 상징이자 그리스의 국가적 영웅이 되었다. 시체는 영국으로 옮겨졌으나 웨스트민스터 대사원의 안치가 거부되어 뉴스테드 근처에 있는 집안 납골당에 묻혔다. 묘하게도 145년 뒤인 1969년에 그를 기념하는 비가 웨스트민스터 대사원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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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3일, 아시아와 유럽을 나누는 터키의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는 수영대회가 열렸다. 200년 전에 이곳을 헤엄쳐 건넌 어느 영국인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였다. 스물두 살의 나이에 에게해와 흑해를 잇는 4㎞의 물길을 맨몸으로 헤엄쳐 수영을 스포츠의 하나로 만든 그는 영국의 귀족이며 시인인 바이런(1788~1824)이었다. 

바이런의 무모한 도전 덕분에 오늘날 올림픽 종목에 수영이 포함됐다. 바이런도 생전에 자신의 가장 큰 성취는 (시가 아니라!) 다르다넬스 해협을 헤엄친 일이라고 자랑했다. 태어나면서부터 다리를 약간 절던 그는 땅에서는 누리지 못했던 자유를 누리며 거친 물살을 갈랐을 게다. 1810년에 4㎞를 1시간 10분 만에 헤엄쳤다고 하는데, 그로부터 200년 뒤인 2010년에 바이런을 흠모하여 폭이 5㎞인 다르다넬스 해협 횡단에 참여한 139명의 젊은이 중 최단기록은 1시간 27분이었다. 바이런은 수영뿐만 아니라 권투와 승마에도 능한 스포츠맨이었다. 

바이런을 말하려면 하루 종일 떠들어도 모자란다. 그는 블레이크의 뒤를 이어 영국의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이며, 철학자이며(바이런은 버트런드 러셀이 저술한 ‘서양철학사’에 당당히 한 장을 차지한다), 당대 최고의 유명인사였고, 가는 곳마다 스캔들을 남긴 바람둥이였고, 그를 본 여자들은 숨이 막힐 만큼 아름다운 외모의 매력남이었고, 매일 밤 머리에 컬을 고정시키는 종이를 붙이고 잠을 자는 멋쟁이였고, 러다이트 운동을 열렬히 옹호한 사회개혁가였고, 그리스의 독립을 위해 직접 총을 든 영웅이었다. 그리스·터키 전쟁에 참전해 얻은 열병으로 36세에 죽음으로써 바이런의 신화는 완성됐다. 
 

 

아시아와 유럽을 나누는 해협을 헤엄친 뒤에 영국으로 돌아온 바이런을 하루아침에 유명인사로 만든 시집,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Childe Harold’s Pilgrimage)에 실린 ‘이네즈에게’(To Inez)를 감상하며 바이런 찬사를 끝맺어야겠다.
 

아니, 우울한 내 이마에 미소 보내지 말아요. 

아! 나는 다시 웃을 수 없으니. 

그러나 하늘이 그대에게서 울음을 거두어 주기를,

아마도 헛된 눈물일 테지만. 

즐거움과 청춘을 녹슬게 하는 어떤 내밀한 고뇌를

내 가슴에 감추고 있냐고 그대는 묻는가? 

그대도 달랠 수 없는 이 깊은 고통을 

알려고 헛되이 애쓰지 마세요. 

나의 현재 상태를 견디지 못해, 

내가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것에서 날 떠나게 하는 것은

사랑도 미움도 아니지요. 

천한 야심이 얻은 명예를 잃어서도 아니지요. 

내가 만나고, 듣고 본 모든 것에서부터 

솟아난 권태 때문입니다. 

어떤 미인도 날 즐겁게 하지 않으니; 

그대의 눈도 나를 매혹하기 힘들지요. 

……(중략) 

저주스런 추억 가득 안고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아야 하는 나; 

내가 아는 유일한 위안은, 

무슨 일이 일어나건, 이미 내가 최악(最惡)을 경험했다는 것.

그 가장 나쁜 일이 무엇이냐고 묻지 마세요- 

연민이 있다면 알려고 하지 마세요. 

남의 마음속을 들춰서 

거기 있는 지옥을 엿보려 하지 말고, 다만 미소를 보내주세요.

Nay, smile not at my sullen brow, 

Alas! I cannot smile again: 

……(중략) 

It is not love, it is not hate, 

Nor low Ambition’s honours lost, 

That bids me loathe my present state, 

And fly from all I prized the most: 

It is that weariness which springs 

From all I meet, or hear, or see: 

To me no pleasure Beauty brings; 

Thine eyes have scarce a charm for me. 

……(중략) 

Through many a clime ‘tis mine to go, 

With many a retrospection curst; 

And all my solace is to know, 

Whate’er betides, I’ve known the worst. 

What is that worst? Nay, do not ask - 

In pity from the search forbear: 

Smile on--nor venture to unmask 

Man’s heart, and view the hell that’s there 

* 
 

아, 바이런. 저주받은 시인이여. 이런 노티 나는 시를 썼을 때 그의 나이 겨우 스물두 살이었으니. 바이런의 생몰 연대를 확인하고 나는 한숨짓는다. 이토록 깊은 회한을,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달랠 수 없는 고뇌를 이십대에 이미 알았으니 서른여섯 살에 낯선 땅에서 죽을 수밖에.

