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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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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강은교 - 우리가 물이 되어
2015년 12월 21일 01시 02분  조회:3780  추천:0  작성자: 죽림
 
우리가 물이 되어
                     //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處女)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萬里)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푸시시 불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人跡)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 
* 감상 : 물이 되어 만난다는 것은 불같이 서로 다투던 욕심과 미움을 버리고 만난다는 것이다. 쉽게 합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사이가 되어 '처녀' 같이 순수의 바다에서 만나기를 바라고 있다.

* 상징적 의미
. 물 : 화합, 생성, 정화
. 불 : 갈등, 투쟁, 소멸

* 주제 : 순수한 마음으로 만나는 삶

다음은 '나룻배와 행인'입니다.

나룻배와 행인 : 한용운 시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음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감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깁흐나 엿흐나 급한 여을이나 건너감니다. //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마지며 밤에서 낫가지 당신을 기다리고 잇슴니다. 당신은 물만 건느면 나를 도러 보지도 안코 가심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아러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어 감니다. //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 
----------------------- 
* 감상 : 사랑의 본질을 자비(慈悲)와 인(忍)에 두고, 그 정감의 깊이를 노래한 이 시는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당신과 나의 관계를 행인과 나룻배에 비유했다.

* 구성 : 수미상관 
제 1연 : 나와 당신의 관계 
제 2연 : 나의 희생 
제 3연 : 당신을 만날 수 있다는 나의 믿음을 형상화
*형태상으로 3연으로 되어 있으나 시상의 전개에 따라 1연의 1, 2행을 각각 하나의 연으로 독립시키면, 기 승 전 결 4개의 연으로 나눌 수 있다.
* 주제 : 희생과 믿음(불교적 자비)

두 작품의 공통점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유를 통해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는 공통점은 우선 찾을 수 있겠네요. 또 대상에 대한 기다림(우리가 물이 되어에서는 순수한 생명력으로의 만남에 대한 소망. 나룻배와 행인에서는 행인에 대한 기다림)이 나타나 있다. 정도로 찾을 수 있겠군요.

다음은 '내 마음을 아실 이'입니다.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 같이 아실 이 
그래도 어데나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과 
속임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밤 고이 맺는 이슬 같은 보람을 
보밴 듯 감추었다 내어 드리지. 

아 !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 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 맑은 옥돌에 불이 달아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

감상 : 이 작품의 주제는 그리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그의 내면 세계에 머물러 있는 안개와 같이 깔려 있다. (김소월, 한용운의 님과는 차이가 있음). 
1930년대 '시문학'파의 성격인 섬세한 언어 감각과 그윽한 서정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투명한 정서와 조탁(彫琢)된 시어, 음악성을 잘 드러나 있다. 
* 어조 : 여성적 어조로 내면의 그리움을 노래

* 주제 : 임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과 회의

우리가 물이 되어와 비교한다면 가장 선명한 것은 간절한 소망의 정서가 드러나 있는 점을 꼽을 수 있겠군요. 

============================================

 

 

 

 

 

나의 아버지 - 강은교


   속 깊은 마당에 떨어지는 비처럼 늘 함께 계시는 듯 그리운 내 아버지


                       
   
얼마나 고독하셨을까아버지는열심히 걸어오신 삶이 후회스러우면서 문득 억울하다고

생각하진 않으셨을까아버지는한밤중에 일어나 앉으니저 가로등처럼 구부정히 서서

골목을 불현듯 지나가시는 아버지가 보이는 듯하다.

그런데어느 날 보니 나도 뒷 허리를 문지르고 있었다내 어린 시절의 아버지처럼
.

그런데어느 날 보니 나도 소금물에 눈을 씻고 있었다내 어린 시절의 아버지처럼
.

그런데어느 날 보니 나도 안경을 들고 있었다내 어린 시절의 아버지처럼
.

그런데어느 날 보니 나도 골목을 멍하니 내다 보고 있었다내 어린 시절의 아버지처럼
.

그런데어느 날 보니 나도 몇 개의 알약을 먹고 있었다내 어린 시절의 아버지처럼
.

그런데어느 날 보니 나도 한약 한 봉지를 고개를 치켜들고 마시고 있었다내 어린 시절의 아버지처럼
.

아버지는 그때그러니까 내가 아주 꼬마였을 때어린 딸을 바라보시며 문득 어떤 생각이 들곤 하셨을까그동안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문득 드셨을까이제부터라도… 하며 굳게 결심하고 계셨을까그때 그렇게 하지 말 것을 하는후회로 가슴 아프고 계시진 않았을까어느날 불현듯 유서를 써두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계시진 않았을까거기엔 당신이 억울한 이유도 조목조목 함께 쓰고 싶으시진 않으셨을까그동안 무엇인가 열심히 원고지를 긁적거리며무엇인가 늘 세상을 향하여 중얼거림과 외침을 던진 일이 참 쓸데없는 짓이었구나하고 생각하고 계시진 않으셨을까다만 어린 아이를 보며 그 아이참 눈부시구나하시며 미소를 짓고 계시진 않으셨을까아마도 세상으로부터 한없이 밀려났다는 생각을 하시며내가 요즘 연속방송극 같은 것을 열심히 보는 것처럼 신문 연재소설을 읽으시고 라디오 방송극을 열심히 들으신 것이었을까
.

평생 신념이 중요하던 아버지에게 그때도 신념은 최후에 신봉하여야 할 그 무엇이었을까이상의 아름다움그런 것을 그때도 만지작거리고 계셨을까아버지의 맨 마지막 시간에 든 생각은 어떤 것이셨을까절망이었을까희망이었을까어머니였을까딸이었을까.신념이었을까 빛이었을까빛이 뿌옇게 드나드는 창이었을까
.

'우리가 사는 것아마 다 어느 날의 동화일거야동화치고는 너무 고통스러운가난의 동화소외의 동화고독의 동화투쟁의 동화,이상의 동화일거야'라고 중얼거리시며, '부재가 우리의 운명이리새소리에 새소리는 없으리우리는 마주오는 불빛밖에 볼 수 없으리'라고 중얼거리시며 마지막 골목길을 걸어가셨을까아니 지금 걸어가시고 계시는 걸까그러나 아버지라는 공간은 수천 아버지가 들끊는 동심원 같은 공간이다그 동심원 속의 속에마치 핵같은 점으로 아버지는 들어있다아버지의 뼈 속에 불던 바람은 나의 하늘에도 불고 있다아버지의 눈썹 밑을 적시던 비는 나의 하늘에도 내리고 있다아버지의 어깨 위를 하염없이 비추던 황혼은 나의 하늘에도 내려 앉아 있다
.

어느 날 푹푹 내리던 하얀 눈발이 시려운 아버지의 이마시금치 나물을 유난히 잘 잡수시던 아버지의 위장그 위장 속으로 깊이 깊이 나는 내려간다그래서 하나가 된다나는 또 하나의 시간이 된다아버지는 아름답다시간이므로 아름답다책갈피에 끼인 어느 날의 단풍잎같은 존재이므로 아름답다가끔 꺼내보는 아버지이기에 아름답다어머니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어느 유원지 사진 속에 서 계신 아버지이기에 아름답다아름다운 아버지는 속깊은 마당이다마당에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이다그것은 마당 위에 고독한 웅덩이를 남긴다그러므로 아버지는 불멸이다어머니가 불멸이듯이모든 숨이 불멸이듯이아버지는 또한 긴 울타리다아버지는 저 지붕이다내가 언젠가 진짜 괜찮은 시를 쓴다면 거기 태어나실 꿈이다그런데 나는 아직 아버지의 꿈을 쓰지 못했다그러기에 아버지는 희망이다젊은 시절에 하셨던 일들을 다시 젊은이가 하는 양을 보고 눈부셔지셨을 아버지는 창이다언제나 활짝 열리는 과거의 미래이다미래의 과거이.

 

 

                

 

 

           
 

시인 강은교와 가수 조영남

 
보내주신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편지의 시작이 인상적이었습니다.“조영남 선생께. 안녕하세요? 강은교입니다. 시를 끼적거리고 있죠.”

그래서 나도 답장의 머리글을 이렇게 써봅니다. 

“시인 강은교 선생께. 안녕하세요? 조영남입니다. 노래를 흥얼대고 있죠.”

강 선생의 편지를 받아 들고 얼마나 가슴 떨렸는지 모릅니다. 

도대체 이게 얼마만입니까. 우리의 첫 인연부터 따지면 굉장합니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한 열여섯 살, 당신이 중학교 1학년 열네 살 무렵부터니까 무려 50년이 넘어가네요. 수치로 반세기 만에 받은 편지라서 크게 놀랐고 반가웠습니다. 

나는 늘 강 선생에 대해 듬성듬성 생각하면서 잘살고 있나 궁금했는데 편지봉투에 명함처럼 찍혀 있는 ‘동아대학교 인문과학대학 문예창작학과 명예교수’라는 직함을 보고 아! 먹고는 살았겠구나, 안심이 되었습니다. 

