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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평면 배다리 출신,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의 시인 황지우 교수가 최근 광주나들이를 했다. 올해 들어 처음으로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지난 16일 저녁, 광주 광산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토크 콘서트 '지금, 윤상원 with 황지우'에는 400여 시민들이 눈 속을 뚫고 달려와 밤중까지 자리를 지키며 윤상원 열사의 정신과 오늘의 의미를 곱씹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 콘서트의 이야기꾼으로 초대된 황지우시인은 "오늘 우리는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는 윤 열사의 마지막 말을 상기하며 '윤상원 정신'이 지금 이 시대에 꼭 필요하다는 말을 이어갔다. 막혀가는 민주주의의 숨통을 윤상원 정신으로 틔워내자는 것이다.
네. 작년 8월에 나갔다가 올해 7월에 귀국했습니다. 주변 친구들이 '생계형 망명'(웃음)이라 놀려대기도 했지만, 장춘에 있는 길림대학교 한국어과에서 1년 동안 한국문학 강의하면서 놀다 왔어요. 중국 길림성지방은 겨울에 보통 영하 30도까지 내려간다고 하는데 불편하지 않으셨어요? 꼭 중국에 가신 이유가 있으신지요? 장춘, 하얼빈, 대흥안령 등 만주 일대의 겨울을 최소 옷 다섯 벌을 입고 지냈어요. 노출된 얼굴 살갗을 면도날로 긋는 것 같은 그 혹독한 추위가, 돌이켜 보면, 뭐랄까, 중독성 같은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리워집니다. 제 첫번째 시집에서부터 '길림'이나 '봉천' 같은 낯설고 먼 지명에 대한 동경이 언뜻언뜻 비춰나는데, 우리 젊은 시절에 그런 거 있었잖습니까? 가슴에 밀서 하나 품고 만주 설원을 가로 질러 가던 우리 독립군에 대한 환상 같은 거 말예요. 그곳에서 무엇을 하시고, 또 시인의 눈으로 무엇을 보셨습니까? 장춘은 우리 식민지 강점기 때 일본 관동군 사령부가 있던 만주국 수도 신경이었죠. 나쓰메 소세키 등이 만주 기행을 통해 대륙 이주 러시를 조성하면서 우리 문학예술에서도 소설가 염상섭, 시인 백석, 작곡가 김동진, 김순남 등이 한때 거쳐 간 흔적들이 여기저기 있더군요. 우선 저는 필담 외에는 말이 안 통하니까 완전히 고립된 개인으로서 어슬렁거리며 응시하는 익명의 산책자로만 지냈죠. 저로서는 오랜만에 보장받은 이 단절이 행복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목격하지 않을 수 없는 '오늘의 중국'. 그건 두려움이었어요. 거리의 붉은 고딕체 표어들이 '문명(文明)'과 '과학기술(科學技術)'에 집중되어 있는데, 앞으로 이 표어가 현실이 될 때 14억 인구로 소용돌이치는 중국 현대성의 블랙홀 가장자리에 근접해 있는, 그것도 분단된 한반도가 더 또렷이 바라다 보였습니다. 네. 그렇죠. 그럼 화제를 좀 바꿔서… 너무나 당연한 결과지만 대학복귀를 우선 축하드리고요. 당시 임기가 아직 남은 총장직을 사퇴한 이유와 비슷한 상황을 겪은 다른 이들도 많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이 정부 들어 대학을 비롯한 문화예술계가 당면한 어려움들은 무엇입니까? 이 정부는 건들어서는 안 될 것들, 즉 강과 문화를 건들었습니다. 그것들은 스스로 숨 쉬는 것들입니다. 문화예술은 근본적으로 가만 둬야 스스로 흐름을 만들고 창의성의 젖을 선사하는 거 아닙니까? 임기가 보장된 현대미술관 관장,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그리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을 마치 포클레인으로 찍어 긁어내듯이 했을 때 저는 어떤 눈먼 권력의 도취상태 같은 것을 느꼈는데요. 특히 이른바 '한예종 사태'에 대해 UN 문화 분과가 이런 식으로 "정부가 대학을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성명을 표하기도 했지만, 전 그때 이거는 우리 문화예술계에 가해지는, 매우 우려스러운 일종의 '반달리즘'(문화파괴행위)이라고 말한 바 있죠. 작년 대법원 승소 판결에 의해 올 9월에 학교로 복귀했습니다. 돌아와 보니 그 활력에 넘쳤던 학교 분위기가 어딘가 우울해요. 냉소주의가 만연해 있는 것 같고요. 올해에 4명의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카이스트에 이어 한예종도 자살 클로스터가 되는 게 아닌가, 참으로 염려됩니다.
