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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신동집 - 오렌지
2015년 12월 27일 00시 55분  조회:4566  추천:0  작성자: 죽림
 

오렌지

                   /신동집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오렌지는 여기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

더도 덜도 아닌 오렌지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찹잘한 속살을 깔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대는 순간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다.

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다.

시간이 똘똘

배암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에

한없이 어진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누구인지 잘은 아직 몰라도.

 

 

​포들한 : 부드럽고 도톰한

찹잘한 : 차갑고 달착지근한​

 

<해설> 1989년 시집 [누가 묻거든]에 수록된 시이다.

전 6연으로 된 주지시이다. 제 1연에서는 오렌지라는 의미 이전의 사물 그 자체로서의 오렌지가 묘사된다. 제 2∼3연은 '나'가 인식하는 단순한 외형적 사물로서의 오렌지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렌지의 껍질을 벗길 수도 속살을 깔 수도 있다. 제 4∼5연은 존재의 본질로서의 오렌지이다. '나'가 그를 파악했다고 느끼는 순간, 오렌지는 '손을 댈 수 없는' 주체적 존재로 마주한다. 그러므로 '나'와 오렌지는 서로를 경계해야 하는 상대적 존재로 대립해 있는 위험한 상태에 있다. 제 6연은 오렌지와 '나'의 긴장이 계속된 채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어진 그림자'의 존재를 막연히 감지함으로써 긴장 해소의 예감을 느낀다.

이 시는 존재의 본질 자체에 대한 물음을 오렌지라는 소재를 통해 던지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는 우리가 어떤 사물을, 혹은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는가 하는 회의에서 시작되고 있으며, 그 회의을 깨끗이 없애지 못했지만 '한없이 어진 그림자' 같은 구원이 있을 수도 있다라는 가능성을 보여 주는 데서 끝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물에 관심을 둘 때는 그것의 껍질을 벗기고 속살을 벗길 수 있는 때, 즉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때인데, 그러나 거기서 나아가 사물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하려 할 때는 존재의 규명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말을 전하고 있다.

존재의 본질을 파악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하는 회의로 시작된 이 작품은 한 가닥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사물의 생명 본질에 닿을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느끼게 하는 시이다. (현대시 목록, 인터넷)

 

* 이 시는 '오렌지'라는 소재를 통해 존재의 본질에 근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 준다. 오렌지의 외면만 보고는 그 본질적 의미를 알 수 없고, 껍질을 벗긴다 해도 본질에 도달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 이미 오렌지의 본질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한계를 느낀 화자는 안타까워하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다. 존재의 본질에 다다갈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한권에 잡히는 현대시)

 

대구 시인 신동집

" 그는 대구의 성주(城主)였다.
이 땅 내륙의 중심부, 덥고 추운 땅 대구를 지키며 살아온 시인이다.
해방 전 대구에 이상화, 이육사가 있었다면,
해방 후에는 김춘수와 신동집이 있었다.

그러나 세인들은 신동집을 ‘기억되지 않는 천재 시인’으로 곧잘 얘기한다.

그가 태어나 평생을 산 곳은 바닷물이 출렁거리거나, 문명이 채색된 출세의 땅이 아니었다. 분지 대구에서 둔중하게 살며, 깊은 생각들을 시로 갈고 깎아냈다.

그는 키는 크지 않았지만, 육중한 몸을 가졌다. 얼굴에 살도 많았다. 빨리 걷지도 않고, 늘 사색하며 무겁게 움직였다. 그에겐 드러내고 싶지 않은 외면적 상처가 있었다. 1950년대 후반 어느 추운 겨울밤이었다. 문우들과 향촌동에서 술을 마시고 남산동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익숙한 길이었지만 비탈길에서 넘어졌다. 그런데 한쪽 눈을 실명하고 말았다. 음악을 좋아하던 그가 이 날도 레코더판을 구입해 들고 가던 길이었다. 넘어지면서도 레코드판을 보호하기 위해 팔을 짚지 않는 바람에 어처구니없게도 그만 깨어진 레코드판이 눈을 찌르고 만 것이다.

그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근원적인 의미탐구를 집요하게 추구한 시인이었다. 6·25 전쟁의 극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자의 존재론적 갈등을 형상화한 초기 작품 ‘목숨’(1954)을 비롯해 ‘송신’(1973), ‘오렌지’(1989) 등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주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계열의 시를 주로 발표했다. 중기 이후에는 삶에 대한 뜨거운 서정과 철학적 사유가 바탕을 이루는 시서구적인 감각과 동양적 예지와의 조화를 추구하는 시 세계를 추구했다. 1983년 고혈압으로 쓰러진 뒤에도 왕성한 창작활동을 했다. 그의 시처럼 ‘바이없는 종국의/잠이 내릴 때까지’ 시에 매달렸다.

진지한 자기 성찰과 존재 탐구에 매달리며 고뇌한 것이 그의 초상이다. 그러나 이 한 장의 사진(아래)은 그의 인간적인 면모가 잘 드러난다. 1968년 6월 찍은 사진이다. 그러나 누가 찍은 지에 대한 정보는 없다. 검은 뿔테 안경에 골초였던 그가 담배를 물고 ‘씩~’ 웃고 있다.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그가 워낙 과묵해 잘 웃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한번 웃을 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이 초상은 시인의 존재감이 잘 드러난다. 어두운 밤, 별을 쫓아 살아온 외골수의 눈동자 속에 웃음이 퍼진다.

‘풍화(風化)하지 않는/어느 얼굴의 가능을 믿으며/참으로 많은 표정들 가운데서/나도 임의의 표정을 짓는다.’(시 ‘표정’ 중에서) 임의의 표정일까, 아니면 그가 그토록 가꾸고자 했던 슬픔 속의 꽃을 본 것일까. " (김중기/기자, 매일신문 '초상')

 

 

 

 

 

 

 

 

 

 

 

 

 

 

        <신동집(申瞳集) : 1924 - 2003 >

 

 

* 1924년 대구 출생. 본명은 동집(東集). 호는 현당(玄堂).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인디애나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수학하고, 경북대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4년 시집 [서정의 유형]으로 아시아 자유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 1955년 영남대 강사를 시작으로 영남대 교수, 계명대 교수, 계명대 외국학대학장, 한국현대시인협회 명예회장 등을 지냈다.

* 2002년 한국현대시인협회 명예회장 및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했다.

* 시집으로 처녀시집인 [대낮](1948)을 시작으로, [서정의 유형(流刑)](1954), [모순의 물](1963), [빈 콜라병](1968), [귀환](1971), [송신](1973), [해뜨는 법](1977), [암호](1983), [여로](1986), [누가 묻거든](1989), [오렌지](1989) 등 다수의 시집을 남겼다. [신동집 시선집](1974), [신동집 시연구](1987), [신동집과 영미시](1989), [휘트먼 역시집](1981) 등의 저서가 있다. 아시아자유문학상(1955), 현대시문학상(1975), 대한민국 문화예술상(1981), 옥관문화훈장(1987), 대한민국예술원상(1982) 등을 수상했다.

 

◈ 빈 콜라병/신동집

 

빈 콜라 병에는 가득히

빈 콜라가 들어 있다.
넘어진 빈 콜라 병에는 
가득히 빈 콜라가 들어 있다.

 

빈 콜라 병에는 한 자락
밝은 흰 구름이 비치고 
이 병을 마신 사람의 
흔적은 아무 데도 보이지 않는다.

 

넘어진 빈 콜라 병은 
빈 자기를 생각고 있다.
그 옆에 피어난 들국 한 송이
피어난 자기를 생각고 있듯이.

 

불고 가는 가을 바람이 
넘어진 빈 콜라 병을 달래는가.
스스로 풀어내는 음악(音樂)이
빈 콜라 병을 다스리고 있다.

