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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조선족 문학의 흐름과 전개과정
조선족과 조선족문학의 일반
현 중국에는 약 200만에 달하는 조선족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그 중 성급 작가협회인 [연변작가협회]는 중국 정부공설의 작가협회로서 약 500여명 정도의 작가회원이 있다. 지금 중국에는 우리글로 출간되는 문학잡지가 3개 있으며, 이 외에 ‘흑룡강신문’, ‘연변일보’, ‘길림신문’, ‘료녕조선문보’ 등 신문들에도 문학부간을 가지고 있으며, 조선족출판사 3개와 연변대학출판사, 료령민족출판사, 중앙민족출판사들에서 조선족도서들을 출판하고 있으며, 흑룡강조선말방송국, 연변인민방송국, 연변TV방송국 등 방송사들에서도 조선족문학작품들을 취급하고 있으며, 흑룡강작가협회에는 조선족전문창작위원회를 두고 있으며, 이 외에 료녕성, 길림시, 청도시, 절강성 등 성, 시들에도 조선족문학인 단체들이 있다.
중국 조선족문학개념에 대한 몇 가지 의문
중국 조선족문학이라 함은 물론 한반도가 아닌 중국지역에서 진행되어온 조선족들의 문학을 말한다. 역시 조선족들이 중국에서 진행한 문학활동의 진실한 기록이기도 한 것이다.
우선 조선족문학의 시점을 어디에 두느냐는 아직도 정론이 나있지 않은 상황이다. 보편적으로 접수되고 있는 관점에 따른다면 조선족문학의 년대기를 대체로 19세기 말, 20세기 초 한반도의 한민족이 중국경내로 대거 천입한 시기, 즉 독립운동시기로부터 보고 있지만, 여기에는 의문점들이 적지 않다. 길림시의 기록에 따르면 1670년대부터 조선족들이 길림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족사의 연구나 조선족문학의 연구는 19세기 말 이전에는 거의 공백으로 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족문학의 시점을 어디다 두느냐 하는 것은 현 시점에서는 아직 의문부호로 던져두는 방법밖에 없다. 다음, 중국 조선족문학을 국적으로 구분할 것인가, 아니면 국경으로 구분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다시 말하면 구한 말, 중국에서 활동한 문학인들이 적지 않은 바, 이는 실학파 학자들까지 그 발자국을 추적할 수 있다. 단재 신채호라든가, 유린석, 그리고 그 외에도 많은 학자와 작가, 정치인들이 중국에서 활약했었다. 그러나 이들은 중국 국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신채호의 경우, 현 한국 국적도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러면 이를 우리의 문학에서 배제해야 할 것인지.] 하다면 이들의 문학창작활동이나 작품을 조선족문학에 귀속시킬 수 있느냐가 문제로 되고 있으며, 광복 전에는 중국에서 문학 활동을 했었지만 광복이 난 다음 한국이나 북한으로 이주한 작가들도 많다. 그러면 이 부분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역시 정론이 나있지 않은 상황이다. 국적에 따라 분류한다면 중국국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의 창작이나 문학활동은 조선족문학에 귀속시킬 수 없다. 세 번째로 조선족문학을 언어로 구분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문학활동을 했던 많은 작가나 학자들은 한글뿐이 아닌 한문으로도 많은 창작을 해왔었다. 그러면 이들의 창작활동이나 작품을 중국문학에 귀속시키느냐, 한국문학에 귀속시키느냐, 아니면 조선족문학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느냐 하는 것 역시 아직도 공론이 나있지 않은 상황이다. 언어에 따라 분류한다면 한문으로 창작된 작품이나 한문문학활동은 조선족문학에 귀속시킬 수 없다. 네 번째로 조선족문학을 민족의 호칭으로 획분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사실상 조선족이라는 공식호칭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면서 얻어진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기 전, 많은 조선족들은 국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거나, 혹은 중국국적, 혹은 한국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전에 중국에서는 조선족이나 한반도에서 이주해온 민족을 조선인, 한국인, 고려인, 지어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간다면 신라인, 이렇게 부르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중국 불교 4대명산 중 하나인 보타산에는 신라초라는 섬이 있다. 따라서 거기에는 한국인들이 창작한 작품들도 적지 않게 기록되어 있다. 