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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고정희 - 상한 영혼을 위하여
2015년 12월 25일 00시 55분  조회:4737  추천:0  작성자: 죽림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 일러스트=잠산

시름 많은 사람들과 "어두운 땅 한 평 가꾸다 갈래요/ 우리나라 하늘 한 평 비추다 갈래요"라고 노래했던 시인 고정희(1948~1991). 이 시를 읽고 있으면 마치 그녀가 상한 영혼의 곁에 앉아 작은 목소리로 "흙에 심은 뿌리 죽는 법 보았나요"라고 묻는 것 같다.


평론가 김주연이 분석한 대로 이 시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신다"는 성경의 말씀과 겹쳐 읽힌다. '하늘 아래'라는 표현도 예수의 언약과 임재(臨在)를 둥글게 포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 넋으로 기댈 곳 없이 큰 고통에 놓여있는 사람들을 힘껏힘껏 껴안고 살겠다는 강한 의지를 이 시는 보여준다.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했고 다분히 기독교적인 신앙에 기초한 시편들을 써낸 고정희 시인은 기독교의 현실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칼을 들이댔다. "하느님을 모르는 절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이쁜 우매함인가"라고 질문했고, 동시에 "하느님을 등에 업은 행복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맹랑한 도착 신앙인가"라며 고민했다. 그녀가 비판하고 날카롭게 투시한 대상은 눈앞의 현실 그 자체였으며, 돌봄이 있는 따뜻한 공동체는 그녀가 꿈꾸는 세계였다.


고정희 시인은 한 생애를 정열적으로 살다 간 여성운동가이기도 했다.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을 지냈고, 여성주의 문화집단인 '또 하나의 문화' 창립 동인으로도 활동했다. "제도적 억압의 굴레를 극복하려는 힘, 그것이 자유 의지라고 말할 수 있다면 나의 시는 항상 자유 의지에 속해 있는 하나의 에너지"라고 자평했는데, 조금의 호락호락함도 없이 평소 신념을 시 창작과 생활에서 실천했다. 한 시대의 깊고 어두운 계곡을 묵상했으므로 그녀의 시는 미지근하거나 융융한 그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시는 80년대의 격문이면서 '우릉우릉 폭발하는 화산(火山)'이었다.


1991년 6월 지리산 뱀사골을 오르다 폭우로 불어난 물에 휩쓸려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충격적인 죽음을 생각하면 생전에 쓴 시 '지리산의 봄 1-뱀사골에서 쓴 편지'가 자꾸 떠오른다.

"아득한 능선에 서 계시는 그대여/ 우르르우르르 우뢰 소리로 골짜기를 넘어가는 그대여/(…)/ 아름다운 그대 되어 산을 넘어갑니다/ 구름처럼 바람처럼/ 승천합니다"라고 쓴 시.

그녀의 시를 읽고 있는 오늘 새벽은 내 가슴이 아프다.

  


 


고정희의 문학과 생애

 

1. 서 론

시인 고정희는 해남군 삼산면에서 출생하여 독신녀로 치열한 현실 인식과 여성해방주의, 기독교정신과 지리산을 그리고 해남을 떠올리게 했던 시인이었다.
실천문학사 일을 보던 소설가 김영현이 본 고정희의 마지막 모습은 종로에서 있었던 국민대회 때 거리에 가득한 최루탄 속에서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었다.

부당한 현실에 분노하고 개혁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며 시를 쓰던 시인은 우아하고 고상한 여류문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해남 그의 생가는 시인이 생전에 사용하던 물품과 손때 묻은 책들을 그대로 보존한 방을 비워두고 있고 그 곳을 찾아간 사람들은 그의 생전의 지향점과 흔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또 고향집 뒷동산에 늘 정갈하고 푸르게 관리되는 그의 묘소에 참배까지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렇게 각별하고 지극하게 기억되는 걸까. 그의 시작품들을 통해 시세계를 살펴 보기로 한다.


2.존재의 이유와 구원의 시작(詩作)

시인의 시혼이 그 누구보다도 치열하고 열정적이었음은 일단 다작의 시집들과 각 시집들과 각 시집의 독자성에서 알 수 있다. 그가 남긴 10권의 시집에는 시대와 사회와 삶에 대한 성찰과 고뇌 뿐 아니라 어둠을 뚫고 나아가 새벽을 깨우려는 의지로 충만해 있다.

최초의 시집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평민사,1979)를 출간한 것을 비롯하여 10권 정도 되는데 1979년부터 1991년까지 1-2년 사이에 꾸준히 한권의 시집을 출간하였다. 유고집「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창작과 비평사,1992)와 한국대표시인 100인 선집 중 90번째 시선「뱀사골에서 쓴 편지」(미래사,1991)가 있다.

