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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중국조선족문학 개요
2016년 01월 22일 01시 17분  조회:5167  추천:0  작성자: 죽림




연변 조선민족문학 개요



권   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과 때를 같이하여 발전의 궤도에 들어선 당대 연변 조선민족문학은 이미 50여년의 역정을 걸어왔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이 민족대가정의 어엿한 일원으로 역사무대에 진출한 조선민족인민은 《중화인민공화국헌법》에 토대한 《중화인민공화국 민족구역자치실시강요》의 각항 규정에 좇아 1952년 9월 연변에다 조선민족의 자치주를 세우고 민족구역자치를 실시하게 되었다. 연변조선민족자치주가 성립된 후 이곳 조선민족은 주인공적지위를 확보하면서 본 민족의 의지에 좇아 정치, 경제, 문화사업을 규획, 발전시켜 나갔다. 그리고 자치주내에서는 자치민족인 조선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첫째가는 관용언어문자로 규정하였다. 연변에서 조선민족자치의 실시는 이곳 조선민족의 생활과 운명에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하게 하였다.

연변 조선민족은 바로 이런 주어진 자주권리에 좇아 본 민족의 문화전통과 유산의 토대위에서 민족의 생활과 지향을 대언한 문학을 창조, 발전시켜나가기에 진력하였다. 아래에 당대 연변조선민족문학발전의 실제에 좇아 1949년으로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시기의 문학을 대체로 1949년으로부터 1966년에 이르는 17년시기, 1966년으로부터 1976년에 이르는 《대동란》시기, 1976년으로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새로운 역사시기로 나누어 고찰하려 한다.



건국 후 연변에 이루어진 새로운 현실은 조선족작가들에게 삶의 보람과 새로운 지향으로 가슴 벅차게 하였고 문학창작의 적극성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이때 우리의 작가들은 문학창작활동을 더욱 조직적으로 벌려나가기 위하여 1950년 1월 기타 문예가들과 함께 연길에서 연변문예연구회를 조직하였다. 이 연구회는 당시 분산상태에 있던 본지 작가들간의 단합을 도모하고 문학창작에 나서게 하는 데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후 당시 정세발전의 수요에 응하여 연변문예연구회를 해소하고 일련의 준비과정을 거쳐 1953년 7월에는 연변문학예술계연합회를 창립하였으며 또한 그의 기관지로 《연변문예》를 간행하였다. 그리고 1956년 8월에는 중국작가협회연변분회를 내오고 문학월간지 《아리랑》을 창간하였다.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는 작가들로 하여금 더욱 적극적으로 문학창작에 나서게 함에 있어서 그리고 문학신진들을 육성함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1949년으로부터 1966년에 이르는 이 시기에 연변 조선민족문학은 자기의 발전행정에서 오류적인, 정치, 문예노선의 간섭으로 하여 실로 적지 않은 시련을 겪으면서 곡절적인 역정을 걸어나왔다. 1956년 전국 범위 내에서 전개한 영화 《무훈전(武訓傳)》에 대한 비판운동으로부터 1954년의 《홍루몽》연구에 대한 비판운동, 1955년 소위 《호풍집단》에 대한 투쟁과 1957년 하반 년에 진행된 문예계에서의 반우파(右派)투쟁의 확대화, 그에 뒤이은 1958년의 《대약진》, 《인민공사화》운동, 1959년의 반우경투쟁과 문예계에서의 《수정주의사조》에 대한 비판운동, 《지방민족주의를 반대하는 것을 중심으로 한 민족정풍운동》등으로 이어지는 부단한 정치운동은 갓 발전궤도에 들어선 우리 문학의 발전을 저해하고 파괴하였다. 이런 연이은 정치운동 가운데서 문학에서의 정치성이 절대화되고 시비가 전도됨에 따라 적아관계가 혼동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되자 1957년에 이르러서는 당시 문단에서 활약하던 중견들인 김학철, 김창걸, 이욱, 채택룡, 김예삼, 최정연, 이홍규, 김순기, 서헌, 등이 선후로 당치 않은 죄명을 쓰고 창작권리를 박탈당하였으며 그 중 일부 작가들은 농촌벽지에 《유배》당하였고 더러는 자진한 예도 있다. 이토록 많은 중견작가들이 정치적으로 단속되고 무시로 덮쳐드는 정치운동과 비판운동 등으로 말미암아 우리 문단은 안정된 문화적 환경을 확보할 수 없었다. 그런데다 또한 문학창작에 대한 지나친 정치적 요구와 간섭은 왕왕 작가들의 창작 자유를 압제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렇게 되자 당시 문단에는 정치과업이거나 서책을 도해하는 식의 개념화, 도식화한 작품들이 속출하였다.