하다면 이 부분의 문학은 중국문학, 혹은 한국문학, 혹은 조선족문학에 귀속시켜야 하는지. 조선족이라는 공식호칭에 따라 분류한다면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기 전 중국에서 진행된 문학 활동과 창작은 조선족문학에 귀속시킬 수 없는 것이다. 다섯 번째로 한반도역사시기에 따른 학자나 작가들의 중국에서의 문학활동을 조선족문학에 귀속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멀리 신라시대, 왕자 김교각스님은 중국에서 불법을 구하면서 열반하실 때까지 많은 창작을 해왔으며, 또 그의 설교와 작품들은 중국인, 특히는 불교신앙인들에세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현, 중국불교계에서는 신라왕자 김교각스님을 불교의 지장왕보살로 인정하고 있을 뿐이 아니라, 현재까지 구화산에는 신라왕자 김교각스님의 육신보살이 보존되어 있다. 김교각스님뿐이 아니라 설총대사의 작품도 중국에 많이 유전되고 있다. 이 외에도 전당시[당나라 시대의 모든 시 총 집합시집]에는 수만 수에 달하는 고구려, 신라, 백제 문인들의 시가 수록되어 있으며, 5등회원이라는 불교고승대덕 행적실록에도 신라, 백제, 고구려와 고려의 수십 명 대사들의 작품이나 어록들이 수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문학대가 최치원도 중국에서 문학창작을 했을 뿐이 아니라 적지 않은 작품들이 중국 고전들에 수록되어 있다. 하다면 이런 문학작품들이나 이들의 문학활동을 중국문학, 한국문학, 아니면 조선족문학, 어디에 귀속시켜야 할지가 문제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에 대한 연구는 거의 공백 상태로 되어 있으며,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나 학자들이 적은 관계로 아직 연구가 깊이 진행되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현실로 보았을 때, 현 중국조선족들의 문학을 어떻게 한 마디로 금을 긋기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이런 실정에서 오늘 필자 말씀 드리려고 하는 중국 조선족문학의 흐름과 전개과정은 대체로 현, 상식적으로 알려진 광복전후로 시작해서 중국에서 진행된 조선족문학창작활동을 기본으로 잡고 전개한다.
조선족문학발전의 연대 획분에 대한 견해
연대기로 획분했을 때 조선족문학은 대체로 1] 광복 전, 2] 광복부터 1967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기 전까지, 3] 1967년부터 1976년 문화대혁명기간, 4] 문화대혁명이 결속되어서부터 1992년 한중수교 이전까지, 5] 1992년 한중수교로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대체로 5개의 큰 시기로 획분할 수 있다고 본다. 조선족문학이라 함은 중국에서 거주하고 있고, 또 중국국적을 가진 조선족들의 문학창작활동과 그 작품으로 중국현실 사회구조와 사회체제의 변화에 따를 수 밖에 없으며. 또 중국 국정에 따라 발전하고 변화되기 마련이다. 위에서 획분하다시피 중국조선족들의 문학의 발전과 시대적 맥락은 자연 중국의 현 상황에 따른 것이다.
1] 광복 전 문학 광복 전 문학은 대체로 한반도 문학과 연결되어 있고, 어떤 시각에서 보았을 때는 한국문학의 구성부분이라고 할 수 도 있었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한국과 중국을 드나들면서 창작활동을 했고, 또 발표매체들도 한국과 중국에 걸쳐 별로 구애를 받지 않고, 그때그때 편리에 따라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시기의 문학은 잘 아시다시피 친일문학과 반일독립문학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본다. 윤동주와 강경애, 심연수를 비롯한 저항문학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자체 나름대로의 왕성한 생명력을 과시했다. 이들은 대체로 중국, 일본과 한국을 두루 섭렵하면서 창작활동을 벌렸던 반면, 김창걸[대표작 암야]과 같은 작가들은 대부분의 창작활동을 중국에서 진행하면서 끈질긴 저항의 정신을 보였으며 김학철과 같은 항일투사들은 중국항일연군에서 창작활동을 해오다가 광복이 나면서 서울, 평양을 전전하며 창작을 해왔고, 나중에는 중국에 다시 들어와 문화대혁명이라는 어려운 고비까지 넘기면서 창작의 신화를 낳기도 했다. 이와 반면, 일부 친일경향의 작가들도 중국 동북지역에서 창작활동을 해왔었다. 최근 들어 좀은 화제가 되고 있는 친일경향의 안수길과 같은 작가들도 중국에서 많은 창작활동을 해왔으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항일투사로 추대 받다가 최근 들어 친일작가로 알려진 [선구자]노래의 작사, 작곡가들 역시 중국에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기도 했다. 총체적으로 광복 전 조선족문학이란 한국문학의 전체적인 흐름을 따르면서 한국문학과 맥을 같이해오고, 한국문학의 한 구성부분으로 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광복부터 1967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기 전까지,