고정희는 놀랄 만한 다산성 시인이면서도 결코 어느 하나 함부로 창작해 내지는 않았다 고 평가된다. 오직 '시를 쓰기 위해서 살았던'것 같은 그에게 시는 존재의 결과이자 이유였고 구원이었다.


3. 남다른 열정과 사회활동

그의 삶이 남다른 열정과 순수로 점철된 탁월한 것이었음은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평가이다. 그는 자신과 주변 사람,사회와 세상과의 관계를 선명히 파악한 사라마으로서 인생을 일관성있게 그리고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인생에서 우리가 소망하고 또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실천한 사람 중의 하나이며 시와 삶이 거의 일치한 보기 드문 시인이었다.

기독교 신문사,크리스챤 아카데미 출판간사, 가정법률상담소 출판부장,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을 거쳐 여성문화운동 동인<또 하나의 문화>에서 열심히 활동하였는데 이런 활동들은 그의 시를 "정환(情恨)'이나 '슬픔' 등과는 거리가 먼, 활기와 강인함으로 가득 차게 한 계기가 되었다.

그의 시는 사유나 관념을 통해서 창작된 것이 아니고 현실 생활을 통해서 창작되었고 그래서 늘 살아 움직여 역동성과 다양성을 지녔던 것이다.
그 생애의 치열함에는 수유리 종교의식과 광주의 역사의식,그리고 여성의식이 기저에 깔려 있었다. 새벽 다섯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시를 쓰거나 묵상에 잠기는 생활을 했던 그는 분명 시를 통해 구원에 이르려 한 시인이었다.


4. 어둠의 시대와 불기둥의 시(詩)

시인의 초기 시편들은 막막한 광야를 인도하는 불기둥을 지향하고 있다. '불기둥'은 구약성서에서 '구름기둥'과 짝을 이루는데 모세를 좇아 애굽의 노예생활을 벗어나 새로운 땅을 찾아 광야를 헤매이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이 보내신 가이드가 바로 불기둥과 구름기둥이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인도하신 하나님에게서 고정희는 구름기둥이 아닌 불기둥을 취하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바로 낮이 아닌 밤이요, 어둠과 암흑의 땅이며 바로 '실락원'이라는 인식 때문이었으리라.

시인의 정신과 영혼이 '불의 상상력'에 근거해 있음을 절감해 왔다는 정효구 교수의 지적과 같이 그의 초기 시집들은 이 '불기둥'이 장악하고 있으며 성서의 비유와 상징을 즐겨 사용하고 있어 서구적인 분위기가 가득하다.

그의 첫 시집「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는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술틀 밟는 여자'의 이미지로 채워져 있다. 포도주를 만들기 위한 술틀을 밟는다는 행위자체가 지중해 연안의 이국적 정서를 유발할 뿐 아니라 짜라투스트라, 카타콤베,브라암스,파블로 카잘스 등의 제목에서도 서구적 정서를 느끼게 해 이런 주제들이 어쩐지 시인의 몸에 잘 맞지 않는 어딘지 겉도는 옷처럼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다.

『실락원기행』이야말로 더더욱 불길의 뜨거움으로 휩싸여 있다. 춥고 어두운 땅과 인간들을 녹일 수 있는 질화로의 뜨끈함,밤과 암흑의 시대를 밝힐 수 있는 램프의 밝은 빛, 꿈의 불기둥을 꿈꾸었던 것이다. 그리고 시적 자아의 지향은 끊임없이 불을 붙여 어둠을 밝혀야한다는 <나찜 히크메트(Nazim Hikmet>에 사로잡혀 있었다.

내가 불을 붙이지 않거나
그대가 불을 붙이지 않거나
우리가 불을 붙이지 않는다면
이 어둠을 어떻게 밝힐 수 있을까?

『이 시대의 아벨』 시편들에서 두드러지는 것도 시대의 어둠에 대한 인식이다. 카인에게 무고하게 살해된 아우 아벨을 찾는 하나님의 물음과 질타가 고정희의 시를 통해 우리에게 쏟아지고 있다. 안락과 번영과 평안을 위해 우리가 저버린 아벨은 누구인가? 아벨은 바로 억압받는 민중이며 억울하게 숨져간 광주의 원혼들이다.

오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
너의 안락한 처마 밑에서
함께 살기 원하던 우리들의 아벨,
...중 략...

너의 식탁과 아벨을 바뀠느냐
너의 침상과 아벨을 바뀌느냐
너희 교회당과 아벨을 바뀠느냐
회칠한 무덤들, 이 독사의 무리들아
너희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이 시대의 아벨」중간 부분

80년대 초 우리 사회를 무고한 아벨을 죽인 어둠의 시대로 인식하였지만 춥고 어두운 겨울의 무덤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희망과 용기를 간직하는 것만이 오직 어둠을 이기는 비결이라고 생각했다.

