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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시모음
2015년 07월 18일 20시 38분  조회:3946  추천:0  작성자: 죽림

 

이것은 시가 아니다

 

                                                                   이승훈

 

 

 한양대 교수로 직장을 옮긴 1980년대 초 밤이면 김일성

이 자신의 집을 폭파하겠다고 전화를 하고 밤새도록 지붕

위엔 낯선 비행기가 떠 있다고 편지를 보낸 제자가 있었

다 춘천교육대학을 중퇴하고 결혼에 실패한 그는 대학 시

절 서울 집으로 간다며 철길을 계속 걸어간 적이 있지 어

느 날은 그의 시집을 영국에서 출판하게 되었으니 선생님

                                                    이 평론을 쓰셔야 한다는 편지도 보냈다

 

 

 그 무렵엔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 연구실 문을 열고

웬 낯선 남자가 들어왔다 나이는 서른 정도 나를 보더니

대뜸 선생님이 불쌍해요 그가 한 말이다 잠바 차림에 무

언가 들고 있었다 그는 전라도 광주에서 시를 공부하는

청년으로 선생님 생각이 나서 도시락을 싸 왔다며 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을 풀었다 그때 조교들이 들어와 그는

조교들과 함께 나갔지 1980년대 초엔 왜 이런 일들이 많

았는지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이 시는 이승훈 시인의『이것은 시가 아니다』라는 시집에 실린 시...(?)입니다.^^

이승훈 시인은 수업 시간에도 몇 번 언급이 됐었는데요.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다 이런 형식으로 쓰여져 있어요.

저는 이런 시를 별로 본 적이 없어서 아주 낯설었습니다. 정말 시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또 생각해 보게 되네요.

시집 뒤쪽에 이 시에 대해서 쓴 글이 실려 있는데요.

 

 이것은 시가 아니다. 그러나 시지에 발표되었기 때문에 시로 대접받는다. 휴지통에 넣으면 휴지가 되고 편지로 보내면

편지가 되고 일기로 쓰면 일기가 되고 정신과 의사의 노트에 적으면 병력이 된다. 도대체 시는 어디 있는가? 내가 이런

제목을 달아 시지에 발표한 것은 도대체 당신들이 생각하는 시는 뭐요? 시는 과연 어디 있소? 이런 질문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고 정신병의 세계를 그대로 옮긴 것은 이젠 우리 시도 이런 세계를 제대로 수용하고 공부하면서 광기에 대한 새로운

사유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예술은 광기를 먹고 산다. 미치지 않은 시인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정신도 육체도

멀쩡한 시인들은 가짜다. 김소월, 이상, 김수영을 생각하자. 그러니까 광기의 이성에 대해 사유하고 이성의 광기에 대해 사유하자.

 

그 중 한 부분입니다. 이 외에도 시집에 실린 시들이나 글을 보면 이승훈 시인이 시에 대해서 많은 고민과 연구를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안 읽어보신 분은 한 번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
이승훈 시인 시모음

사랑

비로소 웃을 수 있고 한가롭게 거리를 
걸을 수 있고 비가 와도 비가 와도 비 
를 맞을 수 있고 서점에 들려도 마음 
이 가벼울 수 있고 책들이 한없이 맑 
아지는 걸 볼 수 있게 된 건 투명한 책 
들 앞에 두렵지 않게 된 건 모두 어제 
네가 있는 곳으로 오라고 말했기 때문 
이야 네가 있는 곳! 따뜻한 곳! 그곳 
으로 오라고! 

~~~~~~~~~~~~~~~~~~~~~~~~ 

사랑의 시작 


피범벅 겨울이 가고 
넌 커단 가방 하나 들고 나타났지 
아니 커단 기차를 들고 나타났지 
그 기차에 타라고 말했지 
난 정신없이 기차를 타고 떠났다 
지금도 떠난다 
계속 떠난다 
이 기차, 이 구름, 이 항아리 속에 
내가 있으므로 
이 방 속엔 내가 없다 
이 학교에도 없다 
이 거리에도 없다 
그럼 어디로 간 거야? 
아마 네가 들고 온 기차 속에 있겠지 
이건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네가 온 다음 
난 아직도 제 정신이 아니야 
네가 오다니? 
다신 오지 않으리라 믿었지 
너, 이 봄, 이 아련한 날들, 이 도취의 날들, 
이 피안의 날들, 
이제 네 속에 내가 있다 
이제 내 밖은 온통 너다 
꽃으로 뒤덮인 들판, 
바람이 불어도 춥지 않은 날들, 
모두가 너다 
내가 앉아 있는 이 의자, 
내가 몰고 가는 쏘나타, 
내가 들고 가는 가방, 
내가 들리는 술집, 
내가 시를 쓰는 이 볼펜, 
이 백지, 
지금 차 밖에 내리는 어둠, 
왕십리의 불빛, 
깊은 밤 의왕 터널을 지나 나타나던 
수원의 불빛, 
깊은 밤 찾아간 카페, 
카페 유리창에 떨어지던 빗방울, 

내가 걸치고 간 겨울 바바리, 
모두가 너다 
피투성이 황혼 다음에 
문득 네가 오고 
이제 내가 보는 것, 
내가 만지는 것, 
내가 듣는 것, 
모두가 너다 난 사라지고 
요란한 폭음 속에 폭음 속에 
하얀 비행기 하나 떠 간다 
넌 다리 없는 새라고 말했지만 