이 17년 시기에 상술한바와 같은 어려운 상황과 시련 속에서도 우리의 작가들은 아주 열성적으로 문학창작에 나섰다. 이런 작가들의 노력에 의하여 시문학과 소설, 산문, 희곡 등 분야에서 나름대로의 창작성과를 이룩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우리 시문학은 건국 전부터 시창작에 나선 이욱, 김예삼, 채택룡, 이성휘, 주선우, 임효원 그리고 새로 시단에 나선 김철, 김성휘, 조용남, 윤광주, 김태갑, 이상각 등에 의하여 활성화의 길에 들어섰다. 당시 시인들의 노력으로 하여 종합시집《해란강》(1954년),《창작선집》(1956년),《청춘의 노래》(1959년),《아침은 찬란하여라》(1961년),《푸른 잎》(1962년),《변강의 아침》(1964년),《연변시집》(1964년)이 출간되었다. 이밖에 시인들의 자선시집 이를테면 이욱의《고향사람들》(1957년),《연변의 노래》(1957년),《장백산하》(1959년), 주선우의《잊을 수 없는 여인들》(1957년), 임효원의《진달래》(1957년), 이민창의《김옥희와 팔거북》(1957년), 김철의《변강의 마음》(1957년) 등이 선후로 나왔다.

이 시기의 시작들에는 주로 변혁기에 처한 현실생활의 이모저모, 오늘의 새로운 역사를 펼치기 위하여 시대의 앞장에 선 선구자, 향도자들에 대한 다함없는 송가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지난날 겨레의 해방을 위하여 몸바쳐 싸운 선열들을 추모하고 인민대중의 고상한 풍모를 찬미, 구가한 시편들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이밖에 현실에 나타난 부정부패 등 암흑면을 고발하고 풍자한 시편들과 애정, 윤리 등의 소재를 다룬 시작들도 가끔 나왔었다. 상기 주제들에 바쳐진 이 시기의 대표작들로는 서정시《어머니와 애기》(이욱),《지경돌》(김철),《피보다도 진한 눈물이》(설인),《산간일경》(윤광주),《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조룡남), 《고동하 시초》(김성휘),《옥중의 노래》(김태갑),《열사비》(김창석),《첫사랑》(주선우),《아, 산딸기는 익어가건만》(임효원) 등을 들 수 있다.

1949년부터 1966년에 이르는 17년 사이에 시문학분야는 일정한 성과들을 거두었으나 또한 오류적 노선의 교란을 받아 실로 평탄치 않은 길을 걸으면서 시련을 겪었다. 이때 정치성을 절대화하고 예술적 민주와 시인의 개성이 짓밟히게 됨에 따라 시단에는 시적 자아가 결여된 정책풀이식 시들이 범람하였으며, 현실의 암흑면을 고발하거나 애정, 윤리 등의 제재는 거의 금기적인 것으로 치부되었고 시작원리와 예술기법 등의 탐구 등은 아예 도외시 당하는 상태에 처하여 있었다.