 

​<해설> 1968년 「동아시단()」에 발표한 시(). 시집 《빈 콜라병》(68)에 수록되었다. 빈 콜라병은 마치 한송이 들국화가 옆에 피어 있듯이 스스로 존재한다. 자연물이나 인공물의 구별을 초월해 스스로 존재하고 있음을 보인 작품()이다. 산이나 들에 가면 흔히들 풀섶 같은 데서 빈 사이다 병이나 콜라병이 버려져 있는 것을 본다. 그러한 데서 이런 물건을 대하면 종종 일종의 야릇한 감동을 받을 수 있다. 넘어져 뒹구는 그 병이, 쓸모 없는 그 빈 병이 너무나 당당하게도 자기를 주장하고 있는 것을 본다. 사이다나 콜라를 넣기 위한 방편 도구로서 병이 존재한다면, 내용물을 다 마신뒤에는 병도 소용없는 물건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오히려 속이 텅 비었을 때, 버려져 뒹군 이 빈병은 더욱 자율적으로 자기를 주장하고 있다. 「빈 콜라 병에는 가득히/빈 콜라가 들어 있다/넘어진 빈 콜라 병에는 가득히/빈 콜라가 들어있다(제1련)」 빈 콜라 병에는 콜라가 없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빈 콜라」가 가득히 들어 있을 것이다. 「없는 것」도 분명히 하나의 「있는 것」이 된다. (국어국문학자료사전)

 

◈ 송신(送信)/신동집

 

바람은 한로(寒露)의

음절을 밟고 지나간다.

귀뚜리는 나를 보아도

이젠 두려워하지 않는다.

차운 돌에 수염을 착 붙이고

멀리 무슨 신호를 보내고 있나.

 

어디선가 받아 읽는 가을의 사람은

일손을 놓고

한동안을 멍하니 잠기고 있다.

귀뚜리의 송신(送信)도 이내 끝나면

하늘은 바이 없는

청자(靑瓷)의 심연이다.

 

​<해설> 1973년 시집 [송신]에 수록된 시이다.

가을날 돌담 아래서 우는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를 통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비애와 숙명을 담담하게 노래한 작품이다.

이 시는 발신자와 수신자라는 전달의 양자관계를 바탕에 두고 이루어진 시이다. 제1연에서 발신자(송신자)는 바로 가을이 깊었음을 알려주는 귀뚜라미이다. 한로(깊은 가을)임을 알려주는 바람, 계절을 알려주는 귀뚜리, 그 귀뚜리는 사람의 인기척만 들어도 소리를 그치게 마련인데, 그런 귀뚜리가 더 이상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더 이상 나를 두려워하지 않고 무슨 신호인가를 보내고 있다고 했다. 왜 그럴까? 그 해답은 한로에 의해서 드러나는 시간적 의미에서 찾을 수 있다. 깊은 가을은 마지막, 죽음, 조락의 이미지를 갖는다. 이 시는 생명의 시효가 끝나는, 죽음이 임박해 있는 시간이다. 그러니 귀뚜리는 인간이란 존재가 두렵지 않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무슨 신호란, 죽음이나 종말을 알리는 신호라고 할 수 있다.

제2연에서 이런 귀뚜리의 신호를 받고 있는 사람 역시 가을의 사람이다. 특히, 인생의 황혼 단계에 있는 노인일 것이다. 이런 노경에 이른 그는 귀뚜리의 죽음의 신호를 들으면서 일손을 놓고 망연해 한다. 귀뚜리의 송신을 매개로 멀잖은 삶의 종말을 예감했기 때문에 일손을 놓고 깊은 생각에 잠기는 것이다. 이윽고 귀뚜리의 울음이 끝나고 나면 세상에는 적막만이 남는다는 것을 '하늘은 바이 없는 / 청자의 심연이다.'라는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다. 귀뚜라미의 애절한 울음소리, 또는 그가 겪어야만 하는 죽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늘은 그 청자의 오묘한 색감같이 더욱 푸르러질 뿐이라는 자연의 영원함과 신비로움을 강조함으로써 유한자적 존재의 무상감이 상대적으로 부각되어 나타나고 있다. (현대시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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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집의 시는 전체적으로 보면 초기에는 휴머니즘의 강렬한 옹호와 서구적인 주지시의 경향을 보였으나, 중기에 접어들면서 인생론적 존재의 탐구에 천착하면서 노장을 비롯한 동양사상에 회귀적 궤적을 확충해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주로 인간·존재·자연·자유였다. 또한 그는 일상생활에서 얻은 시어를 새롭게 조탁해가면서 유연하고 인상적인 특유의 가락으로 시적 리듬을 살리는 데도 소홀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초기에는 휴머니즘적 입장을 바탕으로 한 인간 존재의 근원 탐구에 주력하였으나,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내면 의식의 추구와 함께 사물과 언어의 즉물적 발현이라는 과제를 실행하려 노력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참고 :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누리미디어, 2002
<한국현대문학작은사전>, 가람기획편집부 편, 가람기획, 2000

 
 
    생애
 
 
경북 대구에서 출생한 신동집은 1951년 서울대학 정치과를 졸업하고 1959년 미국 인디애나대학에서 1년간 수학했다. 1948년 서울대학 재학 당시 습작집 <대낮>을 간행한 이래 1952년 시집 <서정의 유형>으로 문단의 각광을 받았다. 영남대학 영문과에 교편을 잡으면서 시집 <제2의 서시>, <모순의 물>, <들끓는 모음>, <빈 콜라 병> 등을 내놓았으며, 1969년 계명대학 영문과로 직을 옮긴 이후 시집 <새벽녘의 사랑>, <귀환>, <송신> 등을 간행하였다. 초기에 보인 형이상학적 시에서 흄 · 파운드를 거쳐 엘리어트에 이른 모더니즘적 경향이, 서정의 존재론적 관점에서 사물의 내용적 의미의 탐구에로 경주, 후기에는 동양적 관조의 철학시를 시도하였다.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약력
 
1924년 경북 대구 출생
1938년 일본 산구현 방부시 다다량 중학에 입학
1945년 광복 후 경성대학교 예문과 갑류에 편입, 양주동과 방종현에게 배우며 향가문학을 처음 접함
1950년 6·25 당시 통역장교로 입대, 진해의 육군사관학교 · 정훈감실 · 고급부관학교에서 복무
1951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정치과 졸업
1955년 영남대학교 교수 역임
1960년 미국 인디애나대학교 대학원 수학
1961년 효성여자대학교 강사
1970년 계명대학교 교수
1980년 경주 동국대학분교 강사 / 현대시인협회 명예회장
1983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피선
1985년 경북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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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아세아자유문학상 - <서정의 유형> / 국방장관표창장
1961년 경북문화상
1980년 한국현대시인상
1981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1987년 대한민국옥관문화훈장
1989년 세계시인상
1992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94년 순수문학상
 
 
    저서
 
 
 
• 시집
<대낮>(1948) <서정의 유형>(1954) <제2의 서시>(1958) <모순의 물>(1963) <들끓는 모음>(1965) 
<빈 콜라 병>(1968) <새벽녘의 사람>(1970) <귀환>(1971) <송신>(1973) <신동집 시선>(1974)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1975) <행인>(1975) <미완의 밤>(1976) <해뜨는 법>(1977) 
<세 사람의 바다>(1979) <장기판>(1979) <진혼·반격>(1981) <암호>(1983) <송별>(1986) 
<여로>(1987) <귀환자>(1988) <자전>(1989) <고독은 자라>(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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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문원사,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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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학문사,1983)]
 
 
    작품세계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작가의 말
 
내가 걸어온 시의 도정을 살펴볼 때 나의 시가 현재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 또한 어느 지점으로 이동해 갈는지 아무래도 잘은 알 수 없다는 것이 옳은 말일 것이다. 아마도 내가 시필을 끊는 날이 오면 그때는 대충 그 전말을 알게 될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런 날이 언제 올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는 일이며 당장 내일에라도 올는지, 또는 조금은 뒷날에 올는지 아무도 알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시작이란 끊임없이 무(無)에 직면하는 일이며 한 언어운술가(言語芸術家)의 눈 앞에는 언제나 희멀건 무의 들판이 가로놓여 있는 일뿐이다. 안이한 예측이나 짐작은 아예 거부하면서 한 발자국 말을 찾아 놓아가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는 일이다. (……)
그동안의 작품들을 훑어보니 여러 가지 부끄러운 시행착오의 흔적도 보인다. 실은 한 편의 쓸만한 작품이 나오기엔 적어도 열 편, 스무 편의 시행착오가 따르기 마련인가보다. 시란 수많은 시행착오 사이로 은총과도 같이 내다보이는 한 조각 하늘의 푸름이나 아닐까. (……)
- ‘후기’, 신동집, <신동집 시선>, 학문사, 1974
 