내가 강 선생의 뜬금없는 편지를 받고 가슴 설레는 걸 봐서 ‘사람은 몸이 늙지 마음은 늙지 않는구나’ 하는 과장 섞인 생각까지 하게 됐습니다. 진도가 더 나가기 전에 한 가지 양해를 구할 게 있는데 강 선생께서 편지 말미에 답장을 기다린다고 써놨기에 물론 답장을 쓰겠다고 맘먹고 있었는데, 무슨 조화인지 공교롭게도 월간지 ‘신동아’로부터 원고지 20장의 신년수필 원고청탁을 받아놓고 있던 터라 나는 불현듯 강 선생에게 보내는 답문의 전문을 ‘신동아’ 쪽으로도 띄우는 방법을 생각해낸 것입니다. 한 통의 편지가 강 선생과 ‘신동아’ 쪽으로 동시에 배달되는 거죠. 요컨대 우리의 관계를 세상에 털어놓는 겁니다. 강 선생이나 나나 이제 살 만큼 다 살았고 또 어차피 강 선생의 시를 내가 노래로 만들어 부를 경우 세상에 알려지는 건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우리 얘기는 10대 때부터 시작됩니다. 

아! 우리에게도 10대 시절이 있었군요. 내가 충청도 시골에서 중학교를 막 졸업하고 서울로 밀려가야 했던 때가 있었죠. ‘밀려간다’는 뜻은 벌써 몇 년 전부터 아버지가 중풍으로 반신불수의 몸이 되어 병석에 누워 계셨기 때문에 시골집에선 고등학교에 올라갈 엄두를 못 내고 서울에 먼저 가 있던 누나네 집으로 쫓겨가야 했다는 겁니다. 

그즈음 나를 친동생처럼 대해줬던 강연희라는 이름의 우리 중학교 예쁜 영어선생님이 나한테 쪽지 한 장을 내밀며 이런 식의 설명을 해줬죠. 

“영남아, 서울 올라가면 얘를 좀 만나보거라. 이름은 강은교, 내 사촌여동생이다. 이번에 경기여중을 수석으로 입학한 아이야. 은교가 나폴레옹을 몹시 좋아하니까 네가 나폴레옹 초상화를 멋지게 그려서 선물을 하렴.” 대강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처녀 영어선생님이 열댓 살 소년 제자한테 열서너 살 소녀를 중매해준 셈이죠. 이런 걸 보통 쿨-이라 하죠. 

나는 물론 장항선 기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와 누나가 취직해서 일하는 을지로 6가 수구문 근처 쪼그만 약방 구석방에 짐을 풀고, 전화 거는 방법과 서울 말씨를 습득해 난생처음 전화를 걸어본 것이 혜화동 강은교네였죠. 달달 떨리는 손가락으로 전화번호를 돌렸고 저쪽에서 따르릉 소리가 들리며 신호가 갔고 “여보세요” 하는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얼른 연습해두었던 서울 말씨로 전화통화를 이어나갔죠. 

“여보세요. 저는 충청도 삽다리 중학교 강연희 선생님의 소개로 나폴레옹 초상화를 그려서 들고 온 조영남인데요” 하자 저쪽에서 “네에 제가 강은굔데요. 아! 이걸 어쩌나”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내 입에선 다음 대사가 튀어나오질 않았습니다. 다음 대사를 연습해두지 않았던 거죠. 그것으로 전화통화는 끝이 났죠.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달빛이 어쩌구 새벽별이 어쩌구 하는 멋진 대사 한 구절 없이 그날 우리의 첫 접선은 맥없이 끝났습니다. 다시 시도하는 뭐 그런 것도 없이 말입니다. 서울 소녀와 시골 소년이 가까운 거리에서 쌍방 전화통화를 실현한 것만도 굉장한 사건이었죠. 

그 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세월은 흘러갔고 내가 고3 때던가, 대학에 들어가서던가, 내가 다니던 동대문 근처 동신교회 학생 성가대원 중에 경기여고에 다니는 학생이 몇 명 있기에 문득 생각나서 이렇게 물었죠. 

“얘들아, 니네 학교에 강은교라는 학생 있니?”

그런데 이름도 기억나는 도건옥이라는 애가 “영남 오빠! 걔 우리 반 반장이야” 하고 알려주더군요.

“그럼 학교 가서 강은교한테 내 얘길 해보렴” 했더니 다음 주일 아침 바로 도건옥을 따라 여고생 강은교 당신이 나를 보러 동신교회엘 나온 겁니다. 아! 내 생애에 강은교를 최초로 보게 된 순간이었죠. 당시 내가 본 여고생 강은교의 인상은 유난히 눈이 큰 예쁜 얼굴에 부티가 주르르 흐르는 소녀였습니다. 그 후 우리는 자연스럽게 오빠 동생이 되어 매주 교회에서 만났고 예배가 끝나면 교회가 있던 동대문에서 혜화동 로터리, 어린 강 선생이 손을 흔들며 사라지곤 했던 주유소 뒤 골목 입구까지 바래다주곤 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우리들 젊은 날의 데이트였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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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잠들수 없어서...

 
강 은교 선생님은 30년간 나의 짝사랑의 대상이며 극복의 대상이었다.
1974년 떠꺼머리 고교 2년생의 눈에 꽂힌 그렁그렁한 눈 - 오늘의 시인총서 1권 풀잎- 갓 서른이 된 시인의 흔치 않은 시어와 감당하기 어려운 개인사..모든 것이 나를 사로잡았고 그의 작품 모두를 스크랩하기에 이른다.


 

 

 

 

중견이 되신 이후에는 산문집을 통하여 자신의 삶의 편린 속에서 어떻게 그의 시가 탄생되었는지 보여주시곤 하셨는데 이 책이 나왔을 때 나는 미국에 있었다. 로스 앤젤레스의 한 한국 서점에서 접한 선생님이 너무 반가와 덜컥 사고는 밤새워 읽었다.


시인의 산문집은 항상 시처럼 사는 사람의 생각 따라잡기가 가능해서, 그렇게 쉬운 모티브를 주셔서 참 좋다. 이 책도 자신의 사는 모습에서 느껴진 어리석음들 - 기실 문인들 중 세상 사는 요령에 정통한 사람들은 거의 없다 -을 고백한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한다.

시인은 수영을 배우려다 수영 강사에게 몸에 힘을 빼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곤 배우는 것을 포기한다. 어떻게 힘 빼는지 정말 몰라서...그리고 이렇게 독백한다.


...그러고 보니 세상에 대해서도, 세상 일에 대해서도 저는 늘 필요 이상의 힘을 주고 있었습니다. 속에서부터 거부하고 불신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을 중얼거렸지만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제 몸의 힘을 모두 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주 아주 가벼워져서 그 무엇인가로 늘 무거운 자기를 놓아버리고 그런 다음 깊이 깊이 받아들이는 일인 것입니다. 사랑에게 아무 보상의 요구 없이 자기를 던지는 일인 것입니다.....

 

-------아찌가 추억하는 강은교님 

 

1974년 종로서적에서 만난 여인


깊은 우수의 눈을 하고
병색이 완연하지만(선천성 희귀병) 또렷한 정신으로
나를 응시하는 한 사진
띠동갑 연상의 그녀에 끌려 

민음사 간 오늘의 시인총서 초판본을 산다.

 


70년대 초반 우리 시단에 새 물결을 가져온 '70년대'동인 중 한 분
또 다른 동인 (임 정남 님.전 샘터 간행인)과 결혼하시고
홍귀자 씨와 말레이지아에서 깜짝 결혼을 80년대 중반에 하면서
파계한 다른 동인(허 이름을 잊었다. 스님이셨는데..정씨)과 

절친하셨던

 


그래서인지 아래의 시에 짙은 윤회의 사상이 깔려 있으며
시평에서 미당 선생님이 '그는 '여류'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없는
최초의 시인이다'라고 했던 분

 

강 은교 님의 초기 시이고 나중에 교과서에도 수록되었다 했다.


내 사춘기의 한 쪽을 지배했던 연상의 여인의 시.....

우리가 물이 되어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Epilogue : 고3때 같이 글쓰던 친구가 죽었다. 그의 시비 제막 때 
이 시와 강은교 님의 '하관'을 내가 읊었었지.....

 

====================================
 

                             시는 어디에 있는가

 

                                                                                  강 은 교 

                            

 

지금까지의 숱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시는 어디에 있는가.

집으로 달려오다가 문득 하늘을 보니 잿빛 허공에 떠 있는 거대한 TV 화면 속에서 적금통장을 들고 마음껏 웃고 있는 여자의 아양 떠는 혀가 보인다시는 그 혀 속에 있는가.

 

시는 어디에 있는가.

산길을 걷다가 그림자로 길을 안으려 애쓰고 있는 나무 한 그루를 본다그 나무는 쉴 새 없이 머리를 흔들고 있다시는 그 흔들림 속에 있는가.

 

시는 어디에 있는가.

그 터널은 누우런 금니빨 같은 등불을 번쩍이며 밖으로 나가고 싶어나가고 싶어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시는 그 터널의 꿈속에 있는가.

 

시는 어디에 있는가.

그 꽃의 입술은 오늘 아침 활짝 열려 공중을 핥아대고 있다두 발이 잘렸음에도 웃음 던지며시는 그 꽃의 순간의 열린 입술 속에 있는가.

 

시는 어디에 있는가.

사유를 위한 존재의 즐거움 속에 있는가추악 속에 있는가결코 잊을 수 없는 美 속에 있는가.

한 사람의 시는 열 사람의 시인가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과연 옳은가.

열사람의 시는 또 어디에 있는가.