~~~~~~~~~~~~~~~~~~~~~~~~ 

난 글쓰는 사람 


난 글쓰는 사람 
불행이여 우린 실컨 싸웠다 
난 위대한 작가가 아니야 
난 위대한 시인도 아니야 
난 글쓰는 사람 
난 글을 사랑하는 사람 
난 언어를 사랑하는 사람 
언어여 우린 실컨 싸웠다 
이제부턴 휴식이다 
재를 재떨이에 털고 
난 입에 담배를 물고 
이 글을 쓴다 
난 글쓰는 사람 
난 언어가 있기 때문에 
난 언어와 노는 사람 
난 당신과 노는 사람 
나의 병은 글쓰기 나의 병은 
나의 건강 오늘도 글을 쓰고 지치고 
언어여 당신에게 전화를 했지 
내가 쓰는 글은 
나의 애인, 나의 정부, 나의 천국 
나의 지옥, 나의 숨결, 나의 가슴 
나의 가슴의 흉터, 나의 섹스 
서지 않는 섹스 오 내 사랑, 
나의 항구, 나의 결핍, 나의 몸 
이유는 없다 
난 그냥 글쓰는 사람 
난 그냥 걷는 사람 
난 그냥 사랑하는 사람 
매미가 울고 햇살이 내리고 
나무가 크고 차들이 지나가듯이 
그냥 글쓰는 사람 
난 글쓰는 사람 
내가 쓴 글 속에 
헤엄치는 물고기 
이 글쓰기가 나를 낳고 
나를 키우고 나를 병들게 
하고 나를 나이 먹게 한다 
오 맙소사! 


시집 ; 너라는 햇빛 

~~~~~~~~~~~~~~~~~~ 

내 친구 개미 


넌 카페가 무언지 알 거다 내가 자주 들르는 카페는 
두 곳이다 하나는 인사동(천도교 회관 지나 고려원 
옆)에 있고 하나는 내가 사는 서초동에 있다 인사동 
(아아 아닌지 모른다 인사동이 아닐 거다 난 시를 
쓰다 말고 의자에서 일어나 생각해본다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승훈 씨가 편집한, 고려원에서 나온 책을 
서가에서 뽑아 살펴본다 종로구 경운동 70 그래 
경운동이로군) 카페에는 길을 향해 난 커단 유리창이 
있고 유리창 앞 나무 의자에 앉으면 유리창 너머 길이 
보이고 해가 지는 골목도 보이고 가을 저녁 낙엽이 
지는 나무도 보인다 고려원에 들르는 날은 야간 
강의가 있는 목요일 저녁이다 시간이 남으면 해질 
무렵 그 카페에 앉아 저무는 길을 보고 지나가는 
미인들도 보고 나처럼 못생긴 중년 남자들도 보고 
책도 보고 담배도 피우고 서초동 카페는 목요일 야간 
강의를 마치고 허전해서 들른다 넌 허전하다는 게 
무언지 알 거다 작은 카페 벽엔 검은 거울이 있고 
빠에 앉으면 거울 속에 내 얼굴이 흐리게 나타난다 
흐린 흐린 가을밤 혼자 맥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공상도 한다 술에 취하면 거울 속에 흐린 얼굴이 
또렷이 드러나고 난 갑자기 부끄러워 일어선다 이런 
밤의 심정을 시로 쓴 적이 있지만 이 시를 읽은 
제자는 너무 감상적이라고 발표하지 말라고 했다 
난 그의 말을 따랐다 이 시는 

술 마시는 밤이 외롭더라 
야간 강의를 마치고 
동대문을 지날 때 
동호대교를 지날 때 

사는 게 외롭더라 
너무 피곤하더라 
아파트 앞 카페에 
말없이 앉아 
담배를 피우는 밤이 외롭더라 

밤 열두시가 외롭더라 
1년이 외롭고 10년이 외롭더라 
의미가 없으면 없는 대로 
만나고 사랑하고 괴로워하고 
기뻐하고 후회하고 
그렇게 나는 게 외롭더라 

처럼 되어 있다 내가 생각해도 감상적이다 아아 난 
이다지도 감상적인가? 어린애들도 아닌 대학교수가 
이다지도 감상적이라니 쯧쯧 그러나 넌 감상이 무언지 
알 거다 벽거울이 있는 카페에 앉아 늦은 밤 맥주를 
마시는 이승훈 씨는 지친 모양이다 넌 지쳤다는 말이 
무언지 알 거다 지친 다음에 지친 다음에 찾아오던 
오한도 웃음도 알 거다 난 지금 보도블록 위에서 
만난 너를 생각하며 이 시를 쓴다 넌 내 친구니까 