 
시작(詩作)은 응집된 밤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그리하여 눈이 캄캄해지는 일이다. 혹은 시작은 응집된 대낮 속으로 뛰어드는 일이다. 그리하여 눈이 캄캄해지는 일이다. 혹은 시작은 응집된 낮과 밤을 풀어 섞는 일이다. 낮과 밤을 풀어 섞으면 백야가 된다. 시는 백야의 체험이다. 그리하여 시작은 백야 속에 홀로 남는 일이다. 배경도 전경도 구별 없는 백야 속에 무(無)의 광원(光源)으로 눈떠 있는 일이다. (……)
침묵에서 우러난 언어는 항상 침묵의 상태를 동경한다. 시는 침묵에서 날아오른 언어의 비상이며 그 비상의 궤도이다. 시는 침묵의 상형문자이다. 언어의 파장이 그린 언어의 궤도이다.
침묵을 상실한 언어는 수직으로 일어설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한다. 시에서는 언어가 언어로 직접 연결되어서는 안된다. 침묵이 언어와 언어를 연결해주어야 한다. 훌륭한 시는 언제나 침묵의 빛깔로 빛이 나고 있다. (……)
시에서 무슨 해답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가령 해답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죽어버린 해답이다. 시는 미지속에 막막히 서는 일이며 간단없이 물음을 던지는 일이다. 이 물음은 답변을 요하지 않는다. 이 물음이 바로 해박(解博)이 되는 일도 있다. 부단히 물음을 던지는 자문 속에 시는 절로 얼굴을 나타내는지도 모른다. 마치 어느 날 아침 갑자기 꽃봉이 열리듯이. 시는 변모다. (……)
작품은 오직 한 번의 행위이다. 그러나 시인의 자기증명은 결코 한 번만이어서는 안된다. 필생을 통해서 그는 자기 증명을 되풀이 계속해야 한다. 골백 번이라도. 시인이 작품 이외 무엇으로 자기 증명을 할 수 있겠는가. 시인이란 집요하게도 끝까지 노래하는 시인을 말한다. 왜냐하면 그에겐 노래가 존재이니까. 만약 그가 진정한 시인이라면, 비록 그의 시가 점점 너절해지고 마침내 자기의 무참을 드러내는 한이 있더라도, 그는 여전히 노래할 것이다. 심지어 자기의 비참을 노래로 퉁겨낼 용기를 가져야 한다. 다만 특수한 예외로 랭보와 같은 이상변이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을 본받아서는 안된다. 그는 이미 살았어도 죽어 있었으니까. 시인의 정신은 부토(腐土)다. 시의 궁극적인 패턴은 재생이며 회귀다. (……)
- ‘나의 시론, 나의 팡세’, 신동집, <예술가의 삶>, 혜화당, 1993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평론
 
(……) 신동집 시인에 있어서 시의 본령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시인의 본분은 무엇이며 시인이 갖추어야 할 요건들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되새겨보고 가다듬어 보는 일에 직결된다. 
‘시인의 요건’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그의 시론이 대변해 주듯이 신동집에 있어 시인이란, 즉 시인이 갖추어야 할 요건이란 시작의 기법 문제라든가 시 작품의 내부구조 문제 등 시학적인 문제에 선행하는 것이다.
그의 관점에서 시인이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요건이란 다음과 같다.
첫째, 시인은 언어-문체를 포함한 넓은 의미의 언어-에 대한 사랑을 지녀야 한다. 그 언어란 모국어를 말하는 것이며 한국시인에게는 한국말을 의미한다. 따라서 한국말에 대한 남다른 자각을 가지고 모국어를 영생시키는 일과 그 모국어로 지상의 존재를 노래로 지켜주고 찬양해주는 일이 시인의 사명 중 으뜸가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시인은 모국어를 캐는 구현자에 다름아닌 것이다.
둘째, 시인이 갖추어야 할 요건은 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의 견자란 ‘사물의 본질과 핵심을 강력한 비전으로서, 강력한 상상력과 직관으로써 투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견자란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줄 아는 사람이다. 시인의 눈은 곧 우리의 일상생활의 주변에 깔려 있는 수많은 소재를 자기 정신의 자장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견자의 눈, 즉 강력히 펼쳐진 레이더와 같은 정신을 말한다. 즉 시인은 언제나 눈떠 있는 레이더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생에 대한 예지, 즉 생에 대한 총체적 진리로 모아져야 할 것이다.
 
 
    연계정보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관련도서
 
<신동집 시전집>, 신동집, 영학출판사, 1984
<예술가의 삶 5>, 신동집, 혜화당, 1993
<신동집과 영미시>, 이영걸, 문학과비평사, 1989
<한국현대시연구>, 김용직 외, 민음사, 1989
<신동집 시선>, 신동집, 학문사, 1974

詩人 신동집(申瞳集) ▣

 



본명 : 신동집(申東集)
 호  : 현당(玄堂)

1924년 대구 출생
1948년 대학 재학 중 습작 시집 <대낮>의
       간행으로 작품활동을 시작,
       첫 시집 대낮으로 등단
1951년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
1955∼1969 영남대 교수
1959년 미국 인디애나 대학원 수학
1954년 시집 『서정의 유형』발표,
       아시아 자유문학상 수상
1960년 아시아 자유문학상
1970∼1986 계명대 교수
1980년 한국현대시인상 수상
1981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수상
1982∼1985 계명대 외국어대학장

신동집시인은 주로 인간,
자연, 존재 등을 추구하였으며,
특히 형이상학적 시에서 모더니즘적 경향을 보였다.
그 뒤 서저의 존재론적 관점에서 사물의
내용적 의미의 탐구에도 노력하였으며,
동양적 관조의 철학도 시도했다.

또한 시인은 구문법이나 호흡을 파괴하고,
그 특이한 구술체(口述體 ; 시의 종결형의 처리가 거의
현재 진행형을 쓰고 있는 점이나
구문상의 도치가 선용되고 있는 것 등)에 의거
고도 지식인 사회로 진입해 들어간 시인이다.
그의 시는 존재(存在)와 무(無) 등 인간의 근원적 자각에
집요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 깊이와 풋풋한 감동을 잃지 않는다.
평이하면서도 철학적 바탕이 다원적(多元的) 은유를 살리고 있다.
그는 <시인의 요건>이라는 글에서 '시는 즐거움으로 시작하여
예지로 끝난다'는 프로스트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 말은 그의 시세계에 매우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즉 즐거움과 예지는 그의 미학이 떠받치고 있는 두 날개이다.


■시집  ■

대낮(1948), 서정(抒情)의 유형(流刑)(1954),
제이(第二)의 서시(序詩)(1958), 모순(矛盾)의 물(1963),
들끓는 모음(母音)(1965), 빈 콜라병(1968), 새벽녘의 사람들(1970),
귀환(1971), 송신(送信)(1973), 신동집 시선(1974),
미완(未完)의 밤(1976), 장기판(1979), 진혼(鎭魂)·반격(反擊)(1981),
암호』(1983), 신동집 시전집(1985), 송별(1986), 여로(旅路)(1987),
누가 묻거든(1989) 등

번역시집 : 휘트먼 譯시집(1981)

저서 : 신동집 詩연구(1987) 신동집 시가 있는 명상노우트(1987)
       신동집과 영미시(1989)


■시 감상하기 ■

※ 목차 ※

1. 목숨

2. 송신(送信)

3. 오렌지

4. 어떤 사람

5. 표정

6. 한로(寒露)

7. 변신(變身)

8. 빈 콜라병

9. 좋았던 날

10. 한알의 씨앗

11. 노을

12. 소년

13. 동행

14. 추일별곡

15. 조국으로 가는 길

16. 진혼

17. 평범한 가을밤

18. 봄비

19. 누가 누구를 닮았다는 건

20. 크리스마스가 지난 뒤 어느 대학촌에서

21. 눈

22. 행인 -1-

23. 항아리

24. 한 사람의 슬픔

25. 하일명상(夏日瞑想)

26. 편지

27. 추일유정(秋日有情)

28. 잠들기 전

29. 이사

30. 오, 하나씩의 이름들

31. 여로 -1-

32. 싸리나무

33. 비가(悲歌)

34. 바다

35. 모과나무

36. 끝나는 계절

37. 금조비가(金鳥悲歌)

38. 가을 햇살

39. 마음 이 한 때

40. 나의 손


☞ 목숨 ☜

목숨은 때묻었다.
절반은 흙이 된 빛깔
황폐한 얼굴엔 표정(表情)이 없다.

나는 무한히 살고 싶더라.
너랑 살아 보고 싶더라.
살아서 죽음보다 그리운 것이 되고 싶더라.

억만 광년(億萬光年)의 현암(玄暗)을 거쳐
나의 목숨 안에 와 닿는
한 개의 별빛.