건국이후 소설문학은 새로운 사회적 현실과 더불어 발전의 길에 들어섰다. 건국 후 소설창작에 나선 작가들로는 건국전 시기부터 소설을 발표하던 김학철, 김창걸, 염호렬, 백호연 등과 새로 문단에 나선 이근전, 이홍규, 박태하, 최현숙 등이다. 이 시기에 단편소설선집《세전이 벌》(1954년),《창작선집》(1956년),《빨간 다리아》(1958년),《병상에 핀 꽃송이》(1959년),《장화꽃》(1962년),《봄날의 이야기》(1962년)와 산문집《강철》(1958년),《푸른 전야》(1965년)등이 출판되었다. 그중 대표적 작품으로는 해방된 농민들의 희열과 지향을 묘사한 김창걸의 단편소설《새로운 마을》, 염호렬의《소골령》(이상·1950년), 새생활과 고상한 품성을 격정적으로 노래한 김학철의《새집 드는 날》(1953년),《고민》(1956년), 새시대 신형농민의 형상창조에 모를 박은 이근전의《과일 꽃 필 무렵》(1954년), 초등학교 교원의 미덕과 풍모를 구가한 백호연의《꽃은 새 사랑 속에서》, 애정을 소박하고 다감하게 노래한 최현숙의《나의 사랑》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지난날의 역사시대를 거시적으로 포착하고 폭넓게 예술화하려는 작가들의 노력에 의하여 선후로 장편소설《해란강아 말하라》(김학철·1954년),《범바위》(이근전·1962년), 중편소설《번영》(김학철·1955년), 중편소설《꽃삼지》(김동구·1957년) 등이 출판되었는데 이 작품들은 일부 미흡점을 동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 연변조선민족문학에서 처음으로 나온 중·단편들이라는 데서 중시를 받고있다.

이 시기 소설문학도 기타 문학분야와 마찬가지로 오류적인 문예노선과 연이은 정치운동으로 하여 저해를 받았다. 소설창작에서의 정치성의 강요는 작가들의 개성을 말살하고 진정한 예술적 추구를 하지 못하게 하였다. 따라서 소설창작에서의 주제는 단일화 도식화되고 현실을 미화하는 경향에 흘렀으며 예술성을 거세하는 결과를 빚어내었다.

건국이후 희곡문학분야에서도 일부 작품들이 나왔다. 이를테면 농업호조합작자의 시책을 노래한 김태희의 장막극 《우리 조장동무》(1950년), 농민들의 문맹퇴치활동을 찬양한 최수봉의 단막극 《농민학교로 가는 길》(1953년), 신형농민의 미덕을 찬미한 황봉용의 단막극《새각시》(1954년), 농업합작화에 일떠선 새로운 면모를 묘사한 최정연의 단막극 《완두씨》(1954년), 전쟁으로 하여 빚어진 비극을 깊이 있게 파헤친 최정연의 단막극《귀환병》(1957년), 동북지구 항일무장투쟁과 항일투사들을 가송한 황봉룡, 박영일의 장막극 《장백의 아들》, 《삼노인》형식으로 농촌에서의 신구의식간의 갈등과 투쟁을 묘사한 이영근의 《풍년가》(1964년) 등이 그 대표적 작품들이다. 이 시기 희곡분야는 시나 소설보다도 더 직접적으로 극《좌》노선의 교란을 받았다. 그것은 당국에서 사사건건 직접 나서서 연극과 정치와의 결합을 강요하였기 때문이다. 극문학창작에서 정치통수의 원칙을 견지하다보니 작품의 주제는 단일화 되어갔고 작가의 각이한 시각과 특색도 무시당하였으며 그리고 극 형식에 있어서도 정극 외의 다른 희극, 비극, 풍자극 등이 거의 자취를 감추다시피 되었다.

