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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신과 한국
2015년 12월 05일 02시 28분  조회:4402  추천:0  작성자: 죽림

 

루쉰과 한국


여러분 반갑습니다.

한국과 중국의 청년 학생 여러분,

그리고 노신 애독자 여러분과 이렇게 노신을 통해 만나게 되어 감회가 깊습니다.

 

저는 오늘 한국의 외교관으로서가 아니라 노신 애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여기에 나왔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제목이「노신과 한국」입니다만 저는 학자도 전문가도 아니기 때문에

그저「수이비엔(마음 내킨대로)」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이야기가 옆 길로 나가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노신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노신과 한국 또는 한국인과의 관계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노신 애독자들에게도 전문가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중국에서 출판된 노신관계 서적들을 상당히 많이 떠들어 보았습니다만,

단 한 줄이라도 노신과 한국관계를 언급한 책을 찾아 보기 힘들엇습니다.

노신과 한국인은 무관계일까요?

 

노신의 작품을 세계에서 최초로 외국어로 번역한 외국인은 바로 한국인 이었습니다. 

1927년 8월「東光」이란 조선어 잡지에 실린「광인일기가 그것입니다.

그 후 2개월이 지나서야 일본에서 최초로 노신의「고향」이 번역되어 나옵니다.

물론, 이보다 몇 년 앞서 노신의「쿵이지」가 베이징 거주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주간지에

일본어로 번역되어 나옵니다만, 그것은 노신의 동생인 周作人이 번역한 것입니다.

외국인으로서는 조선인에 의해 노신의 작품이 세계 최초로 번역 소개되었는 것은

당시 나라 잃은 조선인들이 세계의 어느 사람들보다도 노신에게서

희망과 길을 찾으려 했음을 말해줍니다.

 

요즈음은 중국에서나 한국에서나 노신을 즐겨 읽는 젊은이들이 거의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할 일입니다.  암울한 시대의 괴로운 이야기를 누가 즐기려 하겠습니까.

그래도 저는 여러분에게 노신의 대표작 몇 편과 약간의 잡문들을 읽어볼 것을 권유하고 싶습니다.  노신의 유명한 소설들 광인일기, 고향, 쿵이지, 아큐정전을 처음으로 펼쳐 본 사람들은

좀 놀랄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 짧기 때문입니다.  아큐정전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고작 다섯장내외 정도 분량이니까요. 

짧지만 여운은 길게 남고 뇌리에 오랫동안 남는 것이 노신의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노신의 이름을 처음으로 접했던 것은 아마 중학교 아니면 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습니다.

중국 현대문학의 개척자이고 대표작은 아큐정전이라는 것. 

「물에 빠진 미친 개는 두들려 패라고 그가 말했다는 것 정도가 노신에 대한 전부였습니다.

아큐정전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 바 없었던 저는 그것이 아편전쟁 이야기가 아닐까 하고

추측해 보았던 기억이 지금도 희미하게 남아 있습니다. 

노신 선생이 말했다는「물에 빠진 미친 개는 두들겨 패라」는 말도 당시

저에게는 좀 기괴하게 들렸습니다.

물론 여기서 개는 위선의 가면을 쓰고 민중을 속이고 지배하는 권력자,

위선적인 지식인 등을 상징하겠지만 그때는 그런 걸 알 수가 없었으니까요.

 

실제로 노신 선생이 싫어한 동물은 개가 아니라 고양이었다는 것을 알게된 것은 최근이었습니다.

좀 옆길이지만 그 이야기를 좀 나누겠습니다.

노신 선생이 고양이를 얼마나 싫어했든지,

한때 북경에서는 노신 선생이 고양이를 학대하는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퍼진 적이 있다고 합니다.

노신 선생은 그 소문에 퍽이나 시달린 나머지 그에 대한 변명을 긴 글로 써서 남깁니다. 

제목은 잊어버렸지만 거기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습니다.

노신의 유년시절 이야기입니다.

어느날 뱀에 물려 숨이 할딱거리는 생쥐 한 마리를 노신이 구해 줍니다.

그 후 생쥐는 노신의 친구이자 가족이 됩니다.  학교 갔다 돌아오면 언제나 생쥐는

노신의 주변을 맴돕니다. 

특히 밥을 먹고 나면 언제나 생쥐는 식탁 위에 올라가 흘린 음식 찌꺼기들을

깨끗이 청소해 줍니다. 