불행 속에 있는가흘러내리는 눈물 속에 있는가무덤의 고독 속에 있는가시간의 속눈썹 속에 잇는가.

열 사람의 시는 또 어디에 있는가.

시는 오해와 오류 속에 있다또는 관계 속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은가.

 

시는 어디에 있는가욕망과 무의식 속에 있는가무의식의 생산 속에 있는가.

순환하는 善 속에 있는가순환하는 惡 속에 있는가.

시는 어디에 있는가감자 속에 있는가감자의 얇은 껍질 속에 있는가.

 

시는 어디에 있는가시는 바라봄’ 속에 있는가. ‘바라봄의 꿈’ 속에 있는가시는 가짐’ 속에 있는가. ‘가짐에의 꿈속에 있는가. ‘-혹은 도달’ 속에 있는가. ‘-혹은 도달에의 꿈속에 있는가.

 

이참에 장자의 우화 하나를 보자.

 

장자 「… 얼마 후에 밭일 하던 노인이 물었다. ‘댁은 무엇 하는 사람이오?’ ‘孔丘의 제자입니다.’하고 대답하니까 밭일 하던 노인은 말했다. ‘댁은 그 널리 배워서 성인 흉내를 내며 허튼 수작으로 대중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홀로 거문고를 타면서 슬픈 듯 노래하여 온 천하에 명성을 팔려는 자가 아니겠소!… 댁은 몸조차 다스리지 못하는데 어찌 천하를 다스릴 겨를이 있단 말이오댁은 가보시오내 일을 방해하지 말고’ 자공은 두려워 움츠러든 채 창백해져서 멍청하니 넋을 잃고 말았다. 30리를 가서야 제 정신이 들었다

 

장자의 말을 오늘 시에 대입한다면시인은 홀로 거문고 타며 슬픈 듯 노래하는’ 사람인가.

 

시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햇빛의 혀가 은빛으로 부서지며 고개를 바짝 쳐든 산봉우리를 핥고 있다시는 그 햇빛의 눈부신 혀 속에 있는가.

 

시는 어디에 있는가그 산봉우리는 늘 말없이 서서 이마 위에 흐르는 안개 같은 땀을 닦고 있었다시는 그 산봉우리 속에 있는가.

 

시는 진정 어디에 있는가.

사물 속에 있는가하나의 사물을 향하여 수십 수만 개의 줌 렌즈가 달려온다.

수십 수만의 그 사물은 어디에 있는가상승되는 정신 속에 있는가하강하는 몸속에 있는가.

수십 수만의 사물에 관한 시는 또 어디에 있는가.

개인의 무의미와 그 우연 속에 있는가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지금 옳은가.

그도 아니라면시는 언어 속에 있는가이미지 속에 있는가시는 언어인가언어가 시의 도구인가이미지가 시의 도구인가.

 

시는 시집으로 만들어진다그렇다면 한 권의 시집 속에 모든 시는 있는 것인가.

 

책 이야기가 나왔으니 장자의 우화 하나를 더 읽어보자.

 

장자 제나라의 환공이 堂上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윤편이 당하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다가몽치와 끌을 놓으며 말했다묻겠습니다만전하께서 읽은 시는 건 무슨 말입니까?환공이 대답했다.성인의 말씀이지.」「성인이 살아계십니까?환공이 대답했다.벌써 돌아가셨다네.」「그럼 전하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군요환공이 말했다.내가 책을 읽고 있는데 바퀴 만드는 목수 따위가 어찌 시비를 건단 말이냐설명을 하면 괜찮되 그렇지 못하면 죽이겠다.윤편은 대답했다저는 제 일로 보건대 수레를 만들 때 너무 깎으면 헐거워서 튼튼하지 못하고 덜 깎으면 빡빡하여 들어가지 않습니다더 깎지도 덜 깎지도 않는다는 일은 손짐작으로 터득하여 마음으로 수긍할 뿐이지 입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거기에 비결이 있는 것입니다만 제가 제 자식에게 깨우쳐 줄 수 없고 제 자식 역시 저에게서 이어받을 수가 없습니다그래서 70인 이 나이에도 늘그막까지 수레바퀴를 깎고 있는 겁니다그러니 전하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사람들의 찌꺼기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시집 속에도 시는 없다시집은 찌꺼기일 뿐이다.

그렇다면 시는 어디에도 없다,고 주장해야 한다이런 주장은 과연 옳은가.

 

이미 죽어버린 죽음’ 속에도 시가 있을 리 없다.

결코 선택할 수 없는 출생 속에도 시가 있을 리 없다.

모두 창밖으로 흘러가는 안개를 몽롱한 눈으로 바라보며 커피 잔을 기울이지만안개 속에도 실은 시는 없다.

바이칼에 가려고 모두 가장 질긴 신발을 신지만바이칼에 가보라거기에 바이칼은 없다바이칼의 시는 더욱 없다.

 

그러면 이렇게 한 번 해보자.

중대한 문제들은 길거리에 존재한다,고 철학자 니체는 말했으니오늘 시도 거리에서 찾아보자이때의 거리는 물론 비유로서 쓴 것이다삶터의 비유로서나아가 삶터에서 사는 법의 비유로서 당신은 이해하기 바란다생계라고 해도 되리라.생계의 비유로서결국 ’ 속에서 찾아보자.

 

) : 생계의 일과 시작의 관련성을 어떻게 보시는지요생계의 일이 시작을 방해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 : 밥 짓는 일과 시를 짓는 일은 썩 사이가 좋은 관계는 아닌 것 같습니다밥 짓는 일을 걱정하지 않을 정도가 되면 시 짓는 일이 하찮아 보이겠죠반면에 밥 짓는 일이 너무 고달프면 시 짓는 일을 할 시간을 벌기도 어렵고또 엄두가 나지 않죠둘은 불편한 관계이면서 팽팽한 긴장이 있을 때에야 그나마 사별이 없지요. (시인 ○○○)

 

) : 보통 사람들처럼 땀 흘리며 구체적인 직업을 갖고 있어야 생활하는 사람의 보편적인 정서를 시에 담아낼 수 있다고 본다그런데 굳이 예를 하나 더 들자면 교수나 교사라는 직업에서는 큰 시인모든 규범을 뛰어넘는 그릇은 나오지 않는 것 같다시 편집자의 경우는 시건방진 시 비평가가 되기 쉽고그런데 이 자본제 사회에서 도대체 어느 직업이 시인에게 어울리겠는가. (시인 ○○○)

 

) : 저는 소위 전업 시인이라 해서 반드시 좋은 시를 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오히려 노동과 시는 따로 노는 관계가 아니라 상관성이 매우 깊다고 여기고 있습니다흙에서 멀어진 연장에 녹이 슬듯 항구에 오래 머문 배가 낡아가듯 사유란 노동 속에서 빛나기 때문입니다현실에 발을 딛지 않은 사유란 관념과 추상으로 흐르기 십상입니다물론 지나치게 생계에 얽매이는 태도는 시작에 장애를 가져다줍니다시란 어느 정도의 마음과 몸의 여유에서 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요컨대 적당한 직업이 시인에게 필요하다고 저는 여기고 있습니다.

가르치는 일에 지나치게 몰두했을 때는 시가 의무의 대상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있습니다이는 시작에 치명적입니다출판사에서 교정보는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책에 대한 외경심이 사라지기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시인 ○○○)

 

) : 전업시인으로 살기는 어려움생업(生業)과 시업(詩業사이의 갈등 자체가 시의 중요한 소재. (시인○○○)

 

) : 시를 생각할 때 맨 처음 떠오르는 것은 입니다위의 질문에 맞춰보면 주제적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이 그렇듯 늘 사는 일에 목메고 치이다보니 자연스레 이 삶이 무엇일까지금 현재는 나의 미래에 무엇일까저 꽃은 저 작업복은저 손은저 눈은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어떤 삶의 겨움과 꿈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일까를 고심하게 됩니다.

한편 제가 살아 온 삶 역시 평탄치 않다보니 자연스레 기존의 질서 이외의 사회질서를 꿈꾸는 지향이 늘 제 몸에 제 언행에 따라 붙는 것을 느낍니다그런 점에서 보면 무척이나 이념적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너무 잘 아시겠지만 그것이 시로 올 때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한 구절이 핵이 되기도 하고어떤 상징적 정조를 나타내는 단어 하나예를 들면 슬픔이라든가 고독이라든가해학이라든가상실감이라든가 하는 단어 하나가 시를 마칠 때까지 따라 붙습니다그 정서의 흐름이 압축적으로 잡혀 스스로 말하고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깁니다헌책방에 먼지 쌓여가는 책들 속에 있는 화석화된 맑스주의교조화 된 맑스주의전혀 불온하지 않은 맑스주의가 아니라노동시가 아닌 다른 불온한 노동시(이런 게 있을 법이나 할까?)를 써보는 것이 꿈입니다.

