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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시모음
2015년 04월 10일 22시 18분  조회:3871  추천:0  작성자: 죽림

<자화상 시 모음> 

+==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시인, 1917-1945) 


+== 자화상== 

누군가 
그대와 비슷한 이름만 불러도 
온몸이 굳어 
또 다른 누군가가 
닮은 목소리로 스쳐 지나가면 
그대로 
석고가 
되어버릴 
어느 서툰 조각가의 
그럴 듯한 
실패작. 

(이풀잎·시인)


+== 자화상==

내 몸에 흐른 강이 몇 개
수직으로 떨어지는 폭포가 몇 개
이마에 매달린 납덩이가 몇 개
가슴 속 갈매기 깃발이 몇 개
털 빠진 기회의 꼬리가 몇 개
너무 가까워 보이지 않는 눈썹이 몇 개
아, 무엇이 무엇인가 무엇이 몇 개.


(홍해리·시인, 1942-)


+== 자화상·1 ==

내가 
기울면 
산도 
바다도 
하늘도 
기웁니다. 

당신이 
바로 서도 
아직도 
사뭇 
기울어 있는 
나. 

산도 
바다도 
하늘도 
바로 서 있는데 
나 혼자 기울어서 
모두 기울었다 합니다.


(김영천·시인, 1948-)


+== 자화상== 

울음 끝에서 슬픔은 무너지고 길이 보인다

울음은 사람이 만드는 아주 작은 창문인 것

창문 밖에서
한 여자가 삶의 극락을 꿈꾸며
잊을 수 없는 저녁 바다를 닦는다


(신현림·시인, 1961-)


+== 자화상(自畵像)== 

하얀 종이에 
파스텔로 내 얼굴을 
그렸습니다 

머리칼도 눈썹도 입술도 
하얗게 그렸습니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슬픈 나를, 
하얀 눈물을 그렸습니다 

아무도 내 슬픔은 알아보지 
못했을 겁니다 

그 속엔 
나만이 알 수 있는 
슬픔이 있습니다.

(최영희·시인)


+== 자화상==

거울을 무서워하는 나는 
아침마다 하얀 벽바닥에 
얼굴을 대보았다 

그러나 얼굴은 영영 안 보였다 
하얀 벽에는 
하얀 벽뿐이었다 
하얀 벽뿐이었다 

어떤 꿈 많은 시인은 
제2의 나가 따라다녔더란다 
단 둘이 얼마나 심심하였으랴 

나는 그러나 제3의 나………제9의 나………제00의 나까지 
언제나 깊은 밤이면 
둘러싸고 들볶는다


(권환·시인, 1903-1954)


+== 자화상==

 

푸른 하늘을 우러르는 일이 부끄러워 
언제나 고갤 숙인 사람, 
화살은 수없이 날렸지만 과녁을 
맞춰 본 적 없었네 
혹여, 발자욱 소리 들릴까 
걸음걸이 항상 조심스러웠네 
반세기는 늦게 세상에 태어나 
뒤만 바라보며 실컷 자기 몫을 쓸쓸해하다가 
시드는 낮달처럼 
스러져 없어질 사람, 
오늘같이 푸른 날은 흰 고무신 닦아 신고 
뜸북새 우는 긴 논둑 길 걸어 보고 싶네


(김용화·시인)


+== 자화상 ==

제 몸을 부수며
종鐘이 
운다

울음은 살아 있음의 명백한 증거,
마침내 깨어지면 울음도 그치리.

지금
존재의 희열을 숨차게 뿜으며
하늘과 땅을 느릿느릿 울려터지는

종소리,
종소리,
그것은 핏빛 자해自害의 울음소리.


(이수익·시인, 1942-)


+== 자화상(自畵像)==

돌과 돌들이 굴러가다가 나를 두들기고,
모래와 모래가 쓸려가다가 나를 두들기고,
물결과 물결이 굽이쳐 가다가 나를 두들기고,

너무도 기나긴 억겁의 세월,

햇살과 햇살이 나를 두들기고,
달빛이 나를 두들기고,
깜깜한 밤들이 나를 두들기고,
별빛과 별빛이 나를 두들기고,

아, 훌훌한 낙화가
꽃잎이 나를 두들기고,
바람이 나를 두들기고,
가랑비 소낙비 진눈깨비가 나를 두들기고,
싸락눈 함박눈 눈보라가 나를 두들기고,
우박이 나를 두들기고,

그, 분노가 나를 두들기고,
회의와 불안,
고독이 나를 두들기고,
절망이 나를 두들기고,

아니, 사랑이 나를 두들기고,
끝없는 뉘우침
끝없는 기다림
갈망이 나를 두들기고,

양심과 정의, 지성이 나를 두들기고,
진리와 평화
자유가 나를 두들기고,
겨레가 나를 두들기고,

끝없는 아름다움
예술이 나를 두들기고,

나사렛 예수
주 그리스도와 하느님,
말씀이 나를 두들기고.