어린 노신이 먹물을 갈아 글씨를 쓰고 나면 쪼르르 책상으로 생쥐가 올라와

남은 먹물을 깨끗이 먹어 치워 줍니다.

그런데 어느날 학교에서 집에 돌아와 보니 생쥐가 안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밥을 먹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상심한 어린 노신을 보다 못해 보모 키다리 아줌마 阿長이 노신에게

동정어린 표정으로 조용히 말해줍니다.

 

「고양이가 생쥐를 먹어버렸다」

 

그때부터 노신의 가슴에 고양이에 대한 증오감이 깊히 자리잡습니다.

한번 각인된 그 증오감은,

나중에 노신이 사실은 생쥐를 죽인 것은 고양이가 아니었고

바로 그 키다리 보모였다는 진실을 알게된 뒤에까지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노신은 그래서 오랫동안 고양이만 보면 돌을 던졌다 합니다.

 

이야기가 좀 옆길로 가고 있습니다만, 간 김에 조금 더 가자면

노신이 아주   싫어한 곤충이 하나 있습니다.  모기 입니다. 

벼룩이나 파리보다 모기를 특히 싫어한 노신의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피가 아까워서가 아닙니다.

모기의 장광설, 그 연설 때문입니다.  

모기는 사람을 물기 전에 에엥하고 길게 소리를 내지 않습니까? 

노신의 귀에는 그 소리가「왜 내가 당신의 피를 요구하는가」하는 이유를 길게 연설하는 소리로

들렸던 모양입니다.

빨아먹고 싶으면 그냥 조용히 빨아먹을 일이지 왜 그렇게 변명이 많고 장광설을

늘어놓느냐는 것이죠. 

민중을 착취하고 속이는 지배자들은 항용 자신의 탐욕을 숨기기 위해

많은  이유와 논리를 만들어 떠들어대지 않습니까?

노신의 귀에는 모기의 에엥 소리가 그렇게 들렸던 모양입니다.

 

자,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아까 노신 작품의 번역 이야기를 꺼냈습니다만

일제시대때 조선의 여러 지식인, 지사들이 노신에 주목하고 공감했던 것은

노신이 그만큼 시대의 어둠과 절망속에서 지식인으로서 강렬한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노신은 자신을 문사라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싸우기 위해, 마비된 민중의 정신을 뜯어고치기 위해

문예를 택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노신은 자신의 글을「비수와 투창」이라 하였습니다. 

또한 자기 자신을 전사,투사로 묘사했으며

자기 몸에 난 상처를 자기 혀로 핥으며 황야를 헤메는 한 마리 하이에나에 비유하기도 하였습니다.

 

상처 입은 황야의 하이에나의 절규, 허위와 위선의 심장을 겨냥하는「비수와 투창」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들이 나라 잃은 조선의 지사들, 문인들에게 메아리쳤을 것입니다.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조선의 시인 김광균은「노신」이라는 시를 지어

이렇게 읋기도 하였습니다.

 

「魯迅」

 

 詩를 믿고 어떻게 살아가나

 서른 먹은 사내가 하나 잠을 못 잔다.

 먼 - 氣笛 소리 처마를 스쳐가고

 잠들은 아내와 어린 것의 베개 맡에

 밤눈이 내려 쌓이나 보다.

 無數한 손에 빰을 얻어맞으며

 恒時 곤두박질해 온 생활의 노래

 지나는 돌팔매에도 이제는 피곤하다

 먹고 산다는 것.

 너는 언제까지 날을 쫓아오느냐

 등불을 켜고 일어나 앉는다.

 담배를 피워 문다.

 쓸쓸한 것이 五臟을 씻어 내린다.

 

 魯迅이여!

 이런 밤이면 그대가 생각난다

 온- 세계가 눈물에 젖어 있는 밤

 상해 胡馬路 어느 뒷골목에서

 쓸쓸히 앉아 지키던 등불

 등불이 나에게 속삭어린다.

 여기 하나의 傷心한 사람이 있다.

 여기 하나의 굳세게 살아온 인생이 있다.

 

한국의 식민지 시인이 절망의 시대에 중국의 위대한 작가 루쉰의 용기를 추모하여

스스로를 다짐하는 시입니다.

 

광인일기를 최초로 번역했던 柳樹人 이라는 분은 항일애국지사였습니다.