우리는 아직도 포연(砲煙)의 추억 속에서
없어진 이름들을 부르고 있다.
따뜻이 체온(體溫)에 젖어든 이름들.

살은 자(者)는 죽은 자를 증언(證言)하라
죽은 자는 살은 자를 고발(告發)하라
목숨의 조건(條件)은 고독(孤獨)하다.

바라보면 멀리도 왔다마는
나의 뒤 저편으로
어쩌면 신명나게 바람은 불고 있다.

어느 하많은 시공(時空)이 지나
모양 없이 지워질 숨자리에
나의 백조(白鳥)는 살아서 돌아오라.


☞ 송신(送信) ☜

바람은 한로(寒露)의
음절을 밟고 지나간다.
귀뚜리는 나를 보아도
이젠 두려워하지 않는다.
차운 돌에 수염을 착 붙이고
멀리 무슨 신호를 보내고 있나.

어디선가 받아 읽는 가을의 사람은
일손을 놓고
한동안을 멍하니 잠기고 있다.
귀뚜리의 송신(送信)도 이내 끝나면
하늘은 바이없는
청자(靑瓷)의 심연이다.


☞ 오렌지 ☜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오렌지는 여기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
더도 덜도 아닌 오렌지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찹잘한 속살을 깔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대는 순간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다.
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다.
시간이 똘똘
배암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에
한없이 어진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누구인지 잘은 아직 몰라도.


☞ 어떤 사람 ☜

마지막으로 한번 더 별을 돌아보고
늦은 밤의 창문을 나는 닫는다.
어디선가 지구의 저쪽켠에서
말 없이 문을 여는 사람이 있다.
차겁고 뜨거운 그의 얼굴은
그러나 너그러이 나를 대한다.
나직이 나는 묵례를 보낸다.
혹시는 나의 잠을 지켜 줄 사람인가
지향없이 나의 밤을 헤메일 사람인가
그의 정체를 나는 알 수가 없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창문을 열면
또 한번 나의 눈은 대하게 된다.
어디선가 지구의 저쪽켠에서
말없이 문을 닫는 그의 모습을
나직이 나는 묵례를 보낸다.
그의 잠을 이번은 내가 지킬 차롄가
그의 밤을 지향없이 내가 헤메일 차롄가.
차겁고 뜨거운 어진 사람은
언제나 이렇게 나와 만난다.
언제나 이렇게 나와 헤어진다.


☞ 표정 ☜

참으로 많은 표정들
가운데서
나도 일종의
표정을 지운다

네가 좋아하던 나의 표정이
어떤 것인지
내가 좋아하던
너의 표정이
어떤 것인지
다 잊어버렸다고 하자

우리에게 남은
단 하나의 고백만은
영원히 아름다운
약속 안에 살아 있다

풍화(風化)하지 않은
어느 얼굴의 가능을 믿으며
참으로 많은 표정들 가운데서
나도 임의의 표정을 지운다

표정이 끝난 시간을랑
묻지를 말라
창살 속에서 갇히운
나의 노래를 위하여


☞ 한로(寒露) ☜

* 1 *

허수아비의
헐어빠진
옷자락이나 되어 남는 일이다.

허수아비의 어깨 위
길 잃은 한 마리
새나 되어 남는 일이다.

옷을 갈아입고
단정히 비록
넥타이를 맨다 해도

으스스 바람 도는
한로의 무늬를 어찌할까.
그런 마음의 들판을 어찌할까.

남은 일은 미치는 일이요.
그지없던 날의 옥빛은 갔으니
그런 날의 보람은 갔으니.


☞ 변신(變身) ☜

잎을 벗어 버린 나뭇가지는
어찌 보면 땅에서 하늘로 뻗은
나무 뿌리라 할까
뒤엎어 놓은 밤이 내낮이라면
뿌리는 가지로 변해도 될 일
간절한 꿈에서 열매가 맺고
영근 방울에서 보람이 터질 때
세계는 얼마나 아리게 도치(倒置)했을까

뒤엎어 놓은 내낮이
우리의 밤이라면
백야(白夜)여 주어(主語)없는 강물을 덮어 달라
생자(生者)를 뒤엎어 죽은 자라면
푸른 하늘은 무덤 속을 날아야 할 일

말씀은 안테나 끝으로
푸라티나의 빛을 퉁기고
저기 급하게 피안(彼岸)으로 달리는 짙은 구름群
가지로 변해 선 나무 뿌리에
흔들이며 달려 오는 풍경(風景)은 밀착(密着)한다.

꿈을 배우는 제비야
옳은 신화(神話)를 알려주마
나래 설익은 제비야.


☞ 빈 콜라병 ☜

빈 콜라병에는 가득히
빈 콜라가 들어 있다.
넘어진 빈 콜라 병에는
가득히 빈 콜라가 들어있다.

빈 콜라 병에는 한 자락
밝은 흰 구름이 비치고
이 병을 마신 사람의
흔적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다.

넘어진 빈 콜라병은
빈 자기를 생각고 있다.
그 옆에 피어난 들국 한 송이
피어난 자기를 생각고 있듯이.

불고 가는 가을 바람이
넘어진 빈 콜라 병을 달래는가.
스스로 풀어내는 음악이
빈 콜라병을 다스리고 있다.


☞ 좋았던 날 ☜

좋았던 날은 하마 가고 없다.
두서없이 보내온
지난날의 일들.
그 사이도 하염없이
귀한 것은 새어내리고
오늘은 벌써 찬바람이 돌고 있다.
어디로 갔는가
제비는 이미 보이지 않고
귀뚜리도 바이없이
죽을 자리를 더듬고 있다.
보라 스민 노을은 하르라니
서산마루에 떨고
더없이 귀한 날은 저문다.
예저기 불이 돋은 창문들의 마음
아이를 찾는 아낙네
목소리는 저문다.
나도 밤이 되어갈 때다
별이 되어 갈 때다


☞ 한알의 씨앗 ☜

한알의 씨앗에도 움은 돋는가
가지에 피어날
꽃잎은 지레 보이고

두 알의 씨앗에도 움은 돋는가
가지에 맺을
열매는 지레 보이고
애달파라, 트지 않는
나의 씨앗
기다려도 기별은 없고
보듬어도 보람은 없고

봄이 와 무릇
씨앗들은 돋아도
소망은 바이 없이
흙의 잠을 자리라


☞ 노을 ☜

더없이 날은 가고 없다
잔잔히 번지는
수먹물의 노을
좋았던 날은 이리저리 가고
어디로 제비는 날아갔는가
날은 어둑하여라
하르라니 떠는
비늘구름 하나
좋았던 날은 하마 가고 없고
지나고야 비로소
그지없는 노을
파르라니 떨며 날은 저문다.


☞ 소년 ☜

아득한 옛날
호젓한 네거리에는
붉은 우체통이
고즈너기 서 있었다

서투른 휘파람을 불면서
소년은 우체통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지나간다.

한손엔 잠자리 채를 들고서.
무심코 잠자리가 한 마리
앉다 말다 지나간다.

보릿집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엿장수 가위소리는 고달피 지나간다.
내 어느날 다시
이 길을 간다 해도
여전 그렇게 지날 것이다.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가이없이 변해도
홍안은 찌들어
어깨처진 남루의 막대는 지나가도.


☞ 동행 ☜

길을 가는 우리는 서로 만나
인연껏 함께 가는 同行이다.
同行이란 무엇일까
속속들이 상대를
아는 것도 아니리라.
서로는 그런 요구를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저마다 혼자 가는 우리는
언제나 더듬거리는 목숨이요
다다라 쉴 잠이 어디에 있는지,
되도록이면 이마 위에 별을 이고
저마다의 밤을 헤어갈 뿐
가다가 琴線에 와 닿는
그런 것이 있다면
고마웁게 받아들이며
또한 소중히 나누어 가지며
우리는 함께 가는 同行이다.
인연껏 가다 마칠 그런 同行이다.


☞ 추일별곡 ☜

하마트면 일 뻔도 한
위험한 관계를 미안히 생각하며
오늘은 내가 떠날 차례
그러면 둘이는 다
추일풍경이 되어보는 날이다.
채칼에 뚝뚝 떨어지는
물배 이슬을 거두며
떠나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한자리에 앉고 보면
우리네 생활사는 그래도 숨어 드나부다.
작별의 술잔에 남빛 고름은 비친다.
허리춤에 찬 향주머니
인형의 실눈썹은 비친다.
가을이 너의 소매끝에 닿아도
함부로 설레이진 말일
가지에 앉은 새가 엿보고 있으니,
아리는 미소를 한 군데 가릴
토끼풀 하나
노랗게 익은 탱자알 하나
너의 손에 들어 있어 더욱 좋은 일.
추일은 마침 별곡이 던다.
가다가 잘못 산신령을 만나면
꼰바둑이나 한 판 둘 여유는 있어야지
이마 푸른 고려선비는.