(박두진·시인, 1916-1998)


+== 자화상(自畵像) ==

나는 오랜 옛 서울의 
한 이름 없는 마을에 태어나 
부모형제와 이웃 사람의 얼굴, 그리고 
하늘의 별들을 볼 적부터 
죽음을 밥먹듯 생각하게 되었다. 
아침에 피는 꽃의 빛깔과 
황혼에 지는 동산의 가을소리도 
이별이 곁들어져 
언제나 그처럼 슬프고 황홀했다 
술과 친구와 노래는 입성인 양 몸에 붙고 
돈과 명예와 그리고 여자에도 
한결같이 젖어들어 
모든 것을 알려다 
어느 것도 익히지 못한 채 
오직 한 가지 참된 마음은 
자기가 눈감고 이미 없을 세상에 
비치어질 햇빛과 
피어나는 꽃송이와 
개구리 우는 밤의 어스름달과 
그리고 모든 사람의 
살아 있을 모습을 그려보는 일이다.


(김동리·소설가, 1913-1995)


+== 자화상(自畵像)==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것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숫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서정주·시인, 1915-2000)


+== 베짱이, 나의 자화상==

죽은 벌레들이 땅에 떨어져 다음 해 한여름을 
위해 거름기를 모을 때 혹은 살아있는 것들을 위해 
과일이 단물 들어갈 때 내 삶은 
어느 한 부위도 익지 못했네 
시원한 나무 그늘을 찾아 만수위로 위험수위로 
차오를 때까지 나의 노래만 불렀네 
남의 자리까지 차지하고 앉아 
목쉬도록 노래하다 
여름 끝까지 와버렸네 
어쩔거나 어쩔거나 음풍농월로 
젊은 날을 탕진해 버렸네 
남의 것까지 거덜내 버렸네 

문전박대 그 긴 겨울 
시린 땅을 딛고 갈 마음의 신발 
신발마저 벗겨져 세상하류까지 떠내려가 버렸네 
그것도 모른 체 나부끼는 벽오동 나뭇잎으로 
한여름 밤의 꿈에 부채질이나 했네 
세상 언저리 언저리로만 떠돌았네 
죽은 것마저 땅에 떨어져 
한 줌 한 줌 거름기를 모을 때......


(김왕노·시인, 경북 포항 출생)


+== 자화상==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바라보는 일뿐이다 

새 한 마리 
밤새 무화과나무에서 울어대도 
바람이 계절 따라 가슴을 흔들며 
짙은 물감을 쏟아놓아도 
무엇을 해야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지식의 바구니를 채우고 
감성의 샘물을 일굴수록 
갈 길이 멀고, 지고 갈 짐이 많다는 걸 안다. 

사람들은 현명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지만 
물살을 거꾸로 타고 오르는 힘겨움뿐 
영리한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기조차 숨가쁘다 

다가오는 것들을 말없이 품어주고 
사라져 가는 것들을 손 흔들어 보내는 
생(生)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바라보는 일과 
세상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내 모습 이대로를 지키는 일뿐이다


(홍인숙·시인, 미국 거주 )


+== 유년기의 자화상== 
    
학질을 되게 앓던 날 새벽 
할머니는 정한 뽕잎 하나 따서 
정낭 귀틀에 깔고 그 옆에 나를 앉혀 
혀로 뽕잎을 세 번 핥게 하신 후 
다시 나를 업고 
해 뜨는 봉우리 
까마득한 바위 끝에 앉히고 
내 머리 위에 
동서남북의 바람을 불러들여 
학질을 재판하셨습니다. 
알 듯 모를 듯 주문을 외시던 할머니는 
품속 칼을 선뜻 꺼내 
푸른 바다 뜨는 해를 향해 
십자를 긋고 
이어 그 무선 칼날로 내 머리를 그으셨습니다. 
내 몸 안으로 부서져내리는 칼소리 
내 몸 온 구석에 부서져 하얗게 빛나는 칼빛 
할머니는 나를 업고 다시 
개울로 가셨습니다. 
할미꽃 잎사귀를 손바닥에 비벼 
내 콧구멍을 막아주시고 
징검다리를 건너뛰게 하셨습니다. 
할미꽃 잎사귀의 독한 향기는 
몸에 스미어 내 눈에 별빛이 번쩍이고 
나는 별밭 징검돌 은하수를 
반은 죽어 건너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승과 저승을 오락가락하는 사이 
칼빛에 두려운 학질 무리가 
할미꽃 향기에 질려 
별밭 하늘로 도망가고 말았는가. 
돌아오는 마을 어귀에 
풀꽃잎 까치울음 함께 떠서 
나를 반겨주었습니다.