이 시는 그런 고민 속에 있는 나의 자세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대다수는 칼잠에 새우잠인데 어떤 이는 떡잠인 사회가 여전히 우리 사회라고 봤고아무리 노력해도 기회의 균등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우리 사회라고 생각했습니다그런 사회 안에서 자신의 해방을 가지기 위해서는 피치 못하게 싸움과 갈등이 불가피한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인 ○○○)

 

) : 바쁜 일 속에서 시는 나온다고 생각한다시와 일 둘 중의 하나만 택하여야 한다면 시로 기울겠지만,시가 밥이 되질 않는다는 것을 안다나는 시와 밥 중에 밥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시는 나만 먹여 살린다.밥은 식구를 먹여 살린다시를 쓴다고 가족의 생계를 팽개칠 수는 없다적정한 자괴감이 시를 지탱하는 힘이지만 밥벌이가 없으면 나는 내 문장과 시를 팔아 밥을 구할 것이다그 지경의 자괴는 시를 파괴시킬 것이다.☏ 바쁜 일 속에서 시는 나온다고 생각한다시와 일 둘 중의 하나만 택하여야 한다면 시로 기울겠지만,시가 밥이 되질 않는다는 것을 안다나는 시와 밥 중에 밥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시는 나만 먹여 살린다.밥은 식구를 먹여 살린다시를 쓴다고 가족의 생계를 팽개칠 수는 없다적정한 자괴감이 시를 지탱하는 힘이지만 밥벌이가 없으면 나는 내 문장과 시를 팔아 밥을 구할 것이다그 지경의 자괴는 시를 파괴시킬 것이다. (시인 ○○○)

 

) : 이십 대 후반을 저는 전업시인으로 살았습니다스무 장의 이력서가 아무 데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지금은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데전업일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창작의 경우 크게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시인 ○○○)

 

) : 저는 시를 어렵게 생각하지 않습니다저는 시인보다 선생이 더 좋고 시를 안 쓰고 평화롭게 사는 한 인간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강가에 서 있는 나무처럼 말입니다저는 시를 쓰려고 힘을 쓴 적이 별로 없습니다살다가 보면 써지지요안 써진다고 걱정을 한 적도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교사와 시인도 한 길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시를 택할래교사를 택할래그러면 나는 둘 다 택하겠다고 우길 것입니다. (시인○○○)

 

) : 건설현장에 있을 때는 매직으로 시멘트 포대에 메모를 많이 했습니다. (시인 ○○○)

 

) : 지난 1998년 이후 백수입니다생계가 꼭 시작을 방해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그렇지만 저의 경우 직장을 그만 두고 난 뒤 확실히 작품에 몰두할 수 있었고따라서 더 많은 작품을 생산하게 된 것만은 사실입니다그러나 반성하건데생계를 팽개친 작품 활동은 결코 자랑스러울 가치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시인 ○○○)

 

) : 모든 글 쓰는 이들의 소망은 인세 받아 살면서 글만 쓰고 사는 게 아닐까요저만 그런가요그래서 늘 이런 생각을 합니다이제 글만 쓰고 살면 좋겠다그럼 내가 정말 많은 것을 할 수 있겠다라고… 하지만 솔직히 생각해보면 과연 그럴까 라는 생각도 합니다노동(물론 글 쓰는 일도 노동입니다), 몸을 움직이고,사람들과의 관계를 만들고만원버스를 타고 흔들리며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하고직장 일이 힘들어 포장마차에서 쓰러지고… 그렇게 살아가는 일상은 너무 힘들지만 그것은 또한 아주 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천재가 아니고 그저 사람들과 섞여 살면서 그들과 부대끼는 일은 글쓰는 일 만큼이나 소중합니다.… (시인○○○)

 

그러니까 어디에도 없는 오늘의 시는 어디에나 있다당신이 삶터에서 땀을 닦고 있는 모든 시간에당신이 집에 오면서 들르게 되는 모든 길거리에모든 간판 속에모든 상황 속에당신이 만나는 사람들의 그 어떤 웃음 또는 눈물 속에도 시는 있다시는 언어이며 이미지이며줌렌즈이며 사물사물에서 튀어나온 열개의 손가락이다.

시는 죽음에의 꿈속에 있으며시는 도달이 아니라 도달에의 꿈속에 있으며시는 이 아니라 에의 꿈속에 있다.

시는 어디에나 있다당신의 첫 연애 속에둘째 연애 속에당신의 섹스 속에.

오늘의 시는 어디에나 있다.

나뭇잎의 입술 속에나뭇잎 입술의 꿈속에그 사이를 날아다니는 나비의 꿈속에.

시간의 꿈속에흩날리는 눈과 앉아있는 눈 속에()의 눈(속에()의 손등 위에.

바이칼이 아니라 바이칼에의 꿈속에.

역사가 아니라역사에의 꿈속에.

리얼리즘이 아니라 리얼리즘에의 모더니즘 적 꿈속에카프카 속에이상 속에.

어디에도 없는 시는 오늘 어디에나 있다맑스가 예나에게 보낸 시 속에맑스의 시적 혁명을 꿈꾸는 들뢰즈 속에.

시는 오늘 당신이 지나가야 하는 터널 속에도 있다터널의 검은 벽 속에검은 벽 위에서 번들거리는 등불의 눈물 속에터널로 빨려 들어가는 모든 헤드라이트의 공허한 진땀 속에.

 

늘 안달 하는 애인애인의 손가락을 감싸고 있는 보석반지그 눈부신 빛줄기 속에 시는 있다.

명품 핸드백이 흔드는 대리석의 욕망 속에 시는 있다.

오늘의 꽃은 향기가 없다꽃 파는 화훼공판장에 들러보라썩는 냄새가 진동한다한편에 수북이 쌓인 시든 잎들 때문이다시는 거기 썩는 향기 속에 있다.

래핑 갈매기의 푸른 날개 속에둥지를 밀물에게 내 주고 모래언덕으로 뛰어가는 그 부리 속에조개를 찾는 그 붉은 부리 속에죽어서도 빈 껍질을 다른 물고기의 집으로 선물하는 굴의 인자함 속에.

순환하는 선이 아니라 선의 꿈속에

정상이 아니라정상의 꿈속에.

바람에 눕는 풀의 꿈의 순간 속에풀의 그림자의 꿈의 순간 속에.

그 잎이 개구리에게 넓은 삶터를 제공하는 적도의 정글 속 브로멜리아드나무 속에일생에 한 번 피는 그 꽃잎의 분홍 뺨 속에벌이 올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는 그 꽃잎의 간절한 꿈속에.

살아 있는 것은 무엇이나 가지고 있으며 그것에 자기를 맞추는 리듬 속에빛의 리듬 속에바람의 리듬 속에썰물의 리듬 속에리듬의 꿈속에

외재성의 내재성에의 환상 속에

구겨진 일회용 컵 속에이제는 아무도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싸구려 시계 속의 시계의 꿈속에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베스비오스 화산그 속에화산의 꿈속에.

잠이 아니라잠의 꿈속에

옥상 위를 달리는 토끼가 질질 끌고 있는 초원의 꿈속에.

공간을 끊임없이 살해하는(하이네의 어법철도의 꿈속에

영원히 만나지 않지만 간이역에서 영원히 만나고 있는 평행의 철로 속에철로의 꿈속에

서울역 로비에 있는 에스컬레이터의 꿈속에

 

이런 질문도 해본다. :

 

) : 시가 잘 써지지 않는 시기(dry period)의 경험이 있으신지그럴 땐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시는지?

 

) : 전혀 다른 일 하기내 편에서도 시를 씻은 듯이 잊어주기. (시인 ○○○)

 

) : 시가 한 줄도 안 써지는 고갈의 시기가 분명 있죠저한테는 그것이 자주 오고 오래 갑니다그렇다고 저는 그것 때문에 타는 목마름을 느끼거나 고통스러워하지는 않습니다시가 안 써지면 그냥 내비 둡니다.아마도 그런 가뭄의 시기에 저는 시 말고 딴 짓거리들을 저질렀던 것 같습니다밀교에 심취했다가 금방 싫증을 내고진흙을 주무르거나연극을 하거나선거운동에 빠지거나… 어떤 파멸적인 연애를 시도하거나

그러나 이런 外道가 시적 고갈을 극복하는 길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습니다그저 시가 내 안에서 자라나도록 방기하고 그것이 필연성을 향해 발효할 때까지 가만 두는 것입니다. (시인 ○○○)

 

고독에 대해서도 두어 시인에게 물어보았다.

 

) : 나는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는다오히려 고독을 단련시킨다고독은 시를 발전(發電)시키는 전기와도 같은 그 무엇이 아닐까요. (시인 ○○○)

 

) : 뼈에 사무치는 외로움을 가져보지 못한 자는 좋은 시를 쓸 수 없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시인 ○○○)

 

그러면 나도 내 여섯 가지의 고독을 여기 천명해볼까어디에나 있는 시를 위하여아무도 읽기 원하지 않는그러나모든 이가 읽기를 원하는나를 위한 그의 시를 위하여,

 

1. 모든 관계의 긍정의 고독

2. 긍정의 고독 속에 있는 언어의 고독

3. 시의 거룩한 도구성으로서의 언어와 이미지의 고독

4. 존재의 순환 속에 있는 무한 시간의 고독

5. 외면에 버려지는 내면의 고독

6. 예언과 치유의 고독

 

할 수 없다쓰는 수밖에. ‘이 고독 속에서 숙성되어범어사 대웅전 천정의 연꽃처럼 이미지의 꽃이 되기만을 우연이 되어 기다릴 뿐.

고독의 거리 속에서 다시 한 번 반복하자오늘 시는 어디에나 있다.

사상을 운율에 태우고(니체달릴 뿐인 거기에그저 달릴 뿐인 모든 거기.