~~~~~~~~~~~~~~~~~~~~~ 

흐린 밤 볼펜으로 


흐린 밤 볼펜으로 
이제 무엇을 쓰랴 
흐리게 흐리게 무엇을 쓰랴 

무엇을 찾아 
무엇을 찾아 쓰랴 
서럽던 날들을 쓰랴 
사라진 바다를 
바다 위의 구름을 쓰랴 
용서하랴 부서지랴 

축복받은 날들은 
모조리 아름답던 날들 
이렇게 흐린 밤 
목메이는 밤 
무엇을 쓰랴 

이 백지같은 외롬 
마음껏 찢어지는 외롬 
하염없는 날들만 하염없으니 
영원히 저무는 병원 하나만 
노적처럼 흔들리는 방에서 

사랑했던 사람아 
흐린 밤 볼펜으로 
이제 무엇을 쓰랴 
떠날 수 없고 
머물 수 없으니 
바위같은 가슴이나 울리면서 
이제 무엇을 쓰랴 


시집 ; 환상이라는 이름의 역 / 미래사 

~~~~~~~~~~~~~~~~~~ 

풍선기 1호 
-신동문의 「풍선기 1호」를 모방하여 


초원처럼 넓은 강의실에 선 채 
나는 아침부터 기진맥진한다 
하루 종일 수없이 백묵 가루를 
날리고 몇 차례인가 그리움을 
하늘로 띄웠으나 교수라는 나 
는 끝내 외로웠고 지탱할 수 
없이 푸르른 하늘 밑에서 당황 
했다 그래도 나는 까닭을 알 
수 없는, 너를 위하여 미열을 
견디며 끝내 기다리던, 그러나 
너라는 애초부터 알 수 없던 
고향 대신에 머언 창 너머 지나 
가는 솜덩이 같은 기차만을 지 
킨다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 

너를 만난 날 


너를 만난 날은 
날개 달린 날이다 
현실이 사라지고 
다른 현실이 
태어난 날 
그러니까 그날은 
초현실의 날이다 훨훨 
새가 날아오던 날 
너를 만난 날은 
만신창이가 되어 
여름을 힘겹게 보내고 
문득 가을이 오던 날 
너를 만난 날은 
필연의 날이다 
머리에서 손이 빠져 나오고 
다리에서 얼굴이 튀어나오던 
허리에서 설탕이 쏟아지던 
불안 비참 치욕 따위가 
지루하고 맥이 없던 날들이 
모조리 일어나 빛이 되던 
아아 내 어깨 쭉지에 
문득 날개가 돋던 날 
너를 만난 날 


시집 ; 너라는 환상 ; 세계사 

~~~~~~~~~~~~~~~~~~~~~~~~ 

쌀가게 앞에 서 있던 너 


봄날 오후 
쌀가게 앞에 
서 있던 너 
따신 해 
이마에 받으며 
서 있던 너 
병든 네 옆에 얌전히 
자고 있던 고양이 
봄날 햇살 속에 
말없이 서 있던 
네가 보던 건 
먹빛 슬픔 
바람 속을 지나가던 열차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후리지아 
오늘도 쌀가게 앞에 네가 
있을 것만 같아 
나는 고양이 한 마리 사러 
시장으로 간다 
후리지아는 너의 이름 
후리지아 옆에 잠들던 
고양이도 너의 이름 
먹빛 슬픔 속에 
오늘도 작은 마을 
햇살 내리는 골목 
어느 쌀가게 앞에 
서 있을 것만 같은 너 

~~~~~~~~~~~~~~~~~~~~~~ 

난 당신의 아저씨 


오늘부터 난 아저씨야 
가벼운 가벼운 여름이야 
아저씨는 지나가는 아저씨 
웃는 아저씨 
난 겨울 한강에 서 있던 아저씨가 아니야 
난 고개를 숙이고 웃는 아저씨 
작은 목로집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아저씨 
아름다운 당신 앞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난 당신 아저씨야 
당신 애인이 아니라 당신 아저씨 
이름 없는 아저씨 
모자를 쓰고 마포 삼겹살집에 앉아 
이룬 것도 잃은 것도 없는 황혼 아저씨 
비 아저씨 
빗물 고인 아스팔트나 바라보는 아저씨 
난 당신 아저씨야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묻지 마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지 마 
난 아저씨가 좋아 
끄노 아저씨도 있지 
프랑스에서 시를 쓰던 
기인 벤치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던 아저씨 
인생을 반납한 아저씨 
난 당신 아저씨야 
그동안의 먹구름도 천둥도 모조리 한강에 
버고 온 아저씨! 

~~~~~~~~~~~~~~~~~~~~~ 

허나 밤이 좋다 


허나 밤이 좋다 
악몽만 있는 밤이 
창백한 망치로 두드리는 밤이 
나를 나에게서 분리하는 밤이 
나는 좋다 
그래도 나는 밤이 좋다 
꿈 속에 떠 있는 밤 
의식 없는 밤 
나는 밤의 주인은 아니지만 
밤의 주인은 떠난지 오래다 
몇 번이나 돌아누우며 
바람 소리만 들리는 밤 
아무도 없는 밤 
한번도 꿈꾸는 나를 
제대로 볼 수 없는 밤 
과거만 있는 밤 
코도 없는 밤 
코만 있는 밤 
지남철도 없는 밤 
이 구부러진 밤이 
나는 좋다 횔더린의 궁핍한 
시대도 미래도 모조리 잠든 밤 
불빛도 불빛도 죽은 밤 
비행기도 없는 밤이 
나는 좋다 
누가 뭐래도 좋다 
영혼 따위가 없는 밤 
몽상 따위가 없는 밤 
악몽만 있는 밤 한없이 
식어가는 육체만 있는 
이 밤이 나를 나에게서 
분리하는 이 밤이 
나는 좋다 
너무 좋아서 
이윽고 나는 밤을 
꽉 깨물어 버린다 


시집 ; 환상이라는 이름의 역 / 미래사 

~~~~~~~~~~~~~~~~~ 

가을 


하아얀 해안이 나타난다. 어떤 투명도 보다 투명하지 
않다. 떠도는 투명에 이윽고 불이 당겨진다. 그 일대에 
가을이 와 머문다. 늘어진 창자로 나는 눕는다. 헤매는 
투명, 바람, 보이지 않는 꽃이 하나 시든다. (꺼질 줄 모 
르며 타오르는 가을.) 


환상이라는 이름의 역 / 미래사 

~~~~~~~~~~~~~~~~~~~~ 

또 가을이다 


피는 
불이 되고 

불은 
연기가 된다 

이제 
나는 연기다 

나는 
풀풀풀 날린다 

시간이 
딸꾹질하는 뇌에는 

연기만 가득하다 
또 가을이다 


환상이라는 이름의 역 / 미래사 

~~~~~~~~~~~~~~~~~~ 

이곳에서의 삶 


죽은 듯이 살았다 
빛나는 것은 없었다 
하염없이 살았다 
땅에 침을 뱉었다 
한번 더 뱉었다 
머언 데로 한없이 
가까운 데로 달려갔다 

오오 죽음이 다 된 삶 
나를 떠나게 하던 삶 
내가 떠나던 삶 
나를 위해 기도하던 삶 
내가 기도한 삶 
그토록 커다랗던 삶 
그토록 커다랗게 나를 가둔 삶 
내가 크게 크게 가두었던 삶 

시방 여름 대지에서 
만나면 외면해야 할 
흐린 날들의삶 
비린내 투성이 삶 
한번도 지켜지지 않았던 삶 

저 삶이 하루종일 
연기만 나는 삶이 
허나 영원히 사랑했던 삶이 
나를 영원히 사랑했고 
내가 영원히 사랑할 삶이 
시방 이렇게 불탄다 
삶은 삶 속에 나를 가두고 
나는 내 속에 삶을 가둔다 


환상이라는 이름의 역 / 미래사 