본명이 유석기인 그는 얼마나 노신을 좋아했던지 자신의 이름조차도

노신의 본명인 樹人을 따서 유수인 이라고 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름 이야기가 나오니까 생각납니다만 여러분

김염, 중국 발음으로 진이엔   쇠금에 불꽃염자 진이엔을 혹시 들어본 적 있습니까?

13억 중국인들이 '영화황제'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1932년 영화 전문지 [電聲]이 1년여에 걸쳐 인기투표를 한 결과 김염이 '가장 좋아하는 남자배우', '가장 잘 생긴 남자배우', '가장 친구가 되고싶은 남자배우'등 전분야에 걸쳐 1위를 차지,「영화황제」라는 칭호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의 나이 24세 때입니다.

그가 한국인이었다는 것을 아는 한국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님 웨일즈는 '나는 그에게서 육체의 아름다움 너머에 깃든 정신의 아름다움을 보았다"고

말하였습니다.  본명이 김덕린인 그는 1910년 서울 출신입니다. 

그의 아버지 김필순(金弼淳)은 세브란스 의대 1회 졸업생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사였습니다.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하였습니다.

 

김염은 그 당시 좌파 시나리오 작가인 田漢과 노신의 반봉건,

반억압 진보사상에 경도되어 있었습니다.

김염은 소년시절부터 노신의 사상에 깊은 감화를 받은 것 같습니다. 

그가 10대  였을 때 장래 굉장한 영화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가집니다.

영화배우면 멋진 이름을 써야되지 않습니까. 

소년 김염은 미리서 이름을 하나 지어 놓습니다.

노신을 존경했던 그는 노신에서 신을 따서 金迅이라고 지어 놓습니다. 

그러나 영화배우의 꿈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무작정 상하이에 오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냉대와 가난이었습니다.

「상하이의 어느 골목 조그마한 음식점, 이미 몇 끼를 굶은 한 젊은이가 식사를 하고

돈이 없어서 섣달그믐까지도 돈을 갚지 못해 입고 있던 웃옷을 저당 잡혀 식대를 갚아야 하는」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화에 대한 열정은 더 강력하게 불꽃처럼 타올랐습니다.

그는 전에 지어 놓았던 金迅 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불꽃처럼 타오리라는 열망을 담아

불꽃 염으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김신이 될 뻔한 영화황제가 김염이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김염의 솔녀가 얼마전에 자신의 할아버지 이야기를 추적하여 쓴

「상하이 올드데이스」라는 책에 나온 내용입니다.

 

노신의 영향은 10대의 조선 소년의 가슴에까지 파고 들어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김염은 자신의 연기를 민중의 오락거리로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영화에 나타나는 정신은 반봉건, 반억압, 반일정신이었다 합니다.

「大路」「壯志凌云」으로 대표되는 항일영화의 제작에 앞장섰던 김염을 통해,

중국인들은 외세를 배척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진보적인 젊은이의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영화를 보고 따라 했으며, 청소년과 대학생들은

그의 동작과 말투까지 따라 했다고 합니다. 

저는 며칠 전 김염의 미망인 친이여사를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여사는 노신의 미망인 쉬광핑 여사와 교류하면서 같이 활동하였다고 들려 주었습니다.

「상하이 올드데이스」는 내년쯤 중국어 번역본이 나올 예정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김염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한 비판적 지식인의 선각자적 정신이 얼마나 깊고 넓게

공명되는 지를 알게 됩니다.

 

어떤 면으로 보면 김염은 한류의 원조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중국사람들은 참 묘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중국인이 더 이쁜데 그들은 한국인이 더 예쁘다고 합니다. 

요즈음 한류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아무리 보아도 중국 배우나 탈렌트가 더 예쁩니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한류배우에 푹 빠져 있습니다.

중국인들이 일부러 짐짓,그러는지 왜 그러는지, 어떨땐 의심이 납니다.

 

김염이 영화계의 한류원조였다면 당시 음악계에서는

鄭律成이라는 음악가가 또한 한류원조였습니다. 

나이든 중국인들은 그가 지은「연안송」을 다 안다고 합니다.

1990년 북경에서 개최된 아세안게임 개막식에서 울려 퍼진 노래「중국인민해방군가」를

지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도 당시 나라 잃은 조선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곳 상해에서 음악공부를 하였고 연안의 노신 예술학교에서 음악을 연마하고 가르쳤습니다.