 

 

 

 

 


시창작을 위한 일곱가지 방법
                        강은교

첫째, 장식없는 시를 써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 시적 공간만으로 전해지는 것, 그것이 시의 매력이다. 
시를 쓸 때는 기성시인의 풍을 따르지 말고 남이 하지 않는 얘기를 하라. 
주위의 모든 것은 소재가 될 수 있으며 시의 자료가 되는 느낌들을 많이 가지고 있게되면 
시를 쓰는 어느날 그것이 튀어나온다. 하지만 시는 
관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이 구체화되고 형상화되었을 때 시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묘사하는 연습을 많이 하라.

둘째, 시는 감상이 아니라 경험임을 기억하라
시는 경험의 밑바탕에 있는 단단한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때의 경험은 구체적 언어를 이끌어 내 준다. 
단지 감상만 갖고서는 시가 될 수 없으며 좋은 시는 감상을 넘어서야 나올 수 있다. 
시는 개인으로부터 시작했지만 개인을 넘어서야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감상적인 시만 계속해서 쓰면 '나'에 갇히게 된다. 
그러므로 '나'를 넘어선 '나'의 시를 쓰라. 단, 시를 쓰는 일이란 끊임없이 
누군가를 격려하는 일임도 기억해야 한다. 졸시 <따뜻함>을 보라.
웅덩이 건너편 모래가 
웅덩이 쪽 모래를 손짓하는 새 
아침별이 저녁별을 손짓하는 새 
햇빛 한 올이 제 동무 햇빛을 부르러 간 새

셋째, 시가 처음 당신에게 다가왔던 때를 돌아보고 자신을, 
자신이 시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
'내가 정말로 시인이 될 수 있을까?'라고 의심하지 말고 신념을 갖고 시를 쓰라. 
나의 시를 내가 믿지 않으면 누가 믿어 주겠으며 나의 시에 내가 감동하지 않으면 누가 감동해 주겠는가. 시가 어렵고 힘들게 느껴지는 순간엔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서 시가 처음 당신에게 다가왔던 때를 돌아보라. 
문학 평론가 염무웅은 이렇게 충고한다. 
'세상의 하고 많은 일들 중에 왜 하필 당신은 시를 쓰려고 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시를 쓰는가?'라고. 
우리는 신념을 갖고 시를 쓰되 남이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써야 한다.

넷째, 시의 힘에 대하여
좋은 시에는 전율을 주는 힘이 있다. 
미국의 자연사상가인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이렇게 말했다. '
떠오르는 아침해를 보고 전율하지 않는 사람은 한물간 사람이다. 
오래 살고 싶으면 일몰과 일출을 보는 습관을 가지라.' 
그는 자연에서 생의 전율을 느끼라고 충고한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전율을 많이 주는 것은 무엇일까? 
연애가 주는 스파크, 음악 등이 아니겠는가. 
허나 살다가 보면 이 때의 전율도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시는 정신적으로 전율을 느껴야만 나올 수 있다. 
그러므로 시를 쓰려면 전율할 줄 아는 힘을 가져야 한다. 
표현과 기교는 차차로 연습할 수 있지만 감동과 전율은 연습할 수 없는 부분이다. 
우리에게 감동이 혹은 전율이 스무살 때처럼 순수하게 올 수 있을까? 
그 순수한 전율을 맛보기 위해서는 시인의 남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다섯째, 자유로운 정신(Nomade)에 대해서
원래 '노마드(Nomade)' 란 정착을 싫어하는 유목민에서 나온 말이다. 
이말은 무정부 상태, 틀을 깬 상태, 즉 완전한 자유를 의미한다. 
예술의 힘, 시의 힘은 바로 이 노마드의 힘이 아닐까? 
우리의 정신은 이미 어떤 틀에 사로잡혀 있는 국화빵의 틀에 이미 찍혀 있는 상태다. 
그러므로 우리는 틀을 깨는 연습부터 해야한다. 
흔히 문학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 틀을 깨는 과정에서 
술(알콜)의 힘을 빌어야 좋은 문장이 나온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술을 도구로 하여 얻어지는 상태가 과연 진짜 자유인가를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건 자유를 빙자한 다른 이름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술의 힘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어떤 이데올로기도 그려지 있지 않은 순백의 캔버스를 끄집어 내기 위해서만 
술을 마셔야 하지 않을까.

여섯째, '낯설게 하기'와 '침묵의 기법'을 읽히자
우리는 상투 언어에서 벗어나 '낯설게 하기' 기법을 익혀야 한다. 
상투의 틀에 붙잡히지 말고 끊임없이 새로운 정신으로 긴장을 살려나가자. 
감상적인 시는 분위기로밖에 남지 않으며 '시 자체'와 '시적인 것'은 확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시적은 것은 시의 알맹이가 아니다. 
시적인 것에만 너무 붙들려 있으면 시가 나오지 않는다. 
우리의 시가 긴장하여 이데올로기의 자유를 성취하는 순간 깜짝 놀랄 구절이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에 사로잡히지 않는 자유정신을 지니자. 
몸의 자유가 뭐 그리 중요한가?
또한 "침묵의 기술, 생략의 기술"도 익히자. 
예를 들어 T.S. 엘리어트 의 황무지라는 시는 우리에게 침묵의 공간을 보여주고 있는 시다. 
시와 유행가의 차이는 그것이 의미있는 침묵인가 아닌가의 차이이다. 
시는 감상이 아니라 우리를 긴장시키는 힘이 있는 것인데, 
만약 설명하려다 보면 감상의 넋두리로 떨어져 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침묵의 기술을 익혀야 한다. 
보다 침묵하는 부분이 많을수록 그 시는 성공할 것이다. 말라르메는 말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이 짧은 두 행의 사이에는 시인 자신이 말로 설명 하지 않은 
수많은 말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음이 보이는가? 
그러나 침묵의 기술을 익히려면 많은 연습이 필요한 법. 
우리는 많이 쓰고 또 그 만큼 많이 지워야 한다. 
시를 쓸 때도 다른 모든 세상일처럼 피나는 연습이 필요하며 
더욱이 말로 다 설명하지 않으면서 형상화하는데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일곱째, '소유'에 대한 시인의 마음가짐
시를 쓰고, 어느 정도의 성취를 맛보려면 약간의 결핍현상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매사 풍요한 상태에선 시가 나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긴 하겠지만 시인이 되려는 사람은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해선 안 되지 않을까?

■ 프로필
1945년 함남 흥원 출생, 연세대 영문과 및 동대학원 국문과 졸업 
1968년 <사상계>로 등단, 한국문학작가상, 현대문학상 등 수상 
2001년 현재 동아대학교 한국어문학부 교수

■ 작가 이야기
허무의 바다에서 돛을 올리는 시세계 
시의 위의(威儀)가 여러모로 훼손되고 있는 이즈음, 강은교 시인이 우리에게 보내는 시편들은 작은 축복처럼 느껴진다. 피폐한 우리의 영혼을 따뜻하게 밝혀주는 작은 등불처럼, 시인은 오늘도 어디선가 "저 반짝이는 거품들 사이에서 물고기 한 마리를 건지듯 상황 하나를 건지기 위하여, 혹은 우리에게 우리를 알려주는 은유 하나를, 끝내는 당신의 삶을 쓰다듬을 수 있는 은유 하나를" 낚기 위해 허공의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워 놓고 있다. 
이처럼 강은교의 시세계는 허무(허공)의 바다에서 돛을 올린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게 허무란 오랫동안 면벽좌선하여 터득한 선(禪)의 경지도 아니며, 이 세상을 다 살아본 노인들이 체득한 삶의 무상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현실의 삶의 다양한 무늬가 현상되기 이전의 자의식의 영도(零度)이자 '백지상태(tabula rasa)'이다. 촬영 이전의 순도(純度) 높은 필름인 것이다. 다시 말해 그에게 허무는, 김병익의 예리한 표현처럼, 의식이 순수한 결정으로 남을 때까지 모든 것을 분해, 제거함으로써 인식이 가능한 종말과의 해후(邂逅)다. 그럼으로써 오롯이 빛나는 자의식의 투명성!
다시 말해 삶의 허울과 허위를 대담하게 사상(捨象)시켰을 때 남는 절대적 '시원의 시원', 또는 "한 겹씩 벗겨지는 생사의/저 캄캄한 수 세기"('자전(自轉) 1') 속의 심연과도 같은 곳이다. 그의 시가 주술적인 이미지들과 비의적인 상상력, 그리고 유현한 상징들로 가득 차 있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예컨대 허무에 대한 다음과 같은 예언적인 설교로 보라: "길은 어디에도 있고/그러나/어느 곳에도 이르지 않는다."('길') 정주와 유목을 동시에 욕망 하는 길, 존재와 부재, 삶과 죽음을 한 몸에 지닌 존재론적 비애가 바로 길의 근원, 즉 허무의 본질이 아닌가.
이처럼 시인은, 신경림 시인이 갈파한 대로, 삶/죽음이나 현상/존재를 '등가적 동시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지금 이 순간 또 어디서 "탈주하지 않으면서 탈주하는 것, 끊임없이 기표를 살해하면서 기의를 얻으려고 하는 것, 아, 언어"(<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낚으려고 하는 걸까. 그가 조용미 시인이 상상 속에서 그린 "비가 쏟아져내리면 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정에서 푸덕이며 금과 옥의 소리를 낸다는 萬魚山"('萬魚山'), 다시 말해 물고기 등에 산이 솟아올라 있다는 그 신비의 물고기 한마리를 건져 올릴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류신/문학평론가) 