이 어둠 속에서 우리가 할 일은
오직 두 손을 맞잡는 일
손을 맞잡고 뜨겁게 뜨겁게 부둥켜 안는 일
부등켜안고 체온을 느끼는 일
체온을 느끼며 하늘을 보는 일이거니

-「서울 사랑-어둠을 위하여」일부

5. 살림의 굿,마당굿시

모태신앙인으로 자라나 기독교 정신이 충일하던 고정희는 한국적 전통의 계승과 남도 가락의 재현을 시인으로서 부여받은 최대 과제로 인식했다.
대한민국문학상을 수상한 시집인 『초혼제』는 고정희의 시세계를 본격적인 수준에 오르게 한 장시집이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종교적이며 상징적인 방법을 통해 씻겨 줌으로써 저승으로 천도할 수 있도록 하는 무속적 제의인 '씻김굿'을 차용한 이시집에서 그는 죽음과 부활을 다루었는데 총5부중 특히 <사람 돌아오는 난장판>과 <환인제>를 마당굿시로 창작하였다.

이는 죽은 사람을 대상으로 행해지는 씻김굿이 시대의 어둠과 절망에 짓눌려 죽은 영혼을 천도하는데 적합한 제의라는 것을 수용한 반기독교로의 전환인 동시에 우리의 전통적 가락을 오늘에 새롭게 접목시키려 한 관심사의결과였다. 

이에 비해 6년 후에 출간한『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에서 우리는 좀더 본격적인 '굿시'를 대할 수 있다. 이 시집은 부당한 역사에 대한 회개에서 치유와 화해에 이르는 씻김굿을 그 주요한 창작의 근간으로 삼고 있으며 그 굿의 효과적인 정서적 공감대 형성의 토대로서 어머니라는 주의 한을 어머니의 가슴으로 품어 역사속에서 희생당한 뭇 민중여성의 넋에 접맥시키려는 여성민중주의를 표방한 

점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5월의 광주를 절규하거나 새기는 많은 시인들이 있었지만 그 상처와 한을 역사 속에서 이름도 없이 희생당하고 숨져간 민중여성과 관련시켜 예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위로하면서 또한 민주화에 방해가 되는 바람직하지 못한 여성의 리스트를 열거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어찌하여 민주길이 막혔는고 하니
복종생활 순종생활 굴종생활 '석삼종'때문이라
여자팔자 빙자해서 기생 노릇하는 여자
현모양처 빙자해서 법적 매춘하는 여자
사랑타령 빙자해서 노리개 노릇하는 여자
미모 빙자해서 사치놀음 하는 여자
가정교육 빙자해서 자녀차별 하는 여자
남편출세 빙자해서 큰소리치는 여자
-이하 중략-

이 땅의 여성 중 이 화살을 비껴갈 만한 여성이 있을까? 이 같은 현실을 넘어서서 우리가 지어야 할 '살림 의 집'아름답고 이상적인 집이 그려지기도 하였다.

누구나 일할 권리 있는 집이요
누구나 쉴 자유 있는 집이요
누구나 맡은 임무 있는 집이요
누구나 타고난 천성대로 받들 책임 있는 집이라

집안살림 나라살림 출입문 따로 없고
가사일 바깥일 따로 없는 집이라
차별이 없는 중에 자기 길 각자 있고
귀천이 없는 중에 각자 직분 있는 집이라
조화 있고 화목있고 위로 있는 집이라

원래 마당굿판을 위한 대본으로 쓰여진 이 시집으로 실제 공연을 하면서 그 현장성을 점검했더라면 훨씬 더 감칠맛 나고 거침없는 그리고 화자의 청중들이 그야말로 하나가 되어 한 판 어우러지는 그런 시로 향상될 수 있었으리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6. 눈물의 시와 광주

고정희의 시세계는 흔히 첨예한 현실인식과 준열한 역사의 증언을 줄기차게 해댄 '메시지 강한 목적시'로 인식되지만, 80년대 후반에 이르면서 그의 시에서 처연한 슬픔과 절망,고독이 점차 짙어지고 '불기둥'으로 서기보다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 바다'에 침잠함을 볼 수 있다. 이는 늘상 '있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것'을 좇으며 살아온 열정적인 그의 삶 속에서 눌려 있던 눈물많고 낭만적인 

섬세한 심성이 시대의 무게를 떨쳐내면서 자연스레 점차 자신의 시세계를 장악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개인적으로는 고향을 상징하는 어머의 부음과 독신자로서 맞게 되는 40대의 회환 등이 결핍과 갈망을 한층 강화하게 된 때문이라 이해된다.

해남에서 태어나 70년대말 광주 YWCA간사로 일한 적 있는 그에게 광주는 마음의 고향이었고 그래서 광주의 고통은 뼈저리게 다가왔다. 『눈물꽃』이나 『지리산의 봄』『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광주의 눈물비』 등의 시집에 이르면 온통 흘러내리는 눈물이 가득하다. '눈물꽃'에서 가장 처벌한 세계인식이 드러난 시는 『프라하의 봄.8』시편들이다. 