[출처: 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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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1788~1824)은 문학사상 최고의 미남에다 연애대장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서양철학사>에서 시인으로는 유일하게 거론, 한 장을 마련해주고 있다. ‘사악한’ 귀족이던 종조부(큰할아버지)의 남작 작위를 승계한 이 시인이 “찬미한 자유란 독일 왕이나 체로키 인디언 추장의 자유이지 일상의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하거나 향유할 수 있는 열등한 자유가 아니었다”(<서양철학사> 서상복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고 러셀은 말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자유가 “열등한” 것이란 표현에는 동조할 수 없지만 바이런이 추구했던 악마적인 ‘자유’의 실체에 대한 설명으로는 매우 설득력이 있다.

노동권 옹호한 만능 스포츠맨

그의 모험담들, “자유사상가들의 용기를 뛰어넘는 죄”의 실체를 러셀은 “바이런 가문에 속한 이스마엘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라고 규명한다. 그는 사탄에 카인이며, 프로메테우스이자 아폴론, 돈 판(돈 후안)이자 카사노바다.

키 174cm, 몸무게 60~89kg 사이를 오락가락했던 그는 잔혹한 다이어트로 날씬함을 유지했고, 태어나면서 절름발이였지만 복싱·승마·수영·크리켓·펜싱 등 스포츠 만능으로 불릴 만큼 몸을 단련했다.

상원의원 바이런이 한 첫 국회 연설은 노팅엄 양말공장 노동자의 폭동을 진압 위주에서 고통 경감으로 바꾸라고 비판한 것(1812년 1월15일)이었고, 두 번째 발언은 노동자를 불행하게 만드는 노동법의 부당성을 비판(2월27일)한 것이었다.

세계 노동운동사에서 ‘러다이트 운동’으로 기록된 이 투쟁은 1760년대부터 1830년대에 걸친 한 흐름이었다. 산업혁명 뒤 기계화로 편직(編織) 노동자의 해고가 급증하자 이에 반대한 노동자들이 밤중에 6~50명씩 무리지어 고용주의 편물기기를 부수는 투쟁이 영국에선 1811~17년에 고조됐다. 양말 제조업체에선 1811~12년, 레이스 제조 기계들에 대한 투쟁은 1816년에 절정을 이뤘다.


이복누나와의 불륜

 

스위스 몽트뢰의 시옹성(왼쪽 사진). 지하감옥 벽에 바이런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오른쪽 사진). 임헌영

러다이트 운동의 원인은 “기계 도입에 따른 폐해뿐만 아니라 임금수준의 저하, 실업의 증대, 물가 상승, 노동자의 권익 침해 등”(<세계 노동운동사> 1권 120~137쪽, 김금수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으로 현대 노동운동과 비슷했다.

운동이 격화될수록 징역형에서 사형으로 대응하자 바이런은 폭도, 난동분자, 위험분자, 무식꾼인 폭도로 몰아대는 그들의 노동으로 우리가 밥을 먹으며, 육해군 병력의 원천이라고 윽박질렀다.

누를 길 없는 바람기를 잠재울 상대로 선택한 밀뱅크와의 결혼은 이내 파탄 났는데, 바이런의 이복누나로 6살 연상인 오거스타와의 불륜 때문이었다. 밀뱅크는 남편을 영국에서 추방당하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둘 사이의 딸(에이다 러브레이스)은 수학의 천재로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머의 이론적인 제공자로 유명하다. 러셀은 “무의식적으로 연인이 아닌 어머니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오거스타 이외의 모든 여인은 그에게 실망만 안겨주었다”고 썼다.

바이런이 1816년 28살에 추방당해 36살 그리스에서 죽을 때까지의 8년간은 가히 로맨티시즘의 태풍이었다. 그해 6월23일 셸리와 함께 루소의 <신엘로이즈>의 무대를 찾아다니다가 몽트뢰의 시옹성을 참관했다. 스위스 제네바 호반의 이 성은 애국자이자 종교개혁 운동가인 보니바르가 성주 사보이에게 핍박당해 1530~36년 투옥된 감옥으로 악명 높다. 사보이가 통치하던 이 지역은 가톨릭에 절대권력 통치였으나 보니바르는 신앙혁명과 제네바의 독립을 동시에 추구했다.

바이런의 시옹성 관련 시는 너무나 유명하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지하 일곱 번째가 감옥이고, 셋째 기둥에 바이런 서명이 각자되어 있으며, 다섯째 기둥에 보니바르가 묶여 있었다고 전한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55대 총독 반란 사건을 다룬 시극 <마리노 팔리에로>를 잊을 수 없다. 총독이지만 귀족이 아니었기에 함부로 모욕당한 팔리에로가 노동자를 선동해 반란을 일으켜, 처형당한 희귀한 사건이다. 팔리에로는 총독 자리를 포기하고 “국가의 자유”를 되찾으려 했고, 폭군으로 사느니 시민의 손에 쓰러질 각오를 하며 폭군의 대리인은 아니라고 했다.