1966년으로부터 10년간이나 지속된《문화대혁명》은《지도자가 잘못 발동하고 반혁명집단에 이용되어 당과 국가 및 각 민족인민들에게 엄중한 재난을 들씌운 일장 내란이다.》 10년간이나 지리하게 지속된《대동란》시기에 문예계에서 진행된 투쟁은 《혁명적 인민과 반혁명적 야심가, 음모가외의 투쟁이고 당의 <백화만발, 백가쟁명>방침과 봉건파쑈적 문화전제주의 및 문화허무주의와의 투쟁이며 문예사상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주관적 관념론, 혁명적 사실주의와 공식주의 방팔고( 八股)와의 투쟁으로서 매우 치열하고도 첨예한 투쟁이었다.》.《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4인무리》는 이른바《건국이래 문예계에서의 모주석 사상과 대치되는 반당반사회주의 검은선》을 파낸다는 허울을 내걸고 문예계에 대 토벌과 대 청산을 들이대었다. 조선민족 문단도 결코 예외로 될 수 없었다.《대동란》의 광풍이 이곳에 휘몰아치자 곧 문학단체가 해산되고 이어서 문학잡지도 폐간 당하였으며 나아가 김학철, 최정연, 김철 등 많은 작가들이《나라의 반역자》,《현행반혁명분자》,《간첩》등으로 몰려《비판》을 받고 심지어는 감옥살이까지 하였다. 그리고 《4인무리》와 그 파벌에 속하는 자들은 조선민족 문단에도 건국이래로부터 《민족문화혈통론》을 핵으로 한 매국투항주의적 문예노선이 통치적 지위를 점하였다고 역설하면서 소위 《민족문화혈통론》에 대한 《대비판》을 전개하는 것으로써 우리의 민족적 전통과 민족문화유산을 그 근본으로부터 거세하려 들었다. 이에 따라 지난 시기에 창작된 조선민족의 역사생활과 지향을 반영한 성과작들을《매국적 투항주의》의《대독초》로 몰고 부정하였으며 민족의 얼, 민족의 감정, 민족의 특성 등은 금기로 치부하고 아예 입에 올릴 수도 없게 하였다.

《4인무리》가 통치하던 시기에 우리 문단은 산산히 흩어지고 작가들의 창작활동은 기본상 정지상태에 들어가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발표된 작품이란 거의 다 극《좌》적 정치노선이나 개인숭배를 선양한 것들이었다. 이때 비록 인민대중의 생활과 지향을 나타낸 작품들이 더러 나오기는 하였으나 극히 적었으며 또한 그런 작품들마저도 그릇된 정치와 문예사조의 영향을 면치 못하였다. 《문화대혁명시기에 출판된 시집《조국에 드리는 노래》(1975년),《공사의 아침》(1976년), 《단편소설집《우두봉의 매》(1972년)에 수록된 일부 작품들과 장막극《백산의 봄우뢰》(한원국 집필, 1972년)등이 그 실증으로 된다. 이 《문화대혁명》의 10년은 조선민족문단이 모진 어려움을 겪던 수난기이며 문학창작이 대퇴보를 한 시기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작가들은 그런 역경 속에서도 자기의 지조와 의지를 굽히지 않고 침묵, 절필 등 각이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4인무리》에 저항하면서 암흑이 가시어질 그 날을 고대하였다.

1976년 10월에 《4인무리》가 분쇄되자 조선민족 문학은 소생과 번영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어 우리의 작가들 앞에는 오래 동안 문단을 통치하였던 극《좌》적 경향을 철저히 비판하고 우리의 머리를 짓누르던 정신적 질곡에서 벗어나 전도되었던 역사를 바로잡고 진정한 민족문학을 발전시킬 과업이 제기되었다. 민족적 사명감으로 불타던 우리 작가들은 《4인무리》가 저지른 죄악을 폭로, 공소하고 그들이 날조한 일련의 유설을 비판한 토대 위에서 시비를 가르고 억울한 사건과 그릇되게 처리된 사건을 시정하였다. 이에 따라 장기간 무고하게 정치적 권리와 창작의 권리를 박탈당하였던 김학철, 김순기, 최정연, 김철, 이홍규, 김용식, 조용남 등 많은 작가들이 해방되고 그 명예를 회복하였으며 지난날 《대독초》로 몰려 발행을 금지당하였던 많은 작품들도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다.