~~~~~~~~~~~~~~~~~~~~ 

저녁 기차 


저녁 기차를 타고 
눈발이 날리면 
너와 함께 
겨울 바다에 
가고 싶어 
언제나 생각 뿐이지 
사는 게 지겹다고 
말은 하지만 한번도 
떠날 수 없었어 
저녁 기차를 타고 
떠날 수 없었어 
오늘도 저녁 
기차를 보면 
그동안 살아온 게 
치사해 더러워 
지겨워 역겨워 
거적을 쓰고 
살아온 것만 같아 
엄살이 아니야 
오늘도 저녁 
기차를 보며 
손을 흔든다 
저녁 기차는 
들은 척도 않고 
오늘도 칙칙퍽퍽 
어디로 가는 걸까 
오늘도 저녁 기차는 
가느다란 아편 같다 


시집 ; 너라는 환상 / 세계사 

~~~~~~~~~~~~~~~~~~~~~~~~ 

작은 방에 대한 회상 


겨울 저녁이면 난 버스를 타고 당신의 방에 간다고 
시를 쓴다 언제던가 그해 겨울 저녁에도 난 버스를 
타고 당신의 방에 갔다고 시를 썼다 당신은 없고 빈 
방에 모자를 걸어두고 왔다는 내용이다 그때만 해도 
시적이었군! 당신 없는 방에 혼자 앉아 담배를 피우고 
밖에는 눈이 내리고 당신 혼자 사는 작은 방 벽에 
모자를 걸어놓고 돌아왔다고 

그해 겨울 어머니는 개포동 독신자 아파트(13평)에 
혼자 사셨다 난 일요일이면 어머니를 찾아갔다 
어머니는 작은 방에 앉아 계셨다 어머니는 뒷산에 
산책을 나가신 날도 있었다 난 어머니가 없는 빈 방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어머니가 읽다 둔 원불교 경전도 
보고 혼자 돌아온 날도 많다 어머니는 지난해 겨울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밤에 난 
거리를 떠돌고 있었다 

겨울 저녁이면 당신의 방에 간다고 시를 쓴다 당신은 
겨울 오후 작은 방에 누워 있었지 밖엔 바람이 불고 
난 목에 마후라를 하고 눈 내린 골목을 돌아갔다 아아 
옛날 춘천에서다 난 당신을 찾아갔다 어머니도 겨울 
오후 작은 방에 누워 계셨지 일요일이면 차를 몰고 갔다 
그러나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오늘도 

난 당신의 방에 간다고 시를 쓴다 물론 당신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모든 당신은 어머니다 춘천은 너무 멀다 
개포동도 너무 멀다 아무튼 난 누군가를 따라 이 세상에 
왔다 내가 노래한 작은 방은 모두가 어머니를 상징한다 
내가 그동안 방에 대해 시를 쓴 건 어머니, 그리고 
당신 속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그렇다 모두 
어머니 속으로 돌아가자! 어머니 속으로 돌아가자! 
어머니 속으로 돌아가자! 난 시를 쓰다 말고 책상에 
이마를 처박는다 오 언제나 겨울 저녁이 
문제로다 


시집 ; 나는 사랑한다 / 세계사 

~~~~~~~~~~~~~~~~~~~~~ 

너라는 햇빛 


나는 네 속에 사라지고 싶었다 바람 부는 세상 너라는 
꽃잎 속에 활활 불타고 싶었다 비 오는 세상 너라는 
햇빛 속에 너라는 제비 속에 너라는 물결 속에 파묻히 
고 싶었다 눈 내리는 세상 너라는 봄날 속에 너라는 
안개 속에 너라는 거울 속에 잠들고 싶었다 천둥 치는 
세상 너라는 감옥에 갇히고 싶었다 네가 피안이었으 
므로 

그러나 이제 너는 터미널 겨울저녁 여섯시 서초동에 
켜지는 가로등 내가 너를 괴롭혔다 인연은 바람이다 
이제 나 같은 인간은 안된다 나 같은 주정뱅이, 취생 
몽사, 술 나그네, 황혼 나그네 책을 읽지만 억지로 억 
지로 책장을 넘기지만 난 삶을 사랑한 적이 없다 오늘 
도 떠돌다 가리라 그래도 생은 아름다웠으므로 

~~~~~~~~~~~~~~~~~~~ 

우리들의 밤 


꿈이란 무엇이며 
어둠이란 무엇이며 
혁명이란 무엇인가 
비 내리는 밤 
비 내리는 밤이란 무엇인가 
쓸쓸한 사람 곁에 누워 있는 
비쩍 마른 나는 무엇이며 
흘러간다는 것은 무엇이며 
비 내리는 밤 
문득 들리는 네 가슴의 
시냇물 소리란 무엇인가 
치욕이란 무엇이며 
추위란 무엇이며 
생활이란 무엇인가 
어둠 속에 불을 켜고 
잠이 안 와 돌아눕는 
이 외롬이란 무엇이며 
어둔 창을 열고 
약을 먹는 나란 무엇인가 
그런 게 모두 무엇인가 
어둠 속에 잠시 타오르는 
불빛 불빛 같은 것 
그런 게 
모두 무엇인가? 


시집 ; 환상이라는 이름의 역 / 미래사 