타국 독립전쟁 참전과 죽음

이 미남 천재의 최후의 장렬한 장면은 그리스 독립전쟁 근거지였던 메솔롱기에서 보게 된다. 세르반테스가 참전해 부상한 것으로 유명한 레판토 해전 전적지를 지나, 바이런이 1824년 1월에 상륙했던 메솔롱기에 이르면 한적한 마을이 온통 바이런으로 차 있다. 유적과 기념상, 특히 메솔롱기 바이런 협회는 세계 바이런 관련 학자들과 많은 행사를 열고 있었는데, 한국의 학자들도 꼭 참여해달라고 당부했다.

바이런은 이 독립전쟁에서 그리스군을 위해 재원과 군사훈련을 아끼지 않고 전력투구했다. 레판토 침공 작전을 논의하던 중 열병으로 서거한 이 위대한 로맨티시스트 혁명시인의 투지는 오늘도 유효하다.

그리스인들은 오늘날 바이런을 국민적 영웅으로 받들고 있다.

/임헌영 문학비평가·민족문제연구소 소장

 

♤ 바이런의 일화 "어머니의 손수건" ♤




영국의 시인 바이런은 남달리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성격이었다.하지만 그는 다리를 저는 신체적 장애 

때문에 사랑을 잃어야 했다. 바이런은 고등학교 

시절 마리 차워즈를 사랑했다.짝사랑으로 가슴앓이

하던 그는 아침햇살에 이슬을 머금은 장미꽃 봉오리를


볼 때는 은빛 가루를 뿌린 듯한 달빛 아래를 걸을 때면,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고백할 수 없었다.우연히 

마리가 자신의 다리를 흉보는 말을 엿들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자신을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사랑을 포기하지 못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바이런은 그녀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이제는 오랜 짝사랑을 끝내야 할 때가 

된 것을 알고 그는 매일 마음속에서 혼자 이별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그를 불렀다. 

어머니는 예쁜 손수건을 몇 개 내놓으며 아들에게 

마음에 드는 손수건을 한 장 고르게 하고 그것을 

눈 밑에 대라고 말했다.어머니의 엉뚱한 행동에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그는 시키는 대로 했다. 

“마리가 결혼했다는구나. 마음놓고 울거라.” 







어머니는 바이런이 마음속에만 담아 둔 애틋하고 

지극한 사랑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할까 고민했던 것이다. 

하지만 바이런은 울지 않았다. 

애써 평온을 가장하고 손수건을 고르게 했던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조용히 웃으며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그 아픈 마음을 시로 써 가기 시작했다. 

바이런은 사랑을 잃고 시를 얻었던 것이다. 

- 좋은 생각 - 중에서    

 

조지 고든 바이런_젊음과 반항의 상징인 낭만주의자

 

얻은 이때, 그의 나이는 28세에 불과했다.

그녀는 예쁘게 걸어요, 구름 한 점 없이
별 총총한 밤하늘처럼.
어둠과 빛의 그중 나은 것들이
그네 얼굴 그네 눈에서 만나
부드러운 빛으로 무르익어요,
난(亂)한 낮에는 보이지 않는.

어둠 한 겹 많거나 빛 한 줄기 모자랐다면
새까만 머리타래마다 물결 치는
혹은 얼굴 부드럽게 밝혀주는
저 숨막히는 우아함 반이나 지워졌을 거예요.
밝고 즐거운 생각들이 그 얼굴에서
그곳이 얼마나 순결하고 사랑스러운가 알려줘요.

그처럼 상냥하고 조용하고 풍부한
뺨과 이마 위에서
사람의 마음 잡는 미소, 환한 얼굴빛은
말해 줘요, 선량히 보낸 날들을,
지상의 모든 것과 통하는 마음을,
그리고 순수한 사랑의 피를.

([그녀는 예쁘게 걸어요] 중에서, 황동규 번역)

유럽을 방랑하고 그리스에서 불멸의 생을 마치다

 

바이런은 얼굴이 워낙 아름다워서, 그를 보자마자 기절한 여성도 있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두 가지 신체적 약점이 있었다. 첫째는 다리를 저는 것이었고, 둘째는 쉽게 살찌는 것이었다. 체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이런은 식사를 적게 했으며, 종종 설사약을 복용하는 과격한 방법으로 몸을 관리했다.

바이런은 얼굴이 워낙 아름다워서, 그를 보자마자 기절한 여성도 있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두 가지 신체적 약점이 있었다. 첫째는 다리를 저는 것이었고, 둘째는 쉽게 살찌는 것이었다. 체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이런은 식사를 적게 했으며, 종종 설사약을 복용하는 과격한 방법으로 몸을 관리했다.

 

영국을 떠난 바이런은 스위스의 제네바에 한동안 머물렀다. 머지않아 영국 출신의 시인 퍼시 비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와 그의 부인 메리 고드윈(Mary Godwin), 그리고 메리의 이복자매인 클레어 클레어먼트(Claire Clairmont)가 찾아왔다. 바이런과 마찬가지로 귀족 출신이었던 셸리는 평소에 흠모하던 철학자 윌리엄 고드윈(William Godwin)을 찾아갔다가, 그의 딸인 메리와 사랑에 빠졌다. 메리의 어머니는 [여성의 권리](1792)의 저자로 유명한 선구적인 여성운동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였다.