이번 토크쇼에서 "질식해가는 민주주의의 숨통을 윤상원 정신으로 틔워내자"고 하셨는데요. 윤상원 정신에 대해 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주시겠어요?
네. 작년 8월에 나갔다가 올해 7월에 귀국했습니다. 주변 친구들이 '생계형 망명'(웃음)이라 놀려대기도 했지만, 장춘에 있는 길림대학교 한국어과에서 1년 동안 한국문학 강의하면서 놀다 왔어요.장춘, 하얼빈, 대흥안령 등 만주 일대의 겨울을 최소 옷 다섯 벌을 입고 지냈어요. 노출된 얼굴 살갗을 면도날로 긋는 것 같은 그 혹독한 추위가, 돌이켜 보면, 뭐랄까, 중독성 같은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리워집니다. 제 첫번째 시집에서부터 '길림'이나 '봉천' 같은 낯설고 먼 지명에 대한 동경이 언뜻언뜻 비춰나는데, 우리 젊은 시절에 그런 거 있었잖습니까? 가슴에 밀서 하나 품고 만주 설원을 가로 질러 가던 우리 독립군에 대한 환상 같은 거 말예요. 장춘은 우리 식민지 강점기 때 일본 관동군 사령부가 있던 만주국 수도 신경이었죠. 나쓰메 소세키 등이 만주 기행을 통해 대륙 이주 러시를 조성하면서 우리 문학예술에서도 소설가 염상섭, 시인 백석, 작곡가 김동진, 김순남 등이 한때 거쳐 간 흔적들이 여기저기 있더군요. 우선 저는 필담 외에는 말이 안 통하니까 완전히 고립된 개인으로서 어슬렁거리며 응시하는 익명의 산책자로만 지냈죠. 저로서는 오랜만에 보장받은 이 단절이 행복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목격하지 않을 수 없는 '오늘의 중국'. 그건 두려움이었어요. 거리의 붉은 고딕체 표어들이 '문명(文明)'과 '과학기술(科學技術)'에 집중되어 있는데, 앞으로 이 표어가 현실이 될 때 14억 인구로 소용돌이치는 중국 현대성의 블랙홀 가장자리에 근접해 있는, 그것도 분단된 한반도가 더 또렷이 바라다 보였습니다. 이 정부는 건들어서는 안 될 것들, 즉 강과 문화를 건들었습니다. 그것들은 스스로 숨 쉬는 것들입니다. 문화예술은 근본적으로 가만 둬야 스스로 흐름을 만들고 창의성의 젖을 선사하는 거 아닙니까? 임기가 보장된 현대미술관 관장,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그리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을 마치 포클레인으로 찍어 긁어내듯이 했을 때 저는 어떤 눈먼 권력의 도취상태 같은 것을 느꼈는데요. 특히 이른바 '한예종 사태'에 대해 UN 문화 분과가 이런 식으로 "정부가 대학을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성명을 표하기도 했지만, 전 그때 이거는 우리 문화예술계에 가해지는, 매우 우려스러운 일종의 '반달리즘'(문화파괴행위)이라고 말한 바 있죠. 작년 대법원 승소 판결에 의해 올 9월에 학교로 복귀했습니다. 돌아와 보니 그 활력에 넘쳤던 학교 분위기가 어딘가 우울해요. 냉소주의가 만연해 있는 것 같고요. 올해에 4명의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카이스트에 이어 한예종도 자살 클로스터가 되는 게 아닌가, 참으로 염려됩니다. 80년대 한국문학은 숫제, 광주 오월에 내가 거기에 없었다는 알리바이에 대한 죄의식의 표현이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겁니다. 미안함, 죄책감, 이런 것이 지나쳐 피하고 싶은 기억, 부담감, 나중에는 또 광주야? 하는 식상함까지… 어느 정치학자는 그때의 광주 시민들이 보여준 '태도'를 '절대 공동체'라는 개념으로 해석하는 걸 읽은 적 있는데, 그 코뮌의 한 가운데 윤상원을 비롯해 도청의 마지막 날을 지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얼마든지 그 자리에 안 있을 수 있었지요. 