그의 고향 전남 광주에서 오는 11.12일 제1회 정율성 국제음악제가 열린다고 합니다.

 

저는 김염과 정율성이 모두 노신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를 느끼지만

중국인의 포용성에 대하여 경이에 가까운 느낌을 받습니다.

어떻게  이민족의 배우를「영화황제」로서 받아들이며,

어떻게 이방인에게 자국의 군가를 짖게 하느냐는 것이지요. 

아마 우리 한국에서였더라면 상상도 못할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중국인의 이런 포용성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포용하는 자가 결국 크게 되고 승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중국이 땅 덩어리가 커서 큰 것이 아니고 중국인들의 이러한 포용성 때문에 크게 보입니다.

 

 

노신에 대한 묘사와 비유는 수 없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표현은 아무리 보아도 일품입니다.

 

'메스를 손에 들고 만나는 사람마다 마취약도 사용하지 않고

그들의 환부를 도려내고 마는 기이한 의사'

 

딱 노신의 모습이 앞에 나타나지 않나요?

이것은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노신을 방문취재 했던 언론인 신언준의 묘사 입니다.

그가 노신을 인터뷰한 것은 1933년 5월이었습니다. 

기사는 그로부터 1년 뒤인 1934년 4월 신동아에 <중국의 대문호 노신 방문기>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습니다.

국민당정부의 要注意 인물로 반은 숨어살다시피 하고 있던 노신을 몰래 탐방하여 인터뷰한

노신방문기는 희귀한 자료에 속합니다. 

그를 만나게 된 과정부터 그의 수입에 비해 검소하기 짝이 없는 생활상과

세계혁명이 완성되어야 약소 민족도 해방될 것이라는 노신의 육성을 전한 것은

상해 거주시기의 노신을 이해하는 데 간명하면서도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입니다.

 

노신은 식민지 시대의 조선인 문학가들에게 특히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예를 여기에서 다 열거할 수 없고 또 제가 자세히 알지도 못합니다.

단지, 노신과 관련해서 꼭 알아야 될 한 사람이 있습니다. 

한국학생 여러분이 다 아는 이육사입니다.

「청포도」,「광야」의 시가 지금도 교과서에 나오죠?

그는 노신에게서  영혼의 감화를 받았고 노신을 찾아가 만났으며

노신이 죽자 장문의 추도사를 조선일보에 연재하였으며,

그리고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17차례나 옥고를 치른 끝에

북경의 일본 감옥에서 40세의 젊은 생을 슬쓸히 마감합니다.

그는 조선인으로서 항일 독립 운동을 하다가 최초로 옥사한 시인이기도 합니다.

이육사라는 이름은 대구형무소에서 옥살이할 때 죄수번호 264에서 음을 따온 것입니다

.

노신과 한국관계를 탐색하던 중 내가 다시 만나게 된 이육사는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웠던

청포도에 투영된 그런 서정시인만은 아니었습니다. 

백마를 탄 채 세상을 내려다보는 그런 세속을 초월한 초인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일제의 암흑 속에서 온 몸을 불살랐던 더 없이 순결하나 더 없이 뜨겁게 타올랐던

불꽃같은 영혼이었습니다. 

시대의 어둠과 격량을 온 몸으로 부딛치며 고뇌하며 행동 했던 지식인의 표상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노신을 길잡이 삼은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노신을 찾아가 만난 것은 1932년 6월 국민당에 의해 암살 당한

혁명원로 양싱푸(楊杏佛)의 장례식에서였습니다.

노신이 죽기 3년전의 일입니다.

이육사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1932년 6월초 어느 토요일 아침이었다.  식관에서 나온 나와 M은 네거리의 담배가게에서

 조간신문을 사서 들고 근육신경이 떨리도록 굵은 활자를 한숨에 내려 읽은 것은

당시 중국과학원 부주석이요 민국역명의 원로이던 양행불(楊杏佛)이

남의사원(藍衣社員)에게 암살을 당하였다는 기사이였다. (중략)

그리고 그 뒤 3일이 지난 후 R씨와 내가 탄 자동차는 만국빈의사 앞에 다았다.

