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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파 = 소식 시세계
2015년 10월 13일 17시 54분  조회:5103  추천:1  작성자: 죽림



소동파(蘇東坡)의 시 세계

호방한 작풍, 거침없는 필치

 

  

 

올해도 서른 명의 소동파가 나왔다

 

"올해도 서른 명의 소동파가 나왔다." 이것은 고려 시대의 문학가 이규보가 그의 「전이지(全履之)에게 답하여 문장에 관하여 논하는 편지」에 인용한 것으로 당시 과거 시험 합격자를 발표하는 날이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던 말이라고 한다. 서른 명이라고 한 것은 과거 시험 합격자의 수인 33명을 개략적인 숫자로 나타낸 것이니 당시 젊은 학자들이 과거에 합격하기만 하면 모두 소동파(蘇東坡)의 시풍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 말은 과거에 합격하기 전에는 시험 준비로 시간을 낼 수가 없어서 부득이하지만 일단 과거에 합격하기만 하면 그때부터 너도나도 소동파의 시풍을 배우기에 여념이 없었던 고려 문단의 기풍을 엿보게 하거니와, 조선 시대의 대학자 김종직도 『청구풍아(靑丘風雅)』의 서문에서 "고려 중엽에는 소동파 시만 배웠다"고 한 것을 보면 고려 중엽 이후 우리나라 문인들 사이에 소동파의 시풍을 배우려는 기풍이 만연해 있었음을 잘 알 수 있다.

 

 

고려 시대의 문인 김부식(金富軾)의 이름에는 소동파의 본명인 '식(軾)'자가 들어 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그의 부친일 것으로 추정되는 작명자가 소동파를 너무나 추앙한 나머지 그렇게 한 것임에 틀림없다. 김부식의 동생 김부철(金富轍)의 이름에도 소동파의 동생 소철(蘇轍)의 이름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 이것을 증명한다. 당시 소동파와 소철 그리고 그 부친 소순(蘇洵) 등 삼부자가 모두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손꼽히고 있었던 것이다.

 

소동파의 시문이 우리나라 문인들 사이에서만 이토록 추앙을 받았을 리가 없거니와, 그는 과연 금나라 문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추앙을 받고 있었다. 이처럼 다른 나라에서도 널리 추앙을 받고 있었으니 그의 위상이 본국인 송나라 문단에서는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리고 중국 문단에 있어서의 그의 위상은 송나라 때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이후 지금까지 줄곧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중국을 여행하다 보면 도처에서 이러한 느낌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사형제도 폐지론의 선구자

 

스물두 살 되던 해인 1057년 소동파는 과거 시험 중의 2차 시험인 예부시(禮部試)에 응시했다. 예부시란 1차로 각 지방에서 실시하는 향시(鄕試)에 합격한 사람들을 모아 도성에 있는 예부에서 치르는 시험이었다. 그해 예부시의 고시관리위원장은 구양수(歐陽修)였다. 구양수는 소동파의 답안지를 보고 망설일 것도 없이 대뜸 그것을 수석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다시 그것을 2등으로 바꾸었다. 당시 답안지는 응시자의 이름은 물론 필적조차 알아볼 수 없도록 고시관리관이 옮겨 써놓은 것이어서 확실히 알 수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그것이 증공(曾鞏)의 답안지일 것만 같아서 그랬다. 증공은 구양수가 직접 가르친 제자였는데 자기 제자를 수석으로 합격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로 인하여 소동파는 억울하게 수석 합격을 못하게 되었지만 사실상 당시 문단의 맹주인 구양수에게 이미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셈이었다.

 

 

소동파가 제출한 답안지에 이런 말이 있었다.

 

요임금 때에 고요(皐陶)가 법관이 되었는데 한 사람을 사형에 처할 일이 생겼다. 고요가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라고 하자 요임금은 용서하라고 했다. 이런 식으로 고요는 세 번이나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요임금은 세 번이나 용서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므로 천하가 고요의 법 집행이 준엄함을 두려워하고 요임금의 형벌 적용이 관대함을 좋아한다. ··· 상을 줄 수도 있고 상을 안 줄 수도 있을 때 상을 주는 것은 지나치게 인자한 것이고, 벌을 줄 수도 있고 벌을 안줄 수도 있을 때 벌을 주는 것은 지나치게 정의로운 것이다. 인자함은 지나쳐도 군자로서 문제가 없지만 정의로움이 지나치면 그것이 발전하여 잔인한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인자함은 지나쳐도 되지만 정의로움이 지나쳐서는 안 된다.