강은교 시 모음 40편
☆★☆★☆★☆★☆★☆★☆★☆★☆★☆★☆★☆★
가을 


          강은교 


기쁨을 따라갔네 
작은 오두막이었네 
슬픔과 둘이 살고 있었네 
슬픔이 집을 비울 때는 
기쁨이 집을 지킨다고 하였네 
어느 하루 
찬 바람 불던 날 살짝 가 보았네 
작은 마당에는 붉은 감 매달린 
나무 한 그루 서성서성 눈물을 
줍고 있었고 
뒤에 있던 산, 날개를 펴고 있었네 

산이 말했네 

어서 가보게, 그대의 집으로
☆★☆★☆★☆★☆★☆★☆★☆★☆★☆★☆★☆★
나무가 말하였네 

         강은교

나무가 말하였네

나의 이 껍질은 빗방울이 앉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햇빛이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구름이 앉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안개의 휘젓는 팔에
어쩌다 닿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당신이 기대게 하기 위해서
당신 옆 하늘의
푸르고 늘씬한 허리를 위해서
☆★☆★☆★☆★☆★☆★☆★☆★☆★☆★☆★☆★
내 만일

           강은교

내 만일 폭풍이라면
저 길고 튼튼한 너머로
한번 보란 듯 불어볼 텐데...
그래서 그대 가슴에 닿아볼 텐데...

번쩍이는 벽돌쯤 슬쩍 넘어뜨리고
벽돌 위에 꽂혀 있는 쇠막대기쯤
눈 깜짝할 새 밀쳐내고
그래서 그대 가슴 깊숙이
내 숨결 불어넣을 텐데...

내 만일 안개라면
저 길고 튼튼한 벽 너머로
슬금슬금 슬금슬금
기어들어
대들보건 휘장이건
한번 맘껏 녹여볼 텐데...

그래서 그대 피에 내 피
맞대어볼 텐데...

내 만일 종소리라면
어디든 스며드는
봄날 햇빛이라면
저 벽 너머
때없이 빛소식 봄소식 건네주고
우리 하느님네 말씀도 전해줄 텐데...
그래서 그대 웃음 기어코 만나볼 텐데... 
☆★☆★☆★☆★☆★☆★☆★☆★☆★☆★☆★☆★
너를 사랑한다

         강은교

그땐 몰랐다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 
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 

그땐 그걸 몰랐다 
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의 속 가슴을 보게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그땐 몰랐다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꽃 속에 꽃이 있는 줄은 몰랐다 
일몰의 새 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 몰랐다 
꽃 밖에 꽃이 있는 줄 알았다 
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를 흘기고 있는 줄 알았다 
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너를 사랑한다
☆★☆★☆★☆★☆★☆★☆★☆★☆★☆★☆★☆★
동백

           강은교

만약
내가 네게로 가서
문 두드리면

내 몸에 숨은
봉우리 전부로
흐느끼면

또는 어느 날
꿈 끝에
네가 내게로 와서

마른 이 살을
비추고
활활 우리 피어나면

끝나기 전에
아, 모두
잠이기 전에
☆★☆★☆★☆★☆★☆★☆★☆★☆★☆★☆★☆★


         강은교

새벽 하늘에 혼자 빛나는 별
홀로 뭍을 물고 있는 별
너의 가지들을 잘라 버려라
너의 잎을 잘라 버려라

저 섬의 등불들,
오늘도 검은 구름의 허리에 
꼬옥 매달려 있구나

별 하나 지상에 내려서서
자기의 뿌리를 걷지 않는다
☆★☆★☆★☆★☆★☆★☆★☆★☆★☆★☆★☆★
사랑법 

      강은교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있는 누워있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뒤에 있다.
☆★☆★☆★☆★☆★☆★☆★☆★☆★☆★☆★☆★
서시 

          강은교

이제 눈뜨게 하십시오
눈떠 저희의 손과 발
바람 속에 흔들게 하십시오.

수천킬로미터의
들판을 지나
들판에 겹겹이 앉아 있는 노을들과
굽이치는 죽음을 지나

당신이시여
검붉은 피 여직 흐르는
슬픈 가슴이시여

여기엔 머뭇거리는 길뿐이오니
여기엔
눈먼 안개와
허우적이는 그림자들뿐이오니

아,이제 일어서게 하십시오.
일어서 당신의 깊은 가슴 속
저희가 헤엄치게 하십시오
저희의 피가 수평선을 이루고
저희의 흐느낌이
함께함께
출렁이게 하십시오
☆★☆★☆★☆★☆★☆★☆★☆★☆★☆★☆★☆★
수평선

          강은교 

이제는 돌아갑시다
돌아가 깊이깊이
어둠에 얼굴을 담급시다
수만 주름살 가만가만
몸 흔드는 바닷가
철없이 나와 앉은 피안의 등불들
거품으로 거두고
큰 소리 한 번 외쳐 봅시다

부서지는 것은
파도만은 아니리
부서지면서 온전한 것

또한 바다만은
아니리
☆★☆★☆★☆★☆★☆★☆★☆★☆★☆★☆★☆★
순례자(巡禮者)의 잠 

          강은교

바람은 늘 떠나고 있네.
잘 빗질된 무기(無機)의 구름떼를 이끌면서
남은 살결은 꽃물든 마차에 싣고
집 앞 벌판에 무성한
내 그림자도 거두며 가네.

비폭력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죽은 아침
싸움이 끝난 사람들의 어깨 위로
하루낮만 내리는 비
낙과(落果)처럼 지구는 숲 너머 출렁이고
오래 닦인 초침 하나가
궁륭(穹隆) 밖으로
장미가시를 끌고 떨어진다.

들여다보면 안개 속을
문은 어디서 열리고 있는가.
생전에 박아두었던
곤한 하늘 뿌리를 뽑아들고
폐허의 햇빛 아래 전신을 말리고 있는
눈먼 얼굴들이여

떨어지는 것들이 쌓여서 잠이 들면
이제 알았으리, 바람 속에서
사람의 손톱은 낡고
집은 자주 가벼워지는 것을
위대한 비폭력자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가는 아침
돌아옴이 없이 늘 날으는
바람에 실려
내 밟던 흙은 저기 지중해쯤에서
또 어떤 꽃의 목숨을 빚고 있네. 
☆★☆★☆★☆★☆★☆★☆★☆★☆★☆★☆★☆★


       강은교

나무 하나가 흔들린다
나무 하나가 흔들리면
나무 둘도 흔들린다
나무 둘이 흔들리면
나무 셋도 흔들린다
  
이렇게 이렇게
 
나무 하나의 꿈은
나무 둘의 꿈
나무 둘의 꿈은
나무 셋의 꿈
 
나무 하나가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둘도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셋도 고개를 젓는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이
나무들이 흔들리고
고개를 젓는다
 
이렇게 이렇게
함께
☆★☆★☆★☆★☆★☆★☆★☆★☆★☆★☆★☆★
우리가 물이 되어
                         
           강은교님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에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를 말하면서
올 대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
이유

            강은교

오늘 아침 그 간판이 떠지지 않는 눈 비비며 미소하는 이유는
그래서 거기 내리는 안개가 세상을 허옇게 칠하며 일어서는 이유는
그래서 바람 한 줌이 바위들의 어깨 위에 냉큼 올라앉는 이유는
그래서 이슬 한 방울이 부지런히 산을 오르는 이유는
부지런히 산을 오르며 모든 풀잎의 뺨을 쓰다듬는 이유는
모든 풀잎의 뺨 위에서 또로로록 빗방울과 손을 잡는 이유는
조만간 황금빛 햇님이 긴 치마를 펄럭이며 들어설 것이기 때문이다. 
☆★☆★☆★☆★☆★☆★☆★☆★☆★☆★☆★☆★
일어서라 풀아 

        강은교


일어서라 풀아 
일어서라 풀아 
땅 위 거름이란 거름 다 모아 
구름송이 하늘 구름송이들 다 끌어들여 
끈질긴 뿌리로 긁힌 얼굴로 
빛나라 너희 터지는
목청 어영차 
천지에 뿌려라
이제 부는 바람들 
전부 너희 숨소리 지나온 것 
이제 꾸는 꿈들
전부 너희 몸에 맺혀 있던 것
저 바다 집채 파도도
너희 이파리 스쳐왔다
너희 그림자 만지며 왔다
일어서라 풀아 
일어서라 풀아
이 세상 숨소리 빗물로 쏟아지면
빗물 마시고
흰 눈으로 펑펑 퍼부으면 
가슴 한아름
쓰러지는 풀아 
영차 어영차
빛나라 너희 
죽은 듯 엎드려
실눈 뜨고 있는 것들. 
☆★☆★☆★☆★☆★☆★☆★☆★☆★☆★☆★☆★
자전(自轉)  

         강은교 

날이 저문다. 
먼 곳에서 빈 뜰이 넘어진다. 
무한천공(無限天空) 바람 겹겹이 
사람은 혼자 펄럭이고 
조금씩 파도치는 거리의 집들 
끝까지 남아 있는 햇빛 하나가 
어딜까 어딜까 도시를 끌고 간다. 