산발하고 눈물 핏물 뒤집어 쓴 채 젖가슴 도려낸 흉악한 꼴로 두 눈에 쌍불커고 오는 '미친년'이 바로 5월의 원혼이다. 처참하게 죽어 구천을 헤매는 영령들은 '하나님께 삿대질하며,하늘의 동맥에다 칼을 꽂는'미친 짓을 한는데 이는 바로 절망에 대한 시인의 인식이요 절규이다. 

하지만 눈물 범벅이 된 속에서도 고정희의 시는 여전히 뜨겁고 강하다. 상처를 그냥 덮어두고 쉬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잊어서는 안된다고 외치는 그의 모습은 '광야의 선지자'와 같았다.

오월이라는 의미를
그대 저녁밥상에서 밀어내지 말라
광주는 그대의 밥이다

오월이라는 눈물을
그대 마른 가슴에서 닦아내지 말라
광주는 그대의 칼이다

-「망월동 원혼들이 쓰는 절명시」일부

눈물에 젖어 세계를 향해서 외치는 시인의 음성은 한없이 강인하고 절박하면서도 섬약하고 투명해서 '불의 혼'과 '물의 심성'으로 시작품에 스며들어 단일성을 거부하는 폭넓은 시세계를 형성할 뿐 아니라 리얼리즘시와 서정시의 화해를 가능케 하였다.


7. 지리산과 고향 그리고 어머니

지리산은 고정희의 정신적 고향이었다. 고단하고 외로울 때 그에게 사랑과 희망을 충전시켜 품어주던 지리산은 늘 시혼을 일깨워주던 그리운 곳이었다. 그리고 결국 그가 최후에 안긴 곳이 되고 말았다.

아름다워라
세석고원 구릉에 파도치는 철쭉꽃
...중략...

나는 다시 구불거리고 힘겨운 길을 따라
저 능선을 넘어가야 한다
고요하게 엎드린 죽음의 산맥들을

온몸으로 밟으며 넘어가야 한다
이세상으로부터 칼을 품고, 그러나
서천을 물들이는 그리움으로
저 절망의 능선들을 넘어가야 한다

-「지리산의 봄4-세석고원을 넘으며」일부

아름다운 철쭉이 파도치는 지리산을 울음을 참으며 그리움을 품고 절망의 능선을 넘어가는 시인의 모습은 왠지 비장하기까지 하다. 가슴속의 불을 뿜어내고 나약해져가는 육신을 다독이며 지리산 자락에서 위안과 책망을 얻는 것이다.

시인의 말처럼 '시도 때도 없이 두 눈을 타고 내려와 내 완악한 마음을 다숩게 저미는 눈물,세상에 남아 있는 것들과 세상 밖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게 하는 눈물 그 눈물이 '지리산의 봄' 시편들에 한껏 배어있다.

그의 시를 '리얼리즘의 시'로 특징지으면서 그녀의 시에는 시적 자야와 세계와의 갈등 양상이 리얼하게 드러나 있고 시적 자아의 진리에의 염원이 잘 나타나 있다고 지적한 송현호 교수는 고정희의 시가 서정시 중심의 우리 시단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여 우리 시의 폭을 넓혔다고 그 의의를 평가하였는데 이는 고정희에게 지리산과 고향인 해남,어머니가 늘 자리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여겨진다.

고향의 주인이신 어머니는 고정희에게 있어서 영원한 안식처인자 우주의 자궁이며 해방 사회의 이상적인 인간형이기도 하다.

내가 내 자신에게 고개를 들 수 없을 때
나직이 불러 본다 어머니
짓무른 외로움 돌아누우며

새벽에 불러본다 어머니
더운 피 서늘하게 거르시는 어머니
달빛보다 무심한 어머니
...중략...

천지에 가득 달빛 흔들릴 때
황토 벌판 향해 불러 본다 어머니
이 세계의 불행을 덮치시는 어머니

만고 만건곤 강물인 어머니
오 하느님을 낳으신 어머니

-「어머니, 나의 어머니」

그 어떤 어머니가 가슴 저리게 그립지 않으리오만 '부음'을 받고 달려가 '수의를 입히며' 바람개비처럼 가벼운 어머니를 '하관'해 땅에 묻고 '유채꽃밭을 지나며' 회상하는 과정 과정마다 눈물겨운 시작품들이 뒤따름은 그의 삶의 중심축에 어머니가 자리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의 시에서 어머니는 눌림받은 여성의 대명사이며 잘못된 역사의 고발자요 증언의 기록이며 동시에 치유와 화해의 미래이다.

그래서 시인은 인간세계의 본을 어머니의 자궁으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그가 운동가가 아닌 시인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지리산과 고향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고향정신'은 시세계의 서정적 원천이 되어 리얼리즘시에 서정성을 부여하는 긍정축으로 작용하였다고 생각된다.