 

하지만 당시 셸리는 이미 다른 여자와 결혼한 상태였다. 메리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셸리는 부득이하게 해외 도피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이때 메리의 이복자매인 클레어도 두 사람을 따라왔다. 열정적인 성품의 바이런과 침착한 성품의 셸리는 여러 모로 대조적이었지만, 자유와 예술을 향한 포부와 열망을 지닌 까닭에 금세 의기투합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원고를 바꿔 읽으며 논평을 해주고, 밤새도록 문학 토론을 벌이면서 피차 깊은 영향을 주고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바이런은 여행 중에도 숱한 여성과 염문을 뿌렸는데, 베네치아에 머무는 동안에는 무려 2백 명을 넘게 사귀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1817년 1월에 클레어가 바이런의 딸 알레그라(Clara Allegra Byron)를 낳았다. 바이런은 이 아이를 딸로 인정해서 양육비를 지원했지만, 클레어에 대해서는 직접 만나기도 거부할 정도로 냉담하게 대했다. 이 시기에 바이런이 발표한 주요 작품으로는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 3부(1816)와 4부(1817), 그리고 훗날 슈만의 음악으로 더 유명해진 시극 [맨프리드(만프레드)](1817) 등이 있다.

 

 

 

1819년에 바이런은 숱한 여성 편력 가운데 마지막 단계에 접어든다. 상대는 19세의 테레사 귀치올리 백작부인(Countess Guiccioli)이었다. 바이런은 그녀를 따라 라벤나로 거처를 옮겼고, 끝내 미완성으로 남게 될 장시 [돈 후안](1819~1824)을 쓰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바이런은 문학이나 쾌락에 대한 관심보다도 오히려 정치에 대한 관심이 더 컸던 것으로 전한다. 특히 그가 오스트리아의 지배에 반대하는 이탈리아인의 비밀결사인 카르보나리에 가담한 것은 십중팔구 귀치올리 백작부인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1821년에 무장 봉기가 실패하고 귀치올리 백작부인의 친정 식구들이 줄줄이 라벤나에서 추방되자, 바이런도 애인을 따라 피사로 거처를 옮겼다. 1822년에는 연이어 비극이 벌어진다. 4월에는 클레어가 낳은 딸 알레그라가 사망했고, 7월 8일에는 셸리가 라스페치아 만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 돌풍을 만나 익사한다. 바이런을 비롯한 친구들은 바닷가로 떠밀려 온 셸리의 시신을 수습하여 화장했는데, 불이 꺼진 뒤에도 셸리의 심장은 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1823년 12월 30일, 바이런은 이탈리아의 제노바를 떠나 그리스의 메솔롱기온으로 간다. 15세기부터 계속되던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그리스 독립 운동에 적극 동조한 까닭이었다. 비록 군대 경험은 없었지만 바이런은 그리스 반군과 힘을 합쳐 코린트만의 적 요새를 급습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1824년 2월 초에 그는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진다. 의사들이 사혈(혈관을 절개해 피를 빼내는 치료법)을 시도했지만 효과가 없었고, 오히려 그의 명을 재촉했다고 추정된다.

 

1824년 4월 19일, 조지 고든 바이런은 영국을 떠난 지 8년 만에 그리스의 메솔롱기온에서 36세의 나이로 갑작스레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방부 처리가 되어 영국으로 옮겨졌지만, 일설에는 심장만을 따로 떼어내 현지에 묻었다고도 한다. 웨스트민스터 예배당에서는 바이런의 좋지 않은 평판을 의식한 듯 매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그의 시신은 그해 7월 16일에 가문의 영지인 뉴스테드의 한 교회에 묻혔고, 한 세기가 더 지난 1969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웨스트민스터 예배당의 시인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바이런이 남긴 미간행 원고 중에는 회고록도 있었다. 자기가 겪은 여러 사건에 대한 솔직한 기록이라고 했는데, 항상 주색에 탐닉했던 바이런의 성향으로 볼 때 십중팔구 스캔들을 일으킬 내용으로 짐작되었다. 그의 사후에 원고를 보관하던 출판인 존 머레이(John Murray)는 바이런의 유족과 지인들, 그리고 변호사와 상의한 끝에 이 원고를 여러 증인 앞에서 벽난로에 집어넣어 불태워 버렸다. “별 내용 없었다.” 그 원고를 읽은 메리 셸리의 단언에도 불구하고, 바이런의 불타버린 원고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이렇게 밤 이슥토록
우리 다시는 방황하지 않으리
마음 아직 사랑에 불타고
달빛 아직 밝게 빛나고 있지만.

칼날은 칼집을 닳게 하고
영혼은 가슴을 해어지게 하는 것이니
마음도 숨돌리기 위해 멈춤이 있어야 하고
사랑 자체에도 휴식이 있어야 하리.

밤은 사랑을 위하여 이루어진 것
그 밤 너무 빨리 샌다 해도
우리 다시는 방황하지 않으리
달빛을 받으며. 