 

 

채점관인 구양수와 매요신은 모두 뛰어난 문인이요 학자였는데 이 부분이 어느 책에서 인용된 것인지 출전을 알 수 없어 답답했다. 나중에 소동파가 합격 인사를 갔을 때 매요신이 창피함을 무릅쓰고 소동파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소동파는 뜻밖에도 "꼭 출전이 있어야만 합니까?"하고 반문했다. 요임금처럼 인자한 성군과 고요처럼 엄정한 법관이라면 그들의 천성과 위인으로 미루어볼 때 능히 그럴만하지 않느냐는 것이 소동파의 대답이었다. 그것은 소동파 자신이 즉석에서 지어낸 허구적인 이야기였던 것이다. 가히 소동파의 성격을 짐작게 하고 앞으로 지어질 그의 시문이 얼마나 시원스럽고 호방한 작풍을 지니게 될 것인지를 예고하는 대목이었다.

 

 

이 문장에서 소동파는 인자함은 지나쳐도 무방하지만 정의로움이 지나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상을 줄 때와 달리 벌을 줄 때는 특별히 신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판결에 오류가 있을 경우 죄 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죽는다는 이유로 사형제도폐지론이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거니와 소동파는 천 년 전에 벌써 사형제도 폐지의 필요성을 깨달았던 셈이다.

 

 

제과(制科)란 특출한 인재를 발굴하기 위하여 황제가 특명을 내려 친히 시행하는 특별시험인데 소동파는 동생과 나란히 제과에도 합격했다. 제과에서 소동파 형제를 선발하고 난 뒤 인종황제는 희색이 만면하여 "나는 오늘 자손을 위하여 태평성대를 이룩할 재상 두 사람을 얻었소"하고 황후에게 말했다. 그들 형제는 일시에 재상감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소동파의 글씨 『한식첩寒食帖』/ 세로 34센티 가로 199센티로 소식蘇軾(호 동파)이 황주黃州로 좌천되어 가서 3년째 되던 1082년 한식절寒食節에 동파설당東坡雪堂에서 쓴 두 수의 시다. 이는 평생에 가장 잘 쓴 서법의 작품으로 ‘소동파의 글씨 중 첫째[蘇書第一]’이라는 칭송을 받는다. 이 첩帖은 행서로써 필법이 자유분방하며 왼편(아래쪽)에 황정견黃庭堅의 발문이 실려 있다. 원조元朝 때 서법가 선우추鮮于樞는 칭찬하기를 “《한식첩寒食帖》은 왕희지의 《난정집서蘭亭集序》와 《제질문고祭姪文稿》의 다음으로 천하에 세 번째 글이 된다”라고 하였음. 

 

 

잘되는 사람 곁에는 항상 그를 시기하여 발목을 붙잡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소동파는 일거에 구양수로부터 문학적 재능이 최고라고 인정받고 인종황제에게 정치적 재능이 최고라고 칭송받았으니 그에게 정적이 많을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당시 왕안석을 중심으로 한 신법파 인사들이 무리하게 신법을 강행하고 있었는데 소동파는 많은 대신들과 마찬가지로 신법의 강행이 부당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사사건건 왕안석 일파와 의견이 충돌했다.

 

 

그가 만년에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지은 시 「금산사(金山寺)에 있는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에서 "너의 평생 공적이 무엇이더냐? 황주, 혜주 그리고 담주뿐이네"라고 한 바와 같이 중간에 잠깐씩 조정의 요직을 담당하기도 했지만 그의 생애는 대부분 신법파 인사들의 모함에 의한 지방관 생활과 유배 생활로 점철되었다.

 

 

그러나 이렇듯 힘든 그의 인생역정이 단순히 인생의 낭비였다고만 할 수는 없다. 파란만장한 그의 인생역정이 그로 하여금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게 했고,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부닥치게 했으며, 각지의 풍토와 풍속과 인정을 맛보게 했던 것이다. 더욱이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가까이서 들여다볼 수 있었던 여러 가지 경험은 그의 탁월한 재능과 호방한 성격을 만나 천고에 길이 남을 불후의 명작으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자리를 내주지 않을 수 없소

 

"이 늙은이는 이제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을 수 없소." 이 말은 구양수가 예부시에서 소동파를 선발해놓고 동료인 매요신에게 한 말이었다. 구양수는 당시 문단의 맹주로서 당시의 문인들이 형벌도 무서워하지 않고 죽음이 닥쳐와도 담담하지만 구양수의 평가만은 두려워한다고 한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한 구양수가 소동파를 두고 이런 말을 했으니 소동파는 일거에 구양수를 능가하는 최고의 문장가가 된 셈이었다. 구양수는 나중에 또 자기 아들과 함께 문장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다가 이야기가 소동파에게 미치자 "내 말을 잘 기억해두어라. 앞으로 30년이 지나면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하니 그의 이 말이 결코 생각없이 내뱉은 말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는바, 구양수의 예상대로 소동파는 마침내 송나라 최고의 문장가가 되었음은 물론 당송팔대가 중에서도 으뜸가는 문장가가 되었다.