《문화대혁명》후 《4인무리》가 빚어낸 죄악에 대한 비판과 문예계의 정비작업이 심입 전개됨에 따라 더불어 우리 문단은 날로 활력을 회복하였다. 1978년 10월에는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가 회복되었다. 그리고 문예지 《연변문예》를 계속 간행하는 이외에 문학지 《아리랑》과 문학평론지 《문학과 예술》을 새로이 창간하였다. 이에 따라 우리의 문학창작활동은 날로 활성화되어갔다.

10년 대동란의 결속과 더불어 우리 시단은 새로운 역사시기의 개혁, 개방의 물결 속에서 거족적인 발전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재생의 기쁨을 안은 노시인들과 새로 등단한 신인들이 시창작에 열성적으로 나서자 시단은 활력으로 차넘쳤다. 이어 서정시, 산문시, 서정서사시, 장편서사시 등 다양한 형식의 시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에서도 서정시 창작이 보다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 시기에 종합시집《시선집》(1979년),《변강의 무지개》(1979년),《봄바람》(1981년),《진달래의 노래》(1981년),《서정시집》(1982년)과 시인들의 자선시집 50여 부가 출판되었다. 이 새로운 역사시기에 인민대중 속에서 널리 애송된 시편들로는 서정시 《북방의 성격》(김철·1982년),《아침》(이욱·1982년),《북녘의 서정》(임효원·1980년),《벗들에게》(김성휘·1980년), 《흰옷 입은 사람들아》(김성휘·1987년),《백두와 설련화》(허흥식·1988년),《해빙기의 강변에서》(조용남·1983년),《파도》(이상각·1986년),《사랑의 애가》(김응준, 1985년),《나는 나입니다》(석화, 1985년) 등을 들 수 있다. 상기한 서정시들에서는 《4인무리》가 저지른 죄악에 대한 폭로와 비판, 흘러간 역사와 《대동란》에 대한 심각한 반성, 거세찬 개혁의 물결 속에 뛰어든 혁신자들의 격정과 희로애락, 현실에서 발로된 봉건의식과 각종 부패현상에 대한 고발과 타매, 애정, 윤리와 아름다운 경물에 대한 찬미에 이르기까지 자기 나름의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다.

1980년 좌우로부터 장편서사시와 서정서사시 창작이 활기를 띠었었다. 이 시기에 20여부에 달하는 장편시들이 선을 보였다.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장편서사시 《새별전》(김철, 1980년),《장백산아 이야기하라》(김성휘, 1979년),《만무과원 설레인다》(이상각, 1981년), 서정서사시《아, 청산골》(조용남, 1985년) 등을 들 수 있다. 상기한 시편에서는 역사적 반성의식을 수용하여 지난 역사시대와 참신한 현실생활을 거시적이며 전일적으로 재조명하고 형상화하려는 시인들의 탐구적 노력을 볼 수 있다.