☞ 조국으로 가는 길 ☜

솜구름 말가히 나르고 푸른 들 기름진 땅
불꽃이 마구 올라 붙는 하늘이 서러웁거든
우리 눈알을 한데 모아 조국으로 가자
노래를 한데 엮어 조국으로 가자

그대는 바꿀 수 없는 우리의 운명
속일 수 없는 우리의 혈맥
보다 아름다이 꾸민 땅도 있으리
복되게 사람 사는 부러운 나라도 있으리
이득한 한숨 가슴을 덮드래도
조국은 지울 수 없는 우리의 발자욱임을 어찌하느냐

조국은 자랑스런 우리의 깃발이다
조국은 자랑스런 우리의 훈장이다

우리 눈알을 한 데 모아 조국으로 가자
노래를 한 데 엮어 조국으로 가자
그대는 자랑스런 우리의 꿈이 아니냐
그리하여 조국으로 가는 길은 항쟁의 길이다
자유로 가는 길은 진격의 길이다

조국은 한양 고난속에 부활하는 것인가
넘어져도 열 번 일어나는 용기를 배우자

하나로 가는 길은 영광의 길이다
양편바다 함박꽃이 피는 길이다


☞ 진혼 ☜

가장 미더웁던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가장 미더웁던
나 자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남은 일은 정처없이
펄럭이는 일이다
아무런 방비도 없이
그러나 되도록이면 탁하지 않게.
약간은 흙바람에 눈이 시려도
그럴 수 있는 일,
아침 노을의 무슨 약속이
한 그루 나무로 자라던가.
가장 바라던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가장 바라던
나 자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남은 일은 갈피 없이
펄럭이는 일이다
그러나 되도록이면 추하지 않게.
그러면 이 펄럭임도
약간은 진혼의 노래가 될는가
돌아오지 않는 사람
돌아오지 않은 나 자신을 위하여.
언덕마루에 상기
비가는 바람불고 있다.


☞ 평범한 가을밤 ☜

평범한 가을밤엔
평범한 과일이 낫다.
단 미를 걸러낸 평범한 말이
나에게 더 어울릴 때도 있다.
떠나는 막차 소리를 기억 속에 들으며
한 장의 엷은 잠의 막을 넘어서면
꿈 속을 한 개
커다란 과일이 떨어진다.
어느 깊이로 떨어져 갔는지
내일 아침 출발하는 바람에게 물어 보리라.


☞ 봄비 ☜

전에는 잘 다닌 길인데
그 사이 왠지 시들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찾는 이 길
모퉁이를 돌아서자
낯익은 가게들이 몽땅 헐리고 있다.
약방이며 과일점
이런 저런 식당들.
변했구나.
얼마 후 다시 이 길을 지나자
불도저가 요란하다.
얼마 후 다시 지나자
철골(鐵骨)이 마구 치솟고 있다.
얼마 후 다시 지나자
마친 단장에 미끈한 허우대.
지극히 당연한 듯 빌딩이 서 있다.
유수한 모 기업체 사옥.
어리둥절 들어서 본 나는
열없이 도로 나온다.
수상히 훑어보는 사원도 있다.
사원이여
그럴 필요는 없는데.
이제야 나도 알아지는 것이 있구나
변한 거리에 변한 이 사람
때마침 부슬부슬
봄비가 내리고 있다.


☞ 누가 누구를 닮았다는 건 ☜

누가 누구를 닮았다는 건
참 재미 있는 일이다.
가령 길에서나 어디에서
문득 만난 사람이라도
꼭히 누구를 닮았다고 짚는 순간에
기어코 그는 소를 닮고
말 여우 토끼
고양이 거북이도 닮는다.
꼭히 누구를 닮았다고 짚는 순간에
과연 그는 아보가도로 빠스깔을 닮고
또는 바세도오, 쥐포수를 닮고
시골 정미소 주인을 닮는다.
짖궂은 생각은 다시 얼굴에
턱수염을 달아 붙이고
갓을 씌우면
아 정말 그렇다
李朝 때 아무개 참판을 닮는구나
참 신나는 일이다
동그랑땡.


☞ 크리스마스가 지난 뒤 어느 대학촌에서 ☜

저마다의 진한 겨울을 안고
처녀(處女)들은 한 아름씩
소포(小包)를 띄우고 있던데,
지금은 다 어디로 갔는지 흔적이 없다.
한산해진 우체국에 들어서면
갑자기 들어온 이유(理由)를 잊고
나는 몇 장의 우표(郵票) 밖에 살 것이 없다.
말하자면 그들로 볼 때
시(詩)는 편리한 날개의 대용일 수도 있지만
사람은 그렇지 못할 때
계원(係員)은 나에게 우표(郵票)를 내어주며
잠시 나의 속으로 들어가 본다.
밖을 나오면 동한(凍寒)의 젖빛 거리
어쩌면 띄우고 말 한 장의 편지
그 웃머리를 생각하며
참으로 거짖 없는
한 줄의 육성(肉聲)을 생각하며
며칠 못 본 주인(主人) 눅은 악기점(樂器店)으로
그 옆의 낯익은 주점(酒店)
주점(酒店) 속의 바다로 뛰어든다.


☞ 눈 ☜

아주 너를 떠나 보내고 돌아오는 길은
펑펑 눈이 오는 밤이었다.
돌아서는 모퉁이 마다 내자욱 소리는 나를 따라오고
너를 내 중심에서 눈의 것으로 환원하고 있었다.
너는 아주 떠나버렸기에 그러기에
고이 들을 수 있는 내 스스로의 자욱 소리였지만
내가 남기고 온 발자욱은 이내 묻혀 갔으리라.
펑펑 내리는 눈이 감정 속에 묻혀 갔으리라.
너는 이미 나의 지평(地平)가로 떠나갔기에 그만이지만
그러나 너대신 내가 떠나 갔더래도 좋았을 게다.
우리는 누가 먼저 떠나든,
황막히 내리는 감정속에 살아가는 것이냐.


☞ 행인 -1- ☜

길을 가다 발이 무거워
한동안 나무 그늘 돌 위에 쉬어 본다.
이마에 밴 땀을 씻으며 아래켠으로 눈을 돌리면
들판을 건너가는 사람의 흰 옷이
간혹 조만하게 아른거리고 있다.
이웃 마을이나 읍내로 잠시 나들이나 가는 길인지,
그런데 이들은 왜 하나같이 가면은
다시 안 올 행인으로만 보일까.
길은 분명 같은 길이요
내키면 언제라도 올 수 있는 길인데.

한동안 나는 생각해 본다.
지난 날 인연 있던 사람들의 일을.
바람이나 잠시 쏘이러 또는 장에나 가듯이
가벼운 인사말로 떠난 사람도 알고 보면
다시 못 올 헤어짐이 될 줄이야.
내일 또 만나자던 웃음 먹은 얼굴이
지금은 해밝은 하늘에만 걸려있는 사람도 았다.

쉬었던 몸을 일으켜 발을 다시 옮기면,
아른거리며 가는 저 들판의 사람 눈에
나도 또한 가면은 아니 올 행인으로나 보일까.
기우는 해그늘에 제비는 돌아가고
철교에 느릿이 화물차는 지난다.
오는지 가는지 구별도 없이.


☞ 항아리 ☜

떠나온 사람의 눈에
유현(幽玄)한 항아리는 비친다.
항아리의 겉면을 한 자락 구름이 돈다
한 마리 학이 날은다.
바람을 따라가는 구름의 마음을 아는가
구름을 따라가는 학의 마음을 아는가.
알려면 한평생 걸려도 볼 일
걸려서 마침내 학의 부리를
또 한 번 이승으로 돌려볼 일이다.
어쩌면 길이 굽은 하늘에
시방도 하염없이 학은 날고 있으니.


☞ 한 사람의 슬픔 ☜

쓰지 않았다면 좋았을
그런 것만 써 왔구나 여태.
버릴 데도 없는
이 역겨운 말 누더기.
그러나 여전 나는 쓸 것이다
모래 위에, 물 위에
종이 위에, 허공에.
결코 쓰지 못할
그런 꿈을 위하여
나는 쓰고 또 쓸 것이다.
종국의 수락이
부슬비처럼 내릴 때까지.
나를 늙었다고 하라
마음대로 젊었다고 하라.
기약 없는 이 붓끝에서
끝내 터지는 말은 무엇일까.
울분도 실의도 아니다
깊이 엉긴 한 사람의 슬픔이다.