간단한 소향의 예가 끝나고 돌아설 때 젊은 두 여자의 수원과 함께 들어오는

송경령 여사의 일행과 같이 연회색 두루막에 검은「마괘아(馬掛兒)」을 입은

중년 늙은이 생화에 싸인 관을 붙들고 통곡을 하던 그를

나는 문득 노신인 것을 알았으며 옆에 섰던 R씨도 그가 노신이라고 말하고난 십분쯤 뒤에

R씨는 나를 노신에게 소개하여 주었다. 

그때 노신은 R씨로부터 내가 조선 청년이란 것과 늘 한번 대면의 기회를 가지려고 했더란 말을

듣고 외국의 선배앞이며 처소가 처소인만치 다만 근신과 공손할 뿐인 나의 손을

다시한번 잡아줄 때는 그는 매우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이었다.

아! 그가 벌써 56세를 일기로 상해시 고탑 9호에서 영서하였다는 부보를 받을 때에

암연 한줄기 눈물을 지우니 어찌 조선의 한사람 후배로써 이붓을 잡는 나뿐이랴.」

 

 

자 이제 우리의 시선을 노신에게로 돌려봅시다. 

조선 지식인들에게 이렇듯 큰 영향을 미쳤던 노신 자신은 조선을, 조선인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노신의 글 속에는 조선이 어떻게 언급되어 있을까요?

노신의 글 어디에도 조선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고작, 한 두 마디가 전부이며, 그것도 조선에 대하여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국인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부차적으로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노신 자신이 번역한 어느책 서문에 이런 언급이 있을 뿐입니다.

 

<중국인은 전쟁에 나가기를 좋아하지 않을지 모르나 남을 동정하지는 않는다.

자기에 대해서는 마음을 쓰지만 남에 대해서는 마음을 쓰지 않는다.

예를 들면, 오늘날 일본이 조선을 병탄한 일에 대해 언급할 때도 득의 양양하게

"조선은 원래의 우리의 속국이었다"는 식으로 말을 하여 상대방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이 글에서 조선을 언급한 것도 중국인을 비판하기 위한, 또는 계몽하기 위한 맥락에서

 '조선'을 언급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떤 한국인 학자가 쓴 책을 보니까 이 대목을 인용하면서

그렇다면 노신은 일본의 조선침략을 정당한 것으로 보았을까 라며

스스로 곤혹스러운 의문을 제기한 것을 읽었습니다. 

저는 그가 과민반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민족감정에 이르면 누구라도 병적인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노신의 조선과 조선인에 대한 태도랄까.  견해 같은 것이 어떠했는지는

그의 글에는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단지 노신과 이육사가 만났을 때 노신이 이육사를 친근하게 대한 정황을 통해

노신의 대조선 정서를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또한 조선인으로서 그를 최초로 방문 취재했던 신언준과 나누었던

진지하고 솔직한 대화속에서 간접적으로 짐작해 볼 수 있겠습니다.

 

노신은 신언준과의 대화에서 조선의 문학계와 교류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  합니다. 

그러나 그 뒤에 아쉽게도 교류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만일 신언준이 노신의 바램대로 노신과 조선 문학계를 연결해 주었더라면

노신과 조선인간에는 의미있는 교류가 이루어졌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느껴집니다.

 

노신 선생이 상해에서 서거한지 약 10년후 한국은 해방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그 뒤 1992년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길고 긴 냉전, 동면상태를

거쳐야 했습니다.

모택동 주석이 찬양한 바 있었던 노신이 당시 한국에서 읽히지 않았던 것은

한국이 반공이데올로기에 결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택동 주석의 책이나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소지하고만 있어도 끌려가

조사를 당하고 고문을 당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저는 1952년생으로 한국전쟁중에 태어난 세대인데 잊지 못할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 초등학교 2-3학년때부터 였을 것입니다. 

어느날 학교에 갔더니 모두 모여 놓고 뭘 강제로 외우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1961년 박정희 장군이 쿠테타를 일으켰는데 소위「혁명 公約」을 만들어

전국 국민학생들에게까지 외우게 한 것입니다. 

날마다 그것을 선생님들과 함께 복창하며 외웠습니다.

지금은 다 잊어버렸지만 제1조는 기억이 뚜렷합니다.

'반공을 國是의 제1義로 삼고…'

뭐 그렇게 시작합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날마다 외웠습니다. 

반공이란 말은 공산주의를 반대한다는 거니까 알겠는데

국시라는 말은 생전 처음 들어본 말로 전혀 모르겠고 제1까지는 알겠는데

제1義 라는 말 같은 것은 무슨 뜻인지 통 몰랐습니다.