《4인무리》가 분쇄된 후 새로운 역사시기에 진입하자 소설문학은 다시 활력을 회복하였다. 《대동란》시기에 정치적 박해를 받아 붓을 꺾었던 원로작가들과 새로 진출한 신진작가들이 선후로 소설창작에 적극 나서게 되어 많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에서도 단편소설창작에서 많은 수확을 거두었는바 이 시기에 《단편소설선집》(1979년),《사랑에 대한 이야기》(1980년),《불타는 백사장》(1981년), 《단편소설집》(1982년),《군자란》(1983년)과 작가들의 자선집 이를테면 《김학철 단편소설집》(1982년), 임원춘의《몽당치마》(1984년), 정세봉의《하고 싶던 말》(1985년), 유원무의《아, 꿀샘》(1986년), 김순기의《잔치 전날》, 김훈의《청춘의 활무대》(1986년), 이광수의《새로운 길》(1987년) 등 30여부에 달하는 소설, 산문집이 출판되었다. 그 가운데서 대표성을 띤 소설작품으로는 《문화대혁명》이 빚어낸 인간들에 대한 육체적 및 정신적 유린을 고발하는 상처문학의 계보에 속하는 정세봉의《하고 싶던 말》(1980년), 박천수의《원혼이 된 나》(1979년), 과거의 역사를 엄숙하게 돌이켜보면 한심스럽게도 우롱당하였던 지난날을 신랄히 고발한 이원길의《배움의 길》(1980년), 유원무의《비단이불》(1982년), 거창한 개혁, 개방의 물결 속에서 변화하는 새로운 인간관계와 기풍을 찬미한 임원춘의《몽당치마》(1983년), 홍천용의《구촌조카》(1982년), 김훈의《그 여자가 준 유혹》(1986년), 지난날 《금지구역》에 속하였던 애정, 윤리 등을 둘러싸고 보다 높은 차원에서 부동한 인간의 내심세계와 잠재적 심리를 파헤치고  그릇된 의식을 신랄히 타매한 김학철의 《짓밟힌 정조》(1985년) 등이 있다.

이 시기에는 또 민족의 역사와 현실을 보다 폭넓게 다면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작가들의 노력에 의하여 예술면에서도 일정한 성과를 과시한 중편, 장편 소설이 적지 않게 창작되었다. 이 시기에 출판된 중편, 장편소설은 무려 40여부에 달한다. 그중 김용식의《규중비사》(1980년), 이원길의《한 당원의 자살》(1985년), 김훈의《청춘략전》(1985년), 최홍일의《생활의 음향》(1985년), 우광훈의《시골의 여운》(1985년) 등 중편소설과 김학철의《격정시대》(1986년), 이근전의《고난의 연대》(1982년), 유원무의《봄물》(1987년), 이원길의《설야》(《땅의 자식들》의 제1부) 등 장편소설이 이 시기 문단을 더욱 흥성하게 하였다.

상기한 바와 같이 새로운 역사시기에 있어서의 소설창작은 부당한 정치적 단속에서 벗어나 인민대중이 펼친 새로운 생활을 구김 없이 묘사하는 한편 현대적 의식에 토대로 하여 지난날 《대동란》의 역사적 근원을 파헤치고 존재한 부정한 면을 서슴없이 고발, 타매하는 등으로 사회적 문제를 보다 심각하게 다루었다.

《문화대혁명》의 결속과 더불어 우리의 극문학도 발전을 가져왔다. 《4인무리》가 타도된 후 지난날의 그릇된 노선을 시정하고 개혁, 개방의 새로운 방침이 시달됨에 따라 우리 극작가들의 정신면모도 일신되었다. 그들은 새로운 시대와 인민대중의 미학적 요구를 반영하기 위하여 보다 시대화한 안목으로 극 창작실천에 뛰어들었다. 극작가들의 고심한 노력에 의하여 많은 극작품이 산출되었으며 희곡집《장백의 아들》(황봉룡, 1978년), 《희곡집》(1982년), 《황봉룡 희곡집》(1985년), 《울고 웃는 사람들》(1985년), 《망각된 인간들》등이 출판되었다.

이 시기의 우수한 극작품들로는 홍성도, 박응조의 장막극《눈 속에 핀 꽃》(1980년), 최정연의 장막극《해토무렵》(1981년), 김훈의 단막경희극《두부장사》(1982년)와 《울고 웃는 사람들》(1984년)등이 있다. 이런 극작품들에서는 《4인무리》의 그릇된 노선이 빚어낸 악과들을 심각히 고발한 동시에 모진 시련을 겪어내고 행복하게 살아가게 된 인민대중의 격정과 염원과 지향을 감명 깊게 형상화하였다. 이런 극작품들은 진실성과 구체성을 생활의 흐름 속에서 생동하게 구현하고 있으며 대체로 비극이 많고 신랄한 풍자적 요소가 다분한 것이 특징적이다.