([다시는 방황하지 않으리], 황동규 번역)

인간 바이런, 그리고 바이런적 인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기 작가였지만, 오늘날 바이런은 문학사에서나 대중의 인기에서나 동시대의 다른 시인에 비해서는 덜 주목을 받는 편이다. 당시에는 그보다 인기가 못했던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나 키츠(John Keats)나 셸리가 새로운 시도와 혁신의 공로를 인정받아 불멸의 지위에 오른 반면, 신작이 나왔다 하면 초판본 수만 부가 며칠 만에 동났던 바이런은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진 작가로 여겨진다. 비록 생애는 누구 못지않게 파격적이었지만, 시를 짓는 데에서는 바이런이야말로 오히려 보수적 성향이었던 까닭이다.

 

기교에서도 바이런은 피상적이고 섬세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종종 받는다. 언어의 압축성이나 비유의 신선함에서도 아주 돋보이는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특유의 감상주의와 장광설은 당대의 독자들에게는 사뭇 호소하는 바가 컸을지 모르지만, 세월이 흐르고 시의 판단 기준이 바뀌자 오히려 외면 받는 원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런의 시는 그 솔직함, 정열, 위트에서 여전히 남다른 매력을 지닌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불필요한 유리구슬이 이따금씩 섞인 고급 진주 목걸이,” 그것이 바로 바이런의 시였다.

 

“나는 절대로 글을 고쳐 쓰지 않는다.” 바이런은 퇴고라는 말 자체를 몰랐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적으면 시가 되었다고 스스로도 회고했다. 바이런의 시가 수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지닌 매력은 바로 그 단순성과 생생함에 있다. 선이 굵다는 것, 즉 섬세하지 못한 대신에 번역을 거쳐도 의미가 많이 손상되지 않는다는 것도 강점이다. 바이런의 시가 당대에 영국보다는 오히려 유럽의 다른 여러 나라에서, 그리고 비평가보다는 오히려 대중에게서 더 인기를 얻었던 것도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알바니아 민속의상 차림의 바이런. 그의 출세작인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는 유럽 각지를 여행한 경험이 투영된 작품으로, 이국적인 배경에서 자유와 반항의 정서를 열정적인 언어로 서술해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당대의 인기에 비해 오늘날은 통속적이라고 폄하되는 경향이 있지만, 가슴에서 우러난 솔직한 표현은 어느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바이런만의 매력으로 여겨진다.

알바니아 민속의상 차림의 바이런. 그의 출세작인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는 유럽 각지를 여행한 경험이 투영된 작품으로, 이국적인 배경에서 자유와 반항의 정서를 열정적인 언어로 서술해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당대의 인기에 비해 오늘날은 통속적이라고 폄하되는 경향이 있지만, 가슴에서 우러난 솔직한 표현은 어느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바이런만의 매력으로 여겨진다.

 

 

 

오늘날 바이런의 시보다도 더 유명한 것은 이른바 ‘바이런적 주인공’(Byronic hero)이다. 겉으로는 무모하고 난폭하지만, 속으로는 따뜻하고 열정적이며, 과거를 떠올릴 때면 알 수 없는 죄의식과 우울함에 사로잡히는 남자 주인공, 현대의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는 고독한 늑대 스타일의 전형적인 남자 주인공은 바이런의 창조물이다. 물론 ‘바이런적 주인공’이 실존 인물 ‘바이런’은 아니었지만, 당대의 독자들은 이 두 가지가 똑같다고 생각해서 더욱 열광해 마지않았다.

 

대중의 열광과는 반대로 바이런을 ‘악마’로 지칭한 비판자도 있었다. 가령 워즈워스는 그를 “괴물”이라고 불렀으며, 콜리지(Samuel Coleridge)는 “악마[사탄]적”이라고 불렀으며, 사우디(Robert Southey)는 “악마[사탄]파 시인의 우두머리”라고 일컬었다. 인습타파주의자인 바이런은 오히려 이런 악명을 즐긴 듯하다. 그의 발언이나 작품에는 실제보다 과장해서 자신을 악당으로 묘사하는 위악적인 태도가 종종 드러난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합리성에 대항한다는 점에서 바이런을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선구자로 간주하기도 했다.

 

바이런의 모순적인 기질은 정신의학 쪽에서도 관심의 대상이다. 조울증 전문가인 케이 재미슨은 바이런에 관한 문헌 자료를 근거로 그를 조울증 환자로 진단한다. 즉 바이런이 일종의 열광 상태에서 써내려간 걸작 시들은 ‘조증’ 상태의 발현이며, 종종 억누를 수 없이 터져 나온 분노와 기행은 ‘울증’ 상태의 발현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조울증은 시인을 비롯한 예술가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질환임을 고려해 보면 일리는 있다. 물론 조울증 환자라고 해서 모두가 바이런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나는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매순간마다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어서, 어느 하나도 오래 가지 못한다. 나는 선악이 묘하게 혼합된 존재여서, 나를 묘사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바이런을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개성을 지닌 시인으로 만든 것은 단순히 정신적 혼란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또 다른 그의 발언이야말로 오늘날 ‘바이런적’이라고 부르는 것의 실체를 설명해주는 듯하다. “내가 언제나 변치 않고 간직하고 있는 감정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자유에 대한 강한 애정이고, 또 하나는 위선에 대한 혐오이다.”