☞ 하일명상(夏日瞑想) ☜

노년은 하잘없는
한낱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다.
누가 이런 말을 하던가
손뼉 치며 소리 높이
허리 굽은 남루를 찬양하라.
격조 높은 정밀(靜謐)의 이마 푸른 현자도
때로는 느닷없는 광기에 사로잡히며
스스로의 운명을 이룩하는 수가 있다.
묵묵히 돌아도 안 보고.

명심하라. 헤매이며 떠돌던 노한 노년도
비로소 냉엄히 끓는 눈을 부릅뜬다.
이승을 엿본 자 무슨 한이리오
떠나며 가벼이 코나 풀 일.
더위도 바야흐로 막바지 8월
귀뚜리도 엊그제 울기 시작했다.
꿀벌이여, 제비 나는 빈 집에 와 집을 지어라
황망히 살다 갈 집을 지어라.


☞ 편지 ☜

거리에도 여저기 군밤이 나돌고
가랑잎도 이리저리 굴러다니면
다 쓴 편지에도
마지막 우표를 단다.
그러면 나름으로 길을 떠나리라.
떠나는 후조에 길이 있듯이
띄우는 편지에도 길은 있으니
시월 상달 높은 하늘에
눈을 풀어 적시면
사람도 한동안
무늬 이는 옥빛이다.


☞ 추일유정(秋日有情) ☜

* 1. 한로(寒露) *

진보라 가지나무에
물을 주는 사람의 흰 발도 사라지면
어언 소매 끝에 와 닿는
한로의 바람 무늬.

그러면 나의 노래도
청자의 하늘빛을 닮을 때가 되었는가.
노래는 상기 맑아 오르지 못하고
부질없이 고이는 한로의 이 냉기.

나의 의지도 한 마리
후조의 나래깃을 닮을 때
청자의 심연에서
일어서는 나는 고려 선비다.


* 2. 가을의 얼굴 *

줄기에도 주룽히
보석의 열매가 맺는 날이다.
이마 푸른 선비의
마음은 한로에 젖어
잘 굽은 나무 사이로 보이는
옥빛 하늘.
그러나 아른대이는 보살님
머리에 가리워
서역(西域)은 잘 안 보인다.
그래도 상관은 없는 일,
오늘은 돌 속에
보살님을 캐는 날이니,
제일 맑은 가을의
얼굴을 캐는 날이니.


* 3. 송신(送信) *

바람은 한로의
음절을 밟고 지나간다.
귀뚜리는 나를 보아도
이젠 두려워하지 않는다.
차운 돌에 수염을 착 붙이고
멀리 무슨 신호를 보내고 있나.

어디선가 받아 읽는 가을의 사람은
일손을 놓고
한동안을 멍하니 잠기고 있다.
귀뚜리의 송신도 이내 끝나면
하늘은 바이 없는
청자의 심연이다


☞ 잠들기 전 ☜

거리의 가게도 뚜르르
문을 닫는 소리가 들린다.
하루의 수지도 이리저리
맞추어 보는 시간이다.
또한 텔레비전 화면 앞에 모여
오늘의 마무리
뉴스를 지켜보는 가족도 있다.
무언가 석간을 더듬는
가장의 그늘진 이마 주름도 보이고
또는 잠자리 세수도 대강 마치고
잠시 거울 앞에 앉는 아낙네
그 옆에 고사리 손을 불끈 쥐고서
새근거리는 아기의 잠도 보인다.
고요히 깊어가는 이 밤
나의 안에도 나직이 밤 노래는 흐르고
스르르 잠들기도 전에
꼬리 달린 이삭 별이 하나
동녘 하늘로 떨어지고 있다.


☞ 이사 ☜

늘은 건 세월의 누더기라 하자,
그런대로 불에 사른 것도 많다.
밥을 메겨 시계룰 걸어 놓고
문패도 달아 붙이면
이 집도 당분은 나의 거처가 된다.
잊은 물건도 더러 생각이 나나
묻지 말라
잊기 위한 이사도 있는 법이니.
이 빠진 고흐의 걸상이
여까지 따라오고 보면
질긴 건 인연이다.
수상히 짖던 개도 알아보는지
이내 조용해지면
머리 위에 째잭
인사를 떨구는 새도 두엇 보인다.
일손을 놓고 우러다 보면
앞산 마루 여저기 눈은 아직 남아 있다.
언제면 이 집도 다시 옮길지
기약은 없지만
한 번은 혼자 떠날 그런 이사도
문득 생각이 난다.
어느 날 발에 맞는 새 신을 신고
아득히 먼 가믈 현(玄)으로 나서면
그 때는 무어라 새들은 인사를 할까
알아도 보았으면.


☞ 오, 하나씩의 이름들 ☜

오, 하나씩의 이름들
무시로 떠오르는 하나씩의 이름들
돌이며 길, 들이며 강
풀이며 나무, 별이며 무덤
그리고 또 그리고 또
이런저런 이름들.

이들은 결국
하나씩의 암호였던가.
우리들의 삶의 융단천
그 둘레 안으로
누구인가 짜 넣은
암호였던가.

우리는 저마다의 암호를 안고
이 지상을 살다 가는 것이리라.
조금씩은 나름으로 풀다 말다 하면서
그러나 결코 풀지 못하며,
그리곤 다시 한 번 풀기 위하여
깨어나 지상으로 돌아오는 것이리라.


☞ 여로 -1- ☜

사람은 문득
원경(遠景) 속에 서 있는 자기를 볼 때가 있다.
어릴 때 흔히 그린 크레용 그림
그 속의 조그만
인물을 닮은 자기의 모습을.
그리곤 잠시
지나온 여로를 생각해 본다.
산과 들이 처음 놓이고
한두 채 집이랑 나무, 길이 놓이고
여저기 구름이 놓인 크레용 그림.
그림 속의 인물은 지금도 걸어가고 있다.
불러도 이쪽을 돌아보는 일 없이
한 손엔 무언가 일호 봉투를 들고.
그렇다, 돌아올 리 없는 나요
지금도 원경 속을 가는 사람은.


☞ 싸리나무 ☜

잠자리는 살아 있는 싸리나무엔
앉지 않는 법이다.
언제나 죽은 싸리나무
그 꼭대기에 가 앉는다.
몸에 비해 유달리
눈이 큰 잠자리는
언제나 죽음의 정상에 가 앉는다.
엷은 나래에 모시 하늘은 비치고……
바람이 살짝 싸리잎을 흔들면
꿈에서나 깨어난 듯 잠자리는 떠난다
어느 또한
싸리 마른 가지를 찾아서.
오늘은 또 오늘의 묘비명이다.
바람에 휘적이는 묘비명이다.


☞ 비가(悲歌) ☜

* 1 *

바람에 희끗이 머리카락은 날린다.
삐에로여
작별의 인사말을 아는가.
너의 눈 속에 한 자락
노을 구름은 돈다.
길 잃은 잠자리의 그리매도 저물면
대지의 노래 속에 떨어지는 나뭇잎들,
늦도라지 보라 속에
꿈을 헤맨 사람은
귀뚜라미 울음에도 마음이 설레이고
삐에로여 잠잠히 춤을 거두어라.
사람의 손에 인형은 때묻고
술잔에 남은 머루씨 댓 톨
바람에 희끗이 머리카락은 날린다.



* 2 *

계절 사이로 간간이
웃음 소리는 밝게 들린다.
여름을 살아 남아 여까지 온 사람은
비탈에 그늘 여문 가을꽃을 바라본다.
이것도 그래 다행한 일이다
늦도라지 보라 속에
비치며 사라지는 행인의 그림자.
익어 여문 과일의
무게가 문득 손에 무거울 때
굴러가는 가랑잎은 누구의 것일까.
귀뚜리여 아직은
죽을 자리를 더듬지 말라.
시월 상달 해 짧은 날에
옥빛 바람은 풀어 섞이고
이러할 때 상머리 생명은 유정(有情)이다.