8. 일생마침

우리나라 여성해방운동과 여성문화운동에 있어서 고정희의 궤적은 큰 발자취로 남겨졌다. 그의 시집명대로 '여성해방출사표'를 던지면서 시작된 그의 여성해방운동과 글쓰기는 우리 여성사와 문학사에 길이 기억될 만한 것이다

이 시집에서 우리는 여성해방사상만을 목소리 높게 외쳐대는 구호성 시와는 다른 차원 시다운 시를 접하게 되는데 여성사에 대한 남다른 이해를 바탕으로 역사와 시의 새로운 결합을 꾀한 점 여성들 간의 벽을 충분히 인식해 계층간의 차이나 결혼 여부를 뛰어넘는 대동단결을 호소한 점 사람의 근본과 돌아갈 곳을 '어머니'의 모성으로 상징화한 점 등이 탁월하다.

고정희 시인은 시인이며 구도자이며 운동가이자 학자이고 싶었던 그의 삶이 지향하는 대로 늘 치열하고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 그에게 있어 시와 삶은 하나였던 것이다. 그런데 시인다운 통찰력으로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던 것일까? 사후에 그의 책상 위에서 발견된 시「독신자」는 그로부터 며칠 후 있을 자신의 장례식 광경을 미리 본 것처럼 묘사하고 있어 많은 사람을 경악케 하였다.

환절기의 웃장을 정리하듯
애증의 물꼬를 하나 둘 방류하는 밤이면
이제 내게 남아 있는 길
내가 가야 할 저만치 길에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크고 넓은 세상에
객사인지 횡사인지 모를 한 독신자의 시신이
기나긴 사연의 흰 시트에 덮이고
내가 잠시도 잊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달려와
지상의 작별을 노래하는 모습 보인다

뒤늦게 달려온 어머니가
내 시신에 염하시며 우신다
내 시신에 수의를 입히시며 우신다
저 칼날 같은 세상을 걸어오면서
몸이 상하지 않았구나 다행이구나
내 두 눈을 감기신다.

-「독신자」중 일부

해남가는 길에 동행했던 벗들에게 시인은 이렇게 자기 삶을 정리하는 시를 남겼다. 시인은 1991년 6월 9일 즐겨 찾던 지리산에서 안좋은 일기에 감행한 산행 도중 실족사하여 생을 마감하였다. 장례식은 광주기독병원에서 치루어졌다. 중년의 문턱에서 마감한 짧은 생애동안 현실과 여성을 끊임없이 일깨우며 자신을 부단하게 채찍질하던 여성 시인 고정희는 이렇게 우리 곁을 떠나간 것이다.

 

 

고정희 시비

-광주문학로드 문화예술회관

 

[출처] 고정희 시비|작성자 김을현

 

 

 

겨울 사랑                                                

 

그 한 번의 따뜻한 감촉

단 한 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사이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

소백산 한 쪽을 들어올린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그 한 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 번의 이윽한 진실이

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상한 영혼을 위하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을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고요하여라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무심히 지나는 출근버스 속에서도

추운 이들 곁에 

따뜻한 차 한잔 끓는 것이 보이고

울렁거려라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여수 앞바다 오동도쯤에서

춘설 속의 적동백 화드득

화드득 툭 터지는 소리 들리고

눈물겨워라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중국 산동성에서 날아온 제비들

쓸쓸한 처마, 폐허의 처마 밑에

자유의 둥지

사랑의 둥지

부드러운 혁명의 둥지

하나 둘 트는 것이 보이고

 

 

 

 

우리동네 구자명 씨                                   
―여성사연구 5

맞벌이부부 우리동네 구자명씨

일곱달된 아기엄마 구자명씨는

출근버스에 오르기가 무섭게 

아침 햇살 속에서 졸기 시작한다

경기도 안산에서 서울 여의도까지

경적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옆으로 앞으로 꾸벅꾸벅 존다

차창 밖으론 사계절이 흐르고

진달래 피고 밤꽃 흐드러져도 꼭

부처님처럼 졸고 있는 구자명씨,

그래 저 십분은

간밤 아기에게 젖물린 시간이고

또 저 십분은

간밤 시어머니 약시중든 시간이고

그래그래 저 십분은

새벽녘 만취해서 돌아온 남편을 위하여 버린 시간일거야

고단한 하루의 시작과 끝에서

잠 속에 흔들리는 팬지꽃 아픔

식탁에 놓인 안개꽃 멍에

그러나 부엌문이 여닫기는 지붕마다

여자가 받쳐든 한 식구의 안식이

아무도 모르게 

죽음의 잠을 향하여

거부의 화살을 당기고 있다

 

 

 

 