바이런의 절친한 친구였던 시인 퍼시 비시 셸리(왼쪽)와 그의 아내인 메리 고드윈(오른쪽). 이탈리아로 사랑의 도피를 떠난 두 사람은 한동안 바이런과 머물며 우정을 나누었다. 특히 셸리 부부와 바이런, 그리고 바이런의 주치의인 존 폴리도리가 한 자리에 모인 결과로 공포소설의 고전인 [프랑켄슈타인]과 [흡혈귀]가 탄생했다는 후일담이 있다.

바이런의 절친한 친구였던 시인 퍼시 비시 셸리(왼쪽)와 그의 아내인 메리 고드윈(오른쪽). 이탈리아로 사랑의 도피를 떠난 두 사람은 한동안 바이런과 머물며 우정을 나누었다. 특히 셸리 부부와 바이런, 그리고 바이런의 주치의인 존 폴리도리가 한 자리에 모인 결과로 공포소설의 고전인 [프랑켄슈타인]과 [흡혈귀]가 탄생했다는 후일담이 있다.

 

 

 

프랑켄슈타인, 흡혈귀, 그리고 바이런

바이런의 영향 가운데서도 가장 크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가장 흥미롭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셸리 부부와 함께 스위스의 제네바에 머물던 1816년 6월 14일, 장마가 계속되자 며칠째 밖에 나가지 못한 바이런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괴기 소설을 하나씩 쓰자고 일행에게 제안한다. 셸리의 부인 메리 고드윈은 한 과학자의 실험을 통해 시체가 되살아나는 이야기를 썼고, 이때의 초고를 더욱 발전시킨 것이 바로 공포소설의 고전인 [프랑켄슈타인](1818)이 되었다.

 

바이런은 흡혈귀에 관한 내용을 다룬 소설을 조금 쓰다가 말았는데, 마침 그곳에 함께 머물던 그의 주치의 존 윌리엄 폴리도리(John William Polidori)가 그 소재에 강한 매력을 느끼고 나름대로의 개작을 시도했다. 바이런을 연상시키는 흡혈귀 ‘루스벤 경’을 주인공으로 한 폴리도리의 소설 [흡혈귀](1819)는 훗날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1897)로 완성되는 이 장르의 시조가 되었다. 따라서 바이런은 영국 낭만주의 문학뿐만 아니라 공포소설의 가장 유명한 장르 가운데 하나를 개척한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참고문헌: G. G. 바이런, [라오콘의 고통], 1991; [순례], 1997; 헨리 리 토머스 외, [위대한 시인들], 1983; M. H. 에이브럼즈, [노튼 영문학 개관 II], 1984; 매슈 아놀드, [삶의 비평], 1985; 케이 재미슨, [천재들의 광기], 1993; 앤드루 샌더즈, [옥스퍼드 영문학사], 2002; 토마스 메드윈, [바이런], 2004.

 

조지 고든 바이런

 


George Gordon Byron, 6th Baron Byron
(1788 - 1824)
https://nazionaleanticapitalista.files.wordpress.com/2015/03/lord-byron.jpg

1. 개요2. 일화3. 명언, 그 외

 

1. 개요[편집]

제6대 바이런 남작으로 영국의 대표적인 낭만파 시인, 영어권에서는 George Gordon Byron이란 이름보다는 주로 Lord Byron, 바이런 경(卿)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아버지 존 바이런은 잘 생긴 귀족이었지만 품행이 개망나니 수준이라서, 방탕한 생활로 많은 빚을 지고 1791년 객사했다. 아버지가 죽은 이후 어머니가 그를 스코틀랜드의 애버딘으로 데려가, 1801년 해로 스쿨에 입학할 때까지 스코틀랜드에서 살았다. 안짱다리에 선천적으로 오른발을 절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 많은 콤플렉스를 갖고 자랐으며, 어머니는 장애를 가진 아들에게 냉담한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유모 메이 그레이가 독실한 청교도 신자였는데, 그녀의 금욕적인 태도에 짜증을 냈다고 한다.

1805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해, 어려서부터 잘했던 문학과 사학을 전공하게 된다. 하지만 아버지의 방탕한 일면을 닮았는지 1학기를 술로 지새다가 큰 빚을 졌고, 이 빚을 갚기 위해 시집 <게으른 나날>을 발표했다.술빚 갚으려고 쓴 게 영문학 고전 하지만 스코틀랜드의 문학 잡지 <에딘버러 리뷰>에서 이 작품을 대차게 깠고, 이에 대해 열받은 바이런은 유동닉익명으로 <잉글랜드 시인과 스코틀랜드 비평가>라는 책을 써서 <에딘버러 리뷰>를 키배깠다.

졸업 후에는 할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아 상원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했고, 1812년에 방직공의 임금인상 시위 탄압에 항의하는 연설을 하여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게 되었으며, 이 시기 많은 문학작품을 발표하기도 한다. 

