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어디에 있는가
강 은 교
지금까지의 숱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시는 어디에 있는가.
집으로 달려오다가 문득 하늘을 보니 잿빛 허공에 떠 있는 거대한 TV 화면 속에서 적금통장을 들고 마음껏 웃고 있는 여자의 아양 떠는 혀가 보인다, 시는 그 혀 속에 있는가.
시는 어디에 있는가.
산길을 걷다가 그림자로 길을 안으려 애쓰고 있는 나무 한 그루를 본다. 그 나무는 쉴 새 없이 머리를 흔들고 있다. 시는 그 흔들림 속에 있는가.
시는 어디에 있는가.
그 터널은 누우런 금니빨 같은 등불을 번쩍이며 밖으로 나가고 싶어, 나가고 싶어, 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시는 그 터널의 꿈속에 있는가.
시는 어디에 있는가.
그 꽃의 입술은 오늘 아침 활짝 열려 공중을 핥아대고 있다. 두 발이 잘렸음에도 웃음 던지며. 시는 그 꽃의 순간의 열린 입술 속에 있는가.
아, 시는 어디에 있는가.
사유를 위한 존재의 즐거움 속에 있는가. 추악 속에 있는가, 결코 잊을 수 없는 美 속에 있는가.
한 사람의 시는 열 사람의 시인가,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과연 옳은가.
열사람의 시는 또 어디에 있는가.
불행 속에 있는가, 흘러내리는 눈물 속에 있는가. 무덤의 고독 속에 있는가, 시간의 속눈썹 속에 잇는가.
열 사람의 시는 또 어디에 있는가.
시는 오해와 오류 속에 있다, 또는 관계 속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은가.
시는 어디에 있는가. 욕망과 무의식 속에 있는가. 무의식의 생산 속에 있는가.
순환하는 善 속에 있는가, 순환하는 惡 속에 있는가.
시는 어디에 있는가. 감자 속에 있는가. 감자의 얇은 껍질 속에 있는가.
시는 어디에 있는가. 시는 ‘바라봄’ 속에 있는가. ‘바라봄의 꿈’ 속에 있는가. 시는 ‘가짐’ 속에 있는가. ‘가짐’에의 꿈속에 있는가. ‘감-혹은 도달’ 속에 있는가. ‘감-혹은 도달’에의 꿈속에 있는가.
이참에 장자의 우화 하나를 보자.
장자 : 「… 얼마 후에 밭일 하던 노인이 물었다. ‘댁은 무엇 하는 사람이오?’ ‘孔丘의 제자입니다.’하고 대답하니까 밭일 하던 노인은 말했다. ‘댁은 그 널리 배워서 성인 흉내를 내며 허튼 수작으로 대중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홀로 거문고를 타면서 슬픈 듯 노래하여 온 천하에 명성을 팔려는 자가 아니겠소!… 댁은 몸조차 다스리지 못하는데 어찌 천하를 다스릴 겨를이 있단 말이오. 댁은 가보시오. 내 일을 방해하지 말고…’ 자공은 두려워 움츠러든 채 창백해져서 멍청하니 넋을 잃고 말았다. 30리를 가서야 제 정신이 들었다. 」
장자의 말을 오늘 시에 대입한다면, 시인은 ‘홀로 거문고 타며 슬픈 듯 노래하는’ 사람인가.
시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햇빛의 혀가 은빛으로 부서지며 고개를 바짝 쳐든 산봉우리를 핥고 있다. 시는 그 햇빛의 눈부신 혀 속에 있는가.
시는 어디에 있는가. 그 산봉우리는 늘 말없이 서서 이마 위에 흐르는 안개 같은 땀을 닦고 있었다. 시는 그 산봉우리 속에 있는가.
아, 시는 진정 어디에 있는가.
사물 속에 있는가. 하나의 사물을 향하여 수십 수만 개의 줌 렌즈가 달려온다.
수십 수만의 그 사물은 어디에 있는가, 상승되는 정신 속에 있는가, 하강하는 몸속에 있는가.
수십 수만의 사물에 관한 시는 또 어디에 있는가.
개인의 무의미와 그 우연 속에 있는가.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지금 옳은가.