역사가 피치 못할 숙명이 아닌 자유의지로서 누군가를 호명할 때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그분들… 사람들에게서 어쩌다 정전기처럼 나타나는 '숭고'의 광채를 그들은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우리 나이 육십인데, 그 당시 스물예닐곱 되었을 청년 윤상원은 이 절대적 공동체의 대명사라 하겠습니다. 민주주의의 잔인한 나무가 요구하는 피를 기꺼이 헌혈한 그의 자유의지와 숭고, 그게 저한테는 윤상원 정신이 아닌가 합니다. 아무래도 오월 정신의 핵심에는 정치적인 의미가 크겠지요. 민주화 이후의 한국 민주주의에 사실 우리가 상당 정도 안도하거나 안이하게 생각한 측면이 있죠. 반성해야죠. 어쨌든 그러는 사이 오월 정신도 바람 빠진 풍선처럼 좀 시들해진 듯한 느낌? 그러나 우리가 청춘을 바쳤던 민주주의가 얼마나 연약한 것인가를 실감시키는 오늘의 상황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금 오월 정신으로부터 답을 찾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또 이제는 오월 정신이 어떤 불의한 외압에 대한 반작용으로 불끈 치솟는 것이 아니라 외압이 없더라도 스스로 우러나오는, '작용하는 정신'으로 퍼졌으면 합니다. 제가 네 살 때 일가족이 광주로 이사 나온, 전후 이농 1세대로서 저의 탯자리 해남을 고향 이야기로 말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습니다. 다만 어머님 말씀과 대조해 보면 제 기억이 두 살 무렵까지 소급한다는 걸 알았고, 두륜산 남사면 기슭이 거침없이 내리뻗어 너른 들녘을 치마폭처럼 주름지게 펼쳐놓고 바다로 쑥 들어가 버리는 북평면 배다리 일대의 풍경이 저의 정서적 원형질을 이뤘다 하겠습니다. 제 첫 시집 첫 번째 시, <연혁>은 그 빼어난 명승을 배경으로 한 겁니다. 언젠가 문인 친구들과 그곳 여행을 갔을 때 "여기서 시인 하나 나올 수밖에 없네" 하는 말로 내 고향의 보답을 다 받았습니다. 시는 사춘기를 앓던 중학교 시절에 처음 썼습니다.정정 바랍니다. 전 베스트셀러 시인은 아니고요, 스테디셀러에 가깝다 해야 하나요? 제 독자의 상당수는 소위 옛날 386 세대인 거 같애요. 그들과 시대감이 같았다 할까요?그냥 멍청하게 있습니다. 가끔 '주역'도 뒤적여보고, '시경', '굴원 초사'를 기웃거리고 있죠. /김원자 편집고문·언론인·호남대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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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映畵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렬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출가하는 새
새는 자기의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자기가 앉은 가지에 자기가 남긴 체중이 잠시 흔들릴 뿐 새는 자기가 앉은 자리에 자기의 투영이 없다. 새가 날아간 공기 속에도 새의 동체가 통과한 기척이 없다. 과거가 없는 탓일까. 새는 냄새나는 자기의 체취도 없다. 울어도 눈물 한 방울 없고 영영 빈 몸으로 빈털터리로 빈 몸뚱아리 하나로 그러나 막강한 풍속으로 거슬러 갈 줄 안다. 生後의 거센 바람 속으로 갈망하며 꿈꾸는 눈으로 바람 속 내일의 숲을 꿰뚫어 본다.