그는 조각같이 잘생긴 외모의 소유자였다. 절름발이라는 신체적 결함이 있었으나 오히려 여성들의 모성본능을 자극해 동정을 샀고, 얼굴이 워낙 우월하다 보니 크게 문제는 안 된 모양이다. 당시 사교계 여성들에게 인기가 대단했고 바이런이 지나가면 온 동네 여자들이 창문을 열고 구경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그러한 잘생긴 외모 때문인지, 방탕한 생활을 했던 부친으로부터의 유전인지, 아내 안네 이사벨라와 별거하면서도 여러 여인들과 만나 사귀었는다. 그런데 남녀도 귀천도 가라지 않았던 성편력이 현대의 관점으로 보기에도 만만치 않다. 유부녀과부얀데레에 피가 섞이지 않은 여동생도 있었으며 심지어 그리스로 가는 도중에 어느 유부녀를 하룻밤 NTR했다가 그녀의 남편에게 걸려서 결투를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인생이 미연시 그 밖에도 내키는 대로 방탕한 생활을 하며, 귀족이자 상원의원이면서도 하층민 여성과 관계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결국 피가 섞이지 않은 여동생 오거스터 리와의 근친상간 파문으로 추방당하듯이 영국을 떠났지만, 이 때부터가 그의 본격적인 여성편력의 시작이었다. 영국을 떠나 이탈리아스위스를 전전하면서 별의별 여성들과 관계했는데[1], 문헌에 따르면 당시 그와 관계를 맺은 여성이 최대 약 200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사실 말이야 바른말이지 명문대 엘리트+고위 정치인+유명한 시인이라는 엄청난 스펙에다 잘생기기까지 한 인간이 낭만시로 단련된(...) 달콤한 말로 접근해오면 여성들의 입장에서는 매력을 느끼지 않기가 힘들다. 현대로 비교할만한 인물이라면 역시 같은 영국인이고 예술계에 속하며 '4000여명의 여성, 400여명의 남성과 관계를 맺었다는 악마[2] 믹 재거. 무엇보다도 둘 다 쾌락주의자이자 양성애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까지 비슷하다. 가장 큰 차이는 역시 외모에서 바이런이 압승이란 것.

그와 사귄 가장 유명한 여인은 레이디 캐롤라인 램으로, 당시 영국 수상인 윌리엄 램 경의 부인이었다. 남편이 정치에 신경쓰느라[3] 그녀에게 소홀한 틈에, 그녀는 젊은 낭만파 시인에게 빠졌다.

하지만 상원의원이던 바이런에게는 그녀와의 스캔들이 상당한 타격[4]이었던지라 슬슬 그는 캐롤라인을 피하기 시작했다.그러나 캐롤라인은 그의 사정은 봐주지 않고 편지 세례는 물론 그가 가는 파티마다 모두 참석해 친밀한 모습을 과시하는 등 스캔들에 더욱 불을 붙여버렸다. 그런데도 바이런이 계속 그녀를 피하자, 바이런이 집을 비운 사이 그의 집에 몰래 침입해 그가 아끼는 책에 "Remember me!"라고 휘갈긴 글씨를 남긴다.19세기판 스토커 이제 공포까지 느끼게 된 바이런은 그녀를 노골적으로 피하다가 어느 파티에서 딱 마주쳤는데, 캐롤라인은 말다툼 끝에 열받은 나머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손목을 그어버렸다. 이런 그녀에게 질려버린 바이런은 이별 편지를 보내게 된다. 그녀는 평생 이 편지를 간직했다고 하며 바이런을 모델로 한 소설 <글래나번>을 쓰기도 했다. 반면 바이런은 방탕했던 여태까지의 자신을 반성하고 이후 여성편력을 자제하게 되었다. 사필귀정

캐롤라인에게 크게 데여서인지 진지한 결혼을 고려하게 되고 1815년 Ann Isabella Millbanke와 결혼하지만 딸을 하나 낳고 워낙 성격 차가 커서 다음 해에 이혼해버리고 만다. 그 딸이 나중에 자라서 최초의 컴퓨터인 찰스 배비지의 애널리틱 엔진을 프로그래밍한 최초의 프로그래머 Ada Lovelace 백작부인. 천재적 재능은 집안의 내력인 듯.

1823년 영국 국회의 승인을 받아 투르크에 대항하는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전하였는데 유명한 시인이자 젊은 정치가 귀족으로 19세기판 세계적 인기 아이돌 연예인이었던 그의 참전은 그당시 터키에게 지배당하던 약소국이었던 그리스 국민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그가 생판 타국인 그리스 독립전쟁에 자원한 이유는 낭만파 시인답게 기원전 고대 그리스의 찬란한 문명과 그리스 시 등 그리스 고대 문학에 매료된 대표적 그리스빠였기 때문. 고대 그리스 문화를 소재로한 시도 적지 않다.
이듬해 말라리아 열병에 걸린 후 현지 의사의 잘못된 처방으로 병이 더 심해져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결국 세상을 떠났다. 사후 유해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하고자 했으나 사원에서 거부했고, 때문에 할 수 없이 바이런 집안의 납골당에 안치하게 되었지만 바이런이 영국 낭만시에 끼친 영향이 워낙 지대했기에, 1969년 바이런의 시가 조각된 기념비가 사원 내에 건립되었다. 또한 그리스에서는 그를 투르크에 맞서 싸운 영국의 헌신적인 영웅으로 대접하고 있다고 한다.