(이성선·시인, 1941-2001)


+== 30세의 자화상==

삼십이 되어도 장가도 못간 놈.
고자도 아닌데
세상 불구자로
벼랑 끝에 울고 있다

마지막 남은 
밧줄 하나
불안하게 부여잡고

끙끙대며
때묻은 영혼으로
나부끼고 있다

어제는 시간의 아픔으로
홍역을 치렀고
오늘은
알몸으로 몸부림치며

나이 들수록
왜소해지는 자신을 보며

팔짱 끼고 앉아
덜거덕대는 가슴을
발가락으로 누르고 있다

(권영하·시인)


+== 자화상 문답== 

나이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만 할까 
거울 앞에서 
문득 만나는 묵묵부답 
어느덧 흰 머리칼이 
덧없이 또 지나간 10년을 얘기하며 
이마 앞에서 나부끼고 있다. 

(강남주·시인, 1939-)


+== 자화상 (自畵像)==

어느덧 사십 년 지나 
골동품 다 돼가는 자물통 하나 
묵비권을 행사하듯 늘 
무거운 침묵으로 일관하지만 
뜻맞는 상대와 내통하면 
언제든 찰칵! 
꼭꼭 잠가둔 마음을 푼다 
천성이 너무 솔직하고 순진해 
안 보여도 좋을 속까지 
모조리 내보이는 자물통 하나 
가슴속엔 싸늘한 뇌관을 품고 
보수(保守)냐? 개혁(改革)이냐? 
목하 고민중인 자물통 하나 
남의 집 문고리에 매달려 
알게 모르게 녹슬고 있다. 

 
(임영조·시인, 1943-)


+== 자화상·95== 
  
내 나이 마흔 두 살 
십이간지 중에 말띠로 태어나 
사십 이년 세월을 갈무리했다. 
멋진 갈기를 날리며 
늘씬한 네 다리로 드넓은 초원을 
달렸어야 마땅한데. 
마구간에 갇힌 세상 
발톱만 다듬다 사십 년이다. 
말로 태어나 말로 살지 못한 
가슴은 숯껌뎅이로 남아서 
가끔씩 지구 밖에다 편지질하다 
시심으로 불을 지펴서 
내 영혼을 달래다 시인이 되었다. 
일천 구백 구십 오 년은 
그래서 뜻깊은 해이다.


(목필균·시인)


+== 예순 살의 자화상== 

쓰레기통에 버려진 자전거 바퀴를 주어다가 만든 굴렁쇠를 굴리며 
사내는 운동장을 달린다. 
달리는 트랙은 반대방향이다. 
땡볕 내려쬐는 빈 운동장을 예순의 그가 혼자서 달린다. 
굴렁쇠는 가볍다. 
운동장 옆 키 큰 미루나무 숲의 매미떼가 여물게 울뿐 아무도 없다. 
그는 모처럼 해방감에 젖어 
유년의 때까지 달려가려는 듯하지만  힘이 부친 듯 비틀된다. 
그가 넘어진다. 
굴렁쇠는 혼자서 저만치 굴러간다. 
넘어진 굴렁쇠를 바로 세워 달리던 유년의 때완 다르게 
굴렁쇠가 그를 일으켜 세운다. 
넘어졌던 그가 일어나 굴렁쇠를 다시 굴린다.


(김상현·시인, 1947-)


+== 그릴 수 없는 자화상==

나는 내가 아니다
사진을 보든 거울을 보든
나는 나를 그릴 수 없다

내 몸 속에 내가 없고
벗어도 또 내가 아닌
아니 벗을래야 벗을 수 없는
탈 자체가 되어 버린 고기 덩어리

태워 버리자
묻어 버리자
그리고 떠나자
나도 모르는 곳으로

예수나 석가의 얼굴은 아니지만
어머니 자궁 속에서 짓던 미소를 띠며…

(구광렬·시인, 1956-)


+== 자화상== 

놈은 
가슴속에 칼날 하나 감추고 있다 
누군가 달려들면 내려칠 칼날을 
놈은 날마다 칼날을 간다 
날이 시퍼렇게 서도록 
나를 보호해 줄 건 이것뿐이라며 
갈고 또 간다 
그러다가도 
정작 휘둘러야 될 때가 되면 
정말 휘둘러야 하는데 
차마 차마 망설이다가 
제 가슴이나 후비며 
자상이나 입히는 
써보지 못하는 칼날 하나 
숨기고 산다


(이길원·시인)


+== 자화상·2==

전신이 검은 까마귀
까마귀는 까치와 다르다
마른 가지 끝에 높이 앉아
먼 설원을 굽어보는 저
형형한 눈,
고독한 이마 그리고 날카로운 부리.
얼어붙은 지상에는
그 어디에도 낱알 한 톨 보이지 않지만
그대 차라리 눈발을 뒤지다 굶어 죽을지언정
결코 까치처럼
인가의 안마당을 넘보진 않는다
검을 테면 
철저하게 검어라. 단 한 개의 깃털도
남기지 말고
겨울 되자 온 세상 수북히 눈이 내려
저마다 하얗게 하얗게 분장하지만
나는 
빈가지 끝에 홀로 앉아
말없이
먼 지평선을 응시하는 한 마리
검은 까마귀가 되리라


(오세영·시인,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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