광복으로부터 중화인민공화국 토지개혁까지 중국 조선족들의 문학은 대체로 일제의 압박에서 해방된 기쁨을 노래한 작품들로 주를 이루고 있으며 작가들 역시 광복 전부터 중국에서 창작활동을 해오다가 한국이나 북한으로 나가지 않은 작가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의 영향으로 성장한 청년작가들이었다. 이시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면서 50년대 초반까지 진행된 토지개혁으로 없고 굶주리던 사람들이 땅을 분배받고, 나라의 주인이 되어 사회주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가송한 작품들이었으며, 이시기 토지개혁이 한창인 가운데 6.25가 터지면서 ‘항미원조, 보가위국[미국에 대항하고 조선을 지원하며 나라와 집을 보위하자]’에 대한 내용들이 한시기 많은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로 중국공산당과 새중국의 창건, 노동과 건설, 인민공사와 공산주의에 대한 동경과 이상 등 내용이 위주로 문학활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문화대혁명처럼 순 이데올로기의 지배에 따른 창작이 아니라, 나름대로 문학의 원리에 따른, 비교적 자유롭고 온화한 문학창작의 환경이 마련된 시기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청년/ 중견작가들인 김학철, 김철, 리욱, 김창걸, 이근전 등이 새 중국이 성립된 후 중국조선족문학을 이끌어 갔다고 할 수 있으며 중국 조선족문학의 기틀을 잡았다고 할 수도 있다.
3] 1967년부터 1976년 문화대혁명기간,
문화대혁명기간의 조선족문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아직도 많은 이견들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이다. 비교적 대표적인 관점들로는 상반되는 관점으로 하나는 문화대혁명기간의 문학은 [문학]이 아니라는 주장, 즉 문화대혁명시기의 문학들은 정치의 부산물로 몰락하면서 문학 구실을 하지 못했고, 또 예술성의 극한 저락으로 문학의 범주에 넣을 수 없다는 주장, 다른 하나는 어찌되었건 간에 문화대혁명시기도 나름대로 문학은 [문학]으로 존속했던 만큼 오늘의 시각으로 그때의 현상을 평가할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입장에서 시대에 따른 평가를 해주어 여전히 문학의 범주에 넣고, 평가를 하자는 주장이다. 문화대혁명은 중국인들은 물론, 그 중에서도 지식인들에게 아물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창작의 자유가 없은 것이 아니라 틀에 넣은 [자유], 즉 오로지의 찬송과 비판, 투쟁과 사상교육, 즉 이데올로기에 얽매인 창작이었고, 정치운동의 도구라고 할 정도로 틀에 매워 있었다. 문화대혁명을 겪은 중국 조선족문인들 가운데서 문화대혁명과 당시 정치운동을 노래하는 작품을 쓰지 않은 작가는 거의 없다. 문화대혁명가운데 피해를 받은 문학인들이 대부분이지만, 나는 문화대혁명에 반기를 들었다고 떳떳이 가슴을 치며 외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중국조선족문학의 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김학철 옹 뿐이다. 그만큼 문학인들[원로문인들]을 포함해서 모두 문화대혁명에 종속된 창작을 했었던 경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또 문화대혁명기간 비판투쟁과 개조를 받으면서 피해를 입지 않은 작가들은 또 거의 없는 게 문화대혁명기간 중국조선족문인들의 상황이었다. 고로, 많은 작가들은 문화대혁명기간의 작품들을 자기의 창작에서 배제하고 있으며, 문화대혁명기간의 창작과 문학 활동, 문학작품들에 대한 평가는 물론, 말까지 꺼내려고 하지 않는 것 역시 현 상황이다. 그러나 어쨌건 같, 어떤 형식으로, 어떤 도구로, 지어는 어떤 필요로 존재든지를 막론하고 문화대혁명기간 조선족사회에서 시가 존재했었고, 소설이나 산문[수필, 에세이]가 존재했던 것만은 사실이며 적지 않은 문인들은 문화대혁명기간 어떤 목적이었던 지를 막론하고 창작활동을 해왔고, 창작을 해왔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만큼 문화대혁명기간 문학작품들과 문학 활동이 존재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문화대혁명기간, 현 조선족문단의 중견작가들이 배양되었던 것 역시 사실이며, 지금의 40대 후반부터 50대 초반까지는 모두 문화대혁명시기 문학창작을 시작했던 것이며, 문화대혁명시기 바로 문화대혁명결속 후의 조선족문단의 흥기를 위한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그만큼 개인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문화대혁명시기 역시 조선족문학에서 배제할 수 없는 문학발전 한 단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