~~~~~~~~~~~~~~~~~~~~ 

사는 기쁨 

-없는 사람이 없는 물건과 이야기를 나누듯이 
-타르디유 


없는 사람이 
없는 물건과 
이야기를 나눈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다 
이건 이미지가 아니다 
이건 시가 아니다 

그런 밤이 있다 
그런 새벽이 있다 
그런 저녁이 있다 

그가 시쓸 때 
그가 목욕할 때 
그가 술에 취해 
앉아 있을 때 

없는 사람이 
없는 물건과 
이야기를 나눈다 

과연 그런가? 
의심스럽다면 
독자들도 연습삼아 

없는 사람이 
없는 물건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건 힘든 일이 아니지요 

수동적인 상태로 
기다리는 일이지요 
사랑하는 남자의 몸을 
조용히 기다리듯이 
능동적인 상태로 
기다리는 일이지요 

그러니까 기다림 속엔 
포기와 노력이 있지요 

없는 사람과 
없는 물건이 
이 밤 속에 
나타난다 
사라진다 

나타남과 
사라짐은 
결국 하나다 

이런 생각 때문에 
그는 노이로제가 
되어 간다 

시집 ; 길은 없어도 행복하다 / 세계사 

~~~~~~~~~~~~~~~~~~~~~~ 

도라지 


요만한 여유가 고맙다 여유는 나를 버리는 일 오오 욕 
심 욕심 고정관념을 버리고 담배를 피우면서도 담배 
피운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러니까 망각이다 처음엔 
말보로를 피우다가 도라지로 바꾼 건 인후염 탓이지 
만 오늘 저녁 도라지도 있고 파아란 도라지꽃도 있고 
갑자기 도라지꽃 생각이 난다 도라지 도라지 산도라 
지 내가 피우는 당신 요만한 여유라도 생긴 건 모두가 
당신 때문이고 저녁에 마시는 하이트 때문이다 

~~~~~~~~~~~~~~~~~~~~~ 

너를 만나고 


너를 만나고 사랑이 난리라는 걸 
배웠다 
너한테 너한테 배웠다 
사는 게 난리지만 그동안 
너를 만나고 
난리가 끝난 줄 알았지 
그러나 아니야 
네가 떠난 다음 또 난리가 나고 
이 난리는 
내가 만든 난리 
겨울저녁에 시작된 난리가 
봄이 오는 저녁에도 계속되고 
난리는 난리는 불이 아니야 
불이라면 끌 수도 있지만 
난리는 사랑이야 
사랑은 저주받은 사람들의 직업이야 
겨울저녁 싯벌건 노을이야 
밤새도록 부는 바람이야 
너를 만나고 사랑이 난리라는 걸 
배웠다 
지금도 계속되는 이 고역 
이 업보 이 가난 
하얀 닭이나 백 마리 기르면 
난리가 끝날까? 
이 난리가 지금도 계속되는 난리가 
끝이 없네 
천 마리 닭이나 기르면 끝나리 
어젯밤에도 술만 마시고 
돌아왔네 

~~~~~~~~~~~~~~~~~~ 

새로운 눈물 


새로운 눈물은 
깊은 밤에 왔다 
산을 넘어 왔다 
불안을 이긴 밤에 
문득 찾아왔다 
새로운 눈물은 
어느날 그립다는 말 속에 
불타며 왔다 
눈에 덮인 산과 함께 
불 꺼진 밤과 함께 
갑자기 왔다 
새로운 눈물 속에 
너는 작은 역(驛)이었고 
너는 작은 새였고 
너는 작은 바다였다 
작은 바다 속에 
나는 다시 태어났다 
불안을 이긴 밤에 
산너머 산너머 
갑자기 찾아온 
새로운 눈물은 
나를 감싸고 가슴에 
쾅쾅 못을 박았다 


당신의 방 / 문학과지성사, 1986 

~~~~~~~~~~~~~~~~~~~~ 

풀잎 끝에 이슬 


풀잎 끝에 이슬 풀잎 끝에 바람 
풀잎 끝에 햇살 오오 풀잎 끝에 
나 풀잎 끝에 당신 우린 모두 
풀잎 끝에 있네 잠시 반짝이네 
잠시 속에 해가 나고 바람 불고 
이슬 사라지고 그러나 풀잎 끝 
에 풀잎 끝에 한 세상이 빛나네 
어느 세월에나 알리요? 


시집 ; 인생 / 민음사 

~~~~~~~~~~~~~~~~~~ 

말의 사랑 


그러나 말에 사무치고 말이 가는 
곳에 사무치고 말의 헤맴에 사무 
칩니다 말의 원한이 아니라 말의 
사랑이 뼈에 사무칠 때 우린 깨 
어납니다 말을 사랑하십시오 인 
간이 아니라 말에 사무칠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해가 지고 밤이 옵니다 말에 사 
무쳐서 말을 여의고 사라진 말 
속에 불을 켜십시오 아니 불이 
당신을 켭니다 말에 사무칠 때 
말은 사라지고 사무침만 남습니 
다 사무치는 인생을 사십시오 사 
무치는 사랑, 사무치는 슬픔, 사 
무치는 리듬, 사무칠 때 깨어납 
니다 


시집 ; 인생 / 민음사 

~~~~~~~~~~~~~~~~~ 

학교 


그는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학교에는 책상이 
많았습니다 
그는 책상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의자도 
사랑했습니다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습니다 
그는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가 의자에 앉자 
그만 의자가 부서졌습니다 
[이런 개새끼들] 
그는 중얼거렸습니다 
학생들이 마악 
웃었습니다 
그는 공부할 게 
없었습니다 
그는 학교에서 
하루종일 놀다가 
그만 학교를 
나왔습니다 
[이젠 끝난 거야] 
그리고 그는 웃었습니다 