거대한 거울
한점 죄(罪)없는 가을 하늘을 보노라면 거대한 거울, 이다: 이번 생의 온갖 비밀을 빼돌려 내가 귀순(歸順)하고 싶은 나라: 그렇지만 그 나라는 모든 것을 되돌릴 뿐 아무도 받아주지는 않는다
현기증나는 거울
재앙스런 사랑
용암물이 머리 위로 내려올 때 으스러져라 서로를 껴안은 한 남녀; 그 속에 죽음도 공것으로 녹아버리고 필사적인 사랑은 폼페이의 돌에 목의 힘줄까지 불끈 돋은
벗은 生을 정지시켜놓았구나 터미널에 나가 기다리고 싶었던 그대, 아직 우리에게 體溫이 있다면 그대와 저 얼음 속에 들어가 서로 으스러져라 껴안을 때 그대 더러운 부분까지 내 것이 되는 재앙스런 사랑의 이 더운 옷자락 한가닥
걸쳐두고 싶구나 사랑한다고 한 말은 아무리 하기 힘든 작은 소리라 할지라도 화산암 속에서든 얼음 속에서든 하얀 김처럼 남아 있으리라
거룩한 식사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뼈아픈 후회
슬프다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神像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을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 ; 그것도 파워랄까, 그것마저 없는 자들에겐 희생은 또 얼마나 화려한 것이었겠는가
그 누구고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의 말을 넣어주는 바람이 떠돌다 지나갈 뿐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初經을 막 시작한 딸 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리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 ;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자의 水位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거울에 비친 괘종 시계
다음 세상에선 이렇게 살지 않겠어 이 다음 세상에선 우리 만나지 말자
......
아내가 나가버린 거실 거울 앞에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사나이가 있다 치자 그는 깨우친 사람이다 삶이란 게 본디,손만 댔다 하면 중고품이지만 그 닳아빠진 품목들을 베끼고 있는 거울 저쪽에서 낡은 쾌종 시계가 오후 2시가 쳤을 때 그는 깨달은 사람이었다
당신,이 지독한 뜻을 알기나 해? " 쾌종 시계가 두 번을 쳤을 때 울리는 실내:그는 이 삶이 담긴 연약한 막을 또 느꼈다 2미터만 걸어가면 가스벨브가 있고 3미터만 걸어가면 15층 베란다가 있다
쾌종 시계가 들어가서 아직도 떨고 있는 거울 에 담긴 30여평의 삶:지나치게 고요한 거울 아내에게 말했었다:"그래,내 삶이 내 맘대로 안 돼"
아직도 그대로 있다 석유 스토브 위 주전자는 김을 푹푹 내쉬고
발작 삶이 쓸쓸한 여행이라고 생각될때 터미널에 나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싶다 짐 들고 이 별에 내린 자여 그대를 환영하며 이곳에서 쓴맛 단맛 다 보고 다시 떠날때 오직 이 별에서만 초록빛과 사랑이 있음을 알고 간다면 이번 생에 감사할 일 아닌가 초록빛과 사랑: 이거 우주 기적 아녀