4] 문화대혁명이 결속되어서부터 1992년 한중수교 이전까지,
문화대혁명이 결속되면서 조선족문단 역시 중국전체 문단과 마찬가지로 문학창작의 새로운 발전 시대에 들어서게 되었다. “연변일보”, “흑룡강신문”, 료녕조선문보 등 신문사들에서 본격적인 문학원지가 생겨나게 되고, 연변작가협회기관지 “연변문학[천지]”의 부흥과 함께 많은 작가들이 다시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하기 시작했으며 시대와 공조하여 “도라지”, “장백산”, “북두성”, “갈매기” 등 문학지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고, 흑룡강조선말방송국, 연변인민방송국 등 방송사들에서도 문학작품을 대거 발표하면서 작가대오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이시기는 주로 중국 문단의 주류를 따라 문화대혁명의 피해를 고소하는 “상처문학”, 우리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뿌리를 발굴하는 “뿌리 찾기 문학” “현대시” 등 거창한 문학현상은 형성하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과정은 다 겪었다. 이시기 바로 중국 조선족 현 문학의 중견들이 새로운 돌파와 파격적인 창작방법, 그리고 새로운 사상으로 안받침 된 작품들로 문단에 대거 등장했다. 이들은 원로작가들보다 이데올로기에 덜 구애되고 덜 집착했던 관계로 외려 원로작가들보다 문단에 더 활약하면서 조선족문단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는데 중견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런 창작실천과 10년 문화대혁명동란을 겪으면서 문학의 사막을 지나온 사람들이 문학에 대한 갈구로 문단은 화려하게 장식되기 시작하면서 후기 조선족문학의 황금시기를 맞이하는 데 좋은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5] 1992년 한중수교로부터 지금까지
한중수교는 중국조선족문단의 획기적인 사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중수교 전 중국조선족문단과 한국문학의 접촉은 민간적인 차원에서 약간한 접촉이 있었을 뿐이며, 조선족작가들 역시 어쩌다 구해볼 수 있는 한국도서들을 통해 한국문학을 조금씩이나마 엿볼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한중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조선족문단과 한국문학의 본격적인 교류는 물고를 트이기 시작했으며, 연변자치주를 중심으로, 또 연변을 통해 조선족들은 한국문학작품들을 대폭 접촉할 수 있게 되었고 따라서 조선족문단은 단일한 중국문단-전 소련-조선[북한]이라는 접촉방식에서 한국문학이라는 새로운 선을 하나 더 긋게 되었다. 한국작품들과 한국작가들은 중국조선족작가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으며, 또 상호의 교류로 조선족작가들은 문학과 문학창작의 새로운 세계를 접촉할 수 있게 되었다.
문학의 맥에 따른 변화와 양상
중국조선족문학은 중국문학의 바탕에 뿌리를 두고, 중국문학에서 주로 영양을 섭렵하면서 전 소련, 조선[북한]의 창작방식이나 문학이론을 많이 배워왔었다.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끝나기 전, 외국문학은 주로 전 소련문학과 북한문학과 접촉을 했으며, 그만큼 그 양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이 끝나면서 개혁개방이 시작되고, 한중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중국 조선족문학은 더 다양한 문학과 접촉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단순히 중국도서들을 통해 외국문학이나 문학사조를 접촉하던 한계를 벗어나, 한국문학이나 한국도서들을 통해 우리글로 외국문학과 문학사조를 직접 접촉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족문학은 고유의 틀에서 벗어나 창작형식과 방법, 그리고 발전모드 등 여러 면에서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잇게 되었으며, 개혁개방과 그에 따른 문학창작에서의 퍽 자유로운 환경과 함께 한중수교라는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맞으면서 새로운 도약을 하게 되었다.