세계사시인선 

~~~~~~~~~~~~~~~~~~~~~~ 

日月 


이 신발 너에게 주고 
가리라 
일월(日月)이여 이 옷도 너에게 
주고 
눈 내리면 눈도 주고 
가리라 
흐린 가을 저녁 
찬비는 내리고 
일월(日月)이여 
있음은 무엇이고 
없음은 무엇인가 
언제나 벼락이 있고 
멀쩡한 대낮에 비가 오네 
그러므로 일월(日月)이여 
좀 더 닦아야 하리 
이 책상도 닦고 
벽도 닦고 거울도 닦고 
가으내 아픈 
이 팔도 닦고 
책 속의 글자들 
오오 글자들도 닦아야 하리 
가을 가고 
겨울 오는 아침에 
눈이 오네 

~~~~~~~~~~~~~~~~~~~~ 

너를 안으면 


너를 안으면 
어둠이 사라지고 
바람불던 저녁도 사라지고 
무슨 정신도 사라진다 
너를 안으면 
병든 거리도 
소리없이 사라진다 
너를 안으면 
불안도 사라진다 
너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면 
마흔 개의 
어둠이 사라지고 
너의 얼굴에 
나를 묻으면 
마흔 개의 
감옥도 사라지고 
우울도 사라지고 
만성 신경증에 시달리던 
밤들도 사라진다 
너의 가슴에 
손을 대면 
나의 손도 사라진다 
이젠 네가 있으니까 
이젠 네가 나이니까 
너의 가슴에 
텀벙 뛰어든다 
그래서 이젠 
너의 얼굴도 
볼 수 없다 


아름다운 A / 황금북. 2002 

~~~~~~~~~~~~~~~~~~~~~~ 

무수한 너 


길을 가다가 
문득 살펴보면 
이 팔도 
이 머리도 
무수한 너로 덮인다 
그렇다 
내가 
걷는 게 아니다 
거리를 걸어가는 너 
시장을 보러 가는 너 
운전을 하는 너 
친구들 속에서 더욱 
외로워지는 너 
해질 무렵 유리창에 
물고기를 그리는 너 
편지를 쓰는 너 
기다리는 너 
돌아눕는 너 
그런 네가 
나를 이룬다 
나를 이루고 
나를 부수고 
다시 이루는 
끝없이 돌아가는 
무수한 너! 


아름다운 A / 황금북. 2002 

~~~~~~~~~~~~~~~~~~~~ 

쏘파 위치에 대하여 


난 쏘파 위치만 바꾸며 세월을 보낸다고 
시를 썼다 이런 나를 두고 허혜정은 쏘파 
의 배치에 집착하는 편집증은 기이한 것 
이며 쏘파는 어떤 위치에 있어도 화자를 
만족시키지 못하며 그것은 자아를 <나>라 
는 쏘파에 이르게 하려는, 끝없는 나라는 
주체의 공간에 배치하려는 노력이며 결국 
쏘파를 이리저리 옮기는 것은 틈새를 만 
드는 일이며 채워넣는 일이며 세계의 틈을 
열고 구멍을 메꿔넣는 일이라고 말한다 
(허혜정, 「타이어 또는 말 아래의 공간」, 
『현대시학』,1997.10) 과연 그렇도다 쏘파 
를 옮기며 세월을 보내는 것은 틈새, 어디 
에도 없는 나를 만드는 일이다 허혜정의 
글을 보충하는 의미에서 나도 이승훈의 시 
를 분석한다 그의 시에서 위치 바꾸기를 
강조하면 위치는 입장이고 시각이고 중 
심이다 그는 끝없이 중심에서 벗어나기, 
이탈을 꿈꾼다 그리고 입장은 서는 일이다 
서야 한다 그의 몸도 추억도 페니스도 시 
체처럼 시체처럼 서야 한다 시체를 잡아 
먹으며 서야 하지만 또 위치는 정하기이며 
그것은 흐름을 파괴하고 무를 파괴하고 이 
흐름의 파괴, 고정이 의미를 낳는다면 그 
가 쏘파 위치를 바꾸며 세월을 보내는 것 
은 의미에서 벗어나려는 무의식을 상징하 
고 거리엔 바람이 불고 겨울저녁 그는 
시체처럼 고요히 고요히 고요히 움직인다 
쏘파는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 있는 틈새 
또다른 동굴이다 오오 동굴! 이 동굴을 
들고 그러나 이 동굴에 대해선 말하지 맙 
시다 그의 시에 대해서도 쏘파에 대해서도 
글쎄 내가 너무 예민하다고 말한 건 수선 
소 여인 갑자기 바바리 한쪽 팔 길이가 
기인 것 같아 (아내 몰래) 들고 간 나를 
보면서 이 추운 저녁 아파트 앞 지하상가 
수선소 여인은 글쎄 신경이 너무 예민하다고 
그냥 입으라고 돌려보냈지만 

~~~~~~~~~~~~~~~~~~~~~~~~ 

봄이 오던 날의 대화 


여자:다시 태어난다면 
무얼 하고 싶어? 

남자:다시 태어나길 
바라는 게 죄야 

여자:그러니까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남자:그땐 물새만 그리는 
화가가 되고 싶어 

여자:그래 그런 화가 
물새만 찾아다니는 

남자:언제나 물새만 그리는 

여자:밥은 누가 먹여 주고? 

남자:그렇군 다시 태어나면 
밥 걱정이나 없었으면 

여자:한세상 물가에서 
오리 뻐꾸기 귀뚜라미 

남자:뻐꾸기는 물새가 아니야 

여자:왜 아니지? 

남자:어째서 뻐꾸기가 물새야? 

여자:내가 물새라면 
물새가 되는 거야 

남자:그렇군 원칙은 없으니까 

여자:다시 태어나면 정말 
무얼 하고 싶어? 

남자:시인은 괴로워 

여자:편안한 시인도 있지 

남자:그럼 시를 못 쓰지 

여자:다시 태어나면 

남자:언어는 골치가 아파 

여자:과연 우린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남자:난 지은 죄가 너무 많아 

여자:그건 나도 그래 

남자:나무를 봐 

여자:봄이 오려나 봐 

남자:벌써 봄이 온다고? 



여자와 남자 멍하니 

창 밖을 본다 



이승훈시선 ; 아름다운 A / 황금북 