* 3 *

기적 소리도 울고 가면 그만,
누가 오래 견딜까
이 멀건 들판을.
한 줄기 걸인의
모닥불이 피어 오른다.
간간이 풍기는 고무 타는 내.
이러할 때 날카로이
새는 노을에 빛나고……
저녁 새여 아직은 더 울어라.
나락 말던 사람의 그리매는 사라지고
굽어 도는 강나루 모서리도 저물면
남은 건 한 가지
최후의 기슭에 별이 뜬다.



* 4 *

사람이 두 발로 일어서
걸어 온 시간이 아득히 보인다.
내가 두 발로 일어서
걸어 온 시간이 아득히 보인다.
무엇을 위한 여로인가.
엿장수의 가위 소리는 일찍
해진 길로 발을 돌리고
우수수 달력 속에 날은 어둡다.
이승을 엿본 자
무슨 한이리오
떠나며 가벼이 코나 풀 일.
삐에로여 잔을 들어라
바람이 너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바람이 방금
너의 이름을 지우고 있다.
삐에로여 잔을 놓아라


☞ 바다 ☜

바다여, 옷에 묻으면 잘 안 지는
너는 푸른 잉크 물이다.
살에 묻으면 잘 안 지는
너는 진한 잉크 물이다.

수면으로 내려앉는 돌층계도
뱃전에 날아 뜨는 갈매기떼도
떠나는 고동 소리도
지우려면 다 지울 수 있지만

해만의 끝머리 흰 등대도
등대 위에 조으는 구름 자락도
흩어진 섬들의 밝은 무덤도
지우려면 다 지울 수 있지만

바다여, 한 번 묻으면 잘 안 지는
너는 푸른 잉크 물이다.
찍어서 내가 쓰는
가슴의 잉크 물이다.


☞ 모과나무 ☜

유난히도 포근한 초동 날씨
더없이 옥빛 귀한 하늘빛이다.
고마와라, 이런 날도 있었던가
좋았던 날은 하마 가고 없는데.
하늘거리며 그리 춥지도 않은 바람이
시름없이 건너가고 있다.
뜰의 모과나무엔 예저기
아직도 매달린 가랑잎새들
하르라니 살랑이며 맑게 떨고 있다.
그때는 구슬프기 짝이 없던 나문데
그 사이 어언 자라
실하고 당당한 나무가 되었다.
여름이면 보기에도 시원히
잎새를 살랑이며
호젓한 저녁 한때를
심심히도 반겨 주더니
그 사이도 식구들은 하나 둘 줄고
뜻밖에도 이 몸은 망가져
삽시에 많은 것이 변하고 말았다.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햇살에 살랑이는 모과나무의 향내라 할까.
햇살 바른 뜰에는 향기 드높이
코에 스미던 모과 열매도
지금은 거진 다 따고 말았다.
몇 개만 가지 끝에
지금도 남아 있을 뿐.
바람이 하늘거릴 때마다
지금도 향내는 코에 스미듯
감돌고 있다.
드디어 나뭇잎도 다 떨어지면
사람들은 영하 깊이 문을 닫아 걸리라.
원컨대 해가 바뀌면 또
가지 추운 나무도 다시 살아나
향내 그윽한 열매를 달아 주기를.
바라는 것이 또 무엇이랴,
유난히도 포근한 초동(初冬) 날씨에
더없이 옥빛 귀한 이 하늘
고마와라, 이런 날도 있었던가
좋았던 날은 하마 가고 없는데.
경건히 고개 숙여
지팡이를 다시 짚는다.


☞ 끝나는 계절 ☜

쌀을 안치는 소리가 부엌에 들린다.
짧은 해는 빨리도 기울고
밖에 놀던 아이도 집으로 돌아온다.
들어서며 부르는 갓 배운 콧노래
저무는 날은 오히려 밝기도 하다.
나에게도 한 계절은 끝나고 있다
기울기엔 상기 이른 한 계절이.

아침에 갈아입은 와이셔츠도
후줄히 때가 묻었다.
청마루 한 모서리
어느 날의 잊었던 단추를 주우면
멀리 울리는 열차의 기적 소리.
부엌에 끓는 찌개 소리가
노을에 한창 풀어 섞이고 있다.


☞ 금조비가(金鳥悲歌) ☜

* 1 *

어느 고도(古都)의 박물관에서
마침내 너를 보았다, 황금(黃金)의 새여
혹은 보았다고 여전
지금도 생각고 있다.
그리는 크지 않는 순금(純金)의 몸매
접동이나 방울새 크기만 할까.
허공에 고개를 치껴 들고
방금도 울 듯이 머문 너의 부리,
너의 눈은 뜨고 있는 잠인가
자고 있는 생시인가.
그 사이도 수없이 꽃잎은 피고 지고
맺어서 떨어진 열매들의 행방.
그 사이도 허다히 왕조는 바뀌고
발굽 소리는 요란히 지나간 뒤에도
여전 울 듯이
부리는 허공에 머물고 있다.
간혹은 내
하염없는 생각에 잠길 때면
무시로 나의 눈에 너는 어리고
울 듯이 굳어 버린 너의 울음에
쭝긋이 나귀의
귀를 나는 모아 본다.



* 2 *

오늘도 생각 속에 너를 대하여
무엇을 나는 바랄 것인가
황금의 새여,
그렇다, 죽기 위해 태어난
그런 몸은 아니라 너는 말하리라.
그 말도 맞는 말이다
경우에 따라선
그 말이 옳을는지 모른다.
자고로 시인은 무어라 이르던가,
너는 죽지 않는 새
남들은 다 가도 너는 가지 않는 새
그런 새라
시인의 한 사람은 말하더라.



* 3 *

이승에 태어나 누가 한두 번
살고 싶은 저
영생을 바라지 않았던가.
보라, 망가지듯 두드리는
건반의 두 손을,
미친 듯 휘두르는 백발의 지휘봉을,
쫓기듯 또한 쫓듯
줏어 넘기는 책장을
핏발 선 독서의 눈을.
보라, 신들려 떠는 굿소리
구슬픈 저 염불 소리를
목메인 기도의 탄식을,
보라, 우수수 가랑잎에
남은 잔을 비우고
나룻배를 부르는 행인의 목소리를.
누가 한두 번
살고 싶은 저
영생을 바라지 않았던가.



* 7 *

한 번의 봄을 살은 사람은
한 번의 가을이면 되는 일
무엇을 또 바라랴.
한 번의 꽃을 피운 사람은
한 번의 가는 길이면 되는 일
무엇을 또 바라랴.
해 져도 해 떠도
그저 멍멍할 따름.
눈이 탄 사람은 탄 채
멀건 들판을 헤매이고
아니면 웅크려 식은 간(肝)이나 쪼으며
기억의 아침 노을
그런 저녁 노을을
시리게 다시 또 맞이할 뿐이다.



* 8 *

황금의 새여, 이젠 눈을 열어라
열어서 마침내 울어 보아라
소리없는 울음에
나의 귀는 열려 있으니
살아보고 사라질 목숨의 향기로
울어서 참다운 너의 네가 되어라.
그런 뒤면 또 한번
천 년을 잠들면 어떠랴
만 년을 잠들면 어떠랴.
뜻 있는 사람이 그 때도 살아 있다면
그들은 그들의 슬픔 속에서
간절히 또한 너의 울음을 원할 것이니
황금의 새여
오늘은 오늘의 눈을 열어 울어라
황망히 살다 가는 이 행인을 위하여
다하지 못한 그의 꿈을 위하여
슬퍼하지도 안하지도 말고서.


☞ 가을 햇살 ☜

우리들이 둘러 앉은 이 언저리
나무잎은 물들어
더러는 떨어지고 더러는 남아
가지에 무늬 맑게 설렁이고 있다.

보아라, 천지에 부드러운 이 햇살을
인제는 한이 없는 가을 이 햇살을.
이런 날의 한 때를 위해
사람은 여태 살아 왔던가.

해는 짧아라, 가을날의 오후
서너 시 혹은 반
이런 볕이 너무도 아까워
사람은 쉬이 자리를 뜰 수 없구나.

왕릉(王陵)이 보이는 풀밭에
상기도 무늬 맑은 웃음은 감돌고
한동안 그지없이 목숨은 기쁘다
기뻐서 도리 없이 목숨은 슬프다.


☞ 마음 이 한 때 ☜

피며는 그저
피는 줄만 알았던 꽃잎들
여물면 그저
여문 줄로만 알았던 열매들,
이들은 왜 하나같이
더없는 귀한 걸로 보이는 것일까.
피며는 그저
피는 줄로만 알았던 노을의 분홍빛
변하면 그저
변한 줄만 알았던 보라며 수묵 어린 빛,
고목(古木)은 한 그루
노을 다한 하늘에 우뚝 서 있고
두어 채 방금
불이 돋은 창문들,
이들은 왜 하나같이
더없는 의미로만 보이는 것일까
기쁘고도 서러운 마음 이 한때.