 

  

황주의 동파적벽 / 황저우츠비[黄州赤壁, 황주적벽] 또는 원츠비[文赤壁, 문적벽]라고도 한다. 황강시[黄冈市] 시내의 시먼[西门] 외곽에 위치한다.  성벽처럼 돌출된 바위의 색이 붉은 색이어서 츠비[赤壁]라는 명칭이 부여되었다. 고적의 대부분은 소동파와 관련된 것으로 얼푸탕[二赋堂], 포셴팅[坡仙亭], 류셴거[留仙阁], 베이거[碑阁] 등이 그 예이다. 포셴팅[坡仙亭] 내부에는 소동파의 유명한 《念奴娇 · 赤壁怀古(념노교 ·  적벽회고)》의 초서체가 적힌 석각이 있다.

 

 

소동파의 문장은 다양한 작풍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것을 일일이 다 거론할 수는 없고 단지 몇 개의 편린을 살펴봄으로써 그 전모를 엿볼 수밖에 없다.

 

후뻬이성 우한(武漢)에서 장강을 따라 동남쪽으로 백 리쯤 내려간 곳에 시뻘건 바위 절벽이 하나 있다. 이른바 적벽이다. 그러나 여기는 삼국시대에 오나라 장수 주유(周瑜)가 위나라 군사를 대파한 적벽대전의 현장이 아니다. 여기는 바로 소동파가 저 유명한 「적벽부(赤壁賦)」와 「적벽사(赤壁詞)」를 지은 곳으로 동파적벽이라고 한다. 적벽대전의 현장은 우한에서 서남쪽으로 장강을 삼백 리가량 거슬러 올라간 후뻬이성 푸치(蒲圻)에 있는데 삼국적벽이라는 이름을 붙여 이 동파적벽과 구분한다.

 

 

동파적벽 옆에는 동파공원이라는 공원이 만들어져 있고 공원 안에 이부당(二賦堂), 파선정(坡仙亭), 뇌강정(酹江亭), 수선정(睡仙亭) 등 소동파와 관련된 이름을 가진 많은 부속 건물이 지어져 있으며 건물 안에는 소동파의 시문이 빼곡히 걸려 있다. '이부'는 소동파가 지은 「적벽부」와 「후적벽부」를 가리키는 말이니 이부당 안에는 당연히 그의 부(賦)1) 두 편이 나란히 걸려서 관광객의 발을 붙잡는다. 벽에 걸린 「적벽부」를 읽어보고 있노라면 어디선가 소동파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손님도 저 물과 달을 아시오? 물은 이처럼 밤낮없이 흐르지만 한 번도 저 강이 가버린 적이 없고, 달이 저처럼 찼다가 기울지만 끝내 조금도 없어지거나 더 자란 적이 없다오. 변한다는 관점에서 볼라치면 천지는 한순간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고 변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볼라치면 만물과 내가 모두 무궁하다오. 그렇거늘 또 무엇을 부러워하리오? 그리고 저 천지간의 만물은 저마다 주인이 있으니 내 것이 아니면 비록 터럭 하나일지라도 가져서는 안 된다오. 다만 강위에 부는 산들바람과 산 위의 밝은 달만은 귀에 들어오면 소리가 되고 눈에 닿으면 색깔이 되는데 아무리 가져도 금하지 않고 써도 써도 없어지지 않는다오. 이것은 조물주의 무진장한 보물이니 나와 그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것이라오.

 

 

영원히 변하지 않는 대자연 앞에서 아무리 난다 긴다 하던 영웅도 죽고 나면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것, 인간은 이렇게 천지에 붙어사는 한 마리의 하루살이나 망망대해에 떨어진 한 알의 곡식에 불과한 것, 인생이란 이와 같이 보잘것없는 것이니 슬프지 않느냐고 함께 놀던 사람이 소동파에게 물었다. 이 물음에 대하여 소동파는, 변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자연이나 사람이나 한시도 쉬지 않고 변한다고 할 수 있지만 변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보면 자연도 사람도 변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으니 세속적인 가치에 연연하지 말고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향유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소식의 「적벽부(赤壁賦)」/ 필화() 사건으로 죄를 얻어 황저우[:]에 유배되었던 소동파가 1082년(원풍 5)의 가을(7월)과 겨울(10월)에 황저우성 밖의 적벽에서 놀다가 지은 것이다. 7월에 지은 것을 《전()적벽부》, 10월에 지은 것을 《후적벽부》라 한다. 