~~~~~~~~~~~~~~~~~~~~ 

아름다운 계절 


괴롭지만 신나던 계절 
너를 만난 계절 
꽃이 피던 계절 
그러나 꽃이 지고 
갑자기 슬픔이 찾아왔네 
오늘 저녁 슬픔이 찾아왔네 
어디가 아픈 모양이야 
어디가 아픈 모양이야 
괴롭지만 신나던 계절 
너를 만난 계절 
네가 웃던 계절 
그러나 너의 미소가 사라지고 
갑가지 슬픔이 찾아왔네 
오늘 저녁 슬픔이 찾아왔네 
살다 보면 슬플 수도 있지 
살다 보면 슬플 수도 있지 
그러나 네 목소리 들리지 않고 
난 휴지조각 위에 
시를 쓰네 
이 흐린 저녁에 
시를 쓰네 
하얀 종이 위에 쓰는 게 아니야 
난 지금 어둠이 내리는 저녁에 
휴지조각 위에 
그러니까 휴지가 된 마음 위에 
감기에 시달리며 
시를 쓰는 거야 
너의 미소가 태어나길 바라는 
심정으로 
시를 쓰는 거야 
너를 위해 
실의에 빠진 봄 너를 위해 
이 시를 쓰는 거야 


시집 ; 너라는 햇빛 / 세계사.2000 

~~~~~~~~~~~~~~~~~~~~ 

당신 


고양이처럼 살고 싶어라 
엎드려 있고만 싶어라 
고운 피 흘리는 마음 
복사꽃 복사꽃은 피는데 

어디로 가고만 싶어라 
이 어두운 마음 
밝아오는 해이고 싶어라 
아무리 채찍이 갈겨도 

그리움은 끝나지 않어라 
당신 얼굴에 입맞추고 싶어라 
하아얀 돌이고 싶어라 
파아란 구름이고 싶어라 

모조리 버리고 오늘 
바쁘게 명동을 걸어가면 
바람부는 왕십리를 걸어가면 

고양이처럼 살고 싶어라 
언제나 다른 나라에 계신 
당신 고개 한번 끄덕이면 
복사꽃 복사꽃은 지는데 


이승훈시선 ; 아름다운 A / 황금북. 2002 

~~~~~~~~~~~~~~~~~~~~~~ 

네가 찾는 것 


여름날 오후 
헌 책방에서 
네가 찾은 건 
책이 아니다 
땀을 흘리며 
네가 찾는 건 너의 
마음인지 모른다 
여름날 오후 
모자를 쓰고 
먼지 속에서 
네가 부지런히 찾는 건 
시간인지 모른다 
흘러간 시간 
헌 잡지를 뒤지며 
헌 잡지에 문득 
코를 박는 건 
너의 가슴을 
박는 건지 모른다 
길 모퉁이 허름한 
책방에서 오늘도 
헌 책을 뒤지는 
너의 손과 가슴과 
부르튼 입술은 
달리던 버스에서 
갑자기 뛰어내려 
헌 책방으로 달려가 
헌 책을 뒤지는 
너의 얼굴은 
문득 흐려진다 

~~~~~~~~~~~~~~~~ 

고 향 


두 시간 버스를 타고 
오늘도 문득 내려가면 
너는 거기 있구나 
옛날처럼 내 상처 
다스리며 말없이 서 있구나 
가을 해 부서지는 길거리에 
사금파리 울음 감추고 
너는 나를 맞는구나 
술 마시고 보낸 밤들 
훌훌 털고 10년 만에 문득 
버스 타고 내려가면 
너는 들국화처럼 피어 있구나 
화만 나던 날들이었다고 
너와 마주앉아 말하면 
모든 화 말끔히 씻기며 
눈내린 겨울 아침 
마후라를 하고 찾아가던 
골목에 너는 아직도 서 있구나 
몸은 야위었지만 
하얀 스웨터를 입고 
커단 눈으로 웃으며 
나를 맞는구나 나를 버리지 않는구나 
「옛날에 너를 버린 건 나야」 
나직히 말해도 너는 웃고만 있구나 
가을 해 너무 고운 아스팔트에 
말없이 서 있는 너 
두 시간 버스를 타고 
오늘도 문득 내려가면 
네가 있을 것만 같아 
옛날 골목 찾아가면 
있는 건 너의 흔적 뿐 
오오 고향에 있는 건 
언제나 고향의 흔적 뿐 


이승훈 시선 ; 환상이라는 이름의 역 / 미래사 

~~~~~~~~~~~~~~~~~~~~~~~~ 

격 언 


난 시를 
피로 쓰지 않는다 
당신도 시를 
피로 쓰지 않는다 
우린 시를 
피로 쓰지 않는다 

그러니까 니체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거야 
그래도 좋아 
그래도 좋아 
우린 빈혈이니까 