가을 편지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가을이

흑룡강 기슭까지 굽이치는 날

무르익을 수 없는 내 사랑 허망하여

그대에게 가는 길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길이 있어

마음의 길은 끊지 못했습니다


황홀하게 초지일관 무르익은 가을이

수미산 산자락에 기립해 있는 날

황홀할 수 없는 내 사랑 노여워

그대 향한 열린 문 닫아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문이 있어

마음의 문은 닫지 못했습니다


작별하는 가을의 뒷모습이

수묵색 눈물비에 젖어 있는 날

작별할 수 없는 내 사랑 서러워

그대에게 뻗은 가지 잘라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무성한 가지 있어

마음의 가지는 자르지 못했습니다


길을 끊고 문을 닫아도

문을 닫고 가지를 잘라도

저녁 강물로 당도하는 그대여

그리움에 재갈을 물리고

움트는 생각에 바윗돌 눌러도

풀밭 한벌판으로 흔들리는 그대여

그 위에 해와 달 멈출 수 없으매

나는 다시 길 하나 내야 하나 봅니다

나는 다시 문 하나 열어야 하나 봅니다

 

 

 

 

꿈꾸는 가을 노래                               
 

꿈꾸는 가을 노래 들녘에 고개 숙인 그대 생각 따다가

반가운 손님 밥을 짓고

코스모스 꽃길에 핀 그대 사랑 따다가

정다운 사람 술잔에 띄우니

아름다워라 아름다워라

늠연히 다가오는 가을 하늘 밑

시월의 선연한 햇빛으로 광내며

깊어진 우리 사랑 쟁쟁쟁 흘러가네

그윽한 산그림자 어질머리 뒤로 하고

무르익은 우리 사랑 아득히 흘러가네

그 위에 황하가

서로 흘러 들어와

서쪽 곤륜산맥 열어놓으니

만리에 용솟는 물보라

동쪽 금강산맥 천봉을

우러르네

 

 

 

 

날개                                               
 

생일선물을 사러 인사동에 갔습니다

안개비 자욱한 그 거리에서

삼천도의 뜨거운 불기운에 구워내고

삼천도의 냉정한 이성에 다듬어낸

분청들국 화병을 골랐습니다

일월 성신 술잔같은 이 화병에

내 목숨의 꽃을 꽂을까, 아니면

개마고원 바람소릴 매달아 놓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장백산 천지연 물소리 풀어

만주대륙 하늘까지 어리게 할까

가까이서 만져보고

떨어져서 바라보고

위아래로 눈 인두질하는 내게

주인이 다가와 말을 건넸지요

손님은 돈으로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선물을 고르고 있군요

이 장사 삼십년에

마음의 선물을 포장하기란

그냥 줘도 아깝지 않답니다

도대체 그 분은 얼마나 행복하죠?

뭘요...

마음으로 치장한들 흡족하지 않답니다

이 분청 화병에는

날개가 달려있어야 하는데

그가 이 선물을 타고 날아야 하는데

이 선물이 그의 가슴에

돌이 되어 박히면 난 어쩌죠?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목을 길게 뽑고

두 눈을 깊에 뜨고

저 가슴 밑바닥에 고여 있는 저음으로

첼로를 켜며

비장한 밤의 첼로를 켜며

두 팔 가득 넘치는 외로움 너머로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러질 때까지

어두운 들과 산굽이 떠돌며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향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달력 속에서 뚝, 뚝,

꽃잎 떨어지는 날이면

바람은 너의 숨결을 몰고와

측백의 어린 가지를 키웠다

그만큼 어디선가 희망이 자라오르고

무심히 저무는 시간 속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

나는 너에게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수없는 나날이 셔터 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꿈의 현상소에 당도했을 때

오오 그러나 너는

그 어느 곳에서도 부재중이었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바람으로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더 먼저 더 오래                                 
 

 더 먼저 기다리고 더 오래 기다리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기다리는 고통 중에 사랑의 의미를 터득할 것이요.

 더 먼저 달려가고 더 나중까지 서 있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서 있는 아품중에 사랑의 길을 발견할 것이요.

 더 먼저 문 두드리고 더 나중까지 문 닫지 못하는 사랑이 복이 있나니

 저희가 문닫지 못하는 슬픔중에 사랑의 문을 열게 될것이요.

 더 먼저 그리워하고 더 나중까지 그리워 애통하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그리워 애통하는 눈물 중에 사랑의 삶을 차지할 것이요.

 더 먼저 외롭고 더 나중까지 외로움에 떠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외

로움의 막막궁상 중에 사랑의 땅을 얻게 될 것이요.

 더 먼저 상처받고 더 나중까지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은 복이 있나

니 저희가 상처로 얼싸안는 절망중에 사랑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요.

 더 먼저 목마르고 더 나중까지 목 말라 주린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주리고 목마른 무덤 중에서라도 사랑의 궁전을 짓게 되리라.