2. 일화[편집]

그에 관한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케임브리지 3학년 때 신학 시험에서의 일화이다. 학기말고사 때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기적이 상징하는 종교적, 영적 의미를 서술하라.'는 문제가 나오자 그는 아래의 한 문장만을 적어서 이 시험을 최고점으로 통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Water saw its Creator and blushed."
"물이 그 주인을 뵙고 얼굴을 붉히다."[5]


단 이 일화가 사실인지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참고로 바이런이 태어나기 200여 년 전에 살았던 Richard Crashaw라는 영국 시인의 Epigrammatum Sacrorum Liber이라는 시집에 수록된 시 중 'The conscious water saw its God and blushed.'이라는 구절이 있다. 보면 알겠지만 매우 유사하다. 또한 이 일화는 외국에서는 바이런이 아닌 이름 모를 학생을 주인공으로 해서 돌아다니기도 하므로 이것들로 미루어 볼 때 바이런의 저 일화는 다른 이야기를 차용한 가능성이 높다.

또 다른 일화는 1812년, <차일드 헤럴드의 편력> 1, 2권을 발간했는데, 이 2권이 당시 영국 사교계에 일약 반향을 일으키면서 바이런이 세계적인 시인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여전히 술에 취해 비몽사몽한 바이런에게 편집장과 발행인이 달려와 그가 일약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을 알렸다. 차근차근 말을 듣던 바이런이 던진 한 마디. 보통 바이런이 한 말인지는 잘 모르고 To 부정사의 결과적 용법을 배울때 많이 알게 되는 예문이다. "유명해지기 위해서 아침에 일어났다"라고 해석하면 이상하잖아

"I awoke one morning to find myself famous."
"어느 날 아침 일어나보니 유명해져 있었다."

 

3. 명언, 그 외[편집]

그는 시구나 저작 속에서 명언도 많이 남겼다.

가장 뛰어난 예언자는 과거이다.

 

고난은 진리로 향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인생에서 수많은 적을 만났지만, 아내여, 너같은 적은 생전 처음이다.

 

남자의 사랑은 인생에서 그리 대단치 않은 것이지만, 여자의 사랑은 삶 그 자체이다.

 

바쁜 사람은 눈물을 흘릴 시간이 없다.

 

부를 경멸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절대 믿지 말라.
부를 얻는 것에 절망한 인간이 부를 경멸한다.
이런 인간이 부를 얻었을 때, 제일 결말이 좋지 않다.

 

인간은 웃음과 눈물 사이를 왕복하는 시계추이다.

 

(볼테르의 오를레앙의 처녀를 로버트 사우디의 잔 다르크와 비교하며 평하면서) 잔 다르크는 광신적인 프랑스 창녀다.(...)[6]


최초의 프로그래머로 이름높은 에이다 러브레이스 백작부인이 바로 바이런의 딸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바이런 집안에 흐르는 방탕함과 무절제함이 딸의 인생에 영향을 미칠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딸의 감성을 자극할만한 문학공부를 철저히 방해하고 이과 분야의 학습만 하게 했다. 그 결과 그녀는 희대의 공순이가 되었다.[7] 그녀의 어머니가 그렇게 노심초사하며 신경썼지만, 역시 그녀는 바이런의 딸이었다. 수많은 남자들과 스캔들을 일으켰으며, 도박에 빠져 재산을 탕진한 채 아버지와 같은 37세의 젊은 나이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1] 심지어 스폰서였던 메리 셸리의 의붓여동생 클레어몬트와도 관계를 맺어 딸을 얻으면서 사이가 복잡해졌다. 참고로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의 작가로 유명한 인물.[2] 다만 믹재거는 숫자가 너무 과장되어 있다고 불평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3] 윌리엄 램은 막 즉위한 빅토리아 여왕의 왕권 강화에 힘썼고 이후 대영제국의 토대를 닦는 상당한 명재상으로 꼽힌다.[4] 그 이전에도 피가 섞이지 않은 여동생 오거스터 리와의 근친상간 파문으로 욕을 무더기로 얻어먹었다. 아 그래서 요스가노소라의 부제에... 걔네는 혈연이잖아[5] 번역에 따라, '물이 그 주인을 만나자, 얼굴이 붉어졌도다'라 표기하는 텍스트도 있다.[6] 잔 다르크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영국에서도 18세기 이후로는 로버트 사우디의 작품을 비롯해서 잔 다르크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가 늘어났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자신의 편지에서 이 발언에 대해 바이런이 하나는 그가 위대한 시인으로, 두번째는 귀족으로 부끄러운 일이라며 깠다. #[7] 위대한 문인 아버지 - 뛰어난 과학자 딸.. 이라는 점에서 피천득 - 피서영 보스턴대 물리학과 교수[8]가 떠오르기도 하나, 이쪽은 너무나 사이좋은 부녀간이었다는게 차이점.[8] 피서영은 이론물리학계에서 한국인으로서는 2번째로 많은 논문 인용수를 가지고 있다. 인용수 1위는 이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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