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를 쓸 때 마무리에도 신경 써야...
[15강] 시의 마무리(3 )
시의 마무리에 대한 강의는 사실상 어제 끝내야합니
다. 그러나 사실 어느 강의에도 시의 마무리에 대한
강의는 없기 때문에 선배시인들의 이야기를 여러분
께 전달해드리고 싶어서 한 시간을 더 잡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시를 쓸 때 첫 시작 보다는 마
무리에서 늘 곤혹스러움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시의 시작은 이미 마음 속에 정해져 있기 때문
이지요. 그러나 시의 마무리에서는 여기서 그치면
너무 짧아 하고 싶은 말이 다 들어가지 않는 것
같고, 더 길게 쓰려면 중언부언하여 시가 그 맛
을 잃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한 시간 더 시간을 잡아 선배들 이야기를
해보자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럼 우선 홍윤숙 시인의 견해를 들어보겠습니다.
작년에 예총 초청으로 목포에 오셔서 제가 사회를 보
고 강연회를 하셨는데 한 마리의 홍학처럼 고고하게
늙어가는 여성 시인의 모습을 지켜본다는 것은 경이
그 자체이었습니다.
"누구의 말이던가. [포에지는 지속하기를 원하는데
포엠은 완결을 운명으로 한다. 거기에 시의 종결의
어려움이 있다]고 한 것은, 한 편의 시에 흐르는 포
에지는 연소하는 불이다. 어디서 어떻게 그 불을
잡아서 꺼뜨리지 않고 더욱 압축하며 안으로 영롱
하게 마무려야 할 것인지.....자칫하면 산문으로
타락하고 해설로 죽여 버리기 쉬운 그것을, 하여
시의 마무리 문제는 열편의 시에 열번의 진통을
안고 번번히 새롭게 등장한다.
그야 물론 시의 종결부 몇 줄이 그 시 전체를 흘
러온 포에지에 완성의 불을 점화하는 결정적 작업
으로써 해설이나 산문으로 타락하지 말아야 하며
계속 연소도를 높여 보다 강하고 농밀하게 압축
해야 한다고 이론으로 알고 있지만 아는 것과는
상관없이 가끔 나는 국민학교 학생의 도화지처럼
마지막 부분을 엉망으로 망가뜨리곤 한다.
기실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한편의 시 속에 끊임
없이 포에지를 충전시켜 가야 한다는 일은. 나는 그
긴장과 피로에 나도 모르게 왕왕 종결을 서두르며
안일하게 불을 끄는 과오를 범하려고 한다
결국 시의 마무리를 짓는 몇 줄을 위해 나는 나의
남은 축전기를 최대한 높여 놓고 혼신의 힘으로
투신해야 한다. 대상을 향해 마지막 집중을 시도해야 한다.
무수한 언어와 이미지를 동원하고 다시
그 것들을 휴지처럼 버린다. 불과 두 세줄을 위해
열 번 스무번 원고지에 옮겨 쓰고, 50번 백번 입속
으로 읽어본다. 전편으로 흐르는 포에지의 혈맥을
놓치지 않고 다시 생생하게 되살리기 위해 이렇게
진통하는 어느 순간 나는 문득 감전되듯 충전이 된다.
사실 한 편의 시 가운데 내가 만들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첫 줄과 마지막 줄이다.
어쩌면 그것은 신과 교감하는 영감적인 순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성교 시인의 주장까지 들어보고 가지요.
"이 마무리 단계는 곧 연극에 있어서 닫는 막과
같다. 닫는 막이 좋지 않을 때는 전체 인상이
흐리고 만다. 흐린 인상은 곧 실패작이란 뜻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에 있어서 마무리가 잘 되어야
그 시의 빛이 나고, 향기가 난다. 다시 말해서
그 마무리는 곧 시의 성패 여부를 좌우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마무리하는 시간처럼 엄숙한
시간은 다시 없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이 순간은
하나의 작품이 바로 완성 직전에 있기 때문이다.