 그러므로 사랑으로 씨 뿌리고 열매 맺눈 사람들아

 사랑의 삼보 - 상처와 눈물과 외로움 가운데서 솟는 사랑의 일곱 가지 무

지개

 이 세상 끝 날까지 그대 이마에 찬란하리라.

 

 

 

 

모든 사라지는 것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 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

 

 

 


사랑법 첫째                                           
 

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를 매달아 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에

커다란 돌덩이를 매달아 놓습니다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해서


내 외롬 짓무른 밤일수록

제 설움 넘치는 밤일수록

크고 무거운 돌덩이 하나 가슴 한복판에 매달아 놓습니다.
 

 

 

 

하늘에 쓰네                                          
    
그대 보지 않아도 나 그대 곁에 있다고

하늘에 쓰네

그대 오지 않아도 나 그대 속에 산다고

하늘에 쓰네


내 먼저 그대를 사랑함은

더 나중의 기쁨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내 나중까지 그대를 사랑함은

그대보다 더 먼저 즐거움의 싹을 땄기 때문이리니


가슴속 천봉에 눈물 젖는 사람이여

억조창생 물굽이에 달뜨는 사람이여

끝남이 없으니 시작도 없는 곳

시작이 없으니 멈춤 또한 없는곳,

수련꽃만 희게 희게 흔들리는 연못가에

오늘은 봉래산 학수레 날아와

하늘 난간에 적상포 걸어놓고


달나라 광한전 죽지사

열두 대의 비파에 실으니

천산의 매화향이 이와 같으랴

수묵색 그리움 만리를 적시도다

만리에 서린 사랑 오악을 감싸도다


그대 보지 않아도 나 그대 곁에 있다고

동트는 하늘에 쓰네

그대 오지 않아도 나 그대 속에 산다고

해지는 하늘에 쓰네.

 

 

 


봄비                                                      
 

가슴 밑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강물 풀리는 소리는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오 그리운 이여

저 비 그치고 보름달 떠오르면

우리들 가슴 속의 수문을 열자

봄비 찰랑대는 수문을 쏴 열고

꿈꾸는 들판으로 달려 나가자

들에서 얼싸안고 아득히 흘러가자

그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리

다만 둥그런 수평선 위에서

일월성산 숨결같은 빛으로 떠오르자

 

 

 


강물                                                      
- 편지1


푸른 악기처럼 내 마음 울어도

너는 섬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암울한 침묵이 반짝이는 강변에서

바리새인들은 하루종일

정결법 논쟁으로 술잔을 비우고


너에게로 가는 막배를 놓쳐버린 나는

푸른 풀밭,

마지막 낙조에 눈부시게 빛나는

너의 이름과 비구상의 시간 위에

쓰라린 마음 각을 떠 널다가

두 눈 가득 고이는 눈물

떠나가는 강물에 섞어 보냈다. 

 

 

 

 

지울 수 없는 얼굴                                    

 

냉정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얼음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불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무심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징그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부드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그윽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따뜻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내 영혼의 요람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샘솟는 기쁨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아니야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당신이라 썼다가

이 세상 지울 수 없는 얼굴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 시대의 아벨                                        

 

며칠째 석양이 현해탄 물구비에 불을 뿌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막 닻을 내린 거룻배 위에는

저승의 뱃사공 칼롱의 은발이

석양빛에 두어 번 나-부-끼-더-니, 동서남북

금촉으로 부서지며 혼비백산

숲에 불을 질렀읍니다.

으-아, 솔바람 불바람 홀연히 솟아올라

둘러친 세상은 넋나간 아름다움

넋나간 욕망으로 끓어 오르고 있었읍니다.

아세아를 건너지른 `오그덴 10호'가

현해탄에 당도한 건 바로

이때입니다.


오그덴 10호*

몇 명의 수부들을 바다 속에 처넣고

벼락을 때리며 외쳤습니다.


오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

너희 안락한 처마밑에서

함께 살기 원하던 우리들의 아벨,

너희 따뜻한 난롯가에서

함께 몸을 비비던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

너희 풍성한 산해진미 잔치상에서

주린 배 움켜 쥐던 우리들의 아벨

우물가에서 혹은 태평 성대 동구 밖에서

지친 등 추스르며 한숨짓던 아벨

어둠의 골짜기로 골짜기로 거슬러 오르던

너희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

믿음의 아들 너 베드로야

땅의 아버지 너 요한아

밤새껏 은총으로 배부른 가버나움아

사시장철 음모뿐인 예루살렘아

음탕한 왕족들로 가득한 소돔과 고모라야

너희 식탁과 아벨을 바꿨느냐

너희 침상과 아벨을 바꿨느냐

너희 교회당과 아벨을 바꿨느냐

독야청청 담벼락과 아벨을 바꿨느냐?