시집 ; 너라는 햇빛 / 세계사 

~~~~~~~~~~~~~~~~~~~~~~~~~~ 

인생은 언제나 속였다 


인생은 언제나 그를 속였다 그가 다가가면 발로 차고 
그가 도망가면 팔을 잡았다 그가 웃으면 울고 그가 울면 
웃었다 그가 망하면 웃고 그가 팔을 쳐들면 웃고 그가 
걸어가면 웃고 너를 안을 때뿐이다 인생이 그를 속이지 
않은 건 너를 안을 때 해가 질 때 너의 눈을 볼 때 
너와 차를 마실 때 그러나 너와 헤어지면 인생은 그를 
속였다 추운 골목을 돌아가면 골목의 상점에서 담배를 
사면 가로등에 불이 켜지면 인생은 속였다 밤이 오면 
아파트 계단을 오르면 작은 방에서 잠을 이룰 수 없으면 
밖에 바람이 불면 바람 속에 돌아누우면 잠이 안 와 
문득 일어나면 새벽 두 시 캄캄한 무덤에 불을 켜면 무덤 
속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 책 상 위 전기 스탠드를 켜면 
위통이 찾아오면 다시 불을 끄면 캄캄한 무덤 속에 누워 
있으면 책상 위의 냉수를 마시면 책상 위의 사과를 먹으면 
아아 <나>를 먹으면 아무 소리도 나지 않으면 문득 머언 
무적이 울면 새벽 연필을 깎으면 이마에 술기운이 남아 
있으면 다시 잠이 안 오면 문득 무섭다는 느낌이 들면 
턱을 고이면 떨리는 손으로 일기를 쓰면 돌덩어리 
우울 황폐한 새벽 인생은 그를 속였다 인생은 언제나 그를 
속였다 그를 속이고 그를 감시하는 이 인생이라는 놈! 

~~~~~~~~~~~~~~~ 

당신은 그동안 


당신은 그동안 
너무 무겁게 살았지 
이젠 가볍게 살아야 해 
어린아이처럼 살아야 해 
사람을 사랑하는 건 
순진하게 되는 것 
아름답게 되는 것 
향기롭게 되는 것 
고통보다 환희 
분노보다 용서 
절망보다 희망 
복잡한 건 단순하게 
당신은 쉰이 넘었지만 
어린아이처럼 살아야 해 
실수도 많았지만 
머리도 세었지만 
당신 머리엔 새가 날아와 
놀아야 해 
봄이 한창일 때 
꽃이 한창일 때 
어두운 어린 시절을 보낸 
당신은 그때를 잊어야 해 
오늘은 화창한 날 
오늘은 여름이 오는 날 
오늘은 당신이 좋아하는 
여름이 오는 날 
어린아이처럼 살아야 해 
시간은 많지 않아 
공부할 시간도 
술 마실 시간도 
좋은 사람과 만날 시간도 
그러니까 순진하게 
아름답게 
아름답게 
무엇보다 아름답게 
살아야 해 

시집 ; 너라는 햇빛 / 세계사 

~~~~~~~~~~~~~~~~~~~~~~ 

너 


캄캄한 밤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너를 만 
났을 때도 캄캄했다 캄캄한 밤에 너를 만났고 캄캄한 
밤 허공에 글을 쓰며 살았다 오늘도 캄캄한 대낮 마당 
에 글을 쓰며 산다 아마 돌들이 읽으리라 

~~~~~~~~~~~~~~~~~~~~~~~~~ 

너라는 역 


어제 저녁 사랑에 도달한 나는 어제 저녁 너라는 역에 
도달한 나다 너라는 역에 금잔화 불타는 작은 역에 금 
잔화만 불타는 너의 몸에 너의 가슴에 너의 눈에 너의 
코에 

지금도 도달한다 사고가 극한에 네가 있다 너라는 몸 
이 있다 덧없는 순간들이 진리다 이 덧없음 속에 활활 
타는 금잔화 속에 포옹 속에 눈물 속에 죽음과 삶 속 
에 저무는 가을 

~~~~~~~~~~~~~~~~~~ 

이 종이에 


이 종이에 
무얼 쓸까 
이 하얀 
이 창백한 
이 물보라치는 
얇은 종이에 
너의 이름을 쓸까 
가을의 뼈에 대해 쓸까 
네가 찾아온 날의 
환희에 대해 쓸까 
지나가는 가느다란 바람에 
날려 버릴까 
푸른 건 가냘프다고 쓸까 
이 하얀 
이 부끄러운 
이 죄많은 
얇은 가슴에 
가을은 스미건만 
무슨 목적이 있느냐 
오는 부는바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시간이 정지한 
가을 햇살에 
발을 담그면 
발은 그대로 
폭포가 되는 
이 가을 
하얀 종이에 
슬픈 에세이를 쓸까 
슬픈 독수리 하나 
떠 있다고 쓸까 
이 병든 
이 하얀 
이 펄럭이는 가슴에 
정말 무얼 쓸까 

제4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사 

~~~~~~~~~~~~~~~~~~~~ 

이승훈 시인 소개 

1942 강원도 춘천 출생 
연세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현대시 동인 
1962 <현대문학>에 시 <낮> 외 2편이 추천되어 등단 
1983 제29회 현대문학상 수상 

주요 저서 시집 목록 

저서명 부서명 총서명 출판사 출판년 
시집 <사물(事物) A> 1969 
시집 <환상의 다리> 일지사 1976 
시집 <당신의 초상(肖像)> 문학사상사 1981 
시집 <사물들> 고려원 1983 
시집 <당신의 방> 문학과지성사 1984 
시집 <상처> 영언문화사 1984 
시집 <한국명시감상> [편] 청하 1985 
시집 <아름다운 사람 그리운 시간> 고려원 1987 
시집 <너를 본 순간> 문학사상사 1987 
시집 <인간들 사이에서> 고려원 1987 
시집 <시집 샤갈> 탑출판사 1987 
시집 <너라는 신비> 세계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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