상기 새로운 역사시기에 획득한 문학성과들이 보여주다시피 이 시기는 개혁, 개방의 새로운 형세와 활성화된 국내외의 사상문화 교류 속에서 지난날 《좌경》적 노선으로 하여 형성된 그릇된 사상관념을 포기, 갱신하고 현대의식, 민족의식, 주체의식의 각성을 초래한 년대이다.

이 시기는 또한 우리의 작가들이 혁신적인 문화적 환경속에서 자기를 속박한 숱한 금지구역을 타개하고 새로운 가치관과 다양한 창작방법으로써 민족의 역사적 현실과 지향과 염원을 형상화하기에 힘써 일정한 성과들을 거둔 시기이다. 그러나 시대적 발전과 인민대중의 심미적 욕구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성적은 극히 초보적인 것이며 또한 일부 미흡한 점도 동반하고있다.

그러면서도 기꺼운것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심화되는 개혁, 개방의 새로운 형세와 더불어 발랄하게 전개된 국내외의 문학교류의 영향하에서 우리 작가들의 사상관념이 진일보 갱신·제고되고 보다 성숙되어가고 있는 그것이다. 양지가 있는 우리의 작가들은 시장경제로 이행하는 변혁기에 부딪힌 그 많은 어려움과 곤혹 속에서도 민족의 위업에 자기를 바치려는 초지를 굽히지 않고 문학사업에 진력하고있다. 이런 노력으로 하여 우리의 작가대오는 날로 늘어나고 취득한 성과들도 가시적이다. 지금 연변에는 500명으로 헤아리는 연변작가협회 회원이 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중국조선민족문학의 태두 김학철 선생을 위시하여 많은 중견과 신진작가들이 우리의 문학의 화원을 가꾸고있다. 1950년대 초반부터 시창작에 나선 김철, 조룡남, 이상각, 그리고 그 뒤를 이은 김동진, 석화, 최룡관, 이성비, 김학송, 이임원, 조광명…, 소설, 산문분야에서의 중견작가들인 림원춘, 유원무, 김영금 그 뒤를 이은 리원길, 정세봉, 김훈, 최홍일, 우광훈, 문단에 갖 나선 최국철, 이동령, 김혁 등과 희곡문하강작에서 남다른 기여를 한 리광수 등이 그 대표적 작가이다. 그리고 특기할 것은 90년대에 이르러 허련순, 리혜선 등 여러 여성 작가들로 이룩된 여성작가군의 출현이다.

그리고 90년대에, 우리 작가들의 다함없는 노력으로 하여 심각한 주제내용을 다양한 문학창작방법과 형식으로써 형상화한 무게 있는 작품들이 산출되어 국내·외의 각광을 받고있다. 그중 《20세기 중국조선족문학선집》(연변인민출판사 출판), 《새세기 조선족 중견작가 작품대계》(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출판)에 선록된 작품중의 일부와 시집《그 언덕에 묻고 온 이름》(조룡남), 《나의 고백》(석화), 소설집《도시의 곤혹》(최홍일), 《여름은 더운 계절이 아니다》(최국철) 중의 부분작품, 장편소설《춘정》(이원길), 《눈물젖은 두만강》(최홍일), 《바람꽃》(허련순) 등이 그 예로 될 것이다.

끝으로 세기적 교체를 맞는 오늘 시대적 시점과 새로운 인식으로 지난날의 역사와 경험들을 잘 총화하고 새로운 자세로써 우리 문학을 가꾸어 나간다면 우리 문단에는 반드시 더욱 빛나는 미래가 도래하게 될 것이다.

이상으로 당대 연변조선민족문학의 지난날과 성과들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이 원고에는 미흡점은 물론 오류도 적지 않을 것이다. 여러 독자들의 사심 없는 비평과 지적이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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