일 포스티노 자전거 밀고 바깥 소식 가져와서는 이마를 닦는 너, 이런 허름한 헤르메스 봤나 이 섬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해보라니까는 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으로 답한 너, 내가 그 섬을 떠나 너를 까마득하게 잊어먹었을 때 너는 밤하늘에 마이크를 대고 별을 녹음했지 胎動하는 너의 사랑을 별에게 전하고 싶었던가, 네가 그 섬을 아예 떠나버린 것은
그대 아버지의 슬픈 바다가 롱 숏, 롱 테이크되고; 캐스팅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나는 머리를 박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영화관을 나와서도 갈 데 없는 길을 한참 걸었다
新村驛을 떠난 기차는 문산으로 가고 나도 한 바닷가에 오래오래 서 있고 싶었다
당신은 홍대 앞을 지나갔다 내가 지도교수와 암스테르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커피 솝 왈츠의 큰 통유리문 저쪽에서 당신이 빛을 등에 지고서 천천히 印畵되고 있었다. 내가 들어온 세계에 당신이 처음으로 나타난 거였다. 그것은 우연도 운명도 아니었지만, 암스테르담은 어떤 이에겐 소원을 뜻한다. 구청 직원이 서류를 들고 北歐風 건물을 지나간 것이나 가로수 그림자가 그물 친 담벼락, 그 푸른 投網 밑으로 당신이 지나갔던 것은 우연도 운명도 아닌, 단지 시간일 뿐이지만 디지털 시계 옆에서 음악이 다른 시간을 뽑아내는 것처럼, 당신이 지나간 뒤 물살을 만드는 어떤 그물에 걸려 나는 한참 동안 당신을 따라가다 왔다. 세계에 다른 시간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들은 어느 축선에서 만난다 믿고 나는 돌아왔던 거다. 지도교수는 마그리트의 파이프에 다시 불을 넣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당신은 홍대 앞을 지나갔다. 암스테르담을 부르면 소원이 이뤄졌을지도 모른다. 마그리트 씨가 빨고 있던 파이프 연기가 세계를 못 빠져나가고 있을 때 램브란트 미술관 앞, 늙은 개가 허리를 쭉 늘여뜨리면서 시간성을 연장한다. 권태를 잡아당기는 기지개; 술집으로 가는 다리 위에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다. 그친 음악처럼.
소나무에 대한 예배
학교 뒷산 산책하다, 반성하는 자세로, 눈발 뒤집어쓴 소나무, 그 아래에서 오늘 나는 한 사람을 용서하고 내려왔다. 내가 내 품격을 위해서 너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 너 잇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것이 나를 이렇게 휘어지게 할지라도. 제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이 地表 위에서 가장 기품있는 建木; 소나무, 머리에 눈을 털며 잠시 진저리친다
바깥에 대한 반가사유
눈먼 것은 성스러운 병이다
짐자전거 지나가는 바깥을 본다. 보일까 모든 것이 이미 늦었을 때 알지만 나갈 수 없는 無窮의 바깥; 저무는 하루. 문 안에서 검은 소가 운다.