이 엄숙한 순간은 지극히 짧은 것 같지만 그와
반대다. 제일 많이 시간이 걸린다. 그것은 그저
헐줌하게 처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마무리하는 순간처럼 신경이 곤두세워지는
시간도 다시 없다고 하겠다. 그만치 고통스러운
시간임엔 틀림없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문득
떠올라 시를 마무리 하려고 오래동안 묵혀두었던
초고를 꺼내놓고 앉으면 신기하게도 그 생각이
한 마리 새처럼 포올 날라가 버린다. 이 때처럼
안타까운 순간은 없다. 아무리 머리를 짜내어도
그 생각이 다시 떠오르지 않을 때는
부득이 덮어버리고 만다
나는 이 것을 최소한도 방지하기
위하여 미리 한 생각 한 생각에다 번호를 매겨
둔다, 그래서 글을 최종적으로 마무리 할 때,
이 번호를 가지고 앞 뒤를 꿰 맞춘다. 그럴 때
제일 마지막 번호(끝귀절)에 온통 신경을 더
쓴다. 이 끝 귀절을 그 작품의 결론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끝 귀정에 생명감을 불어넣기 위하여
되도록이면 상징적인 어휘를 쓰려고 한다. 그래
야만 운치를 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어휘도 두 번 사용하기를 꺼려한다.
어쨌든 이 마무리 단계는 임부가 해산하는 단계와
같이 지극히 고통을 겪는 과정이다.
송찬호님의 <나뭇잎 배>입니다.
나뭇잎이 푸른 물결로 출렁거릴 때
강물은 부챗살처럼 하늘로 퍼져 흐르고
떠도는 땅에서 땅으로 사람들도 정처 없이 흘렀다
마주 보며 눕던 여자의 좁은 이마에
실핏줄같이 흐르던 작은 슬픔도
돌아누우면 먼 파도로 밀려와 흐득였고
깨어 보면 건널 수 없는 깊은 강이 되어 흘렀다
거친 손금 속에 일확천금의 비밀을 숨긴 채
일엽편주를 타고 뿔뿔이 흩어져 떠나가던 사람들도
허리에 묶인 그물을 풀며
이마에 굵은 주름살을 지으며 흘러갔고
긴 강 돛에 매달려 벌레 먹은 바람으로 펄럭였다
가지마다 붉은 노을이 걸릴 때면
그들이 흘러간 강 한 줄기씩
어깨에 메고 돌아와
지나간 내력을 독한 입담으로 걸러내며
강물이 마르도록 술을 마셨다
나뭇잎이 푸른 물결로 출렁거릴 때
강물도 끊임없이 흘러갔지만
강물도 강을 찾기 위하여
뜨내기의 몸속으로 흘러갔는지
먼 길을 가는 물고기들도
쉬어가는 나무 밑에
물결이 철썩철썩 밀려와 쌓여도
한번 흘러간 강물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남진우님의 해설을 싣습니다.
"<일엽편주>라는 말이 있다. 이 고풍스러운 사자
성어가 이 시에선 상상력이 촉발되는 수원지가 된
다. 물 위에 떠내려 가는 작은 나뭇잎처럼 세파에
시달리는 가련한 인생사. 시인은 이 표현이 품고
있는 비유적 의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거
기에 더 확장된 상상력을 투여함으로써 삶의 이면
을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들고 있다.
세상의 강물과
그 위를 떠도는 나뭇잎은 실은 하나다. 그 작은
나뭇잎에서 길고 긴 강물이 출렁이며 뻗어나온
것이다. 모든 존재는 <정처 없는> 흐름 속에서
서로 덧없이 멀어져 가고 있을 뿐이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선배시인들의 마무리에
대한 견해를 듣기로 하겠습니다.
유경환 시인의 이야기입니다.
"내 나름의 습관이지만 자꾸 새 원고지에 베껴
가며 고쳐쓰기 때문에, 한편의 글을 마무리 짓기
위해선 열배 이상의 원고지가 든다.
정서를 해가며 마음에 걸리는 낱말을 솎아 내다
보면 생각의 체중이 해소되는 수가 많다.