선생님들도 무조건 외우라고만 하지 무슨 뜻인지 안가르쳐 줍니다.

그래도 선생님을 따라 열정적으로 외웠습니다. 

그때 노신선생이 그 모습을 보았더라면…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 묘한 것은 그래도 일부 한국의 지식인에게 노신이 읽혔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들은 유별난 아웃사이더들이었습니다. 

문학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리영희, 박영복, 전우익 같은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그런 아웃사이더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한국의 지식인, 청년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신을 좋아했던 그들의 인생역정에 재미있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뭘까요?

모두가 감옥에 갔다는 사실입니다.  죄명도 같았습니다.

좀 색깔이 붉다는 것이었지요.

 

노신의 비수와 같은 단문의 일부가 한국 일반에게 소개된 것은 리영희에 의해서였습니다.

리영희는 독학으로 습득한 중국어로 사전을 들쳐가며 노신을 읽었습니다.

리영희는 죽은 노신이 무덤속에서 소리쳐 자기를 불러 일으켰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는 노신을 삶의 지표로 삼은 지식인이었습니다. 

노신은 리영희를 통해 한국에서 부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가 한국의 현대 지성사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 잠깐 보겠습니다.

한 예로서 1999년 말 연세대학원신문이 20세기를 보내고 21세기를 맞는 특집으로

교수와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하면서

'현재 우리 학계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친' 학자와 저작을 국내와 외국으로 나누어 조사했는데

국외 학자로는 프로이드가 1위, 국내학자로는 리 영희가 1위로 나타났습니다.

 

리영희에 대한 일치된 의견은 '1970-80년대 한국 변혁 운동의 중심이었고,

폭압적인 시대 상황에 맞서 싸웠으며, 70년대 냉전주의적 사회분위기에

새로운 시각을 불어넣은 학자'라는 평가였습니다.

 

그의 글은 노신이 자기글을 비유했던 바로 비수와 투창 그것이었습니다.

그는 노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여러 책에 수록된 노신에관한 글들에서 자주 언급하였지만

나의 글쓰는  정신이랄까, 마음가짐이랄까 하는 것은 바로 노신의 그것이에요. 

글의 기법,문장미, 속에서 타는 분노를 억누르면서 때로는 정공법으로,

때로는 비유.은유.풍자.해학.익살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세련된 문장 작법을

그에게서 많이 배웠지요.'

 

그의 글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고 그덕분에 그는 수차례 감옥을 가고 해직되고

고문당하고 모진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고통과 절망과 씨름하고 있을 때

그의 정신을 버텨 준 것도 노신 이었습니다.

 

그는 '노신과 나'라를 글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의 누구나 그렇듯이 정신적·사상적 모색으로 고민하던 나는,

노신의 많은 저서를 읽으면서 '실천하는 지식인'의 삶에 감동했다. 

단순히 지식을 상품으로 파는 것에 안주하는 교수나 기술자나 문예인이 아니라,

부정한 인위적·사회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고난 받는 이웃과 고난을 바꾸어 보려는

지식인의 사회적 의무에 눈을 뜬 것이다. 

그 소명감은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싹튼 것임은 물론이다.

1950년대 말에 중국어 저서(작품)를 사전을 찾아가며 힘겹게 읽어가던 어느 날

가슴에 와 닿는 한 구절에 마주쳤다.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 가령 말일세, 강철로 된 방이 있다고 하자, 창문은 하나도 없고 여간해서 부술 수도 없는 거야. 

안에는 많은 사람이 숨이 막힌 채 깊이 잠들어 있어. 

오래잖아 괴로워하며 죽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혼수상태이기 때문에

죽음으로 이르는 과정에 놓여 있으면서도 죽음의 비애를 느끼지 못한다.

 이때 자네가 큰 소리를 질러서, 그들 중에서 다소 의식이 또렷한 몇 사람을 깨워 일으킨다고 하자,  그러면 불행한 이 몇 사람에게 살아날 가망도 없는 임종의 고통만을 주게 될 것인데,

그래도 자네는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래도 몇 사람이 정신을 차린다면 그 쇠로 된 방을 부술 수 있는

희망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은가?'