날이 저문다. 
날마다 우리나라에 
아름다운 여자들은 떨어져 쌓인다. 
잠 속에서도 빨리빨리 걸으며 
침상 밖으로 흩어지는 
모래는 끝없고 
한 겹씩 벗겨지는 생사의 
저 캄캄한 수세기(數世紀)를 향하여 
아무도 자기의 살을 감출 수는 없다. 

집이 흐느낀다. 
날이 저문다. 
바람에 갇혀 
일평생이 낙과(落果)처럼 흔들린다. 
높은 지붕마다 남몰래 
하늘의 넓은 시계소리를 걸어 놓으며 
광야에 쌓이는 
아, 아름다운 모래의 여자들 

부서지면서 우리는 
가장 긴 그림자를 뒤에 남겼다. 
☆★☆★☆★☆★☆★☆★☆★☆★☆★☆★☆★☆★
풀잎 

   강은교

아주 뒷날 부는 바람을 
나는 알고 있어요
아주 뒷날 눈비가
어느 집 창틀을 넘나드는 지도
늦도록 잠이 안 와
살(肉) 밖으로 나가 앉는 날이면
어쩌면 그렇게도 어김없이
울며 떠나는 당신들이 보여요
누런 베수건 거머쥐고
닦아도 닦아도 지지 않는 피(血)를 닦으며
아, 하루나 이틀
해 저문 하늘을 우러르다 가네요
알 수 있어요, 우린
땅 속에 다시 눕지 않아도
☆★☆★☆★☆★☆★☆★☆★☆★☆★☆★☆★☆★
23층의 햇빛 

       강은교

지금 막 심장에 도착했어 
뼈 하나를 지났다구 

간을 지나 
콩팥을 지나 

갈거야, 너의 피로 

그림자가 오면 그림자를 기대게 하면서 
눈물이 오면 눈물을 기대게 하면서 
바람이 오면 바람을 기대게 하면서 

햇빛의 금빛 손가락 끝에서 그림자들이 일제히 일어선다 
새까만 그림자의 손톱들이 차가운 벽의 가슴을 어루만진다 

갈거야, 너의 핏 속으로 
별이 오면 별을 기대게 하면서. 
☆★☆★☆★☆★☆★☆★☆★☆★☆★☆★☆★☆★
가는 곳 

         강은교

달이 뜬다, 
산 너머 칡 밭에는 
떨어진 눈썹 몇 개 
살 몇 점 
홀로 채비를 서둔다. 

가다가 더러 귀신 만나면 
가는 곳 잊지 말고 물어두게. 
☆★☆★☆★☆★☆★☆★☆★☆★☆★☆★☆★☆★
가을의 書 

      강은교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여자를 
보아라 
종이처럼 그 여자 오늘 구겨짐을 
보아라 
구겨지며 늘 비 흐름을 
비 흐르며 그 여자 길 밖으로 떠나감을 
보아라 
모든 길 밖에 흐르는 길동무들을 
보아라 
언제나 싸우고 있는 길의 밤꿈을 
보아라 
정오엔 많은 바람으로 펄럭이다가 
사라지는 그 여자의 꿈속 
모든 가을길은 멀어서 
마지막엔 그대도 보이지 않는걸 

보아라 
☆★☆★☆★☆★☆★☆★☆★☆★☆★☆★☆★☆★
감자 

        강은교

감자여 

거기 검은 비닐의 홑이불을 제치고 
두 개의 굵은 뿌리와 
백서른다섯 개의 실뿌리를 공중을 향하여 굽이치고 있는 너 

온몸을 쭈글쭈글하게 하면서 
금빛 욕망을 지구에 접속시키고 있는 너 

네 눈물의 소금기가 
베란다를 적시고 
엘리베이터를 적시고 
아파트 정문으로 흘러내린다 

모든 향수와 
모든 부재와 
모든 유토피아 

어쩔 수 없구나 

일으켜 세우라 
눈물이여, 

거기 두 개의 굵은 뿌리와 
백서른다섯 개의 실뿌리를 지구를 향하여 굽이치고 있는 너 
☆★☆★☆★☆★☆★☆★☆★☆★☆★☆★☆★☆★
거리 시(詩) 

      강은교

컴컴한 하늘을 등에 지고 서 있는 그 여자를 보십시오. 
쉴 새 없이 외치는 그 여자의 붉은 칠한 입술을 보십시오. 
그 여자의 입술이 흔들릴 때마다 
몸 흔들며 달리는 찬바람을 보십시오. 
번쩍이는 불빛들을 지나서 
바람에 문들이 가득 덜컹거리는 
골목과 골목을 탐욕스럽게 핥으며 
천지에 누운 먼지들 
낮은 리어카 위에 쌓는 것을 보십시오. 
"오리지날 골덴니트가 싸요, 싸―." 
붉은 칠한 입술 속으로 
세계의 흙들이 흐르고 있음을 보십시오. 
아직도 어둠은 빛의 어머니임을 보십시오. 
길을 삼키는 끝없는 길을 보십시오. 
꿈을 삼키는 끝없는 꿈을 보십시오. 
찬바람에 떠는 그 여자의 두 손이 
무덤의 풀처럼 파아랗게 
밤하늘의 별을 가리키는 것을 보십시오. 
흐르는 무덤들이 이 저녁 거리 
흔들림도 없이 지구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십시오. 
캄캄한 하늘을 등에 지고 서 있는 그 여자 
어둠이 빛인 그 여자. 
☆★☆★☆★☆★☆★☆★☆★☆★☆★☆★☆★☆★
고독 

     강은교

잠자리한 마리가 웅덩이에 빠졌네 
쭈글쭈글한 하늘이 비치고 있었네 
서성대는 구름 한 장 
잠자리를 덮어주었네 

잠자리 두 마리가 웅덩이에 빠졌네 
쭈글쭈글한 하늘이 비치고 있었네 
서성대는 구름 한 장, 구름 곁 바람이 
잠자리를 덮어주었네 

잠자리 한 마리가 울기 시작했네 
잠자리 두 마리도 울기 시작했네 
놀란 웅덩이도 잠자리를 안고 울기 시작했네 

눈물은 흐르고 흘러 
너의 웅덩이 속으로 흐르고 흘러 

너를 사랑한다. 
☆★☆★☆★☆★☆★☆★☆★☆★☆★☆★☆★☆★
그 나무에 부치는 노래 

        강은교

그 나무 지금도 거기 있을까 
그 나무 지금도 거기 서서 
찬 비 내리면 찬 비 
큰 바람 불면 큰 바람 
그리 맞고 있을까 
맞다가 제일 떨어내고 있을까 

저녁이 어두워진다 문득 길이 켜진다 
☆★☆★☆★☆★☆★☆★☆★☆★☆★☆★☆★☆★
그 여자 1 

      강은교

아침이면 머리에 
바다를 이고 오는 그 여자. 

생굴이요 생굴! 
햇빛처럼 외치는 그 여자 

바람 한 점 없어도 
일렁이는 주름 그 여자. 

손등엔 가득 
먹구름 울고 우는그 여자. 

비 언제 올지 몰라… 
비 언제 올지 몰라… 

늘 파도치는 든든한 
엉덩이 그 여자. 

어둠보다 빨리 
새보다 가벼이 

해님하고 같이 걷는 
예쁜 예쁜 그 여자. 
☆★☆★☆★☆★☆★☆★☆★☆★☆★☆★☆★☆★
그대의 들 

      강은교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로 시작하는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하네 

하찮은 것들의 피비린내여 
하찮은 것들의 위대함이여 평화여 

밥알을 흘리곤 
밥알을 하나씩 줍듯이 

먼지를 흘리곤 
먼지를 하나씩 줍듯이 

핏방울 하나 하나 
그대의 들에선 
조심히 주워야 하네 

파리처럼 죽는 자에게 영광 있기를! 
민들레처럼 시드는 자에게 평화 있기를! 

그리고 중얼거려야 하네 
사랑에 가득 차서 
그대의 들에 울려야 하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대신 
모래야 우리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대신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라고 

세계의 몸부림들은 얼마나 얼마나 작으냐, 라고. 
☆★☆★☆★☆★☆★☆★☆★☆★☆★☆★☆★☆★
꽃 

  강은교

지상의 모든 
피는 꽃들과 
지상의 모든 
지는 꽃들과 
지상의 모든 
보이는 길과 
지상의 모든 
보이지 않는 
길들에게 

말해다오 
나, 아직 별 위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
낙동강의 바람 

       강은교

그대 있는 곳을 
나는 아네. 
그러게 이리 정신없이 
몸 흔드는 게 아닌가. 

그대 잠들지 않는 이유를 
나는 아네. 
그러게 이리 한많은 소리로 
뼈 부서지는 게 아닌가. 

살이 살을 뜯는 거리에서 
울음떼 무성한 언덕쯤에서 
출렁임이 또 한 출렁임 낳아 
돌아가지 못하는 것들이여. 