조선족문학의 지역적 분포현황
중국 조선족작가들은 대체로 연변지역에 많이 집중되어 있으며, 국가공설의 조선족 작가협회도 연길에 있다. 다시 말하면 중국 전역의 조선족창작활동에 대한 관리와 조직, 양성을 연변자치주의 관계기관, 즉 연변작가협회에서 총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중국에 4개밖에 없는 조선족문학잡지가운데 “연변문학”만 연변지구에 있고, “도라지”잡지는 길림지구에, “장백산”잡지는 장춘시에, “송화강”은 할빈에 있으며, 중국에서 출판되는 우리글 신문이 모두 4개 되는데 그 중 “연변일보”만 연변에 있고, “흑룡강신문”은 할빈에, “길림신문”은 장춘에, “료령조선문보”는 심양에 있다. 우리글 출판사로 놓고 말하면 연변인민출판사, 동북조선족출판사, 연변대학출판사를 제외하고 나머지 3개는 산재지역, 즉 흑룡강조선족출판사는 목단강시에, 료령민족출판사는 심양에, 민족출판사[중앙]는 북경에 있다. 다시 말하면 작가와 기관은 연변에 있지만, 작품의 발표 지면은 산재지구에서 퍽 많이 있다는 말이 되며, 문학작품의 편집진은 산재지구에 퍽 많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현 공식으로 출판되고 있는 신문이나 잡지 밖에 비공식간행물로 출간되고 있는 내부간행물로 된 문학지들도 산재지구에 더 많은 것이다. 이를테면 통화지구, 절강성, 대련, 심양 등지의 조선족창작단체들에서도 자체 내무간물을 발행하고 있으며 그 발행부수와 편폭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 조선족문학의 한계와 전망 현 조선족문학은 자체의 한계에 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선은 창작대오의 한계, 중견작가들을 뒷받침 해주어야할 후진작가들이 결여, 다음은 독자대오의 축소, 도시와 외국진출, 그리고 신세대의 한문접촉은 거의 장애가 없는 것으로 우리말 잡지나 신문을 필수로 하지 않음으로 독자대오는 대폭 축소되고 있는 게 현실이며, 세 번째로 이론과 철학사상의 한계이다. 문학이 어느 정도 발전한 다음, 문학이론과 철학사상이 안받침 되지 않는다면 발전이 더디거나 발전할 수 없게 된다. 문화대혁명이 결속되고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조선족문단은 활기를 띠면서 황금기를 맞이하다가 90년대 초반에 와서 주춤하게 되었다. 사상과 창작방법, 소재가 고갈되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행히 한중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조선족작가들은 문학 언어와 창작방법에서 새로운 길을 열수 있게 되었는데 이제 와서 한계에 와 닿은 것이다. 언어와 방법만으로는 되지 않는 시기에 접한 것이다. 이론과 철학사상의 결여로 새로운 돌파와 더 깊은 접수와 이해를 가져올 수 없기 때문이다. 한중 문화경제교류가 더 활발하고 심도있게 진행되면서 차후, 중국 조선족문단에 더 많은 한국문인들이 뛰어들 것으로 전망되면서 이들이 중국에 진출하여 조선족문단에서 활발한 문학활동을 하면서 조선족들이 중국문학을 이해하고 배우는데 새로운 사유방식과 방법을 제시해주리라 전망된다. 지금도 적지 않은 한국의 문인들과 지식인들이 중국에서 중국작가, 지식인들과 활발한 교류를 진행하면서 조선족작가들에서 새로운 영역을 제시해주고 있으며, 그 과정에 교량작용을 하는 조선족작가들은 이를 통해 또 새로운 도약의 토대를 마련할 수도 있는 것이다. 조선족문학이라고 함은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작가들이 중국이라는 땅덩어리에서 중국문화와 어울리면서 문학 활동과 창작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중국조선족문학이 중국의 문학을 떠난다거나 한국이나 북한문학을 떠난다면 조선족문학으로서의 존재가지가 없다. 그만큼 조선족문학은 중국조선족들이 중국이라는 나라에서 생활하면서 진행하는 문학창작활동이면서 기록이며, 또 조선족생존상태에 대한 문학적인 관조와 문학생존현상태인 것이다. 차후 조선족문학은 계속 중국문학과 한국문학의 과도적인 문학으로 자체의 생명력을 가질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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