몹쓸 동경(憧憬) 잠깐 새어들어오는 틈새; 영혼의 인화지 같은 것이 저 혼자 환하게 빛난다. 컴퓨터, 담뱃갑, 안경, 접어둔 畵集 등이 공중에 둥둥 떠다니고, 천장에서, 방금 읽은 편지가 내려왔다. 이데올로기가 사라지니까 열광은 앳된 사랑 하나; 그 흔해빠진 짜증스런 어떤 운명이 미리서 기다리고 있던 다리를 그대가 절뚝거리면서 걸어올 게 뭔가. 이번 生에는 속하고 싶지 않다는 듯, 모든 도로의 길들 맨 끝으로 뒷걸음질치면서 천천히 나에게 오고 있는 그러나 설렘이 없는 그 어떤 삶도 나는 수락할 수 없었으므로 매일, 베란다 앞에 멀어져가는 다도해가 있다. 따가운 喉頭音을 남겨두고 나가는 배; 그대를 더 오래 사랑하기 위하여 그대를 지나쳐왔다. 격정 시대를 뚫고 나온 나에게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지루한 것이었다. 맞은편 여관 네온에 비추인 그대 속눈썹 그늘에 맺힌 것은 수은의 회한이었던가? "괴롭고 달콤한 에로스" 신열은 이 나이에도 있다. 혼자 걸린 독감처럼, 목 부은 사랑이 다시 오려 할 때 나는 몸서리 쳤지만, 이미 山城을 덮으면서 넓어져가는 저 범람이 그러하듯 지금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그대는, 이삿짐 트럭 뒤에 떨궈진 생을 두려워하지는 않는지. 신화와 뽕짝 사이 사랑은 영원한 동어 반복일지라도 트럭집 거울에 스치는 세계를 볼 일이다. 황혼의 물 속에서 삐걱거리는 베키오 石橋를 그대가 울면서 건너갔을지라도 대성당 앞에서, 돌의 거대한 음악 앞에서 나는 온갖 대의와 죄를 후련하게 잊어버렸다. 나는 그대 앞의 시계를 보면서 불침번을 선다. 그대 떠나고 없는 마을의 놀이터 그네에 앉아 새벽까지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다. 동경은 나의 소명받은 병이었다. 지구 위에 저혼자 있는 것 같아요. 라고 쓴 그대 편지를 두번째 읽는다.
시에게
시에 피가 돌고, 피가 끓던 시절이 있었지; 그땐 내가 시에 촌충처럼 빌붙고 피를 빨고 앙상해질 때까지 시를 학대하면서도, 딴에는 시가 나를 붙들고 놔주질 않아
세상 살기가 폭폭하다고만 투덜거렸던 거라. 피를 갚고 환한 화색을 찾아주고
모시고 섬겨야 할 터인데 세워두고 오던 날이었던가? 영암 월출산 백운동 골짜기에 천연 동백숲이 한 壯觀을 보여주는디 이따아만한(나는 두 팔을 동그랗게 만들어 보인다) 고목이 허공에 정지시켜놓았던 꽃들을 고스란히 땅 우에, 제 슬하 둘레에 내려놓았드라고! 産달이 가까운 여자후배 하나가 뚱게뚱게 걸어서 만삭의 손으로 그 동백꽃 주우러 다가가는 순간의 시를 나는 아직까지 못 찾고 있어. 상하지 않고도 피가 도는 그 온전한 시를......
늙어가는 아내에게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알 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 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집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신 벗고 들어가는 그 곳
아파트 15층에서 뛰어내린 독신녀, 그곳에 가보면 틀림없이 베란다에 그녀의 신이 단정하게 놓여 있다 한강에 뛰어든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시멘트 바닥이든 시커먼 물이든 왜 사람들은 뛰어들기 전에 자신이 신었던 것을 가지런하게 놓고 갈까? 댓돌 위에 신발을 짝 맞게 정돈하고 방에 들어가, 임산부도 아이 낳으러 들어가기 전에 신발을 정돈하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뛰어내린 곳에 있는 신발은 생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것은 영원히 어떤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다만 그 방향 이쪽에 그녀가 기른 熱帶魚들이 수족관에서 물거품을 뻐끔거리듯 한번의 삶이 있을 따름이다
돌아보라, 얼마나 많은 잘못 든 길들이 있었는가 가서는 안 되었던 곳, 가고 싶었지만 끝내 들지 못했던 곳들; 말을 듣지 않는, 혼자 사는 애인 집 앞에서 서성이다 침침한 밤길을 돌아오던 날들처럼 헛된 것만을 밟은 신발을 벗고 돌아보면,생을'쇼부'칠수 있는 기회는 꼭 이번만은 아니다
두고 온 것들 건성으로 아는 체하며, 미안할까봐, 대충대충 화답하는 동안 나는 기실 그 빈말들한테 미안해,
창문을 좀 열어두려고 일어난다.