☞ 나의 손 ☜

나의 손은 크도 작도 않은 손
알맞게 하나님이 만드신 손
큰 일은 못해도
작은 일은 더욱 못하는 손.
착한 일은 못해도
악한 일은 더욱 못하는 손.

이런 손에 죄가 있다면
분수대로 산 죄밖에.
넘보지도 얕보지도 않고
나름으로 산 죄밖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프나 고프나
나름으로 산 죄밖에.

어느 정도 쥐어도 보고
털털 털어도 본 손
털어도 별 먼지는 안 나는 손
무엇인가 만들고는 부수고
부수고는 다시 만들고
흩어진 장기알도
챙겨서는 다시 두고

모기 파리는 그 자리에 때려 잡아도
함부로 살생은 안한 손
약손은 못되어도
독손은 더욱 못되는 손
어쩌다 꽃을 꺾어도
병에 담기 위한 것.
담아서 짧은 이승
마음 주기 위한 것.

나의 손은 크도 작도 않은 손
알맞게 하나님이 만드신 손.
오늘도 이 손으로 시를 씁니다.
나의 시를 말이지요,
오늘도 이 손으로 코를 풉니다.
오늘도 이 손으로 도장을 찍습니다.
어떠캅니까.
하나님은 아시리라 믿고
손톱을 깎습니다.

==================================================

목          숨                                                          - 신동집 -

 

 

목숨은 때 묻었다

절반은 흙이 된 빛깔

황폐한 얼굴엔 표정(表情)이 없다.

 

나는 무한히 살고 싶더라.

너랑 살아보고 싶더라

살아서 죽음보다 그리운 것이 되고 싶더라.

 

억만광년(億萬光年)의 현암(玄暗)을 거쳐

나의 목숨 안에 와 닿는

한 개의 별빛

 

우리는 아직도 포연(砲煙)의 추억(追憶) 속에서

없어진 이름들을 부르고 있다.

따뜻이 체온(體溫)에 젖어 든 이름들

 

살은 자(者)는 죽은 자(者)를 증언(證言)하라

죽은 자(者)는 살은 자(者)를 고발(告發)하라

목숨의 조건(條件)은 고독(孤獨)하다.

 

바라보면 멀리도 왔다마는

나의 뒤 저 편으로

어쩌면 신명나게 바람은 불고 있다.

 

 

 

 

어느 하많은 시공(時空)이 지나

모양 없이 지워질 숨자리에

나의 백조(白鳥)는 살아서 돌아오라.

 

               - <서정의 유형>(1954) -

 

해        설

 

  [ 개관정리 ]

◆ 성격 : 존재론적, 의지적, 주지적, 형이상학적, 명상적

◆ 표현 : 명령형 종결어미를 통한 선언적인 표현(화자의 반성에의 의지를 강화하는데 기여)

             형이상학적인 계열의 시임에도 불구하고, 발상이나 언어구사에 있어 생경함이나 난해함이 없음

◆ 중요 시어 및 시구

  * 1연 → '목숨이 때묻었다'는 '흙이 된 빛깔'과 '황폐한 얼굴' 등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표현임.

               전쟁으로 인한 목숨과 생명에 대한 회의로부터 비롯됨.

  * 산 자는 죽은 자를 증언하라 → 살아 남아 있는 자는 허무하고 처절하게 죽어간 생명에 대한 증언을 하라.

                                                  전쟁의 비극성을 고발하고 있다.

  * 죽은 자는 산 자를 고발하라 → 죽은 자들이 고발할 내용(온갖 방법으로 생존을 도모했던 구차한 모습)에

           대해 반성하라.  살아 남은 자의 부끄러움이 나타남.

   * 목숨의 조건은 고독하다 → 살아 남은 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이 바로 죽은 자에 대한 죄의식이기에, 목숨

        의 조건은 고독한 것이다.(삶의 의미는 죽음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을 통해 더욱 아름다울 수 있음)

   * 백조 → 반성적 삶에 투철함으로써 성취된 삶. '순수한 생명'의 심상

 주제 ⇒ 생명의 고귀함과 순수한 삶에 대한 동경

 

  [ 시상의 흐름(짜임) ]

◆ 1연 : 목숨의 황폐함(전쟁에서 살아남은 자의 죽음보다 못한 삶)

◆ 2연 : 삶에 대한 소망(생명에의 질긴 의욕)

◆ 3연 : 목숨의 소중함

◆ 4연 : 죽은 목숨에 대한 애틋함.

◆ 5연 : 목숨의 조건(살아남은 것에 대한 치열한 반성적 자세)

◆ 6연 : 미래의 삶에 대한 낙관적 전망

◆ 7연 : 순수한 삶의 구현 소망

 

  [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 

시 <목숨>은 1950년대 한국의 특수상황에서 거둔 수확의 하나로,

전쟁시,

참여시 또는 순수시와 모더니즘 계열의 시가 범람하는 분위기에서 원격조정된

'신동집 스타일'의 한 표본을 보게 되는 작품이다.

전쟁이라는 극한적 상황에서 살아남은 자의 존재론적 갈등이 형상화된 작품인데,

시적 화자는 전쟁이라는 민족적 수난과 폐허 속에서도 삶의 의욕과 목숨의 영원을 마침내 깨닫게 된다.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고 존재론적 갈등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1연에서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의 얼굴에서 죽음보다 못한 삶의 황폐함 곧,

절망과 죽음의 상황을 발견해 내고 있다.

2연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목숨에 대한 강한 열망을 보이며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3연에서는 존재론적 한계에서 맞이하게 되는 인간 존재의 구원의 빛을 발견하고 있다.

기나긴 고통의 시간을 거치면서도 강인한 생명력의 뿌리를 내리며

빛을 발하는 소중한 개인의 생명의 불빛을 보는 것이다.

4연에서는 전쟁을 치르면서 육체는 사라지고 이름으로만 남아있는 죽은 자들의 흔적이 제시되고 있다.

5연은 시대를 꿰뚫어 보는 자의 예지가 응결된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진정한 삶의 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해 선언적 어투를 사용한다.

인간다운 삶이란 육체적인 생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전쟁이라는 비극적 상황에서 죽어간 자들의 처절한 삶을 증언하고 온갖 방법으로

생존을 도모했던 구차한 모습들을 반성할 때에 비로소 진정한 삶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목숨의 조건은 고독하다.'는 단언적 표현은 이러한 치열한 반성적 자세를 갖출 때

필연적으로 찾아들 수밖에 없는 존재의 고독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6연과 7연에서는 시간의 흐름으로 인해,

전쟁의 포화로 점철된 시대와는 또다른 시대가 올 수 있다는 낙관적 전망이 제시된다.

자신의 목숨이 빚어낼 한많은 생애가 모양도 없이 지워지는 죽음의 순간에

'나의 백조'로 표상되는 자신의 진정한 삶이 소생하기를 기원한다.

 

['목숨의 조건은 고독하다'라는 구절의 의미에 대해서] : 김윤식 교수의 시 특강에서

전쟁은 평범한 사람들의 목숨을 순식간에 앗아 간다.

그들의 죽음은 필연적이기보다는 우연적이다.

어떤 사람은 살고 어떤 사람은 죽는다.

삶과 죽음은 순식간에 한치의 차이로 결정된다.

이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누가 총을 맞을런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목숨의 필연성과 소중함을 믿었던 사람들은 여기서 실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삶과 죽음의 차이,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의 광포한 속성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아무런 죄도 없이 죽어 간 자를 위해 산 자가 할 일이란

그 죽음의 우연성과 전쟁의 비극성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것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죽은 자에 대해 부끄럽고 죄가 된다는 인식 때문이다.

산 자와 죽은 자는 결코 만나지 못한다.

산 자는 살아 있어도 산 것이 아니다. 목숨은 고귀하고 존엄하다.

그러나 산 자는 그 목숨 때문에 죽은 자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살아 있음이라는 삶의 조건 자체가 부끄러움의 원천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 고귀한 목숨을 전쟁은 한순간에 제거해 버린다.

산 자의 고독은 목숨을 지닌 것의 부끄러움과 인간의 삶의 조건의 허망함 때문에 생겨난다.

 

 

 

[출처] 신동집(申瞳集)|작성자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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