그도 아니라면, 시는 언어 속에 있는가. 이미지 속에 있는가. 시는 언어인가, 언어가 시의 도구인가. 이미지가 시의 도구인가.
시는 시집으로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한 권의 시집 속에 모든 시는 있는 것인가.
책 이야기가 나왔으니 장자의 우화 하나를 더 읽어보자.
장자 : …제나라의 환공이 堂上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윤편이 당하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다가, 몽치와 끌을 놓으며 말했다. 「묻겠습니다만, 전하께서 읽은 시는 건 무슨 말입니까?」환공이 대답했다.「성인의 말씀이지.」「성인이 살아계십니까?」환공이 대답했다.「벌써 돌아가셨다네.」「그럼 전하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군요」환공이 말했다.「내가 책을 읽고 있는데 바퀴 만드는 목수 따위가 어찌 시비를 건단 말이냐. 설명을 하면 괜찮되 그렇지 못하면 죽이겠다.」윤편은 대답했다. 「저는 제 일로 보건대 수레를 만들 때 너무 깎으면 헐거워서 튼튼하지 못하고 덜 깎으면 빡빡하여 들어가지 않습니다. 더 깎지도 덜 깎지도 않는다는 일은 손짐작으로 터득하여 마음으로 수긍할 뿐이지 입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 비결이 있는 것입니다만 제가 제 자식에게 깨우쳐 줄 수 없고 제 자식 역시 저에게서 이어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70인 이 나이에도 늘그막까지 수레바퀴를 깎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사람들의 찌꺼기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시집 속에도 시는 없다. 시집은 찌꺼기일 뿐이다.
그렇다면 시는 어디에도 없다,고 주장해야 한다. 이런 주장은 과연 옳은가.
이미 죽어버린 ‘죽음’ 속에도 시가 있을 리 없다.
결코 선택할 수 없는 출생 속에도 시가 있을 리 없다.
모두 창밖으로 흘러가는 안개를 몽롱한 눈으로 바라보며 커피 잔을 기울이지만, 안개 속에도 실은 시는 없다.
바이칼에 가려고 모두 가장 질긴 신발을 신지만, 바이칼에 가보라. 거기에 바이칼은 없다. 바이칼의 시는 더욱 없다.
그러면 이렇게 한 번 해보자.
중대한 문제들은 길거리에 존재한다,고 철학자 니체는 말했으니, 오늘 시도 거리에서 찾아보자, ―이때의 거리는 물론 비유로서 쓴 것이다. 삶터의 비유로서, 나아가 삶터에서 사는 법의 비유로서 당신은 이해하기 바란다. 생계라고 해도 되리라.―생계의 비유로서, 결국 ‘밥’ 속에서 찾아보자.
問) : 생계의 일과 시작의 관련성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생계의 일이 시작을 방해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答) : 밥 짓는 일과 시를 짓는 일은 썩 사이가 좋은 관계는 아닌 것 같습니다. 밥 짓는 일을 걱정하지 않을 정도가 되면 시 짓는 일이 하찮아 보이겠죠. 반면에 밥 짓는 일이 너무 고달프면 시 짓는 일을 할 시간을 벌기도 어렵고, 또 엄두가 나지 않죠. 둘은 불편한 관계이면서 팽팽한 긴장이 있을 때에야 그나마 사별이 없지요. (시인 ○○○)
答) : 보통 사람들처럼 땀 흘리며 구체적인 직업을 갖고 있어야 생활하는 사람의 보편적인 정서를 시에 담아낼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굳이 예를 하나 더 들자면 교수나 교사라는 직업에서는 큰 시인, 모든 규범을 뛰어넘는 그릇은 나오지 않는 것 같다. 시 편집자의 경우는 시건방진 시 비평가가 되기 쉽고. 그런데 이 자본제 사회에서 도대체 어느 직업이 시인에게 어울리겠는가. (시인 ○○○)
答) : 저는 소위 ‘전업 시인’이라 해서 반드시 좋은 시를 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노동과 시는 따로 노는 관계가 아니라 상관성이 매우 깊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흙에서 멀어진 연장에 녹이 슬듯 항구에 오래 머문 배가 낡아가듯 사유란 노동 속에서 빛나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발을 딛지 않은 사유란 관념과 추상으로 흐르기 십상입니다. 물론 지나치게 생계에 얽매이는 태도는 시작에 장애를 가져다줍니다. 시란 어느 정도의 마음과 몸의 여유에서 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적당한 직업이 시인에게 필요하다고 저는 여기고 있습니다.