오늘은 돌아가지 못하는 것들끼리 
저무는 해를 만지고 있는데 

그대 가는 곳을 
나는 아네. 
얼었다 녹으며 
녹았다 얼며 

이 구름 밑 
살지 못해 죽는 그대 
오, 죽지 못해 사는 그대. 
☆★☆★☆★☆★☆★☆★☆★☆★☆★☆★☆★☆★
눈발 

       강은교

외롭지 않아요. 우린 
함께 함께 내려가요. 우린 

머리칼 죄 뜯긴 나무 위에 풀 위에 
몸살 앓는 잔돌 위에 산등성이 위에 

쇠꼬챙이 담벼락 위에 
비둘기 날개 위에 

안녕 안녕, 돌아서는 사람들 솟은 어깨 위에 
납작 누운 불경기 지붕 위에 

호텔 보드라운 창틀 위에 
취기 오른 불빛 위에 

그리고 미사 위에 
언제나 언제나 홀로 서 있는 십자가 위에 

끝내는 눈물이 되어 

눈물이 되어 온 땅 
질퍽질퍽 흐느끼게 해요 
함께 함께 흐느끼게 해요. 
☆★☆★☆★☆★☆★☆★☆★☆★☆★☆★☆★☆★
돌아 

      강은교

너 아직 거기 있느냐 
사월에 던진 돌아, 
꽃샘바람 몹시도 불어 가는 
길모퉁이 

연탄재며 밥 찌꺼기 
혹은 목 떨어진 개나리꽃 새 
꾸부정하게 끼어 앉아 
깨진 머리로 빛나는 돌아 

으스름 무렵이면 
한 잎 가득 피 베어문 하늘이 
네 얼굴처럼 달려온다. 

날이라도 궂어 
출출출 비 내리쏟는 날에는 
험집투성이 우리 가슴결엔 
화들짝 살아오는 숨소리, 고함소리 
난장판으로 강물이 흐르고 
뒷산 허리에선 
우르르 우르르 
우뢰 몸서리 요란했다. 

아직 거기 있느냐 너 
사월에 던진 돌아, 
개나리 활활 일어설 때를 기다려 
아, 그 꽃잎 꽃잎에 상채기 흠씬 
문댈 때를 기다려 
일년이고 십년이고 
수유리 한구석 
차마 못 떠나는 돌아 

네가 못 떠나는 이 땅에 
올해도 사월은 가지만 
우리는 영영 남아 있다 그 사월에. 
☆★☆★☆★☆★☆★☆★☆★☆★☆★☆★☆★☆★
등불과 바람 

      강은교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 
등불 하나는 내 속으로 걸어 들어와 
환한 산 하나가 되네 

등불 둘이 걸어오네 
등불 둘은 내 속으로 걸어 들어와 
환한 바다 하나가 되네 

모든 그림자를 쓰러뜨리고 가는 바람 한 줄기 
☆★☆★☆★☆★☆★☆★☆★☆★☆★☆★☆★☆★
모래가 바위에게 

          강은교

우리는 언제나 젖어 있다네. 
어둠과 거품과 슬픔으로 
하염없는 빛 하염없는 기쁨으로 
모든 세포와 세포의 사잇길을 지나 
폭풍의 날개 속으로 스며든다네. 
한낮에도 가만가만 스며든다네. 

길 막히면 길 만든다네. 
바람 막히면 바람 부른다네. 
세계의 수억 싸움 속에 
세계의 수억 죽음 속에 
낮은 지붕 위란 지붕 위 
썩은 살이란 살 위 

넘치고 넘쳐서 
우리는 꿈을 꾼다네. 
금빛 바위가 되는 꿈을 꾼다네. 
☆★☆★☆★☆★☆★☆★☆★☆★☆★☆★☆★☆★
무엇이라고 쓸까 

        강은교

무엇이라고 쓸까 
이 시대 이 어둠 이 안개 
줄줄 흐르는 
흘러야 속이 시원한 
이 불면(不眠). 

무엇이라고 쓸까 
자유롭기를 
기쁘기를 
시간은 즐거이 가기를 
그리고 
그대를 기다리길. 

무엇이라고 쓸까 
어둠 속에서 어둠이 보이지 않는데 
빛이 빛을 덮어 
눈물이 눈물을 덮어 
죽음이 죽음을 덮는데. 

무엇이라고 쓸까 
친구야 일어서라 
어둠이여 밝아라 
죽음이여 저리 가라. 

정말 무엇이라고 쓸까 
아무도 없는데 
저 혼자 문이 열렸다 닫힌다. 
☆★☆★☆★☆★☆★☆★☆★☆★☆★☆★☆★☆★
물방울의 시 

      강은교

펄럭이네요. 
한 빛은 어둠에 안겨 
한 어둠은 빛에 안겨 
지붕 위에서 지붕이 
풀 아래서 풀이 
일어서네요, 결코 
잠들지 않네요. 

달리네요. 
한 물방울은 먼 강물에 누워 
한 강물은 먼 바다에 누워 
거품으로 만나 거품으로 
어울려 저흰 
잊지 못하네요. 

이윽고 열리는 곳 
바람은 구름 사이 문 사이로 불고 
말없이 한 별 
허공에 일어나 
부르네요. 

눈뜨라 오 눈뜨라 
형제여. 
☆★☆★☆★☆★☆★☆★☆★☆★☆★☆★☆★☆★
물에 뜨는 법 

      강은교

힘을 빼야 하네 
어깨에서 어깨 힘을 
발목에서 발목힘을 
그런 다음 
헐거워진 그대 온몸 
곧게곧게 펴야 하네 

그대 어깨에서 
키 큰 수평선들 달려나오고 
그대 발목에서 
꽃 핀 섬들 달려 나와 
황금빛 지느러미 
훨 훨 훨 훨 
흔들 때까지 

예컨대 
길이 길의 옷을 입을 때까지. 
☆★☆★☆★☆★☆★☆★☆★☆★☆★☆★☆★☆★
배추들에게 

         강은교

비 내리는 장터에 모여앉은 
너희들을 본다. 
옹기종기 쓰레기더미 위에 엎딘 
너희들을 본다. 

비바람에 푸른 살 찢기우고 
목숨 꽂은 언 땅에서도 쫓겨나 
탐욕의 비늘 낀 손 기다리는 
아아 너희들 
동강난 뿌리. 

너희들은 울고 있다. 
파도 빛 이파리 허공에 악물어 
펄럭펄럭 왼 동리에 
눈물 섞어 휘날리며 
허리춤엔 낙동강 흙내를 
가슴께엔 두만강 솔바람을. 

모가지여 
이 비탈에도 눈이 오면 
한 무더기씩 두 무더기씩 
없는 피 쏟아 내릴 
모가지여 
머리엔 흰눈이 내려 
흰눈 펄펄펄 엎어져 

천지에 흐느낌 괴는 지금은 
어스름 저녁, 잔별도 돋지 않는. 
☆★☆★☆★☆★☆★☆★☆★☆★☆★☆★☆★☆★
봄 

    강은교

노오란 아기 고무신 한 켤레 
한길 가운데 떨어져 있네 
참 이상도 하지 
자동차 바퀴들이 떠들며 달려오다 
멈칫 비켜서네 

쓰레기터 옆 버스정류소에는 
먼지 뽀얗게 뒤집어쓴 개나리 꽃망울 
터질락 말락 하고 있는데 

'그으대에여어 사아아랑의 미이로오여' 

버스에서 내린 한 사람 
구르는 돌 하나 냅다 차 던지니 
한길 속 거기에 가 서네 

참 이상도 하지 
햇볕에 젖은 
노오란 아기 고무신 
누군가 벗어놓은 살처럼 얌전히 꼼틀대는 
봄의 깊은 뼈. 
☆★☆★☆★☆★☆★☆★☆★☆★☆★☆★☆★☆★
붉은 해 

   강은교

여기서 해는 서산으로 지는데 
붉은 해 등진 큰 벌에서 
바리바리 피를 모으던 어머니 
좋은 날 좋은 시를 가렸지만 
부끄러워라 우리 살은 
한 대접 냉수에도 쉬이 풀리는 
소금이라 하더이다. 
☆★☆★☆★☆★☆★☆★☆★☆★☆★☆★☆★☆★
비 

      강은교

부르는 것들이 많아라 
부르며 몸부림치는 것들이 많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이 오는 날 
눈물 하나 떨어지니 
후둑후둑 빗방울로 열 눈물 떨어져라 
길 가득히 흐르는 사람들 
갈대들처럼 서로서로 부르며 
젖은 저희 입술 한 어둠에 부비는 것 보았느냐 
아아 황홀하여라 
길마다 출렁이는 잡풀들 푸른 뿌리. 
☆★☆★☆★☆★☆★☆★☆★☆★☆★☆★☆★☆★
연애        

       강은교                                               

그대가 밖으로 나가네
등불 하나를 켜네
뒤에서 빗방울이 달려오네

그대를 따라 깊어진 어둠도 밖으로 나가네
문에는 든든한 네 개의 열쇠를 채우고
늙어오는 길과
늙어 있는 길을 지나

그대가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네
등불 둘을 켜네
뒤에서 빗방울이 달려오네

이 다정한 뭍의 死者들
자정엔 헛소리를 꺼내 드는
아, 이 바닥없는 뭇 잠의 추억들

그대가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네
등불 셋을 켜네

뒤에서 빗방울이 달려오네
그대가 돌아오지 않네 
☆★☆★☆★☆★☆★☆★☆★☆★☆★☆★☆★☆★
아주 오래된 이야기                                    

          강은교

무엇인가 창문을 두드린다
놀라서 소리나는 쪽을 바라본다
빗방울 하나가 서 있다가 쪼르르 떨어져 내린다

우리는 언제나 두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이 창이든, 어둠이든
또는 별이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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