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달자/시인
연초 갑오년을 맞이하면서 사람들은 청마(靑馬)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떠 있는 듯했다. 설이 지나고 입춘, 우수까지 지난 지금도 청마에 대한 얘기가 그치지 않는다. 내 주변에도 청말띠 아기를 가지려는 여성이 몇 있다. 다 좋은 일이다. 불임을 임신으로, 실직을 취업으로, 미혼은
결혼으로, 지지부진한
사업은 급성장으로, 환자는 회복으로 바뀌는 기적을 갑오년 청말띠 해에 걸어 보는 일 나쁘지 않다.
어쩌면 바람직한 기대감이 살짝 기분을 상승시키는 일로서 권장할 만하다. 청말띠는 경기회복에도 청신호가 켜진다는 마음으로 모두들 두 손을 모으고 올해에는 진심으로 소망이 이뤄지기를 뼛속 기운을 다해서 빌어 보는 것이다.
땅을 울리는 역동적 기운과 진취적인 기운이 우리에게, 아니 내 안으로 깊이 들어오는 긍정의 꽃향기가 피어나는 것은 진정으로 바람직하다. 바라면 이뤄진다는 법칙을 다 알고 있지 않은가.
며칠 전에도 몇몇 후배들과 만나 차를 마시는 시간에 청마가 과연 있느냐로 한 시간 넘게 수다를 떨었다. 사실은, 있다고 해도 되고 없다고 해도 괜찮은 일이다. 다 마음에 달린 것 아니겠는가. 옛날 같으면 청말띠라면 여자아이는 태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임신부들의 마음을 태웠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은 소리없이 흘러 지금은 오히려 그런 훨훨 나는 딸을 낳고 싶어 안달을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12지에 맞는 말띠이지만 청말은 실제로는 없다는 쪽으로 자꾸만 흘러간다.
나는 ‘청노루’를 생각했다. 박목월의 시에 나타나는 그 환상적이고도 아름다운 청노루, 그리고 자하산, 그리고 청운사 청밀밭…. 그것도 실제로는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박목월 시인이 있다면 있는 것이다.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 집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가는 열두 구비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이 기막힌 상상력의 현실화는 우리에게 청노루며 자하산이며 청운사가 왜 없다고 생각하겠는가. 박목월 시인의 초기 시에 해당하는 이 ‘청노루’는 언제나 우리에게 희망과 비밀스러운 언약을 준비하게 한다. 때론 외로울 때,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나는 이 시를 가만히 외워 본다. 모든 군살을 빼고 행간마저 깊고 넓은 이미지를 연상하게 하는 이 간결한 시는 따뜻한 어머니의 손길처럼 마음을 녹인다. 그리고 멀리멀리 보이지 않는 세계에까지 마음이 가 닿으려는 의지를 북돋아 주기도 하는 것이다.
시는, 예술은 우리들 마음속에 청노루가 있다고 믿음을 갖게 하는 내적 힘을 촉발하는 게 아닌가. 실지로 우리나라에는 순전히 검은빛으로 빛나는 두 필의 말이 있다고 들었다. 너무 검어 윤이 자르르 흐르는 이 두 필의 말은 값도 어마어마하지만 그 관리도 어렵다고 했다. 그 검은빛 말을 보노라면 이상하게도 푸른빛이 감돈다는 것이다. 검은빛 속에 어른거리는 도도한 푸른빛! 나는 알고 있다. 저녁 무렵 어둠이 밀려오는 순간 나는 본다. 어둠의 속살은 푸른빛이라는 것을, 어둠 속에는 유려하고 깊이 있는 아름다운 청색이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본다. 그 어둠 속의 깊은 속살의, 푸른빛의 힘으로 어둠은 세상을 감싸고 새벽 여명의 또 다른 눈부심을 탄생시킨다는 것을 안다.
검은 말을 두고 ‘짙푸른 말’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말갈기를 드높게 날리며 달리는 검은 말의 속도 속에 비쳐나는 맑고 유려한 푸른빛을 보는 사람은 안다.
해가 지고 밀려오는 어둠의 날개 속에서도 주변은 푸른 생명 빛이 감돈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은 어떤 고통, 어떤 실망 앞에 있더라도 우리는 그 안에서 청마를 타고 달린다는 의지만 있다면 우리의 지금의 고통은 청마처럼 달려갈 자신감으로 빛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다. 무거운 현실을 안고 결코 쓰러지지 않고 그 무게를 지고 나르는 의지를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를 따라 우리도 저벅저벅 그렇게 안고 왔던 것이다.
‘어느 가시덤풀 쑥굴헝에 뇌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玉)돌 같이 호젓이 무쳤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서정주 시인의 ‘무등을 보며’의 한 대목이다. 초기 시에 나타나는 ‘싸늘한 바위에 푸른 숨결 불어 넣기’와 같은 이미지로 이 옥돌의 색깔이야말로 싸늘한 바위 속 푸른 숨결의 생명 빛 아니겠는가. 이 생명 빛 옥돌을 품고 청마로 가볍게 날아 볼 일 아닌가.
마음에 있으면 이미 날개를 펼 일이다. 두 팔을 벌리자, 그리고 날아오르자. 번민을 거두고 날아오르자. 훨훨 날자 손끝, 발끝에 힘을 주자.
눈을 감고 생각해 보자. 옥돌을 안고 청마 타고 나는, 그래서 광야를 달리듯 희망의 갈기를 날리며 달려 보는 2014년의 그림을 그리자. 그렇지 않은가. 마음을 이끄는 시, 마음을 부풀리는 그림, 마음을 다스리는 음악이 있다는 것은 바로 우리 마음속에 청노루를, 청마를, 그리고 옥돌 같은 의지를 품는 일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청마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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