또다시 핸드폰이 울리고, 그가 돌아간 뒤 부끄러워해야 할 것들, 지켰어야만 했던 것들과 갚아야 할 것들;
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세상에다가 그냥 두고 왔을꼬! 이별을 깨끗하게 못해준 사람, 아니라고 하지만 뭔가 기대를 했을 사람을 그냥 두고 온 거기, 訃告도 닿을 수 없는 그곳에
제주 風蘭 한점 배달시키랴?
제주 바닷가를 걸어간 발자국
새로운 발견 같은, 그런 기사만 눈여겨보게 되대이. 발견했다는 일면 톱기사를 식탁에서 읽다가 김치 썰던 주방용 가위로 스크랩 해두었어; 그때 한 인간이 빠르게 내 옆을 스쳐 지나가더라고, 어디 먹을 거 없나...... 하는 그런 필사적인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돌칼 들고 5만년 전의 바람 속으로 들어가는데 내가 맡은 바다냄새를 킁킁거리며 그 근처에서 풀을 뜯던 말들이 고개를 돌려 일제히 이쪽을 넘보는 거야 5만년 후의, 유리 깔린 내 식탁으을...... 5만년 뒤 헌 쓰리빠 같은 발자국 화석을 눌러놓은 몸이, 그 한 몸이 다음 몸을 무수히 복제하여 나에 이른 이 냄새, 수저를 들어올리는 손의 이 공기에 대한 느낌; 아, 그 맣은 새들이 내 발자국 주위로 성가시게 내려앉고 아, 살아야 해, 살아야 해!하면서
실은 나는 얼마나 많이 이미 살었등고! 전두환씨 아들의 괴자금 170억 사건; 나는 식어버린 된장국물을 후루룩 마셨어.
황지우 黃芝雨 (1952. 1. 25 - )본명 황재우
1952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나 1968년 광주제일고교에 입학했다. 1972년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여 문리대 문학회에 가입,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1973년 유신 반대 시위에 연루, 강제 입영하였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 1981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제적되어 서강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1985년부터 한신대학교에서 강의하기 시작하였고 1988년 서강대학교 미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하였다. 1994년 한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다가 1997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로 있다.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연혁(沿革)》이 입선하고, 《문학과 지성》에 《대답없는 날들을 위하여》를 발표, 등단하였다.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는 형식과 내용에서 전통적 시와는 전혀 다르다. 기호, 만화, 사진, 다양한 서체 등을 사용하여 시 형태를 파괴함으로써 풍자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극단 연우에 의해 연극으로 공연되었다. 《나는 너다》(1987)에는 화엄(華嚴)과 마르크스주의적 시가 들어 있는데 이는 스님인 형과 노동운동가인 동생에게 바치는 헌시이다. 또한 다른 예술에도 관심이 많아 1995년에 아마추어 진흙조각전을 열기도 하고 미술이나 연극의 평론을 쓰기도 하였다. 《게눈 속의 연꽃》(1991)은 초월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노래했으며《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는 1999년 상반기 베스트셀러였다. 《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는 생의 회한을 가득 담은 시로 대중가사와 같은 묘미가 있는 시집이다. 이 시집에 실려 있는 《뼈아픈 후회》로 김소월문학상을 수상했고 시집으로 제1회 백석문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시는 '시 형태 파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정치성, 종교성, 일상성이 골고루 들어 있으며 시적 화자의 자기 부정을 통해 독자들에게 호탕하되 편안한 느낌을 준다. 또한 1980년대 민주화 시대를 살아온 지식인으로서 시를 통해 시대를 풍자하고 유토피아를 꿈꾸었다.
그 밖에 《예술사의 철학》 《큐비즘》등의 저서가 있고, 《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 》(1985),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1995), 《등우량선》(1998) 등의 시집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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