모든 면에서 군벌지배와 장개석 치하 중국을 방불케 했던 박정희 대통령 치하에서

고민하던 나는 이 구절을 읽는 순간 그 구절은 무덤에서 노신이 나에게 타이르는 소리같이 들렸다.  나는 눈을 뜨고 정신을 번쩍 차렸다. 

나는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맹목적이고 광신적이며 비이성적인 극우, 반공주의에 마취되어 있는 사람들을

잠에서 깨어나게 하여 의식을 바로 잡아주는 일이 나의 삶의 전부가 되었다.

내가 몇 사람의 잠을 깨우고 몇 사람의 의식을 깨우쳤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가 없다. 

노신처럼 '역사'를 밀고 갈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한 '시대'와 함께 살아왔다는 것으로 만족한다. 

30년전 나의 의식의 눈을 뜨게 해 준 노신에 대한 조그마한 답례를 한 셈이다.」

 

 

노신을 일러 많은 중국 사람들이 민족혼이라 하는 거 같습니다.

지금부터 69년전인 1936년 10.19일 노신이 서거했을 때 그의 유해 위에는

민족혼이라고 크게 쓴 銘旌이 덮힙니다.

북경의 노신 박물관 사이트르 열면 거기에도 크고 굵은 글씨로 써진 민족혼이라는

제목아래 노신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이방의 한 노신 애독자로서 관위에 민족혼이라는 글자가 쓰인 사진을 볼 때

마치 노신 선생의 혼이 민족혼이라는 굴레속에 유폐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제가 이방인으로서 소통하는 노신은 어느 한곳에 딱 규정하여 넣기 힘든

그런 자유스러운 존재입니다.

 

노신 선생의 삶과 글, 사상을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노예화에 대한 분노어린 외침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그 외침은 물론 보편적 인간애에 굳건히 바탕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의 심안에 비친 중국의 역사는 황금빛 찬란한 역사가 아니라 노예의 역사  였습니다. 

노예가 되고 싶어도 되지 못한 시대와 잠시 노예로 안정되었던 시대가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처음 대할 때 어리둥절하였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노예화는 중국의 현상만이 아니고 바로 나의 문제이고 인류  역사의 문제임을 말입니다.

 

노신이 한국에 지금 나타난다면 우리에게서 노예가 아닌 자유인의 모습을 볼까요? 

5살쯤이면 여러 학원으로 끌려 다니는 어린이의 모습에서 노예화의 모습을 볼지도 모릅니다. 

끊임 없이 맹목적인 경쟁속에서 삶을 소진하고 있는 청소년들,

소비와 생산의 객체로 전락한 인간군상에서도 그는 노예의 모습을 볼지 모르겠습니다.

 

루쉰은 언제 읽어도 지금을 살고 있는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값싼 희망을 팔지는 않습니다.

 

참, 묘합니다. 

희망을 파는 사람의 목소리는 공허하게 들리는데

희망을 말하지 않는 노신의 저음속에서는 웬지 모를 희망이 느껴집니다.

 

노신은 그의 작품 [고향]의 말미에서 희망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 나와 윤토사이는 마침내 이렇게 멀어지고 말았구나.

그러나 우리의 후대들은  여전히 한마음으로 이어져 있다.

나는 그들이 나를 닮지 않기를 바라며, 사람들 사이에 장벽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그들에게는 마땅히 우리가 아직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생활이 있어야 한다........

희망이란 본래부터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것은 마치 땅위의 길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사실은 길이란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다.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 지면서 차차 생긴 것이다.]

 

이렇듯 노신이 꿈꾸었던, 사람 사이에 장벽이 없고 나라 사이에도 장벽이 없는,

아직 겪어본 적이 없는 새로운 세상, 그것은 여전히 21세기 동아시아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꿈이기도 할 것입니다.

 

돌아보면 노신이 고뇌속에 살다간  지난 20세기는 야만이었습니다.

한 중 일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이 같은 전쟁터에서 만나 서로 총부리를

겨눠야만 했던, 그런 야만과 악몽은 이제 다시는  되풀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노신의 다음과 같은 말로 제 이야기를 끝마칠까 합니다.

 

「현재에 불만을 품은 자는 그러나 복고적이어서는 안된다.

왜냐면 우리 눈앞에 또한 갈 길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상 미증유의 제3의시대를 창조하는 일. 

바로 이것이 오늘날 청년들의 사명이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coindian (상하이 화동사대 강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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