때로는 아무리 새 원고지에 옮겨 써도 스스로
만족에 미흡감이 있어, 그대로 며칠동안 깨끗이
잊어 버려 본다. 내 글을 타인의 눈으로 보듯
하기 위해서는 깨끗이 한 번 잊어 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다.
그러나 우연한 때에 대부분 길을 가다가(걸으면서
생각하는 습관 때문에) 문득 표현의 이미지를 얻게
된다. 이것은 엄격히 말해서 우연한 것은 아니다.
언젠가 읽었던 것, 언젠가 보았던 것, 또 언젠가
생각했다가 접어 두었던 의식이 무의식처럼 소생
해주는 것이리라.
마지막 구절이 되지 않아 마무리를 못하고 생각을
않는 것 보다는 시어를 제대로 못 골라 마무리를
못 맺는 경우가 더 내겐 많다.
그것은 마치 바닷가 모래 속에서 내가 꿈꾸어 오던
조개나 심산천에서 내가 생각해 오던 돌을 찾아
내는 그런 것에 비유할 수 있으리라.
자물쇠에 제 열쇠가 들어 맞아야 열리듯이 꼭 맞는
낱말이어야 맥이 통하고 나타내려는 것이 그대로
담겨질 수 있다고 속으로 우기기 때문에 이건 괴
로운 추적이 아닐 수 없다.
좋고 나쁜 글을 쓴다는 것은 독자의 입장에 선 타
인이 판단할 것이고, 쓰는 내 입장에선 우선 내
스스로가 만족스러워야 마무리가 지어진다. 스스로
만족스러워 지려면 [내 생각이 충분히 전달될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이 나 자신을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내 생각이란, 전연 단절된 분위기나
또는 단속된 상황의식에서도 그대로 공감될 수 있
는 의도를 말한다. 시인은 결코 자기만을 위한 언
어의 연금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몇 분의 자료가 있으나 너무 지루할 것
같아서 생략합니다. 그러면서도 세 시간이나 시의
마무리를 강의한 것은 어느 책에서도, 어느 강의록
에서도 시의 마무리에 대한 강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보아온 것처럼 시의 마무리는 여러가지의
형식과 형태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
리 많은 선배 시인의 이야기를 들어도 우리는 거기
에서 하나의 공식을 도출해 낼 수도 없읍니다. 그
것은 오로지 우리 작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맡겨
진 책무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시의 마무리가 결코 수월하지 않다는 것과
그 것이 첨삭 퇴고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많은 변
화를 가져 온다는 사실만을 엿볼 수 있을 뿐입니다.
때론 최초의 작품이 완전히 다른 엉뚱한 작품의 모
습으로 변질되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마무리란 결코 부분적일 수만 없고 오히려 전체적일
수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시고, 시를 쓸 때 마무리
에도 신경을 쓰시기 바랍니다.
이로소 시의 마무리에 대한 강의는 마치겠습니다.
좋은 시 한 편을 소개하겠습니다.
신경림님의 <떠도는 자의 노래>입니다.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남진우님의 해설입니다.
"누구나 나이를 먹어가다가 한 번씩은 문득 사로잡
히게 되는 상념의 한 대목을 이 시는 간명하고 절
제된 어조로 형상화해 놓고 있다. 삶은 추구나 획
득의 여정이 아니라 끊임없는 상실과 망각의 과정
임을 이 시는 알려 준다. 그 상실과 망각은 보다
확대하면 이 현생에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전
생과 후생을 이어 윤회를 거듭하며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인의 연륜이 자연스럽게 묻어
나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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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 물속의 푸른 방 / 이태수
물속의 푸른 방
이 태 수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근다.
서늘하고 둥근 물소리……
나는 한참을 더 내려가서
집 한 채를 짓는다.
물소리 저 안켠에
날아갈 듯 서 있는 나의 집, 나의
푸른 방에는
얼굴 말끔이 씻은 실바람과
별빛이 술렁이고
등불이 하나 아득하게 걸리어 있다.
이태수 시집 <물속의 푸른 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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