가르치는 일에 지나치게 몰두했을 때는 시가 의무의 대상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시작에 치명적입니다. 출판사에서 교정보는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책에 대한 외경심이 사라지기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시인 ○○○)
答) : 전업시인으로 살기는 어려움. 생업(生業)과 시업(詩業) 사이의 갈등 자체가 시의 중요한 소재. (시인○○○)
答) : 시를 생각할 때 맨 처음 떠오르는 것은 ‘삶’입니다. 위의 질문에 맞춰보면 주제적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이 그렇듯 늘 사는 일에 목메고 치이다보니 자연스레 이 삶이 무엇일까, 지금 현재는 나의 미래에 무엇일까, 저 꽃은 저 작업복은, 저 손은, 저 눈은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어떤 삶의 겨움과 꿈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일까를 고심하게 됩니다.
한편 제가 살아 온 삶 역시 평탄치 않다보니 자연스레 기존의 질서 이외의 사회질서를 꿈꾸는 지향이 늘 제 몸에 제 언행에 따라 붙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무척이나 이념적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너무 잘 아시겠지만 그것이 시로 올 때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한 구절이 핵이 되기도 하고, 어떤 상징적 정조를 나타내는 단어 하나, 예를 들면 슬픔이라든가 고독이라든가, 해학이라든가, 상실감이라든가 하는 단어 하나가 시를 마칠 때까지 따라 붙습니다. 그 정서의 흐름이 압축적으로 잡혀 스스로 말하고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깁니다. …헌책방에 먼지 쌓여가는 책들 속에 있는 화석화된 맑스주의, 교조화 된 맑스주의, 전혀 불온하지 않은 맑스주의가 아니라, 노동시가 아닌 다른 불온한 노동시(이런 게 있을 법이나 할까?)를 써보는 것이 꿈입니다.
이 시는 그런 고민 속에 있는 나의 자세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대다수는 칼잠에 새우잠인데 어떤 이는 떡잠인 사회가 여전히 우리 사회라고 봤고, 아무리 노력해도 기회의 균등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우리 사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사회 안에서 자신의 해방을 가지기 위해서는 피치 못하게 ‘싸움’과 ‘갈등’이 불가피한 ‘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인 ○○○)
答) : 바쁜 일 속에서 시는 나온다고 생각한다. 시와 일 둘 중의 하나만 택하여야 한다면 시로 기울겠지만,시가 밥이 되질 않는다는 것을 안다. 나는 시와 밥 중에 밥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시는 나만 먹여 살린다.밥은 식구를 먹여 살린다. 시를 쓴다고 가족의 생계를 팽개칠 수는 없다. 적정한 자괴감이 시를 지탱하는 힘이지만 밥벌이가 없으면 나는 내 문장과 시를 팔아 밥을 구할 것이다. 그 지경의 자괴는 시를 파괴시킬 것이다.☏ 바쁜 일 속에서 시는 나온다고 생각한다. 시와 일 둘 중의 하나만 택하여야 한다면 시로 기울겠지만,시가 밥이 되질 않는다는 것을 안다. 나는 시와 밥 중에 밥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시는 나만 먹여 살린다.밥은 식구를 먹여 살린다. 시를 쓴다고 가족의 생계를 팽개칠 수는 없다. 적정한 자괴감이 시를 지탱하는 힘이지만 밥벌이가 없으면 나는 내 문장과 시를 팔아 밥을 구할 것이다. 그 지경의 자괴는 시를 파괴시킬 것이다. (시인 ○○○)