회칠한 무덤들, 이 독사의 무리들아

너희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너희 고통을 짊어진 아벨

너희 족보를 짊어진 아벨

너희 탐욕과 음습한 과거를 등에 진 아벨

너희 자유의 멍에로 무거운 아벨

너희 사랑가로 재갈물린 아벨

일흔 일곱 날 떠돌던 아벨을 보았느냐?

아흔 아홉 날 한뎃잠을 청하던 아벨을 보았느냐?


이제 침묵은 용서받지 못한다

돌들이 일어나 꽃씨를 뿌리고

바람들이 달려와 성벽을 허물리라

지진이 솟구쳐 빗장을 뽑으리라

바람부는 이 세상 어디서나

아벨의 울음은 잠들지 못하리


오 불쌍한 아벨

외마디 소리마저 빼앗긴 아벨을 위하여

나는 너희 식탁을 엎으리라

나는 너희 아방궁을 엎으리라

나는 너희 별장을 엎으리라

나는 너희 교회당과 종탑을 엎으리라

소돔아 너를 엎으리라

고모라야 너를 엎으리라

가버나움아 너를 엎으리라

예루살렘아 너를 엎으리라

천사야 너도 엎으리라

깃발을 분지르고 상복을 입히리라

생나무 마른 나무 함께 불에 던지고

바다더러 산 위로 오르라 하리라

산더러 너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바람부는 이 세상 어디서나

이제 침묵은 용서받지 못한다

울지 않는 종은 입에 칼을 물리고

뛰지 않는 말은 등에 창을 받으리

날지 않는 새는 뒷축에 밟히리

뒷날에 참회는 적당치 못하다

너희가 쫓아 버린 아벨

너희가 쫓아 묻어 버린 아벨

너희가 쫓아 묻고 부인한 아벨

너희는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시치미뗀

아벨의 울음 소릴 들었느냐?

금동이의 술잔에 아벨의 피가 고이고

은소반의 안주에 아벨의 기름 흐르도다

촛농이 녹아 흐를 때 아벨이 울고

노랫가락 높을 때 아벨이 탄식하도다


오 불쌍한 아벨을 찾을 때까지

나는 이 세상 어디든 달려가

너희 잔치상과 보신탕을 엎으리라

너희 축복과 토룡탕을 엎으리라

너희 개소주와 단잠을 엎으리라

돌들이 일어나 옥답을 일구고

지진이 솟구쳐 평지 풍파 일으키리라

바람더러 주인이라 주인이라 부르리라


너희의 어둠인 아벨

너희의 절망인 아벨

너희의 자유인 아벨

너희의 멍에인 아벨

너희의 표징인 아벨

낙원의 열쇠인 아벨

아벨 아벨 아벨 아벨 아벨……


그때 한 사내가

불 탄 수염을 쥐어뜯으며

대지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가 눈물 흘리는 동안만이라도

주는 우리를 용서하소서


다음날 신문은

오그덴 10호가

현해탄의 대기권을 완전히 떠나갔다고

보도했습니다.

 

                 * 창세기 4장 2절 이하에 기록된 대로 인간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첫아들 카인과

                    둘째 아들 아벨을 낳았다.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었고 카인은 농부가 되

                    었는데, 형 카인은 아벨에 대한 질투 때문에 아우를 들로 꾀어내어 쳐 죽였다. 

                    이때 야훼께서 이렇게 꾸짖으셨다.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 1981년 8월 초 한반도에도 상륙한 태풍 이름.

 


 

 

고백 (너 여섯)                                                       

 

너에게로 가는

그리움의 전깃줄에

나는

 

 

 

 

 

 

 

 

 

 

고정희 高靜熙 (1948 - 1991)                          

전남 해남 출생. 5남 3녀 가운데 장녀로 태어났다.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한 뒤 1975년 시인 박남수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연가》 《부활과 그 이후》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하였다. 허형륫ㅁ窪唜징ㅐ瀁예?ㅌ蒡仄퐈ㅁ믄예?등과 ‘목요회’ 동인으로 활동하였고,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여성문학인위원회 위원장, 시창작분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1984년부터는 기독교신문사, 크리스찬아카데미 출판간사, 가정법률상담소 출판부장,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을 거쳐 여성문화운동 동인 ‘또하나의 문화’에서 활동하는 등 사회활동도 적극적으로 하였다. 1991년 6월 9일 지리산 등반 도중 실족사하였다.

 

시집으로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1979), 《실락원 기행》(1981), 《초혼제》(1983), 《이 시대의 아벨》(1983), 《눈물꽃》(1986), 《지리산의 봄》(1987),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1989), 《여성해방출사표》(1990), 《광주의 눈물비》(1990),《아름다운 사람 하나》(1991)와 유고시집으로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1992)가 있다. 시집 가운데 《초혼제》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남도가락과 씻김굿 형식을 빌어 민중의 아픔을 위로한 장시집(長詩集)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강한 의지와 생명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노래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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