‘부’란 운문()의 하나인 문체의 명칭인데, 사물의 서술을 중심으로 한 한대()의 장려한 작품에서부터 육조() ·당()시대의 형식적인 소형 작품으로 쇠퇴한 ‘부’의 장르를 생동하는 묘사로, 서정과 사상을 겸비한 문장으로 부활, 완성시킨 작품이 이 《적벽부》이다. 삼국시대의 옛 싸움터 적벽의 아름다운 경치와 역사의 대비, 자연과 일체화하려는 소동파의 제물()의 철학이 결부되어, 유려()한 표현과 함께 문학으로서 높은 경지를 이루었다.

 

 

 

  

마흔일곱 살 때 지은 이 「적벽부」는 적벽의 가을 경치를 배경으로 경물을 통해 우주와 인생의 이치를 설파하고 있다. 그는 이로부터 석 달 뒤에 다시 「후적벽부」를 지어 적벽의 겨울 경치와 도사를 만나는 꿈을 통해 자신의 초탈한 인생관을 서술했다. 이처럼 그의 문장 중에는 인생철학을 노래한 작품이 많다. 인생철학을 노래한 이런 문장들은 시공을 초월한 항구불변의 진리를 담고 있다 할 것이니 지금 읽어도 여전히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굉장히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었으므로 이러한 사고방식 역시 자연스럽게 그의 시문에 반영되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먼 사람이 해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여 눈이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어떤 사람이 "해의 모양은 구리쟁반과 같다"고 말해주자 그는 쟁반을 두드려 그 소리를 들었다. 나중에 종소리를 듣고는 그것을 해라고 여겼다. 또 어떤 사람이 "해의 빛은 촛불과 같다"고 말해주자 그는 초를 더듬어서 그 모양을 알았다. 나중에 피리를 만져보고는 해라고 여겼다. 해는 역시 종이나 피리와는 거리가 먼데 장님이 그 다름을 알지 못한 것은 자기가 직접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물었기 때문이다. 도를 알기 어려움은 해의 경우보다 더 심하니 사람들이 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장님이 해를 알지 못하는 것과 다를 리가 없다. 터득한 자가 일러줌에 있어서 비록 멋진 비유로 잘 가르쳐준다고 할지라도 역시 해를 쟁반과 초에 비유하는 것보다 나을 수가 없다. 쟁반에서 종에 이르고, 초에서 피리에 이르는 것처럼 바꾸어가며 형상화한다면 어찌 끝이 있겠는가?

 

 

그의 문장 가운데는 생동적인 비유와 명쾌한 논리로써 언어의 불완전성과 실습을 통한 체득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나아가 당시 과거제도의 문제점을 넌지시 꼬집은 이 「해의 비유」와 같은 논변문(論辯文)2)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이치를 설파한 것인 만큼 이러한 문장 역시 시대와 상관없이 사람들의 공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마힐의 시를 음미해보면 시 속에 그림이 있고, 마힐의 그림을 살펴보면 그림 속에 시가 있다." 이것은 소동파가 당나라 때의 시인 겸 화가인 왕유(王維)의 「남전연우도(藍田煙雨圖)」라는 그림을 본 소감을 피력한 문장의 일부로 시와 그림의 관계를 극명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흔히 시는 말하는 그림이요 그림은 말 없는 시라고 하거니와 소동파는 일찍이 이 이치를 스스로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동파의 문장 중에는 이처럼 문예이론을 설파한 것도 많다.

 

 

대표적인 예로, "나의 글은 만 섬이나 되는 많은 샘물이 땅을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서 마구 솟아나와 평지에서는 도도하게 콸콸 흘러서 하루에 천 리라도 어렵지 않으며 바위와 만나면 그 모양대로 구부러지고 물체를 따라 형체를 이루는 일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는 것과 같다. 알 수 있는 것은 항상 가야만 할 곳으로 가고 항상 멈추지 않을 수 없는 곳에서 멈춘다는 것, 이런 것뿐이다"라고 하여 문장이란 마땅히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지어야 한다고 역설한 「문장론(文說)」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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