答) : 이십 대 후반을 저는 전업시인으로 살았습니다. 스무 장의 이력서가 아무 데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전업일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창작의 경우 크게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시인 ○○○)
答) : 저는 시를 어렵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시인보다 선생이 더 좋고 시를 안 쓰고 평화롭게 사는 한 인간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강가에 서 있는 나무처럼 말입니다. 저는 시를 쓰려고 힘을 쓴 적이 별로 없습니다. 살다가 보면 써지지요. 안 써진다고 걱정을 한 적도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교사와 시인도 한 길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시를 택할래, 교사를 택할래. 그러면 나는 둘 다 택하겠다고 우길 것입니다. (시인○○○)
答) : …건설현장에 있을 때는 매직으로 시멘트 포대에 메모를 많이 했습니다. (시인 ○○○)
答) : 지난 1998년 이후 ‘백수’입니다. 생계가 꼭 시작을 방해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저의 경우 직장을 그만 두고 난 뒤 확실히 작품에 몰두할 수 있었고, 따라서 더 많은 작품을 생산하게 된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반성하건데, 생계를 팽개친 작품 활동은 결코 자랑스러울 가치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시인 ○○○)
答) : 모든 글 쓰는 이들의 소망은 인세 받아 살면서 글만 쓰고 사는 게 아닐까요? 저만 그런가요? 그래서 늘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제 글만 쓰고 살면 좋겠다, 그럼 내가 정말 많은 것을 할 수 있겠다, 라고… 하지만 솔직히 생각해보면 과연 그럴까 라는 생각도 합니다. 노동(물론 글 쓰는 일도 노동입니다), 몸을 움직이고,사람들과의 관계를 만들고, 만원버스를 타고 흔들리며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하고, 직장 일이 힘들어 포장마차에서 쓰러지고… 그렇게 살아가는 일상은 너무 힘들지만 그것은 또한 아주 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천재가 아니고 그저 사람들과 섞여 살면서 그들과 부대끼는 일은 글쓰는 일 만큼이나 소중합니다.… (시인○○○)
그러니까 어디에도 없는 오늘의 시는 어디에나 있다. 당신이 삶터에서 땀을 닦고 있는 모든 시간에, 당신이 집에 오면서 들르게 되는 모든 길거리에, 모든 간판 속에, 모든 상황 속에, 당신이 만나는 사람들의 그 어떤 웃음 또는 눈물 속에도 시는 있다. 시는 언어이며 이미지이며, 줌렌즈이며 사물―사물에서 튀어나온 열개의 손가락이다.
시는 죽음에의 꿈속에 있으며, 시는 도달이 아니라 ‘도달’에의 꿈속에 있으며, 시는 ‘감’이 아니라 ‘감’에의 꿈속에 있다.
시는 어디에나 있다. 당신의 첫 연애 속에. 둘째 연애 속에…당신의 섹스 속에.
오늘의 시는 어디에나 있다.
나뭇잎의 입술 속에, 나뭇잎 입술의 꿈속에. 그 사이를 날아다니는 나비의 꿈속에.
시간의 꿈속에, 흩날리는 눈과 앉아있는 눈 속에, 눈(雪)의 눈(眼) 속에, 눈(雪)의 손등 위에.
바이칼이 아니라 바이칼에의 꿈속에.
역사가 아니라, 역사에의 꿈속에.
리얼리즘이 아니라 리얼리즘에의 모더니즘 적 꿈속에, 카프카 속에, 이상 속에.
어디에도 없는 시는 오늘 어디에나 있다. 맑스가 예나에게 보낸 시 속에, 맑스의 시적 혁명을 꿈꾸는 들뢰즈 속에.
시는 오늘 당신이 지나가야 하는 터널 속에도 있다. 터널의 검은 벽 속에. 검은 벽 위에서 번들거리는 등불의 눈물 속에. 터널로 빨려 들어가는 모든 헤드라이트의 공허한 진땀 속에.
늘 안달 하는 애인, 애인의 손가락을 감싸고 있는 보석반지, 그 눈부신 빛줄기 속에 시는 있다.
명품 핸드백이 흔드는 대리석의 욕망 속에 시는 있다.
오늘의 꽃은 향기가 없다. 꽃 파는 화훼공판장에 들러보라.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 한편에 수북이 쌓인 시든 잎들 때문이다. 시는 거기 썩는 향기 속에 있다.
래핑 갈매기의 푸른 날개 속에, 둥지를 밀물에게 내 주고 모래언덕으로 뛰어가는 그 부리 속에, 조개를 찾는 그 붉은 부리 속에. 죽어서도 빈 껍질을 다른 물고기의 집으로 선물하는 굴의 인자함 속에.
순환하는 선이 아니라 선의 꿈속에
정상이 아니라, 정상의 꿈속에.
바람에 눕는 풀의 꿈의 순간 속에, 풀의 그림자의 꿈의 순간 속에.
그 잎이 개구리에게 넓은 삶터를 제공하는 적도의 정글 속 브로멜리아드나무 속에, 일생에 한 번 피는 그 꽃잎의 분홍 뺨 속에, 벌이 올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는 그 꽃잎의 간절한 꿈속에.
살아 있는 것은 무엇이나 가지고 있으며 그것에 자기를 맞추는 리듬 속에, 빛의 리듬 속에, 바람의 리듬 속에, 썰물의 리듬 속에, 리듬의 꿈속에
외재성의 내재성에의 환상 속에
구겨진 일회용 컵 속에, 이제는 아무도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싸구려 시계 속의 , 시계의 꿈속에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베스비오스 화산, 그 속에, 화산의 꿈속에.
잠이 아니라, 잠의 꿈속에
옥상 위를 달리는 토끼가 질질 끌고 있는 초원의 꿈속에.
공간을 끊임없이 살해하는(하이네의 어법) 철도의 꿈속에
영원히 만나지 않지만 간이역에서 영원히 만나고 있는 평행의 철로 속에, 철로의 꿈속에
서울역 로비에 있는 에스컬레이터의 꿈속에
이런 질문도 해본다. :
問) : 시가 잘 써지지 않는 시기(dry period)의 경험이 있으신지? 그럴 땐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시는지?
答) : 전혀 다른 일 하기, 내 편에서도 시를 씻은 듯이 잊어주기. (시인 ○○○)
答) : 시가 한 줄도 안 써지는 고갈의 시기가 분명 있죠. 저한테는 그것이 자주 오고 오래 갑니다. 그렇다고 저는 그것 때문에 ‘타는 목마름’을 느끼거나 고통스러워하지는 않습니다. 시가 안 써지면 그냥 내비 둡니다.아마도 그런 가뭄의 시기에 저는 시 말고 딴 짓거리들을 저질렀던 것 같습니다. 밀교에 심취했다가 금방 싫증을 내고, 진흙을 주무르거나, 연극을 하거나, 선거운동에 빠지거나… 어떤 파멸적인 연애를 시도하거나…
그러나 이런 外道가 시적 고갈을 ‘극복’하는 길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습니다. 그저 시가 내 안에서 자라나도록 방기하고 그것이 필연성을 향해 발효할 때까지 가만 두는 것입니다…. (시인 ○○○)
고독에 대해서도 두어 시인에게 물어보았다.
答) : 나는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독을 단련시킨다. 고독은 시를 발전(發電)시키는 전기와도 같은 그 무엇이 아닐까요. (시인 ○○○)
答) : 뼈에 사무치는 외로움을 가져보지 못한 자는 좋은 시를 쓸 수 없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시인 ○○○)
그러면 나도 내 여섯 가지의 고독을 여기 천명해볼까. 어디에나 있는 시를 위하여, 아무도 읽기 원하지 않는, 그러나, 모든 이가 읽기를 원하는, 나를 위한 그의 시를 위하여,
1. 모든 관계의 긍정의 고독
2. 긍정의 고독 속에 있는 언어의 고독
3. 시의 거룩한 도구성으로서의 언어와 이미지의 고독
4. 존재의 순환 속에 있는 무한 시간의 고독
5. 외면에 버려지는 내면의 고독
6. 예언과 치유의 고독
할 수 없다. 쓰는 수밖에. ‘씀’이 고독 속에서 숙성되어, 범어사 대웅전 천정의 연꽃처럼 이미지의 꽃이 되기만을 우연이 되어 기다릴 뿐.
고독의 거리 속에서 다시 한 번 반복하자. 오늘 시는 어디에나 있다.
사상을 운율에 태우고(니체) 달릴 뿐인 거기에. 그저 달릴 뿐인 ‘모든 거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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